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소설] 정령왕 엘퀴네스 6권
제왕의 반려 (1)
"이게 대체 뭐하자는 짓이야!"
소녀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하며 앙칼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벌써 며칠째 이어진 추격전에 온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추욱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끊임없이 공격이 이어지는데, 정작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있는 건 오로지 메마른 사막과 그 위에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 뿐.
소녀는 막막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휘이잉.
그때 마침 푸석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얼굴을 헤집고 있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 바람에 가려져 있던 소녀의 얼굴이 살짝 드러났다.
얇게 구불거리는 금발머리카락에 희고 고운 얼굴.
비록 누더기와 다름없는 차림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소녀의 아름다움을 가리지 못했다.
긴 앞머리 사이에 언뜻 보이는 눈동자는 선명한 주황색.
애띈 얼굴이었지만 누구라도 보았다면 먼저 탄성부터 내지르고 볼 외모였다.
말 그대로 경국지색(傾國之色).
이대로 몇 년 만 지나면 그 외모하나로 사로잡지 못할 남자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 외모에 관심이 없는 건지,
고운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바람결에 헝클어진 머리를 짜증스럽게 쓸어 넘길 뿐이었다.
정확하는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귀찮아서 신경 쓰지 않는 것이었지만.
"정말이지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한눈에 보기에도 대부호나 귀족의 딸로 보이는 소녀가
정처 없이 사막 위를 떠돌아다니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사실 알폰프 제국 드레프 백작가의 서출로,
정령사의 자질을 인정받아 최근에 제국 황실로부터 부름을 받았었다.
보다 넓은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과, 멋진 삶을 기대했던 것도 잠시.
서출이라는 그녀의 신분을 만만히 보고 괴롭히기 시작한 사람들 때문에
2달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뛰쳐나고오 만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백작가의 옛 집으로 돌아갈수도 없는 일이라,
그녀는 할 수 없이 정령술이라도 열심히 연마(?)해서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땅의 정령을 다룰 수 있는 그녀에게 가장 최적의 환경은,
방해자가 다른 잡스러운(?)것 하나 없이
오로지 무한한 땅만 이어지는 이곳 바론 사막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갑자기 침입한 정체모를 적들에 의해
빛도 보지 못하고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힌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아악! 도대체 어떤 인간들이 쫒아다니고 있는거야!
공격을 하려면 모습이라도 드러내란 말이얏!"
청순한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과격한 목소리가 소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무리 인내심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장장 3일간을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쫓기다보면 신경이 예민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찌 보면 저들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상대방을 피로하게 만들어 쓰러지게 만들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적의 정체 따위, 너무 짐작 가는 부분이 많아서 꼽을래야 꼽을 수도 없는 게 현재의 처지.
소녀는 암울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야?
잘나신 1황자님의 엉덩이에 장렬한 손가락질(일명 똥침이라고 한다)를 하고 튀어서?
아니면 2황자님의 식사에 겨자가루를 섞어서?
아니면 1황녀님의 치마단을 실수인 척 밟아 뜯어놓아서?
재수 없어! 그런 것 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의 애교로 봐줄 수도 있는 거잖아!
황자들이라는 게 하나같이 쪼잔하기는!"
...구구절절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 유감이었지만 여하튼 소녀로서는 원망이 컸다.
올해 나이 14살.
한창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어리광 피워도 모자를 시기에
이 한낮 볼 것 없는 사막에 와서 수련하는 것도 억울한데,
그것도 모자라 추격자들까지 나타나니 이래가지고 인생이란 게 과연 살망한 것인가 싶었다.
하긴, 백작가의 저택에 있었을 때도 그녀는 이래저래 쓸모없는 천덕꾸러기였을 뿐이었지만.
만사 귀찮다는 얼굴을 한 소녀는 제풀에 지쳐 마른 돌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론 사막의 터줏대감이라는 악명 높은 지옥 땅 거미 떼에 둘러싸여있을 때에도
지금처럼 심신이 괴롭지는 않았다.
땅의 정령을 불러내어 상대를 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지금처럼 몸이 약해진 상태에선 정령을 소환해봤자 오히려 계약자인 자신만 힘들어질 뿐이다.
문든 손에 닿은 땅의 느낌이 축축하다는 것을 깨달은 소녀는
안색을 창백하게 굳히곤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정체모를 적에게 쫓기는 사이,
저도 모르게 죽음의 숲과 가까운 늪지대까지 이른 모양이었다.
이 상태로 계속가면 늪 옆에 진치고 있는 수 많은
마물들까지 상대해야 할 위험부담이 컸기에,
지금까지 자신을 쫓아온 정체모를 적과의 결판은
곧 죽어도 여기서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문제는....소녀에게는 지금 몸 하나 까딱할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었지만.
"정말 미치겠네. 나 설마 여기서 죽는 걸까? 하다못해 모슨 이유로 공격하닌 지만 알았으면..."
애초부터 대답을 기대하고 중얼거린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아무리 빽빽거리고 이유를 물어도 침묵하던 자들이었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소녀의 예상과는 달리,
추격자들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소녀의 앞에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소녀의 주위는 어느새 검은 두건으로 얼굴 전체를 감싼 5명의 낯선 남자들에게 둘러싸여져 있었다.
그들을 본 소녀의 눈이 동그랗게 벌어지자 그 중 리더로 보이는 듯한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인가. 어린 나이치곤 꽤나 애 먹인 상대로군.
반나절도 못가서 쓰러질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다,당신들 뭐야? 누구야?"
"아아, 그렇게 겁 먹을것 없어, 꼬마 아가씨.
우리들은 너에게 아무런 위해를 끼치지 않을 거니까 말이야.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 네가 얌전히 우리를 따라가는 것 뿐이다.
어때? 별로 어렵지 않지?"
소녀는 기가 막혔다. 지금까지 치사한 수로 사람의 몸을 몰아붙인게 누군데
이제와서 '위해를 끼치지 않겠다'의 태도란 말인가.
가장 중요한건 지금까지도 그들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소녀는 앙칼진 태도로 몸을 긴장시키며 입을 열였다.
"내가 궁금한 건 당신들이 누구냐는 거야. 사람을 데려가라면 우선 본인들의 정체부터 밝히라고."
"후후. 꽤나 당찬 아가씨로군. 좋아, 말해주지.
우리에게 너를 데려오라고 명령하신 분은 저 위대한 솔트레테 제국의 황제폐하님이시다.
자, 이정도면 설명이 충분하지? 알리사노 알 드레프양?
아니 전혀!!
남자로부터 이름이 불려진 소녀-알리사노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녀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자의 정체가 이 순간에 거론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솔트레테 제국...황제 폐하?"
"그렇다,꼬마 아가씨. 선택 받은것을 기뻐하라고.
너는 장차 이 대륙을 지배하실 그 분의 위명을 돋울 영광스러운 제물이 될 몸이니까."
'제...제물?'
알리사노의 얼굴은 금새 사색이 되었다.
재물이라니, 이 무슨 밑도 끝도 없는 소리란 말인가!
설마 진심인가 싶어 올려다봤지만, 두건에 가려져 있는 얼굴 따위,
감정을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알리사노는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입을 열였다.
"제물이라니? 내가 왜?
솔트레테의 황제가 타 제국의 소녀를 제물로 쓴다는 입장을 떳떳하게 밝혀도 되는거야?
난 안가! 절대 싫어! 황제인지 뭔지 모르지만, 남의 목숨을 함부로 할 자격은 없다고!"
"후훗, 그것은 아가씨 본인에게만 통하는 정의겠지.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니란 말씀.
가기 싫다고 해도 우리가 억지로 끌고 가면 그만이지. 안심해.
처음 말했던 대로 과격한 행동은 하지 않을 거니까.
바로 그것을 위해 지난 며칠간 아가씨가 탈진할 때까지 기다린 거고 말이야."
"!!"
농담이 아니다. 그 순간 알리사노는 진정으로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여전히 영문을 모르긴 마찬가지지만 한가지는 확실했다.
이대로 끌려가면 죽는 것이다.
두건을 쓴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본 그녀는 비명처럼 소리쳤다.
"멀든!!"
쿠구궁-
그녀의 부름에 우르르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따.
이대로 순순히 잡혀가느니,
차라리 마나를 완전히 다 써버리는 한이 있어도 정령을 소환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이런!"
완전히 지쳐버린 소녀가 정령을 불러낼 체력을 숨겨두고 있었다는 것을
미쳐 감지하지 못한 검은 두건의 남자 유카르테 대공의 기사들은,
흔들리는 땅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후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지진이 일어나듯 갈라지는
땅 덩어리 위에서 커다랗게 솟아 오르는 커다란 거인의모습을 볼 수 있었다.
땅의 중급 정령 멀든의 등장이었다.
정보길드에서 건네준 던전까지의 지름길은 말이 좋아 '길'이지 완전히 늪지대나 다름 없었다.
사방의 땅은 온통 질척질척 하고 나무엔 이끼가 잔뜩 끼어있었으며,
주변엔 전체적으로 뿌연 물안개가 퍼져있었다.
마치 TV속에서는 보던 밀림의 정글 같은 분위기랄까?
조금이라도 발을 잘 못 디뎠다간 그대로 늪에 빠져버릴 것 같아,
일행들의 걸음은 이제까지와는 비교됴 할 수 없을 만큼 조심스러워 졌다.
이래서야 차라리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돌아가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진지하게 들 정도다.
그러나 정작 나를 당황하게 만든 건 열악한 환경보다,
앞서 지도를 보며 걷고 있던 시벨리우스의 단 한마디였다.
"어라라. 어떡하지,엘. 여기서 길이 끊겼는데?"
"뭐라? 길이 끊겨?"
"응. 이 바로 앞부분부턴 죄다 물이야. 제대로 딛고 걸어갈 부분은 없는 것 같아.
이 제도 제대로 된것 맞아?"
곤란하다는듯이 중얼거리는 시벨의 말에 나 역시 당혹한 얼굴이 되서
지도를 다시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우리가 잘 못 온건 아니고,
그렇다고 정보길드에서 틀린 지도를 제공할리도 없을테니 이것은 아마도...
"이런, 비가 내리는 바람에 물의 수량이 불어났군."
"비?"
"응. 타이밍 좋게도 우리 오기 바로 직전에 폭우라도 쏟아진 모양이야.
지금 흐르는 강은 일시적으로 늘어난 빗물이란 소리지.
원래 열대지방일수록 비가 단기간 동안 한꺼번에 내리는 경향이 있거든.
아마도 지금이 이 지방의 우기(雨氣)인 것 같아."
요즘 들어 부쩍 감을 잘 잡게 된 내가 아무 망설임 없이 설명하자
이사나와 시벨의 표정이 잔뜩 찌푸려졌다.
지금까지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할 생각에 앞길이 막막해 진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나는 살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기는 그렇잖아? 방법이라면 여러가지가 있으니까."
"무슨 방법? 내가 본체로 변신해서 너희들을 옮기는 건 무리야.
우기라면 비가 언제 또 내릴지 모른다는건데, 자칫 중간에 내리기라도 하면 낭패거든.
깃털이 젖으면 날지 못하게 되니까."
"아, 그래? 꽤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안되겠네.
비를 안 내리게 할 수는 있지만 더 간단하게 해결 할 수 있는 일을
일부러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면 이렇게 해 볼까?
물 위를 걷는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 본적 있어?"
"...?"
내 질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녀석들을 보며
나는 슬슬 기운을 집중시켜 늪지대를 이루는 물의 이동을 붙잡았다.
사실 정령왕인 나로선 물의 표면을 일시적으로 딱딱하게 만드는 것 쯤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겉보기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강물을 향해 걸어보라고
하자 이사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결국 시벨리우스가 가장먼저 걸음을 내딛게 되었는데,
분명 물 이에 닿았음에도 밑으로 빠지지 않자 곧 신기한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마치 단단한 얼음 위에 올라선 기분인걸? 엘, 너 정말 정령왕이 된 거 맞구나."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잖아. 어때? 걸을 만 해? 이사나도 걱정말고 가봐. 빠지지 않을 테니까."
"으응.."
민망한지 뻘쭘한 표정을 짓던 녀석은 곧 시벨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불안해하는듯 하더니, 어느새 적응이 되었는지 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광장해. 지금까지 걷던 질척한 흙바닥보다 더 단단한 느낌이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대운 대리석 위에 올라서 있는 것 같아."
"칭찬 감사합니다. 자아, 그럼 가볼까?"
보너스(?)로 텁텁하게 숨을 채우던 습기까지 제가하고 나자,
이사나와 세벨리우는 안색이 훨씬 가뿐해졌다.
지금까지 내색하지 않았지만 늪지대를 이동하는 것이 두 사람(?)에게
상당히 힘든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 중 이사나는 표 안나게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항의를 늘어놓기도 했다.
"너무해, 엘. 이런게 가능했으면 진작 좀 해주지. 여긴 너무 덥고 습해서 답답했단 말이야."
"미안. 깜빡 잊고 있었어. 내가 불편한 걸 못 느끼다 보니..아하하."
만약 내가 이사나의 입장이었으면 불 같이 화를 내며 목을 쥐고 흔들어 대지 않았을까.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린 이사나는 부럽다는 시선을 보내왔을 뿐이었다.
(시벨의 경우는 '엘'이 하는 일이라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는 주의니 신경 쓰지 말기로 하자.)
이보다 더 편한 일행이 어디 있겠는가!
새삼 동료 복이 좋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주위를 살피고 있던 시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기만 넘으면 바로 던전이라는 거지?
마른 흙냄새가 느껴지는데, 근처에 사막이라도 있는 건가?"
"응, 맞아. 바론 던전은 죽음의 숲과 바론 사막의 중간지점에 존재한다고 들었거든.
그런데 흙냄새가 느껴질 정도면, 이 늪지대가 사막과 가까운 건가?"
"아니, 그건 장담을 못하겠는데.
흙냄새와 거의 비슷한 수치로 마물 특유의 퀴퀴한 냄새도 풍기니까 말이야.
후각이 발달된 종족에겐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곳이군."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중얼거리는 시벨은 확실히 지금 이 상황이 즐거워 보이지 않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투덜거리지 않는다는 점이 라피스 녀석과는 다른 점이랄까.
이래저래 동료로서는 손색이 없는 녀석이다.
가끔 나를 두고 이전의'엘'과 혼동하는 것만 빼면.
"그러고 보니 엘…예전의 너도 자꾸 이런 곳 돌아다니면서 뭔가를 찾았는데 말이야.
그건 어떻게 됐어?"
"글쎄. 그렇게 말해도 기억나는 게 없는걸."
"흠. 꽤 중요한 것 같기에 그것만큼은 기억할 줄 알았는데 역시 무리인가?
하지만 그때 굉장히 절박해 보였어.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했었는데 그게 뭐였는진 정확히 기억 안 나네.
사람이었는지, 물건이었는지 조차도."
"그렇게 절박한 것이었으면 찾았겠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 생각보다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거고."
"흐음, 그런가?"
내 말에 시벨은 어느 정도 납득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이런 대화패턴에 익숙해져서,
내가 겪지 않은 일임에도 자연스럽게 그랬다는 듯이 대답할 지경에 까지 오르고 있는 상태였다.
아니라고 말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으니,
정신을 피로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내 나름대로의 대처 방식이었달까.
나중에 제정신을 찾은 녀석이 이때 일을 빌미로 따지고 들면 나 역시 그만큼 항의해줄 작정이다.
처음부터 일방적인 오해로 나를 괴롭게 한건 네 쪽이라고!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숲 저편이 상당히 소란스럽다는 느낌을 받은 나는 몸을 멈칫 세우고 말았다.
희미한 기운이었지만 들썩이는 땅의 움직임에 정령의 기척이 스며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연계의 정령이 아닌, 인간에게 소환되어 능력을 행사하고 있는 기운이었다.
'이런 곳에 웬 정령이?'
평소라면 무심코 넘겼을 정도로 미약한 느낌이었지만,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갑작스런 정령의 기운에 신경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자,
앞서가고 있던 시벨과 이사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왜 그래, 엘? 무슨 일이야?"
"으음. 뭔가 저쪽에서 소란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 같아서 말이야.
싸움인 것 같기도 하고, 좀 신경 쓰이는 걸?"
"싸움? 아아. 내 귀에도 확실히 그렇군."
"어디? 나는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이사나가 연신 귀를 기울이는 것을 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대충 멀리 떨어진 지점이라고만 인식할 뿐, 정확한 방향을 잡을 수 없었던 탓이다.
그런 나에 비해 시벨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소란스럽다곤 해도 적어도 여기서 반나절은 더 가야 하는 거리야.
나와 엘의 청각이 유난히 좋은 탓이니까, 보통은 들리지 않는 게 정상이지."
"헉. 반나절? 그렇게 먼 거리에서 벌어지는 소리도 감지한단 말이에요?"
"별로 놀랄 건 없어. 우리 유니콘 종족은 마음만 먹으면
나흘이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소리도 들을 수 있거든. 응? 엘? 뭐하는 거야?"
"아아. 물의 기억을 읽어볼까 하고. 대체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말이야."
그냥 싸움도 아니고 정령이 개입된 것이니 정령왕이 된 입장으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까지 이어지는 수분의 감각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근처에서 싸움을 관전(?)중인
여러 마리의 나이아스들과 교감할 수 있었다.
-한 여자아이를 상대로 저렇게 많은 인간들이 공격을!
-여자아이가 위험해. 저러다 죽겠어.
-아니, 죽이진 않을 거야. 납치하는 게 목적인 것 같은걸?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멀든님의 얼굴이 무서워.
-하지만 곧 역소환 되실 것 같은데? 여자아이의 힘이 다 떨어진 것 같아.
-지금의 상태론 아무리 멀든님이라 해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여전히 재잘거리기에 정신이 없는 나이아스들은 하나같이
한 존재에 대한 걱정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들이 내뱉는 이름이 낯설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곧 묘한 표정으로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 싸우고 있는 사람이 정령사 인 것 같아.
그것도 땅의 중급인 멀든을 다루는 모양이야."
"그럼 중급 정령사라는 말이야? 꽤 재미있겠군."
"글쎄. 상황을 보니 그리 유리한 것 같지는 않은걸. 마나가 거의 다 소모된 상태인가 봐.
나이아스들 말로는 아직 어린 소녀라는데, 어째서 이런 곳에서…"
"뭐? 소녀?"
"으응?"
순간 나는 이상하리만치 광채가 돌기 시작하는 시벨의 눈동자에 몸을 움찔하고 말았다.
녀석은 마치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구하러 가자, 엘!"
"헉…제정신이야? 걸어가면 바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반나절이라고, 반나절."
"그런 것 쯤 내가 본체로 변신해서 날아가면 1시간이면 충분해.
그 동안만 잠깐 비 안 내리게 하면 되잖아? 정령사라잖아, 정령사. 다치면 어떡해?"
"어떡하냐니, 그거야 그 쪽 사정…뭐야, 시벨. 혹시 여자애라는 말 때문이야?"
"응? 아, 아니, 그게…"
당황한 얼굴로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는 것을 보니 대충 내 짐작이 맞는 모양이다.
여자한텐 사죽을 못 쓰는 종족이라더니, 결국 이런 식으로 그 꼬리가 드러나고 만 것이다.
기가 막힌 표정으로 바라보자 녀석은 손사레를 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 시작했다.
"내, 내가 그 앨 만나서 뭘 어쩌겠다는 뜻은 아니야.
단지 우리 종족 자체가 여자에 대해선 무조건 호의적이라 그래.
어린 여자애가 어려움에 처했다는데 무시할 순 없잖아."
"하지만 만약 그 여자애 쪽이 잘못한 거였다면?"
"그렇다 해도 일단 목숨은 구해줘야… 그렇게 보지 마, 엘.
지난 시절의 버릇은 이미 다 고쳤다고.
지금은 정말 순수하게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뿐이란 말이야."
지난 시절의 버~릇?
아무래도 녀석은 한창시절 잘 나가는 바람둥이로 이름을 떨쳤던 모양이다.
저렇게 민망해 하며 변명 비스 무리한 것을 털어놓는 것을 보면.
뭐, 유니콘의 본능 자체가 그렇다는 걸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멀쩡한 일행을 팽개치고 유희의 로맨스를 즐기겠다며
홀로 떠난 라피스 같은 자식도 있는데 말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옆에 있던 이사나를 돌아보았다.
"어떡할래, 이사나? 너도 시벨리우스의 의견에 찬성이야?"
"글쎄.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알고 있는데 모른 척 하는 건 도리가 아니지 않을까?"
"그럼 할 수 없지. 시벨리우스! 아까 네가 말했던 대로 유니콘으로 변해서 빨리 다녀오자고.
시간이 더 지체됐다간 물 위에서 자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아, 응!"
파앗-
눈에 띄게 밝은 표정으로 대답한 녀석은 금세 날개달린 본체의 모습으로 돌아오더니,
곧 우리들을 향해 등에 타도록 재촉했다.
그리곤 우리가 등에 앉는 걸 확인하자마자 날개를 펄럭이며
곧바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자! 그럼 간다! 둘 다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
"우왓- 잠깐!! 시벨 좀 천천히…"
그러나 시벨리우스의 몸은 이미 전 속력으로 질주하는 상태였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구름들과 쐐애애액- 터지는 무서운 바람소리.
반나절을 한시간만에 주파한다는 녀석의 말이 허언이 아님이
증명되는 순간이었지만 나로선 절대 기뻐할 수 없었다.
녀석의 위에 안장도 고삐도 없던 탓에,
등에 탄 우리는 갈기털 하나만 붙잡은 채 필사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상 최악의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었다.
나와 이사나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밝은 금발머리를 가진 소녀 한명이 6명의 남자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마나를 무리하게 끌어다 쓴 탓인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는데,
짐작보다 어려보이는 모습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중급 정령사를 다룰 줄 아는 정령사라면 아무리 어려도 15세 이후는 될 거라 생각했는데,
저 소녀는 겉보기에 결코 12세를 넘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사나 역시 놀란 표정인건 마찬가지였지만, 녀석이 놀란 이유는 나와는 전혀 다른 것 이었다
"검은 복면? 설마 숙부의 기사?"
"응? 무슨 소리야?"
"소녀를 공격하고 있는 남자들 말이야.
입고 있는 옷과 복면이 나를 추격하는 어둠의 기사들과 같아.
내 짐작이 맞다면 저 녀석들은 숙부의 기사들이야."
"엥?"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이런 낯선 타국의 오지.
그것도 전혀 뜬금없는 상황에서 나타난 게 대공의 기사들이라니?
나는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물었다.
"정말 대공의 기사들이 맞아?"
"틀림없어. 나를 쫓던 추격대와 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는 걸."
"그럼 혹시 저 여자애도 누군지 알아?"
"아니, 전혀. 오늘 처음 보는 아이야."
"정말? 뭔가 대공과 연관 있는 애인 건 아니고?"
"글쎄…"
어이없기는 이사나도 마찬가지인 듯, 녀석은 그들이 왜 우리가 아닌,
전혀 상관없는 여자애를 공격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시벨리우스는 천천히 땅을 향해 내려오기 시작했고,
나는 조금 더 자세히 소녀가 처한 상황을 관찰 할 수 있었다.
소녀가 불러내었다는 땅의 중급 정령 멀든은 우리가 이곳에 오는 사이 이미 역소환 되었는지,
지금은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주위엔 몇 마리의 놈들이 흙을 이용하여 높은 방어벽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상대편 남자들의 매서운 공격을 보건데, 얼마지 않아 무너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대단한걸. 계약된 정령의 역소환은 어른한테도 상당히 큰 충격일 텐데.
그걸 견디는 중에 또 다른 하급정령들을 소환해 방어진을 형성하다니… 정말 어린애 맞아?'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와중에도 전투에 철저하게 임하는 걸 보니,
어리다고 절대 얕볼 수 없는 소녀였다. 그래서인지 상대편 남자들의 얼굴에도
사뭇 비장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그중 일행의 리더인 듯한 남자가 입을 비죽이며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한 꼬마로군. 방심했다가 큰 코 다칠 뻔 했어.
이런 와중에도 몸을 보호할 힘이 남아있다니, 과연 폐하께서 선택한 아이 답구나."
"헉, 헉-"
소녀는 말 할 기운도 잃었는지 큰 눈을 힘겹게 깜빡일 뿐이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이제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우리로서도 너를 상처 입히고 싶진 않으니까 말이야.
소중한 제물이 다치면 곤란하지 않겠어?"
'제물?'
피식 웃는 남자의 미소가 어쩐지 잔인해 보인다는 인상을 받은 순간,
나는 그의 말에서 어렵지 않게 최근에 들었던 대공에 대한 이야기 한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맞아! 마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잡아간다고 했었지!'
맙소사.
그럼 정말 저 녀석들이 대공의 기사란 말이야?
자기 나라 애들로도 성이 안차서 타국의 소녀까지 노리는?
나는 기겁을 하며 소녀와 남자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소녀는 이제 울 듯한 얼굴로 쉰 목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왜 하필 나야! 왜 나를 데려가겠다는 거야! 누가 제물 따위 하고 싶다고 했어?"
(3)
"후후후. 타고난 너의 운명을 탓하려무나. 우리는 그저 별의 계시를 받았을 뿐이니 말이다."
'별의 계시?'
저건 또 무슨 소리일까?
설마 이번에도 마신의 신탁이 내린 건가 싶어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의문에 답한 것은, 나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이사나였다.
"별의 계시란 밤하늘의 별을 읽고 예언을 하는 점술가의 말을 뜻해.
주로 사람의 운명을 점하여 그 궤도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지."
"음? 그럼 저 소녀가 제물이 되어 죽을 운명이기 때문에 잡아간다는 소리야?"
[꼭 그렇진 않아, 엘. 제물이 될 운명이라기 보단,
제물이'되면' 좋을 운명이란 게 있는 셈이니까.]
"제물이 되면 좋을…?"
[응. 그만큼 저 소녀의 운명이 고귀하다는 소리지. 귀한 선물일수록 돌아올 이득이 큰 셈이잖아?]
결국 소녀를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바라는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였다.
대공이 아이들을 잡아다 제물을 바친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런 행사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보지 못했기에
나는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신에게 바치는 거라고 했었지, 아마? 대공은 대체 뭘 위해서 제물을 바치는 걸까?"
"글쎄. 마신전의 제사란 언제나 불규칙 한 것이니 알 수 없지.
숙부는 섭정왕이 되기 전부터 제사를 지내왔었거든.
설마 인간을 잡아다 한다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말이야."
"섭정왕이 되기 전부터? 그럼 언제라는 소리야?"
"숙부가 신관장으로 추대될 당시였으니까…
내가 태어나기도 전일거야. 아마도 25년 전? 아, 새해가 지났으니 올해로 26년 일 거야."
"!"
어긋난 수레바퀴가 드디어 맞물린 듯한 느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어지는 공통된 시간에 나는 멍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사라진 시기와 일치한다는 소리?"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엘뤼엔의 나이는 올해로 26세.
나에게 정령왕의 자리를 물려준 후 곧바로 신이 되었으니,
만약 내가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정령왕이 되었다면 그와 같은 나이였을 것이다.
(그의 전 엘퀴네스 시절의 나이를 제외한다면.)
그러나 26년 전 그날, 명계의 실수로 잠깐 다른 차원으로 건너간 바람에
나는 이제야 태어난 셈이 되었고, 그 사이의 공백동안 대륙은 가뭄에 물들어 있었다.
26년 전에 신관장으로 추대된 유카르테 대공.
그리고 26년 전에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된 나.
이것이 정말 우연인 것뿐일까?
"음…이거 아무래도 따로 조사해 봐야겠는데?"
"조사라니?"
"아니, 아무것도. 지금은 무엇도 확실하지 않으니 나중에 알려줄게, 이사나.
일단은 저 소녀부터 구하는 게 시급한 것 같아."
아닌 게 아니라 소녀의 상태는 상당히 심각했다.
더 이상은 한계였는지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하급의 놈들까지 전부 역소환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미 한번의 역소환으로 몸에 무리가 간 상태에서 다시 충격이 가해지자,
소녀는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풀썩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의식을 잃어가는 듯 탁해진 눈동자에선 구슬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공의 기사들은 낄낄거리고 웃으며 소녀를 붙잡고 있을 뿐이었지만.
"정말 골치 아픈 년이로군. 대공전하께 선택된 것을 기뻐할 것이지 감히 반항이나 하고 말이야."
"어이어이. 대공전하라니, 이제 황제폐하라고 불러야지."
"아차, 그렇지. 후후후. 솔트레테의 위대한 황제폐하께 영광 있으라! 크하하하!"
바로 그 순간, 나는 소녀의 달싹이는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트, 트로웰…"
"!!!"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분명 그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이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트로웰이라니, 설마 저 소녀는 그와 만난 적이 있었던 걸까?
서둘러 살펴본 소녀의 이마 어디에도 정령왕의 인장은 발견할 수 없었지만,
나는 왠지 모를 예감에 서둘러 시벨리우스를 재촉했다.
"시벨! 고도를 완전히 낮춰줘. 내려가서 저 아이를 구해야겠어."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엘. 그나저나 어떻게 할까? 이대로 바로 날려버릴까?]
"응? 어떻게?"
[전에도 한번 봤잖아. 이마에 돋아난 뿔은 우리 유니콘 일족이 힘을 발현하는 장소야.
이정도 거리라면 곧바로 마법을 난사할 수 있는데.]
하지만 그 말을 제지한 것은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이사나였다.
어쩐지 잔뜩 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녀석은 대공의 기사들을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이 일 나한테 전부 맡겨줄 수 없을까?"
"응?"
[그게 무슨 소리냐, 이사나? 저 녀석들을 너 혼자 처치하겠다고?]
"네, 그렇게 하게 해줘요, 시벨님. 부탁해, 엘."
"아니. 그건 어렵지 않지만…갑자기 왜?"
지금까지 이사나는 한번도 스스로 나서서 전투에 임한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뒤에서 보조해주는 것에 그쳤지, 본인이 주도한 전쟁에는 관심이 없었던 탓이다.
그랬던 이사나가 지금은 자청해서 맡겨달라는 말을 하니,
나는 그야말로 어리둥절한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녀석의 한 마디에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솔트레테의 황제는 나야."
"…!…"
"적통 황제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황제로 추대하는 것은 명백한 반역 행위. 그것을 지금 내 눈으로 목격한 이상, 절대로 그냥 묵인할 수 없어. 나를 위해 싸워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내 자리는 내가 지키고 말겠어."
새파란 분노를 머금고 있는 눈동자.
지금까지 이사나에게서 이런 눈빛을 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그제 서야 녀석이 단순한 내 또래가 아닌, 한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황제라는 것을 실감했다.
어쩐지 훌쩍 자라버린 자식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에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좋아, 이사나. 녀석들은 너에게 맡길게.
우리는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멋지게 소녀를 구해서 돌아오라고."
[흠…엘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나도 반대할 이유가 없지. 잘 다녀와라.
하지만 위험하다 싶으면 끼어들 테니까 각오하라고.]
"후후, 고마워요 모두.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저 정도쯤은 문제없으니까요."
확실히 요 근래 이사나의 정령술은 놀랄 만큼 발전하여,
이제 내 도움이 없이도 몇 마리의 시큐엘들을 거뜬히 불러낼 수 있을 수준이었다.
그래서인지 대답을 하는 그의 눈빛은 이제까지완 다르게 자신에 가득 차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럼 일단 조금만 기다려. 녀석들 근처에 착지를 해야…]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시벨님. 저 혼자 다녀올 수 있어요.
두 분은 제가 하는 걸 잘 지켜봐 주세요."
그렇게 대답한 이사나는 냉큼 시큐엘을 소환하여 그 등을 타고 아래로 쏜살같이 내려섰다.
쐐애액-
바람을 가르는 맹렬한 소리가 귓가를 쟁쟁히 울렸다.
그때까지도 나는 상황파악이 덜 된 눈으로 멍하니 녀석의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대체 이사나가 언제부터 저렇게 행동력이 빨랐지?"
[쿡쿡쿡. 원래 남자들은 미인 앞에선 강해지는 법이지.]
"흐으음. 결국 황제의 책임이니 뭐니 해도, 기사도 정신이 발휘된 것?"
[완전히 부정할 순 없을 걸? 뭐라 해도 녀석은 벌써 17살이잖아.
인간들 나이론 한창 좋을 시기지. 더구나 저 소녀, 인간치곤 꽤나 예쁘장하기도 하고.]
"아, 그런가?"
그 동안 하도 미형의 인간들만 봐와서 그런지 이제 어지간한 외모에는 둔감해져버린 나는,
그제서야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기절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탐스러운 금발 머리카락과 귀염성 있는 얼굴이,
그 나이치고 흔치않은 아름다움의 소유자 인 듯싶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가장먼저 비통한 한숨부터 흘리고 말았다.
"'예쁘다'라는 것을 순수한 감동이 아닌, 객관적인 시선으로 판단할 날이 올 줄이야…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엘?]
"아니, 별거 아니야. 그저 눈이 너무 높아져 버린 것이 슬플 뿐."
[……?]
그래서 그 뒤로 어떻게 되었냐고?
뻔하지 않은가. 원래 이런류의 스토리에선 악당과 공주님을 구하기 위해
등장한 기사의 대화란 늘 거기서 거기인 법이다.
그래도 굳이 모르겠다는 이를 위해 설명하자면 대충 이렇다.
이사나는 초반 멋지게 시큐엘을 타고 내려가 소녀를
어깨에 매고 돌아서는 남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멈춰라! 그 소녀를 내려놓지 않으면 내 칼이 너희를 응징할 것이다!"
제법 사납게 소리친 음성에 대공의 기사들은 어깨를 움찔하며 집어넣었던 검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들 모두는 낭패한 시선으로 이사나와 그가 타고 있던 시큐엘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와의 전투 이후 사라졌던 긴장감이 그들 사이로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쳇! 이런 오지에 또 다른 녀석이! 게다가 저건 또 뭐지? 투명한 몸체를 보니…설마 정령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다행히 소년 하나뿐 다른 일행은 없어 보이는 군요. 어떻게 할까요, 대장?"
"목격자는 사살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말라는 폐하의 지시를 기억하십시오."
"네 말이 옳다. 타국에서의 사살은 내키지 않지만 계획에 차질을 빚을 순 없지.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라, 꼬마야. 이건 순전히 끼어들 순간을 잘 못 택한 네 탓이니 말이다."
복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남자의 눈은 분명 야비한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만만한 태도와는 다르게,
안타깝게도 이사나의 옆에 존재한 정령의 존재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물이나 바람의 하급 정령쯤일 거라고 여기고 있는 모양이다.
그 모습에 나와 시벨은 혀를 끌끌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상대편이 이쪽의 본 전력을 눈치 채지 못하는 상황이라면야,
이 게임은 시작도 하기 전에 미리 우승을 거머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끝났군."
[…끝났네. 인간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어리석군.
어째서 정령인 줄 알면서도 저렇게 무방비한 모습인거지?]
"첫째. 이사나가 어리고 여리여리(?)해서 우습게 보였다.
둘째. 쪽수를 믿고 기고만장해 있다.
셋째. 중급 정령을 다루는 소녀의 실력이 생각보다 형편없어서 모든 정령사가 만만해 보였다.
…뭐 이 정도가 아닐까?"
[흐음. 하긴, 정령사치곤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 같긴 하군.
중급 정령도 꽤 대단하다고 알고 있는데 말이야. 저 놈들의 실력이 그만큼 대단한건가?]
의아한 얼굴로 물어오는 시벨리우스의 말에 나는 냉큼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닐 거야.
일단 소녀가 너무 지쳐있었다는 것과,
나이가 어려서 중급 정령의 컨트롤이 힘든 상태라는 것이 문제였겠지.
아무튼 대단해. 저 나이에 벌써 땅의 중급 정령과 계약하다니…
이대로라면 몇 년 안에 트로웰의 소환도 가능할지도…"
[호오~ 그 정도야?]
"응. 그런데 이상해.
아까 기절하기 전에 분명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그게 내 귀에는 트로웰을 부르는 소리로 들렸거든.
설마 이미 알고 있던 사이일까?"
[그럴 리가. 그냥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정령왕을 소환해 보려던 거겠지.
무엇보다 땅의 정령왕이라면 그 시커먼 꼬마 녀석을 말하는 거 아니야?
그 녀석, 인간에겐 별로 좋은 감정이 없어 보이던데,
뭐가 예쁘다고 인간여자애 따위와 친분을 맺어뒀겠어?]
"에? 시벨리우스, 트로웰을 알아?"
무언가 상당히 친근한 듯한 어조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트로웰의 외모를 보고도 단순히'시꺼먼 꼬마'정도로 기억하고 있는
그의 기억력에 경의를 표하면서 말이다.
그러자 시벨리우스는 당연하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친하진 않지만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었지.
그러고 보니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 가 몰라?
당시만 해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데다 성격이 잔뜩 꼬인 녀석이었거든.
유일하게 마음 터놓고 지내는 건 바람의 정령왕인 미네르바 정도일까?
엘퀴네스와 이프리트와는 아주 상종을 안 하고 지내기로 유명했어.]
"…농담이겠지."
[아니야, 정말이야.
게다가 인간들을 어찌나 싫어하는지,
유희를 나가서도 인간들이랑 어울리지 않는 유일한 정령이었다고.
너한테도 대놓고 싫은 티 냈던 거 기억 안나? 그때 너 굉장히 많이 서운해 했었는데.]
기억 날 리가 없다.
녀석이 말하고 기억하는 '엘'은 내가 아니었으니까.
내가 알고 있는 트로웰은 대책 없이 친절한 성격에,
종족을 불문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상냥한 녀석이었다.
때문에 나로선 도무지 그의 말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네 말을 들으면 어쩐지 미묘하게 어긋난 부분이 많단 말씀이야?
그'엘'이란 녀석도 그렇고, 전대 엘퀴네스 이야기도 그렇고."
[하지만 사실인걸. 유니콘의 기억력은 드래곤에 비견된다고. 절대 착각일리 없어.]
시벨리우스는 단호한 얼굴로 나의 수상하다는 시선을 떨쳐버렸다.
뭐 어차피 의심해봤자 증거가 없으니 소용없겠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조만간 트로웰이나 엘뤼엔에게 연락을 해봐야겠는 걸.'
그것이 바로 점점 미궁으로 빠져드는 녀석과의 대화에서 내가 생각해낸 유일한 해결방법이었다.
초반 예상했던 대로, 기사들은 이사나가 어리다는 사실을 얕잡아
처음부터 전력투구를 다하지 않는 바람에 큰 낭패를 보고 말았다.
그들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도도한 물의 정령에 의해 들고 있던 검들이 산산조각 난 후였다.
쨍그랑-파삭!
강철도 유리처럼 잘라내 버리는 시큐엘의 이빨에 기사들은 질린 표정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헉! 이, 이럴 수가! 대체 저 건 뭐지?!"
"단순한 하급정령이 아니라는 소린가!"
"무언가 이상합니다, 대장! 저 녀석은 평범한 소년이 아닙니다!"
"큭- 이런 험한 사막에 꼬마 혼자 온 것이 이상하다 했더니…!!"
남자들은 분한 표정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손잡이만 남은 검을 바닥에 세차게 집어던 진 그들은 곧 품 안에서
짧은 단검이나 표창을 몇 개씩 꺼내 손에 쥐었다.
검을 못 쓰게 될 상황을 대비하여 미리 준비해둔 무기인 듯 했다.
그것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본 이사나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엄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만만히 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너희들의 생각만큼 난 약하지 않으니까."
"크흑! 조그만 것이 말만 많구나! 제대로 본때를 보여주마!"
바로 그때였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기사의 손에 들려있던 단검에 새파란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게만 보이던 단검이 굉장히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시큰둥한 시벨리우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주제에 검기는 조금 다룰 줄 아는 모양이군. 소드 익스퍼드의 상급 정도 되는 실력인가 보지?]
"검기?"
[아아. 검에 마나를 불어 넣는 거야. 수련의 강도에 따라 위력이 천차만별로 달라지지.
검기가 서린 칼은 정령을 베어낼 수도 있어. 제대로 대처하지 않으면 이사나가 위험해 질 거야.]
"뭐? 그럼 가서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일단 지켜봐야지. 솔직히 말해 상급, 아니 정령왕을 소환한 정령사가
겨우 저까짓 기사들 몇 명을 못 이긴다는 건 체면이 영 아니니까 말이야.]
녀석의 말마따나 이사나는 검기가 서린 칼날을 보면서도 별 다른 긴장감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우습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을 뿐.
꿈틀. 기사들의 미간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웃어? 너야말로 우리들의 실력을 너무 과소평가 하는 게 아니냐 꼬마야?
난 지금 당장이라도 네 목숨을 취할 수 있는데 말이다."
"흐음. 할 수 있으면 해보던지.
장담하지만 너희들은 내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못하고 쓰러질 거야.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이 건방진!!"
기사들은 분을 못 이겨 막무가내로 녀석을 향해 단검을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새파란 검기를 머금은 칼날이 쐐애액-요란한 소리를 내며 이사나에게 쏘아져 들어갔다.
그러자 이사나는 담담한 어조로 옆에 있던 시큐엘을 불렀다.
"시큐엘!"
"크하하핫! 소용없다! 제 아무리 정령 따위! 검기를 실은 단검을 감당할 수 있을까 보냐!
이 건방진 자식 본때를 보여주마!"
휘이익!
그들은 이사나가 단검을 막기 위해 잠시 한눈을 판 틈을 타
또 다른 무기를 꺼내쥐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6명이나 되는 성인들이 고작 소년 하나를 향해 전력질주하는 모습은
그다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지만, 그 기세만큼은 칭찬하고 싶을 만큼 매섭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상황을 두 눈 치켜뜨고 바라보아야만 했다.
바로, 방금 전 자신들이 날린 단검이 고스란히 그들의 복부에 와 박히는 것을 말이다.
쐐애액! 퍼어억! 퍽!
"크아악!"
"커헉!!"
"으악!!"
쿠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남자들의 몸은 저만치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옷 위로 새빨간 선혈이 뚝뚝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지켜보는 우리나 당한 기사들이나 할 말을 잃고 멍해진 건 마찬가지.
한순간에 정적에 휩싸인 그들 사이로 짧은 신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대체…어떻게 된…"
멀쩡히 잘만 날아가던 단검이 왜 갑자기 진로를 틀어 자신들의 복부에 박힌단 말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는 기사를 본 이사나는 생긋 웃는 얼굴로 친절한 설명을 건넸다.
"뭔가 착각들 한거 아니야? 내가 굳이 칼을 '막기만'할거란 보장은 어디에서 나온 거지?"
"무, 무슨?"
"확실히 검기를 실은 무기라면 정령에게도 꽤나 까다로운 상대이기니 하지.
하지만 말이야.
단순히 방향을 틀어놓는 것 정도는 하급정령이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거든.
어때? 자신이 던진 칼을 고스란히 맞은 감상이?"
"크, 크윽!"
기사들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몸에 여기저기 박힌 칼을 힘겹게 뽑아냈다.
푸욱-
살에서 뽑히는 끔찍한 소리가 울릴 때마다 흘러내리는 피의양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쿨럭쿨럭. 거친 기침을 내뱉은 기사들의 대장은 쓰고 있던 두건을 거칠게 벗어던지며,
선혈이 흘러내린 입가를 손등으로 닦았다.
새파란 분노를 드리운 눈동자가 똑바로 이사나를 향해 쏘아보고 있었다.
"이런 짓을 해놓고 네놈이 무사할거라 여긴 건 아닐 테지. 우리가 누군지 아느냐? 바로…"
"솔트레테 제국의 어둠의 기사단. 그 이름도 유명하신 반역자 유카르테 대공의 개들 아닌가?
"뭣이?! 감히 황제이신 유카르테 폐하를 향해 반역자라니!! 네 이놈…커헉!!"
남자는 할 말을 다 잇지도 못하고 그대로 땅에 고꾸라졌다.
열 받은 이사나가 시큐엘에게 명령하여 그대로 바닥에 넘어뜨린 것이다.
크르릉-
남자의 몸 위에 올라탄 시큐엘은 험악한 이빨을 번뜩이며 위협하듯 낮게 울음소리를 흘렸다.
기사가 그 모습에 얼어있는 사이 이사나는 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닥쳐. 네놈들의 나라엔 황제가 두 명인가?
멀쩡한 황제가 눈을 크게 뜨고 살아있거늘,
언제부터 유카르테 대공이 황제라 불리기 시작했단 말이냐!
한 번 만 더 그따위 허언을 지껄였다간 죽여 버리고 말겠다!"
"…!! 크, 크흑! 네놈! 황제파인건가!
설마 여기 나타난 것도 우연이 아니라 전부 계획적인 거냐!"
"그렇든 아니든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말해!
무고한 소녀를 끌고 가려는 이유가 뭐냐! 이 땅은 솔트레테가 아니다.
자칫하면 국경의 문제로 벌어질 수 있는 문제일 터!
네놈들의 왕은 대륙전쟁이라도 일으킬 셈인가!"
"이야아아앗!"
그때였다.
이사나가 한 사람을 채근하고 있는 틈을 타,
녀석의 등 뒤에 있던 다른 기사한명이 검을 치켜들곤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사나! 위험…!!"
그러나 나는 굳이 그 다음 말을 이을 필요가 없었다.
언제 불러낸 건지 잽싸게 나타난 또 한 마리의 시큐엘이
이사나에게 달려드는 기사의 몸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던 것이다.
우직-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크아아아악!"
"허억!"
그러나 그 순간조차 이사나의 시선은 오로지 그들의 대장인 듯한
남자에게 향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녀석의 얼굴을 본 기사들은 저마다
질린 표정으로 뒤로 한 발짝 씩 물러서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찌푸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이사나가 아닌 것 같아."
[흐음, 그래도 멋진데? 남자라면 저런 면도 있어야지.
한번쯤은 무서운 모습도 보여줘야 아랫것들을 다루기가 편하거든.]
"하지만 난 저런 걸 가르친 적이 없는데 대체 어디서 배운 거지?
흑, 이사나…이 형님은 슬프다. 대체 왜 그렇게 훌쩍 자라 버린 거야."
[킥킥. 너무 녀석을 애 취급 하는 거 아니야? 17살이면 성인이라고, 성인.]
"쳇."
그 후로도 이사나는 몇 번이나 덤벼드는 기사들을 아주 깨끗하게 땅바닥에 눕혔다.
그들 중에선 기절한 소녀를 인질로 삼아 위협하는 놈도 있었지만,
그 역시 시큐엘의 활약으로 깔끔하게 쓰러트릴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함께한 일행들이 전부 쓰러지고 자신 혼자만이 남게 되자
남자는 뻣뻣한 표정으로 입술을 악물었다.
그리곤 바득바득 이를 갈면서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젠장.
황제파에서 제왕의 반려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거란 생각을 못하다니, 확실히 나의 불찰이다.
게다가 이런 소년을 앞세워 방심을 유도할 줄이야.
기한은 앞으로도 충분하니 지금은 물러서는 편이 좋겠군. 이러다간 나까지 개죽음 당하겠어."
'제왕의 반려?'
처음 듣는 낯선 말이었지만 그것이 소녀를 뜻하는 말임은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러나 이사나는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남자를 향한 채근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오고서도 말할 생각이 없다는 건가? 유카르테 대공이 꾸미고 있는 일이 뭐지?"
"흥- 그런 걸 순순히 듣길 바랬다면 헛다리짚었다, 꼬마야.
확실히 이번엔 내가 방심한 것 같군. 하지만 다음번엔 어림도 없을 거다.
네놈에 대한 건 대공께 반드시 보고해두지.
아마 앞으로 그 얼굴로 대륙을 활보하고 다니긴 어려울 거야!"
다 죽어가는 비참한 상태에서 자신만만하게 소리치는 모습에
이사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남자가 잽싸게 품에 있던 주머니를 꺼내 앞으로 집어 던졌던 것이다.
"무슨! 윽!"
콰아아아아앙!!
"이사나!"
커다란 폭음이 울리는 순간,
매캐한 연기가 퍼지며 눈앞은 아무것도 분별할 수 없을 만큼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놀란 내가 바람의 정령을 시켜 연기를 몰아내고 났을 땐,
이미 남자가 있던 자리는 깨끗하게 비워진 상태였다.
사방이 안 보이는 틈을 타 몸을 내 뺀 것이다.
나는 얼른 시벨의 등에서 내려와 이사나가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콜록, 콜록! 콜록!"
"이사나 괜찮아?"
연기의 향이 독했는지 녀석은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걱정스럽게 묻자 얼른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간신히 숨을 고른 녀석은 씁쓸한 표정으로 짧게 중얼거렸다.
"대체 그는 왜 이런 짓까지 하면서…황제가 되려는 걸까?"
"응? 그게 무슨…헉!"
무심코 주위를 둘러본 나는 그대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와 함께했던 나머지 기사들이 모두 시체가 되어 바닥에 엎드려져 있었던 것이다.
이사나에 의해 기절하긴 했어도 모두 숨은 붙어있는 상태였는데,
아마 도망간 남자가 그새 전부 죽이고 간 모양이었다.
동료애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을 만큼 매정한 대처가 아닌가!
잠시 할말을 잃고 잠시 숨을 삼킨 나는 잠시 후
그들이 노린 여자애가 생각나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혹시나 우리가 방심하는 틈을 타 끌고 간 게 아닌가 생각된 것이다.
"아참! 소녀는? 그 여자애는 어떻게 됐어?"
"아, 그건 걱정 마, 엘. 혹시 몰라 시큐엘에게 보호해달라고 부탁해뒀었거든.
많이 지쳐있는 것 같은데, 엘이 상태 좀 봐줄래?"
"아, 응."
이사나의 말처럼 소녀는 완연히 창백한 기운에 잔뜩 지쳐 축 늘어진 듯이 보였다.
살짝 이마를 짚어보자 일반인의 온도보다 약간 높은 체온이 느껴졌다.
전체적으로 심한 탈진상태에, 열이 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작은 몸으로 연달아 이어진 두 번의 역소환을 경험했으니 상태가 정상이라면
그것이 더욱 이상했을 것이다.
그나마 쇼크로 심장이 마비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랄까?
나는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치료술을 시전 하여 소녀의 몸을 회복시켰다.
따뜻한 흰빛이 감싸고돌자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백지장처럼
창백했던 피부에 옅은 장밋빛이 돌기 시작했다.
"어때, 엘? 괜찮은 거야?"
"응. 치료했으니까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야.
마나소비가 너무 심한데다, 역소환에 의한 쇼크 때문에 정신을 잃은 것뿐이니까.
그런데 이런 사막에 어린여자애 혼자서 무슨 일로 온 걸까?"
"글쎄…. 어쩌면…나와 만날 운명이었던 건지도…"
"뭐?"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이사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세차게 저었지만 나는 보고야 말았다.
녀석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마냥 새빨갛게 붉어져 있는 것을 말이다.
맙소사.
이사나. 너 정말 이런 꼬맹이한테 반해버린 거냐?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내 옆에선 어느새 블루엘프로 폴리모프한
시벨리우스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아 좋을 때로군, 좋을 때야. 바야흐로 로맨스의 시기라는 거지."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시벨님!!"
"그치만 나는 분명히 들었는걸? '나와 만날 운명'이란 건 대체 무슨 소리?"
"그, 그건!! 그, 그러니까…아, 아무튼 아니라니까요!"
이사나.
그렇게 붉은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아니라고 해도…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
'크흑, 얼마 전엔 시큐엘이 말썽을 부리더니 이젠 이사나까지!
날더러 사위(?)도 모자라 며느리(?)까지 맞이하란 말이냐!!'
나는 기절한 소녀의 얼굴을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절대로 평범치 않은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6-5 만남
이사나가 떠난 이후 클모어는 본격적인 전쟁준비 때문에 정신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각국의 용병들을 고용함은 물론,
무기와 식량을 은밀히 사들이기 위해 후작은 몸이 두개가 되어도 모자를 지경이었다.
평소였다면 그의 옆에는 훌륭한 보조역할을 할 사랑스러운 여동생 에이프릴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 전 이사나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가
갑자기 돌아온 붉은 머리의 청년에 의해서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내가 왜 그때 쓸데없이 이사나님께 보고를 했던 걸까.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말짱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후작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마 시간을 다시 돌릴 수 있었다면 이미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돌리고도 남았을 그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동생의 마음을 단 한번에 사로잡아 버린 자의 이름은 바로 라피스.
신분은 커녕 정체조차 알 수 없어 수상하기 이를 데 없이 찝찝한 사내였다.
나이는 20대 중반쯤 되었을까?
엘프에 비견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와 우아한 몸동작.
자연스럽게 명령체가 배여 있는 말투 등이 그의 태생이 천하지 않다는 것을
은연중에 입증하고 있었지만, 그러하기에 후작은 더욱 불안했다.
그가 알기로 귀족가의 자제 중 저토록 눈에 띄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혹시 타국의 귀족일까도 싶었지만,
만약 그렇다면 한 제국의 내정분란에 타국이 개입한 셈이 되니 내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마치 처음부터 노린 듯이 에이프릴에게 접근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한창 이성에게 호감을 느낄 때라 해도 타이밍이
너무 짜 맞춘 듯하니 의심이 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끄응, 그러고 보면 그 엘이라고 했던 물의 정령사도 수상하기는 마찬가지군.
꼭 어릴 때부터 그래왔던 마냥 폐하께 친근하게 대하는 것도 그렇고….
폐하는 상관하지 말라셨지만 아무래도 불안한 심정을 감출수가 없단 말씀이야?
역시 몰래 알아봐야 하나?"
그때였다.
마치 봄바람을 타고 흐르는 듯한 맑은 미성이 그의 혼잣말에 대답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라비와 티타임을 즐기기 위해 들어온 에이프릴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라버니? 몰래 알아보시겠다니…
설마 폐하의 일행을 뒷조사하시겠다는 거예요?"
"크흠, 에이프릴. 방에 들어올 때는 노크를 하라고 누누이…"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하지 마세요, 오라버니.
그러다 폐하의 진노라도 사시면 어쩌시려고요."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수상한 군데가 한둘이 아니지 않니.
뭘 어쩌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알아만 보겠다는 거다.
폐하께서 신용해도 될만한 사람인지 어떤지 정도는 조사해둬야 하지 않겠니?
그러니 너도 그 라피스인가 뭔가 하는 청년을 너무 믿지 말거라.
수상하기로는 그가 제일 심하니까 말이다."
짐짓 엄한 어조의 말투에 에이프릴은 고운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약간 나무라는 듯한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라피스님을 의심하시는 건 당치 않으세요.
그 분은 지금껏 우리에게 해를 입힌 적이 없었잖아요.
아니, 오히려 도와주기 위해 그 먼 길에서 선뜻 달려오시기까지 했는걸요.
그 분이 아니었다면 전 꼼짝없이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갈 뻔 했을 거예요."
그때의 일을 회상하듯 에이프릴은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당시 그녀는 대공이 억지로 주선해준 남자와 반강제적으로 결혼할 위기에 놓였었다.
그런데 소식을 들은 라피스가 그 즉시로 달려 와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만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당당하게 찾아온 백작가의 아들을,
코웃음도 치지 않은 채 딱 죽기 좋을 만큼 손봐주던
그때의 모습을 에이프릴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 후로도 그는 바로 돌아가지 않고, 에이프릴을 지켜준다며 그녀의 옆에 머무르는 상태였다.
눈물날 만큼 고마운 배려였지만, 그것에 대한 후작의 입장은 확연히 달랐다.
"바로 그게 문제라는 거다.
그렇지 않아도 위험천만한 여행길인데 함부로 폐하의 곁을 비우다니!
나는 지금도 폐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걱정을 그칠 수가 없단 말이다.
생각이 있는 자라면 결코 그런 식으로 할 순 없지, 암 그렇고 말고!"
"라피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 엘이라는 정령사분의 실력이 굉장히 뛰어나시니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어요.
오라버니도 그분의 말을 좀 믿어보세요."
"그의 어디를 믿고 신뢰할 수 있다는 거냐?
에이프릴, 답답한 소리는 그만하고 제발 정신 좀 차리거라.
툭하면 피토하기 일쑤인 그런 허약한 마법사의 어디가 좋든?"
"오라버니!"
그렇지 않아도 염려하고 있던 부분이 언급되자 에이프릴은 날카롭게 반응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역시 라피스의 건강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에는 멀쩡하다가도 가끔씩 주저앉아 피를 토하거나 쓰러지는 일이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때마다 얼굴을 찌푸리긴 커녕,
피식 미소 지으면서 이해하기 힘든 소리만 중얼거린다는 거랄까.
'좀 작작 좀 쓰라고, 엘 녀석.
떼어놓고 와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되지만 아주 날 죽일 생각이냐.'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새파란 얼굴로 비틀거리지만,
그것도 몇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해졌다.
새삼 괜찮냐고 묻기가 어색할 정도로 깨끗한 혈색이라,
그녀는 지금도 라피스에게 지병이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컨디션이 나쁠 뿐이라고 했어요.
오라버니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몸이 허약하다거나 병이 있는 게 아니라고요."
"휴우. 세상 어느 인간이 단순히 컨디션이 나쁜 정도로 피를 토한…
아아, 그래 알았다. 내가졌다.
그 부분에 대한 건 더 이상 말하지 않으마. 그러니 울지 말거라."
후작은 에이프릴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고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미우네 어쩌네 해도 결국은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이 좋아하는 남자였다.
이 이상 함부로 말하는 것은 후작 본인의 위신에도 걸맞지 않은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기분이 좀 풀어졌는지,
에이프릴은 재빨리 눈가를 훔치곤 평소처럼 미소 짓는 얼굴로 물었다.
"아참, 그러고 보니 황제폐하의 친위기사단에게서 연락이 왔다면서요?"
"그렇단다. 다행히 이곳 클모어까지 별 탈 없이 도착한 모양이야.
이틀 전에 전서구가 날아왔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거의 도착했을 거다.
경비대장인 퀼트경이 성안으로 이어지는 비밀통로로 안내할거야."
후작은 내심 뿌듯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황제의 친위대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지라 어느 정도 마음의 근심이 덜어진 것이다.
문제라면 이제부터 그들에게 이사나의 부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냐는 거였다.
아무리 황제 본인의 입장이 강경했다 해도, 위험하기로 유명한 던전에
달랑 몇 사람만 대동해서 보냈다는 사실을 알면 달가워 할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얼굴이 굳어지는 후작에게 에이프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비밀통로라면 성 밖 동굴로 이어지는 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위급한 상황에서 몰래 저택을 빠져나가도록 만든 터널이다.
밖은 대공의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이 수밖에는 눈에 뜨이지 않을 방법이 없겠더구나.
게다가 할버크 영주의 아들이란 놈까지 이번 너와의 혼담이 거절된 것에
앙심을 품고 있을 테니 말이다."
"흥, 그런 남자 따위.
대공에게 화를 당할까봐 혼담이 파기됐다고 보고하지도 못하는 겁쟁이인걸요.
라피스님이 제 옆에 계시는 한, 그에 대한 걱정은 하실 필요 없어요.
아참, 차라리 라피스님을 보내는 게 어때요?"
"응? 그건 또 무슨 소리니, 에릴?"
후작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에이프릴(애칭 에릴)은 명랑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클모어는 안팎으로 우리를 감시하는 눈동자로 가득한 상태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성의 경비대장인 퀼트경이 움직이면 틀림없이 적들의 시선에 발각될 거예요."
"하지만 그건 라피스란 남자도 마찬가지 아니겠니?
누구든 성을 나서는 모습을 보면 의심을 당할 텐데 말이다.
차라리 성의 지리를 완전히 꿰뚫고 있는 쪽이 더…"
"모르시겠어요? 라피스님은 텔레포트가 가능한 마법사세요."
"!!"
순간 후작은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아무 말도 이을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입으로 '허약한 마법사'운운했으면서,
정작 이 순간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허- 그러고 보니 그랬구나. 그는 마법사였지. 그것도 꽤 훌륭한."
"네, 그래요. 들어보니 몸 전체에 투명화마법도 시전 할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일단 장소만 알려주면 그곳까지 투명마법으로 이동한 다음,
기사들을 텔레포트 마법으로 성내로 들여보낼 수 있을 거예요.
퀼트경이 가는 것보단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으음. 그거야 확실히 그렇다만…그가 순순히 응해 줄지…"
"그거라면 저에게 맡기세요. 부탁해 보겠어요."
모처럼 라피스가 후작에게 인정받을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에이프릴은 전에 없이 들뜬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어떻게든 연인의 장점을 부각시켜 후작의 호감을 사게 만들 작정인 듯 했다.
그 모습에 후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딸자식은 키워봤자 소용없다더니…
에이프릴이 딱 그 짝이군. 설마 이렇게까지 빠져있을 줄이야.'
물론 에이프릴이 그의 딸인 건 아니었지만, 오라버니로서 허무한 심정이 들기는 마찬가지.
문득 인생무상이라는 단어에 절절히 공감하고 마는 그였다.
"이 장소가 정확한 겁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사람이 나온다고요?"
우연치 않게 동행한 뒤,
이사나의 친위 기사들은 샴페인 용병단에게 자신들의 정체를 솔직히 고백했다.
이왕 도움을 받을 바에야 자신들의 사정을 확실히 털어놓고 협조를 구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휴센들은 상당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얼마 전 이사나 황제 본인을 클모어로 안내한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의 기사들을 안내할 위치에 놓이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우연인가.
상황이 그렇게 되고 보니 기사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했고,
샴페인 용병단은 그것을 기꺼이 허락했다.
이왕 이렇게 된바, 카웰 후작이 비밀리에 모집하는 용병대에 가입 신청을 하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그들의 인연은 클모어 성의 입구만이 아닌,
후작이 머물고 있는 저택으로까지 이어진 참이었다.
후작이 보내온 전서구를 살피며 묻는 휴센에게,
어느새 자연스럽게 일행의 리더가 되어있는 알렉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후작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자를 보낸다고 했네.
아마 저택내부에 이어지는 비밀 통로로 안내할 셈이겠지."
"하지만 이상하군요.
이 전서구가 오늘 아침에 도착했다면, 마중 올 사람이 이미 나와 있어도 충분한 시간인데요.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닐까요?"
"글쎄. 조금 늦어지는 걸지도 모르지.
카웰 후작은 준비성이 철저한 분이라 알고 있는데 좀 이상하긴 하군."
바로 그 순간 그들의 머리위로 드리워진 나뭇가지가 심하게 흔들린다 싶더니,
누군가가 휙하고 내려왔다.
사뿐히 바닥에 착지하는 남자의 등 뒤로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이 가볍게 찰랑거렸다.
그것을 본 샴페인 용병단과 기사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리 없이 경악했다.
'이럴 수가!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기척을 느끼지 못하다니?!'
샴페인 용병단은 물론,
기사들 중 태반은 이미 검술의 상급 경지를 훌쩍 넘어서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고작 나무위에 앉아있는 사람의 기척하나 잡아내지 못하다니!
설마 저 남자의 실력이 자신들보다 뛰어나다는 뜻인가?
그러나 붉은 머리의 남자는 기사들이 놀라건 말건 퉁명스러운 어투로 빈정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상당히 늦었군. 나는 또 하도 안 오기에 내일이나 올 셈인가 했지."
"…!!…서, 설마 그대가 카웰 후작님이 보내신 자인가?"
"그럼 이 시간에 혼자 청승맞게 나와 있을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런데 생각보다 인원이 많군. 내가 듣기로는 12명이었는데 말이야.
그 사이에 6명이나 더 추가된 건 대체…응?"
따분함이 다분히 묻어나는 어조로 성의 없이 대답하던 남자는
문득 일행 중에 낯익은 사람이라도 발견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얼굴은 영 탐탁지 않다는 듯이 살풋 일그러져 있었다.
"대체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불쾌한 듯이 던진 질문에 대답한 것은,
첫만남 이후 이제까지 거의 존재감 없이 지내던 용병단의 소년이었다.
이름이 매튜라고 했던가?
알렉은 놀란 표정으로 소년과 그들을 마중 나온 청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것은 매튜와 같은 일행인 용병단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튜, 너 저 사람이랑 아는 사이냐?"
"척 봐도 귀족같이 보이는데, 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설마 널 괴롭히던 작자는 아니겠지?"
"아아, 용병이 되기 전에 잠깐. 흠…그냥 조금 친분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 이상은 설명이 곤란하군요."
그는 어색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계속해서 이어지려는 질문공세를 자연스럽게 끊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자는,
다름 아닌 누구보다 소년의 정체를 제대로 알고 있는 단 한사람- 정령사 페리스였다.
그는 얼떨떨한 얼굴로 소년과 붉은 머리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땅의 정령왕과 친분이 있는 인물이란 말인가! 대체 저 남자는 누구지?'
기척을 숨기고 있던 솜씨로 보건데, 대단히 뛰어난 실력을 가진 상대임은 틀림없었다.
무엇보다 인간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외형이 더욱 더
그를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땅의 정령왕과 친분까지 있는 존재라니!
하지만 그는 곧 이어지는 남자와 트로웰의 대화에 벙찐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엘과 합류한 것 아니었나? 그는 어쩌고 이곳에 혼자 와 있는 거지?"
"흥,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 남이사 혼자 오든 말든."
"라피스. 그런 식의 대답으로 날 화나게 만들지 마.
그는 아직 이 세상에 미숙한 점이 많아. 내가 굳이 따로 부탁을 해야만 돌아볼 생각이야?"
"어린애 취급은 그만둬. 엘도 엄연히 너와 같은 입장이라고.
오냐오냐 돌볼 존재가 아니라는 점은 네가 더 잘 알잖아?"
'엘? 땅의 정령왕인 트로웰과 같은 입장? 설마… 물의 정령왕이신 엘퀴네스님을 말하는 건가?'
그들의 말인즉슨, 저 라피스란 이름의 청년은 물의 정령왕인 엘퀴네스와도 친분이 있으며,
지금까지 함께 동행했다는 소리였다.
엘의 옆엔 항시 그의 계약자인 이사나가 존재했기에, 페리스는 조급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시, 실례지만…이사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 겁니까? 성내에 계시는 건가요?"
"응? 뭐야, 넌. 여기에 오기 전에 소식도 듣지 못했나?
녀석들은 이미 다른 제국으로 여행을 떠난 지 오래라고."
"예에? 다른 제국?"
그러자 라피스의 대답을 들은 기사들은 모두 놀란 표정으로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후작에게서 받은 편지에는 단순히 상단의 세력을 끌어
모으기 위한 준비 중이라고만 적혀 있었을 뿐,
설마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한 상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령왕인 엘퀴네스가 함께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는지,
크게 불쾌해 하거나 불안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단, 진실을 모르는 샴페인 용병단을 제외하면.
"무슨 말입니까? 폐하께서 다른 제국으로 떠나셨다니. 이거 위험한 것 아닙니까?"
"으음. 확실히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그래도 엘님이 함께 계신다면 신변의 위험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일단 자세한 것은 후작님과 직접 만나서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엘이라니…설마 폐하 옆에 있던 그 파란머리의 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알고 계시는군요.
하긴, 이전에 이사나님과 클모어까지 동행하셨다니, 당연히 엘님과도 친분이 있으시겠지요."
"예, 여기 매튜와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소년이라서 인상이 깊었습니다.
둘이 꽤 사이좋은 친구인 것 같았거든요.
나중에 고위급의 신관이라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사제가 개인의 호위나 전투엔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괜찮은 겁니까?"
"네? 개인적인…친분?"
아무생각 없이 대답한 휴센의 말에 트로웰은 낭패한 표정을, 기사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 역시 엘퀴네스의 정체를 알고 있던 자로서,
그의 친구라는 매튜를 새삼스럽게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이, 아까 붉은 머리의 남자가 엘님더러 저 소년과 같은 입장이라고 하지 않았냐?'
'응, 그랬지. 엘님을 어린애 취급한다고 나무라기까지 했잖아.
저 용병단과 만나기 전부터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고 하면…설마 저 소년도 정령왕??'
'그, 그럴리가. 그건 너무 오버 아니야?
저애가 정령왕이라면 남자의 말투가 건방질 리가 없잖아.'
'하지만 저 남자는 엘님의 이름도 함부로 불렀는걸?'
'헉! 그렇다면 혹시 저 남자도 정령왕?'
점점 갈 때까지 이어지는 상상에 기사들의 얼굴은 모두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말을 꺼내놓고 보니 점점 그들의 정체가 그럴 듯 해보였던 것이다.
그러자 처음엔 아무생각 없이 보았던 남자의 붉은 머리카락이나
소년의 검은 피부마저 새삼스럽게 정령왕의 상징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 기사들의 생각을 읽은 매튜,
트로웰은 짧게 혀를 차곤 다시 매서운 시선으로 라피스를 노려보았다.
"엘은 아직 이 세계에 적응해야 할 부분이 많아.
때문에 누구든 옆에서 도와줄 존재가 필요한 상태다.
너라면 다소 건방지긴 해도 그 역할을 잘 해 줄 거라 믿었는데…실망이구나.
한낮 꿈에 젖어서 현실을 돌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녀석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쳇. 너무 그러지 말라고. 안 그래도 충분히 벌 받는 중이니까.
엘 녀석…날 죽이려고 작정한 게 틀림없어. 며칠 전엔 피까지 토했었다고."
"흐음. 그만큼 그가 긴박한 상황이었다는 생각은 못한 거냐?"
"……"
정곡을 찌르는 트로웰의 말에 그렇지 않아도 내심 찜찜한 기분이었던
라피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것을 본 트로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덩치만 커다랗지 역시 어린애는 어쩔 수 없다니까.
나중에 엘과 만나면 확실하게 사과하도록 해.
그가 정말 화가 나서 너와의 계약을 취소하기 전에 말이다."
"…쳇."
트로웰의 엄한 충고의 말에 라피스는 이렇다할 반박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의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의 기운을 느끼면서도,
무시하고 혼자 단독행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한편 주변의 기사들과 용병들은 이 두 존재의 대치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딜 봐도 소년티가 가시지 않는 매튜가 어른마냥 엄한 충고를 건네고,
오히려 한 성질 하게 보이는 덩치 큰 청년은 끽소리도 못하고 고분고분 받아들이고 있었던 탓이다.
그들은 다시 한번 저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것봐, 것봐. 저 소년은 땅의 정령왕이 틀림없다니까? 뭔가 말투부터가 위엄스럽잖아?'
'헉, 그럼 우리 지금까지 정령왕과 동행한 거야? 믿을 수가 없어.'
'이런 걸 두고 세상 참 좁다고 하는 거겠지? 그럼 저 붉은 머리의 청년은 정체가 뭘까?
대화를 들어 봐선 이프리트인 것 같진 않은데 말이야.'
'계약 어쩌고 하는걸 보니 엘퀴네스님의 또 다른 계약자 인가 보지.'
'에에? 그거 두 사람하고 동시에 해도 되는 거였어?
내가 듣기론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는데.
이제껏 인간 두 명이 한 정령왕과 계약한 역사는 없었잖아?'
'종족이 다르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척 봐도 뭔가 숨겨둔 정체가 있을 것 같지 않아?'
'헤에. 뭐냐, 그건. 설마 드래곤이라도 된단 소리냐?'
마지막 알렉의 말에 기사들은 모두 한결같이 입을 다물었다.
드래곤이 무엇이던가!
대륙에 존재하는 가장 최강의 생명체! 포악한 성질머리와 거대한 힘!
그 육체 하나만으로 어지간한 황성 하나는 박살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존재가 아니었던가!
워낙 그 숫자가 적어 이제는 존재자체가 전설로 취급되는 종족이 바로 그들이었다.
평생가도 유희중인 드래곤 하나 만나기 어렵다는 것은 기본 상식중의 상식.
기사들은 모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하하. 설마…아무리 세상이 좁아도 드래곤씩이나?"
"맞아. 드래곤이라니… 상상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지만 정령왕도 뵌 마당에 까짓 드래곤하나 못 만나겠어?
정령왕에 비하면 드래곤이 오히려 더 가능성 있는 게 아닐까?"
"…음, 그건 그렇군."
그랬다.
이미 그들은 평생은커녕 전설로도 만나보기 힘들다는 정령왕을
벌써 두 번째 마주치고 있는 상태였다.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무심히 넘어갔지만, 기적이라면 이미 이루어지고도 남은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까짓 드래곤쯤(?) 하나 더 끼인다고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기사들은 모두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령왕과 드래곤이라는 게…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 거였어?"
"으음. 알고 보면 이 세상의 절반이 정령왕과 드래곤으로 채워진 걸지도 몰라."
"아, 그런 거야?"
"그럴지도…"
그렇게 기사들의 오해는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옆에 있던 샴페인 용병단들은 여전히 영문모를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트로웰을 평범한 인간 이상으론 생각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단순히 그의 태도의 변화만을 신기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본래 좀처럼 타인의 일엔 간섭치 않는 용병들의 생리 때문인지도 몰랐다.
기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 그들은,
잠시 후 저들끼리 나름대로 상황을 판단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저 붉은 머리의 청년이 엘의 계약자 뭐시기라는 거야?
요즘은 신관도 계약하고 일을 하나보지?"
"그게 아니라 저 청년이 용병인거겠지. 척 봐도 힘 꽤나 쓰게 생겼잖아?
의뢰인을 내팽개치고 혼자 활보하고 나니니 매튜가 저렇게 화난 거 아니야."
"근데 말투가 꽤나 설교조이지 않아? 대화만 들으면 매튜가 더 어른인줄 알겠어."
"그건 그래. 예의바른 매튜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한테 저렇게 엄하게 대할 린 없고…
저래 뵈도 매튜랑 동갑이라던가? 아니면 더 어린 게 아닐까?"
"헉. 요즘 애들은 발육이 너무 좋다니까. 대체 뭘 먹으면 저렇게 크는 거지?"
이릴은 새삼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들의 대화를 들은 라피스의 얼굴은 저절로 일그러졌고,
트로웰은 급히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막은 것이다.
그것을 본 라피스는 더욱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바보들 아니야?
어떻게 이런 꼬맹이의 외모를 보고도 내가 더 어리다는 판단을 할 수 있는 거지?"
"꼬맹이라서 미안하게 됐군. 네가 나보다 더 어린 것은 사실이지 뭘 그래?"
"쳇. 쳇. 그러기에 설교는 나중에 해도 됐잖아.
꼭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날 망신 줘야겠어? 아무튼 은근히 성격 나쁘다니까.
누구냐? 널더러 예의바르고 친절하다고 말한 녀석이."
라피스의 투덜거림에 트로웰은 간단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 말은 내가 더 금시초문인 걸?"
"흥. 어련하시겠어. 너야 거리낄게 아무것도 없겠지.
아무튼간 엘 녀석…눈에 뭔가 쓰인 게 틀림없어.
이런 놈의 어딜 보고 그렇게 철썩 같이 믿고 따르는지 원.
하긴 나라도 못 믿지. 누가 알겠어?
이런 꼬맹이가 한때 드래곤까지 동원해서 인간 세상에 피.바.람.을 일으킨 전적이 있다고 말이야."
그것은 언제고 그의 아버지를 통해 지나가듯이 들은 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수 천 년 전, 땅의 정령왕 트로웰이 인간들을 멸족시킬 계획을 가졌었다는 것이다.
드래곤만이 아닌, 다수 수많은 타 종족까지 동원하여 대륙의 전쟁을 선도했었다는 소리에,
라피스는 언제고 그의 약점으로서 들추어낼 작정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의 말에도 트로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흐음.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을 가지고 물고 늘어질 셈이야?
하여튼 쪼잔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쪼잔하긴 누가!"
조금이나마 타격을 입힐 생각으로 건넨 말이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고 돌아오자
라피스는 분한 표정으로 버럭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트로웰은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능청스러운 말을 건네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나저나 네가 성까지 안내를 맡은 거 아니었어? 언제까지 손님을 이렇게 세워둘 셈이야?"
"이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 어휴, 말을 말자. 말을.
자, 다들 따라와. 아까부터 당신들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야."
살벌한 눈빛으로 건네는 라피스의 말에 기사들과 용병들은 잠자코
그의 뒤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잠시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던 트로웰은 행렬의 가장 마지막으로 걸음을 옮기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라피스의 말 때문이었을까?
그동안 잊고 지내던 기억의 편린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와 온통 머릿속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삐이이이익-쿠와아아앙!!
<살려줘! 살려줘어!!>
<꺄아아아악!!!>
창공을 가르는 거대한 드래곤의 무리.
새빨간 대지와 시커먼 연기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인간들과 그들의 육체를 집어삼키는 수많은 정령들의 향연.
그리고…
그들의 가운데서서 미소 짓고 있는 자신.
<인간들이 싫어. 이 세상에서 그 종족 자체가 완전히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악다문 입술 안에서 새어나오는 낮은 음성은 분명 과거의 자신의 것.
그동안 잊고 지내던 게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게 떠오르는 장면에 트로웰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아아, 그래. 그랬던 적이 있었지.'
인간에게는 오직 적대감 밖에 없던 시절.
타 종족을 충동질하면서까지 전쟁을 일으키려 했던 얄팍한 마음은,
그 당시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죄책감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그때의 상황을 다시 반복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트로웰은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동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고 속으로 상당히 당황하고 말았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이제는 미워할 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에 이런 건가?
아니, 그보다…난 어째서 그때 멈췄던 거지? 왜 인간들을 멸족시키지 않았던 거지?'
그때 희미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가슴이 저밀정도로 구슬픈, 작은 흐느낌을 담은 어린 소년의 목소리였다.
<트로웰은 나쁘지 않아. 언제나 상냥한걸.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파.
이렇게 상냥한 트로웰을 분노하게 만든 존재가…인간이라는 사실이.
그리고 나 역시…그런 인간의 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두 눈 가득 담은 눈물을 차마 떨구지도 못하고,
자신을 향해 아련한 표정을 지었던 그는 대체 누구였을까?
아무리 애써도 떠오르지 않는 얼굴에 트로웰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정령왕은 드래곤만큼이나 망각의 축복을 받지 못한 존재가 아니었던가.
이렇게까지 기억이 나지 않다니, 뭔가 이상했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거라곤 그 목소리의 주인이 그때의 자신을 멈추게 만든 존재라는 것 뿐.
<나는 트로웰을 좋아해. 너는 나의 가족이야.
네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낯선 장소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어.
이곳에서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준 것도 네가 처음.
나를 일으켜 세워준 것도 네가 처음.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가족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도…네가 처음이야.>
가슴가득 행복함이 묻어져 나오는 목소리에 트로웰은
이미 지난 기억임을 알면서도 마음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눈을 감은 그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가고 있었다.
"나도…나도 마찬가지야……엘."
바로 그 순간,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그를 머나먼 기억 속에서 현실로 이끌었다.
한참을 가도 트로웰이 따라오지 않자 이상함을 느끼고 되돌아온 라피스였다.
"엘이라니? 무슨 소리야?"
"응? 뭐가?"
"방금 엘이 어쩌고 그랬잖아. 뭐야, 나도 모르게 녀석이랑 연락이라도 한거야?"
그의 말에 트로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로선 지금 라피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소리야? 내가 엘이랑 연락을 하다니? 무엇보다…난 지금 아무 말도 안했는데?"
"뭐? 내가 듣기론 분명…"
"아아, 됐어, 됐어. 또 무슨 엉뚱한 소릴 할 셈이야?
자, 어서 가자고. 우리 때문에 다른 일행들까지 피해를 보잖아."
"어, 어이?"
어쩔 수 없는 녀석이라는 듯 혀를 차며 걸어가는 트로웰.
혼자 남은 라피스만이 황당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6-8 향수(1)
"으음…"
정신을 잃었던 소녀가 눈을 뜬 것은 마침 시벨리우스가
노숙을 위해 텐트를 만들고 있을 무렵이었다.
절대 떠지지 않을 것처럼 굳게 감겨있던 속눈썹이 작은 신음소리와 함께 파르르 떨리자,
소녀의 간호를 전담하고 있던 이사나가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엘! 엘! 이리와 봐. 아무래도 깨어나려는 모양이야."
"아, 그래? 흐음, 어디보자…"
잔뜩 흥분한 듯 붉게 상기된 녀석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은
나는 그의 앞에 다가가 소녀의 상태를 살폈다.
그래봤자 이마의 열을 짚어본 것이 전부였지만,
이미 완벽하게 돌아온 혈색만으로도 소녀는 충분히 건강한 상태였다.
그래도 혹시 몰라 다시 한번 치유술을 걸어주려는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난 소녀의 깨끗한 주황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
그러나 꿈이라도 꾼다고 생각했는지 소녀는 눈을 뜨고도 한참이나
멍하게 내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내가 먼저 말을 건네자,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듯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신 들었니? 몸은 좀 어때?"
"에…엑?!! 꺄아악!!"
"……"
짧게 비명을 지른 소녀는 누가 말릴 세도 없이 후다닥 일어나더니,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입만 뻐끔뻐끔거렸다.
아무래도 눈 뜨자마자 낯선 사람들을 본 탓에 조금 놀란 모양이다.
나는 소녀 못지않게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사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렇게 빨리 움직이는걸 보면 멀쩡한 가 본데?
나머진 너한테 맡길게, 이사나.
난 시벨리우스를 도와서 노숙준비 할 테니까 그동안 저애 좀 진정시켜줘."
"엑? 내, 내가?"
괜히 좋으면서 곤란한척 하기는.
내가 진정 커플 타도를 외치며 절규하는 꼴을 보고 싶은 게냐?
나의 이러한 눈빛을 읽었는지 이사나는 곧바로 소녀에게 다가섰다.
우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을 주기 위해서인지
전에 없이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이었다.
"저어, 몸은 괜찮습니까? 당신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니 그렇게 경계하지 말아주세요."
17살짜리 다 큰 녀석이 겨우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꼬마를 향해
정중한 어투를 사용한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 상당히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아무리 어리게 생겼어도 신분을 알지 못하는 소녀를 향해 반말을 할 수는 없다는 거겠지.
그게 단순한 그의 성격 때문이 아닌, 이 세계에선 너무도 당연한 행동이라는 것이 문제다.
문득 이곳이 한국이 아니라는,
그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사실이 새삼스럽게 현실로 다가온 기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정말로 오랜만에…내가 서 있는 이 공간이 낯설게 느껴졌다.
"엘. 왜 그래?"
"응? 뭐가?"
"뭔가 멍한 표정이잖아. 잠에서 덜 깬 사람처럼. 혹시 어디가 아픈 거 아니야?"
본연의 임무(텐트를 치는 일)를 끝마친 시벨리우스는 마지막으로
저녁식사 준비를 하기 위해 돌아서다가(완전히 파출부가 다 되었다)
내가 멍하게 서있는 것을 보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 바람에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온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잠깐 딴 생각을 했던 것뿐이야."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지?"
"…? 그래. 그런데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야?"
"왜긴. 네 표정이 너무 어두워 보이니까 그렇지.
정령왕이라면서 무슨 근심이 그렇게 많아? 혹시 누가 못살게 구는 거야?"
"그게 아니라…아, 아니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 일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정령왕을 못살게 굴 정도로 간 큰 녀석은 있지도 않을뿐더러,
근심 같은 건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다고."
그렇지 않아도 나를 다른 '엘'로 오해하고 있는 녀석을 향해,
내 전생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시벨은 반드시 나를 자신이 알고 있는 '엘'이라고
확신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한번 있는 전생이 두 번이라고 없겠느냐고 따지면 나로선 정말 할 말이 없어지는 셈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다른 정령왕들에게는 없는 경험이 나에게만 유독 집중된다는 것은 전혀 즐거운 기분이 아니었다.
마치 '이 세계에서도 너는 외톨이다'라고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 같았으니까.
그 순간 또다시 딴 생각에 빠져드는 나를 일깨운 것은 깨끗한 울림을 닮은 고운 미성의 목소리였다.
"여기가 어디? 당신들은 누구야?"
"아, 그러니까 우리는 당신을 해치려 하는 존재가…"
"웃기고 있네! 그런 말이 더 수상하다는 거 몰라?
내가 알고 싶은 건 당신들이 내게 가지고 있는 적의의 여부 따위가 아니라,
정체가 뭐냐는 거야!
3초의 시간을 주지! 어서 불지 못해? 3-2-1-!!"
"에엑?"
…대체 왜 이곳에서 만나는 여자들이라곤 하나같이 성격이 저 모양인걸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사나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러게 외모만 가지고 함부로 반하면 피 본다니까?
잠시 불쌍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봐준 나는 생긋 미소 지으며 소녀에게 입을 열었다.
(순전히 트로웰의 방식을 흉내 냈을 뿐이다.)
"먼저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부터 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 꼬마 아가씨."
"그, 그런 건 당신들의 정체를 알고 나서 해도 늦지 않잖아!"
"아니, 늦어.
이쪽도 나름대로 '목숨 걸고'구해냈는데,
돌아온 보답이 정체가 뭐냐는 말 뿐이라면 상당히 서운하지 않겠어?"
"…으음. 듣고 보니 그렇네. 확실히 내가 서둘렀어.
미안해. 당신들이 나를 정말로 도와준 사람들이라면 말이야."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와 이사나의 모습을 빤히 흩어보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이 맹랑한 꼬마는 우리들이 대공의 기사들을 무찌르고
자신을 구해냈다고는 전혀 믿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어딜 봐도 이제 갓 17살 넘어 보이는 소년들이
무슨 재주로 그 많은 인간들을 물리쳤다고 생각하겠는가.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상대방을 외모로 평가하는 건 나쁜 버릇 아닐까?
그러는 너도 겨우 12살 될까 말까 해 보이는데 중급 정령을 다루잖아."
"나는 14살이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정령사인걸 어떻게 알았어?"
"그야 네가 싸우는 장면을 봤기 때문이지.
그만큼 거대한 덩치의 흙 거인이 땅의 중급 정령인 멀든이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고 보는데."
"하지만 멀든은 지금까지 계약자가 적어서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맙소사, 그러고 보니 당신도 정령사였구나?"
소녀의 놀란 시선은 그의 옆에 있던 이사나에게 향해 있었다.
동족(?)끼리는 서로 알아보는 법인지, 단박에 그가 정령사임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러고 나서 소녀는 이제야 새삼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이렇게 느낌이 확실한데 왜 진작 눈치 채지 못했지?
황실직속의 정령사들도 당신만큼 강한 기운을 풍기지는 못했어. 설마 상급 정령사?"
"에…일단 그렇습니다만."
"그 닭살 돋는 존대어는 집어 치워.
날 소름 돋게 만들어서 죽일 생각이 없다면 말이야.
있지. 다루는 정령이 뭐야? 난 기운을 느낄 줄 알아도 아직 속성은 구분하지 못하거든."
"아하하…무, 물인데."
"물?! 그럼 당신이 물의 상급 정령사란 말이야? 세상에!
그 만나기 힘들다는 물의 정령사를 보게 되다니! 그것도 상급의 정령사를!!"
그 옆에 있는 존재는 정령왕인데요…
난처하게 굴러가는 이사나의 눈동자는 바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살포시 무시한 나는 피식 웃으면서 소녀에게 추가 설명을 덧 붙였다.
"참고로 널 구해준 사람도 바로 그 녀석이니까, 확실하게 감사인사를 하도록 해.
그래뵈도 상급 정령사 중에서도 뛰어난 실력자라,
녀석의 도움을 받는 것부터 영광인 셈이니 말이야."
"에, 엘!"
"헤에, 그렇구나. 도와줘서 고마워. 오해해서 정말 미안했어."
상급의 정령사라면 나이를 떠나 어지간한 검사 몇 명쯤은 단신으로도 상대할 수 있었다.
같은 정령사로서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소녀는,
그가 자신을 구해준 존재임을 순순히 납득한 듯 보였다.
감탄과 고마움이 섞인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이사나는
눈에 띄게 얼굴을 붉히며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그…그게. 엘이 과장을 해서 말한 거야. 사실 나는 한 것도 별로 없어.
구해내긴 했어도, 정작 치료한 사람은 엘이었는걸.
그러니 인사라면 내가 아니라 엘에게 해야 해. 그가 아니었다면 죽었을지도 모르니까."
"치료?"
그의 말에 소녀는 황급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오랜 시간 흙바닥을 뒹군 바람에 너덜너덜 해진 옷 사이로
흉터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가 드러나 있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다리며 팔뚝을 연신 살피던 소녀는 이윽고 얼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2년 전에 넘어져서 다쳤던 상처까지 없어졌어. 설마 당신…신관?"
"맞아. 엘뤼엔의 사제라고 들어는 봤는지?
뭐, 문장까지 보여주면서 확인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드, 들어본 적 있어.
어둠속성의 신을 섬기는 신전 중 유일하게 치유능력이 있다는 사제들 말이지?
언젠가 기회가 오면 꼭 한번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존재였어.
형벌의 신을 모신다고 해서 꽤나 험상궂은 인상을 예상했었는데…왠지…"
소녀는 뭔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끝을 살짝 흐렸다.
그대로 두었다간 무슨 말을 내뱉을지 겁나, 나는 얼른 화제를 돌리기 시작했다.
"아무튼 우리에 대한 오해는 풀린 거지?
여긴 네가 싸웠던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숲이야.
오늘은 늦었으니까 여기서 노숙하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다음 계획을 정하도록 할게."
"숲이라니…
바론 사막 근처에 있는 숲이라면 죽음의 숲 밖에 없잖아.
온갖 마물의 밀집장소에서 노숙을 할 셈이야?
아무리 상급정령사라도 전투가 길어지면 지치게 될 텐데?"
"아, 그건 걱정할 것 없어. 몬스터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근방에 결계를 쳐둔 상태니까.
우리 일행 중엔 마법사도 있거든."
"마법사?"
소녀의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갑자기 숲 저편에서 '꿰에에엑!'하는 비명소리가 울리더니,
커다란 진동과 함께 무언가가 우리 앞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쿠웅!
"꺄, 꺄악! 이게 뭐야!!"
그것은 단 일격으로 저세상 열차를 타버린 커다란 덩치의 멧돼지였다.
난데없는 돼지의 시체를 보고 놀란 소녀가 기겁을 하며 이사나에게 매달리는 순간,
경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늘 저녁은 바비큐다! 고기스튜 다들 괜찮지?"
"시벨리우스…이런 건 예고 좀 하고 던지면 안 될까?"
"응? 왜? 싫어? 오랜만에 고기라 좋아할 줄 알았더니."
"아니, 좋아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라도 갑자기 돼지 시체가 머리위에서 떨어지면 놀라게 된다고!
그러나 난 녀석에게 방금 그가 저지른 사태에 대한 충고를 해줄 수 없었다.
소녀의 놀란 목소리가 나보다 먼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에, 엘프?"
"이런, 이런~ 사물을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해선 안 되지~소녀여!
나는 엘프같이 능력 없는 존재가 아니라 그 이름도 유명한…"
"엘프 맞아! 신기하지?"
그대로 두었다간 본 정체를 순순히 다 가르쳐 줄 것 같았는지
이사나가 잽싸게 끼어들며 말을 돌렸다.
다행히 소녀는 별다른 의심의 기색 없이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응. 엘프는 태어나서 처음 봤어. 귀가 뾰족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피부색까지 다를 줄은 몰랐네? 굉장히 신비한 느낌이야."
"아, 그건 시벨리우스님이 블루엘프라서 그래.
푸른색 피부와 은발은 블루엘프의 특징이거든."
"블루엘프라니… 바닷가에 터전을 이루고 산다는 엘프 종족을 말하는 거야?"
"응. 지금은 우리와 여행 중이지만 말이야. 일행 중 유일하게 마법을 하실 줄 아는 분이지."
"헤에, 그렇구나. 엘프에 신관과 정령사라니…
뭔가 안 맞을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어울리는 조합인 것 같아. 멋진데?"
소녀의 칭찬에 이사나는 붉어진 얼굴로 맥없이 헤실 거렸다.
장차 팔불출남편이 될 가능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후 간단한 자기소개를 통해 알게 된 소녀의 이름은 '알리사노 알 드레프'.
본인의 말에 따르면 알폰프 제국 지방귀족의 서녀(庶女)였다.
어머니가 평민이었기 때문에 본부인의 자식들과는 엄연히 위치가 달랐지만,
타고난 미모와 총명함 덕분에 대놓고 무시를 당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했다.
특히 어릴 때부터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영주민들 사이에서는 거의 성녀처럼 추앙을 받았다는 소리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특별한 능력이라면 너의 그 정령술을 말하는 거야?"
"맞아. 눈치가 빠른데? 농부들에게 땅의 정령들이란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존재거든.
이 능력을 온전히 각성한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난 선천적으로 정령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던 모양이야.
계약을 하지 않아도 정령들이 스스로 도와줄 정도였으니까."
"흐음, 확실히 벌써 중급 정령을 다룰 정도라면 그럴 만도 하네.
하지만 그 사실은 어떻게 알았지? 대부분 계약하기 전에는 눈치 채기 힘들잖아?
자연계의 정령들이 눈에 보였을 리는 없고."
"아아. 그가 말해줬어."
"그?"
"응. 내가 이 능력을 각성하도록 도와준 존재."
굳이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존재'라고 표현한 것부터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그러면서 얼굴 가득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는 소녀 알리사의 모습에
나는 어렴풋이 잊어버리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가 기절하기 직전 중얼거렸던, 아주 낯익은 친우의 이름이 말이다.
"설마 네가 말하는 존재가 트로웰?"
"응? 헉! 어, 어떻게 알았어?"
당황했는지 단박에 긍정해 버리는 알리사를 보며 나 또한 복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 그러고 보니 언젠가 들은 것도 같다.
땅의 기운이 유달리 강한 소녀가 있다고 했던가?
10년 후라면 상급 정령도 바라볼 수 있지만 아직은 나이가 어려서 무리라고 했었지.
트로웰 본인이 도와줘서 멀든과 계약하게 만들었다고.
'나 참. 왜 그걸 지금까지 잊어버리고 있었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것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짧게 중얼거린 나는 곧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알리사를 쭈욱 흩어보았다.
트로웰을 소환하겠다고 큰 소리를 떵떵 쳤다는 여자애가 바로 이 녀석이란 말이지?
"흐음, 대담한 선언치곤 그다지 기대치에 못 미친 것 같은데?"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별거 아니야. 그냥 열심히 하라고."
"??"
격려의 뜻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자 알리사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리둥절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서 툭 내뱉는 소리에 이번엔 내 쪽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정령들이 후두둑 떨어졌어. 당신 정체가 뭐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눈에 보이진 않지만 내 몸에는 언제나 수 십 마리의 땅의 정령들이 붙어있어.
녀석들이 내게서 떨어지는 순간은 자신보다 상급의 정령이 다가왔을 때나,
기운이 강한 사람이 있었을 때뿐이야.
말해주지도 않은 트로웰의 존재를 단번에 알아맞히는 것도 그렇고, 상당히 수상해."
"아하하…"
물론 내가 건드리는 순간 놈들이 쏴아악~ 흩어지긴 했다.
설마 그걸 느끼는 인간이 존재할 줄이야!
정말 기똥차도록 예민한 기운이 아닌가!
나는 그때서야 트로웰이 알리사에게 호기심을 느낀 진정한 이유를 짐작했다.
이거 굉장히 범상치 않은 꼬마인걸?
나는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래? 그런 것까지 느낄 수 있다니 굉장한 걸?
하지만 난 그렇게 대단한 녀석이 아니야.
아마도… 신성력과 정령술이 서로 상극이라 정령들이 놀란 게 아닐까?"
"그럼 트로웰을 안 것은?"
"기억 안나? 너 기절할 때 잠깐 트로웰이라고 중얼거렸었잖아.
그래서 그냥 짐작해 본거지, 정말로 땅의 정령왕과 친분이 있다곤 생각 못했어.
혹시 정령왕의 계약자? 아, 그럴 린 없겠구나.
만약 그랬다면 네가 위험에 처하는 순간까지 정령왕이 나타나지 않을 리 없으니까."
그러자 이사나는 동조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알리사의 얼굴은 반대로 상당히 침울해졌다.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싶어 멀거니 바라보고 있자니,
알리사는 뚱한 표정으로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 불쌍해 보인다는 거야?"
"어?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치잇. 다음부턴 상황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구.
트로웰은 반드시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야.
위험한 순간에도 나타나지 않은 건,
내 스스로의 힘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상대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암, 녀석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당차게 외친 알리사의 말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시벨리우스였다.
아주 당연한 소릴 들었다는 듯 고개를 커다랗게 주억거리는 모습에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도 남는다니? 뭘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왜~ 트로웰 성격 죽이기로 유명하잖아.
겉보기엔 어린애 같아도 속은 늙은이라,
어린애들은 고난을 겪으면서 자라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사상이 뿌리 끝까지 박혀 있다고.
아마 저 여자애가 당장 죽어가는 순간이 왔어도 돌아보지 않았을 걸?
스스로의 일은 알아서 챙겨야 한다고 말이야."
"하아?"
"틀려! 트로웰은 그런 성격이 아니야! 나한테 얼마나 자상했는데!"
시벨의 말에 흥분했는지 알리사는 얼굴까지 벌겋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솔직히 나로서도 공감할 수 없는 말이었는지라 황당하기는 마찬가지.
그러나 불신의 눈초리가 한가득 쏟아지는 와중에도 시벨의 태도는 의연했다.
"자상? 하- 누가? 트로웰이?
그렇다면 넌 눈에 뭔가 단단히 씌었거나,
그를 만난 순간 요정이 주는 달콤한 환상에 현혹된 거다.
아니면 다른 녀석이 정령왕의 이름을 사칭한 걸지도 모르지.
녀석이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바로 인간이야, 인간. 하긴 뭐, 애당초 정령 외에는 관심도 없었지만."
"그, 그럴 리 없어!"
"너보다 더 오래 산 내가 직접 보고 겪은 것을 말한 것뿐이야.
믿고 안 믿고는 너의 몫이지.
한때 아크아돈의 모든 인간을 멸족시킬 계획까지 가졌던 녀석이니 말 다 한거 아니겠어?"
"며…멸족?"
멸족이란 뭐시냐…
그, 그러니까…온 세상의 인간이란 인간은 전부 없애버린다는, 그걸 말하는 거야?
놀란 표정으로 되묻는 내 말에 시벨리우스는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선 눈빛을 빛내며 이렇게 물어오는 것이 아닌가!
"정말 기억 안나? 그때 녀석을 막았던 사람이 바로 엘, 너였잖아."
"뭐?"
"울면서 매달렸었잖아.
덕분에 트로웰이 제정신을 찾은 거라고, 이 세상의 인간들은 전부 엘한테 감사해야 한다니까?
엘이 아니었으면 십중팔구 멸족했을 거야."
"하아. 또 그 소리였냐."
결국 녀석은 어떻게든 나를 자극(?)시켜서 전생의 기억을 떠오르게 할 셈이었나 보다.
있지도 않은 전생…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어폐가 있다만,
4천년 전의 기억 따윈 정말로 없단 말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큰 문제는 바로…
"당신도 트로웰을 만난 적이 있었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평범한' 신관으로 알고 있던 한 순진한 소녀의 질문이었다.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저 녀석의 말은 신경 쓰지 마. 지금 날 다른 사람하고 착각하는 거거든."
"착각?"
"응. 아마 과거에 나와 상당히 닮은 사람과 친했던 모양이야.
분명한건, 녀석이 말한 내용은 내 기억 속엔 전혀 없다는 소리지."
"그럼 당신은 트로웰을 만난 적이 없다는 소리?"
"아, 글쎄 녀석이 말한 내용은 기억에 없다니까?"
물론 '녀석이 말한 내용만' 기억에 없을 뿐이었지만, 이런 사소한 건 넘어가기로 하자.
어차피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완전히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알리사를 보며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시벨녀석은 탐탁지 않았던 모양이다.
곧바로 나를 향해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것을 보면.
"정말 엘이 맞다니까! 왜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거야!"
"아니, 시벨리우스. 그게 아니라…"
"네가 맞아. 내가 본 사람은 분명히 네가 맞단 말이야!
내 종족의 긍지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
엘이라는 이름 외엔 정체도 신분도,
살아온 세월 따위 하나도 알려주지 않은 무심한 녀석이었지만 그는 분명히 너였어! 엘이었다고!"
그동안 참고 참아왔던 모양인지 시벨리우스는 이때가 기회라는 듯 격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나 역시 마냥 받아줄 정도로 친절한 성격이 아니라서,
바로 새된 반응이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그게 아무리 어린 여자애일지라도)
본래 정체에 대해 논한다는 상황 자체가 나에게는 충분히 짜증스러웠기 때문이다.
"누가 엘이 아니라고 했어? 다만 그 엘과 내가 다른 사람일 뿐이야."
"엘!"
"제발 적당히 좀 해줘, 시벨리우스.
그래, 네 말마따나 나한테 전생이 있었다 치자.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미 태어난 시기가 다르고 살아온 세월이 다른데.
사람은 한번 죽으면 끝이야. 환생을 했다 해도 그 삶이 다시 이어질 수는 없다고!"
"!!"
조금 심했다 싶긴 했지만 이대로 놔두면 녀석의 상상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겁나,
적절한 제지를 가할 필요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지는 시벨의 말에 나는 그대로 할 말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그런 말이 어디 있어? 그런 말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실례잖아.
맞아.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끝이야.
환생했다고 해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거겠지.
네 말이 맞아, 엘. 그래도…설령 그렇다 해도…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해서는 안 되는 말이잖아."
"…아…"
그때서야 내가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시벨리우스는 삐질 대로 삐진 뒤였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녀석은 내가 미처 사과도 건네기 전에
제 할말만 하고 돌아서 버렸다.
"잘 알았어. 이제 이 문제로 다시는 귀찮게 굴지 않을게.
하지만 같이 다니는 것은 허락해줘. 어차피 당장은 갈 데도 없으니까…말이야."
"아, 저기 나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미안. 나 잠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확실히 너무 오랜만에 깨어나서인지 적응이 덜 된 모양이야. 조금만 혼자 있게 내버려둬 줄래?"
"……"
난 바보인가 보다. 어쩌자고 스스로 후환이 생길 일을 만든단 말인가?
혼자서 터덜터덜 구석진 자리를 찾아들어가는 시벨리우스의 모습을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다독이는 듯한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걱정하지 마, 엘. 지금은 저래도 금방 풀릴 거야."
"이사나…"
"지금은 둘 다 너무 감정이 격해져서 다툰 것뿐이야.
오늘은 이만 쉬고 복잡한 일은 내일부터 생각하자. 날도 저물었잖아."
"으응."
평소였다면 우울해 하는 쪽이 이사나고 내가 위로하는 입장이었을 텐데,
그 위치가 반대가 되고 보니 상당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녀석이 너무 훌쩍 자라버린 기분?
어렸을 적 동네에서 같이 놀던 또래가,
어느새 철이 들어서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을 때도 이런 느낌을 받았었던 것 같다.
하긴, 이사나가 언제까지 내 도움이 필요한건 아니겠지.
황권을 되찾으면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질게 뻔하고…
나와는 다르게 몸도 자랄 테고, 나중에 결혼해서 자식도 가질 테지.
(그 상대가 누군 진 이미 결정된 것 같지만.)
그런 생각이 들고 보니 그나마 나아지던 기분이 더욱 엉망이 되 버려,
나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우울한 기분이었다.
"뭐야? 그래서 결국 트로웰을 봤다는 거야, 안 봤다는 거야?"
한없는 우울과 심란의 구덩이에 빠져들려던 나를 깨운 건 새초롬한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샌가 화제에서 소외 돼버린
알리사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부분 싸우는 분위기가 되면 궁금한 게 있어도 참는 게 보통인데,
끝까지 캐내고 싶어 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집요한 성격인가 보다.
그만큼 트로웰의 존재가 알리사에게 의미가 있겠지 싶어,
나는 솟아오르려는 짜증을 간신히 억눌렀다.
"이곳에서 땅의 정령왕을 만난적은 없어."
"하지만 저 엘프는…"
"착각하는 거랬잖아. 녀석이 말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야. 나한텐 전혀 그런 기억 따위 없으니까."
"흐음~ 단정하긴 어렵지 않아? 전생이란 게 있잖아, 전생.
엘프들은 수명이 기니까 환생전의 당신과 만났던 것일 수도…"
"그럴 리 없어. 아니, 설령 그렇다 해도 내가 용납 못해.
난 전생 같은 거 필요 없거든."
단호하게 대답한 내 말에 알리사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상당히 재미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수상하네. 그렇게 말하니까 왜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지?"
"엥? 어째서?"
"아니, 당신 표정이 말이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게…
마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걸 억지로 떠올린 것 같거든.
'필요 없다'는 말을 과감히 할 수 있다는 건,
전생의 삶이 지금의 삶보다 나빴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 아니야?"
"!!"
이, 이런 쓸데없이 예민한 꼬마 같으니라고.
나는 얼른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리곤 다시는 이런 오해를 하지 않도록 따끔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틀려. 나는 그저 전생 따위에 휘말려서 현재의 삶을 포기할 생각이 없을 뿐이야.
기억도 나지 않는 일 때문에 쓸데없이 시간낭비를 하고 싶진 않으니까."
"헤에. 현재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건가?
뭐, 그것도 나쁘진 않네. 하지만 저 엘프에게는 좀 너무했어.
어쨌든 친구였잖아?
육체가 달라도 영혼이 같다면, 결국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
거부당하는 건 가엽잖아."
그렇게 말한 알리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덧붙였다.
머릿속까지 멍해질 만큼 강한 의지가 담긴 목소리였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가장 불쌍한 건 기억하지 못하는 그 자신이라고 생각해.
만약 목숨을 버릴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을 전생이라는 이유로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건 스스로에 대한 철저한 배신이 될 테니까."
"!!"
"그러니까 기억하려고 노력이라도 좀 해봐.
무조건 안 된다고 짜증내지 말고. 자신을 배신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잖아?
나중에라도 기억을 떠올렸을 때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게 만들지 말라는 소리야."
"…너…정말 12살 맞아?"
"이익! 14살이라니까!!"
겨우 콩알 만 한 여자애가 어른들도 깜짝 놀랄 만큼의
확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놀라웠다.
감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내게 알리사는 약간 붉어진 얼굴로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었다.
"그런 건 조금만 생각해 보면 간단하잖아?
좀 더 나중의 일을 생각해보라고, 사제님.
후회할 일은 미리 만들지 말자는 게 내 삶의 모토라서 말이야."
"하지만, 그가 정말로 착각하고 있는 거라면?"
"그건 그때 가서 상대편이 쪽팔려할 일이지, 사제님이 걱정할 일은 전혀 없는 거잖아.
왜? 설마 모든 진실이 밝혀졌을 때, 그가 돌아서게 되는 것이 두려운 거야?"
"아…."
정곡을 찔린 기분이랄까?
심장 한구석이 날카롭게 뚫린 듯한 기분에 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래.
어쩌면 나는 그걸 겁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벨리우스가 생각하는 '엘'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그가 나를 외면하고 멀어지는 상황을.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조건으로 그와 친구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일찌감치 녀석과 '이별'할 것을 연습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단순히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하아. 나 이렇게 한심한 놈이었나?'
착잡한 표정으로 한숨만 내쉬는 내가 안 돼 보였는지 알리사는 쯧쯧 짧게 혀를 찼다.
"그렇게 풀 죽을 것 없어. 누구에게나 자신이 가장 소중한거니까.
하지만 바보 같아. 왜 잃을 것 만 생각하지?
저 사람이 착각하고 있는 존재가 될 수 없다면,
이제부터라도 그와 대등할 만큼 가치가 있는 친구가 되어주면 되잖아.
그럼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져도 절대 떠나지 않을 거 아니야."
"…그래, 생각해 보니 네 말이 맞아. 똑똑하구나, 알리사. 좋은 교훈을 얻었어."
"알았으면 됐어."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는 알리사의 모습은 여느 그 또래의 여자애와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천진난만해 보였다.
어딜 봐도 어린애로 보이는 녀석이 방금 전까지 나를 향해
진지한 충고를 건넸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생각해 보니 알리사는 정체모를 적들에게 목숨의 위협을 당한 상태가 아니던가!
그런 상황에서 울기는커녕 배짱 좋게 웃음을 터뜨리는 배포라니,
생각할수록 대단한 꼬마가 아닌가!
'호오, 이사나. 이거 어째 제대로 임자를 만난 걸지도?'
온유한 황제와 귀족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 왕비라….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제대로 그려지는걸 보면 천생연분이 따로 없는 것 같다.
그런 생각으로 두 사람을 유심히 살펴보는 나에게 낭랑한 알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내 소개는 했어도 정작 당신들 소개는 못들은 것 같은걸?
사제님과 정령사라는건 알겠는데 말이야. 정식 이름이 어떻게 되는 거야?
사제님 이름은 엘…이 맞던가?"
"아참 그렇지! 맞아, 나는 그냥 엘이라고 부르면 돼.
그리고 저쪽에 앉아서 땅 파고 있는 엘프는 시벨리우스.
줄여서 그냥 시벨이라고 부르면 되고. 그리고 여기 있는 녀석은…"
"이, 이사나라고 해. 잘 부탁해, 알리사노."
"이사나?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은데. 성은 없어?"
그녀의 말에 이사나의 얼굴은 순식간에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이름이야 그렇다 쳐도, 성을 밝히면 자연스레 드러날 수밖에 없는 녀석의 신분이 문제였던 것이다.
한눈에 반한 상대에 대한 예의였는지, 평소처럼 과감하게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녀석을 보며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직까지는 내 도움이 필요하다니까.
"미안, 알리사. 이사나는 자신의 가문을 밝히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이 제국 사람이 아니거든."
"아? 혹시 카터스 제국 사람인거야?"
"카터스?"
"응. 그 제국과 우리제국은 몇 백 년 지기 원수라고 들었어.
확실히 그 제국의 사람이라면 신분을 밝히기가 애매하겠지.
좋아, 비밀로 해줄게, 이사나. 이래봬도 입은 무거운 편이거든."
"아…고, 고마워. 알리사."
고맙게도 알아서 오해해주는(?) 알리사 덕분에 상황은 자연스럽게 넘어갈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초대하지도 않은 불청객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런~ 서로 자기소개를 하는데 저는 끼워주지 않으실 겁니까?
지금까지 쭈욱 따라다닌 성의도 있는데 너무하세요오."
"루카르엠!?"
"꺄악! 이 남자는 뭐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 사람의 얼굴이 내려오자 알리사는
기겁을 하며 이사나의 품에 매달렸다.
그러자 팩하고 사납게 노려보는 이사나의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루카르엠은 모처럼 등장한 보람도 없이 또다시
녀석에게 마이너스 점수를 얻고 만 것 같았다.
이때만큼은 멀리 떨어져 있던 시벨리우스도 불쾌한 표정으로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어지간히 주변에 적을 만들고 있는 마족이었다.
"예고도 없이 등장하지 말아요. 사람들이 놀라잖아요."
"아, 죄송합니다. 늦었다간 제 소개는 영영 빼놓으실 것 같아서 말이죠.
워낙 이사나군에게 미운털이 박혀 있지 않습니까. 하하하!"
지금 이 행동으로 더 미운털이 박힌 건 예상 못하나 보지?
그러나 루카르엠은 나의 한심스러운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자신이 할 말만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알리사를 향해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건네는 일이었다.
"반갑습니다, 레이디. 저는 마계 4대 공작 어둠의 기사 루카르엠이라고 합니다."
"마계라니. 서, 설마 마족?!!"
"그거야 마계엔 역시 마족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생김새는 인간과 그다지 다르지 않지요?"
"무, 무슨!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사제님? 어째서 마족이…"
"아, 그게…"
"하하하! 단지 제가 일행으로 넣어달라고 쫓아다니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엘님과 이사나군의 반응이 워낙 강경하셔서요, 그게 말처럼 쉽지 않군요."
넉살좋게 대꾸하는 루카르엠의 태도에 알리사는 잔뜩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의심스럽다는 기색이 가득 들어찬 얼굴이었다.
"당신 정말 엘뤼엔의 사제 맞아?"
"에? 무슨 소리야?"
"그렇잖아. 마족과 가까이 하는 신관은 마신전의 사제밖에 없다고.
다른 신전의 사제들은 마족과 일체 상종을 안 한단 말이야.
그런데 어째서 지금 이 마족이 당신을 쫓아다니는 거지?"
"엘뤼엔도 엄밀히 말하면 마신계열인걸. 딱히 이상하다고 볼 이유는 없지."
그러나 이 말에 대답한 것은 그때까지도 생글생글 웃고 있던 루카르엠이었다.
뭔가 상당히 신기하단 태도로 나를 바라본 녀석은 흥미로운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엘뤼엔? 엘님…혹시 형벌의 신과 친분이 있으십니까?"
"아, 그게 으음… 일단 저는 그의 사제니까요. 친분이 있다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눈빛으로 '내 정체 밝히면 죽~어?'라는 의미를 쏘아 보내자
루카르엠의 얼굴에 삐질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점점 짙어지는 호기심의 빛은 나의 협박에도 전혀 굴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 뜬금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신의 사제를 사칭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다 혼나시면 어쩌시려고요."
"하?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사칭이 아니라 면요?"
"하지만 엘님, 그분의 사제임을 뜻하는 증표가 어디에도 없지 않습니까?
사람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쉽게 믿어주지 않을 겁니다."
"아, 맞아. 당신 처음 소개 할 때도 문장을 보여주지 않았어.
단순히 귀찮아서 안 보여준 게 아니라, 정말 없었던 거야?
그런데 나는 어떻게 치료한거지?"
"윽! 문장이 없기는 누가 없다는 거야. 보여주면 되잖아, 보여주면!"
알리사까지 완전히 루카르엠의 편에 돌아서서 몰아붙이는 상황이 되자,
당황한 나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그때까지 착용하고 있던
푸른색의 서클렛을 과감하게 벗어 들었다.
그러자 흐읍 짧은 신음성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이마에 선명하게 자리 잡은 백색의 문장을 발견한 두 사람(?)의
눈동자가 놀람과 감탄으로 휘둥그렇게 벌어졌다.
"끄응. 설마 이마에 문장이 있을 줄이야. 이거 한 방 먹었는걸요, 엘님."
"이, 이마에 문장?
세상에…이런 건 대사제나 교황급의 사람에게만 내려지는 거잖아.
미, 미안.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괜히 의심을…"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이마에 받은 건 단순히 운이 좋았을 뿐이고.
실제론 대사제도 뭐도 아닌 보통 사제에 불과하거든. 알았어요, 루카르엠?
이건 단.순.히. '사제'임을 뜻하는 표시일 뿐이지 깊은 의미가 있는 건 아니라고요."
"예에, 그렇군요. 깊은 의미라…"
"글쎄, 그게 아니라니까요!"
흐음하고 낮게 신음을 울린 그는 나의 위아래를 빤히 흩어보더니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냈다.
입가에 걸린 미소는 보기 두려울 정도로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왜, 왜 그렇게 보는데요?"
"아니, 아무것도요."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한참동안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작은 휘파람을 불면서 휘익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곤 아까부터 이쪽을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던 시벨리우스와 눈이 딱 마주치더니,
재밌어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설렁설렁 걸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뭐? '저 녀석을 이용하면 되겠다'라고?
"자, 잠깐, 루카!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아~ 잠시 만요, 엘님.
저 순수의 피를 잇는 종족과 잠깐 대화 좀 나누고 싶어서요.
저런 곳에서 혼자 놀게 내버려둘 순 없잖습니까?
아까 보니 다투시는 것 같던데, 제가 책임지고 화해시켜 드리죠."
"그딴 것 필요 없어!!!"
그러나 처절한 외침과는 달리, 녀석은 무력할 정도로 간단히 루카르엠의
손에 붙들려 한참동안 떠벌떠벌 그가 뱉어내는 언어의 홍수에 갇혀 있어야 했다.
가끔가다 쓰윽쓰윽 머리까지 만져주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시벨리우스가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 (그 이유는 절대 알고 싶지 않지만.)
'…그건 그렇고. 대체 아까는 왜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봤던 거지?'
마족과 엘뤼엔의 관계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단순히 놀라워한다고 보기엔 루카의 눈빛에 떠올라있던 무궁무진한(?) 장난끼가 꺼림직 했다.
갑자기 가만히 있던 시벨에게 다가가 엉뚱한 행동을 하는 것도 그렇고.
대체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는 녀석이랄까.
<당부할 것은 그에게 절대 내 문장을 받았다는 소리는 전하지 말라는 거다.
알겠냐, 아들? 절대로다. 절.대.로!>
이 순간, 언제고 엘뤼엔에게 들었던 당부의 말이 떠오르는 것은 결코 내 잘못이 아니었다.
어쩌지, 엘뤼엔?
난 아무래도 네가 말한 '그'가 누구인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아. 아하하….
"제길! 그 마족 자식 기분 나빠! 대체 뭐하는 놈이야?"
의도는 어찌되었던 결과적으로 루카의 행동은
시벨리우스의 화를 단번에 풀어버린 계기가 되 버렸다.
그가 돌아간 후에도 한참동안이나 하염없이 푸념을 늘어놓는
시벨의 모습에 나는 슬쩍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애써 묵묵한 척 대답했다.
"마계 4대 공작이라잖아. 못 들었어?"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 엘! 그 자식, 나를 완전히 애 취급했어.
머리를 쓰다듬지 않나, 어깨를 두드리지 않나.
생글생글 웃는 면상도 하나~~도 마음에 안 든다구!"
"아, 그건 나도 동감."
"그치? 그치? 아무튼 마족들이란 옛날부터 정말 싫었다고.
애체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
엘~ 그 녀석 좀 그만 떨궈내면 안돼? 같이 다니기 싫단 말이야."
"흐음. 굳이 그러지 않아도 이미 어딘가로 사라진 것 같은데?
아까부터 기척이 안 느껴지거든. 그나저나… 너 이제 화는 풀린 거야?"
내 물음에 씩씩거리던 시벨리우스의 얼굴이 딱 굳는 게 느껴졌다.
그리곤 벌겋게 붉어진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더니 큰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이다.
의외라는 듯이 바라보는 내게 녀석은 한결 차분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화를 낸다고 전부 해결 될 일이 아니었는데.
내가 좀 조급했었던 모양이야. 조금 더 네 입장을 배려해야 한다는 걸 잊었어.
이제부터 주의 할게."
"하지만 심한 말을 한건 오히려 내 쪽인데…"
"괜찮아, 그 정도 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니 어쩔 수 없지. 대신 엘도 앞으론 그런 말 하지 않기다?"
"으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벨은 놀랄 만큼 환하게 얼굴을 밝혔다.
기쁨으로 반짝이는 모습이 얼마나 눈부셨는지, 순간 나도 모르게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였다.
음, 어지간한 미인들엔 면역력이 생겼을 줄 알았는데, 아직 무리였나?
괜시리 민망스러운 기분에 나는 그냥 살짝 볼을 긁적이며 멋쩍게 웃고 말았다.
그러다 문득, 그가 알고 있는 '엘'에 대한 호기심에 나도 모르게 무심코 물었다.
"그런데, 그 엘이란 사람이 정말 나랑 똑같이 생긴 거야?"
"응? 아아. 몇 가지는 좀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비슷해.
엘은 금발이었거든. 그리고 눈동자도 선명한 초록색이었고."
"인간이었다며. 그런데 너와는 어떻게 만난거야?"
"우리 일족은 한 장소에 진득이 붙어있는 일이 거의 없거든.
엘과도 여행 중에 만났어. 그땐 이미 녀석 옆에 엘퀴네스가 붙어있었지만 말이야."
"그럼 그때 이미 정령사였다는 소리?"
"그렇지.
게다가 타고난 감각이 남달라서 보통 정령사보다 정령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어.
그리고 정령왕 들에게도 거리낌 없이 대했고. 밝고 명랑해서 누구나 다 좋아했지."
지난날을 회상하듯 아련한 표정을 짓는 시벨리우스의 모습에 나는 슬쩍 미소 지었다.
엘이란 녀석, 누군진 몰라도 정말 주변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있었나 보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 나 일리 없잖아.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말을 삼키며 나는 조용히 되물었다.
"굉장히 친했던 모양이네. 혹시…엘뤼엔, 아니 엘퀴네스도 그를 좋아했어?"
"그거야 당연하지. 엘이 녀석을 잘 따랐거든. 의지를 많이 하는 것 같았어."
"…트로웰도?"
"음. 트로웰하곤 초반에 많이 삐걱거리긴 했는데, 그래도 엘이 녀석을 참 많이 좋아했어.
결국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친한 친구가 되었었지.
사교성 하나는 정말 좋은 녀석이었거든."
"그렇구나."
어쩐지 모든 게 다 허무해진 심정이랄까.
나는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는 손을 들어 가만히 입가를 쓰다듬었다.
한국에 있던 시절 불안할 때마다 버릇처럼 했던 동작이었다.
어쩌면 엘뤼엔은…내가 그와 닮았기 때문에 아들로 삼았던 건 아닐까?
트로웰 역시 나에게서 그를 투영했기 때문에 잘해주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날 처음 '엘'이라고 부르겠다고 했던 사람이 트로웰이었지.'
왜 이제야 깨달은 걸까.
틀어진 수레바퀴가 겨우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에 한순간 서러운 감정이 복받쳤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지?
이제야 겨우 내 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처음부터 혼자였던 셈이다.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이럴 바엔 차라리 한국이 더 나았어. 거긴 적어도…다른 사람의 대타는 아니었으니까."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엘? 왜 그래? 안색이 나빠 보여."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시벨리우스의 시선에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슬퍼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되고 보니 오기가 생겼다.
누가 4천 년 전의 인간 따위한테 질 줄 알고? 두고 봐!
이미 한참 전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닐 녀석 따위, 다시는 생각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릴 테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는 것은 방금 전에 들었던 알리사의 명랑한 한마디였다.
<바보 같아. 왜 잃을 것만 생각하지?
저 사람이 착각하고 있는 존재가 될 수 없다면,
이제부터라도 그와 대등할 만큼 가치가 있는 친구가 되어주면 되잖아.>
"그 말이 맞아, 알리사. 어디 누가 이기는지 해보자고. 후후후…"
"에, 엘?"
어딘지 불안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투지에 타 올라 있느라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이때만큼은 루카르엠의 이상할 정도로 찝찝했던 미소도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혀져 있는 상태였다.
만약 이때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 줄 미리 알았다면 조금은 더 긴장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쾅!
견고하게 만들어진 나무 탁자위로 커다란 소음이 울려 퍼졌다.
당장이라도 때려 부술 듯 주먹을 내리친 남자는 움츠러들 만큼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뭐가 어쩌고 어째? 전멸? 한 명 빼고 전부 죽었단 말이냐!"
"소, 송구스럽습니다."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게야! 방심은 금물이라고 누누이 일렀거늘!
어둠의 기사단들의 실력이 고작 이 정도였나! 그까짓 계집애 하나도 못 잡아 와!"
호통을 치고 있는 이는 얼마전 그의 기사단을 시켜 타국의 소녀를 납치하라
명령한 유카르테 대공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온 몸에 너덜너덜한 상처를 입은
기사 한명이 바닥에 쓰러질 듯 무릎 꿇고 앉아있었다.
이사나와의 전투 중 유일하게 혼자서 도망쳤던 기사들의 대장이었다.
"내 그곳의 지형과 소녀의 실력을 생각해 1년이란 기간을 주었다.
그런데 반년을 채우지도 못하고 전멸이란 결과를 가지고 오다니!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냐! 정녕 실망스럽구나."
"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예상치 못한 방해자가 생겨서…"
"방해자?"
"그,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들의 계획이 이사나 황제파의 녀석들에게 알려진 모양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자세히 말해 보거라."
그때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대공은 한층 진정된 모습으로 다음 말을 촉구했다.
그 모습에 용기를 얻은 기사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그가 기억하고 있던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소녀를 제압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중급 정령사라곤 해도 아직 어려 컨트롤이 불안정한 시점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소녀를 기절시킨 후 데려가려는 저희들을 저지하며 나타난 소년이 한명 있었습니다."
"소년?"
"예, 언뜻 보아도 17세를 넘어 보이지 않는 어린 녀석이었습니다.
주변에 다른 이 없이 오직 그 혼자뿐이라 기사들은 잠시 방심하고 있었습니다만.
아무래도…상급 정령을 다루는 정령사였던 모양입니다."
"뭐라? 상급 정령?"
그의 말에 대공은 앉아있던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기사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이전과는 비할 바 없이 사나워져 있었다.
"감히 내게 거짓을 고할 생각이냐!
어찌 17세 밖에 안 된 어린놈이 상급 정령사가 될 수 있단 말이야!"
"하,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고서는 소년이 불러낸
이상한 형태의 생물체를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투명한 물로 된 늑대의 형상이었습니다."
"물로 된 늑대? 설마 물의 상급 정령인 시큐엘을 말하는 거냐?"
"아, 그, 그러고 보니 소년이 그들에게 명령할 때 시큐엘이라 불렀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한 마리도 아니고 몇 마리를 쉽게 다루는 지라…"
"뭣이!"
확실히 상급 정령들이라면 어둠의 기사단 몇 명 정도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와중에 살아서 돌아온 것을 칭찬해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일이 단단히 꼬이려나 보군.'
짧게 속으로 혀를 찬 대공은 다시 한번 기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 소년이 황제파라 생각한 이유는 무엇이냐?"
"행동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알폰프 제국민은 아니었습니다.
저희들이 대공전하의 기사임을 알면서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던 것을 보면 황제파가 확실합니다.
또한 황제파냐고 묻는 질문에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큭. 정말 주변에 아무도 없더냐? 소년의 생김새는 어떠했지?"
"긴 은발에 황금색 눈동자였습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곱상한 느낌이라 그것만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동행자가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희와 싸울 땐 그 혼자뿐이었습니다."
"은발에 황금색 눈동자라…"
대공은 그가 알고 있던 황제파의 귀족 중 그와 비슷한 생김새의 사람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그와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는 곧 심각한 표정으로 한손을 들어 수염이 까칠하게 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이상하군. 그만한 나이에 상급 정령사라면 내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은발에 황금색 눈동자는 그리 흔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그런 오지까지 따라 붙을 정도라면 확실한 정보출처가 있었다는 뜻인데…
설마 그 늙은이가 흘렸나?'
이번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대공 그 자신과 어둠의 기사단,
그리고 정보를 제공했던 점술사 늙은이 밖에 없었다.
철저한 비밀을 요했던 일인 만큼, 정보길드의 첩자들이 끼어들 구석은 없었으니,
기사들이 배신하지 않은 이상 의심 가는 인물은 늙은 점술사뿐이었다.
"쯧. 다 늙어 죽어가는 것이 불쌍해서 살려뒀거늘,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군."
혼잣말로 짧게 중얼거린 그는 곧 테이블 옆에 있던 금종을 들어 흔들었다.
딸랑, 맑고 경쾌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구석에 검은 두건을 쓴 남자가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지금 당장 히켄 동굴의 늙은 점술사를 찾아 죽여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번 일을 방해했다는 은발머리의 정령사에 대해서 조사해 봐.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맡겨두십시오."
"오호호호! 천하의 대공전하도 안절부절 할 때가 있나보지?"
대공은 갑작스럽게 끼어든 웃음소리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활짝 열려진 창문 밖 발코니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있는 요염한 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마계 4대 공작의 일원인 암흑의 마녀 세르피스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본 그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살짝 고갯짓을 했다.
알아서 나가 있으라는 뜻이었다.
이윽고 방안에 남겨진 사람이 대공 하나만이 되자 세르피스는 기다렸다는 듯
빙긋 미소를 지으며 창문 안으로 들어섰다.
밤하늘 같이 짙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허리 아래에서 찰랑거렸다.
"무슨 일이지?"
"흐음~ 태도가 상당히 무례한 걸? 뭐, 좋아.
어차피 마왕전하의 계약자이니 봐주도록 하지.
위대한 어둠의 군주로부터의 전언이야. 거사의 날은 대체 언제 확정되냐는 데?"
"끄응.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런 건 재촉한다고 될 일이 아니야."
"어머. 그렇게 말해도 나는 무슨 소린지 모르는걸.
아무튼 이번 달 수량을 받으러 왔어. 준비해 뒀겠지?"
"물론."
벌써 10년이 넘게 해온 일을 잊어버릴 리가 없었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대공은 곧 그의 옆에 있던 장식장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각국의 존귀한 술과 와인이 진열된 것으로 그가 평소에 아끼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유달리 작은 모양의 병 하나를 꺼냈다.
언제나처럼 그것을 건네받은 세르피스는 호기심이 어린 얼굴로 병을 살펴보았다.
"이게 그렇게 귀한 술이라며?
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마왕전하만 풀 수 있는 봉인까지 걸어두는 거야?
확실히 굉장한 맛이긴 할 것 같은데."
"아아. 아마 자네들 마족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좋아할걸?
이달로 정확히 9천 9백 10잔 째겠군."
"그런 걸 일일이 기억하고 있는 거야? 아무튼 대단히 독한 인간이라니까.
뭐, 그에 대한 상이라고 하면 뭣하지만 내가 좋은 거 하나 가르쳐 줄까?"
"…?"
대공은 무심한 표정 그대로 눈꼬리만 살짝 치켜떴다.
무슨 말인지 어서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그것을 보고 장난스런 미소를 지은 세르피스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 들어보니 뭔가 대단한 계획을 실패한 것 같아서 말이야.
근데 그걸 방해한 주범이 아무래도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랑 꽤 인상착의가 비슷하던 걸?"
"…! 그게 누구지?"
"글쎄, 누굴까?"
"장난 하지 말아라, 마족! 이건 네가 섬기는 마왕에게도 중요한 문제다!"
"아앗, 깜짝이야. 알았어. 가르쳐 주면 되잖아.
정말이지 재미없기는 마왕전하나 이놈이나 똑같다니까?
음, 그러니까 말이야. 나랑 데르온이 얼마 전에 이사나란 꼬맹이를 쫓아다닌 적이 있었거든?"
"이사나?"
그녀의 말에서 낯익은 이름을 들은 대공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세르피스는 그것을 못 본 척 하면서 생긋 다음 말을 이었다.
"맞아. 그 왜 당신의 조카인지 뭔지 하는 꼬맹이 말이야.
그 녀석이 얼마 전에 폴리모프 마법을 사용해서 모습을 바꾼 걸 확인했거든.
허리까지 오는 고운 은발에 황금색 눈동자로 말이야."
"그게 정말인가?! 하지만 이사나는 정령사가 아닐 텐데?"
"어머? 그럼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
뭐, 믿든지 말든지 상관은 없어. 어차피 마왕전하께서 알아서 처분 명령을 내렸으니까."
"처분?"
"그래. 암흑의 기사 루카르엠이라고 알아?
그에게 당신의 조카를 죽이라고 명령하셨거든. 하지만 안심하진 마.
같은 마족이지만 루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를 녀석이니까.
명령이 떨어진지 한참이나 됐는데, 지금까지 그 꼬맹이가 살아있다는 게 바로 그 증거 아니겠어?"
"끄응. 루카르엠이라는 마족이 배신했다는 소리인가?"
낭패감이 가득한 대공의 표정에 세르피스는 재밌다는 듯이 깔깔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를 놀리는 기색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정말 바보구나?
마족 사이에선 '배신'이란 단어는 있을 수 없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자신보다 강한 자가 나타나면 죽어 주는 게 순리거든.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따르지 않으면 그만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이면 돼.
다만 그럴 실력이 된다는 보장이 갖춰졌을 때의 일이지만."
"…그렇군.
확실히 마족들은 언제고 서로의 뒤통수를 칠거라 예상하고 있는 종족이었지.
그렇다면 루카르엠이란 마족은 마왕의 명령을 따를 생각이 없다는 뜻인가?"
"말했잖아. 그의 속은 아무도 모른다고.
어쨌든 정보는 여기까지. 미리 다 말해주면 재미없잖아?"
더 숨기고 있는 사실이 있단 말인가?
대공은 불쾌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르피스는 한쪽 눈을 윙크하며 능청을 떨어 보였을 뿐이었지만.
아무튼 이제까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했던 이사나의
거취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상급 정령사가 된 것은 확실히 의외였지만,
소드 마스터인 카리브디스 공작을 보낸다면 가뿐히 해결 할 수 있으리라.
대공은 좋은 쪽으로 생각하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나머진 스스로 알아보도록 하지."
"후훗. 분발해야 할 거야.
당신의 조카는 이미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이 자라버렸으니까.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할게. 늦으면 마왕전하에게 혼나거든."
그렇게 대답한 세르피스는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와인병을 장난스럽게 살짝 흔들었다.
마치 피처럼 검붉은 액체가 그 안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외전. 대지의 사랑을 받은 여인.
《 알리사. 비밀을 말해줄까? 너는 대지의 사랑을 받는 아이란다. 》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는 특별한 힘이 있었다.
내가 키우는 꽃나무는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
그게 무슨 특별한 힘이야?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자세한 사정을 들으면 모두 그렇구나하고 공감하게 된다.
생각해 봐라.
4살짜리 아이가 키우는 꽃 화분이 제대로 클 수 있는지.
물을 제대로 안주거나 조금만 관리를 소홀히 해도 금방 비실거리는 꽃잎을
나는 한번도 시들여 본 적이 없었다. 단 한번도.
화분만이 아니다.
정원에 심어져있는 모든 나무들이 내 손에 닿으면 병들어 죽어가는 것도 금방 되살아났다.
아버지의 영지를 가로질러 내려가는 길에 보이는 수많은 밀밭들도
내가 흙장난을 하고 놀면 그해는 풍년이 되었다.
그래서 소작농들은 내가 와서 놀다가는 것을 무척 반가워했고,
굉장히 신성하게 여긴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나 그때엔 10년 가뭄이 지속되고 있어 곡물의 수확이 철저하게 적었던 때라 더욱 그랬다.
마을의 영주인 아버지는 그런 내 능력을 천민들에게나 필요한 쓸모없는 것이라
치부하며 못마땅해 했지만 아름다운 어머니는 굉장히 기뻐하셨다.
대지의 사랑을 받는 아이라며, 너는 언제나 축복받을 거라고.
아무리 네가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어도 땅만은 너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였을까?
나는 지금까지도 땅을 바라보면 돌아가신 어머니의 아름다운 얼굴부터 떠올린다.
25살의 꽃다운 나이에 이렇다할 지병 없이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
주변 사람들은 백작부인이 몰래 시해한 것이라고 떠들고 다니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첩의 딸로 태어나 백작 가(家) 사람들의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나를 그저 안타깝게 여기며 슬퍼 하셨을 뿐.
어쩌면 미래의 내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짐작하셔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아름답기도 했지만, 누구보다 총명하셨으니까.
이제 두 달 후면 나는 옆 마을의 영주 아들에게 첩으로 시집가게 된다.
이제 겨우 14살인 내가 45살인 영주 아들과 결혼해야 하다니!
아무리 친분이 목적이라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에에익! 아버지 따위!! 아버지 따위~~!!! 평생 저주 할 거야앗!!!!
"쿡쿡…"
"헉!! 누, 누구야?"
야심한 밤에 남몰래 울 곳을 찾아 정원 한 구석으로 나와 있던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작은 웃음소리에 놀라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얄미운 이복 오라버니들도, 정원사 아저씨도 모두 잠들어 있을 시간.
그런데 이런 밤에 누가 이런 곳을? 혹시 침입자? 으아악~!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
"푸웃. 괜찮아. 안 죽일 테니까 염려 마."
"헉…어떻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생각하는 것을 아는 거지?
설마…내 생각을 읽어?
머리가 하얗게 비어가는 것을 느끼면서나는 조심스레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돌아보았다.
캄캄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거뭇거뭇한 사람의 형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똑바로 서 있는 것 같은데도 그리 커 보이지 않는 키.
아무리 봐도 내 또래의 어린아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혹시 오라버니 인가?
하지만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바보, 목소리가 다르잖아. 목소리가.
그러자 잔뜩 긴장한 채 낯선 이의 정체를 골몰하고 있는 내 귓가로,
유쾌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흐음~
유달리 땅의 기운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 느껴지기에 와봤더니, 이런 여자아이라니.
정말 놀랐는데?"
"누, 누구야, 너?"
아무리 지방 변두리에 있는 작은 영지라지만 엄염한 작위를 가진 귀족의 저택이다.
그런 저택에 딸린 정원에 경비병도 무시하고 들어와 있는 아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지 않은가.
때문에 나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멋대로 반말로 응수해버리고 말았다.
뭐 어때.
첩의 자식이라지만 나도 백작의 딸이라고.
귀족이 평민(일지도 모르는)아이에게 반말을 한다고 해서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나마 나는 평민인 어머니를 둔 덕에 그런 것을 따지는 녀석이 아니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비명을 질러 경비병을 부르지 않은 게 더 용한 일 아닌가?
나는 제 멋대로 그렇게 생각한 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런 나의 원맨쇼를 보며 즐거워하는 상대방의 모습은 전혀 느끼지 못한 채.
"푸훗. 너 진짜 재미있다. 하지만 난 내가 평민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 걸?"
"뭐? 그, 그럼 너 귀족이야? 이번에 아버지에게 손님이 왔었던가? 중얼중얼…"
그때였다.
시커먼 구름에 가리워져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던 달빛이 그 자태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달빛을 따라 점점 뚜렷해지는 소년의 얼굴을 보고 한순간 숨이 멈추는 느낌을 받았다.
"허억."
어깨까지 찰랑이는 검은색 머리카락.
흙색이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은 예쁜 피부.
황금색의 커다란 눈동자와, 새빨간 앵두 같은 입술….
차분히 달빛을 받은 머리카락이 검은색인 주제에 부럽게도 반짝반짝 빛이 난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에 가득 담겨있는 장난 끼.
나보다 한두 살은 위일까?
언뜻 보아도 15살 내외로 보이는 외모인 듯 했지만 진정한 문제는 바로!
'이게 뭐야! 남자주제에 너무 예쁘게 생겼잖아~~~!!'
그리고 그렇게 느낀 순간, 난 이 정체 모를 소년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풀어버리고 말았다.
저 정도의 외모를 가진 아이가 평민일리가 없거니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예쁜 사람은 나쁜 짓을 못 할 거라는
이상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생각을 또 어떻게 알았는지 생긋 웃은 소년이 다시 말을 건넸다.
"예쁘게 봐줘서 고마워. 음…놀라게 해서 미안했다는 사과가 먼저인가? 네 이름은 뭐니?"
순간 버릇 적으로 '알리사노 알 드레프'라고 대답할 뻔했다.
정숙한 숙녀가 외간남자에게 함부로 이름을 대려하다니.
아버지가 아시면 또 평민의 피가 어쩌고 하면서 호되게 야단치실 게 틀림없다.
'이건 내 탓이 아니라고. 저 녀석이 너무 사심 없이 물어본 탓이야.'
나는 필사적으로 그렇게 납득하며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흐, 흥! 상대방에게 이름을 물을 때는 본인의 이름부터 먼저 밝혀야 하는 거 아냐? 무례하긴."
"아, 그런가? 미안해 알리사노.
이렇게 예쁜 이름을 공짜로 들으려고 하다니 내가 생각이 짧았어."
"!!! 어, 어떻게 내 이름을?"
이 녀석, 대체 뭐하는 녀석이야??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아주 한순간 소년의 웃음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또 실수했다고? 무슨 소리야 그건?
"아아, 미안. 내가 좀 특이한 능력이 있거든.
사람의 생각을 읽을 줄 알아서 말이야.
아, 그렇게 노려보지 마. 이젠 안 읽을게. 정말이야."
"노, 노려보지 않았어. 그런데 정말 생각을 읽을 수 있어? 어떻게?"
"음. 선천적인 능력이라 나도 뭐라고 설명은 못하겠는걸.
아, 내 이름은 트로웰이야. 잘 부탁해."
그러면서 소년은 또다시 예쁘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두 눈 가득 담긴 장난끼는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기에,
나는 그가 지금 장난 치고 있는 거라고 내 멋대로 단정 지었다.
아버지의 손님으로 온 귀족의 아들이라면 내 이름정도 쯤이야 알아내는 건
식은죽 먹기 일 테니 말이다.
흥.
내가 어리다고 그런 뻔한 속임수에 넘어갈 줄 알아?
그리고 뭐? 트~로~웰? 기가 막혀서 정말.
"트로웰은 땅의 정령왕의 이름이잖아! 거짓말 하지 마!"
"거짓말 아닌데."
"웃기시네! 어느 부모가 아들에게 정령왕의 이름을 지어 준다는 거야?
그러다 정령왕의 노여움을 사면 어쩌려고! 자꾸 거짓말하면 경비병을 부르겠어."
"흐음~ 그런가.
그래서 인간들 중에 우리와 같은 이름을 가진 녀석들이 없었던 거구나.
정령왕의 노여움이라. 우리가 그렇게 쪼잔하게 보이나?
그 정도 가지고 화내지는 않는데 말이야."
아주 진지하게 응수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의 태도에
나는 기가 막혀서 화낼 타이밍도 놓치고 말았다.
우리라니? 4대 정령왕들을 지금 우리라고 표현한거야?
거기다 저런 진지한 태도라니, 지나친 장난이 아니라면 저앤 분명히 미친거다.
자기를 정령왕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야, 맙소사.
저렇게 예쁘게 생겼는데 불쌍하게도 어쩌다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소년이 그런 몹쓸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내 마음을 몹시 심란하게 만들었다.
기왕 이렇게 되고 보니 까짓것 몇 번 맞장구 쳐주는 것도
소년을 위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녀석에게는 그것만이 진실일 텐데,
그걸 내가 부정해버리면 앞으로 세상을 어찌 살아가겠느냔 말이다.
아아. 나는 정말 착하기도 하지.
"우와~ 그럼 네가 정말 땅의 정령왕 트로웰이란 말이야? 멋지다~"
"아, 그래? 하하."
"응, 응! 난 말이야~ 기회가 되면 꼭 땅의 정령왕을 만나고 싶었어~
있지, 나한테도 특이한 능력이 하나 있거든. 그게 뭔 줄 알아?"
내가 '트로웰'이라고 인정해주자 기쁜 듯이 헤헤 웃던 소년은,
이어진 질문에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정답을 내뱉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맞추지 못 할 거라 생각하고 있던 나는 그대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땅의 기운이 유달리 강한 걸로 봐서, 흙에 생명을 불어 넣을 것 같은데.
식물을 잘 키우지 않아? 네가 애정을 가진 곡물이 그해는 풍년이 된 다던가…"
"헉? 어, 어떻게 알았어?"
"말했잖아. 너는 땅의 기운이 유달리 강하다고.
정령을 공격과 방어의 수단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땅의 정령은 원래가 식물의 성장을 잘 돕거든.
하지만 계약도 하지 않았는데 땅의 정령을 이끄는 녀석은 네가 처음이야.
그것도 거의 본능적이라니, 역시 인간들은 놀랍다니까? 능력이 무궁무진해."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는 소년의 황금색 눈동자가 문득 소름끼치도록 깊어보였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것 같은 눈이랄까?
나하고 나이차이도 별로 나지 않아 보이는 소년에게서 저런 분위기라니, 말도 안 된다.
나는 억지로 모른 척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흐흠. 그, 그럼 내가 무척 대단하다는 소리네? 그렇지?"
"맞아. 정말 대단해.
기운으로 봐선 나까지는 무리겠지만 상급정령까지도 소환할 수 있겠는 걸?
하지만 아직은 무리야. 나이가 어리니까 마나가 감당을 하더라도 육체가 무너져버리거든.
지금은 중급정령인 멀든이면 되겠다. 어때? 계약할래?"
"엥?"
이 녀석 , 정말 미친 거 아니야?
대체 지금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 지나 알고 있는 걸까?
정령과의 계약이라니!
말해두지만 정령사는 마법사보다도 희귀하고 존귀한 존재다.
특히나 얼마 전에 끝난 10년 가뭄 이후로는 물의 정령사는 거의 신처럼 추앙받고 있을 정도고,
그건 다른 4대 정령들도 마찬가지.
그런데 그런 희귀한 정령을…
그것도 하급도 아니고 중급정령을 나 같은 평범한 꼬마더러 계약하라고?
미쳤어! 정말 미쳤어!! 장난이 너무 지나치다고!
그러나 황당함으로 노려보는 나를 어떤 식으로 해석한건지,
소년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계약이란 게 뭔지 모를까나? 하긴 아직 나이가 어리니 그럴지도.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이래서 곤란하다니까? 으음.
그러니까 계약이란 건, 너의 마나를 정령에게 제공해서
그를 세상에 소환하는 대가로 정령의 힘을 부릴 수 있는걸 약속하는 거야.
상급정령을 소환하여 계약할 경우,
그의 아래에 해당하는 정령은 굳이 계약하지 않아도 소환할 수 있고, 마음대로 부릴 수 있지.
예를 들어 나를 소환하게 되면 내 휘하의 땅의 정령을 모두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뜻이야."
"그, 그런 건 나도 알아!"
"아, 그래? 생각보다 똑똑한 아이네. 그럼 계약 하는 거지?
하는 게 좋을 거야. 정령사가 되어 세상에 너의 존재를 알리는 편이 여러 가지로 유익하니까.
지금 이 상태로도 정령의 기운을 다룰 수 있으니 계약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너의 특이한 능력을 이상하게 여기고 해치려 하는 사람이 나올 거야.
아까운 능력이 독이 되는 건 막아야 하지 않겠어?"
"무, 무슨 소리야?"
능력이 독이 된다고?
정령사가 되어 세상에 내 존재를 알리는 편이 유익하다고?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소년은 난처한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 이건 지금 읽은 게 아니야. 아까 널 처음 봤을 때 읽은 미래거든.
걱정 마, 난 한번 말한 것은 지키는 주의니까.
지금은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상태니까 안심해도 돼.
음…가까운 미래에 마녀 사냥이 일어날 거야.
규모도 작고 아마도 이 지방에서만 유행하는 것으로 그치겠지만,
지금의 네 능력을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밝혀두지 않으면 그 사건에 휘말릴 수 있어.
인간은 의심이 많은 동물이니까."
순간 오싹하고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지금 내가 무슨 얘기를 듣고 있는 거야?
소년의 깊은 황금색 눈동자를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다.
마주보면 그대로 내 존재 자체가 무너져 버릴 것 같아서….
그런 내 모습을 똑바로 직시하며 소년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인간의 운명을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한은 없어.
정령왕이라곤 하지만 신과는 각기 맡은 역할이 다르니까.
하지만 위험을 피할 조언은 해줄 수 있지. 운명의 실을 다른 곳으로 연결하게 한 달까?
사람의 운명은 한 가지가 아니라 무수하게 짜여진 복잡한 그물 같으니까.
조금만 손보면 얼마든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도 돌릴 수 있거든.
뭐, 이런 나 역시도 운명에 매여 있는 몸이라 완전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
"무,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흐음. 간단하게 말해서 그냥 정령과 계약하라는 거야.
틀림없이 너에게 좋은 일이 될 테니까 걱정 말고 날 믿어."
"믿…으라고? 무슨 근거로? 난 오늘 너를 처음 보는데?"
미친 사람을 마냥 믿고 있을 만큼 내 인생은 한가롭지 못하다.
당장 내일 아침부터 시작될 신부수업의 내용도 장난이아니라고 들었으니까.
아아. 그래. 그러고 보니 벌써 이렇게 날이 깊었네.
이제 그만 돌아가서 자야해.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이 소년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더 이상 놀아 줄 시간이…
"정령왕을 믿지 못하는 인간도 있는 거야? 그건 좀 서운한데.
뭐,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잠깐만 가만히… 미안해. 너의 마나 좀 빌릴게."
"뭐, 뭐하는 거야?"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냥 돌아서려했던 내 팔을 붙잡은 소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두 손가락을 내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부드러운 촉감에 흠칫 놀라는데,
이상하게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지금 나한테 무슨 짓을 한거지?
갑자기 눈앞에 있는 소년이 너무 두렵게 느껴졌다.
흠칫 몸을 떠는 나를 본 소년은,
예의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부드럽게 말했다.
"겁먹지 마. 나쁜 짓 하는 게 아니야.
내 말을 따라 하고 나면 곧 좋아 질 거야. 자, 말해봐.
< 땅과. 바람과, 물과, 태양. 4대 기운을 증인으로 계약의 증거를 제시하며,
나 오늘날 그대의 존재를 이땅에 소환하고자 하오니
그 이름은 대지의 기운을 지휘하는 자 멀든이여. 나의 부름에 응답하소서.>"
"……!"
들은 적이 있다.
저건 정령을 소환할 때 외우는 주문이다.
정령사를 꿈꾸는 둘째 오빠가 정령계약에 관련된 책을 줄줄이 외우고 다니기 때문에
나는 언젠가 저 주문에 대한 글을 들어 적이 있었다.
대체 이 소년은 무슨 생각일까?
정말로 내가 정령과 계약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 몸에서 힘이 빠진 건 무슨 이유지? 이 소년의 정체는 뭐고?
수많은 상념이 머리 속을 휘저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재촉하는 소년의 눈빛을 못 이겨 나는 결국 바라지도 않았던
정령소환의 주문을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따… 땅과, 바람과, 물과, 태양.
4대 기운을 증인으로 계약의 증거를 제시하며,
나 오늘날 그대의 존재를 이 땅에 소환하고자 하오니,
그 이름은 대지의 기운을 지휘하는 자- 멀든이여. 나의 부름에 응답하소서.>"
"잘했어."
그때였다.
우르르 하는 커다란 진동이 땅에서 들끓기 시작했다. 설마 지진인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땅에 몸을 가누지 못하자, 옆에 있던 소년이 얼른 부축해주었다.
그래서 알게 된 한 가지 사실.
이렇게 땅이 흔들리는데 어떻게 이 소년은 멀쩡히 서있을 수 있는 거지?
나는 조심스레 소년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분명 발이 나와 똑같이 땅에 대어져 있는데 소년의 몸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편해 보이는 것이,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어이! 이게 무슨 일이야? 땅이 흔들려!!"
"지진이다! 저택의 사람들을 깨워!! 백작님과 백작부인, 도련님들을 보호해!!"
"꺄아악!!"
우왕좌왕 하는 경비병들의 목소리와 저택안의 비명소리.
지금 이 진동이 나에게만 느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곧 속속들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아.
이제 분명히 사람들이 여기로 오게 될 거야.
낯선 아이와 저녁에 이런 곳에 있던 걸 들키게 되면 분명히 아버지께 혼나겠지.
아니, 어쩌면 이 아이를 죽이려고 하실지 모른다. 어서 도망치게 해야!
이상한 아이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죽게 할 순 없단 생각에 난 다급히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현재 흔들리는 나를 보호할 작정으로 끌어안고 있었기에,
내가 그에게 말을 건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저, 저기!!"
"쉿, 잠깐만.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알겠지만 기다려. 멀든이 왔어."
"너 아직도 그런 소리를…허억…?"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던 나는 그만 입을 꾹 다물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크게 진동하던 땅덩어리에 쭈우욱 금이 가더니,
이윽고 흙덩이들을 제치고 커다란 진흙의 거인이 그 속에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
순간 너무 놀라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있는 내 옆으로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미안, 멀든. 형체를 줄여줄래? 그 상태로 있으면 너무 눈에 띄거든."
'이미 눈에 띄였어!!'
엄청난 지진과 함께 곧바로 일어서는 거대한 흙덩이를 사람들이 못 볼 리가 없었다.
그것도 정원에 심어진 어떠한 나무보다 거대한 크기의 진흙거인이라면,
보기 싫어도 자연히 눈에 뜨일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곧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곳곳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꺄, 꺄아아아아악! 괴물이야!!"
거의 자지러질듯이 날카롭게 소리치는 여자의 음성은 분명히 백작부인의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우왕좌왕 하느라,
아직 그 괴물아래에 서있는 나와 소년을 발견하지는 못한 모양이었지만,
발견되면 나는 틀림없이 죽은 목숨이다.
저 히스테릭하기로 유명한 여자가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곱게 안 보고 있는
나를 가만 둘 리가 없는 것이다.
잠시 후, 소년이 자칭 '멀든'이라 칭한 진흙거인은, 형체를 보통 어른크기만한 상태로 줄였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정없이 흔들리던 땅덩이가
흔적도 없이 고요해져 버렸다.
내 눈앞에 여전히 멀뚱히 서있는 흙 모양의 인간이 없었다면,
나는 방금 일어난 모든 상황을 꿈이라 치부해버리고는 잠을 자러 저택 안으로 돌아갔을 것이었다.
그 만큼 정원의 모습은 평소와 한 치의 다름도 없이 평온해져있었다.
"어…어떻게 된 거야?"
나는 떨떠름하게 변한 얼굴로 소년의 부축에서 벗어나면서 중얼거렸다.
대답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소년은 성실하게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별 거 아냐, 그냥 정령소환이랄까. 조금 요란했지?
다른 정령들에 비해 땅의 정령은 소환시에 땅을 이용하기 때문에 자잘한 소동이 불가피하거든.
인사해, 이쪽은 땅의 중급정령인 멀든이야. "
"하…너 아직도 그런 헛소릴."
땅의 중급정령이 흙으로 된 거인의 모양인건 사실이었다.
역대의 정령사 전기에서 유일한 땅의 중급 정령사의 설명에도 그러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눈앞에 서있는 이 흙인간을 순순히 정령이라
인정하기엔 난 순진하지 못했다.
이래봬도 세상에 불가능한 것과 가능한 것을 구별할 줄은 아는 나이란 말이다.
정령이 이렇게 뉘집 땅강아지 이름 부르면 나오듯 쉽게 출현할 수 있는 존재일 리가 없잖아!
그러나 나는 이러한 상식을 소년에게 당당하게 알려줄 수 없었다.
등장 때부터 나에게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던 흙 거인이 소년에게
뜬금없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건네었기 때문이다.
-대지의 기운을 지휘하는 자, 멀든. 고귀하신 땅의 정령왕을 뵙습니다.
"!!"
"응. 그렇지만 지금은 상대가 틀렸어, 멀든. 소환된 거잖아?
이 숙녀 분에게 계약의지부터 먼저 물어야지."
-아, 예. 죄송합니다.
무척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몇 번이나 소년에게 조아린 흙 거인은,
문득 새삼스럽다는 듯이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감탄한듯한 음성이 뚜렷하게 귓가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대가 나를 소환하였는가?
아직 어린 인간아이에게 중급의 정령을 소환할 능력이 있다니 실로 놀랍기 그지없군.
"하, 하아? 설마…저, 정말 땅의 정령????"
-물론이다. 난 땅의 중급정령 '멀든'. 그대의 이름은?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응수하며 자신의 이름을 밝힌 흙거인은
곧이어 나에게도 이름을 물었다.
그러나 너무 놀란 탓에 심장이 진정이 되지 않은
나는 대답할 겨를도 없이 입만 어버버 거릴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소년을 돌아보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라고 사정없이 질문하는
내 눈빛을 보았는지 소년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말했잖아, 정령소환이라고. 아까 외운 주문이 정령 소환주문이었거든."
" 마, 말도 안 돼! 난 주문을 따라 외운 것 빼고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는걸!!"
"물론, 평범한 루트는 아니었지.
소환에 필요한 마법진도 그리지 않았고, 자연 친화에 집중하는 상태도 아니었으니까.
네 경우에는 내가 중간 매개체를 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너의 마나에 내 힘을 섞어서 정령을 불러낸 거지."
"뭐, 뭐야? 네가 대체 뭐길래?"
정령과 계약할 때 누군가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다.
정령과의 계약이란 오로지 시술자 본인의 마나를 통한 정령의 소환을 전재로 두고 있기 때문에,
본인의 능력이 아닌, 제 3자의 개입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돼는 것이다.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얼빠진 눈으로 바라보자 소년은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정령에 관한 것에서 정령왕이 상식에 들어가는 경우는 없어."
"너…그럼 네가 정말 땅의 정령왕?"
아무리 봐도 평범한 15세 정도의 소년,
그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녀석이 정말로 정령왕이었단 말인가?
믿을 수 없다는 뜻이 여실히 들어난 내 얼굴을 보며 소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부터 그렇다고 말했잖아? 너도 그렇다고 알고 있던 거 아니었어?"
"아, 그게…그러니까아…"
"뭐, 인간은 의심이 많은 생물이니까 할 수 없지.
아무튼 사람들이 오는 것 같아. 계약을 빨리 진행해야겠어, 멀든."
- 알겠습니다. 왕이시여. 소녀여, 그대의 이름을 아직 말하지 않았다.
나는 대지의 기운을 지휘하는 땅의 중급정령, 멀든. 그대의 이름을 말하라.
순간 숨도 제대로 몰아쉬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위압감이 정령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나도 모르게 손끝이 덜덜 떨려왔다.
힘이 빠진 다리가 자꾸만 바닥에 주저앉으려는 것을 참으며
나는 두려움이 섞인 시선으로 멀든을 바라보았다.
"내, 내 이름은 알리사노 알 드레프 입니다."
-알리사노 알 드레프. 그대는 나와 계약할 자격이 충분하다.
태초의 약속에 따라 나와 계약을 하겠는가?
"!!"
긴장된 시선으로 멀든을 바라보자 옆에 서있던
소년이-아, 아니 이제 정령왕이라고 해야 하나?- 얼른 대답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는 가타부타한 이것저것을 따져볼 겨를도 없이 황급히 그의 말에 동조해 버린 것이다.
"하, 하겠어요."
-좋다, 나 땅의 중급정령 멀든은 이제부터
그대 알리사노 알 드레프와 계약을 체결했음을 알리는 바이다.
그대는 이제부터 그대의 의지대로 나를 소환할 수 있으며,
나는 그대를 주인으로서 인정하고 성심을 다해 도울 것을 맹세한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파아아앗!!!
엄숙하게 말을 내뱉은 멀든은 곧 휘황찬란한 빛과 함께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이마가 불에 데인 듯한 화끈한 느낌을 받고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이마를 만져보자 피부위로 뜨겁게 달아오르는 선명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 이게 뭐지?'
"계약의 인이야. 보통 사람의 눈에는 안보이지만, 정령들의 눈에는 보일거야.
네가 정령사가 되었다는 증거랄까?
이제 너는 멀든을 원하는 대로 소환할 수 있고, 땅의 하급정령인 놈들을 계약 없이 부를 수 있어.
아참, 하지만 소환할 때 조심해야 해.
지금은 네 마나와 나의 힘을 섞어서 불렀기 때문에 몸의 부담이 적은 것이었지만,
앞으로 소환할 때는 순수한 너의 마나만 필요하니까, 체력이 많이 필요할거야. "
"…!!"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정말…정령과 계약을 했다고? 그것도 중급 정령인 멀든과?
훗날에 생각해보면 정령왕을 만났다는 것이 더욱 대단했던 것이었지만,
눈앞의 정령계약에 온 신경이 가있던 나는 상황의 중대함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난 그것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던 셈이다.
소년… 아니, 트로웰은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나를 흘낏 보더니 지나가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상급정령은 10년 후쯤에 소환하도록 해.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은 네 육체가 받아들이는 힘이 중급정령이 한계야.
꾸준한 수련을 한다면 아마 몇 년 안가서 너는 대륙내의최고의 정령사로 불릴 수 있을 거야."
"……너는?"
"응?"
"너… 정령왕 이랬지? 너를 소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응? 가르쳐줘."
"……"
다급하게 물어오는 말에 당황했는지 트로웰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여전히 차분하게 빛나며 침착하게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대답은 그리 어렵지 않게 나왔다.
"무리야, 나는."
"어째서?!!"
" 친화력이 부족해.
정령왕을 소환할 때는 중급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엄청난 마나가 소모된다고.
목숨을 걸어도 가능할까 말까야. 그냥 상급정도로 만족하는 게 좋아."
"하, 하지만!!"
목숨정도는 나도 걸 수 있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는 트로웰의 행동을 보고나니,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대륙의 인간들 중, 정령왕과 계약했던 인간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야.
대부분 '정령왕을 소환하지 않으면' 죽는 것보다 못하는 삶을 살 사람들이었지.
하지만 너는 그 정도로 극한 상황이 아니잖아?
상급정령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고. 너무 과한 욕심은 더욱 큰 화를 부를 수 있어."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지만 나는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정령왕과 계약할 수 없다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안절부절 했을 뿐.
그런 내 마음을 느낀 탓인지 트로웰은 전에 없이 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허튼 생각을 가슴에 품지 못하도록 처음부터 확실한 경계선을 그어두려는 듯 했다.
"내 말을 이해 못하겠니?"
"……"
아니, 이해했다. 충분히 나도 이해하고 있어.
그런데도 아쉬운 미련에 흔들려 이대로 맥없이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 뿐이야.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한참을 머뭇거리던 나는 문득 나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그럼…이제 다시는 널 볼 수 없어?"
"응?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데?"
"그렇잖아. 정령왕을 소환하지도 못하는데.
약속장소도, 시간도 정하지 못하니까…이대로 가면 이제 다시 만날 수 없는 것 아니야?"
그러자 트로웰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 다음이었다.
"뭐야, 나랑 영영 이별할까봐 정령왕을 소환하고 싶어 한 거였어?
계약을 해서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아…"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게 그 뜻이었잖아!
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자 쿡쿡 거리는 트로웰의 웃음소리가 한층 더 짙어졌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찾아서 숨고 싶다는 게 바로 이런 기분이구나.
차마 눈을 들어 트로웰의 모습을 바라볼 수가 없다.
날 어떤 애로 생각하고 있을까?
인간주제에 용기도 가상하다고 비웃고 있을지도… 으악~ 그것만은 안돼!!
"오, 오해하지 마! 나는 그냥~~!!"
"푸훗. 그렇게 정색해서 변명하지 않아도 돼.
네가 나한테 호감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뭐, 뭐어? 대체 뭘 근거로??"
"난 마음을 읽을 수 있다니까? 그 정도쯤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지.
아, 말해두지만 연애감정만 호감에 포함되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그렇게 창피해할 필요는 없는데…"
"!!! 너, 너어~~!!"
이 녀석…
침착하고 온화한 분위기로 위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사악한 녀석인 거 아니야?
놀림 당했다는 충격에 아까보다 더한 수치심으로 붉어진 얼굴은,
원래대로 회복되려면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할 듯 보였다.
그런 내 모습을 유쾌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트로웰은 여유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뭐, 좋아.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까 선물하나 해주는 셈 칠까?
위험할 때 정돈와서 도와줄 순 있는데."
"이익! 피, 필요 없다, 뭐!!"
"쿡쿡. 그래 나중에라도 필요해지면 불러. 아참!
이제 네가 중급계약과 계약한 사실이 다른 정령사들에게도 느껴질 거야.
어디보자, 이 근처에 쓸만한 정령사가…아, 마침 하나 있구나.
그가 널 찾아올 거야. 두 달 뒤에 결혼식이랬지?
그 전에 찾아와 너를 황성으로 데려갈 테니까 떠날 준비 해놓고 기다리고 있어."
"화, 황성이라니?"
놀라 둥그래진 눈으로 되묻자 트로웰은 안심하라는 듯이 생긋 웃었다.
"여기 알폰프 제국은 정령사를 굉장히 귀하게 여기고 있으니까 말이야.
너 같이 어린나이에 중급정령과 계약한 우수한 인재를 그냥 썩힐 수는 없지 않겠어?
어쩌면 제국의 황제 직속으로 일하게 될지도 모르지.
분명한건, 이대로 옆 영지의 나이 많은 인간과
결혼하게 되는 것보다 너한테 훨씬 이득이라는 거야."
"아하하…"
집안사람들에게 가장 멸시 당하던 내가 황궁으로 불려가 황제직속의 정령사가 된다고?
나…지금 꿈을 꾸는 걸까?
평민인 어머니를 둔 덕에 귀족가에서 태어났어도 변변한 대접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는 나였다.
백작의 신분이긴 했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하급의 관리에 불과했고,
싹수 노란 본부인의 아들들은 재능이라곤 눈꼽 만치도 없어,
앞으로도 백작가의 중앙 진출은 영원히 실현 불가능해 보였다.
툭하면 천한 평민의 피가 어쩌고 하면서 수군거리던 백작가의 사람들은
분명히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테지.
아직 황성으로 불려간 것도 아니었는데 놀랄 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랄까?
그러나 이런 기분은 곧 이어진 트로웰의 작별인사로 인해 급격하게 가라앉아버리고 말았다.
"이제 그만 가야겠다. 사람들이 오고 있어."
"아!"
서운했다.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존재에게 이렇게 집착이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릿한 심정으로 바라보자 트로웰은 따뜻한 시선으로 웃었다.
"그렇게 서운한 표정 짓지 마. 일단은 나도 유희중이니까 심심하면 가끔 놀러와 줄게."
"유, 유희 중이었어?"
"응. 그러니까 지금 내 모습이 너에게도 보이는 거야.
정령들은 계약을 맺지 않으면 인간세상에서 형체를 드러낼 수 없거든.
그래서 대부분 정령왕들은 유희를 즐기려면 억지로라도 누군가와 계약을 해야만 하지."
그건 처음 알았다.
계약을 해야만 모습이 드러난다니.
그렇다면 나는 지금 엄청 운이 좋았던 건가?
정령왕의 실체를 이렇게 만나보게 되다니 말이야.
아…그런데 계약이라면 트로웰도 누군가와 계약을 한 상태라는 걸까???
갑자기 욱씬 하고 심장부근이 아려왔다.
까닭모를 질투심이 알지도 못하는 대상에게 맹렬하게 퍼부어졌다.
그래서인지 그것에 대해 질문하는 내 목소리가 유난히 날카로워졌다.
"그, 그럼 넌 누구랑 계약한거야?"
"음. '라이칸 블랙 디아곤.' "
"그게 누군데?"
"블랙 드래곤의 수장…이라고 하면 알까나?"
"헉!!"
생각지도 못했던 존재의 거론에 한순간 심장이 멎을 뻔 했다.
드래곤이라니! 그것도 사악하기로 유명한 블랙 드래곤이라니!!
그들과도 계약할 수 있다는 건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정령은 오히려 인간외의 다른 종족들과 더 조화를 이루고 있는 편인데.
왜 나는 트로웰의 계약 상대자가 인간일거라고만 단정지었던 걸까?
정령왕과 계약을 할 정도라면 웬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니면 안 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 드래곤 만큼 강력하고 완벽한 힘을 가진 존재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 따위는 죽어도 상대가 되지 않을 테지.
내가 아무리 자연 친화력이 강해도 정령왕을 소환하기엔 무리인 것처럼.
그런 내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던 걸까?
우울한 상태로 고개만 숙이고 있던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드니, 트로웰이 상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야~~ 어린애 취급하지마~!"
"13살이면 충분히 어린이야.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하면 화내겠지? 알았어, 미안해."
능청스레 손을 떼면서 무척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연.기.해 보이는 트로웰.
아무래도 과장스런 행동으로 내 기분을 풀리게 하려는 듯 했지만,
그가 그럴수록 나는 아쉬운 감정만 더욱 짙어져 버렸다.
트로웰은 배려 깊고, 상냥하고, 아름다워. 내가…독점하고 싶을 만큼.
왜 나는 겨우 인간으로 태어난 걸까?
드래곤이었다면 트로웰과도 계약할 수 있었을 텐데.
이미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의 일로 안타까워하던 나는,
갑자기 내게 와 닿는 트로웰의 손으로 인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아, 그럼 '이동'"
"뭐하는 거…꺄악!!"
파아앗-
갑자기 현기증이 일었다.
눈앞의 사물이 뿌옇게 된다고 느낀 순간,
약간의 어지러운 느낌과 함께 추락하는 듯한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도 못한 채 정신을 차렸을 땐
난 이미 저택에 속해있는 내 방안으로 옮겨져 있는 상태였다.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자 언제부터 있었는지 바로 옆에서 트로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왔기에 네 방으로 텔레포트한거야.
아까 정령소환 때문에 소란스러웠는데
괜히 그 자리에 남았다가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잖아. "
"아. 고, 고마워. 근데 내 방은 어떻게 알았어?"
"네 기억을 잠깐 읽었지. 장소만 알면 이동하는 건 어렵지 않거든."
그러고 보니 사람들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었다.
횃불의 수도 여럿 보인 듯 했고.
멀든 때문에 이목이 집중된 상태가 아니더라도 야심한 밤에
혼자 정원에 나와 있던 걸 들켰다면 분명 크게 혼쭐이 났을 거다.
그런 세세한 것까지 배려해준 트로웰의 마음씀씀이가 정말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할게."
"응. 근데, 저기…트로웰?"
"응?"
이제 모든 볼일을 끝냈다는 듯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돌아서던 트로웰을 불러 세웠다.
의아한 듯이 바라보는 시선에 목소리가 잠겼지만 꼭 묻고 싶은 말이 있어서 어쩔 수 없다.
나는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나한테 이렇게 신경써주는 거야?
트로웰은 정령이니까 나 같은 인간 계집애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잖아?"
막말로 내가 마녀로 오해받아 죽던, 늙은이의 첩으로 들어가던,
트로웰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물론 13살밖에 안된 어린 나이에 중급 정령을 소환할 정도의 친화력이라면 대단하다고
생각 할 수는 있겠으나, 두 손 걷어붙이고 나서서 도와줄 정도로
정령왕에게 가치 있는 것은 아닐 터.
그런데 왜 나 같은 것에 신경을 쓰는 거지?
내 질문에 트로웰은 뜻밖이라는 듯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글쎄? 듣고 보니 그렇네. 내가 왜 그랬을까?
원래는 계약자의 부탁만 들어주는데 말이야.
모른 척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정신 차리고 나니 너한테 관여하고 있었어. 그럼 대답이 될까?"
"납득이 안돼."
"흠, 역시? 아, 그래. 그럼 이건 어때?
나도 모르게 동료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
이번 물의 정령왕이 인간들에게 굉장히 호의적이거든.
덕분에 나도 조금 인간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 게 아닐까?"
이번 물의 정령왕? 그럼 그전까진 다른 물의 정령왕이란 소리?
물의 정령왕의세대교체가 있었나?
불쑥 의문이 떠올랐지만 애써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거 생각할 때가 아니잖아!
그러자 트로웰은 내 도리질을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더욱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그것도 안돼? 으음. 그럼… 아, 그래! 그게 좋겠다."
"??"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트로웰의 눈동자가 장난끼로 얄궂게 빛났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대지의 사랑을 받는 아이' 랬던가, 너?"
"에엑? 그, 그건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냥…"
"흐음~ '대지'가 누굴 가리키는 줄 알아?"
"?"
대지가 누굴 가리키냐니.
대지라고 하면 땅이라는 의미 밖에 더 있는가?
유난히 식물을 잘 키우는 내 능력을 칭찬하시기 위해 대지의 사랑을 받는다고 표현하신 것뿐,
어머니도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점점 더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자 트로웰은 쿡 하고 짧게 웃었다.
"대지는 자연의 4대 원소 중 땅을 말하는 거야.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여기 아크아돈에서는 4대원소가 하나의 존재를 가지지.
바로 '정령'이라는 형태로 말이야."
"에?"
"그러니까~ 대지라고 하면, 땅의 정령.
그것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한 땅의 정령왕 트로웰! 즉 나를 가리킨다 이 말이야."
"!!"
헉! 그럼 내가 트로웰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새빨개진 내 얼굴을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는 트로웰이 그렇게 얄미워 보일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인데,
어째서 저 녀석은 저렇게 태연하기만 한거야!
"뭐, 내가 사랑하는 인간에게 그 정도 혜택을 베푸는 건 당연한거라고 생각해. 키득"
"으윽~~ 장난하지마~!!"
"이유야 어쨌든 상관없잖아?
중요한건 넌 골치 아픈 운명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었다는 거고,
그렇게 벗어나게 된 것 또한 운명이겠지.
이를테면 내가 지나가던 길에 우연히
네 기운을 느끼게 된 것부터가 하나의 운명이었다 그 말이야.
그러니 좋은 게 좋은 거다~ 그렇게 생각해."
트로웰의 진지한 대답에 나는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운명? 나와 트로웰이 만난 것이 운명이란 말이지?
'그럼 다음에 만날 수 있는 기약도 운명이 될 수 있을까?
하나의 운명이 또 다른 운명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되풀이 되어서…
영원히 운명 안에 우리 둘의 인연을 엮어낼 수 있는 걸까?'
말도 안돼는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자그마한 희망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트로웰의 존재가 내 가슴속 깊이 새겨지게 된 것이다.
훗날에 돌아보면 그것이 바로 첫사랑이란 열병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나, 나말이야!! 반드시 훌륭한 정령사가 될 거야!!"
"그래, 내가 그렇게 될 거라고 했잖아?"
" 반드시! 반드시 노력해서 5년 안에 상급정령을 소환해내고 말테니까!!"
"엥? 5, 5 년은 무리…"
"그리고 10년째엔 무슨 일이 있어도 정령왕을 소환할거니까!!"
트로웰의 얼굴이 황당하게 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는 지금 23살이란 나이에 정령왕을 소환해 내고 말겠다는 허황된 장담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는 분명히 나에겐 정령왕을 소환하기위한 친화력이 부족하며,
상급정령도 10년 후에나 소환해야 몸에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내가 그걸 완전히 무시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으니 황당해 할 수밖에.
뭔가 기가 막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려는 트로웰을 가로막고,
나는 꿋꿋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렇게 되면…나… 정말로 대지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
"…!"
이건 프로포즈였다.
한마디로 나 댁한테 사랑받고 싶어! 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트로웰은 이 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못 알아 들은 척 딴청을 피워서도 안 되고 그게 무슨 소리야? 라며 되물어 보지도 말아야 한다.
여자가 먼저 용기내어 고백하는 게 쉬운 일인지 알아?
조금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뜬 트로웰은 뭔가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장난스럽게 웃었다.
마치 꼬마에게 고백받은 어른이 곤란해 하면서도 재미있어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나마 외면하지 않아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랄까?
솔직히 13살의 나이면 충분히 꼬마라고 볼 수도 있는 나이이기도 하고.
게다가 정령왕이라면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았을 테니 실제로
그와 나의 나이 차이는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을 것이다.
트로웰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는 아무리 자라서 할머니가 되도
여전히 꼬마로밖에 안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연히 거절할거란 예상과 다르게 트로웰이 내뱉은 말은
놀랍게도 상당히 희망적인 것이었다.
"뭐, 좋아. 일단 긍정으로 해둘까."
"저, 정말?"
"인간들은 가끔… 정령왕의 언령을 뛰어넘는 엄청난 의지를 발현시키곤 하지.
그걸 보고 '기적'이라고 하던가?
방금 네가 말했던 조건은 내 입장에서 보자면 기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어. 정말 할 수 있겠어?"
"야, 얕보지 마! 나도 한다면 한다고!!"
누군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아는가!
나도 내가 말했던 게 얼마나 얼토당토 않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밖에 우길 수 없는 건,
그만큼 내가 그에게 빠져들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언가!
그런 내 마음도 몰라주고 야속한 말을 건네는 트로웰이 얄미워서,
나는 지지 않겠다는 듯이 악을 쓰고 대답했다.
그러자 트로웰은 예상했다는 듯이 맑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꼬마아가씨. 만약 네가 나의 소환에 성공하면,
그때는 계약자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연인이란 존재로 지켜주겠어.
단, 네가 말한 대로 10년 안에 소환해야해. 스스로가 장담한 말이니 불만은 없겠지?"
"물론!"
"흠…솔직히 5년 후면 18살.
그 정도면 상급정령의 힘을 견딜 수도 있을지 모르겠군.
이번에 물의 정령왕을 소환한 인간의 나이가 16세였나?
꽤 운 좋은 상황이 적용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10대 중반의 나이부터는 육체적으로 상급정령의 힘을 견딜 수 있다는 소리인데…
그럼 23살도 너무 봐주는 건가?"
"뭐, 뭐? 물의 정령왕을 소환했다고? 누가? 언제??"
내가 알기로 이제껏 정령왕을 소환한 사람들 중, 물의 정령왕을 소환한 정령사는 없었다.
그들이 시도를 해보지 않았던 게 아니라, 물의 정령왕의 소환이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다.
들리는 얘기로는 물의 정령왕을 소환할 때는 보통의(?)정령왕
소환에 들어가는 마나와 자연친화력의 두 배에 해당하는 기운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보통 정령왕을 소환할 때 들어가는 마나만으로도 충분히 목숨을 걸고 도전해도 성공할까 말까거늘,
그것의 두 배에 해당하는 마나를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그 대단한 물의 정령을 고작 16세의 인간이 소환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트로웰은 내가 놀라던 말던,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치 '이웃집에 누가 열심히 일해서 얼마를 벌었다'고 말하는 듯
아무런 감흥이 없는 듯한 목소리였다.
"누군지는 나도 잘 몰라. 마침 내가 유희중이어서…
엘퀴네스가 소환됐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아직 만나보지 못했거든.
이 참에 한번 만나보러 갈까?"
"으음. 전혀 아무렇지 않아 보이네.
물의 정령왕이라고 하면 소환하기 힘든 거 아니었어?"
"맞아. 힘들어. 보통의 각오로도 안 되고, 보통의 능력으로도 절대 소환할 수 없어.
한마디로 굉장히 운이 따라주는 케이스랄까?
뭐, 이유가 짐작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거야 말로 '기적' 이구나.
그 순간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것도 보통의 기적이 아닌 역사를 바꿀 위대한 '기적'인 것이다.
귀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의 신분이 천민이었다 해도,
앞으로 세상은 그를 향해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 정도로 정령왕이 인간에게 가지는 가치는 대단했다.
16세. 나와는 겨우 3살차이.
아직 성인이라고 쳐주지도 않는 어린나이에 세상을 발아래로 두게 된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리고 나 역시 정령왕의 소환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트로웰이 빙긋 웃으며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때의 나는 오직 눈앞의 희망에만 매달리느라 그의 말을 제대로 들을 겨를이 없었다.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진정한 낭군은 따로 있는 것 같으니."
그리고 그 후 어떻게 되었냐고?
트로웰의 예언에 따라 황성에 올라가긴 했었다.
비록 그 생활이 너무도 지겨워서 몇 달 만에 걷어차고 뛰쳐나오긴 했지만 말이다.
도중에 어떤 정체모를 괴한들에게 습격을 받기도 했지만,
마침 지나가던 일행이 구해줘서 목숨은 건사한 상태다.
나를 도와준 이들 중에는 정령사, 그것도 물의 상급 정령사가 속해 있었는데,
놀라운 것은 그의 나이가 나보다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름이 이사나라고 했던가?
어디선가 분명 들은 이름인 듯한데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무튼 내 또래의 인간 중 상급 정령사가 있다는 사실에
나는 더욱 더 분발할 수 있다는 각오를 다졌다.
이렇게 되고 보니 내친김에 정령왕 엘퀴네스를 소환했다는
그 운 좋은 인간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를 실제로 만나보면 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잖아?
나 또한 기적을 이룰지도 모른다는 것을.
6-12 존재의 이유
다음날 아침 일찍 모든 준비를 갖춘 우리는 다시 던전으로 가기 위한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이제 목적지가 거의 코앞으로 다가온 만큼,
만약을 위한 대비책을 미리 세워둘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한 가지 문제점이 생겼으니,
그것은 바로 알리사의 거취 문제였다.
원래 있던 장소에 돌려보내자니 대공이 다시 공격을 해올 것이고,
그렇다고 우리를 따라 던전으로 가기에는 너무 많은 위험을 수반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좀처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나는 일단 그녀 본인의 의사부터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떻게 할래, 알리사? 이대로 가까운 마을에 데려다 줄까?
정령을 이용하면 금방 갈 수 있는데."
"흠, 어차피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뭐. 그냥 당신들 따라 가면 안 될까?"
"그게 좀 곤란해. 우리가 가는 곳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곳이거든.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는 장소라서 말이야."
"거기가 어딘데?"
"던전이야. 혹시 바론 던전이라고 들어봤니?"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온하기 그지없던 알리사의 눈동자가 놀랄 만큼 휘둥그렇게 벌어졌다.
"엑? 설마 그 악명 높은 바론 던전?
지금까지 들어가서 무사히 돌아온 사람이 없다는 그곳 말이야?
그런 곳엘 왜 가는 건데?"
"응. 아는 사람에게 그 안에 있는 어떤 물건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받았거든.
대신 그에 상응하는 것을 대가로 받기로 하고 말이야."
"자, 잠깐! 거긴 아직 트릭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 되지 않은 곳이잖아.
그런데 가져올 물건이라니…설마 던전의 최하층까지 내려갈 생각은 아니겠지?"
"그럴 생각인데."
"헉! 당신들 미쳤어? 그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서 이래?
무사히 돌아온 사람이 없단 말이야! 십중팔구 죽거나 미친다고!"
"맞아. 그래서 너를 데려갈 수 없다는 소리였어, 알리사.
어떻게 할래? 역시 마을로 가는 편이 좋겠지?
사막에선 또 괴한들이 습격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나의 말에 알리사는 기가 턱 막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정신 나갔기로서니 물건 하나 때문에 제 발로
사지(死地)를 향해 걸어갈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녀는 갑자기 명랑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나도 갈래!"
"엥? 무슨 소리야? 방금 네 입으로 위험하다고 까지 말해놓고서…"
"하지만 당신들도 가잖아.
위험한 줄 알면서도 가는 건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기때문 아니야?
하긴, 상급 정령사에 대사제님까지 있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겠어?
허약한 나 하나 보호하는 것쯤은 일도 아닐 거야, 그치?"
"이봐…너 말이야…"
결국 우리들한테 안전을 책임지라는 소리였냐!
하지만 알리사의 말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팔짱을 끼운 채 말했다.
"나 역시 땅의 중급 정령을 다룰 수 있으니까 도움이 됐으면 됐지, 방해가 되지는 않을 거야.
아니, 오히려 지하니까 내가 더 유리할 지도 모르잖아?
원래 이런 일엔 조력자가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하지만 이건 조력자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지 않아도 한번 던전 탐험에 도전해 보고 싶었는데 잘됐네!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언제 또 가보겠어?
자아~ 우리 모두 함께 바론 던전을 정복 해보는 거야! 와아 재밌겠다!"
"재미라니. 이게 무슨 온라인 게임인 줄 아냐…
파티 맺어서 최종관문 클리어 할 상황도 아니고, 나참."
"응? 온라인…뭐? 그게 뭔데?"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리 어른인척 야무지게 굴어도 결국 어린애는 어린애인가 보다.
뻔히 위험한 상황인걸 알면서도 '모험'이란 타이틀 하나에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보면.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옆에 있던 이사나와 시벨리우스를 돌아보았다.
둘 다 난처한 표정이긴 했지만, 알리사의 합류에 대해선 크게 반발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결국 우리는 갑작스럽게 늘어나 버린 일행에 대한 대책 의논을 다시 세울 수밖에 없었다.
제일 큰 문제라면 역시 던전 안에서 알리사를 보호하는 일이었다.
스스로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알리사의 신변까지
보호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무리가 많이 따랐기 때문이다.
그것에 관해 가장 먼저 의견을 꺼낸 사람은 이사나였다.
"정령을 붙여서 경호하면 괜찮지 않을까?
알리사 본인도 땅의 정령을 부를 수 있으니까 그 옆에 시큐엘도 붙여두면 될 것 같은데."
"그건 안돼. 아직 둘 다 장시간 동안 정령을 불러내는 건 무리잖아.
최하층으로 가기도 전에 쓰러질 셈이야?
던전 안이 어떻게 만들어 져 있는지도 모르는데 처음부터 체력소모가 심한 일은 위험하다고."
"그럼 하급정령은?"
"글쎄, 하급이고 상급이고 안 된다니까? 음…정말 골치 아프네.
이사나 한 사람이라면 내가 어떻게든 해 볼 수도 있겠지만 알리사까지는 힘들 텐데."
그러자 지금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시벨리우스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 이렇게 할까?
엘은 지금까지 했던데로 이사나를 맡고, 알리사는 내가 책임지고 보호하지 뭐.
여차하면 우리야 중간에 빠져도 되지만, 이사나와 엘은 꼭 하층까지 가야 하잖아."
"아, 그래줄래, 시벨? 그럼 나야 훨씬 부담이 덜하지.
너라면 위험한 순간에 밖으로 텔레포트 하는 것도 가능 하지?"
"일단 그렇긴 한데, 그 안에서도 마법을 사용 할 수 있을지 모르니 장담할 순 없을 거야.
하지만 탈출엔 자신있으니 맡겨만 둬.
적어도 걸림돌은 되지 않을 테니까."
오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자태란 말인가!
부탁받지도 않은 일을 스스로 자청해서 하는 시벨리우스의 태도에 나는 깊은 감명을 받고 말았다.
정말이지 누구누구와는 전혀 다른 올바른 사고방식의 소유자가 아닌가!
(그 누구누구가 누구인지는 굳이 밝히지 않아도 알 것이다.)
"시벨… 너 정말 좋은 녀석이었구나."
"훗. 그걸 이제야 알았어? 아무튼 앞으로도 맡겨두라고.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까. 그럼 다시 예전처럼 친구가 될 수 있는 거지?"
"무슨 소리야? 우리가 언제는 친구 아니었어?"
"하지만 엘 너는 과거 얘기만 나오면 싫어하잖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때의 네가 전부인데,
그걸 부정당하면 전혀 낯선 사람처럼 느껴진단 말이야."
"으음. 그, 그래? 알았어. 이제부턴 정말 주의 할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를 줬다면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말했다시피 기억이 나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아무튼 우리가 여전히 계속 친구라는 거지? 와아, 이거 정말 기분 좋은걸?"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는 시벨리우스의 얼굴에 나는 남몰래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한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깊은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고,
하필이면 그가 진짜 내가 아니라는 것에 서운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왜 하필 나는 그 사람과 닮은 얼굴로 태어났을까.
그리고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엘'이라는 사람은 대체 누구인걸까.
정령왕의 계약자였다고 하니 평범한 인간이 아닌 건 분명한데,
시벨을 만나기 전까진 누구에게도 그에 대해서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우연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그 순간, 나는 얼마 전에 읽었던 정령왕에 대해 기록된 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설마?!
"이사나, 전에 샀던 책 아직 가지고 있지? 잠깐만 볼 수 있을까?"
"전에 샀던 책? 아아. 그 정령왕의 로맨스를 다룬 책 말이지.
응, 가지고 있긴 한데…그건 갑자기 왜?"
"아니, 잠깐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내 말에 이사나는 별다른 말없이 순순히 배낭 안에서 책을 꺼내 건네주었다.
처음 보았을 때도 상당히 경악했었던,
'정령왕의 인간'이란 낯간지러운 타이틀이 떡하니 박힌 바로 그 책이었다.
모두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무시한 채 페이지를 한장 한장 넘기자,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엘퀴네스의 사랑'이라고 적힌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얼마 전에도 보았지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넘어갔던 거였는데,
우습게도 진실은 늘 엉뚱한 곳에서 드러나게 되는가 보다.
나는 다시 한번 천천히 그때 보았던 부분을 읽어보았다.
『-엘퀴네스의 사랑-
그는 모든 물의 지배자이며 창조자이다.
그 외모는 얼음같이 차갑고, 시린 물처럼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누구의 사랑받기도 원치 않는다는 이 오만한 물의 정령왕에게도,
한때는 모든 것을 내버릴 정도로 열렬히 사랑했던 존재가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 대상이 하나의 어린 인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행운아는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를 최초로 소환한 인간 계약자라고 알려져 있다.
고문(古文)에 따르면 그는 요정같이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으며,
타고난 정령사의 기질이 뛰어나 감히 해치려 드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만반에 뛰어난 이 존재를 차갑기가 얼음 같기로 유명한 엘퀴네스가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순리였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의 사랑에도 시련은 어김없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라이벌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인간도 아니고, 요정도 아니며, 드워프는 더 더욱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한 마리의 특이한 백마(馬)였다.
엘퀴네스의 계약자는 언제나 그 옆에 아름다운 백마 한 마리를 데리고 다녔는데,
이 말은 범상치 않은 술수와 능력을 행사하며 주인의 연인인 엘퀴네스를 시기했다는 것이다…
[중략]
모든 만물의 물을 지배하는 위대한 엘퀴네스의 라이벌이,
고작 말 한 마리라는 사실에 대해 필자는 참으로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
"……"
세월이 흘러 본래의 내용이 상당히 와전되었다고 쳐도,
이 부분이 시벨리우스가 기억하는 '엘'과 연관이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아마도 이곳에서 말하는 백마란 시벨리우스를 뜻하는 것이겠지.
나는 다시 한번 확인할 겸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벨을 바라보았다.
"시벨, 너 전대의 엘퀴네스와 사이 나빴다고 했던가?"
"윽-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녀석이 내가 하는 사사건건마다 시비를 걸었단 말이야.
날 얼마나 눈에 가시처럼 못살게 굴었는데! 사이가 좋았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라고."
"흐음. 혹시 예전에 여행 다녔을 땐 본래의 모습으로 다녔어?"
"아아, 가끔. 네가 쉽게 피곤해 해서 내가 태우고 다닐 때가 있었지.
그런데 그건 왜? 혹시 뭔가 기억이 나는 거야?"
"아, 아니. 그냥 갑자기 궁금해 진 것뿐이야. 하하하…"
어쨌든 이로서 확실해 진 건, 이 안에 담긴 내용이 전부 거짓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긴, 그러고 보니 미네르바의 이야기도 상당히 비슷한 점이 많았었지.
어쩐지 점점 일이 꼬여가는 것 같아, 나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거참 이상하군.
책에도 실릴 정도라면 꽤 유명하단 건데,
왜 내게는 엘퀴네스의 계약자가 이제까지 없었다고 말한 거지?
일부러 거짓말 할 이유도 없을 텐데."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엘퀴네스의 계약자라니?"
"아, 맞다. 알리사, 너라면 알지도 모르겠네.
혹시 옛날에 엘퀴네스를 소환했던 인간에 대해 들은 적 없니?
뭐, 전래동화식으로 전해진 이야기라도 좋은데."
그러자 알리사는 또랑또랑 눈망울을 굴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혀 금시초문이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엘퀴네스라면 물의 정령왕을 말하는 거지? 옛날엔 없었을 걸?
아, 하지만 바로 몇 달 전에 그를 소환한 사람이 생겼다고 들었어.
내가 알기론 아마 그게 최초일거야. 트로웰한테 들었으니까 틀림없다고."
"트로웰…한테 직접 들었다고?"
"그래. 뭐야~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끄응. 그럼 트로웰이 일부러 숨기고 있다는 건가?
아니면 알고 보면 '엘'이 인간이 아니었다거나…."
인간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갑자기 엄습하는 불길한 기분에 몸을 살짝 움츠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엘이란 사람은 점점 정체가 묘연해 지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 위에 혼자 손을 휘젓고 있는 느낌이랄까?
이대로 계속 궁금해 해도 좋은 걸까?
차라리 이쯤에서 멈추는 게 나를 위해서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수록 마음속에선 계속 같은 말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정말 이대로 있어도 괜찮은 걸까?>
'호오, 이거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 걸?'
마계 4대 공작의 일원 마도의 군주 데르온은 현재 기척을 감추고
엘 일행을 따라다니고 있는 상태였다.
아무리 노련한 솜씨라도 평소였다면 정령왕인 엘퀴네스의 시야에 포착되었을 테지만,
요즘 그의 신경이 다른데 가있었던 탓인지 좀처럼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로선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론 정령왕의 마음을 이토록 어지럽히는 일이 무엇인지 호기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첫 번째 임무의 실패로 마계로 돌아갔던 그가,
다시 이사나들을 쫓아다니게 된 경위는 간단했다.
데르온은 잠시 마왕성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루카르엠은 대체 어찌 된 것이야!
지금쯤이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연락이 와야 할 것 아닌가!"
콰앙!
거칠게 테이블을 걷어차며 노한 음성을 내뱉는 이는,
현 마계를 통치하는 어둠의 지배자 마왕이었다.
그는 얼마 전 그의 수하이자,
4대 마계 공작 중 한사람인 루카르엠에게 이사나의 주살을 명령한 바 있었다.
평소 눈에 가시처럼 여기고 있던 존재였기에, 이번 기회를 통해 제거를 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이사나를 해치려면 필히 그의 계약자인 정령왕 엘퀴네스의 눈에 발각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무사치 못하리라 생각했었다.
제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숨기고 있다 하더라도
감히 정령왕의 상대는 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루카르엠에게선 소식 한장 날아오지 않았다.
마왕으로선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쩐지 그 약삭빠른 놈이 내가 의도한게 뭔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순순히 임무를 맡아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
설마 처음부터 나를 골탕 먹일 작정이었던 건가? 이놈!
드디어 감추어 두었던 가면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구나!"
루카르엠이란 마족은 스스로를 잘 알고 있는 남자다.
마왕이 맡기는 일은 되도록 수행하되, 자신의 능력선에서만 움직이는 것으로 유명한 존재였다.
만약 처음부터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이 내려지면,
교묘히 말을 틀어 임무를 다른 자에게 떠넘기는 식으로 피해왔었기 때문에,
그가 충성심 때문에 이번 일을 무리하게 받아들였다곤 생각하기 힘들었다.
일을 맡았다는 것은 반드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는 증거!
그런데도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는 건 마왕에게서 돌아섰다는 뜻이었기에
데르온은 더 더욱이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알기론 루카르엠은 왕위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는 남자였다.
그런 그가 마왕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지요.
알맞은 타이밍을 노리기 위해 시간이 걸리는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애초부터 왕께서는 그에게 '언제까지'라는 제약을 두신 것도 아니었으니…
좀 더 느긋하게 일을 진행시킬 속셈인지도 모릅니다."
"끄응. 너는 그를 잘 모른다, 데르온!
그는 내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던 자다.
4대 공작이라는 그늘에 감싸여, 마치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역대의 마왕들을 지켜보고 있었어.
놈은 결코 평범한 녀석이 아니다. 무언가 필히 노리는 게 있을 거야.
그래, 어쩌면 이미 눈치 채고 있던 걸지도 몰라."
"예? 무엇을?"
그의 물음에 마왕은 필요 이상으로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리곤 마치 변명하는 듯한 얼굴로 허겁지겁 그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다. 아무튼 계획을 변경할 필요가 있겠군.
데르온 너는 지금 가서 정령왕 엘퀴네스와 그의 일행을 감시해라.
가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루카의 꿍꿍이가 뭔지 조사해 봐.
필요하다면 쟌과 동행해도 좋다."
"쟌…이라 하시면 4대 공작중 하나인 마도의 전사 '쟌 킬 루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원한다면 그를 붙여주겠다. 어찌하겠느냐?"
"아니, 아닙니다.
감시뿐이라면 저 혼자서도 충분하니 굳이 그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맡기신 임무를 수행하러 다녀오겠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요동치는 의문을 삼킨 데르온은,
낮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접견실을 벗어났다.
마왕과의 대화는 그것이 마지막이었지만,
그는 이사나의 일행을 쫓은 지 며칠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때의 일만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이 꽉 막혀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숨겨져 있는 음모가 남모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확실히 깨달은 건 마왕의 접견실에서 나온 이후, 복도에서 우연히 쟌과 마주친 순간이었다.
마족 치곤 흔하지 않은, 귀밑을 살짝 덮는 은발머리와
짙은 보라색 눈동자를 본 순간 데르온은 굳은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좀처럼 마왕성에서 마주칠 일이 없는 자를 만나게 되어 놀랐던 탓이다.
'이상하군. 지금은 알이 부화할 시기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이런 시기에 마왕성엔 무슨 용무로 들린 거지?'
보통 마족의 탄생은 마계 내에 존재하는 은밀한 장소
이른바 카르텐이라 불리는 생명의 숲에서 진행된다.
일정한 시기가 되면 마계는 며칠동안 암흑에 뒤섞이게 되는데,
그때 발산되는 음습한 기운이 이곳 숲에 모여 수 백개의 알로 변화한다.
그 뒤 약 100년 정도의 숙성기간을 거치고 나면 그 안에서 마족의 아이가 탄생하는 것이다.
쟌이 하는 일은 이때 태어난 아이들에게 체계적인 훈련을 시키어,
능력에 따라 신분의 등급을 구분하는 일이었다.
가장 최근에 탄생된 알의 부화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요 근래 가장 바쁘다면 바쁘다고 할 수 있는 마족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왕전하도 뭔가 좀 이상한 걸?
이런 시기에 나에게 쟌을 붙여주겠단 말을 하다니.
알의 부화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말이지.
혹시 잊어버렸나? 에이, 설마….
그 중에서 미래의 라이벌이 등장할 지도 모르는데 잊어버릴 리가…'
그때였다.
맞은편에서 데르온을 확인한 쟌의 얼굴이 무섭도록 살벌하게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다짜고짜 눈앞으로 다가온 그는 데르온이 아차 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멱살을 움켜쥐곤 벽면으로 사정없이 밀어붙였다.
쿠웅!
예쁘장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거친 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마왕 전하는? 지금 안에 계신가?"
"윽- 큭! 이게 무슨 짓입니까, 쟌! 이건 놓고 말…"
"닥.쳐! 지금 내가 흥분 안하게 생겼어?
이 XX같은 XX!! 누군지 잡히기만 하면 절대 그냥 두지 않을 테다!
감히 이딴 식으로 나를 물먹였다 이거지!"
"무, 무슨? 설마 알의 부화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그가 알기로 쟌은 마계에서 루카르엠 다음으로 조용히 지내는 걸 즐기는 편이었다.
그런 그가 이토록 화를 내며 욕설을 내뱉는 다는 것은,
그만큼 사태가 심각한 일이라는 뜻이었기에 데르온의 얼굴 역시 저절로 경직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쟌은 망설임 없이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대답을 내뱉었다.
"문제? 하 그래! 문제가 있지. 그것도 굉장히 큰 문제!
이걸 어쩔까, 데르온군? 아무래도 우리 마계가 멸망하려는 모양이야."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도대체 아까부터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알이 전부 파괴됐어."
"!!"
맙소사.
순간 데르온은 자신이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지금 뭐가 어떻게 됐다고?
"알이 파괴되었다고.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코앞이 부화시기였는데 누가 숲에 침입해서 전부 부수어놓았어.
젠장! 5백년만의 탄생이라 다들 기대가 컸는데!!"
"그, 그런! 숲의 경비는 대체 어찌 된 겁니까?
그곳은 허락받지 않은 마족은 무단으로 침투할 수 없는 구역이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미치고 팔딱 뛰는 거 아니야!
결국 알을 돌보는 관계자중의 한 놈이라는 소린데,
이번대의 알들은 기운이 강해서 어지간한 놈이 아니면 부술 수 없었다고!
으득 누군지 잡히기만 하면~!"
조용히 이를 가는 쟌의 모습에 데르온은 그 만만치 않은 착잡한 심정을 느꼈다.
하필이면 부화 직전의 알이 파괴될 줄이야.
그것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벌인 일이었으니,
쟌 하나의 책임으로 무사히 넘어갈 상황이 아닌 것은 틀림없었다.
"그, 그래서 지금 마왕전하께 보고하러 가는 길입니까? 문책을 면하기 어려우실 텐데요."
"그렇다고 언제까지 쉬쉬할 일도 아니잖아?
뭐, 아주 짐작가지 않는 것도 아니니 말이야."
"짐작이라면…설마?"
"훗, 뻔한 거 아닌가?
부화 직전의 알은 견고한 오리하르콘 방패보다 더욱 단단하다고.
게다가 이번 알들은 다른 때보다 기운이 더 강했기 때문에 작정하고서도 쉽게 깨트릴 수 없었어.
그런 걸 몇 백 개나 간단하게 파괴시킬 수 있는 존재가 누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왕전하가 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의 말에 쟌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무성의 하게 고개를 한번 까닥였다.
하긴, 그러고 보면 이번 사건이 아주 전례에 없던 일도 아니다.
자신을 재치고 왕이 될 아이가 탄생하는 것이 두려워,
부화하지도 않은 알을 몽땅 파괴시켰던 마왕이 어디 한두 명이었던가.
이런 경우 알을 파괴한 마왕은, 4대 공작의 심판아래 비참한 죽음을 맞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뿐이었다.
데르온은 딱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분 앞에선 모쪼록 안정을 취하시길 바랍니다.
자칫했다간 왕의 심기를 거스른다는 명목으로 당신이 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봐, 나도 이성이란 게 있는 마족이야. 누가 왕 앞에서 따지고 들까봐?
무엇보다 지금은 루카의 자리가 공석이라고.
그의 존재가 없는 마계가 무슨 뜻인지 알아?
'고삐 풀린 망아지가 날뛰는 현장' 바로 그 자체라고.
한낮 풀 쪼가리에 불과한 내가 무슨 힘이 있겠어?"
"그런…"
"자네도 명심해 둬, 데르온.
요즘 신계며 명계며 발칵 뒤집힌 것 같은데 말이야,
나는 아무래도 그 일이 마왕과 관계가 있는 것 같거든?
일단 어떤 일이 있어도 자리를 비우는 일이 없는 루카가
왕의 명령 '따위'에 순순히 중간계로 내려간 것부터가 이상하지 않아?"
"!!"
"아무쪼록 지금의 마왕을 조심하라고, 친구.
같은 4대 공작이라 충고해 주는거니까 알아서 새겨들으리라 믿어.
그럼 난 바빠서 이만. 다음에 또 보자구."
"……"
그러나 데르온은 쟌이 간 이후로도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까지 평범하게만 흐르던 일상에 커다란 파문이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일단 루카와 직접 만나보면 뭐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아 부랴부랴 내려왔는데,
대체 어디로 간 건지 그의 모습은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단지 확인한 거라곤 그 사이에 많은 일행의 변동이 있었다는 것 뿐.
'흐음. 그러고 보니 이프리트는 보이질 않는군.
그새 다른 곳으로 떠난 건가? 한번쯤 붙어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군.
하긴,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정령왕의 상대가 되진 않겠지만.'
여전히 라피스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데르온은 그를 철썩 같이 이프리트라고 믿고 있었다.
물론 알았다 해도 쉽사리 덤벼들지는 못했겠지만(라피스의 힘은 4대 공작과 막상막하다),
모처럼 호승심을 불러일으킨 존재가 지금 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에
그는 무척이나 속으로 아쉬워했다.
잠시 쩝하고 입맛을 다신 데르온은 천천히 새로 바뀐 엘퀴네스의 일행을 살펴보았다.
이번에 그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이미 몇 천 년 전에
이 땅에서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유니콘의 청년이었다.
본래 마족과는 정 반대되는 성향의 종족이라,
본체의 모습으로 있었다면 그의 기운을 민감하게 느꼈을 테지만,
지금은 폴리모프 마법의 영향으로 그 감각이 상당히 둔해진 상태인 듯 보였다.
한참동안 시벨리우스를 살펴보던 그는 감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흠잡을 데 없이 깨끗한 기운이군.
저 정도라면 유니콘 중에서도 상당히 고위층의 존재일 텐데,
왜 동족들과 함께 신계로 떠나지 않았지?
저런 '도련님'이 이곳에 남도록 주변에서 호락호락하진 않았을 텐데.
아무튼 상대하기가 더욱 까다로워진 셈인 가…나 참, 점점 골치 아파지는 걸."
그 순간 데르온은 갑자기 귓가를 파고드는 낮은 목소리에 움찔 어깨를 흔들었다.
"당신…지금 그 위에서 뭘 보고 있는 거야?"
"!!"
그는 황급히 놀란 시선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게도, 방금 전까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곳에
어느새 누군가가 서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간단한 여행복 차림에 검을 매단 것을 보면,
아마도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가던 모험가인 모양이었다.
나이는 17세쯤 되었을까?
허리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금발에 긴 앞머리가 내려져 얼굴을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평소보다 몇 배나 기척에 주의하고 있는 그를 찾아낸 걸 보면 범상치 않은 소년임에는 틀림없었다.
놀라서 굳어있는 데르온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소년은
곧 방금 전까지 그가 보고 있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지금 저 일행들을 감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네?
당신 마족인 것 같은데…설마 저 사람들을 공격할 셈?"
"큭 넌 누구지? 인간이 아니로군."
"어? 나 인간 맞는데."
"거짓말 하지 마라.
보통 인간의 시야로 저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뭐가 있는지 알아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것보단 당신이 숨은 곳을 알아낸 것이 더욱 수상한 거겠지.
아무튼 저 일행에게 볼 일이 있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라서 말이야.
어떻게 할래? 그냥 순순히 돌아가 주면 건드리지 않을게. 기회는 지금뿐이야."
그렇게 말하며 생긋 미소짓는 소년의 모습에
데르온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려움이란 감정을 느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땀이 등 뒤를 타고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 소년은 위험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차라리 이대로 뒤돌아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그의 마음을 충동질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족이라는 것은 그 본성상,
강한 자를 만나면 이기고 싶다는 욕망에 더욱 사로잡히는 종족이었다.
정령왕 앞에서도 거리낄 것이 없던 그가,
한낮 평범한(?) 인간 따위에 물러선다면 그건 마족 전체의 자긍심을 저버리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누가 순순히 당할까 보냐!'
마음의 결심을 굳힌 데르온은 천천히 그의 허리춤에 달려있던 검 집에 손을 가져갔다.
그것을 본 소년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결국 물러설 수 없다는 소리구나. 뭐, 좋아. 오랜만에 나도 몸이나 풀어볼까?"
그는 마족과의 싸움을 한낮 어린아이들의 전쟁놀이 마냥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은 긴장은 커녕,
갓 점심을 먹고 난 이후의 무료함을 연상케 할 정도로 여유로워 보였다.
"선공은 내가 먼저 한다? 그래도 상관없지?"
마치 즐겁다는 듯이 묻던 소년은, 자꾸만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이 귀찮았는지
검을 잡으려다 말고 천천히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자 지금까지 가려져 있었던 그의 선연할 정도로 아름다운 초록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순간, 데르온은 자신도 모르게 멍한 신음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아?"
휘이익! 촤아아아악!!
"커헉!!"
그 다음은 어찌 된 일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그가 잠시 멍해져 있는 사이 소년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솔직히 말해, 데르온은 소년이 검을 뽑는 순간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니 휘두르는 검을 피할 시간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데르온은 얼른 고개를 돌려 방금까지 그가 감시하고 있던 정령왕의 일행 쪽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앞으로의 계획 일정을 짜느라 정신없이 바쁜 상태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데르온의 얼굴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이게…대체…어떻게 된?"
"방심은 금물일 텐데. 나랑 싸우는 게 그렇게 재미없어?
좋아, 그럼 좀 더 스릴 있게 진행 해 볼까?"
"!!"
'이런!'
콰직! 콰아아아앙!
놀랍게도 소년이 휘두른 검은 맹렬한 검풍을 일으키며
그가 앉아있던 나무 기둥을 한순간에 세로로 이등분 시켰다.
간발의 차이로 잽싸게 피했지만, 그럴수록 공격은 더욱 집요하게 따라 붙을 뿐이었다.
그가 잠시라도 몸을 피했던 장소는 어김없이 두 쪽으로 나뉘어 파괴되었다.
가히 번개만큼이나 재빠른 속도였다.
쿵! 쿠웅! 쿠우웅!
커다란 소음과 진동이 울릴 때마다 데르온은
마치 지옥의 사신에게 쫓기는 것 같은 긴박함을 느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그 자신 또한 나무와 함께 고스란히 이등분 될 처지였기에,
반격은 커녕 제대로 도망치는 것에도 급급한 처지였다.
검에 실린 푸르스름한 기운은 분명 소드 마스터의 검기.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을 넘어서는 실력인지도 몰랐다.
점점 거칠어지는 호흡을 느끼며 데르온은 소리없이 경악했다.
'대체 저 인간의 정체는 뭐지?'
내가 숲 저편이 소란스럽다고 느낀 건,
막 우울했던 기분에서 벗어나 던전으로 출발하기 위해 일어서던 순간이었다.
간간히 커다란 비명소리가 울리거나 아름드리 나무가 속절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면,
아마도 숲 안에서 누군가가 전투라도 벌이는 듯 했다.
그러자 나와 같은 방향을 돌아보고 있던 이사나가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누가 싸우는 모양이야. 가서 도와줘야 하는 게 아닐까?"
"그냥 내버려 둬. 누가 마물하고 싸우기라도 하나보지.
여기까지 들어왔다는 건 웬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소리니까,
우리가 굳이 가서 끼어들지 않아도 될 거야."
"하지만 아까부터 이상한걸. 정령들이 심하게 불안해하고 있어.
안 느껴져, 엘? 지금껏 많은 전투가 있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야."
"…!"
그의 말에 나는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정신없이 공중을 휘도는 나이아스들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자신들과는 상관없다는 듯 웃음을 잃지 않던 존재였기에,
그것을 발견한 순간 나는 이루 말 할 수 없이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더욱 혼란스러웠던 건 내가 그것을 이사나보다 뒤늦게 서야 알았다는 점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정령들의 감정은 항상 내게 그대로 공유되고 있었는데…?'
정령왕으로 태어난 이후 이렇게까지 주변 감각에 무디어 진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게 된 느낌이랄까?
그러나 이런 내 당혹한 심정을 모르는 일행들은 저들끼리 칭찬하며 감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굉장하다, 이사나씨! 정령들이 불안해한다니, 그런 것까지 느낄 수 있는 거야?
과연 상급 정령사란 대단하구나."
"아니, 나도 제대로 느끼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어.
요즘 수련에 열중하느라 단순히 신경이 예민해진 탓인지도 몰라."
"그래도 대단한건 대단한거야, 안 그래 신관님? 신관님도 그렇게 생각하지?"
"응? 아, 으응…. 많이 발전했네, 이사나. 이제 정말 완벽한 정령사가 된 것 같아."
"고마워, 엘.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많이 어두워 보이는데…혹시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거야?"
걱정스러운 이사나의 시선에 나는 얼른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어보였다.
정령왕 주제에 지금까지 정령들의 상태조차 짐작하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무슨 염치로 밝히겠는가?
뭐, '인식'을 하고난 이후로 나이아스들의 목소리가 똑바로 전달된 것을 보면,
단순히 내가 딴 생각에 빠져 있던 탓인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그 내용이 생각보다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우에엥. 엘퀴네스님. 무서워요~ 저 인간 너무 무서워요.
-흑흑. 저 인간 좀 말려주세요. 싸우는 걸 멈추게 해주세요.
-죽을지도 몰라. 이 숲이 완전히 파괴될 지도 몰라요. 제발 그만두게 해주세요. 흑흑흑.
-우리 부탁을 무시하면 엘퀴네스님은 바보! 사악 독재 대마왕이라고 떠들고 다닐 거에욧!!
…대체 누구기에 정령들의 마음을 이렇게 불안하게 만드는 걸까?
마지막 악에 바친 듯한 나이아스의 말이 아니었더라도,
이쯤 되면 한번쯤 가서 확인해 보는 것이 도리지 싶었다.
어쩐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가보도록 할까…"
"응? 어딜?"
"그 전투가 벌어진 현장 말이야.
정령들이 불안해 할 정도면 뭔가 심각한 일인 것 같으니, 가보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런데 어째 얼굴은 가기 싫다는 표정인 걸?"
내 얼굴이 굳은 것을 보았는지 지금까지
가만히 대화를 듣고만 있던 시벨리우스가 한마디 내뱉었다.
하여간 예민한 녀석이라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별 거 아니야. 그냥 좀 찝찝한 기분이라서."
"찝찝하다니?"
"글쎄, 잘 모르겠어.
뭔가 마음이 좀 진정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한데…
뭐 어차피 기분 탓이겠지. 일단 가보기나 하자. 이러다 늦을 수도 있으니까."
그 뒤 가슴속에 자리한 일말의 불안감을 감추며 향한 곳은
우리가 있던 자리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였다.
대규모의 전투라도 벌어진 건지,
주변에 있던 거의 모든 나무와 바위가 초토화가 되어 쓰러져 있었고,
군데군데 움푹 파인 구덩이와 시커먼 그을음 자국이 눈에 띄었다.
한 눈에 봐도 정말 심각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부상자나 죽은 시체의 모습은 없었지만,
쓰러진 나무의 방향이 점점 숲 안 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전투를 벌인 당사자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장소를 옮겨가며 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주변의 공기가 무척이나 번잡하고 산만했다.
'이거 괜히 갔다가 날벼락 맞는 거 아니야?'
싸움의 현장도 현장이었지만,
이곳에 대한 소문이 워낙 흉흉하다보니 나는 잠시 일행들의 안전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알리사의 경우 능력의 컨트롤이 불안정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전투가 벌어지면 100% 감당을 못한다고 보는 게 옳았다.
하지만 정작 놀란 것은 다음순간 이어진 시벨리우스의 행동이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쓰러진 나무 기둥으로 다가가더니,
그곳에 묻어있던 다량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보곤 이렇게 중얼거렸다.
"마족이로군."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아까부터 쭈욱 살펴봤는데, 이곳에 흘려진 피는 전부 한 마족이 흘린 거야.
그것도 꽤 심각하게 다친 것 같아."
"마족? 설마 루카르엠이?"
"아니, 그 녀석관 냄새가 달라.
아무튼 상대편이 누군지 궁금한 걸?
나무가 쓰러져 있는 모양을 보니 전부 검으로 단 한번에 쪼갠 솜씨야.
잘려진 표면이 유리처럼 매끄러운걸 보면 검기를 다룰 줄 아는 녀석인 것 같군."
"녀석…이라면, 설마 지금 이 장소를 이 꼴로 만들어 놓은 게 단 두 명이라는 뜻?"
나의 얼떨떨한 표정에 시벨리우스는 피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눈으로는 여전히 잘려진 나무의 표면을 살피고 있었다.
"상대편 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단순한 검기만이 아닌 검풍의 흔적도 있는 걸 보면,
적어도 소드 마스터의 영역은 뛰어 넘었다는 뜻이거든.
그런데 뭔가 상당히 익숙한 기분이야."
"익숙하다니?"
"왜 있잖아.
사람들은 검을 쓸 때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맞는 일정한 형식을 구사하거든.
그래서 잘린 표면이나 형태를 보면 누가 한 일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지.
그런데 지금 이 패턴이 상당히 낯익어. 누구였더라?"
"흐음. 너와 안면이 있는 존재라면 인간은 아니라는 소리인가?
대부분 4천년 전의 사람들이잖아."
내 말에 시벨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또다시 커다란 폭발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자잘한 흙먼지가 이곳까지 날아드는 것을 보면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닌 모양이었다.
콰아아앙! 콰앙! 콰아아앙!
"꺄악! 어떤 미친놈들이 저렇게 무식하게 싸우고 있는 거얏!!"
"알리사! 위험하니까 옆으로 물러서. 파편이 튈지도 몰라."
"뭐? 이래 뵈도 나는 엄연히 땅의 정령사라고!
그깟 파편 따위에 다칠 줄 알면 큰 오산이야!
아니면 단순히 내가 여자라서 보호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이전에 레이디 취급은 그만두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이사나씨!"
"아, 저…그건…"
생각보다 날카로운 알리사의 반응에 이사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와중에도 연신 주위를 둘러보는 걸 보면,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를 폭발의 파장을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사나? 내가 보기엔 너 역시 위험하긴 마찬가지라고!
"둘 다 피해!"
콰아아앙!
"꺄아아악!!"
"알리사!"
"젠장!"
아니나 다를까.
오폭이었는지 고의였는지 몰라도,
어디선가 날아온 커다란 불덩어리가 정확히 이사나와 알리사의 앞에서 폭발했다.
다행히 이사나의 대응이 빨라 간신히 피할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은 어느새 자잘한 생채기를 가득 뒤집어 쓴 모습이 되었다.
특히, 알리사를 보호하느라 폭발의 직접적인 사정권에 들어간 이사나 쪽의 상처가 깊었다.
"이사나! 괜찮아?"
"큭- 으응. 그냥 가벼운 화상을 입은 것뿐이야. 알리사는?"
"나, 난 멀쩡해. 미안해, 이사나씨. 괜히 나 때문에…"
"아니야. 네가 무사하다면 됐어. 별로 크게 다친 것도 아닌걸."
어차피 크게 다쳤다고 해도 원망할 생각도 없는 주제에 핑계는.
짧게 혀를 찬 나는 치유술을 사용하여 두 사람의 상처를 치료했다.
그때까지도 시벨리우스는 곰곰이 자리에 앉아 잘려진 나무의 표면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옆에서 폭발이 터지든 사람이 다치든,
일단 궁금한 건 풀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태도에 나는 질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시벨, 아직도 고민하고 있는 거야? 그런 건 직접 만나보면 알게 되잖아."
"아앗! 엘! 지금 생각났어! 이 패턴 말이야! 딱 너랑 똑같아."
"엥?"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한눈에 낯익더라니. 왜 진작 눈치 채지 못했지?
완전히 엘의 방식과 판박이잖아. 모르겠어?"
"하, 하지만 난 검은 안 쓰는데."
"아니, 아니. 지금 말고 옛날에 말이야.
흐음, 하지만 엘은 따로 검술에 제자를 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비슷할 수 있는 거지?
신기하네."
뭔가 굉장한 발견을 했다는 듯,
신나서 떠는 시벨리우스의 모습에 나는 한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녀석이 나를 전의 '엘'로 오해하는 상황이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아프게 조여 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필요 이상으로 몸을 움찔 떨고 말았다.
"어라? 무슨 손님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지?"
…두근!
가슴속을 커다랗게 울리게 만드는 일말의 불안감.
나를 비롯한 일행들은 모두 놀란 표정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선 자신의 몇 배에 해당하는 덩치 큰 남자를 어깨에 짊어진 어린 소년이 서 있었다.
비교적 멀쩡한 그와 달리,
어깨에 매달린 남자는 차마 눈 뜨고 못 봐줄 만큼 처참하게 너덜거리는 상태였다.
소년이 입고 있는 옷에 묻은 지저분한 핏자국도 대부분 그의 것인 듯 보였다.
이 녀석들이 지금 전투의 주범들인가?
긴장된 표정으로 바라보는 순간, 소년은 들고 있던 남자를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앞머리를 죄다가려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웃고 있는 듯 보였다.
이윽고 완전히 남자를 바닥에 떨군 소년은 마치 기지개를 켜듯이
허리를 쭉 피며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끄럽게 했다면 미안. 이 녀석이 너희들을 감시하고 있었거든.
그냥 가면 보내주겠다는데도 고집을 피우지 뭐야?
하여간 마족들이란 누굴 닮아서 싸움에 사족을 못 쓰는지 모르겠어."
"감시라니? …아? 이 마족 설마 지난번에 왔었던?"
그때서야 기절한 남자의 얼굴이 어디선가 봤던 녀석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황급히 얼굴을 굳혔다.
내가 알기로 이 남자는 고작 내 또래의 아이에게 이렇게 당할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이사나 역시 마찬가지인 듯 그는 놀란 표정으로
소년과 쓰러진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맙소사. 마도의 군주 데르오느빌 킬 폰…이잖아. 설마 당신이 이렇게?"
"뭐, 에이션트급 드래곤이라면 모를까, 이 정도는 가볍지.
네가 이사나지?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구나."
"헉? 어떻게?"
생판 처음보는 낯선 소년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에 긴장했는지,
이사나는 굳은 표정으로 경계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소년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곧 내 옆에 있던 시벨리우스에게 향했다.
"오랜만이네, 시벨. 그동안 잘 지냈어?"
"!!"
그의 친근한 인사에 시벨리우스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굳게 다문 입술과 부릅뜬 눈동자가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다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쿵.쿵.쿵.
또 다시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이런, 왜들 그렇게 얼어있어? 이래선 자기소개를 하기에도 상당히 민망한걸.
아, 그러고 보니 인사는 이번이 처음인가? 만나서 반가워, 나는…"
곤란하다는 듯 말끝을 흐린 소년은 빙긋 미소지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덜컥 심장이 멈추는 듯한 기분에 주먹을 꽈악 움켜쥔 순간,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귀찮았는지 그는 한 손을 들어 천천히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윽고 드러나는 단정한 이목구비와 선연한 초록색 눈동자는…
"<엘>이라고 해."
정말 울고 싶을 정도로…나와 닮아있었다.
"엘? 정말…엘이야?"
한참의 시간 후, 시벨리우스는 잔뜩 쉰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덩치에 맞지 않게 덜덜 떨고 있는 몸과,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그렁거리는 눈동자가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소년 아니, <엘>은 생긋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의심하는 버릇은 나빠. 넌 여전히 변한 것이 없구나."
"하, 하지만 이미 4천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야?
나, 나는 네가 죽어서 환생했을 줄로만…"
"으음.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솔직히 말하면 기억이 중간에 듬성듬성 끊겨서 말이야.
잠깐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깨어나 보니 여기더라고."
"어떻게 그런 일이?"
"글쎄. 누군가 내 몸을 가지고 장난 친 것 같기도 한데, 문제는…"
"문제는?"
"어찌된 일인지 엘퀴네스와의 계약이 해지되 버렸어.
그래서 다시 부르려고 했더니 소환이 안 되는 거야.
내 마나력에 변동이 있는 건 아닌 것 같고…
이상하다 싶어서 조사해 보니까 그새 다른 인간과 계약했다며? 정~말 황당했다고."
그렇게 말한 '엘'은 장난끼가 가득 담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한손을 척하고 내밀더니 사람 좋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왔다.
"반가워. 네 이름도 엘이라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봤지만 이렇게까지 나랑 닮은 얼굴은 처음인걸?
시벨이 오해한 것도 무리는 아니지. 미안, 내가 대신 사과할게."
"아니…별로."
"깨어나자마자 들렸던 마을에서 우연히 유니콘에 대한 소식을 들었어.
이미 몇 천 년 전에 신계로 떠났던 존재가 아직까지 남아있단 말에
단번에 시벨이라는 것을 직감했지.
그래서 쫓아와 봤던 건데, 이렇게 만나게 되서 다행이야."
"아아."
머리색과 눈동자만 다를 뿐, 마치 판에 찍어놓은 것처럼 똑같이 생긴 사람이
바로 앞에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건 그리 즐거운 기분이 아니었다.
차라리 어려서 헤어진 쌍둥이 형제를 만나는 상황이었다면 조금 나았을까?
이런 내 기분은 드디어 정신을 차린 시벨리우스가 '엘'에게
매달리는 광경을 보면서부터 더욱 엉망으로 변해버렸다. 와락!
"엘! 엘이다!"
"우왁! 시벨, 이 자식! 놀랐잖아! 방금 까지 멍하게 있었던 주제에…대체 무슨 심보야?"
"엘이다! 진짜 엘이야! 엘! 흐윽! 엘!!"
투덜거리는 '엘'의 태도에도 아랑곳 하지않고,
시벨은 마치 어린애처럼 매달려 눈물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 또한 별로 싫은 건 아니었는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곤 천천히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체 넌 언제 클려고 그러냐? 1500살이나 먹은 녀석이 징징거리기나 하고.
아니, 이미 4천년이나 지났으니 벌써 5천살이 넘은 건가?
엑 뭐야, 너 중년아저씨 된 거야?"
"시, 시끄러! 그건 엘 너도 마찬가지잖아!
인간주제에 4천살이 넘다니, 너 정말 이상한거 알아?
흑 누가, 누구더러 중년 아저씨라고 흐으윽!"
"아아. 알았으니까 그만 울어. 일행들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아, 다들 미안. 이 녀석 감정의 기복이 좀 심한 타입이거든.
흥분하면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성격이라 가끔 이럴 때가 있어. 아하하."
그렇게 말하며 난감한 듯 웃는 '엘'의 모습을 보니,
그는 이미 이런 상황에 무척 익숙한 듯이 보였다.
저런 때 나라면 잔뜩 신경질만 부렸겠지.
어쩐지 자연스럽게 인정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 나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으윽…"
"!!"
그때 '엘'의 발밑에 쓰러져 있던 데르오느빌이란 마족이 정신을 차린 듯
미세하게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놀란 내가 얼른 가서 상처를 살피자 충고하는 듯한 '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신관이랬던가? 치료할 생각이라면 그만 둬.
신성력은 오히려 마족의 몸에 해를 입힐 뿐이야.
차라리 효과 좋은 약초를 이용하는 것이 더…"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죽일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네."
"아아. 어차피 위에서 시켜서 한 일일 텐데 죽이면 가엾잖아?
내가 생각해도 좀 우유부단한 성격인 것 같긴 해.
엘퀴네스도 항상 그 때문에 투덜거렸지만, 이건 시간이 지나도 고치기가 힘든걸.
이제 그러려니 해야지, 뭐."
"…그렇군. 하지만 괜찮아. 내가 쓰는 건 엄연히 말해 신성력이 아니니까."
"응? 그게 무슨?"
어리둥절한 '엘'의 말을 무시한 채,
나는 조용히 기운을 모아 엉망이 된 마족의 육체에 쏟아 부었다.
그러자 여느 때처럼 파앗 강렬한 흰 빛이 터지더니,
상처가 곧 눈에 보일 정도의 빠른 속도로 회복이 되어 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엘'이 놀란 표정을 지었을 때는,
이미 마족은 평소와 하나도 다를 게 없이 멀쩡한 상태로 돌아온 후였다.
"와아. 대단한 걸? 이게 정말 신성력이 아니라고?"
"일단은."
"그럼 그 흰 빛은 뭐지?
그러고 보니 엘퀴네스도 내가 다쳤을 때 종종 그런 식으로 치료해 줬던 것 같은데."
"그건…"
"아, 알았다! 설마 네가 이번대의 엘퀴네스?
이미 정령왕의 세대교체가 일어난 것 맞지? 그래서 내 계약이 풀린 거고."
마지막 말은 작은 목소리라 다행히 알리사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였다.
찝찝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엘'은 단번에 환해진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그럴 줄 알았어. 엘퀴네스랑 똑같은 물빛 머리카락이라 설마 했거든.
헤에, 그럼 저기 있는 이사나가 이번 물의 정령왕의 계약자?
어쩐지, 상급 정령사치곤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 했더니…"
"이젠 정령사가 아니잖아. 그런데도 그걸 느낄 수 있어?"
"난 선천적으로 정령의 기운에 민감하거든.
아무튼 엘퀴네스가 벌써 교체 돼버리다니, 많이 서운한걸.
아, 그래. 트로웰은 여전하겠지? 그는 잘 지내?"
"응. 지금은 유희중이지만."
내 말에 '엘'은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마다 심장 한 구석이 따끔따끔 찔려오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역시 내가 속이 너무 좁은 탓일까?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시벨리우스는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엘'에게 매달려 칭얼거렸다.
"엘! 오랜만에 만났는데 자꾸 그 녀석들 이야기만 할 거야? 나랑도 할 이야기 많잖아!"
"에구구. 제발 좀 봐줘라, 시벨. 잠깐 물어본 것뿐이잖아. 그런 것 가지고 질투하면 못써."
"질투는 누가 그딴 자식들을!"
"쿡쿡. 지금 그 말 엘퀴네스가 들으면 그때처럼 신나게 맞을 걸? 그래도 좋은 거야?"
그러나 시벨리우스는 대답대신 '엘'을 꼬옥 끌어안았을 뿐이었다.
마치 원하던 장난감을 독점한 꼬마처럼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던 녀석은,
감동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엘 맞구나…이번엔 진짜 엘이야. 나와 기억을 공유한…나를 기억해 주는 엘이 맞았어."
"나~참. 같은 말을 대체 몇 번이나 반복하게 만드는 거야?
다른 사람들도 보는데 창피하게 자꾸 이럴래?
아무튼 너 지금까지 일행에게 민폐끼친 건 확실하게 사과해. 알아들었어?"
"쳇, 나도 그런 것쯤은 알고 있다고. 하지만 이게 내 탓인가?
다 너랑 똑같이 생긴 저 녀석 때문인걸."
"…!"
"시벨리우스!"
이런 걸 두고 사람들은 은혜도 모르는 빌어먹을 놈이라고 하지, 아마?
지금까지 오해 받아도 참아준 성의도 모르고 한순간에
나만 나쁜놈으로 몰아가는 시벨리우스의 태도에 나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저 자식…그냥 이 자리에서 콱 육회를 떠버릴까?
그러나 시벨의 말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녀석은 말리는 '엘'을 무시한 채 지금껏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것처럼 떠벌떠벌 떠들기 시작했다.
"혹시 이런 거 아니야? 엘퀴네스 녀석, 유달리 너한테 집착이 심했잖아.
왜 정령왕들은 죽으면서 한 가지씩 소원을 빌 수 있다고 하던데,
자신의 뒤를 이을 정령왕이 엘 너랑 똑같이 생기길 빈 건 아닐까?"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똑같이 생길 이유가 없잖아.
트로웰 녀석도 충분히 수상해. 둘이서 작당을 하고 너의 <대타>를 세운 걸지도 몰라."
"시벨! 너, 정말!!"
빈정거리는 시벨의 말에 '엘'은 기겁을 하고 소리쳤지만 오히려 나는 담담해 지는 심정이었다.
어쩌면 나는 또 하나의 '엘'이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이런 일을 이미 예상했던 걸지도 모른다.
화내는 것이 더욱 우습게 여겨질 정도로 그의 말을 차분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걸 보면.
문득 내 것이 아닌듯한 낮은 목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갔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고?"
"헉 미안해, 엘. 이 녀석은 다 좋은데 말을 함부로 해서 탈이거든. 그냥 무시해 버려, 하하."
"아니, 상관없어. 생각해 보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닌 것 같고.
하지만 말이야, 나도 좋아서 이런 얼굴 가지고 태어난 건 아니야."
"그, 그거야 그렇겠지. …흐음, 그나저나 정말 신기하긴 하다.
이번대의 정령왕이 왜 하필 나와 꼭 닮은 거지?
저기 있잖아, 그 엘이라는 호칭은 유희하기 편리하기 위해서 지은 것?"
"…왜?"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옆에서 지켜보던 시벨리우스가 냉큼 끼어들었다.
녀석은 항의하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불만에 가득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왜긴 왜야! '엘' 본인 앞에서 다른 녀석이 같은 이름을 쓴다는 거 난 기분 나빠.
어차피 애칭이니까 다른 걸로 바꾸라고."
"시벨!! 아, 미안해. 나는 그런 뜻이…"
"상관없을 걸? 어차피 그거…트로웰이나 전대 엘퀴네스가 지어준 이름일지도 모르잖아.
그냥 바꾸는 게 본인한테도 자존심 덜 상하는 일이지 않을까?
그 자긍심 높기로 유명한 엘퀴네스가 남의 대타로 있다는 거, 솔직히 불쾌한 일이잖아."
"이 자식…한번쯤 남의 기분은 생각하고 말하는 게냐아?"
단번에 혈압이 상승한 듯한 '엘'의 분노한 얼굴에도 시벨은 요지부동한 표정으로 고집을 피웠다.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이상한 일이었지만 나는 미운말만 골라하는 시벨보다 옆에서 안절부절하는
'엘'의 모습이 더 얄밉게 느껴졌다.
단순한 기분 탓인진 몰라도,
어째 녀석이 말리려고 건네는 말마다 오히려 시벨을 부추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존심? 엘퀴네스로서의 자긍심? 그런 건 몰라.
난 단지…이곳은 대가 없이 나를 사랑해 주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을 뿐이야.'
처음 명계에서 내가 잘못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솔직히 안심했었다.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된 가정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겠구나, 라는.
신이 내게 주신 또 하나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보단 전혀 낯선 현실 속에 뚝 떨어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두렵고 고통스러웠다.
내겐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이유,
이 땅을 밟으면서 존재해야 했던 이유가 필요했다.
정령왕의 존재가 한 차원에 미치는 영향력 따위가 아닌,
순수하게 '나'를 바라봐 주는 누군가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것은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알았어. 엘이란 이름이 마음에 안 든다 이거지?
그렇다면 바꾸지 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에? 하지만…"
"괜찮아. 어차피 같은 이름이면 헷갈릴 거 아니야?
시벨녀석이 투덜거리는 것도 못 봐주겠으니까, 앞으론 그냥 '지훈'이라고 불러."
"지…훈?"
이곳에선 약간 낯선 억양인 탓인지, '엘'과 시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인지 궁금해 하는 듯 했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가르쳐 줄 내가 아니다.
천하의 강지훈. 버렸던 이름을 다시 주워 삼킨 날이었다.
"와아, 트로웰이 정말 그랬어요?"
"그렇다니까. 그래서 내가 그때 말이야…"
당분간 우리와 동행하기로 결정을 내린 '엘'은 알리사를 비롯한 일행들과 순식간에 친해졌다.
워낙 타고난 사교성이 좋기도 했지만,
상대방이 원하는 화제가 무엇인지 척척 알아맞히고 이끌어가는 화술에 다들 넘어가 버린 것이다.
던전으로 가는 내내 '엘'주위엔 이야기꽃이 질 줄을 몰랐고,
덕분에 나는 본의 아니게 혼자 다니는 일이 많아졌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혼자는 아닌가? 내 옆엔 마족 데르온이 함께 걷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엘'에게 처참하게 당하고 깨어난 이후로 묵묵하게 일행의 곁을 따르고 있는 상태였다.
임무를 실패하고 돌아가서 받을 문책이 무서워서인지,
아니면 이제부턴 대놓고 감시하자는 수작인진 몰라도,
도무지 떠날 생각이 없는 듯한 모습에 사람들은
어느새 그를 자연스럽게 일행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게다가 의외로 지도나 암호를 푸는데 정통한 특기가 있음이 발견되어,
던전을 찾는 모종의 임무를 그에게 고스란히 떠맡긴 상황이기도 했다.
한참동안 지도와 주변 지형을 살피며 걷는 것을 지켜보던 나는,
어쩐지 지루해 지는 느낌에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이름이 데르오느빌 이라고 했나요?"
"그냥 데르온이라고 부르십시오. 무슨 일 이십니까?"
"에? 아니, 일이라기 보단…저, 상처는 이제 괜찮아요? 아픈 덴 없어요?"
"엘님…아, 지훈이라고 부르라고 하셨죠?
지훈님이 치료해 주신 뒤론 아무 탈 없이 멀쩡합니다만."
그러면서 '질문의 의도가 뭐냐'라고 묻는 듯한 시선에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어쩐지 그냥 심심해서 말 걸어봤다고 했다간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사생결단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 내 모습을 본 데르온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정이 길어져서 지루하신 듯 하군요. 걱정 마십시오. 곧 던전의 위치를 찾을 듯 하니까요."
"아, 그래요? 미안해요, 데르온. 괜히 제가 할 일을 떠넘기게 되서…"
"괜찮습니다. 그다지 어렵지도 않으니까요. 그런데 저도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혹 루카르엠이라고 하는,
빌어먹을 정도로 뺀질거리기 좋아하는 이상한 마족 하나 보신 적 없으십니까?
이곳에 오면 만나게 될 줄 알았는데, 전혀 코빼기도 안 보이니 이상하군요."
루카에게 단단히 원한이라도 있는 모양인지,
입술을 악다문 데르온의 눈매가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삐질 식은땀을 흘린 채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보긴 했는데, 전에 갑자기 한번 나타난 이후론 지금까지 소식이 없어요.
뭔가 은밀한 계획을 진행시키는 것 같긴 했는데…"
"큭 이번엔 누구 숨통을 조여 놓으려고."
"네?"
"아니, 아닙니다. 그는 심할 정도로 장난을 좋아해서요.
그게 다른 사람 입장에선 장난이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만.
일단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라, 마족들 사이에서도 항상 요주의 할 인물이지요.
마신은 어쩌자고 그런 저주받은 생물체를 마계에 내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하하하."
대단한 성격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마족들 사이에서까지 '저주받은 생물체'운운할 정도라니,
새삼 루카르엠이란 마족이 얼마나 사악한 녀석인지 실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걸까?
엘뤼엔의 문장을 본 이후, 이상할 정도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던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서 어른거려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혹시 어디선가 또 엉뚱한 소문을 만들어 퍼트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당신은 다시 마계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엘'의 말에 의하면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마왕이 시킨 일이죠?"
"하아,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하기도 그러니 다 말씀드리지요.
정확히 말하면 지훈님 일행보단 루카르엠의 행방을 찾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혹시 그가 받은 임무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이사나를 암살하라는?"
"네, 그렇습니다. 루카가 다 말씀드렸군요.
이미 눈치 채고 계시겠지만, 마왕은 이사나의 숙부인 유카르테 대공과 계약을 했습니다.
그것을 조건으로 무엇을 받기로 했는지는 모릅니다만,
아마도 그 계획에 루카르엠이 방해가 된 듯 합니다.
그래서 정령왕인 당신을 이용하여 그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지요."
"에? 제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전개에 놀란 표정을 하는 내게,
데르온은 마계에 위치한 루카르엠의 존재와 마왕과의 관계,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리하여 결국 나온 결론은,
루카는 마왕의 뒤통수를 치기위한 새로운 작전에 돌입했다는 예상뿐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그의 속셈을 알기위해 이곳에 왔다는 뜻인가요?"
"하하. 그런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그저 마왕의 명령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내려온 것뿐이죠.
저는 누구처럼 유들유들하게 상황을 다른 자에게 떠넘길 재주가 없거든요.
아마도 마왕은 4대 공작들의 자리를 부재로 만들 속셈인 듯 합니다."
"아하. 계획이 들통 났을 때,
자신을 저지할 수 있는 가장 강한 4명을 미리 없애겠다는 생각이군요.
그런데 계속 이곳에 있어도 괜찮겠어요?"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건, 저 혼자서는 절대로 그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죠.
그래서 저는 어떻게든 루카를 만나 자문을 구할 생각입니다. 만날 수 있다면요."
"흐음…."
마족들이란 하나같이 비열하고 나쁜 악당일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성격이 약간 호전적이었던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이제 동료들에 대한 걱정으로 화제를 옮겨가고 있었다.
"가장 걱정되는 건 세르피스입니다.
그녀는 유달리 왕의 자리에 대한 집착이 높거든요.
알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호심탐탐 기회를 노렸으니,
다른 4대 공작이 없는 상황이 절호의 찬스라고 여기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왕은 그녀의 생각만큼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닐 텐데 말이죠."
"세르피스…아아, 그때 당신과 함께 왔었던 검은 머리의 누님 말이죠.
그럼 데르온은 마왕자리에 관심이 없는 건가요?"
"없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것이 제 삶의 목표가 되지는 않을 뿐이죠.
저는 그것보단 강한 상대를 만나 실력을 겨루는 게 더 기쁘거든요.
뭐, 예상치 못한 존재의 등장으로 뼈아픈 실책을 기록하긴 했습니다만."
"아, '엘'을 말하는 거군요."
"크흠. 4천년 전의 인간이라니…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리가 없습니다.
동료들에게도 주의를 주시는 게 좋겠군요.
저런 타입의 인간은 언제 어떤 식으로 뒤통수를 칠지 모르거든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데르온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때부턴 또 다시 던전을 찾기 위한 일과 그것을 지켜보는 것으로 시간을 때우는 식이었다.
가장 괴로운 건 매끼의 식사 때마다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아직 내가 정령왕이라는 걸 모르는 알리사가 자꾸만 음식을 억지로 권하는 바람에,
애초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지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와 동료들의 사이는 점점 소원해 지는 것 같았다.
한 번은 그런 내가 안타깝게 여겨졌는지, '엘'이 몰래 따라 나와 점잖은 충고를 해 준적도 있었다.
"그러면 안돼, 지훈. 길을 떠날 때도 항상 혼자서 다니잖아? 적어도 식사만이라도 같이 해야지."
"아, 미안. 하지만 난 음식을 먹으면 속이 좀 안 좋아서…"
"아아. 정령이라서 그런 거지? 나도 이해하긴 해.
그래도 전의 엘퀴네스는 억지로라도 조금씩 먹는 모습을 보여줬었어.
지훈도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식사시간마다 자리 떠나는 거 솔직히 보기 좀 안 좋잖아."
"아…"
"나중에 정령왕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해도 마찬가지야.
다들 식사를 하는데, 혼자서 가만히 있으면 요리한 사람이 서운해 하지 않겠어?
지금까지 시벨이 만든 음식도 그래서 먹지 않았다며? 그건 고쳐야 할 것 같아."
"……"
그 외에도 그는 이것저것 내 일에 참견하거나,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라고 강요를 하는 일이 많았다.
모두 친절하고 자상한 말투였지만,
들을 때마다 나는 점점 스트레스가 쌓여 나중에는 결국 신경질을 내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엘'이 일행으로 합류한지 정확히 일주일이 지나던 어느 날이었다.
"그러니까 지훈, 내가 하는 말은…"
"알았어. 제발 그만 좀 해! 내가 다 알아서 할 일이잖아.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좀 지나친 참견 아니야?"
"아, 미안. 그런 뜻이 아니라 난 그저…"
"나도 생각이란 게 있고, 가치관이라는 게 있어!
전대의 엘퀴네스는 전대고, 지금의 나는 나야!
그가 했다고 해서 나 역시 똑같이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자꾸 다른 사람의 입장만 배려하라고 하는데, 그러는 너는 왜 내 입장은 배려하지 않는 건데?"
"미안, 난 그런 생각이…"
지금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내가 드디어 반항(?)하는 것이 놀라웠는지,
'엘'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에 뜨끔해진 내가 속으로 좀 너무했나 자책하는 순간,
우리 대화를 들은 탓인지 멀리 있던 시벨리우스가 가까이 다가왔다.
"뭐야?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아, 시벨.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잠깐…"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지훈이 너한테 소리 지르는 거 다 봤어.
너, 지금 정령왕이라고 엘을 무시하는 거야?"
"…그런 적 없어."
"그런 게 아니라면 왜 엘이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데?
엘한테 함부로 했다간 가만히 안 있을 거야.
요즘 너 때문에 일행들 분위기가 얼마나 서먹한지 알기나 해?
항상 오냐오냐 자라서 누구한테나 사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그거 단단한 착각이라는 거 알지?"
너무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못하자, 시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다음순간, 녀석은 나에게만 들릴 듯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그 '사랑'이란 것도 엘의 대신이었던 주제에."
"……"
저 자식을 어떻게 하면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날까.
마치 승리자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엘을 데리고 돌아서는 모습에
나는 들 끓어오르는 살기를 억누르느라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차마 손을 들어 공격을 퍼부을 생각이 안 드는걸 보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녀석의 말을 인정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런 내 생각을 읽은 탓일까?
사방에 퍼져있던 나이아스들이 어느새 내게 다가와 위로의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흑흑흑. 저 자식 죽일 거예요. 감히 엘퀴네스님께 그딴 말을….
-엘퀴네스님 기운내세요, 저런 말똥보다 못한 놈의 말은 무시해 버리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왕께서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랑받을 가치가 있으신 분. 절대 기죽으실 필요 없어요.
-맞아요, 저 녀석은 지금 단단히 착각하는 거라고요.
그 잘난 일행들이 누구 때문에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건데!
감히 정령왕을 무시하다니, 천벌 받을 짓이라고요!
-차라리 정령계로 돌아가요, 네? 이런 곳에서 저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계실 필요 없잖아요!
"쿡…"
씩씩거리는 그들의 목소리에 나는 상황도 잊고 피식 미소짓고 말았다.
정령이라는 것은 어차피 정령왕에게서 파생된 육체의 일부.
어쩌면 나는 이 말을 내 자신에게 건네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국, 혼자서 거울을 보며 떠들어 대고 있는 셈이랄까.
모처럼 위로받은 보람도 없이, 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던전을 발견한 것은 엘과 데르온이 합류한지 2주일이 다 되 가던 무렵이었다.
죽음의 숲과 바론 사막의 교차점에는 온통 바위로만 이루어진 커다란 산이 깎여 있었는데,
던전은 그 안의 지하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형 자체도 험악할 뿐만 아니라,
하필 그 장소가 온갖 사막의 몬스터가 밀집된 곳이었던 관계로,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수십 번 전투를 치러야 했다.
중간에 피 냄새를 맡은 마물들이 숲에서 떼거지로 몰려나오긴 했지만,
그 부분만큼은 마계 4대 공작인 데르온의 활약으로 아무런 피해 없이 물리칠 수 있었다.
가장 위험했던 놈은 바론 사막의 터줏대감이라는 지옥 땅거미들이었다.
평소엔 땅 아래에서 살고 있다가 먹이가 다가오면
바로 지상으로 튀어나와 낚아채 가는 놈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길을 걷는 내내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땅의 정령사인 알리사의 힘만으로는 수비 범위가 너무 넓었기 때문이다.
촤악!!
"끼에에에에엑!!"
쿠우웅!
인간의 몇 배에 해당하는 덩치가 갑자기 땅에서 솟아오르면
누구라도 놀라서 몸을 굳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미는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먹이를 잡아 지하로 끌고 들어가는 수법을 사용하는 듯 했다.
하지만 우리 일행들이 어디 보통 인간이던가?
상대를 살피지 않고 무모하게 돌진한 녀석들은,
'엘'이 휘두르는 칼에 동강나 그대로 시체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던전 안으로 들어가는 내내 우리들의 뒤에는
지옥 땅거미의 시체가 축제의 행렬처럼 길게 늘어졌다.
"어휴. 보통 사람들은 정말 들어갈 엄두도 못 내겠는 걸? 무슨 몬스터가 이렇게 많아?"
"하지만 엘, 정말 멋졌어요. 검을 진짜 잘 다루시네요."
"에헴. 이 정도야 기본이지.
예전에 정령과 계약했을 때는 더 쉽게 처리할 수 있었어. 식후 디저트만도 못했을 걸?"
"와아, 대단해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잘 싸울 수 있어요?"
예전부터 내내 검술을 배우고 싶어 했던 이사나는 '엘'의 활약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엘'이 즐거운 표정으로 설명을 이으려는 순간,
마침 바위산에 다다른 데르온이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입구가 막혀있군요. 별다른 장치가 보이지 않는걸 봐선 부수고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네? 그럴 리가. 정보길드에서 제공한 자료에는 2층까지는 개방이 되어 있었는데요.
여기 정말 바론 던전 맞아요?"
"지도대로 왔으니 확실합니다.
길드에서 받은 자료가 사실이라면 그 사이에 누군가가 와서 보수를 했다는 뜻이겠지요."
"보수라니…설마 이 던전을 만든 사람이 살아있다는 소리인가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나뿐만 아니라 일행들 모두 당혹한 얼굴로 술렁거렸다.
그러자 데르온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던전을 만든 사람이 지금껏 살아있을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차라리 우리들이 이곳으로 올 것을 예상한 누군가가,
악질적인 장난을 쳐두었다고 보는 게 옳겠죠.
던전안의 트릭들도 전혀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을지 모르겠군요."
"하아, 정말 갈수록 태산이군…. 설마 최하층의 물건까지 변동이 생긴 건 아니겠지?"
"우선 들어가 봐야 하지 않겠어?
가 봐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들 물러서봐, 입구를 부술 테니까."
명랑한 목소리로 말한 '엘'은 들고 있던 검을 곧추세우며
미세한 푸른 기운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검기라고 했던가?
검이 완전히 새파란 빛으로 변하자 그는 망설이는 기색없이
단번에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향해 내리그었다.
촤악- 쿠우웅!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위험한 기운을 느끼고 소리쳤다.
"다들 피해!!"
콰가가가가가가가각!!
"꺄아아악!"
"으악!!"
"뭐, 뭐야?!!"
바위가 잘린 순간 우리를 기다린 것은 무식할 정도로 큰 쇳덩이를 박은 수백발의 화살 세례였다.
다행히 나보다 먼저 이 점을 간파한 '엘'이 잽싸게 잘린 바위의 반쪽을 방패로 삼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녀석의 뒤에 있던 우리들은 그대로 꼬치신세로 전락할 뻔한 순간이었다.
그 뒤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별다른 반응이 없자,
'엘'은 그때서야 촘촘히 화살이 박힌 바위를 저 멀리에 내던지며
창백한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죽을 뻔 했다.
입구에 이런 걸 설치해 두다니, 누군지 몰라도 정말 가차 없는 녀석인데?
최하층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바위를 자르면 바로 공격하도록 마법을 걸어둔 것 같군요.
상대편은 마법에 정통한 자입니다. 다들 조심하십시오."
데르온의 충고에 일행들은 전보다 한층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초반부터 엄청난 화살 세례가 날아든 것 때문인지,
만만치 않은 장소라는 인식이 더욱 강해진 모양이었다.
차례대로 서로의 얼굴을 보며 마음의 각오를 다진 일행은,
데르온을 필두로 천천히 던전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던전의 안은 지하라서 어두울 거란 예상과 달리 생각보다 상당히 밝았다.
마치 동굴처럼 둥그스런 내부는 바위를 깎아서 만든 것을 증명하듯
거친 돌 표면이 도드라져 있었고, 천장부위엔 둥그런 모양의 돌맹이가 하나씩 박혀있었는데,
간격에 따라 일정시간 빛을 내뿜는걸 보면 아마도 저것이
이 동굴 안을 밝히는 형광등(?) 역할을 하는 듯 했다.
내가 잠시 그것을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누군가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야명주잖아.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야."
"야명주?"
"…자체적으로 빛을 내는 보석의 일종이야.
중간계에서는 상당히 비싼 값에 거래되는 거지.
저런 걸 수두룩하게 박아 놓은 걸 보니,
누군진 몰라도 이 던전 지은 인간은 돈이 썩어 넘친 모양이군."
요즘 들어 계속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녀석에게 친절한 설명을 건네려니 쑥스러웠던 탓일까?
시벨의 얼굴은 전에 없이 붉어 보였다.
하지만 정작 그 대답에 호기심을 보인 건 나보단 알리사와 이사나 쪽이었다.
"와아, 저게 야명주예요? 책에서만 봤던 건데…멋지다."
"저게 하나에 몇 백 골드씩 하는 거지? 하나만 가져가면 좋겠다. 한번 뜯어볼까?"
"앗, 안돼! 지금부터 던전 안에 있는 모든 물건엔 일체 손을 대지 마.
자칫하면 트릭이 열릴 수도 있으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아무거나 함부로 밟아서도 안 되죠.
일단 알리사님, 땅의 정령을 불러주시겠습니까?
지하층으로 무사히 내려가려면 정령의 도움의 필요할 것 같군요."
데르온의 말에 알리사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곤 한 무리의 놈들을 불렀다.
그들은 곧 계약자의 부탁에 따라 사방을 누비며
던전 안에 감추어진 트릭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실망스럽게도 '아무것도 알 수 없다'였다.
"흠, 그렇다면 기계나 장치가 아닌, 마법을 이용한 트릭들이 대부분이라는 소리입니다.
이래서는 정령들의 도움도 기대하기 어렵겠는걸요?"
"초반부터 쉬울 거라고 예상한건 아니니 어쩔 수 없죠.
일단 그럼 무작정 가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다들 출발 할까요?"
내 말에 일행들은 누구하나 반대 없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서 죽치고 앉아있어 봤자, 아무것도 해결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막상 걸음을 옮기기 채 한 시간이 되기도 전에
바닥에 깔려진 수많은 트릭들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시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한 알리사가
무심코 벽의 돌출된 부분을 잡는 것에서부터였다.
그러자 그녀가 밟고 있던 바닥이 푹 꺼지기 시작했다.
끼익! 쿠쿠쿠쿵!!
"꺄아악! 엄마야!"
"알리사!!"
갑자기 구덩이로 변한 바닥엔 무수히 많은 쇠창살이 박혀 있었다.
미처 아무것도 잡지 못한 알리사가 그대로 떨어지려는 순간,
짧게 혀를 찬 시벨리우스는 재빨리 마법을 사용하여 그녀를 바닥위로 다시 끌어 올렸다.
너무 놀란 탓에 숨만 헉헉거리는 알리사를 '엘'이 얼른 달려가 부축했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덴 없어?"
"노, 놀라 죽는 줄 알았어…"
"그래서 아무것도 건드리면 안 된다고 했잖아. 어쩔 수없다.
시벨, 지금부턴 네가 알리사 옆에 딱 달라붙어 있어.
위험한 순간이 오면 아까처럼 도와주고."
"…그러려고 했어."
"아, 역시 착한 우리 시벨. 고마워. 알리사를 잘 부탁해."
"응."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녀석은 힐끔 내 눈치를 보았다.
아마도 이전에 나한테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시작이었을 뿐,
그 후부터 진행되는 트릭의 발동은 가히 사람의 피를 말리는 작전을 방불케 했다.
갑자기 위에서 뾰족한 칼날이 내려온다거나, 거대한 식칼이 지나가는 건 예사였고,
점액이나 돌덩이로 된 몬스터의 등장도 심심치 않았다.
특히 점액으로 된 몬스터의 경우,
입안에서 강한 산성이 섞인 독침을 쏘아냈기 때문에 피하지 못하면 큰 치명타를 피할 수 없었다.
한 두 마리였던 몬스터는 점점 4마리, 5마리…
결국은 수십, 수백 마리로 번져 결국 우리는 여유부릴 사이도 없이
각자 할당량을 나눠 맡아 처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이야야앗! 죽어라앗!"
"퀘에에엑!!"
"시큐엘! 녀석을 막아!"
"멀든! 놈들의 숨을 끊어버려!"
"암흑의 기운이여! 이 세상을 평정할 지어다! <다크 파이어!>"
콰아앙! 쿠웅! 촤아악!!
"키에에에에엑!"
"쿠오오오오!!"
쿠궁! 쿠구구궁!
마지막 한 마리 남았던 돌덩어리 몬스터(골램이라고 했던 것 같다)가 쓰러지자,
일행은 저마다 풀썩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사이에 나는 얼른 달려가 다친 사람들의 상처를 치료했다.
"헉-헉- 무슨 이딴 던전이 있지?
생전 처음 보는 괴물에, 수백 개의 돌 골램이라니!
혹시 다음 층에서는 와이번이나 발록이라도 나오는 거 아니야?"
"그럼 최하층에선 드래곤이 나오게요? 아무튼 여기까지가 2층인 것 같군요.
벌써 저녁이 된 것 같은데, 일단 오늘은 이곳에서 자고 내일 아침부터 다시 출발하도록 하죠."
"이게 겨우 2층? 히잉, 가기 싫어~그냥 안가면 안 될까?"
알리사의 투정은 당연히 무시되었다.
지금까지 쭈욱 한 통로로 이어지던 1,2층에 비해 3층에서부턴 입구에 문이 달려있었다.
이번엔 또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 조심스럽게 문을 여니,
붉은 카펫이 깔린 기다란 복도가 드러났다.
마치 우리가 던전이 아닌 어느 성에라도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한참을 걸어가는데도 함정은 커녕 그 흔한 몬스터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지나치게 조용한 복도는 우리들이 걷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는 것이 없었다.
"정말 조용하네. 여긴 무슨 함정이 있는 걸까?"
"글쎄요. 아무런 공격이 없으니 뭔가 이상하군요. 하지만 안심은 금물입니다.
원래 이런 곳은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거든요."
데르온의 말에 일행은 모두 동조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턴 또다시 침묵의 연속이었다.
모두들 입을 꾹 다문 채 주변을 살펴보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뚜벅 뚜벅 뚜벅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문득 내 뒤를 쫓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아까보다 줄어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지만 단순히 신경이 예민한 탓이었는지, 여전히 일행의 수는 똑같았다.
하지만…뭔가 좀 어긋난 느낌이랄까?
내가 불안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자 일행들은 왜 그러냐는 듯이 멀뚱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들 중 유일하게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이는 알리사 뿐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이상해서,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알리사, 왜 그래? 어디 아프니?"
"응? 내가 뭘?"
"아까부터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잖아. 혹시 어디가 아픈 건 아닌가 하고 말이야."
"아니, 아니, 아픈데 없어. 난 멀쩡해. 괜찮으니까 계속 가."
평소처럼 생글 웃으면서 대답하는 알리사는 본인의 말마따나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내가 잘못 느낀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뚜벅
'어? 아까보다 걸음소리가 더 줄어든 것 같은?'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일행의 수는 여전히 그대로였고, 사람들의 표정도 변함이 없었다.
이게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인가!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일행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뭔가 이상하지 않아?"
"응? 뭐가?"
"벌써 1시간이 넘었는데 몬스터도 나타나지 않고, 함정 같은 것도 없잖아.
아무것도 안 나타나니 오히려 불안해 져서 말이야."
"아니야. 괜찮으니까 계속 가."
"어? 하지만…"
"괜찮다니까? 그냥 계속 가자."
그러자 그 순간, 내 옆에 있던 시벨의 얼굴이 팍하고 일그러졌다.
젠장하고 짧게 욕설을 뱉은 녀석은 갑자기 내 팔을 잡더니 전속력으로 앞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녀석과 같이 뛰게 된 나로선 그야말로 황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뭐, 뭐야, 시벨! 갑자기 왜 그래?"
"일단 뛰어! 저 자식들 몬스터야!"
"엥? 몬스터?"
놀란 표정으로 뒤돌아 본 순간 나는 그대로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웃고 있던 일행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바짝 뒤쫓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다리는 마치 유령처럼 둥둥 떠 있었다. 나는 기겁을 하고 비명을 질렀다.
"으악! 저게 뭐야!!"
"상급 마물중의 하나인 도플갱어야!
젠장, 이상하다고 눈치 챘으면 진작 말을 했어야 할 것 아니야!
일행들이 전부 교체될 동안 뭘 하고 있었어!"
"사람으로 둔갑하는 마물 따위 내가 알게 뭐야! 그러는 넌 왜 진작 눈치 채지 못했는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투닥거리며 말로 다투는 사이 어느새 우리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뉘어 지는 통로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 앞에 서있는 누군가의 존재를 발견한 순간
나와 시벨은 똑같이 경악에 찬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똑같은 옷차림에 똑같은 얼굴을 가진 두 명의 이사나가
각 통로 앞에 서서 우리를 향해 다급하게 소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시벨님! 지훈! 여기예요! 이쪽으로 오세요!"
"거긴 아니야! 이쪽이야! 동료들이 모두 이쪽에 있어! 얼른 이곳으로!!"
"……"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필요로 하겠는가.
황당한 표정으로 두 명의 이사나를 바라보는 사이,
어느새 우리 뒤를 쫓아오던 일행은 2층에서 마주쳤었던 거대한 점액질의 몬스터로 변해 있었다.
그들은 꿈틀거릴수록 점점 더 많은 숫자의 동료들을 증식시켰다.
키에에엑!
어느새 통로의 앞은 수 백 마리의 몬스터 떼로 바글바글한 상태가 되었다.
그것을 보고 얼굴을 찌푸린 시벨은 그대로 손을 들어 공격 마법을 시전했다.
"섬광처럼 타오르라! <파이어 스톰!>"
촤아악! 쿠우우우웅!!!
지글지글 타오르는 소리와 매캐한 연기도 잠시.
우리는 아까보다 더욱 불어나 버린 몬스터에 그대로 기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어째 이번 몬스터는 죽이면 죽일수록 숫자가 불어나는 체질(?)인 듯 했다.
그때까지도 두 명의 이사나는 연신 자기 쪽으로 오도록 소리치고 있었다.
"공격은 위험해! 일단은 피해야해! 이쪽으로 오라니까? 지훈! 시벨님!!"
"거기가 아니야! 거긴 몬스터의 밀집 장소라고! 동료들은 이곳에 있어! 어서 이쪽으로!"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오히려 담담해 지는 심정이었다.
그러자 시벨은 나를 바라보며 다급하게 물었다.
"저 두 사람 중에 누가 진짜인지 알겠어?"
"…둘 다 가짜야."
"뭐?"
"둘 다 가짜라고. 이사나는 이마에 정령왕과 계약한 인장이 찍혀있어.
근데 저기 있는 두 사람은 모두 이마에 인장이 없어."
"!! 헤에~ 그렇단 말이지? 그럼 해결 방법이야 간단하지. 가랏- <라이트닝 볼트!!>"
"자, 잠깐!"
콰앙! 콰지지지직!
시벨이 시전한 공격마법은 그대로 매섭게 달려가 두 명의 이사나를 불태웠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들의 모습이 곧 우리 뒤에 있던 몬스터와 같은 형체로 변하는 것이었다.
"쿠에에에엑!!"
끔찍한 비명소리와 함께 두 마리의 몬스터가 잿더미로 변하자,
나와 시벨을 둘러싸고 있던 수 십 마리의 몬스터들도 갑자기 땅바닥에 녹아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통로였던 부분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우리는 뻥 뚫려진 바닥으로 순식간에 추락했다.
턱! 쿠우우웅!!
"아야야야…에구구 나 죽네."
"젠장. 뭐 이따위 던전이…"
떨어진 곳은 방금 전까지 있던 곳과 달리 무척 컴컴하고 음습한 장소였다.
짧게 혀를 찬 시벨은 곧 라이트 마법을 시전 하여 주변에 둥그런 빛 덩어리를 띄워 올렸다.
그리하여 간신히 보게 된 장소는 사방이 가로막힌 커다란 파티홀 같은 느낌이었다.
왼편에는 이 방의 유일한 출구인 듯한 문 하나가 달려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그때서야 시벨리우스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너 미쳤어? 두 사람 중에 혹시라도 진짜 이사나가 있었으면 어쩔 뻔 했어?
다짜고짜 공격부터 하다니, 그러다 녀석이 죽기라도 하면 책임 질 거야?"
"시끄러. 아니었으면 됐지 뭘 그래?
그렇게 판단력에 자신이 없으니까 몬스터를 발견한 게 늦된 거 아니야!
애초에 네가 눈치만 빨랐어도 이렇게 까지 일이 복잡해지진 않았어."
"아하, 그래? 그거 참 미안하게 됐네. 누가 들으면 다 내 탓인 줄 알겠다?"
"누가 전부 네 탓이래? 아무튼 이럴 때가 아니야.
한시라도 빨리 녀석들을 찾아야 해. 지금쯤 어떤 장소에서 무슨 일을 당하고 있을지 모르잖아."
그렇게 말하며 벌떡 일어난 시벨은, 성큼성큼 단 하나의 출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놀란 나는 얼른 따라가 당장이라도 문을 열려는 녀석의 팔을 붙들었다.
"뭐야? 왜이래?"
"여기가 정말 출구라는 보장이 어디 있어?
상황이 긴박한건 알지만 좀 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무슨 생각? 늦장 부렸다간 정말로 위험해.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만 좀 해. 정령왕이면 제발 정령왕 답게 굴어.
너란 녀석을 한때나마 '엘'이라고 착각하게 만든 나를 실망시킬 셈이야?
이렇게 우유부단하니 다른 정령왕들이 널 가지고 놀기나 하는 거잖아!"
"!!"
녀석의 말에 나는 못이라도 박힌 듯 잠시 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시벨은 아차 싶었는지, 약간 후회하는 듯한 얼굴로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곤 조금은 풀어진 표정으로 나를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 이런 말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너만 보면 화가 나.
네가 '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어쩐지 배신당한 기분이었거든."
"…난 한 번도 내가 엘이라고 말한 적 없어."
"알아. 그래도 나는 네가 반드시 엘 일거라고 믿었어. 그만큼 녀석과 닮았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진짜 엘을 찾은 지금도 네가 엘 일거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어.
그래서 아마 더 짜증이 솟았던 걸지도 몰라."
"…!…"
"지금까지 말 함부로 했던 건 미안해. 하지만 혼란스러운 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
말해봐, 넌 왜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거지? 엘이 아니라면, 넌 대체 누구야?"
"……"
내가 아무런 대답도 못하자 시벨은 낮게 한숨을 쉬곤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쾅하고 열렸던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그때서야 잠에서 깨기라도 한 것처럼 후들거리는 다리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법의 시전자가 사라진 바람에 공간 안은 다시금 캄캄한 어둠으로 물들었지만,
내 머릿속에선 오직 시벨이 남기고간 마지막 말만이 끊임없이 되풀이 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누구냐고?
'글쎄, 이젠 나도 내가 누군지 알 수가 없는걸.
엘퀴네스는 누구고, 강지훈은 누구지? 4천년 전의 엘은 누구고 엘뤼엔은 누구야?
트로웰이 친구라고 말했던 건 누구?
엘뤼엔이 아들로 삼으려 했던 존재는 누구지? 왜 나는 이런 고민을 해야만 하는 거지?
차라리 이럴 바엔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을 텐데.'
부정적인 생각은 끝없이 사람을 침몰하게 만든다.
그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는 것은,
더 이상 내려갈 수도 없는 밑바닥에 앉아있는 것이 차라리 마음이 편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기대따위는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어쩐지 점점 몽롱해 지는 정신이 지금의 상황을 잊고 잠이나 푸욱 잤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착각이었을까?
점점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어디선가 곤란해 하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으엑. 이, 이게 아닌데? 이런, 장난이 좀 지나쳤나? 난 이제 죽었다.>
"엘! 시벨님! 알리사! 다들 어디 있어?"
하염없이 이어지는 복도의 중간에서 이사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분명 자신은 방금 전까지 일행들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에 자신 외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일행들이 자신을 놔두고 혼자 갈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사나는 점점 더 조마조마해 질 수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엘만이라도 그의 옆에 있었다면 이렇게 불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서야 이사나는 자신이 지금껏 그를 얼마나 많이 의지해 왔는지 깨달았다.
"엘…엘퀴네스! 어디에 있어?"
계약된 정령은 소환자의 부름에 언제 어디서든 응답 할 수 있다.
그것은 엘퀴네스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필사적인 부름에도 그에게선 아무런 반응을 얻을 수 없었다.
이사나는 혹시나 싶어 다른 정령을 불러보기로 결심했다.
"시큐엘? 시큐엘, 나와 봐."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시큐엘에게서도 반응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운디네와 나이아스들 또한 대답이 없었다. 설마 이곳에선 정령술을 쓸 수 없는 걸까?
이사나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허리춤에 매고 있던 검집을 움켜쥐었다.
정령의 힘을 기대할 수 없는 이상,
지금부턴 몬스터가 나타나면 순전히 검의 실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이사나는 문득 복도의 한 구석에 누군가가 주저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은 잔뜩 부운 얼굴로 연신 눈물을 흠치고 있는 알리사의 모습이었다.
"알리사!!"
반가운 마음에 그는 얼른 달려가 알리사를 끌어안았다.
아니, 끌어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알리사의 몸에 닿지 못하고 그대로 스륵 그녀의 몸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사나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울음소리를 가득 담은 애처로운 목소리가 마치 공명처럼 그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흑…다들 어디로 가버린 거야. 멀든!! 나와 봐. 왜 아무도 안 나타나는 거야.>
"아, 알리사?"
<여기 싫어. 무서워…트로웰. 흑, 트로웰…무서워. 이사나씨.
신관님, 엘, 시벨리우스…다들 어디 있어?>
"알리사! 내가 안 보이니? 알리사!"
몇 번의 부름에도 알리사는 전혀 이사나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의 형체가 점점 흐릿해 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당황한 이사나가 무심코 손을 내미려는 순간,
그녀는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
그 다음으로 나타난 것은 무심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데르온의 모습이었다.
<여긴 대체 어떻게 된 공간이지? 마력도 안통하고, 검기도 쓸 수 없다니.
몬스터라도 나오면 낭패이군.>
"데르온?"
<흐음. 처음 눈치 챈 것은 엘퀴네스님 뿐이라는 건가?
것 참. 교체당하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다니,
이거 마계 4대 공작이라는 자리를 내놔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데르온! 당신도 내가 안보여요?"
이사나는 필사적으로 달려가 데르온의 모습을 붙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알리사 때처럼 그의 몸을 그대로 통과했을 뿐이었다.
그가 사라지자 이번엔 시벨리우스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후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녀석도 데리고 나올걸 그랬나? 내가 가면 따라 나올 줄 알았더니 전혀 반응이 없네.>
"시벨리우스님…"
<심한 말해서 삐진 건가? 아무튼 그런점 까지도 엘이랑 똑같다니까.
이러니 내가 자꾸 혼동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 나 참, 어쩔 수 없군.
다시 데리고 와야…어라? 문이 어디로 갔지?>
"시벨리우스님도 …내가 안 보여요?"
<던전의 함정에 빠진 건가…. 미치겠군. 뭐 이딴 곳이 다 있지?
이런 걸 인간이 만들었다니, 말도 안돼.>
낭패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리는 시벨리우스의 모습에 이사나는 털썩 힘없이 주저앉았다.
만져지지도 않고 말이 들리지도 않는다니, 마치 자신이 유령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아니, 정말 살아있는 게 맞는 걸까?
엄습하는 두려움에 입술을 깨문 순간 이사나는
문득 자신이 있던 공간이 크게 뒤틀려지는 걸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복도가 마치 구겨진 종이처럼 엉망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탱할 곳을 잃은 그의 몸은 순식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깊은 암흑 속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궁!!
"으아아악!"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이사나는 문득 자신의 몸이 더 이상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천천히 눈을 떠보았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복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밝고 화려한 빛이 느껴졌다.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그가 처음으로 본 것은 바닥에 깔린 붉은 융단과,
화려한 금실이 수놓아진 커텐이었다.
한 구석에는 커다란 침대가 하나 있었고,
가운데에는 방문한 손님을 응접하기 위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화려할 뿐인, 별다른 이상한 점이 없는 평범한 방이었지만,
한 가지 문제라면 그것이 이사나 본인이 알던 장소와 무척이나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설마…태자시절에 쓰던…내 방?"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불길한 기분에 무심코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본 이사나는 더욱 경악하고 말았다.
이때까지 걸치고 있던 평범한 로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는 황태자가 입는 금색의 화려한 정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똑! 똑!
단정한 노크소리가 울리자 이사나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들어오는 누군가의 모습에 그는 한순간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태자전하. 기분은 어떠십니까?"
"…수, 숙부?"
들어온 이는 하얀색의 법복을 입은 유카르테 대공이었다.
그는 처연한 표정으로 이사나를 바라보며 슬픈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이사나는 지금 이 상황이 어디에선가 많이 보던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청천병력과도 같은 대공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형틀이 마련되었습니다. 아버님의 마지막을 지켜보셔야지요."
"…형틀? 마…지막?"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재앙을 대신 짊어지시고 가시는 겁니다.
그러니 태자전하는 그 분의 희생을 위업으로 받들고 강건한 황제가 되셔야 합니다."
"!! 마, 말도 안돼. 이게 어떻게 된?"
이사나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틀릴 리가 없었다.
이 상황은 아버지가 처형되던 바로 그 때의 일이 아니던가!
그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온 세상을 저주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날의 상황이 다시 펼쳐지는 것에 이사나는 한순간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러자 대공은 뻣뻣하게 굳어있는 이사나를 억지로 일으켜 어딘가로 데리고 가기 시작했다.
가기 싫다고 몸부림을 쳤지만 그럴수록 그의 걸음은 더욱 빨라지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커다란 함성과 수많은 군중들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환호하고 있는 백성들 속에서 커다란 형틀 앞에 무릎 꿇고 앉아있는 사람은 그의 아버지였다.
이 곳 솔트레테의 황제이자, 누구보다도 백성을 사랑하고 배려했던 남자였다.
그런데 어째서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환호하는가!
그의 머리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단단한 밧줄을 본 이사나는 현기증을 느끼고 비틀거렸다.
이제 곧 저 밧줄은 아버지의 목을 졸라 단번에 숨을 앗아갈 것이다.
아버지!!!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순간 엷게 입꼬리를 올린 대공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황족의 유체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교수형을 선택했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드냐고?!'
"보십시오. 국민들이 환호하고 있군요.
폐하께서 돌아가시고 나면 이 모든 재앙이 끝날 거라고 믿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태자전하도 조금쯤은 그들의 기쁨에 동조해 주십시오."
'동조해 주라고? 내가? 날더러 저들의 기쁨에 동조하라고?!'
투둑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었다.
꿈에서조차 잊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술로 지새우게 만든 일이었다.
신을 저주하고, 백성을 저주하고, 스스로마저 저주하기를 몇 번이었던가!
왜 하필 이 악몽이 다시 재현되는 거지? 왜!!
"자, 보십시오. 폐하께서 교수대에 오르십니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보지 않으실 겁니까?"
"…그만"
"현실을 외면하지 마세요, 태자전하.
지금 배웅하시지 않으면 앞으로 영원히 배웅하실 기회가 없으실 겁니다."
"…그마안!!!!"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 사이로 뿌옇게 보이는 모습은 그의 아버지가 처형되는 순간이었다.
교수대에 오르기 직전 자신을 보면서 '괜찮다'는 듯이 환하게 미소 짓는 모습에,
이사나는 차라리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떨어지는 발판, 숨이 막혀 버둥거리는 몸, 그것을 보고 점점 환호하는 백성들과,
광장에 뿌려지는 축제의 꽃가루….
왜 나는 이곳에 있는 거지?
"싫어! 안돼!! 그만! 그마아안!!!"
아아. 이대로 영원히 미쳐버렸으면.
눈을 떴을 때 내가 제일 처음 본 것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한 쌍의 까만 눈동자였다.
헉하고 나도 모르게 놀라서 몸을 일으킨 순간,
별안간 쾅하고 커다란 소리가 울리더니 눈앞에서 별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크윽! 뭐, 뭐야!"
"윽. 뭐긴 뭐야, 자식아!
점심시간 됐는데도 안 일어나니까 이 몸이 몸소 깨우러 온 거잖냐.
이씨! 너 돌머리지? 뭐가 이렇게 단단해? 아파 죽겠다."
"돌머리긴 누가 돌머리…엥? 너 누구야?"
아직도 얼얼한 이마를 문지르며 바라본 앞에는,
생전 처음보는 녀석이 어디선가 많이 본 옷차림을 한 채
나와 똑같은 포즈로 머리를 감싸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대체 정체가 뭐냐!
그러자 녀석은 뭐 잘 못 먹었냐는 듯이 바라보며 눈을 휘둥그렇게 떠보였다.
"에엥? 이게 미쳤나. 설마 머리 부딪친 충격으로 기억이라도 잃은 거야?
정신 차려, 강지훈! 나잖아, 나. 아직도 잠에서 덜 깼냐?"
"어? 설마…하태진?"
맙소사,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눈앞에 있는 녀석은 분명 내가 한국에서 살았을 때 친했던 친구였다.
단정한 교복차림과 약간 갈색 빛이 도는 생머리까지,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던 녀석과 한치의 다른 점도 없는 모습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니,
낯익은 교실의 풍경과 이리저리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 던전에 있던 내가 왜 이런 곳에 와 있는 걸까?
어? 던전? 그건 또 뭐지? 게다가 기억하고 있던 마지막 모습? 한국에서 살았을 때라니?
뭔가 생각 날 듯 말 듯한 느낌에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으윽. 뭐가 뭔지 모르겠어."
"정신 차려, 임마. 수업시간 내내 퍼 자더니만 이젠 현실까지 혼동하는 거냐?
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아직도 비몽사몽이야?"
"…꿈?"
"그래, 꿈. 아무튼 배고파 죽겠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민식이가 네 것까지 도시락 싸왔대. 기다리게 했다간 폭주할걸?"
"어? 어…. 근데, 저기. 나 진짜 꿈 꾼 거 맞아? 정말 실감났었단 말이야.
방금 전까지 굉장히 무식하게 큰 괴물들이랑 싸웠던 것 같은데?"
그러자 태진이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하나씩 질문하기 시작했다.
"첫째, 여기가 어딜까요?"
"학교."
"그럼 지금은 무슨 시간?"
"에…점심시간?"
"음, 그럼 너는 학교 점심시간에 괴물이랑 싸운 용감한 학생이 되는걸까?"
"…아니."
"꿈 꾼 거 확실하지?"
"……응."
마치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뭔가 이게 아니지 싶었다.
그러나 평소처럼 상냥하게 미소짓고 있는 태진이를 보는 순간,
그까짓 꿈이야 아무렴 어때, 라고 무심코 납득하고 말았다.
그러자 태진은 책상 한 귀퉁이에 놓여있던 무언가를 집어 건네주었다.
"뭐야?"
"안경이잖아. 이거 안 쓰면 멀리 있는 건 하나도 안 보이면서."
"으음. 그, 그랬던가? 나 굉장히 눈이 좋아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마이너스 시력주제에 좋기는 개뿔.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써.
너 하나 때문에 애들 다 기다리잖아."
태진의 재촉에 나는 마지못한 듯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얼굴에 걸쳤다.
그때서야 선명하게 주변 사물이 보이기 시작하는 걸 보면,
확실히 지금까지 꿈을 꾼 게 맞았던 모양이다.
왠지 상당히 아쉬워 지는 기분에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잘 보이네."
"그치? 이 자식은 어째 갈수록 얼빵해지는가 몰라. 꿈이 그렇게 재미있었냐?
일어났을 때 친구 얼굴도 한순간 못 알아 볼 만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자식아! 뭐 대충 알만하다.
괴물이랑 싸웠다는 걸 보니 무슨 전설의 영웅이라도 되서 모험 같은 거라도 했겠지.
맨날 판타지 소설 들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정말 언제나 크려는지."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큰 소리를 내자 태진을 비롯한
반 아이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내게 집중되었다.
어쩐지 창피해지는 기분에 고개를 홱 돌리자, 약간 기죽은 듯한 태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야, 알았어…뭘 그렇게 화를 내고 그러냐? 그냥 장난 한 걸 가지고. 미안해. 많이 삐졌냐?"
"아, 아니야. 그냥…갑자기 좀 답답해져서…너한테 화나서 그런 게 아니라…"
"됐다. 네놈 자식의 감정 기복이 불안정했던 게 어디 한 두 번이었냐?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양인데, 이 형님이 확실하게 정신이 들도록 만들어 주지. 에잇!"
"우아악! 이 자식! 무슨 짓이야~~!!"
갑자기 녀석이 끌어안고 간지름을 태우는 통에 나는 기겁을 하고 비명을 질렀다.
어이 거기 여자애들! 왜 이런걸 보고 므흣한 웃음을 흘리는 거야!
"빨리 항복 안 해? 안 그럼 계속 간지럽힌다?"
"으아악! 알았어. 항복! 항복! 내가 다 잘못했어! 항복한다니까?"
"쳇. 진작 그럴 것이지."
그때서야 거만한 표정으로 손을 탁탁 털고 물러서는 태진의 모습은
흡사 진정한 한 마리의 악마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흐트러진 교복을 단정히하며 질린 표정으로 녀석을 노려보았다.
암튼 이자식도 라피스 만만치 않게 변태…
'응? 라피스가 누구지?'
굉장히 낯익은 이름인 게, 어디선가 꼭 들어본 느낌이었지만 좀처럼 떠오르는 건 없었다.
영어라면 쥐약인 내가 외국인 친구를 사귀었을 리도 없고.
얼마 전에 본 영화에 나왔던 주인공 이름인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기던 난 곧 버릇처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마치 딴 세상에라도 다녀온 기분이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현관 앞에서 조심스럽게 건네는 말에 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집에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단지 나라는 존재가 그들에게서 무시되고 있을 뿐.
그나마 아는 척 하는 건 어머니 정도일까?
그것도 대부분이 잔소리라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옷차림이 그게 뭐냐?"
"에? 아, 죄송해요. 학교에서 친구가 장난쳐서…"
"좀 똑바로 하지 못하겠니? 그 꼴을 보면 네 아버지가 또 얼마나 기분이 상하실지.
정말이지 이 엄마는 이제 그만 좀 편하게 살고 싶다.
너 하나 때문에 항상 집안이 시끄러워서야 쓰겠니? 대체 언제나 철이 들려는지."
"…죄송합니다."
"죄송한 줄 알면 좀 고쳐.
낳아주고 키워준 은혜를 몰라도 유분수지, 정말 내가 널 왜 낳았는지 후회가 될 정도니까.
네 형과 누나의 반만이라도 좀 닮아봐라. 집안 이름에 먹칠을 하지 말란 소리야!"
씩씩거리는 어머니의 말에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큰형이 다가와 버럭 큰소리로 외쳤다.
"뭘 멀뚱히 서있어? 얼른 네 방으로 들어가기나 해!
너 때문에 엄마 또 혈압 오르시잖아! 오늘도 아버지 술 드시고 오시면 다 네 탓이야!
알았어, 새끼야?"
"형…"
"형은 무슨 얼어 죽을! 난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어!
공부도 지지리 못하는 게. 얼른 꺼져, 한 대 맞기 전에."
늘 있었던 일이지만 오늘따라 어색한 기분이 드는 건, 오늘 학교에서 꾸었던 꿈 때문일 것이다.
그 안에서 나는 그래도 사랑받고 있었던 것 같았다.
가능하면 오래도록 깨어나고 싶지 않았을 만큼.
그런데 내가 왜 일어났더라? 잠시 생각해 보던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뭐, 그래봤자 꿈은 꿈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겠지.'
아무리 아름답고 행복한 꿈이어도, 결국 깨고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나마 하교 시간이 아버지의 퇴근 시간과 겹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얼른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아버지와 마주친 날은 백이면 백 몇 대 맞기 일쑤였으니, 알아서 피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난히 거울 속에 비치는 내 얼굴이 거슬러 보였다.
약간은 각진 얼굴에 노란 피부도, 검은색 눈동자도,
짧은 더벅 머리카락도 본래의 내 것이 아닌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내 얼굴이 원래 이랬었나? 나는 한참이나 빤히 거울을 노려보았다.
바로 그때, 어쩐지 현관 앞이 시끄러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회사에서 퇴근한 아버지가 이제 막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쿵 재떨이라도 던졌는지 방문에 날카로운 물건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후레자식놈! 당장 문 안 열어?
오냐, 그래 이제 아비고 뭐고 눈에도 안 들어온다 이거지?
이래서 재수 없는 자식은 키우면 안 된다니까! 에잇! 이놈의 썩을 세상!!"
"여보! 내가 오늘은 술 드시지 말라고 했잖아요?"
"시끄럿! 가서 지훈이 새끼나 불러와! 아비가 왔는데도 나와서 인사를 안 해?
저딴 것도 아들이라고 집에 들여놔! 당장 내쫓아버려, 당장!"
"쫓아내려면 당신이 해요! 정말이지 내가 못살아!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해? 이제 좀 그만 둘 수 없어요?"
"뭐가 어째? 당신이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그러게 누가 저딴 녀석 낳으랬어?"
"누가 낳고 싶어서 낳았어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이럴 거면 낙태한다고 했을 때 말리지나 말지~! 왜 이제 와서 난리야? 왜 이제 와서!"
분에 받친 목소리와 통곡하는 목소리…
대부분의 대화가 나를 향한 저주라는 건 이미 어릴 때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내가 태어난 뒤로 벌써 몇 년 동안 반복되던 상황.
형제들이 나만 보면 짜증을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부모님이 싸우는 이유는 거의 다 나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들이 왜 나만 보면 화를 내는지 여전히 알지 못했다.
나는 조용히 벽에 등을 기대곤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전혀 낯선 사람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간혹…흔히 있는 일이 아닙니다만,
원래 가야할 운명의 길이 아닌 다른 쪽으로 억지로 분배 되는 경우가 있지요.
혹, 부모님이나 형제들에게 가족으로서의 유대감을 받지 못하지는 않았나요?>
"…어?"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지만 여전히 나는 어둡고 좁은 방안에 혼자 앉아있는 상태였다.
환청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또 다시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방금 전에 들었던 목소리와는 다른 음성이었다.
<오, 그래. 결정했다. 너 내 아들 해라.>
<갑자기 무슨 아들타령이야?>
<마음에 들었으니까. 내 아들 하라고. 마침 자식도 가지고 싶었거든.>
나를 향해 똑바른 시선을 건네며 방긋 웃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어쩐지 울고 싶어지는 기분에 나는 천천히 무릎을 세우곤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달콤한 꿈은 항상 괴로운 법이다.
그것이 결코 이룰 수 없는 망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고 마니까.
"아야! 아프잖아! 살살 좀 해!"
"시끄러! 바보 같은 자식! 그냥 얌전히 맞고만 있었냐?
나 같았음 차라리 집을 나왔다. 대체 이게 뭔 꼴이야? 완전히 엉망이 됐잖아!"
그날 저녁은 아버지가 일찍 포기하신 바람에 무사히 넘어갔다…라고 했으면 좋았을 뻔 했으나,
결국 나는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온 아버지에 의해 복날 개 잡듯 얻어터지고 말았다.
온 몸에 든 시퍼런 멍 자국을 본 태진은,
나보다 더 괴로운 표정이 되선 치료해 주는 내내 연신 투덜거렸다.
"이 바보, 멍청이, 한심한 놈아! 네가 아직도 무력하던 3살짜리인 줄 알아?
다 큰 고등학생이나 된 게 왜 아직도 맞고 사냐? 너희 부모님도 그래.
왜 맨날 너만 보면 고양이 쥐 잡듯 볶아대는 건데? 말해 봐.
너 사실은 그 집 핏줄 아니지? 혹시 누가 너 그 집에 버려두고 간 거 아니냐?"
"하태진. 거기에서 더 말하면 나 화낸다."
"얼씨구? 화낼 줄은 아셔? 그래서 이렇게 맞고만 사셨어?
안 그래도 네 아빠랑 너 붕어빵인거 알아. 차라리 남의 자식이라고 하면 이해라도 하지, 나 참."
"……."
쩝, 할 말 없다.
저 놈의 자식은 왜 속속들이 옳은 말만해서 이토록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든단 말인가?
나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였다.
"치료해 줄려면 얌전히 치료나 해라. 그렇게 쏘아 붙이고 나면 속 편하냐?"
"안 편하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그렇지 않아도 못생긴 얼굴이 더 엉망이 됐는데 친구로서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는 줄 아냐?
너 이러단 평생가도 여자친구 안 생길걸?"
"뭣시라? 못…생긴? 그러는 너는 얼마나 잘생겼다고?"
그러자 태진은 훗하고 미소를 날리더니 팔짱을 끼며 거만한 포즈를 취했다.
마치 이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 몸의 인기야 자타가 공인한 사실이지.
자 봐라, 이 매끄러운 하얀 피부와 결 좋은 머리카락!
여자애들이 이 몸만 보면 쓰러지는거 너 모르지?
꽃 미남이란 바로 나를 두고 있는 소리다 이 말씀!"
"허허. 네가 아직 진정한 꽃미남을 못 봤구나. 이 형님의 말을 잘 들어.
꽃 미남이란, 얼굴만 딱 봐도 숨이 멎을 것 같이 샤랄랄한(?) 분위기에, 지적인 눈동자.
조각 같은 입술과 자로 잰 듯한 콧날,
그리고 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를 가진 사람들을 말하는 거야. 너 정도로 무슨…"
"꼭 실제로 보기라도 했다는 것 같은 말투다?"
"당연하지! 트로웰부터 시작해서 라피스, 엘뤼엔, 이사나…
심지어 우연히 만난 엘프조차 다들 얼마나 잘 생겼었는데."
"그게 다 누군데?"
"엥? 그, 글쎄? 누구였지?"
"…아버지한테 머리라도 맞았냐?"
뭔가 상당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태진의 모습에 나는 어설픈 미소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째 요즘 들어 헛소리를 많이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단순히 내 착각일까?
그때 교실의 분위기가 한순간 소란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반 여자애들이 창가에 매달려 꺅꺅 소리를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따라 무심코 창밖을 내다본 태진은 입가에 휘파람을 불곤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아얏! 아프잖아! 거긴 어제 당구채로 맞은 데란 말이야."
"아, 미안. 암튼 밖에 좀 봐봐. 네가 말한 꽃미남의 조건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녀석이 있어."
"엥? 어디?"
스스로 말해놓고도 절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그 조건을 수용하는 인간이 있다고?
놀란 나는 벌떡 일어나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태진은 손가락으로 교정 앞에 서있는 훤칠한 키의 외국인을 가리켜보였다.
그는 실크로 된 자켓에 검은색 양복 바지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허리까지 오는 결 좋은 금발을 단정하게 하나로 묶고 있었다.
멀리 있어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여자애들 여럿 홀릴 듯한 분위기의 소유자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무료한 시선으로 담배를 태우던 그는,
창가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우리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무심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옆에 있던 여자애들이 꺄악~ 하고 비명을 지른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
착각이었을까?
우연히 나와 눈이 마주친 그의 얼굴이 잠깐 굳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히야~ 기똥차게 잘 생긴 남자네. 누굴 만나러 온 걸까?
웬만한 연예인은 앞에서 명함도 못 내밀겠다. 그치?"
"으응. 근데 저 사람…아까부터 이쪽만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아?"
"그래? 헉. 혹시 내 미모에 질투라도 한 게 아닐까?
이런, 어쩌지? 이러다 결투장이라도 날아오면…"
"그냥 죽어라, 이 자식아!"
어째 이놈의 왕자병은 점점 더 심해지는 걸까?
나는 녀석과 투닥거리며 싸우느라 어느새 교정 앞에 서있던
외국인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것은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너 여기서 지금 뭘 하는 거냐?"
집으로 가기 위해 혼자서 버스를 기다리는 나는 누군가가 물어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대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학교 교실 창가에서 보았던 외국인이 바로 내 뒤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인간같지 않게 화려한 외모에 감탄한 것도 잠시.
그가 나에게 무언가를 '물었다'고 인식한 순간,
나는 눈에 띄게 뻣뻣해진 얼굴이 되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릴 수밖에 없었다.
"윽! 그, 그러니까…Excuse me? 우에에. 나 영어 못하는데."
"…바보냐. 한국말로 물었잖아. 정신 차려."
"에? 엇! 정말이네? 와~ 한국말 잘하시네요. 근데 뭐라고 하셨었죠?"
내 질문에 그는 턱하고 이마를 짚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떻게 하면 잘 죽일까 고민이라도 하는 듯 보였다.
그런 동작 하나조차 멋있게 보이다니, 역시 사람은 타고난 얼굴이 잘나야 하나보다.
"여기서 뭐하고 있냐고 물었잖아."
"아, 버스 기다리고 있는데요. 학교가 끝나서 집에 가는 길이거든요."
"집? 여기에 너희 집이 어디에 있는데?"
"31번 버스 타고 두 정류장 정도 가면 되는데요."
"그.게.아.니.라. 여기에 네가 살 집이 어디에 있냐는 뜻이다."
"…에?"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그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멍한 얼굴로 바라보자, 남자는 아까전보다 더 화난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파란 눈이 시퍼런 불길에 활 활 타오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잠시 그렇게 나를 쏘아보던 그는,
아버지에게 맞아서 퍼렇게 멍든 팔 부분을 보더니 으득 입술을 깨물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누가 이랬지?"
"아~ 이거 별거 아니에요. 원래 제가 좀 칠칠맞아서…"
"누가 이랬냐고 묻잖아!"
"윽. 왜 화를 내고 그래요? 그냥 제가 좀 잘못한 일이 있어서 아버지한테 맞았어요. 됐어요?"
"누가 아버지라고?"
나는 대체 그가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정 폭력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라도 가진 사람인가?
더 이상 상대했다간 피곤해지지 싶어, 나는 정중하게 인사하고 돌아서려고 했다.
"제가 지금 바쁘거든요? 그럼 이만…"
"외면하지 마! 누가 네 아버지야, 누가!
아무리 너라도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하는 꼴은 안 봐준다. 날 똑바로 쳐다보지 못해?"
"대체 무슨 소리를…"
"기껏 도망친다는 데가 이런 곳 밖에 없었냐?
당장 숨통이 조이는 게 싫어서 물속에 뛰어들어?
입은 뒀다 뭘하고 지금껏 참고 있었어! 날 봐, 엘퀴네스!
대체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듣고 이러는 거야!"
"!!"
순간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떤 것을 억지로 떠올리는 기분?
아아, 그래. 나는 이 사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이, 이것 놔요!"
"엘!"
"내 이름은 강지훈이에요! 사람 잘 못 봤다구요!"
나는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남자에게 잡혀있던 팔을 뿌리쳤다.
그러나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맥없이 붙들리고 말았다.
내 어깨를 강하게 잡은 남자는 진지한 얼굴로 한 글자씩 끊어내듯이 입을 열었다.
"잘 들어. 계속 이곳에 있으면 네 정신세계는 반드시 소멸한다.
지금 당장은 편할지도 모르지만, 앞으로는 계속 괴로운 기억만 반복될 거야.
그럴 목적으로 만들어진 환상 마법이니까."
"환상… 마법?"
"바보 같이 뭘하고 있는 거야? 네가 이러고 있는 동안 네 동료들은 점점 미쳐가고 있다고.
지금 당장 가서 깨워주지 않으면 손쓰는 게 늦어질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
"동료? 미쳐 가다니?"
"기억 안나? 여기에 오기 전까지 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지?
아니, 그보다…네 앞에 있는 난 누구냐?"
"…모르겠어."
남자의 말에 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모르겠는 게 아니라 '알고 싶지 않다'겠지. 말해봐. 왜 나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거지?"
"왜냐니…난 다른 사람 대타 같은 거 싫어."
"친부모한테 무시당하고 맞는 건 괜찮고?"
"그래도 그들은 '나'를 바라 봐. 다른 사람의 대신은 아니야.
아무리 싫어해도, 나만 보면 저주한다 해도…그건 온전히 '나'를 향한 거야.
게다가 아프면 위로해 줄 친구들도 있고…"
"그래서? 계속 여기서 살고 싶은 거냐? 이게 전부 네가 만들어낸 가짜라고 해도?"
"…가짜?"
"그래. 네 멋대로 꾸며낸 환상일 뿐이야.
실제론 넌 이미 이들 사이에서 죽은 사람이잖아. 벌써 잊은 거냐?"
"아…."
떠듬떠듬 말을 하는 사이 짧은 스포츠머리였던 내 머리카락은
점점 길어져 어느새 허리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버스가 다니고 있던 도로나,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전부 사라지고 주변은 컴컴한 암흑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내 눈 앞에 서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볼 수 있었다. 어, 어라?
"…엘뤼엔?"
"하아. 이제야 정신이 든 거냐? 하여간 이래저래 손이 가는 아들놈 같으니라고."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나 방금 전까지 던전에…"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네 놈이 쓸데없이 마음이 약한 바람에 별 시덥지도 않은 마법 따위에 걸려든 거지!
대체 누가 널더러 다른 사람의 대신이라고 한거야? 당장 찾아서 죽여버릴테다!"
"자, 잠깐만. 마법이라고?"
"그래, 마법! 일단 정신 들었으니까 눈부터 떠라. 그게 순서인 것 같으니."
"엥? 그건 또 무슨?…으악!"
그의 말이 끝난 것과 동시에 나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방금 전까지 멀쩡하게 있었던 바닥이 갑자기 사라지더니,
커다란 암흑 아래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허억!"
숨이 멎을 것처럼 놀란 얼굴로 다시 눈을 떴을 땐,
나는 어느 환한 응접실의 바닥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쯧쯧. 깼으면 그만 일어나. 그 상태로 다시 잠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어? 엘뤼엔?"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가득 담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방금 전까지 꿈에서 만났던 엘뤼엔이었다.
그런 그의 옆에선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어설프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하, 하이루, 엘군! 냐하하~ 사랑스러운 밤이지?"
"넌 닥치고 있어!"
"흑- 너무해. 나는 그저 친우의 아들에게 인사를 건넸을 뿐인데."
"친우는 누가 친우야! 이 빌어먹을 자식!
너 때문에 하마터면 내 하나뿐인 아들놈이 저 세상 갈 뻔 했잖아!"
"에헤~ 나는 설마 이 정도로 충격 받을 줄은 몰랐지~ 아이, 그렇게 화내면 무섭잖아~"
"닥쳐!"
…대체 뭐가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건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전개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던 나는,
무심코 옆을 보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이사나를 비롯한 일행들이 모두 내 옆에서 아무렇게나 쓰러져 누워 있었던 것이다.
나는 황급히 다가가 그들의 어깨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 '엘'의 모습이 없다는 것은 미처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당황한 상태였다.
"이사나! 시벨! 알리사! 데르온씨! 이봐요! 다들 정신 차려봐!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다행히도 사람들은 내가 깨우는 소리를 들었는지, 천천히 의식을 되찾는 듯 보였다.
가장먼저 신음을 흘린 건 바로 옆에 누워있던 이사나였다.
무슨 지독한 악몽이라도 꾼 건지, 녀석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연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큭-으흑…에, 엘…"
"이사나! 정신 들어? 나 알아보겠어?"
"나…나아…흐윽. 흑…아버지가…아버지가…흐윽…"
"괜찮으니까 일단 일어나 봐. 천천히 진정해.
시벨! 다시 눈 감지 말고 일어나. 알리사 너도! 데르온씨 정신 차려요."
"윽- 뭐가 어떻게 된?"
"어라? 방금 나 쫓아오던 괴물 어디 갔어?"
그때서야 완전히 의식을 되찾은 건지,
눈을 뜬 일행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 꿈을 꿨다는 듯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들이었지만,
그 외에 별다른 문제는 없어보였다.
다만 한 사람, 이사나만은 좀처럼 쉽게 진정을 하지 못하고
여전히 덜덜 몸을 떨며 격한 흐느낌을 내뱉을 뿐이었다.
"이사나. 이사나? 내 말 안 들려?"
"흑…흑…다 죽일 거야. 가만히 안 둘 거야. 아버지를…아버지를…"
"이런. 단단히 정신을 잃은 모양인데? 어떻게 하지?"
"왜 그래, 신관님? 이사나씨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아, 알리사. 혹시 정신을 잃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
아무래도 이 녀석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은데."
그러자 알리사는 찌푸린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길을 걷다 보니 나 외에는 아무도 없었어.
게다가 정령을 불러도 나오지 않아서 굉장히 많이 불안했거든.
그리곤 계속해서 악몽을 꾼 것 같아."
"악몽?"
"응. 사막 한 가운데서 정체모를 적들이 계속해서 나를 쫓아오는 거야. 정말 소름끼쳤다고.
아무리 불러도 트로웰은 안 나타나지, 적들의 숫자는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지.
하마터면 정말 미칠 뻔 했어.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런 식이지 않았을까? 그렇지, 데르온씨?"
알리사의 질문에 데르온은 잠에서 덜 깬 듯한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두 눈에 살기가 들끓는 것이,
그다지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아아, 네. 일단……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상황만 리플레이 되는 것 같더군요.
좀 지나치게…짜증났습니다."
"그, 그래? 시벨 너도?"
"응…내 경우엔, 엘이 자꾸 나를 모른다고 외면하는 상황이었어.
하하, 그게 생각보다 충격이 컸던 모양이지? 그런데…'엘'은 어디 갔어?"
그러자 그때까지도 옆에 있던 남자와 티격대고 있던
엘뤼엔이 갑자기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곤 당장이라도 씹어 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시벨리우스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네놈의 자식이 그 '엘'인지 뭔지 하는 시덥지 않은 걸로
내 아들놈을 혼란에 빠트리게 한 장본인이냐?"
"시덥지 않다니 그게 무슨…어? 너어? 에, 엘퀴네스?"
"닥쳐! 엘퀴네스 따위 때려치운 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헛소리야!
전에는 빌어먹을 도마뱀 자식이 오해를 하더니 이젠 어디서 개풀 뜯어먹던 망아지까지!
잘 들어, 난 형벌의 신 엘뤼엔이다.
한번 만 더 나를 엘퀴네스로 오해했다간 지옥불에 던져버리겠어."
그러자 일행들은 모두 놀란 표정으로 엘뤼엔을 쳐다보았다.
특히 데르온은 입을 뻐끔뻐끔 거리며 다물지 못하는 것이,
좀처럼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엘뤼엔이라면 마족들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두려워하는 신이 아니던가!
그런 존재가 갑자기 이런 장소에 나타나 나를 향해 '아들' 운운하고 있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시벨리우스 역시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인 듯,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형벌의 신? 하지만 분명 이 얼굴은…"
"아하. 엘퀴네스였을 당시의 날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미안하지만 난 너 따위의 기억 없는데?
'엘'이니 뭐니 하는 인간에 대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함부로 내 아들을 남의 대타로 밀어 넣지마."
"!!"
지금 이 말은 나 또한 의외라 놀란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설마 엘뤼엔이 시벨리우스를 알지 못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엘'과 계약했다는 그 엘퀴네스는 누구라는 거지?
그러자 나와 시선이 마주친 엘뤼엔은 쯧쯧 혀를 차곤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알겠냐? 난 '엘'이란 녀석 처음부터 알지도 못했어.
대타니 뭐니 하는 건 전부 다 네 오해였다는 거다.
그리고 내 어디를 봐서 단순히 다른 녀석의 대타로 아들을 삼을 거라 생각한 거지?"
"…아, 미안. 나는 그저 타이밍이 너무 절묘해서…"
"타이밍이라니?"
"그게 그렇잖아. 만나자 마자 날 아들로 삼겠다고 한 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누군가의 대신이 아니라면 그렇게 빨리 결정 내릴 리가 없다고…"
"미련하긴. 내가 마음에 들었다고 했던 말은 말짱 기억에서 지워버린 거냐?
난 원래 속에서 내린 결정을 행동으로 옮기는 게 빠른 성격이야.
미네르바나 트로웰이 그런 것도 하나 안 가르쳐 주디?"
"……"
순간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굳게 다물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동안 나 혼자 열심히 땅 파고, 우울의 구덩이에 빠져 있었다는 소리인가?
이, 이렇게 쪽팔릴 데가!!
그러자 시벨리우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격하게 소리쳤다.
"거짓말 하지 마! '엘'이 기억나지 않는다니?
그럼 그 당시 나와 함께 다녔던 '엘'과, 그의 계약자였던 넌 대체 뭐란 말이야!
나 혼자 착각이라도 한 거라고?"
"그거야 내 알바 아니지. 아무튼 난 네놈에게 감정이 많은 상태다.
그나마 너 역시 마신놈의 장난에 희생된 꼴이라 봐주는 줄 알아.
당장이라도 찢어죽이고 싶은걸 참고 있으니까."
"…장난?"
그러자 엘뤼엔은 대답대신 한쪽으로 척척 걸어가,
지금까지 멀뚱히 상황을 구경하고 있던 검은 머리의 남자를 끌고 돌아왔다.
처음 눈을 떴을 때 나를 향해 어설픈 인사를 건네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일행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집중되자,
그는 이번에도 또다시 어설픈 웃음을 흘리며 엉뚱한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냐하하~ 모두들 안녕? 참으로 나이스한 저녁이지? 우리 모두 신나게 포크댄스를…"
"닥치고 제대로 소개 하지 못해?"
"하핫! 안녕들 하신가! 이 몸은 그 이름도 유명한 마신 카노스라네!
초면은 아니지만 다들 만나서 반가워."
"…하아?"
"큭- 쿨럭 쿨럭 쿨럭!!"
전혀 생각지 못했던 남자의 정체에 황당해 하는 우리와 달리,
'마족' 데르온은 심하게 사레가 들려 미친 듯이 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자신들의 신을 만나게 될 것이라 그 누가 예상을 했겠는가!
게다가 저렇게 가벼운 말투와 헤픈 웃음이라니!
그나마 어렴풋이 가지고 있던 마신에 대한 이미지가 산산이 조각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잠깐…초면이 아니라고?
"언제 저희와 만난 적이 있다는 소리인가요?"
"오! 똑똑한데? 그래, 만난 적이 있었지. 비록 지금 이 모습으로는 아니었지만 말이야."
"이 모습이 아니라니…그럼 설마?"
"딩~동~뎅~~ 마계 4대 공작의 하나인 루카르엠의 정체가 바로 나였답니다! 놀랍지~?"
"네에?"
"헉!!"
이 무슨 말도 안돼는 상황인가!
나를 비롯한 일행들은 모두 한순간 석화마법이라도 걸린 듯이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뺀질뺀질 돌아다니면서 온갖 꿍꿍이를 감추고 다니던 수상한 마족이 마신이었다고?
그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너무 놀란 나머지 기침도 멈춰버린 데르온이었다.
"맙소사! 지, 지금 루, 루카르엠이라고 하셨습니까? 당신이 정말 마도의 기사 루카라고요?"
"그렇다니까. 아, 그리고 지금까지 쫓아다녔던 '엘'도 나였어. 그건 다들 몰랐지?"
"에엑?"
속사포로 터지는 진실의 물결에 일행들의 얼굴은 전부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엘이 마신이라고? 게다가 루카르엠도 마신이었다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러자 불쾌한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린 엘뤼엔이 퉁명스럽게 한 마디 중얼거렸다.
"그 동안 이 녀석이 전부 장난 친 거야.
그래서 내가 이마의 문장을 보여주지 말라고 했었잖아.
호시탐탐 남들 등 처먹을 기회만 노리는 녀석이라,
네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서 신신당부 했던 건데…쯧."
"어이어이.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나는 그저 모처럼 잡은 네 약.점.을 활용해 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고.
게다가 장난이라곤 해도 '가벼운' 정신적 스트레스와,
던전에 깔린 마법의 트릭을 좀 더 '강하게' 바꾼 것 외에는 없잖아?
이래 뵈도 상당히 건전한 행동이었다고 자부하고 있는데."
"뿌득. 그걸 지금 말이라고 지껄이는 거냐?"
"아하하. 그냥 그렇다는 소리였어.
그러고 보니 이렇게 오래 내려와 있어도 괜찮은 건가, 친구?
신계에 쌓인 서류가 진정 장난이 아닐 텐데?"
"그것도 네놈이 원흉이잖아! 네놈이!"
아무래도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듯,
엘뤼엔은 잔뜩 열 받은 얼굴로 마신의 멱살을 잡아 탈탈탈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여전히 천역덕스러운 얼굴로 생긋 미소 지었을 뿐이었지만.
"에이~ 겨우 평소 처리양의 3배가 늘어난 가지고 뭘 그래?
난 엘뤼엔의 능력을 믿어. 그렇지, 친구?"
"오호라, 그래? 그럼 그 3배 많은 서류를 네놈이 한번 직접 해보지 그래?"
"자아~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그래. 내가 '엘'이었다는 말까지 했었지?
하하하! 그 외에 또 궁금한 것 있는 사람?"
"……"
지금껏 엘뤼엔의 말을 저렇게 능청스럽게 받아넘기던 존재가 있었던가?
나는 새삼 놀라운 표정으로 마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순간 털썩하고 뭔가가 주저앉는 소리가 들리더니, 덜덜 떨리는 시벨리우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이…엘…이었다고? 전부 장난? 그럼 엘은? 진짜 엘은 어디에 있어?"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 어디에 있을까나?"
"장난치지 마! 전부 다 내 착각이었다는 거야?
설마 엘이란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까지 모두? 난 지금껏 환상을 보고 있었다는 소리인가?"
처연하게 묻는 목소리에는 작은 흐느낌이 섞여 있었다.
지금 당장 목 놓아 울고 싶다는 기색이 역려한데도 애써서 참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마신은 생긋 미소지어보였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진 대답에 일행들은 또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착각이었던 건 아니지. 난 네 기억을 토대로 '엘'의 모습을 흉내 낸 거거든.
진짜 '엘'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기억 또한 없었을 걸?
네가 알고 있는 '엘'은 과거에 분명히 존재했어.
다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두의 기억에서 그것이 사라졌을 뿐이야."
"사라졌다?"
"그래. 하지만 넌 그동안 서클렛에 봉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지 않았던 걸 거야.
한마디로 순순히 기억을 잃은 엘뤼엔이 바보라는 소리지. 하하하하핫!"
"…이 자리에서 당장 소멸 시켜줄까?"
아무래도 단단히 결심한 듯, 음산하게 중얼거린 엘뤼엔은
곧 공중에서 커다란 벼락덩어리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오한이 들 정도로 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리자 마신은 대번에 정색을 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여전히 농담이 안 통하는 군! 친구!
아하하~ 설마 바보라는 말을 정말로 믿었던 건 아니지?"
"딴청 피우지 마! 네놈은 항상 그 능글거리는 태도가 문제야.
남의 아들놈을 죽일 뻔 하고서 웃음이 나와?
대체 정령왕의 정신력으로도 견딜 수 없는 환각마법이 뭐가 '조금 강한'마법이라는 거야!"
그러자 마신은 바로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것이 엘뤼엔으로선 전혀 용납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런 섭섭한 오해를! 정말 조금 강했던 거 맞아.
단지 중간에 스트레스를 많이 줘서 그 정도의 환각도 견딜 수 없도록
마음을 불안정하게 만들어 둔 것 뿐."
"그게 그 소리잖아! 이 썩을 놈아!"
"자, 잠깐, 엘뤼엔! 환각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는데, 이사나는 지금 어떻게 된 거야?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때서야 아직도 이사나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놀란 표정으로 엘뤼엔을 불렀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신을 향해 집어 던지려던
불덩이를 소멸시키곤 내 앞으로 걸어왔다.
"뭐가 어떻게 되었다고?"
"아까부터 계속 헛소리만 하고 있어. 얼굴색도 창백하고 열도 있는데…"
"흐음. 환각에 지독하게 걸린 모양이군. 충격을 너무 심하게 받아서 미친 것 같은데?"
"엑? 그, 그럼 어떻게 해? 치료할 방법은 있는 거야?"
엘뤼엔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곤, 한손으로 천천히 이사나의 이마를 짚었다.
그의 손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돌았다고 느낀 순간, 이사나의 눈이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안색이나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보니 아마 그대로 잠이 든 것 같았다.
이제 괜찮은 건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자 엘뤼엔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법에 걸렸던 순간의 기억을 지웠다. 지금은 잠든 것뿐이야."
"기억을 지우다니? 대체 뭐가 어떻게 되었던 건데?"
"과거에서 기억하고 있던, 가장 끔찍했던 상황이 계속 재연되는 마법이랄까.
일찍 깨우지 않으면 대부분 이렇게 미쳐버리지.
이럴 땐 기억을 지우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
"헉. 설마 아까 내가 꿨던 꿈도?"
"비슷해. 너의 경우는 그나마 정신력이 버텨줘서 좋은 기억도 함께 공존했던 모양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래서 데리고 나오기가 더 힘들었어.
일말의 좋은 기억에 매달려 현실로 나올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내가 직접 데리러 간 거잖아.
그대로 더 있었다간 아마 꿈에 먹혀 영원히 잠들어 버렸을 거다."
그때의 상황이 다시 생각났는지, 엘뤼엔은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나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찔끔한 내가 얼른 어깨를 움츠리자, 그는 곧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그리곤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다정한 목소리로 나에게만 들릴 만큼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다행이다. '그'세상에도 너를 사랑해 줬던 사람들이 있어서."
"아…"
"그렇다고 앞으로도 계속 현재의 친구들과 과거의 친구들을 비교하라는 뜻은 아니야.
나도 그렇고 트로웰도, 이프리트나 미네르바도 누군가의 대신으로 너를 대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그 점에서 만큼은 절대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미, 미안해, 엘뤼엔."
"됐다. 다 못난 아들을 둔 내 탓이지. 한 가지 더 명심해 둬.
앞으론 절대 나 외의 존재에게 '아버지'란 호칭 따위 사용하지 마라.
그거 상당히 기분 나쁘니까."
꿈속에서의 일을 마음에 단단히 두고 있었던 듯, 그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그리곤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몸을 일으키더니,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이제 그만 돌아갈 시간임을 비췄다.
좀 더 오랫동안 내려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신계에 쌓여가는 서류가 걱정이 되기는 되는 모양이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보마. 앞으론 무슨 일 생기면 반드시 나랑 먼저 의논하고."
"어, 벌써 가는 거야?"
"신들은 지상에 내려와 있는 시간이 한계가 있다고 했잖아.
가서 해야 할 일도 많으니 더 이상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지.
지금도 네가 걱정되서 억지로 시간을 낸 거니까."
"그럼 마신은?"
"저놈은 예외야. 잠깐 조사할게 있어서 주신께 허락받고 이곳에 머무는 중이거든.
그래도 능력하나는 신계 최고에 속하는 놈이니까 데리고 다닐 때 쓸모는 많을 거다.
눈치보지 말고 마음껏 부려먹어."
"부려먹으라니…그럼 마신은 앞으로도 계속 우리랑 같이 있는 다는 소리야?"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엘뤼엔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두 팔로 내 어깨를 단단히 짚더니,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쪼록 놈의 수작에서 무사히 살아남길 바란다, 아들!"
"엑?"
"저놈을 대할 땐 그저 안 듣고, 안 말하고, 안 보는 게 최고다.
일일이 신경 쓰다간 제 명에 못사니까 무조건 무시해버려.
신이라고 대접해줄 필요도 없다. 받들어주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아가는 녀석이니까."
"하하하…"
어째, 앞으로도 상당히 심란한 여행이 될 것 같지?
평소 좀처럼 볼 수 없는 불안한 표정으로 몇 번이나 내게 당부의 말을 건네던 엘뤼엔은,
곧 이전에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빛으로 승화되어 사라져 버렸다.
중간계에 있을 시간이 다 되어 신계로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배웅을 끝마치고 돌아선 순간,
나는 나에게로 집중되는 일행들의 시선을 느끼고 움찔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알리사의 눈빛이 매우 번뜩이는 것이…
아하하, 그러고 보니 녀석은 아직 내가 정령왕이라는 사실도 몰랐었지, 아마?
눈앞이 캄캄해 진다고 하면 바로 이러한 상황을 두고 말하는 것일 거다.
나는 흐르는 식은땀을 닦지도 못하고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진정 예비된 고난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외전 벌써 1년
"글쎄. 나도 그땐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구나."
오랜만에 찾아간 그 집에서, 태진은 뒤늦은 고백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앞에는 1년 사이에 잔뜩 초췌해진 얼굴에,
때늦은 후회와 연민을 가득 드리우고 있는 50대 후반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하지만 태진은 결코 동정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탄식은 그 스스로 벌어들인 일이었으니까.
여기서 그를 동정하면, 그런 식으로 가버린 친구에 대한 어떠한 위로도 전달해 줄 수 없는 것이다.
태진은 테이블 밑에 가려진 손으로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너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뭐랄까. 그때의 우리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라도 쓰인 것 같이 굴었지. 지금 생각해 봐도 죽은 그 아이를 볼 면목이 없다."
"후회는 언제 해도 늦는 법이예요, 아저씨. 그런 말 이제 와서 듣고 싶지 않습니다."
"태진아…."
"지훈이는 죽었고,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해요.
그 녀석이 죽는 그 순간부터, 저는 아저씨의 가족을 미워하기로 결심했으니까요. 죄송합니다."
"……."
단호하리만치 냉정한 태진의 대답에 상대편 남자는 할 말을 잃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차피 친구의 기일 때문에 잠시 들린 곳이고, 이후로는 절대로 다시 볼 일이 없을 것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굴어도 상관없겠지.
태진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아이는 필사적이었어요, 언제나.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는 가족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하지만 그때 아저씨는 전혀 받아주시지 않았죠.
결국 장례식에서 조차 슬퍼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제 와서 용서를 빈다고 무엇이 달라지겠어요?"
"……."
"오늘은 지훈이가 가버린 지 1년 된 날이라서 들린 것 뿐 이예요.
마음 같아서는 이런 집, 단 한순간도 머물고 싶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이후로는 다시 뵐 일이 없을 겁니다. 안녕히 계세요."
"태…태진아!"
애처로운 부름이 들려왔지만 태진은 결코 뒤 돌아 보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한 존재에 대한 유일한 마음의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친구도 한번쯤은 이런 식으로 자신쪽에서 먼저 가족을 외면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 약한 녀석은 절대로 그의 핏줄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제기랄. 저절로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휘이잉.
밖으로 나서니 4월 특유의 강한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놓기 시작했다.
지훈이 죽은 날도 꼭 이런 바람이 불었었다.
'벌써 1년인가….'
태진은 새삼스럽게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고 생각했다.
바로 엊그제 친구의 장례를 치렀던 것 같은데, 어느새 시간은 1년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시금 깨닫고 마는 것이다.
강 지훈.
어려운 상황에서도 절대 웃음을 잃은 일이 없던 그 녀석을, 이제 다시는 볼 수가 없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가 버리다니. 치사한 자식."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지훈은 몸에 그 흔한 멍 자국 하나 없는 말끔한 상태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멀쩡했는지, 태진은 처음 병원에서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랬다.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깨우려고 했는데, 눈을 감아버린 친구의 무거운 눈꺼플은 그 이후 다시 떠지는 일이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죽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지금까지 본 모습 중에서 그 마지막의 얼굴이 가장 평온해보였으니 무슨 말을 더 필요로 하겠는가.
"그래도 그렇지. 너무 일찍 가버렸잖아…."
겨우 17살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밖에 안 된 지훈은 아직 세상을 떠나가 버리기엔 이른 나이였던 것이다.
졸업하면 집을 독립해서 멋지게 살아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녀석이었다.
절대로 그렇게 죽어버릴 녀석이 아니었는데….
다음 날 보자며 손을 흔들고 교실을 나가던 친구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진의 기억에 지훈이란 이름의 소년은 또래보다 약간 키가 작은 소심한 녀석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 편성된 반에서 만난 짝이었고,
늘 창백한 안색이라는 걸 제외하면 다른 애들과 별 다른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튀는 편에 속했다.
외모는 평범했지만 항상 생글생글 웃으면서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성격인 탓에,
반에서 생기는 시끄러운 사건엔 항상 녀석이 속해 있기 일쑤였으니까.
그러나 그때까지도 태진은 지훈이 언제나 팔뚝이며 몸 여기저기에,
붕대나 밴드를 붙이고 다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만큼이나 운동을 좋아하던 녀석이었으니(실제로 잘 하지는 못했지만)
축구라도 하다가 다친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 뒤 지훈과 같은 중학교를 나온 녀석에게서 그 상처가
가족들의 폭행으로 입은 것이라는 걸 알았을 때, 태진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심정을 느꼈다.
태어나면서부터 외면을 받았다고 했다.
갓 태어난 친 자식의 어디가 그렇게 미웠는지 몰라도
아직 눈도 못 뗀 아이를 외가의 할머니에게 맡겨놓았단다.
그러다 지훈이 1살 될 무렵,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부터 이어지는 건 모진 괴롭힘과 폭력이었다.
처음엔 밥을 제때에 안주거나 울거나 채근해도 안아주지 않는 것에서 그쳤다.
그러나 지훈이 말을 하기 시작하고 걸어 다닐 때가 되자,
그때부터는 본격적인 손찌검이 이어졌다고 했다.
보다 못한 주민들이 경찰에 신고해도, 결국 친부모란 이유로 아이는 다시 그들 손에 돌아갔다.
그렇게 반복되는 악순환 속에서 지훈은 살아남기 위해 웃는 법을 배웠다.
말이 조금만 없어도 반항하는 거냐며 꼬투리를 잡는 가족들에게
유일하게 잘 보이는 방법은 항상 웃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한창 사춘기 무렵인 중학교 때는 무수한 폭언과 폭력을 견디다 못해
반항도 몇 번 해보았던 모양이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럴수록 더 큰 상처가 되어 돌아온다는 걸 깨달아 버린 것이다.
어떤 말, 어떤 행동을 해도 가족들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그가 집을 떠나지 않았던 건,
그런 모진 가족이라 해도 자신의 친혈육이라는 그 사소한 사실 하나 때문이었다.
피가 이어졌다는 이유 하나로 지훈은 가족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했던 것이다.
옆에서 보고 있는 것이 더욱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차마 말릴 수가 없던 것은,
녀석의 하나 남은 희망을 자신의 입으로 걷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네 가족은 절대로 널 돌아보지 않아, 이제 그만 현실을 봐!'
지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알면서도 집착한 것이다.
졸업하면 독립하겠다고 한 말은, 어쩌면 이제까지 지긋지긋하게 이어지던 가족에 대한 미련을,
그때서야 완전히 끊어버릴 결심을 굳혔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결국, 끝까지 그 미련을 접지 못하고 가버리고 말았지만….
태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훈에게는 오히려 그 편이 행복했을 지도 모른다.
마음 약한 녀석이 자신의 가족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질투나서 몇 번이나 '차라리 내가 네 가족이 되 줄까?'라고 말했을 정도였으니까.
자신은 그저 순수한 호의로 형제처럼 지내자는 뜻이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옆에 있던 반 여자애들이 묘한 미소를 짓는 것이 조금 찝찝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다 추억일 뿐이다.
울었던 시간만큼이나 지훈에 대한 기억 역시 하나둘씩 사라지겠지.
태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모래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햇살만큼은 강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1년 전 오늘, 지훈 역시 이런 하늘을 보면서 눈을 감았을까?
그래서 그렇게 미련 없이 떠나버렸던 걸까?
"난… 환생 같은 거 믿지 않아. 아니, 믿지 않을 거야."
한참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던 태진이 문득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서는 1년 전 이날에도 흘렀던 눈물이 다시 흐르고 있었다.
"왠지 알아, 강지훈? 환생하면, 언제 어디서 널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야.
나, 너 오래 기다리는 거 싫거든."
사람이 죽은 후의 세계가 천국과 지옥, 두 가지로만 나뉘어 있다면,
적어도 죽고 난 이후 그의 친구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만날 수도 있는 거고,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의 거처를 알지 못해 가슴 아파하는 일은 없으리라.
그래서 그는 환생을 믿지 않았다.
다시 태어난 그의 영혼을 못 알아보는 것도 싫었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지훈이 자신을 못 알아보는 것도 싫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이제까지 이어온 자신과의 인연은
단순한 전생으로만 치부될 것 같아 싫었다.
그러나 만약, 그의 바램과 달리 정말로 환생이란 게 존재한다면 부디…
"다음 세상에서는 너를 위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기를…."
그리하여…보답 받지 못하는 애정으로 가슴 아파 하는 일이 없기를….
"으아악! 그러니까 일부로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거짓말! 트로웰이랑 만난 적 없다고 했었잖아, 날 속였어!"
"그, 그러니까…시벨이 말했던 '트로웰'과는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이었는데…아하하.
그, 그러니까 고의가 아니었어."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채 나를 향해 이를 부득부득 가는 알리사를 보며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난감한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생판 처음 보는 낯선 여자애에게 내 정체가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줄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간,
금방이라도 두 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구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연신 사과의 말을 건네는 수밖에 없었다.
"미안. 내 실수였어. 앞으론 다시는 거짓말 하지 않을게. 한번만 더 믿어주지 않을래?"
"쳇, 그럼 뭐야. 이사나씨가 사실은 정령왕의 계약자였다는 소리잖아.
바로 눈앞에 두고도 못 알아봤다니 바보 같아. 왜 지금껏 눈치 채지 못했지?"
"하하. 그러니까, 다 내 탓이라니까 그러네.
한 번 신분을 감추고 나니까 적당히 밝혀야 할 타이밍을 잡지 못했을 뿐이야.
계속 숨기고 있을 생각은 아니었어."
"정말이지?"
"그래, 정말이야."
그제서야 좀 진정이 되었는지, 알리사는 토라진 표정을 지으면서도 더 이상 씩씩거리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남모르게 한숨 돌리는 내게 킥킥 웃은 마신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여어~ 고생이 많군. 엘뤼엔의 아들! 여자애 달래기 힘들지?"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처음부터 솔직히 정체를 밝힐 걸 그랬어요.
변명이라는 게 생각보다 상당히 힘들군요."
"그래도 씩씩하니 좋은걸? 밝고 긍정적인 아이야.
그러니 환각에 빠져서도 미치지 않고 쉽게 빠져나왔던 거겠지.
아무튼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 어때?"
"에?"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마신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검고 반짝이는 눈동자가 장난끼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아쉽지 않아? 꿈속에서 만났던 친구들…네 전생에서 소중했던 인간들 아니었어?"
"아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항상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다가와서 장난쳐 주고, 어울려주고, 위로해 줬던 유일한 존재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살고 있는 차원이 달라도 그들을 의지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 건 여전한 모양이다.
이래저래 꿈에서까지 등장시켜 위로받으려고 했던 걸 보면.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죠. 결국 꿈은 꿈일 뿐이니까요.
엘뤼엔의 말마따나…그들 사이에서 난 이미 죽은 존재이니까.
그래도 오랜만에 본건데 아무리 꿈이라도 작별 인사정도는 할 걸 그랬나 봐요.
그냥 바로 깨어나지 말아볼걸."
"큭큭. 그랬다간 엘뤼엔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갔을걸?
그때 만약 그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쳤다면, 넌 정말 깨어나지 못했을 거야.
그건 네 친구들도 진정으로 바라는 일이 아닐 거다."
"…그건 그렇네요. 누구보다 내가 잘 되길 바래주던 녀석이었으니까."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친구와의 추억에 나는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하지만 과거는 어디까지나 과거일 뿐. 나는 이제부터 앞을 보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다행히 내 주위엔 그때보다 더욱 더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스스로 의심하지 않는 한, 절대 불행해지지 않으리라.
'행복해라, 강지훈.'
문득 스쳐지나가는 바람을 타고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울고 싶어질 만큼 그리운 느낌이었다.
6- . 진행되는 음모
"그, 그러니까 당신이 루카르엠…아니, 엘…아니, 그러니까…마신이시라고요?"
뒤늦게 잠에서 깨어난 이사나를 가장 놀라게 한 일은 역시 마신의 정체에 관한 것이었다.
마법에 걸렸던 순간부터의 기억이 아무것도 없던 탓에,
엘뤼엔이 다녀갔다는 말에도 상당한 쇼크를 받은 듯 했다.
그러자 마신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생기발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하하하! 어떠냐!! 이 몸의 위대한 변신술이!
마족과 인간을 오가는 이 한계 없는 능력이 두렵지? 응? 그런 거지?"
"카노스시여! 지금 그런 말을 하실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 참다못한 데르온은 벌개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신들이 모시는 신이 부리는 추태(?)를 차마 더 이상 봐줄 수가 없다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대체 왜 지금까지 숨기고 계셨던 겁니까?
마신이시면서 한낱 마족의 흉내를 내고 계시다니요!
이제껏 아무것도 모른 채 무례를 범한 저는 대체…"
"아아, 신경 쓰지 마. 그냥 심심해서 가끔 유희를 즐긴 거였으니까.
마계는 규율이 너무 엄격해서 탈이야.
다들 다른 차원으로 나가서 사고를 치니, 정작 마신으로서 내가 할 일이 현저히 줄어들잖아?
이 몸도 웬만하면 조금 바빠 보고 싶었다고."
"그런 말도 안돼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아!"
데르온은 단번에 머리를 부여잡고 절규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의 말은 무조건 무시하라는 엘뤼엔의 충고가 옳았음인가?
나는 조용히 그들의 모습을 외면하며, 그때까지도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던 이사나를 바라보았다.
"이사나, 기분은 어때? 이제 좀 괜찮아?"
"응. 멀쩡해. 아직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루카르엠은 그렇다 쳐도…'엘'까지 마신이라니 왠지 믿을 수가 없어서…"
"하하, 그냥 마신이 조금 심한 장난을 친 것뿐이야.
우리가 바보같이 전혀 눈치를 못 챈 것뿐이지."
"그렇긴 한데…시벨님 괜찮을까? 굉장히 충격을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그의 말에 나는 옆 구석에 혼자 앉아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벨리우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신에게 '엘'에 대한 기억이 모두 사라져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녀석은 계속 저 자세로 좀처럼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엘'의 존재가 완전히 허상이 아니라는 소리에 한 가닥 남은 희망을 걸고 있는 것 같았지만,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어디에서 무슨 수로 찾을지 막막해 할 것이 뻔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짧게 어깨를 으쓱한 나는 곧 그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자 흠칫하고 놀라며 어깨를 움찔하는 걸 보면,
그동안 나에게 심하게 굴었던 일에 대해 자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보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꾸욱 눌러 참은 나는,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행…앞으로 계속 같이 다니자."
"…어?"
"어차피 당장 갈 곳도 없잖아? '엘'은 계속 찾으러 다닐 거지?
이왕 여행하는거 우리랑 같이 다니는 게 더 마음도 편하잖아."
"그렇지만…나 너한테 못된 말만 했는데…이름도 바꾸게 하고…다른 사람의 대타라느니…"
"나한테 했던 말 때문에 미안해서 그러는 거라면 괜찮아.
생각해보니까 이전엔 그보다 더 심한 말도 많이 들었더라고.
그리고…엘뤼엔이 나한테 대타가 아니라고 직접 말했으니까 상관없어.
'사실이 아닌'이야기를 듣고 화내봤자 나만 손해잖아?"
"!!"
누군가가 나를 인정해준 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안해하고 슬퍼했던 일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아무렇지 않은 심정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단지 엘뤼엔의 '대타가 아니다'라는 한 마디에 시벨리우스가 했던
모든 말을 무시할 수 있게 되다니.
이래서 사람들은 주변에 꼭 한사람쯤 자기편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모양이다.
그러자 충격이라도 받은 듯 멍한 표정을 짓던 시벨리우스는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에 맺힌 그렁그렁한 눈물이 왠지 분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결국…이번에도 난 엘퀴네스한테 졌구나.
다음번엔 반드시 이기겠다고 큰소리 떵떵 쳤었는데…바보 같아."
"시벨리우스?"
"쳇,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거야. 누가 '아버지'따위한테 밀려날 줄 알고?
지금 실수한 만큼, 앞으로 더욱 잘 할 테니까…나 미워하지 말아줘, 엘. 부탁이야."
그렇게 말하며 뚝뚝 눈물을 떨구는 그의 모습에 나는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지훈'에서 다시 '엘'로 돌아온 것만으로 충분히 감지덕지란 느낌이랄까.
뭐, 그 안에 담겨진 말의 의미는 앞으로 충분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았지만 말이다.
설마하니 시벨리우스…아직도 나를 '엘'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건가?
'으음. 하긴, 진짜 '엘'이 나타났을 때도, 내가 '엘'이라는 느낌이 들었었다니 무리는 아니지.
게다가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진 사람이니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나저나 그럼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정말 나한테 전생이 하나 더 있었다는 소리인가?'
이거 언제 한번 다시 아레히스를 찾아가, 명계를 뒤엎든지 해야 될 것 같다.
도대체가 궁금해서 살 수가 있나!
그런 내 생각이 얼굴이 드러났던 걸까? 마신은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푸하하하! 결국 너도 어쩔 수가 없구나.
의외로 얌전한 성격이긴 해도 타고난 본성은 숨길수가 없다는 건가.
아서라, 아서. 그렇지 않아도 명계는 지금 발칵 뒤집혀서 정신없는 상황일 걸?
너까지 갔다간 당장 아레히스가 자살하려고 할 거야.
뭐, 상당히 재밌는 구경이긴 할 테지만."
"에? 명계에 무슨 일이 있어요? 발칵 뒤집혔다뇨?"
"가면서 천천히 설명해 줄 테니 재촉하지 마.
어차피 알고 싶지 않아도 듣게 될 테니. 지금은 일단 가보도록 할까?"
"어딜요?"
"어디긴. 이 던전의 최하층이지. 이곳에 있는 검을 가지러 왔던 거 아니었어?"
"앗!"
마신의 말에 일행들은 모두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너무 정신없는 일만 일어나는 바람에,
정작 던전에 들어온 이유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민망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는 우리를 본 마신은 킥킥 웃으면서
검이 있는 장소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벌컥 열린 문 아래로 하염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밟는 그의 얼굴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진지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계의 구조에 대해서 아나, 엘퀴네스?"
"아…그다지요. 마왕과 4대 공작밖에는 별로 아는 게 없어요."
"쿡. 그것만 알면 충분해. 사실 그들 빼곤 마족이란 것들은 별 거 아니거든.
그저 머릿속에 전투밖에 없는 외곬수의 종족이지.
그럼 마왕과 4대 공작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알아?
아니, 그것보단 마족이 어떤 식으로 탄생하는지 아느냐고 묻는 게 정확하겠군."
"카, 카노스시여?"
뜬금없이 등장하는 마족에 대한 이야기가 이상했는지,
데르온은 불안한 표정으로 마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빙긋 미소 지었을 뿐이었다.
"나는 일정한 시기가 되면 내가 가진 마력의 일부를 풀어 마계 전체를 감싼다.
그 기운이 한자리에 모여 생명의 숲에 흡수되면 각기 일정한 마력을 담은 알로 변화하지.
마족은 바로 그 안에서 탄생하는 거야.
너도 정령을 만들어 봤으니, 어떤 느낌인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테지?"
"으음. 대충은요."
"그거면 돼. 알에 담긴 마력은 각기 다르지.
한마디로 왕이 될 자가 탄생하는 건 순전히 운이라는 소리야.
지금 왕이 아무리 강해도 다음 알에서 태어난 마족이 더 강할 수도 있고,
몇 백 년이 지나도 자신보다 강한 알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래서 마왕은 항상 새로 태어나는 알들을 경계한다. 그렇지 데르온?"
"큭 아, 알고 계셨습니까."
명랑하게 묻는 마신과 달리 대답하는 데르온의 표정은 무척 고통스러워 보였다.
설마 마계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그러자 마신은 다시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를 탓하고자 물은 게 아니었다.
역대의 마왕들이 자신보다 강한 알이 태어날 것을 두려워해
미리 파괴한 게 어디 한두 번도 아니고 말이야.
덕분에 나만 부리나케 알을 다시 만드느라 상.당.히. 짜증이 나기는 했지만.
뭐, 그거야 호전적인 마족들의 성향상 어쩔 수 없었다 치자 이거야."
"…?"
"그런데 가끔씩 왕 중에선 건방진 생각을 품는 놈들이 나온단 말씀이야?
바로 옆에서 주시하고 있었으면서도 일찍 눈치 채지 못한 나도 문제가 있긴 했지만…
참으로 썩을 놈들이지."
"헉-"
순간 웃음을 머금은 마신의 검은 눈동자에서 강렬한 살기가 불타올랐다.
언젠가 엘뤼엔이 존재감을 드러냈을 때 느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무시무시한 기운에,
일행들은 모두 놀란 표정으로 한순간 숨을 들이켰다.
기운도 기운이었지만, 설마 그 뺀질뺀질 웃으며 농담만 건네던
마신이 이런 분위기를 풍길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정말 한순간 이었을 뿐, 마신은 곧바로 다시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무튼 결론은 이번 마왕 놈이 새로 태어날 알들을 죄다 싸그리~ 몽~~땅~ 부셔버렸다는 거야.
제기랄. 이번엔 좀 더 정성을 담아서 만든 최고의 걸작들뿐이었는데!
그런 내 노력을 깡그리 무시해도 유분수지! 내 그 노무 자슥을 콱 그냥!"
"으음. 그,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요? 이번엔 마족이 하나도 탄생하지 못하는 건가요?"
"아니. 실은 말이야. 내가 색깔이 너무 예뻐서 따로 꿍쳐둔 게 하나 있었거든. 나 잘했지?"
"쿨럭!"
이, 이것도 반전이라면 반전일까?
일행들은 모두 황당한 표정으로 연신 헛기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꿍쳐둘게 따로 있지 새로 태어날 생명을 담은 알을 빼돌리다니!
저거(?) 진짜 마신 맞아? 그러나 더 기가 막힌 건 다음으로 이어지는 설명이었다.
"근데 막상 데리고 와보니까 말이야. 놔둘 만한 장소가 없더라고.
마계의 루카르엠이 사는 집에 뒀다간 쟌한테 걸려서 무지하게 쪼일게 분명하고.
그렇다고 신계의 내 신전에 갖다 두자니, 이놈이 태어나서 활보하고 다닐 것이 두렵고.
그래서 마침 근처에 있던 적당한 장소를 발견하곤 거기에 갖다 두었지."
"적당한…장소?"
"응! 이프리트가 만든 검이 봉인된 던전이라나 뭐라나,
마침 인간들에게는 발견되지 않을 때라 내가 먼저 들어가서
알을 갖다 두고 트릭들을 조금 손 봤어.
중간에 다른 인간이 들어와서 알을 가져가면 곤란하잖아? 하하하하"
나와 일행들은 모두 하나같이 경악한 표정이 되어 소리쳤다.
"뭐라고요?! 그럼 여기잖아!!"
"오오! 그러고 보니 그렇군!"
"뭐가 그러고 보니 그렇군이에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으면서!
저기, 설마 우리들에게 그 알을 떠넘길 생각은?"
"그럴 생각이었는데."
"……."
여기서 무슨 말을 더하랴.
창백한 표정으로 할 말을 잃어버린 우리를 보며 마신은 미안하다는 듯이 히죽 웃어보였다.
그래봤자 끌어 오르는 살심에 불을 붙인 계기 밖에 되진 않았지만.
그러나 다음순간 이어진 진지한 목소리에 우리는 또 다시 멍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마족을 이끌 미래의 왕이다. 잘 부탁할게."
"!!"
"태어난 알 중에서 가장 강한 기운을 품고 있는 녀석이었다.
단번에 차기 마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 하지만 지금 마왕은 야심이 강하거든.
그대로 놔두면 태어나기도 전에 반드시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
예상대로 다른 알들은 모두 파괴됐기도 하고. 아무튼 건진 건 그것 하나뿐이야.
새로 만들어도 상관없지만, 나는 하루라도 빨리 지금의 마왕놈을 밀어내고 싶거든."
"그게 무슨…?"
혼란스러운 우리들의 표정에 마신은 그저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그는 그 상태로 짤막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시간이 없다니요?"
굳어있던 일행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다름 아닌 이사나였다.
그러나 마신은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오히려 우리들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내가 왜 이곳에 와 있는 건지 궁금하겠지?"
"아…뭔가를 조사할 게 있다고…"
"맞아. 주신의 명령을 받고, 10년 전부터 일어난 아크아돈의 불온한 기운을 조사하고 있었지.
원래 귀찮은 일은 안 맡는 주의지만,
여긴 나한테도 개인적인 추억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선뜻 응 한거야."
"불온한 기운? 10년 전이라면…가뭄이 일어난 일을 말하는 건가요?"
그런 거라면 나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니 따로 조사를 벌일 필요는 없었을 텐데?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마신은 냉큼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욱 진지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가뭄이라기보다는…요 근래 사이에 죽은 어린아이들의 숫자 때문이었어."
"숫자?"
"그래. 현재까지 정확히 9천 9백 11명. 이제 89명 남은 건가?
우리가 예상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말이야. 이게 바로 명계가 발칵 뒤집혀 버린 이유지."
"맙소사! 그게 정말 입니까?"
마신의 말에 경악한 표정을 지은 건 데르온과 시벨리우스, 단 둘 뿐이었다.
단지 죽은 아이가 많다는 것 때문에 놀란 것 같지는 않아,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89명이라니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요?"
"당연하지요! 모르시겠습니까, 엘퀴네스님? 아, 악신이 탄생할지도 모릅니다!"
"악신?"
"그렇습니다. 그는 주신께 도전할 수 있는 가장 큰 악의 세력을 가진 신이에요.
어린아이 만 명의 피를 마시고 탄생하는 존재라고요."
"네에?"
그러는 사이 우리는 어느새 계단을 다 내려와 눈앞에 문 하나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태였다.
도대체 어디까지 내려온 건진 모르겠지만,
대강 살펴본 느낌만으로도 꽤나 지하 깊은 곳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일행들은 모두 마신의 말에 놀라느라 차마 문 안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긴장된 표정으로 다음으로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아무 아이나 죽인다고 되는 건 아니야.
반드시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처녀여야 하고, 흠 없이 깨끗해야 하지.
미색이 고우면 고울수록 효과가 좋아.
그런 아이들이 단 몇 년 안에 만 명 가까이 죽었다고 한다면 그건 반드시 악신의 탄생을 의미해."
"그, 그런 게 지금 이곳에서 탄생하고 있다고요?"
"반드시 이곳에서 탄생한다는 보장은 없지.
차원의 이동이 편리한 누군가가 여기의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희생시키는 수법도 있으니까.
마침 이곳은 그동안 가뭄기간이라, 아이들을 죽이고 위장시키는 게 편했을 거야.
그 덕분에 명계에서도 지금껏 눈치 채지 못했던 거고."
시벨리우스나 데르온은 물론, 지금껏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나와 이사나들도 놀라 떡 하니 입이 벌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다른 정령왕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나요? 만약 악신이 탄생한다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글쎄. 아마 대부분의 신계가 장악되고 많은 신과 사람들이 죽겠지.
아직 이 일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어.
괜시리 소동을 크게 만들었다가 결전의 순간에 범인이 모습을 감춰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하거든.
그러니 다른 정령왕들은 모르고 있을 거야.
아, 트로웰이라면 뭔가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그럼 아직 누가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 진 알아내지 못한 건가요?
계속 조사 중인 상황?"
"심증이 가는 녀석들은 충분히 있지. 너도 알고 있을 걸?
요 근래 누군가가 마신을 향해 제사를 지낸다는 명목으로 인간을 잡아들인단 소문 듣지 못했어?"
"!!"
순간 나와 이사나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분명 얼마 전 라피스로부터 이와 비슷한 상황에 대해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알리사 역시 그런 이유로 납치당할 뻔 하지 않았던가!
'설마 유카르테 대공이?!!'
그러자 마신은 지금의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유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우리 모두 다같이 공동의 적을 무찌르러 가 볼까?"
"자, 잠깐만요! 그럼 대공이 정말로 악신이 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가요?"
"글쎄? 본인이 아니더라도 실질적인 배후임에는 틀림없어.
실제로 9천 명이 넘는 아이들 중 대부분이 녀석의 손에서 죽었으니까.
이제 슬슬 우리가 눈치 챘다는 걸 알았을 테니, 다른 방법을 궁리하고 있을 걸?"
"큭 그, 그렇다면 그의 계약자인 마왕도 이번 일에서 피해갈 수 없겠군요.
그래서 새로운 마왕을 준비하려 하신 겁니까?"
침통하게 묻는 데르온의 말에 마신은 그저 아무 말 없이 미소 지어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긍정을 뜻하는 것임을 모르는 이는 우리 중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데르온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를 진작 처분하지 않으셨던 겁니까?
이미 루카르엠이란 이름으로 저희들의 곁에 계셨다면,
그가 야심이 강한 존재임을 눈치 채고 계셨을 텐데, 어째서?!"
그러자 마신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미운 짓만 골라하는 녀석이라도 기회를 주고 싶은 게 부모마음이지.
나도 그것과 비슷한 심정인 게 아닐까?
그리고 안 됀 일이지만 아직 그가 확실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바로 그걸 찾기 위해 내가 이곳에 내려와 있는 거니까.
아무리 마신이라도…증거도 없이 한 세계의 왕을 처단하기는 어려운 일이거든.
어쩌면 그 역시 또 다른 존재의 배후에 불과할 지도 모르고."
"…!!…"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한동안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점점 우리의 숨통을 조여 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 그럼 이제 그만 던전의 최하층을 개봉해 볼까나? 다들 너무 오래 기다렸지?"
잠시의 침묵 후, 어깨를 으쓱한 마신은 그때까지 누구도 열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던전 최하층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끼이익-
녹슨 쇠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한눈에 봐도 육중해 보이는 철문이 큰 어려움 없이 양 편으로 벌려졌다.
처음 방 안으로 들어선 우리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마치 제단처럼 보이는 돌단과 그 위에 박혀진 커다란 길이의 장검하나였다.
그 안에는 붉은 실크로 감싸진 황금색의 알이 놓여 있었다.
설마 저게 마족의 알인가?
호기심을 가득 담은 일행들의 시선이 제단으로 향하는 순간,
무게감을 가득 담은 육중한 목소리가 넓은 공간 안에 낮은 울림을 담고 퍼지기 시작했다.
<<던전의 최하층까지 무사히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용사의 일행들이여….
내 이름은 파이어 버스터.
위대하신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님의 산물인, 봉인된 이그니스가 담긴 정령검입니다.
나를 취하는 자- 이 세상의 모든 힘을 얻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검안에 봉인되어 있는 불의 상급 정령 이그니스의 목소리인 것 같았다.
아직 어린 소년의 미성과 흡사했지만 분위기가 정중해서인지 훨씬 어른스러운 느낌이었다.
그런데 말투가 어째…좀 오버스러운 것 같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신다운 얼굴을 하고 있던
마신이 갑자기 요란스런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 문 앞에서 보았던 애절한 분위기가 한순간에 싸그리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크하하하하!! 세상의 모든 힘이래! 지 까짓게 세상의 모든 힘을 얻게 해준대에~~
아이고 배야! 아이고오~~"
<<이익! 또 카노스님이예요? 젠장! 대체 이런 대화가 어울리는 용사님들은 언제 오는 거야아~>>
"푸훗. 이제 그만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나?
글쎄 이 던전의 트릭은 한낮 모험가들이 뚫을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게 다 카노스님 때문이잖아요!
이프리트님이 처음 저를 이곳에 두셨을 때까지만 해도
이곳은 그렇게 침범하기 어려운 성역 따위가 아니었다고요! 에잇! 이런 알 따위~
알 따위이~~전부 태워버릴 거야~~>>
"헤에. 한 번 해봐. 그거 태어날 때 다 되서 절대 안 태워질걸?
태우려면 진작 태웠어야지. 크하하하"
<<이익! 마신님 미워! 나빠! 진짜 사악해! 다시는 안 놀아~ 우에엥!
이프리트니임!! 저 좀 이곳에서 꺼내줘요오~~!>>
"……"
대체 이게 어떻게 되가는 상황일까.
나름대로 크게 기대하고 있었던 만남이었던 만큼,
첫 판부터 와장창깨지는 이미지에 나와 이사나는 차례대로 이마를 짚고 말았다.
우리는 이제까지…겨우 '저딴 걸' 가져가기 위해 그 온갖 고난을 겪었단 말인가?
그 사이에도 마신과 이그니스의 말다툼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봤자 이그니스는 마신의 발뒤꿈치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중에 이프리트님 오시면 다 이를 거예요!
카노스님이 날 얼마나 괴롭혔는지 전부 꼬치꼬치 말씀드릴 거라고요!
그때 가서 후회하지나 말아욧!>>
"헤에. 그래봤자 내가 더 센데?"
<<그, 그럴 리가 없어요! 이프리트님은 전 차원에서 가장 강하신 분이라고요!
카노스님은 바보야! 바보!바보!바보!!>>
"그래? 그럼 나 한 3백년 후에 다시 돌아올게. 그 때 쯤이면 좀 똑똑해 질 것 같다.
그치? 그동안 혼자서 잘 있어~"
<<꺄아아악! 제가 잘못했어요~~ 우어엉~ 가지 마세요, 카노스니이이임~~~>>
저럴 거면 대체 왜 처음부터 반항을 하는 건지.
끝없이 이어질것만 같던 두 존재의 대립(?)은 결국 스스로의 힘으론
절대 이 던전안을 떠날 수 없는 이그니스의 패배로 매듭을 짓고 말았다.
이런걸 두고 치사하다고 하지 아마?
나는 얼떨떨한 미소를 지으며 검 주제에(?) 패배의 충격으로 추욱 늘어져 있는
이그니스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안녕, 이그니스? 아니, 파이어 버스터였던가?"
<<훌쩍…엥? 이, 이 목소리는?>>
"어? 혹시 날 아는 거?"
<<카노스님 말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 그런 거죠?>>
"아하하…그, 그렇긴 한데."
<<이 무슨! 이 무슨!! 이 무슨 감동의 도가니탕과도 같은 현상이!!
용사님? 혹시 용사님이세요? 드디어 저를 이 지옥에서 구출해 주려고 오셨군요!
아아! 기다리고 있었어요! 자아! 첫 번째 임무를 드리죠!
지금 제 앞에 있는 이 사악한 마신을 무찔러주세요!>>
"……."
아마도 이 검은 목소리만 캐치할 뿐, 다른 점에 대해서는 영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흥분에 들떠있는 이그니스의 모습에
나와 일행들은 모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난감한 표정이 되기 시작했다.
특히 이사나의 경우, 저런 걸(?) 들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 하는…
일말의 회의가 섞인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느라 바빴다.
파이버 버스터가 진정한 것은 그 후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잔뜩 흥분하기 바쁘던 이그니스가 그나마 정신을 차린 것은,
내가 엘퀴네스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부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스스로가 정령이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었는지,
자신들의 왕에게까지 빽빽거리는 성격은 아닌 모양이었다.
<<히잉. 죄송해요. 제가 너무 흥분해서…설마 엘퀴네스님이시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아니, 됐어. 그나마 진정했다니 다행이다. 계속 그 상태였다면 좀 곤란할 뻔 했거든."
<<그런데 엘퀴네스님이 이곳엔 어쩐 일이세요?
혹시 이프리트님과 싸우시고 열 받으셔서 저를 소멸하시러?>>
"……"
혼자서 오랜 시간 갇혀 있었던 부작용인걸까?
상당히 심각한 망상증세를 보이는 검의 말에, 일행들은 또 다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재빠르게 흐르는 식은땀을 수습하곤 어설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게 아니라, 사실은 이프리트에게 널 데려가려고 왔어.
그가 내 부탁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너를 데려와 달라고 말했거든."
<<네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안돼요!
저는 용사님을 기다려야 하는 막강한 사명이 부여된 몸이란 말이어요!>>
"저어, 그 용사님을 그냥 나라고 생각하면 안 될까?"
<<어머머!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왕과 용사는 엄연히 다르다고요!
왕은 왕이시고 용사는 용사죠! 어떻게 왕께서 용사가 될 수 있어요? 말도 안 되요!>>
"크흠.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만 해달라는 건데…."
<<글쎄 안 되는 건 안 된다니까요? 용사님은 용사님이어야 해요!>>
이 썩을…. 그냥 콱 두드려 패고 끌고 나와 버릴까?
순간 엎어놓고 두드려주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집안 망신(?)을 일으킬 수 없다는 생각에 간신히 참았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곧 이어지는 이그니스의 말에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으니…
<<엘퀴네스님은 바보! 어째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예욧!
나는 용사가 좋단 말이야! 절 데려가려면 용사를 데려오세요! 용사를요!>>
"크악! 용사 좋아하고 자빠졌네!! 내가 오라면 갈 것이지 어딜 그렇게 말이 많아!
너 지금 왕한테 반항하는 거야? 앙?!"
<<헉! 너무해…나는 그저 용사가 좋았을 뿐인데…흑흑흑.>>
마치 순정만화의 주인공처럼 너무해~를 연발하는 이그니스의 목소리에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두통이 도지는 것을 느끼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옆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이사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엘. 일단 저 검이 말하는 용사가 누굴 뜻하는 건지 물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혹시 용사가 아니라면 뽑을 수 없는 검일 수도 있잖아."
"아니, 정령왕이 다룰 수 없는 정령은 없어. 저건 그냥 반항하는 거야. 뿌득."
"하하, 그러지 말고 일단 좀 달래봐.
어쩌면 이 던전이 처음 생겼을 때, 이프리트한테 뭔가 언질을 받았던 걸지도 모르잖아."
<<맞아! 바로 그거예요, 친절하신 분!
이프리트님이 저는 반드시 용사의 손에서 빛을 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그 분을 실망시켜선 안 된다고요. 엘퀴네스님은 그런 것도 몰라주고…흑흑>>
"으윽! 알았으니까 그만 울어! 그래서 네가 원하는 용사의 조건이란 게 뭔데?"
<<음…그냥 시간도 없는데 방금 말씀하신 친절하신 분이 하시죠?
전 사실 인간이기만 하면 되거든요. 후훗>>
"……"
"……"
차라리 그냥 소멸시켜 버릴까?
나는 정령왕으로 태어난 이후, 새삼 처음으로 진지하게 살인충동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사나는 그런 내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이그니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기…정말 나로도 돼? 여기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마족도 있고…블루엘프도…"
<<다 필요 없어요! 전 오직 인간이어야 해요, 인간!
인간이 이런 던전 밑바닥까지 오는 일이 어디 그렇게 쉬운 줄 아세요?
그거야 말로 진정한 용사의 조건! 잔말 말고 당장 뽑아요! 어서요!>>
"아, 그럼 잘 부탁할게."
짧게 인사를 건넨 이사나는 간단한 동작으로 이그니스의 검집을 잡고 들어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검안에서 시뻘건 불길이 일어나더니,
그의 몸을 순식간에 집어 삼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화르르륵!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라 나와 일행들은 모두 놀란 표정으로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으아악!"
"이사나!!"
<<아앗! 놓지 말아요! 이건 시험이란 말이에요, 시험!
나를 가질 자격이 되는지 시험을 하는 거니까 검집을 놓으면 불합격 판정을 받는 다고요!>>
"이 썩을!! 그런 건 진작 말해야 할 것 아니야!!"
주인을 시험하는 검이라니!
그래서 내가 잡지 못하게 그토록 땡깡을 피웠던 건가!
불의 속성과 정반대인 내가 잡으면 시험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 할 테니 말이다.
"크…크으윽!!"
'시험'이란 소리에 차마 검을 놓지도 못하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이사나를 보며 나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이사나! 그냥 검을 놔! 차라리 억지로 끌고 가는 게 낫겠어. 그러다 죽는다고!"
"나…난 …괘, 괜찮아…엘. 조금만 버티면…으윽!"
"그러다 네가 먼저 죽는다니까?! 야! 이그니스! 그만 멈추지 못해?"
"괜찮아, 엘! 괜찮아. 버틸 수 있어. 내가 할 수 있도록 해줘."
"이사나?"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지, 이사나는 불길 속에서도 의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분명 뜨거울 텐데도 애써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짓는 모습에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던전에서 잠깐 헤어졌을 때 느낀 게 있었어.
…그동안 엘한테 너무 의지하고 있었다는 걸 말이야.
바보같이…이건 내 일이었는데…엘한테 모두 맡겨버리고…혼자서 편하게 있었던 것 같아."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친구니까 도와주는 건 당연한거잖아."
"그래…치, 친구니까 …친구니까 모든 걸 전부 의지해선 안 되는 거였어.
나도 이제…내가 자립할 수 있다는 걸 당당하게 보여주고 싶어.
그래서…대등한 조건으로 엘과 마주보고 싶어.
물론…가능하지는 않겠지만…그래도 노력은 해야 하잖아. 그렇지?"
"!!"
그의 말에 나는 감전이라도 당한 것 마냥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대체 그동안 녀석의 무엇을 보아온 걸까?
지금까지 당연히 지켜주고 돌봐줄 대상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사나는 어느새 이렇게 혼자 자립할 의사를 보이고 있었다.
마치 품안의 병아리가 스스로 날개를 펴고 공중을 향해 날아가듯이.
이제 더 이상 그는 나의 보호를 받아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 참. 그럼 그렇다고 하면 될 것이지, 꼭 저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고집을 피워야 하나?'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녀석이 알아서 할 거란 생각에 나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 순간, 이사나의 몸을 태우던 불길이 마치 폭풍처럼 사납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퍼어어어엉!
"으아아악!!!"
"이사나!"
털썩.
더 이상은 버틸 힘이 없었는지 이사나는 검을 부둥켜안은 상태에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몸을 감싸던 붉은 불덩어리가
새하얀 은빛의 광채를 띄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빛은 점점 범위를 넓혀가며 이사나의 주위를 마치 후광처럼 채워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불덩이는 완전히 사라지고,
이제 남은 것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검신과 주변을 밝히는 눈부신 은빛밖에 없었다.
우우우웅!
마치 공명이라도 하는 듯이 떨리는 검의 울음소리에 사방은 순식간에 고요해지고,
이사나를 감싸던 은색의 빛도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이제 전부 끝난 건가?
그렇게 느낀 순간, 이사나의 몸이 천천히 옆으로 기울이더니 곧 풀썩 바닥으로 쓰러졌다.
고통의 충격으로 기절해 버린 것이다.
"이사나!!"
<<아이 참! 용사님도! 합격 하신 다음에 쓰러지심 어떻게 해요?
이제부턴 당당하게 검을 치켜들고 합격한 걸 만 천하에 알리셔야 하잖아요!
그게 제일 명장면 이었는데! 흑…너무해!~>>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냐! 이 썩을 놈아!!"
다행히 이사나는 정신만 잃었을 뿐, 불에 의한 화상이나 다친 상처는 없어보였다.
'시험'이라더니, 처음부터 극한 고통만을 전달해 주었던 모양이다.
그럼 녀석의 몸을 감쌌던 불길은 다 화려해 보이기 위한 쇼였다는 말인가?
<<그래요! 쇼였어요! 흑! 저도 좀 멋지게 보이고 싶었다고요.
원래 선택받은 검을 잡을 땐 이렇게 화려한 피날레가 필요하단 말이에요!
엘퀴네스님은 그런 것도 모르고! 바보 바보!>>
"…너 말이야…"
이런 걸 두고 소멸시키지 못해 한이 되는 상황이라고 하는 걸까?
이 한편의 희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마신은 키득거리며 내 어깨를 연신 두드렸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어깨가 당장이라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쿡쿡쿡. 어쨌든 데리고 나갈 수 있으면 됐지, 뭘 그래? 그냥 왕인 네가 참아. 킥킥킥"
"웃을 기분 아니에요. 젠장, 정령왕의 권위가!!"
"크흠. 그냥 너무 오래 땅에 박혀있어서 저놈이 좀 미쳤구나 해.
원래 불의 정령들은 그놈들 왕을 닮아서 다 성깔이 저모양이거든.
나도 참 많이 열 받았었지. 훗."
"카노스님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에? 내가 말 안했나? 나도 한때 엘퀴네스였잖아~몰랐어?"
"……"
생글생글 웃으며 '선배님이라고 불러봐'라고 말하는 마신의 모습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간절할 정도로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엘이 기절한 이사나를 보살피는 사이,
시벨리우스는 한 구석에 서 있던 마신 카노스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카노스는 마치 그럴 것이라고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피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해보라는 뜻이었다.
"정령이었던 존재가 한순간이라도 인간의 육체를 입을 수 있나?"
"킥- 결국 결론은 현재의 엘퀴네스가 '엘'이다 로군?"
"질문에나 대답해! 그런 게 가능하냐고 묻고 있잖아."
"흐음. 글쎄. 불가능 하지 않을까, 보통?
정령이 아무리 실질적인 형체가 없는 존재라고 해도, 인간이 될 수는 없는 거거든."
"그럼…엘퀴네스가 그때의 '엘'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뜻이야?"
기대하고 물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엘'이란 존재는 허공 속으로 흩어지는 듯싶었다.
마치 환상 속을 헤매고 나온듯한 기분에 얼굴을 찌푸리는 시벨리우스에게,
카노스는 빙긋 웃으며 되물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번에도 지금의 엘을 외면할 생각?"
"그런 거 아니야.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는 바보짓은 안 해.
이젠 엘이 그가 아니라도 상관없어. 그냥…진실을 알고 싶을 뿐이야."
"헤에. 그걸 내가 알고 있을 거란 보장은 어디서 나왔는데?"
"하지만 넌 신이잖아? 신이면 뭔가 좀 특별한 구석이 있어야지!
남들처럼 다 모르면 그게 어떻게 신이야?"
"으음. 그건 그렇군. 생각보다 똑똑한 녀석일세."
"지금 나 놀리는 거냐?"
여전히 능청스럽기만 한 카노스의 태도에 시벨리우스는 으득 이를 갈았다.
그러자 그는 얼른 정색을 하며 냉큼 수수께끼와도 같은 말을 내뱉었다.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졌다는 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해?"
"…무슨?"
"단순히 주변 사람만이 아닌, 문서의 기록에서도 '엘'의 존재는 완전히 사라졌어.
엘퀴네스의 첫 번째 인간 계약자가 이사나로 알려진걸 보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
그렇다면 답은 하나. 그는 처음부터 그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사람이었다는 뜻이야."
"존재해서는 안 된다니?"
"흔히 말해 시간을 역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지.
본래 정해진 궤도를 걷지 않고, 어떤 사건에 의해 거꾸로 돌아간 거야.
그리고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다시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가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세상이 혼란스러워 지잖아?
그래서 차원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 사람을 애초에 '없었던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는 소리야."
"…그거…지금의 엘퀴네스가 과거로 갔다는 소리? 하지만 아까 인간이 될 수 없다고…"
"글쎄, 그건 일반적인 '보통'의 개념이고.
시간을 역행하는 자들에게는 상관없지 않을까나?
어차피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오면 '없던 일'이 돼 버리는데 아무렴 어때? 인간이든 엘프든."
"!!"
그제서야 머릿속이 밝아지는 기분에 시벨리우스는 환하게 웃었다.
결국, 그가 바라본 것은 처음부터 한 사람이라는 소리였다.
"'엘'에게 알려줄 거냐? 지금 그 말?"
"아니."
"왜? 본인이란 걸 알았으니 이제 마음껏 달라붙어도 상관없잖아?"
"싫어. 기다릴 거야. 그가 날 기억하게 될 때까지. 그동안 엘을 괴롭혔던 나에게 내리는 벌이야."
시벨리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사나를 간호하고 있는 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를 기억하지 못한 엘에게 내리는 벌이기도 하고."
"그게 무슨 말입니까? 숫자를 단기간에 앞당기는 방법이 있다니요!"
콰앙!
신계에서는 현재 각 상급신들이 한자리에 모여 비상 회의를 구축하고 있었다.
얼마 전 명계에서 보고 되었던, 악신의 탄생 조짐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자는 의도였다.
벌써 희생자의 숫자가 9천 9백 명을 넘어선 만큼,
이제 악신의 탄생은 거의 시간문제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그들을 더욱 경악케 한 것은,
그렇지 않아도 얼마 남지 않은 희생자의 숫자를 단번에 줄이는 방법이 있다는 한 신의 발언이었다.
"전례에 의하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아이 하나가
평범한 아이 10사람의 몫을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귀한 운명의 별을 지닐수록 그 효과는 더욱 큽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돼는 말입니까!
그럼 이제 겨우 80명 남짓한 상황에서,
단 8명의 목숨으로 악신이 탄생될 수도 있다는 소리가 아니오!"
"진정하십시오. 그렇게 특별한 아이들이 흔할 리가 없습니다.
설령 그 방법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당장은 그들을 찾기 위한 시간이 걸릴 겁니다.
당분간은 별을 점치는 자들의 능력을 봉하고,
예언하는 자들의 입을 막는 것으로도 대비책을 세울 수 있겠지요."
"그럼 무얼 합니까! 여전히 주모자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것을!
마신에게선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겝니까?"
"그게 아무래도 마계의 인물과도 관계가 있어, 조사를 착수하는데 더욱 어려움이 있는 듯 합니다.
제사가 벌어지는 장소와, 그 피가 유통되는 과정이 철저하게 가려져 있습니다.
그들도 지금쯤이면 우리들이 눈치 챈 것을 알 테니, 더욱 행동이 조심스러워지겠지요."
마지막 여신의 말에 회의장에 모인 신들은 모두 불안한 표정으로 술렁거렸다.
결국 그들은 악신의 탄생을 막는 것보다,
탄생한 악신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의논하는 것이 더욱 현실적인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끄응. 정녕 사전에 저지할 방법은 없단 말이오? 게다가 소멸시킬 방법이라니.
대체 누가 주신의 권능에 맞먹는 존재를 상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만, 전혀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온힘을 다해 막는다면,
악신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움직임을 봉할 수 있을 테니까요.
문제는 그의 소멸에 필요한 조건입니다만…"
"조건이라니?"
"악신이 탄생하기 위해 어린아이 만명의 피가 필요하듯,
소멸시키기 위해서도 특별한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 조건이란…"
거기까지 말한 남신은 목이 탄 듯,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다음순간, 회의장은 소름끼치도록 고요한 정적으로 물들었다.
"상급신 하나의 목숨입니다."
[정령왕 엘퀴네스 6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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