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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소설] 정령왕 엘퀴네스 13권

by 아도비야 2021.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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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소설] 정령왕 엘퀴네스 13권

 

 



13-1 귀환의 주문(1)

그때가 언제였더라?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이 세계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어난 일.

 모든 것의 시작은 명랑한 모습이 제법 귀여웠던 작은 소녀로부터였다.


 <선물이에요.>

 수줍게 웃으며 내밀었던 작은 목걸이.

 무심코 보기엔 그저 평범한 돌 조각이었지만 나는 그게 무엇인지 한번에 알아보았다.

 
 <와아, 조개화석이구나! 이런 건 어디에서 구했어?>

 <예전에 숲에 놀러갔다가 주웠어요. 엘 오빠한테 드릴게요.>

 <고맙다. 소중하게 간직할게.>


 그때 아무생각 없이 받았던 화석 목걸이는 지난 1년 동안 단 한번도 내 품안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

 무심코 꺼내 볼 때마다, 

심지어 그 안에 보조 마법을 거는 순간조차 나는 그것이 가진 진정한 가치에 

대해 단 한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 이 없었다.

 바로 오늘, 그안에 감춰있던 비밀이 우연히 풀리던 순간까지.

 

 " ............이런 걸 기적이라고 하는 건가."

오매불망 애타게 찾고 있던 물건을 우연히 만난 꼬마에게서 우연히 선물 받을 확률은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 

그리고 그것을 1년 가까이 까맣게 모르고 있을 확률은? 

아니 그보다 먼저, 산에서 무심코 주은 돌조각이 영혼의 보석일 확률은 몇이나 되지?

로또 복권에 1등으로 당첨됐다고 해도 지금의 나보다 더 경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나는 방금전 내게 벌어진 일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손 바닥 위에서 뚜렷하게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것을 아연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정체모를 눈부신 빛이 터진 이후, 랑시에게 선물 받았던 조개 화석은 그 형체도 남기지 않고 부서져 버렸다. 

그런데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한 순간 놀랍게도 그 안에 또 다른 물건이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지금 내 손에 놓여진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그저 붉은 색을 띌 뿐인 평범한 보석이었다. 

아니, 색이 고와 예쁘게 보일 뿐, 가공되지 않은 원석의 상태나 거의 다름없었다.

특이사항이라고는 돌 자체에서 미세한 열기가 느껴진다는 것 정도?

분명히 멋지긴 했지만 원체 정령계의 화려한 보석들에게 익숙해진 나로선 그리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못됐다.

... 그것이 내가 지난 1년 동안 무작정 찾아 헤매던 '영혼의 보석'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하...하하....하하.......농담이지?"


어떻게 이런 말도 안돼는 상황이 벌어질 수가 있는가! 이제껏 가지고 다니던 목걸이가 내가 찾던 물건이었다니! 
아무리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지만 이건 정말 해도 너무 하잖아?!


꿈에 그리던 상황도 막상 정말로 닥치면 믿기지 않는다더니, 바로 내가 그 짝이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기적'에 나는 한동안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방황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보석에서 느껴지는 확연한 '존재감'때문이었다.

한눈에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 한 엘뤼엔의 말은 옳았다.

지금 나는 착각이라고 외면 할 수도 없을 만큼 온 몸으로 보석이 뿜어내는 기운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라피스 라즐리, 그 망할 도마뱀의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화석에 갇혀있던 것에 대한 투정이라도 하듯, 

보석은 어마어마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여과 없이 내뿜고 있었다. 

이렇게 강력한 기운을 왜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것이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라피스? 너...라피스 맞지?"


이미 몇 번이나 실감하고 있었지만 나는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대답을 기대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사실이라고 해도 보석에 갇혀있는 녀석으로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 

결국 나 스스로 판단해야 할 몫인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머릿속에 선명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지지리도 둔한 녀석. 이제야 눈치 챈 거냐?

"!!"


마치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나를 나무라는 말투. 분명 나도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무엇보다 보석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 안니가. 

라미아스의 레어에서 봤던 보석 중에서도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에고소드로 조합된 녀석들의 경우엔 대화는 가능했지만 이미 이지가 상실된 상태라 감 정 없이 자연스럽지 않은 기계적인 말투였다.

혹시나 카노스나 엘뤼엔이 말을 건 게 아닌 가 고민하는데, 그새를 못참고 또다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 어이, 뭐하는 거야? 지금 나 무시 하냐? 이 몸이 친히 말을 걸어주고 있는데 감히 대답도 안 한다 이거지!

"라, 라피스? 진짜 라피스야?"

-장난 해? 그럼 내가 나지 누구야?


"맙소사.......너 어떻게 말을 하는 거야?"

-그건 또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 당연히 하니까 하는 거지.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녀석이 얼마나 황당한 표정을 하고 있을지 눈에 선명히 그려졌다. 

나는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는 것을 느꼈다. 

오랜 만에 만난 녀석이 이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에 적잖이 위안이 되엇던 것이다.

그때서야 나는 비로소 내가 현재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자각할 수 있었다. 이래저래 골치만 썩이던 도마뱀 녀석을 이제야 겨우 만나게 된 것이다.
 

'드디어 찾았다!'


아무런 단서도 없이 무작정 시작한 여행이었다.

실낱같은 희망에 모든 것을 걸면서도 혹시나 찾을 수 없을 까봐 얼마나 전전긍긍했던가.

그런데 정작 본인은 바로 옆에 있었다니.

그 한 많았던 여정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조금 억울한 기분이긴 했지만 지금은 녀석을 찾았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기로 했따. 

긴장이 풀리자 그제서야 충격으로 온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너무 안도한 탓일까? 울컥 북받친 감정에 눈물까지 나올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이 모든 것을 라피스에 대한 원망으로 돌려버렸다.


"이 나쁜 자식아! 여지껏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바로 옆에 있었으면 있다고 말이라도 하던가! 이제까지 완전 헛고생 한 거잖아!"


-윽! 왜 소리는 지그고 난리야? 지가 둔해서 눈치 못 챈 걸 가지고.

"뭐가 어째? 여기까지 찾으러 와준걸 고맙다고 하진 못 할망정! 은혜를 원수로 갚는 거냐, 이 화상아!"


이제껏 고생했던 일들이 떠올라 나는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라피스는 그 말에 죄책감을 느끼기보다 다른 부분을 궁금해 하고 있었다.


-그보다 말이야. 나 뭐가 어떻게 된 거냐? 찾으러 왔다고 한 걸 보니, 내가 어디 멀리라도 날아가 있었던 모양이지? 죽은 게 아닌 건가?


"뭐?"

-그렇잖아. 너랑 대화가 가능하다는 건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리 아니야? 근데 좀 이상하긴 하네. 아까 전 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너하고 느껴지는 거리 감각이 뭔가 애매해. 나 지금 뭐에 갇혀 있는 거냐? 주변의 기운만 느껴지지 정작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까 답답한 걸?

 

진지하게 묻는 목소리에 나는 방금 전까지 솟구치던 분노가 말끔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녀석이 어런 꼴이 된 이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더러 늦게 나타났다는 원망을 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까지 기억해?"

-폭발할 때 내가 널 감싼 것까지. 그 뒤로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당연히 명계로 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기로 보니 이 안이더군.


"후우. 그렇구나."

 

아무리 녀석이라도 자신이 엉뚱한 세상에서 보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지끈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쥐어짜듯 힘겹게 말했다.


"잘 들어, 라피. 너 죽은 거 맞아."


-뭐?

 

"설명하자면 긴데...넌 그때 확실히 죽었어. 지금 넌 영혼만 존재하고 있는 상태야. 정확히는 봉인되어 있는 거라고 해야 하겠지만."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처음부터 제대로 말해봐.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이제껏 있었던 모든 일들을 설명했다. 

그의 영혼이 엉뚱한 세상으로 사라져 버린 것과 보석이 되었다는 사실. 그 뒤 내가 그를 찾기 위해 차원 이동을 감행했으며,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바로 4천년 전의 아크아돈이었다는 것까지.


기나긴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라피스는 단 한마디의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 반응에 나는 속으로 바짝 긴장했다. 

무슨 핑계를 대든 녀석이 죽은 것은 나 때문이었다. 그로 인한 어떤 원망이나 비난이 쏟아져도 전부 감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입을 연 라피스는 의외로 지금의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고 있는것 같았다.


-영혼의 보석이라고? 게다가 지금이 4천년 전의 과거라는 말이지?


"어? 으응."


-쩝,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잖아? 보통 영혼의 보석은 타 차원으로 넘어가는 게 정상인데. 난 죽어서도 이 땅을 떠나지 못하다니, 
대체 무슨 질긴 인연인지 모르겠군. 이왕 이렇게 된 거 다음 환생도 아크아돈에서 하면 딱 좋을텐데. 안 그래,엘?


태연하게 묻는 목소리는 놀라움을 넘어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여유 만만한 반응에 나는 황당해져서 물었다.


"저기...괜찮아, 라피스? 충격 안 받았어?"


-흥! 날 뭐로 보는 거야? 내가 겨우 이 정도에 벌벌 떨 녀석으로 보여?


"겨우 라니! 자기가 죽었다는 걸 알았는데도 아무렇지 않단 말이야?"


-새삼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니까. 사실 그 상황에서 살아있다는 게 오히려 이해가 안됐었거든. 드래곤 하트가 완전히 파괴되었는데 이렇게 
멀쩡할 리가 없잖아?


"......!"


하긴. 그러고 보니 녀석은 부상을 당한 순간부터 이미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 순간 날 감싸던 때까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었던 거겠지.


그때의 상황이 떠올라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 나 때문에....."

-네가 왜 사과 하냐? 난 그저 목숨을 걸고 지키겠단 약속을 지켰을 뿐이야. 어쨌든 기분은 좋은걸? 네가 날 찾기 위해 모험까지 감수하다니. 
대신 죽어준 보람이 있군.


"... 난 하나도 안 고맙거든요?"


-킥킥. 꽤 놀랐던 모양이지? 근데 일찌감치 찾아놓고 눈치 못 챈 것은 좀 문제 있는거 아니냐? 뭐, 그것도 너답기는 하지만.


"우씨! 누가 조개껍데기 안에 들어가 있을 줄 알았냐고! 나도 지금 엄청 황당하니까 비꼬지 마!"


-비꼬긴 누가 비꼬았다고 그래? 그냥 그렇다는 말이지. 근데 돌아갈 방법은 있는 거냐?


설마 아무 생각 없이 쫓아온 건 아니겠지? 대놓고 묻지는 않았지만 끝나는 말의 뉘앙스에서 이러한 분위기가 풍겼다.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당연하지! 그런 대책도 없이 무작정 왔을까봐? 엘뤼엔이 날 여기 보낼 때 귀환의 주문을 알려줬어. 그걸 외우면 당장이라도 돌아갈 수 있다는 말씀!"


-호오, 그렇군. 그럼 이제 슬슬 출발하지?


"에? 벌써?"

-벌써 라니. 날 찾는 게 목적 아니었어? 이렇게 무사히 발견 했으니 이제 돌아갈 일만 남은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아직 여행이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내가 돌아가는 즉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나에 대해 모두 잊어버릴 것이 뻔했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떠나기에는 뭔가 아쉬운 구석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고민하자 라피스는 짜증내며 말했다.

 

-뭘 망설여? 난 지금 답답해 죽겠다고. 빨리 이 좁은 공간을 벗어나고 싶단 말이야.


"앗! 잠깐만 기다려. 아무리 그래도 동료들에게 작별 인사는 해야....."


-나~참, 다른 곳도 아니고 과거잖아. 어차피 돌아가면 또 만날 녀석들인데 뭔 작별 인사야? 네가 여기에 오래 머물면 머무를수록 그쪽은 애가 
탄다는 거 몰라?


반박할 여지없이 옳은 말 뿐이었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1년. 

하지만 원래의 세상은 이보다 더 오랜 시간이 흘렀을 수도 있었다.

육체를 남겨두고 왔다곤 해도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 긴급한 상황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나는 체념의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에휴,알았어. 가면 될 거 아니야. 어디보자, 주문이....."

 

천천히 과거의 기억을 더듬던 나는 잠시 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맙소사!


손끝이 벌벌 떨리고 입이 저절로 멍하니 벌어졌다. 

그러자 내게서 뭔가 이상한 기미를 느낀 듯 라피스가 덩달아 긴장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뭐야, 너? 왜 말을 하다 말아?


"......"


-엘?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다급하게 묻는 목소리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암담한 현실에 피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라피스, 어떡하지?"


-뭐가?


"귀환의 주문을....잊어버렸어."

휘이잉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사이로 황량한 바람소리가 스치고 지나갔다.


시릴 듯이 차가운 공기였다.

13-2. 귀환의 주문 (2)

-너 바보냐?

 


푸욱!


오랜 시간 끝에 라피스가 내뱉은 말은 내 가슴에 적나라한 비수를 꽂았다. 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비틀거리며 원망스럽게 보석을 노려보았다. 

확실히 귀환의 주문을 잊어버린 건 바보 같은 짓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그렇게 말 할 필요는 없잖아? 누가 잊어버리고 싶어서 잊어버렸냐고!

 

"이런 썩을... 넌 말을 해도 그때위로 밖에 못하냐?"


-흥. 여기서 본인이 바보라는 자각도 없으면, 그건 양심이 없는 거지.


"우띠! 난 지금 인간이라고! 1년이나 지난 일을 어떻게 기억해?"


-쯧쯧, 그걸 핑계라고 대는 거냐? 그런 줄 알았으면 미리 적어놓기라도 하던가. 지금 자기가 준비성 없다고 자랑하는 거야?


-으으으으윽!

 

하여튼 말이나 못하면 밉진나 않지!

마땅히 반박할 만한 것을 찾지 못해 나는 두 주먹을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에 아랑곳없이 라피스는 계속해서 나를 추궁했다.

 

-이제 어쩔 거야? 어떻게 돌아갈 거냐고! 미래와 다시 연락할 수단도 없는 거야? 아예 여기서 눌러 살자는 건 아니겠지, 설마?


"누, 누가 그렇대? 좀 기다려봐! 차분히 생각을 해야 대책이 떠오를 거 아냐. 혹시 알아? 이러다가 문득 주문이 생각나게 될지."


-과연 그럴지 의문이군.

 

빈정거리는 대꾸에 기분이 확 상했지만 나는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이 와중에도 머릿속에서는 떠오를 듯 말듯 주문의 조각이 어지럽게 
흩어지고 있었다. 대중도 순서도 없이 마구 얽혀있어서 기억을 가다듬으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때 마침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나를 복잡한 상념 속에서 이끌었다.

 

"엘? 아까부터 멍하니 뭘 하고 있어?"

"...응? 아, 시, 시벨리우스?"


아참! 그러고 보니 지금 나 혼자 있는 게 아니었지?


정신을 차려보니 시벨리우스가 나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용건을 묻던 나는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난처해질 수 밖에 없었다.


눈이 잘못되지 ㄴ않은 이상 다들 방금 전 화석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게다가 앞뒤 없이 곧바로 대화까지 시작했으니, 누가 보더라도 상당히 수상쩍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 모든 일을 해병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저절로 아파졌다.


"시, 시벨. 그,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목걸이가 부서졌다고 하더니, 괜찮은 거야? 그러게 그렇게 꽉 쥐고 잇으니까 그렇지. 안 그래도 너무 세게 쥐는 것 같아서 주의를 주려고 했었는데, 
너무 늦어버린 건가?"


"에?"


"응? 왜 그래? 화석이 부서져서 고민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의아하게 묻는 시벨리우스는 방금 전 벌어진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혹시 못 본 건가? 대화 내용이야 그렇다 쳐도 그렇게 눈부신 빛이 눈에 띄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녀석은 멋대로 내 손을 끌어다 그 안에 있는 보석을 확인하려고 했다.

 


"어디 보여줘 봐. 약간 금이 간 정도라면 고칠 수 잇을 것 같은데. 완전히 산산조각 난 거야?"


"어엇?자, 잠깐만!"

 

뒤늦게 녀석의 하는 양을 눈치 챈 나는 기겁했지만 막상 손바닥 안에 자리 잡은 붉은 보석을 보고도 시벨리우스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말에 나는 아연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어? 멀쩡하네? 아깐 부서졌다고 하지 않았어?"


".....뭐?"


"이것 봐. 목걸이 아무 탈 없이 무사하잖아. 다행이다, 엘. 선물 받은 걸 망가뜨리지 않게 돼서.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가 강화마법이라도 
걸어둘까?"


"......"

 


녀석은 붉은 보석을 보고도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둔한 나라도 이쯤 되면 뭔가 상당히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얼굴 근육이 경직되는 것을 느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기, 시벨. 한 가지만 물어볼게. 넌 지금 이게 조개화석으로 보이는 거야?"


"응? 그럼 조개 화석이 아니야? 하긴, 언뜻 보면 그냥 평범한 돌조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으음, 혹시 아까 전에 뭔가 이상한 일이 있지는 않았어? 가령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던가."

 

"빛? 아니, 그런 건 없었는데."

 


순순히 대답하면서도 시벨은 도통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더이상 물으면 없던 의심까지 생길 것 같아 나는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보석의 모습이  내 눈에만 온전히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더 정확한 증명을 위해선 쟈스민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물어야겠지만 눈치로 봐서는 굳이 그런 과정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영혼의 보석은 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에게만이 본 모습이 제대로 보이는 게 아닐까?

 

'으음, 오내지 그럴듯한데? 하지만 이상하군. 그럼 왜 처음부터 보석으로 보이지 않았던 거지?'

 

한 가지 의문이 해결되면 곧바로 또 다른 의문으로 이어지니 미칠 노릇이었다. 내 표정이 심각해 보였는지 시벨리우스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엘? 왜 그래? 무슨 일 있는 거야?"


"아, 아니야, 아무것도. 아무튼 엉뚱한 질문해서 미안해, 시벨리우스. 이런, 날이 벌써 이렇게 됐네? 이제 슬슬 정비하고 출발하자.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노숙할 자리도 마련해야 하니까."

"응! 알았어. 모두에게 알릴게!"

 

씩씩하게 대답한 시벨리우스는 쟈스민의 일행이 있는 쪽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나는 녀석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린 후에야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슬쩍 닦아냈다.


"휴우.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를 모르겠네. 내 눈으로는 아무리 봐도 보석인데, 왜 화석으로 보는 거지?"

 

그러자 라피스가 한심스럽다는 듯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몰라서 물어? 당연히 너랑 내가 같은 세대의 존재니까 그렇지. 원래 영혼의 보석은 본래 시간대의 존재에게만 제대로 보이는 법이야. 
넌 정령왕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냐?


"엥? 하지만 처음엔 나한테도 그냥 화석이었는데?"


-그건 그냥 나를 감싸고 있던 노폐물이었을 뿐이야. 원래 아름다운 보석이라도 진흙 속에 뒹굴다 보면 빛이 가려질 때가 있는 법이잖아?

 

아,예. 그러십니까.

이런 순간까지도 잘난 척을 멈추지 않는 녀석을 보며 나는 속으로 짧게 혀를 찼다.

 

"아무튼 다행이야. 시벨리우스 한테 들키지 않아서. 응? 가만?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시벨리우스는 영혼의 기운에 민감한 종족이라고 했는데, 
왜 이제껏 모르고 있었던 거지?"


-흥! 그야 너 때문이지.

"에? 내가 왜?"

-네가 날 들고 있잖아. 너한테서 느껴지는 정령의 기운이 강해서 내가 발산하는 영혼의 느낌이 가려지는 거지. 당연한 거 아니야?

 

"헉 ...서,설마? 지금 난 인간인데?"

 


-인간이라고 네 영혼까지 인간이냐? 게다가 평범한 인간도 아니잖아. 설마 보통 인간의 육체가 정령왕의 영혼을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

 

그건 그랬다. 강지훈일 때도 툭하면 몸이 아팠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으니까.


그럼 지금까지 라피스를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나 때문이었단 말이야? 내가 녀석의 기운을 방해해서? 

그리고 정작 나는 위에 쌓인 먼지덩어리들 때문에 못 알아봤단 말이지!

 

'젠장!'

 


이걸 어디다 하소연 할 데도 없고! 돌아가서 말해봤자 바보취급만 받겠지?

억울하면서도 차마 본통조차 터뜨리지 못하는 나를 라피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비웃었다.


-웬만하면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어리버리한 것도 마냥 매력인 건 아니야.

 

"시끄러! 입 다물어. 자꾸 놀리면 나 혼자 콱 돌아가 버릴 거야!"


-헹! 할 수 있으면 해보시지? 귀환의 주문도 모르는 주제에.


"크으윽!"

 

이 자식이 이렇게 얄미운 놈인 지 왜 잊고 있었을까!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한참동안 부들부들 떨었다. 말싸움에 져서 이렇게 열 받아 본 건 꽤 오랜만인 것 같다. 

역시 이 녀석하고는 친해질 래야 친해질 수가 없다니까?!

 

그 때 엘뤼엔이 내게 말을 걸어온 건 라피스로서는 천만 다행의 일이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그대로 집어던져서 흔적도 안 남을 정도로 밟아버렸을 테니까.

 

"아까부터 혼자서 뭘 하는 거냐?"


"으응? 헉! 아, 아버지! 언제 왔어?"


"계속 이 근처에 있었다만?"

 


찌푸린 얼굴로 말꼬리를 올린 엘뤼엔은 무언가 상당히 수상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보석에 대해 눈치 챈 건 아닌것 같고, 내 행동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모양이다. 

하긴, 아까부터 라피스와 대화하고 있었으니 ,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보기엔 내가 허공에 대고 혼자 떠들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설마 미쳤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뜨끔해진 나는 한손으로 뒷머리를 긁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미,미안. 혼잣말이 좀 시끄러웠지? 이제 조용히 할게."

"무슨 소리냐?"

"응? 나 혼자 서 중얼중얼 거리고 있는 게 이상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중얼거렸다고? 글쎼. 내가 봤을 땐 그저 그 볼품없는 돌조각만 빤히 바라보는 것 같았는데. 이상하군. 선채로 꿈이라도 꾼 거 아니냐? 
잠은 저녁에 자라."

 

"......"

 


하나 뿐인 아들내미를 가볍게 벙찌게 만들어 놓고 엘뤼엔은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났다. 

뭐랄까. 아무래도 라피스와의 대화는 알아서 차단되는 시스템(?)이 발동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것도 영혼의 보석과 같은 시대의 존재에게 주는 
혜택인 걸까?


하지만 이런 고민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라피스가 생각할 틈도 가질 수 없게 시끄러운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앗! 방금 전 그녀석 엘뤼엔이지! 아까 그 빌어먹을 놈도 그렇고, 넌 왜 아직도 저런 녀석들하고 같이 다니는 거냐? 현대에서도 그러더니 
과거에서까지 아주 징하게도 붙어 다니는 군! 헛! 설마 트로웰까지 있는 건 아니겠지?

 

"그 설마가 맞다면? 염려놓으셔. 지금은 헤어졌으니까.


-쯧쯧. 어째 넌 만나는 대상에 발전이 없냐? 지겹지도 않아?

"...그러는 너도 여전히 지칠 줄 모르는 구나. 이제 그러려니 해도 되지 않았어?"


-시끄럿! 어서 귀환의 주문이나 기억해 냇! 빨리 돌아가잔 말이다!


"하아......"

 


잠시 못 본 사이에 라피스는 더욱 신경질 적이고 참견하는 성격이 되어있었다. 

앞으로 녀석에게 달달 시달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얼굴이 홀쭉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 구석이 든든해지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녀석에게 의지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은 녀석을 찾았다는 사실보다, 같은 기억을 공유한 상대를 만났다는 사실이 더욱 기뻤다. 

녀석과 함께라면 과거에서 좀 더 머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13-3. 귀환의 주문 (3)

"하압!"

 


휘익! 타닥! 촤아악!


"크악!"


목적지인 리첸에 가까워지자 우리를 쫓는 무리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인해전술이라도 펼칠 모양인지 하루에도 몇 번씩 여러 집단의 어쌔신들이 덤벼왔다. 

오늘만 해도 총 5번째 공격을 받은 참이라, 언제 어디서 또 적들이 나타날지 신경을 항시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육체적인 것보단 정신적인 피로가 만만치 않았다.


"수고했어, 엘! 이번에도 정말 멋졌어!"

 

마지막 녀석까지 베어내고 나니 멀리서 마차를 보호하고 있던 시벨리우스가 환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나는 주위에 늘어진 시체들을 보며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휴우, 총 11명인가? 달아난 녀석은 없었지?"


"응. 그 녀석들이 전부야. 근데 피곤하지 않아? 계속 혼자 싸웠잖아. 이제 나랑 교대할까?"


"아냐. 괜찮으니까 넌 쟈스민양 쪽이나 잘 챙겨줘. 난 여자들을 돌보는 건 영 자신이 없거든."

"알았어. 그럼 힘들 때 말해. 언제든지 교대해 줄 테니까. 알았지?"


고개를 끄덕인 나는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마차를 몰고 있는 엘뤼엔에게 다가갔다. 

살벌한 전투가 벌어진 직후임에도 그는 무료한 듯 나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내 모습을 바라보더니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


"전의 공격 때보다 처리가 느리군. 네가 저 정도 놈들에게 상처를 입다니, 왠일이냐?"

"그냥 가볍게 스친 거야? 순수한 검의 대련이면 문제없는데, 여기저기서 암기가 날아다니니까 완벽하게 피하기가 힘들었어. 
게다가 수법도 점점 더 교묘해지고."


"시간차 공격 말이냐? 쫓는 상대를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아붙이는 것은 어쌔신들이 즐겨 사용하는 방식이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그렇지."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처음엔 조무래기들로 힘을 빼놓고 강한 놈들은 나중에 투입되잖아. 아무리 나라도 체력전이 길어지면 자신 없다고. 
그렇다고 이 정도의 녀석들에게 정령술을 겸해서 대응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는단 말이지."


그러자 엘뤼엔의 답변이라는 것이 가관이었다.

 


"걱정마라. 다치면 치료정도는 해줄 테니까. 죽지만 않으면 언제든 완벽한 상태로 전투에 임할 수 있을 거다. 어디 마음껏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워봐."


"윽! 그게 아버지란 자가 아들에게 할 소리야?이럴 땐 괜찮을 거라느니, 넌 할 수 있다느니 등의 격려의 말이 필요한 법이라고!"


"난 나름대로 격려였다."

"그게 어디가?"

 

"보통 평범한 인간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만 자각해도 용기를 얻지 않던가? 말만으로 위로하는 것보다야 확실하지."


"...아버지는 부자 간의 로망을 너무 몰라."


"그런가?"

나는 뭐가 문제냐는 듯 바라보는 엘뤼엔을 보며 속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어김없이 머릿속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과연 과거의 엘뤼엔 답군. 무신경하고 무뚝뚝한 물의 정령왕.


"시끄러. 닥쳐."


-쯧쯧. 이제 그만 현실을 인정하라고. 원래 저런 놈이라니까? 넌 저런 놈을 아버지로 삼고 싶냐?


"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누구나 성격은 변하기 마련이고, 실제로 엘뤼엔은 많이 변했어. 이런 부분으로 실망하고 싶지 않아."


-쳇, 하여튼 끔찍하다니까.


투덜거리는 녀석을 무시한 다음 나는 마차로 시선을 돌렸다. 

여자들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일절 마차 밖으로 몸을 내밀지 못하게 당부해둔 참이었다.


대강상황이 종료되었으니 그녀들도 안심을 시켜야 할 것 같았다. 

굳게 닫힌 창문을 똑똑 두드리자 삐걱하고 열리며 창백하게 질린 쟈스민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는 나를 보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엘!"

"괜찮아요, 두 분다? 대충 상황이 마무리 되었으니까 이제 안심하세요. 앞으로 며칠만 더 고생하면 리첸에 도착할 겁니다."


"아아, 가, 감사합니다. 저희를 위해 이렇게까지...."


"별 말씀을 .이동 속도는 계속 이대로 유지합니다. 일단 좀 더 두고 보다가 쫓아오는 무리가 없는 것 같으면 노숙할 장소를 찾아보죠. 
먼지 들어가니까 이만 창문 닫으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정비하며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까맣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다행이 더 이상 공격할 생각이 없는 듯, 저녁 무렵이 되자 쫓아오던 어쌔신들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노숙할 장소를 마련 할 수 잇었다. 

짐을 풀고 간단히 식사하는 동안 시벨리우스는 주변에 알람마법을 설치에 만약의 상황을 대비했다. 


그때 나는 구석에서 오늘 하루 전투에서 입은 상처들에 약을 바르고 있었다. 

치료마법을 받으면 간단한 일이었짐나 자잘한 고통에는 익숙해질 생각에 일부러 부탁하지 않았다.

 

"윽, 쓰라려. 뭔 놈의 약이 이렇게 독한거야?"


-약이란 게 원래 다 그렇지. 그냥 치료해 달라고 해. 고생을 사서할 필요가 뭐있냐?

"그건 안 돼. 너무 마법에만 의존하면 의지력이 약해진다고."


-어차피 일회용이잖아. 네가 계속 인간으로 있을 것도 아닌데, 그럼 어때서? 일회용 육체에 신경 쓸 사이에 돌아갈 생각이나 하라고.


"우씨, 너 자꾸 일회용,일회용 할래 재촉 좀 하지마. 지금도 계속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니까."


-퍽이나 기억나겠다. 인간의 망각 작용을 만만히 보지 말라고. 차라리 그 사이에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게 더 낫지 않겠냐?

"다른 방법 이라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알아서 생각해야지.


이런 천하에 도움이 안 되는 놈!


나는 뻔뻔한 녀석의 작태에 분노하며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 사이 주위의 경계를 전부 완료했는지 시벨리우스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상처는 어때, 엘?"

"신경 쓰지마. 가볍게 스친 것들 뿐이니까."

"그래? 그나마 독이 없어서 다행이다. 정말 혼자서 싸워도 괜찮겠어? 이러다 큰일이라도 나는 건 아닌지 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괜찮아. 어차피 어쌔신들의 목적은 마신의 헌물이잖아. 리첸에 도착하면 더이상 쫓지 않을 거야. 앞으로 2,3일만 버티면 돼."


"하지만 괜찮을까? 그들을 보낸 자들이 이제껏 방해한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으려고 할 것 같은데. 리첸을 벗어나면 다시 공격 당할지도 몰라."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럼 당분간 거기서 머물지 뭐. 놈들이 알아서 지쳐 떨어져 나갈때까지."


"그래도 돼, 엘? 영혼의 보석은 어쩌고? 지금도 상당히 돌아가는 길이잖아. 너무 늦어지면 친구의 목숨이 위험하지 않을까?"


"엥? 무슨 친...아, 내 친구 말이야?"


의아하게 바라보던 나는 이전에 보석을 찾기 위해 지어낸 설정을 떠올리고 뜨끔해져서 물었다. 시벨리우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주를 받았다는 그 친구 말이야. 의식도 없으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을 텐데, 빨리 찾아서 돌아가야지. 그러다 그 사이에 굶어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아, 그, 그건 문제 없어. 장기간 체력이 유지되도록 특별한 관리를 받고 있을 테니까. 몇 년 정도는 버틸 수 있다고 하니까 조금 돌아가더라도 
큰 지장은 없을 거야."


"으음. 엘이 그렇다면야 난 상관없지만...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다, 엘. 네 사정도 급한데 쟈스민양의 일까지 도와주고. 그러기 정말 쉽지 
않았을 텐데."


"하하! 내 사정이 급하다고 힘없는 여자의 일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잖아?"


"엘.......!"

 


워낙 레이디 퍼스트 정신에 사로잡힌 종족이라서 인가? 남들이 들으면 황당해할 변명도 녀석에게는 무리없이 먹혀들었다. 

상당히 감동한 듯 보이는 시벨리우스를 외면하며 나는 슬쩍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냥 사실대로 보석을 찾았다고 말해도 될 일을 내가 이렇게까지 숨기는 이유는 간단했다. 

당장 아무 목적도 없이 대륙을 떠돌게 될 상황만큼은 최대한 피해보려는 것이었다.


보석을 찾기 위해 끌어들인 일행인 만큼, 내가 라피스를 찾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모두 본인읜 용무를 위해 나를 떠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시벨은 몰라도 엘뤼엔 만큼은 분명히 그럴 것이다.(지금도 그리 좋아서 동행해주고 있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되면 정말 막막해진다. 당장 본래의 시간대로 돌아갈 수도 없는 내가 라피스와 달랑 둘이서 뭘 하며 지낼 것인가! 

그것도 녀석은 보석의 상태인데. 심심하지는 않더라도 어떤 일에든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했다.


어쨌든 이러한 꿍꿍이로 나는 당분간 처음 정해진 일정을 유지해볼 생각이었다.

이대로 산맥에 가서 보석을 찾는 척 시간을 보내며 귀환의 주문을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지금은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니까.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요즘 들어 유력하게 떠오르는 생각을 확인해볼 요량이기도 했다. 내용은 이랬다.


'혹시 처음 도착했던 장소에 돌아가면 뭔가 떠오르는게 있지 않을까?'

 

지금으로선 근거없는 확신이었지만, 도착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해결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생겼다. 

물론 , 라피스는 어림도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지만.

 


-웃기는 소리. 너 그런 것에만 희망을 가지고 있다간 평생 못 돌아 갈 거다. 그러니까 일찌감치 운으로 해결할 생각은 집어 치우시지?


"윽! 그럼 어떡해? 전혀 생각이 안 나는 걸."

-휴우. 이런 바보한테 내 미래를 맡겨야 한다니.

"쳇."

 

 


한탄하는 라피스의 말에도 나는 볼만 퉁퉁 불렸을 뿐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었따. 

이거야 찾아와줘서 고마워하라는 생색을 내기에도 참으로 민망한 상황이 아닌가. 어차피 돌아가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인 것을.

목적을 이루어 놓고도 이렇게 헤매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설마 엘뤼엔도 내가 주문을 잊어버렸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래의 그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 했다.

13-4. 뜻밖의 동행 (1)

두두두두-


새벽 내내 신나게 달린 마차는 어느새 어둠을 가르고 환한 햇빛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아침이 밝아져 오고 있었던 것이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평야는 어느새 끝이 나고 저 만치 웅장한 성곽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바로 도시 리첸으로 들어서는 입구였다. 

그것을 발견한 나는 신이 나서 모두에게 큰 소리로 소리쳤다.

 


"다들 봐! 리첸이 바로 코앞이야!"

 

그러자 지금까지 달리는 것에만 주력하고 있던 일행들이 한마디씩 중얼거렸다.

 

"그렇군."


"와아, 벌써 다 왔네. 밤새 잠 안자고 달린 보람이 있었는 걸? 신나지, 슈? 조금 후면 맛있는 여물을 먹을 수 있을 거야. 쉬지 않고 달려서 
피곤하겠지만, 조금만 더 힘내자."

 

히히힝!


시벨리우스의 격려에 그가 타고 있던 말-'슈'는 기분 좋다는 듯 푸레질을 했다. 나또한 민국이를 다독이며 힘차게 앞으로 전진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라피스의 몰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쳇,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기뻐하긴. 도시가 어딜 가든 다 똑같지.


"똑같지 않아. 며칠을 고생해서 도착한 곳이라고."

 

-흥!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녀석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한 상태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좁디좁은 공간에 갇혀서 혼자만 동떨어진 상태라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모양이었다. 

평소 유희를 좋아하는 성격인 만큼, 아무것도 못하고 얌전히 있는 상황이 갑갑하긴 갑갑할 것이다.

 


'설마 이대로 아주 못 돌아가게 되는 건 아니겠지.

 

불길한 상상을 애써 외면하며 나는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엘? 뭘 그렇게 생각해?"

 

"으응?"

 


화들짝 놀라서 바라보니 시벨리우스가 바로 옆에서 말을 몰며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근데 왜?"

 

"방금 내가 한 말 들었어? 어쌔신들이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했는데."


"아~ 그랬어? 미안. 어쨌든 나도 추격전에 시달리지 않게 되서 안심했어. 도시 안은 치안이 엄하니까 습격을 받지는 않겠지?"

 

"아마 그럴 거야. 마신전에 도착할 때까진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겠지만."


"뭐, 좋아! 우리가 책임지고 데려다 주자고."

 

씨익 웃으며 말하자 녀석 또한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마차 안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무로 된 창문이 삐걱하고 열렸다. 쟈스민이었다.

 

"어머, 벌써 아침이군요."


"일어났어요, 쟈스민? 밤 새 삐걱거리는 마차에서 자느라 많이 불편했죠?"


"이 정도는 괜찮아요. 내친김에 더 고생하는 셈 치죠. 이제 조금 후면 여관에서 푸욱 쉴 수 있을 텐데요, 뭐."


"네? 여관에서요?"

 

어리둥절하게 묻는 그녀에게 시벨은 검지로 자신의 앞을 가리켰다. 

고개를 좀 더 내밀어 그가 가리킨 방향을 본 쟈스민은 이윽고 서서히 환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세상에!리첸! 저기 앞에 보이는 도시가 리첸인게 맞나요? 다 온 거군요?"

 

"네, 맞아요. 이제 조금 후면 입성이예요."


"오오! 마신의 가호에 감사드립니다. 이게 설마 꿈은 아니겠지요?"

 


그동안의 여정이 힘들긴 힘들었는지 그녀는 감격한 얼굴로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곱게 자란 귀족 아가씨로선 생각지도 못한 험난한 여행이었을 테니 기쁘긴 엄청 기뻤을 것이다. 

하녀인 로잔 또한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연신 쟈스민과 함께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래도 지금까지의 정황상,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는지 약간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저어, 그런데 쫓아오는 무리들은?"


"해가 뜨기 전부터 점차 줄어들더니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어요. 놈들도 리첸이 바로 앞이라 포기한 모양이에요."


"그렇군요. 정말 끈질긴 자들이었어요. 설마 다른 가문에서도 이런 일을 겪었을까요?"


"그랬을 것 같은데요. 놈들이 쟈스민양의 집안만 노리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혹시 이쪽만 예외일수도 있겠네요.
워낙 조심성이 없는 편이었으니까. 안 그래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짓궂게 건네는 말에 쟈스민의 볼은 금새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떻게 저렇게 쉽게 얼굴을 붉힐 수 있는 거지? 여자애들은 참 신기하단 말이야.


나는 창피해서 어쩔 줄 모르는 쟈스민에게서 시선을 돌려 마차를 몰고 있는 엘뤼엔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무료한 표정을 하고 있는 그에게 나는 가볍게 농담을 걸었다.

 

"여~ 능숙하다 못해 연륜마저 느껴지는 걸? 이제 마부로 취직해도 되겠는데, 아버지?"


"시끄럽다. 저리 가라."


"쳇, 재미없긴. 심심해 할까봐 신경써주고 있는 거잖아."


"필요 없다."

 


어떤 말을 해도 단답형의 대답이 돌아오니 더 이상 말을 걸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역시나 화목한 부자하고는 거리가 

먼 건가?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돌아서려는 순간, 갑자기 그가 나를 불렀다.

 

"엘."


"응? 나 불렀어,아버지?"

 

반갑게 돌아본 나는 그의 눈빛이 싸늘해져 있는 걸 깨달았다. 그는 앞을 주시한 상태 그대로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누군가 오고 있다."


"......누구? 어쌔신들이야?"

 

"아니, 그놈들보다 더 강한 녀석들이다."

 

"숫자는?"

 

"셋이로군."

 

꿀꺽!


이번에야 말로 정예를 보낸 건가?

생각보다 긴장했는지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러자 엘뤼엔은 말을 건 후 처음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잔뜩 얼굴을 경직싴니고 있는 나를 보고는 피식-하고 웃더니 편안한 어투로 말했다.

 


"걱정마라. 살기는 없으니까."


"엥? 그럼 적이 아니야?아,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인가?"


"아니, 정확히 우리 쪽으로 오고 있다. 우리 중 누군가에게 용건이 있는 것 같군."


"대체 누구에게......"

 


말을 흐리며 무심코 주위를 둘러본 나는 어느새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는 시벨리우스를 발견했다. 

별다른 말도 행동을 보인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엘뤼엔이 말한 '누군가'가 바로 녀석임을 깨달았다.

 

내 느낌이 맞다면 녀석은 지금 상당히 화난 상태였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은 엘뤼엔과 마찬가지로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녀석은 엘뤼엔에게 부탁하여 말과 마차를 세우도록 했다. 이윽고 일행이 멈추자 그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시벨리우스, 왜 그래?"


"엘, 물러나 있어. 아무래도 이번엔 내 문제인 것 같다."

 

"하지만......"


"부탁해. 나 혼자 해결하게 해줘."


"......"

 

조금은 철없는 어린애처럼 사근사근하던 말투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녀석을 찾아온 자들이 누군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윽고 아무것도 없던 전방에 흐릿한 세 개의 형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로브와 깊은 후드로 인해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었지만, 대충의 체구를 보아 여자한명과 두 명의 남자 같았다.

 

바로 지척까지 다가오자 그들ㅇ느 하나둘씩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벗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존재들과 친분이 그리 많지 않은 나에게도 익히 익숙한 얼굴이었따.

 

'유니콘이로군. 시벨의 약혼녀인 웰디와, 그녀의 호위 기사들인가.'

 

나는 곱지 않은 눈으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들의 목적이 시벨리우스를 데려가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아가게 되면 녀석은 틀림없이 서클렛 안에 봉인 될 것이다.


'알고 있었지만... 역시 전개대로 이루어지니 기분이 좋지는 않군.'

 

내가 속으로 짧게 혀를 차는 사이 시벨리우스는 좀 더 그들 앞에 다가가고 있었다. 

마주편의 일행들도 걸음을 박차며 그에게 달려왔다.


"시벨리우스님!"

 

고운 미성의 목소리와 함께 웰디가 환하게 웃으며 시벨의 품에 안겨 들었다. 그 뒤에선 호위기사들은 그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눈으로 인사를 받는 시벨리우스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진 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웰디는 쉴새없이 재잘거렸다.

 

"아아! 보고 싶었어요, 시벨리우스님! 이날 이때껏 아무런 연락이 없으시다니! 제가 얼마나 걱정한지 아세요?"

 

"여기엔 어떻게 온 거지?"


"당연히 시벨리우스님을 찾아왔지요! 이제 그만 마을로 돌아가요! 할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천진하게 웃으며 말하던 웰디는 잠시 후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이제서야 시벨리우슨의 눈동자가 싸늘해져 있는 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시, 시벨리우스님? 어째서 그런 표정을?"

 

충격을 받은 듯 떨면서 묻는 그녀에게 시벨리우스는 냉정하리만치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


"시, 시벨리우스님!"


"날 찾아오라고 한 기억은 없다. 네가 이러는 건 날 방해하는 것 밖에 안 돼. 돌아가라, 웰디. 날 실망시키지 마라."


"어, 어떻게 그런 말씀을?"

 


비틀


"웰디님!"

 

그녀의 몸이 휘청거리자 뒤편에 서있던 호위 기사들-아렐과 카리안-이 서둘러 달려와 양쪽에서 부축했다. 

하지만 웰디는 가볍게 그들을 물리치며 울먹이는 눈으로 시벨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인간 세상의 유희 때문에 저를 냉대하시는 건가요? 혹시 마음속에 다른 여인을 품으신 거예요?"


"웨, 웰디님!"

 

"무슨!!"

 

그녀의 파격적인(?) 질문에 호위 기사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그에 비해 시벨리우스는 이미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것에 더욱 약 올랐는지 웰디는 거의 악을 쓰듯이 외쳤다.

 

"제가 모를 거라 생각하신 건 아니겠지요? 저는 시벨리우스님의 감정에 공명할 수 있어요! 다 알고 있어요! 여행을 떠난 뒤부터 당신의 가슴에 
나 따위는 설 자리가 없어졌다는 걸! 마을에서 머물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훨씬 행복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그게 어느 한 존재 때문이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하지요? 제 말이 틀렸나요?"


"웰디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호위 기사 중 아렐이 다급하게 만류하기 시작했따. 하지만 시벨리우스의 대답은 허무할 정도로간단했다.

 

 

"맞아."

 

"!!"

 

"헉! 시벨리우스님!"

 

그가 너무 쉽게 긍정해버리자 두 유니콘은 기겁하며 웰디의 얼굴을 살폈다. 

역시나 그녀는 금방이라도 호흡이 끊어질 것처럼 창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어도 입을 통해 직접 확인을 받는 것에는 더욱 큰 각오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시벨리우스의 말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연애감정은 아니다. 그만큼 소중하지만 분명히 달라. 뭐,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해봤자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네가 불안해하는 건 아차피 내가 너 외의 다른 존재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이잖아. 그렇지?"


"...마, 맞아요! 그게 잘못됐나요? 전 당신의 약혼녀에요! 당신의 감정을 독점할 권리가 있다고요!"

 

사람 마음이 물건이냐? 독점을 하고 말고 하게?


거의 억지나 다름없는 웰디의 태도는 옆에서 보고 있는 나마저 얼굴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였다. 

하지만 시벨리우스는 그저 가만히 자조적인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따.

 

"한 가지만 물을게, 웰디. 네가 원하는 나는 마을에서의 시벨리우스냐?"


"그, 그야 당연하지요! 저만이 아니라 모두가 당신이 마을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좋아. 그렇다면 간단하군. 네가 독점할 감정 따윈 아무것도 없다, 웰디. 마을에서의 난 아무런 감정도 없는 존재였으니까."


"!!"


"태어나서부터 나는 늘 혼자였다. 그것을 어색하게 생각해 본적도, 외롭다고 느낀 적도 없었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어떤 부분에서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어졌다. 그러니, 네가 가질 수 있는 것들도 그런 것들뿐이야. 네가 원하는 것이 그거냐?"


"...그, 그건 마을을 버리시겠다는 뜻인가요?"

 


한참의 침묵 끝에 웰디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물었다.

주위의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는 가운데, 시벨리우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 때가 되면 알아서 돌아가겠다. 다만 지금은 시기가 아닐 뿐이야."


"정말이시죠? 저희 동족을...버리지 않으시는 거죠?

"내가 버린다고 버려지는 자들이 아니잖아?"

 

시벨리우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웰디는 안심한 듯 두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대충 마무리가 된 셈인가?

평화롭게 흘러가는 공기에 내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다시 눈을 뜬 그녀가 도전적인 모습으로 소리쳤다.

 

"그럼 저도 함께 동행 하겠어요!"


"...헉!?"


"웰디!"


"웰디님!"

 

설마 이렇게까지 따라붙으려 할 줄이야!

기겁한 남자들이 서둘러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웰디의 태도는 강경했다.

 


"마을로 돌아가시는 시기가 될 때까지, 저 또한 시벨리우스님 곁에서 함께 여행할 거예요! 전 당신의 약혼녀예요! 
당신이 찾아가는 감정이 어떤 건지, 당신이 바라보는 세상은 무엇인지 저 또한 알고 싶어요!"


"웰디, 하지만 그건......"


"거절 하지 말아주세요! 이건 제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해요! 소중한 존재를 만드셨다고 하셨지요? 하나를 만들면 두 번째는 더 쉬워요. 
이제 곧 시벨리우스님 곁에는 또 다른 소중한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거예요! 그들 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제가 될 수 있도록, 
제 자리를 제가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청순하고 얌전한 느낌을 가진 소녀로 보여 지지 않는, 씩씩한 고백이었다. 그런 진심어린태도에는 시벨리우스도 어쩔 수 없었는지, 
한참만에야 머리를 짚으며 물었따.

 

"하아......진심이냐?"


"물론이에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는 바로 시벨리우스님이니까요. 저희 동족은 일생 단 한명만을 사랑하며, 절대 찾아온 사랑을 포기하지 않아요.
 시벨리우스님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그렇다면, 부디 저를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그녀의 간곡한 부탁에 시벨리우슨ㄴ 이들을 만난 후 처음으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녀석은 어색한 눈빛으로 나를바라보았다. 
동행의 여부를 내게 허락받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다가올 미래를 알고 있는 나로선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저들과의 동행이 독이 되어 시벨이 봉인되는 결과를 낳게 될 수도 있었으니까.

 

'어떻게 하지?'

 


나는 일순 망설였지만 웰디의 눈동자에 서린 단호한 의지를 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시벨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돌아보게 할 기회를 얻고자 했고, 시벨은 이에 승낙했다. 그 사이에서 내가 방해할 수 있는 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알기론 봉인에 풀려난 이후로 시벨은 한 번도 웰디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

어차피 결과가 같다면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힘내, 시벨리우스. 부디 그녀가 너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길.'

13-5. 뜻밖의 동행 (2)

"어머, 그러고 보니 당신은? 혹시 이전에 노예시장에서 만났던 그분이 아닌가요?"

황당하게도 웰디는 동행이 완전히 결정되고 나서야 나를 알아보았다. 시벨과 대화하는 동안 내내 옆에 있었는데도 전혀 알아보지 못한 건가? 나는 조금 어이없었지만 그녀가 무안해하지 않도록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엘입니다. 오랜만이네요."

"아아! 역시 그랬군요! 설마 당신이 시벨리우스님의 일행이셨을 줄이야!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다니, 엘님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모양이네요."

"아하하! 그런 것 같네요. 어쨌든 당분간 함께 다니게 될 것 같으니, 지내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저도."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나는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아렐과 카리안과도 간단히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둘 다 겉으로 드러난 태도는 단정했지만,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불쌍할 정도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쯧쯧! 예나 지금이나 말괄량이 아가씨를 모시느라 고생이 많구만.'

이런 호위기사들의 애타는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웰디는 그저 행복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 환한 미소는 마차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쟈스만을 발견하자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다.

"…시벨리우스님, 저기 있는 여자 분은 누구죠?"

"음? 아아, 쟈스민 양 말이로군, 리첸까지 잠시 동행하게 된 분들이야. 마침 잘됐다. 같은 여자이니 당분간은 저분과 함께 마차를 타면 되겠어."

"자, 잠시만이요, 시벨리우스님! 그새 저 아닌 다른 여자를 만드신 건가요? 설마 소중한 존재라는 게……!"

"하아! 웰디, 잠시 동행하는 거라고 했잖아. 며칠 후면 헤어질 사람들이야. 제발 엉뚱한 상상 좀 하지 마."

그녀의 오해는 시벨리우스의 한마디로 간단히 종결되었다. 그래도 일행 중에 여자가 섞여 있다는 것이 불만이었는지, 웰디의 표정은 좀처럼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에게 쟈스민을 소개하는 자리에서는 때 아닌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인사해, 웰디. 이쪽은 쟈스민 양. 인간 중에서도 신분이 높은 귀족이니까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라. 쟈스민, 이 녀석은 웰디라고, 저희 마을의 말괄량이입니다. 아직 철부지이긴 하지만 나이보단 생각이 깊은 아이이니 잘 부탁합니다."

"시, 시벨리우스님!"

한순간에 자신을 철없는 아이로 몰아가는 발언에 웰디는 억울한 표정으로 시벨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이에 쟈스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호호! 상황은 마차 안에서 다 지켜보고 있었어요. 가까이서 보니 훨씬 더 귀여운 아가씨네요. 안녕하세요, 웰디. 만나서 반가워요. 우리 친하게 지내요."

"흥!"

"웰디! 너, 정말! 죄송합니다, 쟈스민. 이 녀석이 이종족에 대한 경계심이 강한 편이라……."

"호호! 괜ㅊ낳아요, 시벨리우스님. 오히려 솔직한 감정 표현이 아주 보기 좋은걸요. 어린 아가씨가 시벨리우스님을 아주 잘 따르는 모양이네요."

순진한 건지 교활한 건지, 쟈스민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사람 좋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에 알 수 없는 한기가 더더욱 심해져가는 가운데,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마무리 지어버린 존재가 등장했으니!

"대체 언제까지 이곳에서 정체할 거냐? 계속 이런 식이면 버리고 갈 거다."

"……!"

삐딱하게 말을 건넨 사람은 바로 마부 자리에 앉아 있던 엘뤼엔이었다. 안 그래도 불편한 상황 속에서 갑자기 끼어든 일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는 대놓고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였다면 불쾌하게 맞대응했을 유니콘들이 이번엔 어쩐 일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웰디는 물론, 그녀의 수호기사들까지 말이다. 엘뤼엔을 바라보는 얼굴이 하나같이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인 것은 내 착각일까?

이렇게 되자 상황을 수습한 것은 시벨리우스였다.

"아, 미안해. 이제 다 됐어. 그러고 보니 아직 그쪽에서는 소개를 못했군. 이쪽은 우리 마을의 웰디라고 해. 정식 네임은 '라반 루 웰디'. 장로 할아범의 하나뿐인 손녀지."

그의 소개에 웰디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엘뤼엔을 주시했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떨어질까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그것을 느낀 듯, 엘뤼엔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흠, 공주님이셨군. 여행 허락은 받고 온 거냐?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엘이 동의해도 허락할 수 없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것은 사양이야."

"무, 물론이죠! 할아버지께 확실히 허락받았어요!"

"그래? 그런데 나이가 어려 보이는데 '루'라……. 아직 일족 최고 여성의 자격을 부여받기엔 이른 거 아닌가?"

"헉! '루'의 의미를 아세요?"

"왜? 알면 안 되나?"

"아, 아니요. 그 의미를 아는 인간을 본 것은 처음이라……."

말을 하면서 당황한 듯, 웰디의 얼굴은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것을 본 나는 황당하다 못해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허둥지둥 하는 꼴이 영락없이 짝사랑 상대를 앞에 둔 순진한 소녀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건 대체 뭐 하자는 시추에이션인지. 방금 전까지 시벨리우스를 향해 약혼녀 운운하던 장본인이 바로 딴 남자한테 한눈을 팔면 어쩌자는 거야?

내가 이렇게 뜨악한데, 만년 '죤 사랑' 쟈스민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파직! 그녀의 눈에 불꽃이 확 타올랐다고 느낀 순간, 약간 높아진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호호호! 역시 죤님은 대단하셔요! 다른 종족에 대한 지식에 대해 해박하셨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제게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이번엔 웰디의 눈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어머나! 장본인이 바로 앞에 있는데 굳이 다른 분께 여쭐 필요는 없어요. 쟈스민이라고 하셨죠? 원하신다면 제가 친절히 알려드리지요."

"아, 아니요. 전 죤님께 부탁드린 것이니,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무래도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보다는, 며칠간 함께 동 !거 !동 !락 ! 해온 분께 부탁을 드리는 편이 제 마음이 더 편하니까요."

왠지 엄한 곳에서 악센트가 강하게 느껴진 것 같은 건 내 착각만이 아니겠지? 명백한 그녀의 도전장에 웰디는 잠깐 얼굴을 굳혔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호호!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누구나 다 처음부터 친하진 않으니까요. 다 이런 식의 대화를 통해 시작하는 거 아니겠어요? 아, 하긴. 어차피 이제 며 ! 칠 ! 밖 ! 에 함께하질 못할 테니, 저와 굳이 친분을 쌓을 필요가 없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무, 무슨 뜻이죠?"

"별거 아니에요. 그저 시벨리우스님과 잠 ! 깐 ! 동행하는 사이라고 들어서요. 즉, 목적지에 도착하면 바로 헤어진다는 뜻 아니겠어요? 정말 안타깝네요. 또 알아요? 시간을 두고 만났다면 친자매 같은 사이가 됐을지."

"큭!"

아아, 살기가 느껴진다, 살기가.

여자의 한이 무섭다더니. 서로를 노려보는 두 여자 사이엔 감히 끼어들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팽팽한 신견전이 느껴졌다. 평범한 처녀가 내뿜는 기운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투지였다.

"그렇게 서운해 하지 않으셔도 돼요.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 한 계속 연락을 드릴 테니까요. 이래 봬도 저희 가문이 유명한 상단과 친분이 있는지라 대륙 어디에도 손쉽게 연락망을 구축할 수 있답니다. 함께하진 못하더라도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돕고 싶네요."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까지 있나요? 신경 쓰지 ㅇ낳으셔도 저희는 제 갈길을 잘 가게 될텐다요. 혹시 이런 말을 아시는지 모르겠네요. 배려도 지나치면 민폐가 된다고."

"뿌득! 그럼 이런 말을 아시는지 저도 여쭙지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뭐라고요? 제가 굴러온 돌이라는 소리인가요?"

어머머! 실례.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실 것까지야. 비유가 그렇다는 거지요. 비유가. 호호!"

'슬슬 말려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불안해하는 나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 상황을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눈빛이 반짝거리는 것이, 결투가 벌이지면 당장 팝콘이라도 사다 먹으며 구경할 기세였다. 심지어 호위기사들 마저 응원하고 있을 정도니 말을 더해 무엇이랴.

'결국 말릴 사람은 나뿐인가.'

깊은 한숨을 내쉰 나는 슬슬 두 여자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기요, 이제 그만들 하시고 출발하죠. 이러다 여기서 밤새겠어요."

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실수였다. 갑자기 쟈스민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결정적인 기회를 잡은 사람처럼 내게 달라붙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머! 미안해요, 엘. 저도 모르게 너무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불쾌했던 건 어니죠?"

"예? 아, 아니, 뭐……."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래? 부담스럽게 눈을 반짝거리며 친근한 태도를 보이는 쟈스민의 모습에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웰디는 심히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그녀가 왜 이런 행동을 보이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 죤님은 너무 부럽다니까요. 학실도 높으시고, 인물도 출중하시고, 게다가 이렇게 멋진 아드님까지 있으시다니, 지금까지 혼자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아요. 주위에 여자들이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 같은데. 안 그래요, 엘?"

"……!"

"아, 아들?"

기겁하는 웰디에게 쟈스민은 마치 천사처럼 상냥한 얼굴로 설명했다.

"호호~ 놀랐지요? 여기 계신 이 귀여운 소년이 바로 죤님의 외아들이랍니다. 그나저나 죤님으로선 상당히 곤란하시겠어요. 저렇게 젊으신데 새 아내를 맞이하려면 적어도 아들과는 어느 정도 나이 차이가 있어야 할 테니. 아무래도 아들과 동갑으로 보이는 외모는 많이 곤란하지 않겠어요?"

"……."

You Win!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잇는 쟈스민의 머리 위로 한차례 은박의 글자가 반짝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반면, 웰디는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를 봐도 멀쩡한 청년인 엘뤼엔에게 나만 한 아들이 있다는 사실은 엉첨난 쇼크인 모양이었다.

하필 내가 전에 쟈스민을 떼어놓기 위해 사용한 수법을 그녀가 고스란히 이용해서 승리할 줄이야!

나는 조용히 침몰해가는 웰디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여자의 무서움을 실감했다.

 

*          *          *

 

리첸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통행인을 감시하는 검문소가 있었다. 영주, 또는 기관에서 발급한 신분증이 없으면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마법사인 시벨리우스의 활약으로 우리는 무사히 그 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바로 투명마법을 사용해서(불법이니 따라하지 마시길).

하지만 안에 들어섰다고 해서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사방에 뿌려져 잇는 수배자 전단들 때문이었다. 그 안에는 얼마 전 세피온 공국에서 '기적'을 일으킨 정령사에 대한 수배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두말 할 필요 없이 나에 대한 것이었다.

한동안 인적이 없는 길만 다녀서 잠잠해졌다 싶더니만, 큰 도시에서는 여전히 나를 찾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본래 제대로 길을 갔다면 소로(小路)를 따라 국경을 넘기 때문에 상관없었지만, 리첸은 엄연히 세이크 제국의 일부로 황제의 명령권에서 피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 사이에 라미아스가 알아서 잘 해결해놨을 거라 믿었건만, 이번 일은 사안이 워낙 큰 탓인지 쉽게 물릴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차라리 이전처럼 다시 머리 스타일을 바꿀까도 싶었지만, 한사코 반대하는 시벨리우스 녀석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덕분에 나는 한동안 쓰지 않았던 후드를 다시 꺼내 입었다. 내친김에 여벌로 가지고 있던 후드를 꺼내어 일행에게 건네주었다.

"자, 다들 입어."

"응? 왜 우리들까지?"

"작은 마을이라면 모를까, 이곳에선 모두 후드를 쓰는 편이 좋겠어. 도시라 유동인구가 많잖아? 괜히 사람들 눈에 띄어서 귀찮아질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 별로 눈에 띄는 것 같지는 안은데."

어이, 어이! 본인의 외모에 전혀 염두에 뒤지 않고 있는 거냐?

나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잇는 시벨리우스를 기막힌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카리안과 아렐 또한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저 똥한 시벨리우스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마차와 그것을 호위하는 남자들 정도면 어딜 가도 평범한 구성인데 굳이 후드까지 써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맞다, 이만한 인원이 모두 후드를 쓰는 것이 오히려 눈에 띄지 않겠나?"

"에효~"

어디 가까운 포물점이라도 찾아가 거울이라도 사줘야 할까?

나는 좀처럼 이해 못하는 얼굴을 하는 유니콘들에게 또박또박 설명을 시작했다.

"잘 들어. 구성은 평범할지 몰라도 다들 외모가 너무 눈에 띈다고. 여자들이야 마차에 잇으니까 상관없다 쳐. 하지만 남자들은 어떻게 할 거야? 시벨리우스는 잘생긴 데다 흔하지도 않은 은발에,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다들 기준치 이상의 얼굴이잖아. 설마 그 정도의 자각도 없는 건 아니겠지? 그럼 나 정말 화낼 거야!"

"아, 아니, 그거야 알고 있지만, 그게 문제가 된다고?"

"당연하지! 인간들은 모두 잘생긴 사람들을 보면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본단 말이야."

"그래? 상당한 이상한 심리로군."

"어쨌던! 이런 관계로, 다들 자신의 외모를 가려주는 것을 충실히 해줬으면 좋겠어. 게다가 인간도 아니고, 다들 엘프로 폴리모프한 상태잖아. 큰 도시라서 대놓고 술수를 쓰지는 못하겠자만, 여기 인간들은 늘 호시탐탐 이종족을 노리고 있다고. 노예시장에서의 일을 벌써 잊었어?"

유니콘들은 그제야 이해한 듯 잠자코 후드를 받아들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여자들에게 마차 밖을 내다보지 않도록 주의를 준 다음에서야 이동을 지시했다.

다행히 거리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후드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용병단 중에서도 단체로 얼굴을 가리고 다는 자들이 많았기에 우리 또한 그런 자들 중 한 무리로 보는 듯했다.

어느 정도 짐작한 일이었지만, 도시 안은 세피온 공국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소문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검술대회 자제가 이슈였던 만큼 그곳에서 벌어진 참사가 상당히 큰 충격이었던 같았다. 사상자가 워낙 많았으니 앞으로 족히 몇 년간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까? 게다가 정령왕이 가담한 일이었으니 역사에도 크게 기록이 남을 것이다.

잠시 쉬기 위해 들렀던 음식점에서 나는 어김없이 그때의 뒷이야기를 접할 수 잇었다.

"어이, 소문 들었어? 세피온 공국이 아주 쑥대밭이 되었다며?"

"이 사람아, 그 이야기가 퍼진 지 언젠데 이제 와서 뒷북이야?"

"헤헤! 그런가? 그래,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 공국은 이제 완전히 무너진 건가?"

"아니, 쑥대밭이 된 것은 검술대화가 열렸던 경기장뿐이라더군. 하지만 사상자가 엄청나. 참관하러 갔던 대부분의 귀족들이 몰살했더라니까? 족히 이십 명이 넘는 중앙 귀족들이 거기에서 죽었다고. 혹자는 어느 세력이 득정 파벌을 견제하기 우해 일부러 테러를 시도한 게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더군."

"뭐? 그게 정말이야?"

"쯧쯧! 그냥 그럴지도 모른다는 애기야. 하지만 듣기론 그날 죽은 귀족들 대부분이 2황자를 지시하는 자들이었다는군."

"뭐? 그럼 1황자파의 귀족들이 이번 일을 주도했다는 소린가?"

"쉿! 이 사람아, 목소리가 너무 커, 요즘 그 일로 예민해져 있는거 모르나? 말 함부로 잘못했다간 경비대에게 끌려갈 수 있다고."

낮게 경고하는 말에 상대편 남자는 질겁한 얼굴로 입을 틀어밖았다. 한동안 불편한 헛기침이 이어지고, 그들은 다른 화제로 서둘러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번엔 그저 가족이나 이웃에 대한 평범한 이야기들이었다. 남의 시시콜콜한 대화를 엿들을 생각은 없었기에 이제 그만 신경을 끄려고 하는데, 이어지는 이야기가 또다시 내 흥미를 이끌었다.

"아참, 그런데 자네, 그 소식은 들었나? 요즘 이변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던데."

"이변이라니?"

"글쎄, 요 근래 다량의 몬스터 무리가 떼를 지어 이동한다고 하더군. 한두 군데도 아니고 대륙 다방에서 흔히 그런 현상이 목격된다는 거야."

"허허! 그게 뭐가 큰일이라고. 몬스터 무리야 워낙 흔하지 않나. 지금까지처럼 토벌대가 나서면 되는 것을."

"어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들이 향하는 목적지가 어딘지 알아? 바로 저 블루 드래곤 라미아스가 살고 있는 유크레나 산맥이란 말이세."

"드, 드래곤?"

상대편 남자가 놀라는 것만큼 나 또한 놀랐다. 드래곤의 이름이 내 귀에 무척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였다.

'라미아스라니, 그가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잇는 거지?'

호기심이 동한 나는 아예 대놓고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 드래곤은 이미 한참 전에 수면기에 접어들었다고 들었는데? 왜 그곳으로 몬스터가 몰리는 거지?"

"낸들 아나. 어쩌면 벌써 깨어나 활동을 시작한 걸지도 모르지. 아니, 그게 틀림없어. 몬스터를 다룰 수 잇는 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드래곤뿐이니까. 아무튼 그렇게 모인 숫자만도 얼추 1만을 넘어서고 있다는 소문이야. 그래서 근처 도시의 치안대들이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다고 하더군."

"그렇겠군. 그만한 숫자가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곤란할 테니."

"곤란하다 뿐인가. 아주 완전히 박살날 걸세. 듣자니 이종족들의 낌새도 영 수상하다던데, 그 일과 관계가 없기를 바랄 수밖에."

"허허! 세상이 왜 이러는지. 드디어 멸망하려는 겐가."

"이 사람아, 말이 씨가 된다는 소리도 모르는가? 재수 없는 소리는 하지들 말게."

나무라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그들의 대화는 다시 일상에 대한 것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우리가 앉은 식탁 위로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나는 방금 전에 그들의 대화가 너무 신경 쓰여 영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시벨리우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엘, 뭐 해? 식사 안해?"

"응? 아, 으응. 입맛이 없네."

"헤에, 엘이 웬일이야? 먹는 것 하나는 늘 열심히 챙겼으면서. 혹시 아까 저 사람들의 대화 때문에 그래?"

그러자 쟈스민을 제외하고 테일블에 앉아 있던 일행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쏠리기 시작했다 다들 청각이 뛰어난지라 나처럼 그들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었다.

"너무 신경 쓰지마, 드래곤이 모슨터를 모으는 일이야 이전부터 흔했으니까."

"그래? 하지만 숫자가 1만을 넘어간다고 하니 좀 이상해서."

"대량으로 식사라도 할 생각인가 보지. 뭐, 덩치만큼 많이 먹는 종족이잖아."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시벨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한 다음, 옆에서 묵묵히 주스를 마시고 있던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저기, 아버지."

"뭐냐."

움찔!

엘뤼엔을 부르는 호칭에 멀리 앉아 있던 웰디가 어깨를 들썩거리는 것이 보였다. 멍하니 벌린 입과 흔들리는 눈동자에 경악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바로 몇 시간 전, 쟈스민에 의해 부자관계가 폭로(?)된 후로 그녀 앞에서 엘뤼엔을 부르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은 그녀에게 '아버지'란 호칭이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오죽하면 호위기사인 아렐과 카리안조차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겠는가. 나는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혹시 무너가 짐작 가는 일 없어? 여기까지 오면서 들은 말 있을 거 아니야."

내가 물은 것은 라미아스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계약자인 엘뤼엔이라면 흑여 일이 벌어지기 전에 뭔가 들은 것이 있을까 싶에서였다. 엘뤼엔 또한 내 말의 뜻을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는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모른다. 다른 녀석들이 뭘 하고 사는지 따윈 내 알 바 아니야."

"으음, 너무한다. 좀 주위에 관심 좀 가지고 살라고."

내가 가볍게 투덜거리자 그는 미간을 잔뜩 좁힌 얼굴로 나를 잠시 노려보았다.

그때, 잠자코 있던 일행 중 카리안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중얼 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저희 마을에서도 뭔가 이상한 움직임이 잇는 것 같았습니다만."

"네? 무슨 일인데요?"

내가 호기심을 보이자 그의 옆에 있던 아렐이 살벌한 눈빛을 보냈다. 그 때문에 카리안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자 시벨리우스가 냉큼 끼어들어 물었다.

"말해봐라 카리안."

"시벨리우스님! 저희 일족의 일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꺼내기에는……."

"내 동료이고, 모두 믿을 수 있는 자들이다. 상관하지 말고 대답해, 카리안."

항의하는 아렐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벨리우스는 묵묵히 카리안만을 바라보았다. 이에 카리안은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재촉하는 그의 눈빛에 못 이겨 허둥지둥 대답했다.

"아, 예. 저도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누군가가 장로님께 익명의 편지를 보냈더군요. 그날로 마을에서 내로라는 전사들을 정비시키는 것을 보아 군사를 모으려는 것 같았습니다."

"엥? 군사? 무슨 일로요?"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설마 전쟁이라도 벌어질 예정인가?

점점 일이 꼬여가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그때, 한심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퍼졌다.

<뭘 그렇게 고민하냐, 바보야? 척하면 척 생각나는 게 있어야지.>

"어? 그럼 넌 짐작 가는 게 있어, 라피스?"

<그야 물론! 시대와 날짜를 잘 계산해봐. 딱 감이 오는 게 없냐?>

"그, 글쎄? 내가 역사 공부를 한 것도 아닌데, 이 시대의 일을 어떻게 알아? 그것도 문서의 기록조차 사라진 황금시대의 일인데."

<그래도 듣긴 했을 거다. 잘 생각해봐.>

"전혀 기억 안나."

내가 계속 헤매기만 하자 라피스는 포기했다는 듯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불쌍한 널 위해 내가 큰맘 먹고 알려주지. 형님이라고 불러봐.>

"됐어. 치사해서 안 듣는다."

<쳇! 알았어. 그냥 말해줄게. 아마 내 예상이 맞는다면 누군가가 군대를 모으고 있는 걸 거다. 유니콘뿐만 아니라 다른 이종족들 사이에서도 지금쯤 군사를 뽑고 잇을 걸?>

"뭐? 그런 일을 하는 게 누군데?"

<있어,  그런 미친놈이. 정신이 완전히 나가서 인간들을 전부 쓸어버리겠다고 다짐하던 게 내가 알기론 아마 이 시대쯤이였거든.>

"……!"

벌떡!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아 올라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전광석화처럼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 왜 그래?"

"……?"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나를, 일행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들의 시선 따윈 전혀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인간들의 멸족! 이것 하나만으로 이미 모든 것이 설명된 게 아닐까.

"…트로웰."

라피스를 찾았다고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아직 내게는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남아 있었다.

13-6. 몬스터의 습격 (1)

리첸에 들어선 이후, 우리는 곧바로 숙박할 곳부터 찾았다. 얼마 후에 시작되는 마신전의 행사 탓에 가는 곳마다 만원이었지만, 다행히 중심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적당한 여관을 잡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우리 일행은 쟈스민과 함께하고 있었다. 그녀와의 동행은 사실상 리첸에 들어선 이후로 종결되었어야 했지만, 혹여 가는 길에 소매치기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하에 완전히 신전에 들어갈 때까지 함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여관에서 약 반나절 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 나는 엘뤼엔과 함께 쟈스민을 마신전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교리 수업을 듣기 위해서는 사전에 미리 접수를 해야 하는데, 바로 그 기간이 내일 아침까지 였기 때문이다.

시벨도 함께 가고 싶은 눈치였지만, 웰디가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해야 하는 사명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남기로 했다. 호위기사들이 있긴 하지만 정작 유사시에 그녀를 제대로 막을 수 있는 존재는 녀석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시벨, 다녀올 테니까 쉬고 있어."

"응. 알았어, 엘. 빨리 와야 해?"

"그래그래."

녀석의 어린애 같은 말투에 킥킥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어디선가 따끔한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아렐과 카리안이 경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 눈을 잔뜩 부릅뜬 것이 흡사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다. 저들로서는 이런 천진한 어투를 사용하는 시벨을 본 적이 없을 테니 놀랍기도 무척 놀라웠으리라.

"시, 시벨리우스님이……."

"이봐, 인간. 대체 저분께 무슨 사술을 쓴 거냐?"

멍해진 카리안, 그리고 나를 추궁하는 아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무래도 나 때문에 녀석이 이상하게 변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두 유니콘을 무시하며 엘뤼엔과 함께 여관을 나섰다.

쟈스민과 그녀의 하녀인 로잔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기다리셨죠? 자, 이제 출발하죠."

"감사해요, 엘. 이렇게 신전까지 바래다주시고. 정말 톡톡히 신세를 지네요."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저도 마신전에 가보고 싶었거든요."

길을 나서니 우리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신전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신전에 바칠 헌물을 실은 것으로 보이는 짐수레가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었다.

대륙 곳곳마다 마신전이 있지만 대사제가 잇는 곳은 오직 리첸에 있는 마신전 하나뿐이었다. 그 때문에 마신의 교리 수업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리첸으로 와야만 했다.

마신전에서 열리는 교리 수업은 1년에 단 한 번 약 일주일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그 대상은 주로 부호나 명망 있는 귀족의 자제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기간 동안 지불하는 수업료가 굉장히 비쌌기 때문이다. 하루에 들어가는 금액이 일반 평민 가정의 1년 생활비에 해당한다니, 그 액수가 얼마나 엄청난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귀족가에서는 이 수업을 받는 것을 가문의 자부심으로 여겼으며, 특히 이 수업을 수료한 여성의 경우엔 남성들 사이에서 최고의 신붓감으로 꼽혔다. 

그래서 어지간한 재력을 갖춘 귀족들은 자신의 딸이 성년이 되면 얼마간 마신전에 보내는 것을 당연한 과정으로 생각했다. 쟈스민 또한 그런 과정으로 마신전을 방문하게 된 케이스였다.

이때, 약간의 헌물을 준비하여 마신에게 바치게 되는데, 얼마나 좋은 것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그 가문의 명성을 높일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떤 귀족은 집안의 모든 가산을 탕진하기까지 하며 마신에게 바칠 헌물을 마련하기도 했다.

내가 보기엔 쟈스민 또한 그런 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귀족치고는 수수한 옷차림도 그렇고, 출발할 때부터 마땅한 수행원조차 대동하지 않은 걸 보면 재정이 그리 충분한 가문인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서클렛을 준비하기 위해 상당한 손해를 감수했을 것이다.

워낙 라피스 라즐리라는 보석이 고가(高價)이고, 특히나 이 시대에는 최고급 보석으로 알려진 만큼 구하고 세공하는 과정에서 들어간 돈도 만만치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인지 마신전으로 향하는 내내 서클렛이 담긴 상자를 다루는 쟈스민의 손길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사실 이번 헌물은 다섯 개의 귀족 가문이 단합을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답니다. 권력도, 중앙에 진출할 세력도 없는 지방 귀족이지만, 서로 다른 귀족 가문들이 한마음으로 뜻을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이것을 잃어버렸다면 정말 다시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군요. 보물을 무사히 지킬 수 있게 되서 다행이에요."

"네. 이 모든 것은 모두 여러분 덕분입니다. 돌아가게 되면 꼭 후사하겠습니다. 아버님께서 무엇보다 고마워하실 거예요."

"하하! 그러실 필요 없어요. 대가를 바라고 한 일도 아닌 걸요. 아! 다왔어요, 쟈스민! 저기 바로 앞에 마신전이 보이네요."

"아!"

손을 들어 앞쪽의 건물을 가리키자, 쟈스민은 짧은 감탄성을 내뱉었다. 신전은 마신을 섬기는 곳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온통 새하얀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그것이 마신전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은 건물 꼭대기에 정교하게 새겨진 신의 문장 때문이었다.

양옆으로 벌어진 새빨간 박쥐의 날개. 티끌 하나 묻지 않은 하얀 벽과 어우려져 신성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그것을 본 내 감상은 지극히 단순했다.

'아무리 봐도 베트맨이라니까.'

만약 근처에 독실한 마신의 신도가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몰매를 맞을 생각이었다. 물론 그 사람이 베트맨이 뭔지 알 리 없겠지만.

 

 

마신전에는 이미 상당수의 행렬이 도착해 있는 상태였다. 수업을 신청하는 이들이 대부분 귀족들인 만큼, 신전 앞은 그들이 타고 온 마차로 즐비했다. 마차의 문에는 가문의 문장으로 보이는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쟈스민은 그중 몇 개의 문장을 알아보고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에요. 저희와 함께 서클렛을 준비하기로 한 가문들이 모두 있네요. 다들 어쌔신들을 피해 무사히 도착한 것 같아요."

"그럼 이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접수는 어떻게 해요?"

"글세요. 저도 이번이 처음 온 것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곤란한 표정이 된 쟈스민이 머뭇거리며 대답하던 순간이었다.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굵고 중후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와 돌아보니, 검은색 로브를 입은 40대 후반 정도의 남자가 서 있었다. 잿빛의 더벅머리에 투박한 얼굴, 아래로 처친 눈동자가 무척 순박한 인상을 풍겼다.

신전의 관계자인가? 슬적 남자의 모습을 훑어보다가 긴 소매 아래 살작 드러난 손목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바로 그 부근에 마신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제님이신가요?"

"예. 저는 마신 카노스의 미천한 종, 베이만이라 합니다. 조금 전에 보니 곤란한 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 제게 말씀해주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그렇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베이만님. 실은 마신의 교리수업 때문에 왔는데요, 접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아, 수업을 신청하러 오셨군요. 어느 분의 대리로 오셨습니까? 접수를 위해서는 본인 확인 절차가 필요합니다만."

"걱정 마세요. 본인도 함게이니까요."

"예? 본인이라면……."

"여기 계신 숙년 분께서 접수하실 겁니다. 저희는 이곳까지 안내 하러 온 것이구요."

내가 쟈스민을 가리키며 말하자 무슨 이유에서인지 베이만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접혔다 사라졌다.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무너가 상당히 석연치 않아 하는 모습이었다.

대체 왜 저런데?

그는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우리들의 모습을 쭈욱 훑어보더니 연신 괴로운 한숨만 뻑뻑 내쉬었다. 그리고는 한참 후에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아주 심각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저어… 혹시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신의 교리 수업은 수업료가 상당히 비삽니다. 그것도 첫날에 모든 금액을 한꺼번에 지급해야 접수가 진행됩니다만."

"아, 그래요? 쟈스민, 수업료 잘 챙겨왔죠?"

"네. 여기."

그녀는 침착하게 품 안에서 묵직한 돈 자루를 꺼내 보였다. 그러자 베이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의외라는 듯이 쟈스민을 쳐다보았다.

"실례지만 성함이?"

"쟈스민 드 카렌입니다."

"아아! 귀족이셨군요? 카렌이라 하면… 혹시 루파 지방의 에드먼드 카렌 남작님의……?"

"저의 아버님 되십니다."

그때부터 베이만의 태도는 180도로 달라졌다. 탐탁지 않게 바라보던 게 언제였냐는 듯, 쟈스민을 향해 정중하게 말하는 모습이 기가 막힐 정도였다.

"오, 그렇군요! 카렌 남작님은 정말 독실한 마신교의 신도시지요. 매번 잊지 않고 신전에 헌금을 기부해주시고 계시니까요. 그분께 이런 아름다운 영애가 있으셨다니, 미처 몰라 뵈었습니다.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아참, 교리 수업을 신청하시러 오셨다고 하셨지요? 그럼 저를 따라오시지요. 접수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친절하신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갑자기 바뀐 사제의 태도가 어리둥절할 만한데도 쟈스민은 침착하게 인사했다. 내가 그 모습을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 옆에서 묵묵히 서 있던 엘뤼엔이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쓰레기로군."

"으응? 무슨 소리야, 아버지?"

"별것 아니다. 사제라는 녀석이 사람의 신분과 재물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 달갑지 않은 것뿐."

로브에 가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는 무척 기분이 나빠 있는 듯했다. 아까 전에 베이만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는 한눈에 봐도 무시하는 느낌이 역력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마도 그는 우리의 초라한 옷차림을 보고 가난한 평민들이 아무것도 모른채 접수를 신청한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수업료가 비싸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쟈스민이 귀족이라는 것을 알고 곧바로 태도를 바꾼 것일 테지.

'한마디로 속물이로군.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갑자기 엘뤼엔의 신전을 처음 방문했을 대가 떠올라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렀다. 그대도 나는 지금처럼 온몸을 로브로 칭칭 휘감은 초라한 차림이었었다. 하지만 맞이하러 나온 사제들 중 누구도 얼굴을 찌푸리거나 싫어하는 기색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겁을 하며 정중하게 대하는 바람에 무척 당황했었다. 그렇게 된 것에는 물론 엘뤼엔의 영향이 컸다. 그가 내 방문을 모든 사제들에게 통보해 버렸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때는 그저 창피하기만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지금처럼 무시 당하지 않도록 그 나름대로 배려한 셈이었다. 어쩌면 오늘 겪은 일이 무의식에 남아 그런 결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어라? 가만 있어봐, 그럼 혹시 날 아들로 삼을 결심을 한 것도, 지금 이 생활이 남긴 무의식에 의한 걸지도 모르잖아?'

그러고 보면 엘뤼엔은 딱히 뭔가 타당한 이유로 날 양자로 들일 생각을 한 게 아니었다. 그저 '마음에 들었다'라고만 했으니까. 그렇다고 그가 평소에 기분 내키는 대로 마구 행동하는 타입인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의 아들을 그런 단순한 이유로만 선택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따져보았을 때, 지금 내 생각이 아주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니었다.

'허 참! 이거야, 원. 닭인 먼저인지, 계란이 먼저인지 모를 상황일세.'

엘뤼엔에게 아들로 선택을 받은 게 아니라, 내가 먼저 그를 아버지로 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뭔가 상당히 복잡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13-7. 몬스터의 습격 (2)

유유상종이라고 했던가.

아무래도 마신교의 사람들은 상대의 옷차림을 상당히 신경 쓰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신전의 정문 앞에 앉아 한창 접수를 받고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리는 걸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적잖이 감탄했다. 어쩜 저리도 처음의 베이만과 똑같은 표정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표정은 우리 앞에 있던 베이만에 이르자 금세 환하게 바뀌었다.

"앗, 베이만 사제님!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수고들이 많군. 여기 계신 영애께서 이번 교리 수업을 신청하고 싶다고 하셔서 내가 모셔왔네."

"아, 그러셨습니까? 어째서 사제님 같으신 분이 직접… 그냥 옆의 아무나 불러 따로 지시하셔도 되는 일을……."

"허허허! 마신께 찾아온 손님을 어찌 소홀히 대할 수 있겠나. 아무튼 이분들의 접수를 도와드리도록 하게. 이번이 첫 방문이신 듯 하니."

"예, 알겠습니다!"

"영애께서는 이쪽으로 오시지요."

여기서 나는 베이만이 꽤 높은 계급의 사제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말에 접수관들이 자신들 앞에 길게 늘어진 행렬을 무시하고 쟈스민의 접수부터 받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 때문에 차례를 밀린 사람들이 뒤쪽에서 불평을 터뜨렸지만, 그 말에 귀 기울리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줄을 선 사람들 모두 한가락 하는 귀족일 텐데도 저런 태도인 것을 보면, 확실히 교리 수업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었다.

나는 쟈스민이 접수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때까지도 옆에 있던 베이만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감사함니다, 사제님. 덕분에 편하게 접수할 수 있게 됐네요."

"후후후!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한데, 여러분은 저 숙녀분과 어떤 관계이신지. 실례지만 가문의 수행원으로 보이지는 않는 군요."

"그냥 일행입니다. 목적지가 같아서 잠시 동행했을 뿐, 원래부터 친분이 있던 사이는 아닙니다."

"그렇군요. 그럼 혹시 여러분도 귀족이십니까?"

"아닌데요."

그러자 베이만은 거의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렀다. 그리곤 갑자기 급한 용무가 생각난 듯 움직임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흠, 흠! 잘 알았습니다. 아,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밀린 업무가 많아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네요. 여러분에게 마신의 가호가 늘 함께하시기를."

"아아, 예. 사제님께도 마신의 가호가 임하시길."

그는 내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곧바로 어디론가 걸어갔다. 누가 보더라도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도망치는 모습이었다. 내가 신분이 높은 귀족이었어도 저랬을까? 이미 그럴 줄 예상했으면서도 기분이 나빠지긴 마찬가지였다.

말없이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는데, 옆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잠깐! 저분 혹시 베이만 대사제님이 아니신가?"

"오오, 그런 것 같네. 일 년 전, 교리 수업에서 뵈었기 때문에 얼굴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 그분이 틀림없네."

"저런 귀하신 분이 왜 이런 자리에까지? 어쟀든 오늘은 정말 운이 좋군! 대륙을 통틀어 다섯 명 밖에 안 되는 대사제 중의 한 분을 뵙게 되다니! 자네, 혹시 저 분의 신의 문장을 보았는가?"

"당연하지! 손목에 새겨져 있더군. 아마 대사제들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일 걸세."

"오오! 역시 마신의 축복을 받으신 게 틀림없군!"

하나같이 감탄하는 목소리엔 그에 대한 존경과 경외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와는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대사제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의 문장 부위가 손목이라니. 적어도 이마나 뺨 정도는 돼야 대사제가 될 수 있는 거 아닌가? 눈에 띄는 부위에 문장이 있을수록 계급이 높다는 점을 생각해봤을 때, 이 시대의 사제들은 카노스로부터 상당히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들키면 난리 나겠군.'

나는 본래 문장이 자리하고 있을 왼손의 손등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 접수를 마친 쟈스민이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오래 기다리셨지요?"

"아, 쟈스민. 다 끝나셨어요?"

"네. 앞으로 열흘 후에 수업이 시작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숙소가 따로 있어서 미리 들어와 있어도 상관이 없다고 해요. 그래서 내일 아침 일찍 짐을 옮기려고요."

"그게 좋겠네요. 신전 안이라면 더 이상 위협 받는 일 없이 안전할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 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리나케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평소였다면 주위의 경관이라도 둘러봤겠지만, 이곳 사람들의 태도 때문인지 그다지 오래 머물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사히 접수를 마쳤음에도 쟈스민의 표정이 어두운 것 역시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다음날이 되자 쟈스민은 하녀 로잔과 함께 짐을 꾸려 마신전으로 들어갔다. 수행원도 없이 여자 둘뿐이어서 걱정이 되긴 했지만, 내가 참견할 영역이 아니었기에 그대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저 얼마 없는 짐이나마 신전 앞까지 들어다주고 배웅해주는 것뿐. 아마 돌아가는 길에는 용병을 고용할 것이다.

떠나기 전에 그녀는 다시 한 번 나와 일행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모두 여러분 덕분이었습니다."

"뭘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쟈스민. 무사히 모든 일정을 마치시고 돌아가시길 바랄게요. 이렇게 헤어지니 좀 아쉽네요."

"저도 그래요. 저어, 이것……."

"……?"

그녀가 조심스럽게 건넨 것은 사자의 머리가 그려져 있는 작은 메달이었다. 원래는 엘뤼엔에게 주는 것이었으나 그가 받을 생각도 없이 무심한 시선으로 일관하고 있는 통에 내가 얼른 끼어들어 대신 받았다.

"이게 뭔가요?"

"저의 가문의 문장이 들어간 것입니다. 혹시 루파 지방에 들르시게 되면 꼭 카렌 가문을 찾아주세요. 이번 일에 대해 사례하겠습니다."

"앗,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

"아닙니다. 꼭 찾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오시는 날까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아시겠지요?"

눈빛을 빛내며 여러 번 당부하는 그녀의 모습은 집념에 가까워 보였다. 보나마나 엘뤼엔 때문이겠지만, 그 모습이 얄미워 보이기 보단 무관심한 태도에도 포기하지 않는 그녀의 자세를 오히려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쟈스민의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감돌았다.

여자들은 참 이상하게도 상대가 나만 한 아들을 둔 아저씨(?)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여전히 호감을 보였다. 나라면 첫눈에 반했더라도 내 또래의 딸을 둔 아줌마라는 것을 알고 나면 절대 관심이 가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내가 굳이 '여자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대상에 유니콘인 웰디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은 것도 잠시, 진정이 되고 나자 그녀는 새로운 관점(?)에서 엘뤼엔을 관찰하고 있었다. 쟈스민처럼 아예 엄마 자리를 노릴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그에게 보내는 관심은 여전한 것 같았다(때때로 엘뤼엔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는 증상을 보면).

주변 치안을 이유로(사실은 호위기사들의 극성으로) 웰디가 함께 배웅 나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지난번에 이어 또다시 살벌한 공기가 조성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 모든 사정을 뻔히 꿰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는 엘뤼엔이 대단해 보인달까? 잘생긴 남자는 피곤하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긴 한 모양이다. 물론 그를 동정하는 것은 아니다. 부러워 죽으면 모를까.

'쳇! 그런 복은 나한테나 줄 것이지.'

내가 상념에서 깨어난 것은 이어진 쟈스민의 말에 의해서였다.

"그럼 이만 헤어져야 할 것 같네요. 부디 원하시는 일을 마무리 지을 때까지 마신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아아, 네. 쟈스민도요. 로잔도 잘 가세요."

내 가벼운 대답에 엘뤼엔 또한 눈인사로 배웅을 대신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냥 넘어가면 시벨리우스가 아니었다. 녀석은 버터가 줄줄 흐를 정도로 느끼한 표정으로 쟈스민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로군요, 쟈스민. 안타깝지만 만남에는 항시 이별이 따르는 법. 다시 또 뵐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러자 쟈스민 또한 생긋 웃으며 답례했다.

"저 또한 그날이 오기를 고대하겠습니다, 시벨리우스. 이종족의 기사님. 당신이 보여주신 용기와 용맹함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그리된다면 영광일 겁니다. 하지만 제 기억에 남을 레이디의 아름다움보다는 오래가지 못할 테지요."

"호호! 재미있으신 분. 하지만 그런 달콤한 말로 인사하고 돌아서면 금방 잊을 것이란 걸 저는 잘 알고 있답니다."

"아아! 어째서 그런 생각을? 오해입니다, 쟈스민. 저는 진실만을 말하는 엘프. 결코 그대를 잊지 않을 겁니다. 그대의 아름다움이 이미 이 가슴속에 박혀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놀고 있네.'

다시 한번 웰디가 없음이 다행스럽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약혼녀가 눈에 불을 켜고 잇는 주제에, 대체 뒷수습은 누구더러 하라고 저런 망발을 지껄인단 말인가?

내가 노려보든 말든 계속해서 닭살스런 대사를 주고받던 그들은 거의 신파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대화를 마쳤다.

"그럼 이제 정말로 안녕히."

이윽고 눈시울을 붉힌 그녀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어디 보자, 이제 완전히 갔지? 쟈스민이 완전히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옆에서 멀뚱히 서 있던 시벨의 등을 인정사정없이 후려쳤다.

짜악!

"으악! 왜 그래, 엘? 아파~"

"아프라고 때리는 거야! 대체 뭐 하는 거야?"

"내가 뭘?"

"그 닭살스런 인사 말이다! 엘프라는 사기를 친 건 둘째 치고, 뭐? 아름다움이 뭐가 어쩌고 어째? 웰디 보기가 부끄럽지도 않아? 네가 이러니까 그 애까지 덩달아 다른 곳에 눈길을 주는 거잖아! 반성 좀 해!"

"하, 하지만 그건 인간들의 귀족식 인사인걸, 그리고 누누이 말하지만, 난 웰디에겐 결단코 그럴 마음이……."

"시끄럿! 아주 보자 보자 하니까 돌아가면서 바람을 피우고 난리야! 주변 사람들의 입장도 생각해달란 말이다! 옆에서 얼마나 민망했는지 알아? 내가 아주 닭털이 되어 날아기는 꼴을 보고 싶어? 그냥 고분고분 사과해도 봐줄까 말까인데!"

"으음… 미안해, 엘."

"쯧! 진작 그럴 것이지."

내가 혀를 차며 중얼거리자 녀석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한 표정으로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그 모습이 좀 불쌍해 보이긴 했지만, 야단 친 걸 철회할 마음은 없었다.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주의를 주지 않으면 얼마든지 바람둥이로 변모할 가능성이 차고도 넘치는 녀석이었으니까.

그러자 왠지 묘하게 감탄한 듯한 라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바로 그런 식으로 길들인 거로군.>

"뭐가?"

<아냐, 그냥 네 성격이 많이 변한 것 같아서.>

"변했다고? 어떻게?"

<별거 아냐. 더 계집애 같아졌을 뿐.>

"우씨! 너 진짜 두고 가버린다!"

버럭 소리치는데도 녀석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키득거리느라 정신없었다. 보석 안에 갇혀서 답답하다느니 심심하다느니 온갖 난리를 치더니, 종종 나를 갈구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할 작정을 한 모양이다. 끄응! 하고 신음을 삼킨 나는 목소리를 차분하게 진정시키고 말했다.

"자증나도 조금만 참아. 나도 노력하고 잇으니까."

<…….>

"미안해, 라피스. 나 때문에 이런 일을 겪게 만들어서. 반드시 원래의 위치로 돌려줄게.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할게."

왜인지 라피스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이제 나랑 말 섞기도 싫어진 건가?

내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 듣기를 포기할 때쯤,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하나만 묻자.>

"응? 뭐, 뭔데?"

<이대로 돌아가면 난 바로 명계로 보내지겠지? 다시 환생한다면, 아크아돈에서 태어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으음, 글쎄. 그리 높지는 않을 것 같은데? 중간계에 속한 차원이 워낙 많다고 하니까, 굳이 같은 차원에서 태어날 이유가 없잖아."

<그래? 그렇다면 난 이대로 돌아가지 않아도 상관없어.>

"뭐?"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경악한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라피스는 웃음기를 담은 말투로 말을 이었다.

<다시 태어나서 모든 기억을 잃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사느니, 지금 이대로가 좋아.>

"하아? 답답하다고 할 땐 언제고? 얼른 새로 태어나서 제대로 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아? 너 지금 네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잖아. 사람들도 만나지 못하고 의사조차 전달하지 못할 텐데?"

<상관없어. 그래도 넌 옆에 있잖아.>

"그치만……."

<그거면 돼. 사실 나보다 네가 더 문제 아니냐? 나야 워낙 인기가 많은 몸이지만, 넌 나 없으면 친구도 없잖냐. 나 없다고 외로워하는 꼴 보느니, 큰 맘 먹고 희생해주지, 뭐.>

"어이."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괴상한 결론에 이르는 거냐?

머릿속이 복잡해졌즈미난 나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라피스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이대로 돌아가고 나면 난 녀석의 공백에 매순간 숨이 막히게 될 것이다. 녀석을 찾아다녔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때부턴 정말로 영원한 이별일 테니까.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을 테니까. 아니, 만나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겠지. 내게도 그런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곧 고개를 저었다.

"쓰, 쓸데없는 소리 마.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난 반드시 널 환생시킬 테니까. 난 너 아니어도 친구 많으니까 신경 끄시지?"

<쳇! 내 크신 배려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아무튼 귀여운 구석이 없다니까.>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나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간ㄴ신히 참았다. 저런 식으로 말해도 그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가슴 깊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에도 나를 걱정해준다는 것이 고맙고 미안해서, 이제부터 어떤 얼굴로 녀석을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라피스를 만난 것은 분명 행운이었다. 그렇기에 훗날 다가올 이별이 더욱 슬프고 괴롭게 느껴졌다. 앞으로 이어질 내 삶에서 이만큼 멋진 친구는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았다.

 13-8. 몬스터의 습격 (3)

"축제?"

"네! 시벨리우스님! 아까 일층에 내려갔다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 도시에 축제가 벌어진대요! 우리 보고 가요 네?"

아침부터 웰디는 유난히 들떠 있는 상태였다. 오늘 저녁부터 시잘될 마신을 위한 축제 때문이었다. 인간 세상의 경험이 충분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축제 참가가 처음이였기에 상당한 욕심을 보였다.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다시피, 이번 축제는 마신전의 주최로 개최되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교리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민심을 달래는 전야제라고 볼 수 있었다. 그 행사가 상당히 화려한 탓에 이도시의 유동인구를 늘리는 것에 톡특히 기여하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런 거야 어디까지나 편하게 관광 온 사람들의 이야기고, 일정이 바쁜 우리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전혀 없는 이야기였다. 덕분에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웰디의 눈을 본 시벨리우스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어 있었다.

"웰디, 우리는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아앗! 설마 그 정도 여유도 없는 거예요? 겨우 하루잖아요. 하루! 하루만 더 있다 가면 안 돼요?"

"하아! 그럼 우리 먼저 출발할 테니까 넌 호위기사들과 나중에 오도록 해."

"시, 싫어요!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같이 다니기로 약속했으면서! 시벨리우스님 나빠요!"

대처 누가 나쁘다는 건지. 그녀의 고집에 오히려 호위기사인 아렐과 카리안이 미안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는 시벨리우스의 모습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냥 보고 가자, 시벨. 저렇게 원하잖아."

"으음, 그래도 괜찮겠어?"

"어차피 좀 늦어진 김에 감수하지, 뭐. 어떤 축제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와아! 그게 정말이지요, 엘? 정말 고마워요! 들었죠, 시벨리우스님? 엘도 축제를 보고 가자고 하잖아요~"

단번에 의기양양해진 웰디가 것 보라는 듯 소리치자 시벨은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미안해, 엘. 벌써 나 때문에 일이 미뤄진 것이 몇 번인지…."

"쿡쿡! 신경 쓸 것 없어. 이미 늦은 일에 하루나 이틀이나 매한가지니까. 그냥 웰디 양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둬."

"고마워."

슬쩍 인사를 건네는 시벨의 뒤로 두 호위기사들도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나 역시 덩달아 목례를 하는데, 갑자기 머리 위에 탁! 하고 무언가가 내려않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든 나는 곧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엘뤼엔이 지나가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은 것이다.

"왜 그래, 아버지?"

"…별로."

시큰둥하게 한마디를 내뱉은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졌다.

덱분에 혼자서 어리둥절해 하고 잇는 나를, 곁으로 가까이 다가온 웰디가 갑자기 잡아끌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강한 힘에 얼결에 끌려가는데 그녀가 내 귓가에 손을 대고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요, 엘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세요?"

"어떤 분이라뇨? 으음, 그냥 보시는 대로?"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 인간이 맞는 건가요?"

"네?"

뜨끔해져서 묻자 그녀는 내가 화난 거라 생각했는지 변명하는 것 처럼 설명했다.

"아, 아니, 나쁜 뜻이 아니에요. 그저 엘의 아버지라는 분의 느낌이 다른 인간들에 비해 너무 달라서요. 신성하면서도 자연의 기운이 너무 강하게 느껴지는 게 마치 정령같다랄까? 맞아요! 정말 정령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처음에 보고 얼마나 놀랐다구요."

"…쿨럭! 아, 그, 그건요……."

"그러고 보니 엘은 정령사였지요? 아버지도 정령사인 건가요? 그게 아니라면 이런 느낌을 설명할 수가 없는데."

"으음, 그렇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혹시 대답하기가 곤란한 질문이었나요?"

내가 쉽게 털어놓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자, 웰디는 무척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빤히 바라보는 눈빛을 거두지 않는 걸 보아 정작 물러설 기색은 없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뒤편에 있던 호위기사들까지 덩달아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들 또한 그동안 말은 하지 않았어도 엘뤼엔에 대해 무척 궁금해 하고 있던 것은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뭐, 유니콘들이니까 상관없겠지?'

생각은 길었지만 결단은 빨랐다. 쟈스민의 경우야 평범한 인간이니 일부러 속일 수밖에 없었다지만, 신족에 가까운 유니콘들에게까지 비밀로 할 내용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순순히 그에 대해 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그는 제 친부가 아니에요."

"네? 하지만 아버지라고……."

"정확히는 양아버지죠. 그의 정체는… 아마도 웰디의 느낌이 맞을 겁니다."

"제 느낌이요? 설마 정령과 비슷하다는 것 말인가요?"

"힌트를 드리죠. 인간은 확실히 아닙니다."

"네? 인간이 아니라고요? 그럼 누구인데요?"

"후후! 맞춰보세요. 누구인 것 같아요?"

"으음……."

내가 장난스럽게 묻자 웰디는 무척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안고 끙끙거리고 있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정령과 비슥하다는 걸 깨달았으면서도 그가 정령 자체라는 생각은 왜 못하는 걸까? 좀 더 골려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후환이 두려워서 나는 그리 오래지 않아 결정적인 힌트를 제공했다.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실 필요는 없는데. 뭐, 이쯤에서 단서를 드릴까요? 아버지의 이름은 죤이 아니에요. 그건 시벨리우스가 급조로 지어낸 가명이죠."

"네? 그럼?"

"본명은 엘퀴네스입니다."

너무 의외의 이름이었던 걸까? 웰디는 물론 호위기사들까지 한동안 멍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동그래진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심각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혹시 환청을 들은 것이 아닌가 확인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웰디였다.

"…엘퀴네스? 저어,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건… 물의 정령왕 이름인 것 같은데요."

"네, 맞아요."

"마, 말도 안 돼! 그럼 당신의 아버지가 물의 정령왕이라고 하는 거예요? 장난이 너무 지나쳐요, 엘."

역시나 쉽게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힘든 일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자신을 우습게 본다고 생각했는지 웰디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선 나보다 먼저 해명을 해준 존재가 있었다. 바로 지금깢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시벨리우스였다.

"엘의 말이 맞아, 웰디. 그는 정령왕 엘퀴네스야."

"시, 시벨리우스님! 정말이요?"

"네에게 이런 일을 속일 필요는 없지."

"하지만 어떻게 정령왕이?"

"엘이 그의 계약자거든."

"……!"

녀석의 마지막 발언에 방 안에 있던 3마리(?)의 유니콘들은 모두 경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 사이에서도 정령왕의 계약자란 대단한 의미인 듯했다. 더구나 나는 비공식적으로 엘퀴네스를 소환한 최초의 인간이었으니까(공식은 다 알다시피 나를 소환한 이사나다). 그 존재적 가치가 남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인지 웰디는 물론, 호위기사들 중 늘 탐탁지 않게 나를 쳐다보던 아렐의 표정도 한결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놀랍군! 설마 정령왕의 계약자였을 줄이야. 드래곤조차 성룡이 되어야만 소환이 가능한 물의 엘퀴네스를 아직 스무 살도 채 넘지 못한 인간이……."

"그러게 말입니다. 아렐, 과연 기적을 창조하는 존재! 인간들의 능력이란 그 끝을 알 수가 없군요. 게다가 양부라니. 그건 대체 어떻게 된 것니까? 아무리 양아버지라지만 정령왕과 부자의 인연을 맺는 존재는 엘, 당신밖에 없을 겁니다."

무척 감탄한 말하는 카리안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대단할 것도 없어요. 그냥 제 쪽에서 억지를 쓴 거니까. 멋대로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더니 처음엔 몇 번 뭐라고 하다가 나중엔 귀찮았는지 포기하더라고요."

"하지만 호칭을 묵인했다는 것은 정령왕께서도 당신을 양자로 인정하셨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건 그렇죠. 저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내가 생긋 웃으며 대답하자 웰디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아버지라고……?"

"아아, 제 친아버지랑 닮았거든요."

정확히는 그쪽도 양아버지이긴 하지만. 마땅히 둘러댈 말이 없어서 나는 대강 넘겼다.

그러자 유니콘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뭔가 살짝 어이없어 하는 느낌이랄까?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모두 수긍한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으음. 하긴, 엘 정도의 외모라면 아버지 되는 인간 역시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겠군요."

"엘 역시 처음에 보고는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정도니까요."

"그, 그랬나요? 하하하……."

"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땐 정말 놀랐습니다. 부모 쪽의 하나는 틀림없이 인간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부친 쪽이 엘퀴네스님과 닮은 외모리나, 좀처럼 상상이 가질 않는군요."

"정령왕과 닮은 인간이라니, 한번 보고 싶은데요?"

인간이 아니라 신입니다만.

선입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내가 인간이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그들은 알아서 엘뤼엔을 인간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그편이 다행이긴 했지만,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동자가 무척 부담스러웠다.

내가 말없이 웃고만 있자 웰디는 문득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보통 닮았다는 이유로 다른 이를 아버지라고 부르나요? 친아버지 쪽에서 서운해 하실 것 같은데요."

"아~ 상관없어요. 어차피 이 세상에서는 만날 수 없는 분이니까."

"네? 만날 수 없다니, 어째서요? 아, 설마! 어맛~! 죄, 죄송해요! 이런 실례되는 질문을……."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마지막 웰디의 말에 의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무척 동정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지만, 굳이 정정해줄 마음은 없었다. 사실 일부러 이것을 노리고 오해성 다분한 말을 한 것이었으니까. 더 골치 아프게 파고들기 전에 내 쪽에서 미리 선수 친 셈이랄까.

'훗! 어차피 거짓말은 아니잖아?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없다는 건 사실이니까.'

나는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웰디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으니까 그렇게 당황하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괜찮다니까요. 어차피 엘퀴네스가 옆에 있어서 헤어졌다는 자각도 못하고 있으니까."

"으음, 정말 굉장히 많이 닮았나 보군요."

닮았다 뿐인가. 그 본인인데.

나는 다시금 신기하단 시선을 보내는 유니콘들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진실을 알고 있는 이만의 특권이랄까? 마치 내가 엄청 비밀스러운 존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 즉시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는 라피스 때문에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사기 치면 즐겁냐?>

"누, 누가 사기를 쳤다는 거야?"

빈정거리는 녀석의 목소리에 나는 순간 울컷해서 소리쳤다. 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라피스는 여전히 깐죽거리는 말투로 물었다.

<순식간에 엘퀴엔을 친아버지로 둔갑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죽은 사람으로 만든 게 그럼 사기는 아니라고?>

"훗! 모르는 소리. 그건 그냥 진실을 교묘하게 감춘 것뿐이야. 사기와는 엄연히 다르지."

<얼씨구? 너 어째 갈수록 뻔뻔해지는 것 같다?>

"이왕이면 임기응변이 뛰어나다고 해줘. 나라고 이러는 게 마음 편한 줄 알아?"

<호오, 재미있어 하는 건 아니고?>

비꼬는 목소리에 나는 한순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 녀석의 말을 아주 부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당혹해하는 유니콘들을 보며 즐거워하지 않았던가!

그러자 것 보라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애써 귀를 닫고 무시했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 많은 인생이다. 이런 식으로 내가 사악해져 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싶지 않았다.

13-9. 몬스터의 습격 (4)

날이 저물자 나는 일행들과 함께 여관을 나와 도시의 광장을 걸었다. 웰디의 소원대로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광장에는 우리처럼 축제를 즐기러 나온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해 있었다. 

축제는 어디를 가도 비슷한 건지, 여기저기에서 장식품을 비롯한 먹거리를 팔거나 서커스를 선보는 무리가 눈에 뜨였다. 어떤 곳은 게임을 해서 사은품을 주기도 하고, 마법으로 만든 놀이기구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니 새삼 학교 다닐 때 열렸던 축제가 생각나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와 보길 잘했네. 그냥 갔으면 나중에 후회했을 거야.'

생각해보면 꽤 오랜만에 갖는 여유 시간이었다. 처음 이곳에 올 때는 무조건 라피스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고, 그 뒤로는 여러 일행들에 치여 적응하기에 바빴으니까. 거기에 가는 곳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다 보니, 이렇듯 한가한 기분으로 관광을 해보는 것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보니 처음 축제 구경을 제안한 웰디가 고맙게 느껴졌다. 그녀는 이런 행사 자체가 생소한지 눈을 반짝거리며 연신 주위를 둘려보고 있었다.

"와아~ 사람이 정말 많군요. 이렇게 많은 인간들은 처음 봐요."

"축제라서 집에 있던 사람들이 다 밖으로 나온 걸 거예요. 아마 조금 더 있으면 훨씬 많아질 걸요?"

"활기차서 좋군요! 그렇지 않나요, 아렐 카리안? 우리 마을에도 이런 행사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웰디는 활짝 웃으며 뒤편에 서 있던 두 호위기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카리안과 달리 아렐은 얼굴을 찌푸리며 나무라듯 대답했다.

"또 그런 말씀을. 이런 건 그저 인간들의 천박한 문화입니다, 웰디님. 전혀 동경하실 것이 못 됩니다."

"으음, 하지만 즐거워 보이는 걸요."

"그야 저들은 웃고 떠드는 것밖에 모르는 족속이니까요. 저런 것에서 명예나 긍지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웰디님이 이런 것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아시면 장로께서 슬퍼하실 겁니다."

이 얼마나 피곤한 성격인가. 닥딱한 얼굴로 축제 분위기에 초를 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아렐을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시벨리우스 역시 골 아픈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 상황에 끼어들 엄두는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의외의 반전이 이렁난 것은 바로 그 다음의 일이었다.

"웃고 떠드는 족속이라 미안하군."

"…에?"

중얼거리듯이 내뱉은 이는 바로 엘뤼엔이었다. 그가 정령왕이라는 것이 밝혀진 이후로 유니콘들 모두 저자세로 엘뤼엔을 대하고 잇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의 등장에 놀랐는지 아렐의 얼굴은 급격히 창백해졌다.

"무,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저는 엘퀴네스님이 아니라 인간들에 대한 평가를……."

"인간들에게 축제를 가르친 것이 정령들이었다. 즉, 놈들이 웃고 떠드는 방식 자체가 정령에게서 나왔다는 소리지."

"헉! 그, 그런!"

"왜? 달리 할 말이라도 있나?"

"죄, 죄송합니다! 저는 결코 정령들에 대한 악의가 있었던 것이……."

새파랗게 질린 아렐은 쩔쩔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한순간에 역전된 상황에 나머지 유니콘들은 모두 곤란한 표정이었다. 상황이 너무 개그적이다 보니 웃고는 싶은데, 아렐에게 미안해서 간신히 참고 있는 것 같았다(웰디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는 것은 모른 척하기로 하자).

나 또한 표정 관리에 노력하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엘뤼엔을 향해 물었다.

"헤에~ 인간에게 축제를 가르친 것이 정령이었어? 그건 처음 알았네."

"초창기의 아크아돈은 순수했으니까. 그 당시만 해도 정령사가 많았지. 인간들의 문화는 대부분 초대의 정령사들에 의해 이루어진 거다. 지금은 많이 변질되긴 했지만."

"그렇구나. 왠지 멋지다!"

아크아돈의 주인이 4대 정령왕이라는 것을 알긴 했지만 지금까지 깊이 자각하지 못했는데, 방금 그의 말을 듣고 나니 내심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내가 숨김없이 감탄을 표하자 무표정하던 엘뤼엔의 입가에도 살짝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기분 나빠하지 않는군."

"응? 왜 기분 나빠하는데?"

"보통 인간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순수하게 스스로 일구어낸 것인 줄 알고 있거든. 정령들이 가르쳤다는 것을 알려주면 인정하지 않는 부류가 태반이지."

"그래? 내가 보기엔 인간만이 아니라 드워프나 엘프들의 문화도 마찬가지라고 보는데. 전부 정령들에게 영향을 받은 거 아니야? 어쩌면 다른 모든 중간계의 문화도 이곳 아크아돈을 중심으로 형성된 걸지도 모르지."

그냥 짐작해본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정곡이었던 모양이다. 엘뤼엔의 눈이 순간 급격하게 커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응? 아, 아니. 그냥 그럴 것 같아서. 정령은 모든 세상의 기본 원소잖아? 당연히 모든 세상의 중심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더구나 정령왕은 신의 준비 과정. 즉, 신계의 문화 역시 사실은 정령계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그들 안에서 창조된 중간계의 종족들이 정령의 영향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고. 고로 아크아돈이 모든 세상의 중심이라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 대단한 연결고리에 흥분한 나는 신나서 떠들었다.

"아무튼 정령의 역할은 대단한 것 같아. 하지만 요즘은 다들 그 의미를 잊어버리는 추세고, 아마 앞으로는 더더욱 그렇게 되겠지. 보통 정령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홀대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이러다가 아예 정령사가 사라지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니까."

"…너랑 이야기하면 가끔 정령과 대화하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응? 그, 그래? 하하! 그거 영광인걸."

뜨끔한 나는 크게 웃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다행히 바로 이어진 웰디의 질문 덕에 그 부분을 무난히 넘길 수 있었다.

"잠시만요, 엘퀴네스님. 방금 전 엘의 말대로라면, 설마 유니콘의 문화도 정령이 주도했다는 말인가요?"

"아크아돈의 생명체는 무엇이든 모드 정령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그건 피할 수 없는 진실이지."

"……."

담담한 엘퀴엔의 대답에 시벨리우스를 비롯한 그의 일행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자신들이 우습게보았던 인간과 문화적인 면에서 스승이 같다는 소리였으니 놀랄 만도 했다. 특히나 종족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유니콘들이기에 더욱 그런 것 같았다. 

그 이후로 아렐은 어떤 일에도 침묵을 유지했다. 여전히 인간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기는 했으니 이전처럼 노골적으로 경멸감을 드러내거나 비꼬는 일은 없어졌다.

정령의 위대함이 뿔 달린 말 한 마리를 개과시긴 순간이었다.

13-10. 몬스터의 습격 (5)

본격적인 축제에 앞서 거리에는 무수한 연인들이 나와 사방에 꽃가루를 뿌리기 시작했다. 한밤에는 마법을 이용한 불꽃놀이와 캠프화이어가 벌어진다고 하니 꽤 근사한 구경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동에 불편함이 따랐다. 안 그래도 사람이 많은데 축제의 주최자인 마신전의 관계자들이 길의 한가운데 자리를 확보하고 양쪽으로 줄을 매달아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아두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곧 퍼레이드가 이어지는데, 그 진로에 구경꾼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미리 조치해둔 것이었다.

줄이 이어진 길에는 각 구관마다 새카만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마찬가지로 검은 말을 타고 주위를 감시하고 있었다. 길이 좁아 미어터지는 와중에도 투구 안에서 빛나는 눈빛이 꽤 매서워서인지 아무도 그들의 주위로는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기사들의 주위는 상당히 한산했다. 그 모습을 본 웰디는 무척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저어… 저자들이 누구기에 다른 사람들이 근처에 다가가지 않는 거죠?"

하지만 그녀와 마찬가지로 이 도시가 처음인 나나 다른 일행들이 그에 대해서 알 리 만무했다. 잠깐 기사 쪽을 바라본 나는 그들이 입은 갑옷에 시선이 미치고서야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마신전의 기사 같네요. 갑옷에 마신의 문장이 새겨져 있어요."

"아아, 신의 기사들이로군요. 그런데 왜 저기서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는 거죠?"

"아마 조금 뒤에 있을 행사 때문일 거예요. 사람들이 질서를 어기지 않도록 감시하는 거겠죠. 이를테면 행사 관리자라고나 할까요?"

내가 설명을 마치기가 무섭게 뒤편에서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드디어 시작이다!"

"오옷! 나온다, 나와!"

"……!"

놀라서 황급히 돌아보니 멀리 마신전 쪽으로부터 화려한 마차들이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오는 것이 보였다. 축제 개막전 퍼레이드가 시작된 것이다.

"와아아아아!"

열린 창문 안으로 마차의 내부가 고스란히 보였는데, 그 안에는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마도 이번 교리 수업을 위해 참석한 귀족들인 것 같았다. 행렬이 긴 탓에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쟈스민 또한 저 안에 속해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중에서 특히 눈에 띈 것은 가장 가운데에 있는 마차였다. 다른 것들도 충분히 예쁘게 꾸며져 있었지만 그것은 특히나 더욱 화려한 장식으로 되어 있었고, 크기도 다른 마차에 비해 몇 배나 컸다.

결정적으로 그 안에 타고 있는 이는 일반 귀족이 아닌 마신의 사제들이었다. 그래서인지 환호하는 사람들의 함성은 대부분 모두 이 마차를 집중적으로 향해 있었다. 

"마신께 영광이 있으라!"

"마신의 사제여! 제게 축복을!"

"저희 가정에 축복을 기원해주십시오!"

"와아아아아!"

마차가 지나가는 길에는 군종들이 앞 다투어 손을 내밀며 마신의 축복을 갈구했다. 사제들 중 누구 하나 마차에서 손을 내밀어 마주 잡아주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눈빛이 마주쳤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천금을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

대강 주위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뭔가 그에 관련된 징크스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이번 행사에서 사제와 눈이 마주치면 다음 축제가 열리기까지 1년간 행복하게 산다나? 행렬의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길에 서서, 그런 소란과는 무관했던 나로서는 상당히 어이없게 느껴진 장면이었다.

"다들 뭔가 착각하고 잇는 거 아니야? 마신에게 축복이라니. 바랄 걸 바라야지, 저주라면 또 몰라."

내가 구시렁거리자 옆에 잇던 시벨리우스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혹시 이런 게 아닐까? 저주를 걸기는 하지만, 반대로 그 저주를 풀 수 있는 것도 마신의 사제잖아. 불행이 닥쳐도 금방 회복하고 일어서기를 기원하는 의미일 것 같은데."

"으음, 듣고 보니 그럴듯하네. 뭐, 그것도 다 마신의 쓸데없는 장난을 치지 않는다는 가정하의 일이지만."

"장난? 아아~ 그러고 보니 마신은 꽤 짓궂기로 유명하지. 인간들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인데, 엘은 어떻게 알았어?"

"글쎄… 어떻게 알았을까."

사실 말이지, 나도 그다지 알고 싶지는 않았거든? 그런데 어쩌다 보니 알 수밖에 없더라고. 네가 보기에도 내가 참 억울할 것 같지 않냐?

차마 말 못할 사연을 혼자 삭이고 있자니, 무언가 이상했는지 시벨리우스가 빤히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것을 모른 척 무시하며 오로지 행사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그다지 볼 만한 광경은 아니었다. 축복을 받기 위해 서로 밀치고 나가며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아비규환, 이 네 글자를 그대로 현장에 옮겨둔 것처럼 보였다.

복잡했던 퍼레이드가 끝나고 나자 이번엔 신전 앞을 중심으로 또 다른 행사가 벌어졌다. 마신교의 대사제 주관으로, 사람들이 각기 준비해온 헌물을 신에게 바치는 의식이었다. 1년에 단 한 번 있는 특별한 날이니 만큼, 평소에 집안 형편상 무언가 바치는 것은 엄두도 못 냈던 사람들도 이때만큼은 사비를 몽땅 털어서라도 헌물을 마련하는 것 같았다.

빵과 고기, 곡식 종류를 비롯해 염소와 소 같은 음식(?) 위주의 헌물을 바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옷감이나 보석 세공품 같은 화려한 것들을 바치는 자들도 잇었다. 제단 위에 하나 둘씩 무언가가 바쳐질 때마다 대사제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축복의 말을 읊었다.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진다 싶더니, 이윽고 인파를 가르고 귀족으로 보이는 5명의 젊은 남녀가 대사제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기 똑같은 검은색 복장에 같은 모양의 상자를 들고 있었다. 그 상자가 유난히 낯이 익어 자세히 쳐다본 나는, 그들 중 한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고 놀라서 소리쳤다.

"앗! 쟈스민 양이다!"

"뭐? 어디? 어디?"

"아아, 정말이네요! 헌물을 바치러 나가는 모양이군요."

웰디의 말대로 쟈스민은 경건한 표정으로 상자를 들고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지난날 그토록 지키기 위해 분투하던 서클렛이라는 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헤어진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왠지 반가운 느낌이었다.

잠시 후, 제단 앞에 닿은 쟈스민과 그녀의 일행들은 경건한 동작으로 일제히 상자를 내려놓았다. 모두가 내용물을 궁금해 하는 동안, 대사제는 빙긋 웃으며 손수 상자를 열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환인했다. 이윽고 그 안에서 푸른색의 보석이 박힌 5개의 서클렛이 나오자 군중들은 모두 환호성을 터뜨렸다.

"와아아아아!"

값도 값이지만, 이 시대에서 라피스 라즐리라는 보석이 가지는 의마는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신성한 기운을 담은 결정! 지니고 잇는 것만으로도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고 있을 정도로 의식적인 면에서조차 대단한 가치를 담고 있었다.

신의 보석이라고 일컬어지는 그것을 눈앞에서 직접 본 기쁨 탓인지, 좌중의 흥분은 한층 더욱 높아졌다. 아마 이것으로 마신교의 입지는 더욱 굳건히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서클렛을 살피는 사제들의 얼굴엔 모두 자부심과 뿌듯함이 가득 드러나 있었다.

"마신의 영광을 위해 귀한 보석을 바친 다섯의 가문에 축복이 있으라! 삼 대를 넘어 앞으로도 여우언히, 그들의 앞날을 마신께서 친히 굽어 살펴주실 것이오!"

"와아아아아!"

사람들은 다시 한 번 환호했다. 그 뜨거운 함성이 하늘과 온 지면을 전부 꽉 메워버린 것 같았다.

그 열광적인 반응에 기분이 들떳던 것일까? 대사제가 즉석에서 특별한 이벤트를 하나 제안했다.

"이러한 기쁜 날! 마신의 영광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위대한 어머니가 될 여성들을 위한 축복을! 지금 이 자리에서 다섯 분의 처녀를 뽑아, 서클렛을 착용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오오오오!"

생각지도 못한 행사에 주위는 무척 손란스러워졌다. 붉게 홍조를 띤 여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그 행운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이었다. 어떻게든 눈에 띄어보려고 앴느는 여자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사제는 평온한 표정으로 주위의 사제들에게 서클렛을 하나씩 들려주며 어울리는 여성을 찾으라고 말했다.

자주색 쿠션 위에 서클렛을 받아든 사제들은 민중 안을 돌며 하나 둘씩 적당한 여인들을 선별해서 이끌어냈다. 특멸한 자격 없이, 일단 무조건 눈에 띄는 여자들을 선택하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안 보이는 곳에서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5개에 불과한 서클렛에 비해 그 자리를 원하는 여자들의 숫자는 넘칠 정도로 많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저리 비켜, 이 계집애야! 여긴 내 자리야! 내가 먼저 온 거 못 봤어?"

"웃기는 소리 하시네! 니 자리, 내 자리가 어디 있어? 차고 들어오면 다 임자지!"

"흥! 너도 저 서클렛을 노리는 모양인데! 어디 너 같은 것 따위가 감히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니? 얼굴도 못생긴 게!"

"뭐야? 난 다음달에 결혼한다고! 위대한 어머니가 될 여성으로서 이보다 더 완벽한 조건이 어디 있어?"

퍽퍽~! 퍽! 쿠웅!

"꺄악! 이 사람이 쓰러지면 저만 쓰러질 것이지, 왜 나까지 밀고 난리야?"

"아, 누가 저 사람들 좀 말려 봐요! 앞으로 나갈 수가 없잖아!"

"거기! 제발 싸우지 좀 말이욧! 네?"

그 외, 기타 등등 시끌벅적.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소리들 때문에 귓가가 다 얼얼해질 지경이었다. 소음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벌서 여럿 쓰러졌을 것이 틀림없었다.

'으음, 생각보다 심한걸.'

힐끗 옆쪽을 바라보니 웰디와 그녀의 호위기사들이 하얗게 질려 잇는 것이 보였다. 잠깐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본 나는 곧 그들의 반응을 이해했다.

유니콘들은 소수 종족이라는 엘프보다 그 숫자가 현저히 적은 종족이다. 그동안 숲 한가운데서 터전을 잡고 한가롭게 살아오던 그들에게는 이렇게 수많은 군중들이 떼 지어 몰려다니면서 함성을 지르는 일 자체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서클렛 하나를 써보기 위해 여자들끼리 치고받는 장면을 목격햇으니, 얼이 빠질 만도 했다.

나름대로 활기차고 역동성 있기는 했으나, 솔직하게 말해… 많이 민망했다. 안 그래도 인간에 대해 인식이 나쁜 그들이 이것을 계기로 확 돌아서는 게 아닐까 싶었다. 뒤늦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부랴부랴 변명 비슷한 것들을 늘어놓았다.

"하하하! 마, 많이 소란스럽죠? 대강 중요한 행사는 다 끝난 것 같고, 별로 볼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이제 그만 돌아갈까요?"

나온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워낙 사람들에게 치인 탓인지 유니콘들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내가 얼른 일행들을 이끌고 여관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였다.

휘이잉!

"꺄악!"

"웰디님!"

갑자스런 강풍에 웰디가 쓰고 잇던 후드가 뒤로 젖혀졌다. 그 바람에 그녀의 굽이치는 선명한 은발과 조각같이 아름다운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순간, 시끄럽던 주위가 일순 조용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서클렛의 주인이 선택될 때마다 환호하던 사람들은 물론, 방금 전까지 치고받던 여자들마저 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윽! 이걸 어째! 눈에 띄어버렸잖아!'

처음 후드가 벗겨질 때만 해도 나는 사람들이 혼란스러운 틈에 적당히 가려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단순히 그 정도의 소란으로 묻히기에는 웰디의 미모가 뛰어나도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눈에 띄는 은발에, 선명한 붉은색 눈동자가 대조적으로 어우러져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으니, 조용히 지나가기는 틀려먹었다.

혀를 찬 시벨리우스가 얼른 후드를 다시 씌웠으나, 이미 한 번 집중된 관심은 흩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도 꽉 막힌 행렬에 막혀 파고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일행들이 서로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하는 동안, 나는 다음으로 벌어지는 상황에 혀를 깨물고 싶었다. 어느새 서클렛을 든 마신의 사제 한 명이 지척으로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정확히 웰디 앞에 선 다음, 그녀에게 서클렛을 내밀며 정중하게 말했다.

"레에디께 마신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잇는 기회를……."

'그딴 것 필요 없어!'

카노스가 들었다면 다분히 서운해 할 생각이긴 했지만, 이때 나의 심정은 절박했다. 눈에 띄는 것은 사양이다. 그것이 아무리 내가 아니라 일행 쪽의 일이라 해도.

하지만 호의로 내민 것을 뿌리칠 수가 없었는지 웰디는 망설임 끝에 서클렛을 받아들였다. 이윽고 다시 후드가 걷혀지고, 그 이마 위에 푸른색의 보석이 장식되자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큰 함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아!"

그때쯤 다른 사제들도 각기 한 명씩 처녀들을 택해 서클렛을 씌웠다. 선택받은 여자들은 사람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으며 모두 사제들의 손에 이끌려 재단 위에 올라섰다. 웰디 또한 재단 위로 이끌리는 것을 두 호위기사가 막아보려 했지만, 워낙 주위의 시선이 뜨거웠기에 어쩔 수 없이 보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나란히 서 잇는 여자들 중에 웰디의 모습이 가장 눈에 띈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자! 모두 이곳에 선 아름다운 여인들을 축복해주십시오! 마신의 영광이 장차 한 사람의 아내이자, 어머니가 될 그녀들에게 임하시기를!"

"와아아아아!"

처음에는 마냥 어리둥절하던 웰디는 재단 아래에서 열광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는 얼굴을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에선 처음 참가해본 축제에 순수하게 즐거워하고 있는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정신없고 시끄럽기만 해도 이런 경험이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를 보낸 이후 마냥 안절부절못하던 호위기사들도 서로를 보며 난감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들도 하나뿐인 아가씨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내심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렇게 한창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였다.

"어? 저게 뭐지?"

"……?"

누군가 하늘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리는 소리가 우연치 않게 내 귀에 들어왔다. 그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웬 커다란 비행 물체가 조금 높은 하늘 위를 여유롭게 선회하고 잇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커다란 새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그와는 상당히 다른 부분이 눈에 띄었다. 날카로운 발톱과 가죽으로 된 2장의 날개, 그리고 뾰족한 부리와 도마뱀을 닯은 눈동자. 그것을 알아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멍하니 중얼거렸다.

"와이번?"

실물을 확인하고도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와이번이라니! 지능을 가진 비행형 상급 몬스터가 아닌가!

'왜 저런 게 여기에 잇는 거야?'

와이번은 주 서식지가 까마득한 산맥의 절벽 위이기에 도시 쪽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종자였다. 꽤나 공격력이 강한 몬스터이기도 해서 숙련된 용병들조차 다루기 까다로은 상대다. 그런 놈이 하필 민간인들이 사는 장소에 나타난 것이다.

한데, 문제는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처음엔 단 하나만이 보였는데, 어느 순간 2마리가 된다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십수 마리로 불어나 저물어가는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주위가 갑자기 캄캄해지자 소란스럽던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하나 둘씩 위를 올려다보았다.

바로 그때,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엎드려, 엘!"

"……!"

삐이이이이이-

콰아앙!

"으아아아악!"

가느다란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주위가 온통 진동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완력에 끌어당겨진 나는 무언가에 머리가 덮이고서야 하늘에서부터 불벼락이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좀처럼 상황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바로 와이번들이 인간들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불덩어리는 위아래로 저억 벌린 와이번의 입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쿠우우우! 콰앙! 콰아앙!

"사, 사람 살려!"

"아아악!"

방금 전까지 축제의 열기에 들떴던 공간은 이제 생각지도 못한 재앙에 놀란 비명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도망치다 말고 불덩이에 맞아 쓰러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지옥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그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나는 잠시 후, 누군가 나를 강하게 감싸 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을 들어 보니 엘뤼엔이 로브의 천으로 내 머리를 둘러 덮고 잇었다. 아마 상황이 급해 자신의 몸으로 불덩이를 막아준 것 같았다. 다행이 물로 된 그의 몸은 불덩이에 맞아도 상처 하나 없이 무사했다.

"아, 아버지?"

"정신 들었냐? 허둥거리지 마라. 지금부터 여길 빠른 시간 내에 벗어나야 할 것 같으니까."

"자, 잠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시벨들은?"

"우리는 무사해, 엘!"

당황해서 주의를 둘러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시벨이 다른 일행들과 함께 서 잇었다. 다행히도 그 자리에는 창백해진 안색의 웰디도 함께였다. 공격을 당해 혼란해지는 틈을 타 호위기사들이 달려가 무사히 구출해온 것 같았다.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에 안심하던 나는 무심코 넘어갈 뻔한 사실을 떠올리고 황급히 물었다.

"아버지! 방금 와이번들이 공격한 거 맞지?"

"봤으면서 뭘 묻는 거냐?"

"으으~ 진짜야? 왜 와이번들이 나타난 거야? 여긴 몬스터 출몰 지역도 아니잖아?"

갑자기 나타난 십수 마리의 와이번들은 축제의 현장을 순식간에 초토화시켰다. 미처 기습을 예상하지 못했던 탓에, 몰려 있던 군중들 대부분이 피하지 못하고 공격을 당해 큰 부상을 입거나 죽었다. 그나마 그것이 오래 가지 않은 것은 마차 안에서 뛰어나온 마신의 사제들 덕분이었다. 주 특기가 저주와 전투 계열인 사제들답게, 그들은 와이번이 공격한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자신들이 가진 능력을 이용해 놈들을 격추시키기 시작했다.

"마신의 권능으로 명하노니!"

"네 뿌리 끝까지 저주의 인을 얻으리라!"

콰앙! 콰지지직!

삐이이이익-

"키에에에엑!"

사제들이 모든 와이번들을 다 상대할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기에는 충분했다. 간혹 땅에 내려오는 놈들은 신전의 기사들이 정면으로 검을 들이대 막았다.

"이 틈에 어서 도망치시오!"

"서두르시오!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시제들의 외침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쳤다. 운이 나빠 불벼락을 정면으로 맞은 자들 외에는 대부분 무사히 도망치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본 나는 사제들을 도우려고 했지만, 엘뤼엔의 반대가 강경했기에 뜻을 이룰 수없었다.

"아버지! 우리들도 같이 도와서 없애자!"

"내버려둬, 여기 인간들이 알아서 처리할 거다."

"하지만!"

"안 돼. 시끄럽게 굴지 말고 따라와. 일단 여기를 피한다."

딱딱하게 대꾸한 그는 내 말을 더 들으려 하지도 않고 곧장 팔을 잡아끌었다. 워낙 강하게 붙잡고 잇었기에 뿌리치기도 힘들 정도였다. 나는 별수 없이 일행드로가 함께 그 자리를 벗어났다.

13-11. 최후의 수단 (1)

참혹했던 순간과 달리 현장은 빠른 속도로 수습되었다. 마신의 사제들이 가진 능력이 생각보다 뛰어났던 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주가 보낸 도시 경비대가 속속들이 도착해 와이번을 몰아내는 것에 합세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사건이 벌어진 지 만 하루도 되지 않아 공격당한 현장은 다시금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벌어진 사상자가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에 주위의 기운은 온통 무겁게 늘어져 있었다.

도시 광장에는 그날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얇은 천에 덮인 채로 뉘여 있었다. 귀족이나 사제들 중에서도 사망자가 나왔지만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민간인들이었다. 그날 축제로 인해 도합 3백여 명의 사람들이 광장에 나왔고, 그중 50여 명이 사망, 1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신원이 확인된 시체들은 곧바로 가족들에게 돌아갔으나, 개중엔 얼굴을 아예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잿더미가 된 자들도 있었다. 도시 전체에 통곡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첸에 머무는 내내 그것을 지켜보는 내 마음 역시 편치 않았다. 그때 사람들을 도와주지 못하고 그냥 피했다는 사실이 죄책감으로 남았다. 하지만 나를 말렸던 엘뤼엔을 탓할 수도 없었다. 그 상황에서 나를 눈에 띄지 않게 보호하려고 한 의도를 충분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국에서의 사건 이후로 나는 황제로부터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다. 그렇지 않아도 정령사는 흐귀한 직업. 만약 내가 이번 일에 나섰다면 틀림없이 알아보는 이들이 나타났을 것이고, 분명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당시 엘뤼엔이 내린 판단은 옳았다.

물론 내 귀찮음과 사람의 목숨이 같은 선에서 처리될 수는 없겠지만, 양아버지이기 이젠에 내 계약자이기도 한 그가 내 쪽의 입장을 더 최우선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고마워한다면 모를까, 그를 원망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저 혼자 뒤늦은 자책감을 느끼며 속으로 끙끙 앓고 있을 수 밖에.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이 도시를 뜨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했지만, 당분간은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적어도 와이번이 습격한 이유를 알아낸 다음에 떠나도 늦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머, 이걸 어쩌죠?"

"왜 그래요, 웰디?"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짐을 챙기는 도중에 웰디가 무척 안타깝다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리둥절하게 돌아보며 물으니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그녀의 손에 들려진 물건을 확인한 순간, 나는 짧게 신음을 흘렸다. 그것은 바로 마신의 헌물로 바쳐졌던 서클렛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왜 여기에?"

"실은 그때 너무 정신이 없어서 돌려주는 걸 잊고 도망쳤어요. 이일을 어쩌지요? 그 사람들에게는 무척 소중한 걸 텐데."

금방 울상이 된 웰디에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위안을 건넸다.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혼란이 수습되고 나면 찾는 사람이 나오겠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니 다시 돌려주면 아무런 일도 없을 겁니다. 그때까진 웰디 양이 간직하고 계세요."

"그래도 될까요? 지금 돌려주면……."

"지금은 다들 바빠서 여유가 없을 거예요. 어차피 앞으로 며칠 더 있다가 떠날 예정이니까 그 전에만 건네주면 될 겁니다."

이에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웰디와 달리 나는 속으로 착잡한 심정을 느꼈다. 하필 서클렛이 다시 돌아올 줄이야.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것뿐이지만, 어쩐지 불안한 앞날을 예고하는 것 같아 영 마음이 불편했다.

'뭐, 내일이라도 가져다주면 되겠지.'

나는 애써 그렇게 자위하며 불길한 상상을 털어버렸다. 그것이 아니라도 지금은 충분히 암울한 공기에 질식할 것 같았으니까.

바깥의 상황도 상황이지만 그중에서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축제 이후로 달라진 엘뤼엔의 분위기였다. 전에도 다정하고 상냥한 성격은 아니었으나, 와이번의 습격을 당한 이후로 그는 어쩐지 손을 대기만 해도 베일 것처럼 날이 잔뜩 서 있었다. 단순히 신경질적인 것이 아니라, 뭔가에 크게 화난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 때문에 나는 물론이고, 시벨리우스의 일행들까지 덩달아 긴장하고 있었다. 꼭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과 한방에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 상태가 하루를 넘어 이틀째가 되고 나니 슬슬 그대로 놔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차가운 냉기를 풀풀 흘리는 그에게 말을 걸기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한참의 망설임 끝에 겨우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저기… 아버지, 혹시 나한테 화난 거 있어?"

"…무슨 헛소리냐?"

"아니, 어제부터 얼굴이 굳어져 있어서. 나 때문인가 하고……."

내가 주저하며 말끝을 흐리자 그는 얼굴을 찌푸린 상태로 잠시 빤히 시선을 주었다. 그리곤 혀를 살짝 차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리 듯이 대답했다.

"뭐, 아주 관계가 없다고는 못하겠군."

"헉! 정말 나 때문이야? 왜?"

그야말로 황당한 심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요 근래 그가 화낼 만한 일을 한 기억은 없었다. 와이번의 습격 때 사람들을 도와 주려고 했을 때도 그가 만류해서 순순히 그만두지 않았던가.

누명을 쓴 것처럼 억울해 하는 내게 그는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관계가 없지 않다고는 했지, 너 때문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게 그 말이지! 어쨌든 내가 문제라는 거잖아! 대체 뭔데? 내가 뭘 어쨌다고?"

"하아! 글쎄 굳이 말하자면, 쓸데없는 일에 이리저리 휘말리는 점이랄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주변 관리가 엉망이라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하겠군."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칠칠치 못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뭔가 주위의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뜻일까?

내가 좀처럼 이해를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신경 쓸 것 없다. 그저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 있는 것뿐이니까."

"에? 내 주위의 사람 중에서? 그게 누군데?"

"있다, 그런 녀석이. 되도록 남이 하는 일엔 상관하지 않는 주의지만, 이번은 조금 기분이 나쁘군."

"이번이라니?"

"어제 일 말이다."

"어제… 라면, 와이번이 습격한 거? 그것과 관계가 있다고?"

무심코 묻던 순간, 왠지 모를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서 얼굴이 저절로 찡그러졌다. 어쩐지 전에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게 언제였더라?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보던 나는 퍼뜩 누군가를 떠올리고 눈을 크게 부릅떴다.

"잠깐만, 아버지! 서, 설마 트로웰? 와이번들을 보낸 게 트로웰이었어?"

설마 하며 물으면서도 나는 그가 부정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엘뤼엔은 냉정할 정도로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계획을 포기하지 않은 것 같더군. 뭐, 그렇게 쉽게 물러설 녀석이 아니긴 하지만. 요 근래 낌새가 수상하다 했더니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럼 그게 벌써 시자된 거야?"

"글쎄, 시기적으로 따지자면 아직은 조금 이르다. 아마 다른 목적이겠지."

"다른 목적?"

전쟁을 코앞에 둔 시점에 굳이 이런 소란을 피울 이유가 있었던 걸까?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지만 막상 결전이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졌다. 내가 정말 그를 막을 수 있을지 자신이 서질 않았다. 거리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던 사람들의 모습을 본 직후라 더욱 그런걸지도 모른다. 그 끔찍한 일이 다른 자도 아니고 트로웰에 의해 이루어졌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는데, 문제는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뒤, 이어지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에 나는 한순간 머리속을 새하얗게 비우고 말았다.

"어제 나타난 와이번들은 널 노린 거다."

"…뭐?"

"네가 있는 장소 따윈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놈이니까. 트로웰 그 녀석, 내 경고 때문에 자기 스스로 손을 쓸 수가 없으니 간접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것 같군."

"자, 잠깐만! 트로웰이 왜… 나를?"

"글쎄……. 소란을 틈타 네가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한결 마음의 부담 없이 일을 진행시킬 수 잇을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미치더니 생각의 틀이 좁아져버린 건가? 그렇게 한심한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유감이라고 할 수밖에."

"……."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걸까.

잠시 동안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엘뤼엔이 내뱉은 말들이 몽땅 단어별로 끊어져서 머릿속을 윙윙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나는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며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온몸의 힘이 빠져서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혼란에 혼란이 거듭되고,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한 지 한참만에야 나는 간신히 트로웰이 나를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심장 한구석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처음이었다. 그가 이렇게 낯설게 느껴진 적은. 내 기억 속의 트로웰은 이제 더 이상 전처럼 웃으며 나를 반기던 모습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그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떤 얼굴로 웃었는지, 어떤 식으로 나를 대했는지조차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눈앞에 그가 있었다면 서슴없이 누구냐고 물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걸까? 너무 자만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에게 있어 내 존재를 그리 가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전의 내가 인정을 받은 것은 단지 정령왕이라서일지도 모른다는 것. 이전에도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왔던 생각이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을 괴롭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표정이 어둡군."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조금 놀라서……."

"흠, 하긴 넌 유독 그를 따랐었지. 어쨌든 너도 그렇게 알고 있어라. 혼란스러운 심정은 이해한다만, 조만간 또 공격이 있을지 모르니까 당분간 단독 행동은 삼가는 게 족을 거다.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

엘뤼엔은 그 말 한마디만 던져놓고 방을 나섰다. 아마도 내게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함인 것 같았다. 그래봤자 방금 전에 들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반복해서 되새기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트로웰이… 나를…."

늘 내게서 거리를 두고 밀어내려고 했지만 한 번도 그게 진심일 거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수시로 죽일 거라는 말을 꺼내도 본심은 아닐 것이라 믿었다. 내가 그렇게 미웠던 걸까? 이런 식으로 소동을 일으켜야 했을 정도로?

그날 죽은 사람들이 다 내 목숨을 대신한 것이라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목까지 차오른 신음을 삼켰다. 그러자 쯧쯧 혀를 차는 낯익은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뭘 하는 거야, 너?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렇게 얼이 빠져서는.>

"…윽!"

한심하다는 듯 물어온 것은 바로 라피스였다. 안 그래도 심란한 참에 기름을 붓는가 싶어 나는 울컥해서 소리쳤다.

"별게 아니라니! 날 죽이려고 했다잖아! 엘뤼엔이 한 말 못 들었어, 라피스?"

<들었어. 그게 뭐?>

"뭐라니! 남의 일이라고 상관없다는 거야?"

서운한 마음에 울컥 눈물이 치솟으려 했다. 그러자 퉁명스러운 라피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누가 그렇데? 그냥 새삼스러울 게 없었을 뿐이야. 트로웰 녀석이 그런 성격인 거 몰랐던 것도 아니고, 이제 와 놀라는 게 더 이상하지.>

"하, 하지만!"

<하기야 그간 녀석의 상냥한 모습만 봤던 너로선 적응이 가질 않겠지. 이해해. 놈의 이중성격이야 자타가 인정하는 바니까.>

"이, 이중성격?"

<그래! 이제야 좀 진실이 보이냐? 아마 너만이 아니라 전대의 미네르바도 모르고 잇을 거다. 녀석이 그렇게 안면을 바꾸고 대하는 상대는 너희 둘뿐이었으니까. 정말 그놈이 내숭떠는 모습을 볼 때 마다 어찌나 닭살이던지!>

"……."

한번 말문이 트이자 그동안 쌓아뒀던 감정이 죄다 폭발했는지, 라피스는 그 뒤로 쉴 새 없이 트로웰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떠들었다. 하도 말이 빨라서 내용의 절반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주로 그가 타인에게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 또 얼마나 사악한 성격인지에 대한 폭로들이었다. 그동안 티를 내지는 않았어도 꽤나 이런 순간이 오기만을 벼려왔었던 모양이다.

녀석은 한참 동안 떠들어대고 나서야 한결 시원해졌다는 듯, 무척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대충 알았냐? 아무튼 그런 녀석이니까 너도 그냥 그러려니 해. 그 때문에 상처 받아봤자 알아주지도 않는다고.>

"…역시 그럴까."

<당연하지! 게다가 그놈은 지금 정상이 아니잖아. 제대로 된 판단 능력도 잃어버린 놈에게 뭘 더 바라냐? 아무튼 혜안이란 게 말짱 소용없다니까. 쳇! 그런 건 나나 줄 것이지.>

"하지만… 난 여전히 가족이라고 생각했어. 지금은 기억에 없다고 해도, 인연의 끈이 강하게 이어져 있으니까 내 진심을 꼭 알아봐줄 거라고. 내가… 잘못 생각한 걸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아니, 가족이라는 기준이 뭘까 싶어서. 그저 같은 피, 같은 능력을 갖춘 존재면 가족이 될 수 있는 걸까? 그래야만 하는 거야?"

<뭐야,  너 설마… 네가 정령왕이기 때문에 트로웰 녀석이 가족으로 받아줬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그렇다는 대답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간신히 눌러 참았다. 지금 여기서 내가 인정하면 정말로 현실이 돼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피스는 이미 내가 무슨 대답을 하려는지 짐작했다는 듯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너란 녀석은. 내가 아까 한 말 뭐로 들었냐? 트로웰이 사약한 놈이라고 누가 강조했던 것 같다만?

"……? 그게 뭐?"

<으이구, 답답아! 그놈이 같은 종족이라는 이유로 가족으로 인정할 놈이었으면, 내가 이렇게 열 받지도 않았어. 너도 지금 보면 알것 아니야! 트로웰이나 다른 정령왕들 사이가 가족처럼 보이냐? 어?>

흥분해서 묻는 소리에 나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시대의 정령왕들은 가족이라는 말로 불리기에는 상당히 어폐가 있었다. 잘 봐줘야 같은 전선에서 일하는 동료 정도랄까?

<그것 봐! 네가 유독 특별했던 거라고! 아무튼 저건 지가 단순하니까 다른 놈들도 죄다 단순하게 정의를 내리는 줄 안단 말이야. 대체 어디까지 둔해질래?>

"그, 그럼 왜 지금은 안 되는데? 종족의 문제가 아니면 난 예전이랑 하나도 달라진 게 없잖아!"

<그것도 말했잖아! 놈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고! 미친놈 눈에 뭐가 제대로 들어오겠냐? 그리고 내가 보기엔 트로웰 녀석, 널 대단히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여전한 것 같다. 저렇게 죽일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뭔가 불안해 한다는 뜻 아니겠어?>

"뭘 불안해 해?"

<네 설득에 흔들리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그 자식, 어른스러운 척하면서 은근히 속이 좁거든. 아니다. 어쩌면 저런 식으로 더 관심을 끌려고 하는 걸지도 몰라. 맞아! 확실해! 말리러 와주길 바라는 게 틀림없어! 이 유치한 자식!>

라피스는 씩씩거리면서 투덜댔지만, 사실 그것은 내가 내심 바라고 있던 일이었다.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안심이 되었으니까. 적어도 그가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한 가닥 기대를 가질 만한 것이 필요했다.

그때 문득 언젠가 트로웰과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악신과의 결전을 앞두던 당시였던가? 시벨리우스와 몇 가지 대화를 주고받던 트로웰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생긋 웃으며 꺼낸 말.

'난 네가 정말 좋아, 엘."

"…뭐?'

'아니, 그냥 그렇다고. 후훗, 어쨌던 '앞으로' 잘 부탁해.'

혹시 그는 과거를 기억해낸 것이 아니었을까? 그때는 마냥 어리둥절하기 만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조차 잊어버릴 만큼 강한 망각이지만, 혜안을 가진 그라면 단편적으로나마 떠올렸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만약 내 생각이 옳다면, 그가 말한 '앞으로' 라는 것은 이곳에서 벌어질 일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리라. 그에게는 과거더라도 내게는 미래의 일이니까. 다시 말해 이 시대의 트로웰을 잘 부탁한다는 소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와이번의 일은 진심이 아니라고 믿어도 되겠지?'

휴우!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졌다.

행여 그게 아니라도 미래의 그가 내 가족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번 일은 단지 지나가는 과거일 뿐. 결코 결과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굳어졌던 얼굴 근육이 다시금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그 미세한 반응을 귀신같이 눈치 챈 라피스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쳇! 내가 결국 그 자식 편으로 돌아설 줄 알았어! 그럴 거면 대체 뭐 하러 땅을 판 거냐? 입 아프게 떠들어댄 나만 멍청이지!>

"어차피 너도 트로웰을 변호했던 거였으면서, 뭘."

<누가 그딴 녀석을!>

"…근데 라피스, 아까부터 궁금해서 그러는데, 트로웰은 네 대부잖아. 대부한테 그 자식이라느니 녀석이라느니 그렇게 불러도 돼?"

<헹! 지가 어쩔 거야? 난 이미 죽었는데! 또 죽일 수 있을 테면 죽여보라지!>

그래도 죽을 죄를 졌다고는 생각하는 모양이지? 고집스럽게 내뱉는 말투에 잔뜩 긴장한 기색이 느껴지는 것 같아 나는 피식거리고 웃었다.

갱각해보면 녀석은 유난히 트로웰에게 약했다. 삐딱하게 대꾸하다가도 그가 대부의 이름으로 다가서면 늘 꼼짝 못하지 않았던가. 험담하는 척하면서 결국은 그의 입장을 대변해준 것만 해도 그렇다. 정말 싫어하는 거였다면 애초에 내가 어떤 오해를 하든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하여튼 둘 다 솔직하지 않다니까.'

하긴, 대부라고 하면 라피스에게는 또 다른 아버지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이니까. 어쩌면 꽤나 의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라피스가 죽었을 때 가장 슬퍼한 것은 내가 아니라 트로웰이 나이었을까? 갑자기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그러고 보니 아스는 잘 지내고 있을까? 지금쯤 마계에 돌아가 있겠지?"

대부라는 말 때문인지 갑자기 검은 머리카락의 귀여운 아이가 떠올랐다.

마족 아스모델. 내가 처음으로 대부가 된 아이. 벌써 청년이 된지 오래였지만, 워낙 첫인상이 강렬했던 탓인지 여전히 녀석은 내게 작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만 남아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평생을 그렇게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스를 떠올린 걸 후회했다. 녀석의 모습이 떠오르자 연결된 쇠사슬 고리처럼, 자동적으로 이사나와 알리사의 모습도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밖에 새침데기 이프리트이나 마족 기사 데르온, 카터스 제국의 황태자인 라온휘젤, 샴페인 용병단의 사람들, 심지어 수다쟁이 정령검 파이어 버스터까지. 이전에 어울렸던 모든 기억들이 한꺼번에 선명히 되살아났다. 나를 밀어내지 않고 온전히 받아주는 아버지 엘뤼엔과 트로웰의 모습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건 내가 절대 바라지 않던 상황이었다. 지난 1년 동안 나는 최대한 이곳에 오기 전의 일을 생각하지 ㅇ낳으려고 노력했다. 이전의 일이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적어도 라피스를 되찾기 전까지는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되었으니까. 그리고 녀석을 찾은 지금은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싶지 않아서 참았다.

그렇게 몇 번이나 외면해왔건만, 한 번 그들의 모습이 생각나자 그동안 참아왔던 것이 무색할 만큼 봇몰이 터지듯 수많은 추억들이 머리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아 나는 입술을 꽉 악물었다.

"…어떡하지, 라피스?"

<뭐야, 또?>

시큰둥하게 물어오는 목소리가 지금 이 순간에는 더할 수 없는 안정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아, 다행이다. 그나마 너라도 내 옆에 있어서.

꽉 막혀 있던 숨을 겨우 트였다. 나는 뜨겁게 달아오르는 눈을 얼른 굳게 감았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 미지근한 것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울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끝끝내 흐느끼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면 정말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모두가 그리워서… 죽을 것 같아.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부질없는 바람임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13-12. 최후의 수단 (2)

세상에는 '있어야 할 장소'라는 것이 있다. 언제 어디서 누가 정해주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로 암묵적인 합의에 의해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고유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사는 곳과 엘프가 사는 곳, 그 외 기타 여러 종족들의 영역이 다른 것이 바로 그래서다.

이와 같은 이유로 몬스터 또한 지정된 장소가 존재한다. 주로 인간들이 사는 영역에서 멀리 떨어진 산맥이나 숲 안쪽 같은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들이 그곳이다.

몬스터들이 지정된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 극히 드물다. 그들은 그 안에서 적당한 먹이사슬을 유지하며 생태계를 유지해나가도록 배웠다.

몬스터는 몬스터끼리, 인간들은 인간들끼리.

바로 이러한 상태가 지켜져 왔기에 오늘날까지 아크아돈이 평화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얼마 전에 인간이 사는 곳, 그것도 도시 한복판에 와이번때가 나타난 일은 대륙 전체를 발칵 뒤집히게 만들었다. 이제껏 상급 몬스터가 아무런 연고 없이 민간인들이 사는 지역을 덮친 적은 없었으니까.

게다가 공격을 당한 도시는 와이번의 서식지와는 한참이나 떨어진 곳. 원래대로라면 와이번들이 날아오다가도 지쳐서 다시 돌아가야 할 만큼 먼 거리에 있었다.

그것은 달리 말해, 와이번들이 누군가에 의해 조종을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간혹 환술사라 불리는 능력자 중에서 몬스터를 포획하여 길들일 수 있는 자들이 있었기에 그로 인한 소행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깊어졌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만큼의 많은 상급 몬스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존재는 마법의 생물이라 불리는 드래곤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 생활에 참견 안 하기로 유명한 종족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사건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미궁에 빠져들고 있었다.

온 대륙이 이 문제로 시끌시끌한데, 정령계라고 그에 대한 일을 모를 리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래저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이프리트는 소식을 듣자마자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이게 왠 자다가 날벼락이란 말인가! 세상 모든 종족들이 몰라도 그는 알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이르긴 하지만, 이 시기에 그런 미친 짓을 감행할 존재는 단 하나빡에 없다는 것을.

"트로웨엘! 이 자식이 진짜!"

씩씩거리면서 괴성을 토한 이프리트는 그 길로 곧장 트로웰을 찾았다. 다행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기척이 읽혀졌기에 그를 찾아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벌컥! 쿠웅!

"야! 나랑 애기 좀 해!"

트로웰이 있는 곳은 습격이 벌어졌다는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그런 엄청난 일을 벌려놓고도 그는 어느 한적한 저택의 홀에 앉아 유유히 창밖의 경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프리트가 뛰어 들어오자 감상을 방해받은 것이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야?"

그 모습에 더욱 기가 막힌 이프리트가 울고 싶은 심정으로 물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뭐가?"

"도시에다 와이번 때를 풀었다며! 그게 정말이야?"

"알면서 묻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는데."

"트로웰!"

미쳤다, 미쳤다 했지만 설말 정말로 공격을 시도할 줄이야!

답답함에 가슴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제 이프리트의 말투는 거의 하소연에 가까워져 있었다.

"오십 명이나 죽었다! 오십 명! 너 때문에 아무 죄도 없는 무고한 생명들이 그렇게나 많이 죽었단 말이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단 말이야?"

"흐음,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껴야 하는 건가 보지?"

"뭐야?"

"미안하지만 이프리트, 너도 알다시피 앞으로 내가 죽일 녀석들은 그보다 더 많아서 말이야. 그 정도 사소한 숫자에 일일이 신경쓰고 싶지는 않아."

"하! 그러셔? 그래, 그건 그렇다 치자. 너 전에 뭐라고 그랬어? 개시일은 일주일 후라고 그랬지? 근데 지금이 며칠이냐? 그때로부터 사 일밖에 안 지났다! 설마 날짜 감각마저 잃어버린 거냐? 잘나신 땅의 정령왕께서?"

사실 이프리트는 이 부분이 제일 억울했다. 일주일 후라는 그 말만 철석같이 믿고, 어떻게든 그 사이에 수습하기 위해 분주해 하던 것이 말짱 헛수고가 된 셈이 아닌가. 자신이 트로웰에게 현혹된 종족 마을을 돌아다니며 설득하고 있는 동안, 정작 녀석은 시기가 되기도 전에 사고 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니! 혹시 일부러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죽이려면 아예 한 날 한시에 똑같이 쓸어버릴 것이지, 이딴 식으로 미리 일을 치르는 건 또 뭔데? 고이 죽이는 것도 싫다 이거야? 인간들이 언제 다가올지 모를 죽음의 공포 속에 몸부림치는 꼴을 보고 싶어? 그래? 그런 거냐?"

힘겹게 묻는 질문과 달리 트로웰의 대답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평온했다.

"내가 어떤 마음이든 상관할 바 없젆아?"

"트로웰!"

"그래, 솔직히 말하면 네 말이 맞아, 이프리트. 난 그들이 고통 속에서 서서히 망가져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 그냥 죽으면 재미없잖아?"

아무리 미쳤다지만 명백히 도를 넘긴 행동이었다. 이놈에게는 '적당히'라는 것이 없는 건가?

경악한 이프리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는 오히려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더 알려줄까? 사실 이번 건 엘을 노린 거였어."

"엘? 그게 누구……! 잠깐만! 혹시 그 '엘'? 설마 너… 엘퀴네스의 계약자인 꼬맹이를 말하는 건 아니지?"

"그 엘 맞아."

"으아악! 너 진짜 미쳤어? 아주 모르는 녀석도 아니고, 너도 꽤 마음에 들어 하던 놈이었잖아! 저, 정말 그 녀석을 노리고 보낸 거야? 정말이지?"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 할 생각 없어."

"…제기랄! 그래서 엘은? 엘은 어떻게 됐는데!"

설마 죽은 걸까?

인간임에도 어딘지 친근한 느낌이 들던 소년이었다. 정령에 대한 뛰어난 친화력도 그렇고, 성격이 유순한 데다 사교성이 좋아서 이프리트 또한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었다. 그런 그가 죽다니, 그런 상황은 믿을 수도 없을뿐더러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조마조마하던 이프리트는 다음 순간에 이어지는 트로웰의 대답에 깊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실패했어. 생각보다 엘퀴네스의 비호가 강하더군. 어차피 혼자였더라도 그 정도 숫자의 와이번에 어떻게 될 거란 생각은 안 하긴 했지만."

"하아~ 십년감수했네. 무지 놀랐잖아, 이놈아! 내가 제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명계로 떠난다면 다 네놈 탓이다!"

"그런 걸로 충격을 받는 네가 문제인 거라고 보는데."

"그럼 다른 인간도 아니고 엘을 죽인다는데 충격 안 받게 생겼냐? 너!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야?"

만약 그가 정말로 죽었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기분에 이프리트는 입술을 푸들푸들 떨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깨달았다. 연고가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죽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트로웰이 그간 제법 친해 보였던 엘을 해칠 마음까지 먹었다면, 다른 인간들은 볼 것도 없다. 그가 원하는 대로 아크아돈에서 인간이라는 종족이 사라지게 될 날이 멀지 않은 것이다.

'정말 이 막무가네를 막을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단 말이야?'

아니, 하나 있기는 하다. 지금 바람의 영역에 봉인되어 잠들어 있는 미네르바. 그라면 트로웰의 마음을 반드시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계기 역시 바로 그였으니까.

생각 같아서는 봉인을 억지로 풀어서라도 미네르바를 깨우고 싶었다. 물론 그랬다간 진정됐던 바람의 폭주까지 다시 진행되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꼴밖에 안 되겠지만.

"후우……. 제발 나 좀 살려주라. 너나 다른 놈들은 몰라도 난 인간들이 있는 게 좋단 말이다. 온순한 엘프나 성질 더러운 드워프, 잘난척 하기 바쁜 드래곤들로만 가득 찬 세상 따윈 생각도 하기 싫다고! 대체 무슨 재미로 사냐?"

"그럼 재량껏 막아봐. 상관하지 않을 거니까."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게 더 어렵다는 거 몰라?"

"그럼 그만두면 되겠네."

"하! 결국 끝까지 굽히진 않겠다 이거지?"

원망스럽게 쏘아붙이는 말에 트로웰은 느긋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다. 그에 또 한 번 분통이 터진 이프리트는 두고 보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몸을 박차고 돌아나왔다. 트로웰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매번 확인할 때마다 속이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미네르바에 대한 그의 집착에 가까운 감정도 알고 있었고, 인간을 중오하는 마음 또한 충분히 알았다. 그렇기에 최대한 그의 입장을 이해해주려 했었다. 지금은 저래도 곧 정신을 차릴 것이라 믿으며. 그런데 이젠 그냥 놔두기엔 너무 위험해져버렸다.

정령은 세상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인간들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면, 더 이상 이 땅은 평온히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 그 간단한 진리 조차 잊어버린 트로웰에게, 이제 더 이상 어떠한 기대도 생기지 않았다.

'누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둘 줄 알고?'

입술을 악문 이프리트는 이동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지금 그가 향하는 곳은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가 있는 곳이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보류해두려 했던, 마지막 방법을 써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한편, 이프리트가 떠나고 다시금 혼자 남은 트로웰은 작은 한숨을 내쉬고 잇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집스러웠던 표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짙은 슬픔과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새삼 이프리트의 말에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비난을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다. 지금쯤 어떤 반응들이 나올 것인지는 이미 훨씬 이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이제 와 후회스러울 일도, 돌이켜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끝까지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마음이 지금 너무도 아팠다. 찌르는 듯한 통증에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리고 싶을 만큼.

이유는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고 있다. 이 고통이 시작된 것은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으니까. 엘이라는 이름의, 누구보다 자신에게 친절했던 소년을 위협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상관없어. 이제 다 됐으니까."

애초에 죽일 생각으로 벌였던 일은 아니었다. 고작 20마리도 안되는 와이번으로 상대하기넹 엘이란 존재는 강해도 너무 강했다. 소드마스터이자 정령왕의 계약자. 그 이름이 가진 의미는 결코 허투로 볼 것이 아니다. 아마 드래곤을 보냈다 하더라도 승산을 판가름하기 어려웠으리라.

그런데도 굳이 이번의 소동을 일으킨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그의 믿음을 배신하기 위해서. 여전히 자신을 믿고 있을 그에게 이제 그만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의 경고이기도 했다.

아무리 마음 착한 그라도 목숨을 위협 당한다는 사실을 알면 쉽게 웃으며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에 따른 충격으로 그가 자신을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좋았다. 내친김에 아예 엘퀴네스를 선동하여 자신을 소멸하고자 해도 상관없다. 그것 또한 바라는 바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아픈 것인지. 미워하길 바라면서도 막상 그가 자신을 정말로 외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의지하고 있던 세계가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겁쟁이인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그래봤자 이미 늦었지만.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트로웰은 피식, 자조적인 미소를 흘렸다.

아마 지금쯤 이프리트가 그들 일행을 찾아가고 있을 것이다. 오늘로서 막다른 한계에 닿았음을 깨달았을 그가 궁지 속에서 내릴 수 잇는 결정은 오직 하나였다. 그 언젠가도 경고했던 말처럼, 일이 커지기 전에, 그래서 정말로 이 땅에 재앙이 시작되기 전에 그 모든 일의 주범인 트로웰, 자신을 봉인시키는 것.

정령왕을 봉인시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힘을 요한다. 같은 정령왕이라도 이프리트 혼자만의 힘으로는 완전히 봉인시킬 수 없으니. 반드시 엘퀴네스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엘퀴네스는 본래 모든 일에 무심한 성격이지만, 훗날 귀찮아질 일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제안에 동의할 서이다.

문제는 그 상황에서 엘이 제동을 걸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순진한 그는 아직도 자신이 설득될 수 있을 것이라 믿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자고 할 것이 틀림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엘에게 약한 엘퀴네스라면 그 말에 흔들릴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되면 이제 정말로 늦어버린다. 그래서 일부러 엘을 화나게 할 구실을 만든 것이다. 그가 온전히 자신을 버릴 수 있도록.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길 때 놓치지 않는 게 좋아, 엘. 내가 마냥 느긋하게 있는 건 아니거든. 설령 되돌릴 수 있는 순간이 주어진다고 해도, 난 끝까지 악역으로 남는 쪽을 택하겠어."

후회하지 않는다. 그만두지도 않을 것이다. 포기하느니 차라리 강제로 봉인되는 편이 나았다. 그럼 적어도 이 마음을 접지 않아도 되니까. 미네르바에게 건넨 맹세를 어기는 것은 아닐 테니까. 이것이 자신이 내보일 수 잇는 최후의 양심이었다.

'그쯤이면 해피 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미네르바?'

트로웰은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잠들어 있을 자신의 연인이 갑자기 무척 보고 싶어졌다.

13-13. 최후의 수단 (3)

몬스터의 침공으로 인해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것은 바로 마신교의 신전이었다. 그들 주최로 벌어진 축제였던 데다, 하필 고위급의 귀족과 사제들을 동반한 퍼레이드 도중이었기에 그로 인한 책임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끔직한 사태를 미리 예견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토록 믿었던 마신의 보호가 없었다는 사실은 일반민중은 물론 카노스의 신도였던 자들마저 그들에게서 마음을 돌아서게 만들었다.

그나마 사제들의 활약으로 몬스터를 물리쳤기에 대놓고 비난하는 무리는 없었지만, 분위기가 흉흉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이런 와중에도 신전은 처음 계획되어 있던 교리 수업을 원래대로 진행할 계획을 밝혔다.

이번 일로 인해 신전의 위신이 망가진 것은 사실이었으나, 1년에 단 한 번 있는 일정을 위해 먼 곳에서까지 온 손님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그대로 일상으로 돌아가기에는 마음이 쓰였는지, 곧 희생자를 위한 대대적인 추모식을 연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 전에 새로운 일정을 정하고 도시를 떠나려는 우리 일행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정령계로 돌아간 이후(정확히는 역소환이었지만). 지금까지 소식을 알 수가 없었떤 이프리트 였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든 그는 내가 반가움을 표시하기도 전에 다짜고짜 화를 내며 알 수 없는 말을 소리쳤다.

"그 자식은 미쳤어!"

"…에? 그게 무슨 소리예요?"

"미쳤다고! 미쳤단 말이다!"

"으음, 확실히 정상으로는 안 보이십니다만."

"우씨! 내가 아니라! 그 녀석 말이야!"

정작 중요한 주어를 빼먹고 말하면 무슨 수로 알아들으라는 건지. 답답하는 듯 가슴을 쿵쿵 치는 그의 모습에 나는 그저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진정 좀 해봐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원……."

"나라고 이렇고 싶겠냐? 하아, 내가 아무래도 너무 오래 살았나 보다. 그러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꼴을 보는 거겠지."

확실히 9천 세면 적게 산 나이는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산 엘뤼엔을 앞에 두고 한탄할 만한 내용은 아니지 않을까.

신경 쓰여서 힐끗 옆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엘뤼엔이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나이의 반도 안 되는 녀석이 오래 살았다는 말을 운운하니, 썩 좋은 기분은 아니군."

"뭐야? 아무리 그래도 갈 때 다 된 늙은이하고는 입장이 다르지!"

"…오랜만에 보더니 겁을 상실한 모양이군."

"헉! 그, 그게 아니고!"

엘뤼엔의 눈빛이 한순간에 달라지자, 이프리트는 기겁을 하며 두 손을 내저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이라도 일단 내뱉고 보는 버릇은 여전한 것 같았다.

'그 갈때 다 된 늙은이보다 자신이 훨씬 더 먼저 명계로 떠단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겠지?'

속으로 피식 웃던 나는 문득 찌르는 듯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시벨리우스와 웰디 일행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 저분은?"

"아참! 내 정신 좀 봐. 다들 인사하세요. 이쪽은 이프리트라고 합니다."

"네? 이, 이프리트?"

"설마…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님 말입니까?"

의외의 정체에 놀란 듯, 유니콘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 중에서 유일하게 평온한 것은 내 전적(?)을 알고 있는 시벨리우스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네, 맞아요. 아버지의 형제이니 저한테는 삼촌뻘이랄까요?"

"누가 이 녀석의 형제라는 거냐!"

"누가 이딴 녀석과 형제라는 거야!"

사이가 나쁜 건지, 좋은 건지. 이런 부분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척척 호흡이 맞는 그들이었다. 둘 다 곧 죽어도 형제로 승화할 수는 없다는 강렬한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나의 '삼촌'이라는 발언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또한 똑같았다.

그것에 남몰래 살짝 감동을 느끼며 나는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같은 정령왕인데 당연히 가족이죠."

"흥! 차라리 정령왕을 때려치우고 말지!"

"그건 내가 할 소리다."

"뭐야? 쌓인 감정은 내가 더 많다고!"

"나 또한 만만치 않아."

또다시 티격태격하는 두 정령을 모른 척하며, 나는 어색하게 일행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모두 얼이 빠진 표정으로 정령왕들의 유치한 말다툼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하하! 저쪽은 신경 쓰지 마세요. 원래 사이가 그다지 좋지는 않거든요."

"…엘은 익숙한가 보네요? 이프리트님과 무척 친해 보이는데, 설마 저분과도 계약을 한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그냥 이전에 잠깐 여행을 같이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친해졌어요."

"여행을? 정령왕들과요?"

"…정말 놀랍군요. 정령왕이 자신과 직접 계약하지 않은 인간과 함께하다니. 믿을 수가 없네요."

뭘 그런 걸 가지고 신기해할 것까지야. 종종 인간으로 속이고 유희를 다니기도 하는 걸?

놀란 유니콘들이 눈을 크게 뜨고 감탄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시벨리우스가 냉큼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불의 정령왕만이 아니야. 전에 내가 봤을 때는 땅의 정령왕과도 함께 있었어. 그렇지, 엘?"

"어? 아아, 그건……."

"헉! 트로웰 말인가요? 그게 정말이에요, 엘?"

"설마 4대 정령왕 모두가 친분이 있는 겁니까?"

"정말 대단하군요!"

유니콘들의 눈빛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이에 어색하게 웃고만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맞아! 트로웰, 그 자식!"

"…에?"

황당해져서 돌아보니 그곳엔 이프리트가 엘뤼엔과 티격태격하다 말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후다닥 달려오더니 양손으로 내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그리곤 놀라서 눈만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내게 알 수 없는 소리를 떠들기 시작했다.

"엘퀴네스랑 애기하느라 깜빡 잊고 있었네! 엘! 네가 그 녀석 좀 말려봐라. 응? 본심은 착하고 상냥한 녀석이라며. 근데 왜 대체 저따위로 노는 거냐?"

"에? 누, 누가요?"

"누구긴 누구야! 네가 그렇게 칭찬해 마징낳는 시커먼 땅꼬맹이지!"

"시커먼…쿨럭……! 설마… 트로웰이요?"

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묻자 그는 헤비메탈을 하는 사람처럼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어찌나 강하게 부릅뜨고 잇는지. 붉은 눈동자에서 금방이라도 번개가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왠지 불안해져서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트로웰이 또 뭔가를 했나요?"

"하다 뿐이겠냐! 그 자식이 뭘 하려는지 알아? 세상에~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글쎄, 그놈이 몬스터와 타 종족을 죄다 끌어들여서 인간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거란다! 아니, 이미 일으켰다고! 아주 대대적으로 대륙을 들쑤셔놓을 작정인가 보더라! 너 이래도 그 녀석이 좋냐?"

쩌어억!

뒤돌아보지 않아도 일행들의 입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령왕이 대륙 전쟁을 주도하다니! 이제껏 전례가 없던 일이기에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트로웰의 계획이 알려지는 건 바라지 않았는데. 덕분에 입 안이 몹시 썼지만 나는 애써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것 말이군요."

"엥? 뭐야? 너도 알았던 거냐?"

"말했잖아요. 처음부터 인간들을 멸족시키겠다고 했다고. 이제 와서 놀랄 것도 없죠. 곧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요."

"후우, 그럼 그 녀석이 널 죽이려 했다는 것도 아냐?"

"네."

내 간단한 대답에 이프리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이, 그렇게 쉽게 대답할 사안이 아니야. 설마 했더니만 그 녀석 진심인 것 같더라. 너희 둘이 꽤 친했잖냐? 내 살다 살다 트로웰 녀석이 인간한테 잘해주는 모습은 처음 봤었다. 그런데도 널 죽이려고 했다고. 그게 무슨 뜻인 줄 알아? 너한테 그 정도라면, 다른 인간들은 어떻게 될지 뻔하지."

"…죄송해요."

"왜 네가 죄송해 하는데?"

"그야… 제가 설득시키지 못했으니까. 자신만만하게 선언해놓고서 결국 실패해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게 무슨 소리냐? 트로웰이 워낙 독해서 그런 거지. 네 노력이 부족했던 건 이냥. 네가 얼마나 녀석을 따랐는지는 나도 옆에서 지켜봐서 잘 알아. 세상에, 그 사악한 놈에게 친절하다느니 상냥하다느니 했던 놈은 너밖에 없었으니까. 말이 나와서 묻는 건데… 너, 설마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다들 내 입에서 어떤 답변이 나올지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잠시 둘러본 나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원래 이성을 잃으면 좀 극단적이 되기도 하잖아요. 트로웰도 그런 범주라고 생각해요. 자기 자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정령이니까. 금방 본인의 실수를 깨닫고 마음을 정리할 수 잇을 거예요."

"…진심이냐?"

"네. 으음, 설득할 기간이 조금 더 길었다면 좋았을 텐데. 처음부터 이삼 년 정도로 할 걸 그랬나 봐요. 일 년은 역시 완벽하게 친해지기엔 짧은 시간이니까. 내게 마음을 완전히 다 열 수 없었을 거예요. 좀 아쉽네요."

"……."

이프리트는 그렇다 쳐도, 어째서 유니콘들까지 저렇게 경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이 중에서 유일하게 본래의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엘뤼에밖에 없었다.

내가 영문을 몰라 바라보자 그는 한심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곧 잛게 한숨을 내쉬곤 얼어 있는 이프리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멍해 있지 마라, 이프리트. 그래서? 이곳을 찾아온 이유가 뭐지?"

"응? 아아……."

그 한마디에 굳어 있던 이프리트는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움츠린 그는 마치 해괴한 생물이라도 보듯이 나를 훑어보다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엘뤼엔의 시선에 얼른 표정을 수습하고 헛기침을 흘렸다.

"흠흠, 미안하다. 내가 좀 당황해서……."

"할 말은?"

"거참, 재촉하기는. 뭐, 하긴 이건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일이니까 나쁠 건 없지. 좋아! 이렇게 된 김에 털어놓으마. 엘퀴네스! 네 도움이 필요하다!"

엘뤼엔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비장했다. 하나로서 이미 완벽하다는 평가받은 정령왕인 그가 다른 자의 도움을 빌리려고 하는 것은 결코 쉽게 먹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상대가 사이가 좋다고 볼 수 없는 물의 절영왕 엘퀴네스라면, 이러한 결심을 내리기까지 숱한 마음의 갈등을 겪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엘뤼엔의 대답은 가차 없었다.

"기각."

"으악! 아직 다 말하지도 않았단 말이다! 왜 끝까지 듣지도 않고 기각이야!"

"어차피 쓸데없는 요청일 게 뻔하니까."

"뭐야?"

"트로웰 때문에 열 받아서 온 거 아닌가. 이 상황에서 네가 내릴 결론이라는 건 뻔하지. 녀석을 봉인시킬 생각 아니냐?"

"……!"

정곡을 찔린 듯 그대로 굳어버리는 이프리트를 보며, 나 또한 경악했다. 봉인이라니! 누굴 말이야? 설마 트로웰을 봉인시키겠다고? 나도 이럴진대, 제대로 된 사정을 모르고 있는 일행들의 충격이 크지 않을 리 없었다. 정령왕의 봉인이라니! 미네르바의 경우야 폭주를 수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치지만, 이번 것은 사정이 다르다. 다들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경직되어 잇는 것을 보며 나는 조마조마해서 소리쳤다.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트로웰을 봉인시키다뇨!"
"후우~ 누군 이러고 싶어서 이러냐? 나도 계속 고민했다고. 근데 아무래도 정신 못 차릴 것 같은 걸 어떡해? 설득해도 도무지 들어먹질 않은 데다 벌서 일은 벌렸지. 앞날이 캄캄하니 하다못해 미네르바가 깨어날 때가지 만이라도 봉인시켜두자 이거야. 정말 인간들의 씨를 말려버릴 수는 없잖아."

"아아, 미네르바가… 깨어날 때까지요."

그거라면 충분히 납득이 갔다. 지금 트로웰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미네르바의 영향이 컷다. 아마 그의 봉인에 제일 많이 충격을 받은 존재 역시 트로웰일 것이다. 그가 다시 깨어나서 이번 계획을 말려주기만 한다면 의외로 쉽게 해결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식의 방법은 롷지 않은 것 같아요. 후에 미네르바가 그를 설득시킨다고 해도, 끝까지 이번 일이 앙금으로 남게 될 거예요. 아마 인간을 미워하는 마음은 그대로겠죠. 어쩌면 이프리트님이나 다른 정령왕들에게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구요."

"우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야. 이곳, 아크아돈을 평화롭게 지키는 것이 정령왕들의 임무니까. 제 살을 파내려 하는 놈을 곱게 놔둘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고."

"그래도……."

"아, 글쎄 지금은 사정이 급하다니까? 벌써 일을 시작했다고. 이제 온 대륙이 전쟁터가 되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란 말이야. 어이, 얼퀴네스! 그러니까 봉인시키자. 나 혼자 힘으로는 힘들다는 거 알잖냐."

"기각한다고 말했을 텐데?"

"대체 왜!"

"귀찮아."

"…허!"

확실히 엘뤼엔은 멀쩡한 얼굴로 상대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 특기인 것 같다. 사태의 심각성을 뻔히 알면서도 귀찮다는 말 하나로 거절할 수 있는 배짱이라니.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무대포적인 개인주의적 성향이 마음에 들었다. 이대로 트로웰을 봉인시키는 방법은 극구 말리고 싶었으니까.

"그래요, 이프리트님. 일단은 좀 더 두고 봐요. 아직 초기잖아요. 본격적인 종족 분쟁이 벌어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어요. 제가 트로웰을 만나볼게요. 노력하면 이제라도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을지 몰라요."

"지난 일 년 동안 하고도 실패한 일이 아직도 가능하리라고 보냐?"

"진심은 언제고 통하는 법이라고 하잖아요. 다시 한 번 도전해볼래요."

내가 진지하게 대답하자 이프리트는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곧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좋아. 그렇게 하지."

"정말요?"

"그래. 하지만 이번 한 번만이야. 이번에도 설득하지 못하면, 그땐 무슨 일이 있어도 놈을 봉인시킬 거니까 그리 알아. 알았어?"

"네! 명심할게요, 이프리트님! 정말 최선을 다할게요."

내가 속으로 환호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찡그리지도 웃지도 않는 기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 통할 수 있을까나 모르겠지만, 마지막이니까 열심히 해봐라. 내가 보기엔 네가 아무리 야단법석을 떨어도 놈이 봉인당할 운명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야. 어이, 엘퀴네스! 그때가 되면 너도 귀찮다는 말로 방관하지 못할 거다! 명심해!"

"흥!"

"저, 저 자식이!"

이프리트의 단호한 경고를 코웃음으로 날려버린 엘뤼엔은 문든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기 시작했다. 맑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정면으로 보이자 어쩐지 저절로 온몸이 긴장되었다. 혹시 또다시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구박하려는 건 아닐까?

머릿속이 이런 저런 생각으로 가득해질 무렵, 크고 따뜻한 느낌이 머리 위에서 느껴졌다.

"……?"

'이게 뭐지?'

무심코 고개를 든 나는 그 정체를 깨닫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엘뤼엔이 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아버지?"

"이번이 마지막이다."

"……?"

"트로웰에게 기회를 주는 게 이번이 마지막이란 소리다."

"아, 으응."

"최대한 네 뜻대로 일을 진행시키되, 그래도 그 빌어먹을 자식이 끝가지 안 들어 처먹거든 전해라. 내 경고도 무시하고 남의 계약자에게 손대려 한 벌이 뭔지 알고 싶다면, 그대로 똥고집을 피워도 좋다고. 봉인? 헛소리하고 있네. 무조건 소멸이다. 그 사랑해 마지않는 미네르바와 다시는 엮이지도 못하도록 아주 이 세상에서 완전히 그 형제를 즈려 밟아주지."

"……."

왠지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 기분이었다. 엘뤼엔의 살벌한 말투야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가 이렇게 험한 말을 쓰는 것을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제야 나는 엘뤼엔이 지금 상당히 화가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직도 와이번 습격 사건 때의 화가 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 때문에 참고 있다는 것도.

그것을 깨닫고 나자 갑자기 몸이 하늘 위로 둥실 뜬 것 같았다. 나는 대체 그동안 왜 그렇게 외로워했던 걸까? 이렇게 넘칠 정도로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는데!

평생 손에 넣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가족을 가졌다. 그런데 사람(이제 사람은 아니지만)의 욕심이란 게 어찌나 끝이 없는지, 가족의 틀을 갖추자 이제는 모두가 화목한 사랑을 주고받는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너무 억지를 피웠던 걸지도 모른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퉁명스러웠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어엿한 내 아버지로서 나를 걱정하는 위치에까지 이르렀다. 과거든 미래든 엘뤼엔이 내 아버지라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한 번 통한 마음은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다시금 통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자각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던가. 그런데 나는 또다시 그에 대해 잊어버리고, 과거만 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만망한 기분에 배시시 웃기만 했다. 그러자 엘뤼엔이 약간 찌푸린 표정으로 물었다.

"내 말 이해한 거냐? 그렇게까지 말하면 녀석도 그 어처구니없는 계획을 계속 이어가지는 못할 거다. 놈이 상처받는다는 것 따윈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것 다 해라. 네 뒤에는 내가 있다. 알겟나, 아들?"

"……!"

한순간 미래의 엘뤼엔과 지금의 그가 오버랩 되어 보였다. 가슴이 벅차올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고, 눈문이 날 만큼 기뻤다. '아들'이라니! 이곳에서 들을 거라 생각이나 했던 말이던가! 이렇게 변한 그의 모습을 보니, 트로웰 또한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마워, 아버지!"

13-14. 통하는 마음 (1)

직접 해도 될 말을 굳이 '전해라' 라고 말할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엘뤼엔은 이번 일에 처음부터 동행하지 않겠다며 못을 박았다. 만나게 되면 기회고 뭐고 필요 없이 곧바로 소멸시키게 될 것 같다나? 그런 살벌한 이유로 거절을 하니, 도무지 그에게 같이 가자고 매달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일행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본격적으로 트로웰을 찾아가기에 앞서, 나는 우선 일행들에게 동행 의사부터 물었다. 아무래도 껄끄러운 사안이다 보니, 다른 이들에게는 이번 일정이 몹시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게다가 위급할 때 가장 의지가 될 엘뤼엔마저 빠질 의사를 보였으니, 어지간히 각오를 하지 않고서야 쉽게 동행 여부를 결정하기 힘들 것이었다.

예성대로 웰디와 호위기사들은 모두 내키지 않은 기색을 보였다. 그들은 잠시 서로를 향해 몇 번 눈빛을 주고받더니 곧 마음의 결정을 굳혔는지 나를 똑바로 응시하였다. 대표로 입을 연 것은 무척 미안한 표정을 한 카리안이었다.

"죄송하지만 저희도 안 되겠습니다, 엘님. 사실 저희들은 지금으로선 땅의 정령왕께 그런 계획이 있다는 것 자체가 무척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터질지도 모르는데, 위험할지도 모르는 곳에 웰디님을 모시고 갈 수는 없습니다."

"으음, 이해해요. 그럼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여기서 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실래요?"

"아니요, 아무래도 저희는 마을로 다시 돌아가야 할 듯합니다. 트로웰께서 종족전쟁을 주도하고 계신다니 분명 저희 유니콘들에게도 그와 관련된 소식이 알려져 있을 겁니다. 돌아가서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고 싶습니다."

"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만난 지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헤어진다니 아쉽네요."

내가 서운한 감정을 가득 담아 말하자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더니 약간 눈치를 살피는 기색으로 물어왔다.

"그런데…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뭐가요?"

"정말 트로웰님을 설득하러 가실 겁니까? 이번 일에 불씨를 지핀 것은 명백히 인간들 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중에 인간인 당신이 나서면 오히려 더욱 그분의 분노를 사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차라리 이번 일은 그냥 정령왕들끼리 해결하도록 놔두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다른 유니콘들도 동의하는지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심지어 시벨리우스까지 동조하는 표정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니요. 오히려 인간이니까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네?"

"인간에게 맺힌 감정이니, 인간이 풀어야지요. 지금 트로웰이 이런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 것은 나쁜 인간을 만났기 때문이에요. 그로 인한 분노가 너무 커서 다른 인간들도 그와 같은 범주로 보게 된거죠. 그러니 그렇지 않은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되살려줘야 해요. 현명한 정령왕이니까 금방 깨달을 겁니다. 원래부터 그리 오래 화내는 성격도 아니고요."

"…엘님은 정말 그분을 따르는군요. 혹시 무섭지는 않습니까?"

"뭐가요?"

"아니, 저어… 왠지 땅의 정령왕이라고 하면, '암흑의 주군'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잔혹한 성정과 냉정함으로 유명하지 않겠습니까? 그 때문에 정령의 친구라 불리는 엘프들조차 트로웰님을 두려워하기에 물어본 것입니다. 아무래도 엘님이 그런 부분을 모르는 듯하여……."

암흑의 주군이란 이름은 예전에도 들어본 적 있다. 그때 한순간에 싸늘해졌던 트로웰을 보며, 그도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했더랬지. 이곳에 와서는 상냥한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지만 말이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카리안, 혹시 트로웰하고 만나본 적 있어요?"

"예? 아뇨. 없습니다만?"

"그런데 트로웰이 잔혹한지 어떤지 어떻게 알아요? 직접 보지도 않은 상대의 성격을 백 퍼센트 다 안다고 자신할 수 있나요?"

까칠한 내 말투에 카리안은 한 방 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당황해 하는 그를 향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또 설령 정말로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곧 달라질 거라 믿으니까. 카리안, 으음… 이런 말까지 해도 될까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트로웰은 그냥… 화내는 방법을 모르는 것뿐이에요."

"네? 화내는… 방법이요?"

주위의 모두가 황당해 하는 것을 모른 척하며 나는 성큼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완벽한 존재잖아요. 모든 생물 위에 군림하는 그들이 한낮 감정에 매달려 크게 싸움을 벌일 일이 얼마나 되겠어요? 더구나 남을 질투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죠. 그런데 자신에게 그런 일이 닥쳤으니, 한순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진 걸 거예요. 그런 사태가 극에 치닫고 치달아 결국 그냥 다 죽여서 없어져버리면 속이 편해질 거라고 생각하게 된 거죠. 한마디로 그냥 자포자기한 상태라고 보면 돼요."

"…정말 그럴까요?"

"당연하죠. 그런 게 아니라면 그 똑똑한 트로웰이 인간을 모두 죽이겠다는 결심을 할 리가 없잖아요!"

"예?"

"인간은 이 대륙에서 가장 많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종족이에요. 그들을 멸하면 이 대륙 또한 멀쩡하지 않다는 것, 트로웰 역시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 무리한 계획을 감행하려고 하는 거예요. 아마 본인도 무척 혼란스러워하고 잇을 테죠. 그러니 괜찮아요. 지금이라도 돌려놓을 수 있으니까. 아직 늦지 않았잖아요?"

내 설명을 이해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난 내 나름대로 최대한의 변호를 했으니, 그에 대한 판단 여부는 저들이 알아서 내리도록 내버려두는 수밖에.

그렇게 대강의 대화가 마무리 되자 나는 다시금 현실적인 문제로 돌아와 중얼거렸다.

"으음, 그럼 일단 유니콘 분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가는 것은 나 혼자뿐인가?"

생각하고 보니 조금 난감했다. 사실 이곳에 온 이후로 내가 혼자 여행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자마자 엘뤼엔을 소환했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쭈욱 함께 다나지 않았던가. 그런데 막상 결전을 앞둔 순간에 아군 하나 없이 맨몸으로 가야 하다니! 이런 원통한 경우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니, 엄밀히 말하면 혼자는 아니구나. 라피스 녀석도 함께니까.'

덕분에 한결 안심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섭섭한 마음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도 같이 갈래."

"응? 정말?"

무척 반가운 요청에 무심코 고개를 들자, 보인 것은 발표하는 어린이처럼 한 손을 든 채 싱글싱글 웃고 있는 시벨리우스의 얼굴이었다.

으음, 가기로 결정한 것은 좋은데 말이지. 넌 네 옆에서 입을 쩌억 벌리고 있는 일행들의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 거냐?

슬며시 걱정이 되는 내가 한마디 건네려는 순간, 예상대로 비명에 가까운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 시벨리우스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는 이제 돌아간단 말이에요!"

"응, 그래. 조심해서 돌아가라, 웰디. 장로 할아범에게 안부도 전해주고."

"말도 안 돼요! 당연히 시벨리우스님도 함께 돌아가셔야지요! 이제 그만 유희를 끝내실 때도 됐잖아요!"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지. 내가 언제 함께 돌아가겠다고 한 적 있었어? 난 처음부터 엘을 따라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와 함께 다닐 거야. 게다가 지금처럼 엘이 곤란한 상황에서 따날 마음은 더더욱 없어. 우리는 친구니까. 그렇지, 엘?"

빙긋 웃으면서 묻는 말에 나는 그렇다는 대답 대신 말없이 식은 땀을 흘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즉시 울먹이는 표정을 거둔 채 표독스러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한 웰디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친구로서 인정을 받고도 이렇게 곤란한 심정을 느껴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대체 뭔 여자가 저리 질투심이 많단 말인가.

민망해져서 시선을 피하자, 따갑던 눈길이 멈춘 듯싶더니 다시금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웰디가 조용히 흐느끼며 말하고 있었다.

"너무해요, 시벨리우스님. 그럼 저는요? 저는 당신의 약혼녀예요. 친구보다 훨씬 중요한 존재 아닌가요?"

"벌서 몇 번이나 말했지만, 장로 할아범이 억지로 정한 혼약 따위엔 관심 없어. 고로 내게는 네가 약혼녀도 무엇도 아니지. 이젠 알아들을 때가 되지 않았나?"

"…흑! 흐으윽! 어엉! 흐어엉!"

"……!"

쌀쌀맞은 시벨의 대꾸에 웰디는 아예 대놓고 통곡했다. 그간 보아왔던 정숙하고 도도하던 이미지하고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었다.

"웨, 웰디님! 일단 진정을……."

"고정하십시오!"

눈물 콧물 신경 쓰지 않고 흉하게 우는 것에 호위기사들마저 당황했는지 서둘러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에 아랑곳하지 ㅇ낳고 한참이나 더 흐느낀 웰디는 모두의 표정에 지친 기색이 떠오를 때가 돼서야 겨우 눈물을 그치고 사나운 눈이 되어 소리쳤다.

"이 나를 몇 번씩이나 거절하다니! 두고 보세요, 시벨리우스님!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날이 오실 거예요! 할아버지께 말씀드려서라도 결코 그냥 넘어가게 뒤지 않을 겁니다!"

헉! 저건 설마 선전포고?

다분히 협박적인 멘트에 어깨를 움츠리며 긴장한 나와 달리 세빌리우스의 표정은 여전히 태연하기만 했다. 녀석은 할 테면 해보라는 듯 살짝 비웃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익!"

"웨, 웰디님. 진정하십시오!"

"너무 흥분하시면 해롭습니다."

씩씩거리던 웰디는 호위기사들이 다시금 달래기 시작한 후에야 호흡을 안정시켰다. 그러고 나서 한참 동안 시벨리우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곧 무슨 결심을 했는지 입술을 꽉 물고는 홱! 하고 등을 돌리며 말했다.

"카리안, 아렐. 돌아가요."

"예? 하, 하지만 시벨리우스님은……."

"아직 돌아가실 의사가 없으신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지 않나요? 장로님께서 알아서 해결하실 겁니다. 힘! 없! 고! 자! 격! 없! 는! 우리들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죠."

왠지 후자의 말에 강한 억양이 서린 것 같은 건 내 착각만이 아니겠지? 거의 비꼼에 가까운 말 때문인지 호위기사들은 얼굴을 잠시 경직시켰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지는 않지만 명령에 순응하기로 한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모시겠습니다, 웰디님."

그렇게 유니콘들은 떠났다. 당초 처음 목적이었던 시벨리우스의 귀환을 이루지 못한 채로.

돌아간 그녀가 장로라는 유니콘에게 어떤 말을 할지, 그로 인해 어떤 과장이 일지 미루어 짐작이 가능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치를 보아 시벨리우스도 이미 단단히 각오를 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으음… 미안해, 시벨. 나 때문에 이렇게 할 필요까진 없었는데……."

"응? 아니야, 어차피 난 돌아가고 싶은 마음 없었어. 마을에 있어봤자 숨만 막힐 뿐이거든. 그보다는 이렇게 너랑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여러 가지를 경험하는 게 더 좋아." 

"하지만 이번 일로 네 입지가 위험해질 텐데. 게다가 장로라는 분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 아니야."

"흥! 상관없어, 그런 독재자 따위. 어디 한번 멋대로 날리쳐보라지. 계승자랍시고 떠받들면서도 정작 마을 안에서 나를 제일 무시하고 잇는 건 바로 그 할아범이라고. 킥킥! 하나뿐인 손녀가 눈물 콧물 쏟으면서 돌아가면 어지간히 속이 쓰릴 거다. 난 오히려 홀가분해. 그동안 계속 질질 끌려 다니기만 해서 상당히 괴로웠거든."

"…뭐, 네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내가 씁쓸하게 중얼거리자 녀석은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은듯, 급히 화제를 전환시켰다.

"그보다 엘!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야? 그 땅의 정령왕을 찾아가는 길은 알고 있어?"

"음? 아~ 그건 이프링트님이 아실 거야. 그렇죠?"

그제야 떠오른 사실에 내가 한쪽에 서 있던 이플이트를 향해 묻자,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데려다주지는 않을 거다."

"엑? 그럼 어떻게 해요?"

"위치를 알려주면 될 거 아니야! 난 더 이상 그놈하고 엮이기 싫다고! 그 면상 보는 것만으로도 열이 뻗쳐 죽을 지경이야! 네가 설득한다고 햇으니까 네가 알아서 해!"

그렇게 쌀쌀맞게 말하며 알려준 트로웰의 위치는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버스나 전철이 있을 때의 이야기고, 이곳의 이동 수단으로 치면 말을 타고도 며칠은 가야 할 듯한 거리였다. 

이제껓 장거리 여행을 했던 경험으로 치면 그리 부담스러운 날짜는 아니었지만,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마음이 저절로 조급해졌다. 이미 전재은 시작되었다. 내가 찾아가는 그 사이에도 트로웰은 서슴없이 인간들의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짓밟고 부술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설득해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싶었다.

그렇다고 안 간다는 엘뤼엔에게 부탁할 수도 없고, 이 순간에는 든든하던 시벨리우스의 마법마저 기대하기 힘들었다. 트로웰이 한 장소에만 계속 머무는 게 아니라 조금씩 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을 통한 이동은 정확한 좌표 계산이 필수이기에 이동하는 존재를 찾아가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랐다.

'그러고 보면 라피스가 꽤 대단하긴 하단 말이야? 언제 어느 때든 척척 텔레포트를 했었으니.'

나는 새삼 라피스가 천재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속으로 잠시 감탄했다. 물론 그 뒤로 이어진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하느라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아~ 진짜 막막하네. 이제 어떻게 하지? 날아갈 수도 없고……."

"아! 그럼 되겠다. 바로 그거야, 엘!"

"엥? 정말 날아가자고? 하지만 플라이 마법이라고 해봤자 이동속도가 그리 빠르지는 않을 텐데?"

"괜찮아, 내가 태우고 가면 하루 만에 갈 수 있어."

"태우… 다니?"

내가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하자, 시벨은 생긋 웃더니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녀석의 몸에서 갑자기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더니 우뚝 서 있던 형체가 일그러지는 것이 아닌가!

"헉! 뭐, 뭐야?"

우글우글 번형을 시도한 녀석의 몸은 어느새 엎드린 것처럼 가로로 길게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 시야를 가득 메운 빛이 사라졌을 때, 그 자리에는 블루 엘프가 아닌, 우아한 백마 한 마리가 서 있었다. 그것도 양쪽에 커다란 날개와 이마에 금색의 기다란 뿔을 가진 채로.

"……!"

대체 이게 뭔 일이라지? 조금 멍해졌던 나는 그 모습이 상당히 낯익다는 것을 깨닫고 조심스레 물었다.

"시벨리우스? 혹시 너야?"

<응! 어때, 엘? 이 모습으로라면 빠르게 이동할 수 있어. 높이 날아갈 테니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을 거고, 괜찮은 방법이지?>

꽤나 오랜만에 보는 본체라서 그런가, 녀석이 유니콘임을 뻔히 알고 있었는데도, 지금의 이런 상황이 무척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말이 말을 하다니!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어깨를 움츠리자 대번에 그 반응을 느꼈는지 시벨이 의아하게 물었다.

<엘? 왜 그래? 아, 하긴. 본체는 조금 기분 나쁜가?>

"응? 아, 그,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라 조금 적응이 안 돼서 그래."

<오랜만? 전에도 유니콘의 본체를 본 적 있었던 거야?>

"그냥 그럴 일이 있었어. 근데 정말 괜찮겠어? 확실히 나쁘지 않은 방법이긴 하지만, 내가 너라면 누굴 등에 태우고 다니는 게 좋은 기분은 아닐 것 같은데."

<괜찮아, 넌 친구잖아.>

그렇게 말하며 시벨리우스는 생극 미소를 지었다(말의 모습인지라 그다지 멋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고민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어차피 상황이 긴급했기에 나는 망설일 여유 없이 염치를 불구하고 녀석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했다.

그 뒤, 나는 녀석과 함께 앞으로의 일정을 논의했다. 아무리 빠르다 해도 하루는 꼬박 걸리는 거리이니 만큼, 여러 가지 준비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한 일은 근처 상회에 들러서 하루분의 식량을 사는 것이다. 하늘 위에서 제대로 먹을 수 있을지의 여부는 미지수지만, 일단은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어서였다. 그 외, 필요한 물품 몇 가지를 작은 배낭에 챙겨 넣은 나를 향해 시벨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오늘 하룻밤을 꼬박 새서 갈 거야. 나야 하늘 위의 이동이 익숙하지만, 아마 네가 많이 피곤할지 몰라.>

"그건 괜찮아. 나도 체력만큼은 누구에게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그거야 나도 잘 알지. 그나저나 높은 곳이라 새벽엔 꽤 추울 텐데, 담요 같은 거라도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

"으음, 그런가. 담여는 들고 다니기 번거로우니까 미리 두꺼운 외투를 입는 편이 낫겠다."

그때, 이프리트가 끼어들었다.

"어이, 꼬맹이! 외투가 왜 필요해? 그거 있잖냐. 내가 전에 화기를 넣어둔 화석 목걸이."

"네? 아~ 그, 그렇지. 참."

영혼의 보석을 화석이라고만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그때, 좀 더 목걸이의 용도를 다양하게 만들기 위해 이플이트에게 보조마법을 걸어달라고 부탁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보온마법 대신 불의 정령을 봉인하고자 했고, 그것이 실패하자 자신이 가진 화기의 일부를 나누어주는 것으로 대신했었다.

평소라면 그 사실을 떠올리는 것으로 만족했겠으나, 이번은 상황이 나빴다. 라피스가 깨어난 이후로 그 모든 목걸이의 기능들이 죄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아마 녀석이 가진 기운이 폭발하는 과정에서 이플이트의 기운과 충돌하면서 무언가 일이 벌어지게 된 것 같기는 한데 자세한 사정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보니 그때 카사가 봉인되기를 꺼려했던 것도 다 그 안에 들어 있던 라피스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급 정령에게는 드래곤의 기운이 픙분히 두렵게 느껴졌을 테니까. 왜 바보처럼 그때 그 안에 뭔가 들어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지금 떠올려보면 참으로 민망한 기억이었다.

'가만? 이미 라피스는 죽었잖아? 영혼인 상태에서도 드래곤의 기운을 낼 수 있는 건가?'

문득 의구심이 들었지만 마침 이어지는 이프리트의 말 땜누에 더이상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을 이을 수 없었다.

"하여간 인간들은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니까. 어쨌든 목걸이를 이요하라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쓰냐? 그거 하나면 웬만한 추위는 다 막을 수 있을 거다."

"으음, 알겠어요."

"어때? 내가 무척 고맙지?"

"네? 아, 예……, 그럼요. 하하하!"

무척 뿌듯한 표정을 하는 그에게 나는 차마 사실대로 털어놓지 못했다. 화기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면 당연히 그 이유를 물을 테고, 그렇게 되면 라피스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하는데, 최대한 그런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외투를 챙기지도, 그렇다고 목걸이를 기대하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상황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배려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는 것을 몸소 깨우친 순간이었다.

'설마 그 정도 추위에 동사하지는 않겠지.'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좋아, 그럼 이제 그만 출발할까?>

"응! 부탁해."

<맡겨만 두라고!>

내가 훌쩍 등에 타오르자 녀석은 가볍게 발굽을 구르며 하늘을 날아오를 준비를 했다. 새하얀 날개가 천천히 펄럭이기 시작하는 것을 본 나는 배웅하듯 한쪽에 서 있던 엘뤼엔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 아버지. 그동안 아버지는 뭐 하고 있을 거야?"

"나는 잠시 정령계로 돌아가 있겠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네 쪽의 상황에는 계속 귀를 열어놓고 있을 거다. 내가 나설 땐 결과는 단 하나뿐이다. 알고 있겠지? 최대한 내가 나설 일 없도록 네 선에서 잘 처리해라."

"응, 알았어."

그가 나선다는 것. 그건 다른 말로 트로웰을 완전한 소멸을 의미했다. 강제로 소멸된 이후에도 정상적으로 명계에 들어갈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지만, 결코 엘뤼엔에게도 그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생각으로 우울해 하는 내게 옆에 있던 이프리트가 진지한 표정으로 충고를 건네어왔다.

"어이, 꼬맹이! 여차 할 땐 그냥 튀어버려. 괜히 고집 피우다가 붕변당하지 말고. 네 말마따나 아직 늦지는 않았지만, 최악의 상황인 것만은 변함없으니까. 행여 일이 터지더라도 너 하나만큼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

"으음, 노력해볼게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꼭 살아라. 네가 죽으면 나도 꽤 서운할 것 같으니까."

"…네. 고마워요, 이프리트님."

히이이잉!

"우왓!"

자신 없는 대답을 내뱉고 나자 시벨리우스가 예고도 없이 하늘로 높이 도약해 오르기 시작했다. 무방비였던 나는 갑자스런 이동에 놀라 기겁을 하며 황급히 녀석의 갈기를 붙잡았다.

그러고 나서야 떠오른 사실 하나. 지금 별다른 안전장치는커녕 안장이나 고삐도 없는 상태였지, 아마?

'맙소사!'

설마 이 상태로 땅 위도 아니고, 까마득한 하늘 위를 질주해야 한다는 건가?

머릿속의 핏기가 한순간에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경악하는 내 상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벨리우스는 아주 얼이 빠질 만큼 빠른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휙휙 지나치는 배경이 하늘인지 땅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으악! 천천히 가, 천천히! 시벨! 날 죽일 셈이냐!"

<응? 뭐라고, 엘? 바람소리 때문에 잘 안 들려~ 나중에 말해~>

"이 자식! 나중은 뭐가 나중에야? 그 전에 내가 죽는다고오! 천천히 좀 가란 말이닷!"

<미안해~ 잘 안 들려!>

"너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떨어지면 죽는다! 

이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얄궂은 녀석은 등에 탄 사람을 위해 최소한의 바람 보호막조차 만들어주지 않았다. 아마도 그간 사람을 태워보지 못해서 그런 부분에 대한 배려에 어두운 모양인 듯했지만, 지금으로선 전혀 이해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녀석의 갈기털을 생명줄인 양 꽉 붙잡고 있어야 했으니까.

행여 손을 놓치기라도 하면 나는 그대로 어마어마한 바람의 압력에 떠밀려 뚝 떨어지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죽더라도 가능한 추락사만큼은 피하고 싶다. 하고 많은 죽음 중에 왜 하필 그런 끔직한 방법으로 죽어야 한단 말인가!

이런 상태가 앞으로 하루 동안이나 계속된다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도착하면 두고 보자!'

필사적으로 녀석의 등에 매달리는 내내 나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중얼거렸다.

13-15. 통하는 마음 (2)

쿠웅! 콰아아앙! 쿠웅!

"으아악! 모, 몬스터다!"

"꺄악!"

"도망쳐!"

엘이 시벨리우스와 함께 출발하고 있을 무렵, 트로웰은 은간들의 도시를 향한 두 번째 공격을 개시했다. 이번엔 한 무리 정도가 아닌, 수백으로 이루어진 몬스터 부대를 동원한 침략이었다.

이미 시작된 전쟁인 이상, 시간을 끌며 지루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다른 정령왕들의 마음에 망설임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욱 과감히 진행할 계획이었다.

흔히들 처음이 어렵다고들 한다. 이미 몇 번이나 인간의 도시를 멸한 경험이 있는 트로웰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말이긴 했지만, 워낙 사안이 컸기 때문일까? 이번 일만큼은 그도 여러 번 마음의 갈등을 겪었다. 하지만 첫 번째 공격을 감행하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약간이나마 남아 있던 미련마저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이미 이프리트가 우려한 바대로 가장 친한 친우였던 엘을 해치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에게 있어 마음을 쓸 인간이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퍼억! 퍽!

케에엑! 취익! 취이익

"아아악! 사, 사람 살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뒤늦게 출동한 도시의 경비대는, 습격하는 몬스터 무리에 무의미한 저항을 시도한 지 채 일각의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전멸했다.

성문이 맥없이 열리자 피난하던 사람들은 모두 비명을 질렀고, 그 뒤로는 아비규환이었다. 이미 가옥들은 절반가량 허물어졌으며, 곳곳마다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정령왕이라는, 절대적인 지배자에게 살육을 허락받은 몬스터들은 무자비한 손속으로 인간들을 도륙했다.

거리마다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도망치며 절규했다. 노인과 불구자, 심지어 갓난아이를 안고 도망치는 젊은 여인도 있었으나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트로웰의 얼굴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그는 차분히 다음 공격 장소를 가늠하고 있었다.

다음 목표는 이보다 더욱 번화하고 큰 도시로 할 생각이다. 그 다음은 더욱 큰 도시, 그 다음은 더더욱 큰 도시로, 점차 범위를 넓혀 갈 계획이었다.

계속적으로 공격이 반복되면 처음엔 그저 우연이라고 믿었던 인간들도 곧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을 유린하는 절대자의 정체를 느끼고 맥없이 쓰러져 절망하게 되리라. 물론 그 전에 다른 정령왕들의 심판을 피할 수없겠지만. 

'그러고 보니 너무 조용한 걸, 지금쯤 찾아올 때가 됐는데.'

이프리트가 떠난 지 하루가 지났다. 지금쯤이면 엘퀴네스의 성격상 당장 자신을 봉인하러 오고도 충분히 남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잠잠하다니, 설마 자신의 행위를 묵인하겠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나야 환영이지만.'

홀가분하게 중얼거리면서도 트로웰은 내심 찝찝했다. 가루약을 들이키고 물을 안 마신 것처럼 온 입 안이 썼다.

그런 그에게 다분히 퉁명스러운 어조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넌 저런 광격을 보고도 딴 생각이 드냐?"

고개를 든 그의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뾰족한 귀와 짙푸른 머리색이었다. 낯익은 준수한 얼굴이 한껏 일그러져 있는 것을 보고 트로웰은 입가에 작은 조소를 흘렸다.

"네가 엘프로 폴리모프한 것은 처음 보는군, 라미아스."

블루 드래곤 라미아스는 폴리모프 시에 무조건 인간의 모습을 택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다른 동족들에 비해 훨씬 더 무수한 유희를 경험했으면서도, 타 종족의 특성에 무지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라미아스의 눈썹이 분노로 꿈틀거렸다.

"쳇! 그럼 인간들을 살육하는 현장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명령을 내리란 말이야? 그딴 짓은 못해. 나도 양심이란 게 있다고."

"그렇게 안 해도 어차피 네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게 될 텐데. 이만한 몬스터를 다룰 수 있는 인간은 없으니까."

"넌 자기 위안이라는 말도 모르냐? 어찌 됐든 이 상황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싫어. 내가 안 편하다고!"

라미아스 본인은 죽어라 하기 싫어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이번 계획의 참모 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지금 인간을 습격하는 수백 마라의 몬스터도 바로 그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응하기 싫으면서도 그의 계획에 끌려 다니는 것이 라미아스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평소에 인간에게 나쁜 감정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좋은 인식을 가졌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왜 말리기는커녕 하자는 대로 다 해주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이 어린아이 모습을 한 땅의 정령왕에게 대책 없이 약한 것 같았다. 아마도 상처받은 듯한 황금색 눈동자 때문이리라.

천성인지 뭔지, 그는 이전부터 외로운 사람에게 마음이 쓰였다. 그리고 트로웰은 그가 이제껏 만났던 자들 중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였다. 그 눈빛을 마주 볼 때면 한없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드래곤으로 태어나서 다양한 유희를 겪고 수많은 사람을 보았어도, 그만큼 고독한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삶을 살았고, 항상 타인을 외면한 채 혼자 존재하는 엘퀴네스 조차 그런 눈빛을 한 적은 없었다. 

그래, 내 팔자가 다 그렇지, 뭐. 라미아스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까지 하나 둘씩 들쑤실 거냐? 감질나는데 아예 한꺼번에 쓸어버리는 건 어때?"

"너답지 않은 말인데. 갑자기 의욕이라도 생긴 거야?"

"누가 그렇대?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으니까 그렇지. 차라리 빨리 끝내버리고 다 잊고 살고 싶다고.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로드가 안달복달하더라. 자기들 차례는 언제 오냐고 묻더군."

말하면서도 이가 부득 갈렸다. 그 망할 로드 드래곤은 트로웰이 인간을 쓸어버린다고 말하자마자 쌍수를 들고 환영했던 놈이다. 아예 일족별로 조 편성까지 해서 전투부대까지 형성한 놈에게는 처음부터 '전쟁은 나쁘다'라는 일반적인 상식 자체가 없었다. 하긴 인간이 싫어서 아예 유희조차 하지 않는 놈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느냐마는.

그나마 다행인 것은 트로웰이 그의 뜻을 받아들일 의사가 아직은 없는 것 같다는 점이다. 당장 온 대륙을 싹쓸이할 것처럼 굴더니, 막상 시작하고 나서는 지켜보는 이가 의아할 정도로 느긋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부터 장기전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면, 무언가 마음의 변화가 있는 게 아닐까?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트로웰을 바라본 라미아스는 곧 얼굴을 찌푸렸다.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좀 더 집요하게 바라보아도 끝까지 별다른 소득이 없자, 라미아스는 조용히 체념했다. 애초에 타인의 마음을 읽는 것은 트로웰의 특기지, 자신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말이었으니까.

"당분간은 조급히 진행시킬 계획은 없어. 드래곤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건 막바지에 닿았을 때야. 안 그럼 너무 쉬워서 재미없잖아? 네 로드에게도 그렇게 전해."

"네, 네. 과연 그 고집쟁이가 얌전히 들어먹을지는 의문이지만."

"들어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이 다음 차례가 드래곤이 될 테니까."

흠칫!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라미아스는 얼굴을 경직시켰다.

"…진심이냐?"

"내가 언제 농담한 저깅 있던가?"

"말이 너무 지나쳐. 그렇게 감정적으로 결정을 내릴 게 아니잖아. 설마 너, 인간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이 대륙을 멸망시키는 게 목적이었던 건 아니겠지?"

"후후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미쳤군."

"그걸 이제야 알았다니 유감이야."

"……."

생긋 웃는 얼굴에 라미아스는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더불어 자신은 결코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아니, 과연 누가 그 앞을 막아설 수 있을까?

그와 같은 정령왕들의 개입이 아니고서야 이 거침없는 녀석을 말릴 수 잇는 존재는 아무도 없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어떤 쪽으로든 트로웰에게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 대륙을 평온하게 유지하는 것이 정령들의 임무다. 그런데 정작 정령왕인 그가 스스로 이 세상을 망치려 들다니!

'바보 같으니! 봉인이라도 당하고 싶은 거냐?'

그때였다.

"으아아아악! 좀 천천히 날라고 했잖아! 이 자식아!"

"……?"

"에? 뭐지?"

갑자기 어디선가 터져 나오는 비명에 라미아스와 트로웰은 똑같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비명소리야 이미 사방에서 울리고 있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문제는 그것이 땅이 아닌 하늘에서 들려왔다는 점이다.

무심코 위를 올려다본 그들은 곧 공중을 배회하는 희미한 형체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저 작은 점으로만 보였지만 눈에 의식을 집중하자 곧 대강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가로로 늘씬한 육체와 튼튼한 4개의 다리, 긴 주둥이의 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양옆으로 날개가 달려 있기는 하지만, 저것은 분명히…….

"말?"

"아니, 유니콘이다."

황당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라미아스의 말에 트로웰은 곧바로 고개를 저이며 정정해주었다. 라미아스는 그제야 백마의 이마에 긴 금색의 뿔이 달려 있음을 발견했다.

"아! 정말이네? 유니콘이 여긴 웬일이지? 저쪽도 아직 행동 개시 하려면 더 있어야 하잖아?"

"…글쎄. 동맹으로서 온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던 라미아스는 곧 하늘을 응시하는 트로웰의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굳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때서야 유니콘이 혼자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는 무심코 보느라 미처 알아보지 못했지만, 등 위에 사람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타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의 비명소리는 바로 그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저들끼리 다투는 건지 다시금 소란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몇 번이나 심장이 철렁했는지 알기나 해! 넌 내려가기만 하면 죽을 줄 알아!"

<아야야! 알았으니까 너무 세게 잡아 당기지 마. 아프다고.>

"시끄럿!"

유니콘이 지상으로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모습은 점차 뚜렷해졌다. 타고 있는 이의 체구는 생각보다 작았다. 나이는 10대 중반쯤 되었을까? 긴 금발과 푸른 눈동자, 여자인지 남자인지 쉽게 분간할 수 없는 예쁘장한 외모가 상당히 낯익은 느낌을 주었다.

"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왜 아니겠는가. 바로 얼마 전에도 만났던 사람인 것을.

그가 엘퀴네스의 계약자인 '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라미아스의 얼굴은 급격히 창백해졌다.

'맙소사! 저 녀석이 왜 이곳에 온 거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가슴이 서늘해진 라미아스는 황급히 트로웰의 표정부터 살폈다. 여전히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이미 엘에게 고정되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가 눈치 채기 훨씬 이전부터 엘을 알아본 것이 틀림없었다.

'최악이다!'

머릿곳에 꾸물꾸물 새카만 먹구름이 밀려드는 기분이었다.

그 사이, 엘은 유니콘과 티격태격하던 것을 멈추었다. 한결 진지해진 표정을 보아 그 또한 이ㅉ고의 상황을 눈치 챈 것 같았다.

'제발 그냥 돌아가라!'

지금이라면 도망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내심 엘을 마음에 들어했던 라미아스로서는 그가 이번 일에 휘말려 희생되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간절한 바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엘은 타고 있던 유니콘의 다리가 완전히 땅에 닿기도 젆에 등에서 훌쩍 뛰어내려, 그들이 앉아 있던 성벽 위에 가볍게 착지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말끔한 동작이었던지라 그때만큼은 라미아스도 상황을 잊고 작게 감탄을 흘렸다.

그러한 순간에도 트로웰의 시선은 엘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둘의 눈이 마주친 순간, 먼저 입을 연 것은 생긋 웃은 엘이었다.

"안녕, 트로웰! 오랜만이다."

13-16. 통하는 마음 (3)

"…설마 네가 나를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인사를 건네자마자 돌아온 것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이었다. 반갑게 환영해줄 것이라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렵게 찾아온 사람에게 겨우 건넨다는 말이 '설마'라니. 섭섭한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아예 무시하지 않은 것만도 어딘가, 최악의 경우, 그 즉시 눈앞에 칼부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던 것에 비하면 오히려 상당히 양호한 반응이라 할 수 있었다.

문득 지난날의 파란만장했던 여정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동수단을 시벨리우스의 날개로 정한 것은 내 일생일대의 실수였다. 전속력으로 날아오는 하루 동안 나는 꼬박 5번 추락했고, 16번을 미끄러졌다. 그때마다 귀신같이 눈치 챈 녀석이 곧바로 달려와 받아냈지만, 그 소림끼치는 아찔함이라니! 정말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뿐인가! 새벽부터 찾아온 추위는 또 얼마나 엄청나던지. 한겨울의 시베리아 눈밭을 알몸으로 걸어도 그보다 더하지는 않을 것이다. 꽁꽁 얼어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려고 노력하며, 나는 모든 사실을 밝히고 모포 하나 챙겨 오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겨유 도착했을 때, 내가 성벽 위에 앉아 있던 트로웰을 한눈에 발견한 것은 정말 '하늘이 보우하사'였다. 그 또한 일찌감치 내 등장을 눈치 챘는지, 굳은 표정으로 내 쪽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마주한 황금빛 눈동자에 서린 기운은 명백한 적의였다.

그때부터 본능적으로 일이 쉽지 않을 거라 예감했지만, 나는 일단 시벨리우스의 등에서 내려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지덕지한 상태였다. 어떻게든 안전해지고 싶다는 생각으로만 똘똘 뭉친 내게, 이런 기회를 제공(?)한 트로웰은 천사나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그에 대한 호감이 2백 퍼센트 상승했음은 물론, 앞으로 벌어질 모든 상황에 대해 너그럽게 넘겨줄 용의까지 무럭무럭 솟아 올랐다. 그런 각오에 비하면 싸늘한 말투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재차 웃으며 말했다.

"내가 반갑지는 않나 보네. 모처럼 큰맘 먹고 찾아왔는데."

"반가울 리가 없잖아. 게다가 저 유니콘은… 그렇군. 결국 일행이 된 건가?"

<네가 무슨 상관이야?>

뭔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트로웰의 말에 시벨리우스는 아직 본체의 모습을 유지한 상태에서 삐딱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트로웰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별거 아니야. 그저 스토커도 그 정도면 해볼 만하다 싶어서."

<뭐, 뭐가 어째?>

"헉! 참아, 시벨. 여기서 네가 난리치면 어쩌라고?"

흥분해서 푸르르거리는 녀석을 달래고 있자니, 이번엔 유쾌한 감정을 담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그새 유니콘까지 흘린 거냐, 꼬맹이? 거참, 재주도 좋단 말이야?"

"에? 누구… 엇, 당신은! 설마 라미아스님?"

처음엔 웬 엘프가 아는 척을 하는가 싶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얼굴이 라미아스와 똑같은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블루 드래곤 특유의 푸른색 머리카락 역시 그대로였다. 내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는 한 손을 흔들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핫! 오랜만이지?"

"라미아스님이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아, 그게 말이야……."

"그는 내 일을 도와주고 있어. 아주 훌륭한 참모지."

뭔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망설이던 말을, 트로웰이 자연스럽게 이어받아 설명했다. 그에 어쩐지 라미아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고개를 갸웃했다.

"참모? 라미아스님이?"

"그래, 그런데 넌 왜 이곳에 온 거지?"

"응? 그냥. 이래저래 보고 싶기도 하고, 할 말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랄까. 하하하!"

"할 말? 아직도 내게 할 말이 남았어? 설마 이프리트나 엘퀴네스에게서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했던 건 아니겠지?"

싸늘한 물음에 나는 그제야 그가 이미 봉인을 각오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혼자서 모든 것을 떠안고 잠들어버릴 생각이었던가. 끝까지 마음을 열지 않으려는, 그러면서도 타인을 위한 마지막 배려를 챙기려 했다는 사실에 가슴 한구석이 시큰해졌다.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실은 그것 때문에 온 거야. 내가 한 번 더 이야기해본다고 했거든."

"…지금쯤이면 말귀를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군. 설마 너…아직도 날 아군으로 여기고 잇는 건 아니겠지?"

"적어도 적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냉정한 말투였지만 나는 틀림없이 보았다. 그렇게 말할 때 트로웰의 눈동자가 한순간 흔들리는 것을.

훗! 역시 내가 찾아온 것이 아주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군.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겉으로는 서운한 듯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냉정해, 트로웰. 그래도 일 년이나 함께 여행한 사이잖아. 게다가 검술로는 스승과 제자지간인데, 좀 더 따뜻하게 대해줘도 되는 거 아니야?"

"이미 지난 일에는 관심 없어. 좀 더 자각이 필요한 모양인데, 네 밑에서 벌어지는 일에나 신경 쓰는 게 어때?"

"밑?"

성벽 아래의 일을 말하는 건가?

무심코 시선을 내린 순간, 나는 그대로 몸을 경직시킬 수밖에 없었다. 트로웰만 신경 쓰느라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광경이 펼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처참히 무너진 민가와 자욱한 연기들. 엉망이 된 거리마다 양손에 무기를 쥔 몬스터들이 아무렇게나 배회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인간들은 필사적을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쳤다. 곳곳마다 피와 살점이 튀고, 비명이 울려 퍼졌다. 차마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한 광경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게 정말 현실인가 하는 멍청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

문득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나는 간신히 혼란을 수습하고 고개를 들었다. 태연하게 벽에 기대어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트로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트로웰, 설마 네가……."

"그래. 내가 전부 다 지시한 일이야. 단 하나도 남김없이, 내 눈앞에서 그 더러운 모습들이 보이지 않도록 깨끗하게 쓸어버리라고 했지. 노인이고 갓난아이고 상관없이 말이야. 어때? 네가 그토록 상냥하다고 칭찬했던 내 본모습을 일견한 기분이?"

생긋 웃는 얼굴이 처음으로 잔인하게 느껴졌다. 얼마 전에 와이번의 습격 때 느꼈던 충격이 다시 한 번 되살아났다. 내가 정말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트로웰의 본 모습이 정말로 이런 것이었던가? 그저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 뿐인가?

나는 벌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 간신히 한마디를 쥐어짜냈다.

"…둬."

"뭐?"

"그만둬! 지금 당장 그만두라고, 트로웰!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스스로 후회할 일을 만드는 거냐고!"

"후회하지 않아. 지금껏 바래왔던 일을 벌이는 것뿐인데, 왜 후회한다는 거지?"

"어쨌든 일단 그만둬!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즐기다니! 제정신이 아니야! 제발 그만두라고!"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를 설득할 수 있는 기간은 이미 끝났어. 내가 네 말을 들을 거라 생각해?"

"……."

마땅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마다나 나는 이미 기회를 잃은 상태였으니까. 그래도 원망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나는 잠시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오히려 트로웰은 그것을 상당히 즐거운 듯했다. 마치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하는 듯, 그는 시선을 피하는 법 없이 똑바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에 울컥한 나는 즉시 호기롭게 소리쳤다.

"좋아! 네가 멈출 생각이 없다면, 강제로라도 내가 막겠어!"

"…뭐?"

"가자! 시벨리우스! 이대로 돌진하는 거닷!"

<어엇? 자, 잠깐만, 엘!>

"꼬맹아!"

다황한 시벨과 라미아스의 외침이 들렸지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 순간 마주친 트로웰의 표정에 당혹감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고 나름 기분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뛰어내리고 나서야 내가 있던 곳이 떨어지면 즉사할 만큼 높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흐어어억! 난 죽었다!'

이곳에 오기까지 이미 몇 번이고 경험했던 일이었지만, 이번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이제까지는 워낙 고공이었던 탓에 떨어져도 시벨리우스가 뒤따라와서 받아낼 거리가 충분했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 조금만 타이밍이 안 맞아도 늦어버리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너무 놀라서 비명도 못 지르는 날 대신해, 뒤늦게 상황을 눈치 챈 라피스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둔팅아! 거리는 재보고 뛰어내려야 할 것 아니야! 니가 아직도 정령왕인 줄 알아?>

"하하하, 그러게 말이다. 이대로 죽으면 나도 영혼의 보석이 될텐데, 이걸 어쩌지?"

<지금 그렇게 한가하게 웃을 때야!>

그럼 어쩌라고! 난 부유마법 같은 건 못한단 말이다!

괴로운 심정으로 위쪽을 바라보니 시벨리우스와 라미아스가 뛰어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이미 거리가 한참 벌어진 탓에 이제 와서 손을 쓰기는 무리인 것 같았다.

땅에 닿을 때가 되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곧 다가올 고통을 대비했다.

그러나 이대로 죽으란 법은 없다고 하던가.

덥썩! 휘리리릭!

갑자기 무언가가 나를 홱 끌어당긴다 싶더니 그대로 꽉 붙잡고 가볍게 공중에서 핑그르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얌전히 바닥에 착지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멀쩡히 살아 있음을 깨달았다.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다.

'누구지, 시벨인가? 아니면 라미아스?'

의아해서 고개를 든 나는 전혀 의외의 인물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나를 끌어안고 있던 것은 놀랍게도 안색이 창백해진 트로웰이었다.

13-17 통하는 마음 (4)

"어라? 트, 트로웰?"

설마 그가 직접 나서서 도와줬을 줄이야! 이게 꿈은 아니겠지?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입술을 악물고 있었다.열린 입에서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지금 무슨 짓을 한거야? 그래도 죽고 싶어?"

"아, 아니, 이건 그냥 어쩌다 보니... 헤에, 혹시 날 구해준 거야?"

나도 모르게 감탄해서 묻자, 트로웰은 안 그래도 찌푸려져 있던 얼굴을 더더욱 일그러뜨렸다.

"무슨 뜻이야? 구하지 말 걸 그랬던 모양이지?"

"헉! 아, 아냐! 너무 기뻐서 그렇지. 이야~ 덕분에 살았어, 고맙다, 트로웰. 역시 너밖에 없어!"

"정말이지 너란 녀석은..."

그는 말을 잇다 말고 복잡한 표정으로 날 빤히 응시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기는 한데,

애써 눌러 참는 듯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그 사이, 라미아스와 시벨리우스도 바닥에 무사희 착지한 듯 다급한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어이! 꼬맹이! 살았냐?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엘! 괜찮아?>

"하하하... 보시다시피."

그때까지도 트로웰의 품에 안겨 있는, 다소 민망한 자세였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몸을

바로 세웠다. 내가 멀쩡한 상태임을 확인하자 라미아스는 안심했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반면, 시벨은 어지간히 놀랐던 모양인지 생전 내지 않던 화를 내며 퍼붓기 시작했다.

<기다리라고 했잖아, 엘! 그렇게 뛰어내리면 어떡해?>

"윽, 미안..."

<사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네가 그래도 죽었다면, 난 평생 동안

자책하며 괴로워했을 거야!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짓 하지 마. 알았어?>

"으응, 알았어. 이제 절대 안 그럴게."

그는 내가 거듭 사과를 되풀이하고 나서야 간신히 화를 누그러트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무시무시할

정도로 살벌한 눈빛이 되어서는 트로웰을 강하게 쏘아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나를 더 이상 

나무라지 못하게 되자 이 모든 탓을 그에게 돌리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예상대로 그를 향해 격분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너! 네가 엘을 구했다고 해서, 방금 전의 일이 다 해결됐다고 여기지마! 엘이 뛰어내린 것을 전부

네 탓이니까!>

"시, 시벨... 이건 그냥 내가 실수한..."

<하지만 일을 이렇게 몰고 간 건 저 녀석이잖아! 설령 엘이 그냥 넘어간다 해도 난 절대 용서하지 않을거야!>

하나, 트로웰이 누구던가? 그는 이런 종류의 협박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릿하게 웃으며

신랄하게 대꾸했다.

"네 용서따위 처음부터 바란 적 없어."

<뭐, 뭐야?>

"설마 유니콘 한 마리 따위가 정령왕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더이상 내 신경을

거슬리지 않는게 좋아. 너로 인해서 유니콘 종족이 멸망하고 싶지 않다면."

<이, 이 자식이!>

부들부들 떠는 시벨 옆에서 라미아스는 골치 아프다는 듯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그 역시 이미 

말리기를 포기해버린 상태 같았다. 둘의 반응을 느긋하게 지켜본 트로웰은 이번엔 나를 향해 싸늘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뭔가 착작하는 것 같은데, 난 널 구할 생각 없었어.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잡았던 것 뿐. 아까 그대로

떨어져서 죽었다면, 나로선 오히려 바라마지않을 일이지. 그러니 행여 무언가 기대를 가졌다면 버리는

게 좋을 거야."

그의 말대로 기대를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굳이 저런 식으로 자각을 시킬 필요는 없잖아? 왠지

억울해져서 나는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하, 하지만 무의식중에 구했다는건, 그만큼 아끼거나 좋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 상황을 좋게 해석하는 버릇은 여전하군."

내가 괜한 짓을 한 걸까?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짧게 중얼거린 뒤, 그대로 몸을 돌려 어디론가 곧장 걸어가기 시작했다.

영문을 몰라 멀거니 그의 뒷모습을 쫓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릿속이 차갑게 식는 것을 경험해야 했다.

그의 시선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눈이 닿는 곳마다 땅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르르

진동하는 대지에 간신히 버티고 있던 가옥들이 산산이 조각나 부서지기 시작했다. 떨어진 돌무더기는 그

아래에서 간신히 생명을 부지하고 있던 인간들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으아아악!"

"사, 살려줘!"

하지만 일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바닥에 금이 간다 싶더니 쩌억 하고 갈라진 틈으로 순식간에

새빨간 불덩어리가 솟아올랐다. 용암처럼 넘실거리며 흐르기 시작한 그것은, 아군 적군 가리지 않고 인간과

몬스터들에게 똑같이 덮쳐들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생명마다 불길에 닿아 녹아들기 시작했다.

"키에에엑!"

"아아악!"

"그, 그만둬, 트로웰!"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탓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런 나를 비웃듯, 트로웰은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지진의

강도를 더욱 강하게 하기 시작했다. 그때엿다. 트로웰의 발치 가까이게 엉금엉금 기어와 그의 다리를 붙드는 것

이 보였다. 눈물과 콧물로 얼룩진 아이는 트로웰의 사나운 황금빛 눈동자를 보며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제발 자비를..."

그러나 소녀의 행동은 오히려 그의 화를 돋우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까보다 더욱 살벌해진 눈동자는

분노와 증오에 휩싸여 있었다. 트로웰은 자신을 붙잡고 있는 아이의 손을 거칠게 떨쳐내더니 혐오감 어린 표정

으로 중얼거렸다.

"더러워."

그는 곧 바닥에 쓰러진 소녀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아이는 이미 저항할 기운도 없는지 그가 움직이는

대로 힘없이 끌려 다니고 있었다. 그 상태로 천천히 트로웰은 갈라진 땅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하려는 일을 알아차리고 눈을 크게 부릅떴다. 소녀를 불구덩이 안으로 던져

넣으려는 것이다! 나는 미친 듯이 달려가 그의 허리를 뒤에서 강하게 끌어안았다.

"안 돼! 안 돼, 트로웰! 그러지 마! 제발 그러지 마!"

"이거 놔."

"안 돼! 아직 어린아이야! 살려줘!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잖아! 제발 살려줘!"

"살려 달라고?"

끄덕끄덕.

나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트로웰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마치 인형처럼 감정이 서리지 않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피식 웃고는 잡고 있더 소녀의 목을 놓았다.

털썩!

13-18 통하는 마음 (5)

"쿨럭! 쿨럭! 으으으… 흐윽……!"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소녀는 괴로운 듯 연신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그리곤 뒤늦게야 풀러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엉금엉금 기어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손을 내저어도 소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트로웰이 소녀의 등을 한 발로 강하게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트로웰!"

그 잔인한 모습에 나는 기겁해서 소리쳤다. 그러자 부드럽게 미소 지은 그의 입에서 평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금 날더러 이 아이를 살려주라고 했어?"

"…그, 그래! 부탁이야!"

"좋아, 살려주지."

"헛! 정말?"

이건 또 무슨 심경의 변화인가? 어찌 됐든 아이가 살았다는 사실에 나는 눈물이 날 만큼 깊이 안도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단, 네가 대신 죽는다면."

"……!"

"트로웰!"

<너, 너 이 자식!>

그의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은 나 하나만은 아닌 듯, 뒤편에서 경악한 라미아스와 시벨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트로웰은 나만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어떻게 할래? 네가 이 아이 대신 죽을래?"

"그, 그건……."

"왜? 역시 망설여져? 하긴, 아무리 너라도 이런 꼬맹이 하나와 목숨을 교환하는 것은 달갑지 않겠지. 아, 그래. 그럼 이건 어때? 네가 죽는다면 인간들을 전부 살려주지. 하나의 희생으로 전부를 구하는 거야. 영웅놀이 하기에 딱 좋은 조건 아닌가?"

"무, 무슨 뜻이야?"

영웅놀이라니? 척 듣기에도 그다지 좋지 않은 어감에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러자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트로웰의 입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말 그대로야. 너로 인해 누군가가 위험에서 구출되는 장면을 보고 싶은 것 아니었어? 스스로는 정의감 운운하겠지만, 결국 자기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만끽하고 싶은 거지. 모두의 존경과 감탄을 받는."

"그, 그런 거 아니야! 난 그저 널 말리고 싶을 뿐이라고!"

"그래? 그럼 죽어봐."

"뭐?"

"날 말리고 싶다며. 네가 죽으면 다른 인간들은 전부 살게 될 테니, 결국 나를 말리게 되는 셈이잖아. 안 그래?"

"……."

이건 나를 시험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 나의 죽음을 바라고 하는 소리일까. 도무지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표정에 나는 갑갑한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내 곁에 가까이 다가온 시벨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둥, '무시하라'는 둥 떠들었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트로웰의 한마디만은 가슴 깊이 박혀들었다.

"왜 대답을 못해? 거절하는 거야? 뭐, 난 상관없어. 오히려 그 편이 더 좋으니까. 단지 저들은 널 원망하지 않을까? 너만 희생하면 살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하다니 안타깝게 여길지도."

"…윽."

<닥쳐! 네 잘못을 엘에게 떠넘기지 마! 엘! 저런 녀석의 말에 고민할 것 없어!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려!>

그때, 트로웰의 발밑에서 발버둥치던 아이가 격한 신음을 흘렸다. 놀란 내가 황급히 바라보자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아이가 죽는 것과 동시에, 대륙은 종족전쟁으로 물들게 될 거야."

"뭐?"

"방금 그렇게 신호를 정했거든. 나 말고도 인간에게 불만이 있는 종족이 상당히 많아서 말이야. 엘프와 드워프, 드래곤과 유니콘까지 전부 내 일을 도와주기로 했어. 지금 그들은 공격 신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지."

"……."

"어때? 아직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해?"

짓궂은 표정으로 묻는 말에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죽는 것은 무섭지 않았다. 속한 세계가 다른 탓에 이곳에서 죽으면 명계로 가지 못하고 영혼의 보석으로 남는다는 사실이 꺼림칙하긴 했지만, 이미 한 번 죽음을 경험한 바 있어서인지 크게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내 경우에는 본 육체가 미래에 있으니, 진짜 죽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잠시 잠들어 있기만 하면, 그 언제가 되었든 기다리다 못한 엘뤼엔이 찾으러 올 것이다.(라피스와 함께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런 걸로 해결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가? 

단순히 전쟁을 중단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를 봉인시키고, 진정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내가 그를 감화시키는 것은 역시 무리였던 걸까?

갑자기 기운이 빠져,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었다. 어차피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의 비난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이 참에 아예 미친척 해봐도 상관ㅇ벗겠다 싶어 나는 충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으니까 그 아이는 놔줘."

<엘!>

"이, 이봐, 꼬맹이!"

내 결정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시벨과 라미아스가 차례로 당황해서 소리쳤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당장 '그러마' 하고 말할 거라 생각했떤 트로웰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이다.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는 전에 없이 둥근 파문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입에서 거칠고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

 

"진심이야?"

"그래."

"…그렇게까지 해서 네가 얻는 것이 뭔데? 그렇게 인간들이 중요한 거야? 네 목숨을 버릴 만큼?"

"그건 아니야."

"그럼 왜지?"

사납게 노려보는 눈빛에 나는 약간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냥… 조금 오기가 났다랄까?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나도 순순히 포기하기가 싫어서."

"하! 지금 나를 시험해보겠다는 거야?"

"설마. 네 제의를 응하겠다는 것뿐이야."

"그래? 그렇단 말이지……."

왠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싸늘하게 들린 것은 내 착각일까? 그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는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거칠게 풀어내 던졌다. 얼결에 받고 보니 1미터는 되어 보임직한 장검이었다.

"이걸 왜?"

"그걸로 자결해. 이왕 죽음을 각오했으니, 그 정도 용기쯤은 있겠지?"

"……."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나 보다. 트로웰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오른 것을 보면.

"왜? 막상 죽으려니까 무서워? 그렇겠지. 너희 인간들은 입으로는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종족이니까. 선택해. 지금 여기서 죽을건지, 아니면 이 이아기 죽는 것을 지켜볼 건지."

"…후우. 그렇게 하겠다고 했잖아. 거짓말 하는 거 아니니까 그렇게 몰아세우지 않아도 돼."

"하지만 난 못 믿겠는데? 그렇게 진실하다면 당장 증명해봐. 바로 내 눈앞에서."

똑바로 처다보며 요구하는 눈빛이 꼭 고집을 피우는 아이처럼 보여 나는 난처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만큼은 그에게 원망스러운 감정이 생기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꼭 저렇게 담달하지 않아도 되잖아? 죽는 건 무섭지 않지만, 아픈 건 싫단 말이다!

내가 어쩔 수 없이 검을 내려다보자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시벨리우스와 라미아스의 만류가 이어졌다.

<에, 엘! 아니지? 설마 정말 죽을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저런 유치한 도발에 말려들지 마. 제발 다시 생각해, 응?>

"그래, 꼬맹아. 네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뭐 있냐? 세상에 너만큼 뛰어난 인간이 다시 나올 것 같아? 네가 죽는 건 전 인류의 치명적인 손실이라고."

"어차피 다 죽을 텐데, 그런 게 무슨 상관이에요."

"아니야. 잘 생각해보라고. 지금 보니 트로웰이 널 죽일 생각은 없었던 모양인데, 차라리 기다렸다가 나중에 어디 건실한 엘프 처녀나,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드래곤이라도 아내로 얻어서 명맥을 이어가는 게 낫지 않겠어? 내가 책임지고 소개해줄게! 멋지지 않아? 네가 신인류의 조상이 되는 거라고! 네가 죽으면 엘퀴네스도 굉장히 슬퍼할 거다. 그러니까 그 검은 다시 돌려주고……."

비록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어떻게든 나를 설득하려고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코끝이 찡해졌다.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요.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니까. 처음 결정한 대로 밀고 나갈래요."

<에, 엘!>

"이봐, 꼬맹아!"

난처한 목소리들을 뒤로한 채 나는 다시금 담담히 손에 들려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결심을 굳힌 나는 검의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스르릉!

검집 안에서 새파랗게 빛나는 검신이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끌려나왔다.

이쯤이면 당연히 난리를 쳐야 할 라피스가 잠잠한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워낙 나에 대해서 잘 아는 녀석이니 만큼 설득하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한 거라 여기고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부디 한 번에 즉사하길.'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끔찍하게 느껴지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나는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은 다음에 ㄲ칼끝을 천천히 심장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러자 대번에 안색이 창백해진 시벨과 라미아스의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마둬, 엘!>

"안 돼!"

하지만 이미 나는 눈을 꽉 감은 채 강하게 검을 찌르고 있는 상태였다.

푸욱!

무언가를 꿰뜷는 섬뜩한 소리가 들리더니 곧 싸한 아픔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소통을 잊기 위해서 더욱 강하게 힘을 주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강하게 내 손을 붙잡아 힘의 진로를 방해하더니, 거의 심장 끝에 닿아가던 검을 강제로 뽑아내는 것이 아닌가!

"크윽! 무, 무슨 짓……!"

신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들어갈 때보다 뽑힐 때의 고통이 더욱 심했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뜨거운 피가 마구 쏫구쳐 나와 나는 얼른 두 손으로 환부를 감쌌다.

"으윽! 허억, 헉!"

숨을 쉬기가 힘들다. 뜨거운 입김을 토하며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따.

대체 누구지? 누가 나를 방해한 거지? 지독하게 아픈 와중에도 나는 나를 막은 존재에 대한 원망스러운 마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고개를 들고 그 정체를 확인한 순간, 나는 믿을 수 없는 심정에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일 수밖에 ㅇ벗었다. 창백한 표정으로 검을 빼앗아 든 이는 바로 트로웰이었던 것이다.

"트로웰? …왜?"

처음엔 환상을 본 건가 싶었다. 이 모든 사건을 부추긴 당사자가 왜 이제 와서 막는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보고, 다시 보아도 검을 쥐고 있는 이는 분명 트로웰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이곳에 와서부터는 좀처럼 그에 대해 알 수가 없었지만, 지금 만큼 그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은 적은 처음이다.

내가 해명을 구하는 뜻으로 그를 바라보는 사이, 기겁을 한 일행들이 달려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 엘, 괜찮아?>

"맙소사! 정말로 심장에 칼을 꽂다니! 이 지독한 녀석!"

<기다려! 바로 치료마법을 할 테니! 세상에… 피가! 피가!>

"어이, 유니콘! 네가 더 당황하면 어떻게 하냐? 그러고 있지 말고 상처를 치료할 생각이면 일단 다른 걸로 변해봐! 그 가로로 긴 덩치가 왔다 갔다 하니까 내가 더 정신이 없잖아!"

<시끄러! 어서 치료나 거들어!>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걸까? 둘이 싸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가물가물해지는 시야를 똑바로 하려고 노력하며 여전히 굳은 듯 서 있는 트로웰을 바라봐았다. 그는 무언가에 화난 듯,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치료가 진행되는 내내 나를 노려보기만 하던 그는, 겨우 통증이 완화되는 순간이 되어서야 입술을 악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

"죽으란다고 정말 죽으려는 멍청이가 어디 있어! 너 이렇게 바보였어? 네 목숨이 아무렇지도 않아? 차라리 이전처럼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서라도 우기지 그랬어! 그게 훨씬 더 너다웠을 거야! 알아?"

"하지만… 네가 증명해보라고 했으니까."

"무엇을? 네 진심?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인간들을 살리고 싶어하는 마음? 내가 그걸 알아주는 게 네 목숨보다 소중하다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이렇게끼지 하는 건데! 이럴 바에야 차라리 날 봉인시켜! 그 편이 나도 훨씬 편하니까!"

"…그럴 수는 없어. 강제로 그만두게 할 거면 처음부터 널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야. 나는 그저, 가능한 네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모든 것을 중단하도록, 어떻게든 설득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그 방법이 이거였다고?"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

힘겨운 대답에 트로웰은 왠지 한 방 먹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때쯤 두 마법사의 활약으로 심장의 상처가 거의 아물어가고 있었지만, 이번엔 마음의 고통으로 인해 심하게 지끈거렸다.

"어떻게 해야 네 마음이 달래지는데? 어떻게 하면 내 진심이 전해지는데? 대체 날더러 어떠헥 하라는 거야? 내가 죽으면 그만둔다고 했잖아.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 했던 거잖아."

문득 숨이 급하게 차오르는 것 같다 싶더니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볼을 타고 미지근한 것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내 눈물에 주위의 일행은 물론 트로웰까지 덩달아 당황해 하는 것 같았다. 턱 아래의 흥건한 느낌이 불편했지만, 나는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연신 흐느끼며 말했다.

"흐윽! 그만두자, 그만 하자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말이 통하지 않은데 어떻게하란 말이야? 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널 막으려는 것뿐이야. 네가 잘못된 길을 가는 게 싫으니까!"

"잘못된…길이라고?"

"그래! 인간에게 받은 상처가 크다는 거 알아. 하지만 이런 방법은 아니잖아. 이래봤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잖아. 트로웰, 너도 잘 알고 있는 사실 아니야? 그런데 왜 자꾸 고집을 피우는 건데? 왜 스스로를 나쁘게 만들어가는 거냐고!"

"틀려, 난……."

"난 원래가 나쁘다고? 원래부터 인간을 증오하고 있었다고? 그런데 왜 나한테는 검술을 가르쳐줬는데? 왜 내게 일 년이나 설득할 기회를 준 건데? 왜 방금 전에 나를 살렸는데? 전부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귀찮아서라고 포장했지만, 사실 누군가 널 말려주기를 기다렸던 거잖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

"뭘 모르는 건 너야!"

당당하게 대꾸한 후 나는 입술을 깨물고 있는 트로웰에게 또다시 소리쳤다.

"처음부터 옳지 않은 길을 갔으면 다시 돌아와야 할 것 아니야!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멈추질 못하는 건데! 정령왕 주제에 그정도 용기도 없어?"

"닥쳐! 더 이상 말하면 내 손으로 직접 죽여 버리겠어!"

"어차피 죽으려고 했어! 네가 막지만 않았으면!"

"……."

보이진 않았지만 지금 내 꼴이 상당히 우스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상태에서 누군가를 훈계하는 모습이라니. 심각한 상황이라지만 얼마나 보기 흉할까.

그런 와중에도 바락바락 소리까지 질러대고 잇으니, 아무리 마음좋은 사람이라도 짜증이 있는 대로 솟구칠 게 틀림없었다. 하물며 당장 마음이 불편한 트로웰이야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그는 분노하기는커녕 오히려 입을 다물었다.

담담한 척하고 잇지만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눈동자는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 안에 서린 마음의 갈등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격해졌던 감정을 추스르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흐윽! 이제 그만 하자, 트로웰."

"……."

"제발 그만 하자. 현명한 너라면 이런 식 말고도 얼마든지 감정을 다스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너무 힘들었잖아. 지금까지 계속 괴롭기만 했잖아. 이제는 그만 하고 편해질 때도 됐잖아. 응?"

"힘든 적 없어. 괴로웠던 적도 없고."

"거짓말. 자꾸 자신을 속이려고 하지 마. 사실은 그만두고 싶었잖아. 말려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지?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 네가 아무리 그대로 난 네 고집 들어줄 생각 없으니까. 잘 부탁한다는 말까지 들은 이상, 끝까지 설득할 거야. 알았어? 흑! 그러니까 네가 먼저 포기해. 그게 이 세계에 온 내 임무니까."

"임무? 잘 부탁한다고 했다니… 누가?"

"있어. 너랑 아~ 주 많이 닮은 사람."

"……."

별로 궁금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애매한 내 대답에도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대신 뭔가 깊이 고민하는 눈치로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끊임없이 흐를 것 같던 눈물이 지쳐서 겨우겨우 멈출 무렵, 살짝 얼굴을 찌푸린 그의 입에서 탁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넌 왜 나를 믿는 거지?"

"…뭐?"

"내가 너한테 기대를 심어준 적이 있던가? 한 번도, 단 한 번도 너한테 먼저 손을 내민 적도, 잘해준 적도 없었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나를 믿으려고 하는 건지… 난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어."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정말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가족을 믿는 것에도 이유가 필요해?"

"…뭐?"

"말했잖아. 난 널 좋아한다고. 내 가족이라고 생각한다고. 넌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만, 내가 네게서 받은 거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포기할 수 없는 거야. 차가운 얼굴에 감춰진 따뜻한 내면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러자 트로웰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넌…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 거니? 아직도 내가 상냥하다고?"

"응."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네 앞에서 인간들을 죽이고, 마을을 부수고, 심지어 너를 죽이려고까지 했는데!"

더듬더듬 말을 내뱉을 때마다 트로웰의 황금색 눈동자가 동요하며 출렁거렸다. 이제 완전히 눈물을 멈춘 나는 생긋 미소로 화답했다.

"아니, 넌 내가 생각한 그대로야. 트로웰, 결국 죽이지 못하고 살렸잖아?"

"…그건……."

"내가 늘 말했었지? 넌 괜찮다고. 이번은 절대 가볍게 듣지 말아줘. 넌 원래는 상냥하고 괜찮은 성격이야. 지금은 단지 겉잡을 수 없는 분노 속에 휘말려 잠시 그것을 잊고 있을 뿐이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항상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 되묻는 트로웰은 어딘지 궁지에 몰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 간절한 눈빛에 나는 생각을 이을 필요도 없이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내가 언제 거짓말 하는 거 봤어?"

"… 너 혼자만 그렇게 보는데도?"

"그야 아직 다른 사람들은 네 진가를 모르니까 그렇지. 사실 나도 이번 일로 인해 여러 가지로 놀라긴 했지만, 그동안 네게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어.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니까. 언젠가는 꼭 돌아올 거라 믿었거든. 그리고 난 지금이 바로 그 시기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넌 어때? 이번에도 내가 너무 앞서서 기대한 거야?"

"……."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트로웰은 조금 당황한 듯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그리곤 천천히 눈을 감은 채 한동안 침묵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맑아진 상태였다. 여전히 복잡하고 혼란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더 이상 아까와 같은 번민의 빛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나는 비로소 그가 마음속의 생각을 정리했음을 깨달았다.

어떤 말이 떨어질지 조마조마하며 기다리는 내게, 그는 엷게 웃고는 뜬끔없이 물었다.

"네가 검으로 심장을 찔렀을 때, 내가 막지 않았다면 넌 틀림없이 죽었을 거야. 그렇지?"

"응? 아, 그, 그랬겠지."

"그럼 넌 이미 죽은 걸로 봐도 무방하겠군."

"아, 그, 그런가?"

내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럼 할 수 없네. 종족전쟁은 그만둘 수밖에."

"…어?"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걸까. 설마 이게 환청은 아니겠지?

그토록 원하던 말을 듣고서도 나는 놀라서 굳은 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빙긋 웃는 그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네가 죽는 대신 다른 인간들을 살린다' , 그렇게 약속했잖아? 설마 내가 널 살리게 될 줄은 몰랐으니, 네가 약속을 불이행했다고 할 수는 없지. 그러니까 나도 내가 한 말을 지키겠어. 아무리 나라도 거짓말 할 생각은 없으니까."

"…트, 트로웰!"

뒤늦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나는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 것을 느끼고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는 트로웰에게 달려가 와락 품에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포옹에 놀란 듯했지만, 이 순간엔 너무 기뻐서 그가 불편해할 것이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말이야? 정말 그만두는 거지?"

"그렇게 믿을 수 없으면 다시 없던 일로 해도……."

"아, 아니야! 믿어! 정말로 믿어! 고마워, 트로웰! 정말 고마워!"

"…고마워할 쪽은 나야."

그 순간,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까지 나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그는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얼마나 이때가 오기를 기다려왔던가!

간신히 멈추웠던 눈물이 또다시 흘러내렸다. 오랜 시간 동안 잃어버린 가족을 이제야 겨우 되찾은 기분이었다.

13-19 통하는 마음 (6)

전쟁을 중단하는 것이 결정되자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트로웰은 제일 먼저

도시 안에서 날뛰고 있던 몬스터부터 물리도록 지시했다. 절대자의 권력 아래

마음껏 살육을 일삼던 놈들은 그의 후퇴 명령 한마디에 꼼짝없이 성밖으로

내쫓겼다. 다행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었다. 이미 민가는 모조리

피해를 입은 상태였으나, 이보다 더 큰 희생이 벌어지지 않은 것을 위안으로

삼기로 했다.

이렇게 되자 우리 중에서 가장 신이 난 것은 라미아스였다.

“하핫! 잘 생각했다고! 정말 내가 얼마나 그 말을 기다려왔는지 알아? 정말

감동해서 울 뻔했어, 트로웰.”

“네 눈물 따윈 하나도 반갑지 않아.”

“쳇, 여전히 쌀쌀 맞기는. 자자, 그럼 나는 지금부터 이종족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이번 일에 대해 알려야겠다. 당장 전쟁이 중단되었다고 말해줘야지. 헤헷! 로드 자식, 

쌤통이다! 아마 땅을 치고 통곡하겠지?”

“아, 부탁드려요, 라미아스님.”

“걱정 말라고. 아무튼 정말 고생 많았다, 꼬맹아. 네가 정말로 죽으려고 했을 땐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잘 해결되어서 정말 다행이야.”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알면 됐어.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마라.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생각보다 

상처가 가벼워서 치료마법으로 치유가 됐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거야.”

“네에,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이번 일은 확실히 무모하게 밀고 나간 부분이 있었기에, 나는 군소리 없이 몇 번이고

사과를 건넸다. 그에 라미아스는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괜찮다고 말하곤, 곧 떠날 의사를보였다.

제일먼저 엘프 마을부터 들른다던 그는, 출발하기 전에 아직도 본체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시벨을 향해 말했다. 

“어이, 유니콘 마을에는 네가 알려줘.”

<뭐? 내가 왜?>

“너희 종족의 일이잖냐?”

<싫다! 난 당분간 마을에 돌아갈 생각이…>

“아무튼 난 그렇게 알고 간다! 그럼 이만 다들 잘 있어! 다음에 또 보자고! “

<앗, 이 이봐!>

당황한 듯 시벨이 황급히 소리쳤으나, 이미 라미아스는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사라져버린 후였다.

그러자 자리에 굳은 채,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녀석을 잠자코 지켜보던 트로웰이 차분하게 한마디 건넸다.

“어차피 그들은 내 신호가 오지 않은 이상 먼저 인간들을 공격하지는 않을 거다. 그렇게 가기

싫으면서 지금 당장 찾아가 알려줄 필요는 없어.”

<시, 시끄럿!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그래? 난 또. 속으로 하도 고심을 하기에 안쓰러워서 말했지.”

<뭐, 뭐야?>

속마음을 들킨 것에 화가 난 듯, 시벨이 얼굴을 붉히면서 성질을 부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트로웰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태도였다. 자연스럽게 무시하며 고개를 돌린

그는 이윽고 나를 향해 물었다.

“너와 개인적으로 얘기하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겠어?”

“응? 둘이서만?”

“그래. 이곳은 너무 시끄럽군.”

<뭔? 안 돼! 엘은 아직 환자라고!>

“너한테 물은 거 아니다, 유니콘.”

<저, 저게~~!>

씩씩거리는 시벨을 이번에도 가볍게 무시한 채, 트로웰은 다시금 내게 시선을 두고 물었다.

“어떻게 할래? 선택은 네게 맡길게.”

“조, 좋아! 나도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

“그럼 장소를 옮기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 트로웰은 손을 내밀어 가볍게 내 팔을 잡았다. 그 순간, 주위의

사물이 일순 어지럽게 변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나는 생판 모를 널따란 초원 위에 서 있었다.

생기 가득한 풀잎과 향기로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운 장소였다.

“와아~ ”

-까르르륵!

-꺄하하하!

바람이 불때마다 흔들리는 꽃 안에서 달콤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방금 전에 보았던 끔찍한 지옥이

모두 환상이었던 것처럼, 평화로운 이곳엔 온통 주위를 노니는 정령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하지만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마음껏 감탄할 여유도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다짜고짜 질문부터

건네기 시작한 트로웰 때문이었다.

“넌 누구지?”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날더러 누구냐니?

이해할 수 없는 질문에 나는 마냥 어리둥절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는 무척 조심스러운 태도로 설명했다.

“이런 말 하면 이상하게 여길지 모르겠지만.. 솔직하게 말할게. 처음부터 넌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뭐?”

“겉모습은 인간인 게 확실한데, 여러 가지로 의심스러운 것이 많았거든. 혜안이 통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단순히 친화력이 뛰어나다는 걸로는 설명하기 힘든 친숙하고 모호한 느낌이었지.

지금도 그래. 그래서 너를 대할 땐 거부감이 없었던 게 사실이야.”

“아하하.. 그, 그게 말이지….”

개인적인 대화라더니 설마 이런 기습을 당할 줄이야. 너무 갑작스러웠던 탓에 나는 마땅히 둘러댈

말조차 찾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그러자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던 트로웰이 픽 하고 웃더니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하기 곤란하다 이거야? 좋아, 그럼 질문을 바꾸지.”

“에?”

쏴아아-

또다시 바람이 불었다. 풀 향기 가득한 초원의 느낌이 무척 좋았지만, 나는 이어질 트로웰의 질문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여유롭게 만끽할 수도 없었다. 조마조마한 눈으로 주목하기를 한참, 드디어

벌어진 그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넌.. 왜 여기에 온 거지?”

“….! ”

흠칫! 어깨가 떨렸다.

왜 ‘여기에’ 온 거냐니? 그건 나를 처음부터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태도를 보니 아마 미래에서 온 정령왕이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해도, 그에 비슷한 존재라고까지는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나는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긴. 내가 생각해도 난 평범한 인간이라고 하기엔 거리가 좀 멀긴 하지.

이쯤에서 들키는 것이 당연했던 건지도.'

.. 이렇게 된 바에야 대충 털어놔도 상관없지 않을까?

난처한 심정이 된 것도 잠시, 갑자기 이 상황이 재미있어져서 나도 모르게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에 당황한 얼굴을 하는 트로웰에게 일부러 입가에 손가락까지 가져가며 무척 신중한 얼굴로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너한테만 가르쳐줄게.”

“….뭐?”

“실은 이곳에서 꼭 만나야 할 녀석이 있었어. 으음,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면 알까?

내 소중한 친구가 나를 대신해서 죽었거든. 그 녀석의 영혼을 담고 있는 ‘무언가’를 찾으러 왔어.”

“친구의 영혼을 담은 무언가를?”

무심코 되묻던 그는 곧 그게 뭔지 깨달았는지 퍼뜩 고개를 틀었다. 누구보다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그이니만큼 지금 내가 한 말을 통해 단번에 영혼의 보석과 연관이 있음을 알아냈을 것이다. 잠시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는 곧 어색한 듯 시선을 피했다. 아마도 꽤 많은 사연을 담고 있을 그것을

이런 식으로 자신이 알게 되어 미안한 모양이었다.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에 웃음이 나와, 나는 얼른 고개를 저어 보였다.

“괜찮아. 네가 그런 얼굴 할 것 없어.”

“아니, 난 그저… 하아, 최대한 비밀로 해줄게. 알려지면 여러가지로 곤란한 일일 테니.”

“상관없다니까? 어차피 전부 잊을 테니까.”

“뭐?”

트로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부러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하더라도 결국 잊어버릴 거라면, 그냥 모르는 채 남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 이곳에서 내가 할 일은 전부 끝났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 스스로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돌아갈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13-20 이별 (1)

좀 더 함께할 거란 생각과는 달리 트로웰은 바로 정령계로 돌아갔다. 아직도 봉인되어

있는 미네르바의 옆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함께 여행하지 못하는 점이 아쉽긴

했지만, 나와 시벨은 텔레포트 마법을 통해 이전에 머물고 있던 마을로 돌아왔다.

정령계에 있던 엘뤼엔이 다시 온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였다. 나타나자마자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는 뜬금없이 내게 치료술을 시전했다. 그리곤 어리둥절해 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팠냐?”

“응? 뭐가?”

“…하긴, 너무 당연한 걸 물었군.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검을 꽂았으니, 아프기도 제법 아팠겠지.”

“헉! 어, 어떻게 알았어?”

그제야 나는 비로소 그가 나의 자살 미수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이미 돌아오기 전부터 그 건에 대해서는 절대 비밀로 하기로

시벨에게 철저히 약속을 받아낸 상태였기에 내가 느낀 혼란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설마 트로웰이 말했나? 아니면 라미아스가?'

시벨을 제하고 사건을 알고 있는 이라면 그들뿐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엘뤼엔의 성격을

잘 아는 그들이 이번 일을 솔직하게 말했을 거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그러자 이런 내 의문을

눈치 챈 듯, 엘뤼엔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령계에서 지켜본다고 말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새 잊어버린거냐?"

"...하하하! 그, 그랬었지, 참!"

정령왕이 하급 정령들을 통해 대륙의 모든 동태를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아마도 실시간 생중계로 나의 상황을 듣고 있었으리라. 그럼 나는 아버지 앞에서 

자결하려 한 불효막심한 아들이 된 건가? 무안하고 민망한 마음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미, 미안해, 아버지."

"...됐다. 여하튼 다시는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마라. 쯧! 협바을 하고 오랬더니,

제 목숨을 내주려고 하고, 아주 잘하는 짓이다."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차고는 있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니, 내가 얼마나 내 생각만 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당시 마음이

아무리 조급했더라 해도 나를 생각해 주는 이의 입장을 한 번쯤은 헤아렸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미래의 그가 알았다 해도 분명 슬퍼했으리라.

"다시는 안 그럴게, 내가 잘못했어, 아버지."

"그 말을 믿겠다. 덕분에 수명이 준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 톡톡히 깨달았으니 말이다.

이거 ㄴ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랍시고 생겨가지고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정신을

빼놓으니, 원,"

"헤헤헤...."

"웃지 말.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니까. 너도, 트로웰도 다음에는 절대 경고만으로 끝나고

넘어가지는 않을 거다."

"응? 나는 그렇다 치고, 트로웰이라니? 설마 트로웰한테 뭐라고 그런 거 아니지?"

이전까지 소멸 운운하던 것이 생각나서 나는 금방 핼쑥해져서 물었다.

그러자 가볍게 혀를 찬 엘뤼엔이 내 이마에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딱!

"아얏!"

"넌 이 순간에도 그 빌어먹을 녀석을 걱정하는 거냐? 그 걱정을 정말로 현실로 이루어줄까?"

"헉! 아, 아니야, 아버지! ...에? 잠깐! 정말이라고? 그럼?"

"가볍게 경고만 했다고 했잖아. 마음 같아서는 당장 소멸시켜도 풀리지 않지만,

네 노력이 가상해서 참아준 거다."

엘뤼엔으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말이었다. 그가 언제 남의 사정을 신경

쓰느라 인내한 적이 있었던가! 딱딱하게 대꾸하는 그의 얼굴에 환한

후광이 빛나는 것 같았다. 나는 감격해서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와아! 고마워, 아버지!"

"..쯧, 이럴 때만 고맙겠지."

여전히 퉁명스러운 말투이긴 했으나, 날 밀어내지 않는 걸 보면 그다지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쯤에서 근처 도시에 몬스터 떼가 습격한 일이 알려지면서 분위기가 몹시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빌미로 각 마을마다 몬스터 경계령이 내려지고 검문이 더욱 강화되었기에 우리는 당분간

지금의 장소(리첸)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혹여나 돌아다니다가 쓸데없는 심문을 받는 일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동안은 평화로운 시간이 흘렀다. 조심서잉 강한 건지, 과민한 건지 일이 주 정도쯤이면

가라앉을 거라 생각했던 경계령은 한 달이 다 되도록 풀리지 않았고, 그 덕분에 우리 일행이

리첸에 머무는 시간도 길어지고 있었다.

거리마다 분위기가 흉흉하긴 했지만, 이미 모근 사건이 마무리되었음을 알고 있는 나로선

어떠한 불안함도 생길 리 없었다ㅏ. 그저 느긋하게 귀환 주문만 떠올리면 되었기에, 

하루하루가 태평하고 행복하게만 느껴졌다. 그런 나를 단번에 현실로 잡아끈 것은, 

짜증스럽게 쏘아붙이는 라피스의 목소리였다.

<어이, 너! 돌아갈 생각이 있기는 한 거냐?>

녀석이 귀환의 문제로 신경질을 낸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언제는 계속 눌러 앉아도

상관없을 것처럼 굴더니, 역시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갑갑한 걸 싫어하는

녀석이 이제껏 잘 참고 있다 했더니만, 결국은 화가 터진 건가. 나는 미안해져서 얼른

대답했다.

"어, 어쩔 수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주문이 안 떠오르는 걸 어떡하라고."

<그렇다고 주문이 떠오를 때까지 평생 눌러앉아 있을 작정이야?>

"으음, 그럼 어떡해?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그럼 빨리 생각나게 해달라고 기도라도 하던가! 그렇게 실실거리고 있으니까 더 열받는다고!>

"나 참, 알았어. 신전에라도 가면 될 거...어! 방금 뭐라고 그랬어, 라피스? 기도?"

<그래! 하도 답답해서 그런다, 왜!>

"바로 그거야!"

<뭐?>

황당하다는 듯 되묻는 목소리에 나는 기뻐서 펄쩍펄쩍 뛰고 싶은 것을 참으며 소리쳤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카노스가 있었잖아! 카노스라면 귀환의 주문을 알지도 몰라!"

<.. 아아, 상급 신이니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렇지? 이럴 게 아니라 당장 마신전에 가봐야겠다! 또 알아? 운이 좋아서 정말 알 수 있게 될지?"

<그렇군.>

"응? 말투가 왜 그래?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이 생겼는데 기쁘지 않아?"

생각보다 힘이 없는 목소리에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그러자 녀석은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곧 볼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그냥 바보가 다 되었다 싶어서.>

"바보라니?"

<뿌득! 너도 머리가 있으면 생각해봐라. 그 간단한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지금까지

이러고 있었다는게 화가 나지 않냐?>

"......"

이번만큼은 나 또한 그의 말에 백 퍼센트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지난번

마신전의 방문 때만 해도 떠올릴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았던가. 내가 하는 일은

전부 왜 이러는 건지. 라피스 녀석을 찾을 때도 그렇더니, 이번에도 가까운 거리를

멀리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심 끝에 애써 위안이 될

한마디를 건넸다.

"그냥 팔자려니 하자. 하하하하하!"

<그것도 위로라고 하냐?>

소리치지만 않았지, 기분 나쁜 기색이 역력히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그 뒤로 쉴 틈

없이 투덜거리는 말에 '무사태평' 이 어쩌구 하는 것을 보면, 내게 단단히 감정이

상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삐질.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미안해, 라피스. 내가 명계에 잘 부탁해서, 다음 생도 멋진 종족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힘써보마. 그러니 지금의 실책을 잊어주지 않으련? 하하하하하!

 

 

 

 

                                              *                       *                        *

 

"갑자기 마신전에는 왜 가는 거야?"

결심을 굳힌 즉시 나는 차림을 정비하고 마신전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서둘러 뒤따라오며

이유를 궁금해 하는 시벨에게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기도하러."

"뭐? 엘, 너 마신교의 신도였어?"

"아니. 하지만 꼭 신도만 기도하라는 법은 없잖아?"

"으음, 그건 그렇지만. 갑자기 기도는 왜? 뭔가 고민이라도 있는거야?"

"응. 신에게 꼭 물어볼 게 있거든."

당당한 내 대답에 시벨은 영문을 모르겟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조금 황당하다는

눈빛인 걸 보니, 내 행동이 너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신이 어디 물어본다고

쉽게 대답해주는 존재던가.

사실 나로서도 불안한 심정이었다. 어쩐지 카노스라면 부름을 무시할 가능성이 99.9퍼센트의

확률에 이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연락할 일이 있을 땐 기도라하고 했지만, 그것에 반드시 응해

준다는 답변은 한 적이 없었으니까.

천근만근 같은 심정으로 걷다 보니, 얼마 지마지 않아 마신전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느낌이 이상했다. 지난번에는 엄숙하긴 했어도 개방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어쩐지 이번엔 주위를 잔뜩 경계한 듯한 살벌한 기색이 도처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인 이유는 신전 앞에 와르르 깔린 신의 기사들 때문이었다.

신전을 오가는 이들을 터치하지는 않았지만, 험상궂은 표정으로 주위를 샅샅이 살피는

모습을 보니, 무슨 큰 변고라도 생긴 게 아닌가 싶었다. 내가 그에 대한 자세한 사정을

접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네? 마신의 헌물을 도둑맞았다고요?"

나처럼 기도하러 온 듯한 한 남자가 알려준 말에 나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러자 그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목소리를 낮추고 설명했다.

"쉿! 목소리가 커, 이 사람아. 글세, 그렇다고 하더군. 지난번 축제 때 다섯 가지의 

서클렛을 공개하지 않았던가? 그중 하나가 그날 사라졌다는 거야."

".....!"

그 순간, 나는 시벨과 동시에 시선을 마주 보았다. 라반 루 웰디! 그녀가 무심코 가져왔던

서클렛이 떠올랐다. 아마 시벨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듯했다.

'맙소사! 그대로 들고 돌아간 건가?'

얼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어떻게든 동요하는 것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내 행동에서 별달리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한 듯, 상대편 남자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제 할 말만을 늘어놓고 있었다.

"확실히 그날 다들 정신이 없었지 않나. 아무래도 그날 선택받은 여자들 중 한 명이

돌려주는 것을 잊고 간 모양인데. 쯧쯧! 그 귀한것을 가졌으니 욕심이 날 만도 하지.

마신의 화를 입기 전에 가져다주면 좋으련만. 아무튼 그 때문에 신전이 발칵 뒤집

혔으니, 아무쪼록 자네도 행동을 주의하게. 신관들께서 그 일로 전부 예민해져 

계시다더군."

"아, 예.... 알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럼 이만 수고하게. 나도 기도를 마치고 돌아가 봐야겠네."

"살펴가세요."

남자는 웃으면서 떠났지만, 남겨진 우리는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웰디가

서클렛을 가져갔다니. 일족이 도둑으로 오해를 샀으니 시벨도 마음이 편치 않겠지만

내 경우, 이로 인해 벌어질 일을 알기에 더욱 심정이 착찹했다. 그래서 시벨이 말을

이었을 땐 심장이 덜턱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마을에 있을 거야. 내가 가서 가지고 올게, 엘."

"응? 뭐, 뭐?"

"뭘 그렇게 놀라? 그 서클렛 말이야. 내가 마을에 가서 가져오겠다고. 유니콘은 남의

물건에 욕심을 내지는 않으니까, 아마 가져온 그대로 보관해두고 있을 거야."

"헉!아, 안 돼!"

"응? 왜 그래, 갑자기?"

내 과민한 반응에 시벨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막상 눈이 마주치고

나니 말이 목구멍에 걸려서 나오질 않았다. 겨우겨우 한 거라곤 어떻게든 녀석이 가지

못하게 말리는 것분이었다.

"그, 그냥 내버려둬. 웰디 양도 가져간 걸 알고 있을 테니까 알아서 돌려주겠지. 네가

일부러 가서 가져올 게 뭐 있어?"

"그건 엘이 우리 마을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야. 웰디는 장로의 손녀인 데다 여자이기

때문에 외출이 그리 쉽지 않아. 다연히 그녀의 호위기사들도 마찬가지고. 그 애들이

돌려주기를 기다렸다간 한세대가 훌쩍 지나가버릴 걸? 내가 다녀오는 편이 빨라."

"글쎄, 그냥 내버려두라니까!"

"에, 엘? 왜 그래? 나한테 뭐 화난 거 있어?"

나도 모르게 새되게 나간 반응에 당황한 듯, 시벨은 금세 울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나는 아차 싶어서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그런 거. 그냥.. 일단 가지 마.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서 그래."

"으음, 알았어. 엘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래, 잘 생각했어."

미래는 바꿀 수 없지만 이걸로 당장 녀석이 봉인되는 순간은 미를 수 있을 것이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시벨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깊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3-21 이별 (2)

기도실을 관리하는 신관으로부터 특별히 독실을 부탁한 나는 잠시 후, 적당한 방 하나를 안내받을 수

있었다. 살작 열어보니 이전에 엘뤼엔이 현신했을 때 들어갔던 장소에 비하면 무척 좁고 협소한 공간

이었지만, 그래도 혼자서 은밀히 카노스와의 대화를 시도하기에는 꽤 적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되도록 카노스와의 인연을 알리고 싶은 생각이 없어, 나는 혼자 기도실에 들어가기로 했다.

다행히 기도실 주변엔 대기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벤치가 있어, 놔두고 가는 미안함을 한결

덜어낼 수 있었다.

"그럼 시벨, 금방 다녀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응, 알았어."

생긋 웃으며 대답하는 시벨을 뒤로하고, 나는 심호흡을 한 채 기도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들어서니, 기도에 집중하게 하기 위함인지 촛불 하나켜 있지 않은 방 안에 곧장 새카만 어둠이

밀려 들어왔다. 나는 대강 적당한 장소를 찾아 앉은 다음, 왼손의 문장이 존재하는 부위를 

문지르며 조용히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했다.

'카노스! 카노스, 들려요?'

뭔가 바쁜 일이 있는 걸까? 카노스는 내가 몇 번이나 부르는데도 전혀 응답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내 부름에 대답할 생각이 없는 걸지도 몰랐다.

'제발 대답 좀 해요, 카노스! 카노스으으으!'

그에 점점 더 마음이 조급해져서 쉴 새 없이 그의 이름을 되풀이 하던 순간이었다. 어딘지 잠기운이

가득 담긴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아함, 뭐야~ 누가 이렇게 정신없이 내 이름을 부르는 거래?>

'카노스!'

기다렸던 만큼 반가운 마음에 나는 얼른 소리쳤다. 그러자 내 목소리를 알아들었는지, 의아함을 

가득 담은 답변이 이어졌다.

<어라? 넌 미래에서 온 정령왕이잖아? 호오~ 나한테는 웬일이지? 무슨 일 있어? 얼레? 지금 보니

내 신전에 있는 거잖아? 되게 급한 일인가 봐?>

'네! 저기, 카노스한테 부탁할 게 있어요! 사실은요....!'

<아니, 아니다. 잠시만 기다려. 내가 거기로 갈게.>

'네?'

파아앗!

"윽! 뭐, 뭐야?"

어리둥절해져서 되묻는 순간, 나는 갑자기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눈부신 빛에 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얼떨덜해져서 눈을 떠보니, 입가에 생글거리는 웃음을 가득 띠운 검은 머리의 청년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카노스의 현신이었다.

'...이 세상에 나처럼 신의 현신을 쉽게 목격하는 사람이 또 있을가?'

그는 아연해져서 있는 나를 향해 반갑게 한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하잉~ 올만이지?"

"뭐, 뭡니까? 그 인사는?"

"응? 몰라? 지구라는 차원 중에 한국이라는 국가가 있는데, 거기 애들이 자주 쓰는 말이라고 하더라고.

귀엽지? 귀엽지?"

"귀, 귀엽긴 뭐가 귀여워요? 그보다, 아까는 왜 그렇게 늦게 대답하신 거예요?"

찾아와준 것도 감지덕지인 상황이긴 했지만, 나는 일부러 배짱을 튀기며 나무라듯이 물었다. 적어도

그가 나를 무시할 생각이 없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상큼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자고 있었거든."

"....."

어이, 당신! 신계에서 최고로 바쁜 상급 신 아니었어? 저렇게 뻔뻔하게 자고 있었다고 대답할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러나 카노스는 이번에도 역시 위대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잠이 얼마나 피부 미용에 효과적인 줄 알아? 이 탱탱한 젊음을 유지하려면 밤에는

물론, 낮에도 꼭 낮잠을 자줘야 한다고."

"...신이 무슨 피부 관리예욧! 늙지도 않는 주제에!"

"후후~ 재밌잖아~ "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더 이상 떠들어봤자 나만 손해라는 생각에 나는 참을 인자를 새기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때, 빙긋 웃은 카노스의 눈빛에 번쩍 빛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 그러고 보니 영혼의 보석 찾았네?"

"네? 아아, 예. 어떻게 하다 보니 우연히..."

"이야~ 제법이잖아? 꽤 둔한 것 같아서 앞으로 한 몇 년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그간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는지 알게 돼서 영광입니다."

"후훗! 그렇지? 마음껏 기뻐해도 좋아."

"......"

말발로는 그를 절대로 못 이긴다. 나는 다시 한 번 참을 인자를 새기며 한 발 물러섰다. 그러자

키득거린 카노스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왜 날 찾아온 거야?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으음... 그게요,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생겨서....."

"무슨 문제?"

"귀환의 주문을 잊어버렸어요."

그리고 잠깐의 침묵.

그 뒤의 상황이야 뻔했다. 모든 사태를 깨달은 카노스가 박장대소하며 웃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기야 남의 일이니 재밌기도 하겠지. 어쨋든 이번 일로 그는 나를 확실히 바보로 단정 지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으며 내 어깨를 마구 두드렸다.

"크하하! 너, 진짜 대박이다! 히익! 히이익! 우째 이런 일이! 아이고, 마신 살려! 나 죽네! 크하하하하하!"

"윽! 아파요, 치지 좀 마세요."

"크큭! 미, 히이익! 미안. 으하하! 너무 웃기니 어쩌냐! 아이고, 배야! 냐하하하하~ "

"...네, 네. 마음껏 비웃으세오. 단, 다 웃고 나면 반드시 주문을 가르쳐주셔야 해요."

하지만 다음 순간에 이어지는 말에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으니!

"응? 그런 주문 모르는데?"

"컥!"

언제 웃었냐는 듯, 곧바로 표정을 싹 바꾸고 대꾸하는 말에 나는 격한 신음을 내뱉었다. 머릿속의

핏기가 한순간에 가시는 기분이었다.

"자, 장난하시는 거죠? 제발 그렇다고 말해주세요!"

"아니. 정말 몰라. 귀환의 주문은 궤도마다 다르기 때문에 널 이곳에 보낸 신만 알고 있을 거다."

"그, 그럴 수가!"

"그러게 왜 그런 걸 잊어버리고 그러냐. 인간의 몸이라 망각이 작용해버린 모양인데, 그런 것은 좀

빨리 눈치 채고 어디 종이에라도 적어두지 그랬어."

진지하게 말하는 표정 어디에도 진실을 감추는 기색은 없었다.

정말 돌아갈 가망이 없단 말인가? 갑자기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 그럼 어떻게 해요? 저 이제 못 돌아가는 거예요?"

"으음, 주문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한, 자력으로 가기는 힘들 거다."

"그, 그런! 아, 그래! 제 기억을 되살릴 수는 없나요?"

"불가능. 일반 인간의 뇌라면 모를까, 네가 기억하고 있는 주문은 네 영혼에 새겨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손대기 힘들어. 신이라도 정령왕의 기억은 함부로 조작할 수 없거든."

"하지만 지난번에는 엘퀴네스의 기억을 바꾸셨잖아요!"

언젠가 그가 인어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돌아가고 난 뒤의 그를 기억한 이는 나 외에 아무도 없었다.

내가 그 사실을 지적하자, 카노스는 덩달아 눈을 부릅뜨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때 내가 티는 안 냈지만 얼마나 고생한 줄 아냐? 몰래 잠식해서 그 부분에 대한 기억만 소거하는데,

그 찰나의 순간 손을 쓰느라 정말 눈물나올 뻔했다. 되살리는 건 그보다 몇 배나 더 어렵다고."

"윽!"

다시금 절망을 확인하고 나니 그대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자 카노스는 전에 없이 놀라며

무척 당황하기 시작했다.

"헉! 너 지금 우냐?"

"어엉! 그럼 이 상황에.. 울지 않게 생겼어요? 흐윽, 흑!"

"어, 어이! 일단 진정해 봐라. 다짜고짜 울기부터 하면 어떡하냐?"

"그, 그치만!"

"뚝 하라니까? 잠깐 기다려봐. 자아~ 어디 보다... . 너 이곳에 온 지 일 년 넘었지?

끄덕끄덕.

울고 있는 와중에도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뭔가 깊이 생각에 빠져든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등을 철썩!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치는 것이 아닌가!

"으악! 무슨 짓이예욧!"

"냐하하하~! 걱정 마라. 곧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에? 그게 정말이예요? 어, 어떻게요?"

"아이~ 이럴 때 내가 무슨 대답하는지 알~ 면~ 서~"

"......."

결국 또 비밀이라는 소리로군.

당황할 때는 언제고, 순식간에 평소의 모습을 되찾은 카노스의 모습에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그가 저렇게 태연하다는 것은, 내가 반드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자, 이제 됐지? 그러니까 울지 말고 차분히 때가 오기를 기다리라고."

"때라니.. 제가 여기에 온 지 일 년이 된 것과 관계가 잇는 건가요?"

"냐하하~ 다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자, 그럼 난 이만 갈란다. 여기서 더 길어지면 수면 부독이거든.

피부에 치명적이야."

"...아직도 그 소리신가요."

"왜? 새삼 반했어?"

"안녕히 가세요."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뜻으로 바로 작별 인사를 하자, 눈에 띄게 서운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편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에서 너를 보는 것은 오늘로 마지막이겠구나. 꽤 재미있었는데, 아쉽군."

마지막이라는 말에 심장이 덜컥 거렸다. 아아, 그러고 보니 돌아가면 이제 다시는 카노스를 볼 수

없구나. 그 생각을 하니 이제 곧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도 그다지 반갑지 않게 느껴졌다.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기뻤어요, 카노스. 여기서 이렇게 다시 뵐 수 있게 되어서."

"후후! 왜 갑자기 분위기가 어두워지냐? 지금 일이야 기억 못하겟지만 어차피 나중에 또 볼 텐데."

"그, 그게..."

"킥킥! 어쨌든 잘 가라고, 후배님. 나중에 다시 볼 날을 기대하겠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는 모습을 보니 갖가지 민감이 교차했다. 이미 대강의 미래를 짐작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이 모습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가볍게 웃고 있는 그 앞에서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말속에는 생각보다 여러 가지의 뜻이 숨어들어있음을, 이때의 나는 결코 알지 

못했다. 내가 그의 말속에 감춰진 진실을 깨닫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13-22 이별 (3)

"시벨리우스, 이제 그만 돌아……. 어? 시벨?"

카노스와 헤어진 뒤 기도실을 나온 나는 곧바로 당황했다. 당연히 기다리고 있어야 할 시벨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마 그 사이에 산책을 나갔을 리는 없고, 혼자 돌아간 건가?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근처에 있던 수습신관 중 한 명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예? 아, 저어… 여기에 일행이 있어야 하는데 갑자기 없어져서요. 혹시 못 보셨나요? 키는 굉장히 크고 후드를 눌러쓴……."

"아아! 그분이라면!"

"알고 계십니까?"

생각보다 긍정적인 반응에 나는 기쁜 마음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신관이 소매 안에서 곱게 접은 종이를 꺼내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봉투로 밀봉된 편지였다. 그는 그것을 내게 전해주며 친절한 어조로 설명했다.

"큰 키에 후드를 쓰신 분 말이지요? 마침 그런 차림의 분이 한 분 밖에 안 계셔서 구분이 쉬웠습니다. 그분께서 일행 분이 나오시면 이걸 전해주시라고 하셨습니다."

"……."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불길한 기분에 나는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개봉했다. 이윽고 단정한 글씨가 펼쳐지는 순간, 나는 차마 다 읽지도 못하고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엘.

정말 미안해, 마신의 헌물이었던 서클렛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마을에 돌아가서 가져오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지금 보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웰디의 인상착의를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야. 녀석이 다시 마을 밖으로 나올 일이야 없겠지만, 일족의 여성이 도둑으로 오해를 받게 놔둘 수는 없잖아.

네가 말리는 거 뻔히 알면서 이런 결정 내려서 미안해.

금방 다녀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저녁 안으로 돌아올게.

-시벨리우스-〕

 

"…바보 같으니."

그렇게 가지 말라고 했건만. 결국 이런 식으로 헤어져버리는 거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기도실 안에 같이 들어가는 건데. 아니, 처음부터 나 혼자 마신전에 오는 건데 그랬다. 이렇게, 이런 식으로 헤어질 줄 알았다면 마지막 인사라도 해둘 걸.

너무나 허무한 이별에 가슴이 휑하게 빈 것 같았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그는 돌아가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는 그 사실 하나만이, 지금의 헤어짐을 간신히 버틸 수 있게 만들었다.

나는 일부러 툴툴거리는 것으로 서늘해진 가슴을 잊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가지 말랬는데 왜 무시하는 거야? 꼭 모든 사실을 털어 놔야만 조심할 생각인가? 저녁 안으로 돌아오는 것 좋아하네. 다음에 만나는 건 4천 년 후란 말이야!"

안녕, 시벨리우스. 지금은 이별이지만, 그대로 다음에 만날 때는 좀 더 많은 것을 공유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긴 한숨을 내쉰 뒤, 나는 편지를 다시 정리하여 품속에 집어넣었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          *          *

 

서클렛을 가져오기 위해 마을을 찾은 시벨이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은 것은, 마을 입구를 넘어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언제나 조용한 편이긴 했지만, 이날따라 마을의 분위기가 너무 고요했다. 그렇다고 안에 일족들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분명히 움직이고, 대화를 하는 자들이 있는데도, 뭔가 하나 둘씩 빠진 듯한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한참을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그는 드디어 그 이유를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마을 안에 여성과 어린아이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단체로 어디론가 놀러갈 일이 없는 일족이라서 그 공백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다들 어디에 간 거지?

그때, 불현듯 엘이 했던 말이 떠올라 그는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가지 마, 시벨.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서 그래'

오늘따라 유달리 날카로워져 있다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단순히 예민했던 게 아니라면? 엘은 혹시 앞으로 벌어질 무언가를 짐작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스스로 과민하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여느 때와 다른 마을 분위기를 보니 불안한 기분이 절로 들었다.

그때,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몸을 돌려 돌아갔을 것이다.

"시벨리우스,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장로님."

하필 마주친 일족이 장로라는 사실에 시벨리우스는 속으로 낭패감을 느꼈다. 다른 자들이라면 적당히 상대하고 넘길 수 있지만, 장로는 쉽게 물리칠 수 없는 존재였다.

마을에서 가지는 위치도 그렇지만, 장로 본인의 성격 또한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당히 대하고 떨쳐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로는-어디까지나 시벨의 관점으로-얄밉게 웃으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어왔을 뿐이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족의 계승자로서 너무 오래 마을을 비우신 게 아닌가 하여, 노파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놔두면 아예 환송 축하 잔치라도 벌어질 분위기라 시벨은 급히 말뚝을 박았다. 그 순간, 장로의 표정이 경직되었다가 다시 원래의 온화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렇게 왤 나가 계셨으면서도 아직도 유희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신 겝니까? 허허, 역시 젊음이란 좋군요. 그럼 오늘은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얼마 전에 웰디가 가져온 서클렛이 있을 텐데요. 은색에 푸른 보석이 박힌."

"아아! 그것 말이군요! 일족의 것이 아니라 제가 잘 보관해두고 있었습니다. 그걸 찾으러 오신 겁니까?"

끄덕.

"마신전의 헌물입니다. 사람들이 찾고 있으니 다시 돌려주려고 합니다."

"그렇군요. 그럼 일단 제 집으로 드시지요. 가지고 나오겠습니다."

"아니, 그냥 여기서……."

"오랜만에 뵙는데 차도 한 잔 안 하시고 가시렵니까? 이 늙은이 섭섭해지려고 합니다."

젠장! 누가 연기라는 것 모를 줄 알아? 능구렁이를 몇백 마리씩 삶아먹은 할아범 같으니라고!

분한 마음이 머리끝까지 치솟았으나, 어디까지나 겉으로 정중한 그를 향해 무슨 꿍꿍이냐며 화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벨은 이를 악물며 내키지 않은 걸음을 옮겨 장로의 집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 들어가자마자 달콤한 향이 나는 차부터 내온 장로는 기다리라는 말을 건넨 뒤 사라졌다.

잠시 후, 다른 쪽 방 안에서 나온 그의 손에는 어두운 색의 목합이 하나 들려 있었다.

"귀한 것인 것 같아 상자 안에 보관해두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맞으신지요?"

열려진 목합 안에 놓인 것이 찾고 있던 서클렛임을 확인한 시벨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용건은 이것으로 끝이란 생각에 그는 얼른 떠나고자 했다.

"그럼 찾았으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허허, 무엇이 그리 급하십니까? 아직 제 용건은 끝나지 않았습니다만."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의아하게 바라보는 시벨에게 장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냈다. 그 웃음이 너무 불길해 보여, 시벨은 엘의 만류를 듣지 않고 온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실은 마을 일로 인해 시벨님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뭐죠?"

"꽤 오래전부터 추진해오던 일이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저희 유니콘 일족이 이번에 신계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

시벨은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신계로의 이주라니!

벌써 몇천 년 전부터 그에 관계된 일이 조심스럽게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중간계에 인간들의 영역이 넓어지면서부터. 유니콘처럼 순수한 동물들이 살 수 있는 땅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 덕에 유니콘들은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영역이 필요했고, 그 장소를 어느 곳보다 평화로운 신계로 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설마 지금 그게 수락되다니!

일족의 미래를 생각하면 당연히 기뻐할 일이긴 했지만, 지금은 마냥 환영할 수 없었다. 이제 막 중간계의 유희에 매료된 참이었다. 게다가 이곳에는 엘이 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귄 친구를 놔두고 떠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잘되었지 않습니까? 이제 어느 누구도 우리 유니콘 일족을 위협하지 못할 겁니다. 이제 거의 모든 것이 정리되었으니 떠나는 일만 남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마을이 조용했던 건가.

시벨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제 떠나는 겁니까?"

"이런 일은 망설임이 없는 편이 좋자요. 일주일 안으로 전부 마무리를 지으려 합니다. 벌써 여자들의 경우엔 신계로 보낸 참입니다."

"웰디가 보이지 않던데, 그 아이도?"

"네. 일찍감치 보냈습니다.

생글거리고 웃는 장로의 얼굴이 다시금 얄밉게 보였다.

살짝 입술을 악문 시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장로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중간계가 더 좋습니다. 신계에는 가지 않을 겁니다."

"시벨리우스!"

흉하게 일그러진 장로의 얼굴이 시벨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나 당황했다기보다는 벌써부터 이런 반응이 나올 것임을 예상했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그동안 마을 안이 지겹다는 표시를 신물이 나게 했으니, 아무리 둔한 이라도 그가 일족에게 애착이 없다는 사실쯤은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장로는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처럼 엄숙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다시 한 번 생각하시오. 유니콘 일족을 대표하는 당신이 신계로 떠나지 않는다면 누가 간단 말입니까?"

"어떤 식으로 회유하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전 이곳에 남습니다."

"일족 모두가 떠나는 길입니다! 혼자 남아서 무엇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중간계에 남는 최후의 유니콘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군요."

"시벨리우스!"

"가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몇 번이나 말하게 하지 마십시오."

단호한 그의 말에 장로는 노려보는 눈빛을 거두고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역시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처음부터 유희를 거락하지 않는 것을……."

"……."

"좋습니다. 남으십시오, 시벨리우스."

"…정말입니까?"

놀라서 물으면서도 시벨은 한구석이 찜찜하다고 생각했다. 평소라면 길길이 날뛰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장로의 허락이 너무 쉽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 평온한 얼굴이라니, 무언가 꿍꿍이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이런 시벨의 생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갑자기 눈빛을 기괴하게 빛낸 장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두 팔을 양옆으로 벌렸다. 그의 오른손에는 어느새 목합 안에서 꺼낸 것인지, 은색의 서클렛이 들려 있었다.

순간, 시벨의 머릿속에 라피스 라즐리의 특징이 떠올랐다. 그 보석 안에 새로운 차원 형식의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던가? 즉, 그 공간을 통해 한 사람을 가두는 효과를 낼 수도 있는 것이다.

아차 싶은 시벨이 도망치기 위해 텔레포트 마법을 시전하려는 순간, 장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미리 완료하두었던 주문의 시동어를 내뱉었다.

"눈앞의 적을 봉인하라!"

"……!"

콰아아아악!

그러자 서클렛에 박혀 있던 푸른 보석이 갑자기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거대한 바람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순식간에 뿜어져 나와 뒷걸음치던 시벨리우스의 몸을 단번에 삼켜버렸다.

"으아아악!"

강한 압력에 빨려 들어가면서도 시벨은 어떻게든 저항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으나,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보석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지막 순간에 그가 한 것이라곤 필사적으로 친우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엘!'

그리고 다시 잠잠해진 방 안.

이제 방 안에는 장로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부터 한 잔밖에 없었던 찻잔마저 치우고 나니 시벨리우스가 왔던 흔적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얌전히 빛을 내뿜는 서클렛을 보며, 장로는 조용히 속삭였다.

"중간계에 남고 싶다면 그렇게 하시오. 단, 영원히 그 서클렛 안에 갇힌 채로 말이지."

일족을 버린 이는 용서치 않는다.

장로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13-23 귀환 (1)

예상했던 대로 시벨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엘뤼엔으로부터 유니콘 일족이 인간 세상을 떠나 신계로 귀화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미 대부분의 일족은 이주를 마친 상태고, 남은 것은 아직 준비를 마치지 못한 장정들 몇뿐이라고. 이제 며칠 안으로 그들도 떠나고 나면, 중간계에서 유니콘 종족은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4천 년 후, 시벨리우스가 봉인에서 깨어나는 순간까지.

 

소식을 접한 이후로 나는 얼마간 녀석이 봉인되어 있을 서클렛의 행방을 알아보려 노력했었다. 그러나 장로라는 유니콘이 무슨 조치를 해둔 건지, 사라진 서클렛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즈음에 마신전에서도 마지막 서클렛을 찾는 것을 포기했음을 선언하고 신전 안과 밖의 겨예를 해제했다. 모두들 그 사실을 안타까워했지만, 나는 알았다. 시벨은 언제고 다시 마신전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라피스가 내게 서클렛을 건네주었을 때, 마신전의 제단에서 훔쳐온 것이라고 말했으니까.

어쩌면 이미 찾아놓고도 모르는 척 감추고 있는 건 아닐까? 그에 관련하여 유니콘의 장로와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최대한 서클렛의 공개 시기를 늦추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발표하도록. 그래서 만에 하나 봉인이 풀리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눈을 뜬 녀석 주위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철저히 고립시키려는 작전일지도 모른다. 1백 년만 지나도 대부분의 인간은 이미 죽고 없을 테니까.

이런 사실을 모르는 엘뤼엔은, 녀석이 사라지자 일족들과 함께 신계로 떠난 것이라 단정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작별 인사도 ㅇ벗이 훌쩍 떠난 것이 괘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간 무심한 척해도 조금은 정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올 때도 두서가 없더니, 갈 때도 제 마음대로군. 그래서 넌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응? 뭘?"

"영혼의 보석 말이다. 그걸 찾기 위해 녀석이 필요했던 것 아니었냐? 유니콘의 감각에 꽤 큰 기대를 거는 것으로 보였다만."

"아… 그건 그렇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녀석에게 화도 나지 않는 거냐? 친구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꼭 찾아야 했던 것이었잖아. 당장 막막하게 된 것치고는 지나치게 태연하군."

"하하! 괜찮아. 찾아보면 분명 또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그게 어떤 건지 일단 들어보기나 하자."

그는 평소답지 않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아마 시벨에 대한 서운함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 같았다. 이 상태가 오래 가면 어쩌지? 나는 삐질 식은땀을 흘리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이, 일단 출발했떤 장소로 돌아가고 나서 결정할 생각인데?"

"출발했던 장소라니? 네가 나를 소환했던 그 고원 말이냐?"

"응. 어차피 시벨이 있든 없든 그곳으로 가려고 했던 거니까. 그곳에 도착하면 뭔가 좋은 방법이 떠오를지 모르잖아?"

"즉, 아무런 계획이 없다는 말이로군."

"……."

단숨에 정곡이 찔린 탓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나를 향해 한심하다는 표정을 보낸 엘뤼엔은 곧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뭐, 상관없지. 어차피 네가 전부 결정할 일이니. 그럼 출발은 언제 할 거냐?"

"음. 지금 당장 하려고 하는데."

"좋아, 그럼 떠나도록 하지."

출발하기 직전에 나는 불필요한 것들을 팔아 짐을 최대한 축소시켰다. 별로 산 것도 없었는데, 조금씩 생각지도 못했던 인원들이 합류하다 보니 어느새 꽤 많은 분량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말(馬)들도 여러 마리로 늘어 있어, 인국이 한 마리만 남겨두고 전부 정리했다. 대게 마시장에 되파는 식이었지만, 유일하게 시벨이 타고 다녔던 말 '슈'만은 타고난 야생마라는 점을 감안하여 안장을 풀고 자유를 주었다.

"잘 살아, 슈. 이젠 절대 나쁜 인간들에게 잡히면 안 된다?"

푸르르르~

내 말을 알아듣는 건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인 녀석은 곧 펄쩍펄쩍 뛰며 저 멀리 산으로 사라졌다. 동족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리라.

그냥 보기에도 상당한 명마라서 앞으로도 꽤 많은 사람들이 노릴 것이 걱정되긴 했지만, 이미 한 번 붙잡힌 경험이 있으니 두 번은 호락호락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리첸의 성곽을 벗어났을 때 내게 남은 것은, 말 한 필과 여러 잡동사니를 담은 작은 배낭 하나가 전부였다. 일행이라곤 엘뤼엔 하나뿐. 결국 처음 출발햇을 때의 인원으로 되돌아온 셈이었다. 아니, 이번엔 라피스도 있으니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으려나?

문득 많은 사람들과 어울렸던 지난 1년간의 일이 모두 꿈속의 일처럼 아늑하게 느껴져, 나는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ㅇ벗었다.

모든 것이 평화로워졌는데,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이곳에서의 관계는 마치 모래알 같았다. 꽉 움켜쥐면 쥘수록 손가락 틈으로 흩어져가는

새삼스레, 내가 있어야 할 장소는 여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는 장장 두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노숙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 마을을 자주 경유하긴 했지만,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먼 거리임에는 틀림없었다. 장시간의 여행은 아무리 체력이 뛰어난 나라도 심신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저 멀리 낯익은 마을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 나는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들렀던 '오렌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와아! 마을이다! 보여, 아버지? 드디어 도착했어!"

"그렇군."

벅찬 감동에 젖어드는 나와 달리, 엘뤼엔은 별다른 감회 없이 그러려니 하는 투였다. 그것도 모자라, 기뻐하는 내게 굳이 지금 일깨우지 않아도 될 사항까지 지적했다.

"하지만 완전히 도착했다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는 것 아닌가? 잊고 있는 것 같아서 말해두지만, 그때의 고원으로 가기 위해선 지금부터 반나절은 더 가야 한다."

"윽! 나, 나도 알고 있어!"

"그래? 그런 것치곤 너무 들떠 있는 것 같은데."

"그야 여기까지 온 것만도 감격이니까 그렇지!"

1년 만의 방문인데도 마을은 떠났을 때 보았던 것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다만 몇 가지의 변화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이전만 해도 흔히 보였떤 엘프들의 모습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엘프 숲과 가까워 유달리 이종족에게 개방된 마을이라고 들은 기억이 떠올라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으니, 얼마 전부터 갑자기 발길이 뚝 끊겼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뿐만 아니라 엘프 숲의 경계가 더욱 강해져서, 아예 그쪽으로는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 또한 종족전쟁의 일환이라 생각하니 마을이 조금 씁쓸해졌다. 비록 전쟁 자체는 무산되었지만 그들 사이의 교류가 틀어지는 것만은 피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엘 오빠? 혹시 엘 오빠 아니에요?"

"…에?"

마을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날이 상당히 어둑해져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당장 고원으로 향하는 것은 무리라 판단,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결정한 나는 마을 안에서 적당히 머물 만한 숙소를 찾아보았다.

다행히 지난번에 머물렀던 여관이 그대로 자리하고 있는지라 발길을 정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그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는 우리에게, 급히 달려와 말을 거는 이가 있었다. 그것도 똑똑히 '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에 놀라 고개를 돌린 나는, 예쁘장한 여자아이를 발견하고 더욱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갈색 고수머리에 푸른색 눈동자. 기억하고 있던 모습에서 많이 자랐지만, 분명 낯이 익은 아이였다.

"에에? 너 설마… 랑시? 랑시니?"

"와아! 정말 엘 오빠가 맞군요?"

"세상에! 많이 컷구나! 날 알아보겠어?"

"그럼요! 후드를 쓰고 있어도 엘 오빠는 눈에 띄는 걸요!"

솔직히 말해 거의 지나가는 인연에 가까웠기에, 랑시가 지금까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상당히 놀라웠다. 그러자 랑시는 오히러 섭섭하다는 반응이었다.

"너무해요~ 제가 잊어버릴 거라 생각한 거예요? 난 오빠가 떠난 뒤로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는데."

"하하! 그랬구나. 이거 매우 기쁜걸."

생긋 웃어주며 나는 랑시의 이마를 살펴보았다. 이전보다 훨씬 선명해진 물의 인장이 보였다.

"정령 소환 연습도 많이 한 모양이네? 이제 제법 오래 불러낼 수 있겠는걸?"

"헤헤! 엘 오빠라면 알아볼 줄 알았어요."

랑시는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나이아스를 최대 5마리까지 소환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소식을 더 알려주었는데, 얼마 전에 마을에 들른 정령사가 랑시의 능력을 눈치 채고 제자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그 정령사가 황실에서 꽤 영향력 있는 존재인 모양인지, 곧 일가족을 데리고 수도로 이사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랬구나. 그럼 이제 여관에서는 일하지 않는 거니?"

"네. 실은 일주일 후에 떠나요. 가고 나면 엘 오빠를 다신 만날 수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이렇게 보게 돼서 정말 다행이에요."

"잘됐다. 너 일하는 모습 보기 안쓰러웠는데."

"저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조심스럽게 묻는 얼굴이 꼭 꾸중 들을 각오를 한 모습 같아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왜 그러니?"

"그게… 저, 오빠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걸요. 정령의 일은 오빠와 단둘의 비밀로 하기로 했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돼버려서… 전 틀림없이 오빠가 제게 실망할 거라 생각했어요."

으음,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일이 커지는 게 싫어서 당부해둔 거였는데. 그것이 오히려 아이의 죄책감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랑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네가 일부러 알린 것도 아니고, 그 정령사가 눈치 챈 거잖아? 그건 오히려 잘된 거야, 랑시. 당연히 축하해줘야지."

"고, 고맙습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영락없이 어린아이이였다.

사실, 랑시가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나는 너그럽게 넘어갔을 것이다. 이 아이에게는 라피스를 되찾아준 어마어마한 공이 있지 않은가! 비록 의도치 않은 일이었다 해도 어쨌든 랑시 덕분에 라피스를 찾은 셈이니, 내가 느끼는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랑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들렸다.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40대쯤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13-23 귀환 (2)

"랑시! 거기서 뭐 하는 게냐?"

"앗, 스승님!"

아아, 저 사람이 랑시의 스승이라는 정령사인가?

남자를 돌아보는 랑시의 얼굴은 무척이나 밝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니 행여

엄한 사람이 아닐까 걱정했던 게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무서운 스승이라면

저렇게 기쁘게 반길 리가 없을 테니까.

가까이 다가온 남자의 이마에는 운디네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또한 물의 정령사였던 것이다. 남자는 랑시의 머리에 꿀밤을 때리는 흉내를

하며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이 녀석! 저녁 수업을 배먹고 놀러나가다니! 요령은 피우지 않는다고 약속했지 않느냐."

"헤헤, 죄송해요. 실은 나이아스가 밖에 나가자고 졸라서...."

"응? 나이아스가?"

"네! 지금 보니까 엘 오빠가 왔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그랬던 것 같아요!"

"엘....?"

휘둥그렇게 눈을 뜨며 묻던 그는 그제야 랑시 옆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을 깨달은

눈치였다. 온통 의문으로 가득한 눈동자에는 행여나 랑시에게 위해를 끼칠 위인이

아닌지 탐색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친딸만큼이나 아이를 아끼고 있는 모습이 보여, 

속으로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정식 소개에 얼굴을 가리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나는 쓰고 있던 후드를 

뒤로 넘겼다. 그러자 점점 더 눈이 커지는 남자를 향해, 나는 한 손을 내밀며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엘이라고 합니다. 랑시와 친한 오빠입니다."

"...."

랑시의 스승인 정령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나와 내

뒤에서 못마땅하게 서 있는 엘뤼엔을 번갈아 살펴보았을 뿐이다. 그것이 꽤 오래

계속되자, 참다못한 랑시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스승님? 왜 그러세요? 엘 오빠가 인사하는데 받아주셔야죠."

"으응? 아, 그, 그래. 그런데 그, 그게...."

저 횡설수설한 모습이라니. 남자의 태도에는 무척 수상한 구석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곧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금발머리에 푸른 눈동자... 끄응! 서, 설마...당신..."

"....?"

"하, 한때 소문이 자자했던, 그... 정령왕의 계약자가..."

아차, 그러고 보니 이 스승이라는 정령사는 황실 쪽 사람이라고 했지? 공국에서의

일로 내 인상착의가 알려졌을 테니 한눈에 알아볼 것이 뻔했는데, 미처 그 부분을

염두에 두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난처한 표정이 얼굴에 드러난 모양인지, 남자는

설마 하던 얼굴에서 확신에 찬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 그랬군! 그럼 랑시에게 정령을 가르친 것이! 아, 아니, 그, 그보다.. 저, 저분이 바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엘뤼엔을 가리키던 남자는 막상 그와 눈이 마주치자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덥석 바닥에 엎드렸다. 워낙 순신각에 벌어진 일이라 아무도 말릴 생각은 못했다.

"위, 위대하신 분을 뵙습니다! 저, 저는 물의 길을 걸어가는 칸 모엘이라 합니다!"

'이런...'

남자의 행동은 지나가던 행인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단번에

구경거리로 전락해버린 나와 엘뤼엔의 얼굴은 절로 찌푸려졌다. 랑시 또한 여간 당황했는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스, 스승님?"

"랑시! 뭘 하고 있느냐! 너도 어서 엎드리거라! 네 앞에 있는 저분은 바로 정령왕이시란 말이다!"

술렁!

남자의 폭탄선언에 주변 일대는 전보다 더욱 많은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랑시의

얼굴은 허옇게 질려 있었다.

"네, 네에? 그럼 엘 오빠는..."

"얼마 전에 물의 엘퀴네스를 최초로 소환한 인간이 나타났다고 말했었지? 바로 그분이시다!"

"그, 그럴 수가!"

랑시는 사실이냐고 묻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대답 대신 난처하게 엘뤼엔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하하, 어쩌지... 아버지? 일이 엄청 커져버렸는데."

"애당초 네가 하는 일에는 기대한바 없다."

"쳇!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불가항력이었다고."

"글쎄. 네가 언제 의도하고 일을 벌인 적이나 있었던가? 전부 다 우연이고, 본의 아니게

벌어진 거였지, 아마?"

"윽! 그,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고 꼭 말을 그렇게..."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은?"

투덜거리는 내 말을 단번에 자른 채, 엘뤼엔은 곧바로 본론을 요구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축 늘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만 특별히 고원으로 그냥 데려다주면 안 될까?"

"뭐?"

"아무래도.. 오늘 여기서 묵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아서 말이지."

내가 주위에 몰려든 인파를 가리키며 말하자, 엘뤼엔은 얼굴을 찌푸리다 말고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군."

아무리 그라도 이런 순간까지 도움 요청을 거절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다시금 굳어 있는 랑시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랑시는 움찍 어깨를 떨었지만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는

허리를 굽힌 다음에 눈을 맞춘 상태로 말했다.

"이제 그만 가야 할 것 같아, 랑시. 정령술 부지런히 배워서 나중에 훌륭한 어른이 되어야 한다."

"오, 오빠, 오빠가 정말로..."

"엘퀴네스의 계약자가 맞냐고 묻는 거냐면, 사실이야. 그래서 싫으니?"

"아,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자랑스러운 걸요! 저, 정말이에요!"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답하는 모습에, 나는 빙긋 미소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고 나니 주위에 새하얀 빛 무리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 엘뤼엔이 이동의 언령을

시전한 모양이었다. 빛이 강해질수록 눈앞의 사물은 점점 흐릿해졌다.

랑시 또한 그것을 느꼈는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오빠 말대로 할게요! 열심히 배워서 곡 훌륭한 어른이 될게요! 그래서 꼭 오빠를 만나러 

갈게요! 약속해요!"

다급한 외침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환하게 밝아지는 랑시의 얼굴을 보며,

나는 마음속에 묻어둔 말을 끝내 거낼 수 없었다.

'미안해, 랑시. 아마 그때까지 내가 이곳에 살고 있지는 않을 거야.'

파아앗!

시야가 환해지고 눈앞의 장면이 바뀌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뜬 내게 보인것은 휑한 바람이

불고 있는 넓은 초원이었다. 그다지 많이 낯익지는 않았지만, 한편에 흐르는 시냇물을 보니 

1년 전 이곳에서 엘뤼엔을 소환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기쁘기보다는 허무하다는 느낌이 더욱 강했다.

'이동의 언령 한 번이면이렇게 간단히 도착할 것을. 진작 좀 데려다주면 안 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대의 엘뤼엔은 성격에 문제가 심각한 것 같다. 그로부터 며칠간,

나는 고원에서 할일 없이 시간을 보냈다. 돌아갈 방법은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지만,

왠지 이곳을 떠나선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혼자서 무료히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는지, 가끔식 이프리트나 라미아스가 먹을 것을 들고 찾아오곤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의 방문이 있었다. 바로 트로웰이

찾아온 것이다.

"트로웰! 여긴 어떻게....."

"그냥. 잘 지내고 있나 해서, 얼마 전에 이프리트한테 네가 산맥에서 엘퀴네스와 단둘이

서만 지내고 있다는 말을 들었거든."

그는 여전히 슬픈 표정이었지만, 이전보다는 눈빛이 훨씬 밝아져 있었다. 내가 반갑게

맞이하자 트로웰이 어색하게 웃더니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미네르바가 거의 진정되었어. 곧 있으면 봉인이 풀리게 될 것 같아."

"정말? 잘됐다, 트로웰!"

"네 덕분이야."

"응? 내,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당황해서 말을 더듬자 그는 차분하게 미소 지었다. 

"실은, 내가 모든 계획을 철회하고 돌아간 날 말이야. 그때 미네르바의 폭주가 눈에 뛸 정도로 진정되었어.'

"정말?"

"으응. 아마도 미네르바는 내가 인간을 증오하는 것을 무척 힘들어했던 것 같아. 내가 파멸을

꿈꿀수록, 그는 인간들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 더욱 슬퍼하고 괴로워했던 거지. 바보같이 그때는

그것을 몰랐어. 단순히 배반당한 충격에 매여 있는 줄로만 알았거든."

"그랬구나...."

"그러니까 모두 네 덕분이야. 네가 날 말렸기 때문에 미네르바가 평온을 되찾은 거니까."

따뜻한 황금색 눈동자에는 나를 향한 무한한 신뢰감이 깃들어 있었다. 이곳에 온 이후로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새삼 쑥스러운 감정이 일었다.

그 순간,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갑자기 끼어든 누군가에 의해 좋은 분위기는 그다지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이야~ 믿을 수 없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사실이냐? 트로웰, 네가 그렇게 착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있다니!"

놀리듯 말을 건넨 이는 소리 없이 찾아온 이프리트였다. 방금 전까지 따뜻하던 트로웰의 눈빛이

순식간에 살벌하게 가라앉았다.

"꺼져, 이프리트."

"헉! 우씨~ 그래~ 엘만 차별한다 이거지? 이래서 자식은 키워봐야...."

"누가 네놈의 자식이라는 거냐?"

"뭐야? 그간 내가 너 때문에 마음 졸인 게 얼만데, 그 정도 호칭쯤은 어때서? 아마 수명이 반은 줄었을 거라고!"

"헛소리 작작하시지!"

모든 게 해결된 시점에서도 이 둘은 여전히 사이가 좋아질 기미가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사이가 아주 좋다고 해야 하는 건가? 티격태격하는 둘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웃음을 참느라

무던히도 애를 써야만 했다. 그렇게 한동안 평온한 일상이 이어졌다.

13-24 귀환 (3)

내가 고원에 터를 잡고 산 지도 어느덧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막연히 돌아갈 수 있을 거란 처음의 기대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무의미하게 퇴색되어갔다. 매일매일 무료한 시간이 이어지자 라피스는 차라리 새로운 여행이라도 하라며 부추겼지만, 그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제는 마냥 채념하는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내게, 그 또한 단념했는지 더 이상 그와 같은 권유는 하지 않았따.

그렇게 조금씩 무감각해져가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뜬 나는, 유달리 이상한 느낌에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평소처럼 평범하게 잠을 자고, 눈을 뜬 것뿐인데도 무언가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늘 보던 풍경조차 어제와 다르게 보였다.

'그게 뭐지?'

굉장히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다.

이 기묘한 이질감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내가 골머리를 앓는 사이, 엘뤼엔이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 듣고 있는 거냐?"

"으응? 뭐, 뭐라고?"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드니 그는 자신의 말이 무시당했다는 불쾌감을 얼굴 가득 드러내고 있었다.

"하하하! 미, 미안. 잠깐 딴생각을……."

"흥! 너무 태평하기만 해서 머리가 굳어버린 거겠지."

"우씨~! 아무튼 나는 왜 부른 건데?"

"잠시 정령계에 다녀올까 한다."

"엥? 왜 갑자기?"

"누구 덕분에 중간계에 내려와 있는 기간이 무척 길어져서 말이지. 물의 영역을 잠시 돌아보고 오겠다."

"에… 그럼 그동안 나 혼자 있어야 하는 거야?"

"심심하면 하급 정령이라도 소환하면서 놀아라. 대화도 통하면서 뭐가 문제냐?"

"그야 그렇지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어린애도 아니면서 칭얼거리는 건 그만둬라."

쌀쌀맞는 말투에 나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내 모습이 은근히 신경 쓰였는지, 그는 돌아서려다 말고 찌푸린 얼굴로 한마디 내뱉었다.

"금방 돌아올 거다."

"응. 헤헤! 잘 다녀와, 아버지~!"

"그래."

짧게 대답한 엘뤼엔은 한숨을 내쉬며 뭐라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뭐? 애 돌보기도 힘들다고?

하지만 내가 그것을 따지려고 했을 땐, 이미 그의 모습은 사라져 버린 후였다. 별수 없이 나는 혼자서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쳇! 누가 보면 엉첨 잘 챙겨주는 자상한 아버지인 줄 알겠네."

뭐, 사실 나름대로 잘 챙겨주기는 한다. 이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나의 의식주를 전부 책임지고 있는 존재가 바로 그였으니까. 원망할 구석이 없음을 깨달은 나는 입맛을 다시고는 한 손으로 뒤통수를 거칠게 휘저었다.

"아~ 그나저나 이제부터 혼자서 뭘 하지?"

사실, 엘뤼엔이 있다 해도 딱히 놀아주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가 곁에 있고 없고의 차이는 확실히 컸다. 갑자기 이 넓은 세상에 나 혼자만이 남은 기분이랄까?

돌아다니는 자연체의 정령들에게 말을 걸어볼까 했지만, 그랬다간 후환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참아보기로 했다. 한번 수다를 시작하면 끝이 없는 녀석들이기 때문이다.

별수 없이 나는 꽃구경을 하거나 풀잎을 세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 내게 라피스는 좀 더 건설적인 일을 해보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이미 지난 시간 동안 면역이 되어버려 한 귀로 듣고 흘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대로 잠들어버렸던 것 같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무척 조심스러운 손길이라 일어나기 싫으면서도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맺혔다.

"엘, 엘?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으음……."

부드럽게 속삭이는 낯익은 목소리.

내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젓자 상대편이 살짝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라자 이번엔 다른 쪽에서 또 다른 낯익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 가지고 일어나겠냐? 조금 더 크게 불러봐."

"으음, 너무 기분 좋게 자고 있어서 깨우기가 미안한걸."

"더 이상 기다릴 시간 없다."

"그건 그렇지만……."

꽤나 난처한지 말끝을 흐리는 모습에 슬쩍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꽤 오랫동안 기다린 것 같은데, 이제 그만 일어나줄까?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리자 환한 빛이 덮쳐 들어왔다. 그 때문에 연신 눈을 깜빡거리는 내게 밝아진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아, 엘! 일어났어?"

"으응? 누구?"

"뭐야, 벌써 날 잊어버린 거야?"

"…에?"

이번엔 무척 서운하다는 감정을 담은 소리에 나는 얼른 눈을 비비고 상대편의 모습을 확인했다.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응시하는 황금빛 눈동자.

"트로…웰?"

"아, 다행이다. 안 잊어버렸구나."

그저 이름을 부른 것뿐인데도 무척 기뻐하는 모습에 나는 한순간 어리둥절해졌다. 묘하게 분위기가 바뀐 것 같다랄까? 아니, 한편으로는 상당히 익숙한 느낌이기도 했다. 내가 원래 알고 있던 그의 분위기가 이랬었으니까.

트로웰이 갑자기 왜 이러지? 요즘 들어 많이 따뜻해지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내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참인지라 나는 조금 어색해져서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좋은 일 있었어?"

"당연하지! 널 이렇게 찾았잖아."

"에? 찾았…다니?"

"그동안 잘 지냈어? 자아, 이제 그만 돌아가야지."

"……!"

쿠웅!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런 내게 트로웰은 여전히 자상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트, 트로웰, 너 설마……."

"응? 왜 그래, 엘?"

"설마……."

벌어진 입에서는 연신 설마라는 말밖에는 나가지 않았다. 거짓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충격으로 덜덜 떨리기 시작한 팔을 느끼고 의식적으로 꽉 주먹을 움켜쥐는 순간, 불현듯 머리 위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보이지도 않는 거냐, 아들?"

"……!"

낮익은 목소리, 낮익은 말투. 분명 몇 시간 전까지 들었던 목소리이건만,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려는 것을 이를 악물고 버텼다.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면,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전부 환상이 될 것 같아서.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러자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던 트로웰의 얼굴에 안타까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슬픈 눈으로 다가오더니 두 팔을 벌려 나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미안해, 엘. 그동안 많이 외로웠지? 혼자 있게 해서, 정말 미안해."

"……!"

숨쉬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하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정신없이 품 안의 온기를 느끼고만 있었을 뿐. 어느새 뜨거워진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데도, 한동안은 그것을 깨닫지도 못했다.

꿈이다. 이건 꿈일 거야. 너무 간절히 바래서, 그래서 이런 꿈을 꾸는 거야.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겠지.

이런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있는 내게 또다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나를 좀 봐, 아들."

"……."

"얼굴 좀 돌려보라니까?"

도리도리.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서운한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말 보지 않을 생각이냐?"

살짝 내뱉은 한숨에서 체념이 느껴져, 나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이대로 돌아보지 않으면 그냥 사라져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분명히 꿈에서 깨버릴 텐데, 어떡하지?'

이런 내 불안한 마음을 알았는지, 나를 끌어안고 있던 트로웰이 살짝 물어서며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곤 빙긋 미소 지은 채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마치 '괜찮아'라고 하듯이.

그 순간,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답답하게 뭘 하는 거야? 저 녀석 칭얼거리는 것도 짜증나는데 그냥 한 번 봐주기나 해라.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라피스 녀석이 내뱉은 말로 인해, 문득 이것이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용기가 조금 생긴 나는 각오를 단단히 굳히고 돌아볼 결심을 했다.

'조금만 보는 거야. 조금만.'

너무 오래 쳐다봤다가 사라져버리면 안 되니까. 살짝만 보자.

상당히 유치한 생각이란 걸 알았지만, 너무 겁이 난 탓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달랠 수밖에 없었다.

"오! 이제야 겨우 바라보는 거냐?"

내가 고개를 돌리려 하자 그는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에 더욱 기운을 얻어 완전히 돌아본 순가, 눈앞에서 드러나는 이의 모습에 또다시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물의 정령왕 특유의 파란색이 아닌, 금색의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엘뤼엔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 지?"

얼마나 그리워하던 모습이던가! 단순히 머리색 하나만이 달라진 것이지만, 그 의미는 내게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게 와 닿았다.

투둑. 방울진 눈물이 떨어지자, 그는 피식하고 웃더니 다시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새 울보가 다 되었군."

이번에도 또렷이 느껴지는 온기에 나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원래 이렇게 꿈이 실감날 수 있는 건가?

"아, 아버지? 정말 아버지야?"

"그럼 내가 나지 누구냐, 아들. 뻔히 보고도 못 믿는 거냐?"

나는 떨리는 손을 들어 가까이에 있는 엘뤼엔의 머리카락을 잡아 보았다. 그러자 선명하게 느껴지는 감촉에 드디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꿈이 아니다!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현실인 것이다!

"어, 어떻게……?"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물으니, 그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불만스럽게 쏘아붙였다.

"금방 다녀오겠다던 녀석이 하도 안 와서 직접 찾으러 왔다. 혼자 오려고 했더니, 트로웰 녀석이 하도 졸라대서 같이 온 거고."

"뭐? 그, 그래도 돼?"

"그럼 어쩌겠냐? 따라가고 싶다고 계속 귀찮게 구는데."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트로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흐음, 너무한 거 아니야? 그래도 나 땜누에 제대로 길을 찾았으면서."

"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찾았다고? 그럼 어디선가 헤맸었다는 소리일까?

내가 의아해져서 묻자, 엘뤼엔은 왠지 급격히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넌 몰라도 되는 일이다. 그나저나 보아하니, 그 썩을 도마뱀도 찾은 것 같은데 왜 안 돌아온 거야?"

"아… 그, 그게 돌아가는 방법을……."

"귀환의 주문을 잊어버린 거냐?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러게 몇 번이나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건만."

그가 한숨을 내쉬자 트로웰이 쿡쿡 웃으며 말했다.

"난 이게 더 엘다워서 좋은데? 어쨌든 이렇게 무사히 만났으면 된 거잖아?"

"좋기도 하겠군. 그래, 여기서 얼마나 기다린 거냐?"

'가디렸다'는 말에 또다시 가슴이 뭉클해졌다. 지난 시간 떠지도 못하고 이상하게 이 장소에 집착하게 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나는 누군가 나를 찾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 모르겠어. 일 년은 된 것 같은데……."

"헉! 이런 곳에서 일 년이나 있었던 거야?"

"…쯧! 좀 더 일찍 올 걸 그랬군."

내 한마디에 놀라고 안쓰러워하는 모습들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왠래 이렇게 표정들이 풍부했었나? 신기한 기분에 마냥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씁쓸하게 웃은 엘뤼엔이 내게 척 하고 한 손을 내밀었다.

"가자, 아들."

"아……."

"안 잡을 거냐? 설마 돌아가기 싫은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된다.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데!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내밀어진 손을 붙잡았다. 이때만큼은 이곳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조차 생각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그저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이 가득 차올랐다.

그러자 엘뤼엔은 피식 웃으며 다른 한 손으로 내 어깨를 꼭 끌어 안았다. 나의 다른 쪽 손은 어느새 트로웰이 잡고 있었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주위에 환한 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비상하는 매처럼 높이 하늘로 솟구친 빛줄기는 순식간에 마주선 우리셋의 몸을 덮쳤다.

휘익! 파아앗!

새하얀 빛에 완전히 둘러싸인 순간, 몸이 붕 뜨는 것을 느끼며 나는 벅찬 감동에 젖어 들었다. 드디어 돌아간다!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그런데 아버지, 귀환의 주문이 뭐였었지?"

"바보냐, 아들? 아직도 기억 못해?"

"……."

"'보고 싶어요, 아버지' 였잖아."

 

*          *          *

 

4대 정령왕 중 하나. 물의 엘퀴네스는 현재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것이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굉장히 중요했던 것 같은데 정작 그게 뭔지 떠오르지 않는다니. 망각이 없는 그로선 처음 겪는 일이라 무척 당황스럽기만 했다.

"이상하군. 벌써 명계에 갈 때가 된 건가?"

이미 평균 수명을 넘은 만큼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지만, 그와 관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찝찝한 기분에 연신 얼굴만 찌푸리는 그에게 반갑지 않은 방문자가 찾아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이, 엘퀴네스! 네가 왜 여기에 잇는 거야?"

씩씩거리며 물의 영역에 쳐들어온 또 다른 정령왕. 불의 이프리트.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엘퀴네스의 눈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내 영역에 내가 있는 게 무슨 문제지?"

"하지만 너, 그 애를 혼자 남겨두고……."

"그 애라니?"

"어라? 내가 방금 뭐랬지?"

이건 또 새로운 수단의 비꼼인가. 아니, 그보다 언제부터 이프리트가 자신을 이렇게 스스럼없이 찾아오게 된 건지 모르겠다. 얼마전, 불의 영역을 망가뜨린 이후로는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리던 녀석이 아니었던가.

이프리트도 뒤늦게 그 사실을 자각했는지, 어리둥절하던 표정에서 급격히 화들짝 놀라는 얼굴로 바뀌었다.

"크악! 내가 왜 이딴 녀석을 마나러 온 거지!"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제기랄! 그냥 한마디해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라 온 건데! 이딴 놈에게 할 말이 있다니, 내가 미쳤나? 어쨌든 너, 이왕 온 김에 말해두겠는데, 또 한 번만 내 영역 건드리기만 해봐! 그땐 정말 나도 가만히 안 있을 테다!"

"훗! 가만히 안 있으면 어쩔 거냐?"

"이, 이 자식!"

분에 바쳐 소리치면서도 이프리트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엘퀴네스의 몸에서 흘러나온 싸늘한 기운 때문이었다. 저런 상태일 때의 그는 상당히 위험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는 것을 이프리트는 지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새로운 방문자가 없었다면, 오늘 불의 영역은 두 번째로 무너지는 참사를 당했을지도 몰랐다.

"뭣들 하는 거야? 시끄러워."

"트, 트로웰? 넌 또 여기 왠일이냐?"

위기를 모면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이프리트는 겉으로는 솔직하지 못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웬일이냐는 질문은 진심이었다. 얼마 전에 인간들을 멸종시키겠다는 무모한 계획을 그만둔 뒤로 늘 바람의 영역에 앉아서 꼼작도 안 한 녀석이 갑자기 이곳엔 왜 온 것이란 말인가.

'어라? 근데 그걸 왜 그만둔 거더라?'

갑자기 흐릿하게 느껴지는 기억에 기분이 이상했지만, 이프리트는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때그때의 감정에 따라 려정을 반복하는 것은 그다지 특이하다고 할 만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마침 트로웰의 대답이 이어졌다.

"미네르바가 깨어났어."

"뭐? 드디어 봉인에서 풀린 거냐?"

"그래."

"그거 잘됐… 자, 잠깐!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온 거야? 네가?"

"그게 어때서?"

기겁하는 이프리트의 반응에 트로웰은 구겨진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이프리트로서 놀랄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미네르바 외에는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고, 절대 누구 하나 챙기는 일이 없는 녀석이 친절하게 상황보고를 하러 오다니!

그는 자신도 모르게 본심을 내뱉었다.

"뭐 잘못 먹었냐?"

"죽! 는! 다!"

"하하하! 말투를 보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기는 한데… 거참, 귀신이 곡할 노릇일세."

연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이프리트와 달리 엘퀴네서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 또한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인 듯했다.

쏟아지는 시선에 당황한 트로웰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나도… 몰라. 그냥 말해줘야 할 것 같았어."

꼭 누군가에게 알려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대상이 지금 눈앞에 있는 정령왕들은 아닌 것 같았다.

"헤에, 네가 드디어 철이 들었구나?"

"닥쳐, 이프리트! 아무튼 말했으니까 난 돌아가겠어."

"큭큭! 쑥스러워하긴."

"시끄럽다, 이프리트. 네놈도 이만 꺼져."

"쳇! 네놈이 말 안해도 알아서 나가! 누군 이딴 곳에 잇고 싶은 줄 알아?"

뒤편에서 들려오는 말다툼에 트로웰은 나가다 말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와 똑같은 일상. 그러나 이전과 다르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마지막 퍼즐 조각 하나가 빠진 것처럼, 허전한 기분이었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13-25 흘러간 시간의 답사 (1)

부글부글.

물속에서 거품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똑 쏘는 탄산을 마신 것처럼, 온몸에 청량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런 기분을 느껴본게 얼마 만이었더라? 분명히 익숙한 감각인데도, 한동안 너무 어색하게 느껴져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몸을 타고 흐르는 것은 공기보다 약간 무거우면서도 자연스러웠다. 마치 나와 한 몸처럼 일체감이 느껴져, 나는 한결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한동안 그 느낌에 빠져 있던 나는, 귓가에 들려오는 낯익은 속삭임에 서서히 몸의 감각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엘퀴네스께서 돌아오셨어!

-우리들의 왕이 돌아오셨다!

-온 대륙의 생명이여! 부활하라!

-우리의 왕께 경배를!

한목소리로 합창하는 정령들의 목소리. 나를 향해 울리는 엄숙한 음성들을 듣고 있자니, 이제야 정말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아아, 내가 드디어 돌아왔구나.

나는 속으로 조용히 감탄하며 그때까지 감고 있던 눈꺼풀을 슬쩍 들어올렸다. 온 공간을 가득 채운 푸른 물줄기가 젱리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온전히 나를 위해 존재하는 물의 영역의 모습이었다.

처음 태어나던 순간에도 느꼈던, 경이로운 감정이 제일 먼저 찾아들었다. 고작 2년 만에 보는 것인데도 마치 평생 동안 못 보았던 것처럼 아득한 기분이었다. 그때와 다른 것은, 이제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음을 걱정하지 않다는 것. 아니, 오히려 공기 속에 있을 때보다 더 편하다는 사실이었다.

'나도 이젠 정령이 다 되었네.'

나도 모르게 혼자 자조적인 미소를 흘리고 있자니, 곧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혼자 바보같이 웃고 잇는 거야? 돌아왔으면 인사부터 할 것이지!"

"…에?"

고개를 든 순간, 나는 선명한 붉은색으로 점철된 한 존재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이프리트!"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 것인지! 저 톡 쏘아붙이는 ㅁ라투도 오랜 만에 들으니 그저 기쁘기만 했다.

반가움에 환하게 웃으며 소리치니, 곧 이어 또 다른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이프리트만 보이는 겁니까? 저도 잇는데요."

"어어? 미네! 와아, 미네잖아? 날 마중 온 거야?"

무표정한 얼굴의 귀여운 소녀까지 발견하고 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얼른 그들 쪽으로 달려가니, 가만히 서 있던 미네가 얼굴을 이상하게 찡그렸다. 놀라서 잠시 멈칫한 나는, 다음 순간 미네가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의 눈에 띄지 않았지만, 파들거리는 입꼬리가 양옆으로 슬쩍 들어올려져 있었다.

"하하하……. 우, 웃는 모습은 여전히 특이하구나."

"그런가요? 아무튼 잘 돌아오셨습니다, 엘. 그 동안 상당히 심심했습니다."

"앗? 내가 없어서 심심했던 거야?"

"네. 엘 주위에는 항상 재미있는 일들만 일어나잖습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따라갈 걸 그랬다고 후회했습니다."

"그, 그랬냐."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는 소리에 나는 허무하게 웃었다. 미네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눈빛만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여행은 어떠셨습니까?"

"응? 아아, 그럭저럭 괜찮았어."

"어떤 육체를 입으신 겁니까? 본체를 이곳에 놔두고 가는 대신, 분명 임시적으로 새로운 종족의 육체를 입게 된다고 들었습니다만."

"평범하지, 뭐. 인간이었어."

"또 인간입니까? 엘은 인간과 상당히 인연이 깊군요."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기에 순순히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제야 제대로 내 몸을 살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냥 잠깐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 같았는데, 어느새 내 몸은 원래대로 되돌아와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다시 정령의 몸으로 돌아왔네? 파란색 머리카락! 오랜만이다!"

"그 쪽에선 다른 색이었나 보지?"

이번에 물은 것은 이프리트였다. 궁금해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차분한 태도를 취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우스워,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거기선 금발이었거든. 아~ 너희들을 보니 정말 돌아온 게 실감난다. 오랜만이야, 둘 다! 보고 싶었어~~!"

"앗! 뭐, 뭐야? 징그러워! 달라붙지 마! 저리 갓!"

"이프리트, 엘이 저렇게 기뻐하고 있는데, 이럴 때 자꾸 거절하는 것도 실례입니다."

"시끄럿!"

빽 하니 지르는 소리에 나는 한참 동안 두 정령왕을 끌어안고 웃었다. 그러다 잠시 후, 한 가지 잊고 있던 것이 떠올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참! 라피스는? 라피스를 담은 목걸이는 어떻게 됐어?"

"빨리도 물어본다."

"어디로 갔는지 알아?"

이 물음에 대답한 것은 이프리트도, 미네도 아닌, 마침 물의 영역에 들어서고 있던 트로웰이었다.

"라피스라면 이곳에 오자마자 영혼 상태로 돌아가서, 명계에서 인수해갔어, 엘."

"…트로웰!"

반갑게 이름을 부르던 순간, 나는 그가 방금 한 말을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라피스를 명계에서 데리고 갔다고? 그럼 그대로 환생하는 거야? 나 아직 작별 인사도 못했는데."

"괜찮아. 녀석의 경우는 악신에 의한 희생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게 환생이 결정지어지지는 않을 거야. 엘뤼엔이 특별히 인사할 수 잇는 시간을 마련해본다고 했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

"아, 그렇구나. 아버지가……."

"명계 쪽은 아니지만 엄연히 상급 신이잖아? 그 정도 권한은 있다고."

그의 설명에 나는 겨우 안심했다. 그런데 이프리트와 미네의 표정이 이상했다. 꼭 뭔가 불만에 찬 느낌이랄까? 그 시선은 정확히 트로웰에게 향해 있었다.

"이제 돌아온 겁니까?"

"무지 아슬아슬했던 거 알아, 너? 또 그 재앙이 반복되는 줄 알고 조마조마했다고!"

"하하! 미안, 미안. 어쨌든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잖아?"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궁금해져서 묻자, 살짝 미간을 좁힌 미네가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글쎄, 트로웰이 엘을 찾으러 간다면서 본체 자체로 이동을 해버렀지 뭡니까? 덕분에 대륙의 모든 식물들이 말라버릴 뻔했습니다."

"에? 겨우 그 사이에?"

언뜻 생각해도 엘뤼엔과 트로웰이 날 찾아와 깨우고 돌아가기까지의 시간은 넉넉히 잡아도 5시간 안팎이었다. 보통 정령왕이 사라진다 해도 휘하의 정령들로 인해 몇 년간은 버티는 것으로 알고 잇었기에, 두 정령왕의 반응이 과민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지는 말에 나는 한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겨우라니요? 거의 팔 년이 다 되었는데요. 이미 대부분의 하급 정령들은 소멸하고, 상급 정령들과 중급 정령 몇만 남아 버티고 있습니다."

"… 뭐?"

8년? 그 찰나의 순간이 8년이 되었다고?

명치를 강하게 두들겨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 내가 보냈던 지난 2년간은 대체 얼마의 기간이란 말인가!

나는 설명을 구하는 눈으로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받은 충격을 이해한다는 듯, 살짝 낭패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런! 조금 천천히 알려줄 생각이었는데."

"어, 어떻게 된 거야, 트로웰? 나… 여기에서는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거야?"

의식하지 않아도 목소리가 저절로 떨렸다.

트로웰은 잠시 한숨을 내쉬곤, 차분한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먼저 충격받지 않겠다고 약속해, 엘. 어떤 말을 들어도 놀라지 않겠다고."

"그, 그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닌걸."

"나도 무리라는 거 알아. 그래도 침착하도록 노력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알려줄 수 없어."

"… 알았어. 그렇게 할 테니까, 말해줘. 대체… 얼마나 지난 거야?"

나는 되도록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노력하며 이어질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를 악문 각오도, 막상 트로웰의 입이 열린 순간에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는 숫자가 지나갔을 때 내가 한 것이라곤, 고작 충격으로 주저앉지 않기 위해 버티고 있는 것이 다였다.

"삼백 년이야. 네가 떠난 그날로부터 삼백 년이 흘렀어."

"……!"

"에, 엘! 괜찮습니까?"

눈앞이 캄캄해지고 몸이 휘청거렸지만 나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겨우 정신을 수습한 후, 나는 가장 궁금한 사실부터 묻기로 했다. 다행히 생각보다는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말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트로웰이 내가 있던 곳에서 돌아가는 순간까지 8년이 걸렸다면, 나는 훨씬 더 많아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자 이미 예상했던 질문인 듯, 트로웰은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그건 시간 궤도가 일정하지 않아서 그래. 출발하는 시각에 따라 변칙이 작용하는 것 같아. 사실 나도 이렇게 오래 흘러 잇을 줄은 몰랐어. 네가 떠난 시기로 계산해봤을 땐, 길어봤자 몇 달 정도 될 거라 생각했거든."

"어쨌든 삼백 년이 흘렀다는 거지?"

"그래."

"… 그럼 이사나는?"

"……."

"알리사는? 라온 황태자는? 카이테인 씨와 샴페인 용병단들은? 다들 죽은 거야?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엘……."

안타까움을 담은 음성에 나는 더욱 미칠 것 같았다. 그것이 긍정을 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겨우 2년이 흘렀을 뿐인데. 내게 흐른 시간은 겨우 2년뿐이었는데, 이곳에서는 3백 년이나 지났단다. 소중했던 동료들, 친구들이 이미 모두 죽고 이 세상에 없단다. 당연히 기다리고 잇을 줄 알았던, 다시 웃으며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고 한다.

"하…하하…하하하……."

왜 웃고 잇는지도 모른 채 웃었다. 처음엔 그저 말도 되지 않는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게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존재했다.

내가 임의로 해지하지 않는 한, 이사나가 죽기 전까지는 결코 끊어질 리가 없었던 계약의 결속이 사라져 잇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이 모든 현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라피스를 찾기 위해 떠났던 것이 후회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때의 선택으로 인해 돌아온 결과가 이런 것이라니.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워졌다.

13-26 흘러간 시간의 답사 (2)

"네게는 이 편이 더 나은 걸지도 모른다."

얼마 후, 내게 찾아온 엘뤼엔이 가장 처음으로 건넨 한마디였다. 그는 좀처럼 충격을 걷어내지 못하고 있는 나를 향해 슬픈 얼굴을 하며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겪어야 하는 일이다. 이사나와 다른 인간들의 수명은 지극히 짧지. 결코 오래도록 함께할 수 없어. 이건 남들보다 긴 수명을 가진 자가 감당해야 하는 숙명이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을 텐데, 그때마다 충격을 받고 슬퍼할 생각이냐?"

"……."

"아주 먼 여행을 떠났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려라. 그 편이 너에게도 그 녀석들에게도 나을 거다. 너와 이어질 인연이라면, 굳이 그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도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거다."

"하지만… 그건 다르잖아."

"뭐가 다르지?"

"내가 알던 이사나가 아니잖아. 모습도, 성격도, 나에 대한 기억도 전부 없을 거 아니야."

그러자 엘뤼엔은 엄격한 표정으로 물었다.

"한때의 추억에만 메어서 상대의 본질을 외면하려는 거냐?"

"……!"

"만약 네가 정령왕의 임기를 끝내고, 신이 아닌 인세의 길을 택한다 해도 여전히 넌 내 아들일 거다. 나를 전혀 못 알아보고, 전혀 다른 얼굴, 다른 모습과 성격을 지닌다 해도 그건 변함이 없을 거다. 넌 그럴 수 없는 거냐?"

"윽……."

그건 생각해볼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과거에서 나를 알아보지 못해도, 여전히 그는 내 아버지가 아니었던가. 비록 그만큼 힘들고 외로웠지만, 또다시 같은 일이 벌어진다 해도 나는 절대 그를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울고 싶은 마음을 감추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엘뤼엔은 굳었던 표정을 풀고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 바로 그런 마음인 거다."

"……!"

"이미 죽은 자는 간절히 원해도 살아나지 않는다. 남겨진 자신을 불쌍히 여겨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인간들은 이 간단한 이치를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되풀이한다. 완벽하지 못하기에 늘 누군가로부터 위안을 얻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넌 아니지 않냐, 엘?"

"……."

"넌 정령왕이다. 스스로 적당히 감정을 멈추고 흘려버릴 수 있다. 더 많은 가능성을 보고, 얼마든지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데도, 계속 인간 식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거기에 매달려 잇을 생각이냐?"

"…아니."

한참 만에 내가 대답하자,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머지 말을 이었다.

"지금 네 감정이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네가 이런 성격이기에 많은 존재로부터 사랑을 받는 거겠지. 다만 슬퍼하는 것과 집착하는 것은 다르다. 단 한순간도 과거에 매이지 마라. 앞으로 너를 스쳐지나갈 인연은 지금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을 테니까."

"…응."

"추억이란 건 상황에 따라 가장 달콤한 꿀도, 가장 쓴 약도 될 수 있다는 걸 기억해라. 나는 네가 현명한 방법을 선택하리라 믿는다."

"응. 알았어, 아버지."

나는 흐르는 눈물을 무시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충고 때문이었을까? 엉망으로 섞이고 얽히던 마음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당장 그의 말대로 전부 따르지는 못하겠지만, 앞으로 하나씩 천천히 배워갈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간 나도 하나의 온전한 정령왕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꽤 오랫동안 감고 있던 눈을 떴을 때, 나는 꼬박 하루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옆에 있었던 엘뤼엔은 이미 신계로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주변에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정령왕들만 보였다.

그때쯤 나는 대부분의 감정을 수습한 상태였다. 여전히 슬프긴 했지만, 처음처럼 심하게 괴롭고 아픈 느낌은 없었다. 나는 거기서 마음이 더욱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완전히 차분해지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한쪽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던 정령왕들이 하나 둘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엘, 이제 괜찮은 거야?"

"응. 괜찮아, 트로웰. 한결 나아졌어."

"정말 다행이다. 걱정했어."

"헤헤, 미안."

그러자 삐딱한 표정을 한 이프리트가 한마디 끼어들었다.

"제발 좀 걱정시키지 마. 대체 얼마나 다른 정령왕들의 가슴을 철렁거리게 만들 셈이야? 그깟 인간들 몇 죽은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이프리트! 너!"

"흥!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수명이 1백 년도 안 되는 인간들이야 늘 그렇게 쉽게 죽는 거잖아? 그때마다 일일이 충격 받아서야 어디 정령왕 노릇 해먹겠어?"

그러자 미네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나무랐다.

"그러지 마십시오, 이프리트. 엘이 유달리 마음이 약해서 그런 것이잖습니까?"

"글쎄, 그놈의 약한 마음, 이제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냐고!"

"이프리트가 그 싸가지 없는 성격을 버리면 엘도 그렇게 될 겁니다."

"뭐야?"

불과 바람은 꽤 상성이 좋은 걸로 알고 있는데, 이번 대의 모습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티격태격하는 두 정령을 보며 어색하게 웃은 나는, 어제부터 쭉욱 생각해왔던 말을 꺼냈다.

"아크아돈을 둘러보고 싶어."

"뭐?"

내 말이 갑작스러웠는지, 분주하던 정령왕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집중되었다. 그것을 하나하나 마주하며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삼백 년이나 흘렀잖아. 그동안 어떻게 변했는지, 이번엔 어떤 사람들로 채워져 있는지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 그 광겅에서 이사나나 다른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면 더욱 좋고."

"엘……."

"곧 마음에 묻어야 할 테지만, 역시 쉽게 잊기에는 너무 특별했던 사람들이니까. 그 흔적을 하나씩 밟아가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할래. 그래도 되겠지?"

그것은 마지막까지 그들과 함께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사과법이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아직까지도 그들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는 나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방편일지도 모른다.

내 조심스러운 말에 정령왕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그러고 싶다면 그래야지."

"맞습니다. 게다가 새로운 문화를 접하다 보면 기분 전환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나저나 딱 둘 있는 계약자가 사라져버렸으니, 제대로 유희를 시작하기는 힘들겠는 걸? 자연체로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

이프리트의 말에 트로웰 역시 낭패 어린 표정이 되었다.

"아참, 그렇지. 이걸 어쩐다. 아, 그래! 내가 적당한 블루 드래곤을 하나 추천해줄 테니 계약할래?"

"블루 드래곤? 누구?"

"음, 원래는 몰라야 정상이지만, 지금의 너라면 기억에 있을지 모르겠다. 전대의 엘퀴네서, 그러니까 엘뤼엔이 소멸하고 나서 곧장 수면기에 들어갔던 드래곤인데, 얼마 전에 깨어났거든. 이름은 라미아스고, 꽤 고룡이니까 능력도 많아서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 거야."

"뭐? 라미아스?"

낯익은 이름에 나는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지금 트로웰이 말한 라미아스가 내가 알고 있는 그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트로웰은 재미있다는 듯 빙긋 웃으며 물었다.

"역시 아는구나?"

"아, 응. 그가 내가 알고 있는 라미아스가 맞는다면."

"맞을 거야. 4천 년 전에도, 지금에도 그 이름은 딱 하나뿐이니까."

"아아, 그렇구나. 아직… 살아 있었구나."

어째서인지 그는 당연히 죽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니! 괜히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프리트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엥? 엘이 어떻게 라미아스를 알아? 태어나서 한 번도 만난 적 없잖아?"

"후훗! 그런 게 있어. 나와 엘만의 비! 밀!"

"뭐야, 트로웰! 얄밉게시리!"

"그건 저도 동감입니다. 무척이나 얄밉군요."

두 정령왕의 원망을 들어면서도 트로웰은 끝끝내 그 건에 대해 함구했다. 그러면서 나를 향해 살짝 혀를 내밀곤 한쪽 눈을 찡긋하는 모습에 나는 한동안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 저 모습을 보고 나니, 과거에 그에게 느꼈던 모든 서운한 감정이 한순간에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트로웰은 '짝' 하고 두 손바닥을 마주치고는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정신이 없어서 이 말 하는 걸 빼먹었다!"

"……?"

또 무슨 일이지?

내가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자 그는 생긋 웃으며 두 팔을 벌려 나를 끌어안았다. 갑자기 폭 하고 안긴 품에서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뜬 사이,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것은, 이곳에 온 내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돌아와서 기뻐, 엘. 기다리고 있었어."

 

*          *          *

 

트로웰의 부탁에 의해 라미아스가 날 소환했을 때, 내가 그를 마주보고 느낀 것은 '여전하다'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드래곤이 폴리모프하면 본래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종족이라지만, 저렇게 4천 년 전과 똑같을 수가!

게다가 나이가 들면 말투나 눈빛이라도 변하는 것이 정상인데, 이 드래곤에게는 그런 것도 없었다. 그 증거로 가장 먼저 나를 보고 한 말이.

"오옷! 이번 대의 엘퀴네스도 엄청난 미인이잖아! 아싸~ 땡잡았다!"

…이것이었으니 말 다했지 않은가.

보통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 알았던 사이가 갑자기 모르는 관계가 되면 기분이 이상해져야 마땅하건만, 이 드래곤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다 충격적이라 그런 것을 느낄 사이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몰라봐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후후~ 후후~ 후후후훗~ 크크크큭!"

"……."

대체 뭐가 저리 좋은 건지.

계약이 진행되는 내내 라미아스는 도무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웃음을 흘려 내 심사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엘뤼엔이 느꼈던 감정이 바로 이런 것이었던가 생각하니, 그때 그렇게 냉정하게 내치던 모습들이 절절히 이해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계약의 인장을 새기고 난 뒤, 무심코 인사를 건넸을 땐 더욱 황당한 반응이 기다리고 있었다.

"으음, 잘 부탁드릴게요."

"헉!"

"왜, 왜 그러세요?"

"방금 나한테 잘 부탁한다고 했어?"

"네, 그렇습니다만?"

어리둥절해져서 대답한 순간, 나는 스스로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라미아스의 표정이 갑자기 이상야리하게(?) 변했기 때문이다.

"아아아이이잉~ 어떡해~~ 너무 사랑스럽잖아~~~"

"쿨럭! 사, 사랑스럽……?"

"우와! 우와! 저 순진한 반응! 이번 대의 엘퀴네스는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자자~ 이 오라비의 품에 안기렴!"

"무, 무슨!"

다행이 적당한 타이밍에 막아선 트로웰로 인해, 나는 그에게 끌어 안겨지는 상황을 면할 수 있었다. 식은땀이 저절로 흘러내린 순간이었다.

"그만, 라미아스! 계약하자마자 장례 치르고 싶어?"

"하지만 저렇게 귀여운걸~! 너도 알잖아. 내가 전대의 엘퀴네스가 소멸한 뒤로 얼마나 시름에 빠져 있었는지! 그런데 이렇게 예쁜 엘퀴네스가 태어날 줄 알았으면 수면기에 들어가지 않는 건데 그랬어. 그럼 더 빨리 만나볼 수 있었을 텐데~"

"닥쳐! 엘에게 무례하게 대하지 마. 내 손에 친히 죽고 싶지 않다면."

"오옷? 엘? 애칭이 엘이야? 우와아~ 어울려! 어울려!"

"그쯤에서 그만두라고 했다!"

"쳇, 쳇! 치사해. 혼자 독차지하겠다 이거지? 햐아~ 하긴, 그 정도로 사랑스럽긴 하네. 저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라니."

'우욱!'

순간, 우드득 닭살이 돋아 더 이상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던 나는, 후다닥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자 뒤편에서 강한 타격음과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트로웰이 두 손을 탁탁 털며 나를 따라왔다. 조금(?) 과격한 훈계를 주고온 모양이다.

"미안해, 엘. 소개시켜준 게 저런 변태라서."

"…하하하! 괘, 괜찮아. 대충은 알고 있었는걸. 저만큼 심할 줄은 몰랐지만."

"아아, 저 녀석이 인간들에게는 제법 멀쩡한 편인데, 유달리 정령왕 앞에서는 정신을 못 차리거든. 하지만 저래 봬도 인맥이나 능력면에서 제법 쓸모는 많아. 그 때문에 엘뤼엔이 유일하게 죽이지 못해 살려둔 놈이었지."

"하하하……."

딱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아 나는 속으로 적극 공감했다.

그 사이, 트로웰은 홀가분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생긋 웃어 보였다.

"자, 그럼 계약도 무사히 마쳤으니 돌아다니는 데는 문제없겠지? 이제 슬슬 가볼까?"

"응? 어디를?"

"어디긴. 인간 세상이지. 지금부터 나랑 천천히 둘러보자. 네가 이 세계의 변화에 익숙해질 때까지. 그러고 나서 네게 보여줄게 있어."

"보여줄 것? 그게 뭔데?"

"아직은 비밀. 곧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말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트로웰의 모습에 나는 억지로 호기심을 참았다.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일이라면, 미리 안달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 부분에 대한 신경을 끄고 나니, 내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이제부터 시작될 새로운 여행에 대한 것으로 가득 차 올랐다.

지난 3백 년간 이 대륙에는 어떠한 일들이 있었을까?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세월의 공백에 암담한 마음이 들었지만, 피할 생각은 없었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모두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일 같았다.

13-27 흘러간 시간의 답사 (3)

재왕의 별. 그 어마어마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까? 솔트레테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누구도 무시 못할 강대국으로서 그 명맥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반면에, 또 하나의 제왕의 별이었던 라온휘젠이 이끈 카터스 제국은, 지금은 평범한 왕국으로 전락하여 상당히 볼품없는 모습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 이유가, 제왕의 반려였던 알리사를 이사나가 차지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듣자니 이사나는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라온 황태자와의 투쟁을 거쳐, 그녀에게 프러포즈하는 것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 당시 한 여인의 마음을 얻기 위한 두 황제들의 눈물겨운 노력은 지금도 음유시인들 사이에서 노래가 되어 불려지고 있을 정도였다.

어쨌든 결혼한 쪽은 이사나였고, 그 결과 그들 사이에선 3명의 아드로가 딸아이 하나가 태어났다. 그러나 부모가 하나같이 뛰어난 정령사였던 것에 비해, 정작 그들의 아이들은 안타깝게도 정령사의 자질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이사나가 죽은 이후론 정령왕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겼고, 그 때문에 한때 제국이 휘청거릴 정도로 국제 정세에 크게 타격을 입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하나같이 후손들의 기질이 뛰어난 편이라, 대부분 총명하게 나라를 잘 다스리기는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솔트레테도 이전의 강대국의 면모를 잃어가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무엇보다 마신의 소멸 이후, 그들의 국교이던 마신교가 완전히 힘을 잃게 되면서부터 그로 인한 타격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간 여러 차례 국교를 바꾸려는 시도가 있기는 했으나, 이사나가 황법을 통해 바꿀 수 없도록 만들어두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내버려뒀다고 했다. 아마도 새로운 마신이 나타나면 제자리를 찾을 테지만,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직도 마신이 결정되지 않았단 말이야?"

"응. 마땅한 적임자가 통 없는 모양이야. 하긴, 워낙 마계의 일이 많잖아. 강단도 있어야 하고."

"그럼 지금 마계는 누가 관리하고 있는데?"

"그야 엘뤼엔이지."

"헉! 정말?"

내가 놀라서 묻자, 트로웰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키득거리며 말했다.

"마계의 상급 신이 한 명 더 있잖아. 지옥의 신 크라제. 그와 함께 돌보고 있는 것 같아. 하여튼 능력이 너무 좋아도 피곤한 법이라니까. 본래 담당하고 있는 차원인 바이톤의 일에 마계의 일까지, 이중으로 부담해야 하니 아주 죽을 맛일걸? 게다가 엘, 널 찾으러 가는 동안 쌓인 서류들을 다 처리하려면 지금쯤 정신이 하나도 없을 거야. 예전에 이프리트가 날린 십 년 치 서류와는 비교도 안 되지."

"아~ 그래서 요즘 잘 안 오는 거구나?"

"정확히는 못 오는 거야. 뭐, 안되긴 했더라. 중간에 길을 잘못 들지만 않았어도 그렇게까지 늘어나지는 않았을 텐데."

"헤에, 대체 어디로 빠졌기에?"

"별거 아니야. 실수로 네 위치를 잘못 짚었었거든. 거기서 꽤 인상 깊은 일이 있긴 했지만……."

"인상 깊은 일?"

"으응. 그런 게 있어."

"……?"

소소한 잡담을 나눈 뒤, 트로웰은 본격적인 여행 궤도를 정하기 시작했다. 주로 내가 이전에 이사나와 함께 여행하면서 거쳤던 곳들이었다. 대륙의 전반적인 모습을 둘러보기 위한 여행이었던지라, 한곳에서 오래 머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워낙 다녀야 할 곳이 많다 보니, 그저 살짝 둘러보는 데만도 꼭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10년이 지나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그것이 30번이나 반복되어서일까? 그동안 천천히 둘러본 아크아돈은 강과 바다, 산맥처럼 커다란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마을의 지형이나 위치 대부분이 바뀌어 있었다.

조선과 한국처럼, 문화나 나라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복식이나 생활 방식 면에서 약간의 변화가 보였다.

그중에서 가장 큰 변화라면 바로 음식이었다. 스튜나 죽처럼 끓여먹는 음식은 거의 사라지고, 그 대신 튀기거나 구워먹는 것들이 주를 이루었다. 지는 3백 년간 내가 잠들어 있던 탓에, 물이 풍족하지 못해서 자연스럽게 그리된 것이라 했다.

그리고 지난 10년 가까이 트로웰의 부채 동안에는 작물 재배가 쉬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듣도 보도 못한 품종이 개발되고, 그로 인한 요리법 또한 많이 발달해 있었다. 흔치 않던 마법사의 숫자는 그 사이에 상당히 늘어서 제2의 황금시대 부홍을 꿈꿀 정도가 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진보한 분야는 연금술이라고 했다.

또한 놀라운 것은 인간과 이종족 사이에 교역이 오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래도록 폐쇄적인 환경만 고집하던 이종족들이 드디어 벽을 부수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엘프나 드워프가 인간들의 마을을 활보하거나 아예 눌러앉아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이제 아주 흔한 일상 중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서로 다른 종족이 서로 양보하며 타협을 이루어가는 것이 중요해진, 어찌 보면 상당히 과도기적인 시기라고 할 수 있었다.

마치 전혀 딴 세상을 둘러보는 것 같아, 오히려 4천 년 전의 세상을 여행했을 때보다 더욱 낯선 느낌이 들었다. 이사나와 함께했던 거리를 걸으면서, 그와 연관되는 무엇 하나 떠올릴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서글펐다.

그나마 내가 용기를 얻은 것은 어느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였다. 지금까지는 모두 생소하게만 보였는데, 커다란 배가 닿아 있는 항구와 그 아래 펼쳐진 갯벌의 모습이 상당히 낯익게 보여, 나는 조금 기대감을 가지고 물었다.

"어라? 이 항구는 무척 눈에 익는데?"

"응, 그럴 거야. 여긴 삼백 년 전과 거의 달라진 것이 없거든."

"헛! 정말? 아아~ 그럼 여기가 전에 던전에 갔을 때 경유했던 그 항구구나!"

이사나와 함께하면서 바닷가에 들렀떤 것은 그때뿐이었기에 나는 어렵지 않게 그때의 일을 추측했다.

그때 마침 항구에 닿은 배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왠지 반가운 마음에 뚫어져라 구경하는데, 급히 뛰어 내린 누군가가 내 어깨를 강하게 치고 지나갔다.

퍽!

"윽!"

방심하고 있던 탓에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나도 모르게 신음을 살짝 내뱉자, 갑자기 머리 위에서 걸쭉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에이, 씨팔! 왜 남이 가는 길을 막고 서 있는 거야?"

"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 무슨 어이없는 말이란 말인가?

황당해진 나는 잘잘못을 따질 요량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상대의 모습에 그대로 바짝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엘프였던 것이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엘프가 욕을 했다는 사실에 먼저 놀랐을 테지만, 나는 그의 낯익은 생김새에 먼저 경악해야 했다. 내가 알고 있던 모습보다 키도 크고 많이 성숙해져 있었지만, 이 엘프는 분명!

"설마… 엔딜?"

"씹, 내가 엔딜이면 엔딜이지, 설마는 뭐가 설마… 에?"

거친 말투로 받아치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점점 말끝을 흐렸다. 싸아악! 이 표현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잇을까? 그의 얼굴에선 어느새 핏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눈앞의 엘프가 엔딜이 맞음을 확신했다.

동생의 약값을 벌기 위해 사람들에게 사기치고 다니던 엘프, 그 녀석을 처음 만났던 바로 그곳에서 재회한 것이다.

"서, 설마… 엘퀴네스님?"

"쿡! 그러는 너는 왜 설마라고 하는데?"

"헉! 맙소사! 정말 엘퀴네스님이야?"

어느새 다 자란 청년의 얼굴로, 엔딜은 그때처럼 똑같이 경악해서 물었다. 내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새파랗게 질려 있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아 환하게 밝아졌다.

"세상에! 세상에!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이야! 어떻게 된 거야, 엘님! 여행을 갔다더니, 이제야 돌아온 거야?"

"응. 그동안 잘 지냈어? 정말… 많이 자랐네."

"헤헤! 당연하지! 삼백 년이나 지났잖아. 이제 나도 성인인 걸? 근데 엘님은 그대로네?"

"그야 나는 여기서 성장이 멈춰 있으니까 그렇지. 참, 그러고 보니 네 동생은?"

"아, 세실이라면 집에 있어."

"그렇구나, 병은 어떻게 된 거야? 폴리모프 마법… 풀리지는 않았어?"

라피스가 건 마법이니 혹시나 녀석이 죽었을 때 풀리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엔딜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멀쩡히 엘프로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괜찮은 엘프 청년을 만나 결혼까지 했다고 하니, 생활에도 전혀 지장이 없는 것 같았다.

이에 대한 의문은 옆에서 가만히 재회 장면을 지켜보던 트로웰이 해소해주었다.

"드래곤의 마법은 시전자가 죽어도 풀리지 않아. 그걸 풀 수 있는 방법은, 그 드래곤보다 더욱 강한 자가 나타나 해지하는 방법뿐이지."

"헤에, 그렇구나. 정말 다행이다. 저기, 카이테인 씬느 그 뒤로 어떻게 됐니?"

그러자 이제까지 방글방글 웃고 있던 엔딜의 얼굴에 처음으로 슬픔이 떠올랐다.

"그야 벌써 죽었지. 카이테인 씨는 인간이었잖아."

"그건 알지만……."

"걱정 마, 엘퀴네스님. 그의 임종은 내가 지켰으니까. 혼자서 쓸쓸히 가지는 않았을 거라고 장담해."

"아아, 그렇구나. 그런데 임종을 지킬 정도였으면, 계속 함께 생활했던 모양이네?"

"그렇진 않아.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난 거거든."

엔딜의 말에 의하면, 카이테인 씨는 뛰어난 신성력을 지닌 사제답게, 결국 원래의 목적대로 대사제의 직위에까지 올랐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운신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우연히 엔딜과 재회했고, 녀석의 강력한 희망에 따라 여생을 그들 남매와 함께 보내게 되었다고 했다.

그때의 일을 말하면서 다시금 쓸쓸해졌는지 엔딜은 눈시울을 붉혔다.

"죽으면서도 엘퀴네스님을 꼭 다시 뵙고 싶다고 그랬었어. 엘퀴네스님을 만난 것은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큰 축복 같았다면서."

"… 그랬구나."

그날, 그와 헤어지면서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은 이런식으로 적중하고 말았다.

서늘해진 마음에 입술을 깨무는 내게,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엔딜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무덤에 가볼래? 무척 반가워할 거야."

13-28 흘러간 시간의 답사 (4)

카이테인의 무덤은, 살아 있을 때의 그만큼이나 단정하고 정결한 느낌이었다. 매일 꾸준한 관리를 해준 것인지, 근처에 잡초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3백 년 가까이 보존된 무덤 치고 이렇게까지 깨끗한 것은 그의 무덤이 유일할 것 같았다.

"나왔어요, 카이테인 씨. 굉장히 오랜만이네요."

'사실 나는 아직 이 년밖에 안 지난 것 같아서, 이렇게 당신의 무덤을 보고 있으니까 기분이 이상해요.'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조금 서글픈 마음으로 웃었다. 그에 대해 생각하니, 저절로 그때 함께 여행했던 샴페인 용병단들도 떠올랐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던 인물들이니, 그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친김에 나는 트로웰에게 그들에 대한 것도 물었다.

"트로웰, 샴페인 용병단들은 어떻게 됐어?"

"궁금해?"

"응. 그야 당연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트로웰은 어디서 구비한 건지 품 안에서 작은 지도를 하나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무심코 그 안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간 달라진 형세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새로운 왕국들이 많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중에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을 발견하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용병 왕국? 이런게 생겼어? 여긴 어떤 곳이야?"

"말 그대로 용병들이 주를 이루는 나라야. 왕과 왕비를 비롯한, 귀족들과 나라 국만 절반 이상이 용병이고, 이들이 벌어오는 수입으로 유지되는 나라지. 용병 길드의 최종 본부가 이곳에 있기 때문에, 용병이 되려면 무조건 이곳에 가서 심사를 받아야 해."

"헤에~ 멋지다. 누가 이런 기발한 발상을 한 거야?"

"훗, 누가 만들었을 것 같아?"

"에? 설마… 샴페인 용병단들이?"

뜨악해서 묻는 말에 트로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참고로, 초대 왕과 왕비가 휴센과 쉐리야."

"헉……!"

엄청난 사람들이다 싶었지만, 설마 왕국을 일으킬 줄이야! 건국때 이사나가 많은 도움을 줬다고는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다시 한번 그들의 경이로운 능력에 감탄했다.

대장이라는 이유로 휴센이 왕이 되기는 했지만, 나머지 단원들도 모두 중요 관직을 하나씩 꿰차고 함께 나라 정세를 도모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모습일 뿐, 실제로는 여전히 용병으로 의뢰를 받으며 대륙을 횡단하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워낙 생활방식이 자유로운 사람들이라 왕궁생활을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나?

그 뒤, 내친김에 나는 그 길로 걸음을 옮겨 용병 왕국을 집적 방문했다. 그리곤 들르는 상점이나 건물마다 초대 왕, 휴센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오래도록 감상에 젖었다.

광장 한복판에는 샴페인 용병단들이 세운 업적을 적은 비석이 자랑스레 세워져 있었다. 문제는 그 내용이 전혀 그들의 업적과는 관계가 없다는 거랄까?

첫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쓰여 있는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너무 웃겨서 부들부들 어깨를 떨어야 했다.

 

1. 우리 정령왕 봤다! 놀랐지? 켈켈켈켈!

2. 그뿐이냐! 솔트레테의 황제 이사나가 우리 편이다, 이거야! 까부는 것들 다 죽어!

3. 위에 쓴 말 무시해라.

4. 3번 말은 더 무시해라!

5. 4번 말 따라하는 놈들 철퇴에 맞아 뒤진다!

6. 쌍칼에 죽고 싶으면 5번 말을 믿던가.

7. 헤롤 공작은 무식한 도끼쟁이다!

8. 휴센 왕은 치사한 쇼타다! 무려 왕비랑 12살 차이다!

9. 헤롤 공작은 틀림없이 변태다! 아내한테 만날 맞고도 헤헤거린다!

10. 봤느냐. 위에 쓰인 말들이 이 나라의 실태다. 이런 공작과 왕을 믿고 싶어? 제 명에 살고 싶음 그냥 이 나라 떠나라!

 

"큭큭큭… 푸하하하하!"

이것만 봐도 대충 이 비석에 누가 글을 썼는지 짐작이 갔다. 왕이 되고 귀족이 되면 뭘 하겠는가. 아무래도 이들은 끝까지 내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 살다가 간 모양이다.

좀처럼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내게 트로웰 또한 빙긋 웃으며 말했다.

"후훗! 재밌지? 하지만 보기보다 저거 썼을 때 분위기가 무척 살벌했어. 나는 그날로 반역이 일어날 줄 알았으니까."

"쿡쿡쿡! 지, 짐작이 가. 하하하! 정말 이 사람들은 전혀 변하지 않았구나."

"응. 정말 순수했던 인간들이었어. 아마 다시는 그런 사람들을 볼 수 없을 거야."

드물게 인간들에게 좋은 평가를 내리는 트로웰의 모습에, 나는 새삼 샴페인 용병단들과 함께했던 시절이 그리워졌다.

내가 비석 앞에 서서 한동안 멍하게 과거를 추억하고 있을 때였다. 트로웰이 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그만 갈까?"

"응? 이번엔 어디를?"

"따라와 보면 알아."

"……?"

의미 가득한 말에 나는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면서도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자 파앗! 하고 주변이 밝아져 오더니, 곧 나는 전혀 낯선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          *          *

 

"여기가… 어디야?"

트로웰에게 이끌려서 온 곳은 전체적으로 무척 어두웠다. 양옆과 올려다본 천장이 둥글고 거친 돌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보아, 어느 동굴 속이라 짐작할 뿐이다.

궁금해 하는 내게, 그는 별다른 설명 없이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그러자 트로웰은 내려가는 대신, 한쪽 옆으로 물러서며 길을 터주었다. 그리곤 내게 먼저 내려가도록 손짓했다.

어깨를 으쓱한 뒤 계단을 밟은 나는, 내려갈수록 점차 공간이 밝아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완전히 계단의 끝에 도착했을 때 멍하니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둥글고 넓은 공간 가운데에 제단으로 보이는 것이 세워져 있었고, 그 위에 황금색 장식이 된 검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장면을 나는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카노스의 함정인 줄도 모르고 들어섰던 던전의 최하층의 모습이 아니던가.

"이건……."

제단에 꽂힌 검은 그때와 똑같은 정령검 이그니스였다. 그 앞에는 마족의 알 대신, 황금색 가죽이 덮인 두꺼운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내가 아연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서자 익숙한 목소리가 엄숙하게 울려 퍼졌다.

<던전의 최하층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용사의 일행들이여. 내 이름은 파이어 버스터. 위대하신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님의 산물인, 봉인된 이그니스가 담긴 정령검입니다. 나를 취하는 자, 이 세상의 모든 힘을 얻을 것입니다.>

"……."

그때와 비교해 조금도 발전하지 않은 멘트에 나는 쓰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왜 파이어 버스터가 여기에 있는 건지, 알 대신 놓여 있는 책이 무엇인지 궁금한 것투성이였지만, 지금은 그 어떤 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내가 혼자 중얼거리자, 용케 목소리를 알아들은 건지 화들짝 놀란 음성이 터져 나왔다.

<엇? 이 목소리는? 설마 엘퀴네스님? 엘퀴네스님 아니신가요?>

"하하! 그래, 안녕! 오랜만이다. 이그니스."

<에에엑~~ 뭐야~~ 또 엘퀴네스님이에요? 너무해! 전 용사님이 온 줄 알았단 말이예요!>

"…그놈의 용사 타령은 여전하구나."

그러자 이그니스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 전의 용사님이 돌아가셨으니, 당연히 새로운 주인을 찾아야지요! 그게 바로 저의 숙명이란 말이어요!>

"그래그래. 그나저나… 넌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러나 이 물음에 대답한 것은 트로웰이었다.

"그 책을 지키기 위해 내가 가져다놓았어."

"책? 아… 이것 말이야?"

내가 검 앞에 놓여 있는 책을 가리키며 말하자, 트로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전에 내가 보여줄 게 있다고 했었지? 이게 바로 그거야."

"헤에, 이게 뭔데?"

"한번 열어봐."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답하는 말에 나는 조금 머쓱한 기분으로 제단 앞에 다가섰다. 가까이서 보니 책에는 자물쇠도, 그 어떤 제제장치도 걸려 있지 않았다. 이에 무심코 겉표지를 펼쳐보는 순간, 갑자기 터져 나오는 빛에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파앗!

"으악! 뭐, 뭐야?"

휘리릭! 촤라라락!

표지가 열린 순간, 책이 내 앞으로 붕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곤 알아서 책장이 휘리릭 넘어가는 것이, 아무래도 마법이 걸려 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페이지가 더 이상 넘어가지 않는가 싶더니, 그 안에서 새하얀 빛 무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말 놀란 것은 바로 그 다음이었다. 바로 그 빛 무리 속에서 익숙한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엘, 안녕? 오랜만이야.>

"…이, 이사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평생 동안 놀랄 것을 지금 전부 다 놀라는 것 같았다. 책 속의 영상에서 나타난 것은 분명 이사나였다. 그것도 나와 헤어진 직후인 듯, 하나도 변하지 않은 앳된 모습 그대로였다.

차분하게 인사를 건넨 녀석은 잠시 후에 조금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하하! 이런 걸 해보는 건 처음이라 조금 긴장된다. 놀랐지? 실은, 내가 시벨리우스님한테 부탁했어. 엘이 돌아왔을 때,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알려주고 싶어서. 엘이 열면 바로 마법이 발현되도록 해놓았어.>

"……."

설마 이런 걸 준비해놓았을 줄이야.

멍해져서 아무 말도 못하는 동안, 이사나는 그동안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일기 형식으로 설명해나갔다. 주로 아침엔 뭘 했고, 누구와 무슨 말을 했다는 등의 사소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중간중간 나에 대한 걱정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엘이 여행을 떠난 지 오늘로 한 달째야. 그곳엔 무사히 도착한 거겠지? 부디 무사히 라피스님을 찾아서 돌아오기를 바랄게. 빨리 만나고 싶다, 엘. 벌써부터 이러니, 앞으로 어떻게 기다리지?>

어색하게 웃는 순간, 갑자기 영상이 바뀌었다.

다음으로 나타난 이사나는 한층 자라 있는 모습이었다. 그나마 남아 있었던 10대의 모습은 거의 다 사리지고, 훤칠하고 준수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생소한 모습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사이, 녀석은 전보다 더 굵고 어른스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 엘? 오 년 만에 남기는 영상이야. 나 많이 변했지? 그곳에서는 잘 지내고 있니? 아직도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이 돼. 트로웰님은 괜찮을 거라고 말했지만, 혹시 아직도 라피스님을 찾지 못한건 아닌지, 그곳에서 혼자 고생하고 있는 건 아닌지. 여러 가지로 마음이 쓰인다.>

걱정스럽게 말하던 녀석은 이후 여러 가지 안부 인사를 더 전하더니, 조금 기쁜 얼굴로 말했다.

<참! 오늘 알리사가 내 아이를 낳았어. 아들이야. 장차 내 뒤를 이어 황위를 물려받을 아들. 정말 예뻐. 내 자식이라 그런가? 아이가 이렇게 예쁜 존재인 줄 처음 알았어. 하지만 사실은, 알리사를 닮은 딸을 더 보고 싶었는데. 이 아이는 나를 더 닮은 것 같아서 조금 아쉬워.>

"…풋."

슬쩍 서운한 표정을 하는 것에 웃음이 나왔다. 자기보다 알리사를 닮은 아이가 더 보고 싶었다니, 결국 이 녀석도 어쩔 수 없는 팔불출인가 보다.

그 뒤에도 영상은 여러 번 바뀌었다. 불규칙적으로 남기기는 했지만, 보통 3년, 5년에 한 번 꼴로 기록되어 있었고, 그때마다 이사나의 모습은 점점 변해 있었다.

청년에서, 중년으로, 중년의 남자에서 조금 더 중후한 느낌으로. 그렇게 점차 변해가는 모습에서도 이사나 특유의 부드러운 분위기는 그대로 남아 있어, 나느 간신히 눈물을 참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나는 욱신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눈을 감아야 했다.

뿌옇게 빛나는 영상에는 하얗게 머리가 센, 완전한 노인이 된 이사나가 힘없이 앉아 있었다. 오물거리는 입술 사이에서 이사나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칠고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 엘? 아마도 이것이 네게 보내는 마지막 영상일 것 같구나.>

"……!"

<나는 그동안 많은 것을 이루었아. 제국의 기반을 더욱 강하게 다졌고, 발전시켰지. 사람들은 나를 향해 현황이라 칭송하고, 아내인 알리사를 가장 위대한 여자로 섬기며, 내 자녀들은 모두 사랑받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했지. 세상에서 이보다 더 행복한 인생이 있을까?>

<황제로서 난 참 오래산 편이야. 하지만 요즘 들어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 알리사는 이미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이 세상에 없지. 나도 이제 곧 그들 곁으로 가게 될 거야.>

그만, 그만 말해!

이미 오래전에 지난 일임을 알면서도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힘없이 축 처진 어깨도, 주름지고 검버섯이 핀 얼굴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이 순간을 피하고 싶었다. 차라리 책을 닫아버리면 괜찮아질까? 그러나 다음으로 이어지는 목소리에, 나는 다시금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죽기 전에… 널 보고 싶었어, 엘.>

"……!"

번쩍 고개를 들어 마주본 이사나의 얼굴은 슬프게 일그러져 있었다. 마른 피부 위로 하염없이 맑은 눈물이 흘러 내렸다. 

<제국이 부홍한 모습을 볼 때마다, 자랑스럽게 큰 아이들을 볼 때 마다 항상 네게 보여주고 싶었어. 네가 이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기뻐할까. 아마 나보다 더 행복해 할 텐데. 나보다 더욱…… 자랑스러워 해줄 텐데.>

맞아, 틀림없이 그랬을 거다. 이사나는 내 친동생과 다름없었으니까. 녀석이 일구어낸 모든 것이 내가 해낸 것인 듯 마냥 뿌듯해 하고 기뻐했겠지.

보일 리도 없는데 나는 영상을 향해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한 흐느낌이 들릴수록 내 가슴도 같이 무너져 내렸다. 나도… 그러고 싶었어, 이사나. 정말 그러고 싶었어…….

잠시 후, 그 상태 그대로, 이사나는 고해성사를 하듯 눈을 감고 독백했다. 더듬더듬 말 한마디가 이어질 때마다 내 눈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넌 내 인생의 가장 위해한 스승이었고, 나의 가장 사랑하는 어버이였고, 의지하는 형제였으며, 가장 소중한 친구였어.>

"이, 이사나…."

<죽어서도… 잊을 수 없을 거야, 엘. 보고 싶다, 엘. 지금도… 네 모습 다시 한 번만 보고 싶다.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널 다시 만나보고 싶어.>

"흐윽… 흐으윽! 이사나! 이사나아!"

책을 부여잡고 나는 한참 동안을 통곡했다. 영상 안에서 이사나 또한 그렇게 울고 잇었다.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원망스러워졌다. 왜, 왜 하필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나를 돌려보낸 건가! 차라리 마지막이라도, 마지막 순간이라도 그의 옆에 있을 기회가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지는 앞았을 것이다.

주저앉아 흐느끼기글 한참, 내가 진정한 것은 다음으로 이어진 이사나의 말 때문이었다.

<항상 행복하기를, 엘.>

"……!"

<난 너로 인해 행복했으니, 더 이상 미련이 없어. 다만, 훗날 네가 돌아왔을 때 나의 부재를 알고 슬퍼할 것이 걱정이 돼. 넌 보기보다 마음이 많이 여린 정령왕이니까. 이런 말을 하면 건방지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라는 인간이 앞으로의 네 삶에 지독한 괴로움으로 남지 않기를. 후회가 되지 않기를…….>

"이사나……."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드니, 책에서 쏟아지던 영상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나는 한 손을 내밀어 영상을 건드려보았다. 아무것도 붙잡히지 않고 통과하는 것에 흠칫, 어깨가 떨려왔다.

<마지막 부탁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줄래? 앞으로 나와의 추억에서 좋은 기억만을 떠올려줘. 만약 네가 나로 인해 슬퍼한다면, 난 그것이 오히려 더욱 슬플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그의 마지막 말을 머릿속에서 되풀이했다.

'그래, 슬퍼하지 않을게. 이사나. 나도 너를 알아서 행복했으니까. 너로 인해 즐거운 추억이 많았으니, 괴로워하지 않을게. 미안해. 끝까지 함께 있어주지 못해줘서, 마지막 순간에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정말…미안해…….'

차츰 허공에서 내려와 다시 제단 위로 돌아가는 책의 모습을 보며, 나는 조용히 속으로 사과했다.

그때,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트로웰이 슬프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진정되기까지 몇 번이나 등과 어깨를 쓸어주고 다독이고는, 한참 만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그가 건넨 것은 단 한마디의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훨씬 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잇었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말?"

"응. 덕분에 후련해졌어. 고마워 트로웰. 이것으로 모든 미련을 전부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생긋 웃으며 답하자, 불안한 듯 바라보던 눈동자에 안도의 감정이 떠올랐다.

"실은, 몇 번이나 보여줄까 말까 고민했어. 겨우 담담해져 있던 너를 오히려 뒤흔드는 게 아닐가 싶어서."

"아니야. 오히려 이런 식으로라도 이사나의 일생을 알 수 있어서 좋았어. 녀석이 나이 들어 변해가는 모습을 나 혼자만 몰랐다면, 그것이 더욱 서운했을 거야."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야."

"… 있잖아.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응. 얼마든지."

궁금한 표정을 하는 그에게 나는 조금 머뭇거렸다가 물었다.

"내 첫 번째 계약은 성공적이었던 거지? 나 정말… 멋진 유희를 한 것… 맞지?"

그러자 트로웰은 조금 눈을 크게 뜨더니, 곧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간절히 기다렸던 대답이 들려왔다.

"이전에도 이후로도, 너보다 멋진 유희를 보낸 정령왕은 없을 거야, 엘."

13-29 흘러간 시간의 답사 (5)

책과 파이어 버스터를 들고 동굴 밖으로 나오니, 눈부신 햇살이 나를 맞이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반가운 존재들이 있었다.

"엘!"

"대부!"

"……!"

나를 부르는 소리에 놀라서 바라보니 훨칠한 키의 두 사람(?)이 내 쪽으로 양팔을 벌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푸른 피부의 엘프, 시벨리우스와 검은색 머리의 마왕, 아스모델이었다.

한순간 믿을 수 없어 넋을 놓고 있다 보니, 정신을 차렸을 땐 나는 어느새 그들의 품에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 아플 정도로 강하게 끌어안은 두 녀석은, 내 사정은 고려치 않은 채로 감격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와아! 진짜 대부다! 대부~! 대부우~!"

"엘! 돌아온 거야? 정말로?"

"세상에! 너희들이 여기에 왠일이야?"

시벨리우스라면 몰라도, 아스라면 당연히 마계에나 가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지금의 만남이 상당히 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아스는 대번에 서운하다는 듯 삐진 표정을 했다.

"칫! 오랜만에 만나서 하는 말이 그것뿐이야? 당연히 대부가 보고 싶어서 왔지!"

"아, 미안. 너무 놀라서…….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이번에 대답한 건 시벨리우스였다.

"마법책이 펼쳐지면 나한테 신호가 오게 되어 있었거든."

"아 참, 그러고 보니 네가 이 책을 만들어준 거라고 했었지! 근데 둘은 어디서 만난 거야?"

궁금해져서 묻는 내게 시벨은 뜻밖의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사나가 죽은 뒤로 마계로 건너가서 지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신수라고 불리는 유니콘이 사악한 종족들이 득시글거리는 세계에서 지냈다니! 아마 상당히 얼빠진 표정을 했을 내게, 녀석은 쑥스럽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아스랑 둘이서 네가 너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했어. 그런데 갑자기 마법책이 펼쳐졌다는 신호가 왔기에 놀라서 달려온 거야."

"하하! 그랬구나. 아무튼 정말 오랜만이다. 보고 싶었어, 다들."

"정말? 정말이지, 대부? 나 보고 싶었던 거 맞지?"

"얌마, 아스! 엘은 우리 둘 다에게 하는 말이야. 너한테만이 아니라."

"쳇! 어쨌든 나 보고 싶었던 것 맞잖아?"

이제는 어느 정도 마왕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을 녀석이, 말투는 여전히 어린애다웠다. 저래 가지고 제대로 마족들을 다스리기나 하는 걸까? 혹시 약하다고 구박 같은 거 받는 거 아니야?

이런 내 속마음을 눈치 챈 건지, 시벨이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엘, 이 녀석 마냥 귀엽게 보지 마. 대부 앞이라고 내숭떠는 거니까."

"에? 내, 내숭?"

"그래. 저래 봬도 누가 마족 아니랄까 봐 얼마나 사악한지, 옆에서 지내는 동안 기절할 뻔했다니까? 뭐, 녀석의 충직한 유! 모! 인 데르온 녀석이야 그럴 때마다 기뻐서 펄쩍펄쩍 뛰지만 말이지."

"앗! 대부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 이미지 망칠 작정이야?"

"켁켁! 이 자식! 떨어지지 못해? 네놈에게 망가질 이미지가 어디있다고!"

"뭐야? 이 시퍼런 망아지가!"

"크악! 너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하하하하……!"

마계에서 함께하는 동안 꽤나 친해진 모양이다.

투닥거리며 싸우는 둘을 잠시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본 나는 문득 떠오른 사실에 두 손바닥을 짝! 하고 마주쳤다.

"아참! 그러고 보니 시벨한테 할 말이 있었는데."

"으응? 나한테?"

"헉! 대부! 나한테는 없어?"

"으음… 미안, 아스. 지금은 시벨한테만 해줘야 할 말이거든."

"… 체엣~ 알았어. 비켜줄게."

투덜투덜거리면서도 아스는 냉큼 멀찍이 떨어졌다. 그것에 잠시 고마운 시선을 보낸 다음,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는 시벨에게 생긋 웃으며 말했다.

"나 이젠 전부 다 기억해."

"응? 뭐, 뭘?"

"4천 년 전의 일 말이야."

"……!"

놀랐는지 눈을 크게 부릅뜨는 녀석의 모습을 보니 잠시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최대한 진심을 담아 사과부터 건넸다.

"그동안 널 몰랐다고 한 것, 기억이 안 났다고 한 것, 전부 사과할게. 그곳에 가서야 알았어. 아무도 날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슬픈 일인지. 그런 경험 하게 해서 미안해, 시벨."

"아, 아니야. 난 괜찮아. 그, 그런데 정말 그곳으로 간 거구나. 4천 년 전으로?"

"응. 네가 했던 말, 전부 사실이었어. 그날 그렇게 헤어져서 작별 인사도 못한 게 못내 서운했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까 다행이다. 정말 기뻐."

"엘……."

녀석의 얼굴은 금방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동안 얼마나 혼자서 마음고생을 해왔을 것인지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찡해졌다.

그 좁고 좁은 공간에 갇혀서 4천 년 후에 깨어나, 온통 뒤바뀐 세상을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 겨우 3백 년간의 공백으로도 소중한 것을 잃어 슬퍼한 나보다, 그는 더욱더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을 것이다. 지난 시간 더욱 잘해주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이제 모든 것을 다 공유하니까, 더욱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다시 한 번 잘 부탁해도 될까?"

나는 조심스럽게 말하며 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시벨은 한참이나 내 손을 내려다보더니 곧 두 손을 모아 꼭 붙잡았다. 환하게 밝아진 얼굴은 기쁨으로 인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나야말로. 나야말로 잘 부탁해, 엘!"

"앗! 나도, 나도!"

질투가 많은 아스는 그 순간도 그냥 곱게 보아 넘기질 못했다. 어느새 끼어들어 마주한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는 모습에 나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이! 낄 때 안 낄 때도 구분 못해?"

"흥! 대부한테 나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뿐이야!"

"근데 왜 하필 이 순간이냐고! 다음에 해도 되잖아!"

"싫어! 지금이 좋아."

"이 유치한 마왕 같으니!"

"시퍼런 망아지 주제에!"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정말이지 저 패턴은 끝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어느새 다툼의 주제가 벗어나 있는 둘을 못 말리는 시선으로 바라본 나는, 그들이 알아서 제풀에 지쳐 진정될 때까지 내버려둘 요량으로 손을 떼고 한 발짝 물러섰다. 둘은 싸우느라 그것도 못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등 뒤에서 톡톡 두드리는 손길이 느껴져 돌아보니 트로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그래, 트로웰?"

"엘, 오랜만의 재회를 방해해서 미안하긴 한데, 잠시만 정령계로 돌아가자."

"응? 왜?"

"반가운 손님이 와 있어."

"……?"

그 뒤, 시벨과 아스에게 양해를 구한 나는 트로웰과 함께 정령계로 돌아갔다.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에바스 에덴이었다. 향기로운 꽃들과 수많은 정령들의 항연 사이로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단번에 그 모습을 알아보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버지!"

"어서 와라, 엘."

일이 바쁘다더니 짬을 내서 만나러 와준 모양이었다. 한달음에 달려가 폴짝 안기니 부드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머리를 쓰다듬는 포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새 더 응석이 늘었군."

"헤헤헤~ "

"아크아돈은 다 둘러보고 온 거냐?"

"응. 전부는 아니지만 보고 싶었던 사람들도 만났고, 마음의 정리도 끝냈어."

"그래, 다행이구나."

엘뤼엔은 빙긋 웃으며 다시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그때,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어 좋은 분위기를 한순간에 망가뜨리는 것이 아닌가!

"헹! 끝내긴 누구 마음대로 끝내! 아직 나랑은 만나지도 않은 주제에!"

"…엉?"

그제야 나는 그 옆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 순간, 씩씩거리는 상대편과 눈이 마주친 나는 그 자리에서 두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아니, 이제 눈에 헛것이…….'

정상적이라면 당연히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서 있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눈을 비비자, 갑자기 무언가가 확 내 팔을 잡더니 강하게 끌어내렸다. 그리곤 코앞으로 무언가가 확 들이밀어졌다.

"뭘 못 본 척이야! 똑바로 봐!"

"……."

지척까지 다가온 그것은 상대방의 얼굴이었다.

그제야 정면으로 마주본 이목구비에 나는 여전히 멍한 기분으로 입을 벌렸다.

"…라피스?"

"이제야 알아보는 거냐?"

"헉! 정말 라피스야?"

"정말은 뭐가 또 정말이야?"

맙소사! 이 녀석이 어떻게 여길 온 거지? 지금쯤 명계에서 환생을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환생 전에 만나게 해준다더니, 그게 오늘이었나?

오랜만에 나타난 녀석은 이전과 달라진 모습이었다.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녀석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던 붉은색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붉은색 머리카락, 붉은색 눈동자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대신해서 자리 잡은 것은, 칠흑 같이 새카만 어둠이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그 모습?"

"별거 아니야. 그냥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거야."

"본래의 모습?"

"그래. 명계로 갔더니 지난 과거가 죄다 다 떠오르더군. 드래곤으로서의 일은 물론, 그 전생의 삶도 전부 다."

"헤에~ 그럼 이제 환생하겠네?"

신기하면서도 내심 섭섭한 기분에 묻자, 녀석은 눈을 사납게 치켜뜨더니 대꾸했다.

"이미 환생했는데, 뭘 또 환생해?"

"뭐?"

이미 환생을 했다고?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고 멍청하게 되묻기만 하는 내게, 때 맞춰 엘뤼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개하겠다. 오늘부로 새로운 마신이 된, 마계의 상급신 크로아첸이다."

"…엥?"

"익숙하지는 않을 테지만, 앞으론 라피스라고 하지 말고 크로아첸이라고 불러라. 주신으로부터 새로 지음 받은 이름이니까."

"……."

대체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분명히 듣기는 들었는데,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지금 엘뤼엔의 말에 의하면, 라피스가 크로아첸이고 크로아첸이 새로운 마신이라는 건데, 그럼 라피스가 마신이라는 건가? 그런… 거야?

꼬박 차 한 잔을 넉넉히 마실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내내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자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린 라피스, 아니 크로아첸이 버럭 성질을 부리며 두 손으로 내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언제까지 그렇게 멍하게 있을 거야?"

"…자, 잠깐 기다려. 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답답하긴! 내가 마신이 되었다는 소리잖아. 그게 아직도 입력이 안 돼?"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그야 내가 신의 영혼이었으니까 그렇지."

"뭐?"

황당한 물음에 돌아온 것은 더더욱 기겁할 만한 대답이었다.

"나도 한때 엘퀴네스였거든."

"……!"

순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누가 엘퀴네스였다고? 언젠가 카노스가 이와 같은 고백을 했을 때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농담이라면 최악이고, 진담이래도 이보다 더 최악일 수 없었다.

나는 굳어서 돌아가지 않는 목을 억지로 움직여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녀석의 말은 도무지 믿을 수 없으니, 사실 여부를 그에게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러자 엘뤼엔은 내 심정을 아주 잘 이해한단 듯 동정의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다. 빌어먹게도 내 바로 전대의 엘퀴네스였더군."

"……."

주신이시여! 어째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나는 비련의 순정만화의 주인공처럼 그 자리에 쓰러져 울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머릿속으로는 온통 '말도 안 돼!'를 중얼거리면서.

이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아니 알아도 신경 쓸 리 없는 라피스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내며 혼자서 신나하고 있었다.

"하하하하! 어쩐지 불의 속성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자꾸 엘퀴네스에게 끌린다 했더라니, 바로 내가 물의 정령왕이었기 때문이었어! 후후후! 멋지지 않냐?"

멋지기는 개뿔!

누가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줘! 이렇게 되면 엘퀴네스들은 죄다 성격파탄자인 것에 적극 동감할 수밖에 없잖아! 라피스를 다시 만나서 반가운 것과, 이런 상황에 직면한 것에 대한 충격은 엄연히 다르다. 나는 발악적으로 소리쳤다.

"제길! 난 인정 못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야!"

"후훗! 네가 뭐라고 하든 난 이제 마신이라고. 좀 더 존경과 사랑을 담아 부르도록."

"웃기고 있네!"

"어이, 그게 한때 너를 대신해 죽은 이 몸을 향해 할 소리야?"

"크윽!"

내가 주춤하자, 녀석은 약점이라도 잡은 눈으로 빙글빙글 웃었다. 어째 앞으로 평생 저걸 우려먹을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드는건 내 착각만이 아니겠지?

그러나 녀석의 미소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바로 옆에서 이어진 엘뤼엔의 단 한마디에 의해서.

"자, 그럼 이제 존경과 사랑을 받을 마신, 크로아첸? 신계로 돌아가서 남은 업무를 계속하도록 하지."

"……."

그 순간, 얄미울 정도로 생글거리던 라피스, 아니 크로아첸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는 것이 보였다. 흡사 귀신이라도 본 듯 한 표정이랄까? 그와 달리, 엘뤼엔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더 환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다.

"네가 태어나기를 진심으로 기다렸다. 정말 축하한다."

"자, 잠깐! 나, 나는 아직 엘에게 할 말이……."

"그건 업무를 마치고 와서 해도 늦지 않는다."

"늦어! 그걸 다 끝내려면 족히 이십 년은 더 걸릴 거라고!"

"자, 잡담은 그만이다. 이제 그만 가지."

"제기랄! 난 인정 못해! 왜 내가 태어나자마자 일에 치여야 하는 건데!"

뒷목을 잡혀 끌려가면서 크로아첸은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엘뤼엔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는 드디어 고된 업무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쁨만이 고스란히 서려 있었다. 그간 그가 얼마나 고된 일정에 시달려왔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단면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내가 떠올린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난 절대 신이 되지 말아야지.'

 

"아참! 아버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뭐냐?"

막 신계로 돌아가려던 그는, 내 질문에 웃던 것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전대의 이프리트, 그러니까 아버지랑 한 시대를 보냈던 이프리트는 지금 어떻게 되었어?"

"아아, 그 녀석이라면……."

엘뤼엔은 뭔가 떠올랐다는 듯 가볍게 말을 이었다.

"인세에 들어갔다고 알고 있다. 지금쯤 어느 평범한 인간이 되어 살고 있겠지."

"아아, 그렇구나. 아쉽네. 신이 되었다면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그러자 엘뤼엔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이미 다시 만난 적 있으면서 무슨 소리냐?"

"어? 만났었다고? 언제?"

설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만났었던 걸까? 그게 누구지?

질문을 하면서 나는 머릿속으로 가능성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검토했다. 그러자 엘뤼엔도 잠시 생각하는 듯 시선을 돌리더니 곧 어렵지 않게 답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그대로 온몸이 굳는 듯한 충격을 느껴야 했다.

"하태진이라는 녀석 말이다. 네가 잠깐 다른 세상에서 잘못 태어났을 때 만나지 않았었냐?"

"……!"

하태진? 태진이라고?

강지훈의 중학교 동창이자, 고등학교 때는 베스트 프렌드라 일컬어진 하태진? 부모님께 맞고 오면 나보다 더 아파하면서 같이 울어주던 그 하태진……?"

그리워하면 힘들어질 것 같아서, 일부러 기억 속에 묻어뒀던 단짝 친구가 생각이 났다. 늘 웃고 잇던 다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나를 언제나 걱정하며 챙겨주던 따뜻했던 모습들도.

"태… 태진이가 전대의 이프리트라고?"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인연의 고리에 숨이 턱하고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충격을 수습하지 못한 채 물어니, 엘뤼엔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녀석과는 벌써 두 번이나 만난 걸 보니, 너와 뭔가 인연이 있기는 한 모양이군. 아마 앞으로 또 만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지."

"저, 정말?"

"운명의 실은 복잡하고 교묘해서, 한 번 얽혀버리면 쉽게 끊어버릴 수가 없지. 꼭 몇 번씩은 마주치게 된단 말이야. 어떠냐,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제법 기다릴 만하지?"

"응?"

"이사나도, 그 외의 다른 인간들도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다."

"아……."

"어느 것에도 영원한 이별은 없다. 네가 한 가지의 추억에 매여 지쳐버리지 않는 한, 운명의 고리는 네게 수많은 기회가 될 것이다."

그의 마지막 말은 내 가슴속에 깊이 박혀들었다.

또 만날 수 있다! 한순간 스쳐지나가는 인연이라도, 어느 것 하나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깨닫고 있었다.

수만 가지로 얽혀가는 실타래. 그 무수한 인연의 고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한,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필요한, 가장 중대한 교훈을 얻은 것 같았다.

13-30 외전-그 후 백년

4천 년 전의 과거에서 돌아온 뒤, 나는 한동안 이것저것 분주한 생활을 보냈다. 이번엔 곧바로 새로운 인간들의 생활에 섞여드는 대신, 못다한 한 친구들과의 회포를 푸는 일에 집중했다.

트로웰이나 미네, 이프리트와도 놀러 다니긴 했지만, 주로 어울린 대상은 시벨과 아스였다. 나는 그들과 함께 여행도 하고 모험도 했으며, 이것저것 새로운 도시를 둘러보러 다니며 관광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천천히 시간이 흘러,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땐 어느새 1백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긴박히 돌아가는 시간 속에서도 정령계는 내가 처음 태어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평화롭기만 했다. 물의 영역 안에 있으면 아무리 지쳐도 편안한 상태로 되돌아왔다. 그래서였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인간 세상보다는 정령계에 머무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점차 정령계에서 나오는 일이 적어지자, 시벨리우스와 아스는 불만을 토로했지만,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다.

사실, 내가 여행을 지겨워하게 된 계기는 바로 그 둘 때문이었다. 어찌나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곳이 많은지, 몸속에 에너자이져를 숨기고 있는 듯 좀처럼 지칠 줄을 몰랐다.

가장 큰 문제는 아스였다. 녀석은 아예 마계의 일에는 신경 쓸 생각이 없는 듯, 돌아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간간이 데르온이 산더미 같은 결제 서류들을 들고 찾아와 울면서 사정해도 콧방귀조차 끼지 않으니, 처음엔 그저 웃으며 보던 나도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느꼈다.

마왕이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워도 괜찮은 걸까? 마신인 크로아첸도 불안한 판에 아스모델마저 저렇게 놀기에 바쁘니, 이래저래 밑의 마족들만 불쌍하게 느껴졌다. 이참에 아예 거리를 두어, 돌아가라고 떠밀어볼까 진지하게 생각 중이다.

 

"엘, 오늘도 물의 영역에서 계실 겁니까?"

오늘도 하루 종일 영역 안에서 굴러다니고 있자니, 미네가 방문하여 물었다. 나는 둥실둥실 떠다니는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요 근래 너무 지쳤어. 이제 조금 쉬고 싶어."

"후후, 그러실 만도 하죠. 그동안 이리저리 치이셨으니. 그 유니콘과 마족이 아직도 귀찮게 합니까?"

"말도 마. 얼마나 끌고 다니려고 하는데. 그것도 매일같이 엄청나게 싸운다니까? 둘 다 크려면 아직도 멀었어."

"엘도 엄마 노릇 하기 힘들겠군요."

"쿨럭! 이왕이면 아빠라고 해줘……."

내가 통하지도 않을 부탁을 중얼거리자, 미네는 무표정한 얼굴로 피식거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본 나는 문득 궁금한 것을 떠올리고 물었다.

"그런데 다른 애들은? 트로웰과 이프리트는 어디 갔어? 정령계에서는 기척이 안 느껴지던데."

"이프리트는 유희를 떠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트로웰은 페르데스를 만나러 명계에 간 듯하군요."

"헤에, 정령왕이 자꾸 아크아돈을 비워도 되나~?"

"한창때니 어쩌겠습니까. 우리가 이해해야죠."

겉모습은 제일 어린아이인 주제에 가장 어른인 것처럼 말하니 이무슨 아이러니한 모습인가. 나는 풋!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미네는 유희 안 가?"

"음, 저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뭘?"

"인간이 저를 소환해주기를요."

"헤에~ 인간에게 소환되고 싶은 거야?"

상당히 의외라는 생각에 나는 입을 헤 벌리고 물었다. 설마 미네가 인간에게 소환되기를 바라고 있는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자 미네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지금으로선 어딜 가도 상당히 무료하거든요. 하지만 계약자가 인간이라면, 지금보다 훨씬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흐음, 그렇구나. 계약자와 함께 다니고 싶은 거구나?"

"네. 실은, 엘이 많이 부러웠습니다."

"…에? 내가?"

"예. 누군가를 도움으로써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기뻐하고,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기도 하고, 때론 그리워하기도 하는 그 모든 것이 다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저런 것이 정말 살아 있는 것이구나. 라는 느낌이었달까요? 저도 그런 것을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그와 같은 말을 하니 갑자기 엄청 무안해졌다.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리려고 노력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내가 부럽다니, 그거 영광인걸."

"저만이 아닙니다. 트로웰도, 이프리트도 엘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이전보다 유희가 부쩍 늘은 것이 바로 그 때문인데, 못 느끼셨습니까?"

"그, 그런거야?"

아아아! 이제 얼굴이 완전히 빨갛게 된 것을 나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이 상당히 우스웠는지, 미네는 또다시 피식 웃었다.(여전히 표정은 없었지만).

"그런데 요즘은 엘을 소환하는 이가 없군요. 이제 인간에게 소환되는 일이 없는 겁니까?"

"아아, 이사나의 경우만도 엄청 특이한 상황이 겹친 거였으니까. 당분간은 무리일 것 같아."

"그런가요?"
"응. 원래 엘퀴네스는 소환하기 힘들다고 하잖아. 그래도 이쯤이면 누군가 소환해줬으면서도 싶어. 하다못해 드래곤이라도."

"그건 무리잖습니까. 그 라미아스가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

미네의 말 그대로였다. 나와 계약한 이후, 라미아스는 자신 외의 어떤 드래곤도 물의 정령왕을 소환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주변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한 상태였다. 정말 한때의 누구를 생각나게 하는 행동에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아~ 대체 내가 만나는 드래곤들은 왜 하나같이 그 모양이지?"

"힘내십시오, 엘. 다 엘이 너무 인기가 좋아서 그런 겁니다."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어."

"언젠간 용기 있는 누군가가 라미아스를 물리치고 소환할 겁니다."

"그러니까 대체 누가 그러냐고! 다들 라미아스가 고룡이라고 꼼짝도 못하고 잇는걸. 아아, 내 정령 생활에는 정녕 희망은 없는 건가."

그렇게 내가 나직한 한탄을 내뱉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미네가 조용해졌다 싶더니, 곧 조심스럽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어, 엘?"

"응?"

"죄송합니다만, 저 앞에 떠오르고 있는 저것, 소환 마법진 아닙니까?"

"어? 뭐라고?"

벌떡!

나는 무료하게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미네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는 순간, 입을 쩍 벌리고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물속에서 서서히 파문을 그리며 등장하는 도형들의 문장. 그것은 틀림없는 소환 마법진이었다.

"헉! 이, 이게 어떻게 된……."

"어쨌든 엘이 바라던 대로 된 것 같군요. 어서 가보십시오. 누군지는 몰라도 저 용기 있는 드래곤에게 축복이라도 해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오옷! 알았어! 미네, 다녀올게!"

"네에~ 좋은 결과 있으시길."

대체 이게 얼마만의 소환인가!

각오를 단단히 다진 나는 전투적인 자세로 소환 마법진을 노려본 뒤, 곧장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대체 어느 용기 무쌍한 드래곤일까 속으로 무척 궁금해 하면서.

 

내가 소환된 장소는 크고 작은 나무들로 가득한 숲이었다. 드래곤이 꼭 레어 안에서 소환하라는 법은 없었기에 조금 여유 있게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느끼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냥 단순한 숲이라고 생각했건만, 자세히 보니 나무들의 모양이 이상했다. 보통의 나무보다 통통하고, 그 안에 새의 둥지처럼 둥글게 파여 있었다. 한두 개가 그런 게 아니라, 꽤 많이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빼꼼이 고개를 내밀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은…….

"…엘프?"

몰려 있는 것은 수십 명은 되 보임직한 엘프들이었다. 그제야 나는 이곳이 엘프 마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둥근 나무들은 모두 엘프들이 사는 보금자리였떤 것이다.

대체 어떤 드래곤이 이런 생뚱맞은 장소에서 정령왕을 소환한 거야? 이렇게 많은 엘프들을 한꺼번에 만난적은 없었기에 내 얼굴은 자연스럽게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놀라서 중얼거린 나 못지않게, 엘프들 또한 경악한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연신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오, 세상에! 엘프의 신이시여!"

나를 본 것이 신을 찾을 ㅁ나큼 다급한 일이었던가? 어이가 없어져서 어깨를 으쓱하려던 순간, 한 엘프의 입에서 거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저주다! 신의 저주다!"

"엥?"

"엘프들에게 저주가 임한 것이야! 아아아아아!"

"……."

이때의 내 기분은 뭐랄까, 황당하다 못해 상당히 더러웠다.

저주라니! 정령왕으로 태어난 이후, 내 등장에 이렇게 혐오감을 드러내는 이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소리친 엘프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엘프들이 모두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지? 당연히 내 입에서는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건가?"

"헉!"

"……."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안색이 좋지 않던 엘프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에 더욱 열 받은 내가 뭐라 한마디 하려던 순간이었다.

"아아, 그렇게 인상 쓰지 마, 너한테 하는 말 아니니까."

"…뭐?"

문득 바로 근처에서 들려온 말에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새파랗게 질린 엘프들 사이에서 유달리 혼자 태연하게 웃고 있는 한 명의 엘프가 눈에 들어왔다.

나이는 이제 막 성인식을 넘겼을까? 연두색 머리카락에 황금색 눈동자, 꽤나 예쁜 색의 조합을 가진 얼굴이었다.

호감이 가는 인상이라 주의 깊게 살펴본 순간, 나는 뭔가 꺼림칙한 느낌을 받고 얼굴을 찡그렸다.

잠시 후, 나는 그 기묘한 기분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소환진의 기운이 바로 그 엘프를 향해 있었던 것이다.

"뭐지? 엘프로 폴리모프한 드래곤?"

순간, 너무 당황한 나머지 속으로 생각하려던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갔다. 그러자 그 연두색 엘프가 생긋 웃더니 가볍게 고개를 젓는 게 아닌가!

"아니, 일반 엘프 맞아."

"…농담이겠지."

"진담인데?"

"에엑?"

태연한 대답에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엘프라니! 나를 소환한 것이 엘프라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적어도 일반적인 상식으로 그렇다. 엘프는 전체적으로 정령과 상성이 좋은 종족이지만, 절대로 정령왕을 소환하지 못한다. 바로 그들이 세상의 균형을 이루는 '조화의 종족'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에 균형을 맞추는 종족, 그렇기에 결코 기적을 이룰 수 없는 종족. 그것이 바로 엘프란 종족의 일반적이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특성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엘프가 나를 소환했다는 말이야?

내가 놀란 표정을 하자, 주위에 있던 엘프들은 아예 대놓고 흐느낀 것이었다.

"흐윽, 흐으윽! 어떻게 이런 일이! 아아아, 엘프의 신이시여! 당신의 자녀들을 버리시려는 겁니까!"

"조화의 종족이 세상의 균형을 깨트리는 일을 하다니! 이건 틀림없이 엘프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점점 길어지는 탄식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울먹이던 엘프들은 급기야 나를 소환한 엘프를 향해 살기까지 보내기 시작했다.

"저 녀석을 죽여야 합니다!"

"조화를 깬 저 녀석만 죽이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겁니다!"

"이대로 저주를 받을 수는 없어요!"

'이 녀석들, 엘프 맞아?'

어떻게 저렇게 쉽게 죽인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인지. 그것도 자신들의 동족을 향해 하는 말치고는 너무 살벌했다.

내가 조금 질린 기분으로 바라보자, 이번에도 연두색 머리의 엘프가 태연하게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말에는 신경 쓰지 마. 근데 계약 안 해? 아무리 나라도 여기서 더 소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무린데."

"에? 아참, 그렇지."

"훗! 여전하구만."

"뭐?"

마치 나를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에 한순간 얼이 빠졌다. 그래서인지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상당히 찝찝하다는 느낌이었다.

"정말 엘프 맞아?"

"아, 글쎄 맞다니까. 나도 조금 황당하지만 말이지."

"…이름은?"

"노엘…이라고 하더군."

"하더군?"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저렇게 소개할 존재가 과연 몇이나 될까?

황당해 하면서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거의 이끌리듯이 계약의 인을 맺어 엘프의 이마에 문장을 새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엘프와 계약한 정령왕은 나밖에 없을 거라며 중얼거렸다.

아니, 사실이 그렇기도 했다. 세상 어느 정령왕이 엘프와 계약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지금 내가 간단하게 했던 이 계약이 새삼 엄청나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나는 퍼뜩 실수를 깨닫고 소리쳤다.

"으앗! 이거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이미 해놓고서 무슨 소리야?"

"하, 하지만 엘프인데!"

"후회해도 소용없어. 이미 늦었걸랑."

이마에 새겨진 물의 인장을 내보이며 연두색 엘프, 아니 노엘은 싱긋 웃어 보였다.

그에 내가 질려하는 동안, 뒤편에서는 두 눈에 살기를 담은 엘프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태도를 보니, 정말로 노엘을 죽이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노엘 또한 그것을 느꼈는지,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정말 약간이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엘굴을 바꾸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자, 엘! 안전한 장소로 이동하자!"

"…에? 어떻게 내 애칭을?"

"자자~ 어서 가자니까? 여기서 더 있다가는 죽을지도 몰라. 계약자를 보호해야지~"

"허!"

도대체가 뻔뻔한 건지, 대담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처음 소환한 정령왕을 보고 놀라지도 않을뿐더러, 당연하게 반말을 하고 애칭까지 마구 부르는 녀석이라니. 그렇다고 머리에 뭔가 이상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다.

이 묘하게 당당한 행동이 누군가와 무척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어 더욱 불길해졌다.

그게 누구였더라? 아아, 그래! 명령이 익숙하고 낙천적이면서도,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이 말투는 마치…

"카노스 같아."

"어라, 눈치 챘어?"

"……!"

쿠웅!

순간, 누군가 내 뒤통수를 강하게 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부릅뜬 눈으로 돌아보니 노엘이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맙소사! 방금 뭐라고 그런 거지? 눈치 챘냐고?

"카, 카노스?"

"그렇다니까는. 얼른 도망이나 가자고. 저거 맞으면 많이 아프다?"

경악하는 내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노엘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엘프들이 들고 있는 활을 가리켰다. 그에 황급히 이동의 언령을 시전하면서도 나는 도무지 정신을 온전히 차릴 수 없었다.

카노스라니! 카노스라니!

대체 왜 카노스가 엘프로! 아니, 그보다 어떻게 과거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거야!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언젠가 내가 보아두었던 한적한 평원이었다. 순간, 노엘의 미소가 더욱 환하게 피어올랐다.

"아싸~ 드디어 탈출이다! 아아아~ 진짜 지긋지긋해 죽는 줄 알았어!"

해방되었다는 기쁨을 만끽하며 마음껏 기지개를 켜는 그를, 나는 의심스럽게 노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모습은 카노스다. 얼굴이나 종족이 달라도, 그 특유의 느낌을 내가 몰라볼 리가 없었다.

"설마… 정말 카노스?"

신음과 함께 저절로 내뱉어진 음성에, 나를 돌아보는 황금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진다. 그러고서 내뱉어지는 말에 나는 어깨를 흠칫했다.

"오랜만이다, 엘뤼엔의 아들."

"……!"

아아, 정말 카노스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지? 환생의 궤도에 올랐다던 그가, 어째서 모든 기억을 지닌 채 엘프로 태어난 거야!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카노스? 대체 어떻게……."

"으음, 그건 말이지."

"꿀꺽!"

"나도 몰라."

"……."

"냐하하~ 농담, 농담이고. 으음, 아무래도 주신의 은총이 아닐까 싶은데. 내가 신으로 살았을 때 좀 이쁜 짓을 많이 했잖냐. 그래서 특별히 이렇게 태어나게 해주신 게 아닐까?"

"…조화를 깨는 엘프로요?"

엘프 주제에 기적을 일으키는 은총 말입니까? 그것 때문에 저주받을 아이로 오해받고 쫓겨 다니게 된 건 부가 옵션 기능인가 보죠? 그것 참 감사하시겠습니다?

내 황당한 표정을 느낀 건지, 카노스 또한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냐하하~ 멋지잖아. 정령왕을 소환한 최초의 엘프! 어째 두근두근거리지 않아?"

"두근두근은 무슨……."

"자자, 투덜거리는 건 이제 그만~ 어쨌든 나한테 소환되었으니, 넌 당분간 내 꺼다!"

"네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카노스의 황당한 선언에 나는 그 자리에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내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서 즐겁게 떠들기 시작했다.

"어때? 기쁘지? 행복하지? 영광스럽지?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잠시 시간을 줄 테니, 나와 함께 여행 다닐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된 것을 충분히 감읍해 하도록!"

"……."

"왜 아무 말이 없어? 역시 실감이 나지 않는 건가? 하긴, 나처럼 잘난 신을 모시게 될 기회가 얼마나 있겠어. 자, 자~ 너무 기쁘면 울어도 돼. 그 정도는 특별히 봐주마."

…나, 그냥 계약 해지하면 안 될까?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사이, 그 나름대로의 배려(?)를 마친 카노스는 뜬금없이 내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뭐예요?"

"잘 부탁한다는 인사. 후훗~ 보다시피 난 거지니까 앞으로 많이많이 챙겨줘야 해?"

"그건 또 무슨 황당한……."

"어허! 아버지 친구이자, 정령왕 생의 선배한테 이렇게 야박하게 굴기야?"

"야박이라뇨! 선배라니 아시겠지만, 일단 계약했다고 해서 무조건 함께 다녀야 한다는 규정도 없잖……."

"헉!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알았다. 이제 내가 필요 없다 이거냐? 흑흑흑, 주신이시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큰맘 먹고 희생해서 전 차원과 신계를 구해놨더니, 친구의 아들이자 제 후배 되는 녀석이 글쎄, 이제는 모든 것을 다 잃고 알거지가 된 아버지의 친구이자 선배 되는 저한테 돈 한 푼 안 주고 쫓아내려고……."

"아, 알았어요! 젠장! 함께 다니면 될 거 아니에요! 그럼 되는 거죠?"

"후훗! 탁월한 선택이었어."

"크윽!"

금세 안면을 바꾸고 생긋 웃는 그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속았다'를 외쳤다. 하지만 막상 내밀어진 손을 붙잡았을 땐, 아무러면 어떠냐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이번이 아니면 언제 엘프와 계약을 해보겠는가? 그 상태가 카노스라는 것이 다소 마음에 걸리긴 해도, 까짓것 그동안 그가 세운 공헌을 생각하면 못 참아줄 것도 아니었다.

지금 내가 웃고 있는 것은 절대 기뻐서가 아니다. 그냥 오랜 만에 유희를 시작한다는 것에 들떠서 그런 거지, 그의 모습을 보고 반갑다거나 안심이 되어서가 아니다.

저, 정말이라니까?

'뭐, 이것도 나름대로 해피 엔딩이라면 해피 엔딩인가.'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했던 그의 인사가 떠올랐다. 당시엔 그저 무리라고만 생각하고 씁쓸히 웃어 넘겼었는데, 설마 정말로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 이미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운명의 엮임 속에서, 자신과의 인연의 고리 또한 계속해서 건재할 것임을.

"아참! 나랑 만난 건 엘루엔한테 비밀이야!"

"네? 왜요?"

"부려먹을 게 뻔하잖아. 난 이제야 겨우 마신에게서 해방돼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고. 알았지? 절대 비밀이다!"

"하하하, 그럴게요."

당장 가서 말해야지.

답과는 따로 노는 생각을 정리하며 나는 속으로 음산하게 웃었다.

오늘따라 날씨가 무척 좋았다. 파란 하늘과 그 사이를 떠다니는 새하얀 구름을 보며 나는 피식 미소 지었다.

이번에도 역시 멋진 모험이 될 것 같았다.

13-31 에필로그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강지훈입니다. 나이는 6살이고요, 남자아이에요.

앗! 이름을 들으면 남자앤지 다 아실 거라고요? 으음, 전 바보라서 그런 것도 몰랐어요. 정말 죄송해요. 이래서 엄마 아빠가 저를 미워하시는 걸까요? 

우리 엄마 아빠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싫대요. 너무 바보 같고 멍청하고, 왜 낳았는지 모르겠다고 하세요. 그래서 열심히 똑독해지려고 노력하는데도 그게 잘 되지 않아요. 형들이 그러는데, 그건 제가 구제불능이라서 그런 거래요.

"강지훈! 이 녀석! 아직도 그런 데서 얼쩡거리고 있어?"

헛, 큰일입니다. 아빠가 정확히 4시 반까지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셨는데, 친구들이랑 놀이터에서 놀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벌써 35분이 넘어가네요.

아빠가 화가 많이 나셨나 봐요. 만날 가지고 다니시던 빗자루 대신에 오늘은 당구 채를 들고 오셨어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저걸 맞으면 정말 아프거든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는지 아빠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습니다.

"아, 아빠……!"

"이 빌어먹을 후례자식 놈! 아빠는 또 뭐가, 아빠야! 어섯 살아니 처먹고 아직도 애인 줄 알아?"

그치만… 형들은 저보다 나이가 5살이나 많은데도 아빠라고 부르는 걸요? 그럴 때마다 아빠가 형들에게 화내신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왜 제가 아빠라고 부르면 때리려고 하시는 걸까요?

"이놈이 그동안 참고 봐줬더니 아주 기고만장해졌구나! 잘 걸렷다, 네놈! 안 그래도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인데, 오늘 한번 죽어봐라!"

퍽-퍽-퍽!

"아악! 아, 아파요! 죄송해요, 아버지!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흑! 흐윽!"

아무리 몸을 웅크려도 아픔을 피할 순 없습니다. 차라리 두 손을 비비며 용서해달라고 매달리는 편이 그나마 조금 덜 맞는 편이에요. 하지만 이번엔 정말 화가 나셨는지, 아빠는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다.

"울긴 뭘 잘했다고 울어! 썩 그치지 못해? 한 번 훌쩍거릴 때마다 열 대씩 추가다!"

울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저도 모르게 눈물을 나오는 걸요. 그치기가 정말 힘들어요.

"아니, 이봐요? 애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애를 그렇게 때리면 어떡합니까?"

"시끄러워! 갈 길이나 갈 것이지, 무슨 참견이야! 내 자식을 내가 팬다는데!"

"거참, 무슨 이런 사람이."

지나가는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말리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아빠는 버럭 화를 냅니다.

이럴 땐 차라리 말리지 않는 편이 좋아요. 그러고 나면 더욱 세게 때리시거든요. 지난번엔 너무 많이 맞아서 정신이 흔미해진 적도 있었어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잠깐 동안 숨을 쉬지 않았대요. 다행히 지나가던 분의 응급조치가 빨라서 살았다나요?

"너 같은 건 빨리 죽어 버려! 이 버러지 같은 놈!"

당구 채가 또다시 하늘 높이 올라갔습니다. 저는 눈을 꼬옥 감고 몸을 웅크렸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시간이 한참 지난 것 같은데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은 거 있죠.

"…어?"

눈을 뜨고 보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서 계시던 아빠가 저 멀리 쓰러져 있고, 그 옆에 엄청나게 잘생긴 2명의 형들이 서 있는 게 아니겠어요?

자세히 보니 형들은 나랑 아빠랑은 생김새가 달랐어요. 형 한 명은 키가 무척 크고 흰 피부에 금발머리였구요, 다른 쪽 형은 새까만 피부에 노란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어요. 저 알아요! 저런 사람을 보고 외국인이라고 하는 거랬어요. 제 친구 중에서 유치원에 다니는 규쳘이가 한 말이니까 틀림없을 거예요.

외국인하고는 말이 통하지 않느다는데, 어떻게 해야 하죠?

조금 머뭇거리고 있는데, 형들 중 키가 큰 금발머리 형이 얼굴을 찌푸리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지? 애를 이렇게 후려 패다니, 하여튼 인간들이란 하나같이 지독한 면이 있는 것 같군. 존재만으로 해악인 것 같은데, 이대로 그냥 죽일까."

"…엘뤼엔, 요즘 들어 점점 본래 성격이 되살아나는 거 알아? 심정은 이해하지만, 여기선 참으라고. 지구잖아. 함부로 신력을 썼다가 주신께 징계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시끄러, 트로웰. 나 혼자 간다는데 왜 귀찮게 따라와서는 잔소리냐?"

엇? 우리나라 말을 아주 잘하네요? 저 형들은 천재인가 봐요! 그런데 어쩐지 키 큰 형은 그리 성격이 좋아 보이지 않아요. 그 옆의 까만색 형도 저랑 같은 생각인지 무척 곤란하다는 표정입니다.

아참! 이럴 때가 아니잖아요? 쓰러진 아빠가 걱정입니다. 혹시 크게 다치신 건 아니겠지요?

저는 형들이 다투는 사이에 얼른 아빠한테 달려갔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괘, 괜찮아요?"

어깨를 흔드는데도 눈을 굳게 감고 꼼짝도 하지 않으시는 걸 보니 덜컥 겁이 났어요.

"아, 아버지! 일어나세요! 어엉! 주, 죽으면 안 돼요! 죽지 마세요! 네?"

그러자 형들이 싸우는 걸 그만두고 대뜸 나를 향해 관심을 보여왔어요.

"뭐? 이봐, 꼬맹이. 저 인간이 네 아빠라는 거냐?"

"네? 네……."

"하! 아비 되는 놈이 자기 자식을 그렇게 후려 패? 역시 죽이는게 낫겠군."

형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어요. 우리 아빠를 죽인다고요?

그런데 그때, 까만 피부의 형이 끼어들어 말했습니다.

"그만둬, 엘뤼엔. 그래도 저 아이한테는 하나뿐인 아버지잖아. 아직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보호자가 필요할 거야."

"저런 놈이 과연 끝까지 잘 키울 수나 있을까?"

"흐음, 그런가."

"네 잘난 특기로 한번 알아보지 그래?"

"미안하지만 무리야. 아까부터 시도해봤지만 전혀 안 통하고 있거든. 꼭 뭔가에 가로막혀 있는 기분이야. 정령왕의 능력이 아ㅖ 통하지 않는 세상이라니. 말로는 들었지만, 지구란 곳은 정말 특이하군."

"여긴 주신의 주 관할 영역이니까. 하여튼, 저 아이는 네가 잘 달래봐라. 쯧! 쓸데없는 일에 끼어버렸군."

금발머리 형의 말에 까만 피부의 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게 다가왔어요. 저도 모르게 흠칫 물러나자 빙긋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괜찮아, 꼬마야. 네 아버지 죽은 거 아니야. 그냥 조금 세게 머리를 부딪쳐서 기절한 거니까 금방 일어날 거야."

"저, 정말요? 정말 죽은 거 아니에요?"

"그래, 괜찮아. 그런데 너, 아빠가 그렇게 걱정되니?"

끄덕끄덕

"왜 그렇게 걱정을 해? 널 이렇게 때린 사람인데."

"그, 그치만 우리 아빠니까요. 제가 잘못해서 맞은 거니까 괜찮아요. 나쁜 어린이는 혼나야 한다고 들었거든요. 그래야 나중에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된대요."

"…후우, 어린아이라 그런가. 생각의 틀이 너무 순수해서 반박을 할 수가 없군."

까만 피부의 형은 뭔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어요. 그러자 뒤에 서 있던 금발의 형이 무뚝뚝하게 말을 걸었어요.

"놔둬라. 이제 그만 엘이나 찾으러 가지."

"아아, 어때? 위치는 알겠어?"

"글쎄. 정확치가 않군. 좀 이상한데. 분명히 이 근처인 건 확실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느낌이 흐릿한 거지?"

"다시 잘 짚어내 봐. 여기에 엘이 있기는 한 거야?"

"…엘?"

왜 일까요? 그 하나의 이름이 갑자기 무척 마음에 걸렸어요. 그래서 무심코 입 안으로 중얼거렸는데, 그게 형들의 귀에 들렸던 모양이에요.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제게 내려왔습니다. 으악! 어떡하죠? 너무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어요.

"죄, 죄송해요!"

"훗! 괜찮아. 엘이 누군지 궁금하니?"

"그, 그게……."

"뭐, 별로 비밀이랄 것도 없는걸. 내 옆의 금발머리 형 있지? 그 형의 아들이야."

"네에? 아들이요?"

저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어요. 금발머리 형은 아무리 봐도 젊은데, 어떻게 아들이 있는 걸까요? 전 아이가 있는 사람은 다 우리 아빠 같은 아저씨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아마 저 형은 세상에서 가장 젊고 잘생긴 아빠일 거예요!

그런데 왜 여기서 아들을 찾고 있는 건지……. 혹시 아이를 잃어버린 걸까요?

"제, 제가 도와드릴까요?"

"응? 어떻게?"

"저 이래 봬도 이 동네 지리 잘 알아요! 같이 찾아드릴게요."

"후훗! 마음은 고맙지만, 그 전에 네 아빠부터 챙겨야 하지 않을까?"

"아, 아참! 그렇지!"

그제야 다시금 아빠의 상태가 떠오른 저는 무안해져서 얼른 고개를 숙였어요. 아무튼 형들은 (아니, 아저씨라고 해야 할지도) 그 상태로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기절해 있던 아빠가 깨어나는 것이 보였어요.

"으윽! 대체 어떤 썩을 놈들이… 사람을……."

"아, 아버지! 괜찮으세요?"

뒤통수가 아픈지 연신 찌푸린 표정으로 쓰다듬던 아빠는 제 말에 무척 화를 내기 시작햇습니다.

"이놈의 후레자식! 넌 이게 괜찮아 보이냐! 강지훈! 솔직히 말해라! 이 아비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네가 도와달라고 소리쳤지? 그렇지?"

"아,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때였습니다.

뒤돌아서서 걸어가던 형들의 걸음이 우뚝! 하고 멈추는 거예요. 그리곤 홱! 하고 이쪽을 돌아보았는데, 둘다 표정이 굉장히 굳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금발머리 형 쪽의 얼굴이 무서웠어요. 어찌나 눈빛이 새파란지, 그대로 번개가 뚝뚝 떨어질 것 같았거든요. 

"네놈이 아니면 누가… 흡!"

"……!"

그 형은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더니, 고래고래 소리치던 아빠의 입을 한 손으로 간단히 틀어막아버렸습니다. 굉장히 힘이 센지, 아바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형은 아빠를 굉장한 눈으로 노려본 다음, 놀라서 굳어버린 제게 나직하게 물었어요.

"꼬마야, 네 이름이 뭐라고?"

"네?"

"이름!"

"가, 강지훈이요."

"…빌어먹을. 한 가지만 더 묻자. 오늘이 몇 년 몇 월 며칠이냐?"

무서운 표정으로 애 저런 걸 묻는 걸까요? 저는 울고 싶었지만 혼날까 봐 억지로 참으면서 더듬더듬 대답했어요.

"처, 천구백팔십팔 년. 사월 일 일……."

"하! 미치겠군."

날짜를 들은 금발 형의 얼굴은 어쩐지 아까 전보다 더욱 무서워져 있었어요. 제가 또 뭔가를 잘못한 걸까요?

아무 말도 못하고 연신 눈치만 살피고 있었는데, 검은 피부의 형이 한숨을 내쉬곤 한탄하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여긴 아닌 것 같다고 했잖아. 강지훈이었을 때의 엘이라니. 하필 궤도를 정해도 왜 이런 시점으로……."

"닥쳐. 거기서 한마디만 더하면 너라도 가만히 두지 않겠어."

"쯧! 그래, 어련하시겠어. 사랑하는 아들의 이런 모습을 목격했으니, 흥분 안 하고 버틸 리가 없겠지."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금발 형이 화가 난 건 확실한 것 같아요.

그때, 입이 막혀 있던 아버지가 화가 나서 드디어 뿌리치고 일어나셨어요.

"이놈의 양키 새끼들이 어디서 감히 행패야! 당장 경찰에 가서 신고해버릴 테다! 니들 어느 나라 사람이냐, 앙?"

"아, 아버지……."

"강지훈! 네놈도 똑같아! 재깍 달려가 도와줄 사람이라도 부를 것인지 멍청하게 뭘 서서 구경하고 자빠져 있어! 이 아비가 새파랗게 어린놈들한테 맞는 걸 보니 기분이 좋던? 엉? 이 불효막심한 자식!"

퍽! 뒹굴!

"아야야야야……."

무방비한 상태로 있어서 아빠의 발길질에 그대로 나가떨어지고 말았어요. 눈물이 찔끔하고 앞을 가렸지만, 울면 또 맞을 것 같아서 간신히 참고 일어서는데, 금발머리 형의 표정이 갑자기 차가워지는게 아니겠어요?

몸을 홱 돌린 형은 그 상태로 바로 아빠의 목을 움켜줘고 공중으로 들어올렸습니다. 아빠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변했습니다.

"우욱! 크윽! 큭……."

"너 따위 인간이 감히 엘을 건드려? 하, 내 아들이 이런 대접을 받으며 컸다 이 말이지? 좋아, 어떻게 죽여주랴? 어떻게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냐? 미천한 인간 따위가 감히!"

"엘뤼엔, 진정해. 이건 과거의 일이야. 정해진 미래는 주신 외에는 바꿀 수 없다는 것.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이 녀석을 죽여도 또 다른 작자가 나타나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될 거야."

"제기랄!"

헉!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섭습니다. 금발머리 형의 얼굴도, 까만 피부의 형도, 푸르게 변해가는 아빠의 얼굴도 모두 무섭기만 합니다.

형들이 아빠를 죽이면 어쩌죠? 그걸 생각하니 심장이 철렁해졌습니다. 저는 덜덜 떨면서 금발머리 형의 다리에 매달렸습니다.

"우, 우리 아빠 살려주세요! 네? 우리 아빠예요!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죽이지 마세요, 네? 제, 제발요!"

"……."

"……."

눈물이 흘러나와 계속 울었습니다. 용서를 빌었더니 형들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져 갑니다. 역시 제가 잘못했나 봐요. 어떻게 해야 형들의 화가 풀릴까요?

다행히 잠시 후에 금발머리 형은 잡고 있던 아빠의 목을 놔주었습니다. 잠깐 저를 향해 슬픈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정신없이 기침을 내뱉는 아빠를 보고 사납게 쏘아붙입니다.

"크윽! 쿨럭, 쿨럭!"

"네 아들… 때문에 살아난 줄 알아라. 당장 찢어죽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으니까. 입너 생에서 최대한 행복하게 사는 게 좋을거야.  앞으로는 환생 때마다 살기 싫을 만큼 처절한 지옥이 어떤 건지 뼈저리게 느끼게 될 테니."

"엘뤼엔, 저 녀석 기억 지워. 저대로 내버려두면 우리가 돌아가고 나서 그 분풀이를 엘에게 다할 거야."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는데, 제게 화가 나 있던 게 아니라는 걸까요?

어리둥절한 눈으로 보고 있자, 금발머리 형은 한결 진정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곤 제 앞에 앉아, 저의 얼굴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쓰다듬습니다. 제 몸의 멈들고 흉터가 생긴 부분을 볼 때마다 형의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차가워졌어요. 하지만 제게 건네는 목소리는 상당히 부드러워 안심이 되었습니다.

"열일곱 살이었지? 네가 죽은 나이가. 그토록 오랜 시간을 이런 고통을 당하며 사는 건가……."

"……?"

"미안하다. 이미 정해진 미래는 나라고 해도 바꿀 수가 없단다. 네가 이렇게 된 것도, 악신의 탄생 역시 모두 예정된 주신의 뜻.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라. 이곳에 있는 모든 건 '진짜'가 아니란다."

"…네?"

멍하니 바라보며 묻자, 금발머리 형이 생긋 웃으며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었습니다. 누구도 이런 식으로 제 머리를 만져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솔직히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어쩌면 이 형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정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어요. 

"지훈이라고 했느냐? 강한 아리구나. 괜찮다. 넌 반드시 이겨낼 수 있을 거다. 함ㄶ이 힘들고 괴로워도, 네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거라."

"혼자가… 아니라고?"

"그래. 잘 찾아보면 언젠가 너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잇을 거다."

"……."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듣는 순간 굉장히 심장이 두근거렸어요. 하지만 이어지는 형들의 말에 저는 다시금 시무룩해졌습니다.

"자, 그럼 난 이제 현! 재! 의 아들을 찾으러 가봐야겠다. 그럼 나중에 다! 시! 보자, 꼬마야."

"아……."

마음이 허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얼핏 멀어지려는 손을 다시 붙잡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칭얼거리는 것 처럼 보일까 봐 그럴 수 없었어요. 아빠는 항상 귀찮은 꼬마는 보기 싫다고 하셨거든요. 형들에게 그런 아이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아요.

형들의 얼굴엔 다정한 미소가 떠올라 있습니다. 까만 피부의 형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다정하게 말했습니다.

"다시 만날 땐 지금보다 행복한 모습일 거야. 네 아버지는 이래봬도 무척 팔불출이거든."

"트로웰, 벌써 생을 마감하고 싶어진 모양이지? 페르데스 곁으로 보내주랴?"

"하하하~ 노, 농담이었어."

"그래? 난 지금도 충분히 용의가 있는데 말이지."

"하하하하… 앗! 저쪽 차원에서 엘의 느낌이 있다! 틀림없어! 이번엔 진짜야!"

"이봐! 기다려!"

술래잡기 하듯 재빨리 어디론가 뛰어가는 검은 피부의 형을, 금발머리 형이 열심히 쫓아갑니다. 점점 저에게 멀어지고 있네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걸까요?

그러고 보니 금발머리 형에겐 아들이 있다고 했었죠? 분명 아빠를 닮아 멋지고 잘생긴 녀석일 거예요. 저와는 달리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겠죠.

본 적도 없는 녀석이 갑자기 무척 부러워졌습니다. 저처럼 못생긴 아이가 저런 사람의 아들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큰 욕심이겠죠?

있잖아요, 하느님. 앞으로 착하게 살 거니까, 엄마, 아빠, 형들 말도 잘 듣고 심부름도 잘할 테니까 소원 하나만 들어주면 안 될까요?

'저도 다시 태어나면, 저런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버린, 두 형들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저는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금발머리 형이 떠나기 전에 다시 보자고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언젠가… 정말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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