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소설] 정령왕 엘퀴네스 12권
12-2. 자각 (1) 이환(煥)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전에도 이것과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아니, 앞으로 먼 훗날에 벌어질 일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악신에 의해 죽음의 위기에 놓였던 페르데스와, 그를 보호하기 위해 끌어안았던 트로웰.
그때의 망설임 없던 행동이 지금 또다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이전과 같은 상황이 될 순 없었다.
지금 폭발의 주범은 바로 미네르바-그로부터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끌어안으면 끌어안을수록, 그것은 보호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뿐인 칼날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안 돼!”
숨 쉬기 힘들 정도로 억세게 몰아치는 바람을 가르며 나는 필사적으로 앞을 향해 내달렸다.
나로선 역부족이라거나 이미 늦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이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의식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힘껏 도약한 내 몸이 막 섬광에 휩싸인 트로웰에게 닿으려는 찰나였다.
“이 멍청한 자식!”
“으앗!”
갑자기 뒤에서 강하게 잡아끄는 힘이 느껴진다 싶더니,
어느새 내 몸은 폭발의 사정권에서 한참이나 밀려나 있었다.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세차게 구른 덕분에 나는 사태를 파악할 정신도 없이 연신 터져 나오는 기침을 뱉어냈다.
“쿠, 쿨럭! 쿨럭! 큭…아야야…”
간신히 진정이 되었다 싶자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구르면서 돌부리에 긁힌 건지 아니면 사납게 할퀴는 바람에 베인 것인지는 모르지만,
온 몸이 자잘한 생채기로 가득해 있었다.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선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밀쳐지기 전 사납게 울려 퍼지던 엘뤼엔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팔자 좋게 그를 원망할 처지는 아니었다. 아마 그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여지없이 폭발에 휘말렸으리라.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하지만 나는 다음 상황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곧바로 누군가에게 답싹 들려져(?) 어디론가 이동되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내린 나는 그가 블루 드래곤인 라미아스라는 것을 깨닫고 더욱 질겁해서 소리쳤다.
“라미아스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여어~ 놀랬다면 미안! 지금은 급하니까 나중에 말하자고~!”
경직된 얼굴로 재빨리 달리는 모습은 방금 전까지 엘뤼엔에게 마나를 공급하며 허덕이던 때와는 전혀 달랐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고 맞은편의 상황을 보려고 노력했지만,
거센 바람과 자욱이 끼어있는 안개에 막혀 도무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엘뤼엔, 나의 아버지가 저 안에 속해버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나를 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아버지…!’
심장이 서늘하게 식어가는 기분이었다.
나 역시 그 속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라미아스가 단단히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쿠구구구궁! 촤아아악!
잠시 후 마른 바닥에서 물줄기가 솟아오르더니 폭발이 터진 공간을 완벽히 감싸 안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꼭 하늘에서부터 거대한 커튼이 둘러쳐 지는 것 같았다.
말 그대로 물의 장막 이었다.
마치 이쪽부터는 전혀 다른 세상의 경계라는 듯이.
그러고 나자 방금 전까지 험악하게 몰아치던 바람도,
들썩이던 땅도, 자욱한 열기와 안개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감춰져 버렸다.
물로 된 장벽, 그 경계 밖의 세상은 태풍이 지나고 난 후처럼 조용하고 한산했다.
“휴우, 죽을 뻔 했네.”
그제야 라미아스는 이마의 식은땀을 훔치며 나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내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보기보다 아주 용감한 꼬맹인데?
어떻게 저런 폭발에 뛰어들 생각을 다 한 거야?
엘퀴네스가 붙잡지 않았으면 그 연약한 몸이 벌써 갈기갈기 찢어졌을 거라고.”
그 말처럼 사방에는 미처 폭발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죽은 자들은 하나같이 온 몸이 칼로 난도질당한 것처럼
너덜너덜 해진 채로, 눈과 코, 입과 귀에서 시꺼먼 피를 흘리고 있었다.
비릿한 핏자국과 떨어진 살점들을 본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여전히 굳건한 물의 장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라미아스는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런 눈 할 것 없어.
제 아무리 심한 폭발이래도 엘퀴네스나 저 안에 들어가 있는 정령왕들에겐 아무런 위해를 끼치지 못할 테니까.
폭주는 무사히 수습될 거야. 다만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지.”
“그걸…어떻게 장담하죠?”
단순한 폭발이 아닌 미네르바가 일으킨 기운이었다.
인간세상에서 빚어진 일이라 다소 위력은 약한 상태였겠지만,
그것은 다른 정령왕들 역시 마찬가지. 최악의 경우 소멸을 각오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미아스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미네르바는 본래가 방어적 성향이 강한 정령왕이고,
다른 3명의 정령왕을 물리칠 만큼 폭주단계가 진행된 것도 아니야.
게다가 엘퀴네스의 힘은 네 상상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본래라면 이 공국 전체가 날아가도 이상할 게 없는 폭발인데
그가 자신의 힘으로 가둬놓은 거야. 그가 제압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반드시 그렇게 될 거다.
정말 대단한 존재야, 엘퀴네스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라미아스는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도 대단하지.”
“…내가요? 난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대단해.
그가 자발적으로 폭발을 수습하게 만들도록 한 건 너야.
난 태어나서 엘퀴네스가 그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니까?
하기야 최초로 물의 정령왕을 소환한 인간이니 대단히 특별할거라곤 생각했지만.”
“끄응. 그런 걸 노린 게 아니었어요. 나도 모르게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그만…”
내가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자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널 탓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난 재밌는 걸 발견해서 기쁘니까.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공국의 내 저택에 초대했을 텐데 아쉽군. 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엘입니다.”
“호오~ 엘퀴네스의 앞 글자와 같군.
그를 최초로 소환한 인간이라고 해서 꽤 기대하고 있긴 했지만 이건 정말 상상 이상인 걸?
아직 어려 보이는데 나이는 어떻게 돼?”
“18세 이긴 하지만…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데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대답한 그는 뭔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를 떠올린 사람처럼 짝-하고 손뼉을 치더니 유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아~ 어차피 폭주가 진정되려면 이틀 정도는 더 걸릴 거야.
그동안 우리는 느긋하게 이곳의 상황이나 수습하도록 할까?”
“네? 수습…이요?”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던 나는 곧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운 좋게 폭발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여기저기에서 신음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윽…사, 사람 살려…”
“으으으…”
“!!”
내가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내 룸메이트 중의 한사람인 다비안씨였다.
온몸에 깊이 페인 상처자국이 가득하고
피와 흙으로 얼룩진 처참한 상태였지만 다행히 심각할 정도의 중상은 아닌 것 같았다.
“다비안씨! 정신 차려 보세요! 이런…슐츠형은 어디에 있는 거지? 다른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본 나는 곧 그와 가까운 곳에서 쓰러져 있는 슐츠형을 발견했다.
그 역시 심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나는 일단 급한 대로 나이아스를 소환하여 흙에 엉겨진 상처부터 씻어냈다.
그 사이 라미아스는 품안에서 종이를 꺼내 대충 뭐라고 휘갈기고는
비둘기 다리에 그것을 달아 하늘로 날려 보내고 있었다.
아마도 자택의 기사단으로부터 지원 요청을 하는 것이리라.
“일단 부상자들은 내 저택으로 옮기자.
황성에 기별을 넣으라고 했으니 곧 치유신관과 병사들을 보내 올 거다.
이번 일로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대거 죽었으니 수도가 발칵 뒤집히겠군.”
“괜찮으시겠어요? 혹시 책임 추궁이라도 당하면…”
“큭큭. 이 제국에서 감히 ‘테이론 드 세피온’을 추궁할 수 있는 간 큰 녀석은 없다.
게다가 정령왕이 벌인 일이니 황제 녀석이 아무리 떽떽거려 봤자지.
아니, 오히려 속 시원해 할 걸? 이번에 죽은 녀석들 중에서 반 황제파의 인물이 꽤 있거든.”
“음, 그렇다면 할 말 없지만…”
내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시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얼굴이었다.
“정말 보면 볼수록 맘에 드네. 너 이참에 내 후계자 되지 않을래?”
“…네?”
이 무슨 봉창 두들기는 소리인가?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라미아스는 생긋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너도 알다시피 지금 내가 유희중인 ‘세피온 공작’에게는 다음 자리를 이을 후계자가 없거든.
내심 누구로 하나 걱정이었는데,
너라면 아직 나이도 어린데다 얼굴도 이쁘고 엘퀴네스의 계약자라는 막강한 배경까지 있으니 딱 제격이야. 어때?”
“어때 라니…전 그다지…”
“뭐어? 왜? 후계자가 되면 이 공국을 통째로 가지게 되는 거라고.
황제에게 정령왕의 계약자임을 밝혀서 쥐꼬리만한 귀족의 작위를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한 부귀영화가 굴러들어온단 말이다. 그런데도 싫어?”
설마 내가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그는 절박한 표정으로 내 두 손까지 붙들어가며 물었다.
물론 보통 평민이었다면 눈이 돌아갈 정도의 엄청난 기회이긴 했다.
아니, 내가 이 세상에 오래 동안 안주 할 수 없는 처지만 아니었다면 당장에 그러마고 허락했을 것이다.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니까.)
라피스를 찾아도 당분간 이곳에서 머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하루라도 빨리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를 기억하고 사랑해주는 ‘온전한’ 아버지와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죄송하지만 힘들 것 같네요. 한곳에서 오래 머물 입장이 아니라서요.”
“여행을 하겠다는 거냐? 떠돌이 생활보다야 귀족으로 지내는 것이 훨씬 나을 거야.
물론 지루하고 빡빡한 느낌도 없지 않아 있지만,
못 먹고 못 사는 것보다 낫지 뭘 그래? 내가 이런 제의를 아무한테나 하는 게 아니라고. 다시 생각해 볼 수 없겠니?”
초면의 사람을 붙들고 이렇게까지 애걸하는 모습을 보니,
그가 그동안 얼마나 이 문제로 고심해 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몇 번을 물으셔도 제 대답은 같아요. 죄송합니다.”
“그러지 말고 조금 더 생각을…”
그러나 라미아스는 거기에서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갑자기 끼어든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뒤로 밀어냈기 때문이다.
“이 자식! 감히 엘한테 무슨 짓이야?”
사납게 으르렁 거리는 목소리가 굉장히 낯익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놀란 표정으로 내 앞을 막아선 이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은발에 푸른 피부, 그보다 훨씬 새파란 눈동자가 눈에 아프도록 들어왔다.
“…시, 시벨?”
“엘. 괜찮아? 어디 다친 곳 없어?”
누가 유니콘 아니랄까봐 녀석은 이런 난장판 속에서도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무척 안도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는 이가 시벨리우스가 맞음을 확인한 나는 반가움에 눈물까지 흘릴 뻔 했다.
“여긴 어떻게…난 너도 폭발에 휘말렸을 줄 알았어.”
“아아. 갑자기 대기의 흐름이 이상해진다 싶어서 얼른 실드마법을 시전 했지.
덕분에 나와 같은 층에 있던 인간들은 모두 무사해.”
“그렇구나. 정말 다행이다.”
“나야말로 굉장히 걱정했어.
당장 널 찾으려고 했는데, 폭발이 연달아 두 번 일어나는 바람에 이제야 겨우 온 거야.
정령왕이 옆에 있으니까 위험할거란 생각은 안했지만…이렇게 무사한 모습을 보니 안심이다.
그런데 저 녀석은 대체 뭐야?”
시벨은 잔뜩 경계하는 표정으로 라미아스를 노려보며 물었다.
모습이 다른 탓에 그가 ‘세피온 공작’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 반면, 단번에 녀석을 알아본 라미아스는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호오~ 이거, 이거 요리사 시벨리우스씨 아니신가? 설마 자네가 엘과 안면이 있는 줄 몰랐군.”
“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 넌 누구지?”
“나? 이 공국의 주인인데.”
“웃기지도 않은 소리. 이곳의 주인이란 녀석은 너보다 한참이나 늙은 인간이다.
남을 속이려면 뭔가 제대로 알고 하는 게 어때?”
이제 시벨은 그를 완전히 수상한 녀석으로 분류해버린 듯 했다.
차가운 파란색 눈동자에 살기가 일어나자 라미아스는 나를 향해 얼른 말려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나는 푹 한숨을 내쉰 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시벨을 붙잡고 그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만 둬, 시벨. 그냥 저 사람도 너랑 같은 입장인 것뿐이야.”
“…나랑 같은? 혹시 폴리모프한 상태라는 거야?”
끄덕끄덕
내 긍정의 동작에 녀석은 이채를 띈 눈빛으로 라미아스를 훑어보았다.
‘폴리모프’라는 단어 하나로 그의 정체를 단번에 꿰뚫어 본 것 같았다.
“인간들이 그렇게 떠받드는 공국의 수장이 설마 유희중인 드래곤 인줄은 몰랐군.
머리색을 보니…블루 드래곤인가?”
“호오, 내 정체를 알고 나서도 이렇게 뻣뻣한 엘프는 처음이군. 내가 무섭지 않나 보지?”
“전혀. 그럼 저 이상한 물의 장벽은 당신이 만든 것이겠군?”
시벨은 시큰둥한 얼굴로 뒤편에서 굳건히 버티고 있는 물의 장벽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직 엘뤼엔의 존재를 모르는 녀석으로선,
갑자기 생긴 물기둥을 보며 드래곤의 소행이라 생각할 만 했다.
그 속내를 짐작했는지, 라미아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천만에. 아무리 나라고 해도 저런 식으로 물을 운용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저건 모두 엘퀴네스의 작품이지.”
“엘퀴네스? 설마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를 말 하는 건가?”
“그럼 그 말고 달리 누가 또 있겠어?
정령왕의 폭주를 이렇게 수습할 수 있는 존재는 같은 정령왕이 유일하지.”
“정령왕의 폭주라니? 이게 그냥 단순한 폭발이 아니었다는 거야?”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는 그에게 나는 이번 일이 벌어지게 된 대강의 연유를 설명했다.
그러자 처음엔 흥미로운 듯이 듣고 있던 시벨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계약자의 배신? 그래서 바람의 정령왕이 폭주했다고?
하, 과연 인간들은 나를 실망시키질 않는군. 구역질이 날 정도로 이기적이고 추악한 녀석들이야.
그런 놈을 사랑했다니 미쳐 버리는 게 당연해.
미네르바가 정말 어리석은 선택을 했군. 왜 주변에서 말리지 않았지?”
“…미안하다. 이기적이고 추악해서.”
내 대답에 시벨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바로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나 역시 인간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안 그래도 파란 피부가 더 창백해지는 모습을 보니, 죽은 시체가 벌떡 일어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아, 아니, 엘 너도 그렇다는 뜻은 아니었어!
다른 녀석들이 그렇다는 거지, 엘 너는 절대 아니야. 정말이야! 믿어줘!”
“사과할 것 없어. 이번 일을 본 이종족이라면 누구나 인간을 욕하게 될 테니까.”
“그게 아니라니까! 너는 다른 인간들과 달라. 정말이야!”
솔직히 말해 시벨이 이렇게 당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시대의 녀석은 묘하게 냉소적이고 덤덤한 편이었으니,
사과를 하더라도 그냥 간단히 ‘미안!’ 정도에서 그칠 줄 알았던 것이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모습을 볼 줄 알았더라면 농담으로나마 태클을 거는 게 아닌 건데 그랬다.
설마 이것도 내가 여자라고 오해하고 있기 때문일까?
이전에 들었던 트로웰의 충고를 떠올리며 나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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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 12-2. 자각 (2) 이환(煥)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어이, 지금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네?”
그때 마침 들려오는 라미아스의 목소리는 내가 잠시 잊고 있던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긴장한 얼굴로 어딘가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라미아스님? 왜 그러…”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무심코 묻던 나는 이윽고 펼쳐지는 장면에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굳건히 버티고 있던 물의 장벽이 서서히 허물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젠장, 본체로 돌아가야 하나?”
“어, 어떻게 된 거예요? 분명 이틀은 걸릴 거라고…”
“나도 모르겠다. 최악의 경우 어쩌면 폭주를 제압하는데 실패한 걸지도 모르니까 바짝 긴장하고 있어라.
어이, 거기 블루엘프! 텔레포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만약 위험한 순간이 오면 이 녀석도 같이 좀 부탁하마.”
“그런 건 말 안 해도 알고 있다.”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도 그 제안이 싫지 않았던 듯,
시벨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라미아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본체로 돌아가면 막을 수는 있는 거예요?”
“그건 모르지. 여차하면 나도 튈 생각이거든.”
“엥? 여기 사람들은 어쩌고요?”
“어떻게든 되겠지, 뭐. 내가 죽을 판인데 남 챙겨줄 정신이 있겠냐?”
“…하긴.”
나도 도망치는 판국에 라미아스에게 책임을 지운다는 건 웃기지도 않은 일이다.
게다가 드래곤인 그가 인간들을 위해 희생한다고 한다면 오히려 더 이해가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물의 장막은 거의 다 무너져 내부의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다.
그 안에서 흘러나온 뿌연 물안개와 시린 공기가 사방에 자욱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벨은 굳은 얼굴로 내게 한손을 내밀었다.
“엘, 내 손을 잡아.”
“으응.”
마지못해 맞잡은 녀석의 손은 잔뜩 경직되어 딱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 녀석도 긴장을 할 때가 있구나 싶어 나는 상황도 잊고 슬쩍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남아있던 물기둥마저 완전히 파쇄 되는 순간에도 우리가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아까전보다 더욱 짙어진 안개 때문에 한치 앞도 구분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이었다.
당황한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안개속의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자 잠시 후 조금씩 흩어져가는 뿌연 기운 안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버지?”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중얼거리는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사방을 가득 매우고 있던 안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뒤로 보인 것은 온통 물바다가 된 바닥과 거의 폐허나 마찬가지로 엉망이 된 주변,
그리고…굉장히 지친 얼굴을 한 엘뤼엔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잘생기면 뭐든지 다 어울린다고…
창백한 안색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빛을 잃지 않는 외모를 보며 나는 새삼스럽게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명한 푸른색 눈동자와 발끝까지 치렁거리는 물빛 머리카락이 마치
‘이것이 물의 정령왕이다’라고 온 몸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자가 엘퀴네스?”
역시나 한눈에 그의 정체를 알아본 시벨이 감탄한 목소리로 묻자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의 진지한 얼굴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순식간에
황홀한 표정으로 돌변한 라미아스가 두 팔을 벌리며 그를 향해 달려갔다.
“엘퀴네스으~~! 다행이야! 자기, 무사했구나!”
그리고 그 무모한 행동은 참담한 결과로 돌아오고 말았으니…
퍽! 쿠우웅!
“꾸에엑!”
“…안 그래도 피곤한데 화나게 만들지 마라.”
단번에 라미아스를 내팽개친 엘뤼엔은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잠깐의 움직임으로도 무척이나 지치고 고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때서야 정신이 든 나는 잡고 있던 시벨의 손을 놓고 얼른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괘, 괜찮아, 아버지? 어디 다친 덴 없어?”
“아버지…?”
뒤에서 어리둥절하게 중얼거리는 시벨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이어질 엘뤼엔의 대답만 기다렸다.
워낙 찔리는 구석이 많았기에 좋은 소리가 나올 거라곤 기대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어김없이 날벼락 같은 그의 호통이 날아 들어왔다.
“넌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네가 뭐라고 그 폭발 속에 뛰어들어?
결국 내가 직접 나서게 만들다니! 어떤 의미론 참 대단하군 그래!”
“윽…화났어?”
“시끄러! 한 번만 더 이따위 일을 벌였다간 죽든지 말든지 그냥 내버려둘 테니 그리 알아!
아니, 산채로 사자우리에 집어 던질 테다!”
“아, 알았어. 그런데 다른 정령왕들은? 미네르바는 어떻게 됐어?”
찔끔한 표정으로 대답한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얼른 다른 질문을 건넸다.
엘뤼엔 역시 그 의도를 짐작한 듯 했지만 피곤했기 때문인지 별다른 꼬투리 없이 대답했다.
물론 절대 평범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미네르바는 봉인, 나머지 두 녀석은 역소환 됐다. 당분간은 세 녀석 다 중간계에 나오지 못 할 거야.”
“엥? 역소환은 그렇다 치고…봉인이라니? 설마 아버지가 봉인 시킨 거야?”
“말로 달래는 방법 따위는 모르니 어쩔 수 없잖아.
한동안은 정령계에서 머리를 식히는 게 나을 거다.
누구보다 이성적인 녀석이니까 시간이 흐르면 알아서 진정할거야. 그게 안 되면 그때야말로 소멸시키는 수밖에.”
냉정한 결론이긴 했지만 귀찮은걸 싫어하는 엘뤼엔이 손수 봉인까지 한 걸 보면 꽤나 배려해준 셈이었다.
나는 슬쩍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봉인은 언제 풀리는 건데? 아버지가 직접 가서 풀어줘야 되는 거야?”
“아니. 폭주가 멈추면 알아서 해제 되도록 해 놨다.
어쨌든 당분간은 바람의 기운이 강해질 거야. 계절의 변화 역시 빨라질 테니 미리 준비해둬라.”
“응. 알았어.”
그러고 나자 주위에 있던 수많은 물의 정령들이 엘뤼엔에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각자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수군거리며 그의 몸에 수많은 이슬방울을 뿌리기 시작했다.
언제고 라피스가 만든 결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탕 힘을 소진하고 났을 때,
나이아스들이 내게 해준 것과 똑같은 행동이었다. 그만큼 현재 엘뤼엔이 지친 상태라는 뜻이리라.
‘하긴, 두 정령왕이 속수무책으로 역소환 되었을 정도인데, 멀쩡한 게 오히려 이상한거지.’
당시 얼마나 힘든 상황이었는지 기억하고 있던 나로선 지금 이런 모습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나야 나중에 도착한 트로웰의 도움을 받아 한결 나아졌다지만,
지금 엘뤼엔에겐 기운을 나눠줄 동료들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하급 정령들의 기운은 고작 최악의 상황(예를 들면 역소환 같은 것)만 막아줄 뿐이다.
“저기…아버지, 정령계에 가서 조금 쉬고 오는 게 낫지 않을까?”
“무슨 헛소리냐?”
“지금 굉장히 지쳤잖아. 물의 영역에서 하루정도만 푹 쉬면 회복 될 것 같은데.”
“쓸데없는 참견이다. 너에게 걱정 받을 정도는 아니야.”
싸늘하게 대꾸한 그는 터벅터벅 걸어가 땅을 흥건하게 적신 물들을 모두 공중으로 증발시키기 시작했다.
힘든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고집부리는 모습에 나는 끌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라미아스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엘퀴네스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니까.
정말 대단하지 않아~?
그 엄청난 폭주를 이렇게 무사히 수습하다니! 아~ 너무 멋져! 역시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니까~”
“…쿨럭. 사, 사랑스럽?”
너무도 적나라한 표현에 온몸에 닭살이 우두둑 돋았다.
그는 어떤 의미론 카노스보다 더 엄청난 존재였다.
내가 질린 표정을 하자 익숙하다는 듯 덤덤한 엘뤼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녀석은 무시해라. 태어날 때부터 머리 구조가 틀려먹은 놈이니까.
그보다 여기 널려있는 인간들은 이대로 방치할 참이냐?”
“아, 그렇지, 참! 아버지! 얼른 정령계에 가서 쉬고 와!”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말했을 텐데?”
“아니, 그게 아니라~그래야 충전 완료해서 이 사람들도 치료할 거 아니야! 심각한 부상을 입은 환자들이 많다고!”
“……”
내 단호한 외침에 엘뤼엔은 물론, 라미아스와 시벨리우스 녀석까지 묘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당연 그 침묵의 의미를 알 수가 없던 나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휴…내가 왜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 모르겠군.”
“그게 무슨 소리야?”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내가 얼굴을 찌푸리자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정령계에 다녀오겠다는 뜻을 밝혔다.
방금 전까진 싫다고 고집만 부리더니, 역시 사람들을 치료해야 할 입장에 처하니 현재 상태가 곤란하긴 했나보다.
잠시 후 그가 사라지고 나자 나는 왠지 엄청나게 반짝거리는 라미아스의 눈과 시선을 마주쳤다.
마치 첫사랑에 빠진 듯이 두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그는 갑자기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너…멋지다!”
“네?”
“저 엘퀴네스를 이렇게 철저하게 부려먹는 인간은 처음 봤어!
드래곤…아니 같은 정령왕들조차 감히 말도 못 붙이는 존재를 이토록 가볍게 대하다니!
정말 멋지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니까!”
“아하하. 제가 그렇게 보였나요? 전 그냥 엘퀴네스의 치유능력을 썩히는 게 아까워서…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본인에게 그럴 마음이 있으니까 제 의견에 따라주는 거겠죠.”
“바로 그거야! 엘퀴네스가 인간들을 돕다니!
이건 천지가 개벽해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아마 너라는 존재가 그에게 어떤 특별한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특별한 영향이라. 혹시 그라면 무의식적으로 내 영혼이 정령에 가깝다는 걸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같은 엘퀴네스이고 하니,
다른 이들에 비해 너그럽게 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예전부터 그는 물의 정령에게는 관대한 편이었다고 하니까.
하지만 정작 혜안이 있는 트로웰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걸 보면 단순히 내가 마음에 든 것일지도?
‘으음. 미래의 관계가 과거에도 영향을 미치는 게 가능한가? 원래 부자(父子)가 될 운명이라거나…’
거의 희망사항에 가까운 결론이었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와 나 사이에 단단한 인연의 끈이 얽혀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샐쭉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여전히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한 라미아스를 향해 말했다.
“엘뤼엔의 속을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워낙 제 앞가림 못하는 녀석이라 신경 써 주는 걸지도 모르죠.”
“흐음~ 그런가. 그런데 ‘엘뤼엔’이란 건 엘퀴네스를 말하는 거야?”
“네, 제가 지어준 가명이에요.”
“가명? 하긴, 여행 중에 대놓고 엘퀴네스라고 부르긴 어렵겠군.
그러고 보니 아깐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그건 무슨 뜻이지?”
그 질문에 시벨까지 덩달아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곤란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그냥 저 혼자 그렇게 부르는 거예요. 왠지 아버지 같아서.”
“켁! 말도 안 돼. 저렇게 젊은 얼굴의 아버지가 어딨어? 엘퀴네스도 용케 화를 내지 않는군.”
“처음엔 싫어하더니 이제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아요. 제가 고집을 피웠거든요.”
“그으래? 아아, 나 같으면 아버지보단 애인 쪽이 더 듬직할 것 같은데 말이지~
그런데 엘퀴네스는 내가 자기라고 부르면 맨날 화만 낸단 말이야? 대체 왜 그런 걸까?”
바로 그래서 화내는 거라는 걸 모르는 건가?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는 라미아스를 보며 조심스럽게 조언을 건네 보았다.
“그럼…차라리 모습을 여자로 바꾸는 건 어때요? 드래곤들은 성별을 바꾸는 게 가능하잖아요.”
“왜에? 싫어. 난 이 모습이 더 편하고 좋단 말이야.”
“하지만 남자잖아요. 엘뤼엔 역시 남성체의 정령인데 그 상태에서 ‘애인’관계는 확실히 무리이지 않을까요?”
“뭐, 어때? 어차피 우리 둘 다 성별에 상관없는 종족이잖아?
두고 보라고. 언젠간 반드시 내 매력에 굴복하고 말테니! 우후훗~”
“……”
뻔뻔하달 지, 과감하달 지. 그는 여러 면에서 확실한 마이페이스였다.
혹시 엘뤼엔이 라피스와의 계약을 거절했던 건 이러한 경험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결국 더 집요한 상태로 돌아오긴 했지만.)
처음으로 엘뤼엔이 불쌍하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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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 12-3. 자각 (3) 이환(煥)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아아~ 그렇군. 엘 너는 물의 정령왕과 계약했던 거구나.”
시벨이 모든 상황을 파악한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난 후였다.
내가 정령사인 것은 알아도 어느 속성의 정령을 다루는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자마자 녀석은 무척이나 놀라워했다.
“지금까지 엘퀴네스를 소환한 인간은 한명도 없다고 들었는데…그럼 네가 최초인 거야?”
“응. 거의 그런 셈이지.”
“정말 굉장하다! 엘프들도 불가능한 일을 해내다니,
친화력이 상당히 뛰어나구나. 하긴, 언젠가 장로 할아범한테서 들은 적이 있어.
‘인간은 기적을 창조하는 동물’ 이라고.”
“오, 그거 멋진 표현인데? 나도 언젠간 써먹어야지.”
“뭐? 하하하!”
이래저래 실없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우리는 착실하게 현장을 정리하는 일에 집중했다.
물론 전부 다 치우는 것은 아니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구조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 것이었다.
갈라진 땅과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치우는 일은 상당히 버거웠지만,
다행히 마법이 가능한 시벨과 라미아스덕분에 특별히 곤란한 일은 없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세피온 공작의 기사들은 한참 동안 폐허가 된 현장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것은 운 좋게 자리를 피해 화를 면한 사람들이나, 멀리서 구경 온 공국의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이고오! 내 아들! 내 아들이!!”
“흐윽! 안 돼! 이럴 순 없어!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크흐흑!”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났을 때, 그나마 멀쩡했던 건물까지 무너지는 바람에 사상자의 숫자는 더욱 불어난 상태였다.
폭주는 수습됐지만 가족과 동료를 잃은 사람들이 통곡하는 소리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본 뒤 다시금 부상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기보다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이 먼저였으니까.
그래도 엘뤼엔의 활약 덕분에 생각보다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다행이랄까.
자잘한 부상을 입은 자는 응급처치 후 임시로 지어둔 텐트 안으로 옮기게 했고,
운이 나빠 의식을 잃거나 상태가 심각한 사람들은 시벨과 라미아스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떠넘겼다.
(신관들에 비하면 위력은 약하겠지만, 일단은 치료마법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우리 세 사람(?)이 부지런히 움직이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덩달아 부랴부랴 일을 돕기 시작했다.
가끔씩 몇몇 사람들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집요한 시선을 보내온 것만 빼고는
그럭저럭 상황은 원만히 수습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나는 누군가가 내게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사람들의 구조를 위해 파견된 세피온 공작의 기사단 중 한 사람이었다.
단단한 투구와 갑옷을 입고 절제된 동작으로 척척 걸어온 그는 내게 무척 정중한 태도로 인사하며 입을 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당신이 이번 사건을 처음부터 모두 지켜본 사람이라고 해서 찾아왔습니다만.”
“무슨 용건이시죠?”
“부상자들에게 상황을 물으니, 모두 하나같이 정령왕이 폭주한 것이라 대답하더군요.
만약 그렇다면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 계기와 어떻게 수습 된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지금은 상황조사보단 사람들을 구하는 게 먼저 아닌가요?”
“그렇긴 합니다만…이제 곧 황성에서 진위조사를 위해 친위대를 파견 할 것입니다.
그들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이쪽의 사전 조사역시 필수라서 어쩔 수 없습니다.”
기사주제에(?) 무척 황송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모습 때문에 나는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얼굴만 찌푸렸다.
그러자 기사는 더더욱 저자세가 되어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실은 폭주를 수습한 남자를 봤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푸른색의 긴 장발에, 준수한 얼굴의 청년이라고…그 사람이 당신과 무척 친밀한 사이로 보였다고 하더군요.”
“아~ 그래요.”
“네에, 저어…그리고 그 사람이…아무래도 정령왕 엘퀴네스 같다고…”
“…!”
아하, 이것 때문에 그렇게 쩔쩔맨 것이었구만?
나는 그 말 하나로 단번에 이 사람의 의도를 파악했다.
진위여부란 건 말짱 허울 좋은 핑계일 뿐이고 본심은 내가 정령왕의 계약자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다.
어쩐지 아까부터 사람들이 흘끔흘끔 바라보더라니.
하긴, 누가 봐도 그때 엘뤼엔의 모습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만큼 ‘위대했다.’
휘몰아치는 태풍을 물의 장벽으로 가둬두는 장면을 보았을 때,
나 또한 그가 물의 정령왕이란 사실을 새삼 자각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지는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뻔했다.
여기까지 와서 발뺌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푸욱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게 아니라 정말 엘퀴네스가 맞는데요.”
“헉! 여, 역시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그와 계약한 정령사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내 대답에 기사는 호흡곤란이라도 일으킨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을 보니 금방이라도 실신해서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기사는 갑자기 무언가를 찾는 듯 다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행동의 뜻을 짐작하곤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엘퀴네스라면 정령계에 돌아갔습니다. 조금 쉬다가 올 거예요.”
“헉, 그, 그렇군요. 크, 크흠. 실례했습니다. 너무 흥분해서 그만…저, 레이디께선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레이디?”
또 여자로 착각한 건가. 이제는 담담하게 이런 상황을 납득하는 내가 무서울 정도다.
오히려 순진무구한 얼굴로 ‘왜 그러십니까?’라고 묻는 걸 보니 머리까지 아파올 지경이었다.
‘확 마법으로 성형이나 해버릴까…’
나는 잔뜩 구긴 얼굴로 중얼거리며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었다.
“저 여자 아닌데요.”
“아, 그러셨…네, 네에?”
“여자 아니라구요. 그러니까 그 레이디 어쩌구 하는 말은 좀 빼시고 질문하시죠?”
“헉…죄, 죄송합니다. 이런 실례를…”
미안한 표정을 하면서도 기사의 얼굴엔 의심스럽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나중엔 그 시선이 묘한(?) 부분에까지 이르는 것을 보고 나는 불쾌한 표정으로 빽 소리쳤다.
“어딜 봐요?”
“쿨럭.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됐습니다! 아무튼 제 이름은 엘이고, 나이는 18세입니다. 됐죠?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예? 아앗 잠깐만요! 성은 없으십니까? 혹시 평민이신 건가요?”
이제 기사는 내가 남자라는 사실보다 귀족이 아니라는 것에 더 놀라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급한 표정으로 뭔가를 물으려는 듯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 순간 어느새 나타난 시벨리우스가 내 앞을 막아서며 기사를 향해 쏘아붙였다.
“넌 뭐야? 엘에게 무슨 볼일이 있나?”
“예, 예? 아, 저 그것이…그저 간단한 조사를…”
“조사라니?”
“이번 사건의 경위와 일을 수습한 과정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여기 계신 소.년.께서 모든 정황을 지켜보셨다고 하기에…”
“그래? 그런 거라면 나 역시 처음부터 봤으니까 내가 대답해 주지. 엘,
너는 이만 가서 쉬어. 아까부터 계속 돌아다녀서 피곤할 텐데.”
“아, 그래줄래? 그럼 나야 고맙지.”
그러자 우리의 대화를 들은 기사가 눈에 띄게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아, 안됩니다! 그분은 저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외람되지만, 저는 자랑스러운 세이크 제국의 기사로서,
귀빈의 신병을 확보하고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분이 정령왕 엘퀴네스의 계약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이제부터 기사단의 보호를 받으셔야 합니다.”
이 무슨 생뚱맞은 답변이란 말인가.
나는 너무도 당당하게 내 신병을 요구하고 있는 기사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기사의 속셈이야 뻔했다.
비단 이 시대뿐만이 아니라 정령사라는 직업은 어딜 가도 귀한 대접을 받는다.
마법사와 마찬가지로 전쟁이 발할 시 적에게 강한 범위공격을 가할 수 있는 능력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귀족도 아닌 내가 무려 정령왕의 계약자가 되었으니,
혹시나 그 능력을 가지고 타국으로 이주할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말이 ‘보호’지 실상은 옆에 두고 감시할 생각인 게 틀림없었다.
시벨 역시 짐작했다는 듯 대놓고 비웃는 얼굴을 하며 대꾸했다.
“이봐. 넌 지금 주변의 상황이 보이지도 않나?
어차피 폭주는 멈췄고, 엘은 너희들이 보호해 주지 않아도 충분히 강하다.
게다가 지금은 할 일이 많다. 이런 데서 너희들에게 시간을 뺏길 이유는 없어.”
“하지만…”
“내 말 못 알아들었나? 더 이상 귀찮게 굴면 네 놈도 저기 굴러다니는 것들과 똑같이 만들어주지.”
“……”
녀석이 싸늘한 표정으로 가리킨 것은 아직 채 수습하지 못한 시체들 이었다.
그것을 본 기사는 얼굴을 창백하게 굳히곤 순순히 물러날 뜻을 밝혔다.
물론 나중에 다시 정식으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긴 했지만 말이다.
기사가 떠나고 나자 시벨은 난감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아, 앞으로 피곤하게 됐군. 저 녀석들 계속 끈질기게 따라 붙을 것 같은데?”
“상관없어. 어차피 대충 정리가 되는대로 떠날 거니까.”
“떠난다고? 어디로?”
“글쎄…일단 여기서의 용무를 마치고 나서 결정해야 할 것 같아.”
“용무? 혹시 검술대회를 말하는 거야? 하지만 상황이 이래서야 경기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 텐데.”
“그것 말고.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거야.”
암, 중요하고말고. 내가 무엇 때문에 그 고생을 하면서 검술훈련을 했는데?
바로 이 대회에서 우승해야만 라미아스를 만날 수 있다는 조건 때문이었다.
그를 만나야 영혼의 보석에 대한 정보도 듣고,
더 나아가 라피스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지금 라미아스를 만난 이상, 나는 대회가 다시 시작되더라도 계속 출전할 생각이 없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정작 보석 얘기는 꺼내보지도 못했잖아?!’
나는 이제라도 물어볼 생각으로 그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당연히 근처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라미아스는 어느새 행방이 묘연해져 있는 상태였다.
처음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척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시벨, 혹시 라미아스님이 어디 갔는지 알아?”
“아마 다시 세피온 공작으로 돌아갔겠지.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데 계속 모습을 감추고 있을 순 없잖아.
그는 이번 대회의 개최자인데다, 책임자이기도 하니 앞으로 당분간은 쉴 틈 없이 바쁠걸?”
“으~하긴. 그럼 나중에 한가해질 때 정식으로 면담을 요청해야 하는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물어볼걸.”
“뭐야, 용건이라는 게 그 녀석한테 있는 거였어?”
궁금한 표정으로 묻는 시벨에게 나는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중에 다시 만날 수야 있겠지만,
서둘러 끝냈을 수도 있는 일을 넋 놓고 있다 그르쳤다는 생각에 영 기분이 찝찝했다.
게임으로 치자면 퀘스트의 완료를 코앞에 두고 실패한 것 같달까.
“어째 이곳에 와선 한 번에 되는 일이 없네.”
또 다시 무료한 기다림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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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 12-4. 자각 (4) 이환(煥)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엘뤼엔이 돌아온 건 그날 늦은 저녁 무렵이었다.
그와 같은 시간, 지원을 요청을 받은 황성의 기사들과 치유 신관들도 도착했으나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그에게만 쏠려있었다.(심지어 세피온 공작의 친위대까지 말이다.)
나는 한결 안색이 좋아 보이는 그를 반갑게 맞이하며 물었다.
“아버지! 이제 오는 거야? 몸은 좀 어때?”
“애초에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잖아. 어차피 부려먹을 생각만 하는 주제에 꽤나 위하는 척 하는군.”
“뭐야, 그래서 삐졌어? 이왕 있는 능력 이럴 때 사용해야지 썩혀서 뭐해?”
“흥. 말해두지만 내 능력은 비싸다. 그에 어울리는 환자가 아니면 치료하지 않을 거야.”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저기…근데 다른 정령왕들에게는 들렸다 온 거야? 트로웰이나 이프리트님의 상태는 어때?”
“내 알바 아니다. 알아서 추스르고 있겠지.”
“뭐? 아직도 다 회복이 안 된 거야?”
이전에도 트로웰은 몇 번인가 역소환 된 적이 있지만 회복하고 돌아온 시간은 한나절도 채 걸리지 않았었다.
때문에 나는 당연히 그들이 엘뤼엔과 함께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추스르는 상태’ 라니. 폭주의 파괴력이 그만큼 엄청나다는 뜻일까?
그러자 엘뤼엔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고작 역소환 된 정도로는 회복이 어렵지 않아.
이프리트 녀석이야 아직 완전히 영역이 복구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조금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그럼 트로웰은?”
“정령계에 돌아온 날부터 바람의 영역에서 꼼짝도 하지 않더군.”
“미네르바의 영역에서?”
내심 짐작하고 있던 일이라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은 채 되물었다.
이때만큼은 늘 담담하던 엘뤼엔 역시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녀석은 탄생의 순간부터 유달리 미네르바에 대한 집착이 심했지.
또 무슨 꿍꿍이를 꾸밀 진 모르겠지만 그냥 내버려둘 생각이다.
스스로 한계치로 몰아가기 전에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
“원래 아는 게 많은 녀석일수록 스스로의 일엔 방심하는 법이지.
어쨌든 내 경고도 있었으니 넌 건드리지 않을 거다.
그러니 되도록 다음에 만날 땐 녀석을 자극하는 말은 하지 말도록 해라.”
차분한 그의 설명에 나는 오히려 기분이 더욱 엉망이 되는 걸 느꼈다.
내 설득은 실패했고, 아직 트로웰은 인간을 멸종시키겠다는 계획을 철회하지 않은 상태다.
단순히 그와 친해지고 싶었던 것일 뿐인 내게 이런 식의 면죄부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엘뤼엔을 앞세워 목숨을 부지한 꼴이 된 것 같아 비참했다. (그게 사실이긴 했지만.)
“휴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걸까.”
“그걸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처음부터다. 나로선 그 녀석을 설득할 생각을 한 것부터가 어이가 없군.”
“윽. 그야 내가 좀 대담하긴 했지만…말을 꼭 그렇게 해야겠어?
그 미네르바의 계약자만 아니었어도 괜찮았단 말이야. 누가 일이 이렇게 꼬일 줄 알았나.”
“그게 바로 현실이란 거다, 멍청아. 때론 무슨 짓을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는 거야.
그런데도 무모하게 도전하는 걸더러 바로 주제도 모른다고 하지.”
“……”
엘뤼엔은 절대 사람을 비꼬지 않는다.
그저 너무도 정확한 사실만을 말해서 가슴에 비수를 꽂을 뿐이다.
특히 이 시대의 그는 그런 면에서 더더욱 가차 없었다.
매번 이럴 줄 알면서도 자신을 변호하려고 하는걸 보면, 내심 그에게 위로라도 받고 싶었던 걸까.
그저 한숨만 나올 일이었다.
부상자의 숫자가 많음에 따라 임시로 지어둔 텐트 역시 벌써 십 여 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중태인 환자들만 모아둔 곳에 엘뤼엔을 집어넣은(?)다음,
사람들을 도와 아직 남아있을 생존자를 찾는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마법도구의 역할이 굉장히 컸다.
사람의 생체 반응을 알아내는 것과 어두워진 주변을 밝히는 것 등,
그 모두가 마법의 도움 없인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황성에서 지원 온 사람들 중에선 마법사들도 꽤 많은데다,
넘칠 만큼 마법도구가 많은 시대였기 때문에 그로 인한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일단 누군가가 탐지마법을 써서 생존자를 찾아내면 사람들이 그 속으로 들어가 들것으로 옮겨왔다.
너무 좁은 틈새에 갇혀 꺼내기가 어려운 사람의 경우,
실드를 치고 그 위를 가로막고 있는 방해물을 부수어 공간을 넓히게 만들었다.
이제는 제법 거드는 사람이 늘어나 구조와 응급처치 모두 무리 없이 착착 진행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는 중 나는 우연히 도우는 사람 속에서 낯익은 한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바로 3회전에서 탈락하고 대기실을 떠났던 크리스였다.
“크리스형! 무사했군요!”
“어? …누, 누구?”
침통한 표정으로 돌을 나르고 있던 그는 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고는 갑자기 얼굴을 경직 시켰다.
그 모습에 나는 서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예요, 엘! 3회전까지 같은 방 사용했었는데 목소리도 기억 못해요?”
“헉! 엘? 네가 엘이라고?”
“어라, 정말 몰랐나보네?”
“앗, 그야 넌 계속 후드를…어, 어떻게 된 거야? 너 설마 여자였냐? 아하하. 미안, 미안.”
놀란 표정으로 묻던 그는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곧바로 사과를 건넸다.
그리곤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허둥지둥 다른 화제를 꺼내기 시작했다.
“목소리 들으니까 확실히 너 맞네.
이야~ 너 굉장한 미소년 이었구나? 그런데 왜 그동안 얼굴을 가리고 다녔어? 아깝게 시리.”
“형처럼 여자로 오해하는 사람이 가끔 있어서요.”
“…핫핫핫! 아무튼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갑다!
안 그래도 굉장히 걱정하고 있었어.
이 폭발 속에 휘말려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이렇게 멀쩡한 모습을 보니 한시름 덜었다. 그런데 슐츠 녀석이랑 무뚝뚝한 귀족씨는 어떻게 됐어?”
“아마 어딘가에서 치료받고 있을 거예요.”
“뭐? 설마 어디가 심하게 다친 건 아니겠지?”
“괜찮아요. 제가 대충 봤는데 가벼운 찰과상이랑 의식이 없는 것 빼곤 큰 문제는 없었거든요.”
“그래? 휴우~다행이다.”
크리스는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갑자기 큰 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웬 회오리가 몰아치잖아.
먹구름은 꾸역꾸역 몰려드는데 정작 주변이 어두워지지는 않고.
건물들은 죄다 부서져서 하늘을 날라 다니지 않나,
땅은 온통 우르릉 요동치질 않나.
게다가 시퍼런 물줄기가 솟아나서 뱀처럼 꿈틀거리고! 난 이 세상의 종말이라도 온 줄 알았다니까?”
“아하하, 확실히 평범한 폭발은 아니었죠.”
“말도 마라. 멀리서 보는 건데도 오금이 다 저리더라.
그런데 그게 정령왕이 폭주한 거라며? 루시엘 드 라비타 백작님이 이번 일과 관계가 있다는 말이 사실일까?”
“엥? 그건 어디서 들으셨어요?”
“일부러 들으려고 한건 아니고…이미 소문이 쫘악 퍼졌던데?
레파르 백작이 정령왕을 배신한 거라는 둥,
그게 루시엘 백작의 여동생 때문이었다는 둥. 뭐, 죄다 입증되지 않은 말들뿐이지만 말이야.”
그 말에 나는 새삼 펠리온과 루시엘의 생존여부가 궁금해졌다.
아마도 2차 폭발에서 살아남았다면 그들은 지금쯤 기사들에게 발견되어 세피온 공작의 자택으로 옮겨졌을 것이다.
그들 말고도 대부분의 살아남은 귀족들은 그와 같은 절차를 밟는다고 들었으니까.
그 두 사람은 이번일의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하니,
향후 제국에서 이 문제의 책임을 누구에게 넘기게 될지 궁금했다.
그러나 설령 추궁 없이 넘어간다 해도 이전처럼 웃고 살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펠리온은 더 이상 정령을 다룰 수 없게 되었고, 루시엘 또한 하나뿐인 여동생을 영영 보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엘 넌 용케 그 안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네. 운이 좋았죠, 뭐. 그러는 형이야 말로 무사하셨네요?”
“크흠. 그게 말이지…실은 돈이 없어서 경기장에 못 들어갔거든.
무슨 놈의 관전비가 그렇게 비싼지, 돌아갈 경비를 빼고 나니까 한 푼도 남는 게 없더라고.
그래서 엘 너랑 슐츠의 4회전 시합도 못 봤어. 뭐, 덕분에 목숨은 건사했지만.”
아~그래서 후드를 벗은 내 얼굴을 못 알아본 거였군.
나는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갑자기 목소리를 낮춘 크리스가 은밀한 이야기라도 하듯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근데 너 그거 알아?”
“네? 뭘요?”
“물의 정령왕 말이야. 그 엘퀴네스를 소환한 인간이 나타났대!
이번의 그 엄청난 폭발을 해결한 것도 그 사람이라던데?
아! 너라면 계속 그 안에 있었으니 봤을 수도 있겠구나. 혹시 얼굴 봤어? 어떻게 생긴 사람이디?”
“네? 아, 그, 그게…”
어라라. 설마 아직 내가 정령사라는 것도 모르고 있는 건가?
순간 당황한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라 슬쩍 말끝을 흐렸다.
그때 마침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 지는가 싶더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어딘가로 우르르 몰려가는 것이 보였다. 잔뜩 긴장한 얼굴들을 보아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진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지?”
“그, 글쎄요?”
모두가 달리는 와중에 나와 크리스만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있었다.
그러자 잠시 후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한 남자가 튀어나와 크리스를 향해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어이, 크리스! 거기서 뭘 하고 있어?
얼른 이리 와 봐! 특종이야, 특종! 정령계에 갔던 엘퀴네스님이 다시 돌아왔대!”
“!”
“뭐? 그게 정말이야?”
“그래! 저쪽 텐트 안에서 중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다더라!
지금 가면 그 대단한 계약자도 볼 수 있을 지도 몰라!
여기 일도 대충 수습된 것 같겠다, 놓치기 전에 얼른 가보자고!”
“와우! 좋았어! 당장 간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크리스와는 달리, 나는 그저 얼떨떨한 심정이었다.
저 많은 사람들이 모두 정령왕을 보기 위해 몰려가는 거였다니!
아마 나중에 엘뤼엔이 내 목을 조르려고 하지 않을까?
‘이번엔 정말 죽을지도…’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기분에 나는 주르륵 식은땀을 흘렸다.
이런 내 맘도 모르고 크리스는 즐겁게 내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어이, 엘 너도 가자!”
“에? 앗, 저기 나는…”
“그렇게 머뭇거릴 때가 아니야. 두 번 다신 이런 기회가 안 올지도 모른다고!
정령사라 잖아, 정령사! 자자, 어서 가자, 어서!”
글쎄 내가 바로 그 계약자란 말이닷! 당사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누굴 보러 간다는 거야!
하지만 나는 그렇게 외치기도 전에 크리스에게 끌려가다시피 어디론가 뛰어가야 했다.
그리하여 잠시 후에 도착한 곳은 예의 엘뤼엔이 한창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는 바로 그 현장이었다.
이미 상당수의 사람들이 소문을 들은 것인지, 텐트 앞엔 몰려든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도 정령왕이 무섭긴 했는지 차마 안으로 들어가진 못하고 밖에서만 힐끔힐끔 엿보는 듯 했다.
크리스와 그의 친구 역시 사람들 틈새에 끼어 열심히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어때? 보여?”
“으으, 잠깐만 기다려봐. 사람들 머리 때문에 잘…오오! 보인다, 보여!”
“정말? 어떠냐?”
“머리 색깔이 완전 물빛이야! 으아~ 진짜 무지 잘 생겼다.
이거 나 같은 놈은 어디 기죽어서 고개나 들고 살겠냐?”
“어디, 어디! 나도 좀 보자.…오오, 정말 멋지다! 나 태어나서 정령왕은 처음 봐.”
“킥킥. 이하동문이다. 그런데 그 계약자란 사람은 누구지?”
“잘 찾아봐. 근처에 있겠지 뭐.”
이때 나는 최대한 이들에게서 떨어지려고 노력하며 시선을 먼 허공에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파도처럼 좌악 갈라지는 것을 느꼈다.
굳이 보지 않아도 상황은 뻔했다. 아마 치료를 마친 엘뤼엔이 텐트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리라.
“야, 야! 엘퀴네스님이 나오고 있어!”
“헉! 우와, 정말이네! 엘, 넌 뭐하고 있어? 정령왕 안 볼 거야?”
어린애처럼 흥분한 크리스의 재촉이 이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자 잠시 후 이런 내 모습을 한심하게 여기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 멍청히 뭘 하고 있는 거냐?”
“!!”
웅성웅성.
아아, 결국 올 것이 오고 만 것인가!
힐끔 돌아보니 바로 뒤편에서 엘뤼엔이 팔짱을 낀 채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덕분에 자연히 사람들의 시선 또한 나에게 몰려들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크리스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어이, 엘. 지금 엘퀴네스님이 너한테 하는 소리인거 맞냐? 널 바라보고 있는 거 맞지?”
“하하, 네에, 그런 것 같네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원래 엘퀴네스님과 아는 사이였어?”
해명을 요구하는 그의 눈빛에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말에 대답한건 내가 아니라 엘뤼엔 본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물음에 가까웠지만.
“내 계약자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네, 네? 계…계약자?”
그러자 헉! 하고 크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들 대부분이 크리스처럼 폭주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자세한 상황을 목격하지 못했던 자들이었다. (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부상으로 치료중인 상태다.)
엘뤼엔은 그 반응을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넘기며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렇다.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해라. 시간 끄는 인간은 질색이니까.”
“히익! 아, 아닙니다! 시, 실례가 많았습니다!”
크리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하곤 옆에 있던 친구와 함께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다.
슬쩍 나를 살피는 그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아무런 대비도 없이 뒤통수를 맞은 꼴이니 배신감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쩝, 여기 오기 전에 미리 말해둘걸.’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미처 변명할 겨를도 없이, 이어지는 엘뤼엔의 말에 황급히 시선을 돌려야했다.
“네 요구대로 저 안의 녀석들은 전부 치료했다. 이제 용건은 끝난 거겠지?”
“아앗! 잠깐만! 설마 그것만 하고 말 셈?”
“그럼 또 뭘 부려먹으려고 그러는 거냐? 내 능력은 비싸다고 말했을 텐데?”
“그래도 이왕 도와주는 김에 조금만 더 부탁해~
아직 무너진 건물 밑에 있을 생존자들 구조작업도 해야 하고…음, 또…”
“…완전히 작정을 했군.”
그래도 화내지 않는 것을 보면 의외로 엘뤼엔은 순순히 도와줄 생각인 듯 했다.
그 증거로, 낮게 투덜거리면서도 그의 시선은 이미 폐허로 변해버린 장소를 향해 있었다.
나는 기대를 가득 담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도와 줄 거야?”
“알았으니까 가만히 보고만 있어라.”
“어떻게 하려고?”
내 질문에 그는 대답하지 않은 채 가만히 한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질서 없이 마구 뒤엉켜 있던 돌 더미들이 일제히 공중으로 둥실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마치 그 공간만 무중력 상태가 된 것 같았다.
“맙소사…”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
한창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던 자들까지 모두 할 말을 잃고 멀거니 그 장관을 구경했다.
그때 나는 물로 된 늑대 여러 마리가 각자의 등에 기절한 사람을 싣고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물의 상급 정령인 시큐엘들 이었다.
멍하니 있던 사람들은 곧 그들이 싣고 있는 것이 무언지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생존자들이다!!”
“!”
그러자 마치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되었던 마냥, 둥실 떠올라있던 돌무더기들이 원래대로 다시 쌓이기 시작했다.
언제 움직였냐는 듯, 처음 있었던 장소 그대로 되돌아간 상태였다.
하지만 모든 게 원상태로 돌아온 이후에도 사람들은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감탄을 넘어서 다들 하나같이 넋이 빠진 얼굴들이었다.
그 소름끼칠 정도로 고요한 정적을 깬 것은 여전히 태연한 엘뤼엔의 목소리였다.
“정확히 열여섯. 이 외엔 전부 압사 당했다. 설마 죽은 녀석을 살려내란 부탁까진 하지 않겠지?”
“괴, 굉장해. 어떻게 한 거야?”
“물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니까. 고체 안에 수분의 비율을 높인 다음, 그것을 내 의지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내겐 숨 쉬는 것보다 간단한 일이지.”
으음. 하긴, 정령왕에게 중력이니 뭐니 과학적인 법칙이 통할 리가 없겠지.
나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만큼은 내가 그와 같은 정령왕이라는 사실이 전혀 실감이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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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그 사이 시큐엘들은 느긋하게 걸어와 등에 업고 있던 부상자들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때서야 정신이 든 사람들이 모두 환호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짝짝짝짝짝!
우렁찬 함성 속에는 엘뤼엔을 향한 감사와 경외의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가 보여준 놀라운 광경은 둘째치고서라도,
밤을 새서 해도 모자를 작업을 단 한 번에 해결했으니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번에도 엘뤼엔은 그들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고 나를 향해 말했다.
“가자.”
“응? 어딜 가?”
“묶을 곳 말이다. 설마 밖에서 내내 밤새울 생각은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만. 어차피 지금 찾아봐도 이미 여관은 전부 만원일 걸?
그럴 바에야 시벨에게 부탁해서 천막이라도 얻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시벨? 그 유니콘 말이냐?”
왠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나는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그 녀석 마법으로 임시 숙소를 만들 수 있거든.
내부도 보통 집이랑 똑같아.
침대 숫자도 원하는 만큼 늘릴 수 있는 것 같으니까 나 하나쯤 재워주는걸 거절하지는 않을 걸?
어차피 아버진 잠깐 정령계로 돌아갔다 와도 되잖아.”
“기각한다. 굳이 그녀석의 도움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어.
게다가 그놈은 널 여자로 착각하고 있잖아. 방심하고 있다가 정조라도 잃을 셈이냐?”
“쿠, 쿨럭! 그런 말도 안 돼는!”
“말이 되고 안 되고는 내가 결정할 일이지.
난 너의 계약자임과 동시에 보호자이기도 하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는 건 당연한 거야.”
“쳇, 아버지가 언제부터 그렇게 나를 챙겼다고?”
“시끄럽다. 일일이 말대답 하지 마.”
그는 전에 없이 엄한 표정을 지으며 내 항의를 단번에 일축시켰다.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기사로 보이는 한 사람이 튀어나와 황급히 말을 건네 왔다.
“시, 실례하겠습니다. 저는 세피온 공작각하 직속 친위 기사대의 일원, 쿠거 드 오리우스입니다.
정령사님의 숙소라면 이미 공작님께서 따로 지시해주신 바가 있으십니다만.”
“네? 라미…아니, 세피온 공작님이오?”
“예, 밤이 깊어지기 전에 자택으로 모시고 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반가운 제의였지만 나는 어쩐지 꺼림직한 느낌을 받고 머뭇거렸다.
이상할정도로 초롱초롱한 기사의 눈동자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왠지 지금 이대로 따라가면 앞으로 굉장히 골치 아파질 것 같았다.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것일까. 엘뤼엔은 찬바람이 쌩쌩 불정도의 냉정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필요 없다. 이 녀석의 거처는 내가 정할 것이니, 너희 인간들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예? 하, 하지만…”
“네놈들의 주인에게 가서 전해라.
쓸데없는 배려는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불러온다고 말이다.
지금까지 베푼 호의를 내 손으로 거두게 만들지 말아라.”
“!!”
조용히 억압해가는 그의 기운에 기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어 후다닥 물러났다.
나는 사람들이 모두 멀찍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제의를 거절한 거야? 좋은 기회잖아?”
“웃기는 소리. 저 녀석들이 단순히 숙소 제공에서 끝날 줄 아냐?
황성의 기사들까지 와 있는 자리다. 아마 이대로 수도까지 끌고 가려고 할 걸?”
“하지만 라미아스가 배려한…”
“라미아스가 아니라 세.피.온.이라고 했다.
녀석이 개인적으로 너를 챙기려고 하는 거였다면 굳이 기사에게 시키지 않았을 거야.
그놈은 지금 자신의 유희에 맞춰 상황에 따른 제의를 한 것뿐이다.
거기에 홀랑 넘어가면 나중에 억울하다고 해도 할 말 없지.”
“윽, 그런 거야?”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도 한 기사가 내 신변을 요구했었지.
그와 같은 맥락인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그저 ‘세피온’이란 이름에 방심한 것이 죽도록 창피했다.
나는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며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어쩌려고? 시벨의 도움도 싫다지, 자택으로 들어가는 것도 안 되지. 그냥 노숙하란 말이야?”
“이전에 트로웰과 훈련하던 곳이 있잖아.”
“엥? 저기요, 아부지. 잊고 있는 것 같은데…여기서 거기까지 가려면 3일은 걸리거든요? 밤새서 걸어가자고?”
“흥. 공간이동 마법은 폼으로 있는 줄 아는 거냐?”
아, 그렇지, 참. 이동마법이 있었지.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 기대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텔레포트 스크롤이라도 있는 거야?”
“무슨 헛소리냐? 그딴 마법 아이템 없이도 나 역시 공간이동쯤은 할 수 있다.”
“헤에, 그렇구…아앗! 잠깐!! 분명 처음에 만났을 때는 날 데리고 텔레포트 할 수 없다고 그랬잖아!”
처음 이 세상에 떨어지던 날, 드래곤을 만나기 위해 공간이동 마법을 부탁한 내게,
엘뤼엔은 딱 잘라 무리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할 수 있다니!? 지금 누굴 놀리는 건가?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짓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땐 귀찮았으니까.”
“크헉! 그게 무슨 소리얏! 여기까지 걸어오는 여정이 더 귀찮았겠다!”
“그건 네 생각이겠지. 설마 정말로 정령왕이 너 하나 데리고 이 정도 거리도 이동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거냐?”
한심하다는 듯이 묻는 말에 나는 순간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정령왕이 공간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나 역시 언젠가 동료들을 데리고 먼 바다건너까지 텔레포트 해본 경험이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왜 순진하게 속아 넘어갔냐고 묻는다면…
“아버지 말이니까 당연히 그러려니 했지! 젠장! 속인주제에 뭐가 그렇게 당당한 건데!”
“덕분에 네가 트로웰에게 검술을 배울 시간도 있었던 거다.
어차피 빨리 온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 그런다고 라미아스를 일찍 만날 것도 아니고.”
“어쨌든 속인 건 속인 거잖아!”
“호오, 그래서 지금 내게 반항하겠다고?”
재미있다는 듯 입 꼬리를 올리며 묻는 것과는 달리 엘뤼엔의 눈빛은 이미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것을 본 나는 찔끔한 표정으로 얼른 항복을 선언했다.
“누, 누가 그렇대?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럼 그냥 가만히 입 다물고 있어라. 내 인내심을 시험해보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이런 독재자 같으니…!’
물론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켰다.
그대로 내뱉었다가 아버지 손에 인생 하직하는 아들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어쨌든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나는 아주 오랜만에 수련하던 장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워낙 오랫동안 머물던 곳이어서 일까? 거의 한 달만의 방문이었는데도 마치 어제 왔던 것처럼 친숙한 느낌이었다.
넓은 공터의 흙바닥에는 지난날 트로웰과 함께 수련하면서 새겼던 발자국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것을 보고 마음이 허전해진 나는 무심코 한마디 중얼거렸다.
“트로웰도 같이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곳에 온 이후론 거의 늘 셋이서 함께 다녔기 때문인지, 그의 빈자리가 무척이나 크게 느껴졌다.
그러자 엘뤼엔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바라는 것도 많군. 목숨을 건사한 거나 다행으로 생각해라. 그 녀석 손에 죽을 뻔 한 걸 벌써 잊은 거냐?”
“윽…하지만 본심은 아니었을 거야. 왠지 괴로워 보였는걸.”
“그야 그렇겠지. 그 녀석이 널 마음에 들어 한 건 사실이니까.
그래도 자신의 목적을 굳히기 위해서라면 그런 감정 따윈 아무렇지 않게 접을 녀석이다.
너무 마음을 열지 않는 편이 네게도 좋아.”
“헤에, 날 걱정해 주는 거야?”
“보고 있으려니 한심해서 그렇다.
자신을 죽이려는 상대더러 본심은 아니었을 거라고? 하, 이거야 원 겁이 없는 건지, 대책이 없는 건지…”
대놓고 혀를 차는 엘뤼엔의 말에 나는 조금은 발끈해서 대답했다.
“이래봬도 가능한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거야. 가족처럼 생각하니까.”
“가족? 네가 트로웰을?”
“그래! 그러면 안 돼?”
“농담이 심하군. 누구 마음대로 가족이지?
날 아버지라고 부르는 걸 그냥 내버려뒀더니 이제 주제 파악까지 못하게 된 거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생각보다 날카로운 반응에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엘뤼엔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단호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넌 인간이다. 그 사실을 단 한순간도 잊지 말아라.
그녀석이나 나나, 너와는 사는 세계가 전혀 달라.
너도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 차이를 분명히 깨닫는 것이 좋을 거다.”
“……”
마치 잊고 있던 쓰디쓴 현실에 직면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나는 쉽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쳐두고 너무 먼 길을 돌아온 걸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내 모든 사정을 털어놓고 정체를 밝혔다면, 이런 냉정한 평가가 돌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트로웰 역시 내 설득에 더 귀를 기울였겠지.
종족의 여부를 떠나 그냥 나 자체로 다가서려 했던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시도였는지 이제야 실감이 들었다.
이들은 인간과 정령을 결코 같은 범주로 볼 수 없었다. 엘뤼엔의 말처럼, 서로 사는 세계가 너무 달랐으니까.
이제는 내가 그 속에 속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숨쉬기 힘들만큼 괴로워졌다.
==============다른곳에 공유하지 마세요!!!===============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정령왕 엘퀴네스의 계약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공국 전체에 퍼졌다.
워낙 목격자가 많기도 했지만, 제대로 입단속을 시키지 않고 돌아간 것이 화근이었다.
내가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기 위해 다시 공국에 왔을 땐,
부상을 당한 귀족들은 모두 치료를 마치고 수도의 자택으로 돌아간 후였다.
루시엘과 펠리온 역시 수도에 있던 그들의 자택으로 송환되었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이번 사건의 경위가 거의 드러나는 바람에 이미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에 따라 나 역시 이번 사태를 일으킨 정령사 펠리온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함께 들리고 있었다.
가장 황당한 일은 제국의 황제로부터 나를 찾아내라는 수색명령이 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일단 대외적으론 이번 사태를 수습한 공로를 치하하고 상을 주겠다는 핑계였지만 그 속을 누가 알겠는가.
어쨌든 그런 이유로 곳곳마다 무장한 기사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나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또다시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행여나 들킬세라 조심스럽게 돌아다녀야 했다.
엘뤼엔 역시 눈에 뜨이지 않게 자연체의 모습으로 변하여 이동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백날 가도 라미아스를 만나기가 어렵겠는걸.”
내가 이곳을 방문한 최종목적-즉, 보석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선 반드시 그를 다시 만나야했다.
하지만 사방에 깔린 기사들의 숫자가 워낙 많다보니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마을로 통하는 모든 입구는 물론 세피온 공작의 자택으로 이어지는 통로까지 철저히 감시하는 데서야,
남몰래 침입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는 연락을 취해보기도 전에 발각 되거나 포기하고 돌아가야 할 처지였다.
이런 내 곤란한 처지를 뻔히 알면서도 엘뤼엔은 나 몰라라 외면하고 있었다.
나는 반쯤은 항의하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 철통같은 수비를 뚫고 어떻게 몰래 라미아스를 만나냔 말이야! 엘퀴네스! 그냥 텔레포트로 들어가자, 응?”
-귀찮아. 그쯤은 너 스스로 알아서 해결해라.
“쳇, 너무해! 그거 좀 도와준다고 어디가 덧나?”
-정 안되겠으면 그냥 기사들에게 발각되면 되는 일 아니냐.
네 평생 꿈도 꿔보지 못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만날 수 있을 거다, 아마.
“그리고 그 다음은 알아서 빠져나오고 말이지?”
-호오, 제법 상황파악이 빨라졌군.
그런 말 들어봤자 하나도 기쁘지 않아!
내가 속 터진 표정으로 씩씩거리자 엘뤼엔은 피식 웃으며 지나가듯 한마디 이었다.
-그 녀석을 만나야 하는데 굳이 네가 찾아갈 필요는 없는 거 아니냐?
“뭐?”
-여기서 네가 이럴게 아니라, 그 녀석더러 오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소리다.
“아…!”
그때서야 나는 스스로의 융통성 없음에 깊이 탄식했다.
내가 모습을 감추는 것보다야,
폴리모프 마법이 가능한 라미아스 쪽이 정체를 숨기기 편하다는 것을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 하지만 라미아스는 유희를 방해 받는걸 싫어한다며.
지금의 ‘세피온 공작’으로선 내 요청에 혼자 나와 주기를 바라는 건 무리지 않을까?”
-물론 평소라면 그렇겠지.
허나 이미 녀석은 네게 어떤 대답이든 해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을 텐데?
드래곤은 약속의 종족이라 그걸 위해서라도 네 요청을 거절하지 못할 거다.
“아! 맞다, 그랬지! 그걸 왜 이제야 알려주는 거야?”
-알아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보려고 했지. 역시나 너무 무리한 바람이었던 것 같군.
“뭐야? 인간은 원래 기억력이 나쁘다고! 약속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단 말이야.
그 정신없는 와중에 지나가듯이 한 말을 누가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어?”
-별로 급한 용건이 아니었던 모양이지?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보통은 지나가듯이 한말이라도 붙들고 늘어지는 게 정상 아닌가?
“윽…”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꼼짝없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와 반대로 엘뤼엔은 승자 특유의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부턴 어쩔 작정이냐? 몰래 연락을 취하는 일도 쉽지는 않을 텐데?
“흥, 누굴 바보로 알아? 그 정도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대답과 동시에 나는 즉시 시큐엘 한 마리를 소환했다.
지금까지 하급 정령들을 소환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상급의 정령을 소환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과연 나이아스를 불러낼 때와는 차원이 다른 양의 마나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녀석은 소환되자마자 엘뤼엔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나를 보며 특유의 딱딱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로 불렀는가?
‘어쭈, 이놈 말투 보게…’
생각해 보면 시큐엘은 상급 정령.
정령계에서 왕 다음으로 높은 직분을 가진 녀석으로서 인간을 얼마든지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의 존재였다.
황제인 이사나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반말하던 녀석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머릿속에서 ‘정령=부하’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있는 나로선
이런 녀석의 행동이 무지 고깝게만 느껴졌다.
하급 정령들이 조잘조잘 반말로 떠들어대는 것은 귀엽게 넘어가줬지만,
왠지 이 녀석만큼은 용서가 안된달까?
그것은 아마도 시큐엘의 말투에 인간을 깔보는 듯한 억양이 서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이곳 세피온 공작이라는 남자를 찾아가 내가 만나길 바란다고 전해줘.
아참, 답변으로 만날 장소도 알아다 주고.”
-…상급 정령인 나를 고작 그런 일에 쓰겠다는 것인가?
늑대 주제에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묻는 말에 나 또한 당연하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의 정령 중에서 인간들에게 직접 의사소통이 가능한 게 너밖에 없잖아. 그럼 엘퀴네스를 시키리?”
-무엄한! 어찌 정령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가!
“호오, 지금 안가면 정말 엘퀴네스한테 부탁해 버린다?”
-가, 가면 되잖은가! 가면!
자신들의 왕을 부려먹겠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시큐엘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역시 시대는 달라도 왕을 향한 충성심은 그대로인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뿌듯한 표정을 하는 내게 엘뤼엔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살다보니 날 이용해서 정령을 협박하는 녀석이 나올 때가 다 있군. 내게 부탁하면 들어는 줄 거라 믿는 거냐?
“훗, 상관없어. 중요한건 시큐엘만 그 사실을 모르면 된다는 거지.”
-굳이 그런 식으로 안 해도 들어줬을 거다.
“천만에! 그럼 내가 먼저 숙이고 들어가야 하잖아.
훌륭한 약점을 바로 옆에 놔두고 그냥 썩힐 순 없지!
두고 봐! 앞으론 두 번 다시 날 건방진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다!”
-무모하군. 정령이 억지로 굽힌다고 숙일 줄 아는 거냐? 정령사로서 기본적인 자각이 없군.
“시끄러! 난 한다면 한다고. 엘퀴네스는 절대 참견하지 마!”
단단히 쐐기를 박을 생각에 험악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는 잠시 뜻을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이 되었다.
조금 굳은 표정으로 침묵하던 그는 곧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벌렸다.
-너…
“응? 내가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
저 독설가가 말을 망설일 때가 있다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는 모양이다.
집요할 정도로 바라보는 내 시선에도 그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가끔씩 나를 보며 뭔가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왔을 뿐.
‘참견하지 말라고 해서 화난건가?
그럼 그렇다고 말할 것이지 어울리지도 않게 저렇게 눈치만 주는 건 뭐래?
드디어 마음잡고 개과천선이라도 할 작정인가?’
속으로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그때 마침 시큐엘이 돌아오는 바람에 나는 얼른 그에 대한 신경을 껐다.
내 앞에 성큼 나타난 녀석은 이런 하찮은 심부름(?)을 맡은 것이 불만이라는 듯,
여전히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
-전달하라고 했던 사항 모두 틀림없이 전했다. 안 그래도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더군.
“그래? 만날 장소는?”
-자신의 레어로 찾아오라고 했다. 그 편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편히 대화를 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뭐? 하지만 난 라미아스의 레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데.”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난 내가 들은 데로만 전달했을 뿐이다.
누가 엘뤼엔의 부하 아니랄까봐 녀석의 말투는 얄미울 정도로 그와 똑같았다.
기껏 도와주고도 고맙다는 소릴 못들을 타입이랄까.
그 증거로 나는 녀석을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마나까지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래? 알았어. 그럼 이만 정령계로 돌아가 봐.”
마치 부하를 대하는 듯이 명령하는 말투에 시큐엘은 미간을 잔뜩 좁혔지만,
내 옆에 있는 엘뤼엔을 의식해서인지 잠자코 사라졌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이 넓은 세상 어디에서 라미아스의 레어를 찾으란 말인가!
‘대책 없는 도마뱀 같으니라고! 다짜고짜 오라기만 하면 다인 줄 알아?
확실한 길잡이라도 붙여두고서 그런 소리를 하면 내가 말을…응? 길잡이?’
복잡한 표정으로 방법을 궁리하던 순간, 나는 퍼뜩 떠오르는 한 가지 사실에 황급히 엘뤼엔을 보며 물었다.
“저기…그러고 보니 엘퀴네스라면 찾아갈 수 있지 않아?
그 공간이동이란 거…아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거잖아.
그게 아니라도 정령왕이라면 위치를 찾는 것쯤은…”
그러자 그는 무지 한심스럽다는 듯이 나를 보며 차갑게 대꾸했다.
-그걸 이제야 깨달은 네 머리에 경의를 표하는 바다.
“으윽, 역시! 그, 그래서 어쩔 거야? 데려다 줄 거야?”
여기서 그가 싫다고 하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설마 거절하지는 않겠지 라는 심정으로 나는 조심스럽게 엘뤼엔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는 귀찮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별 수 없군. 녀석도 날 믿고 그런 소릴 지껄인 모양이니 특별히 데려다 주지.
“와아! 고마워, 엘퀴네스!”
-…그 엘퀴네스란 이름은 그만 둘 수 없겠나?
“응? 왜, 왜? 마음에 안 들어?”
혹시나 이름에 담긴 뜻을 알아버린 걸까?
평소보다 짜증스러운 그의 반응에 나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뭔가 더 말을 이으려는 듯 입을 열던 그는,
막상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푸욱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보였다.
“아니, 됐다. 그냥 너 편한 대로 불러라.”
“…?”
기분 나쁘다는 투가 역력한 주제에 편한 대로 부르라니.
어제 그 사건으로 인해 나는 계속 엘퀴네스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까 전 말을 망설이던 것도 그렇고…오늘의 그는 확실히 평소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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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엘뤼엔과 함께 도착한 곳은 어느 거대한 동굴 안이었다.
수 백 명의 사람들도 한 번에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이 넓은 공간은
마치 산 하나를 통째로 깎아 만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울퉁불퉁한 바위로 이루어진 천장과 벽, 흙바닥 외에는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여느 동굴이 그렇듯 이 안에도 전체적으로 축축한 습기가 가득했다.
아마 블루 드래곤이라는 그의 성향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았다.
‘여기가 레어라는 곳인가?’
내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바로 뒤편에서 들려왔다.
“여어~ 어서와. 연락이 없기에 그냥 돌아가 버린 줄 알았다고.”
“앗, 라미아스님! 먼저 와계셨군요.”
반가운 표정으로 돌아본 곳에는 예의 푸른 머리카락의 청년이 서있었다.
그는 한쪽 눈을 장난스럽게 찡긋 하며 대답했다.
“손님을 초청한 주제에 더 늦을 순 없지. 내 레어에 온 것을 환영해.”
“헤헤, 드래곤의 레어는 처음 와봤어요.”
“그으래? 생각보다 볼 건 없지? 실은 이곳에 온 손님은 네가 처음이야.
나도 잠자는 용도 외에는 써본 적이 없는 곳이거든.”
“엥? 그럼 평소에는 어디서 지내시는 데요?”
“그야 유희를 다니지. 짧고 많은 인생을 즐겨보는 게 내 방식이거든.
그런데 엘퀴네스는 어디에 있어? 같이 안온거야?”
“네? 바로 옆에 있잖아요.”
“하지만 안 보이는데?”
어리둥절하게 묻는 그의 말에 나는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엘뤼엔은 자연체의 상태, 즉 나 외에는 누구도 볼 수 없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찌푸린 표정으로 요지부동으로 서있는 엘뤼엔을 보며 말했다.
“엘퀴네스. 뭐해? 그냥 계속 그 상태로 있을 거야? 대화를 하려면 모습을 보여야 하잖아.”
-용건은 네게 있던 거 아니었나? 난 이대로가 더 편하다.
“하지만 라미아스님이 답답할 텐데…”
-그건 그놈 사정이지.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하긴 그로선 툭하면 귀찮게 달라붙는 도마뱀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왜인지 멍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라미아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엘퀴네스는 지금 이대로가 편하대요.
하실 말씀이 있다면 그냥 여기서 하세요. 어차피 다 듣고 있으니까. 대답은 제가 전해드릴게요.”
“잠깐…설마 너…소환되지 않은 형태의 정령들을 볼 수 있는 거냐?”
“네? 아, 제가 아직 말씀 안 드렸었나요?”
“말 안했어! 우어어~ 정말 보인다고? 자연체의 정령들이 보여??”
더 이상 커지지 않을 정도로 눈을 부릅뜬 라미아스는 아플 정도로 내 어깨를 강하게 잡고는 소리쳤다.
지금까진 다들 사실을 알아도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나는 갑작스런 그의 이런 행동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예에…그, 그런데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당연하지! 너 그게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는 거야?
네 자체가 정령이나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친화력이 엄청나단 거잖아! 게다가 말도 듣고 대화도 가능하다니!”
“하하, 그래도 정말 정령처럼 물을 다루거나 하지는 못해요.”
“어째서 그렇게 태연한 거냐?
네 능력은 보통의 인간들과 판이하게 다르다고! 전무후무한 일이란 말이다! 조금은 더 놀라보라고!”
이거, 내 정체가 미래에서 온 정령왕이라고 하면 심장마비라도 걸릴 사태인 걸?
나는 쓴웃음을 삼키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라미아스는 더욱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내 마음을 진정시킨 듯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긴, 태어날 때부터 그런걸 봐왔다면 새삼 놀라는 게 더 이상하겠지.
지금까지 용케 눈에 띄지 않고 살았군.”
“하하, 뭐…”
“웃을 일이 아니야. 네 그 능력을 알았다간 악용하려고 달려들 인간이 수천일거다.
뭐 엘퀴네스가 옆에 있으니까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앞으로 조심에 조심을 해야 할 거야.”
“네, 명심할게요.”
내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하는 것을 본 그는 그제야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마웠지만, 드래곤치곤 참으로 소심하달까?
이런 내 생각을 느꼈는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허둥지둥 화제를 돌렸다.
“엘퀴네스가 나타나지 않겠다면 아쉽지만 별 수 없지.
아참, 그러고 보니 이제껏 계속 세워두기만 했군. 이거 손님 대접이 영 시원치 않은걸? 자자, 일단 앉아.”
“네? 앉으라니…어디에요?”
방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한 참이었기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눈앞에서 갑자기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떡하니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보란 듯이 의자에 앉는 라미아스를 보며 나 역시 어색하게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이번엔 테이블 위에 주전자와 찻잔이 덩그라니 떠올랐다.
그것들은 누가 건들이지도 않았는데도 스스로 둥실 떠올라 잔에 차를 따른 다음,
나와 라미아스의 앞에 다소곳이 놓였다.
내가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이 라미아스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셔. 하이엘프들이 직접 키운 허브로 우려낸 차야. 대충 마실 만 할 거다.”
“네, 감사합니다. 방금 전의 그건 마법인가요?”
“응. 평소에 모두 갖춰둘 수 없으니까 그때그때 필요할 때만 꺼내 쓰는 식이지.
그런데 내게 물어볼 것이 있다고?”
“아아, 네.”
“가능한 느긋하게 대화하면 좋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이번 사건 때문에 내가 좀 바빠졌어.
지금도 잠깐 쉬고 싶다는 핑계로 사람들을 물리고 온 거야. 그래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하는데.”
“그건 상관없어요. 제게도 꽤 급한 용무거든요.”
나는 다행이라며 웃는 라미아스에게 곧바로 다음 말을 이었다.
“제가 라미아스님을 찾아온 건 영혼의 보석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고 들어서예요.
실은 저도 그걸 찾고 있거든요.”
“영혼의 보석? 아아, 그거라면 헤츨링 시절부터 모았지.
그런 것에 관심이 있었어? 겉보기엔 보통 보석에 비해 오히려 밋밋하고 장식적인 가치도 없는데.”
“그런 것 때문에 찾는 게 아니에요.”
“그럼 역시 다른 물건과 조합시키려고? 그런 걸 만들어서 뭐하게?
너라면 그런 물건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뜻을 이룰 수 있잖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는 그에게 나 또한 같은 시선으로 되받아 쳤다.
그런 자신도 그 말에 해당된다는 걸 모르나보지?
그러자 내 눈빛의 의미를 읽은 라미아스는 민망한 표정으로 흠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하긴 뭐 취미는 다양한 거니까. 그런데 그건 나도 상당히 아끼는 거라서 쉽게 줄 수 있는 게 아닌데.”
“일단 보여주시기라도 하면 안 될까요?
실제로 본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가능하다면 그 보석과 접목시킨 물건들도 보고 싶은데요.”
“뭐, 보여주는 거야 그다지 어렵진 않지. 그럼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봐.”
대답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라미아스는 레어의 한 귀퉁이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아마 여러 통로를 두어 창고를 따로 관리하고 있는 듯 했다.
기다리는 동안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니 나도 모르게 손끝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리 평생을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라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까.
만약 운이 좋으면 이번에 라피스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 나는 온 몸이 들뜨는 기분이었다. 그런 나를 향해 엘뤼엔은 특유의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단순히 취미로 모으려는 건 아니지 않았던가? 꼭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만.
“아하하, 그야 뭐…”
-저 녀석이 저래 봬도 눈치는 빠른 편이다.
솔직하게 말하고 도움을 구하는 편이 나을 거야. 자신을 믿지 않은 자에겐 호의를 베풀지 않는 성격이니까.
“으응, 알았어.”
그의 충고에 나는 조금은 뜨끔한 심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라피스를 찾는 것을 설명하자면, 필수적으로 내 정체에 대해서도 털어놔야 한다.
그래서 현재로선 가능한 이유를 밝히지 않고 보석만 챙겨가고 싶은 욕심이 굴뚝같았다.
뭐, 그것도 여기에 라피스가 있다는 전제하의 이야기에서지만.
“여어, 기다렸지?”
잠시 후 라미아스는 한 손에 보석함을 든 채로 걸어왔다.
필시 영혼의 보석이 담겨있는 것이리라.
나는 아까전보다 더욱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애써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러자 라미아스는 피식 웃고는 내가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안의 것을 테이블 위에 와르르 쏟아놓았다.
그러나 기대치가 너무 컸던 탓일까?
바짝 긴장하고 있던 나는 다음 순간 허탈한 심정으로 눈앞의 것들을 훑어보았다.
“이게…영혼의 보석이에요?”
왠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리 장식적인 가치가 없다곤 했지만,
이건 길에 굴러다니는 돌조각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가공되지 않은 보석 원석정도는 될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단단한 착각이었다. 어째서 이런 것에 ‘보석’이란 호칭이 들어갔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다.
‘이런 것에 라피스가 들어있다니…’
그러자 나의 실망한 표정을 보았는지, 라미아스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러게 별로 예쁘지는 않다고 했잖아.
이걸 수집하는 녀석들 중에서도 나처럼 보석 자체만 모아두는 경우는 별로 없어.”
“으으. 그럴 만도 하네요. 설마 이렇게 평범할 줄은 몰랐어요.
그냥 봐선 그냥 돌조각이랑 구분할 수가 없겠는데요.”
“맞아. 하지만 이런 것도 다른 것과 조합해서 세공하면 이렇게 훌륭한 장식품이 되지.”
그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내민 것은 화려한 황금색의 장식이 된 장검과 목걸이였다.
척 보기에도 아름다웠지만 특히 가운데 박힌 보석이 선명한 빛을 발하여 더욱 돋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건네받은 순간, 나는 머릿속에서 갑자기 울리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자네가 나의 주인이 될 자인가?>
“헉! 마, 말했다!”
“하하! 그게 바로 에고소드 라는 거야.
참고로 이번 검술대회의 상품이기도 했지.
여기 박혀 있는 이 보석이 아까 그 볼품없는 돌덩어리를 가공한 결과야.”
“엣? 정말요?”
“믿기 힘들지? 뭐, 그만큼 세공솜씨가 뛰어난 자가 아니면 다루지도 못하는 물건이지만 말이야.
이 세상에서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건 우리 드래곤이나, 장인으로 이름 높은 드워프들 밖에 없어.”
“헤에, 그렇군요.”
신기한 표정으로 대답하면서도 나는 눈으로 연신 보석들을 훑었다.
제발 이들 중에서 제발 라피스를 담은 보석이 있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10여개가 넘는 영혼의 보석들 중에서 녀석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이미 마법 물품으로 가공된 것들까지 전부 살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역시 무리인가…’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 나는 온 몸의 힘이 쭈욱 빠지는 것을 느끼고 힘없이 의자의 등받이에 기댔다.
한 번에 라피스를 찾을 거라고 생각한건 아니었지만, 역시 일이 성사되지 않았을 때의 충격은 견디기 어려웠다.
아니, 어쩌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생각에 눈 앞이 캄캄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누굴 찾아가야 하는 거지?’
이것을 수집하는 드래곤이 라미아스 하나만은 아니겠지만,
워낙 희귀한 것이니 만큼 어느 드래곤도 그보다 많은 양을 확보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다른 자들은 발견 즉시 십중팔구 마법물품으로 만들어버린다고 하니,
녀석을 온전한 보석 상태로 만날 가능성이 더더욱 희박해진 셈이었다.
설령 누군가에게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상태라고 해도 문제다.
이렇게 평범한 돌조각과 구분이 안 되는 것을 날더러 무슨 수로 찾아내란 말이야!
내가 연신 한숨만 내쉬자 라미아스는 보석을 다시 함에 집어넣는 것을 중단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보고 싶은 것을 봤는데 표정이 왜 그래? 너무 볼품없어서 실망했어?”
“아, 아뇨, 그게 아니라…저어, 이것 말고 다른 보석들은 누구한테 있을까요?”
“흐음~ 글쎄. 아마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걸?
실상 여기에 있는 게 전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거다.
최근에 내가 전 대륙을 돌면서 영혼의 보석과 관계된 아이템들은 거의 다 모았거든.
아, 그래! 로드 드래곤한테 한 개 있다고 들었고, 레드 드래곤 중에서 실비아란 녀석도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군.
나처럼 특이한 걸 모으는 게 취미인 녀석이니까.”
“하아. 그렇군요…”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고 있다면 관둬.
그 녀석들이 가지고 있는 보석도 내거랑 별반 차이 없으니까. 아니면 무슨 다른 사연이라도 있는 거야?”
그 말에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겐 그에게 조언을 구하는 방법 외에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엘뤼엔의 충고도 있겠다~ 마음의 결심을 굳힌 나는 그에게 되도록 자세한 설명을 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여기서 진실 전부를 알려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내 나름대로 설정을 살짝 바꿀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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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실은…제가 찾고 있는 보석이 따로 있어요.”
“흐음? 영혼의 보석에도 종류가 있던가?
너도 보면 알겠지만 다 그게 그건데. 물론 색깔의 차이야 조금씩은 있지만.”
“아뇨, 그런 차이가 아니라…제 친구를 살릴 수 있는 보석이에요.”
“엥? 친구라니?”
이 말에는 엘뤼엔 역시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에 대한 어떠한 일언반구도 없었던 주제에 갑자기 친구 운운하니 황당해 할만도 했다.
나는 그 시선을 애써 담담하게 받아내며 다음 말을 이었다.
“실은 얼마 전에 제 친구가 저주를 받아서 혼수상태에 빠졌거든요.
당장은 목숨에 지장이 없지만 계속 깨어나지 않고 잠만 자는 거예요.
신관님께 문의를 드려봤는데, 녀석을 깨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와 상성이 맞는 영혼의 보석을 몸에 소지하는 것뿐이랬어요. 저는 그걸 찾고 있는 거예요.”
“에엥? 그런 저주도 있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묻는 말에 나는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저주가 많은 데요!
그 녀석은 지금 꼼짝없이 누워서 하루가 멀다하고 말라 죽어가고 있어요.
얼른 찾아서 돌아가야 돼요.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찾을 수가 없어서…”
“그건 그렇겠지. 인간들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보면 구별할 수는 있는 거냐? 여기 있는 것들 중에서 그게 없다고 어떻게 장담하지?”
“그, 그건요…아아, 그래! 뭐랄까…제가 남들보다 감각이 좋다고 해야 하나?
사람이나 물질마다 느껴지는 특유의 기운을 구분할 수 있거든요.
지금 여기 있는 보석들도 각자 풍기는 기운이 달라요. 그러니까 친구의 기운과 동일한 걸 찾으면 될 것 같은데…”
“흐음. 하긴, 자연체의 정령들을 볼 수 있을 정도라면 그 정도쯤은 어렵지 않겠군.
근데 만약 전부 다 살펴봐도 없으면 어떻게 하려고?”
“아뇨! 분명히 있어요! 예지력을 가진 신관의 말이었으니까 틀림없을 거예요!”
“호오, 그렇군.”
얼렁뚱땅 급조한 변명거리가 예상외로 먹히고 있었다.
난 혹시 임기응변의 천재가 아닐까? 내가 속으로 몰래 기뻐하던 순간이었다.
-친구의 목숨을 살릴 보석이라…그래서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했던 거냐?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서있던 엘뤼엔이 별안간 흥미를 보이며 물어왔다.
그러면 내 설명의 허점을 알아챌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바짝 긴장하며 대답했다.
“어? 아, 으응…”
-이 넓은 대륙 어디에서 나올 줄 알고 시작한 건지. 너도 참 대책 없는 성격이군.
“어, 어쩔 수 없잖아. 그대로 놔둘 순 없으니까.”
-흐음. 그 저주라는 것은 마신과 관계된 건가?
“엥? 마신이라니?”
그러자 맞은편에서 눈빛을 빛내고 있던 라미아스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엘퀴네스가 뭐라고 그래?”
“아, 아뇨. 그 저주가 마신과 관계된 거냐고 해서…”
“마신? 아아, 그럴 수도 있겠군!”
“네에? 라미아스님까지 무슨 소리에요?”
저주는 그저 마땅히 떠오르는 핑계거리가 없어서 억지로 지어낸 구실일 뿐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카노스가 언급되자 나는 황당한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에게 라미아스는 뜻밖의 이야기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봐. 영혼의 보석을 소유해야만 낫는 병이라면,
그만큼 네 친구의 영혼이 쇠약해져있다는 상태 아니냐.
그걸 대체하기 위해 보석의 기운을 빌리는 거니까. 그런 사악한 저주는 마신의 사제들이 아니면 쓸 수 없지.”
“에에…마신의 사제들이 저주도 거나요?”
“몰랐어? 그게 그놈들 특기인데. 마족과 연관된 능력이라 죄다 공격형이지.
신의 사제 중 유일하게 치유술을 사용할 수 없는 놈들이잖아.”
“그야 알지만. 뭐, 마신의 사제가 저주를 걸었다 치죠. 그런다고 뭔가 달라질게 있나요?”
“왜 없어? 굳이 보석을 구할 게 아니라 그 저주를 건 놈을 잡아 죽이면 해결되는 건데.
그게 아니라도 그 저주건 녀석보다 더 높은 계열의 사제에게 풀어달라고 부탁하면 간단히 끝나잖아.”
“!”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환한 표정이 된 그와 달리 나는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그가 마신교를 공격하러 가자거나,
저주건 놈을 알아오라고 하면 일이 더 복잡하게 꼬이게 되는 것이다!
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도 모르고 라미아스는 한결 가뿐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그러면 될 걸 괜히 고민하고 있었잖아.
너도 상성이 맞는 보석을 찾는 것보다야 그게 훨씬 더 쉽고 편할 거다.”
“자, 잠깐만요! 저주를 건 장본인은 이미 죽었어요. 그래도 여전히 친구 녀석은 그대로인 걸요!”
“그래? 흐음. 시전자의 목숨에 영향을 받지 않는 주술인가?
꽤나 지독한 저주일세. 뭐, 그래도 더 높은 능력자라면 해결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세피온 공작으로서 알아봐다 주마. 내 신분이면 마신교에다 기별을 넣는 것쯤이야 간단하지.”
“네, 네? 마신교에다가요?”
“그래. 어쩌면 대사제가 직접 네 친구를 보러 가줄 수도 있다고. 그럼 십중팔구 나을 걸?”
맙소사. 있지도 않은 친구를 어떻게 보이란 말이야! 나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그건 절대 안돼요!”
“왜 그래? 그렇게 필사적으로… 혹시 그놈들한테 알려져서는 안 돼는 일 인거냐?”
다행히 라미아스는 내가 마신교에게 당당히 나설 수 없는 피치 못 할 사정이 있다고 생각한 듯 했다.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 나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엘뤼엔을 쳐다보았다.
이게 다 그가 쓸데없이 마신에 대해 언급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를 할 건 뭐란 말인가!
그러나 내가 노려보든 말든 그는 여전히 무심하게 상황을 방관하고 있었다.
아니 평소보다 심각해 보이는 얼굴을 보아, 뭔가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것 같기도 했다.
“흐음.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면 할 수 없지.
일단 기다려 봐. 다른 드래곤들에게 있는 보석들 전부 가져와 볼 테니까.”
“네?”
“혹시 그중에서 찾는 게 나올지도 모르잖아.
잠깐 빌려달라고 할 테니까 한번 보기나 해봐.
단, 네가 찾는 게 나와도 그걸 얻는 것은 순전히 네 노력여부에 달렸지만.”
“아, 가, 감사합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도와줄 줄은 몰랐기에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게 라미아스가 사라지고 나자, 나는 십년은 한꺼번에 늙어버린 심정으로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기분이었다.
“휴우, 큰일 날 뻔 했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을 들었는지 낮게 혀를 찬 엘뤼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도움을 준다고 해도 싫다는 군.
“윽! 누가 마신교까지 찾아가자고 했어? 그런 건 오히려 쓸데없는 배려라구!”
-어째서지? 네가 마신의 사제라서 인가?
“엥? 내가 왜 마신의 사제야?
또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싶어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엘뤼엔은 아랑곳 않고 말했다.
-네 손등에 새겨진 신의 문장 말이다.
그게 아니라도 네 몸 전체에 흐르는 마신의 기운은 어떻게 설명할 셈이지?
“그, 그건 복잡한 사정이 있다고 했잖아.
그냥 정말 아무의미 없이 받게 된 거라고. 전엔 수긍하고 넘어가더니 왜 갑자기 따지고 드는 거야?”
-수긍한 게 아니라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자신의 문장을 아무의미 없이 내리는 신도 있던가?
당연히 카노스는 그러고도 남을 신이다.
재미를 위해서라면 마왕의 부하로 지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자가 아니던가.
(명목상은 마계의 감시였지만.)
하지만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했다간 의심만 더욱 가중될 것 같아 나는 침착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만 정말 난 신관 아니야. 마신교에선 나라는 녀석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 걸?”
-그럼 굳이 그곳에 찾아가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하하, 그게 좀 그렇잖아. 저주를 내린 장본인이 마신의 사제인데, 해결해 주기는커녕 다들 같은 편이면 어떡해?
보석을 찾는 것까지 방해할지도 모른다고.”
-그만큼 대단한 죄를 저질렀나? 저주는 왜 받은 거지?
“아하하, 그 글쎄. 난 그저 녀석을 살릴 방법에 대해서만 들었을 뿐이라…
보석을 찾아야 한다는 것 말고는 생각해 본적이 없는데.”
-아무런 단서도 없이 무작정 말이냐?
역시 너무 급조한 티가 나는 것인지 이제 그는 슬슬 의심스럽다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또다시 닥친 시련에 나는 어떻게든 변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으음, 단서 라긴 뭐하지만, 실은 난 이 제국 사람이 아니야.
저주를 풀 방법을 알려준 사람이 그 보석과 가장 가까운 장소로 보내줄 수 있다고 해서 응했는데,
눈 떠보니 이곳에 떨어져 있던 거거든. 즉 여기 어딘가에 있다는 소리지.”
-가까우나 마나 모래사장에서 진주를 찾으라는 요구만큼이나 터무니없긴 매한가지로군.
“아하하…뭐, 어차피 처음부터 고생을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니까 상관없어.
어쨌든 찾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거잖아.”
자, 이래도 반박할 셈이냐! 라는 눈빛으로 쏘아주자 엘뤼엔은 침묵인지 긍정인지 모를 묘한 침묵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라졌던 라미아스가 다시 돌아오면서부터 나와 그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중지되었다.
“여어~ 기다렸지?”
“앗, 라미아스님! 어떻게 됐어요? 다른 분들이 순순히 빌려주시던가요?”
“응. 사실 나 같은 수집가들이 아니고서야 별로 애착을 가질 정도의 물건은 아니거든.
내친김에 마법물품으로 개조시킨 것까지 죄다 가져와봤으니까 한번 확인 해봐.”
또다시 희망을 품어도 좋은 걸까.
나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라미아스가 테이블에 올려놓는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막상 보석을 받아본 순간 내 기대감은 금방 실망으로 변하고 말았다.
“…없는 것…같네요.”
“그래? 이런… 내가 구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인데.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드래곤 외의 다른 종족이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게 옳겠군. 이거 쉽게 찾기 힘들겠는걸.”
“하아, 그렇군요…”
이 썩을 놈의 자식은 대체 어디 가서 박혀 있기에 아직까지 드래곤의 눈에 띄지 않고 있는 거얏!
상심한 나는 애꿎은 라피스를 욕하며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려 노력했다.
평소에도 이쁜짓 한 적은 없지만 이렇게까지 녀석이 밉게 느껴지기는 처음이다.
아마도 두 번에 걸쳐 연달아 허탈감을 느낀 탓 때문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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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뭐? 영혼의 보석을 주로 어디서 찾냐고?”
언제까지나 절망에 빠져있을 수많은 없는 일.
내가 마지막으로 매달린 방법은 라미아스로부터 직접 보석을 채취하는 요령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헤츨링 시절부터 수집했다는 그라면 틀림없이 일정하게 발견되는
장소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의해서였다.
내 질문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던 그는 곧 곰곰이 생각에 빠진 얼굴로 대답했다.
“글쎄…아, 그래. 특별히 일정한 장소는 없는데 한정된 조건은 있어.”
“조건이오?”
“응. 주로 인간의 손이 잘 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는 확률이 높더군.
예를 들면 산맥의 고원(高原) 같은 데 말이야. 난 주로 그쪽을 뒤지는 편이야.”
“고원이라고 해도…상당히 넓잖아요. 그걸 전부 일일이 둘러보시는 건가요?”
“시간이야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 장소에 보석이 있다는 것만 알면 며칠이든 몇 년이든 쏟아 부을 수 있어. 긴 수명을 가진 종족의 장점이지.”
“보석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아는데요?”
“간단해. 의식을 조금만 집중하면 보석이 내뿜는 영혼의 향기가 느껴지거든.
육체가 배제되어있는 탓인지 어느 것보다 순수하고 선명하지.”
아아. 그러고 보니 드래곤들은 영혼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고 했던가.
이왕이면 나도 드래곤이 되는 편이 좋았을 텐데.
나는 뿌듯한 얼굴로 보석을 만지작거리는 라미아스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우울한 얼굴이야? 너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며.
걱정 마. 네가 비록 인간이긴 하지만, 그 정도의 감각이라면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거야.”
“네? 으으. 무리에요. 전 산맥 전체를 통틀어 기운을 느끼는 제주 따윈 없다구요.
보석의 유무를 확인할 길도 없을뿐더러 하나하나 직접 일일이 비교해 봐야 하는데,
그 수많은 돌덩어리들을 언제 다 살펴보겠어요?”
“흐음, 그런가. 하긴 인간은 우리처럼 시간에 자유로운 종족이 아니니까, 느긋하게 처리하긴 어렵겠군.”
“아마 평생이 걸려도 모자를 걸요. 제가 먼저 지쳐서 죽을지도 몰라요.”
내 푸념에 듣고 있던 라미아스까지 덩달아 심각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곤란하네. 내가 시간이 널널하면 동행이라도 해줄 텐데. 이래봬도 책임감이 깊은 성격이라서 말이지…
이번 일을 수습 하는 데만 통상 몇 달은 걸릴 것 같거든.
게다가 현재까지 후계자도 없는 상황이라 오래 동안 자리를 비울 수가 없는데…”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실례를 끼칠 순 없죠.
으음. 하다못해 어느 곳에 있는지 만이라도 알게 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럼 거기서 몇 년이고 조사해 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러자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엘뤼엔이 지나가듯이 한마디 내뱉었다.
-그거라면 별로 어려울 게 없는 것 같은데. 네가 날 소환한 장소가 어디였는지 생각해봐라.
“응? 엘퀴네스를 소환한 장소? 아앗! 맞다! 거기도 고원이었지! 하, 하지만 거기에 있을 거라는 보장은…”
-멍청하긴. 네가 나한테 했던 말을 잘 기억해봐. 너를 이곳으로 보낸 자가 뭐라고 말했다고 했지?
쯧쯧 혀를 차며 묻는 말에 나는 찌푸린 얼굴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퍼뜩 떠오르는 기억에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말았다.
“…설마…보석과 가장 가까운 장소로 보내주겠다는 거?”
-그래. 그리고 눈을 떠보니 그 고원에 떨어져 있었다는 소리 아니었나?
그 말대로 하자면 바로 거기가 네가 찾는 보석과 가장 가까운 위치라는 소리잖아.
“!”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건넨 핑계였으나 나는 그 순간 마치 망치로 머리를 두드려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의 말 속에서 내가 미처 간과하고 있었던 한 가지 사실을 불현듯 깨닫고 말았기 때문이다.
내가 라피스를 찾겠다는 결심을 굳혔을 때, 엘뤼엔은 보석이 있는 차원으로 보내주겠다고 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라피스의 영혼이 흘러간 것과 ‘똑같은 궤도’에 넣어주겠다고 했다.
그것은 즉, 녀석이 보석이 되어 떨어진 ‘장소’와 동일한 곳에 나 역시 떨어졌다는 소리가 아닐까?
‘맙소사…’
왜 이제야 깨달은 걸까. 보석이 있는 곳이 하필 내가 이곳으로 와서 처음 시작한 출발점이라니.
단서를 찾았다는 기쁨보다 허무감이 더 크게 밀려들어왔다.
문득 지난날의 여정이 슬로우 모션으로 머릿속에서 지나가기 시작했다.
엘뤼엔의 냉담한 태도에 상처받고, 트로웰의 협박에 눈물 삼키며,
노예시장에서의 탈출과 검술을 배우기 위해 고난을 당하던 그 모든 세월이…
전부 헛고생이었다는 거잖아!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표정을 보니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모양이군.
“못했어. 정말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이건 말도 안 돼…”
-그런가. 나로선 그런 힌트를 듣고도 여기까지 온 네가 더 이해가 안 되는데?
역시 머리가 나쁜 녀석은 어쩔 수 없군.
“으윽! 안 그래도 열 받는데 부채질 좀 하지 마, 엘퀴네스!”
미래의 그라도 지금의 나를 봤더라면 굉장히 한심해 했을 것이다.
나름 편해지랍시고 혜택을 준 것을 싸그리 무시하고 엉뚱한 곳이나 헤매다니!
아무렇지 않게 빽 소리치긴 했지만 사실은 너무 민망한 나머지 똑바로 고개를 들고 엘뤼엔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라미아스는 그런 나를 어리둥절한 얼굴로 보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 거야? 엘퀴네스가 뭐라고 그래?”
“으으…라미아스님, 그게요…”
마침 어떻게든 시선을 돌릴 곳이 필요했던 나는 기회를 놓칠세라 얼른 그에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물론 엘뤼엔에게 말했던 것과 동일한 내용의 핑계였다.
그렇게 모든 설명이 끝나자 그 역시 엘뤼엔 만큼이나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보석과 가까운 장소에 보내주겠다고?
뭐야. 출발 전에 그런 얘길 들었으면 당연히 도착한 곳부터 제일 먼저 뒤졌어야지. 대체 왜 여기까지 온 거야?”
“저, 저는 무조건 보석을 소유한 사람부터 찾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이미 누군가에게 발견 되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나~참. 지금처럼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쩌려고?
너도 참 답답하다. 그래, 제일 처음에 도착한 곳이 어디였다고?”
“으음. 에델 왕국의 마라얀 지방이란 곳에 있는 오렌이라는 마을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내가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으며 답하자,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만에야 그는 환한 얼굴로 고개를 들며 말했다.
“다행이다. 일단 내가 알고 있기론 아직 그 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영혼의 보석은 없어.
찾을 기회가 남아있을 있을지도 몰라.”
“정말요?”
“그래. 하지만 그 지역은 엘프들의 숲이 바로 지척이니까,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어.
만약 놈들 중에 누군가가 주워간 거라면 더 골치 아플거다. 숲 자체에 인간들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으니까.”
“……”
희망이 보일라 치면 곧바로 절망이 뒤따르니 마음 놓고 기뻐할 수만도 없었다.
내가 한숨을 푹 내쉬자 라미아스는 마침 생각났다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
“그 블루 엘프를 데려가 보는 건 어때? 만약의 경우 놈들을 설득하는데 유리할 수도 있잖아.”
“네? 블루 엘프라니…아! 시벨리우스요?”
“그래, 그 요리사말이야.
성향은 다르지만 일단은 같은 종족이니까 엘프를 설득하는 일이라면
인간인 너보단 훨씬 경계 없이 다가설 수 있을 거다.
그 쪽도 널 상당히 따르는 것 같은데, 이참에 여행권유라도 한번 해보지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녀석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던 참이었다.
폭주 현장을 수습하다가 말도 없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나란 녀석의 무심함에는 이제 스스로 질릴 정도다. 나는 살짝 혀를 차며 라미아스를 향해 물었다.
“그래야겠네요.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어디긴. 내 저택 앞에서 시위중이다.”
“네?”
“지난번에 내가 너랑 친분이 있다는 걸 알아버렸잖냐.
널 숨긴 장본인이 나라면서 얼마나 볶아대는지.
매일매일 찾아와서 널 내놓으라고 채근하는 통에 나도 곤란하던 참이었어.”
“하하하…”
대체 시벨리우스는 그놈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걸까?
내 기억으론 아직 녀석이 그렇게까지 날 찾을 만큼 친해진 적이 없는데 말이다.
노예시장에서 봤던 이지적인 분위기는 죄다 환상이었던 모양인지,
날이 갈수록 망가지는 녀석의 작태에 나는 할 말을 잃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게 라미아스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나직이 경고했다.
“조심해라. 그 녀석 널 여자로 알고 있는 모양이니까.”
“…라미아스님까지 그 소리에요?”
“얼래. 엘퀴네스도 같은 말을 했던 모양이지?
하긴, 그냥 친한 친구를 보는 눈이 아니긴 하지. 뭔가 흑심을 품은 눈빛이거든. 클클클…”
“나, 남자라고 말할 거예요!”
“에, 그래? 재미없게시리. 조금 더 놀려먹다가 밝혀도 좋잖아?”
“놀리고 싶은 건 라미아스님이면서!”
“이런, 들켰나?”
나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는 라미아스를 노려본 다음 곧바로 엘뤼엔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가자, 엘퀴네스.”
-그 쓸데없는 망아지도 데려갈 생각이냐?
“응. 일단 권유는 해보려고. 아, 물론 내가 남자라는 사실은 밝히고 나서. 왜? 엘퀴네스는 싫어?”
-네 일이니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과연 네가 암컷이 아닌 사실을 알아도 동행할지는 의문이군.
“뭐 어차피 한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니까.”
태연한 표정으로 답하면서도 나는 슬쩍 오한에 떠는 팔을 문질렀다.
대체 그 녀석은 왜 나를 여자로 오해하는 걸까?
생긴 게 예쁘장해서?
아무리 여자같이 생겼다지만 나는 가슴도 없고 목소리 자체도 여자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게다가 명색이 유니콘인 주제에 남자와 여자의 성별조차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도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내 신병을 요구했던 기사 녀석이 그 앞에서 똑똑히 날더러 ‘소년’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때도 그냥 넘어갔지. 설마 못 들었나?’
뭐, 그땐 정말 대충대충 듣고 있는 티가 역력하긴 했다.
어떻게든 날 빼돌려서 피하게 만들 생각뿐인 것 같았으니까.
만약 알면서도 모른 척 한 거라면 정말 놈의 정신 상태를 의심해 봐야겠지만.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라미아스님. 시간 많이 뺏어서 죄송했습니다.”
“아냐. 이정도 쯤이야 뭘. 어쨌든 가능성을 발견해서 다행이다. 나중에 찾게 되면 꼭 연락해줘.”
“네, 그럴게요. 엘퀴네스와 대화 못해서 섭섭하진 않으세요?”
“본인이 싫다는데 어쩔 수 있나. 아참, 한 가지만 묻자.
너 전엔 엘퀴네스더러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어? 근데 지금은 꼬박꼬박 이름으로 부르네?”
그의 말에 나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가 금방 태연한 척 표정을 가장했다.
설마 그 약간의 변화를 알아챌 줄이야. 왠지 엘뤼엔이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 같은 건 착각이겠지?
“아, 네. 아무래도 안 어울리는 호칭 같아서요. 라미아스님 말마따나 이렇게 젊은 아빠가 어디 있어요?”
“흠, 그래? 실은 은근히 어울리는 것도 같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왠지 아쉽네.”
“어울린다고요?”
“응. 그게 말이지. 가끔 보면 뭐랄까. 네 분위기가 엘퀴네스랑 묘하게 비슷한 구석이 있거든.
쩝, 그럼 이제 다신 아버지라고 안하는 거냐?”
“아아, 네. 아무래도 …니까.”
“응?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의아한 얼굴로 다시 묻는 그에게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저으며 웃어보였다.
이제 다시는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트로웰이나 다른 정령왕들을 가족처럼 여기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얼마 전 엘뤼엔으로부터 정령과 인간의 차이점을 분명히 자각한 뒤로 결심한 일이었다.
지난 17년 간 인간으로서 살아왔던 내가 정령들을 가족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신으로서 나와 전혀 상관없는 존재가 되어있던 엘뤼엔을 아버지로 인정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
그때는 그렇게도 억지로 강요받던 관계를… 이제 우습게도 그 쪽에서 먼저 놓아버렸다.
단지 내 육체가 정령이 아니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소한 사실이 미래의 나와 그들의 관계까지 송두리째 뒤흔들 줄이야.
‘인간의 운명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를 외면한 이전의 가족들과 다를 게 없잖아.’
말하지 않아도 알아봐주는 애정을 느끼고 싶었다.
같은 정령왕으로서의 ‘동질감’이 아니라, 가족만이 느낄 수 있는 깊은 유대감을.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면 늘 나오는 진한 혈육의 이끌림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망인지 이번에 확실히 깨닫고 말았지만.
‘그러니까 이제 나도 노력하지 않을 거야.’
나는 연신 아쉬운 표정을 하는 라미아스를 뒤로 한 채, 방금 전 나도 모르게 나올 뻔한 대답을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포기하는 쪽이 마음이 편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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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밑에서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치든 말든, 정령계는 여전히 평화롭고 한산했다.
비록 미네르바의 봉인이라는 불미스러운 일이 잠깐 있었으나,
휘하의 정령들이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미네르바가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린 후, 봉인을 해제하고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오늘로서 마침내 불의 영역의 복구에 성공한 이프리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주 오랜만에 정원을 방문했다.
그래봤자 천 년 전에 보던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늘 바쁘고 복잡하게 변해가는 인간 세상과 달리 정령계는 언제나 똑같았고 변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그만큼 정원의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조금 단조롭긴 하지. 역시 자극을 받으려면 인간세상만큼 좋은 게 없다니까~”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허리를 피고 기지개를 켰다.
이대로 아무 곳에나 누워서 잠이나 푸욱 청하면 좋을 것 같았다.
지금은 이렇듯 여유 있지만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역소환의 충격을 수습하지 못해서 내내 앓고 있었다.
아무리 큰 고통이어도 영역 안에서 며칠 쉬다 보면 나아지기 마련인데,
마침 영역자체가 부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회복이 되는 속도도 상당히 더뎠다.
본래 역소환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하던 그로선 이번 경험은 정말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요 근래 일만 생각하면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특히 그때마다 떠오르는 한 존재에 대한 맹렬한 복수심을 멈출 수가 없었다.
“뿌득…엘퀴네스 자식! 나중에 두고 보자!”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전혀 상관없는 이를 원망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의 역소환은 미네르바의 폭주에서 기인한 것이고,
오히려 엘퀴네스는 그들을 도와 상황을 수습하는데 가장 지대한 공로를 세우지 않았던가.
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물론 당시에 굉장히 위급한 상태이긴 했지만 간발의 차로 그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고,
트로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엘퀴네스가 미네르바를 봉인시키고는,
별안간 엄청난 힘으로 그들에게 물리력을 행사한 바람에 미처 방어할 사이도 없이
정령계로 강제 소환 되어버린 것이다.
몸이 부서지는 순간, 그 끔찍한 역류의 고통 속에서도 그는 엘퀴네스가 한 말을 도무지 잊을 수 없었다.
“크윽! 이, 이 자식! 갑자기 뭐하는 짓이야?!”
“정령계로 가서 쓸데없는 머리나 식히고 와라, 트로웰. 이프리트, 넌 그의 감시역이다.”
“웃기지마, 임마! 누구 맘대로 날 부려먹어!”
화가 치민 이프리트는 발작적으로 소리치며 온 몸으로 현 상황을 거부했었다.
하지만 마지막 말이 내뱉어졌을 땐 이미 그는 정령계로 돌아온 상태였고,
그때부턴 후들거리는 몸의 상태를 신경 쓰느라 정신없는 나날만 반복되었다.
그리고 한결 상태가 나아졌을 땐,
자기도 모르게 착실히 트로웰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이거야 완전히 엘퀴네스가 시키는 대로 굴러가고 있는 게 아닌가!
“으으~ 아니야! 난 단지 트로웰이 걱정될 뿐이라고!
누가 그놈의 말 때문에 이럴까봐!! 꼭 녀석이 아니었어도 이랬을 거란 말이닷!”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이프리트는 지레 비참해짐을 느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가 그렇게 혼자서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어쨌다고?”
“커헉! 놀랐잖아, 이놈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장소에서 뜻밖의 만남에 놀란 적이 있는가?
이프리트가 바로 딱 그 상황이었다. 그의 눈앞에 생각지도 못하게 트로웰이 떡하니 서있었던 것이다.
평소라면 별로 놀랄 것도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가 알기로 현재 트로웰은 바람의 영역에서 하루 종일 미네르바만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어떤 말이나 손짓에도 일체의 반응 없이 멀거니 한곳만 응시하고 있었기에,
적어도 미네르바가 봉인을 풀고 나오기 전까진 꼼짝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예상이 보기 좋게 깨져버린 것이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트로웰?”
황당한 표정으로 물으면서도 그는 스스로의 눈을 믿을 수 없어 연신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그러자 트로웰은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내가 못 올 데를 왔던가? 정령계의 ‘에바스에덴’이 이프리트 네게만 허락된 공간은 아닐 텐데?”
“그런 뜻이 아니라! 너 바람의 영역에서 계속 죽치고 앉아있을 거 아니었어?
왜 이렇게 빨리 나왔나 이 소리다.”
“그야 내 마음이지. 내가 움직이는 데도 하나같이 이유를 붙여야 하는 거야?”
“어이~ 내 말의 본론은…휴우, 그래. 내가 말을 말자.”
원래 트로웰이 이렇게 하나씩 반박하기 시작하면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무시하는 엘퀴네스만 빼면 말이다.)
그 중에서도 이프리트는 언쟁자체에 소질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러려니 수긍하는 쪽이 더 마음 편했다.
그는 질문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얼른 다음 화제로 돌렸다.
“어쨌든 기운을 좀 차린 것 같아 다행이네. 이제 좀 괜찮은 거냐?”
“처음부터 나쁜 적 없었어.”
“하여간 말은 잘해요. 그래도 뭐,
침울해져 있던 것보다야 훨씬 너답다.
우리 둘 다 여기 꽤 오랜만이지 않냐? 이왕 이렇게 됐으니 당분간은 정령계에서 편히 쉬다가…”
“미안하지만 난 할 일이 있어.”
“할 일?”
트로웰의 대답에 이프리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네르바가 이곳에 봉인되어 있는데,
그를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할 일이 무엇이 더 있던가 싶었던 것이다.
“별일이네. 네가 미네르바 보다 더 우선시 하는 일도 있었냐?
아, 혹시 엘퀴네스에게 복수라도 하러 가려고?
그런 거라면 나도 합세하마. 이번 일 때문에 나도 단단히 앙심을 품고 있거든.”
그러자 트로웰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헛소리. 네가 엘퀴네스에게 앙심을 품은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잖아? 그리고 내 목적은 그가 아니야.”
“그게 아니면?”
“아직 계획을 실현시키지 않았잖아. 마무리를 짓고 돌아올 셈이야.”
“계획?…설마 너!!”
그때서야 이프리트는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트로웰, 이 막무가내 정령왕이 아직도 인간의 멸종 계획을 철회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이미 미네르바가 폭주한 순간 모든 일이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했던 그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이래서 엘퀴네스가 감시하라고 했던 건가?
‘젠장!’
그는 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히 엘퀴네스는 정떨어질 정도로 냉정하긴 했지만 틀린 요구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너 왜이래? 이제 다 끝났잖아.
미네르바의 계약자는 폐인이 됐고, 그놈이 사랑하던 인간 여자도 죽었어. 그거면 된 거 아니야?”
“아니, 부족해. 터무니없이 부족해.
내가 다스리는 땅에, 내 의지로 숨 쉬는 대지에, 인간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야.
그대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아.”
“…하아. 인간은 이 차원을 유지하는 주요 생명체야. 그런 게 한순간에 사라지면 균형이 깨진다고.”
“엘프도 있고, 드래곤도 있어. 인어족도 있고 드워프도 있지.
인간을 대처할 종족은 얼마든지 있어.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멸망할 녀석들이야.
그 시기를 조금 앞당긴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고집피우지 마. 황금기의 멸망은 앞으로 2천년 후라고 했잖아.
네가 말해놓고도 기억 안나? 그걸 벌써 끝낸 다는 게 말이 되냐?”
“……”
이프리트는 서글픈 눈으로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원래 인간을 싫어하는 편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분별을 잃게 될 줄은 몰랐다.
지금의 그는 정령왕이라기 보단 사랑에 빠져 앞뒤를 분간할 수 없게 된 철없는 어린애 같았다.
트로웰 역시 자신의 이런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해도 소멸하는 그 날까지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특히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던 초록색 눈동자를 떠올리면 더욱 그랬다.
<괜찮아, 넌 상냥한 녀석이니까.>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가 버릇처럼 내뱉던 말.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주문의 일종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트로웰은 모든 일이 아무래도 상관없어질 정도로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꼈으니까.
복수든, 원망이든, 사랑이든.
그리고 분명할 정도로 이성을 자각하게 되어 몇 번이나 그만둘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말로 안주하기엔 난 이미 너무 지쳐버렸어.’
지금 이 순간에도 미네르바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지만, 혜안을 가진 그에겐 머리가 아플 정도로 절절히 파고들었다.
그 흐느낌에 담긴 마음의 고통이 너무 아플 정도로 와 닿아서,
이젠 그만 두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니까…내 손으로 전부 끝내게 해줘.”
어떤 식으로든 인간은 위대한 존재를 배신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것은 오만한 종족을 향한 형벌임과 동시에 미네르바를 향한 경고이기도 했다.
이제 그는 깨달아야 한다. 그의 선택에, 이렇게까지 어리석어 질 수 있는 이가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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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떠나기 전 나는 라미아스로부터 현재 시벨리우스가 머물고 있는 여관의 위치를 알아냈다.
녀석은 기특하게도(?) 내가 사라진 것을 깨닫자마자,
그날로 당장 짐을 싸서 여관을 잡은 다음, 내가 나타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웬 여관? 그 녀석 라미아스님이 초빙한 요리사 아니었어요?”
“검술대회 일정까지가 계약기간이었거든.
정말 실력 좋은 요리사였는데, 그렇게 휭 나가버리다니 나로서도 굉장히 충격이었다고.
회유고 뭐고 지금으로선 전혀 안 통하는걸 보니까, 어떻게든 너를 따라나설 셈인 것 같다.”
그 말을 할 때 라미아스의 표정이 무척 아쉬웠던 것을 보면, 꽤나 녀석의 요리가 마음에 든 듯 했다.
그는 작게 중얼거린다고 생각했겠지만,
보통 사람보다 청각이 뛰어난 나는 다음으로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 역시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본체였다면 그 까짓 블루 엘프 한 마리쯤이야 노예로 부리는 것쯤은 일도 아닌데.
쩝, 이럴 땐 유희에 회의를 느낀다니까.”
“……”
이보세요. 그 전에 시벨리우스는 엘프가 아니라 유니콘이거든?
유니콘은 드래곤 다음으로 마법에 정통함과 동시에 그들과 동급의 대우를 받는 종족이다.
게다가 시벨리우스는 그 중에서도 왕자라지 않은가!
그런 녀석을 노예로 부릴 생각을 하다니, 과연 막나가는 드래곤다웠다. (라피스 녀석은 맞장 뜬 적도 있었지 아마?)
어쨌든 그가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였으니 시벨의 요리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만 했다.
이제 녀석과 함께 다니면 그 음식을 나 혼자 독점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상상만으로 행복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얼마나 빈곤한 식사를 해왔던가!
이제 그 생활도 드디어 안녕인 것이다! 그러자 그런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엘뤼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결국 동행의 목적은 그녀석이 아니라 녀석이 바칠 요리였나.
“흠흠! 트, 틀려! 난 분명히 시벨이랑 같이 여행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고.”
-‘마음도 있다’는 말은, 요리를 노리고 있는 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란 소리로군.
“으윽! 엘퀴네스도 여행 내내 육포만 뜯어봐!
얼마나 음식에 사무치게 되는지 알기나 해? 난 안 그래도 말라서 많이 먹어야 한다고!”
-죽지 않을 만큼만 먹으면 얼마든지 체력을 회복하는 주제에.
“인간의 3대 본능을 뭐로 보는 거야?
식욕은 필수라고, 필수! 난 살기위해 먹는 것보단 먹기 위해 사는 게 더 좋아.”
-실로 너다운 대답이로군.
엘뤼엔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순간 내가 그렇게 먹을 것에 집착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까지의 궁핍했던 나날을 떠올리고 나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그러고 보니 엘뤼엔을 처음 소환한 날도 배고프다고 했었지, 아마?
“…뭐 어때. 음식을 먹고 싶어도 못 먹는 것보다야 낫지.”
이런 내 가벼운 중얼거림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엘뤼엔의 귀에 포착된 듯 했다.
그는 의미를 알 수없는 시선으로 나를 보며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그건 날 두고 하는 말이냐?
“응? 아니, 그냥 누굴 딱히 예로 든 게 아니라…
-미안하지만, 나와 같은 정령들은 인간의 음식에 큰 감흥이 없다.
먹으면 오히려 속만 불쾌할 뿐인 쓸모없는 것들이지.
“으음. 그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먹고 싶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어?”
-없다.
“엣, 정말? 그렇게 맛있는데도?”
-글쎄, 맛있던가? 잘 모르겠더군.
하기사 그들의 입장에서야 맛을 느끼기도 전에 속을 거북하게 채우는 불쾌한 느낌이 먼저 밀려들어왔을 것이다.
나조차 맛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먹고 싶지 않았을 정도니까.
덕분에 이사나가 식사하는 동안 늘 손가락만 빨며 시간이 얼른 흐르기만 기다려야 했지.(정말로 그랬던 건 아니다.)
이제 라피스를 찾으면 나는 다시 그때의 몸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그걸 생각 하고나니 지금 가지고 있는 인간의 육체가 많이 아쉬워졌다.
“정령의 몸은 편리하지만 불편해…”
-너 방금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단어를 동시에 썼다는 것은 알고 있냐?
“하지만 음식도 못 먹잖아. 추위나 더위를 안타고 아무데서나 살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건 치명적이야. 먹을 때의 행복을 누릴 수 없다니!”
-그건 네 기준이겠지.
“만인의 기준이야!”
-…알았다. 망아지 녀석을 음식을 위해 데려가든 말든 이제 상관하지 않을 테니, 먹는 얘기는 그만해라.
어라라.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뭐, 상관 안 해준다면 나야 고맙지.
나는 왠지 조금 질린 표정을 하고 있는 엘뤼엔에게 생긋 웃어준 다음, 술술 풀려가는 일정에 흐뭇해했다.
“그럼 이제 정말로 가볼게요, 라미아스님. 여러 가지로 감사했습니다.”
“응, 그래. 근데 정말 내 후계자 될 생각은 없는 거냐?
네가 보석 찾을 때까지도 기다려줄 수 있는데.
차기 세피온 공작이 되면 마신교의 눈치를 안보고 친구를 보살필 수도 있을 거다.”
“하하, 죄송해요.”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리는 그에게 나는 거듭 사과를 건넸다.
그러자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택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담 여기서 작별의 선물을 주도록 할까.”
“네?”
라미아스가 내민 것을 본 순간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그가 가지고 나온 자루에 보석들과 함께 들어있던 에고소드였던 것이다.
놀라서 거절하려는 내게 그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이번 대회에서 우승한 자에게 주려고 했던 거야.
너라면 반드시 이겼을 테니까, 본 주인한테 돌아가는 셈이다. 부담 갖지 말고 가져가.”
“하지만…”
“그리 대단한 능력이 들어있는 것도 아니야.
실드와 치료마법 종류거든.
영혼의 보석에도 등급이 있는데, 이 녀석이 품고 있는 마나는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어.
나는 보석 자체에 관심이 있을 뿐이라, 마법물품까진 욕심이 없으니까 네가 가져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나한테 있어봤자 창고신세밖에 안되거든.”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수가 없어서 나는 감사히 그의 선물(?)을 받기로 했다.
하지만 워낙 화려하게 세공된 탓에 들고 다닐 엄두가 나지 않아 받은 즉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감사합니다. 요긴하게 잘 쓸게요.”
“그래. 꼭 원하는 것을 찾길 바란다. 네 앞날에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길.”
라미아스 특유의 편안한 분위기 탓일까.
그리 오래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닌데 마치 오랫동안 친구였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문득 4천년 후의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언젠가 원래의 시대로 돌아가면 꼭 제일 먼저 그를 찾아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마을로 돌아온 후 나는 곧바로 시벨리우스와 만나려고 했다.
문제는 녀석이 있는 위치를 알아도, 여전히 사방을 감시하고 있는 기사무리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나 몰라라 하고 있는 엘뤼엔에게 도움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멀리서 여관의 모습만 지켜보기를 몇 분 째. 결국 나는 아까 전에도 썼던 방법을 다시 재탕하기로 결심했다.
“에라, 모르겠다. 시큐엘 소환!”
쉬익!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량의 마나가 빠져나감과 동시에 물의 늑대가 눈앞에 떠억 등장했다.
이전에 소환했던 녀석은 아니었지만,
정령들끼리는 서로의 의식을 공유하기 때문에 전과 같은 과정을 반복할 필요는 없을 듯 했다.
그 증거로 놈은 나타나자마자 한눈에 용건을 짐작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또 말을 전해 달라고 부른 것은 아니겠지?
“알면서 뭘 물어?”
-크흑! 나는 편지나 전해주는 전령(傳令)이 아니다!
“뭐든 상황에 따라 바뀌는 법이지.
난 정령사니까 내 식대로 하는 것뿐이야.
자~ 잔말 말고 가서 전해. 목표 인물은 저 여관에서 투숙하고 있는 블루 엘프-시벨리우스.
내가 여기 있으니까 마중 나오라고 말해줘.”
-…언제고 내가 가진 가치를 알게 되면, 이런 일에 부른 것을 후회하게 될 거다.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얼른 가서 말이나 전해주고 와.”
잔뜩 폼 잡고 한 말을 내가 아무렇지 않게 흘려 넘기자, 녀석은 고개를 추욱 늘어뜨리곤 힘없이 사라졌다.
어차피 시키는 대로 할 거면서 왜 쓸데없는 반항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씀이야?
“자~ 그럼 난 여기서 기다려보실까.”
내가 알고 있는 시벨이라면 소식을 듣는 즉시 총알처럼 이곳에 나타날 것이다.
그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작정으로, 난 근처에 있던 아무 판자대기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여전히 묵묵히 서있는 엘뤼엔을 향해 말했다.
“엘퀴네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이제 다시 모습을 나타내는 게 어때?”
-못 보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잖아.
“나야 그렇지만 시벨리우스는 아니잖아.
남들이 보면 허공에 대고 떠드는 꼴이라고.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
-네가 정령어를 쓰면 간단한 일이다.
“일일이 말 전달해주는 것도 귀찮아. 이제 그만 소환체로 돌아와.”
그 말에 엘뤼엔은 귀찮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군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유령처럼 흐릿했던 몸이 완전히 선명해지는 순간, 타이밍 좋게 불쑥 누군가가 나타났다.
얼굴 가득 들뜬 기색이 가득한 시벨리우스였다.
“엘!”
“어, 왔어?”
“어떻게 된 거야? 그동안 어디에 갔었어?”
“쉿! 목소리 낮춰. 그러다 들킨다고.”
“들킨다니? 아아, 저 녀석들 때문인가?”
내내 이곳에 있었던 녀석이 황제가 내린 명령에 대해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조금 찌푸린 얼굴로 기사들을 노려보던 시벨은 나직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사일런스!(silence)”
그와 함께 나는 그의 몸에서 발현되는 짙은 마나의 기운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마법이 시전 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뿐.
딱히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아, 나는 살짝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방금 뭘 한 거야?”
“침묵 마법이야. 지금부터 우리가 아무리 크게 떠들어도 저쪽의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거야.”
“아! 맞다. 그런 마법도 있었지? 것 참 편하네.”
“적들의 시야에서 모습을 가리는 마법도 있는데. 그것도 할까?”
“아니, 이정도면 충분해.”
누구 못지않게 훌륭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녀석은 늘상 라피스에 밀려 마법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듯 적절한 타이밍에 도움이 되는 순간이 오다니! 나는 새삼 대견한 시선으로 시벨을 바라보았다.
“라미아스님께 들었어. 날 기다렸다고?”
“아, 으응. 그것 때문에 일부러 돌아와 준거야?”
“꼭 그 이유만은 아니야. 어차피 나도 너한테 할 말이 있었으니까.”
“나한테? 무, 무슨 말?”
녀석은 한눈에도 바짝 긴장한 얼굴로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굳이 이런 비유까지 들고 싶진 않았지만,
프로포즈를 해놓고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이랄까.
날 여자로 착각하고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기로 했다.
“실은 내가 찾고 있는 게 있는데,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네가 바쁘지 않다면, 나랑 같이 여행하지 않을…”
“할래!”
말을 전부 다 듣지도 않고 갑자기 끊고 들어오는 대답에 나는 잠시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날 기다리기까지 했다는 말로 미루어 이런 반응을 짐작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적어도 찾는 게 뭔지는 묻고 나서 결정해야 할 거 아니야!! 위험한 길이면 어쩌려고 넙쭉 받아들이는 거야?’
이로서 유니콘이 타인을 쉽게 믿는 성격이라는 건 확실한 것 같다.
이거야 원, 세 살짜리 어린애를 유괴해도 이보다 더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너무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잠시 먹먹한 얼굴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전부터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너…왕자라면서 이렇게 막 돌아다녀도 돼?”
“……”
“가출한 거 맞지? 전의 그 약혼녀 아가씨가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니야?”
“그, 그건…웰디는 그냥 친한 동생일 뿐이야. 혼약은 장로할아범이 멋대로 정한 것뿐이고…나는 전혀…”
“어쨌든 기다리고 있을 거야. 돌아가야 하지 않아?”
“아니, 상관없어. 성인식을 치른 유니콘은 언제든지 자신의 뜻대로 유희를 즐길 수 있으니까,
방해받을 이유는 없어.”
고집스럽게 대답하는 모습을 보니,
굳이 내가 같이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아도 따라나설 기세였다.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쉰 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니까.
그래도 일단 내가 찾는 게 뭔지는 알고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내 목적은 ‘영혼의 보석’이야. 언제, 어디서 발견될지 모르는 물건이지.”
“영혼의 보석?”
“그래. 그걸 찾기 위해 이제부터 한 고원을 뒤져볼 생각이야.
한 달이 걸릴지, 1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아무도 몰라. 그래도 같이 갈 거야?”
질문을 한 즉시 나는 후회했다.
애초에 만년이 넘는 수명을 가진 이들이 그 정도 시간에 굴할 리가 없다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예상대로 시벨은 문제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갈래.”
“무척 지루할 텐데?”
“괜찮아. 엘이랑 함께 있으니까 심심하지 않을 거야.”
“호오, 그래? 그럼 마지막으로 이것도 알아두고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어떤 조건이든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눈빛에 나는 사악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녀석과의 동행은 나 역시 희망하는 바이지만, 해결해 둘 건 미리 확실히 해두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난 드디어, 전부터 몇 번이나 말 하고 싶었던 ‘어떠한 사실’을 고백했다.
“난 남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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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방금…뭐라고?”
분명 똑똑히 들었을 텐데도 어리둥절하게 되묻는 모습에 나는 속으로 나직이 혀를 찼다.
아직까지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내가 농담이라도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만큼 내 생김새가 오해 당할 정도인가 싶어,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남자라고, 남자. xy염색체를 가진 인간. 암컷과 수컷 중에서 수컷! 오케이? 이제 알아들었어?”
“……”
그러자 그제야 상황파악을 한 듯 녀석의 얼굴이 차츰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이제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겠다는 태연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아무런 걱정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시벨리우스는 자신의 편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분이 꽤 뚜렷한 성격이다.
지금은 저렇듯 순딩이처럼 굴어도,
정작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이라는 확신이 들면 태도가
180도로 바뀐다는 것을 나는 이전의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 모습이 괘씸하게 느껴질지언정, 나로선 그냥 간과하고 넘어갈 사항이 아니다.
행여 이 때문에 시벨리스가 동행의사를 철회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여기서 대충 넘어가면 나중에 더 큰 골치 덩어리로 다가올게 틀림없으니까.
“아, 오해하지 마. 일부러 속인 게 아니니까.
난 네가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았거든. 얼마 전에 트로웰이 귀띔해 줘서 안거야.
사실 내가 선이 좀 얇긴 해도 여자 같다고 보기엔 어패가 있잖아?”
“…그런…”
“엄밀히 말해 이 상황에서 화를 낼 사람은 오히려 나라고.
간혹 오해를 당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설마 너까지 그럴 줄이야. 나야말로 배신당한 기분이야.”
“……”
내 말투에 담긴 진득한 실망의 기색을 느낀 것인지 녀석은 답지 않게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창백한 얼굴을 보면서 앞으로 이어질 상황 몇 개를 머릿속으로 가정해보았다.
첫째. 불 같이 화낸다.
글쎄다. 이번 경우엔 저 혼자 오해한 사실이 민망해서라도 참을 가능성이 있다.
그 증거로 아직까지 어깨만 떨뿐, 별다른 말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 목숨을 위협한다.
내가 무슨 죽을죄를 지었다고?
그렇게 성격이 나쁜 녀석은 아니지만,
만약 그런다 해도 엘뤼엔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다. 음…아마도.
셋째. 생 무시하고 제 갈길 간다.
음, 이거라면 가능성이 충분하다.
녀석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 오랜 기간 두고 친해진 사이도 아니니,
여기서 바이바이하면 그만일 테니까. 나로선 피눈물 나는 손실이겠지만 간다는 걸 억지로 막을 생각은 없었다.
그 외, 넷째-의외의 반전이 일어난다.
즉, 이미 알고 있었다거나 아무렇지 않게 수긍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슬쩍 기대해 봤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누구라도 시퍼렇게 변한 녀석의 얼굴을 본다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분위기가 험악해 지지만 않았을 뿐이지, 아무리 봐도 좋게 넘어갈 기세는 아니다.
그게 그렇게 충격이었나? 쩝, 하고 다신 입맛이 유달리 쓰게 느껴졌다.
“어이, 괜찮냐? 이거야 원, 나도 피해자이긴 마찬가지인데 왜 죄책감이 드는 거지…”
“…안해.”
“응? 뭐라고?”
꽤 한참 만에 들려오는 목소리였기에 나는 반색을 하고 물었다.
고개를 똑바로 들고 나를 바라보는 녀석은 어느새 한층 정리가 된 얼굴이었다.
그리곤 이번엔 또박또박한 말투로 분명하게 의사를 전달했다.
“미안해. 오해해서 정말 미안하다.”
“헤에…?”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수긍’도 아니고 ‘사과’라니! 이건 전혀 예상답안에 없던 결과였다.
본인의 충격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내 입장부터 먼저 배려하다니,
정말 내가 하는 시벨리우스가 맞나 싶었다.
내가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는 난감한 듯 시선을 살짝 피하며 말했다.
“실은 이전부터 뭔가 이상하다고는 느끼고 있었어.
그…뭐랄까. 암컷 특유의 향내도 없었고,
아무래도 겉으로 보이는 신체적인 차이도 있었으니까.
목소리도 여자 톤 치고는 낮은 편이었고. 골격도 여자치고는 큰 편이고…”
“그런데도 단지 이상하다고만 느꼈다고?”
시벨은 절대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니었다.
평소에 그 정도까지 느끼고 있었다면 당연 내가 남자라는 사실도 깨달았을 텐데,
이제야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자 녀석은 더더욱 난감한 표정이 되더니 슬쩍 내 표정을 살피며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얼굴이…”
“……”
아아, 그래. 그 모든 상황을 무시할 정도로 내 얼굴이 여자 같았다 이거군.
하지만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과 반대로 내 이성은 어느새 반쯤 날아가 있었다.
“크악! 내 이놈의 면상을 당장 대패로 갈아버리고 말겠어!”
“헉! 그러면 안 돼! 아프잖아!”
“지금 아픈 게 대수야?”
역시나 얼굴이 문제란다, 얼굴이!
그까짓거 칼자국만 여러 번 내주면 다시는 이런 오해 당할 리도 없겠지!
다분히 제정신 아닌 생각이었지만 나는 충동적으로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채앵! 내가 대뜸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내자,
시벨은 굳은 시체처럼 퍼런 얼굴이 되어 황급히 내 팔을 붙들었다.
“미쳤어? 정말 하려고?”
“한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얼굴과 작별을 고하고 말테다!”
“자, 잠깐!! 내, 내가 잘못했다니까? 그러다 잘못 찔러서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
“누굴 바보로 알아? 이제껏 폼으로 검을 배운 게 아니야!”
물론 제 얼굴을 찢으려고 배운 것도 아니지만.
만류하는 시벨을 재빨리 뿌리친 내가 막 검상을 만들어내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탁 하고 내 손을 잡는 강한 힘이 느껴지더니, 쥐고 있던 검을 강제로 빼앗아갔다.
잠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해 멍해있던 나는 범인을 알아차리고 빽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엘퀴네스! 얼른 내 검 내놔!”
“쯧, 가지가지 하는군.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다음 일정이나 생각해라.”
“난 지금이 더 중요해!”
“얼빠진 소리 하지 말고 정신 차려. 그 얼굴에 검상 하나 둘 생긴다고 달라질게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윽!”
태연한 얼굴로 내 가슴에 대못을 박은 엘뤼엔은 이번엔 시벨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쩔 거냐? 사과를 끝냈으면 의당 다음 대답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이 녀석과 동행하는 것 말이다. 이제 엘이 여자가 아니란 것을 알았잖아. 그래도 같이 갈 셈이냐?”
그 말에 나 역시 씩씩거리던 것을 멈추고 시벨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살짝 찌푸린 표정으로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난 여기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뭐? 왜?”
“실은 아깐 말 하지 않았지만,
통보 없이 마을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 장로 할아범이 날 찾고 있을 거야.
어쩌면 이미 추격대를 풀었을지도 모르지. 그 때문에 너에게 피해가 되고 싶지는 않아.”
“그럼 아깐 왜 수긍한 건데?”
“그야 내가 널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네가 남자라는 걸 알았으니 그럴 필요 없지.
반려가 될 수도 없는 상대에게 호감을 가져봤자 소용없잖아?”
과연 철저하게 여자에게만 친절한 종족! 나는 황당한 심정을 감추지 않은 채 그를 똑바로 쏘아보며 말했다.
“야! 넌 친구란 말도 모르냐? 이 세상에 여자 아니면 다 적이야?
호감을 가져도 소용없기는 왜 없어?
헛참.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네.
유니콘이 순결한 처녀를 좋아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게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다.
너 솔직히 말해봐. 지금까지 왕따였지?”
“…친…구?”
“그래, 임마. 세상에 여자와 남자의 사랑만이 존재하는 줄 아냐?
네가 진정 남자들끼리의 우정을 모르는구나.
넌 친구란 영화도 안봤…아, 봤을 리가 없지. 아무튼!
때론 얄팍한 커플의 사랑보다 훨씬 진득한 것이 바로 친구들끼리의 우정이라는 것이다! 알간?”
하지만 시벨은 오히려 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쯧쯧, 저러니 아직까지 도와주러 나온 동족도 없지.
저 나이 되도록 친구란 것도 모르다니.
혹시 그 장로할아범인지 뭔지 하는 양반이 저 녀석을 평생 마을 안에 붙잡아 놓으려고
일부러 타인과 단절된 생활만 하게 만든 게 아닌 가 의심이 들었다.
인간들 중에서도 귀족이나 왕자 같은 경우, 어릴 때부터 궁 밖으로 나가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것이 나 혼자만의 착각이라는 건 바로 이어지는 엘뤼엔의 말 때문에 알 수 있었지만.
“유니콘들은 친구란 개념이 없다. 배우자를 제하면, 그저 동료관계일 뿐이지.”
“동료가 친구인거 아니야?”
“네가 말하는 친구라는 게 우정이란 감정을 배제한 거라면 그렇겠지.”
“흐~음.”
그러니까 요컨대 ‘함께 어울리긴 해도 친하진 않다’로군.
문득 이전 노예상인에게 잡혀가던 길에 만났던 유니콘들이 떠올랐다.
둘 다 한 여인을 지키기 위해 같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전혀 편한 사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단순한 사무적인 관계라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일상이라니.
보통 유니콘이라도 그럴진대, 왕자라는 신분을 가진 시벨리우스라면 더더욱 다른 이들과 거리감을 두었을 것이다.
나는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을 하고 있는 시벨에게 입을 열었다.
“너 이대로 마을로 돌아갈 생각은 없는 거지?”
“응? 으응.”
“오해 때문이라지만 이왕에 나한테 호감 느낀 거 그대로 썩혀버리면 아깝지 않냐?
어차피 떠돌아다닐 셈이라면 나랑 같이 가자. 1:1의 동등한 관계로 말이야.”
“동등한?”
“그래. 넌 모르겠지만 원래 친구란 그런 거야.
보호받고, 지켜주는 사이가 아니라 역경을 함께 이겨나가는 관계.
참 멋지지? 어때, 친구란 거 한번 만들어보고 싶지 않아?”
“……”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이미 녀석의 마음이 이쪽으로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선뜻 응할 기미를 보이지 못하는 녀석에게 나는 환하게 웃으며 한 손을 내밀었다.
“내가 네 인생의 첫 번째 친구가 되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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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엘이 돌아간 후, 라미아스 역시 본 직분인 세피온 공작으로 돌아갔다.
몰래 빠져나갔던 것과 달리, 다시 들어가는 일은 조금 더 신경을 요하는 일이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 자들이 언제 어디서 눈을 부라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역시나 오자마자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서는 부관을 보며 그는 슬쩍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세피온 공작각하! 지금까지 어디에 계셨던 겁니까? 한참을 찾았습니다.”
“카렌트경. 머리가 아파서 잠시 산책을 하고 왔다네. 그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조금 전에 황제폐하의 칙서가 도착했습니다.”
“칙서? 흐음~ 보나마나 황성으로의 소환 명령이실 테지. 일단 이리 가져와 보게.”
그 즉시 카렌트는 황제의 인장으로 봉해진 편지를 정중히 그 앞에 내밀었다.
느긋하게 봉인의 밀랍을 뜯으며 라미아스, 아니 이제 세피온이 된 그는 속으로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통신용 수정구가 천지로 널린 세상에 굳이 편지를 보낼 필요가 있는 거야?
아무튼 인간들의 허례허식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편지의 내용은 역시나 그의 짐작대로 빠른 시일 내에 황성으로의 방문을 희망한다는 내용이었다.
보나마나 이번 정령왕의 폭주사건 때문이겠지만, 세피온으로서는 상당히 달갑지 않은 제의였다.
황성은 텔레포트를 이용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마법무효화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이동 마법진을 이용하더라도 며칠은 더 이동해야 했다.
그렇다고 황제의 지엄하신 명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그는 푸념처럼 중얼거렸다.
“끄응. 폐하께서는 이 늙은이가 가엽지도 않으신 겐가.
여행하기에는 이미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누차 강조해도 모른 척 하시는 군.”
일반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그의 투정은 맞는 말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세피온의 나이는 이미 60을 훌쩍 넘긴 노인이었으니까.
그가 황성의 출입을 끊고 공국 안에서 지내기 시작하자,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문이 돈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허나 카렌트는 조금도 동정하지 않았다.
부관인 그는 누구보다 현재 세피온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대련 시에 장정 열은 거뜬히 무찌르는 사람이, 그까짓 행군에 지친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잖은가.
“지금 곧 사람들을 추려 출발할 차비를 갖추라 이르겠습니다. 언제 떠나실 예정이십니까?”
“쩝, 통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역시나 냉정하군.
에잉. 하나뿐인 부관이 이래서야 어디 마음 편히 한탄할 사람이 있겠는가.”
“공.작.각.하!”
“아, 알았네. 이틀 후에 출발하도록 하지.”
그제 서야 굳은 표정을 푼 카렌트는 목례를 하려다 말고 마침 떠오른 사실을 알렸다.
“아, 그러고 보니 다비안 드 라스포경이 한 시간 전부터 공작님께 면담을 요청하고 계셨습니다.”
“라스포? 아아, 외무재상 크라우디 드 라스포 후작의 막내아들 말이로군. 그가 이곳엔 왜?”
“모르셨습니까? 라스포경도 이번 검술대회의 출전 선수였습니다.
그 역시 이번 폭발에 휘말렸습니다만
천운으로 큰 부상은 면하고 지금은 신관의 치료를 받아 거의 완치된 상태입니다.”
“호오, 그래? 그런데 아직까지 영지에 돌아가지 않고 뭐했다던가?”
“방금 말씀드렸잖습니까. 공작님을 뵙고 싶어 한다고요.”
“날 왜?”
“…그거야 직접 만나서 들어보시면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카렌트는 입가에 이는 경련을 간신히 억누르며 대답했다.
세피온 공작은 일에 관련된 일에는 무섭도록 냉정한 사람이지만,
평소엔 엉뚱한 태도로 측근들을 놀리는 것이 취미였다.
덕분에 지금까지 부관인 그가 겪어야 했던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카렌트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본 세피온은 즉시 장난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지난 경험을 통해 이 이상 자극하면 폭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험험, 손님을 접견실로 모시도록 하게.”
“네, 알겠습니다.”
부관이 밖에 있던 시종을 향해 지시하는 사이, 세피온 역시 접견실로 이동했다.
잠시 후 한 사내가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왔다.
제법 다부진 체격에 오랜 시간동안 검을 다루어 온 자만이 풍기는 정갈한 느낌을 가진 청년이었다.
오늘 처음 만난 것 치고는 청년의 모습은 꽤 낯익었다.
잠깐 기억을 더듬던 세피온은 곧 그를 폭주의 현장에서 만났던 사실을 떠올렸다.
물론 그때는 라미아스의 모습이었으므로, 상대편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 할 테지만 말이다.
‘호오, 그때 엘과 함께 있던 녀석 중 한명이로군.’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청년의 목적 역시 어렵지 않게 짐작되었다.
아마도 갑작스레 증발된 엘의 행방에 관계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세피온은 어디까지나 이번 만남이 처음인척, 반가운 환영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게, 다비안 드 라스포경. 그래, 후작께서는 요즘 어떠신가.”
“염려해주신 덕분에 언제나 건강하십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세피온 공작님. 갑작스럽게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아닐세. 나야 말로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자리에 앉게나.”
다비안이 의자에 앉자, 주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곧 차와 다과를 가져왔다.
세피온은 사람들을 모두 물러나게 한 다음, 느긋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도 이번 일에 휘말렸다고 들었네. 그나마 크게 다친 곳이 없다니 정말 다행이군.”
“운이 좋았습니다. 실은 공작님을 찾아온 것은 바로 그 일 때문입니다.”
“흐음. 굳이 나를 찾아올 만큼 중요한 사안인가?”
“네. 이번 폭주를 해결한 정령사를 찾고 있습니다.
황제폐하께서도 그를 찾으라는 황명을 내리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공작님이시라면 알고 계실 것 같아서…”
“아아. 엘이란 이름의 소년 말이로군.”
세피온이 슬쩍 아는 기색을 비취자 다비안은 반색을 하며 눈빛을 빛냈다.
지난 며칠 동안 찾던 소년의 행방을 드디어 알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대답에 그는 금세 실망하고 말았다.
“나도 백방으로 찾아보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그는 이 공국을 완전히 떠난 듯하네.
눈에 띄는 인상착의임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목격자가 없다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지.”
“…그렇군요. 아! 혹시 후드 같은 것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 부분 역시 충분이 염두에 두고 조사를 진행 중이네.
그런데 자네는 그 소년에게 무슨 용건이 있는 건가?”
“실은 대회 일정동안 그와 룸메이트였습니다.
폭발 시에 저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고요.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서…어떻게든 꼭 찾아서 보답하고 싶습니다.”
“흐음. 그는 별로 신경 안 쓸 것 같은데.
명예와 보답을 바라는 자라면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렸을 리가 없으니 말이네.”
그런데 이렇게 찾는 건 오히려 그의 뜻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세피온의 말에는 이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 뜻을 어렵지 않게 알아들은 다비안은 망설이는 얼굴로 대답했다.
“공작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아마 이번 일만 아니었어도 그는 끝까지 본인이 정령사라는 사실을 감추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대로 도움만 받고 가만히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
“허허. 은혜를 입고 모른 척 할 수는 없다는 것인가? 요즘 젊은 귀족치고는 꽤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줄 아는군.”
“과찬이십니다.”
세피온은 칭찬에 인색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런 자에게서 드물게 좋은 평가를 받자, 다비안은 쑥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렇지 않아도 자네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가장 최근에 후작과 이야기 했을 때 들은 바로는, 정령사를 꿈꾸고 있다지?”
“아…송구스럽지만 그렇습니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친화력이 부족해서 실현되기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허허. 뭐든지 도전하는 것에 가치가 있는 법이지.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해보게.
타고난 친화력이 없어도 노력 여하에 따라 하급 정령을 소환하는 사례가 가끔 있더군.”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님의 말씀, 가슴깊이 새기겠습니다.”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는 다비안의 모습에 세피온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정령을 소환하려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지금은 잠잠해졌지만 한때 라스포가문의 막내아들이
엘프에게 반해 정령사가 되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귀족들 사이에서 큰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아들의 고집에 지친 크라우디 후작이, 정령을 소환해야만
엘프 마을에 보내준다는 약속을 한 것 역시 꽤 유명한 일화였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그는 꽤나 장래가 촉망되는 검사였다.
라스포가문은 대대로 문인집안이었지만, 다비안은 타고난 무골이었다.
4살 때 검을 배우기 시작해서 빠른 성취를 보였고, 입학한 기사학교에서도 늘 상위권의 성적에 속했다.
세이크 제국에서 기사가 된다는 것은 곧 가문의 영광이었다.
마법사 못지않게 전투를 지휘하는 기사의 역할이 중시됐고, 그 만큼 존중과 대우를 받는 시대였다.
때문에 사람들이 다비안의 행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정령사를 꿈꾸기 시작한 이후로, 이제는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기사학교를 졸업하고 작위까지 받았음에도 그는 가문에서조차 잊혀 진 사람이 되었다.
여전히 그가 자신의 꿈을 포기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정령사가 되었다면 모를까, 조금의 발전도 없는 그를 향해 사람들은 대놓고 비웃었다.
후작과 그의 부인 역시 가문의 위신에 먹칠을 한 그를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만의 전투를 해 온 것이 벌써 햇수로 20년째.
인내심 면에서 보자면 누구도 따라올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세피온은 보면 볼수록 다비안이 마음에 들었다.
“후작의 말로만 들었을 때는 자네가 정령에만 미쳐 아무것도 눈에 두지 않는 안하무인인줄로만 알았네.
하지만 이제껏 내가 잘 못 생각했던 모양이야.
기백을 보아하니 자신의 꿈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검술역시 소홀히 다루지 않은 것 같군.”
“어렸을 때부터 몸에 베였던 일이기도 하지만, 검은 제가 살아가는 또 다른 이유니까요.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흐음. 그래, 현재 작위가 어떻게 되나?”
“자작입니다.”
다비안은 갑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세피온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러자 다음순간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혹시 자네, 내 후계자가 될 생각 없나?”
“……예?”
“허허, 뭘 그렇게 놀라나. 내가 이 나이 되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다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을 걸세.
적당한 후계자를 찾고 있지만 그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더군. 자네가 생각이 있다면, 내 후계자로 삼고 싶은데.”
“예에?”
남들이 들으면 횡재했다고 환호할 제안을 받고서도 다비안은 그저 먹먹한 심정이었다.
세피온 공작에게 후계자가 없는 것이 사실이긴 했다.
그래서 호시탐탐 그 자리를 노리고 공작의 마음에 들기 위해 목을 빼는 무리가 쇄도 한다는 것도.
하지만 집안에서조차 외면당하는 그에겐 모두가 꿈같은 이야기.
방금 전 그 제의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전부 남의 얘기라고만 생각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런 일이 자신에게 닥치고 보니,
다비안은 한순간 자신이 환청을 들은 것이 아닌 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저어…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응? 후계자가 되라는 데에도 굳이 뜻이 필요하나?”
“아, 아니오. 그러니까…저의 어디를 보시고 갑자기 그런 제의를 하시는 건지…”
사랑이란 단어도 모르던 철부지 어린 시절,
우연히 숲에서 만난 엘프에게 첫눈에 반한 이후로 그는 정령사가 된답시고 주구장창 헤매고 다녔다.
낳고 기른 부모조차 낯 뜨거워 사람들 앞에 내세우지도 못하는 아들이 아니었던가.
그런 과거를 모른다면 모를까.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공작이 제정신으로 후계자로 삼겠다는 말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사실 다비안의 생각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
지금 세피온으로서는 누가 되든 얼른 이 자리를 물려주고 유희를 정리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지겨워지고 있을 무렵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몇 번씩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나니,
빨리 꿈에서 깨고 다른 꿈을 꾸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자신이 몇 십 년 동안 이룩한 과업을 아무에게나 물려줄 마음은 없었다.
원래 이 자리를 맡기려 했던 루시엘은 여동생을 잃은 충격 때문에 한동안은 재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던 찰나 다비안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자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드래곤의 눈은 타인의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다.
무뚝뚝한 얼굴에 비해 다비안의 두 눈은 의지와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은 원하는 일에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여 결국 승리하고 만다.
그리고 누구보다 가슴깊이 검을 사랑하는 자였다.
허리춤에 달린 검집이 흠잡을 곳 없이 깨끗하게 손질된 것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검을 애지중지 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그가 루시엘을 마음에 들어 했던 이유도 바로 이런 검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이번 유희에서 설정한 세피온 공작은 오직 우직하게 검 하나만을 믿고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그런 자신의 신념을 이을 수 있다면, 다소 야망이 많은 타입이라 해도 용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다른 적임자를 찾았으니, 굳이 그에게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세피온은 한시름 던 기분으로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사람을 마음에 들어 하는 데도 구구절절한 사연이 필요한 건가?
굳이 붙이자면… 그래, 자네의 순수한 열정이 마음에 들었다고 해두지.
자신이 정한 목표를 향해 청춘을 불사르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그저 되는 대로 흘러가는 다른 귀족 청년들과는 확실히 다르지.
자네라면 내가 원하는 공국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네.”
“하지만…”
“거절치 말아주게. 내가 이런 제안을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니니.
자네만 괜찮다면, 지금 당장 라스포 후작에게 기별을 넣어서 자네를 내 양자로 데려오고 싶다고 말 할 생각이네.”
“헉! 고, 공작님의 뜻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못됩니다.
저 같은 자를 후계자로 맞으시면, 공작님의 위명에 훼손이 갈까 두렵습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이미 세간에 검을 꺾고 정령사가 되려 하는 것으로 알려진…기사의 명예를 저버린 사람입니다.”
“하하!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일은 고되지만 즐거운 법이지.
세상은 그런 자를 한심하게 여기지만, 자네라면 틀림없이 해내리라 믿네.
다만 마지막까지 그 신념을 버리지 않고, 이 공국을 위하는 마음만 가져준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히 족하네.”
“공작님…”
다비안은 눈가가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혼자 고군분투 하면서 단 한사람이라도 자신을 돌아봐주기를 바랬다.
부모 형제조차 믿어주지 않은 자신을 전혀 뜻밖의 사람이 인정해준다는 사실에 그는 감정이 뜨겁게 벅차올랐다.
게다가 그 사람이 누구나 다 칭송하는 대단한 사내임에야!
결국 그는 세피온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나타난 단 하나, 자신을 믿어주겠다는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훗날, 정령기사로서 대륙에 이름을 떨치는 ‘다비안 드 세피온’ 공작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
“후후후후후. 아싸, 좋구나. 이걸로 이제 나도 좀 쉴 수 있겠지?”
다비안이 속으로 감동하든 말든, 라미아스는 라미아스대로
이번 유희를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껏 기뻐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미사어구를 잔뜩 갖다 붙이긴 했지만,
결국 그가 다비안을 택한 이유는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걷어차고 싶어서였다.
(만약 이걸 알았다면 다비안은 벅차던 감격을 집어치웠을 것이다.)
그가 떠나고 혼자 남은 그의 머릿속엔 앞으로 새로 이어질 유희에 대한 구상으로 가득했다.
“랄라~ 신난다. 이번엔 뭘 할까? 넘치도록 권세를 손에 쥐어봤으니,
거지나 노예로 지내볼까? 으하하~ 그것도 꽤 짜릿하겠는 걸?”
새로운 유희도 좋지만 그래도 우선은 레어로 돌아가서 당분간 푹 잠을 청할 것이다.
이번 유희가 생각보다 길어진 탓에 당분간은 본체로 돌아가 여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모처럼 이니만큼 그동안 미뤄두었던 영혼의 보석을 수집하는 일도 다시 재개해볼 생각이었다.
이런 저러한 일을 다 따지고 나면 새로운 유희를 시작하는 일은 꽤 나중의 일이 될 것 같았다.
“자아~ 그럼 어서 다비안을 내 후계자로 정한다는 공문을 띄워야지.
먼저 그 녀석의 아비 되는 인간한테 편지를 써볼까…놀라는 모습이 눈앞에 선한 걸? 킥킥.”
라미아스는 짓궂게 웃으며 책상의 서랍 속에서 깃털 펜과 잉크를 꺼내들었다.
그가 막 편지의 서문을 알리는 한 줄의 글자를 종이에 적던 순간이었다.
“그런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흐엑!”
갑작스런 불청객의 등장에 그는 드래곤으로서의 체통도 잊고 괴상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놀란 시선으로 고개를 드니 이전처럼 예고 없이 찾아온 검은 피부의 소년이 보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그는 안도하며 칭얼거리는 말투로 투덜거렸다.
“뭐야? 트로웰. 예고 없이 좀 나타나지 말라고. 깜짝 놀랐잖아. 또 무슨 일이야?”
그리 오랜만에 보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트로웰은 좋지 못한 일로 정령계에 다녀온 참이었다.
본래라면 괜찮냐고 묻는 것이 순서였겠지만,
서늘하게 식어있는 황금색 눈동자를 보니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본능적인 감각이 눈앞에 서있는 정령왕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오고 있었다.
평소와 변함없는 표정인데 왜 이렇게 위태해 보이는 걸까.
불안함에 침을 꿀꺽 삼킨 그는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얼른 화제를 바꿨다.
“아, 그러고 보니 엘퀴네스랑 그 엘이란 소년은 벌써 떠났어.
그 녀석 알고 보니 영혼의 보석을 찾고 있더군?
나도 한번 맘 잡고 찾으려면 10년 이상은 걸리는 건데 말이야. 괜찮을지 걱정이라니까. 넌 같이 안 가는 거냐?”
“아아.”
“엥? 왜? 꽤 챙겨주는 것 같더니만.”
“……내가 약속을 깨서, 더 이상 같이 있을 수 없거든.”
무심한 어조였지만 굉장히 슬프게 들렸다.
순간 더 이상 물어선 안 된다는 경고가 머릿속에 들어왔지만 라미아스는 호기심을 못 이겨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약속을 깨다니? 그 꼬맹이랑 무슨 약속을 했는데?”
“…1년 동안 나를 설득시키는 것에 성공하면, 인간들을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
“!!”
그때서야 라미아스는 그가 처음 나타나자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런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했었다.
정확히 짚어 주지 않아도 그것이 자신의 후계자건과 관계된 말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얼마 전에도 이와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후계자를 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그것은 바로…
“너 설마…아직도 그 계획을 철회하지 않은 거야? 기어이 인간을 멸종시키려고?”
“말했잖아. 약속을 깼다고.”
“무, 무슨 소리야. ‘약속을 깼다’는 것은 반대로 이미 설득 된 상태라는 거잖아.
그런데 왜 인간을 죽이겠다는 거야? 이런 건 전혀 너답지 않아.”
“내 기준은 처음부터 내가 아니었어. 평소의 모습으로 날 판단하면 곤란해.”
살짝 미소 짓는 모습이 두렵게 느껴지는 건 자신만이 아닐 것이다.
원래 트로웰은 관대한 성격이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 보니 그는 이전처럼 인간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굳이 애꿎은 희생을 감행하려는 것인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건 아닌 것 같고. 결국 미네르바가 문제로군.’
그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는 언제나 이유가 하나로 좁혀졌다.
그놈의 사랑이 뭔지, 미네르바의 존재만으로 트로웰은 어디까지든 악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제 아무리 견고한 정령왕의 정신이래도 오래 지나지 않아 무너져 버릴 것이다.
라미아스는 진심으로 안타까운 심정으로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트로웰 역시 똑바로 마주 보았다.
유리처럼 깨끗한 그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이 나타나있지 않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뜻을 굽히지 않을 얼굴이다.
설령 미네르바가 직접 만류한다 해도 돌이키지 않을 것을 알기에, 라미아스는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트로웰…제발…”
“드래곤들을 모아줘. 평소 인간에게 불만이 많았던 녀석들일수록 좋아.
엘프나, 드워프. 몬스터를 동원해도 상관없어.”
“뭐?”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의 말에 흔들린 건 사실이니까. 원하던 대로…내 손으로 직접 처리하는 건 참아주지.”
“트로웰!”
여기서 그의 말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라미아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설마 전 종족을 동원하여 인간을 몰살시킬 셈인가?
창백하게 굳어지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도 트로웰은 무심한 표정으로 한마디 내뱉고 돌아섰을 뿐이었다.
“기대하고 있겠어, 라미아스. 나를 실망시키지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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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우에에에? 뭐가 이렇게 멀어!”
왔던 길을 고스란히 돌아가야 하는 처지에 직면한 지금.
나는 가는 길을 제대로 알기 위해 상점에서 지도를 하나 구입했다.
지금까지는 엘뤼엔이나 트로웰이 안내해 주는 대로 이동해왔지만,
이제부턴 절대로 도움을 주지 않겠다는 냉정한 선포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까짓 그의 능력이면 몇 초 사이에 갈 수 있는 길을 두고 일부러 고생하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 생각해서 얌전히 수긍했다.
그러나 대충 이곳까지 온 기간을 두고 예상해봤던 길은 생각보다 훨씬 더 멀고 길었다.
아마도 올 때는 다수의 지름길을 이용했었던 듯하다.
게다가 중간에 노예상인에게 잡혀간 뒤, 두 정령왕이 손수 구출하면서 곧바로 수도로 데려와 버리기도 했고.
“으으~ 이거 못 잡아도 2~3달은 걸리겠는데?”
지도를 보며 울상을 짓자 옆에서 덩달아 심각하게 보던 시벨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예상으로도 두 달 반 정도는 걸릴 것 같아.”
“그렇지? 아아. 이번엔 절대 못 걸어.
가는 길에 마시장이라도 들려야겠다. 쩝, 경비 절감해야 하는데 큰일이네. 시큐엘이라도 타고 다닐까?”
야속한 엘뤼엔은 ‘도움’에 해당한다는 명목 하에 물자지원까지 중단해버렸다.
애초에 수도까지 데려다주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그 외의 지원은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덕분에 생전 안 해 보던 돈 걱정까지 겹치게 되자 앞날이 그야말로 가시밭길처럼 느껴졌다.
그나마 고민을 같이 나눌 친구-시벨리우스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한결 위안이 되고 있었지만.
애꿎은 녀석을 붙잡아 덩달아 고생시킨다는 생각에 그리 마음은 편치 못했다.
“시큐엘이라면, 물의 상급정령?”
“응. 나는 드래곤보다 마나가 충만한 편 이랬으니까 장시간 소환해도 괜찮을 거야.
녀석으로서는 좀 기분 나쁘겠지만.”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 정령이라면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
그리고 늑대의 모양이니까 타고 다니기엔 그리 적합하지 않을 것 같은데.”
“으으, 그런가…”
결국 마시장까지 가야 하는 모양이라며 체념하는 내게 시벨은 주저하는 얼굴로 물어왔다.
“저기, 내가 태우고 갈까?”
“뭐?”
“난 유니콘이잖아. 본체로 돌아가면 너 하나쯤 태우고 다니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하하하, 말은 고맙지만…그거야 말로 눈에 띄일 것 같은데. 유니콘이 어디 보통 말이냐.
이마에 뿔도 있고 날개까지 있잖아.”
“그거야 감추면 되지. 게다가 높이 날아서 가면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 거야.”
썩 괜찮은 제안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안 되겠어. 나 혼자 편하자고 널 고생시킬 순 없지.”
“응? 아, 아니. 난 괜찮은데.”
“아냐, 그건 불공평 한 거야.
너도 유희중인데 굳이 본체로 돌아가면서까지 수고할 필요가 뭐있어?
그냥 마시장에서 적당히 싼 말을 구하자. 그게 나을 것 같아.”
시벨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내 태도가 너무 확고해서인지 더 이상 반대하지는 않았다.
결정이 내려진 직후 우리는 바로 마시장부터 들려 적당한 말을 고르기로 했다.
넓은 터에 우리에 갇혀진 말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상인인 듯한 남자가 얼른 달려와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어떻게 오셨습니까?”
“말을 보려고 하는데요. 2~3달 정도의 여행에도 무리 없을 만큼 튼튼한 걸로요.”
“어디 멀리 가시나 보군요. 튼튼한 말이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쪽으로 와서 골라보시지요.”
상인이 안내한 곳은 마시장 내에서 가장 큰 울타리 안 이었다.
그곳에는 우리 말고도 여러 명의 사람들이 말을 고르거나 흥정하고 있었다.
차례로 묶여있는 말들은 하나같이 크고 강해보였다. 내가 말 앞으로 다가가자 시벨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제법 괜찮은 말들이 많은데? 어느 것으로 할 거야?”
“글쎄…내가 보기엔 다 그게 그거라서. 그냥 색깔 예쁜 걸로 고르려고.”
“쿡쿡. 그럼 내가 알려주는 것들 중에서 선택해.
여기 검은색, 저쪽의 흰색, 그 옆의 갈색 말이 여기 있는 말들 중에선 제일 건강하고 튼튼한 거야.”
“그으래?”
녀석이 하는 말이니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언뜻 스쳐본 상인의 표정에 감탄이 깃드는 것을 보니 더더욱 확실했다.
“아이고, 손님이 말을 보실 줄 아시는 군요.
짚어주신 세 마리 모두가 여물도 잘 먹고 피부도 건강하답니다.
셋 중에 아무거나 고르셔도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으음. 그럼 난 검은색으로 할까…시벨, 넌 뭐로 할 거야?”
“응? 나도 사?”
놀란 표정으로 묻는 말에 나는 당연한 걸 묻느냐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럼 나만 타고 다녀? 우리 같이 여행하는 거잖아.”
“난 그냥 걸어도 상관없는데.”
“내가 불편해서 안 돼.”
“돈도 없다면서….”
“한 마리 정도 더 사는 건 괜찮아.”
딱 잘라 말하자 녀석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보라는 말은 안보고 엉뚱한 주위를 휘익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한 부분에 딱 시선을 멈추곤 옆에서 조마조마하게 서있던 상인을 향해 말했다.
“저기에 있는 말은 안파는 겁니까?”
“예?”
시벨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그곳엔 한눈에 봐도 비실비실 거리는 말 한 마리가 애처롭게 묶여있었다.
너무 말라서 뼈와 가죽밖에는 없는 걸 팔려고 내놓은 것 같지는 않았다.
예상대로 그 말을 보자마자 상인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녀석은 팔고 싶어도 사갈 사람이 없을 겁니다.
어디 고산의 야생마를 잡아 온 거라는데 통 여물을 먹지 않아서 저렇게 비쩍 말랐거든요.
당장 죽을 날이 오늘 내일 하는 걸 가져다 어디에 쓰겠습니까?”
“사간다는 자가 있으면 파시기는 하는 거구요?”
“물론 그렇담 환영입지요.
저도 상인인지라 손해 보는 장사는 안하는 사람입니다만, 저건 공짜로 드릴 의사도 있습니다.”
그러자 시벨은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럼 난 저걸로 할래, 엘.”
“뭐? 하지만…”
“불쌍하잖아. 저렇게 그냥 놔두면 당장 오늘 밤도 못 넘기고 죽을 거야. 내가 잘 돌보면서 데리고 다닐게.”
아니, 그전에 네가 타고 다닐 수가 없다는 게 문제라는 자각은 못하는 거냐.
얼떨떨한 심정이었지만 녀석의 순진무구한 얼굴을 보니 차마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내가 탈 말 한 마리의 값만 지불하고, 덤으로 마른 말을 공짜로 얻게 되었다.
경비를 생각하자면 잘된 일이었지만, 시벨이 끄는 말을 볼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저기…시벨리우스. 그 말 너무 약해 보이는데. 지금이라도 다시 가서 사는 건…”
“응? 아냐, 엘. 괜찮아. 이 녀석, 지금은 이렇게 말랐지만 살만 조금 찌면 웬만한 명마가 부럽지 않을 걸?
굉장히 좋은 품종이야.”
“하지만 지금 걷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데.”
“오래 동안 아무것도 안 먹어서 그래. 이제 먹으면 금방 괜찮아 질 거야.”
생긋 웃은 녀석은 간간히 말에게 치료마법을 걸어주며 체력의 회복을 도왔다.
내가 그것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지금껏 침묵하고 있던 엘뤼엔이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동물에 관해서라면 유니콘 보다 잘 아는 자가 없다. 녀석이 괜찮다면 정말로 괜찮은 거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으음. 여물을 먹지 못해서 말랐다고 하던데. 계속 안 먹으면 죽는 거 아니야?”
“야생마라고 했잖아. 경계심이 강해서 인간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았던 것뿐이다.
이제 다루는 상대가 인간이 아니니 지금까지와는 다를 거야.”
“헤에,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언젠가도 들었던 것 같다.
드래곤이 몬스터를 다룬다면, 유니콘은 동물을 다룰 수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두 마리의 말 모두 시벨에게 무척 호의적이었다.
그가 주는 여물을 아주 잘 받아먹는 것을 본 나는 조금 안심하며 물었다.
“일단 완전히 회복되길 기다려야겠지? 언제쯤이면 될 것 같아?”
“치료마법을 꾸준히 걸고 있으니까 내일 아침이면 충분해. 오늘 저녁 사이에 기력 되살려 놓을게.”
“가능할까?”
“응. 나한테 맡겨줘.”
그 뒤 여분의 식량을 구입한 우리는 마을을 벗어나 한적한 장소에서 노숙을 하기로 했다.
여관에서 머물다 출발하고 싶었지만
아직도 나를 찾아 헤매는 기사들이 사방에 깔려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마을을 벗어나고도 무사할 거란 보장은 할 수 없었다.
이미 내 인상착의를 적은 몽타주가 사방에 뿌려졌기 때문이다.
‘이거야 원. 좋은 일 하고도 범죄자 취급이네.’
황제의 명령이라니 아마 들리는 마을마다 비슷한 상황이 될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떠나기 전 라미아스에게 폴리모프 마법이라도 부탁할걸.
이제와 다시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한참의 고민 끝에 먼저 스타일에 변화를 줘보기로 했다.
“염색?”
“응. 몽타주에는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라고 되어 있잖아. 색을 바꾸면 사람들에게 혼동을 줄 수 있을지 몰라.”
“그럴까? 머리카락 색 정도는 내 마법으로도 바꿀 수 있어.”
“와아, 정말? 그럼 나 검은색으로 만들어줘.”
“검은색?”
되묻는 시벨의 표정은 뭔가 잔뜩 불만스러워 보였다.
하고 많은 색 중에서 왜 그렇게 어두운 계열을 선택 하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내가 재촉하자 녀석을 별 수 없다는 듯 순순히 머리색을 바꿔주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반짝거리던 금발이 새카맣게 변하자 마치 예전의 강지훈로 돌아간 마냥 들뜨는 기분이 들었다.
“어때? 괜찮아?”
“으음. 의외로 흑발도 잘 어울리는걸.
이미지가 확 달라 보여. 조금 차가운 느낌이랄까. 차분한 느낌 같기도 하고…”
“그래? 그럼 여기서…”
“우왓! 엘, 지금 뭐하는 거야?”
뭐하긴. 머리카락 자르는 거지. 뻔히 보고도 모르남?
경악하는 시벨을 무시한 채 나는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단숨에 목 아래까지 짧게 잘라냈다.
대강 자른 탓에 잔머리도 삐죽삐죽 튀어나오고 전체적인 모양은 엉망이었지만,
오랜만에 짧은 머리를 한 탓인지 기분만큼은 굉장히 상쾌했다.
후두둑 어깨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아무렇지 않게 털어내며 나는 씨익 미소 지었다.
“자아~ 이제 머리 기장도 다르고 색도 다르니까 의심 받을 확률이 더 줄어들 거야! 어때, 내 계획이!”
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영 떨떠름했다.
처음부터 놀랐던 시벨은 물론, 엘뤼엔 또한 탐탁지 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두서없이 자른 탓에 모양새가 너무 형편없는 게 문제인 모양이었다.
하긴, 아무렇게나 검으로 서걱 자른 것이 오죽하겠느냐 만은.
“표정들이 왜 그래?”
“으으으~ 방금 뭘 한 거야, 엘! 이렇게 예쁜 머리를 자르다니! 아깝잖아~!”
“아깝긴. 머리야 내버려두면 또 자라는걸 뭐.
치렁치렁 내려오는 게 이제 슬슬 지겹기도 하고.
안 그래도 한번 잘라볼까 생각 중이었는데 마침 기회가 좋았잖아? 하하하!”
“하아, 정말 말도 안 돼. 왜 저런 인간들 때문에 엘이 이런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거야?”
“왜? 그렇게 이상해?”
혹시 너무 산발한 머리 탓에 광인(…)처럼 보이는 건가 싶어, 나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엘뤼엔이 거울 대신 내 앞에 커다란 물웅덩이를 만들어 주었다.
그제야 제대로 보게 된 모습은 조금 정돈이 안 되었다는 느낌뿐,
그렇게 한탄이 나올 정도로 이상하게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내 딴에는 오히려 훨씬 남자다워진 것 같아서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난 괜찮은데?”
“이상하다는 게 아니야. 아까우니까 그렇지.
긴 머리 정말 잘 어울렸는데. 그걸 그렇게 망설임 없이…
휴~ 어쨌든 가만히 있어봐.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머지 부분 다듬어줄테니까.”
“…어어, 그, 그래.”
시벨리우스…너 혹시 직업 잘못 선택 한 거 아니냐?
지금이라도 요리사에서 미용사로 전직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고작 머리카락하나 자른 것 가지고 이렇게 울상을 짓다니,
이 녀석에게는 남들과 다른 섬세한 예술의 혼이 불타고 있는 게 틀림없다.
‘내 생전 머리카락 자르고 죄책감 느껴보긴 또 처음이네…’
깨끗하게 정돈해주는 와중에도 바닥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녀석을 보니 절로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 후로도 한참이나 한숨을 내쉬던 녀석은 머리정돈이 전부 끝날 때가 돼서야 겨우 아쉬운 표정을 털어냈다.
“자, 다 됐다. 뭐, 지금 다시 보니까 이것도 꽤 괜찮게 어울리네. 확실히 이미지가 많이 달라진 것 같아.”
“그래?”
“응. 이전은 화려하고 신비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차분하면서 소년다운 느낌이야.
그런데 왠지 전보다 더 어려 보이는데, 괜찮겠어?”
“그런 건 상관없어. 애초에 이미지가 달라지는 게 목적이니까,
연령대의 변화도 나쁘진 않겠지. 어쨌든 이걸로 당분간은 귀찮은 검문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엘퀴네스가 보기엔 어때? 좀 달라져 보여?”
빈말이라도 괜찮다고 말해주면 입안에 수증기가 맺히는 걸까.
질문의 의도가 뭐냐는 듯, 그는 한참동안 내 얼굴을 노려보더니 불쑥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분명 차이는 있군. 소녀에서 남장 미소녀로. 어떻게 해도 여자 같은 얼굴이라니,
쯧, 너도 참 불쌍한 인생이군 그래.”
“…왜 또 시비야?”
그 순간 나는 자그맣게 흘러나오는 시벨리우스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그건 그래.”
“……”
세상에 내 편은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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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남이 빈정거리든 말든 어쨌건 내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공국을 벗어나기까지 몇 번이나 검문에 걸렸지만,
조사를 하고 있던 기사들은 내 머리가 짧고 까맣다는 이유로 전혀 동인인물로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덕분에 무사히 공국을 벗어난 우리는 완전히 날이 저물기 전까지 꽤 많은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다.
그래도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쉬지 않고 계속 걸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노숙 준비에 들어간 것은 앞이 컴컴해져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때가 되어서였다.
“으음. 이쯤이 좋겠어. 오늘은 여기서 묵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자. 말들은 어떻게 하지? 적당한 곳에 묶어둘까?”
“아니, 그냥 풀어놔도 괜찮아. 도망가지 않을 테니까.
이 근처는 몬스터 출몰지역이 아니니까 그리 위험한 일도 없을 거야.”
“그래? 그럼 새벽 불침번은 안정해도 되나?
그래도 들짐승이 있을지도 모르니 모닥불은 피워야겠지? 어디 장작으로 쓸 만한 게 있으려나.”
다행히 우리가 있는 장소는 숲과 가까운 탓에 주위에 꽤 많은 나무들이 있었다.
겨울이긴 하지만 아직 눈이 내리진 않았기 때문에 잘 찾아보면 건사할 만한 게 꽤 많을 것 같았다.
내가 주위를 살피기 시작하자 시벨리우스는 말의 안장을 내리다 말고 황급히 돌아보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주위에 뭔가가 다가오는 낌새가 느껴지면 내가 바로 일어나서 살펴볼게.”
“훗.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어차피 추우니까 불은 피워야 돼.
엘퀴네스나 넌 몰라도, 난 이렇게 그냥 자다간 다음날 얼어 죽은 시체로 발견될걸?
인간의 육체는 날씨에 약하다고.”
“그럼 텐트를 만들면 되지.”
“글쎄 텐트라도 마찬가지…아, 맞다! 너 마법으로 집을 만들 수 있었지?”
“음. 집이라기보다는 그냥 임시적으로 묵을 수 있는 공간 같은 거야.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 내가 전에 보여준 적 있었나?”
고개를 갸웃하면서 묻는 말에 나는 아차 싶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보여준 건 아니고, 그런 것도 가능하다고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아서…”
“그래? 이건 언령 마법의 일종이라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영역이거든. 혹시 전에 만났던 드래곤한테서 들었어?”
“으응! 그랬던 것 같아.”
다행히 녀석은 별다른 의심 없이 내 말을 믿는 것 같았다.
반면 엘뤼엔은 수상하다는 눈길을 보냈지만 나는 모른 척 무시함으로서 위기를 넘겼다.
잠시 후 시벨리우스가 만든 텐트는 이전에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겉모양은 평범한 천막이었으나 내부는 여느 고급여관 못지않게 넓고 안락하게 꾸며져 있었다.
문이 여러 개 있기에 열어 보았더니, 화장실과 주방까지 따로 구비되어 있었다.
내가 그것을 보며 연신 감탄하자 녀석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실 드래곤들은 유희 중에 이런 편법을 쓰지 않아.
고생하는 것도 유희를 즐기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여행 중엔 최대한 마법을 자제한다고 해.”
“그래? 난 그런 마법을 쓸 수 있으면 최대한 편하게 지내고 싶을 것 같은데.”
“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수명이 기니까 너무 편하기만 하면 금방 그 생활에 질리고 말거든. 엘퀴네스, 당신도 그렇지 않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질문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행으로 합류한 이후 그가 직접 엘뤼엔에게 말을 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둘 다 서로가 있든 말든 무시하는 상태였으므로,
나 혼자 둘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끼어있던 셈이었다.
혹시나 지금의 대화로 둘의 관계가 조금은 발전하지 않을까?
내가 조마조마한 눈으로 엘뤼엔을 바라보자 그는 시큰둥한 표정이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여행을 시작한다면 확실히 그렇지.
하지만 정령은 처음부터 완전히 인간 세상에 녹아들지 못하기 때문에,
유희라곤 해도 대부분 5년에서 10년 사이로 끝난다. 질리고 뭐고 할 사이도 없지.”
“그렇군. 그런데 계약자가 응하면 지금처럼 계속 동행해주기도 하는 건가?
내가 알기론 서로 개인 생활을 하다 필요한 일이 있을 경우에만 방문한다고 하던데.”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다.
이 녀석은 아직 미숙한 것 투성이라 옆에서 두고 봐야 할 것 같거든.
인간 중에서는 최초로 나를 소환한 녀석이니까, 일찍 죽어버리면 곤란하지.”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는 말투긴 했지만 결국은 나를 지켜주기 위해 동행한다는 소리였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이미 포기했지만, 이럴 땐 약간의 희망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그에게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는 아닌 것 같았으니까.
그것이 비록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해도.
“아무튼 의외네. 엘퀴네스는 타인의 일에 지독할 정도로 무심한 정령왕이라고 들었는데.
그 소문이 틀렸던 것 같군.”
“…마음대로 생각해라. 다른 이들의 입방아에 맞춰줄 생각은 없으니까.”
“흐으음. 과연 ‘아버지’란 말이지.”
“뭐?”
“전에 엘이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걸 들었어.
과연 그만큼 의지의 대상이 된다는 소리겠지. 그렇지, 엘?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부르는 걸 못들은 것 같아.”
“응? 아, 뭐…역시 진짜 아버지는 아니니까. 아하하하…”
착각이었을까? 순간 나와 시선이 마주친 엘뤼엔의 눈빛이 약간 흔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자세히 보려고 하기도 전에 그는 순식간에 원래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지 않나?
잠들기 전에 내일 일정을 의논한다는 게 어디의 누구더라.”
“으앗! 맞다! 지도가 어디 있지? 지도! 설마 마을에 두고 왔나?”
“아아, 여기. 내가 가지고 있었어, 엘.”
시벨이 바지의 앞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는 것을 본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 텐트에 짐을 푼 우리는 탁자에 앉아 지도를 편 다음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이미 말했지만 목적지까지 가는 데만 두 달이 넘을 것 같아.
조금 고생스럽더라도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큰 길을 따라가면 편하긴 하겠지만,
문제는 도착하고 나서가 끝이 아니거든. 빨리 가서 빨리 시작한 만큼 찾는 시간도 줄어들 것 같은데.”
“그런데 영혼의 보석은 왜 찾는 거야?”
“내가 말 안했나?”
“응. 찾아야 한다는 말 밖에 못 들었어.”
그럼 넌 찾는 목적도 모르면서 동행하겠다고 한 거냐?
나는 조금 황당한 표정을 한 다음 이전에 라미아스에게도 들려줬던 예의 그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처음엔 심각하게 듣던 녀석이 갑자기 울상을 짓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는 것이 아닌가!
덕분에 나는 설명하다 말고 잔뜩 당황해야 했다.
“헉, 갑자기 왜 울고 그래?”
“미, 미안. 듣다보니 너무 슬퍼서 그만…
친구의 목숨을 살리려고 이런 고생을 하다니, 엘, 너 정말 착한 애구나.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야.”
“그, 그러냐?”
“응! 나 정말 열심히 도울게! 기운 내, 엘. 우리 열심히 해서 꼭 친구의 저주를 풀자!”
시벨리우스가 보기보다 순진한 성격이라는 것을 왜 잊었을까.
눈물 기 가득한 얼굴로 다짐을 가하는 녀석을 보니 묻어뒀던 내 양심이 따끔따끔 아파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음으로 이어지는 녀석의 말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정말 다행이지 뭐야. 내가 영혼의 기운을 느낄 수 있으니까, 찾는 게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야.”
“뭐? 영혼의 기운을 느낀다고?”
“어라, 몰랐어? 유니콘들도 드래곤처럼 타인의 영혼을 구별할 수 있어.
하지만 보석 자체에 관심이 없어서 그걸 모으는 자가 없을 뿐이지.
난 그걸 알고 나한테 동행을 청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아…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들었던 것도 같아.
난 그저, 네가 블루엘프로 폴리모프한 상태여서 부탁했던 거거든. 혹시 보석이 엘프 마을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구나. 인간은 뭐든지 쉽게 잊어버리는 군.
하긴, 그게 또 장점이기도 하지. 평생 잊지 못할 바에야 잊어버리는 편이 편할 때가 많거든.”
생긋 웃은 녀석은 곧 눈을 감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뜰 때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다.
“왜 그래?”
“아니, 지금 정신을 집중해보니까 여기 있는 셋 외에 다른 영혼이 느껴져서. 그것도 꽤 가까이에 있는데?”
“뭐? 아아~ 라미아스님한테 받은 에고소드 때문일 거야. 가방에 넣어놨거든.”
“그래? 하지만 그것 말고도…으음, 이건 아닐지도.”
“왜? 뭔가 또 느껴져?”
“그렇긴 한데, 너무 희미해.
정확한 위치를 짐작할 수가 없는 걸 보니까 아무래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정령인 것 같아.
가끔 너무 집중하면 주위의 모든 기운들이 느껴져서 곤란할 때가 있거든.”
그 말대로 공중엔 자연체의 실프들과 나이아스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런 기운까지 느낄 수 있다니,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부러운 표정으로 시벨리우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음으로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나는 심장이 철렁거리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보다, 이제야 안거지만…너와 엘퀴네스의 기운이 상당히 비슷한 걸?”
“그, 그래?”
“응. 의식적으로 느끼지 않으려고 하면 잘 모르는 부분이지만 말이야.
어쩌면 그래서 네가 정령왕을 소환하게 된 걸지도 몰라.
혹시 정령사들은 전부 정령왕과 비슷한 상성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걸까?
이거 신기한걸. 언제 한번 알아봐야겠다.”
그런걸 알아봐야 별로 소용도 없을 텐데.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말을 삼키며 나는 서둘러 식은땀을 닦아냈다.
애써 마주보지 않아도, 엘뤼엔이 나를 쳐다보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번만큼 화제전환이 시급하다고 느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하하! 그런 거야 아무렴 어때? 어쨌든 지금 중요한건 지름길을 알아내는 거야.
여기서 한 달 안에 갈 방법은 없을까?”
“한 달이라. 그렇게 빠른 지름길은 없어, 엘.
음~ 하지만 조금 무리한다면 한 달 반 정도로 줄일 수 있을지도 몰라.”
“뭐? 어떻게?”
그러자 시벨리우스는 지도에서 아무것도 표시되지 않은 한 여백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었다.
“여기 보이지? 지도엔 표시가 안 되어 있지만 이 부근 즈음에 숲이 하나 있어.
네가 말하는 산맥까지 직선으로 통하는 지름길이야.
보통 이곳을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두 달이 넘는 거거든.
이쪽으로 가면 일정의 반은 줄일 수 있어. 몬스터의 출몰지역이기 때문에 출입이 금지되어 있지만.”
“몬스터?”
“응. 사람을 해치기 때문에 분류가 그렇게 된 모양이다만, 실은 세이렌이야. 다른 말로 인어라고도 하지.”
“엥? 숲에 왜 인어가 있어?”
보통 인어라고 하면 바다에 사는 게 정석 아니던가?
혹시 이곳에 있는 인어가 내가 알고 있는 인어와는 다른 개념과 다른 가 싶어,
나는 그들의 생김새부터 확인해 보기로 했다.
“인어란 게 인간의 상체에 물고기의 하체인거 아니야?”
“맞아. 그건 물속에 들어갔을 때의 모습이고, 육지로 올라오면 인간의 다리로 바뀌지.
하지만 귀의 모양이나 손과 발의 물갈퀴 때문에 보통 인간하고는 조금 달라.”
“그런데 숲에 산다고?”
“정확하게는 숲이 아니야. 그 안에 있는 바다에 살고 있거든.”
“바다?”
“응. 신기하지?”
그의 설명에 따르면 원래 숲이 있던 일대는 세이렌이 주둔하던 거대한 바다였다고 했다.
그런데 몇 백 년 전 갑자기 지각변동이 일어나더니, 호수 정도의 크기만 남겨두고 뭍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처음 세이렌들은 길을 따라 다른 바다로 나가려 했지만,
마땅히 안주할 장소를 찾지 못해 그냥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살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가끔씩 숲으로 들어오는 인간들을 유혹하여 죽인다나 뭐라나.
그래서 현재 그 곳은 ‘인어의 숲’으로 불리고 있다고 했다.
“그 호수는 바다하고만 이어지는 거지? 그럼 짠물이 들어오기만 하고 나가지는 못하는 상태인거야?”
“응. 그래도 세이렌들이 꾸준히 물을 순환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곳이 사해(四海)가 되는 일은 없어.
주위의 경치도 굉장히 근사하다나봐. 어때? 이곳으로 갈까?”
일정을 반이나 줄일 수 있다는데 어딜 못가겠는가!
내가 선뜻 고개를 끄덕이자 시벨은 품속에서 깃털 펜을 꺼내더니 지도의 여백에 길을 표시하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난 이만 슈를 보고 올게.”
“슈?”
“오늘 산 말 말이야. 내가 이름을 붙였어. 내일 일찍 출발하려면 얼른 체력을 키워둬야지.”
“헤에, 이름도 지었구나. 나도 지어줄까?”
“후후. 그렇게 해. 그럼 쉬고 있어. 밖에 다녀올게.”
시벨이 나가고 나자 나는 말의 이름을 짓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뜻밖에 염려를 담은 듯한 엘뤼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대로 둬도 괜찮은 거냐?”
“응? 뭐가?”
“인어의 숲 말이다. 넌 몰라도 저 유니콘에게는 상당히 힘든 상대일 텐데.”
“인어가 그렇게 강해?”
“아니, 힘으로 치면 그리 상대가 되진 않겠지만…”
“그런데?”
뭐가 문제냐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엘뤼엔은 묘하게 찌푸린 얼굴로 답했다.
“인어가 전부 여성이라는 기본 상식도 없는 거냐?”
“그건 나도 알아.”
“그럼 저 유니콘이 여자에게 특히 약한 종족이라는 것도 잊어버리지 않았겠군.”
“……헉…맞다.”
순간 낭패감이 들긴 했지만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괘, 괜찮을 거야. 시벨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성격도 아니고.
이전의 그 유니콘 여자한테도 꽤 냉정했는걸.
뭣보다 인어의 숲으로 가자고 제안한건 시벨이 먼저였잖아.
그 정도는 물리칠 수 있을 자신이 있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
“글쎄…. 내가 보기엔 저 녀석, 유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아마 인어라고는 만나본적도 없을 거다. 본래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지.”
“으으, 그렇다고 다른 길로 돌아갈 수도 없잖아. 최대한 내가 옆에서 잘 감시하지 뭐.”
“마음대로 해라. 나중에 후회하고 말고는 네가 결정할 일이니까.”
엘뤼엔의 그 말이 ‘반드시 후회 한다’고 들린 건 내 착각만이 아닐 것이다.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지금은 나가고 없는 시벨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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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괜찮기는 개뿔.”
내가 시벨리우스의 정조(?)를 의심하게 된 것은 바로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
갑자기 텐트 밖에 소란스러워진다 싶더니, 누군가가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애 특유의 높은 소프라노 음과 낮은 음성. 그 중 하나는 나도 잘 아는 목소리였다.
“…시벨리우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텐트의 문을 열자 환한 빛과 함께 황당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웬 흰색의 지붕으로 된 마차가 서있고,
그 앞에서 생전 처음 보는 여자와 시벨리우스가 정답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말이다.
내가 나오는 것을 본 두 사람은 이야기를 잠시 중단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엘! 일어났어? 좋은 아침!”
“…라는 건 둘째 치고, 누구?”
“아~ 어제 저녁에 이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만났어.
산맥 너머의 도시 라첸으로 가시는 길이래. 아침을 같이 할 수 있겠냐고 물어서…”
“그렇군.”
설명은 내게 하고 있지만 녀석의 시선은 눈앞의 여자로부터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네가 달리 유니콘이겠냐. 믿었던 친구로부터 배신당한 기분에 나는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여자가 붉어진 얼굴로 얼른 자신의 소개를 시작했다.
“시벨리우스님의 일행분이신가 보군요.
이른 시간에 실례를 범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쟈스민 드 카렌이라고 해요.
장거리 여행은 처음이라 불안하던 차에, 다른 여행자를 뵈니 반가워서 그만…”
“귀족이시군요.”
“네에, 하지만 작위만 있는 이름뿐인 귀족이랍니다.
저의 신분에 대해선 전혀 부담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객관적으로 보기에 여자는 상당히 아름다운 축에 속했다.
양쪽으로 땋아 둥글게 말아 올린 검은색 머리카락과 푸른색 눈동자,
단정한 이목구비와 턱 아래로 드러난 선명한 목선이 전체적으로 우아한 느낌을 풍겼다.
“…다른 일행은? 혼자는 아니신 것 같은데.”
“네, 마부인 피터와 하녀인 로잔이 있어요. 두 사람은 지금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름뿐인 귀족이라면서 다른 사람을 부리는 일엔 익숙한 모양이다.
말로는 부담 갖지 말라곤 했지만,
지금도 날 보는 시선에선 조금이라도 자신이 우세한 입장이라는 걸 알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스멀스멀 밀려드는 불쾌감을 참으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 엘이라고 해요. 이렇게 만나 뵌 것도 인연인데, 함께 하는 동안이나마 친하게 지내죠.”
“어마, 당연하죠. 그런데 여러분 두 분이서만 여행을 하시는 건가요?”
“아뇨, 한 사람 더 있어요.”
그러자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엘뤼엔이 텐트 안에서 걸어 나왔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쟈스민은 그와 눈을 마주치고는 놀란 얼굴로 흡-하고 숨을 멈췄다.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와 붉게 달아오르는 뺨을 보니 공교롭게도 엘뤼엔에게 한눈에 반한 모양이다.
그 반면 엘뤼엔은 갑자기 나타난 낯선 여자에게는 일절 관심 없는 얼굴로
나를 보며 딱딱하게 한마디 내뱉었을 뿐이었다.
“…뭐냐?”
“아, 대단한건 아니고. 그냥 이 근처에서 노숙하던 일행인데, 아침을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나봐.”
“쯧, 쓸데없는 일만 벌이는군. 저래도 나중에 후회 안하겠냐?”
아마도 인어의 숲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내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그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때까지도 쟈스민은 하염없이 엘뤼엔을 보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저어, 저, 저분은?”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옆에 있던 시벨리우스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얼굴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엘퀴…아니, 죠, 죤이라고 해요! 보셨다시피 상당히 무뚝뚝한 편이니까 말은 걸지 않는 게 좋겠어요.”
즉석에서 지어낸 그의 가명에 엘뤼엔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하필 하고 많은 이름 중에서 죤이라니. 흔한 이름인건 둘째 치고, 전혀 어울리지가 않잖아!
푸흡.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나는 간신히 눌러 참았다.
이 중에서 심각한 사람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쟈스민 뿐이었다.
“죤…죤 이라고요. 저어, 저분의 가문이 어딘지는 모르시는 건가요?”
“가문이라.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인간들은 처음 만날 때 자신의 가문에 대해서 밝혀야 하는 법칙이라도 있나요?”
“아, 아뇨. 그냥 개인적으로 궁금했을 뿐이에요.”
행여나 속마음이 들킬까 얼른 수줍게 고개를 젓는 그녀였지만,
이미 다 눈치채버린 나로선 상당히 복잡한 심정이었다.
시벨리우스의 표정을 보아 쟈스민에게 한눈에 반한 것이 틀림 없는데,
정작 그녀가 반한 상대는 엘뤼엔이라니!
아닌 밤중에 웬 삼각관계란 말인가. 그것도 앞날의 일정을 위해 사이가 좋아져도 모자를 판국에 말이다!
‘빨리 떨구는 편이 낫겠군.’
단번에 결론을 내린 나는 생긋 웃으며 벌써 저만치 멀어지고 있는 엘뤼엔을 향해 소리쳤다.
“어디가, 아버지! 아침 안 먹을 거야?”
“아, 아버지?”
효과는 직빵이었다.
쟈스민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멍하게 입을 벌리며 나와 엘뤼엔을 번갈아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제 아버지인데, 무슨 문제라도?”
“저분이…당신의 아버지?”
“네. 이렇게 말하면 믿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요. 보시다시피 아버지가 굉장히 동안이시거든요. 놀라셨어요?”
“아, 그, 그게…”
말해두지만 결코 인기 많은 엘뤼엔이 배가 아파서 이러는 게 아니다.
다만 평화로운 우리 앞날의 일정을 위해 사소한 희생은 감소하자는 주의랄까.(정말이다!)
다행히 애 딸린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는 듯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나는 석상처럼 굳어버린 쟈스민을 보며 웃어준 뒤,
아직 상황파악을 못한 듯 어리둥절하게 서있는 시벨리우스를 향해 말했다.
“그럼 난 아.버.지.랑 같이 아침 준비를 도울게.
얼른 먹고 출발해야 일찍 도착하지. 넌 그동안 쟈스민양의 말 상대가 되어드려.”
“아, 으응. 그런데 엘, 갑자기 웬 아버…”
“스톱! 오케이, 거기까지. 자아~ 그럼 난 가보실까~”
“엘??”
다급하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안 들리는 척 유유히 엘뤼엔에게 다가갔다.
그는 방금 전 내가 불렀을 때부터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있는 상태였다.
어딘지 굳어있는 것 같은 그의 어깨를 살짝 흔들자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뭘 그렇게 봐, 엘퀴네스?”
“…웬만하면 호칭은 하나로 통일 해 줄 수 없겠나?
엘퀴네스랬다, 아버지랬다, 대체 뭐하자는 짓인지 모르겠군.”
“아아, 미안. 아까 그 여자가 흑심을 품는 것 같길래.
애 딸린 아버지라고 알려주면 떨궈내기 편할 것 같아서 말이지.
삼각관계 방지책이었어. 기분 상했다면 미안해. 이제 안 그럴게.”
“태연하게 아버지라고 할 때는 언제고. 새삼 미안해하다니 우습군.”
“하지만 아버지라고 부르는 거 싫어하잖아?”
“그렇게 말 한 적 없다.”
단호하게 대답하는 엘뤼엔의 말에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어? 그럼 아버지라고 불러도 돼?”
“언제는 내 허락 받고 부른 적 있었나?”
“그건 아니지만….”
내가 말끝을 슬쩍 흐리자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뭘까, 저 기대감이 담긴 눈빛은. 분명 뭔가를 요구하는 얼굴이긴 한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했다.
그와 시선을 마주치던 것도 잠시. 나는 곧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역시 관둘래. 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왜지?”
“당신이 나를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
이제 다시는 나 혼자만의 착각으로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이들에게 가족으로 인정받는 일이 소원이었다.
하지만 원한다고 해서 전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소원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으로선 얌전히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엘뤼엔이 뭔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얼굴로 물었다.
“그럼 너는 날 아버지로 생각하고 있다는 거냐? 인간인 네가, 정령왕인 나를?”
“난 종족으로 가족을 구분하진 않거든.
건방지게 들려도 할 수 없어. 그게 내 진심이니까.
언젠가 당신도 나를 대할 때…인간과 정령이라는 차이가 상관없어지면.
그때 아버지로 불러달라고 해줘. 그럼 얼마든지 그렇게 부를 테니까.”
“……”
한마디 쓴 소리를 각오하고 한 말이었는데, 의외로 엘뤼엔은 대답이 없었다.
다만 아까보다 더욱 심각해진 얼굴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뒤 아침식사가 끝나고 쟈스민과 헤어질 때까지 그는 단 한마디의 말도 꺼내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몹시 어색한 기분이었다.
“저어, 그런데 여러분은 어디까지 가시는 건가요?”
출발하기 직전 쟈스민이 마차에 오르려다 말고 주저하는 얼굴로 물었다.
나는 넋을 잃고 쟈스민을 바라보는 시벨리우스를 살짝 흘겨봐준 다음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저희는 에델 왕국으로 가는 길이에요.”
“어머, 굉장히 멀리까지 가시는 군요. 혹시 왕국 출신이신가요?”
“아니오. 그곳엔 따로 볼일이 있어서 들리는 것뿐이에요.
쟈스민양은 라첸으로 가시는 길이랬지요? 지도를 보니 저희와 가는 방향이 다르네요.”
“네? 제가 알기론 에델 왕국으로 가는 길을 경유한다고 들었는데…?”
“아아, 저희들은 지름길을 이용할 생각이거든요. 인어의 숲 쪽으로요.”
그러자 쟈스민과 그녀의 일행들은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인어의 숲이요? 그런 위험한 곳을!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두 번 다시 나오지 못한다는 말이 있어요.”
“괜찮습니다. 저희 셋 다 그리 약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이왕이면 안전한 길로 가는 쪽이 더 좋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시벨리우스님? 이렇게 만났는데 벌써 헤어지는 것도 상당히 아쉽잖아요.
저희와 함께 가시지 않겠어요? 저도 혼자서 가려니 상당히 무료한데, 우리 같이 가면서 말동무나 해요.”
이 여자. 이것이 속셈이었구만? 게다가 상당히 영악하기까지 하다.
시벨리우스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것을 알고 저렇게 이용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혹시 쟈스민도 녀석에게 마음이 있는 가 싶어 눈여겨보았으나,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엘뤼엔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애 아버지란 말에 새파랗게 질릴 땐 언제고, 그 충격이 가시고 나니 다시금 그의 미모가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다.
‘아무튼 여자들이란. 쯧쯧…’
내가 속으로 혀를 차는 사이 시벨리우스가 들뜬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어왔다.
“어떻게 생각해, 엘? 그냥 좀 돌아가는 편도 낫지 않을까?”
“뭬야?”
“아, 아니. 인어의 숲이 위험한건 사실이긴 하고…
길도 좀 험할 것 같고…생각해보니까 굳이 힘든 길을 택할 필요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위험한 곳으로 가자고 제안했던 게 너란 사실은 잊어버린 거냐?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스스로도 찔렸는지 슬쩍 시선을 피한다.
그에 쟈스민 역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얼른 녀석의 말을 부추겼다.
“시벨리우스님의 말이 맞아요.
일전에는 한 군대가 들어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적도 있는 걸요.
여러분 세 사람이 상대하기에는 버거운 장소에요. 그러지 말고 저와 같이 가요. 네?”
애교 있게 웃으며 조르는 얼굴이 상당히 예쁘긴 했다.
하지만 공과 사는 구분되어야 하는 법!
나는 헤벌래한 얼굴로 당장 고개를 끄덕일 것 같은 시벨의 등을 쿡 찌른 다음
겉으로는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희도 일정이 촉박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인연이 닿으면 다음에 또 뵐 수 있겠지요. 지금은 여기서 헤어지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으음.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시길 바랄게요.
만약 훗날 제게 용건이 생기신다면 라첸의 마신전을 찾아오세요. 앞으로 1년 동안 그곳에서 공부하거든요.”
“마신전에서요?”
“네. 해마다 이맘때쯤 되면 교리수업을 위해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린답니다.
마신의 교리는 귀족 사교계에 몸담은 이들이 교양으로 익혀야 할 것 중에서도 필수과목이거든요.
하긴, 평민들에겐 그다지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지만 말이에요.”
그러면서 슬쩍 나를 훑어 내리는 이유는 뭔데?
시벨리우스나 엘뤼엔에게는 수줍은 눈길을 보내면서,
정작 나에겐 무시하는 태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니 기분이 상당히 나빠졌다.
내가 아무리 어리기로서니, 남자로 보이지도 않는다는 거야, 뭐야?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에 나는 석상처럼 굳어버리고 말았으니…
“호호호, 엘이라고 했나요? 귀여운 아가씨. 만나서 반가웠어요.
이제 슬슬 꾸밀 나이가 된 것 같은데, 겉모습에 신경을 써보는 게 어때요?
머리를 조금만 더 기르면 상당히 여자다워 보일 거예요.
아까워라. 내가 엄마였다면 옆에서 잘 꾸며줬을 텐데. 그럼 이만~”
“……”
다각다각 울리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옆에서 웃음을 참는 엘뤼엔이나, 잔뜩 내 눈치를 살피는 시벨리우스의 기색이 느껴졌지만 화낼 기운도 나지 않았다.
다만 낮은 음성으로 경고를 보냈을 뿐.
“시벨리우스…”
“으, 으응?”
“너 다음에도 여자 끌어오면 죽인다.”
“…미안해, 엘.”
추욱 어깨를 늘어뜨리는 녀석을 무시하고 나는 텐트 안에서 소금을 가져다 뿌렸다.
재수 없긴 하지만 대충 액땜한 셈 치면 그냥 못 넘길 것도 없잖은가!
특히나 앞으로 우리가 가야할 장소를 생각하자면, 이번일은 확실한 교훈을 준 셈이었다.
여자 앞에서 유니콘의 정신력이란 쥐뿔에 쓸래도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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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숲으로 들어서는 길목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장장 일주일간을 말을 탄 채 걷고 또 걸어야 했다.
다행히 첫날 이후론 다른 여행자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기에 일정 자체는 별다른 무리가 없었다.
단, 시벨리우스가 쟈스민을 잊지 못해 한동안 넋이 빠져있었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밤마다 달을 보며 한숨을 내쉬는 녀석에게, 쟈스민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냐고 묻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녀는 내가 본 어떤 여자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웠어.”
“에에, 거짓말! 내가 보기엔 네 약혼녀인 웰디 쪽이 훨씬 더 예쁜데?”
나는 다시금 웰디를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달빛과도 같은 은발에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가, 마치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처럼 아름다운 소녀였다.
나름대로 미인에 익숙해있다고 생각했던 내가 한순간이나마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으니까.
그에 비하면 쟈스민은 분명 미인이긴 했지만 웰디와 견줄 정도는 못되었다.
하지만 시벨리우스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했다.
“그 녀석은 여자가 아니야.”
“뭐? 그럼 웰디양이 남자였어?”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내게 여자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소리야.
그 녀석은 그냥 편한 여동생 같다는 느낌밖엔 없거든.”
“헐. 아주 복에 겨웠구만?
그런 미인을 약혼녀로 얻어놓고 뭐가 어쩌고 어째?
날 여자로 착각했던 것도 그렇고, 너 시력검사라도 받아봐야 하는 거 아니냐?”
지나가던 사람 열을 붙잡고 물어봐라!
웰디와 쟈스민 중에서 누가 더 예쁘다고 할지. 아마 열에 열은 다 웰디를 가리킬걸?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묻자 녀석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나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샐쭉 웃는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실은 웰디나 쟈스민보다는 엘이 더 예뻐. 아깝다. 네가 여자였으면 좋았을 텐데.”
“…너 그거 심각한 거 아니냐? 엘뤼엔한테 치료술이라도 받아볼래?”
“정말인데.”
“그러니까 네가 정상이 아니라는 거다. 쯧쯧, 어릴 때부터 너무 미인들만 봐서 눈의 기준이 이상해 진건가?”
내 혼잣말을 들은 녀석은 아까전보다 더욱 우울해진 얼굴로 달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대략 3일 전의 상황.
하루하루 시름시름 시들어가던 녀석은 이틀 전부터인가 조금씩 기운을 차리는 가 싶더니,
오늘 아침을 기점으로 완전히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더니 이후론 쟈스민의 이야기가 나와도 일절 관심이 없다는 투로 대하는 것이 아닌가.
반한 시간만큼이나 잊는 것도 빠른 녀석이었다.
하기야 미련을 못 버리고 궁상을 떠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만.
“자, 그럼 여기서 간단히 점심이나 먹고 들어갈까? 숲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빈속으로 갈 순 없잖아.”
숲의 진입부에 들어서자 시벨리우스는 타고 있던 말- ‘슈’를 멈추고 활발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 또한 그럴 생각이었으므로 군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녀석이 식사를 준비하는 사이,
나는 두 마리의 말에게 다가가 안장을 내리고 근처에서 쉬도록 한 뒤 여물을 먹였다.
지난 일주일간 해온 일인지라 이제는 자연스럽게 몸에 익어버린 행동이었다.
“자~ 많이들 먹고 이따 또 힘내자!
가서 마음껏 쉬어, 민국아. 슈가 괴롭히면 지체 말고 나한테 와서 일러라. 알았지?”
“푸르르…”
‘민국’이란 내가 며칠 동안이나 고심해서 지은 내 검정말의 이름이었다.
원래는 대한민국이라고 하려고 했는데, 부르기 힘들다는 이유로 뒤의 ‘민국’으로만 한 것이다.
녀석의 까만 털을 보자니, 동양권 특유의 검은 색 머리카락이 떠올라서 충동적으로 그렇게 지은 거지만,
꽤 괜찮은 작명센스였다고 생각한다.
민국의 볼을 몇 번 툭툭 쓰다듬어 준 다음, 나는 옆에서 우아하게 푸레질을 하고 있는 슈를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 땐 비쩍 말라서 볼품없기만 했던 녀석은 지난 동안 부쩍 건강해져서
이제 어느 명마 못지않게 탐스럽게 변해 있었다.
회색인줄 알았던 털빛은 날이 갈수록 하얘져서 완전한 백마가 되었고,
걷는 것도 달리는 것도 민국이를 월등히 앞질렀다.
처음엔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던 차이가 날이 갈수록 점점 벌어지니 심히 눈에 거슬렸다.
말하자면 슈는 왕을 태우는 군마, 민국인 시장에서 흔히 보는 짐말 같달까.
‘그럼 나는 짐말을 끄는 농부라는 거야? 우씨!’
그러자 내가 질투의 눈길로 슈를 노려보는 것을 보았는지, 엘뤼엔의 지나가는 듯한 한마디가 이어졌다.
“타고난 혈통이 다른 말을 두고 서로 비교해대는 건 이제 그만 해도 되지 않나?
그놈의 머리는 늘 쓸데없는 일에 굴러가는 군.”
“윽! 왜이래! 이건 자존심 문제야! 슈는 공짜고 얻었고, 민국인 무려 1골드나 주고 샀단 말이야!
근데 어째서 공짜가 더 뽀대 나 보이는 거냐고~!”
“말은 바로하지. 그때 상인이 말을 그냥 넘긴 건 말의 혈통이 나빠서도 아니고,
장애가 있어서도 아니라, 단지 다루기가 어려워 포기했을 뿐이다.
굶어 죽더라도 명마는 명마지. 그 차이를 단 돈 1골드로 매꾸려고 하다니 욕심이 과하군.”
“으윽!”
이번에도 역시 나의 완패. 과연 말싸움으로 엘뤼엔을 당해낼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아니, 한 사람(?)이 있긴 했구나.
그 어떤 말에도 꿋꿋하게 버텨내며 오히려 엘뤼엔을 지쳐버리게 만들었던 유일한 존재.
‘그래, 바로 마신 카노스 말이지.’
속으로 중얼거린 나는 힐끗 왼손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일루전 마법으로 인해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그 위에 자리 잡고 있을 마신의 문장이 유달리 신경 쓰였다.
그러고 보니 이전의 엘뤼엔의 문장으로는 신계에 있던 그와 통신(?)까지 주고받았었는데 말이지.
카노스와도 그 방법이 가능하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내가 빤히 손등을 바라보고 있던 때였다.
“뭐하고 있어, 엘? 밥 안 먹어?”
“응? 아, 벌써 다 됐어? 와아~ 맛있는 냄새!”
주위에 풍기는 고소한 냄새를 맡고나니,
방금 전의 고민은 어디 갔냐는 듯 금세 식욕만이 간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벨은 피식 웃고는 음식이 담긴 접시와 그릇을 내게 건네주었다.
“아직 시간이 일러서 간단하게 스튜와 베이컨만 준비해봤어. 양이 부족하진 않을까 모르겠다.”
“헤헤, 이거 맨날 얻어먹기만 해서 미안한걸. 나도 요리솜씨가 있었으면 돌아가면서 준비했을 텐데….”
“괜찮아. 난 음식 만드는 거 좋아하니까. 근데 맛은 어때? 입맛에 맞아?”
“새삼스럽게 뭘 물어? 네 요리야 늘 최고지. 정말 맛있다,
시벨리우스. 에효. 이걸 눈앞에 두고도 못 먹었을 때를 생각하면…”
“응? 눈앞에 두고 못 먹다니?”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한탄은 이어진 시벨리우스의 질문에 당황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옆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엘뤼엔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아니. 엘퀴네스를 말하는 거였어.
이 맛있는 걸 먹지도 못하고 혼자 덩그라니 있는 모습이 안타까워 보여서 말이지…”
“하하, 그렇구나. 그래도 정령이니까 어쩔 수 없지.
가끔 보면 정말 안됐다니까. 먹는 기쁨을 모르다니. 하긴 정령왕이라고 전부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데 이 말에 엘뤼엔이 별안간 얼굴을 굳힌 것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설마 화가 난 건가 싶어 조심스럽게 쳐다보자 그는 갑자기 홱 내 손에 들린 스튜 그릇을 뺏어갔다.
그리곤 내가 상황파악을 하기도 전에 넙쭉 스튜를 전부 먹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어어어! 내 스튜!!”
나는 한순간에 텅텅 빈 그릇을 황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식사하는 인원이 적은데다 다들 많이 먹는 편이 아니었으므로 식사 양은 딱 1인분씩만 정해져 있었다.
한마디로 내 몫의 식사를 뺏긴 지금, 나는 저녁때까지 쫄쫄이 굶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것이다.
시벨 역시 이 황당한 사태에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는 상태.
하지만 엘뤼엔은 이에 아랑곳 없이 그릇을 탁-소리 나게 내려두며 말했다.
“맛있군. 잘 먹었다.”
“!!”
남의 걸 뺏어먹고 잘 먹었다는 소리가 나오냐!
나는 당장이라도 그렇게 외치고 싶은걸 간신히 참으며 엘뤼엔을 노려보았다.
“…실례지만, 엘퀴네스씨? 지금 뭐하자는 플레이?”
“나 혼자 먹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 보인다며. 그래서 먹어준 건데 불만인가?
음식에 욕심은 없지만, 미각은 확실히 느낀다. 그 정도는 알아뒀으면 좋겠군.”
“그래서 내 밥을 뺏어갔다고?”
“아아. 날 동정하느라 식사를 못하는 것 같길래.”
이이이 무슨 유치뽕짝치사빤스의 작태인가!
정령왕 씩이나 된 주제에 그 정도 놀림 당했다고 바로 복수하다니!
하지만 내가 억울해 하든 말든, 이미 비워진 그릇은 다시 채워질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간절한 시선으로 시벨을 봤지만 녀석은 말없이 비워진 냄비 안을 보여줄 뿐이었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순간이었다.
“흑흑. 내 밥이…”
“에, 엘! 기다려. 내가 금방 다시 해줄게.”
“하아. 됐어. 날이 저물기 전에 숲 안으로 들어가야 하잖아.
그리 배고픈 상태도 아니고. 한 끼쯤이야 그냥 참지 뭐.”
아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내 말에 시벨은 곱지 않은 눈으로 엘뤼엔을 노려봤지만,
그는 전혀 앙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 뒤론 엘뤼엔도 식사시간에 당당히 제 몫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것에 비하면 현저히 적은 양이었지만 거북하다며 끼니를 거르는 적은 없었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씩 이지만 맛있다며 칭찬하기도 했다.
치졸한 복수와 오기로 시작했을 진 몰라도, 시벨의 요리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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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어? 저 마차…어째 눈에 익은데?”
약 반나절을 더 걸어 본격적인 숲의 초입부분에 도달한 우리는 낯익은
한 대의 마차가 한 구석에 처량히 전복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흰색의 지붕과 테두리를 둘러싼 금장식. 바로 얼마 전에 우연히 아침식사를 함께 했던 쟈스민의 마차였다.
헤어진 지 벌써 열흘이 훌쩍 넘은데다,
우리와 가는 방향이 달랐기 때문에 이런 곳에 그녀의 마차가 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벨리우스 역시 단번에 그것을 알아보고 대번에 안색이 변해 마차 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그 안엔 사람이 없었다. 말과 이어지는 고리가 끊어진 것을 보면 마차를 버리고 이동한 듯 했다.
“길도 꽤 넓은 편인데 왜 전복됐지?
아니, 그보다 왜 이 마차가 여기에 있는 거야?
인어의 숲이 위험하다고 신신당부할 땐 언제고 자기들이 먼저 들어오다니. 혹시 갈림길에서 잘못 들어섰나?”
“글쎄… 뭔가 느낌이 이상한 걸?”
단순히 전복되었다고만 보기엔 마차의 상태가 심히 좋지 않았다.
문은 거칠게 부셔져 너덜거렸고, 여기저기 도끼에라도 찍힌 마냥 굵은 상처가 패어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습격이라도 받은 것 같은 모습이다.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닌 꽤 많은 무리에 의한 공격 같았다.
“…산적인가?”
“몬스터 일지도 모르지. 쫓기다가 이쪽 방향으로 도망친 걸지도 몰라.”
나와 시벨은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또 다른 흔적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언제 전복되었는지 모를 마차를 두고 일행의 행방을 추적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겨울이라 마르고 딱딱해진 땅에는 그 흔한 발자국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았다.
별 수 없이 나는 엘뤼엔을 향해 부탁했다.
“엘퀴네스. 혹시 이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아봐 줄 수 있을까?”
“그런걸 알아서 뭐할 셈이냐?
그냥 무시하는 편이 나을 텐데. 그들을 구하기 위해 지금 네 일정을 늦추려는 거냐?”
“위험하다면 구해야지.
나야 그리 급한 일도 아닌데, 모른 척 할 수는 없잖아. 뭐, 시간이 시간인 만큼 이미 늦어버렸을 지도 모르지만.”
어깨를 으쓱하는 내게 그는 오지랖도 넓다고 혀를 찼다.
그래도 부탁받은 일은 어쩔 수 없었는지 곧 눈을 감고 주변의 기운을 읽는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시 후 눈을 뜬 그는 잔뜩 긴장하고 있는 나와 시벨을 보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 짐작대로 그들은 갈림길에서 도적무리를 만났다.
녀석들을 따돌리기 위해 마차를 버리고 이 숲 안으로 들어갔군. 바로 어제 벌어진 일이다.”
“뭐? 그럼 잡힌 거야?”
“아니. 도적들은 이 부분까지 쫓다가 인어의 숲이란 걸 알고 다시 되돌아갔어.
한 사람의 희생으로 둘을 살렸군. 그래봤자 목숨을 보장하기 어려운 장소지만.”
“희생이라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는 내게 그는 말없이 앞 쪽을 가리켰다.
그 손끝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긴 우리는 멀지 않은 곳에서 쓰러져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하고 얼굴을 굳혔다.
그 사람은 바로 쟈스민의 마차를 끌던 마부였다.
황급히 말에서 내린 시벨리우스가 마부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을 보고 나 또한 말에서 내려 그에게 달려갔다.
그러자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이 어두운 표정으로 슬쩍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미 손을 쓸 상태를 넘긴 것이다.
“복부에 큰 검상이 있어. 아마 여자들이 도망칠 때까지 시간을 버는 역을 한 것 같아.”
“으음. 마차에 매여진 말은 두 마리였지?
쟈스민과 하녀가 각 자 한 마리씩 타고 들어갔겠군. 그 사이 몬스터라도 만났으면 큰일인데…”
그날 아침에 헤어진 대로 끝나는 인연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골치 아픈 문제에 휘말린 것 같아 나는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시벨이 조마조마한 눈으로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벌써 해도 졌는데. 지금 숲에 들어가는 건 위험할지도 몰라.”
“동감이다. 이 숲의 마물들은 주로 야행성이지.
여자들이 어제 들어갔다면 이미 살아있는 목숨이 아닐 거야.
오늘은 이쯤에서 쉬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는 게 현명할거다.”
“으으~ 어떻게 그래? 혹시 운이 좋아 살아있을지도 모르잖아.
숲 안이라곤 해도 그리 깊이 들어가진 않았을 거야.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어차피 가야할 곳이기도 하니 일단 들어가 보자.”
내 결정이 마음에 안든 듯, 엘뤼엔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지만 굳이 말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내친김에 내가 앞장서서 걸어가자 당황한 시벨리우스가 뒤 따르며 얼른 라이트
마법을 시전 하여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사실 다들 안력이 뛰어난 편이기 때문에 어두워도 사물을 알아보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밝은 편이 몬스터의 접근을 막아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숲의 마물들은 빛에 약한 종류가 많아.
그래서 횃불이나 라이트 마법으로도 간단히 접근을 막을 수 있어.”
“흐음. 쟈스민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좋을 텐데. 혹시 세이렌에게 걸리진 않았겠지?”
“그렇진 않을 거다. 세이렌은 기본적으로 여자들을 노리진 않으니까.”
“뭐야~ 그럼 살아있을 확률이 더 훨씬 더 높은 거잖아. 좋았어! 이대로 전진! 달려라, 민국아!”
“가, 같이 가! 엘!”
깊은 밤. 불온한 세력에 붙잡혀간(?) 여인들을 구하기 위해 위험한 숲으로 들어온 모험가들!
꽤나 그럴듯하지 않은가?
사람의 목숨이 걸린 중요한 문제를 앞에 두고서도 나는 내가 영웅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실실거렸다.
다음순간 옆에서 달리는 시벨을 보고선 바로 제정신으로 돌아왔지만 말이다.
새하얀 백마에 탄 채 반짝이는 은발을 휘날리며 진지하게 앞을 응시하는 녀석의
모습은 솔직히 나보다 훨씬 더 영웅다워 보였다.
왠지 자괴감이 들어 슬쩍 다른 쪽을 보니, 이번엔 시큐엘을 탄 채 질주하고 있는 엘뤼엔의 모습이 보였다.
시벨리우스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뒤처질 수 없는 자태였다.
그에 비하면 난 무언가!
이곳에 온지도 벌써 1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소년에서 벗어나지 않는 체구.
툭하면 여자로 오해 당하기나 하고,
짧아진 머리카락에 겨우 남자다워 보일 거라고 기뻐하는 내 처지가 문득 슬퍼졌다.
혹시 성장이 멈춰있는 건 아닐까?
‘더 생각하면 비참해지니까 그만 두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다음, 다시 앞 쪽을 주시했다.
지금은 아직 살아있을 지 모를 쟈스민의 행방을 찾는 일이 더 중요했으니까.
“쟈스민! 쟈스민!! 혹시 이 근처에 있어요?”
“바보 녀석. 크게 소리치지 마. 도리어 자는 몬스터를 깨울 참이냐?”
“그럼 어떻게 하라고?”
“그러니까 그냥 무시하라고 했잖아.”
겨울의 밤은 빨리 찾아온다.
숲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밝았던 주위는 이제 완전히 캄캄해져서
쥐죽은 듯한 정적만을 선사하고 있었다.
굵은 나무 기둥들과 마른 풀을 해치며 천천히 걷기를 한참.
마치 미로 속을 돌듯 똑같은 장면만 반복되는 통에 이제는 어디가
어딘지도 모를 정도로 주위를 구분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게다가 어찌된 일인지 우리가 들어왔던 입구부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모르는 사이 상당히 깊은 곳까지 들어와 버린 모양이었다.
몇 번이고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숲 안이 미로라는 말은 못들은 것 같은데?”
“하하. 실은 나도 이곳에 직접 온 것은 처음이라…”
“쯧, 지도에도 표기가 안 된 곳이니 오죽하겠어.
일단 흩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자. 한번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으응.”
하지만 말과는 달리 나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길을 찾는 것이야 주위의 정령들에게 물어보면 되었으니까.
문제는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마물들의 위협이었지만,
라이트 마법 때문인지 아직까진 접근하는 녀석들도 없었다.
간혹 짐승의 안광으로 보이는 것들이 숲 사이에서 번뜩였지만,
놈들은 우리를 경계하기만 할뿐 선뜻 공격하려 들지는 않았다.
아마 시벨이나 엘뤼엔에게 풍겨 나오는 강자의 기운을 느낀 것이리라.
그렇게 우리가 한참동안 쟈스민을 찾고 있을 때였다.
얼굴을 살짝 찌푸린 시벨이 고개를 살짝 갸웃하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어왔다.
“엘. 혹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아?”
“소리?”
혹시 쟈스민인가 싶어 나는 얼른 귀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그러자 정말 어디선가 희미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사람의 인기척은 아니었다.
규칙적으로 녹아드는 소리는 내 착각인지 몰라도 일정한 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작은 소녀들의 웃음소리 같기도 하고,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하프소리인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노래 소리인가?’
자세히 듣자니 어느 순간 그 음색은 선명한 사람의 노랫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고운 여자의 목소리였다.
디즈니 만화영화에서 인어공주를 본 적이 있는가?
주인공인 인어공주는 설정 상 굉장히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소녀였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역할을 맡은 가수의 목소리도 굉장히 훌륭했다.
내가 여자의 목소리를 아름답다고 느낀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
그 중에서도 바다마녀에게 목소리를 뺏기기 전 불렀던 노래가 가장 인상에 깊었다.
가사도 없이 그저 반복적으로 아아아~하고 소리만 내뱉었을 뿐이지만,
그 어떤 노래보다 인어공주의 음색을 돋보이게 만든 노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들려오는 노래들이 바로 그때 듣던 인어공주의 노래 같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마치 꿈속을 걷는 것처럼 몽롱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름다운 목소리다. 대체 누가?’
문득 나는 이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누구인지 무척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컴컴한 숲이고, 이런 곳에서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엘뤼엔이 다가오더니 두 손으로 내 귀를 막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당황한 내가 거부하기 위해 몸을 비틀자 험악한 표정으로 노려보더니 살짝 고개를 젓는다.
그때서야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나는 흠칫 정신을 차리고 시벨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선명했던 녀석의 눈동자가 멍하게 풀려있었다.
“시, 시벨리우스?”
말까지 더듬어가며 불렀지만 녀석은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내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타고 있던 슈의 정강이를 탁-쳤다.
“히이잉!”
“야! 너 어디 가는 거야?”
주인의 명령을 들은 녀석은 쏜살같이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내가 급히 불렀지만 이미 녀석의 모습은 숲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후였다.
내가 황급히 따라서려 하자 이번에도 엘뤼엔이 막는다.
그는 내 말의 고삐를 단단히 쥔 채 쉿-하고 한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난 방금까지 들려오던 노래 소리가 어느 순간 뚝 끊겨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맙소사.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만약 지금이 낮이었다면 하얗게 질린 내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등 뒤로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그런 내게 엘뤼엔은 책망어린 말투로 말했다.
“그러니까 아침에 출발하자고 했잖아. 골치 아프게 됐군.”
“그게 무, 무슨 소리야? 시벨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방금 전에 들려온 노래 소리는?”
“이곳의 밤엔 마물들만 움직이는 게 아니야.
세이렌들의 기운도 더 강해질 때다. 미혹의 노래에 빠졌으니, 아마 놈들의 본거지로 흘러갔겠지.”
“미혹의 노래? 헉, 그럼 지금 세이렌들에게 납치당했다는 소리야?”
나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무리 인어의 숲이래도 아직은 숲의 초입일 뿐이니 적어도 며칠은 더 가야 본격적으로
그들과 마주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 숲에 들어온 지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세이렌들에게 홀리다니!
아, 아니. 그렇다면 이렇게 한가하게 있을 때가 아니잖아!
“으아아! 얼른 쫓아가자, 엘퀴네스! 아깐 왜 말렸어? 녀석을 붙잡지는 못할망정!!”
“따라갔다가 너까지 홀릴 셈이냐?
걱정 마라. 그래 봬도 유니콘이니 녀석들의 미혹에 그리 오래 빠져있지는 못할 거다.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나~참. 떨어지지 말자고 당부 한지 한 시간도 안됐는데 이게 뭐야!”
투덜거린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적당히 횃불로 쓸 만한 나뭇가지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시벨리우스가 떠나면서, 녀석이 시전 했던 라이트 마법 역시 덩달아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마침 주위가 온통 나무 천지였기 때문에 재료를 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불을 붙이는 문제에서 잠깐 고민했지만,
그것도 곧 조개화석 목걸이를 이용해서 간단히 해결했다.
언젠가 이프리트가 그 안에 불의 기운을 넣어준 탓에, 원하는 만큼 불을 피워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음. 그런데 생각보다 밝기가 약하네. 라이트 마법만큼 환하게 하려면 여러 개를 만들어야 겠는걸?’
내친김에 횃불을 두 개 만든 나는 하나를 엘뤼엔에게 건네준 다음
그가 찌푸린 얼굴로 노려보는 것을 무시하며 말했다.
“에고. 찾아야 할 사람이 하나 더 늘어버렸네.
일단 시벨리우스부터 찾자. 사라진 방향대로 가다보면 만날 수 있겠지.
그놈의 인어들은 잠도 없나? 왜 밤중에 일(?)을 하고 난리야?”
“글쎄. 세이렌이 이렇게 빨리 나타난 것은 나도 예상 밖이다.
놈들의 본거지까지 가려면 앞으로 며칠은 더 가야 하거든. 어쩌면 무리에서 이탈한 녀석일 수도 있겠군.”
엘뤼엔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한시름 던 기분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그 말대로라면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그 뒤 시벨리우스가 홀리듯 달려간 방향으로 나와 엘뤼엔이 천천히 걸어가고 있던 무렵이었다.
가도 가도 이어지는 나무들의 행렬을 몇 시간쯤 지나쳤을까.
문득 앞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새하얀 무언가가 불쑥 눈앞에 덮치듯이 튀어나왔다.
방심하고 있던 나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우왁! 뭐, 뭐야!”
“히이잉!”
그러자 내 비명소리를 들은 민국이까지 덩달아 놀라 앞발을 높게 치켜드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그때 나는 고삐를 그리 세게 쥐고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속절없이 낙마할 수밖에 없었다.
“으아악!”
아찔한 감각이 머리속을 휩쓸었다.
공중으로 붕 뜬 몸이 막 땅에 떨어지려는 순간, 누군가가 순발력을 발휘해 재빨리 나를 받았다.
바로 엘뤼엔이었다.
“헉! 헉! 죽을 뻔 했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
낮게 이를 가는 말투를 보아 그는 상당히 화가 난 듯 했다.
봐줄 데라곤 쓸데없이 좋은 운동신경밖에 없는 내가 말에서 떨어지는 순간에도 얌전히 넋 놓고 있었으니,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해도 할 말 없었다.
사실은 너무 당황한 바람에 대처를 못했던 것뿐이지만.
아마 그대로 땅에 떨어졌어도 크게 다치진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감사와 사과의 인사를 건네야 하는 것은 알았지만,
나는 여전히 놀라서 펄떡 펄떡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없었다.
‘근데 아까 그건 대체 뭐였지? 몬스터? 귀신?’
내 마음속의 의문이 가신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바로 낯익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에, 엘! 괜찮아? 안 다쳤어?”
“!”
…이 목소리는 설마…시벨리우스?
지금쯤 세이렌에게 붙잡혀 있어야 할 녀석의 목소리가 왜 여기서 들리는가!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눈에 익은 하얀 말-슈의 모습과 엘프 특유의 뾰족한 귀가 제일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틀림없는 시벨리우스였다.
그리고 더불어 엘뤼엔의 싸늘한 목소리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가 불쾌한 표정으로 시벨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너무 태연하게 돌아와서 인가?
대충 정신을 차리고 나니 녀석을 찾았다는 안도감보다 이제껏 고생을 하게 만든 것에
대한 괘씸죄가 더 크게 밀려들어왔다. 그것도 모자라 기척도 없이 나타나 나를 낙마시키다니!
내가 화난 표정으로 마음 놓고 한소리 하려던 순간이었다.
“야! 너 어떻게 된 거야? 그렇게 달려 가버리면 우리더러 어떻게 찾으라…”
그 순간 주위로 환한 라이트 마법이 시전 되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제대로 마주본 시벨리우스의 모습에 나는 또다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몇 시간 만에 다시 만난 녀석은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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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태고 때부터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성역의 숲. 바로 유니콘들이 살고 있는 터전이었다.
시벨리우스가 이곳을 박차고 나간지도 어느새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전에도 가끔씩 여행을 다니긴 했지만 그가 아무 통보없이 이렇게 자리를 오래 비운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동안 웰디는 속이 바짝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초조하게 견디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산책도 그만둔 채, 그녀는 늘 마을의 입구에서 서성거리며 시벨리우스의 귀환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며칠이면 돌아오겠지 싶었던 그는 여전히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언제나 생기로 가득하던 그녀의 얼굴은 약혼자의 귀환이 늦어질수록 슬프게 가라앉다.
유니콘의 장로 역시 매일같이 시들어가는 손녀를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켜봐야 했다.
현재 시벨리우스의 부재는 유니콘 마을의 유일한 골칫거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언제까지 이것을 두고 보실 겁니까, 장로님?
당장 시벨리우스님을 송환하셔야 합니다.
제 1계승자의 위치를 생각해서라도 이 이상 인간 세상의 유희는 그분께 적합하지 않습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오.
허나 시벨리우스님의 생각이 너무 강경하니, 당분간은 더 지켜봐야 하지 않겠소?
그분도 한창 젊은 혈기이시니, 인간 세상에 흥미를 보이시는 게 당연한 거요.”
“하지만 웰디님이 걱정이지 않습니까? 저러다 쓰러지기라도 하시면…”
“그만. 난 그렇게 저 아이를 약하게 키운 기억이 없소.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자신의 감정은 스스로 추릴 줄을 알아야하겠지.
어차피 곧 있으면 최강의 세라핀을 정하는 시기가 다가오오.
그때라면 시벨리우스님도 어쩔 수 없이 돌아와야 할 거요.”
“아아, 그렇군요. 벌써 그 시기가 다가오는 건가요.”
“과연, 그 날이라면 시벨리우스님이라도 돌아오실 수밖에 없겠군요.”
침착한 장로의 말에 흥분하던 유니콘들 역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자 그들 중 한 유니콘이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어, 그런데 혹시 시벨리우스님께서 그 사이 타 종족의 여인에게 마음이라도 주시면 어찌 되는 겁니까?”
“!”
술렁술렁.
그 말의 파장은 순식간에 다른 유니콘들 에게까지 번졌다.
다들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 점에 대해서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어떤 말에도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던 장로 역시 심각한 얼굴로 신음성을 흘렸다.
유니콘은 여성에게 약한 종족. 그 반면 시벨리우스는 이상하리만치 담담한 편이었지만,
그것이 유희 중에 만난 여자에게까지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었다.
유니콘은 원래 어떤 종족과 결혼하든 반드시 그 자식은 유니콘으로 태어나게 되어 있었다.
때문에 굳이 같은 종족과 결혼하란 법은 없었지만, 시벨리우스는 달랐다.
그는 유니콘 신의 성스러운 피를 이은 계승자가 아닌가!
타 종족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것은 유니콘 종족 전체의 체면문제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분께는 이미 웰디양이 있지 않은가. 설마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줄 리가…”
“지금은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오!
그 분이 어릴 때부터 정해진 반려자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다른 상대를 찾았을 지도 모르지요.”
“그,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 아니오! 마을로 영영 돌아오지 않으실 지도…”
“역시 강제 송환을 해야…”
그때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유니콘들이 한마디씩 늘어놓던 순간이었다.
“제가 가겠어요!”
“헉, 웰디님?!”
유니콘들은 갑자기 등장한 웰디를 보고 다들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설마 그녀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모두가 당황한 가운데 웰디는 척척 용감하게 할아버지의 앞으로 걸어갔다.
“저를 마을 밖으로 보내주세요, 할아버지. 제가 시벨리우스님을 찾아서 데려오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웰디!”
“이대로 그분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제가 시벨리우스님과 감정의 공명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분의 감정을 느낄 때마다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아요.
제가 가도록 해주세요. 이 중에서 그분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은 저밖에 없을 거예요.”
“안 된다. 인간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지 않니? 다시는 너를 위험하게 만들 순 없다.”
“지난번엔 호기심이었지만 이번엔 달라요. 그분을 찾는 일에만 집중할 거예요. 보내주세요, 할아버지. 제발요.”
손녀의 간절한 표정을 본 장로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시벨리우스를 설득하는 일이라면,
장로인 자신보다 오히려 웰디가 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공식 상으로 그녀는 그의 약혼녀이기도 했고,
결혼의사가 없어도 시벨리우스가 그녀를 친동생처럼 아낀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네 설득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어쩔 셈이냐?
유니콘 남자들은 한번 운명의 여인을 찾으면 설령 목숨을 잃는 경우가 오더라도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웰디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저도 유니콘이에요, 할아버지. 제 운명의 상대는 시벨리우스님이구요.
그분을 잃으면 저도 죽어요. 여기서 마냥 그 순간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정면으로 부딪히겠어요.”
평소에 얌전하기만 한 아이가 입에 담을 내용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녀가 한계에 부딪혔다는 뜻이리라. 장로는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 모습을 웰디와 이하 유니콘들이 초조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한참의 시간 후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좋다, 가거라.”
“할아버지?”
“헉! 장로님!”
“아, 안 됩니다! 어찌 이런 연약한 소녀에게…”
“그렇담 자네가 시벨리우스를 설득할 수 있다는 건가?”
“그, 그건 아니지만…”
항의하던 유니콘이 말끝을 흐리며 물러서자 장로는 웰디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알고 있겠지만, 웰디야. 그분을 강제 송환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시벨리우스님을 설득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너다. 나는 네가 그 말을 반드시 지킬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네, 할아버지. 제가 꼭 그분을 데려오겠어요.”
“네 호언만큼 쉬운 일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너는 그분과 감정을 공명하고 있으니, 그 사실을 더욱 잘 알고 있겠지.
지금 네가 조급하게 구는 이유 또한 그것 때문이 아니냐? 그 분의 심경에 변화가 있는 게지?”
“……”
차마 대답하지 못하는 손녀를 보며 장로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느꼈다.
모두가 걱정하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충격이 오긴 했지만 그는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그 분이 네게 동생 이상의 감정이 없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네 아름다움에 금방 마음을 돌이킬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 착각이었던 것 같구나.
지나치게 친숙한 존재라는 사실이 연인으로서의 발전을 방해했는지 모르지.
너를 그 분 곁에서 함께 크도록 하는 게 아니었는데…”
“할아버지…”
“이제와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없겠지.
호위 기사 둘을 데리고 떠나거라, 웰디. 가서 그분의 마음을 돌려 보거라.
만약 그것이 안 된다 해도 어떤 방법을 써서든 마을로 모셔 오거라.
알겠니? 체념과 원망, 슬픔은 모두 그 다음이다.
일단 그분을 마을로 데리고 와야 한다는 것. 그것만은 절대 잊지 말거라.”
“네, 명심할게요. 할아버지.”
웰디의 대답을 몇 번이고 확인한 장로는 이어서 손녀의 호위기사로서,
언젠가 인간 세상에 잡혀갔을 때 함께 있었던 두 세라핀을 뽑았다. 바로 아렐과 카리안이 그들이었다.
호명된 두 유니콘이 앞으로 다가오자 장로는 그들에게도 손녀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자네들이 최선으로 할 것은 웰디를 보호하는 일이지만,
시벨리우스님을 설득하는 일에도 도움이 되어주게.
설령 그분이 마을로 돌아올 의사가 없다고 해도, 어떻게든 꼭 모셔와야만 하네.”
“알겠습니다, 장로님.”
“맡겨주십시오.”
“그럼 웰디를 잘 부탁하겠네.
그녀가 인간들의 사악한 손길에 떨어지지 않도록, 용감한 기사인 자네들이 잘 지켜줄 것이라 믿네.”
“예. 저희의 목숨을 걸고 웰디님을 지키겠습니다.”
두 유니콘의 대답에 장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녀의 안위가 염려스럽긴 했으나, 이번 일은 그녀를 위해서도 필요했다.
아마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지어지리라.
그리고 그것이 부디 최악으로만 치닫지를 않기를, 장로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염원했다.
‘시벨리우스 전하. 당신은 우리 유니콘 종족의 성스러운 후계자입니다.
동족을 배신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지 않을 것이오.’
굳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눈빛에는 어떠한 결심이 짙게 드러났다가 곧 사라졌다.
종족의 앞날에 필요 없는 가지는 잘라낸다.
그것이 설령 모두가 떠받드는 존재라 해도.
================다른곳에 공유하지 마세요!!!======================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힐끔.
나는 아까부터 묘하게 신경 쓰이는 한 존재를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움찔 떨리는 어깨가 마냥 애처롭기만 하다.
내가 이 ‘존재’를 처음 본 것은 시벨리우스 때문이었다.
몇 시간 동안 사라졌다가 나타난 녀석은 놀랍게도 두 여자가 탄 말을 함께 이끌고 있었다.
바로 우리가 찾고 있던 쟈스민과 그녀의 하녀였다.
쟈스민은 그날 아침에 봤던 때보다 훨씬 꾀죄죄하고 지쳐있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보였다.
잔뜩 울기라도 했는지 눈가에 눈물자국이 가득했다.
나는 안도하는 반면 한편으론 어리둥절한 심정이 되어 물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에요. 두 분 다 무사하셨군요! 어떻게 된 거야, 시벨? 어디서 찾았어?”
그러자 녀석은 난감한 듯 웃어 보이더니 자신의 앞을 슬쩍 가리켰다.
그제야 나는 녀석이 품안에 뭔가를 끌어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도 숨을 쉬고 있는 작은 형체의 생물이었다.
자세히 보기 위해 횃불을 조금 더 가까이에 가져가자 흠칫 놀라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불빛에 환하게 드러난 모습은 이제 겨우 8살이나 되었음직한 어린아이였다.
허리까지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은 특이한 색깔이 많은 이 세계에서도 처음 보는 핑크빛이었다.
눈동자 역시 선명한 분홍색.
전체적으로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아이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한번쯤은 돌아볼 만큼 귀여운 얼굴이다.
시릴 정도로 하얀 피부위엔 차마 옷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천조가리가 중요부위만 간신히 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아이의 귀였다.
일반 인간들처럼 둥그렇지도, 엘프처럼 뾰족하지도 않은 물갈퀴의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뜨억한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나를 따라 아이에게 시선을 건네던 엘뤼엔이 담담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인어로군.”
“헉! 인어? 이 숲에 산다는 세이렌 말이야?”
반문하면서 나는 이게 어떻게 된 거냐는 시선으로 시벨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사라져서 쟈스민을 데리고 온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치자.
그런데 웬 뜬금없는 인어란 말인가! 그것도 이렇게 어린 인어라니.
그에 대한 녀석의 답변은 더욱 가관이었다.
인어의 노래에 미혹되어 정신없이 달려가던 녀석은(자신도 창피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숲 안쪽 깊숙한 구석에 숨어있던 쟈스민과 그녀의 하녀를 발견했다.
그런데 바로 그 옆에 자신을 꾀어낸 인어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 쟈스민이 추가로 설명한 말에 의하면,
산적을 피해 숲에 들어와 겁에 질려 떨던 그녀들 앞에 갑자기 어린아이가 나타났다고 했다.
그게 인어였던 건 몰랐던 모양이지만.
아이는 무서워하는 그녀들에게 괜찮다고 안심시키며 곁을 지켜주었단다.
아마 미혹의 노래를 부른 것도, 누군가 도와줄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서였던 것 같았다.
“저는 천사인줄 알았어요. 저희를 위험에서 지켜주기 위해 마신 카노스께서 보내주신 신의 천사라고…….
정말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이렇게 살아서 여러분들을 다시 만나게 되다니……아아, 신이시여, 감사드립니다.”
“아가씨!”
떨리는 목소리로 감격하던 그녀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기절했다.
귀족가의 연약한 여인으로서 자란 그녀가 연 이틀간을 추위에 떨며 공포심을 참아내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황한 우리는 일단 그 자리에서 노숙하기로 결정하고, 곧바로 쉴 수 있는 준비에 들어갔다.
물론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 마법의 텐트가 아니라 보통의 여행자처럼 침낭을 꺼내고 불을 피웠다.
그 중 침낭은 모두 여자들에게 양보하고, 우리들은 모닥불 앞에서 밤을 새우기로 결정했다.
내친김에 꼬마 인어 역시 재우려고 했지만 어쩐 일인지 시벨리우스 옆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했다.
그래서 결국 그 아이도 덩달아 모닥불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때부터 쭈욱 이런 상황.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져서 바라보면 눈이 마주친 꼬마 인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 피했다.
그게 미안해서 눈을 돌리면 또 다시 아까와 같은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그렇게 신기하게 생겼나?
처음 몇 번이야 그러려니 했지만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자 어쩐지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서 이번엔 고개를 돌려도 계속 바라봤더니 잠시 후 꼬마 인어역시 빤히 시선을 마주 대온다.
동그랗게 뜬 눈동자는 나와 마주친 이후로 한 번도 깜빡인 적이 없었다.
어쭈! 눈싸움을 해 보시겠다?
걸어오는 싸움은 마다해본 적이 없는지라 나 역시 눈에 부릅 힘을 뜨고 바라봐 주었다.
그러자 딱-하고 소리가 울리더니 머리에서 가벼운 통증이 느껴졌다. 엘뤼엔이 꿀밤을 때린 것이다.
“아야! 왜 때리고 그래?”
“어린애들처럼 뭘 하는 거냐? 인어와는 눈을 마주치는 게 아니다.
목소리는 미혹을, 눈동자는 타인의 과거를 훔쳐보는 힘을 가지고 있어.”
“헉, 그게 정말이야? 이봐, 꼬마. 너 내 과거 봤냐?”
트로웰도 보지 못한 과거를 설마 보았으랴 싶어 조심스럽게 물으니 대답대신 생긋 웃기만 한다.
귀엽긴 했지만 그것이 그렇다는 뜻인지, 아니라는 뜻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봤다 해도 인간일 때의 모습뿐이겠지.
아마 내 정체까지 알아냈다면 이렇게 태연하게 웃지는 않을 것이다.
내친김에 나는 대화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난 엘이라고 해. 넌 이름이 뭐니?”
“…….”
“나이는 몇이야? 동료들은 어쩌고 왔어? 엄마는?”
“…….”
하지만 꾸준히 이어지는 질문에도 꼬마 인어는 여전히 또랑또랑 내 눈을 바라보기만 했다.
말을 못하는 건가 싶어 미간을 찌푸리자 시벨이 얼른 한마디 끼어든다.
“소용없어, 엘. 나도 아까부터 계속 물었는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
쟈스민 양에게도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헤에. 정체가 수상한 걸? 인어인건 확실한 거야?”
“응. 귀의 모양도 그렇고, 이런 색의 머리카락이나 눈동자를 가진 건 인어밖에 없거든.
미혹의 노래도 인어가 아니면 부를 수 없어.”
“아아, 그렇지. 그게 아니었다면 네가 그렇게 신들린 듯 뛰어갈 리가 없지.”
“……미안.”
이제 다시 생각하고 나니 자신의 실수가 낯 뜨거웠는지 녀석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러면서도 착실히 자신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기에 바빴다.
“정말 의도한 게 아니었어. 종족 특성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 종족의 남자들이 유달리 여자한테 약하거든.
오죽하면 노예상인들이 여자를 이용해서 유혹할 정도니까…….
그럴 땐 백이면 백 잡힌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나도 내가 이렇게 쉽게 휘둘릴 줄은 몰랐어.”
언제고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나는 다시금 황당한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때 느낀 것과는 조금 다른 기분이긴 했다. 더 나쁜 쪽이었지만.
“이런 꼬맹이도 여자냐?”
“하하하……그게……일단 생물학적으로는 여자 맞잖아. 하하하하하…….”
“……한마디만 해줄까?”
“으응?”
“인간에게 박해당해도 싸다.”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녀석을 모르는 척 하며 나는 다시금 꼬마 인어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별안간 아이가 갑자기 내게 다가오더니,
두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눈빛이 초롱초롱 한 것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응? 왜 그래? 머리에 뭐 묻었어?”
하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당황한 얼굴로 시벨을 바라보니 녀석 역시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웃으며 말한다.
“아마도 네 머리색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인어들 중에선 까만 머리카락이 없으니까 신기해서 그런 가봐.”
“그런가? 하하, 이거 나도 염색한 건데.”
어색하게 웃으며 말해도 듣는지 마는지 영 반응이 없다.
그저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만지작거리고만 있을 뿐.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꼬마인어가 두 손으로 내 머리를 가볍게 쥐고는 아래로 주욱 쓸어내렸다.
그러자 그 손길을 따라 머리카락이 점점 늘어나버리는 것이 아닌가!
“헉?! 뭐, 뭐야?”
눈 깜짝할 사이에 내 머리카락은 자르기 전의 위치만큼 길어져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머리색까지 원래의 금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당황한 가운데 나는 처음으로 인어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 머리가 더 잘 어울려.”
“!”
한 마디로 망연자실.
인어에게 이런 능력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감탄보다는 원망이 더 강했다.
아무리 어려서 생각이 짧다고 해도 그렇지, 상대방의 동의도 없이 무작정 일을 벌이다니!
난 정말 큰 맘 먹고 잘랐단 말이다!
이런 내 맘도 모르고 시벨은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다행이다, 엘. 애써 다시 기를 필요가 없게 됐잖아.”
“……뭐가 어째?”
“아, 아니. 그냥 잘됐다 싶어서. 어차피 기를 생각인거 아니었어?
이제 더 이상 검문에 걸릴 일도 없을 텐데 계속 짧은 머리로 있을 필요는 없잖아.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엘 너는 금발 쪽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남의 가슴에 비수를 박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건넨 주제에 시벨은 뭐가 문제냐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말해 무엇 하랴. 나는 체념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래. 내 팔자가 다 그렇지 뭐.”
“에, 엘? 혹시 화난거야?”
그럼 불난 집에 기름을 붓고도 안 타오르길 바라는 거냐, 네놈은?
나는 대답대신 노려보는 것으로 녀석의 말에 긍정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내 팔을 툭툭 건드렸다.
문득 바라보니 이 모든 일의 주범인 꼬마 인어가 머뭇거리는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혼날까봐 잔뜩 긴장한 얼굴이랄까? 그 얼굴을 보고나니 왠지 화내는 것도 한심해져서 쓴 웃음을 지었다.
‘이거야 원. 엘. 너도 참 속 좁다. 어린애가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뭘 그 정도 가지고 이렇게 꽁해 있고 그러냐. 어른스럽지 못하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괜찮다는 뜻으로 꼬마 인어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금방 헤헤거리고 웃더니, 지치지도 않는지 이번엔 내 손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뭐든지 쉽게 잊는 것은 확실히 어린애다웠다.
낑낑거리고 가져간 내 오른손을 마치 탐정이라도 된 듯이 샅샅이 살핀다.
손가락 사이에 물갈퀴도 없이 매끈한 것이 신기했는지 이리저리 바라보는 것이 꽤 귀여웠다.
내친김에 왼손까지 보여주자 화색이 가득한 얼굴로 날 올려다본다.
그런데 바로 그때, 장난끼 가득한 남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직접 파고들었다.
<헤에, 정말이었네. 너 내 문장은 어디서 받은 거냐?>
“!!”
너무 놀라서 휙 주위를 둘러보니 의아하게 바라보는 일행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짐작은 했지만 역시 나에게만 들린 목소리였다.
하지만 내가 놀란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엘? 왜 그래?”
“응? 아니, 그냥……방금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소리? 난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 혹시 환청이라도 들은 거야?”
“아, 아니야!”
장난스럽게 묻는 시벨의 말에 나는 일부러 정색해서 대답했다.
환청이 아니다. 환청일 리가 없을 것이다.
두근두근.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만큼 강하게 뛰었다.
그때 내 손을 꼬옥 움켜쥐는 작은 힘이 느껴졌다.
떨리는 눈으로 내려다보니 나를 향해 생긋 웃고 있는 꼬마 인어가 보였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 눈동자. 설마…….
‘카노스……님?’
멍하게 속으로 질문하자 의외라는 듯, 꼬마 인어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진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눈을 부릅뜰 사람은 오히려 나였다.
맙소사. 카노스! 당신이란 신은 도대체……!
<호오, 나라는 걸 바로 알아맞히네? 이야~ 대단한데!
그 문장은 어떻게 된 거냐? 정말 내가 준 게 맞아? 근데 왜 내 기억엔 없지?>
‘으으윽!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카노스님! 그 꼴은 또 뭐구요!’
원래라면 내 머리를 이렇게 만든 책임부터 따지고 들었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를 만났다는 충격에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저 생각지도 못한 방식의 만남에 당황해하는 내게,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응? 왜? 인어가 어때서? 꽤 귀엽잖아. 마음에 들어 한 거 아니었어? 방금 전까지 넋 놓고 바라봤던 주제에.>
넋 놓은 적 없어욧!
너무 기가 막히면 오히려 긴장이 풀어지는 모양이다.
놀랄 기운도 없어진 내가 추욱 어깨를 늘어뜨리자 꼬마 인어,
아니 마신 카.노.스.는 또다시 생긋 웃으며 머릿속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허락 없이 내 문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있다는 게 신기해서 조사차 와봤더니,
상당한 걸 만나게 되는 군. 정령왕의 영혼을 가진 인간이라. 혹시 미래에서 왔냐?>
‘하아, 바로 알아보시네요. 역시 신의 눈은 못 속이는 군요…….’
<엥?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정말이었어?>
“…….”
휘둘리지 말자, 엘.
상대는 다름 아닌 카노스다.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뒤통수치는 게 특기인 신이 아니던가.
내가 묵묵히 침묵을 고수하자 그는 재미없다는 듯이 작게 투덜거렸다.
<쳇. 안 넘어가네. 미래에서 나와 꽤 친했나봐? 이런 식으로 성격 파악당하면 기분 상하는데.>
‘하하…….’
그래도 본인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지?
지금이나 미래나(?) 엉뚱하기만 한 그의 발언에 좀처럼 적응을 못하고 있는데,
문득 카노스가 진지한 말투로 물어왔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정령왕인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냐?
영혼만 있는걸 보면 본체는 미래에 놔두고 온 모양인데.
그거 꽤나 위험한 일이라는 건 아는 거냐? 혹시 내가 보내준 거야?>
‘아, 그게 아니라…….’
그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으려다 말고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그와의 대화가 길어짐에 따라 일행들이 이 모습을 이상하게 여길 수 있다는 불안감 들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엘뤼엔과 시벨리우스가 내게 수상하다는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인어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며 시시각각 표정이 바뀌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 내 기색을 느꼈는지, 카노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기다려 봐라. 이야기하기 편한 환경으로 만들어 줄 테니.>
이윽고 그가 딱-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거짓말처럼 주위가 조용해진 것이 느껴졌다.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도, 사람의 숨소리도, 심지어 공기가 흐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의 모습이 마치 돌덩이라도 된 마냥 정지된 채 굳어 있었다.
나를 바라보던 두 눈의 초점역시 잡히지 않았다.
“엘퀴네스……? 왜 그래? 시벨리우스?”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러도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당황한 내가 슬쩍 그들의 몸을 흔들어보려던 때였다.
“걱정 마. 잠깐 시간을 멈춰둔 것뿐이니까. 둘 다 아무지장 없다.”
“!”
귓가에서 똑똑히 울리는 낯익은 목소리에 나는 벅찬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 있던 꼬마 인어는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대신 검은 머리카락에 늘씬한 체구의 청년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카노스님…….”
본 모습을 본 탓이었을까?
방금 전까지도 그와 대화한 주제에 이제야 카노스를 만났다는 실감이 들었다.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 온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었다.
웃음을 머금은 얼굴을 보니, 애써 참고 있던 감정이 북받쳐 올라 눈가가 시큰해졌다.
마지막 소멸되던 순간에도 그는 이렇게 웃었었다.
만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눈앞에 두고 있으니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며 카노스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아~ 그럼, 미래의 엘퀴네스씨. 방금 전에 했던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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