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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소설] 정령왕 엘퀴네스 8권

by 아도비야 2021.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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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소설] 정령왕 엘퀴네스 8권 

 



8-1. 참아야 하는 것 (1)


해가 떠오르고 아침이 되자 나는 다른 일행들에게도 아스의 탄생을 알렸다. 새벽 내내 회의를 하느라 지쳐있던 사람들은 예상보다 빠른 알의 부화에 무척이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 알이 부화했다고? 벌써?”

“응! 이름은 아스모델이라고 지었어. 아주 귀여운 녀석이야.”

“와아! 정말로 알에서 아기가 나왔단 말이야? 그런데 그 아기는 어디 있어?”


갓 태어난 아기를 생각했는지, 기대의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던 이사나는 내 품에 아무것도 안겨져 있지 않는걸 보곤 의아하게 물었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내 뒤에 얌전히 서있던 아스를 일행들 앞으로 이끌었다. 그러자 아이와 시선이 마주친 사람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벌어졌다.


“자아~인사해야지, 아스? 이제부터 너와 함께할 일행들이야.”

“…인사?”

“만나서 반갑다고 하거나, 자기소개를 하는 거야. 별로 어렵지 않지?”

“일행들…마족? 왕이 먼저 인사해?”

“아니, 아니. 이 사람들은 마족이 아니니까 아스의 부하가 아니야. 내 친구들이거든.”

“대부의 친구?”


그제 서야 이해를 했는지 아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일행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순간 묘한 정적이 주변에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스모델이야. 만나서 반가워.”

“…그, 그래. 나도 반갑다. 그런데 생각보다 …크네?”

“…이게 정말 갓 태어난 아이?”


어리둥절한 시선은 어느새 나를 향해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내가 알고 있는 간단한 지식을 설명했다.


“놀랐지? 마족은 유년기가 굉장히 짧다나봐. 그래서 금방 이렇게 자란거지. 아마 한 달 후 면 나보다 더 클걸?”

“아~ 그러고 보니 전에 마신도 그렇게 말했었지! 그래도 설마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어.”

“있지, 그럼 알에서 있던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호기심으로 가득한 알리사의 질문에 대답한건 지금까지 잠자코 듣고 있던 아스였다. 아이는 내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나 이 사람들 알아.” 

“정말? 알에서 본걸 기억하나 보구나. 하긴, 나랑 라피스도 기억했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알아보는 게 당연하지.”

끄덕끄덕

“우와, 대단해! 그럼 누가 누구인지 말해볼래? 나는 누구야?”

“…알리사.”

“와! 정말 맞췄어! 그럼 이 사람은?”

“이사나?”

“맞았어! 너 정말 똑똑하구나! 그럼 이 사람은?”


여자아이라 모성본능이 뛰어난 건지, 또래(?)라서 궁합이 잘 맞는 건지 몰라도 알리사는 금세 아스에게 마음을 터놓는 듯 했다. 기대가 가득한 얼굴로 가리킨 사람-시벨리우스를 멍하게 바라보던 아스는 곧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퍼런 엘프.”

“크악! 누가 퍼런 엘프야, 누가!! 왜 나는 이름으로 기억하지 않는 건데!!”

“퍼런 엘프 아니야?”

“이왕이면 고상하게 블루엘프라고 해달라고! 그리고 나는 엄연히 시벨리우스라는 이름이 있단 말이다, 이 맹랑한 마족 꼬맹아!”

“아스는… 꼬맹이 아니야.”

“하! 이제 막 태어난 녀석이 꼬맹이가 아니긴! 남의 이름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걸 봐서도 너는 틀림없이 꼬맹이라고! 알겠냐?”


부들부들 어깨를 떨며 따지고 드는 시벨의 태도에 아스역시 기분이 나빴는지 작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화를 낼 거란 예상과는 달리, 아이는 그저 나를 바라보며 난감한 듯이 묻기만 했다.


“싸우면, 대부 곤란해?”

“에? 그거야 그렇지.”

“음…그럼 안 싸워. 그냥 아스 잘못으로 할래.”

“…!!…아아, 그래 착하다. 귀여운 녀석.”


이 얼마나 기특한 아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제 멋대로 구는 녀석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기만 했던 나로선, 아스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준 천사나 다름없었다. (한쪽에선 시벨녀석이 여전히 궁시렁 거리고 있었으나 무시하기로 하자.)

나이답지 않게 의젓한 아스의 행동을 본 일행들은 저마다 감탄한 얼굴이 되었다. 특히나 데르온의 감동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듯 했다. 그는 냉큼 다가가 아이의 앞에 부복하며 깊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마계 공작 ‘데르오느빌’이 주군께 인사 올립니다! 탄생을 경하 드립니다, 주군! 뵈,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데르오느빌? 부하 이름?”

“예, 예! 그렇습니다, 주군! 데르온이라 불러주십시오!”


감격이 듬뿍 담긴 그의 말에 아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난…왕이 될 거야.”

“그리 되실 겁니다! 마신께서도 그리 원하셨습니다!”

“있지. 음…자꾸…심장이 쿵쾅거리고 뛰어. 기운을 조절할 수 없어.”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증상입니다. 마족은 청년의 모습을 갖추기 전까진 육체의 밸런스가 일정하지 않으니까요. 그 때문에 제가 주군의 옆에서 보필하는 것입니다! 이 목숨을 다해 주군을 지키겠습니다!”

“…응…”


허무할 정도로 간단한 대화였지만 그 속에 흐르는 심오한 기운을 눈치 채지 못한 이는 없었다. 이순간의 아스는 그냥 예쁘기 만한 꼬마가 아니라, 전 마족을 호령하는 군주의 모습으로 보였다. 

붉다 못해 검게 보이는 눈동자나, 발 끝 까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 하다못해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까지 아이의 분위기를 더욱 진중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바로 타고난 카리스마라는 걸까?

가끔씩 보이는 이사나의 황제다운 면모도 놀라웠지만, 아스의 이런 모습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기에 더욱 감탄스러웠다. 역시 마족은 마족이라는 느낌이랄까.

그 순간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라피스가 흥미롭다는 듯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응~ 조절을 못하신다? 엄살도 강한 꼬마로군.”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엄살이라는 거다. 물론 지금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마력이 풀풀 뿜어져 나오긴 하지만, 적어도 녀석은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컨트롤이 불가능한 단계가 아니야.”

“그걸 어떻게 알아?”

“간단해. 퍼런 엘프의 말에 기분이 나빴으면서도 참았잖아? 갓 태어난 마족은 본능에 충실하기 때문에 분노와 살의에 굉장히 민감해. 자제력 없이 손이 먼저 나가는 녀석들이라고. 그래서 마족들은 성년의 모습을 하기 전까진 일정한 장소에 억압되어 교육을 받게 되지. ‘누군가를 위해 참는다’라는 것 자체가 이미 평범한 꼬맹이의 생각은 아니라는 거야.”

“헤에~ 과연 마신이 선택한 알이 라는 건가?”


아마도 라피스의 피 또한 그 부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데르온이 녀석에게 순수하게 호감을 갖게 된 것도, 아스가 ‘은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저 쉽게 넘어갈 일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이제까지 철없게만 보이던 라피스가 새삼 대단한 존재라는 사실이 느껴졌다. 예전에 녀석이 했던 말마따나, 드래곤은 정령왕의 도움이 필요 없는 그 자체로 완벽한 생물인 것이다.


‘흐음. 그렇게 치면 단순히 엘퀴네스라는 사실 때문에 저런 녀석을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 있는 거니, 나로선 오히려 행운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하긴,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어림도 없었겠지.’


시각의 전환이라고 해야 할까. 

어쩐지 세상을 편하게 살아가는 요령을 배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다음날이 되자 나와 라피스는 계획대로 황성에 가기 위한 준비로 서둘렀다. 내가 후작으로부터 수도로 올라가는 지름길에 대한 정보를 듣고 있는 사이, 한쪽에선 라피스와 이사나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글쎄. 나랑 엘이 가면 3천의 군사 같은 건 필요 없다니까? 뒤따라 오고 말고 할 것도 없다고. 그딴 건 여기 전력에나 보태.”

“그렇게 말씀하셔도 카웰형님은 납득하지 못하실 겁니다. 사람들 눈도 있으니 일단 그들은 라피스님이 맡아 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참. 귀찮은 건 질색이란 말이다. 이래서 인간들이란.”


전쟁 내내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짜증이 났는지, 우리 앞으로 할당(?)된 군사들을 거절하려던 라피스는 결국 이사나의 고집에 못 이겨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서도 녀석은 찌푸린 얼굴로 연신 투덜거렸다.


“대체 언제까지 아군들에게도 우리 정체를 속일 셈이냐? 드래곤과 정령왕의 개입을 너처럼 달가워하지 않는 녀석도 없을 거다. 이미 도움 받을 건 실컷 받고 있는 주제에.”

“네, 죄송합니다. 제가 욕심이 좀 많아서 그래요.”

“알긴 아니 다행이군. 뭐, 그 점을 역으로 이용하려고 들지 않는 건 기특하다만, 넌 너무 세상을 피곤하게 살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 그러다간 평생토록 원하는 여자 하나 못 얻을 걸? 명심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충고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약간 씁쓸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이사나의 모습에 라피스는 더 이상 빈정거리지 못하고 말없이 혀를 찼다. 받아주는 상대가 저래서야 놀려주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사나는 우리 중에서 라피스를 다루는 방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녀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잘 들으시오, 정령사님. 두 분이 먼저 출발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할 생각이 없소만, 황성을 치는 것은 반드시 후발진과 합류한 이후입니다. 두 사람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무모한 행동은 용납지 않을 것이오. 이쪽 지름길로 곧장 가다보면 에바스 평원이 나타납니다. 그곳에서 군사들을 기다렸다가 함께 진격하십시오.”

“흐음. 알겠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저희는 주변 동태를 파악해보도록 하죠. 대공이 다른 술수를 꾸미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후발진은 언제 출발하나요?”

“정령사님이 떠나고 일주일 후입니다. 이곳에서 출발하는 숫자는 천 여명이고, 나머지 2천은 폐하께 충성을 맹세한 스피어 백작의 사병들이 될 것입니다. 그들을 이끄는 대장의 이름은 위칼레인 폰 스피어로, 백작의 차남이자 어릴 때부터 검술 면에서 크게 돋보인 자였으니 이번 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오.”

“스피어 백작이라…수도에 근접한 영지의 귀족이군요. 어쩌면 이들은 우리보다 먼저 약속장소에 도착해 있겠네요.”

“그들은 그곳에서 물자의 보급을 도울 것입니다. 이미 정령사님에 대해서는 설명해 두었으니, 함께 행동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생전 처음 보는 상황이라 해도 일단 나와 라피스는 이사나의 측근으로 분류되어 있으므로, 일행의 리더격이나 다름없었다. 우리와 합류한다는 사람들이 적어도 방해가 되지는 않을 거란 생각에 나는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격적으로 황성을 치려면 적어도 한 달은 걸리겠군요. 그 사이에 대공의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트릴 수 있다면…”

“물론 그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요. 그것은 앞으로 차분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아무쪼록 정령사님은 황성을 혼란하게 만드는 일에만 전념해 주십시오.”


단호한 후작의 부탁에 나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라피스의 모습을 찾았다. 그때 녀석은 이미 모든 출발 준비를 마친 후 데르온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태였다. 덤덤한 녀석에 비해 뭔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데르온은 굉장히 조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자 그의 얼굴은 거의 간곡해 보일정도로 일그러졌다.


“왜 그래요, 데르온? 무슨 일 있어요?”

“에, 엘님…그것이…”

“아스 녀석이 우리를 따라가고 싶다고 했다던데?”

“엥? 그게 무슨 소리야?”


본래 아스는 부화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곳에 남아있기로 되어 있었다. 아직 능력이 미숙한 어린 마족을 마왕의 세력이 판치는 수도에 데려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데르온 또한 같은 입장이었기 때문에 난처한 심정이긴 마찬가지인 듯 했다.


“그건 좀 곤란한데요, 데르온. 알다시피 수도는…”

“네, 저도 같은 말로 여러 번 주군을 설득했습니다만, 이번 일엔 고집을 피워야 겠다고 하시는 군요. 아무래도 엘님과 떨어지는 것이 불안하신 모양입니다.”

“으음. 하지만 마왕의 눈에 발견되기라도 하면…아니, 그 전에 다른 마족들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잖아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마 이곳에 있더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주군의 마력을 느낀 다른 마족들이 하나둘씩 찾아들 테지요. 보호구역에서 벗어난 어린 마족이란 그들에게 적당히 가지고 놀기 좋은 사냥감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그럼 데르온 혼자 힘만으로는 무리겠군요. 만약 대공이 이번 전쟁에 마족의 힘까지 끌어들인다면 더욱 주목을 받기가 쉬울 테니. 이렇게 되면 차라리 내가 데려가는 편이 나으려나?”


의견을 구하는 눈으로 라피스를 바라보자 녀석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당장 귀찮다고 거절할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꼬맹이가 쉽게 당할 거란 생각은 안하지만, 데르온과 같은 4대 공작의 마족이 온다면 사정이 달라지겠지. 그걸 생각하면 우리 쪽에 있는 것이 녀석에겐 안전할걸? 일단 너와 내가 확실한 방패역할을 해줄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마족들이 우리에게 몰린다면, 이곳에 남은 녀석들이 행동하는 게 아무래도 더 편해지지 않겠어? 반대로 너랑 나는 좀 피곤해 지겠지만.”

“한마디로 우리가 미끼 역할을 겸 한다 이 말이지? 하지만 그러다가 대공의 눈에 발각되면?”

“그래도 상관없지. 우리가 수도로 간다는 사실이 미리 알려진다 해도, 대공은 어차피 군대를 두 개로 나눌 수밖에 없어. 설마 드래곤과 정령왕을 몇 천으로 상대할 생각은 못하겠지. 그쯤 되면 이사나도 해 볼 만하지 않겠어?”

“헤에, 그렇구나. 라피스 대단하다.”

“훗. 당연한 소리를.”


내가 그저 ‘황성을 친다’라는 간단한 사실을 인식하는 동안 녀석은 앞으로 벌어질 여러 가지 상황을 궁리해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다지 내키지 않음에도 일행으로서 확실하게 협조해 주는 모습이 기특해서, 나는 이번만큼은 녀석의 잘난 척을 순순히 인정해 주기로 했다.


‘그나저나 블레스터는 어떻게 하지? 정말 이사나 혼자서 해낼 수 있을까?’


몇 번이고 괜찮다는 다짐을 받았지만, 마음속 한구석이 찜찜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사나의 능력을 못 믿어서가 아니었다. 이미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넘어버린 존재라 해도 상급정령인 시큐엘을 한꺼번에 다섯이나 불러낼 수 있는 그를 쉽게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친위기사들의 실력 또한 몰라보게 좋아지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좀처럼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내가 오히려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체 왜 이렇게 걱정이 되는 걸까? 정말 단순히 기분 탓일까?’


출발하기 직전까지 나는 내내 이러한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마도 마음 곳 깊은 곳에서 앞으로 일어날 본격적인 전쟁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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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하하; 오랜만이옵니다; 자아~ 손에 들고 계신 시퍼런 칼날들을 고이 감춰주시어요;;(삐질삐질)

그동안 슬럼프인지 뭔지, 좀처럼 글이 손에 잡히지 않더군요. 이제야 겨우 마음 추스리고 연재를 시작해볼 참이랍니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번 편은 일단 생존신고구요^^; 본격적인 8권 연재는 다음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편 제목은 '참아야 하는 것'인데요, 마땅한 제목이 없어서 일단 붙여둔 식이라, 나중에 언제든지 바뀔 수 있으며, 내용과 전혀 상관없이 진행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점 미리 양해 부탁드릴게요^^;; (출판본에선 제대로 수정하겠습니다.)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p.s- 7권 추가 부분 읽으신 분들~ 어째서 레오는 기억해 주지 않으시는 거예요. 흑흑. 상처받았...<-퍽! 노, 농담입니다;;


*** 아참! 잊어버릴 뻔한 한 마디~!!!! ***


독도는 일본 땅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우리 땅입니다! 와하하하하!! 세계 정복합시다!!<-응??

[정령왕 엘퀴네스] 8-2. 참아야 하는 것 (2)


“나~참. 그렇게 걱정 되면 몰래 처리하고 가면 되잖아.”


계속 안절부절하는 내가 답답했는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라피스가 슬며시 핀잔을 늘어놓았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일정을 서두른 녀석의 탓도 있었기 때문에 대답하는 내 말투는 그리 곱지 못했다.


“하루라도 빨리 가자고 재촉할 땐 언제고?”

“그거야 저택에서만 갇혀 있으니 지루해서 그랬지. 그래도 계속 걱정하고 있는 것보다야 이쪽이 편하지. 확실히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면 꼬맹이가 상대하기엔 버겁기도 하고.”

“응. 그건 그래. 미네르바의 부탁도 있고… 왠지 이대로 가면 후회할 것 같아. 하지만 이미 이사나한테 맡긴다고 말해버렸는데, 내가 처리하고 가면 섭섭해 하지 않을까? 자기를 믿지 못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몰래 하자고 하는 거지. 정령의 봉인만 해제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 뒤는 나한테 맡겨. 다 방법이 있으니까.”

“…?…”


자신만만하게 설명하는 라피스의 계획은 대충 이랬다. 

일단 내가 블래스터에게서 정령의 봉인을 해지하면, 녀석이 마법을 사용해서 그와 비슷한 느낌을 주도록 검의 능력을 향상 시켜 둔 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마법검을 만드는 셈이었다.


“사용하는 공작 본인은 뭔가 달라졌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이사나는 검이 바뀌었다고는 생각하지 못 할 거야. 최대한 바람 속성과 비슷한 마법을 걸어둘 테니까.”

“그럼 이사나한테 위험하기는 마찬가지 아니야?”

“전혀. 녀석한텐 시큐엘과 파이어 버스터가 있잖아. 여유 있게 가지고 노는 건 무리더라도, 이사나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할거다. 그 정도면 해볼 만하지 않겠어? 그리고 우리는 먼저 출발하는 것으로 해야 해. 그래야 다른 녀석들에게 우리가 미리 손을 썼다는 의심을 사지 않을 테니까.”


오오, 이게 바로 완전범죄의 현장? 제법 그럴듯한 설명에 나는 두고 볼 필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이사나들과 짧게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진 우리는, 수도로 이어지는 성문 앞에서 데르온과 아스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뒤 몰래 블래스터의 주인을 찾았다.

검에 봉인되어 있다곤 해도 정령 특유의 기운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어렵지 않게 진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점심 때 인지라 그들은 머물고 있던 여관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검의 주인은 10여명에 가까운 기사들과 멀찍이 떨어져 따로 자리를 마련한 상태였다. 

온통 검은 로브를 둘러쓴 음침한 분위기 탓인지 식당 안은 그들 외의 다른 손님은 없어보였다. 밖으로 열려진 창문으로 안의 상황을 파악한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래서야 접근하기가 쉽지 않겠는걸. 나야 자연계의 상태로 돌아가면 된다지만, 라피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마법을 걸려면 바로 쫓아와야 하잖아?”

“일단 봉인이나 해제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렇게 대답한 녀석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벌컥-여관 문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외모인데, 당당하게 혼자 들어 서기 까지 하니 사람들의 시선이 라피스에게 집중되는 것은 불을 보듯 당연한 결과였다.

녀석은 노려보는 기사들과 감탄을 연발하는 여관 주인의 시선을 깔끔하게 무시한 채 공작과 가까운 테이블에 다가가 거만하게 주저앉았다. 

그리곤 주문을 받으러온 종업원을 향해 간단한 점심 메뉴를 시킨 뒤, 내 쪽을 보며 살짝 눈짓을 했다. 어서 봉인을 해제하라는 뜻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걸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내 몸의 형체를 유지시키고 있던 마나들을 훌훌 털어내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자연계의 모습을 한 채 식당 안에 들어서는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기 중을 떠도는 수분을 느끼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다만 공작의 허리춤에 달려있던 블래스터 만이 희미하게 정령왕의 기운을 느끼고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이렇게 청명한 물의 기운이라니…설마, 엘퀴네스님 이십니까?

-맞아. 한 번에 알아보는 구나. 만나서 반갑다, 진.

-허억! 고귀하신 분이 이런 미천한 장소엔 무슨 일로…아아, 직접 나가 인사를 드리지 못하는 저를 용서하십시오, 왕이여…. 엘퀴네스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감격한 듯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마저도 차분한 느낌이었다. 명랑하고 쾌활하던 다른 진들에 비해 녀석은 제법 엄숙하고 진중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그니스도 이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가공할 만한 수다력을 잠깐 떠올린 나는 피식 웃으며 봉인을 해제하기 위해 블래스터의 검 집에 손을 가져갔다. 


-왕이시여?

-아아, 별 거 아니야. 너의 봉인을 해지해 주려고 하는 거야.

-네? 제 봉인을?

-그래. 미네르바의 부탁을 받았어. 그동안 검 안에만 있어서 답답했지? 금방 꺼내줄테니까 기다려.

-미네르바…께서 말씀이십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게 되묻는 목소리에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지금 이순간이 진에겐 면죄부가 내려진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은 인식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진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굴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얼마 전에…정령왕의 교체를 느꼈습니다. 무례한 질문입니다만…미네르바께서는 마지막까지 평안하셨습니까?

-왜 그런 걸 묻지? 지금까지 너를 버려두고 있던 그가 밉지는 않아?

-그, 그런! 저는 기쁜 마음으로 왕의 명령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왕을 미워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 제 잘못이었습니다. 그 간악한 남자의 마음을 알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었던 제 탓입니다.

-간악한 남자? 혹시 미네르바가 너를 선물했다던 그 사람?

-그렇습니다! 그 악독한 인간은 미네르바님을 배신하고 다른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눈치 채고 있었는데…왕께서 슬퍼하실까봐 말씀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일이 커진 것입니다. 전부 제 탓입니다…. 엘퀴네스님, 저는 봉인에서 나올 자격이 없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배신한 본인이 나쁘지, 그게 어째서 네 탓이야?

-하지만…

-미네르바는 너에게 미안했다고 전해 달랬어. 너를 봉인한 일이 마음 편치 않았었다고. 네가 이런 식으로 자책하며 인간의 손에서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는 더 슬퍼하게 될 거야. 그런 건 싫지?


내 물음에 녀석은 힘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검에 가해진 봉인의 압력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너는 바람이야. 이런 곳에 갇혀서 오랫동안 머물 성질은 아니지.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가도록 해. 이번 대의 미네르바도 분명 너를 반갑게 맞아 줄 거야.

-감사…합니다, 엘퀴네스님. 정말…감사합니다.


파아앗-

봉인이 완전하게 해지되자 진을 담고 있던 검신에서 눈부신 빛과 강렬한 바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자연계 상태의 정령에게만 보이는 것으로, 식당 안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공중을 휘돌던 빛들은 순식간에 뭉쳐져 투명한 청년의 모습을 만들어 내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약간 슬픈 표정을 한 진의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되찾은 자유가 어색한 듯 녀석은 머뭇거리며 내 주변을 맴돌기만 했다. 


-어디든 가도록 해. 네가 원하는 장소로.


내 말에 진은 지금까지 자신이 머물러 있던 검을 힐끗 바라보더니, 나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곤 열려진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날아갔다. 목적지는 정령계가 될 가능성이 컸다. 오랜 방랑에 지친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휴식이었으니까.


‘자아, 봉인은 해제됐고. 라피스 녀석은 이제 어떻게 할 셈이지?’


정령이 빠져나간 블래스터는 겉보기만 멀쩡했을 뿐, 이제 아무 쓸모없는 고철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검 자체는 장식적인 면만 강조한 식이라, 그리 전투 면에서 실용성은 없었기 때문이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라피스를 바라보았지만, 녀석은 천역덕스럽게 종업원이 가지고 온 식사를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무심코 검 집을 움켜쥔 공작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검의 능력이 사라진 것을 눈치 챈 것이다. 


“공작? 왜 그러십니까?”


원래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기면 그 장소에 있는 가장 낯선 사람이 추궁을 당하기 마련이다. 그는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상대편을 무시한 채 벌떡 일어서더니, 곧장 라피스가 앉아있던 테이블로 걸어갔다. 

스르릉. 탁한 빛을 띄운 검신이 순식간에 뽑혀 나와 막 스프를 먹고 있던 라피스의 얼굴을 겨냥했다.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을 텐데도, 녀석은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호오…이게 무슨 짓일까?”

“닥쳐라! 네 놈은 누구냐!”

“보다시피 점심 식사를 하러온 평범한 사람이오만? 무슨 문제라도?”


능청스레 묻는 말에 공작의 얼굴은 더욱 사나워졌다. 


“모른 척 할 생각은 말아라! 네놈이 클모어 후작의 저택에 산다는 것은 알고 있다. 대체 내 검에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검? 지금 나를 겨누고 있는 이 검을 말하는 건가? 흐~음. 아쉽지만 나는 대장장이가 아니라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는 걸. 겉보기엔 멀쩡한데? 그건 그렇고 말이지, 방금 식사하러 들어온 사람에게 이런 시비를 걸어도 되는 거야?”


그렇게 말한 녀석은 은근슬쩍 검 끝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호기심에 만져보는 것 같았겠지만, 나는 그 찰나의 순간으로 라피스의 마법이 시전 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증거로 화가 난 공작이 무심코 휘두른 검 날에서 강한 바람의 기운이 뿜어져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휘이익! 콰아앙! 사나운 공기가 휘몰아치자 라피스의 몸은 저만치 밀려가 넘어졌다. 그러자 공작은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의 검과 쓰러진 라피스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설마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으윽…다짜고짜 사람에게 칼을 휘두르다니. 이게 무슨 짓이야? 그러고도 당신이 기사인가?”

“아, 아니, 나는 그저…”

“바람을 내뿜는 검이라니! 하마터면 골로 갈 뻔 했잖아! 무방비의 상대를 다짜고짜 공격을 하는 게 어딨어? 정말 상식 이하의 인간이로군! 솔트레테엔 이런 사람뿐이 없는 건가? 이거 어디 무서워서 살 수가 있나.”

“…그 말은…자네는 솔트레테의 제국민이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는군.”


당황하던 것도 잠시, 공작은 탐색하는 시선으로 라피스의 위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녀석은 몸을 탁탁 털고 일어서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내가 그런 사정을 당신 같은 무뢰한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나? 아무튼 이제 솔트레테라면 지긋지긋해. 남 밥 먹는데 갑자기 칼을 들이밀질 않나, 기껏 도와준 여자는 함부로 치한으로 매도해서 쫓아내질 않나.”

“도와준 여자?”

“저택에서 나를 봤다면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얼마 전에 이곳 후작의 여동생에게 청혼을 한 남자가 있었거든. 하도 곤란해 하기에 내가 멋지게 쫓아내줬지. 그런데 저번에 손 한번 잡았다고 멋대로 치한으로 매도하잖아! 사람을 뭘로 보고! 물론 예쁜 여자긴 했다만. 흠, 흠.”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라피스를 주제도 모르고 귀족 영애를 넘본 간 큰 남자로 여기는 듯 했다. 잠시 침묵을 지킨 공작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자네는 이제 그 저택에서 나왔다는 소리인가?”

“아아. 안 그래도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라고 다들 술렁거리는 것도 싫고 말이야. 마지막으로 점심이나 맛있게 먹고 떠나려고 했는데, 당신 때문에 다 망쳤다고! 쳇. 어이, 여기 얼마지?”


푸념하듯 투덜거린 라피스는 종업원에게 식사 값을 치르곤 유유히 식당 안을 벗어났다. 그런 녀석의 뒷모습을 공작은 끝까지 바라보았지만, 수하를 시켜 뒤를 쫓게 하지는 않았다.

힐끔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밖으로 나선 나는,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없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서야 마나를 다시 불러 모아 형체를 유지시켰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던 라피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제 다 된 거냐?”

“그렇긴 한데…어쩌자고 그렇게 눈에 띄는 일을 벌인 거야? 좀 더 조심스럽게 할 수는 없었어?”

“뭐가 어때서? 기척이 예민한 녀석한테 몰래 접근하는 게 쉬운지 알아? 저런 놈에겐 정면 돌파가 더 확실하다고. 결국 멋지게 성공했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공작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네가 이사나파 라는 걸 알고 있었잖아. 아무리 변명했다곤 해도 너무 쉽게 놔준 것 같은데.”

“내가 타국민이라는 정보를 흘려서 그런 거야. 혹시나 다른 제국이 개입되어 있을지도 모르니 행동이 조심스러워 지는 거지. 아마 지금쯤 머릿속이 복잡해서 터질 지경일걸? 녀석이 조사하려고 마음먹을 때, 우리는 이미 황성에 도착해 있는 거지. 킥킥.”


상상만으로 좋아죽는다는 듯, 연신 히죽거리고 웃는 라피스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 지금 상황을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괜찮을까? 마법이 뛰어나다곤 해도 정령하고는 느낌이 다를 텐데. 휘두를 때마다 기운이 빠진다던가 하면…”

“그건 블래스터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괜찮아. 어차피 당장은 눈치 채기 어려울걸? 내가 아까 피어로 환각마법을 살짝 걸었거든. ‘이 검은 멀쩡하니 괜찮다.’라고.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진 쉽게 깨닫지 못할 거다.”

“…그렇군.”


찝찝하긴 해도 완벽한 마무리인 것 같았다. 나는 나대로 미네르바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마음이 편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이사나가 잘 해내기만을 바라는 일 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든 일이 잘 되었다고 느낀 순간, 머릿속을 강하게 죄여오는 것 같은 압박감에 나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릴 정도로 강한 통증이었다.


“윽!!…아야야.”

“엘? 왜 그래?”

“으으. …머리가 아파. …뭔가 느낌이 이상해.”

“이상하다니?”

“모르겠어. 자꾸 화가 나고…괴롭고…속이 매슥거려. 이건 아무래도…”


그렇게 말하는 사이 내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맺혀 주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물론 내 의지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를 위해 대신 울어주고 있는 기분이랄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야 나는 지금 이 감정의 원인을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정령이 울고 있어.”

“뭐?”

“나이아스가 울고 있어. 아주 슬프게. 나를 부르고 있어. 복수를 원하고 있어.”

“…흔하지 않은 일이군.”


처음 내가 울 때만 해도 당황한 표정이던 라피스는, 이제 상황이 파악 되었는지 차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벅차오르는 슬픔과 머릿속을 맴도는 누군가의 모습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삐쩍 마른 팔, 다리와 잘 먹지 못해 수척했던 얼굴. 중간계로 소환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던가? 아직 어리기만 하던 작은 꼬마에게 훗날 황성으로 찾아오라며 목걸이를 걸어주던 장면이 떠올랐다. 

지금 슬퍼하고 있는 정령은 그 목걸이 안에 봉인시켰던 나이아스였다. 


‘그 아이가 죽었구나.’


잠시 후 눈물을 멈추고 고개를 든 나는 라피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빨리 황성으로 가자, 라피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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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죽어라 쓰고나서 다 지워버리고 싶은 이 마음은 대체 어찌할 것인가.....

아무리 봐도 마음에 안들어요... 또 다시 도진 마감병;;; 이때는 어떤 글을 써도 마음에 안 든다죠..

낮에 올리려고 했는데, 결국 저녁까지 질질 끌고 말았네요. 겨우 5장이라고 해도, 쓸때는 하루종일이 걸린 답니다. 

폭참은 그야말로 제가 미쳐있을때나 가능한 일이어요.ㅠㅠ 그러니 조금 답답하시더라도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후후..<-어차피 곧 마감임;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정령왕 엘퀴네스] 8-3. 참아야 하는 것 (3)





이사나가 그의 친위기사들과 클리프 상단을 방문한 것은, 엘이 황성으로 출발한 낮시간을 한참이나 벗어난 후였다. 

목적을 위해 천한 신분의 사람(진실이 어찌되었든 간에)에게도 인정을 받으려 하는 황제의 소문은 이미 클모어 전역에 파다하게 퍼져있어, 거리마다 이사나의 모습을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한 상태였다.

떠나기 전 이사나는 시벨리우스에게 부탁해, 라피스가 걸어준 폴리모프 마법을 해제했다. 이제 더 이상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새하얀 은발과 보석 같던 금안이 사라지자, 원래의 푸른 눈동자와 짧은 금발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마법을 걸기 직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단 조금 더 성숙해진 얼굴은, 전체적으로 순한 이미지를 담고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한참동안 빤히 바라보던 그는 잠시 후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뒤에 서 있던 시벨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니까 적응이 안 되네요. 이상한가요?”

“흐음~. 이상하다고 해도 별 수 없어. 난 마법을 해제할 줄은 알아도 폴리모프를 시전 할 수는 없으니까, 그걸로 끝이라고. 내가 보기엔 이쪽이 더 너 같아서 좋은데, 뭘 그래?”

“그래요? 그럼 이전의 모습은 저 같지 않았나요?”

“글쎄…뭐랄까. 지나치게 미모가 강조 되서 별로 인간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어. 쉽게 다가가기 힘든 외모랄까. 엘과 라피스 덕분에 그다지 눈에 뜨이진 않았지만 말이야.”

“킥킥. 그건 그래요. 엘은 그 점에 대해선 별로 자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요. 사람들이 넋을 잃고 쳐다봐도 노려본다고 생각하고 기겁을 하더라고요.”


이사나의 말에 시벨리우스는 동조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4천 년 전 처음 그를 만났을 때부터 한결같이 변하지 않은 점이기도 했다. 비록 그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자신밖에 없었지만.

마신의 장난에 크게 데인 이후로, ‘엘’이란 존재에 대한 언급은 어느새 금기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말 하지 않는다고 해서, 시벨리우스가 ‘엘’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 지금의 엘퀴네스 또한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기약이 있다면야 언제라도 기다릴 순 있지만.’


자신 때문에 상처받는 친구의 모습을 보는 것은 괴롭다. 그러느니 차라리 자신이 조금 힘들어 지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겉으론 평온하기만한 그들의 관계는, 이렇듯 한사람의 의도적인 침묵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이어지는 이사나의 목소리에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어쨌든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니 기분이 묘하네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전부 꿈인 것 같아요. 다른 사람도 모두 놀라겠죠?”

“그렇겠지. 하지만 어차피 언젠간 겪어야 할 일 아니야? 잔말 말고 이제 그만 밖으로 나가보라고. 다들 기다리고 있을 거다. 지금 바로 상단에 가는 거냐?”

“그래야죠. 오늘 결과에 따라 다른 상단들의 협력이 좌우 될 테니, 반드시 인정을 받을 생각이에요. 애당초 그분이 제시한 조건을 이루었으니 잘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흥! 안 해주면 곤란하지. 누구 때문에 그런 고생을 했는데.”


던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슬며시 이를 가는 시벨리우스의 모습에, 이사나는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환상마법에 걸려 미쳐버렸던 기억이 없는 그로서는, 고단하긴 했어도 나름대로 추억할만한 여행이었다. 

물론, 덕분에 성검을 가장한 마검에게 시달리게 된 일은 그다지 달갑지 않았지만.

상단에 가면 알아서 해결 될 일이라 생각됐지만, 들고 가는 내내 또다시 수다 공격을 받을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기가 질리는 심정이었다. 

이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지금까지 ‘보관’이라는 명목으로 상자 안에 봉인(?)해둔 파이어 버스터를 꺼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사나의 손에 쥐이는 순간부터 호들갑스럽게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이게 얼마만이에요, 용사님! 그 동안 제가 보고 싶으셨죠? 아무리 성검이라지만 이렇게 고이 모셔지기만 하다니! 이래선 모처럼 검으로 만들어진 제 체면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요. 그래도 용사님을 위해서 견디고 견뎠답니다! 자아!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드래곤의 레어로 쳐들어가나요? 아니면 마신을 절단 내러? 개인적으론 두 번째 상황을 추천하고 싶지만, 모든 일엔 전부 순서가 있는 법이니 드래곤부터 때려잡도록 해요!>

“……”



정신 바짝 차리자! 

이사나는 속으로 수없이 중얼거렸다. 이제 그를 중재해줄 엘이 없는 이상 모든 일은 자신이 알아서 감당해야만 했다. 겨우 이 정도에 쩔쩔맨다면 누구의 앞에서도 검의 주인이라 나설 수 없게 될 것이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른 이사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랜만이야, 이그니스. 내 모습이 바뀌어도 알아보는구나.”

<모습이 바뀌었어요? 호호호! 저는 검에 갇혀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는 걸요! 단지 기운으로 주위를 분간할 뿐이에요. 그러고 보니 용사님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흐릿한 마나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네요. 아아! 설마 용사님은 그동안 저주에 걸려계셨던 건가요? 흉학한 괴물에서 드디어 찬란한 미소년으로 돌아오신 거군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훗훗훗. 모시는 용사가 미소년이면 즐거운 법이죠! 이왕이면 보는 눈이 즐거워야 더 멋져 보이지 않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용사님은 진정 제 주인님이 되실 자격이 있어요! 자아~ 그래서 드래곤은 언제 잡으러 가나요?>

“저기…일단은 먼저 상단부터 들려야 할 것 같은데.”

<상단? 아! 그러고 보니 이프리트님을 먼저 뵈어야 한다고 했었죠! 그 분이라면 반드시 용사님을 인정해 주실 거예요!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선택한 주인인 걸요! 멋져요, 멋져! 정령왕의 승인을 받고 출발하는 드래곤 퇴치라니! 누구도 감히 넘보지 못할 일정이 될 거예요!>


정신없이 이어지는 수다의 폭풍은 결국 이사나가 자진해서 패배를 선언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검을 부여잡고 비틀비틀 문을 열었다. 누가 보았다면 마검에 홀렸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모습이었다.



이사나가 문을 열고 나오자 가장 먼저 맞이한 사람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알리사와 라온 황태자였다. 당연히 은발에 금안을 가진 소년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던 그들은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나타나자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그의 손에 들린 검이 바론 던전에서 가지고 나온 파이어 버스터라는 것을 알아보고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이사나씨?”


그다지 기대하지 않고 물은 것이었으나 상대방은 즉각 반응을 보였다. 선해 보이는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자 두 사람은 본능처럼 그가 이사나 본인이 맞음을 알아차렸다.


“오래 기다렸지, 알리사. 미안해. 조금 할 일이 있어서.”

“헉! 저, 정말 이사나씨야?”

“응? 왜 그런 반응을…아참, 내 정신 좀 봐. 시벨님께 부탁해서 폴리모프 마법을 해지했어. 이제부턴 본래 모습으로 활동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조금 어색하지?”


그렇게 묻는 이사나는 이전의 동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요정 같은 모습과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생각보다 훤칠한 키라던가, 매끄러운 이목구비, 선량해 보이는 눈동자가 제법 남자다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서 였을까? 알리사는 자기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곤 살짝 얼굴을 붉혔다.


“뭔가…굉장히 의외네. 이제야 나보다 연상이란 느낌이 드는 걸?”

“하하! 칭찬으로 들을게. 요사이 키가 좀 큰 것 같아. 갑자기 시야가 높아져서 적응이 안 되는 중이야.”

“그, 그래도 어울려. 훨씬 멋있어 졌어.”


알리사의 칭찬에 혹시나 실망할까봐 걱정했던 이사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반대로 라온 황태자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두 사람만의 공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멀리서 이사나를 알아본 친위기사들이 환호하며 달려왔기 때문이다.


“세상에! 폐하!! 원래대로 돌아오셨군요!”

“와아~ 인상이 훤해지셨습니다! 예전보다 더 멋져지셨는데요?”

“이게 얼마 만에 보는 폐하의 얼굴입니까! 이런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니까요~”


주변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지만 이사나는 환한 얼굴로 기사들을 맞이했다. 


“하하. 다들 오래 기다렸지? 미안해. 어라? 알렉경 키가 나랑 비슷한 것 같은데? 원래 더 크지 않았던가?”

“폐하께서 자라셨으니 그렇지요. 선황폐하의 기골이 장대하셨으니, 앞으로도 더욱 크실 것입니다! 이 모습을 뵈니 겨우 안심이 되네요. 저는 마법 때문에 영원히 시간이 멈추실 줄만 알았거든요.”

“이제 제법 사내다우신 느낌이 풍깁니다! 거리에 나가면 모든 여인들이 폐하만 바라 볼 것 같은데요? 하하하!”


한 기사의 말에 알리사의 표정이 작게 일그러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기분이 나빠진 것이다. 

지금까지 이사나는 그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면서도 정작 여인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세상 어느 여자가 자기보다 아름다운 남자를 사귀고 싶어하겠는가!

그러나 마법이 풀린 그의 모습은 여느 여자라도 한번쯤은 돌아볼 듯한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카터스의 라온 황자가 큰 덩치와 훤칠한 키로 거친 남자의 매력을 뽐낸다면, 그는 단정한 분위기와 선한 눈동자로 자상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게 했다. 

이제까지 그의 주변에 여자라곤 자신 하나밖에 없었고, 다른 여자가 나타날 거란 생각을 해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알리사의 심정은 매우 복잡했다. 마치 자신의 것을 남에게 빼앗기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흡족했던 이사나의 변화가 갑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기분은 본인에게도 낯선 것이라 그렇게 생각하고서도 스스로 놀라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대체 내가 왜 이러지? 뭘 잘 못 먹었나?’


엘이 알았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반응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중에서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속으로 방황(?)하고 있는 사이, 화제는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것으로 흘러갔다.


“상단으로 가실 구성원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친위대 모두가 폐하와 함께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만.”

“전부 다 가는 건 그쪽에도 실례일 것 같은데. 두 세 사람 정도 동행하도록 하지. 알렉경, 케이경, 페리스만 따라와 줘.”

“네, 알겠습니다. 저어, 일행 분들도 함께 가시는 겁니까?”

“아니, 저택에 남아 있는 편이 좋겠어. 괜히 나와 함께 있다가 시선을 끌게 되면 안 되니까.”


그렇게 말한 이사나는 알리사와 라온 황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들도 내심 생각해 둔바가 있었으므로 큰 거부감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때서야 돌아가는 정황을 파악했는지 흥분한 이그니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꺅! 드디어 용사의 행진인 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아~ 흩날리는 꽃가루! 환호하는 백성들! 이 얼마나 고대하고 고대하던 순간이던가! 백마는 어디 있어요? 휘날리는 붉은 망토는?>

“헉! 이, 이게 어디서 들려온 목소리입니까?”

“귀, 귀신?”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기사들은 순식간에 경계의 태도를 취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사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검신을 툭툭 두드렸다.


“다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파이어 버스터가 말하는 거거든.”

“파, 파이어 버스터? 설마 폐하께서 들고 계신 그 검 말입니까?”

“응. 갑자기 말을 하니까 사람들이 놀라잖아, 이그니스. 그리고 행진이 아니라 그냥 상단을 방문하는 것뿐이야. 망토는 두르지 않을 거고, 말을 타기야 하겠지만 백마는 아니야.”

<엥? 그게 뭐에요? 모처럼 만의 외출인데 좀 더 근사하게 꾸밀 순 없어요? 용사님은 너무 소박하셔서 탈이에요. 흠. 좋아요, 저는 성검이니 마음 좋게 참아드리도록 하죠. 화려한 퍼레이드를 놓치는 건 아쉽지만, 원래 성검의 진정한 목적은 전투에서 빛을 발하는데 있으니까요.>

“그, 그래. 이해해 줘서 고맙다.”


삐질삐질 대답하는 이사나의 말에 기사들은 하나같이 아연한 표정이 되었다. 잠시 후 친위 기사단의 한사람, 알렉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게 정말 파이어 버스터 입니까? 이프리트가 직접 만들었다고 하는 정령검?”

“응. 이 안에 불의 상급 정령인 이그니스가 봉인되어 있어.”

“…그렇습니까? 생각했던 것과는 이미지가 상.당.히. 다르군요. 뭔가 굉장히 특.이.한. 검 같습니다. 하긴, 명색이 정령검이 보통 검과 다를 바 없다면 그건 그것대로 허무했을 테지요.” 

“그, 그렇지? 하하!”


강조하는 말에 서린 뼈있는 의미를 깨달은 이사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맥없이 웃기만 했다. 이미 한차례 겪었기 때문에 익숙해져있던 알리사나 라온 황태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건 역시 마검이야!’


세 사람은 마음속으로 똑같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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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파트의 중심은 이사나의 이야기 입니다. 고로 엘의 상황은 잠시 제낍니다. 냐하하하~<-퍽!

20장을 써도 모자랄 판에 겨우 4장이라니... 과연 이달 안에 원고를 완성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모두 화이팅을 외쳐주세요;ㅁ;



p.s- 레오의 죽음은 저도 상당히 망설였답니다. 훗날 멋진 캐릭으로 돌아올 예정이었지만, 안 그래도 많은 등장인물을 더 늘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고로 깨끗하게 철거!<-응?

이제 부터 하나씩 살생부 명단에 올라간 녀석들을 정리해야...후후후후...







[정령왕 엘퀴네스] 8-4. 참아야 하는 것 (4)
황제인 이사나와 클리프 상단 총수의 만남을 주목하는 것은, 아직 누구의 편에 설지 갈피를 정하지 못한 상인들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이번 접촉으로 총수 이카나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대공의 악행이 심해질수록 반대로 이사나의 입지는 점점 높아졌기 때문에, 내색하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가 무사히 ‘인정’을 받고 황권을 회복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 코앞에 닥친 전시에도 불구하고 마치 축제처럼 활달한 거리에는 분명 황제를 시해하려는 세력 또한 존재했다. 대공의 오른팔인 카리브디스공작과 그의 수하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몇 달 동안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큰 소득을 건지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은 모두 기척을 죽이고 이사나가 저택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혼란을 틈타 암습을 벌일 작정이었다.

기사도 정신에 똘똘 뭉친 공작으로서는 그리 탐탁지 않은 작전이었으나, 더 이상 이사나가 활약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황제가 죽는다면 자연히 사람들은 다시 희망을 버리고 대공을 따르게 될 것이다. 

한 몸통에 두 개의 머리가 있을 수는 없는 법. 그는 자신이 섬기는 주군이 틀렸다고는 한 치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에 눈에 이사나는 자기 앞가림 할 줄 모르고 권력만 휘두르는 철부지 어린아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 자가 황권을 잡게 내버려둘 수는 없는 법이지.’


얼마 후면 할버크에 집결되는 군사의 숫자가 거의 채워질 것이다. 그 사이에 황제만 제거 할 수 있다면 대공은 큰 피를 흘리지 않고 무사히 권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비록 실패한다 하더라도 그의 역량이면 충분히 황제파 쪽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그것으로 그들이 몸을 사리게 된다면 이번 전쟁은 두고 볼 필요 없이 대공 쪽의 승리였다. 여유를 가지고 전력을 다듬을 여유 따윈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나와 환호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해당하는 값을 피로 치르게 되리라! 공작은 마음속으로 확언하며 기척을 죽이고 있던 수하들에게 나직히 명령했다.


“이제 곧 황제가 나올 것이다. 카웰 후작 역시 동행할 가능성이 크다. 내가 그를 상대할 동안, 너희들은 황제의 심장을 노려라. 단, 친위 기사단들의 실력을 얕잡아 보지는 말아라. 그들 모두 소드 익스퍼드의 과정을 담고 있는 검사이자, 그 중 페리스란 남자는 바람과 물의정령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정령사라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알겠습니다, 공작각하.”

“내가 알기로 황제 본인의 실력은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검술을 조금 할 줄 알지만, 너희들의 수준에 비하면 마치 병아리와 같은 것이니까. 대의를 위해서라면 때론 도리를 접을 때도 있는 법. 너희는 어떻게든 황제를 제거할 목적만 기억해라. 그가 죽는다면 자연히 이 모든 수고가 잠잠해질 것이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수하들의 대답을 들은 공작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상대할 카웰 후작은 분명 껄끄러운 남자이긴 했지만,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손에 잡힌 묵직한 검 집이 공작의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황제파였던 붉은 머리의 청년과 접촉했던 일이 잠시 마음에 걸리기는 했으나, 검의 기능엔 전혀 이상이 없었다. 다만 예전보다 말이 더 없어졌을 뿐이다. 물론 실제로는 상당히 달라지긴 했으나, 라피스의 환각마법에 걸린 탓에 공작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이 제국의 사람이 아니라 했다. 떠나는 길이라곤 했지만, 뒤로 무슨 수작을 벌일지 모르는 일이지. 어쩌면 우리의 정체를 눈치 채고 황제에게 알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황제는 단단히 무장을 하고 나서겠구나. 생각보다 어려운 싸움이 될 수도 있겠군.’


공작은 눈을 가늘게 치켜뜨며 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러나 막상 저택에서 나온 황제는 아연하게도 친위기사들 중에서도 단 세 사람만을 동행하고 있었다. 당연히 함께 할 거라 생각했던 카웰후작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이사나의 모습 또한 그들이 조사했던 바와 달랐다. 

폴리모프 마법으로 얼굴이 변했다고 들은 바와 달리, 그는 공작이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던 모습과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이제 제법 소년티를 벗어난 얼굴은 흡사 처형당했던 선대의 황제가 살아 돌아온 듯 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오랜만에 본 황제는 이전보다 훨씬 더 당당하고 기품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공작은 그 모습을 단지 겉 치례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대동한 인원이 겨우 저것뿐이라니. 스스로의 실력을 맹신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에 대한 정보를 전혀 듣지 못한 것인가! 아니, 그렇다 해도 전시가 코앞에 닥친 상황이라면 좀 더 주변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저것은 마치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지 않은가! 카웰 후작은 무슨 생각으로 저들만 내보낸 거지?’


이사나가 적은 인원을 데리고 나온 것은 앞으로 일어날 최후의 전투를 대비해 전력을 아끼려는 목적이었다. 전쟁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귀중한 기사들이 차례로 부상을 입고 누워버린다면 그만큼 곤란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정말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정령을 보내 후작의 성으로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시벨리우스라면 후작을 비롯한 아군의 기사들을 단번에 이쪽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 가능했으니까.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공작은 단순히 그에게 꿍꿍이가 있다고만 생각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전력이 부족하니 미련한 수작을 부리는 건가. 카웰 후작도 많이 달라졌군. 세상엔 요령이 통하지도 않는 상대도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만들어 주지.’


공작은 수하들을 향해 이사나의 뒤를 바짝 뒤쫓도록 지시했다. 적당한 틈을 봐서 공격을 명령 할 생각이었다. 비록 아까운 피를 흘리기는 하겠지만 그들의 희생은 결코 헛수고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음속 깊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 즈음 황제의 얼굴을 구경하기 위해 성 앞에 모인 백성들은 내심 그의 등장이 화려할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귀족들의 행렬이 항시 그래왔기 때문이다. 

때문에 처음 후작의 성에서 후드를 쓴 4명의 남자가 말을 타고 나왔을 땐, 사람들은 설마 그 중에 그들이 기다리던 황제가 속해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이 그 사실을 눈치 챈 것은, 성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대들이 들고 있던 창을 곧추 세우며 우렁차게 소리친 이후였다.


“황제폐하의 앞이다! 모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라!”

“폐하와 시선을 마주치는 자는 모두 엄벌에 처할 것이다!”

“!!”


황제라는 말에 놀란 사람들은 술렁거릴 사이도 없이 황급히 무릎부터 꿇었다. 그들은 비단옷도, 번쩍번쩍한 갑옷도, 붉은 휘장도 걸치지 않은 어린 소년이 황제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퍼져 나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저 세 사람만으로 상단을 가는 건가?’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있나. 곧 수십 명의 기사들이 폐하의 뒤를 따를게 틀림없어.’

‘물론이지. 명색이 황제인데 달랑 수하 세 사람만 데리고 갈 리가 있나. 황족으로서의 체면이 있지.’

‘그래? 그렇다면 곧 금빛 갑옷으로 번쩍번쩍한 기사들의 행진을 볼 수 있는 거로군!’


황제의 친위대는 천민들에게까지 알려질 정도로 유명했기 때문에, 그들 모두 대단한 장관을 구경하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성문을 벗어났음에도 더 이상 그들을 따르는 기사들의 모습은 없었다. 사람들은 허망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지나쳐 걸어가는 네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왼쪽의 바위틈에 다섯, 오른쪽으로 여섯. 뒤쪽으로 일곱 명입니다.”


이사나는 저택에서 나오자마자 정령사 페리스에게 실프를 풀어 주변을 정찰하게 했다. 공작이 가지고 있다는 정령검의 존재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이그니스의 경우를 미루어보아 공격력 외의 감각은 상당히 둔해져 있을 거라 생각하고 벌인 일이었다. 
다행히 그의 짐작이 맞았는지 적들은 실프가 접근한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흠. 생각보다 많은 숫자군. 공작은 어느 쪽에 있지?”

“왼쪽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폐하? 이대로 마을 광장 안에 진입 할까요?”

“아니, 자칫하면 거리에 나온 백성들이 다칠 우려가 있어. 어디 적당한 장소로 유인할 순 없을까?” 

“북문 근처에 제법 넓은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습니다.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기에 손색이 없는 곳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쪽으로 가도록 하지. 서둘러야 해. 상단과 약속한 시간이 되기까진 아직 충분히 남았지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니 처리한다 해도 오래 걸릴 거다.”

“예, 알겠습니다.”


기사들은 상단의 총수가 이프리트라는 사실을 아직 몰랐지만, 상인들의 세계에서 신용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소리 하지 않고 따랐다. 

거리에 나온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한적한 숲길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카리브디스 공작과 십여명을 넘는 그의 수하들이 나타났다. 

본래 공작은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이사나가 일부러 한적한 장소에 유인했다는 사실을 눈치 챘는지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황족에 대한 예우로 말투만은 정중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제폐하. 그간 많이 장성하셨군요.”

“그대도 오랜만이군, 카리브디스 공작. 이런 일로 보게 되어 유감이지만.”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사나의 표정에 별반 동요가 떠오르지 않자, 공작은 내심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고 짐작했다. 아마도 이 숲에 나머지 친위기사들을 미리 숨겨두고 유인한 것이리라. 
알면서도 따라온 것이었지만 불쾌한 기분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자연히 내뱉어진 말투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비꼬는 형식이었다.


“폐하께서는 그간 전투를 요령으로 이끄는 방법만 배우셨나 보군요. 나머지 기사들은 어디에 숨겨두셨습니까? 이제 그만 나오는 편이 서로 상대하기에도 편할 텐데 말입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 공작을 이곳으로 유인한건 사실이지만, 상관없는 백성들을 다치게 하기 싫어서였을 뿐, 숨겨둔 기사 같은 건 없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왜 그런 걸 묻지? 내가 허언을 하는 사람으로 보이나?”


이사나의 눈빛에 서린 진심을 읽은 공작은 이곳으로 온 이후 처음으로 당황했다. 이 맹랑한 황제는 지금 단 네 명의 인원으로 소드 마스터가 포함된 십 수 명의 기사들과 전투를 벌일 작정이었던 것이다.

단순히 무모하다고 보기에는 묘하게 당당한 그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미심적은 표정으로 이사나를 바라보던 공작은, 곧 그의 허리춤에 달린 검집을 보고는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소문으로 들었던 정령검입니까? 클리프 상단의 총수가 요구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설마 그 검으로 모든 일이 해결 될 거라 생각하시는 것은 아닐 테지요. 검의 요행만 믿으시다가는 후회하실 겁니다.”

“물론. 나 또한 그대가 들고 있는 검이 블래스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놀랍군요. 그걸 아시면서도 이런 인원으로 맞서 상대하시겠다는 겁니까? 장담컨대, 저는 폐하의 목숨을 보장하지 않을 겁니다.”

“무례한! 과격한 언행을 삼가 하시오, 공작! 그대의 앞에 계신 분은 이 제국의 하나뿐인 폐하십니다! 공작의 기사도는 모시는 주인에게 검으로 보답하는 것인가!”


분노한 알렉이 소리치자 공작의 얼굴역시 딱딱하게 굳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하자 이사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공작이 하나 착각한 것이 있다. 그대들을 상대하는 인원은 여기 있는 4명이 전부가 아니야.”

“역시! 매복한 군사가 있는 거군요.”

“그렇진 않아. 이미 그들은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하고 있었으니까.”

“무슨?”


무언가 불길한 기분이 든 공작이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을 때였다. 이사나의 주위를 포획하고 있던 그의 수하 중 다수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크아아악!!”

“커헉!!”

“우아아악!!”

“!!!”


엎어진 시체마다 붉은 선혈이 튀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사태에 멍한 표정을 짓던  공작은 어느새 주변을 가득 매운 투명한 독수리의 형상을 보곤 부득 이를 갈았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정령사 페리스가 바람의 중급 정령을 소환하여 기습을 감행한 것이다. 10명을 훨씬 넘었던 인원이 순식간에 7명 안팎으로 줄어든 것을 확인한 공작은 방심하고 있던 자신을 질책하며 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암습을 하다니 비겁하다! 황제의 친위대라는 자들이 기사도도 모르는가!”


그러나 그것에 대한 페리스의 입장은 강경했다. 


“나는 기사가 아닙니다, 공작. 폐하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공작이야 말로 스스로의 실력을 너무 맹신해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큭! 페리스라 했던가? 네 놈을 갈갈이 찢어 죽이겠다! 무엇들 하느냐!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이 정도로 격분하는 공작의 모습은 평소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주변은 금방 싸움터로 돌변했다. 
작정하고 전투에 임하는 어둠의 기사단들은 페리스의 암습에 맥없이 무너질 때하고는 완전히 달랐다. 이미 상당수의 숫자를 줄여뒀음에도 상대하기 벅차기는 마찬가지였다.

챙! 차앙! 콰아앙!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고 둔탁한 타격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온통 아수라장으로 변한 주변을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던 공작은 마침내 검을 뽑아들고 본격적으로 전투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그가 가장 먼저 노린 자는 스스로가 선언한 바와 같이 페리스였다.


“이야아아아!!!”


소름끼치도록 강한 검의 파동이 느껴지자 페리스는 본능적으로 실프들을 불러 방어하게 했다. 그러나 검에 실린 푸르스름한 기운에 닿은 그들은 순식간에 공중으로 분해되었다. 


“페리스!!”

“크헉! 쿨럭, 쿨럭!!”


정령이 역소환되자 페리스는 비틀거리며 한 움큼 피를 토했다. 그 순간 무방비가 된 그의 등을 향해 공작의 검이 달려들었다. 정확하게는 그의 검이 내뿜는 강렬한 바람의 돌풍이었다. 

촤아아악!

소름끼치는 소리는 당장이라도 페리스의 목을 꿰뚫어 놓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바람은 그의 몸에 닿기 직전 강한 불길에 막혀 공중으로 연소되었다. 이사나가 빼어든 정령검에서 나온 것이었다. 


“칫!”


짧게 혀를 찬 공작은 이번엔 검기를 실어 공격했다. 이사나는 이번에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공작의 검을 막았다. 채앵! 콰아앙! 파이어 버스터와 닿은 검면이 치익 소리를 내며 달구어졌다. 마주 본 두 얼굴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퍼져나갔다. 


“큭- 그동안 검술 실력이 많이 늘으셨군요, 폐하. 몇 달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칭찬 고맙군. 날 죽일 거라 했던가, 공작? 그렇다면 그대의 전력을 다 내보여야 할 것이다.” 

“훗, 자신감이 지나치시군요. 전 아직 제 본 실력의 1/3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의 검술로는 저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겁니다.”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공작은 들고 있던 검에 더욱 강한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콰앙! 하고 강한 폭발이 일어나며 검을 맞대고 있던 이사나의 몸이 저만치 날아갔다. 땅에 떨어지고도 한참이나 구른 그의 얼굴에서 주르륵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폐하!!”

“젠장, 폐하!!”


놀란 기사들이 얼른 달려가려 했으나, 싸우는 상대가 있어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들은 분통에 터진 얼굴로 이리저리 달려드는 적들을 베었다. 순간 그들의 귀에 익숙한 소년의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꺄악! 믿을 수 없어! 믿을 수 없다고! 저런 짜가 정령검 따위에 내가 밀리다니!! 용사님, 괜찮으세요? 저런 녀석한테 지심 안 된다고요! 싸워요, 싸워! 이번엔 저도 전력을 다 할 테니까요!>

“헉! 헉!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그런데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이야, 이그니스? 가짜라니?”

<흥! 저 검은 블래스터가 아니에요. 진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요. 녀석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뭐? 무슨…”


그러나 이사나는 다시금 달려드는 공작의 검 때문에 미처 진실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콰앙!! 다시 한 번 울린 폭발음 속에서 그는 이를 악물고 검의 압력을 버텨냈다. 검기를 정면으로 받은 탓에 내상을 입었는지, 속이 있는 데로 뒤틀렸지만 후퇴할 수는 없었다.

그 모습을 공작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말이 많은 검이로군요. 허황된 정보를 주입시키는 것을 보아, 그다지 폐하의 편이 될 생각은 없는 듯합니다.”

<뭬야? 허황된 정보라니!! 아무리 검에 갇혔기로서니 지금 내 감각을 무시하는 거야? 무, 물론, 여기선 아무것도 안 보이고, 전에는 정령왕을 뵙고서도 눈치 채지 못한 적도 있지만! 그래도 이번엔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


오히려 하지 않는 이만 못한 말이었다. 덕분에 공작의 수하들은 물론, 이사나의 기사들까지 이그니스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작 또한 아직까진 환각 마법에 사로잡힌 상태였으므로, 코웃음만 칠뿐이었다.


“크악!!”

“케이!”


그 순간 친위기사중의 한사람인 케이가 어깨에 검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것을 본 이사나는  얼른 달려가 다시금 그의 위에서 내려쳐지는 검을 막았다. 
그러나 막 상대편 기사의 복부를 걷어차며 쓰러트렸을 때, 그의 뒤는 어느새 무방비가 되어 고스란히 공작의 공격권에 들어가 버린 상태였다. 


“이런, 폐하. 지금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실 틈이 없을 텐데요. 폐하의 상대는 저입니다. 황족에 대한 예우로 최대한 일격으로 끝낼 테니 가시는 길이 고통스럽지는 않을 겁니다.”

“!!”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가 울리자 이사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것으로 공작의 수하들은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미 방어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검강이 황제의 눈앞에서 번쩍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아아앙!


“폐하!!!!!!!”


미처 손 쓸 사이도 없이 일어난 일이라 친위기사들은 모두 창백한 얼굴이 되어 소리쳤다.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던 탓에 폭발의 사정권이 매우 커, 근처에 있던 공작의 수하들까지 휩쓸려 부상을 당했다. 그런것을 정면으로 받은 이사나는 물론, 그 옆에 있던 케이 역시 살아있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주변을 가득 매운 연기가 걷혔을 땐, 공작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반대로 페리스와 알렉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나타난 푸른 시큐엘 다섯 마리가 이사나와 정신을 잃은 케이의 옆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최후의 최후까지 숨겨두었던 황제의 본 능력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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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 더~



[정령왕 엘퀴네스] 8-5. 참아야 하는 것 (5



“폐하! 무사하셨군요!”

“아아. 조금 위험했어. 역시 소드 마스터는 굉장하군.”


자신을 반경으로 한 몇 미터의 공간이 움푹 패인 것을 확인한 이사나는 식은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시큐엘의 소환은 마나의 소모가 심하기 때문에 되도록 부르지 않으려 했지만, 확실히 공작은 여유를 부리며 싸우기엔 녹록치 않은 상대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생각했던 것만큼 강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엘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공작은 블래스터로 인해 이미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자였다. 때문에 한 두 마리면 되었을 시큐엘을 무리하게 다섯 마리까지 소환하여 방어했던 것이다. 

그런 노력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막아낸 것 같아, 안도감을 넘어서 어쩐지 허무해지는 심정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이그니스가 한 말이 사실인걸까?’


공작이 들고 있는 검이 블래스터가 아니라면 지금의 상황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 정령검이라고 인정했던 모습을 보아, 그가 다른 검을 들고 나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설마 그 사이에 봉인이 풀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 혹시 엘이?’


그의 계약자는 떠나기 직전까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만약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도와주려 했다면, 몰래 정령의 봉인만 해제하고 떠나는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검에서 나오는 바람은 단순한 눈속임으로, 정령이 사라진 것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마법을 걸어둔 걸지도 몰랐다.


‘아아, 정말 못 말린다니까.’


이렇게 하기 위해 몇 번이고 고민을 거듭했을 엘의 모습이 떠오르자 이사나는 현재의 상황도 잊은 채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 마음을 써준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즈음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공작도 슬슬 검의 변화를 눈치 채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검강의 공격력이 현저히 떨어진 것을 보고나자 라피스가 걸어둔 환각마법의 효력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등장한 시큐엘의 존재 때문에 미처 검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물의 상급 정령인 시큐엘을 다섯이나! 페리스는 아직 실프가 역소환 된 충격으로 몸을 가눌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설마 황제 본인이 불러낸 정령이라는 말인가!’


황제가 정령사라는 사실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것도 흔치 않은 물의 상급 정령사!

그제서야 공작은 지금까지 묘하게 자신감 넘쳐보였던 황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전력을 전부 드러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사나 또한 숨겨둔 힘이 있었던 것이다.


‘명백한 실책이다. 대공 전하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계실까? 대체 언제부터 정령을 다룰 수 있게 된 거지? 상급 정령을 저만큼 다루려면 많은 수련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쩌면 황제가 되기 전부터 이미 정령사였을 지도 모른다. 그 동안 우리는 감쪽같이 속아온 것인가!’


친위기사 중 두 명이 다치긴 했지만, 그것은 공작의 수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방금 전 일어난 검풍의 폭발로 대다수의 수하들이 휩쓸려 큰 부상을 입었기에 전력은 동일. 결국 모두 원점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큭- 겨우 4명을 상대로 고전을 할 줄이야! 친위기사들의 숫자가 이보다 더 많았다면 역으로 당하는 것은 이쪽이었다는 소리인가! 검을 탓할 일이 아니다! 이것은 미리 이런 상황을 대비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 크다!’


분하고 원통하긴 했지만 아직 승산은 충분히 있었다. 다행히 검의 기능이 완전히 망가진 건 아닌 듯, 바람과 폭풍을 일으키는 역할은 제대로 수행하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시체가 되는 한이 있어도 황제의 목숨을 거두어갈 작정이었다.

공작이 매서운 표정으로 검을 고쳐 잡자 이사나와 친위기사들도 다시 몸을 긴장시켰다. 이윽고 그의 검에서는 거대한 바람의 폭발과 함께 푸른 검기가 한자나 뿜어져 나왔다. 
우우우웅!! 검이 진동하기 시작하자 공작은 이사나를 향해 매섭게 달려들며 소리쳤다.


“당신은 오늘 이 자리에서 나와 함께 뼈를 묻을 것이오! 내 목숨을 담은 검을 받으시오!”

“큭! 다들 나한테서 떨어져! 어서!!”

“폐하!!”


휘몰아치는 사나운 기운은 다섯의 시큐엘로도 전부 막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기사들에게 다급히 외친 이사나는 자신이 끌어올 수 있는 모든 마나를 이용하여 시큐엘에게 퍼부었다. 이 한 번의 공격으로 생과 사가 결정될 것이란 예감이 머릿속에 강하게 파고들었다.

콰아아아악!!

시큐엘들은 사납게 으르렁 거리며 이사나를 향해 달려오는 공작에게 맞섰다. 그러나 한쪽 팔과 다리를 물어뜯기면서도 공작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휘두른 검은 마침내 보호 장벽을 이루던 한 마리의 시큐엘을 꿰뚫어 놓는 것에 성공했다.

그 한 번의 일격으로 이사나는 생전 처음 겪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고 정령을 유지하기 위해 부어주던 마나의 흐름을 놓쳐버렸다. 


“커헉!!”

“폐하!!!”


주변을 보호하던 물의 기운이 사라져 순식간에 무방비가 된 이사나의 머리위로, 아직까지도 거침없는 기운을 담은 공작의 검이 내려떨어지고 있었다.

호각을 이룬 다는 생각에 아군을 더 요청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을까? 이 절대 절명의 위기를 지켜본 친위기사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달려가 몸으로 막는다 해도 시간이 따라줄 지 의문이었다.

그러자 그 순간 카리브디스 공작의 매서운 검을 막은 위압적인 힘이 나타났다. 그것은 누구도 놀랄 사이 없이 갑자기 나타나, 검기를 담고 있던 공작의 검날을 완벽하게 부수어 뜨렸다. 

콱! 콰아아아앙!!!


“크아아악!”


막 폭발하려던 힘이 막힌 반동에 의해 공작의 몸은 저만치 날아가 굴러 떨어졌다. 땅에 부딪쳤을 때 늑골이 부러졌는지 부들거리는 몸을 좀처럼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 위험한 폭풍 안에 들어와 단번에 자신을 제압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공작은, 믿을 수 없는 얼굴로 고개만 들어 갑자기 나타난 낯선 존재를 바라보았다. 

거의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단지 노려보기만 하는 건데도,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감이 저리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그것은 인간이 낼 수 있는 위압감이 아니었다.


‘저 자는 누구지? 왜 나를 방해한 것이지?’


온 몸이 뒤틀린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공작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남자는 잠시 동안 그를 주시했을 뿐, 다친 장난감에게는 미련 없다는 듯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곧 낮은 혀 울림을 담은 목소리가 그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쯧쯧. 대체 이게 무슨 한심한 꼴이냐?”

“…아?”


다가올 공격을 대비해 한껏 몸을 웅크리고 있었던 이사나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런 위험한 순간에 끼어들었음에도 몸에 생채기 하나 입지 않은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한 번 보면 쉬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미형의 얼굴이었지만, 그의 기억에는 없는 사람이다. 


‘누, 누구지?’


그러나 남자는 이사나가 궁금해 하든 말든, 자신이 이곳에 온 용건부터 꺼냈다.


“엘은 어디 있지?”

“…예?”

“젠장! 이놈의 목걸이!! 마신이 아니면 컨트롤하기가 힘들다고 미리 얘기를 해줬어야지! 아들 내미 기운 하나 찾기가 이렇게 어렵다니…돌아가서 두고 보자. 뿌득.”


억지로 강탈한 주제에 그런 말을 해봤자 공감해줄 사람은 없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장소에 그러한 진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사나는 방금 그가 한 말에서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눈치 챌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서, 설마…에, 엘뤼엔님이십니까?”


이사나는 이미 그와 두 번의 안면이 있는 상태였지만, 그때마다 기억이 지워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기 때문에 지금의 만남이 초면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엘뤼엔에게 그런 사정을 배려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무슨 헛소리냐, 꼬마. 엘이 어디 있는 지나 말하라니까?”


처음 목걸이를 빼앗아 중간계로 내려온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때부터 엘퀴네스의 기운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나중에서야 그것이 카노스 본인에게만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는 물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던 셈이다. 

그 뒤 운 좋게 이사나를 찾아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당연히 함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의 심경은 매우 좋지 못했다. 엘뤼엔의 험악한 눈빛에 찔끔한 이사나는 힐끔 공작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앗…저어, 이미 이곳을 떠나 수도로 갔습니다만.”

“수~도? 그 시뻘건 도마뱀과 퍼런 망아지도?”

“풋- 으음. 죄송합니다. 라피스님이라면 함께하셨지만, 시벨리우스님은 이곳에 남았습니다.”

“결국 그 찐득이는 못 떼어놨다 이거군. 뭐,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이곳에 남았다는 망아지는 왜 안 데리고 나온 거냐? 설마 저 녀석들을 너 혼자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그의 말에 이사나는 뜨끔한 심정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상황을 짐작한 엘뤼엔은 다시 쯧쯧 혀를 차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몸을 타고 흐르는 기운을 보아 소드 마스터, 또는 그 이상의 실력을 가진 존재다. 이 전투가 미리 예견 된 일이었다면 엘은 반드시 너에게 경고를 하고 떠났을 것이다. 생각은 좋았다만 다소 무리한 계획이었군. 하찮은 자존심이 너와 네 일행들의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었구나.”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당연히 미안해해야지. 여기서 네가 죽었다면 내 아들이 두고두고 슬퍼했을 테니까. 게다가 지금 벌이고 있는 모든 일도 전부 허사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 누군가를 책임지는 입장이란 그런 것이다. 남의 위에 군림하려면 좀 더 자숙하는 편이 좋아. 어떤 일이든 참아야 하는 게 있는 거다.”

“…엘뤼엔님께서도 그리 하십니까?”


이사나의 질문에 엘뤼엔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 꼬맹이가 자신을 향해 배짱 있게 되물어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흐음, 이제 제법 강단이 커진 모양이군.’


그는 피식 미소 지으며 뻔한 걸 묻는 다는 듯이 대꾸했다.


“아니. 난 안 참는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책임질 수 있는 실력이 있거든.”

“……”


뻔뻔하리만치 당당한 대답이었지만 이사나는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할 말을 잃고 굳어진 그를 잠깐 놀리듯이 바라본 엘뤼엔은 곧 성큼성큼 다가가 이사나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곧 새하얀 은빛의 광채가 터져 나와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있는 데로 뒤틀렸던 속이 편안해지자 이사나는 눈을 크게 뜨고 엘뤼엔을 올려다보았다.


“이건…”

“시큐엘이 역소환 되었는데도 기절하지 않은 것은 칭찬해주지. 하지만 다음부터 검기를 다루는 자들과 상대할 때는 무리하게 정령들을 소환하지 마라. 정령사의 가장 취약점은 방어가 뚫리면 그 타격을 몇 배로 되 돌려받게 된다는 것이지. 오늘은 운이 좋아 살았지만 다음에도 이런 요행을 기대할 수는 없을 거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다. 수도라…그 도마뱀 녀석이라면 단번에 텔레포트 마법을 부렸을 테니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겠군. 젠장, 마왕 녀석과 마주치면 골치 아픈데.”


짧게 중얼거린 그는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렇다 할 작별의 인사도 없이 그가 가버리자, 이사나를 비롯한 주변의 기사들은 모두 신기루라도 본 마냥 멍한 표정이 되어있었다. 

한참의 시간 후 드디어 정신을 차린 이사나는 이미 부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는 공작과 나머지 살아있는 그의 수하들을 포박하도록 지시하곤, 나이아스를 시켜 후작의 성으로부터 원군을 요청하는 전언을 보냈다. 

대충의 상황이 정리되자 알렉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그 분은 누구였습니까, 폐하? 제 귀가 잘못 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 형벌의 신의 이름과 같았던 걸로 들렸습니다만. 하하하, 설마 그, 그럴 리는 없겠지요?”


정령왕과 드래곤만으로도 친위기사들은 이미 한 평생에 누려야 할 축복을 전부 경험했다고 생각했다. 신의 강림은 절대 무리라고 생각하며 어색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이사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대의 생각이 맞을걸.”

“예에에에? 히익!! 농담, 농담이시죠, 폐하?!! 그가 정말로 엘뤼엔이라고요?”


경악한 알렉의 외침에 다른 친위기사는 물론, 카리브디스 공작과 그의 수하들의 얼굴 역시 딱딱하게 굳었다. 특히 공작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어렴풋이 엘뤼엔의 존재가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신일 거라고는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다.


‘엘뤼엔? 형벌의 신 엘뤼엔을 말하는 것인가? 신의 강림이라니!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는 말인가!!’


황제가 쫓겨난 직후 3일에 한 번씩 내리는 비를 보며 백성들은 하나같이 이사나가 형벌의 신에게 빌어 일으킨 ‘기적’이라고 믿었다. 

물론 대공파의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헛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공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직접 두 눈으로 엘뤼엔의 존재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대체 황제는 어떤 사람이지? 내가 알고 있던 그가 맞기는 한 건가? 혹시 우리는 지금까지 그의 겉모습에 속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아무 능력도 없이 보잘 것 없다고만 생각했던 어린 소년은 알고 보니 상급 정령을 다섯이나 다루는 정령사에 신의 은총을 받고 있었다. 이사나를 보는 공작의 머릿속은 점점 혼란스럽게 타들어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잠시 후 나이아스의 전언을 받은 후작이 기사들을 이끌고 나타나자 공작은 마음속 깊이 패배를 선언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의 죽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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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편의 포인트는 결국 '엘뤼엔이 지존이다'로군요;

이사나는 정말 띄우기 힘든 녀석이에요. 공로를 세울만 하면 중간에서 가로채는 녀석들이 이리도 많으니,원...

하긴..튀어서 살생부 명단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낫겠지요.(히죽)



덧, 마검을 '마감'이라고 읽은 저는 역시 마감병인걸까요..............ㅠㅠ






[정령왕 엘퀴네스] 8-6. 폭풍전야 (1)



어림잡아 한 달은 걸릴 거라 생각한 여행은 황당하게도 단 1분 만에 해결을 보고 말았다. 라피스의 입에서 ‘텔레포트’라는 말이 뱉어지는 순간, 우리는 어느새 수도 헤리카의 검문소 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어이없다는 내 시선에 녀석은 당당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널 소환하기 전까지 여기서 유희 보냈다는 거 잊었어? 황성의 좌표쯤이야 훤히 꿰뚫고 있다는 말씀!”

“…그럼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었잖아.”

“그렇게 찌푸린 얼굴 하지 말라고. 저택 안에 갇혀서 전략이나 짜는 생활이 뭐가 즐겁단 말이야? 우리는 여기서 적당히 여유 부리다가, 시간이 되면 후발부대가 모인다는 에바스 평원으로 찾아가면 되는 거야. 벌써부터 골치 아파질 필요가 뭐가 있어?”

“……솔직히 말해봐. 너 동족들 사이에서도 왕따지?”

“뭬야?”


나는 얼굴을 찌푸리는 라피스를 무시하곤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 한시라도 빨리 황성으로 가야겠다고 다짐했기에 망정이지, 그것도 아니었다면 얼마나 허무한 심정이 들었을 것인가!

되도록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고 중얼거린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뭐, 좋아. 어차피 나도 공간이동을 할 생각이었으니까. 아까부터 나이아스의 부름이 더 강해졌어. 이 정도라면 기척만으로도 방향을 짚을 수 있겠어.”

“흐응.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장소라 해도 이 세계에 퍼진 모든 정령들이 좌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건가? 거참. 정령왕이란 편리하군.”

“전부가 그런 건 아니야. 지금처럼 정령이 부를 때만 느낄 수 있으니까. 어떻게 할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래? 나 혼자 금방 다녀올게.”


그러자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작은 힘이 느껴졌다. 시선을 내려 본 곳에는 붉은 눈동자를 귀엽게 깜빡거리고 있는 아스가 서 있었다.


“…대부 혼자 안 돼. 나도 갈래.”

“엥? 아스도?”

“어차피 다른 할 일도 없는데 뿔뿔이 흩어질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그냥 다 같이 가기로 하죠.”

“괜찮겠어요, 데르온? 다른 마족의 눈에 발각될지도 모르는데.”

“걱정 마십시오, 엘님. 어지간한 고위마족이 아니라면, 저의 상대도 되지 않을 테니까요. 자, 그렇죠, 주군? 덤비는 녀석들은 모두 어떻게 하라고요?”

“때려잡는다!”

“잘 하셨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앞으로도 그걸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응!”

“……”


한 나라의 새싹이 이렇게 망가지는 걸 지켜봐도 좋은 걸까? 나는 장래가 두렵다는 시선으로 아스를 바라본 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데르온을 향해 말했다.


“교육방법이 조금 과격한 것 같은데요.”

“하하핫! 무슨 말씀을! 마족들의 세계에선 인정이란 약에 쓸래도 없는 것입니다. 덤비면 무조건 싸울 뿐이죠! 무려 마계를 다스릴 왕이 그런 기본적인 의식도 없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혹시 세뇌에 의한 오래된 악습은 아니고?

말똥말똥 눈을 굴리며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스를 보자니, 마족들의 본성이 처음부터 사악하다는 게 오히려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잠시 미심쩍은 표정으로 데르온을 바라본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왕은 너니까 무조건 부하가 시키는 데로 하지 않아도 돼.”

“그건, 때려잡지 말라는 말이야?”

“아니. 상황을 봐서 선택을 하라는 소리야. 어떤 일이든 나는 아스가 현명한 대처를 할 거라고 믿으니까.”

“응!”


뒤에선 데르온이 ‘너무하다’는 둥, ‘날 그렇게 나쁜 놈으로 만들어야 겠냐’는 둥 투덜거리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 뒤 나와 일행들은 나이아스의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단번에 공간이동을 할 수도 있었지만, 사람들의 눈에 뜨일까봐 걸어가는 방향으로 결정한 것이다.

코앞에 닥친 전란으로 수도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매우 흉흉했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의 대부분은 여자와 노약자였고, 기사들에게 끌려가는 청년들의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아마 이번 전쟁에 징병되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군인들은 거리를 다니는 사람은 물론, 집까지 직접 수색해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모든 인원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이대로 다니면 필시 우리까지 걸려들 우려가 있었기에 새로운 대책 마련이 시급한 상태였다.


“엘이나 꼬맹이는 그렇다 쳐도, 나랑 데르온은 눈에 뜨이겠는걸. 별 수 없이 폴리모프 마법을 거는 수밖에 없나.”

“잠깐 기다려! 나는 왜 빼는데?”

“흐음. 설마 너…지금 네 모습이 남자로 보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내가 할 말을 잃고 굳어버리자 라피스는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남의 자존심을 건드린 주제에 대단히 막나가는 배짱이 아닌가!


“그렇게 노려보지 마. 남자로 보이지 않을 뿐이지, 여자 같다는 말은 아니니까. 실제로 너는 꽤나 중성틱해서 겉보기만으론 성별을 알아맞히기가 쉽지 않거든. 일부러 마법을 걸 필요 없이 편하고 좋지 뭘 그래? 

“엑? 잠깐만요, 라피스. 서, 설마 그 폴리모프 마법이란 게…성별을 바꾸는 겁니까?”

“당연한 소리 아닌가? 그럼 그 덩치로 얼굴만 바꾼다고 될 줄 알았어? 골격과 체격 전부 바꾸려면 여자로 폴리모프 하는 게 확실하지.”

“!!”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건 데르온만이 아니었다. 나는 황당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며 라피스와 데르온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사람 다 꽤 예쁘장한 타입이긴 했지만, 나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이들에게 여장이 가능할거라고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이 두 사람이…여자가 된다고??


“푸…푸하하하하!!!”

“우, 웃지 마십시오, 엘님! 농담이 아닙니다! 다, 다른 방법은 전혀 없는 겁니까? 가령 투명 마법을 건다거나!”

“왜 그래야 하지? 어차피 앞으로도 당분간은 수도에서 머물러야 할 텐데, 그동안 계속 투명인간으로 있을 셈이야? 식당이나 여관을 잡을 땐 어떻게 하고?”

“…으음.”


논리 정연한 라피스의 말에 데르온은 반박한 말을 찾지 못하고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결국 별 수 없이 여자가 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웃느라고 시뻘개진 뺨을 감싸며 라피스를 향해 물었다.


“넌 별로 거부감이 없어 보이네? 여장 하는 거 싫지 않아?”

“글쎄. 오랜만이라 그다지 내키진 않지만 귀찮아지는 것 보다는 나으니까.”

“오랜만 이라니…그럼 전에도 한 적이 있다는 소리야?”


너 그런 녀석이었냐? 라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라피스는 아무 감흥이 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헤츨링 시절은 대부분 여자모습으로 지냈지. 워낙 따라붙는 놈들이 많아서 금방 그만 뒀지만. 내가 좀 아름다워야 말이지.” 

“……허걱, 변태?”

“뭔 소리야. 드래곤은 양성이라고. 아아, 어쩌면 엘뤼엔이 나를 못 알아본 건 그래서였을지도 모르겠군. 이 모습으로 소환을 시도한 적은 없었으니.”


그는 멍해진 나를 내버려 둔 채 혼자 납득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데르온이 그에 따른 자세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드래곤은 두 개의 성별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든 마음 내키는 대로 성별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죠. 워낙 종족의 숫자가 적은데다, 수명이 길기 때문에 내린 신의 혜택이라고 들었습니다. 저처럼 ‘여자로 폴리모프’하는 것과는 경우가 다르지요.”

“헉. 정말이에요?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요.”

“뭐, 굳이 말해줄 필요 없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취향에 따라 한 성별만 고집하는 드래곤도 많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으실 겁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해도…”


복잡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린 나는 힐끔 라피스의 눈치를 보았다. 지금까지 남자로 알고 있던 사람이 알고 보니 여자였다 라는 말을 듣는다면 이런 심정일까? 그러자 녀석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게 신기하게 볼 것 없어. 그냥 성별에 대한 개념이 없을 뿐이지, 다른 것은 다 똑같으니까. 오랜 삶을 살며 유희하기에 좀 더 편한 몸으로 만들어 졌을 뿐이야. 다만 정령왕과는 달리 후손을 남길 수 있다 일 뿐이지.”

“그, 그렇군. 근데 어째서 말이 이렇게 전개 된 거야? 중요한건 지금 너랑 데르온이 여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잖아.”

“그러게 누가 변태라고 하래? 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고. 굳이 변태를 정해야 한다면 오히려 양성도 아닌 주제에 여자가 되어야 하는 데르온 쪽이지.”

“으헉! 제, 제가 원해서 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아~”


순식간에 궁지에 몰린 데르온을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이어지는 아스의 말은 그를 처참한 암흑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부하…변태였어?”

“헉!! 주, 주군! 그, 그런 게 아니라!”

“나, 변태 싫어. 떨어져, 바보.”

“커어억!”


한 마족을 순식간에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놓으면서도 아스의 표정은 지극히 샤방하기만 했다. 기겁한 데르온이 오해라며 몇 번이고 설명했으나 한번 의심스럽게 변한 눈빛은 좀처럼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얼른 아스를 타일렀다.


“그러면 안 돼, 아스. 데르온은 아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아니야?”

“응, 우리가 그냥 장난친 거야. 그러니까 다시 사이좋게 지내야지?”

“대부가 그렇게 하라고 하면 할게.”

“에구, 착한 녀석.”

“크흑, 너무 하십니다, 주구우운~~”


그 뒤 라피스는 지칠 대로 지쳐 추욱 늘어진 데르온에게 단숨에 폴리모프의 마법을 걸었다. 파아앗! 그를 감싸던 눈부신 빛이 사라지자, 예전보다 훨씬 가냘픈 느낌이 된 데르온의 모습이 드러났다. 

검은 머리에 날카로운 눈동자를 비롯한 전체적인 외모는 남자일 때와 별 다를 게 없었지만, 단지 키와 골격만 바뀐 것뿐인데도 그는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선과 가는 몸이 성숙한 여인의 향기를 풍긴다고나 할까?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와아! 정말 예쁜데요, 데르온! 누가 봐도 여자라고 생각하겠어요!”

“그, 그렇습니까? 으음. 뭔가 좀 불편한데요. 밑도 허전하고, 가슴도…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건 좀…”

“스톱! 알겠으니까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목소리도 조금 바뀐 것 같은데요? 머리는 좀 더 길어야 하지 않을까요?”

“긴 머리는 관리가 불편해서 영…설마 드레스까지 입으라고 하시진 않겠죠?”

“하하! 활동하기 불편할 텐데 치마는 곤란하죠. 한국처럼 짧은 치마를 입어도 되는 나라도 아니고. 하지만 지금 옷은 좀 커 보이니 적당히 맞는 옷을 사야겠네요.”

“그럴 필요 없어. 옷이라면 몇 벌 가지고 있는 게 있으니까.”

“!!”


갑자기 들려온 소프라노의 목소리에 나는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대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8등신의 늘씬한 미녀로 변한 라피스가 몇 개의 옷가지를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고양이처럼 살짝 올라간 눈매와 새빨간 입술, 하나로 틀어 올린 붉은 머리카락이 ‘남자’였던 과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너무 잘 어울려서 오히려 무서울 정도다.
굳어진 내 표정을 본 녀석은 키득거리며 마치 놀리듯 유혹적인 미소를 그려보였다.


“정말 라피스 맞아?”

“왜? 너무 아름다워서 넋이 나갔냐?”

“…아, 아니. 굉장히 의외라서. 왠지 ‘누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분위기인걸.”

“흐~음. 그것도 나쁘지 않지. 단, 너는 ‘언니’라고 하는 쪽이 더 어울리지만 말이야.”

“뭐, 뭐야?”


강지훈이었던 시절부터 나는 원래 여자들은 될 수 있는 한 건드리지 말자는 주의였다. 

그 끝 모를 수다부터 시작해서 한번 독한 마음을 품으면 끝까지 파고드는 집요함 까지! 도무지 소심한 내 성격으로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이프리트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여자로 변한 라피스에게 이전처럼 편하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 대신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려 은근슬쩍 현재의 상황을 모면하려고 노력했다.


“아, 아무튼 끝났으면 이제 그만 가자고. 아무래도 이 근처에 있는 것 같으니까.”

“있다니, 뭐가? 나이아스가 복수를 원한다는 그 녀석?”

“아니, 그 반대쪽.”

“반대쪽…이라면, 어이, 너 설마…”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라피스를 무시하며 나는 척척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간혹 라피스와 데르온의 미모에 넋이 나간 남자들이 걸음을 멈추고 멍하게 쳐다보긴 했지만, 용기를 내어 접근하는 자는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간신히 들어선 곳은 황성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어두운 숲 안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커다란 돌덩이 틈에 가리워진 작은 동굴하나를 발견하고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그러나 나와, 나를 뒤따라오던 일행은 곧 코를 움켜쥐고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쓰레기 산에서도 풍기지 않을 것 같은 지독한 냄새가 온통 동굴 안에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악취의 원인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헉! 이, 이게 무슨!”

“!!”

“…으음.”


동굴 안을 가득 매우고 있는 것은 말라버린 뼈와 온통 부패한 어린아이의 시체들이었다. 어림잡아도 몇 백구는 되어 보임직한 그것은 질서 없이 뒤섞여 온갖 벌레와 들쥐들이 들끓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역겨운 광경이었지만, 나는 그 와중에도 침착하게 원하던 것을 발견하고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찾았다.”


내가 바라본 것은 수많은 시체 중에서도 비교적 부패의 정도가 덜한 어린 소년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육체위에 걸려 진 낯익은 목걸이는, 몇 달 전 나와 페리스가 어떤 여인의 아들에게 걸어줬던 것이었다. 
내가 직접 그 안에 나이아스를 봉인했기 때문에 못 알아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레오’. 

훗날 은혜를 갚으러 온다던 소년은 지금 눈앞에서 굳은 시체가 되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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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연재만 보신분은 전편 엘뤼엔의 등장이 생뚱맞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네요;; 그래서 이해하시기 편하게 윗편에 7권 추가분량 줄거리를 첨가했습니다.

그밖에 레오의 죽음에 대한 자세한 과정역시 7권에서 소개되었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책방으로...<-어이;



P.S- 감기기운이 있는지 머리가 어질어질 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분량 채워도 모자를 판에 정신이 몽롱해지니 큰일이네요;






[정령왕 엘퀴네스] 8-7. 폭풍전야 (2)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심정이라면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나이아스와 감정을 공유함으로서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 모습이 이렇게 처참한 상태일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다가가 천천히 아이의 몸을 더듬어 보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기운은 살아있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짙은 죽음의 기운을 드리우고 있었다. 채 말라붙지 못한 끈적끈적한 피가 가슴부위를 중심으로 넓게 번져 있었다.

나를 따라 아이의 시체를 확인하던 라피스는 곧 찌푸린 표정으로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심장이 없군. 아무래도 여기 있는 시체들은 모두 제물로 쓰여 졌던 모양이야.”

“…제물?”

“기억 안나? 전에 이곳 대공인지 섭정왕인지가 아이들을 잡아다가 제사를 지낸다고 했었잖아. 그 많은 시체들을 어떻게 처리하나 했더니, 이런 곳에 쌓아두고 있었군. 재수 없는 인간 같으니.”

“!!”


순간 덜컥-숨이 멈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악신의 탄생을 위해 희생되는 아이들이라니! 알리사 역시 그때 우리가 구하지 못했다면 이러한 운명을 걸었을 것이다. 

아무렇게나 쌓아올려진 아이들은 대부분 공포로 눈을 부릅뜨고 있거나,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 하나만으로 마치 지옥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섭정왕은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걸까?


“아, 아참! 아스를 어서 데리고 나가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족들에겐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으니까요. 이것으로 대공이 악신의 부활을 돕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해 졌군요. 지금의 마왕 또한 이 일에서 피해갈 수 없을 겁니다. 용케 이런 장소를 발견 하셨군요, 엘님.”


감탄했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에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처음부터 이런 것을 기대하고 왔던 것은 아니다. 그저 죽은 아이의 시체라도 찾아다 양지 받은 곳에 묻어줄 생각이었다. 이 나라에서 가난한 평민이 제대로 된 무덤하나를 마련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그런데…이런 죽음을 맞이했을 줄이야.’


나는 착잡한 얼굴로 죽은 아이가 걸고 있는 목걸이를 건드렸다. 그러자 안에 있던 자연계의 나이아스가 둥실 떠올라 내 손가락을 부둥켜안았다. 슬픔을 가득 드리우고 있는 얼굴엔 맑은 눈물이 주룩주룩 쏟아지고 있었다.

내가 수많은 시체 중에서도 찾고 있던 아이를 금방 발견한 것은, 정령과 계약했던 흔적이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계약자가 죽었는데도 아직 떠나지 않은 나이아스 덕분에 그 기운이 더욱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던 것 같았다.


-제 친구가 죽었어요, 왕이시여…그런데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아이가 너한테 도움을 청하진 않았니?

-도망치라고만 했어요. 레오는 너무 어려서 제가 정령인 줄도 몰랐는걸요. 그래서 저는 바라 볼 수밖에 없었어요. 흐윽, 흑…


소환된 정령은 계약자가 부탁하는 일 외에는 하지 못한다. 그것은 정령왕을 제외한 모든 4대 정령들에게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그러나 만약 가능했다 하더라도, 하급 정령 하나의 힘만으론 아이를 구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어두운 표정으로 서럽게 울고 있는 나이아스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어머니는 어디에 있니? 아들이 이렇게 되었다는 걸 알면…

-그녀는 이곳에 오기 얼마 전에 귀족의 마차에 치어 죽었어요. 그때의 충격으로 왕께서 걸어두신 제 봉인이 풀리게 된 것이랍니다. 레오에겐 오직 저밖에 없었어요. 

“……”


우스운 일이었지만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이사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죽은 아이와는 처한 상황도, 지위도, 능력도 현저히 달랐지만 녀석에게도 마음을 터놓을 친구는 나 하나밖에 없었다. 

사방이 아군과 적군으로밖에 분류되지 않았던 세계에서 내 존재는 그가 처음으로 안도할 수 있는 공간이자 도피처였을 것이다. 

그래서 인지 나는 지금 나이아스가 처한 상황이 곧 다가올 나와 이사나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 같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자 옆에서 의아하게 바라보는 라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표정이 왜 그래?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나…방금 안 좋은 생각을 했어, 라피스. 자꾸만 불길한 기분이 들어.”

“흐응. 네가 걱정할 일이야 뻔하지. 이사나 녀석 때문이냐? 하긴, 이제부터 싸워야 할 대공이란 놈의 정체를 알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만.”

“괜찮을까? 내가 돌아갈 때까지 무사할 수 있을까? 이제 다치면 치료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는데 큰 부상이라도 입으면 어떡하지?”

“나~참. 그런 걸 바로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하는 거다. 후작이 알아서 치료신관이라도 초빙하겠지. 귀하신 몸이 다치도록 내버려 두겠냐? 가만 보면 네가 더 나보다 인간들을 바보취급 할 때가 있다니까? 아무래도 난생처음 시체들을 봐서 불안감이 증폭한 모양인데, 정신 차려. 앞으로 시작될 전쟁은 이것보다 훨씬 더 잔인할 테니까.”

“!!”


라피스는 냉정한 말로 내가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들었다.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아이의 시체를 노려본 나는 아직도 울먹이고 있는 나이아스를 향해 단호하게 물었다.


-내가 너의 계약자를 해친 사람에게 복수를 해주길 원하니?

-원합니다, 왕이여! 그 남자를 철저한 파멸로 이끌어 주세요! 감히 정령의 친구를 건드린 죗값을 치르게 만들어 주세요!


기다렸다는 듯 나이아스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소리쳤다. 이제까지 보아왔던 밝고 명랑한 얼굴과는 전혀 다른, 증오를 가득 머금은 사나운 표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다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너의 바람은 나와 내 계약자가 이루어 줄 거야, 나이아스. 너의 적은 나의 적이며, 너의 친구는 나의 친구. 네가 느끼는 슬픔과 증오 또한 나의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너의 왕이 어떤 식으로 친구의 원수를 갚는지 지켜보도록 해. 녀석은 절대로 편한 죽음을 맞지 못할 거야.

-왕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나이아스는 곧 내 품을 떠나 동굴 안을 돌아다니던 다른 나이아스의 무리와 합류했다. 내가 반드시 복수를 해 줄 것이란 믿음 때문인지, 동료들과 어울리는 그의 표정은 이전보다 훨씬 밝고 명랑해져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산처럼 쌓인 아이들의 시체에 시선을 돌렸다.


“라피스. 이 아이들… 화장 시킬 수 있을까?”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왜?”

“이런 식으로 썩어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뼈라도 거둬서 묻어주고 싶어.”

“흠. 좋아, 그럼 일단 동굴 밖으로 나가지. 더 이상 악취를 견디는 것도 힘드니까.”


밖으로 나온 뒤 라피스는 파이어 볼의 마법을 시전 하여 동굴 안에 여러 개의 커다란 불덩이를 날렸다. 그러자 곧 화르르륵! 하는 강렬한 소리와 함께 뜨거운 열기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람 속에 섞여드는 매캐한 검은 연기를 보는 내 마음은 무거운 돌덩이라도 매단 것 마냥 한없이 늘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밖으로 나오기 전 레오의 몸에서 떼어낸 목걸이를 만지작  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대로 편하게 잠들길. 지금 받은 고난만큼 다음 생에서는 반드시 행복해 질 거야. 그때는 다시 여기서 태어나 줄래? 지켜주지 못해서…정말 미안해.”


그리고 대공은 오늘과 같은 일을 저지른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다짐하며 마치 용암처럼 붉게 타오르는 동굴 안을 바라보았다. 
오늘의 일을 앞으로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



“어머나~ 이런 곳에 웬 마족꼬맹이람?”


죽은 아이들의 화장을 마치고 돌아선 우리를 반긴 것은, 아직 서늘한 계절과 어울리지 않게 어깨와 가슴을 거의 노출시킨 옷차림을 한 새카만 머리카락의 여자였다. 

우연히 나타나기에는 너무 완벽한 타이밍인데다,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얼굴이었기 때문에 내 얼굴은 자연스럽게 살짝 굳어졌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굳어있던 데르온의 입에서 신음처럼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세르피스…”

“!!”


알고 보니 언젠가 데르온이 나를 찾아왔을 때 함께 있었던 마족 여자가 아닌가! 

데르온과 같은 마계 4대 공작의 하나로, 암흑의 마녀인지 뭔지 당시 같이 있던 일행들이 놀라워했던 것이 기억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르피스는 여자로 변한 데르온과 라피스는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무표정한 얼굴의 아스에게 향해 있었다.


“갑자기 마족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져서 찾아왔더니 이런 광경을 목격할 줄이야. 거참 이상하네. 분명 이번 대의 마족의 알은 전부 파괴 되서 부화된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말이야. 요 깜찍한 꼬맹이는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어머, 그러고 보니 마족 여자도 있었잖아? 설마 당신이 훔쳤던 거야? 호호호호!”


정확히는 마신이 몰래 빼돌린 거지만, 그런 것 까지 일일이 설명해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작은 소리로 얼굴이 경직된 데르온을 향해 물었다.


“저 여자는 누구 편이에요? 마왕?”

“끄응. 정확하게는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쪽에 붙을 일은 없을 겁니다. 마왕의 자리에 욕심이 많은 녀석이니까요.”

“마신의 명령이라고 해도요?”

“그렇다 해도 따르지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세르피스는 루카르엠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으니까요. 그의 정체가 마신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돌아설게 틀림없습니다.”


곤란한 얼굴로 대답하면서도 그는 힐끔힐끔 세르피스의 눈치를 살폈다. 행여나 그녀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킬까봐 조바심이 나는 듯 했다. 

사실 세르피스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면 금방 알아볼 만큼, 남자일 때의 모습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으니 걱정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마왕을 배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둘째 치고, 여장을 했다는 사실 부터 숨기고 싶을 것이다.

아스는 그런 데르온의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부하 왜 그래? 저 여자 누구?”

“아아, 아스님. 으음, 그러니까…암흑의 마녀 세르피스라고 합니다.”

“세르피스? 나랑 같은 냄새 나. 다른 부하?”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 사실을 별로 인정하지는 않겠지만요.”

“…흐음.”


꼬맹이 주제에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굴리는 것이 제법 귀여웠지만, 지금은 마냥 한가하게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둘의 대화를 들은 세르피스는 눈 꼬리를 살짝 치켜뜨며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부하라니? 그게 무슨 소리니, 꼬맹아? 설마 네가 왕이 될 거란 말이니?”

“이미 왕이야.”

“호호! 기가 막히구나! 저 여자가 그렇게 말했니? 네가 마계를 다스리는 왕이라고? 어머~ 이를 어째. 그럼 난 여기서 반드시 너를 죽여야겠구나! 그래야 그 자리를 뺏을 수 있을 테니까. 안 그래?”

“…난 안 죽어. 너, 건방져. 마음에 안 들어.”


찌푸린 얼굴로 그렇게 대답하는 아스의 눈동자엔 어느새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던 낯선 표정이라 우리들은(심지어 라피스마저) 하나같이 놀란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세르피스는 오히려 재밌다는 듯이 눈빛을 더욱 반짝반짝 빛냈을 뿐이었다. 아스를 내려다보는 얼굴엔 비웃음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어머? 그래서 네가 어쩔 건데? 아직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되어 보이는 네가 설마 날 어쩔 수 있다는 말이니? 아니면 거기 계시는 물의 엘퀴네스님께 가서 징징거리려고? 호호! 그건 확실히 어린애밖에 할 수 없는 일이지. 멋진 생각이로구나!”

“대부한테 부탁 안 해. 나 혼자서 할 수 있어.”

“자신감이 넘치는 꼬마네. 그럼 어디 실력한번 테스트 해볼까?”


말을 마친 세르피스는 순식간에 집채만한 크기의 동물 세 마리를 소환했다. 전체적인 모습은 표범과 비슷했으나, 동공이 없는 눈동자가 세 개나 달려 있었고  입에 사람의 팔뚝만한 거대한 송곳니가 뻗어 나온 형상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데르온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이런! 베히모스!!”

“그, 그게 뭔데요?”

“마계에서도 가장 악명높은 고위마물입니다! 어린 마족은커녕, 어지간한 성인 마족도 한 마리를 감당하기 힘든 녀석이죠! 아스님이 상대 하시기엔 너무 벅찹니다!”

“헉! 아스! 이쪽으로 와! 어서!”


그러나 내 외침은 한발 늦은 셈이 되고 말았다. 이미 베히모스 세 마리가 일제히 아스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놀란 나와 데르온은 얼른 아이를 끌어안으려 했으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전혀 필요 없는 시도였다. 

아스의 손에서 갑자기 눈부신 은빛의 광채가 쏟아져 나오더니, 순식간에 한자나 늘어져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드리우는 베히모스들의 머리를 한꺼번에 양단해 버렸던 것이다.

슈우우욱! 콰앙! 콰아앙!! 거침없는 폭격이 울리고 난 자리엔 몸만 남은 베히모스의 시체가 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그 장소에 있던 누구도 한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무슨…”

“하…하하하?”


당혹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아스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다. 아이는 경악하고 있는 세르피스를 똑바로 노려보며 오른손에서 마치 검처럼 길게 뻗어있는 은색의 광채를 겨누었다.


“다음은 네 차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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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났습니다!!! 엄청난 오류가 있었어요!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2권에 나왔던 소년의 이름이 '레오'가 아니라 '레이'였습니다;; 

초반 설정으로 '레오'라고 정해두고 막상 쓸 때  즉석에서 '레이'라고 바꾼 것을 그만 깜빡 잊고 있었지 뭡니까; 출판된 원고는 수정도 불가능 한데.. 이 일을 어쩌죠?;;<-죽어라!



........이왕 이렇게 된거 그냥 레오라고 우길래요; 2권에 나온 이름은 살포시 무시해주시길!

자~! 여러분은 지금까지 '레오'라고 알고 있었던 겁니다! 아셨죠? (레드썬!)

사실 이것 말고 한가지 이름 틀린게 더 있지만...후후후.. 아픈 과거는 묻어두지요;;

역시 폭참은 휴우증이;;;;




[정령왕 엘퀴네스] 8-8. 폭풍전야 (3)


사람들은 흔히 아이답지 않게 영특하고 재주가 뛰어난 아이를 일컬어 ‘신동’이라고 부르며 신기해하는 경향이 있다. 
외국에는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4살 박이가 원어민 수준의 외국어를 구사한다던가, 절대음감 같은, 어른들도 쉽게 할 수 없는 영역에서 돋보일 때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스는 ‘전투’부분에 있어서 타고난 천재성을 지닌 게 틀림없었다. 
우리는 한동안 가냘픈 외모의 작은 소년이 저보다 훨씬 큰 여자를 간단하게 유린하는 현장을 멍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쾅! 콰아앙! 차아앙!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불꽃이 튀어 올랐지만, 일그러지는 세르피스와 달리 아스는 처음과 전혀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힘에서부터 아스에게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황당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며 옆에서 입을 벌리고 서있던 데르온을 향해 물었다.


“마족의 아이는 성년이 되기까진 전투능력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 그럴걸요?”

“그럼 지금 저 모습은 뭐라고 설명할 건데요?”

“그, 글쎄요. 하하하! 저,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보통 마족도 아닌, 마계 4대 공작의 칭호를 달고 있는 존재를 저렇게 쉽게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감탄을 넘어서 경악을 이끌어낼 수준이었다. 아무리 마신이 선택한 알이라고 해도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잠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데르온을 노려본 나는 아까부터 조용한 라피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아니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아스와 세르피스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내가 자신을 쳐다보는 걸 느꼈는지 생긋 웃으며 재미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상당히 곤란한 꼬맹이인걸. 기회를 놓치지 않은 점은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그게 무슨 뜻이야?”

“아무래도 녀석을 깨우려고 주입한 내 피가 능력의 증폭제가 돼버린 모양이야. 즉, 육체는 어린 상태에서 힘의 각성만 앞당긴 거지. 이렇게 되려고 그렇게 피를 많이 흡수한 거였구만? 어째 순순히 은인이라고 부를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

“…그럼 아스는 결국 너 때문에 저렇게 되었단 소리?”

“뭐, 의도한건 아니지만 그런 것 같네. 아아, 역시 나는 대단하다니까. 이 몸의 타고난 천재성은 무시할 수 없지. 후후.”

“네에. 대단하십니다, 누님.”


평소에는 그렇게 거스르게만 느껴지던 잘난 척도, 여자버전(?)으로 보고나니 왠지 쉽게 인정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건성이나마 고개를 끄덕거리는 나를 본 라피스는 아까보다 좀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의왼데. 혹시 여자한텐 본능적으로 약해지는 타입?”

“아니, 귀찮은 건 피하자는 주의. 비웃어도 할 말 없지만, 난 지금까지 여자들하고는 친하게 지낸 일이 별로 없어서 말이야. 남자들 대할 때 보다 많이 불편해.”

“흐음. 그럼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까?”

“됐어. 네 말마따나 당분간 계속 수도에 있을 텐데 불편할 것 아니야.”

“글쎄, 그것도 그렇지만.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의 경험상 아마 마을에 나가면 또 다른 시비에 걸릴 수도 있는데 말이지.”


마지막 말은 거의 혼자 중얼거리는 식이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의아한 얼굴로 바라본 나에게 녀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뭔가 감추고 있는 것 같아 내심 찝찝했던 것도 잠시, 나는 다시금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아스와 세르피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힘을 각성했다는 라피스의 말처럼 아스는 이미 상대방을 전투 불능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상태였다. 재빠르게 움직일 때마다 바람에 휘날리는 긴 머리카락이 마치 검은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것 같았다. 

휘익! 콰앙! 촤아악!


“크, 크윽! 무슨 이런 꼬마가!!”


아스의 손이 스칠 때마다 세르피스의 몸 여기저기엔 새빨간 생채기가 자리 잡았다. 이 쯤 되면 아무리 바보라 해도 아이가 자신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깨달을 시간이었다.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세르피스에 비해, 얼굴에 그 흔한 땀방울 하나 흘리지 않고 있는 아스의 모습만 보더라도 그 차이는 명백했다.

그 순간, 검을 맞받아치던 아스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느낀 세르피스가 후퇴하여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자 아스는 놓칠 수 없다는 듯 은글슬쩍 뒤로 몸을 빼내는 세르피스에게 수 십 개의 빛 덩어리를 날려 보냈다. 

콰광! 콰가가가가강!!! 

아스의 손에서 날아간 빛들은 순식간에 날카로운 얼음화살이 되어 인정사정없이 세르피스의 몸 여기저기에 파고들었다. 


“아아아악!!”


그 충격으로 그녀는 막 시전 하려던 텔레포트의 마법을 놓치고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온 몸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바둥거리던 그녀는 곧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아스를 발견하곤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꺄악! 내가 잘못했어! 제발 죽이지 말아줘!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그러나 세르피스는 그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느새 창대처럼 길게 늘어난 빛줄기를 손에 쥔 아스가 단번에 그녀의 심장을 꿰뚫어버렸던 것이다!

푸욱! 

살이 뚫리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리자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 내 귓가로, 평소와는 전혀 다른 아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어. 너 같은 부하는 필요 없어.”

“!!”


과연 괜히 마족이 아니라는 것인지, 아스는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부분을 제거한 것일 뿐. 

그들 세계에서는 당연한 것일지 모르지만, 지켜보는 내 입장에선 가슴이 서늘해지는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리기만 했던 꼬마가 갑자기 훌쩍 커버린 것 같았다.


세르피스를 꿰뚫은 창을 소멸시킨 아스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나와 시선을 마주치곤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야 겨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나에게 아스는 머뭇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대부, 미안. 싸워버렸어.”

“으, 으음. 다친 곳은 없니?”

“없어. 근데…나…대부 곤란하게 했어?”


불안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묻는 아이에게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이런 것이 마족이 살아남는 방법이라면 나는 아스를 말릴 권한이 없었다. 

이 아이는 언젠가 나를 떠나 마계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도덕과 정의 때문에 마계에서의 생활이 힘들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 사이 데르온은 죽은 세르피스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때 같은 동료로서 활동했던 이의 죽음을 지켜보는 심정은 어떤 것일까.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가 슬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얼굴을 든 그는 온통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아스를 향해 소리쳤다.


“세상에! 대단하십니다, 주군! 그 암흑의 마녀 세르피스를 이렇게 간단히 처치하시다니!! 과연 마신께서 선택한 우리의 왕다우십니다!!”

“…쿨럭! 데, 데르온. 괜찮은 거예요?”

“예? 제가 뭘요?”

“저기…그래도 한때 동료였던 마족이잖아요?”

“아아, 뭐, 어차피 제가 나서서라도 제거해야 할 생각이었는걸요. 앞으로 방해가 됐음 되었지, 절대로 도움이 될 녀석은 아닙니다. 그리고 어차피 왕께 대항한 자가 죽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런 존재에게는 동정을 보낼 가치도 없지요.”


데르온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까지 끄덕거리며 설명했다. 힘 중심의 마족들은 전투에서 약한 쪽이 죽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데다, 이미 주군을 정해버린 그에게는 다른 마족보단 아스의 입장이 최우선이었던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지금 온통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스가 4대 공작 급의 마족을 손쉽게 처치했다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하긴. 내 주위에 언제부터 제대로 된 녀석들이 있었다고. 에휴, 내가 말을 말자, 말을.’


나는 체념의 한숨을 내쉰 뒤 이번에도 라피스에게 시체들을 화장하도록 부탁했다. 수도로 온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몇 년은 흐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이사나는 무사히 이프리트와 만났으려나. 별 일 없이 잘 해결 되었으면 좋으련만.’


지금쯤이면 상단으로 출발했을 이사나를 떠올리며, 나는 마음 속 깊이 그에게 아무 일 없기를 간절히 바랬다. 이런 내 기도를 신이 들어주었는지는 오직 하늘만이 알 일이었다.





***




<꺄아아아악! 이 얼마 만이어요! 보고 싶었어요, 이프리…헉! 아, 알았어요! 한마디도 하지 않을게요! 정말 얌전히 있을게요, 우엥!!!>

“흐음, 틀림없는 ‘파이어 버스터’로군요.”


이사나에게서 받아든 검신을 쓸어 보이며(정확히는 기운을 불어넣어 협박한 거지만)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는 클리프 상단의 총수이며 예언자로 알려진 이카나였다. 

탐스럽게 곱슬 거리는 붉은 색의 머리카락과 루비 같은 눈동자, 새하얀 피부는 한낮 상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찔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이사나를 따라 상단을 방문한 일행들은 이카나를 보며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신비로운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모인 자리에서 그녀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이사나 한사람밖에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 모르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는 이카나를 깨닫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죄송합니다. 저 혼자 방문하려고 했습니다만, 오는 길에 약간 사고가 있어서 굳이 일행들이 따라오겠다고…”


이사나의 호출을 받고 뒤늦게 기사들을 이끌고 나타난 카웰 후작은, 카리브디스 공작을 저택으로 연행한 이후 이사나가 가는 상단까지 함께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혹시나 또 다른 적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번에도 자신의 입장만 강요할 수 없었던 이사나는 울며 겨자 먹기의 심정으로 후작과 다른 친위기사들의 동행을 허락했다. 사실 허락하지 않았다면 억지로라도 따라붙을 기색이었기에 그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대강의 사정을 들은 이카나, 아니 이프리트는 억지웃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상냥하게 대답했다.


“호호!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폐하. 반드시 혼자서 방문하셔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던 것도 아니니까요. 그보다…전에 뵈었을 때와 외모가 많이 달라지셨군요. 지금이 본래의 모습이시겠지요?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몰라볼 뻔 했습니다.”

“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간의 사정은 저 또한 짐작하는 바니까요. 저는 폐하께서 저와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해 주신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답니다. 이것으로 우리 클리프 상단 또한 향후 나아갈 방향을 확실히 결정할 수 있겠군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후작과 기사들은 이카나를 대하는 이사나의 태도가 지나치게 저자세인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도움을 요청하는 입장이라곤 하지만, 상인은 황제의 신분에서 바라보자면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하찮은 직업이다. 

그런 존재에게 굳이 존대말까지 사용하며 정중하게 대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과한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잠시 의아한 표정을 하던 후작은, 이카나의 미모가 범상치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곤 내심 황제의 사연을 짐작했다. 어른스럽긴 해도 한창 혈기 왕성한 때인 이사나가 이 아름다운 여인에게 반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허무맹랑한 착각이었지만 후작은 근심스러운 얼굴로 이사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한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어찌 어울릴 여자가 없어 한낮 상인의 여자에게 마음을 허락한단 말인가! 이런 류의 소문이라도 돌았다간 귀족들 사이에서 폐하의 이미지가 크게 추락할 것이 틀림없다. 이거 아무래도 나중에 따로 충언을 드려야겠군.’


만약 이 순간 이프리트가 그의 생각을 알았더라면 당장 일어나서 목을 조르려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트로웰처럼 혜안이 없는 그가 후작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을 리 만무. 

이프리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이사나를 인정함과 동시에 그에게 클리프 상단의 원조(援助)를 허락했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드디어 보답을 받는 순간이었다.
이사나는 당장이라도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것을 참으며 기쁨이 역력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프리…아, 아니, 이카나님!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 저에게 상단의 지원을 허락하시는 겁니까?”

“그것이 처음 정한 약속이었으니까요. 황제께서 제 요구를 들어주셨으니, 저 또한 마땅히 제가 한 말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다만…”

“다만?”


스윽!

말 끝을 흐린 이프리트가 내민 것은 방금 전 이사나가 그에게 넘긴 파이어 버스터였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사나에게 이프리트는 상큼한 얼굴로 대답했다.


“다시 가져가 주십사 합니다.”

“…네?”

“어차피 이미 주인을 정한 검입니다. 저는 단지 황제폐하의 의지를 읽어보려던 것 뿐, 이것이 정말 필요해서 요구한 것이 아니었으니 폐하께서 도로 가져가 주십시오.”

“헉! 그, 그런 말씀은 없으셨잖습니까?”

“어머~ 그렇다고 제가 가지겠다는 말도 한적 없는 걸요. 이 검도 모처럼 정한 주인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을 겁니다. 사실 한낮 ‘상인 일 뿐인’ 제가 성검을 가져다 무엇 하겠습니까? 이런 것은 팔고 싶어도 팔수가 없을 겁니다.”


언뜻 들으면 고귀한 성검을 어찌 팔수가 있냐는 말로 들렸지만, 그 안에 감춰둔 뜻은 정반대였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마검’ 때문에 상단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싶지 않다는 강력한 의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이사나의 얼굴을 모른 척 한 이프리트는, 능청스러운 태도로 파이어 버스터의 의사까지 확인해 보였다.


“그렇죠, 성검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대로 저와 함께 이 낯선 공간에서 ‘영원히’ 갇혀 지내고 싶나요? 아니면…”

<저야 물론 용사님과 함께 하고 싶죠! 그런 당연한 말씀을! 오호호호! 자아! 용사님 우리 어서 드래곤을 물리치러 가자고요! 그 다음은 마신인거 아시죠? 이분 누구신지 정말 센스가 탁월하시네! 어떻게 내 마음을 이렇게 잘 알아주실까? 호호호호호! 호호호!>

“……”


결국 이사나는 눈물을 삼키며 다시 파이어 버스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일행들은 상단의 인정을 받은 것은 물론 성검까지 가지게 된 것을 매우 기뻐했으나, 진실은 언제고 고독한 법. 
그는 이것으로  앞으로 남은 수명중 10년의 시간을 미리 반납한 셈 치자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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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엘이 여자 주인공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이것저것 온갖 로맨스를 전부 다 넣어볼 수 있었을텐데! 더불어 키스며 그 단계(?)의 상황까지도!! 

아아, 아깝도다!!<-뭐가!!

주변에 멋진 남자들이 널린 주인공이란 부러운 법이에요~ 후후후후.


P.s- 오타 지적 정말 감사합니다!!!!^^**계속 부탁드립...<-퍽!!







[정령왕 엘퀴네스] 8-9. 폭풍전야 (4)

당장 처형당할 거란 생각과는 달리, 공작은 단순히 저택으로 연행되었을 뿐 어떠한 과격한 조치도 당하지 않았다. 

함께 끌려왔던 어둠의 기사들은 모두 지하 감옥에 갇혔으나, 공작 본인에겐 검과 무기로 사용될 만한 것들을 압수 했을 뿐, 오히려 넓은 독실과 따뜻한 식사까지 제공 되었던 것이다.

물론 감시역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황제에게 상해를 입힌 데다 포로로 끌려온 입장치고 그는 꽤나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공작은 굳은 표정으로 자신 앞에 식사를 내려놓는 엘프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감시역’이라며 찾아온 그는, 특이하게도 보통의 엘프완 달리 푸른빛이 도는 피부에 새하얀 은발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말로만 듣던 ‘블루 엘프’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한동안 멍한 얼굴을 했다. 인간들을 피해 숨어 버린 지 몇 백 년이나 지난 종족을, 설마 이런 식으로 볼 수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라는 그의 표정을 다른 식으로 해석한 듯 공작을 향한 엘프-시벨리우스의 말투는 그리 곱지 못했다.


“도망칠 생각은 접어두는 게 좋아. 이방엔 내가 허락한 사람 외에는 드나들 수 없도록 결계를 쳐둔 상태니까. 저택에 있는 사람은 다들 너에게 호의적이지 못하니 얌전하게 있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거다.”

“……황제에게 이종족의 동료가 있을 줄은 몰랐군.”

“여행을 하다보면 별의 별 존재를 다 만나게 되니까 말이야. 그보다 너, 이사나를 멋지게 공격했다며? 쯧쯧, 후환이 두렵지도 않나? 엘이 모르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라고.”

“엘?”


의아한 얼굴로 되묻던 공작은 그가 곧 형벌의 신 엘뤼엔이 찾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곤 급히 얼굴을 굳혔다. 신과 친분이 있는 자라면 그 또한 범상치 않은 존재일 것이다. 공작은 곧 엘뤼엔이 이사나를 나무랄 때 ‘내 아들이 슬퍼한다.’는 표현을 쓴 것을 기억해 냈다.

그 당시 경황이 없어 그 사실을 눈치 챈 자는 자신밖에 없었지만, 만약 그의 생각대로 엘이란 자가 신의 아들이고, 그가 이사나를 돕고 있는 상황이라면, 황제의 전력은 감히 사람의 눈으로 헤아릴 단계를 넘어선 셈이었다.

그러자 공작의 착잡한 심정을 눈치 챈 시벨리우스는 피식 웃으며 그가 앉아있던 의자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이사나는 아직 공작을 죽일 뜻이 없는 듯 했다. 후환이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버려둔다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아까워 한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전 대륙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소드 마스터였으니, 가능한 회유를 통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다는 생각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이 삭막해 보이는 남자가 과연 대공에게서 돌아설 수 있을까? 

시벨리우스는 심심함을 달랠 겸, 그에게 대화를 걸기 시작했다.


“이사나의 사정은 대충 들어서 알고 있어. 이전에 네가 보아왔던 녀석과는 전혀 딴판이 된 것 같겠지?”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 그동안 내 불찰이 컸다는 생각이 들더군. 지금까지 그가 상급 정령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으니까.”

“아아, 그건 이곳에 있는 후작 녀석도 마찬가지니까 섭섭하게 생각할 것 없어. 그 일을 알고 있는 건 여행을 함께했던 일행과 친위기사들뿐이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후작이 모르고 있다고?”


공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본 실력을 감추는 것은 좋지만, 후작까지 모르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의외였다. 아군에게까지 숨길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러자 시벨리우스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과장되게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녀석 고집이 장난이 아니거든. 일단 자신이 가진 황제로서의 재량을 먼저 인정받은 뒤에 밝히고 싶다는 거야. 요령으로 공로를 세우고 싶지는 않다는 거겠지.”

“그런 점은 선황과 닮았군. 선대의 황제는 실력보단 그 사람의 인격을 먼저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이셨지.”

“호오~ 꽤나 인간다운 말이로군. 뭐, 아무튼 그런 줄 알고 다른 사람들한텐 비밀로 해주길 바래. 하긴, 그래봤자 녀석이 정말 감추고 있는 사실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정말 감추고 있는 일? 혹시 형벌의 신 엘뤼엔에 대한 거라면…”

“엘뤼엔이라, 아주 관계가 없다곤 못하지.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는 이사나하곤 상관없어. 친분은 있어도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입장은 아니거든.”

“그렇다면 그의 아들에 대한 것인가?”

“!”


뜬금없이 정곡을 찌르는 공작의 말에 시벨리우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엘이 엘뤼엔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그조차 최근에 알게 된 것으로, 생판 처음 보는 타인이 쉽게 알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굳어있는 시벨의 표정을 본 공작은 순순히 알게 된 경로를 털어놓았다.


“황제와 전투를 벌이는 도중, 금발머리의 남자가 끼어들어 훼방을 놓더군. 엘이란 사람을 급히 찾고 있었지. 한눈에도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설마 그가 형벌의 신 일 줄은….”

“망할! 그놈이 엘은 왜 찾는 건데? 할 일 없으면 신계에 처박혀 일이나 할 것이지, 중간계엔 왜 내려와? 젠장! 이거 나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씩씩거리는 시벨리우스의 말에 공작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신에 대한 언동치곤…꽤나 무례하군. 엘프도 신을 섬기는 종족일 텐데?”

“흥! 엘프는 누가 엘프라는 거야!”

“엘프가 아니다? 그럼?”

“그런 건 알 필요 없어. 뭐, 어차피 말해줘도 모르겠지만.”

“…좋다. 그건 그렇다 치지. 그보다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엘이란 자가 형벌의 신 엘뤼엔의 아들인 게 확실한 건가? 듣자하니 황성으로 올라간 것 같은데, 전시가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왜 그 혼자 따로 활동하는 거지?”


시벨리우스는 한순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편의를 봐주고 있어도, 공작은 이 저택에 포로로 잡혀 들어온 상태였다. 그런데 마치 자신이 주인인 마냥 이것저것 태평하게 캐묻고 있지 않은가! 

왠지 역할이 바뀐 것 같다고 속으로 투덜거린 시벨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아, 대답하지. 첫 번째 질문은 네 생각이 맞다. 엄밀히 따지자면 양아버지지만 말이야. 그리고 두 번째는 당연히 이것이 전략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쪽에서 대공의 군대가 모이고 있는 동안, 엘은 먼저 올라가 수도를 칠거야. 
황성이 불바다가 되면 그들도 어쩔 수 없이 회군을 해야 할 테지? 그때 돌아서는 대공의 군대를 이쪽에 남아있는 이사나의 군대가 친다는 계획이다.”

“…그런!! 큭! 가능할리 없다! 애초에 전략의 차이가…”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말해주지. 대공의 군대가 10만이었던가? 이곳에서 이사나가 최대 끌어 모을 수 있는 군사의 숫자는 대략 5만. 그 중에서 황성 쪽에 배치되는 군대는 아무리 많아도 3천을 넘지 않아. 그 정도라면 양동작전으로 충분히 커버가 가능하다. 게다가 이쪽엔 드러나지 않은 능력자가 많거든.”

“!!”

“내가 이걸 알려주는 이유는, 무슨 수를 써도 네가 이곳에서 도망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너도 제대로 된 인간이고 싶으면 좀 더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게 좋을 거야.”

“현명한 선택?”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바라보는 공작에게 시벨은 빈정거리는 어투로 물었다.


“너는 왜 대공을 따르는 거지? 내가 알기로 인간들은 꽤나 혈통을 중시하던데 말이야. 그런 걸로 치자면 오히려 정통성 있는 쪽은 이사나가 아닌가?”

“…대공 전하 또한 황족의 한사람으로서 계승권이 주어지신 분이다. 나는 내가 내린 결정이 틀렸다곤 생각하지 않아. 그는 냉철하고 지적인 인간이다. 그가 황제가 되면 분명 지금보다 더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나갈 것이다.” 

“흥~ 그런 인간이 마족과 계약해서 애꿎은 어린아이들을 제물로 바치나 보지?”

“그, 그게 무슨?”


믿을 수 없는 말에 공작은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마신교의 신관장인 대공이 마족과 계약한 사실은 새삼스러울 게 없었지만, 제물에 대한 얘기는 전혀 금시초문이었던 것이다. 

평소귀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관심이 없던 그는, 황성에 퍼져있는 흉흉한 소문역시 들은바 없었다. 
영문을 몰라 하는 그에게 시벨리우스는 가차 없이 다음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다. 하여튼 예나 지금이나 인간만큼 탐욕스러운 동물이 없다니까? 입으론 도덕을 논하면서 돌아서선 잔인한 짓도 서슴지 않지. 말해봐. 너희들은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동족을 희생시키면 기분이 좋아지나?”

“그, 그럴 리가 없다! 거짓된 정보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수작이냐!”

“수작이라고?”

“그렇다! 내가 황제에게 돌아서도록 회유하려는 속셈이 아니냐!”

“호오~ 그렇게 해야 할 만큼 네가 대단한 가치가 있는 존재였던가?”

“!!”


할 말을 잃고 굳어진 공작의 모습을 보며 나직이 혀를 찬 시벨리우스는 더 이상 자리에 앉아있을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서슴없이 문고리를 잡아당긴 그는 나가면서 한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더 이상 후회할 일을 늘이고 싶지 않다면 머리 좀 식히는 게 좋을 거야. 세상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니까.”

“……”


끼익! 콰당!

시벨리우스가 나가고 혼자가 된 공작은 두 손으로 천천히 머리를 쓸어 넘기며 신음을 삼켰다. 지금까지 그가 지켜왔던 모든 신념과 정의가 한꺼번에 무너진듯한 기분이었다. 

대공의 손속이 잔인하다는 것은 처음 만났던 자리에서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그동안은 남의 위에 군림하는 자로서 어느 정도는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을 제물로 삼는 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였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못하는 존재는 위험하다. 그런 자가 황제가 되면 제국은 순식간에 피바다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큭- 내 선택이 잘못 되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무엇이지?’


검을 겨루었을 때 마주친 황제의 두 눈은 더 이상 그가 알고 있던 나약하기만 한 소년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것을 본 순간부터 공작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 후로도 공작은 오래도록 지루한 갈등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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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에.. 이번편은 좀 짧습니다; 하루종일 붙들고 있었는데, 이놈의 산만한 집중력 때문에; 많이 쓰지 못했네요;;

뇌세포가 점점 죽어가는 것 같습니다. 방금 써놓고 무슨 말 했는지 몰라서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는(...) 요즘 왜 이럴까요;;ㅠㅠ

아무래도 인터넷을 끊어놔야...<-



p.s- 블레스터의 봉인이 해제되는 부분은 저도 쓰면서 많이..아주 많이..썰렁하다고 생각했습니다;(쿨럭) 
다시 고치려니 상당히 막막하긴 하지만;; 일단 출판되는 원고에서는 수정을 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그러나 요즘의 머리상태로는 그닥 좋은 방향으로 바뀔것 같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아무튼 짧지만 한 편업!~ 모두 다음 시간에 만나요~~<-응?







[정령왕 엘퀴네스] 8-10. 폭풍전야 (5)



결과부터 논하자면, 데르온과 라피스가 여장을 한 것은 결코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수도에서 머문 일주일 내내, 나는 그러한 생각을 몇 십, 몇 백번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따라붙는 인간들이 생기니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여어~ 이쁜 아가씨들. 그러지 말고 우리랑 같이 가자니까? 클클클. 잘 해줄 테니까 그만 튕기고…”


오늘 만 해도 벌써 몇 번째 이 말을 듣고 있는지 모른다. 어이없게도 강제징병을 면했다 생각한 순간 돌아온 것은 수많은 늑대들의 추파였던 것이다. 
가뜩이나 눈에 띄는 외모의 두 사람은 나처럼 얼굴을 가리고 다니지도 않았기에 더욱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나는 깊이 눌러쓴 후드를 움켜쥐며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내 모습에 데르온과 라피스는 방금 자신들을 향해 수작(이라고 쓰고 찝쩍이라고 읽는다)을 부린 건장한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어딜 봐도 아리따운 아가씨로만 보이는 그들이 쏘아보는 눈빛에 두려움을 느낄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나 싸움터에서 잔뼈가 굵은 용병들의 경우가 더욱 그랬다. 
예상대로 그들은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능숙하게 라피스의 어깨를 감쌌다.


“노려보니 더 귀여운데? 아가씨 이름이 어떻게 되지? 나이는?”

“…이 손 떼는 게 신상에 좋을 거다.”

“큭큭큭. 역시 여자는 이래야 하지. 도도해야 제 맛이라니까? 순순히 따라와 주면 일행들에게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겠어. 어떻게 생각해?”

“나 참, 정말 가지가지 하는 군.”


대책 없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기는 라피스는 이미 이런 상황에 상당히 익숙해 있는 듯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남자로 변했던 이유가 ‘따라붙는 놈들이 많아서’였던가. 

하긴 저 정도 외모라면 추종자들이 생기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나 역시 처음부터 여자 모습인 녀석과 만났더라면 충분히 호감을 보였을 테니까.

하지만 일단 ‘남자’라고 인식해버린 탓인지, 나는 아무리 봐도 지금의 상황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그러니 라피스 본인의 심정은 오죽하겠는가! 녀석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거칠게 용병의 손을 쳐냈다. 


“지금 꺼진다면 큰마음 먹고 봐주지. 하지만 물러서지 않으면 넌 죽는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목소리가 녀석이 얼마나 참고 있는지를 고스란히 대변하는 듯 했다. 이쯤이면 무안해서라도 가보련만, 역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용병들은 오히려 코웃음 칠 뿐이었다.


“말씨가 과격한 아가씨군. 뭐, 나는 상관없어. 단~ 이왕 죽일 거 침대에서 멋지게 천국으로 보내줬으면 좋겠는데. 킥킥.”

“크하하하하!”

“휘익! 휘익~”


도대체 뇌구조가 어떻게 되어먹은 작자들인가. 명색이 용병이란 녀석들이 진심과 허풍도 구분하지 못한단 사실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나치게 태연한 얼굴을 보아 라피스의 눈에 서린 섬뜩한 살기조차 느끼지 못한 듯 보였다.


‘저러다 진짜 죽이는 거 아니야?’


그러자 지금까지의 상황을 쭈욱 지켜보고 있던 아스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대부! 죽인다는데 왜 좋아해? 침대에서 죽으면 천국 가?”

“쿨럭!! 으음…그러니까, 그냥 농담하는 거야. 저런 건 몰라도 된단다.”

“농담? 저 인간들 강해? 은인 이길 수 있어?”

“…절대 무리일 걸.”

“아! 이런 걸 무모하다고 하는 거?”

“정답이야. 아주 똑똑하구나.”


나는 기특한 마음에 상황도 잊고 아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자신들을 무시하는 거라고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주변에 있던 용병들의 얼굴이 험악해지자 방금 전까지 라피스에게 추근거리던 남자가 불쾌한 표정으로 내 팔을 붙들었다.


“너 방금 뭐랬냐, 꼬마야? 엉?”

“아야! 무슨 짓이에요?”

“요 맹랑한 녀석 좀 보게! 감히 이 형님들의 심기를 거슬려 놓고 무사히 넘어갈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오냐! 네가 보기엔 우리들이 그렇게 비리비리 해 보인 모양인데! 한번 따끔한 맛을 봐야 정신 차리겠냐! 어?”

“형님은 무슨 얼어 죽을! 난 외아들이야!”


엘뤼엔한테 다른 자식이 없으니 외아들인 게 맞겠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치자 용병들은 한결같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 중에서 내 팔을 잡고 있던 남자는 험상궂은 표정으로 거칠게 내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겨내려고 했다.


“어디 그 배짱 있는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자! 이놈의 자식! 넌 오늘 잘못 걸린 줄 알아!”

“아파! 팔이나 놓고…”


그러나 난 더 이상 말을 이을 필요가 없었다. 갑자기 “우드드득!”하는 끔찍한 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내게 다가오던 용병이 바닥으로 굴렀던 것이다. 


“끄아아악! 내 팔! 내 팔이!!!”

“!!”


남자의 팔은 괴이할 정도로 흉한 모습으로 뒤틀려 꺾여 있었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본 곳에는 방금 전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의 팔을 부러뜨린 괴력의 여자-라피스가 생긋 미소 지으며 서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는 당장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 같이 섬뜩한 빛을 내뿜었다. 그때서야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는지 용병들은 창백한 표정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이것들이 내가 오냐오냐 해주니까 호구로 보였나 보지?”

“그, 그게 아니라…아, 아니! 이게 무슨 짓이야! 감히 사람의 팔을 부러뜨리다니!! 너 우리가 누군지 알아? 우리는 그 유명한 꼬냑 용병단의…”

“꼬냑이고 와인이고, 난 분명히 경고했다. 지금 꺼지지 않으면 죽인다고. 정말 내가 웬만하면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라피스는 다시 한 번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중얼거렸다.


“이왕 쫓겨 다닐 바에야 살인죄가 좋겠지?”


순간 그의 두 손에서 커다란 불덩이가 화르륵 타올랐다. 그것을 본 용병들은 경악하며 소리쳤다. 


“으아아아악! 도망쳐!! 마법사다~!!”

“다들 튀어!!”

“맙소사! 왜 이런 곳에 마법사가!!”


다급한 외침에 용병은 물론, 그 근처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혼비백산한 얼굴로 피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라피스가 알아서 자중하기를 바라기는 무리. 녀석은 도망치는 용병들을 향해 가차 없이 불덩어리를 날려버렸다.

콰앙! 콰아아앙~!! 


“크아악!”

“아아악! 살려줘!!”


순식간에 난잡하게 변한 거리는 공포에 질린 얼굴들과 맞물려 흡사 지옥의 아비규환이라도 보는 듯 했다. 처음부터 봐주지 않고 고급 마법을 날린 통에, 몇 채의 건물까지 부서진 상태였다. 

평소라면 이때쯤 그만 뒀을 녀석이 계속해서 마법을 난사하려 하자, 나는 놀란 표정으로 말리기 시작했다.


“라, 라피스! 화난 건 알지만 이제 그만 둬! 사람을 다 죽일 셈이야?”

“시끄러! 안 그래도 열 받았는데 성질 돋구지마! 너도 그 우유부단한 태도 좀 고쳐! 언제까지 인간들한테 휘둘릴 셈이야?”

“왜 나한테 성질이야? 그러게 너도 후드 쓰고 다니랬잖아! 처음부터 저 녀석들 눈에 뜨인 게 누군데!”

“젠장! 그래, 내가 다 죽일 놈이다!”

“라피스!”

“알았어! 알았다고!”


버럭 소리친 녀석은 잔뜩 찌푸린 표정을 하면서도 순순히 마법을 거두어 들였다. 바로 그때, 주민의 신고를 받은 황성의 경비대가 우르르 몰려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저 녀석들이다! 수도를 어지럽힌 범인들을 잡아라!”

“와아아아아!”

“!!!”


마법사가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나타난 경비대의 숫자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을 상대로 맞서 싸울 수도 업고, 그렇다고 순순히 잡혀 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도망쳐!!”


짧게 혀를 찬 우리는 필사적으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후발대가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한 달. 진정으로 앞날이 캄캄해지는 순간이었다.




***




“마법사?”


한창 전쟁 준비로 바쁜 와중이던 유카르테 대공은 경비대로부터 들어온 보고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수도에 웬 여자 마법사가 나타나 일행들과 함께 건물들을 부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는 대략 20대 초반, 붉은 머리카락에 대단히 뛰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소란을 일으킨 마법사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이었다.

흔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 대공에게 옆에 있던 귀족들이 분개하여 소리쳤다.


“감히 황제폐하가 계시는 수도에서 소란을 피우다니! 누군지 몰라도 당장 잡아들여 지하 감옥에 보내야 합니다, 대공 전하! 허락만 하신다면 제가 직접 군사를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타 제국의 첩자일지도 모릅니다! 여인왕국에서 최근 분란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는데, 그에 관련된 세력일지도!”

“한시바삐 잡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흥분한 귀족들에 비해 대공은 정체모를 여자마법사에 대한 관심을 금방 꺼버렸다. 그에게는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이사나와의 전투가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수도에서 일어나는 가벼운 소란쯤이야 경비대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황성의 경비대가 그들을 뒤쫓고 있다하니 금방 소식이 들어올 것이다. 그보다 할버크에 집결된 군사의 숫자는 이제 몇 이지?”

“크흠. 이제 대략 6만 가까이 모였다고 들었습니다. 각 영지에서 속속들이 보내고 있으니 한 달 후면 10만을 채울 것입니다.”

“좋아, 순조롭군. 클모어의 동태에 대해서는 알아보았나?”

“얼마 전 클리프 상단의 총수란 여자가 후작을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상단이 근방에 꽤 영향력이 있었는지, 다른 상단들도 너도나도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흐음. 상단이라…군사의 수는?”

“여러 경로로 모이고 있습니다만, 다 합쳐서 5만도 되지 않을 숫자입니다. 감히 대공전하의 상대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렁찬 대답에 대공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옆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한 기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대공 전하, 한 가지 드릴 말씀이…”

“무엇이냐?”

“클모어에 먼저 가 있던 카리브디스공작과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며칠 전부터 행방이 묘연한 상태입니다.”

“허엇! 그런!!”


평소 대공의 오른팔로서 활약하고 있던 공작을 익히 알고 있는 귀족들은 놀란 표정으로 숨을 들이켰다. 화가 난 대공이 당장이라도 자신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외로 대공은 평온한 표정으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을 뿐이었다.
보고하던 기사는 안심하면서도 어딘지 이상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저, 저어? 대공 전하? 기사들을 보내 수색하게 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예? 하지만…”

“이미 몇 달이나 내가 내린 지시를 수행하지 못한 자다. 죽든지 말든지 내 알바 아니지. 소드 마스터로서의 재능은 아깝지만 그것도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녀석은 내게 방해만 될 뿐이야.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다.”

“아,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카리브디스 공작을 향해 이런 평가를 내린 자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검술에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아, 모든 기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심한 처사라고 생각하면서도 귀족들은 대공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공작의 처지를 동정하기에는 자신의 목숨이 더 소중했던 것이다.

잠시의 침묵 후 귀족들은 다시금 아부 성 짙은 미소를 띄우며 맞장구치기 시작했다.


“옳으신 선택입니다, 대공전하! 카리브디스 그 자는 검술실력은 좋아도 다른 면에선 영 형편없던 자가 아닙니까? 저는 늘 그가 대공전하의 발목을 잡을까봐 노심초사 했습니다! 하하!”

“허허! 길모트 후작님도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저도 그렇답니다! 참으로 훌륭한 결단이셨습니다, 대공 전하! 대의를 위해 필요치 않은 부분을 과감히 제거하시는 것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출진준비를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일찌감치 대공전하가 타고 가실 명마를 준비했습니다.”

“나는 가지 않는다.”

“예,예, 당연히 그리하셔야…예? 가, 가지 않으신다니요?”


술렁술렁

당연히 할버크로 출진할거라 생각했던 대공이 황성에 남는다는 소리에 귀족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대답하는 대공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하기만 했다.


“황제인 내가 황성을 비울 순 없지 않는가. 나는 이곳에서 결과를 듣겠다. 그대들이 나를 위해 알아서 잘 할 것이라 믿는다.”

“으, 으음. 하, 하긴! 불을 보듯 결말이 빤한 전쟁에 굳이 폐하께서 출진하실 필요는 없겠지요! 하하하!”

“맞습니다! 반이나 전력의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그런 반역의 무리 따윈 하루면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을 겁니다!”


어느새 대공에서 ‘폐하’로 호칭을 바꾼 귀족들은 흐르는 식은땀을 감추며 연신 떠들었다. 그러나 그들 중의 누구도 대공의 숨은 속내를 짐작하는 이는 없었다. 

대공은 입고 있는 자신의 하얀 법의를 바라보며 나직한 미소를 띄웠다. 목표했던 숫자는 이제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이런 중요한 시점에 황성을 비울 수는 없는 일. 

이사나가 필사적으로 전쟁에 임하는 동안, 자신은 벌써 십년을 넘게 진행해온 계획을 마무리 짓고 있을 것이다. 

이제 온 세상이 그의 발밑에 들어올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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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은 자유~~ 와하하하<-퍽!


그나저나... 어디서 헤매고 있는 걸까나요? 우리의 아버님씨는....♥

외아들을 늑대 앞에 던져두고~~ 랄랄라~~ <-네 탓이잖아!!



p.s- 저는 마감이 한 달에 한 번씩 있답니다.ㅠㅠ 어찌어찌 써서 결국 이번 권이 4월 초에 나온다면... 9권 마감은 4월 말에 있다는 소리입니다;-_-;<-그리고 5월 초에 나오는..

우후후후후...(먼산)







[정령왕 엘퀴네스] 8-11. 날개를 펼쳐라! (1)
쏴아아-

탁 트인 초원엔 달콤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흩날리는 꽃잎들과 맑은 웃음소리. 이미 오래전에 기억에서 잊혀져버린,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웠던 황금시대.

그 속에서 자신은 눈앞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물었다.


<넌…왜 여기에 온 거지?>


자신의 물음에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미소 짓는다. 바람에 따라 흩날리는 금색의 머리카락이 부서진 유리가루처럼 눈부신 빛을 내뿜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은밀한 장난을 치는 어린아이처럼 한손가락을 입가에 가져간다. ‘쉿!’하고 짧게 중얼거린 입이 망설이듯 조심스럽게 옹알거렸다.


<어쩔 수 없지.>

<너한테만 가르쳐 줄게.>


아직 채 성년을 되지 못한 어린 미성. 그리고 점점 더 짙어지는 바람의 향기. 


<…를 찾으러 왔어.>

<…를?>


놀란 표정으로 되묻는 자신에게 ‘그’는 또다시 미소 짓는다. 괜히 물었다는 생각에 미안한 얼굴을 하자 ‘그’는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다.


<어차피…전부 잊을 테니까.>






“헉!!”


평소처럼 혜안을 열어두던 트로웰은 거친 숨을 삼키며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숨쉬기 힘들만큼 강한 압력이 그의 온 몸을 압박해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면서 이렇게 고통스럽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만큼 짚어내기 어려운 미래였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그가 이러한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본 장면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혜안을 통해 보았던, 눈앞에 펼쳐진 푸른 초원의 모습은 그의 기억에도 이미 존재하던 것이었다. 

문제라면 그것이 이미 4천 년 전에 사라진 장소라는 점이다.

분명 미래를 보았는데 어째서 과거의 장면이 나타난 것인지, 그리고 왜 또 자신은 그것에 대한 기억이 없는지 트로웰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상대방의 말이 마치 박힌 가시처럼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돌았다.


“…어차피 전부 잊을 거라…고?”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트로웰은 분명히 그를 알고 있었다. 혜안으로 보았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마음을 터놓는 오랜 친구사이 같았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그 부분에 대해 기억하는 게 없다니! 생각할수록 수상한 일이 아닌가!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기억을 지웠다? 그럼 방금 전 본 그 소년이 지운 걸까? 하지만 정령왕의 기억에 손댈 수 있는 존재가…”


설령 상급신이라 하더라도 정령왕의 기억은 함부로 다룰 수 없었다. 그런 것이 가능한 존재는 전 차원과 모든 생명체를 통치하는 주신뿐이다. 

그럼 그 소년이 주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트로웰은 점점 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마침 적절한 때에 등장한 손님의 방문으로, 그는 잠시 동안 그 골치 아픈 생각을 접어둘 수 있었다.


“트로웰. 뭐하고 계십니까?”

“아…미네 구나. 어서와.”


트로웰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영역에 들어서고 있는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를 바라보았다. 가끔 정원에서 마주치긴 했지만 그가 직접 자신에게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반가운 기분보단 의외라는 심정이 앞섰다.


“여긴 웬일이야? 미네가 여기 온 것은 처음이지?”

“네. 그런데 어디 아프십니까? 안색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만.”

“아아. 별거 아니야. 능력을 좀 과하게 사용했더니 좀 무리가 갔나봐.”

“능력이라면…미래를 보는 혜안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응. 엘이 걱정 되서 말이야. 전쟁의 결과라도 알아볼 생각이었는데…생각보다 방해가 심하네. 뭔가 좀 안 맞는 것 같아.”

“흐음. 능력자의 개입이 많을수록 운명은 불안해지니까요. 그래서 정령왕의 소환자는 항시 선택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법이죠. 트로웰 답지 않으셨군요.”

“맞아. 사실은 좀 심심했거든.”

“그건 저도 동감입니다.”


탄생한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았지만, 미네에게는 왕으로서 필요한 수업을 따로 진행시킬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건 정령왕으로서 당연한 일이었지만, 트로웰은 어쩐지 은근히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엘과 지내는 동안 누군가를 보살피고 가르치는 것에 흥미와 보람을 느껴버린 탓이었다. 트로웰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계가 편하긴 한데, 확실히 재미있고 역동적인 것은 중간계인 것 같아. 이번 전쟁만 아니었어도 좀 푹 놀다 오는 건데 말이야.”

“엘퀴네스의 유희에 참가하실 생각은 없는 겁니까?”

“아아. 난 전쟁은 별로…. 좋게 말하면 자중하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성격이 나온다고나 할까? 엘이 충격 받는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거든. 그 녀석은 날 굉장히 착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말이야.”

“제가 보기에도 트로웰은 충분히 상냥합니다만?”

“이런, 이런. 앞으론 미네 앞에서도 조심해야겠는걸. 후후”

“??”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미네의 시선을 외면하며 트로웰은 쓴 웃음을 삼켰다. 

과거의 잘못을 감추는 일은 너무 간단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며 시간이 흐르기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4천년만 해도 트로웰의 이름은 중간계의 모든 존재들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유일하게 거부감이 없는 존재는 같은 4대 정령왕들 뿐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들과의 사이가 원활했던 것도 아니다.

모든 일에 무관심했던 엘퀴네스와 자신밖에 몰랐던 이프리트. 인간에게 빠져 정령들을 돌보지 않았던 미네르바. 그들 속에서 트로웰은 언제나 고독했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누군가를 원망하는 일에 집요하게 굴었던 걸지도 모른다.


<괜찮아. 네가 상냥하다는 것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어?”

“트로웰? 왜 그러십니까?”

“아니, 방금 무슨 소리가…”

“전 아무 소리도 안 들렸습니다만.”


환청이었던 걸까? 언제인가도 한번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던 것 같았다. 어쩌면 방금 전에 본 혜안의 영향일지도 모르지만, 트로웰은 예감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뭔가를 찾고 있다고 했었지. 그게 뭐였을까?’


그 속에 해답이 있을 듯도 싶은데, 한번 사라진 기억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복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던 그는 푸욱 한숨을 내쉬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미네는 그런 그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트로웰?”

“으음. 아무래도 안 되겠어, 미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내가 직접 중간계로 내려가서 알아봐야 할 것 같아.”

“엘퀴네스의 유희에 동참하실 생각이십니까?”

“상황이 되면 그렇게 해야지. 미네도 같이 갈래?”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그러나 미네르바는 거기에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들 사이로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이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휘유~ 여긴 언제 봐도 여전하군. 가장 발전이 없는 세계라니까?”

“!!”

“??”


정령왕의 영역으로 기척도 없이 들어온 존재는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제법 준수한 인상의 남자였다.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면서도 정령왕들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낯선 이의 등장에 긴장하던 것도 잠시, 남자를 감싼 신성한 기운과 그 위를 겉도는 아득한 마기를 느낀 트로웰은 곧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신…카노스?”


그러자 상대편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가볍게 긍정했다. 


“호오! 역시 지혜롭기로 이름 높은 땅의 정령왕답군. 한 번에 나를 알아볼 줄이야. 만나서 반가워~”

“마신이 여기엔 무슨 일로…”

“아아, 급하시긴. 모처럼 찾아왔는데 자리에 앉으라고도 안하는 거야? 상당히 매정한 정령왕님들이네.”


이미 알아서 자리에 앉은 채 하는 말치곤 그다지 신빙성이 없었지만 트로웰은 순순히 사과를 건넸다. 마신 카노스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바다. 괜한 말로 시비를 일으켜 피곤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마신이 주변을 충분히 돌아보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물었다.


“이제 물어도 될까? 마신이 정령계엔 무슨 일로 온 거지?”

“아~ 그게 말이지. 실은 도움을 요청하려고 왔어.”

“도움?”

“응! 도움. 이를테면 협조 요구지! 아, 그게 그 말인가?”


태연하게 자문하는 카노스의 모습에 트로웰은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전대의 엘퀴네스, 즉 지금의 엘뤼엔 덕분에 마이페이스적인 성향에는 꽤 익숙해져 있었지만, 역시 어지간하면 이런 분류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미네르바가 그를 대신하여 질문했다.


“도움을 받고 싶다면 정확히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도와야 하는지 말씀하셔야 하는 게 아닐까요? 카노스님 본인의 의지십니까? 아니면 신계 전체의 의견입니까?”

“오옷! 멋져! 바로 그거야, 그거! 이야~ 이번대의 미네르바는 상당히 센스가 좋은걸~”

“…헛소리는 그만하고 본론부터 말하시지. 상급신이 멋대로 단독행동을 벌일 리는 없으니, 신계에서 요청하는 일이겠지? 이를테면 악신의 탄생을 저지 하라던가, 하는.”


트로웰의 말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 있던 카노스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잠시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뜨던 그는 곧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땅의 정령왕이 가진 혜안을 너무 만만히 봤군.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인가?”

“대충은. 하지만 누가 개입되어 있는지는 알지 못해. 그 부분만큼은 마치 안개가 서린 듯 뿌옇게 보이거든.”

“흐음. 그건 예언 능력이 있는 상급신들과 같군. 하긴, 정령왕은 상급신의 능력 중 한가지만을 강하게 타고난 존재니까. 뭐, 배후는 전부 밝혀냈어. 하지만 너무 늦게 발견해서, 이미 손을 쓰기에 늦어버린 상태야.”

“…별로 유쾌한 소식은 아니네. 그래서? 신들이 할 수 없다면 정령왕도 불가능해. 우리더러 뭘 어쩌라는 거지?”

“말했잖아. 협조를 요청한다고. 이 상태라면 악신은 반드시 태어난다. 우리는 탄생하는 그 순간을 노리려고 해. 하지만 그 때문에 신계의 모든 신들이 자리를 비울 순 없어. 하루라도 손을 쉴 수 없는 녀석들도 있으니까.”


카노스의 말에 트로웰은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즉, 부족한 전력을 정령왕을 통해 보충한다는 뜻이다. 

어차피 아크아돈과 관련된 일이라 4대 정령왕이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으니, 지금의 부탁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의미가 강했다. 
오히려 그런 일로 마신이 직접 왔다는 것이 더 이상할 정도였다.


“그런 거라면 천사를 시켜도 됐을 텐데?”

“아아, 실은 개별적으로 한 가지 더 부탁할게 있어서.”

“…?”


의아하게 바라보는 트로웰에게 카노스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엘뤼엔을 막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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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안으로 8권을 완성해야 한다는 지엄한 명령이 떨어졌습니다;(털썩)

그러나 지금까지 쓴 분량은 반도 채 안됩니다. 흑흑흑흑흑...

그런고로;; 당분간은 연재 없이 글 쓰는 일에만 전념해야 할듯; 

폭참을 기다려 주세요;;;(언제나 죄송스럽습니다아;;)







[정령왕 엘퀴네스] 8-12. 날개를 펼쳐라! (2)


클리프 상단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로, 이사나의 일정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할버크에 집결된 군사들의 소식을 체크하는 것과, 기사들을 배치하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전부 가버리는 느낌이었다.

새벽 내내 회의를 진행하고도 아침 일찍부터 군사의 정비를 살피는 생활은 체력만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으나 이사나는 꿋꿋이 잘 해나가고 있었다. 

전쟁준비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이사나는 여행에 함께 했던 일행만을 모아 따로 회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엔 카터스 제국의 라온휘젠 황태자도 함께 참가한 상태였다.


“지금까지 집결된 숙부의 군사들은 6만 3천정도. 그 중 2만은 할버크에서 꽤 떨어진 평원에서 대기하는 상태고, 3만이 더 오는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정보에 의하면 숙부의 군사들은 할버크 영지의 동서남북에 각각 1만의 군사씩 배치시키고 있는 모양이에요. 때문에 우리들도 군대를 나눠서 진격해야 합니다.”

“흐음. 하긴, 전부가 한쪽으로 몰려들면 다른 양쪽에 배치된 군대에게 역으로 당할 수 있겠군. 그럼 4개의 부대로 나뉘는 건가?”

“맞아요, 시벨리우스님.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각자 나뉜 부대들의 총 지휘를 부탁하려고 합니다.”

“에엑? 나도?”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켜 보이는 사람은 알리사였다. 여자인건 둘째 치고 아직 14살밖에 되지 않은 자신에게 설마 군대의 총 지휘를 맡길 줄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다른 일행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깐만요, 황제! 알리사양은 아직 너무 어립니다. 게다가 연약한 여자인 그녀에게 설마 전쟁의 참혹한 장면을 보게 하실 생각입니까? 군대의 지휘라면 굳이 우리가 아니라도 많을 텐데요?”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선별하기 때문에 그렇소, 라온휘젠 황자. 물론 지휘관은 여러분이 아니어도 맡을 사람이 많습니다. 협력을 요청한 귀족들 중에서 적당히 전투센스가 좋은 사람을 뽑아도 되는 문제죠. 하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 이제까지 동행해왔던 여러분과 끝까지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렇다 해도 알리사 양은…”

“그녀는 그 험악한 바론 사막에서도 한 달 가까이 혼자 살았을 정도로 심지가 굳은 여인입니다. 또한 땅의 정령을 다룰 줄 아는, 흔치않은 능력자이기도 하죠. 카웰 형님이 그녀와 함께 할 것이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제안하는 겁니다.”


말을 마친 이사나는 결정하라는 듯 알리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단지 눈만 마주친 건데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아, 알리사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자신이 없어서라고 판단한 황태자는 또다시 언성을 높이며 항변했다.


“그녀의 능력이 뛰어난 것은 저 역시 인정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알리사양은 여자입니다, 여자! 그런 참혹한 현장을 겪어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결정은 그대가 아니라 알리사양의 몫입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제안을 한 것일 뿐, 강제로 시킬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부담가지지 말고 대답해, 알리사. 네 의사를 존중할 테니까.”

“아…나는…”


알리사는 속으로 열심히 궁리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된다고 했을 때, 이사나를 따라 나서려고 작정하긴 했지만 자신이 직접 나서서 지휘하는 상황은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그 만만치 않게 도전해 보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도 피어올랐다. 

게다가 솔직히 말해 자신의 능력을 믿어주는 이사나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성별도 나이도 상관없이 자신을 인정해 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알리사의 심장은 아까부터 쉴 새 없이 빠르게 박동하고 있었다.


“으음. 나, 나는…하고 싶어!”

“알리사노양!!”

“괜찮아! 위험한 일이라면 이사나씨가 나한테 맡길 리가 없잖아! 분명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제안한 거라고 생각해. 이왕 도와주기로 결심한 거! 이럴 때 나서지 않으면 언제 빛을 보겠어?”

“하지만 알리사양은 여자…”

“난 나를 여자라는 껍데기와 나이로 판단하는 잣대를 무지 싫어해. 그런 점에서 이사나씨한테 후한 점수를 주고 싶어. 맡겨만 둬! 날 선택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 보일 테니!”


당차게 대답하는 알리사의 말에 이사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곧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라온 황태자에게 향했다.


“황자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저를 도와주시렵니까?”

“…크흠. 여자인 알리사 양을 전쟁에 앞세우고 뒤로 숨는 비겁자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맡겨주신다면 황제의 뜻에 따르지요.”

“후후,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든든하군요. 시벨리우스님도 도와주실 거지요?”


본격적인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이사나는 전혀 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항상 투닥거리기만 했던 라온 황자에게 정중한 협력을 구하는 모습을 보며, 시벨은 새삼 인간들의 성장이 빠르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심 즐거워지는 속내를 억누르며 화가 난 척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쳇. 왜 나는 당연히 도와줄 것처럼 물어봐? 그럴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묻지나 말지.”

“이런, 기분 나쁘셨나요?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됐다, 됐어. 어차피 나한테 선택권이란 게 있었나? 마음대로 부려먹으라고. 아무튼 지휘권을 준다니 받기는 하겠는데 말이야. 아까 네 말대로라면 이쪽이 너무 불리하지 않아? 다른 군사들이 오고 있다곤 해도 이제 겨우 3만 2천만 모였을 뿐이잖아. 
그 중에서 클모어의 자체 치안을 위한 병력을 제한다면 기껏 나눈다고 해도 5천이 되지 않을 텐데, 그것으로 1만이 넘는 군대를 상대할 수 있겠어? 게다가 엘이 말한 작전은 어떻게 할 건데?”

“그건 최후의 결전으로 남겨둘 생각이에요. 아직 엘 쪽의 군대가 모이려면 시간이 있으니, 그동안 줄여놓을 수 있는 숫자는 최대한 줄여봐야죠. 물론 무조건 돌격해도 승산이 있다고 보지만, 저는 최대한 이쪽의 희생을 줄이고 싶거든요.”

“흐음. 뭔가 따로 생각해 둔 게 있다는 소리인가?”


이사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미리 준비해둔 도표와 자료들을 꺼냈다. 그곳엔 할버크 근처의 지형과 각 특징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일일이 그것의 활용도를 짚어가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가 제시한 계획은 어찌 보면 상당히 쉽다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일종의 유인책을 통해 함정으로 유도하는 작전이었다. 즉, 각 부대가 여러 방향에서 대공의 군사들을 어떠한 장소로 유인한 다음 한꺼번에 몰살을 시키는 것이다. 

이때, 상대 쪽 군사들이 서로에게 연락을 취할 시간을 줄이도록 최대한 빠르고 은밀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조건이 뒤따랐다.

이것을 위해 이사나가 정해둔 장소는 할버크 영지의 주변에 자리 잡은 늪지대와 크란 산맥 끝으로 이어지는 계곡 이었다. 왜냐고 묻는 일행에게 그는 미리 생각해 두던 답변을 털어놓았다.


“이 계곡은 사방이 고립된 절벽으로 되어있어요. 군사들을 이쪽으로 몰아넣은 다음, 한꺼번에 바위를 떨어트려 몰살시키는 것이 가능하죠. 늪의 용도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아시리라고 믿어요.”

“흐음, 그런 거라면 확실히 알리사가 가진 정령의 능력이 필요하겠군. 하지만 대공의 기사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주변의 지역에 대해서 모르고 있지는 않을 텐데? 순순히 그쪽으로 가려고 할까?”

“안되면 되게 해야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인에 성공하는 것이 우리들의 총 목표에요. 이것을 실패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요.”

“좋아. 성공 했다 치자. 하지만 나머지 2만의 군사는 어떻게 할래? 아군이 공격당한걸 알면 바로 대기하던 장소에서 날아오는 거 아니야? 그것 말고도 3만이 더 내려오는 중이라며.”

“네, 그래서 실은 친위기사를 시켜 그들에게 가는 보급품을 끊으려고 해요. 길가에 매복했다가 그쪽으로 가는 상단의 행렬을 노린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요. 그들 모두는 당분간 식량이 없어 기진맥진한 상태가 될 테니 적어도 도망치는 시간정도는 벌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3만은 아직 이곳으로 오려면 이주일은 더 걸릴 거예요. 그쯤엔 우리 쪽에도 나머지 군사가 당도하게 될 겁니다.”


다행히 일행들은 모두 꽤나 흥미가 동한 듯한 얼굴이었다. 한참의 시간 후, 그가 생각한 모든 계획을 알린 이사는 일행들의 표정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이번 작전은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방법은 거의 흡사하지만, 시벨리우스님과 알리사의 역할이 굉장히 크다고 생각해요. 1만의 군사 중 몇 천이라도 숫자를 줄일 수 있다면 내 계획은 성공한 겁니다.”

“흐음. 내가 생각해도 그리 나쁘지 않은데? 머리 짜내느라 고생했겠군. 다시 봤다, 꼬마야.”

“나도, 나도! 이사나씨 정말 대단해! 이런 방법이 가능할거라곤 전혀 생각 못했어!”

“흐음. 본인도 동의합니다. 이거라면 아군의 전력은 최대한 아끼는 방향에서 최대한의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겠군요.”


하나둘씩 이어지는 칭찬에 이사나는 마음이 풀어지는 걸 얼른 다잡아야 했다. 지금은 한없이 늘어져 태평하게 있을 때가 아닌 것이다. 그는 미소 지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일정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카웰 형님에게는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아마 오늘 저녁쯤이면 군대의 배치가 전부 끝날 겁니다. 우리의 계획을 실행하는 건 일주일 뒤로 하죠.”

“좋아, 빨리 하는 게 속 편하지. 이 작전이 성공해서 아예 전멸을 시킨다면야 더 바랄 것도 없겠군.”

“헤에~ 어쩐지 예감이 좋은걸? 대공인지 섭정왕인지 하는 사람도 이쪽으로 오게 될까? 그 면상 좀 구경하고 싶은데 말이야.”

“아니, 그렇진 않을 겁니다, 알리사양. 그는 다른 잡다한 집무도 겸해야 할 테니 쉽게 자리를 비울 수 없을 겁니다. 아마 황성에서 그때그때 보고를 듣는 쪽을 택하겠지요.”

“호호! 그렇다면 명령 전달 과정이 느려질 테니 우리로서는 전혀 손해랄 게 없지! 와! 어쩐지 두근두근 거려! 일주일 후가 기다려지는 걸?”


환호하는 알리사의 모습에 이사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어린 탓인지 그녀는 전쟁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조금은 위험을 자각시킬 요량으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알리사. 생각보다 상당히 끔찍할 거야. 몬스터와 달리, 사람이 눈앞에서 죽는다는 건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거든. 라온 황자도 그래서 더 걱정했던 거고. 좀 더 마음을 단단히 먹어두는 게 좋아.”

“으, 응. 미안, 이사나씨.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좀 흥분했나봐. 헤헤. 나도 전쟁이 무섭다는 거 잘 알아. 절대로 방자하게 굴지 않을게.”

“그런 건 상관없어. 나는 네가 너무 심한 충격을 받을까봐 걱정하는 거야. 난 널 믿고 있으니까 충분히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일이란 게 눈 앞에 보이는 것만 믿을게 못되잖아.”

“으응…알았어.”


이사나의 말에 서린 진심어린 걱정을 읽은 알리사는 붉어진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요즘 그를 볼 때마다(정확히는 폴리모프 마법이 풀린 순간부터) 쉽게 마음이 들뜨는 것 같아 이상하긴 했지만, 트로웰을 향한 감정과는 확연히 달랐기에 알리사는 이것도 호감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고 무심히 넘겨버렸다.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감정이 미묘한 곳에서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이사나는 당장 그날 저녁부터 각 군대를 맡은 대장들을 불러 일행들을 소개시켰다. 

미리 언질을 준 탓인지, 그들은 아직 어린 알리사를 보고도 크게 동요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군대는 용병으로만 이루어진 제 1부대와, 후작의 사병들로만 이루어진 제 2부대, 그리고 각기 지원을 통해 들어온 일반인과 다른 귀족들의 사병들로 모인 제 3,4부대로 나뉘어 질 예정이었다. 

클모어의 자체 치안을 위해 남겨둔 병력 1만을 제외하고 남은 군사들이 각자 적당히 분배된 셈이다. 그 중 이사나는 제 2부대의 총 지휘를 맡고 있었다.


“거친 용병들은 시벨리우스님이 맡아주세요. 아마 샴페인 용병단들이 있으니 제어하기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알리사와 라온 황자는 각자 3, 4 부대를 부탁할게요. 알리사에게는 카웰 형님이, 황자에게는 부지휘관으로 내 친위기사인 알렉 경이 따를 겁니다.”


말을 마친 이사나는 불려온 대장들을 향해서도 당부를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의 형제와도 같은 존재들이다. 처음이라 많이 어색하겠지만, 지휘관의 명령에 충실하게 잘 따라주길 바란다. 이들의 실력은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우렁차게 대답하는 얼굴에선 그의 결정에 불만을 보이는 기척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훈련이 잘 되어 있는 기사라는 증거! 시벨리우스는 속으로 감탄하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나 녀석, 이제 제법 황제다운 분위기가 풍기는 걸?’


엘이 지금 이 모습을 보았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를 생각하니, 저절로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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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진납세...라고나 할까요;; 아직 분량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써 둔 부분만 미리 올립니다.

※ 이번 파트는 거의  이사나의 이야기만 다뤄집니다. 








[정령왕 엘퀴네스] 8-13. 날개를 펼처라! (3)




“아, 글쎄! 나는 반드시…야 한다니까!”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무력을 행사…”


다음날 아침. 기사들과 함께 연무장을 돌아보고 있던 이사나는 문득 성문 앞이 소란스러운 것을 느끼고 의아한 얼굴로 내려갔다. 그러자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 중의 한명이 그를 발견하곤 얼른 인사를 건네 왔다. 


“폐하! 나오셨습니까!”

“아아. 그런데 무슨 일이지? 밖이 소란스러운 것 같은데.”

“별 일은 아닙니다. 저어…그게 실은…”

“…?…”


난처한 듯 우물쭈물 말끝을 흐리는 모습에 이사나는 얼른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그의 예상을 가뿐히 뛰어 넘는 것이었다.


“웬 거지들이 나타나 황제폐하의 일행 분을 만나 뵙게 해달라고…”

“엥? 거지?”

“죄, 죄송합니다, 폐하! 얼른 그들을 쫓아내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거지라고? 내 일행 중에 누구를 찾아 왔다고 하던가?”


당장 불벼락 같은 진노가 떨어질 거란 예상과 달리 느긋한 질문이 들려오자 기사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자신을 이렇게 곤란하게 만든 거지들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다짐한 후였다.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그저 군청색의 머리에 청록색 눈동자라고만…”

“뭐라고?!”

“황공합니다, 폐하! 제가 직접 그들을 이 근방엔 얼씬도 하지 못하게 만들겠습니다!”

“아니, 아니다! 문을 열어라! 내가 직접 그들을 만나보겠다.”

“네! 알겠습니…네, 네에? 하지만 폐하…”

“폐하의 말씀을 듣지 못했나? 당장 문을 열어라!”

“헉! 네, 네엡!”


이사나는 친위기사의 호통에 놀라 허둥지둥 달려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간단한 특징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는 그는 라온휘젠 황자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카터스 제국에서 황자를 찾기 위해 보낸 사람들일 가능성이 컸다. 
어떤 경로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최근 황제의 일행들에 대한 소문이 퍼져있는 점을 감안하자면 그리 신기할 것도 없는 일이다.

끼이이익! 

육중한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있던 철문이 열리자, 이사나는 친위기사 둘을 대동하고 소란을 벌어지고 있는 장소로 걸어갔다. 그러자 마침 기사들과 실랑이를 하고 있던 자들이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오, 그래! 드디어 여는군! 도대체가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이라 하루 종일 걸리나 했더니…”


반색을 하며 몸을 돌이킨 그들은 성안에서 나오는 이사나와 친위기사를 보더니 눈에 띄게 몸을 경직 시켰다. 이곳에 있다는 황제가 설마 직접 나타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성의 경비들도 마찬가지인지라, 이사나를 본 그들은 모두 기겁을 하여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폐, 폐하의 용안을 뵙습니다!”

“폐하를 뵙습니다!”


우렁찬 기사들의 외침을 듣는 둥 마는 둥 한 이사나는 애초에 목적이었던 황자를 찾아온 자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노인인듯한 한 남자와 중년 남자 하나, 그리고 청년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머뭇거리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고하던 기사가 ‘거지’라고 했던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될 만큼, 그들의 꼴은 차마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지저분한 상태였다. 이런 모습을 하고도 기사들에게 쉽게 쫓겨나지 않았던 게 오히려 용할 정도다.


‘하긴, 그 사막을 경유해서 왔다면 어쩔 수 없겠지.’


속으로 혼자 납득한 이사나는 자신을 보며 이리저리 눈치만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물었다.


“카터스 제국에서 온 사람들인가?”

“!!”


갑작스런 직격탄에 놀랐는지 그들은 차마 그렇다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끄덕거렸다. 그 모습에 친위기사들은 하나같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사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정중히 모시도록 해라. 내 일행을 찾아온 손님들이다. 알렉, 저택으로 가서 목욕물과 의복을 준비하라고 말해줘.”

“네, 알겠습니다, 폐하.”

“이쪽으로 오십시오. 안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사나의 명령이 떨어지자 남자들을 대하는 기사의 태도는 180도로 돌변했다. 권력의 위대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오늘날 이런 상황에 처하고 보니 새삼 감회가 새로운 세 사람이었다.

얼굴이 너무 지저분한 관계로 아직 이사나는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바로 황태자를 찾기 위해 수색을 나선 마법사 세리엄의 일행과 리글레오였다. 

처음 태자의 흔적을 발견한 뒤 사막에서 좌표를 통해 이동한 것은 좋았으나, 실수로 전혀 엉뚱한 장소로 떨어지는 바람에 헤매고 헤매다 이제야 겨우 찾아온 것이다. 

복장이나 무엇 하나 귀족다운 면이 없었기에 각오하고 찾아온 방문이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소문이 무성했던 황제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차마 말 못할 심정으로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그들은, 웃으며 자신들을 안내하는 이사나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실제로 본 솔트레테의 황제는 들려온 말들과 달리 훤칠한 키에 준수한 얼굴, 강한 의지가 돋보이는 제왕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이 고작 섭정왕에게 밀려나다니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다. 이 제국의 귀족들은 죄다 바보만 모였단 말인가? 

그들 중에서도 리글레오는 마치 빨려가듯 넋을 잃고 황제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이사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는가? 왜 그렇게 보지?”

“아, 아닙니다. 저, 저어…저희들이 카터스에서 온 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군청색 머리에 청록색의 눈동자를 가진 남자를 찾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마, 맞습니다! 황자전하…아, 아니 라온휘젠님! 그분이 여기에 계신 겁니까?”


혹시나 했던 것이 역시였다! 세리엄과 필립은 이사나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을 보곤 만세를 외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 모습을 본 이사나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방금 기별을 넣었으니 저택에도 자네들의 방문이 알려졌을 거다. 자세한 이야기는 일단 들어가서 하도록 하지.”






***








카터스로부터 자신을 찾아온 일행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라온 황자는 뛰다시피 손님홀로 내려왔다. 그가 바라본 곳에는 이미 말끔하게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세리엄 일행이 앉아 있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얼굴마다 격한 감동이 일렁거렸다.


“전하!!!”

“오, 이런 맙소사! 스승님이 아니오!!”

“대체, 대체 그동안 어떻게 되신 겁니까! 이 늙은이가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아십니까아~~”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오! 스승님께서 이곳은 어쩐 일 인 게요? 황성은 어찌하고?”

“크, 크흑! 그것은 제가 말씀드립지요, 전하! 폐하께서 전하를 찾아오라며 저희들을 내치셨습니다요. 흑흑. 찾을 때까진 고국에 발도 디밀지 말라시며…”

“뭐라? 아바마마께서 그런 결정을?”


때 아닌 상봉에 홀 안은 금방 시끄러워졌지만, 주변에 있던 누구도 그것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한없이 자신들만의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전하를 찾아 사막이며 온갖 잡다한 장소는 전부 뒤지고 돌아 다녔습니다요! 게다가 세리엄님이 좌표를 잘못 외우시는 통에 엉뚱한 곳에서 헤매기까지!! 그동안 제가 한 고생이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흑흑!”

“아니! 자네!! 치사하게 꼬지르는 겐가? 이제 전하를 뵈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게야?”

“네, 네! 눈에 뵈는 게 없습니닷! 그러게 제가 걸어가자고 했잖아욧! 그런 생고생을 시켜놓고선 뭘 잘하셨다고!”

“뭣이라! 나랑 해보자는 겐가? 엉?”

“그래요! 해보자고요! 저도 이제 더는 못 참습니다! 아니, 안 참으렵니다!”

“하하하! 두 분은 지금도 여전하시오! 정말 하나도 변한 게 없으시구려!”


유쾌하다는 듯 껄껄 웃는 황자였지만, 정작 투닥거리는 두 사람의 사이는 살벌하기만 했다. 이쯤에서 그만 중재를 시켜야 할 것 같아, 이사나는 나직이 흠흠하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다행히 의도가 먹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의 재회라 반가운 심정은 알겠지만, 일단은 진정하시지요, 황자. 서로 정식으로 소개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아, 아참! 그렇지! 제가 너무 경황이 없어 실례하였습니다. 이쪽은 나의 스승이자, 카터스 제국의 수석 마법사인 세리엄 폰 알지오님이십니다. 또한 그 옆에 있는 분은 황실 소속의 문관인 필립 폰 레베타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그가 카터스 제국의 귀족도 아닌 리오를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난감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린 황자를 대신해, 리오는 얼른 일어나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저는 할버크 영주의 차남인 리글레오 드 클란이라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그러자 이사나를 제외한, 그의 일행들과 주변에 서있던 기사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변했다. 할버크가 무엇인가! 유카르테 대공을 도와 적극적으로 이사나를 대적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귀족의 영지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오랜 방랑으로 그동안의 사정을 자세히 모르고 있던 리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갑자기 험악해지자 당혹한 심정일수밖에 없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위험스럽게 흐르는 공기를 환기시킨 것은 이번에도 이사나의 몫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기억나는군. 클란 백작의 둘째 아들이었지. 그 동안 이분들과 함께 여행 하는 중이었나?”

“그, 그렇습니다, 폐하. 저어…제가 무슨 실수라도?”

“그대의 아비 되는 자가 나를 몰아내기 위해 숙부인 유카르테 대공과 손을 잡았다. 이미 그쪽으로 몇 만의 군사들이 집결되고 있는 중이지. 설마 모르고 있었나?”

“헉! 그, 그게 사실입니까?”


군사를 모았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인 엘키노가 프로포즈를 거절당한 일로 복수하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대공의 군사들이라니! 

온 몸이 굳는듯한 충격에 그는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순간, 황제의 기분이 조금만 틀어져도 자신은 목숨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황제는 지금 당장은 그에게 별 다른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저런 식으로 안심시킨 다음 얼마든지 뒤통수를 칠 수 있기에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형님의 일이 생각보다 충격이 크셨나 보구나. 중립이셨던 아버님이 갑자기 대공과 손을 잡으시다니.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클란 백작은 어릴 때부터 유달리 둘째인 리오를 더 편애했다. 아마 그를 내세워 협상을 제시한다면 집결된 군사들을 물리게 만드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을 대공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까? 

슬픈 현실이지만 대공에게 있어서 클란 백작은 있어도, 없어도 좋을 사람이었다. 굳이 그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참동안 속으로 궁리하던 리오는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이사나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뭔가 상당히 심각해 보이는 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을 수 있을까?”


웃음기를 머금은 말투 때문이었을까? 리오는 이상할정도로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끼곤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결심했다. 


“…폐하께서 저의 처분을 어떻게 하실지 궁금해 하고 있었습니다.”

“흐음. 내가 어떻게 할 거라 생각하지?”

“처음엔 포로로서의 역할을 기대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이미 대대적인 전쟁으로 번졌다면 저 하나로 전세를 유리하게 돌리실 수 없을 테니, 상대편 군사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본보기로 처형하실 수도 있다고 사료됩니다.”


술렁술렁.

속내를 숨기지 않은 대답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은 모두 놀란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이사나는 한 손을 들어 사람들을 조용히 시킨 후,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듯한 말투로군. 죽음이 두렵지 않나?”

“…물론 두렵습니다. 그러나 저는 폐하께서 저를 죽이지 않으시리라 확신합니다.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만큼, 제 가치가 낮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듣기에 따라 오만하다고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대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보는가?”

“기회를 주신다면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증명이라…”


실제로 이사나는 그를 죽일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 보이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 다가올 전투에 그대는 나와 함께 출진하도록 한다. 처분은 그 뒤에 결정하도록 하지.”

“!!”

“폐하! 첩자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위험부담을 끌어안으실 필요는!!”

“그 무슨 섭한 소리! 리오군은 우리와 함께 여행했을 뿐, 이번일과는 전혀 무관한 청년이오! 아비가 그렇다 하여 자식까지 같은 식으로 보면 곤란하지!”

“맞습니다! 그건 저도 동의합니다! 솔트레테의 황제폐하, 부디 선처를 바랍니다.”

“흥! 헛소리! 그럼 내 어린 자식과 형제들은 무슨 죄를 지어서 반역자로 매도되었단 말이오? 어차피 핏줄은 속일 수 없는 법! 클란 백작은 폐하에게서 등을 돌린 죄 값을 치러야 할 겁니다!”


카터스 황실의 두 사람이 리오를 두둔하고 나서자 친위 기사 중 몇몇이 분노한 얼굴로 되받아쳤다. 그들 모두 이사나와 함께 황성을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가족을 남겨두고 떠나야 했던 자들이었다. 
미처 피신하지 못한 그들의 식솔을 대공이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했다. 

어디 그 뿐인가! 도망치는 내내 부상을 입어 죽어가는 동료들을 볼 때마다 그들은 대공이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이를 갈았다. 때마침 이사나가 정령왕 엘퀴네스를 소환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들 역시 어느 이름 모를 야산에서 시체로 썩어 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들로서는 복수를 꿈꾸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미 결정을 내린 이사나의 태도는 강경했다.


“너희들이 겪은 설움과 고통은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혈육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살렸으니, 역사는 너희들을 다시없을 충신으로 기록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속의 분노를 다스리도록 해. 당한 대로 똑같이 되갚는다면 내가 숙부와 다를 게 뭐가 있지? 나에겐 내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어.”

“하지만 폐하…아무리 그래도 의심이 가는 자를 근처에 두신다는 것은…”

“괜찮다. 카터스 황실의 두 분이 한 증언도 있고, 무엇보다 거짓말을 하는 눈이 아니야. 만약 틀렸다면 그건 내가 사람을 잘 못 본 탓이겠지. 그 정도도 분간하지 못하는 머리는 필요 없어.”

“헉!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하! 사실이잖아? 우둔한 대장은 부하들의 골치만 썩일 뿐이지. 그래서 지금 나는 스스로를 시험해 보는 거야. 지금 내가 펼치려고 하는 날개가 진짜인지, 아닌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말에 충격을 받은 사람은 마법사 세리엄과 리글레오 쪽이었다. 특히 태자의 스승으로서, 평소에도 타 제국의 황족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세리엄이 받은 감동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성문 앞에서 본 첫 만남에서부터 범상치 않다고 느꼈지만, 그는 과연 과거 성황(聖皇)으로 이름 높던 선대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라는 느낌이었다. 앳된 외모를 제하면 그가 라온 황태자와 같은 17세라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천운이로구나! 다 무너져 가는 제국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큰 별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사막으로 갔다는 황태자가 어떤 경유로 이사나의 동료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지금의 경험이 태자에게 큰 공부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무릇 사람이 성장하는 데에는 도전만큼 중요한 것이 없으니, 장차 그들은 서로에게 최고의 라이벌이자, 훌륭한 조력자가 되어줄 것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흥분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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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하지 않은 원고입니다. 오타, 오류 지적 환영해요^^*



[정령왕 엘퀴네스] 8-14. 날개를 펼쳐라! (4)



“카터스 제국의 수석 마법사?”


일주일 뒤에 있을 작전 때문에 시벨리우스와 의견을 나누고 있던 알리사는 라온 황자를 방문했다는 일행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곧 찌푸린 표정으로 시벨을 바라보았다.


“라온 황자를 데려가려고 온 걸까? 어떻게 생각해, 시벨님?”

“그럴지도. 일단은 그래 봬도 황자인 모양이니까.”

“앗! 그럼 안 되잖아! 그가 빠지면 4부대의 대장은 누가 맡으란 말이야? 이미 계획까지 다 짜놨는데!”


기겁하는 알리사에 비해 시벨리우스는 그게 뭐가 어떻냐는 듯 태평한 얼굴이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늘어져 있는 지도를 살피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뭐, 어때. 어차피 녀석이 하는 역할이 다른 사람과 크게 다른 것도 아니잖아. 새삼 공백이 된다 해도 다른 사람이 채우면 그만이야. 너나 나처럼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좀 섭섭하잖아. 모처럼 이제야 겨우 일행다운 일을 해보겠다는데. 아이 참. 그 쪽 사람들은 왜 하필 이런 시기에 나타나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는 거지?”

“글쎄. 어쩌면 그 마법사라는 인간도 남아서 도울지 모르니 벌써부터 실망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그보다 제대로 보고 있는 거냐? 이동하는 것은 이쪽이야, 이쪽. 제대로 유인하지 못한다면 이 작전은 실패라고.”

“쳇, 나도 알아. 무시하지 말라고. 이래 뵈도 귀족출신이라 지도쯤은 볼 수 있단 말이야.”


새침하게 대답한 알리사는 투덜거리며 다시금 지도에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방금 전까지 그들의 화제에 올랐던 라온 황태자가 들어섰다. 
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뒤에는 백발이 성한 노인과 각각 중년과 청년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서있는 상태였다. 

마법사 세리엄과 그의 수행원인 필립, 그리고 방금 전까지 이사나와 한판 줄타기를 하고 온 리글레오였다.


“알리사노양, 시벨리우스씨! 소개시켜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카터스 황실에서 저를 찾아오신 분들입니다.”

“아! 그렇지 않아도 방금까지 그 말을 하고 있었는데! 라온씨,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는 거야?”

“하하하! 사내로 태어나 한 입으로 두 말 할 수는 없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인사들 하세요. 이쪽은 카터스 제국 황실 수석마법사이자 7서클 마스터의 마도사, 세리엄 폰 알지오님. 나의 스승님이 되십니다.”

“7서클이라니…세상에! 정말 굉장하잖아! 처음 뵙겠어요, 저는 알리사노 알 드레프라고 합니다.”

“아, 아아.”


생글생글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알리사의 모습에 세리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라온 황태자가 다른 일행들을 소개해준다며 2층으로 이끌었을 때만 해도, 그들은 경갑을 걸친 건장한 청년들을 예상하고 있었다. 자세한 계획은 아직 몰랐지만, 이번 작전의 총 지휘관을 황제와 그의 일행들이 맡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회의실이라고 들어온 곳에 떡하니 등장한 사람이 어리디 어린 -그것도 미모가 상당히 출중한-소녀였으니, 황당해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게다가 일국의 황태자를 향해 감히 ‘라온씨!’라니? 
세리엄을 포함한 그의 일행들은 이런 무례를 당하고도 기쁘게 웃는 태자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다음 말에 그들은 사이좋게 굳어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알리사양은 이번 작전에서 제 3부대의 총 지휘를 맡고 있소.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땅의 중급 정령과 계약한 정령사이기도 하지.”

“!!”


소녀의 옷차림을 통해 어느 정도 신분이 높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이곳 후작의 조카이거나 딸 정도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일행들은 그야말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심정이었다. 

정령사, 그것도 이번 작전에 참여하는 지휘관이라니? 이런 어린 여자애가 말인가!! 아무리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할게 아니라지만 이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이다. 

그러자 그들의 이런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던 알리사는 입가에 생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호! 저 같은 꼬마에다 여자애가 지휘관이라니 놀라셨죠? 사실 저는 별로 하는 것도 없어요. 그냥 이사나씨가 세워둔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뿐이니까요.”

“아아. 으음…솔트레테의 황제폐하가 참으로 대단한 결단을 내린 듯싶군. 그런데 저 쪽은…?”


언뜻 보이는 소파에 누군가가 더 앉아있다는 것을 깨달은 세리엄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가 다시 멍하게 입을 벌렸다. 

인간과는 확연하게 다른 뾰족한 귀와 은색의 머리카락, 전체적으로 푸르스름한 피부를 가진 청년은, 요 몇 백년간 인간 세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블루 엘프였던 것이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벌어지자 태자는 으쓱한 얼굴이 되어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아, 이쪽 분은 시벨리우스 씨라고 하오. 보다시피 블루 엘프 종족이지.”

“세상에! 말로만 듣던 블루 엘프를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일반인에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 종족은 흔히 드래곤 다음으로 마법에 능통하여 인간으로서는 힘든 8서클의 영역을 심심치 않게 드나든다고 밝혀져, 마법사라면 꼭 한 번 쯤 만나보고 싶어 하는 존재였다. 

세리엄은 물론, 문서를 통해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던 필립과 리오도 감탄한 얼굴로 엘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록 그는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고개만 까닥하고 말았지만, 인간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그들 종족 특유의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함께한 시간이 긴 알리사가 보기에는 단순히 시벨의 태도가 나쁜 것뿐이었다. 그녀는 곧 새침한 얼굴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시벨님! 소개를 받았으면 제대로 인사를 해야지 고개만 까닥이 뭐야? 너무 불량스럽잖아!”

“사내놈들한테 정식으로 소개하는 취미는 없는데.”

“그런 게 어딨어? 나중에 신관…아니, 엘님이 오시면 전부 이를 거야!”

“윽. 알았어, 알았어! [만나서 반가워. 나는 시벨리우스라고 해. 앞으로 잘 부탁해.] 됐지?”

“그건 너무 형식적이야. 꼭 책 읽는 것 같잖아!”

“어른들의 세계란 원래 그런 거란다.”

“어~~른?”


기가 막힌 알리사의 시선에 시벨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이래봬도 5천살 넘었다고. 우리 종족 중에서도 그 정도면 충분이 어른이야.”

“헉! 그게 정말이야? 시벨님 나이가 5천살이라고?”

“정확히 따지면 5,200살이지. 즉, 나이로 따지자면 이 중에서 내가 제일 어른인 셈이라고.”


거기까지 말한 그는 아직도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황태자의 일행에게 시선을 돌리곤 퉁명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렇게 서있지 말고 자리에 앉지 그래? 어차피 종족도 다르고, 나이도 내가 더 많으니까 말투가 무례하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아아. 물론이네. 그나저나 말로만 듣던 블루엘프를 이렇게 보게 되다니, 정말 영광이군.”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은 그에 대해 이렇게 과민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저 특이한 피부를 가진 엘프라고만 생각했을 뿐, 블루엘프란 종족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자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끊긴 교류 탓에 그들의 존재는 점점 인간들 사이에서 잊혀져가고 있었다. 새삼 서클렛에 봉인되었던 지난 몇 천 년간의 공백이 피부로 와 닿는 것 같아, 시벨리우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4천 년 전만 해도 길거리에 굴러다니던 게 블루엘프였어. 나한테는 그런 반응이 더 새삼스러우니까 편하게 대해줬으면 좋겠군.”

“그렇게 하겠네. 아참, 자네 종족들은 대게 마법에 능하다고 들었는데, 그럼 자네도 마법사인가? 몇 서클이지?”

“글쎄…. 일단 드래곤보단 못하다고 해두지. 별로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들보단 폴리모프의 실력이 조금 떨어지거든.”

“…하하하! 농담도 잘 하는군.”


세상 어느 종족이 마법생물인 드래곤을 능가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당연한 말을 심각하게 중얼거리는 시벨의 모습에, 세리엄은 그가 대답하기 싫어서 말을 돌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곤 쓴 웃음을 삼켰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진짜 블루엘프도 아닐뿐더러, 진실만을 얘기한 시벨로서는 그가 자신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오히려 이해할 수 없었다. 대답해도 못 믿을 거라면 애초에 왜 물었단 말인가? 

잠시 괴상하다는 듯 세리엄을 바라보던 그는 곧 아무렴 어떠냐는 심정으로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러고 보니 7서클의 마법사라고? 당신도 이번 전쟁을 도울 건가?”

“마음은 굴뚝같지만, 무리라고 생각하네. 마법 같이 광범위한 공격은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끌어서 말이지. 내가 사람들한테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이번 전쟁에 카터스 제국의 개입이 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게 될 거야.”

“흐음. 하긴, 황실의 수석마법사라면 이미 얼굴이 알려졌겠군. 라온 황자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한데, 두 사람은 힘들겠지. 그럼 이런 시기에 남의 저택에서 마냥 놀고 있겠다고?”

“핫핫핫! 여기 있는 리글레오군이 황제와 함께 출진하기로 했으니 그것으로 참아주시게나. 사실 나 같은 늙은이보다야 젊은 청년이 보기에도 좋지.”

“이사나와?”


시벨리우스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금발의 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아무리 뜯어봐도 그는 체격이나 근육의 발달 면에서 검사라고 볼 수 없음은 물론, 딱히 마나를 다루는 기색도 없는 그야말로 평범한 남자였다. 

그나마 차분하고 깊은 눈동자를 보아 제법 많은 지식을 갖추고 있는 듯하니, 참모의 역할 정도는 기대해볼 수 있을까?

자신을 향한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자 리글레오는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평가받는 듯한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장이 심하군. 아무리 그래도 7서클의 마법과 동일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무슨 그런 섭한 소릴~! 때론 강한 힘보단 지혜로움이 전투를 더 수월하게 이끌어 가는 법이네. 그런 점에선 리오군 만큼 합당한 자가 없지.”

“흐음, 그런가. 어쨌든 이쪽도 카터스의 귀족인거지? 그럼 차라리 황자가 맡은 부대에 합류하는 게 더 편하지 않겠어? 왜 이사나 쪽에?”

“아아, 사실 리오군은 솔트레테 사람입니다. 클란 백작가의 둘째아들이죠.” 


그 뒤 시벨리우스와 알리사는 라온 황태자를 통해 방금 전 1층 홀에서 벌어졌던 상황에 대한 대강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리오는 이번에도 친위 기사 때와 같은 반응이 나올 거라 생각하고 바짝 긴장했지만, 예상과 달리 그들은 흥미로운 표정만 지었을 뿐이었다.


“할버크 영주의 아들이라고?”

“…예, 리글레오 드 클란이라 합니다. 편히 리오라 불러주십시오.”

“흐응. 이번 전쟁엔 그쪽의 영주도 출진하게 될 텐데, 괜찮겠어? 이사나 옆에 있으면 반드시 싸우게 될 텐데. 아들이 아버지를 대적하게 되는 꼴 아닌가?”

“그건…”

안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던 리오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황제는 이런 식으로 한 가문이 몰살하는 것을 지켜보고 싶은 건지 모른다. 그러나 애초에 증명할 기회를 달라고 한쪽은 자신이었으니 억울하다고 할 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식으로나마 황제를 돕게 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으로 인해 가문의 죄가 조금이나마 덜어진다면 죽어서도 후환이 없을 것이다.


‘왜 진작 만나지 못했던 걸까.’


지금껏 그가 알고 있던 이사나는 단지 ‘숙부에 의해 쫓겨난 어린 황제’였을 뿐, 그 이상도 이하의 존재도 아니었다.

소문으로 알려진 그는 매사 하는 일마다 한심스러웠기 때문에, 섭정왕에게 밀려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다만, 그렇다고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저버린 대공 역시 무조건 옳다고 봐줄 수는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방금 전 홀 안에서 보았던 황제는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코앞에 닥친 전쟁에도 전혀 긴장하지 않고 여유를 부리는 모습에선 자신이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묘한 확신마저 서려있었다. 


‘내 날개가 진짜인지 아닌지 시험해 보는 것이라 했던가.’


그 모습을 보았을 때 리오는 역시 소문은 믿을게 못된다며 남모르게 중얼거렸었다. 도대체 어디의 누가 방탕하며 소인배의 심장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그런 그의 속내를 짐작한 시벨리우스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요 근래 녀석은 갑자기 성장했어. 나조차 몰라볼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부쩍 성숙해졌지. 폴리모프 마법을 해제한 뒤로 좀 더 자신의 입장을 자각하게 된 것 같더군. 뭐, 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더욱 분발하는 거겠지만.”

“…엘?”

“아아. 우리들의 리더야. 그녀석이 아니었다면 이 인원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도 없었을 테지. 아무튼 걱정마라. 남한테 몹쓸 짓을 시키는 녀석은 아니니까. 너를 전쟁에 끌어들이는 건 아마 따로 생각해 둔 바가 있기 때문일 거야. 애초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면 별 탈 없이 백작에게 돌려보냈을 텐데, 제 무덤을 판 격이군.”

“아, 아니오! 저는 그런 건 바라지 않습니다!”


리오의 단호한 대답을 들은 시벨리우스는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호오, 설마 자존심 때문이냐? 순순히 돌아가기는 싫다. 그렇다고 죽고 싶지도 않다? 이곳에 남으면 뻔히 네 부모 형제와 싸울 걸 알고 있으면서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그, 그건…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려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서…”

“뭐야, 그렇게 생각한 것 자체가 네가 이사나 쪽을 더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잖아. 결국 넌 녀석에게 인정받고 싶었을 뿐이야. 안 그래?”

“……”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리오를 보며, 그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실했다. 아직 본인 스스로도 그런 감정을 믿을 수 없어 하는 눈치였지만 말이다.


‘명마는 자신이 태울 주인을 미리 알아본다고 했던가. 이사나 녀석, 제법인걸.’


엘의 그늘에서 벗어나 있는 지금, 녀석은 순수한 자신만의 힘으로 한 사람을 매료시킨 것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성장해 나갈 지, 시벨리우스는 점점 더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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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입니다^^;; 밤새서 썼는데도, 겨우 파트하나 채웠을 뿐이네요;;

결국 폭참은 다음 기회에..<-응?

이번 편은 그야말로 이사나를 띄우기 위해 몸부림 치는 현장~(두둥!)

다음 분량도 조만간 가져오겠습니다.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정령왕 엘퀴네스] 8-15. 접전 (1)


쫓겨 다니는 생활도 이제 슬슬 지겹다고 생각했을 무렵, 황성에서는 클모어를 향해 대대적인 선전포고의 의사를 밝혔다. 

이미 중간지역에 군사들까지 죄다 집결시켜둔 주제에 새삼스럽게 무슨 짓인가 싶었지만, 그들 나름대로는 타 제국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모양이다. 지금 이대로는 아무리 봐도 저들 혼자 막무가내로 군사를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사나를 포함한 황제파의 귀족들을 전부 ‘반역도’로 명명하며, 제국을 배신한 죄의 값을 치르게 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수도의 대다수 풍족한 귀족들은 환호하며 맞장구를 쳤지만, 일반 평민들과 천민들까지 전부 그 말에 동조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평소 흉흉한 소문을 달고 다녔던 대공이 이번 전쟁으로 강제 징병을 강행하는 바람에, 백성들 사이에선 이미 그에 대한 인식이 급속도로 나빠져 있었다.


“들었어? 이번 전쟁을 위해 섭정왕이 일으킨 군사의 숫자가 10만을 넘는다며? 그에 비하면 황제 폐하 쪽의 군대는 반도 되지 않을 거라더군. 과연 이기실수 있을까.”

“재수 없는 소리는 하지를 말어. 당연히 이기셔야지!”

“하지만 자그만치 전력의 차이가 반을 넘는다고? 수도에 배치된 군인들 표정 안 봤어? 얼굴마다 여유가 철철 넘치잖아. 여기까지 밀고 들어올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도 않는다구.”

“아, 글쎄, 이긴다면 이기는 거야! 끌려간 내 남편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난 어디까지나 황제폐하의 편이라고.”

“뭐야, 베시. 아직도 그걸 신경 쓰고 있었어? 행방불명된 네 아들이 실은 섭정왕한테 죽었다는 거?”

“너라면 신경을 안 쓸 수 있겠니? 아이들을 잡아먹는 괴물이라잖아! 나한텐 그 아이가 전부였어! 난 섭정왕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식당에서 식사를 할라치면 어김없이 화제로 나오는 것은 이번 전쟁의 승자가 누가 될지에 대해 점을 치는 일이었다. 그나마도 남자들은 거의 다 군대에 끌려가는 바람에, 홀로 남은 노약자와 여인들만이 하릴없이 수다를 떠는 식이었다. 

그나저나 이번의 대화는 좀 심각한 걸? 나는 슬그머니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앞에서 묵묵히 빵을 뜯고 있던 라피스와 데르온에게 속삭였다.


“전반적으로 이사나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녀석들은 잘 하고 있는 걸까? 뭔가 따로 작전을 짜고 있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응. 대충 들어보니 그리 나쁘진 않더군. 부대를 4개로 나눠서 각자 따로 친다나? 계획대로라면 꽤 많은 숫자가 몰살당할 것 같던데. 다른 한쪽에 따로 대기하고 있던 군사들에게 보급품을 끊는다는 작전은 이미 성공한 모양이야.”

“아, 그래? 다행이다. 그런데 라온 황자라면 몰라도 알리사까지 지휘관을 맡았다며? 믿어도 되는 걸까?”

“카웰 후작도 함께 한다고 했으니 괜찮을 겁니다, 엘님. 사실 나이도 어린 대다 여자인 사람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지위라도 높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흠. 그건 그렇네요. 그런데, 라피스. 넌 아까부터 왜 그렇게 똥 씹은 표정이야?”

“…지금 왜냐고 물었냐?”


그러자 녀석은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는 듯 어깨를 부들거리더니, 들고 있던 마른 빵을 소리 나게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사람이 먹을 음식이야? 대체 언제까지 이딴 걸 먹어야 하는 건데!”

“넌 사람이 아니잖아. 데르온도 그렇고.”

“지금 장난칠 기분 아니야! 난 이제껏 어딜 가도 이런 식사는 해본 적이 없다고! 전쟁이고 뭐고 다 좋다 이거야! 그런데 왜 이런 고생을 사서해야 하는 거지?”

“어쩔 수 없잖아. 이런 수상한 차림으로는 고급 음식점에서 받아주질 않으니.”

“그러게 후드 같은 거 쓰지 않는다고 했잖아!”

“이보세요. 이미 네 몽타주까지 다 돌았거든? 황성의 경비대가 지금도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얼굴 드러내놓고 아주 대대적으로 쫓겨 다닐 셈이야?”


삐딱하게 묻는 내 말에 녀석은 울화통이 터진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때 마침 식당 안으로 들어온 누군가가 맞장구를 치는 바람에 형세는 전적으로 내 쪽이 유리해지고 있었다.


“맞아, 은인. 얼마 전에 남자의 모습으로도 사고치는 바람에 이제 오도 가도 못하게 됐잖아. 그 얼굴 외에 다른 걸로는 바꿀 생각도 안하면서.”

“아! 아스! 어서와. 일은 다 끝냈니?”


우리와 마찬가지로 후드를 깊이 둘러쓰고 있는 사람은 몇 주일 새 부쩍 성장해 버린 아스였다. 처음 만났을 때 12살을 갓넘어보이던 외모는 이제 17, 18살의 청소년으로 바뀌어 있었고, 말투도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워 졌다. 

문제는 점점 더 강해지는 마력을 제어하기가 어려워져, 그 냄새를 맡고 마족들이 자꾸만 몰려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의 경우처럼 아스는 하루에도 몇 번씩 따로 나가 그들을 처리하고 돌아오곤 했다.

내 옆의 빈자리에 앉는 그의 몸에선 언제나 그랬듯 옅은 피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오늘은 좀 늦었네?”

“응. 이번엔 좀 어려웠어. 상대도 많은데다 도망치려는 녀석까지 있었거든. 쫓아가서 없애려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어.”

“잘하셨습니다, 주군! 목격자를 남겨서는 아니 되십니다. 아직은 마계에 있는 놈들이 알 때가 아니니까요.”

“알고 있어. 그래도 이젠 조심하는 것만으론 힘들 것 같아. 이렇게 마족들이 몰려들어서야 조만간에 소식이 들어갈 거라고 생각해.”

“그렇겠지요. 부디 그 전에 마신께서 뭔가 조치를 취해주셨으면 좋으련만.”


데르온이 말하는 조치란 악신의 탄생에 대한 것이었다. 대공이 배후에 있다는 것이 확실해진 이상, 마왕 역시 이번 일에서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마계로 돌아간다고 했던 카노스와의 연락이 그 이후로 완벽하게 끊겨버렸다는 거랄까. 

그 때문에 우리는 지금 신계에서 제대로 된 대처 방안을 세웠는지조차 알 지 못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내 쪽에서 먼저 신계로 연락을 취할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정령왕도 차원 이동의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좋냐고. 그럼 엘뤼엔 한테라도 물어볼 텐데.”

“그렇게 조급해 할 것 없어. 어차피 아크아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너희들에게 반드시 소식이 들어올 테니까. 어쩌면 지금쯤 정령계에는 이미 서신이 도착했을지도 모르지.”

“아~ 하긴, 그렇겠다. 그럼 트로웰이 정령이라도 보내서 알려주겠지? 결국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건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런 내 모습을 본 라피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잠시 후 녀석은 묻기가 조심스럽다는 듯 망설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보다, 너…악신을 소멸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고 있는 거냐?”

“어라? 소멸 시키는 방법이 있어? 그게 뭔데?”

“…그럼 그렇지.”

“헤헤, 내가 원래 이런 정보에 둔하잖아. 다 알면서 새삼스럽긴. 그보다 그 방법이란 게 뭔데?”

“됐다. 그냥 안 듣는 게 좋을 것 같아.”

“엥? 뭐야, 그게?”


말해줄 것처럼 해놓고선 갑자기 분위기를 흐리는 라피스를 난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평소에도 워낙 변덕이 죽 끓듯 하던 녀석이었기에 꼭 놀림을 당한 것 같아 기분이 상해지려는 참이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그럴 거면 처음부터 꺼내지나 말지. 괜히 궁금해지잖아~”

“…그냥, 넌 모르고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그런 것뿐이야.”

“그런 게 어딨어? 나도 엄연히 이곳을 지배하는 4대 정령왕의 하나라고! 어차피 언젠간 알게 될 일이잖아! 치사하게 자꾸 이럴래?”

“맞습니다, 라피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속 편하게 털어 놓으시죠? 저도 궁금하군요.”

“나도 궁금해, 은인. 방법이 있다면 아주 불가능하단 소리는 아니잖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마지막으로 아스까지 초롱초롱한 시선을 보내자 라피스는 찌푸린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곤란한 듯 나를 보며 몇 번이고 신신당부하는 말을 건넸다.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고 들어. 그렇게 태평한 이야기는 아닐 테니까.”

“대체 어떤 방법 이길래…알았어. 놀라지 않을 테니까 일단 말해봐.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글쎄, 까다롭긴 하겠지만 타이밍만 잘 맞춘다면 그리 힘들지는 않을걸.”

“타이밍?”


어리둥절하게 묻는 우리에게, 라피스는 아까보다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우선 내 짐작이 맞다면 이미 신들은 거의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일거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재물의 숫자가 거의 마지막에 임박했을 테지? 그럴 경우 각성만 안했을 뿐이지, 거의 악신이나 다름없다고 들었거든. 웬만해선 건드릴 수 있는 자가 없어. 마치, 부화 직전의 마족의 알처럼.”

“엥? 그럼 어떻게 해? 마냥 손 놓고 각성하는 걸 봐야 한다는 거야?”

“맞아. 내가 알기론 그래. 다만 각성하는 순간 육체의 변화로 인해 약간의 빈틈이 생긴다고 하더군. 소멸시키려면 그때밖에 없다는 소리지. 아니면 그 전에 피를 얻는 유통수단을 제거해서 각성의 시기를 최대한 늦추거나.” 

“!!”


아아, 이래서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한 거였구나.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것의 어디가 각오하고 들어야 할 이야기라는 걸까? 

시작 전부터 잔뜩 겁주기에 뭔가 대단한 말이라도 나올 줄 알았던 나는 약간 허무한 심정으로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데르온과 아스역시 마찬가지인 듯, 그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실망한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게 전부야? 그렇게 심각하게 말할 정보는 아닌 것 같은데. 그냥 타이밍만 잘 노려서 공격하면 되는 거잖아.”

“…그 타이밍에 반드시 누군가가 죽어야 하는데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젠장. 결국 말하게 되는 군. 잘 들어, 엘. 악신을 소멸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상급신의 목숨 하나야. 알았어? 각성의 순간 신 하나가 뛰어들어 같이 자폭하는 수밖에 없다고.”

“!!!”


순간 딱딱한 무언가가 머리를 강하게 후려치고 지나간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라피스는 놀라는 내 표정을 보고 잠깐 후회하는 얼굴을 했지만, 이왕 시작한 말은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계속해서 설명했다.


“아마 결전의 때가 오면 신계에서 대거 상급신들이 내려올 거야. 그리고 악신이 각성하는 순간을 노려 주박술을 펼치겠지. 실제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건 단 몇 분. 그때 놈과 같이 희생할 신이 나타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거다. 아마 지금쯤 투표라도 하고 있을 걸?”

“…말도 안 돼.”

“뭐, 아무튼 그렇다는 소리야. 나도 어디까지나 들었던 이야기기 때문에 확실하다고 할 수는…”

“그, 그럼 엘뤼엔은? 엘뤼엔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거야? 그 희생할 상급신에 엘뤼엔도 해당돼? 아직 신이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창백한 얼굴로 묻는 나를 보며 라피스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쯧쯧 혀를 찼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가차 없이 냉정한 것이었다.


“기간 따윈 상관없어. 상급신이라는 조건만 맞추면 되니까. 아마 엘뤼엔도 예외가 아닐 거다. 악신의 탄생을 막는 것은 전 차원을 위해서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야. 그런 일에 초보라고 빠질 것 같아?”

“…그런…”

“그러게 내가 듣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했잖아. 일단 머리 좀 식혀. 너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라고.”

“……”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지는 기분이 바로 이런 걸까?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천천히 입을 틀어막았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흐트러지면 곧바로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윽-”


곧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시야가 어지러워져 몸속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해내고 싶을 만큼 비위가 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런 내 상태를 눈치 챈 아스가 당황한 얼굴로 얼른 나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렸다.


“대부! 괜찮아? 정신 차려봐. 진정해!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어. 그냥 그렇다는 가정만 들었을 뿐이잖아.”

“미, 미안해. 나 잠깐…아니,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과민한 반응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한번 통제를 잃어버린 감정은 아무리 애를 써도 쉽게 추스를 수가 없었다. ‘엘뤼엔이 죽는다.’ 그 생각만으로 이미 온 몸이 단단하게 결박되어 차갑게 굳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자 라피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평소와는 달리 다독이는 듯 고분고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신계의 신이 어디 그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자원하고 나서는 녀석이 있을지도 몰라.”

“아…”

“뭐야? 그 표정은? 설마 그 정신으로 다른 신들까지 걱정하는 거냐? 그런 걸 바로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하는 거야. 아무튼 녀석은 절대 죽으려고 하지 않을 걸? 희생되느니 차라리 신계의 모든 신들을 작살내려고 할 테니까. 또 모르지. 희생되는 척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자기대신 다른 놈을 집어 던질지도. 킥.”


그러나 라피스는 그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갑자기 예고 없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호오. 그건 설마 날 향하는 말이냐? 그것 참…맞기는 한데 어째 기분이 상당히 더러워지는 구나, 빌어먹을 도마뱀아.”

“!!”

“…엘뤼엔!!”


놀란 표정으로 돌아본 곳에는 어느새 기척도 없이 나타난 엘뤼엔이 이마에 혈관마크를 띄우고 살벌하게 웃고 있었다. 뒤편에서는 그의 화려한 외모를 보고 놀란 사람들이 붉어진 얼굴로 웅성거리기 바빴다.


“여긴…어떻게…”


어쩐지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어 나는 정신없이 엘뤼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꼭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엘뤼엔은 라피스를 쏘아보던 것을 그만두고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당혹감이 가득 드러난 내 얼굴을 잠시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바라보던 그는 곧 미소 지으며 말했다.


“놀러왔다.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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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후후후..T^T.........





[정령왕 엘퀴네스] 8-16. 접전 (2)


그의 입에서 ‘아들’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나는 안도감에 울컥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다 큰 녀석 남자가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울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을 잠시 아쉽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엘뤼엔은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내 머리를 툭툭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왔다는데 반갑다는 말도 안하는 거냐? 어째 점점 반항기 같다?”

“…어, 어떻게 왔어? 아니, 그보다…방금 라피스가 한 말 진짜야? 정말 상급신이…”

“아아, 신경 쓸 것 없어. 저 쓸모없는 도마뱀의 말마따나 희생할 신은 나 말고도 차고 넘치거든. 넌 전혀 걱정할 것 없다. 아무튼 저놈의 도마뱀 때문에…”

“크악! 그놈의 도마뱀 소리 좀 집어치우지 못해!!”


평온하게(?) 이어지던 대화는 갑자기 발작하는 라피스로 인해 방해를 받고 말았다. 찌푸린 표정을 한 엘뤼엔은 씩씩거리는 녀석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도마뱀을 도마뱀이라고 하는 게 뭐가 문제지?”

“대체 내가 왜 도마뱀이야!! 눈이 있다면 종족 구분은 확실히 하라고! 그런 저등한 파충류와 동급 취급 하지 맛!”

“훗. 네 놈은 비하(卑下)라는 것도 모르나? 알고 봤더니 머리도 나쁘군.”

“…이 재수 없는 자식!”


당장 폭발할 듯 부글거리는 라피스와 싸늘한 얼굴로 폭언을 날리는 엘뤼엔의 모습은 서로의 성격만큼이나 완벽하게 대조적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불과 물의 대결이라고나 할까. 

둘에게는 심각한 문제 였을진 몰라도, 나는 평소와 똑같이 흘러가는 분위기에 안심하곤 혼란스웠던 마음을 차츰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제 서야 주변을 둘러싼 구경꾼들의 시선을 느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두 사람(?)의 팔을 붙들었다.


“일단 나가자. 여긴 사람들이 쳐다봐서 안 되겠어. 그런데 엘뤼엔은 지금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거 아니야? 설마 이번에도 금방 돌아가야 하는 건?”

“훗. 이게 뭔지 알아 맞춰보련?”

“??”


씨익 웃은 그가 가리킨 것은 그가 걸고 있던 얇은 은으로 만들어진 목걸이였다. 별다른 장식 없이 그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디자인이었기 때문에, 딱히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었던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평범한 목걸이 같은데?”

“틀렸다, 아들. 이건 신력을 억제하는 물건이야. 주신만이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장기간 중간계에 체류할 수 있게 만들어주지. 즉, 이전처럼 급하게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 그런 것도 있었어? 그런데 왜 이전에는 안 걸고 나왔는데?”

“원래 내 것이 아니거든. 카노스놈 한테서 뺏은 거야. 그 동안 쌓인 서류까지 고스란히 맡겨두고 왔지. 지금쯤 이를 갈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뭐, 그러거나 말거나 내 알바 아니지만.”


그렇게 말한 엘뤼엔은 무척이나 후련하다는 듯이 샤방하게 웃어보였다. 저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그동안 마신에게 쌓인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근데 카노스는 마계에 있던 거 아니었어? 더 조사해 볼게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아. 얼마 전에 돌아왔어. 그 녀석 이야기는 꺼내지 마라.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니까. 원래대로라면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그놈의 부작용 때문에…”

“부작용?”


약물 과다 복용도 아닌데, 웬 부작용이란 말인가? 나는 오만 인상 찌푸리고 있는 엘뤼엔을 보며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내 질문의 대답은 그가 아닌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들려왔다.


“감각이 완전히 둔화됐다지? 그것도 가장 치명적인 방.향.감.각.이. 훗, 엉뚱한 장소에서 헤매고 있는 엘뤼엔을 발견했을 때의 그 기묘한 기분이란…아아,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젠장! 닥쳐!”

“…아?”


험악하게 소리친 엘뤼엔이 바라본 것은 활짝 열리진 식당의 문 앞이었다. 그곳엔 언제부터 있던 건지,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늘씬한 청년과 등 뒤로 새하얀 은발을 늘어뜨린 무표정한 얼굴의 여인이 서 있었다. 

겉보기의 나이는 20대 초반 정도? 엘뤼엔과 친분이 있는 걸 보면 인간이 아닐 가능성이 더욱 컸지만, 그다지 기억에 있는 사람이 아닌데도 분위기가 묘하게 익숙한 기분이었다. 


‘누구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웅성웅성.

한 눈에 봐도 시선을 확 끌만큼 매력적인 미모들 탓에,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은 또다시 어수선 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 시선들이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고 있을 뿐이었다.


“감격적인 상봉은 그쯤에서 마치고 이제 그만 나오는 게 어때? 기다리는 쪽도 생각해 달라고. 설마 여기서 밤 샐 생각은 아니겠지?”

“…기다리라고 한 적 없을 텐데.”

“나~참, 그게 이곳까지 안내해준 사람한테 할 말이야? 아무튼 여전히 성격이 나쁘다니까. 안 그래, 다들? 어라라. 그런데 뭔가 옷차림들이 하나같이 음침하네. 얼굴을 왜 그렇게 가리고 있어? 뭐야, 라피스. 네가 또 사고 친 거야?”


친근하게 웃으면서 묻는 얼굴은 분명 처음 보는 건데도 낯설지 않았다. 아마도 햇볕에 그을린 것 같은 검은 피부나 선연한 황금색 눈동자가, 트로웰과 많이 닮았다고 느껴서 일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라피스와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다음으로 이어지는 라피스의 대답에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사고 친 적 없어. 그저 이곳 인간들이 귀찮게 굴었을 뿐이지. 그나저나 별 일이군. 항상 꼬맹이로만 다닐 줄 알았더니, 갑자기 무슨 마음의 변심이냐, 트로웰? 그 모습은 꽤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

“!!”


저, 정말 트로웰 본인이라고? 나는 휘둥그렇게 벌어진 눈으로 그가 트로웰이라 부른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는 생긋 웃으면서도 입으로는 충실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뭐,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잖아? 쿡쿡, 농담이야. 사실은 지금부터 엘을 따라다닐 생각인데, 예전의 동료들과 만나기라도 하면 곤란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런데 엘은 꽤나 놀란 모양이네? 설마 날 못 알아 본거야?”

“허걱…. 진짜 트로웰이야?”

“흐음. 정말 못 알아본 모양이네. 그냥 키만 좀 크게 한 것뿐인데, 그렇게 많이 달라졌어? 그럼 저기 있는 사람도 모르겠구나?”

“에?”


그가 웃으며 가리킨 사람은 처음 등장 때부터 함께 있었던 은발머리의 여자였다. 그동안 이사나의 은발에 익숙해져 있던 탓에 별로 신기하다고 느끼지 않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녀의 머리카락은 보통의 은발과는 달리 살짝 투명한 빛을 띄우고 있는듯 했다.

눈동자는 희미한 회색. 그 안에 박힌 짙푸른 동공을 멍하게 쳐다보던 나는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우아하게 서있는 여자를 향해 무심코 물었다.


“…설마, 미네?”

“맞습니다, 엘. 그래도 빨리 알아보시는 군요. 제가 생각해도 너무 많이 달라져서 못 알아보실 줄 알았습니다. 키라는 게 전체의 인상을 꽤나 좌우하는 모양입니다.”

“……”


이게 무슨 ‘키만 크게 한 것 뿐!’이라는 거냐! 완전히 다른 사람이잖아!! 

그나마 예전과 같은 건 딱딱한 말투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밖에 없었다.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어설프게 대답했다.


“하하하! 머, 멋지다, 미네. 정말 달라졌어. 이건 거의 폴리모프 수준인 걸?” 

“그렇긴 합니다만, 이 모습을 유지하려면 평소보다 힘이 더 많이 듭니다. 전 역시 본 모습 쪽이 더 편하군요. 트로웰이 ‘어린애’는 전쟁에 끼워주지 않는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바꾸긴 했습니다만.” 

“전쟁이라니? 설마 지금 내 유희에 합류하려고?”


놀라서 두 눈만 깜빡이는 나에게, 트로웰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실을 털어놓았다.


“실은 마신이 정령계에 찾아왔었어, 엘. 너를 도와주라고 부탁하더라고.”

“나를?”

“응. 이사나의 숙부라는 인간이 악신의 탄생과 관계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중간에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까, 가능하면 결전의 때까지 함께 움직이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런데 오는 길에 엘뤼엔하고 우연히 만났지 뭐야? 바보같이 널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길래 내가 데려왔어. 잘했지?”

“헤, 헤매?”

“젠장. 목걸이의 부작용이야. 마신 전용으로 맞춰진 거라 내가 컨트롤하기 어려웠을 뿐이라고. 그나저나 ‘바보’라…트로웰. 너도 그새 많이 컸구나. 그렇지?”


엘뤼엔의 서늘한 목소리를 들은 트로웰은 찔끔한 얼굴로 배시시 웃어보이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딴청을 피우며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하하하…그, 그런데 엘! 이쪽은 누구야? 둘 다 마족인 것 같은데. 새로운 동료?”


그가 가리킨 사람은 지금까지 멀뚱한 시선으로 우리들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아스와 데르온이었다. 그때서야 아직 서로에게 안면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잠시 미안한 시선을 보낸 뒤 얼른 두 사람(?)을 소개시키기 시작했다.


“데르온과 아스모델이라고 해. 아스는 카노스가 선택한 미래의 마왕이야. 동료라기 보단 내 아들 같은 존재지. 내가 아스의 대부거든.”

“대부? 헤에~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내가 기억하기론, 저쪽 데르온인가 하는 마족은 예전에 우리를 몰래 감시하고 있던 것 같던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걸?”

“예, 예? 무, 무슨…”

이제 까마득히 지나버린 옛일로 느껴졌지만, 샴페인 용병단과 동행했을 적 우리를 쫓아다니던 것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나 매튜가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데르온은 당황한 얼굴로 어깨를 움찔 떨었다.


“기억 안 나? 용병단에 있을 때 엘 옆에 있었던 검은 피부의 소년 말이야.”

“검은 피부? 헉! 그, 그럼 설마!!”

“그래, 맞아. 그 사람이 나였어. 그때 케르베로스를 풀어놨던 녀석들도 너희들이었지? 내가 몰래 시야를 방해하느라고 꽤 애썼는데 말이야. 눈치 채지 못했다니 섭섭하네. 지금 엘 옆에 있는 건 카노스의 명령인가 보지?”


마치 탐색하는 듯한 그의 시선에 데르온은 식은땀을 뻘뻘흘리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곤 이제 자신의 주군은 아스모델밖에 없으며, 이전의 마왕과 동료에 대한 의리 또한 없다는 뜻을 밝혔다. 


“아스님을 뵌 순간부터 저는 그의 부하로 정해졌습니다. 이미 저는 과거의 제 자신을 버린 상태입니다.”

“흐음. 그렇다고 하니 나 또한 그때의 일은 묻어주지. 아주 적절한 시기에 주군을 선택했군. 아마 그대로 있었다면 반드시 죽었을 거야.”

“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얼마 전 그의 동료였었던 세르피스가 죽은 일이 떠올랐는지, 데르온은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분위기도 환기시킬 겸, 둘 사이에 끼어들어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자자, 이제 한참이나 지난 일이야. 원래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료라잖아. 하하! 그보다 아스도 인사해야지? 이쪽은…”

“나도 알아. 땅의 정령왕 트로웰.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지? 대부랑 비슷한 기운이 느껴져.”

“와~ 우리 아스 역시 똑똑하구나. 맞아. 내 가족이자 친구들이야. 그러니까 앞으로 말 잘 들어야 한다?”

“응, 알았어. 잘 부탁해, 대부 친구들!”


명랑하게 인사하는 아스의 모습에 트로웰과 미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주일 전이라면 모를까, 이제 훌쩍 커버려 겉보기로 별반 차이나지 않은 녀석을 내가 어린애처럼 대하는 게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스나 나나 이쪽이 더 편했기 때문에, 새삼 어른취급을 하고 말고 할 게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대할라치면 아스 쪽에서 먼저 거부하는 일도 빈번했다.


‘<대부가 나를 어려운 사람 대하듯 하는 건 싫어. 그냥 동생이나 아들처럼 필요할 때 생각나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어.>라고 했던가? 아무튼 귀여운 녀석이라니까.’


갑자기 훌쩍 자라버린 아이에게 쉽게 적응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아스의 변하지 않은 태도 덕분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내가 그의 대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속으로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 다음으로 한 구석에서 따분하게 서있던 엘뤼엔을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여긴…음…형벌의 신 엘뤼엔이라고 해. 내 아, 아버지야.”

“!”


그 순간 엘뤼엔의 눈동자가 놀라움에 크게 벌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껏 누군가에게 그를 ‘아버지’로 소개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터라, 나 또한 굉장히 어색하고 긴장한 상태였다. 남들 다하는 말이라도, 나에게는 무엇보다 마음의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으음.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라고 소개한건 좀 오버였나? 혹시 기분 나빴음 어쩌지?’


어쩐지 그와 시선이 마주치는 게 겁이나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있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 미소가 걸려있다는 사실은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괜히 기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나는 연신 헛기침을 내뱉으며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아스는 나에게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만 놀라워하고 있었다.


“대부한테 아버지 있었어? 그럼 내가 뭐라고 불러야 해?”

“글쎄…할아버지?”

“…아들아, 진지한 대화가 필요할 것 같구나. 조용한 곳에 가서 얘기 해볼까?”

“하하하! 노, 농담이었어. 그냥 이름으로 부르면 될 거야. 일단 마신과 동급이니까 그와 비슷하게 대하면 될 것 같은데.”

“마신님과 동급? 으음, 알았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 아스는 곧 엘뤼엔을 향해 환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위대하고 존귀하신 존재님, 안녕하세요!”

“…쿨럭! 그, 그건 뭔 소리?”

“어라? 이렇게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알에 있었을 때, 마신님은 항상 이렇게 부르라고 했었는데. 대부 아버지도 마신님과 동급이니까 똑같은 호칭이 필요하잖아.”

“으윽…그 신은 대체 애한테 뭘 가르쳐 놓은 거야!!”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웃던 카노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러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던 라피스가 지나가듯 한마디 툭-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보다 말이야. 계속 여기 있어도 되는 거냐? 네가 못 느끼고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지만, 아까부터 인간들이 계속 몰려들고 있는데.”

“뭐?”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본 나는 주위를 가득 찬 사람들을 발견하곤 그대로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워낙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느라, 우리가 있던 장소가 식당이었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잊고 있었던 것이다.

엘뤼엔부터 시작해서 트로웰, 미네르바까지 거리낌 없이 소개했던 지난 장면이 떠오르자 내 얼굴은 스스로가 느낄 정도로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마계공작이니 마왕이니 하는 말도 오고가지 않았던가! 사람들이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너무 눈에 띄어버리는 짓을 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어, 어떡하지?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그러나 이런 고민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인지 깨달은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피식-웃은 엘뤼엔의 눈동자에 옅은 은빛이 돌았다고 생각한 순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마치 몽유병에 걸린 마냥 멍하게 변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을 땐, 그들은 모두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우리에게서 관심을 끊어버린 상태였다. 가끔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건 일행들의 외모에 대한 순수한 감탄의 의미였다. 

어느새 썰물처럼 식당 안을 벗어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엘뤼엔에게 물었다.


“방금 뭘 어떻게 한 거야?”

“우리가 대화한 것을 본 기억을 지웠다. 아마 자기들이 왜 여기있는지도 모를걸?”

“……”


혹시라도 문득,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땐 생각하라. 

당신의 기억도 어떤 신에 의해서 지워진 것일지도 모른다.




***



“우.연.히. 헤매고 있는 걸 발견했다고? 거짓말도 잘하는 군.”


식당을 벗어나자마자 엘의 시선을 피해 낮게 중얼거린 사람은, 당장이라도 죽일 듯 트로웰을 살벌하게 쏘아보고 있던 엘뤼엔이었다. 그러자 트로웰은 난감한 듯 웃으며 살짝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런, 이런. 그럼 날더러 솔직하게 말하란 말이야? 네가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하러 감시하러 왔다고?”

“내 행동에 참견 받을 이유는 없어.”

“그건 너만의 생각이겠지. 이런 게 싫다면 다시 신계로 돌아가. 그럼 다 해결되는 거 아닌가?”

“젠장…대체 카노스놈 한테 무슨 소리를 듣고 이러는 거냐?”


기가 막히다는 듯 묻는 말에 트로웰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얼마 전 정령계로 찾아왔던 마신과의 대화가 되풀이 되고 있었다.







“엘뤼엔을 막아달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앞 뒤 설명 없이 덜컥 내놓은 부탁은 트로웰과 미네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카노스는 순순히 대답해줄 마음이 없다는 듯 여전히 웃는 얼굴로 물었다. 


“혹시 악신을 소멸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

“소멸? 아아. 상급신 하나의 희생 말인가. 설마 방금 한 말이 그것과 관계가 있는 거야?”

“맞아. 나도 몰랐는데 얼마 전에 신계에서 회의가 열렸던 모양이더라고. 그 결과 희생할 신으로 엘뤼엔이 뽑혔다고 하더군. 물론 녀석은 화려한 방법으로 거절했지만.”

“화려한 방법?”

“신계의 신들을 거의 다 소멸 직전으로 만들어 놨어. 덕분에 결정이 보류 되서 곧 다시 회의가 열릴 참이지. 이런 와중에 신기하게도 자원하는 녀석들은 없단 말이야? 평소엔 그렇게 삶이 지겹다, 지겹다 해도 막상 죽기는 싫었던 모양이지.”

“…아무튼 결정이 그렇다면 엘뤼엔과는 상관없는 것 아닌가? 아니면 또 뭔가 다른 문제가 있는 거야?”


그러자 카노스는 이번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는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얼마 전에 있었던 상황에 대해서 주절주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실은 내가 잠시 방심한 사이에 녀석이 내 목걸이를 들고 중간계로 내려가 버렸거든. 뭐, 그것 때문에 내 일거리가 밀려서 복수하려는 건 아니고…아니, 솔직히 좀 억울하긴 하지만 그거야 뭐 내가 한 짓도 있으니까 인과응보인 셈이지. 어쨌든 엘뤼엔좀 막아줘. 다시 신계로 돌아오게 해주면 더 좋고.”

“하아. 좀 알아듣게 말해. 구체적으로 뭘 막아달라는 건진 알아야 할 거 아니야.”


마음이 읽히지 않는 상대와의 대화는 이래서 답답하다고 생각하며 트로웰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카노스는 갑자기 한 쪽 팔의 소매를 걷어 불쑥 그의 눈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흰 피부위에는 상당히 끔찍했을 상처자국들이 보기 흉하게 늘어져 있는 상태였다.


“…무슨?”

“악신의 배후가 밝혀졌다고 했지? 이건 그 조사를 완료하고 나오는 과정에서 입은 상처다. 보다시피 치료신이 직접 돌본 건데도 완쾌가 되지 않았어. 이걸 본 엘뤼엔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내려가 버렸지.”

“이미 악신이나 마찬가지라는 건가…. 그런데 엘뤼엔이 왜…아! 설마, 엘 때문에?”


놀란 표정으로 묻는 그에게 카노스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 실수였어. 엘이 위험할거라고 했거든. 사실대로 말하자면 위험한건 너희 4대 정령왕 모두였지만, 녀석의 귀에는 아들밖에 안 들렸던 모양이야.” 

“하긴, 아크아돈에서 악신이 탄생한다면 우리 정령왕들이 가장 거슬리겠지. 그럼 오히려 잘 된 거 아니야? 이럴 때일수록 서로 힘을 합치는 편이 유리하잖아.”

“어이. 내 상처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엘뤼엔이 강한 건 사실이지만 악신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라고. 게다가 굽히지 않는 녀석의 성격상, 적당히 도망치려고 하지도 않을 테니 십중팔구 죽을 거야.”

“!!”


생각지도 못한 말에 트로웰은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아직 악신이 대대적으로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엘이 위험한 처지에 빠진 것도 아닌데 당연한 듯 ‘죽음’을 언급하는 그의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설마…엘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이번 그의 유희가 악신과 관계된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이사나의 숙부란 인간하고도 연관이 있을 텐데…혹시 마왕이냐?”

“정답. 눈치 챌 줄 알았어.”


트로웰은 생긋 웃는 카노스의 얼굴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마왕이 배후라면, 결국 이번 일은 마신인 그의 관리부족으로 일어났다는 소리다. 이제 와서 따져봤자 시간 낭비밖에 되진 않겠지만.

그 시선을 느낀 듯, 카노스는 제법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짧게 사과를 건넸다. 


“이번일은 마족을 관리하는 신으로서 정말 면목이 없다. 미안하게 생각해. 최대한 수습에 힘쓰겠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뭘 하라는 소리지? 엘뤼엔더러 엘을 지키지 말라고 설득이라도 하라고?”

“냐하하하~ 그거 괜찮은데. 아아, 농담이야, 농담.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 일단 내가 걱정하는 건, 녀석이 소멸을 자원하게 되는 상황이야. 이미 거절하긴 했지만, 마음이란 언제든 다시 돌이킬 수 있는 거니까.”

“엘뤼엔이 엘을 놔두고 죽는 길을 선택할리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그렇지. 하지만…이런 상황에서 멋대로 중간계로 내려간 게 이상하지 않아? 정 안될 것 같으면 이제까지 했던 것처럼, 위험한 순간에 내려가서 도와주는 방법도 있어. 굳이 신력을 억제하면서까지 갈 필요는 없다는 소리지. 본 능력을 전부 발휘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뭘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거지?”

“그거야…”

“게다가 녀석이 나한테 했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 말이야. 네 힘만으론 안 될 거라고 했더니, ‘아들은 지킬 수 있겠지’라더군. 단순히 보호해 주러 간 게 아니라, 마치 죽기 전 마지막 작별인사라도 하고 올 것 같은 얼굴이었어.”

“!!”


그때의 상황이 생각났는지 씁쓸한 표정을 하는 마신을 보며 트로웰은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엘뤼엔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이때가 기회라는 듯, 카노스는 망설임 없이 다음 말을 이어갔다.


“신계에선 아직 결정을 보류한 상태지, 다른 희생자를 뽑은 게 아니야. 즉, 엘뤼엔이 유력한 후보임엔 변함이 없다는 거지. 이런 시기에 멋대로 자리를 이탈한걸 알게 되면 말이 많을 거다. 그러니 그가 중간계에 내려가 있는 동안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막아줬으면 좋겠다는 거야.”

“흐음. 마신 카노스가 그렇게까지 엘뤼엔을 아끼고 있을 줄은 몰랐군.”


빈정거리듯 건네는 말에도 카노스는 생긋 웃기만 할 뿐 불쾌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좋은 녀석이야. 성격이 모나서 쉽게 마음을 열지 않을 뿐이지. 너희들이 엘을 아끼는 것처럼, 나에게도 친구를 챙길 권리는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엘을 위해서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잖아? 그가 죽으면 가장 슬퍼할 존재가 누구일것 같아?”

“…역시 엘이겠지. 좋아. 어차피 그의 유희에 악신이 개입된걸 알게 된 이상 이곳에서 마냥 지켜볼 여유 같은 건 없으니까. 겸사겸사 하는 셈 치지.”


그 뒤 트로웰과 미네르바는 두말없이 중간계로 내려와 제일 먼저 엘뤼엔의 기운부터 찾았다. 그리곤 한창 엉뚱한 곳에서 해매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이렇듯 함께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트로웰은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는 엘뤼엔을 바라보며 생긋 미소 지었다. 


“친구 잘 둔 탓이라고 생각해. 마신이 말하길, 네 행동이 너무 눈에 띄면 곤란하댔거든. 지금은 권유상태지만, 나중엔 강제가 될지도 모른다고 했어. 주신이 직접 명령을 내리면 아무리 너라고 해도 별수 없잖아? 어쨌든 나로서도 네가 희생하는 상황은 내키지 않으니까.”

“희생은 누가! 그런 건 다 헛소리라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게다가 대체 네가 언제부터 남의 일에 신경 쓰는 성격이었지?”

“아니. 나도 이런 내 행동이 평소답지 않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난 아무리 생각해도 엘이 슬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거든. 그러니까…”


살짝 말끝을 흐린 트로웰의 얼굴은 그 순간 사나운 맹수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다정다감하던 모습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차가운 냉기로 가득한 모습이었다. 


“아들을 울리는 나쁜 아버지는 되지 말라고, 엘뤼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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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언제나 트로웰을 편애합니다...와하하<-퍽!






[정령왕 엘퀴네스] 8-17. 접전 (3)



정해둔 일주일의 시간이 흐르자 각 부대는 작전을 실행하는 날짜와 시간을 정한 뒤 서로 맡은 책임을 떠안고 흩어졌다.

이사나의 계획에 따라 알리사의 제 3부대는 계곡 쪽을, 늪지대는 시벨리우스의 용병대가 맡게 되었다. 나머지 두 부대는 소란을 일으켜 다른 쪽으로 지원을 보낼 수 없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어찌 보면 몸으로 때우는 식이라, 위험부담이 가장 큰 부대라고 할 수 있었다. 

덕분에 군사의 배치가 그 두 부대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져, 정작 알리사와 시벨리우스가 맡은 부대는 채 4천을 넘지 못했다. 1만의 군사를 상대로 하는 숫자치곤 턱없이 부족했지만, 어차피 유인이 목적이기 때문에 재빠르고 비밀스런 이동을 해야 하는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클모어를 떠난 후 며칠 뒤 목표했던 장소에 도착한 시벨리우스는 그가 맡은 용병대와 함께 낮은 포복으로 숨어 동쪽의 군사들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작전이 실행되는 것은 다음날 새벽 무렵이라, 아직 기다리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한 상태였다. 

그러나 코앞에 닥친 위기에도 어찌된 일인지 용병들의 얼굴은 태평하기만 했다. 개중에는 서로 농담을 건네며 낄낄거리는 자들도 있었다. 저들 나름대로의 긴장을 풀기위한 방법이라나, 뭐라나. 

그들의 모습을 본 시벨리우스는 새삼 이사나의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라온 황자는 물론, 어린 알리사나 기사도로 똘똘 뭉친 후작으로서는 저 자유분방한 족속들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시벨리우스는 4개 부대 중에서 가장 너그러운 지휘관인 셈이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용병들의 태도는 점점 더 나태해졌지만, 그는 특별히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저러다가도 막상 전투가 다가오면 알아서 잘 싸우는 게 용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묘하게 서로의 상성에 맞아, 용병들은 이 엘프 지휘관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다. 정작 시벨리우스 본인은 귀찮아하는 쪽이었지만. 

특히 신경 쓰이는 족속은 샴페인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쓰고 있는 용병단으로, 단원인 여자 두 사람을 포함하여 도무지 평범한 구석이라곤 찾아보기가 힘든 인간들이었다. 지휘관인 그를 향해 넉살좋게 말을 놓는 ‘센스’도 오직 그들만이 발휘할 수 있는 신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이, 파란 대장! 아직 멀었어? 벌써 이만큼이나 어두워 졌는데.”

“시벨리우스라고 부르라니까! 그리고 결전은 새벽이랬잖아! 아직 멀었다고.”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야? 배도 고프고, 아까부터 슬슬 졸리기 시작했단 말이야.”

“거짓말 하지 마. 눈이 그렇게 또랑또랑한 주제에.”

“오옷! 역시 눈치 챘어! 어이, 다들 봤어? 내가 맞출 거라고 그랬지? 자, 어서 돈 내놔! 10실버야, 10실버!”

“앗싸~이겼다!”

“쳇! 이왕이면 좀 속아줄 것이지.”

“에엥. 나 돈 없는데…”

“……”


두 남자가 환호하며 소리치자 보라색 머리와 금발 머리의 여자가 나지막히 투덜거렸다. 그새 자신을 두고 내기 판이라도 벌였던 건가. 시벨리우스는 새삼 저들의 머리를 해부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 시선을 느꼈는지 그나마 좀 듬직해 보이는, 용병단의 리더인 듯한 남자가 그들을 나무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마이티, 헤롤. 이제 그만들 해, 보는 눈도 있는데 창피하지도 않냐?”

“헹~ 내기에 못 끼어서 서운한 티내기는. 그래봤자 대장 몫은 없어. 이건 다 우리 거라고.”

“약 오르지? 메렁~메렁~”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 이것들아~~~!!”


부들부들 떨면서 말하는 그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놀리기를 계속하는 상대 쪽도 이미 이런 상황엔 이골이 날 정도로 익숙한 듯 보였다. 아니, 이미 즐기는 경지라고 해야 할까?

잠시 혀를 쯧쯧 찬 시벨리우스는 다시금 전방의 장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굳게 쌓여진 성벽 앞에 진을 치고 있는 텐트와 불빛들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보는 것만으로 기가 질릴 정도로 상당히 많은 숫자를 의미하고 있었다. 
이것은 비단 이쪽뿐만이 아닌, 알리사와 이사나가 맡은 곳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흐음. 지금쯤이면 알리사한테 신호가 올 때가 됐는데.’


이번 작전은 4개의 부대가 서로 동시에 쳐야만 최대의 효과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에, 그는 진득하게 다른 부대의 신호를 기다렸다. 
그러자 잠시 후, 수풀 사이를 제치고 소년의 종아리만한 크기의 작은 난쟁이가 고개를 빼곰 들이미는 것이 보였다. 알리사가 다루는 땅의 하급 정령인 ‘놈’이었다.


“호오. 드디어 소식이 왔군. 알리사는 출격 준비를 모두 마친 거냐?”


끄덕끄덕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이쪽도 슬슬 작전을 실행해야 겠군. 어이, 이제 다들 일어나. 사냥할 시간이다.”

“오오! 드디어!”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네! 간만에 실컷 포식해 보실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료함에 찌들어 있던 눈들은 출전 명령이 떨어진 순간 어느새 거친 맹수처럼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 시벨리우스는 다시 한 번 용병들을 향해 당부의 말을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놈들을 유인할 장소는 외워뒀겠지? 무모하게 깊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적당히 싸우는 척 하다가 후퇴하도록 해. 말해두지만 유족들에게 돌아갈 돈이 그리 많지 않을 테니, 괜히 날뛰다가 죽지 말라고. 이사나는 가난하거든.”

“와하하하하!”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얼굴들은 이미 이런 상황에는 질리도록 익숙하다는 듯,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 전쟁이란, 그저 평소 생활하던 방식의 연장일 뿐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일반 군사와 용병의 다른 점일 것이다. 


“자아! 그럼 시작해 볼까?”


피유우우~~ 콰아아앙!

그러자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저 멀리 남쪽의 하늘에 붉은 광선이 터져 오르기 시작했다. 이사나가 맡은 제 2부대가 돌격했다는 신호였다. 


“적이다! 적의 기습이다!!”

“남문으로 적이 기습했다!!”


예고 없이 하늘을 밝히는 빛줄기에 보초를 서던  대공의 군사들이 모두 소리치며 무기를 정비하기 시작했지만, 정작 자신들의 앞에 다가와 있는 위험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시벨리우스는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마법으로 축포를 쏘아 하늘을 밝혔다. 캄캄하던 주위가 대낮처럼 밝아지자 그것을 신호로 용병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거침없이 전장에 뛰어들었다.

피유우우~ 콰아아아앙!


“와아아아아아!!”


요란한 함성과 함께 기습적으로 달려드는 군대의 모습은, 비록 그들보다 숫자가 적다곤 해도 만만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창 단꿈에 젖어 있다가 이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모두 혼비백산하여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질서 있게 정열 된 군대는 순식간에 흐트러져 이리저리 더욱 큰 혼란만 야기 시켰다. 그들의 지휘관들은 고함을 지르며 태세를 갖추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코앞에 닥친 적을 상대하기에는 여러모로 시간이 부족한 상태였다.


“북을 울려라! 잠들어 있는 녀석들을 어서 깨워!!! 적의 기습이닷! 기습이란 말이야!! 모두 자리를 이탈하지 마라! 당장 싸우란 말이다! 명령이다!! 명령!!”

“와아아아!”


둥!둥!둥!둥!둥!! 

커다랗게 울리는 북소리와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에 성루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 역시 적의 기습을 깨닫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용병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여유 있게 대공의 군사들을 배어갔다.

콰앙! 촤아악! 퍼어억!


“아싸! 리듬 좋고~”


용병대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하는 것은 단연 샴페인 용병단이었다. 그들을 다른 사람들이 앞 쪽에서 전전하는 사이, 벌써 깊숙이 안쪽으로 침투해 눈에 띄는 적들마다 족족 배어나가고 있었다.

촤악!


“크아악!”

“와하하! 7명째!”


헤롤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적을 호기롭게 물리치며 소리치자, 옆에서 다른 사람을 상대하고 있던 휴센이 즉시 되받아 쳤다.


“겨우 7명? 난 11명 째다, 하하하!”

“뭐? 거짓말! 내가 늙은이한테 밀리다니!”

“늙은이라닛! 이렇게 펄펄한 늙은이가 어디 있다는 거야!! 오늘 내 손에 한번 죽어볼 테냐!”

“헹~ 죽일 힘이나 있고?”

“이 망할 자식!”


두 사람이 투닥거리기 시작하자 근처에 있던 적들이 기회를 노리고 칼을 들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야아아아!!!”


그러나 힘껏 내지른 칼은 미처 닿지도 못하고 그대로 거꾸러지고 말았다. 입으로는 다투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 자신의 주변을 경계하는 것은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덤벼든 남자의 검을 가볍게 받아친 휴센은 곧 한발로 걷어차서 넘어뜨리곤 망설임 없이 심장을 꿰뚫었다.

푹- 퍼억!


“크헉!”

“12명째!”

“이익! 혼자 활약하게 내버려 둘쏘냐! 어서들 덤볏! 이 헤롤님이 나가신닷!!”


대장의 활약에 자극을 받은 헤롤은 그때부터 종횡무진 적들을 향해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일반인이면 들지도 못할 만큼 커다란 도끼는 한번 내쳐질 때마다 여러 명의 적들을 한꺼번에 양단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이릴과 쉐리는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들은 왜 갈수록 어린애 같아지는 거지?”

“그러게 말이다. 전쟁을 장난으로 안다니까.”

“헤롤이 철이 없어서 그래. 대장한테 자꾸 덤비잖아.”

“어머머~ 무슨 그런 섭한 소릴? 휴센이 나이 값 못하고 헤롤 한테 시비 거는 거잖아?”

“호오~ 지금 자기 남자친구라고 감싸는 거야?”

“그건 내가 할 소리야.”


번쩍!

서로를 바라보는 두 여인들의 눈에서 전류가 튀었다. 그녀들은 주변의 상황도 잊고 어느새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기 시작했다.


“헤롤이 휴센보다 못한 게 사실이지 뭘 그래? 겨우 은패 따위가 금패의 용병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어머머. 그래도 헤롤은 아직 젊잖니. 낼 모레가 환갑인 휴센쯤이야 금방 따라잡을 수 있다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어째서 휴센이 환갑이야? 그게 말이 돼?”

“헤롤이 휴센보다 못하다는 건 말이 되고?”

“당연하지!”


씩씩거리던 그녀들은 곧 동시에 몸을 돌이키며 소리쳤다.


“지금부터 내가 죽이는 몫도 집계에 포함이야!!”

“누가 할 소릴!!”


이것이 과연 방금 전 헤롤과 휴센을 향해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낸 사람들이 할 말이란 말인가! 옆에서 달려드는 적들을 단검으로 받아치고 있던 마이티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대체 누가 어린애라는 거냐, 너희…”


이래서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소리가 있는 모양이다. 새삼 이 세상의 커플이란 모두 악의 축이라는 결론을 내린 22년 솔로 인생 마이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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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 8-18. 접전 (4)


“뭣들 하느냐! 어서 막아라! 전부 죽이란 말이다!!!”


대공의 군사들은 갑작스런 기습에 변변한 반격하나 제대로 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숫자는 훨씬 많았지만 수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일반인들이 대부분인지라, 노련한 용병의 상대가 될 리 없는 것이다. 


“크아악!”

“아아아악!”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터지고, 천막들이 불타기 시작했다. 동쪽 군대의 총 지휘를 맡은 고륜백작은 화가 나서 벌개진 얼굴로 연신 군사들을 채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미 아군이고 적군이고 한꺼번에 엉켜버린 통에 함부로 화살을 날릴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이 치사한 녀석들! 감히 새벽을 틈 타 기습을 하다니!!”


목숨을 거는 일에 치사한 일이 어디있냔 만은 백작은 연신 씨근거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공격해온 숫자가 적다는 것에 안심하고 있었다. 

처음이야 갑작스런 기습에 당황해서 전력이 흐트러진다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쪽이 유리해 지는 것이 기정사실이었다.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는 제 아무리 출중한 실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흥! 계획은 좋았다만, 쓸데없는 몸부림에 불과하다! 시간을 끌어서 놈들의 체력을 떨어트려라! 이 녀석들의 숫자는 채 4천도 넘지 못한다!!”


백작의 외침을 들은 군사들은 그때서야 자신감을 회복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와아아아! 요란한 함성과 함께 다시금 처절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퍼억! 쿠웅! 콰아앙! 촤아악!!

무기와 무기가 겹치고, 발로 차서 넘어뜨리는 소리가 연달아서 들려왔다. 사람들을 동요시킬 작정으로 불 지른 천막들은 시꺼먼 연기를 내뿜으며 꾸역꾸역 타들어가고 있었다. 한쪽에선 철갑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부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리느라 정신이없는 상태였다.


“불을 꺼라! 어서 서두르란 말이다, 이 멍청이들아!!”


둥!둥!둥!둥!둥!

커다랗게 울리는 북소리는 마치 이 치열한 전투를 종용하는 것 같았다. 검은 하늘은 사방에서 터져 나온 축포로 붉은 수를 드리우고 있었다.


“남문의 병사들도 기습을 당했습니다!”

“북문의 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문 쪽에서도 적의 기습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전서구에 백작을 포함한 지휘관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 적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적어서 이상하다 했더니, 사방에서 나눠져 공격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흥! 어리석은!! 적은 숫자를 나눠봤자 자멸만 할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구나! 평원에서 대기하고 있는 위칼렌 자작의 군사들에게 기별을 넣어라! 오늘 이 자리에서 완전히 쓸어버리겠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나 백작이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위칼렌 자작은 현재 움직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지난 일주일간 이사나의 친위대들이 그들에게 향하는 보급품을 끊어놨기 때문이다. 

식량이 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다고 느낀 자작이 몇 번이나 전서구와 사병을 보냈지만, 그것들마저도 중간에 가로챘기 때문에 성안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의 출격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지휘관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지원이 불가능하다니!!”

“지난 일주일 동안 보급품이 오지 않아 변변한 식사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대로 전장에 뛰어드는 것은 무리라고…”

“뭣이!! 보급품이 끊겨?!!”


그때서야 자세한 소식을 들은 지휘관들은 모두 분통을 터뜨렸다.


“이놈들이 실력이 안 되니까 잔꾀를 썼구나! 하지만 지금의 군사로도 놈들을 상대하기엔 무리가 없다! 이 녀석들을 빨리 처리하고 다른 쪽을 지원하러 가야겠다!”

“기마대와 정규군이 전부 집결되었습니다! 지금까지와는 전투의 양상이 다를 것입니다!”

“잘했다! 자~! 감히 대공 전하를 거역하는 반역의 무리를 죽여라!”

“와아아아!”


두두두두두!

성난 외침과 함께 말을 탄 기사들이 뛰어들기 시작하자, 종횡무진 싸우던 용병들의 표정도 달라 질수밖에 없었다. 말에 탄 상대는 쓰러트리기도 힘들뿐더러, 요령 좋게 빠져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이이이잉!!”

“젠장! 기마대다!!”

“모두 피해! 있는 힘껏 달려!”


거친 말의 푸레질이 울리자 용병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몸을 주춤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열세였던 상황이 점점 더 최악으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헤롤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기사 둘을 단번에 도끼로 밀어내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시벨리우스에게 헉헉거리며 달려갔다.


“어이, 파란 대장! 어떡하지? 정규군들이 본격적으로 합세했어. 우리 쪽이 불리하다고!”

“흐음. 네가 지금까지 죽인 숫자는 몇 명?”

“40! 으하하하! 내가 휴센보다 2놈이나 더 많이 처리했…이게 아니잖아! 기마대가 왔다니까?”

“기마대는 상대하기 어렵나?”

“당연하지! 시야가 높아서 검이 안 먹히잖아! 그리고 말의 발차기에 맞는 것도 꽤 아프단 말이야!”

“으아악!”


그 순간 용병대의 누군가가 달려드는 말밑에 깔려 목숨을 잃는 것이 보였다. 헤롤은 그 장면을 가리키며 보란 듯이 소리쳤다.


“봤지! 저렇게 된다니까!”

“…저건 그냥 단순히 아프다고 할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어쩔 거야? 이대로 후퇴해?”

“안 돼. 적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는 버텨야 한다고. 아직 놈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그럼 어쩌라는 거야! 그냥 여기서 다 죽으라고?”


불만스럽게 쏘아붙이는 헤롤의 말에 시벨리우스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곧 한 발 전장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며 유유히 활보하고 있는 기마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말에서 떨어뜨리기만 하면 되는 건가?”

“뭐?”

“저 녀석들 말이야. 말에서 떨어뜨리기만 하면 되냐고. 그럼 상대할 수 있겠어?”

“글쎄, 갑옷이 좀 거치적거리긴 하지만, 해볼 만은 할 것 같아. 그런데 대체 무슨 수로?”

“훗, 그럼 됐어. 다 방법이 있지.”

“??”


영문을 몰라 하는 헤롤을 뒤로한 채, 시벨리우스는 엄지와 검지를 모아 입술에 가져갔다. 그러자 그의 입을 타고 소름끼치도록 높은 피리소리가 흘러나왔다.


“삐이이이이이----------익!!!”


갑작스럽게 전장 안을 떠도는 괴이한 소리에 대공의 군사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 귀를 쫑긋 세운 말들이 모두 하나같이 발작을 하며 이리저리 요동치기 시작했다. 


“히이이잉!!”

“으악! 뭐, 뭐야!!”


펄쩍펄쩍 날뛰기 시작한 말들은 모두 등에 태운 기사들을 떨어트릴 때까지 그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고삐를 놓친 기사 중 한 사람이 혼비백산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누군가가 말을 조정한다!! 모두 떨어지지 말고 버텨라!!”

“허어억!”

“으아악!”


그러나 아무리 승마기술이 뛰어난 자라도 펄쩍펄쩍 몸부림치는 말 위에서 오래 버티기는 힘들었다. 기사들을 떨어트린 말은 전투와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달아나거나, 거친 말발굽으로 군사들을 위협했다. 


“달아나는 말을 잡아!”

“떨어진 녀석들 모두 어서 일어나라! 꼴사납게 언제까지 뒹굴고 있을 거냐!”

“이야아아아!!!”


실전 전투에 강한 용병들은 이런 상황에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끼어들어 말에서 떨어진 기사들의 목숨을 취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기마대가 힘을 못 쓰게 되자, 전세는 다시금 용병대쪽으로 유력하게 돌아갔다.

이 모든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헤롤은 황당한 표정으로 시벨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한 거야?”

“보다시피. 기수들을 떨어트리라고 명령했을 뿐이야.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은 내 의지를 따르거든.”

“허허허…파란 대장이 엘프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군.”


엘프들이 동물과 교감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언뜻 기억한 헤롤은 방금의 경우도 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동물을 향해 명령을 내릴 수 있던 것은 시벨리우스가 유니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드래곤이 몬스터의 왕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유니콘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아예 녀석들을 이용해서 전장을 어지럽히는 건 어때?”

“웃기는 소리. 인간들의 전투에 왜 애꿎은 동물이 희생 돼야 하지? 쓸데없는 소리 말고 너도 얼른 나가서 싸워. 곧 날이 밝는다고.”

“쳇. 좋다 말았네.”


툴툴거리던 헤롤은 전투에 끼어들자마자 완전히 딴 사람처럼 변해 도끼를 휘둘렀다. 그밖에도 샴페인 용병단들이 있는 곳은 어디나 눈에 띄었다. 다른 용병들이 한사람을 상대할 동안, 그들은 몇 십의 인원을 베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귀신같이 빠른 움직임에는 같은 용병대 또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혀를 내둘렀다. 그들이 지나간 곳이면 어김없이 남아있는 무수한 시체들은 보는 사람들의 감각을 오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번엔 어쩌다 운 좋게 같은 편이 되었지만, 나중에라도 적으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자들이었다.

그러니 상대편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군사를 비롯하여 그들을 지휘하는 백작까지도 거의 살육을 방불케 하는 용병들의 모습을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샴페인 용병단 하나하나가 전부 괴물처럼 보이고 있었다.


“저놈들부터 막아! 전부 죽이란 말이다!! 숫자를 이용해서 포위시켜라!!! 창과 화살을 날려! 당장!!”


발작하듯 이어지는 명령에 기사들은 굳은 표정으로 용병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가장 만만한 사람은 역시 여자인 이릴과 쉐리였지만, 생각만큼 포위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이릴이 휘두르는 채찍맛을 본 군사들은 한시라도 도망칠 틈을 찾느라 정신없었다.


“어딜 그 못생긴 얼굴로 가까이 오는 거야!! 모두 지옥으로 떨어져 버렷! 내 분노의 채찍 맛을 보아랏!”

“난 아직 휴센과 이것도 저것도 이러저러한 것(?)도 못해봤다고!! 이대로 처녀귀신이 될 순 없어!!”

‘우리가 뭘 어쨌다고!’


그저 달아나고 싶었을 뿐인 기사들은 하나같이 허탈한 심정으로 소리쳤다. 앞으론 여자란 생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는 그들이었다.

그러나 모든 용병대들이 샴페인 용병들처럼 상황이 좋은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체력이 현저히 떨어져, 끝 모르고 달려드는 적들을 베는 것에 힘이 부치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시간이 됐군.’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 시벨리우스는 마침 하늘에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후퇴! 모두 후퇴하라!”

“!!”


명령을 들은 용병들은 전투에서 물러서서 그대로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그 움직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신속했다. 덕분에 한창 정신없이 싸우고 있던 대공의 기사들은 모두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멀건이 바라보았다.





“적들이 후퇴합니다!!”

“뭣이?! 쫓아라! 반드시 잡아야 한다!! 저들을 모두 몰살시켜 버려라!”

“와아아아아아!!”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던 용병들이 후퇴를 시작하자, 대공 쪽 지휘관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추격을 명령했다. 벌써 몇 시간째 계속 된 전투였기 때문에, 슬슬 힘이 빠진 것이라 생각 한 것이다. 


“놈들이 습지로 도망쳤습니다!”

“하하하! 신이 나를 도우시는구나! 놈들은 이곳의 지형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적들을 늪으로 몰아넣어라! 모두 산 매장을 시켜버리겠다!”


동문 근처의 습지엔 몇 천의 숫자도 한꺼번에 잠겨버릴 정도로 대규모의 늪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용병들이 일부러 그쪽으로 유인하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백작은 신이 나서 더더욱 추격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습지로 들어섰을 때, 백작은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바짝 뒤쫓던 용병들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온통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진 주변은 미세한 풀벌레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수군수군. 별안간 쥐죽은 듯한 침묵이 돌자 군사들의 얼굴에도 동요가 일어났다. 분명 쫓아온 것은 자신들인데 함정에 빠진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백작님, 더 이상 앞으로 나가면 위험합니다. 이 앞은 전부 늪입니다.”

“나도 알고 있다! 젠장! 방금 눈앞에 있던 놈들이 다들 어디로 갔단 말이냐! 이렇게 허망하게 놓쳐 버렸다는 건가!”

“어쩌면 함정일수도 있습니다. 놈들은 처음부터 우리를 이곳으로 몰아넣을 작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서 피하셔야…”


그때였다. 후방의 기사들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앞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혼란스럽게 변한 대열을 본 백작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다들 진정해라!! 대체 무슨 일이냐!”

“몬스터입니다! 몬스터가 때로 몰려왔습니다!!”

“뭐라고?!!”


경악한 얼굴로 소리치던 기사들은 어느새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서있는 수많은 오우거떼를 발견하고 얼굴을 굳혔다. 그 순간 그들의 주위로 무수한 불꽃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앙!! 


“으아아악!”

“마법이다!! 마법사가 있다!!”


죽음의 공포를 맛본 군사들은 명령도 무시하고 대열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몇 천이 되는 군사들이 앞으로 달리자, 맨 앞줄에 있던 기사들과 백작 또한 속절없이 밀려들어갔다.


“안 돼! 이 바보 같은 녀석들! 이 앞은!!!”


푸욱!

갑자기 발이 푹 꺼지는 듯한 느낌을 받은 백작은 부릅뜬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딱딱했던 땅이 어느새 물처럼 걸죽하게 변해 그의 발목을 삼키고 있었다. 

그때서야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서있는 땅이 늪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그러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그들의 몸은 점점 더 빨리 빨려 들어갔을 뿐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직 늪까지는 거리가!!”

“으아아악! 사람 살려!!”


개중엔 운 좋게 늪 안에 빠지지 않은 자들도 있었지만, 모두 안심할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뒤를 바짝 쫓아온 몬스터들이 살아남은 자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 몬스터들은 서로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하고많은 몬스터 중에서 왜 하필이면 오우거야! 이왕 환상마법을 걸 거면 좀 더 그럴듯한 걸로 할 순 없어?”

“맞아! 내 아름다운 미모를 보고 비명을 지르다니, 실례잖아!”


투덜거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샴페인 용병단의 이릴과 쉐리였다. 그 옆에서는 마찬가지로 몬스터로 둔갑한 용병대의 사람들이 헛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몬스터라고 생각했던 무리가 갑자기 용병들로 돌아오자 대공의 군사들은 죽어가는 와중에도 눈을 부릅뜨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용병들이 후퇴하는 순간, 시벨리우스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대단위의 환상마법을 사용하여 적의 군사들이 길을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들은 들어서는 순간까지 눈치를  채지 못하고, 늪을 피한다는 것이 오히려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용병들을 몬스터로 보이게끔 마법을 건 것은, 적들의 공포심을 조장해 몸을 더욱 움직이게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도망치려고 하면 할수록 더더욱 깊이 빠져버리는 늪의 특징을 이용한 거랄까.

뒤늦게 모든 사실을 눈치 챈 대공의 군사들은 이를 갈며 바둥거렸지만, 이미 늪에 빠져버린 몸은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일만의 군사들 중 살아서 도망친 자들은 겨우 이 백여명. 거의 몰살이라 가까운 전적을 내고도 아군의 피해는 부상자 다섯과 사망 8명에 그쳤을 뿐이었다. 

실로 유쾌하기까지 한 대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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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 8-19. 접전 (5)



같은 시각, 서문을 맡은 알리사의 군대역시 모든 일을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었다. 초반 소드 마스터인 카웰 후작의 활약으로 단번에 적의 숫자를 반 이상이나 줄인 그들은 적당한 시간이 되자 퇴로를 확보하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무작정 뒤쫓으려 했던 적의 지휘관은 그들이 후퇴하는 모습에 뭔가 불길함을 느끼고 군대의 진격을 멈췄다.


“뭔가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것 같다! 모두 전열을 가다듬어라! 진형을 다시 짠다!”


대장의 명령을 들은 군대는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고 처음의 진형을 되찾았다. 상대편의 적장이 생각보다 신중한 자세를 보이자, 알리사와 후작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어느 정도 이런 상황에 대해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형 따위야 무너뜨리면 그만이지! 땅의 멀든이여!”


쿠웅! 우드드드드!

그러자 알리사의 부름을 받은 땅의 중급 정령이, 대공의 군사들이 서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땅속에서 거대한 진흙거인이 나타나자 군사들은 또다시 자리를 잃고 우왕좌왕 흩어지기 시작했다.


“으아악! 괴, 괴물이다!!”

“사, 사람 살려!!”

“히이이익!!”


공포에 대한 파급 효과는 역시나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일반병사들부터 시작되었다. 개중에는 들고 있던 무기까지 던지고 달아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알리사나 후작이나 그러한 자들에게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적의 군대를 통솔하는 지휘관이었던 것이다. 그만 처리하면 나머지 군사들은 알아서 항복할 것이라는 것이 알리사의 생각이었다. 


“이대로라면 굳이 계곡까지 몰아갈 필요가 없겠어요. 뒤처리를 부탁합니다, 후작님. 지금부터 일시적인 지진을 일으킬 거예요. 그것이 멈추면 곧바로 돌격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알리사양! 부탁하겠습니다!”


처음의 우려와 달리, 알리사는 기대 이상으로 군대를 잘 이끌어주고 있었다.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의 강단이 있었고, 돌발적인 상황에서의 대처능력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다. 후작은 내심 감탄하며 지진을 일으키기 위해 선두로 나서는 알리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확한 출신지와 신분은 알지 못했지만, 말투나 행동은 어릴 때부터 제대로 교육을 받고 자란 귀족영애에 뒤지지 않았다. 웬만큼 신분이 받쳐준다면 이번 전쟁에서 세운 공로로 인정받을 수 있을 테니, 훗날 이사나와의 혼인을 추진해도 괜찮지 않을까 혼자 남몰래 생각하는 그였다.

그런 후작의 꿍꿍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알리사는 멀든에게 주변의 지형에 균열을 일으키도록 부탁했다. 


“자아~ 멀든, 부탁해!! 적들에게 지하세계가 어떤지 구경시켜 주자고!”


쿠웅! 우르르릉! 콰지지지직!!!


“으, 으아아악!”

“지, 지진이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흐트러졌던 대공의 군사들은 혼비백산한 얼굴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곧 이어 흙바닥이 갈라지고 그 아래에 흐르던 수맥이 공중으로 치솟아 올라 여기저기 튀었다.

쿠웅! 푸우욱! 콰아아앙!

운 좋게 도망친 사람들을 뺀 대부분의 군인들은 모두 갈라진 흙속에 묻혀 꼼짝도 할 수 없는 처지로 변했다. 그 중에서는 깊게 뚫린 구덩이 안에 빠져 그대로 생매장 된 사람들도 있었다. 

쿠웅! 콰아아앙~!

땅이 흔들린 여파로 주변에 있던 나무 중 몇 그루가 균형을 잃고 쓰러져 기사들을 덮쳤다. 곧 사방에서는 끔찍할 정도로 괴로운 비명소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크아악! 사, 살려줘!!”

“아악! 다리! 내 다리가!!!”

“아아아악!”


땅 속에 파묻힌 사람들이 두 손을 뻗으며 기어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모습들은 마치 지옥의 한 장면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자신들을 향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죽음의 사신들과 조우해야만 했다. 바로 카웰 후작과 군사들이 그들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와아아아!!!”


두두두두두두!!!

지진이 막 끝난 직후였기 때문에, 제대로 정신을 가누고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넋 놓고 있던 기사들은 후작이 휘두르는 창과 검에 속수무책으로 꿰뚫려 목숨을 잃었다. 

곧 주위는 끔찍한 피바다로 물들어 갔다. 거의 일방적이라고 할 정도로 살육하는 군사들에게 후작은 큰 소리로 외쳤다.


“도망치는 놈들은 오합지졸이니 쫓을 필요 없다! 대항하는 놈들만 베어라!!”

“와아아아아!”


우렁차게 외치는 소리는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의 승전보인 셈이었다. 군대를 통솔하던 적의 지휘관은 일찌감치 죽어 시체가 되어 있었고 대다수의 병사는 죽거나 도망쳤다. 어느새 환하게 밝아진 주변으로 승리를 알리는 축포가 터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겼다!’


감격한 군사들은 무기를 하늘 위로 치켜들며 환호했다.


“이사나 황제폐하 만세!”

“카월 후작님 만세!!!”

“승리의 여신 알리사양 만세!!”

“만세!!”

“에엥? 나도?”


과한 힘의 소력으로 탈진해 있던 알리사는 기사들이 자신을 향해 ‘승리의 여신’이라 부르며 만세를 외치자 놀란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옆에서 그 모습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있는 후작의 시선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




“아, 그렇구나. 알리사와 시벨리우스님 모두 성공했다는 거지?”


자정을 조금 넘어서 시작된 전투는 다음날 정오 무렵이 되어서야 이사나의 승리 쪽으로 거의 마무리 지어졌다. 

치열한 접전 끝에 간신히 상대편 진형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한 이사나는 그 후로 속속들이 전달되는 아군의 승보에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계획한 작전이 모두 멋지게 성공한 것이다! 보고하던 기사역시 뿌듯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네, 그렇습니다, 폐하. 사상 다시없을 대승이었습니다. 적들의 수장은 모두 죽었고, 병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고 합니다!”

“북문의 라온 황자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었나?”

“방금 전 친위대의 알렉경으로부터 전서구가 날아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승전보입니다만,  이쪽은 아군의 피해가…”

“그쯤은 예상하던 일이었다. 오히려 피해가 그쯤이니 다행이야. 평원에 대기하고 있던 군사들은 어찌 되었는가?”

“보급품이 끊긴 탓에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대열에서 이탈해 도망친 자들도 많습니다. 방금 전 항복을 촉구하는 파발을 보냈으니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좋다. 부상자들을 옮겨 치료하게 하고, 군사들을 쉬게 해라.”

“알겠습니다! 폐하!”


보고를 마친 기사가 물러나자 기사들은 마음껏 환호성을 질렀다. 새벽 내내 전투를 벌이느라 지쳤던 기색은 어느새 완연히 사라진 모습이었다.


“폐하! 해내셨습니다! 우리가 승리했군요!!”

“황제폐하 만세! 오늘 일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겁니다! 이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선황폐하께서 돌보고 계신 겁니다! 얼마나…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는지!”


눈물을 글썽이는 기사들의 모습에 이사나 또한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들 모두 함께 해왔던 시간만큼이나 모진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던 자들이었다. 황성에서 쫓겨나던 일이 아직도 엊그제일 같이 선명한데, 어느새 한 발짝 귀환 길에 다가섰으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잠시 기사들의 어깨를 두드려준 이사나는 곧 단호하게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아직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야. 대공은 여전히 황성에서 건재한 상태고, 또 다른 군사들이 이쪽을 향해 내려오고 있다. 마음을 더욱 단단히 다져야 할 거야.”

“물론입니다, 폐하! 어디까지든 함께 하겠으니, 부디 이끌어만 주십시오!”

“폐하와 함께라면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친위대들은 다시 한 번 호기롭게 대답하며 이사나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의 모습을 자랑스럽다는 듯이 둘러보던 이사나는 곧 한쪽에서 말없이 서있던 리글레오를 발견하곤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전투 초반, 그는 궁병들을 앞세워 원거리로 적들을 공격하게 한 후, 진형이 무너진 틈을 타 기마병을 도입시키는 작전을 제안했다. 

북소리로 전투의 분위기를 띄워 아군의 사기를 고조시킨 것도, 페리스가 가진 정령사의 능력을 이용해 궁병이 날린 화살의 방향을 정한 것도 그였고, 적장이 죽은 것을 확인하자 곧바로 군대를 퇴각시켜 필요 없는 희생을 줄이게 만든 것도 리오의 역할이었다.

단순하지만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여러 부분의 보완점을 발견해 낸 탓에, 그들은 전투를 훨씬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었다. 새삼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 이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대도 수고 많았다. 오늘 전투는 그대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아, 아닙니다, 폐하…저는 별로 한 일이…”

“아니다. 아군이 가진 능력을 이용한 가장 효과적인 전술을 알려주지 않았는가. 덕분에 피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 자유를 달라고 한다고 해도 기꺼이 줄 테니.”

“!!”


예상치 못한 황제의 제안에 놀라기는 주변에 있던 다른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휘둥그레진 시선들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리오는 망설이는 표정으로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있었지만, 과연 지금이 나서서 밝혀야 할 때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회가 또 있을 거란 보장이 없었기에 그는 곧 이사나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제가 원하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폐하를 보필하는 것입니다! 부디 옆에 있게 해주십시오!”

“…!…”


웅성웅성

당연히 놓아달라고 말할 거라 생각했던 그가 황제의 수하를 자청하고 나서자 기사들의 표정은 다시금 의심스러운 빛을 띄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사나만큼은 차분한 얼굴로 그의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옆에 있게 해 달라?”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방금 드린 말씀엔 어떠한 사심도 담겨있지 않습니다! 원하신다면 제 이름도, 아니, 가문까지 모두 버리고 폐하를 따르겠습니다! 새 이름을 주신다면 그리 하겠습니다! 제발 제가 폐하를 보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상한 일이군. 왜지? 이번 전투에서 이겼다고 해서 내가 당장 황권을 회복한다는 보장은 없다. 네게 부귀와 영화를 약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걸 바라고 청하는 일이 아닙니다! 저도 설명할 길이 없는 마음입니다만, 저는 단지 폐하라면…제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외의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나를 따른 다는 것은 곧 그대의 부모를 거역하는 일이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건가?”


재차 확인하는 말에도 리오의 결심은 확고했다.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던 이사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전에도 그렇고, 앞으로도…나를 따르겠다는 자를 내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의 뜻대로 하도록 해라. 할버크 영주에 대한 일은 그대에게 맡기겠다.”

“…!!…가, 감사합니다, 폐하! 감사합니다!!”


황제가 자신을 받아주는 걸로도 모자라, 그의 가족까지 처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이자 리오는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옆에 있던 친위대와 군대의 통솔을 맡은 지휘관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성문을 열어라! 이 제국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겠다!”

“와아아아아아!”


군사들이 환호하자 지금까지 굳게 닫혀있던 할버크 영지의 성문이 거친 소음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미리 성안으로 침투했던 이사나의 군사들이 적의 총지휘관을 비롯한 할버크 영주와 그의 식솔들을 결박해 무릎 꿇려 놓은 상태였다. 

영주와 대공의 군대가 패전했다는 소식은 이미 전 영지에 퍼져 거리마다 구경나온 사람들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황제의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모두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었다.

무척이나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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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 8-20. 결전의 날! (1)


“세르피스가 죽었다고? 그게 사실이냐?”


벌써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암흑의 마녀 세르피스가 결국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쟌은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부릅떴다. 

자세한 내용에 따르면 마지막으로 그녀의 흔적이 남겨진 중간계의 어느 숲 안에서 불에 거슬린 자국을 발견했으며, 그 주위로 세르피스의 마력을 담은 피가 흩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알기 위해 땅이 기억하고 있던 영상을 이미지화 시키려 했으나, 방해하는 기운 때문에 그다지 건져낸 것은 없었다. 다만 마지막에 처절하게 울리는 세르피스의 목소리를 듣고, 상대의 실력이 그녀보다 월등히 강했다는 것을 짐작했을 뿐이었다.


“마계 공작보다 강한 존재라…끄응. 도대체 누구라는 거지? 전혀 감이 잡히질 않는군.”


4명이었던 공작은 어느새 줄고 줄어 그 하나만이 남아있었다. 데르온의 행방이 묘연해지고, 루카르엠이 봉인 당했다는 소문을 접한 지 얼마 안 되어 벌어진 일이라 쟌의 마음은 더욱 착잡하기만 했다. 


“마왕전하도 이 사실을 아시나?”

“아직…”

“흐음. 알았다. 너는 지금 알고 있는 사실을 함구하거라. 마왕전하께는 내가 직접 보고하러 가겠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그는 마왕이 거주한 성의 최상부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마왕은 유난히 바깥외출이 뜸했고, 평소 가까이 하던 수하들도 물리고 있었다. 

그나마 세르피스만은 중간계의 연락책을 맡아 자주 들리는 모양이었지만, 그나마도 이번에 죽었으니 이제 당분간은 누구도 마왕의 옆엔 얼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대체 마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루카르엠이 명령을 어긴 건 사실이지만, 봉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안 그래도 루카를 추종하고 있던 쟌은 그때의 일만 생각하면 가슴속에 불길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이왕 가는 거, 이번에야 말로 확실하게 따지고 볼 참이었다.

용감하게 걷던 그가 마침내 문 앞에 다다랐을 땐, 마침 그보다 먼저 방문한 손님이 용건을 마치고 안에서 나오고 있는 상태였다. 
세르피스의 행방이 묘연해지면서부터 그녀를 대신하여 중간계의 연락책을 맡은 자였던가? 그는 쟌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마계 공작께 인사 올립니다.”

“왕께서는 안에 계신가?”

“예, 그렇습니다. 들어가 보소서.”

“흠. 알았다. 참, 요즘 중간계는 어떻지? 마왕의 계약자에게 이상한 점은 없었나?”

“글쎄요…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그가 주는 물건을 왕께 전해드리는 것 뿐이라서요.”

“물건?”

“작은 술병입니다. 이전에도 계속 드렸던 것이라 하더군요. 저어 그런데…”

“…?…”


쟌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자 말을 잇던 마족은 망설이듯 입을 우물거렸다. 잠시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그는 쟌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래도…그 안에 담긴 것이 피 같아서 말입니다.”

“피?”

“예, 그것도 어린 인간의…. 그저 붉은 것이라 제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


어린 인간의 피라니!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불길한 생각에 쟌은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런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 마족은 또 다른 충격적인 소식을 그에게 알렸다.


“아참, 그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봉인되었던 루카르엠님이 감쪽같이 사라지셨다는 군요. 지금 마족들이 그분의 행방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뭐라고?”

“방금 이 사실을 왕께 알려드렸습니다만, 어찌된 일이신지 이미 짐작하고 계셨다는 듯이…”


콰앙!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쟌은 급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문이 부서져라 열어젖혔다. 그의 과격한 반응에 놀란 마족은 황망이 자리를 벗어났고, 남은 것은 문 안에서 막 붉은 잔을 기울고 있던 마왕과 그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법 요란한 소리가 울렸음에도 마왕은 전혀 관심 없다는 듯 잔에 담긴 술에만 신경을 쓰고 있을 뿐이었다. 쟌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거친 걸음으로 그 앞에 다가섰다.


“루카르엠이 사라졌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흐음. 그렇다고 들었다. 정말 앙큼한 작자지 않은가?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 후후후”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니? 아니, 그건 그렇다 치지요! 방금 왕께서 어린 인간의 피를 유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찌 된 것인지 해명을 부탁합니다.”

“해명이라…”


말끝을 흐린 마왕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다시금 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런데 잔에 담긴 술의 색깔이 묘하게 이상했다. 한참 동안 빤히 바라보던 쟌은 곧 창백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설마…지금 당신이 마시고 있는 게…”

“후화하하! 멋지지 않은가? 어린 인간의 피는 이 세상 어느 술보다 달콤한 맛을 선사하지!”

“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겁니까!!!”


인간의 피를 마시는 행위는 금기다! 그것은 마신과 전 차원을 지배하는 주신이 직접 규제해둔 항목이었다. 경악하는 쟌에게 마왕은 뭐가 어떻냐는 듯 태평하게 웃어보였다.


“이제 전 차원이 내 손에 들어올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몸이 주신과 동급이 되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지! 크하하!”

“미친! 악신이 될 생각인가!! 제정신이 아니군!!”

“하하하하! 마음대로 욕 하거라! 결국 너 역시도 내 발밑에 무릎 꿇을 테니 말이다. 네놈이 그렇게 섬겨마지 않는 루카 놈도 마찬가지지. 아니, 마신 카노스라고 해야 하나?”

“무슨?”

“몰랐나보군. 녀석은 마신이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가장한 인물이었다. 설마 단순한 공작 따위가 마왕의 권위로 내세운 봉인을 뚫고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 한건 아닐 테지? 크하하. 하지만 이번만큼은 놈도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니니까.”

“!!”


온 몸이 감전되는 듯한 충격이 쟌을 휩쓸고 지나갔다. 루카가 신의 사자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마신 본인일거라고는 전혀 짐작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마신을 배알했었다니!!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그는 두 눈에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태평하게 감동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쟌은 얼른 경계의 태세를 취하며 마왕을 향해 공격 자세를 취했다. 몰랐다면 모르되, 이미 그의 계획을 알아버린 이상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막을 생각이었다. 야심이 강한 존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악신이 될 생각을 품고 있었을 줄이야! 

그러자 그의 모습을 본 마왕은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호오. 설마 대적할 생각인가, 이 나에게? 내 부하로 남는다면 너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부귀와 권력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흥! 네놈 밑에서 비굴하게 살 생각은 없다! 지금 네놈이 하는 짓은 우리를 창조한 마신을 거역하는 일이 아니냐!”

“후후. 그랬지. 쟌 너는 다른 놈들에 비해 유달리 마신을 추종하는 녀석이었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군. 결국 아깝지만 없애는 수밖에 없다는 소리인가.”

“헛소리!”


자신만만한 마왕의 말에 쟌은 이를 갈며 일갈했다. 비록 마왕과 마계공작의 차이였지만, 실제적인 능력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기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면 틀림없이 빈틈을 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 생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깨달은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쉬이이익! 콰아아아앙!!


“커어억!!”


마왕에게 검을 들고 달려들던 쟌은 갑자기 몰아닥친 엄청난 압력에 밀려 날아가 그대로 뒤편에 있던 벽에 처박혔다. 우수수 떨어지는 돌가루와 함께 바닥으로 주욱 미끌어진 그의 얼굴에선 어느새 붉은 피가 주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쟌은 온 몸이 뒤틀리는 것 같은 고통을 받는 중에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앞에서는 처음 앉아있던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마왕이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띄운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쿠, 쿨럭! 이…이게 어떻게 된…”

“하하하! 이미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했을 텐데? 가엽구나, 쟌! 마계공작인 네가 손 쓸 틈도 없이 그런 꼴이 되다니!”

“큭- 이미 각성의 순간에 거의 도달한 상태라는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크하하하하! 말 그대로다, 쟌이여! 나는 이제 정확히 20명만 채우면 온전한 악신으로 각성할 것이다!”

“!!!”


20명이라니! 각성의 때까지는 그야말로 시간문제인 셈이 아닌가! 경악한 쟌은 저절로 흘러나온 신음을 억지로 밀어 넣으며 바득 이를 갈았다.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스스로가 한심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막아야 한다!! 내 온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마음속으로 소리친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쟌의 한 손에는 그가 방금 끌어올린 마력덩어리가 생성되고 있었다. 곧 검 보랏빛의 거대한 기운이 쟌의 온 몸을 타고 돌았다. 


“크크크큭! 쓸데없는 반항!”


그러나 자신을 향해 사납게 몰아치는 기운을 보면서도 마왕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공중으로 치솟아 오른 쟌은 손에 모아둔 마력의 폭탄을 남김없이 퍼부었다. 

콰앙! 콰아아앙~ 콰지지지직!!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마왕이 있던 자리는 순식간에 검은 연기로 둘러싸였다. 그 순간을 틈타 쟌은 그가 알고 있던 가장 최고위 흑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적에게 가장 끔찍한 고통을 내릴지라!! 아르티스파게!!”


슈우우우욱! 콰아아아앙!

그가 발현한 마법은 연기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마왕의 형체를 향해 정확하게 쏘아져 들어갔다. 그것은 보통 마족은 물론, 마계의 공작이라도 정면으로 받는다면 치명상을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곧 마왕성 전체가 뒤흔들릴 정도의 엄청난 진동이 일어나며 사방의 공기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콰아아앙! 


“헉! 허어억! 허억!”


몇 번의 공격에도 마왕으로부터 이렇다 할 대응이 없자, 쟌은 그가 죽었거나 큰 부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갑작스런 마력의 소모 탓에 거친 숨을 삼키던 그는 긴장하며 아직도 연기가 완전히 걷히지 않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에 있는 거지? 어디에!!’


죽었든 살았든 반드시 있어야 할 마왕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자, 당황한 쟌은 방금 전 마왕이 서있던 곳에 가보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러자 그 순간 뒤에서 턱-하고 거친 손이 그의 목을 움켜잡더니 강한 힘으로 천천히 그의 몸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컥! 커어억!!”


숨이 막혀 버둥거리는 중에도 쟌은 이어지는 목소리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둔 눈을 부릅떴다. 한손으로 자신의 목을 잡고 있는 자는 여전히 여유 만만한 웃음을 띄운 마왕이었던 것이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큭큭큭. 쓸데없는 반항이라고 말했을 텐데? 지금의 나는 신이라 해도 두렵지 않은 몸! 한낮 마계의 공작 따위가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네 어리석음이 스스로의 명을 단축했구나. 크크크…장난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잘 가거라.”

“크억!”


우두두둑!

귓가에 선명하게 울리는 소리가 쟌이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고통으로 부릅떠진 눈은 미처 감기지도 못하고 그대로 초점을 잃었다.

쿠웅! 마왕은 순식간에 싸늘한 시체로 변해버린 쟌의 몸을 볼품없이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각성의 시기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그는 온 몸에 폭발적으로 끓어오르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크…크큭…크하하하하하하!!!”


이렇게 통쾌할 수가 있을까! 이제 온 세상의 것들이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신계의 무수한 신들과 주신마저도 자신을 어찌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짜릿한 기분이었다. 

그 순간, 아무도 없던 벽 쪽에 커다란 검은 구멍이 생겨나더니, 그 속에서 하얀 법의를 입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놀랍게도 그는 이사나의 숙부이자 마왕의 계약자이기도 한 유카르테 대공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웃고 있는 마왕과 한쪽에 처박힌 쟌의 시체를 보더니 한심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주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군요.”

“크흐흐. 여기엔 무슨 일이냐? 네놈이 게이트를 통과해서 직접 방문한 것도 꽤나 오랜만이구나.”

“그동안 여러 가지 일로 바빴으니까요. 보아하니 이미 신계엔 당신에 대한 소문이 전부 퍼진 모양이군요.”

“흥. 그래봤자 놈들에게 마땅한 대책 안이 있을 리 없지. 이미 나는 악신이나 마찬가지다. 감히 누가 나를 건드리겠느냐!”

“그래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아직 완전히 각성하신 게 아니잖습니까. 혹시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방법을 찾아낼지도…”

“시끄럽다! 네놈이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냐!”


콰아앙! 엄청난 전류가 흘러나와 바로 발치에 떨어졌지만, 유카르테 대공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그가 자신을 죽일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씩씩거리는 마왕의 모습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 실수였습니다. 노여움을 푸시지요. 오랜 시간을 공들여 온 일이 드디어 막바지에 이른다고 생각하니 조금 긴장했던 모양입니다.”

“흥! 입에 발린 거짓말은 집어 치워라! 네놈이 언제부터 긴장 따윌 했다는 거냐! 자아~ 그래, 나를 찾아온 용건이 따로 있을 테지? 그게 무어냐?”

“후후후, 별거 아닙니다. 그저 마족들을 빌려주십사 해서 말이지요.”

“마족들을? 흐응, 요즘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하더니, 뭔가 불리한 상태인 모양이지?”

“아무래도 이사나, 그 아이가 꽤 운이 좋은 편인 모양입니다. 제법 쓸 만한 동료들을 많이 끌어 모았더군요. 마왕께서도 제가 중간에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클클클, 그거야 그렇지. 네 협조가 없었더라면 이렇게 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들었을 것이다. 명계에 술수를 부려 물의 정령왕의 탄생을 늦춘 것도 다 네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 아니냐.”


뒤늦게 밝혀진 진실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자리엔 그 사실을 듣고 놀랄 만한 사람들이 없었다. 대공은 무척이나 송구스럽다는 듯 겸손하게 고개를 조아려 보였다.


“그저 제가 살고 있는 차원의 특성을 잘 살렸을 뿐입니다. 그것으로 마왕전하의 계획에 도움이 되었다니, 오히려 제가 영광이지요.”

“크하하하! 역시 넌 마음에 드는 인간이다! 좋다, 지금 당장 10만 군대를 보내주지! 너의 제국은 물론, 아크아돈의 모든 대륙이 네 발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이다!”

“황공합니다.”


예상 밖의 이사나의 선전으로 대공 쪽의 피해가 컸지만, 그는 이것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다. 흐뭇하게 미소 지은 그는 문득 쟌의 시체에 시선을 미치곤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런데 세르피스 양은 어찌된 겁니까? 아직도 행방을 찾지 못하셨습니까?”

“보나마나 어디선가 딴 짓을 하고 있겠지. 왜? 그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느냐?”

“으음, 실은… 그녀가 뭔가를 숨기고 있었던 것 같아서 말입니다.”

“숨기다니?”

“제 조카인 이사나 말입니다. 아무래도 황성을 떠난 뒤로 뭔가 변한 것 같긴 한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군요. 세르피스 양이라면 그를 감시하기도 했으니 좀 더 정확한 걸 알고 있을 것 같아서…”

“큭큭. 변해 봤자 그런 꼬마 하나가 뭘 어찌 할 수 있단 말이냐. 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그거야 마왕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만.”


동조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대공은 어쩐지 찝찝한 느낌을 감추지 못했다.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랄까?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마왕에게 대적할 존재는 아무도 없을 테니.’


승리의 기쁨에 취할 날도 멀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곧 10만의 마족들이 몰려들면, 이사나와 그를 동조하는 무리들은 모두 시체가 되어 성벽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아니, 갈갈이 찢겨 그 육체의 조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리라. 

대공은 차갑게 미소 지으며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만으로 온 몸이 짜릿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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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 8-21. 결전의 날! (2)


“이사나가 이겼다고?”


간만에 들려온 반가운 소식에 나를 포함한 일행들은 모두 환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소식을 전한 라피스 또한 뿌듯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래, 생각보다 적들이 더 방심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포로로 잡힌 군사는 정규기사들만 제외하고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하더군. 현재 가지고 있는 전력에다 오고 있는 군대까지 합치면, 지금 그쪽으로 향하고 있는 대공의 나머지 군사까지 전부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더라.”

“와아! 제법인데! 이거 이러다 너무 쉽게 끝나는 거 아니야?”

“그렇진 않을 거다, 아들아. 마음을 놓긴 아직 일러.”

“그게 무슨 소리야, 엘뤼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는 내 말에 옆에 있던 트로웰이 냉큼 끼어들어 대답했다. 


“마왕 쪽이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거야. 아마 마족의 군대가 총 출동할걸?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상대니까 오히려 불리해 질지도 몰라.”

“헉…그렇구나. 마족이 있었지. 총 출동한다면 어느 정도나 오게 된다는 걸까?”

“정식 전사들만 몰린다 해도 10만은 될 겁니다, 엘님. 게다가 지금까지 주군을 귀찮게 했던 녀석들과는 힘의 차원이 다른 놈들뿐이죠.”

“하아, 10만이라…어째 상상하기가 힘든걸.”

“저기, 엘퀴네스. 별로 어렵게 생각할 건 없을 것 같습니다만.”

“응?”


영문을 몰라 되묻는 나에게 미네는 조용히 한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켜 보였다. 그리하여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어 위를 본 나는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에 그대로 경악하고 말았으니…!!


“뭐, 뭐야 저건?”


당연히 푸를 것이라 생각했던 하늘은 온통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새까만 그림자들로 점령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것들은 마치 새떼처럼 무수하게 들끓으며 쐐애액- 공중에서 요란한 바람소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환했던 주변은 그들이 해를 가려버린 덕분에 순식간에 침침한 그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공중을 휘감는 검은 덩어리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그것이 사람의 형체와 흡사하다는 것을 깨닫고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내 불안감에 일침을 놓으려는 듯, 마찬가지로 딱딱하게 굳은 아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족이다. 그것도 전사들이야.”

“!!”


새삼 놀라는 게 우스울 정도로, 하늘을 시꺼멓게 수놓고 있는 덩어리들의 정체는 온 몸을 갑주로 무장한 사람들이었다. 바로 마왕이 보낸 마족의 군대인 것이다! 

말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튀어나오다니! 평소였다면 그저 양반은 아니라며 혀를 찰 일이었지만, 사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하나하나의 기운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데다, 그들 모두 살기를 숨기고 있지 않은 탓에 바라만 보고 있어도 저절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꺄아아악! 저, 저게 뭐야!!”

“오, 세상에, 신이시여…”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멍한 얼굴로 할 말을 잃거나 반대로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족들은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다는 듯 오로지 한 곳만을 향해 계속해서 날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가는 방향이 이사나들이 있는 할버크쪽 이라는 것을 알아본 나는 기겁한 얼굴로 소리쳤다.


“어, 어떡하지? 이사나가 위험해!”

“흐음. 확실히 저 정도의 숫자라면 인간의 군대 몇 만 정도로는 뼈도 못 추리겠군.”

“지금이 그렇게 태평하게 중얼거릴 때야! 도착하기 전에 막아야지!”

“귀찮은데.”

“뭣이라!!”

“아아, 알았어, 알았다고. 짜식 성질부리기는.”


못 말리겠다는 듯 한손을 휘저은 라피스는 일행들의 얼굴을 한 번씩 둘러보며 물었다.


“그럼 지금부터 역할을 나눌까? 나랑 몇 명이 마족들을 막는 동안 나머지는 처음 계획했던 양동작전을 펼치도록 하지. 아무리 나라도 혼자서 다 막기는 무리라고.”

“나도 할래, 은인! 나랑 부하 끼워줘.”

“에? 아스 무슨 소리야.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아직 완전한 성인이 되지 않은 아스가 마족들 사이에서 정체를 드러내는 건 굉장한 위험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그의 힘이 강해도 몇 만이나 되는 마족을 전부 굴복 시킬 수는 없을 것 아닌가! 그러나 아스도 데르온도 문제없다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괜찮아, 대부. 난 왕이야. 저들에게 내 존재를 각인시킬 필요가 있어.”

“그렇습니다, 엘님. 오히려 이것을 기회삼아 주군이 더욱 높은 입지를 굳힐 수 있을 겁니다. 마계 공작도 한순간에 제압하신 분이니, 저런 하등한 전사들 쯤이야 상대가 될 리 없지요.”

“하지만…”

“괜찮다니까. 아직 완전한 성년은 아니라서 좀 만만히 보이기야 하겠지만, 마신께 부여받은 선천적인 힘은 나를 따를 수 없어. 이렇게 미적거리는 사이에 이사나가 더 위험해질걸?”


진지한 표정으로 타이르듯 설명하는 아스는 나보다 훨씬 더 큰 어른인 것 같았다.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해 머리를 갸웃거리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자라버리다니. 내심 섭섭한 기분이 들어 나는 기운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아. 나도 이젠 모르겠다. 아스가 그렇다니까 믿을게. 단, 너무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마.”

“알아. 아스는 대부를 곤란하게 하는 일은 절대 안 할 거야.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할게.”

“그래, 그래. 착한 녀석. 그럼 마족은 세 사람이 맡는 거야? 나도 할까?”

“아니오. 제가 하겠습니다. 엘은 인간 쪽 군대를 맡아주십시오.”

“미네가?”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미네가 갑자기 참가의사를 보이자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실력이 못미더워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겉보기에-어엿한 아가씨로 보이는 그에게 이런 일을 맡겨도 되는가 싶어서였다. 그러자 미네는 특유의 회색빛 눈동자를 깜빡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하늘은 바람의 영역이니까요. 엘퀴네스보다 제가 움직이는 편이 더 확실할 겁니다. 이렇게 짜릿한 전투에는 한번쯤 끼어보고 싶었거든요. 역시 엘의 유희는 재밌군요.”

“…그, 그래? 하하하…그렇다면 다행이고. 으음, 그럼 트로웰과 엘뤼엔은?”

“우리는 여기서 엘을 도와야지. 맡겨만 둬, 멋지게 싸워줄게~”

“누가 우리야 누가!!”


엘뤼엔은 버럭 소리 지르면서도 끝끝내 ‘싫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트로웰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잠시 노려보던 그는 곧 나에게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그냥 멀찍이 물러서있어라. 나랑 이 녀석이 알아서 할 테니까.”

“에? 그런 게 어딨어. 다른 사람들 다 고생하는데 나 혼자 구경하고 있으라고?”

“정 찜찜하면 지금부터 인간들이 피신하는 거나 도와주던지. 아무튼 넌 전투와는 무관한 상태로 있어라. 저 녀석들이 다치면 가끔 가서 치료나 해주고.”

“싫어! 불공평해.”

“내 말 들어. 넌 아직 정령왕으로서 자각이 덜 된 상태야. 죽이는걸 보는 것과 직접 죽이는 건 엄연히 다르다. 설마 몬스터 몇 마리 죽여 본 걸로 괜찮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네가 인간과 몬스터의 차이점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면, 그땐 나서도 아무 말 하지 않으마.”

“…윽…”


구구절절 옳은 말 이었기에 나는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하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런 내게 트로웰은 상냥한 얼굴로 한마디 덧붙였다.


“엘뤼엔의 과보호야…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그의 의견에 찬성이야, 엘. 지금의 너는 정령과 인간의 정신체가 뒤섞인 아주 불안정한 상태야. 실제론 사람을 죽이게 되도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할지 몰라. 하지만 그 자체로 이미 엘한테는 충격이 되지 않을까?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는 자신의 모습에 적응할 수 있겠어?”

“…무슨 소린지 알 것 같아.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할 일을 모두에게 떠넘길 수는…”

“떠넘길 수 있는 존재가 있으니까 이런 말도 가능한 거야. 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누가 말리려고 하겠어? 어차피 우리가 영원히 간섭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이러는 것도 이때 뿐 일거야. 그러니 일단 지금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아.”

“응. 알았어, 트로웰. 충고대로 할게.”


걱정해주는 사람들에게 무작정 내 뜻만 우기고 들 수는 없어서 나는 결국 찜찜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라피스는 가차 없이 중얼거렸다.


“팔불출들 같으니…완전히 애 취급이구만. 그냥 정령계에 가둬두고 꼼짝도 하지 못하게 할 것이지, 유희는 어떻게 허락했는지 몰라?”

“시끄러, 라피스. 엘은 말 그대로 특이케이스라 사소한 것에서 어떤 결과를 이끌어 낼지 모른다고. 정체성을 완전히 자각하기 전까지 미리미리 주의를 기울어 두는 것뿐이야.”

“흐음. 난 한번쯤 녀석이 폭주하는 모습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포, 폭주?”


그건 내가 미쳐 날뛰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소리?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트로웰은 얼른 라피스에게 꿀밤을 먹였다. 

따악-


“윽! 무슨 짓이얏!”

“시끄럽다고 했지. 우리 중에서 가장 제멋대로인 녀석은 너야. 엘은 네 장난감이 아니라고. 지금과 같은 흥미위주의 말은 삼가해.”

“쳇. 농담이란 것도 몰라? 아무튼 되게 딱딱한 정령왕 같으니.”

“덩치만 컸지 머리는 아직도 어린애구나. 드래곤 종족의 미래가 심히 어둡다.”

“뭐야?”

“따지고 들 시간 있으면 어서 저놈들이나 막아. 괜히 방심하다가 큰 코 다치지 말고.”


키가 커져서인지 이전처럼 어른스럽게 훈계를 건네는 트로웰의 모습은 그다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연신 투덜거리는 라피스를 억지로 떠밀어 밀곤 멍하니 구경하고 있던 다른 일행들에게도 재촉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뭐해, 다들? 지금 막지 않으면 금방 놓쳐 버릴 거야. 자아, 엘뤼엔. 우리도 그만 가자. 엘! 나머지 일을 부탁할게. 전투가 시작되면 이번 일의 주모자가 등장할거야. 대공의 움직임을 주시해줘.”

“응, 알았어.”


떨떠름하다는 표정과 달리 막상 흩어지기 시작한 일행들은 모두 행동이 재빨랐다. 

콰아아아앙!

라피스들이 성큼 하늘로 날아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곧 엄청난 광음과 함께 새빨간 불덩어리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몇 만의 전사를 상대로 한, 단 네 사람의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꺄아아악!”


폭음이 울리고 불꽃이 튀자 그때까지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기겁을 하며 도망치는 것이 보였다.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유일하게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었다. 

그런데…뭔가를 잊은 것 같다고 생각이 드는 건 내 착각일까?


“아참! 우리랑 합류하기로 한 군대가 있었지!!”


그때서야 수도에서 만나기로 한 후발대를 떠올린 나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기껏 짜놓은 계획이 예상치 못한 인원들로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나중에 이사나와 후작의 얼굴을 볼 면목이 서질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후발대와 합류한 뒤에 치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들었지 않았던가.


“에휴. 이미 늦은 거 어쩔 수 없지. 일단은 그쪽에 가볼까.”


지금쯤이면 후발대들도 하늘을 새까맣게 뒤엎은 마족의 전사들을 발견했을 것이다. 상황이 급하다는 사실을 알면 어느 정도 이해해 줄 것이라 생각하며 나는 얼른 처음 합류하기로 정해두었던 장소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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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여기까지; (나머지는 더 써야 합니다.ㅠㅠ)

아하하하. 다들 오랜만에 뵙습니다;; 늦게 온 주제에 이렇게 허접한 글을 들고와서 정말 죄송해요;; 

본격적인 전투라곤 해도...전혀 긴박한 느낌이 안들어서 좌절하고 있습니다. 역시 전쟁은 어렵군요.. 

죽어야 할 놈들이 얼마 안 죽어서 슬픕니다. <-어이; 살생부 명단을 작성한 보람이!!

그럼;; 나머지 분량은 곧 들고 돌아오겠습니다;

부디 재미있게 읽으셨길 바랍니다.ㅠㅠ




[정령왕 엘퀴네스] 8-22. 결전의 날! (3)





“당신이 엘…님이시라고요?”


내가 약속장소인 에바스 평원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합류하기로 되어있던 군사들이 모두 모여서 나와 라피스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언제 어느 때 기습이 닥칠지 모른단 불안감 때문인지 하나같이 날이 선 표정으로 주위를 경계 하고 있던 그들은, 처음 다가오는 나를 발견하곤 험악하게 으르렁 거렸다가 곧 정체를 밝히자 벙찐 얼굴들이 되었다.

그 중 후발대의 대장이라는 ‘위칼레인 폰 스피어’ 자작은 탐탁지 않다는 듯 찌푸린 표정으로 연신 내 위아래를 흩어보기에 바빴다. 황제의 일행인데다, 후발대의 총지휘관이라는 존재가 이제 10대 후반의 소년이었으니 기가 막히기도 했을 것이다. 

라피스가 있었다면 사정이 약간 달랐을 테지만 나 혼자만으로는 저들에게 믿음직스럽게 보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다시 한 번 늦은 것에 대해 사과를 건넸다.


“제가 여러분이 기다리고 있었던 엘이란 사람이 맞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서 합류가 좀 늦어버렸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으음. 실례지만 황제폐하와는?”

“친구이자, 여행을 함께 한 동료입니다. 생각보다 어려서 놀라셨나요?”

“아, 아닙니다. 그나저나…다른 분이 더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아. 위에 있어요.”

“네?…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자작에게 나는 미네가 그랬던 것처럼 말없이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켜 보였다. 내 손을 따라 고개를 젖히던 사람들은 곧 하늘을 수놓은 시꺼먼 그림자들을 발견하고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인간의 시력으론 그것이 마족의 무리라는 것까진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다.


“저, 저건 대체?”

“음…조금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이랄까. 일단 상황을 설명 드릴게요. 저희가 이곳으로 온 사이, 새로운 일행들이 몇 명 더 합류했습니다. 지금 그들이 황성의 군대를 치고 있는 상태예요.”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희 후발대와 합류 하신 뒤에 일을 진행하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네에, 그러려고 했는데, 보다시피 중간에 엉뚱한 녀석들이 끼어들어서요. 부득이하게 작전의 실행이 빨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그 점에 대해서는 양해를 구할게요.”

“하아? 대체 저것이 무엇이길래?”


자작의 의문은 금방 해결되었다. 하늘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확인한 마족하나가 무리들을 이끌고 땅에 내려섰던 것이다. 

쉬이이익! 강한 바람을 느끼고 돌아보니 어느새 내 뒤편에는 30여명 정도의 마족들이 서서 긴 송곳니를 드러내며 킬킬거리고 있었다. 단번에 그들의 정체를 알아맞춘 자작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신음을 내뱉었다.


“마…마족!!”


짧은 말이었지만 그것은 전 군대에게 파장을 미쳤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공포에 질린 얼굴로 술렁거리자, 마족중의 리더인 듯한 녀석이 쓰윽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큭큭큭. 이런 외딴곳에 이유도 없이 모인 몇 천의 군대라…다른 녀석들 보다 먼저 발견하다니 운이 좋았군. 어이! 한 마리도 도망치지 못하게 하라고. 모두 이 자리에서 갈갈이 찢어 버리자!”

“크하하하하하!”


요란하게 웃는 마족들은 압도적인 숫자의 차이에도 전혀 아랑곳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소리겠지만, 덩달아 나까지 만만하게 보인 것 같아 슬쩍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다. 


“라피스 녀석, 대체 뭘 하는 거야? 이렇게 되면 나도 전투에 끼어들 수밖에 없잖아! 하필이면 전투에서 빠지라는 말을 듣자마자 이렇게 되다니…나중에 트로웰이나 엘뤼엔한테 혼나는 건 아니겠지? 윽, 이건 신의 농간이야!”

“뭐, 뭘 그렇게 중얼거리시는 겁니까? 어서 도망치십시오! 이곳은 우리가 막겠습니다!”

“네? 도망치라뇨?”

“폐하의 일행이신 분을 이런 곳에서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서 피하십시오! 그동안 저희들이 어떻게든 막아보겠습니다.”


마음은 갸륵했지만 자작의 걱정은 전혀 쓸데없는 것이었다. 그 증거로 그는 자신의 코앞에 다가온 마족의 움직임조차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주제에 뭘 막겠다는 거야? 

짧게 혀를 찬 나는 급히 물의 힘을 끌어 모아 이제 막 자작의 목을 치려는 마족을 향해 날려 보냈다. 

촤아악! 퍼어엉!!


“크아아악!”


내 공격에 정통으로 당한 마족은 복부에 붉은 피를 흘리며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그때까지도 자신이 방금 무슨 일을 당할 뻔 했는지 모르고 있던 자작은, 눈앞에서 쓰러진 마족을 보고서야 얼굴을 헬쓱하게 굳히며 발걸음을 뒤로 주춤거렸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사람들에게 짤막하게 소리쳤다.


“공격은 둘째 치고 방어나 열심히 해요! 내가 다 막을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예…예, 알겠습니다!!”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대기하고 있던 마족들이 쏜살같이 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방금 눈앞에서 자신들의 동료가 당해버린 충격인지 모두 눈에 핏발이 가득 드러난 상태였다. 


“크아악! 이 자식! 죽여버리겠다!!!”

“감히 인간 따위가!!”


험악하게 쏘아져 들어오는 기세에 뒤에 있던 사람들이 ‘헉!’하고 크게 숨을 들이키는 것이 느껴졌다. 단단히 주먹을 틀어쥔 나는 곧 한손에 물줄기를 만들어 그것을 창인 것처럼 휘어잡았다. 

아무것도 없던 손에 갑자기 무기-그것도 물로 된 창이 생기자 사람들은 물론, 덤벼들던 마족의 눈까지 휘둥그렇게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너, 넌…! 설마!!”


알아차렸으면 반말은 하지 말란 말이야! 나는 그렇다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지척에 가까워진 마족하나의 몸을 그대로 꿰뚫었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손에 쥔 창을 통해 물컹한 느낌이 전해졌으나 기분은 이상할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몬스터와 싸울 때하고 별다른 느낌이 없다고나 할까?

창에 박힌 마족이 피를 토하며 쓰러진 사이 옆에서는 또 다른 마족이 굳게 뭉친 마력덩어리를 내게 던지고 있었다. 나는 비어있는 다른 쪽 손으로 둥근 물의 방패를 형성한 후 곧바로 날아드는 검은 빛을 막았다. 

콰아아아앙! 


“으아악!”


요란한 폭발음이 들리고 그 파장으로 몇 사람이 밀려나갔으나 정작 정면으로 막아낸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시 녀석이 달려들자 나는 빠른 속도로 방패를 없앤 뒤 또 다른 물의 창을 만들어 놈을 향해 집어 던졌다. 

푸욱! 곧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허무할 정도로 쉽게 공격당한 마족의 몸이 바닥으로 넘어졌다.

그러는 사이 다른 쪽에선 군사들이 마족의 공격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를 벌이고 있었다. 몇 사람이서 한 마족을 향해 창과 칼, 화살까지 동원하는데도 마족의 입가엔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크윽! 죽어랏!!”


챙! 채앵! 촤아악!


“으아아아악!”


잠깐 방심을 했는지, 열심히 칼을 휘두르던 남자가 배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옆으로 쓰러졌다. 워낙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옆에 있던 다른 병사들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마족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다. 녀석은 자신의 바로 앞에 있던 남자의 팔을 잡아 서슴없이 뒤틀어 꺾었다.

우드드득!


“크아아악!”

“쳇!”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나는 또다시 나를 향해 공격해 들어오는 놈들을 무시한 채 그들 쪽을 향해 달려갔다. 정령을 소환하고는 싶었지만, 안 그래도 많은 무리와 싸워야 할 라피스에게 또 다른 체력소모를 하게 할 수는 없었다. 

빠른 속도로 수 십 개의 물 덩어리들을 만든 나는 그것을 딱딱한 얼음조각으로 변하게 한 뒤 막 병사 하나의 몸에 손톱을 박아 넣으려는 마족에게 쏘아 보냈다. 
콰가가각!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든 조각들은 다트처럼 마족의 몸에 요란하게 박히기 시작했다.


“크허억!”


비명을 지른 마족이 쓰러지는 것을 확인할 틈도 없이 나는 바로 이어지는 다음 공격에 대비해야 했다. 그 후 부터 압축된 물을 쏘아 보내거나 폭발적인 물의 흐름을 이용해 질식시키는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이용해서 마족들을 상대하는 나를, 자작 이하 군사들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퍼어어엉! 콰앙!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나는 몰려들었던 마족들을 전부 다 쓰러트리고 잠시 한숨을 돌렸다. 무심코 둘러본 주변은 내가 마구잡이로 끌어들인 물로 흥건하게 젖어, 그 사이 마치 비라도 온 것 같은 형태가 되어 있었다. 

바닥에 흐르는 붉은 핏물과 그 위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마족의 몸은 이미 굳은 시체가 되어 꼼짝도 못하게 된 지 오래였다. 
아무 생각 없이 시선을 돌리려는 무렵, 그때서야 나는 내가 지금까지 이들을 죽이는 행위에 아무런 죄악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흠칫 몸을 떨었다. 


‘나…원래 이렇게 잔인한 성격이었나?’


아무리 이들이 마족이고, 아군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지만, 상대방의 몸을 직접 꿰뚫는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는 건 지금의 나로서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마치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랄까? 이런 게 인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최악의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설마 아니겠지. 지금 이 녀석들은 인간이 아니잖아? 마족인데다 아군을 죽이려고 한 나쁜 놈들이라고. 그래서 그런 거야. 그래서….’


엘뤼엔과 트로웰이 왜 그런 충고를 했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그들의 염려를 현실로 만들 순 없어서, 나는 복잡하게 변하려는 머릿속을 애써 털어버리곤 방금 전 마족의 공격으로 부상을 당한 사람들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헉…”

“으음.”


다친 부위를 감싸 쥐고 끙끙거리던 사람들은 내가 다가서자 긴장한 듯 얼굴을 굳히며 어설프게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긴, 자기들은 하나도 감당하기 힘들었던 마족을 종횡무진 연달아 몇 십 마리나 해치운 내가 괴물로 보이기는 했을 것이다. 
그 모습을 깔끔하게 무시한 나는 대신 옆에서 멍하게 서있던 자작을 향해 물었다.


“스피어 자작님. 이렇게 불러도 실례가 되지는 않겠지요? 사람들이 많이 다쳤나요?”

“…아! 아…으음. 부상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모두 엘님 덕분입니다. 정말 대, 대단하셨습니다.” 

“저야 당연한 일을 한걸요. 상처들은 어때요?”

“뼈가 부러진 자는 심하지 않습니다만, 외상을 입은 자는 좀…그런데, 저어…혹시 마법사 십니까?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분명 물을 이용해서…”

“하하. 거의 비슷합니다. 일단 부상자들을 보여주시겠어요? 간단한 치료마법쯤은 할 수 있거든요.”

“오오! 그, 그래주시면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릴 일입니다. 이봐, 상처를 보여 봐라. 엘님이 봐주실 거다.”


나를 철썩 같이 마법사로 믿어버린 자작은 모든 경계와 의심을 풀고 환한 표정이 되어 다친 사람들에게 안내했다. 아마도 이런 특별한 능력 때문에 어린 나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처음엔 내키지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들도, 내가 완벽할 정도로 깔끔하게 상처를 치유하자 놀란 표정이 되더니 연신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대충 마무리 지어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리더니 우수수 시커먼 물체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쿵! 쿠웅! 쿠우웅! 


“우왓!! 뭐, 뭐야?”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하나둘씩 바닥으로 처박히는 것은 새까맣게 그을린 마족들의 시체였다. 이게 대체 뭔 일인 겨?


“호오~ 이미 한 판 했던 모양이지? 사방이 물 천지군.”

“!!”


황당한 표정으로 올려다 본 하늘엔 어느새 코앞으로 날아온 라피스의 모습이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녀석은 혼자가 아니었다. 녀석을 쫓아온 수많은 마족무리가 그의 뒤편에서 날아들고 있었던 것이다. 

콰드드드드드득! 웅장한(?)소리를 내며 이쪽을 향해 쏘아져 들어오는 마족무리를 본 사람들은 핼쓱한 표정으로 온 몸을 경직시키기 시작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아까 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였기 때문이다.


“내가 미쳐!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끌고 들어오면 어떻게 해!!”

“아아. 그렇게 되나? 난 그냥 몇 마리가 이쪽으로 내려서는 것 같기에 궁금해서 와 본건데 말이지. 괜찮아, 괜찮아. 한방에 날려버리면 되니까.”


그 말처럼 라피스는 단 한마디의 말로 모든 상황을 종결지었다. 녀석의 손에서 갑자기 커다란 불덩이가 솟아오른다 싶더니, 달려들던 몇 백 마리의 마족이 한꺼번에 불타올랐던 것이다.


“헬파이어!”


퍼어어엉! 콰아아앙!


“크아아아아악!!”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떡 벌린 채, 순식간에 재가 되어 흩어지는 마족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마 평생 돈 주고도 못 볼 구경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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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y~~go~




[정령왕 엘퀴네스] 8-23. 결전의 날! (4)


“은인! 전부 죽이지 마! 내 부하들이란 말이야!”


그때마침 요란한 폭발을 발견하고 달려온 아스가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비록 지금은 적이라 해도, 미래의 자신이 지배할 종족을 함부로 다루는 라피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다고 녀석이 눈 하나 깜짝할 성격은 아니었지만.


“덤벼드는 놈들은 죽여도 된다며? 이봐, 꼬맹아. 지금 지천에 깔린 숫자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사정 봐주며 싸우다간 우리가 당할 판이라고.”

“내가 금방 제압 할 수 있어! 조금만 있으면 성년이 된단 말이야!”

“나~참. 알았다, 알았어. 못하면 나중에 나한테 신나게 맞을 줄 알아라. 아, 그리고 엘, 너는 어때? 할 만해?”

“응? 뭐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는 내게, 라피스는 주변에 널려진 마족들의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녀석들 해치운 거 너잖아? 느낌이 어땠냐고 묻는 거야.”

“으음, 그게…”

“대답하기 곤란해 하는 걸 보니 별 느낌이 없었던 모양이지? 그래서 현재의 기분은?”

“…조금 찝찝해.”

“그냥 단순히 찝찝한 수준? 뭔가를 죽였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같은 건 없어?”

“미안하긴 하지만…죄책감은 아닌 것 같아. 그냥 너무 아무렇지 않은 것에 놀란 정도? 역시 나 조금 이상해 진건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나를 보며 라피스는 재미있다는 듯이 킥킥거리고 웃었다. 가볍게 고개를 저어 부정하는 녀석의 입에선 곧 유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그게 정상이야. 그래도 생각보다 적응을 잘 하는 것 같군. 난 또 ‘내가 살인마가 되고 있어!’ 라고 외치며 구석에 숨어 벌벌 떨 줄 알았지.”

“심정은 약간 비슷해.”

“흐음~. 뭐, 어때? 한 번쯤은 미쳐보는 것도 좋아. 그러고 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혀 달라지지. 언제까지 피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 되지 않거든. 그 팔불출 놈들이야 어떻게든 널 상처 입히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양이다만, 감싸는 애정만이 무조건 옳은 건 아니라고.”

“그거야…”

“걱정 마셔. 네가 미쳐도 비난할 존재는 아무도 없어. 엘뤼엔이나 트로웰이나 예전엔 정상이었는줄 알아? 좀 더 솔직해 지시지. 인간을 죽이는 게 꺼려지는 게 아니라, 잔인해진 네 모습을 보고 그놈들이 널 싫어하게 되는 게 더 무서운 거 아니야?”

“!!”


순간 차가운 물벼락을 머리위에서부터 발끝까지 뒤집어 쓴 것 같았다. 멍한 얼굴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나에게 라피스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정도로 널 외면할 놈들이라면 처음부터 손을 내밀지도 않았을 거다. 언제까지 나약하고 힘없는 인간으로 있을 생각이야? 이제 슬슬 자신이 사랑받는 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도 됐잖아!”

“……”


아마도 라피스는 내가 은연중에 주위 사람들에게 어리광부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럴 때면 그가 나보다 연상이며,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내가 무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자 라피스는 한결 부드러운 표정이 되어 뭔가를 더 말하려고 했다. 비록 방해하는 누군가 때문에 이룰 수는 없었지만.

쉬익! 퍼엉!


“으악! 이게 무슨 짓이야! 이 썩을 꼬맹이~!!”


갑자기 등 뒤에 불덩어리를 맞은 라피스는 분노한 얼굴로 주범인 아스를 바라보았다. 그에 맞서 아스 또한 지지 않고 라피스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대부 곤란하게 하지 마! 은인 때문에 화나서 정령계로 돌아가 버리면 어떡해!”

“건방진 녀석!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저기 날아다니는 놈들이나 잡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면 헤츨링 먹이로 던져버린다!”

“헤츨링보다 내가 더 강해! 바보 도마뱀!”

“뭐가 어쩌고 어째!!”


이래서 애들 앞에선 말을 조심해야 하는가 보다. 그새 엘뤼엔의 말투를 따라하는 아스를 보며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투닥거리는 둘의 모습은 주변의 심각한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본분까지 잊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순간에도 마족들은 꾸준히 그들의 공격을 받고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잠시 후 아스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자 라피스는 씩씩거리면서 내 쪽을 향해 소리쳤다.


“젠장! 빌어먹을 꼬맹이! 아무튼 엘, 너는 거기 있는 인간 녀석들이나 맡아. 나나 다른 녀석들이나 이쪽까지 전부 신경 쓰기는 힘들 것 같으니까.”

“아, 알았어. 근데 아스한테 무슨 다른 방법이 있는 거야? 아까 성년이 어쩌고저쩌고 한 것 같은데.”

“저놈이 완전한 성인이 되면 마신한테 받은 왕의 자격이 드러나게 된다더군. 얼마 안 남았다니까 그때까지만 참아볼 생각이다.”

“괜찮겠어? 봐주면서 싸우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은 거 아니야?”

“뭐 어쩔 수 없지. 집단으로 겁이라도 줘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수밖에.”

“에? 어떻게?”


대체 저 많은 마족들에게 무슨 수로 겁을 준다는 말인가? 나는 대꾸도 없이 멀어져 가는 라피스의 뒷모습을 보며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나는 일행들의 모습만 바라보느라, 옆에서 지금까지의 대화를 들은 스피어 자작 이하의 인간들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어있다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 챈 건 스피어 자작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고 나서였다.


“저, 저어…엘님…?”

“아! 죄, 죄송해요, 자작님. 계시는 걸 잊고 있었네요. 워낙 정신이 없어서…”

“아, 아니, 괜찮습니다. 그보다 방금 전 그분들이 폐하께서 말씀하신 일행들이신 겁니까?”

“네, 라피스와 아스모델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 새로 합류한 일행들이 더 있고요.”


또박또박 대답하는 말에 스피어 자작은 보기에도 안쓰러울 만큼 핼쓱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저어…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만.”

“…?…네, 말씀하세요.”

“으음. 대, 대화중에…그러니까…저기, 마신이라든지, 왕이라든지…그 밖에 여러 가지 굉장한 단어들이 많이 나와서 말입니다. 그, 그게…무슨 뜻인지…”

“!!”


아차 싶은 생각이 들어 나는 혀를 꽉 깨물고만 싶어졌다. 그런 내 모습은 본 사람들은 아까보다 좀 더 추궁하는 듯한 집요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 이걸 어떻게 하지? 


“아하하. 드, 들으셨어요? 으음, 그게 말이죠…”

“사실대로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마법을 쓴다 해도 사람이 저리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저분들은 인간이 아닌 거지요? 아까 그 검은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지닌 소년은 마족으로 보였습니다만.”

“아! 마, 맞긴 하지만, 아스는 적이 아니에요. 절대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네, 그건 저도 그럴 거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붉은 머리의 남자는 누구입니까? 저 분도 마족인가요?”


솔트레테의 국교가 마신교라서인지, 스피어 자작이나 그 외 다수의 사람들도 마족이란 존재에 대해 딱히 큰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는 듯 했다. 그 대신 그는 단순히 라피스의 정체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시선만 보냈다. 

방금 전 아스의 입을 통해 ‘도마뱀’이라는 직설적인 호칭까지 들어놓고도 눈치를 못 채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둔한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하긴, 그만큼 드래곤이란 존재가 일반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다는 소리겠지.’


속으로 납득한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속 시원히 그들에게 일행의 정체를 털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잠시 후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에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멀거니 하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우우우우우우우!!


“뭐, 뭐야?”


갑자기 수 만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야유하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주위를 진동했다. 그 소리는 정확히 라피스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두 팔을 활짝 벌린 라피스의 몸이 점점 붉은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빛의 범위가 커질수록 라피스의 몸은 점점 희미해졌고, 종래에는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추고 말았다. 그 순간 눈두덩이 처럼 불어나던 빛의 흐름이 천천히 사라지는가 싶더니, 사방의 웅장한 진동과 함께 그 안에서 거대한 크기의 시뻘건 불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불덩어리라고 본 것은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형체의 전체가 단단한 가죽으로 감싸져 있는데다, 입과 꼬리와 눈까지 달린 살아있는 생명체 였으니까. 단지 그것이 불이라고 착각할 만큼 새빨간 빛을 띄우고 있었을 뿐이다.

그 생명체는 두개의 커다란 날개를 휘저은 상태로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입을 크게 벌려 기괴한 소리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에에에에------]


그 순간은 무수히 날아다니던 마족들과 그와 대항해서 싸우던 일행들은 물론,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과 심지어 주변을 흐르는 공기까지 전부 멈춰버린 것 같았다. 

나조차 움찔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온몸으로 발산하던 생명체는,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멸하겠다는 듯이 두 개의 붉은 눈동자에 짙은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히이익!”

“커, 커헉!!”


거친 숨소리와 함께 그대로 실신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었지만, 나는 순식간에 주변을 장악한 한 존재만 바라보느라 미처 신경 쓸 여유가 없는 상태였다. 

방금 전까지 일어난 일이 사실이고, 내가 짐작한 게 맞다면 저것은 분명!


“맙소사…설마…라피스?”


드래곤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직 그 본체를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은 나에게도 무척이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인간일 때의 모습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확연하게 다른 거대한 육신과 날카로운 뿔들은 두려움과 혐오감 보단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진한 감동을 유발시켰다. 

내가 뾰족한 이빨과 발톱, 거대하게 늘어진 꼬리와 비늘을 보고도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오늘 본 드래곤의 모습은 한때 도마뱀이라는 소리에 웃은 것이 미안할 정도로 온 몸에서 강렬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적막한 공간 안에 오직 그 혼자만이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드, 드래곤!!”


잠시 후 겨우 정신을 차린 자작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그는 옆에 있던 나에게 따지듯이 소리쳤다.


“아까 그 분이 드래곤이었다는 겁니까? 대체, 대체 당신 일행들은 어떻게 된 존재요!!”

“아하하. 조, 조금 특이한 구성이긴 하지요. 너무 놀라실 필요는…”

“드래곤을 실제로 보았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에, 엘님 당신이야말로 인간이 맞긴 한 겁니까?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의연하실 수 있습니까?”


아마 저토록 어마어마한 존재감 뿜어내는 드래곤 앞에서 멀쩡하게 서있는 내가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실제로 그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부들부들 떤 채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상태였다.


“드래곤이다!!”

“레드 드래곤이 나타났다!!” 


종횡무진 하늘을 휘젓고 다니던 마족들도 지금만은 모두 경직되어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순간이었을 뿐, 오기와 승부욕으로 똘똘 뭉친 그들 집단은 곧 들고 있던 무기를 곧추 세우고 라피스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 중 대장인 듯한 한 마족의 입에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래곤이라고 벌벌 떨 것 없다! 겨우 한 마리뿐이다! 모두 달려들어 죽여라!!!”

“와아아아아아!!”


그의 말에 힘을 얻은 마족들은 상대방이 뿜어내는 위압감에도 불사하고 라피스를 향해 돌진을 시도했다. 그러자 라피스는 비늘에 감싸여진 붉은 눈동자를 꿈틀거리며 고압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감히 나를 거역하는 것인가!]


우습지도 않는 다는 듯, 이죽거리는 그의 말투에 달려들던 마족들 몇 명이 약간 주춤하는 것이 보였다. 펄럭- 두 날개를 크게 휘저은 라피스는 또 다시 크게 포효하며 말했다.


키에에에에에---


[나에게 대항하는 모든 존재를 멸하리라!]








***







“레드 드래곤!!!”


초반 여유로운 모습으로 전투의 상황을 관전하고 있던 유카르테 대공은, 갑자기 나타난 드래곤의 모습에 경악하며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있던 발코니 너머로는 멀리 있어도 확연히 눈에 뜨이는 거대한 생명체가 크게 포효하고 있는 상태였다. 


[키에에에에에----------]


거대한 입이 벌려질 때마다 엄청난 진동과 함께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의 위압감이 전해져 왔다. 대공은 낭패한 얼굴로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왜 드래곤이 여기에! 그들이 인간의 전쟁에 끼어들 리가 없을 텐데?”


진실이야 어찌됐든, 겉포장으로는 완벽하게 야심 많은 섭정왕과 쫓겨난 황제의 전쟁이라고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드래곤의 출현은 그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하던 것이었다. 

훗날 모든 계획이 전부 드러나게 되더라도 자존심 강한 신들이 드래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여 처음부터 제외해둔 종족이 아니던가!


“뿌득, 이사나놈…설마 드래곤을 매수했단 말인가! 기고만장해진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군!”


새하얘지도록 주먹을 꽉 진 그의 눈은 무시무시한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제 막 모든 것이 다 끝날 것이라 여긴 참이었는데 드래곤의 등장으로 재가 뿌려진 격이니 그 실망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세르피스가 숨기고 있던 사실이 이것이었나? 안 그래도 찝찝하다 했는데, 그 배은망덕한 계집! 잘도 이런 수작을!!’


단순히 이기고 지는 문제를 떠나, 그는 자신의 조카에게 그만한 행운이 돌아갔다는 것 자체가 괘씸하기만 했다. 이를 가는 대공의 얼굴에선 진즉에 이사나를 죽이지 못한 후회와 탄식이 거침없이 드러났다.

그 순간 어두운 공간 안에서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래곤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불쾌하다는 듯 물어온 자는 방금 게이트를 타고 중간계로 넘어온 마왕이었다. 그는 하늘을 장악한 거대한 드래곤과 주위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마족들을 발견하곤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대공은 이미 그의 등장을 짐작했다는 듯 그리 놀라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셨습니까. 저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 당황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흐응. 정보부족이었다는 것이냐? 평범한 드래곤이 아니다. 적어도 에이션트급은 되는 것 같군.”

“이사나가 설마 저런 아군을 손에 넣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미리 알아내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크큭. 신경 쓸 것 없다. 아무리 그래도 저 혼자 이 많은 전사들을 상대하기는 벅찰 것이다. 그 꼬맹이 녀석이 죽는다면 인간들은 알아서 흩어질 것이고, 놈 또한 흥미를 잃고 자신의 종족에게 돌아갈 테지. 그게 아니라도 상관없다. 저 놈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내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태평하게 대꾸하는 마왕의 말에 대공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끼곤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드래곤 따위는 애초부터 악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놈이 죽는다면, 그것에 온 희망을 걸고 있을 이사나는 그대로 재기불능의 상태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소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마왕전하의 힘을 미처 염두에 두지 못했군요. 전하만 믿고 있겠습니다.”

“큭큭큭. 그래,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느냐? 계획엔 차질이 없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모두 순조롭습니다. 앞으로 이틀 후면 전하는 원하시는 모든 것을 손에 쥐실 수 있으실 겁니다.”

“크하하하하! 마음에 드는 대답이다! 너에게 맡긴 보람이 있구나!”

“황공합니다.”


껄껄 웃은 마왕은 다시금 드래곤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마족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요란하게 등장하며 위협을 가한 것치곤 드래곤은 생각보다 대단한 활약을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단순히 숫자에 밀리는 것이라 태연하게 생각했던 그는, 잠시 후 공격할 수 있는 타이밍인데도 가만히 있는 드래곤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가? 왜 가만히 있는 거지?’


이건 마치 시간을 벌기 위해 주위의 시선을 집중시켜 놓은 것 같지 않은가! 불길한 예감에 눈을 굴리던 그는 곧 한쪽에서 배회하고 있는 검은 머리의 소년을 발견하곤 눈을 크게 치켜떴다. 


“저, 저 녀석은?”


마왕 자신의 눈이 잘못 된 게 아니었다면 소년은 아무리 보아도 마족임이 틀림없었다. 아직 성년이 채 되지 못한 것을 보면 태어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그것을 깨달은 순간 마왕의 눈에서 굵은 불똥이 터져 나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모든 알들을 전부 파괴한 줄 알았는데, 살아남은 것이 있었단 말인가! 루카르엠, 아니 마신 카노스의 짓이구나!! 미리 알을 빼돌려 놓은 건가?’


언뜻 보아도 소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평범한 마족 꼬맹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순간, 마왕은 단번에 그가 자신을 제치고 들어올 차기 마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 마계에서의 왕위 계승은 선대의 마왕을 죽임으로서 이루어지지만, 마신이 직접 선택한 왕이라면 그런 과정이 없이도 마족들이 순순히 따르게 될 것이다. 마족들에게 있어 마신의 영향력은 그만큼 대단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그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자존심이 상했다.


“왜 그러십니까? 마왕전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으득! 네가 보기엔 저 녀석이 무엇으로 보이느냐?”


마왕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자 의아한 시선을 보내던 대공은, 그가 가리킨 방향에 서있던 마족소년-아스모델을 발견하곤 흠칫 숨을 들이켰다. 


“저건 마족의 아이가 아닙니까? 이번 대의 알들은 왕께서 전부 부화를 막으신 게 아니었습니까?”

“그랬지! 아무래도 마신이 수작을 부린 모양이다. 어쩌면 쟌 녀석은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때 놈을 그냥 죽인 것이 실수였던 것 같다. 내가 이런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노여움을 가라앉히십시오, 전하. 어차피 때는 가까워졌습니다. 이제 와서 차기 마왕이 탄생한다 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겁니다.”

“그런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저놈을 죽이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을 것 같구나! 감히 나를 밀어내고 마왕이 되겠다고? 흥! 마신이여! 네가 선택한 아이가 어떤 죽음을 맞이하는 지 두 눈을 똑똑히 뜨고 보거라! 크하하하하!”


호기롭게 외친 마왕은 그대로 훌쩍 뛰어올라 마족 소년-아스모델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시킬 필요도 없이 자신이 직접 처치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대공은 이상할정도로 마음이 찜찜해졌다. 드래곤에 이어 이번엔 마족이라니! 연달아 밝혀지는 적의 정체들은 하나같이 평범하지 않은 것뿐이다. 

그 중에서도 그를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왠지 이것으로 끝이 아닐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마왕과 손을 잡은 이후 처음으로 맛보는 절망감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이사나…황성을 떠난 뒤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직도 나약한 꼬마라고만 생각하고 만만히 보던 것이 화근이었을까? 
성년이 된 이사나가 등 뒤에 서서 그의 목을 바짝 졸라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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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 8-24. 결전의 날! (5)

마족들의 신경이 온통 라피스에게 몰리자 나는 그 틈을 타 스피어 자작과 그의 군사들에게 수도 내부로 진입할 것을 부탁했다. 황성에 있는 군사들이야 엘뤼엔과 트로웰이 알아서 처리(?) 한다지만, 보다 확실한 점령을 위해서는 제대로 된 군대가 닥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와아아아아!”


황성의 군대는 일반 병사가 아닌 기사로만 이루어진 정규 집단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대장을 죽이더라도 군대가 흩어지거나 도망치는 일이 없었다. 결국 전부 몰살시키거나 포로로 잡는 수밖에 없다는 소리인데, 중간에 마족들이 개입하는 바람에 상대하기가 더욱 까다로워진 참이다. 

그나마 드래곤의 등장 덕분인지 아군들의 사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최강의 생명체의 비호를 얻는 만큼,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붙은 모양이었다.

그 사이 나는 클모어로 이동 중이던 대공의 군사들이 수도의 접전 소식을 듣고 회군을 시작했다는 전서구를 받았다. 아마 이사나들에게도 같은 연락이 갔을 테니, 잠시 후면 그곳에서도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녀석이 오기 전에 먼저 성을 점령해버리면 좋을 텐데. 마족들 때문에 무리이려나?’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하늘위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존재들을 바라보았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라피스는 이미 몸 여기저기에 작은 상처를 입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지 않아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녀석들을 손속에 사정까지 두며 싸우자니 제 아무리 잘난 녀석이라도 힘에 부친 것이다. 

그나마 녀석이 내뿜는 위압감에 질린 마족들이 적극적으로 공격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부상으로는 번지지 않는 듯 했다. 


[이 썩을 녀석들! 전부 다 죽여 버릴 테다!!]


마치 파리 떼를 쫓는 듯 달려드는 마족을 향해 거칠게 날개를 펄럭거린 녀석은, 아스에게 아직도 멀었냐고 채근하기에 바빴다. 그 모습에 아스는 난감한 표정을 하며 조금만 더 버텨달라는 말을 간헐적으로 내뱉을 뿐이었다.


“대체 저놈은 저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왜 안 죽이고 저렇게 얻어터지고 있어?”

“헉, 엘뤼엔! 언제 왔어? 황성의 군대는 어쩌고?”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엘뤼엔이 내 옆에서 서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요란한 전투의 한복판에 있었을 텐데도 입고 있는 옷에 핏자국 하나 묻어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지나가는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인간들이 끼어들기에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두고 왔다. 대충 강해 보이는 놈들은 거의 다 제거해 놨으니까 상대하기엔 무리 없을 거야. 근데 저 녀석은 왜 저러고 있다고?”

“아아. 지금 시간벌기 하고 있는 거야. 조금 있으면 아스가 완전히 성인이 된다고 하더라고. 왕으로서 각성하면 여기 있는 마족들을 전부 제압할 수 있다고 했어.”

“흐음. 그래서 지금 한 마리의 온전한 도마뱀이 되어 눈물겨운 희생을 해주고 있다? 재미있군. 놈한테 딱 어울리는 역할이다.”

“아하하. 그렇지 않아도 분해 죽으려고 하는데 너무 놀리지 마. 그래도 녀석의 협조 덕분에 다른 일행들이 편해졌는걸. 난 꽤 기특하다고 보는데.”

“흥! 저런 일에라도 쓸모가 없으면 나가 죽어야지. 도대체가 저런 놈에게 칭찬 같은 게 가당키나…응?”

“왜 그래, 엘뤼엔?”


푸념하듯 투덜거리던 그가 갑자기 말끝을 흐리자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엘뤼엔은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황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마족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사악한 기운이야.”

“!!”


놀란 표정으로 바라본 곳에는 그의 말처럼 강한 살기를 뿌리고 있는 무언가가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향하는 방향이 정확히 아스가 있는 쪽이라는 것이다. 

그는 덤벼드는 마족들과 상대하느라 자신을 노리고 들어오는 적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설령 알아챘다 하더라도 제대로 대응할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상대의 움직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아스! 옆을 봐!! 위험해!!”

“이런, 안 돼! 멈춰, 엘!!”


경악한 내가 아스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띄운 것과, 엘뤼엔이 나를 잡은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서야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감지한 아스는 뒤늦게 실드를 형성하기 시작했고, 마침 그의 주변에 있던 데르온도 주군을 보호하기 위해 기겁을 하며 뛰어들었다. 


“주군!!”


그러나 날아든 적의 움직임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 마치 빛과 같은 속도로 달려들던 그것은 아스가 채 실드를 다 형성하기도 전에 다가와, 순식간에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며 데르온과 주변에 있던 몇 십의 마족들까지 한꺼번에 삼켜버렸다.

쉬이이익- 번쩍! 콰아아아앙!


“아스! 데르온!!”


폭발의 순간은 짧았지만 그것으로 인한 결과는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처참했다. 하늘에서 일어난 폭발임에도 주위의 산과 지형이 지진이 난 것처럼 진동하기 시작했으며, 그 속에 휘말린 대부분의 마족들이 그 자리에서 완전히 재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단지 주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러할 진데 공격의 중심이 된 아스와 데르온의 안위는 어떠할 것인가!

부릅뜬 눈으로 부들부들 떨던 나는 흩날리는 잔해들 속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추락하는 것을 발견하곤 재빨리 달려가 받아 들었다. 쿠웅! 순간 엄청난 압력과 함께 단백질이 불에 탄 것 같은 매캐한 냄새가 풍겼지만, 지금 내게는 그런 것보다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문제가 더 중요했다. 

다음 순간, 온몸이 시뻘건 피와 그을린 화상으로 가득한 남자의 모습을 바라본 나는 흡-하고 숨을 삼키며 신음을 내뱉었다.


“…데, 데르온!!”


죽었는지 살았는지 차마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상태가 된 남자는 바로 데르온이었다. 의식을 잃고 있는 그는 한쪽 팔이 잘라져 거의 끊어질듯 덜렁거리고 있었고, 온 몸의 살이 썩은 것처럼 심하게 문드러져 있었다. 

그의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나는 정신없이 그의 심장이 뛰고 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살아만 있다면 이런 끔찍한 상처라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살아만 있다면!


“대, 대부! 부하가 어떻게 된 거야?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데르온의 상태를 보아, 절대로 무사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아스가 멀쩡한 상태로 내게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창백한 표정으로 시체처럼 늘어진 데르온과 내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스! 무사했구나!”

“폭발하려는 순간 아슬아슬하게 실드가 완성됐어. 부, 부하는? 설마 죽은 거 아니지?”

“괜찮아. 미약하지만 숨을 쉬고 있어. 금방 살릴 수 있어!”

“다, 다행이다…”


아스는 잔뜩 일그러져있던 표정을 풀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주저앉았다. 아직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는 건 여전했지만, 그래도 데르온이 살아있다는 것에 안심한 것이다. 

나 역시 아스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가 되어 미처 공격을 해온 정체불명의 적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우리를 향해 엘뤼엔은 낮은 목소리로 짧게 경고했다.


“아직 마음을 풀기는 일러. 다들 긴장하는 게 좋을 거다.”

“응?”

“…?!…”


그의 목소리가 이전에 비해 잔뜩 굳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불안한 시선으로 폭발이 일어났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짧은 검은색 머리카락에 마찬가지로 검은 눈동자를 가진 야비한 인상의 남자가 거만한 모습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 몸에서 풍기는 느낌은 마족과 비슷했지만, 그 주위로 역겨울 만큼 강한 피비린내가 묻어났다. 우리와 시선을 마주친 그는 곧 아쉽다는 듯 혀를 내밀어 입술을 쓰윽 핥았다. 
그 모습만으로도 그가 방금 전에 아스들을 공격한 남자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크크크…그랬던가, 데르오느빌. 그동안 행방이 묘연해 졌다 싶더니, 나를 배신하고 이런 곳에서 다른 주군을 섬기고 있었다는 말이지. 이렇게 실망스러울 데가! 그동안 내가 너를 잘못 보았던 모양이야!”

“무슨…네가 부하를 이렇게 만들었어?!”


그가 데르온을 다치게 한 주범이라는 생각을 굳혔는지, 아스는 벌떡 일어나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남자는 천천히 지상으로 착지하더니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큭큭. 그렇다면 어쩔 거지? 사실은 너를 노린 것이었는데 상당히 운이 좋았구나, 꼬마야. 뭐, 어차피 그 운도 여기까지겠지만.”

“…!!…죽여 버리겠어!”

“크하하하! 네놈이 나를? 마신에게 선택을 받았다고 아주 기고만장해 있구나! 그렇게 빨리 저 데르온처럼 죽고 싶었나? 하긴, 나를 거역한 존재에겐 그보다 빠른 해답은 없을 테지!”

“부하는 죽지 않아!”


반박하는 아스의 외침에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그는 곧 진득한 살기를 끌어올리며 우리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남자의 몸에 풍기던 피 냄새도 점점 짙어져, 주위가 온통 혈흔으로 물들어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했다. 그와 함께 나는 동시에 남자의 정체를 깨닫고 아스의 몸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위험해!!”

콰아아앙!

간발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아스를 빗겨간 광선은 그가 서있던 자리에서 거친 폭발을 일으켰다. 두 번의 공격이 전부 실패로 돌아가자 남자는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또한 지지 않고 쏘아보며 설마라고 생각했던 그의 정체를 캐물었다.


“당신…설마 마왕?”

“큭큭, 용케 알아보았구나! 그래, 이 몸이 바로 현 마계를 지배하는 위대한 마왕이다! 또한 바로 여기서 네놈들의 목숨을 거두어갈 존재이기도 하지!”

“!!”


맙소사. 정말 마왕이었을 줄이야! 이래서 엘뤼엔이 긴장하라고 했던 건가? 
딱딱하게 굳은 내 표정을 본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입가에 진한 미소를 띄웠다. 


“그러는 네놈은 정체가 무엇이지? 매우 기분 나쁠 정도로 정순한 기운이군. 어딘지 정령의 냄새도 배어있는 것 같고…인간이 아닌 것 확실한데 말씀이야…”

“…맞았어.”

“뭣이?”


놀란 마왕이 휘둥그렇게 눈을 뜸과 동시에 나는 치료술을 시전 하여 엉망이 된 데르온의 몸을 완벽하게 원상태로 복구했다. 파아앗! 눈부신 빛이 퍼져 나온 순간,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데르온의 육체가 순식간에 멀쩡해지자 마왕은 입을 크게 벌리며 소리쳤다.


“네놈! 네놈은 설마!!!”

“입버릇이 나쁜 녀석이군. 누가 네놈더러 남의 아들을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쳤지?”

“무스…? 커억!!”


콰아앙!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을 사이도 없이, 마왕은 엘뤼엔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곤 눈 깜짝할 사이에 저만치 날아가 한 벽돌집 안으로 처박혔다. 그러나 소리만 요란 했을 뿐, 정작 곧바로 튀어나온 녀석의 몸은 흔한 생채기 하나 없이 말짱한 모습이었다. 

후두둑, 몸에 묻은 흙덩이를 떨어낸 마왕은 붉게 충혈 된 눈으로 엘뤼엔을 쏘아보며 이를 갈았다. 


“으드득! 네 놈!!”


스물 스물 피어나는 기운은 눈에 보일 정도로 짙은 검은 빛을 띄우고 있었다. 몸이 저절로 떨릴 만큼 짙은 살기였으나,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본 엘뤼엔은 평소의 무심한 표정 그대로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흐음, 역시 통하지 않나. 각성하기 전부터 이러다니, 정말 골치 아픈 녀석이군.”

“뭐, 뭐야? 공격이 통하지 않는 거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아들아, 너는 일단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내가 시간을 끌 테니까 그 시끄러운 꼬맹이랑 기절한 놈을 데리고 피해라. 뭣하면 정령계로 돌아가도 좋고. 거기라면 저놈도 아직 침범하지 못할 거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엘뤼엔을 놔두고 어떻게 우리끼리 도망쳐?”

“나도 안가! 저 놈 반드시 죽일 거야! 나와 내 부하를 모욕했어!”

“이익! 뭣들 하느냐! 이 녀석들을 공격해! 전부 찢어 죽이란 말이다!!”


우리의 실랑이를 들은 마왕은 길길이 날뛰는 목소리로 주변을 가득 매우고 있던 마족들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라피스와 대립하고 있던 마족들이 방향을 바꿔 우리들에게로 전속력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아스는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멈춰! 전부 다 죽여 버리기 전에!!”


신기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마왕의 명령에 따라 충실하게 공격해 들어오던 마족들이 아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 자리에서 우뚝 정지해 버렸던 것이다.

그 순간 아스의 몸은 순식간에 옅은 붉은 빛으로 휘감겼다. 그러자 키를 비롯하여 팔 다리와 몸의 굴곡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을 땐, 이미 아스는 어린 티를 완전히 벗어버린, 완연한 성인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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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 8-25. 결전의 날! (6)



“아, 아스?”


본인을 확인하는 듯 물어보는 내게 아스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이마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빨간 두 개의 날개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내 손등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마신을 상징하는 문장이었다. 

그러자 저 멀리서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라피스가 씨근거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빌어먹을 꼬마! 이제야 각성하면 어쩌자는 거야!”

“미안, 은인. 막느라 수고했어.”

“젠장! 저 지긋지긋한 꼴들 다신보고 싶지 않으니까 당장 마계로 돌려보내!”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하려고 했어.”


대답하는 목소리마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중저음이었다. 아스는 고요한 붉은 눈동자로 한번 쭈욱 주위를 둘러싼 마족의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명령에 의해 공격을 멈추고 머뭇거리고 있던 마족들이 하나둘씩 지상으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아마 풍겨져 나오는 기운과 이마에 새겨진 문장으로 그가 자신들의 새로운 마왕임을 깨닫게 된 것 같았다.


“마신이 선택하신 우리의 마왕 전하를 뵙습니다!”


우렁찬 외침이 들리자 아스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반대로 선대의 마왕이었던 남자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너희들은 그만 마계로 돌아가. 내가 다시 부를 때까지 중간계에 나타나지 마라.”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무슨 짓들이냐! 네놈들의 마왕은 저놈이 아니라 나란 말이다! 지금 누구를 착각하고 있는 거야!!”


그러자 마족들은 담담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마에 드러난 문장은 마신께서 내리신 것. 새로운 마왕께서 탄생하였으니, 너는 더 이상 우리의 마왕이 아니다.”

“무엇이! 감히! 감히 나를 앞에 두고 능멸을 해!! 네놈들이 감히!!”


으르렁 거리기 시작한 그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위협적인 기운을 뿜어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순간 남자의 폭발적인 기운을 견디지 못한 주변의 지형이 온통 진동하고 들끓어 갈라지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쿵!! 콰지지지지직!!!


“지, 지진이다!”

“모두 안전한 곳으로 피해!!”

“으, 으아아악!”


갑작스러운 지진에 주변은 곧 도망치는 인간들의 비명소리로 가득해졌다. 그러나 그러한 외침도 뒤이어 지는 거대한 소리에 묻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어버렸다. 

남자의 등 뒤에서 문득 붉은 덩어리가 치솟는다 싶더니, 귀가 멀어버릴 것 같은 요란한 폭발을 일으켰던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앙!!!!


“엘뤼엔! 아스!”


온몸을 증발시킬 것처럼 강한열기와 통증이 밀려들기 시작하자 나는 버릇처럼 수막을 쳐서 일행들을 보호하려고 했다. 그 순간,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있던 마왕과 내 시선이 마주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마치 온 세상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사방의 모든 것이 정지한 기분이었다.
 
왜인지 두 팔을 벌리는 그의 동작이 이상할 정도로 느리다고 느껴졌다. 그때만큼은 나를 향해 달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도, 눈앞에서 번쩍이는 거대한 붉은 빛도 모두 꿈을 꾸는 것 같이 아득하기만 했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 펼쳤던 방어막이 속수무책으로 스러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붉은 폭발음. 

나는 본능적으로 이번 공격이 내 목숨을 위협할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자칫하면 역소환이 아닌, 그대로 이 세상에서 소멸되어 사라지게 될 것이란 것도.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몰아쳐지는 폭풍 안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이라곤 누군가가 나를 끌어안았다는 사실 뿐이었다. 
한참의 시간 후,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내 주위는 완벽한 폐허로 변해 있었고, 미처 마계로 돌아가지 못한 마족들이 시체가 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윽…대체…뭐가 어떻게 된…?”


그 요란한 폭발 속에서도 나는 몸을 강하게 부딪쳤다는 충격 말고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한순간에 방어가 뚫리고 직격으로 공격을 당한 것 치곤 이상할 정도로 멀쩡한 것 같았다. 

기분 탓이었을까? 누군가가 내 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이,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 정체를 깨달은 것은, 지나칠 정도로 낮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난 이후였다. 


“멍청한 녀석. 그래서 내가 아까 피하라고 말했잖아.”

“…엘뤼엔?”


갑자기 왜 엘뤼엔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지? 당황한 나는 잠시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가 손에 엉키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고 천천히 들어 보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투명할 정도로 맑은 금색의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겨있는 것이 보였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그 위를 따라 붉은 액체가 뚝뚝 흐르는 것을 발견하곤 흠칫-몸을 굳혔다. 

이건 설마…피?


“…에, 엘뤼엔?”


아니겠지. 아닐 거다. 그럴 리가 없다. 점점 불길하게 흘러가는 생각을 가로막으며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아까보다 더 기운이 없어진 엘뤼엔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아. 아무튼 말도 지지리 안 듣는 아들 때문에 이 나이에 내가 무슨 고생인지 모르겠다니까. 그나저나 저 빌어먹을 자식, 감히 누구 아들을 노리고 공격을…쿨럭.”

“!!”


그가 기침하는 순간, 주르륵- 무언가가 쏟아져 나와 내 볼 옆을 흘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사형선고를 당하게 된다면 바로 이러한 기분일 것이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고 조심스럽게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힘없이 내 위에서 비켜나가는 남자는 틀림없이 내 아버지인 엘뤼엔이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나는 급하게 입을 틀어막고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삼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그의 몸은 흥건한 피에 젖어 온통 붉은 빛을 띄우고 있었다. 


“아…아…”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다. 아직 폭발의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한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다면 엘뤼엔이 이렇게 다칠 리가 없잖아? 이건 악몽이야. 그러니까 깨어나야 해. 정신 차려, 엘퀴네스! 넌…꿈을 꾸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젠장! 웃기지마!!’


“에, 엘뤼엔… 엘뤼엔! 엘뤼엔!!”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정신없이 그의 옷깃을 붙들었다. 왜 하필 나를 감싸다가 다친단 말인가! 이런 못난 놈 따윈 차라리 그냥 죽게 내버려 두는 게 더 낫잖아! 

이 찰나의 순간에도 나는 그가 대답하지 않을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다행히 엘뤼엔은 힘없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윽…그렇게 이름 부르지 않아도 내가 엘뤼엔이라는 건 알고 있어.”

“괘, 괜찮아? 괜찮은 거야? 잠깐만 기다려! 잠깐만…내가 금방 치료할게! 주, 죽으면 안 돼!”

“킥- 겁도 많은 녀석. 죽기는 누가…크윽!”

“에, 엘뤼엔!”

“괜찮…다. 그냥 기운만 없을 뿐이야.”


이상한 일이다. 목소리를 들으면 안심이 돼야 하는데, 나는 오히려 점점 더 불안해 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심정과는 달리 머릿속은 지나치리만치 차가워져서 지금 내가 어떤 기분인지조차 전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내가 누군가를 치료하면서 이렇게까지 필사적인 기분이 든 것은 지금이 처음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먹은 만큼 능력이 전부 따라주는 것은 아니었다. 나보다 등급이 높은 신체(神體)인 탓인지, 계속되는 치료술에도 엘뤼엔의 상처는 도무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엘뤼엔은 점점 말이 없어졌고, 조급해진 마음은 결국 울음으로 번져 나왔다.


“나아…제발 나으란 말이야…명색이 정령왕이라면서 왜 이런 상처하나 못 고치는 거야…제발! 제발 나으란 말이다! 흑…흐윽…엘뤼엔, 죽으면 안 돼! 내 말 들려? 듣고 있어?”

“……”

“나도 알아서 피할 수 있었어! 나 같은 거 일부러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이렇게 다 큰 자식을 위해서 목숨을 던질 필요는 없잖아! 멍청이 엘뤼엔! 바보 아버지!! 젠장! 죽지 마, 아버지…제발…”


좀처럼 대답을 하지 않는 그가 정신을 잃은 것인지 아닌지는 판단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소멸하게 되면 신의 육체가 온전히 남아있을 리가 없단 생각에, 적어도 죽지는 않았다고 안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사이 폭발에 휘말렸던 다른 일행들도 정신을 차렸는지 여기저기서 부스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들은 나와 엘뤼엔의 모습을 발견하고 단숨에 표정을 굳혔다.


“엘…이게 어떻게 된…”


그 순간,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격렬한 비웃음을 띄운 채 쩌렁쩌렁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 엘뤼엔! 엘뤼엔이라고? 설마 그 형벌의 신 엘뤼엔을 말하는 것인가! 모두가 벌벌 떨며 하늘 높게 드높이던 상급신이 이렇게 처참한 상태가 되다니!! 신이라는 것도 알고 보니 별거 아니었구나!”

“!!”

“그 모든 것이 다 나에게 감히 대항한 결과다! 주제도 모르는 녀석은 확실히 죽음으로 다스려야 하는 법이지! 크큭, 크하하하! 너무 억울해 하지 말아라! 이 손에서 직접 죽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영광이 아닌가!”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던 가느다란 무엇인가가 뚝-끊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엘뤼엔을 잡고 있던 손을 떼어낸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제 멋대로 지껄이고 있는 ‘전대의’ 마왕을 바라보았다. 


“…엘뤼엔은 아직 죽지 않았어.”

“호오? 그래? 하지만 곧 죽게 될 거다! 제 아무리 신이라도 저만한 상처를 입고서 살기는 어려울 테니까! 걱정 말거라, 이제부터 하나씩 차례차례 같은 길을 걷게 만들어 줄 테니! 저 혼자 죽는다고 억울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응? 그게 무슨 소리지?”

“넌 아직 악신이 된 게 아니라는 소리다.”

“크하하! 하지만 이미 악신이나 다름없는 몸이지! 그 증거로 상급신인 엘뤼엔이 꼼짝도 하지 못하고 당한 것이 아니냐!”

“정말 모르나 본데…‘이미 다름없는 상태’나, ‘완전히 된 상태’는 엄연히 달라. 그 차이를 정말 모르겠다면…”

“??”

“내가 깨닫게 만들어 주지!”


무슨 정신으로 이런 말을 내뱉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때의 난 분명히 놈을 제압할 자신감이 있었다. 나는 놈이 황당해 하는 틈을 타 몸을 유지시키고 있었던 이사나와 라피스의 마나를 전부 흩어버렸다.


“무, 무슨!!”


방금 전까지 멀쩡하게 눈앞에 있었던 내가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놈은 굳은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신이 되지 않은 그는, 단순히 힘만 센 마족에 불과했기 때문에 자연 그 자체에 녹아든 정령의 기운을 찾아낼 수 없었다.

즉, 놈은 지금부터 인기척이 전혀 없는 투명인간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셈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령왕이 왜 굳이 계약자를 만드는 건지 알아? 그들의 마나를 이용하지 않으면 중간계에서 모습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야. 정말 단지 그것뿐이지. 즉, 지금 이 대로도 나는 너와 싸우는 것에 전혀 지장이 없다는 소리야. 하지만 넌 곤란할걸? 이 상태에선 네 물리적인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거든. 이 차원을 소멸하지 않는 한 말이지.”

“무, 무슨!! 크윽!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이미 완벽한 악신이나 다름없는!!”

“하하하. 그렇겠지. 어쨌든 지금으로선 아주 고맙게 생각해. 덕분에…이런 기회도 가져볼 수 있으니 말이야. 악신인지 뭔지 몰라도, 너는 각성할 장소를 잘못 선택했어. 왜인지 알아?”


즐겁다는 듯이 웃으면서 묻는 나는 내가 생각해도 전혀 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만약 나에게 전생의 기억이 없었다면 바로 이런 성격이지 않았을까?

흥미 있다는 듯 눈빛을 빛내는 라피스와 벙쩌진 일행들의 얼굴을 무심히 스쳐지나간 나는 마왕의 코앞에 이르러서야 친절하게 답변했다.


“아크아돈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령들의 세계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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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의 내용은 여기까지 입니다; 늦은것에 사과드리는 의미로, 출판본에 들어갈 모든 분량을 전부 올렸답니다;;^^;;

전쟁씬이란게 상당히 가볍게 쓰는 편인데도 한없이 늘어지더군요; 결국 원래 이번 권에서 죽어야 할 놈들은 다음 권으로 미루어진..<-어이;

정신없이 쓰다보니 내용이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빗나간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제부터 수습할 생각을 하니 괴롭지만; 부디 재밌게 읽어주셨길 바랍니다^^

그럼 곧 9권 분량도 들고 찾아 뵐게요.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p.s- 원고는 이미 넘긴 상태입니다. 출판 삭제는 이번 주 안으로 할 예정이어요. 책으로 나올 8권도 많이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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