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소설] 정령왕 엘퀴네스 7권
- 제왕의 라이벌 -
기절한 이사나를 편하게 눕힌 후, 나는 카노스의 손짓에 이끌려 지금까지 파이어 버스터-이그니스가 꼽혀있던 제단으로 다가갔다. 그 위에는 자줏빛 비단으로 곱게 싸여진, 타조 알 만한 크기의 황금색 물체가 사뿐히 놓여있는 상태였다.
이게 바로 카노스가 말하던 ‘마족의 알’이라는 건가? 생각보다 고운 색깔에 감탄한 표정을 짓자 마신은 싱글벙글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예쁘지? 내가 이제껏 많은 알들을 봐왔는데 말이야, 이것만큼 색깔이 고운 게 없었다니까? 순금이라고 해도 믿어버릴 정도야. 어떤 녀석이 탄생하려는지 정말 기대돼.”
“헤에… 굉장히 작네요. 부화는 언제 하는 거예요?”
“음~ 아마 한 달 정도 더 있어야 할 걸? 너는 그다지 머리 아프게 신경 쓸 것 없어. 조~기 있는 마족한테 전부 맡겨버리고 가끔씩 대부노릇만 해주면 돼.”
“엥?”
“헉…”
그의 말에 옆에서 덩달아 감탄하고 있던 데르온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숨을 멈추었다. 잠시 후 그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카노스를 바라보며 떨떠름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설마…‘엘’로 나타나셨을 때 저를 살려두신 이유가?”
“당근 아이 맡길 마땅한 녀석이 너밖에 없어서 그랬지~ 세르피스는 너무 야심이 강하고, 쟌은 주책바가지고. 적당히 진중하고 멋진 사람은 루카밖에 없는데 말이야. 그건 나라서 안 되잖아? 냐하하하하~”
“큭…그런 걸 두고 자화자찬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말에 찔끔할 정도였다면, 그는 이미 마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깔끔하게 데르온의 말을 무시한 카노스는 곧 내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의 말을 내뱉었다.
“애가 워낙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녀석이지만 이해해 줘라. 어릴 때부터 피 튀기는 혈전만 벌이더니 성격이 좀 많이 삐딱하거덩. 머릿속에 어떻게 하면 마왕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 없는 놈이라 감시가 좀 필요할거야. 암튼 마족들이란…쯧쯧쯧.”
“다, 당신이 이렇게 만들어 놓으신 거잖습니까!”
“내가 뭘?”
“마족들이 싸움을 좋아하는 건, 전부 마신께서 태초에 마족의 본성을 그렇게 설정하셨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책임을 모른 척 하실 생각이십니까?”
“쳇. 누가 그렇게 순순히 자라래나…재미없는 놈들.”
“커헉!!”
충격이 너무 컸던 걸까? 뻔뻔한 카노스의 대답에 할 말을 잃은 데르온은 더 이상 항변할 기운도 없는지 얌전히 고개를 숙이며 물러섰다.
그 모습을 심히 안타깝게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자, 카노스는 오히려 답답하다는 듯이 나를 붙들고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어떻게 시키는 대로 얌전히 따를 수가 있어? 내가 저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조금쯤은 설정한 것과 다른 면모를 보여야 만든 보람(?)이란 게 생길 거 아니야. 내가 엘퀴네스였을때 만들었던 정령들은 저렇지 않았다고.”
“아하하…그, 그런가요?”
“그래! 오죽하면 내가 루카라는 가상 마족까지 연기하며 녀석들을 얌전히 시키려고 노력했겠냐고. 이곳저곳에서 마족들 때문에 신들의 항의가 끊이질 않으니 도무지 살수가 있어야지, 원.”
“음…그럼 루카는 이번일 때문에 의도적으로 만든 캐릭터가 아니라는?”
“그렇지. 내가 말 안했던가? 루카는 마계 내에서 마왕의 독재를 감시하려고 만든 녀석이야. 자신보다 더 강한 녀석이 언제든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 그만큼 행동이 조심스러워 지지 않겠어?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싸움에 관여하거나, 왕위다툼에 끼어들지는 않았지만.”
진지한 카노스의 대답에 나는 다시금 루카의 모습을 회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뭔가 뒤 꿍꿍이가 있는듯한 그의 표정을 봤다면, 제 아무리 마왕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독단적인 행동을 벌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식이라도 남모르게 마족들을 조절해왔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나는 궁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런데 저는 왜 쫓아오셨던 건데요?”
“마왕이 그러라고 시켰으니까. 마침 이번 사건의 조사 때문에 마계를 떠나있을 변명거리가 필요했는데 잘 되었다 싶었지. 그리고 ‘엘퀴네스’에게 따로 부탁할 일도 있었고.”
“부탁할 일?”
“응. 내가 전에 루카였을 때 했던 말 기억 안나? ‘위대한 어둠의 군주’와 만나게 될 것 같다고 했잖아. 마족에게 ‘어둠의 군주’란 바로 마왕을 뜻하지.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알’을 말하는 거였어.
안 그래도 적당히 맡길 녀석을 찾고 있었는데, 네가 바론 던전으로 간다니 이게 웬 떡인가 싶었지. 하지만 네가 엘뤼엔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상당히 의외였어. 그래서 장난 좀 쳐볼까 했던 게 생각보다 좀 과했던 모양이야, 냐하하하~”
어쩐지, 이제껏 별달리 수상한 낌새가 없었던 루카가 내 이마에 새겨진 문장을 본 이후 갑자기 사라진 것이 이상하다 싶었다. 그때 시벨리우스의 머리를 쓰다듬은 건 그의 기억을 읽기 위해서였나?
나는 찌푸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말로 마신의 손에서 완벽하게 놀아난 꼴이 아닌가.
“…아버지의 친구라서 그냥 넘어가는 줄 아시라구요.”
“호오~ 그거 영광인 걸? 걱정 마 걱정 마. 이제 장난 안 칠 테니까. 나도 엘뤼엔이 정말 화나면 무섭거든. 너 쓰러진 직후 시퍼렇게 변한 얼굴로 나타나는데 어찌나 살벌하던지…그렇게 화난 녀석은 본 적이 없다니까? 그 자리에서 바로 마신 생(生) 종 치는 줄 알았어. 킥킥.”
그게 지금 웃으면서 할 말입니까?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자 그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리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한 마디로 단숨에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나저나…나한테는 편하게 말하네?”
“네? 뭐를요?”
“그 ‘아버지’라는 단어 말이야. 정작 그 말을 들어야 할 신한테는 ‘엘뤼엔’이라고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던가? 그 녀석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속으로는 서운해 할걸.”
“윽…그건…”
“아아 뭐, 어색하기도 하겠지. 정령왕에게 양부(養父)가 있다는 것도 어찌 보면 상당히 우습기도 하고 말이야. 역대로 자존심 강하지 않은 엘퀴네스가 없었으니, 너 역시 마찬가지겠지? 뭣하면 내가 엘뤼엔더러 그만두라고 할까?”
“그만두라뇨?”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내뱉은 순간 곧바로 후회했다. 장난끼가 가득 드러난 카노스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내가 가장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말을 내뱉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내 불안한 표정을 본 카노스는 두 손을 허리에 짚은 채 경망스럽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캬캬캬! 정말 놀리는 보람이 있는 녀석일세! 이러면 엘뤼엔더러 ‘아빠 놀이’그만두라거나, 순진한 정령왕 갖고 놀지 말라는 말을 할 수가 없잖아~”
“윽! 그랬단 봐요. 미래의 마왕이고 뭐고 저 딴 알 당장 깨트려버릴 테니까!”
“헉! 정말루? 이야~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지, 누가 엘퀴네스 아니랄까봐 상당히 살벌한 걸. 너무 엘뤼엔을 못 믿는 거 아니야? 혹시나 그 입에서 또 다른 진실이 나올까봐 두려운 건가? 이를테면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엘’에 관해서라든지…”
아무래도 이 마신은 내 속을 뒤집어 놓기로 작정을 지은 모양이다. 나는 똑바로 그를 노려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누구처럼 심심풀이로 장난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 한번 엘뤼엔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의심할 생각은 없어요. 단지 어느 정도 무의식으로는 ‘엘’의 존재에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인정하는 것뿐이라고요.”
“흐음. 하지만 그거 알아? 너 역시 엘뤼엔을 다른 사람의 대타로 보고 있다는 사실 말이야.”
“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카노스는 어린 꼬맹이를 달래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건 지구에서 겪었던 ‘아버지’에게 실망했기 때문이겠지? 두 번 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지금의 엘뤼엔 또한 아버지로 인정할 수 없게 만드는 거야. 결국 녀석에게서 과거의 아버지를 투영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 단지 그게 ‘그리움’이 아닌 ‘두려움’이라는 것의 차이지.”
“…!…”
“엘뤼엔과 그가 전혀 다른 존재라는 걸 인식하기 전까진, 앞으로도 본인 앞에서 아버지란 말이 쉽게 나오지 못할걸? ‘아버지’라고 하면 무조건 ‘무섭다’와 ‘두렵다’의 감정밖에 없을 테니까. 이것 또한 무의식에서 나온 행동이니 제어할 수 없다는 게 더 큰 문제야. 결국…”
“결국?”
“둘 다 쌤쌤이라는 소리지! 냐하하하하! 이 착각쟁이들~ 어떠냐! 이 위대하신 몸의 결론이!”
“…쿨럭.”
천성인지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이 마신은 진지하게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것이 특기인 모양이다. 모처럼 중대한 걸 깨달은 기분이 산산이 부서지는 걸 느끼며,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아직까진 아버지란 이름이 그렇게 친근한 느낌이 들진 않거든요. 게다가 엘뤼엔은 외모 자체가 나랑 별반 차이가 나지 않기도 하고.”
“캬캬. 그건 그래. 인간나이로 이제 갓 20살 넘어 보이는 놈한테 아버지라고 부르기는 좀 그렇지? 뭐, 아무튼 그냥 그렇다는 거였어. 네가 아무렇지 않게 ‘아버지의 친구’어쩌고 하니까 기분이 굉장히 신선해서 해본 말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으음? 신들도 결혼해서 자식을 낳을 수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리 신선하다기는…”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넌 상상할 수 있어? ‘그’ 엘뤼엔이 한 여자의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 말이야. 난 그 녀석은 영원히 혼자 살 거라 생각했거든. 나만이 아니라 신계에 있는 대부분의 신들이 다 그렇게 알고 있을 걸?”
“아하하…”
이미 ‘이프리트’라는 예비 아내까지 있는뎁쇼?
하지만 나는 녀석을 위해서라도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또 다시 마신의 장난에 희생될 비운의 존재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카노스의 관심은 다시금 눈앞에 있던 마족의 알로 돌아섰다. 그는 자주색 비단에 감싸진 상태 그대로 알을 집어 올리더니, 냉큼 내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어려운 일은 데르온 녀석이 할 테니까 키우는데 지장은 없을 거야. 그냥 태어난 아이가 왕의 자리를 무사히 계승할 때까지 옆에서 지켜봐 주기만 하면 돼.”
“헤에. 이렇게 작은데 어느 세월에 그만큼 자랄까요? 말이나 걸음마 같은 것도 다 가르쳐야 하는 거예요?”
“아니, 아니, 그게 그렇게 보여도 태어나면 아마 인간 아기만 할 거야. 일주일 단위로 부쩍부쩍 자라서 금방 소년기가 될 테니까 따로 가르칠 것도 없어. 다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마족은 능력의 컨트롤이 부족해서 많이 약하기 때문에 주변 세력으로부터 보호가 필요해.
아마 무의식적으로 발산한 마력을 느끼고 주변에서 마족들이 공격해 오는 일도 있을 거야. 이놈들이 워낙 호전적이라 자기보다 잘난 녀석은 잘라버리려는 놈이 많거든. 귀찮겠지만 잘 부탁할게.”
“아, 그럴게요. 그런데 우리와는 함께 동행 하지 않는 건가요?”
내 질문에 카노스는 명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조사할 게 많거든. 틈나는 데로 들려보긴 하겠지만 함께 동행 하는 것은 무리일 듯싶어. 아참, 데르온~! 다른 녀석들에게는 내가 루카라는 거 비밀이다?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쿨럭…처음부터 말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캬캬! 이래서 내가 너를 이뻐한다니까? 암, 암, 자고로 입이 무거워야 오래 살아남는 법이지. 이왕이면 그 서툰 전투욕이나 권력 욕심도 접어버리는 편이 좋을 거다, 미련한 아이야. 곧 다가올 피의 폭풍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면.”
“……”
몸이 절로 움츠려 들만큼 살벌한 말이었으나 데르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두 눈동자가, 한시라도 빨리 그런 상황이 다가오기를 바라고 있는 듯이 보였다.
단순히 싸움이 좋다는 이유하나로 죽음을 불사하는 무모한 용기를 낼 수 있다니, 새삼 카노스가 한탄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껴졌다. 대부분이 그가 자초한 일이라는 점만 빼면 말이다.
그때 마침 뒤편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우리의 시선은 자연히 그쪽으로 돌아섰다.
<<용사님! 정신이 드세요? 얼렁 일어나 봐요! 아직 마지막 행사가 남았단 말이어요!>>
“야! 작작 좀 해, 정말! 이제 막 의식을 차리는 환자에게 또 무슨 짓을 시키려는 거야?”
<<어머머? 제 3자는 빠져요. 이건 어디까지나 용사님과 저만의 문제라고요!>>
“사람을 다 죽여 놓고선 뭐가 어쩌고 어째? 뭐, 이딴 검이 다 있어? 네가 정령이면 다야? 정령이면 다냐고!”
<<그래욧! 정령이면 다예요! 됐어요? 이래봬도 저는 이프리트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받는 불의 상급 정령 이그니스라고요! 당신 같은 평범한 인간 여자와는 차원이 다르신 몸이에요!>>
“하! 이거 왜 이러셔~! 나 역시 장차 땅의 정령왕을 소환하실 고귀한 몸이라고! 이게 어디서 사람을 차별하고 난리야?”
씩씩거리고 싸우는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정령검 파이어 버스터와 알리사였다. 옥신각신하는 둘 사이에선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이사나가 멍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서 다분히 한심스러운 얼굴로 둘의 대립을 지켜보고 있던 시벨리우스가 얼른 다가가 비틀거리는 녀석의 몸을 부축했다.
“괜찮냐?”
“아…시벨님. 어떻게 된?”
“검의 시험인지 뭔지에 합격 했어. 그리고 바로 기절했지. 기억 안나? 이제 저 검의 주인은 너다.”
“아…”
해냈다는 감동 때문이었을까? 이사나는 한동안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막무가내로 도전하긴 했어도 설마 정말 성공할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는지,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한 순간이었을 뿐. 곧 이어지는 수다의 폭풍에 녀석의 얼굴은 점점 창백하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악~~ 용사님! 드디어 일어나셨군요! 자아! 이제 저를 들고 저 사악한 마신을 무찌르러 가는 거예요! 근데 옷이 너무 평범한 것 같아요. 갑옷이랑 투구도 쓰셔야죠! 망토도 입으셔야 해요! 그리고 이곳을 나가 일행들을 모읍시다! 원래 진정한 용사는 자신의 위용을 돋보이게 만들 몇몇 보조 인물들과 함께 해야 하는 거예요! 용사님도 그렇게 생각하죠? 꺄하하~ 그럴 줄 알았어요. 저는 모르는 게 없거든요. 그래서 이프리트님도 이곳에 저를 봉인하실 때, 저의 지식을 칭찬하시며 장차 찾아올 용사가 반드시 기뻐할 거라고 말씀하셨다니까요? 그래서 말이에요…>>
“……”
제트기라도 달아놓은 듯 쉴 새 없이 주절거리는 말에, 이사나는 물론 옆에 있던 우리들의 표정까지 덩달아 굳어졌다. 설마 지난 몇 백 년 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이 자리에서 모두 다 몰아서 할 셈인가?
더 이상 두고 봐선 안 되겠다 싶어 나는 엄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그쯤 해 둬, 이그니스. 조용히 하지 않으면 그냥 던전에 두고 나가 버린다?”
<<헉! 너, 너무 하세요~ 엘퀴네스님은 저의 로망을 너무 몰라주시는 군요~흑흑.>>
“로망은 무슨 얼어 죽을. 수다쟁이 검을 들고 악을 평정하는 용사 같은 건 별로 멋지지 않다고. 아마 싸우기도 전에 정신적으로 지쳐 쓰러질걸? 아~ 그것도 좋겠네. 주인을 쓰러트리는 ‘마검’ 파이어 버스터는 어때? 이프리트가 참 기특하게 생각하겠다. 그치?”
<<마, 마검이라니! 싫어요! 싫어요옷~~!그런 사악한 호칭 따위~ 저하곤 어울리지 않는다고요~ 우에엥~ 엘퀴네스님 너무해~~>>
“그.러.니.까. 그런 말 듣기 싫으면 얌전히 입을 다물란 말이야. 난 내 계약자가 마검의 주인이 되는 건 별로 보고 싶지 않거든.”
<<훌쩍…아, 알았어요. 응? 그런데 방금 하신 말이 무슨 뜻이에요? 용사님이 엘퀴네스님의 계약자라니요?>>
검에 갇혀 있는 영향 탓인가? 이그니스는 정령으로서 기본적으로 느껴야할 것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맨 처음 나도 몰라볼 정도였으니 오죽하겠는가.
그러자 옆에 있던 알리사가 나를 대신하여 대답했다.
“여기 있는 이사나군이 바로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의 계약자라는 뜻이야. 정령 주제에 그런 것도 몰라?”
<<에엑? 하지만 용사님은 인간이잖아요! 이제껏 엘퀴네스님은 인간에게 소환되신 적이 없었는데?>>
“전례는 깨라고 있는 거야.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나 역시 가까운 시일 내에 트로웰의 계약자가 될 몸이라고, 에헴.”
<<흥, 희망사항이겠죠. 정령왕의 계약자가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알아요? 그런 의미에서 역시 이사나님은 용사의 조건에 걸맞으시는 분!! 그건 그렇고…아이 참~ 검속에 있으니 감각이 너무 둔해져서 탈이에요. 그런 중대한 사실을 이제야 깨닫다니.>>
“응? 그럼 검에서 꺼내줄까? 검 자체가 명검이니, 굳이 네가 들어가 있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아니, 들어가 있지 않는 편이 오히려 이사나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인 듯 모두 동조의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그니스는 그 점에 관해서만큼은 확고한 의사표시를 해 보였다.
<<그건 싫어요. 제 꿈은 위대한 용사님의 명검이 되는 거라고요. 이프리트님도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하셨고요. 블래스터보다 훨씬 더 위대한 정령검으로 이름을 떨칠 거예요.>>
“블래스터? 그건 또 뭐야?”
<<어라? 모르세요? 바람의 상급 정령 ‘진’이 봉인된 검이잖아요. 미네르바님이 만드신 거라고 들었어요. 한 번도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것 때문에 이프리트님이 얼마나 자존심 상해하셨다고요.>>
결국 이프리트는 단순한 승부욕 때문에 저 약에 쓸래도 없는(?) 정령검을 만들었다는 소리였다. 자기가 만들어 놓고서도 뭔가 이건 아니다 싶었겠지. 그래서 던전안에 봉인시켜 둔 것이 틀림없다.
아니면 자신의 검은 미네르바의 것보다 더 위대하다는 신비감을 조성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어린 녀석이라니까. 나보다 나이만 많으면 뭐해? 하는 짓은 딱 유치원생 수준인데. 미네르바는 왜 그런 검 같은걸 만들어서 녀석이 똑같이 따라하게 만들었담. 설마 블래스터인지 뭔지도 저런 성격인거 아니야?’
상상조차 하기 싫은 상황에 나는 질린 표정으로 이그니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제까지 뒤에서 방관만 하고 있던 카노스가 생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래보여도 실전에선 쓸 만 할 거야. 불의 정령의 공격력은 4대 정령 중 최고거든. 게다가 이사나가 물의 정령을 다루니 잘못해서 화재 낼 일도 없고. 킥킥.”
“으음. 두 정령이 반대되는 속성인데 괜찮을까요? 혹시 서로의 힘을 억누르는 작용을 하게 된다거나…”
“그러진 않을 걸? 그냥 일반적인 소환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이그니스는 검에 봉인된 상태잖아. 그럴 경우 순전히 검의 공격력만 강화시킬 뿐, 정령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긴 힘들지. 그냥 불 뿜는 검이 하나 생겼다고 보면 될 거야. 단지 말이 좀 많다는 단점이 있을 뿐이지.”
“…흐음. 뭐, 어차피 이프리트한테 가져다 줄 것이었느니, 쓸모의 여부는 돌아가는 길에 판단해도 늦지 않겠죠. 정 아니다 싶으면 이프리트한테 알아서 처분하라고 떠넘기면 되니까요. 그동안 애꿎은 이사나만 피곤하게 된 셈이군요. 괜찮을까나.”
“괜찮을 걸? 일행들에게 ‘마검’취급 당하고 싶지 않다면 이제부터 알아서 얌전히 굴겠지. 자기는 죽어도 성검이라고 우기는 녀석이니까.”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후부터 이그니스는 나름대로 진정된 모습을 보였다.
한번 터지면 말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여전했지만, 호들갑스럽게 떠들어서 사람들의 정신을 빼놓거나 억지를 부리는 일은 줄어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일행은 크게 만족하며 검의 합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우리가 던전을 빠져나간 것은 그로부터 잠시 후의 일이었다.
***
“자아~ 그럼 이제 그만 나가볼까? 칙칙한 지하 속에 오래 있자니 온몸이 쑤시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을 마친 카노스는 나를 바라보며 의견을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여정의 목적이 무엇이건, 일행들의 리더를 은연중에 나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 또한 이곳에 오래 있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 안고 있던 알을 가리켰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하죠? 들고 다니다 떨어트릴 것 같은데.”
“괜찮아, 괜찮아. 마족의 알은 부화 직전이 되면 겉껍질이 오리하르콘 방패보다 단단해지거든. 어지간한 외부충격에는 깨지는 일이 없을 거야. 만약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금이 간다면, 그건 안에서 아기가 나오려 한다는 뜻이니까 주의해줘.”
“그렇군요. 그런데 마족의 아기는 뭘 먹고 자라요? 인간처럼 우유를 먹여야 하나요?”
“아니, 마족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돼. 대신 어른 마족이 일정한 시간에 마력을 부어줘야 하지. 그래서 데르온이 필요한 거야. 하루 3번씩 마력을 주는지 잘 감시해라.”
으음. 이것으로 데르온은 완벽한 ‘유모’당첨인 셈인가? 새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자 데르온은 이미 포기했다는 듯이 허무한 웃음을 흘렸다.
모습을 보관대,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알에서 태어날 아이의 뒤치다꺼리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마신이 직접 그에게 임명한 일이 아니던가.
‘설마 나도 그렇게 되는 건 아니겠지?’
문득 떠오르는 불길한 상상에 나는 살짝 어깨를 떨었다. 어쩌면 나는 감당할 수 없는 화근을 떠맡은 걸지도 모른다. 태어날 아이가 마신의 성격을 닮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하지만 내가 불안해하든 말든, 카노스는 상큼하게 웃으며 일행을 던전 밖으로 이동시켰을 뿐이었다.
파아앗-
붉은색의 빛이 터졌다고 느낀 순간, 우리는 어느새 던전의 입구에 서 있었다. 처음엔 어안이 벙벙한 표정만 하고 있던 일행들은, 지하와는 다른 더운 공기와 강렬한 햇살을 보며 그때서야 안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어림잡아도 이틀가까이 지하에만 있었던 탓인지, 화창하게 내리쬐는 햇살이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특히, 지난 몇 백 년 동안을 땅속에 갇혀있던 이그니스의 반응이 가장 폭발적이었다.
<<아아! 어쩐지 후끈한 이 온도! 살랑이는 모래바람!! 드디어 밖에 나온 거군요! 지난 시간동안 이 순간만을 고대하고 있었어요. 이게 얼마만의 햇빛이던가! 아아아~ 이프리트님! 기뻐해 주세요! 드디어 제가 해내고 말았어요! 저를 그 어두운 감옥에서 끌어내줄 용사님을 찾았다고요!>>
이때만큼은 누구도 떠드는 녀석을 제지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밖에 나온 감동을 마음껏 느끼게 내버려둘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밝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일행은 곧 이어지는 카노스의 말에 단숨에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냐하하~ 어때? ‘일주일’ 만에 햇빛을 본 소감이? 이그니스만큼은 아니어도 굉장히 감회가 새로울 것 같은데.”
“…에? 일주일?”
“응. 몰랐어? 환상마법에 걸린 이후로 꼬박 일주일 지났잖아. 그동안 너희들 아사(餓死) 시키지 않으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다고. 나 착하쥐?”
“……”
그건 전부 당신 탓이잖아!
일행들은 차마 그렇게 쏘아붙이지 못하고 부들거리는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무리 항의해봤자 상대가 저래서야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일주일이나 후작과 연락이 끊긴 셈이 되 버린 이사나는 낭패한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어떡하지…형님이 굉장히 걱정하고 계시겠는 걸?”
“어쩔 수 없지. 지하에선 통신구가 작동하지 않았다고 변명하거나, 고장 났었다고 할 수밖에. 일단 라피스가 알아서 잘 둘러대고 있을 테니 큰 소란은 없을 거야.”
“음…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괜찮을 거야. 그나저나 이제부턴 어떻게 하지? 시벨이야 처음부터 우리일행이었고, 데르온은 알 때문에 우리랑 함께 간다고 해도…알리사,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다시 사막에 들어가긴 그러니, 가까운 마을까지 데려다 줄까?”
내 물음에 알리사는 커다란 주황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사나는 무시하도록 하자.)
잠시 후 명랑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보다 질문이 있어. 전에 이사나씨는 다른 제국의 사람이라고 했었지? 카터스라고 했던가?”
“아, 그, 그랬나?”
“응, 그랬어. 그래서 가문을 밝히는 게 꺼려진다고 했었잖아. 이래봬도 나 역시 귀족인데 그곳에 가도 괜찮은 걸까? 상관없다면 나도 정령왕님을 따라가고 싶은데.”
우물쭈물 말끝을 흐리며 표정을 살피는 알리사의 모습에, 나와 이사나는 순간 난감한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내가 정령왕인 것을 숨겼던 일로 서운한 감정이 있는 상태에서, 사실은 이사나가 카터스의 제국민이 아닌, 솔트레테의 황제라는 말을 꺼내기가 애매했던 것이다.
그러나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나는 과감히 그녀에게 모든 진상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음, 미안 알리사. 이제부터 우리와 여행을 함께 할 생각이라니 말해주는 건데, 일부러 그런 게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 사실은 우리가 너한테 한 가지 더 숨긴 사실이 있었어.”
“에? 사제님이 엘퀴네스였다는 사실 말고 다른 뭐가 또 있는 거야?”
“으응. 실은 이사나는 카터스의 제국민이 아니야. 혹시 솔트레테라는 제국을 아니?”
“그거야 당연하지. 대륙에서 유일하게 마신을 국교신으로 인정하고 있는 나라잖아. 얼마 전에 어린 황제를 내쫓고 섭정왕인 숙부가 황권을 쥐었다고 해서, 알폰프 황실이 얼마나 시끄러웠다고.”
“그래? 그렇다면 설명이 쉽겠구나. 이사나가 바로 그 제국의 황제야.”
“아, 그런 거였어? 진작 말을 하지…가 아니라! 뭐, 뭐라고?!!”
아아, 역시 놀랄 수밖에 없나?
경악으로 물든 알리사의 얼굴을 보며 나와 서로 어색한 시선을 교환하던 이사나는, 결국 자신이 감당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는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이사나 란느 솔트.’ 이게 내 본명이야. 처음부터 밝혔어야 했지만,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면 좋을 게 없을 것 같아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어. 이제 와서 이런 말 해봤자 변명밖에 되지 않겠지만.”
“그, 그런? 솔트레테의 황제가 은발에 금안이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아아. 이건 폴리모프 마법으로 바꾼 거야. 쫓기는 입장이라 정체를 들키면 안 되었거든. 아마 우리와 함께 할 셈이라면, 알리사 너도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을 거야. 특히 지난번에 숙부가 너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맙소사…. 당신은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야? 엘퀴네스의 계약자에 정령검의 주인, 게다가 이번엔 한 제국의 황제라고?”
알리사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이사나를 바라보았다. 정체를 숨겼다는 사실에 화내기 보다는, 갈수록 늘어나는 그의 능력(?)에 놀라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사나는 정말로 용사의 조건에 합당한 녀석일지도?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크게 달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곧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저 운이 좋았던 거야. 이래저래 변명해도 나는 결국 자신의 자리 하나 지키지 못한 못난 녀석밖에 되지 않으니까.”
“흐으음. 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중요한건 현재라고 생각하는데. 무엇보다 이제 당신은 정령왕의 계약자잖아? 그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시 원래 자리를 되찾을 수 있겠네. 설마 이곳에 온 이유도 그런 과정중의 하나인 거야?”
“으응.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그러자 알리사의 두 눈이 놀라울 정도로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덥썩! 허락도 없이 외간남자(이사나)의 손을 잡은 그녀는 곧 흥분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도 갈래!”
“에?”
“나 원래 이런 모험 좋아해! 황제의 일행이라니 뭔가 상당히 근사하잖아?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일이었어! 나도 갈래. 응? 데리고 가주라!”
“아하하…저기, 알리사. 이건 생각만큼 재미있는 일이 아닌데…”
“나도 어렵다는 것쯤은 알아! 어차피 이런 일이 아니었어도 당신들 따라갈 생각이었으니까 그냥 동행하게 해 줘. 아니면 이렇게 연약한 소녀를 설마 혼자 내버려둘 셈이야? 이사나씨,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해!”
“으윽…”
사랑에선 먼저 반한 사람이 죄인이라고 했던가. 결국 이사나는 붉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뭐, 굳이 알리사가 떼를 쓰지 않았더라도, 녀석으로서는 어떻게든 설득해서 데려갈 생각이었겠지만 말이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카노스는 흥미 있는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헤에~ 제왕의 별과 그의 반려인가. 천생연분이로구만.”
“응? 그게 무슨 소리에요, 카노스?”
“아~ 별 거 아니야. 인간들 중에선 가끔씩 별의 운명에 따라 정해진 반려가 생기는 경우도 있거든. 가까운 예를 들자면, 저 소녀는 누가 되었든 ‘제왕’이 될 자의 반려가 될 운명이야. 그리고 이사나군은 어떤 상황이 닥치든 ‘제왕’이 될 수밖에 없는 별을 타고났지. 그럼 문제! 이 둘이 만나면 뭐가 될까요?”
“부부(夫婦)…인 겁니까.”
“정답! 뭐, 순조롭게 이뤄진다는 보장이 있어야 하겠지만 말이야.”
그건 또 무슨 소리?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카노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사실 이번 시대의 제왕의 별은 두 개거든. 그러니까 저 소녀가 굳이 이사나군과 맺어진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겠어?”
“헉? 그럼 삼각관계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건가요?”
“충분히 가능하지. 아마 피 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지도 몰라. 냐하하하~ 왜, 여기 알폰프 제국과 카터스의 사이가 나빠진 것도 바로 그 반려 때문이었잖아. 돈 주고도 못 볼 구경일 걸? 흐흐”
“맙소사…”
어째 이사나는 겪는 일마다 다 이렇게 순탄치가 못한 걸까? 나는 한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앞으로 다가올 녀석의 고난을 탄식했다. 이거 미리 알리사한테 뇌물이라도 바쳐야 하는 거 아니야?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나를 보며 카노스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킥킥거리고 웃었다. 그리곤 앞으로 잘 해보라는 듯 내 어깨를 툭툭 어깨를 두드리며, 모두를 향해 이제 그만 작별해야 할 시간임을 알렸다.
“그럼 나는 이 길로 다시 루카로 변해 마계에나 가봐야겠다. 다들 다음 기회에 보자고.”
“벌써 가시는 거예요?”
“응. 시간을 너무 지체하면 곤란하거든. 근데 말이야, 작전 실패 했다고 마왕이 나 때리면 어쩌지? 아픈 건 싫은데, 냐하하하~”
“…때린다고 맞으실 것도 아니잖습니까.”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사람은 데르온이었다. 가늘게 뜬 그의 눈동자가 ‘어디서 이런 사기를~!’이라고 외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카노스는 이번에도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안 들려, 안 들려~ 아, 요즘 왜 이렇게 귀가 안 좋아졌는지 몰라.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마족씨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모르겠는 걸? 암튼 엘, 손 내놔봐.”
“에? 손이요?”
왜 그런 건지 이유도 묻지 않고 무심코 손을 내민 벌 이었을까? 나는 다음순간 이어지는 카노스의 행동에 그대로 경악하고 말았다.
마치 이곳의 귀족남자들이 여자에게 하듯, 그가 허리를 굽혀 손등에 키스를 했기 때문이다.
“~~!!”
이게 대체 뭔 짓입니까!! 순식간에 경직된 일행들을 보며 카노스는 특유의 능글거리는 표정으로 씨익 미소 지었다.
“내 문장을 새겼으니까, 앞으로 연락할 일이 있을 때는 이곳에다 기운을 집중하면 될 거야. 한마디로 통신용 서비스~랄까.”
“아, 그, 그런 거예요? 그런데 문장을 새기는 방법이…꼭 이런 식이어야 하나요? 전에 엘뤼엔은 그냥 손만 가져다 댔었는데. 혹시 신마다 다른 거예요?”
“아니! 방법은 상관없어. 근데 어쩐지 너한테는 이런 식이 어울릴 것 같아서 말이지~ 냐하하하! 꼭 프로포즈 받은 공주가 된 것 같지 않아? 이런 거 은근히 기뻐하는 여자들 많던데.”
“…전 남자입니다만.”
“에이~ 뭘 그런 걸 신경 쓰고 그래. 어차피 정령은 무성인데. 나중에 신 될 때 여신을 선택하면 되잖아? 나도 원래 여성체였는데 남신이 된 거라고. 하하하하”
“에엑?”
“헉.”
“…쿨럭.”
지금까지 들었던 말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저 신이 한때 여성체였다고? 순식간에 창백해진 얼굴로 ‘믿을 수 없어!’를 외치고 있는 일행들을 보며 카노스는 자랑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이것이 바로 정령계의 신비지. 어때? 뒤바뀐 성별체험! ‘당신도 할 수 있다’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아?”
“아니, 사양하겠습니다. 전 이대로가 좋아요.”
“흐~음. 잘 어울릴 텐데 아쉽네. 뭐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봐. 그럼 난 이제 가볼게. 다음에 볼 때까지 알 잘 부탁 한다~”
생글 웃는 표정을 마지막으로 카노스의 모습은 순식간에 공중에서 분해되었다. 시간을 두고 접근했던 만남과 달리 엄청나게 빠른 작별이었다.
그가 가고나자 일행들은 모두 힘 빠진 얼굴로 하나둘씩 자리에 주저앉았다. 왠지 엄청난 폭풍이 한바탕 주위를 휩쓸고 지나간 느낌이랄까. 좌절하는 데르온, 한숨 섞인 알리사의 목소리가 차례로 이어졌다.
“마신에 대한 내 환상이…환상이…크흑!”
“하아, 나 이제 어떤 신도 믿지 못할 것 같아. 무섭고 위압적인 존재인건 인정하지만…너무 태도가 가볍잖아. 그나저나 아까 ‘나도’라고 했었지? 그럼 마신도 한때 정령왕이었다는 소리야?”
“아, 으응. 정령왕은 나중에 신이 될 수 있다고 들었어. 그런데 그건 왜?”
“왜라니! 그럼 트로웰도 여신이 될지 모른다는 소리잖아! 안 돼! 절대 안 돼! 그건 무조건 반대라고! 내가 목숨을 걸고 말리고 말겠어!”
그러자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던 이그니스가 이죽거리며 대답했다.
"흥! 어차피 그때까지 살아있지도 않을 거면서 무슨 수로 막는담? 아아, 이래서 인간의 여자들이란."
“뭐얏! 너 지금 말 다했어?”
"흐흥~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나본데, 트로웰님은 인간에게 관대한 편이긴 해도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요. 그렇게 혼자 열내봤자 불쌍해지는 것은 당신이 되지 않겠어요? 안 그래요, 용사님? 용사님도 그렇게 생각하죠?"
“그게 무슨 헛소리야! 말해봐, 이사나씨! 이사나씨도 정말 그렇게 생각해?”
“에? 아, 아니 그게…”
이사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검과 알리사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선 트로웰과의 관계 따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그렇게 대답했다간 그녀의 미움을 살 테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적당히 거짓말로 둘러대며 두 사람(?)의 마음을 달래기엔 요령이 부족했던 것이다.
‘쯧쯧쯧. 그러고 있다가 나중에 다른 녀석에게 알리사를 뺏겨도 난 모른다, 이사나.’
자립하고 싶다는 마음은 기특했지만, 아직은 여러 면에서 서툴기만 한 녀석이었다. 피식 웃은 나는 그를 대신해 이어지는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자자, 그만들 해. 이사나가 곤란해 하잖아. 언제까지고 이곳에 있을 수는 없으니 이제 슬슬 이동해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이 쓸모없는 검이 날더러…”
"뭐라고욧? 내가 어디가 어때서 쓸모가 없다는 거예요? 당신보다야 훨씬 이용가치가 높단 말이에요! 아무 능력도 없는 인간주제에~!!"
“흥! 이래봬도 나는 땅의 중급 정령사라고! 오히려 너보단 내가 더 도움이 될 걸?”
"뭐가 어쩌고 어째요? 겨우 중급정령 가지고 잘난 척을!!"
“그만! 이그니스! 용사의 검이 되고 싶다면, 그의 일행들을 무시하는 발언은 하지 말아야지.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할 거면 차라리 검에서 나와! 차라리 정령으로서 담판을 짓는 게 낫겠다. 그리고 알리사, 너도 이제 그만해. 앞으로 가야할 길이 얼만데 자꾸 이렇게 싸우기만 하면 어떻게 해?”
엄한 내 표정에 이그니스는 입을 다물었고, 알리사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진정되자, 데르온의 감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호오, 엘퀴네스님. 애보기에 소질이 있으실 줄은 몰랐는데요? 과연 카노스님이 괜히 알을 맡긴 것이 아니었군요.”
“에?”
“마족의 아이들은 기가 세서 내심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입니다. 저야 어디까지고 ‘주군’을 보필하는 입장밖에 되지 못하니 육아라곤 해도 제대로 할 수 없거든요. ‘대부’이신 엘퀴네스님의 힘이 절실히 필요할 것 같군요.”
“그거…지금 나한테 ‘애보기’를 떠넘기겠다는 소리?”
“꼭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하, 그나저나…괜찮으시겠습니까? 서로 다른 신의 문장을 두 개나 가지게 되셨는데. 손등은 눈에도 잘 띄는 부위이기도 하니, 장갑 같은 것으로 가리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의 말에 나는 불길한 표정으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그 위에는 하얀 둥근 테 안에 한 쌍의 새하얀 박쥐의 날개가 그려져 있었다.
으음, 이건 설마…
“…배트맨?”
“네? 그게 뭡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예전에 봤던 어떤 문장과 비슷해서요. 하하하. 물론 이쪽의 날개가 좀 더 화려하고 멋있긴 하지만…으음. 확실히 눈에 띄네요. 역시 장갑을 구해야 할까나.”
“그러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저와 함께 다니시니 마신의 사제라고 둘러대셔도 상관은 없으시겠지만, 그랬다간 엘뤼엔님이 가만히 두지 않으실 것 같네요.”
“그, 그렇겠죠? 하하…”
아무튼 내 입장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두 신들 때문에 이래저래 착용할 물건만 많아진 나날이었다. 그러자 시벨리우스가 뭔가 생각난 듯이 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 나한테 적당한 게 있어. 줄까?”
“적당한 거?”
“응. 엘한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잠시 후 그가 보여 준 것은, 한쪽으로 된 옅은 하늘색의 비단 장갑이었다. 팔목 전체를 감싼 길이에 손등까지만 덮는 모양이었는데, 착용할 때의 감각이 전혀 없어서 행동하는데 불편함은 없을 것 같았다.
“헤에, 좋다. 이런 건 어디에서 났어?”
“아, 그러니까 예전에 여행할 때 구한 건데 그게 언제였더라?…으음. 아무튼 인어의 비늘로 만든 거야. 장신구용이라 처음부터 한 짝 밖에 없는 건데, 나한텐 안 어울려서 그냥 가지고만 다녔지. 비싸서 남 주기는 아까웠거든.”
“그런데 이걸 나한테 줘도 돼?”
“엘은 상관없어. 남이 아니잖아? 마침 문장이 새겨진 손과 맞는 쪽이라 다행이다. 푸른 머리랑 잘 어울려.”
흡족한 표정의 시벨을 보며 나 또한 고맙다는 뜻으로 미소 지었다. 그 순간 이사나와 함께 주변을 둘러보던 알리사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저게 뭐지? 저거 사람 아니야?”
엘 일행이 정체불명의 남자를 주운(?) 그 시각, 라피스는 저택 홀에 놓여진 소파에 앉아 무료한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전 이곳으로 합류한 이사나의 기사들과 용병단들은 앞으로 일어날 대전(大戰)에 대한 회의를 하느라 모두 자리를 떠나 있는 상태였고, 지금은 그 혼자 저택을 지키는 참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에이프릴과 단 둘이었다. 이미 여동생의 고집을 말릴 수 없다고 판단한 후작이 알아서 그 두 사람을 붙여 두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라피스를 인정했다는 뜻은 아니다.)
남자라면 연인과 단 둘이 남은 상황을 즐거운 기분으로 만끽했겠지만, 지금의 라피스는 무언가 상당히 재미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한참이나 천장을 응시하던 그의 입에선 바쁘게 돌아가는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 내뱉어지고 있었다.
“심심해…….”
그랬다. 그는 심심했다. 언젠가 마나의 역행으로 피를 토한 이후, 대공에게 ‘허약하기만 할 뿐인 쓸모없는 마법사’로 인식 된 라피스는 생각보다 활약할 기회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스스로도 별 달리 도와주고 싶은 의욕도 없었기 때문에, 처음 에이프릴을 어느 패륜아로부터 지킨 이후론 늘 이렇듯 빈둥거리는 나날이 반복되어 왔던 것이다.
처음의 ‘유희니까’라는 심정으로 버티던 것도 잠시. 그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에이프릴에게서는 그가 이런 무료한 심정을 달래면서까지 참고 있을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이미 몇 번이나 말했다 시피 그녀는 단순한 유희 상대 외에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엘 옆에 붙어 있는 건데…”
연인을 상대로 한 여자의 독점욕은 무서울 정도로 강하다. 순결하고 착하기만 했던 에이프릴 역시 그 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혹시나 그가 다른 여인에게 눈을 돌릴 새라, 그녀는 거의 감시하다시피 라피스의 옆에 달라붙어 다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그녀에게 책임질만한 어떤 행동을 했던 것도 아니었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일 정도에 신경 쓸 사고방식의 소유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라피스로선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이번 일로 그가 깨달은 것은 고분고분하기만 한 상대는 의외로 재미없다는 사실 하나 뿐이다. 이래서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한다는 것일까?
‘하긴, 내가 언제 제대로 된 유희를 즐길 시간이 있었어야지. 틈만 나면 엘퀴네스를 소환하기 바빴고, 레어에서 지낸 대부분의 시간이 엘퀴네스를 강제로 제압하기 위한 마법 연구 뿐 이었으니까.’
그토록 오랜 시간을 공들여 계약에 성공한 엘퀴네스를 쉽게 놔두고 돌아선 이유는 간단했다. 그 또한 보통의 드래곤처럼 정상적인(?) 유희를 한 번 즐겨보고 싶었던 것이다.
언제고 자신보다 5백 살 위의 배다른 형제가 거들먹거리면서 자랑하던 말을 그는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었다.
<크하하하! 라피스 라즐리! 그렇게 잘난 척 하더니, 이제껏 유희하나 즐기지 않고 뭐했냐? 난 벌써 결혼만 5번에 애까지 줄줄이 20명은 봤다고! 이런 게 진정한 드래곤의 인생이 아니고 뭐겠어?
그깟 정령왕이 뭐라고 속성에도 맞지 않는 존재에 매달리는지. 네 꼴이 진정 한심해서 봐줄 길이 없구나! 넌 레드드래곤의 수치야, 임마! 내가 너와 같은 레드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줄 모른다!>
물론 그 이후로 라피스가 그를 다시 볼 일은 없었다. 스스로도 위험했다고 느꼈는지 모습을 숨긴 채 나타나질 않았으니까.
라피스는 새삼 떠오르는 형제의 모습을 기억하며 다시금 이빨을 갈았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이런 한심한 일에 끼어든 일은 전부 그 녀석 때문이었다.
“뿌득…메세테리우스, 너 이 자식. 어디 만나기만 해봐. 당장 죽여 버릴 테다. 감히 내 앞에서 그 멍청한 입을 함부로 놀리다니.”
나이로 치차면 그는 어디까지나 동생이었지만, 드래곤의 세계에서 서열을 구분하는 방법은 어디까지나 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메세테리우스는 라피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또래의 모든 드래곤들이 그랬다. 그들로서는 오히려 그가 물의 정령왕을 소환하기 위해 레어에만 처박혀 지내던 게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아~ 심심해~ 심심해에~~할 일도 더럽게 없네, 정말.”
“어머, 라피스님. 그런 경박한 말씀을. 무료하시다면 저와 함께 산보라도 나가시는 게 어때요? 정원에 새로운 꽃이 한가득 피었답니다.”
때마침 정원에서 꽃을 손질하던 에이프릴이 사프란을 한가득 안고 홀 안으로 들어섰다.
어깨를 거의 드러낸 옷차림과 뽀얀 하얀 피부, 굴곡진 가슴과 잘록한 허리선이 여느 남자가 봐도 한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드래곤의 특성상 질릴 정도로 미인에 익숙한 라피스의 눈에는 특별한 감흥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에이프릴을 항상 그것이 불만인 듯 했다. 겉으로 드러내놓고 서운한 감정을 표출한 적은 없었지만, 자신에게 무심한 라피스의 눈동자를 보며 불안한 표정을 짓곤 했다.
하지만 오히려 입을 열어 따지고 드는 편이 그의 흥미를 돋우는 쪽이라는 걸 에이프릴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
‘또야, 저런 감정 없는 눈동자…라피스님은 이상해. 나를 향해 아름답다고 달콤하게 속삭이면서도 정작 반한 시선은 아닌걸. 정말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 걸까?’
처음엔 단순히 숨이 멎을 것 같이 아름다운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그리 흔하지도 않은 마법사에다, 귀족의 예법에도 익숙한 듯 보여 더더욱 호감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자신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존재가 될 것임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상대방에 대한 감정을 믿을 수가 없다니, 이 무슨 불행한 일일까. 에이프릴은 진심으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여전히 맑게 웃는 얼굴로 라피스를 달랬다.
“밖에 나가서 바람을 쏘이면 답답한 마음이 조금 덜어질 거예요. 요즘 너무 저택 안에만 계셔서 그런 듯 하니 저와 함께 나가요, 예?”
“흐음, 어쩐 일입니까? 늘 제가 밖을 나가는 일을 꺼리시던 그대가 자신해서 가자 하니 이상한 일이군요.”
“그거야 오라버니와 마주치면 항상 소동이 벌어지곤 하니까…저어, 혹시 그래서 불쾌하셨었나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아무튼 유감스럽게도 저는 지금 외출할 기분이 아니군요. 사실 이렇게 할 일 없이 얌전히 앉아있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어서요. 이제 슬슬 가볼 때가 된 것 같기도 하고요.”
“가볼 때라니요? 라피스님! 설마 이곳을 떠날 생각이신가요?”
후두둑.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에이프릴은 놀란 표정으로 들고 있던 꽃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라피스는 허리를 굽혀 그녀의 발치에 떨어진 한 무더기의 사프란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아…!”
뒤 늦게 서야 그것을 눈치 챈 에이프릴이 황망한 표정으로 얼른 따라서 집으려 했지만, 이미 꽃은 라피스의 손에서 하나의 다발을 완성한 상태였다.
천천히 일어나 그것을 다시 에이프릴의 품에 안겨준 라피스는 평소처럼 빙긋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 난 이런 유희엔 어울리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별거 아닙니다. 그저 그대에게 내가 어울리지 않는 상대라는 것 뿐. 에릴, 그대는 항상 이 꽃과 같이 우아하게 있을 테지요.”
“그, 그렇지 않아요! 라피스님과 함께라면 그것이 저 자신을 버리는 일이라도 기꺼이 하겠어요. 설마 제 마음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글쎄요.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라고 해두지요.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파삭! 에이프릴의 품에 안겨있던 꽃들이 한순간에 부서져 공중으로 흩어졌다. 바람도 없이 주변으로 휘몰아치는 꽃잎들을 망연자실한 눈으로 보며, 그녀는 곧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 모습을 본 라피스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대는 곧 나를 감당하게 될 수 없을 테니까.”
“!!”
“에릴, 그대는 분명히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인간 중에서 그대만큼 아름다운 존재를 찾아보기는 힘들 겁니다. 그건 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요. 하지만 그것뿐. 아무래도 나에겐 아름답기만 한 꽃은 장식외의 가치가 없는 모양입니다.”
“어, 어떻게 그런 말을?”
에이프릴의 두 눈엔 금새 이슬 같은 눈물이 서렸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그것을, 라피스는 다정한 손길로 천천히 닦아 주었다. 그러나 그런 순간까지 그의 눈빛에 서린 차가운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진심이 아닌 상대를 오래 붙들어 놓을 만큼, 내 자신이 양심 없는 녀석은 아니라서 말입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친척이 가만히 두려하지 않을 테니, 이쯤에서 그만두도록 할까요?”
“친…척 이라면 폐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사나 황제폐하를? 설마 그 분이 당신께 어떤 말이라도 한 건가요? 헤어지라고 명령하셨어요? 그래서 제게 지금 이러시는 건가요?”
에이프릴의 입장에선 라피스는 어디까지나 약간의 재능이 있는 마법사일 뿐이었다. 황제의 권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니, 이사나에게 어떠한 협박이라도 받은 것이라고, 그녀는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라피스는 피식 웃으며 그 말을 가볍게 부정했다.
“이 세상에서 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제 자신뿐입니다. 다만 귀찮은 것이 싫을 뿐이에요. 당신의 친척이 화를 내면 덩달아 그 녀석까지 나를 미워하게 될 테니까.”
“그, 그게 무슨…”
“에릴, 그대는 아름다우니 금방 다른 연인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대와 평생을 약조할 이는 내가 아니에요. 이번만큼은 오라버니의 충고를 듣는 게 좋겠군요.”
“거, 거짓말. 거짓말이시죠? 오라버니가 자꾸만 험한 말을 하셔서 마음이 상하신 거지요? 그래서 저를 떠나시는 거지요? 평생을 약조할 이가 라피스님이 아니라니, 그럴 리가 없어요. 지금까지 제 마음을 이렇게 흔들어놓은 사람은 당신밖에…”
“꽃은 꽃답게 우아하게 있는 편이 좋습니다, 에릴. 세상 어느 꽃도 떠나가는 나비나 벌을 잡지는 않아요. 우리의 이별에 굳이 이유를 붙여야 한다면, 그건 서로 살아갈 이유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해 두지요.”
“서로…살아갈 이유?”
투둑. 가는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졌다. 절망적인 얼굴로 연신 몸을 떠는 에이프릴을 살짝 끌어안으며 라피스는 달래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대는 안주하는 사람, 나는 방랑자입니다. 우리는 너무 이 생활에 안식해 있어서, 잠시 전혀 반대의 생활을 하는 존재를 동경했던 겁니다. 하지만 이제 다시 원래의 길을 걸을 때가 왔습니다.”
“…잔인하신 분. 그런 식의 말로 저를 놀리시는 건가요? 처음부터 당신의 나를 향한 눈빛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요. 그랬으면서…그랬…으면서, 흐흑…”
“맞습니다. 반쯤은 장난으로 시작했었지요. 하지만 에릴, 당신에게 끌렸던 것은 사실입니다. 결코 이 감정을 오해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첫사랑은 원래 아플수록 나중에 기억할 때 아름다운 법입니다.”
“으흐흑…언제고 같이 있어주실 것처럼 말씀하시더니… 그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인가요? 잔인하신 분. 달콤한 말로 현혹하고 여인의 마음을 희롱하는 악마셨군요. 어떻게 이럴 수가! 어떻게!!”
타악!
거칠게 라피스의 품을 벗어난 에이프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홀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미 산산 조각나서 발치에 떨어진 사프란의 향이 은은한 향을 뿌리고 있었다.
점점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에이프릴의 등을 보며 잠시 가만히 서있던 라피스는 곧 사정없이 얼굴을 찌푸리며 쓴 입맛을 다셨다.
“젠장, 내가 왜 이따위 닭살 돋는 대사를 남발해야 하는 거지? 아무튼 귀족여자들이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 차라리 뺨을 한 대 맞는 게 더 낫겠다.”
확실히 고분고분한 상대는 취향이 아니다. 라피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거칠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홀 한 쪽의 기둥에 서있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업자득이지. 그녀는 인간들 중에서도 정숙하기로 이름난 여인이야. 지금의 상처를 두고두고 수치로 여기게 될 거다. 앞으로 이 집안과 얽히게 되면 좀 골치 아플걸? 여자의 한은 무섭다고.”
“뭐~야, 트로웰. 엿 보는 건 나쁘다는 것도 몰라?”
그러자 트로웰은 생긋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엿보지 않았어. 아까부터 당당히 구경하고 있었는데 눈치 채지 못한 건 너잖아? 아무튼 희대의 장면이었다. 천하의 라피스가 여자를 달래는 꼴이라니, 라이칸이 봤다면 당장 기절했을 걸? 드래곤의 이중성은 역시 무섭다니까.”
“시, 시끄럿! 아버지한테 말하기만 해! 그리고 이중성이라고 하면 너도 만만치 않잖아! 친절한 가면으로 남의 뒤통수 칠 궁리나 하는 주제에.”
“…?…그런 적 없어. 난 대놓고 괴롭히긴 해도 남의 뒤에서 치진 않아.”
“하! 그러셔? 그럼 엘퀴네스에게 보이는 그 과분할 정도로 다정한 태도는 무엇일까? 마치 제 동생이라도 되는 마냥 챙기고 돌던 게 과연 평소의 너라고 할 수 있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엘이 너희들과 같아? 그 녀석은 이 세상에 단 4명밖에 없는 내 가족이야. 그런 존재에게까지 냉담하게 굴 정도로 삭막한 성격은 아니라고.”
“전의 엘퀴네스한테는 그러지 않았던 주제에.”
“그건 전대의 엘퀴네스가 워낙 삐딱했으니 그렇고. 미네르바나 이프리트하고는 나쁘지 않았잖아?”
“아아, 그렇겠지. 특히 누구누구라면 목숨이라도 아깝지 않게 굴었지, 아마?”
꿈틀. 미간을 살짝 찌푸린 트로웰의 두 눈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가운 빛을 띄우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잘못 건드렸다는 걸 깨달은 라피스는 순순히 두 손을 살짝 들어 항복 선언을 해보였다.
“…아까부터 자꾸 비꼬는 이유가 뭐야, 라피스? 그동안 안에만 있어서 스트레스를 받은 건 이해하지만, 나를 향해 화풀이를 하는 건 용납 못해. 그런 버릇없는 태도는 누구한테서 배웠지?”
“알았어. 그만 할게. 젠장, 이러면서 이중성이 아니래. 아무튼 정령왕이란 하나같이 성격들이 글러먹었다니까.”
“엘은 아니잖아?”
“그 녀석도 속으로는 꼬인 부분 많을 걸? 그러고 보니 어떻게 됐어? 요즘 녀석들과 연락이 안 된다고 후작이 벌벌 떠는 것 같던데.”
“네가 지금 그걸 태연하게 물어볼 때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엘의 상황을 알아볼 수 있으면서. 하긴, 그런 친절한 성격이었으면 처음부터 그한테서 떨어지지도 않았겠지. 아무튼 조금 전에 연락이 왔어. 무사히 던전에서 나온 모양이야. 곧 돌아올 거라고 하더군.”
“흐음. 과연. 얼마 전에 찝찝한 기분이 들었던 건 역시 기우였던 건가? 하긴, 정령왕이 겨우 그 정도 던전에 위험할리는 없겠지. 자아~ 그럼 나도 이제 가보도록 할까?”
“가다니? 어딜?”
의아한 듯 바라보는 트로웰의 얼굴에 라피스는 당연한 걸 묻는 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원래 있어야 할 곳.”
- 부탁 -
어쩌면 이사나의 라이벌 일지도 모르는 남자는 일단 합류하기로 결정된 상태에서, 나는 단숨에 카이테인씨가 머무는 장소로 일행들을 이동시켰다.
‘언령’의 이동은 장소의 구체적인 정보를 알지 못해도, 그곳에 알고 있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으면 가능했기 때문에, 우리는 곧 어렵지 않게 낡고 초라한 작은 집에 들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건 거리를 갑작스럽게 이동한 부작용인지, 나를 제외한 다른 일행들은 비틀거리며 모두 격한 기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이 이동방식은 정령왕외에는 견디기 힘든 압력을 주는 모양이었다.
“어, 어지러워. 쿨럭-쿨럭!!”
“우욱! 너무해, 엘! 이런 거라면 진작 경고를 해주지…”
“하하, 미, 미안. 사실 나 외의 다른 사람까지 함께 이동시켜본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 다들 괜찮아?”
어설프게 웃으며 묻는 말에 일행들은 원망스러운 표정을 감추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클모어의 후작령에 갈 때는 ‘걸어서’가자고 부탁하는걸 보니, 어지간히 충격이 크긴 컸던 모양이다.
잠시 난감한 얼굴로 일행들의 상태를 살피던 나는 곧 뒤에서 느껴지는 따끔할 정도로 강한 시선에 고개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침대 한켠에 앉아 누군가를 간호하고 있던 카이테인씨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엘퀴네스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기척도 없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으니 놀라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게다가 그 중에 아는 사람이 섞여있다면 더더욱.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시큐엘을 보내 연락을 해두는 건데. 속으로 잠시 후회한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오랜만에 만난 동료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카이씨.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하하하…”
“이, 이게 어떻게 되신 겁니까? 갑자기 나타나시다니…던전에서의 일은 모두 마치신 겁니까? 게다가 이 사람들은?”
“아~ 던전에 가게 되면서 합류하게 된 사람들이예요. 어쩌다보니 계속 일정을 함께 하게 돼서 같이 오게 됐거든요. 모두들 인사 해, 이쪽은 엘뤼엔의 사제인 카이테인씨. 원래 던전까지 함께할 파트너였는데, 중간에 일이 생겨서 나대신 수고를 해주셨어.”
“헤에? 엘뤼엔의 사제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알리사노 알 드레프라고 합니다.”
알리사를 시작으로 일행들은 모두 한마디씩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덕분에 한참동안 정신없이 인사를 주고받던 카이씨는 마지막으로 이사나를 향해서 어색하게 웃음 지어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이사나님. 별 탈 없이 무사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카이씨도요.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니 정말 기쁘네요.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지는 않으셨는지…”
“하하 괜찮습니다. 다만 지금은 환자가 잠들어 있는 상태니 조금만 주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저기 누워계신 저분은?”
카이씨가 가리킨 것은 시큐엘의 등에 업혀 고이 잠들어 있는 정체불명의 남자였다.
아직 깨어나려면 한참이나 남은 듯, 좀처럼 눈을 뜨지 않는 남자를 바라보며 나는 간단하게 지난 일을 설명했다.
“던전 앞에서 쓰러져 있던 사람이에요. 일단 죽어가는 사람을 혼자 두고 오기가 뭐해서 데리고 오긴 했는데, 깨어나면 자세한 상황을 알아봐야죠.”
“그렇군요. 그럼 우선 제가 사용하는 간이침대에 눕히도록 하죠. 몸에 이렇다 할 상처가 없는걸 보니 이미 엘퀴네스님께서 치료하신 모양이군요.”
“네, 지금은 단순히 잠들어있을 뿐이니 금방 일어날 겁니다. 그러고 보니 사기꾼 엘…아니, 엔딜은 어디 갔어요? 아까부터 보이질 않는데. 아, 혹시 누워있는 아이가 녀석의 동생인가요?”
8평도 안되어 보이는 조그만 집안엔 침대에 누워있는 어린 소녀와 카이테인씨 외에는 아무도 없는 상태였다. 흘끗 본 소녀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이전에 보았던 엔딜과 많이 닮아있는 것을 보며 나는 혼자 납득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쯤이면 카이씨의 신력으로 완쾌 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잠들어있는 창백한 얼굴은 완연한 병색이 짙게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대사제의 신력으로도 치유가 불가능 한 거였나 싶어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자, 마침 남자를 침대에 옮겨두던 카이씨가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엔딜군의 동생인 세실이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수명을 늘리는 것 외에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호전은커녕 악화되는 일을 막는 게 고작이라,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관으로서의 제 자질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믿고 맡겨주신 엘퀴네스님께 면목이 없습니다.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저에게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카이씨. 지금까지 수고해주신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니까요. 그나저나 신력으로 낫지 않는 병이라니, 아무리 희귀병이라지만 특이하네요. 약초로 버틸 수 있을 수준이라면 신력으로도 치유가 되었을 텐데?”
“그게…실은 아무래도 약간의 저주가 작용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주?”
“예. 아시다시피 세실은 엔딜군처럼 순수한 엘프가 아닙니다. 하이 엘프인 여인과 인간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생명이지요. 아마 세실이 겪고 있는 병은 그것이 원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옆에서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듣고 있던 시벨리우스였다. 녀석은 황당한 얼굴로 연신 잠들어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하이 엘프와의 혼혈? 대체 누가 그런 미친 짓을 벌인 거야? 제정신들이 아니군.”
“응? 왜? 혼혈이라는 게 문제가 되는 거야?”
“당연하지. 그냥 일반 엘프라면 모를까, 하이 엘프는 엘프들 사이에서도 가장 순결한 피를 가진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과는 본질적인 성향이 너무 달라. 그 자체로 하이 엘프에겐 독이나 마찬가지라고. 다만 결혼한 본인이 아니라 2세에게 해당된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야.”
“2세에게만?”
“응. 보통 이종족의 혼혈은 두 가지의 다른 피를 서로 융화시켜서 하나로 만들거든. 하지만 하이 엘프의 피는 타 종족의 피를 받아들이지 않아. 오히려 자신의 영역에서 밀어내기 위해 공격하는 편이지. 결국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두 개의 기운이 육체를 방황하다 안정될 장소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자멸하는 거야.”
“윽, 그게 뭐야? 인간의 피가 무슨 병균도 아니고.”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이라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대부분의 하이 엘프들은 2세를 위해서라도 타 종족과의 혼인을 금(禁)하고 있어. 무슨 생각인지 이 소녀의 어머니는 그걸 잊어버린 모양이지만 말이야.”
한심스럽다는 듯이 쯧쯧 혀를 차며 얼굴을 찌푸리는 시벨의 모습에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카이씨를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던 그는 잠시 후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렇다면 치료방도가 전혀 없다는 소리입니까? 하지만 약초에는 어느 정도 호전을 보였는데요.”
“육체를 강화시키는 약이었겠지. 그것으로 육체 안을 떠도는 혼란스러운 기운을 잠시나마 견디는 거야. 하지만 그런 걸론 얼마 버티지 못해. 근본적인 해결을 하지 않는 이상 몸 안에 흐르는 두 종족의 주도권 싸움은 계속 될 테니까. 이건 엘퀴네스의 치유력으로도 해결하기 힘들 걸?”
털썩.
순간 문 앞에서 무언가가 크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곳엔 언제 돌아온 건지 엔딜이 한 바구니의 과일봉투를 안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데굴데굴. 맛깔스러운 붉은 빛을 띈 사과가 아무렇게나 발아래에 굴러다녔다.
“에, 엔딜!”
지금까지의 대화를 모두 들은 건지, 전에 없이 창백한 안색이 된 녀석을 보며 나는 얼른 다가가 부축했다. 그러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세실은 절대 나을 수 없다는 거야? 엘퀴네스님이 왔는데도?”
“아니, 그게…”
“거짓말이지? 그렇지? 나와 카이씨 모두 엘퀴네스님이 오기만 얼마나 기다렸는데! 지금에 와서 불가능하다는 건 아니지? 그런 거지? 세실은 나을 수 있는 거지?”
꽈악 움켜쥔 어깨에선 전에 없이 강한 압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마 이 육체가 평범한 인간의 것이었다면 고통으로 얼굴을 찌푸렸을 것이다. 그만큼 동생을 향한 감정이 깊은 것이겠지.
오랜만의 재회에 초반부터 나쁜 소식이라니,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상황인가.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쉰 나는 일단 흥분한 녀석을 진정시킬 겸 달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무 속단하지 마, 엔딜. 아직 아무것도 해보지 않았잖아. 일단은 한번 치료술을 해보고…”
“저, 정말이지? 세실을 고쳐주는 거지?”
“헛수고야, 엘. 이건 병이 아니라니까? 금기를 어긴 저주나 마찬가지야. 치료술을 백날 퍼부어도 소용없다고.”
냉정하게 이어지는 시벨의 말에 그나마 희망을 담고 있던 엔딜의 눈동자가 단번에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러자 녀석은 곧 특유의 험한 입담을 통해 단번에 시벨을 향한 적의를 드러냈다.
“씹-! 이 새끼야! 넌 뭔데 아까부터 그런 소릴 지껄이는 거야! 금기라니! 저주라니!! 세실이 지금 저주받은 아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지금 당장 그 시퍼런 눈탱이를 뽑아버리기 전에 닥치고 있지 못해?”
“나는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너도 하이 엘프라면 장로들에게서 한번쯤 이런 사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텐데? 무엇보다 나는 너 같은 꼬맹이한테 욕을 얻어먹을 정도로 잘못한 일이 없어. 너야말로 입 닥치는 게 신상에 좋을 거다.”
“헹! 인간이 무서워서 바닷가 절벽 틈 사이에 숨어버린 블루엘프주제에 용기도 가상하네!”
“그래봤자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다고 착각하는 머릿속 텅텅 빈 하이 엘프 따위보단 훨씬 나을 걸?”
“죽을래? 다시 한 번 말해봐!!”
“말하라면 못 할 줄 알고?!”
파직!
순간 100만 볼트의 전류가 두 엘프의 사이를 흐르고 지나간 듯 했다. (엄밀히 말하면 시벨은 엘프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무슨 이유때문인지 자신을 정말 엘프라고 착각하고 있는 듯 하니 넘어가기로 하자.)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눈빛이, 당장이라도 치고받고 싸울 듯한 태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두 존재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들 해. 안 그래도 좁은 집안인데 더 정신없게 만들 작정이야? 다들 진정하고 자리에 앉아. 이러다 아픈 애가 깨어나기라도 하면 어떡해?”
“하지만 엘퀴네스님! 저 녀석이…”
“이게 누구더러 저 녀석이래? 너 나이가 몇이야!”
“시벨리우스! 그만 하랬지!”
잔뜩 화난 표정을 짓고 있던 녀석은 나의 화난 목소리에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한참이나 어린 녀석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 때문인지 억울한 목소리로 낮게 투덜거렸다.
“저 녀석이 너무 건방지잖아. 내가 틀린 말을 했던 것도 아니고.”
“뭐가 어째? 세실의 어디가 저주받은 아이라는 거야! 위선자같은 다른 엘프보다야 훨씬 순수하고 착한 아이라고!”
“저주받은 아이라곤 하지 않았어. 저주나 마찬가지라고 했지.”
“이 씹! 그게 그 소리지!!”
“엔딜, 그만 해.”
길길이 날뛰는 엔딜을 진정시키며 나는 난감한 표정이 되어 잠들어있는 세실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아이가 깨어나 지금의 대화를 듣지 않을까 걱정이 된 것이다.
자신을 향해 저주 운운하는 시벨도 그렇지만, 아니라고 우겨대는 오빠의 필사적인 모습을 봐도 어린 마음에 적지 않은 상처로 남을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 챘는지, 카이씨가 조심스럽게 설명을 덧붙였다.
“약을 먹고 잠든 것이라 당분간은 깨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엘퀴네스님이 오셔서 시끌벅적하니 좋군요. 그 전엔 항상 쥐죽은 듯한 침묵만 이어져서 엔딜군이 많이 걱정되었거든요. 당장이라도 나을 것 같던 아이가 전혀 호전이 없어서 더욱 상처가 깊었을 겁니다.”
“그렇겠네요. 으음. 그런데 이제 와서 제 힘도 소용이 없을지도 모른다니. 이런 경우는 어떤 식으로 치료를 해야 할 지 전혀 감이 안 잡히는걸요?”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설령 치료가 불가능한 상황이 온다고 해도 엔딜군은 엘퀴네스님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결국 죽을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는 거니까요.”
“하지만 그래선 면목이 서질 않아요. 일단 치료해주기로 마음먹은 이상,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음 하거든요.”
나는 혹시나 싶어 조심스럽게 세실의 이마를 짚었다.
파앗! 새하얀 치유의 빛의 스며들었지만 잠든 아이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하기만 했다. 역시 안 통하는 건가?
내 유일하다시피한 장기가 전혀 소용이 없다는 사실에 나는 침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나를 위로하려는 듯 어깨를 다독이는 이사나의 손이 느껴졌다.
“엘이 부족한 탓이 아니야. 시벨님의 말처럼 이게 병이 아니라면, 치유력으로 고쳐지지 않는 게 당연한 거니까.”
“으응. 그렇긴 한데… 종족의 차이로 벌어진 현상은 대체 어떤 식으로 해결해야…”
거기까지 중얼거린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밝은 표정으로 시벨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시벨! 아까 네가 말한 것 말이야. 세실의 몸에 흐르는 두 종족의 피가 문제라는 거지? 그럼 둘 중에서 하나만 없어져도 살 수 있는 거야?”
“어느 쪽이든 안정된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몸속에 흐르는 것을 어떻게 없애려고?”
어리둥절한 시벨리우스의 말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씩씩거리던 엔딜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일행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집중되자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머릿속에서 혼자 생각하고 있던 해결방안을 설명했다.
“왜~ 폴리모프 마법이란거 말이야. 그거라면 종족을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굳혀주지 않을까? 시벨 너도 완벽히 다른 사람이 된 거나 마찬가지잖아.”
“아아. 그것 말이군. 확실히 폴리모프 마법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에? 그게 정말이야?”
“!!!”
내가 말했던 거지만 그다지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돌아온 대답은 희망적인 것이었다. 나와 엔딜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시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곤란한 얼굴을 해보였다.
“하지만 그만큼 정교한 마법이 가능한 존재를 구하기가 어려울걸.”
“엥? 시벨 너는? 너도 마법 할 줄 알잖아?”
“마법은 할 줄 알지만, 폴리모프에 대한 것은 내 자신에게만 걸 수 있어. 그리고 나의 경우엔 폴리모프를 했다 해도 본래 종족의 성질까지 전부 달라진 게 아니야. 미묘하지만 조금씩 진짜 블루 엘프완 다르지. 해산물만 먹지 않는 게 바로 그 증거 아니겠어? 그런 것이 가능한건 마법생물이라 불리는 드래곤뿐이야.”
“!!”
드래곤! 그 순간 나와 이사나, 카이씨의 시선이 동시에 마주쳤다. 한결 같이 밝은 표정을 보건데, 나와 똑같은 존재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레드 드래곤 라피스 라즐리! 그 녀석이라면 이 소녀의 치료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라피스의 존재를 모르는 다른 일행들은 모두 복잡한 표정으로 걱정스럽게 한마디씩 내뱉고 있었다.
“드래곤이라니, 곤란하군. 그들이 부탁한다고 쉽게 들어줄 존재도 아니고…”
“그래도 정령왕이 부탁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드래곤이라는 게 어디 흔하디흔하게 널려 있는 것도 아니잖아? 이 넓은 세상천지 어디에서 드래곤을 찾아내겠어. 게다가 부탁해도 공짜로 들어줄 리가 없다고. 반드시 그에 합당한 조건을 받아내려 할거야. 드래곤들은 철저히 계약위주니까.”
“윽…나 때문에 엘퀴네스님을 곤란하게 할 순 없어. 그건 세실도 바라는 일이 아닐 거야.”
침울한 엔딜의 말을 마지막으로 주변은 순식간에 무거운 침묵으로 젖어들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얌전히 있던 이사나의 검-이그니스가 기회라는 듯이 소란스럽게 끼어들었다.
<<오호호호! 용사님! 드디어 때가 왔어요! 동료를 구하기 위해 드래곤의 심장을 취하는 위대한 영웅! 자아~ 험난한 역경을 향해 뛰어들자고요! 이 용사의 검이 함께 하겠어요!>>
“저어, 이그니스. 이건 드래곤의 심장이 아니라, 그냥 부탁을 하는 것뿐인데.”
<<어머머! 무슨 그런 마음 약하신 소리를? 드래곤을 만났는데 단순히 부탁이라뇨? 당장 멱을 따셔야죠! 설마 용사님은 드래곤이 무서우신 거예요? 걱정 마세요! 용사님은 하늘이 택하신 이 세대의 영웅!! 드래곤을 무찌르고 다음엔 사악한 마신을 쓰러트리는 거예요! 어때요, 저의 완벽한 계획이?>>
“……”
완벽하긴 개뿔이.
쓸데없이 망상증만 커져가는 검 때문에 그 주인인 이사나는 민망한 표정으로 주변에 양해를 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엔딜과 카이씨는 단순히 검이 말을 한다는 사실에만 놀라고 있는 듯 보였다.
“지, 지금 저 검이 말 한 거야?”
“호오, 신기하군요. 던전안에서 가져온 것이 설마 저 검입니까? 정령이 봉인되어 있다더니, 과연 범상치가 않네요.”
“하하하…”
범상치 않긴 했다. 세상 어느 검이 허황된 망상으로 용사를 부추기는 무시무시한 수다를 떨 수 있다는 말인가!
일행들은 모두 벌레라도 씹은 것 같은 표정으로, 감탄하기에 여념이 없는 카이씨와 엔딜을 향해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저 검을 향해 대단하다고 생각한 자신을 저주할 시간이 다가올 테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모두가 한결같이 예감했던 바와 같이, 이후로 이어지는 이그니스의 무시무시한 수다에, 카이씨와 엔딜의 얼굴은 점차 창백하게 질려갔다.
처음의 신기하단 듯한 시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느새 남은 것은 그 주인인 이사나를 향한 안쓰러움뿐이었다. 덕분에 얼굴이 벌겋게 된 이사나만 이그니스를 조용히 시키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드래곤이랑 싸울 땐 어떻게 하냐면요! 일단 초반에 너 되게 못생겼다고 말하면 십중팔구 쪽팔려서 아니라고 우긴다니까요? 호호호호! 그렇게 평정심을 잃은 드래곤은 허점이 드러나기 마련! 그 순간 날아올라 콧구멍을 쑤시면 코피가…>>
“윽! 이제 그만해, 이그니스. 충분히 알았으니까.”
<<오호호호! 드디어 용사님도 제 진가를 알아보시는 군요! 앞으로도 어려운 적을 상대하는 방법에 대해선 언제든지 물어보세요! 이 파이어 버스터!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용사님께 전수하겠어요! 무지는 죄가 아니니 전혀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답니다~>>
“알았으니까 이제 제발 그만…”
애원하다시피 매달려서야 간신히 녀석의 입을 다물게 한 이사나는 몇 년의 세월을 한꺼번에 먹은듯한 지친 표정이 되어있었다. 어쩌면 이그니스는 앞으로 이어질 이사나의 명성에 가장 큰 오점으로 남게 될지도?
보기에 따라 재밌다고 해도 좋을 상황이었지만 엔딜의 표정은 금새 침울해졌다. 말하는 검에 대한 신기함이 사라지고 나니, 어느새 병색이 짙은 여동생에 대한 걱정으로 다시 물들었던 것이다.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쓸어주며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엔딜. 드래곤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 녀석이 하나 있으니까 별로 부탁하는 게 어렵지 않을 거야.”
“그, 그게 정말이야, 엘퀴네스님?”
“응. 좀 투덜거리긴 해도 일단 내 부탁을 거절한 적은 없었거든. 그가 아니라도 다른 정령왕들이 알고 있는 드래곤이 많으니까 어떻게든 부탁해볼게. 설마 그들 전부다 거절하진 않겠지.”
“하,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엘퀴네스님한테 피해가…”
말로는 더듬더듬 나를 향한 걱정을 내뱉고 있었지만, 이미 엔딜의 초록색 눈동자는 희망으로 반짝이고 있는 상태였다.
동생을 위해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의 목숨조차 위험에 빠트렸던 녀석이다. 새삼 남의 사정을 살펴준다는 게 우스워 나는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방법을 알았는데 마냥 손을 놓을 수는 없잖아?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엔딜 너는 무조건 동생의 병이 낫기만 기도하면 돼.”
“…고, 고마워 엘퀴네스님. 역시 엘퀴네스님 밖에 없어.”
“뭘. 원래 사위 사랑은 장모라잖아. 어? 이게 아닌가. 장인어른이라고 해야 하나?”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멀뚱히 바라보는 엔딜의 모습에 나는 그저 씨익 미소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곤 녀석의 이마를 짚어 지금까지 흐릿하게 새겨져 있던 시큐엘의 문장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화악! 차가운 공기가 흐르자 움찔 떨던 녀석은, 문장이 선명해진 걸 확인한 내가 다시 손을 떼어내는 순간에도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나는 녀석의 친화력을 높여준 것과, 그 때문에 이젠 언제든지 시큐엘을 소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잠시 비밀로 붙여두기로 했다. 이런걸 보면 내게도 엘퀴네스의 피가 흐르는 게 사실인 모양이다.
‘그나저나…라피스는 또 무슨 말로 이쪽으로 불러낸다지?’
지금쯤 에이프릴양에게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녀석이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몸소 강림(?)할지는 과연 재고해볼 문제였다.
까짓것 텔레포트 몇 번이면 해결될 문제이지만, 사랑에 빠진 놈들은 그런 단순한 작업조차 잠시도 떨어져 있기 싫다는 이유로 거절할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내가 고민하는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자 카이씨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설마 이때까지 라피스님이 합류하지 않으신 겁니까? 저는 당연히 던전에 도착하기 전엔 다시 돌아오실 줄 알았는데요.”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완전히 한 방 먹었다니까요. 뭐, 시벨리우스가 있어서 마법에 대한 불편함은 그다지 못 느꼈지만 서도.”
“시벨리우스라면 저쪽의 블루엘프님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아까 보니 폴리모프에 대해서 말씀하시던데, 설마 저 모습이 진짜가 아니신 겁니까?”
“네, 본 모습은 따로 있지만 그다지 잘 드러내는 편은 아니에요. 일단 인간이 아닌 건 확실하고요.”
“그렇군요. 그런데 저 옆에 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 분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인상입니다만.”
그가 가리킨 것은 지금까지 모든 상황과 전혀 상관없다는 듯 방관하던 자세의 데르온이었다. 언젠가 세르피스란 마족과 함께 우리 앞에 나타난 전적이 있었던 만큼, 이미 한번 그와 조우했던 적이 있던 카이씨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기억 안나요? 전에 한 번 우리 앞에 나타났던 마족이 있었잖아요.”
“아! 서, 설마 마도의 군주 데르오느빌? 대체 저자가 어떻게 엘님과?”
“쿡쿡. 그동안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거든요. 지금은 우리를 공격할 의사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되요. 마신이 직접 저와의 동행을 명령했으니까요.”
“마, 마신이요?”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던 카이씨는 이윽고 침착한 표정으로 나를 쭈욱 쳐다보았다. 마치 그동안 다친 곳은 없는지 살펴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흩어보던 그는 마지막으로 내 왼쪽 손에 이르러서야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못 본 사이에 새로운 장신구가 늘어나셨군요.”
“하하, 피치 못 할 사정이 잠깐…이, 이상한가요?”
“아니요. 꽤 잘 어울리십니다. 엘님은 점점 아름다워지시는 군요.”
“쿨럭…”
이걸 과연 칭찬으로 들어도 좋은 걸까? 복잡무리한 내 얼굴을 보면서도 카이씨는 말없이 웃어 보이기만 했다. 어쩌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무서운 사람은 바로 그 일지도 몰랐다.
저녁이 되자 가장 큰 문제로 다가온 것은 바로 일행들이 마땅히 잘만한 공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엔딜의 집은 너무 좁았고, 침대도 두 개밖에 없었기 때문에 9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꺼번에 수면을 취할만한 장소가 되지 못했다. 결국 우리는 집 근처의 가까운 언덕에 올라가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텐트를 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쩌죠?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게 혹시 어디가 크게 안 좋은 것이 아닙니까?”
카이씨가 가리킨 것은 우리가 이곳으로 오기 직전에 주웠던 정체불명의 남자였다. 처음 발견했던 때부터 지금까지 좀처럼 깨어나지 못하는 남자는, 걱정스러운 그의 말과는 달리 단지 잠들어있을 뿐 몸에 큰 지장은 없었다.
아마도 오랜 여정에 지쳐 몰린 피로를 한꺼번에 잠으로 풀고 있는 듯 했다.
“별 문제는 없어요. 내일 아침이면 일어나겠죠. 이 사람도 일단은 우리 쪽으로 데려가겠습니다.”
“그럼 엘님 일행분들이 너무 장소가 비좁게 되시는 건…”
“아니요. 시벨리우스가 치는 텐트는 마법으로 만드는 거라 얼마든지 공간을 늘릴 수 있으니 상관없어요. 우선은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뵙도록 할게요.”
“예. 그럼 편히 쉬십시오, 엘퀴네스님. 내일 뵙겠습니다.”
단정한 카이테인씨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엔딜의 집을 나와 텐트를 칠만한 적당한 장소를 잡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밤이 깊어지고, 일행들이 모두 잠드는 순간이 되도록 나는 좀처럼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몸을 일으켜 텐트 밖으로 나온 나는 밤하늘에 무수히 떠있는 수많은 별들을 보며 시간을 때우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별들이 이곳에선 마치 은하수처럼 늘어서 있었다.
간간히 울리는 풀벌레 소리나, 썰렁할 정도로 고요한 주변이 새삼스럽게 낯선 장소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결코 혼자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내 주위에 수많은 나아이스들이 떠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꺄하하하하! 나 잡아 봐라~~
-이익! 거기서어! 너어~ 엘퀴네스님 앞에서 나를 망신 줬겠다!
-다들 싸우지 마! 왕께서 슬퍼하신단 말이야.
열기와 먼지로 가득한 알폰프 제국에 비해, 솔트레테는 전체적으로 습기가 충만한 편이었다. 공중을 정신없이 떠돌아다니는 나이아스들을 보며 피식 미소 짓던 나는 곧 떠오르는 한 가지 사실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그러고 보니 알리사와 이사나는 괜찮을까? 텔레포트를 하는 바람에 갑작스런 기후의 변동에 적응하지 못했을 텐데. 다른 사람들이야 인간이 아니니 상관없지만, 두 사람은 나이도 어리고…’
걱정이 된 나는 시큐엘을 불러 두 사람의 상태를 살펴보고 오게 했다. 혹시나 아픈 구석이 보이면 가서 치료해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대답은 ‘별 탈 없이 잘 자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픈 데는 없어 보인단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왕시이여. 오히려 그 옆에 있던 이그니스가 성질을 내는 통에 급히 나온 참입니다.
“쿡쿡. 이그니스 녀석. 이사나가 물의 정령사인 이상 앞으로도 너랑 마주칠 일은 수시로 있을 텐데, 좀 사이좋게 지낼 의사는 없는 건가? 아참, 이사나는 이제 너희를 몇이나 불러 낼 수 있지?”
-7명입니다. 요 근래 수련이 뜸해서 생각보다 많은 숫자를 소환하지는 못했습니다.
정령의 입장에서야 탐탁지 않은 결과겠지만, 사실 말이 좋아 7명이지, 이건 일반적인 정령사중에서도 그리 흔한 숫자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사나는 더 이상 수련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라 해도 좋았다. 상급 정령을 동시에 7마리나 불러내는 실력자를 누가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점점 발전하는 이사나의 모습에 뿌듯하게 미소 짓던 나는 문득 호기심을 느끼곤 반짝 눈을 빛냈다.
“이사나가 7명이라 이거지. 그럼 라피스는 몇이나 될까?”
-으음. 그것은 측정하기가 애매합니다. 드래곤이니 아무래도 30은 간단히 넘길 거라 생각됩니다만.
“30이나? 헤에. 안 그래도 심심한데 한 번 시험이나 해 볼까?”
-시, 시험이라니. 설마 그의 마나로 정령들을 한계시점까지 소환해보실 생각이십니까? 그랬다가 그가 분노라도 하면…
“뭐 어때? 시큐엘이 역 소환한 상태에서도 꿈쩍도 안한 녀석이 겨우 그 정도에 화내겠어? 걱정 마, 걱정 마.”
-와, 왕이시여…
심히 걱정스럽다는 듯 눈을 불안하게 굴리는 시큐엘을 무시하며 나는 그때부터 천천히 라피스의 마나를 끌어와 한 마리씩 시큐엘을 형상화하기 시작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점점 늘어나는 숫자가 텐트 주위의 언덕을 가득 매울 때까지 나는 그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심심해서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모처럼 발견한 장난감을 가지고노는 심정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언뜻 보아도 40마리는 넘어 보이는 시큐엘이 주변을 채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그럼에도 아직도 펑펑 남아도는 라피스의 마나를 깨닫곤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와아, 역시 드래곤. 40마리나 넘었는데도 아직도 마나가 남아도네? 더 불러내볼까? 아니면 이 녀석들끼리 비무라도 펼치게 할까. 역시 가만히 있는 것보단 몸을 움직이는 편이 마나의 소모에 도움을 주겠지? 이만한 시큐엘들이 한꺼번에 역 소환되면 어떻게 될까나…”
아무리 정령왕이래도 멀쩡한 정령들을 역소환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까짓것 하려고 마음먹으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다음순간 이어지는 낮은 목소리에 차마 마음먹은 일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너…나를 죽일 셈이냐?”
“엥?”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니 그곳엔 언제부터였는지 나무기둥에 기대고 서있는 큰 그림자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꽤 장신의 남자가 거만한 포즈로 팔짱을 낀 채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정령왕의 시력으로 알아보기에 무리가 없는 거리였지만, 나는 설마 싶은 마음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마…그 녀석은 아니겠지.”
“그 녀석?”
휘이잉.
그때였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지금까지 달빛을 가리고 있던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환하게 고개를 드리운 달빛은, 나무에 기대고 서 있던 남자의 모습을 정확히 밝혀주고 있었다.
감탄이 절로 흘러나올 만큼 조각 같은 얼굴과 태양처럼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 처음 만났을 때와 전혀 변한 것이 없는 오만한 표정은 분명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와 아주 흡사한 모습이었다.
미미한 바람이 불때마다 흩어지는 핏빛의 머리카락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라피스?”
왜 아니겠는가. 저 녀석이 지금까지 결코 도움을 주지 못했던 시뻘건 도마뱀이라는 건, 내가 가진 전 재산을 걸고라도 증명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피식-하고 특유의 거만한 웃음을 지어보인 녀석은 지금까지 기대고 서있던 나무에서 몸을 떼더니 성큼성큼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곤 이제까지 유지하고 있던 마나를 한꺼번에 앗아가 모처럼 주변을 가득 매우고 있던 시큐엘의 형상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나는 미처 ‘무슨 짓이냐’고 항의할 겨를도 없었다.
“너- 너어!”
“무슨 짓이냐고 물을 셈이라면 관둬. 그대로 놔두면 내가 먼저 쓰러질 참이었다고. 한다한다 했더니 아주 작정을 하고 내 피를 말릴 셈이냐? 이왕 죽일 거면 멋있는 방식으로 죽여 달라고. 정령소환하다 죽었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제 할 말만 냉큼 쏘아붙이곤 사납게 노려보는 통에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좀 심했다 생각이 들었던 것만큼, 찔리는 구석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나저나 이 녀석이 여긴 무슨 일로 온 걸까? 세실의 일을 생각하자면 잘되었지 싶었지만, 갑자기 웬 심경변화인가 싶어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가 여긴 왜 온 거야?”
“왜냐니? 내가 못 올 데라도 온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에이프릴은 어쩌고?”
“헤어졌어.”
“아, 그래? 그것참 유감…엑? 뭐,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헤어졌다니?
이 세계는 한국처럼 교제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남녀의 인연이라는 게 쉽게 말 한마디로 끊기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사귀면 반드시 결혼 한다’라는 게 당연하다고 인식되어있는 세상이랄까?
특히나 에이프릴 같은 귀족일 경우는 그런 사상이 더욱 심했기 때문에 나는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라피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나칠 정도로 무심한 붉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 헤어졌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당연하지! 왜 갑자기 헤어진 거야? 유희의 로망이라며 휙 떠나버릴 때는 언제고! 혹시 에이프릴양이 널 찬 거야?”
“아니. 내가 먼저 떠난다고 했어. 이제 슬슬 지루해진 참이었거든.”
“하아?”
기가 찬 내 시선에도 라피스는 뭐가 어떻냐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남의 금쪽같은 여동생을 채어놓고서 쉽게 버린 주제에 일말의 양심의 가책조차 없는 얼굴이다. 신이시여! 어찌 저에게 이런 썩을 놈을 하사 하셨나이까!
내 눈초리가 점점 사나워지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보지 마. 애당초 내 유희의 목적이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을 뿐이니까. 앞으로의 일정에 지장을 줄 것 같아 미리 끊어둔 게 뭐가 나빠?”
“그럴 거면 처음부터 집적이지나 말던가! 이제 무슨 낯으로 클모어에 돌아가서 후작을 보란 말이야? 이사나는 또 어떻고!”
“그들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할걸? 내 정체를 아는 이사나는 물론, 후작의 입장에서도 나는 그다지 탐탁지 않은 신랑감이었을 테니까. 좋게 좋게 생각하자고, 고지식한 정령왕씨.”
“이게 어디 좋게 생각할 일이야? 이 천하의 바람둥이 자식아!”
그러자 지금까지 고분고분 응수하고 있던 라피스의 미간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리곤 호오~하고 감탄성을 흘린 뒤 입 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 아닌가.
“바람둥이라고 들을 정도로 여러 여자를 홀린 기억은 없는데? 아아, 널 버리고 간 것 때문인가? 그런 거라면 나도 할 말 없지만. 설마 이게 바로 조강지처를 놔두고 애첩에게 눈을 돌린 상황이라는 건가?”
“뭐, 뭔 헛소릴 하는 거야! 나는 그저 사귀고 있던 여자에 대해 책임의식을 가지란 소리였다고. 가볍게 사귀고 금세 헤어질 거면 바람둥이나 다름이 없잖아!”
“그래그래, 앞으론 너한테만 충실 할게. 그동안 혼자 둬서 미안했다, 엘.”
“크아악! 대체 왜 그딴 결론이 나오냐니까!!”
머리를 부여잡고 경악하는 나를 보며 라피스는 연신 피식거리고 웃었다. 더 이상 말을 꺼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아, 나는 그만 잠자코 입을 다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더 이상 놀림거리를 찾지 못한 녀석의 시선이 이제 왼편에 낀 실크 장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건 웬 장갑이야? 척 봐도 장식용인데…너 치장하는 일에 관심 있는 편이었던가?”
“아니, 이건 그냥 사정이 있어서.”
“사정이라니?”
스윽. 말 보단 행동이 더 빠를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단숨에 장갑을 벗어보였다. 처음엔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이던 녀석은 곧 내 손등에 자리 잡은 새하얀 배트맨(…)의 문장을 발견하곤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잠시 후 다분히 한심스럽다는 투의 목소리가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온 몸을 신의 문장으로 도배할 생각이냐?”
“윽. 일부러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연락할 수단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럴 거면 눈에 띄는 부위를 피하던지! 옷으로도 가려지는 부분이 얼마든지 많은데 왜 하필 문장을 받는 곳마다 이런 식이야?”
“나도 몰랐단 말이야! 갑자기 손등에다 키스하는데 그게 문장을 새기는 건지 인사를 하는 건지 내가 알게 뭐야!”
“뭐? 손등에 키~~스?”
황당하단 듯 반문하는 말에 나는 실수했음을 느끼곤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젠장, 내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울 기억의 넘버원을 차지하는 일을 이렇게 쉽게 불어버리고 말다니!
내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는 걸 보았는지 라피스는 전에 없이 즐거운 표정이 되어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푸하하! 혹시 널 여성체라고 착각했던 거 아니야? 요즘은 귀족여자들에게도 잘 안 써먹는 수법을 너한테? 그리고 넌 또 멍하니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단 말이지? 엘~ 도대체 나중에 어쩌려고 그러냐?”
“시, 시끄러! 그냥 장난했던 거라고!”
“흐음. 이렇게 길길이 날뛸 걸 예상하고도 말이지? 이건 아무리 봐도 마신의 문장 같은데…겉보기와 달리 엉뚱한 성격이라더니 소문이 사실이었던 모양이군. 그 녀석은 어떻게 만난거야?”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것도 잠시, 라피스는 곧 취조하듯 낮은 목소리로 캐물었다. 어차피 말해줄 생각이었기에 나는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대강 간추려 설명하기 시작했다.
주로 던전에서 있었던 일과, 마신과의 만남, 그리고 그가 전해준 충격적인 정보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그것을 모두 들은 녀석의 표정은 전에 없이 진지하게 물들어 있었다.
“루카르엠이라는 마족이 마신이었다고?”
“응. 외모는 달랐지만, 그의 말로는 그랬어. 지금까지 쭈욱 마계에서 마족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더라고.”
“흐음. 그가 너한테 미래의 마왕이 될 알을 맡겼단 말이지? 게다가 악신의 탄생이라… 그것참. 점점 일이 복잡해지는 군. 시간 내에 막을 수 있을까?”
“그런데 왜 하필 인간 아이의 생명만 필요한 거야? 다른 종족들도 얼마든지 있잖아?”
“아, 그건 말이지…”
이어지는 라피스의 설명은 대충 이랬다. 수많은 인세 중에서도, 인간은 그 모든 과정을 경험한 영혼의 가장 마지막 단계라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의 영혼에는 이 세상에서 겪은 가장 선한 감정과 가장 악한 감정이 함께 공존하게 되는데, 바로 그 점이 악신의 탄생에 큰 원동력이 된다고 했다.
“순수한 악과 순수한 선만으로는 악신의 조건을 이룰 수 없어. 그것이 적절하게 섞여 혼돈이 되었을 때, 오히려 그 속에서 가장 사악한 존재가 탄생한다는 원리지. 어린아이를 쓰는 것은 어른보다 아이가 그런 본성을 더욱 강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인간은 자라면 자랄수록 예의와 규칙에 얽매여서 이성을 컨트롤 할 수 있게 되니까.”
“어려워…”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 없어. 지금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악신이 탄생 하려 한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 하나 뿐이니까. 아무튼 골치 아프게 됐군. 악신이 이곳에서 탄생한다면 가장 방해될 존재는 아크아돈의 자연을 지배하는 너희 4대 정령왕이야. 앞으로 각오 단단히 해야 할걸?”
“헉. 그게 정말이야?”
하긴, 나라도 어딘가를 지배하려면 먼저 그 세계를 장악하고 있던 가장 강한 사람부터 치는 게 순서일 것 같았다.
아무래도 상당한 고난이 따를거란 생각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자, 라피스는 킥킥 웃으며 장난스럽게 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리곤 마치 어린애를 대하는 것처럼 다정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걱정 마, 걱정 마. 위급한 순간에선 내가 지켜 줄 테니까.”
“하, 웃기시네! 너나 죽지 마시지!”
“나 참. 이럴 땐 그저 고맙다고 하면 되는 거야. 능력 자각이 미숙한 정령왕보다야 천재 드래곤이 훨씬 더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지 뭘 그래?”
“뿌득. 너 지금 말 다했냐?”
화난 표정으로 따지려는 순간, 라피스는 잽싸게 문장이 새겨진 손등을 가리키며 투덜거리듯 한마디 내뱉었다.
“아무튼 다음부턴 주의해. 난 내거에 흠집생기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네가 칠칠맞으니까 그 순간을 노리고 이렇게 떨거지들이 접근하는 거 아니야. 이거야 원, 잠시라도 눈을 뗄 수가 있나.”
“물건취급하지 말랬지!”
“그런 게 아니야. 난 너의 계약자로서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뿐이라고.”
“권리를 행사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못하는 거냐!!”
지금의 대화를 누군가 들었다면 내가 이 녀석과 노예계약이라도 맺었는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 상황의 어디가 ‘물건취급’이 아니란 말인가? 하지만 라피스는 요지부동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했다.
“‘난 이 땅에 필요한 마나를 너에게 주며, 넌 나의 보필자가 된다.’ 이게 네가 계약을 할 때 읊었던 맹세가 아니었던가? 그 말 한마디로도 넌 이미 충분히 내거야. 그래서 지금까지 네가 마음껏 마나를 가져다 써도 아무 말 하지 않았던 거잖아. 내 말이 틀려?”
“쳇! 어차피 그 정도론 꿈쩍도 하지 않는 주제에.”
“꿈쩍도 하지 않는다고 누가 그래? 겉으론 이래보여도 타격은 꽤나 심각했다고. 이 몸께서 인간 따위에게 ‘허약한 마법사’란 칭호를 들을 정도였으면 말 다한 거 아니야?”
“풉- 허, 허약한 마법사? 누가? 네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가리키며 묻자 대번에 감정이 상한 듯 라피스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웃지 마.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안 그래도 만나면 단단히 따질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마나가 대량으로 빠져나가서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이젠 또 필요하지도 않는 시큐엘들을 잔뜩 소환하지를 않나. 나~참.”
“그건 그냥 심심해서…”
“심심해서 날 죽일 생각이었냐? 게다가 뭐? 역소환? 그만한 수의 정령들이 역소환되면 얼마나 충격이 큰 줄 알아? 해츨링의 경우엔 그 즉시로 쇼크사하는 수준이라고! 그러고 보니 전에도 한 번 역소환 된 적 있었지? 넌 몰랐겠지만 그 시점에서 난 피를 토했어. 이게 장난으로 할 짓이야?”
“그땐 장난 아니었어. 마신전의 신관들하고 싸웠을 때였단 말이야. 그런 일을 겪고도 한 번도 코빼기 비추지 않은 넌 뭐 잘한 게 있는 줄 알아? 하도 꿈쩍을 안 하길래 이만한 숫자로도 멀쩡할 줄 알았다. 어쩔래!”
솔직히 말하자면 녀석을 골탕 먹이려는 복수심리가 작용한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자각이 부족하다곤 해도, 40이 넘는 정령들을 불러놓고도 라피스가 무사할 거란 생각을 할 만큼 아무것도 모르진 않았다.
그러니 이건 거의 대놓고 놈의 피를 말리려는 내 수작인 셈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지만.
그러자 나를 바라보는 라피스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호오~내가 보고 싶었던 모양이지?”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사실대로 말해봐. 너 이런 식으로 마나를 펑펑 쓰다보면 화난 내가 따지러 올 줄 알았지?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 그냥 솔직하게 전언을 보내도 되는 것을. 쯧쯧. 귀여운 녀석.”
“…혹시 마나를 너무 많이 쓰면 머리가 이상해지는 거야?”
황당하게 대꾸한 말과 다르게 어딘지 마음속에선 뜨끔한 심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식으로 마나를 펑펑 쓰기 시작했던 게, 녀석이 내 곁을 떠난 이후부터였던가?
말로는 제 실속만 챙기는 녀석에 대한 복수라고 중얼거렸지만, 진심은 그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대체 나는 언제부터 이 녀석을 의지하게 돼버린 걸까?
찌푸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자, 라피스는 피식 웃으며 아까보다 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쩐지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어쨌든 벌 받은 셈 쳐!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놀았으니 그 정도는 가볍지 뭘 그래?”
“내가 언제 가지고 놀았는데?”
“에이프릴양 말이야! 그녀는 진심이었을 거 아니야! 갑자기 네가 떠나버리면 혼자 무슨 심정이 되겠어? 너 같은 녀석이 있기 때문에 멀쩡한 다른 남자들까지 욕먹는 거라고!”
“어차피 꿈은 꿈일 뿐. 꿈속에서 잠시 상대한 여자가 진심일지 아닐지 알게 뭐람. 그런 것까지 마음 써 줄 정도로 내가 상냥한 성격으로 보여?”
“하! 어련하시겠어. 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엘퀴네스가 아니게 되면 필요 없다고 말할 녀석인데.”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군.”
생긋 웃으면서 내뱉는 말이라곤 하나같이 염장을 지르는 것뿐이다. 열 받은 나는 즉시 한 마리의 시큐엘을 불러내곤 그 자리에서 바로 역소환을 시켜버렸다.
놀란 라피스가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라, 곧 나는 비틀거리며 피를 토하는 놈의 모습을 즐겁게 구경할 수 있었다.
“큭- 쿨럭, 쿨럭! 너, 너어~!”
“쌤통이다! 누군 네가 좋아서 옆에 붙여두는 줄 알아? 나도 네가 드래곤이 아니었음 필요 없었어! 인간 강지훈을 우습게보지 말라고!”
“하아…무슨 소리야? 너는 인간이 아니라 정령왕이잖아.”
“어, 어쨌든!! 한번 만 더 잘난척 해봐! 그땐 이 몸이 친.히. 네 마나를 이용해서 역소환 되 줄 테니까! 뭐? 보고 싶었었냐고? 웃기고 있네! 여자나 울리는 비만 도마뱀 주제에!”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는 라피스를 향해 마지막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준 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곧바로 일행들이 잠들어 있는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말로 피를 토했을 때는 좀 너무했나 싶기도 했지만, 나라고 언제까지나 참고만 있으리란 법은 없지 않은가!
‘그나저나…이젠 또 녀석을 어떻게 회유시켜서 병을 고치게 만들지?’
뒤늦게 미친 생각에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고 보면 지금 세실의 병을 치료하는데 가장 필요한 녀석은 바로 라피스가 아니었던가!
…아무래도 일이 수월하게 풀리기는 틀린 모양이었다.
정체불명의 남자가 깨어난 것은 다음 날 아침 일찍 동이 터오를 무렵이었다.
아직 이른 새벽이라 다른 일행들은 모두 잠들어있는 상태였기에, 앞으로 라피스를 설득할 궁리로 밤을 새버린 나만 그가 눈을 뜨는 것을 발견했다.
서둘러 다가가 ‘괜찮으냐’고 물으니, 그때까지만 해도 이곳이 어딘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가 헉-하고 짧은 숨을 들이켰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한 공간에서 내가 갑자기 말을 걸어 놀랐던 모양이다.
“당신은…누구입니까?”
동요한 심정을 감추려는 듯 살짝 억누른 음성이 튀어나왔다. 생각보다 고운 음색을 보아 남자의 나이가 겉보기보다 그리 많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은 진정시킬 요량으로 나를 살짝 미소 지으며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제 서야 바로 보게 된 남자의 눈동자는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깨끗한 청록색이었다. 귀밑을 살짝 덮는 군청색 머리카락과 어울려, 그의 분위기를 한층 매력 있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론 사막 부근에서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하고 이곳으로 옮겨온 것뿐이니까요. 일단 치료는 했습니다만, 혹시 달리 불편한 곳은 없나요?”
“치료? 그, 그러고 보니 이상할 정도로 몸이 가뿐하군요. 혹시 사제님이십니까?”
정중한 말투와는 다르게 남자의 눈빛은 장난끼를 가득 담은 어린 아이같이 빛나고 있었다. 딱히 사제복을 입은 것도 아니었는데, 단번에 내가 치료했다는 것을 아는 걸 보면 눈치가 귀신같이 빠른 녀석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면서도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단 그렇습니다만, 제가 사제인 것은 어떻게 아셨어요?”
“물론 알폰프 제국에서 아무 대가없이 타인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은 치료신의 사제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귀한 인연으로 경각에 다른 목숨을 구했으니, 신께서 아직 제 생을 포기 하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은인의 존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후세에까지 사례하겠습니다.”
“예? 아, 아니…그러실 필요는 없…”
“그럴 순 없습니다. 제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저는 그에 합당한 보답을 반드시 해야만 합니다. 사양치 말아주시고, 은인의 존함을 알려주십시오.”
이거 어째…뭔가 상당히 이상하지?
남자의 어투는 보통사람과는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귀에 거슬리는 건 아니었지만, 듣는 이로 하여금 심히 마음을 부담스럽게 만든 달까?
정작 본인은 그 점에 별로 어색해 하지 않은 걸 보면, 어릴 때부터 그런 말투를 사용하도록 교육을 받았음이 분명했다.
게다가 후세에까지 사례하겠다니! 그런 약속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사람이 과연 평민일 수 있을까? 눈앞의 남자가 카터스 황가의 사람이 확실하다고 판단한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오해가 있으신 것 같으니 다시 말씀드릴게요. 저는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긴 하나, 치료신의 사제는 아닙니다. 혹시 형벌의 신 엘뤼엔의 이름을 들어보셨는지?”
“아, 물론 알고 있습니다. 마(魔)속성의 신이면서 사제들에게 치유의 능력을 허락한 유일한 신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은인께서는 설마?”
“네. 저는 형벌의 신을 모시는 사제 ‘엘’이라고 합니다. 엘뤼엔의 사제들은 일정한 시기가 되면 일반인들에게 선행을 베풀기 위한 치료수행을 떠납니다. 저 또한 그런 수련 중의 일부에 해당할 뿐이니 사례 같은 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런데 당신의 이름은?”
“아! 그러고 보니 이런 실례를! 본인의 성명을 밝히지 않고 은인의 존함부터 들으려 하였군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본인의 성명은 라온휘젠 폰 카터스라고 합니다. 알폰프 제국과는 끊어지지 않는 원한의 관계에 있다고는 하나, 오늘 날 저의 목숨을 구해주신 것에 후회하지 않으실 보답을 해드리겠습니다.”
“…저어, 실례지만 카터스 제국 황가의 사람들은 모두 제국의 이름을 성으로 쓸 수 있나요?”
내가 알기로 제국의 이름을 성(姓)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은 황가의 직계혈통. 즉, 황제의 친 자식들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단순히 황족만이 아닌, 황제의 아들이란 소리인데…계승권을 가진 황자를 호위하나 없이 적국에 보낼 제국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설마 카터스제국은 솔트레테제국과 방식이 다른가 싶어 조심스럽게 묻자, 남자는 무슨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쌈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직계혈통 외의 귀족은 아무리 황족이라 하여도 카터스의 이름을 쓰지 않는 것이 규칙입니다. 이것은 황법의 제 1조에도 규정된 사항이라, 훗날 황태자가 황위에 오르면 나머지 다른 형제들 또한 다른 성으로 바뀌는 것이 원칙이지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저어…문제는 물론 있지만…그게…으윽. 그, 그럼 당신이 카터스 제국의 황자…라는 건가요? 그, 그런데 다른 제국에서 그렇게 쉽게 이름을 가르쳐 줘도 되요?”
“하하, 무슨 말씀이신가 했더니, 저를 걱정하셔서 그런 것이군요. 맞습니다. 저는 카터스 제국의 황자입니다. 허나 생명의 은인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감추는 일은 도리에 맞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일로 훗날 은인께 문제가 생긴다면, 저와 저의 조국이 혼신의 힘을 다해 보호해드릴 것을 약조하겠습니다.”
“…….”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조국을 들먹이는 걸 보면, 이사나의 말처럼 황위다툼에 패해 쫓겨난 황자인 것도 아닌 모양이다. 그런 사람이 지난 몇 백년간 이어져온 철전지 원수의 제국엔 도대체 무슨 이유로 방문했던 걸까?
이전에 들었던 세리엄이란 마법사의 말에 의하면, 카터스 제국 황태자의 나이는 이사나와 같은 17세였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아무리 봐도 20대인데…그렇다면 그보다 어린 황자를 황태자로 삼았다는 것일까?
큰 덩치완 달리 앳된 얼굴이나, 소년티를 벗지 못한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걸려,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어…실례지만 지금 나이가?”
“아! 올해로 17세입니다. 키가 커서인지 다들 나이를 들으면 놀라워 하지만요.”
“십… 17세요? 저어…황자님들 중에 같은 나이가 또 있나요?”
“하하! 쌍둥이가 아닌 이상 어찌 같은 나이의 형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아버님은 오직 한 여인만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달리 배다른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애석하게도 황족 중에서 17세는 저 혼자뿐입니다만.”
“!!”
맙소사! 그럼 네가 카터스 제국의 황태자라는 소리냐!!
혹시나 했던 심정이 역시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눈앞의 ‘청년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소년’을 바라보았다.
내 직감은 아까부터 녀석이 또 다른 제왕의 별이라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었다. 아직 황태자의 신분이긴 해도, 나이나 실력 면에서 장차 이사나와 대등하게 견줄 수 있는 상대이지 않은가!
‘미안해, 이사나. 나 아무래도 네 라이벌을 스스로 끌어들인 모양이야. 이걸 어쩌지? 아하하하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버려두고 올걸. 때늦은 후회로 비탄(悲嘆)하면서도 나는 그에게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으음. 일단 한 가지 알려드릴 일이 있어요. 카터스의 황자인 당신이 호위도 없이 적국인 알폰프에 무슨 일로 갔는진 모르겠지만…이곳은 알폰프 제국이 아닙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기절한 당신을 발견할 당시, 저와 일행들은 곧 그 장소를 떠나야 할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아픈 환자를 남겨두고 갈 수 없어서 부득이하게 이곳까지 데리고 오게 된 겁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원래의 장소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보내주신다니…그럼 이곳은 어디라는 것입니까?”
어리둥절하게 묻는 남자-카터스 제국의 황태자에게 나는 솔트레테의 국경부근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태연하기만 했던 청록색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크게 벌어졌다.
“솔트레테? 그곳은 제가 쓰러져 있던 장소와 무려 2달은 족히 떨어진 거리일 텐데요. 놀랍군요. 제가 그렇게 오랫동안 기절해 있었습니까?”
“아, 그게요…”
“은인께 이런 추궁을 하게 되어 상당히 죄송스럽습니다만. 솔직히 말씀하십시오. 당신은 누구입니까? 정녕 사제임이 맞습니까?”
“네?”
스르릉.
질문과 동시에 황태자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검이 놀랄 만큼 재빠른 동작으로 뽑혀 나왔다.
목 끝을 정확히 겨누는 시퍼런 칼날에 당황한 내가 잠시 할 말을 잃어버린 사이, 그는 처음과는 달리 상당히 굳은 표정이 되어 대답하기를 촉구했다.
“알폰프 제국에서 저의 정체를 눈치 채고 첩자를 풀었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습니다. 그런 오지까지 평범한 여행자무리가 지나갔다고 생각하기는 힘드니, 아무래도 의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군요. 어차피 당신이 아니어도 곧 알게 될 일이라면, 사양치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저기…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솔트레테라고 한 건 사실입니다. 저희 일행 중에 마법사가 있어서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했을 뿐이에요.”
“마법사? 그런 고급 이동 마법이 가능한 자가 카터스 제국 외에…”
하지만 황태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새 그의 뒤에 나타나 검을 겨누고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엘에게서 검 치워. 이 상태로 심장이 뚫리기 싫으면 얌전히 내려놓는 게 좋을 거다.”
“!!”
“이사나!”
도대체 언제부터 깨어있었던 걸까.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잠들어있었던 일행들이 모두 일어나 이쪽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흉흉한 시선이 황태자에게 집중되자, 그는 난감한 듯 한숨을 내쉬며 위협하고 있던 칼을 천천히 바닥으로 내렸다. 당장이라도 끊어질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황태자와 이사나 사이에 흐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황태자가 천천히 두 손을 들어 항복할 의사를 보이자 차가운 이사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이군. 카터스 제국에선 다 죽어가는 사람을 치료해준 은인에게 이런 식으로 대접 하나? 엘이 다정한 성격임을 감사해라.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칼을 든 그 즉시 죽음을 면치 못했을 테니까.”
“…확실히 본인이 성급했던 것 같군요. 일단은 등에 겨눈 검부터 치워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고 약조하겠습니다.”
황태자의 담담한 말에 이사나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검을 거두어 들였다. 그 순간 잠깐 마주친 두 사람의 눈에서 파지직 불똥이 튀는 것 같은 느낌은 비단 내 착각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같은 나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극과 극을 달리는 외모였지만, 상대방을 노려보는 살벌한 눈빛만큼은 서로에게 전혀 뒤지지 않았다.
더 이상 내버려두었다간 감정싸움으로 번지게 될 것 같아 나는 얼른 미소 지으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만 해, 이사나.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으니까. 아무래도 내 설명이 부족했었던 모양이야.”
“엘의 잘못이 아니야! 설령 그렇다고 해도 아무런 위협을 가하지 않은 상대에게 다짜고짜 검부터 빼어드는 예의는 어느 제국에서도 가르치지 않아.”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지금의 일은 전적으로 본인의 실수였습니다. 낯선 장소에서 깨어나다 보니 조금 신경이 예민해졌던 모양입니다. 은인께 이런 무례를 끼치게 되어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사과드리겠습니다.”
황태자는 진심으로 뉘우친 얼굴로 깔끔하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러자 이사나도 더 이상 따질 수가 없었는지 잔뜩 굳어있던 표정을 조금 푸는 듯 했다.
자칫하면 피를 볼 뻔 했던 일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기미가 보이자 저 너머에서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바라보고 있던 데르온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그러면서 품에 안고 있는 알을 향해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주군은 절대 저러시면 안 됩니다. 사나이는 의당 한 번 칼을 뽑았으면 피를 봐야 하는 겁니다. 나중에라도 덤비는 마족이 생겼을 땐 그 놈이 죽을 때까지 족치십시오. 이 데르온이 목숨을 걸고 보필하겠습니다.”
설마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향해 태교라도 할 셈이냐!
그나마 낮은 목소리라 나 외에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살짝 흘긴 눈으로 데르온을 노려봐준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조금 놀란 것뿐이니까. 아까 첩자가 있단 소문을 들으셨다고 했죠?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의심하는 게 무리가 아니죠. 그보다 일단은…배고프지 않아요? 며칠 동안 아무것도 드신 게 없는 것 같은데. 식사부터 하고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하죠.”
“네? 하지만…”
“저희들은 대부분 솔트레테의 제국민으로, 알폰프에는 던전을 탐험하기 위해 갔던 것뿐입니다. 카터스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니 마음 편히 하셔도 되요.”
“으음.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실례되는 질문 하나 해도 괜찮겠습니까?”
“뭔데요?”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지금까지 담담하기만 했던 황태자의 얼굴에 묘한 홍조가 돌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쑥스러운 기색을 담은 목소리가 더듬더듬 흘러나왔다.
“저기…그러니까…으음. 그러니까 사제님은…”
“…?”
“저어, 형벌의 신의 사제님이시라면…남자인 게 틀림없습니까?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만, 현재의 제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서 말입니다.”
“…쿨럭!”
나의 성별이 뭣 땜에 중요한 건데!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치밀었지만 어쩐지 대답을 듣지 않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오해를 당한 게 어디 한두 번도 아니고, 그때마다 일일이 화를 낼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나는 키득거리는 주변의 일행들을 무시하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듣기로 엘뤼엔의 사제 중 여자는 없다고 알고 있는데요.”
“아…역시. 여사제가 있는 신전은 꽃의 여신을 섬기는 프라워스의 사제들밖에 없는데…제가 괜한 오해를 했군요.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뭐라 사과를 드려야 할지.”
“괜찮아요. 이렇게 생긴 제 탓도 있으니까.”
“아닙니다. 제 실수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긴 뭣하지만, 사실 제가 그곳으로 간 이유는 저의 반려를 만나게 될 거라는 점술사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그가 말하길, 위험한 순간에 처했을 때 그녀가 저의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해서….”
“엥?”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때 만약 알리사가 쓰러져 있던 황태자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이곳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결국 치료한 사람이 누가됐던, 그녀가 황태자의 목숨을 살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었던 것이다.
‘맙소사. 너 정말 제왕의 별이었냐?’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막상 제대로 확인하고 나니 참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가장 황당한 것은, 단순한 점술사의 말 한마디 때문에 적국의 국경을 넘어버린 그의 무대포 적인 행동이었다. 지금쯤 카터스 제국의 황실은 벌컥 뒤집혀 있지 않을까?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엉뚱한 성격일지도…’
왜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특이한 걸까. 아니 그것보단, 이번 유희에서 정상적인 인간을 단 한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이 기구한 운명에 대해 마음 놓고 한탄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다. 일행들과 가장 멀리 떨어진 침대에 잠들어 있던 알리사가 눈을 뜨고 일어났던 것이다.
“우웅.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아, 알리사. 이제 일어났니?”
“응…어라? 그때 그분 깨어났네? 몸은 괜찮으세요?”
“!!”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굽이치는 황금색 머리카락. 크고 맑은 주황색의 눈동자와 체리 같은 붉은 입술.
그동안 본의 아니게 미인들에 익숙해진 까닭에 미처 신경 쓰지 못했지만, 누가 보기에도 알리사는 장차 앞날을 예측하기가 두려울 정도의 미소녀임이 확실했다.
그러니 한창 나이의 황태자가 보기엔 어떻겠는가! 그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스피드로 달려가 아직 잠에서 덜 깨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알리사의 두 손을 붙잡고 소리쳤다.
“당신이었군요! 점술사가 말했던 운명의 반려가!! 아름다우신 레이디의 고귀한 성함을 들을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네…네? 무, 무슨? 아, 일단 저는 알리사노라고 하는데…”
“본인의 성명은 라온휘젠 폰 카터스! 알리사노양! 감히 청 하건데, 부디 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허락만 해주신다면 카터스 제국의 부귀와 영화를 영원히 약조하겠습니다!”
쿠웅!
순간 원자폭탄이라도 떨어진 듯한 광음이 울린 듯 했다.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이사나는 말할 것도 없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일행들 역시 멍하니 입을 벌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알리사가 일어나기 전까진 멀쩡하게 보였던 인물이기에 그 충격은 더욱 더 컸다. 만난 지 1분도 안돼서 청혼이라니, 당신 제정신이야?!
그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듯한 청혼에 대한 결과는 이러했다.
“꺄악! 이 사람 뭐하는 인간이야? 미친 거 아냐?”
“아, 알리사노양. 저의 진심은 그게…”
“진심 좋아하네! 저리 안 꺼져? 다들 뭘 구경하고 있어? 이 사람 좀 끌어내! 얼른!!”
알리사의 성격이 걸걸하다는 것에 이렇게 감사한 순간이 또 있을까?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사나를 보며 나 또한 덩달아 한숨을 쉬고 싶어졌다.
제왕의 별은 두 개. 반려의 별은 하나.
그 본격적인 라이벌전의 첫 장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텐트의 소란스러움을 뒤로하고 나온 내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나무에 기대고 선 라피스의 강렬할 정도로 타오르는 시선이었다. 설마 밤새 내내 저러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당장이라도 돌아 가버릴 줄 알았던 그가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안심이 되었지만, 한편으론 이제부터 녀석을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그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라피스의 입가에 불길할 정도로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좋은 아침이지, 엘? 기분 풀렸으면 어제 못 다한 대화나 마저 하는 게 어떨까?”
“…아하하. 나, 나는 별로 할 말이…”
“호오. 정말 그래? 분명 요 앞에서 만난 사제의 말에 의하면 나한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쿨럭! 카, 카이씨를 만났어?”
당황한 내 표정에 라피스는 입술에 더욱 진한 호곡선을 그렸다. 이미 그로부터 대강의 사정을 들었으면서도 모르는 척 시침을 떼고 있는 얼굴이다.
저런 식의 녀석을 설득하기에는 나로선 아직 쌓인 내공이 너무도 부족했다. 나는 체념의 한숨을 내쉬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어제 일은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네가 좀 도와줘.”
“아쉬울 때만 사과하는 거냐? 그것 참 편리한 사고방식이군.”
“젠장, 그럼 날더러 어쩌라고? 솔직히 말해서 어제 먼저 시비를 건 것은 네 쪽이었잖아?”
“내가 뭘 어쨌다고?”
“내가 ‘엘퀴네스’이기 때문에 필요한 거라며! 그런 말을 듣고도 참는 게 더 바보 아니야? 넌 내가 무슨 감정표현도 제대로 못하는 바보로 보이는 모양인데! 세상 어느 인간도 자신의 신분만 보고 따르는 사람은 원하지 않는다고! 네가 그런 경우와 뭐가 달라?”
더 이상 참지 못한 내가 화난 목소리로 쏘아붙이자 라피스는 묘한 표정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이것으로 어제의 연장전이 벌어지는 건가 싶었지만, 녀석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뭐야, 그것 때문에 화난 거였어? 하지만 너도 내가 드래곤이기 때문에 계약한 거라며. 그럼 서로 피장파장 아닌가?”
“그, 그래도 네가 드래곤이 아니면 필요 없다는 말은 안했어!”
“흐음, 나쁘지 않은데? 그럼 만약 이번과 같은 일에 쓸모가 없었어도 일행으로 받아들였을 거라는 소리야?”
“결과적으론 그랬겠지! 네놈이 끝까지 쫓아다녔다면!”
한손으로 척-가리키며 소리치는 말에 라피스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기 시작했다. 그리곤 생뚱맞게시리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니까 나도 그런 것 같다.”
“뭐, 뭐가 그렇다는 거야?”
“너랑 비슷한 심정이라고. 처음엔 엘퀴네스라서 계약한 거였는데…지금 일정이 재미있는걸 보면 굳이 네가 정령왕이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느낌이야.”
“필요 없다고 할 땐 언제고?”
“그거야 물론 나에게 있어 너의 ‘정령왕으로서의 역할’은 필요 없어지겠지. 그건 당연한 거 아니야?”
“정령왕으로서의 역할?”
그게 뭔데? 라는 시선으로 빤히 쳐다보자 라피스는 뻔뻔하리만큼 당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를 돋보여줄 최고의 장신구.”
“이런 썩을…내가 악세사리냐?”
“나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드래곤들이 그런 식일 걸? 솔직히 드래곤이 굳이 정령과 계약할 필요가 뭐있어? 다 자기들 앞가림 할 수 있는 존재들인데. 단지 ‘이런 대단한 존재’와 계약한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것뿐이라고.”
“하, 그러셔?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네! 그래서 세실의 병은 고쳐줄 거야, 말거야?”
냉큼 ‘싫다’고 거절할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라피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 건지, 입가엔 희미한 미소까지 그려져 있는 상태였다. 내심 찝찝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결과만 좋으면 되는 거지.
“내 힘이 필요하다는 말만 들었지 구체적인 건 아직 몰라. 대체 무슨 병이기에 100%의 치유력을 가진 너를 뒷전으로 하고 나한테 부탁하는 건데?”
“아아, 혹시 하이 엘프와 인간의 혼혈을 본 적 있어?”
“하이 엘프? 그런 미친 짓을 누가 해? 십중팔구 저주받은 아이가 태어날 텐데. 혹시 내 힘이 필요하다는 게 그것 때문이야?”
“응. 여기 오기 전에 엔딜이라는 하이 엘프와 친해졌는데, 그 녀석 여동생이 인간과의 혼혈이더라고. 가능하면 내가 치료해보려고 했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서 말이야. 폴리모프 마법이라면 종족까지 바꿀 수 있으니까 가능하지 않을까?”
“흐음, 그거야 그렇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문제라니?”
설마 드래곤의 능력으로도 불가능 한 걸까? 나는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이어질 라피스의 말을 기다렸다. 녀석은 곧 별것 아니라는 듯 가벼운 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이 엘프는 엘프 중에서도 선택된 종족이야. 드래곤이 유일하게 폴리모프로 변신할 수 없는 존재라고나 할까. 아니, 안한다는 말이 더 옳겠군. 그 모습을 유지하려면 마나를 너무 많이 잡아먹어서 조금 힘들거든.”
“에? 그럼 세실을 엘프로 만들긴 어렵다는 거야?”
“엘프는 상관없어. 하이 엘프가 어렵다는 거지. 하지만 그 오빠라는 녀석이 하이 엘프라며. 동생이 평범한 엘프가 되는 걸 용납하겠어?”
“그게 뭐 어때서? 인간들로 치면 귀족과 평민 정도잖아? 그런 걸 이해 못할 정도로 속 좁은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동생이 살아나면 충분한 거 아냐?”
“호오, 하이 엘프들은 대체로 종족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고 들었는데, 그 녀석은 아닌가 보지?”
“아무렴 드래곤만 할까. 넌 네 형이나 동생이 다른 종족이 되었다고 하면 싫어할 거야?”
그러자 라피스의 입가에 화사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즐거워서 미치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소원이 없겠군. 그 꼴 보기 싫은 면상을 다시는 보지 않도록 세상에서 영원히 잠재울 수 있을 테니.”
“…쌓인 게 많은 모양이지?”
“아니, 별로. 난 그저 나보다 모자란 녀석이 형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게 마음에 안들뿐이야. 내 아버지인 라이칸은 세상에서 가장 큰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어.
그 중 하나는 메테녀석을 이 세상에 탄생시킨 일이고, 두 번째는 나를 그놈의 동생으로 태어나게 한 일이다. 하여튼 빌어먹을 도마뱀들 같으니! 난 세상에서 블랙 드래곤이 제일 싫어!”
나는 나중에 그 메테라는 드래곤을 만나게 되면, 지금 이 말을 똑같이 이름만 바꿔서 듣게 될 것이라는데 내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원래 사이 나쁜 형제들치고 한쪽에만 잘못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특히나 라피스처럼 성격 좋지 않은 녀석이라면 더더욱.
‘그나저나…라피스한테 형이 있다니 의외인 걸? 하도 제멋대로라 외아들일줄 알았는데. 블랙 드래곤이라고 한걸 보면 친형제는 아닌 것 같은데…나중에 한번 볼 수 있으려나?’
형제싸움에 대해선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지만, 어쩐지 라피스와 그의 형이라는 드래곤의 격돌은 재미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킥킥거리고 웃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라피스를 무시하며, 나는 지금쯤이면 일어나있을 엔딜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인간과 어울려 산다곤 해도 녀석은 엘프였기 때문에, 마을과는 멀찍이 떨어진 숲 쪽에 주거를 마련하고 있었다.
낡고 초라한 판자집 주위엔 볼품없이 삐쩍 마른 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사람이 살고 있어서인지 어딘지 모르게 생기가 있어 보였다.
똑똑- 가벼운 노크와 함께 문을 열려는 순간, 벌컥 소리가 열리더니 그보다 먼저 엔딜의 모습이 튀어나왔다. 녀석은 평소보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얼굴 가득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 엘퀴네스님!! 잘 왔어. 나, 나 말이야!”
“안녕, 엔딜. 잘 잤어?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있잖아! 나 방금 시큐엘을 소환했어! 내가 다시 시큐엘을 소환하게 됐다고! 다시는 정령을부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느낌이 열나게 좋아서 시도해 봤더니 정말로 된 거야! 믿을 수 없어! 호, 혹시 엘퀴네스님이 도와준 거야? 어제 이마를 짚은 건 그래서였지? 그치?”
“헤에. 생각보다 이른걸. 좀 더 늦게 눈치 챌 줄 알았는데. 그동안 꾸준히 소환을 시도하고 있었구나?”
“당근이지! 시큐엘은 내 유일한 친구였는걸! 그녀석이 없어지고 나서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소환주문을 외웠었다고. 근데 정말 엘퀴네스님이 도와준 거야? 정령왕은 그런 것도 가능해?”
초롱초롱 빛나는 엔딜의 얼굴을 보며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가 한 일이라곤 친화력을 높여준 것 밖에 없었지만, 이전처럼 불완전한 소환으로 엔딜의 육체에 무리가 가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펄쩍뛰는 녀석의 뒤에 낯익은 시큐엘 한 마리가 다소곳하게 서 있는 것을 발견한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심정이 되어 황급히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보다 더 좋은 소식이 있어, 엔딜. 세실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 같아.”
“뭐? 그, 그게 정말이야? 그럼 드래곤님이 오신거야?”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리던 녀석은 그제 서야 내 뒤에 시큰둥하게 서있는 라피스를 발견했는지 헉-하고 짧게 숨을 들이켰다. 자기도 모르게 꼬옥 내 팔을 붙드는걸 보니,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어지간히도 무섭긴 무서웠던 모양이다.
그래서였을까? 녀석은 이어지는 설명에도 별다른 꼬투리 없이 무조건 고개부터 먼저 끄덕였다.
“…그래서 세실을 하이 엘프로 만들 순 없을 것 같아. 보통 엘프로는 가능하다는데, 어때?”
끄덕끄덕
“물론 원한다면 인간이 되는 것도 가능해. 일단 그 아이의 의견도 들어와야 할 것 같은데. 세실은 일어났니?”
끄덕끄덕
“나 참, 엔딜. 그렇게 고개만 끄덕이지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봐. 넌 어떻게 하면 좋겠어?”
끄덕끄덕
상태를 보건데 절대 정상은 아니다. 난감한 표정으로 라피스를 바라보자, 녀석은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달랑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결국 우리는 이 모든 사태를 마법에 걸릴 본인과 상담하기로 결정지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엘님. 라피스님도 함께 오셨군요. 어서 오십시오.”
집안으로 들어가자 세실에게 미음을 먹여주던 카이씨가 반가운 표정으로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고열 때문인지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을 대고 있던 여자아이가 겁먹은 얼굴로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을 뿐, 나와 라피스를 바라본 소녀는 곧 감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와아…천사님들이다.”
“쿡쿡. 안녕, 세실. 만나서 반갑다. 몸은 좀 어때? 많이 아프니?”
“아니요. 세실은 괜찮아요. 늘 이런걸요. 이제 견딜만해요. 그런데 천사님들은 어디에서 오셨나요? 혹시 절 데려가기 위해서 천국에서 오신 거예요?”
“아, 우리는 천사가 아니야. 세실을 치료해 주려고 온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치료요? 그럼 제 병을 낫게 해주신다는 말인가요?”
열에 달뜬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희망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본 나는 생긋 웃으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옆에선 라피스가 이런 건 내 취향이 아니네 뭐네 투덜거리고 있었지만,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 있는 이 붉은 머리의 오빠가 병을 낫게 해 줄 수 있대. 근데 치료법이 굉장히 특이해서 병이 나으면 외모가 조금 바뀌게 될 것 같아. 세실은 엘프가 좋으니, 인간이 좋으니?”
“엘프? 인간?”
“인간은 여기 있는 카이씨같이 생긴 사람이고, 엘프는 네 오빠 같은 사람을 말하는 거야. 병이 나으려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해.”
그러자 세실은 고민스런 얼굴로 연달아 엔딜과 카이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초롱초롱한 소녀의 눈빛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이전에 저를 가끔씩 돌봐주시던 캔디 아주머니한테서 인간과 엘프의 차이점이 뭔지 들었어요. 인간은 오빠처럼 오래 살 수 없지요? 아주머니는 자신이 인간이라서 오빠보다 오래 살 수 없다고 했었어요.”
“응, 맞아. 엘프가 더 오래 살아.”
“그럼 전 엘프가 될래요. 제가 인간이 되면 오빠보다 먼저 죽게 되잖아요? 슬퍼하는 오빠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라피스에게 따로 들은 바에 의하면, 세실은 엘프가 되어서도 엔딜보다는 오래 살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원래 혼혈들은 순수 엘프보다 오래 살수가 없고, 마법으로 엘프가 되었다고 해도 수명까지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드래곤인 라피스가 인간으로 폴리모프 해도 오래 살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그럼 세실이 인간으로 변해도?”
“결과는 똑같아. 하지만 보통 인간보단 오래 살게 될 테니 차라리 엘프로 변하는 게 나을 걸? 마법으로 종족이 변한다 해도 본래 특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아마 꽤 오랫동안 젊음을 유지하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마녀라고 오해를 당할지도 모르지. 생명의 탄생이나 수명에 관계된 건 신의 영역이기 때문에, 제 아무리 완벽한 드래곤의 마법이라도 건드릴 수 없어.”
헤에, 그럼 엘뤼엔은 가능하다는 걸까? 무심코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머릿속에서 뚜렷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물론 가능하지. 이 아버지가 그런 일 하나도 못할 거라 생각 했냐, 아들?>
‘어? 에, 엘뤼엔? 지금 안 바빠?’
<아아, 나라도 잠깐 쉴 틈은 있어야지. 그런데 아직도 그 썩을 도마뱀과 같이 다니는 거냐?>
던전에서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오랫동안 못 만난 기분이다. 차가운 냉기가 풀풀 느껴지는 말에 나는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그게…어찌됐든 일행은 일행이니까.’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오냐오냐 받아주다간 너만 더 피곤해질 거다. 적당히 상대해주고 끊어버려. 관심이 애정이 되고, 그게 더 심해지면 집착이 되는 거야. 근데 아무리 봐도 저 도마뱀은 이미 그 단계도 넘어서버린 것 같다. 쯧쯧, 어쩌다 저딴 놈에게 걸려가지고선.>
‘윽. 그게 어디 내 탓이야? 엘뤼엔이 예전에 한번이라도 계약을 해줬으면 이렇게 까진 되진 않았을 거 아냐!’
<누가 그렇게 끝까지 물고 늘어질 줄 알았냐? 이런 후환이 될 줄 알았으면 그때 그냥 없애두는 건데. 참, 카노스 녀석은?>
‘아, 따로 조사할게 있다면서 다시 마계로 돌아갔어. 근데 아까 했던 말 사실이야, 엘뤼엔? 세실의 수명을 늘여줄 수 있어?’
<그렇긴 한데…부탁할 생각은 말아라. 인간이던 엘프던, 살아가는 것엔 전부 정해진 궤도가 있는 법이야. 병을 고쳐준 것만으로 너는 충분히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 둬.>
‘에? 하지만…’
<나를 이용해서 얻을 수 있는 혜택은 오직 너에게만 해당할 뿐이야. 다른 녀석들까지 끌어들이진 마라. 안 그래도 충분히 바쁘니까.>
냉정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였지만, 그것이 나를 걱정해서 한 소리라는 것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번만큼은 나 역시 고집부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납득한 표정으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내 모습을 잠시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라피스가 곧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뭘 그렇게 혼자서 생각해? 아무튼 빨리 결정이나 내려. 마법 걸어, 말어?”
“응? 아아. 부탁해, 라피스. 세실을 엘프로 폴리모프 시켜줘. 아이들도 그것을 원하니까.”
“맡겨만 둬. 이런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세실이 엘프로 변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라피스의 입에서 ‘폴리모프’라는 한마디가 내뱉어진 순간, 아이는 어느새 온전한 엘프로 변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외모 면에선 크게 달라진 게 없었지만, 보통의 엘프보다 조금 뾰족 했던 귀가 이제는 오빠인 엔딜 만큼 길게 자라 있었다. 거울 속에 비췬 자신의 모습을 연신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세실은 맑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빠! 나 이제 안 아파! 열도 안 나고, 하나도 어지럽지 않아.”
“그게 정말이야, 세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환한 표정으로 기뻐하는 동생의 모습에, 엔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꼭 끌어안은 어깨는 격한 흐느낌을 참느라 아까부터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상태였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이 더 많은 남매였지만 나는 그다지 걱정이 되지 않았다. 저 둘이라면 반드시 잘 해나갈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루카! 다시 돌아오신 겁니까?”
마계 4대 공작의 하나이자, 마족의 알에 대한 총책임의 임무를 맡고 있던 쟌은 지금 하나도 정신이 없었다. 마왕의 명령을 받은 후 벌써 몇 달째 소식이 끊겼던 루카르엠이 어느 날 소리 소문도 없이 다시 마계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멀리서 걸어오는 경쾌한 발걸음의 남자가 루카임을 한눈에 알아본 그는, 놀란 표정으로 다가가 황급히 그의 팔을 붙들었다. 언제 봐도 끝을 알 수 없이 깊은 눈동자가 장난끼를 가득 담은 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어~ 쟌! 오랜만이군요. 그 동안 잘 지냈습니까?”
“지금 그런 한가한 인사를 할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대체 어찌 되신 겁니까? 정말 다시 돌아오신 건가요?”
“어라라? 마족인 제가 마계에 오는 것이 무슨 큰일 날 일이라고 그렇게 놀라시는지? 혹시 제가 없는 사이에 무슨 변고라도 있었습니까?”
“그, 그런 게 아니라…”
쟌에게 있어 루카는 마신의 대리자이자 마계를 지배하는 또 하나의 왕이었다. 말투나 행동이 가볍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마족들이 그를 기피했지만, 실제로 쟌은 이제까지 그보다 더 무서운 존재를 만나보지 못했다. 그보다 더 겉과 속을 완벽하게 컨트롤 할 수 있는 이는 없으리라!
이미 한참 전부터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힌 루카르엠에 대한 정의는 이러했다.
‘마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사명을 부여 받은 자!’
실제로 역대의 마왕들 중, 루카의 눈치를 보지 않는 존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때문에 쟌은 이제껏 그가 마신으로부터 직접 선택받아 내려온 신의 사자(使者)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가 마계를 떠났다는 말을 들었을 땐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던가! 당장이라도 마신의 분노가 임할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듯 아무 일 없이 다시 돌아온 루카를 보니 반가운 감정보다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마신께서는 아직 마계의 멸망을 유보하시는 건가? 어쩌면 우리 마족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걸지도 모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그는 곧 낭패한 얼굴로 루카를 바라보았다.
붙잡은 것 까진 좋았는데 막상 그를 불러 세운 마땅한 사유가 대자니, 떠오르는 것이라곤 이번에 탄생할 마족의 알이 전부 파괴된 사건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마왕의 짓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설령 그렇다 해도 쟌 스스로가 맡은 바 챔임을 다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로부터 힐책을 면하리란 기대는 할 수 없었다.
평소에도 마왕의 진노보단 루카의 사소한 꼬투리를 더욱 두려워하던 그로서는 차마 자신의 입으로 꺼낼 수 없는 화재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언제고 알게 될 일이란 생각에 쟌은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때까지도 루카는 그의 하는 양을 즐거운 기색으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실은 부화시기를 앞둔 알들이 전부 파괴되었습니다.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만…”
“흐음. 그건 곤란한데요. 숲의 통제를 확실하게 하는 것이 당신의 임무 아니었습니까? 평소 관리를 어떻게 하였기에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방관하셨는지?”
“입이 백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당장이라도 4대 공작의 지위를 반환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마계에서 지위의 반환이란 유보 없는 영원한 죽음을 뜻했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쟌의 모습에 루카는 살풋이 웃으며 대답했다.
“어라라? 살벌하셔라~ 그런 일 가지고 일일이 자리를 내놓는다면 이때까지 목숨이 남아나는 마족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알들이 파괴된 사건이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 너무 성급한 결정이 아닌지? 설마 마왕전하께서 그리 하라 명령하셨습니까?”
“예? 아니,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쟌도 배 째라는 심보로 버티세요. 뭐 어떻습니까? 사실 알만한 마족이라면 이번 일의 배후쯤이야 눈감고도 짐작할 수 있을 텐데. 언제나 물증이 없어서 답답할 뿐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며, 면목이 없습니다.”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면서도 그는 어쩐지 가볍게 넘어간다는 생각이 들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까지 루카는 알이 파괴될 때마다 책임자를 불러 가혹한 추궁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평소엔 꽃을 가꾸거나 저택에서 홀로 독서를 즐기는 그였지만, 그때만큼은 암흑의 기사라는 별명답게 두 손에 피를 묻히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존재에게서 면책부를 받게 되다니!
평소에도 루카에 대한 존경심이 남달랐던 쟌으로서는 눈물이 날만큼 감동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의 두 눈에선 이전에 데르온을 가볍게 가지고 놀던 성질머리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만약 이 장면을 데르온이 지켜봤다면 헛것을 봤다며 몇 번이고 눈을 비볐을 것이다. 그것은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가던 암흑의 마녀 세르피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머? 저건 쟌이잖아? 저 싸가지 없는 놈이 어울리지도 않게 얼굴을 붉히고…대체 무슨 일이지?’
좀처럼 볼 수 없는 진귀한 구경거리란 생각에 세르피스는 감히 다가가 아는 척 할 생각을 못하고 근처에 있던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그녀는 곧 쟌의 앞에 서있던 훤칠한 키의 남자를 발견하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헉! 저 녀석은 루카르엠? 중간계로 나가자마자 행방불명되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다시 돌아온 거지? 마왕전하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시나?’
정상적인 보통 마족이라면 마계에 돌아온 즉시 마왕을 배알했을 테지만, 루카가 어디 정상적인 마족이었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명령이라도 가볍게 무시하는 존재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세르피스는 마왕이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녀의 입가엔 곧 화사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호호호~ 내가 먼저 가서 알려줘야지. 안 그래도 요즘 루카와 연락이 끊어졌다고 길길이 날뛰던데, 이 소식을 들으면 까무러치게 놀라겠지? 이런 식으로 천천히 신임을 사다 보면 분명히 그의 빈틈을 노리는 순간이 오게 될 거야. 데르온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왕의 자리는 내가 받아야겠는 걸?’
그가 이미 처량한 유모의 길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세르피스는, 생긋 웃으며 왕의 거처로 이동하는 텔레포트의 주문을 외웠다. 스르륵! 어둠속으로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때까지도 쟌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루카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쥐새끼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데 말이지.”
“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아, 별거 아닙니다. 당신은 이만 가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무래도 상당히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될 것 같으니 말입니다.”
“…?”
쟌을 돌려보낸 후에도 루카는 얌전히 그 자리에 서서 나타날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러자 잠시 후, 갑자기 검은 밧줄이 달려들어 그의 온몸을 꽁꽁 결박하기 시작했다.
마치 뱀처럼 꿈틀거리는 그것에 강한 마력이 담겨있음을 알아본 루카는 별 다른 저항은 하지 않은 채, 어느새 그의 앞에 나타난 마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씩씩거리는 폼새를 보건데, 그가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분을 못 참고 달려온 것이 틀림없었다.
“못 본 사이에 많이 과격해지셨군요, 마왕전하.”
“닥쳐라! 그 뻔뻔한 낯짝을 잘도 가지고 돌아왔구나! 내가 명한대로 정령왕의 계약자는 해치운 것이냐?”
“아~ 그게 실은 깜빡 잊어버려서요. 중간계에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어찌나 신기한 것이 많은지…구경하다 보니 이리 늦어버리고 말았지 뭡니까? 하하!”
“가당치도 않은 수작 따윈 집어 치워라! 데르온은 어찌 했느냐? 네놈을 감시하기 위해 보냈던 마도의 군주 데르오느빌 말이다! 설마 죽인 것은 아닐 테지?”
“데르온 말입니까? 글쎄요. 쫓아오지 말라고 몇 번 가볍게 쓰다듬어 주긴 했습니다만.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뭐, 그리 큰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허약한 마족이 죽는 건 흔한 일 아닙니까?”
“네놈이 나를 능멸하는 것이냐! 데르온의 일이 아니었다 해도 너는 왕의 명령을 불이행한 죄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네놈이 진작부터 나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 밧줄에 담겨진 마력은 순수한 왕의 계승을 치룬 자만이 파괴할 수 있으니 서툰 수작은 부리지 말아라! 내 이손으로 친히 네 온몸을 갈갈이 찢어 죽이고 말겠다!”
격렬하게 진노하는 마왕의 목소리에도 루카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사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이까짓 밧줄쯤은 얼마든지 끊어낼 수 있었다. 마신인 그가 마계에서 하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지금 그가 아무리 이를 간다 해도 생각만큼 쉽게 자신을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다.
‘한심한 녀석. 결국 이것밖에 안 되는 거였나.’
지금은 저래보여도 마왕역시 한때는 그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총명한 아이였다. 장차 훌륭한 왕이 될 거란 생각에 지켜보는 내내 얼마나 뿌듯해 했던가! 하지만 그는 자랄수록 권력과 욕심만 앞세운 인물이 되고 말았다. 역시 마족이란 종족은 어쩔 수 없었다고나 할까?
지금 순순히 잡혀주는 이유는 마계내부에서의 조사를 좀 더 수월히 하려는 의도였지만, 한 때나마 아끼던 녀석을 의심하는 기분이 편할 리 없었다.
그 날 이후로 마계에서는 마도의 기사 루카르엠이 봉인되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
“이게 뭐지?”
같은 시각, 신계에 있던 엘뤼엔은 상급신들로부터 한통의 작은 서신을 받았다.
안 그래도 바쁜 와중이라 짜증이 치솟았지만, 주신의 인장까지 찍혀진 것을 안 볼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엘뤼엔은 불쾌한 표정으로 손에 들린 편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서신을 가져온 천사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번 회의에서 내려진 결정을 통보하는 서신이라고 합니다.”
“회의?”
“네, 그렇습니다. 악신의 탄생에 대한…”
“아아, 그것 말인가. 확실히 회의가 열린다는 말은 들었지. 일 때문에 바빠서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흐음, 뭔가 그럴듯한 결정이라도 내린 건가? 이렇게 서신까지 보내는걸 보면.”
흥미로운 얼굴로 중얼거린 그는 이제 그만 나가보라는 뜻으로 천사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이윽고 주변에 있던 수행원들이 모두 물러나자, 엘뤼엔은 그때서야 차분하게 서신을 감싸고 있던 겉봉투를 뜯었다.
얇은 감촉과는 달리, 편지의 내용은 눈이 아플 정도로 빽빽한 글자로 무려 10장 가까이 이어져 있었다. 사안이 워낙 중요했던 탓에 회의 중에 있었던 모든 대화들을 빼놓지 않고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할 말만 정리해서 써도 될 것을…. 하여튼 융통성 없는 녀석들 같으니.”
찌푸린 표정을 하면서도 잠자코 서신을 읽어 내려가던 엘뤼엔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살벌하게 변한 눈빛은 아까부터 편지에 적힌 마지막 문장만을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
<…때문에 우리들은 형벌의 신인 당신을 이번 일에 가장 합당한 자격을 갖춘 존재로 인정했습니다. 허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의견일 뿐이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든 이의를 제기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우습게도 회의에서는 악신의 제거에 필요한 희생자로 이제 겨우 신이 된지 26년 밖에 되지 않은 엘뤼엔을 선택했다. 이유인 즉, 그가 한때 신이 아닌 인세(人世)를 걷기를 소원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엔 소멸이 된다 해도 주신의 배려에 따라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을 테니, 탐탁지 않은 신의 자리를 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냐는 소리였다.
“호오~ 그렇게 나오시겠다?”
물론 예전이었다면 그도 별다른 반감 없이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지긋지긋하게 이어지는 영원의 삶에는 더 이상 어떠한 미련도 호기심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 않은가!
“날더러 멀쩡한 아들내미를 놔두고 인간이 되라고? 이 썩을 것들이 누구를 호구로 알고!!”
한 번 소멸의 과정을 거친 존재는 다시는 신의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다. 한 마디로 엘과는 영혼의 성질이 완전히 달라지 게 되는 것이다.
그걸 빤히 알면서도 가만히 앉아서 당해줄 만큼 그는 관대한 성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달랑 편지 한통을 보낸 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안이한 태도 자체가 괘씸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의를 제기 해도 상관없다고 했던가? 엘뤼엔의 입가엔 곧 차가운 미소가 흐르기 시작했다.
“날 지목한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아마 조만간에 다시 회의를 열어야 할 거다. 네놈들 모두가 내 손에서 소멸당하고 싶지 않다면.”
이제는 형체도 알 수없이 구겨진 종이뭉치가 볼품없이 그의 발아래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 새로운 바람 -
동생의 병은 나았지만 엔딜은 앞으로도 엘프의 숲에 돌아갈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지금처럼 계속 이집에 살면서 적당한 장사거리를 찾아볼 거란 말에 나와 카이씨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남매를 바라보았다.
이(異)종족인데다, 아직 어리기 만한 두 사람이 과연 언제까지 타인의 시선을 피해 살아갈 수 있을까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부득이하게 괜찮다고 우기는 아이들을 억지로 숲에 보낼 수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표정 안 해도 돼, 엘퀴네스님. 지금까지도 잘 해왔는걸? 나 이래봬도 힘이 꽤 세서 마을에 가면 구할 일자리도 많아. 이종족의 차별이 없다곤 못하지만, 다른 곳에 비하면 심한 편도 아니고.”
“으음. 그러지 말고 차라리 우리랑 같이 가는 게 어때? 일자리라면 내가 알고 있는 상단 사람이 있으니까 소개시켜 줄 수 있어. 대우도 좋고, 급여도 많을 거야. 내가 보장할게.”
“아니,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엘퀴네스님 한테는 이미 많은 걸 받았잖아. 더 이상은 신세질 수 없어. 그리고 이곳은 엘프의 숲하고도 가까워서, 솔직히 떠나고 싶지 않아. 아무리 미워도 일단은 내 동족이고, 부모님이 살고 계신 곳이니까. 지금 이곳을 떠나면 앞으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 같거든.”
“하지만…”
“괜찮아. 그리고 지금은 시큐엘도 다시 돌아왔으니까, 나쁜 새ㄲ…아니, 나쁜 사람들이 세실을 건드리는 일도 없을 거야. 헤헤. 그러니까 엘퀴네스님은 걱정 하지 마. 다 잘할 수 있다니까?”
이렇게까지 말하니 나로선 더 이상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단호한 남매의 표정을 본 나는 피식 웃으며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지금까지 잘 해왔다는 네 말을 믿을게, 엔딜. 나중에라도 필요하면 시큐엘을 통해 연락 해. 바로 달려올 테니까.”
“으응, 고마워 엘퀴네스님.”
“뭘 그 정도 가지고. 근데 이 집은 너무 낡아서 앞으로 계속 살려면 보수가 필요 하겠는데? 이것도 마법으로 가능할까? 어라? 카이씨, 라피스는 어디 갔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던 걸 확인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그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진 상태였다. 혹시 내가 또 부려 먹을까봐 미리 도망친 거 아니야?
카이씨 또한 모르기는 마찬가지인 듯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내내 지루한 것 같으시더니, 잠깐 산책이라도 하러 가신 게 아닐까요? 그보다 엘퀴네스님. 괜찮으시다면 저도 이곳에 남고 싶습니다만.”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카이씨?”
당연히 나와 함께 돌아갈 거라 생각했던 그가 남겠다는 소리에, 나는 물론 듣고 있던 엔딜까지 놀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카이씨는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던 세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병이 나았다곤 해도 세실의 체력은 아직 보통 인간아이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 동안 제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으니…하다못해 건강해질 때까지라도 옆에 있어주고 싶네요.”
“무, 무슨 소리야, 카이! 당신이 도움이 안 되었다니? 세실이 위험할 때 마다 애써준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그런 소리를 할 참이야?”
“하하. 하지만 완치를 하지는 못했잖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엔딜군과 세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잠시나마 지켜보고 싶다는 게 진짜 이유입니다. 엔딜군은 아닐지 몰라도 저는 그동안 꽤 즐거웠거든요.”
“이런 젠장! 나는 아니었다고 누가 그래? 나도 그동안 카이를 형처럼 의지할 수 있어서 좋았단 말이야! 생글거리는 얼굴로 자꾸 그렇게 재수 없는 말만 할 거야? 듣는 엘프 마음 상하게 시리.”
험한 입담으로 툴툴거리면서도 엔딜의 얼굴은 이미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동안 정이 많이 들었던 모양인지 세실 또한 카이씨의 소매에 매달려 떨어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쉽기로는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미 떠나기로 마음먹은 사람을 붙잡고 늘어지는 건 예의가 아니란 생각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없죠. 카이씨 뜻이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엘님. 제가 먼저 동행 의사를 밝혔으면서도…”
“괜찮아요. 오히려 카이씨가 이곳에 계신다면 좀 더 마음이 놓일 것 같네요. 제몫까지 포함해서 엔딜들을 잘 부탁드릴게요.”
“그 점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엘뤼엔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그럼 다른 일행분들과도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식사 후에 바로 카웰 후작의 저택으로 가실 겁니까?”
“아니요. 그 전에 먼저 이프리트가 있던 클리프 상단부터 들려야 해요. 이사나의 골치 아픈 검을 넘겨야 하거든요. 아무튼 저도 그동안 카이씨와 꽤 정이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헤어지게 되니 아쉽네요. 이곳엔 얼마나 계실 건가요? 다음에라도 볼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데…”
“하하. 수련 중인 몸이라 정처 없이 떠돌기야 하겠지만, 설마 그 많은 세월 동안 엘님을 다시 볼 기회가 없겠습니까?”
“하긴, 그렇긴 하네요. 그럼 다음에 다시 뵈도록 할게요, 카이씨. 모든 수련을 마치시고 무사히 대사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랄게요.”
웃으며 건넨 말과는 달리 마음속은 어쩐지 찝찝한 느낌이었다. 카이씨의 모습을 보는 일이 꼭 오늘로 마지막이 될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잠깐 동안 복잡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던 나는 곧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만 두자. 내가 무슨 예언의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단지 예감이 나쁠 뿐이야, 예감이.’
나쁜 상상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나는 먼저 일어난 카이씨를 따라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조용하던 바깥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 무슨 일이지? 누가 싸우나?”
“어서 가보도록 하죠, 엘님. 소리가 큰 걸 보면 쉽게 마무리 될 사항이 아닌 것 같은데요?”
카이씨의 염려스러운 시선을 뒤로하며 나는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혹시나 질투에 미쳐버린 이사나가 카터스의 황태자를 향해 칼부림이라도 일으킨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문을 열고나서 보이는 광경이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나 몰라라 하고 있는 라피스와, 그런 녀석을 향해 길길이 날뛰고 있는 한 명의 푸르딩딩한 블루엘프-시벨리우스의 모습이었다.
중간 중간 물리적인 행사라도 했던 건지, 근처의 흙 밭은 온통 불로 시꺼멓게 그을려 있었고, 텐트에 있었던 나머지 다른 일행들은 멀찍이 떨어져 둘의 대립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무슨 일인겨?”
황당한 표정으로 채 할 말을 못 잇는 사이, 시벨리우스의 험악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뭐라고 이 자식아? 너 방금 뭐라고 그랬어! 다시 한 번 말해보시지!”
“덜 떨어진 엘프라고 했다. 쓸데없는 일에 힘을 남발하는 것도 그렇고, 이래저래 민폐밖에 안 되는 녀석이로군.”
“익! 어디서 꼭 기생 오래비 같이 생긴 게 나타나서 뭐가 어쩌고 어째? 넌 어디서 뭐하는 자식이야!”
“아까 말했을 텐데? 엘의 일행이라고. 성격도 더러운 녀석이 머리까지 나쁜 거냐? 거참. 너도 세상 살기 어렵겠구나.”
“죽인다!”
빈정거리는 라피스의 말에 시벨은 너무도 쉽게 흥분하고 있었다. 더 이상 내버려뒀다간 피라도 볼 기색이라 나는 얼른 달려가 불덩이를 날리려는 시벨리우스의 팔을 붙들었다.
“그만!!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야?!”
“엘! 잘 왔어! 저 자식 대체 뭐야? 정말 너랑 일행이야?”
“일행이고 뭐고 일단 말로 해, 말로! 다들 말리지 않고 뭘 하는 거야?”
그러자 그때까지도 멀거니 상황을 방관하고 있던 일행들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더듬더듬 변명을 이었다.
“아니, 그게…좀처럼 끼어들 틈을 안줘서 말이야. 다짜고짜 마법부터 날리는데 차마 말릴 수가 없더라고.”
“저는 단지 미래의 주군께 화려한 전투씬을 보여드리고 싶었을 뿐….”
“미쳤어! 저 사이에 어떻게 끼어들어? 우리더러 여기서 인생 종치라고?”
“헉!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알리사노 양이 죽으면 저도 따라 죽을 겁니다!”
“……”
결국 말릴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소리인가.
잠시 체념의 한숨을 내쉰 나는 화난 얼굴로 지금의 소란을 일으킨 두 존재를 바라보았다. 친해져도 모자를 판에 초면부터 살벌한 전투라니! 앞으로 이 징글징글한 것들을 이끌고 다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뭣 때문에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해. 다른 일행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 나이는 여기서 제일 많이 먹은 주제에 어른스럽지 못하게 시리!”
“저 녀석이 먼저 시비를 걸었단 말이야! 날더러 덜떨어졌다고 그랬다고! 그리고 엘 너를 멋대로 자기 것이라고 하지를 않나! 그런 말을 듣고 참으란 말이야?”
“흥! 당연한 말을 한 것뿐이야. 내걸 내거라고 하는데 뭐가 이상하지?”
“뭐야? 그래도 이 자식이!!”
한마디로 정리하면 사정은 대충 이랬다.
처음 라피스는 오랜만에 이사나와 인사라도 할 요량으로 그들이 머물고 있던 텐트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자기들 쪽으로 다가오는 강한 마력을 느낀 시벨리우스가 제일 먼저 문 앞을 막아섰고, 정체를 밝히기 위해 서로 윽박지르는 가운데 내 이야기가 나왔던 모양이다.
‘넌 엘과 무슨 사이냐!’라고 묻는 말에 ‘친구’라고 대답했다고 하던가. 문제는 그것을 들은 라피스가 피식 웃으며 ‘그 녀석은 내거니까 넘보지 마.’라고 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평소 남이 듣든 말든 자기 편한 방식대로 함부로 말하던 버릇이, 이번에도 다른 사람의 귀를 거슬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모든 상황을 종합해서 들은 나는 빠드득 이를 갈며 시벨리우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미안해, 시벨. 라피스가 원래 입이 좀 험해. 오냐오냐 막 자라서 버릇이 없거든. 그냥 한 살이라도 더 많은 네가 참아야지 어쩌겠어? 원래 세상은 연장자한테 불리한 법이야.”
“뭐라? 엘 너 지금 방금 뭐라 그랬어?”
“시끄러! 라피 너는 입 닥치고 있어! 이게 전부 다 남한테 오해 살 말을 한 네놈 탓이잖아!”
“왜 내 탓이야? 계약은 곧 소유를 의미하는 거라고! 그걸 직설적으로 표현한 게 뭐가 나빠?”
“계약도 계약 나름이지! 정령사가 자기 정령한테 내거라고 말하는 거 봤어? 이 유치뽕짝 도마뱀아! 이사나도 엄연히 계약자지만 날 이런 식으로 취급한 적은 한 번도 없어! 아무튼 이번일은 전적으로 다 네 잘못이야! 빨리 시벨한테 사과해.”
“…싫다면?”
“그럼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못하게 계약 자체를 파기해주지.”
“!!”
그 말에는 천하의 라피스도 어쩔 수 없었는지 움찔 어깨를 떨었다. 마주보는 내 눈빛에서 진심을 읽은 녀석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시벨리우스를 쏘아보며 내키지 않는 어조로 한마디 내뱉었다.
“…쳇. 내가 잘못했다. 이럼 됐어?”
“오케이, 잘했어. 시벨 너도 그만 화 풀고 사과 받아줘. 저 녀석 입에서 잘못했다는 말이 나온 건 내가 듣기론 이번이 처음이거든. 역시 어떤 종족이건 협박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니까?”
“…으응. 아, 알았어. 근데 엘…어쩐지 성격이 많이 과격해 진 것 같아.”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갈수록 키울 자식만 늘어가는 기분에 온 어깨가 처지는 내 입장이 한 번 돼보란 말이다!
부루퉁한 표정으로 쏘아보자 시벨은 얼른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스스로도 너무 어린애같이 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거의 반 강제적이긴 했어도 라피스의 사과 덕분에 상황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자, 나는 구경하고 있던 일행들을 불러 그를 소개시켰다. 이사나와 데르온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와 안면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이어진 대화들을 토대로, 황태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눈치 챈 듯 보였다. 그래서인지 어제와 확연히 달라진 세실의 모습을 보고도 누구도 이상하다는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소개가 늦은 감이 있지만, 어쨌든 다들 인사해. 이쪽은 라피스 라즐리. 원래 우리랑 일행으로 있어야 했는데, 중간에 잠깐 사정이 생겨서 빠졌던 녀석이야.”
“헤에. 아까부터 느꼈지만, 뭔가 굉장히 화려하게 생긴 사람이네? 그런데 라피스 라즐리는 푸른색의 보석 이름 아니야?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에는 아무리 봐도 안 어울리는데.”
“아, 이 녀석이 푸른색을 좋아하거든. 라피, 이쪽은 알리사노 알 드레프 라고 해. 이번에 던전 근처에서 합류한 일행이야. 앞으로도 계속 함께 다닐 것 같으니까 친하게 지내.”
“흐응. 여자애라니 별 일이군. 그럼 저 녀석은?”
“응? 아아, 저 사람은…”
라피스가 가리킨 사람은 얼떨결에 이쪽으로 휩쓸려 들어온 카터스 제국의 황태자였다.
빠르게 돌아가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듯 연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주변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허리를 숙여 보였다.
한 제국의 황태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아무에게나(?) 허리를 숙일 리는 없으니, 아마 자기도 모르게 몸에 익어있던 동작이 아닌가 싶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본인의 성명은 라온휘젤이라 하며, 미흡하나마 거기계신 사제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 사람입니다.”
“사제? 흐음. 아직 엘의 정체를 모르는군. 다른 녀석들도 몰라?”
“아니, 함께 동행해온 일행들은 전부 알고 있어.”
“호오, 그럼 나에 대해서도?”
라피스의 입가에 떠오른 의미심장한 미소의 뜻을 읽은 일행들은 모두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난리를 치며 소란을 피웠는데 황태자라면 모를까, 이미 내 정체가 뭔지 알고 있던 그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한 게 아닐까?
“아, 그러고 보니…라온휘젤님은 어떻게 하실래요? 본래 있던 장소로 다시 보내드릴까요?”
이미 알리사한테 한눈에 반한 그가 그러마라고 대답할리는 없었지만, 나는 예의상 황태자를 향해 물었다. 예상대로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이미 반려를 찾았는데 무엇 하러 그곳에 다시 돌아가겠습니까? 이 또한 사제님이 저를 살려주신 은혜이니 본국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사례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
“반려는 무슨 놈의 반려야! 수작 부리지 말고 당장 꺼지지 못해? 이사나씨! 이 사람 좀 어떻게 해 보라니까?”
“…보다시피 이런 식이라서 조금 곤란하군요. 알리사노양을 혼자 두고 떠날 수는 없으니 당분간은 사제님의 일행과 일정을 함께 할까 합니다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틱틱대는 알리사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건네는 제안에 나만이 아니라 이사나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 이 길로 후작에게 돌아가게 되면, 우리는 본격적으로 대공을 칠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반려의 라이벌은 둘째 치고, 아직 이사나가 솔트레테의 황제라는 사실도 모르는 존재를 섣불리 일행으로 합류시킬 순 없었다.
게다가 녀석은 카터스 제국의 황태자가 아니었던가! 자국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임은 물론, 그 자체로 이미 다른 제국의 개입을 받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이번일 만큼은 이사나가 먼저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실례지만 카터스 제국의 황자전하라고 하셨나요? 저는 당신의 합류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솔트레테는 지금 황실의 사정이 많이 어렵습니다. 이런 와중에 타제국의 황자를 일행으로 삼고 있는 무리가 발각되면, 어떤 시비에 휘말릴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행의 한사람으로서, 그런 상황이 오는 것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으음. 저의 신분이 걸리시는 거라면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숨길 수 있습니다. 저 스스로 밝히지 않는 이상, 누구도 제가 카터스 황실의 관계라자고는 생각하지 못할 텐데요.”
“아니요. 지금부터 만나러 갈 저의 사촌형은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 틀림없이 당신의 뒷조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설령 들키지 않게 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실례가 되는 일이 아닌가요?”
하나같이 나긋하고 정중한 어조였지만, 그 말속에 담긴 가시를 눈치 채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파지직! 마주보는 두 남자의 눈에서 불똥이 튀자, 그것을 빤히 바라보던 라피스가 피식 웃으며 나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거로군. 저 녀석들 싸우는 이유가 알리사노인지 뭔지 하는 여자 때문이지? 사내자식들이 쪼잔하게 말다툼이라니. 이래서 인간의 귀족은 안 된다니까.”
“헉, 벌써 눈치 챘어?”
“벌써고 뭐고…아까부터 이사나의 시선이 저 여자애한테서 떨어지질 않던데 뭘. 카터스의 황자와 솔트레테의 황제라. 뭐, 신분만으로도 이미 이사나가 이기고 들어간 게임 아닌가? 게다가 저쪽이 더 나이도 많은 것 같은데.”
“으음, 그게 말이지. 그냥 황자가 아니라 장차 카터스의 황위를 물려받을 태자야. 겉보기엔 저래보여도 둘 다 17세고.”
“킥킥. 아아, 불쌍한 자식.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것도 모자라 숙부한테 구박받고 집에서 쫓겨나더니, 이제는 짝사랑 상대한테까지 라이벌이 생긴 건가? 참으로 기구한 인생이로군.”
그 말에 반박할 수 없다는 게 가장 슬픈 일 아닐까?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는 내 옆으로 알을 품에 안고 있던 데르온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묘한 표정으로 힐끔 라피스를 보던 그는 들릴 듯 말듯 속삭이는 어조로 물었다.
“저어, 엘퀴네스님. 저분이 이프리트였던 게 아니었습니까? 지난번에 만났을 때 엘퀴네스님과 반대되는 성질이라고 하셔서 저는 당연히 불의 정령왕인 줄로만 알았습니다만.”
“에? 아, 아니. 그러고 보니 설명을 못했네요. 미안해요, 데르온.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라피스는 레드 드래곤이에요. 그때는 굳이 말해줄 필요를 못 느껴서 대답하지 않았지만요.”
“으음, 그, 그렇군요. 하긴 레드 드래곤 또한 엘퀴네스님과 반대되는 성질이 맞긴 하네요. 제가 괜히 지레짐작을 했던 거군요. 뭐, 이정도야 루카르엠의 정체를 알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하.”
어색하게 웃는 그의 표정은 이제 놀라는 일이라면 어지간히 만성이 된 듯 했다. 하지만 힘없는 대답과 달리 라피스를 바라보는 두 눈은 뜨거운 투지에 불타올라 있었다. 정체가 무엇이 됐든, 언젠가 한번쯤은 겨루어보고 싶은 상대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드래곤이라면 마계 4대 공작의 한사람인 저와 겨루기에 손색이 없는 상대입니다. 그와는 이전부터 실력을 가누어 보고 싶었던지라, 쉽게 포기가 되지 않는군요. 훗날에 만약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말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예? 하지만…”
“쿡쿡. 그냥 내버려 둬, 엘. 어차피 마족이란 놈들은 다 이런 식이니까.”
당황하던 나보다 먼저 대답한 것은 옆에서 지금까지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라피스였다. 그는 웃음기를 담은 얼굴로 데르온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훗날까지 갈 필요 있나? 지금 이 자리에서 승부를 내보는 건 어때? 가볍게 상대해 주지.”
“호오, 그 말에 후회가 없으셨으면 좋겠군요.”
“누가 할 소리를. 품에 안고 있는 건 엘한테 넘겨주고 따라와. 원하는 대로 실력을 가려주지.”
“좋습니다. 저 역시 바라던 바였으니까요.”
‘왜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거야!!’
황당한 표정으로 정신을 차렸을 땐 난 어느새 황금알을 넘겨받은 채, 어디론가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아마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싸울 만한 공간으로 이동할 모양이었다. 이런 망할 놈들 같으니!!
그런 와중에도 한쪽에선 이사나와 황태자의 대립이 계속 되고 있었다.
“진심을 숨기지 마십시오! 당신은 지금 제가 알리사노 양에게 청혼한 일로 감정이 상해있는 상태입니다! 그 때문에 본인이 당신의 일행에 합류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건 황자께서 이 제국의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지금부터 저희들이 할 일은 황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긴박한 시일을 요구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을 받아줄 정도로 태평한 일행이 아니란 말입니다!”
“대체 그 긴박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게 무엇이라는 겁니까? 자세한 상황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서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군요. 그냥 솔직하게 알리사노 양을 뺏기기 싫어서 라고 말씀하시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뭐라고요? 지금 말씀 다하셨습니까?”
척 봐도 살벌하기만 한 대화였다. 저러다 칼부림이라도 일어나는 게 아닐까?
이미 싸우기 위해 사라져 버린 라피스도, 황태자와 다투고 있는 이사나도 지금의 나로선 상대하기 버거운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정작 말려야할 알리사는 오히려 응원을 펼치고 있으니 더욱 미칠 노릇이 아닌가!
“오호호호! 이것 참 재밌네! 자아~ 싸워라, 싸워! 이기는 편 우리 편!! 이사나씨! 좀 더 분발하라고!”
“……”
‘앞으로 갈 길이 멀구나…’
황금알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도 때문이었을까? 나는 스스로도 느끼지 못한 사이 어느새 데르온이 했던 전처를 고스란히 밟아가고 있었다.
“넌 절대 저러지 마라. 날 괴롭히는 존재는 저놈들로 충분히 차고 넘치니까. 너까지 그러면 확 정령계로 돌아가 버릴겨! 알았어? 아아아, 기구한 내 인생….”
아직 깨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알아들을 리가 있겠느냐 만은, 나는 세뇌라도 시키듯 계속해서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훗날 과연 누구의 태교(?)가 더 효과를 보일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 날, 그 처절한 상황 속에서도 한사코 정중하기만 했던 싸움의 결과는 황태자 쪽의 승리로 돌아갔다.
말끝마다 알리사를 들먹이는 통에 열 받은 이나사가 ‘맘대로 해라!’고 쏘아 붙이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놓고 아차 싶었는지 녀석은 뒤늦게야 몇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단! 절대로 중간에서 빠져나가지는 못할 겁니다! 그럴 각오가 되어있다면 일행으로 합류하시든 마시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한 가지 더 명심할 것은, 오늘 이후로 당신이 우리들의 일에 방해가 되는 사태가 발생할 시, 제 손으로 직접 처단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알아 들으셨습니까?”
“흠, 꽤나 강압적인 태도로군요. 뭐,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 한 배를 탄 동료가 아닙니까. 피차간에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이겼다는 포즈로 생글생글 웃는 황태자는, 훤칠한 생김새와 달리 아직도 어린애같은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
의 합류로 인해 앞으로 어떤 파란이 불어 닥칠지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사나의 짝사랑이 점점 더 고달픈 길로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던전 앞에다 버리고 오는 건데.’
때늦은 일로 후회해도 이미 날아가 버린 먼지요, 흩어진 꽃향기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황태자가 허튼짓을 못하도록 단단히 감시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남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라피스는 거의 넝마가 되다시피 한 데르온을 어깨에 짊어지고 돌아왔다. 한 눈에 보기에도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의식을 잃은 데르온의 여기저가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에 비교하면 라피스는 얼굴에 생채기만 약간 있을 뿐, 너무할 정도로 멀쩡한 모습이었다.
언젠가 한번 그로부터 4대 공작이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 다는 말은 들은 적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확인하고 나니 얼떨떨한 심정이었다. 설마 이정도로 전력의 차이가 날 줄이야!
쿠웅! 아무렇지 않게 데르온을 내던진 녀석은 기겁하는 일행들을 보며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허약한 놈이랑 싸우는 건 질색이야! 봐주느라고 힘을 아껴야 하잖아, 젠장!”
“…봐준게 이정도야?”
“죽이지만 않았음 됐지 뭘 그래? 안 그래도 숨 끊어 질랑 말랑하니까 얼른 치료나 해줘. 아, 찝찝해. 메테 녀석도 이보단 오래 버티던데, 이 놈 진짜 형편없잖아?”
“저기…아무리 그래도 기절한 본인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건 너무하다고 보는데.”
패자에 대한 예우는 둘째 치고, 냉큼 한심하다는 시선부터 보내는 녀석을 보니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대체 이 녀석은 언제쯤에나 철이 들까?
덕분에 우리들은 데르온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상단의 방문을 미뤄야만 했다. 정말이지 도움이라곤 쥐뿔도 되지 않는 도마뱀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 여러분은 이전에 방문하셨던 분들이군요? 총수님을 만나러 오신 것입니까?”
엔딜과 헤어진 후 공간 이동 마법을 통해 클리프 상단에 들어선 우리를 반긴 것은, 지난번에 왔을 때 본 적 있던 이곳 소속의 상인중 한사람이었다.
몇 달만의 방문인데도 용케 한눈에 우리를 알아본 그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살갑게 웃으며 건물의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 앞으로 안내했다.
“곧 손님들의 방문을 고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허나 지금 총수께서 업무 중이시라 시간이 조금 걸릴 것입니다.”
“이프…아니, 이카나님은 많이 바쁘신가요?”
“예에. 요즘 이곳저곳에서 물품 주문이 많아 이전보다 몇 배나 일거리가 많아졌거든요. 천천히 기다려 주십시오. 그동안 드실 다과를 가져오겠습니다.”
그의 말처럼 상단 안은 전체적으로 무척 분주한 분위기였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중에선 쉬고 있기는커녕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조차 단 한명도 없었다.
어쩐지 방문할 시기를 잘못 정한 것 같아 난감해 하는 사이, 신기한 표정으로 건물 안을 구경하고 있던 황태자와 알리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아. 이곳이 바로 클리프 상단의 본부로군요. 총수인 ‘이카나 레타’에 대한 소문은 저희 카터스 제국에서도 유명합니다. 병약한 연인을 위해 가련한 여인의 몸으로 상단을 지키고 그 후 다시 일으켜 세우기까지의 에피소드가 대단하더군요. 모든 여인들의 우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맞아, 나도 들었어. 요 근래 클리프 상단의 성장은 눈이 부실 정도야.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온 대륙에 이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될 걸? 설마 내가 그 유명한 총수를 만나게 될 줄이야! 엘님, 그 여자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이야?”
“말했잖아. 누군가의 부탁 때문에 던전에 간 거라고. 그 누군가가 바로 이곳 클리프 상단의 총수였던 것뿐이야. 굳이 말하자면 협력자 정도일까.”
“헤에, 그 도도하기로 유명한 여자의 협력이라…어떻게 생겼는지 빨리 만나보고 싶어! 소문대로 굉장한 미녀겠지?”
그러자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정령검 파이어 버스터의 검신이 우웅-하고 진동했다. 바로 지척에 이프리트가 있는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지, 녀석은 ‘상단’이란 말과 ‘총수의 부탁’이라는 소리에 눈에 띄게 불안해하고 있었다.
<<호, 혹시! 그럴 리가 없겠지만…저를 상단에 팔아넘기시려는 거예요? 이프리트님께 데려다 준다고 속이고 이런 일을 하시다니! 정말로 그런 건 아니죠? 그렇죠?>>
“허억? 방금 누가? 서, 설마 저 검이 말을 한 겁니까? 제가 잘 못 들은 건 아니겠지요?”
이그니스가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이 이번이 처음인 황태자는 놀란 표정으로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녀석은 콧방귀를 뀌며 비웃는 어조로 대답했다.
<<흥! 설마는 무슨 설마! 말하는 검 처음 봐요? 그러고 보니 당신은 아까 우리 용사님의 말에 거역했던 사람이었죠? 당장이라도 끼어들어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용사님의 숭고한 싸움을 참견해선 안 된단 생각에 얼마나 눌러 참았다고요!
원래 진정한 영웅은 늘 옆에 자신을 시기하는 배경 잘난 인간을 데리고 다니기 마련이니,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문제를 크게 탓 하진 않겠어요. 하지만 나를 용사님과 떨어트려 놓으려 한다던가~ 상단에 팔아넘기는 행위는 결코~~ 켤코오오~~용서 못해요오오옷~~>>
화르르륵!
격한 감정을 누르지 못한 탓에 이그니스의 검신은 금새 붉게 타올랐다. 이번엔 들고 있던 이사나에겐 해를 끼치진 않았지만, 반대로 그의 옆에 있던 일행들은 갑자기 타오르는 불길을 피하느라 한바탕 야단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꺄아악~”
“우악! 앗 뜨뜨~~!! 불, 불이야!!”
다행이 정신없이 바쁜 탓에 상단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소란이 더 커지면 쫓겨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웬만하면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었던 나는 화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도 꺼지지 않는 불덩이를 향해 소리쳤다.
“이제 그만 해, 이그니스! 실내에서 이게 무슨 소란이야?”
<<하, 하지만~ 저는 상단에 팔려가기 싫…>>
“팔긴 누가 판다는 거야? 넌 이미 이사나의 검이잖아! 주인인 이사나가 허락하지 않는 한, 네가 팔려나갈 일은 절대 없으니까 안심하라고! 날 그렇게 못 믿어?”
<<그, 그게 정말이어요? 그럼 저는 계속 용사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건가요?>>
“그거야 네 주인 맘이지. 어쨌든 그 불길부터 먼저 꺼. 사람들을 핍박하는 마검으로 오해당하기 싫다면 말이야.”
제대로 먹힌 협박이었는지 이그니스는 재빨리 검신을 감싸고 있던 불덩이를 없앴다. 그때서야 뜨겁게 타오르던 열기가 사라지자, 일행들은 모두 한숨을 내쉬며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잠시 후 겨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황태자가 신기한 표정으로 이사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하하…정말 놀랍군요. 말을 하고 주인을 알아보는 데다 스스로 불까지 일으키는 검이라니. 이런 신기한 검은 세상에 태어나 빛을 본 뒤로 처음 발견한 듯합니다. 그 검의 이름이 이그니스입니까?”
“…아니오. 정식 명칭은 ‘파이어 버스터’입니다. 이그니스라고 부르는 건, 이 검안에 불의 상급 정령인 이그니스가 봉인되어 있기 때문이죠.”
“불의 정령이? 오오, 설마 문서로만 전해지던 정령검이라는 게 바로 이것입니까? 정령왕이 직접 만들었다고 하는? 대단하군요. 이런 것의 주인이 되려면 굉장한 대가가 필요 할 것 같네요.”
그러자 알리사가 질린 표정으로 냉큼 끼어들어 대답했다. 이그니스와는 유달리 사이가 나쁜 그녀였다.
“아아, 말도 마요. 던전에서 가져올 때 이사나씨가 얼마나 고생했다고. 난 그렇게 고통스러운 비명소리는 처음 들어봤다니까? 저건 성검이 아니라, 사람 잡는 마검이야, 마검.”
<<뭐, 뭐가 어째요? 당신! 지난번부터 보자보자 하니까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에요? 이전에 꾸중을 들은 일도 있고 해서 내가 웬만하면 참고 있으려고 했는데! 용사님께 어울릴 여자는 당신 같은 초라한 꼬맹이가 아니라고!>>
“뭐가 어째? 야! 너 다시 한 번 말해봐! 지금 누가 초라하다는 거야, 누가!!”
<<당신이지 누구긴 누구예요? 이름까지 똑바로 말해줄까요? 알리사노~알~드레프양?>>
“크아악! 더 이상 못 참아!!”
“잠깐, 알리사! 진정…”
점점 커져가는 말다툼에 당황한 내가 또다시 한마디 늘여놓으려던 때였다. 놀랍게도 주변을 흐르고 있던 공기의 흐름이 한 순간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나 싶어 주위를 둘러봤지만,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보건데 이것을 느낀 이는 오직 나 혼자 뿐인 듯 했다.
‘이게…어떻게 된 거지?’
강한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져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마음속을 뒤흔드는 불길한 기분에 나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엘? 갑자기 무슨 일이야? 너 왜 그래?”
“미, 미안해, 라피스. 미안한데…나 잠깐 다녀올 데가 있어. 일행들 좀 부탁해도 되지? 너만 믿고 있을게.”
“뭐? 대체 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가기는 어딜 가?”
“미안! 금방 다녀올게!”
“어이? 엘!!”
황당하게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며 나는 얼른 뛰어가 상단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 순간 눈앞에 보이는 것은 건물 맞은편 벽에 기대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까만 피부의 소년이었다.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황금색 눈동자가 평소와는 달리 슬픈 빛을 담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트로웰.”
설마 그는 내가 이곳에 올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
아무런 망설임 없이 손을 내미는 트로웰의 모습을 보며, 나는 내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더불어 그가 이곳에 온 이유 역시.
“어서와, 엘. 기다리고 있었어.”
“트로웰…너도 느꼈어? 방금…공기가……미네르바가……”
“괜찮아. 아직은 배웅할 시간이 있으니까. 같이 돌아가자. 명계의 사자(死者)들이 에바스 에덴을 떠나기 전에. 그리고…새로운 바람의 탄생을 축하해 줘야지.”
“!!”
담담한 어조의 말이었지만 그가 애써 참고 있다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우스운 일이었지만 나는 그 때문에 오히려 더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실감하고야 말았다.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
지금 이 순간, 그에게 허락된 삶의 시간이 끝나려 하고 있었다.
***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저기, 라피스씨…라고 불러도 되죠? 지금 엘님이 어디로 가신건지 알아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엘이 갑자기 창백해진 얼굴로 사라지자, 일행들은 모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그들은 곧 얼떨결에 엘 대신 일행을 떠맡게 된 라피스에게 시선을 건넸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무안하리만치 차가운 냉소뿐이었다.
“그걸 나한테 묻는 이유가 뭐지? 녀석이 아무 설명 없이 뛰어나간 것은 다들 알고 있을 텐데?”
“에? 아…저, 저는 그저…당신이 엘님하고 친하니까 이번 일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친하다고 해서 전부 알 수 있는 건 아니야. 뭐, 어느 정도 짐작 가는 일이 있긴 하지만.”
“그, 그게 뭔데요?”
“내가 그걸 말해줘야 하나?”
“……”
안 그래도 갑자기 엘이 사라진 통에 불쾌한 기분이었던 라피스가 친절한 설명을 건넬 리 만무했다. 그러자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지 못한 시벨이 화난 표정으로 반박했다.
“말해줘야 하냐니! 당연한 소리 아냐? 우리도 엘의 일행이기는 마찬가지라고! 저렇게 나가버렸는데 걱정할 수밖에 없잖아!”
“시끄러, 퍼런 엘프. 그 ‘우리’란 범위 안에 나까지 끼워 넣지 마라. 엘이 아니었으면 내가 너희들과 함께 다녀야할 이유는 없어. 그러니 그가 사라져버린 이유 또한 알려줄 필요는 없지.”
“건방진 도마뱀 자식! 너 지금 말 다했어?”
콰당-! 거친 소음과 함께 일어난 시벨리우스는 죽일듯한 시선으로 라피스를 노려보았다. 첫 대면에서부터 안하무인(眼下無人)격인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엘의 친구란 생각에 참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지금 그 ‘중재자’가 사라진 이상, 시벨이 그를 좋게 봐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 점은 라피스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험악하게 변하자 다른 일행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싸움이라도 벌였다간, 그들이 있는 장소가 온전하게 지켜질리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이사나는 간곡한 태도로 그만 둘 것을 부탁했다.
“두 분 다 그만 두세요. 이런 장소에서 싸우기라도 하시면…”
“너는 끼어들지 말아라, 이사나. 아무래도 이 주제도 모르는 엘프 녀석이 아까 전에 내가 먼저 사과했던 일로 기고만장해 있는 모양이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누가 더 위인지 가르쳐 주지.”
“하, 누가 할 소릴? 엘이 어쩌다 너 같은 녀석에게 걸려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나야말로 건방진 네놈에게 버릇을 단단히 가르쳐 놓겠어! 눈으로 보는 것만이 모든 진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거야!”
그와 동시에 시벨의 양손에는 보기에도 살벌한 시퍼런 마력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캐스팅이 없는 마법의 구현이야 놀라울 것이 없었지만, 모인 마나의 양이 생각보다 방대하다는 것을 눈치 챈 라피스는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띄웠다.
“호오~ 너…이제 보니 엘프가 아니었군?”
“그걸 이제야 알았냐! 후회해도 이미 늦었어! 당장 가루로 만들어 버릴테다!”
“후회 좋아하는군. 아무리 그래봤자 나에게 대항하기에는 턱도 없다! 이 몸이 천재라고 불리는 이유를 가르쳐 줄까? 바로 너 같이 시건방진 놈들을 한방에 날려버리기 때문이야!”
라피스의 손에도 곧 만만치 않은 마나가 모여들었다. 둘 중의 하나만 먼저 터져도, 이 자리에서 목숨을 부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이사나는 창백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신경전을 바라보았다. 이미 일행들더러 멀찍이 물러나 있으라고 말해둔 상태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싸움의 여파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여차하면 시큐엘을 소환해서라도 막을 요량으로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드래곤과 유니콘의 싸움이다. 그들이 전력을 다해 싸우기라도 하면 인간이 이사나가 감당할 수준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 당장이라도 끊어질듯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은 갑자기 등장한 한사람으로 인해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저, 저기…바쁘신 중에 실례합니다만…”
“넌 뭐야?”
“…?…”
의아한 얼굴로 돌아본 그곳엔 처음 이 자리로 일행들을 안내했던 상단의 남자가 서있었다. 그는 겁먹은 얼굴로 벌벌 떨면서도 포기할 줄 모르는 상인의 정신을 불태워 자신이 이곳에 온 용건을 설명했다.
“죄, 죄송하지만 오늘은 그냥 돌아가셔야 겠습니다. 이카나께서…갑자기 급한 용무가 생기셨다면서 방금 사라지셨거든요.”
“……”
“그, 그게…아무래도 오늘 안으로 돌아오실 것 같지 않아서요. 으으음…저, 정 기다리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하하하.”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어색하게 웃는 상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불쌍해보였다.
그 모습을 본 라피스와 시벨은 어느새 싸울 의욕이 사라진 것을 느끼곤 두 손에 가득 담은 마력을 소멸시켰다. 일행들은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쳇, 제대로 되는 일이 없군. 어이, 이사나. 혹시 이카나라는 이곳 총수가 붉은 머리카락의 화려하게 생긴 여자였냐?”
“네? 네에…저어, 엘의 친구라고…”
차마 이프리트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린 말이었지만, 그것만으로 라피스는 충분히 원하는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못 다한 싸움의 찝찝함을 달래며 한손으로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역시 그렇군.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게 사실인 모양이야.”
“그, 그게 뭔데요?”
“몰라. 나중에 엘이 오면 물어봐.”
“엑? 그런 게 어딨어요, 라피스!”
이사나의 원망스러운 목소리에도 라피스는 요지부동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정령왕의 소멸과 탄생은 그 자체로 조심스럽게 다루어질 사항이다. 한낮 인간들에게 쉽게 떠벌릴 일이 아닌 것이다.
‘가만,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정체가 뭐지? 마나를 다루는 폼새를 보면 엘프가 아닌 건 확실하고, 그렇다고 드래곤도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모르는 종족이라도 있었나?’
라피스의 시선은 아직도 씩씩거리는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시벨리우스에게 향했다. 아무래도 엘은 또 골치 아픈 녀석을 일행으로 받아버린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돌아간 정령계는 처음 이곳을 떠날 때 기억하고 있던 장면과 거의 변함이 없었다. 하늘은 여전히 맑고 푸르렀고, 눈부신 보석으로 이루어진 꽃밭과 그 위를 뛰노는 정령들의 모습도 똑같았다.
다만 한 가지 평소와 다른 점을 꼽으라면, 정원에 있던 모든 바람의 정령이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있다는 것이었다. 두 줄로 이어진 행렬의 끝에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미네르바가 평소의 무심한 표정 그대로 서있었다.
그러나 혼자라고 생각했던 그의 옆에는 정령왕 본인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이프리트가 함께 한 상태였다. 이별을 앞둔 상황치곤 지나치게 차분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뒤에, 생전 처음 보는 두 낯선 남자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
한 눈에 그들이 명계에서 온 저승사자라는 것을 알아본 나는 심장이 철렁해지는 것을 느끼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맞잡은 트로웰의 손에서 아플 정도로 강한 힘이 느껴졌다.
“윽, 트로웰?”
“아…미안. 아팠어? 나도 모르게 그만.”
“아니, 괜찮아. 조금 놀란 것뿐이야. 근데…괜찮아? 안색이 나빠 보여.”
그냥 해본 말이 아니라 그의 얼굴은 정말로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물기를 그렁그렁 담은 눈동자가 애처로울 정도로 슬퍼보였다. 가늘게 떨리는 입술을 혼자서 가만히 더듬던 그는 곧 어색하게 웃으며 힘없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미안…하하.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아직도 이런 일엔 적응이 안 돼. 이번엔 특히 더 힘든 것 같아. 완전히 죽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는데도…”
“으음. 근데 정말 미네르바가 소멸하는 거야? 왠지 믿을 수가 없어. 늙지도 않았고…저렇게 건강해 보이는데.”
“인간과는 죽음의 방식이 다르니 어쩔 수 없지. 그는 이미 정령왕의 평균 수명을 넘었어. 소멸의 시기가 다가온다고 해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야. 안 그래도 요즘 바람의 기운이 많이 약해져서…이때쯤이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
“윽. 그, 그랬어? 나는 전혀 못 느꼈는데…”
어쩐지 나 혼자 아무 생각 없이 있었던 것 같아, 괜시리 미네르바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 챘는지, 트로웰은 곧 고개를 저으며 생긋 미소 지었다.
“내가 유달리 예민했던 거야. 실제로 정령왕의 소멸은 같은 4대 정령왕끼리도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으니까. 전대의 엘퀴네스가 소멸했을 때만 해도 이프리트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는걸?”
“하지만 결국 신이 되서 만났잖아. 어쩌면 미네르바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응. 그랬으면 좋겠어.”
조금은 기운을 차렸는지 트로웰은 간신히 명랑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때 마침 우리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눈치 챈듯한 미네르바의 시선이 정확히 이쪽을 향해 돌아섰다.
예상치 못했던 방문이었는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그는, 곧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반가운 음성을 내뱉었다.
“어서와, 모두. 정말 오랜 간만이다. 설마 배웅하러 온 거야?”
“미네르바…”
“안 그래도 너희들 얼굴은 한번쯤 다시 보고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동안 계속 정령계에서 소식을 듣긴 했는데, 직접 보니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야, 엘. 그리고 트로웰, 난 네가 안 올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자 트로웰은 어색한 표정으로 미네르바의 시선을 피했다. 울음을 억지로 참는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오려고 했었어.”
“후훗. 그래, 알고 있어. 누구보다 어른스럽지만 사실은 이런 이별에 가장 약한 녀석이 바로 너였으니까. 그래도 나는 만나게 되서 기쁜 걸? 마지막까지 안보고 갔다면 서운할 뻔 했어.”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 어차피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면서…”
오늘따라 트로웰은 그답지 않게 꼬투리를 잡으며 툴툴거리고 있었다. 함께 한 시간이 많았던 탓인지, 미네르바의 앞에선 유달리 어려보이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이프리트가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한마디 따끔한 말을 이었다.
“떠나는 사람한테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서운한 마음은 알지만 지금은 웃으면서 보내라고. 나처럼 나중에 후회할 생각이야?”
“괜찮아, 이프리트. 와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동안 내가 트로웰 속 썩인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걸. 그런 의미에서 너한테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해, 트로웰. 나만 아니었다면 인간을 싫어하거나 미워할 일도 없었겠지. 지금보다 훨씬 행복한 유희를 즐겼을 텐데.”
“아니, 그런 건 필요 없어. 어차피 너의 일이 아니었어도 나는 지금보다 인간들을 좋아할 수는 없었을 거야. 너도 알잖아. 나 원래 은근히 차별 심한 성격인거.”
“쿡쿡. 하긴 그랬지. 상냥한 가면에 감춰져서 아무도 그 내막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둘 사이엔 무언가 내가 알지 못하는 심각한 과거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미네르바는 미소 지은 얼굴로 내 손을 맞잡았다.
“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엘. 다음 대(代)의 미네르바가 어떤 성격일지는 모르겠지만, 트로웰과 가장 마음이 맞는 존재는 네가 될 거라고 생각해. 앞으로도 그를 잘 부탁할게.”
“…그런 말 하니까 이상해, 미네르바. 꼭 영원히 못 보게 되는 것 같잖아. 엘뤼엔처럼 신이 될 생각은 없는 거야?”
“글쎄. 하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지금처럼 너희들과 가족 같은 유대감을 얻기는 힘들 거야. 정령계에 자주 놀러오지도 못할 거고, 서로의 시간에 치이다 보면 많은 것이 달라지겠지. 실제로 신이 돼서도 정령왕때의 모습을 유지하는 존재는 거의 없다고 알고 있어. 엘뤼엔도 예전과 많이 달라졌고.”
“하지만…”
“그리고 소멸 즉시 바로 신이 된다는 보장도 없어. 아마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 백 년까지 유예기간을 거치게 될 거야. 차라리 그 시간을 활용해서 인간세상을 경험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희망적인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트로웰이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하나만 약속해줬으면 좋겠어, 미네르바. 정령왕은 소멸할 때 한 가지 소원을 빌 수 있다는 거 기억해?”
“…?”
“그럼, 다시는 그때 같은 사랑은 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줘. 혹시 인간이 되어 지금의 기억이 사라지게 되더라도, 두 번 다시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내가 모르는 곳에서 네가 절망하게 되는 상황은 달갑지 않거든.”
“……”
예상치 못했던 제안이었는지 미네르바는 한동안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그의 입가에는 곧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고마워, 트로웰. 네 말대로 할게. 넌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였어. 그것만은 절대 잊지 못할 거야.”
“…아니, 잊어도 돼.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나한테도 너는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였어. 지금 의 이별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처연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트로웰은 끝끝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떠나는 미네르바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한 배려인 듯 보였다.
“이제 가야 할 시간입니다.”
얼마의 시간 후, 두 저승사자들의 입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은 나를 포함한 다른 정령왕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각기 미네르바의 양 옆에 다가섰다.
이 상태로 공간이동의 주문을 외워 명계에 간 뒤, 그곳에서 다음 탄생을 준비하고 있는 영혼에게 모든 힘을 물려주고 소멸하는 것이다.
때문에 우습게도 진정한 정령왕의 죽음은, 정령계가 아닌 명계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본래라면 보일 리가 없는 저승사자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작별인사는 여기까지인 것 같네. 모두들 잘 있어. 다음 대의 미네르바도 잘 부탁할게.”
마지막으로 짧은작별 인사를 건네고 돌아가려던 미네르바는 깜빡 잊었다는 듯 나를 보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참, 엘퀴네스. 너에게 부탁할게 있어.”
“부탁?”
“응. 이번에 이프리트가 만든 정령검을 찾았었지? 실은 나도 예전에 바람의 상급정령을 봉인한 정령검을 만든 적이 있어. 엘, 가능하면 네가 그 검을 찾아 진의 봉인을 풀어줬으면 좋겠는데…들어줄 수 있겠니?”
“아아. 그 블래스터라는 검 말이지? 전에 들어본 적이 있어.”
그러자 미네르바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는 한때 내가 사랑했던 인간 남자에게 선물한 검이었어. 훗날 그에게 배신을 당한 뒤로, 그의 기억과 함께 버려지는 존재가 되었지. 하지만 이제 그만 자유를 되찾아 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내 손으로 직접 해결할까도 싶었지만, 지금의 주인이 이번 너의 유희와 관계된 인간이라서 아무래도 엘이 봉인을 풀어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나와 관계된 인물?”
“응. 내가 알기론 이번 너의 소환자를 위협하는 사람 중에 하나인 것 같아. 블래스터를 다룰 수 있는 자는 마나에 정통한 소드 마스터뿐이니, 찾는 일이 한결 수월할 거야. 그를 만나게 되면 그동안 미안했었다고 전해주겠어? 애꿎은 정령을 희생시켜서 나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었다고 말해줘.”
“으응…그야 어렵지 않지만…”
생각지 못했던 그의 연애사 때문이었을까?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힐끔 트로웰의 눈치를 보았다.
겉으로 보기엔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그는 이미 블래스터 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눈썹을 찡그리고 있는 상태였다. 비록 미네르바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럼 부탁할게, 엘. 부디 이번 유희를 무사히 마칠 수 있기를 바랄게. 너의 일정은 언제나 즐거워서 지켜볼 때마다 재미있었어. 그래서 소멸을 기다리는 시간까지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것 같아.”
“으음. 그랬다면 다행이네. 잘 가, 미네르바. 나 역시 너를 잊지 못할 거야. 함께한 시간은 이중에서 가장 짧았지만, 그래도 너를 만날 수 있어서 기뻤어. 인간이든 신이든, 언젠가 꼭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나의 진지한 눈을 본 미네르바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두 저승사자가 서로에게 사인을 보내는 듯하더니, 곧 명계로 향하는 공간이동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제 완전한 이별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파아아앗! 눈부신 빛이 주위를 감싸기 시작하자 정령계에 있던 모든 바람의 정령들이 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우리의 왕께 작별을 고합니다! 대기에 충만한 공기시여! 다음 생에도 바람의 자유와 함께 하시기를!]
장내는 곧 절절할 정도로 숙연한 분위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이별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현실로 다가오는 기분이랄까.
점점 희미해져가는 미네르바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어?”
투툭. 뭔가 차가운 느낌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무심코 만져본 볼에선 어느 샌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황해서 황급히 손등으로 닦아내자 옆에 있던 이프리트가 냉큼 핀잔을 건네 왔다.
“엘? 뭐야, 너 지금 우는 거야? 하여튼 애 같기는.”
“시, 시끄러! 이런 상황에서도 안 우는 네가 더 이상한 거라고!”
“흥~! 어차피 영원한 이별도 아니잖아? 다시 만날 수만 있으면 되는 거지.”
“그래도 이젠 같이 살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딸이 시집간다고 해도 우는 판국에 이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야?"
제 아무리 노려본다곤 해도 울먹거리는 소리로 말해봤자 전혀 씨알도 먹히지 않을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이놈의 눈물샘이란 게 어찌되어 먹은 건지, 한번 ‘운다’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나니 그때부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격한 흐느낌을 동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다 큰 녀석이 주저앉아 엉엉거리고 울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초인적인 인내로 눌러 참던 나는 생각보다 태연해 보이는 트로웰의 모습을 보곤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흑…뭐야, 트로웰. 너까지 그렇게 담담한 게 어딨어? …흐윽…내, 내가 이상한거야?”
“…그럴 리가. 나나 이프리트나 감정표현이 서툰 것뿐이야.”
“뭐야? 그런 게…울고 싶을 때 울지도 못하는 게 뭐가 대단한 정령왕이야? 나는…나는…흑흑…젠장!”
그러는 사이에도 점점 희미해지던 미네르바의 모습은, 이윽고 그를 데리러온 저승사자들과 함께 이제 완전히 정령계에서 그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정말로 가버린 건가? 어쩐지 실감이 들지 않아 나는 한참이나 흐릿한 시야를 깜빡거렸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뭔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트로웰이 문득 뜬금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엘…내가 소멸할 때도 지금처럼 울어줄 거야?”
“뭐? 그런 당연한 걸 왜 물어? 지금 다 큰 자식이 운다고 놀리는 거지!!”
“아니…그런 게 아니라…새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행이라니?”
“으음. 예전엔 못 느꼈는데, 지금 보니까 정령왕의 소멸이라는 거…굉장히 썰렁한 것 같아.그럴 때 누구 하나라도 울어준다면 조금은 나아질 것 같아서. 내가 소멸할 때도 엘이 울어준다니까 안심해도 되는 거지? 쿡쿡. 근데 말이야. 나 잠깐만…”
“…?”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트로웰은 괴로운 표정이면서도 입가에 억지로 미소를 띄웠다. 내 팔을 잡은 그의 두 손은 놀랄 정도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트로웰?”
“…미안, 엘. 치사한건 아는데…나 잠깐만 네 눈물 빌려도 될까? 내가 흘려야 할 건 이미 옛날에 전부 말라버렸거든. 하지만…지금이라면 울 수 있을 것 같아…그래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두 눈에선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꽉 악다문 입술에선 어느새 작은 흐느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마치 이런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 모습이 너무나 가슴 아플 정도로 슬퍼 보여, 나는 울먹이는 그를 끌어안고 천천히 등을 토닥여 주었다. 트로웰이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그리 어색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단지 본인의 앞에서는 차마 울지 못했던 그의 기분이 느껴져 더더욱 마음이 착잡해 졌을 뿐이다.
“흐흐흑. 미안해, 엘…미안해. 흐윽…흑…흑…”
“괜찮아, 트로웰. 후련해질 때까지 울어도 돼. 참는 것보단 그게 더 나아.”
“흑…흐으윽…흑, 흑…”
그때만큼은 이프리트도 더 이상 나무라는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리는 폼이, 자기도 울고 싶은데 체면 때문에 참고 있는 듯 보였다.
미네르바가 떠난 이후 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져,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정령왕들의 흐느낌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날, 나는 새로운 미네르바의 탄생을 기다리는 내내, 슬픔에 못 이겨 흐느끼는 트로웰을 달래야만 했다.
새로운 미네르바가 탄생한 건, 전대의 미네르바가 소멸한 후 하루만의 일이었다. 탄생을 축하해주기 위해 우리들이 갔을 땐, 이미 그의 영역은 태풍이라도 부는 것처럼 거센 바람이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휘이잉! 거친 소음이 귓가를 맴돌았지만 정작 그것은 구경하고 있는 우리들에겐 아무런 피해를 미치지 않았다.
잠시 후 소용돌이 안에 흐릿한 형체가 잡히기 시작하자 나는 놀란 표정으로 감탄성을 내뱉었다.
“와아! 설마 저게 이번대의 미네르바?”
“응, 맞아. 저런 식으로 천천히 본체의 틀이 잡혀가는 거야. 엘은 정령왕의 탄생을 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지?”
“응. 굉장히 신기하다. 내가 태어났을 때도 저랬어?”
“거의 비슷했지. 하지만 엘쪽의 분위기가 좀 더 신비했던 것 같아. 원래 정령왕들의 탄생장면은 엘퀴네스가 가장 아름답다고 하더라고.”
이제는 제법 기운을 차린 건지, 대답하는 트로웰의 표정은 많이 밝아져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완전히 괜찮아 진 것은 아니겠지만, 예전처럼 차분한 분위기로 이것저것 설명을 늘어놓는 모습에 안심이 된 나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못 보는 것이 아쉽네. 앞으로도 내가 엘퀴네스의 탄생을 볼 일은 없을 텐데 말이지.”
“하하, 이럴 줄 알았으면 영상석으로라도 찍어놓을걸 그랬나? 앞으로 두고두고 볼 수 있었을 텐데, 좀 아쉽네.”
“뭐? 그런 게 가능해? 그럼 지금이라도 찍자! 미네르바도 나중에 궁금해 할 거 아니야.”
“아, 그러고 보니 그런가?”
그리하여 우리는 정령계 최초로, 정령왕의 탄생을 영상석에 저장하는 만행을 벌이고 말았다. 언젠가 유희 중에 구입해온 것이라며 조그만 자주색의 돌덩이를 꺼낸 트로웰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태풍 안에서 흐릿하게 잡혀가는 사람의 형체를 찍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서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이프리트의 시선이 느껴졌다.
“대체 뭘 하는 거야? 인간들처럼 한번 본 장면을 잊어버리는 것도 아닌데 그런 건 저장해서 뭣에 써먹으려고? 엘은 그렇다 쳐, 트로웰 너까지 동참하는 건 무슨 생각이야?”
“왜? 재미있잖아. 나중에 미네르바한테 보여줄 수도 있고. 그러고 보니 나도 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궁금해지는 걸?”
“하여튼 엘이 멀쩡한 정령왕들을 다 버려놨다니까! 너 이걸 어떻게 책임질 거야?”
“하하하…”
아무리 그래도 ‘버려 놨다’는 표현은 좀 너무하지 않냐, 이프리트?
원망스러운 얼굴로 바라봤지만 녀석은 그저 흥-하고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오늘따라 유달리 틱틱거린다는 생각에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너 뭐 기분 나쁜 일 있었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왜 자꾸 찡그린 얼굴이야?”
“찡그리긴 누가! 난 원래 이런 얼굴이야!”
“아니, 그건 맞긴 한데…오늘은 평소보다 더 심해보여서. 혹시 나한테 화난 거 있어?”
그러자 이프리트는 정곡을 찔렸다는 듯 어깨를 움찔 떨었다.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어떻게든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는 걸 보면 삐진 것이 확실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만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야 그럴 것이, 녀석과는 상단에서 헤어진 후 이번이 처음 만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삐지려고 해도 그럴만한 상황이 있어야 이해를 할 것이 아닌가!
“아! 설마 널 보고도 아는 척을 안 해서? 하지만 그럴 정신이 없었잖아. 미네르바가 소멸하기 직전인데.”
“이익! 날 뭐로 보는 거야? 그런 사소한 일에 화낼 정령으로 보여?”
“그럼 왜? 그것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는 걸?”
“그러니까 네가 바보라는 거야!”
녀석의 떽떽거리는 목소리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그라면 뭔가 눈치 챈 게 있을까 싶어서였다. 예상대로 그는 피식 웃으며 이프리트가 저런 행동을 보이는 연유를 알려주었다.
“혹시 전에 엘뤼엔 만난 적 있지 않았어? 아마 그것 때문인 것 같은데.”
“트, 트로웰! 쓸데없는 소리를!!”
“엥? 엘뤼엔?”
그러고 보니 던전에서 잠깐 봤더랬지, 아마? 하지만 누군가 작정하고 소문을 퍼트리지 않는 이상, 그 일이 벌써 이프리트의 귀에 들어갔을 리는 없었다.
게다가 그때는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 아무리 질투가 많은 녀석이라도 그런 것까지 시기한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잠깐 생각하던 나는 곧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이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설마 신전에서의 일을 말하는 거야?”
“그, 그래! 너 왜 말 안했어? 엘뤼엔한테서 신의 문장을 받았다며? 그러고도 모른 척 하다니, 내가 화 안내게 생겼어?”
“윽. 그건 또 어떻게 안건데?”
“어떻게 알긴! 클리프 상단의 총수 이카나의 정보망을 무시하지 말라고! 이미 엘뤼엔의 신전에서 이마에 신의 문장을 받은 푸른 머리카락의 소년에 대한 이야기가 쫘악 퍼졌단 말이야. 지금 차고 있는 서클렛이 그 문장을 가리기 위한 거지? 왜 나한테는 말 안했어?”
여자(?)의 한은 무섭다더니.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따지고 드는 이프리트의 모습에 나는 잠시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먹힐 것 같진 않았지만 나는 일단 달래볼 요량으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게 말이야. 잠시 착오가 있었어. 절대 너를 속이려고 했던 게 아니라…”
“그럼 뭔데?”
“실은 엘뤼엔이 문장을 받았다는 말을 아무한테도 하지 말라고 그랬거든. 그게 알고 보니 마신이 장난칠까봐 그랬던 건데,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너한테까지 비밀로 했던 거야. 화났다면 사과할게. 미안해, 이프리트.”
“뭐, 뭐야, 그게! 여기서 마신 이야기는 또 왜 나오는데?”
“몰랐어? 지금 마신이 여기 아크아돈에 와 있거든. 얼마 전까지도 나랑 동행 했었는걸? 워낙 장난이 심한 성격이라, 가급적이면 내가 엘뤼엔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비밀로 하고 싶었나봐. 결국 얼마 전에 들통나서 굉장히 고생 했지만 말이야.”
“……”
그러자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는지 이프리트는 한결 수그러든 표정이 되었다. 고의가 아니었다는데도 계속 추궁을 할 만큼, 심하게 화가 났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때마침 미네르바의 형체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바람에, 우리들의 대화도 자연스럽게 그쯤에서 마무리 지어졌다.
“저것 봐, 모두! 탄생하기 직전이다.”
“와아, 정말이네? 이제 눈만 뜨면 되는 건가?”
점점 얼굴의 윤곽이 나타나기 시작한 미네르바는, 눈을 감은 모습이 전대의 미네르바와 상당히 흡사해 보였다. 짙은 회색으로 시작해서 끝으로 가면 갈수록 투명해지는 머리카락이라든지, 꾹 다문 입술과 전체적인 분위기도 많이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보다는 좀 더 어려 보인다는 것일까? 작은 키와 동안적인 얼굴이 거의 트로웰과 비슷한 나이 또래인 듯 했다.
한참동안 신기한 표정으로 구경하던 나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 미네르바도 여성체인가? 아니면 남성체?”
“음…여성체 인 것 같은데?”
“트로웰보다 더 어려 보이는군. 이러다 운디네와 헷갈리게 되는 건 아니야?”
“그래도 예쁘게 생기기만 한걸 뭐.”
쏴아아아!
세찬 바람의 폭풍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미네르바의 형체는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었다. 이윽고 온전히 드러난 그는 트로웰의 말처럼 소녀의 형상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전 미네르바의 축소판이랄까?
아무리 같은 미네르바라지만, 누가 보면 딸이라고 오해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둘의 모습은 닮아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를 바라보는 트로웰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진 듯 했다.
‘저 녀석…괜찮은 걸까?’
실컷 울고 난 뒤 트로웰은 미네르바를 기다리겠다고 했었다. 그것이 천년이 걸리든, 만년이 걸리든. 혹은 영원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 해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결심에 서린 단단한 각오를 읽은 나는 그가 단순히 ‘친구’의 감정으로 미네르바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응원을 해주는 것이 전부였던 셈이다.
내가 자신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꼈는지 트로웰은 곧 괜찮다는 듯이 생긋 미소 지었다. 그는 누구보다 스스로를 믿고 있었고, 그 의지를 끝까지 관철시킬 줄 아는 존재였다.
그 순간,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 광대하게 몰아치던 바람의 소용돌이가 사라지더니, 굳게 닫혀있던 미네르바의 눈이 서서히 떠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대의 미네르바와 똑같은, 투명하다시피 새하얀 은색의 눈동자가 그 존재를 드러냈다.
드디어 탄생의 모든 과정이 마무리 된 것이다!
아직 태어났다는 실감이 들지 않은 탓인지, 눈을 뜨고도 멍하게 있는 ‘새 바람의 정령왕’에게 나는 제일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 미네르바! 만나서 반가워. 나는…”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 또한 만나서 반갑습니다.”
“어? 한 번에 누군지 알겠어?”
“이렇게 강한 물의 기운을 느끼고서도 정체가 뭔지 모른다는 건 바보라는 소리밖에 안됩니다. 이쪽은 트로웰, 그리고 이쪽은 이프리트지 않습니까? 다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번에 새로 탄생한 미네르바입니다.”
두 말할 나위 없이 곱고 아름다운 목소리였지만, 내뱉는 어투는 굉장히 살벌했다. 그렇게 느낀 이는 나만이 아니었는지, 트로웰과 이프리트도 어색한 표정을 짓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존대말이라니!
전대의 미네르바도 사근사근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 녀석은 왠지 그보다 더한 성격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사로잡았다. 미소하나 없이 무뚝뚝한 얼굴이었지만, 귀여운 얼굴 탓인지 그다지 나쁜 인상이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나는 이상하리만치 낮아진 온도를 느끼곤 애써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하하…굳이 말 높일 필요는 없어, 미네르바. 나도 그렇고 여기 있는 모두가 다 너의 친구이고 가족인 걸? 그러니까 편하게 해도 돼.”
“…?…저는 이미 충분히 편하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점이라도?”
“에? 아니, 뭐…네가 그렇다면야 할 말이 없지만….”
“그렇습니까? 저는 또 뭔가 제게 문제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질문? 나한테? 뭔데?”
특이한 말투 때문인지 우리들은 한결같이 긴장한 표정으로 미네르바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무표정한 시선 그대로 나를 보며 가슴에 비수를 꽂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엘퀴네스는 여성체 입니까, 남성체 입니까?”
“…쿨럭! 으, 으응?”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트로웰은 남성체, 이프리트는 여성체로 보입니다. 그런데 엘퀴네스는 구별할 수가 없군요. 이것이 흔히 말하는 중성체라는 겁니까? 왠지 부럽습니다.”
왜냐고 묻는 나에게 그는 딱 잘라서 ‘유희할 때 여러 역할을 하기 편하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옆에서 피식피식 웃고 있던 트로웰이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생각만큼 그렇게 편하진 않아. 엘은 남성체로서의 자각이 강한 편이라, 여자로 오해당할 땐 많이 속상해 하거든.”
“정령에게도 성별의 자각이라는 게 있습니까?”
“아니, 엘이 특이한 거야. 정령왕으로 태어나기 이전에 인간으로 살았던 기억이 있거든. 그래서 아직 이 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있는 상태야.”
“…그런 게 가능합니까? 정령왕은 윤회의 기억이 없는 가장 순수한 영혼으로 이루어진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맞아. 그런데 명계에서 잠깐 착오가 생겼던 모양이야. 덕분에 본래 태어날 시간에서 20년 이상이 늦어졌지.”
그의 말에 미네르바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봤자 무표정인 게 변한 건 아니었지만, 뭔가 눈빛이 좀 더 초롱초롱해진 느낌이랄까? 그 시선이 왠지 부담스러워서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그는 감탄했다는 듯이 낮게 중얼거렸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최초의 정령왕입니까? 역시 부럽습니다. 저도 뭔가 남들이 이루지 못한 역사를 만들어보고 싶군요.”
“…충분히 만들었다고 생각해.”
내 대답에 다른 정령왕들도 동조의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특이한 말투의 정령왕이 어디서 또 나타나겠는가? 하지만 미네르바는 그 점에 대해서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어째서 입니까? 저는 탄생과정이 그리 특이하지도, 전생이 있는 것도 아닌데요. 아, 혹시 저도 중성으로 생겼습니까?”
“아니, 외모는 확실히 여성체인데…말투를 들으면 또 그게 아니거든. 으음. 아마 정령왕중에 최초일거야.”
“제 말투 말입니까? 저는 뭐가 이상한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최초라니 기분이 좋군요. 칭찬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순간, 미네르바는 얼굴을 묘하게 일그러뜨렸다. 대답과는 달리 기분이 나빴던 건가 싶어 움찔하던 것도 잠시, 나는 그의 입꼬리가 가늘게 올라간 것을 보고 설마 싶은 심정으로 물었다.
“…저기, 내가 잘못 본건가 해서 물어보는 건데 말이야…혹시 지금 웃은 것?”
“그렇습니다만?”
“허억!”
저 모습이 진정 웃는 것이었단 말인가! 어딜 봐도 찌푸린 표정으로 밖에 안 보이는데? 혹시 나는 지금까지 ‘화낸다’와 ‘웃는다’의 말을 반대로 이해하고 있던 게 아닐까?
그러자 웃겨 죽겠다는 듯한 트로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하하하! 재미있는 정령왕이 태어났는걸? 엘과 완전히 정반대의 성격이잖아?”
“에? 내, 내가 뭘?”
“왜~ 엘은 감정 표현이 풍부하잖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굳이 마음을 읽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러게. 게다가 사교성도 많고 나긋나긋하기까지 하지. 그에 비하면 미네르바는…흐음. 둘이 붙여놓으니까 시간가는 줄 모르겠다. 어째 점점 특이한 녀석들만 나타나는 것 같지 않아?”
“특이하다니! 그게 뭐야, 이프리트? 미네르바,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 기분 나쁘지 않아?”
“어? 기분나빠해야 하는 겁니까? 저는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엘퀴네스는 사교성이 많아 보이는데요?”
“……”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하리요. 킥킥거리는 동료들의 모습에 나는 담담히 패자의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수그렸다.
정말 만만치 않은 강적의 등장이었다.
- Ready! -
일반인들에게는 죽음의 사막, 또는 모래지옥이라고 불리는 바론사막은 나라에 큰 죄를 지어 역적의 몸이 되거나, 자신의 생명이 얼마나 끈질긴지 시험해보려는 고귀한 희생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감히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불모의 영역이었다.
알폰프 제국 특유의 후덥한 기운이 아니었더라도, 이곳은 일 년 열두 달 내내 시도 때도 없이 더웠고 오아시스 또한 없었으며, 나아가 지옥땅거미라는 극악 몬스터의 서식지로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사람들의 접근이 뜸한 지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러한 곳, 바론 사막의 한복판에 전에 없는 낯선 방문자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들은 얼마 전 행방불명된 황태자를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알폰프 제국으로 건너온 카터스 제국의 대마법사 세리엄과 그의 일행들이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수통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엔, 지난 며칠간의 수색작업으로 인한 진한 노고와 수심이 어려 있었다.
“큰일이군요. 물이 다 떨어져 가는데 아직도 목적지는 보이질 않으니. 이대로 가면 되는 건 확실한 겁니까?”
“으음. 그, 그것은 나도 잘 모르겠네.”
“아아니, 모르신다니오? 지금 리오군과 제가 누구 때문에 이런 곳까지 오게 되었는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세리엄님이 다 이쪽으로 가자고 바득바득 우겨서 이리된 거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모르신다는 게 말이 됩니까?”
“끄응. 모르는 걸 날더러 어쩌라고? 필립, 자네는 그만 닥치고 있게. 안 그래도 정신 사나워 죽겠는데 시끄럽게 굴지 말고.”
“허거걱!”
세리엄의 말에 필립이라 불린 중년 남자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이미 한두 번 보아온 상황이 아닌지라, 리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끝도 없이 이어진 사막은 온통 모래와 자갈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님은 점술사의 말에 따라 사막으로 가셨다고 했었지요?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군요. 어딘가에서 쓰러져 있지나 않으면 좋으련만.”
“정확하게는 사막과 죽음의 숲이라 불리는 곳의 중간 즈음이라고 했네. 그리고 너무 염려치 말게나.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라온휘젠님은 강하신 분이라네. 이따위 사막정도에 쓰러질 분이 아니시지.”
“…사막 보다는 몬스터가 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끄응. 그건 신이 알아서 안배하실 일이지. 거참. 마법사인 내가 어쩌다 신을 찾게 됐누. 쯧쯧.”
실제로 그들은 이곳에 오기까지 벌써 몇 십번의 전투를 치러 상당히 지쳐있는 상태였다. 7서클의 강한 마법으로도 상대하기 버거운 때가 있었으니, 단신으로 이곳을 왔을 황태자가 과연 무사할지는 아무도 확언할 수 없었다.
운 좋게 길을 잘 들어 몬스터를 피해 다녔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선 그의 생사를 기대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같았다. 이제까지 그들이 겪어온 바론사막은 알려진 소문보다 더욱 위험천만한 장소였다.
“하지만 황태자께선 어릴 때부터 운 하나는 기가 막히게 타고나셨으니 괜찮을 걸세. 어릴 때 심심풀이로 본 점괘에도 절대 어디서 객사할 운명은 아니라고 했거든.”
“나~참! 일국의 황태자가 객사한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됩니까? 그 점술사도 설마 황태자께서 나중에 가출할 거라는 건 전혀 예상치 못하고 했던 말일 겁니다. 그런 걸 변명이라고…”
“필립! 그대는 좀 닥치라니까? 이 늙은이가 하는 말이 그렇게 아니꼬운 겐가? 앙?”
“그럼 처음부터 제대로 된 희망 좀 주시던 가요! 저희는 이제 고국에 돌아가면 꼼짝없이 죽은 목숨입니다! 이런 곳에서 태자전하가 살아있을 리 없잖습니까! 뭐, 어차피 제국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죽을 것 같지만요!”
“자꾸 그런 재수 없는 소리만 할 텐가!! 다 큰 양반이 리오군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아?”
“체면도 살아있을 때나 차리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의 눈치 보게 생겼어욧? 이게 다 세리엄님 때문이라고요, 세리엄님!!”
“뭐가 어쩌고 어째? 지금 나랑 해보자는 겐가? 앙!?”
또 다시 투닥거리는 두 남자의 모습에 리오는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도 충돌이 많았던 사람들이었지만, 사막으로 온 이후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듯 했다.
알폰프 제국에 온 이후, 카터스 제국으로부터 다시 도착한 정보에 의하면 황태자는 가출하기 전, 유명한 점술사에게서 반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문제는 그녀가 있는 장소가 알폰프에서도 악명 높은 바론사막과 죽음의 숲의 중간지점이라는 것이랄까?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여자가 이런 곳에 와 있단 말인가!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평소 황태자의 막나가는 성격을 알고 있던 자들이 꾸민, 조금 신선한(?) 암살수법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 증거로 황제가 부랴부랴 당시 태자의 점을 봐준 점술사를 찾았지만, 이미 제국을 떴는지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이미 한참 전에 늦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시체라도 찾을 수 있으면 다행일지도.’
요 며칠 사이에 확고해진 생각을 다시금 정리하며 리오는 이마에 깊이 패인 주름을 만들어냈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물거품이 되는 것도 내키지 않았지만, 장차 카터스 제국의 황위를 이을 태자가 이런 식으로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 더욱 찝찝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 황당한 사건으로 인해 대륙은 또다시 피바람이 부는 전란에 휩싸이게 될지도 몰랐다.
‘으음. 부디 살아있다면 좋으련만.’
살아만 있다면 그것이 어떤 장소가 되었든 반드시 찾아낼 각오가 되어있었다. 옆에서 말씨름을 하는 세리엄이나 필립 또한 마찬가지의 심정일 터였다. 잠깐 생각을 하던 리오는 곧 세리엄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혹시 마법 중에 주변에 살아있는 생명이 있는지 탐지하는 것은 없습니까? 이런 식으로 일일이 둘러보는 것보단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만.”
“헐. 이렇게 몬스터가 많은 땅에선 무리라네. 지옥땅거미라는 놈들은 땅 속 밑에서 서식한다니, 아마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많은 놈들이 도사리고 있을 거야. 그 중에서 태자전하의 반응을 어찌 알아본단 말인가?”
“하긴, 그도 그렇군요. 후우. 일단 잠시 쉬어가도록 하지요. 오늘 하루 종일 걸어서 많이 피곤한데. 식사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의 제안에 세리엄도 찬성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은 그들은 사막을 출발하기 전에 준비해둔 마른 건량을 꺼내어 씹었다. 이제 이것도 얼마 남지 않아, 조금만 있으면 굶어 죽게 될 지경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더욱 착잡해졌는지, 연신 우울한 얼굴로 건량을 씹고 있던 필립이 불안한 듯 입을 열었다.
“우리 여기서 더 있어도 되는 겁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모른 척 하지 마십쇼. 이대로 있으면 전원 개죽음이라는 게 뻔한 상황인데. 차라리 태자전하를 찾는 건 포기하고 어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지내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세리엄님이나 저나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말년인생 아닙니까.”
“자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는 겐가?”
험악한 답변이 되돌아왔지만, 정작 세리엄의 얼굴도 그리 자신 있어 보이진 않았다. 리오 또한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세리엄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가족들과 연락한지 너무 오래되었군요. 수정구슬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저택으로 잠깐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끄응. 그러게나. 자네까지 덩달아 이 무슨 고생인지 모르겠네. 정 안될 것 같으면 자네라도 먼저 돌아가도록 해줄 테니 언제라도 말만 하게.”
세리엄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품 안에서 둥그런 모양의 구슬을 꺼내주었다. 그 위에 약간의 마력을 넣고 좌표를 부르자, 곧 매끄럽지 않은 통신음과 함께 반가운 음성이 전해졌다.
<네, 클란 백작가의 저택입니다. 통신을 요청하신 분의 성함을 알려주십시오.>
“센트 집사님, 저 리글레오입니다.”
<어이쿠! 둘째 도련님이 아니십니까? 그 동안 연락이 없으셔서 백작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습니다! 대체 어디서 무슨 생활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하하. 그냥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는 중입니다. 아버님과 형님은 안녕하시지요?”
<아, 저기…그것이…>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대답하기 난감한 듯 망설이는 집사의 목소리에 리오는 굳은 표정으로 수정 구슬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들려온 대답은 그로서는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질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형님이 클모어의 영애에게 청혼을 하셨다고요? 그런데 괴한이 나타나 엉망으로 만들고 쫓아냈다?”
<예,예. 그래서 지금 백작님의 진노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당장 사병을 일으키어 쳐들어 가신 다는 것을 간신히 말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요즘은 내내 저택가에 어떤 사람이 오고가는 지 조사까지 하고 계십니다.>
단편적으로 들었을 뿐이지만, 리오는 대충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짐작했다. 클모어의 카웰 후작이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 에이프릴을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는지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조건에도 차지 않는 남자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동생을 데려가겠다고 나섰으니, 그렇지 않아도 이사나 황제의 일 때문에 대공의 세력에 불만이 많은 그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폭력까지 행사한건 조금 의외인 걸? 카웰 후작은 아무리 불쾌해도 먼저 손을 쓰지 않기로 유명한 사람인데. 아버님께서 저택가의 사람들을 조사한다는 걸 보면, 뭔가 더 다른 일이 있었나?’
예상대로 집사의 대답은 ‘그렇다’였다. 요 근래 카웰후작의 저택에 낯선 사람들이 방문하기 시작했는데, 리오의 형님을 쫓아낸 사람도 바로 그들 중의 한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리오는 호기심이 생기는 것을 느끼며 백작이 조사한다는 낯선 일행들에 대한 것을 물었다.
<그다지 특이한 구석은 없는 일행이었습니다. 신관 하나에 마법사 하나. 그리고 검을 든 소년하나가 전부였다고 알고 있거든요. 외모가 지나치게 뛰어난 게 조금 걸립니다만.>
“외모요?”
<예, 그들 모두 쉬이 보기 힘든 미모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참, 그러고 보니 이번에 새로운 일행이 더 추가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엘프에 어린 소녀와 검사로 보이는 남자 둘이라더군요. 어디에서 왔는진 알 길이 없지만, 그 중 군청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의 옷차림이 많이 피와 모래로 엉켜 지저분했다고 들었습니다.>
“…군청색?”
순간 놀란 세리엄과 리오의 시선이 마주쳤다. 군청색은 다름 아닌 카터스 제국 황실의 상징이 아니었던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집사를 향해 채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남자가 어디서 왔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 겁니까? 혹시 바론사막에서 왔다고 하지는 않던가요? 아, 아니 알폰프 제국이라고!”
<예? 그, 글쎄요. 그런 것은 아직 잘…>
“얼굴은 어떻게 생겼답니까? 인상착의는요? 군청색 머리카락 외에 다른 특징은 발견된 게 없습니까?”
<으으음. 아! 눈 색깔이 신비한 청록색이라고 들었습니다. 제법 남자답게 준수한 얼굴이고 키는 180정도 되는 듯 했다더군요.>
“!!!”
집사가 말하는 내용은 그가 들었던 카터스 황태자의 외모와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행방을 찾게 될 줄이야! 리오와 세리엄 일행은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태자가 어떤 경로로 솔트레테에 넘어갔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만세 삼창을 불러도 모자를 지경이다.
리오는 급히 집사를 향해 진지한 충고를 건넸다.
“일단 아버님께 절대 섣부른 행동은 하지 말아달라고 일러주십시오. 제가 갈 때까지 어떤 일도 하지 마시라고요. 형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겠습니까?”
<예? 그럼 다시 저택으로 돌아오시는 겁니까?>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네요. 어쩌면 클모어에 먼저 들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제가 돌아갈 때까지 아버님과 형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예, 그런 것은 걱정 마십시오. 제 온 힘을 다해 막아보겠습니다. 백작님도 둘째 도련님의 귀환을 굉장히 반가워하실 겁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것을 마지막으로 리오는 재빠르게 수정구슬의 통신을 끊었다. 황태자의 행방을 찾게 된 이상, 더는 이곳 바론 사막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필립은 불안했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으음. 근데 정말 그 사람이 태자전하가 맞을 까요? 알폰프에 가셨다는 전하가 언제 솔트레테로 넘어가셨단 말입니까? 그저 우연히 인상착의가 닮았던 걸지도…”
“군청색 머리와 청록색 눈동자가 그리 흔한 건 줄 아는 겐가? 분명 태자전하일세! 그 분이 그렇게 쉽게 돌아가셨을 리가 없지! 어서 일어나게! 우리도 당장 솔트레테에 가야 하지 않겠나!”
“솔트레테까지 단번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이대로 그냥 걸어가면 틀림없이 중가에 물이 떨어져서라도 죽게 될 겁니다.”
“단번은 무리지만 약 2,3번에 걸쳐서 텔레포트 마법을 시전 할 수 있다네. 좌표는 대충 외우고 있으니 일단 가까운 마을로 이동하도록 하지.”
“허걱! ‘대충’이라니요~ 세리엄님! 잘못된 좌표로 이동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뻔히 아시는 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옵니까요? 저, 전 아직 죽기 싫습니다! 차라리 걸어가자고요. 네?”
그러나 황태자를 찾았다는 생각 외에는 머릿속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세리엄의 귀에 필립의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발밑에다 공간이동의 마법진을 그린 그는, 비명을 지르는 필립을 무시하곤 곧바로 텔레포트의 주문을 외웠다.
이제 그들의 무대가 다시 솔트레테로 옮겨질 차례였다.
금방이라도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엘의 귀환은 벌써 일주일째 늦춰지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클리프상단 총수의 행방 또한 묘연해 진지 일주일이라, 이미 그 둘의 관계를 알고 있던 이사나도 이쯤 되면 정령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작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라피스는 말해줄 기색이 아니고, 그렇다고 마냥 엘이 돌아오기만 기다리기에는 속이 탔기에, 그는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클모어에 있는 후작의 저택에 돌아온 지도 일주일. 이미 한참 전에 이곳에 와 있던 친위기사들과도 재회를 했지만, 여전히 마음속은 텅 빈 것 같이 허전했다. 그것은 비단 이사나 뿐만이 아니었다.
“저기…엘은 언제나 오는 거야? 이 달 내로는 오겠지?”
“그러게. 말도 없이 사라져서 벌써 며칠째 돌아오질 않으니 원. 별다른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걱정 되는 걸.”
“상단의 총수와 같은 시기에 사라진걸 보면, 혹여나 이루지 못한 사랑의 도피 같은 건 아닐 런지? 그날 사제님의 표정이 매우 심각했던 것을 생각해 보자면 아주 허무맹랑한 추측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푸핫! 사랑의 도피? 그 무슨 오크가 바나나 껍질 밟고 미끄러지는 소리야?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어! 암 그렇고 말고.”
장담하는 시벨리우스의 말에 일행들은 모두 동조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왕이라는 신분을 떠나, 엘 자체가 그런 상황과는 어울리는 분위기가 아니다. 차라리 어느 귀족남자에게 찍혀(?) 보쌈을 당했다고 하는 편이 설득이 쉬울 것이다.
덕분에 하릴없이 쓸데없는 소리를 해버리게 된 황태자는, 민망한 표정이 되어 슬그머니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아…정말이지. 어디에 있는지 라도 알면 이렇게까지 답답하진 않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유일하게 알고 있는 누구누구가 죽어도 입을 열질 않으니, 원.”
알리사의 푸념을 들은 사람들은, 소파의 한가운데 앉아 눈을 감고 있는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언뜻 보면 잠자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일행들 중에서 그가 깨어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초반 시벨과의 싸움 뒤로 그는 누가 말을 걸든 무시한 채 지금처럼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 때가 많았다. ‘엘’이 아니었으면 일행이 되지도 않았을 거라는 말마따나, 적당히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지내려는 생각인 것 같았다.
아직까지 별다른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렇듯 서먹해진 사이가 되고 보니 새삼 엘의 존재가 일행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었는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라도 다시 불러올 수가 없다는 것이 유일한 문제랄까? 한숨을 내쉰 이사나는 우울한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애꿎은 테이블만 노려보았다.
그때마침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고 있던 친위 기사들이 저택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훈련이 고된 탓인지 그들 모두 붉게 상기된 얼굴에 땀으로 범벅이 된 모습이었다.
“와하하! 나도 이제 곧 상급 익스퍼드라고! 아까 후작님이 하신 말씀 들었지? 검의 진보가 가장 빠르다잖아!”
“그거야 네가 그동안 워낙 못했으니까 그렇지! 이제 겨우 상급이 되는 주제에 잘난 척은? 나야말로 곧 소드 마스터가 되실 몸이라고!”
“웃기네! 네놈이 소드 마스터면 나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다! 아니, 검의 지존이다!”
“뭣이라? 야~ 알렉!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야?”
투덜투덜 떠드는 목소리였지만 그들 대부분이 수련의 결과에 흡족해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얼굴 가득 미소를 그리며 잡담을 나누던 기사들은, 곧 응접실 안에 무료히 앉아있는 일행들을 발견하곤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갔다.
“다들 이런 곳에 계셨습니까? 아침 식사는 하셨는지?”
“으응. 오전 수련은 모두 끝난 건가, 케이?”
“네, 폐…이사나님. 곧 후작께서도 들어오실 겁니다. 안 그래도 오늘쯤 이사나님과 앞으로의 일정을 의논해야겠다고 하신 걸 들었습니다.”
“그래? 알았으니 그만 쉬도록 해. 모두들 수고 많았어.”
“별 말씀을요. 폐…크흠. 이사나님도 저희의 훈련과정을 보시면 감탄하실 겁니다. 다들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실력이 진보 되었거든요. 후작께서도 매우 흡족해하셨습니다.”
소드 마스터인 카웰 후작이 인정할 정도라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부심이 가득한 기사들의 표정을 보며 이사나는 미소 지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힐끔 그의 눈치를 살핀 기사단장 알렉의 질문이 이어졌다.
“저어…엘님은 아직 소식이 없으신 겁니까?”
“아아. 아무래도 뭔가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야.”
“으음. 페리스가 이번에 바람과 물의 정령을 동시에 소환하게 되었다고 자랑하고 싶어 하던데…막상 장본인이 나타나지 않으시니 난감 하군요, 하하. 그럼 저희는 이제부터 개인 수련에 들어가겠습니다. 편한 시간 되십시오.”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기사들은 마지막으로 카터스의 황태자를 힐끔 바라 보았다. 사실 그들은 오랜만에 재회한 주군의 바뀐 외모보다도, 카터스 제국의 황족인 라온휘젠의 등장을 더욱 놀라워했었다.
혹시라도 무슨 꿍꿍이가 있는가 싶어 각별히 주시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진 별다른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 경우 자신을 숨기는 게 노련한 사람이거나, 정말로 아무런 목적 없이 일행으로 합류한 상황이겠지만, 기사들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후자는 믿음이 가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조금 더 지켜봐야겠군.’
서로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낸 그들은 곧 정중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이사나가 있던 자리를 벗어났다. 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이 사라지자, 일행이 있던 응접실은 다시금 무거운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그 지루한 정적을 견디지 못한 것은 온통 찡그린 표정을 하고 있던 알리사였다.
“아악! 정말 짜증나! 이게 뭐야? 하루에도 수십 번 전투가 일어나도 모자를 판에 저택 안에만 갇혀서 궁상이란 궁상은 전부 다 떨고 있잖아! 이럴 바엔 차라리 바론사막에서 지옥땅거미나 잡는 게 더 나을 뻔 했어! 뭔가 진전이 있어야 할 거 아니냐고, 진전이!”
“아, 알리사…지루한건 이해하지만…”
“이해한다고? 그럼 아무거나 대책을 세워보란 말이야! 이러고 앉아있으면 대공이 알아서 죽기라도 한데? 암살자를 보내든! 직접 가서 멱을 따든! 마땅히 제거하려는 의지를 보이란 말이야! 상급정령은 소환해서 목욕하는데 쓸 거야?!!”
“쿨럭.”
언제 봐도 화통한 성격의 그녀였다. 적나라하게 비꼬는 알리사의 말에는 라피스도 흥미가 돋았는지, 어느 샌가 눈을 떠서 재밌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이제껏 잠자코 자리를 지키고 있던 황태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어, 궁금한 것 몇 가지만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알리사노양? 아무래도 정리가 좀 필요한 것 같습니다만.”
“질문? 좋아! 허락할 테니까 말해봐.”
“허락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본인이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지금까지의 상황을 보고 판단하건데, 이사나군은 단순히 솔트레테의 백성 아닌, 제국 실세에 해당하는 귀족으로 보이는 군요.
또한 이곳의 섭정왕인 유카르테 대공과는 반대되는 입장에 속해있으며, 현재 그를 몰아내고 적통 계승자에게 황권을 회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듯합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장소는 바로 그러할 기회를 노리기 위해 마련된 일종의 아지트인 셈이지요. 제 말이 맞습니까?”
“거의 비슷해. 그래서?”
그 정도쯤이야 알아맞히지 못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기에 알리사와 일행들의 표정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그러자 황태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이었다.
“본인도 제왕학을 배우는 몸으로서 각 국의 실정과 중요한 세력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편입니다. 이 영지의 주인인 카웰 후작은 솔트레테에 단 두 명뿐인 소드 마스터의 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쫓겨난 어린 황제의 외사촌이 되기도 하지요. 후작이 황제파로 돌아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예상이 아니었습니다만, 제가 궁금한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아악! 질질 끌지 말고 본론만 말해, 본론만! 하여튼 귀족이란 것들은 하나같이 요점을 말할 줄 모른다니까! 나 속 터지는 꼴 보고 싶어?”
“크, 크흠. 실례했습니다. 그런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여기 있는 이사나군과 여러분들은 누구입니까? 저는 지금까지 솔트레테의 실세 중에 은발과 금안을 가진 10대 후반의 소년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그’ 카웰후작의 기사들에게 윗사람의 대접을 받는 소년이라면 알려지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자 일행들은 모두 호기심 어린 빛으로 이사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어떤 식으로 대답을 할지 기대가 되었던 것이다.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황태자를 본 이사나는, 얼굴을 서늘하게 가라앉히며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을 의도로 하는 질문입니까? 단순히 일행으로서 저의 정체가 궁금한 겁니까, 아니면 카터스의 황자되는 입장으로서 의문을 품으신 겁니까?”
“저는 이미 황실을 나온 순간부터, 다시 돌아갈 때까진 철저히 그곳과는 상관없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순수하게 일행으로서 묻는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대답할 필요가 없지 않나요? 저의 정체가 뭔지 꼭 그렇게 중요한 겁니까? 어차피 함께 동행 할 사이임은 변함이 없는데 말입니다.”
“하, 하지만…”
“거기까지. 어쨌든 황자께서는 이미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눈치 채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깨달으셨겠지요? 우리의 일정에서 당신의 존재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변수에 해당합니다. 적이냐, 아군이냐는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겠지만요.”
“그런…저를 못 믿으시겠다는 소리입니까?”
“애당초 그런 장소에서 쓰러져 있었다는 것부터가 의심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오해십니다! 저는 단지 점술사의 말에 따라 반려를 찾으러 갔던 것 뿐, 설마 그 곳에서 당신들을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애당초 본국에서 솔트레테의 내정에 끼어들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강하게 반박하는 황태자의 말에, 이사나는 단지 어깨를 으쓱해보였을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설령 지금은 그럴 목적이 없다 해도, 훗날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게 국제관계가 아닌가!
철없는 황자의 말만 믿고 완전히 마음을 놓을 정도로 그는 더 이상 순진하지도, 세상의 물정을 모르지도 않았다. 그것도 자신의 여자(?)를 넘보는 도둑놈의 말이라면 더더욱.
“어쨌든 그렇게만 알아두십시오. 황자 본인께서 극구 본국의 상황과는 상관없다 하시니, 저도 되도록이면 그쪽과 연관을 지어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
“일단 뜻을 같이 하기로 하신 이상, 이곳은 더 이상 한가한 모험가 집단이 아닙니다. 황자의 감정이 어떤지는 내 알바 아니나, 알리사양을 너무 괴롭히지 말아주셨으면 좋겠군요. 앞으로의 일정에 방해 밖에 되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쏘아붙이는 말엔 다분히 사적인 감정이 표현되어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정작 알아들어야할 알리사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다만 그녀는 그 순간 더욱 험악해진 두 남자의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던 라피스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자신을 쳐다보는 일행들의 시선을 모조리 무시한 채 응접실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라, 라피스님! 어디 가세요?”
“아,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계속 해, 이사나. 요즘 들어 신선한 모습만 보니 기분이 꽤 묘하군. 엘이 지금의 네 모습을 보면 감동의 눈물을 줄줄 흘릴 거다, 아마. 역시 인간의 남자란 사랑을 해야 달라지는 법이지.”
“윽~ 장난치지 마시고! 어디 가시냐니까요? 설마 완전히 떠나시는 건 아니죠?”
엘도 없는 상황에서 그마저 사라져버리면 이사나는 정말 의지할 상대가 없었다. 물론 시벨리우스와 데르온이 옆에 있긴 했지만, 초반부터 함께 해 왔던 탓인지 라피스 만큼 든든한 기분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법 황제다운 얼굴이던 그가 갑자기 불안한 표정이 되자, 라피스는 키득거리고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병아리 같은 얼굴은 그만해라, 꼬마야. 넌 이미 날개를 펼쳤어. 더 이상 어미가 먹이를 가져다 줄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무슨 소린지 알겠냐?”
“그건…그렇지만…”
“알아들었으면 네 할 일이나 해. 다른 사람이 뭘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난 잠깐 바람이나 쐬고 오련다. 여긴 날 노려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괴롭거든. 킥킥.”
“노려보는 사람?”
무심코 되묻던 이사나는 곧 얼마 전부터 유달리 라피스에게 차갑게 구는 에이프릴을 떠올렸다. 앞으로의 일정과 엘에 부재에만 신경 쓰느라 미처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일이었는데, 생각해보면 그렇게 다정다감했던 사이가 한 순간 틀어진 일이 그리 쉽게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라피스를 바라보는 누이의 눈에 떠올라있던 미움과 질투, 그리고 진한 연민의 빛을 떠올린 이사나는 곧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모르지. 드래곤인 그가 언제까지고 이곳에서 안주할리는 없으니, 이쯤에서 그만둬 준 것이 누이에게도 이로울 것이다. 지금은 헤어짐이 안타까울 지라도, 곧 장래를 생각해 보면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할거야.’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본인을 향한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알리사노 알 드레프. 나는 그녀를 계속 바라봐도 괜찮은 걸까?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땐 말 그대로 숨이 멈추는 게 어떤 기분인지를 실감했다. 어깨를 타고 흐르는 부드러운 금발과 벌꿀 같은 눈동자가 자신을 사로잡고 놔주지 않는다는 착각이 들었다.
단순히 미모만을 본다면 오히려 엘퀴네스쪽이 좀 더 아름답다고 할 수 있었지만, 알리사에게서 느낀 건 그보다 더 깊은 영혼의 이끌림이었다. 그래서 이사나는 주저 없이 그녀를 자신의 반려가 될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카터스의 황자가 나타난 지금도 마찬가지.
그러나 요즘 들어선 그 마음이 많이 흔들리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걸지도….’
비록 자신의 신분이 솔트레테의 황제라고는 하나, 이번 거사가 실패하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운명이다. 목숨은 구하더라도 평생 쫓겨 다니며 정처 없이 대륙을 떠돌아다니게 될지도 몰랐다.
그에 비하면 카터스의 황자는 장차 황위를 물려받지 않아도 제국 안에 무시 못 할 세력을 구축하며 일생동안 편안한 삶을 이뤄나갈 터였다. 알리사에게는 그쪽이 더 낫지 않을까?
자신은 지금 과한 욕심을 부려, 별이 점지해준 운명의 연인을 갈라놓으려하는 건지도 몰랐다. 지금 이 마음을 알리사가 눈치 채기 전에, 그리고 정말 더 포기할 수 없어지기 전에 놔주는 것이 서로에게 현명한 방법일 수도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사나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는 듯, 유유히 밖을 나서는 라피스의 뒷모습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자신이 날개를 펼쳤다고 말했지만, 거침없이 하늘을 날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하루하루가 촉박했던 중간계의 생활에 비해, 정령계는 나른하고 평화로운 일상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이전보다 몸도 가볍고 주변의 감각을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어서인지, 원래의 세계에 돌아 왔다기보다는 꿈을 꾸다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리들은 미네르바가 탄생한 이후로도 한동안 중간계로 내려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계속 될 것 같았던 이 한가로운 나날도, 귓가를 파고드는 강렬한 목소리 때문에 결국 일주일 만에 종결을 맞이했다.
[너…대체 언제까지 그 곳에서 뒹굴 참이냐?]
“…라피스?”
꿈에서 만난 인간한테 전화가 온다면 이런 느낌일까?
녀석에게서 연락이 올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기에, 당혹스러운 심정은 더욱 컸다.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옆에 있던 다른 정령왕들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뭐야? 호출이야? 그놈의 계약자는 성질도 급하네. 모처럼 인데 좀 쉬게 놔둘 것이지. 누구야? 그 인간 꼬맹이야?”
“아니, 아무래도 라피스인것 같은데, 이 녀석이 먼저 연락을 하다니 웬일이지? 혹시 이사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일주일이나 연락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녀석의 성질머리 상, 강제소환하기 전에 대답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윽! 강제소환? 그런 것도 있어?”
이왕이면 좀 더 버텨볼 생각으로 무시하려던 나는 트로웰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미네르바는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강제소환이란, 이미 한번 계약된 소환자가 다시 정령계로 돌아간 정령왕을 임의로 부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설마 엘퀴네스는 그걸 모르셨습니까?”
“아~그게 말이지…”
“후훗! 엘은 바보거든.”
“이프리트, 너어!”
“어머? 내가 틀린 말 했나? 남들이 다 알고 있는 걸 하나도 모르면 바보지 뭘 그래? 안 그래, 미네르바?”
“맞는 말씀입니다. 바보는 바보입니다.”
“……”
어째 묘하게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이랄까? 무표정한 얼굴로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미네르바의 모습에 나는 울먹이는 얼굴로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억지로 웃음을 참는 듯, 부들부들 어깨를 떨고 있던 그가 헛기침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흠, 흠! 그건 오해야. 엘은 단지 전생의 기억 때문에 본능을 자각하는 게 느려졌을 뿐이거든. 점점 나아지고 있으니까 조만간에 완전히 각성할 수 있을걸?”
“아아, 그런 겁니까? 그건 좀 번거롭겠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재교육 받아야 한다니, 인간들이 흔히 겪는 기억상실과 비슷한 증상이로군요. 엘퀴네스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성심성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아하하…별로 고생이랄 것 까지는…마음만은 고맙게 받을게.”
순간 재촉하는 라피스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이마에 힘줄은 몇 십 개나 드러내고 있을 것 같은 짜증스러움이 가득 묻어나는 어조였다.
[하! 이제 대답도 안한다 이거지. 당장 이 자리에 강제소환 해줄까? 참고로 여긴 마을 광장이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꽤 많지, 아마?]
“으악! 너 그런 짓 하기만 해봐! 이 치사 빤스 도마뱀아! 넌 인내심도 없냐? 좀 기다리면 다리에 쥐가 나냐고!”
[시끄러! 누가 내 말 무시하래? 벌써 일주일이다, 일주일! 뭐하느라 이렇게 늦는 거야? 정령왕의 탄생이 몇 달 걸리는 일이냐!!]
“어?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지금 드래곤의 감각을 무시하는 거냐? 이프리트와 트로웰까지 사이좋게 사라져버렸는데 그 정도 눈치도 못 채는 놈이 어딨어? 아무튼 빨리 돌아오지 못해!]
“쳇, 알았으니까 재촉 좀 하지 마. 기다리고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갈까.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투덜투덜 대답한 나는 앉아있던 보석 밭(이건 절대 꽃이 아니다)에서 일어서며 나머지 다른 정령왕들을 돌아보았다.
“난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너희들은 어떻게 할 거야? 둘 다 유희 중이었잖아?”
“아, 난 여기 오기 전에 미리 1년 정도 휴가를 받았어. 샴페인 용병단이 이사나를 돕기로 한건 알지? 인간들의 전쟁엔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잠깐 동안 쉴 생각이거든.”
“헤에…그렇구나. 그럼 이프리트 너는?”
“가봤자 바쁘기만 하고 재미도 없는걸. 나도 여기 더 있을래.”
“엥? 네가 안 돌아가면 그놈의 클리프 상단의 증명은 어찌 받으라는 거야, ‘이카나’양? 남음 목숨을 걸고 그놈의 파이어 버스터인지 수다쟁이 검인지 가져 왔구만.”
“수다쟁이? 큭- 그 녀석 아직도 그대로인거야? 지금쯤이면 정신 차릴 줄 알았더니…”
“헉, 이프리트…너 설마?”
그 검을 만든 이유가 이그니스의 수다 때문이었단 말이냐!
나의 경악한 표정에 녀석은 찔끔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이윽고 변명하는 목소리가 더듬더듬 흘러나왔다.
“누, 누군 그러고 싶었는지 알아? 시끄러운 건 견딜 수가 없는데 날더러 어쩌라고! 좀 얌전해질까 싶어서 검에다 박아 넣었더니, 오히려 망상만 더 깊어져선 점점 처리가 곤란해졌단 말이야.”
“그래서 던전에?”
“어쩔 수 없잖아! 인간에게 넘겼다간 마검으로 매도당할게 뻔한데! 그래도 명색이 불의 정령왕이 직접 만든 검인데 그런 취급당하게 만들 순 없잖아? 던전은 그야말로 최선책이었다고!”
마검(魔劍)이라…너도 알긴 아는구나.
예전이었다면 당연히 화를 냈을 일이었지만,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이프리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지금이라면 녀석이 검을 봉인시킨 이유를 백번이고 천 번이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자 당황한 쪽은 오히려 이프리트였다.
“뭐, 뭐야? 너 왜 그래?”
“아니…그동안 고생이 많았다고. 오죽했으면 던전에 가뒀을까 생각하니…으흑!”
“이익!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남의 순수한 마음을 그렇게 오해하면 안 되지. 아무튼 이번 일에 상단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니까 귀찮더라도 협조 좀 해줘. 던전까지 갖다온 내 성의를 봐서라도. 상단의 입장에서도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니잖아?”
진지한 내 요청에 이프리트는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쳇, 알았어. 그럼 일단 너 먼저 돌아가 있다가, 하루나 이틀 후쯤에 상단으로 찾아와. 안 그래도 요즘 바쁜 시기라 자리를 오래 비울수도 없으니 겸사겸사 치지 뭐.”
“고마워, 이프리트. 부탁 좀 할게. 그럼 난 이만 간다! 다들 나중에 또 봐.”
“유희를 가시는 겁니까?”
“응. 여기 오기 전에 하던 일이 있었거든. 전대의 미네르바가 부탁한 일도 있고…아참, 트로웰. 혹시 블레스터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아, 이런 질문 싫다면 미안.”
“응? 아니 괜찮아, 엘. 내 짐작이 맞다면, 블레스터는 굳이 찾으러 가지 않아도 곧 스스로 너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거야. 근데 한 가지 주의할게 있어.”
“그게 뭔데?”
“블레스터는 이프리트가 만든 파이어 버스터와는 달리, 검 자체의 위력보다 사용자의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목적이 있는 검이야. 정교한 마나사용을 요구하기 때문에 소드 마스터 이상에게서만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대신 자격이 되는 자의 손에 들어가면 본 능력의 3, 4배까지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지.”
“흐음, 그렇군.”
아무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다음으로 이어지는 트로웰의 말에 입을 멍하니 벌리고 말았다.
“소드 마스터의 능력에서 3,4배가 향상되면 거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급이야. 보통 어지간한 드래곤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수준이지. 실제로 요 근래 3500살난 블랙 드래곤이 블레스터에게 깔끔하게 당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라피스도 방심하면 위험할걸?”
“헉- 그, 그 정도야?”
“응, 그러니까 이번엔 어지간하면 엘의 선에서 처리하는 게 좋아. 제 아무리 블레스터라도 감히 정령왕을 공격할 생각은 못 할 테니까 다른 일행들이 나서기 전에 먼저 제압하도록 해.”
“으음, 알았어. 사람들한테도 주의시켜둘게. 충고 고마워, 트로웰.”
“뭘. 그나저나 가장 걱정되는 건 역시 대공과의 전면전인 걸? 이상하게 내 혜안으로도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뚜렷하지가 않아서 말이야. 아크아돈에 정령왕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곤 생각지 않지만…그의 배후에 마왕이 있다면 전혀 불가능 한 것도 아니지. 어쨌든 우리들은 이곳을 벗어나면 본 능력을 전부 발휘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니까.”
보통 정령들은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역소환이 되어 다시 정령계로 돌아오게 되지만, 육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시점이 넘을 시엔 그 자리에서 바로 소멸이 되는 수도 있었다.
아무리 신에 가까운 능력을 가진 정령왕이라도 중간계에선 현저히 약해지기 때문에, 마왕정도라면 4명 전부는 무리더라도, 정령왕 하나는 상대해볼만 할 것이다.
안 그래도 마신으로부터 그가 수상하다는 말을 듣고 난 이후라, 나 또한 은근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정령계 최초로 100년도 못 살아보고 죽는 정령왕이 되는 거 아니야?
이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트로웰은 안심하라는 듯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마, 엘. 정 위험하다 싶으면 내가 가서 도울 테니까. 라피 녀석도 멀뚱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야.”
“하하…그럴까나?”
그러자 지금까지 얌전히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미네르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저도 돕겠습니다. 4명의 정령왕이 합세하면 어떤 상대라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아, 고마워, 미네르바.”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그런데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습니다만. 트로웰과 이프리트는 어째서 엘퀴네스에게 엘이라고 부르시는 겁니까? 엘퀴네스는 엘퀴네스지 엘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애칭인데…?”
“흐음. 애칭이오? 그렇다면 이프리트나 트로웰은 어째서 애칭으로 불리지 않습니까? 4명의 정령왕은 모두 평등한 존재인데, 전부가 애칭으로 불리지 않는다는 것은 일종의 차별이 아닙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또랑또랑 묻는 말에 나와 나머지 두 정령왕은 대답하기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까지 그냥 부르기 편한 대로 불렀을 뿐, 딱히 차별이라고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트로웰이라고 불리는 게 더 편해서 별로…게다가 애칭을 만들기도 어려운 이름이고.”
“나도 마찬가지야. 엘의 경우는 인간들이 친한 사람을 부르는 방식을 흉내 내다가 버릇처럼 굳어진 것뿐이고. 이제는 너도 나도 다 엘이라고 불러서 새삼 엘퀴네스라고 고쳐 부르기가 어색할 정도인 걸?”
“그렇습니까? 그것 참 유감이군요.”
“엥?”
어쩐 일인지 미네르바의 표정이 더욱 흐려지자 우리들은 하나같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가 유감이라는 말인가! 애칭이 정해지지 않은 일이? 아니면 내가 본명으로 불리지 않는 일이?
나는 설마 싶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미네르바도 애칭을 가지고 싶은 거야?”
“……”
그 순간 우리는 보고야 말았다. 굳게 입을 다문 무표정한 소녀의 얼굴이 아주 조그맣게 일그러지는 것을.
‘그랬구나!’
이미 지난 며칠의 생활로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본 우리들은, 모두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그, 그러고 보니 미네르바도 애칭이 있으면 좋겠다, 그치? 하하…”
“으음. 그러게. 그건 전혀 생각 못했네. 어떤 게 좋을까? 일단 여성체니까 귀여운 이름이 어울릴 것 같은데.”
“귀, 귀여운 이름이라…윽. 나는 작명센스가 꽝이라 마땅한 게 별로…”
그러자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하고 있던 이프리트가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짧게 미네-라고 하는 건 어때? 부르기도 쉽고 간편하고, 무엇보다 미네르바하고도 어울리는 것 같은데.”
“아, 그거 괜찮다!”
“오오! 예쁜 이름인데? 넌 어떻게 생각해, 미네르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말 마음에 드는 이름이네요.”
급하게 결정한 이름치곤 꽤 마음에 든 모양인지, 미네르바는 거부감 없는 얼굴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조마조마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나와 다른 정령왕들은 모두 눈에 띄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엄청난 고비를 해결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체 뭘 하느라 이렇게 늦은 거야? 도대체가 너란 녀석은 대책 없이 남한테 일을 떠맡기질 않나…”
정령계에서 돌아온 뒤, 나는 단지 자신을 기다리게 했다는 이유로 라피스의 온갖 타박과 구박을 다 들어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로 이사나한테 가는 건데. 그래도 불러준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서 녀석의 기운을 따라 온 게 실수였던 모양이다.
한참동안 이어지는 투덜거림에도 불구하고 인내심 있게 들어주던 나는, 말이 점점 더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잽싸게 한손을 들어 중지시켰다.
“그만 좀 해! 나 다시 정령계로 돌아가 버린다?”
“얼씨구? 한 번 해봐, 어디. 그렇게 제국 수도 광장에서 강제 소환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어.”
“윽! 치사한 자식~! 협박하는 거냐!”
“그러게 누가 이렇게 늦으래? 고분고분 미안하다고 사과해도 모자를 판에 돌아가긴 뭘 돌아가?”
“너도 멋대로 일행에서 빠져나가 몇 달 동안 안 돌아온 적 있었잖아! 왜 나만 갖고 그래? 게다가 그저 그런 일도 아니고, 미네르바의 일이었단 말이다!”
“정령왕의 소멸과 탄생이야 어제 오늘일도 아닌데 뭘 새삼스럽게.”
“하! 그러셔? 너 죽을 때 내가 모른 척 해도 괜찮다면야 할 말 없다만.”
“쳇, 귀염성 없기는.”
남의 복장을 뒤집는 말을 하면서 고운 말이 나오기를 바라는 게 더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녀석을 노려봐 준 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왜 너 혼자 나와 있어? 다른 사람들은?”
“몰라. 지금쯤 후작인지 뭔지랑 회의라도 하고 있겠지, 뭐. 재미없어서 바람이나 쐴까 하고 나왔거든.”
“흐음. 카터스의 황태자는 어때? 이사나가 황제라는 사실 알고 있어?”
“아니. 다들 쉬쉬하고 있는 상태라 아직 뭐가 뭔지 모르는 모양이더라. 아참, 대체 그 시퍼런 녀석은 뭐냐? 그냥 평범한 블루엘프는 아닌 것 같던데.”
뭔가 불쾌한 기억이라도 있는지 잔뜩 얼굴을 찌푸리는 라피스의 모습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블루엘프라면…시벨리우스? 그 녀석 유니콘인데.”
“…유니콘? 설마 그 신계에 산다는 이마에 뿔 달린 말? 그런 놈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는데?”
“네가 준 서클렛 있잖아. 그 보석 안에 봉인되어 있었더라고. 내가 말 안했던가?”
“뭐야? …젠장. 괜히 그런 걸 줘가지곤.”
“나~참. 그새 또 싸우기라도 한 거야? 동료끼린데 좀 친하게 지내봐. 엘뤼엔이나 데르온하고도 그렇고, 넌 대체 왜 적을 사서 만드는 건데?”
“내가 적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놈들이 천재이신 이 몸을 질투하는 거다!”
…이놈의 왕자병은 언제쯤 고쳐질까? 나는 거만한 얼굴을 하고 있는 라피스를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봐 주었다.
아무래도 세계 3대 불치병(왕자병, 공주병, 도끼병)에 속하는 것이고 보니, 낫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애시 당초 너무 큰 욕심일지도 모른다.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지도.
“뭐냐 그 표정은? 어째 상당히 기분이 나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헤헤. 그래서? 설마 시벨이랑 싸워서 나온 거야?”
“그럴 리가 있냐! 그냥…저택 안은 좀 불편해서. 지루한 것도 지루한 거지만 자꾸 노려보는 여자도 있고.”
“여자? 아~~ 에이프릴양? 와하하, 쌤통이다! 그러게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치면 벌 받는다니까.”
“시끄러. 그나저나 미네르바의 소멸이라…트로웰 녀석은 괜찮냐?”
스스로도 잘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은근슬쩍 말을 돌리는 녀석의 행동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부터 알아온 사이라더니, 그 또한 미네르바를 향한 트로웰의 감정을 눈치 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처음엔 좀 울었는데, 이젠 평소랑 똑같은 거 같아. 뭐, 어차피 언젠간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지.”
“헤에. 그 녀석이 울어? 겉으론 상냥한 척 하면서 실제론 철벽같은 얼음심장을 자랑하던 땅의 정령왕이? 진심이긴 했던 모양이군.”
“…그 말 트로웰 앞에서 하면 고스란히 바닥에다 뼈를 묻을 걸? 아참, 미네르바가 떠나기 전에 한 가지 부탁한 게 있었어. 블레스터라는 검을 찾아다 봉인을 풀어 달라고.”
“블레스터? 설마 바람의 진이 봉인된 정령검을 말하는 거냐? 넌 왜 이렇게 쓸데없는 일만 떠맡는 건데?”
라피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옆에 지나다니던 사람들의 시선이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외모인데 이 자리에서 서서 구경거리라도 될 참인가? 나는 얼른 녀석을 잡아끌고 저택으로 걸어가며 설명했다.
“어차피 우리와 관계있다고 했단 말이야. 대공파 쪽에 블레스터의 주인이 있는 모양이더라고. 그게 능력을 증폭시켜준다며? 얼마 전에도 3500살인 블랙 드래곤이 당했다고, 너도 조심하라고 하던데?”
“…3500살의 블랙 드래곤? 썩을 놈의 메테 자식! 아주 돌아다니면서 드래곤 망신은 다 시키는 군! 만나기면 하면 콱 그냥!”
“메테…라고 하면 네 형이라는 그?”
“그 녀석 말고 누가 있겠냐? 그런 놈이랑 비교하는 것 자체가 나에 대한 모욕이니까 신경 꺼.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씩씩거리는 녀석의 말에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착각이었을까? 그 순간, 언뜻 스쳐 지나간 남자에게서 바람의 기운이 느껴진 것 같았다.
“…어?”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자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걸어가고 있는 일련의 무리들이 보였다.
그들은 누군가를 찾는 듯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하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진한 보라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30대 초반의 남자였다.
애써 감추려는 티가 역력했지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이나 정교하게 다듬어진 기운이, 소드 마스터인 카웰 후작에 비견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설마 저 녀석이 블레스터의 주인인가?
남자의 허리춤에 매달린 붉은 검집에 시선을 미친 나는 곧 굳은 표정으로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녀석 역시 흥미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말을 하자마자 딱 나타나는군.”
“양반이 될 팔자는 아닌가 보지. 도대체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벌써 이사나에 대한 꼬리를 잡았나?”
나는 혹시나 싶어 자연계의 실프를 향해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엿듣고 오라고 시켰다. 그러자 실프는 곧 그들이 얇은 양피지에 그려진 몽타주를 들고 있으며, 그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찾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몽타주? 혹시 긴 은발에 황금색 눈동자였어?”
-네, 꽤 귀엽게 생긴 인상의 소년이었습니다. 나이는 대략 17세 전후반. 그들끼리의 대화로 소년의 이름이 이사나라고 하는 걸 들었습니다.
“…!…헉, 어떻게 알았지? 또 다른 말은? 네가 들었던 것 전부 다 샅샅이 말해봐.”
-소년 때문에 놓쳤던 제물도 생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곧 클모어를 칠 생각이며, 그것을 위해 이미 군사를 요청한 상태라고 하더군요. 그동안은 되도록 섣부른 행동으로 눈에 뜨이지 말자고 당부하던데요?
“으음. 완전히 들킨 건가? 이거 골치 아픈걸.
“어이, 뭘 그렇게 혼자서 열심히 중얼거려? 뭔가 알아낸 거야?”
자연계의 정령이 보이지 않는 라피스는, 혼자서 납득한 채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채근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오늘 이 계획을 알게 된 것은, 그가 저택에서 나와 있던 바람에 얻을 수 있었던 소득이 아니던가! 녀석의 제멋대로인 행동도 때론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바로 개똥도 약으로 쓰인다는 상황이로군! 역시 선인들의 지혜란!!”
“…그게 무슨 말인데?”
“하하, 아니야. 그냥 해 본 말이었어.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자. 모두의 앞에서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럴 필요가 뭐 있어? 저 녀석이 블레스터의 주인 아니야? 그럼 검을 뺏어서 당장이라도 봉인을 해제해야지. 미적미적 거리다간 오히려 일을 망친다고.”
“엥? 지금 여기서? 보는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대체적으로 한산한 거리였지만, 아직 낮 시간이라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었다. 이런 곳에서 소란을 피우면 오히려 후작의 입장만 곤란해지는 게 아닐까?
그러나 라피스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녀석들이 먼저 쳐들어 올 때까지 기다릴 참이냐? 지금처럼 인원이 적을 때 확실하게 해둬야지.”
“안 돼. 주변에 저 녀석들 말고 다른 대공파가 있을지 모르는데, 일부러 눈에 뜨일 필요는 없다고. 지금은 그냥 정령들한테 저들이 어디로 가는지 감시만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아. 처리를 하더라도 나중에 조용히 해야 쓸데없는 소동도 피할 거고.”
“그런 건 재미없잖아.”
“싸움을 재미로 하냐? 저 녀석들 말고도 또 다른 본진이 따로 이쪽을 향하는 모양이니까, 어차피 그것에 대한 대책도 세워야 해. 일단은 이사나한테 돌아가자고.”
“쳇, 오랜만에 스트레스 해소나 할까 싶었더니…”
“그런 건 나중에 해, 나중에!”
아쉬움에 쩝쩝 입맛을 다시는 라피스를 재촉하며 나는 곧바로 이사나가 있는 장소로 공간이동의 주문을 외웠다. 혹시나 우리를 의식한 무리가 뒤를 밟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무려 일주일 만에 다시 시작된 꿈은 초반부터 나를 본격적인 전쟁의 준비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
“겨우 1만의 군사를 내놓겠다고? 웨폰 공작!!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유카르테 대공은 황실 홀에 마련된 알현실에 앉아 눈앞에 놓여진 서류를 거칠게 넘겨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대공파를 지지하는 수많은 귀족 무리들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긴장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상태였다.
그의 입에서 한 번씩 호통이 나올 때마다 그들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져갔다.
특히나 방금 호명 당했던 웨폰 공작의 얼굴은 불쌍할 정도로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황급히 바닥에 고개를 조아리며 변명을 내뱉었다.
“그 이상은 재정이 받쳐주질 않습니다. 1만의 군사들도 상당히 무리하게 끌어 모은 숫자입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십시오, 대공!”
“닥쳐라! 2만이다! 앞으로 15일의 시간을 더 줄 테니 그 사이에 2만으로 늘여놓도록! 용병이든 일반 백성이든 상관없다! 당장 나가서 싸우다 죽을 수 있는 전사 2만을 만들어 놓도록 해라! 만약 이것을 어기면 웨폰 네놈의 목부터 성탑에 걸리게 될 것이야!”
“허억! 대, 대공! 그, 그것은!!”
“시끄럽다! 제국 황실을 위해 하는 일에 토를 달 참인가? 만약 그렇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반역죄를 물어 네놈 자손의 9대까지 멸할 것이다! 겨우 2만의 군사도 모으지 못하는 공작 따위가 어찌 중앙에 있을 수 있단 말이야! 다음! 차첸 백작!”
“네, 넵! 섭정왕 전하!”
이름이 불린 남자는 전에 없이 불안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곧 이어질 그의 반응이 어떨지 미리 예상하고 있는 탓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공은 전에 없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옆에 있던 화병을 들어 차첸 백작의 얼굴을 겨냥해 집어 던졌다.
퍼억!!
“크헉!!”
둔탁한 소리와 함께 깨진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모두 아무런 항변을 할 수 없었다. 곧 대공의 분노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네놈이 감히 능멸해? 지금 2천이라 했느냐? 보낼 수 있는 군사가 2천?!!”
“허, 허억! 통촉해 주십시오, 전하! 제가 끌어 모을 수 있는 전사들은 그들이 전부입니다. 가문의 사비를 전부 털어 모은 용병의 숫자도 3백에 못 미칩니다! 제, 제발!”
“영지에 있는 백성들도 있을 것 아니냐!”
“하, 하지만 어찌 영주민을…”
“닥쳐라! 네놈이 정녕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네 다시는 그 손으로 검을 쥐지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
“대, 대공! 제발!!”
그러나 차첸 백작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대공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곧 옆에 있던 장식용의 검을 빼어들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휘둘렀다.
촤아악! 스겅!
“으아악!!”
섬뜩한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백작은 팔이 타오르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경악으로 부릅뜬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어느새 몸에서 떨어져 나가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자신의 오른쪽 팔이었다.
“아, 안 돼!! 안 돼!!! 크아아아아악!!!”
“뭣 들 하느냐! 이놈을 어서 끌어내라!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 도무지 마음에 드는 놈들이 하나 없군!”
“화, 황공합니다.”
검사의 생명과도 같은 팔을 아무렇지나 않게 잘라낸 잔인한 대공의 손속에, 귀족들은 하나같이 질린 표정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들은 하나 같이 동정의 시선으로 시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사라지는 차첸 백작을 바라보았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다보니 저런 상황도 결코 남의 일처럼 여기어 지지 않았다. 내일이면 바로 자신의 차례가 될지 모르는 것이다.
알현실에서 완전히 멀어진 그들은 돌아가는 내내 불안한 표정으로 쑥덕거렸다.
“이거야 원…갑자기 군사를 내놓으라고 할 때부터 뭔가 불안하다 싶더니,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랍니까? 10만 군사를 모으신다니요? 게다가 그렇게 모은 군사의 대부분을 곧바로 할버크에 집결시키라는 명령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현 재정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실 분이 어찌 그리 무리한 계획을…강제징병으로 끌어 모은다고 해도 과연 전하가 원하는 시간 안에 숫자를 채울 수 있을지.”
“차첸 백작도 안됐군. 선대의 백작을 유지를 이은, 꽤나 전도유망한 젊은이었는데 말이네. 10년 후쯤이면 소드 마스터가 될 거란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사람이었는데, 쯧쯧. 재력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생명과도 같은 팔을 잃어버리다니.”
“뭐라해도 요 근래 들어 대공전하의 손속이 잔인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안 그래도 흉흉하게 돌던 소문이 오늘의 일로 더욱 가쉽화 되겠군요.”
“소문?”
의아하게 묻는 질문에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모르셨습니까? 대공전하가 아이들을 납치해 마신의 제사에 바친다는 말이 퍼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요 근래 대공을 모시던 아이들이 안보이지 않습니까?”
“그, 그런! 자네는 그런 소문을 믿는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찝찝한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오늘에서는 회의가 들기까지 합니다. 과연 우리가 황제 폐하를 몰아내고 섭정왕 전하를 지지한 것이 잘 한 일이었나 하고요.”
“헉! 이, 이 사람아!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기겁한 다른 귀족들이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남자의 태도는 전혀 거침이 없었다. 방금 전 알현실에서 일어났던 칼부림이 그의 마음을 몹시 착잡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요즘의 대공전하는 이상합니다. 예전의 총기와 현명하던 눈빛은 전부 잃어버리고 마치 살육에 미친 사람 같아요. 이미 대부분의 중립 귀족들이 황제전하 편으로 돌아선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허- 자네는 그 말을 믿는 겐가? 클모어의 카웰 후작이 황제편이라는?”
“아니라는 증거도 없잖습니까? 지금 군사들이 집결되고 있는 할버크는, 수도에서 카웰 후작의 영지로 가는 길목의 중심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지금으로선 대공전하가 카웰 후작을 치기 위해 군사를 모으고 있다고 밖엔 생각되지 않습니다.”
“크흠.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안 그래도 얼마 전부터 이사나 황제가 카웰 후작과 합류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던 참이다. 만약 그곳을 기점으로 그가 다시 황권을 찬탈할 거사를 꾸미고 있다면 대공으로선 일찌감치 대비를 해두는 편이 나았다.
어찌됐든 카웰 후작은 백성들에게 지지받는 몇 안 돼는 귀족중 하나이며, 대륙에서도 손가락으로 꼽는 소드 마스터의 일원이었다.
개인적으로 훈련시킬 수 있는 사병의 숫자 또한 2만이니, 그를 제압하려면 그의 몇 배에 해당하는 군사를 모아야 했을 것이다.
“만약 황제와 관련이 없다면요? 단지 소문일 뿐이지 않습니까?”
“그렇다 해도 그의 존재는 언젠가 대공의 발목을 붙잡게 될 걸세. 이전이라면 모를까, 장차 화근이 될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살려둘 만큼 우리의 마음이 넉넉한 상태는 아니지 않은가?”
“으음. 그러고 보니 후작은 이전에 대공전하가 직접 주선한 혼담을 모욕적으로 파기한 적도 있었지요. 그런걸 보더라도 이미 그는 우리 쪽으로 돌아설 사람이 아니로군요. 결국 전쟁은 불가피한 겁니까?”
“그렇지. 이미 대공전하는 그렇게 하시기로 마음을 굳힌 듯하네. 징병을 하는 와중에도 이미 3만에 가까운 군사가 할버크에 집결되어 있다니 말이네.”
지금의 상황대로 보자면 대공은 몇 달 내로 그가 원하는 숫자만큼 군사를 집결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아무리 카웰 후작의 능력이 뛰어나다지만, 자신의 사병보다 몇 배나 많은 숫자의 군사를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또한 이쪽에는 같은 소드 마스터인 카리브디스 공작도 존재하지 않은가!
‘조만간에 아까운 별을 또 하나 잃겠군.’
처음 그들이 대공을 지지했던 이유는, 심성이 나약한 어린 황제보다 그가 제국을 더 잘 이끌어 나갈 거란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선 누구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대공과 그의 곁에 존재하는 마족들의 힘이 두려워, 아무도 그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있을 뿐.
팔을 잃고 절망의 비명을 내지르던 차첸 백작을 떠올리며 귀족들은 하나같이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모시던 주인에게 검을 들이댄 대가는 이토록 혹독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되돌아오고 있었다.
- 전운의 흐름 -
나와 라피스가 후작의 저택으로 돌아왔을 땐, 일행들은 모두 후작의 개인 서재에 모여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들어섰을 땐 이미 대부분의 계획을 의논중인 상태였는데, 한참 심각한 표정을 하며 후작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일행들은 나를 발견하곤 반가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엘! 드디어 돌아왔구나!”
“엘님! 지금 오시는 겁니까?”
“너무해~ 엘님! 너무 늦었잖아!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제야 온 거야?”
“라피스님과 만나서 같이 온 거야?”
오랜만의 등장에 인사를 건네느라 본의 아니게 회의는 잠시 중단되고 말았다. 덕분에 한창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던 후작은 불쾌한 표정으로 연신 헛기침을 내뱉느라 곤욕을 치루는 상태였다.
나는 노려보는 후작의 시선을 외면하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다들 오랜만이지? 하하,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겨서…”
“그런 식으로 뛰어나가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다들 엘님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으음. 미안, 미안. 그런데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뭔가 계획이 잡힌 거야?”
“크흠. 안 그래도 지금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소. 정령사님도 자리에 앉으시구료. 거기, 마법사 자네도.”
후작의 말에 나와 라피스는 어색한 표정으로 비어있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분위기가 진정될기미가 보이자 지금까지 하고 있었던 이야기가 다시 진행되기 시작했다.
“현재 클모어에서 모을 수 있는 군사는 모두 3만 정도였습니다. 이중 1만은 클모어의 자체적인 치안을 담당해야하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는 실정이 아닙니다. 진격은 일주일 뒤, 이중 만 5천의 군사만을 가지고 출발하여, 우리와 뜻을 같이 하기로 한 귀족중의 한사람, 완트 백작의 성에서 그의 군사들과 합류합니다.”
“일주일 뒤? 그건 너무 촉박하지 않습니까? 군사의 숫자는 그렇다 쳐도 무기와 식량은…”
“클리프 상단의 저력이라면 일주일이면 충분합니다. 문제는 아직 총수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만. 그의 부재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아! 이틀 후쯤에 찾아가면 될 거예요. 그때까진 돌아 올 거라고 들었거든요.”
“그렇습니까?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처음 세운 계획을 무리 없이 진행 시킬 수 있겠군요. 클리프의 총수가 인정을 하면 다른 상단들 또한 적극적으로 나서게 될 겁니다.
가장 처음으로 할 일은 전쟁의 발발 시, 대공쪽의 보급을 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만. 제국에 존재하는 상단 중 가장 넓은 상권을 확보하고 있는 아놀드 상단이 대공의 편이니 그것은 불리한 일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대공과 이사나의 싸움이었지만, 이것은 곧 누구의 편을 드느냐에 따라 또 다른 세력의 전쟁을 예비하고 있었다. 싸움을 주 무기로 하는 용병뿐이 아닌, 상단의 경우도 그러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어떤 판단을 하느냐에 따라 훗날의 존속 여부가 판단될 테니, 솔트레테에 존재하는 모든 상단이란 상단은 바짝 긴장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예지력을 가지고 있기로 유명한 클리프 상단의 총수가 이사나의 편을 들면 대부분의 민심이 이쪽으로 이동하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공의 심사를 어지럽히는 일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저어…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대공의 기사들이 이곳에 와 있는 것 같았습니다만.”
“아아, 사실입니다. 이전에 있었던 에릴과의 혼담을 거절한 일로 꾸준히 찾아들고 있는 형편이지요. 하지만 그런 소수만으로는 단순히 협박거리 이상이 안 됩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그리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 아니. 문제는 그것이 아니에요. 아무래도…그들이 이사나의 정체를 알아본 것 같았거든요.”
“뭐, 뭐라고요?”
설마 폴리모프한 이사나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못했는지, 나름대로 느긋한 얼굴이던 후작의 표정은 급속도로 굳어졌다. 그것은 다른 일행들 역시 마찬가지라, 나는 방금 전 거리에서 보았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들 끼리 나누는 대화를 들으니 곧 클모어에 군사를 집결시킬 예정인 것 같더군요. 이미 그들은 이곳에 이사나가 있고, 황권을 찬탈할 준비를 한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는 듯 보였어요.”
“큭- 어쩐지. 요즘 식량과 무기를 대량으로 유통되고 있다고 해서 이상하다고 여긴 참이었는데. 드디어 군사를 집결 시키는 건가! 이 간악한 대공놈! 그래, 군사의 수는 얼마정도나 한답니까?”
“그 부분에 대한 건 못 들었어요. 일단 그들의 목표는 여기 있는 이사나와 알리사의 위치를 확보하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엥? 나도?”
자신의 이름까지 거론되자 알리사는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카터스의 황태자까지 덩달아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알리사노양은 솔트레테의 귀족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이 무슨 이유로 노린단 말씀이시오?”
“알아봤자 별로 좋은 일도 아니에요. 기억 안나, 알리사? 우리와 처음 만났던 상황 말이야. 그때 대공의 기사들이 널 억지로 끌고 가려고 했었잖아. 그때의 목적을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모양이야.”
“에엑? 뭐야, 그게? 역시 이사나씨를 따라온 게 잘 한 거였잖아. 나 혼자선 감당하기 힘들었을 거야. 어휴, 소름끼쳐.”
“아, 알리사노양! 그게 정말입니까? 솔트레테의 대공이 당신을 억지로 끌고 가려고 했었다고요? 내 이놈들을 용서치 않으리라! 당장 본국에 지원을 요청해야!!”
쾅! 그때 커다란 소음이 탁자위에 울려 퍼졌다.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니 굳은 표정이 된 이사나가 테이블 위에 주먹을 올려둔 채 황태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진정하시오, 황자! 카터스의 개입은 달갑지 않다고 말 했을 텐데요? 경거망동을 보였다간 내 검이 먼저 황자의 목을 겨누게 될 겁니다.”
“큭- 당신이야 말로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고작 3만의 군사들로 황성을 칠 계획을 하고 있다니! 지금은 타 제국의 손을 빌려서라도 목적을 이루는 게 오히려 현명한 선택인 듯 합니다만?”
“역사에서 그런 식으로 남의 도움을 빌려 결과가 좋았던 제국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본.래. 내. 것.이.었.던. 자.리.를 찾기 위해 타 제국의 간섭을 받고 싶지는 않군요. 그러니 쓸데없는 참견은 그만둬 주시겠습니까?”
“…본래의……자리?”
지금 그 말로 황태자는 이사나의 정체가 무엇인지 완전히 깨달은 듯 보였다. 멍한 표정으로 할 말을 잃지 못하는 그를 무시하며 회의는 다시 촉박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정체가 들켰다고 해서 큰 문제가 있을까요? 어차피 전쟁은 불가피한 상황인데, 겨우 그들로는 설령 마주친다 해도 우리들을 어찌할 수 없을 겁니다.”
“아뇨. 기사들을 지휘하는 남자가 꽤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았어요. 혹시 검은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의 기사를 아시나요? 나이는 30대 중반으로 보였는데.”
“…큭. 카리브디스! 하필 그 자가 이곳에 왔을 줄이야.”
남자의 대략적인 인상착의를 들은 후작은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를 파악하고 낭패한 듯 신음을 흘렸다. 그것은 한 쪽 구석에 시립해 있던 이사나의 친위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딱딱하게 굳어진 사람들의 표정을 쭈욱 흩어본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단 대공이 군사들을 집결시키는 장소를 먼저 알아내는 것부터가 순서일 것 같습니다. 한 도시를 치기 위해 모으는 군사인 만큼 모이는 숫자 또한 대군(大軍)이 될 테니, 보급을 위해서라도 중간에 모이는 집결지가 따로 있을 거예요.”
“끄응. 그렇다면 할버크일 겁니다. 수도인 헤리카에서 이곳으로 오기까지 거치는 길 중 거의 중간 지점인데다, 성 남부 외각에 평야지대가 많아 대규모의 군사를 집결시키기에 편한 곳이거든요.
그곳 영주인 클란 백작이 지난번에 자신의 큰 아들과 에릴의 혼담을 파기한 일로 감정이 많이 상해 있으니, 아마 적극적으로 도우고 있을 겁니다.”
“할버크라면…여기서 두 달 정도 떨어진 도시를 말씀하시는 거죠? 얼마의 숫자가 모일 진 모르지만, 일단 모든 계획을 수정하는 편이 좋겠어요. 이곳이 우리들의 본거지인 이상, 적들에게 순순히 빼앗길 수는 없으니까요. 어떻게 생각해, 이사나?”
“나도 엘의 의견에 찬성이야. 그런데 수정이라면 어떤 식으로?”
“으음, 우선 할버크에 정찰을 보내서 정보를 모아야겠지? 적의 확실한 숫자를 파악해야 적절한 대책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이건 나이아스들을 통하면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그리고 아까 식량과 무기가 대량으로 유통된다고 했었지? 그럼 그것과 관계가 있는 상단들도 조사해 봐야겠군.
혹시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대공의 조력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 부분은 철저히 짚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근데 전쟁이 시작되면 대공이 직접 이쪽으로 내려오게 될까? 만약 그렇다면 수도에 남게 될 군대는 몇이나…응? 다들 왜 그렇게 봐?”
활기찬 의견이 교환되어도 모자를 판에 일행들은 모두 멍한 표정으로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의아한 눈으로 시선을 되받아 치자 언뜻 얼굴이 붉어진 후작이 헛기침과 함께 대답했다.
“흠-흠. 아무것도 아닙니다. 상급 정령사라고는 들었지만, 이러한 일에는 전혀 문외한 일이실줄 알았는데 의외여서 그만….”
“에? 실제로도 잘 모르는데요.”
“하지만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나 정황을 파악하시는 것이…”
“하하, 그냥 느끼는 데로 말하는 것뿐이에요. 이런 일에야 후작님이 전문이시니 더 잘 아시겠죠. 전 전쟁조차 이번이 처음 겪는 일인걸요.”
“그러나…”
“흐음, 그러고 보니 대공이 황성을 비운다면 조금 더 수월해 질지도 모르겠는데? 이런 건 어떨까요? 어차피 중간에 집결지가 있는 거라면 그곳으로 모이는 시간이 있을 테니 우리는 그 사이에 군대를 미리 수도 쪽으로 출발시키는 거예요.”
“네? 하지만 그래선…”
당황해서 뭔가 말을 이으려는 후작을 가로 막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전부가 가는 게 아니에요. 일부만 미리 가서 황성을 치는 거죠. 그럼 이쪽에 집결된 대공의 군대는 당황해서 수도를 지키기 위해 다시 회군하는 수밖에 없잖아요? 바로 그때 클모어에 남아있던 나머지 부대가 그들의 뒤를 치는 식이죠. 이를 테면 양동작전이랄까. 으음, 너무 터무니없을까요?”
“…아니, 나쁘진 않은 계획이군요. 하지만 이런 방법도 숫자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나면 소용이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황성을 지키고 있을 군대의 숫자도 생각해야 할 테니까요. 게다가 얼마 되지 않을 나머지 전력으로 할버크에 집결된 모든 군사를 친다는 것도 좀 무리가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양쪽이 전부 몰살당하는 결과를 내게 될지도 모릅니다.”
“너무 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만약 대공이 이번 전투에 사활을 걸고 있다면, 자신이 모을 수 있는 모든 군대를 전부 이쪽으로 집결 시킬 겁니다. 여러 면에서 불리한 우리가 설마 먼저 황성을 칠거란 생각은 못 할 테니, 자연적으로 수도 쪽의 방어가 허술해질 수도 있어요.”
그러나 카웰 후작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음으로서 반대의 표시를 해보였다. 그가 제시한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았다.
“현재 클모어에 있는 3만에서, 중간에 협력하기로 한 다른 귀족들의 군사를 이쪽으로 합한다 해도 모을 수 있는 숫자는 5만이 한계입니다. 그에 비해 대공이 모을 수 있는 군사는 최대 10만을 넘지요. 아무리 뒤를 치는 것이라 해도, 배가 차이나는 전력이 상대가 될 리 없습니다. 게다가 황성으로 갈 전력까지 빼낸다면 더더욱…”
“하지만 원래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 중 90%는 일반 백성들 중에서 징집되지 않나요? 숫자는 많을 진 몰라도 전투력은 별 볼 없을 겁니다. 갑자기 뒤에서 공격을 당하게 되면 당황해서 전열(戰列)을 가다듬지 못할 거예요. 그 사이에 대공을 어떻게 할 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결될 거라 생각해요.”
꽤 그럴듯한 설명이었는지, 내 말이 끝났을 즈음 일행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동조의 표시가 떠올라 있었다. 그 중에서도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하던 카웰후작은 잠시 후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미리 수도로 진격할 군대의 숫자는 얼마정도 입니까?”
“음. 글쎄요? 수도를 지키는 군대가 몇이나 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리 많지는 않을 거예요. 한 3천정도?”
“그런 터무니없는! 3천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눈에 뜨이지 않고 이동하려면 3천이 가장 적당한 걸요. 모자란 전력은 여기 있는 라피스가 보충 할 수 있을 거예요.”
“하아? 왜 또 거기서 내가 나와?”
지금까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방관하는 입장을 취하던 녀석은, 내가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들먹이자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한눈에 봐도 귀찮다는 빛이 역력한 얼굴이라 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하려고?”
“그렇다고 날 전면에 내세울 건 또 뭔데? 마법이 필요한 거라면 저기 있는 퍼런 엘프놈이나 마족놈도 있잖아.”
“시벨은 안 돼. 이사나를 도와서 여기를 지켜야 하거든. 그리고 데르온은 우리 때문이 아니라 알 때문에 일행에 합류한 거야. 그때쯤이면 아이가 태어날 텐데 싸움에 가담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고. 결국 제일 한가한 라피스 라즐리 당첨!”
“네 멋 대로냐!”
버럭 소리치는 녀석을 무시하며 나는 생긋 웃는 얼굴로 다시 후작을 바라보았다. 라피스의 이름이 거론될 때부터 뭔가 상당히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긴장시켰다.
“저래 보여도 마법 실력 하나만큼은 꽤 쓸 만해요. 모자란 전력은 충분히 보충 할 수 있을 거예요. 정 안 될 것 같으면 저도 같이 가면 되고.”
“예? 하지만 겨우 두 명이서…”
“무슨 소리야, 엘? 그럼 서로 따로 움직이는 거야?”
웅얼거리는 후작의 말을 막고 질문한 사람은 지금까지 굳은 얼굴로 내 설명을 듣고 있던 이사나였다. 나는 당연한 소리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어쩔 수 없잖아? 전력이 될 만한 인원은 적당히 분배 시켜야지. 나와 라피스가 먼저 올라가서 적당히 황성을 혼란에 빠트려 둘 테니까, 그 사이에 네가 후발부대와 함께 치고 올라오면 될 거야.”
“잠깐! 난 반대야, 엘! 왜 네가 저 자식이랑 같이 가? 차라리 내가 갈래!”
“그건 안 돼. 시벨은 여기 남아서 이사나를 도와줘. 황성을 치려면 모자란 전력만큼 대단위의 마법이 사용 돼야 할 텐데, 지금 너의 모습으로는 무리잖아? 설마 모두의 앞에서 본 모습으로 배회할 셈은 아니지?”
“…그, 그렇다고 네가 굳이 저 녀석과 같이 갈 필욘 없잖아! 안 그래도 잘난 자식이니, 그냥 혼자 가라고 그래!”
흥분하며 길길이 날뛰는 시벨과는 달리, 그가 필사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라피스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시큰둥한 모습이었다. 서로를 마주보는 두 눈에선 이글거리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도대체 이 둘은 왜 이렇게 사이가 안 좋은 걸까? 잠시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본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또 무슨 억지야? 그렇지 않아도 멋대로 구는 녀석인데 나라도 가서 통제해야지, 안 그럼 제 기분 내키는 대로 온통 수도를 불바다를 만들어 놓을게 뻔하다고. 게다가 그런 큰일을 이 녀석 혼자 부담하게 만들 순 없잖아? 이사나, 넌 어떻게 생각해?”
“응? 아…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듯 이사나는 잠시 놀란 표정으로 어깨를 움찔했다. 지금까지 함께해 왔던 일행들이 분산된다는 사실 때문인지, 고개를 든 얼굴은 결정을 망설이는 빛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 마음의 결심을 굳혔다는 듯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엘의 의견엔 찬성이야. 다소 무리가 따르는 작전이긴 하지만, 엘과 라피스님이 움직인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오케이. 맡겨만 둬. 그럼 언제 출발해야 하려나? 일단 중간에 합류하기로 했던 다른 귀족들에게는 미리 연락해서 이쪽으로 오라고 말해 둬, 이사나. 대공 쪽도 출발하는 시간이 있으니 서두르면 비슷하게 맞출 수 있을 거야.”
“응,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일단 당장은 수도로 진격할 3천의 군사부터 뽑아둬야겠군.”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저 두 사람만으로는 턱도 없는!!”
순식간에 상황이 진행되어 버리자 후작은 기겁한 얼굴로 소리쳤다. 설마 이사나가 이런 무모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계획에 응할 거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미 결정을 내린 그의 결심은 이후로 절대 바뀌는 일이 없었다.
“형님의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지금은 저와 엘을 믿고 따라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는 형님의 생각보다 훨씬 강한 존재입니다. 반드시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줄 겁니다.”
“하, 하지만…폐하!”
“언젠간 반드시 지금 제가 품은 마음을 털어놓는 날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시고 우선은 저의 뜻대로 행해 주십시오.”
“!!”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후작으로선 거역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 이 전쟁은 그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한참동안 복잡한 표정으로 이사나와 일행들을 바라보던 그는 결국 체념의 한숨을 내쉬며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저는 폐하와 함께 하기로 결심한 몸! 그것이 지옥이라 해도 마다하지 않을 작정이었으니 원하시는 뜻대로 하십시오. 제 목숨을 걸고 폐하를 지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형님.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잠시 미안한 시선으로 카웰 후작을 바라보던 이사나는 곧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본격적인 전운의 흐름이 감돌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회의가 끝난 후, 각자 자신이 할 일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려는 우리를 불러 세운 것은 카터스의 황태자-라온휘젠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서린 혼란한 감정을 읽은 나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뒤 혼자 따로 그와 대화를 나눌 자리를 마련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던 서재 안에 두 사람만이 남자, 주변은 금세 쥐죽은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일부러 소리 나게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황태자에게도 밝은 목소리로 앞자리를 권했다.
“일단 앉으세요. 할 말이 많으신 것 같은데 서서 대화할 수는 없잖아요?”
“그보다…먼저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정말…이사나씨가 이곳 솔트레테의 ‘비운의 황제’입니까?”
“으음. 그건 둘째 치고…제가 없던 지난 일주일동안 무슨 일이 있었죠? 그동안 일행들에게서 아무것도 못 들으셨나요?”
“본인이 아는 것이라곤 그가 황제파의 사람이며, 곧 섭정왕인 대공을 치고 다시 황권을 찬탈할거라는 계획밖에 없습니다. 직접 물어본 적도 있지만 알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더군요. 그런데 방금 회의에서…”
악다문 그의 입에선 진한 배신감마저 배어나왔다.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을 자신 혼자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받은 충격과 섭섭함이 컸던 모양이다.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두 주먹을 꽉 쥐고 있는 황태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사나는 쫓기고 있는 입장이라, 아무리 일행이라 해도 함부로 정체를 밝힐 순 없었으니까요. 라온휘젠님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건 물론 이해합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숨길 필요는 없었잖습니까? 게다가 애시 당초 이 몸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해놓고 오늘처럼 중요한 회의에 참석시킨 저의도 몹시 궁금합니다!”
“헤에~ 신뢰할 수 없다고 했나요? 이사나가?”
“그렇습니다. 그는 이 몸의 존재가 앞으로의 일정에 큰 변수로 작용하게 될 거라고 하더군요. 처음에 사막에 쓰러져 있었던 상황조차 의심을 하니 마땅히 변명할 말도 없었습니다. 본인으로선 답답할 따름입니다.”
오오, 그랬단 말인가! 이사나 녀석, 꽤 제법이잖아? 왠지 그때의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해, 나는 피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이사나가 그렇다고 했다면 사실일겁니다. 회의에 참석시킨 것은 그 ‘변수’가 어떻게 작용할지 알아보려는 것이겠죠. 아무튼 그 사이에 배짱만 늘었다니까요. 쿡쿡.”
“서, 설마 그는 이 몸의 반응을 시험해봤다는 겁니까?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아보기 위해? 그런 무모한!”
“미안하지만, 라온휘제님. 이사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타인을 쉽게 믿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또한 겉모습만으로 판단하셔도 곤란해요. 녀석은 당신이 적이라는 판단이 생기면 바로 제거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만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일행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설마 정말 모르셨다곤 말씀 못하시겠죠?”
“…어렴풋이는. 하지만 정말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적어도 이 몸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다룰 수 있다고 장담하는 남자라면, 자신의 정체 정도는 미리 밝혔어도 상관없던 것 아닙니까?”
“으음. 저야 말로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라온휘젠님은 그동안 솔트레테 제국 황제의 이름이 뭔지 전혀 모르고 계셨나요? 아무리 외모가 달려졌다지만, 이름만 들으면 눈치 챌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불쾌한 얼굴이던 황태자의 얼굴이 금세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곧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아, 아니 그게…실은 이 몸의 교육을 담당하고 계신 스승님이 다른 제국 황족이름은 알 필요가 없다고…사람은 일단 제 앞가림부터 할 줄 알아야 한다며…크흠. 솔트레테 제국의 황제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는 들었습니다만, 미처 성명까지는 관심을 두지 못했습니다.”
“하하…그래도 장차 제국을 이어받을 황태자인데, 타 제국 황제의 인상착의나 프로필정도의 기본 정보는 인식하고 계시는 게 앞으로도 도움이 되실 텐데요.”
“네, 본인 또한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습…헉! 이, 이 몸이 태자라는 사실은 어찌 아셨습니까?”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던 그는 곧 말속에 담긴 위화감을 느꼈는지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런 반응에 놀란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어라? 숨기신 거였어요? 저는 아무렇지 않게 나이를 알려주시길래, 다른 일행들도 지금쯤이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 나이요? 아니, 아직 물어본 사람이 없어서 말해준 적은 없습니다만. 그런데 그런 걸로 어떻게 이 몸이 황태자라는 사실을??”
“그거야 이사나와 같은 나이의 황자는 카터스 제국의 황태자 밖에 없기 때문이죠. 그 정도의 정보는 조금만 제국 정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거라고 생각하는데요?”
“…헉!!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그, 그럼 이 몸은 나이를 함부로 알려줘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까? 아아! 그, 그래도 황자라고만 밝히지 않는다면 상관없겠지요?”
“…그러려면 일단 머리색부터 바꾸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앗! 그렇지!! 이 머리색은 황족에게만 물려진다고 했었지!! 이, 이런 낭패가!!”
기겁하는 황태자의 얼굴을 보며 나는 그를 가르쳤다는 스승의 성격에 대해 짐작해볼 수 있었다. 틀림없이 엉뚱한 괴짜이거나, 평소 카터스 제국 황실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일 것이다. 황위를 이을 태자를 저리 바보로 만들어 놓다니, 이거 미래가 영 불안한 거 아니야?
피식피식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눌러 참은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것 보세요. 라온휘젠님도 본인의 신분을 전부 밝히지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이사나만 탓하지 말아요. 그 녀석도 당신이 그냥 황자가 아닌, 카터스의 황위를 이을 태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리 달가운 느낌은 아닐 테니까요.”
“크, 크흠. 그래도 나는 물어보면 기꺼이 말해줬을 겁니다. 애당초 다른 일행들은 전부 알고 있는데 어째서 이 몸에게만…”
“그거야 우리들은 이미 그의 정체를 안 상태에서 여행을 함께 했기 때문이죠. 중간에 합류한 황태자님과는 엄연히 입장이 달라요.”
“하, 하지만 알리사노양은요? 그녀는 알폰프 제국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원래 어떤 일에든 좋아하는 사람은 예외에요.”
“……”
내 대답이 정곡을 찔렀는지, 황태자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묘하게 납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건 그렇군요. 이 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쿡쿡. 웬만하면 황태자님이 이사나를 이해해주셨으면 하네요. 안 그래도 거사를 앞두고 있는 상태라 신경이 많이 예민할 테니까요. 황성에서 나온 이후부터 한 차례도 편한 시간이 없었으니, 겉으론 저래도 속이 말이 아닐 거예요.”
“그리 말씀하시니 노력해보겠습니다. 저어…또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뭔데요?”
이번엔 또 무슨 말을 꺼낼까 싶어 나는 긴장한 얼굴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또 다시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을 털어놓았다.
“방금 전 회의에서 카웰 후작이 사제님더러 정령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설마 이 몸에게 정체를 숨긴 건가 했지만, 사제가 아니신 분이 상처를 치료 하셨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후작에게 거짓말을 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라 말입니다.”
“아… 그건 말이죠. 어차피 언젠가는 곧 알게 되실 일이라 생각하지만, 아직은 뭐라고 말씀드릴 단계가 아닌 것 같네요. 다만 저는 두 분 모두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만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게 무슨? 설마 사제님도 이 몸이 다른 제국의 관계자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말을 돌리시는 겁니까? 그런 거라면!”
“아니요, 그런 건 상관없어요. 단지 제 정체가 밝혀지는 게 이사나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번일은 전적으로 녀석의 활약으로 만들어 주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따라온 거니까요.”
차분하게 대답하는 나를 보며 카터스의 황태자는 점점 더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이 되어갔지만, 나는 그저 생긋 미소만 지어보였을 뿐이었다.
그 뒤 나는 ‘다음에 보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잽싸게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에 성공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질문들이었음에도 막상 부딪치고 나니 10년은 한꺼번에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하아…그래봤자 정령왕의 수명에서 10년이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당연한 걸 말하는군. 대체 뭘 그렇게 꼬박꼬박 대답해주고 있던 거야? 적당히 떨쳐버리고 나올 일이지.”
“어? 라피스? 기다렸어?”
의아한 시선으로 돌아본 곳에는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특유의 거만한 표정을 지은 채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다른 일행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아마도 전쟁준비를 하기 위해 이것저것 분주한 모양이었다.
결국 라피스 혼자 땡땡이 치고 있었다는 소리인가? 그런 주제에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불쾌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제발 사고를 치려면 너나 하라고. 왜 나까지 끌고 들어가는 건데?”
“갑자기 뭔 소리…아~ 황성을 치는 일 말 하는 거야?”
“아~? 지금 그런 한가한 말이 입에서 나와? 대체 뭐하자는 거냐? 어울리지도 않게 전쟁이니 뭐니…넌 그냥 이사나가 하는 일에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 왜 나서서 계획까지 늘어놓는 건데?”
“괜찮은 방법이 떠오르는 걸 어쩌라고. 너나 나나 그렇게 까다로운 조건도 아니잖아? 이왕 할 거 좀 기분 좋게 맡아줄 순 없어?”
“얼씨구? 전쟁이 뭔지는 알고나 하는 소리냐? 그냥 황성만 치면 다 돼는 줄 알아? 지금까지 몬스터만 죽여 본 네가 퍽이나 인간을 상대로 힘을 쓰겠군. 그렇지 않아도 자기가 정령인지 인간인지 헷갈리는 주제에.”
비꼬는 기색이 가득한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평소처럼 불쾌하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그냥 머릿속을 맴도는 아무 말이나 툭-하고 내뱉었을 뿐.
“인간이나 몬스터나 피와 살로 이루어진 건 매한가지인데 뭐가 다르다고? 그리고 지금 내가 남의 사정 봐줄 때야? 안 그럼 이쪽에서 당하게 생겼는데.”
“호오, 평소답지 않은 말인 걸?”
“사실이잖아. 누구의 희생도 없는 전쟁은 있을 수 없어. 그 대신 나는 관대한 성격이니까, 도망치는 녀석들까지는 건들이지 않겠지. 이정도만 해도 충분한 혜택 아니야?”
그런데 그것이 생각보다 라피스에겐 꽤나 의외였던 모양이다. 녀석은 잠시 묘한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뭔가 굉장히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흐음, 그럼 그렇지. 평소보다 딱 부러지게 말해서 뭔가 이상하다 싶었더니. 아직 본성이 완전히 깨어날 리는 없고… 아무래도 새로운 정령왕의 탄생에 잠시 영향을 받은 모양인데. 아무튼 재미는 있군.”
“뭔 소리야?”
“아니, 네가 인간의 기억을 가지지 않았다면 어떤 성격이었을까 생각하니 신기해서. 장담하지만, 전대의 엘퀴네스보다 더 재수 없었을 것 같군. 너 말이야…딴 차원에 빠졌다 오길 잘했다.”
“하아? 지금 나 놀리는 겨?”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라피스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녀석의 모습을 봐서인지, 나는 어쩐지 방금 전에 내뱉었던 말들이 하나같이 찝찝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심하게 말했나? 그래도 일단 인간은 지성이 있는 생명인데. 으윽! 일단이 아니잖아, 일단이! 사람을 해치는 것과 몬스터를 죽이는 게 어떻게 같다는 거야? 아무리 생각 없이 말했다지만 나 미친 거 아냐?’
모처럼 모질어졌던 마음도 보람 없이, 또다시 금세 후회하고 마는 나였다.
다음날 우리는 실프를 통해 이미 할버크에 집결된 대공의 군대가 4만의 숫자를 육박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때 아닌 전시(戰時)에 이미 대부분의 백성들은 피난길에 올랐고, 그 중 젊고 싸울 수 있는 남자들은 강제로 군대에 지원되었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이사나의 얼굴은 침통하게 일그러져있었다.
“강제징병이라니…결국 내가 싸워야 하는 건 아무 죄 없는 백성들이라는 건가.”
“어떻게든 피해를 최소로 줄였으면 좋겠는데…으음, 다른 쪽 귀족들에게선 연락이 왔어?”
“응, 각자의 사병과 영지민들 중 자원해서 모은 군사를 데리고 이곳으로 출발한다고 했어. 그들도 일단은 클모어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 무리하게 일정을 변동한 것인데도 잘 따라와 주고 있어.”
“그래? 그럼 이제부턴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이쪽의 전력을 가다듬어야겠군. 아무쪼록 별 다른 일 없이 무사히 합류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이 쯤 되면 다들 알고 싶지 않아도 전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거야.”
내 말에 이사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던 일이긴 했지만, 막상 눈앞에 현실로 다가오고 나니 착잡한 심정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그 누가 자신의 숙부에게 검을 들이대는 일을 기뻐하겠는가.
“아참! 상단에서의 일은 어떻게 하지? 그 마검…아니, 이그니스를 가져다 줘야 하잖아.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물자의 보급이 필요하지 않아?”
“응, 안 그래도 슬슬 한계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전시를 느낀 상인들이 한사코 몸을 사리고 있어서 말이야. 클리프 상단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야.”
“그럼 모레쯤 방문할까? 2~3일 후에 오라고 했으니, 그때면 이프리트 녀석도 돌아와 있겠지.”
나와 이사나가 오늘 일정에 대해 의견을 짜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풍겨오는 바람과 물의 기운을 느낀 나는 의아한 시선으로 돌아보았다가, 낯익은 사람을 발견하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꽤나 오랜만에 만나는 정령사 페리스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고 서 있었던 것이다.
“페리스!!”
“다들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혹시 제가 타이밍을 잘못 맞춘 것은 아닌지.”
“아니에요. 와~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다른 기사들은?”
“전부 연무장에서 수련중입니다. 엘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나오려고 했지만, 후작님이 워낙 엄격하셔서 말입니다. 꼼짝없이 오전 훈련은 전부 마치고야 개인 시간이 주어질듯 하더군요. 저는 다행히 기사가 아니기에 특혜를 입을 수 있었습니다만.”
생긋 웃으며 대답하는 그의 얼굴에는 이전에 보았을 때보다 한층 더 선명해진 바람과 물의 인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동안에도 꾸준히 기운을 잘 다스려왔다는 뜻이었기에 나는 뿌듯한 얼굴로 칭찬을 건넸다.
“이제 정령들을 모두 어렵지 않게 다루게 된 듯하네요. 축하해요.”
“하하. 역시 엘님의 눈은 속일수가 없군요. 사실 요 근래 물과 바람의 중급정령을 동시에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안 그래도 엘님을 뵙게 되면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와아, 그게 정말이에요? 정말 대단해요, 페리스! 이제 무서울 적이 없겠네요.”
“전부 엘님 덕분이지요. 그래도 폐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성취라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벌써 시큐엘을 다섯이나 다루신다지요? 정령과 먼저 계약을 했던 건 저인데 뭔가 상당히 억울해지는 군요.”
“페, 페리스? 그, 그런 게 아니라!”
“하하하! 장난이었습니다, 폐하. 그렇게 당황해 하시면 제가 더욱 죄송스럽지 않습니까. 아무튼 나날이 실력이 진보하시니 폐하를 모시는 이들 중 하나로서, 자랑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부디 앞으로도 정진해 주십시오. 아, 그러고 보니 폐하께선 이미 정령을 다루시는 일에서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신 거였죠? 이거 분수도 모르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용서를…”
한쪽 눈을 찡긋하며 우아하게 허리를 숙이는 그의 모습에 나와 이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잠시 안보는 사이 이전보다 훨씬 밝아진 것 같았다.
그동안 친위기사들과 험난한 여정을 같이하며 결속력 또한 많이 다진 모양이었다. 앞으로의 성장이 더욱 기대가 되는 사람이랄까?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시던 중이셨습니까? 언뜻 들으니 상단에 대한 말씀이 오가시던데.”
“네. 곧 클리프 상단에 방문할 예정이거든요. 고생고생해서 검을 가져왔으니 인정을 받아와야죠.”
“아하! 그 불의 상급 정령이 봉인되었다는 정령검 말이군요!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여기 없는 겁니까? 듣자하니 정말 무서운 던전이었다는데…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의아하게 묻는 그에게 차마 말이 많아서 방에다 가둬놨다는 말은 전할 수 없었다. 원래는 수월했을 여행이 마신의 장난 때문에 고난에 빠졌다는 것 역시.
잠시 이사나와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은 나와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보검을 함부로 들고 다닐 수는 없죠. 전력을 전부 드러내서는 안되잖아요?”
“맞는 말씀입니다. 상단엔 언제쯤 가실 생각이십니까?”
“글쎄요. 모레 점심때 쯤?”
“흠. 그런데 여기 오기 전에 듣기론 엘님은 그때쯤 황성으로 출발하신다고 하던데요.”
“엥? 벌써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웬 출발이란 말인가! 황당한 표정을 하던 나는 곧 이것이 라피스 녀석의 소행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더더욱 기가 막힌 것은, 3천의 군사도 귀찮다고 물린 녀석이 달랑 나와 둘이서만 가기로 밀어붙였다는 것이었다.
“미쳤어! 아주 자기가 드래곤이라고 광고를 하고 다녀랏~! 후작이나 다른 사람들이 반대는 안 했어요?”
“아, 물론 심하게 반대하셨습니다만. 결국 엘님과 그 분 먼저 출발하시고, 나머지 군사들이 물자가 보급되는 대로 뒤따르는 형식으로 하기로 결정된 듯합니다. 그런데, 그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분이 드래곤이셨습니까?”
“그 녀석 얘기는 하지도 마세요. 나 참, 나랑 의논도 안하고 혼자서 뭐하는 짓이야? 무턱대고 바로 출발이라니…그럼 상단에 가는 일은 어떻게 하지?”
“괜찮아, 엘.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나 혼자서도 다녀올 수 있어.”
안심하라는 듯 미소 지은 이사나였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아직 이 근방에 도사리고 있는 블레스터의 주인을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 클모어에는 클리프 총수의 부탁을 받은 이사나가, 성검을 가지고 돌아왔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에, 웬만큼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상단을 방문하는 순간을 놓치려 할 리가 없었다. 평범한 자객도 아닌, 소드 마스터의 공격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으음.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냥 라피 녀석한테는 며칠만 더 기다렸다가 출발하자고 하던지, 아니면 애초의 계획대로 군사와 함께 가는 방향을…”
“굳이 그러실 필요 없으실 것 같은데요, 엘님. 혹, 이곳에 와있다는 카리브디스공작 때문이라면 저도 함께 동행하겠습니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곤 해도 상급의 정령들을 전부 감당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들고 있는 검이 바람의 상급 정령을 봉인한 블레스터라서…”
“이사나님도 정령검이 있으시잖습니까? 생각하시는 것처럼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두 개의 정령검은 각자의 주인에게 끼치는 역할이 확연하게 달랐다.
그냥 검 자체의 공격력만 높이는 파이어 버스터에 비해, 블레스터는 주인의 능력치를 몇 배나 이끌어 올리는 검인 것이다.
드래곤조차 가볍게 제압한다는 그가 몇 마리의 상급정령으로 힘겨워 할 거란 기대는 가지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사나나 페리스나 부득이하게 괜찮다고 만류하는 바람에 내가 남아서 동행한다는 계획은 일찌감치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괜찮겠어? 글쎄 그 카리브디스인지 카리스마인지 하는 남자는 보통 소드 마스터가 아닐 거래도.”
“너무 걱정 하지 마, 엘. 친위기사들의 실력도 몰라볼 정도로 좋아졌고, 시벨님도 있으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나도 언제까지나 엘에게 부담을 지울 수는 없잖아. 엘퀴네스의 첫 번째 인간 계약자로서, 역사에 부끄럽지 않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
“하하…거창하게 역사씩이나…”
그의 두 눈에 서린 각오의 빛을 읽은 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내가 언제까지고 녀석의 인생에 개입할 수 없는 이상 이제 슬슬 홀로서기를 도와줘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그것은 녀석의 인생에 커다란 교훈으로 남게 될 것이다. 부디 그것이 가장 처참한 형태로 다가오지 않기를 바랄뿐.
바로 그 순간, 저택 안에서 높은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꺄아아아악!!”
“!!”
“에? 무, 무슨 일이지? 2층인 것 같은데.”
“하녀의 비명이야. 설마 자객이?”
놀란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바로 방문을 열고 복도를 나섰다. 꽤나 큰 소리였기 때문에 우리 외의 다른 일행들도 2층을 향하고 있는 상태였다.
급히 계단을 올라갔을 땐 이미 비명을 듣고 찾아온 상당수의 무리가 한 방문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상태였다. 그곳이 데르온에게 배정된 손님방이라는 것을 알아본 나는 당황한 얼굴로 다가가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예요?”
“에? 아니…저어…그게…말입니다…”
“??”
무엇을 본 건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새하얗게 질려있는 모습이었다. 뒤따라온 이사나와 잠깐 어리둥절한 시선을 교환한 나는 굳게 닫혀있던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그러자 안에서부터 비릿한 혈향이 화악 밀려들어왔다.
“윽! 데, 데르온?”
설마 마왕이 알을 눈치 채고 없애러 온 걸까? 머릿속에서 드는 별별 생각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신이 그렇게 부탁한 일이었는데, 잠깐의 방심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왔다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해지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활짝 열려진 문안에서 드러나는 광경에 나는 멍한 표정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데르온…지금 뭘 하고 있는 거예요?”
당연히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그는 너무도 멀쩡한 모습으로 넓은 방의 한 가운데에 쭈그려 앉아 있는 상태였다.
바닥에는 온통 피 칠을 해놓은 듯한 붉은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고, 그 가운데에 황금색의 알이 고이 놓여져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그것도 모자라 그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왼손을 알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할 때마다 다량의 붉은 피가 알의 표면을 적셔갔다. 안에서 풍겨 나온 혈향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그 엽기적인 광경에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헉-하고 숨을 멈추며 저만치 멀리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데르온은 정작 그 행위에 너무 집중하고 있는 나머지, 누가 들어왔는지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아이고, 머리야…’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니, 하녀로 보이는 여자가 방 한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이 장면을 목격하고 처음 비명을 내질렀던 사람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작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사…살려 주세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목숨의 위협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대답했다.
“일단 진정하고 이리로 나올래요? 괜찮아요.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까. 여기 계신 분들도 모두 그만 돌아가세요. 지금 본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시고요.”
“하, 하지만 저 자는 마족이 아닙니까? 혼자서는 위험하실 텐데…”
“제가 데려온 일행이니 괜찮습니다. 이 분이 많이 놀라신 것 같은데 안정 좀 부탁드릴게요. 이사나 너도 그만 가봐, 여긴 나한테 맡기고.”
“응, 알았어. 대체 무슨 일일까? 별 일은 아니어야 할 텐데…”
후들거리는 하녀가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은 찝찝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온통 피로 범벅인 광경을 봤으니, 실제적인 사상자가 없었어도 불쾌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간 뒤 다른 목격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근 나는, 여전히 쭈그려 앉아 일련의 행동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 데르온에게 다가갔다. 자신의 피로 붉게 물들어 가는 알을 바라보는 눈이, 전에 없이 진지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데르온…지금 뭘 하는 거예요?”
“……”
“데르온!!! 지금 뭐하냐니까요?!!”
“우억!! 헉! 에, 엘퀴네스님? 여, 여긴 언제 오셨습니까?”
이제야 기척을 눈치 챘는지 놀란 표정을 한 데르온이 입을 멍하게 벌리며 물었다. 혹시나 머리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닌 가 의심하고 있던 나는 안도하며 방안에서 일어나고 있던 이 황당한 장면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은 또 뭐고, 알에다 피는 왜 쏟아요? 손바닥을 칼로 모질게도 긁어놨네. 아프지도 않아요?”
“아, 많이 놀라신 모양이군요. 전 괜찮습니다. 그래도 일단 되도록 주군께서 빨리 부화하셔야 겠다는 생각에…”
“부화라니? 카노스의 말로는 앞으로 한 달 정도는 걸릴 거라고 했잖아요?”
“네, 그래서 임의의 방법으로 부화시기를 앞당기려고 한 겁니다. 마족의 피에는 마력이 담겨 있거든요. 이런 식으로 피를 흡수시키면 육체의 완성이 더욱 빨라지죠.”
“하아…그래서 언제쯤 깨어나게 되는데요?”
내 질문에 데르온은 잠시 생각하는 듯 고민하는 표정이 되더니 곧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태어나게 될 겁니다. 오늘 하루 종일 피를 흡수시킨다면 바로 내일에도 가능할지 모르죠.”
“그 전에 데르온이 먼저 출혈과다로 죽는 건 아니고요?”
“뭐, 그럴지도 모릅니다만…아슬아슬한 순간에 엘퀴네스님이 치료해주시면 되잖습니까? 하하하하!”
“……”
이런 태평한 성격을 보았나!
잠깐 찌푸린 표정으로 혀를 쯧쯧 찬 나는 문득 스치는 생각에 피로 범벅이 된 알을 보며 물었다.
“부화하려면 꼭 마족의 마력만 필요한 거예요?”
“지금까지는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만. 아직 다른 종족의 기운은 흡수시켜 본적이 없어서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흐~음. 혹시 정령왕의 기운도 가능하려나?”
“예? 엘퀴네스님이 하시려고요?”
“명색이 저도 이 녀석의 대부인데, 데르온 혼자 고생시킬 순 없잖아요. 그런데 알은 갑자기 왜 부화시키려고 하는 건데요?”
한 달만 기다리면 알아서 탄생할 알을 굳이 이런 방법까지 사용해서 일찍 깨우려고 할 필요가 있을까? 의아한 내 표정을 본 데르온은 굳은 표정으로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
“전쟁이 시작되면 대공이 이쪽으로 오게 될 가능성이 있잖습니까? 그렇다면 그와 계약한 마왕역시 이쪽 상황에 관심을 가지게 될지 모릅니다. 태어나기 직전의 알은 마력의 발산이 높은데다 그것을 컨트롤하는 기운이 현저히 약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마족들에 눈에 뜨일 가능성이 높아서…”
“아~ 그래서 차라리 부화시키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하신 거군요. 그런 일이라면 미리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저도 어떻게든 도울 방법을 찾았을 텐데.”
“일단 제가 해둘 수 있는 부분까지는 해두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정령의 기운이 마족에게도 통할지. 차라리 드래곤 쪽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드래곤? 아~ 그럼 라피스를 불러오면 되겠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자 데르온은 당황하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설마 그렇게 쉽게 응수할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괘, 괜찮겠습니까? 그가 순순히 도와 줄 리는 없을 텐데…”
“해주라면 해줘야지 자기가 별 수 있어요? 그래도 우선은 제 기운이 통하는 지부터 먼저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라피스를 호출 하는 건 그 다음으로 하죠.”
“아하하…이거, 알고 보니 일행 중에서 가장 무서운 분은 엘님이셨군요. 주군은 벌써부터 든든한 대부를 두셔서 기쁘시겠습니다.”
어색하게 웃는 데르온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조심스럽게 피에 젖은 알을 들어올렸다. 데르온의 마력을 흡수한 탓인지 왠지 이전보다 좀 더 묵직해 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마력과는 성질이 많이 달랐기 때문일까?
내가 부어주는 기운은 몇 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흡수되지 못하고 그대로 공기 중에 흩어지기 일쑤였다. 그에 따라 긴장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데르온의 표정에도 점차 진한 실망감이 드러났다.
“역시 안 되는 군요.”
“음, 그러네요. 왜 안 돼지? 뭔가 해보려고 해도 그 전에 완전히 흩어져 버리니 어떻게 할 방도가 없네.”
그러자 갑자기 뒤 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안 되긴. 마족이란 종족 자체가 자연을 배덕하는 존재인데, 그와 정반대인 정령과 어울릴 수 없는 게 당연하잖아.”
“어? 라피스, 언제 왔어?”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니 삐딱한 표정의 라피스가 소리 소문도 없이 다가와 있었다. 문이 잠겨 있는데도 들어온걸 보면, 아마 공간이동의 마법을 사용한 것 같았다.
녀석은 주변에 가득한 혈흔과 비릿한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더니, 피로 범벅이 된 알을 내게서 빼앗다 시피 가져가며 데르온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마족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 했더니, 바로 이것 때문이었군. 부화시기를 앞당겨서 뭘 어쩌려고? 아무리 마족이라지만 태어나서 몇 달간은 전력에도 도움이 못 돼. 차라리 알로 있는 편이 간수하기가 더 쉬울 텐데?”
“그거야 그렇지만, 태어나기 직전이라 마력의 증폭이 너무 눈에 뜨입니다. 혹여나 마왕이 이 사실을 알아차렸다간…”
“흐음, 이래저래 골치 아픈 녀석이군. 뭐, 할 수 없지. 이런 일엔 원래 블랙 녀석들이 더 확실하지만, 나에게도 반은 블랙 드래곤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아마 네놈의 피보단 확실할거다.”
“네? 설마…도와주시려는 겁니까?”
“별 수 없잖아? 지금 상황에서 마족까지 상대하기는 귀찮으니까. 미리미리 그런 변수가 될 만한 일들은 막아놔야지.”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녀석은 데르온이 했던 것처럼 과감하게 자신의 왼쪽 손바닥을 찢었다. 촤악-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리고 나자, 다량의 피가 후두둑 알의 표면을 적셔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나마 본래의 황금빛을 드러내고 있던 알은 금세 녀석의 피로 새빨갛게 물들어, 언뜻 괴기스러운 느낌마저 주었다. 미처 알에 흡수되지 못한 핏방울은 그대로 뚝뚝 흘러내려 바닥에 그려져 있던 마법진에 의해 치익하고 타들어갔다.
‘윽…저러다 죽는 거 아니야?’
동맥을 끊은 것도 아닌데 피가 너무 많이 나오는 것 같아, 나는 점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흘끗 바라본 라피스의 얼굴은 창백하기는커녕, 고통을 느끼는 흔적조차 드러나 있지 않았다.
무심한 표정으로 붉게 물들어가는 알을 바라보던 녀석은 문득 질린 표정으로 보고 있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곤 피식-미소를 지었다.
“징그러우면 고개 돌리고 있지 그래? 그런 얼굴로 보지 말고.”
“아니, 나는 그저 신기해서…안 아파? 피가 좀…이 아니라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이 정도야 내 본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나저나 좀 아깝긴 하군. 내 금쪽같은 피가 이런 식으로 쓰이다니.”
“자청한 주제에 투덜거리지 마. 누군 도와주고 싶어도 못 도와주고 있구만. 대체 왜 나는 안 된다는 거야? 이래서는 대부로서의 체면이 서질 않잖아.”
“나참. 아까도 말했지만, 정령과 마족은 완전히 상극이야. 그런 성질끼리 융합될 리가 있겠냐? 그리고 원래 어느 종족도 정령왕의 기운을 흡수할 수 있는 존재는 없어. 겉으론 인간처럼 보여도 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의 근원이야. 육체를 가진 존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라피스의 따끔한 일침에 옆에 있던 데르온도 동조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는 말 같습니다. 실제로 정령왕은 옆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보통 인간의 자연 친화력을 평소의 몇 배까지 높여줄 정도니까요. 그럴 진데 직접적인 기운을 받아들이기는 힘들 겁니다.”
“흐음. 그런가. 어쨌든 결과만 좋으면 되니 제가 양보한 셈 치죠. 근데 피는 언제까지 부어줘야 하는 거예요?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글쎄요. 아마 적당히 신호가 올 거라 생각합니다만.”
“신호?”
데르온이 말한 신호가 온 것은 그로부터 약 2시간이 지나갔을 무렵이었다. 아무리 심한 출혈이라도 일정한 시간이 되면 적당히 멈추게 마련인데, 라피스는 무슨 조취를 해놓은 건지 피가 그때까지도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녀석의 손에 들린 붉은 알이 움찔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라피스는 데르온에게 알을 넘겨주곤 아직도 피가 그치지 않는 손을 불쑥 내 앞으로 내밀었다.
“치료해줘.”
“어? 다 끝난 거야?”
“몰라. 알 속에 있는 녀석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끝난 게 맞겠지. 아무튼 빨리 치료나 해. 이왕이면 체력회복도 같이 해주고.”
“드래곤이라서 끄덕 없다할 땐 언제고?”
“아무리 그래도 폴리모프한 상태에선 체력 소모가 심해. 줄창 피를 흘려놓고도 아무렇지 않으면 살아있는 생명이 아니지.”
그의 말마따나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끄덕도 없었던 얼굴이 지금은 조금 지쳐있는 듯 보였다. 자기 기분 내킬 때만 움직이긴 해도 역시 여러 면에서 도움이 되는 녀석이랄까.
이러고 보니 녀석이 자신을 자화자찬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아무리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드래곤이 대단한건 사실이니까.
내가 라피스의 상처를 치료하는 사이 알을 넘겨받은 데르온은 정성껏 표면을 덮은 검붉은 핏자국들을 닦아내었다. 잠시 후 다시 황금색을 되찾은 알은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미세한 균열자국이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와! 지금 금이 가 있는 거 맞죠? 아이가 태어나는 건가요?”
“하하, 당장은 아닙니다. 마족의 탄생은 신호 후에도 하루나 이틀의 시간을 소요하거든요. 그래도 확실히 드래곤의 피는 대단하군요. 그 짧은 시간에 벌써 부화에 임박하게 만들어 놓다니.”
“드래곤과 마족의 피는 많이 다른가요? 데르온도 4대 공작이니까 마력이 높을 것 같은데.”
“그렇긴 합니다만, 순수한 마력으로만 보자면 마법생물인 드래곤을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마족의 마력은 공격력에만 치중되지만 드래곤은 삶 전체가 마력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물론 라피스가 다른 드래곤들보다 더 특별하기도 하지만요.”
그렇게 말하며 뿌듯한 시선으로 알을 바라보는 데르온의 모습은, 이미 이전에 라피스에게 무참히 깨졌던 과거에 대해서는 훌훌 털어내고 있는 듯 보였다. 자신보다 실력이 월등히 높은 자와 싸우다 졌으니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알의 탄생에 직접적인 도움을 준 탓인지, 그는 라피스를 단순한 고마움을 넘어서 은인으로 여기게 된 듯 했다.
원래 남들로부터 추종받기 좋아하는 라피스가 그런 걸 거절할리 만무. 그날로부터 두 사람 사이에선 이전처럼 살벌하거나 딱딱한 기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도 나름대로 싸움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우정에 속하는 걸까?
사람사이의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엉뚱한 상황에서 바뀔 수 있는지 눈으로 경험하게 된 하루였다.
툭-툭-
“…으음?”
한참 단꿈에 젖어있던 나는 무언가가 내 뺨을 건드리는 느낌에 가늘게 눈을 떠 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곤 아직 캄캄하기만 한 방안과 높은 천장이 전부였다. 여기가 어디더라?
잠시 멍한 얼굴로 생각을 정리한 나는 곧 어제 알이 부화하는 현장을 목격한답시고 끝까지 구경하고 있다가 어느새 잠들어버렸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누워있는 바닥이 푹신한걸 보면 아마도 라피스나 데르온, 둘 중의 한명이 침대로 옮겨둔 모양이었다.
힐끗 둘러본 방안에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으려다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얼굴을 굳혔다.
‘아무도 없어? 그럼 방금 전에 날 깨운 건 뭐지?’
잠결이라 제대로 못 느낀 것일 수도 있지만, 분명 내 볼을 툭툭치던 느낌은 사람의 손이었다. 그런데 막상 일어나보니 아무도 없다니!! 이게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설마 귀신? 아하하하…’
그러자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시금 볼을 건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툭-툭- 내가 아프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두드리는 것을 보니 아마도 잠을 깨우는 것이 목적 인 듯 했다.
오만가지 생각으로 잠시 식은땀을 흘린 나는 완전히 눈을 뜨곤 슬그머니 감각이 느껴졌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어둠속에도 선명한 한 쌍의 붉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보였다.
“으악!!”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평소에도 이런 반사 신경이 있었나 싶을 정도의 빠른 동작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앞에 서 있던 붉은 눈동자의 주인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놀래?”
“왜 냐니…너, 너 누구야? 대체 이런 시각에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정체를 밝혀랏!”
목소리를 들어봐도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황당한 표정으로 다그치자 그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망설이는 듯하더니, 한참만에야 짤막하게 대답했다.
“……몰라.”
“엥?”
“이름, 몰라. 아직 대부가 안 지어 줬잖아?”
“…!!…”
그 한마디로 나는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 나를 향해 대부라고 부를 존재는 하나밖에 없지 않던가! 나는 설마 하는 심정이 되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혹시 알에서 태어난?”
끄덕끄덕
“맙소사! 대체 언제? 태어났으면 날 깨웠어야지!”
“…방금 깨웠는데.”
“아, 그, 그런가? 으음, 잠깐만 기다려봐, 잠깐만.”
설마 이렇게 빨리 알이 깨어날 거란 생각을 못했기에 내 행동은 저절로 서둘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어째서 방금 태어난 녀석이 저렇게 말을 잘한단 말이냐! 혹시 거짓말하고 있는 거 아니야?
파앗! 옆에 있던 호롱에 불을 밝히자 시야가 환하게 밝아져왔다. 그제 서야 제대로 보게 된 아이는 겉으로 보기에 12살 정도 된 듯한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얗다 못해 창백하기까지 한 피부와 붉은 입술, 선연할 정도로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발끝까지 내려오는 흑단같이 새까만 머리카락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던 나는 곧 소년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깨닫곤 살짝 얼굴을 굳혔다. 이렇게 큰 녀석이 정말로 알에서 나왔단 말인가?
그러나 내가 자신을 보든 말든 소년은 방금 전에 불이 켜진 호롱만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게 뭐야?”
“응? 저건 호롱인데. 지금처럼 어두울 때 불을 밝히기 위해 쓰는 거야. 아니, 그보다 너-정말 알에서 나온 거 맞아? 왜 이렇게 커?”
“방금 전에 이렇게 됐어.”
“방금? 그럼 아까 전에는 이렇지 않았단 말이야?”
내 질문에 소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손을 들어 자신의 허리부근을 가리켜 보였다.
“…이정도 쯤?”
“처음에 태어났을 때 그 정도였다고?”
“아니, 처음엔, 더, 작았어. 으음……이정도?”
“아, 알았어. 억지로 위치 안 짚어줘도 돼. 그럼 말을 하게 된 것은 언제야? 그것도 지금?”
끄덕끄덕
결국 태어나고 나서 잠시 동안은 멍하게 앉아있었다는 소리였다. 그러다 키가 커지고 말을 깨닫게 되면서 나를 깨우려고 다가 온 것이다. 걸을 수 있게 된 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리라.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꿋꿋하게 깨어있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지나버린 일을 돌릴 수도 없었기에 나는 그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으음. 마족들의 성장이 빠르다곤 들었지만 이건 예상 밖인데? 어쨌든 뭔가 입을 것부터 가져와야 겠다. 머리카락으로 가려지긴 하지만 그 상태로 다닐 수는 없으니까.”
“왜?”
“왜냐면…음, 다른 사람들은 다 옷을 입고 다니거든. 근데 너만 안 입으면 이상하잖아? 그치?”
“…?…다른 사람들은 왜 옷을 입어?”
“그, 글쎄. 벗고 있으면 민망해서가 아닐까? 원래 누구든 감추고 싶은 신체의 비밀이 있는 법이거든. 아하하하…”
횡설수설 떠벌리는 말이었지만 다행이도 소년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별로 관심이 없었던 건지, 아니면 나를 곤란하지 않게 하기위해서인지, 어느 쪽이든 대답하기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난 건 사실이라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저런 위주의 질문이 파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종래에는 인간의 처음 근원과 철학에 대해 논하게 되지 않던가!
“그럼 나 옷…”
“아, 그래. 적당히 입을 옷이 아마 어딘가 있을 거야. 그런데 혹시 여기 있던 다른 사람들은 못 봤어? 너랑 같은 마족이랑 붉은 머리카락의…”
마침 침대 맡에 손님을 위해 마련된 듯한 잠옷이 있기에, 나는 얼른 소년에게 입히며 물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신기하단 듯 바라보던 아이는 곧 한참만에야 천천히 대답했다.
“……내 부하랑 은인? 대부가 잠들고 나서 나갔는데.”
“쿨럭. 그런 호칭은 어디서 배운 거야?”
“…호칭?”
“나한테 대부라고 하는 거나, 라피스한테 은인이라고 한 것 말이야. 누구한테 배운 거 아니었어?”
“음……아까 전에?”
설마 내가 깨어나기 전에 다른 사람들과도 접촉했던 건가? 하지만 나는 금방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렇다면 소년을 지금까지 알몸으로 놔둘 리가 없지 않은가!
“혹시 알에 있을 때 들었다는 소리?”
“…응, 맞아.”
“어헉! 어디에서 어디까지 들었어? 기억하고 있는 건?”
“…왜?”
“아, 아니 그냥 궁금해서…. 알에서 들었다고 하니까 신기하잖아. 하하.”
그러자 소년은 붉은 눈동자를 천천히 깜빡이며 입을 다물었다. 아직 말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입으로 옮기는 게 어려운 듯 보였다. 그는 잠시 후 느릿한 어조로 대답했다.
“부화시기 앞당긴다……에서……정령왕은 안 된다? 음, 또……”
“으음. 무슨 소린지 대충 알 것 같아. 말 하느라 수고했어.”
“…응…”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정말로 힘들어서인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저러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말투가 느려서인지 소년은 활달하고 명랑한 얼굴과는 달리 전체적으로 굉장히 나른하고 몽환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미네처럼 표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것은 타고난 천성이라기 보단 아직 이 세상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 듯 했다.
‘쩝- 갓난아이가 태어날 줄 알았는데. 뭐, 그래도 상황이 상황이니 차라리 저 모습이 나은 건가?’
아마 저 모습도 한 달 후면 금방 20대의 청년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워낙 서로에 대한 견제가 치열한 종족인 만큼, 마족은 빨리 성장해야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있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유년기가 짧아지고, 대신 전투력이 가장 뛰어난 20대의 시기가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꽤 예쁘장하게 생긴 모습이라 금방금방 커버린 다는 사실이 아쉬웠지만, 한가한 육아가 불가능하니 만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나저나…다른 녀석들은 어딜 간 거지? 네가 태어난걸 알면 굉장히 기뻐할 텐데.”
“음…싸우러?…”
“아, 아니. 싸우진 않을 거야. 나름대로 화해를 했거든.”
“…왜? 죽여야 하잖아.”
“헉, 누, 누가 그런 소리를?”
“…부하가?”
아마도 이전에 했던 데르온의 태교-‘칼을 뽑으면 피를 봐라’에 대한 것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다투었다고 해서 꼭 죽일 필요는 없어. 원래 살다보면 사소한 것에서 틀어지는 일이 생기는 거야. 그때그때 다 죽인다면 이 세상에 남아나는 사람이 없을 걸? 특히나 같은 일행일 경우는 아무리 화가 나도 손속에 사정을 봐줘야 할 때가 있는 거야. 가능하다면 화해를 하는 편이 좋고.”
“…음…대부가 곤란해져?”
“그거야 그렇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원래 싸우는 본인보단 지켜보는 사람이 더 괴로운 법이거든.”
“…그럼 안 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아이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이 얼마 만에 보는 어린애다운 어린애 인가!! 진한 감동이 밀려들어와 가슴속이 뭉클해지는 심정이었다.
잠시 후 아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근데…대부…정령왕?”
“응. 엘퀴네스라고 해. 그냥 편하게 엘이라고 불러도 되고.”
“…나는?”
“음, 너는 마족이고 장차 마왕이 될 후계자지. 그러고 보니 이름이 없구나. 어떻게 하지? 여기서 그냥 내가 지어줄 수도 없고.”
내가 소년의 이름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굳게 닫혀있던 문이 갑자기 벌컥-하고 열리더니, 어둑어둑한 복도저편에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던 나는 그것이 곧 라피스임을 알고 반갑게 말했다.
“라피스! 어딜 갔다 온 거야?”
“아아, 귀찮게 회의를 한다 뭐다 해서 불러내더라고. 재미없어서 그냥 중간에 빠져나왔지. 근데, 그 녀석은 뭐냐?”
무심하게 대꾸하던 녀석의 시선은 내 앞에 서있던 마족의 아이에게 향해 있었다. 그러나 내가 대답해 주기도 전에 그는 알아서 돌아가는 정황을 파악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설마 벌써 깨어난 건가? 꽤 크군.”
“그치? 나도 놀랐다니까. 너희들이 나가고 나서 얼마 후에 부화한 모양이야. 옷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일단 잠옷은 입혀 뒀는데.”
“뭐, 그거야 데르온 녀석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면 되겠지. 어이, 꼬마. 나 누군지 알겠냐?”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며 묻는 말에 소년은 한참이나 빤히 라피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천천히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은인?…그리고 드래곤. 라피스. 음, 또…”
“흐음, 대충은 알고 있군. 그리고 또?”
“대부 애인?”
“…쿠, 쿨럭! 무, 무슨 소리야!!”
“푸하하하하!”
그 어이없는 대답에 라피스는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고 내 표정은 처참해졌다. 애인이라니!! 애인이라니이이~~~!! 난 아직 내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단 말이다!
그러자 소년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인이, 예전에, 내거라고?”
“윽! 그 말도 들었었어? 그건 이 녀석이 멋대로 나를 물건 취급 하는 말일 뿐이야. 실제론 단순한 계약관계일 뿐이라고. 다른 사람들한테 그런 말 하면 절대 안 돼! 알았지?"
“…응, 알았어.”
다행히 아무생각 없이 했던 말이었는지 소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너무 웃느라고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던 라피스가 웃음기를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에 드는 녀석이군. 근데 머리가 너무 치렁치렁 긴 거 아니야? 좀 다듬어야겠는데. 이름은 뭐라고 지었어?”
“에? 내가 지어야 해? 데르온은?”
“네가 대부잖아. 그럼 부하더러 모실 주군의 이름을 지으란 말이냐? 평소에 적당히 생각해 두던 이름 없어?”
“딱히 정해둔건 없는데…으음, 뭐라고 하지.”
아무래도 미래의 마왕이니만큼 아무 이름이나 붙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름이란 게 어디 그렇게 쉽게 정해지던 것이던가.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면서도 좀처럼 결정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했는지, 옆에서 구경하던 라피스가 툭하니 몇 가지 조언을 늘어놓았다.
“너무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어차피 이 녀석은 마왕이 될 녀석이라 자신의 이름으로 불릴 일도 거의 없다고. 정 안되겠으면 보석이나, 계절 같은 것으로 하는 건 어때?”
“보석이라니…음, 눈이 예쁜 붉은 색이니까 루비 같은 거? 하지만 그건 너무 여자 같잖아. 그렇다고 다른 색의 이름을 붙이기도 그렇고. 음…지금이 몇 월이지?”
“인간들의 표현으로 한다면 잠에서 깨어난 페어리가 기지개를 킬 때지. 12달로 보자면 4월쯤?”
“벌써 그렇게 됐나? 4월을 여기선 뭐라고 불러?”
“아스모델 이던가…요즘은 잘 사용하는 편이 아니니, 고어(古語)에 가깝지.”
“아스모델?”
“정확하게 말하면 ‘아스모델 아트디베히스트.’ 4월 달에 흐르는 바람의 이름이라고 해서 그렇게 불렸지. 왜? 꼬맹이 이름을 그걸로 하려고?”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는데, 의외로 발음이 마음에 들었다고나 할까. 내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라피스 역시 나쁘지 않다는 듯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4월의 바람은 차갑지도 않으면서 역동적이고 진취적이지. 꼬맹이에게 붙여줘도 괜찮을 것 같군.”
“그렇지? 넌 어때? 아스모델 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드니? 네가 불릴 이름이니까 싫으면 다른 걸로 할게.”
그러자 소년은 잠시 생각하듯 눈을 깜빡이더니 특유의 느릿한 어조로 물었다.
“…내 이름, 아스모델?”
“응. 정식 이름은 아스모델로 하고 그냥 편하게 부를 때는 아스라고 하자. 어때?”
“음…좋아. 마음에, 들어.”
“아, 다행이다. 그럼 앞으로 잘 지내보자, 아스.”
밝게 웃으며 손을 내밀자 소년- 아니, 아스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는 표정을 짓더니 곧 자신도 한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이윽고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입가에는 지금까지 보았던 것 중에서 가장 환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응…잘 부탁해, 대부.”
붉은 눈과 검은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마족, 아스모델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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