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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소설] 정령왕 엘퀴네스 10권

by 아도비야 2021.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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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소설] 정령왕 엘퀴네스 10권

 

 



새로운 세상 속으로

지금 나는 무척 심란한 고민에 빠져있다. 상식적으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을 떠보니 드넓게 펼쳐진 초원과 그 위를 날아다니는 한 떼의 정령이라... 아크아돈 말고 또 정령계와 연결된 차원이 있었던가? 아니, 만약 그랬다면 내가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렇담 저 눈앞에 날아다니는 것들은 정령이 아니라는 소리? 호, 혹시 나는 유령의 세계에 떨어진 건가? 하급 정령과 똑같이 생긴 유령이라니!!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그럼 유령이 보이는 나는 뭐란 말이야! 설마 무당이라도 된 거야? 이게 바로 영감(靈鑑)소년? 날더러 퇴마사라도 되라는 소리인가?
“젠장, 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있나!”
그렇게 혼잣말로 투덜거리는 동안, 서늘한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휘이잉~ 스쳐지나갔다. 옅은 바람이었지만 꽤 싸늘한 한기가 느껴져, 나는 두 어깨를 감싸며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윽, 뭐가 이렇게 추운거야. 응? 춥…다고?”

정령이 된 이후로 내 몸은 추위와 더위를 잊은 지 오래되었다. 

단순히 기온이 높다, 낮다는 구분할 수 있어도 그것을 몸으로 체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춥다니?!

그러고 보니 중간계에 내려왔을 때 느꼈던 묘한 압박감이라던가, 능력이 제한당하는 것 같은 불쾌한 기분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나는 내가 이미 정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아! 궤도를 따라가면 새로운 육체를 입게 된다고 했었지! 그럼 여긴 정말 아크아돈이 아니라는 소리? 

그, 그럼 난 대체 뭐가 된 거지?”

유령을 볼 수 있는 몬스터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바 없다. 

하지만 워낙 엉뚱한 차원이라면 그런 일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는가!

나는 황급히 시선을 내려 나의 팔다리를 포함한 여기저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멀쩡한 피부색과 손의 모양을 보아 최악의 사태까지는 다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어깨를 타고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눈으로 흘끗 확인한 나는, 그것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빛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금발? 머리 길이는 예전이랑 똑같네. 옷은 입고 있는 것 같고…아! 그러고 보니 얼굴도 달라졌을까?”

일단 몬스터가 아니라는 확신이 서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근처에 흐르고 있던 시내 쪽으로 얼굴을 드밀었다.

 물에 비치는 형상으로 지금의 상태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바라본 모습은 눈과 머리색이 바뀐 것만 빼면 이전의 모습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우연히라도 날 아는 존재를 만난다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예전과 똑같은 얼굴이었던 것이다.

“귀의 모습이 둥그런 걸 보면 엘프는 아닌 게 확실한데…인간으로 변한 건가?”

그나마 가장 흔한 종족이 된 것이 다행일지 불행일지…….

한때 인간으로 살아본 적이 있어서인지, 정령왕의 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만 빼면 그리 불편한 점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발에 녹색 눈동자라…왠지 익숙한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일까? 어라? 그런데 뭔가 묘하게 허전한 느낌이?

“이마의 문장이 사라졌다…….”

서클렛이 없어 밋밋하게 드러나 이마엔 언젠가 엘뤼엔이 새겨 주었던 신의 문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아마도 육체가 달라져서 그에 입혀졌던 권한마저 사라져버린 듯하다.

잠시 아쉬운 기분으로 이마를 만져본 나는, 이내 그에 대한 생각은 털어버리기로 작정하고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흐음, 얼굴이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그런가? 이왕이면 터프하고 남자다운 얼굴로 바뀔 것이지,

 왜 아직도 이런 계집애 같은 몰골인 거야? 헉! 서, 설마 몸까지 여자가 된 건 아니겠지?”

인간이 되어버린 이상, 이제 더 이상은 중성이라는 소리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머리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떨리는 손으로 다급히 몸을 더듬었다. 

그리하여 탁탁 두드려본(?) 가슴은 절벽이라는 말로도 묘사가 되지 않을 만큼 단단하고 평평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차마 말로 하기엔 민망하지만, 남자의 증거인 무언가가 확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마르고 부실한 몸이긴 해도 틀림없는 남자였던 것이다!

“살아 있길 잘했어…….”

감격으로 인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는 감동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많은 종족 중에서 인간이 된 것도, 더불어 완전한 남자가 된 것도 나로서는 모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엘뤼엔은 어찌될지 모른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그가 미리 손을 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즐거운 기분도 그리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다. 인간이 되었다면 당연히 없어야 할 능력! 

자연체의 정령들을 볼 수 있는 것에 무한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연 친화력이 극성에 이른 사람이라도 소환되지 않은 정령들을 보지는 못 한다. 

설마 정말로 정령을 닮은 유령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정면 돌파를 하기로 작정했다. 



즉, 주위를 떠도는 정령 비슷한 생명체들에게 직접 말을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저기…얘들아, 혹시 지금 바쁘니?”

내가 가장 먼저 질문을 건넨 상대는 역시나 제일 만만한 물의 하급 정령인 나이아스였다.

 그 특유의 가공할 만한 수다력으로 연신 웃고 떠들던 그들은, 내가 말을 거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는지 여전히 

자기들끼리 재잘거리며 돌아다니기만 했다. 나는 참을성 있게 다시 한 번 그들을 불렀다.

“어이? 너희들 지금 바쁘냐고!”

-꺄하하~ 그래서 말이야~

-어머! 그게 정말이야? 정말 재미있다!

-헤헤~ 인간들은 웃기구나!

“…이것들이!”

내 말을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안 들리는 건지 몰라도 일단 내 부하(?)랑 똑같이 생긴 녀석들에게 무시당하자 

기분이 은근슬쩍 나빠졌다. 결국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야! 너희들! 내 말 안 들려? 대답을 좀 해보란 말이야!!”

그러자 정령의 탈을 쓴 그 존재들도 드디어 나를 알아챈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놀란 표정을 서로를 바라보던 그들은 곧 우르르 내게 몰려와 주위를 포위하듯이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곤 내가 미처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속사포로 떠들어 대는 것이 아닌가.

-인간 아냐?

-인간이야.

-혹시 방금 우리한테 소리친 거야?

-우리한테 말했어?

-우리가 보여?

-정말 우리 보여?

-우리한테 말했어?

안 그래도 무시무시한 수다력이 한꺼번에 집중되자 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나마 같은 내용만 질문한다는 것이 다행이랄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너희들한테 말한 것 맞아. 보이니까 당연히 부른 거고.”

-헉! 인간이 우리가 보인대!

-우리가 보인대!!

-우리한테 말한 거 맞대!

-정말 맞아?

-맞나 봐!

내가 자신들을 보는 것이 상당히 의외라는 듯, 그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서로에게 같은 말을 확인시켰다. 

그 행동패턴이 정말로 나이아스와 비슷했기 때문에, 나는 점점 불안한 심정이 되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노희들 혹시 물의 정령이냐?”

-우와! 우리가 정령이라는 것도 알아!

-똑똑하다! 어떻게 알았어?

-우리 알어?

-어떻게 알았어?

-우리는 어떻게 보여?

-어떻게 봤어?

“자, 잠깐… 정령이 맞다고?

-응!응! 물의 정령이야!

-가장 낮은 단계의 정령이야!

-어떻게 알아?

-누구야?

-우리가 어떻게 보여?

그들은 또 다시 속사포로 질문을 퍼부었지만, 이미 내 귀엔 들리지 않고 있었다. 물의 정령이 맞다고? 

그럼 정말로 나이아스들이란 말이야?

“자, 잠깐만 기다려봐. 정령계는 아크아돈하고만 연결되는 거 아니었어?”

-맞아! 오직 아크아돈과 연결돼!

-똑똑하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

-다른 인간들은 몰라!

-대단하다!

-신기하다!

역시 내 상식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정령계와 연결되는 유일한 차원은 아크아돈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 설마 여기가…….”

-아크아돈이야!

-아크아돈이라고 해!

-우리는 아크아돈의 정령이야!

“……!!”

생각지도 못했던 결론에 나는 멍하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 아크아돈이라니! 

그럼 라피스의 영혼은 다른 곳으로 날아간 게 아니라 그냥 이 세상에 떠돌아다니고 있었다는 소리인가? 

아, 아니, 그보다… 인간이 된 내가 어떻게 정령들을 볼 수 있는 거지?

이상한 건 나이아스들이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는 거였다. 

내 기운이 달라져서 눈치 채지 못한다고 쳐도. 적어도 외모가 자신들의 왕과 상당히 닮았다는 사실은 인식하고 있을 텐데, 

마치 처음 대하는 것처럼 흥미롭게 구경하는 모습이 뭔가 상당히 껄끄러웠다.

“휴우,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이럼 처음부터 인간이 될 필요가 없었다는 소리인가? 엘뤼엔이 보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아니,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 가지이겠군.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자 내 혼잣말을 들은 나이아스들이 신나서 질문하기 시작했다.

-인간 맞지?

-이제 어디 가는 거야?

-일행들이 있어?

-엘뤼엔이 누구야?

“누구냐니… 형벌의 신 엘뤼엔 몰라?”

마지막 질문에 나는 위화감을 느끼곤 되물었다. 그가 내 아버지가 된 사건은 꽤나 유명한 것인데다, 

나와 감정을 공유하는 정령들은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이아스들은 전혀 금시초문이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아닌가?

-몰라.

-처음 들어.

-형벌의 신?

-그게 뭐야?

“…….”

장난이 심한 녀석들이긴 해도, 기본적으로 정령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위기를 모면하거나 누군가를 놀린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모르고 있다는 소리인데, 설마 여기… 이름만 똑같은 아크아돈이고 알고 보면 다른 차원인 건 아니겠지?

나는 혹시나 싶어 조심스럽게 다른 질문을 꺼내보았다.

“그럼 카노스는 누군지 알아?”

-알아!

-마신!

-마신의 이름이야!

-마신 카노스!

그들은 질문한 내가 무안해질 정도로 정확하게 대답했다. 같은 상급신인데 엘뤼엔은 모르고 카노스는 알다니. 

덕분에 내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지는 것도 모르고, 나이아스들은 즐겁다는 듯이 떠들기 시작했다.

-다른 신의 이름도 알아!

-사랑의 신은 헤르미스야!

-대지의 신은 유엘님이고!

-꽃의 신은 프라워스야!

-우리 똑똑하지?

-우리 똑똑해!

“아아, 그래, 똑똑해. 그런데 정말 엘뤼엔은 모른단 말이지?”

-몰라.

-들어본 적 없어.

-엘뤼엔인 누구야?

“…거참, 이상하네.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물의 정령들이 모를 리 없을 텐데.”

잠깐 골치 아픈 얼굴로 투덜거린 나는 곧 체념의 한숨을 내쉰 후,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모른다는데 더 이상 채근해봤자 소용없는 일 아닌가?

“일단 아는 사람부터 만나야… 아, 그래! 너희들 혹시 트로웰 좀 불러줄 수 있니? 지금 여기 중간계에 있을 텐데.”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결과는 전혀 의외의 형식으로 되돌아 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생글생글 웃고 있던 나이아스들의 얼굴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더니 덜덜 떠는 목소리로 대답했던 것이다.

-트로웰?

-설마 땅의 정령왕 트로웰님?

-트로웰님을?

웅성웅성. 시끌시끌.

서로를 바라보며 떠들어대는 나이아스의 얼굴에는 까닭 모를 두려움이 짙게 드러나 있었다.

아아, 그렇지. 지금 나는 정령왕이 아니라 인간이었지. 겨우 인간인 주제에 정령왕을 불러달라고 해서 화가 난 걸까?

갑자기 험악해진 주위 분위기에 나는 난감한 심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그들이 혼란스러워한 것은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잠시 후, 나이아스들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트로웰님을 부를 수 없어.

-그분은 무서워.

-우리를 그 자리에서 소멸시킬지도 몰라.

-무서워.

-가고 싶지 않아.

“…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기에 나는 아연한 심정으로 되묻고 말았다. 

그 상냥하고 자상한 트로웰이 무섭다고?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라 단체로?

‘아… 하긴, 하급 정령들이니까 정령왕의 존재가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겠군.’

나이아스들은 처음에 나도 무서워했었다. 나중에 내가 그들에게 다정하게 대해주고 나서야 

마음을 풀고 접근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조금 충격이긴 하다. 그 자리에서 소멸시킬지도 모른다니, 

설마 하급 정령들은 정령왕을 모두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언젠가 땅의 하급 정령을 시켜 트로웰에게 연락하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그 정령의 입장에서는 무척 힘든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같은 정령왕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따랐던 것일 테지.

‘그럼 이제부터 트로웰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연락해야 하지? 여기가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인지도 모르는데.’

생판 타지라면 모를까, 뻔히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를 수 없다니 답답한 심정뿐이었다. 

그들은 내가 이런 곳에서 헤매고 있다는 걸 꿈에나 생각하고 있을까?


“아, 그래. 그럼 이렇게 하자. 나한테 지금 중간계에 내려와 있는 정령왕들의 위치를 알려줘. 그건 별로 어렵지 않지?”

내가 이렇게 말을 건네는 이유는 그들에게 길 안내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트로웰이나 이프리트나 아직 솔트레테의 황성을 떠나지 않았을 테지만, 

여기서 그곳으로 가는 정확한 방향을 알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나이아스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왕들의 위치?

-위치라면 존재하는 장소를 말하는 거지?

-다들 제각각인데, 어느 분부터?

“음, 여기서 가장 가까운 쪽.”

제각기 떨어졌다면 이프리트가 다시 상단으로 돌아갔다는 의미일까? 

설마 트로웰과 미네까지 이사나의 옆을 비우진 않았겠지? 

어찌되었든 찾아가기 편한 쪽부터 만나는 것이 가장 최선이었다. 

그들이라면 내가 인간이 되었다고 해도 틀림없이 알아볼 테니까. 

그러나 이어지는 나이아스들의 대답에 나는 그대로 경악하고 말았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시는 왕이라면 역시 미네르바님일까?

-그렇겠지?

-맞아. 얼마 전에 이곳에 있는 인간에게 소환되었잖아.

“뭐? 미네르바가 인간에게 소환되었다고?

내 놀란 외침에 나이아스들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몰랐었어?

-헤에, 소식에 둔한 인간이구나?

-그땐 정말 장관이었지. 인간들이 모두 기뻐서 축제까지 열었으니까.

-그럴 만도 할 꺼야. 정령왕의 소환이었잖아.

-게다가 소환한 인간이 이곳에서 꽤 세력 있는 귀족이었으니까.

-젊고 능력 있는 도련님이라고 해서 꽤 많은 인간 여자들의 환호를 받았지.

나는 나이아스들이 신나서 떠드는 내내 복잡한 심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요즘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정령왕이 인간에게 소환되는 것이 유행인가? 

내가 이사나에게 불려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미네까지 소환되다니. 

어쩌면 인간들의 능력이 점점 업그레이드 되어가는 걸지도.

“하아, 모르겠다. 그럼 다른 정령왕들은?”

-미네르바님 다음으로 가까이에 계신분은 트로웰님이야.

-엘퀴네스님이랑 이프리트님은 정령계에 계시고.

-이프리트님은 얼마 전에 유희에서 돌아오셨지? 이번엔 정령계에 오래 계실까?

-아니. 어차피 잠시일걸. 엘퀴네스님은 몰라도 이프리트님은 무료한 걸 질색하시잖아. 곧 중간계로 다시 나오실 거야.

-그전에 엘퀴네스님과 또 싸우시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러게 말이야. 안 그래도 요즘 엘퀴네스님 기분도 좋지 않으신데.

그들의 말에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와 이프리트가 만나면 언제나 사소한 말다툼이 있긴 했지만, 

나이아스들이 저런 식으로 걱정할 만큼 심하게 싸운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령계에선 이미 내 영혼이 빠져나가 육체만 남아 있을 텐데, 기분이 좋고 나쁘고를 어떻게 판단한단 말인가?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에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나이아스들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엘퀴네스… 그러니까 너희들의 왕이 기분이 좋지 않다고?”

-응. 요즘 내내 그러셔.

-유희를 나가시는 것도 그다지 흥미를 잃으신 듯하고.

-뭔가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신 게 아닐까?

-그럴지도 몰라. 요즘은 눈에 띄게 재미있는 일이 없잖아.

-세상이 너무 평화로워도 문제인 거지.

“저, 저기, 한 가지만 더 물어보자. 혹시 내 얼굴이 너희들의 왕이랑 꽤 많이 닮지 않았어?”

하지만 돌아오는 건 명백한 부정이었다. 나이아스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까르르! 그런 말은 처음 들어.

-정령왕과 닮은 인간은 없어. 그건 창조될 때부터 허락되지 않는 일이지.

-게다가 엘퀴네스님은 확연한 남성체인걸. 당신처럼 어리고 예쁘장한 얼굴이 아니야.

-굳이 말하자면 청년?

-맞아! 인간으로 치면 성년을 넘긴 성숙한 느낌이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설마 저들이 알고 있는 엘퀴네스가 내가 아니라는 소리? 

정령왕의 존재가 단 4명 뿐인게 아니었단 말이야?

그들은 내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듯 여전히 웃으며 자기들의 왕을 자랑하기에 바빴다.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정령왕!

-얼음처럼 차가운 성정에 도도하신 분!

-그분은 역대 물의 정령왕을 통틀어 가장 강하다는 칭송을 얻고 계시지.

-그만큼 중간계의 생물이 소환하기에 어려워하는 존재이고.

-그래서 오히려 외로워질 수밖에 없는 분이야.

“…….”

들으면 들을수록 나와는 거리가 먼 얘기였기에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심정으로 

하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곳이 내가 알고 있던 아크아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 이들이 말하는 트로웰과 미네르바도 내가 알고 있는 그들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나는 대체 어느 황당한 차원으로 떨어진 걸까?

좀처럼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진 상황에 나는 연신 한숨을 내쉬며 푸욱 고개를 숙였다.

 순간, 무심코 바라본 왼쪽 손등에 익숙한 새하얀 문장이 새겨진 것이 보였다.

“…어?”

순백의 은테안에 그려진 두 장의 날개.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완벽한 마신 카노스의 문장이 아닌가! 

그가 소멸한 이후 지워진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참이었기 때문에, 

나는 갑자기 다시 나타난 문장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왜 카노스의 문장이…….’

하지만 나는 이어지는 나이아스들의 속공에 막혀, 놀라움을 표현할 사이도 없이 다시 그들에게 시선을 돌려야 했다.

-아, 그래! 당신이 엘퀴네스님을 소환해보는 게 어때?

-맞아! 엘퀴네스님을 소환해봐.

“뭐? 내, 내가?”

-응! 우리를 볼 수 있는 당신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꺼야.

-이렇게 자연 친화력이 뛰어난 인간은 본 적이 없어.

-엘퀴네스님을 소환할 수 있을 거야.

-해봐. 응? 한번 해봐~

정령왕한테 정령왕을 소환하라니, 이렇게 어이없는 일이 또 있을까. 

하지만 나이아스들은 내 얼굴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단순히 두려워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정령왕의 소환은 실패할 경우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걱정 마. 할 수 있다니까?

-당신이라면 충분히 가능해.

-엘퀴네스님을 소환해 봐. 응?

나이아스들이 하는 말이니 내가 이들의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다는 건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만나 봐도 괜찮은 걸까? 

아직 누가 진짜고 가짜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데, 소환해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지금 상태론 내가 엘퀴네스라고 말해봤자 비웃음만 당할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성격도 그다지 좋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정령왕이면서 도도하고 차가운 존재라면 엘뤼엔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당시 신력으로 가볍게 손봐주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어라? 그러고 보니 정말 엘뤼엔이랑 비슷하네?’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엘퀴네스였을 시절 엘뤼엔은 역대 물의 정령왕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게다가 남성체인 것과 성격이 차가운 것 또한 판박이라고 할 만큼 똑같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찜찜할 정도가 아닌가?

인간에게 소환된 미네르바와 다시 나타난 카노스의 문장. 

엘뤼엔과 똑같은 성격의 엘퀴네스. 틀어졌던 수레바퀴가 점점 맞물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홀린 듯 

옆에 흐르고 있던 시냇물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어쩌면…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러는 사이, 내 입에선 어느새 나도 모르게 정령을 소환하는 주문이 뱉어지고 있었다.

“…땅과 바람과 물과 태양. 4대 기운을 증인으로 계약의 증거를 제시하며, 

나 오늘날 그대의 존재를 이 땅에 소환하고자 하오니 그 이름은 모든 물의 근원이자 지배자, 

정령왕 엘퀴네스여! 나의 부름에 응답하소서.”

주문을 마친 나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맑은 시냇물에 담갔다. 

그러자 잔잔히 흐르던 물결에 커다란 파동이 일어나더니, 

폭발이라도 일어나듯 물줄기가 거친 파도처럼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촤아악! 철썩!

마치 분수처럼 하늘 높게 뻗어 올라가던 물줄기는 사방으로 물안개를 퍼뜨리며 

그 안에서 점점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정령왕의 소환이 성공한 것이다!

“크윽……!”

그와 함께 나는 급격한 기운의 소모를 느끼고 짧은 신음을 삼켰다. 

어지간한 인간이라면 정신을 잃을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그 고통이 오래 이어지기 전에 나에게 건네는 낯익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네가 나를 소환한 인간인가?”

“……!!”

마침 어지러움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화들짝 놀라 얼굴을 들었다. 

그곳엔 어느새 소환진을 타고 지상에 내려온 엘퀴네스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서 있었다. 

보통의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정령왕을 소환한 사실에 놀랐겠지만, 나는 그와 다른 문제로 더욱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시리도록 하얀 피부에 얼음처럼 차가운 푸른색 눈동자.

 발끝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물색보다 맑은 푸른빛이었지만, 

그의 얼굴이 내가 알고 있던 이와 판박이라고 할 만큼 똑같았던 것이다.

“아, 아버지?”

그랬다. 그 모습은 틀림없이 엘뤼엔과 닮아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자 그 놀라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에 눈앞의 존재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 표정조차 평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겼을 때 보이던 엘뤼엔의 모습과 똑같아서 

나는 연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나를 시큰둥한 표정으로 보던 그는 한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삐딱하게 한 마디 내뱉었다.

“난 너 같은 아들 둔 적 없는데.”

“아, 그, 그게 아니라…….”

“흥! 소환의 충격 때문에 정신이 나가버린 모양이군. 

역시 인간들은 정신상태가 약해빠졌어. 그런 주제에 날 소환하다니, 간덩이가 부었군.”

“…독설까지 똑같잖아.”

“뭐라고?”

“아, 아니에요. 저어, 당신이 엘퀴네스인가요?”

조심스럽게 묻는 내 말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다. 나는 엘퀴네스. 그리고 넌 물의 정령왕을 최초로 소환한 인간이지.”

“최…최초라고요? 내가?”

“그럼 여기 너 말고 다른 인간이 있나? 뭐, 확실히 나로서도 놀라운 일이었다. 

설마 인간이 나를 소환할 줄이야. 어쩔 텐가. 계약을 할 거야. 말 거야? 의사표현은 확실히 해라.”

“자, 잠깐만요! 그 전에 몇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러자 엘뤼엔, 아니 엘퀴네스라고 자신을 밝힌 정령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내가 자신을 소환한 최초의 인간이라는 이유로

 꽤나 관대함을 베풀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인내심이 바닥이 나기 전에 나는 재빨리 질문을 건네기로 마음먹었다.

“여기가 아크아돈이란 차원이 맞나요? 4대 정령왕이 존재하는?”

“그렇다.”

“혹시 이 대륙에 솔트레테 제국이나, 이사나라는 황제가 있었던 적은 없었나요?”

“내가 알기론 없다.”

“그럼… 10년 동안 비가 안 내린 적은요? 혹시 형벌의 신 엘뤼엔을 아세요?”

“그런 신은 없어. 그리고 내가 존재하는 한, 이 땅에 가뭄이 생기는 일은 없다. 

너는 내가 10년 동안이나 이곳에 비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는 점점 사나워졌지만, 나는 이미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어서 느끼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내가 흥분 때문에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듯, 그는 마치 선심을 쓴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은 뭐지? 나를 소환한 최초의 인간이란 점에서 이름 정도는 기억해 두겠다.”

“아…엘퀴… 아, 아니! 엘이요. 엘이라고 해요.”

흠칫! 무심코 대답한 순가, 나는 우연처럼 시벨리우스의 모습을 떠올리곤 어깨를 움찔거렸다. 

아니, 그가 이제와서 생각났다는 것이 더 이상했다. 

나는 내 머리색이 변한 것을 눈치 챈 순간부터 깨달아야 했었다. 

금발 머리에 초록색 눈동자라면, 언제나 시벨리우스가 입버릇처럼 말했던 ‘엘’의 생김새와 똑같지 않은가!

“흠, 엘이라고? 내 이름의 앞 글자와 같군.”

재미있다는 듯 혼자서 중얼거리는 정령에게 나는 떨리는 입술로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이곳에… 유니콘이 살고 있나요?”

“정말 당연한 걸 묻는군. 드래곤보다 많이 퍼져있는 종족이 바로 유니콘이다. 

이 정도 상식은 인간들도 대부분 알고 있을 텐데?”

“…….”

10년 가뭄이 없던 나라. 유니콘이 존재하는 게 당연하고, 

물의 정령왕을 소환한 최초의 인간이 이사나가 아니라 ‘엘’ 이라고 알려지는 세계.

“…4천 년 전의 과거인가.”

설마 그 ‘엘’이 바로 나였을 줄이야.

왠지 허탈해진 기분에 나는 피식 미소를 터뜨렸다. 

설마 설마 했지만 정말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비록 어디로 떨어지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곤 했지만, 과거로 가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혹시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4천 년 전이라면 시벨리우스가 서클렛에 봉인되기 전이며, 

트로웰의 나이가 천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이다. 

라피스와 내가 알던 이프리트는 태어나지도 않은데다, 엘뤼엔이 아직 엘퀴네스이던 시절. 

그러니까 지금 눈앞의 정령왕이 바로 엘뤼엔의 과거라는 소리가 된다.

“하…하하하하!”

그제야 나는 떠나기 전에 트로웰이 ‘이것이 끝이 아니다’라고 말했던 의미를 깨달았다. 

그는 이미 혜안을 통해 내가 이곳에 떨어지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의 이별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나는 또 다른 그들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나는 여전히 혼자가 아니었다.


“이봐, 뭘 그렇게 혼자서 웃는 거야? 계약은 할 건가, 말 건가?”

‘아참, 이럴 때가 아니지.’

기다리는 것이 지루해졌는지, 엘퀴네스, 아니 엘뤼엔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시간을 끌었다간 당장이라도 정령계로 돌아가 버릴 것 같은 기세라, 나느 얼른 표정을 수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계약한다고 하면 해줄 건가요?”

“무슨 의미지?”

“정령왕은 소환자와의 계약을 거절할 수 있는 권리가 있잖아요. 계약자로서 나를 택할 거냐고 묻는 거예요.”

그러자 엘뤼엔은 무척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보통 인간들은 소환을 하면 전부 계약이 가능하다고 알고 있으니 이런 말에 놀라는 것도 그다지 무리는 아니다.

평소라면 좀처럼 볼 수 없는 표정이었기 때문에 나는 괜히 신이 나서 열심히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런 권리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나?”

“어떤 책에서 읽었어요. 하긴, 소환된다고 무조건 계약해야 한다면 정령왕의 체면도 말이 아니죠. 

하지만 나와의 계약은 거절하지 말았으면 해요.”

“그건 또 왜지?”

“엘퀴네스를 최초로 소환한 인간이라면서요. 제 입장도 생각은 해주셔야죠.”

생긋 웃으며 대답하자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무심하기만 한 얼굴에 미소가 번지니 주변이 다 환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비록 비웃는 것에 더 가까웠지만.).

푸른색 머리카락 때문인지 그는 이전보다 한층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범접하기 힘든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신이 된 이후 그의 성격이 밝게 바뀌었다는 말은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이다.

잠시 후,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한낮의 모래사막을 떠올릴 만큼 마르고 건조했다.

“당돌한 인간이군. 내가 두렵지는 않나?”

“대하기가 어렵긴 해요. 하지만 무섭진 않아요.”

신계에서 그와 처음 만났을 떄도 나는 그를 무서워하진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된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엘뤼엔은 자신있게 대답하는 나를 잠시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널 죽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하긴, 너처럼 자연 친화력이 뛰어난 자를 내 손으로 없애는 것도 그리 내키지 않는 일이긴 하지.”

짧게 중얼거린 그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천천히 한 손을 뻗어 내 이마에 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그것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나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곧 이어질 엘뤼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최초로 인간에게 소환된 기념으로 계약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나는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 그대 ‘엘’은 계약을 이행함으로 나를 이 세계에 끌어낼 힘을 제공하며, 

나는 그 대가로 너의 보필자가 될 것을 약속한다. 계약하겠는가?”

“네! 물론.”

“훗! 좋아. 계약은 성립되었다. 이것은 너를 평생동안 구속할 족쇄이자 보호막이 될 것이다. ”

내가 한때 읊었던 말을 고스란히 듣는 순간이 올 거라 누가 예상했을까. 

나는 엘뤼엔이 내 이마에 물의 인장을 새기는 동안 착잡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싼 정령들을 바라보았다. 

정령왕으로서 간신히 적응이 되었다 싶었더니 다시 인간이 돼버렸다. 

이걸 설명한다고 이해해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지금 계약하는 엘뤼엔조차 내가 자신과 똑같은 성질의 정령왕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는데…….

잠시 후, 물의 인장이 완전히 새겨지자 그의 형체 또한 온전하게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중간계에서 유희하기에 걸맞은 몸으로 바뀐 것이다. 

당시에 나는 무척 신기해하던 일이었지만, 엘뤼엔은 익숙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왜요?”

“계약할 때 보니 몸에 전체적으로 묘한 기운의 흐름이 느껴지더군. 마신의 힘이 서려 있던데, 넌 설마 신관인가?”

그의 시선은 정확히 내 손등에 새겨진 마신의 문장을 향하고 있었다. 

보통 신관이 정령을 소환하는 경우는 없었기에, 나는 이래저래 특이한 인간으로 부각되는 듯했다.

“마신의 문장? 그것도 꽤 고위급의 사제인 것 같군.”

“아, 아니요. 오해예요. 전 신관이 아니거든요.”

“그럼 그 문장은 뭐지”

“아하하! 여기엔 좀 복잡한 사정이…….”

이곳에선 아직 카노스가 살아 있기 때문에 문장이 다시 살아난 것일까. 

언젠가 그와 다시 만날 수도 있을지 모른단 생각에 내 마음은 기대감으로 붕 뜨기 시작했다.

그 밖에 내가 알고 있던 이들의 지난 과거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당장 라피스의 영혼을 찾아야 한다는 조급함을 잠시 잊을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그런 나를 잠시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엘뤼엔은 곧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물어왔다.

“그래, 이제부턴 넌 뭘 할 작정이지? 별 다른 일이 없다면 난 이만 정령계로 돌아갈 생각이다. 

가능한 난 귀찮게 하지 말고 휘하의 정령들을 이용하도록.”

“엑? 돌아간다구요?”

“왜? 굳이 나와 함께해야 할 이유가 있나?”

“그야 당연하죠! 난 여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내가 정처없이 떠돌다가 굶어죽어도 좋아요?”

“그런 건 내 알바 아니다. 내가 계약자의 생활까지 챙겨줄 의무는 없을텐데?”

생각보다 훨씬 쌀쌀맞은 말투에 나는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지금의 그가 나를 모른다는 사실은 알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에게 서운한 감정을 느끼고 마는 것이다. 

때문에 반박하는 내 목소리도 자연스럽게 사나워졌다.

“그건 아니죠. 방금 자신이 한 말도 기억 못해요? 계약하는 조건으로 정령왕은 계약자의 보필자가 돼주기로 했잖아요. 

그러니까 정령계로 돌아가면 안돼요.”

“어처구니없는 결론이군. 그런 형식적인 서약 따위로 내 발을 묶어두겠다는 거냐?”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잘라야지! 말에는 힘이 담겨 있다는 거 몰라요? 약속은 약속이라구요.”

“그래서 내 휘하의 정령들을 시키라고 했잖아. 그 정도라도 너 같은 인간에겐 큰 힘이 될 거다.”

“안 돼요! 난 지금 시급을 다투는 무지무지 중요한 난국에 빠져 있단 말이에요!”

이러다 열 받은 그가 계약을 파기하고 돌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지만, 

다행히 엘뤼엔은 그렇게 까진 하지 않았다.

잠시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던 그는 푸욱 한숨을 내쉬곤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좋아. 일단은 함께해주지.”

“정말요? 와아, 고마워요.”

“단! 네가 거취 할 장소를 정할 때까지만 이다. 

평생 인간의 뒤치다꺼리를 할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여기서 더 귀찮게 굴면 지금 한 계약도 파기하고 너도 죽이겠다.”

“으음… 아, 알았어요.”

살벌한 눈빛에서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경직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엘뤼엔은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후우! 그래, 그 시급을 다투는 중요한 일이라는 건 뭐냐?”

“아 그, 그게요…….”

“정확히 말해라. 확실히 의사표현을 하지 않으면 내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잖아.

 그런 수법은 트로웰이나 불러서 써먹으라고.”

“…파요.”

“뭐?”

하지만 그는 다시 한 번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 순간 내 뱃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진동했기 때문이다.

꼬르르르륵.

“…….”

“…….”

한참의 침묵 후, 나는 어이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엘뤼엔을 보며 허무하게 웃었다.

“배고파서 죽을 것 같아요.”





‘배고픈 게 무슨 시급을 다툴 정도로 중요한 일이냐!’ 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꾸하겠다. ‘너도 한 번 굶어봐’라고.

특히 나는 정령왕으로 태어난 이후 공복감을 잊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다시 찾아온 배고픔은 반가움을 넘어서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게다가 수중엔 돈 한 푼 없고, 주위에 마을조차 없으니 이 캄캄한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조목조목 설명하지 않아도 엘뤼엔은 잠자코 주위의 정령들을 불러 근처에 먹을 만한 산열매와 

나물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꽤 화를 낼 거란 생각에 바짝 긴장하고 있던 나로선 전혀 의외의 반응이었다.

“먹어라. 정령들이 가져온 것이니 독성은 없을 거다. 있어도 내가 치료하면 그만이니까 죽지는 않을 거야.”

잠시 후, 산더미 같은 과일들을 눈앞에 쏟아놓은 엘뤼엔이 퉁명스럽게 내뱉는 소리에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헤에! 의외네요? 화낼 줄 알았는데.”

“화를 내? 내가 왜?”

“별거 아닌 것 가지고 붙들었다고 생각할 줄 알았거든요. 뭐, 나로선 꽤 중요한 일이었지만.”

“생리적인 욕구만큼 인간에게 중요한 건 없다. 그리고 이것으로 네가 처한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내가 처한 상황?”

그러자 엘뤼엔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주위에 널려있는 과일들을 보고도 먹어도 되는지 안되는지 모를 정도로 

네 생존지식이 부족하다는 것과, 이곳을 벗어나 마을로 갈 방법을 모른다는 것. 

그리고 음식을 사먹을 돈이 한 푼도 없다는 사실이지. 굳이 내게 부탁한 건 그런 이유 때문 아닌가?”

“정확해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글쎄, 나로선 이런 산중에 너같이 어린 인간이 혼자 들어온 것이 더 이상하군. 혹시 쫓기는 중인가?”

“에? 여기가 산속이에요?”

주위에 보이는 것이라곤 넓은 들판뿐이기에 어느 평원쯤이라 생각하고 있던 나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엘뤼엔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리에 대한 기초적인 상식도 부족하군. 이곳엔 혼자서 어떻게 들어온 거지?”

“그, 그냥 걸어왔는데요.”

“농담하지 마라. 넌 모르는 것 같은데, 여긴 인간들에게는 접근금지 영역으로 알려진 쉘바이돈 산맥의 고원이다. 

한 발자국 마다 몬스터를 만난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온갖 몬스터와 마물의 밀집 지대이지. 

이런곳에 무기도 없이 혼자 걸어왔다고? 마법을 할 줄도 모르는 것 같은데.”

“쳇! 자기가 보냈으면서.”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에게 이곳에 온 자세한 사정을 털어놓고 도움을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엘뤼엔이 과연 믿어줄지도 의문이고, 그 때문에 미래의 일에 변화가 생겨선 안되기 때문에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훗날 그들이 이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 것을 보면 말해줘도 괜찮을 듯싶었지만, 

상황이 어찌 변할지 모르니 당분간은 가만히 두고 보는 편이 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의아하게 바라보는 엘뤼엔의 시선을 무시하며 그가 가져다준 과일 하나를 집어 베어 물었다. 

아삭하고 씹자 달콤하게 퍼지는 향이 안 그래도 배고팠던 위장을 더욱 부추기는 것 같았다.

내가 정신없이 먹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엘뤼엔이 문득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맛있나? 이런 걸로 배가 채워지는지 모르겠군. 내가 알고 있는 미식가 드래곤은 산열매 따윈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죠. 

사실 지금은 돌이라도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 뭔가를 먹어본 건 굉장히 오랜만이거든요.”

“그 정도로 굶었나? 그렇게 혈색이 나빠 보이진 않은데.”

“아하하! 그런 뜻이 아니라… 음, 그러지 말고 아버… 아니, 엘퀴네스님도 한번 드셔보실래요?”

내 말에 엘뤼엔은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나와 내 손에 든 과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먹지 못하는 사실이 곤란한 게 아니라, 이런 권유를 받는 것이 처음이어서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난감해 하는 느낌이었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저으며 딱딱하게 대꾸했다.

“나는 먹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맛있는데. 으음… 하긴, 먹지 않는 것보단 먹을 수 없다는 게 더 맞겠죠? 

물 이외에는 음료수를 마시는 것도 괴롭잖아요.”

“인간인 네가 그런 건 어떻게 알지?”

“아하하! 그냥 짐작이에요, 짐작. 그나저나 이거 정말 맛있네요. 

앞으로 며칠 동안 여기서 살아도 문제없겠는데요? 사방에 먹을 것이 널려 있으니.”

“아니, 이런 걸론 체력이 오래 버티지 못할 거다. 인간들이 사는 마을로 가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야 해.”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말투는 처음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귀찮고 성가시긴 해도 계약자를 챙겨줘야 한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다. 

그 작은 변화에 남모르게 기뻐하는 나에게, 그는 다시금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라.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산을 내려가도록 하지.”

“네? 어디로요?”

“여기서 반나절 거리에 작은 마을이 있는 걸 확인했다. 

지금 가면 해가 저물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거다. 뭐, 네가 싫다면 상요하지는 않겠지만.”

“저는 상관없어요. 사실 여기 꽤 추운 편이기도 하고…….”

“흠, 인간이 견디기엔 기온이 조금 낮긴 하군. 그건 그렇고… 

산을 내려가는 것에 쉽게 동의하는 것을 보면 쫓기는 상황은 아닌 모양이지?”

끄덕끄덕.

내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엘뤼엔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진실이야 어쨌건 그가 보기엔 다급한 상황도 아닌 내가 무일푼으로 혼자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것이니, 

한심하게 비쳐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혹시 가출 소년으로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옷차림이나 안색을 봐선 이런 생활을 오래한 것 같지는 않은데. 용케 나를 소환할 생각을 다 했군.”

“하하! 뭐…….”

“여러모로 의심스러운 점 투성이지만, 

네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캐묻지는 않겠다. 그런데 이곳에서 나가면 가고 싶은 목적지는 있는 건가? 

혹은 만나야 할 사람이라던가.”

“글쎼요. 만나야 할 사람은 몇 명 있어요. 목적지라면 무한정이지만.”

“무한정?”

“네. 아직 정해둔 곳이 없거든요. 가능한 어디든 돌아다녀볼 생각이에요.”

“네 처지를 잊고 있는 건 아닌가? 여행비도 없을 텐데?”

“에이~ 아버지… 아니. 엘퀴네스님이 있잖아요. 

설마 계약자를 모른 척할 셈은 아니죠? 거처를 정할 동안은 동행해준다면서요.”

“…….”

내 뻔뻔한 태도에 할 말을 잃은 듯, 엘뤼엔의 굳은 표정은 한 동안 풀어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실제로 나는 아무것도 없는데다가 지금 의지할 데라곤 그밖에 없는 것을.

‘미안해. 아버지. 돌아가면 이 빚은 꼭 갚을께.’

하지만 이런 내 속마음이 그에게 들릴 리 만무.

잠시 후, 나는 한탄하듯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엘뤼엔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애보기인가. 앞으로 피곤하게 됐군.”

이 관계가 앞으로 4천 년 후에도 지속된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경악할 그의 얼굴을 상상하며 남몰래 숨죽여 웃는 나였다. 


엘뤼엔의 말처럼 거의 반나절을 걸어서 도착한 마을은 산맥 근처에 자리 잡은 것치곤 무척이나 번화한 편이었다. 

날이 저물었음에도 거리마다 불이 켜진 상가와 손님을 태운 마차의 행렬이 즐비했고, 

보통 큰 도시에서나 있음직한 여행자들을 위한 여관이 여러 곳에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엘뤼엔은 가장 크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여관을 택해서 걸음을 옮겼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손님. 묵어가실 건가요? 방을 몇 개나 드릴깝쇼?”

딸랑.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온 종업원의 말에 엘뤼엔은 별다른 감흥 없는 표정으로 담담히 대꾸했다.

“2인실로 하나. 이틀 정도 머무를 생각이다.”

“2인실이라면… 아, 마침 2층에 자리 하나가 있군요. 202호라고 적혀 있는 곳으로 가시면 됩니다. 

가격은 선불로 은화 2개입니다. 식사와 목욕을 포함하시면 가격이 더 추가됩니다만.”

“목욕은 필요 없다. 식사는 1인분으로.”

“아, 그러시다면 은화 1개만 더 추가하시면 됩니다.”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하는 종업원에게 엘뤼엔은 말없이 금화 한 개를 꺼내 던졌다. 

그러자 그때까지만 해도 여유 있던 남자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 죄송합니다, 손님. 꽤 큰 금액이라 거스름돈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잔돈은 필요 없다. 여기 이 녀석의 식사나 제대로 챙겨와. 소화에 지장이 가지 않는 것으로.”

“헉! 예, 옙! 알겠습니다! 요리사에게 급히 지시하겠으니 준비 되는 동안 올라가셔서 푹 쉬십시오. 

저희 여관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허리까지 90도로 숙이며 인사하는 걸 보면 이곳에서 금화 한 개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지 알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 1층은 술과 음식을 겸하는 바(Bar)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곳에 앉아 있던 대다수의 사람들도 모두 놀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2층으로 올라가는 내내 계속되자 엘뤼엔은 성가시다는 얼굴로 낮게 투덜거렸다.

“인간들은 쓸데없는 일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단 말이야. 정말 귀찮기 짝이 없군.”

“그럼 처음부터 은화를 냈으면 됐잖아요. 아니면 거스름돈을 받거나.”

“날더러 그런 푼돈을 가져다 어디에 쓰라는 거냐?”

“…….”

아직 이곳 화폐의 기준은 잘 모르지만, 

고급에 해당하는 여관 숙박비를 해결할 금액이라면 서민들에겐 꽤 큰돈임이 틀림없었다. 

그런 것을 푼돈으로 취급하다니, 돈이 썩어 넘치는 건가?

잠시 황당한 표정으로 엘뤼엔을 바라본 나는 곧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곤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에바스 에덴에 있는 것이 죄다 보석덩어리들이니 은화 한 두 개쯤은 푼돈으로 느껴질 만도 하겠군요.”

“…네가 에바스 에덴의 이름을 어떻게 알지?”

“채, 책에서 읽었다니까요. 하하하!”

“그런 것까지 기록되어 있나? 책 이름이 뭐지? 정령계의 사소한 내용까지 적혀 있다면 찾아서 제거해야겠다.”

“하하… 그, 그럴 필요 없어요. 이미 태워졌거든요.”

“태웠다고?”

“네. 집 창고에 있던 걸 우연히 발견한 거였는데, 

아버지가 장작 대신 불쏘시개로 써버렸어요. 사실 굉장히 낡아서 글자를 알아보기도 힘들었거든요.”

찔끔한 얼굴로 대답하자 엘뤼엔은 더욱 의심스럽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벌써 태워버렸다는데, 결국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들어가서 쉬어라. 식사는 알아서 가져올 거다.”

“엥? 아버… 아니, 엘퀴네스님은요?”

“난 잠시 정령계에 가 있겠다. 인간들의 침구는 불편해서 안 맞아. 무슨 일이 생기면 불러라.”

“뭐야~ 그럼 처음부터 2인실로 안 해도 됐잖아요.”

“흥! 너 같은 어린애가 혼자 있다는 걸 대대적으로 광고할 셈이냐? 노예상인에게 잡혀가고 싶다면 그렇게 하든지.”

삐딱하게 대답하는 걸 보니 책을 태웠다는 말에 삐진 건가? 

매정한 엘뤼엔은 그 밖의 별다른 언질도 없이 정령계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아마 나와 동행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이럴 작정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덜렁 혼자가 돼버린 나는 방 안에 마련되어 있던 나무 침대에 걸터앉아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쉽게 친해지긴 힘들다는 건가. 쳇! 나중에 두고 보자.”

낯선 세계에서 의지할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지덕지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듯한 엘뤼엔의 태도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굴만 똑같으면 뭘 하겠는가. 성격이나 말투가 영 딴판인 것을. 설마 다른 일행들도 이러진 않겠지?

‘그러고 보니 이번에 미네르바가 인간에게 소환되었다고 했었지. 

그럼 아직 그에게 배신당하기 전인가? 지금 트로웰은 뭘 하고 있을까.’

시벨의 말에 의하면 이때의 트로웰은 인간을 무척 싫어했다고 했었다. 

바로 미네르바가 인간의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비슷한 이유로, 이미 결말이 비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 역시 기분이 찜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왠지 이번 여행도 앞날이 막막해 보이는 건 내 생각만이 아닐 것이다.

똑똑!

“네, 누구세요?”

“저어, 식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손님.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내 물음에 들려온 것은 어린 소녀의 목소리였다. 

설마 싶은 마음에 문을 열자, 갈색 고수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땋은 

여자아이가 식사가 담긴 커다란 쟁반을 든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나이는 이제 10살이나 되었을까? 

귀염성 있는 얼굴에 또렷하게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가 무척 인상적인 아이였다. 

적어도 내 또래의 사람이 올 거라 생각했던 나는 당황한 얼굴로 얼른 아이에게서 쟁반을 받아 들었다.

“이런, 괜찮니? 많이 무거웠겠구나.”

“어? 안돼요. 제가 방 안까지 들고 들어가야 하는데…….”

“방 안까지?”

“네. 그래야 주인어른께 혼나지 않거든요. 손님에겐 최상의 서비스를 대접해야 한댔어요.”

아이는 또랑또랑하게 대답하며 다시 자신에게 쟁반을 넘겨줄 것을 요청했다. 

이 얼마나 투철한 직업정신(?)인가? 손님을 비롯하여 이 여관 주인에게도 매울 훌륭하다는 칭찬을 받아 마땅했다. 

나이가 너무 어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나는 짧게 혀를 차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한국에서였다면 아동학대로 신고 들어갈 일 이라구. 이건 내가 가지고 들어갈 테니까 넌 걱정 말고 돌아가렴.

“하지만 들어가서 손님의 잠자리도 미리 정돈해야…….”

“그것도 내가 알아서 할게.”

“안 돼요. 손님에게 그런 일을 시킬 순 없어요!”

단호하게 외친 소녀는 내가 말릴 사이도 없이 안으로 뛰어 들어와 이불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 다람쥐 같이 재빠른 움직임에 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아이는 자신이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정리가 되었는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푸욱 허리를 숙여 보였다. 

“침실의 정돈을 끝냈습니다, 손님. 저희 여관을 이용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식사가 입맛에 맞지 않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저는 손님께서 식사를 마치실 동안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 하아! 저기, 너 이름은 뭐니? 나이는 몇 살?”

“저는 랑시라고 해요. 올해로 7살 이구요.”

“7살? 그렇게 어린데 이런 일을 한단 말이야?”

“4살 때부터 했는걸요. 별로 힘들지도 않아요. 손님들도 험하시지 않고, 

주인아저씨도 친절하시구요. 제나 아주머니가 저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했어요. 

이런 고급 여관에서 일하는 건 쉽지 않거든요.”

“…….”

풍요로웠다는 황금시대에도 평민들은 여전히 고단한 삶을 살았던 모양이다.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소녀, 랑시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어쩌지? 수고비라도 주고 싶은데, 지금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볼일이 있다고 잠깐 나갔거든.”

“괜찮아요. 어차피 숙박비에 전부 포함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는 건 그렇고… 아, 그래. 신기한 거 보여줄까?”

“신기한 거?”

호기심에 초롱초롱 빛나는 아이의 눈동자를 보고 피식 웃은 나는 곧 물의 하급 정령인 나이아스를 소환했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갑자기 투명한 요정이 나타나자, 랑시는 입을 떡 벌리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 우와! 어, 어떻게 한 거예요? 이건 마법인가요? 손님은 마법사였군요!”

“쿡쿡! 마법이 아니라 정령이라고 하는 거야. 이 아이는 물의 하급 정령인 나이아스라고 해.”

“아! 이게 바로 정령이군요! 말로만 들었어요. 저어… 한 번만 만져 봐도 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나이아스를 이끌어 랑시의 두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물의 축축한 감촉이 느껴졌는지 아이의 얼굴이 더욱 환하게 피어올랐다. 

“차가워. 그런데 손에는 전혀 물기가 없어요! 정말 신기해!”

“그래? 다행이구나. 내가 해줄 건 이런 것밖에… 어라?”

“……??”

그 순간, 랑시의 몸에서 이상한 변화가 생긴 것을 깨달은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얼굴을 굳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없었던 정령에 대한 친화력이, 내가 나이아스를 손에 올려준 순간 급속도로 커졌던 것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 까. 

믿을 수 없는 마음에 몇 번이나 확인해 봤지만, 결말은 처음과 똑같았다. 

지금 랑시는 소환주문을 외무면 당장 나이아스를 소환할 수 있을 정도로 친화력이 상승되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예전이라면 내가 가진 정령왕의 기운에 영향을 받아 친화력이 높아졌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나는 인간인데?’

이미 시험을 통해 내가 정령왕의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라, 

지금 일어난 일은 나로서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것도 나름대로 기적이라면 기적인 걸까.

“에잇! 아무렴 어때. 잘되면 그만이지.”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랑시,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따라 해볼래? 잘 하면 선물이 있을 거야.”

“선물이요? 와아! 할래요!”

단지 정령 소환의 주문을 알려주려는 것이었지만, 

저렇게 순진하게 답하는 아이를 보니 괜히 내가 사탕으로 꼬여내는 변태 아저씨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찝찝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린 것도 잠시, 나는 랑시에게 하급 정령을 소환하는 의식을 치르도록 했다. 

아니나 다를까. 주문이 끝나는 순간, 덜컥 나이아스가 소환돼 버렸지만, 

이미 100% 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태연한 나와는 달리 소환한 본인인 랑시는 입을 뻐끔거리기만 하고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장난처럼 따라한 말에 정령이 소환될 거라 누가 생각했겠는가? 

아이가 정신을 차린 것은 나이아스가 입을 열어 계약의 의사를 묻는 순간이었다.

-당신이 저를 소환한 인간이군요. 저와 계약하시겠습니까?

“계, 계약? 지,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이야?”

-네, 그렇습니다. 나는 물의 하급 정령인 나이아스. 나를 소환한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라, 랑시라고 해.”

-랑시. 예쁜 이름이군요. 저와 계약하시겠습니까?

정령의 질문에 랑시는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안심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용기를 내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나이아스는 빙긋 웃으며 한줄기의 물이 되어 랑시의 이마로 스며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드러나는 물의 인장을 보며, 나는 이들의 계약이 완료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물의 하급 정령사가 탄생한 것이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방금 제가 겪은 일이 사실인가요? 여기 있던 정령은 어디 갔어요?”

계약을 완료한 정령이 사라지자, 랑시는 꿈꾸듯 몽롱한 표정에서 벗어나 당황한 목소리르 물었다. 

나 또한 복잡한 기분이 든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얼굴이 되어 어색하게 대답했다.

“나이아스는 다시 정령계로 돌아갔어. 하지만 걱정하지만, 이제부터 네가 부르면 어디에서든지 나타날 테니까.”

“어디에서든?”

“그래. 그래도 가급적 사람들 앞에서 부르는 것은 자제하도록 해. 

이번 일은 너와 나만의 비밀이야. 알겠지? 그리고 너무 자주 부르면 힘들 테니까 가끔씩 부르도록 하고.”

“아, 알겠어요. 정말 감사해요. 제가 정령과 계약을 하다니…….”

그 뒤로 랑시는 몇 번이고 정령을 불러 자신이 정말 계약했다는 사실을 체감하고서야 다시 원래의 일자리로 돌아갔다.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며 황급히 내려가는 아이를 바라보던 나는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문득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으음, 왠지 무지 엄청난 사고를 친 것 같은 느낌이…….”

“그걸 이제야 알았나?”

“……!!”

갑자기 들려온 낮은 음색에 나는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언제 내려온 건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엘뤼엔이 나를 거의 노려보다시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안 그래도 조금 전에 한 일 때문에 찔려하고 있는 상태인지라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아, 아하하… 어, 언제 왔어요? 왔으면 인기척이라도 내시지… 하하하하!”

“하아, 그새를 못 참고 일을 벌이다니. 방금 네가 무슨 일을 한 건지는 알고 있나?”

“아니, 난 뭐, 설마 정말로 정령을 소환하게 될 줄은 몰랐죠. 아하하하하!”

“거짓말하지 마라. 넌 이미 그 아이의 친화력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말 이해 불가능한 녀석이군. 함께 있는 것만으로 타인의 자연 친화력을 높여버리다니. 

설마 자연계의 정령들도 보이는 건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뤼엔은 아까 전보다 더욱 험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인간 주제에 자연계의 정령이 보인다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겠는가.

잠시 후, 그는 푸욱 한숨을 내쉬더니 식탁에 놓인 채 다 식어가는 저녁식사를 보며 한마디 툭 내뱉었다.

“밥이나 먹어라. 또 배고프다고 징징거리지 말고.”

“아, 네. 그런데 정령계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다시 돌아왔어요?”

“인위적으로 정령이 소환되었기에 혹시나 싶어 내려와 본 거다. 

그 지점이 네가 있는 곳이라는 게 마음에 걸려서 말이야.”

“그, 그렇군요.”

“지금 한 일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앞으론 누군가의 친화력이 높아진다고 해도 절대 정령을 소환하게 만들지 마라. 

너와 접촉하는 모든 인간을 정령사로 만들 작정이 아니라면.”

“으음, 실수였어요. 이제부턴 주의할게요.”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엘뤼엔은 그제야 굳어있던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그 이후, 그는 다시는 혼자 정령계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마 이번 일을 계기로 나를 사고뭉치로 단단히 찍어버린 듯했다.

암흑의 군주, 대지의 왕

나중에 안 것이지만 내가 떨어진 곳은 에델이라는 왕국의 한 지방이었다. 

이때의 아크아돈은 2개의 제국과 5개의 왕국이 존재했는데, 에델은 바로 그 5개 왕국 중에서도 가장 작은 축에 속했다.

그래도 제국에서 이 왕국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이곳이 엘프들의 영역과 밀접한데다 그들과의 교류가 가장 활발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걸 증거이라도 하듯 나는 마을에 도착한 내내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는 엘프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내 관심을 끈 것은 요 근래 마을에 떠돌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었다.

“연쇄살인?”

“네. 벌써 다른 마을에서는 여러 명이 죽었다더군요. 

손님들도 주의하십시오. 세상이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조금 살 만해지니까 별 이상한 놈들이 설쳐서는. 쯧쯧!”

“계속 잡지 못하고 있나보죠?”

“잡기는커녕 인상착의조차 파악하지 못했어요. 

살아남은 사람의 증언으론 웬 조그만 꼬맹이라는데. 허, 그게 말이 됩니까? 꼬맹이가 장정을 열 명 넘게 죽이다니요.”

한참 동안 기가 막힌 얼굴로 떠들던 여관 주인은 다시금 몇 번이고 주의를 당부한 후에야 돌아갔다. 

그가 이토록 열성적으로 충고하는 이유는 범인이 노리는 목표가 대부분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어제 엘뤼엔이 보인 큰 씀씀이로 인해, 그는 우리를 여행중인 귀족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뤼엔은 창밖만을 응시한 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흐음, 이 세계에도 연쇄살인이란 게 있구나. 어째 무섭네.”

“이 세계? 꼭 너는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는군.”

“아하하! 그, 그랬나요? 아니, 뭐… 여긴 왠지 굉장히 평화로울 것 같았거든요. 

그래도 역시 인간이 사는 곳은 어쩔 수 없나 봐요.”

“그런가? 하지만 방금 그가 말한 녀석은 트로웰일 거다.”

“아~ 그렇군… 네? 누, 누구라고요?”

확신이 어린 말에 무심코 대답하던 나는 곧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그제야 창밖에서 시선을 뗀 엘뤼엔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날 보며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땅의 정령왕 트로웰이란 말이다. 요즘 녀석이 이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거든.”

“아, 아니, 이 근처에 있다는 것이 어째서 그가 범인이라는 결과로 이어지는데요?”

“이미 몇 번 전과가 있으니까. 그런데 벌써 이곳까지 왔나. 흐음, 어지간히 재미붙여버린 모양이군.”

혼잣말로 중얼거린 그는 바짝 얼어 있는 나를 보곤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를 만나면 너도 주의해라. 내 계약자라고 해서 예외를 두지는 않을 테니까. 

아니, 정령왕의 계약자라는 이유로 더 죽이려고 할지 모르지. 인간을 굉장히 싫어하는 녀석이거든.”

“거, 거짓말이죠? 트로웰이 정말 그런다고요?”

“믿기 어렵다면 직접 만나보던가.”

“…….”

저런 무책임한 말에도 그다지 서운하지 않은 건 트로웰의 이야기가 그만큼 충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 기억속의 그는 늘 형같이 다정하고 따뜻한 존재였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모습은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만난다면 제일 먼저 무슨말을 해야 할까. 언제고 내게 말한 ‘고맙다’는 것이 설마 이번 일과 관계있는 건 아니겠지?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내게 엘뤼엔은 냉랭한 얼굴로 물었다.

“그나저나 넌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지? 

구체적인 목적지를 말하지 않으면 이동할 수 없잖아.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음, 그건 그냥 겸사겸사구요. 사실은 뭘 찾고 있거든요.”

“무엇을?”

“으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지금 날 놀리는 건가?”

엘뤼엔의 얼굴이 찌푸려지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보석’이라는 힌트 하나로 찾기에는 무리일 정도로 그 대상이 광범위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런 애매한 힌트를 던져준 장본인이 바로 엘뤼엔이지 않은가? 

나로선 오히려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았다.

혹시 지금의 엘뤼엔도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지 않을까? 나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혹시 누군가가 죽었는데, 그 영혼이 명계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그야 영혼을 인도하는 자들이 알아서 찾겠지. 본래의 궤도에서 크게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그럼 찾을 수 없는 장소로 떨어진 경우에는요?”

그러자 이제까지 퉁명스럽게 대답하던 엘뤼엔이 눈을 크게 뜨더니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건성으로 건네는 질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그럴 땐 일정한 형태의 물질에 봉인된다고 들었다. 

우연히 발견되기 전까진 절대 명계로 돌아갈 수 없지. 혹시 네가 찾는 것이 그런 종류인가?”

“맞아요!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그런 걸 가져서 뭘 하려고?”

“알고 있는 거군요?”

내가 환한 표정으로 묻자 그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흔하진 않지만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영혼의 보석’ 이라고 해서 수집가들 사이에서 굉장한 인가를 모으고 있지.”

“영혼의 보석?”

“그래. 보통 가공해서 에고소드의 재료로 쓰더군. 

내가 알고 있는 것도 전부 그런 종류들뿐이야. 

원석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녀석도 있지만, 겉보기는 보통 보석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별로 특이할 것도 없어.”

일이 풀리려면 이런 식으로도 풀리는 구나!

막막하던 앞에 드디어 희망이 보이자 가슴이 심하게 두근두근 뛰었다. 

엘뤼엔은 그런 내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꼭 찾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

“네! 굉장히 중요해요. 그런 보석은 어디에서 찾아요?”

“인간들은 봐도 잘 모를 거다. 

드래곤이나 유니콘들이라면 그 속에 담긴 영혼의 기운을 느낄 수 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그게 정말이에요? 그럼 혹시 아버… 아니, 엘퀴네스님 주위에 그런 보석을 가지고 있는 드래곤은 없나요?”

“몇 개나 퍼져 있는지 알 순 없지만, 

내 계약자 중에 가지고 있는 놈이 있긴 하다. 하지만 워낙 보석에 미친 녀석이라 쉽게 내주지는 않을 거야.”

“상관없어요. 저 좀 그 드래곤한테 데려다주세요. 나머진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떠나기 전, 엘뤼엔은 내가 한눈에 라피스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그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곧바로 손에 쥐고 귀환주문을 외워버리면 그만이다. 

설마 미래까지 쫓아오지는 못할 테니까.

소유하고 있던 드래곤에겐 안된 일이지만 길을 잃고 헤매는 영혼을 명계로 

돌려보내지 않는 책임도 있으니 미안해할 생각은 없었다. 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엄연히 불법(?)행위일 테니 말이다.

아, 다행이다. 정말 막막했었는데. 고마워요, 아버지. 덕분에 살았어요.”

“뭐가 그렇게 중요한진 모르겠지만, 

일단 가야할 방향을 잡았다니 다행이군. 그런데 왜 자꾸 날더러 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지?”

“앗! 죄송해요. 사실 엘퀴네스님이 제 아버지와 꽤 많이 닮았거든요. 그래서 자꾸 착각하게 되네요.”

“나와 닮은 인간이 있다고?”

“하하하! 그 뭐랄까,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으음, 말투라든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말에 엘뤼엔은 더욱 기분 나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한낮 인간이 자신과 닮았다는 소리가 꽤나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나는 화제도 돌릴 겸 다른 것을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바람의 정령왕이 인간에게 소환되었다면서요? 

한 시대에 정령왕을 소환한 인간이 두 명이나 되다니, 굉장히 놀랍네요. 미네르바를 소환한 사람은 어떤 인간이에요?”

“관심이 없어서 모르겠군. 내가 왜 그런 걸 알아야 하지?”

“에? 하지만 가족이잖아요. 형제를 소환한 인간인데 기본적인 정보쯤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아요?”

“정령왕들은 가족의 개념이 아니다. 그저 같은 일을 하는 동료 일 뿐이야.”

냉정하게 답하는 말투엔 다른 정령왕에 대한 애정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 모습을 통해 나는 그가 이 세계에서 철저하게 독립된 혼자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훗날, 그가 나를 아들로 삼은 사실이 새삼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하긴, 괜히 성격파탄자라는 말을 들었겠는가. 그것도 자신을 짝사랑하던 상대에게서 말이다.

“…그래도 조금은 마음을 여는 편이 좋을 텐데.”

“지금 뭐라고 했지?”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앞으로 뭐라고 부를까요? 사람들 앞에서 ‘엘퀴네스’님이라고 부를 순 없잖아요.”

“글쎄. 특별히 유희중에 쓰려고 정해둔 애칭은 없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불러라.”

“으음… 그럼 엘뤼엔이라고 해도 될까요?”

“엘뤼엔? 나쁘진 않군.”

그 속에 담긴 뜻이 ‘파괴하다’라는 것을 안다면 과연 괜찮다고 했을까?

나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엘뤼엔을 보며 이번 일을 조용히 마음속에 묻어두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내 조마조마한 기색을 눈치 채지 못한 듯, 엘뤼엔은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여행이 시작될 테니 그 전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미리 준비해둬라. 

마을을 벗어나면 당분간 노숙행일 테니까.”

“어디로 가는 건데요?”

“보석을 가지고 있는 드래곤은 현재 세이크 제국에서 유희 중이다. 짧게 잡아도 한 달은 가야 할 거야.”

“한 달이나요? 공간이동 같은 건 못하나요?”

“나 혼자라면 모를까, 너까지는 무리야.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사서하는지 모르겠나?”

그의 시선이 거의 노려보는 것에 가까워지자 나는 찔끔한 얼굴로 얼른 딴청을 피웠다.

그런 나를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던 엘뤼엔은 곧 체념한 듯한 한숨을 내쉬더니 내게 짤랑거리는 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

“돈이다. 앞서 말한 대로 나가서 필요한 것이나 사라.”

“저 혼자서요?”

“그럼 이런 일까지 나에게 의지할 생각이냐? 한 가지쯤은 알아서 해결해.”

“하지만 난 여기 물가도 잘 모르는데… 쳇! 알았어요. 혼자서 하면 되잖아요.”

어차피 방 안에서 할 일도 없으면서 같이 가면 어디 덧나나?

나는 속으로 잔뜩 투덜거리며 용감하게 혼자 1층으로 내려왔다. 

그러자 마침 점심때였는지 식탁에 앉아 식사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내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고급 여관에 어린 소년이 달랑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다. 

그에 한술 더 떠서 카운터에 있던 여관 주인이 나를 알아보고 얼른 달려와 허리를 숙여 보였다.

“어디 나가십니까?”

“아, 네. 내일 떠나야 해서 여행물품 좀 사려구요. 이 근처에 시장이라든가… 상가가 활발한 곳이 있나요?”

“오른쪽 길을 걷다 보면 큰 광장이 나옵니다. 

그 주위가 전부 상가입니다만. 그런데 손님 혼자서 가실 겁니까? 그런 것이라면 저희에게 시키시지요.”

“아뇨, 괜찮아요. 나온 김에 구경도 할 겸 천천히 돌아다닐 생각이니까요. 

하지만 워낙 초행이라… 아, 그래! 혹시 길 안내를 해줄 사람은 없을까요? 보수는 지불할께요.”

“에, 그러시다면 저희 가게에서 잡일을 돕고 있는 꼬맹이 하나를 붙여드리겠습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마을 지리는 확실히 꿰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여관 주인은 허둥지둥 누군가를 부르러 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와 함께 나타난 아이는 어제 식사를 가져왔다가 얼떨결에(?) 정령사가 된 바로 그 소녀였다. 

이름이 랑시였던가? 갈색 고수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채 남자 뒤에 어색한 얼굴로 

서 있던 아이는 문득 나를 발견하곤 환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앗! 손님은 어제 그……!”

“험험! 랑시야, 우선 인사부터 해야지.”

“아앗, 그렇지! 아, 안녕하세요! 오늘 손님을 도와 길 안내를 맡은 랑시라고 해요. 자, 잘 부탁합니다.”

“안녕. 또 보는구나. 나야말로 잘 부탁해.”

잔뜩 붉어진 얼굴로 입을 달싹거리는 모습을 보니, 

약속대로 아직 누구에게도 정령을 소환한 일을 말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 모습을 긴장한 걸로 착각한 여관 주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내게 사과의 말을 건냈다.

“하하하! 아무래도 얘가 수줍음을 타나 봅니다. 그래도 자신이 맡은 일을 소홀히 하는 아이는 아니랍니다.”

“그런 것 같아요. 어제보니 아주 똑 부러지던 걸요.”

“하하!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수고비는 아이에게 따로 주시면 됩니다. 그냥 지나시다가 맛있는 거나 한 개 사주십시오. 

랑시, 성심성의껏 안내해야 한다?”

“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주인아저씨, 다녀오겠습니다!”

아마도 랑시는 이곳 주인에게 딸처럼 귀여움을 받고 있는 듯 했다. 

하긴, 아직 나이도 어리고 얼굴도 귀염성 있게 생겼으니 누구라도 예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 고된 환경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한 내게,

 랑시는 여관에서 벗어나자마자 무척 흥분한 얼굴로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저기, 손님이 주신 정령 말이에요. 

이름이 나이아스라고 했지요? 제방에 돌아간 후에도 몇 번 불러봤었어요! 정말 너무너무 귀엽고 예뻐요.”

“그래? 굉장히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네! 물론이죠! 이 마을에서 가장 부자인 첼시가 그러는데, 

정령은 아무나 데려올 수 있는게 아니랬어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다고요. 

아! 하지만 약속대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하하! 그래, 잘했어. 앞으로도 약속 지키기다?”

내말에 랑시는 단단히 각오한 표정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곤 갑자기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머뭇거리는 어조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제가 보기엔 손님도 정령 같아요.”

“에? 내가?”

“네! 저는 이 세상에 손님같이 생긴 사람도 있다는 걸 어제 처음 알았어요. 

1층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손님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거 모르셨어요? 정말 굉장히 이쁘고 반짝반짝거려요.”

“저기… 난 남자인데?”

“그래도 예쁜 걸요! 주인아저씨가 손님은 여행중인 귀족이니 더욱 정중하게 모시랬어요. 

귀족들은 전부 손님처럼 예쁜가요”

“그, 글쎄? 하하하…….”

호기심에 가득한 얼굴로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묻는 얼굴을 마주 바라볼 용기가 없어, 

나는 은근슬쩍 아이의 시선을 외면했다. 

문득 혼자 다니는 쪽이 더 마음 편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모든 것은 전부 때 늦은 후회에 불과했다.


랑시와 함께 상점가로 나온 내가 가장 먼저 들린 곳은 바로 옷가게였다. 

지금 입고 있는 것은 얇은 비단으로 된 것이라 여행복으로 적합하지 않음은 물론, 

슬슬 겨울로 넘어가려는 현재의 계절과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랑시가 적극 추천한 종류는 바로!

“후드?”

나는 아이의 손에 들린 낯익은 옷감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이전 유희에서 지긋지긋하게 쓰고 다녔던 것이라 이번엔 되도록 피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랑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호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 이건 반드시 사야 해요!”

“…왜?”

“왜라뇨! 손님은 너무 자신에 대해서 몰라요. 

거리마다 사람들이 얼마나 쳐다보는지 아세요? 그렇게 눈에 띄는 외모로 다니다간 납치될 지도 모른다고요!”

“하하!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안 돼요. 안 그래도 요즘 귀족들만 노리는 살인범이 있어서 얼마나 무서운데……. 

손님 같은 사람은 가장 표적이 되기 쉽다고요. 무조건 사세요! 무조건!”

결국 나는 랑시의 강압에 못 이겨 쇼핑 목록에 후드를 추가하고 말았다. 

그것 외에도 한겨울을 대비한 망토와 여행복을 몇 벌 더 산 우리는 

이번엔 식량을 사기 위해 곡물이 있는 상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흐음, 한 달 치면 대략 얼마 정도를 사야하지? 영 감이 안 잡히네.”

“이런 여행이 처음이신가 보지요?”

“아니, 처음은 아니지만, 식량 부분은 내 관할이 아니었거든. 

다른 동료들이 알아서 챙겨서 말이야. 너무 많이 사면 무거워서 힘들겠지?”

“경량화 마법이 걸린 배낭에 넣으면 되잖아요. 그 정도 아이템은 여기서도 쉽게 구할 수 있어요.”

“에? 정말?”

내가 놀란 표정으로 묻자 랑시는 또랑또랑한 얼굴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흔한 마법이잖아요. 여기가 이래봬도 이방인들이 꽤 거쳐 가는 지역이라 

여행 시에 필요한 물품은 대부분 다 갖춰져 있어요.”

“그래? 다행이다. 그럼 마음 놓고 잔뜩 사야지.”

과연 마법의 황금시대랄까. 그 외에도 대부분의 과일과 육류에 보존마법이 걸려 있어, 

마르거나 상할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마법이 흔한 시대임에도 지방의 외각에선 마법사라는 존재를 구경하기 힘들지만 말이다.

“뭐, 어차피 나만 먹을 테니까 내 입맛에 맞는 것으로 해야겠지? 

육포같은 것보단 재료를 사서 그때그때 요리를 해먹을까나.”

“그럼 귀찮지 않아요?”

“그야 그렇지. 하지만 난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보단 ‘먹는다’ 는게 더 중요하거든. 

돌아가면 다시 먹지 못하게 될 테니 이 기회에 열심히 먹어둬야지.”

“……??”

내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하지 못한 랑시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그저 웃어 보이기만 했따.

아, 그러고 보니 이런 요리는 시벨이 잘했는데. 

먹어보라는 권유에도 어쩔수 없이 거절해서 얼마나 괴로웠던가! 

아마도 이곳에서 그를 만나게 되면 가장 먼저 요리를 부탁하게 될 것 같았다. 조만간에 만날 수 있겠지?

혼자 즐거운 상상에 빠져 있느라 나는 주위의 사람들이 갑자기 술렁거리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그것을 느낀 것은 옆에 있던 랑시가 흥분한 표정으로 내 팔을 흔들었을 때였다.

“세상에! 손님! 저 사람봐요! 너무 멋있다!”

“으응? 아, 맞다. 랑시, 손님이라고 하지 말고 엘이라고 불러.”

“엘이요?”

“응. 내 이름이야. 그냥 편하게 오빠라고 해도 되고.”

“헤헤! 그럼 엘 오빠, 저 사람 봤어요? 굉장히 특이하지 않아요?”

“누구?”

랑시가 가리키는 방향은 광장 한가운데에 마련된 큰 분수대였다. 

그곳엔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누군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바로 그 장소엔 한 소년이 앉아 피리를 연주하고 있었다. 

지금 막 시작된 듯, 맑은 음률이 퍼질수록 하나둘씩 몰려드는 사람들을 따라 나 또한 랑시에게 이끌려 그 앞으로 걸어갔다. 

웅성웅성. 술렁술렁.

“…어라?”

피리의 연주도 수준급이었지만, 

사람들이 몰려드는 진짜 이유는 소년의 외모 때문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듯한 갈색 피부와 호리호리한 체형, 

그리고 긴 속눈썹을 드리운 두 눈은 비록 감겨 있었지만 한눈에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웠다. 

거기에 환상적인 음률까지 더해지니 누구라도 한 번쯤은 걸음을 멈추고 구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태연하게 그 모습을 보고 감탄할 수 없었다. 

소년의 모습이 내가 아는 누군가와 무척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트로… 웰?”

무심코 이름을 부르는 중에도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렸다. 

하지만 수십 번 반복해서 확인해도 그는 틀림없는 땅의 정령와 트로웰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피리부튼 것에만 심취해 있는 그 모습은, 

이곳이 과거라는 사실을 잠깐 잊을 정도로 내가 알고 있던 그의 분위기와 닮아 있었다.

‘우, 우와! 정말 트로웰이잖아?’

설마 이런 곳에서 만날 수 있게 될 줄이야!

하지만 연주를 마친 그가 눈을 떴을 때, 

나는 반가웠던 감정이 순식간에 경직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황금색 눈동자가 마치 얼음처럼 차가웠기 때문이다. 

단지 눈빛이 달라진 것뿐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돼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하는 주위 사람들은 연신 트로웰을 향해 칭찬을 늘어놓기 바빴다.

“와아! 정말 잘 들었네! 어린 소년이 연주를 아주 잘하는데?”

“굉장히 멋졌어! 자네, 이름이 뭔가? 혹 우리 가게에서 일해 볼 생각은 없는가?”

“여행 중이라면 잠시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은데. 만찬을 대접 할 테니 한 번만 더 피리를 연주해줄 수는 없겠나?”

시끌벅적한 소란 속에서도 트로웰의 시선은 오직 나를 향해 있었다. 

그러자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린 사람들이 멀뚱히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곤 헉! 하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곤 갑자기 파도처럼 양 갈래로 쫘악 물러서며 그와 나 사이에 길을 트는 것이 아닌가!

“어, 어라?”

그 잽싼 행동에 당황한 나와 달리, 트로웰은 망설임 없이 내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태도를 보아 아마도 처음부터 나를 만날 생각으로 이곳에 나타난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나에게 내뱉은 첫마디는 시작부터가 다분히 시비조에 가까웠다.

“너구나? 그 독불장군을 이 땅으로 끌어낸 인간이. 생각보다 어리네?”

“…아하하, 아, 안녕.”

“흐음… 안녕? 내가 누구냐고 묻지 않는군. 이미 알고 있다는 소리인가?”

“보시다시피… 랄까.”

어색한 내 대답에 그는 의외라는 듯이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는 괜찮군. 외모도 그럭저럭 봐줄만 하고. 아쉽네. 인간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죽이기엔 조금 아까운데?”

“……!!”

생긋 웃는 얼굴에서 살벌한 말이 쏟아지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나보다 더 당황해서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아마도 어린 녀석이 농담을 너무 과하게 한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트로웰은 절대 허언은 하지 않는다. 

그 증거로 아까부터 심장이 따끔따끔 거릴 정도로 강렬한 살기가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설마 이런 대낮에 거리 한복판에서 시비를 걸어올 줄이야!

만나고 싶다곤 생각했지만, 절대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하지만 난 억울하다고 말할틈도 없이 곧바로 이어지는 그의 공격에 몸을 피해야 했다.

“다들 피해!!”

쉬익! 콰아아앙!

“히이익!”

“사, 사람 살려!”

거대한 폭발 후 남은 것은 1m는 족히 패였음직한 커다란 구덩이였다. 

사람들은 무기도 없는 소년이 맨손으로 괴력을 발휘하자 혼비백산한 얼굴이 되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마찬가지로 어쩔 줄 몰라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랑시를 향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랑시! 어시 도망쳐! 당장 여관으로 돌아가!”

“하, 하지만!”

“난 괜찮으니까 얼른 가! 운디네 소환! 랑시를 목적지까지 무사히 보호해줘!”

“에, 엘 오빠!!”

소환된 운디네는 내 부탁에 고개를 끄덕이곤 황급히 아이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들의 모습이 멀리 사라지자 트로웰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후후! 꽤 페미니스트인가 보네? 자신의 안전은 상관없이 여자와 어린이부터 보호하는 건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장난치고는 너무 살벌하잖아!”

“장난? 쿡쿡! 잘못 짚었어. 나는 정말 너를 죽일 생각이거든.”

“내가 뭘 어쨌다고?”

뜨악하며 되묻자 트로웰은 살짝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별로 이유 같은 건 없어. 그냥 인간이 싫은 거니까. 

나중에 전부 몰아서 죽이기 전에, 몇 명만 시범 삼아 먼저 괴롭히는 것뿐이야.”

“……!!”

질투에 미친 사람은 무섭다더니, 트로웰이 바로 그 짝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무대포로 몰아붙일 필요는 없잖아!

이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도망친 후라 광장에 남아 있는 것은 나와 트로웰밖에 없었다. 

덕분에 거치적거리는 방해물이 없어진 탓인지 그의 공격의 강도 역시 점점 더 거침이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쾅! 콰앙! 우르르르!

“으악! 자,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필사적인 내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격은 도무지 멈출 줄 몰랐다.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덕에 큰 부상은 없었지만, 

이미 내 몸은 자잘한 생채기들로 엉망이 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트로웰은 찌푸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꽤 잘 피하네. 요령으로 정령왕을 소환한 건 아니란 소리인가? 뭐, 좋아. 그럼 이제부턴 제대로 상대해주지.”

그가 한 손을 내밀자 곧 바닥이 크게 진동하더니 갈라지는 땅 위로 시커먼 흙더미가 불쑥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순식간에 기다란 장검으로 변형되어 그의 손 안에서 무기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내가 사용하는 얼음창을 만드는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그것을 보고나자 나는 마음의 여유가 완전히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용병으로 유희 중이었을 때도 트로웰은 검을 굉장히 잘 다루었었다. 

지금의 내가 막아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것이다. 

“……!!”

쉬이익!

어느새 검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라면 충분히 몇 달은 운신하지 못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한참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각오하고 있던 통증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 마음에 슬쩍 눈을 떠보니 어느새 검을 거두어들인 트로웰이 따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내게 딱딱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왜 반격을 하지 않지?”

“…어?”

“내 공격을 피하는 움직임을 봐선 너도 충분히 반격을 가할 실력이 있는 것 같은데, 

어째서 얌전히 당하고만 있냐고 묻는 거야. 

게다가 도망치지도, 엘퀴네스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다니. 내가 알아서 멈출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하하… 설마. 단지 정신이 조금 없었을 뿐이야. 그리고 난 친구를 공격하는 일에는 영 자신이 없거든.”

“친구? 너와 내가 언제부터?”

“그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지! 뭐, 지금 상황에서는 다소 일방적이긴 하지만 말이야. 하하하…….”

그가 화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트로웰은 말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의 얼굴은 곤란한 상황을 대면한 사람처럼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마음이 안 읽혀.”

“에?”

“인간임이 틀림없는데, 내 혜안이 통하지 않는군. 운명이 없다는 소리인가? …넌 대체 정체가 뭐지?”

“으음, 그러니까… 엘이라고 해.”

“뭐?”

“엘이라고. 내 이름이야.”

자랑스럽게 대답하는 내 말에 트로웰은 한순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정체를 묻는 질문에 대뜸 이름을 말해버렸으니 누구라도 어이없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름은 트로웰 본인에게도 무척 의미 있는 것이었다. 다름아닌 그가 지어준 애칭이었으니까.

“난 네 이름을 물은 게 아니야.”

“알아. 하짐나 지금의 난 이것밖에 내보일 게 없는 걸. 그 외에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건 전부 가까거든.”

“가짜라고?”

“응. 그래서 네 혜안이 통하지 않는 걸 거야. 이런 빈껍데기에게는 건질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마치 본 성격을 감추고 있는 지금의 네 모습처럼 말이야.”

그러자 묵묵히 듣고 있던 트로웰의 어깨가 흠칫 굳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던 그는 아무런 말없이 그대로 내게서 등을 돌리곤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숨 막힐 듯 조여오던 살기 역시 순식간에 사라졌다. 

“자, 잠깐만, 트로웰!! 지금 어디 가는 거야?”

그가 이렇게 가버릴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당황해서 소리쳤지만, 

트로웰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을 뿐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는 멈춰진 상태 그대로 서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널 죽이는 건 잠시 보류해두겠어. 다른 인간들과 뭔가 좀 다른 것 같으니.”

“그, 그럼 이제 어디로 가는 건데?”

“알려 줄 의무는 없어.”

“윽! 그야 그렇지만… 혹시 괜찮으면 나랑 같이 여행 다니지 않을래? 그렇게 혼자 다니면 재미없잖아.”

“…….”

초반부터 욕심이 너무 과했던 걸까? 

트로웰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아마도 정령계로 다시 되돌아간 것이리라.

이렇게 차갑고 냉정한 트로웰이라니… 

미래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난 서운한 감정을 느낌과 동시에 

한편으론 무척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조금 더 친해질 수 있을까?

아마도 오늘 밤은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할 것 같다.



“이런 미련한 녀석!”

여관에 돌아오자마자 내게 돌아온 것은 엘뤼엔의 날벼락 같은 불호령이었다. 

이미 정령을 통해 사건의 전개를 대충 들은 듯, 그는 전에 없이 화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조심하라고 한 말은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린 거냐! 

너 같은 인간 따위가 무슨 배짱으로 트로웰을 상대한 거야! 너는 도망이라는 말도 모르나?”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았는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이런 한심한 녀석과 계약을 하다니. 트로웰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 빤하군 그래.”

“쳇, 어차피 뭐라고 생각하든 신경도 쓰지 않잖아? 뭘 새삼스럽게.”

“뭐라고?”

엘뤼엔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 또한 당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그가 타인의 시선에 신경쓰지 않는 마이페이스인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사실 지금의 그가 이런 식으로 화를 낸다는 것 자체가 무척 의례적인 상황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나는 괜히 심통이 나서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러게 처음부터 같이 마을로 갔으면 좋았잖아. 

나 혼자 보낼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잔소리래? 누군 뭐 트로웰을 만나고 싶어서 만났나?”

“이봐… 너……!”

“계약자가 위험에 처하면 알아서 나타나 주는 센스! 

엘뤼엔이야말로 그 정도의 기본은 갖춰달라고. 

위험 했니 뭐니해도 내가 부르지 않으면 끝까지 나타나지 않을 생각이었지? 결국 마지막까지 오지 않았잖아.”

“…….”

정곡을 찔린 듯 곧바로 입을 다물어버리는 엘뤼엔을 보며 나는 남몰래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또 그를 이겨보겠는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엘뤼엔은 잠시 후, 문득 생각났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내게 반말을 하는 거냐? 이제 눈에 뵈는게 없어진 건가?”

“에? 그랬나?”

“그랬나… 라니?”

“에이~ 뭐, 어때. 그냥 편하게 하자고, 편하게. 원래 서로 친해지려면 쓸데없는 격식은 허물어야 하잖아?”

“… 대담한 건지, 막나가자는 건지 모르겠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엘뤼엔은 내 말투에 대해 별 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다. 

어디 네 마음대로 날뛰어보라느 식이랄까. 

차갑고 냉정하기로 유명했다는 것치고, 그는 의외의 면에서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됐으니 떠날 준비나 해라. 귀찮은 일이 생기기 전에 마을을 벗어나야겠다.”

“귀찮은 일?”

“그런 소란을 일으키고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줄 알았나? 

마을 인간들이 경비대에 신고한 것 같더군. 곧 이쪽으로도 들이 닥칠 거다.”

“하짐나 난 잘못한 거 없는데?”

“사건 진술이라는 게 있잖아. 적어도 며칠 동안은 붙잡힐 거다. 그래도 좋다면 기다리든가.”

엘뤼엔의 그 말은 내가 상황의 심각성을 절로 깨닫게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 장소에 있었던 사람들이라면 트로웰이 처음부터 나를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쉽게 눈치 챘을 것이다. 

게다가 나 역시 피하지 않고 응수했으니 그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인물로 착각하기 쉬웠다. 

자칫하면 엉망이 된 광장을 복구하는 비용을 고스란히 지불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스스로 불러들인 일이니 불만은 없겠지? 알았으면 짐이나 챙겨라.”

엘뤼엔의 엄한 표정에 나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막상 짐을 챙기려는 순간,

 나는 다시금 낭패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산 옷과 식량을 전부 놔두고 와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헉! 어떡하지? 트로웰이랑 싸우느라 다 버리고 와버렸는데. 지, 지금 가도 다시 찾을 수 있을??”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이젠 화낼 기운도 없는지 엘뤼엔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턱하고 이마를 짚었다. 

어째 여행 초반부터 있는 대로 말썽만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았다.




상점에 들를 여유가 없다는 말로 단단히 못을 박은 엘뤼엔이 차후로 선택한 방법은, 

여관 주인에게 며칠분의 곡류를 사는 것이었다. 

이미 금화 한 개의 인심으로 홀딱 넘어가 있던 주인은, 

부탁을 받은지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밀가루를 포함해 육포를 담은 묵직한 자루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미 랑시에게 대강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게 처음부터 저희에게 시키셨으면 좋으셨을 것을. 

송구스럽지만 저희가 준비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두 분이서 이틀 정도는 해결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연신 허리를 숙이며 쩔쩔매는 남자의 말에 엘뤼엔은 가만히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그 시선을 피해 슬쩍 딴청을 피우자 그는 찌푸린 미간을 한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 일행이 아직 철이 없어서 실수를 한 것 같군. 

혹 이번 일과 관게되어 누군가가 찾아와도 별다른 언급은 하지 말도록 해라. 그것이 이 여관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무, 물론입니다. 마을에 나가 봉변을 당하시고 이런 식으로 떠나시니 얼마나 송구스러운지 모릅니다. 

그, 그리고 랑시를 보호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남자는 눈동자를 굴려 내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호기심이 가득 깃든 눈을 보니, 내가 정령사라는 사실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마법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대였지만 이곳에서도 정령사의 존재는 여전히 히귀했다. 

그나마도 대부분 제국에서 독점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런 작은 왕국에서는 

평생 가도 정령사를 볼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를 향한 여관 주인의 얼굴은 무한한 동경과 감탄에 젖어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사람이 정령왕이라는 걸 알면 기절하겠군.’

나와 함께 다닐 때 이사나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랑시는 어디갔나 보죠?”

“아, 예. 제 아비가 불러서 집에 잠깐 갔습니다.”

“어라? 아버지가 있었어요?”

내가 눈을 크게 뜬 채 묻자 여관주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어린 자식을 일터로 보내는 것은 평민들에겐 그리 특이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많았던 나는 괜히 염려스러운 기분이 되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랑시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에요? …아이에게 잘해주나요?”

“아, 예. 아주 끔찍하게 아낀답니다. 

사실 여기서의 일도 안 시키려는 것을 제가 몇 번이고 설득했지요. 

외팔이라서 그 자신은 변변한 수입을 벌 수 없거든요. 

아내는 훨씬 전에 죽어 없고, 그저 랑시 하나만 보고 사는 남자인데… 

쯧쯧! 사실 이런 곳에서 썩히기엔 아까운 아이지요. 

볼 때마다 마음이 편하지 않지만 어쩌겠습니까? 타고난 팔자가 그 모양인 것을…….”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 혀를 쯧쯧 차는 모습을 보니, 그가 랑시를 딸처럼 여기고 있다는 내 생각이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엘뤼엔에게서 받은 돈 주머니 안에서 은화 한 개를 꺼내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실은 아까 너무 정신이 없어서 랑시에게 아무것도 사주지 못했어요. 아저씨가 제 대신에 맛있는 것 좀 사주세요.”

“예? 아, 아닙니다. 보호해주신 것만도 어딘데요. 게다가 이렇게 큰돈을…….”

“그럼 놔두셨다가 두고두고 사주시면 되지요. 

아무것도 안 해주고 가기엔 너무 미안해서 그래요. 아참, 그런데 이 마을 이름이 뭔가요?”

“오렌이라고 합니다. 이래봬도 마라얀 지방에선 가장 도시 축에 들어가는 곳이랍니다.”

자부심이 깃든 얼굴로 대답하는 남자의 말에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마을의 이름을 되새겼다. 

랑시에게 정령을 소환하도록 도와준 일도 인연이고 하니, 혹시나 언제라도 기회가 된면 다시 들러볼 생각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엘뤼엔은 기다리기가 지루했는지 싸늘한 말투로 재촉했다.

“아직 멀었나? 용건이 끝났으면 이만 가지.”

“아, 으응. 알았어.”

여관 주인의 배웅을 받으며 거리를 나서자 주위는 온통 몇 시간 전에 광장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술렁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몰래 고개를 숙이며 걷던 나는, 마침 주변에서 들리는 대화에 귀가 솔깃해지고 말았다.

“글쎄, 그 페허가 되었던 광장이 순식간에 원래대로 되돌아왔다면서요?”

“그렇다네요.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땅이 움푹 패이고 갈라지고 야단이 났다는데, 그걸 어떻게 원래대로 돌려놨을?요?”

“혹시 알아요? 애초에 그런일이 벌어진 것이 아닐지. 단체로 환각이라도 봤나 보지요.”

“어머, 정말 그럴지도. 호호호호!”

‘설마 트로웰이?’

갈라진 땅을 원래대로 복구시키는 일쯤은 땅의 정령왕인 그에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대로 정령계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던 걸까?

나는 괜스레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주위를 휙휙 둘러보기 시작했다. 

혹시나 근처에 트로웰이 있는 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을을 벗어나 한적한 길을 따라 걸을 때까지 나는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마을에서 나오기 직전,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혹시 땅의 정령왕께서 보살피신 게 아닐까요? 원래 대지는 그분 관할이잖아요.”

“그,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허험! 어둠의 군주께 그런 자비심이 있다면야 우리들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지만.”

“쉿! 그러다 그분의 진노가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다들 입조심해요.”

“크흠!”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활기차던 분위기는 단지 ‘트로웰’이 했다는 가능성을 언급한 것 뿐이었는데도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리라.

어쩌다 트로웰이 이런 대우를 받게 된 걸까? 나는 답답한 마음에 엘뤼엔을 향해 질문을 건넸다.

“사람들이 왜 저렇게 트로웰을 무서워하지? 어둠의 군주라는 게 무슨 뜻이야?”

“나도 자세한 건 모른다. 다만 십 년 전엔가, 

녀석이 인간들의 도시 하나를 깨끗이 지워버린 일이 있었지. 아마 그때부터 비롯된 일일 거다. 

자신이 정령왕임을 숨기는 성격도 아니니까.”

“도시를 지웠다고?”

“그래. 아마 그 도시의 인간들이 대지의 신을 찬송하는 축제를 벌였을 때일 거다. 

정작 수고하는 자는 따로 있는데 공로가 엉뚱한 녀석에게 돌아가니 화가 난 거겠지.”

“…….”

그 부분에 대해서라면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실제로 트로웰이 투덜거리는 것을 본 적도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일을 벌였을 줄이야! 나는 황당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며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말리지는 않았어?”

“왜? 정령왕들은 서로의 일에 간섭할 권리가 없다. 있다 해도 그리 상관할 생각도 없고.”

네, 네. 어련하시겠습니까.

담담하게 대꾸하는 엘뤼엔의 말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잠시 말없이 걷던 나는 곧 길가에 서 있는 작은 인영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랑시?”

아마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무료하게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아이는 내가 이름을 부르자 환한 표정으로 얼굴 가득 미소를 띠었다. 

나 역시 반가운 기분에 재빨리 랑시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거야? 아버지한테 갔다면서.”

“헤헤! 아무리 그래도 오빠 배웅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미리와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러지 않아도 됐는데. 여자아이가 이렇게 혼자서 돌아다니면 위험해. 아버지가 걱정하시겠다.”

“괜찮아요. 평소에도 자주 혼자 다니는 걸요. 이제 다들 그런가보다 해요.”

명랑하게 웃으며 대답한 랑시는 그만 돌아가라는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전 오빠가 크게 다치셨을까봐 굉장히 걱정했거든요. 

그 사람은 왜 갑자기 공격한 거래요?”

“그, 글쎄. 그냥 심심했나 보지. 아하하!”

“피~ 그게 뭐예요. 아무튼 이렇게 ?리 가버리셔서 너무 서운해요.

좀 더 머무시면 좋았을 텐데. 마을관광도 하고~ 근처 숲에도 모셔가고 싶었거든요. 

이맘때가 가장 경치가 좋아요.”

“하하! 다음에 와서 보면 되지. 또 놀러올게.”

“정말이죠? 다시 여기 오실 거예요?”

“그래. 언제가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헤헤! 아무때나 오세요. 언제든지 책임지고 안내해드릴 테니까요. 아참, 이건 선물이에요.”

“……??”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랑시는 입고 있는 앞치마 주머니를

 뒤지더니 곧 긴 가죽 끈이 달린 작은 돌조각을 내밀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냥 평범한 돌은 아니었다. 그 안에 꾹 입을 다문 조개 모양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와아~! 조개화석이구나. 이런 건 어디서 구했어?”

“예전에 숲에 놀러갔다가 주웠어요. 

여긴 바닷가 근처도 아닌데 조개가 나왔다고 사람들이 다들 신기해하던 걸요. 

끈은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제가 직접 단 거예요. 엘 오빠한테 드릴게요.”

“하짐나 아끼는 거 아니야? 이런 걸 받아도…….”

“괜찮아요. 오빠가 주신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걸요. 

저도 뭔가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이것밖에는 생각이 안나더라구요. 헤헤!”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7살 어린아이한테는 어려운 일 아닌가? 

확실히 랑시는 평민으로 태어난 게 안타까울 만큼 똑똑한 아이였다. 

그나마 지금 이 모습도 충분히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랄까.

“고맙다. 소중하게 간직할께. 이렇게 과분한 선물을 받다니… 랑시를 보기 위해서라도 꼭 다시 와야겠는 걸?”

“정말이죠? 와아! 신난다~”

“후훗! 그럼 이제 그만 돌아가. 어른들이 걱정하시겠다. 앞으로도 이렇게 씩씩하고 밝게 지내야 돼?”

“네! 엘 오빠도 건강하세요! 옆에 있는 오빠도 잘 가시구요! 정말 꼭 다시 놀러 오셔야 돼요?”

그 뒤로도 랑시는 몇 번이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마을로 돌아갔다. 

아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때까지 잠잠하던 엘뤼엔도 그제야 의문이 서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돌조각이 뭐가 대단하다고 감탄하는 거지?”

“응? 화석이잖아. 게다가 이런 산 밑에 있는 마을에서 나온 거니까, 

단순한 돌조각이 아니라고. 어쩌면 옛날엔 여기가 바다였을지도 모른단 소리잖아?”

“어쩌면이 아니라 실제로 바다였다만?”

“엥? 그, 그래?”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내게 엘뤼엔은 더욱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주었다. 

5천년 전에 바다였던 이곳을 그가 통째로 말려 땅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유는 단지 이 장소에 바다가 있는 것이 미관상 나빠 보였기 때문이라나?

그는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를 눈치 채지 못한 듯 혼자서 심각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바다였던 장소에서 조개가 나오는 건 당연한 거지. 

화석인지 뭔지 그런거 그냥 몇 천 년만 지나면 저절로 생기는 거 아닌가? 그게 뭐가 신기하지?”

“…….”

이런게 바로 오래사는 자의 여유라고 하는 걸까? 

시간만 흐르면 알아서 생긴다니… 왠지 화석을 보며 감탄한 내가 바보가 된것 같은 기분이었다.


식량은 둘째 치고 여행복을 다시 구하지 않은 건 정말 최악의 실수였다. 

낮에는 잘 몰랐는데, 밤이 되자 날씨가 무척 추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안그래도 얇은 옷차림에 쌀쌀한 바람이 몰아치자 나는 새파랗게 질린 채 입술만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라피스가 있었다면 보온마법인지 뭔지라도 걸어달라고 했을 텐데. 

무심한 엘뤼엔은 방법을 찿기는 커녕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다. 

내 생전 정령왕의 몸을 이렇게 간절하게 그리워해본 적은 처음이다.

“추워, 추워~ 춥다고오~~!!”

“알았으니까 제발 그 입좀 다물어라. 정말 엄살이 심하군!”

벌써 1시간 가까이 춥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자 더 이상 참지 못한 엘뤼엔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나는 그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소리쳤다.

“추운걸 어떡하란 말이야? 난 원래 추위를 잘 탄다고!”

“옷을 챙기지 못한 건 엄연히 네 잘못이다. 이 정도로 얼어 죽진 않으니 참아.”

“우씨! 자기는 추위를 안탄다고 너무하는 거 아니야?”

“시끄럽다고 했다.”

쌀쌀맞게 쏘아붙인 엘뤼엔은 곧 주위를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다. 

캄캄해서 이동하기 힘들어지기 전에 노숙할 장소를 마련하려는 것이다. 

잠시후, 적당히 머물 ㅎ만한 공터가 발견되자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불의 중급정령인 샐러맨더를 불러내 한가운데에 앉혀두는 일이었다.

“이러면 되겠지? 불을 쬐고 있으면 나아질 거다. 정말 귀찮은 계약자로군.”

“헤헤! 고마워, 아버지~”

“그놈의 아버지란 소린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나?”

“그러게. 한번 입에 붙으니까 잘 안 떨어지네. 그새 버릇이 돼버렸나봐.”

그의 못마땅한 표정에 나는 그저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럴 땐 그저 화제를 돌리는 것이 상책이다.

“그런데 여기서 밤을 새는 거야? 덮고 잘 모포도 없는데.”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아니, 그냥 그렇다고. 생각해보니까 이렇게 급하게 마을을 떠날 필요는 없었던 것 같아. 

광장도 다시 복구되었다고 하던 것 같은데, 적어도 상점은 들렀다 나올걸.”

“피해가 없는 것과 문책을 받는 것은 별개다. 

지체했다면 시끄러운 인간들에게 발목을 붙잡혔을 거야. 난 귀찮은 건 딱 질색이다.”

“쳇! 그럼 적어도 엘뤼엔만이라도 마을에서 뭘 사오면 됐잖아. 인상착의가 알려진 건 나뿐이었을 텐데.”

“지금 네가 날 시켜먹겠다는 거냐?”

사실 이런 투정이 얼마나 배부른 소리인지는 알고 있었다. 

만약 내가 전혀 연고도 없는 세상에 떨어졌다면 당장 살길부터가 막막했을 테니까. 

지금은 옆에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있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인 것이다. 

너무 욕심을 부렸다는 생각에 나는 뜨끔한 심정이 되어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거 아니야. 그냥 그랬으면 좋았을 거라는 거지. 혹시… 화났어?”

“흥! 그런 건방진 말을 봐주는 것도 지금뿐이다. 

계약자라고 해서 내가 너의 모든 행동을 너그럽게 넘겨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끄덕끄덕!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사나워져 있던 엘뤼엔의 표정도 한층 누그러졌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는 시무룩해져 있는 나를 보며 슬쩍 미간을 

좁히더니 곧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알았으니까 오늘은 그냥 참아라. 날이 밝으면 쓸 만한 것들을 가져올 테니까.”

“…어?”

“담요와 옷가지들만 있으면 되는 거지? 필요한 게 있으면 지금 말해라. 두 번 다녀올 생각은 없으니까.”

이건 또 무슨 심경의 변화인가!

나의 놀란 표정을 본 엘뤼엔은 변명하듯 황급히 다음 말을 이었다.

“춥다고 내내 시끄럽게 구는 걸 듣는 것보다야 한 번 귀찮음을 감수하는 편이 낫겠지. 

하지만 다음부터는 어림없다. 네 몸은 네가 알아서 챙겨.”

“고, 고마워, 아버지. 나 감격 먹었어.”

“글쎄, 그 아버지란 소리는 좀 그만두라니까!”

화가난 엘뤼엔의 목소리에도 나는 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닌 척해도 은근히 배려해주려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느꼈던 서운한 감정들이 이 한 번으로 전부 날아간 느낌이었다. 조금은 친해졌다고 생각해도 좋은 걸까?

그런데 그 순간, 이런(나 혼자만의 일방적인) 평온한 분위기에 갑자기 끼어드는 불청객이 있었으니!

“아버지? 언제 이런 아들을 낳았어. 엘퀴네스?”

“……!!”

사방이 어두워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목소리를 통해 말을 걸어온 이가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직 변성기가 채 지나지 않은 고운 미성이면서도, 

묘하게 어른스러운 말투는 그 외의 다른 존재가 흉내 낼 수 없을 것이다. 

엘뤼엔 역시 진작 그의 존재를 깨닫고 있었는지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

“트로웰, 네가 여기엔 왜 온 거냐?”

‘역시 트로웰이 맞구나!’

그의 등장이 반가우면서도 나는 한편으론 불안한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왠지 그가 찾아온 용건이 나에게 있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죽이는 걸 보류하겠다.’ 고 선언한 지 아직 채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설마 그새 마음이라도 바뀐 걸까.

별의별 상상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는 사이, 

트로웰은 천천히 달빛 아래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반나절 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얼음처럼 무심했기에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어, 어서와, 트로웰! 아까 낮에 보고 반나절 만이지? 이런 데서 보니까 더 반갑네. 하하!”

“…반가운 것치곤 얼굴이 굳어 있는 걸. 걱정 마. 죽이려고 온 건 아니니까. 마음을 읽진 않아도 그 정돈 알 수 있어.”

“…….”

바른말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라니까. 괜스레 민망해지는 기분에 나는 뻘쭘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착각이었을까? 그런 내 모습을 보는 트로웰의 얼굴에 얼핏 미소가 감돈 것 같았다. 

하지만 워낙 순식간이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본 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여유도 없이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냥 잠깐 전해줄 게 있어서 온 거야. 지금 상황을 보니 오길 잘했군.”

“응?”

“이거. 네 것 맞지?”

트로웰이 내민 것은 제법 커다란 배낭이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든 나는, 

그 안에 담긴 것이 오늘 내가 샀던 옷가지와 음식이라는 것을 깨닫고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앗! 이건 설마… 트, 트로웰이 가져와준 거야?”

“네가 떨어트린 걸 봤거든. 그냥 놔둘까 싶다가 엘퀴네스가 이런 걸 세심히 챙기는 성격이 아니라는 사실이 떠올라서. 

잃어버린 걸 알면 다시 살 줄 알았는데… 그냥 맨몸으로 나왔군. 너도 꽤 막나가는 타입이구나.”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웃는 얼굴은 이번엔 틀림없이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내가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자 그는 얼른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와서 말했다.

“그런데 너 꽤 묘한 재주가 있더군. 

인간 주제에 ‘저’ 엘퀴네스를 멋대로 휘두르다니. 하긴, 

그런다고 순순히 끌려 다니는 엘퀴네스도 확실히 평소답지 않지만.”

“아하하! 재주랄 것까진… 앗! 맞다. 마을 광장 복구시킨 거 말이야. 트로웰이 한 일 맞지?”

“그냥 기분전환 삼아서 한 거야. 딱히 인간들을 위한 건 아니니 그런 부담스러운 눈빛은 그만둬줬으면 좋겠군.”

“하지만…….”

“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거 싫어해. 마음에도 없는 말 꾸미는 재주도 없고. 되도록 내 말에 반문하지 말았으면 해.”

“아, 그, 그래.”

내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트로웰은 어깨를 으쓱하곤 한 손을 휘저었다.

“뭐, 어쨌든 내 용건은 이것뿐이야. 그럼 이만.”

“에? 가, 가려고?”

“왜? 나에게 뭔가 할 말이라도 있어?”

무시하지 않고 돌아보다니! 확실히 지금의 트로웰은 오전에 봤을 때보다 한결 독이 빠진 모습이었다. 

지금이라면 내 제의를 고려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했었지만, 우리랑 같이 여행하지 않을래? 

아, 그래! 인간을 싫어한다고 했었지? 나랑 같이 어울려 다니다보면 그런 생각도 많이 사라지게 될 것 같은데.”

“별로 끌리는 조건은 아니군. 미안하지만 난 혼자가 편해.”

“나랑 다니기 싫다는 뜻은 아니지? 

그럼 된 거네! 같이 다니다 보면 일행에 익숙해질 거야! 

어차피 중간계에 있을 거라면 여럿이 함께 여행하는 편이 더 즐겁잖아? 응? 그렇게 하자, 트로웰.”

“이거야 원. 정말 막무가내로군.”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트로웰의 얼굴엔 그리 싫어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 모습에 너무 일찍 안심했던 것이 문제였을까? 다음으로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나느 입을 멍하니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할까?”

“응?”

“아까 내 생각을 바꾼다고 했었지? 

난 앞으로 1년 후에 이 세상의 인간이라는 종족을 완전히 멸할 생각이야. 

네가 그전까지 나를 설득한다는 조건이라면 여행에 동참해주지. 

하지만 끝까지 이 생각이 변치 않게 되면 제일 먼저 너부터 죽일 거다.”

“……!!”

“왜? 싫어? 그런 게 아니라면 굳이 너와 동행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걸. 엘퀴네스도 내가 못마땅할 테고 말이야.”

천진하게 웃는 얼굴이 이렇게 무서워 보일 줄이야. 역시 세상엔 뭐든 쉬운일이 없는 모양이다. 

아니, 오히려 이런 식으로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을 기뻐해야 하는 걸까?

내가 할 말을 잃고 얼어있는 동안 엘뤼엔은 오히려 흥미를 느꼈는지 재미있다는 얼굴로 물었다.

“인간을 멸족시킬 생각인가?”

“왜? 반대하려고?”

“아니, 네가 뭘 하든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런데 왜 하필 1년 후지? 지금 당장이 아니고?”

“그냥… 조금만 더 지켜보자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러자 엘뤼엔은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를 봐도 비웃는 것이 명백히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고작 1년을 지켜봐서 뭘 얻으려는 건지 모르겠군. 이제까지 질리도록 지켜본 게 아니었나?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

“차라리 솔직하게 누가 자신을 말려주길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는 게 낫겠군. 

그래서 넌 아직 꼬마라는 소리를 듣는 거다, 트로엘. 머릿속에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아.”

“윽…….”

아니, 이놈의 아버지가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부채질을 할 셈인가? 

둘 사이의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하자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 그만! 알았으니까 다들 진정해! 네 제안에 응할게, 트로웰. 그럼 우리랑 동행하는 거에 승낙하는 거지?”

“…그렇긴 하지만, 네 계약자의 의견은 묻지 않아도 되는 거야? 내가 함께 다니는 걸 굉장히 싫어할 것 같은데.”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엘뤼엔은 내가 거처를 정할 때까진 동행해주기로 약속했으니까. 

그 조건에 반드시 일행이 나 혼자여야 한다는 말은 없었다고. 그치, 엘뤼엔?”

넉살 좋게 묻는 말에 엘뤼엔은 잠시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네놈의 행동패턴을 파악할 생각은 이미 깨끗이 접었으니까.”

“헤헤! 정말이지?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자~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트로웰.”

“아아.”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트로웰의 손을 억지로 잡고 악수했다. 

그는 이런 나를 마치 희귀생물이라도 보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조건에도 상당히 자신만만하군. 날 설득할 자신이 있는 건가?”

“물론이지! 장담하지만, 1년이 아니라 4천 년 후에도 인간이란 존재는 여전히 존재할걸?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흠, 그래? 그럼 어디 능력껏 노력해봐. 과연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응, 알았어. 그, 그런데 말이야…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될까?”

“부탁?”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나는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설득할 기간 말인데, 십년으로 늘려주면 안 될까?”

“…….”

“안 돼? 오, 오년이라도 괜찮은데. 아니, 일년만이라도.”

“이봐, 너…….”

“아~ 오해하지 마! 설득할 자신은 있거든? 있긴 있는데… 일년 가지고는 모자랄 것 같아서. 아하하하… 역시 안 될까?”

그 순간, 주위의 온도가 이전보다 더욱 내려갔다고 느낀 것은 나 혼자만의 착각만이 아닐 것이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공터에 나의 허무한 웃음소리만이 흩어지고 있었다. 

미안해, 라피스. 널 찾게 되어도 당분간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건 무리일 것 같다. 그래도 이해해줄 거지? 하하하…….



밤이 깊어지자 엘은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인간의 육체로는 처음 겪는 노숙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쉽게 피곤해지고 견디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가 잠들자 트로웰과 엘퀴네스는 묘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언제 그들이 이런 식으로 함께 여행해본 적이 있던가? 

같은 정령왕이지만 사실 그들은 타인보다 더 낯선 관계였다. 

아마 이번일만 아니었다면 서로의 소멸일까지 정령계에서조차 맞부딪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트로웰은 지금 상황이 좀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뻣뻣하게 굳은 분위기도 무마시킬겸 궁금했던 것을 간단하게 질문하기로 마음먹었다.

“아까 보니 이 소년이 너에게 엘뤼엔이라고 부르던데… 그게 무슨 뜻이지?”

“아아, 그냥 녀석이 제멋대로 붙인 애칭이다. 귀찮아서 마음대로 하라고 내버려뒀지.”

“의외로군. 이 인간에겐 여러 가지로 관대한걸, 엘퀴네스? 상당히 마음에 들었나 봐?”

“설마, 다만 이제까지 보던 인간들과는 다른 타입이라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는 것뿐이다. 

오히려 너야말로 고분고분하던걸. 원래 남이 흘린 물건을 세심하게 챙겨주는 성격은 아니지 않나?”

“…할 말 없군.”

트로웰의 눈으로 보기에 ‘엘’은 여러모로 특이한 소년이었다.

제아무리 스스럼없이 남을 대하는 사람이라도 상대가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일단 저자세가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소년은 겁이 없는 건지 뭔지, 

여전히 친근하게 구는 것은 물론 심지어 목숨을 위협하는 협박에도 그저 웃기만 하는 게 아닌가?

아니, 그게 아니라도 그에게선 애초에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공격을 피하는 스피드나 육체의 조건이 뛰어난 것은 그렇다 쳐도, 혜안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라니. 

이런 경우는 정말 듣도 보도 못했다. 

그나마 알기 쉬운 성격이라는 것 때문에 마음을 읽지 못하는 답답함은 덜었지만 말이다

(이 생각을 알면 엘이 방방 뛸지 모르겠지만.).

“인간인 건 틀림없어. 그런데 미심쩍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군. 왠지 숨기는 것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확실히 평범하지는 않다. 

단순히 친화력만으로 자연계의 정령을 볼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자연계의 정령들을 본다고?”

“그래. 믿을 수 없겠지만.”

정말 인간이 맞은 걸까? 트로웰은 다시금 심각하게 생각을 정리해볼 수밖에 없었다. 

짐작되는 경우야 굉장히 많지만, 

과연 그것이 실제로 가능한가를 따지기 시작하니 말이 안 된다는 결론이 내려졌던 것이다.

자연계의 정령을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신계의 신과 정령왕뿐. 

설마 미래의 정령왕이 과거에 오기라도 했다는 소리인가?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신들 중 하나가 인간의 육체를 입고 유희를 왔다고 하는 편이 더욱 합당하리라. 

하지만 그런 생각도 엘의 손등에 새겨진 새하얀 그림을 발견하자마자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잠깐만. 이건 설마 마신의 문장?”

“그렇더군. 본인의 말로는 신관이 아니라고 우기지만 말이야.”

“…엘퀴네스, 넌 도대체 얼마나 황당한 녀석에게 소환된 거야?”

“나도 모른다. 내가 소환자를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

신의 문장은 본인은 물론, 같은 신에겐 절대 새길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동등한 입장의 그들이 서로에게 일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낙인을 찍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한마디로 엘은 유희 중인 신도 아니라는 소리. 

더불어 신관인 그가 어떻게 정령을 소환할 수 있냐는 문제가 더 추가된다. 트로웰은 쓴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점점 정체를 알 수 없군.”

“그래도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네가 앞으로 1년 후에 죽일 녀석이기도 하지.”

“…아아, 그래. 그렇지.”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는 둥, 아직 멀었다는 둥 말했지만 엘퀴네스는 이미 그가 결단을 내린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년이라는 시간적 여유를 둔다고는 해도, 아마 결정을 번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왕 마음먹은 거 빨리 처리하지 못하는 행동이 영 마음에 들지 않긴 했지만 말이다.

‘이 계약도 길어봤자 1년이라는 건가.’

어차피 오래 동행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엘퀴네스는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허전해지는 것을 느끼고 슬쩍 양 미간을 좁혔다. 

겨우 이틀 전에 만났을 뿐인, 이런 작은 인간 아이에게 그새 정이라도 생긴 것일까?

스스로가 생각해놓고도 어이없었는지, 엘퀴네스는 피식 하고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건 생각보다 자신의 계약자가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리라. 

어쩌면 1년 후에 트로웰을 말리는 것은 엘이 아니라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 아주 오랜만에 유쾌해지는 기분이었다.



검술을 배우자!



“영혼의 보석?”

이번 여행의 목적을 들은 트로웰이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의아함이었다. 

엘뤼엔도 그랬지만 그 역시 그런 것을 가져다 뭐에 쓰냐는 것이었다.

“장식용으로 두기에는 너무 밋밋할 텐데? 물건과 조합시켜서 쓰려고? 하지만 넌 마법을 못하잖아?”

“물건? 아! 그 에고소드인지 뭔지 하는 것 말이지? 그게 마법으로 만드는 거야?”

“맞아. 아무래도 영혼을 봉인시키는 작업이니까 단순한 기술만 가지고는 힘들거든.”

“봉인시킨다고? 이미 보석안에 들어가 있는데?”

“바로 그 보석에 담긴 영혼을 다른 쪽으로 흡수시키는 거야. 설마 에고소드가 뭔지 모르는 건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트로웰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말하는 검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

“말하는 검? 정령이 봉인된 검 말이야?”

“호오, 그건 또 어떻게 알지?”

“아, 아니. 그냥 그런 게 있을지도 모른다 싶어서…….”

그 순간, 떠오르는 건 이미 마검으로 위명(?)을 떨친 바 있는 이사나의 ‘파이어 버스터’였다. 

그 가공할 수다력에 쓰러진 인간들이 몇이었던가. 

결국 최후의 결전까지 상자안에 봉인되어 나오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

지금 생각해보니 녀석을 악신에게 던져줬다면 놈이 스스로 자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음만큼 커다란 공해가 없다고 하지 않은가?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굉장히 허무했겠지만.

내가 잠깐 딴생각에 빠진 사이, 트로웰은 다음 설명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거의 비슷해. 다만 에고소드는 검 안에 담긴 것이 정령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이라는 차이가 있지. 

보통 정령검이 그 안에 담겨진 정령의 기운을 이끌어내느 것이라면, 

에고소드는 검에 새겨진 마법식을 봉인된 영혼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거야. 그만큼 사용자의 마나를 잡아먹지만.”

“저기… 그걸 영혼의 보석으로 만든다는 거야? 말을 하기도 해?”

“원석 자체는 못해. 하지만 그걸 가공해서 물건과 접목시키면 가능한 것 같더군. 

그리고 방식만 알면 검이 아니라 어디든 혼합 할 수 있어. 가령 목걸이 같은 것에라도.”

“헤에, 정말? 나도 그 방법 배울 수 있을까?”

“마법이라고 했잖아. 정령사와 마법사는 그 성질이 완전히 달라. 

그게 아니라도 너는 체질적으로 마법을 배울 수 있는 몸이 아니야.”

인간이 되었으니 마법을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기대는 그의 한마다로 인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트로웰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듯, 계속해서 궁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보다 영혼의 보석이라면 평범한 인간들은 찾기 어려울 텐데?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지?”

“아, 엘뤼엔이 알고 있는 드래곤 중에 그걸 수집하는 용이 있다고 해서. 세이크 제국에서 유희중이라고 하더라고.”

“세이크 제국에 있는 드래곤? 

아아, 블루 드래곤 라미아스로군. 확실히 그런 취미가 있다고 들었지. 하지만 쉽게 내주진 않을 거야.”

“괜찮아. 일단은 확인이 먼저니까.”

“……?”

의아하게 바라보는 트로웰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목적은 오직 라피스의 영혼. 그것을 찾을 때까진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비록 그 과정이 무척 힘들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해도 말이다. 

그 순간, 굳은 표정으로 다짐하는 내게 트로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참! 잊을 뻔했군. 잠시만 왼쪽 손 좀 줘봐.”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자 그는 뭔가 주문 같은 것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오더니, 나의 왼손“(정확히 신의 문장이 새겨진 부분)을 감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빛이 사라진 이후에도 내 눈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방금 뭘 한 거야?”

“일루젼 마법을 걸었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문장이 보이지 않을 거야. 

넌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눈에 띄는 신체부위에 문장이 새겨지면 귀찮은 일이 많거든.”

“앗, 그렇지. 미처 생각을 못했어. 고마워, 트로웰.”

다행히 지금까지는 용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이제부터 지나칠 마을에서도 무사히 넘어가리란 법은 없었다.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내게 트로웰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심한 척 외면하긴 해도, 역시나 그는 배려깊은 성격이었다.



사람의 몸이 이렇게 불편한 것인 줄 왜 예전에는 깨닫지 못했을까. 

하루 삼시 세끼 일일이 챙겨 먹어야 함은 물론, 피곤할 땐 앉아서 쉬어야 하고 잠도 꼭 자야 한다.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일이었는데, 

그새 정령왕의 몸에 익숙해져버린 것인지 오랜 만에 하려니(?) 굉장히 번거로운 느낌이었다. 

하긴, 지금 상황에선 공간이동이 되지 않는 것이 제일 불편했지만 말이다.

“다리아파.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 될까?”

“또냐? 그놈의 다리는 쉽게도 아프군.”

“아까 쉬고 나서 벌써 4시간째 걸었는데 뭐가 또야? 난 철인이 아니라고.”

사실 내가 힘들다고 느끼게 된 것에는 엘뤼엔의 책임이 가장 컸다. 

식사와 잠자는 시간을 빼면 무조건 걷는 일정이라니, 

아무리 내가 원한 여행이었다지만 이렇게 강행군을 펼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가만 보면 그는 이상한 곳에서 사람을 괴롭히는 악취미가 있었다.

내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툴툴거리자 옆에 있던 트로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거들었다.

“어차피 저녁식사 때야, 엘퀴네스. 잠시 멈춰도 될 것 같은데?”

“아아, 그런가. 좋아. 그럼 어서 밥이나 먹어라. 먹고 나서 다시 출발이다.”

“헉!”

설마 이번에도 먹자마자 이동할 셈인가? 나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되물었다.

“솔직히 말해, 엘뤼엔. 지금 나 괴롭히는 거 즐기는 거지?”

“애초에 데려다 달라고 한 건 너였다. 불만을 토로할 입장이 아닐 텐데?”

“그래도 이렇게 살인적인 스케줄을 원한 건 아니었단 말이야!”

“흐음? 이 정도가 힘든가?”

“당연하지! 엘뤼엔도 한번 인간이 돼봐! 아주 죽을 것 같다고.”

하지만 그런 말로 그의 공감을 얻기에는 십분 부족했던 것 같다. 엘뤼엔은 오히려 뻔뻔스러운 얼굴로 이렇게 대꾸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인간이 될 수 없으니 네 기분을 이해할 날은 없으리라고 보는데?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걸 보니 기운이 펄펄 넘치나 보군. 다시 이동할까?”

“이 독재 대마왕!!”

친해졌다고 생각한 거 다 취소다! 젠장! 꼭 저렇게 사악한 티를 내야 속이 시원하단 말인가?

하짐나 역시나 엘뤼엔은 강적이었다. 그는 노려보는 나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식사나 해라. 나로선 재잘거리는 시간에 체력을 비축해두는 쪽을 권하고 싶다만?”

“입을 다문다고 없던 체력이 돌아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 순간, 마주보는 시선에서 파지직 불꽃이 튀었다고 느낀 것은 내 착각만이 아닐 것이다. 

나를 바라보는 엘뤼엔의 얼굴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만약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트로웰이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자리에서 고이 세상을 하직했을지도 모른다.

“둘 다 그만 해. 벌써 며칠째 같은 패턴으로 다투고 있잖아. 질리지도 않아?”

“저 쪼그만 녀석이 대들짐나 않으면 나도 이러진 않는다.”

“내가 보기엔 말 상대를 해주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싸움을 즐기고 있는 것 같은데? 

엘, 너도 얌전히 밥이나 먹어. 일정이 촉박하면 오히려 네가 편한 게 아닌가? 용건을 빨리 끝낼 수 있잖아.”

“…하지만 힘든걸. 다리가 너무 아파서 꼼짝도 할 수 없어.”

“아프다고? 흠… 하긴, 오늘 하루종일 걸었지? 인간들의 체력으론 다소 무리가 있었나?”

혼자서 중얼거린 트로웰은 자리에 주저앉아 휙하고 내 바지를 걷어올렸다. 

덕분에 퉁퉁 부어있는 다리가 드러나자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엘뤼엔을 향해 마치 나무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역시 부었군. 조금쯤은 계약자의 상태를 확인해가며 일정을 강요하는 게 어때, 엘퀴네스?”

“흥! 고작 하루 걸었다고 다리가 부어? 한심할 정도로 약해빠졌군.”

“아니, 이런 식으로 걸은 게 오늘로 사흘째니까 하루라곤 할 수 없어. 

오히려 다른 인간들에 비하면 월등히 나은 편이라고.”

“그래도 귀찮다는 것엔 여전히 변함이 없다.”

쯧쯧 혀를 차는 말에 잠시 울컥할 뻔했지만, 

또 다시 싸움으로 번지는 게 싫어 나는 그냥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엘뤼엔 역시 투덕투덕하면서도 내 다리 상태에 관심을 가지는 걸 보면, 속으로 나름대로 찔리긴 했던 모양이다.

파앗!

그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터지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끊어질듯이 아팠던 다리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러자 덩달아 예민해져 있던 신경도 한결 가라앉았다.

“아! 고마워, 엘뤼엔. 많이 좋아졌어.”

“당연한 소릴. 엘퀴네스의 치유력은 완벽하다. 너 정도의 인간쯤은 다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살려낼 수 있어.”

“그거야 나도 잘 알지. 음, 어쨌든 이제 다시 걸을 수 있겠다. 밥 먹고 바로 출발해도 괜찮을 것 같아.”

하지만 그 말을 내뱉은 것은 실수였다. 

간단한 과일로 끼니를 때우자마자 정말로 기다렸다는 듯이 엘뤼엔이 출발할 것을 종용했기 때문이다. 

내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걸을 수 있다며? 그 표정은 또 뭐지?”

“그렇다고 정말 곧바로 출발하냐? 암튼 배려라곤 눈곱만큼도 없다니까.”

“치료해줬으면 된 거 아닌가? 

어차피 이런 곳은 그리 쉴 만한 장소도 되지 않는다. 너도 하루빨리 노숙을 청산하고 싶을 텐데?”

“네네, 어련하시겠습니까. 가면 되잖아, 가면!”

“아, 잠깐만 기다려.”

“……??”

그때 갑자기 트로웰이 바닥에서 거대한 흙더미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공중을 선회하던 모래알갱이가 순식간에 뭉쳐지더니 곧 말의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마치 잘 다듬어진 조각상 같았다.

갑자기 저런 걸 왜 만든거지? 

내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자 트로웰은 곧 흙 말(?)의 판판한 등 부분을 가리키며 나를 바라보았다.

“타.”

“에? 이걸?”

“내가 움직임을 조정할 수 있으니까 아마 걷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매번 엘퀴네스가 치료하는 것보다야 이게 더 나을 테지. 즉석에서 처리하기도 편하고.”

한마디로 1회용 말인 셈인가? 살아 있는 말보다 다루기도 편하고, 

먹을 거나 휴식 걱정할 필요도 없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나는 당황하면서도 기쁜 얼굴로 대답했다.

“앗! 고, 고마워, 트로웰. 그런데 이러면 네가 피곤해지는 거 아니야?”

“아니, 전혀. 어차피 흙도 대지의 일부니까. 숨을 쉬는 것보다 쉬워.”

“헤에, 그래? 정말 신기하다. 이런 방법이 있을 줄은 몰랐어. 나도 돌아가면 꼭 해봐야지.”

“…해본다고?”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잽싸게 고개를 젓자, 그는 잠시 수상하다는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도 굳이 캐묻지 않는 건 그의 성격상 조금 더 나를 관찰 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이럴 땐 트로웰이 내 마음을 읽지 못한다는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나는 속으로 조심스럽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앞으론 조심해야지.’

언젠가는 밝힐 때가 오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나의 사정을 얘기하고 도움을 구하기엔 지금의 엘뤼엔이나 트로웰이 어딘지 못미더운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트로웰의 경우는 여전히 친절하고 배려심이 있긴해도 두 눈에서 나에 대한 호의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보통사람이라면 잘 모르겠지만, 이미 그의 ‘진짜’ 상냥한 모습을 보았던 나는 그것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엘뤼엔 역시 지금 동행해주는 것이 내가 ‘특이한 인간’이라는 것에 호기심을 느꼈기 때문이지, 

그 유일한 궁금증이 해결되고 나면 나 몰라라 할 가능성이 다분했다. 

정말 피치못할 상황이 오기 전까지는 이대로 모른 척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유일하게 이때의 나를 기억하고 있던 시벨리우스도 내가 미래에서 온 사실만은 알지 못했지. 

난 끝까지 밝히지 않고 떠나게 되는 걸까?’

아니, 그 전에 무사히 라피스의 영혼을 찾을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왠지 생각만으로도 암담해지는 기분에 나는 푸욱 한숨을 내 쉬었다. 

이럴 때 차라리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친근한 이들임에도 전혀 다른 사람 대하듯 보는 눈빛들이 소름이 돋을 만큼 싫었다. 

어느 날 문득 눈을 떠보니, 온 세상이 뒤 바뀌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나 혼자만이 사라진 기분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과정을 밟아야 할까. 아마도 당분간은 외톨이가 된 심정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것 같았다.




길을 떠난 지 어느새 일주일이 넘어갔지만 새로운 마을은 좀 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가도 가도 똑같이 이어지는 나무숲에 니루해 하기를 여러 날. 

그 뒤 조금 넓은 길에 다다르자마자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한 떼의 시커먼 몬스터 무리였다.

“인가… 인간이다, 취익!”

“취익! 먹을 것을… 털자. 취익! 인간이다. 취익!”

한 손에 도끼를 거머쥔 채 우락부락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는 것은, 

여행자라면 꼭 한 번쯤은 만나는 것으로 유명한(?) 오크들이었다. 

조금쯤은 다를만도 하련만, 4천년 전에도 여전히 똑같은 옷차림과 말투를 구사하는

 그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조용히 감탄하고 말았다. 

정령왕이 두 명이나 끼여 있는 일행에 겁도 없이 다가서다니. 본능은 가져다가 죄다 팔아먹은 것인가?

하지만 나는 곧 이어지는 엘뤼엔과 트로웰의 대화를 통해,

 이 것이 그들의 의도대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무료한 표정으로 오크들을 바라보던 엘뤼엔이었다.

“꽤나 심심했나 보군.”

“아아, 계속 걷기만 하자니 너무 지루해서 말이야. 조금 박진감 있는 여행도 나쁘지 않잖아”

“박진감? 겨우 저런 걸로? 이왕 하는 거면 오우거나 트롤 쪽이 더 낫지 않나?”

“그 녀석들은 죄다 눈치가 빨라서 다가오다 말더라고. 내가 애써 존재감을 감췄는데 말이야.”

설마 일부러 오크들이 다가오는 것을 내버려 뒀단 말인가?

가볍게 대답한 트로웰은 언젠가 봤던 것처럼 순식간에 장검을 만들었다. 

그러자 맑게 빛나던 그의 황금색 눈동자에서 번쩍 하고 시퍼런 살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아무리 생각 없는 오크들이라도 무언가 깨닫는 것이 있을 터! 

놈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어느새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취익! 이, 인간이 아닌 것 같다. 취익!”

“취, 취익! 도망치자!! 취익!”

“흐음, 어딜!”

그러나 뒤돌아 달려가려던 오크들의 시도는 그들의 계획을 일찌감치 

눈치 챈 트로웰에 의해 허무할 정도로 쉽게 막히고 말았다. 

도망치는 오크들 앞에 거대한 흙벽을 세워 길목을 차단했던 것이다 .

그러고 이어지는 것은 잔인할 정도로 화려한 피의 춤사위.

촤아악!

“키에에엑!”

“꾸에엑!”

칼을 휘두르는 것이 보이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하나둘씩 몸이 갈라져 쓰러지는 오크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20마리에 가깝던 오크들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모두 시체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전적을 내고서도 트로웰의 표정은 그다지 개운치 않아 보였다.

“…역시 몬스터를 가지고 노는 건 재미없어.”

“인간보다는 전투력 면에서 더 나을 텐데?”

“그래도 미관상 보기 흉한 건 질색이야. 죽이는 감촉도 인간 쪽이 낫고.”

“취향도 까다롭군.”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오가는 대화치곤 너무 살벌하지 않은가?

잠시 후, 들고 있던 칼을 흙으로 되돌린 트로웰은 한쪽에서 굳어 있는 나를 발견하곤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아아, 실례. 어린애한텐 자극이 심했나? 마치 시체를 본 건 처음이에요~ 라고 말하는 얼굴인데?”

“…처음 아니야.”

“흠, 그래? 그런 것치곤 너무 얼어 있는 걸? 

그냥 스트레스 해소용이었으니까 너무 겁먹지 마. 당분간은 인간을 죽일 생각이 없으니까.”

“음, 그런 건 별로 상관없어. 있잖아,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뭐?”

내가 아무렇지 않게 수긍하며 화제를 넘기자 트로웰은 한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내가 방금 벌어진 일에 충격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야 물론 놀라기는 했다.. 정확히는 그의 검술에 감탄한 거였지만.

눈앞에서 화려한 실력을 본 감격 때문이었을까? 

그때는 막연히 동경만 하던 일이, 이번엔 직접 배워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꽤 의외였는지 어리둥절하게 묻는 그에게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실은 전부터 배우고 싶었는데, 좀처럼 기회가 없었거든. 

지금 너 검 쓰는 거 보니까 굉장히 멋지다. 나한테도 가르쳐주면 안 될까?”

“하지만 넌 이미 정령사에다… 신관이잖아? 호신을 위해서라면 그것만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게 앞으로 어찌 될 지 알 수가 있나. 

그리고 난 신관이 아니야.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으로 문장을 받았긴 했지만. 마족과 계약을 한 상태도 아니고 말이야.”

“…하긴. 확실히 마신의 사제라고 보기엔 여러 가지 미심쩍은 부분이 있군.”

“그렇다니까.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것도 마법처럼 배우기에 적당하지 않다던가, 그런 건 없을까?”

그러자 트로웰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전에 내 공격을 피했을 때 보였던 

순발력이나 체력 등을 보면 검술을 익히기에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야.”

“정말이지? 그럼 나 좀 가르쳐줘.”

“뭐, 그거야 별로 어렵지 않지만. 수업이 편할 거란 기대는 접는 게 좋을 텐데?”

“괜찮아! 열심히 배울게!”

솔직히 말해서 난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한 편이라 과도한 운동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정령왕으로 태어난 이후에는 굳이 호신술을 배울 필요가 없었고 말이다. 

때문에 훈련이 힘들다곤 해도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 인지상정!

겁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트로웰은 생긋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가르쳐주지.”

“정말?!”

“그 대신, 몇 가지 조건이 있어. 첫째, 내가 시키는 일에 토를 달지 않는다. 

둘째, 훈련 과정으로 인해 몸이 아프게 되더라도 절대 치료를 받지 않는다. 

이건 육체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니까 반드시 지켜야 해.”

“으응, 알았어.”

“그리고 셋째는 중간에 그만두지 않는 거야. 먼저 배우겠다고 한 것은 너니까 이 부분에 대한 이의는 없겠지?”

“당연하지!”

주먹까지 움켜쥐며 대답하는 나를 트로웰은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희한한 녀석.”

“응? 나한테 하는 말이야?”

“그래. 도대체 겁이 없는 건지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모르겠군. 

보통 무서워하지는 않더라도 이런 장면을 보면 혐오감이 들지 않아? 

그런데 도리어 검을 가르쳐달라고 하니 특이할 수밖에.”

“하하! 난 또 뭐라고. 이것보다 더 끔찍한 것도 여러 번 봤는 걸. 

내가 충격 받았을까 봐서 신경 쓴 모양이구나? 역시 친절하다니까.”

“…글쎄. 네가 생각보다 곱게 자란 도련님이 아니라는 건 잘 알았어. 그럼 당장 시작할까?”

“에? 지금 당장?”

‘친절하다’고 말한 것에 대한 복수였을까? 

트로웰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얼마 전에 내게 만들어주었던 흙 말을 순식간에 소멸시켰다. 

그리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보며 상큼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부턴 걸어.”

“…엑?”

“인내와 끈기, 지구력의 시험. 더불어 체력을 쌓는 훌륭한 방법 중 하나지. 

설마 내가 시키는 일에 토 달지 않는다는 약속을 벌써 어기려는 건 아니겠지?”

“…….”

다른 사람들보다 체력 좋다고 할 땐 언제고, 

갑자기 웬 극기훈련이란 말인가?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떠나간 배였다. 그것도 모자라 트로웰은 핸디캡을 강화한다는 핑계로 요상한 주술을 거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으, 으악! 이게 뭐야!”

멀쩡히 딛고 서 있던 땅이 갑자기 푸욱 꺼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바로 지금 내가 그런 상태였다. 모래 늪처럼 다리를 빨아들이는 땅 때문에 균형을 잃고 허우적거리자, 

트로웰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다음 말을 덧붙였다.

“그냥 걷는 것보단 그 편이 단기간에 체력을 쌓기에 더 나을 거야. 이대로 마을이 나타날 때까지 꾸준히 걸어봐.”

“마, 마을이 언제 나타나는데?”

“글쎄. 여기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곳이 평균 나흘 정도인가?”

“헉!”

아무리 훈련의 명목이라지만 이건 단순히 모래주머니를 다리에 매달고 걷는 수준이 아니지 않은가. 

그것도 4일이나 버티라니, 날더러 죽으란 소리냐?

그래도 먼저 배우겠다고 말한 죄가 있어써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초, 초반부터 강도가 너무 센 거 아니야?”

“아니. 넌 기본적인 체력이 있기 때문에 이 정도는 해야 훈련이 돼. 

어서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우고 싶겠지? 그럼 잘 해봐. 응원까지는 아니어도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볼 테니.”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트로웰의 모습은 이곳에서 그를 만난 이후로 가장 잔인하게 보였다. 

그 순간, 옆에서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엘뤼엔이 조용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제 무덤을 팠군.”
기관총으로 난사된 몸에 확인사살까지 당한 심정이랄까. 

나는 아연한 얼굴로 저 멀리 끝도 없이 이어진 길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해 보였던 그것은 이 순간 지옥의 황천길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국경의 검문을 통과하는 방법은 흔히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첫 번째가 경비대에게 신분증을 보여주는 평범하고 일반적인 방법이고, 

두 번째는 일명 ‘암흑의 루트’라고 하여 산맥을 빙 돌아가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 산맥이란 것이 한여름에도 폭설이 몰아치는 살벌한 환경인데다, 

몬스터의 출현이 잦아 보통 사람들은 넘어갈 엄두를 못 낸다고 하는 게 옳았다. 

또한 정상적인 길보다 일주일 이상을 돌아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찮더라도 신분증을 구하려는 방법을 택했다.

국경을 넘으면 바로 앞에 자리 잡은 ‘글모어’라는 마을이 보이는데, 

이곳은 흔히 수도로 가려는 이방인들의 중간 휴식지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장사가 잘되기로 유명한 ‘피렌체’란 이름의 여관을 운영하고 

있던 남자는 손수 장을 보러 나왔다가 그날따라 유달리 소란스러운 거리의 모습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원래 활기찬 편이긴 했지만, 지금의 분위기는 마치 어느 유명인사의 방문에 들떠 있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어느 대귀족의 자제가 오기라도 한 걸까?’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한 그는 마침 자신의 곁을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이보시오. 오늘따라 거리가 술렁거리는데, 혹시 그 이유가 뭔지 아시겠소?”

“네?”

제 갈 길을 가다가 난데없이 붙잡힌 청년은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곧 무슨 소린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아마 그 여행자들 때문일 겁니다.”

“여행자들?”

“네. 청년 하나에 소년 둘로 된 일행인데, 1시간 전엔가 마을로 들어왔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특이하다고들 해서…….”

“겨우 그런 걸로 온 동네 사람들이 이 야단이란 말이오?”

워낙 각양각색의 사람이라도 관심이 집중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설명해주는 청년 또한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닌 모양인지 동감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혹시 모르죠. 돌아다니면서 돈이라도 뿌리는 걸지도.”

“허허! 별 희한한 여행자들도 다 있군.”

“어떻게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보려는 장사치들이겠죠, 뭐. 이런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요.”

가끔 그런 상인들이나 가무단이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돈이나 보석류를 뿌려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이번에도 그와 같은 것이라 생각한 남자는 기막힌 얼굴로 혀를 차며 여관으로 돌아왔다. 

“쯧쯧! 하여튼 동네가 조용할 날이 없으니, 원.”

“쟈콥 아저씨, 무슨 일 있으세요?”

“별거 아니다. 웬 여행자들 때문에 마을 전체가 시끌시끌하더구나. 

아참,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뭐 별다른 일은 없었고?”

“네. 아참, 챌시가 설거지를 하다가 접시를 한 장 깨트렸어요.”

“또? 이게 대체 몇 번째인지. 으휴. 월급에서 삭감시켜라.”

“네. 이미 그렇게 했습니다.”

일상에 오가던 대화를 나눈 뒤 쟈콥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계산대 의자에 앉아 월별 장부를 뒤적거렸다. 

그때 마침 딸랑 하는 경쾌한 종소리가 울리며 누군가가 들어와서 그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저희 여관을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한 것은 그 순간 주위가 무척이나 고요해졌다는 것이다. 

한창 청소를 하거나 주문을 받던 종업원들의 움직임도 어딘지 경직되어 있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쟈콥은 순간 헉 하고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키고 말았다.

“3인실이 있나? 2인실 하나에 1인실 하나라도 상관없다.”

“아, 그, 그게…….”

“뭐야, 있다는 건가, 없다는 건가?”

차갑게 쏘아붙이는 사람은 대략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허리까지 흘러내린 반투명한 하늘색 머리카락과,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새하얀 얼굴이 마치 조각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생길 수 있단 말인가! 쟈콥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용한 곳으로 가자고 했잖아. 이런 번화가는 딱 질색이야.”

“……!!”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투덜거리는 사람은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햇볕에 일부러 태운 듯한 새까만 피부가 묘하게 가슴을 자극하게 만드는 타입이랄까. 

찰랑거리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모든 것을 꿰뚫어볼 듯이 차분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는 

소년의 분위기를 한층 신비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비록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무척이나 살벌했지만 말이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그 더러운 시선 치워.”

“헉… 죄, 죄송합니다!”

쟈콥은 뜨끔한 심정에 얼른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상대는 자신보다 훨씬 어린 나이였지만, 외모로 보나 말투로 보나 귀족임이 확실했기에 자존심을 챙길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그 살벌한 분위기는 곧 소년의 뒤에 있던 누군가의 한 마디로 인해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으니…….

“크흑! 사, 살려줘…….”

“에?”

눈을 휘둥그렇게 뜬 그가 발견한 것은 시커먼 도포로 온몸을 덮은 채 비틀거리고 있는 한 소년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는 보기에도 애처로울 만큼 흐느적거리는 몸으로, 

까만 피부의 소년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붙들려 있었다. 혹시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걸까?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동안 까만 피부의 소년은 힐책하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겨우 그 정도가지고 쓰러지면 쓰나. 여기서 기절하면 다음날 벌칙이 세 배인 거 알지?”

“…겨, 겨우라고? 맨손으로 암벽을 등반한 일이……? 설마 날 죽일 셈이냐?”

“후후, 그래도 아직 안 죽었잖아?”

“차라리 죽여줘어~~”

“쯧! 변덕도 심하네. 방금 전엔 살려달라고 해놓구선.”

…무언가 상당히 살벌한 포스가 느껴지는 대화가 아닌가? 

게다가 일행임이 틀림없는 푸른 머리의 청년은 중재는커녕 오히려 귀찮다는 표시를 얼굴 가득 드러내고 있었다.

모포를 둘러쓴 소년을 한심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청년은, 멍 하니 서 있던 쟈콥에게 시선을 돌리곤 짜증스럽게 물었다.

“방이 있냐고 물었잖아. 없다면 다른 곳으로 가겠다.”

“아, 아닙니다! 3인실 있습니다! 하루 머무시는 데 은화 1개입니다만. 

계산은 선불이나 후불이나 상관없습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식사는 1인분만. 방 안으로 가져올 수 있나?”

“네,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얘야, 토마스! 여기 손님들을 2층의 3인실로 안내해드려라.”

“네!”

귀족을 모심에 있어서 실수는 절대 금물! 

쟈콥은 일부러 이 여관에서 가장 경력이 오래된 종업원을 불렀다. 

그는 5살 때부터 이 여관에서 자라다시피 하여 손님을 대하는 일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소년이었다.

불려온 토마스틑 과연 그의 기대에 걸맞게,

 보통 사람이라면 놀라서 허둥거릴 정도의 출중한 외모를 보고도 종업원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들. 방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 짐은 저에게 주십시오. 타고 오신 마차나 말은 어디에 두셨습니까?”

“없다.”

“아, 예. 그러시군… 에에? 말이 없으시다고요?”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국경에 닿아 있는 이 마을은 여기서 가장 가까운 도시로 가려고 해도 족히 한 달 이상은 걸어야 했다. 

물론 다른 데서 이곳으로 오는 길 또한 마찬가지. 

말을 타지 않고 걸었다면 진즉에 녹초가 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험난한 여정을 겪어왔다고 하기엔 푸른 머리의 청년이나 검은 머리의 소년이 너무도 생생해 보였다.

잠시 의아한 표정을 하던 토마스는 곧 한 가지 경우를 떠올리곤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관에 오시기 전에 이미 처분하신 모양이군요. 

하긴, 지쳐버린 말을 계속 타느니 이곳에서 새로 품종이 좋은 말을 구입하시는 게 훨씬 나으실 겁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좋은 마(馬)시장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굽실거리는 말투가 나쁘지 않았는지 일행은 귀찮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단 한 사람, 모포를 뒤집어 쓴 소년만 빼고 말이다.

“저, 저기요, 혹시 저 계단을 올라가야 하나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이르자 소년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왠지 그 말투에 절망이 섞여 있다고 느낀 것은 착각 일까? 토마스는 의아하게 바라보면서도 습관대로 충실하게 대답했다.

“3인실은 전부 2층에 있습니다만.”

“헉!! 그럼 나 혼자만 1인실로 따로 해주면 안 돼요?”

“예, 예?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역시나 저 소년은 몸이 많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당연한 듯이 반말을 하는 일행과 달리 유일하게 

주위 사람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걸 보면 그다지 세력이 강하지 않은 지방 귀족일 가능성이 컸다. 

모포로 온몸을 가리고 있는 이유도 일행들에 비해 초라한 외모를 감추고 싶어서이리라.

대충 사정을 짐작한 쟈콥이 얼른 소년의 옆에 다가가 말했다.

“혹시 몸이 불편하신 거라면 위층까지 부축해드리겠습니다. 제게 기대십시오.”

“네? 아, 그러실 필요까진…….”

“아닙니다. 걷는것도 힘들어 보이시는데 그렇게 하시지요. 

어차피 현재 1인실은 전부 꽉 차서 드릴 수 있는 방도 없습니다.”

하지만 막 부축하려는 순간, 그는 싸늘하게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의해 내밀었던 손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를 막은 사람은 검은 피부를 지닌, 예의 그 차가운 분위기의 소년이었다.

“쓸데없는 참견은 그만두시지? 그냥 알아서 오르도록 내버려 둬.”

“네, 네? 하, 하지만…….”

같은 일행이면서 어찌 이리 냉정할 수 있단 말인가!

쟈콥은 자신이 더 분한 심정이 되어 억울한 표정으로 항의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년은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먼저 다른 말로 선수 쳤다.

“엘, 이것도 훈련의 연속인 거 알지? 게으름 피우면 벌칙이야.”

“크흑! 알아어! 알았다고!!”

“어떻게 그럴… 에? 후, 훈련?”

훈련이라니? 이런 곳에서 무슨 훈련을 한단 거지?

쟈콥이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에 굳어 있는 사이, 

그들은 엘이란 이름의 소년만 남겨둔 채 유유히 방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혼자 남은 소년은 한참이나 빤히 계단을 노려보더니, 곧 심호흡을 하고 한 발씩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확고한 표정을 보니 정말로 혼자서 오를 작정인 듯했다.

“끄응! 아이고~ 나 죽어. 헥! 헥!”

“저어, 정말 도움이 필요 없겠습니까?”

“네, 네. 괜찮아요. 전 신경 쓰지 마시고 하던 일이나 계속하세요. 하하!”

“손님이신데 그럴 순 없습니다. 다른 일행분들은 다들 멀쩡하신데 어째서 혼자서만 이렇게……?”

“아, 그게요. 요즘 뭘 배운답시고 과하게 움직였더니 온몸의 근육들이 온통 비명을 지르는 거예요. 

쉬면 또 금방 나아지니까 정말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럼 근육을 푸는데 효과적인 약이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손님이 원하지도 않은 서비스를 이렇게 베풀고 싶어지기도 처음이었다. 

그 만큼 눈앞의 소년은 어딘지 위태롭고 불안해 보였다. 하지만 소년의 대답은 이번에도 정중한 거절은 담고 있었다.

“안 돼요. 약 먹으면 혼나거든요. 벌칙이 꽤 살벌해서…….”

“벌칙이요?”

“쿡쿡! 이 모포 한번 들어보실래요?”

“……??”
생긋 웃은 소년은 곧 입고 있던 모포 중 한 겹을 벗어내어( 그 모포가 여러 겹이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아무렇지 않게 건네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든 쟈콥은 곧 눈이 휘둥그레지는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천이라고 하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포의 무게가 어마어마하게 무거웠던 것이다.

“헉! 이, 이것은??”

“벌칙 한 번에 모포 한 개씩 추가. 벌써 다섯 개째예요. 여기서 더 늘어나면 난 죽어요. 흑흑!”

“이, 이런 것을 입고 다닌단 말입니까? 설마 여행하는 내내??

그에게서 다시 모포를 받아든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랑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네! 그래도 걸을 땐 그나마 낫지, 산타고 암벽을 오를 땐 정말 죽을 뻔했어요. 떨어질 뻔한 게 몇 번인지…….”

“아, 암벽이요? 이곳에 암벽이 어디에…….”

“왜, 이 마을 주변이 온통 산이잖아요? 저 안쪽으로 가니까 전부 암벽뿐이던 걸요.”

“헉! 서, 설마 산맥을 통과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쟈콥은 좀처럼 믿을 수 없는 말에 멍하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내노라하는 정정들도 쉽게 건너지 못하는 산맥이다. 

그런 곳을 이런 어린 소년들이 넘었다는 말은 그가 아니라 누구라도 쉽게 납득할 수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방금 전 소년이 입은 모포의 무게까지 확인한 뒤에서야 더욱이 현실감이 떨어지지 않겠는가?

“노, 농담이시겠죠?”

“휴우 저도 농담이었으면 좋겠어요. 아! 잡담이 너무 길었네요. 그럼 저 이만 올라가 볼게요.”

“…아하하. 네. 그, 그러십시오.”

얼떨떨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쟈콥은 또 다시 멍해지고 말았다. 

무겁게 짓눌러진 모포 사이로 소년의 새하얀 얼굴이 살짝 드러났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벌꿀이 타고 흐르는 듯한 허니 블론드 머리에, 시리도록 빛나는 초록색의 눈동자였다. 

오뚝 솟은 콧대와 부드럽게 미소 지은 입술은 마치 상아를 가져다 그대로 깎아 만든 듯이 정결한 느낌을 주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불분명한 중성적인 아름다움. 그것은 마치 신계의 천사가 지상에 하강이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너무 순식간에 사라져, 쟈콥은 방금 자신이 본 것이 정말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눈을 뜬 채 꿈이라도 꾼 건가?’

그가 어리둥절한 심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소년은 어느새 계단을 다 올라 방을 향해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러자 조용했던 1층이 갑자기 술렁거리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손님들은 물론, 종업원들까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에 쟈콥은 

의아한 표정으로 근처에 있던 심부름꾼 아이를 향해 물었다.

“얘야, 죠. 사람들이 갑자기 왜들 저러는 거냐?”

“왜긴요! 방금 올라간 그 손님의 일행들 못 보셨어요? 모두 하나같이 인간의 기준을 벗어난 것 같았다고요.”

“쯧쯧! 조그만 한 것이 밝히기는.”

“윽! 저뿐만이 아니에요. 아까부터 동네가 온통 술렁거렸다고요.”

“엥? 설마 밖이 시끄러웠던 게 전부 저 손님들 때문이라는 거냐?”

“당연하죠! 우리 여관에 오다니, 믿을 수 없어! 쟈콥 아저씨! 이따가 식사 가져다 드리는 거 제가 해도 돼요?”

“그, 그래. 그려려무나.”

“야호! 신난다!!”

그러나 그 뒤로 쟈곱은 아이에게 기회를 빼앗긴 다른 종업원들의 원망 어린 시선을 감당 해야만 했다. 

외모만으로 주위를 장악하는 사람들이라니, 왠지 엄청난 손님을 맞아들이게 된 것 같았다.



트로웰로부터 체력훈련(체력훈련이라 쓰고 고문이라 읽는다.).

 을 받게 된 지도 어언 한 달째. 요즘 들어 나는 한 가지 심각한 의문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훈련양이 너무 과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초반에 질척거리는 땅에서 걷게 했을 때만 해도 그런가 보다 했었다. 

하지만 보통 평범한 인간을 훈련시키는데 집채만 한 바위를 들거나 나무를 매달고 강을 헤엄치게 하던가?

마치 드래곤x 이란 만화에 등장하는 손x공이라도 된 심정이다. 

물론 시키는 대로 다 해내는 나 역시 정상이 아닌 것 같긴 하다만.

“…이러다 나중엔 초사이언이라도 되는 거 아닐까…….”

그런 모진 시간 속에서도 아직까지 살아 있으니(?) 이런 생각도 그리 터무니없는 건 아니다. 

게다가 이놈의 육체는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이런 과한 운동에도 근육은 커녕 살이 붙지도 않는다.

그뿐인가! 심한 훈련 때문에 온몸이 아파 끙끙거리다가도 그날 저녁 한숨 자고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멀쩡해지는 것이다. 

덕분에 약이 오른 트로웰이 훈련의 강도를 더욱 높이게 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지만.

“흑흑! 그렇다고 땅 밑에 매장시켜놓고 알아서 살아나오라고 한 건 너무했잖아.”

그랬다. 현재 나는 어딘지 모를 지하 깊숙한 곳에 묻혀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온몸을 무섭게 짓누르는 무거운 모포와, 커다란 돌덩이를 고스란히 허리에 매단 채로.

그나마 숨을 쉬게 해준다고 실프 한 마리를 던져줬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올라가기도 전에 질식사했을지도 모른다. 

곳곳에 돌조각과 나무 뿌리가 섞인 흙을 밀어내고 위로 올라가는 일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힘든 작업이었다. 

-이봐,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 당신, 우리들의 왕께 무슨 죽을지라도 저지른 거야?

“헥헥! 놈, 지금 나 고생하고 있는 거 안 보여? 힘드니까 말시키지 마.”

-하지만 벌써 3일째잖아? 이러다 올라가기도 전에 굶어 죽는 거 아니야?

“젠장! 그래서 어쩌라고!”

-아니, 그냥. 되게 불쌍해 보여서.

“그래봤자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지금 말을 할 수 있는 건 순전히 내 얼굴에 공기층을 씌워준 실프 덕분이었다.

그에 비해 저 놈들은 어떠한가! 

누가 땅의 정령 아니랄까봐 시종일관 옆에 붙어서 재미있다는 듯이 쑥덕대니, 

안 그래도 없던 기운이 더욱 빠지는 기분이다.

내가 빽 하고 소리 지르자 놈은 무슨 당연한 소릴 하냐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왕께서 절대 도와주지 말라고 하셨다고.

“나도 알아! 누가 뭐래? 바라지도 않네욧!!”

-쯧쯧! 애교 없긴. 그러니까 이런 고생을 하지.

“큭! 놈!! 너 자중에 두고보자!! 앞으로 딱 4천 년만 기다려! 알았어?”

-……??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는 놈을 무시하며 다시 있는 힘껏 흙덩이들을 밀어 올렸다. 

아무리 검술이 배우고 싶었어도 그렇지, 하필이면 사악버전의 트로웰에게 부탁을 하다니!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용감했던 걸까? 

체력훈련만으로도 이렇게 힘든데, 앞으로 본격적인 검술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제 무덤을 팠다’는 엘뤼엔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휘유~ 정확히 3일째 15시간 하고도 38분 지났어. 5일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꽤 빨리 나왔는 걸? 아주 훌륭해!”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이렇게 얄미워 보일 수 있을까? 

나는 간신히 빠져나온 상반신만 땅 위에 지탱한 채 한참 동안을 거친 숨을 골랐다.

처음 떠났을 때만 해도 가을 중반이었던 계절은 여행하는 도중에 겨울로 바뀌었지만, 

나의 온몸은 한여름의 무더위 때보다 더욱 땀에 절어 있었다. 

거기에 지저분한 흙들과 상처들까지 두드러지니, 

이미 내 모습은 사람의 몰골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런 걸 보고도 트로웰은 영 재미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 정도쯤 하면 미칠 때도 됐는데, 꽤 오래 버티네? 

뭐, 육체나 정신력이나 이미 일반인의 기준을 뛰어넘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하아, 하아! 어, 어째 미치기를 바라는 듯한 말투다?”

“하하! 설마. 1년 후에 날 막아야 하는데 벌써 미치면 곤란하지. 난 그렇게까지 사악하진 않아.”

이미 충분히 사악해!

버럭 소리치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벌칙까지 당하고 싶진 않아 나는 꿋꿋하게 눌러 참았다. 

원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지 않은가? 하긴 이 경우엔 처음부터 법이 통할 리도 없지만.

내가 뾰로통한 표정을 하자 트로웰이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수고는 많았어. 예상보다 빨리 올라온 상으로 원하는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지.”

“정말? 그럼 인간을 멸종시킨다는 계획 취소해줘!”

“통과!”

“그런 게 어디었어? 소원 들어준다며!”

“그건 예외야. 겁 없는 녀석이네. 한 번 더 땅속을 구경하고 싶어?”

“쳇!”

어차피 들어줄 걸 바라고 말한 건 아니었지만 역시 단칼에 거절당하니 충격이 컸다. 

그런 내 모습을 트로웰은 상당히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도무지 방심할 수가 없군. 그새 기회를 노리는 건가?”

“당연하지! 설득할 기간이 1년밖에 안 되잖아. 

그러니까 기간 좀 늘려달라니까? 아, 그래. 이걸 소원으로 하면 안 될까? 3년만 늘려줘.”

“안돼! 이것도 통과.”

“쳇! 수명도 길면서 치사해.”

만난 가까이 사는 인생에서 고작 3년을 참는 것도 힘들단 말인가. 

내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툴툴거리자 트로웰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그런 거 말고 좀 더 네 자신을 위한 걸로 바랄 생각은 없는 건가?”

“나를 위한 거라니?”

“음, 아프니까 치료를 받게 해달라거나, 체력훈련은 이쯤에서 그만두자거나 하는 거 말이야. 

난 당연히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거든.”

“뭐, 그것도 절실하긴 하지. 그래도 역시 너를 설득하는 일이 더 중요하니까.”

“흐응, 인간들의 멸종이 두렵긴 한가 보군? 

하긴, 너 역시 인간이니 남의 일이라곤 할 수 없겠지. 그래서 그렇게 매달리는 건가?”

“아니.”

“그럼?”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는 트로웰의 모습은 영락없이 짓궂은 장난을 치는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그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며 또박또박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이 널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게 싫어.”

“…뭐?”

“안 그래도 요즘 널더러 ‘암흑의 군주’ 니 뭐니 하면서 수군거리고 있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근데 멸종까지 시켜봐. 이미 죽은 인간들이야 말이 없겠지만, 

엘프들이나 드래곤들이 얼마나 쑥덕거리겠어? 그런 거 정말 싫어.”

“대체 무슨… 내가 그런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사실인걸.”

“하! 지금 뭔가 중요한 걸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내가 너에게 그런 ‘과분한’ 대접을 받을 정도로 살갑게 군 기억이 있던가?”

“그야 당연하지!”

처음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것은 내 앞을 둘러싸고 있던 3명의 정령왕들. 

무심한 표정의 미네르바나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던 이프리트와 달리, 웃으며 반겨주던 유일한 존재가 바로 트로웰이었다.

수업을 한다는 핑계로 구박하던 이프리트에게서 날 두둔해주던 것도 그였고, 

처음 나간 유희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나를 능숙하게 이끌어주던 것도 트로웰이다. 

그는 오히려 엘뤼엔보다 먼저 내게 가족이란 의미로 다가와준 존재였다.

“나는 트로웰을 좋아해. 너는 나의 가족이야. 

네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낯선 장소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어. 

이곳에서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준 것도 네가 처음, 나를 일으켜 세워준 것도 네가 처음.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가족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도… 네가 처음이야.”

“…….”

물론 이 말에 해당하는 것은 4천년 후의 그였지만, 

지금의 트로웰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동일인물이니 누가 듣든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충격이라도 받은 듯이 할 말을 잇지 못하고 서 있는 그를 보며 나는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지금 굉장히 황당하다고 생각하지? 표정이 완전히 굳었어.”

“…잘 알고 있네. 방금 한 말은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내뱉은 헛소리로 간주해주지.”

“헉! 남의 진심을 짓밟다니!”

“미안하지만 난 인간들이 말하는 진심 같은 건 안 믿어. 

너희들이 한 가지 얼굴로 얼마든지 다른 성격을 연기해낼 수 있는 종족이란 걸 아주 잘 알고 있거든.”

무뚝뚝하게 대꾸한 트로웰은 아직도 땅속에 몸을 묻은 채 상체만 내밀고 있는 나를 한 손으로 덥석 잡아 끌어올렸다. 

모포와 바위덩어리까지 매달려 있는 무게를 단번에 들어 올리는 괴력이라니!

아담한 체구와는 전혀 매치가 안 되는 현상에 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그는 먼지 묻은 손을 탁탁 털며 입을 열었다.

“오늘로 한 달째지? 내일 부턴 본격적으로 검술을 배우게 될 테니 각오해.”

“에? 정말? 그럼 체력훈련은 오늘로 끝이야?”

“끝이라고 한 적은 없어.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진 병행이야.”

“그, 그게 언제까지인데?”

“글쎄. 네가 하는 걸 봐서.”

“살려만 주십시오! 사부!!”

그 순간, 나는 보고야 말았다. 

트로웰의 입가에 서리는 사악한 웃음을!!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대답에 나는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좋아. 소원 접수.”

“에? 자, 잠깐만 기다려! 이게 소원이 아닌데?”

“이미 지나간 일에 왈가왈부하지 마. 어서 들어가서 씻기나 해. 지금 네 몰골,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니까.”

“으윽! 얍삽해, 트로웰! 이런 법이 어디있어!”

그럴 거면 처음부터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을 하질 말던가! 단지 살려만 준다니! 

앞으로 또 얼마나 괴롭히려고?!

그러나 억울한 외침도 통할 상대에게나 통하는 법. 

완고한 면으로만 보자면 그는 엘뤼엔보다 더 대하기가 까다로운 존재였다. 

키득키득 웃으며 먼저 돌아가 버린 트로웰의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던 것도 잠시, 

나는 그때까지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닫고 허무한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여관까지 가려면 반나절을 걸어야 한단 말이야… 흑흑.”




무려 ‘만’ 3일만에 돌아온 여관은 여전히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비록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하긴, 여기저기 흙먼지와 피를 잔뜩 묻힌 채 좀비처럼 흐느적흐느적 걷는 사람을 그 누가 반가워하겠냐마는.

게다가 온몸에서 퀴퀴한 냄새까지 풍기니, 

만약 이곳의 주인과 미리 안면을 터놓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쫓겨났을 것이다. 

나병(문둥병) 환자라도 대하듯 슬금슬금 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울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런 나를 알아보고 제일 먼저 말을 걸어온 사람은 역시나 이 여관의 주인인 쟈콥이라는 남자였다.

“아, 아니!306호실의 손님이 아니십니까? 이 꼴은 대체…….”

“아하하! 아, 안녕하셨어요.”

“지금 인사하실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식사는 제대로 하신 건가요? 몸이 완전히 엉망이 되셨군요. 토마스! 어서 부축하지 않고 뭘 하는 거냐!”

대부분의 사람들이 엘뤼엔과 트로웰의 외모에 홀려 내게 관심을 두지 않기 일쑤인 반면, 

이곳 여관의 주인은 이상하리만치 나를 더 챙기려는 경향이 있었다. 

잘나고 화려한 일행들에 비해 초라한 차림의 내가 불쌍해 보이기라도 한 모양이다. 

의외로 동정심이 많은 타입인 걸까? 나는 애꿎은 종업원을 닦달하는 쟈콥에게 얼른 고래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쟈콥씨. 제가 알아서 갈게요.”

“예에? 설마 이번에도 도움을 받으면 벌칙을 받으시는 겁니까?”

“아마도 그럴 걸요. 그보다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 좀 준비해 주시겠어요? 

내내 육포로만 끼니를 때웠더니 배가 너무 고프네요.”

“대체 무엇을 하시다 오셨기에?”

“아하하하! 지하탐방이랄까요… 뭐, 그다지 정신건강에 좋은 건 아니었어요.”

“……??”

강도가 높은 훈련을 한다는 말을 끝으로, 

달랑 육포 10조각이 들어 있는 주머니만 받은 채 깊은 땅속에 파묻혔을 땐 얼마나 황당했던가. 

주위에 있던 땅의 정령들이 지상으로 가는 길을 알려줬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영원히 그 안에서 헤맬 뻔했다. 이번엔 용케 살아나왔다지만, 정말 두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랄까.

내 장담컨대,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사형법은 생매장일 거다! 암, 그렇고 말고!

“왔으면 얌전히 방으로 돌아올 일이지, 거기 멍하니 서서 뭘 하는 거냐?”

“아… 엘뤼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은 것은 훈련 때문에 며칠 동안 보지 못했던 엘뤼엔이었다. 

그는 꼬질꼬질하고 엉망이 된 내 모습을 보곤 그간의 

상황을 잠작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그 모습에 황홀해하는 주변 사람들은 무시하도록 하자.).

“죽지 않고 살아온 것을 칭찬해야 할지, 독하다고 혀를 차야 할지 모르겠군.”

“아하하! 자, 잘 지냈어? 참 오랜만이지?”

“고작 사흘 주제에 뭐가 오랜만이라는 거냐? 어서 들어오기나 해라.”

짜증내면서도 일부러 나와 준 걸 보면, 날 기다리기라도 했던 걸까? 

괜스레 기쁜 마음에 헤헤 웃자 옆에 있던 쟈콥이 얼른 내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보십시오. 곧 간단한 음료와 식사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 네! 고마워요, 쟈콥씨.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의 말에 나는 허둥지둥 인사를 건네곤 얼른 엘뤼엔의 뒤를 따라갔다. 

늦장이라도 부렸다간 당장이라도 호통이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육통이라는 게 어디 그렇게 쉽게 낫는 것이었던가? 

온몸의 통증을 견디며 방으로 들어갔을 땐, 엘뤼엔은 그새를 못 참고 의자에 앉아 질책하듯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거기서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 대체 몇 분이 걸리는 거냐?”

“헥헥! 몸이 뻐근해서 움직이는 것도 힘들다고. 이런 무거운 걸 짊어지고 계단 오르기가 쉬운줄 알아?”

“넌 바보냐? 모포를 벗으면 되잖아.”

“하지만 이거 벗으면 트로웰한테 혼난단 말이야.”

“쯧쯧! 넌 그런것을 입고 찝찝하지도 않냐?”

“하지만…….”

살아남는 것에 급급하다 보니 찰림이 지저분한 것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는데, 

그게 엘뤼엔에게는 영 불만이었나 보다. 

하긴, 지금 언뜻 본 머리카락이 본래의 금빛을 잃고 시꺼멓게 보일 정도니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는 말 다한 셈이다.

머쓱한 얼굴로 모포를 만지작거리고 있자, 그는 곧장 나이아스를 불러내어 나를 씻기도록 명령했다.

“인간의 몰골이 될 때까지 씻겨라. 지금 입고 있는 지저분한 옷들까지 전부 세탁해. 도저히 봐줄 수가 없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왕이시여.

“자, 잠깐만! 인간의 몰골이라니! 그럼 내가 지금은 인간이 아니라는 거야?”

“거울을 보면 알 거다. 앞으로 어디 가서 절대 내 계약자라고 말하고 다니지 마라. 창피해서 원…….”

“…….”

아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도 여유만만한 아버지라니!

하지만 엘뤼엔은 내가 노려보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나이아스에 의해 깔끔해진 내 모습만을 만족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 한결 낫군. 대체 어디서 무슨 훈련을 하면 금발이 흑발처럼 보일 수 있는 거냐?”

“별거 아니었어. 그냥 흙속에서 좀 뒹굴었더니…….”

“아무튼 넌 봐줄 데라곤 외모밖에 없으니까 평소에도 틈틈이 관리하는 게 좋을 거다.”

“쳇! 누가 할 소릴.”

“뭐야?”

“그나저나 트로웰은 어디 갔어? 아까부터 안 보이는데.”

내가 은근슬쩍 딴청을 피오며 말을 돌리자, 엘뤼엔이 푸욱 한숨을 내쉬고는 내키지 않는 어조로 대답했다.

“잠깐 계약자를 만나러 갔다.”

“계약자? 아, 혹시 블랙 드래곤 아니야? 이름이 라이칸이랬던가.”

“녀석이 그런 것까지 말해줬나?”

“아니, 그건 아니지만, 헤헤! 역시 맞구나.”

라이칸이라면 블랙 일족의 수장인 동시에, 

라피스의 아버지 되는 드래곤이었다. 그와는 라피스의 장례에서 잠시 마주친 기억밖엔 없지만, 

왠지 반가운 기분이 들어 나는 슬쩍 미소 지었다.

그러자 그 모습에서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한 듯, 엘뤼엔이 내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뭐냐, 그 웃음은?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엥? ‘또’ 라니?! 내가 언제 사고를 쳤다고 그래?”

“글쎄… 주위에서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무덤을 파는 게 네 특기 아니었던가? 

덕분에 트로웰이 요즘 신났더군. 다른 인간들을 죽이는 대신, 널 괴롭히는 것에 재미가 붙어버린 모양이던데.”

“…….”

쩝, 할 말 없다. 이번 일은 정말 나 스스로 만든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모처럼 인간이 되었는데 정령사에만 안주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전보다 죽을 위험이 높아진 만큼, 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좀 더 다양하게 익히고 싶었을 뿐이다. 

비록 훈련하다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요 근래 깨닫긴 했지만…….

‘괜찮아, 괜찮아. 다 나 잘되라고 그러는 건데, 뭐. 어차피 편한 훈련이라는 건 없잖아?’

문제는 트로웰이 제아무리 사악하게 굴고 멋대로 행동해도, 

내 머릿속에서는 언제나 다정하고 상냥한 그만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모진 구박에 화가 울컥 치밀이도 막상 얼굴을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고 마니, 

요즘 들어서는 거의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이것도 나름대로 가족에 대한 콤플렉스 같은 걸?(브라더 콤플렉스나 시스터 콤플렉스처럼.).?

“이런 험한 세상에서 검술은 기본이지! 정령술만으론 버티기 힘들다고.”

“어쭈? 지금 정령의 힘을 무시하는 거냐?”

“그게 아니라~ 나도 뭔가 한 가지쯤은 나 스스로 해내고 싶어서 그래. 

정령들의 도움을 받는 걸로는 성이 안 찬다고 해야 하나? 왠지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한심할 정도로 배부른 소리로군. 그래서 이 고생을 사서 한다고?”

내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엘뤼엔은 이마에 시퍼런 혈관을 띄운 채 꽉 쥐인 주먹을 높이 펴들었다.

따악!

“아얏! 무슨 짓이얏!”

“멍청한 녀석에겐 매가 약이다. 도대체 정령왕을 소환한 주제에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군.”

“하지만 성취감이 떨어지는 걸.”

“정령을 소환하여 그것의 힘을 빌리는 건,

 정령사가 가진 능력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그걸로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는 네가 이상한 거야.”

“나도 알아! 그래서 다른 것도 배우려는 거잖아!”

정령은 이미 내게 생활의 일부나 마찬가지라, 

소환한다고 해도 그것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마 그래서 더 정령사란 직업에 애착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겠지만.


그걸 알지 못하는 엘뤼엔은 간단하게 내 상태를 결론지었다.

“쯧! 몸이 고돼야 보람을 느끼는 타입이었나? 어쨌든 네 육체가 인간의 기준을 뛰어넘은 것에 감사해라.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탈진해서 죽었을 테니까. 트로웰은 네가 평범한 인간이었어도 지금과 똑같은 훈련을 시켰을 거다.”

“헤에, 지금 날 걱정해주는 거야?”

“이젠 헛소리까지 하는군.”

미래의 그였다면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을 텐데. 

어찌된 게 지금의 엘뤼엔은 하루라도 쌀쌀맞게 대꾸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라도 돋는 모양이다. 

그런데도 이 모습 쪽이 좀 더 그 답다고 생각하는 나는 또 뭐라 말인가!

“하아, 역시 패밀리 콤플렉스라도 있는 모양이야…….”

“패밀리… 뭐라고?”

“아냐, 아무것도. 그냥 특정인에게 무작위로 약해지는 게 버릇이 돼버린 것 같아서.”

“……??”

대충 말을 얼버무린 나는 한쪽 구석에 마련된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온몸이 뻐근거리는 탓에 잠이라도 잘 생각이었다. 

엘뤼엔 역시 내가 피곤한 상태라는 것을 느꼈는지 그에 대한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그렇게 막 의식이 끊기려는 찰나, 환청인지 뭔지 작게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쯧! 온몸이 상처투성이군. 할 수 없지. 오늘만 특별히 해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겁게 짓누르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진 것은 단지 기분 탓이었을까.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한 잠자리였다.



다시 깨어났을 땐 이미 트로웰이 방 안에 돌아와 있었다. 웬일인지 기분이 좋은 듯 얼굴에 가득 웃음을 지은 그는, 


내가 눈을 뜬 것을 발견하곤 반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깨어났군. 몸은 좀 어때?”

“으응, 괜찮아. 어라? 그러고 보니 이상할 정도로 개운하네.”

평소에도 회복이 빠른 편이긴 했지만 오늘은 유난히 상쾌한 기분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팔을 구부렸다 폈다 해보이는 나에게, 

트로웰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엘뤼엔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느 누가 잠깐 반칙을 해서 말이야. 뭐, 어차피 이번은 나도 심했다 싶으니 상관없지만.”

“…에? 설마 엘뤼엔이 치료해준 거야?”

“슬슬 한계가 온 것 같아 도와준 것뿐이다. 고작 이런 훈련으로 한심하게 죽을 순 없지 않나.”

내가 놀란 목소리로 묻자 엘뤼엔은 머쓱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며 변명하듯 대답했다. 

잠들기 직전에 들었던, 환청이라고 생각했던 그 중얼거림이 정말이었던 것이다.

“고, 고마워. 엘뤼엔.”

“흥! 당연한 소릴.”

그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지만, 

지금까지의 그를 생각해봤을 때 부탁받지도 않은 일을 해준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혹시나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게 아닐까?

“뭘 그렇게 멍하니 보는 거냐? 일어났으면 밥이나 먹어라.”

“응? 밥?”

“그래. 아까 여기 주인인지 뭔지 하는 인간이 네가 부탁했다면서 식사를 가져왔더군.”

엘뤼엔의 말대로 테이블 위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스튜와 베이컨이 놓여있었다. 

그 주위를 묘한 기운이 감싸고 있는 것을 보면, 

누군가 보온 마법을 걸어 음식이 식는 것을 방지해둔 듯했다. 

내가 그것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자 자연스럽게 트로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음식이 식지 않은 게 이상한 거야? 엘퀴네스가 보온마법을 걸어뒀어. 그 정도의 마법쯤은 정령왕들도 할 수 있거든.”

“에, 엘뤼엔이 직접?”

“왜? 그게 이상해?”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지려는 것을 불굴의 이성으로 참아냈다. 

이런 식으로 자잘한 것을 배려해주는 모습을 보니 반가움보다는 오히려… 불안하다. 

이거 혹시 훗날 닥쳐올 고난을 미리 달래려는 의도 같은 건 아니겠지?

불길한 생각이 화가 된다고 했던가! 

찝찝한 표정으로 스프를 먹는 내 앞에 갑자기 트로웰이 묵직한 자루 하나를 터억 내밀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언뜻 보기에도 수많은 팔찌들과 장신구 종류였다. 물론 ‘겉으로’는 말이다.

“이게 뭐야?”

“그동안 모포 덮고 있느라 힘들었지~

 미관상으로도 나쁘고 해서 좀 더 간단하고 섬세한 것으로 준비해봤어. 앞으로 시작될 네 훈련에 많은 도움이 될 거야.”

“훈련이라면… 이거 설마 모포 대요?”

“정답. 한 번 착용해볼래?”

생글생글 웃으며 물은 트로웰은 대답은 듣지도 않고 멋대로 팔찌 하나를 가져다 내팔에 채웠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모포 대용이라는 말에 그 정도만큼의 무게라고 생각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 순간, 어마어마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쿵!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

너무 놀라서 비명도 못 지르고 굳어 있는 나를 보며, 트로웰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흠, 무게설정을 너무 높게 잡았나? 가만히 앉아서 넘어질 정도면 곤란한데.”

“쿠, 쿨럭! 날 죽일 셈이야?”

“설마. 그냥 사소한 실수였어. 어디보자, 그럼 발찌의 무게도 낮춰야 하나?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훈련이 부족했을지도…….”

그러면서 생긋 웃는 걸 보니 이미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저런 소(小)악마 같으니라고. 제발 나에게 친절하고 상냥한 트로웰을 돌려줘~~!

하지만 내가 울상을 짓든 말든,

 그는 착실히 내 손목과 발목에 예의 그 끔찍한 정도로 무거운 장신구를 달기 시작했다. 

그리곤 육중한 무게에 눌려 꼼짝도 못하고 있는 나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 무게에 익숙해지면 앞으로 어딜 가든 칼 맞을 염려는 없을 거야. 내 이름을 걸고 장담하지.”

“…대체 이런걸 어디서…….”

“아아, 내 계약자한테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어. 중량 마법쯤이야 나도 쓸수 있지만,

 일일이 물건에 새기는 게 귀찮아서 말이야. 어때? 꽤 잘 만들어졌지?”

갑자기 계약자에게 다녀온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던가. 

물론 만들어지기야 잘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훈련이라곤 해도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너무 심한 거 아닌가?

그런 내 불만을 느낀 듯, 트로웰은 킥킥 웃던 것을 그만두고 딱! 하고 가볍게 두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바위라도 매단 듯 추욱 늘어져 있던 손발이 한층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

“뭐야, 그 표정은? 아무리 나라도 처음부터 무리한 일은 시키지 않아. 

앞으로 차차 단계를 늘려서 방금 전의 무게까지 도달할 생각이니까 충분히 각오하는 게 좋을걸.”

“윽! 정말 악취미야.”

“그러게 수업이 편할 거란 기대는 하지 말랬잖아? 난 빈말은 안 하는 주의라서 말이야.”

엘뤼엔의 말마따나, 그는 나를 괴롭히는 것에 단단히 재미가 들려버린 듯했다. 

왠지 앞으로의 일정도 순탄치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우연은 필연을 부른다.



처음 시작하기에 앞서 트로웰이 가장 먼저 나에게 건네준 것은 제법 날카롭게 벼려진 진검이었다.

원래 기초 동작을 연습할 때는 목검으로 시작하는 거 아닌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에게 그는 여유만만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덤벼.”

“…엥?”

“안 덤빈다고? 흠, 그럼 내가 먼저 간다?”

“에에에? 자, 잠깐만!!!”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얼렁뚱땅 성립된 대련모드. 

아니, 정정한다. 한 사람의 일방적인 칼질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는 오직 몸을 피하는 것에만 급급해 있었으니?.

한 몇 분간 그런 상태가 지속되자 트로웰은 도리어 짜증나는 얼굴로 투덜거렸다.

“피하기만 하면 어떻게? 제대로 좀 막아봐.”

“막으라니! 이걸 어떻게 막아!”

“일부러 느리게 움직여주고 있잖아. 이번에도 못 막으면 정말 찌를 거다.”

“……!!”

팔다리에 무거운 걸 매달아놓고, 칼 휘두르는 법은 가르쳐 주지도 않은 채 무조건 막으라니!!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그런데 이프리트의 정령 만들기 시범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쐐애액!

허리 아래를 파고드는 낮은 파공음은 내 얼굴의 핏기를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게 어딜 봐서 느리게 움직이는 거얏!!

속으로 비명을 지르던 것도 잠시, 

나는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들고 있던 검을 앞으로 내밀었따.

채앵!

‘막았다!’

그래. 우연인지 몰라도 분명 처음은 막았었다.

 하지만 트로웰이 어디 한번 막혔다고 가만히 있을 바보였던가?

그러나 나는 처음 막았다는 사실에만 들떠 이어지는 공격에는 전혀 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빈틈!”

“에? 우악!”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빡-!! 하고 강하게 내려치는 통증. 순간, 

나는 눈앞이 핑그르르 돌아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첫날에 벌어졌던 훈련의 결말. 그리고 오늘, 나는 또다시 역사적이 5번째 기절을 기록하고 있었다.



“네놈은 바보냐? 어떻게 단 한 번도 반격을 못하는 거냐.”

이전에 머물던 마을을 떠나 노숙을 다시 시작한 지도 벌써 일주일째. 

오늘도 어김없이 허리에 기다란 검상을 입고 돌아돈 나를 보며 엘뤼엔은 기막힌 얼굴로 혀를 쯧쯧 찼다. 

여기서 ‘그건 내가 묻고 싶소!’라고 말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겠지? 

꽤 소질이 있다는 평가를 들었음에도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으니, 내가 생각해도 정말 답답한 심정뿐이었다.

내 표정이 우울해지자 엘뤼엔은 더 화가난 얼굴이 되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다치면 알아서 치료해주는 신관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냐? 

그러니까 그따위 검은 왜 배우겠다고 해서 이 난리인지. 내일도 이런 식이면 치료고 뭐고 없다. 알아서 살아남아!”

“그래도 오늘은 세 번이나 막았다, 뭐.”

“글쎄, 막지만 말고 반격을 하란 말이다, 

반격을! 똑같은 패턴으로 공격하는데 왜 항상 지는 건지 도무지 내 머리론 이해할 수가 없군. 

네놈은 생각이란 걸 하고 사는 거냐?”

“생각이야 하지. 그래도 몸이 안 따라주는 걸 어떻해? 공격할 장소가 보여도 손이 안 나간단 말이야.”

“그럼 때려 치든가!”

이놈의 아버지는 걸핏하면 때려 치라는 말만 한다. 

하나뿐인 아들내미가 다쳐서 돌아오는 게 불쌍하지도 않은 건가? 

그나마 목적지인 수도가 코앞이라 훈련이 막바지에 이르렀으니 망정이지, 

그것마저도 아니었다면 진즉에 계약을 해지하려 했을 것이다. 그 만큼 내가 자주 다쳤다는 뜻이다.

“흐음, 빈틈이 보이는데 손이 안 나간다고? 좀 더 자세하게 말해봐.”

훈련이 끝나면 트로웰은 그나마 친절한 성격으로 돌아와서 이것저것 질문을 건네곤 했다. 

그리고 내가 그것에 답하면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지거나 흥미진진한 얼굴을 하는 것이다. 

오늘도 내가 느꼈던 바에 대해 간단히 말하자, 

그는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눈이 되어 더 자세히 설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니까… 칼이 휘둘러지는 방향이나, 네가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보이거든? 

그런데 막상 빈틈을 발견하고 공격하려고 하면 손이 딱 멈춰서 굳어버리는 거야. 

팔찌 무게엔 대충 익숙해진 것 같은데 이상해. 앗! 혹시 그 틈에 무게수치를 높였던 거 아니야?”

“…당장 최대수치로 올려줄까??”

“아하하… 시, 실언이었습니다, 형님.”

순식간에 비굴모드로 돌아온 나에게 그는 알면 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갑자기 예고도 없이 내 얼굴을 향해 홱! 주먹을 내뻗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그의 공격을 피했다. 

전부 그동안 받아온 훈련의 성과였다.

“트로웰?”

“흐음, 반사신경은 문제없군. 좋아! 방금 내가 한 것처럼 이번엔 네가 나한테 공격해봐.”

“에? 공격을?”

“그래. 제대로 하지 않으면 벌칙 있을 줄 알아.”

그 말에 나는 잽싸게 주먹을 말아 쥔 다음, 

느긋하게 앉아 팔짱을 끼고 있는 트로웰을 향해 곧바로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쭈욱 내뻗은 팔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는데도 그는 전혀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위험……!!’

물론 정령왕인 그가 이 정도 주먹에 맞고 눈 하나 깜짝할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무의식 중에 손을 멈칫하고 말았다.

그 잠깐의 망설임의 대가는 언제나처럼 끔찍한 수법으로 되돌아왔다. 

못마땅한 표정이 된 트로웰이 내 팔을 잡고 그대로 엎어치기를 했던 것이다.

퍼억! 쿠우우우웅!

“크윽! 아야야야!”

“제대로 하라고 말했을 텐데? 그렇게 벌칙이 그리웠어?”

“하지만 네가 피하지 않으니까…….”

“멍청이! 그렇다고 공격을 멈추면 어떡해! 지금 이 순간은 적이라고 생각했어야지! 자, 다시 해봐.”

“으응.”

시무룩하게 대답한 나는 이번에야말로 성공하기 위해 단단히 마음의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이어지는 결과는 역시나 실패. 그 것도 방금 전과 똑같은 상황에서의 실수였다. 

그 뒤로도 같은 일이 몇 번 반복되자 트로웰은 찌푸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치기 전에 꼭 망설이는군. 배울 의사가 있긴 한거야? 아니면 그 정도에 맞고 쓰러질 정도로 내가 약해 보여?”

“윽! 미안…….”

“뭐, 어쨌든 넌 싸울 상대에 대한 적의가 너무 부족해. 

대련 결과가 형편없는 게 오히려 당연할 정도야. 애초에 방어 외의 다른 것은 시도해볼 생각도 없었지?”

그의 말에 나는 곰곰이 지난날의 내 성적을 떠올려 보았다.

 이제껏 막는 것에만 급급해서 공격할 틈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처음부터 그럴 의사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새삼 누군가를 공격한 행위에 거부감이라도 있는 걸까? 

찝찝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나에게 트로웰은 냉정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방어만으론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없어. 그 점 명심해둬.”

“으응, 알았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트로웰은 한결 풀어진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평소였다면 이쯤에서 끝나지 않았겠지만, 이미 날이 저물어가는 무렵이라 더 이상의 훈련은 힘들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지금까지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엘뤼엔이 지나가는 말투로 툭 쏘아붙였다.

“뭐하는 거냐? 너도 앉아라. 어차피 오늘도 여기서 밤을 새야할 것 같으니까.”

“응. 아~ 배고프다. 아참! 식량이 얼마나 남았지?”

“빵과 과일 종류라면 거의 떨어졌다. 육포라면 조금 남았지만. 한 5개 정도?”

“엑? 벌써? 그럼 난 내일부터 뭐 먹고 살아?”

“그야 내 알 바 아니지. 정 배고프면 멧돼지라도 사냥하든가. 검술은 배워서 스프끓여 먹을 생각이냐?”

“헉! 엘뤼엔, 너무 냉정해.”

“시끄러. 평소에 조절해서 먹지 못한 네 탓이다. 더 이상 귀찮게 굴지마.”

과한 체력소비를 하면 당연히 배가 고프기 마련이고, 

그에 따른 식량 섭취는 필수다! 그걸 가지고 저렇게 구박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이럴 줄 알았으면 마을에 들렀을 때 음식을 좀 더 많이 사두는 건데 그랬다.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중 요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겠지만.

음식의 섭취가 필요하지 않은 두 정령왕은 물론이고, 

나 역시 이곳 세상 음식을 요리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히 사게 되는 것은 빵과 과일처럼 부피가 큰 것들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담을 수 있는 숫자가 한정되고, 지금처럼 여행 중에 식량이 부족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아공간의 마법이 걸려있는 가방이 있다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지만, 

이곳에서도 그 마법은 꽤나 고급축에 속했기에 지방의 마을에서는 구할 방도가 없었다. 

지금은 그저 경량화 마법으로 감지덕지하는 처지랄까. 

주위에 아는 드래곤에게 부탁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트로웰이나 엘뤼엔이나 그 부분에 대해선 일절 방관하는 추세였고 말이다.

“하아… 라피스 녀석, 이럴 땐 정말 편했는데…….”

말로는 연신 귀찮다고 했지만 그의 합류가 이사나에게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다는 건 사실이다.

 앞서 말한 아공간의 마법은 물론이고 폴리모프 마법이나, 

보온 마법, 텔레포트 등 그가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던 일이 수두룩하지 않았던가.

그것을 생각하고 나자 나는 새삼 우울한 기분이 들어 살작 입술을 깨물었다.

‘만나게 되면 제일 먼저 고마웠다는 말부터 해야지. 

그리고 미안하다는 사과도… 휴우! 그런다고 지금 느끼는 이 죄책감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지금쯤 혹시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에고소드라도 되어 있지는않을까.

문득 조심스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얼마 전에 안 사실인데, 에고 소드가 되면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말을 할 순 있어도 

자신이 살아 있었을 때의 기억이 전부 지워진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이계, 혹은 미래와 과거에 속한 존재의 개입으로 차원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한 자연스러운 절차였지만,

 라피스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타인의 손에 조종당하는 라피스라니. 

그 자존심 강한 녀석이 훗날 얼마나 분해하겠는가. 

그 모든 것이 전부 내 탓이 된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미움받고 싶지 않다… 겠지.’

친했던 사람일수록 내게서 등을 돌렸을 때 받는 상처는 크다. 

나는 결국 나 자신을 위해 라피스의 영혼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가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이 싫어서.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역시 난 이기적인 녀석이야.”

나도 모르게 한탄하듯 중얼거린 소리에 옆에 있던 엘뤼엔이 무슨 생뚱맞은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소리냐? 인간은 원래 전부 이기적이야.”

“으음. 그런가?”

“맞아. 타인을 위해 산다는 것도 결국 자기만족인 경우가 허다하지. 

이기적이라고 해서 꼭 나쁘다고 볼 수는 없어. 누구나 다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한 거니까.

 그리고 그 때문에 이득을 보는 쪽 역시 존재하잖아?”

가볍게 받아친 이는 다름 아닌 트로웰이었다. 

인간이라고 하면 무조건 나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의 반응이 나오자 나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트로웰은 인간들이 이기적인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다는 소리야?”

“거부감? 그런 거 없어. 그냥 재수 없을 뿐이지.”

“…쿨럭!”

그럼 그렇지. 웬일로 좋게 대답하나 했다.

생각해보면 미래의 그도 인간들에게 그다지 호의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처럼 직접적으로 반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을 뿐. 

뭐, 아예 관심조차 없는 엘뤼엔에 비하면 오히려 가능성이 있는 것일지도.

게다가 미네르바에 대한 질투까지 섞여 있으니 그것만 일단락되어도 대부분이 해결될 문제였다. 

물론 그 전에 일어날 사건들이 잘 수습돼야 할 테지만.

‘아, 그러고 보니 미네르바가 그 계약자에게 배신당하는 게 언제지? 

트로웰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왜 아무 말 없이 방관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그의 충고에도 개의치 않을 만큼, 미네르바가 그 남자에게 깊이 빠져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트로웰이라면 굳이 설득하려 하기보단 묵묵히 분란거리를 제거하려는 쪽을 택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퍼뜩 떠오르는 의문에 얼굴을 굳혔다. 

혹시 그가 인간을 말살할 계획을 굳이 1년 후로 정한 것이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즉, 앞으로 1년 후에 미네르바가 계약자에게 배신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담 지금 건드리지 않는 것은 아직 미네르바가 인간들에게 호의적이기 때문에? 

그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다는 건가? 휴우! 그럼 누구부터 설득해야 하는 거지? 무지 복잡하네.’

이래서 남의 연애사에는 끼어들지 말라는 말이 나오는가 보다. 

하필이면 가장 감정이 엇갈리고 있을 시기에 떨어져서 이런 고생을 떠맡아야 한단 말인가? 

나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몰래 트로웰의 옆모습을 흘겨보았다.

‘이 빚은 4천 년 후에 꼭 받는다! 이자까지 전부 계산할 거야!’

물론 이것은 엘뤼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장부라도 하나 만들어서 적어놔야 하는 게 아닌가 모르겠다. 

앞으로도 계산해야 할 빚이 무궁무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말 받아낼 수 있을지 그 여부는 먼 나중의 문제였지만.



“어? 눈이다!”

수도의 외성 앞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던 어느 날, 

나는 하늘에서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들을 발견하고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처음엔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던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크게 불어나서 거의 쏟아진다 싶을 정도로 내리기 시작했다.

 이 세계로 온 후 맞이하는 첫눈이었다.

“헤에, 첫눈치곤 꽤 많이 내리네. 15cm는 가볍게 쌓이겠는 걸.”

어린 시절 들었던, 겨울에 관련된 동화들 때문일까.

 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면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것이 여름에 내리는 비와 같은 성질인 것을 알면서도, 더 신비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아마 내리고 나면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것이 아름다운 탓이겠지만.

잠시 서서 그 모습을 감상하던 나는 곧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쿡쿡거렸다 .

눈 한 송이 한 송이마다 올라앉아 있는 나이아스들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였다. 

녀석들의 뒤에는 바람의 실프들이 하나씩 달라붙어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자아!! 마음껏 달리자앗~~!!

-까아악! 좀 살살 밀어~ 빠른 거 싫단 말이야!

-꺄하하하하하!

아무 고민 없이 무사태평한 존재라면 역시 하급 정령들이 아닐까.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곤란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령들이 뛰어놀면 놀수록 점점 폭설로 변해가는 눈 때문에 방금 전까지 해왔던 일을 그만둬야 할 처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오늘 저녁은 굶어야 한다는 건가…….”

나는 비통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간당간당하던 식량은 결국 이틀째가 되자 완전히 바닥이 나고 말았다 .

그러자 트로웰과 엘뤼엔은 훈련이란 명목으로 내게 알아서 음식을 구해오라고 지시했다.

이 얼마나 비정한 가족인가!

그때부터 나는 혼자서 먹을 만한 것들을 찾아다니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를 반복하고 있었다. 

운 좋으면 간혹 토끼라도 사냥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빈손으로 끝마치는 일이 허다했다. 

그런데 이제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으니 이 작업(?)이 꽤나 번거로워 질 것이라는 건 불을 보듯 빤한 일. 

나는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배고파…….”

오늘처럼 팔다리에 매달린 장신구들이 무겁게 느껴진 적이 없는 것 같다 .하

루 종일 돌아다녀서 지친 몸에 배고픔까지 겹치니 뭔가 하고자 할 의욕까지 전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쉬운 대로 물이라도 마셔둘 요량으로 그 자리에서 나이아스 한 마리를 소환했다.

“나이아스 소환!”

파앗!

그러자 주위에는 한창 뛰놀고 있던 나이아스 중 한 마리가 툭! 하고 내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갑작스런 소환에 놀랐는지 녀석은 얼음이 잔뜩 엉킨 머리카락을 부르르 털며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금세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와아! 이쁜 인간이다. 엘퀴네스님의 계약자잖아?

“풋! 안녕? 만나서 반가워. 나이아스.”

-어? 내가 말하는 게 들려?

“응. 똑똑히 들려.”

-와아, 정말이야? 내 목소리가 들려? 얘들아! 이 인간이 내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대!!

그 말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주변에 있던 나이아스들과 실프들이 모두 내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것도 들고 있던 눈덩이까지 고스란히 가지고 온 탓에, 

내 주위는 다른 곳보다 훨씬 더 많은 바람과 눈덩이들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그것들의 영향권 안에서 무사했다. 

실프들이 알아서 내가 피해를 입지 않게 바람의 방향을 조절한 탓이었다. 마치 태풍의 눈 안에라도 들어온 느낌이었다.

몰려온 정령들은 곧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저마다 한마디 씩 떠들기 시작했다.

-와아! 엘퀴네스님의 계약자다!

-왕의 인간 계약자는 처음 봐!

-안 추워? 바람을 멈춰줄까?

-여기서 혼자 뭐해?

그냥 잠깐 물만 마시려던 것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나는 호기심에 가득 차 또랑또랑 눈을 빛내는 정령들을 보며 등 뒤로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그, 그냥 잠깐 쉬는 중이었는데.”

-와아~! 정말 대답했다!

-우리가 보이는 거야?

-아! 나 얼마전에 들었어. 엘퀴네스님의 계약자가 자연체의 정령들을 볼 수 있다고!

-헤에~! 정말? 무지 신기하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우리한테 말 안 걸었어?

그야 이렇게 수다가 시작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말을 삼키며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행히 별로 그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정령들은 가볍게 다음 대화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런 곳에 혼자 있으면 안 돼. 얼어 죽을지도 몰라.

-실프! 얼어 죽는 게 뭐야?

-음… 몸이 꽁꽁 얼어서 죽는 거라던데?

-인간들은 그런 걸로도 죽어?

-헤에! 무지 약하구나.

하급정령에게 약하다는 소리를 듣다니, 볼 장 다 본 셈인가.

정령들은 어느 새 동정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얼어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걱정 마! 우리가 얼어 죽지 않게 해줄게!

-응, 응! 보호해줄게!

-우리에게 맡겨!

“아아… 그, 그래. 고맙다.”

이걸 정말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나는 허탈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그 고생을 하며 배운 검술과 험난한 체력단련이 한순간에 전부 수포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바로 그때, 나는 근처에서 느껴지는 작은 인기척을 깨닫고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누군가가 내가 있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부스럭!

“……!!”

황급히 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봤지만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눈에 덮인 나무밖에 없었다. 

멧돼지일까? 아니면 몬스터? 나는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앉아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음 순간, 위험을 경고하는 정령들의 목소리와 무언가가 내게 쏘아져 들어오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위험해! 피해!!

쐐애애액!!

“……!!”

훈련 덕분인지 나는 흩날리는 눈 속에서도 내게 날아오는 것의 정체를 정확하게 꿰뚫어보았다. 

황당하게도 그것은 검지만한 길이의 가느다란 바늘이었다.

‘이, 이게 뭐야?’

하지만 내가 그것에 대응하려 했을 땐, 이미 바늘은 내 목의 피부를 파고든 상태였다. 

평소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지친 덕에 행동이 굼뜬 상태였다.

“…어?”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 바늘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따끔한 감촉이 느껴졌다 싶은 순간, 갑자기 온몸이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이게 대체 어떻게 된거지?’

나는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를 느끼며, 몽롱해지는 의식속에서 간신히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그 다음의 일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기절한 것이라 조심스럽게 짐작하고 있을 뿐.



쿠마가 ‘그것’을 발견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때 아닌 폭설로 서둘러 사냥감을 찾으러 나온 곳에서, 그는 정말로 뜻밖의 대박을 발견하고 말았다.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무수한 눈의 폭풍 안에 갇혀 있었다. 

잘못 본 것이 아니라 유달리 ‘그것’의 주위에만 눈이 폭풍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이 기이한 현상을 휘둥그런 눈으로 쳐다보던 쿠마는, 곧 ‘그것’의 손안에 들린 작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바로 물의 하급 정령인 나이아스였던 것이다! 쿠마는 단번에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엘프다!”

이런 눈보라가 몰아치는 숲속에서 정령을 데리고 있을 만한 존재라면 엘프들밖에 없었다.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근처에 있던 동료들에게 손짓했다.

“어이! 다들 이리 와봐! 엘프야! 엘프가 있어!!”

“뭐라고?”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동료들은 모두 놀란 표정으로 쿠마의 곁에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하나같이 열띤 감탄을 내뱉었다.

“운이 좋군! 이런 곳에서 엘프를 발견하다니!”

“아직 어린 것 같지? 성인식을 치르지도 않은 것 같아. 300살 정도 되어 보이는데?”

“이게 웬 횡재냐!”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엘프를 보통의 인간들이 보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웠다. 

인간들과 교류하는 엘프 마을에서도 어린 엘프들은 철저히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하게 될 줄이야!

쿠마와 동료들은 이 갑작스레 찾아온 행운에 사이좋게 환호했다. 

단순히 엘프를 본 것이 신기해서가 아니다. 

바로 그들의 직업이 엘프를 사로잡아 노예시장에 팔아넘기는 상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곧 뿌듯한 표정으로, 늘 해와서 이제는 몸에 배어버린 작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바로 엘프를 상처 없이 무사히 사로잡는 일이었다. 

“자, 자, 엘프들은 청각이 예민하니까 접근할 때 조심해야 해. 쿠마, 자네가 수면제가 발린 침을 날리도록 하지.”

“헤헤, 맡겨둬!”

기다란 퉁소를 이용해 수면제가 발라진 바늘을 날리는 것은 쿠마에겐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고 눈이 오긴 했지만, 

워낙 어릴 때부터 연습했던 것이라 문제없었다. 쿠마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한 발짝 내딛었다.

그때, 나이아스와 놀고 있던 엘프가 이상한 것을 느꼈는지, 불안한 표정으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이크!’

마음이 조급해진 쿠마는 얼른 퉁소에 바늘을 집어넣고 강하게 뿜어냈다. 

다행히 그의 시도는 무사히 먹혀들어, 엘프는 별다른 반항을 하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아싸! 잡았다!!”

“수고했어, 쿠마!”

“역시 멋진 솜씨였어!”

“헤헤! 이 정도 쯤이야.”

이어지는 칭찬에 쑥스럽게 화답한 쿠마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포획한 엘프를 마차로 옮기기 위해 다가갔다. 

하지만 그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틀림없이 엘프라고 생각했던 아이의 귀가 동그스름한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엑? 이게 뭐야! 인간이었잖아?”

“뭐어? 인간이었어?”

“쳇! 그럼 그렇지. 이런 숲에 어린 엘프가 올 리가…….”

순식간에 실망 어린 표정이 된 그들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물론 인간도 납치해서 팔긴 하지만, 대부분 이 또래의 노예를 찾는 고객은 여자아이나,

 남자일 경우엔 일꾼으로 쓸 만한 듬직한 덩치를 원했다. 

그런데 눈앞에 쓰러진 아이는 남자 옷을 입고 있는데 몸이 가늘고 마른 편이었던 것이다.

“뭐야, 쿠마! 나는 네가 엘프라고 해서 그런 줄 알았잖아.”

“에구. 미안, 미안. 난 이런 눈 속에서 정령을 가지고 있기에 당연히 엘프일 줄 알고…….”

“뭐? 그럼 이 꼬마가 정령사란 말이야? 쯧! 그럼 탈출할 확률도 높아지잖아. 이거 누가 사가기나 하려나?”

그래도 일단 사로잡은 사냥감을 그냥 놔줄 수도 없고 해서, 

쿠마는 쩝쩝 입맛을 다시며 쓰러진 아이를 확인했다. 

예상가를 계산해봐야 하니 아쉬운 대로 대충 생김새나 확인해볼 참이었다. 

옆으로 누워 있던 몸을 똑바로 돌리자 자연히 머리카락 속에 가려져 있던 아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순간, 있는 대로 투덜거리고 있던 일행들의 불평이 딱 멈추고 말았다.

“…세상에! 내가 지금 헛것을 보는 건가?”

“맙소사! 이거 완전 거물이었잖아.”

생각했던 대로 사냥감은 아직 앳된 소년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소년의 외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것이다. 

벌꿀처럼 달콤한 허니 블론드 머리카락에 눈처럼 새하얀 피부.

 마치 조각같이 선명한 이목구비라니!! 이 정도의 미모는 엘프들 중에서도 흔하지 않았다. 

어느새 그들의 입가엔 다시금 환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역시 쿠마, 자네 눈은 틀리지 않았어.”

“간만의 건수로군. 노예시장에서 우리가 단연 돋보이겠는 걸?”

서로를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짓던 일행은 곧 기절한 소년을 들쳐 업었다. 

혹시나 일행이 있을지 모르니 얼른 마차로 돌아가 이 자리를 떠날 생각이었다.

“어이쿠! 뭐가 이렇게 무거워?”

“킥킥! 엄살은. 이렇게 마른 몸이 뭐가 무겁다고.”

“아니야. 굉장하다고. 혹시 뭐 배낭이라도 메고 있는 거 아니야?”

의아한 표정으로 소년을 살펴 본 일행은 곧 그의 손과 발에 금색의 장신구가 달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팔찌와 발찌였지만, 혹시나 싶은 마음에 그들은 조심스럽게 소년의 손에서 팔찌를 빼어냈다. 

하지만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던 팔찌의 무게는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팔찌를 빼어 낸 남자가 잠시도 견디지 못하고 떨어트리자, 

그것은 곧 육중한 소리와 함께 이미 상당히 쌓인 눈 속에 파묻혔다.

쿠웅!

“헉! 뭐, 뭐야! 이런 걸 왜 달고 있는 거지?”

“굉장한 소리군. 체력훈련용인가? 원래 정령사들이 몸이 좀 약하잖아.”

“그놈의 체력훈련 한번 험하게도 하네. 

어쩐지 아까 일어날 때 좀 비틀거린다 싶었지. 마법물품 같은데… 

이런 건 그리 비싸게 팔지도 못하겠는 걸? 어떻게 할까?”

“추적마법처럼 귀찮은 게 걸려 있을 수도 있으니 다 버려두고 가자.”

마법 아이템이 워낙 흔한 시대이니 만큼, 무겁기만 한 장신구는 그리 탐나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둘러 소년에게 착용된 나머지 것들도 풀어냈다. 

 그들의 행동이 오히려 그의 무력을 높이게 될 것이라곤 전혀 생각지 못한 채.


“늦는군.”

엘퀴네스는 찌푸린 표정으로 이미 상당히 저물어버린 해를 바라보았다. 

사냥을 하러 나간 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엘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눈 때문에 지체하는 걸까. 쯧 하고 혀를 찬 그는 옆에서 시간을 재며 즐거워하고 있는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재미 들려버린 것 같군. 인간을 싫어하는 것 아니었냐?”

“응? 아아~ 반응이 귀엽잖아. 저런 인간이라면 하나쯤은 키워도 괜찮을 것 같은데.”

“…남의 계약자를 멋대로 애완동물 취급하지 마라.”

“이런 실례. 그냥 내 방식의 칭찬이었어.”

“흥!”

겉으론 생글거리는 얼굴이었지만 트로웰은 속으로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지금은 저리 얌전해 보여도 그의 본 성격을 아는 이들은 감히 엘퀴네스에게 시비를 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단순히 괴팍하다는 것을 넘어서 더럽다는 말로도 표현이 안 되는 성질머리를 누가 감당하겠는가.

얼마 전엔 자시의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 하나로 불의 정령왕인 

이프리트의 영역을 싸그리 날려버린 적도 있으니  말 다한 셈이다. 

그 때문에 이번 중간계의 겨울이 예전보다 빨리 찾아왔다는 것은 이미 

정령계에선 공공연하게 알려진 비밀이었다(그래서 현재 이프리트는 불의 영역을 복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지만 그런 엘퀴네스도 자신에게 ‘속한’ 존재에게는 어지간하면 화를 내지 않았다. 

그의 휘하에 있는 물의 정령들과 계약자가 바로 그에 해당했다. 

유달리 엘에게 관대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이리라.

‘그래도 설마 인간 계약자까지 너그럽게 봐줄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자신이 인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증오라면, 

엘퀴네스는 거의 혐오에 가까웠다. 공공연히 벌레 취급하며 대놓고 무시할 정도이니 말이다. 

하긴, 자연을 오염시키는 가장 대표적인 종족을 그 어느 정령왕이 좋게 봐주겠는가!

그런 면에서 보자면 아무리 계약자라고 해도,

 엘퀴네스가 인간인 엘에게 너그러운 것은 상당히 의외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 트로웰은 그 이유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트로웰을 좋아해. 너는 나의 가족이야. 

네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낯선 장소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어. 

이곳에서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준 것도 네가 처음, 

나를 일으켜 세워준 것도 네가 처음.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가족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도… 네가 처음이야.>

“가족이라…….”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를 마주 대하기가 곤란하다고 느낀 것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 앞에선 내색하지 않았지만 당시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트로웰은 가슴 한켠이 뭉클해졌다. 

빤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흔들린 것은, 그의 진심이 무엇인지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일까.

적어도 이제까지 누구도 자신에게 가족이라고 말해준 적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 그 말이 특별하게 들렸던 걸지도 모른다. 

엘퀴네스 역시 이와 크게 다른 심정은 아닐 것이다. 

일단 종족을 불문하고 그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서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었던가! 

‘으음, 앞으로도 이런 식이라면 조금 위험한걸. 결정을 번복하는 건 꼴사납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하지만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부터가 이미 번복할 의사가 있다는 증거.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요 근래 더욱 심하게 괴롭히고 있지만, 이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엘에겐 정령왕의 마음을 뒤흔드는 묘한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

왠지 즐거워지는 기분에 트로웰은 혼자서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정말 늦는 걸? 

자연체의 정령들을 볼 수 있으니 눈 속에서 조난을 당하진 않을 텐데. 

설마 멧돼지와 싸우다 기절한 건 아니겠지?”

“정말 여러 가지로 귀찮게 하는군. 할 수 없지.”

트로웰의 말에 나직이 중얼거린 엘퀴네스는 곧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감고 주위의 기운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트로웰은 단번에 그가 하려는 행동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정령왕의 시야를 열어 주위에 퍼져 있는 모든 나이아스의 기억을 더듬으려는 것이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고 있으니 그가 엘의 위치를 발견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예상대로 엘퀴네스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입을 열었다.

“…찾았다.”

하지만 쉽게 발견한 것치곤 그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혹시 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유감스럽게도 트로웰의 예감은 적중했다. 

“노예 사냥꾼에게 걸렸군. 이렇게 부주의해서야…….”

“뭐? 노예 사냥꾼?”

“그래. 아주 깔끔하게 납치됐다. 

대체 그동안 체력훈련은 왜 했으며, 배운 검술은 다 어디로 흘려버린 건지 모르겠군.”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 만 했다. 

아마도 하루 종일 사냥감을 찾아다니다 지쳐서 쉬고 있을 때쯤 기습을 당했겠지.

금일의 사태는 트로웰에게도 약간(?)의 책임이 있었다. 

아직 누구에게도 말해준 적은 없지만, 사실 그가 엘에게 준 장신구에는 

착용자의 체력이 떨어지면 무게가 더욱 강해지는 마법이 옵션으로 걸려 있었던 것이다. 

아마 기습을 눈치 채고 대항했더라도, 팔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을 테니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체력이 떨어지기 전에 모든 것을 해결하는 습관을 들이게 하려던 것이 도리어 발목을 잡을 줄이야…….

트로웰은 멋쩍은 얼굴로 입맛을 다시며, 옆에서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엘퀴네스를 향해 물었다.

“지금부턴 어쩔 거지? 구하러 갈 건가?”

“글쎄… 네 생각은 어때? 녀석이 자력으로 탈출이 가능하리라고 보나?”

“아마도 그럴걸.”

“‘아마도’라니? 너치곤 꽤 애매모호한 답변이군.”

“어쩔 수 없어. 전부 엘이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거든. 

엘퀴네스, 너도 봤겠지만 녀석은 방어는 잘해도 공격할 때 머뭇거리는 습관이 있어. 다수가 몰리면 힘들지도 몰라.”

“호오, 그건 그렇군. 그래서 구하러 가자는 거냐?”

그 말에 트로웰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재밌으니까 그냥 내버려 둬보자.”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안 그래도 어떻게 하면 더 괴롭힐 수 있을까 궁리하는 트로웰이 이런 기회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엘뤼엔 역시 귀찮은 일을 사서 하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자연히 두 정령왕은 엘이 알아서 살아나오기를 기도해 주는 걸로 결론지었다(정말 기도할지는 의문이지만.).

“뭐, 이것도 다 훈련의 연장이지. 혹시 또 모르잖아? 의외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의외의 모습?”

거기서 달라질 게 뭐가 있다고?

미묘하게 찌푸려진 엘퀴네스의 표정은 바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힘든 수업을 꽤 잘 버티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동안 그가 보아온 엘은 여전히 트로웰에게 구박을 받는 부실한 제자였던 것이다.

그런 엘에게서 달라진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건, 4살짜리 꼬맹이에게 어른 흉내를 내라는 것만큼이나 억지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에 관한 트로웰의 생각은 달랐다.

“대련과 실전은 다르잖아? 인간은 목숨이 위태하다고 느끼면 좀 더 적극적이 되는 경향이 있거든.”

“…네 훈련도 충분히 실전이나 마찬가지였다만? 그동안 날 믿고 마음대로 칼을 휘두른 거 아니었나?”

“어라, 눈치챘어?”

“항상 대놓고 급소만 노리는 주제에 잘도 능청스럽게 말하는군.”

엘퀴네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것도 너무 빤한 급소(이를 테면 심장 같은곳)만 노렸기에, 

엘 또한 그가 사정 봐주지 않는 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즉, 단순한 대련이라서 기강이 해이해지는 일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다는 소리다.

그런 주제에 대련과 실전이 다르다고?

황당한 엘퀴네스의 눈초리에 트로웰은 스스로도 찔렸는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에이~ 그래도 난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실제로 목숨에 위협을 받는 상황과는 엄연히 다르지.”

“글쎄. 과연 녀석도 그렇게 생각할 지 의문이군.”

“흠흠! 아, 그래! 어쩌면 내가 어려워서 반격을 제대로 못했던 걸 수도 있잖아? 

인간들은 만만하니까 좀 더 마음껏 실력발휘를 할 수 있을지도 몰라.”

“… 녀석이 어려워한다고? 누굴?”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되묻는 말에, 

이번에는 트로웰도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엘은 믿는 구석도 없으면서 당당하게 할 말 다하는 인간이 아니었던가. 

오히려 노예시장에서 대놓고 대들었다가 상인들에게 몰매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과연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까?

그제야 슬그머니 솟아오르는 불안감에 두 정령왕은 복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깨어난 것은 덜컹거리는 바닥의 진동 때문이었다. 

왠지 묘하게 몸이 불편해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뜨자, 온통 컴컴하기만 한 주위가 제일 먼저 나를 반겼다.

여기가 어디지?

잠시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 나는 이곳이 생판 처음 보는 낯선 장소라는 것을 깨닫고, 

문득 의식을 잃기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웬 바늘이 날아왔었는데… 그러고 나서 잠들었나? 헉! 설마 나… 지금 납치된 겨?’

그러고 보니 내 손과 발엔 짐승을 묶을 때나 쓰는 수갑에 사슬과 비슷한 것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몸이 불편한 것은 이것 때문이었군. 그나마 움직임에 크게 제약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잠시 황당한 표정으로 수갑을 노려본 나는 차분히 현 상황에 대해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사냥을 중단하고 쉬고 있는 나를 누군가가 발견했다.

 그런데 다짜고짜 마취바늘을 날려서 잡았다? 그게 말이 돼? 

내가 무슨 몬스터도 아니고 말이야. 이렇게 온몸을 죄다 제압해놓다니…….’

하지만 거추장스러운 것만 빼면 묶여 있는 것치고는 오히려 가벼운 느낌이었다.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몸을 살펴본 나는, 

훈련 때문에 착용하고 있던 팔찌와 발찌들이 어느새 사라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나를 옮기는 과정에 무거워서 빼낸 모양이다.

덜컹덜컹.

끊임없이 흔들리는 바닥은, 이것이 고정된 천막이 아닌 움직이는 마차 안 임을 뜻했다. 

검은 천으로 잔뜩 가려놓은 탓에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 분간할 길이 없었지만, 

적어도 한밤중에 이동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갑자기 확 걷혀지는 천 밖에서 눈부신 빛이 들어오는 바람에 얼굴을 잔뜩 찡그려야 했다.

“윽……!”

“어? 깼네? 어이, 이봐들! 드디어 일어났어. 저 눈동자 색 좀 봐!”

“헤에~ 선명한 초록색이군. 저렇게 깨끗한 색은 처음 봐.”

시끄럽게 소리친 사람들은 어느새 마차를 멈추고 내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제야 간신히 빛에 적응한 나는 똑바로 눈을 뜬 다음,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구경하고 있는 3명의 남자들을 마주보았다.

 어째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더욱 감탄하는 듯한?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데? 너무 놀란 거 아니야?”

“히야! 정말 보면 볼수록 거물이군. 이건 따로 경매에 넘길 필요도 없겠어.”

“귀족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광경이 눈앞에 선하군. 

킥킥! 어이, 꼬마! 뭐라고 말이라도 해봐라. 목소리 좀 들어보자.”

“…….”

멀쩡한 인간을 납치한 주제에 너무 당당한 거 아니야? 

게다가 떠드는 대화를 들어보니 이건 사람을 마치 물건으로 취급하는 것 같은 말투다. 

기분이 무척 나빠졌지만, 그래도 궁금한 건 알아야 했기에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누구세요?”

그러나 내 질문은 무참히 씹히고 말았으니…….

“오오! 말했다!!”

“목소리도 최고야! 아직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것 같군!”

“돈 많은 변태 귀족에게 넘기기는 너무 아까운데. 정말 인간이 맞기는 한 거야?”

뭣이라? 돈 많은 변태한테 뭘 넘겨?

왠지 오가는 대화가 점점 심상치 않게 흘러간다고 느낀 나는 다시 한 번 참을성 있게 질문했다.

“아저씨들은 누구세요? 여긴 어디죠?”

“흐흐흐. 궁금하냐?”

끄덕끄덕.

내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씨익 의미심장한 미소를 건넸다. 

그러더니 별안간 직구를 날려 내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드는 만행을 저지르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노예상인들이다. 그리고 지금 레파르라는 도시로 이동 중이지.”

“…네?”

뭔 상인이라고? 설마 잘못 들었나 싶어 멍하게 되묻자 그들은 유쾌해서 못 견디겠다는 얼굴로 실실거리며 대답했다. 

“큭큭! 상황파악이 아직 안 되나 본데, 넌 지금 우리에게 잡힌 거란다. 앞으로 있을 노예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팔릴 거야.”

“도망치려고 해도 소용없어. 우린 이미 네가 정령사라는 것도 알고 있거든. 

지금 팔에 채워진 수갑은 보기에도 평범해 보여도 사실은 마나를 차단하는 마법 아이템이지.”

“아무쪼록 우리에게 잡혀줘서 고맙다. 네 덕분에 이번 노예시장에선 우리가 가장 주목을 끌 것 같아.”

“자, 잠깐만요! 누구 맘대로 날 팔아요?”

“그야 우리 마음대로지.”

남자들은 마치 짜고 있던 것처럼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지금 나랑 장난하나? 그냥 납치해다 팔면 그만이라니! 이놈의 나라는 인권이라는 것도 없는 거야?

잠깐 자고 일어난 것뿐인데, 펼쳐지는 세계가 완전히 달라지다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이보다 황당하진 않을 것이다. 

‘잠깐! 아까 수갑이 마나를 차단한다고 했었지?’

혹시나 싶은 마음에 나는 그 자리에서 즉시 나이아스의 소환을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몸 전체를 감싼 묘한 기류에 막혀 번번이 실패하는 것이 아닌가.

 하급 정령이 무리라니, 중급과 상급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설마 정말로 정령술을 못 쓰게 된 건가?

내 표정에 서린 당혹감을 읽었는지 자신을 노예상인이라 밝힌 남자들은 음흉하게 웃으며 눈빛을 번뜩였다. 

이것으로 내 무력 수단을 완전히 차단했다고 믿는 듯 얼굴 가득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그러게 소용없다니까 그러네. 그 수갑은 유니콘들도 가볍게 제압하는 거라고. 

도망칠 생각은 그만두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좋을 거다.”

“어째서 이런 짓을…….”

“그야 돈을 벌 수 있으니까. 그냥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라. 

그래도 넌 다른 녀석들에 비해선 나은 편일 거야. 귀족 집에 팔려 가게 될 테니까.”

그러는 자기들이 한 번 팔려가 보라지. 저런 말이 입에서 나오나!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문 나는 지금 내가 탄 마차 외에도 같은 종류의 마차들이 여러 개 더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안에는 나처럼 손과 발에 수갑을 착용한 엘프들과 어린 아이들이 주욱 앉아, 

또 다른 노예상인의 감시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절망과 탄식으로 지쳐있는 얼굴들을 보니 몸속에 흐르는 피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기분이다.

내 시선이 그들에게 향한 것을 본 노예 상인들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굉장하지? 전부 이번 사냥에서 건진 물건들이다. 

이번 노예시장은 볼만 할 거야. 좋은 물건이 꽤 많이 들어왔거든. 흐흐!”

“…인간 말종이로군. 당신들 전부 쓰레기인 거 알아?”

“킥! 이제야 성질이 나오는 건가? 뭐,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봐주마. 

어차피 성격 나쁜 귀족님들 중에선 고분고분한 것보단 앙탈을 좋아하는 분들이 꽤 많거든.”

“그딴 건 알고 싶지 않아. 내가 기절하고 나서 얼마나 지났는지나 말해.”

“핫핫! 배짱 좋은 녀석인 걸? 행여 동료들이 찾으러오길 바라는 거라면 아서라. 

이제 만 하루 되었을 뿐이지만, 그 사이 텔레포트 게이트를 두 개나 거쳤으니까. 

정상적인 걸음으로 쫓아오려면 적어도 3개월은 더 걸릴 거다.”

젠장! 하필이면 수도를 코앞에 두고서 이런 일이 닥칠 건 뭐란 말인가. 

안 그래도 이 시대에 무지한 내가 이곳이 어느 지방의 어느 구석인지 알아낼 수 잇을 리 없었다.

행여 트로웰이나 엘뤼엔이 도와주러 올 거란 기대는 깨끗이 접은 지 오래다. 

알아서 살아나오라고 기도나 해주면 다행이게(충분히 그러고도 남는 정령왕들이다.)?

짧게 속으로 욕설을 뱉은 나는 내 양 팔목에 단단히 채워져 있는 수갑을 노려보았다. 

적어도 중간에 이어진 사슬만이라도 어떻게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지나치게 가벼운 탓일까?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쉽게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 강하게 힘을 줘본 나는,

 수갑과 연결된 사슬고리에 쩍! 하고 금이 가는 것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과연 트로웰의 훈련은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이런 괴력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

정작 배우고자 한 검술엔 진전이 없는데 힘만 무식하게 강해지다니. 

이것을 과연 기뻐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 순간엔 도움이 되고 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기로 할까.

노예상인들은 내가 잠잠히 입을 다물자 일행과 멀리 떨어진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들은 곧 위로인지 놀리는 것인지 모를 말을 신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너무 낙심해 할 필요 없어. 말했다시피 너는 귀족 집으로 가게 될 테니까 말이야. 

평민으로 그럭저럭 사는 것보다야 높으신 분들에게 귀여움 듬뿍 받는 게 더 낫지, 뭘 그래?”

“맞아. 앞으로 평생 부족할 것 없이 지내게 될 거라고. 귀부인들의 달콤한 속살을 평생 음미하면서 말이야.”

“크하하! 그거 멋진데!”

글쎄, 너나 그러세요. 난 관심 없다니까? 

부귀영화도 그것을 바라는 사람에게나 멋있어 보이는 법이다. 

자신의 눈에 멋지게 보인다고, 남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생각은 대체 어디서 튀어 나왔는지 모르겠다. 

정령왕들에게 아무리 예쁜 보석을 가져다 줘봐라. 에바스 에덴에 널려 있는 풀 쪼가리 취급밖에 더 받겠는가?

하긴, 그런 것을 알 리 없으니 이렇게 뻔뻔하게 납치해서 사람을 사고파는 것일 테지만.

‘어디 보자, 나 혼자 도망치면 재미없으니까 다른 녀석들도 다 풀어줘야지. 뭐? 

노예시장에서 주목받을 거라고? 그래~ 어디 노예를 다 놓친 상인들로 주목 좀 받아보라지.’

덤으로 전치 10주에 해당하는 부상을 입고 나면 정신을 좀 차릴 것이다. 

그럼에도 갱생의 여지가 없을 것 같으면 완전히 생을 끝내줄 생각이었다. 

남의 목숨을 팔아먹고 희희낙락하고 있으니 의당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자아~ 그럼 어떻게 혼을 내줄까…….’

나는 주위를 둘러보는 척 시선을 돌리며 근처에 적당한 무기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사슬을 풀어도 수갑 자체를 어찌하지 못하면 정령을 소환할 수 없으니, 그동안 배운 검술이라도 써먹을 생각이었다.

마침 바로 앞에서 떠들고 있는 남자의 허리춤에 적당한 검이 매달린 것을 

확인한 나는 두말할 필요 없이 몸을 날려 그것을 뺏으려고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어지는 노예상인의 말에 나는 이 계획을 잠시 보류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보단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으니 배가 고플 테지? 얌전히 군다면 맛있는 음식을 먹게 해주마. 

지금 요리사 녀석이 솜씨를 발휘하고 있으니 말이야.”

“…….”

공교롭게도 마차가 멈춘 이유는 지금이 식사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노예상인의 말마따나 나는 현재 굉장히 배가 고픈 상태였다.

납치당하기 전에도 거의 하루 종이 굶었음은 물론, 

그 뒤로도 꼬박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요리는 커녕 육포 하나에 감지덕지하던 내게 ‘맛있는 음식’이란 차마 거부할 수 없는 유혹과도 같았다.

‘으음… 뭐, 어차피 몽땅 뒤엎으려 해도 힘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나중에 하지 뭐. 아하하…….’

내가 이렇게 먹을 것에 약해질 줄이야. 

생각할수록 한심했지만 나는 애써 ‘어쩔 수 없다’ 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이런 내 심정도 모르고 노예상인들은 그저 나를 얌전하게 만들 건수를 찾았다는 것에 희희덕거리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잠시 노려본 나는, 문득 나 외의 다른 존재들을 떠올리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나 혼자만 이쪽에 격리된 거지?”

“그야 네가 상등품이라서 그렇지. 잡은 노예들은 따로 등급을 구분해서 마차에 싣거든.”

“헤에, 그럼 상등품이 나 하나라는 거야? 당신들도 꽤나 능력이 없구나…….”

“무, 무슨소리야! 상등품 중에서도 종족을 구분해서 따로 실는다고. 다른 마차에 또 다른 상등품이 있어.”

“네네, 그렇겠죠.”

내 말투에 서린 비꼬는 기색을 느꼈는지 노예상인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일에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건지, 무시당하는 것에 꽤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쳇! 이건 비밀이었는데, 할 수 없지. 사실 말이야… 저기 따로 떨어진 마차 보이지? 그 안에 들어 있는 게 뭔지 알아?”

“뭔데?”

상인이 가리킨 것은 쭈욱 늘어진 마차의 행렬에 유일하게 속하지 않은 검은색 마차였다. 

내부가 훤히 보이는 다른 마차들과 달리, 그것은 유일하게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마치 밀폐된 느낌을 주었다. 

내가 그것을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들은 곧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엄청난 사실을 밝히고 말았다.

“킥킥! 놀라지 말라고. 바로 유니콘이란 말씀! 그것도 세 마리나 된다고! 어느 상단도 우리만큼 잡지 못했을 걸?”

“…에?”

유니콘이라니! 그러고 보니 4천 년 전의 아크아돈은 아직 유니콘이 신계로 떠나지 않았을 시기였다. 

하지만 드래곤 만큼이나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종족이, 

이런 허접한 노예상인들에게 잡혔다는 사실을 나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흐흐! 믿지 못하는 얼굴인데? 하긴, 당연하지! 

드래곤 다음으로 강한 종족이라고 알려진 녀석들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정말이라고! 뭣하면 보여줄까?”

그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는지는 잘 모른다.

 너무 놀라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상태였으니까.

 다만 상인들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나를 데리고 그쪽 마차로 가는 것으로 보아,

 무의식적으로 긍정 표시를 했던 모양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여기서 잠시 떠오른 생각.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난 감시해야 할 노예일 텐데, 

이렇게 쉽게 자리에서 이탈하게 해도 되는 거야?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수갑의 위력을 너무 맹신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걸지도. 

철컥철컥.

걸어갈 때마다 바닥에 끌리는 사슬 소리가 꽤나 

거슬렸지만(내가 죄인이냐!)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마차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혹시나 저 안에 시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을 안고서.



끼이익!

문이 열렸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내가 갇혀 있던 마차보다 훨씬 어두운 내부였다. 

본래는 창문이었을 부근에는 간신히 공기만 통할 정도의 작은 구멍이 두 개 뚫려 있는 것이 다였고, 

나머지는 온통 밀폐된 공간이었던 것이다.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건 알겠지만,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쯧쯧 혀를 차며 안을 들여다본 나는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존재들을 본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들이… 유니콘?”

“킥킥! 왜? 안 믿겨지냐? 하긴, 지금은 본체의 모습이 아니니 알아보기 어렵겠군.”

“아니, 그게 아니라 왜 저렇게 해놓은 거지? 당신들 미쳤어?”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엘프였지만,

 폴리모프가 가능한 종족이니 그런 것으로 의심할 생각은 없었다.

 문제는 그들의 온몸이 밧줄로 꽁꽁 묶여진 것은 물론, 눈과 입까지 전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각 손목과 발목에는 두꺼운 수갑과 사슬이 늘어져 있었다.

내가 화난 얼굴로 묻자 상인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모처럼 잡은 건데 도망치면 곤란하잖아? 

유니콘들은 마법뿐만 아니라 검에도 일가견이 있는 녀석들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제압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눈과 입은 왜 가린 건데?”

“그야 위치를 알리지 않기 위해서지. 입을 가린 건 자살을 막기 이해서고.”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는 식사도 할 수 없잖아!”

“흐흐! 괜찮아, 괜찮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종족이거든.”

괜찮기는 개뿔이!

유니콘들은 사람이 왔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데도 의사표현을 하지 못해 연신 신음만을 흘리고 있었다.

 다행히 시벨리우스로 짐작이 가는 자는 없었지만, 

이래서야 밥 먹기 전까진 얌전하게 있자는 결심이 왕창 무너져도 할 말이 없지 않은가!

잠시 본능과 이성이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지만, 결론은 금방 내려졌다.

“쳇! 할 수 없지.”

맛있는 밥들아, 안녕! 너희들과 나는 아무래도 이 세상에선 별로 인연이 없는 것 같다. 

대체 왜 나는 걸리는 일마다 다 이런 것들뿐인 거야!

완전히 결심을 굳힌 나는 노예상인들이 방심하는 틈을 타 얼른 한 녀석의 허리춤에서 검을 빼앗았다.

 뒤늦게야 내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놈들이 경악에 찬 시선을 보냈지만, 이미 그때는 상황이 끝난 상태였다.

“엇? 너 지금 무슨……!!”

“뭐하는 거야! 다들 잡아!!”

그러자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사방에서 무장한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방심하고 있던 것은 아닌 모양이지?

언뜻 봐도 20명은 가볍게 넘어가는 숫자에 나는 곤란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배고파서 기운도 없는데, 이들을 다 물리칠 수 있을까.

내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본 상인들은 입가에 야비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어쩐지 너무 고분고분하다 했더니, 이런 꿍꿍이가 있었군.”

“큭큭큭! 지금이라도 검을 버리면 험하게 대하지 않으마.”

“다치는 건 싫겠지? 자~ 어서 검을 버려라. 착하지?”

저런 식으로 말을 해도 어차피 녀석들은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물건에 흠집이 나는 것이 싫은 것처럼, 상처가 생긴다는 것은 곧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일일 테니까. 

그 증거로 몰려 든 사람들 역시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고 칼로 위협만 하고 있지 않은가.

“어허! 어서 검을 버리라니까! 정말 혼나고 싶은 거냐?”

“어차피 그렇게 사슬이 달린 채로는 싸우지도 못할 게 빤하잖아. 고집 부리지 말고 검을 놓은 것이 좋을 텐데?”

하지만 그 말을 한 남자는 곧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피식 웃은 내가 보란 듯이 두 팔에 이어진 사슬을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헉!”

“어떻게 저럴 수가!”

챙! 후두둑!

마지막으로 발에 채워진 사슬까지 들고 있던 검으로 간단하게 끊어낸 나는,

 새파랗게 질린 사람들을 둘러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물었다.

“사슬? 그게 어디 있는데?”

“이, 이익! 안 되겠다! 일단 잡아! 다쳐도 좋으니까 잡으라고!”

“놓쳐선 안 돼! 무조건 잡아!!”

“와아아아!”

주위는 때 아닌 싸움으로 인해 온통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 도망치는 노예가 나올까 걱정했는지, 

서둘러 각 마차의 문까지 꼭꼭 걸어 잠그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나대로 몰려드는 을 막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고 말이다. 정작 머릿속에서는 전혀 엉뚱한 걸로 고민하고 있었지만.

‘죽일까?? 그냥 가볍게 부상만 입힐까?’

잠깐의 생각 끝에 나는 모두 기절시키기로 결정하고, 

덤벼드는 녀석들의 목과 복부를 칼등으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솔직히 상대가 많다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질 않았다. 

덤벼드는 동작들이 트로웰과 비교하면 거의 굼벵이에 가까울 정도로 느렸기 때문이다.

퍽! 퍼억! 콰악!

경쾌한 소리가 울릴수록 내 행동은 점점 더 빨라졌고, 곧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숫자들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뭐야? 이렇게 느려가지고 누굴 잡겠다고! 이거 제대로 검술 훈련은 한 사람들이야?’

내가 만만히 보인다고 허접한 녀석들만 부른 건가? 

왠지 더 자존심이 상한 탓에 나는 힘 조절이고 뭐고 아무것도하지 않았다.

 가끔 맞부딪친 검이 부러질 때면 상대편 검의 재질이 약한 것이라 위안하면서.

갈수록 내 쪽의 상황이 우세해지자, 덤벼드는 움직임이 한풀 꺾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지켜보고 있던 상인들의 닦달 역시 커지기 시작했다.

“다들 뭣들 하는 거야!! 어서 잡아! 놓치면 이번 의뢰비는 없을 줄 알앗!!”

“제길! 무슨 꼬마가 검을 저렇게…….”

“한꺼번에 달려들란 말이다! 한꺼번에!”

의뢰비 운운하는 것을 보면 지금 나와 대치하는 자들은 용병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의 협박도 그리 큰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했다. 

한꺼번에 덤벼들면 뭐하겠는가! 여전히 굼벵이처럼 느려터진 움직임은 

트로웰이 혼자서 가볍게 휘두르는 칼보다 못했다. 

20명을 넘었던 숫자가 어느새 5명으로 줄어들자 상인들의 얼굴은 전보다 더욱 조급해졌다.

“쿠마! 뭘 하는 거야! 어서 저번처럼 수면침을 쏴!”

“아, 안 돼! 너무 빨라서 조준을 할 수가 없다고!”

“에잇, 빌어먹을!”

내 실력이 자신들보다 우위란 것이 드러나자, 

남은 용병들은 섣불리 덤비지 못하고 슬금슬금 주위만 포위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한가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납치된 사람을 태운 마차의 숫자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한 개, 두 개, 세 개… 으음, 유니콘을 실은 마차를 빼고도 다섯 개가 넘는 건가? 휘유~ 생각보다 많은데?’

그러자 약삭빠른 상인들은 내가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간파한 듯했다. 

의미심장하게 웃는 모습에 내가 ‘아차’싶었을 때, 그들은 이미 마차 하나로 다가가 누군가를 끌고 나오는 상태였다.

“꺄아아악!”

“움직이면 이년을 죽여버리겠다! 살리고 싶다면 순순히 검을 버려!”

아니나 다를까. 놈들은 치사하게 인질작전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동정심을 자극하기 위해서인지 나보다도 훨씬 어려 보이는 작은 소녀를 상대로!

 지금 이 사람들이 제정신인가?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차피 그 애도 당신들이 납치한 아이일 것 아니야! 손해 봐도 좋다는 거야?”

“큭큭! 그저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흔한 평민 아이 중 하나일 뿐이야. 

상등품인 너와는 가치가 다르지. 이런 건 팔아봤자 별로 수입도 없다고.”

“뭐? 이런 것들이…….”

“흐흐!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다고 했을 텐데? 

상인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움직이는 존재라서 말이야. 널 잡을 수 있다면 이런 꼬마 한둘의 목숨쯤이야 우습지. 

자~ 어떻게 할래? 네 선택에 이년의 목숨이 달려있다!”

단도를 바싹 들이댄 목에 찔끔 피가 흘러나오자,

 상인에게 잡힌 소녀의 안색이 점점 파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놈들이 그러든 말든 신경 쓸 생각이 없었다. 

안 그래도 배고파서 힘까지 빠져나가는 판국에 남의 사정까지 봐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차피 다른 사람들을 구하려는 이유는 상인들이 약 올라 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정의감을 가지고 하는 일도 아닌데, 굳이 전부 살려야 할 의무가 있을까? 

내가 여기서 상인들을 때려 눕히면 틀림없이 저 소녀는 죽을 테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구할 틈을 벌 수도 있는 것이다.

‘흠,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군.’

만약 잡혀 있던 아이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거나 살려달라는 말을 했더라도 나는 가뿐히 무시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의 입에서는 전혀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흐… 흑! 저,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어서 도망가세요!”

“……!!”

“저, 저 알아요! 이 사람들… 저 안 죽여요! 

저 같은 꼬맹이도 귀족 집에서 비싼 값에 산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얼른 도망가세요!”

“아니, 이년이!”

철썩!

“꺄악!”

우람한 손이 사정없이 폭력을 가하자, 소녀의 피부는 금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것을 본 순간 내 머릿속에 여러가지 잡다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목숨에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날 향해 ‘도망가라’는 말을 하는 아이를 더 이상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낭패감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은 얼마든지 계획을 변경한다. 

지금이야 정말 죽일 생각이 없어도 내가 끝까지 응하지 않으면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인질로 잡힌 소녀와 내 사이의 거리는 제법 떨어져 있었고, 

여기서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해치기 전에 구할 순 없었다. 

이럴 때 정령술을 쓸 수 있다면 훨씬 수월할 테지만, 마나를 차단하는 수갑인지 뭔지가 있으니 별 수 없지.

“쳇!”

챙강!

찌푸린 표정으로 혀를 찬 나는 결국 들고 있던 검을 발치에 던졌다. 

그와 함께 환하게 변하는 상인들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또다시 목 언저리에 따끔한 감촉을 느끼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참으로 징한 놈들이었다.



엘이 노예상인들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던 그 시각, 

트로웰과 엘퀴네스 또한 멀리 떨어져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알아서 탈출하길 기다리긴 했지만 설마 정말로 난동(?)을 피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두 정령왕은, 

심지어 엘이 망설임 없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저게 누구지?”

“그러게. 나와 대련할 때랑은 전혀 다른 걸. 아주 서슴없이 내리치는데?”

“네 녀석의 훈련이 헛되진 않았던 모양이군.”

“그러게. 인간들을 상대로 하면 다를지도 모른다고 했잖아. 후후!”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트로웰 역시 정말로 자신의 생각이 맞아떨어질 줄은 몰랐다. 

그저 기절시키고 있는 정도였지만, 

타격을 가할 때 아무런 머뭇거림이 없는 것을 보면 공격이란 행위에 별로 자책을 느끼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자신과의 대련 때는 그렇게 망설인 건지,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역시 내가 어려웠던 걸까? 의외로 서열을 따지는 걸지도.”

“어쩌면 친분이 있는 상대와는 싸울 수 없는 성격인 걸지도 모르지.”

“흐음, 배신당하면 깨끗하게 망할 타입이군. 뭐, 그게 더 녀석 답기는 하지만.”

“답다고? 꽤나 마음에 든 것 같은 말투로군.”

그러나 평소였다면 당연히 반박했을 그 말에 트로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새 정말 마음에 들기라도 한 건가? 

엘퀴네스는 잠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에게서 신경을 끊었다. 

원래 그는 타인의 감정에 참견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또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니까.

트로웰 또한 묵묵히 엘이 싸우는 장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달려드는 용병들은 모두 한두 방에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는데, 

엘이 내내 지루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상대방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느리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수갑에 연결된 사슬을 단순히 힘만으로 끊어놓고도.

 자신이 강해진 것이라고는 자각하지 못하는 걸까?

잠시 흐뭇한 시선을 그 모습을 바라보던 트로웰은 

엘의 손목에 착용된 수갑을 발견하고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저 수갑은 마나를 차단하는 용도지? 분명 시초는 죄를 저지른 마법사나 검사들을 제압하려는 목적이었는데 말이야. 

지금 보니 참 다양한 곳에서 활용되는걸.”

“인간들은 응용력 하나만큼은 칭찬받는 종족이니까. 

뭐, 아무튼 저런 식이라면 더 두고 볼 것도 없이 탈출에 성공하겠군.”

“그렇겠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쓸데없는 생각?”

의아하게 물은 엘퀴네스는 곧 단번에 그가 하는 말을 이해했다. 

황당하다면 황당하고 어이없다면 어이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저건 또 뭐하는 걸까?”

“보시다시피. 인질로 협박하는 것 같은데?”

그 사이, 노예상인들은 엘을 잡기 위해 다소의 희생을 감수한 듯했다. 

근처에 있는 아이를 잡아다 눈앞에 검을 들이대며 위협을 가하는 것이 아닌가! 

보통의 마음 약한 인간이라면 자신 때문에 희생될 아이를 위해서라도 전투를 포기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엘은 의외로 표정에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검을 버리고 투항할 거라고 생각했던 두 정령왕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할 테면 해보라는 건가? 네 말마따나 정말 의외의 모습만 보는군.”

“그, 그러게.”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인질로 잡힌 소녀의 입에서 ‘도망가라’는 말이 나온 순간, 

오히려 엘은 얼굴을 찌푸린 채 착잡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아무 상관없는 타인의 일은 무시할 수 있지만, 자신을 위해주는 사람은 버릴 수 없는 것일까. 

결국 엘은 끝까지 모진 마음을 품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여기까지인가…….”

검을 버리는 순간, 주위를 둘러싼 상인 중 한 명이 날린 바늘에 맞고 

쓰러지는 그를 보며 트로웰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한번의 기회를 놓쳤으니 다음에 탈출할 때는 지금보다 더 힘들어 질 것이다. 

아니, 다음 기회라는 것이 오기는 할까? 

의외의 실력이 드러났으니, 어쩌면 저 마차안에 갇힌 유니콘들보다 더한 억류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빠직! 

‘…응?’

순간, 무심코 쥐고 있던 나뭇가지가 부러진 것을 본 트로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별로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은데 왜 이게 부러진 걸까? 그 해답은 옆에 있던 엘퀴네스의 입을 통해 나왔다.

“네가 화내는 모습을 보는 것도 꽤 오랫만이군.”

“뭐?”

“의식하지 못하는 건가? 얼굴이 찌푸려져 있다. 

당장이라도 저 인간들에게 달려가 죽이고 싶다는 표정이야. 

네가 그런 얼굴을 하는 것은 미네르바 때 이후로 두 번째군.”

“…….”

그제야 자신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트로웰은 피식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해보니 정말로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저런 치사한 수법으로 그가 잡혀버린 것에 대해.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는 자기 자신조차도.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마음을 쓰는 존재가 돼버린 걸까. 

인간을 싫어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멸족시키라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상에 엘까지 포함이 된다고 하면 많이 고민하고 머뭇거리게 될 것 같았다.

“별일이군. 네가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는 일도 있다니.”

“아아 속단은 일러, 엘퀴네스. 아직은 아니야. 현재까진 지켜보는 단계니까.”

글쎄, 거기서 더 지켜봤자 일 것 같다만.

엘퀴네스가 보기에 트로웰은 이미 상당수 엘이란 인간의 매력에 매료되어 있는 상태였다. 

보통 마음에 들지 않는 자에게 선뜻 검술을 가르쳐주는 녀석은 없지 않은가. 

물론 그 표현이 다소 삐뚤어진 형태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어쩔 거냐? 저대로 보아하니, 앞으로 더 골치 아파질 것 같은데.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빼내올까?”

“안돼!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지. 난 저렇게 약하게 가르치치 않았다고. 

배운 것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책임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것 보라니까.”

“응? 뭐가?”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걱정돼 죽겠다는 얼굴을 하는 주제에 정작 해결은 알아서 하라는 건 또 무슨 심보인가. 

역시나 삐뚤어진 애정표현이다. 혀를 쯧쯧 찬 엘퀴네스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노예상인들에 의해 어디론가 실려가는 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자신의 얼굴 역시 걱정으로 물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눈과 입이 단단한 천으로 가로막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목과 발목을 결박하는 수갑 역시 더 무겁고 단단한 걸로 바뀌어져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철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온몸이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는 것 같았다. 

답답해진 내가 연신 몸을 꿈틀거리자 옆에 있던 누군가가 낮은 신음을 뱉어냈다.

“으으으…….”

“으음, 으으음!!”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한 그 소리에 나는 이곳이 유니콘을 가두어둔 마차 안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챘다. 

종족별로 구분이 어쩌고 하다니, 결국 탈출 가능성이 높은 인물들을 한자리에 모아둔 셈이다.



한바탕 소란을 피웠으니 얌전히 놔둘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그래도 황당한 심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누가 보면 감옥으로 이송 중인 죄인으로 착각해도 딱 할 말 없는 모습이 아닌가.

쓰러진 뒤로 며칠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고,

 무엇보다 배가 너무 고파서 짜증이 났다. 

유니콘들이야 안 먹어도 살 수 있다 치자. 하지만 이곳에 쳐박아둔다는 건 나까지 덩달아 굶긴다는 뜻이 아닌가.

 놈들은 내가 인간이라는 기본적인 정보마저 잊어버린 듯 했다. 설마 이대로 아사(餓死)시킬 생각은 아니겠지?

‘흑! 누가 나 좀 살려줘…….’

바로 그때, 나는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낯익은 목소리를 듣고 몸을 움찔했다.

-쯧! 한심한 녀석. 스스로 탈출할 기회를 버렸으니 당연한 대가다.

‘어? 엘뤼엔?!!’

머릿속을 파고드는 대화법은 이전에도 했던 것이라 크게 거부감은 없었다. 

하지만 설마 정령왕인 그와도 교감이 가능할 줄이야. 왠지 믿을 수 없는 기분에 나는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정말 엘뤼엔이야? 지금 환청 듣고 있는 거 아니지? 엘뤼엔 맞아?’

그러자 그는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령왕은 계약한 존재와 정신교류가 가능하다. 

나 맞으니까 그렇게 호들갑 떨지 마.

헉! 계약자와의 정신교류가 가능하다니! 

그러고 보니 언젠가 소멸하는 미네르바를 배웅하기 위해 정령계로 돌아갔을 때, 

라피스가 내게 텔레파시를 보냈던 것이 생각났다. 그걸 왜 이제야 깨달은 걸까?

하지만 지금의 내겐 그런 건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당장 급한 문제가 눈앞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에엥! 엘뤼엔~!! 나 배고파~~’

-시끄럿! 그러게 그런 허접한 놈들에게는 왜 잡힌 거냐? 넌 바보냐!

‘쳇! 누가 잡히고 싶어서 잡혔나, 

뭐. 내가 너무 잘나고 이뻐서 노예로 팔아야겠다는데 그걸 어떻게 막어~’

-… 사지를 결박당하고 눈과 입까지 막힌 주제에 잘도 떠드는군.

‘아하하! 농담이었어, 농담. 어? 근데 지금 내가 보여??’

-똑똑히 보인다. 그야말로 한심하다는 말밖에는 안 나오는 모습이군.

설마 자연체의 모습으로 들어온 건가?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려던 나는 지금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라는 걸 깨닫고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아쉬운 대로 일단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도록 할까.

‘근데 여긴 왜 온 거야? 설마 나 구해주러?’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해결하라더군. 네 스승이란 녀석의 전언이다.

‘흑! 너무해…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혼자 해결해? 이젠 힘도 없어서 사슬을 끊지도 못하겠단 말이야.’

-그래서 날더러 어쩌란 거냐. 징징거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라. 

그래도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아주 외면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나는 일말의 기대감을 안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결박만이라도 풀어주면 안 될까? 이러고 있으니까 너무 답답해.’

-흐음, 좋아. 몸에 둘러진 사슬은 풀어주지. 하지만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결해라.

의외로 가볍게 수긍한 그는 곧바로 내 온몸을 꽁꽁 얽어매고 있던 사슬을 하나씩 끊어냈다. 

덕분에 움직임이 한결 자유로워지자 나는 얼른 눈과 입을 막고 있던 재갈을 풀었다.

‘푸하! 죽는 줄 알았네! 드디어 살았다.’

밀폐된 곳이라 여전히 어둡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답답함이 해소됐다는 것만으로 턱 막혀 있던 숨이 완전히 트이는 느낌이었다. 

나의 홀가분한 표정을 본 엘뤼엔은 슬쩍 혀를 차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제 무덤 파는 버릇은 어딜 가도 똑같군. 다시 잡힐 거면 아예 도망칠 시도를 말든가.

‘응? 그건 어떻게 알았어? 설마 처음부터 보고 있었던 거야?

-물론이다. 웬일로 당차게 싸우나 했더니, ‘역시나’더군.

‘아하하,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내 꾀에 내가 당한 격이랄까.’

-흥! 한심한 녀석. 네가 조금만 더 모질기만 했어도 해결되는 일이었다.

‘그, 그런가.’

자연체인 엘뤼엔은 전체적으로 약간 투명한 느낌이 들었다.

 그 모습을 신기한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자니, 다른 쪽에 묶여 있던 유니콘들이 신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으으음!”

“으으으…….”

‘아, 맞다! 저 사람들(?)도 풀어줘야지! 깜빡 잊고 있었네.’

하지만 역기서 엘뤼엔은 상큼하게 배신을 때리고 말았다. 

적어도 탈출과정까지 같이 있어줄 거라 생각했는데, 곧바로 작별 인사를 건넸던 것이다.

-알아서 해라. 난 이만 갈 테니.

‘엥? 간다고?’

-이런 답답한 곳에서 더 있을 생각 없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잘 해결하고 와.

‘먼저 간다니… 앗! 엘뤼엔! 잠깐만!!’

놀란 나는 재빨리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휘익 사라지고 말았다. 

갑자기 나타났던 것만큼이나 재빠른 퇴장이라, 그가 사라지고 난 이후에도 나는 한동안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긴, 처음부터 날더러 알아서 하라고 했으니, 굳이 옆에 있어줄 필요는 없나? 

그나마도 아주 외면하지 않고 도와준 게 어디인가. 나는 잠자코 현재의 결과에 만족하기로 했다.

‘쩝! 할 수 없지. 그럼 우선 이 사람들이나 풀어주도록 할까.’

속으로 작게 중얼거린 나는 묶여 있는 세 명의 유니콘 중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한 명에게 다가갔다. 

그는 훤칠한 체격에 오렌지 빛 머리카락을 지닌, 전체적으로 화사한 느낌의 청년이었다.

 본래의 나이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겉보기로는 대충 시벨리우스의 또래처럼 보였다.

안대와 재갈이 풀리는 순가, 비명을 지르려는 그의 행동에 나는 황급히 한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아……!”

“쉿!! 조용히 해요. 들키고 싶어요?”

“……!!”

놀라서 동그랗게 떠진 눈동자는 이런 컬러플한 세상에서도 그리 흔하게 보기 힘든 살구색이었다. 

세상엔 별의별 색이 다 있구나 하며 감탄한 것도 잠시, 

나는 그가 대충 진정이 된 것을 느끼고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치웠다. 물론 약간의 타박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누가 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다짜고짜 비명부터 질러요? 간 떨어질 뻔했네.”

“…다, 당신은?”

“보면 몰라요? 여기에 잡혀 들어온 사람이지. 

할 말이 있어도 잠깐만 기다려요. 다른 쪽도 풀어줘야 하니까.”

“…….”

왠지 얼떨떨해 보이는 남자의 표정을 무시하며 나는 곧 다음 사람들의 안대와 재갈도 풀어냈다. 

그리하여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이 있었으니! 잡힌 세 명 중의 하나가 여자였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꽤나 가녀린 분위기를 가진 소녀라, 체격을 가리기 위해 

풍성한 차림을 했음에도 한눈에 여자임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은빛의 머리카락에 자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안대가 풀리자마자 겁에 질려 몸을 잔뜩 떨기 시작했다.

지금은 딱히 유해요소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떠는 걸까. 

혹시나 어디가 아픈 건가 싶어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결코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저기, 괜찮아요? 어디가 아픈 건…….”

도리도리.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는 모습이 마치 접근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아, 

나는 잠시 뻘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다음 순간, 굉장히 허스키하고 낮은 목소리가 으르렁거리듯 울려 퍼졌다.

“웰디님에게서 떨어져라, 인간! 그분은 네놈 따위가 건드릴 수 있는 분이 아니다.”

“……!”

그렇게 말한 자는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안대를 풀어줬던 남자였다. 

밤하늘처럼 새까만 검은색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가 엘프보단 마족에 가까운 인상을 주었는데, 

지금 노려보는 모습을 보니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그저 괜찮냐고 물어본 것이 이런 말을 들을 정도로 잘못한 일이었던가(정말 흑심 없었다니까?)?

‘그나저나 웰디라고?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같은데…….’

인간이 된 이후로 기억력이 나빠진 것이 확실하다. 

예전 같았으면 그저 흘려들은 말이라도 전부 떠올랐을 텐데, 이젠 좀처럼 머리를 짜내도 기억이 나질 않는 것이다.

그 사이, 살구색 눈동자의 청년은 당황한 얼굴로 나무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아렐. 우리를 도와준 사람이 아닙니까.”

“난 인간을 믿지 않아. 애초에 우리가 왜 이런 처지에 이른 건지를 자각해라, 카리안. 지금까지 당한 치욕을 잊은 거냐?”

“하지만 저 인간도 같은 처지였는걸요.”

“흥! 같은 처지였던 인간이 어떻게 혼자서 사슬을 푼 거지? 오히려 그 말을 듣고 보니 더욱 의심스럽군 그래.”

“아, 아렐!!”

강압적인 말투를 보아, 아렐이라는 남자도 엘뤼엔 만만치 않은 성격인 듯 싶었다.

잠시 쩝 하고 입맛을 다신 나는,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살구색 눈동자의 남자, 카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이런 상황에선 예민해져 있는 게 당연하죠. 그런데 당신들이 정말 유니콘인가요?”

“아아, 네. 맞습니다. 저희 셋 모두가 유니콘입니다.”

“제가 보기엔 세 분이 전부 일행이신 것 같은데, 어쩌다가 저런 몹쓸 놈들한테 잡히신 거예요?”

“그게… 설명하자면 조금 깁니다. 저어, 그 전에 이 밧줄을 푸는 것을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참, 내 정신 좀 봐. 잠시만 기다려요. 풀어줄게요.”

그러고 보니 당장 안대와 재갈만 풀 생각에, 밧줄에 대해서는 그만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다. 

나는 얼른 카리안의 뒤로 다가가 그의 몸을 결박하고 있던 밧줄의 매듭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비교적 꼼꼼하게 묶인 상태긴 했지만, 아무렴 사슬을 끊는 것보다 더 힘들겠는가.

“자, 다 됐어요. 다른 분들은 그쪽에서 알아서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정말 친절하신 분이군요. 저어, 성함이……?”

“엘이라고 합니다.”

“아, 그렇군요. 앞으로 엘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으음, 그런데 이쪽의 것들은 대체……?”

그가 가리킨 것은 내 주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쇠사슬이었다.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대답이라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쇠사슬이죠. 아까 약간 소동을 피웠더니 단단히 벼른 모양이에요. 이걸로 온몸을 칭칭 감아 뒀더라구요.”

“그러고 보니 뭔가 소란스럽다 싶었는데… 그것이 엘님 때문이었군요. 그런데 혼자서 이걸 어떻게 푸신 겁니까?”

“하하! 뭐, 어떻게 하다 보니… 그래도 역시 이 수갑까지는 좀 무리네요. 배고파서 더 이상의 힘도 없지만.”

그러자 내 팔에 채워진 수갑을 확인한 카리안의 얼굴에 무척 놀란 빛이 스쳐지나갔다.

“그건 저희와 같은 마나 차단용의… 혹시 마법사입니까?”

“아뇨. 정령사예요. 잠깐 방심하는 바람에 운 나쁘게 이런 꼴이 되긴 했지만요.”

“정령사요?”

인간을 싫어하는 종족이라도 정령사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경우가 많다. 

자연 친화력이 충만한 사람들은 보통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경우가 대부분이라, 

정령왕의 축복을 받은 존재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들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경계하고 있던 표정이 180도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중에서도 웰디란 소녀는 나에 대해 호기심을 느낀 듯, 망설이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저어… 정말… 당신이 정령사인가요?”

‘와아, 목소리 이쁘다.’

웰디의 목소리는 정말 생각 이상으로 고운 소프라노였다.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간다는 표현이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막 대답하려는 순간, 나는 기겁을 한 아렐의 호통소리에 의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웰디님! 어찌 인간에게!”

“앗! 미안해요, 아렐. 하지만 인간 정령사는 처음 보는 것이라…….”

“그 호기심 때문에 저희가 이렇게 된 것을 잊으신 겁니까? 

걱정하고 계실 류렌님을 생각하십시오. 지금은 인간 때위에게 신경 쓰실 상황이 아니십니다.”

“그렇지만…….”

“웰디님!”

“윽, 아, 알았어요.”

지금 보니 웰디란 아가씨는 유니콘 사회에서도 꽤 상류층에 속하는 것 같았다. 

하긴, 그게 아니라도 유니콘은 웬체가 암컷이 존중받는 종족이기도 했다. 

본능적으로 여자에게 약해진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고 보니 보통 유니콘을 잡을 때는 여자로 유혹한다고 하던데, 

여자인 웰디는 무슨 수로 잡은 걸까? 아까 호기심 운운하는 것을 보니 

저 아가씨 때문에 다른 둘도 덩달아 잡힌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저는 여러분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그냥 그쪽이라고 하기는 좀 그래서요.”

“아참, 이제보니 아직 저희 소개를 하지 않았군요. 저는 유니콘 종족 세라핀의 일원 카리안이라 합니다.”

“세라핀?”

“인간들로 치면 ‘기사’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렐님 역시 저와 같은 세라핀의 일원이죠. 그리고 여기 계신 여성분은 ‘라반 루 웰디’양이십니다.”

이른바 귀족 ‘레이디’와 그녀를 지키는 두 기사들이라는 소리인가. 

더불어 웰디란 아가씨 덕에 다른 사람들도 잡힌 것이라는 가정이 확실해졌다. 

아무리 여자에 약하다지만, 설마 지켜야 할 존재가 있는 기사들이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릴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꽤나 말괄량이인가 보네.

 아, 혹시 인간세상으로 구경나오는 게 이번이 처음인가?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를 보호하느라 고생이 많구만.’

잠시 측은한 표정으로 두 명의 기사 유니콘을 바라봐준 나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움직이고 있는 마차. 밀폐된 공간. 각 손목과 발목에 채워진 마나 차단용의 수갑! 

대체 어느 하나 빠져나갈 구석이 없지 않은가! 설마 이대로 고이 노예시장까지 끌려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하아, 정말 곤란하네요. 솔직히 말해서 이젠 도망칠 기운조차 없는데.”

“저희들도 꽤 난감합니다. 

애초에 웰디양의 외출은 2박 3일로 정해져 있었거든요.

 그런데 벌써 일주일째 돌아가지 못하고 있으니… 지금쯤 마을이 발칵 뒤집혔을 겁니다.”

“으음, 그럼 다른 사람들이 찾으러 오지 않을까요?”

“그야 그럴 테지만, 위치추적이 힘든 이상 조금 불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이 마나용 팔찌는 착용자의 마나 사용은 물론, 

다른 쪽에서 이쪽의 마나를 감지하는 것까지 방해하는 것 같더군요.

 결국 자력으로 탈출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에 관한 웰디의 생각은 전혀 다른 듯 했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의 얌전한 분위기를 벗어던지고 도전적으로 소리쳤다.

“아니야! 그분이라면 꼭 와주실 거야!”

“웰디님?!”

“이런, 웰디님! 진정하십시오. 여기서 큰 소리를 치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다들 너무 일찍 낙담하고 있잖아. 난 걱정 안 해. 그 분 이라면 틀림없이 와주실 테니까!”

단호하리만치 똑 부러지게 답하는 말에는 두 기사들 역시 크게 반대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들은 어느새 수긍하는 표정으로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고 있었다. 

“아아, 하긴.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그분이라면 언제고 웰디님의 위치를 알아내시는 게 가능하시니까요.”

“하지만 과연 장로님께서 그분이 직접 움직이는 것을 허락하실지…….”

“다른 자도 아니고, 웰디님의 일이니 가능하리라 봅니다만.”

“하긴, 그런가. 그 말대로라면 우리로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 겨울 한시름 덜었군.”

올 거라는 예상만으로 이렇게 안심하다니, 뭔가 굉장히 대단한 유니콘인 모양이지?

왠지 자기들끼리만 알아듣는 대화를 하는 것 같아 나는 직접적으로 묻기로 했다.

“그분이 누군데요?”

“아, 그건…….”

“으음.”

처음 그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을 망설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기사들의 얼굴엔 곧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가득 드러나기 시작했다.

“유니콘 왕족의 제 1계승자임과 동시에 최고의 세라핀이시죠. 

여기 계신 웰디 양의 반려로 내정되어 계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헤에, 왕족이 있군요? 그런데 그런 존재도 장로의 허락을 받고 움직여야 하나요? 

반려로 내정되었다면 약혼자라는 소리인데, 구하러 오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왕족은 존재만으로 유니콘들의 상징이 되는 자라서요.

 행여 불온한 세력에게 잡히거나 험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미리 주의를 기울이는 겁니다. 

물론 그분, ‘시벨리우스’님이라면 무력 면에서 당할 자가 없으니 쓸데없는 걱정이긴 하지만요. 하하!”

“……엥?”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지? 

왠지 무지무지 낯익은 이름이 지나간 것 같은데? 나는 설마 환청을 들었나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방금 뭐라고요? 그분 이름이… 설마…….”

“아! 시벨리우스님입니다.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유니콘! 

고귀하고 성결한 피를 계승하고 계시는 제1왕자님 이시지요.”

“……!!!”

쿠우웅!

무심코 지나가던 길가에서 갑자기 물벼락을 맞는다면 이런 심정일까?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지는 충격에 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못했다.

 그 떼쟁이에 주책바가지, 라피스 만만치 않게 독점욕 강한 고집쟁이가… 뭐라고?

‘세라핀? 그것도 제 1왕자?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은 거야? 아! 그래! 어쩌면 동명이이일… 리가 없겠지. 아하하!’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왕족과 같은 이름을 지어주겠는가. 

그 반대의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들이 말하는 ‘그분’이 내가 아는 ‘그 녀석’이라는 

결론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으음… 시벨리우스, 너… 꽤 빵빵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구나. 이, 이런 식으로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려나?

이렇게 우연들이 겹치는 것을 보니 왠지 그와 만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내 생각은 여지없이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외전- 현재 그들은 ……

“헤에, 시벨리우스님이 유니콘 종족의 왕자였다구요?”

엘퀴네스가 라피스의 영혼을 쫓아 떠난 지도 어느덧 1년이 넘어서고 있었다. 

그 사이 솔트레테 제국은 어느새 완전히 안정을 되찾아, 과거 이루었던 태평성대를 이어가고 있었다.

‘현황(賢皇)이사나.’

사람들은 앞 다투어 그들의 황제를 이렇게 칭했다.

 그가 숙부에게 쫓겨나 떠돌던 시절의 이야기는 어느새 

무용담으로 퍼져 코흘리게 꼬마들도 외우고 다닐 정도였고, 

역적 유카르테 대공을 몰아내고 다시 황성으로 귀환한 일은 거의 신화처럼 역사에 기록됐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3명의 정령왕과 황제 이사나가 여행 중에 만난 지인들의 도움이 컸다. 

그들이 떠난 엘퀴네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수시로 이사나를 찾아와 의지의 대상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사나는 현황이란 칭호 외에도 

‘위대한 존재들의 친구’ 로서 많은 이들의 동경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유니콘 시벨리우스는 아예 황성에 눌러 앉아 

이사나가 전부 처리할 수 없는 잡다한 서류들을 도맡아 관리하고 있었다.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시간 때우기에 가장 적절하다는 그의 의견을 반영한 일이었다. 

덕분에 이사나는 간간이 시벨리우스와 자리를 마련하여 티타임을 즐기곤 했다.

그날도 평소처럼 이어지던 휴식시간에, 

무심코 오가던 잡담에서 의외의 사실을 발견한 이사나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시벨리우스의 반응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맞아. 유니콘 세계도 왕족과 평민이 나뉘거든.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인간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왕’의 개념은 아니야.”

“그런게 아니면요?”

“그냥 성스러운 피를 계승하는 자들이야. 단순하게 말해서 신과의 혼혈이지.”

“신(神)이요?”

이미 엘뤼엔이나 마신과의 접촉 덕에 그들이 환상 속의 존재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혼혈이 가능한 거였던가? 이사나의 의문은 금세 풀렸다.

“유니콘들도 엄연히 말해 신족에 가까운 종족이니까 말이야. 

신과의 혼혈이 생겨도 크게 이상할 건 없지. 

아무튼 왕족이란, 유니콘의 신 ‘페가수스’와의 혼혈들이야. 그의 반려인 유니콘이 바로 내 할머니이지.”

“헉! 그렇군요. 뭔가 굉장한데요?”

“그냥 피를 잇고 있다는 것뿐이지, 

대단할 것도 없어. 정작 유니콘을 통치하는 존재는 ‘장로’ 라고 해서 따로 있거든. 

우리는 그냥 상징적인 의미일 뿐이야. 나는 그중에서 제 1계승자였지.”

신과 결합한 반려인 유니콘은 성마로 불린다.

 그리고 그녀가 낳은 첫 번째 아이는 피의 ‘전승자’가 되며, 

그 다음 세대의 아이가 피를 잇는 ‘계승자’가 되는 것이다.

 시벨리우스는 바로 그 계승자들 중에서 가장 첫 번째로 태어난 유니콘이었다.

“말이 좋아 계승자지, 얼마나 짜증난다고. 

내가 그렇게 태어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말이야. 

얼마나 참견하는지 알아? 뭐 하나 하려고 해도 이래선 안 된다, 

저래도 안 된다, 정말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가출을 꿈꿨지.”

“거의 인간세계의 귀족 같은 거군요. 그럼 엘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뭐? ‘엘’ 말이야?”

어리둥절하게 되묻는 시벨리우스에게 이사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엘’이란 사람이 실존인물이라고 하셨잖아요. 두 분이 어떻게 만난 거예요?”

“헤에?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그냥 궁금해져서요. 정말 엘퀴네스랑 똑같이 생겼나요?”

“뭘, 새삼스럽게. 전에 마신이 변했던 것 봤잖아? 그 모습 그대로라고 보면 돼.”

말하면서도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당시 카노스에게 놀림 당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던 것이다. 

그 때문에 엘에게 깊은 상처를 입히고 말았으니, 다시 떠올려봐도 여전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때의 일은 그로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 1순위에 속했다. 

“분명 머리색과 눈동자색만 달랐었죠? 신기해요. 어떻게 그렇게 똑같이 생길 수 있지?”

“그야 둘이 동일인물이니까…….”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무심코 중얼거린 소리에 이사나가 곧바로 반문하자, 

시벨리우스는 당황해서 얼른 고개를 저었다. 

과거의 ‘엘’이 사실은 지금의 엘퀴네스와 동일인물이고, 

자신이 그것을 잠깐이었더라도 착각했따는 사실을 스스로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서둘러 처음 엘을 만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흐음, 첫 만남이라면 역시 그거겠지? 노예시장!”

“네? 노… 예시장이요?”

“아아, 엘이 노예상인들에게 잡혀 있는 걸 내가 구해줬거든. 

정확히 말하면 그때 함께 잡혀 있던 동료들을 구하려던 거였지만.”

“헤에, 그 ‘엘’이란 사람은 굉장히 뛰어난 검사가 아니었나요? 그런데 어째서 노예상인들에게?”

던전에서 보았을 때, ‘엘’은 그 화려한 외모와 뛰어난 무위로 주위사람들을 단번에 매료시켰다. 

비록 그 정체가 마신이긴 했지만 허구로 사실을 일부러 꾸미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벨리우스 역시 적극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뭐, 본인의 말로는 잠깐 방심했다고 하더라고.”

“하지만 그래도 중간에 탈출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아아, 그게 말이지, 그때 당시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거든.”

발견 당시, 엘은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거의 탈진한 상태였다. 

한차례 탈출을 하려고 소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는데, 

그 것이 계기가 되어 노예상인들이 아예 결박해둔 채 종일 굶겼던 것이다(지독한 놈들이 아닌가.).


그때 자신을 처음 보고 그가 꺼냈던 말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해서 잊혀지지가 않았다.

<뭘 봐? 먹을 거 안 줄 거면 꺼져. 쳐다보기도 귀찮아.>

아무리 배가 고파서 힘이 없다지만, 

구해주러 온 사람을 보고 다짜고짜 성질이라니. 그때 당시 시벨리우스는 꽤 황당해 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엘이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그는 어디선가 먹을 것을 구해와 엘 앞에 내밀고 있었다. 

‘이젠 안 가도 되지?’라는 순진한 질문과 함께.

“…뭐랄까, 너무 상황이 잘 연상되어져서 무서울 정도입니다만.”

“쳇! 나도 알아.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고. 아무튼 그렇게 만나게 된 거야. 좀 싱겁지?”

“아뇨, 나름대로 충격적이네요. 그럼 그때부터 같이 여행을 시작하시게 된 건가요?”

“아니. 그리고 일단 헤어졌어. 트로웰 녀석이 홀랑 데려가 버렸거든. 다시 만난 것은 꽤 나중의 일이지.”

“…에? 트로웰님이요?”

놀라서 되묻는 이사나에게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당시의 억울한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대답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난 보호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늑대에게 새끼양을 맡기는 목동은 없잖아?”

“앗! 트로웰님!”

“안녕, 이사나. 쉬고 있는 모양이네?”

“……!!”

그들의 대화에 갑자기 끼어든 자는 다름 아닌 땅의 정령와 트로웰이었다. 

세월을 타지 않고 여전히 소년의 모습인 그를 잠시 노려본 시벨리우스는 빈정거리는 얼굴로 쏘아붙였다.

“흥! 지금쯤 명계의 신과 사랑 놀음에 빠져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줄 알았더니 이곳엔 무슨 일로 오셨을까?”

“페르데스가 매일 한가하기만 한 건 아니거든. 내가 와서 못마땅하면 말해. 

앞으로 천 년 정도는 얼마든지 여기에서 눌러 살아 줄 수도 있으니까.”

“이런 사악한!!”

4천 년 전에나 지금이나, 시벨리우스는 여전히 트로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요 근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이후론 대 놓고 시비를 거는 일도 많아, 

하루에도 몇 번씩 울화통이 터졌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늑대와 새끼 양이라니! 그럼 내가 늑대라도 된다는 소리냐! 난 그저 먹을 것을 가져다준 죄밖에 없다고!”

“후후, 누굴 속이려고? 네 녀석이 엘을 여자로 착각했었잖아? 

적령기의 유니콘 남성이 여자에게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모를 리 없을 텐데?”

“제길! 어쨌든 남자였잖아, 남자! 그리고 덮칠 생각도 없었어!”

“호오, 그래서 그때 있었던 약혼자도 걷어차고 가출한 건가 보지?”

“큭! 아니야! 원래 웰디와는 결혼할 생각도 없었다고! 장로 할아범이 멋대로 결정한 거란 말이닷!”

“그래그래. 그래도 네가 엘에게 첫눈에 반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안그래?”

“젠장 할!”

애초에 말발로 트로웰을 이기려는 게 무리였음을 깨닫지 못하는 건가. 

이사나는 동정이 가득한 눈으로 시벨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오히려 그것이 더 상처가 된다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는 얼굴로.

“헤에, 그럼 트로웰님도 ‘엘’이란 사람과 함께 여행을 다니셨던 건가요?”

“맞아. 너희들은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걸? 덕분에 내가 아직까지 인간을 죽이지 않고 있는 거니까.”

“헉… 트, 트로웰님?”

“하하! 안심해.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으니까. 

앞으로도 엘퀴네스가 너희들에게 호의적인 이상, 내가 직접 이빨을 드러내는 일은 없을 거야.”

“에, 엘퀴네스요?”

여기서 갑자기 엘퀴네스가 왜 거론되는 거지? 

이사나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지만 더 이상 이어지는 설명은 없었다. 왠

지 건드려선 안 되는 영역을 넘본 기분이랄까. 그는 이쯤에서 화제를 돌리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엘퀴네스는 어떤가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나요?”

“응. 아주 깊이 잠들어 있어. 너무 평온해서 깨우기가 미안할 정도로.”

“그렇군요. 부디 무사히 라피스님의 영혼을 찾아오면 좋을 텐데요. 설마 아직도 못 찾은 건 아니겠죠?”

“이 넓은 땅덩어리에서 단 한 개의 보석을 찾은 거니까, 

그리 쉽지는 않을 거야. 덕분에 주변인들만 애가 타지.

 엘뤼엔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정령계에 들러서 얼굴을 보고 갈 정도니까.”

“하긴, 걱정이 많이 되실 만도 하죠. 어디서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모르니…….”

“아아, 그야 그렇지.”

트로웰은 아직 그에게 엘이 과거로 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그에게 

알려주더라도 걱정하는 것은 마찬가지 일 테니 말이다

(아니, 그보다는 그가 안절부절 잘못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재미있어서였지만.).

그가 웃으며 대답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벨리우스는, 

곧 따로 할 말이 있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자 트로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이사나에게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사나, 방금 전에 라온 황자가 알리사한테 프러포즈하는 것 같던데…….”

“뭐라고요! 자,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두분!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순식간에 문 밖으로 사라지는 이사나를 보며 시벨리우스는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보내는 수법도 수준급이군.”

“응? 아니, 정말이었는데. 여기 오기 전에 봤거든.”

“…그런데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하는 거냐!”

“재미있잖아. 후후후!”

“……!!”

이 얼마나 사악한 심성인가! 할 말을 잃고 굳어진 시벨에게, 트로웰은 생긋 웃는 얼굴로 물었다.

“자아~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용건이 없다면 이만 가겠어.”

“앗! 잠깐 기다렷! 그, 그게 실은 말이야.

 지금 생각해보니까 예전에 엘이 뭔가를 찾고 있다고 하는 것 같았거든. 

그게 혹시 라피스 녀석의 영혼의 보석이 아니었나 싶어서…….”

“하아. 내 이럴 줄 알았지. 둔하기는. 그걸 아직도 눈치 못 챈 거야?”

“뭐? 그, 그럼 ‘과거를 거슬러 간 것이’ 이번 일 때문이란 말이야?”

“그럼 또 무슨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한 거지? 휴우~ 이래서 바보랑 대화하는 건 싫다니까.”

“으윽!”

이번만큼은 그도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다 눈치 챌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가! 

그가 낭패감에 신음을 흘리자, 트로웰은 쯧쯧 혀를 차며 다분히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드문드문 기억하는 나도 눈치 채는 일을, 어째서 넌 모르고 있었던 거냐?”

“하지만 그때 엘은 단 한 번도 미래에서 왔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는걸. 

그리고 나도 이상하게 녀석이 뭘 찾고 있었는지 기억이 정확히 나질 않는단 말이야.”

“그래도 보통은 감으로 눈치 챈다고. 아, 잠깐! 그럼 보석을 찾았는지의 여부도 기억을 못하는 건가?”

“맞아. 그 부분은 전혀 생각이 안 나. 넌 뭔가 알고 있어?”

그 말에 트로웰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떠오르는 것은 드문드문 장면의 기억일 뿐이었고, 

그나마도 이어지는 것은 거의 없었다. 

이것 역시 그가 가진 혜안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더 자세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그와 어떻게 헤어졌는지도 몰라?”

“으음, 헤어진 거야… 여행 중에 잠시 마을로 돌아갔다가, 

장로 할아범에게 붙잡혀서 서클렛에 갇힌 게 끝이야.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지.”

“흐음, 그렇군. 역시 넌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었어.”

“우씨! 뭐얏~~! 기껏 대답해줬더니!”

벌게진 얼굴로 소리쳤지만, 이미 트로웰은 한 손을 흔들며 여유있게 문을 나서고 있는 상태였다.

 왠지 처음부터 끝까지 놀림 당했다는 생각에 시벨리우스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야! 너 거기 못 서?! 나중에 엘이 돌아오면 다 이를 거야!”

“네가 꼬맹이냐. 훗! 마음대로 해. 어차피 엘은 내 편일 테니까.”

“크아악! 저 이중인격자 같으니!!”

뒤에서 버럭버럭 소리치는 말을 한쪽 귀로 흘려들으며 트로웰은 가볍게 정령계로 텔레포트했다. 

이사나에게 인사하지 않고 돌아온 일이 마음에 걸렸지만, 

다음에 또 들르면 될 것이다. 

어차피 지금은 라온 황자를 상대로 알리사를 사수하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 말이다.

정령계에 돌아온 즉시 그는 제일 먼저 물의 영역부터 들렀다.

끝없이 펼쳐진 물의 공간, 그 속에서 엘퀴네스는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어린애처럼 보였다.

굳게 잠긴 이 눈은 언제쯤 다시 떠지게 될까?

 그 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트로웰은 문득 낯익은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엘뤼엔이었다.

“…어서와. 요즘은 바쁜일이 없는 모양이지?”

“아아, 아무리 바빠도 여기에 들릴 틈 정도는 있어. 이프리트가 망가뜨린 서류도 이제 거의 다 복구한 상태고.”

“그렇군. 생각보다 빨리 했네? 10년 정도는 걸릴 줄 알았더니.”

“흥! 날 뭘로 보는 거냐? 그 정도 가지고 10년이나 끌 생각은 없다.”

“쿡쿡! 역시 가장 부지런한 신답네.”

악신과의 싸움이 끝난 후 벌써 1년. 

그와 함께 엘이 깊은 잠에 빠진 지도 어느덧 1년이란 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 사이, 신계는 다시 원래의 흐름을 되찾았다. 

소멸한 마신의 빈자리만 없었다면 악신이란 존재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단, 명계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악신에 의해 희생된 1만여 명의 영혼에게, 각자 적당한 내세를 분배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으니까.

덕분에 트로웰은 요 근래 페르데스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는 따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정령계는 너무 무료해. 유희를 나가는 것도 식상하고. 

이럴 때 엘이 돌아와 준다면 참 좋을텐데.”

“미네르바와 이프리트는?”

“둘 다 유희중이야. 간간이 정령계에 들르긴 하짐나.”

“흐응, 혼자서 집 지키느라 고생이 많군.”

“엄밀히 말하면 혼자가 아니지. 엘도 함께니까.”

그는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여전히 깨어날 줄 모르는 엘을 가리켜보았다. 

아아, 그렇군. 엘뤼엔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쯤 깨어나게 될까.”

“글쎄… 중간에 귀환주문이나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군.”

“쿡쿡쿡! 엘이라면 정말 그럴지도.”

다분히 농담조로 대답한 트로웰의 얼굴은 어느새 짙은 근심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유일하게 기대를 걸고 있던 시벨리우스도 엘이 보석을 찾는지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했다.

 결국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그가 신호를 보내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엘, 제발 무사히 돌아와.’

그 순간, 한 신과 한 정령왕은 마음속으로 똑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과연 이 간절함이 육체를 벗어난 그의 영혼에게 닿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엮어지는 마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현저히 떨어진 체력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눌 수도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앉아 있는 것이 힘들어서 맨바닥에 그냥 누워 있을 정도이니 말 다했지 않은가.

아까 전까지만 해도 이것저것 묻고 활기찼던 

내가 쥐죽은 듯 고요해지자 유니콘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던 아렐이란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이봐, 인간. 살아는 있는 건가?”

“…으으, 체력 아껴야 돼요… 말 시키지… 마요…….”

“그래도 대꾸할 기력은 남아 있는 모양이군.”

피식 웃으며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빠직하고 혈압이 돋으려는 것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그게 지금 다 죽어가는 사람한테 할 말이야?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구만, 위로는 못해줄 망정 염장을 지르다니! 

분명 저 녀석은 유니콘 사회에서도 왕따일 거다! 에잇, 가장 헐값에 팔려나기길 기도해버릴 테닷!


내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속 좋은 카리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 여기 인간들도 너무하군요. 

우리들이야 안 먹어도 괜찮다지만, 

엘님은 엄연히 인간인데 식사는 커녕 물조차 주지 않다니.”

“먹고 기운나면 또 난동을 피울까봐 무서운 거겠지. 쳇!

 이 수갑만 어찌 할 수 있다면 이런 마차쯤은…….”

아렐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수갑에 이어진 사슬을 당겼다. 

그래봤자 철거덕거리는 소리만 날뿐,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저걸 아무렇지 않게 끊었던 거 같은데.

 순수한 힘만으로 따지면 내가 저들보다 더 센 건가? 아니면 그때 채워진 수갑이 유달리 불량(?)이었던 걸까.

‘아무래도 좋으니 누가 먹을 것 좀 줘어~~’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염치가 없더라도 엘뤼엔이 왔을 때 수갑까지 풀어달라고 매달릴 걸 그랬다. 

그럼 적어도 정령을 불러서 물이라도 마실 수 있었을 텐데.

혼자 알아서 해결하라고 선언한 뒤론 코빼기조차 비취질 않으니,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지만 말이다.

“저, 저기, 조금만 기운 내요. 엘. 곧 시벨리우스님이 구해주러 오실 거예요.”

“웰디님, 저런 인간에게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지금은 웰디님의 안전이 더 중요합니다.”

“하지만 불쌍하잖아요, 아렐. 저러다 죽을 것 같은걸요.”

“그렇다 해도 그것은 저 인간의 운명인 겁니다. 웰디님께서 마음 쓰실 것이 아닙니다.”

정말 저 아렐이란 유니콘은 어디서 미운 말만 골라 하는 재주라도 익힌 모양이다. 

어쩜 저렇게 살심이 새록새록 돋아나는 소리만 떠들어 대는 걸까.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덜컥덜컥 굴러가던 마차가 어느 순간 떡하고 멈추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차가 멈췄다?!”

“식사하려는 것일까요?”

이전에도 종종 식사 때문에 행렬을 멈추곤 했기 때문에, 

카리안은 이번에도 그러한 것 이라 생각한 듯했다.

그에 비해 아렐은 마차에 뚫려 있는 두 개의 구멍으로 다가가 유심히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시 후 이어지는 대답은 결코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아니, 틀렸어. 아무래도…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군.”

“……!!”

“네? 그럼 벌써 노예시장에 왔다는 말인가요?”

놀란 표정으로 굳어버린 카리안과 경악한 웰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렐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웰디를 보호하려는 듯 잽싸게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카리안 또한 경계하는 눈빛으로 마차의 문만을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저벅저벅.

얼마 후, 다수의 발소리가 점점 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우리를 다른 곳으로 옮길 작정인 듯했다. 

인기척이 커질수록 새하얗게 질려가는 웰디의 모습에, 아렐은 한탄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 여기까지 온 건가… 아무래도 장로께선 제 1계승자님을 보내시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 모양이군.”

“그럴 수가. 하, 할아버님이 어떻게… 흐흑!”

“아직 포기하기엔 이릅니다, 아렐. 웰디님도 진정하십시오. 

지금 오시고 계시는 중일 수도 있잖습니까? 그때까지 우리가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

양손과 발에 수갑이 채워진 상태로 뭘 어떻게 지키겠다고? 

게다가 그 사이에 늘어진 사슬의 길이가 그렇게 긴 편도 아니었다. 

걷는 것도 불편할 상태인데 과연 여자까지 보호할 수 있을까?

덜컥덜컥!

불안한 마음과는 관계없이, 마차의 문이 열리는 순간은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자물쇠를 푸는 소리가 들리자 아렐은 좀 더 웰디의 옆에 바짝 붙어 섰고, 

카리안 또한 슬쩍 자세를 낮추며 마치 덤벼들 듯한 태도를 취했다. 문이 열리면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듯한 기세였다.

그러는 동안 난 뭘 했냐고? 빤한 걸 왜 묻는가? 힘이 없어서 그냥 누워 있었지.

사실 지금 같아서는 먹을 것만 준다면 당장 노예로 팔려간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이대로 죽는 것보다야 구차하게라도 목숨을 연명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뭐, 그것도 배가 부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겠지만.’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동안 자물쇠가 다 풀렸는지 육중한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끼이익! 소리와 함께 마차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미리 대비하고 있던 카리안의 몸이 마치 총알처럼 쏘아져나갔다.

“자~ 드디어 도착… 으악!! 뭐, 뭐야!!”

퍽! 쿠웅!!

“으아악!!”

놀랍게도 카리안은 못 쓰는 손과 발을 대신해 온몸을 이용하여 노예상인들에게 맞부딪치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한 사람을 깔아뭉갠 후 그는 재빨리 마차 안, 즉 이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지금입니다. 아렐! 어서 웰디님을!!”

끄덕!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아렐은 잠시 나를 보고 머뭇거리는 듯했으나, 

곧 웰디를 데리고 잽싸게 마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사슬을 매달고도 저렇게 뛸 수 있다니, 유니콘들은 운동신경이 굉장히 좋은 모양이다.


반면, 노예상인들 쪽은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당황하여 연신 소리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유, 유니콘들의 밧줄이 풀어졌다!! 놈들이 도망간다! 어서 잡아!!”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다들 뭐하고 있는 거야!!”

“제길,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결박을 어떻게 푼 거지?”

“앗! 나머지 한 녀석은? 마지막에 넣은 아이는 어디에 있나? 설마 같이 도망친 건 아니겠지?”

낭패감이 가득한 대화가 오간 후, 누군가가 마차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다급하게 휙휙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곧 마차 바닥에 힘없이 누워있는 나를 발견하곤 기쁨에 겨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 꼬맹이는 여기 있어! 기운이 없어서 도망치지 못한 것 같아!”

“헤엣, 그렇군! 다른 녀석들도 멀리 가진 못할 거다. 

용병들이 쫓아갔으니 곧 잡힐 게 틀림없어. 일단 소년부터 옮기도록 하지!”

그들은 추욱 늘어진 나를 안아서 어디론가 옮기기 시작했다. 

갇힌 뒤 며칠 만에 보는지 모를 햇빛이 따갑게 피부를 피고들었다. 

잠시 후, 침낭 같은 것에 뉘인 후에도 내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노예상인들은 슬슬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지? 너무 비실거리잖아.”

“밥은 그렇다 쳐도 물까지 안 준건 너무 심했나? 이러다 죽으면 말짱 꽝인데.”

“쯧! 어서 뭐라도 좀 먹여봐. 죽이면 다들 가만 안 둘 줄 알아.”

“아, 알았어.”

더듬거리며 대답한 남자가 서둘러 뭐라고 지시하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움직임 역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마도 그 사이에 잠시 의식을 잃었던 듯, 

나는 갑자기 입가에 떨어지는 차가운 물의 감촉에 흠칫 놀라 눈을 떴다. 

그러자 내게 물을 주고 있던 남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 느껴졌다.

“드디어 깨어났군. 거의 반나절 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다. 

얼른 마셔라. 물을 마시면 조금이나마 나아질 거다.”

“…아.”

“쯧쯧! 그러게 얌전히 있었으면 이런 꼴도 안 당하잖냐. 

왜 그 소란을 피워서 고생을 사서 하는 건지. 다 마시면 스프를 가져다 줄 테니 기다려라.”

“여기는…?”

그제야 제대로 돌아본 공간은, 마치 유목민이 이동하면서 사용하는 천막과 비슷했다. 

바닥 전체에 깔려진 부드러운 쿠션과 짙게 내려온 붉은 색의 휘장이 몹시 화려한 것만 빼면 말이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들고 있던 물 컵을 건네준 남자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노예시장 안이지. 여긴 네게 배정된 방이다. 

야단났군. 조금 후면 손님들이 들이닥칠 텐데 맞을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잖아. 그놈의 유니콘들 때문에…….”

“유니콘들? 아! 그들은 어떻게 됐지? 설마 잡힌 건가?”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그런 수갑을 달고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게다가 이곳은 이미 시장안이라, 사방이 우리 편이라고.”

결국 실패한 건가. 적어도 그들만이라도 무사히 빠져나갔기를 바랐었는데, 

역시 세상은 마음먹을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모양이다.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무는 내게, 남자는 의외의 사실을 알려주었다.

“유니콘 중에 계집애가 하나 있었지? 바로 이 옆 천막에 있다고 하더군.”

“옆이라고? 다른 자들은?”

“뭐, 적당히 알아서 분배됐겠지. 

행여나 엉뚱한 마음은 접는 게 좋아. 이곳은 너 하나가 날뛴다고 탈출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곳이 아니거든.”

“…….”

본래 세이크 제국은 타 종족을 포함하여, 

죄 없는 인간을 노예로 삼는 행위를 엄격하게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귀족중에서는 반드시 노예를 얻으려는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고, 

그런 사람들을 위한 어둠의 푸트 역시 당연히 존재하기 마련.

지금 내가 끌려온 이 레피르라는 곳이 바로 그런 류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도시였다.

이곳은 한 달에 한 번씩 축제를 가장한 노예시장을 열어 그때 벌어들인 수익으로 먹고 살았다. 

그 규모가 상당히 크기 때문에 이미 정체를 알고 있는 자들도 꽤 되는 모양이지만, 대부분 눈감고 모른 척하기가 일쑤였다.

당연하다. 이것이 발각되면 당연히 토벌군대가 와서 진압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노예를 얻는 수단 역시 사라지게 되는데, 어느 귀족들이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보겠는가.

요컨대 황제와 몇몇 외곬의 귀족들에게만 소문이 들어가지 않으면 된다는 식인 것이다.

‘아니, 어쩌면 황제도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걸지도 모르지.’

그 역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에 나는 찌푸린 표정으로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아무튼 어딜 가나 이놈의 정치인들(?)이 문제라니까. 설마 이사나도 이런 몹쓸 인간으로 자라는 건 아니겠지?

어쨌든 그러한 관계로 일단 이곳에 노예로 잡혀온 자는 쉽게 도망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물을 마시고 나서인지 한결 몸에 기운이 솟은 나는, 

이제부터 어떻게 탈출할지에 대해 궁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시 후, 갑자기 천막의 휘장을 걷고 들어온 웬 여인네들에 의해 그 생각도 곧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누, 누구세요?”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들은 다짜고짜 내 옆에 앉아,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번쩍번쩍한 장신구들을 갖다 대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거라 나는 기겁을 해서 소리쳤다.

“자, 잠깐만요! 뭣들 하는 거예요?”

“지금부터는 치장을 해야 합니다. 얌전히 있어 주세요.”

“치, 치장?”

아니, 이 사람들아! 이제 겨우 물마시고 정신 차린 사람을 치장해서 뭐에 쓰겠다는 거야?

하지만 내가 황당해 하든 말든, 그녀들은 묵묵히 자신들의 할일만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클린 마법을 이용하여 땀과 먼지로 지저분해진 내 몸을 청결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곤 웬 정체를 알 수 없는 비즈 장식들을 꺼내놓고 이것저것 머리를 다듬더니, 

아무리 봐도 속이 거의 다 비치는 천 쪼가리를 들이밀며 날 더러 입으라고 내주는 것이 아닌가

(천도 아니고 천 ‘쪼가리’다.).

“이걸 입으라고? 당신들 죄다 미쳤어요? 내가 무슨 포르노 배우인 줄 알아?”

“그레모리님의 명령입니다. 저희들은 그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내가 알게 뭐야! 절대 안 입어!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난 남자라구요!”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글쎄, 곤란한 건 나도 마찬가지야!” 

“후우… 어쩔 수 없군요.”

그렇게 말하기에 나는 처음엔 그냥 순순히 포기하려나 보다 했다. 

그런데 웬걸! 오히려 눈에 투지를 일으키며 옆에 있던 다른 여자들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닌가!

“얘들아! 잡아라!”

“네!”

“으악! 무슨 짓이야!!”

여자의 힘이라고 해서 무시할 게 아니라는 걸 나는 이 순간 뼈저리게 느끼고 말았다.

 뭔 놈의 힘들이 그렇게 센지, 꽉 눌려진 온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상태에서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에, 나는 머릿속의 핏기가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직접 갈아입혀 드리겠습니다.”

“……!!”

이 여자는 미친 거다! 미친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다 큰 남자의 옷을 갈아입히겠다는 망언을 함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예의 하늘하늘한 천 조각을 들고 점점 내게 다가오는 여자를 본 순간,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아아아악! 싫어어어어어!!!”

“뭐, 뭐야? 무슨일이야?!”

내 비명소리에 화들짝 놀라 들어온 것은 처음 정신이 들었을 때 물 컵을 건네줬던 남자였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광경

(여자들이 나를 억압한 채 억지로 옷을 갈아입히려는 상황)을 보더니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그거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뭘 하고 있는 거야? 밖에 까지 비명소리가 쩌렁쩌렁하다고.”

“죄, 죄송합니다, 자칸님. 이 소년이 옷을 갈아입는 것을 거부해서…….”

“그렇담 잘 달래야지, 소리를 치게 만들어? 이것 때문에 우리 상단의 이미지가 나빠지면 어쩔 거야? 잘들 좀 해봐.”

“네, 명심하겠습니다.”

“난 죽어도 그거 안 입어!!”

내가 질세라 버럭 소리를 지르자, 

자칸이라고 불린 남자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스쳐갔다. 

그러더니 마치 어린애를 달래는 것 같은 말투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봐, 꼬맹아, 어차피 넌 상품이고, 높은 가격에 팔리기 위한 치장단계는 필수라고. 

이런 식으로 고집을 피워봤자 서로 피곤하기만 하다는 소리야. 이제 그만 포기하고 고분고분해질 수 없는 거냐?”

“멀쩡한 사람을 납치한 주제에 멋대로 상품 취급 하지 마! 누굴 변태로 알아? 저렇게 비치는 걸 어떻게 입어?”

“이 정도가 뭐가 비친다는 거야? 딱 적당하구만.”

“호오, 그러셔? 그럼 당신이 한번 입어봐. 그거 입고 돌아다니면 나도 그 정성을 봐서 입어주지.”

“…….”

내 말에 자칸은 대꾸할 용기가 안나는 모양이다. 나는 그 모습을 마음껏 비웃어주었다.

“당신도 못 입겠지? 그치? 그러면서 날더러 입으라고? 헹! 메렁이닷!”

“…고작 물 하나 마시고 기운이 펄펄 솟는 모양인데, 너 자꾸 그럼 이따 스프 안 줄 줄 알아. 그래도 안 입을래?”

“……!!”

이런 치사한 작자들을 보았나! 말이 안 통할 것 같으니까 먹을 것을 가지고 협박하다니! 

보통 때라면 당연히 거절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아사직전까지 갔었기에 음식을 이용한 공격은 치명적이었다.

결국 난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가 내미는 옷가지들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하하하! 잘 생각했다. 단언하건대, 

그걸 입으면 귀족 나으리들이 서로 데려가려고 싸우게 될 거다.

 넌 얼굴 하나는 제법 봐줄 만하니까 말이다.”

“하나도 안 기쁘네요! 젠장”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하늘하늘한 옷 조각을 휘날리며 탈출할 나의 모습이었다. 

이 곳에서야 그렇다 치고, 마을이나 길거리를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 큰 남자가 란제리 속옷 같은(그것도 안이 다 비치는) 옷을 입고 맨발로 뛰어다닌 다라… 

공개적인 변태로 찍혀서 수배당하는 게 아닐까.

게다가 지금은 혹한 강풍이 몰아치는 겨울. 잘못하면 도망은 커녕 동사?(?死)로 사망할지도 모른다.

이런 걸 정말 입어야 할까. 나는 한동안 음식과 내 최소한의 자존심 사이에서 어느 것을 택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 문득 문 밖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저어,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직 준비가…….”

“노예들을 치장하는 것이야 다 똑같은 게 아닌가. 

난 치장하기 전의 모습을 보고 싶다. 화려한 치장에 속아 샀다가 나중에 후회한 적이 한두 번인 줄 알아?”

“하, 하지만 이왕이면 아름답게 포장된 것이…….” 

“필요 없다고 하였다. 어서 이 휘장이나 걷어라. 안에 있는 노예의 얼굴의 봐야겠다.”

들려온 것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30대 중반을 넘지 않은 듯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자들과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지자, 

옆에서 나에게 옷을 갈아입기를 강요하던 자칸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이크! 벌써 오신 건가. 이, 이걸 어쩌나! 아직 옷도 입지 못했는데.”

“누군데?”

“당연히 노예를 사러 오신 귀족 분이시지, 누구긴 누구냐?”

“이렇게 빨리? 노예시장이라는 게 오자마자 시작하는 거였어?”

“일반노예들의 매매는 좀 늦은 편이지만,

 상등품은 경매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거든. 

자격을 가진 귀족만이 이곳까지 들어올 수 있고, 원하는 노예를 선택해서 돈을 지불하는 식이지.”

“에, 그럼 나 지금 팔리는 거야?”

당황해서 묻는 말에 자칸은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 넌 아직 이야. 

노예로서의 자각이 없음은 물론, 무엇보다 요 며칠 사이에 너무 말랐어. 

뭐라도 먹어서 살이 쪄야 보기도 좋지. 지금 팔았다간 부실한 걸 보냈다고 경을 칠걸?”

“흐응, 그럼 왜 여기에 오는 건데?”

“그냥 둘러보시는 김에 들르시는 것 같군.

 나 참, 할 수 없지. 내가 잠시 시간을 끌 테니까 그동안 너는 얼른 옷을 갈아입어. 알았지?”

“네, 네~”

자격을 가진 귀족이라면 지위가 어느 정도 된다는 거지?

나는 약간 사소한 의문을 삼키며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입고 있던 상의의 끈을 풀어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심정이랄까(꽤 위험한 생각일지도.).

하지만 밖에 있던 손님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고집불통이었던 모양이다.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라는 처절한 자칸의 외침을 무시하고,

 벌컥 휘장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마치 엄한 사극의 한 편을 보는 듯 했다.).

그때 마침 겉옷을 거의 벗고 있었던 나는 놀라서 딱 굳어버렸고, 

그와 동시에 남자를 뒤따라 들어온 자칸이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루시엘님, 정말 이러시면 난처합니다. 아직 이 노예는 준비가…….”

“조용히. 방해된다.”

“앗! 죄, 죄송합니다.”

방해는 무신. 그냥 얼굴만 쭈욱 쳐다보는 것뿐이면서. 

상인 측의 입장을 가뿐히 무시하고 들어온 남자는 예상대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어깨까지 내려온 은회색의 머리카락과 노란빛이 도는 눈동자, 

뚜렷한 얼굴 윤곽 탓인지 전체적으로 냉막한 분위기가 풍겼다.

뛰어나게 잘생긴 건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봐줄 만한 얼굴이랄까.

그는 묘한 표정으로 굳어있는 나를 훑어보더니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자칸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아직 어리군. 소년인가?”

“네, 네, 그렇습니다 .아주 아름다워서 소녀로 오해할 정도지만이요.”

“그런데 너무 말랐군. 먹을 것은 제대로 주기는 한 건가?”

“아무렴요! 저래 봬도 무척 건강하답니다. 마른 것은 단순히 체질인 것 같더라구요. 하하하!”

웃는 얼굴로 저런 망언을 내뱉다니, 하늘이 무섭지 않나 보다. 

대체 언제 너희들이 먹을 걸 제대로 줬다는 거야? 

바로 조금 전까지 기절했다가 물 한 모금에 기사회생한 것을 잊어버린 건가?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자 자칸은 찔끔한 얼굴로 얼른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찔리기는 하는 모양이지?

루시엘이라 불린 귀족 남자는 그 외에도 이것저것 나를 훑어보더니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를 듣고 말았다.

“괜찮은 것 같군. 이 아이로 하겠다.”

“네, 네에? 아, 저, 그, 그것이…….”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실은… 이 아이는 아직 다른 사람을 섬길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충분한 교육을 시켜야…….”

“흐응, 그런 것이야 얼마든지 내 저택의 하인들에게 시키면 그만이다.”

“그, 그것도 그렇지만… 그, 그렇지 마시고 다른 노예를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실은 이번 노예 중에 암컷 유니콘이 들어왔거든요. 보시면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호오, 암컷 말인가? 대단하군.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여자라는 말에 호기심이 동한 듯, 남자의 얼굴에 옅은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그것을 기회 삼아 자칸은 연신 자랑을 늘어놓기 바빴다.

“이번에 저희가 상당히 무리했습죠. 그 외에도 좋은 물건들이 많습니다. 천천히 둘러보시고 골라보시지요.”

“암컷 유니콘이라니 꽤나 흥미롭긴 하군.”

“그럼은요! 생긴 건 또 얼마나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지! 

달빛 같은 은발에 루비같이 붉은 눈동자랍니다! 한 번 보시면 결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허걱! 저러다 설마 웰디가 저 남자한테 팔려가는 건 아니겠지? 

시벨리우스의 약혼녀라는 말을 들어서일까. 

대화라고는 거의 해본 적도 없고, 그나마도 캄캄한 마차에 갇혀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지만, 

나는 슬그머니 그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가 이런 심정인데 세라핀들은 지금 심정이 오죽할까.

하지만 놀랍게도 루시엘이란 남자의 입에서 나온 대다은 ‘NO!'였다.

“흥미는 있지만 난 아무래도 이쪽이 더 나을 것 같군. 

유니콘들은 너무 드센데다, 철장에 가둬두지 않으면 탈출의 위험이 많아서 관리가 귀찮다.”

“아이고,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수컷들이야 그럴지도 모르지만, 암컷은 상당히 얌전하답니다.”

“암컷이라면 유니콘들 중에서도 꽤 귀한 존재라 들었다. 

그것을 구하기 위해 다른 유니콘들이 찾아올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번거로운 문제는 딱 질색이야. 난 역시 이쪽의 아이가 더 마음에 드는군.”

“그, 그래도 일단은 보시고 선택을 하심이…….”

자칸의 얼굴은 이제 거의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훗날 당할 문책이 무서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뭔가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는 곧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사실 이 아이도 지금은 저리 얌전해 보이지만 성질이 꽤 있습니다. 

도중에 탈출까지 시도한 전적이 있어서 얼마나 애를 먹였다구요.”

“호오, 그래? 그러고 보니 마나 제어용 팔찌가 채워져 있군, 설마 마법사인가?”

“아니요! 그게… 정령사입니다만.”

“정령사?”

그러자 시큰둥하게 듣고 있던 남자의 눈에 번쩍하고 불꽃이 튀었다.

 그는 재미있다는 시선으로 나를 훑어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욱 더 마음에 드는군. 이 아이로 결정했다.”

“헉! 루, 루시엘님!!”

“왜 그러지? 정령사 같은 까다로운 능력자를 다룰 수 있는 자는 귀족 중에서도 별로 없다. 

내게 파는 것이 너희들에게도 유리 할 텐데?”

“그, 그야 그렇습니다만. 실은… 정령을 다루는 것 말고도 또 다른 골치 아픈 문제가…….”

“아는 대로 말하라. 시간을 끄는 건 딱 질색이니까.”

대체 루시엘이란 남자의 신분이 무엇이기에 저렇게 쩔쩔매는 걸까. 

자작 이상의 귀족일 것은 확실했지만, 겉모습만드로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재촉하는 그의 시선을 못 이긴 자칸은 에라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고 설명을 털어놓았다.

“시, 실은 검술이 꽤 뛰어납니다.”

“호오, 검까지 다룬다는 건가? 겉보기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실력은 어느 정도나 되지?”

“그, 그게… 용병단 전체를 상대로도 우세했었습니다만.”

“…용병단? 내가 알기론 한 단의 숫자가 20명은 넘는다고 들었는데. 그 숫자를 감당한다는 말인가?”

무척 놀란 얼굴로 묻는 말에 자칸은 자포자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 소문이 퍼지면 날 사갈 사람이 없을 테니, 저들 딴에는 막심한 손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남자는 강적이었다.



“내가 사지.”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 네, 네에?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정령사에 장정 20명을 가볍게 제압하는 검사. 

보통 제정신을 가진 인간이라면, 노예에게 목숨을 잃고 싶지 않은 이상 외면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루시엘이란 남자는 겁이 없는 건지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건지 여전히 날 사고 싶다는 의사를 굽힐 줄 몰랐다.

당연히 포기하리라 생각했던 나로선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지는 순간이었다(그것은 자칸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그는 놀라는 우리 둘의 표정을 감상하며 여유 있게 대답했다.

“내가 산다고 했다. 몇 가지 걸리는 점이 있긴 하지만, 저 정도의 외모라면 무난히 봐줄 수 있을 것 같군.”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그렇다. 이곳 상단의 주인인 그레모리에게 그렇게 알려라.”

“아, 알겠습니다! 당장 가서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자칸은 감격에 겨운 얼굴로 얼른 뛰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남자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 하지만 역시 검을 다룰 줄 안다는 건 조금 불편하군. 사슬을 계속 채워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차피 내가 살 것이니 조금 손을 봐도 괜찮겠는가?”

“예, 예? 소, 손을요?”

‘어떻게?’라는 반문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허리춤에서 시퍼런 장검을 뽑아들었던 것이다. 

그저 단순히 폼으로 꺼냈다기에는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본능적으로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몸을 뒤로 주춤거렸다. 그러자 남자의 눈에 옅은 감탄의 빛이 흘러갔다.

“눈치도 제법 괜찮군. 이 정도라면 조금만 훈련을 시키면 금세 길들일 수 있겠어.”

“그, 그야 그렇지만, 대, 대체 뭘 하시려고?”

“아아, 별거 아니다. 손목과 발목의 힘줄을 끊으려는 것뿐이니까.”

“……!!”

그게 뭐가 별거 아니야!!

아무렇지 않게 살벌한 말을 뱉어낸 남자의 모습에 나는 그대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자칸 또한 놀랐는지 휘둥그렇게 된 눈으로 되물었다.

“힘줄을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걷는 것이나 일상생활에서는 크게 지장이 없을 테니까.

 단, 앞으로 평생 동안 검을 쓸 수 없을 테지만.”

“헤에, 그런 것이었습니까? 그것 참 괜찮은 방법이군요!”

괜찮기는 개뿔!! 이것들이 누굴 호구로 아나? 

내가 설마 가만히 앉아서 당해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뒤로 물러서자 남자의 입가엔 더욱 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리곤 어울리지도 않는 자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별로 아프진 않을 거니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된다. 아주 잠깐 따끔할 뿐이야.”

“그래! 루시엘님은 세이크 제국에서 알아주는 검사이시거든! 얌전히 있으면 금방 끝날 거다.”

저런 십중팔구 거짓말일 게 분명한 말을 날더러 믿으라고? 

단순히 인대가 늘어나기만 해도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데 힘줄을 끊는 것이 어떻게 잠깐 ‘따끔’하고 만다는 거야!

검을 든 남자가 점점 다가오는 것을 본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들고 있던 천 쪼가리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가까이 오지마!!”

“헛, 이, 이봐! 이분이 뉘신 줄 알고!”

“시끄럿! 귀족이면 다야? 누구 맘대로 남의 힘줄을 끊어? 더 이상 다가오지마!”

“이, 이런! 저 녀석이 눈에 뵈는 게 없나… 죄, 죄송합니다, 루시엘님. 입버릇이 좀 험해서…….”

자칸은 낭패 어린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에 비해 귀족 남자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이었다.

“흐응, 괜찮다. 수준급의 능력자에 저 정도 외모라면 성격이 드센 게 당연하니까. 

오히려 지금까지 얌전히 있던 게 더 이상했으니. 제법 길들이는 맛도 있을 것 같군.”

“그렇게 봐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이것들 다 변태 아니야! 길들이긴 뭘 길들이고, 감사하긴 뭘 감사해!”

도대체가 자신도 검을 드는 입장이면서, 

어떻게 상대편의 힘줄을 끊을 생각을 저렇게 쉽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검사가 검을 다루지 못하게 되었을 때 맛볼 절망감을 생각이나 해보고 지껄이는 걸까?

어차피 노예로 팔린다면 좀 뚱뚱하고 못생기더라도 여자쪽이 더 낫다. 

저런 남자 밑에서 애완동물 취급당할 생각을 전혀 없단 말씀이다, 이거야!

내가 버럭버럭 소리치자 루시엘이란 남자는 이곳에 온 후로 처음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곧 옆에 있던 자칸에게 무심한 말투로 명령을 내렸다.

“반항이 좀 심할 것 같군. 사람을 시켜서 붙잡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거기 밖에 있는 녀석! 한 3명만 들어와라.”

“부르셨습니까, 자칸님.”

자칸의 부름을 받고 들어온 남자들은 한눈에 봐도 우락부락한 덩치들이었다. 

내가 그들을 보고 새하얗게 얼굴을 굳히자, 그는 얄미울 정도로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가리켜 보였다.

“저 아이의 팔 다리를 잡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라. 지금부터 루시엘님이 힘줄을 끊으실 거다.

“예, 알겠습니다.”

“으아악! 싫어! 이거 놔앗!!”

누누이 말해두지만 난 물 한모금 마신 것 외에는 여전히 속이 허전한 상태였다.

 가뜩이나 기운이 없는 몸에 3명의 덩치가 힘으로 눌러 내리니, 꼼짝도 못하고 그대로 잡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귀족 남자는 그 모습을 만족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가볍게 휘두른 검날을 내 앞에 치켜세웠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엉뚱한 곳을 자르게 될지도 모른다. 

치료는 신관을 통해 금방 시킬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나머지 길들이는 것은 내 저택에 도착해서 해도 늦지 않겠지.”

“싫어! 놔! 이거놔!! 너희들 전부 다 죽여 버릴 거얏!!”

“흐음, 확실히 입이 험하군. 그렐 녀석이 잘 훈련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는걸.”

“그렐이라면… 루시엘님 저택의 집사 분 말씀이십니까? 그러고 보니 오늘은 같이 오시지 않으셨군요.”

“아아, 귀찮아서 말이다. 그 녀석은 잔소리가 많아서 성가셔.”

“하하! 그렐님이 무척 서운해 하시겠습니다.”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주인의 일에 일일이 참견하는 종은 아무리 쓸 만해도 피곤한 법이지.”

사람을 비참한 상태로 만들어두고 저들끼리 한가한 잡담이라니! 이

래서 귀족놈들이 싫다니까! 아등바등 몸을 움직일수록 위에서 눌러 내리는 힘은 더욱 더 커졌다.

그들은 내 눈앞이 노래질 정도가 돼서야 간신히 숨을 트이게 만들어주었다.

“자아, 그럼 시작해볼까?”

그 순간, 검에서 흐르는 싸늘한 예기에 나는 몸을 움찔 떨었다. 

저 녀석은 지금 진심으로 힘줄을 자를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쉬이익!

높게 쳐든 검날이 공기를 가르며 내게 내려오는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고 소리쳤다.

“살려줘, 아버지!!”

촤아악!

챙강!

“큭! 뭐지?”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기적은 존재 한다’ 였다.

갑자기 터져 나온 물보라에 의해 귀족 남자가 들고 있던 검을 놓친 것이다.

놀라서 부릅뜬 내 눈앞에는 자연체의 모습인 엘뤼엔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당황하는 귀족 남자와 나를 붙들고 있는 남자들을 둘러보며 못마땅하게 중얼거렸다.

-알아서 해결하랬더니, 갈수록 태산이로군.

‘아, 아버지?’

-그놈의 ‘아버지’란 호칭은 또냐. 너란 녀석도 정말 어쩔 수 없군.

‘왜 이제야 나타나는 거얏!!’

-호오, 구해줘도 불만인 모양이지? 다시 갈까?

‘헉, 아,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한가하게 그와 대화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모처럼 위기를 모면한 것은 좋았지만, 

곧 무시무시할 정도로 살벌한 얼굴을 한 루시엘과 마주해야 했던 것이다.

검을 놓친 것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것인지, 

그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물러나게 한 뒤 한 손으로 내 목을 잡아 눌렀다.

콰앙!

“큭……!”

아무래도 녀석은 방금 전에 물을 쏘아 보낸 것이 나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평범한 인간에게는 자연체의 정령들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다.

으르렁거리듯 낮게 묻는 목소리에 나보다 자칸이 더욱 겁에 질려 몸을 떨었다.

그는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어떻게든 사태를 진정시켜 보려는 듯했다.

“루, 루시엘님, 일단 진정을… 녀석이 사술을 쓸 리가 없습니다! 마나 제어용 팔찌를 착용하고 있는걸요.”

“흥! 그럼 방금 일어난 사태가 단지 우연이라는 소리인가?”

“그, 그건…….”

“내 눈이 틀리지 않다면, 지금 이 아이는 뭔가 또 다른 능력을 숨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자아,

 이대로 목이 부러져서 죽고 싶지 않다면 솔직하게 대답해라. 난 그다지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니까.”

“윽! 이것… 놔앗!!”

무지막지한 손아귀에 놀란 나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그럴수록 내리누르는 힘만 강해질 뿐이었다.

내가 아등바등거리는 모습을 본 엘뤼엔은 한심하다는 듯이 낮게 혀를 찼다. 

그 옆에는 어느새 나타난 트로웰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고 있지만 말고 뭔가 반격을 해보지 그래?

-맞아, 엘~ 계속 이 상태로 있다간 죽는다고. 그래도 좋아?

-고통을 즐기는 걸지도 모르지.

-그러게 말이야. 꽤 아플 텐데 용케 참고 있네. 나 같음 벌써 떨치고 일어났을 텐데.

빠직!

대체 이 정령왕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사이가 좋았단 말인가. 

아주 척척 맞는 호흡을 자랑하는 그 모습에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소리쳤다(물론 속으로).

‘누군 반격을 하기 싫어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이 화상들아!!’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내뱉은 즉시 후회했다. 

엘뤼엔의 입가에 피식! 하고 잔뜩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던 것이다.

-호오, 그럼 그대로 계속 있어보든가.

-왜? 엘이 뭐라고 했는데?

-알아서 살아날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군.

-헤에, 정말? 꽤 용감한데? 그럼 우리는 여기서 쭈욱 구경하고 있을게, 엘! 잘해봐!

상큼하게 파이팅을 외쳐주는 그 모습에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목숨이 오가는 순간도 이들에겐 그저 가벼운 장난으로만 느껴지는 걸까.

그 사이, 루시엘은 내 목을 조르는 손에 더욱 강한 힘을 가하고 있었다.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에 나는 옅은 신음만 뱉어냈다.

“크윽……!”

“굉장히 고집이 세군. 어서 말하는 편이 좋을 텐데? 

여기서 더 힘을 주면 너 목은 부러진다. 그래도 좋은가?”

“루, 루시엘님, 고정하십시오. 일단 차분히 대화를…….”

“네놈은 끼어들지 말아라.”

“헙! 죄, 죄송합니다.”

‘윽. 의, 의식이…….’

아까 힘줄을 끊는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이 루시엘이란 남자는 차가운 얼굴만큼이나 냉정한 성격인 듯했다. 

무섭게 옭아메는 손을 밀어내며 옅은 숨을 뱉어내던 나는, 점점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을 깨닫고 낭패감을 느꼈다.

‘이대로 기절하면 죽을지도…….’

왠지 지켜보는 두 정령왕들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져 있는 듯한 것은 착각일?.

그리고 다음 순간, 기대하지도 않았던 ‘두 번째 기적’이 일어났다.



라반 루 웰디. 

그녀는 암컷이 그리 흔하지 않은 유니콘 종족의 얼마 되지 않는 여성임과 동시에,

 마을을 통치하는 장로 류렌의 단 하나뿐인 외손녀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유니콘 종족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성이기도 했다.

절세가인(絶世佳人)이라고 하던가.

그녀의 달빛을 머금은 듯한 새하얀 은발과 새빨간 루비같은 눈동자는 뭇 유니콘 남성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녀가 가는 길엔 어김없이 수많은 청년들의 구애가 이어질 정도였다.

이 사실은 장로인 류렌이 그녀를 과보호하는 데 중요한 이유가 되었고, 

덕분에 그녀는 성년식을 치르고도 단 한 번도 마을 밖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웰디는 그 부분이 불만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왜 저는 인간세상을 구경할 수 없다는 거죠? 

저도 유니콘이 아닌 다른 종족과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단 말이에요!”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하소연한 끝에, 

그녀는 결국 할아버지로부터 2박 3일간의 자유를 허락받았다.

 두 명의 세라핀이 동행한 외출이었지만, 놀러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한 그녀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웰디는 자신의 실책을 깊이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류렌의 말처럼 마을 밖의 세상은 아직 어리고 순진한 그녀가 감당 할 수 없는 곳이었던 것이다.

“흑흑… 할아버지…….”

이제와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웰디는 끊임없이 흐느꼈다. 

마차 안에서는 그나마 위로해주었던 세라핀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낯선 방 안에 오직 그녀 혼자뿐이었다.

마차안에서 도망친 보람도 없이, 그들은 너무 쉽게 잡히고 말았다. 

본체가 아닌 유니콘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약했을 뿐더러 사방에 적이 너무 많았던 탓이다.

대체 왜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웰디는 처음 잡혔던 때의 일을 회상했다.



“와아! 굉장해! 이게 인간들이 사는 곳이구나!”

그녀가 처음으로 본 인간세상은 온통 신기한 것 투성이였다. 

수많은 사람들과 높은 건물들, 무엇보다 여자의 숫자가 많은 것도 신기했다. 

옆에서 두 세라핀이 계속 주의를 주고 있었지만, 

그런 소리도 제대로 안 들릴 만큼 그녀는 인간세상의 문화에 푹 빠져 있었다.

“아시겠습니까, 웰디님? 종족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절대 유니콘이라고 대답하시면 안 됩니다.”

“네네, 알았어요, 아렐. 기억하고 있다구요.”

“그렇게 건성으로 대답하실 게 아닙니다. 인간들은 웰디님이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위험합니다. 

그들은 우리 유니콘이 본체가 아닐 땐 마법 빼곤 별 볼일이 없어진다는 사실도 아주 잘 알고 있죠. 

그것을 노리고 잡으려는 인간들도 있습니다.”

“글쎄, 잘 알았다니?요! 몇 번이나 말하지 말아요.”

사실 유니콘은 엘프만큼이나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은 종족이었다. 

따라서 종족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너무도 쉽게 정체를 밝히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세라핀들은 연신 주위를 주었지만, 결국 웰디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

우연히 들른 마을 여관에서 친근하게 대해준 주민이 무심코 어느 마을의 엘프냐고 물은 질문에, 

‘엘프가 아니라 유니콘이다’라고 대답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세라핀들은 그 즉시 마을로 돌아가기를 권유했지만,

 그녀 본인의 희망에 의해 결국 남게 되었고, 그 결과가 지금 이것이었다. 

하필이면 그때 주위에 있던 인간들 중에 노예상인이 있었던 것이다.

마취액이 묻은 천에 감싸여 정신을 잃은 후 다시 눈을 떴을땐, 

이미 그들은 한치 앞도 보지 못하는 상태로 결박되어 어딘가로 옮겨지고 있는 상태였다.

세라핀들은 자신들의 무능을 탓했지만, 

모든 것의 원인이 그녀 본인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웰디는 죄책감과 두려움에 더욱 더 흐느꼈다.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는데… 난 그저 모든 것이 신기했을 뿐인데… 흑흑!”

그러나 지금은 그녀의 혼잣말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방금 전에는 웬 인간 여자들이 들어와서 옷을 갈아입히고 몇 가지 장식을 하는 것 같더니, 

그것이 끝나고 나자 또다시 텅 비어버린 방 안에 혼자 남아버린 것이다.

“아렐, 카리안, 둘 다 무사하겠지? 혹시 다쳤으면 어떻하지? 흑흑!”

그녀가 이렇게 많이 울어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아마 평생 동안 흘려야 할 눈물을 오늘 한꺼번에 전부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웰디는 밖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따.

“으아아아악!! 싫어어어어!!”

“꺄악!”

두근두근. 세차게 뛰는 심장을 움켜잡은 그녀는 곧 방금 들은 목소리가 굉장히 낯익다고 생각했다. 

바로 마차 안에 자신들과 함께 갇혀 있었던 인가, 엘의 목소리와 똑같았던 것이다.

“서, 설마, 그 사람도 여기에?”

대체 무슨일이기에 저렇게 비명을 지르는 것일까? 

생각만으로도 오싹해져서 웰디는 더욱 몸을 작게 웅크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있던 방 앞에서도 뭔가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앙! 쿠우웅!

“꺄아악!”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웅크린 그녀는, 덜덜 떨며 계속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당장이라도 억센 인간들의 손에 이끌려 노예로 팔려나가게 될 것 같았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몸을 떨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주위가 조용해진 것 같다는 생각에 웰디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보았다. 

그때 갑자기 그녀의 앞에 드리우고 있던 휘장이 거칠게 휘익! 걷히는 것이 아닌가! 

웰디는 화들짝 놀라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시끄러워.”

“……!!”

그 순간, 웰디는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선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가 바로 위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왠지 믿을 수 없는 기분에 그녀는 설마 싶은 심정으로 눈을 떴다.

“아……!”

그녀의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티 없이 깨끗한 새하얀 은발이었다. 

쭉 뻗은 키와 잘 조화된 체격, 조각같이 수려한 얼굴에 박힌 

선명한 사파이어 빛의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찬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운 블루 엘프였다.

“시벨… 리우스… 님?”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환상인가.

 멍하게 입을 벌리고 묻는 그녀에게, 앞에 서 있던 블루 엘프는 짜증스럽게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너 하나 때문에 마을이 전부 뒤집어졌다. 장로 할아범은 기절하기 직전이라고.”

“저, 정말 시벨리우스님이 맞아요?!”

“무슨 헛소리야? 저런 한심한 인간들에게 잡혀 있더니 그새 바보라도 된 거냐? 내가 아니면 대체 누구라는 거야.”

“흑! 흐으윽! 시벨리우스니임!! 으아아앙!!”

눈앞의 블루 엘프가 자신이 아는 그가 맞다는 판단이 내려지자,

 웰디는 서럽게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지난 시간 동안 겪었던 마음고생과 두려운 감정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블루 엘프로 폴리모프한 유니콘, 시벨리우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곤 그녀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어 주었다. 

“너도 참 어지간히 사고뭉치구나. 그러게 얌전히 마을에 있었으면 좋았잖아. 

아직 인간 세상에 나오기에 천 년은 이르다고.”

“흑, 흐윽! 너, 너무해요. 왜 이제야 오신 거예요? 웰디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안 그래도 네가 보낸 공명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다. 

너, 나와 정신적으로 공명한다는 사실을 너무 악용하고 있는 거 아니야?”

유니콘들은 매해 검술이나 마법 시험을 통해 그해 최강의 세라핀을 뽑았다. 

이렇게 뽑힌 세라핀은 신의 축복을 받아 마찬가지로 

그해 최고의 여성으로 뽑힌 유니콘과 1년 동안 정신적인 공명을 할 수 있었는데, 

시벨리우스와 웰디가 바로 이에 해당했다. 

공명을 하는 두 존재는 서로에게 자신의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전달할 수도 있었고,

 각자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가 웰디를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악용이라뇨! 제가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다 아시면서!!”

“그래그래. 그런데 다른 녀석들은? 아렐과 카리안은 어디에 있지?”

당연히 암컷을 지켜야 할 두 세라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시벨리우스는 굳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웰디 또한 당혹한 심정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만 따로 떨어져서 이쪽으로 보내졌거든요.”

“흐음, 비슷하게 생긴 천막이 여러 개던데, 죄다 돌아다녀야 하나? 

귀찮게 됐군. 웰디, 넌 먼저 마을로 돌아가라. 다른 녀석들은 내가 알아서 구해갈 테니까.”

무심하게 대답한 그는 웰디의 손과 발목에 착용되었던 마나 차단용 수갑을 한 번에 끊어냈다. 

착칵 소리와 함께 그동안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짐 덩이가 떨어지자 웰디의 표정은 한결 밝게 피어올랐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순순히 시벨리우스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싫어요. 저도 같이 가겠어요. 그 둘은 저 때문에 잡혔단 말이에요.”

“무슨 소리야? 기어이 장로 할아범이 쓰러지는 꼴을 보겠단 거냐? 

지금 네가 돌아오기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고. 얼른 돌아가는 편이 날 도와주는 거다.”

“하지만…….”

“라반 루 웰디! 최고의 숙녀를 뜻하는 ‘루’의 호칭을 받았다면,

 조금쯤은 그에 해당하는 모습을 보이도록 해. 언제까지 날 피곤하게 만들 셈이냐?”

“윽…….”

싸늘하게 쏘아붙이는 말엔 그녀도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처음부터 구구절절 옳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왕 말 하는 거, 좀 더 다정스럽게 전해줄 수는 없는 걸까. 웰디는 그것이 무척 서운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시벨리우스님은 너무 차가워요. 마치 심장이 없는 존재 같아요.”

“흐응, 그렇담 지금 눈 뜨고 살아 있지도 않았겠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언제나, 늘 그래요.

 무심하고, 차갑고, 무뚝뚝하고.

 그래도 나는 시벨리우스님의 반려가 될 유니콘인데… 조금쯤은 자상하게 대해줄 순 없나요?”

그 말에 시벨리우스는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그녀는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따. 애초에 그 반려 건에 대해 자신이 동의한 적이 있었던가?

그는 방금 전보다 더 딱딱한 표정이 되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장로 할아범이 멋대로 정해놓은 혼약에 책임질 의무 따윈 없어. 

너도 그만 환상에서 깨어나라, 웰디. 나에게 넌 그냥 친한 여동생일 뿐이야.”

“시벨리우스님!”

“착각하면 너만 더 괴로워질 뿐이다.

 일찌감치 다른 상대를 찾아보는 게 나을 거야. 앞으로도 내가 널 여자로 볼 일은 없을 테니까.”

“…….”

한 여자로서, 좋아하는 이성에게 이보다 더 비참한 말을 들을수 있을까.

가슴을 저미는 듯한 아픔이 밀려왔지만 웰디는 울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울어버리면 왠지 그의 말을 인정해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곧 스스로 화제를 돌릴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또다시 근처에서 낯익은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던 것이다.

“으아악! 싫어! 이거 놔앗~!!”

“……!!”

“…뭐지?”

꽤나 처절한 외침이었기에 시벨리우스 또한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웰디는 작게 심호흡을 한 뒤, 그의 팔을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같이 구하러 가요!”

“뭐?”

“제가 아는 사람이에요. 마차 안에서 같이 잡혀 있었어요. 아마 그 사람도 이 근처로 끌려온 모양이에요.”

“무슨 소리야, 웰디. 지금 가장 시급한 건 네가 마을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그리고 난 유니콘이 아닌 녀석의 일까지 챙겨줄 생각은 없어.”

“시벨리우스님이 도와주지 않으신다면 제가 직접 가겠어요!”

“웰디!!”

이건 또 무슨 고집인가. 설마 아까 일에 대한 복수라도 하려는 걸까?

시벨리우스는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는 마차 안에서 우리를 도와줬어요. 안대와 재갈을 풀어줬거든요. 

덕분에 한번 도망갈 수 있는 기회를 벌기도 했으니, 이번엔 제가 도와줄 차례예요.”

“하아? 진심이냐?”

“물론이죠! 그러니 제발 부탁해요, 시벨리우스님! 그분을 도와주세요!”

웰디의 간곡한 표정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여자에게 약한 종족이라 이런 식으로 부탁을 해오면 거절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후, 알았으니까 넌 여기서 기다려.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괜찮아요! 마나 차단용 수갑도 이젠 없는 걸요. 저도 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요.”

“라반 루 웰디!”

“싫어요! 시벨리우스님 옆에서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지켜주시면 되잖아요? 최강의 세라핀의 옆보다 더 안전한 장소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말에 시벨리우스는 더 이상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쯤 되면 알아서 져주는 편이 정신건강에도 이로운 것이다.

“…쯧, 알았다. 네 녀석의 고집을 누가 막겠냐. 단, 얌전히 있어야 해. 방해하면 혼날 줄 알아.”

“네에!”

활기차게 대답하는 모습은 아무리 최고의 숙녀란 찬사를 받아도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저런 꼬맹이와 결혼을 하라고? 다시 생각해봐도 어이없다고 중얼거리며 

시벨리우스는 천천히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막 의식이 끊기려는 찰나,

 나는 휘장 밖에서 뭔가가 싸우는 듯한 둔탁한 타격음을 들었다.

 그것을 느낀 것은 루시엘 역시 마찬가지 인 듯, 그는 드디어 목을 조르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와 함께 나는 터져 나오는 숨을 참지 못하고, 나는 연신 격한 기침을 내뱉기 시작했다.

“크윽! 쿨럭! 쿨럭!”

하지만 내가 괴로워하든 말든 그들의 관심은 온통 휘장 밖을 향해 있었다. 

잠시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던 루시엘은 곧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자칸을 향해 물었다.

“방금 전에 그게 무슨 소리지?”

“그, 글쎄요? 지금 나가서 살펴보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 자칸은 허리를 굽실거린 다음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가 미처 휘장을 열기도 전에 무언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안으로 불쑥 쳐들어왔다.

쿠웅! 우당탕 쿵탕!!

“으, 으악! 뭐, 뭐야?”

“……!!”

안으로 떠밀리듯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그것도 전신을 흠씬 두드려 맞은 것처럼 멍과 핏물로 범벅되어진.

“으으, 크으윽……!”

아는 사람이었던 듯, 신음을 흘리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자칸은 곧 휘둥그렇게 떠진 눈으로 소리쳤다.

“아니, 넌 뭐야! 이 천막의 보초를 서는 녀석이잖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어, 어서… 피, 피하십… 크흑!”

“뭐?”

하지만 남자의 경고는 한참이나 늦은 감이 있었다.

 자칸이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코앞에 누군가의 주먹이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퍼억! 콰앙!

“크아악!”

“…약하군.”

한 방에 자칸을 날려버린 남자는 너무 쉽게 쓰러지는 게 불만이라는 듯, 낮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왠지 어디선가 들었던 것처럼 굉장히 낯익었다.

설마 싶은 생각에 고개를 든 나는, 그대로 멍하게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허리까지 흘러내린 새하얀 은발과,

 푸른 눈동자를 지닌 블루엘프!! 바로 시벨리우스가 내 눈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헉… 정말 시벨리우스?’

아무리 뚫어지게 살펴보고 두 눈을 깜빡거려도, 그것은 틀림없는 시벨리우스 였다.

그 순간, 놀라서 입만 뻐끔뻐끔거리고 있는 나를 본 녀석은, 왜인지 살짝 굳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이냐, 웰디? 너를 도와줬다는 인간이?”

“……!!”

그제야 나는 그가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방문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뒤에서 조심스럽게 휘장을 젖히고 들어오는 사람은 이곳에 오기 전 마차 안에서 만났던,

 여성 유니콘인 ‘라반 루 웰디’였다.

나를 보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곧 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맞는 것 같아요!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금발이었거든요!”

“흐응, 그럼 저건 또 뭐지?”

녀석이 턱 끝으로 가리킨 것은 어느새 한 손에 검을 쥐고 있는 루시엘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이 방해받은 것이 몹시 불쾌하다는 듯 찌푸린 표정으로 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러는 댁은 누구지?”

“질문한 것은 내가 먼저다. 너는 누군데 이곳에 와서 소란을 피우는 거지? 처벌이 두렵지 않은가?”

“처벌? 킥킥! 내 살다 살다 별 소리를 다 듣는군.”

낮게 중얼거린 시벨리우스는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루시엘의 눈동자에 옅은 살기가 감돌았다.

한동안 살벌한 눈으로 시벨리우스를 노려보던 그는 문득

 옆에 있던 웰디에게 시선을 미치고는 짐작이 간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평범한 블루 엘프가 아니군. 설마 유니콘인가?”

“호오, 정답! 눈치가 빠른 인간이군.”

“은발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유니콘 여성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동료를 구하러 왔다면 얌전히 그들만 데리고 돌아갈 것이지, 왜 이쪽의 일까지 참견하는 거지?”

“아아, 여기있는 이 아가씨가 꼭 도와줘야 한다고 해서 말이야. 우리 유니콘들은 여성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거든.”

웰디를 가리키며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모습이, 

정녕 내가 아는 ‘그’ 시벨리우스가 맞는지 의심스러워졌다.

 언제나 어린애 같았던 녀석이 여기서는 ‘무려’ 냉소적인데다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눈앞의 적이 ‘유니콘’이라는 사실은 루시엘의 사기를 한층 가라앉게 만든 것 같았다.

 잠시 입술을 깨물며 나와 시벨리우스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는,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나를 향해 물었다.

“운이 좋은 아이로군. 

결국 무슨 사술을 쓴 건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이 빚은 나중에 받도록 하겠다. 네 이름은 뮈지?”

“…엘.”

“엘이라… 기억해두겠다. 명심해라. 네가 다음에 또 나를 만나게 된다면,

 그땐 이렇게 쉽게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반사다, 이 자식아.”

그러자 내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 녀석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아무렴 어떠냐 싶었는지 피식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따.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기가 살아 있군. 아무래도 너와는 또 만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난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내 앞에 다시 나타나면 죽여 버릴 거다.”

“하하하! 기대하지. 단, 실패하면 그때야말로 팔다리의 힘줄이 끊기는 것을 각오해야 할 거다.”

“……!!”

크아악! 얄미운 자식! 엘뤼엔보다 잘 생기지도 않은 주제에(?) 폼만 더럽게 잡기는!!

‘가다가 줄에 걸려 자빠져랏!!’

나는 여유롭게 빠져나가는 루시엘의 등 뒤를 향해 몇 번이고 가운데 손가락을 날려주었다. 

그래봤자 이 세상에서 이 뜻을 알고 있는 존재는 라피스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놈의 정령왕들은 또 어디로 사라진 거야?’

야속한 두 정령왕은 이번에도 먼저 돌아가 버린 듯했다.

 안 그래도 배고파서 예민해져 있는 신경에 방금 전에 겪은 일까지, 

나는 주체할 수 없는 히스테릭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결국 이 끓어오르는 화는 애꿎은 곳에서 분출되고 말았다. 

바로 유심히 나를 바라보고 있던 시벨리우스에게 향했던 것이다.

“뭘 봐? 먹을 거 안 줄 거면 꺼져. 쳐다보기도 귀찮아!”

“……뭐?”

황당하다는 듯이 되묻는 말에 ‘아차’ 싶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도로 주워 삼킬 수도 없는 지라 

나는 그저 홱 하고 시선을 피하기만 했다. 그러자 따가울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아무래도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것 같아요, 

시벨리우스님. 무리도 아니죠. 목의 자국을 보세요. 굉장히 끔찍한 일을 당한 게 틀림없어요.”

“…….”

당황한 웰디가 어떻게든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했으나 시벨리우스의 굳은 표정은 좀처럼 펴지질 않았다. 

모처럼 구해준 녀석이 고맙다는 말은 커녕 다짜고짜 신경질을 냈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녀석은 잠시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더니,

 갑자기 휙 하고 휘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웰디 역시 당황한 얼굴로 쪼르륵 그의 뒤를 쫓아 갔다.

설마 삐쳐서 가려는 건가?

그제야 ‘내가 왜 그랬지’ 하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모처럼 만난 건데 이렇게 헤어지게 되다니… 나란 녀석은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잠시 한숨을 푸욱 내쉰 나는 여전히 팔다리에 고스란히 채워진 수갑을 보며 나직이 투덜거렸다.

‘이왕 갈 거면 이거라도 풀어주고 가지. 으음, 그건 너무 염치 없나?’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그때부터 열심히 수갑을 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끙끙거리며 손가락으로 간신히 틈을 벌리는 것에 성공한 찰나, 

갑자기 불쑥 나타난 커다란 손이 턱 하고 그것을 방해했다.

그리곤 내가 미처 상황을 판단하기도 전에 철컥! 하고 너무도 간단히 풀어내는 것이 아닌가?

“…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든 나는 수갑을 풀어준 사람이 시벨리우스라는 것을 깨닫고 멍하게 입을 벌렸다. 

그것도 모자라 녀석은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모를 커다란 빵바구니를 내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 먹을거다. 가져왔으니까 이젠 안 가도 되지?”

“에에?”

“왜? 부족한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아까 사라진 이유가 정말로 먹을 것을 가지러 갔던 거야?

황당한 표정으로 시벨리우스를 바라본 나는 고맙다는 말조차 잊을 정도로 당황해 있었다. 

화나서 가버린 줄 알았던 녀석이 이런 걸 가져올 것이라 그 누가 예상했겠는가. 

뒤따라갔던 웰디 역시 이럴 줄 몰랐다는 듯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으음, 일단 고맙게 먹을게…….”

끄덕끄덕.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4천 년 후의 그와 판박이였지만, 

방금 전에 보았던 카리스마 있는 모습과는 너무 상반된 것이라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설마 여기에 독이라도 탄 건 아니겠지?

잠시 의심스러운 얼굴로 빵을 노려본 나는 조심스럽게 한입 베어 물었다. 

목을 졸린 충격 탓인지 미각이 둔해져 무슨 맛인지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너무 오랜만에 먹는 음식이라 그 순간 자체가 감격이 될 정도였다.

뭔가를 씹어본 게 얼마만이더라? 얼추 잡아도 대강 사흘은 넘긴 것 같다.

 진즉에 탈진하지 않고 이때까지 버티고 있는 내 체력에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몇 분 동안 내가 먹는 모습만을 유심히 바라보던 시벨리우스는 잠시 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질문을 건넸다.

“이름이 엘이라고?”

“아아, 응. 넌 시벨리우스지?”

“어떻게 알았어?”

“아, 그게… 옆에 있는 웰디 양이 마차에서 한 얘기를 들었거든. 왕자님이라며?”

“쿡! 그냥 상징적인 의미일 뿐이야. 실질적인 통치권은 장로에게 있으니, 

오히려 그의 손녀인 웰디가 공주님이라고 할 수 있지.”

오오, 그렇군. 하긴, 겉으로 보기에도 웰디는 무척이나 우아하고 도도한 이미지의 숙녀였다.

 겉모습 하나만으로 충분히 사랑받고 자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시벨과 같은 은발인데다 눈동자 색깔만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나뉘어져, 

이렇게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결말이 비극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저 소녀와의 혼담을 거절한 일 때문에 서클렛에 갇힌 거였지. 아마?’

그러고 보니 그 장로란 유니콘도 참으로 사악한 종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녀를 거절한단 이유로 상징적인 ‘왕자’를 봉인시키다니. 그게 제정신으로 할 일인가?

왠지 지금까지의 시벨리우스도 그리 평탄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심각하게 바라보는 내게 녀석은 즐거운 기색으로 또 다른 질문을 건넸다.

“빵 맛있어?”

“응! 정말 맛있다. 사실 지금이라면 돌이라도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만.

 하하! 역시 사람은 제대로 된 요리를 먹어야 돼.”

“되게 배고팠던 모양이네?”

“말도 마. 거의 아사 직전이었다고. 

아무리 도망치려고 했어도 그렇지, 어떻게 인간을 생으로 굶길 수 있지?”

“생으로 굶겨? 흐음, 음식을 굉장히 오랜만에 먹는 건가 보지?”

놀란 표정으로 묻는 말에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납치된 이후로 처음이라면 믿겠어? 

하긴 뭐, 그전에도 그다지 제대로 된 음식을 먹ㅁ은 지는 오래됐어. 육포로 때울 때가 대부분이었으니까.”

“왜?”

“왜냐니! 당연히 요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지. 

이제라도 슬슬 배워야 할까 진지하게 생각 중이야.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할 것 같으니.”

“흐응, 그렇군.”

그 밖에도 녀석은 이것저것 질문을 건네며 내게 여러가지 대화를 시도하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졸음이 밀려와,

 종래에는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나는 비몽사몽하는 상태에서, 시벨리우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참으로 뜬금없을 한마디를 내뱉었다.

“…졸려.”

“어? 졸리다고?”

“미안한데, 나 잠깐만 눈 좀 붙일게… 다시 만나서 반가웠어. 시벨… 잘 가…….”

“뭐? 이, 이봐! 이런데서 자면…….”

당황하는 목소리를 뒷전으로 한 나는 그대로 푹신한 쿠션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건 정말로 정신 나간 일이었다.

노예시장 안에서 도망치지도 않고 그대로 떡하니 누워 잠들다니! 다시 잡아달라는 소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 졸린 나머지 내가 처한 상황이나 주위환경이 어찌되었든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마도 굶주린 몸에 오랜만에 먹ㅁ을 것이 들어가니,

 예민해져 있던 신경이 안정이 되어 그것이 한꺼번에 잠으로 쏟아진 듯했다. 

아무튼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웬 낯선 여관의 침대에 누워 있는 상태였고,

 그 옆엔 트로웰과 엘뤼엔이 서서 내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들은 약간의 핀잔을 담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드디어 일어났냐?”

“잠자는 공주님이 깨어나셨군. 기분은 어때?”

“어? 엘뤼엔? 트로웰? 여긴 어디야? 내가 왜…….”

“어디긴 어디야. 세이크 제국의 수도 내성에 있는 여관이지. 너 이틀 내내 잠들어 있었어. 기억이 안 나?”

“엑? 이틀? 되게 오래도 잤네. 둘이 직접 노예시장에서 데려와 준 거야? 시벨리우스… 아니, 그때 있던 유니콘들은?”

그 말에 트로웰은 다시 마을로 돌아갔다고 대답했다. 

떠나기 전에 ‘다음에 다시 보자’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나? 

꽤나 오랜만의 재회(?)였는데,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진 것에 무척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더 묻고 싶은게 있었지만, 
트로웰이 그에 대한 대화를 꺼리는 기색이라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흐음, 그나저나… 어째 몸이 훨훨 날아갈 것 같은데?’

그동안 나름대로 고생이 많았던 것치곤 나의 온몸은 이상할 정도로 상쾌한 상태였다.

 아마 잠들어 있던 사이에 엘뤼엔이 치유술을 시전해준 모양이다. 

그 증거로 지금쯤 검붉게 남아 있어야 했을 목의 손자국이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역시 엘퀴네스의 치유력은 대단하구나!

그 순간, 옅은 감탄을 내뱉으며 신기한 얼굴로 요리조리 살펴보는 내게, 뜬금없는 트로웰의 사과가 이어졌다.

“미안해, 엘. 그때 도와주지 않아서.”

“응? 아, 아니. 뭘 새삼스럽게?”

“실은 도와줄 수도 있었는데, 내가 그렇게 하지 말자고 했어. 

그 편이 네 훈련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뭐, 

이젠 충분히 질렸을 테지? 그러니 이쯤 하도록 하자. 검술 훈련도, 나와의 거래도.“

“거래도 라니… 설마 1년 후의 그 일 말이야? 갑자기 왜 그래, 트로웰? 여, 역시 설득이 안 돼?”

생각해보니 이번 노예상인 사건은 그나마 좋아졌을지도 모를 인간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뒤집어엎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쓰레기 같은 녀석들만 있었지 않은가(막판의 루시엘이 가장 하이라이트였지만)!

 하지만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너는 죽이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잠깐이나마 함께 여행 다녔던 정이 있어서인지 너에 대해선 꽤 좋은 인상을 받았거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거래를 취소한다는 건, 같이 여행을 다니지도 않겠다는 소리지? 혹시 내가 뭘 잘못했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왜?”

간절하게 바라보는 내 얼굴에 트로웰은 잠시 곤란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한참 후, 그는 내키지 않는 듯한 어조로 떨떠름하게 물었다.

“내가 싫어지지 않아?”

“엥?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니… 내가 생각해도 꽤 심하게 괴롭히고 있는 것 같은데,

 넌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그게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어. 넌 이대로도 괜찮다는 거야?”

“음… 그, 글쎄? 난 별로 상관없는데?”

“왜지? 앞으로도 난 계속 널 모른 척할 거야. 

이번에 일어난 일보다 더한 상황이 와도 알아서 해결하라고 내버려둘 거고. 

다음번엔 엘퀴네스가 도와주려는 것까지 막게 될 거야. 그래도 괜찮다고?”

“… 아하하! 물론 힘들기야 하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그건 내가 아직 트로웰에게 그만큼의 의미가 못 된다는 뜻이니까 말이야. 

정말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면 위험한 순간이 왔을 때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도와주게 될 걸?

 결국 아직 내가 그만큼 너를 설득하지 못했단 소리라고 생각하는데?”

내 대답을 들은 트로웰은 굉장히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평소의 그에게서는 흔히 보기 힘든 장면임이 틀림없었다(어찌된 일인지 엘뤼엔도 덩달아 심각해져 있었지만.).

“그럼 너는 계속 내기를 지속하자는 거야?”

“당연하지! 사나이가 한번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잘라야하는 법!”

“후우, 그러다 끝까지 설득하지 못하면 어쩌려고? 

말해두지만 1년 후에는 정말 봐줄 생각이 없어. 기회는 지금뿐이야.”

글쎄, 지금 이런 식으로 걱정하는 것이 이미 반쯤은 넘어왔다는 뜻이 아닐까? 

하지만 이 말은 얼른 마음속으로 삼켰다. 고지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미리 적에게 알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후후후!

왠지 즐거워지는 기분에 나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네가 상냥하다는 것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마을로 돌아온 이후, 시벨리우스는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아졌다. 

평소에도 워낙 말이 없는 타입이기도 했고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일이 없는 편이긴 했지만, 

요근래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고민이 있는 사람 같다고 할까?

이따금씩 웰디가 그의 감정과 공명해보려 했지만, 

읽을 수 있는 것은 온통 ‘혼란스럽다’는 것뿐. 그의 근본적인 고민이 무엇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정확히 노예시장에서 ‘엘’이란 인간을 만나고 난 이후부터였다.

 별로 특이할 것도 없었던 그 잠깐의 만남이 시벨리우스에게 무슨 영향을 준 것일까?

 왠지 걱정이 된 웰디는 조심스럽게 그를 불러보았다.

“저어, 시벨리우스님?”

“…….”

“시벨리우스님! 제 말 안 들리세요?”

“…으응? 아, 미안, 웰디. 뭐라고 했어?”

“핏, 뭐예요. 요즘 시벨리우스님은 이상해요. 

마치 영혼을 딴데 두고 온 것 같다구요.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얼른 고개를 저었지만, 웰디는 믿지 않았다. 그녀는 더욱 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혹시 그때 만났던 엘이란 인간 때문에 그런 건가요?”

“무, 무슨 소리야?”

“그렇잖아요! 그때 이후로 시벨리우스님은 항상 넋이 빠져 계신다고요. 

대체 뭐가 문제예요? 엘이란 아이는 그의 동료가 무사히 데려갔잖아요?”

그랬다. 대화 중에 갑자기 잠들어버린 엘의 모습에 당황해 하던 순간,

 갑자기 나타나 그를 안아 올린 것은 검은색 피부를 가진 매혹적인 분위기의 소년이었다. 

그대로 말없이 돌아서는 소년의 모습에 시벨리우스는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차갑게 가라앉은 황금색 눈동자를 보니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소년의 입에서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나왔을 때는 너무 놀라서 혀를 깨물 뻔했다.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은 전해주지. 그 외에는 기대하지 마.”

“……!!”

지금 생각해보면 그 소년은 마치 자신의 마음속을 읽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마치 정령왕 트로웰처럼 말이다. 게다가 인상착의도 꽤나 비슷하지 않았던가. 

만약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그 둘은 틀림없이 계약관계일 것이다. 

마침 엘 스스로도 자신을 정령사라고 밝힌 전적이 있다고 들었다.

‘요 근래 땅의 정령왕을 소환한 인간이 있었던가? 아니, 어쩌면 인간이 아닌 걸지도.’

드래곤 중에서도 얼마든지 인간으로 폴리모프가 가능하니, 

무조건 인간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보통 드래곤이 아사 직전까지 간다는 게 말이 되나?

이런 식으로 또 그의 상념이 길어지자 웰디는 분통이 터질 수 밖에 없었다.

“시벨리우스님! 정말 자꾸 이러실 거예요?”

“아아, 미안. 휴. 어디까지 얘기했지?”

“몰라요! 시벨리우스님, 정말 나빠요. 

이런식으로 매일 멍해 있으시려면 차라리 유희라도 떠나시는게 더 낫겠어요! 아무런 의욕이 없어 보이잖아요, 의욕이!”

“유희?!”

‘이거다!’

그 순간, 시벨리우스는 머릿속이 뻥 뚫리는 듯한 상쾌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고민하고 답답해하던 모든 일이 마치 이것 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벙찐 웰디를 향해 말했다.

“고맙다, 웰디! 네 덕분에 방향을 찾았어.”

“무,무슨… 서, 설마 정말 유희를 나가시려는 건 아니겠죠?”

“아니, 그럴 생각이야. 역시 너무 마을 안에서만 지내는 건 정신 건강에 나쁜 것 같아.”



“안 돼요!! 그, 그런 일… 할아버님이 허락하실 리가 없어요! 

시벨리우스님은 성스런 피를 잇는 제1계승자라구요! 마을 밖에 나가셔서 무슨 일이라도 당하시면…….”

“웰디! 유니콘 종족 최강의 세라핀이 누구지?”

“윽! 그, 그야 물론 시벨리우스님이시지만.”

이제 웰디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든 막아야겠다는 일념에 그녀는 고집스럽게 소리쳤다. 

“할아버님께 말씀드려서 막을 거예요! 시벨리우스님이 떠나지 못하게 막을 거라구요!”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그 할아범한테 허락받고 나갈 생각은 없으니까.”

“네, 네에? 설마 가출을 하시겠다는 소리세요?”

“이왕이면 출가라고 해줘.”

맙소사! 웰디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제정신이 아니다. 뜬금없는 유희선언으로도 모자라서 가출을 하겠다고?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대체 유희를 나가서 뭘 하시려고요?”

“그야 당연히 배워야지.”

“배운다고요? 시벨리우스님은 이미 마법이나 검술 면에서 모두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계시잖아요! 

거기서 더 이상 무엇을 배우시려고요?”

“요리.”

“…네?”

순간, 웰디는 자신이 환청을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대답이 나올 수 있는가. 

멍하게 되묻는 그녀에게 시벨리우스는 마치 쐐기를 박듯,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대답해주었다.

“요리 말이다. 음식 만드는 거 몰라? 바로 그걸 배울 생각이야.”

그래서 엘이란 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많이 만들어줘야지. 

이어지는 뒷말은 가슴속에 묻으며 시벨리우스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난 요리사가 될 거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엘을 ‘소녀’로 착각했기에 가능한 이야기.

이것이 바로 성스러운 피를 잇는 제1계승자!

 유니콘의 귀공자 시벨리우스가 어이없는 가출을 결심하게 된 유일한 동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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