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소설] 정령왕 엘퀴네스 11권
11-1. 검술대회(1)
1. 검술대회
정신을 차린 뒤 나는 곧바로 노예상인들에게 복수하러 가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놈들이 유니콘을 놓쳤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모든 축제를 철거하고 이슬처럼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유니콘은 드래곤 못지않게 마법실력이 뛰어난 종족이라,
행여 놓치는 일이 생기면 곧바로 도망을 가야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 사로잡은 유니콘 중에선 암컷도 있었으니, 목숨을 보존하려면 몸을 숨기는 방법 밖에 없을 것이다.
단 망각이 없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려면 앞으로 평생 도망 다녀야 할 테지만.
나는 아쉬운 기분에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그렇게 뒤 끝이 나쁠 걸 알면서 유니콘은 왜 사냥하는 거지? 사가는 사람도 이상해.
나중에 놓치게 되면 복수하러 올게 뻔한데.”
“이번 녀석들이 너무 방심한 거다.
보통은 유니콘을 사로잡자마자 환상마법을 걸어서 충실한 노예로서의 기억을 덧입히지.
외모도 뛰어나고 마법 실력까지 출중한 노예를 가지게 되는 건데 그 정도 모험은 감수하지 않겠나?”
“헉, 그게 정말이야?”
엘뤼엔의 대답에 내가 놀란 표정으로 묻자 트로웰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맞아. 그래서 나중에 구출당해 마법에서 풀리게 되도 수치심을 못 이겨 자살하는 유니콘이 많아.
능력은 뛰어나지만 인간들에게 너무 잘 속아 넘어가는 게 문제인 종족이지.”
“그럴 수가…. 무슨 대처할 방법 같은 건 없는 거야?”
“타고난 본성을 바꿀 수 없는 이상 어쩔 수 없어.
어차피 유니콘은 신수(神獸)니까 신계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해. 아마 지금쯤 슬슬 건의가 나오고 있을 걸?”
“으음.”
누구 못지않게 강한 종족이지만, 드래곤이 인간의 오만을 비웃으며 즐기는 쪽이라면,
그들은 외면하며 피하려는 쪽이었다. 남에게 이용당하기 쉬운 성격에 높은 자존심까지 가지고 있으니,
중간계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 것 치곤 시벨리우스는 너무 잘 적응하는 것 같았지만.
“아참, 그나저나 한 가지 문제가 생겼어.”
“문제라니?”
“우리가 만나러 온 블루 드래곤 말이야. 여기 수도에 있는 건 확실한데 정상적인 방법으로 만나기가 좀 힘들 것 같아.”
“왜?”
수도에 오면 당연히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던 나는 트로웰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그 대답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엘뤼엔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그 녀석이 이번 유희를 귀족으로 설정했다. 그것도 꽤나 세력가의 수장인 것 같더군.”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끝까지 들어. 그 썩을 놈은 용건이 있으면 자신의 유희에 맞춰서 찾아오라는 주의다.
즉 지금부터 너는 나와 친분이 있는 드래곤이 아닌,
세이크 제국의 세도 있는 귀족가의 수장을 찾아가야 한다는 소리지. 놈이 평민인 너를 순순히 만나줄 거라 생각하나?”
“그, 그렇다고 그냥 포기할 수도 없잖아.”
반쯤은 억울한 심정으로 대답하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트로웰이 동조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그래서 그를 만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알아봤어.
첫째는 네가 엘퀴네스의 계약자라는 사실을 인간들에게 밝히는 거야.”
“뭐?”
그 말에 엘뤼엔은 인상을 팍 찡그렸고 난 뜨억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트로웰은 쿡쿡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정령왕과 계약한 존재는 인간세계에서 꽤 큰 특전이 있거든.
적어도 남들 앞에서 굴하지 않을 정도의 대단한 뒷배경으로 작용할 수 있지.
귀족을 상대하기에도 무리 없을 거야. 하지만 그만큼 귀찮아 지는 것도 감수해야 돼. 사람들이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니까.”
“그, 그럼 두 번째는?”
“간단해. 한 밤중에 몰래 담을 넘어가서 만나는 거지.
단, 이중 삼중의 철저한 방어벽과 알람마법을 무사히 피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윽. 다른 방법은 없어?”
“흠. 이것도 마음에 안 들어? 그렇담 마지막 방법밖에 없네. 세 번째는…이거야.”
품속에서 부스럭 거리는 종이를 꺼낸 트로웰은 내 앞에 그것을 활짝 펼쳐 보였다.
조만간 이 근처에서 어떤 대규모의 행사가 열리는 모양인데,
그에 대한 간단한 날짜와 일정, 그리고 몇 가지 주의사항이 적힌 안내문이었다.
“이번에 녀석의 가문에서 주체하는 검술대회가 열리더군.
그 대회에 참가해서 우승하는 방법이야. 그럼 1:1로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거든.”
“!!”
제국의 실력 있는 검사를 선발하여 상을 주기 위해 만든 행사이기 때문에,
평민도 참여할 수 있고 뒤탈이 없다는 것이 대략의 설명이었다.
우승이라는 제약이 있긴 했지만, 앞서 제시한 방법 중에선 그나마 가장 나은 것이기도 했다.
내가 종이를 든 채 머뭇거리자 트로웰은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말했다.
“뭐, 편하게 생각해. 어차피 검술을 배우는 김에 목표를 세우는 셈 치면 되니까. 일석이조잖아?”
“그야 그렇지만…내가 우승할 수 있을까?”
“누구한테 배우는 건데, 그야 당연하지. 물론 지금 이대론 안 돼.
넌 아직 몇 가지 부족한 부분이 있거든. 대회가 열리는 게 언제지?”
“으음. 두 달 후 같은데?”
“그 정도면 충분해. 그 사이 내가 너의 결점을 완벽하게 보완해 주지.”
왜 그 말이 사형선고를 받는 것처럼 심장을 철렁하게 만들었을까?
자신만만하게 선언한 그는 제일 먼저 훈련장소를 물색하러 다녔다.
지금까지는 대충대충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공터에서 수련하며 여관을 오갔지만,
단기간에 실력을 향상시키는 만큼 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사라진 트로웰은 정확히 이틀 후에 커다란 자루를 메고 나타났다.
“수련 장소를 마련했어. 이제 출발하자.”
“지금 당장? 등에 메고 있는 자루는 뭐야?”
“아, 이거? 두 달 동안 네가 먹을 식량이야. 앞으론 마을에 오지 않고 거기서 수련하면서 의식주까지 해결해야 하거든.”
“대, 대체 거기가 어딘데? 설마 두 달 내내 노숙하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건 가보면 알아.”
의미심장한 대답에 흠칫하던 것도 잠시. 반항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트로웰의 표정에 나는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를 따라 도착한 장소를 본 순간 나는 황당함에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저기 트로웰…정말 여기야?”
“응.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니,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문제가 아니라…여기서 어떻게 해?”
그곳은 거대한 산맥 사이에 뻗어진 높다란 벼랑 밑이었다.
문제는 정말 그 뿐이라는 것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지나갈 수 있는 길 외에는 수련을 할 만한 기본적인 공간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런 곳에서 대체 뭘 하라는 거지?’
설마 벼랑 위쪽을 말하는 건가 싶어 고개를 들어봤지만,
온통 뾰족하게 치솟은 바윗덩어리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 표정이 암담하게 변하자, 트로웰은 킥킥 웃으며 대답했다.
“나참. 날 뭘 로 보는 거야? 당연히 생각해 둔 게 있지.”
“그, 그게 뭔데?”
이에 그는 자신이 몸소 시범을 보임으로서 모든 의문을 해소시켰다.
바로, 눈앞의 벼랑 속을 스윽-통과하여 들어갔던 것이다.
“!!”
“뭐해? 들어오지 않고. 수련 장소는 이 안이야.”
“드, 들어가라고?”
“응. 괜찮으니까 나처럼 들어와 봐. 노움들이 길을 터 줄 거야.”
그의 말처럼 내가 벼랑에 접근하는 순간,
흙속에 파묻혀있던 노움들이 다닥다닥 내 몸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 덕에 나는 땅의 정령이라도 된 마냥 자연스럽게 흙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눈앞에 드러난 광경에 나는 또다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벼랑 속에 들어왔다고는 믿기 힘들만큼 야구장만큼이나 넓은 공터가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바닥은 돌부리 하나 없이 완벽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하늘은 뻥 뚫려 있어 답답한 느낌도 들지 않았다.
게다가 한 구석엔 식생활을 할 수 있는 나무 판자집까지 갖추어져,
그야말로 속세를 잊고(?) 수련에 집중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거의 취미로 검을 배우는 내가 사용하기엔 과분할 정도다.
“정말 대단하다. 설마 트로웰이 직접 만든 거야?”
“그럼 내가 하지 누가 했겠어? 쭉 둘러봤는데,
이 주변엔 그다지 마음에 드는 장소가 없었거든. 직접 만드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말이야.”
“헤에. 정말 고마워, 트로웰.”
“감사인사는 말보단 수련의 성취도로 보여 달라고. 애써 만든 훈련장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진 않겠지?”
“아하하, 무, 물론이지.”
활활 타오르는 눈빛을 보니, 만약 두 달 후의 검술대회에서 우승을 하지 못하면
당장 이 훈련장과 함께 매장시켜 버릴 것 같았다.
어쨌든 그날 이후 트로웰의 훈련방법은 이전과 판이하게 달라졌다.
실전을 방불케 하던 대련이 아닌, 찌르기나 정면 베기 같은 기초 동작부터 반복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중량화 마법이 걸린 팔찌도 다시 착용했다.)
그는 한 동작을 몇 천 번씩 정확하게 펼칠 것을 강조하며, 하루에 한 개씩의 새로운 동작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배운 것은 모두 그동안의 대련을 통해 저절로 알게 됐지만, 정확한 동작이나 명칭은 모르고 있었던 것들이었다.
그런 식으로 하루를 꼬박 검을 휘두르고 나면 마지막엔 그날 배운 동작만을 사용하여 트로웰과 대련하는 시간을 가졌다.
단, 그는 일절 반격을 하지 않고 방어만으로 내 공격을 유도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이 살벌한 검을 막기에 급급하던 때보다 더 힘들었다.
챙! 채앵! 휙! 부웅!
“정신 차려, 엘! 또 움직임이 멈추었잖아!”
“윽! 미안…”
“사과는 집어치워! 검 끝을 정확히 하라고 늘 강조했지?
이런 식으론 상처를 입혀도 치명상이 안 된다고! 팔에 더 힘을 실어. 정확히 찌르지 않으면 가만히 안 둘 거다.”
끄덕끄덕.
서늘하게 굳은 황금색 눈동자를 보니 등 뒤로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이번에도 공격이 실패하면 정말 가만히 두지 않을 기세였다.
그가 저렇게 화를 내는 이유도 당연했다.
내가 매일 그와의 대련 때마다 공격을 주저했기 때문이다.
완전한 타인을 찌르는 것과 아는 사람을 찌르는 것은 느낌이 너무 달랐고, 나는 좀처럼 둘의 갭에 적응하질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트로웰은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어리광 피우지마! 이건 실전이 아니라 대련이야! 죽이려고 하는 싸움이 아니라고! 구분을 똑바로 해!”
“그, 그야…”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런 것치곤 너무 몸을 사리는 걸?
내가 다치는 게 무서운 거야, 아니면 그 때문에 네 마음이 다치는 게 무서운 거야?”
“!!”
정곡을 찌르는 트로웰의 말에 나는 흠칫 얼굴을 굳혔다.
어쩌면 난 친구를 공격하는 행위에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짐작 가는 부분도 있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거다.
언제고 화가 난 내가 시벨리우스에게 얼음창을 드밀었던 때.
굳어버린 일행들의 얼굴을 보며 왠지 몹쓸 짓을 한 것 같아 마음속이 편치 못했었다.
지금 내가 공격을 망설이는 건 또다시 그때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트로웰은 그런 내 모습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었다.
“잡념은 그만두고 오직 이기는 것만 생각해.
똑바로 임하지 않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인다. 나를 화나게 만들지 마. 알았어?”
오늘도 어김없이 날아드는 질책에 기죽으며, 나는 몇 번이고 약해지려는 마음을 추슬렀다.
그렇게 쭈욱 임하던 대련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간신히 끝을 맺었고, 나는 녹초가 된 몸으로 항상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이런 식의 훈련방식은 꼬박 한 달 가까이 이어졌다.
검술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트로웰은 이전보다 더욱 대련 시간을 늘렸다.
아무리 힘들어도 엘뤼엔의 치료한방이면 원상태로 복구가 돼버렸기 때문에,
식사와 잠자는 시간을 빼면 하루 종일 검을 들고 훈련하는 일정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혹사당하는데도 근육이 안 붙다니, 너란 녀석도 참 괴물이군.”
그렇게 지옥 같은 매일 매일을 보내던 어느 날.
내가 혼자서 수련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엘뤼엔이 문득 무료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그 부분에 잔뜩 실망하고 있던 나는 꽥하고 소리쳤다.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야?”
“그저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시비를 걸었다면 어쩔 거지? 나에게 결투라도 신청하겠다고?”
“쳇, 까짓 거 못할 것도 없지!”
“호오, 용기는 가상하다만…후회할 텐데?”
그렇게 말하며 씩 입꼬리를 올리는 엘뤼엔의 모습은,
분명 웃는 얼굴이었는데도 함부로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무서웠다.
게다가 한손에 냉큼 물로 된 검을 만드는 것을 보니, 정말로 결투라도 벌일 작정이 아닌가!
그 상태로 성큼 걸어오는 모습에 경악한 나는 뒤로 움찔 물러서며 소리쳤다.
“자, 잠깐! 설마 정말 싸우려고?”
“왜? 그걸 원하는 게 아니었나? 말해두지만 난 트로웰처럼 봐줄 생각은 없다.”
“아하하…아버지, 너무 흥분하셨음다. 지, 진정을…”
당신 자식을 패륜아로 만들 셈이야?!
하지만 엘뤼엔은 이미 결심을 완전히 굳힌 듯 했다. 그는 들고 있던 검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아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물로 만들어진 검이라고 만만히 보았다간 크게 다칠 거다. 네가 들고 있는 진검보다 더 단단하고 날카로우니까 말이야.”
“그야 나도 알지만…으윽! 왜 얘기가 이렇게 되는 거야!”
“훗, 감히 내게 덤빌 마음을 품은 벌이라고 생각해라. 이참에 누가 우위에 있는지 확실하게 깨닫게 해주지.”
아무래도 내가 그냥 농담 삼아 해봤던 소리가 그의 자존심을 건들인 모양이다.
시퍼렇게 피어오르는 살기와 상반되는, 무척이나 화사하게 웃고 있는 엘뤼엔의 얼굴을 보며 나는 낭패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래봤자 그는 그만 둘 생각이 없어보였지만.
아무튼 그날 나는 놀라운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되었다. 바로 그가 굉장한 검술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퍽! 채앵! 휘익! 퍼어어어억!
“히익!, 자 잠깐만!! 으악! 머, 멈추라니까!!”
“그렇게 떠드는 사이에 피하는 게 더 나을 텐데?”
“큭!”
현란하게 몰아치는 검기는 살짝만 스쳐도 피부에 깊은 생채기를 만들었다.
봐주지 않겠다고 하더니 엘뤼엔은 정말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몰아붙였다.
그나마 피할 여유를 허락하는 걸 보아 죽일 생각까진 없는 것 같으니 다행이랄까.
휘이익! 챙!! 콰앙!
“꾸엑!”
철퍼덕!
요리조리 피하던 것이 드디어 한계에 이르자 나는 어쩔 수 없이 정면으로 엘뤼엔의 검을 막았다.
그러나 막상 맞부딪히는 순간, 나는 순수한 압력만으로 저만치 밀려나 바닥에 대자(大)로 엎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공격을 멈춘 엘뤼엔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꼴불견이다. 어서 일어나라.”
“우에에에~~~!!”
아무리 추하게 넘어졌기로서니 꼴불견이라니!
그동안 엘뤼엔은 숨소리는커녕, 치렁치렁 기른 머리카락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내 사력을 다한 전투도 그에겐 식후의 간단한 운동보다 못한 듯 했다.
하긴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이제 겨우 검술을 배운지 1년도 안 되는 녀석(바로 나다)한테 지겠는가?
“어어? 지금 둘이 뭐하고 있는 거야?”
그때 마침 자리를 비우고 있던 트로웰이 돌아와 이 장면을 발견했다.
그는 바닥에 엎어져 있는 나를 보고 대충의 상황을 짐작한 듯, 나무라는 시선으로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애를 데리고 장난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니야, 엘퀴네스? 온 몸이 상처투성이잖아.”
“흐응. 그냥 가볍게 경고를 했을 뿐이다. 너무 쉽게 쓰러지니 싱거울 정도군.”
“검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당연하지. 그런데 경고라니?”
트로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그는 잠시 내게 시선을 주더니 삐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요즘 이 녀석이 나를 만만히 생각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훈계를 해준 것뿐이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후후. 그저 엘에게 마음을 열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게 아니고? 내가 보기엔 억지로 벽을 쌓으려고 애쓰는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뜻이지?”
“글쎄…. 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잖아?”
순간 파지지직!하고 두 정령왕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난데없이 전투태세라니.
도대체가 이 둘은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다.
덕분에 중간에 낀 나만 일어날 타이밍을 잡지 못한 채, 뻘쭘하게 누워서 눈치만 보게 되었지 않은가!
그렇게 한참동안 무서운 얼굴로 트로웰을 노려보던 엘뤼엔은 곧 휙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마 정령계로 돌아가 버린 듯 했다.
하지만 당황한 나와 달리 트로웰은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아, 가버렸다. 원래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날 역소환 시켰을 텐데. 그냥 말없이 물러서다니, 역시 변했어.”
“…여, 역소환? 같은 정령왕을?”
“아아. 기분 나쁠 땐 동료고 뭐고 없거든.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알지? 그 녀석은 거의 소멸할 뻔 했었어.
나와 미네르바가 말려서 간신히 불의영역이 붕괴하는 걸로 그치긴 했지만.
뭐, 이렇게 말해도 넌 이해 못하겠지? 요즘의 그는 평소와 굉장히 다르니까.”
“아하하하…”
장난스럽게 묻는 말에 나는 그저 허무한 웃음만 흘렸다.
이전에도 귀가 따갑게 들었던 악명이지만,
막상 이곳에서 만난 엘뤼엔은 조금 퉁명스럽다는 것 외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그동안 소문이 와전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평소와 다른 상태였다니!
새삼 내가 얼마나 대담한 짓을 했는지 실감이 들었다.
잠시 후 트로웰은 내 몸을 부축하며 일으킨 다음 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쨌든 무모했어. 왜 엘퀴네스에게 시비를 건거야?
그는 나보다 검술 실력이 더 뛰어나다고. 지금의 네가 도전할 상대가 아니야.”
“엑? 엘뤼엔이 트로웰보다 강하다고?”
“당연하지. 각 정령왕들은 속성마다 능력치가 약간씩 달라.
나와 미네르바는 방어에 강한편이고, 이프리트는 공격력이 높지.
엘퀴네스는 방어와 공격 둘 다 월등한 편이야. 인간들로 치면 그랜드 소드 마스터 급이라고.”
“그, 그랜드으?”
내가 떡하고 입을 벌리자 트로웰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냥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해.
아무리 그래도 엘퀴네스가 직접 검을 드는 일은 거의 없는데, 이번엔 너에게 시범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군.”
“시범이라니?”
“음…검사들은 자신보다 월등히 높은 상대와 대련할 때 실력이 정진되는 경우가 많거든.
고위마법사가 수련생들에게 좀 더 높은 레벨의 수식을 알려주는 것과 비슷한 경우랄까?
사실 본 실력대로 했다면 네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지도 않았겠지. 아무튼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아하하…”
솔직하지 못한 건 당신도 만만치 않거든?
속으로 작게 투덜거린 나는 온 몸에 벌겋게 자리 잡은 상처자국들을 보며 울상 지었다.
치료해줄 사람(?)이 사라져 버렸으니 당분간은 크고 작은 부상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트로웰이 상처가 완치 될 때까지 기다려줄 리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딜 갔다 온 거야?”
“응? 아아, 검술대회 참가자 신청이 오늘까지라 접수하고 왔어.
1차 대련 상대자는 대회 전날 뽑기로 결정되는 모양이니까, 여기서 일주일 후에 출발하면 될 것 같아.”
“흐음. 총 몇 차까지 있는데?”
“참가자 수가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흔치않은 대회인 만큼 대륙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릴 테니 금방 끝나진 않을 거야.
아참, 그곳에서 우승상품에 대한 얘기를 들었는데, 네가 들으면 꽤 좋아하겠던걸?”
“와아~ 상품도 있어? 그게 뭔데?”
상품이란 말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트로웰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말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에고소드야.”
“에고…소드? 설마 그 영혼이 담겨있다는 검 말이야?”
“맞아. 쉽게 내줄만한 것이 아닌데 이번 검술대회에 사활을 걸었는지 꽤나 인심을 썼더군.
원석은 아니지만, 일단 영혼의 보석과 접목시킨 것이니까 꽤 흥미가 동하지 않아?”
동하다 뿐인가! 어쩌면 그 보석이 라피스 일지도 모르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다급히 검을 잡고 트로웰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트로웰! 얼른 대련하자!”
“어라? 괜찮겠어? 아직 엘퀴네스와 대련해서 다친 상처도 치료하지 않았잖아.”
“괜찮아, 이 정도쯤은.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조금이라도 더 훈련해야지!”
그래서 반드시 검술대회에서 우승해야 한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데도, 나는 벌써부터 라피스를 만나기라도 한 마냥 마음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트로웰은 드물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상품에 대한 말을 듣자마자 의욕백배인걸?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알려줄걸 그랬네. 아! 이제부턴 팔찌를 빼도 돼.”
“으응? 훈련 중엔 계속 착용하는 거 아니었어?”
“마음이 바뀌었어.
이젠 대련할 때의 망설임도 많이 사라진 것 같고. 좀 더 본격적으로 시작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무엇보다 그게 있으면 확인이 어려워지거든.”
“확인?”
수련의 성취도를 말하는 건가?
혼자서 속으로 납득한 나는 냉큼 손목과 발목을 단단히 감싸고 있던 무거운 장신구들을 풀어냈다.
그러자 마치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몸속을 흐르는 기운도 아까전보다 훨씬 더 활발해 진 것 같았다.
노예상인들과 싸웠을 때도 장신구가 풀어진 상태였지만, 지금처럼 가벼운 느낌은 아니었다.
아마도 트로웰이 훈련하는 중에 틈틈이 무게수치를 높였던 모양이다.
나는 팔 다리를 조금씩 움직이면서 가벼워진 몸에 적응할 시간을 가졌다.
금방이라도 붕 뜰 것 같은 것이, 마치 중력이 사라진 땅에 서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때? 움직일만해?”
“으음. 너무 가벼워서 내 몸이 아닌 것 같아.”
“하하, 금방 적응 될 거야. 그럼 시작한다?”
“뭐? 우왓!”
트로웰은 내가 반문할 틈도 없이 곧바로 공격을 시작했다.
쐐애액! 공기를 가르며 쏘아져 오는 검은 다분히 위협적이었지만,
이미 내 몸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몸놀림이 빨라지자 여유시간이 많아졌고, 반격 또한 거침없이 이어졌다.
‘와아, 이게 정말 나야?’
겨우겨우 버티던 공격을 쉽게 피해내자, 나는 저절로 신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언제나처럼 대련이 힘들다거나 버티기 어렵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대련에 흠뻑 취해버린 탓이었을까?
나는 이전만큼 트로웰을 공격하는 행동에 대해 머뭇거리지 않게 되었다.
그를 공격하는 행위 자체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중요한건 지금 내가 검을 휘두른 다는 것. 무기였던 그것은 어느새 또 다른 나의 분신이 되어있었다.
검신을 잡고 있는 손에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나의 온 몸이 검 자체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검과 검이 맞닿는 느낌이 좋았다. 시작 한 뒤 처음으로 검술훈련이 즐겁게 느껴졌다.
몸속의 기운이 태풍처럼 날뛰며 온 신경을 자극했다.
나의 두 눈은 대련을 넘어선 다른 무언가를 넘보고 있었다. 폐를 파고드는 공기가 청량한 사이다처럼 따갑고 시원했다.
휘익! 팟!
“…윽!”
“!!”
그 순간 무의식적으로 내지른 검이 그의 볼 옆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옅은 핏방울이 튀었다.
놀란 나는 움찔하며 그 즉시 행동을 멈췄고, 대련 또한 자연스럽게 중지되었다.
방금 전까지 열기로 가득하던 공간은 순식간에 싸늘한 정적으로 가라앉았다.
“트, 트로웰!! 괜찮아?”
살짝 스친 거라 생각했던 상처가 생각보다 컸는지, 길게 패여진 피부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가 당황한 목소리로 묻자, 그는 뭔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뺨의 상처를 슬쩍 더듬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자신의 상처가 아니라, 내 검 쪽을 향해 있었다.
“…헤에, 제법인 걸?”
“뭐?”
“아무것도 못 느끼는 거야? 네가 들고 있는 검을 봐.”
“…?…!!…”
장난스럽게 말하는 트로웰의 모습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길게 늘어진 검신에 생전 처음 보는 푸르스름한 빛이 뿜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건…?”
“마나가 일정한 물질을 통해 밖으로 구현된 단계.
흔히 말해 검기(劍氣)라고들 하지. 검술에서 일정한 경지에 이르면 나타나는 현상이야.”
“!!”
뭐가…어떻게 됐다고?
담담한 설명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나는 쩍 벌린 입을 다물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트로웰을 응시했다.
내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던 그는 생긋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소드 마스터가 된 것을 축하해, 엘.”
쿠웅!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에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환청이길 바란다면 너무 큰 욕심일까. 나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방금…뭐라고?”
“소드 마스터가 된 것을 축하한다고 했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다, 당연하지! 소드 마스터는 아무리 검술에 소질 있는 사람이라도 10년은 넘게 배워야 되는 게 아니었어?
난 시작한지 불과 몇 개월 밖에 안 되잖아!”
아무리 본체가 정령왕이라지만, 인간의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한계가 있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트로웰은 그다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그렇게 일반론에 얽매일 것 없어.
네 신체적인 조건과 능력을 생각해보자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으니까.
조금 빠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워낙 기본조건이 좋았으니 어쩔 수 없지.
게다가 검기라는 것도 결국 체내에 쌓인 마나의 일종이니, 나와 엘퀴네스의 기운에도 영향을 받았을 거야.”
“하지만 겨우 그 정도 가지고…”
“흐음. 지금 나한테 받은 훈련을 무시하는 거야?
오우거 두 마리의 무게를 합친 것보다 무거운 장신구를 차고,
소드 마스터이상의 실력을 지닌 자와 매일같이 살벌한 대련을 펼친 주제에.”
“헉? 오우거 두 마리? 지금껏 내가 하고 있던 팔찌의 무게가?”
그동안 트로웰이 알게 모르게 무게수치를 높여왔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내 몸무게를 가볍게 뛰어넘은 수준이었다니!
뜨억한 표정으로 묻자 그는 그저 말없이 생긋 웃기만 했다.
양심의 가책은커녕, 오히려 잘 되었지 않느냐고 말하는 얼굴이었다.
“너무해, 트로웰. 혹시 날 죽일 셈이었어?”
“엄살은. 어쨌든 그 덕분에 소드 마스터의 길이 빨라진 거잖아?
마침 검술대회 일정에도 맞추었으니 겨우 한시름 덜었군.”
“아! 맞다, 검술대회!! 소드 마스터라면 우승도 노릴 수 있겠지?”
지금껏 막막하다고만 생각했던 미래에 드디어 희망이 보였다.
이대로라면 무사히 에고소드를 받을 수 있음은 물론, 블루 드래곤과의 대면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라피스를 찾을 수 있다는 확신에 마음이 들뜬 내게 트로웰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야 그렇지. 하지만 대회 중에 검기를 쓰는 건 금지야.”
“엑? 왜에?”
“뭐, 사람들 눈에 띄고 싶다면 그러던가.
내가 알기론 역사상 가장 최연소 소드 마스터지, 아마? 밝혀지는 순간 인간들이 벌떼처럼 몰려드는 모습이 눈에 선하군.”
“……”
다분히 빈정거리는 어조였지만,
트로웰의 예지는 이제껏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허튼 소리를 내뱉는 성격이 아니다. 그것은 다소 삐뚤어져 있는 현재의 그도 마찬가지였다.
‘쳇, 그럼 괜히 좋아했잖아.’
검기를 쓰는 것과 안 쓰는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게임으로 치면 보조마법을 받는 것과 안 받는 것의 차이랄까?
단기간에 소드 마스터가 된 만큼,
검술의 기교적인 면에선 오랫동안 훈련해온 사람들에 비해 떨어질 테니,
검기를 쓸 수 없다는 제약은 상당히 아쉬운 것이었다.
“자아~ 그럼 난 이제 조금 쉬어야겠어.
너도 하고 싶은걸 하도록 해. 출발이 일주일 후니까 그 사이에 좀 여유가 있겠군.”
“에? 대련은 더 안 해? 훈련은?”
내가 놀란 표정으로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검기를 다루게 됐으니 내가 더 가르칠 건 없어.
오늘부터 훈련은 끝이야. 하지만 아직 검의 기교가 부족하니까 틈틈이 수련해서 보충은 해야 할 거야.”
“으응, 알았어. 아참, 트로웰! 아까 입은 상처는 어때? 꽤 깊이 베였던 것 같은데, 괜찮은 거야?”
그때서야 대련 중에 그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을 떠올린 나는 황급히 물었다.
트로웰 또한 그 사실을 잊고 있었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다가 슬쩍 볼에 새겨진 상처를 더듬었다.
“아아. 상관없어. 어차피 실체도 아니니까. 겨우 이정도로 역소환 될 리도 없고.”
“하지만 통증은 느끼잖아. 많이 욱신거릴 텐데…”
“통증을 느낀다는 걸 네가 어떻게 알지?”
“응? 아, 아니. 그냥 그럴 것 같아서. 이, 일단 치료부터 하자. 어디 적당한 약초가…”
곤란한 질문을 얼렁뚱땅 넘기며 허둥대자, 그는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곧 피식 웃었다.
그리곤 보란 듯이 붉게 패여진 상처 부분을 슬쩍 쓰다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피범벅이던 뺨이 순식간에 멀쩡하게 되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부상을 말끔히 치료한 그는,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뜬 나를 향해 가볍게 말을 이었다.
“실체가 아니라고 했잖아. 이 정도는 마나를 덧입히면 금방 나아. 뭐, 그 대신 내 계약자는 기운이 빠지겠지만.”
“아하하, 그, 그렇지, 참. 중간계에 소환된 정령은 마나를 덧씌워 모습을 투영한 것뿐이었지. 깜빡 잊고 있었어.”
정령에게 직접 위협을 가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정령계에서일 뿐.
다른 곳에서 입는 상처는 소멸을 의식할 정도로 심각하지 않은 한,
피가 흐르고 통증이 느껴져도 실제로는 큰 영향이 없다.
그저 유희를 실감나게 즐기기 위한 제약에 불과하니 말이다. (일종의 분신 또는 예비용 목숨을 가지고 다닌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 해도 설마 상처를 그런 식으로 ‘지울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생각해보면 실체가 아니니 당연한 것인데도, 나는 새삼스레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정령에게 치유술을 시전 해 본 적은 없었지?’
인간과 마족, 심지어 신(엘뤼엔)에게까지 시도해봤는데,
정작 정령들은 그 대상에 없었다.
그들이 치료를 필요로 할 만큼의 부상을 입은 적이 없었을 뿐더러,
정작 위급한 상황에선 알아서 역소환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지금은 그 간단한 기억조차 떠올리지 못한 걸까? 혹시 이것도 인간의 육체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
멋쩍은 기분이 든 나는 애꿎은 머리카락만 잔뜩 헝클어트리며 중얼거렸다.
“쩝…왠지 점점 바보가 돼가는 것 같아.”
“뭘 새삼스레? 원래 바보였잖아?”
“하긴 그야 그렇…커억! 트로웰! 지금 그 말 진심이야?”
“후후후, 글쎄~. 그럼 수고해! 난 조금 쉴 테니까.”
“잠까안! ‘글쎄’라니? 그렇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내 울상이 된 얼굴을 보고도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며 설렁설렁 판자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 여유 만만한 태도를 보아 애초부터 대답해 줄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불어 닥친 무언가가 그의 진로를 방해하고 말았으니!!
화르르르륵!! 쿠우우웅!
“트로웰!!”
믿을 수 없는 현장을 목격한 나는 입을 떡 벌리고 소리쳤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어디선가 커다란 불덩이가 내려와 그대로 트로웰 위에 작렬했던 것이다.
이윽고 엄청난 폭음과 함께 시꺼먼 연기가 자욱이 사방에 퍼지기 시작했다.
“쿠, 쿨럭! 쿨럭! 트로웰!! 트로웰, 괜찮아?!”
‘이게 대체 뭔 난리래?’
폭발이 터졌을 때 울리던 진동과 타오르던 불길을 생각하면 결코 우연으로 일어난 현상은 아니었다.
폭탄에 버금가는 화력이지만, 이곳엔 아직 화약이 발명되지 않았으니 누군가가 공격마법을 날린 것이리라.
‘어떻게 이곳을 알고 찾아낸 거지? 밖에선 전혀 보이지 않을 텐데?’
게다가 아직 이곳에서 누군가에게 원수 질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적의 정체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또한 트로웰의 결계를 일반인이 쉽게 파악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내가 황급히 뛰어갔을 땐 슬슬 걷혀가는 연기 사이로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로, 바닥에 쓰러진 트로웰과 그 위를 올라탄 웬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어, 어라?”
이 무슨 황당한 전개라지?
나는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일말의 기대감이 스르륵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뜬금없는 적과의 대치는 그렇다 쳐도, 저건 마치 초등학생들의 몸싸움 같은 구도가 아닌가!
일단 갑자기 나타난 저 남자가 방금 전의 폭발을 일으킨 주범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뭔가에 무척 화가 난 듯한, 잔뜩 일그러진 얼굴은 그 아래에 맥없이 깔려있는 트로웰을 무시무시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사납기로는 받아치는 트로웰 또한 만만치 않았다.
“큭. 이게… 무슨 짓이야!”
그는 갑작스런 충격에 떠밀려 넘어진 것이 화가 났는지(보통사람이었다면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죽었을 것이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다그치는 말투와 표정에 익숙함이 담겨있는 것을 보면 평소에 안면이 있던 사이인 모양이다.
그러자 붉은 머리의 남자역시 지지 않고 소리쳤다.
“트로웰 너 이 자식! 엘퀴네스에게 무슨 짓 했어!!”
제법 괜찮은 중저음의 목소리였지만, 지금은 흥분한 탓인지 매우 신경질적으로 틀어져있었다.
그에 트로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헛소리야? 갑자기 나타나서 한다는 말이 엘퀴네스라니?”
“크아악!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지금 정령계가 어떻게 됐는지 알기나 해!!”
“왜? 무슨 일이라도 있나보지?”
“하! 무슨 일? 무슨 일이냐고 했냐?”
짧은 대화 속에서 나는 단번에 남자의 정체를 알아냈다.
정령계의 일을 알고 있는데다, 트로웰이나 엘퀴네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존재는 그리 흔치 않았으니까.
더욱이 붉은 눈동자에, 붉은 머리카락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연상하기가 쉬웠다.
‘설마…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불과 함께 나타났으니 틀림없었다.
화염계열의 공격마법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실제론 이프리트 그 자체가 달려드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신기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헤에~ 지금의 이프리트는 남성체구나.
근육도 제법 되고, 키도 훤칠한 게 평소 상상하던 불의 정령왕의 이미지랑 딱인걸?’
전대의 이프리트라면 그다지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을뿐더러 생김새조차 몰랐던 존재다.
이제야 제대로 된 과거의 인물을 만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다행히 둘 다 내게 신경을 안 쓰고 있는 상태라 나는 마음 놓고 구경할 수 있었다.
“엘퀴네스 그 자식이 에바스 에덴을 아주 떡으로 만들어놨어!
그 뿐인 줄 알아? 내 영역을 초토화 시켜놨단 말이다!
이제 거의 다 복구 돼가던 곳을 또 다시 망쳐놨다고! 대체 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흐응~. 말은 똑바로 하시지?
아무리 엘퀴네스라도 두 번이나 불의 영역을 건드릴 리 없어.
괜히 가만히 있던 그에게 네가 먼저 시비를 걸었겠지. 내 말이 틀려?”
“윽! 그, 그야 꼴 보기 싫으니까 당연하잖아!
하필 오늘 그놈이 저기압 상태인줄 내가 알게 뭐야!? 네 녀석이 그렇게 만들어놓은 거잖아!”
“그래서 다짜고짜 나한테 책임을 물으러 오셨다? 그냥 솔직히 피신 왔다고 말해도 돼, 이프리트.”
“피, 피신이라니! 나를 뭘로 보는 거야!”
‘피신 맞구만, 뭘.’
정황을 보니 대충 이런 식이다.
트로웰의 말에 삐져서 정령계로 돌아간 엘뤼엔.
안 그래도 화풀이할 곳이 없어서 예민해져 있던 참에 이프리트가 시비를 걸자,
두고 볼 필요 없이 곧바로 불의영역을 초토화 시켰다.
그 덕에 머물 곳을 잃은 이프리트는 냉큼 정령계를 떠나 이곳으로 도망쳤다는…바로 그런 이야기였다.
“일단 비켜봐.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응? 아아.”
푸욱 한숨을 내쉰 트로웰은 그를 억지로 밀어내어 몸을 일으켰다.
이프리트도 계속 깔고 앉아있을 생각은 없었는지 순순히 비켜주는 듯 했다.
잠시 후 트로웰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미 알겠지만 화난 엘퀴네스는 나도 막을 수 없어. 일을 크게 불려놓은 건 너니까 알아서 해결하라고.”
“글쎄, 그런 게 아니라니까! 난 그저 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보려고 온 것뿐이다!
요 근래 트로웰 너와 행동을 함께 했으니 당연히 네 탓일게 뻔하잖아!”
“나? 내가 뭘?”
“시치미 떼지 마! 암튼 너나 전대의 트로웰이나 성격 능글맞은 건 똑같구만!! 이래서 땅의 정령들이 싫다니까!”
하지만 그런 말에 끄덕할 트로웰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쁘다는 듯이 빙긋 웃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것참 유감인데. 어쨌든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렇지, 엘?”
“…!!…으응? 나, 나한테 물은 거야?”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나는 어깨를 움찔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제야 이프리트도 내 존재를 눈치 챈 듯 이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닥 호의적인 태도는 아니었지만.
“뭐야, 이건. 인간 꼬맹이잖아?”
덕분에 제대로 보게 된 이프리트는 순정만화에 흔히 등장하는 화려하게 생긴 악당(?) 같은 인상이었다.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에 눈 꼬리가 약간 올라가있어, 전체적으로 도도하고 사나운 인상을 풍겼다.
보여 지는 나이는 20대 중반쯤? 같은 불의 정령왕이라도 남성체라서인지,
미래의 이프리트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잠시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나를 흩어보던 그는 내 이마 쪽에 시선이 이르자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잠깐, 저건 설마. 물의 인장…그것도 엘퀴네스의 인장이 찍혀 있잖아? 어떻게 된 거야?”
“당연하지. 그의 계약자니까.”
“뭐? 엘퀴네스가 인간에게 소환되었단 말이야? 언제?”
“쯧쯧, 꽤나 소식에 둔감하군.
하긴, 그동안 불의 영역을 복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테지. 엘, 인사나 해.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야.”
“아, 안녕하세요.”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네자, 그는 뭐가 불만인지 얼굴을 확 찡그렸다.
그리곤 트로웰을 보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닌가.
“저 녀석 착하냐?”
“그건 왜 묻지?”
“날더러 ‘안녕하세요.’라잖아. 그 엘퀴네스의 계약자라면 분명 싸가지가 없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건 네 이야기겠지. 예전 너의 인간 계약자는 꽤 건방졌었지, 아마?”
“그래서 네놈이 죽였잖아! 그게 무려 500년 만에 계약한 인간이었다는 건 알고나 있었냐?”
“아아, 미안. 난 마음에 안 드는 걸 두고 보는 취미는 없어서.”
‘주, 죽였다고?’
충격적인 사실에 내 입은 떡 벌어졌지만, 대답하는 트로웰의 얼굴은 느긋하기만 했다.
정작 다그치는 이프리트 또한 그 일을 크게 괘념치는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가 화를 내는 것은 전혀 엉뚱한 내용이었다.
“암튼 성깔하고는. 뭐, 그건 그렇다 치고…이건 차별이야!
왜 그놈의 계약자는 저렇게 얌전한 건데?
아니, 그보다 넌 인간을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는 녀석이잖아. 그런데 왜 같이 붙어있는 거야?”
“…후후, 알아서 생각해.”
“크아악! 이제 너까지 날 무시하는 거냐!”
자존심이 강하고 버럭버럭 흥분도 잘 하는 것을 보면 그 역시 어지간히 다혈질의 성격이었다.
틱틱거리는 말투와 붉은 색 머리카락 때문일까?
겉모습이나 분위기는 현저히 달랐지만, 그는 여러 면에서 라피스를 연상시켰다.
그래서인지 난 지금의 이프리트도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저나…이거 엄청난 파란이 몰아칠 것 같은 예감이…?’
“헉…!!”
왜 아니겠는가. 그때 문득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움찔하며 돌아본 나는 그대로 기겁했다.
대체 언제부터였는지, 엘뤼엔이 시퍼런 눈으로 서 있었던 것이다.
이프리트를 똑바로 노려보는 그의 얼굴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본적 없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구더러 그놈이라고?”
“누구긴 누구야! 당연히 그 시건방진 엘퀴…켁!! 에, 엘퀴네스?!!!”
그를 발견한 순간, 나는 이프리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바뀌는 것을 보았다.
그와 함께 비죽이 말려 올라간 엘뤼엔의 입 꼬리는 소름이 끼칠 만큼 차가웠다.
그의 두 손에는 어느새 기다란 얼음창이 형성되어 있었다.
“네놈이 아직 정신을 덜 차린 모양이군. 당장 이 자리에서 소멸 시켜줄까?”
“자, 잠깐! 엘퀴네스, 진정해! 진정하라고!”
“닥쳐!!”
“우와아아악!”
퍽! 쿠웅! 콰아아아앙!!
“꾸에엑!”
그날 나는 한 정령왕이 처참하게 망가지는 현장을 똑똑히 지켜보고 말았다.
그렇게 가소롭게 보는 인간 앞에서 체면이고 뭐고 차릴 틈도 없이 곤죽이 되었으니,
이프리트의 입장에서 보자면 참으로 비참한 하루였으리라.
그 옆에서 트로웰은 한가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게 일을 크게 만드는 건 네 쪽이라니까, 이프리트.”
“……”
그날부터 나는 조용히 평화로운 앞날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정신건강에 가장 좋은 이름, 그것은 바로 체념이었다.
현재 세이크 제국은 조만간 열릴 대회에 대한 흥분으로 시끌벅적해 있었다.
바로 제국의 실세귀족중 하나인 세피온 공작이 주최한 검술대회에 대한 것이었다.
우승자에게는 검사들이 꿈에서나 그리던 전설의 에고소드가 상품으로 주어진다는 말에,
대륙 각지에서 내노라하는 장정들이 몰려들었다.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다는 에고소드가 개인이 개최한 검술대회의 상품으로 걸린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만큼 세피온 공작의 자금력이 대단하며, 그가 이 검술대회에 부여한 의미가 크다는 뜻이기도 했다.
게다가 우승자는 공작과 개인면담을 할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진다. 검사라면 누구나 다 꿈꾸는 일이었다.
세피온 공작은 오직 검술 하나로 평민에서 귀족이 된 자였다.
그가 젊은 시절에 보여준 패기와 무용담은 많은 기사들의 동경을 샀으며, 전설이 되었다.
황제가 출신 따위는 무시하고 단숨에 공작의 지위와 공국을 하사했을 정도로.
비록 지금은 나이가 들어 정계진출을 그만둔 후지만,
검을 잡는 이들에게 세피온 공작은 언제나 뛰어넘고 싶은 목표의 대상이었다.
그런 상대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건 상당히 매력적인 제안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공국 안에만 머물며 잠잠히 지낸 이후로 은근히 무시하고 있던 귀족들은,
이번의 사건으로 다시 한 번 세피온 공작의 저력을 실감해야 했다. 사자는 늙어서도 결국 사자였던 것이다.
대회 이틀 전날인 오늘, 개최장소인 세피온 공국은 출신을 알 수없는 사람들로 가득해져 있었다.
접수처에서는 벌써 며칠째 계속된, 대회당일 날의 대련상대를 고르기 위한 절차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행사장 앞에는 기한 내 접수한 사람들의 이름이 쭈욱 적혀 있었는데,
워낙 인원이 많은 탓에 각 4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접수한 사람이 그것을 확인하고 이름과 속해진 그룹을 말하면,
공작가문에서 파견된 기사들은 각자 들고 있는 통속에서 무작위로 번호를 한 장씩 뽑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다른 누군가가 자신과 일치한 번호를 뽑으면, 그가 바로 1회전에서 만날 상대 선수였다.
이 번거로운 작업은 거의 일주일의 시간을 두고 이루어졌다.
하지만 접수를 했다고 해서 누구나 다 참가할 자격을 얻는 건 아니었다.
우선 15세 미만의 어린이와 50세 이상의 성인들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너무 허약해 보이거나 실력이 없어 보이는 이가 나서면 기사들은 그 자리에서 간단한 테스트를 치르게 했다.
그들은 거기에서 통과를 해야만 비로소 번호표를 뽑을 수 있었다.
기간 내에 나타나지 않는 자는 그 자리에서 탈락이었고,
그로 인해 상대선수가 공석이 된 자들은 그렇게 된 자들끼리 모아 겨루게 했다.
순수한 실력을 겨루는 대회에서 부전승이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솎아내는 과정에서만도 수 백 명의 사람들이 탈락 되었다.
그런 일이 오랜 시간 반복 되자 정신력이 강한 기사들도 서서히 지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소드 유저에 이른 잭 마킬버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하아, 정말 지루하군. 하지만 이 짓도 오늘까지니까 참을 수밖에.’
기사라는 신분 때문에 그는 남 앞에서 함부로 하품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절제되어야 했고, 타의 모범이 돼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순간도 구경나온 인파들이 자신들을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본 다는 것을 잭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의식적으로 뻣뻣해지는 목을 풀어내며 이제 막 차례가 돌아온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음순간 그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응? 웬 어린애가?’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체격과 골격을 통해 나이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눈앞의 사람은 이제 막 16살에서 17살이나 되어봄직한 어린아이였다.
보통 15세에 성인식을 치르니 꼬마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대회 참가자의 평균 나이가 20대 중 후반인 것을 생각하자면 어려도 한참 어렸다.
뿐 만인가! 긴 소매 사이로 드러난 손은 마르고 희어서 검이라곤 한 번도 잡아본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잭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느끼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호기심에 참가해보는 건가? 쩝, 어린 녀석이 겁도 없군.’
어차피 테스트를 하면 떨어질 테지만, 접수자는 접수자였다.
그는 일단 다른 사람들에게 했던 것처럼 형식적인 질문을 건네기 시작했다.
“이름과 정해진 그룹을 말해라. 벽보에 적힌 것은 확인 했을 테지?”
“예. 1번 그룹의 엘…이라고 합니다.”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목소리는 소년 특유의 미성이었다.
가늘게 울리는 음성이 매우 듣기에 좋았다.
검사보단 긴 주문을 읊는 마법사가 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잭은 속으로 그렇게 궁시렁 거렸다.
“엘? 성을 말하지 않는 것은 평민이란 소린가? 흐음, 나이가 몇이지?”
“에, 그러니까…18세인데요.”
“생각보다는 많군. 사용하는 무기는?”
“당연히 검입니다.”
“그래? 그럼 저기 가서 검으로 저 바위를 쳐봐라.”
잭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예의 테스트를 위한 커다란 바위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에 새겨진 검상을 통해 실력을 판가름 하는 것이다.
그의 말에 소년은 잠시 움찔하는 듯 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허리에 매단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막상 검을 내리긋기 전, 소년은 망설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어…있는 힘껏 내리쳐야 하나요?”
“테스트를 하는 거니까 당연하지. 최대한 자신의 실력을 보여 봐라.”
“으음, 곤란한데…예비용 바위가 또 있을라나.”
피식. 소년의 혼잣말을 들은 잭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저 가냘픈 몸으로 내리친 검에 바위가 쪼개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스승이 누구인지 몰라도 너무 자신의 실력을 맹신하도록 가르친 모양이다.
휘익! 촤악!
“앗! 이봐, 그렇게 하면…”
소년이 검을 드는 동작은 성의 없기 짝이 없어서, 그냥 아무렇지 않게 휘두르는 걸로밖에 안보였다.
검상은커녕 바위에 부딪힐 때 손목이 부러지지 않으면 다행이리라.
하지만 다음 순간 이어지는 광경에 잭은 물론,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전부 경악하고 말았다.
수많은 도전자들 앞에서도 굳건하기만 했던 바위가 소년이 친 순간 정 가운데로 갈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쿠웅! 쩌어억!
“허억?!!”
“어, 어떻게 저럴 수가!!”
“세상에 맙소사…”
저 가냘픈 몸에서 어떻게 저런 괴력이 나올 수 있는 거지?
동요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소년은 차분히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매우 미안한 듯이 물었다.
“저어…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요? 일단 예비용 바위가 없을까봐 깔끔히 자르려고 노력하긴 했는데.”
그 말처럼 바위는 아주 정교하게 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흔한 돌 부스러기와 갈라진 금조차 없는 상태였다.
이것은 소년의 실력이 생각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
잭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단순히 자르기만 하는 것뿐이라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깔끔하게 만드는 것은 무리였다.
‘대단한 실력자였구나. 아무리 사람은 겉보기로는 모른다지만 정말 엄청나군.’
그는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얼른 1번이라고 적혀있는 통을 들어 소년 앞에 내밀었다.
“테, 테스트는 통과다. 이 안에서 번호표를 뽑도록!”
“아, 감사합니다.”
예의바르게 대답 한 소년은 곧 통 속에서 작게 접힌 종이 하나를 꺼냈다.
“으음. 4번이네요.”
“기록 되었다. 내일 정오에 이곳에 와서 대련표를 확인하면 겨룰 상대자와 대련 날짜,
그리고 시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참가선수임을 증명하는 뱃지다.
대련 1시간 전까지 대회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자동 실격이 되니 조심하길 바란다.”
“네, 알겠습니다.”
뱃지를 받아든 소년이 돌아서자 주위에 몰려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길을 터주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바위를 자른 소년의 괴력에 감탄하며 선망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잭 또한 다음 접수자를 검사할 생각은 않고 한동안 뚫어지게 소년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대회는 황제와 수많은 고위 귀족들이 참관할 예정이었다.
그 덕에 각 귀족가문의 수많은 자제들과 검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아카데미의 학생들 또한 참가를 희망했다.
1차전이야 다소 잡다한 무리들의 판이겠지만,
회가 길어질수록 남는 것은 검술을 체계적으로 배운 귀족들일 것이다.
그중에는 벌써부터 우승자가 될 거라고 당연히 생각되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 일어난 사건 이후로, 잭은 그동안 짐작하고 있던 우승후보자들을 몽땅 뒤엎을 수밖에 없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로군. 어쩌면 저 아이가 이번 대회의 우승자가 될지도…’
소년이 떠난 이후, 그곳에 남아있던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이거 바보 아냐? 그걸 자르면 어떡해? 넌 적당히 라는 말도 모르냐?”
접수절차를 끝내고 돌아온 나에게 질책을 늘어놓은 이는 다름 아닌 이프리트였다.
지난번 정령계 탈출 사건(?) 이후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늘러 붙어 있더니, 아예 일행으로 자리매김 한 참이다.
그래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는 다혈질인 성격만큼이나 잔소리도 많았다.
한마디도 곱게 하는 법이 없었고, 사소한 일에 참견하는 것도 심했다.
게다가 유독 나를 갈구는 것에 심취해 있기도 했다.
아마 엘뤼엔에게 직접 덤비지 못하니까 계약자인 나를 대신 괴롭히는 것 같았다. (이점에선 미래의 이프리트와 판박이다.)
물론 엘뤼엔 앞에서 직접 시비를 걸지는 못했지만,
공교롭게도 지금 나를 따라나선 이는 이프리트 하나뿐이었다.
트로웰이 여관을 알아보러 간 사이, 엘뤼엔이 귀찮다는 핑계로 나를 그에게 떠넘겼던 것이다.
지금도 그는 테스트 할 때 바위를 자른 일 가지고 꼬치꼬치 따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내심 찝찝해 하고 있던 나는 찌푸린 얼굴로 반박했다.
“하지만 기사 아저씨가 힘껏 내리치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진짜 힘껏 치냐? 넌 네 힘이 어느 정도 되는지 자각도 못하는 거야?
소드 마스터가 뉘 집 애 이름인 줄 알아? 정말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우씨. 왜 구박하고 그래요? 잘 해결됐으면 된 거지.”
“덕분에 쓸데없는 시선이 늘어났잖아! 이게 뭘 잘했다고 눈을 동그랗게 떠?”
“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요?
그리고 사람들이 바라보는 건 이프리트님 때문이잖아요! 그 붉은색 머리 좀 가릴 수 없어요?”
그의 화려한 외모와 붉은 머리카락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덕분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힐끔거리는 데도 그는 가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절대 자신 탓이 아니라 우겼다.
“흥! 타고난 외모가 뛰어난 걸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
죄지은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인간들을 피해 가리고 다녀야 하지?”
“그럼 사람들이 쳐다봐도 신경 쓰질 말던가요!”
“그건 그거고, 싫은 건 싫은 거야.”
“네네~ 오죽하시겠습니까.”
삐딱한 내 대답에 그는 잠시 얼굴 근육을 꿈틀 거렸지만,
이곳이 마을의 한복판이라는 사실에 신경을 미쳤는지 억지로 참는 듯 했다.
그 대신 그는 걸어가는 내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어.
왜 트로웰이 너 같은 녀석을 그냥 내버려두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야 트로웰은 이프리트님 같지 않으니까요.”
“그게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에요. 그는 친절하거든요.”
그러자 이프리트는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들어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 누가 친절해? 트로웰이? 그 사악한 꼬맹이가? 너 지금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니야?”
“상관없어요. 적어도 이프리트님보단 낫거든요.”
“으득! 이게 감히…!!”
아무래도 내 대답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다.
노려보는 눈에서 진득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지만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받아냈다.
그러자 먼저 그만둔 것은 오히려 이프리트였다.
“하아, 그래. 너 같은 애송이가 녀석을 어떻게 알겠냐.
내가 불쌍해서 한 가지만 말해두지. 세상의 모든 존재는 믿어도 트로웰 그 녀석은 믿지 않는 게 좋을 걸?
특히나 인간을 무척 혐오하고 있어서 말이야. 그가 내 계약자를 어떻게 죽였는지 말해줄까?”
“이미 지난 일에는 관심 없어요.”
“흐흐흐.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걸? 내 계약자 중에서 인간의 여자가 있을 때가 있었지.
트로웰에게 한눈에 반해서 쫓아다녔는데, 그게 귀찮다고 단번에 사지를 잘랐어.
뭐, 귀족이라 성질이 괴팍한 것도 원인이었지만. 너라고 다르진 않을 걸?”
“지금 저를 협박하시는 거예요?”
“이런~ 내 나름대로의 충고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다니 역시 인간은 속이 좁다니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제가보기엔 그걸 말리지 않은 이프리트님도 피차 마찬가지거든요? 그다지 고맙지는 않네요.”
“흥, 재미없는 녀석.”
그는 또다시 투덜거리기 시작했지만 난 전부 무시했다.
그렇게 한동안 혼자 떠드는 것이 이어지자, 그는 심심해 졌는지 은근슬쩍 질문을 건네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 말이야. 자연계의 정령들이 보인다며? 그게 정말이냐?”
“네, 보여요. 목소리도 들을 수 있구요.”
“뭐? 정령어도 알아듣는 단 말이야? 어떻게?”
“그냥 들리는 건데 저라고 알 수 있나요. 그런데 이프리트님은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나? 올해로 딱 9천살이야.”
내가 태어날 당시 이프리트의 나이가 2천살 가량.
그리고 지금이 4천 년 전의 과거이니 그는 약 만 천세에 소멸하는 것이었다.
엘뤼엔의 경우는 2만년, 보통 정령왕들의 평균 수명이 만 오천 이상인 것을 생각하면
무척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셈이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굉장히 오래 사셨네요. 만약 다시 태어난 다면 뭐가 되고 싶으세요?”
“흥. 뭐냐, 그 어이없는 질문은? 내가 소멸해서 인간으로 태어나는 걸 상상이라도 하고 싶은 거냐?”
“혹시 그럴지도 모르잖아요. 환생이란 게 있으니까.”
“흐음. 뭐, 소문으론 정령왕이 소멸해서 신이 된다는 말도 있던데,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만약 중간계에서 태어나게 된다면 드래곤이나 마족이 좋겠군.”
“왜요?”
“중간계에서 그나마 강한 녀석들이니까. 약한 건 딱 질색이야.”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다시 태어나면 과거의 기억도 지워질 텐데 뭘 그렇게 따지는지 모르겠다.
내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 이번엔 이프리트가 물어왔다.
“그러는 너는 뭐가 되고 싶지?”
“엑? 글쎄요.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나한텐 대답하게 하고 넌 은근슬쩍 넘길 셈이야? 지금이라도 생각해봐.”
지금까지 소멸하면 당연히 신이 될 것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환생은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프리트에게 그런 사정을 설명할 수는 없는 일.
그의 재촉에 당황한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으으음. 저, 저도 드래곤이 되고 싶어요.”
“호오, 강해지고 싶어서? 아니면 영원에 가까운 생명 때문에?”
“둘 다요. 사실은 그들의 다양한 능력이 부러워서예요. 마법에, 검술에, 정령술까지 쓸 수 있잖아요?”
“너도 이미 정령사에 검사잖아. 그거면 됐지, 마법까지 욕심을 부리는 거냐? 하여튼간 인간들이란.”
쳇, 이래봬도 영혼은 정령왕이네요!
그렇게 툭 내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는 꾹 참은 채 다른 말로 반박했다.
“원래 정령술과 검보단 마법을 더 배우고 싶었다구요.”
“뭬야? 정령술이 어때서?”
“뭐가 어떻다는 게 아니라, 실생활에는 아무래도 마법 쪽이 더 유용한 것 같아서요.
텔레포트나 보존마법도 그렇고, 경량화 마법도 그렇고. 도움이 되는 게 많잖아요?”
“흥, 아무리 그래도 우리 정령왕들의 능력에는 비할 바 아니다.
영광이라고 생각해도 모자를 판에 배부른 소리만 하는군.”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예요. 아아~ 마법에도 소질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 말에 이프리트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빈정거렸다.
“소질 이전에 넌 머리가 나빠서 힘들 것 같다만?”
“뭐라고요?”
“마법이 주문만 외우면 다 되는 건줄 아는 거냐?
그에 따른 수식과 연산을 일일이 계산해야 하는 거다. 괜히 마법사들이 천재라고 불리는 줄 알아?”
“쳇. 무시하지 말아요. 그래도 고등학교 때 가장 잘하는 과목이 수학이었다고요.”
“고등학교? 그건 뭐지?”
“아, 암튼 그런 게 있어요.”
물론 아주 잘 하는 것은 아니고 내 성적 중에서 그나마 괜찮은 수준이었을 뿐이다.
무엇보다 소질이 있었다고 해도, 공부와 머리 아픈 건 질색인 내가 마법을 끈기 있게 배웠을 리도 없다.
결국 나는 그때까지 남아있던 마법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접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막상 내가 그렇게 결심한 찰나, 이프리트가 예상치 못한 제안을 건네 왔다.
“그렇게 마법이 배우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까?”
“네? 이프리트님이요?”
“뭐, 드래곤 만큼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기초마법이라면 나도 쓸 수 있으니까.
너한테 필요한 몇 가지 마법을 영구적으로 새겨주지. 그럼 굳이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마법을 쓸 수 있잖아?”
“와아, 그런 게 가능해요? 그런데 그걸 어디다 새겨요?”
“이왕이면 마나석이 좋겠지만, 아무거나 상관없어.
그래도 가지고 다니기 편하려면 장신구 종류가 낫겠지. 목걸이나 팔찌 같은 것 없어?”
그의 말에 나는 작게 아쉬운 한숨을 뱉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착용하고 있던, 중량화 마법이 걸린 팔찌는 이제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나는 문득 한 가지 적당한 것을 떠올리고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어…이런 것도 괜찮을 까요?”
“응? 뭐냐, 이건. 웬 돌조각?”
내가 그에게 내민 것은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만났던 소녀-랑시가 준 화석목걸이였다.
지금까지는 그냥 품속에 넣고만 다녔는데,
이왕 마법을 새길 것이라면 선물 받은 것에 하는 게 더 의미가 깊을 것 같았다.
“그냥 돌조각이 아니라 조개 화석이에요. 여기다가 새기는 건 불가능할까요?”
“흐음. 화석이라면 오랜 시간동안 굳혀진 것이라 품고 있는 마나도 많고,
재질이 약하지도 않지. 좋아, 이거라면 2~3개 정도의 ‘보조마법’은 새길 수 있을 거다. 어떤 걸로 해줄까?”
긍정적인 평가에 안도한 나는 그때서야 허둥지둥 어떤 것이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령왕이 사용가능한 마법의 범위는 4서클까지가 전부. 내가 선택해야 할 것도 그 안의 것이어야 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아쉬운 표정으로 물었다.
“텔레포트나 폴리모프, 치료마법은 안 될까요?”
“바랄 걸 바래라. 그건 죄다 5서클 이상의 마법이잖아. 기초 마법 중에서 골라, 기초마법!”
“쳇, 알았어요. 그럼 독을 치료하는 마법이나,
보온마법, 보존마법, 경량화 마법. 이중에서 알아서 골라서 해주세요.”
그러자 이프리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곧 조개화석을 꽉 쥔 채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누가 불의 정령왕 아니랄까봐, 마법이 새겨지는 내내 뜨거운 불꽃과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잠시 후 모든 주문을 마친 이프리트는 목걸이를 내게 건네며 퉁명스러운 어조로 설명했다.
“큐어 마법과 보존마법, 경량화 마법을 걸었다.
마법을 쓰려면 이 목걸이를 그 위에 올려놓고 시동어를 외치면 될 거다.
단, 이것은 단순히 수식연산과 캐스팅을 대신 해주는 역할 밖에 되지 않으니까,
마법을 썼을 때 그만큼 빠져나가는 마나는 감수해야 할 거야. 일반 마법사들에 비해 위력은 약하겠지만,
어차피 보조마법이니 큰 상관은 없겠지.”
“엑? 보온 마법은 없어요? 날씨 추울 때 딱 좋은데.”
“바보냐, 넌? 불의 정령이 있잖아. 자연체의 정령들도 보이겠다,
대화도 가능하겠다. 불러다 쓰면 될 일이지 뭐가 문제야?”
“겨울에 불의 정령을 보기가 어디 쉬운 줄 아세요?
그리고 되도록 자연체의 정령들에게는 말을 걸고 싶지 않아요. 얼마나 시끄러운데요.”
“나 참. 정말 주문도 많은 녀석이군. 알았다, 알았어.
그럼 불의 하급정령인 카사를 목걸이에 봉인시켜주마. 그럼 문제없지?”
‘헤에. 의외인 걸? 되게 친절하네?’
엘뤼엔이었다면 어림없었을 일을 쉽게 받아주는 모습을 보니, 생각만큼 삐뚤어진 성격은 아닌 모양이다.
다소 어린애 같은 경향은 있지만 속이 너그러운 것은 미래의 이프리트와도 비슷했다.
‘…설마 엘뤼엔에게 시비를 거는 것도 녀석처럼 그를 좋아하기 때문은 아니겠지?’
내가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하는 사이, 이프리트는 카사를 불러 목걸이에 봉인시키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카사의 완강한 거부가 이어졌다. 봉인되지 않기 위해 사방으로 몸을 휘저었던 것이다.
설마 왕이 하는 일에 반항하는 정령이 나올 줄은 몰랐기에, 나와 이프리트의 눈은 똑같이 휘둥그레졌다.
“어라? 뭐야. 이 녀석 왜이래? 감히 내 말을 거역하는 거냐?”
-그, 그게 아니라, 흑…시, 싫어요, 이프리트님. 무서워요. 들어가지 않을래요.
“누가 너에게 거절해도 좋다고 했지? 소멸 당하고 싶은가?”
-흑, 흐윽…제, 제발…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도 카사는 끝까지 고개를 저었다.
별 수 없이 이프리트는 다른 정령을 넣으려 했지만 이러한 현상은 다른 카사들에게도 똑같이 이어졌다.
그러자 마침내 이프리트의 인내심이 폭발했다.
“크아악!! 이것들이 죄다 왜이래? 싹 다 소멸돼서 갈아치워지고 싶냐! 앙?!!”
“돼, 됐어요, 이프리트님. 그냥 이대로 쓸래요. 어차피 겨울도 다 지나서 이젠 보온마법도 필요 없을 것 같고…”
“되긴 뭐가 돼! 감히 하급 정령주제에 왕의 명령을 거역하잖아!
오냐, 내가 엘퀴네스에게 당하고 산다고 너희들까지 날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아하하, 그럴 리가 있겠어요? 지금도 저렇게 덜덜 떨고 있는데.
뭔가 이 목걸이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에요. 아! 혹시 제가 물의 정령사라 그런 걸지도? 불과는 정반대 속성이잖아요.”
꽤 일리 있는 말이라 생각했는지,
당장이라도 카사들을 싹쓸이 할 것 같았던 이프리트의 기세가 한결 누그러졌다.
그러면서도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하긴, 네가 좀 유달리 물의 기운이 강한 편이긴 하지.
하급정령들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겠군. 그래도 이렇게 끝내기는 좀 찜찜하니, 방법을 좀 바꾸도록 할까?”
“??”
내가 의아한 표정을 하자, 이프리트는 보라는 듯이 내 눈앞에서 커다란 불덩이를 일으켰다.
그러자 용광로속의 쇠처럼 빨갛게 타오르던 화석이 순식간에 그것을 흡수하는 것이 아닌가!
목걸이는 금세 원래대로의 모양으로 돌아왔지만, 스며든 불의 기운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래도 아주 뜨거운 것은 아니고, 손을 대면 약간 따뜻한 온도가 느껴지는 정도?
그 모든 작업이 마무리 되자 이프리트는 내게 목걸이를 돌려주며 짐짓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기운을 약간 흡수시켰다. 필요시엔 네가 필요한 만큼 발화하게 될 거다. 어때, 이정도면 쓸 만하겠지?”
“물론이죠. 정말 감사해요, 이프리트님. 보기와 다르게 꽤 친절하시네요?”
“흥, 아무렴 엘퀴네스와 같을려고?
녀석이나 트로웰은 인간을 싫어하지만, 난 별 감정 없는 편이다.
특히나 정령사라면 싫어할 이유가 없지. 너란 녀석도 참 운이 없군.
하필 엘퀴네스를 소환하다니. 차라리 나와 계약했다면 한결 여행이 편했을 거다.”
맞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저 빙긋 웃어 보이기만 했다.
뭐, 어차피 상관없지 않은가. 엘뤼엔은 그 존재만으로 큰 안도감을 주고 있으니까.
어차피 라피스를 찾으러 떠날 결심을 했을 때부터 편한 여행에 대한 기대는 깨끗이 접었다.
오히려 도움 받는 것이 훨씬 많으니 불평할 입장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나저나, 무섭다는 것은 무슨 뜻이었을까.’
나는 슬쩍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카사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프리트는 아예 신경을 꺼버린 듯 했지만, 아까 전 그들이 목걸이에 봉인되지 않기 위해 했던 말이 새삼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물의 기운이 강한 편이라도 인간을 무서워 할 필요까지 있을까? 그것도 왕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설마 내 정체가 정령왕이란 것을 느낀 건 아니겠지?’
이프리트나 엘뤼엔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을 하급 정령들이 알 리는 없겠지만, 묘하게 기분이 찝찝해졌다.
꼭 죄라도 지은 심정이었다.
2. 정령왕의 계약자
깊은 밤. 고급스런 마차 한 대가 웅장한 저택 앞에 멈추었다.
마차에 새겨진 포효하는 사자의 문장을 본 경비병들은 모두 긴장한 얼굴로 마른 침을 삼켰다.
누구라도 한 번 보면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가문의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라비타’
세이크 제국 실세라고 할 수 있는 5개의 귀족가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이름이었다.
백작가문이긴 했지만 타고난 무골들을 많이 배출해낸 탓에 황제조차 무시하지 못했다.
그 문장이 새겨진 마차를 타고 왔다는 것만으로 안의 인물이 범상치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으리라.
이윽고 마차의 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은색의 갑옷을 걸친 기사 한명이 걸어 나왔다.
라비타의 수장만이 지휘할 수 있다는 '화이트 라이언'단의 기사가 틀림없었다.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된다는 라비타의 기사는 적어도 소드 익스퍼드 급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하면 꿈조차 꿀 수 없다.
100년 전 영토 전쟁 때부터 대대로 이어져온 그들의 활약은 기사 지망생은 물론,
일반 평민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기에도 충분했다.
평생가도 한 번 볼 수 있을까 말까한 존재를 눈앞에서 보았다는 충격에
경비병들의 눈에는 경악과 찬탄의 빛이 차례로 떠올랐다.
“어서 오십시오. 레파르가(家)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그러자 기사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속에서 두루마기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레파르가의 인장이 찍힌 초대장이었다. 아마도 3일 후에 있을 레파르 백작의 생일 파티에 대한 것이리라.
먼 길을 행차하는 귀족들이 파티 당일보다 앞서 방문하는 경우는 그리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경비들이 그것을 받아 확인하는 것을 본 기사는 곧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들의 주인에게 라비타의 수장과 영애께서 오셨다 이르게.”
“!!”
그저 가문의 관계자가 온 것이라 생각했던 경비들은 입을 떡 벌렸다.
설마 수장이 직접 초대에 응할 줄이야!
이들이 소속된 레파르가 역시 백작가문이었지만 라비타는 보통 백작가문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제국의 실세라는 말은 아무에게나 붙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지키고 있는 저택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자면 그리 크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들의 주인은 누구라도 부러워 할 굉장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최근 황제의 신임을 독차지 하고 있는 남자였다. 제아무리 라비타의 수장이라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위치인 것이다.
그것을 상기한 경비병들은 모두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라비타의 수장께서 방문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저택으로 바로 기별을 넣겠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대답에 기사는 잠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라비타라는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거나 동경에 가득 찬 시선을 보내기 마련이다.
하물며 수장이 직접 방문하는 일은 그 어느 세력가에서도 흔치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이들은 감탄을 하되 절대 그 정도가 수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들의 가문에 자부심이 있다는 뜻이며,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는 증거였다.
‘단기간에 성장한 귀족치곤 제법이군.’
끼이익.
굳게 닫힌 철문이 열리자, 마차는 다시 기사를 태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앞에는 이미 소식을 듣고 마중 나온 내관의 기사들과 집사가 서 있었다.
그들은 이번에도 가장 먼저 내린 화이트 라이언의 기사를 향해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저택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저는 집사인 세바스찬 이라고 합니다.”
“카밀시온 드 카르핀일세. 영애께서 많이 피곤해 하시는데 바로 쉬실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물론입니다. 이미 시녀들을 시켜 침소와 목욕물을 마련하라 지시했습니다.”
그 말에 카밀시온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마차의 문을 열며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세바스찬은 정말로 마차안의 인물의 라비타의 수장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얼음기사단이라고 불릴 정도로 냉혹하기로 유명한 화이트 라이언단의 기사가 저렇게
저자세로 임하는 상대는 오직 그들의 수장뿐이었으니까.
“도착했습니다. 이제 내리십시오.”
이윽고 ‘알았다’는 화답이 들려오자 세바스찬과 그 옆에 서있던 저택의 기사들은 모두 긴장했다.
현 라비타의 수장은 이룩한 업적만큼이나 가려진 부분이 많은 사람이었다.
4살의 나이에 검을 쥐어 20살에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는 것만 알 뿐,
그 외의 다른 부분은 검증되지 않은 소문들만 무성했다.
사실 이렇게 두각을 나타낸 것도 얼마 전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백작의 작위를 이어받고 나서부터였다.
이전까지는 검술에만 매진하느라 오직 연무장에서만 살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또한 황성에서 주도하는 파티 외에는 참석하지 않을 정도로 사교와는 거리가 먼 자라,
초청장을 보내놓고도 정말 올 것이란 기대는 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당일도 아닌 3일 전에나 도착하다니! 친분을 쌓자면 얼마든지 쌓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닌가!
라비타의 수장이 되는 자가 그런 간단한 것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애초에 그것을 의도하고 온 것일지도 모른다. 세바스찬은 기쁨으로 온 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
마차에서 가장 먼저 내린 사람은 분홍색의 드레스 차림에 얇은 실크망토를 두른 여인이었다.
은회색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나비 모양의 장식핀으로 산뜻하게 틀어 올린 모습이 굉장히 잘 어울렸다.
세바스찬은 한눈에 그녀가 수장의 하나뿐인 여동생인 ‘아나이스 드 라비타’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올해로 18세인 그녀는 결혼 적령기의 여성답게 사방에서 귀족 청년들의 구애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는 것인지 좀처럼 혼처를 정하지 않아,
오빠인 라비타 백작의 골머리를 썩이는 중이었다.
이번 파티에서도 생일 축하보단 신랑감 물색을 위주로 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
오랜 여행이 지루했던 듯, 그녀는 환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흥미롭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흐응. 여기가 레파르 백작가(家)? 어두워서 주변이 잘 안 보이는 걸? 낮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마치 노래 부르는 듯한 맑은 목소리는 듣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싸늘한 남자의 음성에 주위의 분위기는 갑자기 가라앉았다.
“일정을 서둘러서 하루라도 빨리 도착하자고 재촉한건 너였다, 아나이스. 네가 불평할 군번이 아닐 텐데?”
‘저 남자가 현 라비타 백작인가!’
세바스찬은 얼굴의 근육이 경직되는 것을 의식하며 이제 막 마차에서 내린 훤칠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소문대로 그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사람이었다.
남매라 얼굴이 닮은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화사한 여동생과 달리 그는 무척이나 냉막한 분위기를 풍겼다.
오빠의 무심한 말투에 토라졌는지 아나이스는 예쁜 얼굴을 찡그리며 작게 투덜거렸다.
“그다지 불평한 건 아니었어요. 오라버니는 꼭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무안을 주시는 군요.”
“후후. 꼭 상처라도 받은 것 같은 말이로구나.”
“그게 당연하지요! 오라버니는 늘 저를 과대평가하셔요. 저도 마음이 여리단 말이에요.”
“뭐? 하하하! 라비타 가문의 누가 그 말을 믿을까. 이런 말괄량이가 마음이 여리다고?”
“아이참! 오라버니!”
남자의 웃음에 민망해진 아나이스는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지만,
주위의 사람들은 같이 따라 웃을 수 없었다.
허물없이 동조하기에는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너무도 차가웠기 때문이다.
그것이 평소의 습관인지, 아니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어서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잠시 그 모습을 멍하게 보던 세바스찬은 질린 얼굴로 얼른 허리를 숙여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라비타 백작님과 영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저는 집사인 세바스찬이라고 합니다. 저의 주인께서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때서야 마중 나온 존재들에게 시선을 미친 듯,
두 사람은 다투던 것을 멈추고 조용히 세바스찬을 응시했다. 백작은 곧 냉소를 가득 머금은 목소리로 물었다.
“늦은 시간에 실례가 많군. 나를 기다린다니…
레파르 백작은 아직 침소에 들지 않은 건가? 혹여 우리가 깨운 건 아닌지 모르겠군.”
“아닙니다. 평소에도 업무량이 많아 늦은 시간까지 깨어 계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응접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아가씨는 따로 쉬실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세바스찬의 말에 라비타 백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는 옆에 서있던 그의 기사 카밀시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아나이스의 호위를 맡아라.”
“알겠습니다, 백작님.”
“앗! 저는 싫어요! 이런 곳에 와서까지 감시 받고 싶지는 않다고요.”
“감시라고 했느냐? 타지에서의 호위는 당연한 일이다,
아나이스. 철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얌전히 시키는 대로 따르거라.”
“루시엘 오라버니!!”
그녀의 외침을 들은 세바스찬은 그때서야 라비타 백작의 정확한 이름을 기억해냈다.
‘루시엘 드 라비타.’
전 대륙을 통틀어 최연소 소드 마스터이자 세이크 제국 실세 가문의 수장 중 한 사람.
그가 이끄는 기사단은 이제껏 그 어느 전투에서도 패배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뛰어난 무용(武勇)에 감격한 전대의 라비타 백작이,
당시 13살밖에 안되던 어린 아들에게 기꺼이 기사단의 지휘권을 넘겨주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작의 작위에 올라서야 사람들에게 알려진 기이한 남자.
결혼 적령기를 넘긴 나이임에도 내정된 약혼녀는 물론, 귀족세계에서는 그 흔한 염문설조차 돌지 않아,
고자거나 남색가라는 둥, 별의 별 지저분한 뒷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간간히 노예시장에 얼굴을 비추기도 한다는 말이 있는걸 보면 완전히 거짓은 아닌 모양이지만.
‘하지만 저렇게 냉정한 얼굴이서야 아가씨들이 달라붙지 않는 게 오히려 당연하게 느껴지는 군.
후계자를 낳기 위해서라도 혼사를 거를 순 없을 터인데. 과연 어느 가문의 영애가 라비타의 안주인이 될 지 궁금해지는걸.’
속으로 중얼거린 후 세바스찬은 여동생을 보내고 혼자 남은 루시엘 백작을 자신의 주인에게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거물이라면 지극히 거물인 손님의 방문이었지만 그는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자신이 모시는 남자 또한 이에 못지않은 능력을 가진 위대한 사내였기 때문이다.
현 대륙에서 ‘펠리온 드 레파르’ 백작이라고 하면 코흘리개 꼬맹이도 알 정도로 유명했다.
아마도 요 몇 백 년 사이 가장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름일 것이다.
그는 다름 아닌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의 계약자였다.
기록된 역대의 정령사중에서 2번째로 바람의 정령왕을 소환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몸으로 정령왕을 소환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거의 몇 백 년 꼴로 겨우 한 명씩 등장한다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
이미 대륙에 10명 남짓 존재하는 소드 마스터보다 오히려 더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주인을 모시고 있는 세바스찬이 어찌 자부심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는 라비타 백작보다 더 한 인물이 나타나더라도 평정을 유지할 자신이 있었다.
이때 그의 내심을 짐작한 루시엘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비록 지금은 황제의 신임을 독차지하는 존재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레파르 백작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작은 지방의 영주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정령왕을 소환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황제의 부름을 받아 황성에서 근무하며 수도에 저택을 옮기게 된 것이다.
하루아침에 벼락출세를 한 셈이었다.
아무리 권력에 약한 게 귀족들의 생리라지만,
그런 존재의 생일파티에 몸소 참석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찌 우연히 타고난 운 따위가 자신의 가문이 몇 십년동안 이룩한 업적을 넘볼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정령’이라고 하면 그는 불편한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 전 노예시장에서 마음에 들었던 소년을 아깝게 놓쳤었기 때문이다.
그때 ‘엘’이라고 이름을 밝힌 소년이 바로 정령사라고 들었다.
그때부터였다. 그가 정령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실제 그동안 눈이 마주쳐도 모른 척 했던 레파르 백작의 초청에 응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소문의 정령왕을 실제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어쩌면 그때 그 소년이 했던 사술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애써 좋은 방향으로 생각을 가다듬던 루시엘은 문득 복도 앞에 누군가가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손으로 끌어안길 만큼 갸날픈 몸에 허리아래까지 흘러내린 새하얀 머리카락.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진 그는 마치 눈밭의 설녀라도 보는 듯 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아련함이 보는 이의 모성본능을 자극했다.
‘엘프? 아니, 사람인가? 정말 내 눈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군.’
루시엘이 작게 감탄하는 사이 집사인 세바스찬은 한눈에 그(혹은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는 얼른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밖에 나와 계신지요, 미네르바님. 무언가 찾으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
미네르바!
그때서야 루시엘은 눈앞의 사람이 인간이 아니라 바람의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윽고 굳게 닫혀있던 미네르바의 입술이 열리며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람의 기운이 달라진 것을 느끼고 나왔다. 펠리온을 찾아온 손님인가?”
“네, 그렇습니다. 라비타 백작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루시엘님, 인사 올리시지요.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님이십니다.”
집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루시엘은 귀족의 예법에 맞추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보였다.
“고귀한 존재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미네르바시여. 루시엘 드 라비타라 합니다.”
하지만 미네르바는 다시 입을 다물었을 뿐, 그의 인사에 대해 어떠한 화답도 없었다.
처음부터 그의 존재조차 관심이 없었다는 얼굴이었다.
‘지독하게 말이 없는 정령왕이라더니 사실인 모양이군.’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리던 루시엘은 미네르바의 시선이 다른 방향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곳은 동생인 아나이스가 사라진 쪽이었던 것이다.
표정 없는 얼굴로 한참동안 그곳을 응시하던 미네르바는 지나가는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일행이 더 있군.”
“…?…아아, 제 여동생입니다. 긴 여정으로 노곤해 하기에 먼저 방으로 가서 쉬게 했습니다만.”
“그런가.”
대답하는 미네르바의 얼굴은 묘하게 착잡해 보였다.
하지만 루시엘이나 세바스찬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사실 미네르바 본인조차 그러한 이유를 알 수 없었으니 그 누가 알겠는가.
아니, 모른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미네르바는 얼마 전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이미 경고를 받은 적이 있었다.
마치 울 것처럼 일그러진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혜안을 지닌 땅의 정령왕 트로웰의 모습이었다.
<그는 널 사랑하지 않아, 미네르바.>
<네가 사랑하는 인간은 정해진 반려가 따로 있어. 누군지 알고 싶어?>
<조만간 너는 스스로 함정을 파게 될 거다.
넌 네 손으로 그를 파멸의 길로 이끌게 될 거야. 지금의 너는 불안해. 내가 이렇게 쉽게…미래를 읽어버릴 정도로.>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애초에 펠리온을 부추겨 라비타 가문에
초대장을 보내게 한 것이 바로 미네르바 자신이었으니까.
초대하는 문구에 꼭 여동생도 데리고 와줄 것을 부탁하게 만들었다.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의 반려가 될 운명을 가진 여인과 자신 중에서 선택받는 것이 누구인지.
트로웰의 예지가 틀렸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옳은 행동일까?
사랑은 서로에 대한 신뢰로 이어지는 것이다.
애꿎은 사람을 의심하는 것 같아 그의 마음은 조금도 편치 못했다.
아마 지금 기분이 착잡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가슴속을 묘하게 불안하게 만드는 감정을 무시하며 미네르바는 조용히 눈을 내리감았다.
“오오, 어서 오십시오, 루시엘 백작님. 오시길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 이쪽에 앉으십시오.”
‘저자가 레파르 백작인가.’
얼굴 가득 반가운 기색을 띈 채 자신을 맞이하는 남자를 보며 루시엘은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펠리온 드 레파르.’
올해 31세의 미혼의 청년. 이름뿐인 귀족에서 하루아침에 백작의 작위를 부여받은 남자.
살다보면 벼락출세를 하는 귀족들이야 가끔 있는 일이지만, 그는 상당히 특별한 케이스였다.
바로 그 흔하지 않은 정령왕의 계약자였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정령술에 천부적인 소질을 보였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설마 정령왕을 소환하게 될 줄이야. 그 엄청난 사실은 금세 온 대륙으로 퍼졌고,
지금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 덕에 진작 연줄을 두지 않은 것을 후회한 부호들이 셀 수 가 없을 정도.
게다가 인물까지 제법 번듯했기에 어딜 가나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최근엔 또래이면서 같은 백작의 지위를 가진 루시엘- 자신과 같은 저울에 놓고 비교하는 자들도 부쩍 늘어난 형편이다.
희대의 라이벌이라는 명목이었다.
‘흥, 검사와 정령사를 두고 라이벌 운운하다니. 지하에 계신 아버님이 들었다면 땅을 치고 통탄할 일이로군.’
대대로 뛰어난 검사를 배출해낸 그의 가문은 뼛속까지 무장인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의 아버지도 그러한 사람 중의 하나였고, 검만이 모든 전투의 으뜸이라고 생각하는 자였다.
특히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리는 것만이 진정한 노력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학구파인 마법사나 친화력위주의 정령사를 가장 싫어했다.
루시엘 또한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그에 공감하고 있었다.
마법과 정령술의 위력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대단위의 공격방식은 한사람씩 맞서 싸우는 전투의 묘미를 망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더욱 실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는 마법사에 비해,
정령사는 큰 쓰임이 없었기 때문에 이제까지 쓸모없는 종자로 분류하고 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게 무시하고 있던 정령사와 동급의 취급을 당하고 있으니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새삼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은 채 자신을 반갑게 맞이하는 펠리온을 바라보았다.
“늦은 시간에 실례가 많습니다,
레파르 백작. 황성에서 몇 번 뵈었지만, 정식으로 인사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군요.”
“하하! 그래서 저도 설마 백작님이 직접 와주실 거란 생각을 못했습니다.
백작께서 와주셨으니, 이번 파티가 더욱 빛을 발하겠군요.
여동생이신 아나이스 영애께서도 함께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미안합니다. 밤이 깊어 피곤해 하기에 먼저 쉬도록 했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그리 하셔야지요.
백작께서도 많이 피곤하실 텐데, 어서 쉬실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배려에 감사하지만 난 괜찮소. 그러고 보니 생일 축하에 대한 인사가 늦었군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하, 아직 제대로 된 생일이 오려면 이틀 더 있어야 한답니다.
아참, 루시엘 백작님께서도 이번 세피온 공국에서 열리는 검술대회에 초청을 받으신 걸로 압니다만.”
펠리온의 말에 루시엘은 얼마 전 당도했던 또 하나의 초대장을 기억해냈다.
대륙 최고의 검사이자, 현재는 공국에서 요양 중인 걸로 알려진 테이론 드 세피온 공작이 개최한 검술대회에 대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 동경의 대상이었던 공작이 직접 주관하는 행사라는 말에,
두고 볼 필요 없이 초대에 응하는 화답까지 미리 보낸 참이다.
그런데 여기서 왜 그 말이 나오는 걸까?
루시엘이 눈빛에 서린 의문을 읽은 펠리온은 서두르지 않고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실은 저도 그 대회의 참관초청을 받아서 말입니다.
이왕 여기까지 오신 것, 파티 후에도 며칠 더 머무르셨다가 저와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아, 물론 다른 바쁜 일정이 있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저야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레파르 백작께서도 검술대회에 흥미를 보이실 줄은 몰랐군요.”
“어릴 때부터 호신술삼아 검술도 조금씩 배웠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행사도 매우 매력적이게 느껴지더군요.
물론 소드 마스터이신 루시엘님이 가지신 관심에는 비할 바는 아니겠지요.”
그의 말에 루시엘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펠리온을 흩어보았다.
제법 다부진 체격에 장신이긴 해도, 검술까지 배웠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손에 잡힌 굳은살과 팔 다리의 발달된 근육은 단순히
호신삼아 배워다 치기에는 그 수련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관심이 없던 탓에 이제야 발견하게 된 것이다.
‘호오, 제법인걸. 이정도면 어느 정도의 실력은 갖추고 있겠군.’
그는 이제껏 가지고 있던 펠리온에 대한 편견이 호의로 기울이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띈 것은, 펠리온의 허리춤에 매달린 화려한 무늬의 장검이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형식적인 장신구로만 보였으나, 그 주위를 둘러싼 미묘한 기운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궁금한 것을 참지 않고 직접 묻기로 마음먹었다.
“저어, 그것은…?”
“아아, 이것 말입니까? ‘블래스터’라고 합니다.
미네르바님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검이랍니다. 앞으로 가문의 가보로 남길 생각입니다.”
“호오. 정령왕 미네르바께서 직접 말입니까?”
정령왕이 만든 검이라니! 루시엘은 숨김없이 감탄을 내뱉었다.
그에 펠리온은 무척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블래스터의 검집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령술로만 만족하지 않는 저를 위한 응원의 선물이라고 하시더군요. 제게는 꽤 과분한 물건이지요.”
“흥미롭군요. 정령왕께서 만든 검이라면 평범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바로 보셨습니다. 백작님이시라면 이 검에 서려있는 특이한 기운을 느끼셨을 겁니다.
혹시 바람의 상급정령인 진을 아십니까?”
“그야 들어는 보았습니다만.”
“하하! 블래스터에는 그 바람의 상급정령이 봉인되어 있답니다.
세간에서는 이런 것을 두고 정령검이라고 하더군요.”
“!!”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눈앞의 블래스터는 천금을 주고도 살 수없는 보물이었다.
마법검과 에고소드보다도 희귀하다고 알려진 것이 바로 정령검이 아니던가!
게다가 상급 정령이 봉인되어 있다면 그 위력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검사라면 누구나 욕심낼만한 물건이었기에,
루시엘의 눈에 잠시 탐욕의 빛이 잃었지만 이내 사그라들었다.
도구의 힘을 빌려 능력을 높이는 것은 검사로서의 그의 자부심이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요하는 감정이 사라지자 그는 차분히 생각을 이을 수 있었다.
‘아무리 계약자라고 해도 정령왕이 직접 검을 만들어 주다니.
미네르바와 펠리온 백작이 서로 연민을 품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군.’
루시엘은 곧 이곳에 들리기 전에 만났던 미네르바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령들은 타고나길 남자도 여자도 아닌 중성이라 들었지만,
그 정도의 미모라면 백작이 후세를 포기하고서라도 매달릴 만 했다.
마치 이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았던 아름다움.
눈이 마주친 순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을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은 ‘그때’ 이후로 두 번째였다.
‘그러고 보니 그 엘이란 소년도 꽤 중성틱한 외모였지.
그렇게 눈에 띄는 외모에 정령사라면 반드시 사람들의 입소문이 퍼질 것이다.
사람을 사서 정보를 모으고 있으니 곧 찾아낼 수 있겠지.’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곤 펠리온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참, 마침 잘 되었군요. 그동안 궁금해 하던 것이 있었는데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아, 그게 무엇인지?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가르쳐드리지요.”
“백작님만이 대답하실 수 있는 겁니다. 혹시 정령사가 마나를 차단하는 팔찌를 차고도 정령을 부릴 수 있습니까?”
루시엘의 질문에 펠리온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불가능 합니다. 정령을 소환하는 데에도 일정한 양의 마나가 반드시 필요하니까요.”
“흐음, 그렇다면 정령외에 물을 다룰 수 있는 사술이 있습니까?
실은 얼마 전에 한 정령사 소년을 만났는데,
양 팔에 마나차단 팔찌를 착용하고도 물을 다루는 것을 보았거든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는 사술이길래, 혹 정령사인 백작님은 아실까 하여 묻는 겁니다.”
“으음. 별 일이군요. 제가 알기론 그런 사술은 없는데요. 아마도 타인의 도움을 받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하지만 그 주위엔 저와 그 소년밖에 없었습니다. 제 감각으로도 사람의 인기척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죠.”
“당연하다. 그건 정령이니까.”
“!!”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란 루시엘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정령왕 미네르바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펠리온 또한 놀랐는지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네르바를 맞았다.
“미네르바! 어딜 다녀오시는 겁니까? 한참동안 돌아오시지 않기에 혹 정령계로 가신 건가 했습니다.”
“그저 이 앞을 둘러보았을 뿐이다.
그보다 꽤 흥미로운 대화가 진행되더군. 그대, 루시엘이라 하였던가?”
“네, 그렇습니다, 미네르바시여.”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루시엘의 얼굴엔 방금 전 그가 했던 말에 대한 의문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에 미네르바는 천천히 설명을 이었다.
“그대의 설명이 틀림이 없다면, 그 소년을 대신하여 물을 다룬 이는 정령일 것이다.
아마도 소환되지 않은 자연체의 정령이겠지.”
“그런…정령사가 소환하지 않고 정령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놀란 루시엘의 질문에 미네르바는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도움을 청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마침 주위를 돌아다니던 물의 정령이 일시적으로 변덕을 부린 걸 테지.
그만큼 소년의 상황이 위급하며, 친화력이 높았다는 뜻이다.
그 장소에 소년과 그대 둘뿐이라 했던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하군.”
“그, 그건…”
당황한 루시엘은 말끝을 흐렸지만, 미네르바는 굳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듣지 않아도 뻔했다. 마나 차단 팔찌를 착용하는 경우는 국가에 반역된 죄인이거나, 노예들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최근 잡힌 죄인들 중에서 정령사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십중팔구 후자의 경우일 것이다.
청렴결백한 외모와 뛰어난 능력과 달리,
루시엘의 뒷소문이 좋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만한 귀족들은 거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미네르바는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루시엘의 눈빛에 서린 탁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 그런 경우가 가능한 일이 한 가지 더 있었지만 일부러 말해주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다.
‘나머지 수는 정령왕이 직접 도운 경우인가…’
소환된 정령왕은 계약자와 의식을 연결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했으니 얼마든지 도움을 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엘퀴네스를 소환한 인간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그 소년이 인간이 아니었거나, 앞서 말한 경우일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설명은 했지만 둘 다 흔치 않은 일이다. 미네르바는 새삼 그 소년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루시엘은 루시엘대로 마음이 심란한 상태였다.
그저 그런 정령사라고만 들었던 소년이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답 감사합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쉬러가고 싶습니다만.”
“아! 그렇군요. 세바스찬! 루시엘 백작님을 방까지 안내해 드리게.
오래 붙들어서 죄송합니다, 백작님. 부디 머무시는 동안 충분히 즐기시길 바랍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편한 시간 되십시오, 펠리온 백작, 그리고 미네르바시여.”
루시엘이 사라지고 난 후, 미네르바는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펠리온을 바라보며 물었다.
“탐욕이 많은 남자다. 왜 저런 자를 가까이 하는 거지?”
“하하. 인간 중에 욕심이 없는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는 본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젊은 나이에 가문을 훌륭하게 이끌어 나가며,
귀족들 세계에서 살아나가는 법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남자니까요.”
“허나 너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구나.”
“괜한 염려이십니다. 게다가 이번 파티에 루시엘 백작을 초대하자고 하신 건 미네르바님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러시는지?”
“글쎄. 이번만은 내가 잘 못 생각한 것 같아서 말이다.
그에겐 하나뿐인 여동생이 있다고 들었다. 역시 너도 인간의 여자에게 더 끌릴 테지?”
“네? 하하! 설마 미네르바님, 지금 질투하고 계시는 겁니까? 저는 얼굴조차 본 적이 없는 여자를요?”
‘그야 그녀가 당신의 운명의 상대이니까.’
미네르바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펠리온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입술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이제 보니 정령왕도 의심이 많은 존재였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사랑하는 이는 죽어서도 당신뿐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겁니다.”
“맹세 할 수…있는가?”
“물론입니다. 나의 영혼을 걸고.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이미 난 포로가 되어버렸으니까. 다른 사람을 사랑할 바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진지한 펠리온의 눈동자에 미네르바는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사람이 나를 배반할 리가 없다. 이번만큼은 트로웰의 예지가 틀린 것이다.
미네르바는 간절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과 달리, 예고된 파란은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며칠 후 발표된 검술대회의 총 참가인원은 128명으로 집계되었다.
이들은 각 32명씩 4조로 나뉘어져 약 한 달의 기간 동안 7번의 대련을 진행하게 되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그 마지막 7회전에서 이긴 사람이 이번 대회의 최종 우승자였다. (너무 당연한가?)
대회 장소는 공국 내에 마련된 커다란 경기장 안이었다.
관객석과 귀빈석은 물론, 선수들의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방까지 마련된 건물이었지만,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3차전을 통과한 32명뿐이었다.
그러므로 1회전과 2회전은 경기장 밖의 공터에서 따로 진행되었다.
아마 거의 예선전 같은 식으로, 제대로 된 실력자를 골라내기 위한 절차 같은 식인 듯 했다.
그래서인지 승부내용도 검의 실력보단 체력적인 조건을 따지는 것이 많았다.
1회전의 경기방식이 무거운 추를 매단 채 1시간 동안 누가 더 팔굽혀펴기를 오래하느냐는 것이었으니 말 다했지 않은가.
(5분당 추가 하나씩 더 추가되며, 도중에 쓰러지면 즉시 탈락이었다.)
게다가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공터에서 진행되는 탓에 사방은 구경꾼들과 함께 한 동행인들로 가득했다.
곳곳에서 응원전과 노점이 열렸고, 1회전이 진행되는 일주일 동안 마치 축제 같은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1회전이 끝나는 마지막 날, 바로 2회전의 대전표와 날짜가 공개되었다.
오늘은 바로 그 역사적인 2회전이 시작되는 첫날이었다.
“어라? 저건 또 뭐지?”
1회전을 가뿐히 통과한 나는 경기장 앞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커다란 텐트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텐트는 입구와 출구가 한 방향으로 뚫려있는 모양이었는데,
마치 동굴처럼 안이 컴컴하고 깊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2회전의 경기 방식이라는 것이 아닌가.
우선 호명된 두 선수가 앞으로 나오면 진행자가 그 텐트 속으로 함께 들어가도록 지시했다.
그곳에서 먼저 나오는 사람이 이기는 방식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터널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들어간 사람들은 오랫동안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나온 후에도 뭔가 상당히 겁에 질리거나, 녹초가 된 얼굴들이 대다수였다.
“혹시 안에 뭐가 있나?”
내가 궁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이프리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환상마법이 걸려있는데? 일종의 정신력 테스트일지도.”
“엑? 환상 마법이요? 왜 하필 그딴 걸? 으윽. 정말 악취미야.”
“어쩔 수 없잖냐. 이 많은 인간들이 일일이 대련하자면 끝이 없을 텐데.
그래도 그렇게 강도 높은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 일단 들어가 봐야 알겠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일전의 바론 던전에서 겪은 일 탓에,
나는 환상마법이라고 하면 무조건 끔찍한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사이에도 어김없이 내 차례는 다가왔고,
나는 곧 대회진행자가 내 이름과 상대 선수의 이름을 호명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1조의 ‘엘’!과 ‘라반’! 나오시오!”
“아! 내 차례다. 그럼 다녀올게요!”
“어이어이, 이번엔 적당히 하는 것 잊지 말라고. 저번처럼 압도적으로 이겨서 사람들 놀라게 하지 말고.”
이프리트가 말한 것은 1회전에서 벌어진 팔굽혀 펴기에서,
내가 상대방을 500번 차이로 이긴 걸 두고 한 말이었다.
그것도 중도에 상대방이 탈진해서 쓰러졌기 때문에 멈춘 것이지, 더 했다면 숫자차이가 더욱 불어났을 것이다.
그냥 아무생각 없이 한 건데 설마 상대방이 그렇게 쓰러질 줄 내가 알게 무언가.
사실 그때까지도 나는 내 체력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전혀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검을 배우는 사람들은 으레 나만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적당히라는 기준이 참 애매하긴 한데….
어차피 저 안에 들어가서 벌어지는 일들은 밖에선 안보이니까 상관없지 않을까요?”
“밖으로 나오는 시간이 있잖아.
너무 빨리 나오지 말고 상대 녀석의 텀을 보고 행동하란 말이야. 그런 것까지 일일이 가르쳐 줘야 하냐?”
“네네, 알았어요. 아무튼 노력해 볼게요.”
역시나 잔소리가 많은 타입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설렁설렁 대회 진행자의 앞으로 걸어갔다.
마침 다른 쪽에서도 호명 받은 남자가 나오고 있었다.
이번에 나와 겨룰 상대는 오랜 전투생활이라도 한 건지 온 몸이 굵은 상처들로 가득한 남자였다.
그가 등에 매고 있는 도끼는 그간 묻혀온 피의 양을 증명하듯 검붉은 기가 배어 있었다.
‘헤에…용병인가?’
그 순간 나를 발견한 남자가 눈에 띄게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곧 대놓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후드를 써서 음침한 데다, 언뜻 봐도 체구가 작고 어려보이는 녀석이 자신의 상대가 된 게 불만인 모양이다.
잠시 후 남자의 입에서 다분히 시비조의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이거 완전히 꼬맹이잖아? 이런 몸으로 잘도 1회전을 통과했군.
그래봤자 상대는 더욱 더 비실거리는 놈이었겠지만. 어디 엄마 젖은 다 먹고나 온 거냐, 아가야?”
“!!”
아니, 이게 나를 언제부터 봤다고 아가래? 불쾌한 기분이 확 치솟았지만 나는 일단 참을 인자를 새겼다.
눈앞의 남자는 상당히 큰 장신에 우람한 덩치였기 때문에,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한 내가 꼬마로 보여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참자, 참어. 용병들 성격 나쁜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저런 거 일일이 맞대응하다간 내가 먼저 홧병으로 죽지. 으득…’
하지만 남자는 내가 가만히 있는 것이 겁을 먹어서라고 생각해 버린 듯 했다.
그는 더욱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대답할 용기도 없는 주제에 잘도 이 대회에 참가했구나.
아무튼 요즘은 개나 소나 주제를 몰라서 탈이라니까.”
“…말씀이 좀 심하시네요. 그럼 제가 개라는 건가요?”
“헤, 꼴에 기분은 나쁘다 이거냐? 이봐, 꼬마야.
그냥 순순히 말할 때 기권하는 건 어때? 기절해서 실려 나가는 것보다야 그게 훨씬 더 폼 날 텐데?”
기절하긴 누가 기절한다는 거얏! 발끈한 나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참자고 생각했던 것도 잊고 냉큼 쏘아붙였다.
“그렇게 말하는 아저씨가 기권하는 건 어때요?”
“뭣이? 아저씨? 내가 어딜 봐서? 난 아직 창창한 25살이란 말이다!”
“흥. 20살 넘으면 다 아저씨지 뭘.”
“뭐, 뭐야? 너 지금 뭐라 그랬어?”
물론 25살은 많은 나이가 아니다.
하지만 원래 사람이란 자신보다 젊은 사람을 부러워하기 마련.
그는 여러 번 반복된 ‘아저씨’란 호칭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음껏 써먹어주기로 작정했다.
“어라, 왜 그러세요, 아.저.씨? 안색이 굉장히 나쁘시네요.
혹시 뭐라도 잘못 드셨어요? 하긴, 아.저.씨. 정도의 나이가 되면 먹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나저나 이런 대회에 나와도 괜찮으시겠어요?
이제 슬슬 행동도 굼떠지실 나이인데, 과격한 운동은 피하셔야죠. 안 그래요, 아.저.씨?”
“이, 이자식이!!”
“흠흠! 둘 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실격당하고 싶지 않으면 정숙해라.”
다툼이 커질 기미가 보이자 진행을 맡은 기사가 얼른 끼어들어 제재를 가했다.
덕분에 보복을 가하지 못하게 된 남자는 울그락불그락 해진 얼굴로 연신 씩씩 거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기사는 우리들에게 2회전의 경기 방식과 간단한 룰을 설명해주었다.
“이미 앞서나온 선수들을 보았다시피, 지금부터 너희들은 저 공간 안을 통과해야 한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시련을 뚫고 먼저 나오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무기는 현재 소지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들어가도 되지만, 서로를 공격하는 행위는 금지다. 자, 그럼 건투를 빌겠다.”
상대를 공격해선 안 되지만 무기의 소지를 허용하다니? 혹시 저 안에 괴물이라도 나오는 걸까?
기사의 말이 끝나자 나는 망설이지 않고 텐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용병남자도 얼른 뒤 따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젠장, 어디 두고 보자. 잘 못 했다고 울고불고 빌게 만들어 줄 테다.”
말투를 보아하니 경기가 끝난 후에 복수라도 할 생각인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그저 상큼이 무시했을 뿐이지만.
안으로 들어선 순간 나는 주위의 기운이 미묘하게 바뀌는 것을 느꼈다.
또한 피부를 타고 도는 공기가 마치 끈적한 액체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은 평소보다 공기 중에 포함된 마나의 함유량이 많다는 뜻이었으며,
주변에 마법이 설치되어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쩝, 아주 대놓고 함정이 있다는 걸 알려주네. 아무리 예선전이나 마찬가지라지만 너무 허술한 거 아니야?’
바론 던전에서 일행이 전부 없어질 때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건 그야말로 아이들 장난수준에 불과했다. 하긴, 마신의 능력과 인간들의 수준을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일단 뭐가 나올지 모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허리춤에 달고 있던 검집을 움켜잡았다.
그 상태로 잠시 동안 가만히 있어봤지만 여전히 불유쾌한 공기만 느껴질 뿐, 일어나는 현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갑자기 옆에 있던 용병남자가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아악!! 괴, 괴물!!”
“엥?”
그의 말에 놀란 나는 남자가 벌벌 떨며 가리키고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 눈에는 괴물은커녕 그저 밖으로 나가는 출구만 뻥 뚫려 있었을 뿐이었다.
속았다는 느낌에 나는 찌푸린 표정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뭐예요, 아저씨. 장난치지 마요. 괴물은 무슨 괴물이 있다는 거예요?”
“무슨 헛소리야! 저기 저렇게 큰 오우거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제길, 2회전에서 오우거를 풀어놓다니, 이건 사기야!!”
“!!”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는 들고 있던 도끼를 힘껏 움켜잡으며 앞을 경계했다.
그 모습은 처절한 전투를 앞둔 전사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괴성을 내지르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부웅, 부웅~ 휘익!!
“크아아악! 죽어랏! 죽어!!이 괴물 자식!!”
“……”
남자가 발악하는 장면은 굉장히 진지하면서도 심각했다.
웬만한 신경으로는 쪽팔려서라도 일부러 저러지는 못할 테니, 장난을 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십중팔구 환영마법에 걸렸다는 소리인데. 왜 나는 멀쩡하고 저 남자만 걸린 걸까?
‘쩝. 아무렴 어때. 암튼 이대로 나가면 내가 이기게 되는 건…어, 어라라?’
그 순간 나는 어디선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다수의 시선들을 느꼈다.
아마 행사를 주관하는 자들이 영상석을 설치하고 내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 이곳에 오기 전 이프리트가 신신당부하던 말이 떠올랐다.
<이번엔 적당히 하는 것 잊지 말라고. 저번처럼 압도적으로 이겨서 사람들 놀라게 하지 말고.
밖으로 나오는 시간이 있잖아. 너무 빨리 나오지 말고 상대 녀석의 텀을 보고 행동하란 말이야.
그런 것까지 일일이 가르쳐 줘야 하냐?>
예선전에선 일부러 돋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게 아니라도 사람들 눈에 띄어 시끄러워지는 것을 피하려면 알아서 주의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여기서 그냥 나가버리면 우승이야 확정이겠지만,
마법을 설치한 자들의 주목을 끌게 될 것은 틀림없었다.
환영마법이 몇 서클인지는 몰라도 그것에 걸리지 조차 않았다고 하면,
자칫 내가 소드 마스터라는 것을 들킬 수도 있는 노릇이다.
원래는 그냥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나갈 생각이었는데, 지켜보는 시선이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 말은 즉…내가 여기서 걸리지도 않은 환영마법을 보는 것처럼 미친 짓을 해야 한다는 소리…인가? 아하하하…’
나는 핼쓱한 얼굴로 여전히 헛손질만 하고 있는 용병남자를 바라보았다.
오우거를 본다고 했으니 아마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몬스터와 대치하는 환영인 모양이다.
그 몬스터와 겨루어 이겨야만 풀리는 마법인걸까, 아니면 시간 안에 버티기만 하면 되는 걸까?
이래저래 맨 정신으로 할 일이 아니다. 생각 같아선 억지로라도 환영마법에 걸려서 뭐라도 발견했음 싶었다.
‘신이시여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시나이까…’
일단 나는 검을 뽑아 든 채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그리곤 마지못해 모기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아이고 무서워라…왜, 웬 괴물이 여기에…”
‘젠장! 연기인 거 다 들통 나겠다!!’
익숙하지 않은 짓을 하려니 이미와 등 뒤로 온통 식은땀이 흘렀다.
그게 나름대로 겁에 질린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 와중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 순간 굉장히 낯익으면서도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연기라고 하는 거냐? 차라리 그냥 나가지 그래?
“이, 이프리트님?”
놀랍게도 말을 걸어온 이는 자연체의 모습으로 나타난 이프리트였다.
그새 궁금해서 뒤따라 온 건가? 그는 잠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옆에서 여전히 헐떡이고 있는 용병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모습을 보고도 느끼는 게 없는 거냐?
적어도 흉내정도는 내야 할 것 아니야, 흉내는! 도대체가 제대로 할 생각은 있는 거냐?
“아하하. 그게…이런 경험은 처음이라서…”
-쯧, 암튼 내 이럴 줄 알았지.
너 정도면 웬만한 환영마법엔 끄덕할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뭘 하고 있나 와 봤더니만.
딴 인간들은 잘도 남을 속여먹던데, 넌 어떻게 된 게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냐?
“이, 이래봬도 노력하고 있다구요!”
-그래서 결과가 고작 ‘아이고 무서워라~’냐?
어떤 인간이 그런걸 보고 속아 넘어가? 할 수 없지. 내가 좀 도와주마.
“에? 어떻게요?”
그에 이프리트는 행동으로 모든 것을 설명했다.
바로 눈앞에서 시뻘건 ‘불의 검’을 꺼내 들었던 것이다.
뛰어난 공격력을 자랑하는 그것은 전 차원을 통틀어 오직 이프리트만이 다룰 수 있는 무기였다.
예전에도 몇 번 (미래의) 이프리트가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난 한눈에 그것을 알아보았다.
덩달아 그의 목적 역시.
-자! 전투다, 인간!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건데!!”
그때부터 나는 필사적으로 이프리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구를 수밖에 없었다.
자연체의 정령에게는 물리적인 공격은커녕,
검기조차 잘 통하지 않기 때문에 맞서 싸운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접은 상태였다.
설령 통한다 하더라도 이제 겨우 소드 마스터 초입에 들어선 내가,
무슨 수로 공격 계열의 정령왕인 그를 이길 수 있겠는가. 게다가 지켜보는 눈 때문에 검기도 쓰지 못하는데!
그와 반대로 이프리트는 연신 신나는 표정이었다.
휘익! 촤악! 퍼어억!
-으하하! 그쪽이 아니잖아! 자자~ 피하지 않으면 죽는다아~~
‘이 썩을 놈의 정령왕!’
내가 속으로 비명을 지르던 말든,
어쨌든 덕분에 지켜보는 이들은 내가 단단히 환영 마법에 걸렸다고 믿을게 틀림없었다.
지금 그들의 눈에는 미친 듯이 웃으며 검을 내지르고 있는 이프리트가 보일 리 없었으니까.
‘당신 평소에 인간에게 불만 없다는 거 거짓말이지!!!’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흐르자 옆에 있던 용병남자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기절하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이프리트는 공격을 멈추었고, 나는 녹초가 된 몸으로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은 채 우승할 수 있었다.
정말 눈물 나게 고마운 도움이었다. 뿌득.
2회전의 결과가 나온 후에도 트로웰의 표정은 그닥 밝지 못했다.
이유는 이프리트가 그의 동의 없이 나를 도와준 일 때문이었다. (전혀 고맙지는 않지만.)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프리트를 노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꾸 그렇게 도와주는 버릇을 들이면 여기서 더 성장하지 못해. 자신의 일은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게 해야지.”
“트로웰 네가 못 봐서 그래. 이 녀석의 연기가 얼마나 어설펐는지 알아?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다 그러면서 대처 능력을 키우는 거다. 중간계에서 유희도 많이 해본 녀석이 설마 몰랐다고는 대답하지 않겠지.”
“쳇, 별 탈 없이 이겼으면 됐지, 뭐가 문제야? 어차피 우승이 목적인 대회잖아. 자잘한 부분은 서로 신경 끄자고.”
그러자 트로웰도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굳게 입을 다물었다.
이프리트는 이프리트대로 화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그 묘하게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엘뤼엔만이 태연하게 주위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핵폭탄이 터져도 나 몰라라 할 것 같은 얼굴이다. 마치 처음부터 우리들과는 동떨어져 있는 존재 같았다.
슬쩍 그에게 다가간 나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좀 말려봐, 아버지. 저러다 싸우면 어떡해?”
“…이미 싸운 것 같다만? 그리고 왜 내가 녀석들을 말려야 하지?”
“일행의 분위기가 험악해 지는데 당연히 말려야지! 나보다야 엘뤼엔이 참견하는 게 더 효과적이잖아.”
“난 관심 없다.”
“윽! 자꾸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굴 거야?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엘퀴네스씨!”
“거참 종알종알 시끄럽군.”
찌푸린 얼굴로 중얼거린 엘뤼엔은 곧 서로를 외면하고 있는 두 정령왕
-트로웰과 이프리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얼음창을 만들어 그대로 둘을 향해 집어 던지는 것이 아닌가!
휘익! 콰아앙!
“헉!!”
“으악! 이게 무슨 짓이야, 엘퀴네스!!”
다행히 두 정령왕 다 맞지는 않았지만, 예상치 못한 공격에 상당히 당황한 듯 했다.
열 받은 얼굴로 당장 따지고 드는 이프리트에게 엘뤼엔은 서늘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 맘이다.”
“뭐, 뭣이라!! 너 지금 말 다했냐?”
“유치한 일 가지고 딱딱한 분위기 만들지 마라.
너희들이 그러고 있으니까 저 녀석이 나한테 달라붙잖아. 날 귀찮게 만들지 마.”
“뭐야? 자기 계약자를 떠넘긴 게 누군데? 우리가 네놈 계약자 대신 챙겨주는 유모냐? 엉?”
“…그래서 나와 해보겠다는 건가?”
누누이 말하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엘뤼엔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자, 이프리트는 어깨를 움찔하더니 곧바로 항복을 선언했다.
(그 옆에서 트로웰은 키득거리고 웃고 있었다.)
“큭! 알았어, 알았다고!! 암튼 저놈의 성질머리하곤. 어이, 인간! 이쪽으로 와! 이 몸 바쳐 신나게 놀아주마!”
“에? 아니, 그런 걸 바란 게 아닌데…그리고 나에게는 엄연히 엘이라는 이름이…”
“흥, 그래봤자 다 똑같은 인간이지. 이 몸한테서 이름으로 불리려면 아직 백년은 이르다!”
“헐, 인간은 백년후면 죽는다구요.”
“그러니 꿈 깨란 소리다.
네가 인간치곤 제법 능력이 된다는 건 인정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직 십 만년은 멀었다.
아까도 네가 좀 더 잘했으면 내가 나설 필요까지도 없는 일이었잖아. 왜 도움준답시고 한 일에 구박을 받아야 하냐, 엉?”
결국 화살이 내게 돌아오는 건가?
나는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엘뤼엔을 바라봐 준 뒤,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그래요. 다 내가 죽일 놈이에요.”
“쯧쯧, 저 삐딱한 대답 봐라. 하긴 네가 괜히 엘퀴네스의 계약자겠냐?
암튼…오늘 2회전을 통과했으니, 이제 경기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거지? 숙소는 따로 제공해 주는 거냐?”
그의 질문에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공국 안에 있던 여관에서 지내며 대회 일정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지만,
2회전을 통과한 이상 앞으로는 경기장 내에 마련된 선수 대기실에서 지낼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어차피 여관을 전전하는 탓에 별다른 짐이 없었던 나는 바로 숙소를 그곳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선수외의 동행자는 입장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정령왕들이야 자연체로 변해서 따라오면 될 테니까.
그때까지 쿡쿡 웃고 있던 트로웰도 동의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3회전에서 겨룰 상대와 미리 만나보는 것도 괜찮겠지.
여관처럼 북적이거나, 시끄럽지도 않을 테고. 그럼 이프리트, 네가 따라가서 지켜봐줘.”
“엥? 왜 또 나야? 너희들은 뭐하고?”
“나와 엘퀴네스도 갈 거야. 그전에 먼저 만나봐야 할 녀석이 있어서.”
“뭐야, 이 대회 주최자라는 드래곤을 만나러 가는 거냐?”
이프리트의 말투는 다소 퉁명스러웠지만, 트로웰은 전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맞아. 지금 세피온 공작으로 유희중인 블루 드래곤 라미아스는 드래곤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수전노거든.
그런 녀석이 이번 대회에 에고소드를 상금으로 건 게 이상해서 말이야.”
“흐응. 에고소드라고 전부 좋은 건 아니잖아?
어떤 영혼이냐에 따라 능력이 천차만별이니, 별로 쓸모도 없는 걸 내놨겠지.
아님 어느 헷가닥 하는 놈을 집어넣어서 마검을 만들어놨을지도.”
“바로 그게 문제야. 마검은 자신보다 약한 사용자의 의식을 잡아먹기 때문에 인간들에게 유출이 금지되어 있어.
만약 그 조항을 어기는 거라면 일이 커지기 전에 막아야지.”
“쩝.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런 정신 나간 짓을 벌일까.
우리 4대 정령왕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다는 걸 뻔히 아는데.
그나저나 네가 웬일이냐? 중간계가 소란스러워진다면 얼씨구나 할 녀석이 말릴 생각을 다하고.
인간들이 위험해 지는 건 너도 바라는 일 아니었어?”
“…그 피해가 인간으로 그치지 않으니까 그렇지.
난 인간들의 멸종을 원하는 거지, 아크아돈의 멸망을 바라는 게 아니야.”
“큭큭. 그야 그렇겠지. 그럼 이럴 때 네 특기를 안 써먹고 뭐하는 거야?
이런 일 쯤이야 혜안으로 미리 알아볼 수 있잖아.”
그러자 트로웰은 갑자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내가 움찔하고 놀라자 그는 피식 웃으며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엘이 관련된 미래는 안 읽히거든.
그래서 지금은 검술대회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안보여. 현재로선 직접 만나보는 수밖에 없어.”
“뭐야, 그게? 이 녀석 인간인거 아니었어? 신도 아니면서 관련되었다는 것만으로 미래가 안 읽힌다고?”
“응. 그래서 나도 좀 놀랐어. 운명이 없는 인간이 있다는 건 처음 들어봤거든.”
“운명이 없다고?”
그 말에 이프리트도 덩달아 신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러다 조만간 정체가 들키는 게 아닐까? 절로 심장이 조마조마 해지는 순간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1조의 엘님이시군요. 2회전을 통과하신 것을 축하합니다.”
건물 내부에 들어서자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곳의 관리인인 듯한 중년남자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아직 내가 누구라고 밝히기도 전의 일이라, 나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엘이라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하하. 행사 보조인으로서 3회전 진출자들의 인상착의는 파악하는 건 기본이지요.”
“하지만 전 후드를 쓰고 있는 대요?”
“대회 중에서도 마찬가지셨잖습니까.
선수 중 유일하게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특징과 전체적인 체격. 그리고 목소리와 분위기를 보고 알아본 겁니다.”
하긴, 얼마 안 된 경기였다지만 2번 내내 얼굴을 가리고 참석했으니 오히려 특징으로 남을 만 했다.
게다가 참가자 중에서 유일하게 후드를 쓰고 있었다면 기억하기가 더 쉬웠을 것이다.
물론 32명이나 되는 3회전 진출자들을 전부 알아본다는 건 역시 놀라웠지만 말이다.
내가 굳이 후드를 쓴 이유는 예쁘장한 얼굴 때문에 오해받는 것이 귀찮아서였다.
지금도 작은 체구 때문에 꼬맹이라고 놀림 당하는데,
그도 모자라 여자라는 의혹까지 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어차피 규정에 걸리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지 않은가.
“자, 그럼 저를 따라오시지요. 선수 대기실 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경기장은 총 두 개의 건물로 나뉘어져, 가운데의 대련장을 중심으로 커다란 원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일반인의 출입이 일체 금지되며 오직 참관하러 온 귀족과 부호들이 휴식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흐응, 꽤 돈을 퍼부은 게 눈에 보이는데? 주인이 드래곤이라더니 화려하게도 지어놨군.
이프리트의 말마따나 건물 안은 그저 평범한 경기장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넓었다.
곳곳에 세워진 황금 동상과 바닥에 깔린 붉은 융단.
그리고 벽면마다 세밀하게 새겨진 조각들이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일반 건물이 이러할 진데, 귀족들이 머무는 건물의 내부는 얼마나 더 화려할까.
내가 신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동안, 관리인은 건물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건물은 세피온 공작께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랍니다.
드워프들이 직접 설계하고 완공 하는 데만 10여년의 세월을 투자했지요.
아직 2회전이 끝난 것이 아니니 그 시간동안 천천히 둘러보셔도 좋을 것입니다.
곳곳마다 아름다운 세공과 볼거리가 많답니다.”
“예에. 정말 멋진 건물이네요. 그냥 경기장으로 놔두기에는 아까울 정도인걸요?”
“하하하!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정도 화려한 내부라면 즉석에서 파티를 열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니까요.
수도에서 제법 세력 있는 부호들도 이곳을 보면 전부 감탄하지요. 우리 세피온 공국의 자랑이랍니다.”
그 정도면 이곳 사람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할 만 했기에 나는 공감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선수 대기실은 총 몇 개가 있는 건가요? 한사람씩 개인 방이 주어지나요?”
“아니오, 유감스럽게도 방은 8개뿐입니다.
3회전에 출전하시는 분들이 총 32분이니, 4명씩 한 방을 쓰시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방 자체가 큰 편이라 지내시는 것에는 큰 불편이 없을 겁니다.”
“4명이 한방이라면…정해지는 기준은요?”
“그냥 들어오신 순서대로입니다. 엘님은 이전에 먼저 들어오신 2분과 합류하시게 될 겁니다.”
“흠, 이번 대회에는 귀족들도 참가했다고 하던데, 그 분들도요? 선수 중에 여자들이 있다고도 들었는데…”
보통 귀족들이 평민과 같은 방을 쓰는 것을 찬성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관리인의 대답은 단호했다.
“엄격한 승부의 세계에 신분을 따질 순 없습니다.
그분들께는 이미 대회전 이런 일에 대한 사전 동의서를 받아낸 참이니 불만을 갖지는 못하실 겁니다.
그리고 여성분의 경우엔 예비분의 방이 따로 주어질 겁니다.”
“그렇군요. 아직 2회전이 전부 끝난 것은 아니죠? 3회전이 열리는 것은 언제인가요?”
“2회전이라면 현재 3조까지 완료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일쯤이면 마무리 되겠군요. 3회전이 열리는 것은 앞으로 5일 후입니다.
그동안 연무장에서 개인 수련이 허락되며, 불편하신 사항은 언제든 건물 내의 일꾼들에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그러는 사이 도착했는지,
관리인은 한 방문 앞에서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금색의 문고리가 달린 고급 원목 바탕에는 두 명의 기사가 서로 칼을 겨누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다 왔습니다. 이 방이 경기가 진행될 동안 엘님께서 사용하실 대기실입니다.
안에는 먼저 도착하신 2분이 계실 겁니다.”
“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저 혼자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 그럼 편한 시간되시길. 식사는 후에 일꾼들이 가져올 것입니다.”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 후 관리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척척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벌컥!
나는 잠깐 심호흡을 한 다음 단숨에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있던 두 명의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중에 한사람은 반가운 표정을, 다른 한사람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 중 반가운 표정을 지었던 갈색 머리의 남자가 내게 악수를 청해왔다.
“헤에, 또 다른 라이벌인가? 만나서 반가워. 나는 크리스라고 해.”
“안녕하세요. 엘이라고 합니다.”
“목소리가 꽤 어리네? 2회전에서 본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몇 조였어?”
“1조였는데요.”
“아하~ 그렇군. 나와 저 형씨는 2조야.
너하곤 3회전에서 만날 일이 없겠구나.
앞으로 잘 지내보자구. 침대는 맨 왼쪽과 오른쪽 것 빼고 알아서 정하면 돼. 그런데 나이가 몇이야?”
“18세에요. 크리스씨는요?”
“와, 설마 했는데 정말 어리군! 난 23살이야.
그렇게 어린나이에 2회전을 통과하다니, 정말 대단한 걸? 그 환상마법은 꽤나 진국이었는데 말이야.”
크리스라는 남자는 꽤나 사교적이고 서글서글한 성격인 듯 했다.
반면 처음부터 나를 향해 불쾌한 표정을 지었던 남자는,
한마디의 말도 없이 아까 전까지 하고 있던 스트레칭을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그 남자 쪽을 바라보자, 크리스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냥 신경 꺼. 귀족이라서 우리 같은 평민들과 한 방을 쓰는 게 불만인 모양이니.
아, 너 평민 맞지? 아니면 혹시 내가 죽을죄를 저지르고 있는 건가?”
“하하, 평민 맞아요. 크리스씨는 꽤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어허! 그냥 형이라고 불러.
애늙은이도 아니고 ‘씨’는 무슨. 암튼 네가 와서 살았다.
저 무뚝뚝한 인간 때문에 추워서 동상 걸릴 지경이었거든.
무슨 말을 해도 대답이 있어야지, 원. 이래서 내가 귀족들을 싫어한다니까. 설마 다음에 올 녀석도 귀족이진 않겠지?”
무뚝뚝한 건지 무시하는 건지, 남자는 거의 대놓고 떠드는 크리스의 말에도 일절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그나마 귀족의 권위를 내세우며 발끈하는 것에 비하면 나은 편이었지만, 왠지 불편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그때 이프리트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길, 저 놈을 보니 재수 없는 엘퀴네스놈이 생각나잖아! 에잇, 기분 잡치는 군!
엘뤼엔의 어디가 어때서?
순간 무의식적으로 대답하려던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다 말을 거는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령들의 대화가 들린다는 것은 곧 나도 정령어를 사용하는데 지장이 없다는 소리가 아닌가?
지금은 비록 인간의 육체를 입고 있지만, 내 본질이 정령왕이라는 것까지 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
-엘뤼엔이 뭘 어쨌다고요?
‘헉! 정말 된다!!’
너무 놀라고 기쁜 마음에 심장이 쿵쾅쿵쾅 울렸다.
그러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던 이프리트의 눈까지 휘둥그레졌다.
-보면 몰라? 도도하고 상대방 깔보는 게 딱 엘퀴네스놈…엥? 너 방금 뭐라고 말했냐? 다시 말 해봐.
-네? 무슨 말이요?
-헉! 너 지금 의지로 대화를 전달한 거냐? 인간인 네가?
-에…저도 방금 알았어요. 혹시나 싶었는데 되더라구요.
-이런 어이없는!!
이프리트의 표정은 말 그대로 황당하게 변해 있었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한참이나 나를 요리조리 살피던 그는 오히려 의문만 더 가중된 얼굴이 되어 물었다.
-너 정말 인간 맞냐?
이제껏 친화력이 높다고 자연체의 정령들을 보는 놈은 없었다.
운명이 없다는 것도 그렇고. 혹시 유희중인 신인 건 아니야?
-하하하, 그, 글쎄요.
-쳇, 하도 황당하니 이젠 별 말도 안 되는 가정까지 떠오르는군.
그런데 그런 대화법이 가능하면서 왜 이제 서야 사용하는 거냐?
-저도 방금 알았다니까요. 그리고 지금까진 이렇게 몰래 대화 나눌 일도 없었잖아요.
-쩝, 그야 그렇지.
그러면서 이프리트는 또 한 번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마침 이어진 크리스의 말에, 그에게는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이거 알아? 3회전부터는 귀족들이 관람하러 온다더군.
중앙의 귀족들이 꽤 많이 모일 예정인가 보던데? 성에서 파티도 열 건가보더라.”
“흐음, 그렇군요. 하긴, 장식용으로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닌데,
경기장의 관람석을 그냥 썩히지는 않겠죠.”
“하하! 듣고 보니 그렇네. 암튼 우연히 초대받은 귀족 명단을 봤는데,
정말 대단하더군! 백작부터 후작, 공작까지.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유명한 가문들이 좔좔좔 이더라니까? 아참! 그 대단한 루시엘 폰 라비타 백작도 있더라고.”
루시엘?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군데요?”
“헉! 그 사람을 몰라? 20살에 소드 마스터가 된 라비타 가문의 수장이잖아.
아마 대륙 내 최연소 소드 마스터일걸?
내가 웬만해선 귀족들은 안 좋아하는데 말이야~
그 사람은 정말 존경하지! 그가 지휘하는 기사단-화이트 라이언의 위용은 정말 말로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라고.”
“실제로 보셨나 봐요?”
“뭐, 그냥 딱 한 번. 수도에서 황녀님의 생일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렸을 때 참석한 것을 멀리서 본 게 전부지만 말이야.
그래도 워낙 소문이 대단한 사람이잖아? 아! 한 사람 더 있다. 정말 대박인 귀족이.”
“??”
그 말에 나는 물론, 옆에서 시종일관 흥미 없다는 태도로 몸을 풀고 있던 남자까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크리스는 마치 엄청난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것처럼 주변을 잔뜩 경계하면서 말했다.
“최근에 정령왕 미네르바를 소환한 일로 떠들썩했던 귀족 알지? 그 사람도 온다는 소문이야.”
“헉! 뭐, 뭐라고요? 누가와요?”
-엥? 미네르바의 계약자? 그 썩을 놈이 여긴 왜 와?
크리스의 말마따나 정말 대박인 사건이었다.
나와 이프리트는 똑같이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 떠오르는 건 역시 트로웰이었다. 그가 인간에게 반감을 가지게 된 원흉의 등장이 아닌가!
“굉장하지 않아? 잘하면 그 소문의 정령왕을 실제로 볼 수도 있다구.
듣자니 미네르바는 황홀한 은발을 가진 여성의 모습이라는데,
히야~ 정말 기대된다. 정령왕이라니…얼마나 아름다울까? 멀리서라도 봤으면 좋겠다. 그치?”
크리스가 아직 본적도 없는 정령왕에 대한 상상에 빠져있는 사이,
나는 나대로 걱정하고 있었다. 이곳에 나타난다면 십중팔구 트로웰과 마주칠 텐데, 과연 아무 충돌 없이 지나갈 수 있을까?
나와 다니면서 감정이 많이 누그러졌다지만,
아직 모든 인간에게 호의적이 된 것은 아니다. 어쩌면 꺼져가는 불씨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수도 있었다.
‘이거 어째 일이 꼬이는 걸?’
그래도 어쩌랴. 온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미 정해진 결과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설령 말린다 해도 미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아무쪼록 별 탈 없이 지나가기만을 바랄 수밖에.
말 그대로 폭풍전야였다.
“그런데 너 말이야. 그 후드 답답하지 않냐? 마법사도 아닌데 실내에선 그냥 벗지 그래?”
“네? 아~ 전 이게 더 편해서요.”
“흐음. 뭐, 그렇다면야 상관 않겠지만. 그런 게 편하다니 너도 참 별나다. 혹시 변태?”
“아니에요!”
그러자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프리트가 박장대소를 시작했다.
-크하하하! 변태래, 변태!! 아이고 배야~~!!
-웃지 마요! 안 그래도 기분 나쁘구만!
-큭큭. 그러게 그 거추장스러운 후드를 벗으면 될 거 아니야. 지금 네가 얼마나 음침해 보이는지 알아?
-여자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죠. 누군 쓰고 싶어서 써요?
그 말에 이프리트는 웃던 것을 멈추고 공감이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하긴, 네가 꽤 중성틱한 얼굴이긴 하지.
그래도 어릴 때부터 줄창 겪었을 텐데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나 보지?
-이프리트님 같으면 익숙해지겠어요?
-나야 원래 무성인걸.
성별로 자존심 챙길 입장은 아니라서 말이야. 근데 너 그러다 장가도 못가는 거 아니냐?
-시끄러워욧!
아픈 부분을 찌르다니!
이놈의 정령왕은 친근한 얼굴로 염장을 지르는 게 취미인가 보다.
잠시 이프리트를 째려본 나는 열도 식힐 겸 검을 들고 밖을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웃고 있던 크리스가 황급히 말을 걸었다.
“어이.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네? 아아. 연무장이 있다고 들어서요. 개인 수련은 자유라고 해서 가볍게 몸이나 풀까 하고…”
“그래? 그럼 나도 같이 갈까?”
“크리스 형도요? 좋죠~ 저랑 대련하실래요?”
이제껏 대련이라곤 트로웰이나 엘뤼엔과 해본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대회에서 어느 정도 수위를 조절해야 하는지 난감해 하던 중이었다.
크리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일반인에서 많이 떨어지지는 않을 테니
대련을 통해 좋은 경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크리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상관은 없지만…괜찮겠어? 다칠 수도 있을 텐데.”
“문제없어요. 저도 놀면서 검을 배운 건 아니거든요.”
“아, 미안.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었나?
네 실력을 무시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완력이 좀 강한 편이라 그래.
대련 중에 상대편 검이 부러지는 일도 가끔 있거든.”
“그런 거라면 괜찮아요. 그럼 형, 어서 가요. 날이 저물기 전에 한판이라도 해야죠.”
“아, 그래.”
나는 어울리지도 않게 머뭇거리고 있는 크리스를 붙잡고 방을 나섰다.
연무장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마침 주위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붙잡고 물어볼 수 있었던 것이다.
외부에 따로 건물이 있을 거란 생각과 달리 이곳의 연무장은 지하에 있었다.
하지만 워낙 공간이 넓은데다,
마법으로 탁한 공기와 빛을 조절해주고 있어서 그다지 답답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마침 따로 수련하러온 다른 이도 없었던 탓에 대련을 하기에도 딱 좋은 상태였다.
“와~ 잘됐어요, 형. 사람들이 없으니 방해 없이 마음껏 대련할 수 있겠네요.”
“아아. 뭐, 그야 그렇지.
아직 2회전 통과자들이 전부 결정 난 상태가 아니니. 아마 내일쯤이면 이곳도 북적거릴걸.”
“그럼 더더욱 오늘밖에 기회가 없네요.
실은 저 스승외의 다른 사람하고 대련해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거든요. 어서 시작해요.”
“뭐? 오늘이 처음이라고?”
뜨억한 크리스의 표정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매우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잘도 그런 경력으로…아, 아니. 정말 괜찮겠어?
이번 대회엔 걸린 상금도 상금이거니와 워낙 대단한 사람이 주최했기 때문에 경쟁이 장난이 아니라고.
이럴 때 경험 부족은 아주 치명적이야.”
“그러니까 여기서 경험을 쌓겠다는 거잖아요.
음, 크리스형의 실력은 어느 정도 되나요? 이 대회에 참가했다는 건 우승을 노리고 있다는 뜻이겠죠?”
“나 말이야? 하하, 우승은 무슨. 그냥 내 실력이 어디까지 인가 알아볼 겸 도전한 것뿐이야.
이런 대회라면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검술을 배운 귀족의 자제들도 참가할 테니,
좋은 승부를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앗, 그렇다고 만만히 보면 곤란해. 이래봬도 기사 지망생이거든.”
23세에 기사 지망생이라.
만약 이번의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귀족 가문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역시 내심 그걸 노리고 있었던 건지, 이내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백했다.
“실은 이 대회에 참가한건, 참관하러 온 귀족 중에 솔렌 자작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야.
이번에 그 가문에서 신입 기사를 뽑거든.
나 같은 평민이 기사가 되기 위해선 어떤 식으로든 눈에 띄는 방법 밖에 없으니까.”
“흐음. 더불어 귀족들과 겨뤄서 이기면 통쾌할 테고요?”
“하하! 맞아. 네가 뭘 아는 구나.
태평성대라고 하지만 그거야 다 귀족들 말이지.
내가 살던 곳은 지독한 시골인데, 밀이 없어서 지금도 보리만 먹고 산다고.
여행을 해보니 더더욱 격차를 알겠더군. 조금쯤은 그들의 콧대를 눌러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어.”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같은 평민으로서 이해는 되네요. 자, 그럼 대련 시작해볼까요?”
“엥? 저, 정말 하려고?”
그럼 진짜 시작하지, 가짜로 하리?
나는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눈으로 크리스를 바라본 뒤, 허리춤에 달고 있던 검을 빼어들었다.
그러자 크리스 역시 마지못한 표정으로 검을 잡은 채 내 앞에 마주섰다.
“정말 후회해도 난 모른다. 3회전 나가기도 전에 다쳐서 실려 나갈지도 몰라.”
“글쎄, 문제없다니까요. 제가 선공 합니다!”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가볍게 놀아주마. 와라!”
크리스는 제법 호기롭게 소리치며 단단히 검을 움켜쥐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내가 막 땅을 박차고 나가려 할 때였다.
“여기서 뭣들 하는 건가!!”
“…에?”
얼굴을 굳힌 채 소리치는 남자는 이제 막 연무장으로 들어서던 중이었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저 개인수련 하러 온 대회참가자중 하나이겠거니 생각하고 있던 나는 갑작스런 호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살짝 올라간 눈 꼬리에 희멀걸한 피부를 가지고 있어,
척 보기에 어딘지 얍삽한 인상을 풍겼다.
남의 대련을 방해한 주제에 오만한 표정으로 묻는 것이 무척 신경에 거슬리는 인간이었다.
“이봐. 누가 너희들더러 이곳 연무장을 써도 좋다고 했지?”
“대회 3회전 진출자는 연무장에서의 개인수련이 가능하다고 알고 있는데요.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는지,
크리스는 슬쩍 나를 자신의 몸으로 가리며 물었다. 그러자 돌아온 상대방의 대꾸라는 것이 가관이었다.
“얼른 대기실로 돌아가라. 지금부터 여기는 우리 칼빈 드 맥시우스 도련님께서 사용하실 것이다.”
“맥시우스라면…‘쾌검의 기사’라고 하는 루이스 드 맥시우스 후작의?”
“제법 눈치는 있구나. 그렇다! 칼빈님은 바로 그 분의 첫째 도련님이시다! 그러니 너희는 어서 돌아가래도!”
알고 보니 지금 당당하게 따지고 있는 남자는 그 도련님인지 뭔지 하는 자의 개인시종인 듯 했다.
크리스의 얼굴엔 황당함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무슨 소립니까? 댁 도련님의 연무장 사용 여부야 우리가 따질게 못됩니다만.
그렇다고 멀쩡히 수련하고 있던 사람들까지 내쫓다니요?
여기가 맥시우스가의 개인 소유입니까? 그리고 분명 이곳엔 대회 참가자외의 동행자는 금지된…”
“어험! 펴, 평민이 하라면 그렇게 할 일이지 뭔 말이 많아?
3회전 진출을 했다고 귀족과 똑같은 입장일거라 착각이라도 하는 거냐?”
“!!”
또다시 이어진 남자의 호통에 크리스는 흠칫 얼굴을 굳혔다.
이쯤 되면 누구라도 사태파악이 가능했다.
대회 규정이 마음에 안든 귀족들이 결국 권력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다.
아무리 연무장 사용이 자유라지만, 이런 식으로 귀족들이 텃세를 부리기 시작하면 평민들은 절대로 들어올 수 없었다.
이런 경험은 내게 무척 신선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신분 때문에 어디에서 밀려본 적이 있었던가?
말로는 평민이라 했지만, 황제인 이사나의 신분은 다른 모든 것들의 세력을 단 한 번에 억눌렀다.
그렇다 보니 이 세계에 와서 제대로 된 평민 대접을 받은 것은 지금이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전혀 기쁘진 않았지만.
“알아들었으면 어서 꺼지지 못해?!
곧 도련님과 친구 분들께서 이곳에 오실 거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우리 도련님과 함께 연무장을 사용하겠다는 거냐?”
“큭!”
크리스는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기사를 꿈꾸는 그가 한낮 시종에게 무시를 당했으니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요, 형. 오늘은 대련이 무리인 것 같으니 다음에 하죠, 뭐.”
“…그래.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다.”
만약 거기서 상황이 종결 됐다면 별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나를 착하게만 두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를 지나쳐 나가려는 순간, 나는 남자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흥, 천한 것들이 어디서 감히…개, 돼지만도 못한 것들이.”
“!”
안 그래도 2회전에서 만난 용병 남자한테 개나 소나라는 말을 들었던 나로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망언이었다.
크리스 또한 상당히 열 받았는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언사가 과하군요. 우리가 왜 당신한테 그런 취급을 당해야 합니까? 당장 사과하십시오.”
“흥! 평민 주제에 어디서 눈을 크게 뜨고 따지는 것이냐?”
“이봐요. 자꾸 평민, 평민, 그러는데, 그러는 당신도 귀족은 아니지 않습니까?
섬기는 이가 높다고 해서 당신까지 대접을 받아야 합니까?”
“큭! 감히 맥시우스가의 후계자 칼빈 도련님의 수하인 나를 무시하는 거냐?
오냐~ 네놈이 3회전 진출을 포기 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내 당장 가서 네놈의 무례를 도련님께 고하겠다!”
“!!”
“흥! 어떠냐, 이러고도 네놈이 당당할 수 있겠냐?
지금 당장 무릎을 꿇고 빈다면 너그럽게 한번은 용서해 주마.”
마치 선심 쓰는 듯한 대사에 나는 그야말로 기가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본인이 귀족인 것도 아니고, 단순히 배경이 든든하다는 이유로 잘난 척 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하긴, 민주주의라는 한국에서도 뒷배경이 작용하는 데, 신분이 명백한 이 세계에서는 오죽할까.
힘없는 크리스로선 방금 남자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였다.
그가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을 본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쉰 뒤 검 집에 꽂아뒀던 검을 다시 뽑아 들었다.
“아~ 이것 참. 그냥 조용히 지나가려고 해도 시비 거는 놈들이 있단 말이야.”
“…에, 엘?”
“무, 무슨!!”
그는 갑자기 내가 검을 빼어들자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춤거렸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강압적인 말투로 소리쳤다.
“뭐, 뭐냐! 설마 날 베기라도 할 작정이냐?
네놈이 그랬다간 3회전 실격은 물론, 칼빈 도련님께서도 절대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이다!”
“…흥. 귀족들 밑에서 꼬리치고 사는 게 즐거운가보지?
하긴, 그게 바로 당신들의 썩어빠진 생리겠지.”
“감히!!”
나는 단 한 번의 행동으로 남자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바로 칼끝을 그의 턱 밑으로 바짝 들이밀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베일 것 같은 기세에, 남자는 소리치지도 못하고 그저 붕어처럼 입만 뻐끔뻐끔 거리고 있었다.
나는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며 (그래봤자 후드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겠지만) 물었다.
“너 이름이 뭐야?”
“윽…거, 검은 치우고…말을…”
“대답 안하면 이대로 찌르는 수가 있어.”
“히익! 브, 브루스라고 하오.”
브루스? 이름대로 논다더니, 어쩐지 아까부터 온갖 난리 브루스를 친다 했다.
나는 피식 웃은 다음 빈정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진짜 눈치 없는 인간이네.
곱게 간다고 했을 때 가만히 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왜 날 화나게 만들어? 네가 고양이야? 목숨이 9개라도 돼?”
“큭…칼빈님께서 이 일을 아시면 절대 가만히 있지…”
“글쎄, 그거야 내 사정이니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죽기 직전까지 한번 맞아볼래?”
“에, 엘? 지, 진정해. 그러다 정말 큰일 난다고.”
당황한 크리스가 얼른 내 어깨를 붙잡았지만, 난 아랑곳 않고 브루스만 노려보았다.
“싸움을 걸어도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지.
대회 규정을 어긴 쪽이 누군데 뭐가 잘났다고 유세야?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수하를 보니 주인의 성격도 뻔하네.
너네 도련님인지 뭔지가 과연 몇 차전까지 가게 될 지 궁금한 걸?”
“가, 감히 맥시우스가의 후계자를 모욕하다니!!”
“호오~ 지금 네가 흥분할 입장이 아닐 텐데? 이대로 목이 꿰뚫리고 싶다면 계속 하던가.”
“헉! 그런 짓을 하면!!”
“당연히 넌 죽겠지. 나야 까짓거 이번 대회 포기하고 사라져도 상관없어.
장담하지만 너희 도련님이 가문 사람들을 전부 다 풀어도 날 찾지 못할 걸? 빽은 너만 있는 게 아니거든.”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자, 브루스는 물론 옆에 있던 크리스의 얼굴까지 덩달아 창백해졌다.
덤으로 나는 브루스에게만 슬쩍 살기를 흘려보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오만하게 서있던 녀석이 다리를 후들후들 떨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는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며 애원하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사…살려주십시오. 제발…”
누가 정말 죽인댔나?
대회 실격이야 상관없지만 그로 인해 드래곤을 만날 기회를 놓치는 것은 치명적이다.
홧김에 협박을 하긴 했어도 쉬운 길을 일부러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겨우 이정도 살기에 덜덜 떠는 녀석이라니.
나는 찌푸린 표정으로 겨누고 있던 검을 다시 검 집에 집어넣었다.
그 즉시 털썩-하고 브루스가 주저앉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나는 모른 척 하며 얼떨떨한 표정을 한 크리스를 향해 말했다.
“그만 가요, 형. 별로 재미없네요.”
“아, 그, 그래. 이것 참.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네? 뭐가요?”
“아니, 굉장히 의외여서. 밝고 명랑한 녀석인 줄 알았더니, 제법 무서운 면이 있는 걸?”
“음, 그런가요? 난 별로 모르겠는데.”
놀란 것은 크리스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동태를 구경하고 있던 이프리트 또한 뜨억한 얼굴로 물었다.
-이거 완전히 이중인격일세. 열 받으면 원래 그렇게 사악해지냐? 뭘 고작 그런 걸 가지고 협박까지 하고 그래?
-고작이라뇨! 날더러 개, 돼지보다 못하다고 했단 말이에요.
그걸 그냥 놔둬요? 콱, 반 죽여놓으려는 걸 대회 때문에 참았구만.
-아니, 그건 그렇지만, 평소 네 이미지랑 너무 다르잖냐.
-내가 뭘요?
-흠. 뭐랄까. 옆에서 무시하고 놀려도 꾹 참고 속으로 꽁알거릴 것 같달까.
아까 옆의 놈이 변태냐고 물었을 때도 그냥 넘어갔잖아.
-그거랑 이게 같아요? 의도가 다르잖아요, 의도가. 저런 녀석들은 딱 질색이에요.
-호오, 요컨대 적의를 가진 인간에게는 얄짤없다 이거군. 좋아!
정령왕의 계약자라면 그 정도 근성은 있어야지.
하하하! 너 참 마음에 든다. 혹시 엘퀴네스랑 계약 파기하고 나랑 할 생각은 없어?
그 말에 나는 잠시 낯익은 한 존재를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계약이라는 말만 들으면 무조건 라피스가 먼저 생각나니, 이것도 나름 트라우마의 일종이 아닌가 모르겠다.
지금쯤 녀석은 어느 이름 모를 보석 안에서 구하러 오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고 있을 지도.
피식 웃은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싫어요. 이프리트님은 잔소리가 너무 많아서 피곤해요.
-뭐얏?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구만 잔소리라니!
그 싸가지 없는 엘퀴네스 놈보다야 훨씬 낫지 뭘 그래?
-그래도 전 엘뤼엔이 더 좋아요.
-하아~ 너도 참 성격 특이하다.
그런 살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놈이 대체 뭐가 좋다는 거냐?
그 엘뤼엔인지 뭔지 하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도 그렇고. 하긴 그걸 받아주는 엘퀴네스놈도 확실히 정상은 아니지.
-그야…아버지를 싫어할 아들은 없거든요.
-엥? 방금 뭐라고?
황당한 표정의 이프리트가 반문했지만 나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남들이 모르는 진실을 혼자서 알고 있다는 게 생각만큼 답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즐겁고 유쾌한 느낌도 있었다.
아마도 다시 돌아가는 순간에야 밝히게 되지 않을까?
‘후후, 그때 다들 어떤 얼굴을 하게 될지 궁금한 걸?’
아직 라피스의 행방에 대한 실마리도 찾지 못했는데, 벌써부터 그 순간이 기대가 되는 나였다.
3. 예정된 배신
검술대회로 인해 온 거리의 인파는 축제의 열기로 들떠있었다.
그 반면 평소 때보다 더욱 조용히 가라 앉아있는 곳도 있었다. 바로 세피온 공작이 머무는 성내의 자택이 그러했다.
니케우스 드 세피온.
오직 검 하나로 평민에서 공작의 지위까지 거머쥔 남자. 모든 평민들의 우상이며, 기사들이 동경하는 존재!
그는 때때로 자리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질 때가 많았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저택안의 사람들도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인보다 훨씬 좋은 청각을 지닌 탓에 움직임 하나, 발걸음 소리까지 주의해야 했다.
그는 최근(이라고 하나 거의 10여년에 가까운 세월이다.)
모든 대외적인 집무를 접은 채 자택 안에서 나오지 않는 중이였다.
심지어 황제의 부름조차 병환을 핑계 삼아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죽을병에 걸렸다는 의혹까지 사고 있었지만, 실상은 지나칠 정도로 건강했다.
그 증거로 방안의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세피온의 모습은
불혹을 훨씬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생기가 가득해 있었다.
세간에 알려진 나이는 이미 60세. 하지만 겉보기로는 4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단지 귀찮아서였을 뿐이다.
요 근래 그는 지금의 생활이 점점 지루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황성 기사단의 대장의 자리도, 사교파티도, 황제를 알현하는 것도 무엇 하나 재미없었다.
아마 적당한 후계자만 있었더라도 당장 자리를 박차고 떠났을 것이다.
잠시 후, 그의 명상을 방해하는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누구냐.”
“저어, 루시엘 드 라비타 백작님이 오셨습니다, 공작님.”
“아아. 라비타 백작 말인가? 안으로 모시게.”
세피온은 얼마 전 보낸 검술대회 참관 초대명단에 그의 이름이 있음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조금 전 그가 정식으로 면담요청을 해왔다는 것 역시.
이윽고 문이 열리며 들어온 이는 은회색의 머리카락을 단정히 하나로 묶은 청년이었다.
몸에서 발산되는 기를 통해 그동안 그가 쌓아온 수련의 역량을 짐작한 세피온은 속으로 적지 않게 감탄했다.
그것은 젊은 나이에 쉬이 이루지 못할 경지였다.
‘20살에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고 했던가?
그 이후로도 쉬지 않고 계속 정진했던 모양이군.
무척 정교하게 다듬어진 기다. 사람들이 라비타 백작을 칭송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군.’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실상 그를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가 한창 활동하고 있을 시기엔 루시엘의 나이가 어렸고,
루시엘이 두각을 드러냈을 땐 이미 세피온은 모든 집무를 접고 저택에서 휴양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방안으로 완전히 들어선 루시엘은 너무 비굴하지도, 당당하지도 않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세피온 공작님. 루시엘 드 라비타라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서 오게, 라비타 백작.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네. 먼 길을 오느라 수고가 많았군.”
“아닙니다. 당연히 와야지요. 제가 공연히 공작님의 시간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귀족들과의 대면을 거부하신다고 들었지만, 어떻게든 뵙고 싶어 억지를 부렸습니다. 제 요청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아닐세. 그렇지 않아도 자네는 한번쯤 만나보고 싶었네. 거기 자리에 앉게나.”
“예.”
세피온은 주위에 대기하고 있던 하인에게 마실 것과 다과를 내오게 하며 자신의
맞은 편 의자에 걸터앉는 루시엘을 빤히 훑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눈앞의 젊은 청년에게 무척 호감이 있었다.
그래서 만남을 요청했을 때도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다.
소문으로 접한 루시엘의 검술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과 수련, 뛰어난 무용은,
젊은 날의 세피온 공작과 무척이나 빼닮은 면이 있었다.
그래서 항간엔 루시엘이 그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세피온 또한 내심 그를 후계자 감이라 생각해두고 있던 참이었다.
평생을 홀로 지낸 탓에 혈육이 없던 그로선, 어차피 양자라도 들여 자리를 물려줘야 할 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젊고 능력 있는 루시엘을 눈여겨보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게다가 부모까지 일찍 여의었으니 걸릴 것도 없었다.
‘흠, 후계자로선 손색없는 재목이다.
야심은 많아 보이지만 스스로 경거망동할 타입은 아닌 것 같고…이 부분은 계속 지켜보는게 좋겠군.’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세피온은 내색하지 않고 싱긋 웃으며 질문했다.
“그래, 나와 만나자고 한 연유가 무언가?”
“그저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공작님을 꼭 한번 뵙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 외의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하하하! 라비타 백작에 대한 소문은 귀가 아프도록 들었네.
그런 자네가 나를 동경한다니 빈말에도 기분은 나쁘지 않군.”
“진심입니다. 처음 검을 드는 순간부터 공작님은 언제나 제 삶의 목표이자 우상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검사를 지향하는 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후후, 잘 알았네. 아, 그보다…펠리온 드 레파르 백작 이었던가? 자네가 그와 같은 마차를 타고 왔다고 들었는데…”
제국의 공식적으로 알려진 라이벌이 한 마차를 타고 사이좋게 등장한 사실은 이미 공국안에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루시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 레파르 백작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습니다.
그도 이번 대회에 초대를 받았다고 하여, 동행을 한 것뿐입니다.”
“호오, 그렇군. 그 또한 평소에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네.
제국에 자네들같이 훌륭한 재목들이 있어줘서 다행이야. 내게 딸이 있다면 당장 사위로 삼았을 텐데 아쉽구만.”
그 순간 잠잠히 입을 다물고 있던 루시엘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번뜩였다.
지금 세피온이 한 말은 가벼운 농담으로 흘려들을 것이 아니었다.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그가 결혼하지 않았으며, 슬하에 자식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겉보기로는 아직도 정정했지만, 나이가 나이이니 만큼 이제 슬슬 후계자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미 항간에 퍼져있는 소문을 루시엘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그 또한 은연중에 자신만큼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야말로 아쉽습니다. 공작님 같은 분이 아버지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허허. 죽은 전 라비타 백작이 그 말을 들었다면 무척 서운해 할 걸세.”
“물론 돌아가신 아버님도 훌륭하신 분이셨죠.
하지만 공작님도 어딘지 모르게 의지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아마도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분이라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만.
아, 과한 욕심으로 공작님의 심사를 어지럽혔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호오, 제법 적극적인 녀석이로군.’
세피온은 그의 속내를 짐작하고 속으로 미소 지었다.
바로 그때였다.
“…시커먼 꿍꿍이는 여전하군. 그 재수 없는 면상도.”
“누, 누구냐!”
인기척도 없이 갑자기 들려오는 말에 루시엘과 세피온은 똑같이 경악했다.
공작이 머무르는 자택은 평소에도 수 십 명의 기사들이 이중 삼중으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아니, 그건 둘째 치고서라도 설마 소드 마스터의 기척을 피해 침입한 괴한이 있을 줄이야!
침착을 되찾은 것은 세피온이 더 빨랐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상당히 낯익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곧이어 어둠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사람을 발견한 세피온은 어느새 검을 빼어든 루시엘을 향해 말했다.
“아아, 걱정할 것 없네, 라비타 백작. 아무래도 내 친우가 장난을 친 것 같군.”
“네? 아시는 분입니까?”
친우라는 표현에 루시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낯선 사람을 바라보았다.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나 체구만으로도 상당히 어린 소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꽤 오래전부터 알아왔던 친구네. 미안하지만 이만 돌아가 주겠나? 이다음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죠.”
루시엘은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잠자코 몸을 돌렸다.
세피온 공작에게 밉보여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으니,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이 현명하리라.
덜컥.
루시엘이 나가고 나자 세피온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사방에 결계를 치는 일이었다.
평생을 검사의 길만 걷던 그가 마법을 쓰다니!
누군가 보았다면 경악할 일이었지만, 실제 그의 정체를 생각하자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유희 중인 블루 드래곤 ‘라미아스’. 바로 그것이 세피온의 본 모습이었으니까.
이윽고 어둠속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이는 새카만 피부에 황금색 눈동자를 지닌 어린 소년이었다.
하지만 겉보기만으로는 상대의 진가를 평가할 순 없었다.
그 정체가 땅의 정령왕 트로웰이라면 더더욱 당연한 일이다.
“이번 유희는 꽤 재미있나봐, 라미아스? 벌써 40년 넘지 않았나? 이전엔 길어도 20년에 그치더니 별 일 이군.”
“큭! 갑자기 나타나면 어떡해, 트로웰!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그 순간 늘 엄숙하고 지엄하기만 했던 세피온의 말투가 완전히 바뀌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투정부리는 것 같이 괄괄한 어투였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본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트로웰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내가 언제는 예고하고 찾아왔던가? 새삼스럽게 놀라긴.”
“그래도 손님이 있을 땐 기척을 내줘야 할 거 아니야! 평소엔 안 그러더니 갑자기 무슨 심보야?”
“아아. 그냥 놈이 재수 없어서.”
“흐음. 루시엘을 아나보지?”
의아하게 묻는 말에 트로웰은 생긋 미소로 답변했다.
그것을 본 라미아스는 더 이상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가 기분이 나쁠수록 웃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쩝, 분위기를 보아하니 조만간 사단날 것 같구만.
대체 뭣 때문에 또 저렇게 심통이야?
정령왕한테 밉보인 녀석을 들였다간 나까지 무사하지 않겠지.
이렇게 되면 후계자 건은 물 건너 간 건가? 어디 적당히 다른 녀석이…’
그가 그렇게 루시엘을 제외한 다른 후보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심통 부린 적 없어. 내키지 않으면 그렇게 까진 하지 않아도 돼.
네 유희를 방해할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뭐, 그 다음일은 상상에 맡겨두겠지만.”
“윽! 남의 생각을 멋대로 읽지 맛!! 대체 갑자기 무슨 용무야?”
“별로. 네 계약자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그냥 따라온 것뿐이야.”
“내 계약자? …라니!! 설마 에, 엘퀴네스가 왔다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떡 벌리는 라미아스의 말에 트로웰은 보란 듯이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엘퀴네스의 모습이 있었다.
미묘하게 찌푸려진 미간이 왠지 평소보다 기분이 나쁜 듯 보였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기가 죽었겠지만,
라미아스는 그 반대였다. 그는 오래전부터 흔치않은 엘퀴네스의 추종자였던 것이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직접 와주다니!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다.
그 순간, 라미아스의 세상은 온통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엘퀴네스를 향해 달려갔다.
“엘퀴네스! 이게 얼마만이야! 정말 보고 싶었어~~!”
잽싼 행동이었지만 엘퀴네스 또한 대처가 빨랐다.
그는 이미 이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짧게 혀를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의 바로 앞에 커다란 얼음벽이 솟아올랐다.
쿠웅!
“큭! 아이고, 머리야…”
미처 달려가던 속도를 줄이지 못한 라미아스는 그대로 벽에 충돌하고 바닥을 뒹굴었다.
부딪힌 이마가 벌겋게 부어올랐지만 엘퀴네스는 걱정은 커녕 동정의 시선조차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추잡하니까 일어나라. 그동안 전혀 변한 게 없군.”
“우엥. 너무하잖아, 엘퀴네스~. 반가워서 그러는 건데 그까짓 거 한번만 얌전히 안겨주면 안 돼?”
“…죽고 싶은가.”
“에헤헤. 너의 품안에서라면 죽어도 좋…, 아, 알았어.
농담이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 하긴, 그렇게 차가운 모습이 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인 거지만~!”
라미아스는 두 손을 모으며 행복한 듯 황홀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동시에 엘퀴네스와 트로웰의 표정은 자연히 일그러졌다.
변태적인 발언은 둘째 치고, 본인이 현재 60넘은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전혀 없는 걸까?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라미아스는 어색한 얼굴로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아, 아참. 그런데 네가 웬일이야?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를 다 찾아오고.”
“그저 이곳에 용무가 있는 김에 들렸을 뿐이다. 몇 가지 알아볼 것도 있고.”
“용무라니? 정령왕들이 이런 좁은 공국에 무슨 일이 있어서?”
“아아, 내 계약자가 이번에 네가 연 검술대회에 참가하게 됐거든.”
“다른 계약자? 엘퀴네스의? 호오~ 그게 누군데 두 정령왕이 여기까지 따라다녀? 당연히 내가 아는 드래곤이겠지?”
“아니, 인간이다.”
“아, 그렇군…뭐? 인간?”
무심코 대답하던 라미아스는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인간이라니! 물의 정령왕이 지금 인간에게 소환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건가? 그는 곧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왠지 믿을 수가 없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하군. 한번 만나보고 싶은걸?”
“잘됐군. 그 녀석도 너에게 용건이 있는 모양이거든.”
“호오~ 그래? 나에게 볼일이 있다면 어느 쪽?”
“물론 블루 드래곤인 라미아스지.”
“이런, 그건 곤란한데. 지금이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나는 가급적 본체로 돌아갈 생각이 없거든. 유희 중엔 되도록 현실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알고 있어. 네 녀석의 그 특이한 고집 때문에 일부러 검술대회에 참가시킨 거다.
그러니 우승하면 제대로 만나줘라. 그 정도도 양보하지 않겠다면 너와의 계약을 끊겠다.”
“헉! 그럴 땐 협박이 아니라 부드럽게 부탁하는 거라고! 아잉~ 내 맘 다 알.면.서~”
그는 부끄럽다는 듯 손가락을 비비꼬며 얼굴을 붉혔다.
아까전보다 엘퀴네스의 얼굴이 창백해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그는 유달리 딱딱해진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소름끼치니까 관둬. 네놈과 계약한 일이 슬슬 후회되려고 하니까.”
“하하, 자극이 심했구낭. 그런데 정말 별일이네?
겨우 그걸 부탁하려고 날 찾아온 거란 말이야? 그 인간 계약자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봐?”
“겸사라고 말했잖아. 그건 그렇고, 이번에 상품으로 내놓은 에고소드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거겠지?”
“문제? 아아, 설마 폭주한 마검일려고.
그냥 주목 좀 끌어보려고 내놓은 것뿐이야.
실드와 힐 계열의 보조마법 밖에 안 걸려 있어서 그다지 등급이 높은 것도 아니거든.”
드래곤들은 거짓말을 잘 하지 않는 종족이었지만,
엘퀴네스는 확인 차원에서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줄 아는 그라면 방금 말의 진위여부를 확실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선에 트로웰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데 둘이 요즘 함께 다니나 보지?
이프리트나 미네르바라면 모를까… 정령계의 쌍벽을 이루는 아웃사이더들이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래?
혹시 둘이 사귀어?”
“거기서 한 마디만 더하면 죽인다.”
“…큽. 이상하구만. 성격이 바뀐 것 같지는 않은데.”
엘퀴네스와 트로웰. 이들은 제법 궁합이 잘 맞는 성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단 한 번도 사이좋아본 역사가 없었다.
(물론 이프리트와 엘퀴네스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러니 지금처럼 함께 다니는 모습이 라미아스의 눈에 괴상하게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그는 마침 떠오른 사실에 반색하며 외쳤다.
“아참, 트로웰! 미네르바 하니까 생각나는데,
이번에 내가 초대한 귀족 중에 그의 계약자도 있어.
아까 봤던 루시엘이란 녀석이랑 같이 왔던 모양이던데, 미네르바도 함께 오지 않았을까?”
“!!”
그 순간 트로웰의 입가에 서려있던 미소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것을 눈치 챈 엘퀴네스는 쯧 하고 짧게 혀를 찼지만, 라미아스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세대에 정령왕을 소환한 인간이 2명이나 되는 거잖아?
거참 정말 신기하네! 근데 네 계약자는 왜 그 사실을 밝히지 않는 거야?
알려지는 순간 출세는 따놓은 당산일 텐데.
어쨌든 이번 대회는 정말 볼만 하겠는걸? 엘퀴네스에 트로웰, 미네르바까지 와 있으니!”
“…이프리트도 있어.”
“오옷, 이프리트까지? 그게 정말이야? 우와, 그럼 이번 대회에 4대 정령왕이 모두…”
흥분해서 소리치던 라미아스는 트로웰과 얼굴을 마주치곤 점점 말소리를 줄였다.
그를 똑바로 쏘아보는 황금색 눈동자가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웠기 때문이다.
본래가 다정한 성격은 아니었으나 지금의 그는 분명 화를 내고 있었다.
라미아스는 자신이 한 말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뭔가 잘못 건드렸다는 사실만 느꼈을 뿐.
그렇게 라미아스가 혼자서 쩔쩔매고 있을 때였다.
트로웰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소 지으며 무심코 내뱉는 말처럼 물었다.
“아까 보니 후계자 문제로 고민하는 것 같던데…”
“응? 아아, 이왕 시작한 거 끝도 제대로 맺으려고.
귀찮아서 결혼을 안했더니 양자 문제가 걸리지 뭐야?
지금 여러 가지로 알아보는 중이야. 아까 여기에 있었던 인간도 그 후보 중 한명이고.”
“루시엘 말인가.”
“맞아, 그 녀석. 탐욕이 많긴 해도 제법 쓸 만한 인간이야.
아까 내 유희 방해 안한다고 했었지?
그럼 너랑 상관없이 후계자 목록에 그대로 놔둬도 되는 거지? 나중에 딴 말하기 없기다?”
“뭐, 마음대로. 하지만 굳이 누굴 고를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걸. 어차피 죄다 죽을 테니.”
“뭐?”
놀라서 되묻는 말에 트로웰은 소름끼칠 만큼 잔인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인간이란 종족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날이 멀지 않았거든.”
3회전 대결은 예상보다 훨씬 더 싱겁게 끝났다.
상대편이랍시고 나온 선수가 긴장한 나머지, 본격적인 공격에 들어서기도 전에 칼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관람석에 있던 귀족들의 시선을 너무 의식한 탓이었다.
덕분에 손쉽게 우승을 거머쥔 나를,
다른 선수들은 매우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경기 일자를 이틀 뒤로 두고 있던 크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어~ 축하한다. 별로 힘들이지도 않고 이겼다며? 운도 좋은 녀석.”
“헤헤,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요.”
“오냐, 부럽다! 그것도 아주 배 아프게 부럽다! 짜식, 넌 좋겠다. 난 아무래도 3회전 탈락할 것 같은데 말이야.”
“엥? 왜요?”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그는 마치 비밀이야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최악이야. 하필이면 내 상대 선수가 ‘바로크’거든.”
“그게 누군데요?”
“헉! 용병왕 바로크를 모른단 말이야?
용병 길드에서 내로라하는 실력자잖아.
이번 경기 2회전도 최단 시간으로 통과했다고 들었어. 이미 소문이 쫘악 퍼졌는데 전혀 못 들었단 말이야?”
“소문엔 그다지 관심이 없다보니…”
“나참, 그래도 기본적인 정보쯤은 알아두라고.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거니까.”
시합에 대한 스트레스 탓인지 그는 평소보다 훨씬 더 말이 많아졌다.
이후로도 주르륵 이어지는 잔소리를 한귀로 흘려들으며 나는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그때 무심코 눈에 들어온 것은 엘뤼엔과 트로웰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드래곤에게 다녀온 이후부터 그들은 왠지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원래가 잘 떠들고 웃던 성격들은 아니었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마디도 안하고 있으니 확실히 문제가 심각하지 않은가.
특히 트로웰은 이곳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그로 되돌아 간 것 같았다.
간혹 눈을 마주칠 때마다 서늘하게 흐르는 살기가 누군가에 대한 깊은 증오를 담고 있었다.
‘혹시 미네르바에 대해서 들은 건가?’
이곳에 와서 그의 기분이 저조할 이유라면 그 것밖에 없었다.
드래곤에게 정보를 들었거나, 직접 마주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당장 날뛰지 않고 얌전하게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답답한 심정은 이프리트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의 얼굴은 아까부터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왜들 이리 궁상이야?
원래 말이 없는 엘퀴네스야 그렇다 쳐! 트로웰, 넌 또 갑자기 왜 그래? 뭐라고 말 좀 해보지?
-…….
-크아악! 정말 이러기냐?
네가 이런다고 미네르바가 정신 차릴 것 같아?
어차피 그 녀석은 그 인간 놈이 죽기 전까진 미련 못 버려. 배신?
이미 콩깍지가 쓰인 놈이 그런 거 따질 것 같냐? 혜안이 있으면서 그런 것도 몰라?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이프리트의 말에도 트로웰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를 테면 ‘너는 짖어라, 나는 무시하련다’랄까.
그에 더더욱 화가 난 이프리트는 급기야 금기를 침범하기에 이르고 말았다.
-그래봤자 미네르바가 널 돌아보는 일은 없을 걸?
그놈이 죽든 배신당하든 또 다른 인간이나 찾아 헤맬게 틀림없다고!
-!!
‘맙소사! 저 바보 정령왕이!’
당황한 나는 옆에서 크리스가 떠드는 것도 잊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지만 예상외로 트로웰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니,
오히려 생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게 아닌가.
잠시 후 이어지는 그의 대답에 나는 물론 이프리트까지 경악하고 말았다.
-상관없어. 어차피 전부 죽일 거니까.
-뭐, 뭐야?
-다 없앨 거라고. 그럼 네 말처럼 미네르바가 다른 인간을 돌아보는 일도 없겠지.
인간이라는 종족이 화근이라면 사라지게 만들면 그만이야.
-너 미쳤어? 그렇다고 모든 인간을 전부 죽여? 아크아돈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래?
-다른 종족도 얼마든지 있어.
-그야 그렇지만… 아, 그래! 엘은? 저 녀석도 인간이잖아. 그런데도 죽이겠다고?
내가 마지막 희망이라고 여긴 건지,
이프리트는 손가락질까지 하며 나를 가리켜 보였다.
하지만 트로웰의 황금색 눈동자는 마치 유리알처럼 아무런 동요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곧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인간은 무조건 싫어. 예외 따윈 없어.
“!!”
그때서야 나는 그가 나로 인해 망설이고 있던 감정을 완전히 정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난 몇 개월의 설득으로는 결국 질투에 미친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약속한 기간이 얼마나 남았더라?
잠깐 속으로 계산해 보던 나는 남은 시간이 겨우 한 달 남짓하다는 것을 깨닫고 머릿속을 하얗게 비웠다.
그때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황금시대의 종말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는 기억이었다.
이유도 모른 채 멸망한 인간들이 다시 땅을 일구어서 일어나기까지 2천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고 했다.
즉, 내가 있던 시대의 인간들이 지금 시대에서 무사히 이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설마 트로웰이…? 아, 아닐거야. 녀석이 했다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게 만들었을 테니,
다시 왕국을 만들어낼 인력이 생겨날 리가 없어. 으윽, 근데 정말이라면 어쩌지?’
이럴 줄 알았으면 반드시 설득하겠다고 큰소리나 치지 말걸.
물밀듯이 밀려오는 후회감에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쥐어 잡았다.
그러자 혼자서 신나게 떠들고 있던 크리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갑자기 일어서서 뭐해? 어쭈 표정 봐라~?
감히 이 형님의 충고가 싫다 이거냐? 지금 넌 3회전 통과해서 여유만만이다 이거지?”
“아니, 그게 아니라…휴우. 저 잠깐만 머리 좀 식히고 올게요, 형.”
“어어? 자, 잠깐! 정말 나 때문이야? 에, 엘?”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도 무시하고 나는 쓴 표정으로 방안을 나섰다.
그러자 이프리트가 냉큼 따라와 어울리지도 않게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 괜찮냐? 충격 심하게 받은 건 아니지? 저기, 저 녀석이 말은 저래도 진심은 아닐 거다, 아마.
-트로웰이 빈말을 하던 성격이던가요?
-응?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 그게 말이지…
-후후…억지로 위로 안 해도 돼요. 저도 다 알고 있으니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인간을 멸족시키겠다고 말했고,
제가 그것을 1년 동안 설득한다는 조건으로 함께 다니던 거였거든요.
그동안 나름대로 사이가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역 부족 이었나 봐요.
-쯧쯧. 네가 무슨 죄가 있겠냐? 다 그 빌어먹을 미네르바의 계약자 탓이지.
-흐음. 확실히 그놈이 원인이긴 하죠. 이참에 아예 찾아가서 없애버릴까…
-뭐?
뜨억한 표정으로 되묻는 이프리트를 보며 나는 베시시 웃었다.
-농담이에요. 어차피 지금은 죽이려고 해도 소용없을 걸요.
제가 알기론 녀석은 평생 폐인으로 방황하다가 죽을 운명이거든요.
-헐. 네가 언제부터 예언가가 된 거냐?
-다 아는 수가 있죠! 그래도 어떤 녀석인지 한번 만나보고는 싶네요. 열 받는데 가서 한 대만 패주고 오면 안 될까요?
그러자 이프리트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더니 곧 유쾌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크하하! 안될게 뭐있냐? 한 대만 아니라 백대라도 때려보자. 안 그래도 나 역시 근질근질하던 참이다.
-좋아요! 근데 미네르바가 말리면 어쩌죠?
-어쩌긴! 그 녀석은 내가 막을 테니 넌 신경 쓰지 말고 분이 풀릴 때까지 때려라.
이거 아주 오랜만에 재밌게 됐는데? 크하하하!
호쾌하게 웃은 그는 단번에 나와 의기투합을 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결정 난 일을 나와 그가 직접 행동으로 실천 하려 할 때였다.
“저, 저 녀석입니다, 도련님! 검은색 후드로 얼굴을 음침하게 가린 녀석! 저 놈이 틀림없습니다!”
“엥?”
시끄러운 소리에 돌아보니 오른쪽 복도 끝에 시커먼 두 남자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그 중 한사람은 언젠가 연무장에서 마주친 적이 있던 브루스였고,
그 옆에는 한눈에 봐도 귀족임이 티 나는 청년이었다.
분위기나 말하는 정황을 보아 맥시우스가의 장남이라는 그 남자가 틀림없었다.
벌써 며칠이나 지난 일 가지고 이제 와서 복수랍시고 찾아온 건가?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브루스는 약 올리는 말투로 떠들었다.
“헷! 그동안 네놈을 찾아다니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네놈의 무례를 여기 계신 우리 도련님께 전부 고했다!
넌 이제 죽은 목숨이야! 헤헷!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어서 무릎 꿇고 비는 게 좋을 걸?”
살려달라고 벌벌 떨 때는 언제고 주인 옆에 있으니 다시 기고만장해진 모양이다.
그때 조금 더 겁줄 걸 그랬나? 이프리트도 어이가 없었는지 황당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손봐줄 인간이 여기 하나 더 있는데?
가는 곳마다 저런 놈이 들끓어서 어쩌냐, 엘? 이햐~ 역시 인기 많은 남자란 괴로운 법이구만.
피식.
즐거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의 말투가 재미있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그것을 비웃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브루스와 도련님이라는 남자의 얼굴이 똑같이 찌푸려졌다.
“저, 저 찢어죽일! 저것 보십시오, 칼빈님!
글쎄 반성이라곤 조금도 하지 않는 모습이잖습니까?
저놈은 제가 도련님의 수하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공격했습니다!
이는 맥시우스가의 위명을 무시하는 처사! 귀족 무서운 줄 모르는 놈이 틀림없습니다!
가문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본때를 보여주셔야 합니다!”
“…알겠으니 너는 물러서 있거라. 내가 직접 말해보겠다.”
장황하게 떠벌리는 브루스의 말을 칼빈이란 남자는 단 몇 마디의 말로 일축했다.
그 모습에 브루스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고, 반대로 나는 호감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남자는 적어도 시종의 말에 흥분해서 같이 안하무인격으로 덤비는 자는 아닌 것 같았다.
그 증거로 나를 차분히 훑어보는 눈동자에는 나에 대한 일말의 불쾌한 빛도 보이지 않았다.
이 경우 감정 컨트롤이 잘 되어 있거나, 정말 화가 나지 않았거나 둘 중의 하나인데 둘 다 평범한 사람의 반응은 아니었다.
잠시 후 칼빈은 슬쩍 턱을 들어 올리며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그대가 내 수하에게 무례를 범했다는 자가 맞는가?”
“글쎄요. 하도 열 받게 해서 가볍게 겁을 준건 맞지만, 무례를 저지른 기억은 없는데요?”
“듣기론 그대가 검으로 위협을 했다고 들었다.
무기를 소지하지 못한 자에게 검을 들이미는 것이 그대의 정의인가?”
“전 기사가 아니거든요. 신분을 내세워 협박하는 사람에게 그에 합당한 대우를 했을 뿐입니다.”
“…귀족의 수하를 건드리는 일은,
곧 그가 모시는 귀족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군.”
“적어도 그것을 믿고 설치는 부류는 아니거든요.”
당돌하다면 당돌한 내 대답에 이제껏 아무 표정 없던 얼굴이 살풋 찡그려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조금 딱딱해진 말투로 물었다.
“브루스가 그대를 찾은 것은 경기장에서다. 이번 3회전 시합을 통과했더군. 다음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나?”
“모릅니다.”
“그건 유감이군. 바로 나다.”
“!”
그의 말에 나는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4회전은 조별 최종 우승자를 가리기도 하는 시합.
즉 그가 나와 같은 1조란 소리였는데, 나는 어디에서도 눈앞의 남자를 본 기억이 없었다.
그제야 크리스가 자잘한 소문에도 신경 쓰라고 했던 말이 이해가 되었다. 바로 이럴 때 당황하지 않기 위해서인가보다.
“설마 같은 조인 줄은 몰랐네요.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거죠?”
“시종의 시비에 같이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대가 귀족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그 점에 대해서 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군.
그렇다 해도 권력을 내세워 강제로 굴복시키진 않겠다.
4회전 시합에서 내가 이기면 그대는 여기 있는 브루스에게 무릎 꿇고 사죄해라.”
“호오. 만약 제가 이기면요?”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단호하게 대답하는 말에서 나는 그가 스스로의 실력에 무척 자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기야 아버지가 유명한 검사이고, 그 자신 또한 어릴 때부터 검을 배워왔다면 자부심이 대단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옆에서 대놓고 키득거리는 이프리트를 무시하며 나는 슬쩍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도 저 역시 조건을 걸어야 균형이 맞죠. 말해두지만 시비를 건 것은 그쪽의 브루스씨가 먼저였다고요.”
“당돌한 자군. 그럼 원하는 것을 말해보아라.”
“카, 칼빈님!”
순순히 응해줄 거란 생각을 못했는지 브루스가 기겁을 하고 소리쳤지만,
그는 깨끗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얼마나 대단한 것을 원하겠냐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원래 수하의 죄는 그의 상관에게 묻는 법이죠.
칼빈님이라고 하셨나요? 제가 이기면 정중하게 사과해 주세요.
그때의 일은 물론, 지금 여기서 제 갈 길을 막고 있는 것까지 전부.”
“!!”
“아, 아니 저놈이 감히 누구에게!!”
그때서야 처음으로 칼빈의 얼굴이 분노로 딱딱하게 굳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자신이 내뱉은 말 때문인지 대놓고 화를 내지 못하고 속으로 삭이고 있는 듯 했다.
이윽고 말을 내뱉는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건방진 제의지만 수락하겠다.
하지만 결코 그대가 나를 이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시합이 끝난 후, 지금 내게 행하는 무례의 대가 역시 따로 받겠다.”
“좋을 대로. 그럼 전 이만 가 봐도 될까요? 급한 용무가 있는데 칼빈님 덕분에 시간이 지체됐거든요.”
여기서 말하는 급한 용무란 두 말할 필요 없이 미네르바의 계약자를 찾아가는 일이었다.
칼빈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 한 나는,
그래도 귀족이라는 예의상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 틈에 슬쩍 브루스를 째려보자 마침 나를 보고 있던 녀석이 흠칫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반드시 이겨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나서일까?
왠지 4회전 시합은 지금까지와 달리 무척 즐거울 것 같았다.
참관하러온 귀족들이 머무는 건물은 엄격한 감시와 경호를 받고 있었지만,
내가 그곳을 뚫고 들어가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처음 가본 곳이긴 했어도 내부는 내가 있던 곳과 똑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고,
목적지인 미네르바가 있는 곳은 주변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자연체의 정령들이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기척을 최대한 죽인 채 몸을 숨기며 걷던 나는 옆에서 편안하게 따라오는 이프리트를 향해 물었다.
-갑자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미네르바가 인간에게 소환된 지 얼마나 된 거예요?
-흠, 글쎄다. 한 5년쯤 됐나?
-둘 사이가 처음부터 좋았나요?
-나쁘진 않았지. 녀석은 원래 인간에게 호의적이었으니까.
그게 사랑이란 감정으로 변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말리진 않았어요?
-당연히 말렸지! 지금도 트로웰 녀석 살벌한 거 봐라. 그때라고 안 그랬을 것 같아?
그런데 다툼이 길어지니까 미네르바가 아예 정령계로 돌아올 생각도 안하더라고.
나야 그러려니 했지만, 트로웰은 아직도 포기가 안 되나 봐. 하긴, 탄생 때부터 꽤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으니….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우리는 어느새 미네르바가 있는 방 앞에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막상 다가서려는 순간, 갑자기 문이 열리는 것을 보며 나와 이프리트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잠시 후 방안에서 나오는 사람은 꽤 준수한 얼굴의 20대 남자였다.
그의 이마에 새겨져 있는 정령왕의 인장을 통해, 나는 한눈에 그가 바로 미네르바의 계약자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저 사람이…”
-맞아, 미네르바의 계약자, 펠리온 드 레파르인지 뭔지 하는 놈이다.
이프리트의 말에 나는 다시 한 번 남자의 모습을 빤히 훑었다.
생각보다 미소를 가득 드리운 얼굴이 전체적으로 무척 호감 가는 인상이었다.
그는 우리가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방안의 누군가를 향해 말을 건네고 있었다.
문 너머로 힐끗 보이는 모습은 분명히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였다.
“그럼 미네르바님, 저는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금방 돌아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딱딱한 말투와 달리 다정하게 건네는 남자의 목소리는 사랑에 빠진 연인 같이 부드러웠다.
그에 화답하는 목소리 또한 내가 알던 이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따뜻한 느낌이었다.
“벌써 3일째 연달아 파티로군.
하루쯤은 빠져도 상관없지 않나?
어제도 종일 시달려서 피곤할 텐데.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잖아.”
“귀족들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는 목적인만큼 어쩔 수 없지요.
잠시 얼굴만 비추고 오는 거니 그렇게 서운한 표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당신을 오래 기다리게 하긴 싫으니까요.”
“나 때문에 무리할 것 없다. 인간들 사이에서 이런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후훗…아무리 그래도 그것이 당신보다 소중하진 않습니다. 기다리세요. 금방 돌아 올 테니까.”
나긋하게 중얼거린 남자는 미네르바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춘 뒤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봐도 완벽한 닭살 커플이었기에, 저런 자가 배신한다는 것이 잠시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남자 혼자만이 남아 어디론가 걸어가자, 나는 이프리트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도 따라가요.
-엥? 저 녀석을?
-원래 저 남자한테 용무가 있는 거잖아요. 보아하니 파티에 참석하는 모양인데, 따라가서 기회를 노리자구요.
-어이어이. 난 그렇다 쳐도 네 차림이 너무 눈에 띈다는 생각은 안드냐?
넌 평민이라고.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파티면 사람이 많을 테니까 잘 섞이면 들키진 않을 거예요. 여기서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보다야 낫잖아요.
-쩝, 그야 그렇지.
그렇게 나와 이프리트가 미네르바의 계약자 뒤를 막 밟으려던 순간이었다.
-여기서 뭘 하는 거냐?
“!!!”
텁!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놀란 나는 비명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한 손으로 틀어막았다.
빠르게 요동치는 심장을 달래며 돌아보니, 언제 우리를 따라온 건지 엘뤼엔이 삐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에, 엘뤼엔? 여긴 왜…
그러자 나 못지않게 놀란 표정을 하던 이프리트가 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소리쳤다.
-너 이 자식! 우리한테 감정 있냐? 일부러 기척을 죽이고 나타난 이유가 뭐야!
-별거에 다 놀라는군. 이정도 기척도 눈치 채지 못한 네 감각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안 드나?
-뭬야? 내가 어디가 어때서?
-다들 조용! 이러다 미네르바한테 들키겠어요. 일단 이동부터 하자구요, 어서요!
황급히 쏘아붙인 내가 냉큼 미네르바의 계약자를 따라가자,
막 말다툼을 하려던 정령왕들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조용히 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엘뤼엔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게 사람 뒤를 밟는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군. 저 녀석을 따라가서 뭘 어쩌려는 거지?
-응? 왜, 재밌잖아. 원래 이런 스릴감은 돈 주고도 못사는 거라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사람을 미행해보겠어?
-희한한 녀석.
엘뤼엔은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따라오는 것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잠시 후 미네르바의 계약자가 도착한 곳은 건물 중앙에 마련된 파티홀이었다.
이미 한창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는지 수많은 남녀가 서로 어우러져 춤과 노래에 빠져 있었다.
그 중 몇몇의 사람들이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말을 건 사람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신사였다.
“어서 오게, 레파르 백작. 오늘은 좀 늦었군.”
“준비가 조금 오래 걸렸습니다. 그런데 공작님은 혼자십니까? 다른 분들은?”
“아하하! 아니네. 다들 저쪽에서 대화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다네.
자네도 함께 하지. 그런데 언제쯤이면 자네의 여신님을 보여줄 텐가?
벌써 3일째 파티인데 그 분의 발끝조차 볼 수 없다니 서운하기 그지없네.”
“죄송합니다. 미네르바님이 워낙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을 어색해 하셔서.”
“껄껄, 농담이네, 농담. 자네라고 정령왕의 의지를 꺾을 수 있겠는가?
자, 어서 가게. 아까부터 사람들이 자네만 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네.”
그가 사람들 틈에 섞이는 틈을 타 나 또한 자연스럽게 그들 속에 파고들었다.
다행히 시종들 중에서도 얼굴을 가린 이들이 종종 되어서, 내 후드 차림도 크게 의심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정말 시종으로 오해해버려서 곤란했달까.
그것도 하필이면 파티장에 들어서는 순간 운 나쁘게 시종장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딱 걸려버리고 말았다.
“이봐,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어서 떨어진 음식을 다시 채워야지! 뭘 그렇게 두리번 거리고 있어?”
“에? 저요?”
“그럼 여기에 너 말고 놀고 있는 녀석이 어디에 있다는 거야?
게으름 부리지 말고 어서 일해. 안 그럼 오늘 일당은 없을 줄 알아! 자, 어서 이 쟁반을 들고 날라!”
그가 가리킨 것은 엄청난 양의 음식이 담긴 무수한 쟁반들이었다.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시종들 틈에 섞여 한참동안이나 테이블에 음식을 나르느라 바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일의 양이 줄기는커녕 여전히 그대로인 게 아닌가?
이놈의 귀족들이 얼마나 돈이 썩어 넘치는지,
내용물이 조금만 식어도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에 늘 따뜻한 음식을 새로 내와야만 했던 것이다.
(이때 낄낄거리고 웃는 두 정령왕들은 무시하도록 하자.)
그러는 동안에도 미네르바의 계약자는 여러 무리의 사람들에게 휩쓸려 다니고 있었다.
수없이 반복되는 정치적인 얘기와 사교적인 화제가 지루해질 법 하건만,
그는 늘상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지 않고 사람들을 상대했다.
그런 분위기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나참. 저게 어디가 인사차 잠깐 들리는 거냐?’
미네르바한테 금방 돌아온다고 말한 것치곤, 그는 대화에 빠져 꼼짝도 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화제가 떨어지면 오히려 그 스스로 직접 다른 주제거리를 꺼내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눈으로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사람들 틈에 떨어져 혼자가 되었다 싶자,
그는 품안에서 양피지를 꺼내어 뭔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다 적은 후 그는 마침 홀을 돌아다니는 척 주위에서 그를 감시(?)하고 있던 나를 보며 말했다.
“어이, 거기 너. 잠시 이리와 보거라.”
“저요?”
순간 심장이 철렁한 느낌이었지만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금 적었던 쪽지와 은화 한 개를 내게 건네주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발코니에 가면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그에게 전달해 주거라. 돈은 네가 가져도 좋다.”
“네? 하지만…”
“레파르 백작이 전해주는 것이라 하면 알 것이다.
걱정 말고 너는 전달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럼 그 사람이 네게 다른 무언가를 줄 것이다.
그것을 내게 가져오너라. 가급적 사람들 눈에는 띄지 않게 조심하고.”
“예, 알겠습니다.”
역적모의라도 하는 건가?
왜 찾아가서 말을 하면 될 걸 가지고 굳이 쪽지를 주고받는 거래?
어리둥절하게 생각하던 것도 잠시,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몸을 피한 나는 씨익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손안에 고이 접힌 양피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쭉 내 뒤를 따라다니고 있던 정령왕들도 호기심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으하하, 그 자식 바보 아냐? 완전히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구만. 뭐라고 적혀있냐? 한번 펴봐.
-잠깐만 기다려 봐요. 엘뤼엔, 여기에 이상한 마법 같은 거 걸려 있는 건 아니지?
-그냥 평범한 종이다. 열어봐도 아무 지장 없어.
그의 말에 안심한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쪽지를 펴보았다.
즉석에서 썼다는 것을 증명하듯, 아무렇지 않게 휘갈긴 글체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응? 이게 전부?’
뭔가 대단한 사건이라도 써있을까 기대했던 바와 달리,
안에 적힌 것은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짧은 한 문장뿐이었다.
내가 실망한 표정을 짓자, 마찬가지로 잔뜩 얼굴을 찌푸린 이프리트가 물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걸로 끝이야? 또 다른 말은 없어?
-으음. 그런 가 본데요. 발코니로 가봐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래? 그럼 얼른 가보자고. 이거 은근히 재밌는걸?
-후후, 알았어요. 근데 사람들이 많으면 어떡하죠? 쪽지를 건네줘야 할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그런 내 우려와는 다르게 도착한 발코니에는 단 한사람의 그림자 밖에 없었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느낌상 장신의 남자인 것 같았다.
여자라면 스캔들이라도 생각했겠지만 남자라니. 정말 역적모의라도 하는 건가?
그러나 이런 생각도 그리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다.
미리 사람을 보내기로 약속을 해둔 것인지,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기척을 느낀 상대편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던 것이다.
“레파르 백작이 보냈나?”
“!”
그 순간 나는 온몸의 피가 싸악 식는 것을 느꼈다.
꿈에서라도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경직되는 얼굴을 느끼며 천천히 내 앞에 다가오는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등지고 있는 탓에 침침하기는 여전했지만, 얼굴을 알아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어깨까지 내려온 은회색의 머리카락과 노란빛이 도는 눈동자.
냉막한 얼굴로 잘도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녀석! 그가 맞음을 확인한 순간,
나는 이때까지 까맣게 잊고 있던 놈의 이름을 기억하고 이를 갈았다.
“루시엘…”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정말 빌어먹을 정도로 짜증나는 우연이었다.
대체 이 녀석이 여긴 왜 온 거지?
그러고 보니 언젠가 크리스가 그에 대해서 말을 했었던 적이 있었다.
20살에 소드 마스터가 된 엄청난 귀족이 왔다나 뭐라나.
그때도 분명 루시엘이란 이름을 들었었는데, 왜 기억하지 못했던 걸까?
다음에 만날 때는 절대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런 상황이면 뭘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행히 놈은 아직 나를 못 알아보고 있는 듯하니, 나중에 다시 기회를 노려야 할 것 같았다.
“뭘 그렇게 멀뚱히 서있는 거지? 레파르 백작이 보낸 게 맞냐고 물었잖아.”
내가 한참동안 말이 없자 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덕분에 정신이 든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묵묵히 손에 쥔 것을 내밀었다.
시종치고는 전혀 공손하지 않은 태도에 루시엘은 살풋 얼굴을 찡그러졌지만 별다른 책망 없이 쪽지를 넘겨받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읽을 거란 예상과 달리 놈은 말없이 그것을 품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엷은 실크에 쌓인 편지를 꺼내 다시 내게 건네주었다.
“레파르 백작이 기다리던 것이다. 가서 전해 드리거라.”
‘말 안 해도 알거든?’
나는 속으로 삐딱하게 중얼거리며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루시엘은 아까보다 더욱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아까부터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군. 혹시 말을 못하는 건가? 아니면 레파르 백작이 그리 하라 시키더냐?”
제 딴에는 감히 귀족의 말에 입을 열지 않는 이가 있으리라곤 생각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피식 웃은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살짝 인사를 마치고 돌아섰다.
보지 않아도 지금 놈의 표정을 예측하기란 무척 쉬었다. 아마 잔뜩 일그러져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이프리트가 중얼거리는 소리는 내 예상과 하나도 틀리 지 않았다.
-휘유. 저놈 표정 보게? 저러다 아주 잡아먹겠네,
그려. 근데 너 귀족한테 그렇게 삐딱하게 굴어도 돼? 저러다 보복한다고 설치면 골치 아플 텐데?
-상관없어요. 다음에 만나면 땅에 파묻어 버릴 거니까.
-헤에? 저 녀석하고 무슨 원수진 일 있냐?
-네! 아주 뿌리 깊은 원한이 있죠. 예전에 저 자식이 날 죽이려고 했다구요. 재수 없는 변태귀족!
-변태?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데?
-저게 어디가요? 변태도 저런 상변태가 따로 없구만!
-흐음. 역시 인간은 외모로 판단해선 안 된다니까.
근데 고작 땅에 파묻는 걸로 성에 차겠어? 화형은 어때? 원래 불에 타죽는 게 제일 아프다고. 겔겔겔.
이런 사소한(?) 것에서도 트로웰과 라이벌 의식은 느끼는 건지 이프리트는 계속 화형을 주장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그도 뭔가 혼내줄 방법을 말해주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자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가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목적을 잊은 거 아니냐? 그 손에 들린 편지나 확인하지 그래?
-쳇, 너무 야박해. 내가 저 녀석한테 어떻게 당했는지 알면서 그렇게 담담한 말이 나와?
-자신의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했을 텐데.
배운 검술은 스프 끓여 먹을 생각이냐? 그렇게 분하면 이 자리에서 결투라도 신청하면 되잖아.
-안 돼. 그래봤자 다른 사람들이 자객으로밖에 오해 안한다고.
뭔가 공개적으로 망신을 줄만한 게 필요해.
-흐음, 그런 거라면 간단하지.
-??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은 엘뤼엔은 슬쩍 뒤를 돌아보며 한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발코니 밖으로 갑자기 엄청난 먹구름이 몰리더니
놈이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굵은 장대비를 쏟아 붓는 것이 아닌가!
후두둑, 쏴아아--
“어머! 갑자기 비가!”
“루시엘님에게 어서 닦을 것을!”
지붕이 없는 구조로 된 발코니라 그 아래 서있던 루시엘은 꼼짝도 못하고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물에 흠뻑 젖은 생쥐꼴로 홀에 들어서는 놈에게, 근처에 있던 귀족 여자들이 다급히 수건을 꺼내 닦아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다 그렇게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귀족들 중에서는 노골적으로 비웃는 자들도 있었다.
“큭큭. 천하의 소드 마스터도 자연의 현상을 피할 순 없는 가 봅니다? 그게 대체 무슨 꼴입니까.”
“풋. 어서 가서 씻으셔야 겠소. 모습이 말이 아니구려.”
“어이, 뭘 하느냐? 백작님을 방으로 안내해 드려라. 저러다 감기라도 걸리시면 어떡하느냐?”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말에 루시엘은 사납게 눈을 치켜뜨며 입술을 꾹 악물었다.
대놓고 씩씩거리진 않았지만 이미 자존심이 있는 대로 상한 얼굴이었다.
반대로 나는 십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푸, 푸하하하! 멋지다! 역시 아버지가 최고라니까!
-너 말이다. 이전부터 은근슬쩍 계속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한 번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나?
-글쎄, 왜 내가 너의 아버지라는 거냐?
-뭐, 어때. 그냥 편한 대로 부르는 거지.
내가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엘뤼엔은 손으로 턱하고 이마를 짚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달리 이프리트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호오, 엘퀴네스가 아버지? 그럼 나는, 나는?
-엥? 이프리트님은 그냥 이프리트 님이죠. 뭐 다른 호칭이 필요한가요?
-우씨! 지금 정령왕 차별이냐? 나도 다른 걸로 불러줘!
-…어머니라 불러드려요?
-켁! 내가 이놈하고 부부라는 소리냐? 그딴 거 말고 다른 거 없어?
-으음. 그럼…삼촌이라든가?
-오옷! 그거 좋다! 삼촌~! 이제부턴 나도 삼촌이라 불러라. 크하하!
확실히 그는 인간에게 호의적인 정령왕이었다.
아니면 단순히 질투에 미쳐서 사소한 것도 공유하려는 심보이거나.
새로 생긴 호칭에 만족한 듯 껄껄거리는 그를, 엘뤼엔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 삼촌이란 소리가 아주 틀린 것도 아니지. 미래의 이프리트의 오빠라고 치면.’
이렇게 착실히 가족 구도가 이루어지는 건가?
가볍게 미소 지은 나는 손에 들린 편지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개봉해볼 생각이었다.
편지의 겉봉에는 유려한 여성의 필체로 짤막한 문장이 적혀있었다.
아마 루시엘 본인이 아닌, 다른 이의 것을 전달해 준 것 같았다.
<친애하는 펠리온 백작님께>
‘어째 시작부터가 심상치 않은데? 이게 루시엘 본인이 쓴 거라면 말 그대로 엽기다.’
그러나 잠시 후 내용물을 확인한 나는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한통의 연서였다.
그것도 꽤 오래전부터 주고받았던 건지,
일상의 소소한 얘기부터 시작해서 이전 편지에 대한 화답까지 적혀 있었다.
군데군데 애정표현도 서슴지 않는 걸 보면 이미 두 사람의 사이가 상당히 깊어져 있는 듯 했다.
혹시나 싶어 편지의 아래 부분을 확인하자 그곳엔 <아나이스 드 라비타>라는 확실한 여성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으윽, 하긴. 트로웰이 약속한 기간이 이제 겨우 한 달 남짓하니,
미네르바가 배신당하는 날도 얼마 안 남았다는 소리겠지. 이걸 어쩌지?’
설마 펠리온이란 작자가 바람피우는 상대가 변태귀족과 연관이 있을 줄이야.
나는 찌푸린 표정으로 다시 편지를 원래대로 봉인한 다음, 이프리트에게 내밀었다.
-응? 이걸 왜 나한테 줘?
-태워주세요. 저 녀석한테 가봤자 별로 좋은 일은 없을 것 같네요.
-뭐, 상관이야 없지만.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미네르바한테 들키는 것보다야 낫잖아요.
내 말에 이프리트는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순식간에 재 초차 남기지 않고 편지를 소멸시켰다.
하지만 증거가 사라졌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지금쯤 미네르바도 어느 정도 낌새를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계약자의 상황을 알아낼 수 있는 그가,
단 한번도 뒷조사를 안 했을 리 없었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믿고 있는 거겠지.
언젠가 인류가 최초로 인정한 정신병이 바로 사랑이라고 한 것을 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굳이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왠지 씁쓸한 기분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정된 배신은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크리스는 이미 스스로 예언(?)했던 바와 같이 3회전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검술 실력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용병왕 이라는 칭호답게,
뼛속까지 실전 전투에 익숙해있던 자와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그나마 큰 부상 없이 내려왔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시합에서 진 자는 그날로 대기실을 이용할 권리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는 잠자코 돌아오자 마자 짐부터 챙겨들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충격을 받지는 않았는지 오히려 후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괜찮냐고 묻는 내 말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뭐, 어차피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어.
덕분에 내 검술의 약점도 많이 발견했고. 지기야 했지만 이정도면 손해보다 이득을 본 게 더 많은 거지.”
“상당히 긍정적이시네요.”
“당연하지! 앞으로 갈 길이 먼데 고작 이정도의 패배감에 평생을 매여살 순 없잖아?
난 여기서 물러나지만, 너는 반드시 우승해라. 4회전 상대가 그 맥시우스가의 도련님이라며? 꼭 보러올게.”
“네, 알았어요. 이렇게 헤어지게 되니까 섭섭하네요.”
“후후. 당분간은 이 근방 여관에서 머물 거야.
이왕 온 김에 도시 구경이나 실컷 해야지. 거처가 정해지면 연락하마. 심심하면 놀러와.”
환하게 웃으며 건네는 말에 나 역시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나 외의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2회전이 끝나는 날, 마지막으로 방에 합류한 룸메이트였다.
나이는 20세, 이름은 ‘슐츠’. 어릴 때부터 용병수업을 받았다는 그는, 사교적인 면에서 거의 크리스와 맞먹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친형제처럼 친해진 상태였다.
“어? 크리스형 지금 가는 거예요?”
막 목욕을 마친 듯 수건으로 물기를 털며 묻는 슐츠의 말에 크리스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오냐, 슐츠. 넌 4조니까 아직 시합 날짜가 많이 남았지? 이 형님은 간다. 부디 나 대신 우승해다오.”
“칫, 엘한테도 같은 말 한 거 다 알아요. 고향엔 언제 돌아갈 거예요?”
“대회가 전부 끝나면. 그래도 체면이 있는데 냉큼 돌아갈 순 없잖냐.”
“쳇, 진 주제에 체면은 무슨.”
“아니 이 자식이 감히 하늘같은 형님에게?”
벌떡 팔을 걷어 부친 크리스는 곧바로 슐츠의 목을 끌어 잡고 비틀었다.
그러자 장난끼 가득하던 슐츠의 얼굴이 금세 하얗게 탈색되기 시작했다.
“켁켁! 하, 항복! 항복, 형님! 우와악~잘못 했어요~~”
“쯧, 진작 그럴 것이지.”
회심의 미소를 지은 크리스는 냉큼 그를 놓아주었다.
간신히 그의 팔에서 벗어나자 슐츠는 울상이 된 얼굴로 벌겋게 된 목을 쓰다듬으며 투덜거렸다.
“우씨…형 진짜 기사 지망생 맞아요? 무슨 힘이 용병보다 세?”
“후후후~ 그것이 다 오랜 훈련의 성과이니라.”
“그냥 이참에 용병으로 전직하는 게 어때요? 형은 아무리 봐도 기사감은 아니라고요.”
“무엇이? 내가 어디가 어때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시죠. 과연 자신이 기사와 적성이 맞다고 생각해요?”
“응.”
“우씨~ 충고한 내가 병신이지.”
늘 험한 싸움에 앞장서는 용병답게 그는 꽤나 입이 거칠었다.
그 대가는 곧 방금 전 그만뒀던 헤드락으로 다시 이어졌지만.
덥썩! 꾸욱, 꾹.
“뭐야? 너 지금 뭐라 그랬냐? 엉? 호오~
니가 진정 형님의 무서움을 아직 모르는 구나? 이 자리서 한번 목이 부러져 볼 테냐?”
“으아악! 실수! 실수라니까! 켁켁! 움메 나죽어~~ 동생을 잡을 셈이슈?”
한편 크리스와 같은 날에 시합이 있던 검은 머리의 남자는 3회전을 여유롭게 통과하고 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첫날에도 말 한마디 없더니, 며칠간 한방을 쓴 일행이 떠나는 데도 일체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크리스는 서운한 표정으로 따지고 들었다.
“이봐, 형씨! 그래도 그동안의 정이 있지! 간다는 데도 어찌 한마디도 안하는 거야? 예의상 잘 가라는 말이라도 하지?”
“켁켁, 형님. 일단 나는 놔주고 말을…”
“시끄러, 임마! 이봐! 정말 끝까지 무시할 거야?”
크리스가 험악하게 소리치자 남자는 읽고 있던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이 사뭇 무서웠기에, 따지던 크리스는 물론, 그에게 잡혀있던 슐츠까지 덩달아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에 방안의 모든 사람들은 아연한 표정을 짓고 말았으니…!
“잘 가라.”
“…뭐?”
“잘 가라고 했다. 이제 됐나?”
“으응? 아, 뭐…그, 그건 그렇지.”
“그럼 이제 책 읽어도 될까?”
“아아, 무, 물론.”
설마 이렇게 쉽게 응해줄 줄 몰랐기 때문인지, 원하는 말을 들었는데도 크리스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지만.
그 옆에서 슐츠는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소리 없이 강한 형님이네.”
언젠가 보았던 자동차의 CF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그때 무심코 그가 읽고 있던 책을 본 나는 휘둥그렇게 눈을 떴다.
겉표지에 적힌 제목이 바로 <정령 소환하기>였기 때문이다.
‘검사이면서 웬 정령 소환에 관심을? 그냥 시간 때우기 용인가?’
호기심이 생긴 나는 머뭇거림 없이 곧바로 남자를 향해 물었다.
“재밌는 책을 보시네요. 정령을 소환하시려 구요?”
그러자 남자는 눈썹을 약간 움찔거리곤 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 눈은 남의 일에 무슨 상관이냐는 뜻을 담고 있었지만,
나는 가뿐히 무시하며 그가 읽고 있던 책의 안쪽을 흩어보며 말했다.
“어디보자, 정령을 소환하기 위해 필요한 재료? 헤에. 정령석이라…이게 뭐지?”
“응? 정령석을 몰라, 엘? 정령왕이 직접 만든 작은 구슬이 있다는데, 그게 있어야 정령을 소환할 수 있어.”
대답해준 것은 크리스였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더욱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정령왕이 만드는 구슬이요? 그걸 어디서 찾는데요?”
“으응, 정확한건 몰라. 몬스터를 잡으면 나온다는 말도 있고…
이미 정령사가 된 사람한테서 얻어야 한다는 말도 있고, 가지가지거든.”
“우와~ 누가 그런 사기를 쳤대요? 그거 완전 몹쓸 놈이네.”
“뭐? 그럼 아니라는 거야?”
놀란 목소리로 되묻는 크리스의 말에 이제껏 아무 반응이 없던 남자 역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당연하죠! 정령을 소환하는 데는 자연과의 친화력과,
소환한 정령을 유지할 수 있는 적당 수준의 마나만 있으면 된다고요. 정령석이라니, 말도 안돼요.”
“그, 그래? 근데 자연과의 친화력이라니?”
“말 그대로 얼마나 정령들과 친숙 하느냐는 거죠.
하지만 이건 거의 선천적인 것이기 때문에 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건 아니에요.
특히 어른이 될수록 옅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 무리죠.”
“에이, 뭐야. 그럼 별 소용없잖아. 그런데 넌 다른 상식에는 무지하면서 그런 건 어떻게 잘 아냐?”
“주위에 아는 정령사가 있었거든요. 아무튼 이 책은 읽어봤자 전혀 도움이 안돼요.”
그러자 남자는 눈에 띄게 실망한 얼굴로 책을 덮었다. 그 모습을 힐끗 본 나는 지나가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인위적으로 친화력을 높이는 방법도 있긴 한데.”
“…!…그게 정말인가?”
오늘 두 번이나 이 사람의 목소리를 듣다니 별일이군.
속으로 잠깐 중얼거리는 나는 기대로 초롱초롱 빛나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슬쩍 식은땀을 흘렸다.
이사람, 단순히 말이 없을 뿐이지 알고 보면 재미있는 성격인 게 아닐까.
“왜요? 정말 정령이라도 소환하시게요?”
“……”
“뭐, 알려드리는 건 상관없지만, 공짜는 안 되는데.”
“후우, 뭔가 원하는 거라도 있는 건가?”
그냥 해본 말에 순순히 응해줄 기미가 보이자 나는 그때부터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떠오른 것은 눈앞의 남자가 바로 귀족이라는 사실이었다.
“저기요, 아저씨 귀족 맞죠?”
“…아저씨가 아니라 라스포다. 다비안 드 라스포.”
그때서야 처음으로 알게 된 남자의 이름에 크리스와 슐츠는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라스포 가문? 설마 외무재상인 크라우디 드 라스포 공작의?”
“내 아버님이시다.”
“우와, 형씨. 생각보다 엄청난 거물이었잖아? 그동안 도도하게 굴 만하네~”
하지만 대단하다는 말과 달리 크리스가 그를 대하는 말투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다비안이라는 남자 또한 애초에 존대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릴 거란 느낌에 나는 싱긋 웃으며 물었다.
“음, 어쨌든 귀족이란 소리죠? 그럼 다른 귀족들에 대한 정보도 많겠네요?”
“뭘 알고 싶은 거지?”
“뭐, 그냥 간단한 거요. 무슨 기밀문서 같은 거 빼돌리라는 소리는 아니니까 그렇게 긴장 안 해도 되요.”
그 말에 다비안은 자신의 어깨가 지나치게 경직되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슬쩍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가 원래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원하던 질문을 이었다.
“혹시 ‘아나이스 드 라비타’라는 여자에 대해서 알아요?”
***
다비안의 말에 의하면 아나이스라는 여성은 귀족 사교계의 꽃이었다.
청순가련한 얼굴에 내숭을 모르는 명랑한 성격,
지혜로운 머리와 누구에게나 관대한 성품 덕분에 어느 무리에서나 인기가 좋았다.
매 파티마다 에스코트를 신청하는 남자가 부지기수지만 정해진 연인은 없고,
그 흔한 스캔들 한 번 일어난 적이 없을 정도로 과거가 깨끗했다.
지금 한창 결혼 적령기임에도 본인에게 그럴 마음이 없는 것인지 들어오는 혼처를 전부 거절하고 있다나.
평소에 남자에게 관심이 없던 여자가 한 순간에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리 특이한 경우가 아니다.
게다가 아직 소문이 나지 않은 걸로 봐선 둘 사이의 감정이 깊어진 것도 최근의 일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나를 제일 경악시킨 것은 그녀가 바로 변태귀족 루시엘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나는 그녀에 대한 감정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완전히 비 호감으로 돌아서는 것을 느꼈다.
‘아주 남매가 똑같이 나를 시련에 빠트리는구만!’
내가 알기론 그녀는 미네르바에게 죽을 운명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부탁에 의해서!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된 대가치곤 혹독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미네르바가 입은 상처를 생각하면 동정의 여지는 없었다. 내겐 내 가족이 더 중요했으니까.
그 뒤로도 몇 가지 설명을 마친 다비안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아는 건 이것뿐이다. 혹시 다른 걸 원하는 거라면…”
“아뇨, 충분해요. 그냥 평범한 여자였네요. 덕분에 잘 알았습니다.”
“그럼 이제 네가 대답할 차례다. 정령과의 친화력을 높이는 방법이 뭐지?”
그의 진지한 질문에 나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별로 어렵지 않아요. 혹시 주위에 아는 정령사가 있나요?”
“그렇긴 하지만…”
“그럼 간단해요. 정령사에게 부탁해서 정령을 소환하게 한 다음,
최대한 그와 시간을 오래 보내면 돼요. 매일매일 꾸준히 반복하다보면 친화력이 많이 높아질 거예요.”
“그럼 얼마정도나 그 일을 반복해야 정령을 소환할 수 있게 되는 거지?”
“누굴 불러내느냐에 따라 다르죠. 하지만 인위적으로 올리는 것이니 만큼,
시간도 오래 걸리고 상급의 정령을 소환하기는 힘들 거예요.”
“그런 건 상관없어. 대충 얼마나 걸리지?”
딱딱하게 묻는 다비안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절박함마저 묻어있어,
그저 호기심삼아 알아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덕분에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알려주려던 마음이 살짝 흔들리고 말았다.
‘어쩌지. 그냥 솔직하게 말해줄까?’
이전에 랑시가 그랬던 것처럼, 이미 그는 나와 함께 지내는 동안 친화력이 급상승 되어있는 상태였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부리부리하게 눈을 치켜뜨고 있는 엘뤼엔을 발견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고치지 말라고 했다.
-아하하, 이제 안 그런다니까 사람 말을 못 믿네~
-글쎄. 신뢰를 받고 싶다면 적어도 그럴만한 의지를 보여야 하지 않던가?
-윽, 알았어. 그냥 잠자코 있으면 되잖아.
-당연하지. 네게서 떠나면 알아서 흩어질 친화력이다.
지금은 주문도 알려줄 생각하지 마라. 운으로 정령사가 되는 것은 이전의 그 인간 꼬맹이로 끝이다.
그의 싸늘한 경고에 나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비안을 향해 말했다.
“하급 정령이면 보통 5~6년 정도는 각오하셔야 돼요.
조건이 나쁘면 그보다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구요.
특히나 다비안 씨…라고 불러도 되죠? 다비안씨는 검을 배운 기간이 있기 때문에 많이 힘들 거예요.
서로 상극이 아니라 병행하는 데 큰 지장은 없지만 마나를 다루는 방식이 약간 다르거든요.”
“…그런가.”
예상대로 그는 너무 긴 기간에 낙심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잠시 후 고개를 드는 그의 얼굴은 한결 편안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잘 알았다. 좋은 정보에 감사한다.”
“뭐,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구요.
조금 어릴 때 알아보지 그러셨어요. 귀족이니까 정령사와 접할 기회도 몇 번 있었을 텐데.”
“아아. 늘 연무장에서만 갇혀 지내서 다른 세상을 볼 기회가 없었거든. 지금이라도 안 것에 만족하고 있다.”
그렇게 대답한 다비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귀족이라고 전부 행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때의 여관에서 힘겨운 생활을 하던 랑시는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세상은 참 공평한 걸지도 모른다.
죽었지만 사랑을 얻은 여자와, 배신한 자를 응징했지만 평생을 괴로워했던 미네르바처럼.
4. 세계 최고의 요리사
4회전 경기가 다가올수록 내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트로웰이 약속한 기간역시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슐츠는 무리 없이 3회전을 통과하여, 다시 한 번 크리스가 얼마나 운이 없는 경우였는지를 증명했다.
그리고 대망의 4회전 시합 당일.
경기장에 오르기 전 나는 관람석에 착석하는 한때의 귀족 무리 중에서 루시엘과 그와 함께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놈과 꼭 닮은 외모를 보아 그녀가 바로 편지의 주인공인 아나이스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처음으로 본 그녀는 맑고 하얀 얼굴에 가냘픈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분홍색의 실크 드레스에 보라색의 가디건을 걸치고 수줍게 웃고 있는 모습이,
제법 매력이 있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에서는 홀로 나온 미네르바의 계약자
- 펠리온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간혹 우연인척 시선을 맞추며 슬쩍 얼굴을 붉히곤 했다.
그 모습에 나는 잠시 웃어야 할지 황당해 해야 할지 고민했다.
자리에 없으면 시선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주위에 있는 수많은 자연체의 실프들은 곧 미네르바의 눈이었다.
그게 아니라도 미네르바 본인이 직접 자연체의 모습으로 등장해서 들키지 않고 놈을 감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정령사면 그 정도쯤은 알 법한데도 펠리온은 너무 방심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행동이 노골적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미네르바가 자신을 의심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거나.
‘남은 지금 일초를 다투고 있는데 당사자인 네놈은 한가해 죽겠다 이거지!’
잠시 욱하는 기분이 일었지만 나는 불굴의 의지로 참았다.
사실 나보다 더 속상할 존재는 바로 트로웰일 테니까.
슬쩍 돌아보니 예상대로 그의 얼굴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모르는 척 무시하며 지나가는 듯이 말을 건넸다.
“조별 최종 승리자를 가리는 시합이라 그런가?
관람석에 못 보던 귀족들이 많이 왔네. 아! 저기 있는 저 녀석이 미네르바의 계약자 맞지?”
-내게 말 걸지 마.
“윽, 나한테 삐진 거 있어, 트로웰? 요즘 계속 저기압이야.”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렇다고 그전부터 미리 살벌해질 필요는 없잖아.
아직 3주나 남았다고. 조금쯤은 마음에 여유를 두는 게 어때?”
-건방지게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
네네, 어련하시겠습니까.
슥 하면 베일 것 같은 기세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순순히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여전히 펠리온과 아나이스에게 향한 것을 보자 그냥 넘어가선 안 될 것 같아서 한마디 덧붙였다.
“너무 미워하지 마. 네가 싫어하지 않아도 어차피 불행해질 인간들이잖아.”
-뭐?
“내버려둬도 알아서 파멸할거야.
그런 한심한 녀석들 때문에 감정싸움을 하는 건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데.
차라리 미네르바를 달랠 궁리를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폭주…얼마 안 남았잖아?”
-너…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트로웰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늘 차분하던 황금색 눈동자가 지금만큼은 마음의 동요로 흔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알걸? 저 여자가 미네르바의 손에 죽는 다는 거.
그로인해 남자의 배신이 완벽하게 두각을 드러내고,
미네르바가 폭주하게 된다는 거. 어쩌면 더 훗날의 이야기까지 알지도 모르지.”
-그렇군. 너 마신의 문장을 가지고 있었지. 혹시 예지력이 있는 신관인가?
“아니, 신관이 아니라고 했잖아.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나는 그냥 들은 대로, 겪은 대로 말했을 뿐이야.”
-지금 날 놀리는 거야?
“설마. 그런게 아니라는 건 트로웰이 더 잘 알잖아?”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하는 말에 그는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렸지만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 반응이 재미있어서 나는 다시금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을 미워하는 이유가 저들 때문이라면 멸종에 대해서도 다시 고려하는 게 좋지 않을까?
저런 녀석들 때문에 죽으면 무지 억울할 것 같은데.”
-왜? 이제 와 죽음이 두려워지기라도 했나보지?
“그야 아픈건 싫거든. 다시 돌아가는 일이 막막해지는게 곤란하기도 하고.
또 저승사자들 찾아 헤맬 생각하면…아니지. 일단은 나도 영혼의 보석이 되는 건가? 호오, 그럼 다음 타자는 누가 되려나.”
-뭐?
“아, 아무것도 아니야. 너야말로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어?
트로웰, 너는 미래를 읽는 정령왕씨이잖아.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바랄게. 사랑이든, 질투든 뭐든지 과하면 보기 나쁜 법이야.”
-무슨…내가 지금 단순히 질투 때문에 인간을 미워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응.”
그럼 아니었남? 내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그는 한순간 멍한 얼굴이 되었다.
“4회전의 ‘엘’님과 ‘칼빈 드 맥시우스’님은 앞으로 와주십시오!”
“앗. 드디어 부르는군. 그럼 난 다녀올게, 트로웰. 이따 보자.”
그때 마침 경기장에서 4회전 선수들을 호명하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살짝 손을 흔들어주곤 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작게 중얼거리는 트로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말대로 단순한 질투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아니어도 인간은 언젠가 한 번은 멸망하게 될 거야. 나는 그저 그것을 조금 더 앞당기고자 한 것뿐이야.
“!”
-스스로 멸망하니까 내버려 두라고? 그런 것조차 봐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난다면?
그래도 참고 봐야 하는 거야? 어차피 알아서 파멸하니까?
‘으음, 그런 식으로 말하면 대답이 곤란한데.’
이렇게까지 조급한 느낌의 트로웰을 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그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기에 나는 슬쩍 볼을 긁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기다림의 미덕이지. 그들 스스로 멸망하는 거야 내버려둬도 그만이지만,
네 손으로 인간들을 죽이면 그 몫이 전부 네게 돌아가게 될 거야.
후회할 걸 뻔히 알면서 일부러 손을 더럽히는 것도 우습지 않아?”
-후회하지 않아. 적어도 미네르바가 다른 인간을 바라보지는 않게 될 테니까.
“아니, 늦어도 4천년 후에는 후회할걸.”
‘내가 여기서 못 돌아가게 되면 곤란할 테니.’
의아하게 바라보는 트로웰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모른 척 하며 경기장으로 나갔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간 자동 실격 될 판국이었기 때문이다.
둥근 원형으로 된 바닥 위에는 이미 경기 진행자와 4회전 상대인 ‘칼빈 드 맥시우스’가 서서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1조 4회전 참가자 ‘엘’님!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까?”
“아뇨! 여기 있습니다.”
와아아아--
내가 나오는 것을 확인한 군중들은 곧 시합이 시작 될 거란 기대감 때문인지 모두 커다란 목소리로 환호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칼빈과 마주선 나는 그를 향해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별로 반갑지는 않지만.”
“…늦었군. 나오는데 뜸을 들이기에 혹시 꼬리를 말고 도망친 비겁자인가 했었다.
설마 그때 한 내기를 잊지는 않았겠지?”
“당연하죠. 칼빈님이야말로 나중에 딴 소리 하지 마시죠.”
“훗, 그 건방진 태도가 얼마나 가나 두고 보겠다.”
슬쩍 비웃는 목소리는 이번 시합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마침 이어지는 진행자의 설명에 우리의 대화도 자연스럽게 그쯤에서 마무리 되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경기방식은 오로지 순수한 검으로만 합니다.
시합 중 마법아이템의 힘을 빌리는 자는 자동 실격이며,
고의 적인 살수(殺手)를 쓰는 자 역시 엄중히 처벌할 것입니다.
도중에 검을 놓치거나 장외로 떨어져도 실격입니다. 혹시 다른 질문이 있습니까?”
“없소.”
“없습니다.”
나와 칼빈이 동시에 대답하자, 진행자는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우며 소리쳤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4회전 첫 시합,
‘엘’과 ‘칼빈 드 맥시우스’ 자작의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신호탄을 쏘아 올려라!”
퍼엉! 펑! 퍼어어엉!!
와아아아아아!!!
이어지는 엄청난 환호성은 확실히 3회전 때보다 훨씬 늘어있었다.
아마 황제가 직접 참관하러 오는 결승전 때는 이보다 더욱 많아질 것이다.
얼얼한 청각을 달래며 슬쩍 얼굴을 찌푸린 순간, 검을 낮게 세운 칼빈의 선공이 이어졌다.
“차앗!”
“!”
채앵!
처음이라 탐색을 목적으로 한 것인지 그는 생각보다 검에 많은 힘을 싣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가볍게 그것을 받아 한쪽으로 흘려버린 다음 곧바로 다음 공격을 이었다.
휘익! 챙! 채앵! 휙!
몇 번의 검을 주고받고 나자, 여유 있던 칼빈의 얼굴이 약간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채앵! 거칠게 맞부딪히는 공격을 걷어낸 그는 한 발짝 훌쩍 뒤로 물러나며 가늘게 눈을 떴다.
“생각보다 제법이군. 이제부턴 제대로 상대해 주겠다.”
“좋으실 대로. 아참! 제가 아직 힘 조절에 서툴러서 그러니까 손목 부러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큭! 건방진! 감히 날 도발하는 건가?”
칼빈은 순식간에 울그락 불그락 해진 얼굴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슈우웅!
거친 파공음과 이어지는 검 날은 확실히 방금 전의 공격보다 훨씬 빠르고 사나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또래의 인간들 중에서는 제법 나은지는 몰라도,
그는 여러 면에서 트로웰보다 한참을 못 미치는 실력이었다.
‘충고를 해줘도 고맙게 받아들이지는 못할망정…’
슬쩍 얼굴을 찌푸린 나는 밀어붙이듯 쏘아져오는 공격을 이번에도 가볍게 흘러 보냈다.
평범한(?) 인간과의 제대로 된 검술시합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확실히 힘 조절을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채앵!
“헉!”
그와 동시에 칼빈의 입에서 격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 딴에는 자신 있게 선보였던 공격을 내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이윽고 구경하던 관중들의 환호성이 이어졌다.
와아아아--!!
함성 소리는 평민들이 앉아있는 쪽에서 더 크게 터져 나왔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평민 소년이 귀족을 상대로 선전을 하는 것이 통쾌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칼빈은 자존심이 상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시 쉴 틈 없는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휘익! 휙! 부우웅!
제법 사나운 그의 기세를 본 나는 쩝하고 입맛을 다시며 연신 공격을 피하기만 했다.
내미는 공격마다 모두 허공에서의 헛손질에 그치자 칼빈은 화난 얼굴로 소리쳤다.
“큭! 다람쥐 같은 녀석! 피하지만 말고 공격을 받아라!”
“이봐요. 힘을 좀 줄여요. 내가 이대로 받으면 정말 손목 부러진다니까요.”
“시끄럽다!”
“휘유. 말이 안 통하네, 진짜.”
도무지 응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나는 차라리 시합을 빨리 끝내는 것으로 마음을 바꿨다.
설마 순수한 대련의 승패에 귀족 상해죄의 명분이 붙지는 않겠지?
속으로 잠깐 중얼거린 나는 팔에 적당한 힘을 준 채 다가오는 공격을 받아 올렸다.
휘익! 챙!!
“…크악!”
예상대로 내 완력에 밀려난 칼빈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손목을 움켜쥐었다.
다행히 부러지지는 않았는지 검을 놓치지는 않았지만 한동안은 마비가 온 것처럼 얼얼할 것이다.
“큭, 어떻게 이런 힘이…”
그쯤에서 끝내면 좋으련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쪽 손으로 검을 바꿔 들었다.
그 독한 반응에 나는 저절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히도 사과하기 싫은가보네. 그렇게 이기고 싶어요?”
“닥쳐라! 감히 날 능멸하다니,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버럭 소리친 그는 내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 재빠른 동작으로 검을 휘둘렀다.
정확히 얼굴을 노리고 들어온 공격에 놀란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피했지만,
후드의 상당부분이 찢겨나가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휘익! 촤악!
“윽-!”
동시에 따끔한 느낌이 들어 슥 볼을 문지르니, 엷게 배인 피부에서 붉은 피가 손가락에 묻어나왔다.
시합 중에 다치는 거야 흔한 일이고, 이정도의 상처는 트로웰과 훈련하면서 입었던 부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치사하게 방심한 틈을 타서 공격하다니!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끊기는 것이 느껴졌다.
“…아, 진짜 말로 하려니까 사람을 우습게보네?”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열 받은 나는 얼굴 앞에서 너덜거리는 후드를 거칠게 찢어 던졌다.
그 모습에 칼빈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놀라는 것을 보며, 나는 아까보다 훨씬 밝아진 시야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안 봐준다.”
벌떡!
아나이스는 갑자기 자신의 옆에서 일어나는 루시엘의 행동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항상 느긋하고 냉정하던 오빠가, 지금 순간 당혹감을 가득 담은 얼굴로 경기장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라버니?”
원래 그녀는 결승전만 관람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차기 맥시우스 공작으로 알려진 칼빈 드 맥시우스의 경기에 관심을 보인 오빠 때문에 부득이하게 따라오게 된 것이다.
상대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평민이라는 사실에 실망하던 것도 잠시,
그녀는 곧 자신의 옆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바로 펠리온 백작이었다.
‘아, 백작님도 오셨구나.’
그것을 깨닫고부터 아나이스는 더 이상 시합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대신 온 신경이 펠리온을 향하기 시작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운명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자존심도 무릅쓰고 직접 편지를 건넨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놀랍게도 펠리온 역시 그렇다고 했다.
이미 두 사람의 감정은 남들에게 공공연히 알려지지 않았다 뿐이지, 확실히 서로를 향해 닿아있었다.
그럼에도 쉬쉬하는 이유는 그가 계약한 정령왕 미네르바 때문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미네르바가 워낙 계약자를 아끼는 나머지, 연인이 생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아끼는 감정과 같으니 염려할 것 없다며,
시간을 두고 설득해보겠다는 말에 그녀는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실상 검술대회를 보러 왔으면서도 마음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었기에,
그녀는 루시엘이 이러는 이유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 역시 경악한 얼굴로 술렁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사람들의 시선이 지금 한창 진행 중인 4회전 시합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옅은 감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세상에…”
사내들의 거친 싸움밖에 연상하지 못했던 경기장에 천사가 서있었다.
적어도 그녀의 눈으로 보기엔 그랬다.
햇빛에 반짝이는 금색의 머리칼과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가 그 자체로 마치 보석 같은 느낌이었다.
새하얀 피부에 보기 안쓰러운 상처가 나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의 미모를 가릴 수 없었다.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었다니!
멍한 얼굴로 정신없이 바라보던 아나이스는 곧 그가 경기 초반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음산한 느낌의
평민이었음을 알아보았다. 단지 가리고 있던 얼굴이 드러난 것뿐인데도, 그 차이는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놀라웠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아아, 그래. ‘엘’이었지.’
이름을 기억해 낸 그녀는 환한 표정으로 루시엘을 보며 물었다.
“오라버니! 보셨어요? 칼빈경의 상대가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였다니 굉장히 놀랍네요.”
“아니다, 아나이스. 그는 남자다.”
“호호, 마치 이전에 알고 계셨던 것처럼 말씀하시는 군요?”
“……”
장난스럽게 묻는 그녀의 말에 루시엘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 와중에도 시선은 여전히 경기장의 ‘그’에게만 머물러 있었다.
그 반응에 아나이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려는 찰나, 곧 루시엘의 입에서 나직하면서도 희열에 들끓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진행자로부터 ‘엘’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만 해도 설마 했던 그였다.
워낙 흔한 이름인데다 애칭으로도 자주 쓰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 본인이 맞았을 줄이야! 루시엘은
그의 행적을 찾기 위해 수소문 하고 다녔던 지난 몇 달간의 일이 허무해지는 것을 느꼈다.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군. 하긴, 저렇게 눈에 띄는 외모라면 그럴 만도 하지.’
노예시장에 잡혀갔다가 도망치는 일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미 한번 호된 경험을 했으니 외모를 가리고 다니는 것에 더욱 충실했을 텐데,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덕분에 이런 장소에서 뜻밖의 재회를 했으니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예상치 못했던 장면도 보게 되지 않았던가.
‘엘’의 상대선수인 맥시우스 가의 장남은,
검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아카데미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뽐내던 학생이었다.
그런데 ‘엘’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가볍게 상대했다.
언젠가 용병단 전체를 상대로 했을 때도 선전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막상 눈으로 체험하고 나니 그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정령술까지 함께 다룬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제 전투에선 이보다 더욱 큰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정말 여러 가지로 나를 놀라게 만드는 자로군.”
처음 그가 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그의 외모 때문이었다.
엘프보다 아름다운 외관에 정령술까지 사용할 줄 아는 노예라면 장식용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사술을 쓰고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더니,
이번엔 출중한 검술실력으로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한 사람이 이렇게 다방면의 재주를 가질 수 있는 걸까?
루시엘은 행방을 찾을 때도 궁금하지 않았던 그의 정체가 새삼 알고 싶어졌다.
“그때 그를 도운 건 사술이 아니라 정령이라고 했었지.
그만큼 친화력이 깊으면서 정령술에 정진하지 않고 검에만 매달린 걸까?
그런 게 아니라면 저만한 나이에 저 정도의 검술을 구사하긴 어려울 텐데.”
“어머, 오라버니, 정말 아는 사이였던 거예요?”
놀란 토끼처럼 동그랗게 눈을 뜨고 묻는 여동생의 모습에 루시엘은 그저 피식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와아아아!!
그 순간 막바지에 다다르던 시합이 드디어 완전히 끝을 맺었다.
결과는 두고 볼 것이 없이 ‘엘’의 승리였다.
경기 내내 쥐 잡듯 몰려야 했던 맥시우스 가문의 장남은 시합에 패했다는 판정이 내리자
털썩 주저앉으며 멍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루시엘은 쯧 하고 짧게 혀를 찼다.
평소에 자부심이 강했던 사람일수록 무너졌을 때의 충격이 큰 법이다.
저대로 자신을 추스르지 않고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폐인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금방 다른 쪽으로 돌아섰다.
그는 관중들의 환호에 답례하며 다시 대기실로 돌아가는 ‘엘’을 보고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뒤에서 의아하게 바라보는 아나이스와 그녀의 연인인 펠리온이 따라오는 것을 느꼈지만,
지금 당장은 ‘엘’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 그는 건물의 복도에서 걸어가는 엘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봐, 잠깐! 거기 서라.”
그다지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의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데는 충분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얼굴이 자신이 아는 이가 확실하다는 판단이 내려지자 루시엘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반대로 엘의 얼굴은 못 볼 것을 봤다는 마냥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 진짜. 오늘 무슨 날인가? 꼴 보기 싫은 인간들만 만나네…”
방금 전 격렬한 시합을 펼쳤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그는 땀 하나 흘리지 않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볼에 새겨진 상처만 없었다면 어디 간단히 산책이라도 나왔나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자신의 본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았다는 뜻.
루시엘은 눈을 가늘게 뜨며 엘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여전히 가늘고 마른 체구는 도무지 검으로 단련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랜만이군.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가 건넨 인사에 엘은 더더욱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삐딱하게 서서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 어찌 보면 무례할 정도였지만 예쁘장한 외모 때문인지 귀엽게만 보였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단단히 화가 난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용건이야? 다시 만나면 죽인다고 했을 텐데? 뭐, 죽으려고 왔다면 이해해주지.”
“무, 무슨! 오라버니께 감히 그런 말을!”
“아나이스, 너는 가만히 있거라.”
놀란 여동생이 소리치자 루시엘은 얼른 나서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가 자신의 일에 방해받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나이스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잠자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펠리온이 속상해 하는 그녀를 위로하듯 어깨를 다독였다.
그 순간 루시엘은 엘의 눈빛이 차갑게 굳어진 것을 느꼈다.
그런데 똑바로 노려보는 시선은 그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뒤의 펠리온을 향해 있었다.
루시엘이 그에 대해 의문을 품기도 전에, 엘은 뚜벅뚜벅 그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느닷없이 펠리온을 향해 입을 열었다.
“미네르바의 계약자인 펠리온 드 레파르가 맞습니까?”
“…??…그렇다만?”
“미안한데…한대만 좀 맞죠.”
“뭐?”
그것은 양해가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였다.
그 증거로 펠리온은 의문을 품기도 전에 엘이 휘두르는 주먹에 맞고 저만치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퍼억! 쿠웅!
“꺄아악! 페, 펠리온님!!”
“!!”
제법 힘을 실은 타격이었는지 쓰러진 펠리온은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연신 신음만 삼키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후드득 피가 흘러내리자 아나이스는 창백한 표정으로 얼른 달려가 손수건으로 맞은 부위를 감쌌다.
평민이 귀족을 때리다니! 그 하나만으로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루시엘은 루시엘대로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정작 원한이 있는 자신은 무사하고 아무 상관없는 펠리온이 화를 당한 것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 중에서 태연한 것은 오직 엘 한사람밖에 없었다.
“다, 당신 뭐예요? 어째서 이런 짓을!”
아나이스는 글썽거리는 눈으로 펠리온을 부축하며 소리쳤다.
심하게 부풀어 오른 볼을 보니 뼈라도 부러진 것 같았다. 저 가냘픈 체구에 이만한 괴력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아~ 미안, 미안. 실은 전에 패준다는 걸 깜빡 잊었거든요.
쩝, 이놈의 건망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단 말이야.”
“뭐라고요?”
“한대가지고는 영 부족하지만…이렇게라도 해야 훗날 한사람이라도 죽을 목숨에 위안이 되지 않겠어요?”
생긋 웃는 얼굴은 마치 천사같이 아름다웠지만 아나이스는 오히려 두려움을 느꼈다.
엘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움찔. 엘이 바로 앞까지 다가오는 것을 느낀 아나이스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그것을 본 루시엘이 얼른 막아서려 하자 그의 입에서 조금 떨떠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비켜. 이래봬도 여자 때리는 취미는 없어.”
“대체 무슨…”
“저 사람에게 꼭 해줘야 할 말이 있거든.”
그 말에 루시엘은 엘의 시선이 여전히 펠리온에게 향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를 쓱 훑어보던 눈이 허리춤에 있던 검에 이르자 엘의 얼굴은 금세 어둡게 물들었다.
“블래스터…”
그것은 미네르바가 펠리온에게 직접 선물했다던 정령검의 이름이었다.
아직 드러내놓고 사용한 적이 없었기에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소년은 당연하다는 듯이 알고 있는 걸까.
루시엘이 그에 대해 의문을 품으려는 찰나, 엘은 조금 딱딱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재수 없는 자식. 다른 이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어놓고, 네사랑은 잘 될 거라 여기는 건가?
잘도 그 뻔뻔한 얼굴을 들고 다니는군.”
“크, 크윽…무, 무슨 짓을…”
“무슨 짓~? 한 번 네 양심에 손을 얹고 물어보시지?
하긴, 적어도 그 정령검이 가진 의미를 알았다면 함부로 이따위 짓을 벌이지도 않았을 테지만.
정령사라는 이름이 아깝다, 아까워.”
하지만 루시엘은 태평하게 그것을 구경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펠리온에게서의 용무를 마친 엘이 곧장 그가 방심한 틈을 타 복부를 가격했던 것이다.
그 충격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수그리자, 기다렸다는 듯 등을 찍어 누르는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퍽! 쿠웅!
“크윽!”
“오, 오라버니!”
천하의 소드 마스터도 기습에는 어쩔 수 없는지 그는 속수무책으로 바닥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서 자신과 친근한 남성 두 명이 쓰러지자 아나이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그와 반대로 엘은 두 손을 탁탁 털어내며 후련하다는 듯이 미소 짓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평소 손봐주고 싶었던 놈들을 차례로 물리쳤으니 나름대로 수확은 있네.
아참, 루시엘 넌 쓸데없는 일에 관심 쏟을 힘 있으면 여동생이나 잘 챙기는 게 좋을 걸? 나중에 조금 덜 후회하려면 말이야.”
“쿠, 쿨럭! 너, 넌 대체 누구지? 무엇을 알고 있는 거냐?”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신음을 억누르며 루시엘은 간신히 물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상하게 느낀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엘의 모습은 온데 간 데 없이 휑한 복도만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마치 꿈을 꾸고 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루시엘은 본능적으로 이것이 끝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저 화풀이 삼은 것 치고는 방금 전 엘이 건넸던 말이 하나같이 의미심장했기 때문이다.
아주 짐작 못 할 바도 아니었다.
펠리온이 그와 계약한 정령왕 미네르바와 연인사이라는 소문은 이전에도 퍼져있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아나이스에게 마음을 주는 것을 보며 단지 과장된 오해였다고 생각을 고쳤던 루시엘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게 사실이었다면?
그동안 펠리온이 둘 중 어느 하나의 마음을 기만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방금 전 엘의 말을 미루어, 그 대상이 아마도 미네르바였던 모양이지만.
‘대책 없이 큰일을 저질렀군, 펠리온. 자네는 정령왕의 분노에서 연인을 지킬 자신이 있는 건가?’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앞날의 일이 어찌됐든 그저 연인이 입은 상처에만 가슴을 졸이는 여동생을 보며,
루시엘은 착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소리 없는 태풍안에 휘말려 들어간 기분이었다.
-쯧쯧, 겨우 고거 패주고 마냐? 암튼 넌 너무 물러서 탈이라니까.
4회전 시합이 끝나고 돌아가는 내게 루시엘과 그 일당들이 찾아온 건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이번이 아니라도 언젠가 손봐줄 작정이었지만,
알아서 마련된 기회를 놓칠 리 만무. 그 정성을 봐서 가볍게 상대해준 내게 이프리트는 연신 불만을 감추지 못했다.
그 옆에서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엘뤼엔도 약간 못마땅한 표정이었고, 트로웰 역시 찌푸린 얼굴이긴 마찬가지였다.
날더러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둘 땐 언제고 왜 이제 와서 난리야?
나는 약간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항의하듯 말했다.
“그래도 제법 힘을 실었다고요. 이빨 두세 개는 부러졌을 걸요?”
-겨우 이빨 가지고 무슨. 적어도 죽기직전까지는 가야지!
그리고 아까 그 여자는 왜 그냥 내버려 둔거야? 따지자면 가장 큰 화근인데.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여자를 때려요? 그렇게 막나가지는 않는다고요.”
-어쭈~ 꼴에 너도 기사도를 아는 남자라 이거냐?
“힘없는 사람을 때려봤자 자랑은 아니잖아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한 말에 세 정령왕은 차례로 할 말을 잃은 얼굴이 되었다.
그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놀랍게도 트로웰이었다.
-단지 연약한 여자라서 그냥 내버려 둔거라고? 어차피 죽을 테니까 봐준 게 아니고?
“응? 아, 뭐…그런 의미도 있긴 하지. 사실 조금 불쌍하잖아? 그냥 한 사람을 사랑한 대가치곤 가혹하기도 하고.”
-흥. 그들 편을 들고 싶은 거야? 결국 너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소리군.
“어허~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편을 드는 것과 동정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그래도 네가 인간인건 사실이잖아?
아무리 정령왕들을 가족처럼 여겨봤자, 결국 넌 우리와 같은 처지가 될 수 없어.
너 역시 우리를 이용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지?
“……”
심장 부위가 따끔 거린다.
지금 그 말이 내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그는 절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이곳에서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인간이었다. 결코 그들이 말하는 ‘우리’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분하고 답답한 심정보단 가장 먼저 슬프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만약 내 정체를 알고 있어도 같은 반응이 나왔을까?
한편이라는 기준이 단지 종족의 차이일 뿐, 결국 나라는 존재 자체는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 속상했다.
나는 푸욱 한숨을 내쉬며 우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좋을 대로 생각해. 그래서 네 마음이 더 편해진다면.”
-…부정하지 않는 게 더 수상해.
“흐음. 그럼 나도 한 가지만 묻자. 내가 이용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그럴 수 있을 만큼, 트로웰은 날 신뢰하고 있어?”
-……
“그런 게 아니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내 목적은 그저 너를 말리는 것뿐이야.
이제와 새삼 편 가르기를 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는데? 무슨 소꿉장난 식의 영역싸움도 아니고.”
낮게 혀를 차며 건네는 말에 그는 찌푸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분위기가 썰렁해지자 이제까지 잠자코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프리트가 호들갑 떨며 떠들기 시작했다.
-어이, 어이. 뭘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애들처럼 싸우고 그래?
인간인 엘이 자신의 종족을 위하는 거야 당연한 거지!
낳아준 부모와 형제가 있는데 아주 외면할 수 있겠어? 아참, 그러고 보니 넌 고향이 어디냐? 부모들은?
“없는데요.”
-아, 그래 없… 뭐, 없어?
휘둥그렇게 눈을 뜨며 묻는 말에 엘뤼엔과 트로웰까지 덩달아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을 뻘쭘하게 피하며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뭐, 양아버지와 미래의 양어머니 될 분이 있긴 하지만.”
-양아버지? 친부모는 어쩌고?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어요.”
-그, 그럼 너 고아였냐?
“에에. 말이 그렇게 돼나?”
그러자 이프리트는 갑자기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래봤자 정령체라 그다지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제 딴에는 고아(?)인 나를 위로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크흑! 불쌍한 자식! 엘퀴네스를 아버지라고 부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이 어린것이 얼마나 의지할 데가 없었으면!
-…거기서 왜 내가 나오는 거지?
-이 인정머리 없는 놈! 넌 자기 계약자가 고아라는데 불쌍하지도 않냐!
-적어도 너처럼 호들갑 떨 정도의 일은 아니지.
-큭, 네가 달리 냉혈한이겠어.
이만한 나이 때의 아이에게 보호자가 얼마나 중요한 줄 알기나 해?
하긴, 소환은 커녕 평소에 유희도 다녀보지 않은 네가 인간들에 대해서 뭘 알겠냐.
너 같이 무심한 계약자를 만났으니 앞으로 고생할 모습이 훤하다, 훤해.
-뿌득. 지금 내게 시비 거는 건가?
“아, 저기…난 별로 아무렇지 않은데…”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한 내가 황급히 말을 꺼냈지만 이미 두 정령왕은 듣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둘 사이에 험악한 공기가 급속도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요즘 오냐오냐 해줬더니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군.
-흥! 다 같은 정령왕에게 건방이 어딨어? 힘만 세면 다냐? 나도 공격력에선 너한테 뒤지지 않는다고!
-호오, 그래? 그럼 어디 여기서 담판을 지어볼까?
-누, 누가 해보자면 못할 줄 알고!
‘쩝, 왜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거지?’
그저 무심코 꺼낸 말에 두 정령왕의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나를 구원한 것은 옆에서 멀뚱히 상황을 관전하고 있던 트로웰이었다.
-배고프지 않아?
“응?”
-아니, 방금 전 시합 때문에 힘 소모가 있었을 텐데 밥을 찾지 않는 게 이상해서. 조금만 배고파도 힘들어하잖아, 너.
“아아, 그러고 보니 좀 배고프긴 하네.”
-그럼 저 둘은 내버려두고 식당이나 가자.
“어? 안 말리고?”
-괜히 끼어들었다가 단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
말을 마친 트로웰은 먼저 몸을 돌리곤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 모습에 당황한 내가 얼른 그를 쫓아가는데도,
이미 두 정령왕은 그런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이 있던 장소에서 엄청난 폭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콰앙! 콰지지지직!! 쿠우웅!
“히익! 뭐, 뭐야?”
-돌아보지 마. 어차피 이프리트가 당하고 있을 테니까.
“저, 저거 정말 안 말려도 돼? 저러다 건물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괜찮아. 둘 다 그 정도도 생각하지 않을 바보는 아니니까.
단지 기후에 조금 기변이 일어나는 정도일거야.
불과 물이 만났으니 당분간 이 전역에 때 아닌 안개가 잔뜩 끼겠군.
담담하게 말하는 모습은 이미 이런 상황에 너무도 익숙해 있는 듯 보였다.
덕분에 혼자 뻘쭘해진 내가 묵묵히 뒤를 따라 걷기를 몇 분.
잠시 후 그의 입에서 약간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안. 편 가르기를 할 생각은 아니었어.
“뭐?”
허걱. 트로웰이 사과를 하다니!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놀란 내가 멍하게 입을 벌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냥 화풀이 한 거야. 네가 그 인간들을 더 위하는 것 같아서 속이 좀 꼬였달까.
힘없는 사람을 괴롭히는 게 자랑은 아니라고 한 말이, 마치 나를 간접적으로 비난하고 있는 것 같았거든.
“엑? 그,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알고 있어. 뭐, 맞는 말이긴 하니까 신경 쓸 필요 없기도 하고.
나도 지금 내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건 지 잘 알아. 네 말대로 언젠가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런데 왜 멈추지 않아?”
-멈출 수 없는 거야. 아직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까.
“윽! 그거 왠지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다?”
내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러니까 좀 더 분발해 보는 게 어때? 태연하게 놀기엔 시간이 별로 안 남지 않았나?
“쳇,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기야? 나도 나름대로 필사적이라고.”
-그래? 그런 것 치곤 지금까지 적극적으로 설득한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인간을 죽여선 안 되는 이유라던가, 그들의 장점을 부각해 본다던가…하다못해 동정심 작전이라도 해 본적이 있던가?
“그래도 나랑 많이 친해졌잖아. 인간이라면 무조건 치를 떨던 때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 아니야?”
그러자 트로웰은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리더니, 마치 선생님 같이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착각하지 마. 네게 가진 호감이 전 인간에게로 이어질 수는 없어.
너 역시 예외는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하지만 적어도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시간은 있었지?
그걸로 충분해. 넌 본래 상냥한 녀석이니까 절대 다른 사람을 아프게 만드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또 그 소리군. 세뇌라도 시킬 작정이야?
질렸다는 듯이 혀를 차는 그의 말에 나는 말 없이 생긋 웃어 보였다.
그래도 아주 싫은 반응이 아닌걸 보면, 세뇌의 효과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어쩌면 그도 내가 말려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의 식당은 건물 1층의 넓은 홀을 통째로 이용하고 있었는데,
주문식이 아니라 그날 그날 주제가 다른 뷔페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보통 식사시간이 되기 한 두 시간 전부터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오는 음식들은,
놀랍게도 단 한사람의 주방장의 주관 하에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런데 요리사의 음식 솜씨가 어찌나 뛰어난지,
참관하러 온 귀족들까지 전부 소문을 듣고 몰려드는 바람에 홀 안은 늘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붐볐다.
그래서 평민들의 경우는 한쪽 구석에서 접시하나만 든 채 조금씩 먹고 돌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평소보다 한산했다.
“흐음. 이상하네. 그세 요리사라도 바뀌었나?”
“그게 아니라 식사시간 치고는 이르니 그렇겠지. 게다가 아직 시합이 전부 끝난 것도 아니잖아.”
현재 트로웰은 혼자서 밥 먹는 모습이 뻘쭘해 보일 거라는 내 주장에 의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상태였다.
어차피 붐비는 식당 안에서야 낯선 사람 한명쯤 더 섞여 든다고 눈치 챌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워낙 눈에 띄는 외모다 보니 흘끔흘끔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었지만,
트로웰 특유의 ‘접근금지’ 오오라 덕에 다가오는 자들은 없었다.
“아아, 그러고 보니 오늘 2조 시합까지 함께 치룬 다고 했었지?
다비안씨가 2조라고 했었는데, 끝까지 있다가 보고 올걸 그랬나?”
“다비안? 너랑 같은 방 쓰는 그 얌전한 인간?”
“응. 이번 시합에서 그가 이기면 5회전에서 나랑 만나게 되거든.”
그러자 트로웰은 찌푸린 얼굴로 뭔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녀석이 이기는 군.”
“앗, 정말? 혜안으로 본거야?”
“그래. 결과를 알았으니 이제 밥이나 먹어. 곧 사람들이 몰릴 거야.
미어터지는 인간들 사이에서 식사하고 싶지 않으면 서두르는 게 좋을 걸?”
“응. 알았어. 고마워, 트로웰.”
미래를 본 다는 게 이렇게 편할 줄이야!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나는 대충 접시하나를 들고 눈에 보이는 음식들 몇 가지를 담았다.
트로웰도 그냥 가만히 있기는 뭐했는지 가벼운 음료 종류를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트로웰, 평소에 혜안을 통해서 최대 볼 수 있는 미래가 어디까지야? 몇 천 년 후까지도 가능해?”
“아니, 거기까지는 무리야. 보통 몇 년 정도?
하지만 내 경우엔 예지보단 통찰력에 비슷한 거라 오히려 볼 수 있는 게 더 많지.”
“헤에, 예를 들면?”
“여러 가지야. ‘이런 사람이 이러저러한 유형의 누군가와 만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런 선택을 하면 그러한 결과를 불러오게 될 것이다’
정도? 미래를 볼 수 있는 건 이런 유추를 좀 더 넓고 확실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부품중 하나일 뿐이야.”
“으윽, 무지 복잡하다.”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아. 그냥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걸 알 뿐이거든.”
담담하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모습에 나는 갑자기 장난기를 느끼고 눈빛을 반짝였다.
“그럼 나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게 많겠네?”
“뭘? 네가 바보라는 거?”
“쿨럭. 너무해…”
“네가 날 시험하려고 하니까 그렇지.
말해두지만 어떤 식으로든 네가 원하는 대답을 할리는 없을 거야.
속마음을 읽지 않아도 네 생각을 짐작하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니까.”
“쳇, 치사해.”
내가 작은 소리로 투덜거리자 그는 피식 웃더니 갑자기 여러 개의 접시에 종류별로 음식들을 잔뜩 쓸어 담기 시작했다.
그리곤 어리둥절해 있는 나를 테이블에 끌어다 앉힌 후,
산더미처럼 쌓인 접시들을 차례로 늘어놓으며 냉정하게 명령했다.
“5분 내로 전부 먹어.”
“헉! 이 많은 걸 나 혼자 다 어떻게 먹으라고?”
“지금 이렇게 떠드는 동안에만 먹어도 충분히 다 처리할 수 있어.
빨리 먹고 돌아가자. 아까부터 자꾸 쳐다보는 인간들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어.”
“흠. 그거야 어쩔 수 없잖아? 트로웰이 워낙 눈에 띄는 탓이니까.”
내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그의 표정이 순간 기묘하게 변했다.
“그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응? 내가 뭘? 이 세상에서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만큼 흔한 조합이 어디 있다고.
남자치곤 좀 예쁘장한 편이긴 하지만 이정도 외모는 귀족들 중에서도 흔하잖아?”
“…너 거울은 제대로 보고 다니는 거야?”
황당한 목소리로 묻는 말에 나는 뜨끔한 표정으로 잠시 먼 천장(?)을 응시했다.
계집애 같은 얼굴이 싫어서 거울 따윈 죽어도 안 본다는 말을 어찌 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그는 충분히 알 만 하다는 듯이 쯧쯧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이미 충.분.히. 눈에 띄는 얼굴이니 남 탓 할 생각은 그만 하시지?
이번 4회전 시합도 그 얼굴 때문에 더 유리했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무, 무슨 소리야? 난 내 실력으로 이겼다고!”
“하지만 상대방이 놀라서 멍해진 사이에 완벽히 밀어붙인 것은 사실이잖아?
넌 아니라고 해도 그쪽에선 미인계를 썼다고 생각할걸?”
“미, 미인…계…?”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는 충격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여자도 아닌 남자를 향해 미인계라니,
꿈에라도 다시 들을까 무서운 소리가 아닌가! 트로웰은 그런 나를 놀리듯 한껏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후드는 함부로 벗는 게 아니야.
특히 너 같은 경우엔 평소 음침해 보였던 인상과 본판과의 괴리감이 더욱 큰 편이거든.
상대방이 충격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런 걸 이제 와서 충고해봤자…”
“훗, 무슨 소리야. 이런 건 돌이킬 수 없을 때 알려줘야 더욱 재밌는 법이잖아?”
“……”
역시 사악해…라고 말해봤자 별로 충격 받지도 않겠지?
이제는 내가 알고 있던 트로웰이 진짜 눈앞의 그와 동일인물이 맞는지 의심까지 든다.
하긴, 이곳에 와서 무엇 하나 이전과 똑같은 것을 본적이 있었던가.
푼수쟁이 시벨리우스 마저 카리스마 왕자님으로 돌변한 판국에 말이다.
‘아참, 그러고 보니 녀석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그때 그렇게 만나고난 이후론 소식조차 들은 적이 없네. 쩝, 고마웠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내가 그렇게 새삼 잊고 있던 친우를 떠올리던 순간이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요리사가 음식을 더 이상 안 만들겠다니!”
내가 앉은 테이블에서 꽤 떨어진 자리에서 홀의 종업원인 듯한 두 남자가 나누는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청각이 좋은 탓에 나는 바로 옆에서 떠드는 것만큼이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그게 말입니다…재료가 신선하지 못해서 요리 할 맛이 안 난다나 뭐라나.”
“그럴 리가! 내가 한 달 전에 직접 보존 마법이 걸려 있는 걸로 전부 공수해 왔다고.
오전까지만 해도 싱싱한 것을 똑똑히 봤는데,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건 아닙니다. 보존 기간이 짧게 걸려있어서 조금 전에 풀린 것 같더라고요.”
“이익! 그래봤자 겨우 하루도 안 지났다는 소리잖아! 그걸 가지고 따지고 든단 말이야?”
홍당무처럼 붉어진 얼굴로 화내는 남자에게 상대편은 무척 곤란한 투로 대답했다.
“총관님도 아시다시피 요리사가 굉장히 까다로운 성격이잖습니까.
고기 육질 하나, 풀 쪼가리 색 하나에도 신경 쓰는 자인데 오죽하려고요.”
“그렇다고 요리를 아예 안 해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식사시간은 이제 막 시작이라고! 앞으로 사람들이 더 몰려올 텐데 지금 있는 양으로는 턱도 없단 말이야.
자네가 가서 어떻게든 잘 다독여 봐.”
“그런 게 가능했으면 이렇게 직접 총관님을 찾아오지도 않았죠.
지금은 뭐라고 말해도 고집불통이에요. 무조건 신선한 재료를 가져다 놓으라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더라고요.”
“끄응. 이번 요리사가 황실에서 주최한 요리대회에서 최종 우승한 자라고 했었지?
이래서 경력이 화려한 녀석들은 안 된다니까. 실력에 자부심이 있는 것도 좋지만 융통성이 있어야지, 원.”
끌끌거리고 혀를 차는 소리에 나는 내심 식사시간을 제대로 맞추었음을 안도했다.
하마터면 음식이 부족해져서 쫄쫄 굶고 돌아갈 뻔 했던 것이다.
바로 그때, 내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원래 엘프들이 ‘적당히’라는 말을 모른다고 하잖습니까.
그렇다고 현재 있는 재료들을 전부 버릴 수 도 없으니 총관님도 그 자를 설득하시려면 꽤 애먹으실 겁니다.”
“흥! 엘프도 엘프 나름이지,
그자는 그냥 괴짜일 뿐이야! 내 생전 블루 엘프가 해산물 외의 다른 음식을 먹는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더구나 요리사까지 된 경우는 더더욱!”
‘엥? 블루 엘프?’
그 순간 나는 버릇처럼 시벨리우스를 떠올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블루 엘프가 그 하나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실제로 블루 엘프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역시 친근한 존재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확인하는 차원에서 트로웰을 바라보자 그는 귀찮다는 것이 역력한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예시장에서 만났던 그 녀석 맞아. 뭐, 진짜 엘프는 아니지만.”
“헉! 그게 정말이야? 여기 요리사가 시벨이라고?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트로웰?”
“지금 방금. 평소에 관심 없는 부분까지 일일이 캐고 다니는 성격은 아니거든.”
“으음, 하긴…. 그런데 유니콘 일족의 왕자라더니 갑자기 웬 요리사?
그때 곧바로 마을에 돌아간 거 아니었나? 그 녀석 그동안 대체 뭔 짓을 하고 돌아다닌 거지?”
4천년 후의 그라면 모를까.
어딜 봐도 도도하고 과묵하기만 했던 그때의 시벨리우스가 인간세상에서 요리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도무지 믿기 힘들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앞에 놓여 진 산해진미들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걸 모두…시벨리우스가 만들었다고?
“…먹어도 될까.”
“쿡. 이제껏 잘 먹어놓고 무슨 소리야?”
“아니, 뭐. 시벨리우스의 요리솜씨가 좋다는 거야 알고 있지만…
왠지 현재 모습과는 매치가 안 된다고나 할까. 이 음식도 뭔가 술수가 있다고 느껴지는 것이…”
“흠, 확실히 ‘흑심’이 있긴 하지.”
“응?”
뭔 심?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트로웰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둘이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진 거야?
그때 만난 시간 이래봤자 고작 몇 분밖에 되지 않았잖아?”
“아하하. 친해지는데 순서가 있나?
어쨌든 날 도와준 은인이잖아. 그때 못했던 인사라도 하고 싶은데, 지금 주방에 가보면 만날 수 있을까?”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단조롭게 대답한 그는 손가락으로 나의 뒤편을 가리켜 보였다.
그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린 나는 막 홀의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낯익은 누군가를 존재를 발견하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시벨리우스!’
꽤 오랜만에 보는 그는 뭔가에 단단히 화가 난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상태였다.
요리에 방해되는 은발은 단정히 하나로 묶은 상태였고,
전체적으로 하얀 옷차림에 앞치마까지 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본판이 출중한데다 엘프라는 종족 특성 탓에, 홀에 있던 무수한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가 나서자 곧 허둥지둥 낯익은 두 남자역시 따라 나왔다.
방금 전 이곳에서 시벨리우스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던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허리에 두른 앞치마를 풀어내는 시벨리우스를 보며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로 만류하기 시작했다.
“이, 이보게! 그렇다고 이대로 그만 둬버리겠다고 하면 어쩌나? 자네가 가버리면 지금 이 수많은 식단은…”
“내 알바 아니오. 애초에 내 요구를 묵살한 것은 당신들 쪽이잖소?”
“글쎄, 지금 당장은 그 조건을 맞추기가 힘들다고 했지 않나.
당장 기다리는 손님들이 이렇게 많은데 새로 재료가 준비될 때가지 마냥 손을 놓고 있는 다는 게 말이 된단 소린가?”
“그러니까 나 말고 다른 요리사를 찾으라고 말했을 텐데?
난 저런 형편없는 재료들로는 요리 할 생각 없으니 딴 데 가서 알아보시오. 음식을 망치는 무책임한 자가 되고 싶진 않소!”
“이, 이보게~!”
아무래도 따진다는 것이 결국 일을 더 크게 만들어 버렸던 모양이다.
녀석의 입장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답답해진
나는 나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먹고 죽는 것도 아니고… 이 많은 손님을 놔두고 일을 중간에 그만두는 게 더 무책임한 거 아닌가?”
“!!”
이크, 작게 말한다는 게 생각보다 컸나?
그가 보통의 엘프보다 더 청각이 좋다는 것을 미처 계산하지 못한 실수였다.
나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시벨리우스를 보며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그런데 막상 나와 마주치는 순간, 녀석의 얼굴에 서려있던 분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넌……”
그 대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리는 모습에 나는 어색하게 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 안녕. 아하하. 오랜만이네? 설마 이런 곳에서 볼 줄은 몰랐는걸?”
“네가 여긴 어떻게…”
“아~ 나도 여기 검술대회에 참가했거든. 그러는 넌 갑자기 웬 요리사야? 일족들이 용케 허락했네?”
그 말에 시벨리우스는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나의 위아래를 응시했다.
한참동안 뚫어져라 바라보던 시선은 이윽고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들에 이르더니,
마지막으로 맞은 편 좌석에 있던 트로웰에게 향하곤 살풋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더니 그는 별안간 불쑥 엉뚱한 질문을 꺼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요리…맛있어?”
“응? 으응. 여기 요리 꽤 맛있다고 소문났어.
귀족들까지 몰려들어서 먹던걸. 설마 네가 요리사인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그런데 정말 그만두는 거야? 아깝게시리.”
“그래, 그럼 됐어.”
“엥?”
마치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거린 녀석은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냉큼 앞치마를 다시 두르더니 어디론가 또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에서 그의 눈치만 보고 있던 남자들 역시 반색을 하며 따라갔다.
“다시 마음을 돌린 건가? 잘 생각했네! 내 얼른 다른 재료를 구해오라 이를 테니 아까 일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게나!”
“공작님도 자네의 요리를 얼마나 좋아하신 다구! 자네는 정말 뛰어난 요리사야, 암! 그렇고 말고!”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소리에도 녀석은 일절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아까 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걸 보니 그들의 말처럼 포기하고 다시 요리라도 할 작정 인 듯 했다.
나름대로 멋진 재회인사를 기대하고 있던 나로선 그야말로 어이가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뭐, 뭐야, 저 녀석. 사람 무안하게시리 이상한 것만 묻고는 그냥 획 가버리는 법이 어딨대?
오랜만에 봤는데 인사라도 할 것이지.”
“쿡쿡쿡. 그러게 너는 평소에 거울을 봐야 한다니까…큭큭.”
“에엥? 트로웰 너는 또 왜 웃는 거야?”
왠지 기분이 나빠진 내가 퉁명스럽게 물었지만 트로웰은 웃기만 할 뿐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홀로 고스란히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 * * * * * * * * * * * * * *
내가 또다시 시벨과 재회한 것은 식사를 거의 마쳐갈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또 불쑥 나타난 녀석은 내가 미처 반가움을 표현하기도 전에
뜬금없이 뭔가를 휙 내밀며 경직된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거먹어."
"응?"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보니 여러개의 과일로 만든 푸딩이 들려있었다.
뷔페식이라 디저트로 먹을 만한 것들이 많았지만, 지금 그가
내민것은 그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성을 기울인 티가 역력했다.
이거 나름대로 재회를 반가워한다는 뜻인가?
먹을 거라면 사양할 리가 없었기에 나는 기쁜마음으로 푸딩을 받았다.
"와아! 맛있겠다. 고마워. 네가 직접만든 거야?"
끄덕끄덕
"부럽다. 언제 이런 재주를 익힌 거야? 원래부터 요리를 잘했나?"
"아니. 너와 헤어지고 난 후에 바로 유희를 시작했어.전부 요근래 배운 거야."
"요근래? 그런데 이렇게 잘한단 말이야?
좋겠다~ 난 아무래도 요리에 소질이 없나봐. 아직오 직접 해먹는 것보단 육포가 더 편하거든."
내푸념에 시벨은 덩달아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 그런 것만 먹으면 몸이 금방 약해질 텐데."
"음, 괜찮아. 이래봬도 굉장이 튼튼해.
트로웰이 그러는데 난 보통 인간하고 육체의 구조가 다르댔어. 어느 정도의 영양만 섭취하면
일반인보다 뛰어난 체력을 유지할수 있다고 했거든."
"트로웰?"
"아....!"
그제야 나는 이 두 사람(?)이 아직 서로 제대로 안면을 익힌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워낙 친근한 모습으로만 익숙해 있던 탓에
나도 모르게 으레 알아왔던 사이처럼 대답했던 것이다.
'윽! 이거 엄청 놀라는거 아니야?'
하지만 의외로 시벨리우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트로웰을 한번 힐끔 바라볼 뿐이었다.
이미 훨씬 전부터 그의정체를 눈치 채고 있었던 것 같은 행동이엇다.
"역시 땅의 정령왕이 맞았군. 넌 그의 계약자인 건가?"
"응? 아닌데."
"아니라고? 그런데 어떻게 함께 다니게 된 거지?"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지금가지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던 트로웰이었다.
시벨리우스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약간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
"엘이 누구와 함께 다니든 네가 상관할 바 아닐 텐데?
자중하는게 좋을거아. 고귀한 유니콘씨. 쓸데없는 호기심은 화를 부르기 마련이지."
"그다지 불쾌해 보이는 얼굴은 아닌데?"
"아아, 난 인간이 아닌 종족에겐 꽤 너그러운 편이거든."
"그거 참 눈물 날 정도로 대단한 영광이로군."
차분히 오가는 대화와 반대로 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무척 살벌했지만,
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있던 세계에서도 사이가나빴던 만큼,
이곳에서도 당연히 그러려니 하는 심정이었다,
문제는 이 둘의 모습을 본 다른 이들의 반응이었다. 이미 상당수 시선을 끌고있던 탓에 무척 눈의 띄는 편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테이블 하나를 두고 묘하게 신경전을 버이고 있으니, 주위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느껴지는 시선들은 더욱불어났고,
그중에선 아예 대놓고 구경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원래 전혀 말릴 생각이
없었지만, 나는 큰마음 먹고 분위기를 환기시키기로 작정했다.
"와아! 이푸딩 정말 맛잇다 혹시 또 없어? 더 먹고 싶은데."
칭찬에 약한 녀석이니 요리에 관해 만족스러운 평가를 해주면 관심을 돌릴 것이란 기대를 담고 건넨 말이었다,
예상대로 시벨은 즉각반응을 보였다.
"응? 마, 맛있어? 원한다면 얼마든지 만들어줄게."
"그래도 돼? 괜히 귀찮게 하는 거면....."
"아니야, 그정도로 귀찮기는. 조금만 기다려 또 금방 만들어서 올테니까."
"헤헤! 고마워. 시벨리우스. 그럼 부탁할게."
생글 웃는 얼굴로 대답하자 녀석은 돌아서다 말고 슬쩍 놀랄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내이름... 기억하고 있었어?"
"응,왜?"
"아, 아니. 겨우 그때 한번 잠깐 본 것뿐이었고,
벌써 몇개월이나 지났는데도 알고 있는게 신기해서. 인간들은 뭐든지 쉽게 잊는다고 들었거든."
"하하! 그렇게 강렬한 만남이었는데 잊을리가 았나. 그때 만났던 네 일족의 이름들도 전부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그렇구나."
밝게 대답한 그는 얼굴 가득 숨김없이 기쁨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린애처럼 감정표현에 솔직한 건 지금도 똑같은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사라지고
나자 잠시 후, 트로웰의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무 잘해주지 않는게 좋을 걸."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쓸데없는 기대를 하면 불쌍하잖아. 저맘때의 유니콘은 절대 동성(同性)에겐 친절하지 않거든."
"하지만 나한텐 친절한데?"
"네가 동성인줄 모르는게 아닐까."
그말에 나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다가 곧바로 얼굴을 경직시켰다.
아무리 내가 눈치가 없다지만 지금 그말을 듣고도 아무런 짐작도
하지 못말리가 없다. 나는 스멀스멀 밀려드는 불안감에 몸을 떨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날여자로 오해하고 있는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정답. 이제야 좀 머리가 돌아가는 군."
"으아악! 말도 안 돼! 하지만 여태껏 그런 기색은 한 번도....!"
"너 혼자만 못 느낄 뿐이겟지.아마 오늘 시합을 보러 온 사람중에서도 널 여자로 오해한 녀석들이 꽤 될걸."
"뭐어....?"
기가 턱 막힌 기분에 큰 소리로 되묻던 나는 술렁거리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고 꾸욱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트로웰은 어깨까지들썩이고 웃기 시작했다.
"쿡.. 쿡쿡..큭큭!"
"우, 웃지머! 내 어디가 여자 같이 보인다는 거야? 다들 눈들이 이상한 거라고!"
"그렇게 일일이 화내다간 제풀에 먼저 지치고 말 걸.
보아하니 한두번 겪은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이제 덤덤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
물론 상당수 익숙해지긴 했다.
방금 전 시벨리우스의 일만 아니었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절친한 친구녀석한테 이성취급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평생 그 기분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론 녀석의 친절을 마음 편하게만 받아들일수 없을것 같아 상당히 마음이 무거워 졌다.
"휴우... 누가 이런 얼굴로 태어나고 싶어 그런 것도 아니고..........."
"나쁘게만 볼 것 없잖아? 아름다운 외모는 살아가면서 꽤 많이 도움이 될텐데. 특히 너 같은 인간들이라면 더더욱."
"천만에! 남자가 예쁘장하기만 해서 어디다 갖다써?
비리비리하고 약해 보이기만 하지. 이왕이면 엘뤼엔이나 이프리트 같은 스타일이었으면더 좋았을 걸."
"욕심도 많군.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점을 보면 너도 인간은 인간이구나.별로 보기 안 좋아."
꽤나 따끔한 일침에 나는 찔끔한 표정으로 혀를 날름 내밀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일 줄 알면서도 바라는 모습이, 내가 생각해도 참 한심했기 때문이다.
"미안, 푸념하는 게 버릇이 됐나 봐. 고칠게."
즉각 건낸 짧은 사고에 트로웰은 의외라는 듯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동안 자주 웃긴 했지만 그가 저렇게 상냥한얼굴을 하는 것은 이곳에 와서 처음이었다.
순간 마음이 놓여 하마터면 눈시울을 붉힐 뻔 했다.
바로 그때, 타이밍 좋게도 근처에 있던 어떤 남자가 다가와 우리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 왔다.
"저어..실례지만 방금 전 그 블루엘프와는 어떤 사이십니까?"
의아한 심정으로 고개를 든 나는, 그가 아까 전에 일을 그만두려는
시벨리우스를 설득하려고 애쓰던 총관이라는 것을 알아 보았다.
두 눈에 호기심을 가득 담고 바라보던 그는 막상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앗! 죄송합니다. 캐물으려는 것이 아니라, 시벨리우스 씨에게 연고가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요.
여기서 일을 시작한 지는 꽤 되었습니다만, 도통 과거의 일을 꺼낸 적이 없어서..."
"아아, 그냥 친구예요, 만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렇군요! 그가 개인적인 일로 요리하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그 특제 푸딩은 공작님께서 직접 요청하셔도 만들까 말까 하던 것이거든요.
그것을 자진해서 만들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래요?"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거의 다 먹어가고 있는 푸딩을 바라보았다.
상당히 맛있긴 했지만 그 속에 그런 깊은(?)사연이 담겨 있을 줄을 꿈에도 몰랐던 일이다.
나로선 녀석이 요리사가 된 것 자체가 신기했으니까.
"그런데 공작님이라고 하면 이곳 공국을 다스리시는 세피온 공작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분이 시벨의 요리를 좋아하시나봐요?"
"물론이죠. 대단한 미식가이시기 때문에 저택의 전속 요리사들도 늘 입맛을 맞출수 없어서 고민했습니다만,
시벨리우스 씨가 오고 나선 한결 편해졌습니다.
황실에서 주최한 요리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을 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는 정말 대단한 요리사예요. 어느 요리에서도 타인이흉내낼수 없는 최상의 맛을 찾아낼 줄 알죠.
아마 대륙 최고의 실력일 것이라 자부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저택이아니라 이곳에서 요리를......"
순수한 의문을 담은 질문에, 신나서 떠들던 남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공작님도 늘 권유를 하신 일이긴 합니다만.
한곳에서 오래 묶이는 건 성미에 맞지 않다고 거절했다더군요. 사실 이번 대회가 끝나면
그도 떠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블루 엘프 자체가 워낙 자유로운 성향이니 어쩔수 없지만요."
아쉬워하는 남자와 달리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간발의 차로 녀석을 못 만날 뻔했던 것이다 오늘 우연한 만남이 없었다면
대회가 끝나는 날까지도 모르고 지나갔을게 틀림없었다.
지금은 그가 나와 함께 다닐 거란 어떠한 보장도 할수없었지만, 이렇게라도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순간, 나느 곤란한 심정을 느낄수밖에 없엇다. 내가 남자와 대화를 주고 받는 것을 본 사람들이
어쩐일일지 너도 나도 접근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기.. 혹시 아까 4회전에서 우승했던 사람 아닙니까?"
"네?"
"멀리서 봐서 확실하진 않지만,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가 똑같은데."
"아아! 얼굴의 상처를 보니 확실하군! 그사람이 맞아!"
"세상에! 가까이서 직접보니 더욱 아름답군!
이렇게 가냘픈 몸으로 그 맥시우스가의 유망주를 이기다니! 정말 대단한 이변이었소! 놀라운 시합이었습니다."
"언제 저와 함께 식사라도....!"
귀족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이 이번 대회의 참가자로서 4회전 시합을 앞두고 있는 자들이었다.
아마 내가 먼저 5회전에 진출한 사실에 부러움을 느끼고 말을 건 것 같았다.
(정말로 순수한, 검술에 대한 감탄인지는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지만.)
내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
트로웰은 앞에 놓여있던 오렌지 주스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거칠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끼이익!
의자의 다리가 바닥과 마찰을 일으키는 소리에 사람들은 찌푸린 표정으로 소음의 원인을 노려보았지만,
곧 그 자리에 서 있는 트로웰을 발견하곤 낮게 숨을 죽였다, 예상치
못한 그의 외모에 할 말을 잃은 듯한 얼굴들이었다.
순간 주위에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기대감에 가득 찬 시선들은 트로웰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고개를 든 그는 주변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는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이 나를 향해 짤막한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이었다.
"가자. 엘"
"으응? 하지만 시벨리우스가........."
그가 농담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뒤,
그때까지도 옆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총관이란 남자를 향해 말했다.
"저어, 푸딩 정말 맛있었다고 전해주세요. 이렇게 그냥가게 돼서 미안하다는 말도요."
"네? 네에.그,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잽싼 대답에 내가 안심하고 떠나려는 찰나였다. 우악스럽게 내 팔을 잡는 강한 힘과 함께 거만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이,어이! 그렇겐 안 되지. 이대로 그냥 가면 쓰나! 여기 모인 사람들을 전부 바보로 만들 참이야?"
"아?"
갑자기 나를 방해한 사람은 척보기에도 싸움 줌 했다 싶은 우락부락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제법 잘 차려입은 옷차림을 보니 귀족인 듯했는데,
어디에나 빠지지 않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역을 맡은 것 같았다.
그 뒤편에선 한눈에 봐도 그의 일행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 짓기는. 여기서 가봤자 대기실밖에 더 돼?
피차 서로 알 거 다 아는 처지에 이렇게 도망치듯 몸을 빼면 못쓰지."
"저기, 무슨말인지는 알겠는데 일단 팔은 놓으시죠?"
불쾌함을 참으며 건넨말에 남자는 오히려 잡은 손에 더욱 힘을 가하며 떠들었다.
"히야~ 이렇게 가는 팔목으로 어떻게 5회전까지 올라갔는지 모를 일이군.
너 솔직히 말해봐. 혹시 시합 전날 미리 몸이라도 상납한 거 아니냐? 계집애들 중에선
가끔 그런 수법으로 치고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던데?"
"지금 말 다햇어요?"
"큭큭! 어쭈~ 노려볼 줄도 아네?
맥시우스 녀석은 마음이 약해 봐줬을지 몰라도, 나한텐 어림도 없다! 그런 편법이 두 번 통할줄 알아?"
그러자 주위에 있던 놈의 패거리들이 와하하하 웃을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열 받은 내가 놈으 팔을 역으로 비틀어 꺾으려던 순간이었다.
"으아아악!"
".....!"
휘익! 쿠웅!
뜬금없이 남자의 비명이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놈은 내 팔을 놓고 저만치 날아가 있었다.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그곳엔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시벨리우스가
좌중을 노려본 채 서있었다.
"어? 시, 시벨리우스..."
"괜찮아? 어디 다친 덴 없어?"
아마도 요리를 하던 중 밖이 소란스러워지자 호기심에 나온 모양이었다.
내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억이자 그는 다시금 사나운 표정으로 나를 잡고 잇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쓰러진 놈을 부축하던 패거리들 역시 험악한 얼굴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차림새를 보아하니 겨우 요리사인 것 같은데, 후환이 두렵지 않나?"
"우리를 화나게 하면 넌 다시는 여기에 발도 못 붙이게 된다고!"
척 봐도 유치한 협박에 시벨리우스가 꿈쩍할리 없었다.
오히려 그는 할 테면 해보라는 듯이 삐딱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너희들 말대로 이종족이라 인간의 귀족 '따위'가 내 일행한테 함부로 하는 꼴은 못보거든."
"뭐? 따,따위? 지금 우리에게 따위라고 한 건가?"
"당연한걸 묻는군. 더 뜨거운 맛을 보고 싶지 않다면 이만 물러서는 것이 좋을텐데?"
차갑게 대꾸한 그는 한손에 시뻘건 불길을 일으켜 보였다.
그러자 당장이라고 덤빌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던 자들의 얼굴에 차례로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마, 마법!"
"허억!"
그러고 보니 시벨리우스가 폴리모프한 종족인 블루 엘프는 본래 마법에 능통하기로 알려진 존재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주위에있던 누구도 그가 아무렇지 않게 마법을 사용하는것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리 칼부림에 익숙한 자들이라곤 해도 마법사, 그것도 상당한 실력을 가진 존재와의 다툼은 달갑지 않을 것이다.
사납던 기세가한층 누그러지자 시벨은 다시 한 번 경고하듯 읊조렸다.
"이종족이라고 무시하는 모양인데,
이래봬도 나는 이 제국의 황제로부터 직접 시민권을 얻은 몸이라고.
이곳에 오게 된것도 세피온 공작의 정식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해코지를 하고 싶다면 먼저
그의 허락을 받아내야 할 거야."
"큭!"
단지 이름을 언급한 것 뿐이었는데도 세피온이란 세 글자가 지닌 힘은 가히 위력적이었다.
분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던 녀석들은 곧 두고보자는 말을마지막으로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렇게 상황이 대충 일단락되자 시벨은 단번에 굳은 표정을 풀며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넌 항상 이런 일에 휩쓸리는구나? 벌써 나한테 진 빚만 두번째야."
"하아, 안 그래도 심히 괴로우니까 놀리지마, 그리고 방금 전엔 나도 알아서 해결할수 있었다 뭐."
"쿡쿡! 그냥 해본 말이었어. 그런데 벌써 가려고 한 거야?
모처럼 푸딩을 더 준비하고 있었는데, 인사도 없이 가려고 하다니 서운한걸."
"아~ 미안. 안 그래도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한 참이엇는데 푸딩 정말 맛있었어.
하지만 아무래도 주의의 시선도 그렇고... 그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대답과 함계 나는 멀리서 무료하게 기다리고 있는 트로웰을 힐끔 쳐답보았다.
그러자 나를 따라 시선을 옮기던 시벨도 곧 수긍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담 어쩔수 없지. 도다시 시비가 붙기 전에 얼른 가봐."
"응.. 오늘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 사실 그동안 어떻게 지내가 궁금하던 참이었거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저기.. 다음에 또 볼수 있을까?"
순간 트로웰의 충고가 걸리긴 했지만 나는 아무렴 어떠냐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그야 물론이지. 여기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앞으로 자주 놀러올게."
"정말? 그럼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 놓고 기다릴게.
식사시간만 빼면 비교적 한가한 편이니까 언제든 마음 내킬때 와."
친근하게 웃으며 말하는 모습은 내가 알고 있던 녀석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문득 가슴 한쪽이 뭉클해지는 걸 느끼며 나느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새삼 그와 나의 입장이 반대가 되었다는 걸 느낄수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을까? 이유도 모른 채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나를 찾으며,
혼자서 과거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한없이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몇 명의 귀족들이 이유를 알 수없는 복통을 호소하며 시합을 자진 포기했다는 소식을 접었다.
황당하게도 그들은실격패의 사유를 하나같이 그날 아침에 먹은 식사를 내세웠지만,
동일 같은 음식을 먹은 다른 사람들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깔끔하게 묵살당했다.
시벨리우스의 치밀한 면모를 엿볼 수 있던 순간이었다.
-바람의 폭주, 대지의 눈물-
아니이스는 지금 도박을 벌이려 하고 있었다.
그랬다. 이건 도박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정당한 요구를 하는 데도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오진않으리라.
그녀의 앞에는 일생동안 함께하고 서로를 바라보기로 맹세한 연인이 서 있었다.
항상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잇던 그의 얼굴이 지금만큼은 살짝 일그러져 있고, 떨리는음성으로 말을 내뱉었다.
"지금.. 뭐라고 하였습니까?"
이미 뻔히 들었음에도 되묻는 것은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아나이스는 결코 물러설수 없었다.이번만이 아니라 그 어느 순간이라 하더라도이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때문에 펠리온이 난처해진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현재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미네르바님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펠리온 님은 제게 그분을 단 한 번도 소개해주신 적이 없으시지요.
지금까진 당신의 입장을 생각해 참아왔지만,이제 더이상기다릴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무, 무슨 소립니까. 아나이스! 그 부분에 관해서라면 내가 이해할수 있도록 설명했었을 텐데요?"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저와 펠리온님의 사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것을요.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서 만나야 합니까? 제가 직접 그분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아니이스!"
크게 호통을 치는 펠리온의 모습에 그녀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아무리 마음을 굳혔다 해도 사랑하는 이가 분노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알기에더욱 그랬다.
"정령왕은 굉장히 포악한 존재입니다.
눈에 보이는 겉모습만으론 절대 판단할수 없단 말입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거슬리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행여 그대가 미네르바님에게 해를 입게 되면 나는 평생을 어떻게 살아간단 말입니까?"
"정말 ... 정말 그것 뿐인가요?"
"그럼 무슨 이유가 있단 말입니까?"
휘둥그렇게 눈을 뜨며 묻는 연인의 말에 아나이스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얼마 전 그녀의 오빠인 루시엘이 세간에 도는 소문을 귀띔해주었는데, 펠리온과 그의 계약자인 미네르바가
서로에게 깊은 연정을 품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그 소실을 접한것은 엘이란 이름의 아름다운 소년이 갑자기 행패를 부리고 난 직후였다.
지금은 신관에게 치료를 받아 생채기 하나 없이 말끔한 얼굴이었지만,
아직도 아나이스는 펠리온의 얼굴을 보면 당시 소년이 주먹을 날린 뒤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다른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해놓고 네사랑을 잘될거라 생각하는 건가?>
그때는 워낙 경황이 없어 깊이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으나,
만약 그것이 루시엘이 전해준 소문과 연관이 있는 거라면 그냥 넘어갈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자신을 향한 펠리온의 감정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수상한 구석이 무척이나 많았다. 언제나
그는 미네르바의 이름이 나오면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긴장하며 경계하는 태도를 보이기 일쑤였다.
정령왕을 소환한 것이 화제가 되어 단번에 신분 상승을 한 사람치곤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만약 그것이 자신을 속이고 있기 때문이었다면?
상상만으로 아찔해지는 기분에 아나이스는 두 눈을 질끔 감았다.
"얼마 전에 당신과 미네르바님이 연인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
"솔직하게..말씀해주세요 그게 사실인가요?"
용기있게 물은 것과 반대로 아나이스의 손끝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아니라고 부인해주길 바랐지만, 펠리온은 한참 동안이나 입을 열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기까지 마치 1초가 1년 같은기분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왜.... 대답하지 않으시나요? 그동안 펠리온님이 제가 하신 말씀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건가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에 품은 남자였다.
앞으로도 이보다 더욱 빠져드는 대상을 만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매일 주고받던 달콤한 연서와 가끔씩 마주치언 눈빛에 두근거리던마음,
얼마나 많은 행복을 느꼈던가.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니!
차오른 눈물이 뚝뚝 구슬처럼 떨어지는 데도 전혀 느끼지 못할만큼그녀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매달려서라도 붙잡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흑...흐윽..흑...."
감정을 이기지 못한 아니이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흐느끼던 순간이엇다.
그녀는 곧 자신을 가득 채우는 다정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펠리온이 그녀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던 것이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다정한 속삭임에 아나이스는 상황도 잊고 큰 소리로 엉엉 울 뻔했다.
"언제고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은 했습니다.
모두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그만 눈물을 멈춰요.아나이스. 당신이 울면 내마음이 더 아픕니다."
"흐윽! 펠리온......"
"당신은 참 바보같은 사람입니다. 왜 그런 소문에 흔들립니까?
내마음은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오직 그대에게만 향해 있었는데 내가 그토록 신뢰를 주지 못했습니까?"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에 아나이스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소문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누구보다 자신의 연인을 믿고 있었다.
지금도 아니라는 한마디만 들으면 단번에 모든 의심을 풀 수 있을 만큼 그를 사랑하는 마음엔 변함이 없었다.
그 반응에 펠리온은 적잖이 안심하는 듯 보였다.
잠시 심호흡을 한 그는 이윽고 마음의 결심을 굳힌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우선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미네르바님이 내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생각보다 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분이 나를 아들처럼 여긴다고 말한 것은
당신에게 불안감을 주지 않기 위한 변명에 불과했습니다,"
"그,그런....!"
"하지만 결코 내가 그분과 같은 마음인 것은 아닙니다.
다만 확실하게 거부할수 없는 처지인 것도 사실이지요. 우습게도 정령사라는 직분이그렇게 만들더군요
그분이 떠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될 내 자신이 두려웠습니다.
이런 나를 경멸한다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말에 아나이스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정령사에게 있어서 계약한 정령이란, 검사에게 주어지는 검만큼이나 그를 이루는 전부와 마찬가지였다.
어릴 때부터 늘 검을 수련하는 오빠를 가까이서 지켜봤던 그녀는 그것이 가진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몇 번이고 말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만나고 난 이후론 나는 더더욱 그분을 자극하는 행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내마음이 다른곳을향해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분을 틀림없이 당신을 해하게 될 테니끼."
".........!"
"아시겠습니까.아나이스? 당신을 만나기 전의 나는 그저 단순히 정령왕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인형에 불과했습니다.
내게 생명을 불어넣고 , 내 진실한 감정을 일깨워주는 것은 오직 당신만이 가능한 일어었습니다."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펠리온의 모습은 지난날 고뇌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은 눈에서. 그녀는 그가 한 말이 모두 진심임을느낄수 있었다.
어쩌자고 이런 사람을 잠시나마 의심했단 말인가! 아나이스는 안타까운 마음에 그의 품안에 더욱 파고 들었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 펠리온님 미안해요. 제가 나빴어요."
"아닙니다. 진즉에 털어놓지 못한 내 나약한 태도가 문제 였지요.
모든 사실을 밝히면 당신이 떠나게 될 것 같아서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이젠 떠난다고 해도 붙잡을 수 없겠군요.
내겐 그런 자격은 없으니까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저는 절대로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사실을 알았으니 됐어요. 그거면 충분해요."
"아아.. 아나이스!"
진실을 알고 나니 그녀는 오히려 펠리온에 대한 감정이 더욱 깊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나이스는 경솔했던 자신의 행동을 탓하며 다시는 그를 의심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이미 사랑에눈이 멀어버린 그녀에겐 정령왕의 존재도 결코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행복해지리라.
이순간 그녀는 선택받은 사람이자, 승리자였다.
* * * * * * *
그와 같은 시각, 다른 쪽에서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몸을 떨며 분노하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그러나 믿고싶지 않았던 바람은 결국차디찬 비수가 되어 가슴에 박혔다.
'정령왕의 인형이었다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나의 감정에 장단을 맞춰준 것이라 말한 건가? 그대.. 펠리온이?'
동료들의 만류를 저버리며,
자신의 종족과 의지까지 부인해가며 사랑한 대가가 고작 이런 것이었다니!
시꺼멓게 타들어가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것도 잠시, 미네르바는 뜨겁게 붉어진 눈시울에서 어느새 투둑!
하고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생애 처음으로 흘려본 눈물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에게는 아나이스처럼 그것을 다정하게감싸며 닦아줄 존재가 없었다.
투명하리만치 창백한 피부를 따라 흐르는 눈물은 곧 빛과 함께 천천히 산화되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두 팔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크게 벌린 입에서는차마 새어나가지 못한 흐느낌이 연신 목 안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펠리온.. 펠리온...펠리온!!'
어째서 네가! 나를 사랑한다던 그 입으로, 나만을 바라본다던 그 눈으로! 나만을 품는다 했던 그 가슴으로!
'아아아아아!!'
마음껏 토해내지 못하는 비명이 멍든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이 순간처럼 자신을 저주해본적이 있었던가! 이토록 숨쉴수 없는 고통 속에 내던져진적이 있었던가!
배신을 당했다는 충격보다 더욱 비참한 건,
그럼에도 아직까지 그를 믿고 싶어하는 마음이엇다.
이미 모래전에 눈치 챘어야 할 일을 이제와서 안 것은 스스로가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던 탓.
하지만 한계선을 넘은 지금에 와서도 그는 여전히 펠리온을 사랑했다.
그래서였을까. 이런 상황에서도 미네르바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운명의 상대로 내정된 남녀가 만났으니 서로에게 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껏 그 사실을 감춰왔던 것은 자신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한때는 자신을 향한 감정도진심이었노라고. 미네르바는 애써 그렇게 자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번만 더 그를 믿어보자.적어도 그가 나를 기만한 것은 아니었음을......'
마음의 결심을 굳힌 그는 천천히 흐르는 눈물을 거두었다.
쓰라리고 고통스럽기는 여전했지만 사랑하는 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길이라면 참을수도 있을것 같았다.
"미네르바님? 왜 이런 시간에......."
밤늦게 아나이스와의 밀회를 마치고 돌아온 펠리온은 그의 방에 환하게 불이 밝혀저 있음을 깨닫고 살짝 얼굴을 굳혔다.
이미 자정을 넘어 새벽이 깊었는데도 미네르바가 어쩐 일인지 깨어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본래 정령왕은 수면이 필요 없었지만,
계약한 이후로 지금까지 인간인 그의 흐름에 맞추어 아침과 저녁을 동일하게 보내고 있었다.
나오기 전에도 잠들어 있는것을 확인한 참이었기 때문에 펠리온으로선 이런 갑작스러운 반응에 바짝 긴장될 수 밖에 없었다.
"어딜 다녀오는 거지?"
착각이었을까? 펠리온은 미네르바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 공허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와 표정도 어딘지 좋지 않았지만, 어두워서 잘못 본 것이라 단정하고 그는 애써 태연한 철 대답했다.
"잠이 안 와서 잠시 산책을 다녀오는 길입니다. 곤히 주무시는 것 같기에 일부러 깨우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제가 없어서 찾으셨나 보군요. 빨리 돌아온다는 것이 밤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넋을 잃고 보는 바람에 늦었습니다."
"......."
별이 아름다웠던 건 사실이었다.
다만 그것을 볼 때 혼자가 아니라 다른 여인이 함께 있었다는 것이 문제일 뿐.
그는 미네르바가 자신의 사생활을알기위해 일부러 미행을 한다거나,
뒷조사를 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렇게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것이다.
하지만 이전이었으면 가볍게 수긍하고 넘어갔을 그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제야 펠리온은 본능적으로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다.
"미네르바님? 대체 왜......"
"이게 무언지 말해주겠나?"
"네? 아........!"
순간, 그는 터져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삼킬 수밖에 없었다.
미네르바가 꺼내어 내민 것은 지난 시간동안 아나이스가 그에게 건넸던 수많은 연서들이었다.
그동안 꼼꼼하게 감추어두었던 것인데 하필이면 오늘 들키고 만 것이다.
다행이라면 그에 대한 자신의 답장부분은 없다는 사실 정도였다. 당혹한
표정을 한 것도 잠시, 펠리온은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이런, 몰래 버리려고 모아둔 건데 그걸 용케 찾아내셨군요.
별거 아닙니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우리와 동행한 라비타 가문의 영애를 기억하시는지요?
그분이 혼자 일방적으로 제게 연심을 품고 편지를 보내오는 겁니다."
".. 일방적이라고 보기엔 꽤 오랫동안 주고 받아온것 같은데."
"그, 그저 소소한 일상 대화들을 나눈 것 뿐입니다.
그렇게 해주면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거든요. 제가 다 알아서 할테니 당신은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그의 대답에 미네르바는 눈을 가늘게 떴다.
곧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들은 펠리온은 심장 한구석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왜 나를 속이는 건가?"
"......!"
"이 편지의 답장이 어땠을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내가 무지해 보이는가?
솔직하게 말하라.펠리온 드 레파르. 적어도 이제까지 너를 믿고 있던 나를 더 이상 실망시키지 말아다오."
"미, 미네르바님........"
속을 알 수 없는 지독한 무표정에 펠리온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악운은 한꺼번에 터진다더니, 연이어 이런 시련에 빠지게 되니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몰랐다.
더구나 이번상대는 정령왕이 아닌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는 존재다.
지금 당장은 위기를 모면한다고 해도 앞으로도 계속 피할 수 있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게다가 분위기를 보아 이미 미네르바는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좀 더 일찍 편지를 처리했으면 좋았을 걸.
볼 때마다 애틋한 마음에 신중을 기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펠리온은 자신을 실책하며 속으로 낮게 혀를 찼다.
'이걸 어쩐다! 모두 솔직하게 말하고 용서를 구할까? 아니면 끝까지 모른척하는 것이 좋을까?'
짧은 시간동안 수많은 상념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지금 미네르바는 자신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정황대로 하자면그 뜻에 맞춰서 그동안 속인 것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자니 한편으론 미네르바가 자신을 떠날 것이 걱정되었다.
능력 면에서나 외모면에서나그는 굉장히 아름답고 매력적인 존재였다.
아나이스를 만나기 전에는 꽤 끌렸던 것도 사실이었고,
앞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가장 큰 조력자가 될 것도 틀림없었다.
펠리온은 꽤 야심이 많은 남자였다.
아나이스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녀가 가진 신분과 명예만으로는 더욱 앞으로 박차고 나골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은 미네르바가 가진 정령왕의 위력이었다.
만약 그가 떠나버린다면 다시는 지금과 같은 명예를 누릴 수 없을 것이다.
비겁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어떻게든 미네르바가 자신을 떠나지 못하도록 구슬릴 방도가 필요했다. 결국 그는 끝까지 모른척하기로 마음먹었다.
"무,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저를 의심하시는 것가요?"
"..펠리온."
"물론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네. 편지의 내용이 확실히 의심스러우셨겠지요.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그러더군요. 잠깐이나마 연인의 분위기라도 만들어보고 싶다고요,
미네르바님께 죄송스러운 일이라는 건 알지만,
그것으로 나를 순순히 포기해준다면따라주는게 평화로운 해결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장단을 맞춰줬던 것 뿐입니다."
술술 나오는 변명은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지어낸 것치고는 매우 훌륭했다.
이쯤이면 그도 수긍할 수 있으리라.
펠리온이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 미네르바는 아까보다 더욱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억지로..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미네르바님. 저도 그동안 무척 괴로웠습니다.
아무리 진실이 아니라지만 당신을 속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요."
"그럼 이 모든 것이 그녀의 탓이라는 소리로군."
"에? 아니, 그건........."
싸늘하게 묻는 미네르바의 말에 펠리온은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혹여 자신 때문에 연인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와말을 다시 바꿀수도 없으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최대한 그에게 거슬리지 않으면서 아나이스의 편을 들어주는 쪽으로방법을 바꾸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녀도 나쁜 마음에 그리 한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죄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 내 앞에서 그 여인을 두둔할 생각인가?"
"그,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설마 저를 못 믿으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내가 이번 일에 대해 그녀에게 책임을 물어도 상관하지 않겠군."
".......!"
생각보다 강경한 반응에 펠리온은 내심 당혹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걸 두고 '잘못 건드렷다'고 하던가?평소 미네르바는 담백한 축에 속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자가 한번 의심을 품고 나자 그 어떤 변명을 늘어놔도 쉽게 넘어가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모든 것을 눈치채고 잇는 상대에게 뻔히 속보이는 핑계를 대는 것이 무리였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펠리온은 그다지 실망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나이스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는 나에게 피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으니까.'
분노도 결국 질투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는 펠리온에겐 지금 미네르바의 반응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아니, 어쩌면 이상황을 잘 이용해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펠리온은 일부러 안타까운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곤 주먹을 움켜쥔채 감정을 꾹 억누르는 얼굴로망설임이 가득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것이 ... 당신이 바라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
정 화가 나신다면 당장 그녀를....죽이신다고 하셔도 말리지 않겠습니다. 아니, 차라리 마음편하게 아예 죽여주십시오.
저도 더 이상 그녀에게 끌려 다니고 싶지 않으니까요."
"..진심인가?"
"그렇습니다."
펠리온이 이렇게 대답한 것은 오로지 그의 동정심을 자극하기 위한 연극에 불과했다.
미네르바는 지극히 현명하고 이성적이었지만, 한편으론 정도 많은 정령왕이다.
처음엔강경하게 나가더라도 막상 상대방이 극단적으로 대처해버리면 우스울 정도로 흔들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물며 그 상대가 연인인 펠리온임에야 두말 할 나위가 없었다.
애초에 정령왕과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부터가 비현실적이었으니,
이번 일로 오히려 아나이스와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떠밀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되면 못이기는 척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예상되로 미네르바의 회색빛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그의 생각처럼 동정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네르바는 방금 전보다 더욱 분노한 상태였다.
그는 펠리온이 모두 솔직하게 말하고 용서를 구하길 바랐다.
사랑하는 존재를 두고 다른 여인에게 끌리게 된 자신을 진심으로 자책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것이 배신한 존재에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용서해줄 의향도 있었다.
하지만 펠리온은 뜻밖에도 여자의 죽음을 원했다.
그것이 그녀보다 자신을 더 사랑해서가 아니란 것을 미네르바도 잘 알고 있었다.
말을 내뱉으면서도 슬픔에 가득한 표정을 짓는 펠리온을 본다면 누구나 그렇게 느낄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거지?'
미네르바는 원래 인간 세상에 그다지 많이 익숙한 편이 아니었다.
거의 정령계에서 머무는 편이 많았고,
이따금씩 중간계에 내려오더라도 드래곤이나 엘프들과 어울리는 일이더 많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인간들의 심리나 행동에서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갓 태어난 아이가 선의와 악의를 구분하지 못하듯, 미네르바 또한 인간들에게 그랬다.
그래서 눈에보이는 모든 것을 진심으로 믿었고, 설마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미 한 번 속앗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어쩔수 없는 이유가 있어서였다고 애써 믿고 있던 그 였다.
때문에 이런 반응이 당혹스러웠다.
'설마 정말 그녀를 사랑한 게 아니라는 뜻일까? 지금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내가 의심하는 것이 괴로워서인가?'
이렇게 되자 미네르바는 오히려 자신의 오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굳혀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용당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녀쪽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여자가 일방적으로 매달리니 할 수없이 받아주는 척했던 것이거나.
'아, 나도 모르게 그동안 트로웰의 경고를 너무 의식하고 있었구나. 이렇게 그를 쉽게 의심하다니!'
일단 자신을 배신한게 아니라는 점에서 미네르바는 속으로 크게 안도했다.
그는 곧 한결 풀어진 얼굴로 펠리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겠다. 네가 바라는 대로 해주겠다."
'킥! 그럼 그렇지.'
그의 속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펠리온은 단순히 자신의 의도가 먹혔다고 생각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잠깐의 방만의 결과가 어떻게 되돌아오게 될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 * * * * * * * * * * *
"슐츠 형도 4회전에 통과했다면서요? 축하해요!"
경기에서 이긴 이후 내내 방에서만 뒹굴거리던 나는 룸메이트의 승전보를 듣고 무척 반가운 표정으로 악수를 건넸다.
하지만 슐츠는 무슨 심경의변화인지 얼굴을 붉히기만 하고 좀처럼 다가오지 못했다.
평소였으면 거리낌없이 마주 잡았을 그였기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슐츠 형. 뭐해요? 악수 안 해요?"
"어어? 꼬, 꼭 해야 돼?"
"무슨 소리예요? 나 팔 아파요. 얼른 잡아요!"
내가 찌푸린 표정으로 윽박지르자 그제야 그는 마지못한 듯이 투박한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왜 마주잡는 순간 움찔 떠는 걸까?
혹시 나한네 뭐 실수한 거라도 있나? 아무리 봐도 수상한 태도에 나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슐츠를 노려보았다.
"왜, 왜 그렇게 봐?"
"형, 혹시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요? 며칠 전부터 안 어울리게시리 왜 그렇게 몸을 사려요?"
"내가 뭘........."
"지금도 시선 피하고 있잖아요. 전엔 안 그러더니 왜 갑자기 그래요?"
이런 현상은 슐츠만이 아니라 다비안도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말이 없던 그는 어느 날을 기점으로 아예 책에만 시선을 박고 고개조차 들지 않기 시작했다.
말을 걸어도 무시하거나 떨떠름하게 반응하기 일쑤였고,
행여나 시선이라도 마추칠세라 급히 몸을 움직이기에만 바빴다.
처음 며칠이야 경기때문에 예민해져서 그런가 보다 싶었지만,
그것이 유독 나에게만 한정되는 반응이라는 걸 깨닫고 난 뒤로는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일부러 말을 더 시키거나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만 건네는 등, 다방면으로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적으로 이유를 물은것은 정작 이번이 처음이었다.
"잘못한 게 있으면 말을 해줘야 알죠. 그렇게 피하기만 한다고 해결이 돼요?
무슨 문제인지 말해봐요. 나도 알아야 고칠거 아니에요."
"그, 그게 아니라.. 으윽! 어이, 형님! 뭐라고 말 좀 해봐요! 그대로 보고만 있을 거예요?"
다급한 슐츠의 외침에 호명당한 다비안은 어깨를 눈에 띄게 경직시키더니 곧 읽고 있던 책에 더욱 시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눈에 봐도 '나는 할 말 없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었다.
"크악! 배신자! 설마 나혼자 '이걸' 떠맡으라는 거예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에이XX!! 내가 이래서 귀족을 싫어한다니까! 혼자만 살지 말고 다같이 죽자고요! 뭔 놈의 사나이가 베짱도 없어!"
"시끄럽군. 책 읽는 중이니 방해하지 마라."
"우~ 씨이~~!!"
나는 혼자 흥분해서 씩씩거리는 슐츠를 보며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내 시선을 눈치 챈 슐츠가 흠칫 하고 놀라더니 창백해진 얼굴로 갑자기 푸욱,
긴 한숨을 내뱉었다.
"아, 젠장! 나도 더 이상 이 짓 못해먹겠다. 부탁이니 제발 너! 후드 좀 쓰고 다녀라."
"네?"
"새벽에 잠결에 일어났다가 널 보기라도 하면 얼마나 심장이 철렁한지 알아?
아님 그 긴머리라도 자르든지! 아, 아니다. 크흑! 자르긴 좀 아깝고 끈 같은 걸로 묶고 다니든가 해라."
"대체 무슨 엉뚱한 소리를........"
"엉뚜웅? 너 지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냐?"
거의 윽박지르듯이 묻는 말에 나는 찝찝한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내얼굴 때문이에요?"
"오오! 바로 그거야! 기특한 자식! 그래도 아주 생각없이 사는 건 아니었구나!"
이 말에 내가 화를 낼수 없었던 건 순전히 절박해 보이는 슐츠의 표정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들이 이런 식으로 나를 피하게 된 게 내가 후드를 벗기 시작하고 나서부터였던가.
단번에 상황파악을 한 나는 짧게 혀를 찼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내가 이제 무서울 정도다.
"그렇게 의식 안 해도 나 남자 맞는데..........."
"누가 남자가 아니라서 이래?
웬만한 계집애들보다 예쁘게 생겨서 그런 말은 통하지도 않는다고!
암튼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제발 후드 좀 써라. 수면 부족 때문에 오늘 시합에서도 잘뻔했다면 믿겠냐?"
"헤에, 알았다! 형... 아직 동정이죠?"
"쿠, 쿨럭! 쿨럭!"
직격탄이었는지 슐츠는 부릅뜬 눈으로 연신 기침을 내 뱉었다.
나는 그 모습을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라, 맞췄나? 쯧쯧! 그러니까 평소에 애인을 사귀어둬야죠.
이런 데까지 와서 엉뚱한 대상한테 욕구불만을 풀려고 하면 안돼요. 그런걸 두고 바로 변........."
"으아악! 그마아안~~ "
기겁을 한 슐츠는 괴성을 지르며 그대로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냥 조금 놀리려고 해본 말이었는데 어지간히 충격을 크게 받은 것 같았다.
"흐음, 내가 조금 심했나? 저렇게 당황할 줄을 몰랐네."
휭하니 사라져버린 그의 모습에 내가 미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그때까지 묵묵히 책을 읽고 있던 다비안이 툭하니 한마디 내뱉었다.
"..아니, 아마 찔려서 저럴 거다."
"켁! 그거야 말로 농담이죠?"
"지금이 한창 때니까 어쩔 수 없지."
"........"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기분이랄까.
나는 어쩐지 으스스해지는 팔을 문지르며 짐 속에서 후드를 찾아다 냉큼 뒤집어썼다. 이제 절대로 벗지 않을 테다!
내행동을 가맍히 지켜보던 다비안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런 상황에 꽤 익숙한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군."
"쳇! 다비안 씨가 한번 내 입장이 되어 봐요. 웃음이 나오나. 그런데 읽고 계신 책은 뭐예요?"
"음? 아아, 그냥 시간 때우기 용이랄까?"
멋쩍게 웃으면서 그가 들어올린 것은 이전에도 본 적이 있는 정령 소환법 책이었다.
책장마다 손때가 가득 탄것을 보아 아마 몇번이고 정독해서 읽은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못말닌다는 표정으로말했다.
"그거 읽어도 소용없다고 했잖아요? 시간 낭비밖에 안된다구요."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왠지 미련을 버릴 수 없어서."
"글쎄. 내 말이 틀림없다니까요. 그런거 읽을 시간에 차라리 수련이나 해요. 5회전 상대가 나라는 거 잊었어요?"
그 말에 다비안은 잠시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대꾸했다.
"내 실력을 너무 만만히 보는 것 같군. 이래봬도 세 살 때부터 검을 듣 몸이다."
"수련기간은 단지 숫자에 불과해요."
"심하군. 4회전에서 너무 쉽게 이겼다고 기세가 등등해 있는거 아니냐?
내 비록 정령사가 꿈이긴 하지만, 단 한순간도 검술 훈련을 소홀히 한 적은 없었다."
"나도 만만치 않다구요. 그런데 정령사는 왜 되고 싶어 했던 거예요? 뭔가 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그건 알 필요 없다."
하지만 딱딱한 말투와 달리 그의 볼에는 옅은 홍조가 피어올라 있었다.
그것을 본 내가 더더욱 호기심을 느끼고 재촉하려는 찰나였다.
"..굉장히 한가하군."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본 나는 대체 언제부터 였는지 문 앞에 기대어 서 있는 트로웰의 모습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늘 자연체로 왔던 그가 오늘은 모습을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앗, 트... 아, 아니. 가, 갑자기 어떻게?"
반가운 기분에 실수로 이름을 부를 뻔한 걸 간신히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나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려고 했다.
하지만 평소보다 가라앉은 그의 분위기가 접근을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화난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지금의 트로웰은 그저 지독한 무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사이가 좋아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나는 갑자기다시 무뚝뚝해진 그가 불안하게만 느껴졌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것도 잠시, 나는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그래? 혹시 무슨 일 있어?"
"...같이 확인하러 가야 할 일이 있어."
"확인이라니?"
"그건 날 따라와 보면 알아."
그 말에 무심코 따라서려던 나를 붙잡은 것은 바로 다비안이었다.
그는 우리 사이에 흐르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무척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곧 날이 저물 거다. 이런 시각에 어딜 간다는 거냐?"
"아, 다비안씨, 그게요........"
"게다가 이쪽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참가 선수 중에서도, 관람하러 온 귀족 중에서도 이런 얼굴은 본 적이 없어.
여긴 관계자외 출입금지인 구역이다. 상관없는녀석은 나가.
게다가 난 아직 이 녀석하고 할 얘기가 남아있다. 중간에 끼어드는 것은 예의가 아닐 텐데?"
트로웰의 어려보이는 외모 탓인지 그는 짐짓 어른 흉내를 내며 엄하게 훈계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트로웰의 대답에 그는 멍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할 얘기? 12살때 엘프를 처음 보고 사랑에 빠진 것과 그 영향으로 정령사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
아니면 정령을 소환하게 되면 엘프마을에서 살게 해준다는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낸 것?"
"헉! 어, 어떻게 그걸....!"
"이미 다 알아버렸으니 더 할 말은 없겠군.
내정체야 네가 상관할 바 아니고, 그럼 이제 데리고 가도 되겠지? 가자, 엘."
"어? 으응."
불쌍하게도 다비안은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좀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알려주지도 않은 과거가 적나라하게 끄집어내졌으니굉장히 충격이 컸을 것이다.
설마 엘프에게 반해 정령사가 되려고 했던 것일 줄이야!
아마도 다비안의 부모는 처음부터 그에게 정령 소환이 무리라는 걸 알았기때문에 그런 조건을 걸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정보를 수집하려는 자세는 칭찬받을 만했다.
'그런 애틋한 사연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해버리다니. 아무튼 악취미라니까.'
잠시 그를 향해 동정의 시선을 던진 나는 아무 말 없이 앞서 걸어가고 있는 트로웰의 뒤를 우물쭈물하며 따라나섰다.
하지만 다음 순간 갑자기 복도에서 터지는 누군가의 고함소리에 나는 온몸의피가 한순간에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엄청난 특종이야! 살인사건이 일어났어! 아니아스 드 라비타 영애가 죽었어!
그 루시엘 백작의 여동생이 시체로 발견됐다고!"
".........!!"
* * * * * * * * * * * * * *
쿠웅!
심장이 몸에서 떨어질 때의 느낌이 이럴까?
이때까지 평화롭게 흐르던 시간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숨도 쉴 수 없을 정도의 충격에 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루시엘의여동생이 죽었다니!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있던 나는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다급히 앞에 있던 트로웰의 옷깃을 붙잡았다.
"트, 트로웰! 설마 이거........."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새삼스럽게 놀랄 필요 없잖아? 이제 때가 온 것뿐이야."
"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던가?
하지만 이제 그런건 아무 상관도 없다. 미네르바가 계약자의 연인을 죽였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맞는다면 그는 곧 폭주를 시작할 것이다.
어떻게는 심각해지기전에 말려야 했다.
소문이 이곳까지 퍼졌다면 이미 사건이 터진 지 시간이 조금 흘렀다는 소리다.
나는 조급한 마음에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이 머무는 건물 앞에 다가가자 이미 그 앞에소문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 틈을 파고들어 문에 접근하자 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봐! 여긴 일반인은 출입금지야! 어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비켜요! 급하니까!"
쿠웅! 콰앙!
"흐익!"
"허억!"
신경질적으로 소리친 나는 단 한번의 발길질로 굳게 잠겨있던 문을 부수었다.
설마 작은 체구의 소년이 이런 괴력을 발휘할줄을 몰랐는지 기사들은 물론 주변의 사람들까지 모두 그대로 경악했다.
그틈을 타 나와 트로웰이 여유있게 안으로 들어가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기사 중 1명이 기겁을 하고 소리쳤다.
"앗! 안 돼! 모두 뭐하는 거얏! 어서 저 녀석들을 막아!"
하지만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문이 부수어진 틈을 타 몰려든 구경꾼들까지 죄다 우르르 안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순식간에 통제가 벗어난 군중을단 몇사람의 기사가 모두 막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그들은 우리를 쫓아오기는커녕 사람들을 막기에만 급급했다.
웅성웅성. 술렁술렁
'저기인가?'
구경꾼은 바깥뿐만아니라 안에도 존재했다.
그들은 바로 사건이 일어난 건물 내에 있던 다른 귀족들이었다.
제법 사람이 많은 탓에 내가 그들에게 섞여들어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경위를 조사하러 온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가운데,
나는 그중에서 익숙한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아나이스! 아나이스, 제발 눈을 떠보십시오! 제발! 눈을 떠요! 안 돼, 안 돼! 이럴수는.... 이럴수는 없어!!"
축 늘어진 여인의 몸을 끌어안고 오열하고 있는 것은 미네르바의 계약자인 펠리온이었다.
이전에 봤을 때는 그토록 오만해 보였던 남자가 지금은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에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눈물로 범벅이 되어 비통한 통곡을 흘리는
그를 보며 주위를 감싸고 있던 사람들은 연신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며 쯧쯧 혀를 찼다.
그중 마음 약한 여인들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혼절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내 관심은 이미 그들이 아닌 다른 쪽에 향해 있었다.
"미네르바는? 미네르바는 어디 있지?"
한동안 정신없이 둘러보던 나는 잠시 후 펠리온의 앞에 서 있는 새하얀 존재를 발견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끊임없이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나는 그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살짝 입술을 깨물며 트로웰을 바라보니,
그는 내 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똑바로 미네르바만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북적북적한 사람들과 끝없는 오열 속에서 오로지 그 두 존재만고요한 모습이었다.
마치 그 사이에만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1초가 1분 같은 시간이 흐른 후, 여전히 연인의 시체를 끌어안은 채 울고 있던 펠리온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붉게 충혈된 그의 눈동자는 정확히 자신의 앞에 서있는 미네르바를 향해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원망을 가득 담은 탁한 음성에 사람들은 모두 흠칫 놀라며 뒷걸음을 쳤다 지금 펠리온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입가에 거품까지 물고 눈을 허옇게 뜨는 모습이 마치광기에 사로잡힌 야수 같은 느낌이었다.
그 반면 미네르바는 한층 차분한 표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그대가 바라는 결과를 이루었을 뿐이다."
"큭! 내가 바라는 것? 내가 이런 것을 바랐다고!"
"그녀를 죽여 달라고 했던 건 그대였다. 왜 화를 내는 거지?"
"크아아악!!"
담담히 부탁받은 것을 했을 뿐이라고 대답하는 말에, 펠리온은 더더욱 이성을 잃고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에 조사를 나온 기사들이 서둘러 말리려 들었지만, 워낙 기세가
흉포했던 탓에 결국 다들 혀를 내투르며 내버려둘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문제의 말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멍청한 정령왕! 내가 설마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을 거라 생각한 거냐?
모두 다 핑계일 뿐이야! 네가 질투한 거지! 그래서 아나이스를 죽인 거지! 널 저주한다. 미네르바! 평생 저주할테다!"
"헉!"
"......!"
웅성웅성
감히 정령왕을 향해 저주라니!
그 엄청난 말에 사람들은 모두 할 말을 잃은 표정이 되었다.
그속에서 오직 미네르바만이 침착하려고 애쓰는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곧 이어지는 녀석의 말에 온전한 충격으로 변하고 말았다.
"절대 용서 안 할테다! 나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뿐인 나의 연인을 앗아간 너를 저주하겠다!
지옥 끝에 떨어져도 너를 원망하겠다!"
"연......인?"
"흥! 그래! 아나이스는 나의 연인이었어!
설마 내가 널 사랑한다고 한 말을 믿었나?
너 따윈 내 출세에 필요한 도구였을 뿐이야! 크하하하하~!
저주받을 정령왕! 결국 넌너희들이 가장 하찮게 보는 인간에게 이용당했을 뿐이야! 기분이 어떠냐!"
그 말에 미네르바는 부릅뜬 눈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 천천히 머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러나 펠리온은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소리치기 시작했다.
"하늘 아래 무서울 것이 없는 정령왕이여! 그 오만함에 취해 모든 자가 다 너를 사랑하는 줄 알았겠지!
나의 반려를 네가 죽인 거다!"
"그만.........."
"흥! 그만이라고? 누구 마음대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말해주지!
저주한다, 미네르바! 저주한다! 죽어버려! 너도 소멸해버리란 말이야! 나의 아나이스를 돌려줘!
나의 생명을 돌려줘! 그녀를 다시 되돌리라고!"
"그만 해!!"
결국 지켜보다 못한 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녀석에게 달려들어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둔탁한 타격음이 울림과 동시에 녀석의 몸은 저만치 날아가 쓰러졌다.
퍼억! 쿠웅!
"커억!"
"꺄아악!"
생각보다 힘을 많이 준 탓인지 녀석은 단 한 방에 볼품없이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지만,
나는 그들의 반응에 일일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두 팔을 두르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미네르바의 모습이 심심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 이봐! 넌 대체 누구야? 방금 일은........"
"귀족이 아닌 자는 들어올 수가..경비들은 대체......"
"시끄러! 다들 비켜! 미네르바! 미네르바, 정신처려! 괜찮아?"
하지만 아무리 소리쳐도 미네르바는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그의 몸에서 희미한 바람이 부는 것을 느끼고 천천히 얼굴을 굳혔다.
원래 바람의 정령왕이긴 하지만, 가많리 있을 때도 그 영향이주변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확실하게 그의 몸 주위로 미풍이 불고 있었다.
그의 발끝을 중심으로 시작되는 바람은 회오리처럼 그의 몸을 서서히 감싸고 오르더니 이윽고 머리끝까지 타고 올라갔다.
그 와중에바람의 강도가 점점 세지더니 어느덧 미네릅의 형상도 그 속에 삼켜지기 시작했다. 이건 설마........!
-위험해!!
"......!"
바로 그때, 나는 다급한 외침과 함께 내몸을 감싸는 강한 기운을 느꼈고,
그와 동시네 내 바로 앞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쿠과가가가가가가광!!
"크아아악!"
"아아아악!"
"......!!"
콰아아아앙! 콰가가가가!
어떤일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귀가 얼얼할 정도의 거대한 소음 속에서 나는 어떤 커다란 힘에 밀려나 속절없이 뒤로 쓰러졌고,
그 와중에 함께 섞여든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들었다는 것만 기억할 뿐이다.
"으윽, 대체 무슨...일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 후에 다시 눈을 떴을 땐 나는 그대로 입을 멍하게 벌릴 수 밖에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건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온 사방에 잘게 부서진 돌더미들과 사람들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어떻게 된거야.....?"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도 통증이었지만,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욱 어려웠다.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 중 살아남은 자는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이렇게 멀쩡한 걸까? 그러고 보니폭발 직전에 나를 감싸던 힘과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듯도 하다.
-이제 정신이 들었나?
"....!"
잠시 멍하게 있던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한심하다는 듯이 쯧쯧 혀를 차며 서 있는 것은 다름아닌 엘뤼엔이었다.
"아........아버지?"
하지만 내가 그에 대해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날카로운 그의 목소리가 먼저 이어졌다.
-멍청한 녀석! 폭주 직전의 정령왕에게 다가가면 어쩌자는 거냐!
네 목숨은 열 개라도 되냐? 내가 손쓰는게 조금만 늦었다면 너도 저들과 똑같은 꼴이 됐을 거다.
"설마 아버지가...구해준거야?"
-그럼 내가 하지, 누가 했겠냐? 이럴 땐 알아서 도움요청을 해라, 넌 계약한 정령왕을 폼으로 달고 사냐?
그 뒤로도 몇 차례 그의 핀잔이 이어졌지만 나는 거의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실실 웃기만 했다.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그가 나를 구해줬다는 사실이 날아갈 듯이 기뻤다.
마치 미래의엘뤼엔을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이었다.
-너 내말은 듣고 있는 거냐?
"응?헤헤, 뭐라고?"
-..휴우 됐다 말을 말자.
그는 포기했다는 듯이 한 손으로 턱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평화로운 시간도 잠시였을 뿐, 나는 다시금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미네르바와 트로웰은? 방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궁금하냐?
"당연하지! 아까 폭주 직전이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럼 미네르바는 어떻게 된거야? 응?"
내 질문에 그는 간단히 손가락을 위로 향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모습에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올린 나는 그대로 뒷목이 뻣뻣해질 정도의 충격을 느끼고 안생을 딱딱하게 굳혔다.
"하늘이.. 새카매...."
날이 저물어갈 때긴 하지만 아직 밤이 된 건 아니었는데, 하늘이 온통 새까맸다.
그런데도 그 아래 펼쳐지는 환경은 여전히 밝아, 위아래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를 더욱 경악하게 한 것은땅과 하늘의 가운데 지점에 둥실 떠 있는 미네르바의 모습이었다.
정신을 잃은 듯 눈을 감고 있는 그는 거의 투명할 정도로 모습이 흐려져 있는 상태였다.
한참 동안 그를 찬찬히 살펴보던 나는 곧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바람들이
하늘로 올라가 시꺼먼 구름의 일부를 이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하늘이 온통 까매진 이유가 미네르바 때문이었던 것이다.
"저, 저게 대체......"
-폭주해버린 거다. 조금 후면 사방이 전부 녀석이 행사하는 기운의 영향력안에 들어가게 되겠군."
"그,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그걸 몰라서 묻냐? 낙엽위에 바람이 강하게 불면 어떻게 돼든?
"날아가지."
-마찬가지다. 저 하늘이 덮는 범위내의 모든 것이 날아가겠지.
단, 태풍보다 위력이 훨씬 강하기 때문에 압력은 견디지 못하고 전부 산산조각 나겠지만.
".......!"
비교적 덤덤한 설명이었지만 그 말의 의미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하늘을 덮은 시커먼 구름은 언뜻 보기에도 공국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 제국 전체를 감싸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이 범위내의 모든 것이 미네르바의 폭주에 휩싸인다면,
결국 한 제국 전체가 그 자리에서 소멸한다는 소리와 다름 없었다.
"으엑! 그럼 이번 검술대회는 이대로 끝나는 거야?
아, 아니 이게 문제가 아니지! 어서 미네르바를 말려야.. 그런데 트로웰은 어디갔어?"
하지만 나는 굳이 그를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완전히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 속에서 무언가를 짊어지고 걸어 나오는 트로웰을 발견한 것이다.
"트로웰!"
굳은 표정은 여전했지만 그의 분위기는 이전보다 오히려 안정되어 있었다.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그는 들고있던 '무언가'를 내 앞에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쿠웅!
".......!"
놀랍게도 그가 던진것은 기절한 사람이었다.
붉은 피와 상처들로 뒤범벅되어 있는 비참한 몰골이었지만 나는 그가 누군지 확실하게 알아보았다.
폭발에 휘말려 들어 죽을 수 있는것을 그가 굳이 살려가지고 나온 것이다.
말은 하지않아도 나는 그가 이런 행동을 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대로 곱게 죽이진 않는다는 뜻이겠지. 이거 어째 살벌한 걸.......'
바짝 긴장한 내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 순간이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트로웰의 입에서 낮고 건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약속한 기간이 지났어. 엘. 미안하지만 이번 거래는 내가 이겼어."
* * * * * * * * * * * * * * * * *
"..........!"
아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던가?
굉장히 큰 충격을 받는 게 정상인데도 나는 오히려 머릿 속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미네르바의 폭주를 보는 순간부터 아마 은연중에 나의 실패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결국 이렇게 끝나버리다니.
조금 허탈한 심정에 나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기절한 펠리온을 노려보았다.
지금까지의 내 노력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든 장본인이니만큼 절대 곱게 보일리가 없었다.
'그때 더 패들 걸 그랬나.........?'
아마 그렇게 될 거라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야속한 심정이 드는 것은 여전했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란 생각에 조금 안이하게 대처했던게 아닌가 후회스럽기도 했다.
그 순간, 조금 서늘한 느낌이 목 언저리에 와 닿았다.
트로웰이 한 손으로 내목을 잡았던 것이다. 그다지 힘을 준 상태가 아니었기에 움직이는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지만
나는 의식적으로 몸을 살짝 움츠렀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지금 이 행동이 뜻하는 바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 나를 향해 트로웰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거래의 조건 기억하겠지? 이미 한 번의 기회를 버렸으니,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날 원망하지 말길 바랄게. 그래도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너만은 고통 없이 보내줄게."
"으응, 고, 고마워..."
얼떨결에 대답하면서도 나는 정말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나저나 여기서 죽으면 다시 미래로 돌아가지 못할 텐데 어쩌지?
무작정 다른 누군가가 찾으러 올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내가 그렇게 속으로 끙끙거리는 순간이었다.
-그 손 놔라, 트로웰.
싸늘한 목소리로 말한 것은 다름 아닌 엘뤼엔이었다.
경고조가 다분한 말투에 내 목을 잡고 있던 트로웰의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살짝 입술을 깨문 그는 조금 원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이건 내 일이야.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마음이 바뀌었다. 계약자의 죽음을 넋 놓고 지켜보는 것도 체면이 아니지.
손을 놓지 않는다면 내게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 철저히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큭! 이제 와서 이런 법이 어디있어. 엘퀴네스!"
살기 가득한 목소리와 달리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슬퍼 보였다.
하지만 엘뤼엔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찌푸린 표정으로 차갑게 일갈했다.
-너답지 않게 멍청한 짓 그만두고 정신 차려. 트로웰!
일의 우선 순위를 판단하지 못하나? 지금은 미네르바의 폭주를 멈추는게 먼저 다.
".......!"
그러자 트로웰은 흠칫 얼굴을 굳히더니, 황급히 미네르바가 떠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그는 아까보다 형체가 더욱 사라져 있는 상태였다.
그 반면에 하늘을 덮고 있는검은 구름의 양은 점점 더 불어났다.
고오오오!
강하게 휘몰아치는 바람은 대지를 삼킬 듯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주위를 유린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망설이는 표정을 짓는 그에게 엘뤼엔은 완전히 쐐기를 박는 말을 내뱉었다.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너도 알겠지?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미네르바는 완전히 미쳐버릴 거다.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막아라. 아니면 내가 저 녀석을 소멸시킬 테니까. 기회는 지금뿐이다.
"........!"
'소멸'이라는 말에 트로웰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잡고 있던 내 목에서 힘없이 손을 떼어냈다.
돌아서기 전에 그는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지만,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미네르바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잠깜 마주쳤을 때 본, 죄책감과 혼란으로 가득한 그의 눈동자를 통해 나는 왠지 그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나를 죽이겠다고 결심한 것도 본심은 아니었으리라.
-미네르바! 깨어나! 이대로 너를 포기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꺼야!
가까이 다거서자마자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몸을 감싸고 있던 마나를 풀어내고 자연체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었다.
순수한 정령체가 된 그는 즉시 자신의 기운을 발산하여 폭주하고 있던 미네르바의 힘을 강제로 억누르기 시작했다.
그러자어디선가 튀어나온 이프리트 역시 같은 방법으로 트로웰의 일을 거들었다.
-흐억! 이 녀석 왜이래? 결국 폭주한 거냐?
-안 돼! 생각보다 폭주가 너무 진행됐어. 이프리트, 좀 더 거들어!
-우씨! 나도 노력하고 있다고!
그렇게 두 정령왕이 혼신을 다해 폭주를 잠재우는 동안에도 엘뤼엔은 묵묵히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이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잠시 내게 시선을 주곤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목은 괜찮은 거냐?
"응? 아아, 멀쩡해.애초에 세게 잡은 것도 아니었는 걸.
그런데 아버지는 저거 말리러 안 가도 돼? 둘만으론 힘들어 보이는데."
-흥! 막지 못할 시엔 소멸시키면 그만이야. 난 미치려고 작정한 놈까지 말려줄 만큼 너그러운 성격이 아니다.
"우우! 너무 냉정한 거 아니야?"
하지만 나의 투덜거림에도 그는 여전히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포기한 채 주위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폭발이 일어난 건물은 완전히무너졌지만,
선수들의 대기실이 있던 다른 쪽 건물과 검술 시합이 열리던 경기장은 비교적 멀쩡한 편이라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일이 벌어진 시각이 마침 4회전의 시합이 막 끝다던 참이라,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안에 있던 사람들은 엄청난 소음에 놀라서 뛰쳐나왔다가
부서진 건물의 잔해와 걸레처럼 늘어진 시체들을 보고 하나같이 퍼렇게 질린 얼굴이 되었다.
나는 그 중에서 나와 같은 방을 쓰는 슐츠와 다비안 씨를 발견하고 얼른 그들에게 뛰어갔다.
" 슐츠 형! 다비안 씨!"
" 엘! 무사했구나! 정말 다행이다."
"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갑자기 이게 어떻게 된 일이......!"
불안한 표정으로 묻는 그들으 모두 하나같이 하늘 위에 떡하니 떠있는 미네르바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듯 했다.
그저 갑자기 컴컴해진 하늘과 엄청난 바람이 휘몰아치는 것을 보며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 바람의 정령왕이 폭주했어요! 어서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좋을것 같네요.
혹시 텔레포트 스크롤 가지고 있는거 없어요?가능한 제국에서 멀리 떨어지는게 좋을것 같은데"
" 뭐? 정령왕의 폭주? "
" 그, 그게 무슨 소리야? "
" 자세하게 설명할 시간 없어요! 조금후면 폭주가 더 진행될지도 몰라요! 그럼 완전히 끝이라구요!"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까지 내 말을 듣고 모두 경악한 얼굴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벌어지는 현상이 워낙 심상치 않았던 탓인지라 그 말에 반박하거나 의문을 품는 자는 없었다.
" 이거 큰일이군! 정령왕이 폭주하다니! 레파르 백작이라는 사람이 그의 계약자라고 하지 않았어?
그 사람은 대체 뭘 하고 있었기에 이런일이 생기기전에 미리 막지 않은 거야?"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쉽게도 그들중에는 텔레포트 스크롤을 가진 이는 단 한명도 없는것 같았다.
바로 그때 , 무리 중에서 황급히 누군가가 뛰어나와 내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 아, 아나이스는? 내 여동생은 어떻게 된거지? 제발 말해다오!"
"......!"
잠깐 당황하던 나는 곧 그가 루시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아마도 경기장에서 시합을 관람하느라 우연히 그 혼자만 화를 피하게 된 모양이였다.
평소의 오만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저 동생에 대한 걱정으로 창백하게 굳어있는 얼굴을 보니 지난 시간 가져왔던 악감정이 약간 누그러지는 걸 느꼈다.
나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 않됐지만 그녀는 이미 폭주가 시작되기 전에 죽었어.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던 모양이군."
" 그,그게 무슨......?"
" 미네르바가 펠리온이 배신한 사실을 알았거든."
"......!"
그제야 녀석은 모든 정황을 깨달은 듯 힘없이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백치라도 된 듯이 멍해져 있는 모습이 않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자업자득이란 생각에 나는 애써 동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쿠우웅!
" 헉!"
그때 갑자기 엄청난 광풍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두 정령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네르바의 폭주가 더욱 진행된 것이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는 물론 나무조차 뿌리째 뽑혀 나갈 정도의 강렬한 바람 이었다,
당연히 그 안에 휘말린 사람들도 쟂빛 폭풍에 빨려들어 마치 종이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쿠오오오오!
"크, 크아아악! 사, 사람살려!"
"아아악!"
눈 앞에서 거대한 회오리가 일어나 꿈틀거리는 모습은 마치 지구 종말 영화의 한장면을 보는것 같았다.
제아무리 사람들이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쳐도 순식간에 닥친 자연의 함은 그들의 목숨을 맥없이 앗아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이렇게 큰 바람을 실제로 보는것은 전생을 통틀어 난생 처음이였다.
지나가는 곳마다 성한곳 없는 그 엄청난 파괴력에, 나는 나도 모르게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 이게 미네르바의 힘인가!"
평소의 차분한 인상탓인지 지금 이렇게 광폭하게 변한 그는 마치 전혀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이윽고 나의 코앞까지 다가온 잿빛 무법자는 근처에 있던 슐츠와 다비안 까지 집어 삼키려 했다.
" 으, 으아아아악! 끄, 끌려들어간다아아!"
"크윽! 버틸수가......!"
" 아, 않돼!"
화들짝 놀란 나는 황급히 두사람의 팔을 붙잡았다.
그래봤자 겨우 인간의 힘으로 버티기엔 역부족 이였지만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기에 행할 수 있던 일이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나의 온몸을 마구 휘저으려는 순간, 나는 버릇처럼 가정 먼저 떠오르는 이름을 불렀다.
" 우와악! 아버지~!"
그러자 나직하게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거짓말처럼 주위에 있던 바람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날려갈것을 대비해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것은 나와 함께있던 슐츠와 다비안, 두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 뭐, 뭐지?"
" 바람이......"
널립게도 그렇게 살벌하게 날뛰던 바람이 한순간에 진정되어 있었다.
그것을 느낀 내가 고개를 든 순간 가장 먼저 본것은 하늘 끝까지 치솟은 물줄기가 회오리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였다.
마치 커튼처럼 둘러쳐진 물보라는 날뛰는 바람을 그 안에 가두어 더 이샃의 행ㅂ로를 하지 못하도록 가두고 있었다.
" 헉! 어떻게 저럴수가......!"
" 세상에......!"
운 좋게 파장 밖에서 무사했던 사람은 물론,
막 휘말릴뻔했던 사람들 까지 모두 얼떨떨한 얼굴러 이 기적같은 현상에 감탄했다.
하지만 도두 넋 놓고 구경하느라 갑자기 등장한 푸른색 머리의 남자에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는듯 했다.
그는 물론 바람을 막은 장본인, 엘뤼엔이였다.
자연체였던 그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저 안더한 얼굴로 감사의 인사부터 건냈다.
" 헤에, 죽을뻔했다. 고마워, 아버지. 덕분에 살았어."
그러자 자신이 만든 물의 장벽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곧 나를 노려보며 짜증스럽게 한마디 내뱉었다.
" 정말 가지가지로 피곤하게 만드는군. 넌 나한테 부탁하면 다 되는줄 알고 있는거 아니냐?"
"태평한 녀석.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 방편일 뿐이다. 미네르바가 멈추기 전까진 절대 사라지지 않을꺼야."
그 말대로, 바람의 가운은 가둬진 후에도 여전히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거대가 어쩐지 힘들어 보이는 엘뤼엔의 표정으로 보아, 계속해서 꾸준히 힘으로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여전히 미네르바와 씨름을 벌이고 있는 두 정령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트로웰이 그를 진정시킬 수 있기만을 바랄 뿐.
그러자 옆에서 엘뤼엔의 눈치를 보고 있던 슐츠와 다비낭이 조심스럽게 내게 말을 건내왔다.
" 어이, 엘! 저사람은 누구야?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 호,혹시 저분이 방금전의 일을 막은거냐?"
" 예? 아,그게요"
호기심에 가듣한 그들의 얼굴에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평범한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그가 선보인 능력이 너무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체를 솔직하게 알려줄수도 없으니 난감한 심정일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그렇게 잠시 망설이고 있던 때였다.
"우에에에~~자기, 너무해에~~~ 남의 힘을 이렇게 막 뽑아 써도 되는 거야아?"
" 엥?"
발 밑에서 묘파게 늘어진, 닭살스러운 말이 들려와 느는 화들짝 놀라 다래를 바라보았다가 더더욱 기겁하고 말았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 왠 새파란 남자가 문어처럼 흐물거리는 몸으로 엘뤼엔의 다리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뤼엔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그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은채 가둬둔 태풍만 노려보고 있을 뿐이였다.
이윽고 살벌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공국이 날아가는건 너도 바라는 일이 아닐텐데? 닥치고 얌전히 협조해라."
" 후후~ 터프한 자기, 멋져...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 이러다가 죽을것 같은데에?"
" 그럼 죽어."
" 후후~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그치만 나 진짜 농담 아닌데에~?"
장난스러운 말투치곤 정말 괴로운지 남자의 안색은 무척이나 창백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쯧! 혀를 찬 엘뤼엔은 잠시후 약간 망설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 엘, 미안하지만 네 힘도 써야겠다."
" 응? 내 힘?"
" 네 마나 말이다. 중간계에선 계약자들의 마나를 끌어 쓰는 편이 강한 힘을 발휘하기에는 더 용이하거든.
그런데 아무래도 저 약골 도마뱀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군."
" ......!"
그제야 나는 바닥에 거의 쓰러지다시피 누워있는 남자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탈진해서 기진맥진한 얼굴로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 여어~ 네가 엘퀴네스를 소환했다는 그 인간이구나아? 이렇게 기막힌 미인일줄은 몰랐네. 만나서 반가워어~"
그 말에 내 뒤에 서있던 두 사람,
슟츠와 다비안이 급히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나대로 다른 것에 놀라느라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이런곳에서 만날 드래곤이라면 내가 알기론 딱 하나 뿐이었던 것이다.
" 설마... 당신이 블루 드래곤 라미아스?"
" 정답~ 날 만나러 왔다지이? 지금 여기서 날 살려주면 원하는 대답을 뭐든지 해줄게~~ 그러니까 제발 허락해줘"
그 대답에 나는 잠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라미아스라면 당연히 60대의 세피온 공작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마 이렇게 젊은 청년으로 나타날 줄이야(그것도 상당한 푼수의)정말 드래곤이 맞는걸까?
아무리 봐도 위엄이라곤 없어보이는 모습에,
불신 어린 눈으로 그를 살펴본 나는 별수 없이 엘뤼엔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곧 한 치의 배려도 없이 무지막지하게 마나가 빠져 나나근 것이 느껴졌다.
" 큭!"
온몸의 진기가 빨려들어가는 듯한 충격에 나는 살짝 신음을 흘리고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끌어다 쓸 때는 몰랐는데, 막상 입장이 뒤바뀌고 보니 기절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언제고 라피스의 마라를 이용해 몇 십마리의 시큐엘들을 소환해놓고 역소환 시키려고 했던 게 미안해지는 순간이였다,
나야 그저 단순한 장난이었지만, 녀석한테는 정말로 목숨을 위협하는 행동이였던것 이다.
' 에고고, 만나면 사과할 일이 하나 더 늘었군......'
나는 쩝 하고 입맛을 다신뒤 몸을 안정시키기 위해 길개 심호흡을 했다.
다행이 힘든 것은 잠시였을뿐,
내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빠져나가는 마나에 빠른 속도로 익숙해져 있었다.
그에 비해 블루 드래곤 라미아스는 여전히 힘에 겨워 헐떡이고 있는 상태였다.
" 우어어~ 엘퀴네스~ 다른 사람의 마나도 같이 쓰는것 맞아? 저아이는 왜 저렇게 멀쩡해?"
" ... 너보다 마나가 풍부하거든."
" 뭐? 말도 않돼! 인간이 드래곤인 나보다 마나가 더 풍부하다고?"
" 척 보면 알텐데? 더 이상 다른 대답이 필요한가? 집중에 방해되니까 말 시키지 마라."
싸늘한 대답에 라미아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으로는 연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눈동자가 더 이상 벌어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떠졌다.
" 으엑! 정말이잖아? 마법사도 아닌것 같은데, 어떻게 이런 마나가 인간에게? 저, 정말 인간인 거 맞아?"
뭐 1년만에 소드마스터가 된 전적도 있는데 이정도 쯤이야!"
그의 경악에 모른 척 무시한 나는,
그제야 아직 슐츠와 다비안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리고 그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왠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두 사람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처럼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 응? 두사람 다 왜 그래요?"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다 죽어가는 듯이 작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저, 저기... 그, 그게 말이지....... 방금 저분이 앨퀴네스라고......"
" 아! 드, 들었어요?"
하긴 그렇게 대놓고 떠들었는데 안 들릴 리가 없겠지.
그들뿐만이 아니라 주위에 있던 몇몇 사람들도 대화를 들은 듯 경악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에는 루시엘도 있었다.)
내가 어색하게 웃자, 제일 먼저 다비안이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을 건네왔다.
" 소, 솔직히 말해다오. 엘, 너 설마... 정령사였던 거냐? 그, 그리고 저기있는 저분이 설마 그......"
"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님이 맞아요, 제가 정령사인것 도 맞구요."
" 헉! 그, 그런데 왜 이제껏......"
정령사를 동경하고 있던 사람답게 다비안은 남들보다 몇 배는 더 기겁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 일부러 숨긴 것보단... 딱히 말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에요.
검술대회에 참가하러 와서 정령사라고 떠벌리는 것도 우습잖아요."
" 아니, 그... 그래도 정령왕을 소환한... 건 ... 정말 대단한......
게다가 엘퀴네스님이라면 이제껏 단 한번도 인간에게 소환된 전례가......"
" 그야 그렇지만... 뭐, 유명세를 타려고 소환한 것도 아닌데 굳이 알릴 필요가 있나요?
그리고 엘퀴네스는 미네르바와 달라서 시끄러운 걸 무척 싫어한다고요.
알려지는 즉시 저랑 계약 파기하고 정령계로 돌아가 버렸을 거에요."
그 말에 엘뤼엔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것을 본 사람들이 지레 겁을목고 흠칫 몸을 떨었지만, 정작 그들이 우려하는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았다.
그순간 퍼런 드래곤 라미아스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 크하하하! 아주 정확하게 엘퀴네스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데?
벌써 5천년 가까이 알고 지낸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것 같군! 대채 저런 재밌는걸 언제 찾아 낸거야. 엘퀴네스?"
" ...닥쳐라, 도마뱀"
" 아잉~ 자기, 화내면 무섭잖아~~"
하지만 그는 마음 놓고 웃을수 없었다.
열 받은 엘뤼엔이 나에게서 가져가던 마나를 일시 중지하고 다시 라미아스의 마나만 끌어다 쓰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가신히 혈색이 돌아왔던 그의 얼굴이 다시금 새파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 우에에에~~ 내, 내가 잘못했어, 엘퀴네스! 용서해줘어~~"
" 왜? 마나가 남아돌아서 여유 부린것 아니였나? 사양하지 않고 마음껏 써주지."
" 나, 날 정말 죽일셈이야?"
" 물론이다."
" 히익!"
쯧쯧! 그러게 누가 엘뤼엔의 성질을 건드리래?
비교적 코믹한 상황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상황도 잊고 슬쩍 미소를 내비쳤지만 나는 그럴수 없었다.
내 눈엔 그들이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트로웰......'
바람의 안정으로 비교적 평화를 되찾은 주위와 달리,
이 시각에도 그는 어떻게든 미네르바의 폭주를 잠재우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미네르바를 보는 그의 얼굴에는 이제껏 단 한번도 본 적 없었던 애잔한 표정을 드리워져 있었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던 탓에 그가 중얼거리는 목소리 또한 내 귀에까지 똑똑히 들려왔다.
- 제발 정신차려, 미네르바! 부탁이야, 제발......"
폭주란 결국 이성을 잃고 자해하는 행위이다.
사랑하는 자의 이런 모습을 온전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처음 나직하게 시작했던 말은 시간이 지날수로 조금씩 거칠어져갔다.
- 몇 번이고 아니라고 말했잖아! 배신당할 거라고 말했잖아!
이제와서 충격 받는 걸 내가 용납할 것 같아? 눈을 떠, 미네르바! 도망치는 건 용서하지 않겠어
- 어, 어이 트로웰! 달래도 모자를 판에 그렇게 윽박지르면......!
그의 격한 반응에 옆에서 돕던 이프리트가 일순 당혹해했으나 트로웰은 아랑곳 하지 않고 소리쳤다.
- 내가 알고있던 미네르바는 이렇게 약하지 않았어!
고작 인간의 배신따위에 자신을 내버릴 정도로 한심하지 않았다고!
원래대로 돌아와! 바람의 정령왕으로 되돌아 오란말이야!
마치 떼를 쓰는 어린아이와 같은 말투였지만 그의 얼굴은 슬픔으로 가득 일그러져 있었다.
이윽고 그의 황금색 눈동자에서 또르륵 맑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거의 투명해져있는 미네르바를 끌어안으며 옅은 흐느낌을 내뱉었다.
- 너는 바람이잖아. 미네르바...... 어느것에도 속하지 않고 자유로웠던 바람이잖아......
고작 이정도에 무너지는 너를 보려고... 지금까지 바라만 보고 있었던게 아니였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고백에서 나는 트로웰이 얼마나 미네르바를 사랑하고 있는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이 뒤로도 4천년이 넘도록 한결같이 오직 한 존재만을 바라보고 살 것을 알기에 더욱 감탄이 흘렀다.
미네르바가 소멸을 위해 떠나던 날도 트로웰은 지금처럼 처연하게 울었었다.
그가 내세의 길을 걷더라도 말없이 기다린다고 했던가. 아마 그라면 영원히 기다리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 이모습이 슬프게만 보이지 않는 건,
결국 둘의 마음이 서로에게 향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아주 간단하개 이루어진 것 같았던 그 과정이
사실은 이렇게 한쪽의 끊임없는 인내력에서 이루워진 승리였다.
'잘됐다, 트로웰. 지금은 페르데스와 행복하게 지내고 있겠지?'
내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던 순간이였다.
"...어?"
놀랍게도 미네르바의 몸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던 흉포한 기운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이 보였다.
그와 함께 흐릿해졌던 그의 몸 또한 점차 원래대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미네르바의 폭주가 멈췄다!'
그것을 느낀 이는 나만이 아니였다.
그와 가장 가까이 있던 트로웰과 이프리트는 물론,
내 주위에 있던 인간들까지 한결 정돈된 기운을 느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안심하고 있을 때, 예기치 못했던 두번 째 폭발이 일어났다.
쿠쿵! 콰아아아아아아앙!!
" 않돼! 트로웰!"
시끄러운 소리에 얼핏 잠이 깼다.
왠지 생각이라는 것을 해보는 것이 아주 오랜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자유로운 의식과는 달리 이상하게도 온몸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좁고 갑갑한 공간안에 억지로 구겨저 갇혀있는 기분이다.
언제부터 잠들어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전애 절박했던 순간만큼은 방금전에 격었던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거대한 폭발과 강렬한 바람, 흩어지는 모래의 잔재들. 그리고......
< 지금 뭐하는 거야! 난 괜찮으니까 너나 어서 피해!>
나를 향해 외쳤던 그리운 녀석의 목소리.
'...그립다고?'
나도 모르게 무심코 중얼거렸던 말에 나는 또다시 스스로 의문에 빠졌다.
그립다는 표현이 아무렇지 않게 나왔다는 것언 그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뜻.
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잠들어 있던 걸까?
' 그리고 여긴 도대체 어디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은 생각보다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없다는 것은 확실히 불쾌했다.
원래 낯선 장소에서도 곧잘 머무는 성격이지만, 내가 원해서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게다가 당시의 정황에 따르면 나는 지금 죽었어야 할 몸이다.
그때의 폭발을 온몸으로 막지 않았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어차피 치료를 해도 살기 힘들 만큼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니까.
그렇다면 여긴 설마 명계인가?
' 흐음. 명계가 이렇게 좁고 답답한 공간이라곤 들어본 기억이 없는데.'
잠깐 고민하던 나는 곧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바람에 머리가 단단히 굳어버린 모양이다.
이대로 방금 전처럼 다시 깊은 잠에 빠지고 싶다는 마음뿐이였다.
' 아... 그래도 그녀석이 걱정하고 있을 텐데.'
쓸떼없는 염려를 할까 봐 다친것도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정이 많은 녀석이 뒤늦개 그 사실을 알고 죄책감에 시달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것을 떠올리고 나나 나는 놈처럼 쉽게 잠을 청할수 없었다.
' 흠,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오래 쉰 것도 같겠다,
이제 슬슬 정신을 차려볼까? 너무 오래 기다리개 했다가 미움 받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내가 있는곳이 어딘지는 모른다.
물론 그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난 어느 곳에 있더라도 녀석을 찾을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나는 조용히 머릿속을 비우고 의식을 집중했다.
애초에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주 가까이에서 녀석의 기운이 느껴졌다.
' 어? 가까이 있다?'
잘못 짚은것이 아니였다.
이렇개 맑고 청결하며 정순한 영혼의 느낌은 오직 녀석에게서만 풍기었으니까. 설마 이렇게 빨리 찾게 될 줄이야!
기대하지도 않았던 보물을 건진 기분에 나는 싱긋 미소 지었다.
문제는 아직 녀석이 내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였다.
아무래도 나를 감싸고 있는 이 좁디좁은 공간이 그의 감각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내 능력으로는 혼자서 이곳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결국 그가 나를 눈치 채기만을 기다리는 수 밖엥.
" 바보같긴! 빨리 찾아내지 못하고 뭘 하고 있는거야?"
괜스래 답답한 마음에 괜히 녀석에게 화를 내 본다. 그래봤자 이 울림이 밖으로 전달되지는 못하겠지만.
"지금 내가 이러한데 그의 심정은 오죽할까?
아마도 마지막 순간에 내멋대로 한 행동 때문에 지금까지 꽁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라피스!)
폭발의 순간에 보았던, 크게 부릅뜬 푸른색 눈동자,
물거품처럼 흐트러진 하늘을 닮은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울고 화를 내는 것을 기대해 보기는 처음 이였다.
그래서 당장 죽는다는 것을 알았을때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 뒤로 무슨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나를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 이곳에 갇혀있는 시간도 즐겁게 보낼수 있을것 같았다.
지금 내 생각을 알면 녀석은 당연히 화부터 먼저 내겠지만.
나는 키득거리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 난 여기에 있어, 엘 바로 네 근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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