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소설] 정령왕 엘퀴네스 4권
- 새로운 일행 -
헤롤이 눈을 뜬 것은 몬스터와의 전투가 벌어진 다음날 오후였다. 몸의 상처는 완전히 다 나았어도 고통에 대한 정신적인 충격이 컸었는지, 좀처럼 깨어나지 않던 그가 드디어 일어날 기미를 보이자 일행들은 모두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깨어난 본인은 이것이 현실인지 아닌지조차 구분을 하지 못하는 듯 했다. 생사를 다투는 험한 인생을 살아온 용병답게, 자신이 입었던 상처가 쉽게 회복될 수준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거, 혹시 꿈? ”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일행들 한사람 한사람과 일일이 눈을 맞추더니 갑자기 기겁을 하여 소리쳤다.
“ 뭐야, 너희들! 그깟 몬스터 두 마리를 못 이겨서 죄다 죽은거냐~! ”
“ 엥? 무슨 헛소리야? ”
“ 그게 아니라면 너희들이 어떻게 이곳에 와있는 거야! 아아, 그래. 그놈들 좀 세더라. 다 죽었다 해도 이해할 수 있다고. 자, 그건 그렇다 치고… 가장 중요한 게 남았어. 여긴 천국이냐, 지옥이냐? ”
“ ……. ”
전혀 의심의 여지없이 물어오는 진지한 표정에 일행들은 모두 어이없는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왠지 이제까지 불안하게 지켜보며 걱정했던 것이 몽땅 손해 보는 기분이었달 까? 여전히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헤롤은 나와 눈이 마주치곤 환하게 안색을 밝혔다가 다음으로 이릴을 보더니 실망어린 표정을 지었다.
“ 쳇… 엘이 있어서 천국인가 보다 했더니, 역시 지옥이었던 거냐…. ”
“ ……죽을래? ”
애틋한 고백을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지옥이라고 하다니. 대체 헤롤의 말은 어디까지가 진심이란 말인가. 설마 죽어가는 와중에서 거짓고백을 했을 리는 없고. 당황한 이릴이 인상을 험악하게 찡그리자 헤롤은 반색이 되어 고개를 휘휘 젓기 시작했다.
“ 헉, 그, 그런 뜻이 아니었어. 그러니까 뭐랄까… 이왕이면 너는 살았으면 했달까? ”
“ …? ”
“ 바보냐, 너? 내 말은 귓등으로 흘려들었냐? 이왕이면 사랑하는 사람은 살아주는 편이 행복하잖아. 너까지 여기로 와버리면 모처럼 내가 지켜준 보람도 없고, 볼 때마다 가슴 아플 텐데 그게 지옥이 아니고 뭐야? ”
“ 그, 그런 소리를!! ”
오오, 저 도도한 이릴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민망해 하는 모습이라니. 저런걸 보면 그녀도 딱히 헤롤에게 마음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킥킥거리고 웃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쯤에서 그만 정신을 차리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거침없는 동작으로 아직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헤롤의 뒤통수를 빠악-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렇지 않아도 상황파악 하지 못하고 있던 그가 기겁을 한건 당연한 일이었다.
“ 우아악- 이게 무슨 짓이야! 아프잖아! ”
“ 호오? 아프냐? 영혼 주제에 챙기는 것도 많다, 너? ”
“ 에엥? 어? 그…그러고 보니 그렇네. 영혼도 아픔을 느끼나? ”
경험자로서 대답하는 거지만 정답은 ‘아니다’ 였다. 일단 벽에 부딪치게 된다 해도 닿는 느낌이라곤 하나도 없고, 오히려 통과해서 건너편 장소에 도착하기 일쑤였으니까 말이다. 아, 그래도 역시 같은 영혼들 끼리 부딪치면 아플려나?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사실로 고민하고 있는 사이 헤롤을 향한 일행들의 면박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 야, 이 자식아! 보자보자 했더니 아주 소설을 써라~! 네가 죽긴 왜 죽어? ”
“ 엥? 그럼, 설마… 내가 안 죽었다고? ”
“ 그래, 보면 몰라? 몸 하나 다친 곳 없이 멀쩡하잖아! ”
“ 에엥? ”
그제 서야 상처에 생각이 미쳤는지, 몬스터의 억센 이빨과 발톱에 찍혔던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둘러보기 시작하는 헤롤이었다. 이미 완벽하게 치료된 몸에 붕대 따위가 감겨있을 리 만무, 거기다 통증하나 느껴지지 않았을 테니 그가 믿고 싶어 하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조심스런 기색으로 몸을 살펴본 그는 또 다시 멍한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 그럼 설마…내가 몬스터랑 싸운 것이 꿈? ”
“ …정신 차려, 임마. 어떻게 된 게 네놈 머리는 그쪽으로밖에 안 돌아 가냐? 치료했다는 생각은 도무지 못하겠든? ”
“ 오오, 치료를? 아하~ 그러고 보니 카이테인씨가 있었지! ”
이제야 확실히 상황판단이 되었다는 듯 얼굴을 환하게 밝히는 그였지만, 이번에도 일행의 반응은 가차 없었다. 쯧쯧 혀를 차며 헤롤을 바라본 쉐리는 새침한 표정으로 나를 가리켜 보였다.
“ 생명의 은인은 이쪽. 어서 고맙다고 해, 헤롤. ”
“ 엥? 엘한테? ”
“ 그래. 헤롤을 치료한건 엘이야. 글쎄 그동안 신관인 걸 깜찍하게 속이고 있었지 뭐야? 카이테인씨 조차 놀랄 정도로 대단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말이야. 아무튼 엘이 아니었으면 넌 죽었을 거라고. 어서 고맙다고 해. ”
“ 아하하… ”
그녀의 말에 헤롤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나는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인사를 받기 위해 한 행동이 아니라서인지 현재의 분위기가 상당히 민망한 느낌이었다. 거창하게 생명의 은인 어쩌고 할 것 까지는 없는 건데 말이다. 당황한 나는 변명하듯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 아니, 사실은… 카이 씨가 초반 응급처치를 확실하게 하셨기 때문이라, 전적으로 저의 공로라고 하기는 좀 그런데요. 아무튼 헤롤 괜찮으세요? 어디 아픈 곳은요? ”
“ 아… 전혀. 오히려 아주 상쾌해. 근데 네가 정말 신관이었어? 어느 신전의? 치료 능력이 있을 정도면 꽤 대단한 고위급 사제인거 아니야? ”
물론 그렇긴 하지만 여기서 내 입으로 ‘나 고위사제 맞소!’ 라고 어찌 대답하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양심이 찔리는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거늘,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그의 호기심어린 눈동자에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한 심정이 되었다. 그런 나를 구제해준 것은 어김없이 위급한 상황마다 나의 버팀목이 되어주던 트로웰이었다.
“ 자자, 죽다 살아났으니 할 말이 많을 테죠? 우린 이제 슬슬 자리를 비켜주는 게 어때요? ”
“ 아…! 그, 그렇지, 참! ”
“ 어머, 그러고 보니 너무 눈치가 없었네? 호호, 두 사람 잘해봐! ”
“ 응? 무슨… 너, 너희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
사람들의 의도를 알아차린 이릴이 경악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이미 나를 비롯한 일행들은 일찌감치 물러서서 방을 나서고 있는 중이었다. 당황해서 붙잡으려고 했던 것도 잠시. 뒤에서 들려오는 진지한 목소리에 그녀는 결국 망설이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 나 할말 있어, 이릴. 다른 사람들 듣는 게 민망하면 그냥 내보내는 게 나을 걸? ”
“ ……. ”
아무래도 고백을 하고 나니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듯, 대담한 발언을 내뱉는 그로 인해 싱글벙글 나서던 마이티와 휴센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당황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정작 당사자인 헤롤이 너무 담담하니 약이 오른 것이다. 특히 그동안 그 때문에 쉐리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던 휴센은 무언가 상당히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의 연애를 방해한 인간 치곤 꽤나 조짐이 좋은 상태가 아닌가.
아무튼 두 사람만 남겨둔 채 방을 나선 우리는 그대로 뿔뿔이 제 할일을 찾아 떠났다…고 했으면 좋았을 뻔 했으나, 장난끼 많은 무리는 절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살짝 열어놓은 문 틈 사이로 방안의 사정을 정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과연 전투에 뼈가 굵은 사람들답게 기척을 죽이고 호흡을 가라앉히는 것에 기똥차게 익숙한 모습이었다.
“ ……. ”
“ ……. ”
이릴과 헤롤은 방안에 단 둘이 남아서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평소와 다르게 한참이나 서로의 눈치를 보던 두 사람은, 결국 만사를 포기한 듯한 헤롤의 거침없는 음성을 시작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단숨에 흐트려놓았다.
“ 에잇,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사귀자, 이릴. ”
“ 뭐, 뭐야? 너 미쳤니? ”
“ 뭐 어떠냐? 지금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나 아니면 누가 너 같은 마녀를 바라본다고 그래? 제 목숨 부지하기도 힘든 세상, 여자를 위해 몬스터 앞에 뛰어드는 용병이 어디 흔한 줄 알아? 넌 봉 잡은 거라고. ”
“ 우, 웃기지 마! ”
그렇지 않아도 자존심 센 그녀가 그런 말에 호락호락 넘어갈리 없었다. 자연스럽게 대화는 두 사람의 다툼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 뭐야? 내가 어디가 부족한데? ”
“ 그럼 너의 어디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데? 너 너무 꿈이 큰 거 아니니? 아니면 날 너무 만만히 보는 거야? 목숨 하나 바쳤다고 기겁을 하며 사겨줄 여자로 보여? ”
“ 누가 그렇댔냐? 그 만큼 내 사랑이 지고지순하단 뜻이잖아, 말귀를 그렇게 못 알아먹겠어? ”
“ 그래! 못 알아먹겠다! 내가 너와 사귀어야 할 특별한 이유를 대봐! 대체 무슨 심보야? 이제까지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던 주제에! ”
앙칼지게 맞받아치는 말에 헤롤은 신경질이 난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곤 퉁명스런 목소리로 뜻밖의 사실을 고백했던 것이다.
“ 그럼 어떡 하냐? 네가 날 그렇게 싫어하는데, 나 혼자 열 내는 모습 보이는 게 기분 좋겠냐구. 그나마 동료취급이라도 받으려면 얌전히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야. ”
“ 호오, 그러셔? 그러던 게 갑자기 죽을 때가 되니 아까워졌고? 그래서 이때가 기회라고 고백한거야? 그렇다면 넌 대단히 이기적인 놈이라고 밖에 할말이 없다. 그 상태로 네가 죽었으면 나는 뭐가 되니? 평생을 죄책감에 치여 살라는 소리야? ”
“ 우씨- 그래! 그렇게라도 날 기억해주길 바랬다, 떫냐? ”
“ ……뭐? ”
할 말을 잃어버린 건 오히려 이릴 쪽이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다 포기한 헤롤은 이제까지 용케 감정을 숨기고 있었구나 생각될 정도로 당황스러울 만치 강압적으로 밀어붙였던 것이다.
“ 내가 이기적인 놈인 거 이제 알았어? 그 동안 좋아한 세월이 아까워서라도 네가 날 알아주길 바랬 다고. 그게 그렇게 큰 문제냐? 마지막인데 좋아한단 고백도 못해? 사실 나도 무지 고민했어, 과연 해도 좋은 말인지 어떨지! 근데 네가 막상 딴 놈이랑 행복하게 살 미래를 생각하니까 속이 뒤집어 지는 걸 어쩌라고! ”
“ ……. ”
“ 그래도 살았잖냐? 살았으니까 이제 기회를 버리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거잖아! 그걸 그렇게 못 봐주겠냐? 이놈의 용병이란 게 직업상 언제 황천길을 오락가락 할지 모르는데, 그 전에 사랑하는 여자랑 연애한번 해보자는 게 그렇게 어이없냐고! ”
“ 무, 무슨 소리를! ”
낯 뜨거운 소리에 얼굴이 붉어진 이릴이 얼른 제지하려고 했지만, 헤롤은 용납하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심사인지, 쉴 새 없이 떠드는 입은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 사귀어야 할 특별한 이유를 대보라고? 그게 목숨까지 받쳐서 구해준 사람한테 할 소리냐? 이릴 너 정말 그렇게 잔인하게 나오기야? 그래, 이거 한가진 확실하게 약속할 수 있다! 너 나랑 결혼하면 애 낳을 수 있을 거다! ”
“ 뭐어? ”
갑자기 웬 자식 타령인가? 문틈에서 엿보는 우리나, 이릴이나 하나같이 황당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헤롤은 당당하게도 가슴을 쭈욱 피더니 자랑스럽게 자신의 얼굴을 가리켜 보였다.
“ 이 얼굴을 닮은 꼬맹이가 있다고 생각해봐라! 절대 안 귀여울걸? 그러니 귀여운 애들한테 미치는 너의 그 고질병도 무사통과라 이거지! 안심해라, 이래봬도 대대로 내려오는 악성 유전병이라 내 피를 이은 자식은 절대로 이 얼굴에서 벗어나질 못할 거다! 어때, 이래도 안 끌려? ”
“ ……. ”
……쿨럭. 비, 비참해요, 헤롤. 차마 이렇게 말해주지 못하는 것이 정녕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설마 저런 말도 안돼는 이유를 갖다 붙일 줄이야. 그것을 본 마이티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으며 동정이 무럭무럭 피어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 크흑, 불쌍한 자식. 얼마나 갖다 댈 이유가 없었으면…. ”
“ 아니, 이릴에게는 꽤 현실적인 문제일걸? 저래 봬도 상당히 끌릴 거야, 아마. ”
“ 킥킥킥… ”
“ ……. ”
하긴 이릴이라면 정말 그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을 지도…. 묘하게 수긍이 가는 대화를 들으며 나는 다시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문 안의 상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마침 굳어있는 이릴을 두고 헤롤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 그리고 또 있어! 나만큼 네 잔소리 감당하고, 다툴 수 있는 존재도 없을 거다! 이 정도면 평생 같이 살아도 될 정도로 충분한 이유 아니야? 너 지금 당장 내가 다른 여자하고 결혼하게 되도 멀쩡할 수 있어? 후회하지 말고 내가 매달릴 때 잡으란 말이다! ”
그렇게 쏘아붙인 헤롤은 그대로 쭈욱 양 팔을 벌렸다. 침대에 앉아 반쯤은 이불에 덮힌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포즈만큼은 당당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 자존심도 내세울 때 내새워, 이 고집불통 아가씨야. 이렇게 매달리는 남자가 어디 흔한 줄 알아? 목숨 버려, 자존심 버려, 널 위해서 다 버렸는데 자꾸 그렇게 튕길 셈이야? ”
“ ……. ”
“ 이리와. ”
“ ……. ”
놀라운 일은 바로 다음에 일어났다. 언제까지고 자리에 서서 뻣뻣하게 굴 것 같았던 이릴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 가 싶더니 천천히 헤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혹시나 이대로 다가가서 어퍼컷을 날리는 반전이 있지는 않을까 기대했던 나는, 그녀가 일말의 망설임 없이 푸욱 헤롤의 목을 끌어안는 것을 보고 그대로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켜보던 다른 일행들 역시 마찬가지. 무언가 한방 먹었다는 듯 묘하게 복잡한 표정을 짓던 사람들은 허탈한 미소를 흘리기 시작했다.
“ 허허허… 설마 이릴도 헤롤에게 마음이 있었다…는? ”
“ 미치겠네. 오늘 여러 가지로 진귀한 경험 한다. 허허허… 이거 완전히 마녀와 머슴 아니냐? ”
“ …멋지다…. ”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사람은 다름 아닌 쉐리였다. 맙소사, 여자애들은 왜 저런걸 보면 감동하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게다가 헤롤이 했던 설득이라는 것도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전혀 무드가 없는 말이지 않은가? 세상 어떤 인간이 못생긴 자식을 낳게 해주겠다는 조건으로 여자를 꼬신단 말이냐!
꽉 끌어안은 두 사람이 어느새 키스를 하기 시작하자 민망해진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지만, 일행들은 히죽 웃으며 그것을 끝까지 구경했다. 사실 단번에 쳐들어가서 휘파람을 불러주고 싶은 것을,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이릴의 채찍이 무서워 참고 있는 듯 했다. 한참동안 두 사람의 애정씬을 관람하던 휴센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이거, 이거…헤롤 자식이 나를 앞지르게 생겼군. ”
“ 헤에? 왜, 부러워? 단장이 웬일이야? 킥킥 ”
“ 아니… 뭐…. ”
그러면서 힐끔, 쉐리를 돌아보는 표정엔 묘한 아쉬움이 담겨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막상 용기를 내지를 못하는걸 보면 11살 차이라는 게 어지간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보다 못한 나는 작은 목소리로 휴센에게만 들리게끔 입을 열었다.
“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 몰라요? ”
“ …응? ”
“ 헤롤을 잘 봐둬요, 사랑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매달린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
“ ……. ”
닭살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부럽지 않을 수가 없을 걸? 어쩌면 이번 일을 기회삼아 휴센도 좀 더 분발하게 될지도 모른다. 피식 웃은 나는 좀더 부채질할 목적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 시간을 끌면 끌수록 휴센과 쉐리의 감정의 벽은 두꺼워 질 거예요. 나중에 30넘어서 받아들이면 그 땐 정말 도둑놈 소리 듣는 다구요. ”
“ ……쿨럭. ”
그러니 아직 20대일 때 확실히 잡아라! 라는 눈빛을 보내자 그는 얼떨떨해하면서도 상당히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일 모래가 30인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말 뼈 속 깊이 공감이 가는 소리였던 것이다.
어쩌면 조만간에 한 커플이 더 탄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흡족해진 나는 씨익 미소 지었다. 평생 솔로로 살아온 몸으로서 배가 안 아픈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사람들은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정령왕으로 탄생한 이후, 벌써 내가 알게 된 커플만 3개나 되는 셈인가?
그 중에서도 가장 내 삶에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라고 하면 당연 엘뤼엔과 이프리트 커플을 꼽겠다. 이프리트의 소멸이후로 시기가 늦춰지긴 했어도 일단 두 존재간의 관계가 진전될 희망이 보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밀어붙인 커플이기도 하고.
그런데…설마 정말 이프리트를 엄마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니겠지? 뭐, 엘뤼엔도 딱히 ‘아빠’라고 부르라고 강요하지는 않으니 괜찮을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실제적인 나이가 몇 천 년이나 많다고 해도, 외모 상으론 나와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여자(?)한테 엄마라고 부르기가 쉬운 건 아니니까.
그렇게 치고 보면 엘뤼엔의 외모도 그렇게 나이 많아 보이지 않은데, 별 다른 거부감 없이 쉽게 아버지로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협박이 있었다곤 하지만, ‘형’보다 ‘아버지’란 인식을 강하게 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카리스마가 남다르다는 뜻이 될까? 어쩌면 그가 선대의 엘퀴네스라는 점이 강하게 작용하게 된 것일지도.
‘ 흐음, 그럼 같은 범주로 엘뤼엔이 나를 아들로 보게 된 것도 내가 후대의 엘퀴네스이기 때문인가? ’
신이 된다 해도 본 성질이 그대로 남아 있는 다고 치면, 같은 물의 성분(?)을 가진 존재에게 끌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혈육의 이끌림과 비슷한 거랄까? 그나마 이런 식으로 유대 할 수 있는 관계가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헤롤이 완전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상단일행은 다시 출발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론 처음 계획에서 며칠이 더 늦어버린 꼴이 되었지만 예상치 못했던 수입도 있었고(케르베로스의 가죽이 생각보다 값이 더 비싼 모양이다), 동문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이득이었기 때문인지 누구도 별다른 불만을 내비치지는 않는 상태였다.
특히 그 동안 몬스터 때문에 남문을 이용하지 못하던 도시 사람들이, 감사의 뜻으로 서로 식사를 대접하려고 했었기에 쉽게 떠나버리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괜찮다고 한사코 물리는 데도 하루에도 몇 번 씩 빵 바구니와 구하기 힘든 귀한 술을 종류별로 가져다주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확실히 이곳이 한국에 비해 인정이 살아있는 세계라는 것을 실감했다.
“ 저희는 용병으로서 의뢰받은 일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이런 대접은 곤란합니다. ”
“ 아이고, 그래도 용병님들 덕분에 저희가 살았는걸요? 이제까지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이룬 영웅들께 이런 것도 못해드려서야 오히려 저희들이 면목이 없습니다. 한 끼 식사 정도는 대접하게 해 주십시오. ”
이런 식의 호의를 보이는 사람이 지금까지 몇 차례나 있었는지 모른다.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너무 과하면 그것도 부담스러운 법. 휴센은 적절히 예의바른 미소를 유지하며 부드럽게 거절했다.
“ 이미 충분히 과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일행의 출발시간도 가까우니 지금은 그냥 마음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
“ 허허…이것 참, 아쉬워서 어쩌지요. ”
쩔쩔매는 상대방이었지만, 이미 우리의 품에는 그가 만들어 보내준 쿠키와 빵이 한가득 안겨있는 상태였다. 그러고도 모자라 계속 무언가를 더 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 때문에 일행들은 받아들일 수도, 그렇다고 냉정히 거절할 수도 없는 난감한 상태에 빠져야만 했다.
그러나 잠시 후, 우리가 머무는 여관 앞으로 한때의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겁먹은 얼굴이 되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금발머리에 나름대로 준수한 얼굴의 20대 남자한명이, 백마에 탄 모습으로 갑옷을 입은 10명의 남자들과 함께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번쩍 번쩍한 옷차림이나 깔끔한 생김을 봐서도 어느 잘난 집안 자제임이 한눈에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설마 귀족인가? 속으로 의문을 삼키는 사이 어느새 우리 코앞으로 다가온 무리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시선만을 내려 주변을 쭈욱 흩어보았다. 그 중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갑옷을 입은 사람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였다.
“ 그대들이 이번 남문에 등장한 몬스터를 퇴치했다는 용병들인가? ”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질문이었지만, 말투에 서린 오만함은 감출 수 없었다. 무슨 혐오생물이라도 보듯, 투구아래 가려진 그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져 있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휴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허리를 숙이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 샴페인 용병단의 단장 휴센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이시온지…. ”
“ 크흠. 나는 피닉스 기사단의 단장인 크렌트라고 한다. 여기 계신 분은 이곳 할버크의 영주로 계시는 카일 드 클란 후작님의 장남이신 엘키노 도련님이시다! 이번에 그대들이 도시의 경비대를 대신하여, 남문의 몬스터를 퇴치하신 것을 치하하기 위해 귀하신 걸음을 하셨으니 모두 무릎을 꿇어라! ”
그러자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일행을 제외한 근처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이기 시작했다. 헉. 여기는 설마 귀족아들이 치하하러 나타나면 죄다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거야? 이러느니 차라리 칭찬하러 오지 않느니만 못한 게 아닌가.
그 자리에서 몸을 숙이지 않은 사람은 미처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던 샴페인 용병단들 밖에 없었다. 그것을 본 후작아들인지 도련님인지 하는 녀석 얼굴이 불쾌감으로 일그러지자, 당황한 남자는 큰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 이 무례한 것들! 뉘 앞이라고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있는 거냐! 어서 무릎을 꿇지 못할까! ”
그러자 그제 서야 돌아가는 상황을 인식한 일행들은 하나같이 벌레 씹은 표정이 되어 천천히 무릎을 꿇으려 했다. 의외였던 것은, 여기서 이사나가 지지 않고 반박하는 말을 꺼냈다는 것이었다. 녀석은 갑옷 입은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황법에 규정된 바, 무릎을 꿇어 인사하는 예절은 제국의 황족에게만 취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아무리 귀족의 아드님이시라고는 하나, 황족이 아니신 분께 극상의 예우를 보일 수는 없습니다. ”
오오! 그런 법이 있었단 말인가? 과연 틀린 말은 아니었는지 찔끔한 표정을 짓는 기사였으나, 그는 곧 지지 않겠다는 듯이 흥분하여 소리쳤다.
“ 무, 무엇이!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 구나, 감히 이 분이 뉘시라고! ”
“ 설령 마신교의 법황이라 하더라도 황족이 아닌 이상, 백성들로 하여금 무릎을 꿇어 보이는 인사를 받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모시는 주인을 반역죄로 이끄실 셈입니까? ”
“ …!!!… ”
과연 맞는 소리였다. 황족만이 받을 수 있는 인사를 자진해서 받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가 황족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는 의미. 즉, 현재의 황족을 몰아내고 새로운 황권을 확립할 의지를 보이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반역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너무도 당연한 말이었지만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그는 절대 쉽게 수긍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긴 커녕 도리어 그의 수하들을 돌아보며 일행들을 위협할 것을 명령하는 것이었다.
“ 이…이익! 무얼 하느냐! 이 무엄한 것들을 즉각 결박해라! 죄목으로는 귀족을 향한 도전과 모욕이다! 감히 엘키노님 앞에서 무례를 범한 죄 값을 치르게 하겠다! ”
“ 예, 알겠습니다! ”
명령을 받은 기사들은 험악한 기세로 달려들어 당장 일행들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어디 샴페인 용병단이 쉽게 당할 인간들이던가. 순순히 잡히기 보단 싸우다 죽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렸는지, 일행들은 저마다 쥐고 있던 무기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실버급의 용병 이라고 하면 어지간한 전투에 뼈가 굵은 기사들이라 해도 쉽사리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포획하러 오는 기사들의 표정은 무척 조심스러워 보였다. 아마도 소문을 통해 우리가 은패를 가진 용병단이라는 것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 표정도 점점 긴박해 졌다. 아무리 이사나의 말이 옳다곤 해도, 일단 영주의 아들과 대적하게 되는 셈이니 쉽사리 무운을 빌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 기사들과 일행이 대치하려는 순간, 한손을 들어 그것을 제지한 것은 예상외로 도련님이라는 귀족의 아들이었다.
“ 멈추어라. 지금 나는 용병들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온 것이지, 싸움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
“ 옛? 하지만 도련님! 저 무례한 것이 감히… ”
“ 불쾌하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더구나 저 안에는 여인들도 있지 않은가? 기사된 그대가 아무리 평민이라 하나 여성에 대한 대우를 험하게 할 셈인가? ”
“ 시, 시정하겠습니다. ”
단호하게 꼬집는 질타에 기사단장이라는 남자는 단번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여보였지만 나로서는 기가 턱 막히는 심정이었다. 이 나라의 기사도가 땅에까지 떨어졌다는 것은, 이전에 페리스와 함께 샘터에서 목격한 사건으로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때 한모금만 물을 달라고 하는 여자를 모질게 걷어찬 기사의 입에서 스스로 기사도라는 것이 얼마나 썩어빠졌는지를 자백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새삼 이곳의 기사들이라고 그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더구나 정작 그렇게 만류하는 도. 련. 님.이란 인간의 눈빛이 노골적으로 흑심을 담은 채 쉐리와 이릴을 바라보고 있다면, 순수한 기사도를 내세운다고 보기도 어려운 상황 아닌가? 불쾌한 표정으로 오만 인상을 찡그리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입맛을 다시는 꼴을 보자니 내가 다 소름이 끼치는 심정이었다.
“ 호오~ 용병이란 항상 거칠고 험한 인상을 받아왔었는데 말이야, 이렇게 기가 막힌 미인들이 있을 줄은 몰랐군. 부하의 무례를 용서하시오, 아가씨들. 나를 봐서라도 말입니다. ”
도대체 녀석의 어디가 봐줄게 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더 이상 상황을 악화시킬 필요는 없다는 판단에, 이릴과 쉐리는 마지못한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히죽 띄우더니 그대로 훌쩍-타고 있던 말에서 몸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리곤 탐색하듯 두 여인을 다시 쭈욱 흩어보며 중얼거리는 소리에 일행들의 어깨는 기사들과 대치할 때보다 더한 긴장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 후후후, 이거 횡재로군. 섹시한 미녀와 청순한 소녀라…. ”
“ …네? 방금 뭐라고… ”
“ 아니, 아니오. 무례를 사죄하는 의미로 오늘 저녁 만찬에 초대하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
능글능글한 미소는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느끼할 만큼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왜 다들 가만히 있는 거지? 평소라면 이때 쯤 나서서 정중하게 거절했을 휴센이 잠자코 있자, 당황해서 돌아본 나는 그대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를 비롯한 세 명의 남자-마이티, 헤롤, 휴센-이 하나같이 화난 표정이 되어 당장이라도 덤빌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공식적으로 이릴과 커플로 지정된 헤롤은 물론이며, 쉐리에게 마음이 있는 두 남자(휴센과 마이티)가 그녀들에게 찝쩍거리는 남자에게 고운 마음을 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독기서린 표정이 그래도 차마 귀족이라고 당장 주먹부터 내지르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다.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아가자 일행 중 가장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트로웰이 휴센을 대신하여 단정한 태도로 대답했다.
“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저희는 몇 시간 후면 의뢰일정에 맞추어 도시를 떠나야 합니다. 그러니 저녁 만찬에는 참석할 수 없습니다. ”
“ 으응?…!… 호오, 그대는? ”
거절하는 말에 불쾌한 듯이 미간을 모으던 영주아들은 정작 트로웰에게 시선을 미치고는 묘한 표정으로 미소지어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또…이릴이나 쉐리를 향할 때만큼이나 끈적끈적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당장이라도 한 발짝 물러서고 싶을 만큼 소름끼치는 시선이었으나 트로웰은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대답했다.
“ 샴페인 용병단의 일원입니다. ”
“ 호오, 지금 몇 살이지? ”
“ 15세입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
“ 아니, 아니, 후후… 어린 나이에 험한 세계에 몸을 담았군. 전투에 실전 경험이 많을 테지? 과연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몸매야. ”
“ ……칭찬 감사합니다. ”
늦가을이라 상당히 쌀쌀했지만 어차피 계절을 타지 않는 트로웰은 여름에 입는 차림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어깨와 몸의 굴곡이 거의 드러나 보였는데, 그것을 어찌나 느끼하게 쳐다보던지 바람도 불지 않는데 온몸에 닭살이 돋아날 지경이었다. 여자인 이릴이나 쉐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어딜 봐도 소년으로 보이는 트로웰한테 까지 저런 관심이라니… 저 자식! 혹시 변태 아니야?
나를 비롯한 일행의 얼굴엔 모두 혐오스러운 빛이 가득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영주아들은 여전히 트로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 그대로 ‘찝쩍’거리는 행동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불쾌한 취급을 당하면서도 안색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그가 정말이지 위대해 보일 정도였다.
“ 용병패의 등급은 어떻게 되지? ”
“ 은패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
“ 호오, 15살에 은패의 용병이란 말인가? 정말 대단하군. 그렇지 않아도 성을 지키는 사람이 모자라서 용병을 모집하는 중이었는데…어떤가? 내 저택에서 일해보지 않겠나? 원한다면 기사의 작위도 내려줄 수 있는데 말이야. 수당도 섭섭하지 않게 챙겨주지. ”
지금 저 말을 순수한 스카웃으로 받아들일 존재는 이 중에 아무도 없었다. 저절로 욕설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삼키며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는데, 그런 나를 힐끗 바라 본 트로웰의 표정이 살짝 찡그려졌다. 절대 끼어들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 트, 트로웰?
- 가만히 있어, 엘. 아직 이 녀석은 널 발견하지 못했어. 후드로 최대한 얼굴 가리고 기척 내지 마.
- 하, 하지만…
- 난 괜찮아. 우습지만 이런 상황 익숙하거든.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절대 끼어들지 마. 알았지?
그렇게 말한 트로웰은 내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은 채 바로 영주아들을 바라보며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평소와 다르게 싸늘하게 굳어진 모습이었지만, 일행들에게는 오히려 익숙한 것이었는지 다들 감회가 새로운 표정이었다.
“ 죄송합니다만, 저는 단에서 탈퇴할 생각도, 기사작위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모처럼 제안해 주신 거지만 사양하겠습니다. ”
“ 흐음, 싸늘한 태도도 마음에 들어. 꽤나 도발적인 눈이로군. 이런 아름다운 황금색 눈동자는 처음 보는 걸? 정말 올 생각이 없나? 이런 곳의 용병으로 굴러다니는 것보단 훨씬 많은 돈을 벌수 있을 텐데? ”
“ 거듭 죄송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어떤 이유로도 단에서 탈퇴할 생각은 없습니다. ”
단호한 대답에 그는 의외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물러나는 듯 했다. 끈덕지게 추근거리던 것에 비해 너무 쉽게 물러나는 것 같아 의아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다른 사냥감을 찾듯 휘이-일행을 흩어보던 영주아들의 시선은 이번엔 후드로 온통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이사나에게 고정되었다.
그 순간 그의 입가에 드러난 미소는 트로웰 때처럼 흥미본위가 아닌, 무언가 약점을 잡았다는 듯한 희열을 담고 있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그가 걱정되어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영주아들은 자못 엄숙한 표정으로 이사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 황법으로 규정된 사항을 알고 있다니, 그대는 꽤나 공부를 많이 한 듯 하군. 혹 학자인가? ”
“ …아닙니다. 아직 임시용병에 불과할 뿐입니다. ”
“ 호오, 그래? 그런데 그 후드가 참 답답하군. 얼굴을 보여봐라. ”
‘ 헉… ’
순간 심장이 멈추는 기분이었지만, 이사나는 요령 있게 위기를 넘길 변명을 만들었다. 얼굴에 심한 흉터가 있어 타인에게 보이기가 꺼려진다고 대답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꽤나 심미안이었는지, 못생겼다는 얼굴을 일부러 들여다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아…
“ 감히 내 명령을 어기다니! 보자보자 했더니 평민 주제에 너무 기어오르는 구나! 귀족을 모욕한 명분은 이것으로 차고 넘친다! 이들을 저택의 지하 감옥으로 인계하라! ”
…라는, 말도 안돼는 어거지가 전개 되어 버린 것이다. 아무리 봐도 일부러 시비건 것이 명백한 태도였지만, 귀족인 그에게 대항할 수단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감옥에 끌려갈 것 같아 당황한 내가 나도 모르게 입을 열려는 찰나, 그것을 먼저 눈치 챈 트로웰이 얼른 끼어들어 소리쳤다.
“ 잠깐만요! ”
“ 응? 무슨…? ”
그 순간, 그를 바라보는 영주아들의 두 눈이 반짝 빛이 나는 것을 본 나는, 이것이 그의 궁극적인 목표임을 깨닫고는 안색을 새하얗게 굳히고 말았다. 녀석은 일부러 일행을 자극해서 트로웰이 당황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새침 뚝, 모르는 척 되묻는 모습에 생전 느껴보지 않았던 살의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트로웰 역시 그 시선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용케 내색하지 않으며 침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실례합니다만, 얼굴에 상처가 많아 타인에게 보이길 꺼려하는 그의 입장은 전혀 고려해 주시지 않는 겁니까? 건방지다고 해도 할말은 없습니다만, 지금의 처사는 너무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
“ 호오, 억울하다는 건가? ”
“ …적어도 지하 감옥으로 끌려갈 정도의 큰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기는 힘듭니다만. ”
한 치의 물러섬이 없는 대답에 영주아들은 뭐가 그리 마음에 드는지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경계하는 일행들을 쭈욱 흩어본 그는 오만한 표정으로 거들먹거리며 대답했다.
“ 귀족의 말이 곧 법이다. 아무리 죄가 없다 해도 내가 있다고 하면 그만이야.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가 됨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뭐, 그대가 내 저택의 호위로 들어와 준다면 너그럽게 보아 넘겨줄 용의는 있다만은…. ”
‘비열한 자식!’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킨 나는 눈이 아플 정도로 녀석을 노려보았다. 트로웰의 ‘나서지 마’라는 시선만 아니었다면, 주먹이라도 한대 내질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를 향해 탐욕스러운 표정을 가득 드러낸 영주의 아들은, 그것도 모자라 처음 이릴과 쉐리에게 뻗쳤던 마수까지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 후후훗, 걱정 말아. 당장 지하 감옥으로 가게 된다 해도 아가씨들은 융숭히 대접을 해 줄 테니 말이야. 물론 침실에서의 서비스를 기대해야겠지만. ”
“ …이 빌어먹을 자식! ”
“ 헤롤! ”
더 이상 참지 못한 헤롤이 악에 받쳐 소리치자 옆에 있던 마이티가 기겁을 하고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귀족인 그를 자극해봤자, 상황만 더욱 나빠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분노에 눈이 뒤집힌 그의 머릿속엔 눈앞의 남자가 영주의 아들이라는 것 따위는 고려할 가치도 없어진 듯 했다.
“ 이걸 그냥 참으란 말이야! 제기랄, 목숨 걸고 몬스터 죽여줬더니 치하한다는 핑계를 내새워 남의 여자를 가로챌 궁리나 해? 썩어빠진 인간 같으니-! ”
“ 그만해, 헤롤! ”
“ 귀족 따위가 별거야? 이 나라가 망해가는 이유가 뭐고, 선황폐하가 돌아가신 이유가 뭔데! 다 저놈의 같지도 않은 귀족들이 무지한 백성을 충동질해서 일이 이렇게 돌아간 거 아니야! 이거 놔! 내가 오늘 저 자식 아주 회를 뜨고 말테다! ”
흥분하는 그의 말에 휴센은 조용히 이마를 짚었고, 다른 일행들은 만사를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이전엔 정당성이라도 유지했던 것이, 그의 말로 인해 완벽히 귀족 모욕이 성립되어 버린 것이다. 분노한 영주의 아들은 기사들을 명령하여 당장 우리들을 포박하도록 명령했다.
“ 이 미천한 것들이 감히! 보자보자 하니까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군! 뭣들 하는 게냐! 어서 이 것들을 묶지 못해? 당장 지하 감옥으로 연계해라! ”
그러자 그의 명령만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일행들을 억압하곤 억지로 무릎 꿇린 뒤 준비된 밧줄로 포박하기 시작했다. 잡히는 과정에서 소란이 일어나게 되면 가중되는 죄의 무게가 몇 배나 커지게 되므로 모두들 어쩔 수 없이 순순히 잡혀주는 기색이었다.
나 역시도 그들과 다를 바 없었기에 지푸라기로 짠 굵은 밧줄에 뒤로 돌려진 손목을 결박당하기 시작했다. 도망치기 못하게 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일행의 실력을 고려한건지 몰라도 한 치의 배려도 없이 꽉 묶는 통에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아얏- 헉…! ”
크게 뒤틀려지는 어깨의 느낌에 약간 몸을 움직인 것이 화근이었다. 얼굴에 걸친 듯이 쓰고 있던 후드가 그대로 스스륵 흘러내렸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눈에 뜨이는 푸른 색 머리카락이 고스란히 햇빛에 노출되자, 영주의 아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쳇-하고 짧게 혀를 차는 트로웰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 호오, 특이한 머리색이군. 이렇게 선명한 푸른색은 또 처음인 걸? 고개를 들어봐라. ”
미쳤냐, 내가 고개를 들게? 평소에도 자주 사람들에게 여자로 오해받는 얼굴이다. 저 녀석이라고 그다지 다를 것 같지 않았기에 나는 그야말로 낭패감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꼼짝도 하지 않고 땅만 바라보고 있자, 영주아들은 서슴없이 다가와 휙-하고 거친 손길로 내 턱을 잡아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뒤쪽으로 손이 묶인 상태라 반항도 제대로 할 도리가 없던 나는, 별 수 없이 귀족아들놈의 크게 뜨여진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하고 말았다. 흡, 하고 숨을 잠시 멈추던 녀석은 트로웰을 보았을 때와 별 반 다르지 않은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 이거…정말 대단하군. 그대도 이 용병단의 일행인가? ”
보면 모르겠냐?…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상하게 입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난생 처음으로 마주한, 형용할 수 없는 소유욕과 욕정으로 얽힌 눈을 바라보는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아 그대로 굳어버렸던 것이다. 솔직히 소유욕이라고 하면 라피스 자식 역시 만만치 않았지만, 그의 시선은 이런 식으로 불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마치 온몸에 뱀이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미끌거리는 눈빛에,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설을 가라앉히는 것만도 곤욕이었다. 그것을 겁먹은 것이라고 오해했는지 녀석은 더욱 마음에 든 다는 듯 헤죽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 도도한 것도 좋지만, 순결한 처녀를 더럽히는 재미도 꽤 쏠쏠하지. 그대도 남자를 알게 되면 안아 달라 매달리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될 걸? ”
“ …!… ”
역시 이 자식은 변태였어! 밀려드는 수치심과 분노는 그렇다 치더라도, 점점 턱을 따라 얼굴을 더듬는 손길 때문에 이성이 끊기려는 순간이었다. 소름끼치도록 낮으면서도 고요한, 그러면서도 잔잔한 분노를 머금은 목소리가 영주아들을 향해 똑바로 울려 퍼졌다.
“ 거기까지. 더 이상 그를 건드리면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
“ 으응? ”
어리둥절해진 녀석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그때는 이미 그럴 필요가 없는 상태였다. 어느새 결박을 푼 트로웰이 주변의 기사들이 눈치 챌 틈도 없이 다가와 영주아들의 목덜미에 단검을 들이대고 있었던 것이다. 뒤 늦게 서야 그것을 깨달은 녀석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 …헉! 이, 이게 무슨 짓이야! ”
웅성웅성
예상치 못한 상황전개에 기사들은 물론이고 몰려있던 동네 사람들까지 전부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손아래서 빛나고 있는 단검의 기세가 워낙 흉흉했던 탓에 누구도 섣불리 접근하지는 못했다. 안절부절 하는 기사들에게 눈빛으로 ‘다가오면 이 녀석 죽는다’라고 쏘아붙인 트로웰은, 지금까지 한번도 지은 적 없던 피식-하는 비웃음을 흘리고는 영주아들을 향해 나직이 쏘아붙였다.
“ 경고를 늦게 해서 미안하군요. 당신은 실수 한거야. 그를 건드림으로서 내가 이성을 잃게 만들어버렸으니까. ”
“ 무, 무엄한! 내 너를 어여삐 여기려 했거늘, 감히 평민주제에 귀족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절대 무사치 못할 것이다! 너는 물론이고, 네 일행인 용병들도 모조리 참수시킬 테다! ”
그의 협박에도 트로웰은 코웃음도 치지 않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그러자 긴장한 표정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다른 일행들이 통쾌하다는 듯이 환호하며 소리쳤다.
“ 역쉬, 매튜! 그렇게 나와야지! 아주 잘 하고 있어, 기특한 짜식! ”
“ 저 자식 그냥 멱을 따버려. 귀족을 죽인 죄로 평생을 쫓겨 다니는 한이 있어도, 우선은 저놈 빌빌대는 꼴을 봐야겠다! ”
“ 마지막 숨 쯤은 남겨 놔! 나도 분풀이 하고 싶으니까 말이야. 자~ 그럼 우리도 처리해보실까? ”
그 말을 마지막으로 결박되어 있던 밧줄을 아무렇지 않게 후두둑 후두둑 끊어버린 일행들은 무릎을 털고 일어나며 그들 주변을 둘러싼 기사들을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헤롤은 오늘 아침 되찾아온, 그의 도끼를 한번 탁탁 바닥에 굴려보고는 신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 한 놈, 두 놈, 세 놈… 뭐야, 겨우 10명? 이 정도면 나 혼자도 가뿐 하겠는데? 어떻게 할래, 너희들? 구경이나 할래? ”
“ 흐음, 마음대로 해. 마음껏 날뛰어 보는 것도 좋겠지. 학살방법이 워낙 잔인해서 인간을 상대로 싸우는 것도 오랜만이잖아, 너? ”
“ 무, 무슨 짓을! ”
그제 서야 사태가 돌아가는 것이 심각하다는 것을 파악한 기사들이 질린 얼굴로 소리쳤지만 이미 누구도 귀담아 듣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헤롤은 당장이라도 도끼를 휘두를 듯 그들 가까이 다가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자 처음 기사단의 단장이라고 소개했던 중년 남자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이, 이번일이 알려지면 너희는 물론이고, 너희에게 호위를 요청한 의뢰 주 측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용병은 신용이 가장 중요할 텐데? ”
“ …!… ”
과연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는지 헤롤은 다가가던 것을 멈추고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너무 화가 나서 현재 동행중인 상단 측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쳇-하고 혀를 차는 그의 모습에서 용기를 얻었는지 영주아들의 얼굴에도 희망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 그, 그래! 아버님이 절대 고이 넘기지 않으실 것이다! 너희들의 용병생활은 물론이고, 의뢰주인 상단도 무사치 못할 거다! 너희들 우리 아버지가 어떤 분인 줄 알아? 섭정왕 유카르테 대공이 가장 아끼는 수하 열사람 안에 들어가신 단 말이다! ”
그의 말에 단검을 대고 있던 트로웰의 얼굴도 약간 굳어졌다. 일을 벌인 건 후회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미친 파장이 너무 커서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당장 유희를 끝마칠 생각이 없는 그에게는 현재 영주아들이 지껄이는 말이 너무도 현실적인 문제였다. 일행이 잠시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자 기사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반격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직 그들의 도련님이 인질(?)로 잡힌 상태이긴 해도, 타인의 입장을 의식하기 시작한 샴페인 용병단들이 함부로 굴지는 못할 거란 자신감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들어맞는 것이라, 일행들은 처참히 구겨진 얼굴이 되면서도 둘러싸는 기사들의 포위진열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오만함을 되찾은 기사단장은 뽑아든 칼을 트로웰에게 들이대며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 도련님을 놓아드려라. 그렇지 않으면 이 칼이 너를 칠 것이다! 순순히 잡혀 간다면 도련님께서도 지금의 네 무례를 크게 탓하지 않을 게다. ”
이미 승기는 자신 앞으로 돌아왔다는 듯 승승장구하는 표정의 기사들이었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싸늘하게 미소를 띄운 트로웰이 영주아들의 목에 대고 있던 검을 더욱 깊이 박아 넣었던 것이다. 녀석의 피부를 뚫고 새빨간 선혈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자 자신만만하게 다가서던 사람들은 그대로 움찔 몸을 굳히고 말았다.
“ 무, 무슨! 감히 도련님의 몸에 상처를 내다니, 처벌이 두렵지 않은 거냐! ”
“ ……. ”
점점 불리해지는 상황이었지만 트로웰이나 다른 일행들이나 전혀 거리낄 것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대로 죽으면 죽으라지, 뭐.’ …라는 느낌이랄까? 그 흉흉한 분위기가 깨어진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들이 끼어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 호오, 이건 또 무슨 구경거리라지? 이 동네는 정말 볼게 많단 말씀이야? 명색이 기사라는 놈들이 멀쩡한 용병들에게 시비를 걸다니, 이건 돈 주고도 못 본다고! 필립, 어서 영상석을 준비하게! ”
“ 헉, 세리엄님! ”
그것은 흰 수염을 발끝까지 길게 늘어뜨린 나이 지긋한 노인 한명과, 검은색 고수머리를 가진 30대 중반의 남자였다. 간단한 여행복 차림의 그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타 지역 사람임이 눈에 뜨이는 복장이었는데,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유쾌한 말투에 당황한 표정으로 돌아보던 나는 그대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도시에 처음 도착하던 날 이사나와 함께 들린 식당에서 보았던, 온통 흥분하며 대화하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리둥절해 하는 기사들이나 일행들은 완전히 무시한 채 저들끼리 심각하게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 제발 낄 때 안 낄 때를 가리시란 말입니다! 타국의 귀족들이 행하는 일에 참견하시다니, 그러다 크게 경을 치시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
“ 행하는 꼴들이 같잖아서 이러는 거 아닌가! 이래봬도 정의의 세리엄이란 칭호가 괜히 붙은 게 아니네! ”
“ 사람들을 협박해서 그렇게 부르게 해놓고서는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천벌 받으십니다요! ”
“ 아니, 지금 자네 내게 도전하는 겐가? ”
“ 누, 누가 그렇다고 했습니까? 아무튼 이런 식의 전개는 위험하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조용히 다녀도 모자를 판에 어째 돌아다니면서 사고를 치시는 겝니까? ”
여전히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우는 두 사람이었다. 멍한 표정으로 그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던 기사단장은 한참만에야 퍼뜩 정신을 차리는 듯 하더니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큰 목소리로 일갈했다.
“ 상관없는 것들은 꺼져라! 네놈들까지 처단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원, 재수가 없으려니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를 빌어먹을 늙은 것들이… ”
그리고 그것은, 열심히 세리엄이란 노인을 말리고 있던 필립이란 남자가 그대로 분노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스윽-하고 기사들을 돌아본 그는 그의 옆에 있던 노인이 흥분할 때보다 더 큰 목소리가 되어 외치기 시작했다.
“ 뭐가 어쩌고 어째? 늙은 것들?? 이놈의 썩을 나라는 위아래도 없단 말인가! 세리엄님, 그냥 저것들 다 쓸어버리시죠? 보자보자 하니까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입니다! ”
“ 호오, 그래도 되는 겐가? 나는 그렇다 쳐도 자네는 문책을 면하기 어려울 텐데? ”
“ 그래봤자 반성문 천장입니다! 내 오늘 이 땅에 피를 묻히는 한이 있더라도 저 놈들의 끝을 봐야겠습니다! ”
그나마 이성을 갖추고 있던 그 까지 흥분해 버리자 세리엄이란 노인은 히죽거리며 장단을 맞춰주기 시작했다. 그는 들고 있던 나무 지팡이를 기사들에게 겨누더니 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 지금이라도 반성하고 사죄한다면 봐줄 생각이 있다! 용병들은 내버려두고 조용히 돌아가라. ”
그러나 어딜 봐도 평범한 노인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며 겁을 낼 사람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기사들은 기도 안 차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 별 미친것들이 울화를 돋구는 군, 젠장. ”
“ 저 들부터 먼저 포박할 까요? ”
“ 포박할 필요까지 있나? 미친 것들에겐 매가 약이다. 간단하게 몇 번 두들겨 주고 성문 밖으로 쫓아 버려. ”
그렇게 대꾸한 기사단장은 다시 영주아들에게 칼을 대고 있는 트로웰에게 몸을 돌리려고 했다. 일단 인질로 잡힌 거나 마찬가지인 그들의 도련님부터 구하는 것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멍청한 짓이었는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에 분노한 노인이 그대로 지팡이를 치켜 올리며 큰 소리로 마법주문을 시전 했던 것이다.
“ 이익, 저런 버르장머리를 보았나! <눈앞의 적을 섬멸하소서! *파이어 스톰!* > ”
“ 헉, 마…마법?! ”
생각지도 못했던 능력은, 막 그들을 위협하기 위해 다가서는 기사들을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었다. 노인의 손에서 순식간에 생성된 불의 폭풍은 미처 아차 할 사이도 없이 그대로 날아가 10명 가까이 되는 기사들을 차례로 꿰뚫어 버렸다.
슈우욱- 콰아앙! 커다란 폭염과 연기가 터지기 시작하자 단장은 물론이고, 트로웰에게 잡혀있던 영주아들의 얼굴역시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 이, 이게 무슨 짓이오! ”
눈 깜짝할 사이에 대부분의 기사들이 재기불능 상태가 되어 쓰러지자, 영주아들은 옴쌀달싹도 못한 자세에서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세계에서 마법을 할 줄 아는 이는 귀족이란 소리와 다름이 없었다. 정령사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국가에서 존귀한 대접을 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게다가 방금 전에 시전한 마법이 꽤 대단한 마법이었는지, 무리는 어느새 노인에 대한 경계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 어째서 마법사인 그대가 귀족을 위협하는 거요! 지금 상황을 봐도 알 수 있을 텐데? 불리한건 이쪽이지 이 용병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
흥분한 영주의 아들은 목에 들이밀어진 칼에 계속 상처가 나는 것도 무시한 채 거친 동작으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인은 어디서 개가 짖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태연하게 귀를 후벼 보았을 뿐이었다.
“ 노인도 공경할 줄 모르는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에게 훈계를 해 준 것뿐이다. ”
“ 이익, 먼저 참견 해 온건 그쪽이 아니오! 다른 귀족이 하는 일에 끼어들다니, 마법사라 해서 무사히 넘어갈 거란 생각을 하는 건 아닐 테지! 대체 당신들은 누구요! ”
지지않고 되받아 치는 말에 노인은 짧게 혀를 차보였고, 필립이란 이름의 남자는 약간 몸을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들…이 제국의 귀족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여행 중인 귀족이 타 제국 귀족의 일에 참견하면 국가간의 분쟁으로 번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애꿎은 일에 휘말린 것 같아 걱정이 되었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노인은 전혀 꿀릴 것이 없다는 듯한 당당한 태도였다. 또 다른 낯선 인물이 끼어들어 단정한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카터스 제국 황실의 수석 마법사이신 세리엄 폰 알지오님이시군요. 이곳 할버크를 방문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설마 이런 상황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
“ …응? ”
“ 리오! ”
그는 금발머리를 어깨까지 늘어트린, 보라색 눈동자의 단정한 얼굴을 가진 청년이었다. 나이는 20살 쯤 되었을까? 영주아들과 마찬가지로 10명 남짓의 기사들을 이끌고 걸어오고 있었는데, 바닥을 뒹구는 부상자들과 영주아들이 처한 상황을 보더니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서 내뱉는 말에 일행은 물론이며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 그게 대체 무슨 꼴입니까, 형님? ”
“ …!! ”
혀, 형님? 설마 저 사람이 영주아들의 동생이라는 건가? 그의 정체는 뻣뻣하게 서있던 기사단장이 얼른 부복하며 인사를 건네는 모습에서 온전히 확인할 수 있었다.
“ 리글레오 도련님께 인사 올립니다. 이곳까진 어쩐 일로… ”
“ 크렌트 경, 그것은 내 쪽에서 하고 싶은 말이군.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어째서 형님이 저런 상황에 처해있으며, 기사단장인 그대는 손을 놓고 있는 것이지? ”
“ 소, 손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니오라…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던 탓에 그만… ”
“ 변명은 듣지 않겠소. 주인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책임은 차후 돌아가서 묻겠습니다. 어찌된 일인 진 모르겠으나, 소년이여? 우선은 형님을 놓아주지 않겠습니까? 지금 상황에 대해서 처벌하지 않겠다고 약조하겠습니다. ”
그러자 트로웰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순순히 잡고 있던 남자의 목을 놓아주었다. 목숨을 보전했다 싶자, 그는 씩씩거리는 표정으로 얼른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았다.
“ 이게 무슨 짓이냐, 리오?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었다! ”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 때문에 살아난 것과 다름이 없으면서도 그는 오히려 동생을 힐책하는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조금은 억울한 감정이 생길만도 하련만, 리오란 이름의 청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단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우선은 형님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긴박하니 저라도 나서서 중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 흥, 저 자가 타 제국 황실의 수석마법사인지 뭔지 라서 그런 것이냐? 감히 다른 제국 귀족이 하는 일에 참견하려 들다니! 당장 아버지께 고해 그 책임을 물게 할 것이다! ”
그의 말에 노인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어보였고, 그의 옆에 있던 필립이란 남자는 불쾌한 듯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 모습에 동생 쪽 남자가 당황하여 얼른 고개를 숙여 보였다.
“ 죄송합니다. 형님은 현재 극심한 스트레스에 의해 제대로 된 판단을 하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십니다. 대신 사죄드릴 테니 저를 보아 너그럽게 넘어가 주십시오. ”
“ 뭐, 뭣이? 리오, 네 녀석이 감히 무슨 소리를? ”
“ …흐응, 그나마 정신이 제대로 박힌 인간이 한명이라도 있으니 다행이구만. 내 아까부터 쭈욱 지켜봤지만, 이번일은 일방적인 자네 형 되는 사람 쪽의 잘못이었네. 이들을 풀어주고 차후 이번일로 피해가 돌아가지만 않게 한다면 용서해 주지. ”
노인의 제안에 리오란 남자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그러마’라고 대답했다. 그의 형이란 녀석이 입에 거품을 물고 항의하려 했지만, 기사들을 시켜 간단히 제압시켜버린 뒤였다. 두말 할 필요도 없는 깔끔한 마무리에 일행들이 멍해져 있는 사이, 그는 우리 쪽을 바라보며 진심어린 사죄의 말을 건네었다.
“ 불쾌한 경험을 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이번일로 그대들에게 다른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약조하겠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형님을 대신하여 이번 남문에 출몰한 몬스터를 퇴치해주셔서 무척 고맙다는 인사도 드리고 싶군요. 덕분에 사람들이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한다면 수고비를 지급하고 싶습니다만…. ”
“ 아, 개인적인 의뢰를 받고 처리한 일이니 그렇게 까지 신경써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로서는 현재의 상황에서 무사히 벗어나게 된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니까요. ”
“ 이익! 리오 이 녀석! 감히 네가 나를 엿 먹이고 이 따위로 놀아? 머리에 하나 든 것 없는 멍청한 놈의 자식이라,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오냐오냐 봐주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에잇- 이것들 놓지 못해?! 당장 저 용병들부터 사로잡으란 말이다! ”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발악을 하는 남자였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혀를 끌끌 차던 세리엄이란 노인이 서슴없이 다가가 딱-하고 지팡이로 머리를 후려쳤던 것이다. 제대로 된 반항 하나 하지 못한 상태에서 당한 불시의 기습이라, 그는 미처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그대로 추욱 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것을 확인한 동생은 생긋 웃으며 다시 한번 노인을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께서도 정신을 차리시면 마음을 가다듬으실 겁니다. ”
“ 호오, 자네는 내가 하는 행동이 불쾌하지는 않은 겐가? 자네의 부하들을 다치게 한 것도 모자라, 형까지 기절시켰는데 말일세. ”
“ …후후, 세리엄님의 행동에 불쾌한 감정을 입을 리가 없지요. 카터스 제국은 마법사의 제국. 그 중 황실 수석마법사이신 당신은 언제 어느 때나 황제폐하와 독대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리 타 제국이라 하나, 고작 지방 영주의 아들을 훈계한 사건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지는 않을 테지요. 이 자리에서 바로 처단하셨다고 해도 무어라 항의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단정한 대답을 들은 노인은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그렸다. 막무가내인 형에 비해 훌륭할 정도로 처세가 똑바른 동생이 아닌가. 그래서였을까? 그 후 노인이 그에게 건넨 말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뜻을 담고 있었다.
“ 자네는 모시는 주인에 따라 검이 되기도 하고, 방패가 되기도 하겠구만. 부디 이 나라를 제대로 이끌 주군을 선택하길 바라네. ”
“ …명심하겠습니다. ”
그 순간 이사나의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을 느낀 것은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녀석의 시선은 아까부터 리오란 남자에게 머물러 좀처럼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원하던 인재를 발굴했을 때의 집요한 눈빛이랄까? 아마도 그와는 조만간에 다시 조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 몇 번이나 거듭 일행들에게 사죄의 뜻을 밝힌 리오란 이름의 남자는, 데리고 온 기사들을 시켜 부상자들과 기절한 변태귀족을 저택으로 옮길 것을 명령했다. 그러면서 차후로 이번 일 때문에 피해가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다시 한번 약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변태 귀족 입장에서 보자면, 오만하게 등장했던 것에 비해 그야말로 너무도 비참한 후퇴를 맞이했던 셈이다.
그것을 마냥 기분 좋게 바라보던 일행들은 뒤 늦게 서야 우리를 위기해서 구해준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노인을 바라보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 정말 감사합니다, 어르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
“ 허허허. 별 것 아니었네. 나야말로 그대들이 남문의 몬스터를 퇴치해 주는 바람에 따로 호위용병을 고용할 필요가 없어 한결 가뿐해졌는걸. 정말 크게 경을 칠 뻔 했군. 세상엔 별 이상한 놈들이 많단 말일세. ”
“ 정말 그렇군요. 어르신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저희들은 꼼짝없이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을 겁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는 휴센의 인사에 세리엄이라 불린 노인은 만족스럽게 웃어보였다. 그런 그의 옆에서는 필립이란 남자가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세리엄님은 잘 하신 거 하나도 없습니다. 이건 국제적인 망신이라고요. 원, 이번 일이 다른 나라에 소문이나 날까 두렵습니다요! ”
“ 어허, 무슨 소리인가! 이 사람들이 내 덕에 살았다지 않은가! ”
“ 어련하시겠습니까? 물론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은 다행입니다만, 꼭 그렇게 극단적으로 손속을 쓰지 않으셔도 되었잖아요? 정말이지 태자전하가 세리엄님을 닮아 난폭해 질까 걱정입니다요! ”
“ 무엇이? 자네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건가? 앙? ”
또 다시 버릇처럼 투닥이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 모습을 불편해 하는 사람은 일행 중 아무도 없었다. 잠시 웃으며 그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던 나는 퍼뜩 트로웰을 떠올리고는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마침 단검에 묻어있던 변태 귀족의 피를 오만인상 찡그리며 닦아내고 있었던 그는, 내가 오는 것을 보더니 굳은 얼굴을 펴고 평소처럼 생글 미소지어보였다.
“ 미안, 매튜. 괜찮아? 나 때문에 어려운 일만 하게 되고…정말 미안해. ”
“ 무슨 소리야? 나야말로 제대로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한걸. 이런 입장만 아니었어도 바로 목을 그어버렸을 거야.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심한 살의를 느껴본 것도 꽤나 오랜만이니까 말이야. 그 녀석 시선 정말 불쾌했지? 엘이야 말로 괜찮은 거야? ”
“ 하하, 뭐… 좀 적응이 안 되긴 하더라. 하지만 뭐 나만 당했나? 이릴이나 쉐리, 매튜 너도 똑같이 심한 취급 받았는걸. 그런 주제에 혼자서 엄살 떨 수는 없지. ”
씩씩하게 웃으면서 대답하는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이사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망설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든 녀석은 묘한 죄책감이 서린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미안해, 내가 그때 나서지만 않았어도… ”
“ 응? 무슨… 아아, 그 무릎 꿇는 거 말이야? 아니야, 라이. 네가 틀린 게 아닌 걸? 솔직히 똑바로 반박하는 모습 보고 아주 통쾌했다고. ”
“ 하지만 결과적으론 그것 때문에 더욱 눈에 뜨여버린 거잖아…결국 또 나 때문에 붙잡힐 계기를 만들기도 했고…. ”
“ 그건 그 변태자식이 너를 이용한 것뿐이야. 죄책감 같은 거 받을 이유가 못된다고. 라이, 너도 분했을 거 아니야? ”
별 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꽉 악문 입술을 봐도 그가 얼마나 분노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일행들을 위험한 상황에 몰고 간 것에 일조하게 된 데다, 그것에 대해 당당히 항의할 입장이 되지 못하는 현재의 처지가 너무나 비참했을 지도 모른다.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이나 감정을 추스르던 녀석은 잠시 후 약간의 물기를 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 나…그때 정령들을 불러내야 했을까? 가만히 넋 놓고 있을 게 아니라, 그들을 혼쭐내줬어야 했는지도 몰라. ”
그러나 그의 말에 대답한 것은 내가 아니라 트로웰이었다. 단정한 빛의 황금색 눈동자가 이사나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 그럼 너는 그때 왜 가만히 있었던 거지? 얼마든지 기회는 있었을 텐데? 그런데도 얌전히 있었다는 건 뭔가 생각해 둔 것이 있다는 소리 아닌가? ”
“ 아…나는 그저 눈에 뜨이지 않으려고…내 정체가 들키면 일행들에게 더욱 피해를 끼치게 될 것 같아서… ”
“ 그럼 그것으로 된 거야. 네 생각처럼 샴페인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해주는 성격도 아니니까. 미리 말해두지만, 이후로도 네가 옳다고 생각한 일을 후회하지는 말아. 넌 조금 더 네 자신의 행동에 자신을 가질 필요가 있어. 내가 전에도 말했지? 여행의 주체는 너다. 네가 바로서지 않으면 누구도 도와주지 못해. 곤란하다고. ”
“ ……. ”
그리 자상하다고 볼 수 없는 딱딱한 말투였지만, 담겨진 말에는 이사나를 향한 격려가 담겨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평소처럼 위축되기 보다는 환한 표정이 되어 얼른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모습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트로웰은 피식 웃으며 알 수 없는 한 마디를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 이대로라면 그 아이에게도 짐이 될 뿐이니까…. ”
“ 응? 방금 뭐라고 했어, 트로웰? ”
“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엘. 그냥 혼잣말이었어. ”
흐음, 어째 뭔가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내 착각이었나? 평소와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생글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의심하는 것 자체도 한심스러운 기분이었기에 나는 굳이 캐물으려 하지 않았다.
그 뒤 행렬의 출발시간이 다 되었음을 깨달은 우리는 세리엄 일행과 헤어져, 처음 출발 장소로 잡아두었던 남문 앞으로 서둘러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리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용병단의 사람들이 그런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곤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들 중 가장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칵테일 용병단의 일원인 코웰이었다.
“ 여어~ 늦었네? 무슨 일 있었어? 당신들이 온 방향에 아까부터 사람들이 계속 몰려가는 것 같던데. ”
“ 아아, 잠시 복잡한 사건에 좀….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다들 모인 겁니까? ”
“ 가장 중요한 상단일행이 늦고 있어. 그러고 보니 이번에 샴페인 용병단이 케르베로스 두 마리를 잡았다며? 우리 단장이 자기도 끼워주지 그랬냐고 아주 난리라고. ”
“ 코, 코웰! ”
붉어진 얼굴로 기겁이 되어 말리는 피트였지만 이미 뱉어진 말을 다시 주워 삼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피식거리며 웃은 코웰은 민망해 하는 피트를 가리키며 놀리듯 말을 이었다.
“ 늙은 것이 주책이라고 해도 상관없다만, 좀 이해해줘. 원래 상급 몬스터라고 하면 용병들의 꿈이잖아? 꼴에 은패랍시고 희망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야. ”
“ 코웰!! ”
“ 쿡쿡. 미안합니다, 피트씨. 사실 당신에 대해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습니다만, 상단에서 제시한 조건도 있고,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에 함부로 도움을 요청하기도 죄송스럽더군요. 이해해 주십시오. ”
“ 아, 아닙니다! 저는 전혀 그런 생각이…코, 코웰이 제멋대로 오해한겁니다. ”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그였지만 잔뜩 붉어진 얼굴에 담긴 일말의 아쉬움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확실히 코웰의 말마따나 상급 몬스터의 토벌을 꿈꾸고 있었긴 했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일행들은 미안함 반, 웃음 반의 시선으로 서로를 마주보며 조용히 키득거렸다.
잠시 후 상단사람들이 호위 물품을 실은 마차를 이끌고 나타나자, 흩어져 있던 용병들은 일제히 한 자리로 모여 들기 시작했다. 상인들이 탄 마차 안에는 카이씨도 함께 앉아있었는데, 그가 우리와 눈인사를 나누는 사이, 용병들의 숫자를 대충 확인한 상단의 대표자가 유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모두 모인 것 같으니 이제 슬슬 출발하도록 하지요. ”
그는 케르베로스의 가죽을 얻은 날 이후부터 지나치게 얼굴근육을 혹사시키고 있었다. 한마디로 하루 종일 생글생글 웃고 다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평소 삭막하기 그지없던 그의 인상이 요즘 들어 10살 박이 어린아이처럼 아주 해맑게 보일 지경이었다. 아마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케르베로스의 가죽을 경매에 팔아넘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을 까 싶다. 돈이 저렇게 좋을까?
‘ 하긴…돈 싫어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 만은… ’
누구나 십분 공감이 갈 소리를 중얼거리며 나는 서둘러 이사나와 함께 말 위에 올랐다. 이제 곧 있으면 클모어에 도착하게 된다고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들뜨는 심정이었다. 뭐, 그렇다곤 해도 족히 15일은 더 가야하는 긴 여정이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라피스 녀석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한 달 내에 반드시 찾아내겠다고 자신만만하게 호언장담하던 녀석의 얼굴이 떠오르자 나는 피식 미소 지었다. 지금쯤 어느 엉뚱한 동네에 가서 헤매고 있을지도 모르지.
변태귀족을 만나고 난 이후여서일까? 그에 대한 호감이 훨씬 높아진 느낌이었다.
클모어에 가까워질수록 날은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나무마다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불어오는 바람의 온도도 한층 차가워 진 것이, 이제 완연히 겨울이라고 불러도 할말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일행들을 춥게 만드는 건 이런 날씨가 아니라…
“ 이릴, 자기~ 춥지? 일루와, 내가 따뜻하게 해줄게~! ”
“ 아잉, 헤롤씨도 참… ”
…따위의 두 마리(?)의 닭이 일으키는 닭살들이었던 것이다. 기온의 변화 외에는 춥다, 덥다를 느끼지 못하는 나조차 한기를 느끼고 부르르 떨 정도이니 말 다했지 않은가. 그러니 마이티와 휴센의 얼굴빛이 점점 창백해진다 해도 탓할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일정에 지대한 차질을 빚고 있는 한 커플을 바라보았다. 투닥거리며 싸울 때는 언제고, 마음을 확인한 이후부터는 아주 찹쌀떡이 되어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는 두 사람이었다.
자기야~ 우리 애기~ 따위의 닭살 언어는 그렇다 치더라도… 키스나 포옹 같은 과한 애정표시 같은 것도 서슴치 않는 것이다. 그것이 무수한 솔로들의 염장을 지르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라서 더욱 문제였다.
“ 저어…헤롤, 이릴. 우리만이 아니라…다른 사람들도 보고 있는데 키스는 좀… ”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충고를 건네 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그게 뭐가 어떻냐는 태도뿐이었다.
“ 원래 연인끼린 수시로 애정을 확인해줘야 하는 거야, 엘! 너도 남자라면 알아둬라! ”
“ 아하하…그, 그런가요? ”
“ 제기랄, 그렇긴 뭐가 그래? 엘! 저런 놈 말 따위에 홀릴 것 없어! 이 배신자! 너 혼자 평생 잘 먹고 잘 살아봐라!! ”
결국 질투에 눈이 돌아버린 마이티의 절규가 이어졌다. 그 옆에서 휴센은 적극적인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말이다. 그러나 어디 헤롤이 그런 말에 눈이나 하나 깜짝할 인간이던가? 그는 오히려 약 올리듯 히죽 웃으며 이릴의 허리를 더욱 힘차게 끌어안았을 뿐이었다.
“ 왜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냐? 이릴이랑 같이 잘 살 거다~ 니들이야 말로 솔로들끼리 잘 해보셔~ 음하하! ”
“ 이익~ 빌어먹을 자식! ”
“ 저 자식 그냥 죽여! ”
“ 표창하나 던질 깝쇼? ”
때는 점심시간. 식사를 위해 행렬을 멈추고 있던 용병들은 모두 살벌한 시선으로 헤롤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이어진 이릴의 말에 눈물을 삼키며 돌아서고 말았으니…
“ 어쭈? 눈들 안 깔아? 지금 누구를 노려보는 거야? 앙? 채찍에 맞아 다 죽어볼텨? ”
“ 아이~ 자기 멋쟁이~~ ”
“ 오호호호~ 당근이지, 자기~ 앞으로 괴롭히는 것들 있으면 말만해. 내가 다 쓸어버릴 테니까. ”
“ 응, 응! 자기만 믿을게~~ ”
“ ……. ”
신이시여…저것이 진정 한달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인간들이 맞단 말씀입니까? 새삼 연애란 것이 사람을 어디까지 망쳐놓나 확인하는 사례라고 되새기며 나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로서는 점점 닭털을 날리는 헤롤과 이릴도, 그것을 부럽게만 바라보는 쉐리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이었다.
이건 설마 지난시간동안 연애경험이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 젠장, 이래봬도 한때는 커플 훼방 놓기 위원회 회장이었던 내가! ”
“ 응? 무슨 소리야, 엘? ”
“ 아…아무것도 아니야, 매튜. ”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트로웰의 시선에 괜시리 민망해져서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나이 4000살.(정확하게는 4230살) 지금까지의 유희에서 단 한번도 연애를 경험하지 않았을 리는 없을 테지. 설마 트로웰도 저렇게 닭살커플이었을까?
척 봐도 침착, 냉정, 온유하게만 보이는 그가 헤롤처럼 주책스럽게 자기야~라고 하는 모습을 떠올리려니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쩐지 이미지가 산산이 망가지는 것이…
“ 미안, 매튜…. ”
차마 사과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두려워졌던 것이다. 앞뒤 설명을 죄다 빼놓은 사과에 그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이해했다는 듯이 피식 웃어보였다.
“ 뭐, 연애 경험이 아주 없다곤 못하지만…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었어. ”
“ 쿨럭. 역시 그렇겠지? 아하하… ”
“ 상대방 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와서 곤란한 적은 몇 번 있었지. 보다시피 외모가 이래서, 꼬마숙녀들과 애틋한 감정만으로 끝날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말이야. ”
“ 헤에… 그, 뭐랄까. 폴리모프인가 하는 마법으로 모습을 바꿀 수는 없는 거야? ”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묻자 그는 살짝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게 알고 보니 꽤나 고위급이 마법이라, 적어도 6서클이 되어야만 완벽한 변화를 시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힘의 제약 상 4서클밖에 부릴 수 없는 그로서는 평생을 가도 시도할 수 없는 영역인 셈이었다.
“ 가끔은 드래곤들에게 부탁해서 모습을 바꾸기도 해. 그게 아니라도 현재의 형체를 조금 바꾸는 정도는 정령의 힘으로도 가능하니까 말이야. 이게 본래의 모습일 뿐, 사람들에게 투영시키는 겉모습을 다르게 하는 건 가능한 편이거든. ”
“ 헉, 그럼 지금 당장이라도 어른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거야? ”
“ 응. 왜? 보고 싶어? ”
당연히 보고 싶지!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보여주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작은 목소리로 ‘키만 커지는 것 뿐’이라고 강조하는 말을 덧붙이는 것이었다.
“ 그러니까 너무 기대하면 곤란해. ”
“ 하지만 신기한걸. 어라? 그럼 나도 모습을 바꿀 수 있다는 거네? ”
“ 그렇긴 하지만…바꿔도 별로 달라질게 없다니까? 머리색이나 눈동자색은 절대로 안 바뀌고, 단지 키나 몸체가 커졌다 작아졌다 할뿐이야. 인간처럼 늙는다는 개념이 없어서 나이가 더 들어보이게 하는 것도 힘들어. 그래서 드래곤의 힘을 빌리지 않는 한은 대부분 유희가 짧게 끝나는 편이지. ”
“ 흐음, 그렇구나…. ”
그렇게 치면 드래곤은 정령왕들의 유희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인 셈인가? 마음껏 마나를 가져다 써도 별 탈 없고, 가끔은 모습을 바꾸는 서비스(?)도 받을 수 있고. 어떤 유희, 어떤 생활을 하든 지나친 참견이나 도움 같은 것도 요청하지 않고.
‘ 아, 물론 라피스 녀석의 경우는 마지막 사항이 제외지만. ’
그 녀석은 남의 일에 참견하고 싶어 안달인 타입이니 말이다. 드래곤 중에서도 돌연변이라고 해야 돼나? 그러고 보면 난 참 특이한 경우의 사람들만 만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나라고는 쥐뿔도 없는 주제에 떡하니 정령왕을 소환하게 된 이사나나, 신(v)최초로 양자를 들인 엘뤼엔이나, 다른 존재의 유희에 어떻게든 끼어들고 싶어서 애쓰는 라피스나….
‘ 하긴…이러는 나도 정상적이냐고 묻는다면 그다지 할말이 없다만. ’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일단 나부터가 제대로 된 정령왕이 아닌 주제에 다른 사람을 탓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나는 피식 미소 지으며 그때까지도 일행들을 닭털 속으로 밀어 넣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릴과 헤롤을 돌아보았다. 이미 휴센과 마이티는 참는 경지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부들거리는 어깨가 거의 경련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생각될 때쯤, 그제까지 꿋꿋하게 입을 다물고 있던 휴센이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 단원 간의 연애 따위 당장 금지 시켜 버릴테닷!! 두 사람 다 그만 떨어지지 못해! 애들도 보는 앞에서 무슨 추태들이야!! ”
“ 어머머~ 단장은 괜히 부러우니까 심술이야. ”
“ 킥킥킥, 냅둬, 이릴. 저게 바로 솔로의 슬픔이라는 거야. ”
“ 뭐가 어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좀 반성을 해라, 이것들아! ”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를 지르는 휴센은, 저러다 쓰러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만큼 같은 솔로된 입장으로서 바라보기에 절절한 안타까움을 유발시키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30대의 미래가 두려워지는 참에, 후배라고 있는 것이 옆구리에 애인을 끼고 히히덕거리고 있으니, 그것을 마음 좋게 받아줄 인간이 몇이나 되겠는가.
옆에서 열심히 식사준비를 하고 있던 쉐리가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중얼거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 그러니까 순순히 내 마음을 받아주면 될 텐데. ”
“ 뭐…뭐어? ”
당황하는 휴센의 표정에도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받아주지 않는 짝사랑이 오기로 번진 것인지, 어떻게 해서든 밀어붙이겠다는 태도가 강경한 모습이었다.
“ 내가 틀린 말 했어? 이렇게 예쁜 여자가 언제 또 대쉬할 거라 생각하는 거야? 미안하지만~ 난 내가 못 먹는 건 남도 못 먹게 하자는 주의라서 말이야. 다른 여자랑 잘 되는 꼴은 절대 못 보니까 그렇게 알아. 휴센은 평~~생 홀아비로 늙어죽을 거라고. ”
“ 쿨럭… ”
아주 뼛속 깊이 작심한 듯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로 쏘아붙이는 말에 휴센은 어색하게 마른 기침만을 뱉어냈다. 그러나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던 그가 다시 눈을 들었을 때, 휴센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상당히 부드러운 표정이 되어 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마음이 약해진 건지, 아니면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조짐이 좋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당차기만 하던 쉐리의 얼굴에 작은 홍조가 피어오르자,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휴센은 한숨처럼 한마디 내뱉었다.
“ 나 같은 늙은이가 뭐가 좋다고 그러는 거냐? 넌 아직 17밖에 안됐어. 얼마든지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아무리 취향이 특이하다곤 하지만… ”
“ 휴센은 늙은이 아니야! 아직 28살밖에 안됐잖아? 그리고 휴센만큼 다정하고 멋진 남자도 없다고. ”
“ 하아. 칭찬은 정말 고맙다만. 너 말이야. 혹시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 같은 감정과 착각 하는 건 아니냐? 아무래도 다시 생각을… ”
“ 읏… 어린애 취급하지 마! 나도 이제 알거 다 아는 나이란 말이야!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연인을 바라보는 감정을 헷갈릴 리가 없잖아! ”
사실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17살은 아직도 한참이나 어린 꼬맹이나 다름없다. 그것이 어릴 때부터 거의 자식처럼 키우다시피 한 아이라면 더더욱. 휴센으로서는 아무리 호감이 있더라도, 그것이 연애 감정인지, 딸을 바라보는 부정 같은 심정인지 구분하기가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쉐리에게도 다시 한번 숙고해 보라며 기회를 주는 것 같았는데, 그런 마음도 몰라주고 그녀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당차게 대답해 버리자, 그는 곧 난감한 표정이 되어 볼을 긁적거렸다.
하늘한번 보고 땅 한번 보고,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던 그의 시선은 마지막에 내 쪽을 향하더니 결심을 굳힌 듯 단호한 눈빛이 되었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조용히 충고 한바 있던…30대가 되면 도둑놈 소리 듣는다는 게 어지간히 충격으로 자리 잡은 듯 했다. 이후에 벌어진 헤롤과 이릴의 애정행각이 그런 심정에 더더욱 불을 지폈고 말이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딱딱하게 얼굴이 굳은 휴센은 희멀건 스튜그릇을 아무렇게나 스푼으로 휘젓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 후회할 거다, 반드시. ”
“ 안 해! 그런 거! ”
“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난 다정한 인간도 아니고, 재밌는 사람도 아니야. ”
“ 그런 건 지난 시간동안 같이 살아온 세월로 이미 다 파악했어. 날 뭘 로 보는 거야? ”
“ ……난 헤롤 자식처럼 닭살 같은 거 죽어도 못 떤다. ”
“ 처음부터 기대도 안…뭐, 뭐야? 지금 그 말? ”
그제 서야 휴센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깨달았는지, 쉐리는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헤롤과 이릴, 마이티, 심지어 트로웰마저 황당한 얼굴로 그들의 단장을 돌아보았던 것이다. 나야 일찌감치 그의 감정과 고뇌하는 바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 별달리 당황스러울 게 없었지만, 다른 이들에겐 전혀 티낸바 없던 그가 냉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쑥스러웠는지 어울리지도 않게 얼굴을 붉히는 모습에 쉐리는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집요하게 캐묻기 시작했다.
“ 그렇게 대답하는 거…내 마음 받아준다는 뜻… 맞아? ”
“ …크흠. ”
“ 똑바로 대답해, 바보야! 사람 기대하게 만들지 말고 제대로 대답하란 말이야! 지금 한 말 나랑 사귀어 준다는 뜻 맞지? 그렇지? ”
“ …저 두 녀석이 놀리지만 않는다면. ”
“ 헉… ”
그렇게 말하며 휴센이 가리킨 손가락의 끝엔 어김없이 헤롤과 마이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뭔가 상당히 억울한 표정을 짓던 그들은, 쉐리가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자 필사적인 태도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애꿎은 남의 연애사에 끼어들어 장렬하게 희생당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내 생각이지만 아마도 그 때만큼 그녀의 인생에 찬란한 햇살이 비치는 순간도 다시없지 않을까 싶다.
“ 이 바보야! ”
“ 우왓- ”
감격한 쉐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도 무시하고 그대로 휴센의 목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처음엔 당황하던 그도 곧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그 동안 이래저래 겪었을 서러움에 들썩이는 어깨를 천천히 토닥여 주는 것이었다. 그 태도가 얼마나 부드럽고 다정스러웠던지, 기가 막힌 시선으로 바라보던 일행들은 모두 허탈한 미소를 흘리기 시작했다.
“ 이게 대체 뭔 일 이라냐… ”
“ 크흑! 나의 쉐리가 결국 저 무뚝뚝한 인간에게! ”
“ 허허허허… ”
때는 클모어를 불과 3일 앞으로 남겨둔 어느 초겨울의 한적한 오후. 헤롤과 이릴을 이은, 샴페인 용병단의 또 다른 공식 커플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클모어 후작령은 이사나의 사촌형인 카웰 드 콘첼 후작이 다스리고 있는 영지로, 흔히 말하는 자유 무역도시-이른바 상인들의 천국이었다. 알폰프와 카터스 제국을 오가는, 항구를 이용한 모든 수출, 수입품목은 반드시 이곳을 거쳐서 거래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두 제국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인 카리프해(?가 바로 이곳 클모어 영지를 끼고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교역로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클모어를 제외한 다른 지역의 항구는 모두 해적의 왕국이 존재하는 알지르만 섬을 경유해야 하기 때문에, 진즉에 그 기능이 폐쇄된 지 오래되었다고 들었다. 오갈 때마다 해적을 만나게 되지는 않는다 해도, 일단 한 번 걸리게 되면 감당할 손해가 만만치 않으니, 굳이 안전한 장소를 놔두고 일부러 이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군대를 보내 토벌을 한다면 할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해적들의 해전병술이 워낙 뛰어난 데다, 전쟁이 발발할시 소모되는 국력 또한 만만치 않았기에, 딱히 어지러운 현 황실의 사정을 고려치 않더라도 제국에서도 어쩔 수 없이 손을 놓는 입장이라고 했다. 또 이제까지 그렇게 강경할 대응을 취할 정도로 해적들이 난동을 부린 적도 없었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클모어는 상인들의 입장이나, 제국의 입장에서나 눈에 불을 켜고 사수해야 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일단 솔트레테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무역 항로였으니, 각 나라에서 내놓으라 하는 큰 상단의 지부가 한 개씩 꼭 들어차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워낙에 오가는 타국인이 많아, 사사건건 영주민과 시비가 벌어질 것을 우려해, 자체적인 치안이 다른 곳에 비해 몇 배나 발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후작이 개인적으로 부리는 사병의 숫자만도 2만에 해당한다니 말이다. 만약 이사나가 황권을 되찾는데 그의 협조를 얻을 수만 있다면, 굳이 지역적인 이점을 따지고 들지 않더라도 대공과 해볼만한 세력을 충분히 끌어 모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클모어에 가까이 도달한 우리들은 바로 그 점 때문에 난감한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성문 앞 치안이 어찌나 철저하던지, 이제까지 거쳐 온 그 어느 검문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비들이 눈에 불을 켜고 사람들을 샅샅이 조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사나를 찾으려는 대공의 기사들까지 합세한 탓이겠지만, 단지 용병패를 제시한다고 해서 쉽게 통과될 거란 기대를 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 헤에. 이거 장난 아닌데? 검문이 엄청 철저하네? ”
“ 하아, 그러게요…. ”
빼곡히 늘어서있는 행렬 한사람 한사람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는 기사들을 보며,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이사나를 돌아보았다. 그 역시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해결할 방도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딱딱하게 어깨를 경직시키고 있는 상태였다.
그저 어떻게 하지…라는 막연한 심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는 사이에도 검문 행렬은 점차 줄어들 것이고, 곧 우리차례가 될 것임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결국 장시간의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바로 이곳에서 샴페인 용병단과 헤어져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나와 이사나, 두 사람만이라면 어떻게든 이목을 속이고 들어갈 수 있다. 정 안되면 성문 앞에 흐르는 수로를 이용해서 숨어 들어가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많은 인원들 사이에서는 눈에 뜨지 않게 갈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헤어지게 되도 성문 안에 들어가면 다시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렇게 되면 이들에게 검문을 피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기게 되므로 차라리 이쯤에서 완벽하게 정리해 두는 게 나았다. 더 이상의 폐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에서라도 가능하면 이릴들과는 다시 마주치지 않게 노력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가 막 이러한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했을 때, 그보다 먼저 말을 꺼낸 이는 바로 단장인 휴센이었다.
“ 이렇게 된 바에야 어쩔 수 없지. 엘, 라이. 너희들과는 여기에서 헤어지는 편이 낫겠다. ”
“ 예? ”
“ 이 무리에 있으면 아무래도 검문을 피하기 힘들 거야. 성벽의 왼편을 따라 돌아가다 보면 숲이 나오는데, 그 숲과 연결된 구석을 잘 살펴보면 안으로 들어가는 작은 통로가 있을 거다. 너희들이라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거야. 상단 측에는 일이 있어서 돌아가게 됐다고 말해둘 테니 지금 가도록 해. ”
“ 예…예에? ”
예상치 못한 제안에 당황한 나와 라이는 서로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 사람들…우리가 검문을 피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건가? 뜬금없는 단장의 말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일행들을 보니, 이미 그들끼리는 이번 상황에 대한 정리가 끝난 모양이었다. 어쩐지 불길한 기분이었달 까?
따스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그들은,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조심스럽게 이사나를 향해 차례대로 허리를 굽혀보였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경악한 것은 그들이 취한 행동이 아니라 이어지는 말에 의해서였다.
“ 예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점을 용서하십시오, 황제폐하. 부디…원하시는 일을 달성하시기를 바랍니다. ”
“ !! ”
“ 헉…어, 어떻게? ”
숨이 턱 막힌 듯 눈을 부릅뜬 이사나를 대신해서 내가 그렇게 되묻고 말았다. 이제까지 전혀 우리를 향해 어떠한 의심의 시선도 보낸 적이 없던 사람들이다. 갑작스런 상황전개에 놀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설마 이들은 처음부터 우리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건가?
무심코 시선이 마주친 트로웰이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내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그러자 이번엔 휴센을 대신하여 그의 옆에 있던 헤롤이 침착한 태도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 실은 이전부터 얼굴을 가리시는 모습을 보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폐하 또래의 외모에, 얼굴을 감추려 하는 것, 굳이 이런 위험한 시기에 클모어로 가시려고 하던 것 등이 그런 생각을 점점 확신으로 이끌어 갔지요. 특별한 능력이 없는 소년과 동행하시기에 설마 했습니다만…그것도 이번에 그가 엘뤼엔의 사제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납득이 되었습니다. ”
“ …그런…. ”
“ 지난날에 저질렀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저희는 잠시나마 폐하의 일정에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배운 것 없는 미천한 용병이라, 예법에 맞지 않는 행동으로 심사를 많이 어지럽혀드렸을 것입니다. 부디 우매한 백성들의 마음을 너그럽게 보아주시길 청하나이다. ”
“ ……. ”
할말을 잃어버린 이사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샴페인 용병단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이 어떠한 흑심을 품고 우리와 동행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오히려 그들의 말을 들어보자면, 이사나가 무사히 이곳까지 도착하게 만들기 위해 협력해 온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녀석은 무한한 감동이 드러나는 얼굴로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현재의 녀석은 정령사인 라이가 아니라, 이 제국의 하나뿐인 황제 이사나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일행들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눈빛엔 이전까지 보이지 않은 굳건한 위엄과 기백이 서려있었다. 그러나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채 완전히 숨기지 못한 탓에 그 눈동자는 아까부터 쉴 새 없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페리스들과 헤어질 때도 이사나는 저런 식으로 울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막상 산에서 돌아섰을 때의 그는 단호하리만치 냉정한 모습으로 단 한번도 그들을 뒤돌아보지 않았었다. 그 순간의 만남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스스로가 황제라는 자각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기사들이 원하고 있던 바이기도 했다.
한참동안 떨리는 눈동자로 동행해온 용병들 하나하나를 돌아보던 이사나는,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듯 잔뜩 가라앉은 쉰 목소리를 천천히 내뱉었다.
“ 미안합니다. 미덕한 본인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마는 군요. ”
“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저희 모두는 당신께서 속히 황권을 되찾으시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이 땅의 백성이 살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 …이런 나약한 황제라도 믿어주는 겁니까? 나의 앞날은 앞으로도 희망적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번의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당신들 또한 무사할 수 없을 겁니다. ”
도와준 은인들에 대한 예우를 지키고자 함인지, 이사나는 끝까지 그들을 향한 존칭을 거두지 않았다. 냉정하게 답하는 말 속에 담긴 걱정을 느꼈는지 이릴들은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 낳아준 어버이를 배덕하는 자식이 어디 있나이까. 폐하께서 백성을 저버리시지 않는 한, 저희 역시 폐하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무사히 원래의 영광을 되찾으십시오. 폐하께서 이루시는 역사에 잠시나마 동참했다는 사실을 평생의 영광으로 여기고 살아가겠습니다. 끝까지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하는 부족한 저희들을 용서하십시오. ”
“ ……그대들 한 사람, 한사람을 이 땅을 지키는 100명의 기사들보다 더 의롭다 칭해도 이 순간 나를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오늘의 일은 나의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
“ 크흑, 폐하… ”
그렇게 이사나와 샴페인들이 이별을 고하는 사이, 나 역시 트로웰과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우리의 모습을 일행 중 누구라도 보았다면, 뻔한 대화가 필요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아름다운 우정이라고 생각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오해를 하든 말든 우리는 꿋꿋하게 정령어를 사용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결국 이렇게 헤어지게 되네, 트로웰. 혹시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거 아니야?
- 아니라고는 말 못하지. 쿡쿡.
- 하아, 너무해. 나 정말 무지 놀랐단 말이야.
- 미안, 미안. 하지만 헤어지게 되서 아쉬운 건 오히려 이쪽이라고. 정말이지, 엘은 처음부터 너무 힘든 유희를 선택한 것 같아.
- 풋. 왜? 물가에 내어놓은 아이 같아서 불안해?
- 응? 물의 정령왕인 네가 물가에 다가가는 게 왜 불안한데?
“ ……. ”
정말 오랜만에 발동된 말 끊기…랄까.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굴리고 있는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저런 식이라도 농담을 건네는 것을 보니, 혜안을 통해 본 이사나의 앞날이 아주 캄캄하지는 않은 모양이지? 결국 먼저 미소를 지은 것은 내 쪽이었다.
- 진지한 표정으로 농담은 하지 마. 헷갈린다고…
- 쿡쿡. 엘이 먼저 내 마음을 떠보려고 했으니까 그렇지. 내가 걱정하는 건 당연한거 아니야? 물가에 내어놓은 아이 같지는 않더라도, 그 비슷한 심정은 가지고 있어. 이전처럼 이상한 인간한테 걸릴까봐 염려도 되고….
- 흐음, 설마 그런 변태귀족이 또 있을려고.
- 그건 모르는 일이야, 엘. 대륙엔 사람이 많아. 그 중에서 엘에게 해꼬지 할 인간이 다시 나타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지. 안 그래?
진지하게 묻는 말에 나는 내가 너무 경솔한 태도로 대답했다는 걸 깨닫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트로웰이 아니면 누가 또 내게 이런 걱정을 다해주겠는가. 당장 두 달이라는 시간동안 동거 동락해왔던 샴페인 용병단들도 전부 내게 이사나를 잘 부탁한다는 말만 전하는데 말이다.
- 알았어, 트로웰. 주의할게.
- 내가 끝까지 함께 가주지 못해서 미안해, 엘. 종종 놈들을 통해 연락 보낼게. 가끔씩은 정령계로 돌아와서 서로의 근황을 알려주는 시간도 갖자.
- 으응. 트로웰은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 글쎄. 보수를 받고 나면 수도에 있는 용병길드 본사에 올라가게 될 것 같아. 승급시험을 받아야 하거든.
아아, 그러고 보니 트로웰은 이번 겨울을 지나면 금패를 받게 된다고 그랬던가? 당장 전투라도 벌어지게 되면 가장 먼저 수도로 진격하게 될 텐데, 그 소란에 휩싸이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정작 당사자인 트로웰이나 샴페인 용병단이나 그 점에서는 크게 염려하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 어차피 용병들의 생활이란게 다 전쟁입니다. 그런 것에 겁을 냈다간 은패를 딸 수도 없었을 걸요? ”
걱정하는 이사나를 보며 유쾌하게 대답하는 헤롤들의 모습에 그나마 적은 위안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
몇 번이나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말을 뒤로하며, 우리는 그렇게 샴페인 용병단과 작별했다. 이미 한차례의 전적이 있어서 그런가? 아쉬운 이별임에도 처음보단 많이 담담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들 일행에 트로웰이 속해 있다는 사실이, 다 괜찮을 거란 믿음을 심어주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 아차, 그러고 보니 카이 씨는 어쩌지? ”
샴페인 용병단과 헤어져 이사나와 함께 휴센이 가르쳐준 비밀통로(일명 개구멍)로 가던 나는, 그때서야 퍼뜩 떠오른 사실에 낭패감을 느끼곤 얼굴을 찡그렸다. 엘뤼엔의 신전까지 안내를 해주기로 약속한, 신관이자 공범인 카이 씨를 그대로 행렬 안에 놔두고 온 것이다. 부득이하게 헤어지게 됐을 경우 다시 만날 장소를 정해둔 것도 아니었기에, 그와의 만남은 오리무중으로 돌입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그렇다고 지금쯤 기사들에게 검문을 받고 있을 행렬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결국 우리들은 카이 씨에 대한 것은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결정지었다.
“ 어쩔 수 없지. 어차피 그도 엘뤼엔의 신전에 볼일이 있다고 했으니, 거기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사정이야 그때 가서 설명해도 늦지 않겠지, 뭐. ”
“ 으음. 운 좋으면 성안에 들어가서 우연히 만나게 될 지도 모르고. ”
카이 씨가 들었으면 서운함에 눈시울을 붉혔을지도 모를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은 우리는 킥킥 웃으며 숲 안 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느 세월에 이렇게 지었는지 감탄이 절로 흘러나올 만큼 기나긴 성벽을 따라 걸어가니, 울창한 숲의 그늘과 나무 넝쿨에 가려져, 작정하고 찾으려 들지 않으면 쉽게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틈새를 발견할 수 있었다. 덩치 큰 어른은 무리더라도, 아직 근육이 연한 시기인 이사나라면 충분히 비집고 들어가 볼만한 크기였다.
잠시 주변을 살펴본 나는 나이아스들을 통해 벽 너머에도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이사나부터 먼저 들어가도록 했다. 나야 원래 형체가 물이니, 마음만 먹으면 벽이고 뭐고 아무렇지 않게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허탈할 정도로 간단하게 성안에 들어온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곧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 뭐야, 이런 식으로 들어올 수 있으면 애초에 검문 같은 게 필요도 없는 거 아니야? 휴센은 용케 이런 장소를 알았네? ”
“ 지난번에 한번 의뢰 때문에 들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마을 아이들이 드나드는 것을 봤다나봐. 카웰 형님을 만나게 되면 보수공사를 건의해달라고 하던걸? ”
“ 흐음, 그렇군. 그럼 이제 가보자, 이사나. 먼저 엘뤼엔의 신전부터 들려야겠지?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신전으로 가는 길을 물어보면 될 거야. ”
그러자 알았다는 뜻으로 얼른 고개를 끄덕이던 이사나가 문득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 그런데…왜 꼭 엘뤼엔의 사제가 돼야 하는 건데? ”
“ …응? 글쎄. 굳이 이유를 대자면야…다른 신들보다야 그한테 신의 문장을 부탁하기가 더 편해서일까? ”
“ 부탁이라니…그럼 엘은 형벌의 신인 엘뤼엔하고 아는 사이란 말이야? ”
“ 어, 어라? 내가 말 안했나? ”
허걱. 그러고 보니 난 그동안 이사나한테 엘뤼엔의 사제가 되겠다고만 말했을 뿐, 굳이 그래야만 하는 정확한 사정을 설명해 준적이 없었던 것 같다. ‘몰랐어’라는 의미가 다분히 포함된 시선을 느끼며 나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 그게…사실은 내가 엘뤼엔하고 개인적인 친분이 있거든. ”
“ 헤에? 정령왕과 신들은 서로 교류도 할 수 있는 거야? ”
“ 우리 쪽에서는 불가능한데, 신들은 할 수 있어. 워낙 바빠서 제대로 만날 수는 없지만 말이야. ”
“ 그, 그럼 마신하고도? 마신하고도 가능해? ”
“ …응? 글쎄…마신하고는 아직 만나본적이 없지만…굳이 못할 건 없지. 그런데 왜? ”
무심코 되묻던 나는 금새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는 아차하며 입을 다물었다. 솔트레테 제국의 선(-)황제, 즉 이사나의 아버지가 처형당하게 되었던 배경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가 10년 재앙의 책임을 뒤집어 쓴 것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마신이 내린 신탁 이 아니었던 가. 나는 바로 후회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보였다.
“ 미안해 이사나. 내가 괜한 말을 한 것 같다. ”
“ 으음, 아니야…사실은 가능하면 마신을 만나서 왜 그런 신탁을 내렸는지 묻고 싶었어. 정말 아버지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는지. 그리고 있다면 그게 무엇인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해선 안 되는 거겠지? 하루빨리 원래 자리를 되찾는 게 더 중요하니까 말이야. ”
그렇게 대답하며 해맑게 웃는 이사나는 이미 확고한 마음의 결심을 굳힌 듯 보였다. 자신을 이곳까지 이끌어 준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또 다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되었던 것이다. 두 달 전 처음 만났을 때보다 부쩍 성숙해진 눈빛을 마주하며 나 역시 덩달아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 그래. 나중에 네 것을 모두 찾고 나면, 그땐 내가 엘뤼엔을 협박해서라도 마신 불러오라고 할게. 그럼 우리 둘이서 실컷 따져보자. 아니, 아예 트로웰과 이프리트, 미네르바까지 합세 시킬까? 아무리 마신이라도 4명의 정령왕이 따지고 들면 꼼짝도 못할걸? ”
“ 킥킥, 응. 그때가 되면 잘 부탁할게. ”
자칫하면 무거워 질수도 있던 분위기가 별 다른 탈 없이 가벼워지자 나와 이사나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신전을 찾기 위해 거리를 나서기 시작했다. 쇠뿔도 단 김에 빼랬다고, 이왕 도착한 김에 하루라도 빨리 엘뤼엔을 만나서 문장을 받고, 후작과 담판을 짓고 싶었던 것이다.
성 안은 자유무역 도시라는 말이 무색치 않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과 수레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가지각색의 복식을 갖춘 사람들이 저마다 실어온 물건을 나르거나 서로 넘길 값을 흥정하는 등, 활기 있는 거리는 마치 시장 통 한가운데를 방불케 할 정도로 번잡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에 비해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무언가에 조심스러워 하는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요 근래 대공의 기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수시로 사람들의 검문을 하는 것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그들은 주로 후드를 눌러쓰고 다니거나, 일행이 많은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단속하고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눈이 내리는 바람에 우리가 거리를 나설 때쯤엔 거의 손을 놓고 있는 상태였다. 머리를 적시지 않으려는 사람들 대부분이 모자를 눌러쓰고 다녔기에 일일이 검문을 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만약 엘뤼엔에게 아크아돈의 계절을 다스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면, 일부러 그가 이런 현상을 유도한 게 아닐까 생각될 만큼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 흐음, 포악한 성자가 쥐고 있는 창에서 드디어 그 첫 번째 얼음가루가 떨어지고 있네. 이제 정말 그의 휴식이 시작되나 보다. ”
…해석하자면 ‘와, 첫눈이다. 이제 정말 겨울인가 봐.’의 뜻이다.
눈이 내리는 게 신기한지 감탄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이사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떨어지는 눈 덩이를 손바닥에 받기 시작했다. 어차피 피부에 닿아봤자 금방 물이 되어 사라지는 대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다른 눈송이를 잡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하는 대로 내버려 두던 나는 곧 지나가는 한 사람을 붙잡고 신전으로 가는 길을 묻기 시작했다. 마침 이곳 주민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에게서 비교적 자세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 저, 죄송합니다만, 엘뤼엔의 신전은 어디에 있어요? ”
“ 음? 아아, 엘뤼엔님의 신전 말이지. 도시 북쪽 숲 외각으로 나가야 할 게다. 가장 춥고, 험난한 지형에 새하얀 신전이 있지. 지금 그런 차림으로 가는 건 어려울 거야. 산을 타야하거든. ”
“ 예? 산이요? 여기서 먼가요? ”
“ 글쎄, 여기서 산까지라면 몰라도, 산에서 신전까지 가는 길은 족히 하루가 더 된다고 알고 있다. 요즘 같은 때에는 옷과 식량을 잘 챙겨가는 편이 좋아. 참배를 드리러 가다가 얼어 죽은 인간도 꽤 되거든. 그래서 엘뤼엔님의 신전은 다른 말로 ‘생(?과 사(?의 갈림길’이라고도 하지. ”
“ ……. ”
으음. 누가 괴팍한 성격 아니랄까봐 모시는 신전도 꼭 그런 곳에…. 아무래도 이사나에게 지금 입은 것보다 더 두꺼운 망토를 사서 입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선 나는 그대로 마주친 장면에 그대로 몸을 굳히고 말았다. 동네 불량배로 보이는 거친 인상의 형님(…)들 4명이, 혼자 있던 이사나를 둘러싼 채 히죽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저들을 용병이 아닌 단순한 불량배로 보는 까닭은 낡은 셔츠위에 덧입은 조끼와 민 바지뿐인 평범한 옷차림에, 아무런 무기를 소지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이 생명인 용병들은 간단한 산책을 나갈 때도 평소 전투 시에 착용하는 보호 장비와 무기를 가지고 다닌다. 언제 어느 때에 무슨 시비에 휘말릴지 모른데다, 의뢰를 요청하는 사람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난 용병이니 용건 있는 사람은 오시오!’라고 몸으로 홍보하고 있는 셈이랄까?
샴페인 용병단 같이 유명한 사람들이야 그런 번거로운 작업 없이도 알아서 의뢰가 쇄도 한다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용병들은 그런 식으로 돈을 벌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거친 성격을 가진 용병이라고 해도 이사나처럼 성인도 아닌 어린애한테 시비를 걸거나 행패를 부리는 인간은 없었다.
전투로 먹고 사는 사람이 어린애하고 싸워서 이겨봤자, 도리어 자존심만 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렇게 쪽수만 믿고 덤벼드는, 무기도 소지 하지 않은 상태의 인상 험악한 인간들은 그저 불량배라고 보는 편이 더 옳았다.
그래서인지 이사나는 갑자기 자신의 주위를 둘러싸고 덩치 큰 남자들이 다가오는 데도 별 달리 긴장하거나 두려운 빛이 없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불량배 중의 한명이 얼굴을 찌푸리며 낮게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 요거 맹랑하네? 도망갈 생각도 안 해? 호오~ 어디 귀한 집 도련님이라도 되는 거냐? 그래서 수하들이 도와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
“ …무슨 일인 진 모르겠지만, 저는 이런 시비를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일행이 기다리고 있으니 비켜주시겠어요? ”
그러자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도 나타날 줄 알았는지 흠칫 하고 놀라며 돌아본 남자들은, 이사나가 바라보는 방향에 내가 멀뚱히 서있는 것을 발견하곤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후드에 가려져 얼굴이 제대로 안 보이긴 해도, 키나 체구만 봐서는 도무지 그의 또래란 느낌을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나는 다시 한번 이들이 용병이 아니거나, 혹은 그렇다 해도 제대로 된 용병이 아님을 확신했다.
원래 실력 있는 사람일수록 상대방의 외모만을 가지고 능력을 판단하지 않는 법이다. 적어도 트로웰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어린애라고 함부로 만만하게 여길 수 없을 테니까.
‘별 귀찮은 놈들이 다 있네.’ 속으로 중얼거린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이사나를 바라보았다.
“ 라이, 무슨 일이야? ”
“ 글쎄, 모르겠어. 갑자기 이 사람들이… ”
“ 어이, 꼬마들. 무섭게 안 할 테니 가지고 있는 거 좀 내놔라. 여긴 통행세가 존재하거든. 니들 이 도시 처음이지? 여기 오면 반드시 우리한테 돈 내게 돼있다. 그래야 가난한 사람도 다 같이 먹고 살 거 아니겠냐? ”
허허허. 겉보기에 깡패, 알고 보니 불우이웃을 도웁시다?…일리는 없고. 정말 너무 상투적인 수법이로군. 속으로 짧게 혀를 찬 나는 괜히 사건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순순히 대답했다.
“ 보시다시피 저희는 나이가 어려서 그렇게 많은 돈을 들고 다니지 않아요. 얼마를 드리면 되는 데요? ”
“ 헤에, 이 녀석, 말이 좀 통하는 녀석이네? ”
“ 낄낄, 안 그럼 우리들이 섭섭하지. ”
기분 나쁘게 클클 거리면서 웃은 남자들은 이사나에게서 시선을 떼곤 내 쪽으로 점차 다가오기 시작했다. 말하는 투나 행동에서 내가 돈을 가지고 있음을 짐작한 것이다. 대부분 이런 류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곤 하는데, 이들도 그런 점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이런 경우엔 기분이 더러워도 그냥 참고 넘어가는 쪽이 속 편하다.
하지만 그렇게 다짐하던 나도 막상 건들거리는 남자 중의 한명이 우악스럽게 어깨를 움켜잡았을 때는 인상을 그대로 구길 수밖에 없었다. 아픈 건 둘째 치고 그들이 말하는 내용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골드만 내 놔라. ”
“ 네에? ”
1골드라니! 대충 알아본 바로 이곳의 500실링은 1실버에 해당하고, 200실버는 1골드에 해당했다. 평민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대충 10실버이니, 그것은 평민노동자 한달 품삯과 거의 맞먹는 금액이다. 아무리 내가 보석을 팔고 받은 금액으로 돈이 썩어 넘칠 만큼 많이 있어도 선뜻 내주기 어려운 액수였던 것이다.
대체 우리의 어딜 보고 그렇게 많은 돈을 요구하는 거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바라보자 남자들은 히죽 웃으며 이사나가 입고 있는 옷을 가리켜 보였다.
“ 낡은 망토로 가리고 있다고 못 알아 볼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저거 꽤 비싼 가죽으로 만든 옷이지? 아마 못 받아도 3골드는 하는 걸걸? ”
“ 헉…저건 부모님이… ”
“ 정 지금 주기 힘들면 부모님께 가서 받아오던지. 아, 물론 저 녀석은 우리와 함께 기다리고 있어야 할 테지만 말이야. ”
“ ……. ”
정말이지 걸려도 된통 걸렸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큰맘 먹고 산 비싼 옷이 이런 상황에서 발목을 잡을 줄이야. 차라리 그냥 몇 대 패고 도망칠까? 속으로 맹렬히 머리를 굴리던 나는 문득 머리 위가 허전해짐을 느끼곤 그대로 경악했다. 이 빌어먹을 깡패들이 멋대로 후드를 벗겨버렸던 것이다.
그나마 이사나가 당한 게 아니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마주친 시선마다 놀라는 것을 보고나니 불쾌한 기분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 이거 왜 이래요? ”
“ 헤에, 너 여자였나? 죽이는 파란색 머리네? ”
“ 남이사 여자든, 남자든! ”
이젠 일일이 여자가 아니라고 대꾸하기도 귀찮아 신경질적으로 말한 것뿐이었는데, 그것을 들은 남자들은 어느새 나를 완전히 여자로 단정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보았던 변태귀족만큼이나 느끼한 시선이 오간다는 생각이 들 찰나, 나로서는 믿고 싶지 않은 말이 남자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1골드를 당장 마련하기가 어렵다면 몸으로 갚는 수도 있지. ”
“ 뭐, 뭐어? ”
“ 간단해. 우리들이랑 딱 3시간만 같이 보내자고. 그럼 네 일행은 무사히 돌려보내 줄 테니까 말이야. ”
‘ 내가 미쳤냐! ’
더 이상 참았다간 무슨 말을 들을지 겁나, 나는 드디어 폭력을 행사하기로 마음먹었다. 트로웰처럼 화려하게는 못하더라도 단번에 기절시켜 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막 물의 기운을 끌어올린 주먹으로 그들을 차올리려는 순간- 갑작스런 등장인물이 그보다 먼저 깡패들을 제압해 버리기 시작했으니…
퍽- 콰악- 퍼어억-
“ 꾸에엑- 어떤 자식이… ”
“ 우왁- ”
“ 꼬르르르륵 ”
그 순간 내 눈에 보이는 거라곤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으로 깡패들을 넘어뜨리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불의 폭풍이었다. 육체를 가진 자의 움직임이라곤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붉으스레한 무언가가 단 일격으로 남자들을 기절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눈만 깜빡이고 있던 나는 한참만에야 붉으스름한 그것이 사람의 머리카락임을 알아보곤 멍하게 입을 벌렸다.
‘ 사…사람? ’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도 온전히 감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제 정신을 차리는 순간, 4명의 건달들을 완전히 땅바닥에 눕혀버린 그가 천천히 내 쪽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어림잡아도 180은 되어 보이는 훤칠한 키에 허리까지 찰랑이는 붉은 색 머리카락.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조각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마지막으로 루비를 박아 넣은 것 같은 붉은 눈동자와 마주치고는 그대로 경악하고 말았다.
그런 나의 심정과는 전혀 반대로, 그는 잘생긴 얼굴을 한껏 찡그리며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고 있었다.
“ 이런 조무래기 들을 상대로 뭘 쩔쩔매고 있는 거야? ”
“ ……라…피스? ”
맙소사. 저 녀석이 대체 어떻게 이곳에 나타난 거지? 당황한 내가 입만 뻐끔뻐끔거리고 있는데도 그는 전혀 개이치 않는 태도로 씨익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리곤 성큼성큼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그대로 불쑥 손을 내미는 것이다. 마치 뭔가 맡겨놓은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 마냥 당당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는 찌푸린 얼굴로 붉은 눈동자를 가늘게 치켜 올렸다. 그러나 화가 났다 기 보다는 어딘지 불안한 듯한, 난감해 하는 표정에 더 가까웠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열심히 눈을 굴리던 라피스는 잠시 후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약속대로 찾아냈으니까 계약 해줘.”
“…!”
그렇지 않아도 4명의 깡패를 때려눕힌 직후라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주목된 상태였다. 그런 자리에서 다짜고짜 계약을 해달라고 하면 날더러 어쩌란 소리인가! 벌써 약속한 한달이 지난건가 라는 의문도 잠시, 나는 얼른 그의 팔을 잡고 그대로 이사나와 함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처음 그는 내가 무작정 이끄는 것에 놀라는 듯 했지만 별 다른 반항 없이 순순히 따라와 주고 있었다.
미로보다 복잡한 골목길을 한참이나 돌아, 누구도 이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고 나서야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숨소리 하나 벅차지 않은 라피스를 돌아보았다.
“이봐, 당신!”
“라피스.”
“아, 그래! 라피스! 그런 장소에서 다짜고짜 계약해달라는 말을 하는 게 어디 있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봤잖아!”
“남들 시선이 무슨 상관이야? 나는 약속을 지키라고 말 한 것뿐이다.”
으이구, 그래 너 잘났다. 정말 이렇게 대꾸해 주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랄까? 잠시 지끈거리는 머리를 달래려 이마에 손을 짚고 있던 나는 애써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름대로 침착 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건만 분한감정을 완전히 숨길 수 없었는지,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떨리고 있었다.
“정말 빌어먹게도 딱 한달 만 이잖아. 대체 어떻게 찾은 거야?”
“흐음? 그게 궁금한가?”
“당연한거 아니야? 정령한테 추적마법인지 뭔지가 통하지도 않을 테고, 내가 어디에 간다고 말해주지도 않았는데 이 넓은 땅덩어리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어? 설마 드래곤들은 천리안이라도 있는 거야?”
그러자 옆에서 나와 라피스를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던 이사나가 흠칫 놀라며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전에 내가 말해 준 바 있던, 일행으로 새로 합류할 드래곤이 바로 그임을 눈치 챈 것이다. 충격이 꽤나 컸는지 녀석은 차마 소리만 내지 못하고 있을 뿐, 당장 이 자리에서 쓰러져도 하나 이상할 게 없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그것을 힐끔 바라 본 라피스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천리안 같은 건 없어. 한 가지 말해줄까? 난 한달 전부터 이곳에 와있었다.”
“엥?”
“우연히 와 있던 건 아니야. 정확히 너를 기다리고 있었지. 너무 늦어서 찾아 나설까 생각하던 참이었다고.”
“어, 어떻게?”
나의 놀란 표정을 감상하듯 여유롭게 눈을 굴린 녀석은 이번엔 정확히 이사나를 가리켜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얼굴이 창백해져 있던 녀석이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사나 란느 솔트, 이 제국의 황제전하가 맞으신가?”
“…!!헉, 그건 또 어떻게 안거야?”
“간단한거 아닐까? 난 이미 네가 3일에 한번씩 비를 내린 주범이라는 걸 눈치 챘는데 말이야.”
“…!…”
그제 서야 나는 그가 어떻게 나를 찾아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대륙 전체에 솔트레테의 ‘3일의 기적’이 알려진 마당에, 그 배후인물을 찾기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기적을 일으킨 장본인이 나라는 걸 알고 있는 라피스 로서는, ‘3일의 기적’을 서원한 이사나가 엘퀴네스의 계약자라는 걸 눈치 채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만 알면 행보가 뻔한 게 아니겠는가. 섭정왕인 대공조차도 이사나가 사촌인 카웰 후작을 찾을 것을 염려해 미리 클모어에 기사들을 풀어둔 마당에, 드래곤인 라피스라고 그것을 짐작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뭐야, 그게…’
아무래도 손해 본 듯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어, 내 얼굴은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그 모습을 유쾌하게 바라본 라피스는 아까 전처럼 다시 한번 내 눈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자, 이젠 계약해 줘. 그리고 일행에도 포함시켜 주는 거다.”
“하아…이건 사기야.”
“흐음? 난 일부러 다 알고서도 잠시 나를 떼어놓으려고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그게 아니었나 보지? 하지만 그런 건 조금만 생각해보면 다 알 수 있는 거잖아?”
“으윽, 그래 나 바보다. 쳇, 약속은 약속이니 어쩔 수 없지. 계약해! 한다고!”
그렇지 않아도 비참해 죽겠는데 아주 염장을 지르는 거냐? 하여간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놈이라니까?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막상 계약해준다니까 얼굴이 환해지는 걸 보니 투덜거리고 싶은 기분이 조금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지난 시간 동안 질릴 정도로 잘생긴 얼굴들만 봐왔어도, 아주 면역이 된 건 아닌 것 같다고 속으로 중얼거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계약을 맺기 위한 의식의 언어를 중얼거렸다.
“너는 나와 계약을 이행함으로 나를 이 세계에 끌어낼 힘을 제공하며, 나는 그 대가로 너의 보필자가 될 것이다. 계약…은 당연히 할 테니 따로 의사를 물어볼 필요는 없겠지?”
퉁명스럽게 묻는 말에도 그는 마냥 기분 좋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을 뿐이었다. 차라리 이전처럼 거만이라도 떨면 얄밉기라도 할 텐데,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그를 보니 오히려 화내는 것이 더 바보 같아 졌다.
순식간에 끌어올린 물의 기운을 손가락위에 집중시키자 얇은 푸른 막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라피스의 이마위에 닿자마자 선명한 푸른색의 문장을 새기며 산산이 부수어져 갔다. 이사나의 이마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모양의 물의 인장인 것이다.
약간 차갑기만 할뿐, 별다른 느낌도 없을 텐데 라피스는 기운을 음미하듯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감격에 젖어 떨리는 눈동자를 감추기 위한 것 같아 나는 피식 미소 지었다.
“소감이 어때? 드디어 물의 정령왕과 계약했는데 말이야.”
“…느낌이 이상해.”
여전히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어딘지 가라앉은 목소리가 현재의 기분이 어떤지 짐작하기 힘든 상태였다. 설마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아서 실망한건가? 그러나 잠시 후, 간신히 들어올린 눈꺼플 안에는 확연한 기쁨을 드러낸 붉은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차가운 감촉이 기분 좋아. 마치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이제야 겨우 제 자리를 찾은 기분이야.”
“헤에, 당신은 레드 드래곤인 거 아니었어? 레드 드래곤은 불의 성질을 따른다고 알고 있는데…내가 틀린 건가? 하긴, 3천년이나 바라던 것이 이루어진 셈이니 그 감격이야 오죽 하겠냐 만은…”
“글쎄…감격일까. 그런 것보다는 드디어 네가 내 것이 되었다는 것에 실감이 든다는 것이 맞겠군.”
“헉.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데?”
아무래도 이 녀석은 나를 물건 취급하는 것을 끝끝내 고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것도 모자라 그대로 이사나에게 시선을 돌리며 엄하게 한마디 내뱉는 것이 아닌가.
“이봐, 인간. 네가 엘퀴네스와 먼저 계약했다고 해서 나보다 더 그에 대한 소유권이 많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제부터 나한테 동료취급이라도 받고 싶다면 알아서 나서지 않는 게 좋아.”
“하…하하….”
갑자기 드래곤에게 라이벌선언(?)을 당한 이사나의 심정이 오죽 황당했겠는가. 차마 대답도 못하고 어설픈 미소를 짓는 녀석을 보다 못한 나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계약했다고 해서 무조건 나를 소유하는 권한이 생기는 건줄 알아? 그리고 당신!”
“라피스.”
“그래, 라피스! 저번에 분명히 표현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치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뭐야? 한달이 지나도록 전혀 변한 게 없잖아! 그리고 이번 여행은 이사나를 위한 거라고! 멋대로 네 마음대로 굴면 곤란해.”
“일정에 참견할 생각은 없어. 그저 저 인간이 먼저 계약했답시고 까불까봐 미리 경고하는 것뿐이야.”
“하아, 당신이란 드래곤은 정말이지…”
저 녀석 눈에는 겁에 찔려 떨고 있는 이사나가 보이지도 않는 건가? 드래곤이란 사실하나로 저렇듯 경계하는 녀석이 그에게 까불 리가 없지 않은가! 복장이 다 터질 지경이었지만 나는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라피스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온다고 느껴진다 싶더니, 무언가 부드럽고 말캉한 느낌이 입술 위를 맴돌았던 것이다.
“…!!!”
그 예상치 못한 상황전개에 나는 물론이고 옆에 있던 이사나의 눈까지 크게 부릅떠지고 말았다.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느라, 나는 어느새 형체를 유지하던 마나의 기운이 평소보다 몇 배나 강해진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 저…저 썩을 놈의 드래곤이 내게…내게!!
“이게 무슨 짓이야!!”
“음? 인간세상에서 쓸 수 있는 마나를 좀더 강화시켜 준 것 뿐인데? 뭐가 문제인가?”
“뭐가 문제냐고? 너…너 지금 나한테!”
“아아. 마우스 투 마우스(mouth to mouth)의 방식이 문제였던 건가? 그게 어때서? 마나를 주는 방식이야 내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는 거잖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오!”
넌 어떨지 몰라도 난 첫 키스였단 말이다! 지금 그걸 빼앗아가 버리고 뭐가 어떻냐는 표정이 나와? 경악하는 내 모습을 보고서도 그는 끝까지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남자와 남자사이에 일어난 일이라고 가볍게 넘어가는 문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키스에 대한 개념이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놀라는 내가 더 이상하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으니 말 다했지 않은가.
“지금 그건 인간들을 흉내 내는 것?”
“하아?”
“뭐랄까. 반응이 묘하게 첫 키스를 빼앗긴 인간들이 충격 받는 모습과 비슷해서 말이야. 그런 건 따라할 필요 없어. 여긴 네 정체를 아는 존재들뿐인데 굳이 연기하고 있을 필요는 없을 텐데?”
“…….”
대화가 안 통하는 상대가 있다는 게 이렇듯 비참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첫 키스를 어이없게 잃어놓고도 도리어 이상한 놈 취급받으니 기가 막혀 한이 뼛속까지 사무치는 기분이었다. 만약 이 장면을 트로웰이 봤다면, 그도 화내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을까? 아니…그는 내 전생을 알고 있으니 어느 정도는 이해해 줄지도.
‘크흑, 17년간 고이 모셔두었던 나의 로망이…’
이래봬도 훗날에 사귈 여자친구를 위해 아끼고 또 아껴두었던 영역이었는데. 비록 가벼운 뽀뽀에 불과하다 해도 처음인건 처음인 것. 더구나 원체 스킨쉽이란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는 벼락을 맞은 것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참을 수 없었던 내가 취한 행동이란…
“라피스.”
“뭐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나한테 딱 한대만 맞아라.”
…였던 것이다. 그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라피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안 그럼 내가 미쳐버릴 것 같거든? 정령 하나 살리는 셈치고 그냥 맞아줘.”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마음대로.”
이유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면서도 그는 여유 만만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때리는 주먹은 아프지도 않을 거라는 건가? 빌어먹을 자식, 넌 지금 그렇게 허락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거다!
그리하여 나는 그 언젠가 트로웰이 그랬던 것처럼 강한 펀치로 라피스의 얼굴을 날려 버렸던 것이다. 퍼억! 경쾌한 타작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그때와는 달리 라피스는 전혀 미동도 없는 상태에서 그냥 살짝 미간을 찡그려보였을 뿐이었다. 너무 열 받아서 다짜고짜 날리느라, 주먹에 제대로 물의 힘을 싣지 않은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던 것이다.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맞은 부위를 만지작거리며 한마디 중얼거렸다.
“아프군.”
“…말이라도 고맙다. 그 말 들으니까 그나마 살 것 같아.”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걸로 대충 매듭지은 걸로 해두지. 더 이상 불만은 없겠지?”
“…….”
한대 더 때려도 되냐고 물어볼까? 견딜 수 없는 유혹이 스멀스멀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
“어허, 그러니까 나는 이번 일에 상관하고 싶지 않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가.”
책으로 빼곡히 가득 찬 서재 안, 은밀한 한 구석에서 정색을 가득담은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깔려진 붉은 융단과 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테이블이, 자연스럽게 이곳이 어느 귀족가의 사택 안임을 연상시켰다. 벽면 한쪽에 장식된 방패에는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 새겨져 자랑스럽게 걸려있는 상태였다.
포효하는 사자를 꿰뚫는 날카로운 창대의 모습-그것이 현 솔트레테 제국 실세중의 한사람이라 이름 높은 ‘플레어 드 바이스’공작가의 문장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이 제국내의 귀족들 내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더불어 그가 현 황제와 섭정왕 유카르테의 사이에서 일찌감치 중립선언을 한 귀족이란 사실도 말이다.
불쾌한 듯 미간을 모으는 공작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두 명의 남자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찌 이 제국의 사활이 걸린 일에 상관이 없다 하십니까? 공작께서 돌아서시기만 하면 상황이 크게 반전될 것입니다.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크흠, 정말 말이 안 통하는 자들이군. 내 그대들이 무단으로 저택 내에 침입한 것에 대해서 관대하게 넘어가 주려 했는데, 도무지 안됐겠네. 당장 기사들을 부르기 전에 어서 나가게.”
“…바이스 공작가는 황제폐하에게서 돌아서실 작정이십니까?”
“무슨 소릴! 나는 그저 누구의 편도 들고 싶지 않을 뿐이라고 몇 번이나…”
당황한 공작이 변명하듯 말을 이었지만 앞에 앉은 이의 차가운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지지 않고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섭정왕의 횡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제국의 하나뿐인 황제폐하를 반역죄로 몰아 신전의 쫓김을 당하게 하고, 거액의 현상금을 매긴 것을 보시고서도 중립을 지키신다함은, 이미 대공에게로 돌아섰음이 아니고 무엇인지?”
“페리스 드 해머! 겨우 하급정령사인 그대가 지금 나를 능멸하는 겐가!”
“공작께서 끝까지 이 상태를 고수 하겠다 하시면 능멸이 아니라 더 한 것도 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이 저택 안에 소리 소문 없이 침투한 목적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
소름끼치도록 냉정한 목소리에 공작은 목에 칼이 들어와 있는 것도 아닌데 날카로운 아픔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페리스의 옆에 있던 기사가 내뿜는 살기 때문이라고는 굳이 생각해보지 않고도 알 수 있으리라. 설마 회유가 안 되면 죽일 작정이었던 건가? 속으로 침을 꿀꺽 삼킨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게 있네. 황제폐하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곁에 두신 세력이라고는 자네들 밖에 없는 분이지 않은가? 그나마 대공의 편을 들지 않고 이렇듯 중립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나는 충분히 그분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네.”
“그저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신 것뿐이겠지요. 당장이라도 대공의 편으로 돌아서고 싶으신 것을 참고 계신 것 아닙니까? 만에 하나 황제폐하가 일으킬 ‘기적’을 대비해서 말입니다. 혹시나 운이 좋아 폐하께서 사촌이신 카웰 후작의 힘을 손에 넣게 되면 대공을 대적할 힘을 일으킬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승산을 판가름 할 수 없을 테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크흠, 무, 무슨 소리를….”
붉어진 얼굴로 연신 헛기침을 해대는 공작이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페리스와 알렉의 시선은 변함없이 차가웠다. 삐닥하게 고개를 휘저은 페리스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회유하려 하는 건 다른 중립을 지키는 귀족들을 회유하기에 편하게 만들기 위해서지, 공작님이 정말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만약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현재는 목숨을 부지하셔도 다음이 위태로울 것입니다.”
“…그런 협박에 내가 넘어가리라 생각하는 건가? 애초에 하급정령사인 자네가…”
그러나 공작은 그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피식 웃은 페리스가 한 손을 내밀자 그 위를 타고 거대한 물의 늑대가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책에서나 보던 물의 상급 정령-시큐엘의 모습이라는 것은 누구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헉-사, 상급 정령?? 어떻게!!”
경악하는 공작의 모습을 보며 페리스는 후드 속에 가려진 입가에 살짝 미소를 그려보였다. 그의 눈동자는 처음 공작을 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차가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공작께서도 3일의 기적에 대한 소문은 들어보셨을 테지요.”
“헉! 그, 그럼 설마…그것이 정말 사실이었단 말인가? 그 기적을 일으킨 존재가 황제폐하가 맞단 말인가?”
이미 대륙전체에 파다히 퍼져있는 소문을 그라고 못 들었을 리는 없었다. 단순한 우연을 가지고 퍼진 헛소문이라고 치부하고 말았는데 그것이 설마 사실이었단 말인가. 믿을 수 없다는 빛을 띄고 있는 공작의 눈을 보며 페리스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것역시 그 기적의 일부이지요. 아아,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공작께서 아무리 아니라고 하셔도 황제폐하는 이미 두 번의 기적을 이루셨으니 까요. 아마도 지금쯤이면 클모어에 당도하셨을 겁니다. 카웰 후작이라면 절대로 폐하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을 터. 앞으로 더욱 강건해지실 폐하를 상대로 섭정왕은 과연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헉…”
확연한 존재감을 드리우고 있는 시큐엘의 모습은 보는 그 자체로 위압감이 어마어마했다. 그런 엄청난 존재를 아무렇지 않게 불러낸 페리스의 모습도, 이 순간엔 감히 쳐다보기도 힘들만큼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손끝을 느끼며 공작은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내, 내가 무엇을 하면 좋겠는가?”
때는 이사나와 페리스 일행이 헤어지고 난지 정확히 두 달하고도 15일이 지난 어느 날. 솔트레테의 수도 헤리카에서는, 중립을 선언한 귀족들이 섭정왕의 눈길을 피해 차례대로 그들의 어린 황제를 향해 돌아서고 있었다.
- 부자상봉 -
조금씩 내리던 눈은 라피스와 만나고 난 이후로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한치 앞도 안 보일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첫눈치고 보기 드문 폭설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당장 신전을 찾아 산을 오르려 했던 내 계획도 어쩔 수 없이 눈이 그친 뒤로 변경될 수밖에 없었다. 나와 라피스는 그렇다 쳐도, 순수한 인간의 몸인 이사나로서는 저 거센 눈발을 뚫고 산을 오를 체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슬슬 날도 저물고 있으니 오히려 잘 된 셈이었다.
“엘뤼엔의 신전이라니…생긴지 얼마 안 된 초보 신의 문장 따위를 받아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정령왕이 청하면 마신이라도 나와 줄 거다. 차라리 그의 문장을 받는 게 낫지 않아?”
아직 전 엘퀴네스가 엘뤼엔으로 환생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라피스는 단순히 산에 가기 귀찮다는 이유로 그렇게 되물었다. 생긴지 얼마 안 된 초보신이라니…엘뤼엔이 들었으면 당장이라도 벼락을 내릴 소리다. 그 초보신이 현재 마계에서 마신보다 더 두려움을 받는 존재라는 걸 알면 어떤 얼굴이 될까?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개인적인 친분을 일부러 썩힐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엘뤼엔도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으니 어차피 가 봐야해. 그나저나…눈을 피할 곳이 필요한데.”
“흐음, 식당에라도 들어가면 되잖아? 마침 식사 때니까 상관없을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만…여긴 다른 곳보다 몇 배로 이사나의 포스터가 붙어있어서 말이야. 얼굴이 눈에 뜨일까봐 사람들 많은 장소는 못가겠어.”
그러자 라피스는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사나를 돌아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이사나가 움찔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처음보단 익숙해졌답시고 크게 어려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그는 잠시 고민하듯 흐음…하고 짧은 신음을 삼키더니, 곧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건네어 나와 이사나를 사이좋게 당황하게 만들었다.
“어떤 타입이 좋아? 미소년? 미청년? 아니면 미 중년? 붉은 머리? 파란머리? 뭣하면 은발도 상관없는데.”
“그, 그게 뭔 소린데?”
“얼굴이 다르면 알아볼 수 없잖아? 그러니까 지금 마법으로 바꿔주겠다는 거다. 최대한 취향을 고려해 주겠다는 거니까 빨리 대답해.”
“헤에…”
알고 보니 그 폴리모프 마법이란 걸 걸어주겠다는 소리였던 것이다. 역시 드래곤이란 편한 존재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고민할 필요 없이 계약해 줄걸 그랬나? 나름대로 기특한 행동을 하는 라피스를 나는 매우 감탄스러운 눈으로 바라봐 주었다.
“그런데 왜 예를 드는 것마다 미소년, 미청년뿐인데? 눈에 안 뜨이려면 평범한 얼굴이 낫지 않아?”
“기각. 이 위대하신 몸은 다른 건 다 참아도 아름답지 않은 건 못 봐준다.”
“…….”
그래서 네 얼굴이 그렇게 지나치게 잘 생겼던 거냐? 차마 대답을 듣기가 두려운 질문을 삼키며 나는 고심하는 표정으로 이사나를 돌아보았다. 지나치게 예쁘장한 얼굴은 오히려 평범한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 현재의 내 결론이다. 특히나 평범 이하였던 과거가 있는 인간 일 수록 그 괴리감이 말도 못하게 커지는 것이다. 바로 현재의 내 처지처럼.
그렇다고 이사나의 얼굴이 나쁘다는 건 아니었지만(아니 오히려 잘생긴 축에 속하지만)역시 무리를 해서라도 라피스의 의견을 뒤집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색머리에 푸른 눈동자. 지금보다 약간 터프해 보이는 게 어떨까?”
“갈색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색이야. 똥파리 골드 놈들이 생각나거든. 지네들 딴에는 황금색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말이야. 그게 어디 금색인가? 똥색이지. 후훗.”
“…그럼 검은 머리는?”
“칙칙해보여서 싫어.”
“일일이 당신 취향에만 맞출 수는 없어.”
“마법을 실행하는 건 나야.”
“…….”
결국 한참의 실랑이 끝에 깨끗이 포기를 선언한 나는 이사나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해 버렸다. 어차피 마법이 걸리는 건 녀석이니까 알아서 마음에 드는 외모로 선택하라고 떠넘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참의 고민 후에 이사나가 선택한 얼굴은 희멀걸한 피부에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은발의 미소년이었다.
솔직히 말해 십분 라피스의 취향이 반영된 것이다. 이사나는 되도록이면 눈에 안 띄는 방향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도, 그가 뻔뻔스럽게 밀어붙였던 것이다. 항의 하는 눈빛 따위는 일찌감치 무시되었다.
“자, 그럼 실행해볼까? <폴리모프>”
눈부신 빛이 터지고 나자, 어느새 눈앞에는 새하얀 은발을 허리까지 늘어트린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소년이 서있었다. 얼굴의 반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커다란 황금색 눈동자에 희멀건 피부는, 내리는 눈과 어울려져 지독할 정도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동화책에나 등장하는 눈의 요정의 모습이랄까?
나이는 16살로 설정했다더니, 막상 바뀐 모습은 이전보다 더 어려 보였다. 그럼에도 여자애로 착각이 되지 않는다는 게 더 용할 정도다. 바뀐 녀석의 모습을 보며 흡족해 하는 리피스에게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건 너무 눈에 띄잖아. 내 충고는 귓등으로 흘려들었어?”
“어차피 나와 네 모습만으로 충분히 눈에 뜨여. 이 정도는 가볍지 뭘 그래?”
“이왕 눈에 뜨이는 거 아주 작심을 하고 시선을 끌어보자 이거냐? 이래서야 그냥 후드를 눌러쓰고 있는 게 더 낫잖아!”
내리는 눈에 묻혀서 머리카락인지 눈인지 구분할 수도 없을 정도의 은발이 어디 흔하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따지고 들어봤자 라피스는 죽어도 다른 모습으로 폴리모프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고집스럽게 고개를 젓는 그를 보며 체념의 한숨을 내쉰 나는, 신기한 표정으로 바뀐 자신의 모습을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던 이사나를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다, 이사나. 특별한 일이 없으면 되도록 후드를 쓰고 다니는 방향으로 하자.”
“으응. 그런데…이런 은발이 실제로 존재하는 색일까? 신기해.”
“글쎄…그리 흔한 색은 아니지 않을까?”
그러자 라피스는 생색내는 듯한 거만한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내 속이 뒤집어 지든 말든 그로서는 자신이 원한바대로 이루어져서 매우 만족스럽다는 모습이었다.
“실버 드래곤들이 인간으로 폴리모프하게 되면 바로 그런 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게 되지. 너무 눈에 뜨인다고 다른 색으로 일부러 바꾸고 다니지만.”
“것 봐! 역시 눈에 띄잖아!”
같은 종족인 드래곤조차도 일부러 바꾸는 색을 선택하다니! 네가 그러고도 이번 일정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자신하던 드래곤이 맞단 말이냐! 기가 막힌 표정으로 노려보며 소리치는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너무도 당당했다.
“괜찮아. 아무리 그래도 너보다는 덜 하니까.”
“…….”
내가 무슨 말로 저 녀석을 당하겠는가?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이상 말싸움으로 기를 소진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이미 발목까지 쌓인 눈길을 헤치며 적당히 들어갈 만한 식당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고급 음식점으로 들어가자는 가당찮은 드래곤의 요구는 깨끗이 무시해준 직후였다.
다행히도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적당한 크기의 음식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워낙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거리마다 여행객을 위한 여관과 식당들이 즐비했던 것이다. 남들 눈에 흔히 뜨이지 않으면서도, 라피스의 취향에 맞게 상당히 깔끔한 내부의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한창 서빙을 돌고 있던 여자애가 달려와 인사를 건넸다.
“앗, 어서오세…!! 어, 어서오세요!”
당차게 소리치던 소녀는 라피스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치고는 얼굴을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면 소녀만이 아니었다. 손님으로 온 사람들 중 우리 쪽으로 시선을 주던 여자들 대부분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튀는 외모가 양 사이드로 음침하게 후드를 덮은 우리를 끼고 있으니 더욱 빛이 나는 건 당연한 거겠지만, 막상 여자들이(심지어 남자들 까지도)소란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니 새삼 라피스의 외모가 얼마나 잘났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뭐, 그래봤자 본체는 도마뱀의 확장판밖에 더 되겠느냐 만은….
“이, 이쪽으로 오세요. 손님은 세 분이신가요?”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면서도 투철한 직업정신(?)으로 우리를 자리까지 안내해준 종업원 소녀는 쭈욱 라피스에게만 시선을 건네고 있었다. 일행 중 가장 키가 큰 것을 보고 은연중에 그를 우리들의 리더라고 생각한 모양이다.(단순히 얼굴이 잘나서 바라보는 건지도 모르지만) 머리와 어깨에 쌓여 있던 눈이 녹아 물이 되어 뚝뚝 떨어지자 소녀는 얼른 주방에서 마른 수건을 가져와 건네주었다.
“저어…이걸로 닦으세요.”
“음, 고마워요. 이 가게는 손님에게 서비스가 좋군요.”
놀랍게도 그는 생긋 미소까지 지으며 소녀가 건네주는 수건을 건네받았다. 그러면서 여유 있게 가게를 둘러보더니 우리를 향해 친절하게 물어오기 까지 하는 것이다.
“식사는 어떻게 할까? 따로 먹고 싶은 것 있어?”
“…….”
“…….”
가게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툴툴거리던 녀석이 갑자기 나긋나긋한 모습을 보이자 나는 물론이고 이사나까지 소리 없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설마 저 녀석…여자들 앞에서는 내숭떠는 타입이었단 말인가? 황당하게 쳐다보던 우리가 간신히 제 정신을 차린 건 그가 다시 재촉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뭐 먹을 거냐니까 왜 이리 말들이 없어? 어디 안 좋아?”
“…아니, 아무것도. 난 입맛이 없어. 그냥 물 한잔. 라이 너는?”
“으음, 나는 그냥 아무거나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걸로.”
그러자 라피스는 이번에도 나긋한 태도로 베이컨과 훈제로 처리한 양고기, 비프스튜를 차례대로 주문했다. 상냥하게 미소 짓고 있던 얼굴은 소녀가 주방장에게 달려가고 나자 다시 싸늘한 무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눈살을 찌푸린 모습이 무언가 상당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다. 그 불만의 화살촉은 정확히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물 한잔이라니. 그럴 거면 식당에는 왜 들어와?”
“어쩔 수 없잖아. 음식을 먹으면 오히려 넘어올 것 같단 말이야.”
“응? 설마 액체종류밖에 못 먹는 거야?”
의아하게 물어오는 것에 나는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물 외에는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는다. 억지로 먹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삼킬 때마다 몸이 오염되는 것 같은 미식거리는 느낌을 받는다면 누가 음식을 먹고 싶겠는가.
정체를 숨겨야 했던 시절이라면 모를까, 이미 내가 정령왕인 걸 알고 있는 일행과 어울리면서도 억지로 식사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새로운 정보를 입수했다는 듯이 흥미롭게 고개를 끄덕이는 라피스를 향해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너야말로 아까 그 태도의 변화는 뭐야? 아주 딴 사람 같잖아.”
“어쩔 수 없어. 얼굴이 이렇다 보니 평소처럼 대하면 귀족으로 오해받거든. 너희들은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 눈에 띄이고 싶지 않아하는 것 같으니, 조금 친절하게 대해준 것뿐이다.”
“그게 더 튄 것 같은데. 특히 저 소녀한텐.”
열심히 서빙을 도는 와중에도 힐끔 힐끔 이쪽을 쳐다보는 종업원을 가리키자 라피스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나름대로 배려한다고 한 행동에 내가 꼬투리를 잡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큰둥하게 소녀를 한번 돌아본 그는 이번엔 나와 이사나를 느릿하게 바라보면서 한마디 내뱉었다.
“내가 보기엔 너희 둘이 더 튀어. 물이 뚝뚝 떨어지는 후드를 언제까지 쓰고 있을 생각이냐?”
“…….”
흐음, 할 말 없다. 식당 안에까지 들어와서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으면 당연히 시선이 쏠리겠지.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머뭇거리며 주변을 돌아본 이사나는 잠시 후 천천히 쓰고 있던 로브의 후드를 벗어 내렸다. 그로서는 꽤나 오랫동안 얼굴을 감추고 다녔으니, 마법으로 바뀐 지금에 와서까지 마음대로 드러내 놓고 다닐 기회를 놓치기 싫었을 것이다.
사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눈보다 더 하얀 은발이 드러나자 여기저기서 탄성의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라피스가 등장한 이후부터 우리 쪽을 주시하고 있던 주변 손님들이, 청아할 정도로 아름다운 이사나의 외모에 감탄했던 것이다.
“헉…”
“흐읍”
“호오…”
솔직히 폴리모프한 이사나의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넋을 잃고 바라볼 만큼 묘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파란색 머리나 붉은 색 머리도 한국에 있을 때 보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지만, 역시 은발 쪽이 더욱 신기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가발로도 구경하기 힘든 색깔이라서 그런가? 사람들이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고 느껴졌다.
처음 녀석은 후드를 벗자마자 사람들이 놀라는 것에 움찔하는 듯 했지만 금새 평온한 표정이 되어 여유 있게 식사가 나오길 기다렸다. 그 모습이 마치 이런 종류의 시선에 오래도록 익숙하다는 듯한 모습이라, 또 다시 사람들의 감탄을 사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걸 무대체질이라고 하지 아마? 한국에 있었으면 틀림없이 연예인이 됐을 거다.
“뭐해? 넌 안 벗어?”
“하아, 알았으니까 재촉하지 마.”
그러나 당당하게 대답하는 것과 다르게 나는 속으로 무지 망설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성체로 오해받은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보니 불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거 혹시 멋진 남자를 둘이나 끌고 다니는 복 많은 여인네로 찍히는 거 아니야? 그렇지 않아도 식당 안에 여자의 존재가 더 많다보니 고민하는 행동이 굼떠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답답하단 듯이 바라본 라피스가 성질 낼 때가 되서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한 듯이 후드를 벗었다. 아까보다 조용해진 가게 안이라든지, 여자들의 흉흉한 시선 따위는 저 멀리 외면하려고 노력하면서 말이다.
“으이씨. 난 어차피 젖어도 상관없단 말이야. 물에 닿는 느낌도 없는데 꼭 벗을 필요 없잖아?”
“그거야 네 사정이고. 보는 사람은 답답해 보인다고. 실내에까지 들어와서 얼굴을 감추고 있는 건 수상하다는 인상밖에 안돼. 그러고 있으니 한결 낫군.”
“이봐, 당신…”
그 때 마침 주문한 식사가 나오는 바람에 나는 더 이상 따지고 들 수 없었다. 차분히 테이블 위에 음식을 내려놓는, 종업원 소녀의 무시무시할 정도의 따끔한 시선을 느끼면서 나는 정령왕으로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목이 타는 듯한 느낌을 받고 말았다. 그래서 우연히 시선이 마주쳤을 때 어쩔 수 없이 헤실거리며 웃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로서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가볍게 해보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달 까?
그러나 웃는 내 얼굴과 마주친 소녀는 그대로 휙-고개를 돌려버렸고, 라피스의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만 되돌아 왔을 뿐이었다. 제기랄. 내가 왜 여자한테 라이벌 의식을 심어줘야 하는데? 착잡한 심정으로 물을 들이키려는 순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라피스가 내뱉는 말에 나는 그대로 사레에 걸리고 말았다.
“여성 체 주제에 여자 꼬시지 마.”
“쿠, 쿨럭- 쿨럭, 쿨럭! 무, 무슨 소리야!”
“넌 내거니까 나만 바라봐. 다른 쪽에 시선 돌리는 건 용서 못해. 또 한번 더 그딴 식으로 웃으면서 사람들 쳐다보면, 식당이고 뭐고 다 엎어버릴 테다.”
“헉…”
말도 안돼는 ‘여성 체’의 오해는 그렇다 쳐도…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협박까지 하는 거냐?
아무래도 이 상태로 내버려 두었다간 점점 증상이 심각해 질 것 같아, 나는 이쯤에서 재지를 가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녀석이 가장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부터.
“난 남성체야.”
“…뭐?”
“너야말로 한번만 더 날 여자취급하면 계약이고 뭐고 다 파토 내 버리고 잠적해 버릴 테다.”
“…….”
꽤나 충격적이었는지 라피스는 내 협박(?)을 듣고 난 이후로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것도 잠시. 그는 다시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돌아와 씨익 미소 지었다.
“남성체라도 상관없어. 어차피 정령은 무성이잖아?”
“…….”
하긴, 저 녀석은 엘뤼엔의 그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고도 반했던 녀석이다. 단순히 엘퀴네스가 풍기는 특유의 기운이 마음에 든 거라고 했으니, 외모가 어떻든 상관없는 건가? 어쩐지 단단히 잘못 걸린 것 같은 기분에 내 얼굴은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그렇다면 이왕 상관없는 거, 확실하게 남성체로서 대우해 줬으면 좋겠어. 아무리 무성이라고 해도 익숙해진지 이제 겨우 4달 지났을 뿐이고…여자로 오해받는 것도 슬슬 짜증나니까 말이야.”
“흐음? 이상하군. 정령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성 가치관이 없다고 알고 있는데? 그렇게 남성체를 고집하는 이유가 뭐야?”
여기서 잠시 뭐라고 대답할까 망설였지만, 저 녀석을 설득하려면 확실하게 사정을 설명을 해둬야겠단 생각에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숨겨봤자 좋을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난 17년간 남자로 살았던 기억이 있어.”
“뭐?”
“…?”
“그러니까…전생에 남자였다고. 갑자기 무성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쉽게 행동패턴을 바꿀 수는 없단 말이야.”
나의 담담한 대답에 이사나는 무슨 소린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얼굴이 되었고, 라피스는 놀란 표정으로 얼굴근육을 딱딱하게 경직 시켰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내 뱉는 목소리는 경악과 흥분으로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거짓말. 생명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명계의 몫이지만, 나도 어느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어. 정령왕은 윤회의 기억이 없는, 처음 창조된 가장 순결한 영혼으로만 탄생되는 거다. 그런데 어떻게 네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나도 자세한 사정은 몰라. 태어나는 과정에 잠시 실수가 생겨서 엉뚱한 차원으로 떨어졌다 돌아온 거라고 밖에. 아무튼 난 확실히 전달했으니까 그렇게 알아두라고.”
“거참…그 동안 행동이 묘하게 인간 같았던 건 그래서였던 건가.”
“……?”
모든 것을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라피스에 비해 이사나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냥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뭐 자랑할게 있다고 그다지 유쾌하지도 않은 과거를 두 번이나 떠벌이겠는가. 그냥 그렇게 넘어가면 좋을 것을…라피스는 끝까지 짓궂은 표정으로 내 복장을 뒤집어 놓았다.
“헤에. 그럼 역시 상당히 충격이었겠네. 그 ‘키스’ 말이야.”
“…제길, 내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기억 베스트 1로 기록 될 거다. 됐냐?”
“킥킥. 지금 당장은 그래도 천년정도만 지나면 전생의 기억이 가물가물 해질걸? 남자였다는 사실은 아무렇지 않아질 날이 분명히 올 거다. 그건 정령들의 본성이나 마찬가지니까.”
“…….”
사실은 나도 그렇게 될 까봐 걱정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성격이 많이 바뀌어 가는 것 같아서 겁난단 말이다. 굳이 일깨워주지 않아도 되는 사실을 친절하게 충고하는 라피스를 보며 나는 분한 마음에 입술을 악물었다. 그때 마침 분위기를 환기시킬 목적인지 문득 생각난 듯한 이사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참, 이제부턴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유희중이시니 본명을 부를 수는 없을 텐데…”
“아아, 상관없어. 그냥 라피스라고 불러.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은…”
“라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저는 되도록 정령사의 모습으로 꾸밀 생각입니다만.”
“흐음, 그래? 그럼 난 뭘 로 할까나…”
“자, 잠깐! 그런 대화는 사람들 없는 곳에서 하자고.”
아무리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거래도 작정하고 엿들으려 하면 들릴 가능성이 있었다. 뒤 늦게 서야 우리의 대화가 너무 위험수위(?)로 치닫는 것을 깨달은 나는 혼비백산한 표정이 되어 서둘러 가로막았지만 돌아오는 건 자신만만한 라피스의 대답뿐이었다.
“이미 우리 주변에 사일런스 마법을 실행해 뒀어. 다른 인간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거다.”
“헉! 어느새?”
사이좋게 놀라는 나와 이사나의 표정을 보면서 그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드래곤의 마법을 인간과 같은 범주로 생각하지 마. 이 정도는 캐스팅이나 시동어 없이도 시전 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나저나 아까 하던 얘기나 계속 하지? 나는 그냥 무난하게 검사로 나갈까?”
“엥? 검술도 할 수 있어?”
“나이 3천 먹은 드래곤치고 유희 중에 검술 한 두 개 쯤 익혀두지 않은 존재는 없어. 마법만큼 완벽하진 않아도 이 녀석 하나 지킬 정도는 충분히 될 거다.”
그러면서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이사나를 가리켜 보였다. 확실히 유희를 많이 해본 인간(?)답게 이번 일정의 핵심인물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달 까.
앞으로 이사나에 대한 것은 그에게 떠넘기면 될 것 같다고 속으로 흡족해 하는 나에게 라피스는 덤덤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너는 신관이 될 거라고 했던가? 이름은…?”
“그냥 엘이라고 불러. 사실 신관이 되는 건 확실하지 않아. 엘뤼엔의 협조가 없으면 불가능하거든. 일단 와보라고 한다니 희망은 있지만 서도…”
“…대체 그 엘뤼엔이란 신하고 너는 무슨 관계인거지? 부탁을 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지만, 막상 허락을 내릴지 어떨지는 가늠해 봐야 한다니. 단순히 편한 친구사이라고는 보기가 힘든 걸? 그가 너보다 서열이 위라는 건가?”
‘예리한 놈’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라피스는 뭔가 할 말이 많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이어지는 내 말에 결국 침묵하고 말았다.
“직접 만나보면 알아.”
“…….”
아무렴, 직접 만나보지 않으면 절대 모르지. 아마 엄청 놀랄걸? 자기가 3천년이나 매달렸던 그 도도한 물의 정령왕이 떡하니 신이 되어 나타났는데 놀라지 않을 녀석이 어디 있겠어? 너무 기뻐서 자기도 엘뤼엔의 신관이 되겠다고 설치지나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잔뜩 폼 잡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봐서는 전혀 상상이 안 가진 하지만, 그가 엘뤼엔에게 보인 집착의 세월이 그만큼 길었으니 아주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 것이다.
말이 좋아 3천년이지, 10년에도 변한다는 강산을 그보다 몇 십 배나 반복한 세월동안 바라보던 존재인데,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으면 그게 더 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설마 이프리트처럼 내 엄마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건 아니겠지?’
무성이던 시절이면 모를까, 이제 완벽한 남성이 된 엘뤼엔을 보고서도 포기하지 않으면 정말 곤란해진다. 만약 정말 그런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게 되면 계약이고 뭐고 다 끊어버릴 테다. 엘뤼엔이 누군지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그저 싱글거리는 라피스의 얼굴을 보며 나는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트로웰의 말마따나 정말 순탄치 않은 유희였다.
밤늦도록 그칠 줄 모르던 눈은 아침 해가 떠오르고서야 간신히 진정될 기미를 보였다. 무릎까지 차오른 눈을 헤치고 산을 오른다는 게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언제 다시 눈이 내릴지 몰라 되도록 서둘러서 신전을 찾아가기로 결정지었다.
어제 저녁식사를 한 식당 근처의 여관에서 하룻밤을 머문 우리는(3인실의 방을 주문했더니 여관 주인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자가 왜 남자 둘이랑 같은 방을 쓰냐나? 열 받아서 내 멋대로 남매라고 대답해 버렸다.)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 하곤 도시 외각의 북쪽 숲을 향하기 시작했다.
출발하기 전에 얼핏 들은 소문으로는, 클모어의 북쪽 외각에 있는 숲은 ‘마법의 겨울’이라고 하여, 한여름에도 공기의 온도가 현저하게 낮은 데다 눈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는 데, 바로 그 숲과 연결된 산맥을 타고 올라가야 엘뤼엔의 신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었지만 신전에 까지 이르는 산맥의 일부도 추워 얼어 죽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제 길에서 물어본 아주머니가 ‘동사한 사람이 많다’고 했을 때는 이 맘 때에만 해당 되는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사시사철 그런 고난을 감수해야 했던 것이었다. 이곳 외에도 전 대륙에 퍼져있는 얼마 안 되는 엘뤼엔의 신전들은 죄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 세워져 있다하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내 장담하지만 엘뤼엔은 신도의 숫자를 불리려면 제일 먼저 신전의 위치부터 바꿔야 할 거다. 안 그럼 죽어도 안 모일걸?
성문 앞의 검문을 간단하게 통과한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척 봐도 사람들이 발길이 한적한 숲 안쪽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건, 어느 지점을 벗어나면서부터 몸을 감싸는 공기의 느낌이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뭔가 설명하기 힘든 이질적인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달까?
계절 차이가 극명한 여름에 와서 본 광경이라면 모를까…겨울인 현 상태에선 겉으로 보기엔 일반 숲의 모습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기에, 나는 그 묘한 느낌의 정체를 밝히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 거렸다. 1년 내내 겨울이라 온도가 더 낮은 건가 하는 의문도 잠시, 미간을 살짝 찡그린 라피스가 하는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어떤 쓰잘데기 없이 할 일 없는 놈이 이런 짓을…”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놀란 표정으로 묻자 그는 여전히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멈추지 않은 채 또박또박 대답했다.
“이곳만 사계절 내내 겨울이라는 게 이상하지 않아? 누가 숲 전체와 산맥의 일부에 마법을 건 거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실버놈들밖에 없지만, 드래곤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걸로 봐선 현재 유희중이거나, 레어를 옮긴 모양이군. 떠나면서 마법을 해지하지 않은 거야.”
“헉, 그건 생태계 파괴잖아!”
마법으로 일정한 공간을 겨울로 만든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나는 이 순간 산맥의 일부를 못 쓰게 만들어 버렸다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라피스는 피식 웃으면서 천상 정령왕이라며 거친 동작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뭐하는 거야?”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 마법이 풀리면 단기간 안에 원상태로 복구되니까 말이야. 자아 그럼 가볼까?”
“자, 잠깐!”
“…?”
당장이라도 걸음을 옮기려던 녀석은 내가 필사적으로 제지하자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리곤 내가 가리키는 손끝에 이사나가 있음을 깨닫고는 얼굴을 살짝 찡그려 보이는 것이다. 멀쩡하니 잘만 걸어오던 녀석은 숲 안쪽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지나치게 몸을 떨고 있었다. 확실히 숲 저편보단 이곳의 온도가 훨씬 낮은 모양이다.
“또 뭐가 문제야?”
“사실은 이사나가 입고 있는 망토가 그렇게 두꺼운 게 아니거든. 이곳에 오기 전에 새로 사서 갈아입히려고 했는데 경황이 없어서 말이야. 몸을 따뜻하게 하는 마법은 없어?”
“…정말이지 귀찮은 동행자로구만. 기다려 봐.”
잔뜩 찌푸린 얼굴로 투덜거리면서도 라피스는 순순히 한손을 들어 이사나의 머리를 짚었다. 보온<keeping> 마법이라던가? 그의 입에서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창백하던 안색에 혈색이 돌기 시작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마법이란 게 대단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막상 이렇게 여러 가지로 실용적인 모습을 보고나니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아, 고맙습니다…굉장히 따뜻하네요.”
“다음부턴 미리미리 말하라고. 난 행동 굼뜨는건 딱 질색이니까. 엘퀴네스가 널 언제까지 챙기게 만들 거냐? 어리광 좀 작작 부려라.”
감사의 인사에도 매몰찬 대답을 내뱉는 녀석은 정말이지 정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어보였다. 그나마 같은 일행이랍시고 함부로 굴지 않는 것만도 천만 다행이려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가 좋아서 챙겨주는 거야. 그렇게 느린 게 싫으면 알아서 먼저 마법을 걸어주던가.”
“유감이지만 이 몸은 부탁받지 않은 일은 안한다.”
“…너 잘났다.”
드래곤들은 원래 다 저런 건가? 아무런 거리낌 업이 당당한 태도로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 세우는 모습을 보며, 나는 현재의 삶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빠지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엘뤼엔보다 더 제 멋대로의 존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이번 기회에 약간의 수정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 와서 내 주변에 ‘절세미인’들 말고 늘은 게 또 있는 건가? 그것은 바로 지나칠 정도로 거만한 존재가 많다는 것. 벌써 내가 알고 있는 이만 해도 세 명이 넘지 않은가. 이프리트부터 시작해서, 엘뤼엔, 라피스까지.
서열구분이 확실한 세계이니 만큼 앞으로도 말도 못하게 많은 거만덩어리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복잡한 기분도 이어져 오는 라피스의 재촉에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뭐해? 안 갈 건가? 그 놈의 문장인지 뭔지 빨리 받고 떠나자고.”
“아, 알았어. 흐음? 근데 어째 상당히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뭐야, 겨우 마법 하나 해줬다고 기분 상한거야?”
동료한테 도움 준 것 가지고 생색내는 거냐! 라고 불쑥 외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묻자, 이상 하리 만치 불쾌해 보이던 라피스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툴툴거렸다.
“얼음은 불의 속성과 반대야. 공기만 맡고 있어도 짜증난다고. 제기랄. 이래서 실버놈들이 싫다니까.”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라피스가 그런 말을 하면 한참이나 현실감이 떨어진다. 불과 가장 정반대의 성분인 물의 정령왕과 계약하려고 발악을 했던 놈이 아닌가. 그런 내 심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는지, 이사나 역시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어…실례지만, 물 역시 불과 반대 성분인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누가 그걸 모른대?”
“아니…그, 그래도 엘퀴네스하고는 계약 하셨잖습니까?
그 조심스러운 질문에 대답이라고 꺼내는 말은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엘퀴네스는 처음부터 예외다. 비교할 가치가 안 된다고. 저런 얼음덩어리 따위하고는 차원이 달라.”
“…….”
기가 막힌다. 저 자식은 3천년이나 산 주제 얼음의 본질이 물이라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건가?
아직 실제로 체험해 본건 아니지만, 이성을 잃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분노가 일어나면 나를 이루는 형체의 속성이 얼음으로 변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실제로 엘뤼엔은 엘퀴네스였을 시절 몇 번이나 그 수법(?)으로 대륙을 꽤나 살벌하게 만든 전적도 있었고 말이다.(주로 이프리트와 싸우고 난 직후였다.) 반박하는 내 목소리엔 나도 모르게 바짝 힘이 들어가 있었다.
“물을 얼리면 얼음이 된다는 거 몰라? 뭐가 차원이 다르다는 거야?”
“당연히 다르지. 저건 마법으로 만든 인공적인 얼음이라고. 자연 그 자체인 너의 속성하고는 그 본질부터가 달라. 엘퀴네스의 ‘물’은 이 피부 밑에 흐르는 혈액까지도 지배하는 것이다. 아무리 나와 속성이 반대라고 해서 싫어할 수가 없잖아? 자연에 속한 그 무엇도 정령의 손길은 피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그가 굳이 속성을 거부하면서 까지 물의 정령왕에게 집착하는 사유로는 너무도 빈약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도 그것 말고 다른 이유에 대해선 딱히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기에 더 이상 따지고 들 수도 없는 문제였다. 그러니 어쩔 수 있나? 그저 타고난 성격이 괴짜려니…하고 넘어갈 수밖에.
그 괴짜가 하필이면 내가 태어난 세대에 존재한다는 것이 비극인 것이다. 뭐, 그래도 생각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되고 있어서 현재로선 그다지 큰 불만이 없었지만 말이다.
신전에 도착하기까지는 정말 꼬박 하루가 걸렸다. 최대한 이사나의 체력을 고려해서 수시로 휴식을 취하긴 했지만 설마 산위에서 밤을 샐 줄 몰랐던 나는 상당히 찝찝한 기분으로 다음날 아침 해를 맞았다.
그래도 과연 보온 마법이란 게 효과가 좋았던 모양인지,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바닥에서 잠을 자면서도 이사나는 한번도 떨거나 얼굴이 창백해지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손을 만져보면 평소보다 체온이 뜨거울 정도다. 살얼음 같은 바람이 매섭게 불어오는 상황에도 지나치게 혈색이 좋으니 그건 그것대로 뭔가 위화감이 들기도 했다.
밤을 샜던 장소가 신전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었던 듯,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걸음을 옮긴 우리는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널따란 평원위에 세워진 새하얀 신전을 발견했다. 탁 트여진 외관과 건물을 받치고 있는 기둥의 모습이 이전에 신계에서 봤던 엘뤼엔의 신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한 가지 신기했던 건 신전을 이루는 벽돌이 그저 단순한 돌을 흰색으로 페인팅 한 게 아니라, 그 자체로 하얀색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보통 다른 건물을 보았을 때보다 그 격이 달라져 보였다.
“헤에, 드디어 도착인가?”
떠오르는 아침햇살에 찬연히 빛나는 건물은 그 자체로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눈과 얼음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산 위에 떡하니 세워져 있는 그림 같은 신전이라니…종교적인 목적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다 감동하며 바라볼 장면이 아닌가 싶다. 엘뤼엔의 신도가 아닌 사람이라도 이 것을 보면 당장에 신관이 되겠다고 설치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원치 않은 강행군에 산에서 밤을 샜다는 불쾌감으로 온통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라피스나, 화려한 황실건물에 익숙해져 있던 이사나에게는 별 다른 감흥을 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나와 달리 이곳을 꼭 방문할 목적이 있던 인간들도 아니니 투덜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무슨 놈의 신전을 이따위 구석에 박아 둔거지? 정말 할일도 더럽게 없는 인간들 같으니라고.”
“흐음, 그래도 상당히 멋진데요.”
“뭐? 네 눈엔 저게 멋져 보여? 생긴지 25년 정도밖에 안된 초급 신 따위의 신전이?”
“흐음…확실히 마신전에 비하면 소박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소박한 게 아니라 초라한 거다, 저건!”
신전을 코앞에 두고 서로 품평하고 있는 라피스와 이사나를 보며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무리 대통령도 없는 자리에선 욕한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상급신의 신전을 가지고 초라하다느니 소박하다느니 떠들고 있다니. 엘뤼엔이 들으면 정말 크게 경을 칠 일이 아닌가.
신전 앞에는 신관으로 보이는 두 명의 남자가 청소를 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소란스럽게 걸어오는 우리를 보더니 서둘러 몸가짐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여느 무리와 같이 신전에 기도를 드리러온 방문자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중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금발머리의 남자가 가슴부위에 손가락으로 한바퀴 원을 그리더니(성호인 모양이다) 공손하게 말을 걸어왔다.
“엘뤼엔님의 가호가 임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엘뤼엔님의 종 세이렌이라 합니다. 신전의 방문 목적과 머물 시기를 말씀해 주십시오.”
신의 문장이 눈에 띄지 않는 걸 보면 아마 가장 하급의 신관이거나, 수련사제일 경우가 높았다.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속으로 망설이는 사이 인상을 팍 찡그린 라피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방문목적이야 뻔한 것 아닌가? 기도하러 왔으니 신전 안으로 안내해라.”
초반부터 반말인데다,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데도 정작 신관들의 태도는 크게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식의 대우에 익숙하다는 모습이랄까? 오히려 내가 더 당황해서 허둥지둥 말을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아, 죄송합니다. 초면에 실례를…”
“아니, 괜찮습니다. 기도하러 오셨다니, 안내를 붙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참, 신전 안으로 들어가실 때는 쓰고 계신 후드를 벗어주십시오. 그 어떤 사연을 가진 자라도 신께서는 전부 포용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당장 죽을죄를 짓고 도망치는 죄인이라도 신전에서는 묵인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때까지도 내가 후드를 쓰고 있었다는 걸 몰랐던 나는 얼른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끌어 내렸다. 그런데 이상한건, 나와 시선이 마주친 신관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경직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곤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무, 무슨?”
“알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토록 방문에 대해 통보를 받았으면서도…어, 어서 오십시오! 대신관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엘뤼엔의 계시가 내려진 게 카이 씨 만이 아니었던가?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라피스나 이사나도 그랬지만, 나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우리의 심정도 모른 채 신관들은 서둘러 안에 들어가 나의 방문을 알렸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 한때의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20대 초 중반의 외모인 듯. 아무리 많아 잡아도 30은 넘지 않은 것 같았다.
입고 있는 옷은 하나같이 드레스로 착각될 만큼 풍성한 자락의 흰 법복이었는데, 가운데 금색 문장이 새겨진 한 사람을 제외하곤 다들 은색실로 꼬아진 덮개를 걸치고 있었다. 그들 중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 나는 현재 상황도 잊고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카, 카이 씨?”
그랬다. 대략 10명 남짓해 보이는 청년의 무리엔 본의 아니게 일찍 헤어져 버렸던 카이씨도 속해 있었던 것이다. 평소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여 트린 그는, 감았는지 떴는지 구분이 안 되는 가는 눈동자를 반달모양으로 휘면서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엘님.”
“하아…여기 오면 만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정말 이렇게 될 줄은…”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유일하게 금색 문장이 그려진 옷을 입고 있던-남자가 성큼 걸어오더니 정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짧은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단정한 느낌의 얼굴이랄까. 신체의 굴곡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기장이 넓은 옷을 여러 개 겹쳐 입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무척이나 엄숙하고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얼핏 본 손등위로 새하얀 엘뤼엔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이곳까지 단번에 오는 텔레포트 스크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련사제에게만 지정되는 이동 아이템이지요. 당신과의 동행에 함께 하지 못했다며 무척 죄스러워 했습니다.”
“헤에…당신은?”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형벌의 신 엘뤼엔님의 첫 번째 종, 루얀이라고 합니다. 엘뤼엔님의 계시를 받고 당신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첫…번째 종?”
그러자 불쾌한 듯이 미간을 좁히고 있던 라피스가 냉큼 대답했다.
“대 사제란 뜻이다. 아무리 봐도 20대 중반 밖에 안 되는 데 벌써 대 사제라니…”
“후훗, 엘뤼엔님의 신전은 역사가 짧으니까요. 나이 30을 넘지 않은 대 사제가 저 말고도 여럿 있답니다.”
신관의 능력을 제대로 받는 시기가 10세 이전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치면 이제 25년 밖에 안 된 신전의 신관들이 연령대가 높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태아 속에 있을 때부터 신력을 받았다 쳐도 25세 라는 소리니까 말이다. 사실 50대 이후의 신관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여타 다른 유구한 역사를 지닌 신전에 비하면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라고 했다.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기에 그것에 대한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엘뤼엔님께서는 조속히 당신을 만나 뵙기를 희망하고 계셨습니다. 제대로 된 응접을 하지 못해 죄스럽습니다만…바로 기도실로 가시겠습니까?”
“아, 그렇게 할게요. 이 두 사람도 함께 하고 싶은데…괜찮을까요?”
“일행에 대한 언급은 없으셨지만, 상관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안내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루얀이란 이름의 사제는 조심스럽게 앞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신전 안에는 기둥 사이로 각기 다른 장식으로 된 나무문들이 달려 있었는데, 그 중에서 천사가 조각된 문이 바로 기도실이라고 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새겨진 천사의 모습이 신계에서 봤던 엘뤼엔의 수행천사라는 것을 알아본 나는 그 순간 붉은 머리의 새초롬한 존재를 떠올리고 피식 미소 지었다.
‘이프리트가 보면 당장 부숴버리겠다고 난리치겠는 걸?’
신전의 모습도 엘뤼엔의 계시에 따라 지은 거였을까? 유난히도 신계에서 봤던 그의 신전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아니, 그때 본 그 모습을 그대로 옮겨다 지었다고 해도 할말이 없을 정도였다.
기도실에는 나와 이사나, 라피스 세 명만 들어가게 되었는데, 아마도 개인적인 신의 면담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신관들의 배려인 듯 보였다.
“기도가 끝나실 때 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예에? 아니…꼭 그러실 필요는…”
“괜찮습니다. 신의 손님을 모시는 사제로서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무사히 신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하하…가, 감사합니다.”
아무리 계시에 이끌려온 사람이라고 해도 엘뤼엔의 강림까지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것은 내 정체를 알고 있는 카이 씨나 라피스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고 굳이 신계에서 내려올 필요까지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 증거로 라피스는 문이 닫히자마자 숨 돌릴 시간도 없이 얼른 끝내고 돌아가자고 닦달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빨리 문장 달라고 그래. 어서 돌아가자고.”
“으윽, 좀 기다려 봐. 어쨌든 이왕 온 건데 구경 좀 해도 되잖아?”
“이런 초라한 신전에 볼게 뭐가 있다고 구경이야?”
“라, 라피스. 기도실에서 그런 소리를 하시면…신이 들으신다고요.”
기겁한 이사나가 얼른 나무랐지만 그렇다고 반성하는 기색이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들을 테면 들으라는 듯이 흥-하고 콧방귀를 뀌는 것이다. 저러다 후회해도 난 모르지…무심코 생각하는 순간, 나는 눈앞에 모셔진 제단에 빛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것을 깨닫곤 멍하게 입을 벌렸다.
“헉…”
기도하는 자리에서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단상위엔 엘뤼엔을 위해 쌓아둔 제단과 성수를 받치고 있는 천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위로 해맑은 빛이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천장을 바라봤지만 그 어느 곳에도 햇빛이 들어올 만한 구멍 따위는 뚫려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설마 신전 측에서 신비감을 조성하기 위해 일부러 마법으로 빛을 만들어 냈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내 예상이 맞다면 저것은 아마도…
“어떤 싸가지 없는 자식이 감히 내 신전 더러 초라하다는 예쁜 말을 지껄이는 걸까?”
“…에, 엘뤼엔!”
“뭐어?”
어느새 제단 위에는 그가 나타나고도 사라지지 않은 빛줄기를 고스란히 후광으로 등진 채, 선명한 백금발을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는 엘뤼엔이 느긋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조각같이 단정한 얼굴은 방금 전에 들은 라피스의 말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는 상태였다.
못 본지 몇 달 밖에 안 된 건데도 꽤나 오래 동안 떨어져 있었던 것 같은 느낌. 예상치 못한 신의 강림에 경악하는 두 사람도 의식 못한 채 나는 너무 반가워서 환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은 엘뤼엔은 앉아있는 상태 그대로 두 팔을 벌렸다.
“이리와, 엘.”
“뭐, 뭐?”
“흐음?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냥 손 흔들고 말 생각? 나는 널 만나기 위해 장장 10년 치 서류도 등지고 나왔는데 말이다.”
그 서류라는 게 이전에 이프리트가 날려버린 바이톤 주민의 생명 기록서 라는 건 물어보지 않아도 뻔한 일. 숨도 못 쉴 정도로 바쁜 와중에 나를 위해 짬을 내줬다는 게 고마워서 나는 이번만은 얌전히 아들 역할을 해주기로 했다.(한마디로 가서 안겨줄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내가 그에게 다가가려고 했을 때, 방해를 한 것은 다름 아닌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라피스였다.
“가긴 어딜 가! 저 자식은 대체 뭐야?”
아마도 역광 때문에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듯, 아직까지도 라피스는 그가 전대의 엘퀴네스라는 것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과 반대로 이사나는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한 채 그대로 털썩 무릎을 꿇고 있었고 말이다.
신의 위압감이라는 걸까?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안색을 창백하게 굳히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조심스럽게 엘뤼엔을 바라보았지만, 이미 그의 시선은 잔뜩 찌푸려진 채 라피스를 똑바로 쏘아보고 있는 상태였다.
“저~자식? 엘, 저 싸가지 없는 도마뱀은 뭐냐?”
“아? 드래곤 인 거 알겠어?”
“신한테 불가능은 없다. 어떤 인물이든 그 본질만이 보이니까 말이야. 흐음, 근데 어째 상당히 낯이 익다?”
3천년이나 자신을 쫓아다닌 존재가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더니, 막상 만나고 나니 무언가 생각이 나긴 하는 모양이다. 그와는 반대로 라피스의 얼굴은 점점 더 험악해 지고 있었다.
“크아악! 뭐? 도마뱀?? 겨우 25년짜리 초급 신 주제에!!”
“…거기서 한 마디만 더 해라. 불에 구워진 도마뱀아. 한번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아무렇지 않게 덤덤히 대답하는 엘뤼엔 이었지만 나는 그가 두 번은 경고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이미 첫 대면에서 깨달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것을 모르는 라피스는 겁도 없이 그의 말을 무시한 대가를 고스란히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뭐가 어쩌고 어…우왓-”
퍼억-하는 경쾌한 타작음과 함께 그의 몸은 저만치 공중으로 치솟아 올라 구석에 처박히고 말았다. 우수수 떨어지는 벽돌의 잔해가 그가 얼마나 심각한 타격을 입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과연 드래곤이랍시고 기절은 하지 않고 피만 토하고 있었는데(이게 더 심한가?) 그것을 보면서도 엘뤼엔은 여유 있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만 있었다. 여전히 제단에 걸쳐진 몸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우웁- 쿨럭 쿨럭-쿨럭!”
“내가 한 마디만 더 하면 맞는다고 그랬을 텐데?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내 말을 귓구멍으로 쳐듣는 놈들이 없다니까. 엘 저딴 놈하곤 일찌감치 계약 끊어버려라.”
“아하하…”
순간 계약한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신인 그가 정령왕이 새겨둔 물의 인장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단 생각에 그저 어설픈 미소를 흘리고만 나였다. 서, 설마 저것도 경고인건 아니겠지?
라피스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든 것과, 엘뤼엔이 이사나에게 흥미를 보인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까지도 녀석은 신의 위압감에 질려 떨리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는데, 그것을 바라보며 쯧쯧거리고 혀를 찬 엘뤼엔은 주변을 감싸고 있던 신의 기운을 차츰 감소 시켰다. 더 이상 창백해질 수 없을 것 같던 안색이 그나마 한숨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이익, 너 이 자식!”
“흠, 역시 인간들은 약하다니까? 최대한 줄인 건데도 이렇게 힘들어 할 줄이야. 그런고로 나는 오랫동안 인간 세상에 나와 있지 못하겠다, 엘. 그나마 신전이니까 이 정도의 신성이라도 뿜어낼 수 있는 거지, 다른 곳에선 어림도 없어.”
“아, 굳이 만날 장소를 신전으로 한 것도 그것 때문?”
“그래. 네가 유희중이 아니면 정령계로 찾아가면 될 텐데, 인간계에 있는 너한테는 도통 연락이 닿아야지 말이다. 종종 주시하고는 있었는데, 바빠서 그것도 영 시원찮고. 젠장, 상급신이라고 때려 칠 수도 없으니 원.”
“하하하…”
“크악! 나 무시하지 맛!!”
이제 완전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 라피스가 성난 목소리로 외쳤지만 그런다고 돌아봐줄 엘뤼엔이 아니었다. 역대 엘퀴네스 중 가장 도도하고 성격 더럽기로 유명했던 그다. 상급 신이 된 이후로 험악한 것들(마족)을 담당하면서 더 나빠졌다는 말도 있는데서야 어디 라피스가 상대나 되겠는가. 예상대로 아주 깔끔하게 무시한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경외의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사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봐, 인간. 네가 이번 엘의 유희상대인가?”
“예? 아, 그…그렇습니다. 이, 이사나라 합니다. 지, 지극히 높으신 분을 뵙게 되어 영광…”
“그거야 당연한거고. 뭐, 너한테도 상당히 볼일이 많았다만 지금은 반성의 기미가 넉넉해 보이니 넘어가 주마. 정신 차리고 처신 똑바로 하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계약을 중지 시켜 버릴 거다.”
싸늘하게 쏘아붙이는 말에 이사나의 얼굴은 다시금 창백한 빛을 띄웠다. 예전이라면 이런 경우 ‘네가 뭔데?’라고 되받아 쳤을 나지만 돌아올 대답을 뻔히 알아서인지 그다지 상관하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분명히 아버지가 그 정도의 참견도 못하냐고 그러겠지.’
그러나 당연히 이런 사실을 모르는 라피스는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시당한 충격에 그가 나에 대한 이런저런 참견을 하고 있으니 더욱 화가 났던 것이다.
“네가 뭔데 엘의 계약을 참견하는 거야! 신이라고 정령왕의 영역에 상관할 수는 없을 텐데?”
“나는 가능해.”
“뭐가 어째? 이 빌어먹을 초짜 신…어?”
그 순간 당장이라도 멱살을 움켜쥘 듯 엘뤼엔에게 덤벼들던 라피스는 의외의 사실을 발견한 사람 마냥 멍한 표정이 되어 행동을 멈췄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도도한 얼굴이 어딘가 상당히 익숙하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잊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장장 헤츨링 시절부터 목매던 바로 그 존재가 눈앞에 있는 것을….
경악으로 벌어진 눈동자가 이보다 더한 놀람을 담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뭐, 뭐야. 너…어째…”
“…?”
“설마…에, 엘퀴네스??!!”
충격으로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라피스의 모습에 엘뤼엔은 잠시 고민하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러나 그다지 진지하게 대답할 생각은 없는 건지 턱 끝으로 나를 슬쩍 가리켜 보였다.
“무슨 엉뚱한 소리냐, 도마뱀? 엘퀴네스는 여기 있을 텐데?”
“제길! 그게 아니잖아! 그, 그 얼굴은!”
“앙? 내 얼굴이 어때서? 흐음~ 네놈 면상보단 확실히 낫지. 설마 반했다는 건 아닐 테지? 오, 그래. 반했다고 하니 생각나는 놈이 하나 있군. 너 만한 시끄러운 도마뱀이 한 마리 있었었지, 아마.”
그러면서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는 모습을 보니 아직도 라피스에 대해서는 제대로 기억하는 부분이 없는 것 같았다. 왠지 3천년동안 혼자서 열 낸 그만 불쌍해지는 느낌이랄까. 역시 이래서 반할 상대도 제대로 골라야 한다는 거다.
그러자 답답하단 듯이 가슴을 두드린 라피스는 정공법을 택했다. 단도직입적으로 그의 정체를 캐물었던 것이다.
“너 설마 엘 전대의 엘퀴네스냐!!”
“흐음,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한 치의 당황함도 없이 여유롭게 되묻는 모습에 오히려 할 말을 잃어버린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이유라니…그야 얼굴이 똑같으니까. 머리색이 달라지긴 했지만 분명…”
“날 만난 적이 있었나?”
“만난 적이 있었냐니…역시 전대의 엘퀴네스??”
놀란 것은 라피스만이 아니었다. 이사나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한 표정으로 이쪽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 것이다. 정령왕이 소멸하면 신으로 환생한다는 것은, 바로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정령계에서 조차 소문으로만 인식되고 있던 사실이었으니 그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설마 누가 한때 정령왕으로 이름을 날린 존재를 신으로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는가.
그러나 현재의 상황에 불만이 많은 엘뤼엔으로서는 그다지 동조해 주고 싶지 않은 감정들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그들에게 엘뤼엔은 삐닥한 시선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쥐어터지고 싶지 않으면 눈 깔아라.”
“큭, 그러고 보니 이 더러운 성질머리까지 똑같잖아! 역시 전대의 엘퀴네스가 맞는 건가?”
“뭐, 보시다 시피 그렇다 만은…넌 뭐냐, 도마뱀? 나를 어떻게 알지?”
“…너를 어떻게…아냐고?”
이런….그러고 보니 라피스는 처음 내가 소환되자마자 ‘날 알아요?’라고 물었을 때 굉장히 서운해 했었다. 장장 몇 십 번의 소환에도 얼굴을 기억해 주지 않는다고 얼마나 닦달을 했던가. 그때는 내가 본인이 아님으로서 그냥 넘어갈 수 있었지만, 현재의 엘뤼엔은 진짜 그가 원하던 엘퀴네스. 기억을 하지 못하면 당연히 충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척 화를 낼 거라는 내 예상과는 반대로 라피스는 뚱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헤츨링 시절부터 엘퀴네스와 계약하기 위해 소환주문을 몇 십 번이고 외우던 드래곤이다. 기억 안나?”
“아아, 네가 설마 라피스 라즐리? 나한테 보복한답시고 다른 드래곤들과의 계약을 방해했다는 그 썩을 도마뱀이냐? 덕분에 엘의 유희를 다분히 망칠 뻔한?”
“흥, 어디가 유희를 망쳤다는 거지? 아무튼 난 이제 너한텐 볼일 없어. 소원하던 엘퀴네스도 손에 넣었으니까.”
“손에…넣었다?”
딱딱하게 중얼거린 엘뤼엔의 미간이 꿈틀거리고 움직인 것을 느낀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급격히 표정이 없어진 그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자 나는 무슨 의민지도 모르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른바 ‘난 저런 자식 손에 들어간 적 없어!’라고나 할까. 그러자 분위기가 한결 여유로워진 엘뤼엔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엘은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인데?”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 그가 내 것이 된 것은 변함이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네가 그와 친한 척 하는 현재의 상황이 상. 당. 히. 마음에 안 들어. 무슨 운이 좋아 신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전대면 전대답게 신계에만 얌전히 처박혀 있으라고.”
‘헉! 너 미쳤냐?’
3천년이나 매달린 존재를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것을 넘어 적대까지 보이는 라피스의 모습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설마 그는 이제껏 ‘엘퀴네스’였기 때문에 그에게 집착했다는 소리? 그래서 엘퀴네스가 아닌 현 상황에서는 필요가 없다는 건가?
감동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 정도는 표시할거란 초반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는 순간이었다. 모욕이나 다름없는 말에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라피스를 노려보던 엘뤼엔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천천히 뒤로 쓸어 넘겼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당장의 손속을 가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까부는 상대는 즉시로 척살하는 평소의 그 치고는 놀랄 만큼 관대한 반응이었다.
“죽고 싶냐, 도마뱀? 이 자리에서 그대로 저승가기 싫으면 그만 닥치시지?”
…물론 험한 말투는 숨길 수 없었지만 밀이다. 하지만 라피스가 어디 보통 드래곤이던가? 성깔이라고 하면 엘뤼엔 못지않은 그였다. 역시 만만찮은 기세로 쏘아붙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흥, 그렇게 말하면 누가 겁먹을까봐? 네가 아무리 그래도 엘은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다. 바로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호오, 연애감정이냐?”
“그런 건 너와 상관없을 텐데?”
눈을 번뜩이고 쏘아보는 두 존재덕분에 가운데에 끼인 나와 이사나만 죽어나갈 지경이었다. 특히 엘뤼엔의 경우, 감소시켰던 위압감을 다시 고스란히 드러내는 바람에 이사나가 거의 기절할 지경에 까지 이르고 있었다. 당황한 나는 얼른 라피스에게 소리쳤다.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아버지라는 엘뤼엔한테 성질을 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라피스 그만해! 엘뤼엔은 신이야! 당신이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니라고! 그리고 저번부터 말하는 거지만, 내가 왜 당신 거라는 거야? 물건 취급 하지 말라고 그랬잖아!”
“뭐야, 너. 지금 내 앞에서 저 신의 편을 들 생각?”
“네 쪽이 잘못한거잖아!”
먼저 시비 건 쪽이 한눈에 봐도 명백하거늘, 어디서 눈을 부릅뜨고 항의를 하는 건가. 불만어린 눈빛으로 쏘아보자 전혀 반성할줄 모르는 목소리가 울컥하고 튀어나왔다.
“난 내가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일러둔 것뿐이다. 잘못한거 없어.”
“아하~ 그래서 남들 다 오해하도록 내 것이 어쩌구저쩌구 하는 거냐? 내가 분명히 말 했을 텐데? 난 남성체니까 그렇게 대우해 달라고. 그런데 왜 하필 엘뤼엔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하필이라니…엘뤼엔의 앞에서는 해서는 안 되는 소리라 이건가?”
뭔가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 떨떠름하게 되묻는 모습에 나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어째서? 엘뤼엔이란 존재가 네게 어떤 의미가 되기에?”
“어떤 의미라니?”
쪽팔리는 것도 상대를 봐서 쪽팔려야 한다는 건가? 누구라도 물건취급 당하는 모습을 보이면 황당해 하는 게 당연한데도, 라피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엘뤼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당히 골치 아픈 도마뱀한테 걸렸구나, 아들아. 후환이 없도록 죽여주랴?”
“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저런 녀석은 두고두고 널 괴롭힐 타입이다. 미리 없애두는 게 나을 걸?”
흠, 확실히 예전처럼 단호하게 거절할 수 없는 게…상당히 끌리는 제안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 앞에 닥친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 라피스는 그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의 단어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아들이라니?”
“응?”
“방금 엘뤼엔이 너한테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았어?”
“아아. 그게 무슨 문제라도?”
아직 이사나와 라피스에게는 엘뤼엔과 나의 관계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던 나는, 도리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바라봤고, 라피스는 점점 복잡한 표정이 되어갔다. 그러자 그 심정을 헤아려준다는 듯, 엘뤼엔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엘은 내 아들이다.”
“……뭐?”
“내 아들이라고, 이 썩을 도마뱀아. 그러니 함부로 대하면 그날로 죽을 줄 알아라. 봐주는 것도 이번뿐이니까.”
“…엘뤼엔?”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처음 라피스를 가차 없이 날려버렸던 그 치고 지금은 지나치게 관대해 보였던 것이다. 모욕적인 말은 둘째 치고, 평소 자신보다 연배가 어린놈이 반말하고 들어오는 것에 굉장히 예민하던 그가 아니었던가.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라지?
눈빛에 서린 한기를 보면 틀림없이 화난 상태인데, 크게 손속을 두지 않으려는 모습에 나는 그야말로 어리둥절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 웃기는 소리! 정령왕과 신 사이에 어떻게 부자지간이 형성된다는 거지? 그런 꼴 같지도 않은 관계를 인정해줄 존재가 얼마나 된다는 거야?”
…라는, 상당히 기분을 불쾌하게 만드는 라피스의 말에 엘뤼엔은 이곳으로 나타난 이후 한번도 움직이지 않았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훗-하고 미소를 짓는 얼굴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극한 희열로 가득 찬 상태였다.
설마 엘뤼엔…완전히 돌아버릴 때까지 화를 참고 있던 건 아니겠지?
슬며시 드는 불안한 생각을 애써 털어버리려 노력한 나는, 이후 입을 잘못 놀린 대가를 극명하게 받고 있는 한 존재를 바라보며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폐를 찌를 듯한 비명소리와 커다란 폭격음. 작렬하는 빛줄기와 함께 신전의 기도실이 무너져 내린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망연자실.
이 네 글자의 단어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힘들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현재 엘뤼엔의 사제들은 모두 신전 안에서 나와 밖으로 대피한 상태였는데, 그들의 눈앞에는 처음의 위풍당당한 형체는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의 하얀 돌 조각이 폐허가 된 잔해를 이루고 있었다.
엘뤼엔이 무너뜨린 기도실이 알고 보니 신전 전체를 이루는 대들보중 하나가 있는 장소였던 것이다. 그것이 쓰러졌으니 건물 전부가 붕괴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사제들, 특히 루얀이란 이름의 대신관은 창백한 표정이 되어 할말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쓰러진 건물에만 신경 쓰느라 어느새 우리 일행이 한 사람 더 늘어났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한참동안 하늘과 땅을 오가며 기도하던 시선은 우리들(정확하게는 나와 이사나)가 죄책감에 질식할 무렵이 되어서야 간신히 더듬거리는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이게…도대체…”
“아…죄, 죄송합니다. 그저 사소한 다툼이 잠깐…”
“사…소한 다툼이라고요?”
그러면서 다시 빤히 무너진 신전을 바라보는 모습에,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자세한 사정이야 어찌됐든 이 모든 사태는 전적으로 그가 벌인 일이 아니었던가. 아무리 열 받았다고 해도 그렇지. 이런 건물 안에서 신력을 무자비하게 날려댔으니, 무너지지 않았으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했을 것이다.
신전이 붕괴되도록 라피스를 패놓고도 기분이 풀리지 않아 계속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엘뤼엔은, 내가 바라보는 것을 느꼈는지 곧 한숨을 내쉬며 항복하듯 두 손을 살짝 들어보였다.
“조금 과격했다는 건 인정하마.”
“…그렇다고 건물을 죄다 부셔놓을 건 없잖아.”
“저 자식이 날 자꾸 열 받게 하니까 그렇지.”
신경질 적으로 가리킨 손가락 끝엔 기절 상태로 누워있는 라피스가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심하게 맞은 건지 굳게 감겨진 눈이 좀처럼 떠질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하긴, 정령왕인 나도 꼬박 하루 종일을 기절해 있다가 일어났었으니 그라고 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아까 맞은 양으로만 치면 적어도 일주일 후에나 깨어나게 될 지도 몰랐다. 쌤통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엘뤼엔의 신력이 얼마나 아픈지 아는 나로서는 약간은 안쓰럽다는 느낌도 들었다. 이게 바로 동변상련이라는 건가?
엘뤼엔이 소리치는 말에 멍한 표정으로 건물의 잔해만 살펴보던 사제들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이제야 우리 일행 중에 낯선 사람이 추가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갑자기 늘어난 일행의 숫자보단, 그가 신전을 무너뜨린 범인이라는 사실이 더욱 중요한 듯 보였다.
“건물을 부수어 놓다니…그럼 기도실이 무너진 건 이분 때문입니까?”
자신들의 터전을 완전히 망친 사람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꿋꿋하게 존칭을 사용하는 루얀의 모습엔 감탄이 저절로 흘러나올 정도였다. 그 모습이 기특했는지 엘뤼엔은 한결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끼었다.
“흐음, 네가 대신관인 루얀인가? 올해로 나이 25살인?”
“그렇…습니다만, 신전을 부수신 이유를 알려주시겠습니까? 신의 터전을 상하게 하시다니…엘뤼엔님의 분노를 살까 두렵습니다.”
또박또박 대답하면서도 그는 자신들의 앞에 있는 금발의 남자가 엘뤼엔 본인일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적인 신성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긴, 어느 누가 신의 강림이 이렇게 쉽게 일어날 거라 생각하겠으며, 정작 강림한 신이 자신의 신전을 부수는 사태가 일어날 거라 짐작하겠는가. 사제들이 몰라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엘뤼엔 특유의 오만한 분위기에 휩쓸려서인지 섣불리 적의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살피는 사제들의 모습을 본 엘뤼엔은 피식 미소 지으며 볼품없이 무너진 그의 작품을 돌아보았다.
“아주 깨끗하게 쓰러졌는걸? 이 기회에 신전을 다른 곳으로 옮겨버릴까?”
“헉? 무슨 소릴? 신전을 옮기 다니오! 그런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호오, 권한이 없다고?”
흥미롭게 반짝이는 엘뤼엔의 눈빛을 눈치 채지 못한 루얀은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연합니다. 이 신전은 엘뤼엔께서 직접 세우신 것. 저희는 계시를 받고 이 자리에 모여 있던 그분의 종들 일 뿐입니다. 그분께서 세우신 신전을 임의로 옮기는 행동은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헤에? 이 신전을 엘뤼엔이 직접 세운 거라고? 하긴, 이런 험한 지형까지 돌을 옮겨다 건물을 짓는 건 인간의 상식으론 불가능한 일인 것 같았다. 그래서 신계에 있는 그의 신전과 모양이 비슷한 건가하고 짧게 감탄한 나는,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그럼 직접 세운 그 신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건 불만 없겠군.”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아직 저는 엘뤼엔님께 그러한 사실에 대한 계시를 받은 기억이 없습니다.”
우리가 엘뤼엔의 손님으로 왔다는 사실 때문일까? 사제들은 불쾌하단 듯이 미간을 모으면서도 끝까지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속 깊은 곳에 잠식된 분노를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던 듯, 꽉 움켜쥔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 챈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엘뤼엔에게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신전을 옮기는 건 무리잖아? 이 사람들이 지낼 곳도 필요하고. 이왕 지어 놓은 건데 다시 복구 시킬 수는 없는 거야?”
“평소라면 그랬겠지. 저 썩을 녀석이 초라하다 뭐다 떠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쿡쿡. 뭐야~ 그런 걸 마음에 두고 있었어? 나는 마음에 드는데. 설원 위에 세워진 새하얀 신전이라니, 뭔가 환상적이잖아?”
“흐음, 그래?”
내 칭찬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신전을 다시 보수하기로 결정했다. 아들이 좋다는데 다른 잡것들(라피스)의 의견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다나? 어리둥절한 표정의 사제들이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여유롭게 돌아선 엘뤼엔의 입에서 단 한마디의 단어가 나온 순간, 잔해가 된 돌덩어리들이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던 것이다.
【복구】
우르릉거리는 소음과 함께 날아오른 돌들은 점차 차곡차곡 쌓이며 본래의 형태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신전을 이뤄가는 모습은, 마치 돌덩이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경악한건 사제들만이 아니라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 이런 식으로 신전이 복구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엘뤼엔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언령일 뿐이야. 상급 신정도 되면 어지간한 산 정도는 말 한마디로 만들 수 있지. 차원전체를 만드는 주신께 비할 바 하겠냐 만은….”
“헤에. 정령왕이 쓰는 언령과는 수준이 다른 것 같은걸?”
“정령왕은 인간 세상에 내려올 경우엔 힘의 제약을 받으니까. 정령계에서는 신과 거의 동급의 언령을 사용할 수 있어.”
“그렇구나.”
그럼 나도 정령계에서는 말 한마디로 건물을 만들 수 있다는 소리인가? 호오, 그거 정말 굉장한 걸?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 점을 가지고 감탄할 수 없었다. 우리의 대화를 들은 사제들이 모두 흙빛이 되어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던 것이다. 루얀과 카이 씨는 이미 훨씬 전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려진 상태였다. 아마 드디어 엘뤼엔의 정체를 깨달은 듯 보였다.
사실 조금 늦은 감이 있는 반응이다. 갑자기 등장한 정체불명의 남자. 그것도 흔치않은 잘생긴 외모에,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풀풀 뿌리고 있는 존재를 평범한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리가 아닌가.
그럼에도 그들이 뒤늦게야 눈치 챈 것은, 말했다 시피 ‘신’의 강림이란 게 워낙 흔치 않은 현상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인간이 이렇게 쉽게 신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겠는가. 내가 만약 저들과 같은 입장이었다 해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싶었는지 루얀은 침착한 표정으로 엘뤼엔을 바라보며 좀더 확실한 확인을 요구했다.
“미천한 존재가 감히 청하옵니다만, 사실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형벌의 신…엘뤼엔님이 맞으십니까?”
담담한 척 애를 쓰고 있어도 눈동자와 목소리는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사제들을 힐끔 바라 본 엘뤼엔은 신전이 전부 완성되었다 싶자 지나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미 깨닫고 있는 사실에 확인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 오늘 본 일에 대해서는 함구하라.”
“오오! 엘뤼엔님!!”
“세상에! 나의 신이여…”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리는 사제들. 엘뤼엔이 감춰두고 있던 그의 신성을 고스란히 드러낸 순간은 바로 그 때였다. 파앗- 햇빛보다 강한 빛이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커헉!”
“허어억!”
나조차도 움찔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존재감이었다. 그 바람에 엎드려있던 사제들 대부분이 그대로 기절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흐느끼느라 정신이 없었다. 간질 환자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입에 거품을 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엘뤼엔은 좀처럼 드러낸 존재감을 거둘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아니, 그러긴 커녕 터져 나오는 빛의 양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이젠 누가 빛이고 누가 사람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빛 덩이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에, 엘뤼엔?”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자 눈부신 빛 속에 잠겨있던 그의 형체가 살짝 움직였다. 나를 향해 내밀어진 손(이라고 추정되는 부분)을 잡았더니,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따스한 체온이 그대로 옮겨지고 있었다. 느낌만으로 치면 빛 덩이와 닿아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였다.
나를 자신 쪽으로 바짝 끌어당긴 엘뤼엔은 잠시 후 난처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인간 세상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다. 존재감을 감추는 것도 더럽게 힘들군.”
“엑? 정말? 그럼 지금 신계로 돌아가야 하는 거야?”
“아아. 모처럼 만인데 미안하다. 신들은 인간 세상에 오래 동안 못 내려와 있거든. ‘능력의 제한’이 있는 정령왕과 달리, 신들은 머물 수 있는 ‘시간의 제약’이 있어. 아무리 그래도 하루 정도는 될 텐데…언령을 써서 그런가? 엄청 당겨졌군.”
투덜거리는 엘뤼엔의 목소리는 현재 상태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 같아 불안한 표정으로 손을 꽉 잡았더니 피식-미소를 흘린다. 그리곤 마치 어린애를 다루듯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 것이 아닌가. 이건 또 뭐하는 짓이지? 하는 시선으로 올려다봤지만 이제 눈앞엔 거대한 빛 덩어리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엘뤼엔의 형체가 사라질수록 그나마 버티고 있던 사제들도 그의 존재감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있었다. 대신관 루얀을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전부 정신을 잃자, 엘뤼엔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손(이라 추정되는 부분)을 들어 내 이마를 짚었다. 익숙지 않은 열기가 미간 위의 피부를 뜨겁게 달구었다.
“……뭐야?”
“이번 유희에 필요한 거. 이게 필요해서 나 만나려고 했던 거 아니었나, 아들?”
“응? 아! 설마 신의 문장?”
놀란 표정으로 묻는 말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지만, 분명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것 이란 느낌이 들었다. 잠시 동안 이마위에 머물던 열기는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어색한 기분에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재미있다는 듯한 엘뤼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흠, 엘퀴네스한테 신의 문장을 내려준 신은 아마 내가 처음일걸?”
“엥? 어째서? 그 동안 다른 엘퀴네스들은 한번도 사제가 된 적이 없었단 말이야?”
“음…역대의 물의 정령왕들은 자존심이 강했거든. 그래서 다른 존재한테 부탁 하는 걸 상당히 싫어했지. 사실 신관은 정령왕이 하기에 적합한 유희가 아니야. 치유능력이 없는 몸으로 사제가 되면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으니까.”
“하지만…마신교의 사제들은 치유능력이 없다고 하던데?”
“그거야 그렇지. 대신 마족들과 계약해서 그 능력을 부릴 줄 알아야 해. 정령왕들이 일일이 유희를 도와줄 마족을 찾아다니는 것도 우습지 않아? 그들이 정령왕을 소환한 경우라면 모를까.”
하지만 마족이 정령왕을 소환할 확률은 드래곤이 바늘에 찔려 사망할 확률보다 적다고 했다. 워낙 자연과 친숙하지 않은 족속들이라, 정령과의 친화력이 눈꼽만큼도 없다나? 파괴와 살상을 주로 이루는 존재라니 쉽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어려웠고 말이다.
“흐음…마족들은 어떻게 생겼는데? 신족들은 인간하고 별 다를 게 없었는데 말이야.”
“마족도 마찬가지야. 아니, 오히려 상당히 아름답지. 외관이 아름답다고 방심하면 큰 코 다칠걸? 녀석들은 아름다울수록 고위급의 힘을 가지고 있거든. 아마 죽음의 숲 근처에 가면 한 두 놈쯤은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제 2의 마계라 불리는 바이톤 만큼은 아니더라도, 마족들은 다른 차원에도 수 십 명씩 놀러 다닌 다고 했다. 아크아돈의 죽음의 숲은 바로 그렇게 휴양(?)온 마족들이 마음 편하게 머물기 위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숲 안에 마을이라도 지어놨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실제로 놀러왔다가 아주 눌러 살게 되는 녀석들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럼 이만 가봐야겠다. 아, 모를까봐 미리 말해두는 건데, 이제부턴 그 문장을 통해 나와 언제든 대화할 수 있을 거다. 저 썩을 도마뱀이 괴롭히면 곧 바로 연락해라.”
아직 완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나직한 살기가 흐르는 목소리에 나는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도 아들의 동료랍시고 기절선에서 끝내준 그의 자제력(?)에 경의를 표하면서 말이다.
그 뒤 엘뤼엔은 종종 연락을 취하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를 감싸고 있던, 눈앞을 현란하게 만들던 빛 덩어리들 까지 모두 공중으로 분해 되고 난 후였다.
한참동안 그가 사라지고 난 장소를 멍하게 바라보던 나는, 이윽고 바닥에 여기저기 널려있는 사제들을 보고는 허무하게 중얼거렸다.
“…이 사람들을 안으로 다 어떻게 옮기지?”
그야말로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오는 순간이었다.
이사나와 사제들이 정신이 차린 건 그로부터 약 1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라피스에게서 뽑아낸(?)마나로 정령들을 불러내서 그들을 신전 안으로 옮겨뒀던 나는, 하나 둘 씩 정신을 차리는 신관들을 보며 앞으로 닥쳐올 수많은 질문들을 대비하느라 잔뜩 긴장했다. 흔치않은 신의 강림 이었으니, 나와 엘뤼엔의 사이부터 제일 먼저 캐물을 것을 예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깨어난 그들은 기절하기 얼마 전부터의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곤란해 질 것을 염려한 엘뤼엔이 미리 손을 써두었던 모양이었다.
“저희들이 어째서 이런 곳에서…아, 엘님. 기도는 다 끝나셨습니까?”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대신관 루얀은 나와 눈이 마주치곤 서둘러 그렇게 물어왔다. 우리가 기도실에 들어간 직후부터의 기억이 사라진 듯싶었는데, 손님을 모셔놓고 잠이 들었다며 한참이나 자책하는 것을 괜찮다고 말렸더니, 내 얼굴(정확하게는 이마)을 보며 그대로 경악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근처 에 있던 다른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세상에, 신이시여!”
“오오! 어떻게 이런 일이!”
“맙소사…”
“…무, 무슨?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라이, 왜 그래?”
하나같이 입을 벌리고 감탄하는 모습에 당황한 나는,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이사나까지 덩달아 놀라는 것을 보며 불안하게 물었다. 그러자 녀석은 한 손을 들더니 여 보라는 듯이 자신의 이마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아무런 설명 없는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내가 지금의 상황을 인식하기에는 넘치도록 충분했다.
설마 엘뤼엔…이 아버지가!
“혹시…신의 문장이 이마에 새겨진…거야?”
떨떠름하게 묻는 말에 이사나 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던 다른 모든 사제들까지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고위 신관일수록 신의 문장은 눈에 뜨이는 부위에 새겨진다. 대신관이라는 루얀조차 손등에 새겨진 것을, 나는 정면으로 드러나는 이마에 받았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가 문장을 새길 동안에는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오르자, 나는 낭패감에 그대로 얼굴을 굳혔다. 제기랄, 엘뤼엔!
‘자식 사랑도 적당해야 한다는 거 몰라?’
차마 터뜨릴 수 없는 원성을 삼키며 허무한 웃음을 흘리고 만 나였다.
역사가 짧은 엘뤼엔의 신관을 제외하고도, 역대의 수많은 사제들을 통틀어 얼굴에 신의 문장을 받은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것이 대 신관 루얀의 설명이었다. 그것도 대부분 날 때부터 문장을 받은 이들로 차기 법황(교황이라고도 한다), 또는 현재의 대 신관이 되는 이들에 한해서였다.
나처럼 10살이 넘은 나이에(실제는 태어난 지 몇 달 안 되었지만) 일반인으로 살아온 시간이 긴 사람은 신의 문장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로도 충분히 기적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얼굴 부위에 받았으니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다고, 엉뚱한 타인이 한순간에 대 신관의 위치를 뛰어 넘어 버린 것이다.
현재 엘뤼엔의 신전은 국교화가 되지 않은 관계로 대 신관 외에 따로 사제들을 통치하는 교황의 존재가 없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어쩌면 내가 그들 중에 가장 높은 사람이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 증거로 아까보다 훨씬 대접이 지극해진 사제들을 보며 나는 결코 평탄치 않을 앞날을 예감했다. 때문에 가장 먼저 물어본 질문이란 것이 바로…
“솔트레테는 마신을 유일신으로 섬긴다고 알고 있는데요.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는 않나요?”
지금까지 일정을 통해서 본 사람들의 반응으로는 딱히 마신이라고 해서 더 섬기거나, 다른 신이라고 거부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그렇게 물었다.
원래 어떤 종교든 말단보단 지도부측에 속하는 인간들이 더 위험한 법이다. 다른 몇 백의 신도보다 한사람의 지도자를 잡는 것이 탄압을 하는 것에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얍삽하다고 욕할지는 모르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마에 새겨진 문장을 유지시킬 생각은 없는 나였다. 당장 엘뤼엔을 다시 호출하는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지워버리고 말리라.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지극히 희망적이었다.
“물론 사람들의 마음속 밑바닥엔 마신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다른 신전을 배척하거나 밀어내지는 않습니다. 이번 10년 재앙을 거치면서 그러한 경향이 더욱 강해졌죠. 그나마 솔트레테는 교황의 권력이 강해 모두 조심하고 있지만, 다른 제국은 피해만 주지 않으면 어떠한 종교라도 받아들이는 추세입니다.”
“흠, 이를테면 모든 신은 평등하다…라는?”
“약간의 높낮이는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쉽게 무시하거나 경멸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지구에 비해 신의 개입이 자유로운 아크아돈은 오히려 유일신을 섬기는 것이 더욱 무리였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어떤 제국, 어떤 왕국을 가도 신관의 지위를 가진 사람은 일반 귀족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고 했다. 일단 신의 문장을 받은 것만 확인 되면, 여행 시 영주의 저택에 머물 수 있는 권한까지 획득된다는 것이다.
이전에 변태귀족에서 시비를 당했을 때, 카이 씨가 일행 중에 속해 있었다면 훨씬 간편하게 물리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엘뤼엔의 고위사제라고 하면, 마신교의 법황이라고 해도 쉽게 대하지 않는다니 말이다.
처음 루얀은 내가 왜 그런 것을 묻는지 궁금해 하는 눈치였지만, 곧 여행 중이란 사실을 자각했는지 침착하게 설명했다.
“엘님은 ‘신의 선택을 받은 자’로서 대 신관의 자격을 수여받으실 수 있습니다. 아니, 누구라도 엘님에게 새겨진 문장을 보면 신전의 실세라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아무리 타 종교를 배척하지 않는 풍토라 해도, 여행 다니실 때 불편하신 점은 감수하셔야 할 겁니다.”
“하아…역시 그런가요?”
“신전에 계시기를 권유하는 바입니다만, 지금까지의 일정이 있으니 쉽게 결정하긴 어려우시겠지요. 정 귀찮으시면 앞머리를 내리거나, 서클렛을 통해 가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서클렛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말에 옆에 있던 이사나가 이마를 장식하는 보석류라고 설명했다. 대부분 귀족들이 착용하는 것으로, 쉽게 떨어지지 않게 고정되기 때문에, 앞머리보다는 그것으로 가리는 편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이다. 거의 500원 짜리 동전 크기만한 문장을 무난히 커버할 수 있을 정도의 보석 알이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상인들의 천국이라는 클모어에 설마 그 정도의 서클렛 하나 없겠는가? 일단 구입하기 전까지는 앞머리로 가리고 있기로 결정했다.
“참, 그러고 보니 라피스는? 아직도 못 일어났어?”
“으응.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좀처럼 눈을 못 뜨던데…”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기억이 사라진 이사나가 걱정스럽게 물어왔지만 그의 프라이드를 존중하는 셈치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신한테 까불다가 죽도록 얻어터졌다고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그의 일생 최고의 수치로 기록되는 사건이지 않을까 싶다.
“좀 불미스러운 일이 약간….별거 아니야. 그나저나 신력으로 다친 것도 치료가 될까 모르겠네.”
“신력으로 다치다니?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던데…그냥 기절한 게 아니라 어디가 아픈 거야?”
“음, 확실하게는 않지만 내상을 입었을 거야, 아마. 우선 치료부터 해보고 안 되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야지 뭐. 설마 죽기야 하겠어?”
“…엘…어쩐지 점점 사악해 지는 것 같아…”
훗. 너도 그 징글징글한 자식한테 한번 이리 채이고 저리 채여 봐라. 고운 말이 입에서 나오나. 솔직히 일정이 급하지만 않았어도 치료 같은 건 시도하지도 않았을 거다. 이왕 이렇게 된 거…알아서 쫓아올 때까지 내버리고 가버려? 상당히 솔깃한 유혹이 치밀어 올랐지만 미운 놈 떡 하나 주는 셈치고 치료해 보기로 했다.
방문하는 손님들을 위해 마련해 둔 숙소로 가니 침대위에 떡하니 누워있는 붉은 머리의 남자가 보였다. 이사나의 말처럼 아무런 흉터하나 없이 말끔한 얼굴이, 그냥 잠들어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평온한 모습이다.
잘생긴 얼굴이니 입만 다물고 있으면 상당히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속으로 혀를 끌끌 찬 나는 곧 녀석의 복부에 손을 올려놓은 뒤 치료를 시작했다.
【회복】
파아앗-
밝은 빛이 터져 나와 라피스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지만, 눈에 띄는 외상이 없어서인지 치료가 제대로 된다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대충 충분하다 싶을 정도의 힘을 퍼부어줬는데도 도무지 반응이 없자, 나는 그가 알아서 눈을 뜰 때까지 내버려 두기로 작정했다.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하지 않는 것에 진을 빼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설마 진짜로 일주일 뒤에 깨어나지는 않겠지.”
“왜? 그 정도로 상태가 심각한 거야?”
치유술을 사용했는데도 일어나지 못하는 라피스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이사나는,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심각하게 되물었다. 트로웰을 꼭 닮은 황금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나는 안심시키기 위해 가볍게 미소 지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니까 괜찮을 거야. 이래봬도 드래곤인데 곧 눈을 뜨겠지.”
“흐음. 그럼 라피스가 일어날 때까진 이곳에 머물러야겠네?”
“응, 뭐 어쩔 수 없지. 그냥 내버려두고 갈수는 없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좀 쉰다고 생각하자. 그 동안 편하게 논 적 거의 없었잖아?”
속단은 금물. 클모어까지 별 탈 없이 왔다 하더라도, 이 다음의 일정 역시 순탄할 것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정작 이곳까지 와서 후작의 도움을 구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아니, 어쩌면 이미 그 사이에 후작이 대공의 편으로 돌아섰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앞으로의 일이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만큼은 아무생각 없이 편히 쉬어두고 싶었다. 이사나도 같은 심정인지 크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만약 후작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글쎄…사실 이곳에 와야겠단 결심을 굳힐 당시만 해도, 카웰형님의 도움을 얻지 못하면 그냥 포기해 버릴 생각이었는데…이젠 아니야. 날 믿고 지켜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수도로 돌아가겠어.”
“후훗, 여전히 내 도움은 필요 없고?”
“이미 받을 대로 받고 있는 걸. 사실 엘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기도 힘들었을 거야.”
“그건 동료로서 당연한 거고. 뭣하면 네가 정령왕의 계약자라고 밝혀도 괜찮아. 나는 상관없으니까. 지금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는 아니잖아?”
운도 하나의 실력이다. 고로 나를 소환하게 된 이사나의 운도 실력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 그가 나를 이용해서 황권을 되찾든, 세계를 정복하든, 그것역시 그의 실력으로 봐줘도 무방했다. 자존심이 강한 이사나는 그 점을 상당히 민망스러워 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막상 후작으로부터의 지원을 약속받지 못하면, 녀석은 어쩔 수 없이 라도 ‘정령왕’인 내 존재를 이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불어 드래곤인 라피스의 힘 역시.
이용할 수 있는 대로 모두 이용하고 보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려진 밥상을 못 먹는 쪽이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이사나가 그 단계를 잘 조절할 수 있기만을 바랄뿐이었다.
라피스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4일 뒤, 그것도 사람들이 한참 단꿈에 젖어 있을 새벽 무렵이었다. 마침 그의 상태를 보려고 침대 곁에 다가갔던 나는, 아무런 미동 없이 눈만 시뻘겋게 뜨고 있는 그를 보곤 소스라치게 놀라 헉-하고 숨을 삼켰다. 정신을 차렸으면 차렸다고 기척이라도 낼 것이지, 눈만 뜨고 누워있을 건 뭐란 말인가?
멍하니 나를 돌아본 라피스는 잠시 후, 내가 괜찮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잔뜩 쉬어터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자식은?”
“응?”
“그 자식 어디 있냐고. 그…엘뤼엔…말이야.”
“엘뤼엔? 신계로 돌아갔는데.”
“뭐?”
벌떡.
4일이나 꼼짝 않고 누워있던 놈치곤 지나치게 멀쩡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며 놀라던 것도 잠시. 나는 곧 내가 치료술을 시전 해줬다는 것을 상기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근본적인 치료는 무리였어도, 일단 통증은 가라앉힌 셈인가….
그러나 그런 숨겨진 노고(?)를 전혀 모르는 라피스는 그저 엘뤼엔이 없다는 사실 하나로 분개하여 얼굴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비겁한 자식. 반격의 틈도 주지 않고 팬 다음에 튀었다 이거지. 감히 25년짜리 초짜 신 주제에! 뿌득”
“그 정도로 감사해. 더 쥐어 패려는 걸 참는 것 같았으니까. 말해두지만, 이번 일은 라피스 네 잘못이 컸어.”
“내가 뭘?”
억울한 듯이 돌아보는 라피스의 표정엔 일말의 자책감도 묻어있지 않았다. 그저 엘뤼엔만 죽일 놈이라는 건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자꾸 그의 성질을 건드렸잖아. 먼저 시비 건 쪽이 너라는 생각 안 들어? 오랜만에 만난 건데 말을 그 정도밖에 못해서야, 원. 그러니 이전에도 계약을 안 해줬지.”
“흥, 이미 과거의 일일 뿐이야. 물의 정령왕이 아닌 그에겐 관심 없어. 그러니 상냥하게 대해줄 필요도 없다고.”
“…그럼 나도 엘퀴네스에서 물러나게 되면 상관없다는 소리?”
“그거야 당연하지. 하지만 엘뤼엔에게 정말로 화난 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야. 같지도 않게 네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었잖아? 아들이니 뭐니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하아. 그러니까 자기 물건을 넘봐서 기분이 나빴다 이건가?
엘퀴네스를 향한 그의 집착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정말이지 이렇게 완벽하게 ‘물의 정령왕’만을 원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단순히 상대방을 향한 관심법이 서투르다고 생각한 게 잘못이었을까?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미안한데…엘뤼엔 말이 맞아. 일단은 내가 그의 아들이라고 되어있으니까 말이야. 비록 양자이긴 하지만.”
“뭐? 너까지 그의 말도 안돼는 장단에 놀아나고 있는 건가?”
“글쎄.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건, 너보단 그가 더 나를 생각해 준다는 거지. 나도 자존심이 있어서 ‘물건’보단 ‘아들’취급이 더 좋거든.”
“…물건이라고 하진 않았어.”
퉁명스럽게 중얼거리긴 해도 찔리긴 찔리는지 표정이 많이 누그러졌다. 그래도 아주 양심이 없던 건 아닌 모양이다.
“내가 아무리 부족한 게 많은 정령왕이라도, 당신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닐 이유는 없어. 물건 취급은 더 더욱 사양이야. 동료로서 받아주는 행동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그 점 명심해 줬으면 좋겠어.”
“못하겠다면? 그럼 계약을 다시 해지할 텐가?”
“그거야 당연한거 아닐까? 더불어 앞으로의 유희에 지장이 생긴다는 판단이 생겼을 시 그에 따른 조취도 서슴지 않을 생각이야.”
“호오, 죽이기라도 하겠다고?”
“적어도 드래곤 본체의 모습일 때라면 ‘살해 한다’라는 자책은 받지 않겠지.”
직설적으로 ‘그렇다’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이미 충분히 뜻은 전해졌을 것이다. 나도 이렇게까지 막 나갈 생각은 없었지만, 전혀 반성 없는 그의 태도로 봤을 때 앞으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나도 모르게 격해진 감정으로 응수한 것이 꽤나 효과가 좋았던 모양인지 라피스는 천천히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반쯤은 분한 듯이 투덜거렸다.
“기절했다가 일어난 사람한테 걱정의 말은커녕 살벌한 협박부터 건네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일어나자마자 엘뤼엔을 욕한 네가 더 나빠. 조금은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라고. 물의 정령왕이 아니니 상냥하게 대해줄 필요가 없다니. 너야말로 너무하다는 거 알아?”
“쳇.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아아, 알았어. 알았다고.”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소리는 내가 노려보는 눈빛에 눌려 그대로 쑤욱 들어가고 말았다. 질린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는 그의 모습에, 나는 그제 서야 딱딱하게 굳히고 있던 안색을 조금 풀었다.
“맞은 덴 어때? 아픈 곳 있어?”
“이제 서야 물어보는 거냐? 너 말이야. 정령왕 주제에 아버지를 챙기는 것도 좀 웃기지만…당장 현재의 동.료.에 대한 태도가 너무 무르다는 생각 안 들어?”
“멀쩡한 모양이네. 그럼 문제없지? 아침 되면 신전을 내려갈 생각이니까 준비 해 둬. 네가 안 일어나서 벌써 4일이나 신세지고 있었다고.”
“뭐?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기절해 있었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경악하는 라피스에게 나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면서 ‘일주일은 더 기절해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깼다’며 친절한(?) 설명을 추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신에게 맞아서 기절한 드래곤이라니…아무리 생각해 봐도 웃기지 않은가? 덕분에 라피스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마냥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그런 주제에 하나도 아픈 곳이 없다는 것을 단순히 자신의 신체적 조건이 뛰어나서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으윽! 그 빌어먹을 초짜신! 다음에 두고 보자! 감히 나를 4일이나 의식불명의 상태로 만들어? 드래곤 종족의 자존심을 걸고서라도 박살을 내주고 말테다!”
…저건 나도 일어나자마자 생각했던 말이었으니 딱히 꼬투리를 잡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사실 그가 아무리 애써봤자 엘뤼엔의 상대가 될 수는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라피스는 무심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나의 이마를 향하고 있었다.
“뭐냐, 그게? 신의 문장을 이마에 받으면 어쩌자는 거야? 눈에 띄려고 작정했어?”
“아아, 그게…엘뤼엔이 좀 오버한 모양이야. 아무래도 가리고 다녀야 할 것 같아.”
“나 참. 그 녀석은 신 주제에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정말이지 어쩔 수 없군. 기다려 봐.”
“……?”
툴툴 내뱉듯이 말한 그는 그 상태로 한 손을 내밀어 공중의 한 곳을 휘젓기 시작했다. 꼭 파리를 쫓아내는 듯한 볼 품 없는 동작이었지만, 그 행동이 끝났을 때 그의 손에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둥그런 물건이 들려있었다.
은으로 꼬아진 둘레에 푸른색의 촘촘한 보석알로 이루어진 그것은, 가운데에 야구르트 밑 바닥만한 크기의 투명한 다이아몬드가 달려 있었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모양새가 보석을 볼 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상당히 값비싸 보였다.
갑자기 등장한 정체불명의 물건에 의아한 시선을 보내던 것도 잠시. 나는 곧 라피스가 그것을 내 이마에 씌워주려는 것을 느끼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이거 서클렛?”
“보면 몰라?”
“헉. 이게 갑자기 어디서 난거야? 분명 아까 전 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잖아.”
“아공간에 저장해둔 내 개인 수집품중 하나야.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인가? 마황국 황실의 보물이었지. 인간들에게는 황금시대의 유산이라고 알려진 모양이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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