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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소설] 정령왕 엘퀴네스 5권

by 아도비야 2021.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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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소설] 정령왕 엘퀴네스 5권

 

 

 



 - 클리프 상단의 주인 - 

“후후후, 무슨 대화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세요?”


투닥거리던 우리를 향해 말을 걸어온 사람은 후작의 여동생인 에이프릴이었다. 그러자 라피스는 언제 투덜거렸냐는 듯이 금새 얼굴 표정을 바꾸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다. 인간의 안면근육이 어찌 저리 순식간에 뒤바뀔 수 있는지, 새삼 인체의 신비에 대해 조사해 보고 싶을 정도였다.


“별 일 아닙니다. 그나저나, 후작각하께서 꽤나 기뻐하시는 것 같군요.”


없는 자리에선 이놈 저놈 잘만 불러대던 녀석이, 고작 여자에게 잘 보일 작정으로 ‘각하’란 칭호까지 다는 것을 보자니 헛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하지만 녀석의 본질을 알 리가 없는 에이프릴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 그저 수줍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폐하를 가장 많이 걱정하시던 분이니까요. 지금 이렇듯 성장한 모습을 보았으니, 기쁘실 수밖에요. 아마 천하를 다 가지신 기분일 겁니다.”

“하긴, 주군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보다 즐거운 일은 없겠지요. 이거 후작각하가 부러워지는 군요.”

“어머? 라피스님… 이렇게 불러도 되지요? 라피스님은 마법사라고 들었는데요. 그런데도 주군을 섬기는 기사의 마음을 이해하신 다는 건가요?”

“하핫. 기사만이 주군을 모시는 건 아니랍니다. 마법사라 하여도 얼마든지 주군을 모실 수 있지요. 저 역시 주군을 찾아 헤맨 지 몇 년이나 되었으니까요.”


‘맙소사…주~구~운? 네 입에서 그딴 말이 나오다니. 진정 하늘이 두렵지 않냐, 라피스?’


기가 막힌 내 시선에도 녀석은 뻔뻔할 정도로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내 장담하지만 놈은 다른 사람을 섬길 바엔 차라리 죽는 것을 선택할 타입이다. 일족 안에서 천재라 일컬어지며 떠받들어 살아온 탓인지, 자신외의 잘난 존재는 절대 두고 보질 않는 것이다. 그런 주제에 주군이라니? 내숭의 강도치고는 너무 심각한 게 아닌 가 절로 생각이 들었다.


“어머, 제가 실례를 한 것 같네요. 그러신 줄 모르고….”

“아닙니다, 레이디. 일반적으로 마법사들이 주군을 섬기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으니까요. 그러니 이해를 못하신다 하셔도 탓할 일이 아닙니다.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후후 꽤나 멋지신 분이시네요. 폐하 곁에 라피스님 같은 분이 계셔서 다행 이예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녀석의 연기에 완벽히 속아 넘어가버린, 가련한 여인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그저 한숨만을 내쉬었다. 새삼 콩깍지가 얼마나 세상을 피폐하게 몰아가느냐 탄식하면서 말이다.

그런 생각은 카이씨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 그는 아까부터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연신 헛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역시 사제도 인간이었던 건가. 사례가 걸려도 단단히 걸린 것 같아 나는 말없이 그에게 물 한잔을 내밀었다.


“아, 감사합니다, 엘님. 그나저나…용케도 태연하신 얼굴이네요. 대게 저런 상황을 보고 나면 속이 거북해지지 않나요?”

“그야 그렇지만, 이미 몇 번 경험이 있어서 그런가? 생각보단 참을 만 하네요. 그새 면역력이 생겼나 봐요.”

“그거 부럽군요. 엘뤼엔님의 은총으로 저도 제발 빨리 익숙해지길 바래야 겠습니다.”

“쿡쿡쿡. 글쎄요, 엘뤼엔이라면 익숙해지기보단 차라리 눈앞에서 없애는 쪽을 선호할 것 같은데요.”


그러나 장난스럽게 대꾸한 내 말에 대답한 것은 카이씨가 아니었다. 문득 머릿속으로 똑바로 전달해 오는 듯한 선명한 음성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게 정답이다, 아들아. 부탁이니 저 느끼한 녀석 좀 그만 떨궈내라.>

“에, 엘뤼엔?”

“헉, 설마 엘뤼엔님의 계시입니까?”


덩달아 당황한 듯한 카이씨의 말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후작과 이사나만을 신경 쓰느라 누구도 우리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잠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카이씨의 시선을 무시하며 작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갑자기 이런 곳에서 텔레파시(?)를 보내면 어떡해!”

<호오. 지금 반항하는 거냐? 이 아비는 바쁜 와중에도 이렇듯 짬짬이 시간을 내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타이밍이 나쁘잖아. 주변에 사람들도 많단 말이야.”

<괜찮다. 어차피 너 혼자 중얼거리는 걸로밖에 생각 안 할 테니. 그래봤자 미친놈 취급 밖에 더 받겠냐?>

‘바로 그게 문제야!’


아무튼 라피스나 엘뤼엔이나 이놈의 지독할 정도로 마이페이스적인 성격이 문제다. 자신에게 피해가 없으면 어떤 짓을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덕분에 나 같은 선의의 피해자가 속출하는 것 아니겠는가. 

불만이 가득한 내 표정을 본 카이씨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물어왔지만, 나는 전혀 친절하게 대답해 줄 기분이 아니었다.


“엘뤼엔님이 뭐라고 계시를 내리신건가요? 혹, 나쁜 소식입니까?”

“그냥 미친놈 취급당하고 살라는데요.”

“예에?”

<그런 식으론 말 안했다, 아들. 별거 아닌 것에 투덜거리다니, 평소답지 않은걸? 혹시 인간들이 자주 겪는다는 사춘기라도 오는 거냐?>


세상 어느 정령왕이 사춘기를 겪는단 말인가. 게다가 태어난 지 몇 달밖에 안된 나는 더더욱 해당사항이 없는 거 아니야? 내 표정은 아까보다 더 찌푸려졌다.


“이젠 나를 일반적인 정령왕의 개념에서 아주 제외시켰나 보지?”

<전혀. 네가 평소와 다르기에 해본 말이다. 그 동안 스트레스가 심했나 보구나.>

“아아, 이것저것…”


그 스트레스의 주범에 엘뤼엔 역시 포함 된 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봤자 씨도 먹힐 리 없으니. 그 대신 나는 현명하게 그가 갑자기 말을 걸어온 용건을 묻기로 했다. 곤란한 대화에서 탈피하는 방법은 화제전환이 장땡인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연락을 다 했어?”

<아버지가 아들한테 연락해선 안 된다는 거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예감에 뭔가 용건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이지.”

<그런 거 없다. 그냥 잘 지내고 있나 해서 말이야. 그때 만난 이후로 벌써 며칠 흘렀으니까.>


담담하게 대답하는 말투인데도 나는 어쩐지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혹시 나도 모르게 사고 쳐놓고 시치미 떼고 있는 거 아니야? 하지만 내가 트로웰처럼 투시력을 가지지 않은 이상, 엘뤼엔의 숨겨진 본심을 알아낼 방도란 게 있을 턱이 없었다. 

무언가 알 듯 말 듯한 미묘한 기분에 인상을 찡그리고 있자니, 가벼운 혀 차는 소리와 함께 타이르는 듯한 엘뤼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 의심이 많아서 어디에 쓰겠냐, 아들. 별거 없다. 아마도 조만간 누군가와 마주치게 될 것 같아 신경이 쓰였던 것뿐이니까.>

“누군가라니?”


그럼 그렇지. 역시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구만.

엘뤼엔처럼 바쁜 신이 쓸데없이 안부를 확인할 요량으로 말을 걸 리가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모른 척 하려 하다니. 아무래도 그동안 내가 너무 만만히 보였나 싶다.


<자세한건 만나보면 알게 될 거다. 당부할 것은, 그에게 절대로 내 문장을 받았다는 소리는 전하지 말라는 거다. 알겠냐, 아들? 절대로다. 절.대.로.!>

“아, 알았으니까 그렇게 강조하지 마.”


엘뤼엔의 기세가 워낙 흉흉했던 탓에 나는 ‘왜 그런 거냐’라고 물어보지도 못한 채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농담이라도 ‘싫다’고 했다간 당장 아들이고 뭐고 사단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질린 표정으로 대답하자 옆에 있던 카이씨의 표정까지 덩달아 딱딱하게 굳어졌다. 행여나 신의 계시에서 나쁜 소식이라도 들은 게 아닌 가 염려하는 얼굴이었다. 거기다 사람들의 시선도 슬슬 이쪽으로 몰려드는 것 같아, 나는 그쯤에서 양해를 구하곤 엘뤼엔과의 통신(?)을 끊었다. 제 멋대로 미친 사람 취급하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으니까 말이다.

“어떻게 된 겁니까? 엘뤼엔님의 천사가 무언가 안 좋은 소식이라도 전달하던가요?”

“별거 아니에요. 그냥 안부 차 인사한 것뿐이니까요.”

“예에? 하지만 표정이 많이 어두우셨는걸요.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겁니까?”

“네.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카이씨. 그보단 우선…이 상황부터 해결해야겠군요.”

“네?”


내가 가리키는 상황이란, 바로 눈앞에서 웃고 있던 후작과 이사나였다. 

한참동안 껄껄거리고 웃던 후작이 우리를 향해 연신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이사나에게만 따로 긴히 전달할 말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가 눈치 없이 계속 자리에 붙어 앉아 있던 탓에 자리를 파할 타이밍도 잡지 못하고 속만 끓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나마 헛기침도 몇 번 하면서 시선을 주목하려고 노력도 해본 모양인데, 아시다시피 나와 카이씨는 엘뤼엔과의 대화에 정신이 없었고, 라피스 역시 에이프릴을 유혹하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 본의 아니게 무시한 셈이 되었다. 황제를 도와준 은인들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니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뒤 늦게 서야 그것을 눈치 챈 나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다는 오래된 격언(?)을 떠올리며 어색한 표정으로 살짝 미소 지었다. 


“오래 걸어왔더니 많이 피곤하네요. 이만 쉬고 싶습니다만…실례가 되지는 않을까요?”


다행히 후작은 별다른 꼬투리 없이 사람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잠깐 이어진 라피스의 ‘너 미쳤냐?’라는 시선은 무시하기로 하자.


“오, 아닙니다. 미처 손님들이 피곤하실 것을 예상치 못했군요. 그럼 이만 일어나실까요? 에이프릴, 네가 손님들을 방으로 안내해주겠니?”

“네, 그럴게요 오라버니.”

“감사합니다, 후작각하. 그럼 저희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예의바른 태도로 정중하게 고개까지 숙이고 나자, 그제 서야 상황을 눈치 챘는지 라피스는 연신 피식거리고 웃었다. 그리곤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훌륭한 포즈로(귀족가의 인사 예절인 모양이다)허리를 굽히며 우아하게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귀한 시간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작각하. 오늘 저녁식사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제 평생에 다시없을 훌륭한 만찬이었습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군요. 저 역시 매우 즐거운 저녁 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대답한 것과 달리 라피스를 바라보는 후작의 눈빛은 미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봐도 멋지구리했던 그의 인사법에 혹시나 귀족이 아닌지 의심하는 얼굴이었다. 

마법사는 대체로 신분을 가리지 않고 작위를 받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겉모습과 행동까지 완벽한 귀족처럼 보일 수는 없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른 탓에 예법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릴 때부터 궁으로 들어와 교육을 제대로 받은 평민이라 쳐도, 그럴 경우 십중팔구 윗사람들에게 얼굴이 알려지게 되므로 후작과 안면이 없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특히나 폴리모프 같은 고급마법이 가능한 평민출신 마법사를, 후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모르고 있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라피스를 귀족가의 사람이라 짐작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귀족처럼 경계해야 할 대상이 또 있을까? 후작의 얼굴은 자연히 딱딱하게 굳어졌다.


‘바보 라피스. 일부러 눈에 띄는 행동을 해서 좋을 게 뭐가 있다는 거야!’


하지만 나는 곧 이상 하리 만치 생글거리는 라피스의 표정에서, 그가 일부러 이런 상황을 유도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성격이 꼬인 녀석이었다.

 

 

 


“폐하, 저들은 대체 어떤 경로로 만나게 되신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요, 형님?”


질문의 의도를 알 법도 하련만, 이사나는 모르는 척 시침을 떼며 그렇게 물었다. 아니, 한편으론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자신을 제외한 사람들은 이미 나가고 없는 상태였지만,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해서 지금의 대화를 듣지 못할 일행들이 아니다. 혹여나 카웰후작의 입에서 그들을 비방하는 말이라도 나왔다간 크게 경을 칠 일이 분명한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라피스님은 절대 가만두지 않겠지.’


그러나 이러한 이사나의 속을 모르는 후작은 그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우연히 만나게 된 사람들 치고는 지나치게 능력들이 좋은 것 같군요. 상급 정령사에 고위급 마법사에, 신관까지 말입니다.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볼 수는 없는 상황이 아닐까요?”

“저들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군요.”


심각하게 구겨지는 후작의 얼굴을 보며 이사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진실의 말을 억누르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아직은 모든 것을 밝힐 때가 아니었다. 또한 일행들 역시 현재 ‘작정하고’ 유희를 즐기는 셈이었으므로,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사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겁니다. 신이 내리신 안배지요.”

“폐하, 그렇게 우유부단한 태도로 넘기실 일이…”

“걱정 마십시오, 형님. 저들의 목적과 의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저들은 어려운 처지의 나를 도와주려는 것 외에는 어떠한 뜻도 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를 믿어주시지 않겠습니까? 형님이 우려하는 일이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만.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요.”


끝까지 의심의 기색을 떨치지 못하던 후작은 이사나가 맹세까지 들먹이고서야 수그러드는 듯 했다. 그렇다곤 해도 개인적으로 그들의 정체를 밝히려는 움직임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 어느 부하가 주군의 곁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인간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겠는가.


‘부디 쓸데없는 일에 힘을 너무 많이 소비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자신의 말을 순순히 믿어주지 않는 후작에 대한 서운함이 들면서도, 그게 또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쓴 웃음을 짓고 마는 이사나였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후작이 하루라도 빨리 포기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후작은 이사나에게선 그들의 정체를 알아낼 방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는지 순순히 다른 쪽으로 화제를 전환시키기 시작했다. 이사나와 나눌 본격적인 밀담이 벌어진 것이다.


“저들을 물리셨을 때부터 눈치 채셨겠지만, 지금부터 말씀드릴 내용은 상당히 중요한 겁니다. 황제폐하 본인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와도 연관이 되지요.”

“…!! 그게 무엇입니까?”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제가 개인적으로 모을 수 있는 사병은 2만 명에 달합니다. 보통 귀족들 사이에서는 흔치않은 숫자라고는 하나, 대공에게 대적하기는 턱도 없는 숫자지요. 그렇다고 용병을 모집하자니, 당장 수도로 진격할 것이 아닌 이상 너무 눈에 뜨입니다. 어쩌면 저쪽에서 먼저 선수를 칠 기회를 마련하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그건 그랬다. 아무리 은밀하게 진행시킨다 해도, 대규모의 용병들이 이동하는 것이 포착된다면, 눈치 빠른 대공이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마족이니, 마왕이니, 정체불명의 집단까지 공격의사를 보이기 시작한 이상, 섣부른 행동으로 화를 일으킬 수는 없었다. 

근심하는 이사나에게 후작은 침착한 태도로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실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을 정당하게 모을 한 가지 방법이 있으니까요.”

“그게 정말입니까?”

“예. 바로 상단의 힘을 이용하는 겁니다. 시국이 불안하여 상단을 지킬 용병들을 고용하는 식이라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무역도시인 클모어에는 상단의 숫자도 많으니, 그 만큼 용병들의 숫자가 불어도 이상할 일이 없지요.”

“아? 하지만 상단이라면…”


이사나의 얼굴은 금새 난처하게 물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미 대부분의 상단들은 이사나의 승리를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도움을 요청한다고 해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 뻔한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후작은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미리 생각해둔 계획에 따라 차분하게 대화를 진행시켜 나갔다. 


“대부분의 상단들이 설득되지 않는 건 사실입니다. 오히려 솔트레테에 세운 지부를 폐쇄하고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겠다는 강경한 상단도 있었지요.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건 클리프 상단뿐입니다.”

“클리프 상단?”


어디서 들어본 듯한 낯익은 이름에 고개를 갸웃하자, 후작은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단숨에 설명을 이어나갔다.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상단입니다만, 급속도로 규모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대륙 10대 상단의 상위권에 속할 정도지요.”

“아아, 기억해요. 아까 식사 때 말했던 거지요? 상단의 주인이 근래에 바뀌어서, 안팎으로 굳건해질 계기가 필요하다고 했던…”

“예, 그렇습니다. 오직 그곳만이 우리들의 도움 요청에 ‘좀 더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지요. 두고 볼 여지없이 그곳을 뚫어야 합니다. 지금 상단들은 막막한 앞날에 도박을 걸 수 없어 잠자코 있는 것뿐입니다. 클리프 상단이 우리 편이 되 준다면, 그것을 계기로 다른 이들도 충분히 돌아설 겁니다.”


단호하게 대답한 후작의 말에 이사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랬다. 요즘 들어 한창 주가를 달리는 상단이 이사나의 편이 되 준다면, 다른 상단들 역시 솔깃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인들은 무엇보다 이득을 노리는데 혈안인 종족들이니까.


“뿐만이 아닙니다. 새로 바뀐 클리프 상단의 주인은 예지력을 가지고 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그만큼 미래를 읽을 줄 알고, 그가 인정한 사람은 반드시 대성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선택한 행동에서 손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상인들의 마음을 움직일 겁니다.”

“하아? 그렇다면 설마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에…”

“맞습니다. 상단의 주인을 만나십시오, 폐하. 그리고 그의 ‘인정’을 받고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


쿠궁- 벼락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듯한 충격이 느껴지는 듯 했다. 그가 상단의 주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무언가 불안하다고 느낀 이사나였지만, 정말로 이렇게 직구를 날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무리 쫓겨났다곤 해도 황제는 황제였다. 고귀하다 칭송받는 황족 중에서도 가장 높은 이가 아닌가? 그에 비하면 상인은 평민 중에서도 가장 천한 취급을 받는 종족이다. 한 마디로 지금 후작은 인간 중에서 가장 높은 이더러, 그와 가장 반대의 신분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얕게 생각해도 충분히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 이사나는 아찔한 기분에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려서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호오~ 이거 벌써 테스트 시작인가? 저 후작 놈,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드는 걸?”


지금 우리는 라피스의 방에 모여앉아 사이좋게 영상을 관람하는 중이었다. 이미지 마법이라던가, 뭐라던가. 우리가 보지 못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을 스캔하는 마법이라는데,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이 생생한 화질과 음감이 눈앞에서 고스란히 벌어지고 있었다.

그랬다. 우리는 지금 당당하게도 후작과 이사나의 상황을 도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시작은 이사나가 뭘 하는지 궁금하다는 내 말이 화근이었지만, 일을 벌인 것은 라피스이니 들켜서 문책당할 책임을 고스란히 전가시키도록 하자. 

덕분에 저 은밀한 대화를 생 라이브(?)로 목격하게 되었으니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정말 성격 이상하다니까. 마음에 들긴 뭐가 마음에 들어? 이사나가 저렇게 곤란해 하는 거 안 보여?”

“모르는 소리. 저게 다 녀석의 역량을 시험하는 게 아니고 뭐냐? 지금 후작은 저 한마디로 여러 가지를 노리고 있다고. 이사나가 뜻을 위해서는 천민에게도 머리를 숙일 수 있는 인물이 되는지, 또한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는 사람인지. 그리고 모욕적인 제의를 한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 만큼의 관대함이 있는 사람인지.”

“흐음. 그렇군요. 그러다 일이 잘 되면 상단의 주인을 설득시키는 귀찮은 작업을 이사나님에게 떠넘길 수도 있고 말입니다. 또한 운이 좋아 인정까지 받으면 일석이조의 효과로 다른 상단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지요.”

“바로 그거야. 여~ 신관 녀석. 똑똑한데?”


라피스는 연신 카이씨를 기특하단 듯이 바라보면서 내게는 본 받으라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저 건방진 눈빛이라니. 아무래도 조만간에 놈과의 계약을 해지해야 할 듯싶다. 


“너 또 쪼잔하게 계약 해지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냐?”

“내, 내가 언제?”

“말 더듬는걸 보니 맞나보군. 난 가끔가다 정말 네가 정령왕이 맞는지 의심스러워 진다.”

“뭐, 뭐가 어째?”


그렇지 않아도 아픈 부분을 사정없이 찌르다니. 네가 그러고도 내 계약자란 말이냐! 

원망어린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라피스는 그저 코웃음 한방으로 무시해 버릴 뿐이었다. 세상 사 무서울 것 하나 없다는 그 태도에 열 받는 나는 분에 겨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에이프릴에게 네놈의 비리를 다 폭로하고 말 테닷!”

“그러든지 말든지. 이미 그녀는 나한테 80%는 넘어왔다고. 이제 와서 무슨 말을 들어도 흔들리지 않을 걸?”

“이익! 이 천하에 다시없을 느끼만땅 왕자 병 도마뱀 같으니!!!”


귀신은 뭘 하고 이런 썩을 도마뱀 하나 잡아가지 않는 단 말인가! 씩씩거리는 내 말에도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귀엽다는 듯이(뿌득) 흐뭇한 표정을 짓는 녀석을 보자니 살심이 불끈불끈 치밀어 올랐다.

역시나 엘뤼엔이 처리해 준다고 했을 때 가만히 있었어야 했던 거다. 이게 다 어른의(?) 말씀을 무시한 죄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너 자꾸 날 그따위로 취급하면…!!”

“쉿! 기다려. 이사나 녀석이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하는 군.”

“!!”


너무 열 받은 나머지 현재 상황도 잊고 길길이 날뛰려던 나는 라피스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얼른 정신을 찾고 덩달아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이 기가 막힌 타이밍이 정말로 우연인건지, 아니면 녀석이 뭔가 술수를 부린 건지는 영원히 미궁에 빠질 일이다.

영상에 비친 이사나는 생각을 완전히 정리한 듯, 감고 있던 두 눈을 천천히 뜨고 있는 상태였다. 맑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가 똑바로 후작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나 그 눈에 담긴 것은 노여움도, 서운함도 아닌 단단한 각오의 빛이었다. 그것을 보고나니 나는 듣지 않아도 그가 어떻게 대답할 건지 충분히 그린 듯이 예상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사나는 차분한 표정으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형님께서 그것으로 저를 인정할 수 있다면 그리 하겠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평민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일을 태연히 받아들이는 무리라고 생각했는데요.>

<쿡쿡쿡. 아시면서 떠보다니 형님도 많이 짓궂어 지셨네요. 하지만 형님의 성품상 허튼소리를 할 리는 없는 법. 그 만큼 상단의 주인이 대단한 인물이라는 소리겠지요. 무릇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태연한건 그러한 이유에서 입니다.>


거기까지 짧게 말을 끝낸 이사나는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후작에게 미소 지으면서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놀란 건 사실입니다만, 모욕이라고 여기진 않았습니다. 그걸 노리고 한 제의인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내가 그 장단에 일일이 맞출 필요는 없겠지요. 어때요? 이 정도면 훌륭한 대답이 되었습니까?>

<…많이 변하셨군요, 폐하. 몇 달 전의 그 분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 할 정도 입니다. 감히 폐하를 시험하려 했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후작은 기쁨 반, 당혹감 반인 표정이 되어 얼른 고개를 수그렸다. 설마 자신의 생각까지 전부 이사나가 짚어낼 줄은 몰랐다는 투였다. 그 모습에 이사나는 웃을 듯 말 듯한 묘한 표정을 지으며 살짝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글쎄요. 모욕감을 느끼지 않았다 해도 괘씸한 건 괘씸한 것. 아무리 사촌 형제라 하더라도 공과 사는 정확해야 하는 법이지요. 설령 그것이 충의를 가지고 벌인 일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니 어찌할까요?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형님?>

<원하시는 대로 처벌하여 주십시오, 폐하.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이사나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는 걸 듣고, 그가 화가 나 있다고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나는 교훈 한 가지를 얻으며 감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이래서 눈싸움이 중요하단 거구나. 시선을 끝까지 떼면 안 된다니까?”

“킥. 너 다운 말이다. 저 모습을 보면서 하는 말이라는 게 고작 그거냐?”

 

 

“사실이 그렇잖아? 봐~ 이사나는 웃고 있는데 후작 혼자서 지례 겁먹고 벌을 내려달라고 하는 거잖아. 아무튼 사람은 정면을 응시해야 돼.”

“한 얼굴로 두말하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 네가 몰라서 그렇지, 웃으면서 사람 죽이는 인간 여럿 봤다. 찔리는 게 많은 놈은 알아서 비는 수밖에 없는 거야.”


그러나 정작 그렇게 말하는 라피스 조차도 다분히 후작을 향해 한심하단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간 보아온 이사나의 성격상, 저런 일로 화내거나 벌을 내리기는 가당치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짐작은 전혀 틀리지 않아, 이사나는 곧 오래지 않아 웃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쿡쿡. 그만 두세요, 형님. 내가 이런 일로 화낼 사람으로 보였습니까? 형님께서 그렇게 벌을 좋아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하, 하지만…>

<뭐, 정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내려드리지요. 형님께선 이 못난 아우의 여정을 부디 끝까지 지켜봐 주십시오. 잘되면 잘 되는 것으로, 안되면 안 되는 것 그대로의 저를 형님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내가 형님께 내릴 수 있는 벌의 전부입니다.>

<…!!폐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기억해 주고 응원해 주는 존재를 바라게 되나 보다. 그리하여 언제고 문득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와 카이씨완 달리, 라피스는 짧게 혀를 차며 ‘소심한 놈’이라 중얼거렸다. 이왕에 벌을 줄 거라면 화끈하게 손모가지를 비틀거나 재물을 달라고 할 것이지, 겨우 기억해 달라는 게 뭐냐고 말이다. 

어느새 감격한 얼굴이 된 후작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이사나의 앞에 부복했다. 올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었다.


<신(臣) 카웰 드 클모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전하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전하의 끝과 함께 할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가문 대대로 폐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클모어의 핏줄은 솔트레테의 정통성을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형님…>


눈물을 드리우고 있는 이사나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는 것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끝이 났다. 

그야말로 한편의 영화를 본 기분이었달 까? 마법이 사라지고 났을 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박수를 칠 뻔 했다. 정작 전생에 영화관에 갔을 때는 아무리 감동적인 장면을 봐도 박수는커녕 하품만 하기 일쑤였는데 말이다.


‘혹시 감수성이 풍부해진건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리며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고단한 하루의 마지막이었다.

 

***

 


엘퀴네스 일행이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는 바로 그 시각, 명계의 신들은 하나같이 어두운 표정으로 긴급회의를 열고 있었다. 명계의 모든 것을 총괄  하는 5명의 중급 신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것은 어지간히 중대한 일이 아니면 극히 드문 일로, 모여 있는 당사자들 역시 당혹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시선은 처음 소집령을 내린 중급신 메테르에게 향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그렇지 않아도 일거리가 많아서 정신이 없는데 말입니다. 우리 5명을 모두 소집 할 정도로 위중한 일이오?”


개중에서 가장 성격이 급하기로 유명한 중급신 아스카가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더러 모이라고 했던 메테르는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단 듯이 난처한 기색뿐이었다. 

그는 명계에서도 영혼의 죽음과 인도를 담당하고 있는 신이었다. 대부분의 인도자(엘은 저승사자라고 부른다)는 모두 그의 소속이나 다름없다. 

매사에 침착하고 표정이 흐트러지는 일이 없기로 유명했던 그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다른 신들 역시 불안한 심정이 들기는 마찬가지.

결국 분위기를 바꾼 것은 이제까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있던 아레히스였다. 그는 특유의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메테르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말씀해 보십시오. 소집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겠지요? 사실 저 역시 무언가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다만.”

“아아. 역시 아레히스님은 눈치 채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소집령을 내린 것은, 아무래도 무심히 넘길 일이 아닌 것 같아 의견을 구하려고 모신 겁니다.”

“대체 무슨?”


잠시 숨을 삼킨 메테르는 모두의 궁금하단 눈빛을 무시한 채 테이블 위에 새하얀 빛의 구를 띄웠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빛 덩어리를 바라보던 신들은 그 안에 갇혀진 것이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인간의 영혼임을 깨닫곤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이, 이게 뭡니까, 메테르? 어째서 죽은 영혼이 환생의 궤도를 타지 않고 이렇듯 모여 있는 것이오? 개인의 취미생활을 위해 인간의 영혼을 악세사리로 이용하는 건 불법임을 모르시지는 않지 않소이까!”

“진정하십시오. 여러분. 이건 실제 영혼이 아니라 기록용 환상에 불과합니다. 모여진 영혼의 숫자를 세어보십시오. 모두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인 것은 척 보면 알 수 있소! 어디보자, 한 9천 9백 명 정도 되겠군. 이렇게 많은 어린아이들의 영혼 기록은 무엇 하러 모아두신 게요?”


불쾌하단 듯이 턱을 쓸며 대꾸한 한 중급신의 말에 다른 중급신들 역시 동조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메테르의 말에 그 장소에 있던 누구도 감히 입을 먼저 열 용기를 지닐 수 없게 되었다.


“정확히 9천 9백 명 이 맞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 모두 요 몇 십 년 사이에 차원 아크아돈에서 거두어 들였지요. 사인은 한결 같습니다. <마신께 바치는 재물>이었습니다.”

“!!!”

“무슨!!!”


덜컹-

커다란 소리와 함께 대부분의 신들이 놀라움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란으로 가득한 얼굴은 하나같이 한가지의 사례에 대한 염려를 담고 있었다.


“서, 설마 그 일을 벌이는 존재가 또 다시 생겼단 말입니까?”

“아니, 아니. 진정하십시오. 아직 확실한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아크아돈은 오랜 물의 정령왕의 부재로 10년 사이에 멸망직전까지 치달은 적이 있었습니다. 죽은 아이들의 대부분은 그 사이에 생겨났으니, 마신께 기우제를 지낸 인간들의 행위라고 보셔도 타당합니다. 특히나 아이들을 제사지낸 나라는 마신을 섬기고 있는 제국이니까요.”

“하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지 않소이까! 벌써 9천 9백이라지 않았소! 설마 또 다시 누군가가 악신이 될 생각이라도 하고 있다면-!!”

“피렌체님!”


모두가 상상하고 있던 사실을 입으로 뱉어내자, 아레히스는 굳은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모여 있던 신들의 얼굴은 어느새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당연했다. 악신이 누구인가! 주신의 가장 강력한 저주를 받은, 악의 정점에 선 신의 이름이 아니던가!

1만 명에 해당하는 어린 인간의 피. 그것을 모조리 흡수하여 탄생하는 가장 사악한 존재! 

그 강대한 힘은 주신을 필적하며, 마음만 먹는다면 중간계 뿐만 아니라, 신계의 대부분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진정 위기라고 하면 위기인 것이다. 오히려 태연해 하는 것이 더욱 무리가 아닌가.

술렁술렁. 도무지 진정할줄 모르는 신들의 모습에 아레히스는 쾅-하고 커다랗게 테이블 위를 내리쳤다. 그 바람에 간신히 시선이 집중되자 애써 차가운 표정으로 메테르를 바라보았다. 

그 냉기어린 눈빛에 메테르는 꼼짝없이 몸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영혼의 죽음과 인도를 담당하신 것은 메테르 님입니다. 9천 9백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모일 때까지 침묵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보, 본의가 아니었소. 당시 아크아돈은 아이들 말고도 죽은 인간이 많았기 때문에 숫자를 깊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쪽이 정확합니다. 가뭄 때문에 죽은 사람이 몇 만에 해당했으니 딱히 큰 문제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갑자기 이상하다고 여기신 계기는요?”

“이미 가뭄이 끝나는데도 재물을 바치는 일이 계속 되고 있었기 때문이오. 혹시나 마신을 향한 기우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그 숫자가 벌써 만에 달하니 혹시나 하신 거겠지요. 맞습니까?”


아레히스의 말에 메테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을 해 보였다. 그 바람에 모여 있던 신들의 얼굴은 더욱 불안감으로 물들었으나, 아무도 그것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신들이 술렁거리든 말든, 한참동안 눈을 감은 채 침묵하던 아레히스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엘퀴네스님, 당신과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겠군요.’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그는 다시금 확고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그와 함께 모여진 4명의 명계의 신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가고 있었다.


“만약 이것이 우리가 우려하는 일이 벌어지는 그대로라면, 우리 중 누구도 주신의 문책을 피할 순 없을 겁니다. 또한, 현재 그 일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는 가장 유력한 대상인 마신께서도 결코 무사히 넘어가진 못 할 테지요.”

“크윽…”

“하지만 메테르님은 아직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여기서 이런 식으로 떠들어봤자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일단 모여진 숫자가 숫자이니만큼, 상급신께는 반드시 보고해야 합니다. 지금, 대표로 신계로 다녀오실 분을 선정하겠습니다.”


명계의 가장 깊은 곳, 으슥한 장소에서 벌어진 긴급회의의 마무리가 지어지는 순간이었다.

 


한편 엘뤼엔의 수행천사들은 딱 자살하기 좋은 심정을 경험하고 있었다. 신전을 들어갈 때마다 느껴지는 그 서슬퍼런 살기라니! 

보통 신도 아니고, 신계의 흔치않은 상급 신 중 하나인데다, 마 속성을 가진 신이 뿜어내는 살기는 마음이 여린 천사들이 감당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벌써 며칠째 이어진 한파 아닌 한파 속에, 천사들의 얼굴은 점점 창백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누가 보면 신계에도 겨울이 있냐고 물어보기 좋은 상태다.

대체로 딱딱한 느낌이긴 했어도 조용하던 엘뤼엔이 신전이, 요 며칠 새 이렇듯 분위기가 바뀐 이유는 간단했다. 살신(?)적인 스케줄로 쉴 틈 없이 몰아붙여지던 엘뤼엔이 드디어 그 한계를 느껴버리고 만 것이다. 

그것은 며칠 전 그의 신전으로 당도한 한 무더기의 서류더미가 원인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배달된 정체모를 양피지 더미. 그리고 파일마다 수줍게 붙여진 <마계 내 총괄 관리>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엘뤼엔의 잠자고 있던 마성이 한순간에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크아아아악!! 그 영감탱이! 죽여 버릴 테다!!!!!!!”

“에, 엘뤼엔이시여! 진정하셔요, 진정!!”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어어어어엇!!!!!”


그야말로 미친 듯이 소리치는 와중에도 행여나 서류가 상할 새라 신력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는 엘뤼엔이었다. 그의 투철한 직업정신(?)을 주신이 보았다면 한달쯤은 포상으로 휴가를 내렸을 지도 모른다. 


“왜 내가 마계까지 담당해야 하냔 말이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원망을 터뜨리며 엘뤼엔은 진심으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그의 머릿속엔 얼마 전에 벌어졌던 ‘원흉’과의 만남이 바로 어제 일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그날도 엘뤼엔은 일에 치여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이프리트가 날려버린 서류의 분량이 생각보다 더 많았던 대다, 그 와중에도 틈틈이 엘의 유희를 살펴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것이다. (그럼 엘의 유희를 살펴보는 것을 그만 두면 될 텐데. 그건 죽어도 그만 두지 않는 엘뤼엔이었다.)

때문에 어지간한 신들은 엘뤼엔의 그 방대한 작업분량에 질린 나머지, 용건이 있더라도 간단히 천사를 시켜 전달하는 선에서 그치곤 했다. 그것을 싸악 무시하고 찾아온 이는 신계에서도 지극히 패륜적이기로 유명한 마계의 상급 신 카노스였다.

그는 어깨까지 기른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쌈박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 왔다.


“여어- 엘뤼엔. 신계 최초로 과로사한 신이 되고 싶은 건가? 뭐가 이렇게 바빠?”

“알았음 꺼져.”


…한 가지 참고해 둘 사항이 있다면, 엘뤼엔은 카노스에게 전혀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적의를 가지고 있다는 쪽이 더 타당했다. 이 방대한 분량의 일거리들 대부분이 바이톤에 놀러온 마족들이 벌여놓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을 관리하는 마신을 곱게 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당장이라도 씹어 먹을 듯한 엘뤼엔의 기세에 카노스는 과장된 포즈로 ‘어머 무셔라~’를 외쳤다. 그러나 그의 생글 웃는 얼굴 어디에도 진심으로 무서워하는 기색 따위는 전혀 찾아볼 길이 없었다. 

엘뤼엔은 간신히 가라앉힌 혈압이 다시 도지는 것을 느끼며 빠득빠득 한마디씩 내뱉었다.


“대.체.또.무.슨.짓.거.리.를.하.러.온.거.야.이.썩.을.놈.의.자.식.아.”

 

 

“어라라.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무려 한 때 같은 직업에 종사했던 신으로서 말이야~ 좀 더 곰살맞게 맞아줄 수는 없는 거야?”

“너 같은 놈이 ‘한 때’ 엘퀴네스 였다는 사실은 전~~혀 기억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 입 다물어. 할 말 있으면 빨리 말하고 사라지라고. 내 눈앞에서 영원히!”

“쳇- 재미없기는. 난 나름대로 후배한테 최선의 예우를 다하는 데 말이지. 이봐~ 엘뤼엔씨. 그렇게 인상 쓰다가는 주름살 생긴다고.”

“닥.쳐.!”


카노스는 엘뤼엔의 눈빛에 흉흉한 살기가 감돌고서야 아쉽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쌀쌀맞기 그지없는 반응이었지만, 그나마 이런 식으로 ‘상대’라도 해주는 이는 신계 전체를 통틀어 엘뤼엔 밖에 없었다. 다른 신들은 모두 그와 시선이 마주 칠 새라 도망치기 바빴기 때문이다. 

언제고 그 사실을 서운해 하는 카노스에게 엘뤼엔은 담담히 한마디 충고한 바 있다.


<친해지고 싶으면 남을 괴롭히는 그 못된 성격부터 고치라고.>

<내가 뭘~>

<내가 뭐얼? 꽃의 신한테 선물한답시고 벌레자루를 건네준 건 어디의 누구였더라? 덕분에 그녀의 정원의 꽃들이 죄다 벌레 먹어 시들어 버린 것은 누가 벌인 짓? 학자의 신을 찾아가 축구를 가르친 건 누구며, 밤의 신을 찾아가 빛의 신이 사용하는 망토를 덮어씌운 건 또 누구? 그 신은 그때 입은 화상 때문에 한동안 신전 안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었지, 아마?>

<헤에. 누구냐. 그 엄청나게 사악한 짓을 벌린 놈은?>

<바로 너야, 너!!>


그나마 엘뤼엔은 서류 때문에 너무 바빠 그를 제대로 상대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술수에서 비교적(아니 상당히 많이) 벗어날 수 있었다. 

새로 신계에 들어온 신들이 거의 ‘신고식’처럼 치른다는 마신의 장난을 당하지 않은 유일무이한 존재였으므로, 다른 상급신들이 엘뤼엔을 존경하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 사실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지도 모른다. 바로 단 한명의 존재로 인해서….


“그러고 보니 엘뤼엔 너 이번에 양 아들 들였다며?”

“…엘 건드리면 죽인다.”

“호오, 정말이었나 보네? 네가 웬일이냐? 자신외의 존재한테는 티끌만치도 관심 없던 놈이. 이름이 엘이라고? 실속을 따지는 네가 인간을 아들 삼았을 리는 없고…누구냐? 그 엄청난 행운아가?”

“관심 꺼.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마. 보지도 마. 생각하지도 마. 절~~~대 호기심으로 물어보지도 마.”

“쳇~ 이거 아들 없는 신 어디 서운해서 살겠냐? 그러지 말고 가르쳐 주라. 누구야? 응?”


그걸 가르쳐 주느니 차라리 내가 혀를 깨물고 만다. 엘뤼엔은 그렇게 다짐하며 맹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실수로라도 알려주었다간,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남아도는 마신이 언제 또 정령계를 뒤지고 다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엘로서는 저 엄청난 성격을 절대 감당할 수 없으리라. 


“난 내 아들이 기절하는 꼴 보고 싶지 않다.”

‘그리고 너 같은 선조(?)가 있다는 사실 역시 가르쳐 주고 싶지 않아.’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쏘아붙이며 엘뤼엔은 꿋꿋하게 버텼다. 한 번 마음먹은 일은 곧 죽어도 지켜내는 그였으므로, 마신 카노스는 아쉬운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본인의 입으로 정체를 알아내기는 어려울 듯 했다. (그럼 다른 사람의 입으로는 들을 의향이 있단 뜻인가!)


“대체 무슨 일이야? 나 바쁜 거 안보여? 용건만 간단히. 수초내로 말하고 가라.”

“아아. 사실은 말이지, 내가 출장을 가게 되서 말이야. 못 보는 동안 잘 지내라고 인사차 들렸지.”

“…출장이라니?”


신이 출장을 다닌다는 소리는 생전 듣도 보도 못 했다. 하루 종일 신전에 갇혀 서류싸움을 한다는 소리라면 모를까. 웬 출장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이리저리 뺀질거리며 놀러 다니기 바쁜 녀석이었던 터라, 엘뤼엔은 슬며시 불쾌한 감정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놀러간단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단 말이야?’


그랬다. 그리고 엘뤼엔으로서는 무척 불행하게도… 그건 사실이었다. 카노스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무려 중간계로 무기한 유희 플레이! 그 동안 노고가 심했던 나를 위해 내려주신 주신의 선물이랄까나?”

“크윽!! 이건 차별이야!!!”

“큭큭. 너도 알다시피 신들은 인간세상에서 1시간 이상을 버티질 못하잖냐. 근데 이번엔 특별하게도 무려 5년이나 기회가 주어졌단 말씀. 대신 행사할 수 있는 신력이 상당히 줄어들겠지만 말이야. 어때? 부럽지?”

“뿌득. 염장 지르러 온 거면 그냥 가라. 나 지금 엄.청. 바쁘거든?”


살기를 담은 엘뤼엔의 목소리에 카노스는 과장된 몸집으로 움찔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게 엘뤼엔의 화를 더 돋운다는 건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행동이었다.


“킥킥. 어디로 가는지는 안 물어보는 거야? 우리로서는 상당히 인상 깊은 곳인데.”

“뭐냐, 마계라도 가는 거냐?”

“설마. 그럼 내가 굳이 ‘중간계’라고 말할 리가 없지. 아크아돈이야. 엘퀴네스였을 때 수시로 가본 곳이었지만 오랜만에 가니까 감회가 새로운 걸?”

“뭐? 어디라고? 아크아돈?!!”


벌떡-

엘뤼엔은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하필이면 하고 많은 차원 중에 아크아돈이라니! 저 녀석의 성격상 우연히 엘을 만나기라도 하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것이 아닌가. 맙소사.


“절대 안돼! 다른 곳으로 가!”

“에? 뭐야~ 내가 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라고. 주신께서 그 곳으로 지정해 주셨단 말이야.”

“그래도 안돼! 빌어서라도 다른 곳으로 옮겨!”

“쳇~ 시잃어. 나도 오랜만에 고향에 가는 기분이라 상당히 들떴다고. 아무튼 다녀올 때까지 잘 부탁해. 너만 믿고 있을 테니.”

“뭐, 뭐야? 자, 잠깐!!”


그것을 마지막으로 휭하니 사라져 버린 마신 카노스 였으니… 엘뤼엔으로서는 그야말로 낮잠 자다가 날 벼락을 맞은 심정이었다. 

담담한 표정과 달리 그의 눈앞은 점점 새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저 장난밖에 할 줄 모르는 마신이 엘을 만나기라도 하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아들임이 밝혀지기라도 하면 더욱 낭패인 것이다.


‘아버지 친구라는 핑계로 애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지도 몰라! 그것만은 절대 안 돼!!’


그러나 당시의 엘뤼엔은 아들의 걱정만을 하느라, 정작 카노스가 마지막 남기고 갔던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처절한 결과는 며칠 후,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고스란히 돌아오고 말았던 것이다. 무려 ‘마신의 부재동안 대신하여 서류처리’라는 극악의 방법으로 말이다.

평소 처리하던 분량의 몇 십 배를 가뿐히 넘기는 방대한 서류더미를 보며, 이성을 잃은 엘뤼엔이 외치는 말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내 이놈의 마신 놈을~!! 크아악! 그 자식 당장 불러와아앗!!”

“엘뤼엔님! 제발 진정하세요오!”

명계와는 다른 방법으로 한바탕 파란이 몰아치고 있는 신계였다.

 

***

 

다음날 아침 날이 밝는 대로 우리는 클리프 상단의 주인을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이왕 해치우는 거(?) 하루라도 빨리 담판을 짓고 수도로 진격하자는 것이 일행의 하나같은 의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아침이 되고 나자 라피스는 단 한마디로 자신의 불참의사를 밝히고 말았다.


“재미없을 것 같다. 난 안 갈 테니 알아서 잘 들 다녀와.”

“거짓말. 에이프릴이랑 승마 가기로 해서 그런 거지? 아까 식사 중에 속닥거리는 소리 다 들렸어.”

“쳇. 알아들었으면 이 형님 좀 도와줘라. 인간 중에서 그만한 미모를 찾기가 쉬운 줄 아냐? 남의 연애사업에 끼어들면 벌 받는다?”

“뭐야, 그럼 지금 내가 당장 나가서 누굴 꼬셔와도 방해하지 않겠다는 말?”

“그것과 이건 달라.”


다르기는 개뿔. 아무튼 지독할 정도로 이기적인 녀석의 행동에는 두 손 두발 다 들었다. 얼굴을 살짝 찡그린 나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차피 따라 다녀봤자 이것저것 잔소리만 늘어놓을 테지. 맘대로 해. 에이프릴이랑 승마를 하든, 춤을 추든.”

“호오, 설마 질투하는 거냐?”

“드래곤이 착각 속에 사는 생물인 걸 깜빡 잊었네, 미안.”

“하여튼 말이라도 못하면.”


쯧쯧거리는 폼이 영락없이 철없는 어린애 대하는 투다. 내가 전생에 인간이었던 데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아주 애 취급을 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그 고운 마음씨에 나는 화사하게 웃으며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주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킥킥거리는 녀석을 보니, 아무래도 아침 식사에 누가 약이라도 탄 게 아닌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역시 이 대륙엔 정신과가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절실하게.


“흐음. 그게 무슨 뜻이길래 라피스님이 저렇게 웃으시는 겁니까, 엘님?”

“아아. 비속어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건데…저 녀석은 욕먹는 게 좋은가 보네요.”

“비속어라면 어떤?”

“그, 그게 말이죠. 이를테면…‘꺼져’랄까.”


차마 신관인 그에게 알려주기 민망한 말을 입에 담자, 카이씨의 표정이 묘해졌다. 불쾌하다기 보다는 재미있다는 투였다.


“신기하군요. 저는 처음 보는데 그런 건 대체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아, 하하…그게 그냥 어디선가 잠깐. 잘 기억이 안 나네요.”


뻘쭘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카이씨는 그것으로 족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문득 사제복을 입은 그가 사람들을 향해 생글 웃으며 뻑큐~를 날리고 있는 장면이 떠오르고 말았다. 찰랑이는 검은 머리카락이 햇빛 속에 눈부시고, 가운데에서 찬연히 빛나는 손가락이라.


“……”


생각보다 상당히 웃기구나. 그래서 라피스가 그렇게 미친 듯이 웃었던 건가? 외모와 전혀 안 어울려서?


“쳇. 그냥 강지훈이던 시절의 외모를 돌려줘…”

“네? 그건 또 무슨?”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하하.”


혹시라도 무슨 소리였는지 물을 새라 나는 냉큼 얼버무리곤 이사나를 찾았다. 마침 녀석은 후작과 함께 방에서 나오고 있었는데, 이제까지완 달리 고급스러운 느낌의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평소 우중충하게만 보이던 그의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진 느낌이다. 옷이 날개라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아, 엘. 미안, 오래 기다렸지. 그냥 아무거나 입겠다는데도 형님이 자꾸만 정복을 입혀서 말이야.”

“한 나라의 황제로서 초라한 옷차림을 하시게 둘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여행 중이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하셔도, 제가 옆에 있는 이상 다시는 그런 옷차림은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난처하게 변명하는 이사나의 말에 덩달아 굳은 표정으로 못을 박는 후작이었다. 그 옆에서는 어느새 따라 나온 에이프릴이 쿡쿡 웃고 있었다.


“정말이지 오라버니도 너무 하시다니까요. 폐하께서 괜찮으시다는 데도 계속 고집을 부리시니. 듣자니 상단까지 가는데 호위 기사를 10명이나 대동시키신 다면서요?”

“당연한거다, 에이프릴. 혹여나 밖에 나가셨다가 무슨 변고라도 당하시면 어쩌란 말이냐.”

“하지만 실력 있는 정령사가 바로 옆에 계시는 걸요. 오라버니는 너무 과보호 세요.”


웃음기를 머금은 에이프릴의 말에 후작의 뚫어질 듯한 시선은 고스란히 내게 돌아왔다. ‘

폐하를 잘 부탁하오. 실수하면 알지?’라는 듯한 목소리가 듣지 않아도 귓가에 쟁쟁 울리는 기분이었다.

 


“흠. 그러고 보니 어제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소. 물의 상급 정령사라 하였습니까?”

‘아니요, 정령왕인데요. 정령사는 그 쪽이 껌뻑 죽고 못사는 이사나랍니다~’

“아, 부족하나마 정령을 조금 다룰 줄 압니다. 폐하의 신변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최선을 다해 경호할 테니까요.”


입과 생각이 따로 노는 진귀한 경험을 하며 대답하자, 후작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입가에 미소를 드리웠다. 그러나 그의 좋은 기분은 얼마 가지 않아 곧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바로 옆에서 그의 여동생에게 추근거리는(?) 도마뱀 한 마리를 발견한 탓이다.


“오늘은 정말 날씨가 좋군요. 승마하기 딱 좋은 것 같은데요? 멀리 나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요.”

“호호호, 저 이래봬도 말 잘 타요. 여자라고 우습게 보셨다간 큰 코 다치실 걸요?”

“어디, 그 솜씨 지켜보겠습니다, 레이디.”


남들이 보면 한 쌍의 완벽한 선남선녀라고 칭찬할지 모르지만, 여동생을 둔 오라비 입장에서는 그저 꽃에 접근한 나방정도로만 보일 광경이었다. 

얼굴 가득 느끼한 웃음을 흘리며 에이프릴과 친근한 대화를 나누는 라피스를 잠시 살벌하게 쏘아보던 후작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미소를 띄웠다.


“허허허. 젊은 사람들이 저렇듯 마음이 맞으니 보는 사람 입장에서 참으로 기분이 좋군요.”

“그렇군요, 형님. 그러고 보니 에이프릴 누님도 슬슬 혼처를 정해야 할 시기가 아닙니까? 벌써 여럿 혼담이 들어왔을 것 같은데요.”

“아, 그, 그렇지요. 하하하!”


이사나. 너는 후작의 이마에 돋아난 시퍼런 혈관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아무리 눈치가 없기로서니, 저 탐탁치 않은 시선을 보면서도 그런 말이 나오디?

결국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후작의 마음을 안정시킨 것은 나였다. 이왕 가는 거 시간 지체하지 말고 얼른 떠나자고 재촉했던 것이다. 그 완벽한(?) 화제 전환에 후작은 고마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이사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일행은 별 탈 없이 상단의 주인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앞에 기다리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

 


“죄송합니다만, 총수께서는 지금 새벽까지의 과한 업무를 마치시고 이제 겨우 잠이 드신 참입니다. 몇 시간 후에 다시오시지요.”

“뭐라! 지금 우리가 모셔온 분이 뉘신 줄 알고 감히!!”


화를 내며 닦달하는 기사를 보자니 도리어 내가 묻고 싶어졌다. ‘그러는 당신은 우리가 누군지 아냐’고.
아직 후작은 기사들에게 이사나의 정체를 알리지 않았다. 그러니 저들도 단순히 귀족이라고만 짐작하고 있을 뿐, 정작 이사나가 누군지 알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런 주제에 당당하게 ‘뉘신 줄 알고’를 연발하는 기사의 모습을 보자니 헛웃음이 나오다 못해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클리프 상단의 본점을 찾는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타 제국에 본점이 있는 다른 상단에 비해, 클리프 상단은 솔트레테 제국에 본점이 있는 몇 개 되지 않는 상단이었으므로, 이곳의 주인을 찾는 일 또한 식은 죽 먹기 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도착하고 나서였다. 총수라는 인간이 너무 피곤한 관계로 독대를 피하고 있다나, 어쨌다나. 덕분에 자신만만하게 우리를 안내해온 기사들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아무리 그러셔도 곤란합니다. 깊이 잠드신 분을 깨울 수는 없습니다.”

“무엄하다! 일개 상단의 주인이 감히 귀족이 요청한 만남을 거부한단 말인가! 가서 네 주인에게 이르거라! 당장 나와 맞이하라고 말이다!”


큰 목소리도 이정도 면 민폐다. 더구나 이사나는 지금 당당히 나설 입장이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 상단의 주인에게 ‘인정’을 받고 돌아가야 하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사나의 얼굴엔 난처한 빛이 가득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다 못한 나는 다시 소리치려는 기사의 팔을 붙잡곤 만류했다.


“그만 두세요. 저들도 사정이 있는데 이쪽 입장만 고집할 수는 없잖아요?”

“예? 하지만…”

“까짓 몇 시간쯤 기다리면 됩니다. 시간이 그리 급한 것도 아니니까요.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으니 기사 분들은 이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후작님께서도 상단을 방문한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신 것이 없으니, 저희들의 의견에 따라주십시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각하께선 손님들을 무사히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그럼 이곳에서 소란 피우지 말고 밖에서 따로 대기해 주세요. 기다리시기가 지루하시다면 한 몇 시간쯤 주변을 둘러보다 돌아오셔도 좋습니다.”


나의 단호한 표정을 본 기사는 반박하려는 듯이 입을 뻐금거리던 걸 그만두곤 할 수 없단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10명이나 되는 장정들이 우르르- 몰려나가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좁아 보이던 건물 안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상태 그대로 여전히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상단의 사람에게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총수께서 일어나실 때까지 이 안을 둘러봐도 될까요? 몇 시간이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만.”

“아…아! 그, 그리 하시다면 곧 차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테이블에 앉아서 기다리시지요.”

“배려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만 폐를 끼치겠습니다.”


예의 바른 인사를 마지막으로 우리(나와 이사나, 카이씨)는 눈에 띄는 테이블의 아무자리나 잡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곧 기다렸다는 듯이 따뜻한 녹차와 간단한 다과가 담긴 접시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상단의 사람을 붙잡고 총수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하기 시작했는데, 별다른 불쾌감 없이 선선히 대답해주는 그의 말에서 전혀 뜻밖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총수께서…여자 분이시라는 겁니까?”

“예, 다들 그 사실을 알면 놀라시더군요. 하지만 저희 상단의 총 책임자분은 틀림없는 여성이십니다. 하지만 일반 평범한 아낙과 비교하시면 곤란합니다. 이카나님은 혼자서 장정 열  사람 몫을 충분히 감당하실 수 있는 범상치 않은 분이니까요.”

“이카나…라, 그분의 이름?”


‘장정 열사람’이란 대목에서 대책 없이 덩치가 큰 우락부락한 근육녀가 떠올랐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자랑스러운 빛이 가득한 눈으로 얼른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상단을 일으킨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라더니, 상단 사람들로부터 전폭적인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외모도 얼마나 아름다우신데요. 지금까지 그 분께 청혼을 한 귀족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만, 전부 다 거절하셨습니다. 사실, 전 총수님의 연인이셨거든요. 그 분에 대한 의리를 저버릴 수 없었던 거지요.”

“대단하신 분이군요. 평소에도 저희처럼 찾아오는 사람이 많습니까?”

“물론입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방문하는 이들이 많지요. 지금은 아침이라 사람이 뜸한 것일 뿐, 점심이 지나고 나면 다시 붐빌 겁니다.”


그들이 아침에 상단을 방문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지금처럼 총수란 인간이 잠잔다는 핑계로 만나주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빨리 담판을 짓자며 이른 새벽부터 서두른 우리만 바보가 된 셈이었다.


‘그나저나 아름다운 외모에 무식하게 힘이 센 여자라니…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 걸? 설마 그 장정 열사람 몫이라는 게 힘이 아니라 머리를 뜻하는 걸까? 아, 그렇다면 이해가 가는군.’


“그런데 건물 안이 상당히 따뜻하군요. 딱히 눈에 띄는 난로도 없는 것 같은데…혹시 마법입니까?”


혼자서 무심코 생각하던 나는 카인씨가 주위를 둘러보며 묻는 말을 듣고 서야 건물 안의 공기가 훈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찬바람이 부는 밖과 달리, 이곳은 별달리 불을 지펴둔 곳도 없는데 보일러를 틀어놓은 것처럼 공기가 가벼웠던 것이다.(정령왕은 온도를 피부로 체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의해서 느끼지 않으면 눈치 채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자 상단의 남자는 자부심이 깃든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법이 아닌 특별한 방법이 있다나? 그 아리송한 대답에 이사나와 카이씨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어렵지 않게 그 뜻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까부터 눈앞을 어지르며 돌아다니는 붉은색의 나비가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어디보자,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대충 세는 숫자만도 10마리가 넘네. 이렇게 많은 카사들을 건물 내에 통제를 해두다니, 상단 사람 중에 불의 정령사라도 있는 건가?’


척 봐도 계약 되지 않은 자연계의 정령들이었다. 아무래도 선천적으로 불의 기운을 강하게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카사들은 그의 기운을 느끼고 몰려온 것일 테지. 나는 피식 미소 지으며 눈앞을 팔랑거리는 불의 하급정령을 향해 살며시 손을 내밀어 보았다.

그러자 녀석들은 흠칫 놀라며 부끄러운 듯 팔랑팔랑 저 쪽으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힐끔힐끔 눈치를 보는 것이 멀어지면서도 어쩐지 아쉽다는 얼굴이다. 정말이지 이프리트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부하였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귀엽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나는 곧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혹시 상단의 주인이라는 여자가 불의 정령사인건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불의 정령사라니오?”

“아, 그게요. 아까부터 불의 카사들이 공중을 날아다니고 있거든요. 건물 내의 공기가 전체적으로 따뜻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거예요.”

“카사라면…불의 하급정령 말씀이십니까? 호오, 소환되지 않는 정령들도 인간 세상에 기운을 미칠 수 있는 건가요?”


궁금하다는 듯이 묻는 카이씨의 말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근처에 있던 상단의 남자가 개인적인 용무 때문인지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마음 놓고 설명 할 수 있었다.


“정령은 자연 그 자체니까요. 자연의 기운은 항상 주변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도 굳이 ‘소환’의 형식이 있는 건, 좀더 본질적인 속성의 기운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자연계의 정령들이 근처에 있다는 것만으로 주변의 공기가 확연히 달라질 수도 있겠군요.”

“물론이죠. 다만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계절의 성질을 따르지만요. 지금과 같은 겨울엔 바람의 정령이 활기를 띄어요. 그들은 대체적으로 쾌활한 성격이기 때문에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바람을 일으키죠. 반대로 불과 물의 정령의 기운은 감소하고요.”

“하지만 지금은 겨울인데도 불의 정령이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훈훈할 정도로요. 그건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여전히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는 그의 질문에 나는 가볍게 ‘불의 정령사나 선천적으로 불의 기운이 강한 인간’이 있을 경우, 자연적으로 그 속성에 해당하는 정령들이 모이게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 예로 이사나의 옆에도 항시 물의 정령이 따르지요. 다만 물은 언제든지 기온의 영향으로 온도가 달라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근처에 있어도 별 다른 느낌이 없는 거예요.”

“에? 그, 그런 거야?”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이사나는 무척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보이지도 않는 허공을 향해 손을 마구 휘저었다. 제 딴에는 무심코라도 정령을 만져보고 싶었던 모양인데, 정작 그 바람에 녀석의 팔에 앉아 있던 수많은 물의 정령들이 꺄하하하~ 웃으며 미끄럼틀을 타고 있다는 건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여간 극성스러운 녀석들이라니까.’


그래도 전혀 미워할 수가 없는 건, 그들이 나와 한 몸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어서 일 것이다. 이제 슬슬 정령이란 몸에 적응이 되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건물 내의 이것저것을 구경하면서 무료함을 달래던 우리는 곧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 오는 한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겨울이라는 날씨 자체를 무시하듯, 얇은 반소매 차림이었는데, 묘하게 당당해 보이는 태도를 보니 지금까지 우리를 접대하고 있던 남자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인 듯 했다.


“실례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이카나님을 만나러 오신 분들입니까?”

“예, 그런데요.”

“저는 클리프 상단의 부총수 엘드란 이라고 합니다. 이카나님께서 지금 막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하셨으니 저를 따라오시지요.”

“헤에, 벌써요?”


시간이 꽤 지난 것 같기는 해도, 1시간도 채 채우지 않은 시각이었다. 당장 몇 시간이라도 기다릴 각오로 앉아있던 우리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총수라는 엘드란은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묘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곤 다짜고짜 뜬금없이 이렇게 대꾸하는 게 아닌가.


“아마 좋은 결과를 얻어 가실 수 있을 겁니다.”

“무슨…?”

“이카나님이 저렇게 빨리 기침하실 때는 귀한 손님을 맞이하거나, 예지가 밝은 분밖에 없거든요. 분명 원하시는 대답을 얻어 가실 겁니다.”

“!!!”


아, 그러고 보니 상단의 주인이란 여자에게 예지력이 있다고 했던가? 


순간 내가 상단에 와있는 건지 점집(?)에 와 있는 건지 헷갈렸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크게 다른 심정은 아닌 듯,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엘드란은 그런 시선이 익숙하다는 듯 별달리 신경 쓰지 않은 채 우리를 주인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내가 상단의 총수라는 여자- 이카나를 보자마자 가장 처음먼저 내뱉은 말은 ‘맙소사’였다. 어쩐지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크게 휘둘리는 기분 이었달 까? 

그녀는 나의 당혹스러운 표정이 보이지도 않은지 특유의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응접실까지 안내해온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분들과 따로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엘드란은 그만 나가 있어.”

“네, 이카나님. 마실 것이나 다과는?”

“기다리시는 동안 실컷 드셨을 테니, 간단한 음료정도로만 하지. 어때요? 괜찮으시겠죠?”

“아, 네. 그렇게 해주십시오.”


생글거리며 동의를 구하는 이카나의 모습에 이사나와 카이씨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직 나만이 연신 ‘신이시여~’를 외치고 있을 뿐이었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와 마주앉은 우리 사이에 따뜻한 찻잔이 놓여지자, 이카나는 서둘러 엘드란을 내보냈다. 그리곤 미처 다른 사람들이 말을 꺼내보기도 전에 나를 향해 두 팔 벌려 외쳤던 것이다!


“이게 얼마만이야~ 우리 엘!! 그 동안 잘 지냈어?”

“왜…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그제 서야 마음 놓고 경악하는 나에게 이카나, 아니 이.프.리.트.는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특유의 핑크빛 피부는 어디로 날려버렸는지(?) 백옥같이 하얀 피부가 시선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어머? 정말 이러기니, 아들? 오랜만에 만난 엄.마. 한테.”

“어, 엄마?”

“헉…”


그의 엽기적인(!) 발언에 놀라버린 두 인간들을 보며 나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믿지 마! 나는 결백하다고!


“크윽! 대체 누가 엄마라는 거야! 소름끼치는 소리 좀 하지 마! 부모노릇 하는 건 엘뤼엔 만으로 벅차다고!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왜 네가 여기 있냐고!”

“보다시피 유희중이지~ 물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 했더니, 역시 너였구나. 어머나~ 운 좋은 계약자 씨도 함께셨네. 반가워라. 그런데 이런 미소년이었어? 엘~ 너 능력도 좋다?”

“말 돌리지 마! 유희기간은 나랑 별반 차이도 나지 않은 주제에 어떻게 상단의 총수씩이나 된 거야? 제대로. 똑바로 설명해.”


중얼거리면 못들을 줄 알았지! 뭐? ‘쳇, 그동안 많이 영악해 졌군’ 이라고? 잔뜩 찡그리고 있는 내 얼굴에 이프리트는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넘기더니 곧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순순히 입을 열었다.  


“어쩌긴 뭘 어째? 상단 주인을 꼬셨지. 단기간에 신분상승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다행히 이정도의 몸매와 얼굴이 받쳐줘서 말이야~ 아주 쉽게 꼬여 냈단 말씀!”

“너…너어어어!!”

“엘뤼엔한테 일렀다간 죽어! 알았어? 그날로 너랑 나랑 사이좋게 죽는 거야.”

“……”


아니, 실망시켜서 미안한데 말이야, 이프리트. 이미 엘뤼엔은 내 이마에 새겨진 문장을 통해 이 상황을 다 지켜보고 있을 거거든? 그런고로 내가 이르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네가 바람피운 사실이 다 접수된 단 거지. 이거…미안해서 어쩌나.

그러나 서슬 푸른 얼굴의 이프리트를 보니 ‘당분간은’ 녀석을 살리는 셈치고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마침 이전에 엘뤼엔이 했던 말이 떠오르기도 했고 말이다.


‘문장을 받았다는 걸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지. 설마 엘뤼엔은 이 상황을 미리 짐작하고 있던 건가?’


그의 질투와 분노의 시선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듯 해 나는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내 입으로 진실을 알리는 일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지도 모르겠다.


“저어, 엘님? 대체 어떻게 된…”

“에? 아- 그러고 보니 카이씨와 이사나는 초면이었죠. 내 정신 좀 봐. 그러니까…간단히 소개할 게요. 이쪽은…내 동료이자 불의 정령왕인 이프리트랄까요.”

“예에?”


아아. 저 놀라다 못해 소스라치는 모습을 보니 죄책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딱딱하게 굳어진 두 사람의 얼굴을 보며 나는 짧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요. 이런 녀석이 정령왕이라서.”

“하, 하아?”

“뭐어? 야! 엘! 너 그게 지금 무슨 뜻이야!”

“무슨 소리긴! 우린 잔뜩 기대하고 왔단 말이야. 인정을 받느니 마느니 얼마나 가슴 떨렸는데, 떡하니 나타난 녀석이 이프리트라니! 내가 얼마나 황당해 했을지 생각해 봤어?”

“그거야 네 사정이지. 나야말로 네가 날 찾아올 거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고. 즉, 황당한 건 나도 마찬가지라는 말씀!”


당당하게 가슴을 쭈욱 펴며 하는 말에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보다 이프리트. 그 키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가슴 좀 없애줄 순 없는 거야? 보는 남자들이 상당히 민망스럽거든?

어쩐지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이프리트가 아닌 것 같아 나는 퉁명스럽게 빈정거렸다. 


“잘~ 한다. 미래의 남편이 버젓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잔뜩 치장하고 다른 남자나 유혹하고 다니다니.”

“시, 시끄러! 이건 그냥 단순한 유희란 말이야! 너 엘뤼엔한테 이르면 진짜 죽~어?”


당황한 듯 잔뜩 얼굴을 붉히면서도 할말은 다하고 마는 이프리트였다. 그때서야 간신히 정신이 들었는지, 이사나와 카이씨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서, 설마…정말로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맙소사.”


그들로서도 이렇게 흔하게(?) 정령왕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반대속성의 정령끼리 만나 투닥거리며 싸우는 광경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을 테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잠시 그와의 휴전을 선언했다. 지금은 내 일행부터 챙기고 볼 셈이었던 것이다.


“너무 그러게 놀랄 필요 없어요. 이렇게 만난건 정말 예상치 못하긴 했지만, 정령왕도 유희를 즐기니까요.”

“아, 그렇지만 정말 굉장한 우연이군요. 이런 곳에서 불의 정령왕을 뵙게 될 줄이야. 만나서 영광입니다, 이프리트님. 저는 카이테인이라 합니다. 미약하나마 엘퀴네스님의 여정에 동반하고 있습니다.”

“아. 저, 저는 이사나입니다. 아시는 것 같지만 일단 엘퀴네스의 계약자이고요. 불의 정령왕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호호호. 마음에 드는 인간들이네. 엘 녀석은 남성체 주제에 이렇게 멋진 남정네들만 끌고 다니다니. 좀 부러운 걸?”

“이프리트! 너 정말!!”


그러니까 말을 제발 가려하란 말이다! 지금 이 대화 엘뤼엔이 다 듣고 있다니까?

행여나 불벼락이라도 떨어질 새라 나는 얼른 하늘을 쳐다보며 안절부절 소리쳤다. 그러나 이프리트는 단순히 잔소리가 귀찮다는 듯한 태도로 손을 내젓기만 하는 것이다.

이미 한차례 엘뤼엔의 경고도 있었던 이상, 속 시원히 다 털어놓을 수도 없고. 이래저래 나 혼자 답답해서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그런데 나를 찾아온 용건은 뭐야? 설마 그냥 인사하러 온 것은 아닐 테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간신히 진정한 나는 이프리트의 한 마디에 그제 서야 여기를 온 목적을 깨닫곤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런 나를 향한 다분히 한심스럽다는 듯한 이프리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오늘날 몇 겹이나 쌓아온 철판신공을 빌어 무시할 수 있었다.


“아, 그게 말이야. 사실은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호오~ 부탁이라니? 뭔데?”


눈을 흥미롭게 빛내며 묻는 말에 나는 지금까지 이어진 일정과 이사나의 상황 등을 차근히 설명해 나갔다. 자칫 지루하게 들렸을지도 모르는 이야기였는데, 이프리트는 동화책을 듣는 것 같이 재밌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어제 후작과 만나 담판을 짓게 된 것과, 그가 이사나더러 클리프 상단 주인의 ‘인정’을 받고 돌아오라는 대목에서는 폭소를 하며 웃어 젖혔던 것이다.


“꺄하하하! 정말 재미있다. 이런 흥미로운 유희를 벌이다니, 너도 제법인 걸?”

“알아주니 고마운데 말이지. 그렇게 되서 현재 네 인정이 필요해. 조금만 도와줄 순 없을까?”

“흐음. 글쎄다. 모처럼 엘의 부탁이니 딱히 못 들어줄 것도 없지만 말이지.”


여기서 이프리트의 진면목을 모르는 사람은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며 얼굴을 환하게 밝히게 된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이미 몇 번이나 반복된 그와의 말싸움을 통해, 이프리트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님을 온몸으로 체험한 바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역시나 이프리트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모두의 얼굴이 기대에 물드는 것을 천천히 흩어보고서야 냉큼 ‘싫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단번에 천국에서 지옥을 오가는 일행들의 표정을 보며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지금부터는 심리전이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너 진짜 그러기야? 네 말처럼, 모처럼 부탁하는 걸 그렇게 냉큼 거절해도 되는 거냐고.”

“싫은 건 싫은 거야. 귀찮단 말이야. 그리고 이런 가벼운 일 하나하나 신경 쓰기에는 내가 너무 바쁜 몸이라서 말이지.”

“그냥 인정만 해주면 되는 거잖아. 나도 너 못지않게 바쁜 몸이라고. 그 가벼운 일 하나 못해줘서 동료간의 의리를 상하게 해야겠어?”

“어머? 너와 나 사이에 무슨 의리가 있었단 거람?”

“뿌득. 그렇게 나오시겠다? 너 찾아오는 사람들을 다 이런 식으로 내 쫒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무려 황제에다 정령왕의 계약자인 사람을 인정해 주지 않는 이유가 뭔데?”

“그거야 내 맘이지. 그동안 너 하는 행동 얄미웠던 거 복수하는 셈 치지 뭐.”


대체 내가 언제 그렇게 얄미운 행동을 했다는 거냐! 속으로 잠시 이를 간 나는 곧 피식 웃으며 거만한 포즈로 팔짱을 끼었다. 바야흐로 비장의 카드를 내밀 때가 도래한 것이다.


“아하~ 그러셔? 그럼 나도 너한테 복수하는 셈치고 지금까지 네가 벌인 행동을 엘뤼엔한테 ‘고스란히’ 알려줘도 상관없는 거겠네?”

“!! 이익! 너어어~!”


쳇, 그러게 누가 내 성질 돋우라나. 나로서도 많이 굽히고 들어갔던 거라고. 까짓 인정하나 해주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워서 이런 식으로 괴롭히냔 말이다.

결국 승리한건 엘뤼엔을 등에 업은 내 쪽이었다. 아직까지 짝사랑 확정! 중인 이프리트로서는, 엘뤼엔에게 미움 받는 다는 걸 상상 이상으로 무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울 것 같은 녀석의 얼굴을 보고나니 괜시리 애꿎은 여자애 한명 괴롭힌 꼴이 된 것 같아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로서도 사정이 급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굳게 믿고 싶었다.

그것은 다음으로 이어진 이프리트의 중얼거림을 듣는 순간 확신되었다.


“쳇, 그냥 ‘엄마’라고 한번만 불렀어도 순순히 들어줬을 텐데. 아무튼 밉살맞은 아들이라니까?”

“누가 아들이라는 거냐, 너…”


도무지 포기할 줄 모르는 ‘엄마’운운하는 소리에 나는 질린 표정으로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아무래도 내가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세뇌라도 시키려고 작정한 게 아닐까.

그러나 불안하게 바라보는 내 시선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프리트는 투덜거리며 태연히 다음 말을 잇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내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 ‘인정’해 준적은 없었어. 그러니까 너라고 해도 마찬가지야, 엘. 나의 인정을 받고 싶다면 그에 해당하는 조건을 이루고 돌아와야 할 거야."

"조건을 이루고 돌아오다니?"


 - 출발! 바론던전을 향하여 -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에 당황하는 나와 이사나에게 이프리트가 내건 조건이란 다음과 같았다. 

역사와 유래가 깊기로 유명하여, 타 제국에 비해 고성과 던전의 숫자가 많기로 유명한 알폰프 제국에서 최근에 또 다시 새로운 던전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바론 사막' 부근에서 발견되었다고 해서 바론 던전이라고 이름 붙여졌다나 뭐라나.

문제는 그것이 발견된 장소가 마물들이 판 치는 죽음의 숲 근처인데다, 여기저기 위험한 지형이 많아 제대로 된 안내자가 없으면 입구조차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랄까? 

처음 발견 된 이래 벌써 3년 동안 수많은 탐험가들이 도전을 시도한 모양이다만, 던전의 끝까지 가본 일행은 아직까지 단 한 팀도 없었다는 것이 대체로 알려진 기본 설명이었다.

그리고 이프리트가 내건 조건은, 그 던전 깊숙이 잠들어있는 단 하나의 검을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검이라니? 그 던전 안에 검이 있다는 거야?”

“그래. 아마도 내 예상이 맞다면, 던전의 가장 최하층 에 있는 건 오직 검 한 자루 뿐이야. 그걸 가져오면 ‘인정’해 주지.”

“헤에. 끝까지 가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그런데 넌 그 던전에 검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안 거야?”


아무런 사심 없이 무심코 물은 질문에 이프리트의 어깨가 살짝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당혹한 감정을 숨기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설마…


“그 던전을 만든 사람이 사실은 너였다던가?”

“아니야! 난 그런 쓸모없는 일에 기운 소비하는 건 딱 질색이라고. 그냥 예전에 알고 지내던 인간이 만든 거야. 인간의 도전정신을 연구해 봐야 한다나 뭐라나 하면서 말이야.”

“그럼 그 검도?”

“농담하니? 던전의 최하층에 있는 검의 이름은 ‘파이어 버스터’. 이그니스가 봉인된 마법검이라고. 그걸 인간이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쳇. 보지도 못한 검이 마법검인지 식칼인지 내가 알게 뭐람? 한심하다는 듯한 이프리트의 시선에 잠시 속으로 투덜거리던 나는, 이윽고 드러난 또 하나의 진실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잠깐만~! 이그니스라고? 불의 상급정령인 그 이그니스? 그럼 검을 만들었다는 게 설마…”


이프리트! 바로 너였단 말이냐!!

아니나 다를까. 경악하는 내 시선에 이프리트는 뻘쭘한 시선을 옆으로 돌리면서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저것이야 말로 죄를 시인하는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잠시 내가 시큐엘을 데려다가 검안에 봉인시키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리하여 나온 결론은 오직 단 하나! 그건 결단코 감정을 가진 생물로서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 내 목소리는 지극히 험해지기 시작했다.


“야! 너 미쳤어? 불의 정령왕 주제에 이그니스를 검에다 봉인을 시켜? 그리고 뭐? 8백년? 그 오랜 시간동안 혼자서 검안에 갇혀있을 이그니스가 가엽지도 않았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시끄러. 내 휘하의 정령을 어떻게 하든 그건 내 마음이잖아. 지금이라도 생각나니까 다시 데려오겠다는 거고. 하여간 별것도 아니 것 가지고 쨍알거리긴.”

“별 것도 아니야아? 이프리트, 너 정말!”


저런 사악한 것도 왕이랍시고 제대로 된 거부도 못한 채, 꼼짝없이 검안에 갇혀 지냈을 이그니스를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런 나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이프리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연신 투덜댔다.


“싫으면 관 둬. 어차피 급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언제고 한번 가서 찾아올 생각이었는데, 보시다시피 지금은 좀 바빠서 말이야. 한 백년 뒤에 쯤 가서 느긋하게 한번 들려보지 뭐.”

“뭐? 그러다 그 사이에 인간들이 들고나가면 어쩌려고?”

“그럼 찾는 게 좀 더 나중으로 미뤄지는 거지. 그래봤자 몇 백 년 밖에 더 가겠어?”

“이프리트…너 정말…”


도무지 반성할 줄 모르는 그의 태도는 하루 이틀 만에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니 어쩌면 최초의 정령왕 때부터 이루어진 본능 같은 것일 지도 모른다. 

그걸 이제 와서 나 같은 돌연변이가 나타나 ‘옳지 않다’고 떠들어 봤자 씨알도 먹힐 리가 없는 것이다.

결국 어디까지나 ‘쓸데없는 실갱이’가 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나는 얌전히 먼저 항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대신 이프리트! 죽어도 내가 널 엄마라고 부르는 일은 없을 거다. 알아? 넌 오늘 실수한 거라고!


“하아. 알았어. 그러니까 그 검을 가져오면 인정해 주겠다는 거였지? 일행의 숫자에 제한 같은 건 있는 거야?”

“그런 게 있어 봤자지. 몇 명이 가든 어차피 네가 나서면 다 해결될 일 아니야? 말이 좋아 ‘조건’이지 이건 완전히 형식적인 거라고.”

“그래, 그래. 눈물나게 고맙다, 정말.”


이후에도 계속 칭얼거리려는 녀석의 말을 간단한 손사래로 받아친 나는, 아직까지 전혀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는 두 사람(이사나와 카이씨)를 일으키곤 상단의 문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이프리트의 염장을 지르는 한 마디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은 채.


“저기 말이야, 이프리트. 아무래도 미리 알아두고 있는 편이 마음의 준비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말이지.”

“…?”

“엘뤼엔이 가끔가다가 내 일정을 알아보는 모양이더라구. 혹시 모르잖아? 우리가 나눈 ‘대화’를 몽땅 듣게 되었을지?”

“뭐, 뭐?!”

“…명복을 빈다.”

“크악! 그게 대체 무슨 소리얏! 야, 야!! 엘퀴네스! 너 거기 안서?!!”


벙쩌진 이프리트가 처절한 비명을 질렀을 때는 이미 나는 저만치 문 밖에서 멀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 마디로 The end. 즉, 상황종료인 셈인 것이다. 

십년 묵은 체증이 쑤욱~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건물 밖에서 추위에 떨며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과 함께(원망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건 살포시 무시해 주었다.) 성으로 돌아온 우리는, 마치 대기하고 있었다는 듯이 불쑥 나타난 후작의 손에 잡혀 무작정 접대실로 끌려가고 말았다.

그리곤 다짜고짜 상단에서의 일이 어떻게 되었냐고 캐묻기 시작했는데, 정신을 못 차리는 나와 이사나를 대신해 카이씨가 침착한 태도로 상황을 설명하자, 곧 심각한 얼굴이 되어 수염도 없는 턱을 쓸어보였다.


“끄응.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바론 던전이라니, 전혀 뜻밖의 조건이로군요. 하필이면 그런 위험한 곳을.”

“아직 아무도 최하층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게 사실입니까?”

“맞습니다. 이르기는커녕 대부분 입구부분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죠. 알폰프 제국에서 몇 번이나 탐험가를 보냈는데 결과는 하나같이 전멸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선 누구도 자진해서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지요.”

“전부 전멸이라니…그렇게 위험한 요소가 많나요?”


위험하다고는 들었지만 전부 전멸할 정도일 거라고는 전혀 상상치 못했기에, 나는 벙쩌진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자 후작은 여전히 근심어린 빛을 감추지 못하며 진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바론던전은 아시다시피 알폰프 제국에서 발견된 던전입니다. 오른쪽으론 죽음의 숲을, 왼쪽으로는 지옥 땅거미의 서식지로 유명한 바론사막을 끼고 있지요. 두 지형의 교차점이라고 해야 할 까요? 때문에 던전의 입구는 항시 수많은 마물들과 거미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럼 던전 자체는 그리 위험한 게 아니라는 건가요?”

“그건 아닐 겁니다. 던전 내에도 수많은 트릭들이 설치되어 있다고 하니까요. 마법으로 만든 건지, 완전히 깨부수기 전까진 망가지지도 않는다는 군요. 안은 미로로 되어있어 길을 찾기도 쉽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극악한 마물들과 트릭들이 판치는 곳이라…. 설마 이프리트. 그걸 처리하고 다니는 게 귀찮아서 이제껏 가만히 내버려 둔건 아니겠지? 크윽! 어디 돌아와서 두고 보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생각을 떠올리며 나는 다시 한번 묻어뒀던 녀석에 대한 복수심을 피워 올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후작의 근심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나저나 이거 정말 걱정이군요. 그런 위험한 던전을 소규모의 일행이 감당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타 제국 안에 가문의 기사들을 보낼 수도 없는 일이니.”

“내가 인정받기 위한 시험이잖습니까? 형님은 전혀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일행은 저와 함께 오신 이들로 충분하니까요.”

“예? 말도 안 됩니다, 폐하. 바론던전이 어떤 곳인지 설명 드렸잖습니까? 그런 위험한 곳에 달랑 3명의 일행들과 동행하시다니요! 정규군대가 가서도 며칠 만에 몰살된 장소입니다. 절대 불가합니다!”


단호한 표정으로 입장을 털어놓은 이사나의 말에 후작은 경악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러면서 처절한 목소리로 말리기 시작했는데, 하나같이 나와 일행들의 실력에 대해 불신을 포함하고 있는 내용이 전부였다.


“괜찮습니다. 라피스님은 훌륭한 마법사이시고…”

“그래봤자 머리카락과 얼굴을 바꾸는 수준의 기초적인 폴리모프 마법이 한계 아닙니까! 6서클의 마법사 두 명이 가서도 비참하게 당했단 말씀입니다!”

“에에…카이테인씨는 치료능력이 가능한 신관이신데다…”

“아무리 그래도 다 죽어가는 상처는 회복시키지 못할 겁니다!”

“그, 그리고 엘은 상급 정령사…”

“아, 글쎄 상급정령사가 아니라 정령왕이 나타나도 그 던전을 뚫을 수는 없다니까요!”


…마지막 말에는 조금, 아니 ‘상당히’많이 울컥해 버렸다. 까짓 던전 주제에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다고 정령왕이 뚫을 수 없다고 장담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후작의 피를 토하는 외침은 마침 에이프릴과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라피스에 의해 그 종말을 맞이하고야 말았으니.


“대체 무슨 일이야?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데이트가 아주 흡족했었는지, 평소완 다르게 기분 좋은 미소까지 싱글거리고 있는 녀석이었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설명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나는 얼른 그를 자리에 앉히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의 중요한 부분을 대충 간추려 설명했다. 

상단에서 일어난 일부터, 지금 후작이 반대하고 있는 상황까지 말이다. 물론 후작과 에이프릴의 시선을 생각해 그 상단의 주인이 이프리트라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흥미로운 표정으로 끝까지 경청하던 녀석은 다 듣고 나서는 ‘그럼 가면 되네. 그렇게 간단한 걸 가지고 뭐가 어쨌다고 이 난리야?’라고 대답하여 다시금 후작이 발작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바야흐로 말싸움 제 2차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아, 글쎄 그곳이 위험한 곳이란 말이오! 나는 폐하의 기사로서 절대로 그런 위험한 여정에 당신들만 보낼 수는 없소이다!”

“아아~ 걱정 마시죠. 제 마법 실력도 쓸 만 할 겁니다.”

“겨우 폴리모프 마법의 초급단계만 구사하는 수준이 아니오! 그것에 모든 걸 기대하기에는 바론 던전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닙니다!”

“그거야 가봐야 아는 거죠. 게다가 다치면 여기 이렇게 치료할 신관도 있으니, 이보다 더 완벽한 파티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신관이라 해도 다 죽어가는 상처는 치료할 수 없을 것 아닙니까!”

“그나마도 없는 것보단 낫죠. 또 상급 정령사도 함께 하잖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크게 다칠 일도 없을 겁니다.”

“상급 정령사가 아니라 정령왕이 나타나도 위험하다는 데도요!”

“호오. 상급정령을 너무 만만히 보시는 군요. 그럼 지금 당장 시험해 볼까요? 아마도 이런 성 따위는 단 한방에 무너질 거라 생각합니다만.”

“……”


한 마디로 후작의 완벽한 K.O 패였다. 

저 라피스의 마이페이스적인 성격이 이런데 써먹힐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는 감탄한 표정으로 녀석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기뻐할 거란 내 예상과는 다르게, 라피스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뭐가 또 불만이야?”

“엥? 뭐가?”


나름대로 칭찬한다고 했던 건데 생각 외로 차가운 반응을 보이자 좀 당황한건 사실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투덜거리는 듯한 라피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방금 한 행동 말이야. 넌 나한테 불만 있을 때만 꼭 이상한 행동 보이잖아. 근데 어째 전에 보던 것과는 다르다? 이번엔 대체 무슨 뜻이냐?”

“!!”


마치 벼락이 훑고 가는 듯한 충격이 내 몸을 강타하는 듯 했다.

서, 설마 이 동네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네가 최고다’라는 뜻이 만들어지지 않았단 소리? 그래서 지금 가운데 손가락을 드는 것과 헷갈려 하는 거야?


‘맙소사…’


웃기다. 엄청 웃기다. 너무 웃겨서 돌아가실 것 같다. 나는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웃음을 얼른 한손으로 틀어막았다. 아이고 배야! 누가 나 좀 살려줘!!


“큭…아, 아무것도…아니야. 큭큭큭큭…푸흡!!”


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참고 넘어가려고 했다. 그동안 이런 사소한 상식하나 제대로 교육시키지 않은(?) 내 잘못이라고 여기면서 말이다. 그러나 다음으로 이어진 라피스의 말에 결국 한계를 느끼고 말았으니-!


“…혼자서 욕하고 비웃지 말고 순순히 불어라. 자식이 점점 귀여운 짓을 한다니까? 너 자꾸 까불면 나도 똑같이 되받아 치는 수가 있어.”

“푸…푸하하하하하하하!”

“에? 뭐, 뭐야?”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라피스가 덩달아 욕한답시고 엄지손가락을 당당하게 치켜드는 장면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웃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눈물까지 찔끔거리면서 미친 듯이 웃는 나를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정말이지 태어나서 가장 많이 웃어본 날인 것 같았다.

 

 

 

휘이잉.

살을 에이도록 차가운 겨울바람이 잎이 다 떨어진 마른 잔가지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하늘을 활개 치는 수많은 정령들 중에서 요즘 들어 부쩍 눈에 띄이는 것은 바람의 상급 정령인 ‘진’이었다. 바야흐로 완연한 겨울이 도래한 것이다.

깔깔거리기 바쁜 정령들의 춤사위를 구경하던 검은 머리의 소년은 어깨에 덮어쓴 모포를 걷어내곤 어딘지 나른한 듯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바람이 부는 군…”


그러나 소년의 혼잣말은 결코 혼잣말로 그치지 않았다.(?) 

어느새 귀신같이 알아들었는지 옆에 있던 일행들이 덩달아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아. 그렇네. 바람이 불지.”

“그것도 더럽게 차가운 바람이 말이지.”

“이 바람이 백번 정도 불고나면 우린 다 동사한 시체로 발견 되지 않을까?”

“아마 그럴걸?”

“이익! 이게 다 너 때문이야, 헤롤!!”


무료한 듯 이어지던 대화는 한사람을 향해 살기를 드러내는 것으로 그 끝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덕분에 모두의 시선집중을 받게 된 불쌍한 청년, 샴페인 용병단의 한 사람- 헤롤은 억울하단 표정을 지으며 작은 항변을 시도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네가 여행 경비가 담긴 주머니를 잊어버리지만 않았어도 오늘날 이런 추위에 노숙할 지경까진 이르지 않았을 거 아니야!”

“그게 어떻게 내 탓이야! 말안장에 달린 주머니가 헤져서 떨어진 거잖아! 내가 일부러 잊어버렸냐?”

“어쭈! 끝까지 잘났다는 거냐!”


코끝까지 로브를 눌러쓴 마이티는 괘씸하다는 시선으로 헤롤을 바라보며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트렸다. 애초부터 일행의 모든 식비와 노숙 경비가 담긴 주머니를 그에게 맡기지 않았어야 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나서야 후회가 되다니, 정말이지 땅에 엎드려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 사람 다 그만둬. 지금 이런 상황에서 누구 한 사람의 탓으로 돌려봤자지. 아무튼 오늘도 역시 노숙이니까 알아서 아침까지 살아남아라.”

“크윽! 휴센! 그게 명색이 용병단의 대장으로서 할 말이야?”

“그럼 어쩌란 거냐? 능력 있으면 당장 여관비를 마련해 오던지.”

“쳇-”


야속하게 들리긴 했지만 어찌됐든 구구절절이 휴센의 말이 옳았다. 지금은 싸우면서 기를 소비하기 보단 적당한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더욱 시급했던 것이다. 

짧게 혀를 찬 마이티는 헤롤을 향한 원망의 눈빛을 부라리며 불을 피우기 위해 마른 나뭇가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노숙준비를 끝마칠 생각이었다.

 

 

엘 일행과 헤어진 이후, 지금쯤 뜨뜻한 여관방을 만끽하며 수도인 헤리카를 향해 신나게 이동하고 있어야 할 샴페인 용병단들이, 오늘날 이 겨울에 오돌오돌 떨며 노숙하게 된 사연은 간단했다. 

클모어에서 받은 의뢰비를 포함한, 일체의 모든 경비가 담긴 가죽주머니를 헤롤의 부주의로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덕분에 그들은 여관은커녕, 매 끼의 식사조차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항시 고민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특히나 요즘같이 추울 때에는 무엇보다 잘 챙겨먹어 체력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던가!

며칠 새 부쩍 수척해진 얼굴들은, 하나같이 피골이 상접해 보인다는 표현이란 게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식욕이 왕성한 헤롤이나, 마이티, 휴센은 말 할 것도 없고, 이릴과 쉐리 역시 힘들어 하기는 마찬가지. 

요즘 들어 고기를 부르짖는 것이 어찌나 심상치 않은지, 더 이상 내버려 두었다간 인육(人肉)이라도 뜯어 먹을 기세라, 트로웰은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내일 아침엔 제가 근처에서 멧돼지라도 잡아오지요. 그러니 아직은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평소의 트로웰 답지 않은 무뚝뚝한 음성이었지만, 일행 중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익숙하다는 얼굴이다. 당연했다. 그것이 바로 엘과 합류하기 이전부터 보아왔던 트로웰의 ‘본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과거의 친구를 만나 탈선(?)을 하긴 했지만, 다시 돌아오는 게 당연하다고 느낄 정도로 그들에겐 무뚝뚝한 매튜 쪽이 오히려 친근한 느낌이었다.


“정말이야, 매튜? 우웃! 이렇게 감동스러울 데가! 역시 너 밖에 없다!”

“저놈의 헤롤 자식만 아니었어도, 어린 너를 고생시키지 않는 건데…”

“아, 글쎄!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니까?”

“야! 마이티! 헤롤이 자기 잘못이 아니라잖아! 왜 애꿎은 사람을 볶고 난리야?”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애정을 과시하며 이릴이 냉큼 헤롤을 감싸고돌았다. 그러나 그 행동으로 돌아오는 것은 오직 일행들의 우우~ 하는 야유소리 뿐이었다.


“감싸줄게 따로 있지, 이릴언니. 지금 헤롤 편 들어줄 기분이 나? 우리가 이렇게 고생 하는 게 누구 때문인데? 휴센 얼굴이 반쪽이 된 게 안보여?”

“어머, 얘 좀 봐~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도 있는 법이지, 그걸 가지고 계속 무안을 주고 그러니? 그리고 반쪽이 된 게 어디 휴센 얼굴뿐이야? 우리 헤롤도 안됐기는 마찬가지라고.”

“크아악! 이것들이 지금 애인 없는 사람 놀리나! 당장 그만 두지 못해?”


마지막으로 이어진 것은 처절한 마이티의 절규였다. 그렇지 않아도 춥고 배고픈데 옆구리가 시리다는 비극적인 사실까지 인식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릴과 쉐리가 누구인가! 그녀들은 결코 굴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의 연인을 챙기기 시작했다.


“봐, 봐! 휴센의 얼굴이 더 말랐다고! 헤롤관 달리 휴센은 몸이 말라서 잘 챙겨 먹어야 한 단 말이야.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지 않아?”

“무슨 소리! 헤롤이야 말로 이 체격을 유지하려면 평소에 많이 먹어둬야 한다고! 이 쑤욱 들어가는 근육 안보여? 탄력을 잃었잖아, 탄력을!”

“우아아악! 그만~~!! 이 화상들아! 제발 솔로의 심정도 헤아려 달란 말이다!”


뻘쭘해 하는 두 남자와 절규하는 한 남자, 그리고 두 여자의 유치한 애정 과시를 지켜보던 트로웰은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저러고 밤을 샐 생각은 아니겠지?


‘하긴, 추위를 잊는 데는 ’대화‘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지.’


비록 체력소모라는 심각한 부작용이 따른 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트로웰은 굳이 그 사실을 알려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남을 챙기고 다니는 건 애초에 그가 설정해둔 매튜의 설정에 한참이나 위배되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지금의 그는 엘퀴네스와 함께 했을 때의 ‘그’와는 다른 인품이었으므로.


‘그러고 보니 엘…무사히 후작이란 인간과 만났을려나?’


알아서 잘 하고 있으련만, 역시나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이렇듯 진심으로 ‘보호’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하긴, 이제까지의 정령왕들과는 전혀 다른 타입이니 어쩔 수 없지.’


지금껏 정령왕들은 그에게 동료, 또는 동등한 조건의 쌍둥이 형제라는 느낌뿐이었다. 어떤 일, 어떤 행동에도 자신보다 뒤처지거나 우위에 있다고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엘은 그 보다 좀 더 어린 느낌이랄까? 본인이 들으면 상당히 불쾌해 하겠지만, 트로웰은 아무래도 그가 자신의 ‘동생’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로인해 마치 한편의 가족구도가 완성되어 가는 기분이다. 정령으로 태어나, 항상 혼자라는 인식이 강했던 그로서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감각이었다.


‘어디보자…. 엘뤼엔이 아버지 역할이라고 치면, 이프리트는 내 쌍둥이 누나 쪽? 지독한 파더 콤플렉스라 아버지가 편애하는 막내, 그러니까 엘하곤 맨날 싸우는 거지. 흐음, 그럼 엘뤼엔이 내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는 소리? 쿡쿡. 이거 정말 재밌네. 엘뤼엔이 알면 그대로 기절하겠는 걸? 흐음, 그리고 미네르바는…’

- 크하하하하핫!!


휘이잉-


그때 마침 강한 바람이 트로웰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멍하니 올려다본 하늘위엔 겁도 없이 정령왕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간 용감무쌍한 진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트로웰은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처연해지는 심정이었달 까? 이와 같은 기분을 그는 과거에도 몇 번이나 경험해 본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왠지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미네르바…”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트로웰은 그렇게 나직히 중얼거렸다. 

 

 

***

 

 

바론 던전으로 향하는 일행의 숫자를 결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충돌이 거세어, 결국 밤샌 공방으로 치닫고 말았다. 이사나는 절대로 처음 4명에서 인원을 더 늘릴 뜻이 없다는 의견을 고집했고, 그와 반대로 후작은 기사와 용병을 모집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거기다 중간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후작의 동생인 에이프릴까지 덩달아 합류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는 바람에 상황은 난데없는 삼파전으로 돌입하고 있었다.


“그건 안 될 말이다, 에이프릴! 여자의 몸으로 어찌 그런 험한 곳으로 가겠다는 거냐! 바론 던전은 네가 어릴 때부터 호신술 삼아 배운 검술로는 상대가 안 되는 곳이란 말이다!”

“그래요, 에이프릴 누님. 그것만큼은 저도 형님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목숨이 위험할 지도 모르는 곳에 누님을 모시고 갈 수는 없습니다.”

“폐하, 오라버니. 부디 저를 힘없는 여인으로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스스로를 지킬 능력은 충분히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같이 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저도 이제 보호만 받는 여인의 모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뜻은 거창했지만 나는 어렵지 않게 그녀의 숨겨진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에이프릴의 시선이 아까부터 상황을 방관중인 라피스에게서 떨어지지를 않았던 것이다. 이건 설마…사랑하는 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르겠어요! 라는 상황인 게냐!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라피스를 향해 낮게 이를 갈았다.


“정말이지 능력도 좋으셔~? 대체 언제부터 이런 사이로 발전한거야?”

“그건 무슨 소리?”

“능청 떨지 마. 에이프릴의 시선이 따갑지도 않아? 보아하니 널 따라갈 생각인가 본데, 그냥 두고 볼 셈? 달래든지 해서 어떻게든 말려보란 말이야.”

“흐음?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라피스의 모습에 기가 막힌 나는, 억한 심정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천천히 ‘그녀를 말려야 할 이유’에 대해 하나씩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녀가 여자라서 벌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불편한 사항은 둘째 치고서라도 가장 큰 문제는-!


“정체를 또 숨기고 다녀야 하잖아.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이사나 본인도 제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기가 어려울 텐데 그래도 상관없단 말이야?”

“흠…확실히 그렇겠군. 하지만 그거야 솔직하게 다 밝히면 그만인 거 아닌가?”

“하아? 그 말 진심이야?”


유희 중인 드래곤이 자진해서 정체를 밝힌다는 얘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설마 그 정도까지 저 여자에게 빠져있던 거였나?


‘으윽. 이거 진짜 미치겠네. 친구의 사랑을 도와주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저 녀석 사정 때문에 일행들 모두가 불편을 감수할 수도 없으니 원.’


그러나 나는 곧 빙글빙글 미소 짓는 라피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것이 놈이 내게 벌이는 지독한 장난임을 깨닫곤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녀석은 단순히 내가 곤란해 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뿐인 것이다. 

이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식 같으니-! 그리하여 나는 사정 봐주지 않고 가장 극악한 처방을 내리기로 결정지었다. 


“그냥 네가 여기 남아서 저 여자 맡아라.”

“뭐?”

“아무래도 나는 친구의 사랑을 위해 이 한 몸 희생할 정도로 위대하신 정신을 가지지 못하겠거든? 그러니까 네가 그냥 남으라고. 우리가 알아서 검을 가지고 돌아올 테니. 설마 드래곤하나 빠진다고 전력에 큰 차질이 생기겠어? 그러다 정 쓸모없으면 계약을 파기하면 그만이고.”

“……알았어, 내가 어떻게든 말려보면 될 거 아니야.”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 못내 아까웠는지, 라피스는 이후로도 계속 꿍얼꿍얼거리며 불만을 감추지 못했다. 

어찌됐든 에이프릴이 일행에 합류할 의사를 취소하게 된 것은 기정 사실. 그리하여 갈 곳 잃은 삼파전은 다시 후작과 이사나- 두 양대 산맥(?)간의 대립으로 돌아서고 말았던 것이다.

 

 

“폐하, 제발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바론 던전은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장소입니다. 더구나 대공이 보낸 추적자가 언제 따라 붙을지 모르는 상황이 아닙니까?”

“하지만 형님. 이 정도 일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처음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형님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여기 있는 일행들의 실력이 보잘 것 없는 것도 아닙니다. 쓸데없는 동행은 오히려 불편을 일으킬 뿐이지요.”

“그러나 폐하…”

“그만! 아무리 형님이라 하셔도 내가 정한 일에 대한 참견은 용납지 않겠습니다. 나는 누가 뭐래도 지금 여기 있는 일행들과 함께 출발할 겁니다.”


간곡한 후작의 부탁에도 이사나는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얼굴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뜻을 굽힐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아닌 척 하면서도 지난 몇 달 간, 샴페인 용병단과 동행하면서 정체를 숨기고 다녔던 일이 어지간히도 불편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반대하는 후작의 입장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더 이상 동행의 숫자를 늘릴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다른 말로 이사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폐하는 여기 남으시고 일행들만 보내시는 건 어떻습니까? 어차피 검만 가져오면 되는 거니 굳이 폐하께서 가지 않으셔도 상관없을 텐데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형님? 그런 말씀을 하시려거든 그만 두십시오. 누가 뭐래도 저는 갑니다. 여기 있는 일행외의 다른 동행은 전혀 필요치도 않구요.”

“하지만…”

“형님!!”


결국 후작은 더 이상 참지 못한 이사나가 ‘명령’운운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러서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물러나고 말았다. 더 이상 어떠한 말로도 그의 뜻을 굽힐 수 없음을 깨닫고 포기한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결론이 내려지기 까지 무려 하루라는 시간을 꼬박 잡아먹었으니, 정말이지 징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형제싸움인 셈이었다.

 

 

***

 

 

다음 날부터 후작의 성은 긴 여행을 떠날 우리를 위한 준비로 분주해 지기 시작했다. 

마련되는 것은 던전을 오가면서 먹을 넉넉한 양의 식량과, 갈아입을 옷. 타고 다닐 말과 간단한 여행경비의 수준이었지만, 아무래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몰래 하려다 보니, 다 준비 되는 데까진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때문에 우리가 본격적으로 후작의 성을 빠져나와 던전이 있는 제국-알폰프로 떠나기 전까진 그 후로부터 무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러나 여행의 첫날부터 우리를 난감하게 만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말의 안장에 실려진 엄청나게 많은 수의 짐들이었다. 넉넉잡고 1년을 예상하여 준비한 물품이라, 그 수가 상당히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다간 던전에 도착하기도 전에 물건의 무게에 실려 압사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차라리 따로 짐말이나 수레를 부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사람의 무게에 짐의 무게까지 견디려면 말이 너무 힘들 텐데 말입니다. 꾸준하게 회복마법을 걸어 준다 해도 오래 버티지 못할 텐데요.”

“하지만 수레는 너무 느린 걸요. 말을 하나 더 사자니 왠지 돈이 아까울 것 같고. 그렇다고 짐을 덜어 낼 수도 없으니, 이래저래 곤란하네. 어떻게 생각해, 이사나?”

“글쎄.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마땅한 대비책을 궁리하지 못해 끙끙거리는 우리를 비웃은건 그 이름도 위대하신 레드 드래곤- 라피스였다. 녀석은 아주 간단한 손동작 하나로 지금까지 우리가 고민했던 것을 바보짓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아공간 워프>”

파앗-


그 간단한 한마디의 단어는, 말의 안장에 얹혀져 있던 무수히 많은 짐들을 한꺼번에 투명화 시키는 초유의 기적을 유발시켰다(?) 즉, 한마디로 말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대체 그 짐들이 다 어디로 날아갔단 말인가!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라피스!!”

“헛…이것도 마법 입니까, 라피스님?”

“설마…가져가시기 귀찮다고 죄다 소멸시킨 건 아니죠? 그거 준비하는데 꼬박 일주일 걸린 거란 말이에요.”


경악하는 나와 놀라워하는 카이씨, 그리고 울먹거리는 이사나의 목소리가 차례대로 이어지자, 라피스는 그런 우리들을 한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귀찮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알고 있는 공간에다 이동시켜 둔 것뿐이야. 나중에 언제든지 꺼내올 수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보다시피 당연히 마법이다. 그리고 이사나, 내가 그렇게 한심한 놈으로 보이냐?”

“아하하. 그,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아무튼 별 거 아닌 것 가지고 제발 소란 좀 피우지 마. 특히 엘! 이 몸은 계약자로서 네놈의 대범한 모습을 볼 날이 있을지 심히 의문스럽다고 말하고 싶다.”

“쳇 남의 일에 신경 끄셔!”


거들먹거리는 꼴이 하도 얄미워서 혀를 낼름 내밀어 주었더니 라피스 녀석의 표정이 딱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척[!]하고 엄치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맙소사! 상상하던 일이 현실로 벌어지면 어떡해! 너, 너무 웃기잖아!!


“풉! 푸하하하하!”

“…대체 왜 웃는 거야?”


…아무래도 녀석은 지난 번 사건 이후로 엄지손가락을 드는 것을 ‘너 잘났다!’라고 쏘아 붙이는 것 정도로 인식 한 듯 했다. 당연히 재미있었으므로 그것이 잘못된 정보라고 지적해 주는 일은 패스(pass).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복수의 서곡이 흐르는 순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세상에서 다시없을 ‘개그’에 배를 움켜잡고 웃는 나를, 녀석은 그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정말 이상한 녀석이라니까? 혼자 웃고 혼자 궁리하고. 대체 뭐가 그렇게 웃긴 거냐?”

“쿡쿡, 아, 아무것도 아니야. 크흠. 그럼 우리 이제 출발하기만 하면 되는 건가?”


너무 웃어서 경련까지 이는 볼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물었더니 마침 배웅 나오던 후작과 에이프릴이 냉큼 그렇다고 대답했다.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폐하를 잘 부탁한다고 거듭 인사를 건네던 후작은, 마지막으로 두툼해 보이는 가죽 주머니를 이사나에게 쥐여주며 진지한 목소리로 당부의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혹시나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시면 이 돈으로 용병을 고용하십시오, 폐하. 넉넉히 챙겨 넣었으니 상급 용병 다섯은 충분히 고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아. 배려 감사드립니다, 형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꼭입니다, 폐하! 꼭 그리 하셔야 합니다!”

“알았다는 데도요.”


아무래도 그는 일행의 숫자를 늘리는 일에 끝까지 미련을 떼지 못한 것 같았다. 눈을 부라리며 ‘꼭’을 강조하는 후작의 모습에선, 감히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어마어마한 집념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옆에선 에이프릴이 라피스를 향해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어요’라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을 건네고 있었지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니 일단 넘어가기로 하자.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형님. 내가 없는 동안의 일을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시고 맡겨주십시오. 수도에 있는 폐하의 기사들에게도 소식을 넣었으니 곧 연락이 닿을 것입니다. 그 동안 저는 언제 어느 때든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도록 완벽한 전쟁 준비에 들어가겠습니다. 부디 아무쪼록 무사하게만 돌아오십시오.”


지금 쯤 수도에서 다른 귀족들을 회유시키고 있을 친위 기사단들이 돌아온다면, 상황은 훨씬 이사나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지도 몰랐다. 거기에 다른 황제파의 귀족들까지 합류하게 된다면 더욱 금상첨화이리라. 그들이 데려올 군대의 숫자까지 합치면 충분히 승산이 가능할 테니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문득 하나의 사실을 떠올리곤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굳이 이런 모험을 감행하면서 까지 이프리트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어차피 군대가 모이기 시작하면 대공의 눈에 띄일테고, 그럼 몰래 용병을 모집하기 위해 상단의 도움을 받을 이유도 없잖아?”


그러자 귀신같이 알아들은 라피스의 반박이 이어졌다. 녀석은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번 여행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르는 소리. 용병들의 문제는 확실히 그렇겠지만, 나머지 다른 이득을 배제할 수 없지. 일단 인정을 하고 나면 그 상단은 이사나의 처지를 외면할 수 없어. 자신이 인정한 사람이 형편없이 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거든. 인간들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글쎄? 군대의 숫자일까? 아니면 똑똑한 지휘관?”

“그것도 그렇지만 일단 무기와 식량문제가 가장 시급하지. 내가 생각하기론 대공이나 이사나나 모을 수 있는 군대의 숫자는 서로가 비슷비슷 할 것 같거든. 그렇게 되면 누가 얼마나 더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는 가로 승부가 갈라질 수밖에 없지 않겠어? 

또 체력을 보존하려면 식량을 확보하는 게 굉장히 중요해. 굶어가면서 싸울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자~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그 많은 군대들의 식량과 무기를,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유통할 수 있는 존재는 누가 있을 까요? 1번 상인, 2번 기사, 3번 귀족, 4번 알아서 구한다.”

“뭐야 그건…당연히 1번이지.”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내 말에 라피스는 기특하다는 듯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엘뤼엔이나 이놈이나 점점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 것이 갈수록 태산이다.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대모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나 나의 불쾌하다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설명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튼 그러한 관계로 전쟁 시 상단의 협력은 굉장히 중요해. 특히나 클모어는 무역도시로서 타지에서 온 상인들이 많으니까 그만큼 더 유리하지. 클리프 상단의 ‘인정’은 다른 상단들의 협력까지 이끌어 낼 수 있으니, 물자 면에서는 이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해지는 셈이야. 즉, 만에 하나 고립되어도 절대 굶어죽을 일은 없다는 셈이지. 여차하면 독립 국가를 형성해 버려도 그만 이랄까?”

“헤에. 그걸 대공이 얌전히 보고만 있을까? 무엇보다 녀석들한테는 마족이라는 존재가 있잖아? 인간들은 상대도 안 될 것 같은데.”

“그리고 이쪽에는 ‘드래곤’과 ‘정령왕’이 있지. 충분히 해 볼만한 싸움 아니야?”

“……그렇군.”


그의 말대로 치자면 대공과의 싸움은 어떤 식으로 계산해 보아도 이쪽의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 것이었다. 더구나 아직 대관식조차 치르지 않은 대공은, 황권에 ‘정통성’이 있는 이사나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만한 마땅한 명분이 없었다. 

지금 마신전에서 내세우고 있는 ‘반역’의 모함도 터무니없는 트집에 불과했으니, 생각이 있는 귀족이라면 함부로 꼬투리를 잡고 늘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당장 전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치고, 후작의 얼굴에선 그리 어두운 기색을 읽어낼 수 없었다. 단지 승리를 확신하는 당당한 기사의 모습만이 우리 앞에 존재하고 있었을 뿐.


‘아하, 그러고 보니 카웰 후작이 소드 마스터라고 했던가? 그래서 저렇게 기세등등한 거였군. 하지만 대공 쪽에도 만만치 않은 기사가 있을 것 같은데…’


이를 말이겠는가? 나중에 이사나에게 슬쩍 물어본 바에 의하면, 대공의 오른팔이라는 카리브디스 공작이란 자가, 바로 후작과 함께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으로 꼽는 소드 마스터의 일원이었다. 

또한 왼팔이라는 세트니오 백작은 대공의 친위대인 ‘어둠의 기사단’을 이끌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제국에서 내놓으라 하는 최정예 기사들로만 구성되어 있으므로 결코 만만하게 여길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어지는 이사나의 추가설명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확실한건 아니지만 지금 나를 뒤쫓고 있는 무리가 바로 그 어둠의 기사단일지 몰라.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대장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헉, 그게 정말이야?”


이제껏 별로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추적자들의 존재가 그렇게 대단했다니, 축구하다 잠시 한눈 판 사이에 패스를 놓쳐도 이렇게까지 찝찝한 느낌이 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따라잡히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달 까? 

그래서 나는 지금부턴 흔적을 더욱 꼼꼼히 지우고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그렇지 않아도 고단할 여행길에 끔찍한(실은 귀찮은) 피 부림 만큼은 사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엘의 일행이 알폰프 제국을 향해 길을 떠난 그 시각, 카리브디스 공작 이하 어둠의 기사단들은 클모어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할버크에 머물러 있었다. 

이사나가 벌써 후작과 합류한 것으로 모자라, 새로운 목표를 위해 여행을 시작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기 위해 영주관을 쳐들어간(?) 참이었다.

그 때문에 할버크의 영주관은 예상치 못했던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한 준비로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할버크의 영주인 카일 드 클란 백작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카리브디스 공작을 만났다는 감격에 살짝 몸을 떨며 연신 몸을 굽혀 인사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카리브디스 공작님. 갑자기 찾아오셔서 놀랐습니다. 사람을 찾고 계시다고요?”

“그렇소. 감히 대공전하께 대적한 반역자를 찾는 중이오. 그러니 백작은 최선을 다해 협조를 해야 마땅할 것이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반역자라니, 당연히 그리 해야지요. 영지 내에 공문을 돌렸으니 곧 수상한 자들에 대한 인상착의가 파악될 것입니다.”


단지 ‘반역자’라고만 칭했지만 그것이 이사나 황제를 뜻하는 것임을 모르는 자는 이들 중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 건, 그가 생각하기에도 반역자라는 호칭이 억지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개 힘없는 지방의 영주가 무슨 용기를 낼 수 있겠는가? 지금으로선 권력의 정점에 선 대공을 따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최선이었다. 

백작은 화제를 돌릴 겸, 옆에 있던 자신의 큰 아들을 향해 얼른 인사를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이번 기회에 공작의 눈에 잘 보인다면, 어렵지 않게 높은 자리를 꿰어 찰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시선을 눈치 챈 장남- 엘키노 드 클란은 기다렸다는 듯이 생글거리며 허리를 굽혔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각하. 엘키노 드 클란이라 합니다.”

“흐음? 백작의 아들이오?”

“그렇습니다, 공작님. 이 녀석이 공작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우기는 바람에 이렇게 데리고 나왔습니다, 허허.”

“공작님의 위용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습니다. 비록 아직 기사의 작위는 받지 못했지만 한 사람의 검사로서, 검의 경지에 달하신 분을 뵙게 되어 정말 무한한 영광입니다.”

“흐음…”


엘키노는 자신이 공작의 마음에 들 것이라 확신했다. 무엇보다 그는 정식 아카데미의 수료까지 거친 검사였으니 말이다. 

비록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남작의 딸을 겁탈하려다 적발되어 작위가 취소되었다.) 작위를 받지는 못했지만, 엘키노는 자신의 실력이 대단한 것임을 한순간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 출세하는 건 시간문제지. 그동안 리오 녀석만 오냐오냐 하던 아버지도 땅을 치고 후회하실 걸? 이런 보석을 옆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셨으니 얼마나 미안하시겠어?’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공작은 그리 탐탁지 않은 얼굴로 엘키노 모습을 흩어보고 있었다. 명색이 기사라는 주제에 그 육체에서 수련한 느낌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런 몸으로 잘도 검사라고 우기는 군.’


검의 실력만큼이나 검사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그로서는, 있으나 마나한 실력주제에 검사 운운하는 그가 오히려 건방져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불쾌한 시선으로 백작의 큰아들을 노려보던 공작은 곧 새로운 사실을 떠올리곤 흥미로운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클란 백작가라고 하면, 이번 황실에서 주체한 백일장에서 최고득점을 얻은 청년의 가문이 아니오? 분명 이름이 리글레오 드 클란이라 들었던 것 같소만.”


‘에? 뭐야, 왜 갑자기 리오녀석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엘키노는 뜬금없이 동생인 리오의 화제가 나오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자신의 모습은 거들떠보지 않은 채, 동생만을 칭찬하는 공작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비인 백작의 입장으로선 누가 되었든 공작의 눈에 띄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화색이 되어 얼른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공작님. 부족한 제 둘째 아들놈이지요. 덕분에 이번 대공 전하의 대관식에 초대를 받게 되었으니, 정말 가문대대로의 영광입니다.”

“그랬군. 대공전하께서 꽤나 칭찬했던 걸로 기억되오. 상당히 훌륭한 청년이더군. 그런데 보이질 않은 걸 보니 지금 자리에 없는 건가?”

“아, 그, 그것이… 잠시 여행을 다녀오겠다며 짐을 꾸려 나가버렸지 뭡니까? 좀 더 많은 세상을 둘러보겠다나 뭐라나…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보기완 다르게 고집이 센 녀석이거든요. 아, 아마도 대공전하의 대관식 이전엔 돌아올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그것은 얼마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느닷없이 성문 앞에 나타나 사람들의 통행을 어렵게 만든 상급 몬스터를, 우연히 지나가던 용병단이 처치한 사건이 있었다. 

그 소문을 들은 백작은 자신을 대신해 큰 아들인 엘키노를 시켜 수고를 치하하고 오라고 일렀고, 혹시나 문제가 생길 것을 대비해 둘째인 리글레오를 불러 몰래 따라가 보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큰 아들은 여지없이 용병들과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고, 리오는 아버지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장엄히 등장! 무수한 사과 끝에 간신히 뜯어말렸다…는게 그날 벌어진 대충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 때 이후부터 리오의 행동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을 하는가 하면, 이전엔 뜸하던 외출이 부쩍 잦아지는 것이 아닌가!

설마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도 발견한건가 싶어, 한번은 그가 나 갈 때 몰래 사람을 딸려 보낸 적이 있었는데, 별 다른 특이한 점을 발견 할 수는 없었다. 외출 시마다 만나는 이는 어느 초라한 차림의 노인이 전부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일부러 만났다기 보단 우연히 마주치는 경우가 더욱 허다하다고 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리글레오는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생각을 정리할 계기가 필요하다며 짐을 꾸리더니, 그대로 여행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미처 말려볼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낭패로군. 공작이 불쾌해 하면 어쩌지?’


혹시라도 불호령이 떨어질까, 백작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떠듬떠듬 대답했다. 마지막에 덧붙인 ‘대관식 전에는 돌아올 것이다’라는 것도 당장 분노할 그를 달래기 위한 변명일 뿐. 리오가 정말로 그럴 것이란 기대는 처음부터 가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대관식이 며칠인지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그러나 예상과 달리, 공작은 그것을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폼이, 더욱 더 마음에 들었다는 얼굴이다.


“그 나이 때의 청년이라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기 마련이지. 한번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군. 훌륭한 아들을 두어서 든든하시겠소, 백작. 그에게 거는 대공전하의 기대가 크오.”

“여, 영광입니다. 공작각하.”


크게 경을 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일이 의외로 별 탈 없이 넘어가자 백작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을 계기로 그가 둘째아들을 더욱 편애하게 되었다는 건 당연지사. 

이래저래 소외당한 장남 엘키노만이 분한 얼굴로 입술을 악물고 있을 뿐이었다.

 

 

***

 


여행을 핑계 삼아 집을 떠난 리오가 향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카터스 제국이었다. 이전에 벌어진 소동이 인연이 되어, 카터스 제국의 수석 마법사- 세리엄 폰 알지오의 일행으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저 더 넓은 세상을 체험하고 좀 더 많은 학식을 겸비하고 싶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그의 속사정에 대해서는 누구도 짐작하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별 탈 없이 진행되던 여행길에 난데없는 제동이 걸리고 말았으니- 그것은 카터스 제국 황실로부터 날아온 한편의 통신구가 원인이었다.


“아아니! 지금 뭐라고 그랬나? 황태자 전하가 뭘 어쨌다고?”


마냥 태평하고 능청맞게 굴 것 같았던 세리엄은 이 한편의 통신구로 인해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옆에 있던 그의 수행원-필립이란 남자도 놀라 굳어있기는 마찬가지. 리오는 이 흔치 않은 사태에 대해 심각히 고민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수정구에 나타난 사람은 단정하고 밋밋한 옷차림으로 미루어 보건데 카터스 제국의 시종장인 듯 보였다. 안색이 잔뜩 어두워진 그의 입에서는 방금 세리엄을 경악시킨 단어가 다시 나열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가 ‘또’ 황궁을 탈출하셨다는 말입니다, 세리엄님. 이번엔 채 한달도 버티지 못하셨습니다.>

“그건 나도 들어서 알아!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 다음 말이네! 전하가 어디로 가셨다고? 아무래도 내 귀가 잘못 된 것 같아서 그러는데 다시 한번 말해주겠나?”


흥분하는 그의 목소리에 수정구에 나타난 남자의 얼굴이 한 층 더 어두워졌다. 그는 한숨을 쉬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세리엄님의 귀가 잘 못 되신 게 아닙니다. 제가 분명히 그렇게 전달했으니까요. 황태자님은 바로 며칠 전 ‘알폰프 제국으로 놀러가겠다’라는 쪽지를 남기시고 황궁을 탈출 하셨습니다.>

“허억! 신이시여~맙소사!!”

“말세로군.”


경악하는 세리엄, 그리고 이어지는 필립의 세상을 다 산 듯한 목소리였다. 그 격한 반응을 본 리오는 조심스럽게 알폰프 제국과 카터스 제국과의 관계에 대해 떠올렸다가, 그대로 헛바람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그 두 제국은 벌써 몇 백 년 째 이어진 철천지원수 지간 이었던 것이다.

원인은 한 여자를 두고 다툰 두 초대 황제의 비극적인 사랑(?)이었다는데, 그것이 발전하고 발전해서 영토싸움으로 까지 이어졌고, 종래에는 만나기만 하면 서로 호시탐탐 목을 벨 기회를 노리는 사이로까지 이어진 참이었다.


‘그런 극악한 장소에 스스로 걸어 들어갔단 말인가?’


카터스 제국의 황태자가 대책 없는 성격이라는 것은 그도 어느 정도 소문을 통해 알고 있던 참이었지만, 이 정도까지라고는 결코 예상치 못했다. 이건 완전히 무대포 수준이 아닌가!

황당해 하는 리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리엄은 애꿎은 수정구를 향해 호통을 치고 있었다.


“도대체 궁정 안에 사람이 몇 명인데 그것 하나 말리지 못했단 말인가! 하루 이틀 가출하시는 것도 아니고, 이젠 척하면 척이어야 할 거 아니야! 도대체가 도망칠 낌새도 하나 못 차린단 말인가? 그러고도 월급으로 산 음식이 입에 들어가나? 앙?”


그러나 억울한 건 수정구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질 수없다는 표정으로 반박론을 펼쳐보였다.


<황태자전하의 연기실력이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 하시는데 저희가 뭘 어쩔 수 있단 말입니까? 말씀하신대로 하루 이틀 가출하시는 것도 아닌데, 그분이 바보라고 순순히 티를 내시겠냐고요! 이것도 애시당초 세리엄님이 ‘남자라면 모름지기 여행을!’ 이라고 주장하신 덕분이 아닙니까? 저희도 지금 미치겠단 말입니다!>

“뭬야? 그래서 지금 그게 내 탓이라는 건가?”

<그럼 아닙니까? 지금 황제폐하의 진노가 극에 달하셨다고요! 전하의 수호기사들은 물론, 시녀들과 저까지 당장 내일이라도 처형대에 오르게 생겼습니다! 이번엔 아주 작정을 하셨는지 궁에 있는 물품이란 물품은 죄다 챙겨가셨단 말입니다! 이걸 어쩔 겁니까? 예?>

“아니, 지금 그걸 나한테 따져서 어쩌자는 건가? 앙?”

<애초에 시작을 하셨으면 책임을 지시란 말입니다! 7서클 마스터의 마법은 놔두셨다가 스프 만들어 드실 겁니까? 당장 알폰프 제국으로 뛰어가셔서 황태자 전하를 끌고 오시란 말이예욧!!>

“뭐가 어쩌고 어째?”


세리엄은 분노했다. 황제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 황실의 수석 마법사였다. 아무리 자신이 실수한 게 사실이나 하나, 한낮 시종장에게 막말을 들을 정도로 낮은 신분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다음으로 이어지는 시종장의 말에 그는 화내려던 것도 잊고 그대로 멍하니 굳어져버릴 수밖에 없었으니…


<…라는 게 지금까지 이어진 황제 폐하의 전언이셨습니다. 참고로 찾기 전까진 고국에 발도 들이밀지 말라 십니다. 전 분명히 전해 드렸습니다? 그러니 알아서 잘 다녀오십시오. 건투를 빌어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뭐…뭐어엇? 자, 잠깐! 이보게!”

“헉…”


눈 뜬 채 코가 베여도 지금보다 황당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통신이 꺼진지 한참 후에서야 화들짝 정신이 든 세리엄이 목 놓아 소리쳤지만, 이미 잠잠해져버린 수정구에서 대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의 옆에 있던 필립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일찌감치 누울 땅을 파고 있는 상태였다. 알폰프 제국이라니! 지금 우리더러 그곳에 가서 황태자를 잡아 오라는 것인가? 그것도 황제폐하의 명령으로?

일단 한번 내려진 황제의 어명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만 하는 게 카터스 제국내의 황법이었다. 그것은 제 아무리 수석마법사라고 해도 마찬가지.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만 것이었다. 

이제 그들은 황태자를 찾기 전까진 고국에 발조차 들여놓을 수 없었다. 들여 놓는 순간 황법을 어긴 반역죄가 성립되어 근위대의 추격을 받을게 뻔한 것이다. 대체 그 넓은 알폰프 제국 어디에 가서 황태자를 찾는단 말인가!

쩍 하니 할 말을 잃어버린 두 남자를 보며 리오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신은 아무래도 그의 여행길을 길게 잡으실 모양이었다.


“이거 어째 예정보다 상당히 여정이 길어지겠군요.”


움찔. 조금은 가라앉은 듯한 그의 목소리에 세리엄과 필립의 어깨가 자연스럽게 흔들거렸다. 다음으로 이어질 그의 말을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테면 현실도피랄까?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리오의 얼굴엔 어느새 해맑은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럼 가실까요? 알폰프 제국으로…”


가차 없는 확인 사살이 통보된 순간이었다.

 

 - 사기 치는 엘프 - 


후작의 성을 떠난 후 며칠 뒤, 우리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해 당황해야만 했다. 

클모에서 알폰프 제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두 제국 사이에 흐르는 카리프 해(海)를 건너는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가 탈 배의 선장이란 사람이 말이란 동물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황당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어찌나 고집이 황소 같은지, 추가비용을 지급하겠다고 해도 전혀 요지부동이었다.


“아, 글쎄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절대 말들을 배에 실을 일은 없을 거다! 얼마의 돈을 주든 마찬가지야! 그렇게 말을 타고 싶으면 육로를 타고 가면 될게 아닌가!”

“말도 안돼. 배로 가도 한달이 넘는 거리를 어떻게 육로로 가요? 산맥이라도 넘지 않는 이상 일부러 빙빙 돌아가야 하잖아요. 가는 데만 꼬박 1년을 잡아먹을 거라고요.”

“그게 싫으면 말들을 처분 하던가! 아니면 다음 배를 기다려. 헹, 그래봤자 아무도 태워주지 않겠지만.”

“엥? 왜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묻는 나에게 선장은 선심 쓰는 듯한 태도로 이곳 카리프 해(海)에만 있는 징크스를 알려주었다. 배에 말을 실고 가면 그 날은 틀림없이 바다괴물이 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다 괴물이요?”

“그래. 몸은 뱀같이 생겼는데, 그 크기가 200미터를 훌쩍 넘는 다고. 이빨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이런 배의 갑판 따위는 한입에 산산조각을 낸다니까? 머리에 달린 촉수로 사정없이 공격을 해오는데, 일단 한번 놈에게 걸리면 그날은 죽었다고 복창하는 수밖에 없어. 그래서 우리는 놈을 죽음의 사자라고 부르지.”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 두려움 가득한 표정으로 몸을 부르르 떠는 선장에게 나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왜 말을 실을 때만 나타나는 데요?”

“낸들 아나? 아마도 놈이 말고기를 좋아하는 모양이지. 냄새는 귀신같이 잘 맡는 녀석이거든. 이 징크스를 어기고 항해를 나섰다가 죽은 인간이 어디 한둘 인 줄 알아? 아무튼 말은 절대 안 돼. 이 배를 타고 떠나고 싶으면 알아서 처리하고 오라고.”

“……” 


결국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알폰프 제국에 도착해서 다시 구입하기로 결정을 내리곤, 그때까지 타고 있던 말들을 근처에 있던 마시장에 가져가 처분하는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멀쩡한 지름길을 놔두고 육로를 통해 빙빙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말을 팔고 돌아오는 길 내내 라피스는 연신 투덜거림을 멈추지 못했다.


“쳇, 마음에 안 들어. 그런 시덥잖은 징크스인지 뭔지 때문에 이 귀찮은 작업을 해야 하다니. 인간들은 왜 그렇게 겁이 많은지 모르겠다니까?”

“어쩔 수 없는 거 아니야? 바다 한 가운데잖아. 배가 부서지면 꼼짝없이 물에 빠져 죽는 건데, 조금의 위험이라도 방지하는 게 낫지.”

“그래도 겨우 돌연변이 뱀 하나 따위에 설설기는 꼴이라니. 인간은 그 빠른 번식력 빼고는 도대체가 봐줄만한 게 없다니까?”


그러자 ‘빠른 번식력을 빼곤 봐줄만한 게 없는 두 인간’- 이사나와 카이씨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지더니, 곧 반박하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호오, 그럼 라피스님은 왜 그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 폴리모프하신 겁니까? 이왕이면 엘프라던가, 드워프로 하시질 않고.”

“맞아요. 게다가 지금 이 대륙에서 가장 많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건 바로 인간이라고요.”


그러나 라피스가 누구인가! 녀석은 코웃음도 치지 않은 채 차례대로 두 사람의 입을 다물게 만들어 버렸다.


“흥, 누군 인간으로 폴리모프하고 싶었는지 알아? 눈에 띄지 않으려면 대륙에서 가장 썩어 넘쳐나는 종족의 모습으로 행동 하는 게 편하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 그리고 차지하고 있는 땅의 숫자가 많다고 해봤자…그것도 역시 인간의 숫자가 많았기 때문이잖아? 정말이지 생각하면 할수록 숫자 외에는 내세울게 없는 종족이로군.”

“쳇…”


결국 승리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라피스에게 돌아갔다. 괜히 따지고 들었다가 이번에야 말로 완벽하게 ‘숫자만 넘치는 종족’으로 매도당한 두 사람은, 분한 표정으로 비통한 한숨만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때 인간이었던 몸으로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지!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을 대신하여 복수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는 드래곤은 힘 빼곤 별 볼일 없는 종족 아닌가?”

“뭣시라? 드래곤이 어쨌다고?”

“사실이 그렇잖아. 아무리 잘났다곤 해도 결국 생김새는 도마뱀의 확장판 밖에 더 되냐고. 덩치는 쓸데없이 커가지고 집 지을 때 땅이란 땅은 잔뜩 잡아먹고, 인내심 부족에, 이해심 결여. 배려심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도 없음. 유희를 핑계로 여러 가지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되어 이중, 삼중, 더 나아가 다중인격을 연기하고 다님. 한마디로 심각한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성격파탄자다 이 말이지.”

“뿌득~! 너 지금 말 다했냐?”


분노로 이글거리는 라피스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려퍼졌다. 그런데 어쩌나? 아직 내 얘기는 다 끝나지 않은 것을.


“나로선 숫자 외에는 자랑할게 없는 인간이, 성격파탄자인 드래곤 보단 훨씬 낫다고 생각해. 그래도 어쩌겠냐? 이왕 태어난 건데 살아야지. 부디 꿋꿋하게 살아남아라, 라피스. 본체는 별 볼일 없어도 일단 폴리모프한 네 모습은 봐줄만 하니까 말이야.”

“크아악! 더 이상 못 참아!”

“호오? 못 참으면 어쩔 건데? 계약이라도 해제하자고?”

“너, 너, 너어어어어!”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나를 가리키는 라피스의 모습은 완벽하게 충격 먹은 인간의 형상 바로 그 자체였다. 그럼 내가 언제까지고 당하면서 살 줄 알았냐? 이래봬도 나 역시 한때 한 성질 하던 인간이었단 말이다.

어쩔테냐! 하고 덩달아 쏘아보는 나를 기가 막히다는 듯이 쳐다 본 녀석은, 곧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한 손을 휘익 들어올렸다. 헉! 설마 저대로 때리려는 셈?


“에?”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내 몸 어느 곳 하나 커다란 충격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이 어찌된 일인 고 하니 …라피스 녀석은 이번에도 당당하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끝까지 열 받은 표정을 한 주제에 ‘넌 최고다’의 포즈라니! 나는 이번에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쿠쿡, 라피스 너…킥킥킥.”

“뭐야? 웃어? 감히 나를 모욕한 주제에 태평하게 웃~~어? 그나마 너라서 이 정도에 끝내주는지도 모르고!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넌 벌써 내 손에 죽었어! 알아?”

“아하하, 아, 알겠는데. 이왕이면 다른 걸로 바꿔라. 너 그게 무슨 뜻인지나 알고 사용하는 거야? 쿡쿡.”

“뭐긴 뭐야! 어쨌든 욕하는 거잖아!”

“땡! 틀렸어.”

“뭐가 어쩌고 어째?”


화난 얼굴로 눈을 부라리는 라피스 녀석이 그날따라 귀여워 보인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뜻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인 이사나와 카이씨도 저렇듯 재밌다는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너무 심하게 놀렸나 싶어 나는 순순히 잘못된 지식을 고쳐주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가 더욱 수치스러워 할 거란 계산을 아주 배제한건 아니었다.


“그건 내가 살았던 세상에서 ‘너 굉장하다, 최고야’라고 할 때 보여주는 표시야.”

“…뭐?”

“그러니까 욕 같은 게 아니라고. 오히려 칭찬하는 거란 소리지. 설마 전혀 눈치 못 챘어? 아무렴 내가 날 욕하는걸 보고도 웃었겠냐?”

“…….”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라피스가 길길이 날뛰는 일 뿐이었다. 어쨌든 몇 번이나 본의 아니게 이 몸을 즐겁게 해 주었으니(?) 자존심 강한 녀석으로서 얼마나 화가 날 것인가! 

어쩌면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맞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몸을 살짝 긴장시키고 있었다. 누가 순순히 맞아줄 줄 알고?

그러나 이런 내 예상은 깨끗하게 빗나가 버리고 말았다. 녀석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흐뭇한 표정을 짓더니, 얼굴 가득 의미심장한 미소를 피워 올렸던 것이다.


“호오, 그럼 그때 나를 칭찬했었단 말이지?”

“뭐?”

“그때 후작 녀석하고 다투고 있었을 때 말이다. 네가 나한테 엄지손가락 들어올렸잖아. 그거 칭찬한거 맞는 거지? ‘네가 최고다’라고?”

“그, 그거야 그렇지만?”

“후후후, 그랬단 말이지.”


미소를 잔뜩 머금은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는 녀석은 누가 보기에도 확실히 기분이 좋아보였다. 설마 그 때 받은 칭찬하나로 저렇게 즐거워하는 건가? 그 뒤로 이어진 무수한 쪽팔림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헤에, 라피스 녀석, 생각보다 단순한 놈이었군.’


그랬다. 아무리 덩치가 커도 녀석은 드래곤의 나이로 3천 살. 그건 인간으로 치면 이제 18살 먹은 철부지와 다름이 없는 숫자였다. 아무리 성인식을 치뤘으면 뭘 하겠는가? 칭찬하나로 저렇게 헤벌쭉거리는 단순한 놈이었던 것을. 

어쩐지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그동안 내가 널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라피스.”

“아아, 저도 동감입니다, 엘님.”

“나도 동감…”


피식 웃으며 중얼거린 내 말에, 마찬가지로 어이없다는 듯한 카이씨와 이사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말이지 세상은 오래살고 볼 일이었다.

 

 

 

배에 오르기 전 우리는 하나의 요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하나같이 출항을 코앞으로 두고 있는 선장들이 한 자리에 모여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얼굴이나 키를 보건데, 채 15살도 넘어 보이지 않는 소년이었다.

그 들 중에는 우리가 탈 배의 선장도 있었으므로, 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떠들어 대고 있는 소년에게 향했다가 그대로 휘둥그레 질 수밖에 없었다. 소년의 귀가 일반 사람처럼 둥글지 않고 마치 장식이라도 붙인 것처럼 뾰족했기 때문이다. 

이미 옆에 있는 동료들 덕분에 눈이 높아질 데로 높아진 내게 있어서는 그럭저럭 봐줄만한 수준이었지만, 보통의 인간 아이치곤 얼굴 역시 지나치게 아름다운 편임은 확실했다. 나는 그것으로 저 소년이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확신 할 수 있었다.


“헤에. 혹시 저게 말로만 듣던 엘프라던가?”

“엘프라던가, 가 아니라 엘프다. 피부색이나 머리카락으로 보건데 노말엘프가 확실하군. 숲의 종족이 이런 항구엔 웬일이지?”


신기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내 말을 들었는지, 라피스의 추가 설명이 이어졌다. 엘프를 보는 녀석의 표정은 나와는 다른 의미로 놀라운 빛을 띄고 있었다.


“노말엘프? 그게 뭐야? 엘프에도 종류가 있어?”

“아아. 세 종류로 나뉘어지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반적인 엘프들은 저 녀석 같이 흰 피부에 금발 머리를 가지고 있는 노말 엘프를 뜻 해. 그 외에도 그리 흔하진 않지만 다크 엘프와 블루 엘프가 있지.” 

“헤에, 생김새가 다른 거야?”


호기심 어린 내 표정에 라피스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선 이나사와 카이씨 역시 궁금한 얼굴로 이어질 설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블루 엘프는 대체로 푸른색 피부에 은발머리가 많아. 노말 엘프보다 약간 날카롭게 생긴 편이지. 그리고 다크 엘프는 짐작했다시피 검은색 피부에 검은 머리카락. 대체로 다른 녀석들이 아름다운 편이라면, 다크 엘프는 우락부락하달까? 터프한 놈들이 많지.”

“아아, 저도 이전에 여행 다닐 때 우연히 본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엘프의 상식을 깨던 자들이더군요.”

“엘프의 상식?”


조금은 질린 듯한 얼굴의 카이씨의 말에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애초에 그들이 어떤 상식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내게 있어서, 그의 말은 좀처럼 이해가 가질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라피스는 군말하지 않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인간들은 그저 엘프라는 말만 듣고 몽땅 한 성향으로 보는 경항이 있지. 하지만 각 엘프들은 말이 좋아 엘프지, 사실은 종류마다 성격과 생활습관이 천차만별이야. 보통 숲의 종족이라고 표현하는 엘프는 노말 엘프, 그리고 블루 엘프는 바닷가 근처에 터전을 이루지. 이유는 간단해. 그들이 어패류를 좋아하기 때문이야.”

“흠, 그럼 노말 엘프가 숲의 종족인건 과일이나 채소를 좋아하기 때문? 그럼 다크 엘프는?”

“다크 엘프는 잡식성이랄까? 살기 편하면 아무 곳에나 자리를 잡기 때문에 딱히 자신들끼리 사는 마을이란 개념이 없어. 아마 인간들과 가장 교류가 흔한 게 녀석들이 아닐까 싶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일반적인 엘프의 기준을 노말 엘프로 정하게 된 계기는 간단했다. 세 종류의 엘프들 중에서 그들이 가장 숫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크 엘프의 경우는 평생가도 한 번 볼까 말까한 희소성을 자랑하는 수치라고 했으며(거의 드래곤 다음으로) 그나마도 인간들과의 혼혈이 많아 순수 오리지날을 보기는 더욱 어렵다고 했다. 

또한 블루 엘프 같은 경우는 숫자도 많은 편이 아니지만, 타 종족에 대한 경계심이 강하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인간 세상에 발을 디밀지 않는다는 게 더욱 큰 이유랄까?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나는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엘프나 사람이나 유명해지려면 자기홍보가 중요한거군.”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냐? 아무튼 순하기로 따지면 노말 엘프가 가장 온화하지. 블루 엘프들은 차가운 성격이고, 다크 엘프들은 화통해. 인간세상의 개념으로 치면 아마 거의 용병수준일거다.”

“헤에…그럼 저 녀석은 노말 엘프의 탈을 뒤집어 쓴 다크 엘프라는 소리?”

“뭐? 그게 무슨…!!”


황당한 표정으로 내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던 라피스는 그대로 소리 없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신나게 선장들과 떠들고 있던 엘프 녀석이 일그러진 얼굴로 어떤 한 사람의 멱살을 쥐어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차마 듣기 민망한 수많은 육두문자들과 함께.


“야 이 XX 같은 XX 자식아! 뭐가 어째? 누굴 감히 사기꾼으로 매도하는 거야! 내가 어떻게 사기꾼인데? 네 눈엔 내가 엘프로 안 보이고 인간으로 보이냐? 어? 이 XXX해서 XX하고 XXX 해 먹을 놈아! 너 몇 살 X먹었어? 새파랗게 어린 자식이 감히 날더러 이놈저놈 했다 이거지!”


내가 보기엔 엘프의 나이가 훨씬 더 어려 보였지만, 일단 그들이 인간보다 오래 산다고 하니 겉보기만으로 따질 일이 아니었다. 꽤나 예쁘장한 얼굴임에도 인상을 구기니까 제법 험악한 모습이다. 

나는 ‘이런 말도 안돼는-!!’을 외치고 있는 한 도마뱀과 두 사람(카이씨와 이사나)를 무시하며 흥미로운 표정으로 상황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히이익! 난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고! 너 지난번에 나한테 뭐라고 했어? 폭풍이 분다고 해서 잔뜩 겁주더니, 결국 그날은 화창했단 말이다.”

“시끄럿! 그게 다 두려워하는 네 마음을 헤아린 정령왕의 섭리셨단 말이다! 내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말해줘야 하냐?”

“헹! 그럼 지난번 폭풍 때는 왜 그냥 잠자코 있었던 건데? 그 놈의 정령왕은 시도 때도 없이 기분이 바뀌나 보지?”

“뭐? 너 지금 내 앞에서 정령왕을 모욕했다 이거지! 이 XXXX! 죽여 버린다!”

“……”

대체 뭔 일이기에 멀쩡한 정령왕을 들먹이고 있는 건지. 

황당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는 날 보며 라피스는 연신 피식거리고 웃었다. 노말 엘프가 욕을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혼란스러워 할 땐 언제고 그새 적응이 된 모양이다. 


“엘프들은 정령들과의 친화력이 강하거든. 그래서 정령왕에 대한 존경심이 어마어마하지. 무슨 일인 진 몰라도 그걸 건드렸으니, 아마 저 인간 무사하지 못할 거다. 평소엔 온화한 녀석들이지만 열 받으면 사정 봐 주지 않으니까.”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나는 엘프 소년이 불러낸 커다란 물의 화살을 볼 수 있었다. 언뜻 봐서 몰랐는데, 녀석은 자그마치 시큐엘의 계약자였던 것이다. 덕분에 그 장소에 있던 사람들은 기겁하며 도망치기 시작했고, 갑판은 허겁지겁 배에 오르는 인파로 인해 무척이나 부산스러워졌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했냐고? 뭐 별 수 있나, 그냥 배에 오르는 수밖에. 어차피 시큐엘의 공격이 나한테 통할 리는 만무했지만, 남들 다 도망치는 상황에서 멍하니 구경하는 것도 내키지 않아 순순히 대세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서자니 엘프 녀석이 일으킬 피해가 걱정되어, 나는 다른 쪽에 있던 자연계의 시큐엘에게 그의 공격을 무마시키도록 명령했다. 엘프가 욕먹는 건 상관없지만, 애꿎은 우리(?) 시큐엘까지 공범으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콰아악- 파지직-촤아악!!

기특하게도 녀석은 엘프가 소환한 또 다른 시큐엘이 막 물 화살을 쏘아 보내려는 순간에 멋지게 끼어들어, 그것을 공중으로 분해 시키는 데 성공했다. 

분수처럼 사방으로 터지는 물살이 그 자리를 피해 도망치고 있던 사람들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지만 대부분 무슨 일이 터졌는지도 눈치 채지 못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통 인간들에 해당되는 사항일 뿐, 공격을 방해받은 당사자인 시큐엘은 정확하게 내가 서있는 방향을 돌아보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달려들은 존재가 같은 물의 상급 정령(그것도 소환되지 않은)이란 것에 약간 놀란 듯 보였지만 적이란 생각엔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감히 누가…


그러나 으르렁거리던 것도 잠시. 나와 시선이 마주친 놈은 그대로 놀란 표정이 되어 몸을 뻣뻣하게 굳힐 수밖에 없었다. 방금까지 노려보던 자가 바로 자신들의 왕이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에, 엘퀴…


움찔거리면서 입을 달싹이는 것이 당장이라도 인사를 건넬듯해 나는 환한 표정으로 생긋 웃으며 나직히 한 마디 충고해 주었다.


-지금 나 아는 척 하면 죽는다.

-헉!


그때 마침 엘프의 성난 목소리가 이어진 탓에 시큐엘은 미처 대답할 타이밍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지금 날 방해한 놈 어떤 새끼야!!”

“엔딜! 이제 그만 하게. 아무리 녀석이 말실수를 했다지만 이런 공격을 할 것 까진 없지 않은가. 내가 대신 사과할 테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지금 어떤 자식이 시큐엘의 공격을 방해했단 말이야! 누구야? 어떤 놈이냐고!!”

“다들 도망치느라 정신없는 와중인데 무슨 소리야? 내가 보기엔 시큐엘이 실수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 미친-! 세상 어느 상급 정령이 공격하는 걸 실수해? 아악! 아까운 내 마나만 소모됐잖아! 누군지 잡히기만 해봐라! 아, 그래! 시큐엘, 네가 대답해봐. 공격을 방해한거 누구였어? 너라면 어디서 그랬는지 알 수 있을 거 아니야!”


그러나 엘프 소년은 그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이미 뼛속까지 나와 공범인 시큐엘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다. 


-난 모르는 일이다.

“뭐야? 네가 모르면 대체 누가 안다는 거야? 너 설마 알면서도 침묵하는 거 아니지?”

-글쎄 모른다면 모르는 거다. 대체 이런 추궁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뭐지?

“뭐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쉑아!!”


삐딱한 시큐엘의 반응에 엘프는 이제까지 이어진 화려한 입담을 죄다 그를 향해 쏟아 붓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끝까지 모르는 척 시침을 떼자, 악악거리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험한 입만큼이나 성격 역시 차분한 녀석은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모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옆에 있던 배의 선장들이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고 슬슬 달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이, 어이, 엔딜. 정령에게 화낸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 이제 그만 기분 풀게. 내 이번 항해를 마치면 거하게 한턱 쏘겠네.”

“그래, 자네가 이해하게. 뭔가 실수가 있었던 모양인데 그걸 그렇게 다그친다고 해결되겠어? 출발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 그만 배에 올라야지? 자네가 없으면 물의 정령이 함께 해주시질 않잖나.”

“쳇-”


하나같이 아부성이 짙은 말들에 욕쟁이 엘프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리곤 곧 건방진 태도로 시큐엘을 향해 돌아갈 것을 명령했는데, 그게 어찌나 열 받던지 나는 당장이라도 녀석의 머리위에 물벼락을 퍼붓고 싶은 것을 참느라 죽을 뻔 했다. 

지금까지 정령이라고 하면 벌벌거리는 사람밖에 못 봐서 그런지, 저렇게 하인부리 듯 하는 모습을 보니 도무지 참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설마 다른 사람들도 모두 저런 식인 걸까? 그런 내 불안한 마음을 읽었는지 라피스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 녀석이 특이한 거야. 물의 상급 정령한테 함부로 하는 건 인간은 물론 하이 엘프(엘프 중에서도 귀족에 속하는 무리)중에서도 없다고. 아니, 그 이전에 엘프들은 정령을 자신의 친구로 여기기 때문에 명령이란 것 자체를 하지 않아. 한 마디로 저 녀석은 돌연변이인 셈이지.”

“뿌득, 감히 돌연변이 주제에~~”

“아아. 알았으니까 그만 화 풀고 우리도 이제 배에 오르자고. 이러다 놓치겠어. 설마 다음 배를 기다릴 셈은 아니겠지?”

“……”


대충 알아본 바에 의하면 다음 배는 3일 후에나 표를 살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순순히 일행들의 손에 이끌려 배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역시 첫인상이란 만만한 것이 아닌지라, 내 머리 속에서는 어느새 엘프 종족 전체를 싸가지 없는 무리로 매도하고 있었다. 

때문에 배에 오르자마자 만난, 한 무리의 노말 엘프들을 발견했을 땐,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그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도 무엇도 아닌 단지 짜증, 그 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배가 출발한 뒤, 그 욕쟁이 엘프를 우연히 다시 만나는 순간까지 계속 되었다.

 

 

 


항해는 무척 순조로웠다. 바람도 선선하고 하늘도 맑았기 때문에 갑판은 바다를 구경나온 사람들로 여기저기 가득한 상태였다. 대부분 바다여행이 처음인 듯, 얼굴가득 신기한 기색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잘난 척 하기 좋아하는 도마뱀, 라피스의 말에 의하면 저런 것도 하루 이틀이지, 3일만 지나도 지겨워서 경기를 일으키게 될 거라고 했다. 하루 종일 물만 보게 되면 당연히 질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땅을 밟고 살아야 하는 종족이라서 어쩔 수 없다나? 

녀석의 한심스럽다는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이사나는 분한 표정을 지으며 곧바로 반박하는 말을 내뱉었다.


“저렇게 멋진 바다를 보며 질릴 리가 없잖습니까!”

“하아~ 글쎄, 그게 아니라니까? 인내심 강한 이 몸조차도 길어봤자 일주일이라고. 바다는 블루 드래곤처럼 아예 물을 끼고 사는 놈들이나, 여기 이 녀석처럼 물의 정령들에게나 좋은 곳이지, 일반적인 평범한 육체를 가진 종족은 견디기 힘든 장소라고.”

“그건 라피스님의 생각뿐이겠지요. 본인이 오래 버티지 못하니 다른 사람도 그럴 거라고 짐작하시는 건 아니에요? 두고 보세요! 제가 알폰프 제국에 도착할 때까지 버티나 안 버티나!”

“호오? 자신만만한데?”

“그럼요! 인간들을 우습게보지 마시라니까요!”


…그러나 녀석은 그렇게 당당하게 외치고 난 정확히 한 시간 뒤부터 지독한 배 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한달은커녕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바다의 위력에 K.O패당하고 만 것이다! 

결국 하루 종일 비실거리며 선실에서 끙끙거리는 이사나를 보다 못한 카이씨가 자청해서 간호하는 역을 맡았고(멀미에는 신성력도 통하지 않는다.) 그것을 보며 연신 쌤통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던 라피스 녀석은 좀 버티는가 싶더니, 곧 따분하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배가 항해를 시작한지 3시간이 넘어가는 현재- 일행 중에서 갑판에 나와 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나 혼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래가지고 한달을 어찌 버티려는 지…쯧쯧.”


태어나서 처음으로 배를 타본 다는 이사나야 그렇다 쳐도, 라피스나 카이씨까지 덩달아 불편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혼자서 들뜬 기분이 된 나만 이상한 놈이 된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나는 지겹긴 커녕 오히려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반가움만 가득했으니 말이다. 

이건 설마 내가 물의 정령왕이라서 그런 걸까? 사실 전생의 ‘강지훈’이던 시절의 나는 그리 바다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뭐랄까, 물만 보면 이상하게 기운이 없어지고 몸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는 느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것이 인간의 육체가 정령왕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폭주하기 직전으로 몰아치던 상태인 것 같다. 평소엔 멀쩡하다가도 강이나 바다 같이 방대한 양의 물을 보면 그런 느낌이 강했으니 아마 틀림없을 것이다.


‘헤에. 그때부터 이미 내 몸은 돌아갈 곳을 찾고 있었단 건가?’


새삼 신기한 기분에 나는 천천히 내 몸을 흩어보았다. 어쩐지 내 나름대로 큰일을 해낸 기분이랄까? 이럴 바에는 차라리 좀 더 일찍 죽었어도 괜찮았을 거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아무래도 나는 지금 이 세상이 너무 마음에 들어버린 것 같다.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마음껏 바닷바람을 만끽하는 나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딱히 시비 거는 일은 없었기에 그냥 무시했다. 일행들 없이 나 혼자 있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묘한 해방감마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는 곧 난데없이 끼어든 어느 불청객의 침범으로 마음껏 즐기던 자유시간을 포기하고 말았으니…


“계집애가 이런데서 혼자 뭘 하는 거냐? 뱃사람들이 얼마나 험한지 알아? 구경은 일행들이랑 같이 하고 지금은 그냥 들어가 선실에나 처박혀 있지 그래?”

“뭐?”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본 나는 옆에 다가온 이를 확인하자마자 그대로 얼굴이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배를 타기 직전에 봤던 입이 험한 엘프! 시큐엘의 적인 그 녀석이 껄렁껄렁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고 있었던 것이다. 내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너- 너!!!”

“어쭈? 언제 봤다고 초면부터 말을 까냐? 이 몸의 성함은 엔딜이다. 보는 엘프 기분 나쁘니까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짓은 좀 피해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좀 한 성질해서 말이지, 대접이 시원찮으면 폭주하는 경향이 있걸랑?”

‘그러는 너는 초면에 반말이 아니냐, 이놈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에서 나는 할 말을 잃은채 입만 뻐끔뻐끔거렸다. 설마 이 극악한 놈을 다시 만나게 될 거란 생각을 못했던 탓에 전혀 대비책을 준비해 두지 않았던 것이다. 

따지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이 많았거늘, 막상 눈앞에 두고 나니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막막해 지기 시작했다. 크아악! 그냥 날려버릴까?

그런 나를 보며 겁이라도 먹었다고 생각한건지, 욕쟁이 엘프는 씨익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마치 달래기라도 하는 듯이.


“뭘 그런 거에 쫄고 그러냐? 걱정 마셔. 아무리 나라도 계집애한테까지 함부로 하지 않으니까.”

“뭐? 누가 계집애라는-!”

“일단 충고하는데 말이지~ 이 배에는 인간의 귀족들도 많이 타는 걸로 알거던? 그러니까 조심해라. 오랜 항해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귀족 놈들은 가끔 돌아버리는 모양이니까. 너 정도 외모면 여기저기서 찝쩍거리는 놈들이 많을 거야, 아마. 킥킥.”

“…하아?”


청순한 외모에 단정하게 생긴 분위기로 내뱉는 말치곤 하나같이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것뿐이다. 대체 어디까지 타락하면 엘프가 이 지경이 될 수가 있다는 거냐?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지, 모르는지. 엘프는 이제 한 술 더 떠서 중요한 정보랍시고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중요한 정보라는 것이…


“태풍이 분다고? 그것도 이번 항해 중에?”


…였던 것이다! 놀란 표정을 감추질 못하는 나를 보며 엘프녀석은 선심 쓰듯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그래, 틀림없다고. 나는 바다의 날씨를 읽을 수 있거든. 틀림없이 태풍이 분다니까?”

“그런 말을 하는 근거는?”


지금은 이렇게 맑게만 보여도 바다의 날씨가 언제 어떻게 변하게 될 줄 모른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만약 내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그 말을 듣고도 크게 위화감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심하는 척 노려봐도 적어도 속으로는 은근히 불안하겠지. 바다 한 복판에서 난파당하면 십중팔구 무사를 기원하기 힘들테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 그 이름도 유명한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가 바로 이 몸이란 말씀! 아크아돈의 자연을 관장하는 내가 태풍이 불도록 가만히 놔둘 리는 없을 뿐더러, 애초부터 항해 중에 태풍을 일으킬 예정조차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런데 대체 이 엘프는 뭘 믿고 저리 당당하게 태풍이 분다는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나는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의 근거 없는 자신감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의미심장어린 미소를 지은 녀석이 자신의 옆에 시큐엘을 불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녀석은 바로 몇 시간 전에 엘프에게 하인 취급당했던 바로 그 비운의 시큐엘이었다. 제법 당당한 포즈로 나타나는 모습에 할말을 잃은 나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소리쳤다.


“무, 무슨!”

“어때? 물의 상급 정령인 시큐엘이야. 이래도 날 못 믿겠어?”

“아니, 그게 아니라…”


확실히 시큐엘이라면 바다에 태풍이 일어나는지 안 일어나는지 정도는 예측할 수 있다. 일단 태풍이란 게 바로 시큐엘과 바람의 상급 정령인 진들이 일으키는 합동작품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언제 태풍을 불게 한댔더냐, 시큐엘? 넌 설마 네 주인이 탄 배를 전복시킬 생각이냐?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큐엘을 바라보자 녀석은 차마 시선을 마주치기가 겁났는지 고개를 은근슬쩍 돌렸다. 이 자식! 바른대로 불지 못해?


“아아. 그렇게 노려봐도 시큐엘인거 틀림없으니까 괜한 기운 빼지 말라고. 이래봬도 나는 엘프 중에서 꽤나 잘난 축에 속해서 말이야~ 물의 상급 계약자란 말씀!”

“…흐응 일단 네 말은 알겠는데 말이야. 그래서 뭘 어떻게 하라는 거지? 태풍이 분다 해도 도망칠 곳이 없는데 알아 봤자 소용없잖아? 오히려 모르니만 못한 정보라는 생각은 안 들어?”

“쯧쯧,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인간이로군? 내가 설마 그 정도 대비도 못했을 거라 생각했냐?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너 공부 좀 해야겠다. 그래가지고 어디 시집이나 가겠냐?”

“그 따위 노파심 전~혀 고맙지 않으니 그 대비라는 거나 말해 보시지?”

“쳇, 성깔은. 하여튼 엘프나 인간이나 얼굴 값하는 것들이 있다니까? 자, 두고 보고만 있으라고.”


어디 얼마나 귀엽게 노는지 봐주마! 라는 심정으로 쳐다보고 있으려니 녀석은 주섬주섬 자신의 품안에 갈무리 해둔 하나의 비단뭉치를 꺼내보였다. 그리곤 그 안에서 웬 결 좋은 종이 한 장을 내미는 것이 아니겠는가? 

의아한 심정으로 받아 보자니 복잡한 그림들과 도형들이 즐비해 있는 것이, 어째 부적 같은 느낌이었다. 설마 이걸 몸에 지니고 있으면 태풍이 비껴간다느니 하는 황당한 말을 할 생각이냐?


“설마, 그럴리가. 네 손에 들려진 건 다름 아닌 텔레포트 스크롤이란 말씀! 배가 출발하던 항구로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도록 고안된 거지.”

“텔레포트…스크롤?”


그건 또 뭐래? 

이럴 땐 라피스 녀석이 옆에 없다는 것이 아쉽다. 잘난 척 대장이긴 하지만 이 세상의 상식을 알아내는 데는 꽤나 유용했는데 말이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엘프 녀석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척 세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그리곤 내가 의아한 얼굴을 하기도 전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단 돈 3골드에 모시겠습니다!”

“뭐? 이거 설마 돈 받고 파는 거냐?”

“그럼 내가 무슨 자선사업간 줄 알아? 시세보다 비싼 건 사실이다만, 목숨과 바꾸는 값인데 그 정도는 지불할 가치가 충분히 있지.”

“하지만 정말로 태풍이 불건지도 확실치 않은…”

“무슨 소리야, 너? 여기 시큐엘을 보고도 의심하는 거냐? 사실 4골드는 받아야 할 걸 네가 계집애라서 좀 깎아준 거라고. ”


아니, 글쎄 나는 여자가 아니라니까…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너 이 자식! 설마 시큐엘을 이용해서 돈을 벌어먹고 다녔던 거냐아?

그러나 난 거기에 화를 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어느새 엘프의 곁으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대, 대화 중에 실례하오. 태풍이 온다는 게 정말 사실이오?”

“아, 보면 몰라? 여기 이렇게 시큐엘이 있잖아! 이 녀석이 제공한 정보니까 틀림없다 그러네?”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어. 항해 때마다 날씨를 예측해주는 엘프가 있다고 말이야. 그 이름이 엔딜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바로 그 엔딜이 이 몸이란 말씀!”

“오오오!”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말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저 녀석의 이런 사기술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모양. 이미 이름까지 알려져 있던 모양인지 녀석을 보는 얼굴마다 신뢰가 가득 깃들어 있었다. 

 


하긴 그러고 보니 출발하기 전에도 선장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펼치고 있었지. 그땐 녀석의 하는 행동이 신기해서 구경하느라 제대로 살피지 못했는데, 분명 폭풍이 어쨌다느니, 사기가 어쨌다느니 하며 흥분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애초에 시큐엘을 불러냈던 이유가 자신을 사기꾼으로 매도(?)하는 사람을 응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이게 대체 어떻게 되먹은 세상이야!’


사람들은 서둘러 스크롤을 사고 있었다. 단체용도 아니고, 일반 개인용. 그것도 단거리 스크롤이라 시세로는 1골드에도 못 미친다는 것을 그 보다 몇 배인 3골드에 파는데도 끽소리도 못하고 구입하는 것이다. 목숨이 일각에 달했다는데 재물이 아까울 수가 있겠는가!

황당한 표정으로 시큐엘을 바라보자 녀석은 여전히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있었다. 그 배신감을 당해보지 않은 정령왕은 모를 거다. 사기 치는 엘프는 둘째 친다 이거야. 하지만 시큐엘! 네가 공범이 되면 어쩌자는 거냐! 

분노하는 속과는 반대로 내 입에서는 어느새 미소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 일까나, 시큐엘?

-헉, 그,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엘퀴네스님.

-설마 너 혼자 태풍을 일으킬 건 아닐 테고. 대체 몇 마리의 시큐엘이 이런 작당을 펼치고 있는 거냐? 아니, 태풍이라면 바람의 진들도 합세했겠군. 감히 계약자 하나를 위해 자연을 좌지우지하려 들어? 그것도 정령왕도 아닌 상급 정령 주제에?

-에, 그, 그것이…정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사~~정? 고작 텔레포트 스크롤 하나 비싼 값에 팔아넘기려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사정’에 포함된단 말이냐? 이 자식이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누굴 보자기로 알아?

잘못했다고 빌 긴 커녕 변명을 찔끔찔끔 늘어놓는 시큐엘의 모습에 열 받은 나는 말 그대로 사정 봐줄 필요 없이 단칼에 시큐엘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녀석은 소멸되었을 것이다.


“한심하군요. 저런 녀석의 사탕발림에 넘어가는 인간들이라니…”

“글쎄 내말이 바로 그 말!! 에? 누구?”


놀란 표정으로 돌아본 내 뒤에는 언제 온 건지 한 무리의 노말 엘프들이 서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고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였다. 그 중 일행의 리더로 보이는 초록색 머리카락의 엘프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실례합니다. 저희들은 이번에 알폰프 제국으로 여행가는 엘프들입니다만, 사람들이 모이기에 무슨 일인가 하여 잠시 들려보았습니다.”

“아아. 저는 저기 있는 엘프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거든요? 아하하”

“알고 있습니다. 사실 ‘날씨를 읽는 엔딜’이라고 하면 저희 마을에서도 유명하니까요. 나이 3백이라 해도 인간들로 치면 어린아이나 다름없는데, 일족의 아이가 이래저래 피해를 끼치게 되어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렇게 말한 초록색 머리의 엘프는 이번에도 예의바르게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그와 함께 있던 다른 엘프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사과의 말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겠는가. 분위기가 어찌나 숙연한지, 꼭 일생일대의 역죄를 짓고 사죄를 건네는 것 마냥 장엄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면서도 일정 선에 다가갈 수 없도록 경계선을 두고 있는 모습은 절도 있다는 느낌보단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여러모로 욕쟁이 엘프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저 녀석과 같은 마을이세요?”

“일단은 저희 마을 소속의 엘프가 낳은 아이긴 합니다만, 같은 마을에 살지는 않습니다.”

“그렇군요. 저는 또 같은 일행인 줄로만…”

“설마요. 같은 엘프라곤 해도 마주치는 횟수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걸요. 엔딜은 바닷가에서만 사니까요. 숲의 종족인 우리와의 교류가 없을 수밖에 없답니다.”


그러면서 얌전히 호호호 웃는 이는 어깨까지 드리운 금발머리를 가진 여자 엘프였다. 단아한 외모와는 반대로 어쩐지 싸늘한 분위기가 풍기는 느낌이었데, 다음으로 이어지는 그녀의 말이 확실하게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저런 녀석과 같은 마을이라니, 생각하기조차 싫군요. 엘프로서 가장 수치스러울 테니까요. 아니, 사실 지금도 수치스럽긴 마찬가지지만 말입니다.”

“예?”

“인간들을 속여서 돈을 벌다니, 선의의 종족인 우리 엘프들을 배덕하는 행동이 아니겠어요? 정말 언제나 철이 들려는지. 엘프와 숲의 신인 크리아텔님이 무척이나 슬퍼하실 거예요.”


아무래도 그동안 욕쟁이 엘프한테 쌓인 게 많았던 모양. 그러나 이 한기가 뚝뚝 떨어지는 음성에 대답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어느새 우리들의 대화를 들었는지 욕쟁이 엘프(이름이 엔딜이라는)녀석이 눈에 시퍼런 불을 키고 노려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누가 속였다는 거야? 이 망할 아줌마가! 내가 속이는 걸 봤어? 봤냐고!!”

“오, 엔딜. 교양없긴. 당신이 우리와 같은 하이엘프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군요. 그 험한 말투는 언제쯤 자중할 생각이죠?”

“닥쳐! 여행을 하려면 조신히 여행이나 다니라고! 별 거지 같은 것들이 남의 속을 뒤집고 난리야? 그 놈의 엘프와 숲의 신은 할일도 더럽게 없나보다? 나 같은 것의 품행방정을 위해 슬퍼할 시간도 있고 말이야!”

“엔딜! 감히 크리아텔님을 모욕하는 발언을 하다니요!”


그러나 발끈한 초록색 엘프의 말에 돌아오는 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엔딜은 아주 작정하고 시비를 붙이기로 한 것인지 눈짓으로 시큐엘을 가리키며 히죽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꼬우냐? 그럼 덤벼! 네놈들 따위 몇 십 마리가 달라붙어도 여기 있는 시큐엘 하나의 상대가 되지는 않을 테니까! 뭣하면 내가 먼저 시큐엘더러 네놈들을 가볍게 손봐주라고 지시할 수도 있다구?”

“엔딜! 정령의 힘을 그런 식으로 사용해선 안돼요! 정령은 우리의 친구랍니다. 아무리 당신이 시큐엘의 계약자라고 해도 이런 태도는 용서할 수 없어요!”

“용서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그래봤자 시큐엘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주제에? 가식적인 태도 집어치우고 눈 앞 에서 꺼져주시지? 네놈들 면상 보는 건 생각보다 더 밥맛 떨어지는 일이거든. 이건 엄연히 영업방해라고.”


무언가 만류해 보려던 다른 엘프들도 엔딜녀석의 강경한 태도에 결국 입술을 깨물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금발머리의 여자 엘프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마지막으로 싸늘한 한 마디를 내뱉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해봤자 어차피 당신은 인간들과 융합될 수 없을 거예요. 아니, 이미 뼈저리게 느꼈을려나? 주변의 인간들이 하나둘씩 죽어갈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나요, 엔딜? 정말 가엽군요, 당신이란 존재는. 평생을 그렇게 외롭게 살다 죽어갈 테니.”

“씹! 거기서 한 마디만 더 지껄이면 죽여 버리겠어!”


이글이글거리는 푸른 눈동자. 그 안에 담겨진 소름끼칠 정도의 차가운 살기에 엘프들은 모두 움찔하더니 곧 창백한 얼굴이 되어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안 그러면 정말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체 저 녀석에겐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나는 복잡한 눈으로 멀거니 녀석을 바라보다 문득 옆에 있던 시큐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은 침착한 얼굴로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왕께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나쁜 아이는 아닙니다. 저들이 말하는 것처럼 저를 부려먹는 것도 아니고요. 단지…

-단지?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계약자가 허락할 때까진 설명하기가 곤란합니다만…. 이해해주십시오. 왕이시여


빠직. 순간 머리에서 혈관이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허락할 때까진 말을 못하니까 곤란해? 왕인 날더러 이해를 해 달라고? 

기가 막히다. 설마 엘뤼엔때도 정령들이 이런 식의 태도를 보였을 리는 없고, 역시 내가 너무 무른 탓인가?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눌러 참은 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대꾸했다. 내 감정이 정령들에게 전달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말이다.


-시큐엘, 네가 선택한 계약자니 그에 따른 행동의 결과도 네가 책임져야 할 몫이겠지. 친구대접을 받든 종 취급을 당하던 나와는 상관없어. 계약자를 잘못 정한 네 탓이니까. 그렇지?

-호, 혹시 화나셨습니까?

-화? 내가 왜? 아무튼 시큐엘. 멋대로 자연을 이용한 대가는 나중에 받아내도록 하겠다. 말해두지만 나는 너희들한테 임의로 자연을 부릴 권리를 준적이 없어. 한 번 만 더 멋대로 굴었다간 전부 제명시키고 새로 만들어 버릴 겨!

-헉!! 그, 그게 아닌 데에…


무언가 심히 억울하다는 듯한 시큐엘의 항변이 이어졌지만 이미 나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 아직도 씩씩거리기에 바쁜 욕쟁이 엘프 엔딜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이, 너한텐 미안한 얘긴데 말이야, 이번 항해 동안 태풍이 부는 일은 없을 거다.”

“뭐?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꿈틀. 이마의 근육을 심하게 부들거리는 채로 되받는 녀석의 표정엔 말 그대로 분.노. 이 두 글자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것을 똑바로 마주본 나는 다시 한번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번 항해 동안 절대로 태풍이 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사람들에게 판 스크롤 값을 다시 돌려주는 게 좋을 걸? 안 그러면 알폰프 제국에 도착하고 나서 넌 뼈도 못 추릴 테니. 아. 상관없나? 어차피 너는 태풍이 불던 안 불던 항해가 끝날 시점에서 도망칠 테니 말이야.”


웅성웅성. 지금까지 녀석에게 열심히 스크롤을 사가던 사람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것을 눈치 챈 엔딜은 입술을 악물면서 나를 사정없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너 이 계집애! 대체 무슨 꿍꿍이야!”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인데, 넌 눈이 나쁘구나? 나의 어딜 보고 여자로 오해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지. 나름대로 상당히 열 받거든? 아무튼 내 충고 흘려듣지 마. 태풍은 불지 않을 거야.”

“제길! 헛소리 하지 마! 태풍은 와! 반드시 온다고! 이건 시큐엘 뿐만이 아니라 정령왕께서도 계획하고 계신 거라고!”

“허업!”

“호오~”


녀석의 악에 바친 말에 ‘정령왕’이란 단어가 들어가자 사람들의 반응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상급 정령에 ‘정령왕’이라니, 무언가 굉장히 대단해 보였나 보다. 

그것에 비하면 나는 정령사도 무엇도 아닌, 그저 평범한 소년에 불과해 보였으니 엘프 쪽으로 대세가 기울인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셈이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증거에 약하니까. 

그것을 빤히 둘러본 나는 실소를 감추지 못하며 엔딜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 근데 이걸 어쩌나, 내가 알기론 정령왕이 그렇게 한가한 존재가 아닌데 말이지. 멀쩡한 정령왕을 팔아먹다니, 너 그러다 벌 받을 거다.”

“헹! 웃기지도 않은 소리! 너 같은 일반인이 정령왕의 마음을 어찌 안다는 거냐? 여기 이 시큐엘이 어떻게 나와 계약하게 되었는지 알아? 바로 내가 정령왕께 기원해서 얻어낸 선물이란 말씀!”

“!!”


이건 또 뭔 소리래? 내가 시큐엘을 선물로 주었다고? 

나는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다시 한번 엔딜의 모습을 흩어보았다. 녀석의 말을 듣고 나니 무언가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이마에 새겨진 흐릿한 시큐엘의 문장. 그래, 바로 이거였다. 내가 녀석을 보고 한눈에 시큐엘의 계약자임을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 

내 얼굴은 자연스럽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시큐엘. 설마 너…

-요, 용서하십시오, 왕이시여.


그래도 지은 죄는 아는 모양인지 슬금슬금 고개를 숙이는 늑대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손으로 짚었다. 기가 막히게도 저 엔딜이란 엘프에게서는 상급 정령과 계약할 수 있을 정도의 친화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아무리 자연과의 친화력이 강한 엘프라고 해도 상급 정령을 소환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녀석처럼 일족 안에서 ‘어린아이’취급 당할 나이엔 더더욱. 그런데도 대책 없이 시큐엘의 계약자가 되서 녀석을 마음대로 부리고 있는 게 어딘지 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설마 시큐엘이 자청해서 계약자로 나선 것이었을 줄이야.’


짐작컨대 아마도 시큐엘은 저 엔딜과 계약을 하기 위해 자연계 상태로 옆에 머물면서 친화력을 높여 주었을 것이다. 당장은 무리지만 몇 달 정도 꾸준히 자연계의 정령이 붙어있다 보면 친화력이 높아지는 건 사실이니까. 그렇다고 영구적으로 높아지는 게 아니라 다시 정령이 떠나면 사라지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임의로 늘어난 친화력이 드디어 상급 정령을 소환할 수준에 도달했을 때, 시큐엘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엔딜과 계약을 한 셈인 것이다.

한 마디로 정령 스스로가 원해서 이뤄낸 계약이랄까? 때문에 소환자의 이마에 찍힌 시큐엘의 문장이 흐릿한 게 당연한 셈이다. 그야말로 이사나와 맞먹는 운이 아닌가! 


-이건 설마 종족을 넘는 사랑인 게냐?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시큐엘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는 모습에 왠지 모를 서운함이 느껴졌다. 이건 뭐랄까… 다 키워놓은 자식이 애인 생겼다며 부모를 나 몰라라 하는 심정이랄까?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면 실토하도록 만드는 수밖에!’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이제 내 눈에는 엔딜이 그저 싸가지 없는 엘프가 아니라, 남의 귀한 자식을 넘보는 도둑놈으로 보였다. 때문에 자연히 놈을 노려보는 내 눈빛이 살벌해 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자 내 흉흉한 눈과 마주한 녀석이 질 수없다는 표정이 되어 당당하게 되받아 치는 것이 아닌가! 이 괘씸한 놈!


“뭐, 뭐야! 그렇게 노려본다고 누가 쫄 줄 알아?”

“난 너 같은 사위(?) 둘 생각 없어!”

“뭐어? 무슨 헛소리야?”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을 무시한 채 나는 내 옆으로 또 다른 시큐엘을 소환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시큐엘엔 시큐엘이다 이거야! 너만 상급 정령사인 줄 아냐, 이놈아! 라는 심보였달까? 

이런 내 작전은 깨끗하게 먹혀 들어가 주변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놀란 얼굴로 신음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것은 꿋꿋하게 나를 노려보고 있던 엔딜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옆으로 어느새 다섯 마리의 시큐엘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헉!”

“흐읍!!!”

“맙소사…”


같은 상급 정령사 중에서도 얼마나 많은 정령을 소환해 내느냐에 따라 등급이 구분된다. 겨우 한 마리로 간당간당한 엔딜에 비해 나는 다섯 마리의 시큐엘을 소환해 내었으니 이로서 누가 더 우세하냐가 증명이 된 셈이다.

놀라서 할 말을 잃은 엔딜을 보며 나는 비웃는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이제 우리 둘 중에서 누가 더 정령왕의 선물을 많이 받았는지 알았겠지? 태풍은 불지 않을 거다, 꼬맹아. 정 못 믿겠으면 내기할까?”

“이익!”


여유 있게 웃는 내 얼굴을 본 엔딜은 잠시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악에 바친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렇게 신경질을 내던 것도 어디까지나 잠시였을 뿐. 곧 스크롤을 환불하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통에 녀석은 꼼짝없이 돈을 내주는 수밖에 없었다.


“크흠. 아무래도 다시 환불해야 겠소. 돈을 돌려주시오!”

“나도! 스크롤은 돌려주겠소.”

“아아, 나도!”

“쳇! 환불해 주면 될 거 아니야!!”


잔뜩 얼굴을 구긴 녀석이 돈을 아무렇게나 던져주는 모습을 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다시금 그의 옆에 있던 시큐엘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느낌으로 자신의 계약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를 향한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걸보면, 그건 역시 내가 왕이기 때문이겠지?
그의 슬픈 얼굴을 보며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곧 고개를 저으며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정령은 계약자의 하수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동등한 입장이야. 그건 너도 알고 있겠지, 시큐엘? 녀석을 돕고 싶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이런 식의 상품가치로 전락하는 꼴은 절대 두고 보지 않을 테니까.

-왕이시여…

-똑바로 생각하고 행동해. 너와 계약한 건 저 엘프에겐 분명히 큰 행운이었겠지. 하지만 짊어져야 할 책임 역시 만만치 않아. 정령사의 이미지는 둘째쳐도, 버틸 수 있는 체력이 얼마나 갈까?

-!!!


일단 소환되고 나면 자신이 알아서 마나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정령왕과 달리, 상급 정령인 시큐엘은 소환자의 마나에 고스란히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친화력이 부족한 ‘어린’엘프가 감당하기에는 힘든 상대인 것이다. 

이미 몇 번이나 계속된 소환에 지금까지 태풍을 불기 위해 부어준 마나까지 보태면 아마도 저 엘프는 이미 여러 면에서 한계에 달해있을게 틀림없었다. 그걸 감안하면서까지 사기를 치는 이유는 알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이제 서야 그것을 눈치 챈 모양인지, 급하게 엔딜을 바라보는 시큐엘의 눈빛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보 엘프 옆에 붙어 다니더니 저 녀석까지 바보가 된 모양이다.

 

 - 바다괴물의 출현 - 

그 후로 엔딜은 아주 오랫동안 갑판위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충격이 큰 것인지, 아니면 내 짐작 따라 시큐엘을 소환한 몸의 부담이 이제야 제대로 적용된 건지 알 길이 없었지만, 꽤 오랜 시간 녀석을 보지 못한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항해를 시작한지 2주일이 지났을 무렵이던가? 통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게 이상해서 은근슬쩍 선장에게 엔딜의 행방을 물었더니,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도무지 나올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에게 전혀 뜻밖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동생이 아파요?”

“그렇다고 하더군. 아무래도 희귀병인 모양인데, 그나마 효과가 있는 약초를 파는 사람이 알폰프 제국에 사는 모양이야. 그래서 6개월 마다 한번씩 꼭 이 배를 타고 알폰프 제국으로 건너가지.”

“헤에? 그게 언제부터인데요?”

“글쎄. 꽤 오래된 것 같은데 말이야. 그나마 요즘 들어서야 약초 구하기가 쉬워졌지, 지난 10년 가뭄 때는 정말 힘들었다고 하더군. 입이 걸걸하긴 하지만 나쁜 녀석은 아니야. 환경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든 거지. 좀 무례하다 생각되어도 이해해 주게.”


흐음. 그럼 시큐엘이 말한 ‘사기 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사정’이란 게 혹시 이것과 관계된 걸까? 아픈 동생의 약값을 벌기 위해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집안에 어른 엘프들도 있을 거 아니에요. 아까 들어보니 엔딜이란 녀석…성인식도 넘기지 못한 것 같은데 혼자서 약을 사러 다녀도 괜찮은 건가요?”

“글쎄. 자세한 사정은 나도 모르겠지만, 듣기로는 엔딜은 엘프마을에서 살지 않는다더군. 동생이랑 단 둘이서 살고 있다고 하던걸?”

“네? 그럼 녀석이 없을 동안에 동생 병간호는 누가해요? 희귀병이라면서요.”

“동네 사람 중에 봐주는 이가 있는 모양이야. 마을에서 나온 것도 거의 추방 식이었다는데, 어린 나이에 딱하게 되었지. 부모란 엘프가 살아있는 건 확실한 것 같은데…나 참, 제 자식을 버리고도 멀쩡할 수 있는 건가? 하여튼 엘프란 종족이란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순간 심장 한 구석에 서늘한 칼날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그 말 한마디가 남의 일 같이 느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전생의 트라우마랄까. 

어쩌면 엘프 답지 않은 걸걸한 입담이나 거친 성격이, 자신의 종족을 부인하고 싶어 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심스럽게 들기 시작했다. 이거 시큐엘을 불러다 진상규명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왠지 모를 찝찝함에 속으로 투덜거리는 순간,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소란스러움에 돌아보니 어느새 갑판위로 나온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특히 라피스) 항해가 시작된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배 안에 있던 모든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만행을 벌였는데, 지금처럼 셋이서 우르르 갑판이라도 나올라치면 여기저기서 감탄성과 신음성이 터지기 일쑤였다. 

그 소란의 내용이란 다음과 같다.


“아아, 멋져. 정말 아름다운 붉은 머리카락이지 않니? 저 조각 같은 얼굴로 나에게 미소지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 심장이 터져서 죽어버릴지도 몰라.”

“저 환상적인 은발 좀 봐! 눈의 요정이 있다면 저렇지 않을까? 아아, 한번 말이라도 걸어봤으면…”

“어쩜, 고아한 느낌의 사제님을 봐! 정말 다정하실 것 같지 않니? 저렇게 어린 사제님이 고위급 사제라니, 너무 멋지다!”


꺅꺅거리는 목소리에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지만, 다행인건 저 닭살스러운 상황 속에 내가 끼어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여행 초반, 시큐엘을 다섯이나 불러내버린 관계로 본의 아니게 내가 너무 눈에 띄여 버려, 항해 내내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귀찮게 굴기 시작해서 어쩔 수 없었달까? 

그리고도 벌어질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갑판에 나와 있을 때는 서로 아는 척을 하지 않기로 약속을 한 상태였는데, 주변 반응을 보니 그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의 패턴으로 봐서 십중팔구 이번에도 여자로 오해받을 것이 뻔한데, 나로선 도무지 질투에 불타오를 여인네들의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숨처럼 한마디 중얼거렸다.


“결국 이래저래 나는 왕따 일수밖에 없는 거지.”

“응? 왕따? 그게 뭡니까?”

“??”


갑자기 끼어들어 나의 말을 되받은 사람은 180정도 되어 보이는 훤칠한 키에 준수한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머리카락은 짧은 검은색. 눈동자는 특이하게도 평소에 흔히 볼 수 없었던 옅은 호박색이었는데, 동공 안으로 살짝 붉은 빛이 감돌았다. 

분명 오늘 처음 본 건데도 낯설지 않은 기분이랄까? 한동안 그 느낌의 정체에 골몰하던 나는 곧 어렵지 않게 이와 비슷한 느낌을 주던 존재들을 떠올리곤 얼굴을 굳혔다.


“당신 혹시…마족?”

“하하. 이런, 벌써 들키다니 민망한데요? 과연 정령왕 엘퀴네스님이시군요.”

“!!”


마족인데다 내 정체를 알고 있다. 설마 이번에도 마왕이 보낸 자객 녀석인가? 

나의 눈은 자연스럽게 서늘한 빛을 띄우기 시작했다. 이런 나의 경계하는 태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정체가 들켰음에도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다음 말을 잇고 있을 뿐이었다.


“제 이름은 루카르엠. 마계 4대 공작의 일원입니다. 그냥 간단하게 루카라고 불러주십시오. 엘퀴네스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별로 반갑진 않은데요.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요?”

“그런 서운한 말씀을. 저는 여러분께 전혀 악감정이 없답니다. 그러니 그렇게 경계하지 말아주셨으면 하는데요.”


그러면서 생긋-미소 짓는 얼굴은 카이씨에 비견될 만큼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미 머릿속에 '마족=사악한 종족'이란 공식이 성립되어있는 나로서는 그 모습이 전혀 달가울 리 없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세뇌교육의 결과!)

때문에 나는 경계를 풀기는커녕 도리어 퉁명스러운 태도가 되어 대꾸했다.


“본인은 악감정이 없어도 위에서 시키면 싸워야 하는 게 부하 아닌가요?”

“하하. 이거 할말 없게 만드시는 군요. 꽤 날카로우신데요? 맞습니다. 사실 부하란 게 어쩔 수 없는 직업(?)이라서 말입니다. 원치 않아도 싸워야 할 때가 상당히 많죠. 그래도 일단은 엘퀴네스님의 일행에 합류하는 게 목표입니다만.”

“엥? 우리 일행에 합류를? 무슨 이유로요?”

“으음. 마왕님의 명령이 바로 그거였거든요. 엘퀴네스님의 일행에 속해 있다가 기회를 봐서 저쪽에 있는 이사나님을 처단하라는 것이었는데…역시 안 되겠지요?”

“그걸 말이라고!!”


이 녀석 혹시 바보가 아닐까? 계획을 미리 다 말해줘서 뭘 어쩌려는 거야! 

황당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며 바라보자 루카르엠이라고 밝힌 검은머리의 마족은 난감한 기색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방심작전을 유도한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태연한 모습이었기에 나는 다시 한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이 놈의 마족이 무슨 꿍꿍이인겨!


“아,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엘퀴네스님한테 미움 받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에…그러니까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마왕님의 계획에 따를 생각이 별로 없거든요. 지금 엘퀴네스님께 접근한건 순순한 제 의지니까 너무 예민하게 구실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그리 신용이 가는 말은 아닌데요.”


전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바로 되받아 치자 마족의 얼굴이 더욱 난처하게 물들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곧 표정을 정비(?)하곤 다시 살갑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이거 너무 경계하시니까 대화가 통하지 않네요. 결국 시간이 해결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걸까요? 좋습니다, 엘퀴네스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다시 찾아뵙도록 하죠.”

“…그건 우리를 쫓아다니겠다는 말?”

“물론입니다.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당신의 일행에 합류하는 것이 목표라고. 일단 명령을 받드는 척이라도 해야 마왕님께 혼나지 않거든요. 그 대신 제가 엘퀴네스님의 적이 아니라는 증거로, 기척을 숨기고 다니지는 않겠습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 따라다니는 것만 허락해 주십시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의 말 어디에도 진심일거란 확신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한 차례 마족들의 공격을 받은 경험이 있는데다, 본인의 입으로 직접 마왕의 명령을 받고 찾아왔다는 데 순순히 의심을 풀어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구나 나를 노리는 것도 아니고, 이사나를 겨냥하고 있는 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련하게 바라보는 루카의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나는 반드시 허락을 해줘야 할 것만 같은 이상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난 어느새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던 것이다. 강지훈! 아니, 엘퀴네스! 너 미쳤냐? 

당연한 말이지만 루카르엠은 그 찰나의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헛. 정말이죠? 허락 하신 거죠? 감사합니다, 엘퀴네스님.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찾아와서 생때를 쓰는데도 그리 불쾌한 기색 없이 허락해 주시다니. 알려진 소문과는 다르게 정말 좋으신 분이네요! 저를 믿으신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아아, 네에… 부디 그러길 바랄게요.”


이미 쏟아버린 물을 다시 담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찝찝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어쩔 수 없지. 지금부턴 이사나 옆을 철저히 지키는 수밖에. 누굴 탓하겠는가? 내 매를 내가 번 것을.

이번 일이 일행들에게 알려 지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눈앞에 선했다. 라피스는 재밌다며 킥킥댈 것이 분명하고 카이씨는 걱정할 것이며, 이사나는 불안 해 하겠지. 그런데도 나를 원망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만큼 신뢰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속이 푸근해 지는 느낌이었다.


“어? 그새 어디로 갔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루카르엠은 이미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진 뒤였다. 등장만큼이나 재빠른 퇴장이었지만 근처에서 그의 기운이 느껴지는 걸 보면, 숨어서 따라다니겠다는 약속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속을 짐작할 수 없기에 더욱 경계가 된다고 해야 하나? 나는 서둘러 바다 위를 떠다니던 자연계의 시큐엘에게 이사나의 주위를 지키도록 지시했다. 아주 조금이라도 신변의 위협이 느껴진다는 판단이 설 시, 주저하지 말고 바로 보고하라는 명령도 덧붙인 후였다.

덕분에 이사나는 약 10마리에 해당하는 시큐엘들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저 쯤 되면 아무리 감이 둔한 사람이라도 감시당한다는 느낌을 피할 순 없겠지만…살려면 무슨 짓을 못 하겠는가!

불안한 듯 움찔거리면서도 끝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찾아내지 못하는 이사나를 향해 나는 슬그머니 미안한 시선을 보냈다.


‘미안, 이사나. 불편해도 좀 참아줘. 마족한테 뒤통수 맞는 것보단 낫잖아?’


그러나 딴 사람들은 다 속여도 라피스의 눈은 속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정령, 특히 물의 정령에 대한 감이 남들에 비해 몇 배나 발달되어 있던 녀석은, 어렵지 않게 이사나의 옆으로 모여든 기운을 눈치 채곤 나에게 무척 수상하다는 시선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이쪽을 향해 퉁명스러운 한 마디를 던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체 무슨 꿍꿍이야?”

“뭐가? 갑판에 올라온 상태에서는 아는 척 금지 아니었던가?”

“말 돌리지 마. 내가 못 느낄 줄 알아? 이사나를 감싼 정령의 기운은 둘째 치고, 아까부터 확연히 느껴지는 마족의 기운은 뭐라고 설명할 거냐? 아까 너한테 말 걸었던 시커먼 놈. 마족 맞지? 지금 숨어있는 녀석이 그 놈이냐?”


으음. 이 예리한 놈 같으니라고. 대체 언제 또 나랑 루카르엠이 대화하는 장면을 본거라지? 

어차피 숨길 사항도 아닌 것 같아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람에 녀석의 눈빛이 한층 가늘어 졌지만 그런다고 기죽을 내가 아니다.


“별 거 아니야. 일행으로 넣어달라고 하길래 싫다고 했더니, 그냥 따라 다니는 건 허락해 달라잖아. 그래서 그러라고 한 것뿐.”

“호오. 그 별거 아닌 일 때문에 이사나를 저렇게 보호하기 시작한 거고?”

“만일을 위해서야. 공격의사는 없다고 하지만 언제 어떻게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까 말이지.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내가 쫓아다니지 마란다고 해서 안 쫓아다닐 마족도 아니고 말이야.”

“그래서 대 놓고 허락하셨다 이거군. 이럴 바엔 일행에 포함하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나?”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눈빛이 초롱초롱한 걸 보면,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행으로서 동행하는 것과 쫓아다니는 건 엄연히 달라. 난 수상한 사람한테 뒤통수 맞는 건 참아도 ‘같은 일행’이 배신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거든. 이사나에게도 그런 경험은 한번으로 족하니까 말이야.”

“아아.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숙부한테 배신당한 거였던가? 흐음, 일리 있는 말이네. 나야 재미있으니 상관은 없다만, 앞으로 좀 피곤해 질지도 모르겠는데? 저 마족 녀석. 생각보다 등급이 높은 것 같아서 말이지.”


마계 4대 공작의 일원 이랬으니 등급이 높은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정령왕과 드래곤이 보호 하고 있는 소년을 쉽게 건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생각은 라피스도 마찬가지인 듯, 곤란하다는 말투 어디에도 진심으로 긴장하는 구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적(?)과의 미묘한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사나의 친위기사단들은 현재 수도인 헤리카를 벗어나 있는 상태였다. 얼마 전 정보 길드내의 은밀한 루트를 통해 카웰 후작에게서 보내진 한통의 전서구가 도착했던 것이다.
 
그 안에 담겨진 대강의 사정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읽은 페리스들은 앞뒤 사정 볼 것 없이 곧 바로 클모어 행을 결정지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동안은 정보길드 마스터의 도움을 받아 추적자들로부터 은신할 수 있었지만, 수도를 벗어나면 곧바로 위치가 발각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친위기사들로서는 목숨을 건 위험을 떠안은 셈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길을 나서는 기사들 중 누구도 불안한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의 주군을 찾으러 가는 길이 괴로울 수가 있겠는가! 그들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이사나와 합류해서 그의 안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했을 뿐이었다.


“페리스, 클모어로 가는 방향이 이 쪽이 맞던가? 지도를 봐도 도무지 방향을 찾을 수가 없는데.”


전문적인 지도 제작꾼이 만든 것이 아닌, 일개 잡화점에서 구입한 지도에서 세밀한 지형 표시를 기대하기란 애초부터 무리였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단 생각에 챙겨들고 온 것이었는데, 역시나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자 리더인 알렉의 얼굴은 난처하게 물들었다. 

그때 마침 그 옆에서 일행의 점심식사 준비를 돕던 페리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맞을 겁니다. 우리가 가는 방향이 헤리카에서 똑바로 이어진 남서쪽이라면 말이죠.”

“어이. 지금 그걸 확신할 수가 없어서 이러는 거잖아. 거~참. 이상하네. 지금쯤이면 크란 산맥의 꼭대기라도 보여야 하는데 말이야. 그 산맥 너머에 클모어가 있는 거 맞지?”

“제가 알기론 그렇습니다만,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요. 검문소를 피하기 위해 힐튼 산맥을 경유한 것이 문제가 된 걸지도. 혹시 길을 잘못 든 건 아닐까요?”

“허어억. 말도 안돼. 지금까지 걸어온 시간이 얼만데! 그러지 말고 실프에게 길 안내를 부탁해 보는 건 어때? 바람의 정령이면 지형쯤이야 훤히 꿰뚫고 있을 거 아니야.”


그러나 간절하게 부탁하는 알렉의 말에 돌아온 건 냉정한 거절의 말이었다. 계약자가 처음 가 보는 곳의 지형은 제 아무리 바람의 정령이라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마지막 희망까지 사라져 절망하는 알렉에게 페리스는 어설픈 웃음을 흘리며 간단하게 끓인 스튜 한 그릇을 내밀었다.


“일단 뭐라도 먹으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죠. 실프의 말에 의하면 아까부터 점점 공기가 훈훈해 지고 있다는 군요. 클모어는 남쪽이라 수도인 헤리카에 비해 따뜻한 지역이니, 틀리게 온건 아닐 겁니다.”

“휴우.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군. 말이 없으니 이동이 느려서 큰일이야. 이러다 중간에 대공놈들한테 발각이 되기라도 하면 더 지체되겠는걸.”


그러나 염려스러운 건 오직 알렉 뿐인 듯 했다. 친위기사단의 다른 이들은 그게 뭐가 어떻냐는 듯한 태도로 연신 음식을 먹기에 바빴던 것이다. 아무래도 지난 몇 달간 이어진 도피 생활이 그들의 행동을 점점 무대포로 몰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막나가는 상태랄까?


“그래봤자 몇 달일 텐데 뭘. 까짓 좀 늦어진다고 해서 그 사이에 거사가 벌어지겠어? 설마 우리만 쏙 빼놓고 수도로 진격하지는 않겠지. 후작님 쪽에서도 다른 귀족들과 연락할 시간이 필요하잖아.”

“맞아. 진격이야 거사 당일 날 합심해서 한다손 쳐도, 연락하랴, 군대 정비하랴 준비하다보면 정신없을 걸? 느긋하게 가자고, 알렉. 급하게 해서 제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 말이야.”

“맞아. 사실 우리야 아쉬울 거 없잖아? 이미 수도 내에 침투해서 귀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상태니까. 황제파와 대공파가 극명하게 대립하기 시작했으니, 이젠 우리는 살아남기만 하면 돼. 그것이 이사나님과 한 마지막 약속이었으니까.”

“옳소!!”


…그렇다고 정말 살.아.남.기.만. 할 생각이냐, 너희들? 

지난 시간동안 기사들의 성격에 묘한 변화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역시 피부로 체감하니 새삼스러운 느낌이랄까. 저런 느긋한 태도들이라니. 이사나가 쫓겨나기 전, 그러니까 지금의 친위단이 황성에 머물러 있었던 때에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런 생각으로 황당해 하는 알렉을 보며 페리스는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보기 좋은데요. 낙천적인 성격은 정신건강에 이롭잖습니까.”

“저건 낙천적인 게 아니라 아무생각이 없는 거라고. 전에도 좀 대책 없는 놈들이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후훗. 글쎄요. 하지만 바뀐 사람은 알렉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일단 저를 대하는 말투부터가 좀 더 가벼워지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랬다. 이전의 알렉은 페리스를 대함에 있어서 언제나 ‘하오’체의 정중한 말투와 함께 일정한 경계선을 그어둔 듯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기사단 내의 유일한 정령사였으니 친분을 쌓을 기회가 적어서이기도 했지만, 페리스가 평민 출신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기사들과 그의 사이를 소원하게 만든 것이 사실이었다. 그랬던 것이 지난 몇 달간 함께 동거동락 하면서부터 완전한 일행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 점을 날카롭게 꼬집힌 알렉은 반박할 말을 잃고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쩝. 할 말 없군. 그렇게 치면 우리 중에서 가장 변하지 않은 사람은 페리스인가? 말투도 성격도 여전하니 말이야. 물론 능력 면에서는 이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과찬이십니다. 다 엘퀴네스님이 도와주신 덕분이죠. 말투는 본래 버릇이 그래서 어쩔 수 없는 것일 뿐, 성격이라면 저도 많이 변했습니다, 알렉.”

“맞아, 난 페리스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인줄 근래에 알았으니까. 귀족들 협박할 때 봤어? 일행이었으니 망정이지, 적으로 뒀으면 난 살고 싶지 않았을 거야. 정말 무시무시했다고.”

“와하하하!” 


과장되게 몸을 떠는 한 기사에 말에 함께 식사를 하던 다른 이들도 모두 맞장구를 치며 웃기 시작했다. 수도에 있을 때는 이런 식으로 크게 웃거나 인기척을 드러내는 일에 민감한 편이었다. 사방에 대공의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니, 그들로서는 적진 한 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과 진배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 여유를 부릴 수 있겠는가!

때문에 이들이 이렇게 웃으며 느긋할 수 있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랄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알렉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해방감을 만끽해도 상관없겠지. 이제부터 시작이라지만 그 동안 고생이 심했으니까.’


하지만 알렉은 곧 이러한 생각을 진지하게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근처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금만 부주의 했어도 놓칠 수 있을 만큼 미세한 그것은, 감지되는 곳이 여러 군데인 것을 보아 한 사람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하나, 둘, 셋… 대충 6명 정도인가? 이 정도로 기척을 숨길 수 있는걸 보면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자들인 것 같군. 설마 추적자가 벌써 따라 붙을 줄이야.’


인기척을 느낀 이는 알렉 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훨씬 전부터 실프를 통해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페리스 역시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의 존재를 확인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다른 기사들 또한 인기척을 느끼고 얼굴을 굳히기 시작했으나, 페리스는 안심하라는 듯 한 손을 들어보였을 뿐이었다. 주변에 사람이 있음을 알리러 온 실프의 표정이 생각보다 그리 어둡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단순히 지나가는 사람인 것 같군요. 추적자는 아닌 것 같으니 안심하십시오.”

“하지만 이 정도로 인기척을 낮춘 이들이 평범할 리가…”

“글쎄요. 아마도 꽤 수준급의 용병들일지도 모르니까요.”


바로 그때였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그들을 향해 울려 퍼지는 상쾌 발랄한(?) 음색이 있었으니-!!


“꾸웨에에에엑!!!!”

“엥? 꾸웨에엑?”

“이건 웬 돼지 멱따는?”


이윽고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그들 머리위로 ‘날아든 것’은 집 채 만하다는 표현이 무색치 않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덩치를 가진 커다란 멧돼지였다. 그것도 입에 거품을 잔뜩 물고 있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미쳐있는’ 돼지였던 것이다. 

그 장대한 모습을 본 기사들은 긴장하던 것도 잊고 모두 신기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오오오옷! 날아다니는 돼지다!!”

“진짜 크다! 저거 돼지 맞어?”

“꾸웨엑이라고 비명 지른 걸 보면 돼지 맞을 걸? 사자가 꾸웨엑거리고 울지는 않잖아?”

“아하! 그렇군!” 

“지금 그걸 가지고 품평하고 있을 때냐, 너희들!!”


버럭 외친 알렉은 상황을 따질 겨를도 없이 얼른 검을 뽑아 자신들을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돼지를 처단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한발 먼저 나타나 재빠른 동작으로 상황을 종결시키는 사람이 있었으니! 

휘리리릭! 퍼억! 콰아아아앙!!!


“뭐, 뭐야!”

“대체 무슨…으응?”


현란한 폭발음이 들렸지만 그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확인 한 사람은 그들 중 아무도 없었다. 매캐한 먼지가 거치고 난 순간에 보인 것은 완전히 기절한 돼지 한 마리와 그 앞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한 사람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것도 아무리 잘 쳐줘도 16살은 넘기지 않은 것 같아 보이는 ‘소년’이었다. 

이 추운 겨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가벼운 민소매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어색한 느낌이 들지 않은 것은 전체적으로 까무잡잡한 소년의 피부 때문인 것 같았다. 마치 햇볕에 그을린 듯한 느낌이라 그 혼자 여름을 지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던 것이다.

설마 저 소년이 돼지를 잡았단 건 아니겠지? 알렉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소년의 손에는 어떠한 무기도 들려있지 않았던 것이다. 저 가냘파 보이는 맨몸으로 돌진 했다고 하기에는 기절한 돼지의 덩치가 커도 너무나 컸다. 


‘대체 무슨 수로 기절 시킨 거지?’


그때마침 숨을 진정시킨 소년의 무심한 황금빛 눈동자가 똑바로 알렉들에게 향했다. 덕분에 정면으로 소년의 얼굴을 확인한 그들은 범상치 않은 그 미모에 또 다시 얼빠진 얼굴을 해야만 했다.


“…설마 여자애?”

“바보냐? 아무리 봐도 남자라고 본다.”

“으으,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러나 그들의 혼란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소년의 곁으로 5명의 남녀가 모여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나같이 흔치 않은 미형을 가진 젊은 사람들이었는데, 그 중 허리에 채찍을 감고 있던 보라색 머리카락의 섹시한 여자가 기쁜 얼굴로 소리쳤다.


“꺄아악! 역시 매튜가 최고야! 해낼 줄 알았어! 저 무식한 배틀피그를 잡다니! 이리와~! 누나가 예뻐해 줄게~”

“아니, 사양하겠습니다.”

“만쉐이! 이걸로 오늘 저녁도 고기다! 고기! 으흐흐흐흐!”

“수고했다, 매튜. 훌륭한 솜씨였다.”

“그러게 말이야. 정말 볼수록 감탄한다니까? 집 채 만한 배틀피그를 한방에 때려눕힐 수 있는 건 세상에서 매튜 한 사람밖에 없을 걸?”

“자아~ 그럼 이제부터 들고 가 보실까! 아침부터 쫄쫄 굶어서 배고파 죽을 것 같다고.”


마지막으로 말한 남자는 자신의 덩치의 3, 4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도끼를 들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들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깔려 죽을 만큼 무거워 보이는 그것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손으로 휘둘러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알렉 이하 기사들은 그 모습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저거 도끼 맞어?”

“우린 지금 인간을 보고 있는 거냐? 아니, 그전에…아까 그 돼지를 저 소년이 잡았다고 한거 맞지? 그것도 단 한방으로?”

“말도 안돼. 도끼를 든 남자라면 모를까, 저 소년의 어디에 그런 힘이 있다는 거야?”

“옷차림을 봐선 저 사람들 용병인 것 같은데. 용병이란 직업 말야… 혹시 힘이 센 기준으로 뽑는 건 아닐까?”

“헉, 그런 거였어?”


지금까지 황궁에만 있었던 데다, 세상에 나온 이후로도 도피하기에 바빠 보통의 평범한 용병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던 기사들은, 눈앞에 있는 이들이 용병 사회에서도 ‘괴물’이라고 불리는 존재라는 건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세상의 모든 용병들을 모두 그와 같은 기준으로 해석하는 만행을 벌이기 시작했다.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가 가장 처음 본 것을 부모로 믿고 따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달 까? 그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던 페리스는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알기로 용병이 되는 기준 어디에도 괴물 같은 힘을 본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저 분들이 용병 중에서도 특별하신 것 같은데요?”

“…흠흠.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웃기네. 방금 전까지 내 말에 고개 끄덕이고 있던 주제에.”


기사들은 서로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며 민망해 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은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결국 전혀 해결되지 않은 의문을 삼키며 그들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용병들의 정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편 샴페인 용병단 역시 기사들의 정체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수도로 출발한지 며칠 만에 홀홀 단신이 되 버린 그들은, 지금처럼 간간히 사냥을 하면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멧돼지 중에서도 덩치가 커서 거의 몬스터 급으로 분류되는 배틀피그를 발견하곤 쫓아오던 참이었다.

평소처럼 날렵한 매튜의 움직임으로 간단하게 돼지를 제압한 것까지는 문제가 아니었으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웬 한 무리의 인간들이 멍한 얼굴로 쑥덕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옷차림은 볼 품 없었지만, 휴센의 예리한 눈썰미는 그들이 차고 있는 무기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의 생각으로 아마 명망 있는 가문의 기사쯤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저 사람들은 뭐래?”

“글쎄? 척 보니 식사 중이었던 모양인데. 혹시 우리가 방해한건가? 사과할까, 단장?”

“방해한거라면 물론 그렇게 해야겠지. 일단 우리가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부터 밝혀야 할 필요가 있겠군.”


겉보기엔 태연자악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지만 눈빛에 어린 경계를 느끼지 못할 만큼 샴페인 용병단들은 둔감하지 않았다. 그 중 한 사람은 저릿저릿 할 정도의 살기까지 내뿜고 있었으니 말이다. 휴센은 낭패한 얼굴로 낮게 투덜거렸다.


‘이거 괜한 소동에 휘말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지금까지 수련해온 검사의 감으로 휴센은 저들의 실력이 결코 자신들의 하수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한사람 한사람마다 풍기는 기운이 검술의 상급수련자에게서나 느꼈던 그것과 동일했던 것이다. 

더구나 기사는 곧 귀족이 아닌가! 여러모로 판단해 봐도 자신들이 불리한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좋게 마무리 지을 생각으로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저희는 지나가던 용병단으로, 단지 사냥을 하고 있었을 뿐이니 경계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기사들의 태도는 좀처럼 바뀔 줄을 몰랐다. 오히려 점점 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당황해 하는 휴센에게 말을 건 것은 학자타입의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용병이시라면 길드에서 발급받은 단증을 가지고 계시겠지요. 실례지만 저희가 쉽게 타인을 신뢰할 상황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 여기 있습니다만.”


휴센은 곧 품안에 갈무리 하고 있던 단증을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개인 등급을 알려주는 금패에 소속된 용병단과 길드의 인장이 찍혀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남자와 기사들의 얼굴에 잠깐 감탄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샴페인 용병단의 휴센씨군요. 금패의 용병을 여기서 뵙게 되다니, 놀랍네요. 잠시나마 수상한 인물로 의심을 해서 죄송했습니다. 제 이름은 페리스 입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신분은 밝힐 수 없지만, 여기 계시는 분들과 함께 클모어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저희는 클모어에서 의뢰를 마치고 수도로 돌아가는 중입니다만.”


그때였다. 휴센은 자신을 바라보는 기사들의 눈빛이 갑자기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리더 격으로 보이는 매서운 인상을 가진 남자의 반응이 단연코 돋보였다. 그는 갑자기 다가와 휴센의 손을 움켜쥐었던 것이다. 

휴센은 난생처음으로 사람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다.


“클모어에서 왔다고! 그게 정말입니까?”

“예, 예? 아, 그,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실례지만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옳은지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 쭈욱 가면 클모어가 나오긴 나오는 거요?”


남자는 흥분한 듯,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가며 쓰고 있었다. 설마 길을 잃었던 것일까. 휴센은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글쎄요. 지금 방향으로 계속 가시면 아마도 에른으로 가시게 될 것 같군요.”

“엑? 에른이라면 클모어와는 정 반대쪽에 있는 도시가 아닙니까?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분명 힐튼 산맥을 경유해서 남서쪽으로 왔는데!”

“힐튼산맥? 흐음… 혹시 중간에 동굴을 거치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출구가 여러 군데라서 말입니다. 잘못 나오면 방향이 틀어질 가능성이 높죠. 아무래도 지금까지 계속 동쪽으로 내려오신 것 같은데요. 설마 산맥을 넘으시면서 나침판도 준비하지 않으신 겁니까? 그게 아니라도 해가 지는 방향만 살폈다면 충분히 제대로 가실 수 있었을 텐데. 상당히 운이 나쁘셨던 것 같네요.”

“……”


심장에 비수를 박는 휴센의 말에 알렉은 그대로 쓰러져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어버렸다. 

나침판을 준비하자는 페리스의 말에 문제없다며 행군을 강요한 것은 그였다. 어두컴컴한 산맥 안에서 해가 뜨는 방향 아니냐는 말에 지고 있다고 우기던 것도 그였다. 한마디로 일행들이 정반대의 방향으로 오게 된 것은 모두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죽어라, 이 자식! 너 때문에 지금까지 생고생을!!”

“뭐? 서쪽이 맞아? 내가 아닌 것 같다고 할 때 그렇게 박박 우기더니! 야! 삽 가져와! 이 자식 묻어버려!”

“어디서 낡아빠진 지도 하나 들고 왔을 때부터 이상하다 했어! 이리 와서 다들 밟아!!”

“우와악! 사람을 죽일 셈이냐!”


분노한 동료들의 발길질은 진정으로 매서웠다. 퍽!퍽!퍽! 경쾌한 타작 소리를 외면하며 페리스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샴페인 용병단을 향해 정중히 사과의 인사를 건넸다.


“실례했습니다. 원래 저런 분들이 아닌데…그 동안 스트레스가 심했나 보네요. 하하.”

“아뇨, 재미있는 분들이군요. 클모어로 가실 거라면 이대로 서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오셨던 길을 다시 돌아가셔야 겠지만요. 넉넉잡고 한달이면 도착하실 겁니다.”

“흐음, 그렇군요. 그렇다면 크란 산맥까지는 대충 며칠이나 걸립니까?”

“크란 산맥이오? 아, 혹시 산맥을 넘어 들어가실 생각? 그럼 검문소를 거치는 것보다 열흘이상 늦어질 텐데요. 더구나 지형이 험악하고 복잡해서 나침판이 없으면 정말 방향을 잡기가 힘들 겁니다. 해마다 몇 십 명씩 조난자가 나오는 곳이니까요.”


그의 말에 페리스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침판은 소량 제작인데다, 큰 도시에서만 비싼 값에 팔기 때문에, 도피하는 처지의 그들이 구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추적자들에게 위치가 발각될까봐 일부러 마을을 들리지 않고 숲과 강을 전전하는 상황이 아니던가! 

수도에 있었을 때였다면 정보길드의 도움을 얻었겠지만, 이제와선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던 것이다. 모험을 한다면야 못할 것도 없었지만 눈앞이 캄캄해지는 심정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러나 다음순간 끼어드는 말에 페리스는 한줄기 광명을 받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말았으니-!


“그렇다면 우리를 고용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어차피 지금은 딱히 의뢰받은 일도 없으니. 안 그래요, 휴센? 크란 산맥의 지형은 훤히 꿰고 있잖아요. 안내 정도야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니 의뢰비를 많이 받을 필요도 없구요.”

“헛!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게 말한 사람은 지금까지 계속 무심한 표정으로 대화를 듣고 있던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이었다. 이름이 매튜라고 했던가? 흔히 팀 안에서 가장 어린 사람의 발언은 무시당하기 십상인데도, 돌아보는 용병단의 얼굴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응? 하지만 매튜, 너 승급시험은 어쩌고? 수도에 있는 길드 본부에 가야 승급 시험을 치를 수 있잖아.”

“별로. 꼭 올해 받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보단 곤란한 상황에 처한 분들을 돕는 게 먼저 일 것 같군요.”


여전히 무심한 표정이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배려심이 깊은 것들뿐이었다. 페리스는 어쩌면 저 소년이 생각만큼 무뚝뚝한 성격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얼핏 소년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우리로선 할 말이 없지. 어떻습니까, 페리스씨? 안내만 해드리는 거니 의뢰비는 매끼식사를 책임져 주시는 걸로만 해도 좋은데요.”

“예? 그런 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가 알기로 금패를 가진 용병 한 사람을 고용하기 위해 지급하는 의뢰비는 적게는 몇십 실버에서 시작해서 기본적으로 몇 골드는 가뿐히 상회했다. 뿐만 아니라 쉽게 의뢰를 받아주는 일도 드물어서, 지금처럼 자청해서 의뢰를 수행해 주겠다는 경우는 길드 역사상 몇 번 일어날까 말까한 천문학적인 수치를 자랑하는 일인 것이다.

이 믿을 수 없는 행운에 놀라는 페리스에게 휴센은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사실 일행의 부주의로 경비를 전부 잃어버렸거든요. 보다시피 식사 때마다 이런 식으로 자급자족 하는 형편이라, 매튜의 일만 아니었다면 진작 클모어로 돌아가서 적당한 의뢰인을 알아보고 다녔을 겁니다. 마침 녀석이 상관없다고 하고, 페리스씨도 곤란하신 것 같으니 겸사겸사 가는 거지요. 그런 걸로 의뢰비를 챙겨 받을 순 없잖습니까?”

“아, 이렇게 고마울 데가…”


사실 알렉들로서도 용병을 고용해 보겠단 생각을 아주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용병이란 원하는 만큼의 돈만 쥐여주면 의뢰인이 누구인지, 무슨 사정이 있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기사들의 안내인으로서 가장 탁월한 존재인 셈이었다.

하지만 도망 다니기도 바쁜 와중의 그들이 용병을 고용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 이사나와 헤어질 당시, 정령왕 엘퀴네스로부터 몇 달은 거뜬히 버틸 수 있을 정도의 돈은 받긴 했지만, 이번 클모어로 가는 길에 충당할 식량을 사는 것으로 전부 소비했던 탓에 사람을 고용할 여유가 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었던 만큼, 페리스는 결코 거절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두 팔 벌려 환영해야 한다면 모를까.


“저로서는 상당히 기쁜 제안입니다만.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군요. 혹시 짐작 하셨을 지도 모르지만, 저희 사정이 좀 곤란한 편이어서…”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편한 길을 놔두고 일부러 험한 길을 택하는 사람치고 사연이 없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앞으로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저희들은 못 본 걸로 하겠습니다. 단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요.”


이보다 더 완벽한 대답은 없다, 라는 것이 페리스를 포함한 기사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불안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혹시나 대공이 보낸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갈 길을 몰라 방황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나 안내인을 자청하는 용병단이라니, 우연치곤 지나치게 좋은 타이밍이 아닌가. 기쁜 미소를 드리우는 것과 달리 페리스는 속으로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친위기사단들의 실력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조심해야겠군. 아무리 소드 익스퍼드의 실력이라도 기습에는 도리가 없으니 말이야.’


문득 고개를 든 그는 또 다시 매튜란 이름의 소년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무심하리만치 고요한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마치 광활한 대지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는 것이었다. 

청명한 하늘과 그 아래 끝없이 이어져 있는 거대한 대지의 운동. 쉴 새 없이 돌고 도는 위대한 자연의 섭리!

그곳에서 페리스는 아주 볼품없는 작은 생명체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숨조차 쉬기 힘들만큼의 압박감이 그의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허억!!”

“어이, 페리스? 갑자기 왜 그래? 이봐!”

“무슨 일이야? 설마 발작이라도 있는 건가?”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동료들이 서둘러 다가왔지만 누구도 원인을 알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 분주한 상황에서도 페리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소년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소름끼치도록 낮은 목소리와 함께.


<너무 예민한걸. 엘퀴네스가 도와준 부작용인가? 친화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져 버렸네. 앞으론 기운 컨트롤에 신경 좀 써야겠군> 

“!!!”


그 순간 온몸을 억압하고 있던 알 수 없는 무형의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억눌려있던 숨이 한순간에 터져 나오자 그는 급하게 기침을 내뱉기 시작했다.


“허업! 욱- 쿨럭! 쿨럭! 쿨럭!!”

“어이, 페리스! 괜찮아? 설마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거야?”

“콜록. 하아, 괘, 괜찮습니다. 잠깐 몸이 경직되었던 것 같네요.”

“대체 갑자기 뭔 일이래. 그 동안 너무 무리했던 거 아니야? 그러게 굳이 정찰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고집스럽게 실프들을 불러낼 때부터 불안하더라니.”


걱정스러운 말들이 이어졌지만 페리스의 신경은 온통 샴페인 용병단의 소년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러나 집요하리만치 바라보는 시선에도 소년의 무심한 표정은 조금도 변할 줄 몰랐다. 너무 피곤해서 헛것이라도 봤던 걸까?


‘아냐, 그 생생한 대지의 감각은 분명 꿈이 아니었어. 게다가 엘퀴네스라느니, 기운의 컨트롤이라느니…. 대체 그게 무슨 뜻이었을까? 설마 저 소년이 땅의 정령왕 트로웰이라는?’


바로 그 때, 소년과 시선이 마주친 페리스는 그만 아연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피식 미소 지은 소년-매튜가 한 손가락을 들어 입가에 살짝 가져다 대었던 것이다. 저것은 어딜 봐도 ‘비밀 지켜!’의 포즈가 아닌가!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는 언젠가 보았던 정령왕 트로웰에 대한 기록이 스쳐지나가고 있었으니!


『땅의 왕을 만났을 때에는 그 생각을 조심하라. 그와 마주치는 순간부터 이미 네 머릿속은 그의 지배 하에 속함이니, 어설픈 속임수로 화를 당하지 말지어다.』


‘분명 땅의 정령왕은 타인의 마음을 투시하는 능력이 있다고 했었지. 아하하…그럼 정말로 트로웰님?!’


대체 정령왕이 무슨 일로 이런 곳에서 돼지나 잡고 있는 거냐~! 페리스는 그야말로 눈앞이 아득해 지는 것을 느꼈다. 

이로서 한 가지는 확실해 졌다. 샴페인 용병단은 절대로 대공이 보낸 수하들이 아닌 것이다. 
설마 그는 이 간단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정체를 밝혔던 걸까? 그것은 앞으로 페리스가 풀어야만 할 숙제였다.

 

 

“예? 대공 쪽에서 움직임을? 에이프릴 누님을 어쩐다고요?”


알폰프 제국에 도착하기 보름을 앞둔 어느 날. 후작이 건네준 통신구로 클모어와 연락을 시도한 이사나와 우리는 뜻밖의 사실을 전해 듣고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선언하고 있지만 어딜 보아도 대공파임이 ‘확실한’ 클란 백작의 큰 아들이 에이프릴을 향해 청혼을 했다는 것이다.

사실 말이 좋아 청혼이지, 보내온 편지의 내용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에이프릴을 내 주지 않으면 대공에 대한 반역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클모어에 군대를 집합시키겠다는 것이 아닌가. 

설마 대공이 낌새를 느끼고 먼저 선수 치려는 건 아니겠지? 우리들의 얼굴은 볼품없게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형님? 에이프릴 누님은 뭐라고 하던가요?”

&lt;계획이 빨리 진행되는 한이 있더라도 안 될 말입니다, 폐하. 하필이면 클란 백작의 큰 아들이라니오! 무능력에 패륜아로 유명한 자가 아닙니까! 그런 녀석에게 소중한 누이를 줄 오라비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에이프릴은 지금 며칠 째 울고만 있습니다.&gt;

“형님의 마음 이해합니다. 일단은 클란 백작의 아들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아보십시오. 대공이 뒤를 봐주는 자라면 뭔가 의미가 있을 테니까요. 이왕이면 제가 돌아갈 때까지 미뤄두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것이 무리라면 형님 뜻대로 일을 진행시켜도 탓하지 않겠습니다.”

&lt;최대한 시간을 벌 예정이지만 가능하려는 지. 클란 백작의 아들놈이 아주 기세가 등등해져서 며칠 내에 방문할 것을 통보해 왔습니다. 일단은 두고 보겠습니다만…참지 못하고 일을 벌이더라도 용서하십시오, 폐하.&gt;


같이 있던 시간을 얼마 되지 않았지만, 후작이 여 동생을 얼마나 끔찍이 생각하는지 모르는 이는 우리 중 아무도 없었다. 라피스가 접근할 때만 해도 눈빛이 시퍼렇게 변해서 안절부절 하지 않았던가. 헉? 라피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괜찮은 건가?


“!!”


아니나 다를까. 평소 투덜거리는 일이 잦아도 좀처럼 화내는 일이 없었던 라피스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노려보는 붉은 안광은 금방이라도 불이 튀어나올 것 같이 이글거렸고, 여유 있게 팔짱을 낀 것과 달리 그 팔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한마디로 폭발하기 일보직전인 상태였던 것이다.


“헉, 라피스…괜찮아?”

“안 괜찮다면?”

“어이어이. 일단 진정을 해. 네가 여기서 화내봤자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다고 클란 백작의 아들이란 녀석이 무서워 할리도 없… 에? 클란 백작?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다?”


정령왕이 된 이후 기억력이 좋아진 탓인지 어디서 언뜻 들어본 듯한 이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러자 막 통신을 끝내고 돌아서던 카이씨가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 아닌가.


“클란 백작이라면 우리가 클모어에 도착하기 직전에 거쳤던 도시 할버크의 영주입니다. 왜, 그때 케르베로스가 나타났던…”

“헉! 그럼 그 큰아들이란 녀석이 설마, 그때의 그 변태귀족??”

“맙소사.”


이사나와 나는 동시에 이마를 짚고 아득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하고 많은 귀족 중에서 어찌 그 변태귀족이 마수를 뻗쳐온단 말인가! 그러자 이 의미심장한 포즈(?)를 본 라피스의 미간이 꿈틀- 움직였다. 


“변태귀족이라니?”

“아, 그, 그런 게 있어. 인상도 나쁘고 야비한 성격이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인간이었는데…하필 이런 식으로 다시 그 이름을 언급하게 될 줄이야.”

“그런 녀석한텐 절대로 누님을 줄 수 없어! 다시 형님께 통신을 드리겠어. 어떤 강경한 대응을 해서라도 이 결혼 막을 거야.”


평소와 다르게 씩씩거리는 이사나 또한 그때 입었던 수치심을 잊지 못하는 듯 했다. 자신 때문에 일행이 곤란한 일을 겪었다며 얼마나 죄책감을 느꼈던가. 

그 순간 당장이라도 다시 클모어에 통신을 넣을 듯한 녀석의 움직임을 막은 건 다름 아닌 라피스의 한마디였다.


“그럴 것 없어. 내가 직접 간다.”

“뭐? 라피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헉.”

“라피스님??”


웬 환청을 들었나 싶어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우리들에게 라피스는 또박또박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직접 간다고. 가서 그 클란 백작의 아들인지 변태인지 하는 놈을 친히 응징해 주고 오겠어. 감히 내 것을 넘본 녀석을 내버려둬서야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

“에이프릴양이 대체 언제부터 네놈 것이…아니, 그건 둘째 치고. 그럼 던전엔 우리끼리 가란 말이야? 한사람이라도 아쉬운 판에 네가 빠지면 어떡해!”

“그건 정말 곤란한데요, 라피스님. 아무리 엘님이 계시다곤 하지만 던전 안이 어떤지도 모르는 판국에 중요 전력이 빠져버리면…”

“굳이 라피스님이 가지 않아도 되잖아요. 부끄러운 말이지만 우리들로서는 엘의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다들 한마디씩 늘어놓으며 어떻게든 녀석을 설득하려 했지만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한 번 마음의 결정을 지은 라피스는 끝까지 자신이 직접 클모어로 가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선실 안에 묘한 대치가 이루어지자 그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넉넉잡고 이주일이야. 이 배가 제국에 도착하려고 해도 앞으론 보름은 더 가야할거고. 도착하고 나서도 바로 던전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잖아? 그때까진 돌아올 수 있을 거다.”

“에이프릴이 무섭다고 가지 말라고 매달리면 안 올 거면서.”

“그거야 그럴지도 모르지만. 엘, 일단 나도 유희를 즐기도록 해달라고. 드래곤은 꿈을 꾸는 종족이야. 그 안에 로맨스가 빠진다면 말이 되겠어?”

“허허. 그래서 이번 꿈은 백마 탄 기사인가 보지? 공주님을 위기에서 구출하는?”


비꼬듯이 말하는 말에도 녀석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전혀 창피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렇게 되고나면 할 말 없는 쪽은 오히려 우리가 되는 셈인가? 

가지 말란다고 안갈 녀석이 아닌지라 차라리 곱게 보내주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허락하는 말을 내뱉었다.


“마음대로 해. 하지만 되도록이면 돌아오는 방향으로 결정해줬으면 좋겠어. 너도 알다시피 던전에 가는 것은 ‘우리’ 뿐만이 아니잖아?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았지만 신경 쓰인다고.”


여전히 주변에서 알짱거리는 기운을 가리키며 말했더니 라피스 역시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생각해 보지’라는 한마디를 남긴 채 그대로 파앗- 텔레포트를 하며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 성질도 급한 녀석 같으니!!


“……”

“……”


순간에 찾아온 정적. 남겨진 우리 세 명은 연신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의 일정을 다시 짜기 시작했다. 

그렇다 보니 아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마법 항목에 대한 모든 공력 및 저항력이 완벽하게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손해가 커도 너무 컸다.


“미운 짓만 하는 놈이었지만 능력 면에선 쓸모가 많았는데. 하아, 앞으론 좀 힘들어 질지도 모르겠는걸.”

“저어, 그보다 더 큰 현실적인 문제가 있는데요, 엘님.”

“네? 무슨?”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드니 그곳엔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이 된 카이씨가 앉아있었다. 라피스가 ‘떠난다’고 선언했을 때도 약간 난처한 기색만 있었을 뿐, 별달리 동요하지 않았던 그가 아닌가! 

아무래도 단단히 중요한 일인 것 같아 나와 이사나는 덩달아 긴장하기 시작했다.


“알폰프 제국에서 써야할 물품과 경비…라피스님이 보관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헉”

“…선실에 제공되는 모든 음식은 유료입니다만, 이제부터 우리는 굶어야 하는 걸까요?”

“……”


그랬다. 나야 안 먹어도 상관없는 몸이지만 평범한 인간인 두 사람은 매끼 식사마다 먹어야 살아갈 수 있었다. 아무리 나에게 정령계에서 가지고온 꽃잎들이 있으면 무엇 하겠는가. 사방에 바닷물뿐인 배 안에서 마땅히 돈으로 바꾸어줄 만한 곳이 있을 리 만무한 것을. 

그렇다고 내다팔면 족히 몇 십 골드를 받을 수 있는 물건으로 달랑 음식만 사먹을 수는 없는 일. 거스름돈이야 안받을 수는 있다 쳐도 그 보석으로 인해 배에서 벌어질 파란까지 감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라피스 이 자식! 나중에 두고 보자!!’


바야흐로…일행의 생계를 책임질 위에 빠지고만 나였다.

 

***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날부터 우리 식단에 올라온 메뉴는 전부 해산물과 생선이었다. 바다에서 구할 음식이란 게 한정되어 있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것도 종류별로 하다보니 대충 먹을 만 했던지 두 사람의 불만은 없었다. 

대충 바다 속에서 건져 올린 돌덩이로 자리를 만들고 그 아래에 불의 중급 정령인 샐러맨더를 앉힌(?)다음, 그 위에서 요리를 하는 식이었는데, 이것도 하다보니 나름대로 재미있다. 뭐, 직접 먹어야 하는 두 사람의 심정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맛있습니다. 대륙에선 생선이 귀해서 맛보기 힘들었는데, 요새 엘님 덕에 호강하는 기분이네요. 정령왕이 직접 바다에서 잡아 올린 싱싱한 해산물과 고기를 먹어본 사람은 아마 저희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벌써 며칠째 생선만 인데 질리지 않아요?”

“아니오, 괜찮습니다. 엘님께서 매끼마다 바다에 들어가시는 수고도 마다하시는데, 불만이 있을 리가 없죠.”


그러면서 생긋 웃은 카이씨는 오히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 왔다. 하급 정령들에게 시켜도 될 일을, 좀 더 좋은 음식을 먹이고(?) 싶다는 생각에 직접 바다에 들어가서 잡아오는 내 남모를 노력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날도 평소처럼 물고기를 잡기 위해 갑판에 나와 있을 때였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시각은 다들 잠들어있는 늦은 새벽이기 때문에, 자연히 내가 활동하는 시간도 그 시각에 맞춰져 있었다. 

오늘은 어떤 물고기를 잡을까, 속으로 중얼거리며 막 바다 속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언제 나와 다르게 갑판위에 사람들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 중 한명은 나에게도 낯익은 녀석이었다. 

작은 체구에 인간과 다른 뾰족한 귀. 바로 사기 치는 엘프-엔딜이었다.


‘그동안 통 안보여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이런 새벽에 무슨 일로 나온 거지?’


나는 아직 그들이 나를 발견하지 못한 것을 틈타, 얼른 선박 뒤로 몸을 숨겼다. 하나같이 심각한 얼굴들이 금방이라도 중요한 대화를 나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엔딜과 함께 있는 인간들은 모두 덩치가 크고 우람한 체구였는데, 조금은 껄렁거리는 듯한 태도가 불량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닌 듯, 그들을 바라보는 엔딜의 표정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왜 자는 엘프를 깨우고 지랄이야! 난 할말 없다고 했잖아.”

“킥킥. 아니지, 엔딜. 넌 할말이 없어도 우린 할말이 있거든. 이제 슬슬 줄 때가 되지 않았나? 조금만 더 가면 제국에 도착하는데 언제까지 모른 척 할 셈이야?”

“제기랄. 니들도 봤잖아. 이번 수입은 꽝이었다고. 빌어먹을 정령사 때문에 손님을 전부 놓쳤단 말이야! 한 푼도 없어.”

“그건 네 사정이지. 여기서 마음 놓고 장사할 수 있는 게 누구 때문인지 잊었어? 그리고 없을 리가 없잖아? 네 주머니에 돈이 들어있는걸 난 이미 알고 있는데.”


느긋하게 건네는 말에 엔딜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녀석은 마치 빼앗길 새라 품을 끌어안은 채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건 안돼! 세실의 약값이란 말이야! 그 앤 하루라도 약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고!”

“글쎄, 그건 네 사정이라니까? 우리로선 매달 받아야 하는 납부금을 꼭 챙겨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맞아, 맞아. 엔딜. 너도 그 동생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에 배타고 돌아다니는 거 힘들지 않냐? 그만두고 엘프 마을로 돌아가는 게 더 편할 것 같은데 말이야.”

“씹! 뭐가 어쩌고 어째?”


엔딜의 눈꼬리가 바싹 치켜 올라갔다. 거기에서 한 마디만 더 하면 절대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상대편 남자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낄낄거렸다.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잘 생각해보라구. 벌써 이게 몇 년 째냐? 이제 피곤할 때도 되지 않았어? 어차피 네 동생이란 것, 반쪽만 같은 거잖아. 그 앤 몰라도 넌 엘프의 숲에 돌아갈 수 있을 텐데? 고귀하신 하이엘프가 이런 곳에서 고생하는걸 보니 마음이 아파서 그렇지. 킥킥”

“나 화낼 거다. 거기서 더 이상 지껄이지 마.”

“오오, 무서운데? 어차피 비밀도 아니면서 무슨. 엔딜의 여동생인 세실이 사실은 인간과 섞인 하프엘프이고, 그 때문에 마을에서 추방당했다는 거.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유명한 얘기 아니야? 사실대로 말해봐, 엔딜. 그 희귀병이라는 거. 부모가 저지른 금단의 사랑으로 인한 저주 같은 건 아니냐? 크하하핫!”

“죽여 버리겠어!!!!”


그 순간 분노한 엔딜 녀석이 막무가내로 덩치 큰 남자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악다구 있는 돌진과 다르게 그 움직임은 맥없이 한사람의 손에 잡혀 간단히 억압되고 말았다. 

뒤틀린 손목의 아픔으로 인한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퍽-이어지는 짧은 타격음. 눈 깜짝할 사이에 엔딜의 몸은 어느새 저만치 구석으로 처박혀 있었다.

쿠웅! 그와 동시에 웃고 있던 남자들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불쌍한 녀석. 그 자랑하던 정령술도 더 이상 못쓰게 되었으니 이젠 어딜 가서 약값을 벌까나? 신파 그만 찍고 이 형님이 충고해 줄때 잘 귀담아 들으라고. 세실은 가망 없어. 백날 약으로 처발라봤자 죽는 기간만 늦출 뿐이야. 그러니 그나마 몸 성히 움직일 수 있을 때 엘프의 숲에 돌아가라는 거다. 킬킬.”

“맞아, 맞아. 넌 이제 날씨도 읽지 못하게 됐잖아? 엘프 따위를 고용해 줄 정도로 마음씨 좋은 사람은 없다고.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걸? 이러다간 세실도 너도 사이좋게 세상 하직 할 거라고.”


뭐? 정령술을 못쓴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그 사이에 계약을 해지라도 한건가?

전혀 뜻밖의 이야기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나 서둘러 살펴본 녀석의 이마에는 여전히 흐린 듯한 시큐엘의 문장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때 마침 몸을 일으키고 있던 엔딜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시끄러! 죽기는 누가!! 그따위 망발 입에 담기만 해봐! 죽어도 가만히 안 둘 테니!”

“헤헤, 여전히 씩씩하구만. 그런데 정령도 못쓰는 녀석이 우리를 어떻게 가만히 안 둘지 모르겠네? 설마 그 비리비리한 몸으로 덤벼보겠다고? 그러다 지금처럼 또 쓰러지기나 하지.”

“킥킥킥. 주제도 모르는 놈. 이봐, 엔딜. 충고할 때 정신 차리라고. 이 세상에 널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말이야. 엘프들도 네 녀석이라면 치를 떤다는 사실을 모를 줄 알고?”

“크윽!”

“아무튼 도착 할 때까지 돈 마련해 놔. 동생의 약값이든 뭐든, 정해진 수금은 지켜야 하지 않겠냐? 지금 당장이라도 연락만 하면 네놈의 동생 따윈 한순간에 운명을 달리 할 수 있다는 거 모르진 않겠지?”

“이 치사한 자식들!!”


설마 협박이라도 당하고 있었던 걸까? 바락바락 소리치면서도 차마 덤벼들지 못하는 엔딜의 모습을 보면서 난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이게 바로 시큐엘이 말했던 그 ‘어쩔 수 없는 사정’일지도 모른다고.


‘바보 녀석.’ 


갑자기 사라져 버린 정령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마에 남아 있는 상급 정령의 문장을 볼 때부터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진정 저 녀석을 사위로 맞이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였다. 

쿠우우웅!!!

커다란 소리와 함께 선박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갑판에 나와 있던 나와 엔딜들은 물론, 자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까지 전부 다 깨울 정도로 엄청난 진동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시퍼렇게 얼굴을 굳힌 선장과 선원들이 서둘러 붉을 밝히며 사태를 알아보기 위해 애를 쓸 무렵, 쿠우웅 하고 한차례 진동이 더 일어났다. 그 바람에 균형을 못 잡고 넘어진 사람들은 곧 물 위로 떠오르는 거대한 형체를 보고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우와아앗! 이게 뭐야!!”

“괴, 괴물이다아!!!”

“으아아아악!!”


소름끼칠 정도로 붉은 세 개의 안광과 뱀을 연상시키는 미끄러운 동체. 낼름거리는 기다란 혀 위에서 날카롭게 번뜩이는 송곳니. 

‘맙소사!’


항해 전 선장이 그렇게도 두려워했던, 바다괴물이 출현하는 순간이었다.

 

 

 

“말도 안 돼! 어째서 바다괴물이? 말을 싣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신이시여…”


뒤늦게 깨어난 사람은 물론 선장과 선원들은 모두 갑판위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산처럼 거대한 괴물의 모습에 질린 나머지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긴, 바다 한가운데서 도망쳐봤자 얼마나 도망갈 수 있겠냐 만은.

잠시 후, 손님들 중에서 몇몇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다가와 선장의 멱살을 잡아 올리기 시작했다. 


“지금 신이나 찾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저 괴물은 뭐야? 왜 바다 속에서 저런 게 나오냐고!!”

“바, 바다괴물이오. 이곳 카리프 해(海)에 출몰하는 몬스터라고 알고 있소. 심해 속에 깃들다가 가끔 배고플 때만 모습을 드러내곤 하는데, 설마 이렇게 나타날 줄이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방법을 찾아내란 말이야, 방법을! 이대로 전부 죽을 셈이야?”


격하게 소리친 사람들은 선장의 얼빠진 얼굴을 보고서는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다 갑판 구석에 처박혀 있던 엔딜을 발견하곤 만연에 화색이 되어 소리쳤던 것이다.


“아, 그래! 저 엘프 녀석 텔레포트 스크롤을 가지고 있었지!”

“오옷! 진정 이런 곳에서 죽으라는 법은 없군! 이봐, 스크롤을 내놔! 돈은 달라는 대로 줄 테니!”

“나도!!”

“나도 하나 줘!”


웅성 웅성, 시끌 시끌.

순식간에 우르르 몰려든 남자들은 엔딜이 직접 꺼내주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억지로 강탈하다시피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항할 거란 생각과 달리, 엔딜은 멍한 시선으로 괴물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엔딜? 대체 무슨…’


녀석의 두 눈동자에 담겨 있는 감정은 분명 체념이었다. 그 모습에 의아한 기분이 든 것도 잠시, 이후에 벌어지는 상황에 나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엔딜에게서 빼앗은 종이를 열심히 찢던 사람들이 곧 당혹한 얼굴이 되어 비명을 질렀던 것이다.


“와앗! 이게 뭐야! 텔레포트 스크롤이 아니잖아! 왜 이동하지 않는 거야!!”

“내 것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나도 마찬가지야!”

“이 자식!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잔뜩 성난 얼굴을 한 남자가 우왁스러운 손으로 엔딜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체구가 작은 녀석은 곧 볼품없이 몸이 들려 그대로 목을 죄일 수밖에 없었다. 콜록- 낮은 기침을 깨끗하게 무시한 남자는 험악하게 소리쳤다.


“사실대로 말하지 못해?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야!”

“킥- 보면 몰라? 그게 가짜라서 그런 거지. 바보들 아냐? 진짜 텔레포트 스크롤과 가짜도 구별 못해?”


분명 숨을 못 쉬어 괴로울 텐데도 엔딜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비웃는 듯이 입 꼬리를 치켜 올리는 것이 아닌가. 자조적인 목소리가 녀석의 억눌린 입에서 흘러나오자 멱살을 잡고 있던 남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가짜 스크롤이라니!!


“너, 너 이 새끼! 감히 우리를 속여? 이건 고발하면 당장 지하 감옥행이라고!!”

“미친 놈. 어차피 태풍이 부나, 몬스터가 나타나나, 죽으면 말짱 끝인데 고발은 무슨 고발? 그래봤자 죽고 나면 속았다고 하소연할 곳도 없잖아? 이걸 두고 완벽한 증거인멸이라고 하는 거지.”


싸늘하게 대꾸하는 말에 남자는 물론,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 때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격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이, 이 망할 엘프가!! 오냐, 그래! 그렇다면 네가 쓸 스크롤은 있겠지! 당장 그것이라도 찾아서-!!”

“없어.”

“뭐, 뭐?”

“없다고. 약값 벌기도 빠듯한 내 형편에 스크롤은 무슨? 의심나면 한번 찾아보든지. 아마 백날 뒤져도 안나올걸? 사실 그동안은 시큐엘이 있었기 때문에 바다 한 가운데 빠져도 안심이었거든. 그런데 운도 더럽게 없지. 몇 주 전부터 소환이 안 되대? 뭐, 결국 다 사이좋게 죽는 거지. 그래도 다행이야. 안 그래? 저승길 동무가 이렇게 많으니 죽을 때 외롭지는 않을 테니까”

“이 빌어먹을 자식! 웃기지마! 누가 너 따위와!!”


킥킥거리며 중얼거리는 엔딜의 말에, 멱살을 잡고 있던 남자는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만졌다는 듯 혐오서린 표정으로 녀석을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거친 기침을 내뱉고 있는 녀석의 작은 몸을 사정없이 걷어차는 것이 아닌가!


“이 자식! 여기서 바로 죽여주마!”


쿠우우웅- 그때 또다시 괴물 녀석의 거대한 꼬리가 선체를 흔들었다. 그 바람에 엔딜을 걷어차던 남자의 몸이 주욱 미끄러지며 바닥을 뒹굴자, 그때서야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한 사람들은 녀석을 향해 화내던 것도 잊고 다시금 선장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이보시오! 선장! 어떻게든 해보란 말이오!”

“배를 돌려! 도망치란 말이야!!”

“젠장! 이런대서 죽을 순 없어! 없다고!!”

“진정, 진정하십시오, 여러분! 소란을 피우면 괴물이 흥분합니다! 모두 진정하세요!”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그들 모두 볼품없이 추욱 늘어진 어린 엘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투였다. 생존본능이란 것은 때론 사람을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몰고 가는 것이다.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는 틈을 타 나는 얼른 엔딜에게 달려가서 부축했다. 남자에게 맞은 데다 아까 배가 흔들릴 때 구른 탓인지 녀석이 몸 여기저기에 얼룩덜룩한 상처가 나 있었다.


“이봐, 괜찮아?”

“쿨럭, 상관 말고 꺼져. 어차피 발악해 봤자 소용없다구. 이런 바다 한 복판에서 어떻게 도망칠 수 있다는 거야? 추잡하다고 이런 거. 죽으려면 깨끗하게 죽는 게 낫지.”

“그 무슨 인생 다 산 듯한 소리야? 아직 괴물이 배를 부순 것도 아니잖아.”

“하, 녀석은 그저 가지고 놀고 있을 뿐이야. 빌어먹게도 내겐 들리거든. 저 녀석은 지금 이 배를 어떻게 가지고 놀까 궁리하고 있어. 이제 곧 본격적인 요리에 들어갈걸? 배가 많이 고픈 모양인데, 누가 가장 먼저 괴물의 입 속에 들어가게 될까? 킥킥.”


혹시 아까 발로 걷어차일 때 머리라도 맞은 건 아닐까? 녀석의 웃는 얼굴을 보며 나는 심각하게 고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라도 멀쩡하게 웃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본다면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걸? 

그랬다. 엔딜은 울고 있었던 것이다. 유쾌하게 떠드는 입과는 전혀 다르게 녀석의 두 눈에서는 구슬픈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곤 반쯤 실성한 듯한 얼굴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내가 죽으면 세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

“이럴 줄 알았으면 약값으로 모은 돈으로 맛있는 거나 잔뜩 사주는 건데. 그렇지 않아도 몸이 말라서…안쓰러운 녀석이었는데. 내가 죽으면 세실은 정말 혼자가 될 텐데. 나처럼…길동무로 끌고 갈 녀석도 없이 정말 혼자서 죽게 될 텐데.”

“야, 너 지금 무슨 소릴…”

“정령왕 엘퀴네스를 알아?”

“!!”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갑자기 튀어나온 내 이름에 나는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것도 잊을 정도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런 내 모습을 녀석은 여전히 눈물을 가득 담은 눈동자로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하긴. 모를 리가 없지. 너 역시 물의 정령사였지? 엘퀴네스는 물의 정령왕이잖아. 온 세상의 물을 다스리는 멋진 정령왕, 그에게 걸리면 저런 괴물 따윈 한 주먹감도 안 될 테지. 어때? 너도 그 분을 소환하는 게 꿈 아니야?”

“그, 글쎄?”

“흐음. 뭐,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찌됐든 나는 그분을 존경하고 있으니까. 시큐엘을 소환했을 때는 당장이라도 엘퀴네스님의 소환도 가능할 줄 알았지. 하지만 안 되더라? 엘프는 조화의 종족이라 세상의 균형을 깨트리는 행동은 할 수 없다는 거야. 정령왕의 소환은 그만큼 기적 이라는 거지. 그런데…인간은 가능하다고 하더군.”

“뭐, 나도 그렇다고 들었다만. 지금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괴물의 혀가 바로 코앞에서 날름거리고 있는데도 녀석은 잘도 태평한 얼굴이었다. 엔딜은 무언가 꿈을 꾸는 듯한 멍한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인간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엘퀴네스님이라면 세실의 병을 고쳐주실 수 있을 거야. 그걸 위해서라면 내가 어떻게 되도 상관없었는데 말이지. 그런데 아예 시도조차 불가능 하다니…이걸 바로 불공평 하다고 하는 걸까?”

“……”

“우습지 않아? 엘프들은 말이야, 은연중에 인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스스로를 정령의 친구라고 자청하며, 마치 종처럼 그들을 부리는 인간의 행동을 비난하곤 해. 그런데 막상 ‘세상을 바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건 엘프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거지. 그걸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냐니…. 지금 내가 여기서 인간 애찬론이라도 펼쳐주리?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엔딜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또다시 킥킥거리고 웃었다. 


“처음엔 이해를 못했는데 말이야, 어머니가 인간에게 반했던 이유도 그런 게 아닐까 해. 그리고 세실은 그 기적의 피를 반이나 가진 존재인 거지. 그러니…결코 하등한 존재가 아니란 말씀! 누구도 그 앨 천하다고 비난할 자격이 없단 말이야.”

“동생이 인간과 혼혈인가 보지? 아까부터 듣자니 약값을 번다느니, 엘퀴네스라면 고칠 수 있다느니…어디가 많이 아프기라도 한거야?”


내 물음에 엔딜은 힘없는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다.


“하루 종일 침대에서 일어나질 못해. 몸에 열도 없고 신체에 아무 이상도 없는데 말이야. 그나마도 약을 먹지 않으면 눈도 뜨지 못하더군. 매일 꼬박꼬박 챙겨줘야 하는데, 보다시피 이런 상황에 이르렀으니 다 틀린 거지 뭐. 결국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게 된 셈이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죽고 나서 다시 만날 수 있긴 한 걸까?”

“쯧, 궁상떨지 마. 죽긴 누가 죽어? 저까짓 괴물, 좀 힘들긴 해도 상대 못할 정도는 아니야. 시큐엘 몇 마리면 충분하다고.”

“그래? 하긴, 그렇겠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마찬가지야. 사람들을 속인 게 들켰으니 난 도착하고 나면 틀림없이 지하 감옥에 가게 될 테니까. 이래저래 세실을 챙겨줄 존재는 없어지는 셈이지. 나로선 여기서 죽는 게 오히려 더 편할 것 같은데? 고문당하다 죽는 건 사양하고 싶거든. 지하 감옥의 고문은 끔찍하다고 들었어.”


…할 말 없다. 이 엘프놈의 자식! 속속들이 옳은 말을 해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바로 그때, 배에 붙어있던 괴물 녀석의 몸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쿠우웅! 거대한 진동과 함께 깃발을 지탱하고 있던 기둥 하나가 우지끈 부서지더니, 사방으로 나무의 파편이 튀었다. 
커다랗게 벌려진 괴물의 입 안에선 덩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음의 울음소리가 마치 비명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삐이이이익---!!”

“으아아아악!!”

“사, 살려줘!”


소리를 이용한 공격 방법인걸까? 괴물의 울음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귀를 틀어막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그대로 입에 거품을 물며 기절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귀에서 피가 흘러나오는걸 봐선 아마도 고막이 터진 것 같았다. 

엔딜 역시 마찬가지로 귀를 부여잡고 신음을 내뱉었다. 이 중에서 멀쩡한 존재가 나밖에 없는 걸 보면, 정령에게는 통하지 않는 공격인 모양이다.


“크, 크으윽!”

“엔딜! 괜찮아?”

“너, 너는 대체 어떻게 멀쩡, 악! 귀- 귀가 아파!!”


설마 이사나와 카이씨도 이런 상태인 걸까? 갑판위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 봐선 선실에 있는 게 틀림없었지만 나는 슬며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단은 저 괴물 놈부터 처치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놔두기엔 엔딜의 상태가 심각해 보였기에, 나는 서둘러 녀석의 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크윽, 뭐, 뭘 하려는…”

“조금만 참아. <회복>”


파앗-

엷은 흰 빛 덩이가 손에서 뿜어져 나오자 방금 전까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엔딜의 얼굴이 서서히 안정되었다. 찰나의 시간 후, 녀석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지, 지금 뭘 한거야?”

“보다시피 치료했는데.”

“뭐? 하지만 너는 정령사잖아. 정령사가 사람도 치료할 수 있는 거야?”


글쎄다. 내가 알기론 꽤나 어려운 일이라고 알고 있는데 말이지. 

정령들의 능력이 여러 면에서 쓸모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사람을 치료하는 능력이 부여된 건 오로지 물의 정령왕인 나뿐이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정체를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변명하듯 대답했다.


“흠, 일단은 신관과 겸업(?)을 하고 있다고 해두지.”

“뭐야, 그 어설픈 대답은? 내가 바본 줄 알아? 정령사와 신관은 서로의 마나패턴의 현저히 다르기 때문에 두 가지를 함께 배울 수 없다는 건 기본 상식 중에 상식이라고!”

“뭐, 아무렴 어때.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도 있는 거지. 정령왕도 소환하는 마당에 두 가지 능력을 사용하는 것쯤이야. 이것도 기적의 일부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그걸 지금 핑계라고! 솔직히 말해! 너 대체 정체가 뭐…”


쿠우웅-!!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바다괴물!!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 배 때문에 중심을 못 잡고 쓰러지는 엔딜을 얼른 붙잡아 앉히면서,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이 난감한 상황을 벗어날 완벽한 핑계거리를 잡았으니 어찌 아니 기쁠 쏜가! 그러자 피식거리는 내 얼굴을 본 엔딜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이익! 어째서 너는 배가 이렇게 흔들리는 데도 멀쩡한 거야!”

“대화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지금은 저 괴물부터 처리하는 게 순서인거 같은데?”

“알았으니까 마음대로 해. 그래봤자 나는 도움도 되지 않을 테니. 잘나신 너랑 달라서 나는 있던 정령도 소환 못하게 된 처지거든.”


비꼬듯이 내뱉는 말과는 다르게 녀석의 얼굴은 씁쓸한 빛을 잔뜩 드리우고 있었다. 아닌 척 해도 시큐엘을 소환 못하게 된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그것을 곁눈질로 힐끔 바라 본 나는 애써 못 본 척 무시하면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배를 부수려는 바다괴물을 향해 돌아섰다.


‘완전히 엉망인걸.’


솔직히 말해 갑판은 이미 손쓰기도 힘들만큼 망가진 상황이었다. 배의 방향을 잡고 있던 키는 물론, 돛대는 이미 훨씬 전부터 망가져 보기 흉하게 나뒹굴고 있는 상태. 

그 중에서는 미처 쓰러지는 기둥을 피하지 못하고 깔린 사람도 있었고, 파편에 부딪쳐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나마 신체 말짱한 사람들도 방금 전 괴물이 지른 울음소리 때문에 바닥에 엎드려져 귀를 부여잡고 있는 상태라, 배 위의 광경은 흡사 생지옥을 보는 듯 했다. 선실 쪽 상황은 가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아마도 이와 별반 다르진 않을 것이다.


‘이사나, 카이씨…괜찮은 걸까? 이럴 때 라피스만 있어줬어도.’


남의 탓 할 처지가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 모든 일은 내가 조금만 더 행동을 빨리 했다면 사전에 막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애초에 선장이 바다괴물 운운할 때부터 경계를 했다면, 처음부터 괴물이 접근하지도 못하게 막을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가 정령왕이라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나와 함께한 일행들에게 부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니, 그보단 자기 살기만 급급한 이기적인 사람들을 조금 혼쭐 내주고 싶었다는 쪽이 옳을 것이다. 흠, 그래도 배가 이지경이 될 때까지 내버려 둔건 좀 너무했나?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지은 나는 곧 2마리의 시큐엘을 불러냈다. 낮게 자세를 낮춘 상태에서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는 녀석들의 모습을 보자니 문뜩 떠오르는 사실이 있어 무심코 입을 열었다.


“어이, 엔딜.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있는데 말이야.”

“…뭐야.”

“증거인멸이라고 하니까 생각난 건데, 그 가짜 스크롤 팔 때마다 일부러 폭풍을 일으켜서 사람들을 죽였던 건가하고 말이지. 만약 그렇다면 정말 시큐엘에게 나쁜 짓을 시킨 거잖아.”

“쳇, 나쁜 짓은 무슨…”


투덜거리듯 대답하면서도 잔뜩 찌푸린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나마 나름대로 양심은 있었던 모양이라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엔딜은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아마도 내가 못 듣기를 바라고 한 말인 것 같지만, 녀석으로서는 불행하게도(?) 정령왕의 청각은 아주 선명하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내게 전달해 주고 있었다.


“가짜 스크롤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나로선 지하 감옥에 갈 감수까지 하고 준비한 거란 말이야. 애초부터 이번 항해엔 태풍을 일으킬 생각조차 없었어. 아무리 내가 최악이래도 살인 따위는 안 해.”

“헤에,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인데? 너 생각보다 쓸모 있는 엘프구나?”

“…젠장…귀 한번 더럽게 밝네.”


당황한 듯 고개를 푸욱 수그리는 엔딜은 목부터 시작해서 귀까지 잔뜩 시뻘개져 있었다. 그것을 쿡쿡 웃으며 바라본 나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괴물을 바라보며 그때까지 대기하고 있던 시큐엘에게 명령했다.


“괴물의 몸을 배에서 떼어내. 가능한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조심하고.”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명령을 받듭니다!


“시큐엘들이 계약자에게 존대말을 하다니?!”


놀란 엔딜을 무시한 녀석들은, 언제나처럼 충실한 모습으로 공중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마치 또아리 트듯 배를 감싸고돌기 시작하는 바다괴물을 떼어내기 위해 합동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촤아악! 콰아앙!! 한 녀석이 괴물의 머리를 붙들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자, 나머지 한 녀석이 솜씨 좋게 등허리 부분을 떨쳐내기 시작했다.

우지끈! 촤악! 콰악! 콰아아아앙!!


“키에에엑!!!”


커다란 물소리와 함께 꿈틀거리는 바다괴물과 시큐엘의 실갱이가 이어졌다. 간신히 고개를 쳐든 녀석이 크게 입을 벌린 것을 본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또 다시 소리 공격을 할 셈이야! 성대를 막아 울지 못하게 만들어!”

-명령을 받듭니다!!


다행스럽게도 시큐엘의 재빠른 행동 탓에 녀석은 삐-소리를 채 지르지도 못하고 입을 막혀 버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촤악, 촤악! 쏴아아! 첨벙 첨벙. 뱀처럼 긴 몸뚱이가 요동칠 때마다 다량의 물이 갑판위로 밀려 들어왔다. 그 바람에 본의 아니게 짠 물을 뒤집어 쓴 사람들의 옅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으으윽! 쿨럭 쿨럭!”

“아, 사- 살려줘…”

‘아차, 사람들을 잊고 있었네. 내 정신 좀 봐.’


나는 또 한 마리의 시큐엘을 불러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을 보호하도록 지시했다. 원래 이런 일엔 운디네를 불러도 상관없었지만, 이번 기회에 얄미운 라피스 자식의 마나를 펑펑 써 줄 작정이었던 것이다. 오늘 어디 탈진 좀 해봐라, 이 나쁜 놈아!!

구으윽!! 구으윽!!

성대를 막힌 괴물은 괴로운 듯 몸을 비틀면서 마치 허파에 바람이 빠진 듯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사정없이 첨벙거리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배를 뒤집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는데, 다른 한 마리의 시큐엘이 몸뚱이를 제압하고 있는 탓에 원하는 바를 이룰 순 없었다. 

그것을 멍하게 바라보던 엔딜은 시간이 지나도 내가 별 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자, 살짝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왜 제압만 해두는 거야? 마나 소모도 만만치 않을 텐데 이쯤에서 그만 끝내지 그래?”

“그럴 순 없지. 목표는 녀석이 탈진할 때까지 마나를 소비하는 거니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아, 그, 그게 아니고. 사실은 저 뱀…맞나? 아무튼 저 괴물의 시체도 팔면 돈이 될까 생각하고 있었어. 상황에 따라 유체를 보존시키느냐, 안되느냐가 결정되거든.”

“시체를…팔아?”


얼떨떨한 듯이 바라보는 엔딜의 표정에 나는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황당한 얼굴을 하는 녀석을 대신해서 대답을 한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한 존재였다.


“호오 안목이 상당히 높으신데요? 저 바다괴물의 본 명칭은 스켈라, 드래곤에 필적하는 두꺼운 가죽은 귀족들이 없어서 못사는 물건이죠. 붉은 눈은 연금술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마법 물품의 재료가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몇 백 골드는 충분히 챙기실 수 있을걸요?”

“오오, 역시 몬스터는 죄다 돈이었…헉! 루카르엠??”


황급히 놀라서 돌아보니 그곳엔 기절한 이사나와 카이씨를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 있는 루카르엠이 서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두 사람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던 나로서는 그대로 눈이 뒤집힐만한 광경이었던 것이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야! 


“아아, 그렇게 노려보시면 저 상처 받습니다. 이건 제가 한 짓이 맞긴 하지만 절대 고의는 아니었다고요.”

“고의는 아니었다?”

“네. 그러니까 사정을 말씀드리자면, 배가 심하게 요동쳐서 선실 안에 있던 물건들이 죄다 엎어졌거든요. 그대로 놔두면 위험할 것 같다 싶어 도와드리려 했더니 잔뜩 경계를 하셔서 말입니다. 괴물이 음속공격을 하는데도 통 협조를 안 하시길래 어쩔 수 없이 얌전하게 만든 결과, 랄까요?”


그러면서 ‘난 아무것도 몰라요’ 표정으로 생긋 웃는 얼굴을 본 나는 그대로 할말을 잃고 말았다. 결과야 어찌됐든, 일단 일행들을 도와준 마족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아니, 이건 오히려…


“고맙습니다, 라고 해야 하는?”

“설마요. 인사를 듣기 위해 한 행동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잘 보이기 위해 미리 포석을 깔아둔 셈 치지요.”


또다시 사람 좋은 얼굴로 이사나와 카이씨를 눕히는 루카르엠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착잡한 심정에 빠지고 말았다. 지금 이 행동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나를 향해 루카르엠은 짓궂은 미소를 띄우며 물었다.


“이래도 역시 일행으로 합류는 안 되는 걸까나요?”

“…본인이 더 잘 알거라 생각하는데요. 오히려 무슨 꿍꿍이인지 저의가 궁금해집니다만?”

“에에, 저의 같은 건 없었는데. 그냥 단순히 구해주고 싶은 마음에도 이유가 필요한 건가요?”

“처음부터 쫓아다니는 의도가 불분명한 존재라면, 없던 이유도 의심해 볼 수밖에 없죠.”

“헉, 의도가 불분명 하다뇨. 이미 말씀 드렸잖습니까? 명령이라 어쩔 수 없다고. 뭐, 그 전에 일단 재미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지만요.”


그다지 신뢰성이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마족이 재미있을만한 상황이란 게 피와 살이 튀기는 전투밖에 더 되겠는가? 나의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본 루카르엠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마치 비밀이야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실 이건 비밀인데 말입니다. 당신을 따라다니다 보면 아무래도 조만간 만나게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만나요? 누구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라 나는 그대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기로 내 주변에 있는 사람 중에서 마족과 친분이 있는 이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던 것이다.


‘아, 맞다. 엘뤼엔이 있었지!’


그라면 평소에 담당하고 있는 마족들이 많으니 어쩌면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루카르엠의 입가에 머문 미소가 짙어졌다.


“바로 우리들의 위대한 어둠의 군주시지요.”

“에? 어둠의…?”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굽어 살피는 지배자-라고나 할까요?”


그럼 엘뤼엔은 아닌 건가? 하긴, 아무리 마계의 4대 공작이라고는 해도, 나와 엘뤼엔의 시시콜콜한 사생활까지 다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형벌의 신과 엘퀴네스가 친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드문 일 일 테니 말이다. 그럼 대체 누구를 만나겠다는 걸까? 

하지만 루카르엠은 그 이상 더 설명을 할 생각은 없는 듯 했다. 자연스럽게 말을 끊는 폼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궁금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닌가 싶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쉽게 다 밝혀버리면 밑천이 바닥나지 않겠습니까? 저도 먹고 살아야 해서 말이죠.”

“이를테면…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일행으로 넣으라는?”

“뭐,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군요. 쿡쿡. 그럼 다음에 다시 설득 하러 오겠습니다. 아참, 저 몬스터의 내장은 최고급 요리로 미식가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으니, 죽이실 땐 간단하게 질식사 시키는 편이 이로울 겁니다.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죠.”


그렇게 말한 루카르엠은 마지막으로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은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래도 처음 약속대로 여전히 기척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면, 조금은 믿어도 괜찮은 녀석인 걸까?

 


 - 흔적 - 


바다괴물에 의한 배의 피해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사망자 2명을 포함, 선장과 선원을 합친 모든 사람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꼼짝도 못하는 상황이었고, 돛대와 키가 부서지는 바람에 배가 물살을 가르고 앞으로 나가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적이라고 말했다. 카리프 해(海) 한가운데서 바다 괴물을 만난 배는, 반드시 난파당하여 전원이 몰살 한다는 게 일반적인 정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와 일행들은 본의 아니게 배를 위기에서 구한(사실이긴 하지만) 영웅이 되어 최고 대접을 받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의 대우가 부드러워진 틈을 타, 그들이 엔딜을 사기꾼으로 신고하지 못하도록 설득시켰다. 가짜 스크롤에 대한 부분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단 식으로 둘러댄 것이다. (그동안 태풍을 일부로 일으켰단 얘기는 교묘히 감췄다.) 

실제로 녀석에게 물건을 사서 피해를 본 사례는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색내는 셈치고 이해해 주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 바람에 나를 향한 엔딜의 눈동자가 더욱 초롱초롱 해졌다는 것은, 굳이 입 아프게 얘기 하지 않아도 눈치 챘으리라 본다. 내가 엘퀴네스 임이 밝혀진 순간부터 내 옆에 딱 달라붙기 시작한 녀석은, 사람들에게 신고당할 걱정까지 사라지자 어떤 일에도 결코 떨어지려 들지 않으려 들었다. 그나마 라피스처럼 이사나에게 경계심을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랄까?

질투하는 건 둘째 치고 당장 부러워할지도 모른다는 내 예상을 깨끗이 무시한 엔딜은, 그저 이사나를 대단하다며 칭찬하기에 바쁜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엘프의 본성이 온유하다는 라피스의 말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다.

또래 친구라도 만난 듯, 어느새 친해진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내게 카이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 엘님! 이제 거의 다 도착한 것 같습니다. 육지가 보이는군요.”

“앗, 정말이네. 헤에, 저기가 알폰프 제국이라는 건가?”


그의 말마따나 과연 저 멀리 히끗히끗한 육지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거의 한달에 다다른 항해 끝에 도달한 땅덩어리 였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갑판에 나와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무한한 감격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역시 사람은 땅을 밟아야 사는 종족이라는 걸까? 그동안 남모르게 바닷물을 움직여 배의 항해를 도왔던 나의 노력이 조금이나마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연신 감사의 말을 건네는 선장을 뒤로하고 배에서 내렸을 땐, 새로운 문제가 일행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바로 엔딜 녀석의 처리(?)에 대한 것이었다. 

녀석으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아픈 동생에게 돌아가 병을 치료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상황이 긴박한 쪽을 우리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쉽게 그러마라고 고개를 끄덕일 입장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흐음, 곤란한걸. 우리 용무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그건 안돼! 세실의 약이 떨어질 때가 됐단 말예요. 오가는 것만으로도 족히 두 달은 걸리는 거리인데 여기서 시간을 더 늦출 수는…”

“나도 알아. 그래서 지금 이렇게 궁리하는 거잖아.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이미 도착하기 전 나에게 대강의 사정을 들었던 일행들은 모두 똑같이 난처한 표정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무언가 홀가분하다는 듯한 카이씨가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었으니!


“이러면 간단하겠는 걸요. 제가 엔딜군과 같이 가겠습니다.”

“예?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카이씨!”

“헉…”


당혹한 얼굴로 표정을 굳히는 우리를 보며 카이씨는 마치 달래는 듯한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들어보니, 엔딜군의 동생이 앓고 있다는 병은 고위신관이 고칠 수도 있다는 거잖습니까? 그게 안 되더라도 엘님이 도착하실 때까지 수명을 늘리는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을 테고요. 먼저 가서 기다리는 셈 치면 될 것 같은데요.”

“하, 하지만!”

“어차피 저는 던전에 가서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오히려 엘님이 하시는 일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크죠. 마침 소녀의 희귀병이란 것에 호기심도 있었으니, 제가 가는 편이&nbsp;&nbsp;나을 것 같군요. 엔딜군도 그 점은 조금 양보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 저야 병을 고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들으셨죠? 이보다 더 완벽한 해별 방안은 없는 듯 싶습니다만?”


우물쭈물 대답한 엔딜의 말에 카이씨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나는 엄청난 파렴치한 죄인이 된 것 만 같아 미처 고개를 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안합니다, 카이씨. 제 개인적인 약속 때문에 카이씨가 번거롭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엘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저는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저는 오히려 기쁜데요? 이렇듯 딱한 처지의 소년을 엘님께서 외면하지 않아 주셔서요. 뭐, 완전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린다는 거니까 너무 부담스러워 하지 마세요. 사실 제가 간다고 해서 소녀의 병이 나을 거란 확신도 없으니까요.”

“아니, 카이씨라면 가능하실 겁니다. 엘뤼엔의 고위사제에게 못 고칠 병이 어디 있겠어요? 그럼 일단, 저를 대신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꾸벅 고개를 숙이자, 카이씨는 황망한 듯이 서둘러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엔딜 녀석까지 덩달아 나를 향해 허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엔딜? 인사라면 여기 있는 카이씨에게…”

“하, 할거야! 하지만 그보단 당신한테 먼저 감사를 전해야 할 것 같아서.”

“…?”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도와줄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을 거 아니야. 엘퀴네스님이 직접 가지 않아서 아쉬운 건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충분히 만족하니까. 아니, 오히려 나 때문에 일행과 헤어지게 만들어서 미안해. 이 빚, 언젠가 꼭 갚을게요.”


여전히 반말과 존대말을 섞어쓰는 엔딜의 얼굴은 마치 화로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렇게 쑥스러워 하는걸 보면 생전 누군가에게 감사치레를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한참동안 나를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이던 녀석은 이번엔 카이씨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폐만 끼치는 녀석이지만 앞으로 잘 부탁할게. 난 원래 좀 버릇없고 건방진 성격이라 대하기 피곤할지 모르지만, 그, 그래도 은인에게까지 함부로 하지는 않아. 머무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고 약속할게.”

“쿡쿡쿡. 그거 영광인걸요?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리 같이 동생의 병이 나을 수 있도록 노력해 봐요.”

“으…응! 고마워!”


엔딜 녀석, 아주 물 만난 물고기가 된 심정인지 얼굴이 환하게 피어올랐다. 저렇게 기뻐하는 걸 보니 내가 직접 가주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이 커졌지만, 그래도 상대가 카이씨다 보니 안심하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서운한 감정을 가득 담은 이사나와 짧게 작별을 고한 카이씨는, 아마도 당분간은 이곳 항구에 머물면서 엔딜의 동생을 치료할 약초를 구입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신성력만으로 안될 경우를 대비해 미리 준비해둘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엔딜이 모아놓은 돈으로는 넉넉한 양의 약초를 구입하기는 무리였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근처에 있던 상단을 찾아가, 바다괴물의 시체를 팔아 넘겼다.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 
상단 사람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감탄만이 떠오르고 있었다.


“오오! 이 견고한 스켈라의 가죽이라니!”

“그야말로 흠집하나 없는 완벽한 상품입니다! 황제폐하께 진상해도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군요!”

“내장의 보존 상태가 깨끗하군요. 죽은 지 일주일이 넘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고급 요리점에 비싼 값에 넘길 수 있겠어요.”

“이렇게 강력한 이빨이라니! 쓰일 곳이 상당히 많겠군요! 그야말로 드래곤본에 뒤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 선명한 붉은 홍체는 어떻구요! 이런 완벽한 특상품을 보게 되다니, 정말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연금술사들이 불을 키고 달려들 겁니다.”


황홀한 얼굴로 바다괴물의 시체를 어루만지며(?) 이리저리 품평한 결과, 나는 상단으로부터 우대손님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무려 5백 골드라는 거금을 챙길 수 있었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엔딜의 입이 떡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설마 저런 몬스터의 값이 몇 백 골드를 상회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는 그중에서 3백 골드를 카이씨에게 건네주었다.


“이렇게 많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엘님도 쓰셔야 하잖아요?”

“괜찮아요. 저흰 2백 골드로도 충분하니까요. 혹시나 모자르게 되더라도 정령계에서 가져온 보석도 있으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카이씨야 말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경비는 넉넉히 챙겨가야죠. 자주 시큐엘을 보낼 테니, 전달사항이 있으면 그 녀석한테 말하면 될 겁니다.”

“이것 참…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배려 감사합니다, 엘님. 그럼,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뵙기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아앗! 나도! 엘퀴네스님! 꼭 다시 만나러 와야 해?”

“쿡쿡. 알았어, 알았어. 대신 카이씨를 잘 부탁해.”

“그거야 물론이지!”


활기찬 대답만큼이나 씩씩한 얼굴을 한 엔딜은 동생을 살릴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인지 표정 가득 생기가 가득 차 올라 있었다. 아마 그래서 더욱 녀석과의 이별이 아쉬웠는지도 모른다. 

힘차게 손을 흔들며 뒤돌아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나는 멍한 시선으로 한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이 든 것은, 이사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어깨를 흔들었을 때였다.


“엘, 괜찮아?”

“으응? 아, 미안. 결국 카이씨도 가버렸네. 어라? 그러고 보니 다시 또 두 명만 남은 건가?”

“쿡쿡. 그러게. 이게 얼마만이지? 알렉들과 헤어진 이후로는 거의 처음인 것 같은데.”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짓는 이사나의 모습에 나는 새삼 인연이란 게 얼마나 돌고 도는 것인지 깨닫고 말았다.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 무수히 엮어나는 인연들 속에서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는 존재는 과연 몇이나 될까? 

언젠간 이사나도 그 수많은 인연 중에 하나로 잊혀지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가슴 한 구석이 저며 오는 기분이었지만, 나는 애써 즐거운 마음으로 털어냈다.


“뭐, 이것도 오랜만이니까 좋네. 그보다 이제 어떡하지, 이사나? 또 혼자 밥 먹게 생겼네.”

“신경 쓰지 마, 난 괜찮으니까. 그나저나…던전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알폰프 제국도 대륙공용어를 쓰기 때문에 의사소통엔 문제가 없겠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려면 지도를 구입해야 하는 게 좋을까?”

“글쎄? 일단 쉴 곳부터 찾아보자. 날이 저물어서 어차피 오늘은 아무것도 못할 것 같으니. 운 좋으면 그 안에서 바론 던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지도 몰라.”


내 의견에 이사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을 해보였다. 그리하여 우리가 선택한 곳은 바닷가에서 약간 벗어난 도시에 세워진 3층짜리의 여관건물이었다. 제법 장사가 잘 되는 곳인지 식당으로 마련된 1층 안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는데, 사람들의 출입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시끌벅적 떠들고 있었다

 

 

 

“저어, 빈방 있나요?”


낯선 타지인이라 쉽게 방을 내주지 않을 거란 예상과 다르게, 투박한 인상의 주인은 별다른 꼬투리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2인실 하나, 3인실 하나. 1인실 3개가 비었수. 어떤 걸로 하겠수?”

“2인실로 하나요.”

“하룻밤에 150실링이유. 거기에 식사와 목욕을 포함하면 1인당 1회 200실링이 추가되는데, 어찌 하겠수?”

“목욕은 필요 없는데…저, 1인분의 식사만 포함할 순 없을까요? 여기서 3일정도 머물 계획인데요.”

“그렇게 하슈. 그럼 50실링이요. 식사비는 먹을 때 내도 상관없소만, 방은 선불이올시다. 3일이면 450실링이오.”


그러면서 척- 두꺼운 손바닥을 내미는 모습에 할말을 잃은 나는 군말 없이 품에서 1실버짜리 한 개를 꺼내 내밀었다. 그러자 주인은 익숙한 태도로 잔돈을 거슬러 주더니 앞에 놓여진 수많은 열쇠중의 하나를 내게 건네주며, 막 서빙을 돌고 있던 종업원 하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또래로 보이는 주근깨 가득한 소년이었다.


“어이, 미첼! 손님이다, 방까지 안내해 드려라!”

“예, 예, 가요! 자아, 두 분이신가요? 2인실? 그럼 이쪽으로 오세요. 열쇠에 적힌 번호가 몇 번인가요?”

“에? 203…”

“아, 203호실이군요. 거기 전망 꽤 좋아요. 며칠 편하게 묵기 딱 좋은 방이죠. 식사는 어떻게 하셨나요? 아, 1인분이요? 그럼 한분은 안 드시는 거예요? 아쉽네. 자랑인 것 같지만 여기 음식 정말 맛있거든요. 나중에라도 생각나면 주문하세요. 헤헤.”

“……”


이것도 나름대로 서비스 정신인걸까? 쉴 새 없이 떠드는 소년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느새 우리는 방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것을 멍하니 본 나는 마침 떠오른 생각에 돌아가려는 소년을 다시 붙잡았다.


“저기, 잠깐만요. 식사를 방에서 하고 싶은데…”

“아, 그럼 저한테 식사비 까지 합쳐서 55실링을 주시면 되요. 배달금액은 별도거든요. 오늘 저녁 메뉴는 양고기 스튜에 베이컨, 마늘 빵과 야채주스입니다만. 이외의 더 필요하신 것이라도?”

“음, 식사는 그 정도면 충분하고, 달리 필요한 거라면… 저, 혹시 제국지도를 구해다 주실 수 있을까요? 이왕이면 던전의 위치가 대충이라도 표시되어 있으면 하는데요.”

“헤에, 던전이요? 그런 것은 왜… 오옷! 혹시 모험가세요?”


부담스러울 만치 눈을 반짝인 소년은 우리들의 옷차림을 보고는 확실하다고 느꼈는지 얼굴을 환하게 밝히기 시작했다. 로브와 후드로 몸을 음침하게 가리고 있는 폼새가, 무언가 상당히 ‘있어 보임직’ 했던 모양이다.


“아, 그런 건 아니고…”

“어.쩐.지! 등장하면서부터 뭔가 팍- 느낌이 왔었다니까요? 하긴 우리 제국이 워낙 던전의 숫자가 많아서, 모험가가 많기도 하죠. 근데 몬스터가 그렇게 흉악하고 강하다는 게 사실이에요? 전 태어나면서부터 이 동네를 떠나본 적이 없어서 몬스터라는 걸 실제로 구경해 보지 못했거든요. 나이도 어려보이신데 벌써 모험이라니…정말 멋지다! 어느 던전으로 가시는 거예요? 두 분이서만 가시는 건가요?”

“아, 일단은 그렇긴 한데…실은 바론던전이란 곳을…”

“헉! 바론 던전이요? 그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살아 돌아 올 수 없다고 알려진 위험한 바론 던전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지금까지 누구도 최하층으로 내려가 본적이 없다는? 우와~ 대단하세요! 그런 곳을 단 두 분이서만? 실력이 대단하신가 봐요! 저도 한때는 던전을 탐험하는 게 꿈이었어요! 멋진 일행들과 마법검을 들고 괴물을 무찌르는 거예요! 상상만 해도 신나지 않아요? 뭐, 결국 여관 종업원으로 만족할 수밖엔 없었지만요, 헤헤.”

“……”


흔히들 있다. 현실과 이상을 착각하는 녀석들이. 멋진 일행과 마법검은 무슨 얼어 죽을! 혹시 마왕을 무찌르고 공주님을 구한다는 동화 속 얘기를 꿈꾸고 있는 건 아니야?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소년은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헛기침을 내뱉었다. 


“흠흠, 미안해요. 제가 원래 말이 좀 많아서요. 헤헤. 아! 제가 돌아다니면서 알아봐 드릴수도 있지만 자세한 정보를 원하신다면 정보길드를 찾아가시는 게 더 괜찮으실 것 같은데.”

“정보길드?”

“네, 요 앞 광장에 나가면 2층으로 된 목조건물이 보이실 거예요. 적절한 금액만 제시하면 그에 맞춰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전해준다고 알고 있어요. 아마 거기라면 지도도 구하실수 있을 걸요?”

“아, 그렇군요.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고마움의 뜻으로 식사비로 지불할 55실링과 함께 1실버를 꺼내 소년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를테면 팁이랄까? 수고비 치고는 꽤 많은 금액이었지만, 가끔 이런 낙이 있어야 일할 맛도 날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돈을 받는 소년의 눈빛이 더욱 초롱초롱 해지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뿐.

 


다음날 아침, 소년이 알려준 대로 찾아간 정보길드에서 무려 1골드나 지급하고 얻은 것은, 바론 던전으로 향하는 지름길이 자세하게 그려진 지도와, 던전이 존재하는 지역의 주변 생태계, 그리고 지하 3층까지 설치된 대강의 트릭들에 대한 정보였다.

누구도 끝까지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총 몇 층으로 되어있는지 확인된 바 없으며, 4층부터 미로가 시작된다는 것이 길드에서 알아낸 전부. 일단 4층 아래로 내려가고 나면 살아 돌아오는 경우가 거의 희박하다는 것이 길드측의 말이었다.


“희박하다고 하면…살아 돌아온 사람이 있기는 있다는 건가요?”

“네, 그렇긴 하지만 별다른 정보는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다들 쇼크로 미쳐있는 상태라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했으니까요. 그들 중 대부분은 얼마 못가 자살한다고 하더군요. 반응이 한결같은 것을 보아 아마도 환상마법에 의한 정신적 착란이 아닐까 유추됩니다만.”

“……"


완전히 사람 잡는 던전일세. 그런 곳에 이사나를 데리고 들어가도 괜찮은 걸까? 길드에서 돌아오는 내내 나는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칠 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이프리트는 ‘정령왕’인 나라면 문제없다고 했지, 같이 가는 동료들에 대한 점까지 언급한건 아니었다. 그건 해석하기에 따라 나 외의 다른 존재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이사나를 떼어놓고 나 혼자 갈수도 없는 일이고. 이걸 어쩌지?’


혼자서 중얼중얼 고민하면서 걷고 있자, 길드를 방문하기 전 중간에 서점에 들린다는 이유로 헤어졌던 이사나가 저만치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손에는 방금 구입한 듯한 새 책이 들려 있었다.


“무슨 책이야?”

“아, 엘. 음…그게 말이야. 정령왕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서 내용도 안 보고 샀는데 말이지. 아무래도 이거 좀…로맨스 소설인 것 같아.”

“엥? 로맨스?”

“응. 소환된 정령왕이 인간과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 있잖아. 그리 특별한 건 아니야. 흔히들 퍼져있는 이야기니까.”


아무래도 괜히 샀다는 듯한 이사나의 말투에 나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책을 들여다보았다. 대륙에 떠도는 정령왕에 대한 전설(주로 사랑에 관한부분)을 모아서 묶어놓은 식이라는데, 두꺼운 가죽으로 덮힌 겉표지엔 유려한 필기체로 ‘정령왕의 인간’이라고 쓰여 있었다. 

…척 보기에도 그리 건전해 보이지 않는 느낌이랄까.


“흠. 정령왕이라고 하면 4명 전부에 대한?”

“응. 각 정령왕 마다 단편 식으로 실려 있어. 가장 최근의 이야기래 봤자 2천년 전? 어차피 이런 거야 다 지어내는 거겠지 뭐.”

“아냐, 혹시 또 모르잖아? 정말 옛날에 있었던 실화를 이야기로 꾸며놓은 것일지. 이거 내가 봐도 될까?”

“응. 마음대로 해.”


읽어봐서 허황된 마구잡이 식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웃기겠지만, 만약 실화라고 한다면 그것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을 것 같았다. 두근두근 한 것이…부모님의 과거를 다른 사람 입으로 듣는 기분이랄까?


‘아, 그러고 보니…2천년 전이라면 엘뤼엔의 이야기도 있을지도?’


다른 녀석들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했지만, 역시 가장 시선이 가는 것은 내 전대의 물의 정령왕, 엘뤼엔의 과거일 수밖에 없었다. 

대충 넘겨본 페이지에 ‘엘퀴네스’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여관에 도착한 뒤에 제대로 읽어보기로 작정하고 말없이 그것을 품안에 끌어안았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손에 쥐고 있는 느낌이다. 원래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숨겨진 비리가 드러나지 않던가!

그러나 막상 방에 돌아와서 뒤져본 책의 내용은 이사나의 말마따나 ‘로맨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심지어 낯 뜨거운 정사 씬까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있는 것을 본 나는,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어!를 수 만 번 외치며 장렬하게 책을 덮고 말았다. 도무지 맨 정신으로는 책의 내용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트, 트로웰이…계약자를 겁탈… 이프리트가…이프리트가 할렘을…”

“쿡쿡. 그런 류에 등장하는 로맨스야 뻔하지 뭐. 아무래도 실화는 절대 아닌 것 같지?”

“으응. 그래도 뭐…아주 허구는 아닌 것 같은데? 미네르바의 얘기는 내가 들은 것과 비슷하거든. 분명 로맨스는 아니었지만.”

“정말? 어떤 얘긴데?”


책에 등장한 미네르바의 전설은 지금으로부터 약 4천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대충 정리하자면 인간이었던 계약자를 짝사랑하던 미네르바가 결국 그가 사랑하는 여인을 무참히 죽이고, 끝끝내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는 계약자마저 파멸의 길로 인도하고 만다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바람의 정령왕은 그날 이후로 질투의 정령이란 명칭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 나도 이 내용은 알아. 꽤 유명하던걸? 근데 이게 로맨스가 아니라고?”

“응. 사실과 전혀 틀려. 내가 듣기론 여자를 먼저 죽여 달라고 부탁한건 계약자 쪽이었거든. 그냥 농담으로 건넨 말이었는데, 애석하게도 미네르바가 눈치 채지 못했던 것뿐이지. 그걸 사람들이 잘 못 해석 한 게 아닐까?”

“헤에, 그렇군. 하긴, 4천년이라면 충분히 내용이 와전되고도 남을 시간이지.”

“응. 그런데 좀 이상한 게…4천년 전에도 인간이 살았었어? 전에 알렉한테 듣기로는 인간이 탄생해서, 부족에서 제국으로 발전한 역사가 단 2천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처음 인간세상으로 소환되고 난 후, 이사나의 기사들에게 들었던 아크아돈의 정보를 떠올리며 묻자 이사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곤 곧 아하~를 외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마도 황금시대에 대한 설명을 뺀 것 같은데? 현 시대는 고대의 황금시대가 멸망하고 나서 다시 세워진 거거든.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지만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멸망했다고 하더라고. 천지가 개벽이라도 했는지 몇 개의 유적을 제외하곤 아주 깨끗하게 자취를 감췄지. 지금 시대는 그때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예가 다시 일으켜 세운거야. 그 성장기간이 2천년일걸?”

“헉, 그런 거야?”

“응. 그 시대에는 지금보다 더 무수한 종족이 있었다고 해. 뿔이나 날개를 가진 말도 있었다고 하고, 인간들도 9서클의 마법이 가능했다고도 하고. 정령과의 계약도 지금보다 훨씬 자유로웠다고 하더라고. 뭐, 어차피 내가 아는 것이야 전부 소문일 뿐이니까 확실하진 않지만.”


흐음. 그렇다면 언제고 라피스나 엘뤼엔한테 자세한 걸 들어봐야겠군. 

그러고 보니 날개가 달린 말-아마도 페가수스랑 비슷한 듯-이라고 하면, 책에 나온 엘퀴네스에 대한 기록에 잠시 등장했던 것 같다. 황당한 것은 그 말이 엘뤼엔의 라이벌이었다는 것이다. 

처녀들을 홀리기 좋아하는 페가수스가 엘퀴네스-그러니까 엘뤼엔의 계약자를 유혹하려고 해서 결국 두 존재의 피 튀기는 싸움으로 전개된다는 내용…이었달까? 가장 기대했던 부분이었던 만큼, 읽고 난 뒤의 허탈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왜 하필 하고 많은 라이벌 중에 ‘말’이란 말인가.


“엘뤼엔이 보면 그 자리에서 기절하려고 하겠는 걸? 하여튼 사람들 생각이란 대단하다니까?”

“흠… 하지만 미네르바의 내용이 실화와 비슷하다면, 이것도 그렇지 않을까? 말이란 게 꼭 정말 말이 아니라, 누군가를 비유한 것 일수도 있잖아.”

“그건 그래. 어쩌면 로맨스가 아닌 전혀 다른 상황일 수도 있지. 만약에 그렇다면 말이야…트로웰이 계약자를 덮치는 거나, 이프리트의 할렘은…대체 어떤 점이 와해가 된 걸까?”

“……”


그것은 결코 풀리지 않을 미스테리. 조용한 침묵이 방안에 깔리는 순간이었다.

 

 

***

 

 


세 명의 정령왕들이 유희로 자리를 비운 와중에도 정령계는 언제나처럼 평화로웠다. 정원에 깔려진 드넓은 꽃밭은 평소처럼 영롱한 꽃잎을 피워냈으며, 맑은 시내와 선선한 바람은 일정한 주기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한겨울인 아크아돈에 비해 정령계의 계절은 항상 화창한 봄의 오후. 그곳에서 미네르바는 바람을 통해 실프들이 전달해 주는 세상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요즘 들어 한창 나른해진 몸 탓에 쉽사리 유희를 나가지 못하고 있는 그였다.

본래라면 이맘때쯤의 그는 오히려 전신에 힘이 넘치고 생기가 가득해야 했다. 바람의 정령들이 가장 본격적으로 행동하는 겨울의 계절이 아크아돈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의 패턴이 바뀌기 시작한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미네르바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였다.

루비로 된 장미꽃밭에 드러누워 눈을 감고 있던 그는, 때 마침 엘퀴네스의 일정을 주시하고 있는 상태였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데다, 전생의 기억까지 가진 그가 과연 유희를 수월히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반의 예상치고 그는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만나는 일행마다 기상천외하기 짝이 없었고 특이한 구석뿐이라, 정말이지 심심할 때 보고 있으면 종일 질리지 않을 정도였다. 문득 무심한 듯한 미네르바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흘러갔다.


“아아, 그건 아니야, 엘퀴네스. 트로웰의 이야기는 정말 헛소문. 이프리트라면 상당히 가능성 있는 내용이지만 말이야.”


어디선가 구해온, 정령왕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은 엘퀴네스가 한창 계약자와 토론을 하는 것을 들으며, 미네르바는 무심코 그렇게 덧붙였다. 그래봤자 들릴 리도 없겠지만.

그러자 그의 옆을 알짱거리던 바람의 상급정령인 진이 유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가서 전해드리고 올까요? 빨리 도착할 자신 있는데!


“훗. 너는 그저 지금의 역할에만 충실하거라. 지금의 나는 방관자일 뿐. 모든 것은 엘퀴네스, 그 스스로가 결정할 일이야.”

-에이~ 그치만 심심하잖아요~ 정령계는 다 좋은데, 너무 지루한 게 탈이라니까요? 푸하하하하!


……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시큐엘과는 달리, 진들은 대체적으로 성향이 자유롭고 분방한 편이었다. 감히 자신들의 왕인 미네르바 앞에서조차 저렇게 껄껄거리고 웃음을 터뜨릴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미네르바는 그렇지 않은 유일한 바람의 상급 정령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저렇듯 활기찬 진의 모습을 볼 때면 그렇지 않은 한 존재에 대한 기억이 가슴속에 강하게 파고들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다른 한 존재의 모습과 함께.


“사랑한다고 말했었지.”


씁쓸한 듯이 중얼거리는 것과 달리 미네르바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본래 감정 표현이 드문 그였지만 지금만큼 그 모습이 차갑게 느껴진 적은 거의 없었다. 만약 트로웰이 본다면 틀림없이 슬퍼했을 테지만 그걸 알면서도 미네르바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입으로 그 눈으로, 그 품으로 나를 사랑한다고 했었지. 그렇게 야속한 인간이었지…”


책에 기록된 내용과는 분명 달랐지만, 미네르바는 그를 사랑했었다. 아끼고 아끼는 마음이 넘쳐서 그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정령왕들과 대적했을 만큼. 그리하여…배신을 당한 그 순간엔 견고한 정령왕의 정신으로도 한순간 미쳐버렸을 만큼.


[블레스터어? 하- 그따위 인간을 위해 검을 만들어? 너 미쳤어, 미네르바? 제정신이야?]


이미 4천년도 더 지난 일인데, 바로 어제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에 미네르바는 감고 있는 두 눈을 살짝 찡그렸다. 

자신을 향해 호통을 치는 이 목소리는 분명 전대의 이프리트. 이때만큼은 사이가 나빴던 전대의 엘퀴네스도 동조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었다. 당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트로웰의 눈물을 본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미네르바. 하지만 네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지. 그의 입과 머리는 항상 따로 놀고 있어. 네 사랑이 귀찮지만, 권력을 쌓기 위해 필요하니까 사랑받길 원해. 모순이란 말 알아? 단지 널 이용하고 있을 뿐이야.]

[그럴 리 없어.]

[과연 그럴까? 조만간 그는 스스로 함정을 파게 될 거다. 넌 네 손으로 그를 파멸의 길로 이끌게 될 거야. 알겠어, 미네르바? 지금의 너는 불안해. 내가 이렇게 쉽게…미래를 읽어버릴 정도로.]


그때의 경고를 들었을 때 모든 것을 멈췄다면 지금의 나는 조금 덜 후회하고 있을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미네르바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금의 아픔은 흔적이었다. 자신이 한때 한 인간을 너무도 사랑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마음의 흔적.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로 희석된 과거에 지나지 않았지만, 묻혀진 흔적이라도 언제고 드러나게 마련. 그 한순간의 어리석음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내몰게 될 줄 알았다면, 미네르바는 결코 사랑이란 감정을 배우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뭐, 이런 걸로 심란해 하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만…말이지.”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어설픈 과거의 회상을 걷어내며 그는 피식 미소 지었다. 점점 나른해 지는 몸과 선선한 바람의 기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모를 미네르바가 아니었다. 지금으로선 오히려 반가울 정도 일까.


“그나저나…‘그 엘퀴네스’가 말과 라이벌이라…쿡쿡. 이프리트가 들으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그가 인간들의 사고회로를 이해하는 날은 아무래도 영영 돌아올 날이 없을 듯싶었다.

 


 - 잊혀진 기억 - 


알폰프 제국은 전체적으로 솔트레테 제국에 비해 기온이 따뜻한 나라였다. 이미 겨울의 대부분이 지나가 버리기도 했지만, 굳이 두꺼운 망토를 걸치지 않아도 될 만큼 거리의 공기는 무척 훈훈했다.

던전 근처에 사막이 있다는 걸 미루어 보아 아마도 그 지방은 열대일 가능성이 컸고, 어차피 우리가 던전에 도착할 무렵이면 초여름에 닿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준비품목에서 과감하게 겨울옷을 빼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방 안은 여행 중 필요한 물건으로 가득 차서 더 이상 채워지기 힘들 지경이 되어 있었다. 사야할 것은 많은데 들고 다니기는 힘드니 그것만큼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또 있을까?


“더 이상은 안 되겠다. 나머지는 그냥 다니면서 그때그때 사야겠어. 이러다간 가방이 터져버리는 건 둘째 치고 무거워서 이동에 방해가 될 것 같아.”

“그거야 상관없지만…뭘 그렇게 많이 준비하는데?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나 하나뿐인데 그것치곤 양이 많은걸?”

“노숙을 자주하게 될 텐데, 언제까지 건량만 씹을 순 없잖아. 간단한 요리도구들과 식료품을 산건데 이러네. 바론 던전까지는 아무리 지름길로 가도 족히 3개월은 걸리는 거리인데다 늪지대가 많아서, 마을에 들릴 수 있을 때 많이 챙겨둬야 할 것 같거든.”


현재 우리는 처음 제국에 도착해서 머물렀던 도시를 벗어나, 그곳에서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떨어져 있는 마을에 들린 참이었다. 이곳을 떠나면 다음 마을에 도착하기까지 약 3주일이라는 시간이 소비가 된다는데, 그때까지 평야와 늪지대 밖에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한 많은 비상식량을 상비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상당히 무거운데다 부피가 커서, 들고 다니기에 여간 귀찮았던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럴 때 라피스가 있었으면 뭔가 도움이 됐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더욱 기분이 심란해져서, 나는 시큐엘 한 마리를 소환하여 그 위에 짐을 싣고 다닐까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딱 3개월만 이어지면 제 아무리 마나가 남아도는 라피스 녀석이라 할지라도 틀림없이 탈진할 것이다. 후후후.


“흐음, 뭔가 곤란하신 건가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잉? 모처럼 라피스 녀석 말려죽일 계획을 방해할 셈…아, 루카르엠?”

“…? 아! 저 사람!!”


갑자기 등장한 루카르엠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던 이사나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이전에 바다괴물이 나타났을 때 잠깐 만났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도와줄 의도였다곤 해도 누군가에게 맞아서 기절한 것이 좋은 기억일리는 없었기에, 이사나의 어깨는 저절로 경직되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카르엠은 여전히 천진난만한 태도로 생글생글 웃고 있었을 뿐이었지만.


“아아, 그렇게 긴장하시면 가슴이 아픕니다. 저는 절대 여러분께 나쁜 의도로 접근한 것이 아니거든요.”

“동기는 충분히 불순합니다만? 긴장하지 마, 이사나. 그냥 요즘 들어 우리를 따라다니는 마족이니까.”

“헉, 마, 마족??”

“응. 그런데 방금 도와주신다고 했었나요? 어떻게요?”


이미 몇 차례 안면을 틀고 난 상황이었는지, 이전처럼 그의 방문이 긴장되거나 경계되지 않았다. 불안하게 눈을 굴리는 이사나를 다독이며 태연하게 묻자, 루카르엠 역시 의례 그래왔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이런 물건엔 경량화 마법을 걸어버리면 장땡이거든요. 그리고 안에 아공간을 설치해 두면 아무리 많은 물건을 넣어도 끄덕 없단 말씀! 아마 산 하나의 분량을 넣어 가지고 다녀도 될걸요?”

“헉. 그게 이런 평범한 가방에도 할 수 있는 거예요?”

“물론이죠. 마법 자체가 어려운 것이지, 그것이 발휘되는 장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과 같은 이치랍니다. 제가 이래봬도 마법 실력 하나는 탁월하거든요. 걸어드릴까요?”

“에? 그럼 저야 좋지만…”

“그럼 결정 되었군요. 잠시 가방 좀 줘 보시겠습니까?”


척 손을 내미는 손에 무심코 가방을 건네주었더니, 루카르엠은 안에 있던 물건을 죄다 빼고는(넣는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작은 소리로 무언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겉보기에 별로 달라져 보이지 않는 가방을 다시 내게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경량화 마법과 아공간 마법을 걸어 두었으니, 이젠 괜찮을 겁니다. 물건을 꺼내실 땐 가방 안에 손을 넣고 원하시는 이미지를 떠올리기만 하면 되요. 간단하죠?”

“굉장히 빠르군요….”

“까다로운 마법이긴 하지만 저한텐 별로 어려운 게 아니니까요. 그나저나, 단 두 분이서만 가시는 겁니까? 혹시 일행이 부족해서 심신이 고단하신다거나…”


그러면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루카르엠의 모습에 나는 그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전투 외에는 필요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자잘한 부분에서 쓸모가 있을 줄이야! 그냥 눈 딱 감고 일행으로 받아들일까?

하지만 경계하는 이사나의 모습을 보고 나니 아무래도 당분간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으로 짤막하게 거절하는 나에게 루카르엠은 아쉬운 기색 없이 생긋 웃어보였다.


“뭐, 어쩔 수 없죠. 처음부터 수상하게 등장한 제 탓이니까요. 이렇게 따라다니는 것도 나름대로 재밌으니 지금은 이대로 만족하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


무언가 흥미가 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루카르엠은 곧 한손을 내밀어 천천히 한 곳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이 위치한 것이 정확히 내 이마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화들짝 놀라 뒤로 슬그머니 물러났다. 혹시나 엘뤼엔의 문장 때문에 호기심을 보이는 게 아닌가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루카르엠이 가리키고 있던 것은 문장이 아니라, 그 위를 가리고 있던 푸른 보석의 서클렛이었다.


“호오, 이제까진 제대로 살피질 못했는데…이걸 여기서 보게 되다니. 2천년 전 이후로 말끔히 사라져서 소실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설마 엘퀴네스님이 가지고 계실 줄은 몰랐는걸요?”

“에? 서클렛이요? 이건 그냥 우연히 얻은 건데.”

“그렇습니까? 흐음,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여기선 좀 귀찮아 지실지도 모르겠네요.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그 서클렛은 고대 마신전의 제단을 장식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거든요. 그냥 보기엔 평범해 보여도 각기 하나씩 숨겨진 능력이 있지요. 마족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악세사리 중 하납니다.”

“…능력이라면 어떤?”


그렇지 않아도 이전에 라피스에게 이 물건의 출처를 들었을 때부터 무언가 심히 불길했던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노릴 것이라는 생각은 이전부터 늘 해왔기 때문에 달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서클렛 자체의 숨겨진 능력이란 면에선 상당히 신경 쓰였다.

살짝 찌푸린 표정으로 서클렛의 보석을 만지작거리는 나에게 루카르엠은 덩달아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서클렛을 착용한 사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언뜻 들은 바는 있습니다만, 정확하게는 모르겠군요.”

“착용자를 보호한다고요?”

“네, 정확하게는 착용자의 신변에 위험이 닥칠 시, 그를 ‘보호하는’ 마물이 등장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마물이라는 게, 마족 외에는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없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보통 일반인들에게는 오히려 위험에 직면하게 하는 도구입니다만. 뭐, 엘퀴네스님이라면 문제없겠죠. 너무 걱정 마십시오.”


아니… 이건 나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마물이 등장한다는 부분에서부터 이미 새하얗게 변해버린 이사나의 얼굴을 보며 나는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셨다. 도대체가 왜 내 주위에는 물건하나 조차 평범한 것이 없는 걸까? 정말이지 언제 한번 날 잡아놓고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고 맞는다 했던가. 

루카르엠에게 서클릿의 정확한 정체를 듣고 난 이후, 넣어도 넣어도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가방에게 홀려 어느새 그것에 대해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는, 무심코 밖을 나섰다가 한 무리의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들에게 붙잡혔다.

아무래도 작정하고 나온 건지 한 무리의 갑옷을 입은 기사들까지 대동하고 있었는데, 언뜻 보인 목덜미에 새하얀 문장이 있는 걸로 봐선 어느 신전의 신관인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신교라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고 생각한 그 순간, 그들 중 후드를 깊게 눌러쓴 중년의 남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실례하겠소. 나는 마신교의 사제 카올리스라고 합니다. 잠시 우리와 동행해 줄 수 있겠습니까?”

“…마신교의 사제분이 무슨 용무신지?”

“당신이 착용하고 있는 서클렛이 우리 마신교의 보물로 전해져온 페네트와 아주 흡사하다는&nbsp;&nbsp;신고가 들어와서 말입니다. 동일한 물건인지 잠시 보았으면 하오만.”


말투는 경어인데 그 어투는 전혀 정중하지 않았다. 겉보기의 내 나이가 어려 보여서 인지, 아니면 마신교라는 권력을 믿고 그런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칼자루를 쥐고 있는 나로서는 상당히 기분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의문이 들기도 했다.

정작 마신교의 본산이라는 솔트레테에서조차 무사히 넘겼던 일을, 어째서 이곳 알폰프 제국에서 추궁당해야 하는 거지? 내가 알고 있기로 알폰프 제국은 대지의 신 유엘을 국교신으로 섬기고 있었다. 아무리 대륙 전체 모토가 타 종교를 타박하지 않는 취지라 해도, 이곳은 엄연히 마신교가 드러내 놓고 활동할 구역이 아닌 것이다.

대답하는 내 목소리는 자연히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불쾌하군요. 이건 내 지인이 직접 선물해 준 물건입니다. 흡사하다는 여부로 의심하기에는 상당히 흔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긴 하지만, 서클렛의 가운데에 달려있는 보석은 흔한 게 아니라서 말입니다. 정말 문제가 없다면 보여주는 것쯤은 문제가 없지 않소이까?”

“상대방을 떠보는 듯한 말투, 저는 상당히 싫어합니다. 이 서클릿에 달려있는 보석은 분명 흔치는 않지만, 그렇다고 구하지 못할 종류도 아니라고 들었는데요? 마신교의 신관들은 원래 이렇게 막무가내로 사람을 추궁합니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내 태도에 마신교 신관들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누구라도 자신들이 말을 걸면 설설 눈치를 보며 굽힐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로선 그럴 수가 없는 게…이미 엘뤼엔의 신관들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고 인정을 받은 이상, 쉽게 다른 신의 사제들에게 만만히 보일 수 없었다. 

그것이 이사나의 목을 틀어쥐고 있는 대공이 관련된 종교라면 더더욱.


“협조를 구하고 싶다면, 제가 착용한 서클렛이 당신들이 찾는 것이 맞다는 증거를 가져오세요. 애초에 마신교에 내려오는 보물이 있다는 것조차 의심스러운 저로서는 당신들의 요구가 그저 막무가내적인 생떼라고 밖에 보이질 않네요.”

“이 무엄한!!”


아마도 성기사인 듯, 신관들을 호위하고 있던 검은 갑옷의 기사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으려는 것을 한손을 들어 저지시킨 마신교의 신관은, 아까보다 좀 더 굳은 표정이 되어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 서클렛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고대의 마신교를 장식한 마지막 신물이오. 한 때 마신교가 몰락하면서 제단위에 놓여있던 대부분의 신물들이 강탈당하기전 까지, 무려 2천년이란 역사를 마신교와 함께해온 것입니다. 어떤 경로로 당신의 손에 들어갔는지 모르나, 우리는 절대 쉽사리 포기하지 않을 거요.”

“…이미 말씀드렸다 시피, 내게서 이것을 요구하려면 확실한 증거를 가져오세요. 그런 어림 잡이 식 말에 호락호락 넘어갈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이미 2천년이나 전에 사라진 물건을, 이제 와서 다시 되찾겠다고 생각하는 심보도 상당히 문제가 있군요.”

“큭! 고운 대화로 끝내려 했더니, 말이 통하지 않는 작자였군. 일단은 물러가주지만 이 대륙에 있는 한, 당신은 절대 마신교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요.”

“협박도 고단수시네요. 이게 마신교의 방식인가요? 새삼 알게 되서 반갑군요.”


약간 비웃음 어린 어투로 되받아치자 신관들의 얼굴은 더욱 험악해졌다. 어차피 좋은 말로 한다고 해서 포기할 생각도 아닌 주제에, 자신들 쪽에서 선심 썼다는 듯한 태도는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대공이 관계된 이상 언제고 한번은 마신교와 부딪쳐야 했지만, 이런 식으로 그 시기를 앞당기게 되니 과히 좋은 기분만은 아니었다. 나와 이사나의 진정한 고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당장 다음날부터 쳐들어올 거란 예상과 달리, 마신교의 신관들은 한동안 불안할 정도로 잠잠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잠시였을 뿐, 우리가 마을을 벗어나 평야지대로 들어서고 나자 그때부터 본격적인 추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기다 악운은 겹친다고, 우리가 항구에서 바다괴물을 비싼 값에 팔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돈을 노린 도적떼의 습격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아마도 항구에서부터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가 마을을 완전히 벗어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말 짜증나네. 대체 어디서 이렇게 도둑들이 몰려드는 거지?”

“어쩔 수 없지. 알폰프 제국은 대륙 전체에 퍼져있는 도둑길드의 총본부가 있는 곳이니 만큼, 흔치 않은 규모와 숫자를 자랑하거든. 한번 노린 것은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는 신념이 있는 것 같아.”

“흐음, 제국 내 치안이 너무 엉망인거 아니야?”

“글쎄? 들리는 뒷소문으로는 도둑길드를 지원해 주는 곳이 바로 제국의 황실이라는 말도 있는걸? 그 예로, 이곳의 도둑들은 절대 자국내의 상인들은 건드리지 않아. 우리처럼 신분이 확실치 않은 모험가나, 타 제국의 상인들만 노린다고 알고 있어.”


…그건 국가 분쟁으로 번질 요지가 상당히 높은 거 아니야?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이사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리 뻔한 수법이라도 증거가 없기 때문에 항의를 걸래야 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알폰프 제국을 돌아다니려면 어지간히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없는 이상은 용병들을 고용하는 편이 이롭다는 것이 그가 말한 대강의 설명이었다.


“가진 돈을 내놓아라! 그렇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뻔한 대사를 읊으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등장하는 도적들의 모습에, 나는 귀찮음을 넘어선 분노 그 이상의 것을 느껴야 했다. 결국 더 이상 참다못한 내가 시큐엘들을 풀어 주변을 초토화 시키는 것으로 간신히 잠잠해 졌지만, 마신교의 추적은 여전히 멈추지 않은 상태. 

끈질김만으로 치자면 정녕 물의 정령에 대한 라피스의 집념에 못지않은 그들이었다.


“귀찮은데 그냥 줘버릴까?”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기사들이 정확히 무슨 명령을 받았는진 모르겠지만, 주든 안주든 처음부터 살려둘 생각은 없었을 거라 생각해. 지금까지 마신교의 신물을 가지고 있던 사람치고 교단의 추격을 받아 살아남은 인간은 못 봤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이상해. 왜 하필 이런 순간에 들키게 된 거지? 지금까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던 거잖아. 겉으로 보기엔 그냥 평범한 서클렛하고 별다를 게 없으니까 말이야. 어쩐지 누가 고의적으로 신고한 거란 의심을 피할 수가 없는 걸?”


그 중 가장 유력한 용의자라고 한다면 당연 루카르엠- 그 밖에 없었다. 그 말고는 이런 짓을 할 존재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서클렛이 마신교이 보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나와 라피스 밖에 없지 않았던가! 젠장, 같은 편인 척 할 때는 언제고! 그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속을 읽을 수 없는 존재는 이래서 싫다. 나는 얄미울 정도로 생글생글 웃던 루카르엠의 얼굴을 떠올리며 부드득 이빨을 갈았다. 어디 나중에 두고 보자!

바로 그때, 어느새 바짝 &#51922;아온 마신교의 기사들이 검을 들이대며 소리쳤다. 그들의 뒤에서는 여유 있게 말을 탄 신관들이 미소 짓고 있었다.


“도망은 거기까지다. 순순히 말할 때 서클렛을 내 놓아라!”

“…도둑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군요. 무엇을 근거로 남의 물건을 내놓으라고 하는 겁니까?”

“닥쳐라! 네가 가지고 있는 그것은 틀림없는 우리 마신교의 신물! 우리는 의당 돌려받아야 할 것을 요구하는 것뿐이다!”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네.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 해서 순순히 내 줄 생각은 없어요. 정 무력을 사용하겠다면, 우리 쪽에서도 그에 합당한 대처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함께 마치 미리 타이밍을 맞추기라도 한 듯이 이사나가 두 명의 운디네를 소환했다. 평소의 순한 표정은 걷어낸 채, 제법 사나운 얼굴로 공격 태세를 갖추고 있는 물의 정령들의 모습에 마신교 신관들의 입안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끄응, 정령사인가…”

“과연, 우리들 앞에서도 태도가 묘하게 당당했던 이유가 이것이었군. 설마 동료가 정령사였을 줄이야. 그것도 물의 중급 정령인가?”


그때서야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생각했는지, 신관들과 기사들의 태도가 바짝 긴장되는 것이 느껴졌다. 저런 사람들에게 굳이 이사나가 상급 정령사…아니, 정령왕을 소환한 존재라고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간만에 녀석이 활약할 기회라고 생각하며 나는 자신감 있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래요? 끝까지 고집한다면 이쪽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는 않겠습니다만?”

“건방진! 그깟 중급 정령 하나로 마신교의 성기사들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오만하구나! 정 말을 듣지 않겠다면 강제가 될 수밖에! 무엇들 하는가! 당장 신물을 되찾아라!”

“예! 알겠습니다!”


크게 소리쳐 대답한 기사들은 모두 흉흉한 살기를 띄운채 우리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평범한(?) 나보단 정령사 쪽을 먼저 제압해야겠다는 생각인지, 시퍼런 칼날들은 모두 이사나에게 겨냥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해나갔다.


“운디네! 물의 바람을 이용하여 공격해! 저들의 시야를 막아! 다른 한명은 방어를 해줘!”

끄덕끄덕.

휘이이익! 촤아악!


“크악!”

“우욱!!”


그 동안 시큐엘만 불러서 서운했던 걸까? 전에 없이 매섭게 기사들을 몰아붙이는 운디네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녀석들의 표독스러운 표정이 나에 대한 무언의 시위로 느껴졌던 것이다. 

아무리 애를 써서 검을 휘둘러도 물로 된 운디네들의 공격을 피할 순 없었다. 쐐에엑!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들릴 때마다 기사들은 팔이며 몸뚱이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곤 하나둘씩 재기불능 상태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강하게 회전하는 물기둥이 두꺼운 쇠 갑옷을 마치 총알처럼 뚫고 들어가 기사들을 유린했던 것이다.


“크아악!”

“커헉!!”

“이, 이 자식들!! 지금 뭘 하는 거얏! 공격을 하란 말이다, 공격을!! 이렇게 많은 놈들이 고작 2명을 상대 하지 못해!!” 


닦달하는 신관들의 재촉에도 그리 호응을 해주지 못하는걸 보면, 생각보다 성기사들의 실력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끼어들지 않아도 알아서 잘 싸우는 이사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어느새 흐뭇한 미소와 함께 관람하는 자세로 돌입하기 시작했다.


‘이거 앞으론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이 이사나가 다 알아서 하게 내버려둬도 되겠는 걸?’


바로 그때였다.

안절부절하는 신관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눈을 감고 주문 비슷한 것을 외우는 것이 보였다. 혹시 마법사라도 있는 건가고 긴장한 것도 잠시, 나는 곧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소름끼칠 정도로 어두운 기운에 흠칫 놀라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대체 저게 뭐지?’ 


신관이 모은 어둠의 기운들은 모두 그의 손안에서 천천히 둥그런 모습으로 압축되고 있었는데, 그 위력은 기사들이 내뿜는 살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곧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곤 큰소리로 외쳤다.


“이사나! 위험해!!”

“어? 우왓!!”


콰아아앙!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그 타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사나가 서있던 장소 위로 반격 3미터 폭의 커다란 구멍이 뚫려 버린 것이다. 다행히 아슬아슬한 순간에 내가 시큐엘을 불러 피하게 했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어도 이사나는 그대로 세상을 하직했을 것이다.

생각만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마신교의 신관들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이게 무슨 짓이야! 사람을 죽일 작정이야?”

“큭큭큭. 이미 말 했을 텐데? 순순히 말할 때 서클렛을 내 놓으라고. 경고를 어긴 네놈들의 멍청함을 탓해라! 이것이 바로 우리 마신교 신관들의 힘이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와중에도 이미 또 하나의 검은 기운을 모아두고 있는 상태였다. 여차하면 바로 던질 기세라, 나는 뒤돌아 볼 기색 없이 바로 시큐엘에게 명령했다.


“시큐엘! 이사나를 보호해!”

“크하핫! 소용없다! 이 순수한 암흑의 덩어리는 제 아무리 정령이라 해도 막아낼 수 없음이야!!”


신관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가 또다시 던진 검은 물체와 부딪친 시큐엘의 모습이 그대로 파앗- 분해 되어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콰아앙!! 공중에서 현란하게 폭발하는 물체와 산산히 흩어지는 시큐엘의 모습을 보며 나는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설마 역(逆)소환?!!”

“하하하핫! 이제 틀림없이 보았겠지! 보아하니 저 소년, 중급이 아닌 상급 정령사였던 모양인데, 나이치곤 대단한 능력 이었다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마신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크하하하!!”


…이런 상황에서 라피스의 마나를 끌어다 시큐엘을 불렀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좀 매정한걸까? 지금쯤 역소환의 부작용으로 피를 토하고 있을 라피스를 생각하며 나는 과감히 묵념을 올렸다. 미안하다, 라피스. 속이 좀 쓰리더라도 참아라. 그러게 누가 날 버리고 가래?


“아참,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그들이 웃고 있는 틈을 타,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이사나에게 달려갔다. 거친 기침을 내뱉고 있긴 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흔적은 없는 것 같았다.


“윽! 쿨럭, 쿨럭, 쿨럭!”

“이…라, 라이! 괜찮아?”

“으응. 난 괜찮은데…시큐엘이…”

“시큐엘이라면 걱정할 거 없어. 충격은 받았겠지만 죽지는 않았어. 단지 정령계로 역 소환 된 것뿐이야.”

“그, 그래? 다행…”

“라이!!”


직접적으로 폭발에 휘말린 것이 아닌데도 그 타격이 심각했던 건지, 맥없이 기절하는 이사나를 보며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서둘러 치료술을 시행하자,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던 신관들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네 녀석! 신관이었나!”

“치료능력이 가능한 것을 보면 의술의 신인 헤르메슨의 사제로군! 그닥 별 볼일 없는 신의 사제주제에 감히 마신교를 거역하다니! 따끔하게 본보기를 보여주겠다!”


그놈의 마신, 마신! 마신이 잘났지, 네놈들이 잘났냐? 내 이놈의 마신 녀석 만나기만 해봐라, 사제들 교육을 저 모양으로 시켜놓은 것을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 버릴 테다!!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간 나는 또다시 검은 덩어리가 날아오는 데도 전혀 피하지 않았다.

제 까짓게 아무리 잘났어도 결국 마족의 힘을 끌어온 것에 불과한 것. 그 정도 가지고 정령왕인 내 몸에 타격을 입힐 리는 만무했던 것이다. 폭발이 터지는 순간 아무런 상처 없이 멀쩡해 있을 내 모습에 경악하는 신관들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바로 그다음이 네놈들 제사상이 차려지는 순간이다!

쐐애애액! 콰아아아앙!!!


‘응? 전혀 아무런 느낌도 안 드는 듯한?’

고통은 없어도 어느 정도 몸에 와 닿는 느낌은 있을 줄 알았던 나는, 신관이 던진 어둠의 농축덩어리가 바로 앞에서 터지는 중에도 별 다른 일이 없자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이마가 왜 이렇게 뜨거운 거지?

정확하게는 이마위에 놓여진 서클렛의 보석이 뜨거워져 있었다. 매캐한 검은 연기에 가려져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언뜻 보이는 눈앞에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서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누, 누구? 설마…라피스라도 온 건가?’


혹시나 녀석이 우리들에게 닥친 위험을 감지하고 날아온 건가(?) 싶어,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연기가 걷히길 기다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런 상황에서 등장할 마땅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의례 녀석이려니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등장한 것은 라피스도, 무엇도 아닌. 심지어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존재였으니-!


“맙소사…”


매끄러운 등선과 기다란 목. 곧게 뻗은 우아한 다리와 옅은 바람결에 흩날리는 눈부신 은빛의 갈기. 긴 속눈썹 사이로 드리워진 청명한 푸른 눈동자와, 이마에 돋아있는 금색의 기다란 뿔. 그리고… 비둘기와 같은 새하얀 날개라니!!!


“……유니콘?”


그랬다. 그건 유니콘이었다. 이리보고 저리 봐도, 심지어 두 눈을 비벼보고 수 십 번 깜빡여 봐도 유니콘은 유니콘이었다. 설마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상당히 멍청한 표정으로 한없이 구경하고 있자니, 유니콘의 푸른 눈동자가 똑바로 내 쪽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곤 뭔가 마음에 든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이윽고 푸드덕 날개짓을 하며 작게 푸레질을 하는 것이다. 은쟁반위에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맑은 음색이었다.


“푸르르르…”


그런데 문제는…이 어딜 보아도 말의 푸레질로 밖에 안 들리는 소리가, 내 귀에선 전혀 다르게 해석되어 들렸다는 거랄까? 


[보고 싶었어…엘. 널 기다렸다.]


“…엥?”

 

 

 

그 뒤로 상황이 어떻게 됐냐하면, 대충 이렇다. 

난데없이 등장한 유니콘에 놀란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마신교의 신관들 또한 갑자기 나타난 이 정체모를 동물의 등장에 당황했던 것이다. 

한참동안이나 환상마법이네, 어쩌네 저들끼리 신나게 떠들던 그들은, ‘그래도 문제없다’며 곧 재차 다시 공격하려 했고, 그러자 그때까지만 해도 얌전히 있던 유니콘이 갑자기 발작(?)을 하더니 쭉 뻗은 금빛 뿔로 불을 뿜어 내는 희귀한 광경이 연이어졌다.

그런데 그게 어찌나 효과가 탁월한지, 마치 마법 중 강력한 살상력을 자랑하는 파이어 스톰의 위력과 맞먹는 불덩이가 터져 나오는 바람에, 신관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그대로 불길에 구워져 줄행랑을 쳐야만 했던 것이다.

이 예상치 못한 상황전개에 멍해져 있는 내게, 유니콘은 의아한 얼굴을 들이밀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분명 ‘말했다.’


[엘, 왜 그래? 어디 아파?]

“으응?”

[왜 그렇게 멍하게 있는 거지?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

“저, 저기?”

[…?]

“방금…네가…아니, 당신이 말 한건가요?”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럼 여기에 나 말고 다른 녀석이 있던가?]


그야 이사나가 있기는 합니다만, 기절해 있는 상태니 말을 할리는 없겠지요. 아하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무리 이놈의 세계가 기상천외한 나라라지만 날개달린 유니콘이 등장한다는 얘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그것도 모자라 말까지 하다니. 이거…정말 환청이 아닌 거 맞지? 내 표정이 이상하게 굳은 것을 느꼈는지 유니콘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그리곤 걱정이 가득 담긴 어투로 또다시 이렇게 물어오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정말 어디가 아픈 거 아니야? 날 봐도 전혀 반가워하지도 않고, 너 지금 상당히 이상해. 엘.]

“저…죄송합니다만, 날 알아요?”

[응? 그건 또 무슨…? 혹시 장난? 아니면 아까 폭발 때문에 충격이 너무 큰 건가. 흠, 아무튼 인간들이란 너무 약하다니까.]


엥? 인간이라고? 오케바리. 이제 확실히 알았어, 유니콘씨. 당신은 지금 날 다른 인간이랑 착각하고 있었던 거야. 아~ 그랬던 거였어. 휴우. 이상한 놈한테 걸린 건줄 알고 깜짝 놀랐네.

나는 되도록 친절하게 보이도록 마음먹으면서 생긋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선 덩달아 히죽&nbsp;&nbsp;거리는(그다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유니콘에게 지금 하고 있는 착각을 정중히 정정해 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다른 사람이랑 착각하고 계신 것 같네요.”

[뭐어?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엘이 아니란 거야?]

“아, 일단 제 이름이 엘인 건 맞지만…그건 애칭이고. 정식 이름은 엘퀴네스. 현 아크아돈의 물의 정령왕입니다. 정확히 말해, 인간이 아니라는 소리죠.”

[하아? 대체 무슨 소린지… 너 엘퀴네스하고 계약하고 다니더니 뭔가 이상해 진거 아니야? 갑자기 무슨 물의 정령왕…어? 그러고 보니 너 머리색깔이 다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분명 금발이었는데?]


“그러니까…당신이 아는 사람과 다른 존재라고요. 저야말로…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묻고 싶은데요?”


어설프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더니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유니콘의 얼굴이 팩 일그러졌다. 그리곤 갑자기 척척 다가와 그대로 주둥이(…)를 내 목덜미에 파묻고 킁킁거리는 것이 아닌가!


“히익! 무슨…!!”

[엘 맞아. 이 특유의 체향을 몰라볼 리가 없잖아. 게다가 얼굴도 똑같고, 말투도, 성격도 똑같아. 너-! 오랜만에 만났다고 나를 이렇게 놀리기야? 그 동안 답답한 공간 안에 갇혀 있던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글쎄! 나는 당신을 모른다니까요!!”

[거짓말!]

“아, 글쎄! 이렇게 눈에 띄는 말을 내가 몰라볼 리가 없잖아! 한번 봤다고 쉽게 잊혀져 버리는 인상도 아니고!!”


당연하다. 누구도 유니콘을 보고 나면 잊어버릴 리가 없다. 세상천지 날개 달린 말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억울한 마음에 신경질 적으로 반박하자, 유니콘은 냄새를 맡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빛이 반짝 반짝 한 것이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할지 심히 두려워지는 기분이었다.


[방금 뭐라고 그랬어? 눈에 띄는 마알?]

“헉! 기,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지만, 어쨌든 내가 보기엔 당신은 말로밖에…”

[아하! 이 모습이라 몰라보는 거야? 진작 말하지 그랬어! 그렇게 간단한 것을…]

“에? 헉…”


의아한 얼굴로 반문하던 나는, 이윽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그대로 몸이 굳어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얼굴을 바싹 들이밀고 있던 유니콘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온다 싶더니, 그 형체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어느새 내 앞에는 푸르스름한 피부에 새하얀 은발을 가진 남자가 친근한 미소를 띄우며 생긋 웃고 있었다.


“이제 나 알아보겠어? 나야, 나. 시벨리우스. 정말 오랜만이지?”


“……”

저기…당신은 대체 누구신가요?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이 머릿속을 맴도는 순간이었다.

 

 

***

 

 


다행스럽게도 나의 어색한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까지 사태를 방관하고 있던 마족 루카르엠이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 이때만큼 그의 등장이 반가운 순간은 없는 것 같았다.


“호오, 이거 굉장히 신기한데요? 마물이 아니라 유니콘이라니.”

“루카르엠!”

“넌 뭐야?”


꿈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게 환한 미소를 띄우고 있던 유니콘(본인의 말로 시벨리우스라고 하는.)의 얼굴이, 루카르엠을 향해서는 적개심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여전히 생글거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미안합니다, 엘님.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마신교에 서클렛 이야기를 흘린 건 저였습니다.”

“하아? 대체 어째서 그런 짓을?”

“서클렛 안에 담겨진 마물이 뭔지 궁금했거든요. 적당히 위험한 상황만 되어주면 등장할 것 같아서 말이죠. 사실 그동안은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처리하는 통에 엘님이 본격적으로 나설 기회는 별로 없지 않으셨잖습니까. 하핫”

“…이봐요, 당신…”


단순히 어떤 마물이 나올지 궁금해서 그런 짓을 벌이다니, 당신 지금 제 정신이야! 황당한 표정으로 차마 화조차 내지 못하는 내게 루카르엠은 변명처럼 서둘러 말을 이었다. 바로 유니콘 시벨리우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정말 유니콘 일 줄은 예상 못했습니다. 이 종족은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에 아크아돈에서 깨끗하게 증발해 버렸거든요. 신계의 한 부분에 귀속되었다고 들었기 때문에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거참, 이상한 일이네요.”

“에? 유니콘이 종족?”

“엘, 저 녀석 대체 누구야?”


뭔가 상당히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는 시벨리우스의 모습에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해 지기 시작했다. 사실 나로선, 루카르엠 보단 시벨리우스의 정체가 더욱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는 너야 말로 대체 누구란 말이냐!


“호오, 엘님과 벌써 이렇게 친해지신 건가요? 유니콘과는 친해지기는 어렵다고 알고 있는데, 과연 정령왕은 다르시군요.”

“정령왕?”

“아? 모르셨습니까? 일단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자면, 처음 뵙겠습니다, 위대한 유니콘의 후예시여. 제 이름은 루카르엠, 당신이 ‘엘’이라고 칭하는 분은 이곳 아크아돈의 정령왕 엘퀴네스님 이시랍니다.”

“엘…퀴네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시벨리우스는 고개를 살짝 갸웃 해보였다. 그리곤 다시 나를 한참이나 돌아보더니 냉큼 이렇게 잘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틀려. 내가 보았던 정령왕 엘퀴네스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 이 녀석은 그저 ‘엘’이라고. 너야말로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호오? 엘퀴네스를 보셨다고요? 그것 참 이상하군요. 제가 알기로 이쪽에 계시는 분은 틀림없는 엘퀴네스님인데 말입니다. 아아, 혹시…”

“…?”

“문제하나 드리겠습니다! 올해가 몇 년일까요?”


상큼발랄하게 묻는 목소리에 시벨리우스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잠시 고민하듯 눈동자를 굴리더니, 곧 어렵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세이크 제국력 445년?”

“저런, 틀리셨습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 세이크 제국은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에 있었던 나라입니다만.”

“…뭐?”


잠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이 좁아지던 그는 드디어 상황을 깨달았는지 무섭게 표정을 굳혔다. 잠깐…4천년 전이라고?


“무슨…그럼 지금이 그때로부터 4천년이 지났다는 소리야?”

“정답입니다. 그 증거로 현재 이 세계에 남아있는 유니콘 종족은 단 한분도 안계시거든요. 아니, 지금 이렇게 당신이 나타나셨으니 아크아돈의 유일한 유니콘이 되신 건가요? 아까 말씀드렸다 시피 유니콘 종족은 신계로 흡수되어 그곳에서 살고 있답니다.”

“말도 안돼! 그럼 여기 있는 엘은?”

“정령왕 엘퀴네스님이시죠. 당신이 보신 엘퀴네스님이란 분은 지금 계신 분의 전대가 아닐까 생각됩니다만. 아마도 서클렛 안에 봉인된 동안의 기억이 없으신 것 같군요.”

“……”


지금 보는 엘퀴네스의 전대…라면 역시 엘뤼엔이겠지? 우연찮게도 나와 같은 이름에 비슷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 그 시절 살았던 모양이다. 4천년 동안의 기억이 없다니, 대체 서클렛 안에서 무슨 생활을 하고 있었던 걸까?

완전히 현실을 깨달은 시벨리우스는 말 그대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툭 치면 당장이라도 푸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얼굴. 그래서 였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저어…신계로 갈 수 있게 알아봐 드릴 수 있어요. 당장은 무리더라도 곧 가족들에게 돌아가실 수 있을 거예요. 4천년이 시간이 날아가 버린 건 좀 아깝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풀려나서 다행이라고 생각을 하면…”

“그럴 것 없어. 날 그 서클렛 안에 가둔 녀석들이 바로 내 일족이니까. 어차피 다시는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고.”

“…에?”

“그보다…네가 엘이 아니라면 대체 녀석은 어떻게 된 거지? 아, 하긴. 녀석은 평범한 인간이었으니까…이때까지 살아있을 리 없겠지. 하- 기가 막혀서. 잠깐 자고 일어난 기분이었는데, 그새 4천년? 제기랄!!!”


콰앙-!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가 큰 소리를 내뱉은 순간 바닥 한 가운데가 음푹 패여 들어갔다. 그것에 놀래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자, 잔뜩 화가 난 듯한 시벨리우스의 시퍼런 눈동자가 내게 똑바로 돌아서는 것이 아닌가.


“너 뭐야?”

“…에?”

“넌 뭐냐고! 네가 뭔데 엘이랑 똑같이 생긴 거야! 왜 그와 같은 체향을 풍기고 있어? 정령왕인 주제에 무슨 권리로 엘의 모든 것을 그대로 담고 있냐고! 제길, 정령왕이라고 하면 하나같이 재수 없는 기억밖에 안 떠올라! 그런데 끝까지!!”

“저기, 그건 여기 계신 엘님께 따질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무엇보다 4천년 전의 일을…”

“닥쳐! 엘의 이름 함부로 부르지마! 너! 당장 애칭 바꿔!”

“……”


이건 또 뭐라고 받아들여야 할까. 대책 없이 친한 척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지만 무작정인 적개심도 그다지 기분 좋은 건 아니었다. 게다가 그게 내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더더욱. 

대체 엘뤼엔은 옛날에 뭘 어떻게 하고 다녔길래 만나는 녀석마다 나를 괴롭게 한단 말인가! 어쩐지 점점 피곤해 지는 기분에 나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때 마침 기절해 있던 이사나가 깨어나는 바람에 나는 자연스럽게 시벨리우스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으음…”

“앗, 이사나! 정신 들어?”

“…엘? 윽! 어, 어떻게 된 거야? 여긴, 아까 그 장소?”

“아아. 상황이 갑자기 이상하게 전개 되 버려서 말이야. 일단 그 신관들은 전부 물러갔어.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청객들이 몇 명 등장했지만.”

“불청객?”


내 기분이 별로라는 걸 눈치 챘는지, 의아하게 바라보던 이사나는 곧 시벨리우스와 시선을 마주치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블루엘프?”


아, 그러고 보니 유니콘이 변신한 모습이 블루엘프라는 종족이랑 같은가? 약간 푸른색이 도는 피부에 은빛 머리칼, 뾰족한 귀를 보니 새삼 그렇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그러자 이사나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친 시벨리우스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뭐야, 이 인간은?”

“아, 이사나님입니다. 현 엘퀴네스님의 계약자시지요. 당신이라면 이마에 새겨진 물의 인장이 보일 텐데요?”

“흥미 없어, 그런 건. 그나저나 인간 계약자라… 별 일이군. 계약도 더럽게 어렵다는 엘퀴네스가 연이어서 인간에게 소환되다니. 그럼 이번이 두 번째 계약자인가?”

“에? 첫 번째 인데요?”


그러자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시벨리우스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마치 씹어 발기는 듯한 목소리가 앙다문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가.첫.번.째.라.고?”

“여기 있는 이사나가 전 엘퀴네스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최초의 인간 소환자라고요. 이건 다른 정령왕들에게도 확인한 사실이니 틀림없어요.”

“무슨 소리야! 그럼 엘은 대체 뭐라는 거야!! 내가 알기로 엘퀴네스를 가장 최초로 소환한 인간은 바로 엘이었다고!”

“아, 글쎄 내가 알기론 아니라니까요? 그쪽이야 말로 뭔가를 단단히 착각한거 아니에요?”

“뭐가 어째? 지금 나의 기억력을 의심하는-”

“아, 시끄러! 정신 사납게 쫑알거리지 좀 마! 이 빌어먹을 말 같으니!!”

 

 


“……”

“……”


순간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임하는 내 태도에 시벨리우스를 포함한 사람들이 굳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전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녀석을 똑바로 노려보며 숨도 쉬지 않고 소리쳤다.


“그렇게 의심나면 돌아다니면서 대륙 역사서를 뒤져보면 될 거 아니야! 너야말로 지금 정령왕의 기억을 의심해? 난 분명히 들었다고! 여기 있는 이사나가 엘퀴네스의 첫 번째 인간 계약자란 말이야! 너 아까 나한테 뭐냐고 그랬지? 그 말 나도 좀 해보자. 너 누구냐? 대체 누군데 갑자기 나타나서 멀쩡한 정령왕의 정신을 이렇게 피폐하게 만드는 거야? 뭐? 애칭을 바꿔? 못 바꾸면 어쩔 건데! 어? 니가 정령왕인 나를 어쩔 거냐고!!”

“어이…너…”

“보자보자 하니까 이제 별게 다 나타나서 시비야! 처음엔 드래곤, 다음엔 마족이더니, 이번엔 유니콘이냐? 아~ 그래. 내가 보기에도 나 안 평범해. 그래서 내 주위에 특이한 놈들이 모여도 찍소리 못할 처지란 거 알거든? 근데 이건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누군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줄 알아?”

“…엘.”

“그래, 내 이름 엘이다! 엘퀴네스건 엘이건 강지훈이건! 다 내 이름이라고! 이 세상에 동명이인이 어디 한 둘인 줄 알아? 넌 이 대륙 모두 돌아다니면서 엘이란 사람들 이름 다 뜯어 고칠 거야? 어? 그런…으악!!”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많았던 건지, 스스로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도 의식 못한 채 열심히 쏘아붙이던 나는, 갑자기 벌어지는 현상에 놀라 그대로 말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하여 정신을 차렸을 땐, 난 어느새 시벨리우스의 품에 끌어 안겨 꼼짝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무, 무슨!”

“엘이다….”

“어? 뭐라고?”

“엘이다. 분명히 엘이야. 그럼 그렇지. 내가 잘못 봤을 리 없지. 엘이 아닐 리가 없지.”

“에엑?”


대체 어째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는 거냐. 아니 무엇보다, 나는 인간도 아닐 뿐더러, 4 천 년 전엔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단 말이다! 

그러나 차마 등 뒤로 뚝뚝 눈물을 흘리는 녀석을 향해 그렇게 말해 줄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진 화내느라 전혀 고려치 않았던 녀석의 심정이, 이제야 어느 정도 공감이 되는 기분 이었달 까?

잠깐 잠들고 일어났는데 4천년이란 세월이 흐른다면, 누구나 다 당황하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전에 알았던 친구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난다면 더욱 현실의 변화를 믿을 수 없겠지. 만약 엘뤼엔이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나를 모른다고 말한다면? 트로웰이나 이사나랑 닮은 사람이 날 모른다고 한다면… 난 어떤 기분이 될까.


‘좀…심한 말을 해버린 걸지도.’


욱씬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얼굴을 찌푸리자 한참동안 나를 끌어안고 있던 시벨리우스가 천천히 몸을 떼어냈다. 올려다 본 그는 눈물 가득한 얼굴로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예전에 엘도 화가 나면 나한테 그렇게 소리쳤었어. 분명히 엘이야.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저기, 미안한데…”

“괜찮아. 엘이 아니라도 상관없어. 분명한건, 넌 엘을 대신하기 위해 내게 나타난 존재니까.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그렇게 믿을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날 책임져.”

“!!!”


맙소사. 이건 또 무슨 소리냐. 

순간 눈앞에 별이 왔다 갔다하는 환상이 펼쳐졌다. 경악하는 이사나나, 감탄을 연발하는 루카르엠의 얼굴은 전혀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패닉에 빠져 버린 것이다. 정녕 내 인생에 평탄한 길은 없단 말인가? 진정으로 울고 싶어진 하루였다.

 

 

유니콘 이란 종족은 아크아돈이란 차원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존재하던 생물로, 정령왕과 드래곤에 버금가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인간들의 숫자가 점점 불어나기 시작하면서, 몇몇 탐욕스러운 인간들에게 영토를 점령당하게 되자, 더 이상 수모를 견디지 못하고 주신께 의뢰하여 신계로 떠나버린 것이다.

만방에 팔방미인으로 이름 높은 그들은 외모면 외모, 전투면 전투, 요리면 요리, 그야말로 각 분야에서 뒤처지는 구석이 전혀 없었다. 바로 그것이 내가 녀석을 군식구에서 쓸모 있는 놈이라고 인식을 바꾸게 된 계기였다.


“흐음, 그렇게 대단하다면 인간들에게서 영토를 지켜내면 되잖아? 뭣 하러 여길 떠난 거지?”

“우리들이 제대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것은 본체일 때뿐이야. 지금처럼 인간체로 변신해 있을 경우엔 큰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거든. 바로 그때를 틈타서 인간들이 우리를 붙잡았지. 다시 본체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마법으로 금제까지 걸어 놓으니 별 다른 방도가 없었어. 게다가 우리 종족은…치명적인 약점이 있거든.”

“치명적인 약점?”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한창 요리를 하던(이것이 바로 쓸모 있는 이유인 것이다!) 시벨리우스(줄여서 시벨)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그러면서 상당히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여자한테 약해.”

“엥?”

“그, 뭐랄까. 순결한 처녀한테 본능적으로 약한 종족이야. 그래서 여자로 유혹하면 백이면 백 전부 잡혔지. 아아, 한심하게 생각해도 돼. 전에 이 얘길 들었을 때의 너도 상당히 황당해 했으니까.”

“음. 그러니까 나는 그 엘이 아니란…휴우, 관두자. 아무튼, 전혀 의외인걸. 아,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유니콘이 처녀들을 좋아한다는 얘길 들어본 것 같아. 그게 이곳에서도 적용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아, 그 얘기! 전에도 말했어.”


그러면서 생긋 웃는 모습에 나는 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막막해 지기 시작했다. 사람을 착각해도 단단히 착각하는 놈을 무슨 수로 말린단 말인가! 


“그나저나 너 정말 이거 못 먹는 거야? 조금도 못 먹어? 응?”

“말했잖아. 난 정령이라서 음식은 소화 못해. 주스로도 벅찰 정도라고. 그래서 지금까진 본의 아니게 이사나의 식사가 소홀했는데, 그나마 네가 합류해서 다행인걸까? 요리를 잘 할 줄은 전혀 몰랐는걸.”

“아아, 이래봬도 노숙 경험이 많거든. 유니콘은 방황하는 종족이기 때문에 성인식만 지나면 대체적으로 잘 돌아다니는 편이야. 그래서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할 기회가 있었지. 아, 하지만 못 먹는 다니 아쉽네. 예전에 너…내가 만든 요리 상당히 좋아했었는데.”


그러니까 그건 내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듣겠냐, 이 화상아! 버럭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가슴만 두드리자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이사나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멋대로 나를 ‘엘’이라고 인정한 뒤부터 시벨은 이사나에게 무척 자상해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급속도로 친해져 버린 두 사람(?)은 이제 내가 ‘일행으로 인정 못해!’ 라고 말할 수도 없는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시벨리우스 녀석. 아마도 본능적으로 우리 일행의 진정한 리더가 누군지 파악하고, 미리 포섭을 펼친 모양이다. 그 예로, 이사나에게 인정받지 못한 루카르엠은 여전히 기척만 드러낸 채 쫓아다니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역시 이래서 사람은 공략 대상 선정을 잘 해야 한다니까?


“그러고 보니 널 이 서클렛 안에 가둔 게 네 일족이라고 했지? 대체 무슨 이유였어?”

“별거 아니야. 장로할아범한테 대판 대들었거든. 억지로 결혼시키려고 하는데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렇다고 세상에! 멀쩡한 유니콘을 서클렛 안에 봉인시키는 장로가 어디 있어? 아무리 그 상대자가 장로의 손녀였고, 나 때문에 상사병이 도졌다지만 해도해도 너무 하잖아?”

“헤에. 여자한테 약하다더니, 일족의 여자일 땐 경우가 좀 다른가봐?”

“아니. 별 다른 건 없는데, 뭐랄까. 그때 나는 이미 다른 존재를 마음에 두고 있었거든. 어릴 때부터 한집에서 자란 거나 마찬가지인 웰디는 눈에 안 차는 게 당연했지. 뭐, 그렇다 해도 내가 특이한 경우인건 사실이었지만. 원래 유니콘들은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잡는 주의라서 말이야.”

“정말 제대로 된 바람둥이 종족이로군. 인간에게 박해받아도 싸다.”

“아! 그 말! 그것도 전에 말했었어, 엘.”

“……”


무슨 말만 해도 이렇게 전의 ‘엘’과 연관을 지으려고 하니, 이젠 말을 꺼내는 것이 두려울 지경이었다. 덩치에 안 맞게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도 상당히 부담스러웠고. 아,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지금 몇 살이나 된 걸까?


“나? 당시에 1200살이었으니까…지금 나이는 5200살이네. 유니콘은 별다른 일 없으면 만년까지는 살거든. 그나저나 봉인 된 시간도 몸에 적용이 된 건지 몰라? 지금 보면 그다지 생체 리듬에 큰 변화는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슬쩍 물어보니까 순순히 가르쳐 주는 건 좋은데, 대답이 참으로 신선했다. 나는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 1200살에서 시간이 멈춘 셈?”

“아마도 그런 것 같아. 그런 게 아니라면 잠들어 있던 4천년의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을 리 없으니까. 그런데 엘은 어떻게 된 걸까? 시간이 멈춘 건 아니고…환생이라도 한건가?”

“그럴 리가. 정령왕은 처음 창조되는 영혼으로만 탄생된다고 했어. 전생이 있는 경우는 그야말로 특별한 케이스라고.”

“네가 그 특별 케이스일지도 모르잖아.”


그래, 맞다. 내가 바로 그 특별 케이스란다. 하지만 절대 4천년 전의 기억은 가진 바가 없다고. 남들은 하나도 없는 전생을 날더러 두개나 가지란 말이냐?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주자 시벨은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그 때 마침 요리가 알맞게 익었기에, 우리들의 화제도 자연히 그 쪽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시벨이 저녁식사로 마련한 것은 간단한 베이컨에 양고기 스튜였을 뿐이지만, 마을을 벗어난 이후 건량으로 끼니를 때우기가 일 쑤던 이사나로서는 그야말로 만세를 절로 외칠 정도로 호화로운 식단이었다. 때문에 녀석의 입가엔 아까부터 웃음이 떠나질 않고 있었다.


“와, 맛있겠다. 시벨님, 정말 요리 잘하시네요. 저도 한번 배워보고 싶은 걸요?”

“아, 그래? 언제든지 말만 해. 내가 한때 황실 요리 자격증까지 가지고 있었단 말씀. 가르쳐 주는 것도 잘 할 수 있어. 사실 내가 요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엘 때문이었는데 말이야. 먹는 걸 굉장히 좋아했거든. 항상 간식거리가 입에서 떠나질 않았어.”

“윽, 또 시작이냐.”

“아냐, 정말이라니까? 그런 의미에서 엘, 너도 한번만 먹어봐, 응? 먹지 않아도 상관없을 뿐이지, 조금쯤은 먹어도 무리 없는 거잖아? 전대의 엘퀴네스 -그 놈도 가끔 빼앗아 먹었다고.”

“…엘뤼엔이?”


그 엘뤼엔이 남이 만든 요리를 빼앗아 먹었다고?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 얘기에 뜨억하게 입을 벌리자 시벨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응? 엘퀴네스라니까, 엘뤼엔은 또 누구?”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난 사양할래. 음식은 조금만 먹어도 속이 거북해 져서 싫어.”

“쳇, 언젠간 반드시 먹이고 말테다.”


이상한 것에 집착을 보이는 유니콘-시벨리우스의 모습을 보며 나는 라피스가 떠난 이후 가라앉았던 두통이 다시 도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은 녀석이랄까.

 

 

이사나와 호흡이 잘 맞는다는 점에서는 분명 라피스보단 점수가 높지만, 저 시도 때도 없이 전 ‘엘’과 연관짓는 것을 내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 시벨이 언제까지 나를 전 ‘엘’로 보게 될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지금 저렇게 상냥한 것은 단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어서 일 뿐, 다시 현실을 자각하고 나면 분노했을 당시처럼 싸늘하게 돌아올 것이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녀석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한 녀석은 나를 물건취급하고, 또 한 녀석은 다른 사람이랑 착각을 하고. 에휴, 내 팔자야…’


세상 어떤 정령왕이 나보다 더 처량한 신세가 될 수 있을까? 정말이지 갈수록 한숨쉴 일만 늘어나는 것 같다. 그러나 비참하게 고개를 수그리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시벨과 이사나는 연신 저들끼리 떠들면서 오붓한 시간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헤에, 네가 이 제국의 황제라고?”

“아뇨, 여기가 아니고 바다건너 솔트레테라는 제국이에요. 지금은 황권을 다시 되찾기 위해 노력중이죠.”

“흐음, 그럼 본인의 나라에서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야? 바다건너까진 왜 온 건데?”

“나를 도와주기로 약속한 사람이 가져와 달라고 한 물건이 있어서요. 그걸 가져와야 도와준다고 했거든요.”

“쳇, 쪼잔한 놈일세. 도와 줄려면 그냥 도와줄 것이지, 조건을 다는 건 또 뭐야? 그런 건 친구도 아니라고.”


그건 네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다, 시벨. 심지어 친구를 넘어서서 ‘엄마’를 자청하고 있는 존재라면 더더욱 문제가 되지 않겠니? 무심코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을 보았는지, 이사나는 또다시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오직 상황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시벨만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을 뿐.


“아, 그런데 시벨님은 왜 블루 엘프족으로 변신하신 거예요?” 

“응? 왜? 이상해?”

“아니, 이상한건 아니지만, 흔한 종족은 아니잖아요. 여행 다닐 때 분명 눈에 띄었을 텐데, 불편하시지 않았어요? 이왕이면 평범한 노말 엘프나, 인간으로 변신하셔도 될 텐데.”


그러고 보니 그건 나도 궁금했다. 굳이 변신할 거면 인간으로 할 것이지, 뭣 하러 눈에 띄는 블루 엘프를 선호한 걸까? 그러자 우리들의 호기심 어린 표정을 한 몸에 받은 시벨은 곤란한 듯 미간을 잠시 좁히더니 도리어 의아하단 듯이 물었다.


“블루 엘프가 눈에 띈다고? 그거야 말로 금시초문인데. 설마 그 몇 천 년 사이에 종족의 분포수가 바뀌어 버린 거야?”

“에? 옛날엔 블루 엘프가 흔했어?”

“적어도 특이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지. 노말 엘프나 블루 엘프나, 거의 비슷비슷 했어. 인간과의 교류도 상당히 활발한 편이었고.”

“헤에. 지금은 아니야. 블루 엘프들은 소수로 모여서 따로 숨어 지낸다고 하던걸? 아마 그대로 다니면 상당히 눈에 띌 텐데, 괜찮겠어?”


안 그래도 특이한 종족인데 세빌은 외모조차 상당히 아름다운 편이라 더욱 눈에 띄였다. 블루 엘프를 실제로 본적은 없었지만 세빌이라면 그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외모로 꼽힐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지나다니면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휘어잡지 않을까? 그러나 정작 세빌 본인은 그런 점에 대해 크게 신경 쓰는 얼굴이 아니었다.


“난 이대로가 좋은데. 너희들이 불편하지 않다면 이 상태로 있고 싶어. 전의 엘과 다녔을 때도 이 모습이었기 때문에, 좀 애착이 있는 편이거든.”

“아, 저도 그다지 상관은 없어요. 어차피 지도 대로 가면 마을을 거칠 일도 별로 없고.”

“흐음, 그럼 결국 이 상태로 가는 건가? 뭐, 나도 본인이 좋다는데 굳이 반대할 필요는 없지. 블루 엘프는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자아, 그럼 오늘은 이만 여기서 자고,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길 떠나볼까?”


그러자 침낭을 꺼내려고 가방을 뒤적거리는 나에게 세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뭐 하는 거야?”

“응? 침낭이랑 담요 꺼내려고. 자려면 필요하잖아?”

“그런 거라면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그렇게 말한 세빌은 우리들에게 양해를 구하더니, 처음 나타났던 유니콘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곤 이마에 뻗은 금색의 뿔을 통해 커다란 원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 안에서 번져 나오는 금가루가 정확하게 나와 이사나가 있는 공간을 감싸고 나자 순식간에 거대한 텐트가 등장하는 것이었다. 

놀란 얼굴로 안을 들여다보니, 마치 여느 가정집에라도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헉!”

“우와…”

“침대는 세 개로 설정해 놨으니까 편하게 잘 수 있을 거야. 안에 들어가서 문을 닫으면 자동으로 투명화 마법이 실행 되서 도둑들의 습격을 받을 걱정도 없지. 어때? 나 이만하면 쓸만하지?”


마치 나 일행으로 삼길 잘했지? 라고 물어보는 듯한 얼굴에 나는 의식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시벨리우스…녀석은 참으로 제대로 된 복덩이었던 것이다.

 

 


***

 

 


“반려의 운명을 가진 소녀입니다.”


그것은 거무튀튀한 손으로 연신 수정 구슬을 매만지고 있던 늙은 마법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가래침이 잔뜩 섞인 쉰 목소리였지만 앞에 앉아있던 남자의 표정에는 별다른 불쾌감이 서리지 않았다. 오직 노인이 하고 있는 말의 내용에 집중하고 있을 뿐.

어두컴컴하여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은 동굴 안에서 남자는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반려의 운명이라…. 정확하게는 누구의?”

“클클클, 제왕입니다. 이 세상을 지배할 위대한 군주의 반려지요.”

“호오, 흥미로운 걸? 그렇다면 내가 그녈 취하게 되면 그 제왕의 자리는 내 것이 된다는 건가?”

“킥킥, 나이를 생각하셔야지요. 당신이 넘보기에는 아까운 별입니다.”

“…!”

“이놈! 감히 이분이 뉘신 줄 알고!!”


노인의 직설적인 어투에 화가 난 듯, 남자의 옆에 서있던 기사한명이 성난 표정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그것을 한손을 들어 제지시킨 남자는 이윽고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자네의 농담은 언제 들어도 유쾌하지 않군. 뭐, 좋아. 어차피 내가 원한 것은 반려 따위가 아니었으니.”

“클클클. 그렇게 대답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이 소녀만큼 당신의 요구에 적합한 존재는 없을 것 같군요. 제 일생에 이렇듯 강렬한 별의 기운을 느낀 것은 처음입니다.”

“그렇다면 소녀가 있는 곳은?”


노인의 말을 들은 남자의 표정이 일순 달라졌다. 자신이 그렇게 찾고도 찾았던 존재를 드디어 발견 한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력과 부귀! 그것을 손에 넣을 순간을 더욱 앞당겨줄 바로 그 존재를!

남자의 두 눈에 서린 탐욕의 감정을 읽은 노인은 곧 클클 미소 지으며 탁자위에 아무렇게 나 쌓아두었던 양피지 더미를 집어 들었다. 그가 한참을 뒤적여 남자에게 건넨 것은 그중 얇은 비단으로 감싸져 있는 것이었다.


“…이건?”

“소녀의 초상화와 간단한 인적사항, 현재 사는 거취가 기록된 것입니다. 언제고 방문하실 날이 있으면 전해드리려고 가지고 있었지요. 클클.”

“준비성 하나는 확실하군. 그런데 괜찮겠나? 내가 소녀를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 모르진 않을 텐데?”

“클클. 괜찮을 이유도, 그렇지 않을 이유도 없지요. 저는 다만 찾아온 사람들에게 제가 읽은 별의 정보를 제공해 줄뿐.”


노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받은 그것을 옆에 있던 기사에게 건네주었다. 조심스럽게 서류의 겉봉을 뜯은 기사는, 곧 차분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알폰프 제국, 드레프 백작의 외동딸인 알리사노 알 드레프, 라고 적혀있습니다. 첩이었던 어미가 평민 출신이라 집안에서의 위치는 그리 견고하지 않으며, 올해로 나이 13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개월 전, 정령사의 자질이 있음이 밝혀져 제국 황실로 불려갔으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와 현재는 제국을 방황하는 중이며, 지금 머무르고 있는 곳은 죽음의 숲 근방의 바론 사막입니다.”

“사막? 호오, 그런 곳엔 어째서?”

“정령과의 친화력을 쌓기 위해서…라고 되어있군요. 아마도 땅의 정령사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흐음, 재미있군.”


그러나 싱글거리며 중얼거리는 그의 눈동자는 마치 얼어붙은 듯 차가운 빛을 띄고 있었다. 그것을 본 노인은 다시 조롱하듯 이죽거리는 말을 내뱉었다.


“재밌다시는 분이 눈은 전혀 웃고 계시지 않군요. 클클. 그리 그 아이가 욕심나시는 겝니까?”

“…물론이다. 그녀는 나를 부유하고 위대하게 만들어줄 완벽한 전초전의 역할을 하게 될 테니까. 거기다 제왕의 반려라니, 더욱 마음에 드는 군. 아마 내 평생에 바친 가장 고귀하고 비싼 제물이 될 거야.”
흐릿하게 웃은 남자는 그 상태 그대로 기사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어둠의 기사단 제 2진을 보내라. 결코 실수 없이 잡아와야 할 것이다. 반드시 ‘순결한 상태 그대로의’몸으로 데려오도록. 기간은 1년이다.”

“대공전하의 명령을 따릅니다!”


경직된 자세로 대답한 기사는 서둘러 남자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어두침침한 동굴 안을 나섰다. 기사로부터 ‘대공전하’라고 불리운 남자- 유카르테 란느 솔트는 이번엔 노인을 바라보며 나직히 경고했다.


“오래 살고 싶다면 그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거야. 그간의 정성을 봐서 지금은 살려주지만, 상황은 언제고 바뀌는 법이지.”

“호오, 협박이신가요? 클클…”

“사실을 말한 것이다. 어차피 얼마 남지도 않은 인생, 편하게 살다 가고 싶겠지? 그렇다면 기억에서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을 지워라. 내 말,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도 이 한목숨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는지라 말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히죽 웃는 노인을 본 대공은 이곳을 방문한 이례 처음으로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곧 상대 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건지, 홱-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몸을 돌리며 뚜벅뚜벅 동굴 밖을 향해 걸어갔다.


“클클클…”


대공과 그를 따르는 기사들이 모두 사라지자, 노인은 조심스럽게 들고 있던 수정구를 천천히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자 말갛기만 하던 수정 위로 어느새 검은 밤하늘이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그 위로 박혀있는 수많은 별들을 무심한 표정을 바라보던 노인은, 문득 다른 별들보다 유난히 빛나는 세 개의 빛 덩어리를 보곤 천천히 미소 지었다. 여전히 가래서린 쉰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왕의 반려는 하나…선택된 제왕은 둘. 대공전하, 그대는 과연 원하는 일을 이룰 수 있을까?”
밝혀지지 않은 진실하나가 조용히 그 빛을 드리우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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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입니다..... 우후후후.. 어제 밤을 샌 결과 입니다. 한숨도 못잤더니 눈앞이 가물가물 하군요. (그래도 역시 뿌듯.)

이것으로 5권 원고의 대부분이 완성되었습니다.

자,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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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에 삭제합니다. 푸하하하하!!!

 

 

 

 

제왕의 반려 (1)

"이게 대체 뭐하자는 짓이야!"

소녀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하며 앙칼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벌써 며칠째 이어진 추격전에 온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추욱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끊임없이 공격이 이어지는데, 정작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있는 건 오로지 메마른 사막과 그 위에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 뿐. 소녀는 막막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휘이잉. 그때 마침 푸석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얼굴을 헤집고 있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 바람에 가려져 있던 소녀의 얼굴이 살짝 드러났다.

얇게 구불거리는 금발머리카락에 희고 고운 얼굴. 비록 누더기와 다름없는 차림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소녀의 아름다움을 가리지 못했다.

긴 앞머리 사이에 언뜻 보이는 눈동자는 선명한 주황색. 애띈 얼굴이었지만 누구라도 보았다면 먼저 탄성부터 내지르고 볼 외모였다.

말 그대로 경국지색(傾國之色).

이대로 몇 년 만 지나면 그 외모하나로 사로잡지 못할 남자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 외모에 관심이 없는 건지, 고운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바람결에 헝클어진 머리를 짜증스럽게 쓸어 넘길 뿐이었다.

정확하는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귀찮아서 신경 쓰지 않는 것이었지만.

"정말이지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한눈에 보기에도 대부호나 귀족의 딸로 보이는 소녀가 정처 없이 사막 위를 떠돌아다니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사실 알폰프 제국 드레프 백작가의 서출로, 정령사의 자질을 인정받아 최근에 제국 황실로부터 부름을 받았었다.

보다 넓은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과, 멋진 삶을 기대했던 것도 잠시. 서출이라는 그녀의 신분을 만만히 보고 괴롭히기 시작한 사람들 때문에 2달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뛰쳐나고오 만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백작가의 옛 집으로 돌아갈수도 없는 일이라, 그녀는 할 수 없이 정령술이라도 열심히 연마(?)해서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땅의 정령을 다룰 수 있는 그녀에게 가장 최적의 환경은, 방해자가 다른 잡스러운(?)것 하나 없이 오로지 무한한 땅만 이어지는 이곳 바론 사막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갑자기 침입한 정체모를 적들에 의해 빛도 보지 못하고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힌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아악! 도대체 어떤 인간들이 쫒아다니고 있는거야! 공격을 하려면 모습이라도 드러내란 말이얏!"

청순한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과격한 목소리가 소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무리 인내심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장장 3일간을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쫓기다보면 신경이 예민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찌 보면 저들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상대방을 피로하게 만들어 쓰러지게 만들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적의 정체 따위, 너무 짐작 가는 부분이 많아서 꼽을래야 꼽을 수도 없는 게 현재의 처지. 소녀는 암울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야? 잘나신 1황자님의 엉덩이에 장렬한 손가락질(일명 똥침이라고 한다)를 하고 튀어서? 아니면 2황자님의 식사에 겨자가루를 섞어서? 아니면 1황녀님의 치마단을 실수인 척 밟아 뜯어놓아서? 재수 없어! 그런 것 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의 애교로 봐줄 수도 있는 거잖아! 황자들이라는 게 하나같이 쪼잔하기는!"

...구구절절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 유감이었지만 여하튼 소녀로서는 원망이 컸다.

올해 나이 13살.

한창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어리광 피워도 모자를 시기에 이 한낮 볼 것 없는 사막에 와서 수련하는 것도 억울한데, 그것도 모자라 추격자들까지 나타나니 이래가지고 인생이란 게 과연 살망한 것인가 싶었다.

하긴, 백작가의 저택에 있었을 때도 그녀는 이래저래 쓸모없는 천덕꾸러기였을 뿐이었지만.

만사 귀찮다는 얼굴을 한 소녀는 제풀에 지쳐 마른 돌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론 사막의 터줏대감이라는 악명 높은 지옥 땅 거미 떼에 둘러싸여있을 때에도 지금처럼 심신이 괴롭지는 않았다.

땅의 정령을 불러내어 상대를 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지금처럼 몸이 약해진 상태에선 정령을 소환해 봤자 오히려 계약자인 자신만 힘들어질 뿐이다.

문든 손에 닿은 땅의 느낌이 축축하다는 것을 깨달은 소녀는 안색을 창백하게 굳히곤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정체모를 적에게 쫓기는 사이, 저도 모르게 죽음의 숲과 가까운 늪지대까지 이른 모양이었다.

이 상태로 계속가면 늪 옆에 진치고 있는 수 많은 마물들까지 상대해야 할 위험부담이 컸기에, 지금까지 자신을 쫓아온 정체모를 적과의 결판은 곧 죽어도 여기서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문제는....소녀에게는 지금 몸 하나 까딱할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었지만.

"정말 미치겠네. 나 설마 여기서 죽는 걸까? 하다못해 모슨 이유로 공격하닌 지만 알았으면..."

애초부터 대답을 기대하고 중얼거린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아무리 빽빽거리고 이유를 물어도 침묵하던 자들이었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소녀의 예상과는 달리, 추격자들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소녀의 앞에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소녀의 주위는 어느새 검은 두건으로 얼굴 전체를 감싼 5명의 낯선 남자들에게 둘러싸여져 있었다. 그들을 본 소녀의 눈이 동그랗게 벌어지자 그 중 리더로 보이는 듯한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인가. 어린 나이치곤 꽤나 애 먹인 상대로군. 반나절도 못가서 쓰러질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다,당신들 뭐야? 누구야?"

"아아, 그렇게 겁 먹을것 없어, 꼬마 아가씨. 우리들은 너에게 아무런 위해를 끼치지 않을 거니까 말이야.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 네가 얌전히 우리를 따라가는 것 뿐이다. 어때? 별로 어렵지 않지?"

소녀는 기가 막혔다. 지금까지 치사한 수로 사람의 몸을 몰아붙인게 누군데 이제와서 '위해를 끼치지 않겠다'의 태도란 말인가. 가장 중요한건 지금까지도 그들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소녀는 앙칼진 태도로 몸을 긴장시키며 입을 열였다.

"내가 궁금한 건 당신들이 누구냐는 거야. 사람을 데려가라면 우선 본인들의 정체부터 밝히라고."

"후후. 꽤나 당찬 아가씨로군. 좋아, 말해주지. 우리에게 너를 데려오라고 명령하신 분은 저 위대한 솔트레테 제국의 황제폐하님이시다. 자, 이정도면 설명이 충분하지?  알리사노 알 드레프양?

아니 전혀!!

남자로부터 이름이 불려진 소녀-알리사노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녀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자의 정체가 이 순간에 거론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솔트레테 제국...황제 폐하?"

"그렇다,꼬마 아가씨. 선택 받은것을 기뻐하라고. 너는 장차 이 대륙을 지배하실 그 분의 위명을 돋울 영광스러운 제물이 될 몸이니까."

'제...제물?'

알리사노의 얼굴은 금새 사색이 되었다. 재물이라니, 이 무슨 밑도 끝도 없는 소리란 말인가! 설마 진심인가 싶어 올려다봤지만, 두건에 가려져 있는 얼굴 따위, 감정을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알리사노는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입을 열였다.

"제물이라니? 내가 왜? 솔트레테의 황제가 타 제국의 소녀를 제물로 쓴다는 입장을 떳떳하게 밝혀도 되는거야? 난 안가! 절대 싫어! 황제인지 뭔지 모르지만, 남의 목숨을 함부로 할 자격은 없다고!"

"후훗, 그것은 아가씨 본인에게만 통하는 정의겠지.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니란 말씀. 가기 싫다고 해도 우리가 억지로 끌고 가면 그만이지. 안심해. 처음 말했던 대로 과격한 행동은 하지 않을 거니까. 바로 그것을 위해 지난 며칠간 아가씨가 탈진할 때까지 기다린 거고 말이야."

"!!"

농담이 아니다. 그 순간 알리사노는 진정으로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여전히 영문을 모르긴 마찬가지지만 한가지는 확실했다. 이대로 끌려가면 죽는 것이다. 두건을 쓴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본 그녀는 비명처럼 소리쳤다.

"멀든!!"

쿠구궁-

그녀의 부름에 우르르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따. 이대로 순순히 잡혀가느니, 차라리 마나를 완전히 다 써버리는 한이 있어도 정령을 소환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이런!"

완전히 지쳐버린 소녀가 정령을 불러낼 체력을 숨겨두고 있었다는 것을 미쳐 감지하지 못한 검은 두건의 남자-유카르테 대공의 기사들은, 흔들리는 땅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후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지진이 일어나듯 갈라지는 땅 덩어리 위에서 커다랗게 솟아 오르는 커다란 거인의모습을 볼 수 있었다.

땅의 중급 정령-멀든의 등장이었다.

***

정보길드에서 건네준 던전까지의 지름길은 말이 좋아 '길'이지 완전히 늪지대나 다름 없었다. 사방의 땅은 온통 질척질척 하고 나무엔 이끼가 잔뜩 끼어있었으며, 주변엔 전체적으로 뿌연 물안개가 퍼져있었다. 마치 TV속에서는 보던 밀림의 정글 같은 분위기랄까?

조금이라도 발을 잘 못 디뎠다간 그대로 늪에 빠져버릴 것 같아, 일행들의 걸음은 이제까지와는 비교됴 할 수 없을 만큼 조심스러워 졌다. 이래서야 차라리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돌아가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진지하게 들 정도다.

그러나 정작 나를 당황하게 만든 건 열악한 환경보다, 앞서 지도를 보며 걷고 있던 시벨리우스의 단 한마디였다.

"어라라. 어떡하지,엘. 여기서 길이 끊겼는데?"

"뭐라? 길이 끊겨?"

"응. 이 바로 앞부분부턴 죄다 물이야. 제대로 딛고 걸어갈 부분은 없는 것 같아. 이 제도 제대로 된것 맞아?"

곤란하다는듯이 중얼거리는 시벨의 말에 나 역시 당혹한 얼굴이 되서 지도를 다시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우리가 잘 못 온건 아니고, 그렇다고 정보길드에서 틀린 지도를 제공할리도 없을테니 이것은 아마도...

"이런, 비가 내리는 바람에 물의 수량이 불어났군."

"비?"

"응. 타이밍 좋게도 우리 오기 바로 직전에 폭우라도 쏟아진 모양이야. 지금 흐르는 강은 일시적으로 늘어난 빗물이란 소리지. 원래 열대지방일수록 비가 단기간 동안 한꺼번에 내리는 경향이 있거든. 아마도 지금이 이 지방의 우기(雨氣)인 것 같아."

요즘 들어 부쩍 감을 잘 잡게 된 내가 아무 망설임 없이 설명하자 이사나와 시벨의 표정이 잔뜩 찌푸려졌다. 지금까지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할 생각에 앞길이 막막해 진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나는 살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기는 그렇잖아? 방법이라면 여러가지가 있으니까."

"무슨 방법? 내가 본체로 변신해서 너희들을 옮기는 건 무리야. 우기라면 비가 언제 또 내릴지 모른다는건데, 자칫 중간에 내리기라도 하면 낭패거든. 깃털이 젖으면 날지 못하게 되니까."

"아, 그래? 꽤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안되겠네. 비를 안 내리게 할 수는 있지만 더 간단하게 해결 할 수 있는 일을 일부러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면 이렇게 해 볼까? 물 위를 걷는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 본적 있어?"

"...?"

내 질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녀석들을 보며 나는 슬슬 기운을 집중시켜 늪지대를 이루는 물의 이동을 붙잡았다. 사실 정령왕인 나로선 물의 표면을 일시적으로 딱딱하게 만드는 것 쯤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겉보기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강물을 향해 걸어보라고 하자 이사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결국 시벨리우스가 가장먼저 걸음을 내딛게 되었는데, 분명 물 이에 닿았음에도 밑으로 빠지지 않자 곧 신기한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마치 단단한 얼음 위에 올라선 기분인걸? 엘, 너 정말 정령왕이 된 거 맞구나."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잖아. 어때? 걸을 만 해? 이사나도 걱정말고 가봐. 빠지지 않을 테니까."

"으응.."

민망한지 뻘쭘한 표정을 짓던 녀석은 곧 시벨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불안해하는듯 하더니, 어느새 적응이 되었는지 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광장해. 지금까지 걷던 질척한 흙바닥보다 더 단단한 느낌이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대운 대리석 위에 올라서 있는 것 같아."

"칭찬 감사합니다. 자아, 그럼 가볼까?"

보너스(?)로 텁텁하게 숨을 채우던 습기까지 제가하고 나자, 이사나와 세벨리우는 안색이 훨씬 가뿐해졌다. 지금까지 내색하지 않았지만 늪지대를 이동하는 것이 두 사람(?)에게 상당히 힘든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 중 이사나는 표 안나게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항의를 늘어놓기도 했다.

"너무해, 엘. 이런게 가능했으면 진작 좀 해주지. 여긴 너무 덥고 습해서 답답했단 말이야."

"미안. 깜빡 잊고 있었어. 내가 불편한 걸 못 느끼다 보니..아하하."

만약 내가 이사나의 입장이었으면 불 같이 화를 내며 목을 쥐고 흔들어 대지 않았을까.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린 이사나는 부럽다는 시선을 보내왔을 뿐이었다.(시벨의 경우는 '엘'이 하느 ㄴ일이라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는 주의니 신경 쓰지 말기로 하자.)

이보다 더 편한 일행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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