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판타지소설] 정령왕 엘퀴네스 9권

by 아도비야 2021. 7. 28.
반응형

[판타지소설] 정령왕 엘퀴네스 9권

 

 



- 차원의 주인 - 
 

 
쿠쿠쿠쿠쿵!! 
 
 
“커헉!” 
 
 
일이 벌어진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커다란 압력이 밀려들어오자 남자의 입에선 저절로 거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태어난 이래 이렇게 강한 힘을 느끼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주변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수분과 공기가 자신의 목숨을 마음껏 유린하는 기분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이었기에 제대로 대응을 할 수조차 없었다.  
 
마왕, 아니 이제 그 신분을 다른 이에게 빼앗겨 버린 마족남자는 좀처럼 현재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믿을 수 없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자연의 힘이 자신을 넘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해 본적이 없었으니까.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째서 내가 밀리는 거지? 겨우 무형적인 기운만으로 나를 제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연의 4대 원소 즉, 땅과 불, 물과 바람은 마계에서는 존재하기는 하되 그다지 필요하지는 않는 것들이었다. 마족에게 중요한 것은 본인이 가진 강대한 힘뿐이었고, 그것은 그들이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었다.  
 
덥거나 추운 것, 마실 것과 공기 같은 것은 있으나 마나한 것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은연중에 자연 원소의 토대가 되는 4대 정령왕의 힘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가 아크아돈을 자신의 계획을 실행시킬 장소로 선택한 것은, 다른 차원보다 마계의 개입이 수월하면서도 신계의 간섭을 거의 받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을 주관하는 정령왕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없었더라면 감히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악신의 각성이 코앞에 이른 지금은 그러한 마음이 더욱 강했다. 
 
자신은 신계의 상급신 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해 처치를 고민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하물며 정령왕정도야 간단히 이길 수 있으리라 확신했던 것이다. 눈앞에 있던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가 갑자기 사라지기 전까진. 
 
 
“우습네. 방금 전까지 위풍당당하던 녀석의 얼굴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인 걸? 좀 더 제대로 대응 해보는 게 어때? 이런 식은 너무 시시하잖아.” 
 
“크윽!” 
 
 
감미롭게 울리는 달콤한 목소리는 그의 바로 귓가에서 울리고 있었다. 경악한 마왕은 곧바로 손을 크게 휘저었으나,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엘퀴네스가 말한 것처럼, 자연체로 돌아가 버린 정령의 몸엔 그의 무력이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럴 리가 없다! 이럴 리가 없어!’ 
 
 
악신이 된 존재는 온 차원의 최고여야 했다. 비록 아직 온전한 각성을 하지 않은 상태라 해도, 그는 이미 능력만으로 모든 존재를 제압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평소 그가 우습게 여기고 있던 정령에게 이런 식으로 유린을 당할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완전한 각성을 한 이후에 활동을 시작할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다급해진 그는 미친 듯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마력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쾅! 콰아앙~! 콰앙! 
 
나무가 쓰러지고 흙이 음푹 패였지만, 정작 그가 가장 원하는 상대방의 고통어린 신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비웃는 웃음소리만 짙어졌을 뿐. 
 
 
“하하하. 좀 더 제대로 해봐. 그래가지고 어디 날 맞출 수 있겠어?” 
 
“이이익!! 이런 찢어죽일… 커헉!!” 
 
 
거칠게 대꾸한 대가는 곧 고스란히 그의 육체에 이어졌다. 주위에 흐르던 미세한 수분덩어리들이 급속하게 모여들더니 단숨에 그의 숨구멍을 차단했던 것이다.  
 
인간처럼 공기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종족은 아니었지만, 단순히 숨을 못 쉬는 것만이 아닌 물을 이용한 질식을 시키는 것이라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끄윽- 끅, 크으윽!!” 
 
“입버릇이 나쁘네. 지금 이 상황에서 누가 우위에 있는지도 자각을 하지 못하는 거야? 마족들은 그런 것 하나는 귀신같이 알아맞힌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평생토록 헛짓거릴 하느라 그런 본성마저 잊어버렸구나. 안타까운 일이야.” 
 
 
정말로 안됐다는 듯이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공격을 당하는 마왕뿐만이 아니라, 주변에서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의 전신까지 오싹하게 만들었다.  
 
특히나 지금까지 엘퀴네스라는 존재에 대해 나름대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충격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조금 전 부터 엘퀴네스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대부가 아닌 것 같아. 말과 목소리의 억양부터 달라.” 
 
“저, 저도 동감입니다, 주군. 엘님에게 이런 면이 있으실 줄은…”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린 아스와 데르온의 말에 그들 옆에 있던 라피스가 ‘쉿!’하고 짧게 제동을 걸었다. 당황하고 있는 두 마족과는 달리, 그는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이 즐기는 기색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이런 긴박한 장면도 그에게는 한차례의 스릴 있는 유희에 불과한 듯 했다. 
 
 
‘너무 태연한 거 아니야?’ 
 
 
완벽하다고 알려진 드래곤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건 지나치리만치 현실에 대한 자각이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들은 어떠한 복잡한 사건에 연루되어도 ‘유희’라는 명목 하에 빠져나갈 틈을 만들어두는 종족이었다. 
 
호기심으로 빛나는 라피스의 눈동자를 본 아스가 찌푸린 얼굴로 한마디 늘어놓으려는 찰나,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엘의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졌다. 
 
 
“아, 그러고 보니 네가 이전에 레오를 죽인 녀석이었지? 그 아이 뿐만이 아니야. 동굴 안에 쌓여있던 시체들이 전부 같은 방식으로 죽었더군. 다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었지. 뭐, 이런 자리에서 그런 것 까지 꼬치꼬치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말이야. 이미 나이아스에게 복수해 주기로 약속해버렸거든.” 
 
“크윽! 끄으으윽!” 
 
“어떻게 해줄까? 너도 그 아이처럼 똑같이 몸에 구멍을 내줄까? 그 몸에 흐르는 피가 전부 다 빠져나올 때까지 거꾸로 매달려 보는 건 어때? 하하. 이상하지? 예전이라면 이런 일 엄두도 못 냈을 텐데 말이야…지금은 어쩐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크으으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마왕이 뱉어낼 수 있는 말이라곤 숨을 쉬기 위해 발악하는 신음 소리뿐이었다.  
하지만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그는 아무런 제압을 받지 않는 멀쩡한 모습인 것 같았다. 조롱하는 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그가 왜 괴로워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흐음. 숨을 쉬지 못해서 괴로워? 그것 봐. 너는 아직 악신이 아니라니까. 결국 이런 간단한 방법으로 죽일 수 있는 하찮은 생명체였던 거야.” 
 
“!!” 
 
 
악신인 자신을 향해 하찮은 생명체라니?!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낀 마왕은 있는 힘껏 기운을 끌어 모아 자신을 억압하는 엘의 힘을 필사적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몇 번의 실랑이가 이어졌지만, 잠시 후 그는 숨을 막고 있던 수분을 곧 어렵지 않게 증발시킬 수 있었다. 간신히 숨이 트이자 그는 기침을 내뱉으면서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겨우 이 정도 수작 부린 것을 가지고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지 마라, 어리석은 정령왕이여! 난 아직 나의 온전한 힘을 전부 내보이지 않았다!” 
 
 
그는 지금쯤 엘퀴네스가 속으로 상당히 당황해 할 것이라 생각했다. 감춰둔 여분의 힘을 전부 드러낸다면 자신의 승리가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퀴네스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물었다. 
 
 
“쿡쿡. 그래서? 어차피 통하지 않을 힘이 강해봤자 무슨 소용이지?  
 
“!!” 
 
“마음껏 해봐.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나를 공격해도 좋아. 단, 그러려면 먼저 내가 서있는 위치부터 제대로 찾아야 하겠지만.” 
 
“크윽!!” 
 
 
그의 말처럼 마왕은 지금도 엘퀴네스의 위치를 전혀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자연 상태로 돌아간 정령왕은 주변에 흐르는 공기와 물 그 자체였기에, 일반적인 마나의 흐름으로는 찾을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정령왕을 위해 만들어진 차원이니, 그에게 불리한 조건이 많은 것이 당연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온 몸의 신경을 모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노려보는 곳이 제대로 된 건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아마도 엘퀴네스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는 이는 그와 같은 정령왕들밖에 없을 것이다.  
 
그 증거로 한 구석에서 뒤늦게 나타난 트로웰이 바라보는 곳은 그와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에구, 이걸 어쩌지….” 
 
 
엘의 부탁으로 수도 내 황성의 주변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을 상대하고 있던 트로웰은, 함께 행동하고 있던 엘뤼엔이 갑자기 사라지자 그 흔적을 쫓아 달려 나왔던 참이었다.  
 
그런 중에 하늘 위를 뒤덮던 수많은 마족무리의 움직임이 멈추고 사악한 기운을 머금은 폭발이 일어나자, 그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곤 다급히 일행들을 찾았다. 혹시나 마신이 염려하던 상황이 벌어질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엘뤼엔은 큰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고, 그것을 보고 분노한 엘이 악신을 상대로 대치를 벌이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에 와선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엘을 말릴 수가 없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같은 정령왕인 그에게는 온 사방에 퍼져있던 모든 자연계의 정령들이 요동치고 있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던 것이다. 그만큼 엘이 분노했다는 뜻이리라. 
 
 
‘화가 나서 이성을 잃어버린 것 같군. 박력이 대단한걸.’ 
 
 
잠시 한숨을 내쉰 그는 조심스럽게 엘뤼엔에게 접근하여 그의 상태부터 확인하기 시작했다.  
복부를 중심으로 온 몸이 피투성이였지만, 다행히 의식을 잃지는 않았는지 작은 신음을 간헐적으로 내뱉고 있었다. 엘이 몇 번이나 치료술을 시행한 덕분인 듯 했다.  
 
 
“엘뤼엔. 내 말 들려? 들리면 대답해봐.” 
 
“……” 
 
“엘뤼엔? 안 들리는 거야?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빌어먹을. 아파 죽겠으니까…말 시키지 마.” 
 
 
험악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트로웰은 오히려 안도한 얼굴을 했다. 적어도 대답할 정도라면 그의 상태가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라는 소리였으니까.  
 
죽지는 않을 거란 판단이 서자 트로웰은 마음 놓고 엘뤼엔을 향해 힐책어린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내 충고는 다 어디로 흘려들었는지 모르겠군. 이래서야 희생될 상급신으로 채택된 것과 뭐가 다르지? 아주 죽고 싶어서 작정을 했구나.” 
 
“큭. 시끄러. …엘은?” 
 
“악신 녀석을 상대하고 있어.” 
 
“…뭐?” 
 
 
놀란 엘뤼엔이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트로웰은 그의 어깨를 가만히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켰다.  
 
 
“가만히 있어. 상처가 생각보다 심하니까. 흐음. 치료신이 직접 주관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직접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으니 곤란하군.” 
 
“지금 그게 문제가-! 큭. 엘이…” 
 
“괜찮아. 생각보다 잘 싸우고 있으니까. 아주 약간 상태가 불안정하긴 하지만, 덕분에 중요한 걸 깨달았으니까.” 
 
“그게…무슨 소리지?” 
 
 
찡그린 얼굴로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엘뤼엔에게 트로웰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곳이 아크아돈이라는 사실 말이야. 그동안 우리들 모두 악신이라는 존재만 생각하느라 미처 이곳의 특성을 염두 하지 못했던 것 같아. 모든 것이 정령왕을 위주로 돌아가는 땅이니, 아무리 악신이라도 애 좀 먹을걸.” 
 
“아니, 그것보다…엘의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아참. 깜박했네. 너한텐 이런 것보단 엘이 최우선이었지? 쿡쿡.” 
 
“크윽…젠장, 쓸데없는 소리는 빼고 대답이나 해!”  
 
“아아, 알았어. 흠, 뭐랄까. 너무 화가 나서 반쯤 이성이 나간 것 같은데. 덕분에 전생 때문에 감춰져 있던 원래의 성격이 드러났다고 해야 하나? 더불어 정령왕으로서의 본능이 강하게 살아난 것 같아.” 
 
 
트로웰의 말에 의하면 엘은 단지 이성을 잃었을 뿐, 다른 부분은 지극히 정상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설명을 듣는 내내 엘뤼엔의 표정은 마치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무섭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잠깐 기다려. ‘원래의 성격’이라면…” 
 
“당연히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엘퀴네스 고유의 성격이 드러났다는 뜻이지. 난 엘이 저렇게 살벌하게 웃는 건 처음 봤어. 저 모습 보니까 네가 엘퀴네스 였을 때랑 아주 판박이인데 그래?” 
 
“…젠장.” 
 
 
‘정령왕’일 때의 자신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엘뤼엔으로선 그다지 달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그때의 성격이 문제가 되어 신이 될 때에도 마신계열의 속성을 부여받은 것이 아닌가!  
 
참고로 역대의 엘퀴네스들 중, 마 속성을 부여받지 않은 존재는 이제껏 단 하나도 없었다. 이유는 성격이 더러우니 사악한 일도 잘 해낼 것이란 주신의 판단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마속성의 신들은 다른 계열의 신들보다 일거리가 더 많은 편이다. 엘뤼엔 본인이 바로 그 산증거가 아니겠는가?)  
 
그가 짧게 욕을 내뱉자, 트로웰은 웃음을 참으며 일부러 엄하게 쏘아붙였다. 
 
 
“그러게 누가 다치래? 내 충고를 무시한 벌이라고 생각하라고. 그나저나 이 상처를 어찌 한다? 지금 이대로 신계에 이동할 수 있겠어?” 
 
“…아들을 두고 혼자서 돌아가라고?” 
 
 
샐쭉하니 묻는 엘뤼엔의 말에 트로웰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말이 좋아 ‘상처’지, 지금 그가 입은 부상은 어지간한 인간이라면 보는 것만으로 쇼크사(死)할 만큼 끔찍한 것이었다.  
 
온 몸이 거의 찢기다시피 너덜너덜하고 피가 철철 흘러넘치는 주제에 끝가지 버티겠다는 태도라니! 고통을 참는 인내력은 칭찬받아 마땅했지만,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십중팔구 소멸될 것이 틀림없었다. 
 
 
‘날더러 나중에 엘에게 무슨 원망을 들으라고…’ 
 
 
트로웰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설마 지금 자신의 상태가 멀쩡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고집 부리지 말고 순순히 신계에 돌아가. 정말 소멸하고 싶은 거야?” 
 
“난 멀쩡해.” 
 
“그런 말은 지혈이 되고 나서나 하라고. 몸을 가누기도 힘겨워 하는 주제에 멀쩡하기는 뭐가?” 
 
“아, 시끄러. 아무튼 난 아무렇지 않으니까 가만히 좀 내버려둬. 이럴 시간 있으면 엘이나 말려보라고.” 
 
 
귀찮다는 듯이 건성으로 대꾸하는 엘뤼엔의 말에 트로웰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둔한자라 해도 지금 그가 입은 상처를 본다면 한눈에 중상임을 눈치 챌 정도다. 하물며 절대 둔하다고 할 수 없는 엘뤼엔이 그러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할 리가 없었다.  
 
놀라운 부정(父情)에 의한 인내심의 발현이라고 쳐도,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까지 이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그것이 정작 엘을 위한 일이 아님을 모르고 있을 리는 없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트로웰은 굳은 표정으로 엘뤼엔의 모습을 다시 살펴보았다. 언제나처럼 냉소적이면서도 무심한 얼굴 그대로였지만, 평소와 달리 유난히 창백한 피부색이 눈에 띄었다.  
 
처음엔 그저 고통 때문이라 생각하고 가볍게 넘어갔었는데, 이제 와 짐작되는 일이 있고 보니 그 모습이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엘뤼엔. 설마…너?” 
 
 
그러자 트로웰의 표정이 딱딱해진 것을 알아본 엘뤼엔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힘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정도로 간단히 속일 수 있을 만큼 눈앞의 존재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닐뿐더러 자신의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이럴 땐 필요 없는 자존심은 굽히고 솔직해 지는 편이 나았다. 
 
 
“보시다시피. 차원 이동은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힘든 상태야. 한마디로 지금 신계로 돌아가는 건 애초부터 무리라는 소리지.” 
 
“그럼 일부러 안 돌아가는 게 아니라…”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 쪽이 맞겠지. 그래도 엘이 치유술을 몇 번 해준 덕에 정신을 차렸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적어도… 마지막 말은 하고 갈 수 있을 것 같군.” 
 
“!!” 
 
 
그 대답에서 트로웰은 그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급신인 그가 스스로의 상태를 모를 리 없을 테니, 아마 그 예상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정령왕으로 태어난 이래 수많은 죽음들을 목격해왔었지만, 그 차례에 엘뤼엔이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정령왕으로서 한번 소멸한 전적이 있긴 해도, 죽는 다기 보단 먼 곳으로 여행을 간다는 느낌에 더 가까웠으니까. 지금처럼 아슬아슬한 긴장감과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기분은 없었던 것이다.  
 
하긴, 내세가 결정된 죽음과 영원한 소멸을 같은 선에서 놓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상황이겠지만.  
 
트로웰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듣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목소리를 작게 낮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는 거야? 하루? 이틀?” 
 
“…농담하는 거냐? 앞으로 5시간도 못 버텨. 이렇게 깨어 있는 것도 신기할 지경이다.” 
 
“바보 같은! 그런데 왜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 했어?!” 
 
“킥. 티낸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미 나는 부상을 입었고, 엘은 저렇게 되 버렸는데. 아무튼 급하게 됐군. 신계놈들이 빨리 와야 할 텐데…굼뱅이들 같으니. 뭘 하느라 이렇게 늦는 거지?” 
 
“하아. 그렇지. 악신을 처리하기 위해 신계의 신들이 곧 내려오겠군. 그렇다면 치료신을 부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야. 지금이라도 치료하면 살 수는 있는 건가?” 
 
 
혜안이 통하지 않는 상대이기에 미래의 일을 짐작할 수 없었던 트로웰은 답답한 심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엘뤼엔 또한 확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언제 그가 이런 식으로 부상을 당한 적이 있던가! 다친 경험이 없던 그에겐, 치료받은 경력 또한 전무했던 것이다. 아마도 트로웰은 그가 치료신을 기다린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정작 엘뤼엔이 노리고 있는 것은 전혀 달랐다.  
 
 
“글쎄, 회복 여부야 내 알 바 아니고…적어도 내세를 가질 기회는 얻을 수 있을 테지.” 
 
“그건 또 무슨…맙소사, 엘뤼엔! 설마 이번 일에 네가 희생할 생각은 아니겠지?” 
 
 
눈치 빠른 트로웰은 단번에 그가 의도하는 것을 알아채곤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소멸한 신은 영원히 그 존재가 사라지지만, 악신에 의해 희생되는 경우는 다르다. 인간으로서 환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엘뤼엔은 바로 그 점을 상기시켰다. 
 
 
“어차피 이대로 죽으면 영원한 소멸이야. 그럴 바엔 희생되고 나서 내세를 가지는 편이 낫지. 나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물론 최악의 경우엔 그렇겠지. 하지만 체념이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아직 치료를 받아보지도 않았잖아.” 
 
“그 말이 맞아, 엘뤼엔. 넌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문제야.” 
 
“!!” 
 
 
갑자기 뛰어든 낯익은 목소리에 트로웰만이 아닌, 엘뤼엔 또한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곳엔 언제 온 건지 특유의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은 마신 카노스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 
 
 
“카노스!!” 
 
“여어~ 그새 화려하게도 당해놨는걸? 천하의 엘뤼엔이 다쳐서 쓰러진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젠장, 닥쳐. 네놈이 여긴 왜 온 거야? 다른 녀석들은?” 
 
“아아. 아직 준비 중이야. 난 그전에 이곳의 상황을 알아보려고 미리 와 본거고. 역시 먼저 오길 잘했군. 하마터면 손도 못써보고 소멸할 뻔 했잖아?” 
 
 
하고 많은 신중에 왜 하필 이 녀석이 왔단 말인가? 이젠 말싸움조차 할 기력이 없는 엘뤼엔에게 꼬치꼬치 참견하기 좋아하는 그는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그는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카노스는 언제나처럼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 녀석의 극단적인 성질이라면 이런 일이 몇 번이고 벌어져도 전혀 이상할 게 없지. 그러게 감시 좀 잘 하랬잖아, 트로웰. 결국 스스로 희생을 자처하게 만들다니. 게다가 엘은…호오, 완전히 맛이 갔는걸?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면목 없다. 잠시 한눈을 팔았더니 그새 이 모양이더군.” 
 
“킥킥. 원래 애들을 돌 볼 때는 긴장을 늦춰선 안 되는 법이지.” 
 
“아아, 그 말에 동감이야.” 
 
“어이어이. 네놈들 지금 감히 누굴 아이 취급 하는 거야?” 
 
 
아픈 와중에도 자신을 애 취급했다는 것에 화를 내는 엘뤼엔을 보며 트로웰과 카노스는 사이좋게 혀를 찼다. 고통을 호소하며 신음하는 것이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지만, 억지로 참으며 의연하게 있는 것보단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카노스는 엘뤼엔의 옆에 무릎 꿇고 앉아 상처를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쯧쯧. 지금까지 소멸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군. 완전히 망가졌잖아. 이래서야 치료를 받는다 해도 다시 원래대로 회복할지 의문인걸.” 
 
“그러니까 그냥 희생하겠다고 하잖아. 어차피 가망 없다고.” 
 
“엘뤼엔! 넌 입 다물고 있어! 그렇게 상태가 나쁜 거야, 카노스?” 
 
“지금으로선 그래. 부상 이후 치료하려고 시도한 적은 있었나?” 
 
“으음. 엘이 몇 번 치료를 하려고 한 모양인데, 잘 안되었던 것 같아. 정령계에서 였다면 좀 더 나았을지 모르지만.” 
 
“흐음. 그래? 곤란하군. 엘퀴네스의 치유력으로도 힘들다면 치료신이 주관을 한다 해도 완쾌하기 어려워. 정령왕과 신의 능력이 그렇게 많이 차이나는 게 아니거든. 본래 신의 능력 중 일부를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정령왕이니까.”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글쎄… 네 말대로 이곳이 중간계라서 능력제어가 된 것을 감안한다면, 회복의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지. 일단 신계로 옮기는 것이 낫겠어.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한 작업이니까.” 
 
 
간단히 결론이 내려지자 엘뤼엔은 벌레라도 씹은 마냥 못마땅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어떻게든 살리려고 하는 노력은 기특했지만, 자신의 의견이 몇 번이고 무참히 무시된 데서야 기분이 좋을 리가 없는 것이다.  
 
카노스는 그 시선을 모른 척 하며 능글거리는 미소와 함께 가볍게 그의 몸을 안아 올렸다. 그것도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공주님 포즈’로!  
그것을 자각한 순간 엘뤼엔의 얼굴은 급속도로 창백해졌다. 
 
 
“큭!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자아~ 사이좋게 신계에 돌아가자고, 친구. 이곳의 일은 네 아들과 정령왕들에게 위임하면 만사 오케이라는 거야. 내말에 동의하지?” 
 
“동의 좋아하네! 어서 안내려놔? 대체 무슨 꿍꿍이…크윽!!” 
 
“어허! 그것 봐. 부상자는 부상자답게 얌전히 몸을 맡기라고. 이 형님의 품안이 참으로 듬직스럽지? 냐하하하~” 
 
“너…죽여 버리겠…” 
 
“자, 자! 좋았어! 당장 신계로 출바알~~” 
 
 
자신이 안은 포즈에 문제가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카노스는 단지 그가 이곳을 떠나지 않기 위해 발악하는 거라 생각하곤 상큼하게 소리칠 뿐이었다.  
엘뤼엔에게 있어 한 가지 유감이라면 그 모습이 묘하게 어울린다는 거랄까? 트로웰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푸훕!” 
 
“제길!! 웃지 마, 트로웰!! 이 제멋대로인 녀석들 같으니!!” 
 
“하하, 알았으니까 무사히 치료나 받으라고. 그동안 엘은 내가 잘 챙기고 있을 테니까.” 
 
“큭-” 
 
 
그러자 엘뤼엔은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국 포기했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그가 잠잠해지자 카노스는 피식 웃고는 트로웰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참, 너한테 부탁할게 하나 있는데…” 
 
“부탁할 것?” 
 
 
트로웰이 의아한 얼굴로 되묻자, 카노스는 허리를 숙이곤 그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워낙 작은 소리라 그의 품에 안겨있던 엘뤼엔조차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을 정도였다.  
 
 
“뭐? 하지만 그건…”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어. 못마땅한 건 인정하지만 일단 협조해주기로 한 이상, 이 뜻에 따라줬으면 좋겠군.” 
 
“…하아. 할 수 없지. 알았어. 원하는 대로 해주지. 그 대신 최대한 피해가 덜한 방향으로 끝을 내주라고.”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것일까. 궁금해진 엘뤼엔은 물어보려고 했으나 점점 희미해지는 시야 때문에 미처 입을 열수가 없었다. 그 사이 대화를 마친 카노스는 신계로 이동하기 위해 기운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파아앗!  
 
주변을 감싸는 희미한 빛 무리를 마지막으로 그는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의식의 끝머리를 놓았다. 오래 버티는 가 싶더니, 결국 기절한 것이다.  
 
 
“흐음. 떠날 때가 되서야 쓰러지는 군. 하여튼 자존심이 대단하다니까?” 
 
 
두 신의 모습이 사라지자 혼자 남게 된 트로웰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쓴 입맛을 다셨다. 차원이동의 충격으로 가는 도중에 죽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카노스가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저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엘도 엘이지만, 그로서도 오래된 친구를 이런 방법으로 잃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과연 엘뤼엔도 친구라고 생각할지는 의문이지만.) 
 
 
“자아, 그럼 나는 마신이 부탁한 일을 시작해 볼까?” 
 
 
그렇게 중얼거린 트로웰의 시선은 지금 한창 악신과 싸우고 있는 엘에게 향해 있었다. 
 
 
 
 
 
 
 
 
생각의 흐름이 끊긴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분명한 것은 지금의 나는 결코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전투를 하면 할수록 처음의 목표는 어느새 온데 없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눈앞에 있는 존재가 상당히 거슬린다는 단순한 인식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는 왜 싸우고 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점점 동물화가 되어가는 기분이랄까? 왠지 바보가 돼버린 것 같아 나는 다시금 현재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성을 느꼈다.  
 
우선, 눈앞에서 나를 잡기 위해 발악을 하는 마족남자가 누구인지부터 알아내는 것이 순서겠지? 
 
 
‘흠…얼굴은 낯설은데. 그것도 아주 많이. 내가 언제 이런 녀석에게 원한을 질 행동을 한 적이 있던가? 아니, 있으면 또 어때? 그러고 보니 이 자식 아주 건방지잖아? 마족주제에 감히 정령왕한테 덤비겠다고 설치다니. 콱 죽여 버릴까?’ 
 
 
녀석은 내가 공격을 멈추고 노려만 보는 것에 애가 탔는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래봤자 자연체로 돌아간 나를 찾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어디냐! 어디에 있는 거냐!! 크아악! 나타나! 나타나란 말이다!!” 
 
 
미친놈. 도망치는 도둑더러 서란다고 서는 거 봤냐? 대체 왜 저런 쓸모없는 요구를 하는 거지?  
결국 끝끝내 내 위치를 발견하지 못한 놈은 기운을 끌어내어 무작위로 주변에 난사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용 써 봐도 소용없다고 친절히 설명해준 것 같은데 말이지…참으로 머리가 나쁜 놈임에 틀림없다. 
 
쾅쾅 콰아아앙!  
 
 
“으아악! 피해!! 마법이다!!” 
 
“아아악!” 
 
 
불이 피어오르고 번개가 내려쳐지는 것을 본 나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눈먼 불덩어리에 맞아 사람들이 죽는 건 내 알바 아니지만, 바닥이 패이고 나무가 쓰러지는 것이 신경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놈이야 마족이니 마계로 돌아가 버리면 그만이지만, 우리 정령왕들은 저걸  고스란히 복구할 책임이 떨어진다. 한마디로 일거리가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걸 자각한 순간 내 눈에서는 불똥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나뭇가지 하나 떨어지는데 열대씩이다. 어디 더 발광해봐.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주지. 만년동안 지옥 불에 구운 다음 천년동안 식칼로 한 점씩 다져져 보는 것도 꽤 재밌을 거야. 그렇지?” 
 
“큭!!” 
 
 
서슬 푸른 내 음성에 질렸는지, 마구잡이로 휘두르던 마족의 움직임이 움찔 멈추는 것이 보였다. 잠시 승리의 미소를 짓던 것도 잠시, 나는 나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녀석에게서 이상한 점을 느끼곤 고개를 갸웃했다.  
길길이 날뛰는 멍청한 녀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놈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생각보다 훨씬 강했던 것이다.  
 
 
“음…? 마족주제에 무슨 기운이 이렇게 강하지? 이건 마치…신에 가까운?” 
 
 
한낮 창조물에 불과한 존재가 신에 가까울 수 있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에 얼굴을 찌푸릴 찰나, 친절하게도 상대방 마족은 나에게 큰 소리로 설명(?)해주었다. 
 
 
“무슨 헛소리냐! 신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나는 이미 신이다! 온 차원을 재패할 악신이 바로 이 몸이란 말이다!! 각성을 하는 순간, 제일 먼저 네놈부터 갈갈이 찢어버리고 말겠다!! 아니, 지금이라도 위치만 잡아낸다면…” 
 
“지금이라도? 하- 네놈이 악신인지 뭔지는 잘 알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나를 죽일 수 있다는 말이냐? 아직 불완전체인 반 쪼가리의 힘만 믿고?” 
 
 
놈이 강한 건 사실이었지만, 아직 완성된 단계가 아니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황당하게 되묻는 나에게 녀석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물론이다, 정령왕이여!! 기고만장한 것도 지금뿐! 너 역시 피 흘려 바닥에서 신음할 날이 멀지 않았다! 제 아무리 정령왕의 육체라 하여도 신보다는 못할 터! 아까 형벌의 신 엘뤼엔이 당한 것을 그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더냐!” 
 
“…뭐?” 
 
 
누가…누구에게 당했다고? 
 
그 순간 반쯤은 장난하던 기분이 싹 사라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타고 도는 기운이 싸늘하게 식는 느낌. 애초부터 이 녀석에게 분노한 진정한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것일까?  
녀석이 내뱉은 말이 마치 비밀 상자의 열쇠라도 되었던 마냥, 내 머릿속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잊고 있던 기억들이 속속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커다랗게 울리는 폭음과 마주치는 두 눈. 나를 부르며 뛰어오는 목소리. 그리고…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던 엘뤼엔!! 
 
 
“-흡!!” 
 
 
머릿속을 아찔하게 잠식하는 장면들에 나는 평정을 잃고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아아,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도대체 어떻게 잊을 수 있었던 걸까? 지금 이 녀석을 상대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는데!  
 
꿈에서조차 겪고 싶지 않은 잔인한 영상. 그러나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내 몸은 점차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에, 엘뤼엔…아버지는 어떻게 된 거지? 나 이 녀석이랑 싸우느라 그를 내버려두고 있었는데. 설마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일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었는걸.’ 
 
 
이제는 눈앞의 마족이 누구인지, 현재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나는 엘뤼엔이 쓰러진 직후, 이성을 잃고 이 녀석과 전투를 벌였던 모양이다.  
 
차라리 이럴 시간에 치유술에 힘을 썼다면 엘뤼엔의 상처가 회복되었을지 모를 텐데. 하다못해 정령계라도 데려갔다면 훨씬 수월했으리라! 내가 뒤늦게 깨달은 실책에 후회하는 사이 마족 남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떠들기 시작했다. 
 
 
“정령왕이니, 뭐니 이곳의 특성 따위야 내 알바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이제 세상은 내 발밑에 들어온다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네놈이 반드시 죽게 된다는 거지! 비록 조금 방심하긴 했지만, 네 힘으론 나를 완전히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네놈도 그것을 슬슬 느끼고 있을 테지?” 
 
“닥쳐! 네가 무슨 말을 지껄이든 관심 없으니까.” 
 
 
놈의 말은 완전한 허풍만은 아니었다. 그럴 것이, 어떠한 방법을 써도 도무지 죽지를 않는 것이다. 호흡을 차단시키는 것만 아니라, 폐에 물을 채우거나 심장에 구멍을 뚫어도 여 보란 듯이 살아있으니 공격하는 입장에서도 상당히 질릴 수밖에 없었다. 만여 명에 달하는 아이들을 잡아먹은 탓인지, 목숨만큼은 모지게도 끈질긴 놈이었다.  
 
징한 놈! 그냥 절벽에다 매달아 놓고 까마귀들이 내장을 파먹게 만들어 버릴까보다! 아예 사지를 뜯어다 몬스터의 먹이로 던져주고 머리만 남겨둘까? 설마 그래도 살아있지는 않겠지. 
 
 
‘어라…방금 나 치고는 꽤 잔인한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착각인가?’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생각을 다른 사람들이 알면 경악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나에게 뭔가 변화가 일어난 것 같긴 한데, 그것이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그건 그렇고…엘뤼엔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싸우는 중에 점차 거리가 떨어졌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발견할 수 없다니 속이 타 들어갔다. 설마 그대로 소멸해 버린 것은 아니겠지? 나도 모르게 무심코 중얼거린 소리를 들은 마족 녀석이 기고만장해져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이미 죽어나자빠졌을 녀석을 찾는 것이냐? 쓸데없는 짓을 하는 구나!” 
 
“닥쳐! 죽기는 누가 죽었다는 거야!” 
 
“크크. 그렇다면 그가 살아나 신계라도 되돌아갔단 말이냐? 저 바닥에 널려진 핏자국만 봐도 그럴 가능성이 없음을 느낄 수 있을 텐데?” 
 
“!!” 
 
 
녀석이 가리킨 방향에는 흙바닥에 채 마르지 않은 붉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누가 보았더라도 살아있기는 힘들다고 생각할 만큼 많은 양이라, 그것을 발견한 순간 나는 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엘뤼엔은 마지막에 내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때 이미 늦어버렸던 거라면? 소멸한 신은 영혼조차 없으니…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는 건가? 
 
 
‘말도 안 돼…’ 
 
 
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입술을 꽈악 악물었다. 그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속에 큰 불안감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 와중에 마족 녀석은 겁도 없이 떠들어 댔다. 
 
 
“그네들이 말하는 ‘한낮 창조물’의 힘에 당해 소멸했으니, 놈은 신계의 역사에서 두루두루 수치로 기억될 테지! 훗날 인간들은 형벌의 신을 가장 얼간이로 기억할 것이다! 크하하하! 바보같이 저런 놈을 두려워했었다고 말이야!” 
 
“…죽고 싶어서 아주 발악을 하는군.” 
 
“흐흐흐흐! 그래서 어쩔 수 있다는 거지? 난 죽지 않는다! 이미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몸이니까!” 
 
 
음침한 미소를 흘리는 녀석을 보니, 잠시 잊고 있던 분노가 무럭무럭 치솟아 올랐다. 나는 끓어오르는 살심을 억누르며 시니컬한 어조로 되물었다. 
 
 
“영원한 생명? 훗. 뭐, 좋아. 그렇다 쳐두지. 하지만 그런 것에 온전한 신체 따위는 포함되지는 않을 테지?” 
 
“그게 무슨?” 
 
 
나 참. 이거 꼭 시범까지 보여줘야 알아듣는 건가? 잠시 쯧-하고 혀를 찬 나는 한손에 얼음 창을 만들어 크게 한번 휘둘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부웅- 서늘한 한기를 뿌린 창이 공중을 가르고 지나가자 마냥 어리둥절하게 서있던 마족 녀석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순간 놈의 왼편어깨에서 피분수가 퍼지더니 붙어있던 팔 한쪽이 너덜한 모양으로 떨어져나갔다. 
 
푸와아악!! 
 
 
“아아아아악!!! 내 팔! 내 팔이!!!” 
 
 
녀석은 갑자기 떨어져 나간 자신의 팔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친근하게 생긋 미소 지었다. 
 
 
“사지가 한쪽씩 떨어져나가는 걸 보는 것도 즐거울 거야. 그렇지? 머리 하나만 남은 채 그 빌어먹을 영생의 세월을 지내보는 건 어때?” 
 
“아…아아아!!” 
 
 
그때서야 나의 의도를 깨달은 녀석은 퍼렇게 질린 얼굴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훗날을 기약하려는 모양이지만, 우습게도 그 도망치는 방향이란 것이 바로 내가 서있는 쪽이었다.  
상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불리한 조건인지 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하지만 역시 이런 식으로 내빼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겠지? 
 
 
“싸우는 중에 도망치면 안 돼지. 그럼 내가 화풀이 할 곳이 없잖아?” 
 
 
적어도 이 가슴속의 울분이 가라앉으려면 놈의 비명소리를 더 들어야했다. 나는 달려오는 녀석을 향해 망설임 없이 들고 있던 창을 집어던졌다. 쐐애액! 맹렬한 속도로 쏘아져가던 얼음 창은 마족의 몸을 꿰뚫어 근처에 있던 민가의 벽에 박았다.  
 
콰아아앙! 
 
 
“크아아아악!” 
 
 
시뻘건 선혈이 흘러내리고 새된 비명이 울려 퍼질수록 내 입가에 서린 미소는 더욱 짙어져갔다.  
 
 
“겨우 그 정도에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아아, 참. 넌 영원히 산다고 했지? 그럼 앞으로 질릴 때까지 괴롭혀도 되겠다. 그거 괜찮은걸?” 
 
“크, 크윽 네…네놈!!”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에 담긴 감정엔 분노만이 아닌, 날 향한 두려움 또한 섞여 있었다. 놈의 악에 바친 시선을 무시한 나는 또 다른 얼음 창을 만들곤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섰다. 
 
 
“정령왕이 신보다 못하다고? 글쎄, 물론 다른 곳이었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여긴 아크아돈 이라니까. 몇 번을 설명해도 못 알아먹으니, 정말 머리가 나쁜 녀석이군. 이곳 차원의 주인이 누군지 다시 깨닫게 만들어 줄까?” 
 
“으, 으윽!” 
 
“그리고 엘뤼엔이 너한테 당한 건 그가 약해서가 아니라 방심 때문이었어. 겨우 그런 것 가지고 기고만장해지다니 우습구나. 이번엔 어디를 자를까? 다리? 왼쪽 팔이 없어졌으니 오른쪽 다리가 없어져야 균형이 맞겠지? 쿡쿡.” 
 
 
나는 얼음 창의 날카로운 부분을 녀석의 오른쪽 허벅지에 꽂았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창끝이 사정없이 파고들자 녀석은 한쪽만 남은 오른팔로 복부에 박힌 창대를 잡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그래. 그런 식으로 차라리 소리 지르는 편이 나을 거야. 그래야 내가 좀 봐줄 마음이 생길 테니까.” 
 
 
하지만 그 만족스러운 기분은 오래 가지 못했다. 갑자기 누군가가 끼어들어 훼방을 놓았던 것이다.  
 
 
“윽- 뭐, 뭐야!” 
 
 
등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뒤로 당기는 힘에 놀란 나는 잡고 있던 얼음 창을 놓치고 정체모를 누군가가 이끄는 대로 속수무책으로 떨어졌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한 나는 서둘러 방해자를 찾았지만, 이미 그 누군가는 마족남자에게 다가가 그 몸에 박혀있던 창들을 말끔히 제거 해버린 뒤였다.  
 
몸을 결박한 것들이 사라지자 마족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으면서도 황급히 몸을 돌려 도망쳤다. 그때 뒤따라가 녀석을 잡으려는 나를 또다시 막는 힘이 느껴졌다. 
 
 
“큭- 이게 무슨 짓이얏!!” 
 
 
자연체인 내 모습을 어떻게 발견하고 막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맥없이 마족을 놓쳤다는 생각에 화가 나서 있는 힘껏 몸을 뒤틀었다. 그러자 귓가에서 아이를 달래는 듯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자, 자. 진정해, 엘. 착하지?” 
 
“착하기는 누가…어? 트, 트로웰?” 
 
 
놀랍게도 나를 붙잡고 있는 존재는 땅의 정령왕인 트로웰이었다. 함께 가세해서 공격해도 모자를 판에 왜 나를 막는 거지? 놀란 내 표정을 보며 난감한 듯 웃던 그는 도망치는 마족의 모습을 옆 눈으로 확인하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일단 지금은 가게 내버려 두자. 성은 안차겠지만 충분히 괴롭혔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저놈을 놔주면 악신으로 완전히 각성해버릴지도 모르는데!” 
 
“그래. 바로 그걸 노리는 거야.” 
 
“…뭐?” 
 
 
나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반항하던 것도 잊고 얌전해졌다.  
 
그 순간 도망친 마족이 황성 안으로 들어서는 것에 성공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성 주위에 거대한 결계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각성하는 순간까지 시간을 벌기위한 수작인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신음을 삼킨 나와 달리, 트로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더니 거의 폐허나 마찬가지로 엉망이 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우선 장소를 옮길까? 설명은 그때 가서 해줄게.” 
 
 
 
 
 
 
 
주변의 상황을 일단락 시킨 트로웰은, 나에게 그때까지도 멀찍이서 상황을 관전하고 있던 다른 일행들을 데리고 한적한 장소로 이동할 것을 제안했다.  
 
어차피 계속 이곳에 있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으므로,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마나를 불러와 중간계에 형체를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다른 일행들은 그 모습을 기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는 거야?” 
 
 
아까부터 따가울 정도로 강한 눈빛들이 느껴지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시큰둥하게 물었다. 그러자 헉-하고 낮은 신음이 울리더니 안 그래도 떨어져 있던 거리가 더욱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내 기억에 의하면 이들은 분명 나와 친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저런 반응은 뭐란 말인가? 난 의혹에 찬 시선으로 딴청을 피우는 그들을 노려보았다. 
 
 
“봤지? 봤지? 아직 정상이 아니라니까. 저 띠꺼운 표정에다 반항하는 말투를 봐. 이전의 녀석이라면 절대 어림없지.” 
 
“저대로 대부가 원래 모습으로 안 돌아오면 어떡하지, 은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군! 제가 기필코 엘님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말겠습니다!” 
 
 
아스가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화들짝 놀란 데르온이 당차게 대답했다. 그 옆에선 미네가 동조하는 표정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내가 모두 듣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다.  
 
확 가서 뒤집어엎을까 고민하던 나는, 과격한 힘의 사용으로 몸이 많이 피곤해져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곤 그만두었다. 이럴 땐 무시하는 게 상책이지. 암!  
 
 
‘아…그러고 보니 엘뤼엔은 어떻게 된 걸까.’ 
 
 
무심코 그가 어떻게 됐는지 물으려 했던 나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나 아까 전에 주절거리던 마족과 같은 대답이 돌아 올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런 내 속마음을 눈치 챘는지, 웃음을 머금은 트로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깐 경황이 없어서 깜빡 잊었는데, 엘뤼엔이라면 신계로 돌아갔어. 부상이 너무 심해서 치료신에게 보여야 했거든.” 
 
“아…아, 그, 그래?” 
 
“쿡쿡. 안 가려고 억지 부리는 걸 카노스가 와서 ‘공주님처럼’ 모시고 갔으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아마 상처가 낫는 데로 다시 돌아올 거야.” 
 
“으응.” 
 
 
말하면서 왠지 웃음을 참고 있는 느낌이었지만, 나는 그가 무사하다는 사실에만 안심해서 신경 쓰지 않고 밝은 표정을 지었다. 바짝 곤두서있던 신경이 이제야 가라앉는 기분이다. 그러자 멀찍이서 우리의 대화를 듣던 라피스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투덜대기 시작했다. 
 
 
“쳇. 엘뤼엔 얘기가 나오니까 단번에 얼굴이 펴지는 군. 그런 싸가지 없는 놈이 뭐가 좋다고…” 
 
“남의 아버질 함부로 욕하지 마. 죽인다.” 
 
“호오~ 한판 붙자고? 좋지~ 단, 난 아까 그놈처럼 쉽게 다루진 못할 거다.” 
 
“라피스님!! 그, 그게 무슨!” 
 
 
데르온이 창백한 얼굴로 기겁을 했지만, 라피스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붉은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속에 담긴 것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조금 난처한 기분이 되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혼쭐을 내주고 싶은데, 막상 실전으로 옮기려니 꺼림직한 느낌이 되었던 것이다. 그사이 다른 일행들은 열심히 라피스를 만류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예민하신 분을 더 자극하시면 어쩝니까! 정말로 돌아가시고 싶어서 그럽니까?” 
 
“죽으려면 은인이나 죽어! 대부까지 괴롭히지 말고!” 
 
“이렇게 무모할 줄이야. 역시 드래곤은 어쩔 수 없군요.” 
 
“으득! 이것들이…” 
 
 
하나같이 그를 나무라는 일행들의 반응에 라피스는 화가 난 얼굴로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그다지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나는 기분이 유쾌해져서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풋- 하하하하. 너도 어지간히 인지도가 낮구나.” 
 
“시끄러! 이놈들이 눈이 삔 거라고!” 
 
“흐응. 맨날 유치찬란한 일만 벌이고 다니니까 그렇지. 그러게 누가 덤비래?” 
 
“하! 먼저 시비건 쪽이 누구더라?” 
 
“응? 아아, 죽인다고 한건 내가 먼저 였나…윽. 왜 그런 말을 했지? 맞다! 네가 엘뤼엔을 욕했기 때문이잖아! 이 바보 도마뱀!!” 
 
 
그러나 당장 화낼 거란 예상과 달리, 라피스는 오히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내 모습을 살피며 이렇게 물었다. 
 
 
“…호오, 이제 좀 제정신이 드나보지?” 
 
“응? 뭐가?” 
 
“눈빛은 여전히 맛이 갔는데 말투는 그나마 돌아왔군. 너 지금 누구라도 하나 걸리면 작살낼 것 같은 얼굴인건 아냐?” 
 
“내가?” 
 
 
뜬금없는 말에 황당해진 나는 황급히 수경을 만들어 내 얼굴을 비춰보았다. 그 속에서 나는 이전의 온순했던 느낌과는 확연히 다른, 제법 날카로운 이미지가 풀풀 풍기는 모습이었다. 단순히 눈빛이 차가워졌다는 것 하나만으로 전혀 새로운 얼굴이 된 것 같았다. 
 
 
“난 이쪽이 더 마음에 드는데?” 
 
“그 말 진심이냐?” 
 
“왜? 괜찮지 않아? 남자다워 보이기도 하고.” 
 
“……” 
 
 
그러자 일행들은 또 뭐가 불만인지 서로를 바라보며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뭐? 순수했던 엘을 돌려달라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건 그렇고. 아까는 왜 날 말린 거야, 트로웰? 녀석이 각성하는 것을 노리다니, 난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어.” 
 
“아아, 그건 말이지. 마왕…아참, 이젠 마왕이 아니지? 그녀석의 이름이 뭐더라?” 
 
“카류드리안, 줄여서 카류안이라고 합니다. 그가 왕이 된 이후로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이름이죠.” 
 
 
데르온의 대답에 트로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설명을 이었다. 
 
 
“그래. 그 카류안이라는 녀석은 이미 평범한 방법으로는 죽일 수 없는 상태라서 그런 거야. 팔이 잘리고 다리가 떨어져도 조금 있으면 금방 재생되거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재생되면 다시 베어버리면 그만이잖아.”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언제까지? 엘, 네가 소멸하는 순간에도 녀석은 살아있을 텐데? 우리 정령왕들이 세대교체를 수 십 번 반복하면서 의무처럼 놈의 육체를 지키고 베어야 할까?” 
 
“…그건…” 
 
“게다가 놈이 완전히 각성하기 까지 필요한 아이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혹시라도 방심한 사이 그가 도망쳐서 멋대로 각성을 해버린다면, 그땐 정말 대안이 없는 거야. 신계에서는 그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없기를 바라고 있어.” 
 
“하지만 지금 각성해 버린다면 그것도 의미가…” 
 
“그건 틀려. 지금은 충분히 대처가 가능한 상황이잖아. 잊었어, 엘? 악신을 소멸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말이야.” 
 
“!!” 
 
 
그때서야 나는 트로웰이 말하는 의미를 깨닫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각성하는 순간에 생기는 공격할 수 있는 틈! 바로 그 순간을 위해 일부러 악신 카류안을 놓아 준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에는 반드시 상급 신 하나의 희생이 뒤따르지 않던가! 놀란 내 표정으로 본 트로웰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건 상황을 빨리 파악하지 못한 신들의 책임도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 두고두고 후환을 만드느니 차라리 희생자를 결정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야. 놈에게 재물로 바쳐질 아이들은 안됐지만. 그에 따른 대가가 주어지겠지.” 
 
“그럼 희생되는 신은…” 
 
“으음. 명계의 상급신으로 정해졌다는군. 그러니까 엘의 걱정처럼 엘뤼엔이 위험할 일은 없을 거야.” 
 
“……” 
 
 
이상하게도 안심이 돼야 하는데 머릿속은 더욱 복잡하게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침묵하던 나는 곧 확인사살 하는 심정으로 어렵사리 물었다. 
 
 
“중간에…자청하는 신이 나온다면 바뀌겠지?” 
 
“그거야…” 
 
“엘뤼엔이 자원할 가능성은? 아까 카노스가 와서 데려갔다고 했지? 스스로 신계에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상태가 심각했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내 생각이 맞아? 치료를 받아도 낫지 않는다면 소멸하게 될 텐데…그렇게 되면 엘뤼엔은 스스로 희생하려고 하지 않을까?” 
 
“…생각이 너무 지나쳐, 엘.” 
 
 
트로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부정을 한 것도 아니었다.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는 소리다.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때문이야…” 
 
“무슨 소리야, 엘. 그게 왜 네 탓이야?” 
 
“하지만 날 보호하려고 하지만 않았어도 엘뤼엔이 그렇게 다칠 일은 없었을 거 아니야.” 
 
 
그러자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라피스가 한심하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뭔 헛소리야? 놈이 끼어들지 않았으면 네가 그렇게 되었다고.” 
 
“차라리 내가 그렇게 되는 것이 나아. 왜 하필 엘뤼엔이…” 
 
“그야 놈이 네 가장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잖아.” 
 
 
무슨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식으로 대답하는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네 말은 꼭…엘뤼엔이 아니라도 누구나 그랬을 거라는 말처럼 들리는데…” 
 
“그 말이 맞는데? 실제로 그때 너한테 달려가던 녀석은 엘뤼엔만이 아니었다고. 아스와 데르온 녀석도 달려가던 중이었지.” 
 
“흐음. 넌?” 
 
“나야 뭐….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물어보자. 다친 사람이 엘뤼엔이 아니라 나였다고 해도, 넌 아까처럼 분노해서 마족 녀석과 싸웠을까?” 
 
 
뜬금없는 질문치곤 라피스는 상당히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묘한 박력을 느낀 나는 나도 모르게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왠지 아니라고 하면 한 대 칠 것 같은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라피스는 생긋 미소 짓더니, 한손으로 내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좋아, 다음에도 만약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땐 내가 너 대신 죽어주지.” 
 
“윽! 어린애 취급하지 마! 그런 약속 따윈 하나도 안 반갑다고! 그리고 너! 지금 그런 말 한다는 건 엘뤼엔이 다쳤을 땐 꼼짝도 안했단 소리잖아!” 
 
“그래서 다음번엔 내가 죽겠다고 하잖냐.” 
 
“웃기지마! 넌 단순히 내가 엘뤼엔 때문에 화난 게 부러워서 그런 거잖아! 제발 이상한 것 가지고 경쟁 좀 하지 말라고! 목숨이 무슨 장난 인줄 알아?” 
 
 
버럭 쏘아붙이는 내 말에 라피스는 그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뭔가 복잡한 표정으로 나와 라피스를 바라보고 있던 아스가 입을 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아, 그렇구나. 은인은…현실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게 아니라, 본인만 좋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던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아스?” 
 
“으음. 그게… 난 지금까지 은인이 유희를 즐기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위급한 상황에도 여유를 부리는 건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은인은 그냥 재미있었던 거야. 갑자기 성격이 변해버린 대부를 관찰하는 일이.” 
 
“!!” 
 
“맞아. 그리고 그걸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버려도 좋을 정도로 단순무식한 놈이지. 하여튼 겉멋만 잔뜩 든 바보라니까.” 
 
“트로웰…” 
 
 
마지막으로 이어진 트로웰의 말에 라피스는 단번에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니라고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리곤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나에게 대놓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재미없는 건 딱 질색이야. 그런 의미에서 너랑 계약한건 행운이었어. 좀 귀찮긴 해도 네 옆에 있으면 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져서 즐거웠거든.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처음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무슨…” 
 
“뭐, 어쨌든 난 네가 맘에 들었어. 하지만 그저 계약자나, 친구의 입장에선 독점하기 힘들다는 게 꽤 불쾌하긴 하군. 뭔가 특별한 존재가 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그걸 지금 네놈이 나한테 묻는 거냐!  
녀석은 돌이 되어 굳어진 내 모습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연신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버지 자리는 이미 엘뤼엔놈이 꿰어 찼으니 별 수 없고…아, 그래! 연인은 어때? 원한다면 여자 모습으로 변해줄 수도 있는데.”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천재란 놈들은 원래 다 이런 걸까? 새삼 장담하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드래곤을 좋아할 날은 없을 것 같았다. 당췌 뭔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가 있나! 
 
 
“제길. 언제 날 잡아서 저 놈 머릿속이나 해부해 버릴까.” 
 
“쿠, 쿨럭. 에, 엘님. 아직 완전하게 원래대로 돌아오신 건 아니었군요.” 
 
“응? 뭐가요?” 
 
“음, 그러니까 방금 하신 말씀이라든가…” 
 
“내가 한말이 뭐가 어때서? 아아, 걱정 마요. 해부한 다음엔 다시 고이 봉합할 테니까. 머리가 갈라진 시체라도 꿰매 놓으면 그리 보기에 나쁘진 않을 걸요.” 
 
“허억. 저어…설마 전혀 자각이 없으신 건?” 
 
“??” 
 
“아, 아니 실례했습니다!!” 
 
 
어이, 그런데 왜 그 말을 하면서 나한테서 멀찍이 떨어지는 건데? 나는 의혹에 찬 시선으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데르온을 바라보았다. 설마 방금 했던 말에 문제가 있었던 건가. 
 
 
‘흐음…해부한 걸 다시 봉합해두는 건 역시 심한 걸까. 아니, 그전에 해부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을지도. 그냥 간단하게 죽인다고 표현할 걸 너무 직선적으로 말했나?’ 
 
 
겨우 이 정도의 말 가지고 놀라서 벌벌 떨 줄이야. 마족이란 종족이 잔혹하다더니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해할 수 없는 건 트로웰 역시 마찬가지. 그는 생긋 웃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흐음. 말투나 행동은 예전 그대로인데, 사고방식이 좀 달라진 것 같군. 엘퀴네스 본래의 성격과 엘의 성격이 섞인 건가. 게다가 본인은 그 점에 대한 자각도 없으니… 뭐, 아무렴 어때. 귀여우면 그만이지. 후후훗.” 
 
“……” 
 
 
저기, 트로웰? 그런 말은 본인에게 안 들리게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닥쳐올 내 앞날을 진심으로 걱정하기 시작했다.  
왠지 앞으로도 한동안은 동물원 원숭이 취급을 면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 
 
요 근래 충격적인 일을 두번이나 경험했다지요.. 
 
그 첫번째 사례:) 
 
제가 자주 가는 사이트에서는 가끔 판타지 소설을 추천해달라는 글이 올라온답니다. 그때마다 검색한 결과 엘퀴네스는 없더군요. 뭐,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어떤 분이..'동인, 여성향느낌이 강한 판타지 소설 추천바랍니다!'라는 글을 올리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아래 올려진 리플에 엘퀴네스가 3번이나 들어가더이다.(털썩)  
 
...........그냥 히로인 만들어 버릴까요..? (울먹) 
 
 
두 번째 사례:) 
 
아주 오래전에 매신저에 대화상대 신청이 왔습니다. 모르는 이름이었지만 아는 사람중에 하나이겠거니, 하고 확인 버튼을 눌렀었답니다. 그리고 한참이나 잊고 지내다가, 오늘 점심무렵, 컴퓨터를 키자마자 대화창이 켜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절 아세요? 라고 묻더군요. 당연히 모른다고 했고, 그쪽이 먼저 신청을 해서 확인 버튼을 눌렀다고 했지요. 뭔가 긴박해 보이길래, 큰 일이라도 있는 줄 알고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습니다. 잠시 후 그 사람은 자신의 이름이 기억났다고 하더군요. <-기억상실증입니까? 
이름을 말했지만 모르는 사람이길래, 전 모르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뜸 '나도 너 몰라 ㅋㅋ' 이러더이다. 
 
그러면서 너 몇살이야? 이러더군요. 그래서 그쪽은 나이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습니다. '내가 먼저 물었잖아' 라길래, '상대방의 신분을 알려면 본인부터 밝히는게 정식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죠.<-토씨하나 안틀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됐어. 너 혼자 놀아. 즐!ㅋㅋ' 이러더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예의를 갖출 상대가 아니길래, '모르는 사람 같으니 이제부터 대화 상대에서 삭제하겠습니다' 라고 했더니, 맘대로 해. 라고 하면서 왠 알아보지 못할 타자를 난무하더군요. (욕이라는 것은 해석하지 않아도 알겠더이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중에 찔리는 분 있으실까요? 
 
성실 연재 안한다고 이렇게 저주를 내리시면 아니됩니다아아아아아 (눈물을 흩뿌리며 달려가기) 
 
 
 
  - 끝과 시작 - 
 
 
악신 놈이 각성에 돌입하기 위해 성안에 틀어박힌 이후, 나는 끈덕지게 달라붙는 라피스를 상대하느라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세워져 있는 상태였다. 놈은 말도 되지 않는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으며 쓸데없는 설득이란 걸 하고 있었다. 
 
 
“이봐, 다시 생각해 보라고. 연인이 뭐가 어때서? 적당히 독점하기 편하고, 유대감을 느끼기에 그보다 더 좋은 사이가 어디에 있어?” 
 
“…난 분명히 싫다고 했다.” 
 
“글쎄, 싫은 이유를 대보라니까? 원한다면 여자로 폴리모프도 해준다잖아. 아! 혹시 네가 여자역할을 하고 싶은 거야? 나야 오히려 환영이지만.” 
 
“이익! 나가 죽어!!” 
 
“앗! 대부, 안돼!” 
 
“엘님, 제발 진정을!!” 
 
 
아쉽게도 놈의 머리를 해부해보겠다는 내 계획은 옆에서 말리는 데르온과 아스 때문에 무산되고 말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내 팔을 잡고 매달리는 두 마족을 떼어내며 화난 얼굴로 소리쳤다. 
 
 
“이것 놔! 저걸 참으란 말이야! 그냥 냅두면 병이 더 심해진다고!” 
 
“대, 대화라는 좋은 방법을 놔두고 어찌 손에 피를 묻히려 하십니까아! 그러다 아스님이 배우면 어쩌시려고요.” 
 
“맞아, 대부! 나 아직 배울 거 무척 많아! 교육적인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봐. 응?” 
 
“교육?” 
 
 
아아. 그러고 보니 아직 아스는 어린애였지. 이미 겉보기로는 어른이지만 태어난 지 한 달 밖에 안됐으니 아직 이 세상에 대해 호기심이 많을 것이다.  
그들은 내가 움직임을 멈추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마주보며 생긋 미소 지은 채 대답했다. 
 
 
“그래? 그럼 더 잘 됐네. 아스, 잘 봐둬. 까부는 놈들을 어떻게 척살하는지 몸소 시범을 보여 줄 테니.” 
 
“으아아악! 엘니이임~!” 
 
“대부우우우!” 
 
 
나참. 대체 왜들 이렇게 기겁을 하는 거야?  
 
결국 나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달려드는(?) 두 마족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이거야 마치 내가 가해자가 된 것 같지 않은가!  
그 와중에도 이 모든 사건의 주범인 라피스 녀석은 그 와중에도 실실 웃음을 흘려 내 울화통을 도지게 만들었다. 
 
 
“여어~ 정말 고생이 많은걸~” 
 
“닥쳐! 이게 다 네놈 때문이잖아!” 
 
“흠. 그러니까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간단하잖아. 대체 뭐가 문제인데? 친구는 너무 평범하고, 계약자는 어감이 나쁘고. 그래서 연인하자는 것도 불만이야?” 
 
“당연하지! 내가 머리에 총 맞았냐?” 
 
“총?” 
 
“아씨! 그런 게 있어!” 
 
 
설명해주진 않았지만 대충 어감에서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라피스는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이 되었다. 아무래도 장난인건 아닌 것 같아,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물었다. 
 
 
“하아. 대체 네놈이 생각하는 연인의 정의가 뭐냐? 친구보다 소중한 수준?” 
 
“가족과 친구와는 또 다른 개념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리고 유일하게 상대방을 독점해도 당연할 권리를 가진 존재, 아닌가?” 
 
“그리고 너는 그 ‘독점할 권리’가 마음에 들어서 연인하자고 하는 거고?” 
 
 
끄덕.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놈을 보고 나는 또 다시 치밀어 오르는 살인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건 순전히 옆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감시하는 아스와 데르온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오고 보니 지금까지 용케 이 녀석과 어울려 다녔나 싶다. 나, 전에는 대체 어떻게 참았던 거지? 
 
 
“당장 이 자리에서 그나마 있던 계약자의 입장까지 파기당하고 싶냐? 시끄러우니까 이사나나 불러. 진작 불렀어야 했는데 네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통에 늦어졌잖아!” 
 
“흐음. 난처한 상황에 대한 대처가 빨라진 건 성격이 바뀌었기 때문인가. 그렇담 별로 반갑지 않은걸.” 
 
“라.피.스.라.즐.리!!” 
 
“아아, 알았어. 알았다고. 쪼그만 주제에 성질은…” 
 
 
자신의 요구가 먹히지 않는 것이 불만스러웠는지 라피스는 이후로도 대놓고 투덜거리며 내 신경을 긁었다. 혹시 저 자식은 날 어떻게 하면 괴롭힐 수 있나 궁리만 하고 사는 게 아닐까? 
 
 
 
 
 
이사나와 그 일행들을 조우한 것은, 기분이 나빠진 라피스가 그들을 단번에 강제 연행 해버린 탓에 비교적 빨리 이루어질 수 있었다. 문제라면 미처 대비지 못한 상태에서 불려나온 거라 차림새가 전투의 한복판에 서있는 사람마냥 다들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전투 중에 끌려온 것이 맞았다. 우리가 이쪽에서 악신을 상대하는 사이 이사나쪽도 대공의 군사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라피스는 바로 그 와중에 불러냈던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상대(그것도 다수)를 강제 연행하는 마법이라니! 새삼 라피스가 드래곤 중에서도 천재라는 사실을 공감할 수 있었다. 
 
 
“…어?” 
 
 
이사나와 알리사, 그리고 시벨리우스는 불려온 이후에도 한참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곧 나와 라피스를 발견하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에, 엘? 정말 엘 맞아?” 
 
“…그러는 너야 말로 이사나가 맞는지 묻고 싶다만.” 
 
 
잠시 못 본 사이에 이사나는 폴리모프 마법을 풀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 훤칠하게 커버린 키가 이제 어디에 내놔도 도무지 소년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다.  
 
나랑 의논도 없이 멋대로 마법을 해제하다니! 겉으론 표현하지 않았어도 그의 요정 같던 모습을 내심 뿌듯해 했었던 나는 일말의 배신감(?) 마저 느끼고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내 반응이 이상했는지 반가운 얼굴을 하던 이사나들의 몸이 흠칫 굳는 것이 느껴졌다. 
 
 
“왜, 왠지 못 보던 사이에 변한 듯한?” 
 
“이, 이사나씨도 그렇게 느꼈어? 어째 묘한 카리스마가 흐르는 것이…혹시 엘의 탈을 쓴 가짜가 아닐까?” 
 
“왜? 나는 훨씬 보기 좋은데.” 
 
“켁. 그 말 진심이야, 시벨리우스씨?” 
 
 
경악하는 알리사의 반응에 내 기분이 더 나빠지는 이유는 뭘까. 잠시 세 사람의 얼굴을 노려본 나는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이 나오기 전에 이쯤에서 화제를 전환시켜야 겠다고 생각했다.  
 
 
“자자, 다들 잡담은 그만. 보아하니 전투 중에 온 모양인데, 그쪽 상황은?” 
 
“아, 이제 거의 마무리만…어? 그러고 보니 이곳 상당히 낯 익는데… 맙소사! 수도잖아? 우리들 어떻게 여기로 온 거야?” 
 
“어떻게 라니. 당연히 라피스가 마법으로 불러왔지.” 
 
“마법으로? 아, 텔레포트 인가?” 
 
 
그걸 이제야 궁금해 하다니. 너무 놀라서 사고회로가 멎어버렸던 걸까?  
 
수도란 걸 알아차린 즉시 이사나가 보인 반응은 초토화가 되어버린 주변을 보며 경악하는 것이었다. 현재 황성 주변은 바닥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마족전사의 시체와 폭발의 잔재들로 쑥대밭을 이루고 있었다.  
이쯤 되면 아무리 둔한 녀석이라도 뭔가 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을 것이다. 예상대로 세 사람(?)의 얼굴엔 당혹스러운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마족들이…설마 숙부가 마족들까지 동원했던 거야?” 
 
“아아. 잠깐 그럴 일이 있었어. 지금은 안심해도 돼. 아스가 마왕의 자리를 넘겨받았거든.” 
 
“뭐? 아스가? 아스는 어디에 있어?” 
 
 
한 달 사이에 훌쩍 어른이 되 버린 탓에 이사나들은 그들의 코앞에 있던 아스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아스는 입가에 피식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나 여기에 있는데.” 
 
“에? 네가…아스라고?” 
 
“헉, 거짓말!”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꼬맹이가 갑자기 자랐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세 사람은 불신의 눈빛을 띄며 경계하는 얼굴로 아스를 살펴기 시작했다. 그러자 열혈 충성 부하 데르온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끼어들어 소리쳤다. 
 
 
“감히 주군을 의심하는 겁니까! 주군께 대항하는 것은 곧 저에게 도전하는 일! 이 데르오느빌! 목숨을 걸고 싸워서라도 증명해 보이지요!” 
 
“에? 아니, 진정해요, 데르온. 우리는 단지 믿을 수가 없어서…아무리 인간이 아니라지만, 이렇게 빨리 자란다는 게 좀…” 
 
“마족들은 유년기가 짧다고 말씀 드렸잖습니까. 한 달이면 성년으로 자라기 충분한 시간입니다.” 
 
“흠, 그러고 보니 흑단같이 새까만 머리카락이나 붉은 눈동자는 그대로군. 휘유~ 엄청난 미남으로 자랐는걸.” 
 
 
그러자 아스는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칭찬 고마워, 퍼런 엘프씨.” 
 
“크악! 시벨리우스라고 부르랬잖아!!” 
 
“아, 그랬던가? 미안. 깜빡 잊었어.” 
 
“너 이 자식, 지금 일부로 그렇게 부른 거 맞지! 엘! 대체 저놈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앗! 대부한테 시비조의 말은…” 
 
 
하지만 아스는 채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한손에 얼음 창을 꺼내 쥔 내가 그것을 시벨의 목에 똑바로 겨누었기 때문이다. 그 돌발 상황에 주변에 있던 일행들은 모두 당황했지만 나는 그것을 말끔히 무시하며 싸늘하게 물었다. 
 
 
“지금 뭐라 그랬냐. 교육? 그딴 걸 왜 나한테 물어. 내가 아스 보모야?” 
 
“어어? 아니, 난 그냥…” 
 
“이번 한번은 봐주지. 다음에도 그딴 말 했단 봐. 수틀리면 다 때려 치고 정령계로 돌아가 버리는 수가 있어. 안 그래도 저 썩을 도마뱀 때문에 짜증나 죽겠는데, 너까지 날 실망시키지 말라고. 알아들었어?” 
 
“…으응.” 
 
 
나는 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얼음 창을 거두어들였다. 왠지 묘하게 주위가 조용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피곤했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잠시 후 나는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던 이사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전투 중에 갑자기 불려 와서 놀랐겠군. 지휘관이 3명이나 빠졌으니 그쪽 상황이 나빠질까?” 
 
“아, 아니. 괜찮을 거야. 어차피 거의 마무리 단계였고, 카웰 형님과 보좌관도 있으니까. 그리고 얼마 전에 생포한 카리브디스 공작도 내 뜻에 따르기로 결정했거든. 나의 공석은 그들이 알아서 채우겠지. 하나같이 유능한 사람들이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고. 너희들을 불러온 건 예상보다 결말이 빨리 닥칠 것 같기 때문이야. 오히려 그 쪽에 있는 편이 훨씬 안전하겠지만, 대공에 대한 처벌은 직접 내리고 싶겠지?” 
 
“뭐? 설마 벌써 일이 그렇게까지 진척이 된 거야?” 
 
“황성을 자세히 살펴봐. 뭐가 보여?” 
 
 
내 말에 이사나는 황급히 황성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 전체를 감싸고 있는 붉으스름한 막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박쥐의 날개가죽에 달린 피막처럼 생긴 지라 보는 이로 하여금 혐오감을 저절로 유발시켰다.  
 
 
“저, 저게 뭐야?” 
 
“악신 녀석이 설치한 결계야. 누구도 접근 하지 못하게, 각성의 순간까지 시간을 벌어볼 작정인 것 같더군.” 
 
“뭐? 그럼 위험한 거 아니야? 어서 막아야…”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일부로 방치하고 있는 거니까. 신계에서 뭔가 따로 생각해 둔 게 있는 모양이더라고. 그건 네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야.” 
 
 
그밖에 나는 이곳에 와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대강 간추려서 말해주었다. 10만 대군의 마족전사부터 시작해서, 악신이 도망친 일까지. 그 과정에서 벌어진 누군가의 부상라든가 아스가 전대의 마왕, 즉 악신으로부터 왕좌(王座)를 받아내던 상황의 긴박함 또한 빼놓지 않고 설명했다.  
 
물론 그 전에 라피스와 데르온이 여장한 사건이나, 수도의 경비대들한테 쫓겨 다니며 몸을 피했던 이야기는 숨겼지만 말이다. 
 
 
“헤에. 라피스님이 본체로 돌아갔었단 말이지? 아쉽다. 나도 한번 보고 싶었는데.” 
 
“별로 구경할 만 한 건 아니었어. 참고로 황성의 친위대들은 이미 전부 제압해서 항복을 받아둔 상태지. 대공만 죽으면 혁명은 성공인 상황이랄까.” 
 
“아…그렇구나. 숙부만 죽으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이사나는 곧 흠칫 몸을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얼굴이었지만, 자기 손으로 혈육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현실로 다가오니 두려운 모양이다.  
 
 
 
 
 

그 모습에 무심코 어깨를 다독여 주려했던 나는 곧 머쓱한 기분이 들어 반쯤 들었던 팔을 슬그머니 내리고 말았다.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했던 행동들이 전부 어색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 대신 나는 딱딱한 얼굴로 뭔가 위안을 줄만한 말이 없을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나보다 한발 앞서서 말을 건네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옆에서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시벨리우스였다.

"왜 그런 얼굴이야? 모든 일이 순조로우니 다시 원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 텐데."

"그거야 그렇지만..."

"새삼 같은 핏줄이라는 사실이 걸리는 거냐? 정말이지 인간들은 별 쓸데없는 것에 목을 맨다니까. 놈에게 당했던 시절을 잊었어? 
네 아버지와 수하들을 죽인 녀석이 누구지? 이미 인간이길 포기한 놈이야. 새삼 동정할 가치도 없다고."

"알고 있어요, 그저...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 버렸나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숙부는 어땠는지 몰라도, 배신당하기 전에 나는 그를 꽤나 좋아했었거든요. 뭐, 그렇다고 그를 죽이겠다는 마음이 변한건 아니에요. 
그것만큼은 반드시 해낼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확고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모습이 기특했는지, 시벨리우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내 기분은 점점 바닥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왠지 내가 할 역할을 남에게 빼앗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쳇, 뭐야. 나도 그 정도의 말은 할 수 있었다고.'


내 말투가 이전보다 험해진 건 나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부드러운 어법을 사용하려고 고민 한 거였는데, 그 사이 차례를 빼앗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일행들은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그저 내가 불쾌한 표정을 짓는 것을 의아해 하기 시작했다.

"엘? 기분이 안 좋아? 오늘따라 유난히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것 같아."

"그러게. 말투도 달라지고, 눈빛더 날카로운 걸? 뭐, 이런 모습도 신선해서 좋긴 한데 어째 적응이 안 된달까."

"흥! 수작부리지 마. 난 원래 이런 말투, 이런 얼굴이었어. 대체 뭐가 어쨌다고 그러는 거야?"


하지만 그건 오히려 역효과였다. 내 대답을 들은 이사나들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헉! 드, 들었어, 알리사? '흥'이래! 믿을 수가 없어! 엘의 입에서 '수적부리지 말라'는 말이 나오다니!"

"저기, 시벨님. 정령왕도 미칠 수 있는 건가?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해?"

"그, 글쎄??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뭔가 방법을 궁리해봐! 엘님이 가엽지도 않아?"

"......"


이젠 아주 대놓고 날 미친 정령으로 취급하는 거냐! 
그들은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더니 종래엔 아스와 데르온마저 합세하여 '나를 치료할 방법'을 의논하는 것이 아닌가!

나 지금 화내도 되는 상황인거 맞지?
하지만 나는 미처 그들에게 따지고 들 수 없었다. 
막 드러려는 찰나 지금까지 멀찍이 떨어져 사태를 방관하고 있던 트로웰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환기시켰기 때문이다.


"쿡쿡쿡. 다를 그만들 해. 엘이 당황하잖아. 자각도 없는 본인을 추궁하는 건 잔인한 일이라는 거 몰라?"

"윽, 자각이 없어요? 그건 더 심한 상태잖아.어라? 그런데 누구?"


그러고 보니 아까 설명 중에 트로웰의 모습이 변했다는 말을 한다는 것을 깜빡 잊었던 모양이다. 
그 또한 아스처럼 어린애에서 갑자기 성년으로 자라지 않았던가!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자랐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지만.)

일행들은 바짝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트로웰은 불쾌한 기색 없이 생긋 웃으며 여유롭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음? 아아. 이 모습으로는 처음인가? 나 트로웰인데."

"헉, 뭐, 뭐라고요? 트로웰?"

"그래. 다들 오랜만이네. 다시 만나서 반갑다, 알리사. 그때보다 제법 많이 컸는걸?"

"거, 거짓말. 절말 트로웰이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묻는 알리사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그녀가 이미 트로웰과 안면이 있었음은 물론, 그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알리사는 이사나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는 상태다. 
그런 와중에 이전부터 동경하던 존재를 만나게 되면 두 사람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더욱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이사나 또한 불안한 표정으로 알리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운명의 라이벌까지 있는 참에 최강의 적을 대면했으니 지금 어지간히 착잡한 심정일 것이다.
혜안을 가진 이로서 그 속마음을 모를 리 없을 텐데도, 트로웰은 따청을 피우며 유난히 알리사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그렇게 몰라볼 정도야? 그냥 키만 좀 키운 것뿐인데."

"키가 큰 것 정도가 아니야. 완전히 다른 사람 같잖아! 바보! 그동안 뭘 하고 지낸 거야?"

"뭐이것저것. 그나저나...넌 여전히 중급 정령사 구나. 아직 클레이의 소환은 성공하지 못한 거야? 
그래서야 어디 날 소환해낼 수 있겠어?"

"시, 시쓰러! 요즘 바빠거 소환할 시간이 없었다고! 꼭 해낼 테니까 두고 봐!"

"하하하! 여전하구나."

"뭐야? 놀리는 거야?"

"아니, 전혀. 오히려 보기 좋다는 칭찬의 뜻이었는걸."

"흐, 흥!"


어우리지도 않게 얼굴을 붉히는 알리사를 보자니, 새삼 어린애라도 여자는 여자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트로웰과의 대화에만 정신이 팔려, 옆에 있는 이사나의 어깨가 추욱 늘어지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거야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자가 된 꼴인가. 쯧쯧, 그러게 평소에 확실히 프로포즈를 해두지 그랬니, 이사나.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그리 오래 이러지지 못했다. 무척 놀란 표정을 지은 시벨리우스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트로웰! 네가 정말 땅의 정령왕 트로웰이라고?!"

"...?...아아. 그렇긴 한데. 넌 누구지? 생김새는 영락없는 블루엘프지만, 그다지 엘프의 냄새는 나지 않는데."

"너도...내가 기억나지 않는 거야?"


허탈하게 묻는 시벨의 얼굴은 마치 유일하게 믿고 있던 마지막 희망까지 놓치고 기력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의아한 표정을 하던 트로웰은 잠시 후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호기심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넌 유니콘이군? 이 특유의 기운은 절대 잊을 수 없지. 
세상에. 4천 년 전에 이 땅을 떠난 종족이 이곳엔 무슨 일로 온 거지? 게다가 꽤나 고위급의 유니콘 같은데."

"유니콘? 그게 뭐야? 시벨님은 엘프인 게 아니었어?"


어리둥절하게 묻는 알리사의 말에 트로웰은 생긋 웃어보이곤 대답했다.


"음, 유니콘이란... 이마에 기다란 뿔이 있고, 두 개의 하얀 날개를 지닌 말이라고 해야 하나? 
성스러운 동물로서 신의 가호를 받는 종족이지. 4천 년 전까진 이 세계에 있었지만, 다들 신계로 이주했기 때문에 지금의 
인간들에게는 거의 전설로 남아있지만 말이야."

"날개 달린 말? 하, 하지만 시벨님 모습은..."

"폴리모프 한 거야. 유니콘들은 드래곤 다음으로 마법을 잘 다루거든. 
아무튼 다시는 못 볼거라 생각했던 종족을 이곳에서 보게 되다니, 굉장히 신기한 걸? 엘은 인맥도 넓다니까."


그러자 시벨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원한 대답은 그게 아니야."

"어라.아니라고? 흐음. 기억하지 못하냐고 묻는 걸 보면, 전에 나와 만난 일이 있었나? 이상하군. 
아무리 존재감이 희미해도 한 번 만나면 잊을 리가 없을 텐데. 게다가 넌 그렇게 존재감이 없는 타입도 아닌걸."

"아니. 4천 년 전에 넌 나와 만난 적이 있어. 그것도 여러 번. 그리 사이좋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말이야."

"4천 년 전 이라면..."

"온 세상의 종족들이 대지를 일컬어 '암흑의 주군'이라 칭하던 때지."

"!!"


그 말이 꽤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던 걸까? 
시벨을 바라보는 트로웰의 얼굴엔 어느새 옅게 흐르던 미소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정한 빛을 뿜던 황금색 눈동자도 서늘하게 식어 상대를 향한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트로웰도 이런 얼굴을 할 줄 알았던가?
난생 처음 보는 그의 차가운 얼굴에 내가 움찔 놀라는 사이, 시벨은 오히려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바로 그 얼굴이야. 아깐 너무 낯설어서 하마터면 그새 정령왕의 교체라도 있었는지 착각 할 뻔 했어, 트로웰."

"...넌 누구지?"

"너도 알다시피 유니콘이지. 그리고 4천 년 전에 사라진 비밀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존재기도 하고."

"비밀이라... ."


짧게 중얼거린 트로웰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시벨의 모습을 빤히 흩어 내려갔다. 
잔뜩 굳어버린 공기에 주위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지만, 두 사람(?)의 얼굴이 너무도 진지한 탓에 누구도 그 사이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트로웰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넌 '그때의'장면과 관계가 있던 녀석이군. 어쩐지 생판 처음 보는 광경이 떠올라서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 
그게 환상만이 아니었다는 건가."

"뭐? 그럼 너도 뭔가 기억나는 게 있다는 소리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트로웰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시벨은 예상치 못한 대답이라는 듯 놀란 표정을 하며 황급히 
물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바짝 긴장해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시벨이 묻는 것은 틀림없이 과거의 '엘'과 관계된 일일 것이다. 정말 그와 같은 인간이 실존했단 말인가?

하지만 역시나 트로웰은 강적이었다. 그는 기대감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눈을 마주보며 상큼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안 가르쳐 주지."

"...에?"

"그, 그게 무슨!!"


지금 누굴 놀리는 건가! 시벨은 물론, 덩달아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트로웰의 입장은 간결했다.


"암흑의 주군이니 뭐니, 잊고 싶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 벌이야. 
내게서 원하는 정보를 얻고 싶다면 다음부턴 좀 더 예의바르게 구는 게 좋아. 그때의 나를 기억하고 있다면 당연히 알겠지만, 
난 그리 친절한 성격이 아니거든."

"...하아. 그래. 넌 그런 녀석이었지."

"뭐, 어쨌든 이것으로 나도 의문이 풀려서 기분이 후련한걸. 그래, 그랬었던 거군...후후후."

"제길! 혼자만 알고 중얼거리기냐!!"


혜안을 가진 트로웰로선 시벨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그의 기억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편리선이란 말인가!
시벨이 화를 내든 말든, 혼자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려보이던 그는, 잠시 후 나를 보며 뜬금없는 말을 건넸다.

"난 네가 정말 좋아, 엘."

"...뭐?"

"아니, 그냥 그렇다고.후훗.어쨌든 '앞으로'잘 부탁해."

"...???..."

어쩐지 강조하는 단어에서 묘한 뉘앙스가 풍겼지만, 나는 좀처럼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었다. 
하지만 트로웰이 건네는 엉뚱한 말의 대상은 나 하나만이 아니었다.
마치 사냥감을 물색하듯 휘익~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이번엔 아까부터 무료한 표정을 짓고 있던 라피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라피스 너도 제법이야.이제껏 제멋대로 구는 바보라고만 생각했는데 다시 봤어."

"뭔 헛소리야?"

"아아, 별거 아니야. 좀, 아니 상당히 많이 기특해서 말이지. 쿡쿡, 귀여운 녀석. 너도 가끔은 제정신일 때가 있구나."

"...그러는 너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로군."


단번에 결론은 내린 라피스는 옮기라도 할 것처럼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서 주춤 몇 걸음 물러섰다.
나야 뭐, 어느 정도 짐작되는 부분이 있어서 잠자코 있었지만, 정말로 상태가 나빠 보였다면 역시 똑같이 물러났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뭔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아내고 이러는 것이겠지? 별로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지만.


"너무하는 걸. 난 그저 순수한 호의로 말했을 뿐인데."

"시끄러! 아까부터 영문 모를 소리만 하고 난리야? 어이, 퍼런 엘프. 네가 말해봐. 저 녀석 대체 왜 저래?"

"내 이름은 시벨리우스닷! 혼자서 알고 그러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답답하긴 나 역시 마찬가지라고!"

"으음.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군요. 정말 말 안 해주실 겁니까, 트로웰님?"


데르온 역시 궁금했던지 슬쩍 물었지만, 그의 대답은 여전히 전과 동일했다.
그러자 요상하게도 일행들의 시선이 죄다 나에게 몰리는 것이 아닌가? 
뭔가 잔뜩 기대를 담은 눈들이라 나는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목소리를 더듬거리며 물었다.


"뭐, 뭘 그렇게 봐?"

"엘님! 엘님이 트로웰님께 물어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 내가?"

"그래,엘! 네가 부탁하면 들어줄 지도 몰라. 같은 정령왕이잖아."

"나도! 나도 궁금해, 엘님! 지금 트로웰이 무슨 말을 한 거야? 응? 좋아한다는 게 무슨 뜻이야?"

"......"


알리사. 너는 어째 다른 사람들과 궁금해 하는 핀트가 빗나간 것 같구나. 정녕 이사나는 관심 밖인 거냐?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식으로 부탁을 해오면 거절항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쪽팔리는 것도 무릅쓰고 매달여서라도 설명을 부탁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우리가 알아도 되는 일이라면 트로웰이 진즉에 알아서 설명했을 것이다. 
그것을 일부로 감춘다는 것은 그만큼 복잡한 사건이라는 뜻이 아닌가.
안 그래도 처절한 내 인생이 앞으로 점점 더 가시밭길 이라는 사실 따윈 모르는 편이 오히려 유익하다고!
그렇게 다짐한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거절했다.


"싫어. 난 끌어들이지 말고 알아서 해결해."

"헉! 어떻게 이렇게 매정할 수가!"

"시끄러. 귀찮은 건 딱 질색이야. 도움이 되는 말이었다면 트로웰이 알아서 설명했을 거야. 
즉,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은 우리가 들어봤자 하등 좋을 게 없다는 소리지. 그런 걸 뭣하러 물어서 그를 곤란하게 해야 하지?"

"하, 하지만 궁금하지 않습니까? 엘님도 관계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게다가 라피스님도..."

"그러니까 나는 더 알고 싶지 않다는 거야! 저 녀석과 관계 되서 좋았던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날 설득할 시간동안 차라리 트로웰에게 매달리는 편이 훨씬 나을걸!"


내가 한 손으로 척하니 라피스를 가리키며 쏘아붙이자, 일행들은 더 이상 부탁하지 못하고 꿀꺽 마름 침을 삼켰다.
다행히 머리가 나쁜 모양은 아니라, 말귀를 잘 알아들은 것 같다. 진작 이렇게 할 걸.

잠시 후 그들은 돌아서서 걷는 내 뒤에서 자기들끼리 조그마한 목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못 듣는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대화는 내 귓가에 똑똑히 들려오고 있었다.


"흑흑, 대부가 변했어."

"착하고 순진하던 엘이 어쩌다가 저렇게..."

"뭔가, 라피스님에게 유감이 많은 듯 한데요?"

"맞아! 그래보였어. 대놓고 손가락질까지 했잖아."


이사나의 말에 알리사가 동조하고 나서자 단번에 불쾌함이 가득 담긴 라피스의 대답이 이어졌다.


"쳇. 내가 뭘 어쨌다고? 그나저나, 저 따분하다는 얼굴이며 시큰둥한 대답이며...점점 누굴 닮아가는 것 같군."

"저거 정말 치료방법은 없는 겁니까?"

"글쎄.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해결 되지 않을까?"

"혹시 영원히 저 상태면요?"


걱정스럽게 묻는 데르온의 말에 일행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왜 저
쪽의 공기만 서늘하게 식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까?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이내 신경을 완전히 끄기로 작정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들에게 말이라도 붙였다간, 치료한다는 명목 하에 모진 고문(?)을 당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은 표정들을 보건데, 아마 내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생애 첫 유희에 만난 존재들이 하나같이 저모양이라니, 나는 동료 운이 없는 걸까?

 

 결국 내가 이 모든 고민을 털어놓고 위안을 얻은 존재는 같은 정령왕인 미네와 트로웰 밖에 없었다. 
나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성격의 변화라든가, 그로인해 주변에서 보이는 반응들이 적응되지 않는다는 말에 미네는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하지만 기분이 나쁜 걸. 미네가 보기에도 내가 이상해졌어?"

"이상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군요. 정령왕으로서 어느 정도 위엄을 갖추는 것은 전혀 나쁘지 않습니다. 
대대로 내려온 엘퀴네스들의 성향에 비교하면, 오히려 그동안 엘이 너무 우유부단했던 셈입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트로웰도 동조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미네의 말이 맞아. 본 성격을 되찾아 간다는 게 그리 나쁘다고 볼 일은 아니지. 난 오히려 반가운데?"

"반가워?"

"응. 그동안의 너는 어떻게든 사랑받고 싶어서 애쓰는 사람 같았거든. 그래서 자꾸 시선이 가고 돌봐주고 싶다는 느낌이 강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자신감이 넘쳐서 활력 있게 보여. 굳게 닫혀있던 꽃봉오리가 드디어 활짝 펼쳐진 느낌이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하하. 신경 쓸 것 없어. 다들 어리광쟁이라 네가 자신만 두고 멀리 가버릴 것 같아서 불안해하는 것뿐이니까. 
정 귀찮으면 끌어안고 다독여줘. 금새 헤헤거릴걸."

"......"


왠지 유치원 원장으로부터 아이들을 요령 있게 다루는 방법을 배우는 초보 교사가 된 것 같달까. 
트로웰이 하는 말이니 틀리지는 않겠지만, 나는 왠지 꺼림직한 기분이 되어 아직도 저 멀리서 수군거리고 있는 일행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연신 힐끔힐끔 내 눈치 보기에 바빴다가, 내가 한숨을 내쉬며 손짓을 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우루루 몰려왔다. 
이번 일에서 만큼은 평소 사이가 나쁘던 라피스와 시벨 또한 예외는 없었다.

그들 하나하나와 일일이 시선을 맞추던 나는 잠시 후 사형집행을 하는 간수가 된 심정으로 딱딱하게 물었다.


"내 성격이 뭐가 어쨌다고?"

"헉! 드, 들었어, 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하하하! 농담이었습니다, 엘님! 결코 나쁜 뜻이 아니었고 말구요!"

"맞아! 호호, 농담이지. 뭘 그런 것에 예민하게 굴어~ 그치, 이사나씨?"

"응? 아, 그, 그렇지. 아마도..."

"호오, 그러셔? 그럼 아스 너는?"

"저, 저기...으으...대부, 미안! 잘못했어."

"헉!"

 

오냐, 아스. 넌 그나마 개선의 여지가 보이는 구나. 하지만 혼자 살길을 도모하다니, 후환이 두렵지는 않니?

변명하기에 급급하던 인간들은 아스가 냉큼 사과를 건네자 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어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래도 제 잘못을 알긴 아는 모양이지?
저럼 모습을 보니 차마 화내기조차 민망해지는 지라, 나느 가볍게 응징해주려던 처음의 생각을 접고 적당히 손은 휘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됐어. 내가 말을 말지. 이번 한번은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번에도 걸리면 죽음이야."

"요,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흐흠. '용서'라는 거창한 말까진 집어넣을 필요 없고...
이런 일에 일일이 얼굴 붉히는 것도 짜증나서 그래요, 데르온. 그러니 앞으론 할 말이 있으면 직접 눈앞에서 해달라고요. 
괜히 뒤에서 쑥덕거리지 말고. 마족 주제에 배짱이 너무 없는 거 아니예요? 아스가 뭘 보고 배우겠어요?"

"며, 면목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그런 식으로 뒤에서 수군거려봐야 내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니까 앞으로 불만이 있으면 직접 와서 얘기하라고. 
다 큰 녀석들이 애들처럼 유치하게 그게 뭐야? 내가 무슨 고질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말이야!"

"으음. 불만이라기 보단 그냥 놀라서 그랬던 건데, 화났다면 미안해, 엘. 앞으론 주의할게."

"미안해, 엘님. 다신 안 그럴게."


하지만 차례차례 이어지는 사과의 말 속에서도 라피스 만큼은 당당했다. 
녀석은 자신이 뭘 잘못했냐는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쳇, 왜 나한테까지 그래? 나는 그냥 네가 누구랑 점점 닮아간다는 간단한 감상만 말했을 뿐인데."

"시끄러! 넌 더 질이 나빠! 네놈이 엉뚱한 장난을 하는 바람에 살심이 더욱 가중된 걸 못 느끼겠냐!"

"내가 뭘? 미리 말해두지만, 연인이 되어달라는 말은 진담이었다고. 남의 진심을 무시하다니, 그러다 벌받는다, 너?"

"에?여, 연인?"

"그게 무슨 소리야?"


뒤늦게 온 바람에 이와 관계된 자세한 사건을 모르는 이사나들은 모두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뭔가 기대감이 담긴 초롱초롱한 눈빛들을 보건데(시벨은 제외다. 녀석은 반대로 얼굴이 구겨졌으니까) 언제고 이런 날이 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는 모습이었다.

하긴 그동안 라피스가 오죽 나를 여자취급 했던가! 
그 시선에 살벌한 미소로 화답해준 나는 눈빛으로 침묵할 것을 종용하며, 어떻게 하면 라피스를 잘 팰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확 육포를 떠버릴까. 새로운 별식이 탄생할지도 모르는데. 으음, 근데 드래곤 가죽은 뭐로 벗기지? 
오리하르콘으로 식칼 따위를 만들면 사람들이 비웃을 텐데. 아니, 그걸로 잘라지긴 하는 거야? 어쩌면 검기를 일으켜야 할지도.'


나는 잠시 흰색 앞치마에 주방 모자를 쓴 요리사가 오리하르콘 검을 들고 검기를 내뿜으며 고기를 자르는 장면을 떠올렸다. 
......좀 엽기적인가?

그러자 내 생각을 읽었는지 트로웰이 갑자기 풋-하고 웃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아연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속에서 한참이나 배를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더니 너무 웃어서 새빨갛게 된 얼굴로 내 어깨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 역시 귀여워. 엘! 그냥 계속 이 상태로 있어라, 응? 아무리 생각해도 난 지금이 딱 좋은 것 같아."

"그거...내 생각이 너무 허무맹랑하다는 소릴 간접적으로 비꼬는 말이지?"

"그럴 리가. 아,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속상하더라도 너무 구박하지는 말아. 
라피 녀서 말마따나 나중에 정말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거든."

"후회라니?"

"후후, 그런 게 있어."


말을 얼버무리는 것을 보면 아마 이것도 시벨을 통해 본 미래의 상황과 관계가 있는 모양이다. 
대충 유추래 보자면, 라피스는 다른 사람이 놀랄만한 어떤 사건을 일으키고, 바로 그것 때문에 내가 그동안 잘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된다는 소리인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거지?

그는 내사 미심쩍은 표정으로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이며 '난 아무것도 모른다'의 얼굴을 해보였다. 
순전히 대답할 마음이 없는 건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서 신중한 자세를 보이는 건지, 그 속마음은 알 길이 없었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 대답으로 인해 라피스가 천만대군이라도 얻은 마냥 의기양양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 모습을 보고 더욱 의혹이 가중된 것 같은 세 사람-알리사, 이사나, 시벨리우스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내 경고하는 시선을 
무시한 채 용감하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트로웰! 그건 설마 엘님에게 라이벌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소리야? 라피스님을 사이에 두고 필사의 신경전이 펼쳐진다던가!"

"...뭣이라?"


이런 환당한 말을 하는 이는 다름 아닌 알리사였다. 
누가 여자애 아니랄까봐 상상력이 너무도 풍불해서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감탄의 눈물이 저절로 흐를 정도다.
내가 기막힌 얼굴로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지, 알리사는 거리낌 없이 다음 말을 잇고 있었다.


"왜~지금이야 관심 없지만 나중에라도 어떻게 될 지 누가 알아? 상황은 언제나 반전을 거듭하는 법이라고."

"아! 혹시 뒤늦게 깨달은 사랑에 후회하며 돌아오기를 바라지만, 결국 그리운 님은 나를 버리고 떠난 다는 설정?"

"맙소사! 그건 절대 안 돼, 엘!! 네가 어디가 부족해서!"

"무슨 헛소리야! 아주 소설을 써라, 소설을!!"


알리사는 그렇다 쳐! 그런 말도 안 돼는 설정에 넘어가버리는 네놈들은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아무래도 그냥 내버려뒀다간 일이 더 커질 듯 해, 나는 황급히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곤 눈에 띄게 실망하는 두 사람(어째서!)과 반대로 안도하는 한 유니콘을 보며 냉담하게 쏘아 붙였다.


"알겠어? 저 놈은 그냥 연인 사이를 계약관계가 좀 더 발달된 의미라고밖에 인식하지 못한다고! 
저 바보 드래곤에게 로맨스를 논하지 말란 말이다! 그리고 그 상대역에 나도 끼워 넣지마!"

"히잉. 겉모습은 정말 잘 어울리는데."

"셧업(Shut up), 알리사! 내가 남자라는 사실은 잊은 거냐?"

"그치만 정령은 무성(無性)이라며, 게다가 나중에 신이 될 때 여신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시끄러. 일일이 따지지 마. 내가 싫다면 싫은 거야. 뭣하면 너도 여기서 남자로 만들어 줄까? 그럼 즉시 여자를 사랑할 수 있겠어?"

"엥? 왜 여기서 그 말이 나와? 그건 엄연히 상황이 다르잖아."

"나한텐 같아."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한 나는 또 다른 질문이 나오기 전에 화제를 돌릴 생각으로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순간 마침 내 눈에 띈 것은, 한 구석에 서서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미네의 모습이었다.

그때서야 그가 아직 이사나들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오른 나는, 얼른 미네를 끌어다 이들 앞으로 이끌었다. 
그러자 뭔가 할 말이 더 남았다는 듯 입을 뻐끔거리던 알리사의 표정이 묘하게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아직 제대로 인사 안했지? 바람의 정령왕인 미네르바야. 나를 도와주려고 이번에 정령계에서 내려왔어."

"쳇, 알았어. 결국 엘님한테는 연인이  따로 있다는 소리지? 그럼 그렇다고 진작 말할 것이지."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에? 미네르바님이 연인인거 아니었어?"

"그 얘긴 이제 그만. 미네는 내 형제와 마찬가지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인사나 해. 
이쪽은 내 계약자인 이사나랑 그 친.구.인 알리사, 그리고 시벨리우스라고 해. 진작 소개했어야 했는데, 이제야 해서 미안."

"아닙니다. 무엇보다 경황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처음 뵙겠습니다. 나는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입니다. 
편하게 미네라고 부르십시오."


그 말에 시벨은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라? 미네르바? 내가 기억하는 얼굴과 다른데. 설마 바람의 정령왕도 교체가 있었나?"

"맞습니다. 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소환도 바로 얼마 전에 되어 이제 막 한 마리의 드래곤과 계약했을 뿐이지요."

"으음. 그렇군, 하긴, 당시 엘퀴네스와 미네르바의 나이 차이는 별로 나지 않았으니. 
그가 소멸했다면 당연히 미네르바도 소멸했겠지."

"그렇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물과 바람의 소멸과 탄생은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 질 겁니다. 
나와 엘의 탄생시기도 그리 차이나지 않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엘?"

"응, 그야 그렇지."


어른이 된 미네는 그 특유의 엄숙한 말투와 어울려 무척이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얼굴 자체도 여성스러울 뿐만 아니라 분위기까지 차분하니, 말괄량이인 알리사가 절로 주눅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방금 전과는 달리 무척이나 허둥대는 모습으로 허리를 꾸벅 숙여보였다.


"마, 만나서 반갑습니다! 전 알리사라고 해요. 정식 풀 네임은 알리사노 알 드레프입니다."

"아아, 반갑습니다. 당신은 땅의 정령사로군요. 어린나이에 벌써 중급 정령을 소환하다니, 왠지 엘의 주변엔 전부 괴물들만 있는 것 
같습니다."

"...네?"

"실례. 괴물이라는 표현은 감수성 풍부한 소녀에겐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잊었군요. 하지만 괴물은 괴물입니다. 
평범한 인간들은 절대 불가능한 영역 아닙니까?"

"......"


미네가 본의 아니게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 
덕분에 주위가 잠시 썰렁해 지긴 했지만, 다들 정신을 차린 고로 나머지 인사도 그럭저럭 무난히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어쩐지 평소보다 약각 굳은 듯한 라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어이, 인사는 나중에 하고, 지금은 다들 저걸 봐야 할 것 같은데? 결계의 색깔이 더욱 짙어졌어."

"뭐?"


그의 말에 놀라서 돌아본 우리는 황성을 감싼 결계의 표면이 완전히 새빨갛게 변해버린 걸 발견하고 서로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알 길은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악신의 각성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순간, 왠지 멍한 눈으로 결계를 바라보던 트로웰이 갑자기 머리를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는 것이 보였다.


"크윽!! 쿨럭! 쿨럭!"

"트로웰!"


힘없이 바닥에 쓰러진 트로웰은 고통그러운 신음과 함께 한 움쿰 붉은 피를 내뱉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우리들이 얼른 부축하려고 했지만, 그는 한손을 내밀어 다가오지 말라는 듯 살짝 휘젓기만 했다. 
그 뜻 모를 행동에 나와 일행들은 아연한 얼굴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트로웰?"

"큭-미안. 희생될 신이...누굴 지...마음에 걸려서...억지로 혜안을 열었는데...좀 무리였나 봐.아무래도 더 이상 못 버티겠어."

"뭐? 그게 무슨..."


하지만 난 잠시 후 그가 말한 '더 이상 못 버티겠다'는 소리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바닥을 짚고 있는 트로웰의 손이 흐릿해지는 가 싶더니 곧 온 몸 전체가 뿌옇게 변해갔던 것이다.


'역(逆)소환?!'


설마 혜안을 열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역소환이 될 만큼 몸에 무리가 왔다는 건가? 
딱딱하게 굳은 내 표정을 보았는지 트로웰은 형체가 사라지는 와중에도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 엘. 조금만 쉬다 돌아올게."

"아..."

"괜찮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나저나, 라피스. 너한테도 미안하다. 아마 네 아버지가 좀 많이 아플 거야.하하하."


그 말을 마지막으로 트로웰의 모습은 완전히 우리가 있던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마나가 흩어지는 느낌을 보아 정령계로 역소환 된 것이 확실했다. 
아마 하루나 반나절 정도는 그의 영영 안에서 쉬어야 회복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일행들은 트로웰이 갑자기 사라지자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나와 미네, 그리고 시벨과 라피스를 제외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모두 하나같이 불안감이 가득 드러나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엘님? 트로웰은 어디로 간 거야? 서, 설마 죽은 거 아니지?"

"진정해, 알리사. 그냥 정령계로 역소환 된 것 뿐이야. 하루 정도 푹 쉬고 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역소환이라니? 공격을 받은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역소환이 되는 거야?"

"트로웰이 본인이 쓴 능력이 강하게 거부당했기 때문이야. 아무래도 악신에 관계된 것은 코앞의 일도 알아내기 어려운 모양이군. 
그렇다고 그렇게 무리를 하다니, 트로웰도 참..."


그러자 라피스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맞는 말이다만, 그런 식으로 한가하게 따지고 있을 겨를은 없을 걸?ㅜ 트로웰이 그 지경이라는 건, 엘 너도 위험하다는 뜻이야. 
지금부터 놈에게 정령왕의 능력은 전혀 안통할거다."

"...놈에게 입은 상처는 치료가 불가능할 수도 있겠군. 이거 상당히 곤란한걸."


비록 예기치 못한 사고였지만, 이로서 우리가 지금부터 대면해야 할 존재가 얼마나 엄청난지에 대한 것만큼은 확실하게 깨닫게 된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붉다 못해 검은 빛을 띄우기 시작하는 결계를 보며 입술을 꽉 악물었다. 
수 천 명의 생명을 잡아먹은 악마가 이제 막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아아, 그나저나 지금쯤 영감탱이 기절했을지도 모르겠는걸. 혹시 복수한답시고 날름 쫓아오는 거 아니야?"

"...영감탱이?"


제법 분위기가 엄숙하게 무르익었다 싶은 순간 라피스가 내뱉은 말은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소리였다.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녀석은 홋잣말을 들켰다는 듯이 난감한 얼굴로 볼을 긁적이더니 알아서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트로웰의 계약자가 내 아버지인 블랙 드래곤이잖아. 계약한 정령왕이 역소환 되었으니 이래저래 내상이 심할걸? 
평소엔 근엄한 양반이어도 제 몸 상하는 꼴은 죽어도 못 참으니, 아마 지금쯤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을 거다."

"흠, 그래서 트로웰이 네 아버지가 많아 아플 거라는 말을 한 거구나. 있잖아. 나도 한번 역소환 해봐도 돼?"


나는 기대감이 가득 남긴 눈으로 라피스를 바라보며 최대한 순진무구한 어투로 물었다. 
왠지 녀석의 이마에 한줄기 식은땀이 흐르고 지나간 듯하다.


"...눈 반짝거리며 묻지 마. 그래봤자 정작 내가 쓰러지는 장면은 못 보게 될 거 아니야?"

"음, 그건 그렇네. 정령계로 가버리면 중요한 장면을 포착하기가 힘들겠구나. 어쩔 수 없지. 
아쉽지만 간간히 시큐엘들로 만족할 수밖에."

"어이, 내가 그렇게 싫냐···"


녀석은 질린 시선으로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고 정면만 응시했다. 
솔직히 '싫은가'라는 질문에 바로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만큼 내게 못된 짓을 한 것은 아니다. 
단지 좀 귀찮고, 잘난 척 하는 것이 얄미운 것일 뿐. 하긴, 그래서 더 대하기 편하고 만만하게 보이는 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일행들은 내 침묵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나무라는 시선으로 라피스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그 스스로 자처한 것이라는 의견이 강했던 것이다.


"라피스님이 평소에 엘을 너무 함부로 대하셔서 그런 거예요. 혹시 엘의 성격이 변한 것도 라피스님 때문인건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지 아버지란 녀석이 다쳤다고 길길이 날뛴 뒤부터 저렇게 됐구만.
저놈 성격변화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무조건 엘뤼엔 탓이라고."

"응. 그건 은인 말이 맞아. 뭐, 부상당한 직후에 카류안놈이 쓸데없는 입을 놀리지만 않았다면 덜했을지도 모르지만."

"카류안?"

"내 전대의 마왕이자, 현재 악신이 되기를 꿈꾸는 괘씸한 마족 말이야. 그 녀석 이름이 카류안이거든. 그렇지 부하?"

"네,맞습니다,주군. 그러고보니 엘님이 저렇게 되신 건 모두 그 놈 때문이군요. 정말 죽어 마땅한 놈입니다."


데르온이 이를 부득부득 갈며 대답하자 일행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악신에 대한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잠시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던 나는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데르온, 내 성격이 그렇게 이상해졌나요?"

"예? 으음. 그, 그러니까 그게···"

"솔직하게 말해요. 화내지 않을 테니까. 대답하지 않으면 평생 말하지 못하게 입을 꿰매버릴 수도···"

"네넵! 그, 그게 말이죠! 조, 좀 잔인해 지셨다고 할까요. 모든 관계에 냉담해 지신 것 같기도 하고···."

"흐음, 그런가. 하지만 그러면 오히려 마족들의 눈으로 보기엔 더 괜찮아 진거 아니에요? 마계에건 강한것이 무조건 최고라면서요."


내 말에 데르온은 뭔가를 생각하는 눈으로 한참동안 턱을 쓸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아스가 냉큼 끼어들어 대신 대답하기 시작했다.


"강한 것과 잔인한 것은 달라, 대부."

"그거야 그렇지만···"

"마족들이 강한 걸 추구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마족의 성품이 잔인한 것은 아니야. 
상대방에게 자신의 힘을 보여주는 수단으로서 잔인함을 이용하는 것뿐이지. 
그렇게 하면 보복을 두려워해서 다신 덤비지 못하니까 귀찮은 일을 방지할 수 있거든."

"흐음, 나도 그런 의미라고 하면?"

"뭐, 상관없지. 대부는 강하니까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난 무척 슬퍼질 것 같아."

"슬퍼? 왜?"


왠지 아스가 풀 죽은 얼굴이 된 것 같아, 나는 심장이 쿵~하고 떨어진 느낌이 되어 황급히 물었다. 우는 애를 달래는 심정이랄까. 
대부라는 의무감 때문인지 아스 한테 만큼은 유달리 약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다음으로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대부는 날 죽일 수 있어?"

"···뭐?"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엔 농담의 빛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나의 놀란 표정을 본 아스는 굳이 대답을 기다릴 생각이 없었는지 곧바로 다음 말으 이었다.


"마족들은 타인을 구분할 때 자신보다 약하다와 강하다로밖에 인식하지 못해. 자신 외에는 누구도 믿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지. 
아무리 친하게 지내던 상대라도 마음이 달라지면 바로 죽일 수 있을 만큼. 
그리고 그것에 대해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도, 슬퍼하지도 않아. 내가보기엔 지금 대부도 그런 상태인 것 같아."

"!!"

"뭐, 대부가 날 죽인다고 해도 별로 억울하진 않을 거야. 대부가 나보다 훨씬 강하니까 그보다 약한 내가 죽는 건 당연한 거지. 
하지만···대부가 내 죽음을 전혀 슬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


이때의 느낌을 말하자면, 꼭 단단한 둔기로 머리를 거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전보단 좀 더 냉정하게 굴 수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방금 아스가 말한 상황 같은 것은 꿈에서라도 상상해 본적이 없었다.
그만큼 이들이 내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소리인가?

내가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있던 일이 타인에겐 정 반대일수도 있다는 사실에, 나는 지금부터 뭐라고 설명해야 할 지 무척 난감해 
지기 시작했다.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일행들을 바라본 나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난 변하지 않았어. 단지 이전에는 생각에만 그치던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된 것 뿐이야. 
그 점은 분명히 알아줬으면 해."

"엘···"

"내가 악신놈과 싸울 때 너무 열 받아서 반 미쳐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해. 그것 때문에 놀랐을 거라는 것도 이해하고. 
하지만 너희들이 내 동료라는 것을 잊어버린 건 아니야. 날 그렇게 냉정한 놈으로만 평가하지 말아줘. 그리고 아스?"

"으응?"


왠지 숙연해진 주변의 분위기를 모른 척 한 나는 이번엔 찔끔한 표정을 하고 있던 아스를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내가 널 죽이는 일은 없어. 그리고 혹시라도 네가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면 난 굉장히 울고 슬퍼하게 될 거야. 
앞으로 또 그런 말 하면 혼날 줄 알아. 하나밖에 없는 대부의 가슴에 못을 박다니, 못된 녀석."

"미,미안해, 대부···"

"알았으면 됐어. 그나마 너라서 봐주는 줄 알아. 라피스 녀석이었으면 벌써 척살이었다고."

"왜 또 거기서 내가 나와?"


라피스는 세상 다시없을 생뚱맞은 이야길 들었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그것을 못들은 척 살며시 무시해주자 어디선가 풋-하고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던 이사나였다.


"왜 웃어, 이사나?"

"아, 흠흠. 미안해, 엘. 우리가 너무 예민했던 것 같아. 지금 보니까 너는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글쎄 그렇다고 했잖아. 아무튼 그놈의 악신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아참! 신계는 대체 뭘 하고 있는거야? 
놈의 각성이 코앞에까지 다가왔는데 마냥 손 놓고 있을 참인가?"


각성하는 순간을 노리려면 정확한 타이밍이 중요했다. 
그런데 정작 와야 할 신들이 코빼기도 비취지 않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
그렇지 않아도 엘뤼엔의 안부와, 희생될 신에 대한 것들이 머릿손에서 불안하게 엉켜들어가던 참이라 나는 찌푸린 표정으로 연신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마침 무심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미네가 내 어깨를 툭툭 치기 시작했다.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그는 말없이 한손으로 하늘을 가리켜 보였다.


"왜 그래, 미네? 위? 위에 뭐가···!!···"

"헉!"

"저, 저게 뭐야?"


무심코 고개를 든 우리가 본 것은 하늘위에 은은하게 퍼지고 있는 색색별의 빛 무리였다. 
그것은 마치 노을처럼 화려하게 주변을 수놓고 있었는데, 한국에 있을 때 텔레비전이나 사전으로만 보았던 은하수의 모습과 흡사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히 아름다운데다가, 이미 주위가 상당히 어둑해진 시점이었기 때문에 갑자기 등장한 빛 무리는 어디에서나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경악한 것은 은하수가 아닌, 그 위로 서서히 등장하는 새하얀 존재들 때문이었다. 
거리가 멀어 여자인지, 남자인지, 하다못해 인간인지 조차도 확인이 어려운 상태였지만, 내 눈이 잘못 된 것이 아니라면 저것은 
분명···


"신(神)들?"


그랬다. 그것은 치렁치렁한 옷가지를 늘어뜨린 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다수의 신 무리(?)였다. 
그들은 악신과의 대결을 앞둔 때문인지 다소 무거운 분위기를 흘리고 있었는데, 그 옆에선 보좌하러 나온듯한 수많은 천사들이 
새하얀 날개를 늘어뜨린 채 청아한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저렇게 눈에 띄는 등장이라니!

지금쯤 수도에 있떤 사람들은 저 현장을 보고 경악하고 있을게 틀림없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듯한 모습에 내가 할 말을 잊은 사이, 나처럼 그 광경을 지켜본 라피스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단체로 미쳤군. 신비감을 조성할 때가 따로 있지, 이런 상황에서까지 주접이라니. 아무튼 신이라는 것들이란···"


그 말을 시작으로 일행들은 모두 얼빠진 얼굴에서 벗어나 하나둘씩 질문을 건네기 시작했다. 
특히 뒤늦게 온 바람에 돌아가는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사나와 알리사 들은 지금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맙소사. 저 사람들이 정말 신이야?"

"어, 어떻게 된 거에요, 라피스님? 왜 갑자기 신들이?"

"왜겠냐. 당연히 악신을 물리칠려고 왔지. 꼭 저렇게 등장하면 지들이 정의의 용사인줄 안다니까. 
정잦 죽어라 고생한 놈들은 따로 있는데 말이야."

"세상에! 신들이 이번 일에 개입하는 건가요? 그럼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겠군요!"


기뻐하는 이사나의 말에 라피스는 피식 비웃으며 가차 없이 대꾸했다.


"그런 걸 두고 착각도 자유라는 거다, 꼬맹아. 신계의 신들이 전부 몰려도 완전히 각성한 악신을 이기긴 힘들어."

"예? 그럴 수가···. 말도 안돼요. 그, 그럼 저분들은 이기기 힘든 줄 알면서도 이곳에 왔다는 소리인가요?"

"그럴 리가 있냐. 정식으로 붙으면 어려우니까 당연히 편법을 쓰려고 하는 거지. 뭐 각성 직후에 생기는 틈을 노린 다나 어쩐다나···그다지 미덥지는 않지만 말이야."

"틈이라···"


일행들이 심각하게 중얼거리는 동안 나는 필사적으로 그들 사이에 엘뤼엔의 모습이 있는지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무리 찾아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아직도 부상이 완치되지 않은 걸까?

 

 


'하긴, 나았으면 벌써 나를 찾아왔겠지.'


그나마 각성의 순간 때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기대가 완전히 사라지자 마음속이 허탈해지는 기분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희생될 신에서 그가 제외된 것이 아닌가 하는 실날같은 희망이 생겨났다.
원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카노스는 왜 안 보이는 거지? 이번 일에 빠질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듣기로 마 속성을 부여받은 신들은 다른 상급신들에 비해 꽤 능력이 강한 편인데다 그 중에서도 마신의 능력이 가장 뛰어났다. 
그런 그가 이번 일에 빠지려 한다면 다른 신들이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엘뤼엔이야 부상 중이니 예외라 치자.)


그런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나는 곧 등 뒤편에서 낯익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이, 엘뤼엔의 아들~ 누굴 그렇게 찾아?"

"카노스!"

"세상에! 마, 마신님?"


당연히 신들과 함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는 어느 샌가 우리 앞에 나타나 여우 만만한 표정으로 손을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기척도 없는 등장에 놀란 우리가 입을 뻐끔거리자, 그는 쉿-하고 한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더니 이내 아스를 발견하고 환한 
얼굴로 소리쳤다.


"이야~이게 누구야? 그 쪼끄만 황금알이 벌써 이런 청년으로 자라셨나? 기대대로 아주 예쁜 붉은 색이로군. 
역대의 마왕 중에서 이와 같은 색을 본 적이 없지. 넌 아마 마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왕이 될 거다."

"마신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다시없을 영광입니다."


자신의 신을 만났다는 감격 때문인지 아스는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카노스 같은 신에게서 어떻게 저런 정상적인 아이가 나왔는지 참으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잠시 후 카노스는 아스의 옆에서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데르온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엥? 데르온? 넌 아직도 살아있었냐?"

"크흑! 어, 어째서 그런 말씀을?"

"아니, 난 또···알 키운답시고 피 죄다 쏟아 부어서 출혈 과다로 진즉에 사망했을 줄 알았지. 
그런 무식함 때문에 내가 널 예뻐한 거였잖아. 냐하하하~"

"우어어어! 너무하세요오오~~"


데르온은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지만, 언젠가 알을 부화시킨답시고 온 방에 피 칠을 해놨던 그의 모습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던 
나로선 카노스의 예상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때 내가 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라피스가 그 대신 피를 주지 않았다면 데르온은 정말로 출혈 과다로 
사망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생각은 아스 또한 마찬가지인 듯 했다.


"맞는 말에 억울해 할 필요 없어, 부하."

"헉! 아스님 마저!"

"하지만 부하의 피론 나를 부화시키기에 택도 없었는 걸. 
그떄 은인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부하는 피를 주입하는 중간에 죽었을 지도 몰라."

"그, 그거야···으으음, 흑흑흑, 그래요오~ 전 아무 쓸모없는 마족이에요오···"


라피스의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는지, 데르온은 꾸물꾸물 말을 삼키며 우울하게 한 구석으로 찌그러졌다. 
순식간에 한 마족을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놓고도 아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굵로 카노스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위대하신 마신께선 어찌하여 다른 신들과 함께 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따로 행차하셨습니싸?"

"아, 그건 말이지~ 저런 유치찬란한 빛 무리 속에서 인간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거든. 
조용히 나타나도 될 걸 굳이 화려하게 등장해야겠단 속셈을 모르겠단 말이야. 
저런 걸 보고 지구에서는 '쇼(show)를 한다'고 한다며? 오늘 본 광경 때문에 불신자가 늘어날 걸 생각하면 눈에서 피눈물이···
크흑···"


그러자 묵묵히 듣고 있던 라피스가 냉큼 끼어들어 한마디 거들었다.


"과연 그렇군. 저런 걸 보면 나라도 신을 믿을 수 없을 거야. 유치해서 어디 봐줄 수가 있어야지, 원."

"오오! 말이 통하는 군! 역시 이래서 드래곤들이 똑똑하다니까."

"훗, 당연한 소리를."

"지금 중요한건 그게 아니에요!엘뤼엔···아니, 아버지는요? 부상은? 다친 상처는 치료 되었나요?"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카노스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그는  장난하듯 말을 끌거나 돌리는 기색 없이 순순히 대답하기 시작했다.


"글쎄, 말도 마. 치료신은 물론, 온갖 치유가 가능한 신이란 신은 죄다 소집해서 난리를 피웠다고. 
그 덕에 간신히 위기는 넘긴 상태야. 아직 몸을 움직일 수는 없겠지만."

"저, 정말이에요? 그럼 이제 회복할 수 있는 건가요?"

"당분간 요양기간을 가져야겠지만, 곧 완쾌할거야. 그녀석이 이렇게 이쁜 아들을 두고 먼저 갈 리가 있나.핫핫핫!"

"하아···"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저절로 주저앉으려는 것을, 먼저 눈치 챈 라피스가 잡아주는 바람에 버틸 수 있었다. 
너무 안심이 되면 몸에 기운이 빠진다더니 바로 내가 그런 상황이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몸에 열리라도 나는 듯이 후들거렸지만, 마음만큼은 날아갈듯이 가벼웠다.

학교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문제를 풀게 하려고 마구잡이로 애들 번호를 불렀을 때도 이렇게까지 조마조마 하지는 않았다. 
아마 카노스가 즉시 대답하지 않고 장난을 쳤다면 긴장감을 이기지 못해 기절해버리지 않았을까?


"어이, 괜찮아? 얼굴이 붉은데."

"아아··· 괜찮아요. 안심해서 그런 거니까. 그런데 이제부터 뭘 하는 거죠?"

"일단 날이 밝으면 신들이 힘을 모아 봉진 진(鎭)을 펼칠 거야. 
놈이 결계를 해제하고 나오는 순간 아주 잠깐 힘을 못 쓰도록 붙잡을 수 있을걸. 
그전에 먼저 밝혀둘게 있는데···이사나라고 했나? 어쩌면 황궁이 통째로 날아갈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

"네에? 통···째로?"


제국의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인 황성이 고스란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말에 이사나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레 카노스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응수했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걸? 이건 어디까지나 예상이지만, 놈이 소멸하게 되면 주위에 적지 않은 파장이 미칠 것 같거든. 
아마 그 부근은 처음에 뭐가 세워져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초토화 될 거야. 하지만 걱정 마.
일이 잘 마무리 된다면 신들이 알아서 보상해줄 테니."

"보, 보상이오?"

"그래. 보통 인간이라면 어림도 없지만, 넌 자그만치 정령왕의 계약자잖냐. 게다가 그 정령왕이 어디 또 보통 정령왕이야? 
신계에서 성질 더럽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엘뤼엔의 아들인데, 설마 간 크게 무시하지는 못할 거다. 
아주 이참에 더 멋진 건물로 새로 지어달라고 해버려. 다이아몬드로 지어보는 건 어때?"

"아하하하."


저런 말을 진지한 얼굴로 설명하는 신이 이 세상에 카노스 말고 또 어디 있을까.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이사나를 잠시 동정의 눈길로 바라본 뒤 다른 질문을 건넸다.


"그런데 왜 하필 날이 밝을 때지요?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건가요?"

"응, 맞아. 아직 놈은 피를 전부 채우지 않았어. 
몰랐는데 심장에서 미리 피를 짜냈더라도 마시는 시각이 따로 정해져 있는 모양이더라고. 
아무튼 대충 계산해 보니까 꼬박 오늘 밤은 새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더군."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녀 근처에 있던 평평한 바위위에 걸터앉았다. 
그 사이 공중에서 하강하던 신들도 완전히 지상에 착지했는지 하늘을 떠도는 빛 무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덕분에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지자 카노스는 멀뚤히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들에게 한마디 더 덧붙였다.


"일단 인간들은 자두지 그래? 밤을 완전히 새고 다음날 까지 강행군 하기는 무리일 거다. 
뭐, 보아하니 밤을 샐 체력도 없는 것 같지만."

"아, 그러고 보니 전쟁 중에 와서 다들 피곤하겠군. 시벨, 마법으로 간단한 잠자리 좀 마련해주겠어?"

"응, 알았어. 이사나와 알리사의 자리만 만들면 되는 거지?"


그 말에 두 사람은 무척 서운한 표정을 지었지만, 체력적인 한계는 어쩔 수 없었는지 순순히 시벨이 만든 텐트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카노스에게 희생되는 신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아니, 묻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엘뤼엔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해 버린 내가 누군가를 동정한다는 사실은 무척 염치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트로웰은 어디 갔어? 아까부터 안 보이는 데."


카노스가 물은 것은 알리사와 이사나, 두 사람이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난 이후였다. 
늦어도 한참이나 늦은 질문을 건네는 그에게 나는 오기 전에 있었던 대략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무척 흥미로운 표정으로 듣던 그는 마지막에 트로웰이 역소환 되었다는 말을 듣고선 재미있다는 듯 껄껄거리며 웃기까지 했다.


"이야~ 악신이 대단하긴 대단한 가 본데? 겨우 혜안을 열었다는 것만으로 역소환 될 정도라니. 트로웰도 어지간히 억울했겠군."

"웃을 일이 아니에요. 놈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라구요. 그 썩을 놈. 도망치기 전에 다리 한쪽도 마저 잘라냈어야 하는 건데. 
트로웰이 말리지만 않았어도···"

"헤에~? 어째 묘하게 과격해 진 것 같네? 오옷! 드디어 개과천선 한 거야?"


누가 마신 아니랄까봐 초롱초롱한 눈으로 묻는 것이, 일행들에겐 나쁜 일이 그에겐 오히려 좋게 보여 진듯 했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뜻이 이렇게도 변질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동하며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놈 때문에 벌써 내 가족 중에서 둘이나 다쳤다구요!"

"아니,아니, 정확히는 셋이지. 본인은 왜 빼먹어?"

"나요? 나야 뭐, 놀란 것 외에는 별로···"

"쯧쯧. 아직 뭘 모르는 군. 아마 이 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게 바로 너일걸?"

"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게 되묻는 나에게 그는 곧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전달했다.


"태어날 시기를 놓치고 엉뚱한 차원에서 해매다 왔잖아? 그게 저 악신 놈 짓이라는 것이 밝혀졌거든."

"!!"


잠깐 동안 내가 환청을 들었나 싶었다. 지금이야 악신이 되기 직전이라지만, 그때만 해도 놈은 평범한 마왕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구로 정령왕의 탄생을 조작할 수 있단 말인가?

설마 날 놀리는 건가 싶어 미심쩍은 표정으로 바라보니 카노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마왕쯤 되면 다른 차원으로 공간이동을 할 수 있거든. 
그 당시에 명계로 건너가서 너의 탄생을 주관하고 있던 담당자에게 최면을 걸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지금까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거고."

"···마, 말도 안 돼. 차원이동이오? 정령왕은 못하는 걸 마왕이 할 수 있단 말이에요?"

"그야 정령왕은 이곳 아크아돈을 떠나면 안 되니까 능력이 없는 거고. 마왕은 아니잖아? 
아무튼 뒤통수치는 데는 타고난 놈이야. 설마 가뭄을 이용해서 재물을 끌어 모을 줄 누가 알았겠어?"

"······"


물이 없어서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동안, 놈은 천천히 재물들을 모아 악신이 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고 했다. 
짧은 시간에 수많은 아이들이 죽었으나, 모두 가뭄 때문이라는 생각에 명계나 신계에서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갑자기 사라진 엘퀴네스의 행방을 찾기에 급급했을 뿐.

결국 녀석은 나를 방패삼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낸 것이다. 
나 역시 피해자의 입장이었지만, 왠지 이 모든 일에 내가 조력자로 가담해 버린 꼴 같아 기분이 무척 더러워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자라 생애 첫 유희까지 이렇게 꼬이게 만들다니! 
하늘이 맺어준 악연이 있다면 바로 나와 악신의 사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때 그냥 목을 잘라버릴걸."

"헉, 에, 엘님?"

"아, 미안.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데르온. 아무튼 놈에게 멋지게 한방 먹었는데요? 
진작 만나서 없애버리지 못한 게 한이 될 정도군요."

"킥킥. 신계의 모든 이들이 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걸? 아, 그리고 이번 일에 희생될 녀석 말인데-"

"!!"


설마 그가 먼저 그에 대한 말을 꺼낼 줄 몰랐기에 나는 무척 신장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듯 카노스는 지극히 평안한 어조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미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명계의 상급신으로 결정 되었어. 가장 강력한 후보인 엘뤼엔을 물리치고 이룩한 최대의 쾌거였지. 
정말 대단했다니까."

"···쾌거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요."

"뭐, 어때. 어차피 둘 다 서로 자원한 상태였는걸. 
도중에 엘뤼엔의 상처가 회복될 기미가 보였기 때문에 그쪽으로 넘어가게 된 거거든."

"자원을 해요? 꽤나 희생정신이 강한 신이군요."


엘뤼엔이야 어차피 소멸이 다가온 상태였기에 자포자기로 지원한 거겠지만, 다른 쪽의 신은 무슨 이유로 하나뿐인 목숨을 포기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카노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렇다거 볼 수도 있지. 덕분에 골치 아픈 문제가 해결되어서 신계에선 꽤 만족스러워 하는 눈치야. 
사실 그가 아니었다면 상처가 낫든 말든 엘뤼엔으로 지목되었을 걸? 그 녀석이 제멋대로 사고를 쳐서 단단히 찍혀있었거든."

"으음. 그럼 난 그 신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군요. 한번 만나볼 수 있을까요?"

"그야 어렵지 않지. 그렇지 않아도 그 역시 너를 보고 싶어 하니까."

"네? ···나를?"


만나본적도 없는 신이 왜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인가? 
어리둥절하게 묻는 내게 왠지 씁쓸한 표정이 된 카노스가 새로운 사실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아직 신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만나보면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난 신계에 친분이 있는 자가 별로···어? 지금 뭐라고 했어요? 신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요?"


갑자기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나는 내 생각이 틀리길 바라면서 급히 카노스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정혀 엉뚜한 방향에서 흘러나왔다.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낯익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한 편에서 들려왔던 것이다.


"신이 된 건 정확히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지. 상급신이라고 해서 그리 좋은 건 없던데? 
신계로 입성하자마자 일거리가 얼마나 쏟아지던지. 별로 재미는 없더군."

"!!"


놀란 나는황급히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언제부터 서 있던 건지, 검은색 머리카락을 발끝 까지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지적이면서도 전체적으로 차가운 듯 냉정한 그녀의 분위기는, 주변에 짙게 깔린 밤공기와 어울려 마치 저승에서 내려온 검은 
사신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비록 머리색은 달랐지만, 그 모습이 내가 알고 있던 누군가와 무척이나 흡사하다는 것을 순간, 나는 잡고 있던 카노스의 팔을 
놓으며 힘없이 내 기억에 있던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미네르바···"

 

 - 끝과 시작 ∥-


눈앞에 나타난 존재는 바로 얼마 전에 정령계에서 소멸했던 정령왕 미네르바였다. 
시벨리우스도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는지, 귀신이라도 본 마냥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정말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설마 소멸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그가 신이, 그것도 악신을 소멸시키기 위해 희생할 신으로 뽑혀서 나타날 줄이야!

하고 싶은 말을 정말 산더미 같이 많았지만 정작 입을 벌려도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서서 내 앞에 있는 미네르바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왜'냐고 묻고 싶었다. 하고많은 신들을 놔두고 어째서 네가 자원을 했냐고.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을 듣는 것이 두려워서 나는 차마 물을 수 없었다. 
왠지 그가 이런 선택을 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한참이나 말없이 굳어있자, 미네르바는 피식 미소 지으며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비취는 몸의 굴곡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여성의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헙게 어울려 새삼 그가 '여신이 되었구나'라고 감탄하기가 어색할 정도였다. 
그, 아니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 널 위해서 희생한다고 생각하는 거구나."

"···그럼···아니라는 거야?"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메마른 어조로 물었다. 그러자 미네르바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음, 완전히 아니라곤 할 수 없지. 하지만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도 아니야. 그저 내가 하려는 일과 뜻이 맞아서 겸사 겸사랄까?"

"미네르바···그건···"

"아니지. 이제 나는 미네르바가 아니야. 신이 되면서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거든. 
망자의 신 '페르데스'. 일주일 전부터 내 것이 된 이름이야."

"페르데스?""응, 명계 소속의 상급신이지. 나는 그 중에서도 망각의 물을 관리하고 있어."


그래봤자 어차피 잠시 후엔 버리게 될 직분이지만 말이야. 라고 말하며 미네르바, 아니 페르데스는 멎쩍은 얼굴로 웃었다. 
그래도 내가 여전히 굳어있기만 하자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더니 곧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잘 들어, 엘. 난 원래 신이 될 생각이 없었어.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도, 책임져야 하는 것도,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것에도 지쳤지. 
가능하면 오래도록 아무생각 없이, 그 삶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싶었어."

"그런데 왜···"

"왜 신이 되었냐고 묻고 싶겠지? 그건, 소멸하기 직전에 보았던 너희들 표정 때문이야. 
인간이 되면 너희를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거든."


"그런 이유로?·"

"어쩔 수 없잖아. 그 순간에는 그게 정말 안타까웠으니까. 하지만 지금이라고 그 마음이 달라진 건 아니야. 
다만 중요하게 여기는 순위를 좀 더 나중에 둔 것뿐이지."

"무슨 소리야? 그럼 지금 첫 번째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이번 일에 희생되는 일이라는 소리야?"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나에게 그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난 너희들이 이 땅에서 행복하게 오래 살았으면 하거든."

"미네···아니, 페르데스!"

"흥분하지마, 엘.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은 저마다 달라. 엘뤼엔이 옆에 남아서 지키는 애정이라면, 나는 그 반대가 되는 것뿐이야."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말도 안 돼! 지금 당장 그만 둬!"

"이미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어. 게다가 내가 아니면 엘뤼엔이 죽게 될 거야. 그건 네가 바라는 일이 아니잖아?"

"!!"


맞는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결과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 또한 나에게는 형제만큼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페르데스를 바라보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페르데스, 너···"

"미안하다, 엘. 난 너와 다른 정령왕들이 날 이해해줄 거라 믿어. 사실 이건 나 자신을 위한 일이야. 
그렇지 않다면 굳이 네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까지 이런 선택을 하지는 않겠지. 
그러니까 전혀 안타까워할 필요도, 슬퍼할 필요도 없어."


그러자 카노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말을 이었다.


"그건 그의 말이 맞아. 페르데스는 이번 일에 스스로 자원 했으니,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것은 다 자신이 선택한 몫이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은 지켜봐주는 것이 최선이야."

"하지만···태어난 지 일주일밖에 안 됐다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신은 태어난 순서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는 게 아니거든."

"······"


간단명료한 그의 대답에 나는 할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내가 자신의 말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는지, 페르데스의 얼굴에 묘한 안도감이 스쳐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혹시라도 내가 계속 매달린다면 무척 곤란했을 거라는 듯이.

실제로 나는 더 이상 그를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가 죽지 않기를 바라지만, 한편으론 그 대상이 엘뤼엔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추악한 이기심이 함께 솟아올랐던 것이다.

그건 나 스스로도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감정임과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페르데스가 소중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것이 엘뤼엔과 같은 선이 될 수는 없었나 보다.

그러나 잠시 후 미네르바가 소멸했을 때 흐느꼈던 트로웰의 모습이 떠오르자, 나는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착잡해져서 씁쓸한 
표정으로 한마디 중얼거렸다.


"지금 이 자리에 트로웰이 있었다면 울었을 것 같아."

"···엘···"

"이런 말 내가 대신하긴 뭣하지만, 네가 소멸했을 때 트로웰···울었었어. 꽤 많이. 그에게 이런 면이 있었구나 싶었지. 
아마 널 굉장히 좋아했었던 것 같아."

"···그러는 넌 이제 울지 않는 구나."


그건 그랬다. 미네르바가 소멸했을 때만 해도 가장 먼저 눈물을 쏟던 내가, 그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서 울지 않는다는 사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꽤 묘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슴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울고 있을 때보다 더 서럽고 마음이 괴로웠다. 
아마도 이것은 울지 않는 게 아니라···


"울지 못한다는 말이 더 맞을 거야. 난 널 위해서 울어줄 자격이 없거든. 
사실···엘뤼엔이 희생되지 않는 다는 말에 누구보다 안심한 사람은 바로 나였으니까. 그런 주제에 어떻게 울겠어? 
솔직히 난 지금 너에게 미안한 감정밖에 없어."

"엘···"

"머릿송이 온통 뒤죽박죽이야. 다시 너를 만나게 되면 그땐 반가운 기분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어. 
이프리트가 엘뤼엔을 만났던 그때처럼. 하지만 역시 세상은 원하는 대로만 돌아가지는 않는 구나."

"그런가. 나는 널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꽤 반가운데. 트로웰과 이프리트가 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은 다소 유감이지만."


그렇게 말하며 차분하게 웃는 페르데스는 이미 어떠한 걸득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그는 신이 된지 몇 일만에 죽는 것이 억울하지도 않느냐는 내 말에 대답했다. 


"신의 자리엔 미련이 없어. 말했잖아. 별로 재미없다고. 
어쩌면 그떄 충동적으로 신을 선택한 것이, 바로 이번 일을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농담이라도 그런 소린 하지 마. 꼭 죽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처럼 들리잖아."

"후후. 그런 건 전부 받아들이는 의미의 차이일 뿐이야. 난 오히려 좋은데? 이런 건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하아. 너도 은근히 고집이 세구나. 좋아, 네 뜻대로 해. 더 이상 말리지는 않겠어. 
하지만 다른 정령왕들도 분명히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그건 내가 알아서 할께. 너한텐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아서 많이 미안하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솔직히 네가 엘뤼엔을 대신한 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쉽게 포기하진 않았을 거야. 
이렇게 보여도 난 굉장히 이기적인 녀석이라, 지금 내 입장만을 생각하고 너를 외면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미워해도 괜찮아. 
아니, 저주해도 돼."


나로선 무척 각오하고 한 말이었는데, 그에 대한 페르데스의 반응은 내 예상과 영 딴판이었다. 
그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흐음~ 그렇다면 난 외면해줘서 고맙다고 대답해야 하나? 끝까지 매달렸으면 내가 더 곤란했을 테니. 
나 때문에 자책하지 않아도 돼, 엘. 내가 바라서 하는 일이고, 넌 충분히 이기적이어도 되는 상황이니까."

"······"

"네 마름이 슬픈 건 '죽는다'는 사실을 두려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야.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너도 언젠간 죽음이란 단어에 민감해 지지 않을 때가 올 거야. 그때는 지금의 내 마음도 이해할 수 있겠지.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사는 존재에게 '죽음'이란 정말 아무것도 아니거든. 가끔은 모든 것을 다 잊고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어지니까."

"···그럼 다른 신들은?"

"그들은 아마 용기가 부족한 것이라 생각해. 맡은 엄무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책임의식도 커지지. 
그것을 버리고 떠날 수가 없는 거야. 자신을 믿고 의지하고 있는 인간들이 가여워서. 
말해두지만 엘, 죽음이 무서워서 피하는 신은 없어."


그렇게 말한 페르데스는 죽음을 택한 신이야 말로 신계의 일에 가장 무책임한 존재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욕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죽음이 무서운 신은 없다라···'


아무리 오래 산 사람도 막상 죽을 때가 되면 두려울 거라 생각했다. 
'아픔'이나 '고통'때문이 아니라,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 헤어진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금 페르데스가 말한 '죽음'의 의미엔 그런 것까지 전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누군가를 잊는 일조차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신들은 죽음을 '새로운 시작'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잊고 사면 당연히 그 본인은 편안할 테지. 그가 괜찮다면 나 또한 얼마든지 괜찮아 질 것 같았다. 
하지만 페르데스, 이건 알아?


'네가 보고 싶어질 땐 어떻게 해야 하지?'

 

* * *

 

"누가···뭘 어떻게 했다고?"


엘뤼엔이 의식을 차린 것은 신계에 도착하고서도 꼬박 하루가 지난 후였다. 
그것이 자그마치 치료신 신 15명을 포함하여, 치유능력이 있는 모든 신들이란 신들은 죄다 소집해 놓고 치료를 시작한 끝에 이루어낸 
쾌거였음을 알까.

하지만 엘뤼엔은 자신을 치료하느라 기진맥진해서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신들은 본 척도 하지 않은 채
(이런 것을 두고 배은망덕하다고 한다.), 소식을 가져온 천사만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찔끔한 천사는 황급히 방금 전했던 이야기를 기계적으로 다시 읊기 시작했다.


"앞으로 10시간 후에 악신의 각성이 있을 겁니다. 그에 대비하여 봉인진을 만들기 위해 20명의 상급신들이 중간계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엘뤼엔님께서 의식을 잃고 계시는 동안에도 희생되는 신에 대한 의견은 계속 분분했으나, 결국 명계의 상급신인 페르데스님이 
자원하심으로서 일단락되었습니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여 몸을 회복시키는 일에만 전념하라는 카노스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흐응, 결국 천사표 하나가 나섰구만."


자신의 무사하다는 결론이 내려졌음에도 엘뤼엔의 표정은 여전히 심드렁하기만 했다.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천사의 시선을 느끼곤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이미 충분히 쉬었다. 그런데 명계의 상급신이라는 페르데스가 누구지?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데?"

"에, 저, 저기···이번에 새로 신의 운명을 받으신 영혼이십니다. 바로 이전대의 정령왕 미네르바라고···"

"뭐? 미네르바?"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에 엘뤼엔은 금새 얼굴을 찌푸렸다. 
이전대의 미네르바라면, 그가 엘퀴네스였을 시절 함께 정령계에서 지냈던 바람의 정령왕이 틀림없었다.
그가 벌써 신이 되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이번 일에 스스로 희생하겠다고 자원할 줄은 더더룩 몰랐던 일이었다.


"흐응, 1년도 안 되서 신의 삶을 포기하다니, 그렇게 재미가 없었나. 아, 하긴, 명계의 상급신이 되었다고 했지? 
우중충한 놈들 얼굴을 영원히 보느니 인간이 되는게 더 나았겠군."


간단명료하게 결론은 지은 그는 즉시로 그 일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소멸에 대한 동정이라던가, 안타까움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덕분에 속으로 위로의 말을 잔뜩 준비하고 있던 천사는 허무하게 어깨를 늘어트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엘뤼엔은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왜? 뭐 할 말 있나?"

"에···에, 저기···괜찮으십니까?"

"뭐가? 아아, 상처라면 조금 쑤시는 군."

"아니, 그것 말고 말입니다. 이번에 희생되시는 명계의 페르데스님은 엘뤼엔님과 같은 시대의 정령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충격을 받으시지는 않으셨는지···"


상극신들이야 어차피 전부 과거엔 한가락 하는 정령왕이었다지만, 자신과 같은 시대를 지낸 정령왕에겐 조금 더 애착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일단 같이 살아온 세월이 남다르지 않은가? 하지만 엘뤼엔에게는 그러한 보통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내가 왜? 자기가 좋아서 죽겠다는데 상관할 이유는 없지. 
내 몸이 회복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렇게 멀쩡한 상태라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보해 줄 수 있는데?"

"양···보 입니까?"

"그럼 달리 다른 말이 있나? 그 녀석도 틀림없이 신계의 진실을 눈치 채고 미리 도망칠 길을 모색해 둔 걸 거다. 
그러고 보니 놈이 부럽군. 쳇, 아들내미만 아니었어도."

"신계의 진실이오?"
 

의아하게 바라보는 천사에게 엘뤼엔은 서슴없이 긍가 입을 딱 벌리게 만들 만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매일 하루같이 수 백 장의 서류를 처리해야 하는 빡빡한 일정의 시작이지. 
자리를 굳혀 일거리가 늘어나기 전에 내빼야 나중에 후환이 없을 걸? 
완전히 소멸하는 경우도 아니니, 그거 처리하지 않고 죽으면 인간이 되더라도 고스란히 업으로 쌓여서 안 좋은 인생을 살게 되거든."

"저어···그럼 설마 신들께서 이번 일에 한사코 서로 안하시려고 한 이유가···"

"나처럼 꼬박꼬박 서류를 처리한 놈들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되면 전부 업으로 짊어지게 되는데, 그거 다 풀려면 족히 몇 억년은 자갈밭을 뒹구는 삶을 살걸? 누가 그러고 싶겠어? 
차라리 아예 소명멸 되고 말지."

"그, 그럼 엘뤼엔님은···"

"나야 당연히 성실한 업무를 해왔으니 죽어도 별 탈 없다. 그래서 놈들이 더 나한테 떠넘기려 한 거라고. 사
실 아들내미만 아니었어도 솔깃한 일이긴 하다만."

"······"


그랬다. 저래 봬도(?) 엘뤼엔은 꽤나 능력 있는 신이었고, 투덜투덜 하면서도 일처리에는 단 한 번도 지장을 준적이 없었다. 
반면에 다른 신들은 탱자탱자 놀면서 적당히 처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악신을 처리하기 위해 희생되는 그 성스러운 작업이, 한순간에 신계를 탈출하기 위한 약삭빠른 신의 계략으로 변모되어 가는 과정을 
보며 천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세계인 것이다.


"하, 하지만 이렇게 헤어지고 나시면 이제 다시는 못 만나시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건 역시 슬픈 일이···"

"못 만난다고? 누가?"

"에? 그, 그럼 다시 재회도 가능하다는 소리입니까?"


완전히 영혼의 성질리 바뀌어버리는 존재를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놀란 표정으로 묻는 천사에게 엘뤼엔은 시큰둥한 어조로 답했다.


"인간이 되어버렸다고 해서 지난 세월에 묻어버린 영혼의 향을 쉽게 지울 수 있는 건 아니다. 
같은 차원에 있다면 알아보는 게 당연하지. 물론 놈이야 날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하지만 그건···"

"기억이 사라졌다고 해서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던 관계로 되돌아 갈 수 있나? 그건 인간들도 안하는 생각이야. 
넌 천사라는 녀석이 그런 기본적인 것도 생각하지 않는 거냐?"

"죄, 죄송합니다."


엘뤼엔의 말투에 불쾌함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파악한 천사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곤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엘뤼엔은 지금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천사 덕분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떠올리고 말았던 것이다.


'알아보는 것으로 족하는 거야 나 같은 놈한테만 해당하는 거고···엘은 괜찮으려는지 모르겠군. 
꿍꿍이야 어쨌든, 녀석으로선 처음 겪는 주변인의 '죽음'일 텐데···. 충격을 심하게 받으면 억눌러져 있던 본성이 나타날지도.'


본성이 드러난다는 것은, 그만큼 엘의 마음이 견딜 수 없는 한계치에 부딪친다는 뜻이었다. 
그런 경우 보통 인간이라면 미쳐버리게 되지만, 정령왕인 엘은 스스로의 본능에 의해 본래의 성격을 되살려 자신을 보호한다.

즉, 타인에 대한 감정을 누르고 엘퀴네스 특유의 독선적이고 냉정한 성격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지키는 최대의 방어 자세였다.

그렇지 않아도 기절하기 직전에 보았던 엘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 엘뤼엔은 급히 몸을 추슬러 중간계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항시 시련이 따르기 마련인 법!


"너희들 뭐야···?"


그는 지금까지 바닥에서 데굴거리고 있었던 치료신들이 벌떡 일어나 자신을 가로막자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평소였으면 엘뤼엔의 살벌한 얼굴에 덜덜 떨었던 신들이 오늘만큼은 확고한 표정으로 고집스럽게 대답했다.


"엘뤼엔, 그대는 아직 환자이오. 부상이 다 회복된 것이 아니니 더 쉬어야 합니다."

"무슨 헛소리야? 난 멀쩡해."

"일시적인 치료의 효과 일 뿐. 무리를 하면 다시 악화 됩니다. 마신 카노스도 그대에게 절대적인 안정을 하라고 부탁하시고 가셨소. 
앞으로 일주일간은 이곳에서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싫다면?"


삐딱하게 묻는 말에도 치료신들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사실 그들은 신계에서 무섭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마신 카노스로부터 직접 엘뤼엔의 치료를 부탁받은 입장이었다. 
여기에서 순순히 그를 놓아주면 훗날 그 사실을 안 마신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에 이렇게 용기를 내고 있는 것이다.

엘뤼엔 역시 껄끄러운 상대임은 마찬가지였으나, 지금은 부상 때문인지 그 기세가 한결 누그러져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들은 평소였다면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바로 엘뤼엔의 신력이 약해져있는 틈을 타 강제로 기절기키는 방법인 것이다.
 

"우리들을 용서하시오, 엘뤼엔. 다 그대와 우리를 위한 일이오."

"이봐, 너희들 무슨-!!"


퍼억!

뒷목에서 강한 충격이 오자 엘뤼엔은 힘없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사실 지금 이렇게 일어나 있다는 것이 용할 정도로 그의 몸 상태는 그리 호전적이지 못했다.
그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엘이 걱정되어서 한번 내려가 볼까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꼴을 당하다니!


'깨어나면 손봐줄 녀석들이 늘었군.'


점점 흐려져 가는 의식을 느끼며 엘뤼엔은 마음속으로 살포시 이를 갈았다. 
그 순간 쓰러진 그를 다시 침대로 옮기던 치료신들의 팔에 우드득 소름이 돋아났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깨닫지 못했다.
지옥의 급행열차는 그렇게 소리 없이 그들 곁에 다가오고 있었다.

 

 

 

전쟁 중에 갑자기 사라진 이사나 덕분에 황제의 측근들은 전투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고서도 모두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들은 저녁이 되기 전에 이사나로부터 그의 행방에 대한 자세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황제폐하와 일행들은 모두 무가 하시 답니다. 방금 수도에 도착해 계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가장 먼저 소실을 받은 이는 이사나의 오른팔을 자처한 리글레오였다. 
그의 입에서 황제가 무사하다는 말이 나오자, 측근들은 그제 서야 마음을 놓으며 군사들을 향해 마음껏 승리의 축제를 벌이도록 
허락했다.

그들은 이미 클모어로 내려오던 대공의 나머지 군사들을 깨끗하게 섬멸시킨 뒤였다. 
지금 상태로라면 황성이 있는 수도까지 거침없는 진격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다행입니다. 갑자기 사라지셔서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그러게 말입니다. 대체 무슨 수를 쓰면 그 단시간에 갑자기 수도에 가실 수 있는 걸까요? 
시벨님과 알리사님이 함께 가셨으니 염려는 되지 않았습니다만, 혹여나 황성의 군대와 부딪치시지는 않으실지 걱정되는 군요."

"혹시 수도에 미리 올라가있던 부대와 합류하신 게 아닐까요? 그 쪽 상황이 긴급해지니 폐하를 뫼신것 같습니다만."

"끄응. 하긴 겨우 3천명밖에 안 올라갔으니···"


이렇게 대성을 할 줄 알았으면 군대를 넉넉해게 배치해도 괜찮았을 터. 
전력이 부족하단 생각에 수도를 치는 군사를 너무 적게 잡았던 것이 못내 염려가 되는 카웰 후작이었다. 
잠시 후 그는 약간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이것도 다 폐하께서 본 실력을 너무 숨기신 탓이야. 상급 정령사이시면서 어찌 그 사실을 모른 척 하고 계실수가!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내게 끝까지 숨기시다니. 말씀은 안 드렸지만 정말 서운하더군."


그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전투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군사들과 같이 전장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열심히 싸우고 있던 이사나에게 갑자기 많은 적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하필 그때 황제의 측근들은 하나같이 그 주위에서 멀어져 있었고, 장거리 마법이 가능한 시벨과, 알리사, 정령사 페리스도 속속들이 
밀려드는 적을 상대하느라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사나의 검술이 수준급이라고는 하나 다수의 적을 한 번에 베어버릴 만큼 뛰어났던 것은 아니다. 
뒤 늦게서야 황제가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은 친위대들이 서둘러 달려갔지만 이미 코앞에 닥친 적들은 사정없이 이사나에세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다 끝났다, 라고 생각했던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황제의 주위에 갑자기 시퍼런 물길이 치솟더니, 무려 5마리나 되는 상급 정령 시큐엘이 나타나 주변의 적들을 갈가리 찢어버렸던 
것이다.

설마 이사나가 물의 정령사였을 줄이야!

카웰 후작은 지금도 그때 일만 생각하면 긴장이 되어 손안에 땀이 맺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만 빼고 모두가 다 알고 있던 일이 아닌가? 심지어 포로로 잡힌 카리브디스 공작마저 말이다.


"하하. 일부러 숨기신 게 아니라 폐하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을 잊어버리고 계셨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말하실 타이밍을 놓치신 것뿐이죠."

"흥!페리스, 자네도 너무했어. 미리 알고 있었다면 내게 말해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알고 보니 친위대들 모두가 나에게 숨겼더군."

"이런, 후작님. 폐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 걸 제가 알려드릴 순 없지요. 수도의 일이 걱정되어서 그러신 걸 제가 알려드릴 순 없지요.
 수도의 일이 걱정되어서 그러신 거라면 너무 염려 마십시오. 그곳엔 엘님과 라피스님이 계시니까요."


정령사 페리스의 말에 후작은 점점 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단 두 사람의 힘으로 어찌 황성의 군대를 막아낸 단 말인가?

그러나 그가 막 그 점에 대해 따지려는 찰나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황제의 편이 되기로 결정한 이후 이제껏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카리브디스 공작이었다.


"라피스라면··· 그 붉은 머리에 적안을 가진 청년을 말하는 것인가?"

"예, 맞습니다. 혹시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가 수도로 떠나시 전에 잠시 나에게 들렸었지. 겉보기의 행동은 가벼워도 실력은 굉장히 뛰어나더군. 
내 블래스터의 봉인을 풀고, 내가 그것을 눈치 채지 목하도록 환각 마법을 걸었으니까."

"!!"


그 말에 카웰후작은 놀란 표정으로 숨을 삼켰다. 
일개 마법사가 소드 마스터의 눈을 피해 그에게 접근하여, 정령검의 봉인을 푸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게다가 환각 마법까지 걸다니! 라피스의 마법 실력을 그저 조금 출중한 정도라고 밖에 알지 못했던 후작으로선 두 눈이 휘둥그레질 
내용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놀란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카터스 제국의 수석 마법사이자, 현재 자국의 황태자 라온휘젠을 따라 이번 전쟁에 남몰래 합류했던 마도사 세리엄 또한 흥분된 
얼굴로 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공작에게 환각 마법을 걸었다고?"

"그렇다. 내 검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전투를 시작하고 나서였으니 한참이나 늦은 감이 있었지. 
그는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었어."

"그의 나이가 어떻게 되오? 서클은?"

"나이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20대 초반을 넘을 것 같지는 않더군. 서클은···잘 모르겠군. 
그건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이 더 잘 알 것이라 생각하는데."

"끄응. 언젠가 5서클 초입에 들어섰다고 들었던 것 같소."

"5서클!"


후작의 대답을 들은 세리엄은 경악성을 터뜨리며 크게 전율했다. 
고작 20대의 나이에 5서클에 들어섰다면 그건 범상치 않은 실력이었다. 
장차 8서클까지 노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잠재성을 지닌 천재인 것이다.

비록 평생 검에만 매진했기에, 다른 상식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카웰 후작으로선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내심 무시하고 있던 남자가 알고 보니 '천재'라는 결론이 내려지자, 후작은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여동생인 에이프릴이 그와 헤어진 것이 관연 잘된 일인지 다시 심사숙고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자체를 부정하려는 듯, 그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으음. 하, 하지만 나는 도무지 그를 믿을 수 없소. 출생부터 시작해서 어디 한 구석 신뢰가 가는 부분이 있어야지. 
황제폐하께서 정체모를 녀석과 같이 다닌다는 것이 영···"

"하긴, 그도 그렇군. 20대의 나이에 5서클이라면, 평민일지라도 이미 어느 정도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자일 것이오. 
하지만 라피스란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군. 적발에 적안이라면 상당히 눈에 띄는 자였을 텐데, 이제껏 알려지지 않다니."

"그와 항상 같이 다니는 엘이란 정령사도 마찬가지요. 고작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나이에 물의 상금 정령사라니. 
게다가 그렇게 화려한 미모를 가지고서도 이제껏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소이까? 
폐하께서 그를 형제처럼 따르니 지금껏 묵인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인간인지조차 의심스러웠소."

"인간이 아니라면?"

"하긴, 블루엘프까지 있었으니, 그보다 특이한 종족이 아니라는 법도···"


대화가 점점 오묘한 곳으로 흐르자 페리스를 포함한 이사나의 친위대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저들이 의심하고 있는 존재가, 사실은 황제에게 있어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의지가 되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까.

더 이상 언제까지고 숨길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페리스는 드디어 오래도록 감추어왔던 진실을 밝힐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 먼저 들어주십시오. 엘님과 라피스님은 후작님이나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정체가 수상하지도, 의심스러운 인물도 아닙니다."

"그럼 페리스 자네는 뭔가 짚이는 것이 있다는 소리인가?"

"지금부터 천천히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제가 알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일 뿐이니, 더 자세한 상황은 폐하께 직접 들으셔야 할 겁니다."


페리스가 진지한 어조로 말하자 주변에 있던 황제의 측근들은 모두 긴장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경청할 자세를 갖추었다. 
잠시 후 모두가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페리스는 심호흡을 한 뒤 처음 이사나가 황성에서 도망치던 일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시 황성을 벗어나는 중에 친위대의 대다수가 죽었습니다. 
일단 산 속 깊이 들어가 숨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급하게 나온 터라 수중에 돈 한 푼 없었고, 있었다 하더라도 음식을 사러 마을로 
내려갔다간 당장이라도 추적자들에게 꼬리가 밟힝 위기였지요.
부상자는 갈수록 늘어났고, 저희뿐만이 아니라 폐하께서도 며칠 동안 식사를 하시지 못해 기진맥진한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그때 추적자에게 잡혔다면 우리 모두 그 자리에서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큭, 자네들의 노고에 대해서는 뭐라고 해 줄 말이 없네. 정말 고생이 많았군."

"아닙니다, 후작님. 이미 지난 일이니까요. 아무튼 그러한 와중에 폐하께서 갑자기 자리를 비우고 사라지신 일이있었습니다. 
늦은 시각인데다, 아직 사방에 추적자들의 위험이 있는지라 우리 모두 혼비백산  하여 폐하를 찾기 시작했죠. 
엘님을 만난 건 바로 그런 중에서였습니다."

"그때 만났다고?"


페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후로부터의 자세한 일을 늘어놓았다. 
엘을 수상하게 여긴 친위대가 그를 포박하여 끌고 간일부터 시작해서, 부상당해 쓰러져있던 기사를 엘이 치료한 일까지. 
결코 순조롭지 못한 출발이 그들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결과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부상을 치료했다고? 그럼 신관이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정령사가 어찌 신관이 될 수 있단 말이지? 둘의 속성은 전혀 달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 텐데?"

"공작님 말이 맞네. 그저 평범한 의관도 아닌 신관이라니,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상식이야. 
혹시 치료 포션을 썼던 건 아닌가?"

"앗! 그러고 보니 이 몸이 처음 사막에 쓰러진 것을 발견했을 때, 치료한 사람이 바로 엘님이었소. 
그때 그는 신관이냐는 본인의 말에 부정하지 않았소이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라온휘젠 황자?"

"이게 어떻게 된 건가. 그럼 그가 다루는 정령이 진짜 정령이 아니란 소리인가?"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마디씩 늘어놓자 페리스와 친위대의 기사들은 모두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에 이들이 놀랄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물론 엘님은 물의 정령을 다루고 계시죠. 하지만 분명히 말해서 그분은 정령사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정령사가 아니라니? 그가 물의 상급 정령을 다루는 것을 이 눈으로 직접 보았는데?"

"그분은 정령사가 아니어도 정령을 다루실 수 있는 분이죠. 혹시 엘퀴네스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거야 4대 정령왕의 이름중 하나가 아닌가. 갑자기 여기서 왜 그 이름이···"


거기까지 대답하던 후작은 문득 말을 멈추고 멍한 눈으로 페리스를 바라보았다. 
주변이 유난히 조용해졌다고 느낀 것은 비단 그의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카리브디스 공작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모두 얼빠진 표정을 한 채 몸을 굳히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하면서도 확인 사살하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엘이란 정령사···가 그 엘퀴네스라고 말하려는 건 아닐 테지?"


정령사가 아니면서도 정령을 다룰 수 있는 존재는 마나에 정통한 드래곤이나 정령들을 지배하는 정령왕 뿐이다. 
'엘'이란 이름도 그렇고, 흔치 않은 푸른 색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얼굴을 생각하면 그런 가능성을 아주 배재시킬 순 없었다.

긴장한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페리스는 약간 우쭐하는 느낌으로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엘님이 바로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님 이십니다."

"허억!"

"쿠, 쿨럭!"

"뭐, 뭐라고?! 그게 정말인가?"


페리스는 본래부터 진지한 성격으로 허튼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후작은 놀란 표정으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그 예쁘장한 소년이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 였을줄이야! 
페리스에게 '그렇다'는 대답을 몇 번이고 확인 한 그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넋이 나간 사람마냥 중얼거렸다.

 

"그, 그렇다면 황제폐하께서는···"

"정령왕의 계약자시지요. 참고로 역대 정령왕의 소환자들 중에서, 물의 정령왕을 소환한 인간은 이사나님이 처음이십니다. 
또한 엘퀴네스는 치료신의 고위사제보다 완벽한 치유력을 가진 것으로도 알려져 있지요."

"허, 허어···어떻게 이런 일이···"

"맙소사···"


충격으로 다리에 기운이 빠진 몇몇 사람들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카터스 제국의 황태자인 라온휘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언젠가 엘에게 직접 찾아가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물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엘은 어색하게 웃으며 언젠가 알게 될 것이라는 말로 대답을 회피했다. 
자신의 정체가 알려지면 이사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때는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이사나가 정령왕의 계약자라서가 아닌, 그 스스로의 힘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계약자의 입장을 배려하는 정령왕이 또 있을까. 그는 갑자기 이사나가 미치도록 부러워졌다. 
타고난 카리스마는 물론, 실력 있고 믿음직한 신하들과 동료들,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존재까지! 
그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이 아닌가!

사실 그는 이제껏 이사나를 망해버린 제국의황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와 대공을 몰아내고 재기에 성공한다 해도, 이미 탄탄한 대로를 걷고 있는 카터스의 황실에는 비견할 수 없을 것이라 
은연중에 믿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믿음이 완전히 부서져 버렸다. 
이사나는 저 멀리 바라보기조차 힘든 위치에 올라서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과연 내가 따라잡을 수 있을까?'


라온휘젠은 긴장으로 축축이 젖은 주먹을 바라보며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새 이사나는 단순히 한 여인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만이 아닌, 그의 전부를 걸고 맞서나갈 인생의 라이벌로 그 의미가 변질 되어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질투가 나고 뛰어 넘고 싶은 상대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가능하다면 그 무엇 하나 그에게서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

카터스의 수석 마법사 세리엄은 그 모습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자극을 받으신 게로군. 좋은 현상이야, 암 그렇고 말고.'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부터 교육받는 과목마다 발군의 실력을 드러내어 스승들로부터 극찬을 받고 자한 태자였다. 
그러나 항시 모든 것을 다 쉽게 배워버린 것이 문제였는지, 태자는 자랄수록 배움에 대한 열의가 줄어들어, 
주변인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태자라면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을 듯싶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경쟁심을 느꼈으니, 이젠 그를 뛰어넘기 위해서라도 분발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세리엄이 처음 본 순간 예상했던 것처럼, 이사나와 라온 황태자는 평생을 두고 
겨룰 멋진 라이벌이 될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가출소동에서 이런 값진 결과를 얻어내리라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그는 이것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내정되어 있던 운명의 안배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이사나 황제는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로군. 정령왕의 계약자에 충성심 깊은 수하들과 좋은 동료들까지. 
게다가 인품 또한 훌륭하니, 꼭 태자전하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부러워 할 만 한 사람이다. 
솔트레테 제국은 앞으로 더욱 강해지겠구나.'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세리엄만이 아니었다. 
주위에 있던 이사나의 측근들도 모두 한결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새삼 자신의 주군에 대한 충성심을 다지고 있었다. 
그 사이 드디어 진정이 된 카웰 후작이 감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선 정말 남을 놀라게 하는데 타고 난 실력이 있는 것 같군. 설마 이렇게까지 감쪽같이 입을 다물고 계셨을 줄이야! 
그가 수도 쪽의 군대를 적게 달라 한 이유를 이제야 알았네. 정령왕이라면 일만의 적이라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을 테지."

"네, 그렇습니다. 게다가 라피스님도 함께 하시니, 오히려 이쪽에서 보낸 군사는 눈속임용에 불과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군요."

"으음. 그러고 보니 라피스란 마법사 청년이 극구 둘이서만 가겠다고 했었지. 그는 엘님이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건가?"

"예, 당연하죠. 제가 알기론 그 분도 엘님의 계약자십니다만."

"···뭐? 하지만 그는 마법사···게다가 두 사람이 동시에 정령왕과 계약된 사례는···"

"음, 그렇긴 하지만 드래곤은 언제나 예외이지 않겠습니까? 아마 그에 관한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만."

"······"


그 순간 주위는 또다시 깊은 침묵의 늪으로 가라앉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진 이유를 알면서도 페리스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어라? 다들 왜 그러십니까? 제 말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요?"

"다, 다시 한 번 말해주게. 그···가···드, 드래곤이라고?"


후작은 정녕 이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하나뿐인 여동생의 일과 부딪혀, 대놓고 라피스에게 힐책어린 시선을 보낸 것이 
몇 번이었던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진정 죽은 목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을 모르는 페리스는 명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레드 드래곤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마 이번에 황제폐하와 동료분들을 수도로 불러내신 분도 그분이실 것 같군요. 
이렇게 멀리 떨어진 상대를 한꺼번에 이동시키는 마법이라면, 드래곤이 아니면 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건 자네 말이 맞네. 세상에! 블루 엘프도 모자라 이번엔 드래곤이라니! 
내 평생 절대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한 존재를 이번에 다 만나게 되는 군! 이참에 우리도 수도로 올라가는 것은 어떻소? 
꼭 그 분을 직접 뵙고 싶은데."


마법사로서 드래곤을 만나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을까! 
세리엄은 흥분된 얼굴로 떠들었지만, 그럴수록 후작의 얼굴은 점점 더 칙칙하게 가라앉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카리브디스 공작은 쯧쯧 혀를 차며 어느새 어둑어둑 하게 저물어버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처음 이사나를 따르기로 결정했을 때만 해도, 그는 마음속에 많은 망설임을 남겨둔 상태였다. 자신이 지금 제대로 된 길을 걷고 
있는 것이 맞는지, 스스로의 눈을 의심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드래곤과 정령왕이 보호하는 존재라면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그의 가슴은 벅찬 희열로 들떠 있었다.

 

 


동이 틀 무렵이 되자 지상에 도착해 있던 신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부산그러워지기 시작했다.
페르데스 역시 그들과 함께 이것저것 준비를 하는 듯 했는데, 한참동안이나 저들끼리 의견을 나누던 그들은 곧 천천히 공중으로 
부유하더니, 악신이 들어가 있는 황성 전체를 둥글게 감싸는 형식으로 서로의 자리를 배치했다.

내가 그것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아직 그들과 합류하지 않은 카노스가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봉인진을 설치하려는 거야. 지금부터 미리 주문을 외워둬야 악신이 나오는 순간 몸을 묶을 수 있거든."

"각성이 다가온 거군요."

"맞아. 이제 곧 놈이 희생된 재물의 마지막 잔을 비울 때다. 
사실 신계의 신들이 총 출동 한다면 좀 더 버틸 수 이겠지만, 아쉽게도 모두가 자리를 비울수는 없는 상황이니까. 
뭐, 우리들만으로도 충분할 거라 생각하지만. 일단 정령왕들의 도움이 필요할 듯 해."

"우리의?"

"여차 싶을 땐 놈을 결박시키는 것을 도와줘. 
이 세계의 자연을 움직일 수 있는 너희들이라면 놈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하는데 큰 힘이 될 거다."


그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미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프리트야 부르면 될 테지만, 트로웰은 어찌합니까? 역소환 된 상태니 오고 싶어도 올 수 없을 것 같습니다만."

"음. 그건 그래. 게다가 이번에 희생되는 신이 누군지 알고 나면 충격을 많이 받을 텐데, 차라리 오지 않는것이 좋을 지도."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전력의 차가 상당할 텐데요."

"그래도 난 트로웰이 괴로워하는 얼굴은 보고 싶지 않은걸."


이미 예전에 미네르바가 소멸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 슬퍼한 트로웰에게 똑같은 경험을 되풀이 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자 그 순간 명랑한 톤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응? 내가 뭘 괴로워해?"

"!!"

"트로웰!"


이제 막 정령계에서 내려 온 건지, 트로웰은 이전의 청년의 모습을 버리고 다시 원래의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예고치 못한 그의 등장에 나와 미네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어, 언제 온 거야? 몸은 괜찮아?"

"기척도 없이 오셔서 놀랐습니다. 완전히 회복하고 돌아오시는 겁니까?"

"응, 보시다 시피. 후후, 그런데 뭘 그렇게 놀래? 내 얘기가 나온 것 같은데, 혹시 나 없는 사이에 험담이라도 한 거야?"

"아,아니. 그게 아니라···"

"쿡쿡, 농담이야, 농담. 흐음, 그 사이에 벌써 신들이 온 건가? 악신의 각성이 가까워지긴 가까워졌군. 다들 표정이 비장한데?"


우리의 반응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트로웰은 멀리서 봉인진을 펼치기 위해 공중전(?)을 펼치고 있는 신들을 알아보곤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에게 근처에 있던 카노스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여어~ 역소환 해본 기분이 어때, 트로웰? 듣던 만큼 짜릿한가?"

"응? 뭐야, 카노스. 당신은 왜 여기에 있어? 저들과 함께 봉인진을 설치해야 하지 않아?"

"안 그래도 이제 슬슬 가보려던 참이었어. 에휴. 땡땡이 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랬다간 가만히 있지 않겠지? 
아~ 이래서 인기인은 피곤하다니까. 냐하하."


카노스의 주책 맞은 말에 나와 미네의 얼굴은 자연스럽게 찌푸려졌지만 트로웰은 이미 면역이 되었다는 듯이 빙긋 미소 짓기만 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오히려 잘 해보라는 듯이 카노스에게 격려의 말까지 건네었다.


"저들 20명을 합쳐도 마신 하나가 합류한 것만 못할 테지. 활약을 기대하고 있겠어, 카노스. 부디 고향땅을 잘 지켜달라고."

"고향땅이라. 듣고 보니 그렇군. 모든 상급신들에게 이곳은 잊지 못할 추억이 담긴 곳이지."

"그래, 그래. 그러니까 성심성의껏 임해줬으면 좋겠어. 참, 미네르바···아니, 이젠 이름이 바뀌었겠군. 
아무튼 그는 어디에 있지? 이번에 희생되는 상급신 말이야."

"!!!"


그의 말에 놀란 것은 나와 미네만이 아니었다. 
카노스 또한 그가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목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척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의 침묵 후,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난처한 어조로 물었다.


"···알고 있었군?"

"미래를 보는 것이 내 특기니까. 사실 이걸 확인하느라 무리하는 바람에 역소환이 된 것이었거든."

"!!"


미네르바가 소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트로웰의 표정은 이전에 비해 그리 큰 변화가 없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믿을 수 없다는 걸까? 아니면 이미 정령계에서 쉬는 동안 혼자서 슬퍼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조마조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카노스는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다른 신들과 합류해있던 페르데스를 부르려는 것이다.

"쯧쯧. 알만하군. 어이, 페르데스!트로웰이 널 부르는데?"


그러자 멀리서도 용케 카노스의 목소리를 들은 페르데스가 놀란 표정으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는 트로웰을 발견한 그는 옆에 있던 신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서둘러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정확히는 날아왔다는 표현이 맞지만 말이다.)


"트로웰! 어떻게 된 거야? 역소환이 되었다고 들었느데···"

"이런, 이런. 그런 창피한 기억은 잊어달라고. 그보다 처음 만나자 하는 말이 겨우 그거야? 
반갑다거나, 오랜만이라거나, 잘 지냈냐거나 하는 인사치례도 없다니 너무한걸."

"후후. 지금 보니 잘 지내는 것 같은걸. 어쨌든 이렇게 만나게 되니 다행이다. 널 못 보고 가게 되는 줄 알고 무척 서운했었거든."


왠지 안심한 듯한 페리데스의 모습에 트로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심으로 빛나는 그의 눈은 페르데스의 전신을 샅샅이 흩어 내리고 있었다.


"여신이 됐네? 머리카락도 검어지고. 전체적으로 명계의 기운이 짙게 드러나 있는 걸? 아아, 알았다. 명계의 신이 된 거구나?"

"맞아. 망자의 신 페르데스라고 하지. 바람의 정령왕은 대부분 명계의 신이 되는 경우가 많다더군."

"잘 어울려. 이 모습을 보는 게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니 아쉬워 지는 걸. 뭐, 미네···아니 페르데스라고 했지? 
너라면 인간이 되도 분명히 멋질 테지만."


능청스럽게 말을 건네는 트로웰의 모습에선 이별에 대한 아쉬움만 남아있을 뿐, 이전처럼 괴로워하거나 슬픔을 억지로 참는 듯한 
기색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페르데스도 날 대할 때보다는 한결 편한 분위기로 대답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실은 나는 너도 엘처럼 이번 일에 결사반대 할 줄 알았어."

"하하. 반대한다고 들을 네가 아니지. 넌 네가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해내고 말잖아. 
기억 안나? 4천 년 전에도 모두가 반대한 일을 꿋꿋하게 해냈었잖아."


그 말에 페르데스는 그떄의 일을 회상하듯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난처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 엘의 말처럼 난 고집이 센 모양이야. 설마 그래서 안 말리는 거야? 어차피 안 통할 것이란 걸 알아서?"

"아니, 네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을 뿐이야. 네가 어디로 가든, 누가 되는 난 상관없어. 말했잖아. 내가 너를 기억할 거라고."

"!!"


그 말에 페르데스는 무척 놀란 얼굴을 했다. 트로웰은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디에 있든 나는 반드시 널 찾아낼 거야. 네가 날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고, 끝까지 못 알아봐도 상관없어. 
수명이 짧아서 금방 죽어도, 나는 다음 대의 네 환생을 찾아낼 거야. 
과거의 인연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버리면 그만이거든."

"트로웰···"

"괜찮아. 그 작업은 그렇게 외롭지도, 힘들지도 않을 거야. 어쩌면 소멸하는 때까지 못 찾을 수도 있겠지. 
네가 아크아돈에서 태어나게 될 거란 보장은 없으니까. 그렇담 나중에 신이 되어서 찾으면 그만이야. 어때? 간단하지?"

"왜 그렇게까지···"


곤혹스러운 얼굴로 묻는 페르데스를 트로웰은 정말 모르겠냐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널 좋아하니까."

"!!"


"널 좋아했어, 페르데스. 아니, 지금도 좋아해. 나름대로 많이 표현한다고 했느데, 넌 끝까지 모르더군. 
그러고 보면 너도 참 많이 둔한 녀석이야."

"그, 그런···"


그가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 아닌가 싶다. 
갑작스런 고백에 놀랐는지 허둥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페르데스를 보며, 트로웰은 장난끼 어린 얼굴로 짓궃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넌 내가 왜 인간을 싫어하는지 몰랐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어.
네가 인간과 사랑에 빠지지만 않았어도 난 그럭저럭 그들에게 인자한 정령왕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트, 트로웰···"

"자, 어쨌든 과거의 고백은 모두 끝! 받아들이고 말고는 네 자유지만, 포기하지 않는 것 또한 내 자유니까. 
마음껏 부담스러워 해줘, 페르데스. 그래야 지금깝지 혼자서 앓던 내 짝사랑이 그럭저럭 보상받을 거 아니겠어?"

"하, 하아···"


새삼 느끼는 거지만 트로웰은 무조건 자상하기만 한 녀석이 아니었다. 
적당히 남을 놀릴 줄도 알고, 다독일 줄도 아는 모습이 트로웰이 가진 진정한 본모습인 것이다.

완전히 여유를 되찾은 그에 비해 페르데스는 점점 복잡한 표정이 되어 눈동자를 굴리느라 정신없었다. 
언제나 정숙하고 지적이던 그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이야!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푸훗! 아하하하!"

"우, 웃지 마, 엘! 그, 그러니까 나는···"

"쿡쿡쿡. 아, 오해하지 마. 놀리려고 웃은 게 아니야. 그냥 너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나 싶어서. 
어쨌든 걱정하던 상황은 안 나와서 다행이야. 난 트로웰이 상처받을까봐 조마조마 했거든."

"어라? 나름대로 상처 받았는데. 사실 조금 충격이긴 했어. 
미네르바가 신이 될 줄 몰랐고, 이번 일에 자원 할 줄은 더더욱 몰랐으니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까, 어차피 포기할 수 없는데 아무렴 어떠냐 싶더라고. 결국 그의 선택에 맞춰가기로 했을 뿐이야."


트로웰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건 생각보다 훨씬 힘들고 어려운 결정이었을 터였다. 
언젠가 찾아낸다 해도, 그리하여 또 다른 인연을 만들어낸다 해도, 결국 인간의 수명은 짧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수고를 몇 번이고 반복해도 돌아오는 보답은 없을 것이고, 꿈같은 해피엔딩은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건 정말 사랑하는 감정이 없다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 트로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피스는 이런 희생적인 사랑을 두고 단 한마디로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스토커의 탄생이로군. 하긴, 네놈의 그런 기질은 진작부터 꿰고 있었지."

"스토커라니. 이왕이면 좋은 말로 표현해 줄 수 없어?"

"흥! 스토커는 어떤 말로 돌려도 스토커야. 앞으로 주구장창 쫓아다니기만 할 텐데 그 외에 다른 표현이 있나?"

"너처럼 민폐는 끼치지 않을 테니 염려 놓으렴."

"얼씨구~ 과연 그럴까? 당장 녀석에게 인간 남자친구라도 생기면 눈에 불을 켜고 방해할거면서."

"그건 좋아하는 상대를 지키려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행사야. 참견 받을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는 트로웰의 얼굴은 '거기서 한마디만 더하면 죽는다!'의 포스를 짙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도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는지, 라피스는 쳇 하고 혀를 차곤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때까지도 페르데스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연신 말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 옆에서 배를 움켜잡고 킬킬거리는 카노스는 살포시 무시해 주도록 하자.


"으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할 지···"

"큭큭큭. 억지로 생각할 필요가 뭐 있어? 어차피 싫다고 해도 저 녀석은 널 끝까지 쫓아다닐 기세인데."

"뿌득. 남의 일이라고 너무 즐거워하는 거 아닙니까, 카노스?"

"훗, 모르는 소리.남의 일이니까 당연히 즐겁지. 그래도 자네는 운이 좋은 것 같은데? 끝까지 기다려 주겠다는 존재가 있잖아? 
아무리 영생을 사는 존재라도 저러긴 정말 쉽지 않다고. 아니, 오히려 영생을 살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일이지."

"하아. 그래서 더 문제인 겁니다."


그러나 힘없이 내뱉는 말과 달리, 트로웰을 바라보는 페르데스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지만, 그의 말이 기쁘긴 기뻤었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고 나니 어쩌면 페르데스 또한 트로웰에게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오랜 시간동안 두 사람은 어떻게 서로의 마음을 감출 수 있었을까. 그리고 왜 하필 이런 순간에 알게 된 것일까.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페르데스는 이번 일에 자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엘뤼엔이 희생되었겠지?


'맙소사. 나 지금 안심하는 거야?'


갑자기 마음이 너무 답답해져서 나는 입술을 꽉 악믈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트로웰의 고백이 늦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 
페르데스의 희생이 가슴이 아픈 건 사실이었지만, 이젠 이 마음이 진짜인지조차 확신 할 수 없었다. 
마치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 순간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툭 건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자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카노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지금 한 생각을 들킨 건가 싶어 허둥거리자, 그는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괜찮아, 엘뤼엔의 아들. 네가 나쁜 게 아니야."

"에? 무, 무슨?"

"넌 지금 '자기방어' 상태야. 사물을 보는 시각이 모두 너를 중심으로 맞춰져 있는 것뿐이지. 
엘뤼엔이 너를 감싸다 다쳤기 때문에, 지금 온통 녀석의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거야. 그래야 그를 향한 죄책감을 덩어낼 수 있거든. 
그런 것 가지고 자책할 필요 없어."

"아···"

"그래도 정도가 심한 건 아니니까 금방 괜찮아 질 거다. 
상태가 심하면'나를 위해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해라!'라고 떠들지도 모르거든. 
뭐, 그건 그것대로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을 것 같다만."

"윽. 제발 참아주세요."


내가 정색을 하며 대답하자 카노스는 뭐가 그리 웃긴 건지 킥킥거리고 배를 움켜쥐기 시작했다. 
내가 개그맨이야? 왜 말만 시켰다 하면 웃는 건데?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카노스의 정신세계는 내 머리론 이해하지 못할 머나먼 차원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아,이러면 안 되는데. 떠날 만 할 때 정이 붙는 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닌데 말이지."

"네?떠나다니요?"

"아니, 그냥 혼잣말.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네가 생각하는 것 같은 불행한 결말은 아닐 테니까."

"??"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나는 어렴풋이 그가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착각이었을까? 정면을 응시하는 카노스의 옆모습이 무척이나 슬퍼보였던 것 같았다.

 


신들이 황성 밖에서 봉인진을 설치하고 있을 그 무렵, 성 내에서는 짙은 어둠에 잠긴 남자가 음산한 목소리를 내뱉으며 앉아있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카류드리안.' 마신을 배신하고 태어난 고향까지 배반하여 악신이 되기를 꿈꾸던, 한때는 마왕으로 불렸던 마족남자였다.


"시간이 되었다."


거칠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불과 이틀 전의 그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서 흘러나오는 기운과 얼굴의 형체도 못 알아 볼 정도였다.

새까맣고 짧던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와 거붉은 빛득 띄었고, 온톤 흙빛으로 변해버린 피부엔 붉은색의 반점이 피부병처럼 
돋아나 있었다. 눈돈자는 동공이 사라져서 새빨간 안광을 뿌렸고, 이마엔 커다란 뿔이, 짙은 갈색의 입술에는 두 개의 거대한 
송곳니가 삐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혐오감이 느껴질 정도로 추악한 외모였지만, 정작 카류안 본인은 그 모습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지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크르르르.' 짐승의 울음을 연상시키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그의 성대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이제 단 한잔의 피를 남겨두고 있는 상태였따. 
그것만 마시면 이제 모두가 두려워서 벌벌 떠는 완벽한 악힌으로 각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자 카류안을 자신의 온 몸이 흥분되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를 지배한다는 것은 짜릿할 정도로 즐거운 일이다. 그는 거침없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큭큭. 크하하하하!"


그때 마침 그가 있던 방 안으로, 재물의 마지막잔을 준비한 대공이 들어섰다. 
그는 성이 떠나갈 정도로 웃음을 터뜨리는 카류안을 보고 뿌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기분이 무척 좋으신 것 같군요."

"아아, 물론이다. 참으로 긴 시간이었지.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로 끝났기에 영 글러먹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그 성과가 눈앞에 다가왔으니 어찌 기분이 좋기 않겠느냐. 이번 일엔 너의 공이 크다. 소원을 말해 보거라. 
그 어떤 것이라도 들어주마."

"후후, 제 소원은 전하를 처음 뵈었을 때 말씀드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크큭, 영원한 생명과 인간들을 지배할 권세 말이냐? 물론 기억하고 있다. 
넌 앞으로 나의 신하로서 남부럽지 않은 권력을 얻게 될 것이다!"

"영광입니다, 나의 주군이시여."

대공은 감격스러운 표정이 되어 카류안의 앞에 엎드려 그의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의례와 형식에 얽매인 기사들조차 잘 취하지 않는 절대적인 복종의 의식이었다.

그것이 매우 만족스러웄는지 카류안은 드물게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충성스러운 신하와 그를 아끼는 위엄 있는 주군의 모습이라고 착각해도 할 말이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끼어들어 그의 행동을 방해하는 무리가 있었다. 
솔트레테의 귀족들로, 황성에 남아 전략을 짜고 있던 대공의 측근들이었다. 
그들은 갑자기 마족의 전사들이 나타나고 드래곤이 끼어들었을 때부터 이 전쟁이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갑자기 성 밖에 붉은 결계가 설치되고, 내부에 기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공에게 따질 
참으로 자신들의 사병을 데리고 찾아온 것이었다.

콰앙!

거칠게 문을 열어젖힌 그들은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기운에 잠시 울찔했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은 온톤 대공에게만 쏠려있느라 미처 그 앞에 있던 악신 카류안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대공 전하! 할 말이 있소이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성 밖에 둘러진 저 붉은 것이 무엇입니까!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마족들부터 시작해서 드래곤의 개입이라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을 해주십시오!"

"그것 뿐 만이 아니오! 지하실에서 다량의 시체와 피를 발견했습니다! 그것도 모두 어린아이들 말입니다! 
대체 우리 모르게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겁니까!"


항간에 대공이 아이들을 잡아다 재물로 쓴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모두 헛소문이라 치부하고 믿지 않았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 증거를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끝 모를 배신감 때문에 전신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래도 설마 싶은 마음에 해명할 기회를 주고자 찾아온 것인데, 대고의 표정은 무척 평온하기만 했다. 
그는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듯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적반하장으로 예고 없이 쳐들어온 그들의 무례를 탓하는 것이 아닌가.


"다들 시끄럽군. 지금 무례를 저지르는  이유가 겨우 그것 때문인가?"

"겨우라니! 죽은 아이들의 시체가 지하실에서 발견되었소! 설마 대공 전하, 그대가 한 일이 아니라 말하실 참이오?"

"물론 내가 한 일이 맞다. 하지만 그래서? 수많은 인간 중에 아이 몇 명이 죽은 것이 뭐가 문제이지? 
인간이 재물로 필요해서 잡아다 죽였을 뿐이야. 그 간단한 것을 왜 깨닫지 못하는 건가. 난 오히려 그대들을 이해 할 수가 없군."

"뭐, 뭐라고!"


눈앞에 있는 자는 악마였다. 인간을 재물로 쓰는 자가 어찌 같은 인간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전혀 죄책감조차 없는 얼굴이라니! 사람들의 얼굴이 퍼렇게 질리자, 대공은 우습다는 듯이 조소하며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새삼 내가 틀렸다고 몰아세울 참인가? 자세한 사정을 몰랐던 어쨌든 간에, 그대들이 나를 도운 건 사실이야.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일이지. 설마 그대들은 그 어린 황제가 정말 반역을 했기 때문에 쫓겨난 것이라 생각했던 건가?"

"그, 그건!"

"아니겠지. 결국 자네들은 스스로의 실익을 위해 죄 없는 아이를 몰아세운 게 아닌가. 그것 뿐이 아니지. 
난 그대들이 선황의 정치에 불만을 품었던 사실을 알고 있네. 확실히 형님은 귀족보단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분이었지. 
그것이 싫어서 늘 투덜거리지 않았는가. 그렇담 그것을 제거한 나에게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닐까."

"무, 무슨 소리요! 서, 설마 당신이 선황폐하를?!"

"하, 하지만 선황폐하는 마신의 신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진실에 사람들은 창백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공은 그 모습을 마치 전시회에 걸려진 그림마냥 흥미로운 눈으로 감상하며 대답했다.


"마신교의 신관인 내가 신탁을 위조하는 것쯤이야 간단한 일이지. 참으로 허무한 죽음이었어. 
안 그런가? 그에 비하면 아들인 이사나는 정말 끈질긴 녀석이야. 아직까지 살아있다니."

"!!"

"허억!"

"이, 이 악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오, 세상에 신이시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신탁을 위조하다니! 설마 이 모든 것이 그가 의도적으로 계획한 일이었단 말인가? 
그때서야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커다란 실책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이제까지 떠받들고 있던 자가 사실은 아무 죄 없는 황제를 몰아낸 진짜 반역자 였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진실을 밝힌 순간에도 대공의 표정은 여유롭기만 했다.


"쿡쿡. 흥분은 그다지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네."

"이익! 닥쳐라! 뭣들 하는 거냐! 어서 저 반역자를 잡아라! 선황을 죽이고 나라를 삼키려한 죄인이다!"

"와아아아!"


명령을 받은 사병들은 무기를 곧추세우며 대공을 향해 곧장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사실이 있었으니, 그 방에 있던 이는 대공 혼자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꽤 시끄러운 날파리로군,."

"!!"


대공을 향해 달려들던 병사들은 곧 귓가에 울리는 음산한 목소리를 듣고 몸을 흠칫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드때는 이미 돌이키기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그 순간 뒤에 있던 병사들은 앞서나각 동료의 머리가 터져나가는 현장을 고스란히 목격하고 말았다.

퍼걱! 촤아아악!


"으, 으아아아악!"


붉은 핏물이 터지고 머리를 잃은 몸뚱이가 바닥에 하나둘 쓰러지자 병사들은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앞에 드러난 것은 차마 인간이라 부를 수도 없을만큼 흉측한 괴물의 형상이었던 
것이다.

남자의 이마에 달린 뿔과 거대한 송곳니를 본 그들은 순식간에 전의를 잃고 미친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괴물이다!! 괴, 괴물이야!!!"

"히익! 사람 살려!"

"후퇴하라! 모두 후퇴해!"

"아아아악!!"


그것은 흡사 지옥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이미 죽어 넘어진 시체들과 바닥을 가득 채운 핏물들. 
그리고 스 속에서 도망치려 허둥대는 사람들 속에서 카류안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하!"


그 뒤부터 이어지는 것은 제대로 된 반항조차 없는 카류안 혼자만의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그는 한 번에 죽일 수 있음에도 일부로 느릿느릿 움직이며 한사람씩 잡아 죽이고 있었다. 
죽이는 행위보다, 자신에게 공포를 느끼고 벌벌 떠는 사람들의 모습을 더욱 즐기는 듯이 보였다.

우드득!


"크아아악!"


도망치는 벌레를 쫓듯 하나둘씩 잡아 목을 부러뜨리던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살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손안에서 처참히 
찢겨져 최후를 마감했다.

그 모습을 본 대공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것은 카류안의 행동을 나무라서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겁 없이 달려든 귀족들에게 힐난의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래봤자 이미 시체가 된 그들이 그것을 느낄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미련한 것들. 나를 따랐다면 지금 보다 더 큰 부귀와 영화가 주어졌을 것을···"

"크크큭. 답지 않게 동정하는 것이냐? 어차피 너완 뜻이 맞지 않는 자들이었다. 
이런 심약한 놈들은 부하로 둬봤자 앞의로의 일에 방해만 될 터."

"후후, 그저 의례상 해본 말이었습니다. 지금은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분위기이지 않습니까?"

"흥! 네놈도 농담이 많이 늘었구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예의바른 어조로 답한 그는 곧 품안에서 붉은 액체가 든 작은 병을 꺼냈다. 
악신으로 각성하기 위한 마지막 잔이 담긴 병인 것이다! 
아무 망설임 없이 그것을 카류안에게 건네준 대공은 곧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이제 온 세상을 지배하실 시간입니다, 주군."

"크하하하! 이제 마지막 잔인가!!"


기다려왔던 순각이었기에 카류안은 기쁨이 역력한 얼굴로 얼른 병을 막고 있던 입구를 열었다. 
꿀꺽, 목을 타고 넘어가는 액체의 향은 그 어떤 고급 음료보다 더욱 감미로운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완전히 다 마신순간, 카류안은 자신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용솟음 치고 있음을 느꼈다. 
제어하기조차 힘든 그 힘은 그의 전신을 타고 돌며 상상도 하지 못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곧 그의 입에선 저절로 끔찍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아아악!"

"주군!"


그와 동시에 그의 육체가 공중으로 붕 떠오르며, 온 몸의 근육이 거칠게 꿈틀꿈틀 거리기 시작했다. 
카류안의 몸에서 발산 된 빛은 그들이 있던 방안을 넘어 성 전체에 까지 번져 나갔다.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붉은 결계는 이미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해 산산이 터져 나가버린 후였다.


"오오! 드디어!!"


우르르르르! 강하게 진동하는 땅과 그 속에서 폭발하는 빛의 향연을 느끼며 대공은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이제 막 각성에 돌입한 
주군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쿠쿠쿠쿵!

악신의 몸은 곧 성의 지붕을 뚫고 끝없는 하늘 위로 치솟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성 밖에서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무리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고요한 새벽의 정적이 깨진 것은, 성 안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된 이후였다. 
갑자기 번쩍-하고 밝은 빛이 터지는 듯싶더니, 성을 감싸고 있던 붉은 결계가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던 것이다.


"각성이 시작됐다!"


결계가 사라지고 난 자리엔 하늘 끝까지 올라간 거대한 빛줄기가 마치 감옥처럼 성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게 무언지 궁금해 하기도 전에 나는 숨도 쉬기 힘들만큼 어마어마한 압력을 느끼고 얼굴을 찌푸렸다.

주위에 있던 일행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창백한 것을 보면 모두 나와 같은 것을 느낀 모양이다. 
특히 인간인 알리사와 이사나는 견디기가 힘들었는지 연신 기침을 내뱉으며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윽···이, 이게 뭐야. 수, 숨을 못 쉬겠어."

"쿠, 쿨럭! 쿨럭!!"


그때쯤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잔뜩 긴장하고 있던 참이었다. 
먼저 잠들었던 이사나와 알리사는 물론, 저 멀리에 있던 이프리트 역시 일행에 합류하여 언제 어느 때 시작될지 모를 악신의 각성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겪어본 악신의 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 했다. 
나약한 인간의 육신으론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나는 황급히 옆에 있던 라피스에게 입을 열었다.


"라피스, 실드를 부탁해. 저 두 사람 좀 보호해 줘."

"쳇, 누군 여유가 남아도는 줄 알아? 나도 힘들긴 마찬가지라고."

"그래도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잖아! 잔말 말고 얼른 해!"


연신 투걸거리던 녀석은 내가 험악한 표정으로 소리치고서야 마지못한 듯 두 사람에게 실드를 걸었다. 
그리곤 한결 안정이 된 두 사람을 노려보며 압력이 닿는 범위에서 멀리 떨어질 것을 명령했다.


"너희들은 방해만 되니까 저 멀리 떨어져 있어. 이런 순간에 힘을 분배하는 게 얼마나 자살행위인지 알아?"

"하, 하지만···"

"아, 글쎄 시키는 대로 해! 여기서 개죽음 당하고 싶냐!"


녀석의 기세가 워낙 살기등등하다 보니 이사나와 알리사도 더 이상 아무 말 못하고 말었이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훌륭한 선택이었다. 
그들이 압력 범위에서 벗어난 순간, 몸을 가하던 힘이 전보다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르르릉! 쿠오오오오!!

거대한 기운에 휘말린 공기는 미친 듯이 나부끼며 거대한 돌풍을 만들어 내었고, 땅은 온톤 진동하여 강한 지진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자연의 속성인 4대 정령왕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그렇지 않은 라피스와 시벨리우들은 어김없이 그 폭풍 안에 
휘말려 들어가야 했다.


"크, 크으으윽!"

"윽, 젠장···뭐 이런 놈이···"


그나마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였기에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편이었다. 
성 주위를 둘러 싼 채 봉인진을 외우고 있던 신들은 악신이 발산하는 기운의 직접적인 사정권 안에 들어가 있었기에 피해가 더욱 
컸다.

하지만 넋 놓고 앉아 놈을 욕하고 있을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우리가 거대한 빛줄기에 정신을 팔리고 있을 동안, 누군가가 성의 지붕에 해당하는 부분을 뚫고 하늘 위로 천천히 치솟아 올랐던 
것이다.

쿠웅! 콰지지지직!


"저, 저게 뭐야?"

"아, 악신이다!"


나는 한순간 악신의 모습을 몰라볼 뻔 했다. 고작 하루 사이에 놈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녀석은 그새 사람의 형체를 버리고 완연한 괴물의 형상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머리에 솟은 뿔부터 시작해서 입에 삐죽이 튀어나온 거대한 송곳니까지. 
녀석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위압적인 기운이 아니었더라도, 이미 우리는 녀석의 겉모습에서 충분히 압도당하고 있는 상태였다.

또한  녀석은 일반인의 수 십 배에 해당하는 몸집으로 덩치가 불려져, 멀리에서도 그 모습이 단연 눈에 띄었다. 
거친 짐승의 신음소릴를 연상시키는 소리가 울릴 때마다 살짝 벌려진 입안에서 하얀 서리가 뿜어져 나왔다.


"크르르르···"


이제 막 각성을 끝낸 것인지, 굳게 감겨 있던 놈의 눈이 붉은 안광을 흩뿌리며 떠지려 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 주위를 둥글게 감싸고 있던 20여명의 신들이 바짝 긴장하며 손으로 이상한 형식의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모두 지금이오! 봉인의 진(鎭)을 펼치시오!!"


한 신이 소리치자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신들은 곧 양손에 붉은색의 빛덩이를 띄워 올렸다. 
그것은 정확히 서로의 빛들과 연결되어 악신을 가운데에 두고 순식간에 둥근 테두리를 형성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붉은 빛들은 
마치 꾸물거리는 뱀처럼 악신의 몸을 칭칭 얽매어 가기 시작했다.

파앗! 파지지지직!!


"성공이다!"

"와아아아!"


누군가의 외침에 의해 나는 그들의 시도가 제대로 먹혀들어갔음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성공한 것이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어쨌든 악신은 온 몸에 붉은 쇠사슬을 매달은 꼴이 되어 공중에 꼼짝없이 
떠있는 상태였다.

그 순간 막 정신을 차린 듯, 슬며시 열리고 있던 악신의 눈꺼풀이 완저히 번쩍 떠지는 것이 보였다. 
주위를 노려보는 녀석의 눈동자는 동공이 없이 새빨갛기만 하여, 마치 핏물을 가득 담아놓은 것 같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놈의 주위룰 둘러싼 신들을 발견하곤 눈을 크게 부릅뜨더니, 곧 자신의 몸이 쇠사슬에 감긴 것을 깨달았는지 
으드득 이를 갈았다.


<네놈들이 감히 이런 수작을!!>


그가 내뱉은 말은 청각이 아니라, 머릿속으로 곧바로 뜻이 전달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제압당한 사실이 분한 듯, 놈은 곧 사정없이 포효하며 크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크와아아아아악!!>


출렁 출렁. 악신의 몸이 뒤틀릴 때마다 그와 연결되어있던 쇠사슬이 끊어질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와 함께 지을 유지하고 있던 신들의 안색 역시 점점 창백해져 갔다.


"어, 어떻게 이런 힘이!"

"무서운 힘이다! 봉인진이 이렇게 흔들리다니!"

"큭- 오래 버틸 수 없소! 어서 소멸의 의식을!!"


말하는 기운조차 아깝다는 듯, 다급하게 소리치는 말에 그들의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페르데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의연한 표정이었던 그는 막상 악신을 정면으로 대하니 긴장이 된 것인지 꽉 쥔 두 손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대신 나는 옆에 있던 트로웰의 팔을 꽉 붙들었다. 그러자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그래, 엘? 얼굴이 창백해."

"트, 트로웰. 너 정말 괜찮아? 페르데스를 이대로 보내도 괜찮은 거야?"

"뭐? 새삼스럽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트로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이 힐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분명히 내 마음을 읽었을 것이다. 엘뤼엔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느낀 내 생각을 그가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 주제에 이제와 걱정하는 내가 가증스럽게 느껴질까?
머릿속이 점점 엉망진창으로 변해갔다. 갑자기 나 스스로가 너무나 추해진 기분이었다.


"내, 내가 잘못했어. 미않해. 그러니까 나는···나는···"

"엘? 이런, 감정이 너무 격해져있는 것 같은데. 좀 진정해 봐."

"자기 방어 같은 게 아니야. 그때 엘뤼엔이 날 감싸고 다치지 않았어도 난 지금과 똑같은 생각을 했을 거야. 
미안해,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닌데···그런데···"

"아아, 무슨 소린지 알았어. 엘, 나나 페르데스나 전혀 아무렇지 않아. 왜 그렇게 미안해하는 거야?"

"하지만···"

"에구. 어쩔 수 없지. 내가 재미있는 거 하나 가르쳐 줄까?"

"??"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리자, 트로웰은 빙긋 웃음 지으며 지금 한창 봉인진과 씨름을 벌이고 있는 신들 중 한 사람을 
가리켜 보였다.


"저 녀석은 지금 '어서 소멸하지 않고 뭐하는 거야? 힘들어 죽겠는데.'라고 생각하고 있어."

"어?"

"그리고 옆의 녀석은 '내가 소명하는 게 아니라 다행이야.'라고 중얼거리고 있고. 
그 옆의 녀석은 소멸을 자처한 페르데스를 오히려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지. 
보통 때는 신의 생각이 잘 읽히지 않는데, 지금은 다들 감정이 격해진 탓인지 굳이 혜안을 열지 않아도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 
하지만 그 중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자책하거나 미안해하는 신은 단 하나도 없어."

"!!"

"알았어,엘? 누구나 다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게 당연한 거야. 그건 너라고 해도 마찬가지고. 
난 오히려 엘이 그렇게 생각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페르데스를 말렸다면 서로 입장이 난처했을 테니까"

"트로웰···"

"날 걱정하는 거라면, 아까도 말했지만 괜찮아. 기다리는 것은 상관없는 데다, 질리지 않을 자신도 있거든. 
그리고 페르데스는 정말로 인간이 되고 싶어 했었어. 그건 그의 미네르바시절을 더 많이 지켜본 내가 잘 알아. 
우스운 건 내 고백을 들을 이후로도 그 생각이 변함이 없다는 거야. 뭐, 어차피 나도 그럴 거라 생각해서 기대도 안했지만."

"아···"


트로웰은 멍해진 내 표정을 보며 다시금 생긋 미소 지어 보였다.


"아무튼 엘이 나와 동료들을 끔찍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은 잘 알았어. 네가 이런 성격이라서 다행이야, 엘. 
'그때'의 나를 구원해 준 거···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응? '그때'라니?"

"후훗. 아직은 비밀. 실은 나도 완전히 기억하는 건 아니야. 그냥 다른 사람의 단편적인 기억을 통해 유추한 것뿐이니까. 
아, 그리고, 성격의 변화에 대해선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이미 본래의 성격과 적당히 조화가 돼 벟린 것 같으니."

"그, 그런가···?"


조화가 되었다곤 해도, 원래부터 뭐가 문제인지 자각을 못했으니 내가 그런 사실을 느낄 리가 없었다. 
왠지 화제를 돌리기 위한 말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지만, 나는 굳이 따지지 않고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은 내 자신에게 면죄부가 내려진 사실만 위안이 되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악신을 소멸시키는 섯만 생각하자. 슬퍼하거나, 미안해하는 건 그 다음의 일이야."

"으응."


그러고 보면 나도 꽤 약은 성격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트로웰에게 매달린 것부터가 그가 내게 화내지 않을거란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윽. 정말 한심해. 내가 이런 놈이었다니.'


내가 속으로 자책하며 반성하고 있는 사이, 페르데스는 몸부림치는 악신의 가까이에 다가가며 무언가를 열심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소멸의 주문을 외우는 것이리라.

그러자 처음엔 아무생각 없어보였던 악신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방금 전보다 더욱 몸을 크게 요동하며 소리쳤다.


<크아아악! 이놈들! 대체 무슨 꿍꿍이냐!!>


"큭-!! 시간이 없어! 어서!!"

"크윽!"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봉인진의 힘은 점점 줄어들어, 결박이 약해지는 것이 눈에 뜨일 정도였다. 
처음 선명한 붉은 빛을 띄우던 사슬은 점점 투명해져서 악신이 몸부림치면 칠수록 아슬아슬하게 풀릴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마침 그때 페르데스도 거의 소멸의 주문을 완성해 가는 중이었기에, 우리는 조마조마한 눈으로 두 존재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문제가 있었으니···


"···아, 안 돼! 이제 더, 더 이상은!!"


파악! 챙그랑!!


"헉!!"


"아, 안 돼!!"


우리들은 혼비백산한 얼굴로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악신의 힘을 결딜 수 없었던 신중의 한명이, 결국 봉인진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어느 한쪽의 균형이 깨지자 나머지 다른 신들의 손에 있던 사슬의 부분도 순식간에 와해되어 공중으로 흩어졌고, 
곧 자유로워진 악신의 몸에서 폭발적인 사악한 기운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미처 그 힘에 대비하지 못한 탓에, 우리는 20명이나 되는 신들이 손도 한번 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저 멀리 나가떨어지는 
현장을 지켜보았다. 소멸을 위해 악신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페르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콰아아아앙!!


"아아아아악!"

"커헉!!"

"페르데스!!"


그 순간 지상으로 낙하하는 페르데스를 트로웰이 얼른 달려가 받아 안았다. 
폭발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있던 탓인지, 의식을 잃어버린 그는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트로웰은 다급한 표정으로 그의 
뺨을 툭툭 치며 깨우기 위해 노력했다.


"페르데스! 정신 차려봐, 페르데스!!"

"으응···"


그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오자 트로웰은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반대로 다른 편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아 결코 평안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봉인진이 깨졌다!!"

"아아아, 이제 끝났어! 완전히 끝나버렸다고!"

"오오, 주신이여···"


진(鎭)이 와해되자 신들은 하나같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절망하기에 바빴다. 
각성한 직후의 틈을 놓쳤으니 이제 어떠한 방법도 통하지 않을 터! 
그들은 완전히 희망을 잃어버린 얼굴로 연달라 한탄을 내뱉고 있었다. 악신은 그런 신들의 모습을 통렬하게 비웃었다.


<크하하하! 쓸데없는 발악을 하였구나! 무슨 꿍꿍이었는지 몰라도 감히 내게 반항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쿠쿵! 콰아아앙!


"으윽···"


악신의 몸을 타고 거대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하자, 곧 주위에 무수한 번개와 먹구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맑았던 날씨는 흔적도 사라지고, 하늘과 땅은 점점 칠흙같은 어둠으로 물들어갔다.

전신이 오싹 할 정도로 위압적인 기운에, 나는 저절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이미 의욕을 잃어버린 신들은 하나같이 자포자기한 얼굴을 보아, 이제 겸허히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듯 했다.

악신의 몸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투둑. 투두두둑!


<쿠오오오오오오!!!>

"헉···저, 저게 무슨?"


그것은 마치 놈의 등에서 피 분수가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놀란 표정으로 자세히 바라본 나는, 그것이 곧 새빨간 가죽으로 된 날개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도 저것이 악신의 마지막 완성 단계인 듯,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날개를 꺼내기 시작하는 악신의 모습은 무척이나 끔찍하고 
혐오스러웠다. 그때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던 내게,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카노스가 급히 다가오더니 뜻밖의 말을 건네 왔다.


"엘, 녀석을 막을 수 있겠어?"

"네? 막다니요?"


신들도 하지 못한 일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내게 카노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놈이 날개를 다 꺼내면 완전히 끝이야. 아주 잠깐만 녀석을 방해해줘. 지금이라면 봉인진을 다시 설치할 수 있어! 
그게 아니라도 놈을 붙잡은 사이에 소명의 의식을 진행시키면 될 거야."

"그, 그게 정말인가요? 하지만···"

"5분이면 된다. 그 시간만 버티면 돼. 놈의 각성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어. 
이곳에서 움직이는 것은 아직까진 너희 정령왕들에게 더 유리하단 소리다.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알겠어요, 해볼게요."

"부탁한다."


내가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카노스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띄우며 어깨를 다독였다.
그를 알게 된 건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제야 겨우 그가 진심으로 웃는 모습을 보게 된 것 같았다.

 


카노스가 다른 신들을 독려하러 간 사이, 나는 나대로 정령왕들을 모아놓고(그래봤자 나를 합쳐 달랑 4명 뿐이지만.) 방금 전에 
그에게 들었던 말을 전해주었다. 그러자 이프리트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에? 우리보고 공격을 하라고? 저거 아무리 때려도 꿈쩍도 안할 것 같은데?"

"5분만 막으면 된대. 어떻게든 날개를 꺼내지만 못하게 하면 될 것 같은데."

"'5분만'이 아니야. 저거 한방만 잘 못 맞아도 우리는 고스란히 역소환 될 거라고. 자칫하면 그 자리에서 소명 될 지도 몰라. 
봉인진을 다시 펼칠 때까지 막는다는 게 가능할까?"

"일단 해봐야지. 어차피 이래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잖아."

"그야 그렇지만···"


잠시 난감한 얼굴로 악신을 바라보던 이프리트는 결국  다른 선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불의 정령왕들만 쥘 수 있는 
'불의 검' 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본 미네는 고개를 쓰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담 엘과 이프리트가 먼저 선공을 해주십시오. 나와 트로웰은 방어속성이기 때문에 공격을 해도 큰 타격을 입히지 못할 겁니다."

"응, 알았어. 그럼 내가 제일 먼저 공격을 시작할 테니까 이프리트 네가 적당한 타이밍에 끼어들어 와줘."

"엘, 네가?"

"응. 엘퀴네스는 방어와 공격 모두가 무난하다며. 그럼 적당히 치고 빠지기도 쉬울 거 아니야. 
미네는 이프리트의 보호에 힘써주고, 트로웰은 가능한 악신의 움직임을 봉쇄해줘."

"알겠습니다."

"응, 알았어."


결정을 내린 즉시 나는 얼름 창을 꺼내 쥔 다름 전속력으로 악신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쐐애애액!


"크으윽!"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의식을 잃을 것 같이 저릿저릿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이를 악다문 끝에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다행히 녀석은 날개를 꺼내는 것에만 신경이 미쳐, 
내가 가까이 다가온 것도 깨닫지 못한 듯 보였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놈의 뒤편으로 돌아가, 들고 있던 얼음 창을 이제 막 날개 죽지가 돋아나기 시작한 녀석의 등 뒤로 깊숙이 
찔러 넣었다.

푸욱! 콰지지직!


<크아아아아악!!!>


갑작스런 공격에 놀랐는지, 녀석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마구 뒤틀었다. 
그러자 곧 자신의 몸에 박힌 차가운 얼음의 결정체를 발견했는지, 붉은 눈동자에 살기를 띄우며 노성을 내뱉었다.


<정령왕 엘퀴네스!! 또 네놈이냐!!!>


"하하~오랜만이지? 그새 인상이 많이 바뀌었네?"


나는 일부로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손안에 또 다른 얼음창을 만들어냈다. 
실은 몸이 너무 후들거려서 마음 같아선 이런 장소 근처에도 오고 싶진 않았지만, 카노스의 '5분만'이라는 말을 위안삼아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 속을 알길 없는 악신은 당장이라도 찢어죽일 듯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길게 자란 손톱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카캉! 얼음창으로 가로막은 손톱 뒤로 악신의 흉측한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안 그래도 네놈은 꼭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이 자리에서 처참이 찢어주마!!>


"큭-!"


생각보다 놈의 힘이 무시무시해서 예전처럼 자연 상태로 돌아가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곧 생각을 고쳤다.
이미 각성중인 녀석이라면 내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도 알아볼 것이 틀림없었고, 놈의 공격 또한 내게 먹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내 뒤를 이어 이프리트가 악신을 향해 불의 검을 내질렀다.


"하압! 엘한테서 떨어졋!!"

촤아아아악!

<크윽! 이건 또 무슨!!>


불의 공격은 정확하게 악신의 몸을 집어 삼켰지만, 놈은 약간의 그을림 말고는 전혀 타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화가 난 그는 나에게 들이밀던 두 개의 손 중에서 하나를 휘저어 이프리트를 향해 무형의 기운을 날렸다.

하지만 그것은 다행히도 미네가 불러낸 거대한 폭풍에 휘말려 그에게 닿기도 전에 저만치 밀려 나갔다.

콰지지직!! 콰아아아앙!


"미네, 나이스!"

"괜찮으십니까, 이프리트?"

"응! 아슬아슬 했어. 앗, 엘! 조심해!"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린 나는 악신의 팔을 막고 있던 얼음창을 순식간에 물로 변모 시킨 뒤, 녀석이 가댈 곳을 잃어 허공을 가르는 
사이 잽싸게 놈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그러자 약이 올랐는지 안 그래도 붉으죽죽한 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정령왕들!! 네놈들이 감히!!>


그러는 사이에도 악신의 등에서는 조금씩 꾸준하게 날개가 돋아나고 있었다. 혹시 저 날개가 약적이 되지는 않을까? 
나는 시험 삼아 공격해보기로 작정하고 압축된 물 덩어리 여러 개를 날개 죽지가 돋아난 놈의 어깨를 향해 사정없이 퍼부었다.

슈우욱! 퍼어어엉!


<크아아아악!>


다행히 어느 정도 짐작이 맞았는지, 놈은 공격한 내가 무안해질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다. 
하지만 그건 또 한편으론 건드려서는 안 될 영역이기도 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악신이 내게 미친 듯이 달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노오오옴!!!!>

"크윽!!"

"앨!!"


놈이 뿜어내는 살기만으로 나는 충분히 온 몸이 저리는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놈은 두 송으로 내 목을 잡고 빠르게 지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처 손 쓸 사이도 없이 벌어진 일이라 나는 그대로 놈에게 이끌려 땅의 저 밑바닥 아래까지 쳐박히고 말았다.

콰아아앙!


"커헉! 쿨럭!"

"엘!!"


그러자 트로웰이 나를 보호하기 위해 급히 대지를 부드러운 성질로 바꾸었지만, 나는 땅에 부딪히자마자 어김없이 붉은 피를 
토해내고 말았다. 내려쳐진 속도에 의해 내 목을 움켜쥔 악신의 손톱이 점점 피부를 꿰뚫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떨쳐내려 했으나, 놈의 힘은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숨 막힐 것 같은 압박감을 비롯한,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의 여운으로 나는 쉽사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크큭! 이 곱상한 얼굴로 감히 나를 농락했겠다! 이대로 죽여주마! 내 다시는 엘퀴네스 따위가 내게 대항하지 못하도록 말들어주지!>

"큭···웃기지···맛!!"


버둥거리면 거릴수록 목에 가해지는 압력은 더욱 강해졌다. 
나는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짜내며 소리친 후, 자유로운 두 팔을 이용해 얼음창으로 삐죽이 솟아나온 놈의 날개를 꿰뚫었다.

콰직!

<크아아악!>


그 순간 땅이 크게 진동하며 내 양 편으로 두 개의 거대한 흙더미가 일어섰다. 
그것은 곧 내 목을 조르고 있는 악신의 두 팔을 휘감아 돌더니, 정신없이 괴로워하는 놈의 몸을 주욱 뒤편으로 잡아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 사이 간신히 자유를 되찾은 나를, 미네가 다가와서 재빠르게 부축하곤 하늘 위로 올라갔다.


"큭! 쿨럭, 쿨럭!!"

"엘! 괜찮으십니까? 목에 상처가···"

"윽, 괘, 괜찮아. 미네. 조금 아플 뿐이야."

"바보야! 넋 놓고 있으니까 당하지! 진짜 그 자리에서 역소환이 안된 게 용하다! 뭘 하고 있어? 얼른 치료하지 않구!"


현재 내 목엔 드라큐라에게 당한 마냥 보기 흉한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치유굴을 쓰려던 나는 곧 묘한 감각을 느끼고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자 늦장을 부린다고 생각했는지, 옆에서 재촉하던 이프리트의 성화가 더욱 짙어졌다.


"뭐하냐니까!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당장 치료 안 해?"

"윽, 좀 가만 있어봐, 이프리트.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야."

"엥?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립니까, 엘? 상처 치료를 못하신다고요?"


그 말에 나를 부축하고 있던 미네와 이프리트는 눈이 동그랗게 뜨며 당황했다.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아까부터 치유수을 쓰고 있는데 전혀 먹히지 않아. 손톱에 독이라도 있었던 건지 뭔지···"

"아무리 그래도 엘퀴네스의 회복력이라면 그 어떤 독이라도 해독이 된다고!"

"하지만 지금은 안 되는 걸."

"뭐, 뭐야. 그럼 이대로 계속 못 고치는 거야?"

"음···정령계에서라면 좀 나을지도.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정령계로 돌아갈 수도 없고. 
어차피 좀 아픈 것 빼고는 괜찮으니까 그냥 이대로 있지 뭐. 명색의 물의 정령왕인데 설마 출혈과다로 죽지는 않겠지."


흐르는 피를 닦으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하자 이프리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랄까? 
그리곤 뜬금없이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넌 누구야! 엘의 탈을 쓴 가짜지?!"

"하아? 무슨 소리야?"

"왠지 묘하게 터프해졌잖아! 울먹이는 것도 아니고, 곤란해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덤덤하게 '괜찮겠지'라니!! 
원래라면 지금쯤 이러다 죽는 거 아니냐고 무서워해야 정상인거 아니야? 넌 바로 그런 역학이었잖아, 만인의 재롱둥이!"

"······네가 평소에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잘 았았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트로웰과 혈전을 벌이고 있는 악신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누가 따의 정령와 아니랄까봐 요리조리 대지를 이용해 놈의 움직임을 봉괘하는 모습이, 내가 보기에도 그는 무척이나 멋지게 잘 
싸워나가고 있었다.

가능하면 나도 저러고 싶었는데, 꼴사납게 붙잡혀서 목에 구멍까지 뚫리다니. 진정으로 스스로의 한심함을 금할 길이 없다.


"어이, 엘! 그렇게 간단하게 넘길 문제가 아니야! 너 진짜 이상하게 변했다니까?"

"알았어. 알았으니까 지금은 저놈을 붙잡을 생각만 하자고. 아참, 지금 봐서 알겠지만, 어찌 된 건지 몰라도 놈한테서 당한 상처엔 
내 치유술이 전혀 안 먹히거든? 그러니까 가능한 다치지 말고 조심해. 
지금 한 말 무시하고 까불다가 나중에 피투성이 돼도 난 모른다."

"역시 변했어!!"


경악하는 이프리트를 살포시 무시하며 나는 다시금 두 손에 다량의 얼음 화살을 띄워 올렸다. 
그리고 이제 거의 반쯤 튀어나온 악신의 날개를 향해 그것을 사정없이 쏘아 보냈다.

마침 트로웰에 의해 진흙 속에 발이 박혀 버둥거리고 있던 녀석은,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맞을 밖에 없었다. 

콰아아앙!


<큭-! 이놈!!>

'쳇. 데미지가 약했나. 너무 멀쩡하잖아.'


그러나 나는 투덜거릴 사이도 없이 또다시 달려드는 악신을 상대하기 위해 온 전신을 바짝 긴장시켜야 했다.

날개가 나오면 나올수록, 놈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기운도 점점 강해졌고, 또한 고통을 느끼는 감각도 둔해지는 것 같았다.
아마 등에서 날개가 완전히 펼쳐지면, 우리의 공격 따위엔 간지럼조차 느끼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봉인진은 아직 먼 건가? 5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지긴 처음인데.'


나는 초조한 표정으로 흘끗 카노스와 신들의 정황을 살펴보았다. 그때까지도 그들은 뭔가 서로 의견이 안 맞는 건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생긴 건지 좀처럼 다시 진을 펼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페르데스 역시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어쩌면 5분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시간이라도 버텨야 할지도 몰랐다.

저러다 우리를 다 죽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셈인가? 
순각 화가 치밀어 뭔가 한마디 쏘아주고 싶었지만, 워낙 달려드는 악신의 기세가 험하다 보니 더 이상 그쪽에는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크크크크! 죽어랏!!!>


콰직! 콰아아아~! 퍼어엉!

그 사이 놈은 공격의 패턴을 바꿔, 몸으로 직접 부딪치기 보단 시커먼 번개를 일으켜 사방으로 날려 보내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그것을 피하랴, 다른 일행들을 보호하랴, 그야말로 정신없이 움직이며 놈의 시선을 교란시키는 것에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놈의 공격에 나의 방어가 전혀 먹히지 않는 다는 사실이었다. 
악신이 임의적으로 만든 번개여서인지 몰라도, 그것은 보통의 전기와는 그 성질이 완전히 달랐다. 
물속에 '속한' 생물체에 타격을 입히는 것이 보통의 전기라면, 놈이 던지는 번개는 물 그 자체에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때문에 나는 그것을 막으면 막으려 할수록 고스란리 상처를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악신이 나를 의도적으로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피하기조차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콰앙! 콰지지지직!!


"크흑!!"

"엘!!"


이번에도 놈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은 나는, 그 힘에 주욱 밀려나면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나무기둥에 강제로 부딪히고 말았다. 
아까 전 악신에게 목이 졸렸던 충격도 채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연타로 강한 타격이 이어지자, 한순간 시야가 흐릿해지며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아, 안 돼, 어서 일어서야···'


이대로 다시 충격이 가해지면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 것이란 본능적인 직감에, 나는 안감힘을 써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각만일 뿐, 실제론 온 몸의 힘이 빠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악신은 바로 그 순간을 노렸다는 듯, 흉측한 미소를 지으며 족히 1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손톱을 꺼내 내게 들이밀었다.


<크하하하! 갈가리 찢어주마!!>

"엘! 피해!!"

'우씨! 피할 수 있었으면 진작 피했지!'


소리친 사람의 다급한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나 역시도 상당히 난처하긴 마찬가지였다. 
꼼짝없이 굳어버린 몸이 도무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곧 저 손톱이 내 몸을 무자비하게 뚫고 들어오겠지. 쐐애액! 바람을 가르고 날아드는 손이 바로 내 지척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박힌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두 눈을 꽉 감고 다가올 고통에 대비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몸에 느껴지는 통증이 없었다. 
설마 너무 아파서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나는 슬며시 눈을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

 

 

내가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이었다. 
허리까지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은 핏빛을 머금은 것처럼 붉어, 나는 한순간 내가 피를 뒤집어 쓴 것이 아닌 가 의심까지 했다.

하지만 곧 그 정체가 무엇인지 꺠달은 나는 곧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내 주변에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존재는 이프리트를 포함하여 단 두 명밖에 없다. 
그 중에서 지금 이프리트는 저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 이것의 주인은 아마도 나머지 한 사람!


"라···피스?···"


그리고 그와 함께 스쳐지나가는, 가장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영상이, 거대한 폭발음과 나를 대신하여 뛰어들었던 누군가의 목소리.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던 엘뤼엔!!


"헉!!"


그 순간 무서울 만큼 전신이 떨려 나는 차마 목소리를 내뱉을 수가 없었다. 설마 이번에도 같은 상황일 리가 없다. 
아무리 나란 녀석이 바보여도 그렇지, 나 하나 때문에 두 사람이나 다치게 만들어선 안 되잖아?

하지만 다시금 그의 등을 보는 순간, 나는 간신히 붙들었던 희망의 조각이 그 자리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새빨갛게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피부를 뚫고 비죽이 솟아나온 다섯 개의 손톱을 발견했던 것이다.


"아······"


그 이후로 이어지는 것은 라피스의 몸에 손톱을 박아 넣은 악신이 천천히 피 묻은 손을 빼내는 장면이었다.
슈우욱. 쿨쩍.
피부와 피부가 액체 속에서 마찰하는 끔찍한 소리가 울리며, 놈은 아쉬운 표정으로 막 뽑혀 나온 자신의 손톱과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크큭. 네놈도 꽤나 운이 좋구나. 벌써 두 번이나 다른 놈 때문에 목숨을 건지다니 말이다.>

"!!"


그 순간 지금까지 느릿하게 돌아가던 세상이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듯 꼼짝도 하지 못했던 나는, 그때서야 아직도 내 앞을 막고 있는 라피스에게 다가가 정신없이 그의 상태를 
살폈다.


"라피스! 라피스, 정신 차려봐! 라피스?"

<큭큭, 지금 그놈을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이번에야 말로 네 차례다!>


악신은 통렬하게 비웃으며 피가 뚝뚝 떨러지고 있는 손톱을 다시 내게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존재가 끼어들어 놈의 행동을 방해했다.

쿠웅!


<큭! 무, 무슨!>

"어이, 형씨. 어린애는 그만 데리고 놀고, 이젠 나랑 한 판 해보지?"


놀랍게도 놈을 막은 자는 얼굴 가득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마신 카노스였다. 
봉인진이 만들어 질 때까지 직접 시간을 벌 요량인지, 그는 지금과 같은 긴박한 상황에서도 특유의 장난끼 어린 표정으로 악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그에게서 풍기는 마계의 기운을 느낀 듯, 악신의 눈빛이 흥미롭게 변하기 시작했다.


<네놈은 걸마···마신 카노스인가?>

"···'네놈?' 호오, 상당히 건방지군. 한 때 너를 창조했던 신에게 그 무슨 말버릇이지? 아무튼 이래서 시건방진 놈들이 싫다니까."

<크아악!!- 감히 내게!!>


그가 내뱉은 말은 악신이 내개서 시선을 돌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화가 난 놈이 막무가내로 달려들기 시작하자, 카노스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머찍이 이동하며 슬쩍 나를 쳐다보았다. 
이틈에 안전한 장소로 도망치라는 뜻이다.

설마 나 때문에 미끼를 자처한 건가? 그의 의도를 깨달은 나는 얼른 고개를 쓰덕이곤, 비틀거리는 라피스를 부축해서 일으키기 
시작했다.


"라피스! 괜찮아? 너 무슨 짓 한 거야! 왜, 왜 끼어들어서···상처는!! 상처는 괜찮아? 일어설 수 있겠어?"

"아아···"


그러자 돌아온 것은 의외로 멀쩡한 그의 목소리였다. 
찌푸린 표정으로 돌아보는 얼굴은 고톤 때문에 일그러지긴 했어도, 의식을 잃을 것처럼 눈빛이 흐릿하지는 않았다.

그것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그는 오히려 어떻게 그런 뻔한 질문을 할 수 있느냐는 듯한 의문을 담고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네가 보이겐···이게 괜찮아 보이냐?"


묘하게 나를 힐책하는 어조의 말에 나는 순간 울컥하는 심정이 되어 소리쳤다.


"멍청한 자식! 그러게 누가 몸으로 막으래? 너 미쳤어? 죽으려고 작정했어? 
끼어들 일이 따로 있지, 왜 이런 상황에 끼어들고 난리야!!"

"뭐야? 네가 꼼짝도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 처음부터 제대로 피하지 못한 게 누군데 이래?"

"윽! 누가 널더러 보호해 달래? 까짓 거 그냥 맞고 정령계로 역소환 되면 그만이지!"

"그 역소환의 충격은 대체 누가 감당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이래저래 내가 고생하는 건 마찬가지잖아!"

"몸을 뚫리는 것보다야 그게 백번 낫지!! 어디 봐봐, 일단 치료는 해야 할 것 아니야!"

"됐어. 이래뵈도 드래곤이라 이 정도 쯤엔 끄덕도 안한다고. 그보다 네 목이나 좀 치료해라. 
시뻘겋게 피는 철철 흘려가지고 그게 뭐냐?"


녀석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나는 도무지 안심할 수가 없어서 만류하는 녀석을 무시하고 치유술을 시전 했다. 
하지만 이것도 악신에게 당한 탓인지 좀처럼 쉽게 아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엘뤼엔과는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천만다행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정말 나 자신이 한심해져서 울컥 눈물이 
치솟았다.
대체 얼마나 더 남을 희생시키고 내 자신의 나약함을 깨달아야 하는 걸까. 
그러자 라피스는 내가 우는 것이 의외라는 듯 얼굴 가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 뭐야. 너 지금 우는 거냐?"

"시끄러! 너 때문이 아니야. 내가 한심해서 그런 거야. 미련하게 벌써 두 번이나···흑, 왜 나를 자꾸 비참하게 만드는 거야!"

"얼씨구? 위험한 순간에 구해줘도 말이 많아요. 아무튼 난 약속 지켰다?"

"···뭐? 약속이라니?"

"이번엔 내 목숨을 걸고 지켜주겠다고 했잖아. 설마 벌써 까먹은 거냐?"


녀석의 말에서 나는 무언가 불길한 기분을 느끼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 설마!!


"너···너 혹시 그 약속 때문에 뛰어든 거야?"

"당연하지. 드래곤은 약속의 종족이거든."

"이익! 차라리 나가 죽엇!!"

"아얏! 내가 뭘 어쨌다고?"


드래곤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생물이라고 한 인간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만날 수만 있다면 난 그의 멱살을 부여잡고 천만번이라도 짤짤짤 흔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자 라피스는 화내는 나를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욱 거리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구해줬으면 고맙다고 해야지, 왜 화를 내는 거야? 쳇, 쳇. 수고한 보람도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그런 수고 따윈 필요 없어! 한번 만 더 그딴 짓 했다간 다신 너 안볼 줄 알아! 계약도 파기야, 파기! 알았어?"

"저건 툭하면 계약 파기래. 알았어, 알았다고! 어이,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해야 하지 않겠냐? 내 덕분에 산건 사실이잖아."


그의 말에 나는 그제 서야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너무 그를 몰아붙이기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유야 어쨌든 라피스가 나를 구해준 것은 사실이고, 그 때문에 몸에 구멍이 뚫리는 큰 부상까지 당하지 않았던가!

아직도 꾸역꾸역 피가 흘러나오는 상처를 보자니 나는 또 참고 있던 눈물이 흘러나오는 걸 느끼고 얼른 주저앉아 다시 치유술을 
시정하기 시작했다. 라피스는 그런 내 모슴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너 또 우는 거냐? 화냈다가, 울었다가···대체 감정의 기폭을 이해할 수가 없군. 
말로는 뻔히 남자라고 우기면서 이럴 때 보면 영낙없는 계집애라니까."

"시끄러. 치료하는 데 말 시키지마. 열 받으면 다른 쪽에도 구멍을 내버리는 수가 있어."

"쳇, 살벌한 녀석. 아, 그리고 고맙다는 말은?"


이쯤 되면 끈질겨도 보통 끈질긴 게 아니다.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퉁명스럽게 쏘아 붙였다.


"아~ 그래, 고맙다, 고마워!! 이 말 한마디 들으려고 이 난리를 피웠냐? 넌 진짜 이해할 수 없는 도마뱀이야. 
드래곤들은 전부 다 이래?"

"글쎄. 적어도 한번 약속을 정한 것은 지키려고 하는 편이지. 뭐. 어쨌든···
네가 날 위해 울고 있는걸 보는것도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닌 걸?"

"착각도 심하군. 누가 널 위해 울어?"

"큭큭. 아니라고 우겨도 상관없어. 그보다···치료도 안 되는 것 같은데 이제 그만 하지? 그냥 생 기운만 빼는 것 같은데."

"······"


라피스의 지적에 할 말을 잃은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손을 거둬들였다. 
그의 말마따나 아까부터 열심히 치유술을 시전 했지만, 전혀 먹히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계속 노력하고 있던 건데, 상처를 입은 본인이 지나치게 태연하니 오히려 치료하려고 분주한 내 자신이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절정! 그리고 결말 - 


"대부! 다치지 않았어? 은인은?"


카노스와 다른 3명의 정령왕들이 악신을 상대하고 있는 틈을 타, 나는 얼른 라피스를 한적한 장소로 옮겼다. 
그러자 내 뒤를 쫓아왔는지, 아스와 다른 일행들이 서둘러 달려왔다.

그들은 목을 비롯해 몸 여기저기에 생채기를 입고 있는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더니,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라피스에 시선이 
이르러서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너희들은 이 녀석이 갑자기 끼어들 때 뭘 한 거야? 말리지 않고."

"그게···너무 빨라서 미처 말릴 틈이 없었어. 은인, 괜찮은 거야?"


아스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라피스는 이번에도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대꾸했다.


"꼬맹이. 네가 보기엔 내가 괜찮아 보이냐?"

"···아니, 무지 아파 보여."

"그럼 알면서 뭘 물어? 지금 나 놀리는 거냐?"

"그런 건 아닌데···얼굴이 너무 멀쩡해 보여서. 그거 진짜 다친 거 맞아? 그냥 다친 척 하는 거 아니지?"

"뭐야?"

"시끄러, 라피스. 걱정해서 하는 말에 일일이 토 달지마. 그러게 누가 끼어들래? 다 자업자득이라고."

"쳇, 엘뤼엔 때는 암말도 안했으면서. 이런 식으로 차별하기냐?"


이 녀석은 꼭 엘뤼엔과 겨루려고 하는 나쁜 습관이 있다. 
한 때 스토커도 불사하면서까지 따라다닐 땐 언제고, 지금은 사사건건 라이벌 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정작 엘뤼엔은 놈에게 아무런 관심도, 취급도 하지 않는데 말이다.
나는 푸욱 한숨을 내쉰 후, 일단 달래고 보자는 심정으로 건성건성 대답했다.


"아버지한테도 나중에 뭐라도 할 거야. 부탁이니까 둘 다 제발 날 어린애 취급 좀 하지 마. 
이런 식으로 대신해서 다쳐줘 봤자 하나도 고맙지 않다고."

"네가 제대로 싸우면 이런 일도 없지."

"아아, 그러셔? 그래, 다 내 잘못이고 내 탓이다. 아무튼 넌 여기서 꼼짝 말고 얌전히 있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누구든 위험한 짓 하면 정말 용서 안 할 거야.알았어?"


내 말에 이사나와 시벨리우스를 비롯한 주위의 일행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중에서 유일하게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아스의 부하이자 마계 공작이기도 한 데르온이었다.

그는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내가 의아한 얼굴로 다가가 말을 걸자, 그제 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화들짝 놀랬다.


"데르온, 내 말 안 들려요?"

"···네, 네? 아··· 무, 무슨 말 하셨습니까, 엘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해요? 혹시 뭐 문제라도 있어요?"


그러자 그는 눈에 띄게 당혹한 표정을 하며 힐끗 라피스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재촉하는 시선으로 보자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저기···라피스님의 상처 말입니다. 치료는 안하시는 겁니까?"

"아, 그게~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예요. 어쩐 일인지 내 치유술이 전혀 안 통하는 상태거든요. 
일단 카노스한테 가서 방법을 의논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마신께 말입니까?"

"네, 아무래도 신이니까 뭔가 대처법을 알고 있지 않겠어요?"

"그거라면 됐어. 못 견딜 정도도 아니고, 이제 지혈도 된 것 같으니까."

"어? 정말?"


갑자기 끼어든 라피스의 말에 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꽤 심하게 피가 흐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거의 말라붙어 더 이상의 출혈은 없는 상태였다. 
그것을 확인 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마조마했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다행이다. 난 이러다 네가 출혈과다로 죽을 줄 알았어. 그런데 이상하네. 어떻게 지혈이 된 거지?"

"드래곤들의 회복력을 무시하지 말라고. 이 정도야 본체로 돌아가면 금방 나아."

"하지만 내 치유술이 안 먹힐 정도였는데···"

"흥. 네 능력에 문제가 생긴 거 아니야? 악신 때문에 자연계의 흐름에 변동이 생겨서 그 영향을 받는다든가."

"그, 그런가?"


묘하게 납득이 가는 말이었기에 나는 찝찝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야 어쨌든 그의 부상이 심하지 않다는 사실이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그 와중에도 데르온의 표정을 여전히 밝아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는 얼굴로 라피스를 바라보던 그는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저기···라피스님,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저는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되는 데요."

"에? 왜요, 데르온? 뭔가 짚이는 일이라도 있어요?"

"네, 엘님. 저기···그러니까···지금 라피스님이 부상을 입으신 부위가 아무래도···"

"부위? 배 말이에요?"


그러자 지금까지 묵묵히 듣고 있던 라피스의 인상이 확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더니 당장 죽일 듯한 시선으로 데르온을 노려보며 낮게 협박하는 것이 아닌가?


"쓸데없는 말 하면 죽인다."

"쓰, 쓸데없다니요, 라피스님! 아무래도 그건 드래곤들에게···"

"닥쳐! 정말 말이 많은 녀석이군. 넌 네 주군인지 대장인지 하는 꼬맹이만 챙기면 되는 거야. 그 이상의 참견은 이쪽에서 사양이다. 
어디 죽고 싶으면 거기서 한마디라도 더 해보시지?"

"윽···죄, 죄송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라피스와의 대결에서 크게 혼쭐이 난 경험이 있던 데르온으로선, 그의 협박을 무시할 배짱이 있을 리 없었다. 
아무래도 그냥 넘길 일이 아닌 것 같아, 나는 굳은 표정으로 라피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말이야, 라피스? 드래곤이 어쨌다고?"

"그냥 헛소리야. 별 거 아니니까 넌 신경 끄고 네 동료들이나 도와."

"별 거 아닌데 왜 데르온을 협박해? 내가 모르는 중요한 일인 거 맞지? 혹시 다친 곳과 관계있는 거야?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하다든가···"

"거참, 답답하네. 지금 멀쩡한 거 보면 몰라? 그러는 너야말로 괜찮은 거냐? 
아까 내가 도와줬다고 해도 거의 역소환 되기 직전 까지 갔었잖아. 한 순간 움직이지도 못했던 것 같은데."

"아니, 나야 뭐···잠깐! 너 지금 말 돌리는 거지? 자꾸 그런 식으로 대답을···"


하지만 나는 그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저 멀리서 나를 부르는 이프리트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엘! 너 거기서 뭐하는 거야! 놀지 말고 당장 빨리 와서 도우지 못해!"


그사이 이프리트는 싸움의 고전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 못지않게 심한 상처를 입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중간에 미네가 방어를 하는데도 저 정도였으니, 새삼 악신의 힘이 얼마나 강대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쳇, 할 수 없지. 너, 지금은 급하니까 그냥 넘어가는 줄 알아! 돌아와서 다시 얘기하자고. 알았어?"

"그러던지."


피식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이는 라피스를 잠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쏘아본 나는, 곧 카노스와 악신이 겨루고 있는 현장으로 달려
나갔다. 떠나는 순간 불안해 보였던 데르온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다시 싸움에 가담하자 나머지 정령왕들도 한숨을 돌린 듯, 움직임이 눈에 띄게 안정이 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얼떨결에 합류한 카노스 역시 단단히 한 몫을 하고 있었기에, 악신과의 전투는 여유롭지는 못해도 대충 '해볼 만한' 
전개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요령 좋게 악신을 이프리트에게 떠넘긴(정령왕들의 상처가 늘어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카노스가 내게 다가오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이, 엘뤼엔의 아들! 몸은 괜찮아?"

"네, 견딜 만해요. 그런데 봉인진은 아직 멀었나요?"

"움직임이 고정되어 있어야 진을 펼치기 수월한데, 보시다시피 놈이 한 자리에 가만히 있어야 말이지. 
자칫 진을 펼치다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어서 신중을 가하는 중이야."

"하지만 이런 식으론 결국 다 죽을 것 같은데요."


내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하자 카노스 역시 동감이라는 듯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악신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는 어느덧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아! 혹시 말이야. 아까 그 번개 공격을 역이용 할 순 없을까?"

"에? 그 검은 번개 말이에요?"

"그래. 좀 전에 너희들 싸우는 걸 보고 몇 가지 분석을 해봤는데 말이야. 
다른 세 정령왕의 경우는 번개를 맞아도, 전류가 통과해서 그대로 지나가더군. 
그런데 유달리 너만은 그걸 흘려버리지 못하고 고스란히 감당하더란 말야야?"

"제가 아직 방어하는 요령이 부족해서 그런가 보죠."


내 시무룩한 대답을 들은 카노스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마도 그 번개는 물속에서 뭉치는 성질이 있는 것 같아. 
그래서 네가 억지로 튕겨내기 전까진 일시적으로 그 안에 갇히게 되는 거지. 바로 그 점을 이용하면 될 것 같은데."

"어떤 식으로요?"

"놈이 번개를 내리치면 너도 물줄기를 쏘아서 그걸 묶은 다음 되돌려 보낸다거나, 아니면 시큐엘이나 운디네의 몸에 가둬서···"

"웬만한 물로는 부딪치는 즉시 증발되던데요? 그리고 제가 직접 맞아봐서 알지만, 그건 하위 정령들로는 견디기 힘든 위력이에요. 
번개를 가두기는 커녕, 맞자마자 곧바로 역소환 될 확률이 훨씬 높아요."


내가 차분히 반박하는 말을 꺼내가 그는 곧바로 입을 다물더니, 죄책감이 깃든 얼굴로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가 의도한 바를 깨달은 나는 뜨억한 표정으로 카노스의 옆모습을 노려보았다.


"설마 날더러 번개 끌어안고 놈한테 뛰어 들라는 소리는 아니겠죠?"


왜 아니겠는가! 바로 부정하지 않는 것만 봐도 내 말이 맞았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했다 싶었는지, 그는 찔끔한 표정을 하며 어색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냐하하~ 원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번개에는 번개라잖아."

"웃으면서 시선 피하지 마요. 그게 얼마나 아픈지 알기나 해요? 그리고 설마 자기가 만든 번개에 맞는다고 꿈쩍 할 리가···"

"아,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원래 저런 놈들일 수록 스스로의 능력에 자폭하는 경향이 강하거든.
게다가 물에선 전류가 더 잘 통하니까 타격도 몇 배로 입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서 결국 하라는 거군요."

"하하하하하하! 원래 세상은 그런 거야, 소년! 다 같이 죽자는 위대한 희생정신! 정말 멋지지 않아?"


멋지기는 개뿔. 그러다 내가 먼저 죽으면 당신이 책임 질겨?

하지만 지금으로선 찬밥 더운밥을 가리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희망이 있다면 어떤 방법이라도 붙들고 늘어져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결국 나는 카노스를 노려보던 것을 그만두고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일단 해보죠. 이래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까."

"오오! 멋지다, 엘뤼엔의 아들! 그럼 적당히 제압할 수 있을 때까지만 부탁할께~ 
잠깐만 틈을 만들어 두면 나머진 착착 알아서 진행 될 거다."

"이번에도 봉인진이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왠지 단어마다 하트가 들어간 듯한 말을 무시하며 되묻자 카노스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씨익 미소를 지었다. 
뻔히 알면서 뭘 묻느냐는 건가? 쩝, 할 말 없군.


""이번 일은 전적으로 너에게 달렸어. 부담스럽겠지만, 한번 이 세상을 구원할 엄청난 영웅이 돼보라고, 물의 정령왕씨."

"떠넘기는 주제에 말만 그럴싸하게 하지 마요. 이거 전부 다 빚으로 남겨둘 거예요!"

"네네. 하지만 제발 엘뤼엔에게는 이르지 말아줘."

"그거야 앞으로의 태도를 보고 결정해야겠죠!"

"허걱. 너무해에~~"


카노스의  칭얼거리는 목소리를 뒤로하며, 나는 훌쩍 악신과의 거리를 좁혀가기 시작했다. 
그때 녀석은 다른 3명의 정령왕들에게 둘러싸여 치열한 혈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각성이후 감각이 예민해진 것인지 기똥차게 내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곤 잽싸게 검은 번개를 일으켰다.
내가 그 공격에 가장 약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의도적으로 노릴 것이다.


<어디서 감히 술수를!>

파지지직!!


"엘!, 피해!!"


시꺼멓게 타오르는 전류는 놈의 손을 떠나 곧장 내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러자 트로웰을 비롯한 다른 정령왕들이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으나, 나는 꿋꿋하게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러자 곧 비명이 터져 나올 만큼 끔찍한 고통과 함께 온몸이 저릿저릿한 전류로 휘감기기 시작했다.

콰지지직! 파아아아앙!


"큭···!!"

"엘!!"


악신이 만든 검은 번개가 물속에서 뭉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카노스의 말은 옳았다. 
번개에 맞는 순간, 몸 안에 스며든 전류가 통과하지 않고 마치 물에 섞인 기름처럼 따로 뭉쳐져 떠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몸속을 배회하는 전류를 다시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버티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 순간의 고통이 너무 큰 바람에 나도 모르게 거의 본능적으로 전류를 튕겨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크윽. 장난이···아니잖아.이거···"


처음 시도를 허사로 만들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이를 악물고 버티는 나를 보며, 악신은 통쾌하다는 듯이 껄껄 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어떻게 된 거냐, 엘퀴네스! 기고만장하게 굴 때는 언제고, 지금은 아주 다 죽어가는 꼴이라니! 그래, 네놈 정령왕들의 
실력도 여기까지 였구나!>


다행스럽게도 녀석은 내가 감전을 의도적으로 참고 있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그것에 대해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 어느 때 복병이 될지 모르는 상대 앞에서 경각심을 잃어버리다니! 악신이 되었다고 머리까지 좋아지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고 내가 당장 뛰어들어 놈에게 번개를 선사해줄 만큼 상태가 좋았다는 소리는 아니다. 
속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지금 생으로 벼락을 맞고 있는 상황이었고, 악신놈은 날 이렇게 만든 주범이자 가해자였으니, 
여유만만해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큭, 젠장···"


하지만 역시 아파 죽겠는데 누군가의 놀림을 당하는 건 썩 기분 좋지 않은 일이다. 
당장 복수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놈을 향해 띄엄띄엄 한 걸음씩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것을 최후의 발악이라고 생각했는지, 고맙게도 악신 녀석이 직접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살았다···'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상황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듯, 내 앞에 선 놈은 이죽거리는 얼굴로 거만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크크큭. 벌레처럼 벌벌 거리는 꼴이 참으로 보기 좋구나. 네놈만큼은 반드시 잔인하게 죽여주마. 
그 반반한 얼굴이 조금 아깝긴 하지만 말이다. 크하하!>

"윽···웃기지···마···누가 너 따위한테···"

<흥! 그렇게 건방지게 지껄일 수 읶는 것도 지금 뿐일 것이다! 네 녀석은 이제 단 한번에···>


악신은 그렇게 소리치며 내 멱살을 잡아 공중으로 들어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내 몸에서 퍼져나가는 전류에 감전되어 처절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파지지지지직!!


<크아아아아악!!>


카노스의 말처럼 놈이 내게 쏘아 보냈던 검은 번개는 그것을 만든 장본인에게도 고스란히 타격을 입혔다. 
갑작스런 감전에 놀랐는지 악신은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괴성을 질렀고, 나는 그 사이를 틈타 놈의 팔을 뿌리치고 자리를 피했다.

 

"엘! 괜찮아?"

"엘!!"


걱정이 된 동료들이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지만, 나는 한손은 펴서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미처 한숨을 돌릴 여유도 없이, 열 받은 악신이 내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크아아악! 네 이놈!!!>

쿠웅 콰가가가각!


"아악!!"

"안 돼! 엘!!"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놈이 폭파시킨 압력에 밀려, 족히 수 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땅 속에 파묻혀 들어갔다. 
참기 힘든 고통에 의해 내 입에서는 제어하지 못한 신음소리가 흘러나갔다.


"크흑···헉, 허억···"


머릿속이 윙윙 돌고 온 몸의 기운이 마치 역류하는 것처럼 뒤틀려, 나는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내가 억지로 몸을 가누려 애쓰는 동안, 악신은 구덩이의 위쪽에 자리한 채 두 손 가득 시꺼먼 전류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저 상태에서 곧바로 내게 번개를 내리칠 작정이었던 것이다.


<네놈이 감히 얕은 수를 썼겠다!! 어디 네 꾀에 한 번 고스란히 당해 보거라!!>

퍼엉! 파지지직!


악신의 손에서 떠난 번개는 거대한 뱀처럼 꾸불거리며 내게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이번에야말로 단순히 위험한 수준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직감했다.

아마 운이 나쁘면 그 자리에서 소멸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십중팔구 역소환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나는 결코 그런 식으로 정령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내가 역소환 하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그렇게 될 경우 안 그래도 몸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라피스가 그 파장을 견딜 수 없을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간인 이사나에게 그런 위험부담을 떠넘길 수도 없지 않은가?


'젠장, 누가 그렇게 만들 줄 알고?'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든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의 갇혀 있다시피 한 구덩이 안에서 뛰어올랐다. 
그러자 목표를 잃어버린 정류가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나를 노리고 따라오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것을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악신의 
팔을 붙드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했다.

나를 쫓아온 전기덩어리가 내 몸에 작렬하는 순간, 그것이 내 몸을 타고 돌 틈도 없이 곧바로 모아 고스란히 악신에게로 밀어 
넣었던 것이다.

콰지지직! 파지지지지지직!!!

<크, 크아아아아악!!!>

"허억···"

"엘!!"


최대한 빠르게 몰아낸다고 했지만, 역시 나 또한 전류의 영향에서 완전히 무사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도박과도 같은 시도가 성공하여, 악신이 최대한의 피해치를 전부 가져갔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꼼짝없이 그 자리에서 
소멸할 뻔했다.


'이, 이제 된 건가?'


전류의 이동이 완전히 끝난 것이 확인 되자 나는 붙들고 있던 놈의 팔을 놓고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더 이상은 버틸 힘도, 일어설 힘도,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히 이번만큼은 악신 또한 타격이 컸는지, 내가 바로 앞에서 주저앉아 있는데도 부들부들 몸을 떨며 부릅뜬 눈으로 
좀처럼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피부는 온 허물이 벗겨져 묽은 짓물을 잔뜩 머금은 데다, 여기저기 갈라져 고름 섞이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크으으···어, 어떻게 이런 일이···>


쥐죽은 듯한 침묵의 시간이 흐른 후, 악신은 놀라울 정도로 추하게 변해버린 자신의 육체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로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악신의 시뻘건 눈동자에 커다란 분노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정령왕 엘퀴네스!!! 이게 다 네놈! 네놈 때문에-!! 네놈이 감히!!!>


다시 말하지만 그때의 나는 온 몸, 심지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있었다. 
만약 악신이 그자리에서 손톱을 들이밀었다면 피하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맞아 큰 부상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곳에나 기적이 존재한다고 하던가?

그때 마침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붉은 쇠사슬이 악신의 몸을 칭칭 휘감으며 그의 몸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다가올 그의 공격을 대비해 눈을 감으려던 나는, 갑작스레 악신의 행동을 구속하는 기운을 느끼고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신들이 다시 펼친 봉인진이 드디어 성공했던 것이다!


"붙잡았어! 성공했다!!"

"지금이라면 아직 소명 시킬 수 있어!"

"와아아아아!"

<크아악! 이놈! 이놈들!!!>


자신의 몸이 묶인 것을 깨닫자 악신은 있는 힘껏 몸부림을 쳤지만, 이번엔 진을 설치한 신들 또한 녹록치 않았다. 
그들은 처음보단 훨씬 여유로운 자세로 버티며 그 앞에서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향해 하나 둘씩 있을 열었다.


"정령왕 엘퀴네스! 수고하셨소! 여긴 위험하니 이제 그만 뒤로 물러서시오!"

"당신 덕분에 이런 기회를 다시 맞을 수 있었소! 신계를 대표하여 감가 인사를 드리오."

"여어~ 수고 많았어, 엘뤼엔의 아들. 해낼 줄 알았다니까!"


신들과 함께 봉인진을 유지하고 있던 카노스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르는 날 향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몸은 괜찮은 거야? 일어날 수 있겠어?"

"아···그게···"

"엘! 괜찮아?"


내가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추스르며 말을 더듬거리자 트로웰이 황급히 다가와 부축했다. 
그의 눈은 찔끔한 듯 시선을 피하는 카노스를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카노스, 네가 엘에게 이런 일을 시켰나?"

"아아, 미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방금 일은 엘퀴네스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었어."

"핑계 대지마! 신 주제에 정령왕보다 능력치가 낮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 몸으로 직접 해도 상관없었을 텐데?! 
굳이 엘에게 시킨 이유가 뭐야!"

"이런, 이런. 흥분하지 말고, 내 얘기 좀 들어봐. 물론 신들이 정령왕보다 능력치가 높은 건 사실이지. 
하지만 중간계에 내려오면 힘의 사용에 제한을 받는 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지금의 우리는 봉인진을 유지할 여력밖에 남지 않았어. 
게다가 이곳 아크아돈에서는 신보단 정령왕쪽이 오히려 대기를 움직이거나 적을 공격하기에 더 유리하다고. 너도 알고 있잖아?"

"하지만 엘이 소멸할 뻔 했어!"

"그가 악신을 막지 않았다면 여기 있는 모두가 소멸했을 거다. 
트로웰, 네가 엘을 형제처럼 생각하는 건 잘 알지만, 그는 보호받기만 하는 어린애가 아니야. 
게다가 나 역시 그가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면 부탁하지도 않았을 거고."


카노스의 차분한 반박에 더 이상 따질 수 없었는지 트로웰은 평소에 좀처럼 볼 수 없던 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고작 번개를 맞고 그걸 고스란히 악신에게 돌려주는 것뿐이었는데, 이렇게 과한 반응을 보이니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럴 때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들의 다툼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사슬에 묶인 악신의 몸부림이 더욱 강해져서 진의 유지가 점점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크아아아아악!!>


"크윽! 시간이 없소! 우리가 버틴다 해도, 놈이 날개를 완전히 다 꺼내면 전부 끝이오!! 어서 소명의 의식을!!"

"페르데스! 페르데스는 뭘 하고 있는 건가!!"


다급한 신들의 외침에 저 멀리서 이제 막 정신을 차렸던 페르데스가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모두가 바짝 긴장한 가운데, 담담한 표정을 한 페르데스의 소멸의 주문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주신께 창조 받은 자, 그 성결한 영혼의 삶을 버리며, 나 지금 이 땅에서 새로운 삷을 부여하고자 하오니···"

<소명의 주문? 큭! 대체 무슨 꿍꿍이를!!>


그때서야 신들이 자신을 묶은 이유를 깨달았는지, 악신은 경악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페르데스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터져 나오는 진득한 살기를 느낀 듯, 악신과 눈이 마주친 페르데스는 주문을 외우는 중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래서였을까? 페르데스의 움직임이 어쩐지 점점 경직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트로웰. 페르데스가···"

"응? 어라···왜 저러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소멸의 주문을 외우고 있던 페르데스는 어느새 걸음을 멈추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왠지 탁하게 변해버린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멍한 빛을 띄웠다.
신들을 비롯하여 주위에 있던 동료들은 그의 행동이 갑자기 멈추자 당혹한 표정으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페르데스? 페르데스, 지금 뭘 하는 건가!!"

"꾸물거릴 시간이 없어! 놈의 각성이···"

"페르데스!!"


신들의 다급한 외침에도 페르데스는 마치 돌덩이처럼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본 신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가 지금 정신을 차린다 해도, 이미 악신의 등에 솟아나던 날개응 거의 다 펼쳐진 상태였고, 중도에 끊겨버린 소멸의 주문은 
처음부터 다시 외워야 할 판국이었던 것이다.
이 여러모로 진퇴양난인 상황 속에서 악신은 교활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큭···크하하하하!!! 미련하고, 미련하구나! 결국 네놈들은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거다!!>

"닥쳐라, 이 사악한!! 대체 무슨 술수를 쓴 거냐!!"

"페르데스가 움직이지 않는 건 설마 네놈 탓인가!"

"대체 무슨 짓을!"

<하하하핫! 고작 이정도의 봉인진으로 내 능력을 모두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지! 
그는 내가 건 최면에 걸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다. 역시 악신의 능력이란 대단하군! 
상급의 신조차 간단하게 최면술에 걸리다니!>

"큭! 최면!!"


그러고 보니 내 탄생을 막기 위해 명계의 인물에게 최면술을 건 것이 바로 악신이었다. 
아마도 페르데스는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행동을 구속당하도록 최면이 걸린 것이 틀림없었다.

뒤늦게야 놈이 가진 또 다른 특기를 깨달은 듯, 신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낭패어린 표정을 했다. 
그것을 보고 상황의 우세를 판단한 악신은 더더욱 기고만장하여 소리쳤다.


<네놈들이 무슨 꿍꾸이인지 몰라도 그의 소멸을 바라는 것 같으니, 스스로 주문을 외울 필요 없이 내 직접 녀석을 죽여주마!>


그와 함께 사슬에 단단히 동여져있던 악신의 팔이 슬슬 그 안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붉은 핏빛을 머금은 팔이 녀석의 앞에 가까이 접근해 있었던 페르데스를 향해 뻗어나가자, 신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사슬을 
유지하던 기운에 더욱 힘을 불어 넣었다.


"큭! 아, 안 돼!!"

"봉인진의 위력을 높이시오! 이대로는!!"

"정신을 차리시오, 페르데스!! 어서 피해!!"


악신과 함께 죽기 위해선 반드시 본인의 의지를 포함한 일종의 소명 의식을 거쳐야 한다. 
만약 여기서 페르데스가 그냥 죽게 된다면, 그는 내세의 기회를 얻을 틈도 없이 그 자리에서 존재가 소멸될 것이 틀림없었다.


"페르데스!!"


상황의 위급함을 깨달은 트로웰이 황급히 달려가 그의 몸을 끌어안았지만, 이미 악신의 손에선 검은 암흑의 덩어리가 생성이 되어 
바로 그의 앞으로 던져지고 있는 상태였다.
쐐액! 바람을 가르고 날아든 것은 목표물인 페르데스의 앞에서 정확하게 폭발을 일으켰다.


퍼어엉! 콰아아아아앙!

 


"안 돼! 페르데스! 트로웰!!!"

"크악!!"

"아아악!"


폭발의 위력에 휘말린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진을 유지하고 있던 신들 또한 그 파장에 떠밀려 잡고 있던 사슬을 놓쳐버렸던 것이다.


"아아아! 봉인진이!!"

"안 돼! 이럴 수는!!"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 봉인진 마저 허무하게 무산되자 신들은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침통하게 소리쳤다.

이미 상당수의 신들이 폭발에 휘말려 부상을 당하거나 의식을 잃은 상황인지라 더 이상 그들은 봉인진을 설치할 여력조차 남아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는 후들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정신없이 연기 속에 가려진 모습들을 찾았다.


'페르데스는? 트로웰은 어디 있지? 다들 무사한 거야?'


나는 점점 안 좋은 방향으로 옮겨가려는 생각을 억지로 부정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모든게 끝이라는 결론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점점 안 좋은 방향으로 옮겨가려는 생각을 억지로 부정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모든게 끝이라는 결론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사이 뭉게뭉게 퍼져가는 검은 연기 속에서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누군가의 형상이 드러났다. 
두 개의 날개 중 이미 한 쪽의 날개를 완성해 버린 악신 카류안의 모습이었다.

힘이 강해진 탓인지 그가 나에게 입은 부상은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치유되어, 이젠 거의 원상태로 돌아와 있는 상태였다. 
놈은 자신의 주위에 이리저리 흩어진 신들과 와해된 봉인진을 바라보더니 비웃는 것이 역력한 얼굴로 낮은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크크큭. 반항은 여기까지인가? 제법 재미있었다. 그다지 별 볼일 없었지만, 나에게 대든 그 용기만은 칭찬해 주지.>

"크으으···"


그때 그의 발치에 쓰러져 있던 신들 중 하나가 피투성이가 된 손을 들어 놈의 다리를 붙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악신의 움직임을 막아보려는 것이다. 그러자 악신은 얼굴을 팍 일그러뜨리며 거칠게 그의 몸을 걷어 찼다.

퍽!!

"크헉!!"

<흥! 이런 날 파리 같은 녀석이···>


넘어지면서 신이 흘린 피가 몇 방울 튀자, 놈은 더욱 험악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그 순간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피부위에 묻은 핏발울들이 치익 소리를 내며 살짝 타들어 갔던 것이다. 
워낙 적은 양인데다 치유가 빠른 탓에 악신 본인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얼핏 남은 옅은 화상 자국을 보아 타들어 
간 것이 확실했다.


"설마···"


캄캄한 동굴 속에서 간신히 출구를 발견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어쩌면 신의 피가 녀석을 다치게 할 수 있는 효과를 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적당히 실험에 
동참 해 볼만한(?) 대상자를 찾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근처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 무사해?"

"카노스!"


놀랍게도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폭발 때문에 정신을 잃은 듯이 보이는 페르데스를 함께 부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얼른 그에게 다가서며 다급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 어떻게 된 거에요? 트로웰은?"

"그 녀석은 페르데스를 보호하느라 폭발의 사정권에 완벽하게 휘말려서 손 쓸 틈이 없었어. 
정령계로 역소환 됐다. 그 자리에서 소멸당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운이 좋은 셈인가."

"하아. 그, 그렇군요."

"안심할 때가 아니야. 페르데스는 정신을 잃었고, 봉인진은 와해된 데다 신들은 재기가 불가능한 상태라고. 
아아 그러고 보니 엘, 네 몸은 어때? 괜찮은가?"


그렇게 말하며 묻는 카노스의 얼굴엔 드물게 미안한 감정이 묻어나 있었다. 
아마 나에게 악신을 상대하라고 부탁한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심하진 않아요. 아직 빠르게 움직이는 건 무리지만. 그런데 봉인진을 다시 만드는 건 어려울까요?"

"일단 기절한 녀석들도 있으니까. 그리고 저 봉인진이라는 게 생각보다 힘을 많이 잡아먹거든. 
그걸 두 번이나 했으니, 겉보기엔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지금 저들은 전심전력으로 악신과 전투를 벌인 상태와 다름없어."

"헤에, 그런데 카노스는 굉장히 멀쩡하네요?"

"마신의 특권이랄 수 있지. 성질 난폭한 녀석들을 다루려면 자연히 힘이 세질 수밖에 없거든. 
어쨌거나, 이제부터 녀석을 제압할 수 있는 다름 방법을 궁리해야 겠군. 이거 골치 아픈걸? 시간도 별로 없는데."


악신이 우리의 모습을 발견 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갑자기 터져 나오는 검은 빛줄기를 느낀 찰나, 나는 갑자기 내 어깨를 부여잡고 옆으로 몸을 날리는 카노스에 의해 아슬아슬하게 
놈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우리를 스쳐지나간 공기는 다음 순간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며 주위의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슈우우욱! 콰아아아앙!


"큭!"


시꺼먼 연기와 함께 강한 바람이 불자, 카노스는 주위의 정황이 진정될 때까지 내가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붙들었다. 
잠시 후 사납게 몰아치던 공기가 진정되자, 그는 낮은 휘파람과 함께 명랑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휘유~ 장난 아닌데? 괜찮니, 엘뤼엔 아들?"

"네, 네···정신은 조금 없지만요."


빙글빙글 돌아가는 머리를 억지로 추스르며 대답하자, 카노스는 빙긋 웃으며 거칠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것을 탁-하고 쳐내며 거칠게 노려보는 존재가 있었으니···


"남의 것에 함부로 손대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라피스!!"


아직 몸의 부상도 쾌차하지 않은 주제에 느닷없이 싸움한복판에 나타난 라피스였다. 
그 뒤를 따라 미네르바와 시벨리우스, 이프리트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엘퀴네스! 무사합니까?"

"엘!! 괜찮아? 다치지 않았어?"

"미네! 어떻게 된 거야? 이 녀석이 왜 여기에? 게다가 시벨리우스까지!"


그러자 찔끔한 표정을 지은 미네가 어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그게···방금 전에 일어난 폭발 때문에 엘의 동료인 인간들을 보호하기 위해 갔는데, 굳이 따라오겠다고 고집을 피우시더군요.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뭐? 시벨리우스!! 내가 거기서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그리고 라피스 너는 부상자인 주제에 뭘 하겠다고 여기에 오는 거야?"

"미, 미안, 엘···하지만 너무 걱정이 돼서···"


움찔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시벨에 비해 라피스의 태도는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녀석은 뭐가 문제냐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시끄러. 멀리서 싸움 하는 것만 보자니 지루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아아, 염려놔. 
마족 꼬맹이랑 보호자 녀석은 따라오지 못하도록 단단히 충고해주고 왔으니까."

"···지금 상태에선 너보다 차라리 아스가 더 도움이 되겠다. 너 지금 다친 것에 대한 자각을 전혀 못하고 있는 거 아니야?"

"글쎄."

"글쎄라니! 정말 죽고 싶어서 작정했어? 그러다 상처가 악화되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그 말에 라피스는 묵묵부답의 태도를 취하며 그저 어깨만 으쓱해 보이기만 했다. 
이 녀석, 단순히 시벨이 가겠다는 말에 경쟁심을 느끼고 따라온 건 아닐까?충분히 가능성 있는 생각에 나는 의심가득한 눈초리로 
라피스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다음 순간 재차 이어지는 악신의 공격 때문에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크하하하핫! 모두 다 죽여주마! 그 몸을 갈가기 찢어서 피 한 방울까지 모조리 집어 삼켜주지! 
네놈들의 피는 어떤 맛인지 궁금하군!!>

'아! 맞다, 피!!'


콰가가가가각~!!

"피, 피해!!"

"크흑!"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리는 다시금 일어나는 폭발의 파장을 피해 각기 일정한 장소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우리가 모두 무사히 공격을 피한 것을 확인한 카노스는 무서운 눈으로 악신을 노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큭, 젠장- 녀석에게 효과적인 공격 방법이 있어야 할 텐데. 마땅한 수가···"

"아! 저기, 카노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부탁?"

"네! 죄송하지만, 몸에 상처 좀 내도 될까요?"

"엥?"


갑작스런 제의에 놀랐는지, 카노스만이 아니라 주위에 있던 다른 동료들도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카노스의 팔을 잡아 얼음 칼로 제꺽 그어 피가 베여 나오도록 만들었다. 
그러자 놀란 동료들이 만류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에, 엘! 무, 무슨 짓이야! 너 미쳤어?"

"헉! 혹시 벼락을 맞으면 피를 마시고 싶어지는 겁니까? 그 벼락에 안 맞기를 천만다행이군요!"

"흡혈하는 정령왕이라···제대로 궁상이군."

"엘! 차라리 내 피를 줄게! 마신의 피는 마셔봤자 몸에 해롭다고!"


정정한다. 다들 그저 내 행동이 재미있었을 뿐이다.

오죽하면 칼에 베인 장본인인 카노스조차 킥킥 웃으며 어서 마셔보라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겠는가!


"흐음~ 신의 피를 마신다고 힘이 더 세지 지는 않을 텐데? 엘뤼엔의 아들."

"윽! 누가 이걸 마신댔어요? 왜 다들 오버하구 난리야!"

"응? 그럼 갑자기 상처는 왜 만들었는데?"

"그냥 한 가지 확인해 볼 게 있어서···."

"??"


의아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뒤로한 채, 나는 카노스의 팔에서 흐르는 피를 두 손에 받은 다음 그것을 물에 실어 곧바로 악신에게 
쏘아 보냈다.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위력이라곤 조금도 없는 단순한 물줄기에 불과해 보였다.

촤아악!


<킥, 이건 또 무슨 장난이지?>


녀석은 자신을 향해 물줄기가 달려들자 피식 하고 비웃는 표정을 하더니 곧 한 손을 들어 그것을 가볍게 막았다. 
마치 어린애가 쏜 물총을 간지럽다고 받아들이는 식이었다.

하지만 놈은 곧 그런 행동을 한 것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물이 닿는 순간, 그의 손바닥이 치익하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녹아들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크, 크아아아악!! 내손! 내손이!!>

"빙고!!"


이로서 신의 피가 악신에게 해를 입힌다는 가정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이 의외의 전개에 놀란 카노스와 동료들은 모두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맙소사. 손이 녹았어!"

"방금 뭘 어떻게 한 거지, 엘? 어째서 물이···"

"물이 아니에요. 카노스의 피 덕분이지."

"내 피?"


아연하게 되묻는 그에게 나는 우연히 신의 피가 놈의 피부를 태운 것을 발견한 경위를 털어놓았다. 
하지만 정확핮니 확인할 방법이 없어, 이런 식으로 카노스의 피를 얻은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자 그는 한 방 먹었다는 
얼굴을 하며 무언가 납득했다는 시선으로 악신을 바라보았다.


"···그렇군. 악신이 사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와 반대되는 정결한 신의 피가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이거라면 녀석을 좀 더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 물론 그러려면 카노스가 좀 많이 힘들긴 하겠지만···"

"아니다, 엘. 쿡, 대단한데? 덕분에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어."

"에? 중요한 사실이요?"


내 물음에 카노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이었다.


"단순히 소멸의 주문을 외운 채 뛰어들어 자폭하는 것만으론 놈을 죽일 수 없어. 
한 신이 목숨을 걸고 자신의 피를 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 씌워야 하는 거다. 
하마터면 생으로 애꿎은 신 하나만 죽일 뻔 했군."

"헉, 굳이 한 신이 희생해야 해요? 그런 거라면 신들의 피를 조금씩 모아서···"

"아니, 생명을 담보로 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요령은 통하지 않아. 목숨 하나에 목숨하나라는 소리지. 
봉인진은 녀석이 그 피를 고스란히 뒤집어 쓸 수 있도록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하는 수단에 불과했던 거다. 
그래봤자 이 방법도 놈의 날개가 완전히 다 드러나면 말짱 소용없지만."

"!!"


그 말에 우리는 다급히 악신의 등 뒤를 확인했다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막 거의 다 펼쳐지려는 날개가, 이미 상황이 최악의 끝을 달리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카노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엘, 일단 저 녀석을 묶어 둘 수 있을까? 내 피를 섞은 물로 주위에 물보라를 일으키면 간단할 것 같은데."

"아···그렇군요. 해볼게요. 하지만 그 뒤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건 따로 생각해 둔 게 있으니까 놈을 붙잡아 줘. 아, 그리고 미네르바와 이프리트는 주위의 방어를 확실히 해주고."

"방어?"

"조금 후에 큰 폭발이 일어날 지도 모르거든."

"??"


빙긋 웃으면서 건네는 말에 우리는 서로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다가 결국 그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손의 부상을 어느 정도 회복한 악신이 눈에 핏발을 세우며(어차피 붉은색으로밖에 안 보이지만) 우리를 향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부웅-허공을 크게 휘젓는 긴 손톱은 정확히 나를 노리고 있었다.


<크아아악! 엘퀴네스 네놈이 끝까지!!>

"엘! 위험해!"


나는 놈이 이성을 잃고 덥비는 것을 피하며 카노스의 피를 담은 물을 놈의 몸에 칭칭 감아 올렸다. 
피를 머금어 붉은 빛을 띄운 물줄기가 마치 뱀처럼 몸을 휘감자, 악신은 화상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또다시 거센 비명을 토하기 
시작했다.

치지지지지직!


<크, 크아아아아아악!!!>


이렇게 효과가 좋을 수 있나! 진작 알았다면 봉인진을 만들 필요도 없이, 바로 이 방법을 썼을 텐데. 
고생은 있는 대로 다하고 막바지에 알아내버렸으니 그 아쉬운 심정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기지인 듯, 동료들은 고통스러워하는 악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나같이 허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카노스는 대체 무슨 방법을 쓰려는 거지?'


놈의 움직임이 완전히 고정된 것이 확인되자, 카노스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놈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에 팔에서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확인 한 나는 미안한 마음에 얼른 다가가 치료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곧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듯 한손을 들어 보이는 카노스에 의해 곧바로 저지당했다.


"엘, 위험하니까 너는 저쪽으로 가 있거라. 아직 몸도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잖아?"

"에? 하지만 일단 치료는···"

"아아, 괜찮아. 이 정도 쯤이야. 어차피 다 써야 하는 거니까."

"···네? 다···쓰다니요?···!!···서, 설마 카노스!!"


그 순간 카노스의 의도를 깨달은 나는 경악한 표정으로 그의 팔을 붙들으려 했다.
그러자 내 앞에 강한 바람이 터지더니, 내 몸을 주욱 밀어내며 순식간에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파앗! 콰아아앙!


"허억!"

"엘!!"


마침 내 뒤쪽에 있던 라피스가 달려와 넘어지는 내 몸을 강하게 붙드는 바람에 꼴사납게 바닥에 구르는 꼴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난 잡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할 여유도 없이 곧바로 카노스 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카노스! 안 돼! 그만 둬요!! 지금 뭘 하려는 거야!!!"


그러자 내 비명과 같은 외침을 들은 카노스가 악신에게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더니, 슬쩍 미소 지은 얼굴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냐하하! 엘뤼엔에겐 그동안 재미있었다고 전해줘라. 놈이 신계로 들어온 이후로 살아가는 재미를 조금 알게 되었거든. 
꽤 좋은 친구였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카노스!! 당장 그만둬요! 그만!!"

"아아, 이런 내 행동이 갑작스럽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이미 처음부터 계획한 일이었다고 말해주지. 
이번 악신 녀석이 내가 창조한 마족이잖냐? 나 이래봬도 꽤나 책임의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신이라고. 
피해보상은 당연히 해야 하지 않겠어? 원래 자식놈의 허물은 그 부모가 갚는 법이잖아. 
창조신과 창조물의 관계도 그와 다를 바 없거든."

"무슨···"


믿기 힘든 눈으로 바라보는 나를, 카노스는 따뜻한 시선으로 마주하며 생긋 웃었다.


"너 같이 귀엽고 말 잘 듣는 녀석을 아들로 둔 엘뤼엔은 죽어도 내 심정 모를 테지. 
그는 분명 지금의 내 결정을 한심하게 생각할 거다. 하지만···이런 녀석이라도 나에겐 소중한 자식이야. 
그래서 위험한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몇 번이고 기회를 다시 줄 수밖에 없었다."

"카노스···"

"···라는 건 거의 핑계고, 역시 신계의 삶은 별로 재미없어. 평탄하긴 한데 지루하고! 스릴이 너무 부족해. 
나같이 자유분방한 성정에는 갇혀 지내는 삶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젠 좀 신나게 놀고 싶달까?"


그는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나는 전혀 웃을 수 없었다. 그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불고 가볍게 말을 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윽···흐윽···"


나는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쯧쯧 혀를 차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너는 수없이 많은 이별을 경험하게 될 거다. 그때를 위해서 지금은 눈물을 아껴두는게 좋아. 나중엔···
흘리고 싶어도 말라버려서 나오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거든."

"카노스···"

"하긴 뭐, 그게 또 엘의 매력이긴 하지만. 너를 보면 엘퀴네스들도 그다지 성격이 더럽지만은 않다는 걸 느끼게 돼서 기분이 
좋다니까. 그래서 엘뤼엔이 널 덥썩 아들로 삼았는지도 모르지. 쿡쿡."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혼자서 연신 키득거리던 카노스는 움직임을 제압당한
채 몸부림을 치고 있는 악신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놈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진득한 슬픔으로 젖어 있었다.


"마족으로서 어느 정도의 교만과 욕심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방관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내게도 똑같은 죄가 
적용되는 것일 테지."

<크윽! 무슨 헛소리냐! 죽일 테다! 네놈은 반드시 죽이고 말테다!!>

"추악한 영혼이여, 이미 너는 네 소원을 이루었다. 악신이 되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고 이제 이 세상에서 사라지거라. 
길동무라면 내가 기꺼이 되어주지."

<대체 무슨 짓을!!>

"카노스!!"


그 순간 이어지는 것은 카노스의 몸에서 붉은 핏물이 치솟아 오르는 광경이었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몸을 가른 카노스가 그 피를 악신에게 퍼부었던 것이다.

촤아아악!

그것은 카노스 본인의 의지를 타고 마치 물기둥처럼 두 신의 주위를 감싸며, 그들의 머리부터 온 전신을 흠뻑 적시었다. 
그러자 핏물에 잠긴 악신의 형체가 지글지글 타오르며 그 자리에서 서서히 녹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크, 크아아아아아악!!!!안 돼! 내 몸! 내 몸이!!>


악신은 진흙처럼 밑으로 흘러내려가는 자신의 살덩이들을 바라보며 절망하는 얼굴로 소리쳤다. 
그와 함께 놈처럼 피투성이가 된 카노스의 몸이 서서히 뒤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아닌가!


'쓰러진다!'


그것을 자각한 순간, 나는 무의식중에 달려가 그에게 팔을 뻗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예상치 못한 방해에 밀려 중간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만큼 녹아들던 악신의 몸에서 갑자기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파아아앗! 


<크아아아아아악!!>


순식간에 악신의 몸을 휘감은 빛은 그 앞에 있던 카노스까지 집어삼키고도 끝없이 범위를 확장시켜 나갔다. 
잠시 후 그것은 둥근 원형의 기둥의 모양을 이루며 마치 승천하는 용처럼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올라가더니, 
곧 높은 하늘 위에서 엄청난 압력을 동반한 광대한 폭발을 이루기 시작했다.

촤아아악! 쿠와아아아아아앙!!


"아악!"

"엘!!"


갑작스런 압력에 밀려 중심을 잃는 나를 라피스가 급히 붙잡아 지탱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 순간, 눈도 뜰 수 없을 만큼 밝은 빛의 폭발 속에서 나는 내 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카노스의 모습을 발견했다.


"!!"


그때만큼은 그와 나를 제외한 주변의 모든 움직임이 멈춘 것 같았다. 
매우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의 입가에는 밝은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차마 아무 말 못하고 멍하게 바라보는 나에게 그는 입을 벌려 뭐라고 중얼거렦다. 
주위의 소음과 먼 거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입모양을 통해 나는 대충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엘뤼엔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정해줘.>

"아······"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카노스의 모습은 폭발하는 빛 속에 완전히 파묻혀버렸다. 악신과 함께 소멸의 과정에 휩쓸린 것이다.


"카, 카노스!! 크윽!!"

"엘! 고개 숙여!"


끝까지 그를 찾으려고 고개를 내밀었던 나는 이후 이어지는 모래바람과 빛의 향연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라피스가 보호하듯 위에서 단단히 감싸 안았다. 그리고 또 다시 이어지는 폭발음!

쿠웅! 콰아아아아!

거대한 연기가 강한 바람 속에 뭉쳐 일어나는 모습은 마치 TV나 사진 속에서나 보았던, 핵폭발의 장면과 흡사했다. 
그 파장 때문에 황성을 비롯한 주위의 건물까지 부서져,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 속에 매캐한 연기와 커다란 벽돌의 잔재들이 섞여 
다녔다.


"큭, 젠장. 역시 이대로는 힘든가?"

"라피스?"

"넌 계속 고개 숙이고 있어!"


그때, 나를 감싸고 있던 라피스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순식간에 본체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폭발의 압력에서 버틸 수 있도록, 육체의 능력을 강화시키려는 것이다.


<삐이이이이익!>


순식간에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한 라피스는 그의 날개 죽지로 내 몸을 덮은 채  정면에서 폭발의 기운을 막아서기 시작했다. 
녀석의 무모한 행동에 나는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라피스, 지금 뭘 하는 거야? 난 괜찮으니까 너나 어서 피해!"

<시끄러! 입 다물어!>


얼마나 지난 걸까?

악몽과도 같은 한참의 시간 후 이 모든 과정이 끝났을 땐, 우리 앞에 휑하게 파인 거대한 구덩이와, 폐허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초토화된 주위의 풍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고서도 나는 한참동안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 없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끝난···건가? ···전부?"


나는 멍한 표정으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카노스와 악신 카류안이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 두 존재의 모습은 폭발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뒤였다. 분수처럼 솟았던 핏자국이나, 육체의 찌꺼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끝···끝이다!"


그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신들 중 하나가 큰 목소리로 외치응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사라진 악신과 안정을 되찾은 주위의 기운을 둘러보며 미친 듯이 고함치기 시작했다.


"악신이 소멸했다!! 우리가 이겼어! 우리가 이겼다고!!"

"정말인가? 정말 악신이 소멸했단 말인가?"

"세상에! 악신이 소멸했어!! 소멸했다고!!"

"오오오오!!"


두 번이나 봉인진이 실패하는 바람에 자포자기 하고 있던 신들은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마음껏 기뻐했다. 
그들은 악신이 없어졌다는 사실에만 정신이 팔려, 정작 그를 위해 희생한 신이 누구인지,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느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봉인진의 와해 후 의식을 잃은 대다수의 신들이 이제야 정신을 차린 셈이니 그간의 상황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엘! 무사합니까?"


주위의 거센 기운이 완전히 진정되자, 일행들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미네가 서둘러 내게 달려와 물었다. 
마음은 허전한데 눈물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왜일까. 나는 여전히 휭하게 비어버린 구덩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휴우, 다행입니다. 용케 멀쩡하시군요."

"미네···카노스가···죽었어."

"예, 알고 있습니다. 저도 봤으니까요."

"그런데 이상해. 왜 눈물이 안 나오지? 마음은 슬픈데···어쩐지···울어선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러자 미네는 푹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내 어깨를 툭툭 다독이기 시작했다. 
내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히 입을 열었다.


"당연한 일에 당혹해 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의 죽음은 불행하지 않았으니까요. 
누구든 친구가 멀리 여행을 가버렸다고 해서 울지 않습니다. 그저 아쉬운 감정만 있을 뿐이죠."

"···여행?"

"네, 여행입니다. 앞으로 그는 수많은 내세를 보내면서 죽을 때마다 반드시 명계에 돌아오게 될 겁니다. 
카노스를 다시 만날 수단은 얼마든지 있는 겁니다. 제가보기엔 엘은 그 사실을 본능덕으로 깨닫고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


그러고 보니 카노스는 영혼의 성질만 바뀔 뿐,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되더라도 죽으면 명계로 영혼이 되돌아 올 것이고, 그때마다 새로운 삶을 부여받으리라. 
그건 드래곤이 유희를 다니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그렇구나."


"이제 안심이 되셨습니까?"

"으응, 미네··· 다른 일행들은?"


그러자 미네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시의 뒤편을 가리켜 보였다. 
그곳에 페르데스를 포함한, 이프리트와 시벨리우스가 나란히 흙바닥에 누워 있었다. 
순간 흠칫 놀라던 나는, 그들의 몸에 큰 생채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절···한 건가?"

"네, 의식을 잃었지만 모두 무사합니다. 방금 실프를 통해 다른 쪽에 있던 마족과 인간들도 안전하다는 것까지 확인한 참입니다."

"아아, 그래. 이사나와 알리사도 무사했구나. 다행이야. 폭발에 휘말릴 거라 생각했는데···"


엄청난 돌풍 의해 악신이 소멸한 주위는 완전히 폐허처럼 변해버렸고, 그 파장은 꽤 멀리까지 이어진 상태였다. 
그런 중에 연약한 인간인 두 사람이 무사했다는 건, 아마도 아스와 데르온이 그들을 보호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에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나에게 미네는 힐책하는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그건 내가 할 소리입니다. 엘이야 말로 너무 그들의 가까이에 있었지 않습니까? 
그 거대한 폭풍에 직접적으로 휩쓸렸으니···난 틀림없이 엘이 소멸하거나, 역소환 됐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 난 괜찮아. 라피스가 본채로 변하면서까지 막아줬는걸. 아참! 라피스는?"


내 만류에도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포기하지 않았던 녀석은, 꿋꿋하게 폭발의 흐름을 맨몸으로 버텼다. 
하다못해 실드라도 전개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때는 녀석도 정신이 없었던 건지 마나의 운용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부상 중인 몸이 그런 기운을 감당하고도 멀쩡할 리 없을 터! 
나는 다급한 표정으로 여전히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형체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라피스는 두 날개를 추욱 늘어뜨린 채 기절이라도 한 듯 눈을 감고 있는 상태였다. 
언제나 생기발랄하던 기운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녀걱의 몸에선 시체 같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악신에게 당했던 상처는 본체로 돌아가자 더더욱 크게 두드러져 보여, 새삼 그가 입은 부상이 얼마나 큰 것이니 실감이 들게 
만들었다. 한 방울씩 투욱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니, 간신히 지혈된 부위가 다시 터진 모양이다.


"라피스? 너··· 괜찮은 거야?"


왠지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에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마음 같아선 몸이라도 흔들어 보고 싶었지만, 툭하고 치면 넘어질 것 같아 차마 건드리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말도 안 돼. 이렇게 큰 덩치에서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은 위태로운 느낌이라니···'


내 표정이 불안해지자, 미네 역시 난감한 얼굴로 라피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때까지도 녀석은 입을 꾸욱 다문 채 한 치의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는커녕, 숨을 쉬는 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라···피스?"

"엘,아무래도 이 드래곤은···"

"응? 무슨 소리야, 미네?"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미네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그때 마침 기절했던 페르데스가 정신을 차리는 바람에 우리의 시선은 자연히 그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으응···아, 이런! 내가 또 의식을···"

"페르데스! 정신이 들어?"

"아? 엘! 모두들···어떻게 된 거야? 트로웰은? 그리고 악신은 어디에 있지?"


그녀는 자신의 주위에 쓰러져 있는 이프리트와 시벨리우스의 모습을 발견하곤 당황한 듯 얼굴을 굳히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완전히 폐허가 된 주변과 거대한 구덩이에 시선을 미치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악신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페르데스. 이미 소멸했거든."

"소멸이라니? 어, 어떻게? 그런데 왜 나는 멀쩡한 거지? 두 번째 봉인이 성공하고, 분명 내가 소멸을 하려고 주문을···"


아마도 그녀는 최면에 걸린 순간부터의 기억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미네가 나를 대신해거 혼란스러워 하는 페르데스에게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소멸의 의식은 실패했습니다. 두 번째 봉인진이 와해되고, 신들은 의식을 잃거나 재기불능의 상태가 도었지요."

"그, 그런데 어떻게?"

"우연히 엘이 악신을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해서, 의식을 전개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페르데스님을 대신하여 소멸을 자처하신 신이 계셨기에···"

"누구지,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묻는 페르데스는, 이미 소멸한 신이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야 그럴 수밖에, 악신의 소멸을 기뻐라고 있는 신들 중에서 유독 한 존재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면에서나 눈에 띄는 자였기에, 그의 공백 또한 그만큼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네가 그의 이름을 말했을 때, 페르데스는 충격을 받기 보단 '역시···'하며 침통하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결국 카노스···였구나. 그일 거라고 예감을 했지만···대체 그가 어째서···"

"책임을 지겠다고 했어. 마족 중에서 악신이 탄생한 것을 내내 마음에 걸려했었던 것 같아."

"하아, 하긴. 그는 마족들을 유달리 아꼈지. 자신이 창조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단순한 창조물이 아니라 하나의 자식처럼 대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번 소멸엔 그도 자원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신들의 반대 때문에 통과되지 못했었지만."

"반대했다고? 신들이?"


의외의 소식에 나와 미네는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페르데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카노스는 주신이 창조한 신들 중에서도 가장 첫 번째의 신이야. 가장 최초의 엘퀴네스임과 동시에, 주신의 뜻에 따라 처음으로 한 
종족의 창조를 허락받은 존재지. 태어난 순서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는 건 아니지만, 그의 존재는 신계에서도 특별해. 
누구라도 잃고 싶지 않았을 거야."

"···그랬구나."

"뭐, 우리한텐 슬퍼도, 그에겐 잘 된 일일지도 모르지. 그가 신계에서의 삶을 무료해한다고 들었거든. 
그래서 주신께서 특별히 그에게 만큼은 마계에서 장기간 유희를 즐기도록 허락 하신 거고."


그렇게 말하는 페르데스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다. 
그녀는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고개를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치사하게 남이 기절한 사이에 새치기를 하다니. 분명 처음부터 계획하고 있던 일이겠지. 일부로 안 깨운 게 틀림없어."

"응? 페르데스, 지금 뭐라고 했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트로웰은···"

"정령계로 역소환 됐다고 들었어. 지금쯤 땅의 영역에서 기운을 회복하고 있을 거야. 그런데···"

"응? 엘, 표정이 왜 그래?"


걱정스럽게 묻는 페르데스의 말에 나는 말없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나를 따라서 위를 바라본 그녀는, 마치 동상처럼 
굳어있는 라피스를 발견하곤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레드 드래곤? 이마의 저 문장은···세상에, 엘, 너의 계약자니?"

"으응. 그런데 라피스가 전혀 대답을 하지 않아. 아까부터 불러도 눈도 뜨지 않고. 서, 설마 어디가 잘못 된건 아니지?"

"으음···저 부상은?"

"나를 보호하려다가 악신에게 당한거야. 치유술을 썼는데도 전혀 먹히지 않아."


왠지 아까보다 페르데스의 안색이 나빠졌다고 느낀 것은 나뿐일까? 
그녀는 미네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안해하는 나를 보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곧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엘, 잘 들어. 지금 하는 말에 네가 큰 충격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무슨?"

"저 드래곤의 영혼은···이미 육체를 떠났어. 지금 남아있는 것은 주인을 잃은 빈껍데기일 뿐이야."

"···뭐?"


나는 잠시 동안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그런 내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페르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난처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었다.


"부상을 당한 부위가 나빴어. 아무래도 드래곤 하트가 완전히 파괴된 것 같아. 
그 자리에서 즉사를 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거다."

"드래곤···하트?"

"인간들로 치면 심장이나 마찬가지야. 마나를 모아서 통제하는 기관이지. 드래곤들은 그 부위가 파괴되면 끝이야. 
어지간하면 파괴되지 않는 것이지만, 아무래도 상대가 악신이라면 사정이 다르겠지."

"아···"


그러고 보니 그때 데르온이 안절부절하며 걱정했었던 것 같다. 
아마 그는 라피스가 입은 상처가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일지도 모른다.

그때 왜 더 채근해서 알아내지 못했던 걸까. 그의 괜찮다는 말에 넙죽 안심했던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엘. 괜찮아? 안색이···"

"아, 아니. 난 멀쩡해. 저,저기···페르데스···가 착각 한 건 아니지? 정말 영혼이 없어? 라피스가···정말···"


죽었느냐고 물으려던 말은 목에 가시가 박힌 듯 걸려 나오지 못했다. 왠지 입 밖으로 내뱉으면 그것이 정말 현실이 되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없어···아까 전까지만 해도 말도 했었어. 부상당한 주제에 날 보호하려고 해서, 그만두라고 했더니···
날 보고 시끄럽다고···"

"엘···"

"괜찮다고 했어. 그래곤은 회복력이 빨라서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식은땀도 안 흘리고 안색도 나쁘지 않았는데···
그런데 어째서···"

"엘, 일단 진정해. 너 지금 너무 동요했어."


페르데스는 내 어깨를 잡으려고 했지만, 나는 뒤로 주춤 물러서며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어떻게 쉽게 인정 할 수 있겠는다! 
지금의 내게는 페르데스의 말이 질 나쁜 농담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드래곤 하트가 파괴되었다면!! 라피스도 알았을 거 아니야! 자기가 죽을 거란 걸 그때 이미 알았단 소리잖아! 
그런데 왜 나한테는 한마디도···적어도 한마디라도···했어야 했잖아···"

"엘, 그건···"


페르데스는 뭔가 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나는 듣지 않고 곧바로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 라피스에게 다가갔다.
숨을 쉬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의 육체에 흐르는 기운에 생기가 전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죽음'이라는 
단어와 연결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녀석의 말마따나 드래곤은 최강의 종족이었으니까. 겨우 그 정도의 상처에, 그 정도의 폭발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믿음이 크게 흔들리려 하고 있었다.


"라피스···대답해."

"······"

"대답해, 라피스. 눈을 떠! 몸을 움직이란 말이야! 내 말 안 들려?"

"······"

"대답해! 대답하란 말이야! 라피스 라즐리!! 제발 일어나!"

"엘, 그만 둬. 그런다고 떠난 영혼이 다시 돌아오진 않아."

"죽지 않았어!"

"엘···"

"죽지 않았어. 죽을 리가 없어!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자신의 죽음조차 밝히지 않고 떠날 리가 없어. 
그 잘난 척 하는 녀석이 그럴듯한 유언도, 잘 있으라는 말도 안했단 말이야! 아무 말도 없었어! 정말 아무것도!!"


그래. 그렇기 때문에 더욱 믿을 수 없는 걸지도 모른다. 적어도 카노스는 자신이 죽는다는 의사를 확실하게 표현했다. 
때문에 슬프고 괴로워도 마음을 달래는 것 역시 빨랐던 것이다.

아니, 최소한 녀석이 날 보호하려고만 하지 않았어도, 그것 때문에 다친 것만 아니었어도 나는 좀 더 이 상태를 차분히 인정했을지 
모른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는 내 머릿속에서는 언젠가 라피스가 했던 말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물어보자. 다친 사람이 엘뤼엔이 아니라 나였다고 해도, 넌 아까처럼 분노해서 마족 녀석과 싸웠을까?>


그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 아아, 그래.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아니라고 하면 녀석이 무척 서운해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녀석은 어린애처럼 좋아하며 이렇게 대답했었다.


<좋아. 다음에도 만약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땐 내가 너 대신 죽어주지.>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가 나대신 뛰어들어 다쳤을 땐 가슴이 철렁했지만, 그래도 살아날 자신이 있기에 가볍게 하는 말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화만내고 말았던 건데···설마, 라피스는 전부 진심이었던 걸까?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


갑자기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나는 흠칫 놀라며 소리가 들여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곳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머리카락을 지닌 남자가 살풋 찡그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투욱. 어느새 볼을 따라 흘러내려가는 눈물을 느끼며 나는 작은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엘뤼엔···"

 

 

"뭐야, 너 설마 우는 거냐?"


내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엘뤼엔은 눈에 띄게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에서 악신의 소멸을 자축하고 있던 신의 무리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너희들 조용히 안 해! 내 아들이 울고 있는데 무슨 짓거리들이야!"


그러자 한껏 기쁨에 취해있던 신들의 얼굴이 마치 얼음처럼 쩌억-굳기 시작했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엘뤼엔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며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헉! 에, 엘뤼엔?"

"엘뤼엔! 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어, 어찌 된 겁니까? 아직 당신은 치료가 필요한···"

"호오~ 빛의 신, 지혜의 신, 생명의 신. 너희 셋 기억 해 두지. 내가 언제 너희들에게 날 아는 척 해도 된다고 했던가?"

"헉!"

"크흡!"

"그, 그런···말씀은 안하셨지요, 분명히···하하하하···"


지명당한 세 명의 신이 새파랗게 굳은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자, 반대로 나머지 살아남은(?) 신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식간에 축게분위기를 파토 내 놓은 엘뤼엔은 불쾌한 표정으로 라피스의 모습을 보곤, 내가 우는 이유를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찰거머리 도마뱀이 죽은 거냐?"

"······"

"게다가···그 상처는 뭐야? 몰골이 말이 아니군. 왜 도움이 되라고 보낸 신들은 멀쩡하고 너희 정령왕들이 처참한 상태인거냐?"

"!!"


악신을 물리쳤다는 것에만 기뻐하던 신들은 그때서야 우리의 상태를 제대로 돌아본 듯 했다. 
그들은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뭔가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다.


"에, 엘뤼엔- 그, 그것은···"

"닥쳐, 너한테 대답하라고 한 적 없어."

"헙! 넵!"

"젠장, 소멸한다고 나섰던 신은 멀쩡히 살아있고, 당연히 있어야 할 놈은 보이지 않는데다, 하나뿐인 아들내미는 울고 있고···
완전히 뒤죽박죽이군. 엘, 네가 말해봐라. 악신과 함께 소멸된 녀석은 누구지? 그리고 저 도마뱀은 왜 죽은 거냐?"


차갑게 묻는 목소리와 달리,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다정한 빛을 담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갑자기 서러운 감정이 치솟아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 했지만, 나는 애써 참은 채 더듬더듬 대답하기 시작했다.


"소멸은···카노스가···"

"!!"

"뭐, 뭐라고? 그, 그게 정말이오, 정령왕 엘퀴네스?"

"카, 카노스가 소멸되었단 말인가!"

"큭! 어떻게 이런 일이!"


희생된 신이 누구인지 들은 신들은 놀란 표정으로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이어지는 엘뤼엔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의해 동요하던 입을 꾸욱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몰랐다'는 사실은 자랑이 아닐 텐데?"

"······"

"녀석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너희들이 그만큼 제대로 역할을 못했다는 뜻이겠지. 입 닥치고 가만히 듣고나 있어. 
질문은 그 다음이다."

"며, 면목이 없소."

"끄응···"


신들이 저마다 민망한 얼굴로 입으 다물자, 엘뤼엔은 다시 나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서 다음 말을 이으라는 뜻이다. 
그는 카노스가 소멸했다는 말에도 전혀 놀라지 않은 듯, 여전히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기···소멸하기 전에···고마웠다고 전해 달랬어···"

"흥! 민폐를 어지간히 끼쳤다는 건 알긴 알았던 모양이군. 끝까지 재수 없는 녀석. 그래서? 저 도마뱀은 왜 죽어있는 거냐?"

"그게···나를 보호하다가···"

"호오? 너를?"


그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 얼굴을 보고 나니, 갑자기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할기 갈피가 서질 않아, 나는 점차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악신이 나를 공격했는데···내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아서···그때 라피스가···흑···나 때문에···다쳐서···흐윽···괘, 괜찮다고 했는데···"

"엘? 울지 말고 똑바로 설명해. 그래서 어떻게 됐다고?"

"드래곤···하트가 파괴됐대. 이미 영혼이 떠나서···없다고···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자, 작별인사도 못 했어···죽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을···흐윽···"


"작별인사? 그게 중요하냐?"

"당연하지! 아무 말도 못했단 말이야···정말 아무 말도···"


하지만 거기까지 들었는데도 엘뤼엔의 표정은 여전히 별 변화 없이 무감각학만 했다. 
그는 오히려 인상을 찌푸리며 무서운 눈으로 라피스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네가 이렇게 우는 거란 말이지? 흐음. 별 시덥잖은 도마뱀이 남의 귀한 자식을 울리다니. 
이미 죽은 녀석을 가지고 팰 수도 없고, 난감하군. 아아, 그래. 명계에 가서 놈의 영혼이라도 손봐줄까?"

"···응? 무슨 소리야?"

"아직 그 도마뱀에게 다른 인생이 부여되지는 않았을 거다. 악신 때문에 명계 녀석들도 정신이 없어서 일이 밀렸다고 들었으니까. 
영혼이라면 아직 만나볼 수 있어. 작별인사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란 소리야. 그럼 괜찮겠냐, 아들?"

"아···"


그때서야 그가 하려는 말을 깨달은 나는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그가 나를 명계로 데려가 라피스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소리인 것이다.

설마 그런 방법이 가능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한 상태에 빠져 버렸다. 
그러자 엘뤼엔은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툭툭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능력 좋은 아버지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 
작별인사 정도로 성이 안찰 것 같으면 그 녀석은 특별히 이 아크아돈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조치해주지. 
이미 한번 끊긴 인연이라도 다시 이으면 그만이야. 너라면 금방 익숙해질 거다."

"아, 아버지···"

"호오, '아버지'라···꽤 듣기 좋은걸. 아무튼 이제 그만 울어라. 
방법이 생겼는데도 지난 과거에 매달리는건, 어리석은 놈들이나 하는 짓이니까. 거기 있는 너희 두 놈도 마찬가지야."

"!!"


뜬금없는 엘뤼엔의 말에 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가 응시하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가, 낯선 청년 두 명이 서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이는 20대 초반쯤 되었을까? 그들은 하나같이 준수한 얼굴에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 한사람은 몸이라도 안 
좋은 건지, 창백한 안색에 병색이 짙게 드러나 있었다.
그들은 엘뤼엔이 자신의 존재를 눈치 챘다는 것을 깨닫자 살짝 고개를 숙이며 정중한 인사를 건네왔다.


"풍기는 기운으로 보아 형벌의 신 엘뤼엔님이시군요. 만나 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그러는 너희들은 드래곤인가? 블랙일족이로군."


드래곤이라는 말에 나는 다시금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고 있었다. 
그 중 대답한 자는 안색이 나빠 보이는 청년 쪽이었다.


"맞습니다. 저는 블랙 드래곤 일족의 수장, '라이칸 블랙 디아곤'이라고 합니다. 제 옆에 있는 녀석은 아들인 메세테리우스입니다."

"너희들의 이름엔 관심 없다. 여긴 무슨 용무지?"


시비 거는 듯한 엘뤼엔의 말에도 수장이라는 드래곤의 얼굴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잠시 말없이 라피스의 모습에 시선을 보내던 
그는 곧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저 녀석을 자연으로 돌려보내려고 왔습니다. 저대로 두면 인간들에 의해 시체가 악용될 수 있으니까요."

"흐응~ 동족의 명예를 지키자는 건가?"

"그런 의미도 있고, 저런 못난 아들이라도 제 손으로 직접 보내는 편이 마음에 위안이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나는 멍하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아들이라니! 그럼 라피스가 저 드래곤의 자식이라는 소리인가? 
그러고 보니 라피스로부터 아버지가 블랙드래곤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트로웰의 계약자라고 했던가?


'으음···안색이 안 좋은 건 그래서였군."


계약된 정령왕이 연속으로 두 번이나 역소환 되었으니, 제 아무리 드래곤의 수장이라도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은 당연했다. 
저런 몸으로도 아들의 화장을 치르기 위해 직접 찾아온 것을 보니, 그가 얼마나 라피스를 아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왠지 가슴이 따끔하게 아파와 나는 슬그머니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라피스가 죽은 것은 나 때문이다. 
저 드래곤들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용서하지 못할 원수나 다름없는 것이다.

비난당하는 건 상관없었지만, 그런 식으로 또다시 라피스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그들의 모습을 외면하고 있는 사이, 엘뤼엔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한 손을 휘저으며 시큰둥하고 대답하고 있었다.


"너희들 좋을 대로 해라. 나는 여기 뒷수습만으로 충분히 귀찮으니까."

"뒷수습이라면···"

"이렇게 야단이 났는데 목격한 인간이 없을 리 없지. 어디보자, 기억의 시간을 과거로 돌리면 되려나?"

"인간들의 기억을 지우실 생각이십니까?"


무척 의외라는 듯이 묻는 블랙 드래곤 수장의 말에 엘뤼엔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니···그건 아니지만. 왜 그런 번거로운 방법을? 기억하면 기억하는 데로 남겨둬도 괜찮으실 텐데요."

"인간들은 쓸데없는 환상을 지어내는 종족이니까. 나는 진실이 왜곡되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없었던 일이 되어버리는 쪽이 낫거든."

"아아. 하긴···지금 일을 목격한 인간이라면, '신들의 전쟁'이란 거창한 제목이 붙어도 이살할 게 없군요. 
그리고 전쟁이 일어난 이 땅은 성역(聖域)이 되어 대대로 인간들의 추앙을 받게 되겠군요."

"그러니까 바로 그게 싫다는 거야."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엘루엔은 혐오감 가득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더니 주위에서 멀뚱히 서있던 다른 신들을 향해 삐딱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이만 신계로 돌아가. 중간계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도 슬슬 한계가 되었을 테지."

"우, 우리도 수습을 돕겠소, 엘뤼엔. 인간들의 기억도 그렇고, 엉망이 된 터전도 다듬어야 할 것이 아니오. 그래 혼자서는···"

"흐응. 그래도 책임의식은 있다는 건가? 그럼 알아서 고쳐 보던지. 엘, 너는 기절한 녀석들이나 전부 깨워라."

"으응···"


그러자 두 드래곤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나를 흩어보며 왠지 감탄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엘'이라면···혹시 정령왕 엘퀴네스가 바로 당신입니까?"

"아, 그게···"

"오오! 그렇군! 라피스 녀석이 말한 거랑 똑같잖아! 푸른색 머리카락에 눈동자, 딱 계집애처럼 생긴 얼굴!!"

"···뭐라?"


방금 그렇게 말한 것은 메세테리우스라는 이름의 드래곤이었다. 
그 역시도 수장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라피스와는 형제인 셈이다. 
내 표정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지자, 수장 드래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얼른 아들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메테! 정령왕께 말버릇이 그게 뭐냐!"

"쳇, 난 그냥 들은 대로 말 한 것뿐이라고. 여성체인 정령왕에게 계집애 같다고 한 게 틀렸나, 뭐?"

"윽! 난 남성체야!"

"그것 봐, 자기 입으로도 남성체라고···엥? 나, 남성체?"


낄낄거리며 내 말을 받아 이으려던 녀석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달리 형제겠는가! 누가 피 섞인 드래곤 아니랄까봐 어째 하는 짓이 이렇게 똑같은 거야!


"헤에? 정말 남성체야? 거짓말이 아니라?"

"메테, 너 이 녀석! 에, 엘퀴네스, 미안합니다. 워낙 철이 없는 녀석이라···"

"그치만 아버지! 저 얼굴이 어떻게 남성체가 될 수 있어? 언제부터 남자 녀석들이 저렇게 곱상한 얼굴이었다고? 
난 라피스가 엘퀴네스에게 목맨다고 하길래, 정령왕과 드래곤의 희대의 로맨스를 기대했단 말이야! 아! 
설마 라피스가 여자 역이었던 거야?"

"메세테리우스!!"


설마 라피스보다 나를 더 열 받게 만들 존재가 나타날 줄이야! 
이래서 세상이 넓다고 하는 건가? 말이 필요 없는 녀석이라는 생각에 나는 즉시 얼음창을 만들어 희희낙락거리는 블랙 드래곤을 향해 
집어 던졌다.

쐐애액! 콰앙!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차가운 무언가가 지나가자, 메세테리우스는 본인은 물론, 내 옆에 있던 엘뤼엔까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들을 가뿐히 무시한 나는 잔뜩 질려있는 드래곤을 향해 생긋 웃으며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해봐. 내가 뭐라고?"

"힉! 너, 너 무슨 짓이야! 다짜고짜 공격을 하다니?"

"까부는 녀석은 그 자리에서 척살하라는 교훈을 얻어서 말이야. 안 그래도 열 받아서 미칠 것 같은데 부채질 하지 마. 
다음번엔 네 몸에 맞출 거다."

"···무, 무슨 정령왕이 이래? 완전히 성격 파탄자잖아!"

"아하. 창에 맞고 싶다고? 그런 식으로 돌려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듣거든?"

"헉!! 아, 아버지~~"


내가 다시 얼음창을 꺼내들자 메세테리우스는 기겁한 얼굴로 아버지인 수장 드래곤에게 매달렸다. 
라피스보다 배짱도 없고, 겁도 많은 녀석이 대체 뭘 믿고 말을 함부로 하는 거지?

그를 바라보는 내 눈초리가 점점 사나워지자, 수장 드래곤이 얼른 사죄의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실례가 컸습니다. 이 녀석이 워낙 함부로 하는 성격이라···아직 어려서 그런 거라 생각하시고 용서하십시오."

"3500살이 어린나이인가요?"

"아하하하. 그,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드릴 말이···"


하지만 이런 대립적인 구도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시벨리우스와 이프리트, 그리고 이사나와 알리사들이 
나를 발견하고 달려왔기 때문이다. 아마도 미네가 돌아다니면서 그들응 직접 깨운 듯 했다.


"엘! 무슨 일이야? 어, 어떻게 된 거야?"

"다친 곳은 없어? 엘, 너 아까 폭발에···"

"대부!!"

"엘님! 괜찮으십니까? 라피스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오던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을 떡하고 가로 막은 거대한 형체를 발견하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것이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라피스의 본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엘? 이 드래곤···라피스님 맞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어오는 이사나의 목소리에 나는 들고 있던 창을 힘없이 내리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헉하고 숨을 들이킨 일행들이 머뭇거리며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라피스님이 왜···"

"죽었어."

"응? 바, 방금 뭐라고 했어, 엘?"

"라피스가···죽었어."

"!!"


일행들은 순식간에 굳은 얼굴로 나와 라피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크게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저마다 믿을 수 없다는 뜻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것을 못 본 척 무시하며 나느 두 주먹을 꽉 쥔 채 입술을 악물었다. 간신히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나를 보호하다가 죽었어."

"엘···"

"처음 다쳤을 때···이미···드래곤 하트가 파괴됐었대. 데르온···당신은 알고 있었죠?"

"···큭. 역시 그랬군요.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라피스님이 워낙 완강하시기에, 저는 제 생각이 틀렸다고만···"


그렇게 대답하는 데르온의 얼굴은 마치 쓴 나물이라도 삼킨 듯 찌푸려져 있었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으며 얼른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죽은 녀석은 아무리 애써도 돌아오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울어봤자 일행들의 마음만 더 무겁게 할 뿐인 것이다. 
게다가 엘뤼엔이 그를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준다고 했으니까, 아직은 완전한 이별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바보 같은 녀석이 그런 부상을 당하고서도 입을 다물고 있었어. 다시 만나기만 해봐. 절대 가만 안 둘 거야."

"호오, 좋은 생각이다, 아들. 많이 강해졌구나."


그러자 내 혼잣말을 들은 엘뤼엔이 장하다는 눈빛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 명의 블랙드래곤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침울해진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제법 큰 폭발이었는데도 그것에 휩쓸려 피해를 입은 인간들은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단순히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그것 역시 카노스의 배려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결과적으로 손해를 입은 것은 다 부서진 건물과 
엉망이 된 자해들뿐이었떤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신들이 입으로 '명령'하자 알아서 원래의 자리를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언젠가 엘뤼엔이 부서진 신전을 고쳤을 때 썼던 '언령'을 이용한 것이다. 
완전히 가루가 된 잔해가 순식간에 멀쩡한 건물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며 나는 새삼 신들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었다.

인간들의 기억을 지우는 작업(?)도 생각보다 훨씬 간단했다. 
그저 한 신이 눈부신 태양을 하나 띄워 놓은 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던 것이다.

햇살을 받은 인간들은 모두 자신들이 목격했던 장면을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잊었다. 
그것은 건물 속에 숨어있거나 그늘에 있던 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번 일에 직접 가담한 자들은 예외가 되어 이사나나 알리사들은 멀쩡했지만 말이다.

그 즈음 두 명의 블랙 드래곤은 애초에 이곳을 찾아온 이유-라피스를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의식을 벌이기 시작했다. 
본래의 수명을 다 채우고 죽게 되면 알아서 자연으로 회귀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이렇게 직접 의식을 벌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수장 드래곤이 경건한 표정으로 주문을 외우는 내내 우울한 얼굴로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위대한 드래곤의 신이여···지금 그대의 아들이 이 땅에서 젊은 생을 마감하였으니 부디 그 육체를 받아주소서. 
그 피는 강물로, 그 뼈는 바위로, 그 살점은 흙으로 채우소서···"


의식을 치르기 전 수장 드래곤은 단순히 형식적인 주문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을 듣는 순간 엘뤼엔은 팍 얼굴을 찡그리며 연신 
투덜거리기에 바빴다.


"흥, 위대한 드래곤의 신은 무슨 얼어죽을···"


다행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신중에서 드래곤의 신은 없었던 듯, 의식이 진행되는 내내 신들은 쿡쿡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런 울지도 웃지도 못할 뻘쭘한 분위기 속에서 라피스의 몸은 천천히 화려한 불길에 휩싸였다. 
누군가가 일부오 태운 것이 아니라, 그의 몸 자체에서 발화된 것이다.

파앗! 화르르륵!


"헉! 뭐, 뭐야?"


라피스의 몸이 불길에 휩싸이자 나는 놀란 표정으로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내 옆에서 같이 지켜보고 있던 블랙 드래곤 메세테리우스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의식이 완료된 거다. 녀석이 레드 드래곤이라서 불에 태워지는 거야. 
우리 드래곤들은 죽음의 순간, 각 속성의 특징을 따라 육체가 사라지거든."

"속성?"

"그래. 레드 드래곤은 불의 속성이고, 반대로 블루 드래곤은 물의 속성이지. 그래서 라피스더러 돌연변이라고 한 거야. 
불의 속성인 주제에 물의 정령왕을 소환하려고 애쓰는 괴짜였으니까."

"그럼 블랙 드래곤은···"

"우리는 흙이 되어 흩어지지. 땅의 속성이거든. 아버지가 트로웰의 계약자라는 거 몰랐어?"

"아, 그거야 알지만."

"아무튼 이번에 그 트로웰이 역소환되는 바람에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고. 수장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으니까. 
그러고 보면 악신이 대단하긴 대단한가봐? 정령왕들이 대책 없이 당하다니."


거기까지 말한 메세테리우스는 다시금 불길에 잠식되어 가는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뭔가 시원섭섭하다는 감정이 짙게 드러나 있었다.


"이제야 녀석이 죽었다는 것이 실감이 들어. 소식을 들었을 땐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동생인 주제에 힘은 무지 세서, 난 나보다 훨씬 오래 살 줄 알았거든.
"

"···미안해."

"엥? 왜 네가 사과를 해?"

"하지만 라피스는 나 때문에···"

"하아? 뭔 소리를 하는 거냐. 그 녀석이 죽은 건 순전히 자기 탓이야. 
드래곤 하트라는 건 원래 배 부위에 있긴 하지만, 자신의 의사에 따라 위치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고. 
그게 파괴됐다는 건, 녀석이 그만큼 대처가 늦었다는 거야. 단순한 연습 부족이지."

"연습 부족?"


메세테리우스는 내 황당하다는 표정에도 아랑곳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대처가 늦었다는 건 그만큼 순발력이 약하다는 거잖냐. 마법 연구한답시고 매일 같이 레어에 처박혔을 때부터 알아봤지. 쯧쯧. 
녀석은 드래곤으로서 대성할 타입이 아니었어. 천재면 뭘해? 드래곤의 로망을 모르던 놈이었는데."

"드래곤의 로망이라니?"

"보다 많은 유희를 섭렵하여 자랑거리를 쌓는 거지! 근데 라피스 놈은 유희를 보낸 숫자가 손가락으로 꼽거든. 
그것도 10년도 안 되서 그만드기 일쑤였고. 오직 엘퀴네스의 소환에만 미쳐있던 놈이니···"


이 녀석이 라피스보다 더 한심히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나는 동정어린 눈빛으로 블랙일족의 수장이라는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왠지 지난날의 그의 용생이 파란만장하게 느껴지는 건 내 생각만이 아닐 것이다.


"아무튼 녀석도 소원을 이루고 죽었으니까 더 바랄게 없겠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너를 고맙게 생각한다. 
너로서는 그리 탐탁치 않은 계약이었겠지?"

"별로···도움 받은 것도 많았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오히려 이득이었던 점이 많았던 것 같아."

"헤에. 진심이냐? 특이한 취향이군. 그런 독설가에 제멋대로인 녀석에게 무슨 도움을?"

"그렇게 멋대로이진 않았어. 적어도 부탁받은걸 거절한 적은 없었으니까. 나대신 죽어주겠다고 했었어.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게 돼버렸어."


그 말에 메세테리우스는 이해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억였다.


"드래곤들은 아무리 가벼운 말이라도 허엄을 하지 않아. 한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고 해서 '약속의 종족'으로도 불리지."

"그렇구나. 그런 줄 알았으면, 그때 무슨 수를 써서든 취소하게 만들었을 텐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전혀 몰랐어. 
무슨 일이 생겨도 끝까지 살아남을 녀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흐음. 솔직하게 말해봐. 너 이중인격이지?"

"···뭐야?"

"아, 아니, 아까 나한테 창 던질 때하고는 표정이 너무 달라서. 하하하···정령왕들은 모두 그런가? 
트로웰도 평소엔 얌전한데 잘못 건드리면 엄청 무섭거든."


나는 찔끔한 얼굴로 변명하듯 대답하는 메세테리우스를 한심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혹시 라피스의 성격이 삐딱해진 건 이 녀석 때문이 아니었을까?

 

 

라피스의 육체를 태우던 불길은 그의 몸이 완전히 재로 변해 사라지고 나서야 완전히 사르라 들었다. 
그 즈음에는 이미 주변을 정돈하는 일들도 거의 마무리가 되어, 페르데스와 엘뤼엔을 제외한 신들은 모두 신계로 돌아가게 되었다.

상황이 대충 정리된 것을 확인한 이사나가 가장먼저 한 일은, 그의 군대를 찾아가 지휘관을 만나는 것이었다. 
기억이 지워진 탓에 좀처럼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던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이사나를 보고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며 감격해 했다.


"화, 황제폐하?"

"세, 세상에! 황제폐하시다!"

"황제폐하께서 오셨다!"

"와아아아~"


어린아이처럼 환호하는 기사들의 모습에 이사나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군대의 지휘관인 스피어 남작이 달려 나와 얼른 부복하여 소리쳤다.


"신(臣)위칼레인 폰 스피어가, 황제폐하를 뵙습니다!"

"아아, 그동안 노고가 많았소, 스피어 자작. 아군의 피해는 어느 정도 입니까?"

"예! 다들 미미한 경상에 그쳤을 뿐, 죽은 자는 없었습니다. 감히 폐하께 대항하던 무리들은 모두 잡아 포박하였고, 
나머지 기사들이 황성 안으로 들어가 반역의 주모자를 찾고 있으니, 이제 마무리만 남은 셈입니다."

"그렇군."


신들의 기억 조작력(?)이란 게 어찌나 뛰어난지, 그들은 없어진 기억에 대해선 전혀 의심조차 품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황성으로 쳐들어가서 군대와 맞서 싸워 이긴 것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사나는 그 점에 무척이나 안심하는 듯 했지만, 사람들 앞에서 내색하지는 않았다.

바로 그때 성 내부에 들어서 있던 기사들 중 몇 몇 사람이 뛰어나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작님! 황성 지하에서 어린아이들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뭐라? 반역자들은?"

"저어,그게···대다수의 주모자는 이미 죽은 듯 합니다. 이번 일에 가담했던 귀족들 중 5명의 시체를 방금 찾았습니다."

"흥! 스스로 자멸한 건가. 살아있는 놈들은 모두 포박하여 무릎 굻려라! 하인이나 하녀들도 마찬가지다!"

"예! 명령 받들겠습니다!"


신속하게 대답한 기사는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 방금 들은 명령에 대해 전달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 성안 어딘가에는 몸을 숨긴 대공도 있을 것이다.
이번 악신의 일에 직접 가담한 자들의 기억은 내버려두었으니, 그 또한 자신의 일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게 
틀림없었다.

이사나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아까부터 잔뜩 굳은 얼굴로 성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알리사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걸었다.


"이사나씨.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어. 긴장 풀어. 정말 괜찮겠어?"

"아, 으응. 걱정해 줘서 고마워, 알리사. 그냥···결국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조금 복잡해진 것 뿐이야."

"음. 쉽지 않은 만남이겠지만, 어차피 이젠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렸잖아? 그러기엔 여러 가지로 희생이 너무 컸어."

"그래, 알리사. 네 말이 맞아."


이사나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알리사의 볼에 옅은 홍조가 감돌았다. 
그 의외의 전개에 나는 놀란 얼굴로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이건 완전히 로맨스에 등장하는 연인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저 두 사람이 언제부터 저렁 사이가 된 거지?

내가 호기신 어린 표정으로 빤히 두 사함을 바라보자, 근처에 있던 메세테리우스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뭘 그렇게 봐?"

"아니, 저 두 사람 사이가 좋아보여서···헤에. 이렇게 되면 내가 억지로 이어주지 않아도 되는 건가?"

"이어줘? 정령왕들은 그런 일도 해?"

"그건 아니고···원래 친구가 잘 되는 모습을 보면 기분 좋잖아?"

"그런가? 난 잘 이해 안 되는데. 그런데 저 인간은 너한테 어떤 존재지? 정령왕인 네가 인간을 돌보다니 별일도 다 있군."

"아아, 내 계약자야."

"켁. 계약자? 라피스가 그걸 가만히 뒀단 말이야? 독점욕이 워낙 강한 녀석이라, 절대 계약하지 못하게 방해했을 것 같은데?"


이미 계약해버린걸 무슨 수로 방해하겠는가? 나는 피식 웃으며 당시의 상황을 대충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메세테리우스는 그 말에 납득하기 보단, 오히려 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되어 중얼거렸다.


"별일이군. 그 녀석 성격이라면 자기보다 먼저 계약한 녀석 따윈 당장 죽여서라도 독점했을 텐데."

"그랬다간 내가 그 녀석을 죽였을걸."

"헤에, 그렇군. 너도 꽤 제법인걸. 녀석을 다루는 방법을 확실히 알고 있었던 것 같군."


그 뒤 블랙 일족의 수장 드래곤과 메세테리우스는 감단한 작별인사를 마직막으로 자신들의 영역으로 되돌아갈 뜻을 전했다. 
자식과 형제가 죽었는데도 끝까지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모습에서, 나는 드래곤 세계의 일부를 경험하게 된 느낌이었다.

그들은 같은 피가 흐르는 같은 편, 또한 같은 종족이지만, 결코 '우리'라는 울타리에는 섞일 수 없는 존재였다. 
어쩌면 이 세계에 태어난 의미를 그저 가볍게 머물다 가는 방랑자라고 여기는 걸지도 모른다.

라피스도 그래서 인사 없이 가버린 걸까? 왠지 씁쓸해진 기분에 나는 잠시 동안 빤히 수장 드래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어색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엘퀴네스?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니에요.아참. 몸은 괜찮으신 건가요? 역 소환이 두 번이나 일어난 걸로 아는데."

"으음. 뭐 어쩔 수 없지요. 상대가 다름 아닌 악신이었으니···이정도의 고통은 오히려 가볍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트로웰 본인이 느낀 고통이 훨씬 더 컸을 테니까요."

"그야 그렇지만, 뭐 일부로 생고생할 필요는 없죠. 잠깐만 이대로···"


나는 그가 의아하게 바라보는 것을 무시하며 곧바로 치유술을 시전 했다.
파앗! 밝은 빛이 터져 나와 수장 드래곤의 몸을 감싸자, 그와 메세테리우스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몸을 감싸던 은색의 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는 한결 나아진 안색으로 내게 감사인사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엘퀴네스에게 치유능력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군요."

"몸은 이제 괜찮으신가요?"

"네. 한결 좋네요. 아니, 평소와 똑같을 정도입니다. 정말 굉장한 능력이군요."

"···그래봤자 악신에게 당한 상처에는 전혀 먹히지도 않았는걸요. 라피스가 다쳤을 때도 효과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하. 그것이 그 아이의 운명인 겁니다. 아무튼 당신은 지금까지 들어오던 바와 굉장히 많이 다른 분이군요.
라피스가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건···"

"이제 곧 명계에 가시게 될 테지요? 녀석을 만나면 우리의 안부도 전해주십시오. 
어차피 망각의 물에 의해 잊혀 질 인연이지만, 그래도 한때나마 소중한 아들이었다고. 아참 이 말도 전해주시겠습니다? 
'네게 인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서 무척 놀라웠다'고요."


···그 말을 들으면 엄청 화낼 것 같은데? 내가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두 드래곤은 만족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몸을 돌이켰다. 곧 그들의 몸은 밝은 빛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텔레포트 마법을 시전 한 것이다.


"어라? 엘. 여기서 혼자 뭐하고 있어?"

"앗, 트로웰!"


드래곤들이 사라지자마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트로웰이었다. 이 얼마나 귀신같은 타이밍인가! 
설마 일부로 이때를 노리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이런 내 짐작이 어느 정도 맞았는지, 그는 슬쩍 딴청을 피우며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아하하하. 라이칸은 잔소리가 심해서 말이야. 칠칠치 못하게 역소환을 당했다고 엄청 구박할게 뻔하거든."

"못 말려. 몸은 이제 괜찮은 거야? 또 역소환 됐다는 말 듣고 걱정했었어."

"응. 멀쩡해. 이번엔 기운의 회복도 빠른 편이었고. 아아, 그나저나 그 사이에 이미 모든 게 다 정리가 된 모양이네? 희생된 신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트로웰에게, 나는 그가 역소환 된 이후의 자세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카노스가 희생된 일부터 시작해서, 라피스가 죽은 일까지. 자신이 없던 동안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들은 그는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그는 특히 카노스가 죽었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은 듯이 보였다.


"으음. 그렇구나···카노스가···"

"처음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것 같아. 아마 봉인진이 실패하지 않았더라도 페르데스가 소멸의 의식을 외우는 것을 방해하려고 했을 
거야."

"그렇겠지. 역시 이번 일엔 내 혜안이 그리 먹히지 않은 것 같군. 이런 식으로나마 해결이 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참, 엘. 이젠 왼손의 그 장갑···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응? 아아. 그렇구나."


트로웰이 말한 것은 언젠가 카노스가 손등에 문장을 새겨준 이후로 쭈욱 착용하고 있었던 장갑이었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데다 전혀 불편하지 않아 그동안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나는, 그때서야 내가 아직도 장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곤 머쓱한 표정으로 벗겨냈다. 그의 말마따나 이젠 더 이상 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윽고 드러난 손등에는, 처음 보았을 때 배트맨이라고 중얼거렸던 마신의 문장이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뒤였다. 
그것을 보니 새삼 카노스가 소멸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모든 게 다 끝났다곤 하는데···실은 전혀 끝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

"여러 가지 일이 있었으니까. 첫 유희치곤 너무 파람만장했어. 시작부터가 평탄치 않았잖아?"

"으응."

"그리고 분명히 말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야. 이번은 내 혜안을 믿어도 좋아."

"···그게 무슨 뜻이야?"


나는 조급한 얼굴로 물었지만 트로웰은 어깨를 으쓱 해보일 뿐, 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다만, 부드럽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통해, 그리 불안한 미래만은 아니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황제 폐하!!"


그때 이사나의 기사들이 황성의 지하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유카르테 대공을 찾아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로인해 처음으로 보게 된 그는 제법 준수한 생김새에, 눈 끝이 날카롭게 올라가 있어, 고고한 학자의 이미지를 풍기는 남자였다. 
누가 혈육 아니랄까봐 전체적인 인상이 이사나하고 많이 닮은 편이었지만, 대공 쪽이 좀 더 신경질적이고 퇴폐적인 분위기였다.

기사들에게 온몸이 포박당한 채 허무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눈동자는, 지난 몇 십 년 동안 투자한 과업을 한꺼번에 잃은 
충격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한참동안이라 빤히 바라보던 이사나는, 곧 격한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타인의 생명을 장난감처럼 여긴 일이 자랑스러우셨습니까?"

"······"

"저는 숙부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모습을 보니, 측은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군요. 
당신은 한낮 권력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인간으로서 마지막 양심을 저버린 느낌은 어떤 기분입니까?"

"···큭!"


그의 도발적인 말에 대공은 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사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똑바로 마주 노려보며 주위의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지라 감옥에 가두어라. 처벌은 나중에 할 것이다."

"예, 폐하!"

"자, 가자! 똑바로 일어서라!"


이사나의 명령을 들은 기사들은 거친 동작으로 대공의 몸을 일으키며 그를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맥없이 그들에게 잡혀 가던 대공이 처절한 목소리로 잡혀 가던 대공이 처절한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넌 죽어도 모른다, 이사나!! 내가···내가 어떤 심정으로 이 황성에 있었는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다 가진 네가 어떻게 아냔 말이냐!"

"!!"

"무례한! 감히 황제폐하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담다니!"


그를 끌고 가던 기사 중 한명이 기겁을 하며 호통을 쳤지만, 대공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형님이 성황(聖皇)이라고?! 흥! 그 성황이란 자가 황제가 되기 전에 자신의 형제들을 어떻게 했는지 말해볼까! 
난 살아남기 위해 신관이 되어야 했다! 계승권을 가진 형제를 모두 살해한 네놈의 아버지 때문에!! 
그런 자가 무슨 얼어 죽을 성황이란 말이냐!"

"아버지가···형제들을?"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던 듯.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 이사나의 눈동자엔 혼란스러운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자 대공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비웃음이 역력한 얼굴로 다시 소리쳤다.


"왜! 네 아버지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하하! 그럴 테지! 
황제가 된 이후의 그는 꽤나 건실한 삶을 살았으니까 말이다. 
결국 네놈의 아버지도 지하에서 썩어가는 형제의 시체를 밟고 올라선 자란 소리다! 
그에게서 살아남으려면 권력이 필요했다! 강대한 힘이 필요했다고!! 그래서 그걸 추구한 것이 뭐가 나쁘단 말이야!"

"······"

"몰랐다고 말하고 싶겠지! 하하하! 그래서 넌 아직 어린 거다! 어려서 세상물정을 모르는 철부지 꼬맹이에 불과할 뿐이야! 
그런 네가 이 나라를 맡을 수 있겠나? 책임질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어? 응?"

"이, 이놈의 감히 폐하께 무슨 망발을!!"


대공의 말에 당황한 기사가 제지를 하려고 하자 이사나는 한손을 들어 그것을 중지기켰다. 어느새 차분하게 돌아온 그의 눈동자는 
광기로 번들거리는 대공의 모습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적어도, 어린아이의 생명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희생시킨 자보다는 나을 겁니다."

"큭!!"

"선황(先皇)폐하에 대한 말은 꽤나 의외였습니다만, 그 때문에 당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킬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허울 좋은 핑계에 흔들리기엔, 당신하나로 인한 희생이 너무 컸습니다. 
게다가 난 죄인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이 아닙니다."

"큭!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냐!!"

"맞았다 해도 들을 이유가 없다는 소리입니다. 
선황폐하는 분명 과한 방법으로 황위에 오르셨을지 모르지만, 이미 모든 권력을 포기한척 하여 그 자리에서 살아남은 자에게 그런 
비난을 들으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네놈! 네, 네놈이!!!"

"뭣들 하느냐. 끌고 가라. 저자는 인간의 탈을 쓰고 추악한 짓거리를 해온 악마다. 동정의 여부가 필요 없다. 
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 물 한모금도 주어선 안 된다."

"예, 폐하! 명령을 받듭니다!"


그 뒤로도 대공은 악에 받친 얼굴로 떠들었지만, 그 소리는 곧 끌고 가던 기사의 제압에 막혀 맥없이 묻히고 말았다. 
이사나는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끝까지 대공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단호한 표정을 한 그의 두 눈은 한 인간의 추악한 몰락을 지켜보며, 자신은 절대 그러한 길을 걷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 후, 이사나는 주위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야 모든 게 끝났다. 다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그리고 터지는 우렁찬 함성! 기사들은 한 목소리로 이사나의 이름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이사나 황제폐하, 만세!!"

"황제폐하께 영광 있으라!! 악독한 대공에게 저주를! 우리의 위대하신 주군께 만세!!"

"이사나 폐하 만세!! 우리의 주군 만세!!"

"와아아아아!"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로 변한 주위를 보며 나와 트로웰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손꼽아 기다리던, 그들의 어린 주군이 다시 황성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 영혼의 행방 - 

 

그로부터 일주일 후, 이사나의 숙부이자 솔트레테의 대공인 유카르테 란느 솔트의 처형이 거행되었다. 
그는 반역자의 이름으로 교수대에 올라,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처형을 당했다.

하지만 지켜보는 사람들 중 누구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동정을 보내는 이는 없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이미 그가 모종의 이득을 위해 아이들을 잡아다 제물로 썼다는 사실이 온 천하에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는 카웰 후작을 비롯한 이사나의 최측근들과 친위 기사들 또한 참석하여, 그들의 주군인 이사나의 위용을 빛냈다. 
그 후 이사나는 약 한달 간 솔트레테 전역에 대대적인 축제를 선포했고,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백성들을 위로하며 앞으로 그들이 
살길을 도모해주었다.

그 밖의 군의 재정비와 중앙 귀족들의 대거 교체 등으로, 이사나는 황성으로 돌아온 이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알리사는 그 사실이 못내 불만인 듯 했다.


"대체 이사나씨는 언제쯤이면 짬이 나는 거야? 좀처럼 얼굴을 볼 수가 없잖아!"


하루 종일 내내 혼자인 것에 화가 난 모양인지, 다짜고짜 내가 머무는 방에 쳐들어온 그녀는 멀뚱히 앉아 있던 나에게 다가와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쩐지 말해야 상대가 바뀐 것 같지만, 마친 나도 무료했던 참이라 웃으면서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어서와, 알리사. 어쩔 수 없잖아. 이사나는 황제라서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아까 집무실에 쌓인 서류들 못봤어?"

"나도 알아! 그래서 보채지 않고 얌전히 있는 거잖아. 이사나씨만이 아니야. 트로웰, 시벨리우스님, 심지어 라온휘젠씨와 그 
측근들까지 다들 바쁘다고. 심심해 죽겠어!"

"헤에, 그래? 난 오랜만에 평화로워서 좋은데."


나의 대답을 들은 알리사는 아까전보다 더욱 얼굴을 찌푸리며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그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 혼자 떨어져 있었을 때부터 눈치 챘지만, 정말이지 답답한 것은 죽어도 참지 못하는 말괄량이였다.
저래가지고 어디 나중에 우아하고 고상한 황비가 될 수나 있을까?


'절대 무리지. 몬스터 잡으러 다닌다고 가출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게?'


내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는 꿈에도 모르는 알리사는 잠시 후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있잖아, 엘님! 다들 바쁜데 왜 엘님만 이렇게 한가한 거야? 엘님도 이사나씨의 최측근이잖아?"

"글쎄. 아마도 아버지가 뭐라고 한마디 언질을 준 것 같긴 한데···"

"아버지라면, 그 무지무지 잘생긴 금발 머리 남자분 말이지? 그 분이 뭐라고 했는데?"

"···그런 게 있어."

"엑. 그게 뭐야? 대답이 너무 불성실하잖아~~"


'내 아들 귀찮게 하면 다 죽인다.'라고 했던가. 그러고선 엘뤼엔은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한 이프리트를 떼어놓기 위해 다시 신계로 
돌아가 버렸다.
그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이프리트의 구박을 받았는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주제에 벌써부터 계모노릇을 하려고 한다. 
뭐,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산더미처럼 떠맡겨진 일 때문에 중지되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사나처럼 대단한 녀석도 없을 거야. 정령왕에 유니콘, 타 제국의 황자까지 마구 부려먹다니. 
그거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온 달까. 쿡쿡."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