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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소설] 정령왕 엘퀴네스 1권
-엘퀴네스의 장-
<프롤로그..>
200x년 4월 26일.. '나는 죽었다.'
..라고 하니까 어쩐지 분위기 있어 보이는 것이.. 얼마전에 봤던 일본만화영화의 시작부분을 따라해 본 것 뿐이지만
꽤나 탁월한 문장선택이었다는 생각이든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 내 눈앞에 죽어있는 내 모습이 떡하니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내 이름은 '강지훈'.
올해로 17살인, 대한민국 소속의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난 이제껏 내 자신이 평범하다는 것에 대해 단 한번도 의심을 해본적이 없었다.
운동 실력도 또래중의 보통이고, 성적도 보통. 신체 사이즈며 외모며 그야 말로 무엇하나 남들보다 뛰어난 것이 없는내가
평범하지 않다면 세상의 그 누가 평범하다는 말을 들을수 있겠는가!
평범한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고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평범이란 세상의 그 어느 일보다 쉽고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아침, 아니 불과 몇분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내 생각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방금전의 그 '사고'를 당하기 전까진..
" 우아악... 미치겠네!! 왜 내가 이딴 일을 당해야하냐고오!! "
애초부터 사고의 발단은 별거 아니었다.
한국이란 나라는 워낙에 땅덩어리가 좁은데다가, 교통체제가 복잡하고, 단순무식한 무대포 정신의 운전자들이 많기 때문에,
흔하디 흔하게 일어나는 것 중의 하나가 교통사고다.
얼마 남지 않은 모의고사 준비 때문에, 평소엔 하지도 않던 공부 좀 해보겠답시고 영어 단어장을 들고 외우고 다니던게 화근이었다.
신호를 무시한 자동차 한 대에 손도 못써보고 그대로 치이게 될줄 누가 알았겠는가.
치이던 직전에 실신한 정신은 다시 돌아왔을땐 이미 지금과 같은 황당한 장면만 덩그라니 두뇌속에 각인시키고 말았다.
허공에 떠있는 내가.. 바로 아래에 죽어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말이다.
' 허허허.. 이래서 평소에 안하던짓하면 죽는다는 얘기가 나온거구나...'
옛말 틀린거 하나도 없다. 선조의 지혜란 그저 아무데서나 꾸며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어른들 말씀을 무시한 죄로 받는 형벌이란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벌치고는 너무 과하다고 생각지 않아? 허허허...
나는 허탈하게 웃으면서 망연자실한 얼굴로 죽어있는 내 몸을 다시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웅성웅성
사거리의 대로 한가운데서 벌어진 사건인데다 한창 창창한 대낮이어서 그런지,
너무나도 눈에 띄는 내 시체주위엔 사탕에 꼬인 개미마냥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사고지점이 횡단보도의 중간즘이라 도로마저 꽉 막혀버려, 주변은 막혀진 차들과 구경나온 사람들로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아마도 병원차가 내 시체를 치워갈때까지는 한동안 이 곳 사거리 도로는 혼잡한 교통체증을 이루게 될것만 같았다.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불안해 보였고, 개중엔 울면서 도망가는 간 작은 인간들도 간혹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썩을 놈은 재미라도 났는지 카메라폰으로 내 시체를 열심히 찍어대며 킥킥 거리고 있다.
저런 놈들 때문에 우리나라가 망하는거야!
..어쨋든 그러한 혼잡한 상황...바로 그 중심부분에 볼썽 사납게 도로에 뻗어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숱많은 시커먼 고수머리에 두꺼운 뿔테안경(용케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학교 트레이드마크인 촌스런 검청색 교복을 입고있는 손엔, 사건의 원흉인 영어단어장이 신주단지 모시듯 고이 쥐어져있다.
그 앞에서 아까부터 계속 안절부절하며 내 의식을 확인하고 있는 사람은, 신호를 무시하고 막나가다가
공교롭게도 나를 치어버린 자동차의 운전자였다.
순간의 실수로 살인자가 되어렸으니 지금 속이 어지간히 썩고 있을것이었다.
그러게 누가 교통법규를 어기라나. 법을 지키라고 만들어 놓을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라고. 캬캬캬..
물론.. 별로 세게 치이지도 않은주제에 훼까닥 영혼을 떨구어 버린 내 약해빠진 몸뚱아리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겠지만..
근데 정말 말이 나와서 말이지.. 내 시체는 그 흔한 핏방울이며 긁힌 상처자국하나 없었다.
오죽하면 영혼이 된 내가 보기에도 멀쩡해 보여서, 내가 다시 육체로 들어가 보려 시도까지 해보았겠는가.
하지만 여러번의 시도에도 번번히 육체는 내 영혼을 튕겨 냈고,
지금은 숨을 안쉰지 20분이 넘어간 상태라 나도 포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아.. 나는 정말 이렇게 어이없게 죽어버리고
엘퀴네스의 장-1. 내가 운명이 없다고?
내가 그렇게 어이없게 짧은 생을 마감해 버린지도 벌써 사흘을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교복차림으로 평소와 다름없이 길거리를 돌아다녔고, 가족들이 내 시신을 거둬가는 것도 지켜봤으며,
더불어 장례를 치르고 있는 요즘은 내 영정을 놔둔 식탁(?)앞에서 나한테 인사하러 오는 반 녀석들에게 아는척을 하고 있었다.
" 야~ 박규철! 너도 왔냐? 짜식- 나 죽어도 절대 내 장례식엔 오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어째 용케도 왔네.
역쉬 너밖에 없다니깐~ 핫핫핫 "
"..............."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가 여기서 어떤 말 어떤 행동을 해도 저들에게는 전~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저녁때라면 유령처럼이라도 보일까 해서 돌아다녀 봤지만 그것도 실패.
내 사진아래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하얀 국화꽃을 바라보며 나는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까진 영혼이 된지 얼마 안돼서 영혼들이 받는 혜택-예를 들면 벽을 통과한다거나 공중을 날아다닌다거나
하는-에 재미를 붙이고 있지만, 이제 이것도 익숙해지면 할 일이 없을 것 같아 그게 걱정이다.
내 평생의 염원이던 세계여행이나 느긋하게 다녀볼까? 아, 그것도 꽤 괜찮을지도.
한가지 의문이라면, 왜 아직도 나에게 저승사자들이 나타나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의례 죽으면 영혼을 인도하는 사자들이 나타나서 그 영혼을 천국이든 지옥이든 데려다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난 내게는 저승사자는커녕 '사랑과 영혼'에 나왔던 하늘에서의 빛조차 비췬 적이 없었다.
설마 그게 모두다 사람들의 상상? 죽으면 그냥 이런 식으로 땡이란 말이야? 허..이렇게 허탈할 수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영혼이 또 있나 싶어 돌아다녀 봤지만 이 동네는
죽은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나말고 다른 영혼은 없는 것 같았다.
'설마 나 혼자 영원히 이렇게 외톨이로 있어야 하는건 아니겠지?'
문득 불길함이 엄습해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혼자인 것은 정말 질색이다. 난 혼자만 되면 내 스스로의 정체성을 쉴세없이 잊어버리곤 하니까.
난 누구지? 내가 왜 여기 있을까? 난 무엇에 의해,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거지? 등등..
이런식의 답없는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을때면 차라리 술취한 아버지의 골프채에 두들겨 맞는 편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내 생각을 알았더라면 아버지는 더 신이나서 날 쥐어팼을테지만.
그리고 어머니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역시 못난놈'이라 중얼거렸을테고. 형들과 누나는 눈살을 찌푸렸겠지.
하도 당해왔던 일이라 이젠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을정도로 익숙하다.
솔직히 우리 가족 중에서 날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까.
원치도 않았는데 느즈막히 본 막내아들이라 윗형제들하고는 나이차이가 벌어져 그들과 내 사이는 언제나 소원했다.
아버진 아이를 싫어하는 독불장군이었고, 어머니 역시 가난한 살림에 돌볼 식구가 늘어난것에 짜증만 더 느셨던 것 같다.
막둥이가 생기면 그저 오냐오냐하고 응석받이로 키우는 보통의 다른 가정에 비하면, 나는 참으로 태어날 집을 잘못잡은 셈이다.
지금도 봐라. 그래도 막내 아들이 죽었다고 장례는 치르고 있지만 사흘간 끈질긴 관찰의 결과로도
난 이들이 내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본적이 없는 것이다.
이들에게 내 죽음이란 것은 '어차피 죽을거 괜히 태어나 집안 살림만 축낸 죽일놈' 정도에나 머물고 있는 듯 하다.
오죽하면 내가 살아있을적에 이 사람들과 친 부자, 형제지간이 맞나 싶어서 혈액형검사까지 받아봤겠는가!
우기고 우겨서 받은 DNA의 검사가 친가족이 맞다는 판정이 내렸을땐, 낳아준 부모를 의심한다며 또다시 이어지던
아버지의 구타보다 지구가 먼저 거꾸로 돌아 세상 하직하겠구나 싶었다.
돌잔치는커녕 이제껏 생일한번을 챙겨준적이 없고, 보기만 하면 원수대하듯 욕하고 때리는 사람들이 정말로 내 친혈육이라니..
억울하고 서러워서 자살까지 결심해 본적도 몇 번 있었지만 내가 죽어봤자 저들 좋은일밖엔 되지 않겠구나 싶어서 참고 또 참았었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이딴 집 독립해서 멋지게 인간처럼 살아보겠다고 다짐도 하면서말이다.
...결국 이런 식으로 정말로 죽어버리고 말았지만...
에휴. 어쨌든 난 혼자인건 죽어도 싫다.(아니 이미 죽었으니 상관없나;)
애정결핍이든 뭐든 옆에 있어줄 존재가 필요하단 말이다!
어디 적당히 연배 맞는 유령 한 마리(?) 없냐고요~~~!!
" 아! 그렇지! "
지루함에 몸부림치며 절규하던 그 순간,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난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현재 나의 장례가 치러지는 이곳은 큰 종합병동의 지하 영안실이었다.
한 층 전체가 여러개의 방으로 이루어져있는 이곳은, 식당과 휴게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방들이 죽은이의 장례를 치르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설마 이 많은 방들이 단 한 사람을 위한 것이겠는가?
개인실로 마련된 방들이긴 하지만, 각 방마다 놓여있는 사진은 분명 얼굴이 다른 사람들이었다.
즉, 나만이 아니라 다른곳에서도 장례가 여럿 치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 돌아다녀본 결과로 이미 영혼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뒤였지만, 나는 절대 실망하지 않았다.
인연이 없으면 만들면 되지 않은가!
죽고 난 다음의 영혼을 찾기가 힘들다면 이제 곧 죽을 사람옆에서 영혼이 나오길 죽치고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병원이란 곳은, 그 특성상 하루에도 몇 번씩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곳이 아니던가!
곧 죽을 사람 구하는 것은 식은죽먹기나 다름없었다.
나는 친구생겨서 좋고, 신참유령도 외롭지 않아 좋을테니 그야말로 누이좋고 매부좋고 도랑치고 가제잡고,
떡먹고 알먹고 인 것이다! 이~예쑤!!
" 좋아! 그럼이제 가볼까나? "
즉시로 결정을 한 나는 내 장례가 치러지고 있는 병동안을 미련없이 벗어나서 지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솔직히 전혀 슬프지도 않은 주제에 체면치례상 장례를 치르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을 더는 보고싶지 않기도 했다.
언젠가 영력(?)이 높아져서 기(氣)만으로도 물건을 움직일 수 있는 경지가 되면, 제일먼저 가족들부터 놀래켜주고 말테닷!
(아무래도 '사랑과 영혼'을 너무 많이 본 듯..)
누군가 지금 나에게 현재의 심정을 세가지로 표현해보라면, 난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황당하고, 황당하며, 황당하다...
정말 내 평생에 이토록 황당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던가!
종합병동에서 중환자실을 찾는건 의외로 간단하고 편했다.
우선 현관 1층에 걸려있는 병원 층 안내판도 있었고 벽을 자유자재로 통과하는 영혼인 덕분에 계단을 일일이 오르거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중환자실을 발견했을때만 해도 난 동지(?)를 만들고 말겠다는 의지로 여전히 의욕에 불타오르는 상태였다.
지금도, 아니 앞으로의 며칠까지도 나를 황당하게 만들어 버릴 그 일이 생기기 전까지 말이다.
중환자실은 평소에 생각해왔던 이미지대로 숨막히는 긴장감과 음침한 분위기가 여기저기서 풍겨나오는 곳이었다.
일반 병실의 환자들과는 달리 이곳의 환자들은 그야말로 생사를 오락가락 하는 사람들 뿐이라,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는 상태.
앓는 환자 자신이나 지켜보는 가족이나 괴롭기만 할뿐인, 온갖 슬픔과 고통의 밀집장소인 것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였고. 산소호흡기를 달고있거나, 그 사용여부를 심히 의심해 봄직한
복잡한 기계들을 몸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끔찍한 것은 그렇게 달려진 기계들이 대부분 생살을 뚫고 들어가 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아프면 저런 식으로 기계를 몸에 매달 수 있는 걸까?
차마 눈뜨고 봐줄 만한 광경이 아닌지라, 나는 필사적으로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 사람들 옆엔 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생명 이라는게.. 저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남아서까지 지켜야 할정도로 대단한 것인가?
나 같으면 차라리 영원한 안식을 얻는 쪽을 택하겠다. 생살을 뚫고, 약물을 복용하고,
기계에 의존하며 생을 연맹 하는건 어쩐지 바보 같아.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조금 매정 한건가?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조금 씁쓸하긴 하지만. 난 그야말로 이미 죽어버린 몸이 아닌가? 살아있는 저들과는 이미 차원이 다른 몸이시다~ 이거야.
저들을 동정하고 위로하는건 죽은 내가 할짓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면 모를까.
때문에 나는 다시금 당당하게도 처음 중환자실을 방문하려고 했던 목적인- 누군가 죽어나가기를 끈기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 사..상민아! 안돼!! 눈을떠 상민아! "
" 오빠! "
내 바램이 너무 지나쳤던 탓일까.
중환자실에 올라온지 그다 별로 시간이 흐른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부터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교통사고라도 당한 모양인지, 환자가운안으로 온통 붕대칠을 하고있는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애 한명이,
산소호흡기를 쓰고있는데도 거친 호흡을 뱉어내며 온몸을 사정없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달려와 여러 가지로 손을 써보고는 있었지만 소년의 사그라드는 호흡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의학지식이 전혀 없는 내 눈에도 그 소년은 이미 가망이 없었다.
왜냐하면.. 소년의 영혼이 그 육체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 허억... "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그 리얼한 광경을 눈앞에서 똑똑히 목격한 나는 그저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것 말고는
어떤 행동도 취할수 없었다.
무슨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게 소름이 오싹 돋았다.
이미 딱딱하게 식어버린 녀석의 누운 몸 위로, 옆의 벽면까지 그대로 허옇게 비취는 투명한 모습을 가진 또 하나의 녀석이
서서히 일어섰던 것이다.
차라리 영혼이나 죽은 시체인, 둘 중 어느 한쪽만 보였다면 이렇게 간담이 서늘하지도 않았을 것을..
판박이로 닮은 똑같은 녀석의 상반되는 두 가지 모습이 동시에 보이자 그저 비명을 질러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는 나도 영혼인주제에!
..아무튼 소년의 영혼이 그 육체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킨순간, 의사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고,
소년의 가족들은 오열하기 시작했다.
녀석이 완전히 죽은 것이다.
" 자아. 그럼 면상이나 터볼까나. "
소년의 가족들에게는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기대하고 있었던 만큼 나는 아직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것 같은
녀석에게 반갑게 말을 걸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파아아앗.
".....엉? "
소년의 영혼이 앉아있는 병실 침대 옆으로 난데없는 빛무리가 터져나왔다.
아직도 울고있는 사람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있는 것을 보면, 분명 평범한 빛이 아닌게 분명했다.
놀란 나는 신참 녀석(?)에게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고 정말 소심하게도 벽면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고개만을 내밀어, 지금 무슨일이 벌어지는건지 동태만을 살피기로 한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으로 용기없고, 꿀꿀하며, 소심함의 극치를 달리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직후 보이는 장면으로 인해 난 내 행동에 스스로 부끄러워할 겨를도 없이 두 눈만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 뭐야 저 사람들은? '
빛 무리에서 걸어나온 것들은 분명 사람이었다.
그것도 외국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끝내주게 잘생긴 서양인들이었는데, 빛에서 나온 두 사람 모두 현대의
옷차림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그리스시대에나 입었을법한 하늘하늘한 천소재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거기다 머리는 어찌나 긴지 별다른 장식이나 꾸밈없이 길게 기른 머리카락이 등뒤를 넘어 발끝까지 치렁거렸다.
잘생기긴 잘생겼지만 그래도 남자인 주제에 저러고 다니다니.
아무리 사람들 눈엔 안보인다지만 정말 잘도 저러고 다니는 구나, 쪽팔리지도 않나 싶었다.
그 화려하고도 화려하고 민망하다면 민망스러운 차림을 한 남자들은,
익숙한 일인지 아무 거리낌 없이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는 소년에게 다가가더니 녀석을 사이에 두고 자기들끼리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 물병자리생 최상민, 국적 한국. 16세의 고등학생. 사인은 교통사고입니다. 운명부에 기록이 끝났습니다. "
" 이동은? "
" 내세의 길을 걸어야 할겁니다. 짊어진 업이 너무 많습니다. "
" 그렇다면 중앙소속이로군. 오늘 영혼은 이것으로 마감인가? "
" 일단 저희 파트는 그렇습니다. "
똑같은 금발이었지만, 약간 주황빛이 도는 금발쪽 머리가 백금발 쪽의 남자보다 지위가 더 높은 듯 보였다.
일방적으로 보고하던 다른쪽 (백금발) 남자의 대답을 마치자, 그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직도 멍하니 앉아있는 소년의 팔을 잡아 가볍게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완전히 한손으로 나무에 매달린 원숭이 꼴이었지만, 들어올린 남자나 잡혀있는 소년이나 별다른 감정은 없어보였다.
그는 그렇게 소년을 잡고있는 상태 그대로 고개만을 돌려, 부하로 보이는 다른쪽 금발머리의 남자에게 입을 열었다.
" 이만 돌아가지. "
" 예. 프레우니스님. "
파-앗.
........
하. 하. 하.
지금 무슨일이 일어난거지? 응? 내가 지금 뭘 본거야?
눈 깜짝할 사이에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빛무리와 세명의 영혼들을 보며, 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저 멍하니
그들이 있던 장소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별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금발머리의 두 남자가 소년의 영혼을 데리러 온것이라는 것을 쉽게 눈치챌수가 있었다.
아니, 바보가 아니라면야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저렇게 뻔한 상황이 눈앞을 오갔는데!
".....날 안데리러 오길래 저승사자따윈 없는줄알았는데.. "
살아온 한평생도 순탄치 않았거늘. 이제 저승세계까지 나를 물먹이자는건가?
서럽고 억울하다기 보다는 화가 제일 먼저 치밀었다.
저녀석은 데려가고 난 안데려가는 이유가 뭐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나 죽을땐 영혼 담당하던 저승사자가 어디 화장실이라도 갔었다냐?!!
이럴순 없어! 이럴순 없음이라고~!
나는 필사적으로 방금 보았던 사실을 잊기위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생각하자. 나는 아무것도 안본거야, 아무것도 보지 않았어.
방금 내 눈앞에선 아무것도 안죽었고, 코스프레 차림의 외국인들도 나타나지 않았어.
결정적으로, 그들이 죽은 소년의 영혼을 데려가는 꿈같은 상황도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나를 안정시키는 말을 되뇌이며, 스스로 끝없이 세뇌하고 있었다.
이렇게 라도 하면 이 서러운 감정과 치미는 억울함이 어느정도 씻겨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사가 그리 쉬운일이 아니라고 누가 그랬던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날... 나는 결국,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한가지의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역시 저승세계는 날 따돌리고 있었어!!!! '
처음엔 그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다른 영혼들을 찾아다니기에 바빴었다.
응급실이며 중환자실은 기본이고, 일일이 일반 입원실까지 돌아다니는 수고도 아끼지 않으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찾아 헤매고 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죽는 그때마다 전에 보았던 빛무리는 어김없이 나타났고,
등장하는 저승사자는 모두 달랐지만 어찌됐든 영혼을 데리고 다시 돌아가기를 계속하는거였다.
5명을 발견했는데, 그들 모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저승사자에게 영혼이 인도 되었다.
이러니 저승세계가 날 따돌리는게 아니라면 대체 뭐란 말이야!
상황이 그렇게 되고 보니 처음엔 '어디 한번 두고보자'하고 독을 품은채(?) 지켜보던 나도,
하루가 1년같이 지나갈수록 점점 초조해지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정말 실수로 안데려간거였으면 어쩌나. 그래서 지금도 날 찾고있는거면 어쩌지?
이대로 이곳에 영원히 혼자 있게 되는건 아닐까.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날 보거나 만질 수 있는 존재는 하나도 없는 이런 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얼마 안 가서 미쳐 버릴 것이 분명했다.
날더러 이대로 영원히 혼자 떠들고, 혼자 웃고, 혼자 장난치며 놀라는거야?
말해두지만, 그건 지옥의 형벌중에서도 가장 끔찍하고, 괴로우며, 잔혹한 벌이 될 것이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그래서 나는 한참을 고심하고 궁리한 끝에 한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것은.. 조금 억울하고 민망하고 남사스럽고 수치스럽고 창피하더라도 남자답게 정정당당히!!
....저승사자들한테 가서 나도 데려가 달라고 매달리는거다.제길.
무슨 자수해서 광명찾자도 아니고, 내 잘못은 어딜봐도 없는데 자존심도 버리고 내가 매달려야 하다니. 크흑.
생각할수록 원통하고 원망스러웠지만, 이대로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것보단 백배 더 낫지 싶어서
자존심이란 놈은 마음속 깊은곳에 살포시 묻어두기로 했다.
장하다 강지훈. 원래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는 거라잖아? 지금의 비굴함이 후에는 너를 더욱 빛나게 만들고 말거야. 넌 할 수 있어!!
일단 마음의 결심을 굳힌 나는 그 즉시 저승사자가 나타날만한 장소를 물색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생사를 오락가락하는 중태에 빠진 환자를 찾으러 다녔다는 소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곧 어렵지 않게 응급실에 실려온 중환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아아. 이 사람 이미 늦었네. 벌써 혼이 몸을 일으키고 있잖아. 쩝. 나로서는 이득이지만 저 사람 가족들은 안됐군. "
이미 며칠째 보던 광경이지만 다시봐도 언제나 으스스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살풋 인상을 찡그렸다.
사라져가는 호흡을 살린답시고 충격마사지다 뭐다 하면서 급히 응급처리를 하고있는 의사와 간호사들로 인해 주변은
아수라장이었지만,
육체에서 떠난 영혼은 그런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마치 잠들어있는것처럼 고요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지난 며칠간 으레 그랬듯이 빛무리가 나타나기 전에 몸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앞에 다가서며 저승사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상한 것은, 육체에서 벗어난 영혼들 대부분이 저승사자가 올때까지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거다.
대개가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상태고, 정신을 차린다 해도 이미 저승사자에게 손목이 잡히고
난 후라 '아'소리도 못하고 저승으로 끌려가는 것이다.
지금도 내 앞에 멍하니 있는 여자영혼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하나도 없다.
육체에서 분리될 때의 충격이 큰걸까? 나는 안그랬던 것 같은데.
눈앞에서 손이라도 한번 흔들어 볼까 하고 내가 잠시 쓸데없는 고민에 빠지던 때였다.
-파아앗.
" 오옷, 드디어 왔다! "
나 때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착실히 번쩍이며 나타나는 빛무리를 보며,
나는 반가움과 동시에 씁쓸함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이윽고 희뿌옇게 빛덩이를 토해내던 밝은 공간안에서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어? 저녀석들은..'
긴장해서 바라본 저승사자들은 내 눈에도 상당히 낯익은 모습이었다.
발끝까지 흘러내린 금발머리카락에 그리스식 옷차림. 그리고 모델 뺨치는 곱상한 외모.
내가 제일 처음에 발견한 영혼을 데려갔던, 바로 그 저승사자들인 것이다!
이제껏 한번도 같은 저승사자를 두 번이상 본적이 없던지라 그들을 본 내 두눈이 휘둥그레지는건 당연했다.
이게 바로 인연이라는건가?
그들은 전에 했던 방식 그대로 여자의 영혼옆에 서더니, 곧 한사람은 보고하고 한 사람은 그것에 짧게 답하는 식으로
대화를 나눠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내가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걸 느꼈는지, 무심코 내 쪽을 돌아본 백금발의 남자가 표정이 눈에 띄게 경직되는것이었다.
" 좋아, 그렇다면 이 영혼의 이동은... 응? 표정이 왜그러지 하레스? "
" 프..프레우니스님.. 저.. 저 소년은.. "
" 응? 무슨소리를.. 헉!!!
보고를 하던 남자의 경직된 자세에 의아한 시선을 보내던 남자는,
그가 가르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아마도 이제껏 나를 살아있는 사람으로 여겼던 모양인데,
내 시선이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는걸 알고는 내가 영혼인걸 깨달은 것 같다.
그들은 한참이나 믿을수 없다는 듯 두 눈을 깜빡이다가, 민망해진 내가 헤벌쭉 웃어주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무척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
" 이..이게 어찌된 일이냐 ,하레스? 어째서 영혼이 인도자도 없이 저리 혼자 돌아다니는건가!"
" 그..그것이 .. 그..그럴 리가 없는데? 오늘 운명이 다 한 영혼중에 저런 아이는 없었습니다 프레우니스님. "
" 뭐? 그럼 저건 영혼이 아니고 대체 뭐라는.. "
" 당연하죠, 전 오늘이 아니라 벌써 일주일도 더 전에 죽었으니까요. "
당황하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더 지켜볼까 했지만 난 곧 순순히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내가 죽은건 이미 열흘이 넘었으며, 계속 날 데려가줄 존재를 기다렸지만 아무 소식도 없어서 직접 당신들을 찾아왔노라고.
그러나 그들은 나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오히려 더욱 불신의 빛을 띄우며 의심스럽게 나를 바라보기 시작하는것이었다.
" 그럴 리가 없다. 영혼이 생기면 그 파장은 자동으로 우리 인도자들에게 전해지게 되어있단 말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열흘씩이나 인도자들이 너의 파장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엇?
그러고보니 너는 어떻게 된거지? 어째서 죽은자 특유의 파장이 느껴지지 않는거냐? "
"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프레우니스님! "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있는 프레우니스라는 남자 옆으로 하레스란 이름의 백금발남자가 황급히 끼어들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투명한 판넬에 끼워진 얇은 가죽종이 였는데, 무언가를 위한 기록용인 듯 빼곡한 글씨가 적혀있었다.
" 저 소년이 죽었다는 4월 26일의 기록 어디에도 '강지훈'이란 소년은 없습니다. 거기다 더욱 곤란한건.. "
" 영혼이 어렇듯 멀쩡히 눈앞에 있는데 기록이 없다니? 설마 유체이탈인가.."
" 아닙니다. 단순한 유체이탈로는 영혼이 어렇게 오랜시간동안 몸안으로 돌아가지 못했을리 없습니다.
게다가 저 소년의 말에 의하면 이미 육체는 소각된 모양인데,
유체이탈의 경우 이런상황이면 십중팔구 '죽음'으로 기록되어 운명부에 이름이 올라오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
" 연고가 없는 영혼이 있는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단 말인가? "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게 돌아가는 것 같자 나는 어쩐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냥 '나 왜 안데려갔어요?' 하고 물어보면 '아니! 이런 실수가 있었다니!'하고 잠자코 저승세계로 데려갈줄 알았는데
이건 무슨 귀신보듯 -아니 엄밀히 따진다면 귀신으로 볼수도 있지만- 바라보면서 잔뜩 경계만 하는게 아닌가.
가뜩이나 미운털 박힌 저승계에 또다시 불만이 쌓여가는건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던 나 역시, 하레스란 남자의 다급한 외침엔 돌덩이가 된것마냥 딱딱히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 이 소년의 존재 자체가 생명부에 기록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운명이 없는 아이'입니다! "
" !!! "
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내가 '운명이 없다'니?
비록 구박만 받는 심히 불쌍한 인생을 보내왔다지만 엄연히 나에게도 기억하는 과거가 있고 죽지만 않았다면
앞으로 이어질 창창한 미래도 있었다.
그런 내가 운명이 없다니!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은 그럼 뭐라는 거야! 니들 장난 하냐?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은 충격에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어째 나란 인간은 죽고 난 이후부터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도 없느냔 말이다!!
" 운명이 없다? 그게 무슨.. 애초에 운명이 없는 존재가 태어날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나? "
" 저도 그 점이 의문스럽습니다. 아무래도 이 영혼은.. "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하레스란 남자가 얼빠진 내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그의 상관에게 더듬더듬 거리며 말을 이었다.
" 결정자 '아레히스'께 데리고 가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
곳곳에 상아색 기둥이 세워진 영화에서나 보던 화려한 홀이 눈앞에 드러났다.
학교 운동장만한 크기의 넓은 공간은 모조리 흰색 일색이었는데,
기둥을 장식하는 오밀조밀한 꽃이며 창문에 달려있는 고급스런 커텐,
심지어 창문을 장식한 스테인 글라스의 색깔까지 투명한 흰색이어서 가뜩이나 밝은 공간을 더욱 눈부시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바닥에 깔려진 대리석은 신기하게도 투명에 가까운 은색이다. 걸을 때마다 자그맣게 들리는 사박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딱히 구경 할 거리는 하나도 없다. 앉아 있을만한 의자 라던지, 식탁 같은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벽에 그림이 달려져있는 것도 아니고, 기둥에 장식된 꽃들이 특이하거나 예쁘게 생긴것도 아니다.
티끌하나 묻어있지 않은 하얀색 꽃은, 마치 석고로 빚어놓은 것 같아서 오히려 인공적인 위화감만 조성하고 있었다.
그저 희뿌옇게 빛나는 공기중의 빛덩이가 유일한 호기심 거리랄까?
하얀색 외에는 어떠한 색도 담고있지 않은 넓은 공간을 오래 바라보고 있자니,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한 기분마저 들었다.
내가 생명부에 기록이 없다느니 운명이 없다느니 떠들어대던 저승사자들은 한동안 호들갑을 떨며 안절부절하더니
곧 하레스란 남자의 제안으로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직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를 데려온다고 하는 것 같았는데.. 그게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리 들어도 외국인의 이름은 외우기도 어렵고 그다지 기억해 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겠으니까.
하아. 그나저나 정말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모르겠네.
이대로 넋놓고 있어도 괜찮은건가?
위기를 느끼고 탈출하고 싶어도 지금 내가 있는 이 공간은 어떻게 되어먹은 곳인지 나가는 문짝하나 벽에 달려있지 않았다.
영의 세계답게(?) 문 없이 통과해서 다니는건가 하고 다가가 봤지만 통과는커녕 무시무시한 방전만 일으켜서 하마터면
감전사(?) 당할뻔했다.
아마 일정거리 이상 허락되지 않은 자가 벽에 다가오면 전기를 내뿜도록 되어있는 모양이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면.. 아까의 그 사자들은 저 벽을 아무렇지 않게 통과했기 때문이다. 쳇.
" 아아. 심심해에.. 언제까지 이렇게 놔둘거냐고오~~~ "
" 이런,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지훈군. "
" !!! ..... "
그다지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무도 없는 적막한 흰공간에 혼자만 덩그라니 앉아있자니 심심해서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날 버리고 가버린 저승사자들을 속으로 열심히 씹으면서 푸념처럼 한마디 내뱉었을 뿐인데,
바로 그 순간 낯선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오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움찔하며 경계하는 시선으로 돌아보니 언제 왔던건지 날 이곳에 데리고 왔던 저승사자들과 한명의 사람(?)이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있던 것처럼 태연하게 서서 날 바라보고있었다.
" 아.. 안녕하세요 "
허억.. 내가 원래 이렇게 얼빵했던가.
난데없이 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존재에게 내가 제일 처음 취한 행동이란 것이..
바로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였다..인사..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예의가 발랐다고!!
스스로가 해놓고도 민망하고 어이가 없어서 내 얼굴은 순식간에 불타는 화로처럼 붉게 물들어 버렸다.
새로 등장한 인물의 양 옆에 서있던 저승사자들이 킥킥거리며 웃는 것이 보인다.
크아악 걍 죽어라 강지훈 너 왜이러고 사니, 응? ... 아. 나 이미 죽은거지.참..
..바보는 죽어서도 못고친다는 말이 사실이었단 말이냐!!!!
" 후후.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제 소개부터 할까요? 제 이름은 아레히스입니다.
영의 분배와 관리를 책임지고 있지요.
직분으로 치자면 지훈군이 살던 세계에서 말하는 부장급쯤 되겠군요.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을 아레히스란 이름으로 소개한 남자는 어깨까지 기른 검은색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동자를 지닌,
TV에서나 보던 전형적인 미남이었다.
그의 뒤에 서있는 저승사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하얀색 계통의 부드러워보이는 천으로 몸을 감싼 그리스식 옷차림을 한 그는,
전체적으로 무척이나 고풍적인 분위기의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만약 우리반의 남자킬러 송혜은이 봤다면 벌써 팬클럽을 결성해서 쫓아다니고도 남을 경이적인 외모랄까?
남자인 내가 봐도 이렇게 가슴이 벌렁거리는데 여자애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 않은가.
얼굴 잘생겼지, 친절하지, 지위도 높지.. 으으 영의 세계라는것도 별거 없구나.
어딜가도 불공평은 존재한단 말인가!! 아..아참 내 소개도 해야지..
그의 외모에 놀라느라 뒤늦게 소개를 듣고도 멍하니 있었던걸 깨달은 나는, 황급히 정신을 수습하여 허둥지둥 고개를 숙이려고 했다.
" 아.. 죄 죄송합니다. 저는.. "
" 알고있습니다. 강지훈 군. 실례였지만 이곳에 오기 전에 당신의 리스트를 미리 흝어보았습니다.
프레우니스와 하레스가 놀라서 저를 찾은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더군요.
제가 이 자리에 온 것은 당신이 원래 있어야 할 곳을 찾아드리기 위해서입니다. "
" 원래 있어야 할 곳? "
" 앉아서 얘기하도록 하죠, 무척 길어질 것 같군요. "
이 적막한 공간에 앉을 곳이 어디에 있다는거지? 설마 바닥에 주저앉자는 소리인가?
이해를 못한 내가 눈만 동그랗게 뜨자 아레히스란 남자는 또 쿡쿡하고 웃더니 그저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것으로
모든 행동을 마쳤다.
그래서 누군가가 의자라도 가지고 오나 하고 기대하던 나는, 갑자기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에 제대로 놀라지도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서 넘어질뻔 한 것이다.
" 허억.. "
그것은 공간의 뒤틀림이었다. 나로서는 정말 그렇게 밖에 설명할수 없었다.
아레히스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마자 아무것도 없이 텅 비었지만,
나름대로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던 하얀 공간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이 모양이 일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기이한 현상은 놀란 내가 제대로 입을 뻐끔뻐끔 거리기도 전에 제자리를 찾는 듯 한참이나 뒤엉키더니,
정신을 차린 순간 아까 와는 전혀 다른 공간이 되어있었다.
마치 근대의 유럽식 귀족 별장과도 같이 화려한 방안에, 바닥엔 붉은 카페트가 깔려있고,
4명이 충분히 앉을 수 있는 숫자의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있는 공간으로 말이다.
나는 그냥 한자리에 서있었을 뿐인데.. 어째서 뒷배경이 지멋대로 바뀌는거야!
" 자, 여기에 앉으세요. "
서울에 갓 상경한 시골뜨기 마냥 어안이 벙벙해져있는 내게 아레히스는 상냥하게 웃으며 테이블의 한쪽의자를 가르켰다.
결국, 나는 영의 세계라서 일어나는 신기한 현상이려니 ..하고 억지로 납득하고 체념하면서 권해주는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표정들을 보아하니 저들에겐 이런 현상이 너무도 당연하고 익숙한 것인듯한데 나 혼자만 당황하고 놀라워해봤자
나만 바보가 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분위기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아레히스는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머릿속에서 정리하는 듯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곧 투명한 판을 하나 꺼내어
내 앞으로 내밀었다.
재질을 전혀 알 수 없는 판에는 마치 물감으로 찍어놓은 것처럼 여러 가지의 색깔이 동그라한 모양으로 그려져 있었다.
"...........? "
처음보는 물건에 의문을 보내는 내게, 아레히스는 물건에 대한 설명은 나중으로 미루려는지 다른말로 화제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 우선, 지훈군에게는 정말로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저희 쪽의 착오에 의해서 생긴 사고였습니다.
영혼의 분배가 잘못되었달까요? 지훈군은 피해자입니다. "
" 영혼의 ..분배요? "
" 내세의 길을 걷는 영혼이든 새로 창조된 영혼이든 일단 육체를 빌어 태어나는 영혼들은 모두 이곳 명계에서 분배의 과정을 거쳐
그 나름대로의 정해진 운명의 궤도를 걸어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흔히 있는 일이 아닙니다만, 분배과정 연산에 착오가 생겨서 원래 가야할 운명의 길이 아닌 다른 쪽으로
억지로 분배 되는 경우가 있지요. 지훈군의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혹.. 부모님이나 형제들에게 가족으로서의 유대감을 받지 못하지는 않았나요? "
" !! "
불에 데인 듯이 화들짝 놀라는 내 반응에 아레히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약간의 연민과 죄책감, 동정이 어린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 그들에게는 지훈군이 자신들 가족의 운명에 정해지지 않은 존재였으니 소홀히 대하는 것이 당연했을겁니다.
아마 그들도 지훈군을 홀대하면서 이해하기 힘들었을겁니다.
'왜 우리는 이 아이를 냉대하는가' 하고 말이지요.
저희들의 실수 때문에 지훈군이 받지 않아도 될 상처를 입게 만들었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흐음. 뭐 그런거라면 그다지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데.
사실 내가 너무 둔감한건지 무식한건지.. 가족들의 그 심오한 냉대를 있는대로 받아왔으면서도 별로 상처받고 살지는 않았었더랬다.
아니면 너무 일찍 그런 대우를 받아버린 바람에 감정도 못느낄만큼 익숙해져 버린것일수도 있고.
아버지가 구타를 할때는 억울하고 서러운 느낌이 들긴 했지만..뭐, 그것도 몸이 아픈데 그런느낌을 안받는게 더 이상한거 아니야?
그리고 말이 좋아서 말이지.. 사람을 실수로 죽여놓고 사과하면 땡이냐? 아, 내 경우에는 실수로 잘못 태어나게 한거지만..
어쨌든. 잘못을 인정했으면 이제라도 고치면 되지 않겠느냐고.캬캬캬..
" 저어. 그런데 운명이 없다는 소리는? 생명부에도 제 기록이 없다고 그러던데.. "
" 아, 그건 지훈군이 잘못 태어나는 바람에 원래의 태어나야할 장소에 공백이 생겨서 그런것입니다.
한마디로 지훈군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분배의 과정을 기다리는 영혼인 셈이지요. 태어나지 않은 자에게는 운명이 없으니까요. "
허거걱. 그럼 내가 여지껏 산 것이 다 무효라는 소리?
죽어라 풀고있던 시험문제가 잘못 된거라면서 새 시험지로 교체되었을때의 기분이 바로 이럴까?
할말을 잃고 망연자실해 있는 내게 아레히스는 다음 말을이었다.
"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훈군이 지금껏 살아있었다는게 더 신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운명이 없는 영혼을 담은 육체는 영혼과의 단결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조금 큰 충격에도 쉽게 영혼과 분리가 되기 때문이죠, 지훈군은 몸을 굉장히 소중히 다루었던 모양입니다. "
" 하...하...하... "
어쩐지.. 별로 심하게 부딪친 것 같지도 않았는데 죽어버려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저 이 험한세상, 몸이 재산이라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사려왔던 것이 이리 될줄이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어려서 사리분별을 하지 못할 나이에 죽었다면
스스로 인도자를 찾아가지 못해서 우연히 발견되기까지 영원토록 혼자서 떠돌아 다녔을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그 말을 아레히스에게 듣는 순간,
상상만으로 너무 끔찍하고 소름끼쳐서 그나마 나에게 운이 아주 없지는 않다고 스스로 얼마나 위안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 운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 자, 그럼 지훈군의 원래 위치를 찾아보도록 할까요? 이것을 봐주십시오. "
이미 지난 17년의 공백이 있기 때문에 되도록 빨리 원위치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 아레히스가
나에게 내민 것은 처음 테이블에 앉았을 때 꺼내두었었던,
투명한 판에 물감이 여기저기 찍혀있는 정체를 알수없었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내가 의아한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자 아레히스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 이것은 '소울메이트'라는 것으로 여기 묻혀진 색깔들은 영혼의 운명을 나타내는 겁니다.
이렇게 보여도 주신의 신력으로 만들어진 신뢰성이 높은 물건이죠. "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아레히스 자신부터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시선으로 그 물건을 바라보고있었다.
지금 저런 행동을 취하면서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건가?
나는 불안함과 동시에 호기심을 느끼면서 판에 그려져있는 여러개의 색깔들을 흝어보았다.
" 뭘 어떻게 하는건데요? "
" 음.. 간단합니다. 여기있는 색깔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색을 고르기만 하면 됩니다. 정말 쉽지요? "
..겨우 그것만으로 운명의 위치를 찾을수있다고?
다시금 불안한 심정으로 아레히스를 못미덥게 바라봤지만, 아레히스도 그렇고 옆에 앉아있는
두명의 사자들도 연신 맞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바람에 할수없이 시선을 다시 소울메이트에게로 돌렸다.
이왕 이렇게 된김에 속아주는 셈치고 그냥 색깔이나 골라볼까나?
가장 마음에 드는 색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고 했으니 어려울것도 없겠다, 좋아 까짓거 해보지 뭐..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소울메이트의 색깔들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치 물감이 묻혀진 파레트처럼 가지런히 정돈 되어있는 색깔들은 7종류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각기 초록색, 붉은색, 검은색, 흰색, 금색, 파란색.. 그리고..
" 이게 가장 마음에 드네요. 이 색깔로 할래요. "
그것은 투명하도록 맑은 연녹색의 빛깔이었다. 거기다 각도를 다르게 볼때마다 색깔이 조금씩 달라졌는데,
그때문인지 다른 색들보다 훨씬더 반짝이고 신비해보였다.
물감으로 혼합한 것 같지는 않은데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런 빛깔을 만들어 낼수있었는지 무척이나 궁금하고 신기했다.
" 어디 볼까요? 지훈군이 선택한 색...은.... "
" 헉! 아레히스님! 이건!!! "
" .....엉? "
뭐..뭐야? 왜들 그러지?
유쾌한 표정으로 내가 색깔을 고르기를 기대하고 있던 아레히스와 사자들은 내가 가르킨 연녹색의 빛깔을
보자마자 눈에 띄게 안색이 달라졌다.
그리곤 한참이나 무언가를 가져오거나 자료등을 찾는 듯 술렁거리기 시작했는데 상황을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설마 내가 고른 색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그저 빛깔이 예뻐서 선택한 것 뿐인데..
으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건지 알수가 없잖아! 그냥 다른걸로 바꾼다고 할까?
불안해진 내가 색을 다시 골라도 돼냐고 막 물어보려던 때였다.
마침 그들끼리의 대화가 끝났는지 다시 침착한 표정이 된 아레히스가 나를 똑바로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 하아. 이거 정말 행운이랄지.. 운명이랄지.. 아무래도 드디어 찾은 것 같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
" 예? "
" 지훈군은 모르겠지만 이 소울메이트의 선택은 단순히 마음에 드는 색깔을 고르는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선택된 색은 비록 아무렇지 않게 찍는다거나, 누군가의 강요로 이뤄진것이라고 해도 반드시
그의 운명의 색깔을 선택하도록 되어있지요.
예를들어 지훈군이 다시 색깔을 선택할 기회를 부여받는다 해도 지훈군은 반드시 이 색에 다시 끌리게 될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지훈군의 운명의 색이기 때문이죠."
아레히스는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추고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격양되어있는 감정을 추스르려는듯. 그의 두 뺨은 아까전과는 달리 옅은 붉은색으로 상기되어있었다.
" 여기 있는 색깔들의 의미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소울메이트의 첫 번째 색은 영혼에게 부여된 육체의 종족을 나타냅니다."
" 종..족이요? "
" 그렇습니다. 지훈군이 살던 세계에는 생소한 단어겠지만 무수한 타차원에서는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들이 수없이 존재하지요.
초록색은 초목을 상징하는 엘프, 붉은색은 열정을 상징하는 인간, 검은색은 어둠을 지배하는 마족,
흰색은 신성을 상징하는 신족, 파란색은 고귀함을 상징하는 드래곤,
그리고 금색은 뛰어난 기술성을 상징하는 드워프입니다.
그리고... 이 연녹색은.. 부연과정이 더 필요하겠군요."
".............? "
판타지에서나 등장할 법한 화려한 종족의 순서가 모두 지나고 나자 어안이 벙벙해져있는
내게 아레히스는 생긋 웃더니 곧 또 다른 소울메이트를 꺼내어 내 앞에 내밀었다.
전거와는 다르게 단 네가지의 색만이 담겨있는 소울메이트에는 각기 파랑, 빨강, 금색, 그리고 흰색이 가지런히 병렬되어있었다.
내가 다시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아레히스는 다시한번 색깔을 고르도록 권유했고,
결국 난 이유도 알지 못한채 다시 소울메이트에게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고른 것은 사파이어보다도 푸르고 반짝거리는 시원한 파란색의 빛깔이었다.
갑자기 목이 말라와서 선택한 것 뿐이었지만, 내가 그걸 고르는순간 아레히스는 무척이나 진지해진 표정이 되더니
'역시..'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리곤 여전히 영문을 모르고있는 내게 천천히 설명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 지훈군. 이 전 생에 있었을 때, 몸이 약하거나 잔병치례를 자주하지는 않았습니까? "
" 예? 아..네. 체력이 약한편이긴 했는데.. "
" 비가 자주 오거나 태풍,혹은 장마로 인한 피해를 입은 적은요? "
" 직접적인적은 없었지만 매년 여름마다 수해가 나긴 했어요. 장마가 길기도 했구요...그게 무슨 문제라도? "
그러고 보니 내가 태어나던 해부터 죽기 전까지의 한국의 여름은 지독하게도 비가 자주 내려서 사람들의 원성을 들었던 것 같다.
거기다 요 몇 년 전부터는 무슨 심술인지 날씨의 기승이 더욱 심해진 터라 수해민의 피해가 갈수록 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이야기가 왜 지금 여기서 아레히스의 입을 통해 회상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무효로 돌아가 버린 전생인데 죽어버린 지금에 와서 무슨의미가 있다고?
게다가 지금은 원래의 내 위치를 찾고있는 중이 아니었던가.
" 아아, 왜 그런걸 물어보냐는 눈빛이군요. 지훈군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지금부터 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아까전에 지구만이 아닌, 여러종족이 존재하는 타 차원이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그 차원중의 하나인 '아크아돈'에 재앙이 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벌써 10년 이상을 비가 단 한방울도 내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
" 헉? "
" 다행히도 그곳 사람들의 자체적인 힘으로 인공비를 뿌리는 등, 사태의 최악으로 치닫는 길은 막고 있지만
그것도 언제까지 유지될지 아무도 모르는 위태한 상황입니다.
주신이 허락하신 재앙이 아닌지라 한때 이곳을 포함한 명계와 모든 신계의 관리들이 원인을 밝히기 위해 동분서주 했었죠.
그리고 드디어 그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
" 뭐..뭐였는데요? "
나랑은 상관이 없는 얘기였는데도 이상하게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잔뜩 긴장한채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자 아레히스는 그럴줄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곧 다음말을 이었다.
" 아크아돈은 주신이 직접 개입하는 지구와는 달리, 4대 정령을 통해 자연계의 질서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특히나 각 정령왕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생태계의 흐름을 좌지우지 할수있을 정도죠.
정령왕들의 수명은 대략 1만에서 2만 사이이며 그들이 죽게되면 곧바로 새로운 정령왕이 탄생하여 그 뒤를 잇게 됩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번 아크아돈에 물의 정령왕이 소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령왕이 탄생하지 않았던겁니다.
10년간의 재앙의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었죠. "
" 겨우 그거 하나로요? "
물의 정령왕인지 뭔지 하나가 없다고 10년간이나 비가 내리지 않는단 말인가?
어이가 없어진 내게 아레히스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겨우'가 아닙니다, 지훈군. 그 만큼 정령왕의 존재가 대단한 겁니다.
'물의 정령왕'이라고 한다면 모든 자연계의 '물'에 대한 권리와 통제가 가능한 존재니까요.
아무튼 그 정령왕이 탄생하지 않는 바람에 신계와 명계는 다시한번 발칵 뒤집혔습니다.
정령왕으로서의 분배를 기다리고있던 영혼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 뒤늦게 발견되었거든요.
아, 정령왕들도 영혼이 있습니다. 다만 인간의 경우와는 조금 달라서 육체가 아닌 자연의 기운을 빌어 태어나지요.
소멸이 가까워진 정령왕은 이곳 명계에 와서 주신이 창조한 순결한 영혼에 자신의 모든 힘을 부여하여 정령왕을 만든 후,
신계로 들어가거나 내세의 길을 걷습니다.
그럴 경우 가장 많이 환생하는 케이스가 '드래곤' 이란 종족이죠- 이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가겠습니다.
어찌됬든 이미 정령왕으로서의 힘을 부여받은 영혼은 이제 자연과 동화되어 정령계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라졌으니 저희로서는 정말 난감한 상황일수밖에요. "
속사포로 말을 마친 아레히스는 지금도 생각하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오한이 이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째 처음에 보았을 때 느꼈던 신비하고도 이지적이던 분위기가 상당히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걸 증명이라도 하듯, 아레히스는 전혀 쑥스러워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러고는 정말로 태연한 목소리로 엄청난 소식을 나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 그런데.. 오늘 드디어 그 정령왕의 영혼을 찾아내었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지난 십수년간 그를 찾기위해 고생했던 모든 일들이 물거품처럼 아득해 지네요. "
" 예? 찾았어요? 어디에 있는데요? "
혹시나 운이 좋으면 그 대단한 존재를 만날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나는 눈빛까지 반짝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마 그 즉시 바로 대꾸한 아레히스의 말이 아니었다면, 그 정령왕에게 소개 좀 시켜 달라는 바보같은 행동을 저질렀을지도 몰랐다.
아니. 평소의 내 성격을 짐작하건데 틀림없이 그랬을거다.
정말로 바보같은 행동을 말이다!
" 어디에 있긴요. 바로 제 앞에 앉아계시지 않습니까. "
" 네? "
대체 무슨? 아레히스의 앞이라면 나밖엔 없는... 에에엑? 서.. 설마?
순간 당황하는 나를 보는 아레히스의 표정이 무척이나 오만하게 보였던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그는 승기를 잡은 장군마냥 의기양양한 포즈로 입가에 씨익 미소를 띄웠다.
저것 하나만으로도 그렇게나 얄미워보일수가 없는 것이.. 크윽 아깝다.
저 꽃같은 외모만 아니었어도 돌이라도 하나던져줄수 있는 것을..
예전부터 내 주위엔 꽃소년에 열광하는 무리들이 드글드글했었다.
그 영향으로 언제부터인가 나 마저 꽃미남들에게는 자연히 약한 모습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
그나마 오늘의 소득이라고 한다면.. 꽃미남이라고 다 같이 내숭쟁이들은 아니라는 것 하나일까?
아레히스 좀 봐라. 저 얼마나 뻔뻔스럽고 잘난척하는 모습인가.
남 속을 다 뒤집어 놓는 엄청난 말을 꺼내면서도 아레히스의 표정은 무척이나 평온했다.
" 두번째 소울메이트의 색은 종족의 지위. 각도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는 연녹색은 자연을 상징하는 정령을..
그 중에서도 사파이어와 같은 시릴듯한 푸른색은 '물의 정령'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아크아돈의 물의 정령은 현재 모두 소멸한 상태.
정령왕이 먼저 태어나지 않으면 하위정령들은 태어날수가 없죠.
따라서 이번 소울메이트에서 물의 정령을 선택할수 있는 존재는 '물의 정령왕'밖에 없다는 소리입니다.
그동안 운명을 잃은 많은 영혼들에게 시도해봤지만 이 색깔은 선택한 자는 단 한명도 없었지요.
정말 오래동안 찾았습니다,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님.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
" 에에에에엑?? "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 셰계를 다스리는 4대 정령왕이 있었답니다.
그들의 이름은 불의 이프리트, 바람의 미네르바, 땅의 트로웰, 그리고 물의 엘퀴네스 였어요.
어느날 물의 엘퀴네스는 자신이 소멸할 때가 다가옴을 알았고,
곧바로 명계에 가서는 자신의 후계자에게 모든 힘을 부여해 주었답니다.
새로운 물의 정령왕이 탄생한거예요.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새로 탄생한 물의 정령왕은 그만 띨.띨.하게도 엉뚱한 세계에서 잘못 태어나
온갖 구박을 받으며 인간 노릇을 하였답니다~
지가 무슨 신데렐라도 아니면서 말이죠. 참 어이없지 않나요?
글쎄글쎄~ 명계의 사람들이 잘못을 지적해 줄때까지 자기가 정령왕인지도 몰랐다지 뭐예요?
자기 때문에 다른 쪽 사람들은 물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었는데 말이죠.
그것 참 정말 띨.띨.한.놈. 아닙니까? 하. 하. 하.
" 글쎄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이번일은 지훈.. 아니 엘퀴네스 님의 잘못이 아니라니까요.
당신께서 그렇게 자책하실 일이 아닙니다. "
어느새 나에 대한 호칭을 극존칭으로 바꾼 아레히스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아까부터 심한 자기 모멸감에 빠져 환상의 세계(?)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는 나를 더 이상은 못봐주겠던 모양이었다.
" 당신이 잘못 태어나신건 저희 쪽의 불찰이었으니 당신의 부재로 인한 아크아돈의 피해도 어디까지나 저희 책임입니다.
이미 그것에 대한 여러 가지 시정조치를 취해둔 상태이고,
다행스럽게도 사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당신을 찾았으니 이제 남은 일은 모든 일을 원상태로 돌려놓는 것 뿐이에요. "
아레히스가 말한 원상태 라는 것은 내가 아크아돈의 정령계라는 곳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뜻했다.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속에 자리잡은 일말의 불안감 때문에 나는 쉽사리 그의 말에 응하질 못하고 있었다.
" 그런데.. 정말 착각하는거 아니예요? 나같이 평범한 놈이 정령왕이라니... "
머리가 특별히 뛰어났던것도 아니고..
외모도 그저 그래서 변변한 여자친구 하나 만들어 본 역사가 없는 내가 사실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라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질 않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확인을 요구하는 말을 꺼내자,
아레히스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듯 단번에 정색을 하면서 단 한마디로 나의 생각을 일축해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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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울메이트는 주신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것. 착각일 리가 없습니다. "
" 하..하지만.."
" 지훈군이었을 때 몸이 약하다고 했었죠? 그건 정령왕의 강대한 힘을 인간의 육체가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비 바람과 폭풍이 잦았고, 그것이 해가 지날수록 피해가 커진 것은 당신이 성장함으로서
그 안에 담겨진 정령왕의 기운이 더욱 강해졌기 때문이죠. 이래도 납득이 되지 않으십니까? "
... 그래도 납득이 안되는데요?...
사실 저승세계 라는 곳이 이렇게 서양놈(?)들이 판치는 판타지풍 이라는 것 자체부터가 납득이 안되는 나인데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죽는 순간부터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염라대왕은 코빼기도 안보이고.
원래라면 검은 삿갓을 쓰고 창백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야 할 저승사자들은
어디 연예계에 데뷔 시켜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엄청난 꽃미남들 뿐이다.
안 그래도 딸리는 내 외모에 주변에서 넘실거리는 꽃배경은 정말이지 감당하기 힘들었다.
아아. 내 숯 많은 고수머리가 이렇게 원망스러울 줄이야!
나는 이런 내 심정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서 아레히스에게 털어놓았고,
그 말을 들은 아레히스는 잠시 어이없다는 얼굴이 되더니 곧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비웃는 듯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어째 바보가 된것같아서 되게 기분이 나빠지려는데 그는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 아, 죄송합니다. 실례를 했군요. 흠..
그러니까 엘퀴네스님은 이곳 명계가 그 동안 당신이 생각해 왔던 이미지와 많이 달라서 적응이 되지 않는다.. 이 말이신가요? "
" 예? 아니,뭐.. 조금 놀라긴 했지만.. 적응을 못할 정도는 아닌데요? "
외국인과 마주치면 그대로 석상이 되어버리는 내 버릇이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것에
조금 신기할 뿐이지 별로 적응을 못하는건 아니었다.
그저 동양사람이 없다는것에 대한 서운함 정도랄까.. 까짓 적응을 못하면 또 어떻겠는가.
어차피 이곳에서 아주 눌러 사는것도 아니고. 곧 다른곳에서 태어난다는데..그냥 신기한 구경하려니 하고 견디는 수밖에.
어쩌면 나는 이미 내가 정령왕이라는 얼토당토않는 아레히스의 설명도 이런식으로 억지로 납득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 부분에 대해 더 이상 반박하고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을 보면.
내 대답을 들은 아레히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 그건 다행이로군요. 이제 엘퀴네스님이 돌아가셔야 할 곳도 이곳과 비슷한 분위기거든요. 적응을 못하시면 어쩌나 했습니다. "
".........."
그것은 그곳 인간(?)들이 꽃미남들 뿐이라는 소리일까, 아니면 서양인들 뿐이라는 소리일까.
둘중 어느하나도 반갑지 않은 나로서는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 질 수밖에 없는 애매모호한 설명이었다.
엘퀴네스라는 이름을 들었을때부터 심상치 않다 싶긴 했지만. 이대로 태어나면 서양세계에서 태어나는 건 거의 확실한 듯..
크흑. 우째 이런일이! 언어는 정말 자신없는데에!!!
그나마 보통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적을 받았던 다른 과목들에 비해 언제나
전매 특허 미스테리의 최악점수를 매번 영예롭게 기록하던 나의 영어 실력을 떠올리자,
차라리 이대로 태어나지 않는편이 좋지 않을까 하는 맹렬한 유혹에 사로잡혔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레히스는 원래 모든 사람의 생김샘이는 서양인계열이었다느니,
그러던 것이 사는곳의 지형과 풍토, 의식주의 형성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게 된것이라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열심히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들을 주절거리고 있었다.
물론, 이제 막 현실을 깨달은 이유로 몸에 긴장이 잔뜩 들어간 나는 전혀 귀담아 듣고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까... 아레히스도 외국인(?) 이잖아?
그런데 나는 어떻게 저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는거지?
" 아레히스, 혹시 한국말 할줄 알아요? "
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아레히스는 설명하던 것을 멈추고 무슨 엉뚱한 소리랴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떳다.
그리곤 내 질문의 의미를 알았는지 잠시 '아'하고 감탄사를 내뱉더니 큭큭거리며 짧게 웃었다.
" 무슨 소린가 했더니.. 쿡쿡. 엘퀴네스님. 영혼은 언어로 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일때의 의식이 남아계셔서 착각하고 계시는 거겠지만,
지금 저희가 하는 대화법은 입으로 내뱉는 소리가 아니라 의지로 이루어진 파장의 전달입니다.
아, 그리고 보니 정령어와 비슷하군요. 그들도 의지로 파장을 전달하여 대화하죠.
다시 태어나셔도 대화하시는데엔 큰 지장이 없을겁니다. "
그렇다면 지금 말하면서 움직이는 입 모양은 뭔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내게 아레히스는 아직 이런 대화법에 익숙하지 않은 영혼들에게 무의식 적으로나마
대화를 유도해내기 위한 일종의 속임수라고 대답했다.
상대방이 입 모양을 움직이며 말을 걸어오면 영혼도 별 다른 거부감 없이 살아있을 때 하던 대로의 대화를 구사하게 된다나 어쩐다나.
하긴, 소리는 분명히 들려오는데 어딜 봐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사람들 뿐이라면 초짜 영혼입장에선(?)
무섭기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내가 영혼으로 떠돌아 다닐 때 궁금해 했었던,
이제 막 육체에서 벗어난 영혼이 왜 그리 멍하니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냈다.
일단 처음에 생각 했었던데로 육체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영혼이 받는 충격이 만만치 않아서 이기도 했지만,
육체에서 벗어나자 마자 바로 정신이 들면 인도자들이 오기전에 자리에서 일탈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에
그들을 통제할 수단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하루가 바쁜 저승사자들이 일일이 일탈한 녀석들까지 찾아다니는 수고를 더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금제를 걸어둔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가끔씩 정신이 일찍 깨어 인도자가 도착하기 전에 사라져버리는 녀석들이 간혹 생기는데
그런 녀석들은 운좋게 발견되지 못하면 귀신이 되어 이승에 남는단다.
그러다 나중에 붙잡히면 구제받을 길도 없이 호된 벌을 받고 가장 구질구질한 내세를 걷게 된다고 하니..
괜시리 이승에 미련이 남는답시고 인도자들을 피해다니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아레히스의 푸념섞인 설명이었다.
" 아, 그리고 엘퀴네스님의 지금 모습은 진짜가 아닙니다.
인간으로 있을 때 입었던 육체에 영향을 받아서 본래의 모습이 변질되었습니다만,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신다면
그것도 본 모습을 되찾으실겁니다. "
" 그..래요? "
지금것은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제라서 나는 조금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서양세계에 동양인인 지금 모습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있는데다,
서양인으로서의 내 모습이 진짜 모습이라고 하니 기대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내심 섭섭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심란해 졌다.
그래도 17년동안 한결같이 아침 거울을 통해 인사하던 얼굴이랍시고 잘생기지도 않은 주제에 정이 좀 들었던 모양이다.
엘퀴네스의 장-2. 탄생...그리고 만남.
" 이런 ,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서두르셔야 겠습니다. 이 이상 아크아돈에 물의 정령왕의 부제를 늘일 여유가 없네요. "
그다지 오랜 시간을 앉아 대화를 나눈것도 아니었는데 아레히스와 두명의 저승사자들은
학교 지각하기 1분전의 학생처럼 초조한 기색이 되더니,
마냥 태평히게 앉아있던 나를 재촉해서 일으킨후 곧 어디론가 끌고(?)가기 시작했다.
이왕 늦은거 차 한잔 대접해줄 여유도 없나. 여기 손님 대접이 너무 엉망인거 아니야?
무어라 한마디 핀잔을 주고 싶긴 했지만 내 팔을 잡고 걸어가는 아레히스의 굳은 얼굴이 너무나 비장해 보여서
차마 투덜거리지 못하고 속으로만 꿍얼거렸다.
원래 저렇게 성실.친절.온유하게 생긴 것들이 잘못 건드리면 일본야쿠자 보스보다 더 사악한 법이다.
저 젊은 나이에(?) 높은 자리까지 꿰어차고 있는 놈이니 오죽이나 더 하겠는가.
열받으면 정령왕이고 환생이고 다 때려치우고 당장에 소멸시킨다고 덤빌지도 모르는 일이다.
때문에 나는 순순히 아레히스가 이끄는 데로 테이블이 있었더 방을 나와 새하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복도는 마치 미로처럼 높은 벽 이곳 저곳에 통로가
뚫려있었는데 뿌연 안개 같은 것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어서 앞을 분간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런데도 아레히스들은 시력이 좋은건지,
아니면 무슨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건지 단 한번도 머뭇거리는 기색없이 방향을 척척 잘도 정하는 거였다.
거침없던 그들의 발이 멈춘 것은, 내가 거의 하루종일을 걷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들이 멈춘 곳은 복도의 마지막으로 보이는 막다른 벽면에 덜령 놓여진 나무 문 앞이었는데,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안개들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언뜻 보기에도 새겨진 장식들이 매우 고풍스러웠다.
덕분에 아까까지의 강행군때문에 쌓인 스트레스가 어느정도 풀리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문에 달려진 팻말을 조심스럽게 읽어보았다.
" '차원 17, 아크아돈의 정령계'라... 설마 이 문안으로 들어가면 아크아돈의 정령계인지 뭔지에서 태어난다거나 하는건 아니겠지? "
그래. 설마 아무려면 그럴 리가.
태어나는게 그렇게 썰렁하고 간단한 형식일 리가 없어. 암 그렇고 말고.
그러나 스스로를 세뇌하듯 다짐하던 나에게 아레히스의 가차없는 대답이 화살촉처럼 날아와 박혔다.
"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건 '생명의 문' 이라는 것으로
이것을 통과한 자는 각 문이 가르키고 있는 차원에서 주어진 운명에 따라 알맞은 신분과 외모를 갖고 태어나게 됩니다.
단번에 알아내시다니 눈치가 빠르신데요? "
".............."
제길. 난 왜 꼭 이런 쓰잘데기 없는 건 잘 맞추는거지?
내 얼굴은 순식간에 벌레 씹은 것마냥 사정없이 구겨졌다.
영특하다느니, 똑똑하다느니 하는 아레히스의 칭찬이 들려왔지만 싸악 무시해 줬다.
입에 침도 안바르고 하는 아부성 칭찬따윈 하나도 안반가워, 쳇!
" 자, 그럼 이제 이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할.. 아..참참. 그걸 잊을뻔했네요. "
시간이 없다고 서둘렀던 것 답게 당장이라도 문을 열어나를 들여보내려는 듯 급하게
손잡이에 손을 갖다대던 아레히스가 무슨 일인지 잠시 멈칫했다.
"........? "
영문을 몰라 눈만 멀뚱히 뜨고 있는데 이제껏 별말 없이 아레히스의 옆만 지키고 있던-그래서 있는지도 잊어버리고 있었던-
두명의 사자중 프레우니스가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도대체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던 건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머그컵하나를 내게 불쑥 내미는 것이었다.
당연 그 행동의 의미를 모르는나는 '이게 무슨짓이지?' 하는 시선으로 그의 상관인 아레히스를 바라봤고,
그러자 기다렸다는듯한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 이 문을 통과 할때 받는 차원의 압력을 완화시켜주는 용액입니다. 마셔두는게 좋을거예요.
환생의 여러 가지 부작용을 막는 역할도 하거든요. "
" ...그.. 그래서 이걸 마시라구요? "
그것은 마치 용암과도 같은 붉그스름한 색깔의 걸쭉한 액체였다.
이따금씩 부글거리며 떠오른 방울이 툭툭 터져나가는 것을 보며 나는 떨떠름하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거.. 정말 마셔도 괜찮은걸까?
의도 하지 않았는데도 내 표정은 자연스럽게 구겨졌다.
그 때문인지 내 심정을 어느정도 눈치챈 아레히스가 냉큼 뒷말을 덧붙였다.
" 조금 쓰긴 해도 맛은 크게 나쁘진 않을겁니다. 인체(?)에도 무해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드세요.
설마하니 제가 먹고 잘못되는 것을 드리겠습니까? "
" 아..하하. 그..렇죠? "
그런데 말이지, 아레히스씨? 당신은 왠지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서 무서워..
차마 면전에 대고 '네' 라고 대답할 수가 없어서 어설픈 웃음으로 맞장구 쳐주었지만 그럴수록 정쳅불명의 액체에
대한 나의 거부감은 점점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아까 내가 아레히스한테 말대꾸한게 있었나?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반항이라도?
생각해내자, 생각해내. 이건 안심시킨뒤에 교묘히 살해(?)하려는 아레히스의 교활한 속임수 일지도 몰라!
그러니 꿀리는 일은 무조건 생각해 내서 용서를-!!
" 자자, 뭘 그렇게 망설입니까? 몸에 좋은 약일수록 입에 쓰다는거 몰라요? 얼른 마셔요, 얼른~ "
" 우왓-!! "
그것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자꾸만 재촉하는 아레히스의 강압적인 권유에 못이겨 얼떨결에 컵을 입 가까이 대고 있었던 나는 그가 무심코 어깨를
툭- 치는 바람에 손도 못써보고 그대로 용액을 입안으로 들이키고 만 것이다!!
아주 조금만 맛을 먼저 보고 괜찮으면 마시려고 했었거늘..크흑
이로서 부질 없는 목숨. 조금만 더 구차하게 연명해 보려던 내 처절한 시도는 어이없게 무너지고 말았다.
물컹거리는 액체는 말로 형용할수 없는 쓴맛과 함께 목구멍을 타고 흘러 넘어갔다.
꿀꺽..
" 우웨에에에엑!!!! "
세상의 모든 쓰디쓴 약들은 거의 종류별로 먹어봤고, 심지어 덜익은 생감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씹어본 경험이 있는 나다.
그러나 기필코 하늘에 맹세하건데 그때 맛보았던 그 어느 쓴맛이라 할지라도 지금 내 목을 타고 넘어간 액체 만큼
내 혓바닥을 유린할수 있었다라고는 감히 칭하지 못할 것이다!
아레히스의 반 강제적인 권유로 인해 억지로 액체를 삼킨 나는 쓰다는 투정을 부릴 겨를 조차 없이 곧바로 돌아서서
구역질을 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아무리 토해내려고 해도 한번 들어간 액체는 다시 세상구경을 하진 못했다.
덕분에 쓴맛의 찝찝함과 느글거리는 속을 달래느라 한동안 정신이 없던 나는, 다시 진정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만 했다.
이딴 것을 조.금.쓰고 인체에 해가 없다 우긴 뻔뻔한 장본인을 한껏 째려봐 주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아무리 살기에 가까운 째림을 날려도 여전히 유유부동,
여유만만한 자세로 미소까지 머금으며 나를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행태가 마치 약물 실험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코 박사처럼 보여서 나도모르게 소름이 오싹 돋았다.
이런 썩을.. 나 혹시 인간 마루타 된거 아니야?
정령왕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로 사람 정신 어지러워진 틈을 타서 말그대로 인체실험을 한것일수도.. .. 흐흠..
내가 생각해도 그건 오버다. 자중하자 강지훈.
그러나 이런 생각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내가 진정된 것을 느꼈는지 안색을 바로 하고 엉뚱한 질문을 꺼낸 아레히스에 의해서..
" 자, 그럼 엘퀴네스님!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1 + 1 이 뭐죠? "
"..........."
이 후로부터 나는 끊임없이 어떻게 하면 명계의 높으신 분을 죽일 수 있을까 맹렬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기절할만큼 쓴 약을 먹여 사람 울화를 돋구더니.. 뭐? 이젠 뭐가 어쩌고 어째?
1 + 1 이 뭐냐고 그랬어, 지금? 엉? 1 + 1 ???!!!!
할수만 있다면 당장 멱살이라도 쥐어잡아 비오는날 먼지나도록 짤짤짤 흔들어 주고 싶은 충동이 전신에서 물씬물씬 풍겨나왔다.
설마 답이 중노동이니, 창문 이니 하는 것 따위의 넌센스는 아닐테고.. 대체 저것(!! 점점 말이 험해지고 있다.)들은
내 머리를 뭐로 보고 있는거야!!
진지한 표정들을 보니 정말로 내가 그걸 모르고 있을거라 생각하는 모양이다.(울컥)
대답하는 내 자세가 삐딱해진 것은 그야말로 당연한 일이었다.
"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슈? 1 + 1 이면 5살짜리 코흘리개도 다 알아, 이거 왜이래! 내가 바보야? 엉? 내가 바보냐구!!
2 잖아, 2! 2 아니야? 여기선 1+ 1이 2가 아닌가 부지?
하, 그래? 여기선 2가 아니야? 아! 여긴 숫자의 개념이 다른가 보지? 엉? 그런거냐고!!! "
" 흠흠.. 아..알았으니 진정좀 하십시오... 흐음.. 역시 안되네.. 이걸 어쩌지... "
나의 반항섞인 태도가 생각보다 과격했는지 아레히스는 잠시 땀을 삐질거리며 할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는 성질내던 내가 스스로 무색해 질 만큼 나에게 보내던 시선을 완전히 끊더니 같이 온 사자들과
저들끼리 심각하게 쑥덕이는 거였다.
대체로 소곤거리는 목소리라 내용은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이따금씩 용액을 더 먹여봐야 겠다느니 ,
성공할 때 까지 먹여보자느니 하고 중얼거리는 것 같아 나는 나도 모르게 뒤로 주춤 거리며 그들에게서 멀어지고자 노력했다.
저런 최악의 음료수는 내 평생 단 한모금이면 족하다! 아니, 넘치고도 남아!!
내가 저딴걸 두 번 다시 먹을줄로 안다면 그건 인간 강지훈을 너무 우습게 본거라고!
내가 이대로 얌전히 당해줄줄 알고?
그들끼리의 대화가 끝났는지 서서히 내게로 집중되는 6개의 눈동자들을 보며 나는 필사적으로 도망칠 구석을 찾았다.
그리고 그렇게 사정없이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내 눈에 생명의 문이 들어온 것은 병아리가 자라 닭이 되듯.
너무나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저 이상한 액체가 차원의 압력을 완화시켜주는 거라는걸 알고 있다.
저걸 제대로 마시지 않고 들어간다면 무슨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 앗! 잠깐만- 엘퀴네스님!! "
" 에잇, 난 몰라! 이렇게 되면 이판사판이다 ,뭐! 그딴 액체 다시 마시느니 차라리 죽는게 더 낫다고 빌어먹을!! "
...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참 아무것도 아닌 일에 쓸데없이 목숨을 가지고 도박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지독할 만치 쓴 약으로 인해 이성이 마비되어 버린 난 아레히스의 만류를 채 듣기도
전에 겁도 없이 생명의 문을 벌컥 열어 젖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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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아아악! "
정신을 잃을만큼 거세게 빨아당기는 기류에 밀려 문 안으로 떨어져 버렸다.
희미하게 부르는 아레히스의 외침이 들렸던 것도 같지만 기류에 밀려드는 순간 완전히 정신을 놓아 버렸기
때문에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딴에는 내 걱정 한답시고 이것저것 챙겨주는 거였는데 내가 너무 배은망덕 한 것 같다고 속으로 책망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나는 명계와 이별하고 새로운 세계에서의 출발을 시작했다.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외전.
<아레히스의 사정>
희미한 비명소리가 들리면서 생명의 문 안쪽의 기류가 거세게 소용돌이 쳤다.
방금전에 지훈이 들어가 버린 영향으로 기류는 전에 없이 난폭해져있었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것은 명계의 인물인 아레히스나 두명의 영혼 인도자들에게는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았다.
저 기류가 빨아들이는 것은 오로지 인세에 탄생할 영혼들 뿐이다.
" 흐음. 그렇게도 이 약이 싫었나. 저렇게 인사도 제대로 안하고 가버리다니. "
지훈이 제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는데도 아레히스의 표정은 예의 평소와 같이 지극히 담담하고 평온했다.
그로서는 이제껏 명계의 골머리를 썩혀오던 사건 하나가 해결된 것이니, 오히려 시원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곁에 있던 인도자들이 생각은 조금 달랐음인지 그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레히스를 바라보았다.
" 어쩌시겠습니까, 아레히스님. 망각의 물이 소용이 없었으니 엘퀴네스님은 인간의 기억을 가진채 탄생하게 될텐데요.
혼란이 빚어지지는 않을까요? "
" 그렇습니다. 전생의 기억 때문에 혹시나 정령왕으로서의 직무를 못하시면.. "
" 후훗. 그런일은 없을겁니다. 아무리 인간으로 살았었다곤 하지만 그는 인간과는 영혼의 근본부터 다른 순결한 정령왕이니까요.
적응과정에서 진통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것도 어느정도는 감수해야지요. 오히려 저는 기대가 되는데요? "
인간이었을 적의 기억을 지워보고자 사용했던 망각의 물은 지훈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본래라면 마시는 순간부터 숫자의 계산은커녕,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말하는 법조차도 잊게 만들어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는 전설의 액체인데도 말이다.
이것은 정령왕의 존재가 어지간한 신(神)과 맞먹는 고위 지성체라서 그렇기도 했지만,
지훈이 '물'을 다스리는 엘퀴네스였기 때문에 더욱 가능한 일이었다.
평소보다 망각의 물의 함량을 더욱 높인 것이었는데도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을 보면 후자 쪽의 이유가 더 맞았다.
아레히스는 점점 잦아드는 기류들을 바라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띄웠다.
" 인간을 이해할줄 아는 정령왕이 있는것도.. 가끔은 나쁘지 않을겁니다. "
꽁꽁 얼어버린 손과 발을 그대로 더운물에 녹히는 것처럼 따뜻하고 아른한 느낌이 들었다.
한 겨울 아침에 늦게까지 누워있는 이불 속 과도 같은 포근한 기분.
이대로 계속 꿈에 젖어 영원히 깨어나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 같다.. 내가 누구인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는 기억하지도..
기억나지 않아도 좋았다.
지금 이 상태로만 계속 있고 싶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이대로 가만히..
... 그러나 이전에도 한번 말한바 있지만, 여전히 세상은 만만한것이 아니었으니...
" 드디어 탄생했다! "
" 우와~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네, 십수년이 길게 느껴진건 이번이 처음이라구. "
" 이거 축배라도 들어야 하는거 아냐? "
대체 왜 남 잠 자고 있는데 와서 떠드는 거냐! 어휴.. 징글징글한 놈들..
분명 남 잘되는 꼴 못보는 민수 자식이랑 그 일당들 소행일거다.
니들 이번에야 말로 다 죽었다고 복창해라! 나도 더 이상은 못참아. 오늘 진짜 갈때까지 가보자고!!
잠자는 강지훈을 건들면 인생이 어떻게 되는지 친히 그 몸으로 새겨주고야 말테닷!!
늘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잠들면 고의적으로 괴롭혀서 억지로 깨우는 것을 즐기는 사악한 친구넘을 떠올리며
나는 속으로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그리하여 분명히 책상에 엎어져 있을 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전신의 감각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곧 닥칠 찌뿌드한 느낌과 함께 엄습할 무시무시한 근육통들을 미리 대비해두는것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응? 근데 뭔가 이상하다? '
분명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몸이 움직이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필요치 않은 근육을 억지로 사용하는 듯한 불쾌한 기분만 느껴졌던 것이다.
가물가물하는 시야는 아직도 온전치 않아서 희미한 빛만을 간신히 인식하고 있을뿐, 제대로 앞을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익숙치 않은 느낌에 한동안 고개를 갸웃한 나는 결국 약간의 짜증을 동반하며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이기 위해 팔을 크게 휘저었다.
그러자..
첨벙.
' 어엉? 왠 물소리가? '
나는 그저 단순히 팔을 움직인 것 뿐인데 어디선가 크게 물이 휘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도 젖는 듯한 느낌이나 물이 튀는 감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허걱. 귀신에라도 씌였나? 이게 대체 무슨 조화라지?
순간 당황한 나는 나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섰고, 그 때문에 또 다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뒷걸음질 쳤어? 내가? 나 지금 책상에 엎어져있는게 아니라 서있는 거였단 말이야? '
정녕 이제는 서서도 잠들 수 있는 경지까지 마스터했다는 것인가!
확연이 느껴지는 발밑의 감촉에 나는 등뒤로 어색한 식은땀을 흘렸다.
인간이 서서도 이렇게 깊게 잠들 수 있다니.. 과연 또하나의 한계를 깨버렸다는 생각에 기분마저 경건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꿈도 꿨더랬다.
내가 죽었는데. 왠 서양 판타지풍 저승사자들이 나타나서는 내가 사실은 인간이 아니라
정령왕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했던 것.. 같... 은.......
허억..
' 이런, 바보! 꿈이 아니잖아!!!'
한겨울에 얼음물로 세수한 것 같은 오싹한 감각이 전신에 엄습했다.
그리고 그제 서야 나는 몽롱한 정신을 깨고 퍼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떻게 된거지? 어떻게 된 거였더라... 아, 그래.. 생명의 문이라는 걸 열었었지.
그리고 엄청난 충격에 휘말려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정말 기이한 일이다. 정신이 들고나니 아까 까지 흐리멍텅했던 기억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온몸을 찢어발기는듯한 엄청난 압력과 고통 속에서 끝내 정신을 잃었던 그 순간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똑똑히.
정신을 잃은 직후 그것이 꿈으로 이어져, 한동안 꿈나라를 왔다갔다 하다가 이제야 깨어나게 된 모양이었다.
' 헤에.. 그 맛없는 액체. 딱 한모금 마신건데도 효과는 좋은데?
그 기류에 휘말려 놓고도 정신 멀쩡하고 아픈곳도 없는 것 같으니. 난 무사한건가? 하지만 다신 마시고 싶지 않아. '
아직도 입안에 느껴지는 비릿하고 씁쓸한 액체의 맛을 떠올리며 나는 몸서리를 쳤다.
태어날때마다 그런걸 마셔야 한다면 차라리 영원히 환생안하고 영혼으로 사는 쪽을 택하고 말겠다.
이번에야 어쩔수 없이 모험을 감행했다지만 다음엔 절대로 마시지 말아야지.
명계라는곳.. 너무 서비스 정신이 부족한거 아냐? 그넘의 액체맛좀 개선시킬 생각은 없는건가?
환생하는 영혼들 전부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면야.. 어떻게 그딴 액체를 마시라고 권유할수 있는거냐고, 쳇.
내가 그렇게 생각만해도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고약한 액체를 떠올리며 잠시 회상에 빠져있을때였다.
" 형체가 완성되었군. 이제 눈만 뜨면 돼. "
"헤에. 내가 태어났을때도 이랬던 건가? 되게 신기하다. "
" 뭐야, 이거? 남성체야, 여성체야? 엄청 헷갈리게도 생겼네. "
아까전 나를 잠에서 깨게 만들었던 누군가의 떠드는 목소리가 또다시 두런거리며 들려왔다.
꿈결에 잘못 들었던 거라 생각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그야말로 전신에 긴장이 저절로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기류에 휘말린 충격과 쓰디쓴 용액으로 인한 불만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던 현실이 그제서야 온몸으로 엄습해 들어왔다.
난 정신이 깨어나는 순간부터 당연히 인식해야 했던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온몸을 찢어발기듯 거세게 휘몰아 치던 그 엄청난 기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고요해져있는것의 의미를..
애초부터 내가 그 맛없는 액체를 마셔야만 했던 이유와. 대책없이 뛰어든 방문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확연하게 느껴지는 존재감과 현실감 때문에라도 나는 순순히 현재의 상황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 환생 성공...... 인가? 아하하하... '
풍요로운 대지와 맑은 공기, 넘치는 생수와 따뜻한 불꽃으로 가득 채워진, 생명력이 넘쳤던 축복받은 차원
아크아돈에 때아닌 재앙이 임한지도 벌써 10년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바로 이 십수년의 기간동안 단 한방울의 비도 대지를 적시지 못했다는 것.
몇 만년을 이어오던 풍요로운 대지는 단 십몇년만에 마르고 갈라져 변변한 과실도 제대로 맺지 못하는 쓸모없는 땅으로 변해버렸고,
언제나 시원하게 땀을 식혀주던 바람은 가득한 먼지만 날리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렸으며,
인간들의 발전에 크나 큰 기여를 하여 사랑받았던
불꽃은 건조한 공기가 기폭제가 되어 나날히 흉폭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매한 인간들은 재앙의 원인을 그 왕에게 물어 저들끼리 심판을 하기도 하고 신에게 빌어보기도 하며 동분서주하고 있었으나,
그 땅에 비가 내리지 않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에 있었다.
바로- 주신의 임명을 받아 아크아돈을 관장하고 있던 4대 정령계에서 물의 정령왕이 탄생하지 않은 것.
그 한 존재의 부재로 인한 재앙이었던 것이다.
탄생을 기다리고 있던 정령왕의 영혼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는,
그야말로 어이없는 명계에서의 보고를 들은 정령계는 한동안 물의 정령왕의 부재를 매우기 위해 많은 고심을 치러야만 했다.
그리하여 간신히 아크아돈의 멸망이라는 사태의 최악으로 치닫는 길은 막을수 있었으나, 그렇다고 더 이상 희망적이지만도 않은..
반복되는 가뭄과 흉년으로 진통하며 물의 정령왕을 빨리 찾아내기를 기다리는 나날만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낙관적이지 않은 것은 정령계도 마찬가지인지라 스스로의 힘을 최대한 봉인하여 피해의 정도를 약화시키고 있던
나머지 3대 정령왕들은
물의 엘퀴네스의 공간에 이상한 뒤틀림이 생기고 있다는 소식에 서둘러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이자 마자 서로에게 안부를 전할 겨를도 없이 제일 처음 그 기이한 현상을 접한
바람의 정령왕-미네르바에게로 앞다투어 질문을 퍼부어댔다.
" 엘퀴네스의 영역에 무슨 변고가 생겼다고? 그거 좋은 일이야, 나쁜 일이야? "
" 설마 영역 자체가 소멸되는건 아니겠지? 아~ 제길. 가뜩이나 요즘 힘 줄이고 있느라고 한시가 안편하다고. 나 살빠진거 보이냐? "
"........좋은 건지 나쁜건지 지금부터 확인하러 가는길이야, 이프리트. 그리고 트로웰. 정령은 살이 빠지지 않아,
소멸하는 날까지 외모가 변하지도, 힘이 약해지지도 않지. 그걸 너도 모르지는 않을텐데? "
" 쳇 딱딱하기는. 말이 그렇다는 거지. "
트로웰의 투덜거림은 가볍게 무시했다.
미네르바는 엘퀴네스의 영역까지 앞장서서 걸어가면서 자신이 봤던 상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나도 자세히 보지는 못했어. 정찰로 보낸 실프가 물의 영역에 뒤틀림이 일어나고 있다는 보고를 해서 서둘러 달려가 본 것 뿐이야.
내가 봤을때는 가볍게 공간이 일그러지고 있었을 뿐이었지만, 지금은 어찌 되었을지 모르지. "
" 실프를 다시 보내보면 안될까? "
트로웰의 의견에 미네르바는 고개를 저었다.
" 무리야.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건지 지금은 실프의 접근이 완전히 통제된 상태거든.
우리 힘이라면 뚫을수있겠지만 하급정령으로는 어림도 없지. "
" 뭐야, 그게? 정령왕이라도 탄생하는 거래? 주제에 왠 하급 정령이라고 차별을 한담. "
" !!! "
반 장난스레 내뱉은 이프리트의 말에 순간 미네르바의 눈동자가 부릅 떠졌다.
" 바로 그거야!!! "
" 뭐? " (X2)
" 왜 진작에 못 깨달았지? 트로웰과 이프리트의 탄생도 지켜봤으면서 까맣게 잊고 있었어.
이프리트! 네 말이 맞아. 영역의 뒤틀림은 정령왕이 탄생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야! "
미네르바의 폭발선언에 멋모르고 있던 이프리트와 트로웰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 뭐어? 그걸 이제야 깨달으면 어떡해!!! "
" 그럼 이렇게 느릿느릿 여유 부릴때가 아니잖아. 빨리 가보자구!! "
황급히 말을 내뱉은 트로웰의 모습이 순간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본래 물과 궁합이 잘 맞는 땅의 정령왕 답게 엘퀴네스의 탄생을 제일 기다리고 있던터라,
다른 정령왕들의 반응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급하게 물의 영역으로 텔레포트를 한 것이다.
어쩔수 없는 녀석이라고 피식웃은 미네르바와 이프리트는 자신들도 곧 트로웰의 뒤를 따라 물의 영역으로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세명의 정령왕이 도착한 물의 영역은 말 그대로 물의 영역이 되어있었다.
엘퀴네스가 탄생하지 않은 뒤로 흔적도 없이 말라버렸던 메마른 공간이 어느새 생명력 넘치는 생수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물고기만 없을 뿐이지, 바닥에 오밀조밀 깔려진 자갈과 물살에 우아하게 흔들리는 해초들은,
마치 바닷속 한가운데에 들어와있는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거침 없는 물의 공간 한가운데에 회오리 치듯 소용돌이로 맴돌고 있는 커다란 기류 하나가 꿈틀거리고 있는것이 보였다.
아직까진 물의 소용돌이- 그정도에 불과했지만,
주변에 충만하게 깔려진 물의 기운에 의해 세명의 정령왕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정령왕이 탄생하고있는 모습이라는걸 깨달았다.
"드디어 탄생했다!! "
" 우와~~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네. 십수년이 길게 느껴진건 이번이 처음이라구. "
" 이거 축배라도 들어야 하는거 아냐? "
감격에 빠져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은 소리에 문득 물의소용돌이가 꿈틀거리는 것 같이 느껴졌다.
설마 옆에서 떠든다고 화내는 건가? 하기사 물의 정령왕들의 싸가지 없음은 대대로 이어져오던 전통이나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전대 엘퀴네스의 오만했던 성격을 떠올리며 세 정령왕들은 누가 시킨것도 아니었는데 표정이 똑같이 찌푸려졌다.
그러는 사이에도 거세게 휘몰아 치던 소용돌이는 이윽고 천천히 가라앉으며 진정이 되는 듯 폭발적인 흐름을 멈추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들은 끊임없이 하나의 형체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드디어 정령왕의 탄생이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수도 셀수 없을 만큼의 많은 물거품들이 얼핏 형체를 이루고 있는 물덩이에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물덩이에 흡수되듯이 하나둘 물방울들이 사라질수록, 엘퀴네스의 형체는 점점 더 뚜렷해졌다.
이윽고. 엘퀴네스를 감싸고있던 물방울들이 온전히 사라지며 상아빛의 투명한 피부에 선명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허리까지 찰랑이는 머리카락은 주변을 이루고 있는 물 과 같은 색의 청명한 파란색이었다.
" 형체가 완성되었군, 이제 눈만 뜨면 돼. "
" 헤에. 내가 태어났을 때도 이랬던 건가? 되게 신기하다. "
" 뭐야, 이거? 남성체야,여성체야? 엄청 헷갈리게도 생겼네. "
푸른 바다를 닮은 머리카락을 물속에 흝날리며,
마치 잠자고 있는 듯 두 눈을 감고 있는 평온한 엘퀴네스의 모습을 본 세 정령왕의 감상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평가에 반응이라도 하듯, 약간 움찔거린 엘퀴네스의 감긴눈이 천천히 떠졌다.
눈을 뜨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본 것은 '물' 이었다.
정말 그것말고는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힘들만큼 내 주변은 온통 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치 바다 속이나 강물 속에 빠져있는 듯한 기분이랄까? 아니, 어항 속의 물고기가 된 기분이라고 하면 더 적절 하려나..
순간 너무 놀라서 거의 본능적으로 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 막을뻔 했다가 멀쩡하게 숨을 쉬고있다는 걸 깨닫고
곧 그만 두었다는 것만 빼곤 무지 신기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팔다리를 움직이는 데도 물 속 특유의 저항감으로 인한 무거운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공기 중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있었지만,
막상 이런 식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상황에 처하고 보니 갑자기 내가 너무 대단한 존재가 된 것 같아서
기쁘기보단 먼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규현아, 이 자식아! 나 물속에서도 숨쉰다! 어떠냐? 부러워 죽겠지? 음핫핫핫.
판타지의 맹신자였던 친구놈을 떠올리며 나는 승리감에 빠져 허허 거렸다.
그런데 아까 떠드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누가 와있는 것 같았는데... 어디지?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계속 따끔따끔 거리는 미묘한 시선들이 느껴지는 것 같다.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두리번 거리자 곧 어렵지 않게 나를 바라보고 서있는 3명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각각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사이로 보이는 외모에 수려한 미모를 가진 눈에 번쩍 띄는 미인들 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난 분명 이들을 오늘 처음 보는건데도 전혀 낯설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미인들에게 면역력이 생겼다지?
조금만 예쁘장하게 생긴 사람만 봐도 금새 얼굴이 붉어지고 호흡이 가빠지는 등, 소심함의 중증을 앓고있던
내가 이런 미인들 앞에서 스스로도 놀랄정도로 의연해 질수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말세가 임박한 것이다.
설마 아레히스나 저승사자 때문에 적응이 되버린건가? 그 잠깐 사이에?
그들은 내가 한참이 지나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자 안돼겠다 싶었는지 먼저 말을 걸어왔다.
" 탄생을 축하해. 엘퀴네스. 하지만 너무 늦었는걸? 뭐, 이제라도 와줘서 다행이긴 하지만. "
정령왕이라는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은 그도 역시 같은 정령왕급의 인물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난 굳이 이러한 상식을 계산해 보지 않아도 내 앞에 서서 말을 건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얀피부에 기묘한 느낌을 주는 하얀색 눈동자. 허리를 타고 내려가 흩날리는 머리카락은 투명에 가까운 은회색.
차가운 무표정이 너무나도 빼어나게 어울리는 여성의 모습을 한 그는 바람의 정령왕인 '미네르바'였다.
어떻게 알게 된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지극히 자연스러운 절차를 치르고 있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내 머리가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기분에 내가 잠시 혼란스러워 할때였다.
기다렸다는 듯 미네르바의 뒤를 이어서 내게 말을 건네는 존재가 있었다.
" 만나서 반가워, 엘퀴네스. 너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다고. 아아 이제 이것으로 안심이야.
아크아돈도 다시 평화를 찾을 수 있겠어. "
장난 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 윙크해 보이는 그는 완벽한 흙색의 피부에 칠흙같이 검은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악동의 이미지가 다분한 미소년 이었다.
대지의 축복을 거머쥔 땅의 정령왕, 트로웰 인 것이다.
참고로, 나는 검은색 피부가 사람을 섹시하게 보이게 한다는 걸 들은적은 있었지만, 그 표현이 이토록 지.독.하.게. 어울리는
존재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무리 봐도 남성의 이미지가 강한 트로웰인데도 그의 섹시한 눈 웃음 한방이면 전세계에 홀리지 못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말이다.
'어..어쩐지 나부터 조심해야 할 것 같은... 쿨럭.. '
아무리 여친 하나 없는 불행한 청소년 이었다 해도 금단의 사랑(?) 에 빠질 생각은 추호도 없던
나는 장렬하게 트로웰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어찌보면 거의 외면이라 할만큼 상대방을 무시해 보이는 걸로 비춰질수도있는 태도였지만,
정작 트로웰은 그다지 불쾌해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 역시 물의 정령왕. 차갑기가 바람같군. 실망을 시키질 않는다니까~'
라고 중얼거려서 옆에 서있던 바.람.의. 정령왕인 미네르바의 눈총을 받았다.
자아~ 그럼 남은건 불의 정령왕인 이프리트인가?
"................"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이프리트를 바라본 난 순간 할말을 잃었다.
붉은 불꽃을 상징하는 불의 정령왕이기 때문에 당연히 예상했던 바대로 이프리트는 눈동자도 머리카락색도
모두 타오르는 듯한 붉은 색이었다.
그 옆에 다가서서 손이라도 대봤다간 금새라도 화상을 입을 것 같이 정렬적인 새빨간 색이랄까?
피부색은 옅은 핑크색이었는데,
피부색으로는 절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 특이한 색깔이 이프리트와는 어색함 없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화려한 붉은 색의 곱슬머리에 약간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가 무지 성깔있어 보였는데,
마음만 먹으면 천하의 바람둥이라도 휘어잡을 것 섹시한 이미지 였지만,
여성의 이미지가 강해서 그런지 트로웰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트로웰이 살인 미소라면.. 이프리트는 여왕님이랄까? 아하하.. 내가 무슨 생각을..
나는 멋쩍게 웃으며 여전히 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3명의 정령왕들을 바라보았다.
인사도 해줬는데 (이프리트 제외.) 아무말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건 예의가 아니겠지?
자아,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나?
왠지 이들에게는 '안녕하세요' 따위의 존대말은 절대 하지 못할 것 같다.
내가 저들과 같은 정령왕이니 당연한 거라면 당연한 거겠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명계에서의 그얼빵한 행동을 다시 할 것 같아? '
처음 대면하는 자리에서 나의 '안녕하세요'란 인사에 어이없음을 감추지 못하던 아레히스의 표정을
나는 소멸하는 날까지 결코 잊을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쌈박해보이면서도 비굴해 보이지 않도록 웃는 얼굴 하나에도 최대의 신경을 써야만 했다.
으.. 억지로 웃는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지만.. 참자, 참는 자에게 복이 오나니!!
그리고 말하는 거야, 이 상황에서 가장 잘 어울릴만한 인사말을 말이야!!
" 안녕? ... "
".............."
"............."
순간 말로 표현할수 없을만큼의 기묘한 정적이 나와 세명의 정령왕들 사이로 흘렀다.
크흑.. 알았어. 미안해... 나도 내가 이렇게 단순한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살고있는지 몰랐다고
그러니 이제 그만 차가운 바람좀 잠재워주지 않겠어, 미네르바?
물속에서 바람을 일으키니까 소용돌이를 치잖아! 어지럽다고!
그리고 지진 그만 일으켜도 돼 트로웰. 이 공간이 모두 엎어지기를 바라고 있는게 아니라면.
이프리트.. 너는 여길 모두 증발시키기로 작정한 모양이지? 나 다시 죽을까? 쿨럭..
이미 모두의 인사가 끝난 시점에서 (역시 이프리트 제외) '안녕'이라고 말을 건넨다는건 내가봐도
앞뒤의 정황이 맞지 않다는걸 알고있었다.
차라리 '인사가 늦었네, 앞으로 잘 부탁한다.' 라고 하는것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었을거라는것도.
아아.. 아무래도 나는 어딘가 모자란게 분명해.
학교에서 친구놈들이 나만보면 '얼빵한 놈'이라 중얼거렸을때는 그저 이몸의 뛰어난 유머센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우매한 것들이라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아.. 이제와서 다시 잘 부탁한다고 말을 할수도 없고.. 대체 어찌해야 한다지?
나는 무척이나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있는 세 정령왕들을 난감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미..미안해. 내가 자기소개에 좀..약하거든....."
".............."
" 으윽..그..그러니까 일부러 썰렁하게 만들려고 그런게 아니란거야. 내 딴에는 엄청 진지하게 인사한거거든?
그러니까 그렇게 살벌한 표정은 좀.. "
그만 치워주지 않겠어?;
그래도 초면이랍시고 겉으로 폭발하지 않고 은근히 살기만 흘리는 세명에게 나는 무척이나 긴장하면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러자 그들은 아차 싶은 표정이 되더니 곧 자신들이 너무 본능에 충실했다는것을 깨달았는지 헛기침과
함께 민망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 아. 미안해. 전대 엘퀴네스와 성격의 괴립이 너무 커서 잠시 혼란스러웠을 뿐이야. 아무튼 환영한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
전대 엘퀴네스의 성격이 도대체 어땠기에?
아니, 그것보다.. 당신들은 혼란스러우면 살기부터 뿌리나 보지?
이거 한번만 더 혼란시키면 멀쩡한 정령하나 잡겠구먼..
나는 속으로만 투덜거린후 겉으로는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령왕의 수명이 1만에서 2만 사이라지 않은가.
그 동안 곧 죽어도 얼굴보고 지내야할 동료들과 벌써부터 삐걱거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착해 보이려고..얼굴에 경련이 이는것도 참으면서 미소를 멈추지 않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태클이 들어왔으니..
" 흥. 생글생글 웃는얼굴 집어쳐. 바보같아보이니까. 하긴..너 바보 맞지?
오죽 어리버리하면 탄생도 제대로 못하고 엉뚱한곳에서 헤매다가 이제야 겨우 돌아온담. "
커헉. 가뜩이나 찔려하던 부분이건만.. 그렇게 정확하게 가격하다니.
비웃음이 가득 머금어진 소프라노의 목소리에 나는 웃던것을 멈추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타오르는듯한 붉은 머리카락을 귀뒤로 넘기면서 무척이나 도도한 표정을 짓고있는 이프리트가 떡 하니 보이는 것이었다.
아니, 저 정령왕은 이제 태어난 정령한테 왜 시비를 걸고 그런다지?
처음부터 다른정령왕들과 달리 나한테 인사도 하지 않고 노려보고만 있었기에 심사가 뒤틀려있나보다 생각은 했지만
이런식으로 시비거리를 만들어서 정면 도전할줄을 몰랐던 나는 조금 당황했다.
" 이프리트! 왜이래. 초면인 상대한테 실례잖아. "
" 사실을 말한것 뿐이야. 트로웰. 저녀석이 공석인 동안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알기나 해?
미네르바나 트로웰은 저녀석과 어느정도 궁합이 맞으니까 별일 없었겠지만.
내쪽은 상극이라 저녀석의 기운이 줄어들면 반대로 내 기운이 더 강해진다고.
인간계에 해마다 불바다가 일어나는것을 어쩌지도 못하고 기운 줄이려고 노력한 내 고충을 어찌 알겠어?
모두 다 저녀석이 멍청한 탓이야. "
" 그만해 이프리트. 이번일은 엘퀴네스의 잘못이 아니라고 명계에서도 그랬어.
그날 영혼분담을 책임지던 자가 하필이면 초보였었다는게 문제였다고. 엘퀴네스도 피해자야. "
아, 그랬군.
그때 영혼분담하던 놈이 신입이었다 이거지? 허허.. 몰랐는데 가르쳐줘서 고마워 미네르바.
그리고.. 아레히스?..나중에 내가 소멸하면 ..다시 한번 만남의 장을 가져야겠는걸.
신입한테 그런 중요한일을 맡기다니! 덕분에 나만 이프리트한테 미움받게 생겼잖아!
이걸 어떻게 책임질거야!!!
" 그래~ 알았어. 어차피 너희는 엘퀴네스가 그저 반갑기만 하지? 흥. 다들 똑같아.
난 이딴 물의 영역에 오래있어서 피곤하니 먼저 돌아가겠어. 반가운 존재끼리 잘들 놀아 보라고."
" 이프리트!! "
잔뜩 기분상한 얼굴로 심통맞게 중얼거린 이프리트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나를 노려보고는 그대로 불길이 되어 사라졌다.
물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이라..
나름대로 신기하고 멋있었지만 나는 도저히 감탄할 기분이 들지 않아서 그저 멍하니 이프리트가 사라진 공간을 바라보았다.
오늘 처음 본 나한테 밉살맞은 말을 하고 그냥 돌아가 버릴정도로 내가 뭔가 잘못한게 있었나 생각해 봤지만 ..
그런일이 있을리가 없잖아!!
처음만나서 한말이라곤 '안녕'이 전부였고 내가 공석이었기 때문에 생긴 피해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미네르바가 친절히 설명까지 해줬다.
그런데 도대체 저녀석은 나한테 뭐가 불만인거야!
" 아, 이런. 미안해 엘퀴네스. 기분 상했지? 원래 대대로 엘퀴네스와 이프리트는 서로 상극이라서인지 사이가 좋질 못했어.
전대 엘퀴네스와 지금의 이프리트도 틈만나면 으르렁 거렸지. 그러니 너무 마음 상해 하지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도록 해. "
미네르바의 침착한 설명에 나는 다시 한번 뜨악한 심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 날더러 저 여왕님과 맨날 마주칠때마다 싸우란말인가...허허허... "
" 뭐라고? "
" 아, 아니야.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할게. 나를 그냥 엘퀴네스로 불러도 되고, 지훈이라고 불러도 좋아.
아직은 지훈이란 이름쪽이 더 편하지만. "
" 지훈이라니? "
" 음.. 내가 인간으로 태어났을때 가졌던 이름이야. 강지훈인데. 강은 성이니까 그냥 지훈이라고 불.. "
본래의 내 이름이라곤 하지만 전생의 기억이 남아있어서 그런 건지 엘퀴네스란 소리가 아직 귀에 거북했다.
그래서 좀더 익숙한 쪽을 사용하고 싶어서 '지훈'이란 이름을 애칭으로 불러달라고 하려던 거였는데
내 말을 듣자 마자 미네르바와 트로웰의 표정이 뜨악하게 변하는 것이었다.
내가 또 뭔가 잘못한 건가 싶어 멍청히 하던 말을 자르자 트로웰이 기다렸다 는 듯이 내게 질문을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 설마 엘퀴네스! 인간으로 태어났던 거야? 차원의 틈에 빠져서 헤매고 다녔던 게 아니라? "
" 차..차원의 틈? 아니.. 분배가 잘못 되서 인간으로 태어났던 건데.. "
" 우..우와! 이거 진짜 짱인데~! 유희 정도가 아니잖아. 정령왕이 인간으로 태어나다니.. 살다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역대 정령왕서에 영원토록 기록되고도 남을 일 아니야, 미네르바? "
" ...흔한 일은 아니지. "
호들갑떠는 트로웰과는 달리 그나마 미네르바는 침착해 보였다.
그래도 눈빛에 가득 담긴 호기심을 지우지는 못했지만.
" 다른 차원으로 빠진 모양이지? 이름이 이곳 발음이 아닌걸 보니.. 하긴. 이곳에서 태어났다면 우리가 금새 발견했거나,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이 속출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 "
" 아. 응... '지구'라는 곳인데.. 여기서 얼마나 떨어진 건지는 잘 모르겠어. 기회가 되면 나중에 다시 가보고 싶긴 한데..
가능할지도 의문이고. "
가족들은 별 생각 없었지만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진 친구녀석들은 무척 보고싶었다.
그러고 보니 내 장례식때 와서 울고 간 녀석들도 꽤 많았는데.
어떤 녀석은 '시험 전날에 죽다니..넌 참 복도 많은 녀석이다.
시험보고 죽는것 보다는 낫지. 안 그러냐, 부러운 자식.' 이라는 말로 사람 복장을 뒤집어 놓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녀석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눈물이며 콧물을 줄줄 흘려대고 있었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좋은 친구들을 뒀다는 생각에 감격했었던 기억이 난다.
..좀 추잡했던 게 흠이었지만.
" 흐음. 지구? 거긴 주신께서 관장하는 곳일텐데..어쨋든 '지훈'이라고 부르면 된다는 거지? 별로 어려울 건 없네 뭐.
어차피 엘퀴네스며 미네르바며..
이런 건 다 우리들의 직위를 나타내는 거지 딱히 이름이라고 할순 없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트로웰이란 이름이 더 편하니까 그냥 트로웰 이라고 불러.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인간세상에서 살았을 적 얘기를 듣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다음기회로 미루도록 할게.
앞으로 한동안은 바빠질 것 같으니. "
잠시 회상에 빠져있던 나는 트로웰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 그게 무슨 소리야? 바빠진다니? "
" 네가 태어났으니까 지금까지 편법으로 얼기설기 막아놓은 자연의 규칙들을 다시 재정비 해야지.
당분간은 아크아돈의 회복에 집중해야 할거야.
네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회복되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편이 빠르지 않겠어? "
그..그런가?
아레히스한테서 들었을 때는 그저 내가 다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굴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던 나는 뜨끔한 심정이 되어 고개를 어설프게 끄덕였다.
나 때문에 그렇게 되버린거니 내가 힘써야 하는 건 당연한 거겠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하는거지?
아직 물 속에서 숨쉬는것 말고는 특별할게 전혀 없는 내가 무슨 도움을 줄수 있다는거야?
이러한 내 걱정은 미네르바와 트로웰이 뭔가를 요구하는것마냥 나를 빤히 쳐다보자 더욱 심각해졌다.
그냥 아무말도 없이. 내가 뭔가를 시작하기를 기대하고 있는것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그들이 바라는것이 뭔지를 모르는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들의 시선을 맞받아 칠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많은것을 바라지 말라고. 정령왕이 되긴 했어도 독심술을 익힌것은 아니란 말이야.
그렇게 쳐다만 본다고 없는 눈치가 생기리?
결국 장시간의 침묵과 눈싸움 끝의 승리자는 나였다.
"...후우.. 멀뚱히 서있지만 말고 이제 그만 시작하지? "
기다리다 못한 미네르바가 한숨과 함께 드디어 말을 건넨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말에 담긴 뜻을 내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 뭘 시작하는데? "
" 자연을 회복해야지."
" 그러니까..그게 어떻게 하는건데? "
".......장난하냐? "
으윽..그렇게 스산하게 말해봤자..... 알지도 못하는걸 어떻게 하냔말이야!!
가뜩이나 적응이 안되는 미네르바의 하얀색 눈동자에 꾸물꾸물한 어두운기운이 서리니까 차마 말도 제대로 못붙일 만큼 무서웠다.
거기다 누가 바람의 정령 아니랄까봐 화가나니 은회색 머리카락이 등뒤로 흩날리는 모습이 ..
딱 저상태로 공포영화에 출연하면 정말이지 대박날듯 싶었다.
그러자 보는것만으로 잔뜩 질리게 만들어버리는 그 호러틱한 장면에 내가 아무말도 못하고 얼어있는게 불쌍했는지
옆에 있던 트로웰이 냉큼 한마디 보태주었다.
" 정령을 만들어야지, 정령을. "
" 저..정령? "
" 그래. 정령! 하급의 나이아스들이야 네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기운을 느끼고 탄생하겠지만 중급과 상급정령들은
네가 직접 만들어야돼.
요 몇년사이 전대가 만들어 놓은 물의 정령들이 모두 소멸했으니까 다시 만드는게 당연하지. 어라? 뭐야 그 표정은.
정말 몰랐다는 얼굴이네? "
정말 몰랐던거 맞는데..
내 표정이 상당히 어리버리 했는지 트로웰과 미네르바는 그제서야 내가 장난이 아니라 정말로 모르고 있다는것을 깨달은것 같았다.
확인하듯이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두 정령왕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뭐랄까.. 마치 못볼거라도 본 듯한 얼굴이랄까.
현실적으로 있을수 없는일을 눈앞에 대면한 사람이 있다면 그 표정이 딱 저랬을거라는 생각이든다.
두 눈에 경악을 담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할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바로 저런 모습.
그런데..이제 막 태어난 내가 그런걸 모르는건 당연한거 아닌가?
" 틀려. 이거 뭔가 잘못됐어. 정령왕들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자연의 흐름을 읽고 그에 따른 대처방법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고.
다른때면 몰라도 지금처럼 아크아돈이 메말라 있는 상황에서 물의 정령왕인 네가 아무것도 자각하는바가 없다는건 말이 안돼.
우리가 먼저 말하지 않았더라도 너 스스로 정령들을 만들어 분포했어야 했단 말이야! "
그..그러냐?.. 근데 트로웰.. 너 독심술도 익힌거야?
어떻게 내가 딱 궁금해하던 그 시점에서 바로 '틀려'라는 말이 나올수 있는거지?
기가막힌 우연인지 아니면 정말로 내 맘을 읽었는지 무척이나 혼란스러워하는 트로웰을 보면서 내가 식은땀을 삐질 흘리고 있는데
무언가 곰곰히 생각하는듯하던 미네르바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지훈. 한가지만 더 물어볼게. 지금 여기서 정령을 만들라고 하면 만들수 있겠어? "
" 그..글쎄.. 만들어 본적이 없어서 잘.. "
"...........흐음.. 역시 그렇군. "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할수있는 내 대답을 들은 미네르바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욱 어두워보였다.
그러고는 한참이나 뭔가를 음산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는데..
간간히 '명계 이자식들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라는 말이 들리는걸 보니 절대로 좋은 단어를 입에 담고있는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트로웰이 궁금증을 못이겨 옆에서 재촉하지만 않았더라도 족히 1만년은 계속해서 그러고 있었을거다.
그만큼 미네르바의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는 얘기다.
" 미네르바! 뭔가 알아낸거야? 혼자만 알지 말고 얘기좀 해봐. 가뜩이나 답답해 미치겠는데 너까지 이럴꺼야? "
" 아!.. 미안. 흠..그러니까 지금 지훈의 상태는.. 인간으로 태어난 부작용 같은거야. "
" 부..부작용? "
멀뚱히 되묻는 나를 보며 미네르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작용이라니? 그런게 있다는 소리는 아레히스도 안했는데?
십몇년의 세월이 도로 무용지물이 된것도 억울한데 그런 말도안되는 질병까지 겹쳤단 말이야?
그게 뭔소리야!
" 인간으로 살았던 기억때문에 그 습관을 버리질 못하고있어.
나는 인간이니까 이런건 불가능하다고 미리부터 한계를 정하고 마는거야.
능력을 좀먹고 있달까? 이거 골치아프군. 명계에선 왜 망각의 물을 주지 않은거지? "
" 줬다 해도 소용없었을걸. 지훈은 물의 정령왕이잖아. 가드가 가장 강한 정령왕이 그깟 망각의 물 정도에 기억을 잃을리가있겠어? "
" 하긴... "
한마디로 종합하자면 내가 인간으로 먼저 태어나버렸기 때문에 그 습관이 굳어져서 무의식적으로 내가 인간이라고
아직도 착.각.을 하고있다는소리였다.
이럴경우 태어나기 전에 망각의 물이라는것을 마셔서 인간일때의 기억을 지워야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정령왕,
그것도 물계열의 정령왕이라서 망각의 '물'은 나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혹시 그 엄청나게 썼던 빌어먹을 액체가 망각의 물인거 아냐?
그러고보니 마시고 난후에 난데없이 1+1이 뭐냐고 물어봐서 사람 염장을 지르기도 했었지.
그게 만약 기억을 잃었는지 안잃었는지 확인해본거였다면 그 액체가 망각의 물이 맞다는 소리가 된다.
지금으로선 확인해볼 길이 없지만.
엘퀴네스의 장-3. 정령만들기
" 하지만 미네르바.. 내가 스스로 한계를 정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어? 아직 아무것도 해보지 않았잖아. "
내가 인간일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스스로가 정령이라는걸 잊고있는건 아니다.
조금 적응이 안되긴 해도 물속에서 숨도 쉬고 있잖아?
만약 내가 인간이라고 계속 우기고 싶었다면 지금쯤 익사하고도 충분히 남아 돌 시간이 지났다 이말이야.
그래서 내 딴에는 아직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당당하게 주장했던 것인데 미네르바는 지극히 무심한 얼굴로
내말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 그래? 그럼 한번 정령 만들어봐. "
"..........."
" 그렇게 머뭇거리는 것부터가 자각이 덜 됐다는 증거야. 설마 만드는 방법을 모른다는 말로 변명할 생각은 아니겠지?
정령왕이라면 태어날때부터 본능적으로 정령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있다고. 누구한테 배우지 않아도 말이야. "
크흑..그래, 내가 졌다.
난 아무것도 할줄 모르는 바보에 인간이라고 착각까지 하는 멍청이다.
그러니 그 한심하다는 눈빛좀 이제 그만 거둬주지 않으련? 나도 내가 비참한거 안다고!
" 그럼 이제 어떡하지? 설마 계속 이런 상태로 있는건 아니겠지? "
완전 참패를 당한 내가 구석에 가서 찌그러지는 모습이 심히 보기 않좋았는지 트로웰이 땀을 삐질거리며 미네르바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미네르바는 다시 생각하는 포즈를 취하더니 곧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보였다.
" 그렇지는 않을거야. 누가 뭐래도 지훈이 정령왕인건 변함이 없으니까.
물속에서 숨쉴수 있는걸 보면 아주 자각을 못하는건 아닌것 같으니 시간이 흐르면 알아서 해결될 문제라고 봐야 할거야.
하지만 지금 당장 엘퀴네스의 능력이 필요한 시점이라... "
본래 아크아돈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내가 정령왕으로서의 자각을 더디게 하더라도 전대가 이뤄놓은 성과가 있으니
별 피해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라 물의 정령이 모두 소멸되었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내가 능력을 자각해서 정령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곤란하다는것이 미네르바의 설명이었다.
하급정령인 나이아스 만으로는 공기중의 수분은 어찌할수 있더라도 바다나 강,
호수의 오염된 물은 정화할수도 생성할수도 없기 때문이다.
" 그러고 보니 비도 내려야돼. 바다에서 끌어오는 물만으로는 땅을 만족시키는데 한계가 있으니까.
미네르바랑 합작으로 폭풍우도 불어서 오염된 공기도 몰아내야 하고..
나는 막혀진 수맥을 다시 뚫어놔야하고..휴우.. 정말 오랜만에 할일이 산더미같겠군. "
뭣시라? 비를 내리고 폭풍을 불고..수맥을 뚫어?
트로웰의 푸념섞인 말에 나는 뜨악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 정령왕들이 그런것도 해? "
" 뭐 그렇지..원래는 상급정령들한테 시키지만.. 단기간에 복구시키는거니까 우리들이 직접 움직이는 편이 더 빠르거든.
한달 ..아니 두달 정도면 완전히 예전으로 회복될거야. "
" 아니.. 그게 아니라.. 신은 뭐하고? 그런건 신이 하는거 아니야? "
비를내리고 바람 불게 하는건 당연히 신의 몫이라 생각하고 있던 나는 조금 황당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트로웰은 오히려 그게 무슨 말도안돼는 소리냐는듯 나를 빤히 쳐다보는것이었다.
" 신? 신계에서 맨날 팔자좋게 늘어진 그 신들을 말하는거야? 그놈들이 왜 우리영역을 넘봐?
아크아돈의 자연은 주신께서 우리 4대정령왕들에게 전격으로 위임한 곳이라고.
오히려 신들이 판치면 항의해도 모자를 판에 누가 뭘하냐? "
" 그..그래? 그럼 여기는 신을 믿는 사람들이 없는거야? "
" 없지는 않지. 몇몇 심심해서 미치는 신들이 아크아돈에 놀러올때가 많거든.
주신께서는 매일매일 밀려드는 업무에 과부하가 걸리실 지경인데 그놈들은 하급이라고 팔자도 좋다니까?
덕분에 인간들이 아크아돈에 4대정령왕이 가지는 가치를 자꾸 잊어버린다고. 쳇. "
"............하하.."
신곈지 뭔지의 신들에게 쌓인게 많은 모양인지 그 후로도 트로웰은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덕분에 석유에 불을 붙인 꼴이 되버린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말리지도 못하고 그저 땀만 삐질삐질 흘려대는 수밖에 없었다.
그저 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복잡한 얼굴로 뭔가를 골몰히 생각하던 미네르바가 드디어 결론을 맺었는지 한결 나아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뭔가 숨겨진 비책이 있을거라 생각하고 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그가 내놓은 결론은 너무나 간단해서 나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 어쩔수 없지. 전례에 없는 일이긴 하지만 , 당분간은 지훈이 우리 나머지 정령왕들에게 정령왕의 업무를 배우는것이 좋겠어. "
무지 진지하고 엄숙하면서 비밀스럽다는 듯이 내뱉은 말이 겨우.. 나보고 업무를 배우라고?
정말 그것 뿐인거야? 아무것도 모르는내가 배워야 하는건 당연한거잖아!
그럼 너희들은 안가르쳐줄 생각이었냐!
나는 황당한 얼굴로 여전히 진지한 미네르바를 바라보았다.
그런 뻔한 결론을 내리는데 몇분이나 머리를 소비한 미네르바를 이해할수가 없다.
설마 겉으로 보이는 이 지적이고 똑똑해보이는 모습은 다 거짓이란 말인가!
그러나 더욱 황당한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 뭐어? 우리가 지훈을 가르친다고??? 아무리 한시가 급하다지만 정말 그래도 되는거야? "
어떻게 그런말을 할수가 있냐는듯 기겁을 하고 대답하는 것은 트로웰이었다.
그러자 미네르바는 정말 미안하다는듯이 나를 바라보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것이다.
" 어쩔수 없다고 했잖아. 지훈만 괜찮다면 난 그렇게 하고 싶은데.. "
"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훈 입장에서는..."
마지막 말을 쭈볏거리며 우물거리는 트로웰. 그리고 엄청나게 죄책감을 느끼는듯한 미네르바의 표정.
나한테 무언가를 가르쳐 준다는것이 저렇게 유난떨정도로 큰 일이던가?
미네르바에 이어서 트로웰까지 저런 반응이 나오자 오히려 황당해 하고 있던 내가 더 이상한 놈이 되는것
같아서 기분이 상당히 찝찝했다.
그렇다고 '니들 바보아냐? 그런건 당연히 가르쳐 줘야지~' 하고 말하기에는 둘의 분위기가 너무 진지하기 때문에 그럴수도 없고..
결국 나는 그들의 이유도 알수없는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어색하게 웃으면서 미네르바의 말을 긍정해 줄수밖에 없었다.
" 나는 괜찮아, 미네르바.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다. "
" ........정말? "
" 지훈!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거야? "
허걱..그렇게 놀라면서 다가오면 이몸이 더 놀라잖니?
특히 트로웰! 너는 제발 내 반경 1m 안으로 다가와 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하하.
가까이선 본 트로웰의 얼굴은 조금 떨어져서 봤을때보다 훨씬 더 섹시했다.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얼굴이 붉어지는것을 느끼며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것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젠장. 같은 남자만 아니라면 작업한번 걸어보는 건데... 아깝다. 쿨럭.
" 지훈. 너 정말 좋은 녀석이구나! 이번 물의 정령왕이 이렇게 마음이 넓다니 너무 반갑다. "
"....아하하..그..그래? "
겨우 이런정도의 일로 좋은 녀석이란 소리를 듣다니..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는것 같아서 기분이 상당히 얼떨떨해졌다.
오히려 이번일은 내가 가르침을 달라고 부탁해도 모자르지 않나?
거기다 선뜻 나서서 가르쳐 준다고 하면 고마워 해야할 자는 아무리 봐도 내가 되야 하는데.
이거 뭔가 잘못돌아가도 한참 잘못돌아가는것 같다.
입장이 바뀌었다고 해야하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정령왕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완.벽.한 존재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주거나 배우는일에 상당히 민감하다고 한다.
특히 같은 정령왕끼리 배우고 가르친다는건 서열이 나뉘어 지는것 같은 기분을 받기 때문에 아무리 마음 좋은 정령왕이라고
해도 자존심에 큰 타격을 받는다나 뭐라나..
그래서 어떤일이든 정령왕들이 서로에게 뭔가를 가르치려 한다는건 상당한 실례되는 행동이라고 했다.
거기다 대대로 물의 정령왕들은 다른 정령왕들에 비해 그런것에 유난히 민감한 편인데다,
내 바로 전대의 엘퀴네스대가 그중에서도 제일 심각했기 때문에 나도 당연히 그럴줄 알았다는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성격이길래 그 후손(?)이라는 이유 하나로 같은 녀석일거라 치부할수 있는걸까?
새삼 내 전대의 엘퀴네스에 대해 궁금해 졌지만 이때까지는 그런 사정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트로웰과 미네르바의 성격이
그저 괴상하다고 여기고만 나였다.
이래서 조상도 잘 만나고 볼 일 이라는걸까? 쩝.
정령계라고 해도 낮과 밤은 있었던 모양이다.
단지 지구에서처럼 어두워지면 별과 달이 나타나고 반대로 환해지면 태양이 뜨는 효과는 없었지만
일단 밤이 되니 주변 시야가 어두워진것만은 확실했다.
물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주변에도 자세히 살펴보니 침구와 자잘한 생필품들이 구비되어 있었고,
물이라는 공간 특성상 맘대로 부유하며 헤엄쳐 다닐수있었던 나는 그야말로 천국을 만난 기분이었다.
어릴때 꿈이 비행조종사가 되어 중력이 없는 곳에서 날아다녀보는거였단 말이다!
비록 우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물속이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에 공기속에서 헤엄쳐다니는 기분이니
내가 만족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던것이다.
(영혼일때도 공중을 날아다니긴 했지만 공기와 접촉하는 기분이 들지 않아서 그런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거기다 밤이 되어 어두워진 공간에도 내 시야는 주변을 살펴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시력이 나빠 언제나 돋보기 안경을 쓰고다녀야만 사물을 구분할수있었던 과거의 나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
아니, 출세 한거라고 표현해야 할까나?
아무튼 나는 더할나위없이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앞으로 내가 생활할 곳을 익혀두는 작업을 시작했다.
" 테이블. 식탁보. 의자. 침대.. 우와.. 없는게 없네~
정령계라고 해서 무슨 원시시대인줄로만 알았더니 여기도 문화라는게 있었구나~
TV랑 컴퓨터도 있었으면 좋았을테지만..그건 좀 너무 무리한 희망사항인가? 하하. 어? 거울이다! "
그러고 보니 아직 태어나서 한번도 내 모습을 본적이 없는것 같다.
예전의 나는 차마 내가 봐주기도 민망한 얼굴이라서 거울을 회피했었더라지만..
아레히스 말로는 다시 태어나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예전 강지훈의 얼굴하고는 틀리다는 소리겠지?
다른 정령왕들의 외모가 서양인 이었던 걸 감안해 보자면 나도 크게 그들과 다르지는 않을것 같았다.
나는 두근두근한 가슴을 안고 기대 어린 시선으로 무지 화려한 장식으로 감싸진 거울을 쳐다보았다.
평범해도 좋다! 제말 추하지만 말아다오!!! 안 그럼 다른 정령왕들이랑 비교해서 너무 딸리잖아~! 그런건 사절이라구!!
" 에엑? 이게 뭐야~!!! "
거울을 쳐다본 난 그대로 경악을 내지를수밖에 없었다.
비춰진 모습이 내가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달랐던 것이다.
허리까지 찰랑거리는 웨이브진 파란색 머리카락은 그렇다 쳐도..
아니 오히려 이런 완벽한 물빛색은 지구에서 돈주고도 염색못할 그야말로 천연의 빛깔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아주 마음에 들었다.
다만 길이가 너무 길었다는것이 문제였지만 그것도 나중에 자르면 되니 논외로 치고.. 문제는..
" 이건 완전히 계집애 얼굴이잖아~~!!! "
그랬다. 그랬던 것이다.
지금의 내 얼굴은 비록 구질구질했었지만 그래도 남자다워보였던 강지훈의 얼굴이 아니라,
우유를 잔뜩 빨아들인 다음 밀가루를 뿌려놓은것같은 하얀피부에,
날카로운 콧날과 피칠이라도 한듯한 붉은 입술. 거기에 조막막한 계란덩어리 같은 얼굴형까지
..그야말로 예쁘장하게 생긴 계집애의 전형적인 얼굴이었다.
툭 하고 치면 팍 쓰러질것 같이 비실거리는 몸에 머리카락까지 기니까 누가 여자냐고 물어봐도 할말 없을 것 같다.
하고 많은 얼굴중에 하필이면 이따위 얼굴을 가지고 태어나다니.. 이런 빌어먹을..
같은 예쁘장한 타입이라도 차라리 트로웰쪽이 훨씬 나았다.
페르몬이 과다 분비되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래로 남자로 보이기는 하니까.
이딴 청순가련형 타입은 내가 원하는 스타일이 아니란 말이야~~!!
밋밋한 가슴에 여자얼굴이라니 웃기지도 않다. 머리카락이라도 자르면 좀 나아보이려나?
이건 미네르바 보다 더 약해보이잖아. 음? 근데 뭔가 허전한듯한...?
불만스러운 눈으로 새로생긴 몸을 흝어보던 나는 어딘지 익숙치 않은 허전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있어야할 것이 없는듯한 찝찝한 느낌이랄까? 아까까지도 아무렇지 않았던게 이제와서 이렇게 불편한걸 보니
그다지 중요한건 아닌 모양인데.. 그게 뭐지?
나는 천천히 내 몸을 하나씩 더듬어(?) 보면서 이 기묘한 감각을 느끼게 하는 원인이 뭔지를 차근차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어렵지 않게 ..아니 오히려 못찾은것이 이해가 안될정도로 아주 쉽게 그 이유를 밝혀낼수 있었던 것이다.
" !!!!~~~~~~~~~!#$@%#$^&!!!! "
100만 볼트에 그대로 감전당하는듯한 엄청난 충격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덜덜 떨리는 손은 방금전 믿지 못할 감각을 맛본 탓이었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담고있던 거울은 이젠 금방이라도 울듯이 일그러진 내 모습을 비추고있었다.
" 없어... 없...어! 없다구~!! 크아악 말도안돼!!!! "
굳건히 지키고 있던 신념이 무너질때의 기분이 바로 이럴까?
17년 평생을 당연하게 알아왔던 한가지 사실이 부정됨으로서 나는 살고싶다는 의지마저 잃어버렸다.
그야말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탔다 해도 이런 기분을 맛볼수는 없을것 같았다.
" 왜 내가 여자가 된거야!!! "
그날 저녁 .. 내 몸의 중요한 부위가 없어짐으로서 내가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퀭한 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잠을 못자서라기보단 정신적인 쇼크로 몰골이 초췌해져있는
나를 본 이프리트는 다분히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짧게 나에대한 평가를 내렸다.
" 이거 바.보. 아냐? "
" 크흑!! 하..하지만!! "
"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미네르바한테 듣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 하고 있었는데..
정말 인간의 기억에 연연하고 있을줄이야. 정령왕 주제에 정령이 성(性)이 없다는것도 모르다니..
전대 엘퀴네스가 알았다면 그대로 까무러쳐서 다신 일어나지 못했을거야. 하- 기가막혀서.."
" 그러니까 나는~.. 엥? "
신랄하게 비꼬아가는 이프리트의 말에 필사적으로 내 자신을 변호하려던 나는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방금 이프리트가 뭐라고 그랬더라? 뭐시기? 정령은 성이 없다고라???
놀란 내 표정이 상당히 얼빵했던지 이프리트의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더 구겨졌다.
" 기본적으로 정령은 무성(無性) 이라고.
남자니 여자니 구분지을 필요가 없단말이야. 다만 외형에서 남성과 여성으로 차이가 날뿐이지.
정령이 자식 낳았다는 얘기 들어본적 있어?
나나 미레르바만 해도 외모로는 확연히 여성체이지만 가슴은 없잖아? 너랑 똑같다구. "
" 헉..그..그러고보니... "
그래..그러고 보니 여자주제에 가슴이 이정도까지 나오지 않은건 말이 안돼는것 같아.
아무리 발육이 덜된 절벽가슴이라고 해도 어림잡아 17~20대초반의 여성이 이렇게 밋밋한 가슴을 가질수는 없는것이다.
아, 다행이다. 그럼 내가 여자가 된 건 아니란 건가? 무성인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실감이 나진 않지만.
일단 여자가 아니라는거 ..맞지?
나는 적잖이 안심되는 가슴을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남자. 그것도 한때 가부장제도의 주축으로 기반을 다지던 한국의 남자로 살아온 내게 있어서 여자가 됐다는 건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으니까.
미리 말해두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남녀차별이 아니다. 가치관의 차이랄까?
만약 내가 여자 였어도 남자가 됐다면 똑같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심정으로 가슴을 쓸어 내리는 나를 보고 이프리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에 한껏 감정이
비틀린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네 얼굴 어디가 여자같이 보인다는 거야?
조금 예쁘장한 편이긴 해도 아무리 봐도 남자녀석 얼굴인데. "
" 그..그래? 하핫 이것참.. 인간이었을 때 남자가 조금만 예쁘장하면 무조건 여자얼굴이라고 생각했던 버릇이 아직도 남아있나봐. "
" 흥. 미련스럽기는. "
" 하하하... "
그래..그러고 보면 아랫도리가 허전했다는 사실에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여자가 됐다고만 철썩같이 믿었던 것 같다.
청순틱해서 마음에 안들긴 하지만 미네르바나 이프리트에 비해서는 그래도 남자라고 볼수도 있는 얼굴인 것을..
이런게 바로 미소년이라는건가? 쿠쿠쿠.. 남들은 돈주고도 못되서 아쉬운 것을 다시 태어났다는것만으로
이렇게 거저 먹었으니 불만을 가져서는 안돼겠지?
이 치렁치렁한 머리카락만 자르고 나도 지금 보단 훨씬 남자다워 보일테고.
근육이야 운동 이라도 해서 키우면 되겠지. (근데 정령도 근육이 생기나?)
헉.. 근데 생각해 보니 정말 이상하네. 위는 밋밋한가슴에 아래는 허전하고..
이건 완전히 위는 남자. 아래는 여자 가 된 꼴이잖아? 욱..변태같애.
간신히 가라앉은 마음에 또다시 파문이 일어나며 찝찝함이 생기는 것이..
아무래도 이 요상한 몸에 적응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더 이상 불쾌한 기분이 들기 전에 나는 내 신체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리기로 작정했다.
그것이 바로 앞으로의 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행복해질 지름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란걸 증명이라도 하듯. 나는 곧 고요해진 마음과 평안한 상태를 다시 유지할수 있었다.
그러고 나자 한편으로 흡족한 마음이 들면서도 뭔가 꺼림직한 기분이 드는 것이.. 아! 맞다!
" 그런데 이프리트가 여긴 왠일이야? 미네르바나 트로웰은 어쩌고? "
너무 당황했기 때문에 눈치못챘었는데, 내가 살고있는 물의 영역에 와 있던 정령왕은 바로 이프리트였다.
어제 그런식으로 시비를 걸어놓고 심통맞게 돌아가버린 정령왕이 무슨 이유로 이곳을 다시 찾은 거라냐.
행동을 봐서는 족히 몇천년간 인연끊고 살 것 처럼 굴었던 녀석이 여전히 퉁명스럽긴 해도 다시 나한테 찾아왔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이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오늘부터 정령왕의 업무를 가르쳐주겠다고 자기들딴에는 파격선언(?)을 해놓고서는 코빼기 도 비치지 않는 미네르바나 트로웰도
그렇고..
이 세계는 앞으로도 내가 배워야 할 미묘한 부분이 많은듯..쿨럭.
이프리트는 내가 이제서야 자신의 존재를 눈치챘단 사실에 기분이 상했는지 어제처럼 사정 없이 표정을 구겼다.
그리곤 뭐라고 한참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음산해 보여서 나는 나도 모르게 땀을 삐질 흘리며
그에게서 한발짝 물러섰던 것이다.
.. 설마 이프리트! 저주라도 거는것이냐?
" 뭐야 그 겁먹은 표정은?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한다니? 전대 엘퀴네스는 건방지긴 했지만 그래도 품위라도 있었는데..
너는 대체 그놈의 꼬락서니가.. 쯧쯧.. "
" ..품위없어서 미안하게 됐네요... "
그러는 자기는 품위가 넘쳐나는줄 아나. 꼭 압구정판 생 양아치 같이 생겨가지고서는..쳇.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당당히 이프리트 앞에서 중얼거리지는 못했다. 목숨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소중하고 아깝기 때문에.. 후훗.
너무 비굴하게 산다고 뭐라고 하지 말길 바란다. 원래 비굴한 자가 생명줄 하나는 끈질기게 이어나갈수 있는 법이다.
흠..그러고 보니 이프리트가 압구정이나 양아치라는 소리를 알아들을 리가 없으려나?
여기와는 차원이 다른 공간, 그것도 한국이라는 비좁은 나라에서나 통하는 언어니까 당연히 못알아 들을수도..
그럼, 배째는 셈치고 한번 말해볼까?
에이..관두자 관둬. 말을 못알아 듣는다 하더라도 억양에서부터 좋은 의미가 아니란걸 눈치챌텐데.
그 후에 일어날 일을 짐작하고도 무모하게 시도해보기에는 내 배짱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
그나 저나.. 정말 이 정령왕이 왜 온거라지? 설마 일부러 시비거리를 만들기 위해 행차한 것은 아닐테고..
이런 내 생각이 표정에 드러났었나 보다.
이프리트는 다분히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곧 당당하게 자신의 방문 목적을 밝혔다.
" 앞으로 너의 교육을 내가 담당하기로 했다. "
"....뭐? "
" 거참. 정령이 귀 먹을수도 있다는건 오늘 처음 알았네. 못들었어? 내가 너의 교.육.을 담.당. 하기로 했다고. "
허거거....
이건 신의 농간이다. 아니면 아레히스의 음모야! 이럴수는 없어! 말도안돼! 어째서 저 정령왕이 내 교육담당이 되버린거냐~!!
벼랑끝으로 침몰하는 듯한 기분으로 경악에 빠져있는 내게 이프리트는 비웃는 듯이 입술 끝을 살짝 치켜올렸다.
다른 사람이 보면 무지무지 섹시하고 엄청엄청 도발적으로 보일지도 모르는 모습이었지만
지금의 내게는 하늘에서 악마라도 강림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만큼 사악하고 흉악하게 보였다는 말이다.
도대체 왜? why? 무슨이유로!!
" 죽어가는 표정 집어쳐. 기분나빠지니까. 누군 좋아서 맡은 줄알아?
미네르바나 트로웰은 아크아돈의 회복에 집중하고있어서 바쁘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내가 맡게 된 거라고. "
"... 이..프리트..너는 안바쁘고? "
" 응. 나는 지금 겉잡을수 없이 흉폭해져있는 불 기운을 줄이기만 하면 되거든. 그래서 다른 애들보다는 시간이 널널한 편이지.
걱정마. 내가 일주일 안에 완전히 정령왕으로 각성하게 만들어 줄테니까. "
"................"
그런식으로 노려보면서 말하면.. 내가 걱정을 안할 수가 있냐고!
시련은 달리 있는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정령왕으로 태어난 이후 -하루밖에 안됐지만- 제대로 되는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앞으로 이어질 꾸질꾸질한 앞날을 생각하며 상심해져 있는데 이프리트가 대뜸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 너. 나한테 뭔가 할말 없어? "
"......엉? "
할말? 할말이야 많지. 저기 이프리트.. 나 가르치는 건 말인데.. 그거 다시 생각해 보면 안될까?
내가 이렇게 착해보이고 성실해 보여도 사실은 말이지. 머리도 엄청 나쁘고 반항도 조금 .. 할줄 알거든?
네가 아무리 스파르타식으로 달달 볶아도 내가 못따라가면 너만 고생하는거잖아. 그치?
그러니까 부탁이니 제발 다시 생각을...
수없는 상념들이 머리속을 돌아다녔지만 정작 입으로 나온 단어는 '엉?'하고 되묻는 말이 전부였다.
그게 어찌나 답답해 보였는지 이프리트의 표정은 도무지 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아마 속으로 열번을 넘게 '바보'라고 욕해 댔을지도 모르겠다.
" 진짜 귀먹었냐? 나한테 할말 없냐고 물어봤잖아! 어제 미네르바나 트로웰한텐 너를 '지훈' 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며!
근데 나한텐 그런말 안하겠다고? "
" 엉? 아~ 그거 말이구나.. 하하.. "
씩씩거리는 이프리트의 태도에 나는 뜨끔한 심정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어제 그런식으로 가버려서 정식으로 인사를 나눌기회가 없던 만큼 나름대로 내 소개를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내가 눈치도 없이 그저 이프리트의 교육시간을 피할 궁리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인상이 않좋았다고 은근히 따를 시킨듯한 분위기라 이프리트에게 상당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표현방식이 제멋대로일뿐 이프리트가 날 싫어하는게 아닐지도 모르는 것을..
내가 너무 내 멋대로만 단정짓고 박정한게 군 것 같다.
이리 편협한 시선으로 세상을 살면 안되는데.. 쩝.
그래서 나는 기분좋지 않았던 어제의 첫인상을 지워버리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이프리트와 잘 지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나니 어째 이프리트에게 업무를 배우는것도 나쁘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밝은 표정으로 되도록 좋은 인상을 남기도록 노력하면서 입을 열었다.
" 아, 미안. 그러고 보니 제대로 인사를 못했네. 앞으로 잘 부탁해 이프리트. 아직 이름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데..
미네르바나 트로웰처럼 '지훈'이라고 불러줬으면 해. "
그리고 그런 나의 눈물겨운 노력은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으니..
" 싫.은.데? "
.........엉?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었지? 하하.
웃고 있는 얼굴 그대로 석상이 되어 굳어진 나를 보며 이프리트는 재미있다는 듯이 눈꼬리를 휘었다.
그리곤 무척이나 오만한 표정으로 나를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것이다.
" 미네르바가 그러던데... 너 인간일때의 기억에 매달려서 정령왕의 자각을 못하는거라며?
그런 상황에서 '지훈'이라고 부른다면 오히려 자각하는데 방해만 될걸?
그러니 나는 널 '엘퀴네스'라고 부르겠어. 이몸의 깊으신 뜻을 고마워하라고. "
"....그..그럼 어째서 나한테 지훈이라고 불러달라는 말을 하라고.. 했던건데? "
처음부터 엘퀴네스라고 부를거였다면 이런 과정이 전혀 필요없었잖아!
싫다고 반박할거라면 대체 뭣하러 그랬던거야!
" 그야 재미있으니까. "
"................"
휘이잉...
허무하게 부서져가는 나를 보며 이프리트는 내일부터 교육을 시작할거라고 말하더니 미련없이 돌아섰다.
자기 딴에는 안들리게한다고 조심해서 말한 모양이지만 텔레포트 하는 순간에 이프리트가 중얼거린 말은 내 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 다른건 몰라도 놀리는 재미만큼은 톡톡한 녀석이네? 아~ 당분간은 심심하지 않겠다. "
...............
바야흐로..... 여왕님과의 전쟁이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크흑.
" 그게 아니야!! "
" 그..그럼 이렇게? "
"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아!! 너 돌머리야? 어째서 한번 본걸 그대로 따라 하지 못하는 거야!
전대 엘퀴네스 만큼은 못하더라도 그 발 밑은 흉내라도 내야 할 것 아니야!
너 정말 그 녀석 능력을 제대로 물려받은 거 맞는 거야?
어째서 4대 정령왕중 최고의 가드와 공격을 자랑하는 물의 정령왕의 실력이 이따윈 거냐고!!! 설명 좀 해봐, 설명을!!! "
... 그걸 내가 알았으면 벌써 바닥에 돗자리를 깔았다. 쳇.
다음 날부터 시작된 이프리트의 수업은 말이 좋아 수업이지 완전히 수련을 빙자한 구박공격(!)의 연속이었다.
도대체가 무슨 말을 하나 던지더라도 곱게 나오는 것이 하나도 없는것이다.
시작할 때부터 불길했다. 뭐랬 더라? '전대 엘퀴네스의 능력을 받았다면 내 수업을 못 따라올 이유가 하나도 없으니.
못하면 각오해라!'였나?
그러면서 시작한 수업이란 것이 정령왕이 무엇이며 능력을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지에 대한 이론은 몽~~~땅 배제시킨,
곧바로 상급정령을 만들어내는 실습과정이었으니 내가 황당해하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
그것도 눈앞에 떡 하니 불의 상급정령 하나를 만들어서 보여주더니 나보고 그걸 보고 그대로 따라하란다..허허..
별다른 특징이란 하나도 없고, 그저 손 하나만 쭈욱 내밀기만 했는데도 불쑥불쑥 생기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고 따라하냔 말이냐.
초보한테 너무 많은걸 바라는 거 아냐?
" 난 태어나자마자 할 줄 알았는데? "
"............."
" 못하는 네가 오히려 이상한 거라고. 그것도 이렇게 눈앞에서 직접 시범까지 보여줬는데도 아무런 자각하는 바가 없다니..
으으 속 터져. 대체 뭐가 잘못 된 거지 "
답답하다는 듯한 이프리트의 푸념이 길게 늘어졌지만..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지가 아무리 답답해봤자 어디 당사자인 나보다 더 하겠냐고.쳇.
솔직한 심정으로 그때 아레히스가 줬던 쓴 용액을 다 마시지 않은걸 후회할 정도다.
그걸 다 마셨다면 기억을 잃게 됐을지도 모르고, 그럼 오늘날 이 모양처럼 정령왕으로 서의 자각을 못하게 되지는 않았겠지.
한모금 이라도 더 마시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외쳤던 그 빌어먹을 액체를 오히려 마시지 않은 게 후회가 되다니..
게다가 그게 망각의 물이 맞다면 지금의 모든 기억을 다 잊어버리고 전혀 다른 내가 된다는 것인데..
그걸 뻔히 알고있으면서도 후회가 될 정도이니 내 심정이 오죽한지 알만하지 않은가.
이게 다 저 정령 하나 태워 죽일 듯이 몰아붙이는 이프리트 때문이다!
원체 날 보는 시선이 곱지 않는 녀석이었는데 수업을 시작하고 나서부턴 원수도 이런 원수를 본적이 없다는 듯이 대한다.
말끝마다 '멍청한놈 한심한놈' 이라며 자존심에 상처 입히는 건 기본이고 '네가 이런걸 어떻게 하겠냐, 그치?'라며
자괴감에 빠지게 하는 데다 전대 엘퀴네스와 사사건건 비교해대는 것 까지..
정말 옳바른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덕목만 모조리 외워 놓은것 같은..
아,흠흠.. 이건 아니지. 이프리트가 내 선생도 아니고.
지금 이프리트가 날 교육 시키는 것은 정령왕 으로서의 자각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뿐, 그가 내 선생이 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정령왕들은 서로에게 동급. 낮춰 볼 수도 올려 볼 수도 없는 존재이니까.
그러니 이프리트가 날 달달 볶는다고 해서 학생의 입장으로 선생을 원망하는 심정이 되면 안되는 것이다.
어째 그것이 더욱 억울해 지지만..
근데 정말 이상하네. 전대 엘퀴네스와 이프리트는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하지 않았나?
사이가 안 좋았던 정령왕들 치고는 이프리트가 나와 전대 엘퀴네스를 비교 하는 것이 어째 심상치 않다.
설마하니 속으론 좋아하면서 겉으로는 시비 걸고 싸움 걸었을 리는 만무하고....가 아니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거기다 대대로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했던 이프리트와 엘퀴네스 였으니 드러내놓고 친해지지가 쉽지 않았을지도..흠.
그래서 이프리트가 날 그렇게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가?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호감 있던 존재가 소멸한 것만도 불쾌 할텐데 그 자릴 꿰어찬 놈 이란게
나같이 얼빵 하고 소심한 녀석이었으니 울화가 치미는 게 당연할지도.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고 보니 나에 대한 이프리트의 무조건적인 반감이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에 대해 쌓여가는 감정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니, 어쩌면 나 혼자만의 억측일지도 모르겠다.
이프리트가 전대 엘퀴네스를 정말로 좋아하고 있었다면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을 그들과 같이 지내왔던
트로웰이나 미네르바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럼 뭘까나.. 그냥 좋은 라이벌이 사라진 것에 대한 울분정도가 될까..?
으윽. 관두자 관둬.. 괜시리 어울리지도 않는 추리해본답시고 고민해봤자 머리나 아프지..
아무래도 이 문제는 나중에 날이라도 한번 잡아서 이프리트와 진지하게 대화를 해봐야 할것 같다.
" 남은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데 무슨 딴 생각에 빠져 있는 거야! 너 진짜 그따위로 할래? "
열심히 가르치기는 개뿔이 .. 옆에서 빨리 만들어 보라고 호통만 치는 게 열심히 하는 거면,
대한민국의 모든 학교 선생님들은 제자를 위한 희생정신으로 투철한 인간들이냐?
따지고 싶은 마음으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나름대로 애쓰고 있는 정령 앞에서 딴 생각 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그냥 참고 넘어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프리트의 교육방식은 정말 따라가기 힘들다. 내가 무슨 천재도 아니고 말이야.
" 이프리트. 자세히 설명 좀 해주면 안될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보는것 만으론 이해가 안되서 그래. "
더불어 그 보는 것도 딱 한번뿐이었다.
쪼잔한 이프리트는 그 한번 이후로 따라해 보라고 닦달 만 할 뿐 다시 정령을 만들어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
내 부탁 아닌 부탁에 아까 전 이프리트가 만들었던 불의 상급정령 이그니스가 쩔쩔 매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불새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이그니스는 이프리트의 옆에 서있는 것이 몹시도 황송한 모양인지 아까부터
우물쭈물하며 나와 이프리트의 실갱이를 지켜 보고있었다.
아무리 내가 정령왕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직속 상관(?)도 아니고.
자신의 왕인 이프리트에게 이토록 면박을 당하고 있는데도 이그니스는 전혀 나를 비웃는다거나 깔보지 않았다.
정령과 정령왕은 그 속성의 계열이 다르더라도 절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
저런 충실한 모습을 보자니 나도 빨리 정령을 만들어냈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무럭무럭 자란다.
세상에 자신의 절대적인 쫄다구가 생긴다는데 싫어할 존재가 어디에 있겠느냔 말이다.
그러나 시작부터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 나의 정령만들기 수업은
도무지 진지하지 않은 이프리트로 인해 계속해서 난관을 거듭하고 있었다.
" 설명? 그래, 좋아 설명해주지. 그냥 정신을 집중해. "
"...겨우 그것? "
" 그럼 뭘 더 바라는데? 잔말말고 빨리 정신이나 집중해봐. 너의 기운을 한자리로 모은다고 생각해 보라고. "
"..........."
이후로도 이프리트가 나에게 계속해서 강조하는 말은 그저 정신이나 집중하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뭔가를 해보려고 해도 옆에서 계속 종알거리는 이프리트의 참견 때문에 나는 도무지 정신을 집중 할수 없었고
결국 날이 어두워 질때까지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아무리 먹거나 잠자지 않아도 살수 있는 게 정령이라지만-영혼으로 지낸 며칠 간으로 이미 익숙해져 있어서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별로 놀라지 않았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인지 날이 저물고 나자 나와 이프리트는 상당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투덜투덜 거리면서도 날 가르쳐야겠단 사명감에 불타오른 이프리트는 내일을 기약하자면서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갔고,
나는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과 창피함에 한동안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정녕.. 나에게도 정령을 만드는 날이 오기는 할라나?..
저녁이 되자 사방이 어두워짐과 동시에 주변은 무척이나 고요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적막감이 이제 서야 느껴진다는 것은 아무래도 오늘 하루종일 옆에서 종알거렸던
이프리트의 잔소리가 없는 탓이지 싶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폭탄선언을 하러 잠시 이프리트가 들린 이후로는 하루종일을 혼자서 멍하니 보냈다.
비록 대화가 통하지 않더라도 옆에 누군가가 있어야만 안심이 되는 ..
혼자인 것을 죽어도 싫어하는 내가 낯선 환경에서 종일을 있었어도 아무런 느낌 들지 않았다는 것은 솔직히 굉장히 묘한 기분이었다.
이건 내가 원래의 위치를 찾았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된 탓일까, 아니면 정령왕이란 존재 자체가 이렇게 생겨 먹은 건가..
" 흐음..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조금 심심하긴 하다.. 뭐 할거 없나? "
바쁘다는 핑계로 내 교육을 이프리트에게 위임해 버린 미네르바나 트로웰도 정령계의 저녁시간에는 일을 잠시 쉰다고 들었다.
둘은 지금쯤 자신들의 영역에서 놀고 있을테고, 놀러가면 분명히 반갑게 맞아주겠지만..
' 텔레포트하는 방법을 모르잖아, 제길.. '
걸어가는 방법도 없지는 않겠지만, 가는 방향도 모르는데 무조건 나설수는 없다.
그러다 운나쁘게 불의 영역으로 가버리면 이프리트의 무수한 잔소리를 또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정령을 만드는 일이 시급한건 알지만 이런 실생활에 필요한 정보는 미리 알려줘도 상관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프리트는 너무 쪼잔하다니까.
하긴.. 정령왕에겐 숨쉬는것보다 더 쉽다는 정령만들기 에서부터 걸리는 나인데 어디 텔레포트가 가당키나 하냐만은..
그래도 쪼잔한건 쪼잔한거다,뭐. 쳇..
" 이왕 이렇게 된거. 이프리트가 말한 정신집중이나 해볼까? 참견쟁이도 없겠다~ 조용하겠다.. 아까보단 잘 될것 같은데. "
하루종일 혹사당한 정신을 또다시 부추긴다는건 내키지 않았지만 소란스러운 이프리트옆에서는
아무리 해도 진전이 없을것 같아서 나는 혼자가 된 지금 다시 시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잠도 안와서 할일도 없는데 잘됐다 싶은 태평한 기분으로 말이다.
지금은 실패하더라도 놀려댈 불의 정령왕도 없고, 실패한 나보다 더 민망스러워할 불의 상급정령 이그니스도 없다.
그러니 맘 놓고 시도해 보는거야! 핫핫핫.
될대로 되라지 하는 심정으로 침대 한켠에 자리를 잡은 나는 마음을 가다듬은 상태로 두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눈을 뜨고 있는것보단 감고 있는 쪽이 집중하기에 더 편하기 때문이다.
넘실거리는 물의영역에서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자 기다렸다는듯 새카만 어둠이 꾸물꾸물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완벽한 적막감.
'그래~ 이정도는 되야 집중하기에 편하지~ '
보이는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당연하다 눈을 감고 있으니까.)들리는 소리역시 하나 없는,
그래서 온전히 혼자가 된것을 깨닫게 해주는 소름끼치는 감각이 전신에 물들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종류의 적막함은 나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불과 며칠전까지만 해도 내 생활의 일부였던 것이니까.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지난 며칠간 중에서 가장 행복한 기분이었다.
안정이 된다고나 할까?
아직 인간이었을때의 버릇-그래봤자 얼마 지나지도 않았지만- 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 장난 아니었지, 그때. 아버지는 맨날 술취해서 들어오지..
형들은 시비거리 찾기 위해 두리번 거리지. 자기들이 무슨 먹이감 찾는 하이에나도 아니고 말이야.
아니지, 하이에나는 오히려 귀엽게 생기기나 했지.
나랑 똑같은 유전자를 받은, 그 열등한 외모로 얼굴마저 일그러뜨리고 다녔으니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났다구.
아무튼 그 인간들 피해서 벽장에 숨어지내던 우울한 과거가 새록새록 떠오르는 구만..쩝. '
술에 취한 아버지한테 일단 한번 걸리면 그날은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모질게 맞았다.
형제들이나 어머니나 그러한 행태를 말려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지칠때까지 단 한번도 쉬지 않고 구타를 당했던 거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술을 마셨다! 하는 정보를 입수하면 조용히 윗층의 다락방으로 가서 몸을 최대한 숨겼었다.
나를 찾아낼까봐 불안감에 몸을 떨고, 숨소리마저 들킬까봐 최대한 호흡양을 줄이면서.. 가족이 모두 잠든 새벽이 올때까지.
그 다음날이면 오랜시간 벽장에 틀어박힌 결과로 전신에 근육통이 도져 아파 돌아가실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한 고비 무사히 넘겼다는 생각에 얼마나 안도하고 가슴이 뿌듯해졌는지 모른다.
전체가 쇠로 이루어져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골프채로 두들겨 맞는것보단 근육통이 백배 이롭지 않은가?
게다가 근육통은 하루면 사라지지만 골프채로 맞아서 생긴 멍은 며칠이고 계속 아프단 말이다.
' 아, 이런 잡생각을 할때가 아니지. 집중하자, 집중. '
오랜만의 적막감을 맛봐서 그런지 쓸데없는 기억이 자꾸만 도지는것 같다.
나는 산만한 정신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면서 기운을 한자리로 모으라는 이프리트의 설명을 떠올렸다.
기운? 기운이라..
무협지에 나오는 무사들 처럼 나에게도 기운이 흐르고 있다 이말인가? 그걸 내가 지금 캐치하지 못한다는 것?
.. 도대체가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줘야 할것아닌가.
모든 일엔 순서가 있는 법이거늘.. 기운도 느끼지 못하는 날더러 기운을 모으라고 하면 그게 그렇게 쉽게 되겠냐구.
지금쯤 자신의 영역에서 달콤한 잠에 빠져있을 이프리트를 잠시 씹어준 다음 나는 내 몸에 흐를것이라 추.정.되.는.
기운의 흐름을 알아내기 위해 감각을 곤두세웠다.
그러자 예민해진 피부 탓인지 아까까진 느껴지지 않았던 주변의 물의 흐름이 미세하게 움직이는것이 느껴졌다.
너무 미약한 것이라 자칫 마음을 놓아버리면 다시 찾아내기 힘들 정도였다.
뭐랄까. 우리가 공기중에 있으면서도 공기의 흐름을 잘 알지 못하는것 같달까?
공기는 분명히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데도 바람이 불지 않으면 신경이 가지 않는것처럼,
지금 내가 있는 물의 영역역시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데도 그 움직임이 너무나 미미해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것 같다.
그리고 그 움직임을 잡아내고 나자 나는 이들이 미세하게 움직일 때마다 내 몸도 같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 할 수 있었다.
' 이게 뭐야? 겨우 이정도의 흐름에 몸이 흔들리다니...대체 어떻게 된거라지? '
공기의 흐름이 아무리 급작스러워도 사람의 몸을 흔들수는 없는것이다. 태풍이 불때라면 모를까.
자연스럽게 스치고 지나가던지,
혹은 흡수를 하던지 통과를 하던지 해야할 물의 미미한 흐름에 내 몸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조금 신기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마음을 편하게 하고 물의 흐름에 온 신경을 집중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이 자연스러운 흐름에 둥실둥실 흔들리는 감각을 맘껏 즐기기로 했다.
내 몸에 흐르는 기운을 알아내어 정령만들기 수업에 진전을 보여야 겠다는 처음의 의지는 몽땅 소각시킨 상태였다.
뭐 , 아무렴 어때. 어차피 복습 이라는 것은 나하곤 어울리지도 않는다.
마땅히 할일이 없길래 시도 해보려던 것 뿐, 신기한 것을 발견한 지금에 와서까지 고집할 정도로 집착이 가는일은 아니었다.
오늘 하루종일 시달린 일이 이제와 집중해 본다고 해결된다는 보장도 없고.
지금은 자유시간이니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 마음아닌가? 훗훗.
이프리트가 안다면 꽤나 인상을 찌푸릴 생각 이었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는 한참을 눈을 감은채 물의 흐름 만을 느끼도록 정신을 집중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을 그러고 있었더니 이제는 물이 흐르는 미약한 소리까지 내 귀에 닿고 있었다.
재잘재잘 거리는것 같은 맑은 소리가 쉬임 없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아까전 까지만해도 느껴졌던 적막감은 씻은듯이 사라지고 나는 무척 편안한 상태가 되어 마치 처음부터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것 같은 기분 좋은 감각을 유지할수있었다.
아아, 그래.. 나는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내 주변에 넘쳐나는 물들, 그것들과 함께있었다.
물의 정령왕이라고 하면.. 나도 물이라는 소리가 아닐까?
비록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지만 내 몸도 물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이 들고 보니 주변의 물과 한걸음 더욱 가까워진것 같았다.
신선한 기분, 신선한 감각, 신선한 감동..
마음껏 물의 소리와 흐름을 즐기던 나는 문득 이것들을 내 의지대로 움직일수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내가 물이니까, 물의 왕이니까 내가 하고싶어 하는데로 움직여 주지 않을까?
어째서 그런생각이 들었는 지는 모르겠다. 너무 기분 좋은 감각에 취한 나머지 정신이 잠깐 나간것일수도.
나는 물에 집중하고있는 그 상태로 감고 있었던 눈을 떴다.
저녁이 되도 여전히 푸른빛으로 아름다운 물들이 나의 몸을 감싸듯 유유히 흐르고 있는것이 보였다.
거참..이상도 하지. 분명히 눈을 감기 전엔 이런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말씀이야..
새삼 집중해보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자아.. 이제 이 물들을 어떤식으로 움직여 볼까나?'
평소의 나라면 이런생각은 하지도 않았을거다. 물을 움직여 볼까라니..
물이 무슨 내 수족도 아니고. 내 몸에 붙어 있는것도 아닌데 내가 무슨 수로 원하는모양으로 움직인단 말이냐.
하지만 지금 나는 너무도 당연하게 물들을 움직일수있을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드디어 미친건가? 뭐, 아무렴 어때.
주변에 가득 넘실거리는 물의 공간은 사파이어를 잘게 부셔서 넓게 펴 발라 놓은것 같았다.
이부분에서 한덩이를 떼어다 동그랗게 만든다면 꽤 예쁠것 같다.
물의 색깔이 원래 이렇게 예뻤었나?
나는 마음 속으로 물덩이가 내 앞에서 이루어지는 상상을 했다. 아니, 상상을 한다고 말할수도 없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도 전에 내 앞으로 물이 천천히 모여 들더니 하나의 덩이를 만들어 버렸으니까.
마치. 내가 손을 움직이기 위해 따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말이다.
가공되지 않은 사파이어 원석같은, 푸른색으로 빛나는 농구공크기의 물덩이를 보며 나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땀을 삐질 흘렸다.
설마.. 진짜로 물을 움직일수 있을줄이야...
일단 한번 물을 조정 할 수 있게되자 그 다음부턴 일사천리였다.
유심히 집중하여 나약하게 흐르는 물의흐름을 애써 잡아내지 않아도 아주 쉽게 움직임을 찾아낼 수 있었고,
조정하는 물의 모양도 자유자재가 되었다.
처음엔 그저 단순한 농구공 모양의 물덩이 였던 것이 조금씩 다듬어 내자 나무모양도 되고 별 모양도 되는 것이다.
때문에 물의 모양을 만들기에 재미를 붙여버린 나는 무슨 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 조각가가 되는
마냥 심혈을 기울이며 여러 가지 작품을 선보이고 있었다.
강아지 모양이나, 새. 호랑이 등등.. 물의 공간은 순식간에 여러 가지 동물의 모양을 한 물 덩이가 여기저기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 참에 사람도 만들어볼까?
마땅히 떠오르는 모델이 없어서 전생의 내 모습을 만들어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갑작스런 방문자로 인해 생각으로만 만족하고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 "
" 엥? 이프리트? "
물의 영역 한쪽에 시뻘건 불꽃이 솟아오른다 했더니 금새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내곤 사라졌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에 섹시한 눈매가 매력적인 이프리트와 불사조형상을 한 불의 상급 정녕 이그니스였다.
이프리트는 그렇다 치고.. -어제 만든 것이 분명한- 저 이그니스는 왜 데리고 온 거라지?
설마 정령하나도 못 만드는 날 약올리려고?
딴 녀석이라면 몰라도 이프리트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역시 이프리트의 교육방식은 틀려먹었어..
" 뭐야, 그 의미 모를 도리질은? 어째 상~당히 기분이 나빠진다? "
" 아하하 그저 잡생각 을 좀.. 근데 왜 벌써 왔어? "
이프리트가 내일을 기약하며 돌아간지 아직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별다른 기별 없이 다시 왔다는 소리는..
설마 저녁에도 공부하자는 소리??
....그건 아닌 모양이다. 이프리트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보면.
" 무슨 헛소리야. 날이 밝은지가 언젠데. 이제까지 한껏 여유 부리다가 온 거란 말이야. "
" ......엥? "
나, 날이 밝았다고?
황당한 심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니.. 허걱. 정말 어느새 날이 밝아있었다.
물로 뭔가를 만들어 낼수 있다는 매력에 빠져 창작에만 열중하느라 시간이 가는줄도 모르고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황당한 일이..
내가 이렇게 집중력이 좋았던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침을 맞아버린 물의 영역은 침침한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고 완연히 흰빛으로 사방을 밝게 비추고있는 상태였다.
내가 잠시 주위를 바라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는 사이,
이프리트는 내가 결과적으로 밤새 만들어 놓은 물로 된 조각상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특유의 오만한 포즈와 함께 뜬금 없는 말을 내뱉는 것이다.
" 흠. 난 역시 천재라니까? "
" 뭐, 뭐가? "
내가 만든 조각상을 보고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건 뭔가 커다란 오류가 있는 것 같지 않냐, 이프리트?
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지 이프리트의 시선은 조각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러더니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밤새 이만큼의 진전을 보이다니! 난 역시 대단해~
이 정도로 정교하게 물을 다룰 수 있게 됐으니 정령을 만드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야. 역시 가르치는 방법이 좋았어 "
".........."
아아. 정말이지.. 네가 언제 그렇게 좋은 방법으로 날 가르쳤냐고 따지고 싶다.
분명 정신을 집중하라는 이프리트의 말에 힌트를 얻어서 이뤄낸 성과이긴 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인정할라 치면 가슴속에서 뭔가가 울컥울컥 솟아오르는 것이다.
굳이 표현해 보자면 뭐랄까..차마 말로 형용 할 수 없는 울분 혹은 격분이라고나 할까?
이건 절대 내가 속이 좁아서 그런 게 아니다.
내 얼굴에 미미한 경련이 일어나는 것 을 눈치챘는지 이프리트는 짐짓 딴청을 피우며 헛기침을 했다.
저도 찔리는 게 있는건 아는 모양이지? 덕분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아~주 조.금.
지렁이가 물고 다니는 모래알만큼, 불개미의 연약한 더듬이만큼,
온 세상에 널리널리 퍼져있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균의 크기만큼!!!
" 뭐, 뭘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보는 거야? 나한테 관심 있어? 흐응~ 전대 엘퀴네스 만도 못한 실력으로 나를 넘보다니.
간도 크구나~? "
" 커헉.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건데? "
" 어머? 그렇게 이글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그럼 아니란 말이야?
하긴~ 나처럼 섹시하고 예쁜 정령을 찾아보기는 힘들긴 하지. 나한테 반하는 네 심정을 내가 어떻게 모르겠어?
그치만~그 마음은 정말 고마운데 말이지~ 나는 물의 정령하고는 친하게 지낼 생각 없거든? 날 그냥 포기 해줘."
......공주병도 있었더냐 ,이프리트? 세상의 삼대 불치병(암, 에이즈, 공주병)중에서도 가장 고치기 힘든 것에 걸리다니..
잠시 묵념 해줄까?
물론, 이프리트가 예쁘게 생기긴 했다. 강지훈 이었던 그 시절의 우리 반 여자 애들에 비하면 거의 천사처럼 보일 지경이고,
한가닥한다는 유명연예인들을 한자리에 모아놔도 이프리트보다 예쁜 인간은 찾기가 힘들 정도다.
그러니 어느 정도의 공주병은 경도가 미미하다면 무난히 너그럽게 봐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 얼토당토 않는 도끼병(어느 이성이든 자신을 무조건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무시무시한 병)까지는 너무 한 거 아니야?
하늘에 맹세 하건데 너한테 흑심이나 연애 감정 따위는 품어 본적이 없단 말이다!
트로웰 이라면 또 모를까... 쿠..쿨럭. 이,이게 아니지..흠흠..
어쨋든. 이프리트의 말에 정신적 충격을 받은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오해의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부들부들 말을 이었다.
" 저기..나는.. 너한테 그런 감정.. 전혀 없거든? "
그러니 그런 말도 안되는 허튼 상상은 제발 그만둬 주지 않으련? 나도 보는 눈은 있다고.
이렇게 말하면 이프리트가 반격이라도 할줄 알았다.
그럼 왜 그렇게 뜨겁게 쳐다 봤냐느니, 창피하다고 감정을 숨기지 말라느니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게 아니라도 특유의 도도한 표정으로 '농담이었어' 라고 말할줄 알았는데..
" 어? 이.. 이프리트? "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머물러있었던 장난끼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얼굴로 이프리트는 날 바라보았다.
어쩐지 굳어 보이는 표정. 가늘게 노려보는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슬픔? 혹은 원망. 아니면 그리움..
그 순간 나는 이프리트와 나 사이에 무언가 침범할 수 없는 차가운 벽이 존재한다고 느꼈다.
마치 서로 절대 어울릴 수 없는 물과 ,기름.. 불길과 물길처럼..
이프리트가 불의 정령이고, 내가 물의 정령 이란걸..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나를 못마땅하게 여긴 녀석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정도 까지 거리감을 받은 적은 없었는데.
두 눈에 가득 담긴 적의. 이프리트는 지금 화내고 있었다.
무엇에 대한 분노인지는 어쩐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이프리트가 노려보고 있는것은 나지만,
담겨있는 것은 내가 아니다.
한참을 나를 통해 그 '누군가'를 노려보던 이프리트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힘겹게 열며 작게 중얼거렸다.
" 알고 있어... 네가 나한테 아무런 감정 없다는 거. "
아련한 슬픔이 묻어나는 저 목소리 역시 나를 향한 것이 아니다.
나한테 말하고 있지만, 이프리트가 바라보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어쩐지 건드리면 안될 부분을 건드리고 만 것 같아서 나는 속으로 땀을 삐질 흘렸다.
제길.. 나는 그냥 인류의 적인 도끼병을 조금만이라도 퇴치해보고자 했던 것뿐인데.
'왜 얘기가 이렇게 되는 거야!!'
" 돌아가겠어. "
어찌할 바를 몰라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내게 어느덧 '나'를 바라보기 시작한 이프리트가 퉁명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까 전의 일로 무지 감정이 상했는지 심술 맞은 표정이었다.
" 도.. 돌아가다니? "
" 흥, 귀찮아 졌어. 내가 왜 널 가르쳐야 하는지. 생각해보니까 그럴 이유가 없겠 더라고.
혼자서도 물을 다룰 수 있게 됐으니 내가 없어도 상관없겠지? 앞으로 잘 해봐~ "
" 뭐어? 자..잠까안~~!! "
커헉.. 늦었다. 이프리트는 이그니스와 함께 불길이 되어 내 영역 안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이미 사라져버린 이프리트가 있던 공간을 허무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제대로 된 가르침도 아니었거늘.. 이런 식으로 팽개치고 도망가버리다니!
아까 그거 혹시.. 귀찮은 일을 그만 두려던 이프리트의 고도의 연기력이었던 거 아니야?
막막한 미래를 생각하자 현기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강지훈- 겁나게 운 좋아 정령왕으로 태어난 인간. 아니, 겁나게 운이 나빠 인간으로 태어났었던 정령왕.
이프리트에게 정령왕 업무 배운지 이틀만에 파토나다... 크흑..
엘퀴네스의 장-4. 운디네와 시큐엘
그 날 이후, 정말로 이프리트는 나 혼자 하게 내버려두었는지 다시는 물의 영역을 방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미네르바나 트로웰에게 도움을 바란다는 건 가당치도 않은 소리 아닌가.
결국 나는 며칠째 혼자서 물을 가지고 어찌할 바를 몰라 끙끙거리고 있었다.
주변의 물들을 하나의 존재로 인식하고 나서부턴 혼자라는 적막감 따위는 전혀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늘 옆에서 수다를 떨고 재잘재잘 거리는 것 같아서 이프리트가 옆에 있을 때 보다 더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맑은 물 흐르는 소리가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로 들리다니.. 정녕 내 귀가 이상해 진 것이 틀림없다.
- 만나서 반가워. 이번에 새로 태어났구나
- 그래,그래. 너도. 후훗.
- 그런데 왜 운디네님 들은 안 오시는 걸까? 벌써 며칠은 지난 것 같은데.
- 시큐엘님도 없어. 우리들의 힘만으로는 이 광활한 바다를 전부 정화 할수 없는데.. 엘퀴네스님은 왜 가만히 계시는 거지?
"............."
이 정도쯤 되면 단순히 귀의 이상정도 가 아니다.
그동안 안 쓰던 머리를 너무 굴렸던 부작용 인 거야. 난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해!!
처음 물을 다루게 된 것을 계기로 소근거리며 들리기 시작한 이 수다 소리는,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가 정령을 만들기 위해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들리는 범위가 커지고 소리가 뚜렷해지고 있었다.
지치지도 않고 떠들어대는 소리에 질려버린 내가 어느 한순간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버리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늘 이렇게 웃고 떠드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뜬금 없이 그들의 수다 속에 내 이름이 간혹 들어가는 때도 있다.
설마 싶어서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는 거라곤 여전히 정적인 물의 흐름밖에는 없는데.. 도대체 이게 어디서 들려오는 건지..
환청이어도 문제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나에게는 충분한 고민거리였다.
뭐, 그래도 요 며칠 간 많이 익숙해지는 바람에 긴장했던 처음과는 달리 이젠 그들이 떠드는 세상얘기를 들으며
즐길 수도 있게 되었지만.
그래서 알게 된 건데, 이제부터 내가 정 붙여야할 이 아크아돈 이라는 세계는 그전에 살았던 '지구'와는 이해해야하는
개념부터 다른 세상이었다.
귀족과 평민. 상인과 노예 라던지 기사나 레이디. 황제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만 해도 그저 지구에 비교해서 몇 세기 뒤떨어진,
중세시대 정도 되나보다..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레드 드래곤이 헤츨링을 낳았다느니, 엘프 숲의 누군가가 결혼식을 올렸다느니,
마법사나 소드마스터가 어쨋 다느니 하는 얘기를 듣고 나니까 결코 이곳이 평범한 세계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레히스가 그랬었지.. 아크아돈은 인간을 비롯한 타 종족이 함께 존재하는 차원들 중의 하나라고.
내가 없는 동안 부족한 물을 인공 비를 내려 보충시켰다는 말에 그저 과학의 발전이려니 생각하고 말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구에서는 너무나 생소하지만, 여기서는 숨쉬는 것보다 당연한- 마법.(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마법을 할줄 아는건 아닌 것 같다.
마법사가 되는 것은 그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선택받은 소수에 불과하며 사람들에게 꽤 존귀한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특히나 요 십 몇 년 간 비가 내리지 않을 때 그들의 힘이 무척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제국의 황제보다
더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나 뭐라나..)그것의 힘이었던 것이다.
하기사. 정령이라는 존재가 생태계를 유지한다는 곳인데, 지구와 똑같을 리는 없겠지.
이들의 말을 듣자면, 전 세계는 지구와 아크아돈을 포함한 여러 차원과, 주신을 포함한 여러 상,중,하급의 신들이 모여 살고 있는
신계,
그리고 악한 속성을 지닌 존재들이 주를 이루어 구성되어있는 마계와, 죽은 이들이 모이는 명계,
그리고 현재 내가 살고있는 정령계로 나뉘어져 있는 것 같다.
신들은 신계에 머물면서 각각 자신들이 맡은 차원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데, 주신이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지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차원들의 일은 중,상급 신들의 손을 거쳐서 이루어지지만,
차원의 멸망이나 탄생 같은 존속문제 만큼은 주신의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고 한다.
전쟁과 사랑, 인간의 희노애락을 관장하는 것은 대부분 중급 신들의 일이고, 차원의 유지와 전체적인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것은
상급 신들의 일. 하급 신들은 인간세상의 자연을 가꾸는 일을 하지만,
아크아돈에서는 그 일을 정령왕이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하급 신들이 필요하지 않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꿋꿋하게 놀러와서 사람들의 믿음을 얻어 가는 몇몇 하급 신들이 있는데,
전에 트로웰이 투덜거리던 대상이 바로 이런 하급 신들인 모양이다.
몇 백개에 해당하는 숫자의 차원들 중에서도 아크아돈은 '정령'이라는,
다른 곳에는 없는 특별한 존재의 힘으로 자연을 꾸려나가는 만큼, 인간세상도 그만큼 다른 차원보다 재미있는 구석이 많다고 들었다.
종족들의 분포도 빠짐없이 고루고루 되어있는 편이고, 인간의 능력도 타 차원의 인간들보다 훨씬 상회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정령을 다룰 줄 안다는 정령사와 마법사의 능력이 뛰어나다나 어쨌다나..
정령 만들기에 성공하고 나면, 바깥세상 구경하러 돌아다닐 수 있으려나? 아, 마법사 보고싶다..
- 들리는 소문으로는 엘퀴네스님이 인간으로 잘못 태어나시는 바람에 그 기억에 매어 왕의 업무에 적응을 못하시는 거래.
- 뭐어? 그게 정말이야? 그래서 운디네님들이 못 오시는 건가..
- 설마~ 아무리 그래도 왕이신데 정령하나 제대로 못 만드셔서 쩔쩔매시진 않잖겠어?
- 맞아. 만약 그렇다면 엘퀴네스님은 바보야.
- 쿡쿡쿡. 맞아. 정말 바보야.
.....썩을. 그래, 나 정령왕인 주제에 정령도 못 만드는 바보 중에 최고 바보다, 어쩔 거냐 이것들아!
이렇게 마구마구 내 뒷담을 까고 있는 걸 보면 이 수다쟁이들은 자기들의 소리를 내가 듣고 있다 는걸 모르는 모양이다.
이 녀석들.. 혹시.. 나이아스들인가?
운디네나 시큐엘과는 달리 내가 직접 만들지 않아도 스스로 내 기운을 느끼고 탄생한다는 물의 하급정령을 떠올리며
나는 표정을 사정없이 구겼다.
' 이것들이 감히 지 상사(?) 뒷담을 까? 내가 그렇게 만만히 보인다 이거지? '
어째서 전 세계에 고루 퍼져있어야 할 나이아스들의 목소리가 들리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거리낌 없이 나를 '왕'이라고 부르고, 정령들 밖에는 모르는 내 불우한 탄생스토리를 알고 있는 것을 보아
이것들은 틀림없이 정령들이 맞는 것이다.
그것도 바다를 정화할수 없다느니 운디네와 시큐엘은 왜 이리 안오냐느니 떠들어대는 걸로 봐선 확.실.한. 물의 정령들이었다.
' 어허 통제라.. 동료복도 없는 나는, 부하복도 없는 놈이었단 말인가? 우째 이런일이..'
하지만 이렇게 기분이 나쁜데도 이상하게 화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나이아스들의 목소리가 철부지 여자아이들의 가는 미성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들끼리 재잘거리는 것 같아 그저 귀엽다고만 생각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있는 자의 여유라는 건가? 아니면 어른들이 대드는 꼬마를 바라볼 때의 심정인가..
아무튼, 빨리 정령들을 만들어야 저런 괘씸한 대화들이 오고가지 않을 것인데 말이지..
문득 부하한테 무시 받고 좌절하는 상사의 기분으로 한심해져있는데 예상치 못한 힌트가 나이아스들의 대화에서 들려왔다.
- 그거, 그거~ 그냥 명령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 그럴걸? 물의 흐름을 한자리로 모으면서 탄생하기를 명령하면 될텐데.
- 에이~ 그렇게 쉬운걸 엘퀴네스님이 못하실 리가 있어? 다른 방법이겠지.
- 그런가? 맞아, 그렇겠다. 다른 방법일거야.
"............."
명령? ...명령이라.....하하.
그러고 보니 나는 지난 며칠 간 어찌하면 정령을 만들 수 있을까 하고 끙끙거렸을 뿐, 뭔가 시도를 해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 기운을 한자리로 모으려면 먼저 기운을 느껴보는 수밖에 없단 일념으로 하루종일 명상에 잠겼다가 허탕친 적도 많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나는 안색을 하얗게 굳혔다.
설마.. 이프리트가 말한 내 '기운' 이라는 것이.. 물이란 말이야? 물의 흐름을 잡아 내는 것?
" 허허허.. 하긴.. 내가 물이니까.. 물의 흐름이 내 기운의 흐름이나 마찬 가지겠.... 이런 빌어먹을!!! "
아아.. 나의 고상한 입에서 요즘 들어 너무 험한 말이 많이 나가는 것 같다.
다시 한번 느끼지만, 정령왕으로 태어나고 부터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지난 며칠 간 고입시험때도 굴리지 않았던 머리를 쥐어 짜가면서 혹사시켰건만, 정녕 내게 돌아온 결과는 이런 것이란 말인가?
물의 흐름은 이미 진작에 잡아냈단 말이다! 이제는 그 흐름까지도 내가 마음먹은 대로 바꿀 수 있는 경지에까지 올랐거늘..
'아니지, 이제라도 알아내서 다행이라고 해야지.. 나이아스들이 떠들지만 않았어도 난 계속 끙끙거리고 있었을 거고.
그렇다고 이프리트가 다시 와서 친절하게 가르쳐 줬을 리도 없잖아?
그러니까 이건 운이 좋은 거야. 그..그렇게 생각하자. '
때론 매사를 긍정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봐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특히나 나같이 불행한 정령에게는 더더욱.
자, 우울한 감정은 멀리멀리 떨궈내고~~ 이제 방법도 알았겠다! 고대하던 정령을 만들어 볼까나? 훗훗.
가까운 길을 아주 멀리 돌아서 온 것만 같다. 오늘이 오기까지 그 얼마나 구석에 처박혀 궁상을 떨었더냐.
나는 잠시 북받쳐 오르는 감동을 느낄 뻔하다가.. 아직 정령 만들기에 성공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진정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곤 천천히 감정을 가라앉힌 다음, 그동안 해왔던 대로 물의 흐름을 느끼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사실 이젠 굳이 집중하고 말 것도 없이 물의 기운쯤이야 자연스럽게 찾아낼 수 있지만,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인 만큼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신중을 더한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미미한 물길의 흐름에 내 몸은 살며시 흔들렸다.
나를 중심으로 퍼져있는 물의 잔잔한 진동은 내가 정신을 집중하자 더욱 선명히 느껴지며 어미 닭을 쫓는 병아리처럼 천천히
나에게로 모여들었다.
그 이동시에 느껴지는 물의 파장들이 너무 간지러워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부드러운 실크천에 푸욱 파묻히게 된다면 그때의 기분이 이럴 것 같다.
어머니의 양수 속에 들어가 있는 태아도 이런 느낌일까?
완연히 하나로 뭉쳐진 물의 기운들은 곧 떨어질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고 천천히 정렬되기 시작했다.
가만, 물도 정렬된다고 표현할 수 있나? 이게 무슨 군대의 군인들도 아니고.. 흠.. 냅두자.
여기까지가 내 표현력의 한계인 게야..헐헐..
" 자, 그럼 모두 모아놨으니 이제 명령을... 에? 명령? 뭐라고 명령 해야하는 거지? "
한시름 덜어놨다 했더니 예상치 못한데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기운을 모아 놓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떤 식으로 명령해야 하는지를 내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중급과 상급이라면 만들어지는 과정이 서로 다를 수도 있는데.. 어찌해야 한다지?
" .. 그냥 운디네 태어나라! ...는 아니겠지... "
역시나 말을 꺼낸 내가 스스로도 무안해 질 정도로 기운들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다.
'태어나라' 가 아니면 뭐라고 해야하는 거지? 탄생해라? 만들어 져라? 안 태어나면 죽일겨? 제발 태어나 주세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두서 없고 멋대가리 없는 문장만 떠오른다.
그래.. 매번 국어점수 75점을 들락날락 하던 실력으로 무슨 멋드러진 문구냐, 문구가..
그딴건 아무래도 좋으니 제발 태어나 달라고~! 이프리트는 어떻게 명령해야하는지를 왜 안 가르쳐 준거야!
어쩐 일인지 내 앞에 모여있는 물의 기운들이 식은땀을 흘려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몸이 허 해진 게 아닐까..
나는 명령어를 생각하느라 흐트러진 정신을 다시 기운들에게 집중시켰다.
이런다고 뭔가 해결책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물의 흐름만 열심히 정돈해두는 수밖에.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달리 기운에 집중하는 방법은 의외의 효과를 일으켰다.
점점이 점멸 하는 빛들과 새롭게 탄생하는 빛들은 물 속에서 마냥 살기가 좋은지 무수히 활개치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투명한 푸른색의 공간 속에 끊임없이 반짝이는 수없이 많은 빛 무리는 물 속 특유의 아련한 느낌과 어우러져 가히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새삼스럽게 넋을 잃어버린 나는 차츰 꿈을 꾸듯 몽롱한 기분이 되었다.
중 3때 아버지 몰래 마시고 취했던 소주의 느낌이랑 비슷한 듯. 왜,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취한다고들 하잖아?
내가 바로 그런 상태였다.
이 순간 내가 물의 정령왕이라는게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를.. 너무도 확실하게 깨닫게 된것 같다.
불이나 땅, 바람이었다면 이런 황홀한 광경을 하루종일 구경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한참을 그러고 넋을 잃고 있던 잠시 후,
나는 물의 자태(?)에 정신 없이 감탄하느라 정령 만들기는 싸~악 잊어버리고 있었다 는걸 깨달았다.
'허걱.. 또 딴 생각했네. 어쩐지 자꾸 어리버리 해지는 것 같단 말이야.. 빨리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데 황당한 일은, 지난 며칠을 이어 계속해서 끙끙거리고 있었던 그 골치 아픈 문제 거리를 생각하면서도 내 심정이
너무도 담담해 졌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스스로가 너무 태연해서 속으로 아주 뼛속까지 포기해버렸구나..하는 허탈한 기분까지 들었을 정도로.
잠시 물에 마음을 빼앗긴 사이에 해탈의 경지라도 이룬 건가?
아무튼 나는 지극히 태연한 눈으로 여전히 앞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아름다운 물의 무리를 바라보았다.
뭔가가 떠오를 듯 말듯.. 머리 속에서 계속 맴돌고 있는 것 같다. 당장이라도 입을 벌리면 쏟아져 나올 듯한 아슬아슬한 충동감.
자꾸만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는, 의식을 점령하는 무언가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 태초부터 존재하는 나의 아이들아, 너희의 아버지이자 절대적인 주인으로서 명령 하노니,
나의 부름에 응답하고 지금 이곳에서 탄생할지어다.
애 띤 소년의 낮으면서도 부드러운, 약간의 울림을 담은 듣기 좋은 미성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허스키 하면서도 터프 한 내 목소리는 어딜 가고 이런 갸날픈 음성이 나온단 말인가!
내 입에서 내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가 나왔다는 것에 나는 참으로 설명할 수 없이 묘한 기분이 되었다.
얼떨떨한 심정으로 다시 아무 말이나 나오는 데로 주절거려봤지만 이번엔 평소의 내 목소리 그대로다.
설마.. 아까 그건 환청이었나?
그러나 그 직후 물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난 더 이상 그것에 의구심을 가지지 못했다.
내 앞에 장벽처럼 펼쳐져 있던 물의 기운들이 타오르는 화산처럼 순식간에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폭풍에 휘말리는 듯 거대하게 몰아치는 소용돌이.
성난 폭군 마냥 마구잡이로 휘둘러지는 물결은 나에겐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하고있는데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기가 질리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참으로 보기 좋은 광경이다..
라며 속으로 흡족해 하고 있는 나는 어딘가 상당히 삐뚤어진 성향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 엉망으로 뒤엉키는 물의 소동을 보자니 또다시 뭔가를 말해야 할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거참..이상도 하지. 이프리트는 정령 만들 때 이런 식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설마, 정령왕들마다 정령 만드는 법이 다 다른 건가?
불쑥 생기는 의문을 애써 떨치면서 난 이번에도 머리 속에서 맴도는 말을 그대로 뱉어냈다.
물의 아름다움에 반한 순간부터 내 머리 속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을 구속하고 있었다.
자각을 못할 뿐 본성은 훌륭한 정령왕 인지라 아무래도 본능의 의지가 이성을 누른게 아닌가 싶다.
- 나의 명령받아 탄생하는 자의 이름은 운디네, 그리고 그 이상에 선 자- 시큐엘이니. 자연이 원하는 그 수 만큼 머물지라.
제약을 받지 말고 이동할지라. -
아. 또 내 목소리가 아닌 것이 흘러나간다. 대체 어찌된 일이라지?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확실히 이 목소리가 지금의 외모와 어울리긴 했다.
그래서 나는 대책 없이 그저 좋은 게 좋은 거지..하고 의문을 넘기기로 해버렸다.
솔직히 여기서 태어난 이후(정확하게는 지구에서 죽고 난 이후지만.) 인간의 기준으로 정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 하나라도 있었던가.
괜시리 고민해 봤자 내 머리만 아프다는 쓸모 있는 교훈을 톡톡히 가슴에 새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내 앞에서 뭉쳐져 형상을 이루어 내는 수많은 물방울들 때문에라도 그런 사소한 것(?)에
더 이상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기도 했다.
정적인 흐름만을 유지하던 물의 공간은 어느새 수십만 개의 물방울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서로 뭉쳐서 뭔가를 이루었다가 금새 해체되고, 다시 뭉치기를 반복하고있었다.
얼핏 물방울들이 뭉치는 순간에 흐릿한 형체가 보이는 듯도 했지만, 너무 순식간이라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 엄청난 물방울들의 움직임은 내가 이상한 목소리로 명령한지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쉬임 없이 계속되었다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아니, 순간에 사라진 건지 아닌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물방울들의 반복된 움직임에 지겨워진
내가 중간에 잠들어 버려서 그들의 마지막(?)을 보지 못하고 말았니까.
내가 깨어난 것은 그 물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고 다시 정적으로 변하고 나서도 한참이 흐른 뒤였던 것 같다.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한참 헤매고 다니던 달콤한 꿈속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 저어...엘퀴네스님.
".........우움..뭐야........."
- 부르심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인사를 올리려 하는데 괜찮으시겠는지요?
"...... 엉?........."
뭘 받고 뭘 올린다고? 아직 완전히 깨어난 상태가 아닌 머리 속으로 나는 멍청이 되물었다.
내가봐도 충분히 한심스러웠고, 이프리트가 봤다면 머저리라고 욕할지도 모르는 그 답답한 작태에도 상대방은 침착하게
자신의 말을 다시 번복했다.
- 엘퀴네스님의 부르심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인사를 올리려고 하는데요..
" 후음..내가 언제 불렀다는......어엉?? "
고요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한 젊은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조금 짜증내듯이 되묻다가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제길. 앞으론 잠 같은 거 자지 말아야지. 어째 나란 놈은 잠만 잤다 하면 정신을 못 차리는 거라냐..
내 이름 뒤에 거창하게 '님'자를 붙이는 데다 내가 불러서 태어났다고 하면 단 한가지 존재밖에 없잖아!!
그때서야 나는 멍한 정신을 완전히 수습하고 눈을 동그랗게 떳다.
잠들기 전까지도 수십 개의 물방울들로 바글거렸던 물의 영역은 어느 샌가 평소처럼 티끌하나 없는 정적으로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무난한 물의 움직임 속에서 여러 군데 자리잡은 가구들이 보였고,
바로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낯선 두 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 헉..뭐, 뭐야 너희들..놀랐잖아... "
- 죄..죄송합니다, 아무리 불러도 안 깨어나시기에...
이번에 대답한 것은 하이 소프라노톤의 맑은 소녀의 목소리였다.
내 앞에 서있는 것은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귀여운 소녀 한 명과, 시베리안 허스키처럼 생긴 늑대 한 마리였으니..
대답한 쪽은 소녀였다.
처음 정령왕들을 만났을 때처럼 난 이들이 본능적으로 내 휘하의 정령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하대가 나갔을 때도 별로 어색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쪽이 운디네고, 어느 쪽이 시큐엘이지?
내가 막 그것에 궁금해 했을 때, 타이밍 좋게도 정령들의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 높으신 분을 처음 뵙습니다. 샘물과 강을 지휘하는 운디네 입니다.
아하~ 저 소녀형상을 한 정령이 운디네로군.
체구로 봤을 때 어림잡아 12세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모습을 한 운디네는, 입고있는 물색 원피스의 양끝을 잡고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상큼하게 생긴 아름다운 얼굴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모습에 저절로 감탄이 들만도 하련만, 내 눈엔 꼬맹이가 어른흉내를
내려고 애쓰고 있는것 같이 보여 그저 웃음만 나왔다.
아, 왜 친구녀석들이 결혼하면 딸 낳을 거라고 난리를 쳤는지..그 심정이 조금 이해가 가는 순간이다.
' 너무 귀엽잖아~~~! '
- 고귀한 왕을 뵙습니다. 바다의 광할한 영역을 감시하는 시큐엘입니다.
내가 잠시 운디네를 보며 속으로 감동하고 있는 사이, 늑대 형상을 한 물의 상급정령-시큐엘의 소개가 이어졌다.
시베리안 허스키처럼 풍성한 털과 우람한 덩치에 날카로운 눈매, 전체적으로 투명한 물색으로 되어있는 시큐엘은
그 목소리만큼이나 강직하고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시큐엘이 운디네 만큼이나 꽤 마음에 들었다.
' 시베리안 허스키!! 말라뮤트!! 이 얼마나 내가 키워보고 싶어 안달이 나던 동물이던가! 집에선 절대 못 키우니까,
독립이후로 미뤄 뒀던 것을 이렇게 비슷한 거나마 얻게 되다니!! '
거기다 이 허스키(?)는 말도 할수 있다. 이 얼마나 훌륭한 애완동물(?)이란 말이냐!
아마 이런 내 생각을 시큐엘이 알았다면 태어난 것을 죽도록 후회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연히 독심술을 익힌 바 없는 시큐엘은 그저 나의 음침한 눈빛에 움찔 하는 것으로 사태를 방관 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후후후. 이제부터 아주아주 예뻐해 주마, 시큐엘. 나의 사랑스런 강.아.지.로 말이야.
흐뭇한 내 시선에 두 정령의 어깨가 흠칫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내가 그렇게 속보이는 웃음을 지었던가?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 그토록 나를 괴롭혔던 정령 만들기가 성공한 것도 모자라서 그 태어난 정령들이 이렇게 마음에
드는데 어떻게 표정을 감출 수 있겠냐고.
때문에 나는 그들이 떨던 괴로워하던 웃는 표정을 굳이 감추지 않기로 했다.
" 내가 잡아 먹냐? 왜 겁을 내고 그래. 흠.. 근데 이상하네.. 겨우 너희 두 명 만드는데 하루하고도 꼬박 반나절이나 걸리다니..
이프리트는 금방 만들어내던데 말이야. 내가 모자란 건가? "
나야 성공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쁘지만, 이프리트나 다른 정령왕들에게는 미덥지 못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당장이라도 물의 중,상급 정령들이 대거 필요한 때에 달랑 두 명만 만들어냈으니.
거기다 두 명당 하루 반나절이면, 다른 녀석들을 더 만들어내려면 10명만 만들어도 열흘은 족히 넘는단 소리가 된다.
그런데 세계라는 곳이 그렇게 작은 곳이 아닌데다, 바다도 좁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니, 적어도 몇 백명,
혹은 몇 천명이 필요할지도 모르는데...
' 설마 이 두 명이 아크아돈 전체의 나이아스들을 부릴 수 있다고는 상상 할 수도 없고. '
그렇다면 정령을 만드는 데만 2~3년은 걸린다는 소리?
그것도 한차례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만들어내야만 가능할 것 같다.
이렇게 막막할데가...
정령왕 이라는 것은 정령을 찍어내는 공장이라도 되는 것인가?
운디네와 시큐엘을 보고 정령왕 되기 잘됐다는 감동을 느낀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나는 좌절감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러자 시큐엘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 무슨 말씀 이신지.. 왕께서 부르신 정령들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들은 왕의 명령을 따라 이미 지정된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저희들은 왕의 보필자로서 옆을 지키기 위해 남은 것입니다만..
" 엉? 그게 무슨소리야? 그럼 탄생한 정령들이 너희만이 아니라는 소리야? "
- 왕께서 그렇게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아크아돈이 원하는 수많큼 탄생하여 제약을 받지 말고 지정된 자리로 위치하라고 분명히...
허거걱.. 그러고 보니 내가 이녀석들을 부를때 이상한 목소리로 말한 내용이..
【 나의 명령받아 탄생하는 자의 이름은 운디네, 그리고 그 이상에 선자- 시큐엘이니. 자연이 원하는 그 수많큼 머물지라.
제약을 받지 말고 이동할지라. 】
....였지. 아마..
내가 말하고도 기억을 하지 못하다니.. 정말 그동안 바보가 다 됐나보다.
그럼 난 이미 정령을 모두 만들어 전세계에 고루고루 분포했다는 소리인가?
급한 불은 다 껐다는 뜻?
그저 막막해 보이기만 했던 미래에 드디어 한줄기 빛이 내려 오는 것 같다.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아. 살았다.. 그럼 이제 내가 할 일은 뭐가 남은 거지? "
실생활에 필요한 정보들이야 나중에 차근차근히 배워 가면 되는 거니 그리 급할 건 없다.
정령도 만들었겠다, 자기들이 알아서(?) 전 세계로 이동도 했겠다~ 생각 같아서는 나는 자유인이다~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어쩐지 마음속에 뭔가 자꾸만 걸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던 건지, 내가 뭔가 해야할 것 만 같은 불길한 기분에 사로잡힌 바로 그 시점에 예상치
못했던 방문객이 등장했다.
" 여어~ 지훈! 정령들 모두 잘 분포됐어~ 이프리트도 대단한데? 정말로 일주일 안에 정령을 만들어내게 하다니.... 엉?
이프리트는 어디 갔어? "
" 트로웰....오랜만이네......"
바닥이 갑자기 치솟는다 했더니 여전히 생기발랄한 얼굴로 매력 있게 웃는 트로웰이 튀어나왔다.
과연 , 땅의 정령답게 이동시에도 땅을 이용하는구나..하는 태평한 기분으로 바라보자니 트로웰은 반갑게 다가오다가
한 존재의 부재를 알았는지 인상을 살풋 찡그렸다.
그 한 존재의 부재 란게 바로 이프리트다.
" 뭐야? 이프리트. 설마 그냥 널 내팽개쳐 둔 거야?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이럴 줄 알았다고.
그래서 미네르바의 의견을 그렇게 말렸던 건데. 결국 이프리트한테 맡기더니 이렇게 됐잖아.
차라리 내가 저녁 틈틈히 알려 주는게 더 나았을 뻔했다고. "
어떻게 내 옆에 이프리트가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 모든 상황을 유추해 낼수 있는걸까?
단순히 이프리트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을..너무 정확하게 맞추니까 어쩐지 수상한 기분이 든다.
설마 정말로 독심술을 익힌 건 아니겠지?
" 흐음~ 그래도 어떻게 혼자서 여기까지 잘 했네? 역시 완전히 본능을 잊어 버린 건 아니었구나. 어쨋든 한시름 놨어.
오염된 바다가 급속도로 정화된 건 물론이고, 지하수도 다시 솟아나기 시작했으니까. "
" 아, 그래? "
몰랐다는 듯이 되묻긴 했지만 사실은 나도 알고있었다.
아까부터 부산스러워진 나이아스들의 수다 소리가 아크아돈의 변화를 전부 알려주고 있던 것이다.
아무래도 물의 영역에서 나이아스들의 대화가 들리는 것은 내가 아크아돈의 모든 영역을 살펴보기 편하게 하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얼마나 위대한 혜택이냔 말이다. 정령왕 이라는 거.. 너무 대단한 것 같어..
" 헤에~ 뭐야, 이제 나이아스들이 떠드는 소리도 들리는 거야? 몇 가지만 제하면 완전히 엘퀴네스로 자각한 것 같으네? "
" 커헉.. 정말로 독심술이 있는 거냐 , 트로웰? 어떻게 알았어? "
뜨악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트로웰은 생긋 웃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는데 곧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듯이 말하는
트로웰의 목소리가 들렸다.
" 뭐라고 해야하나. 굳이 들린 다기보다는.. 유추해내는 능력이 빠르다고 해야 할거야. 눈치가 좋다고 할까나.?
그렇다고 아주 안 들리는 것도 아니고, 설명하기 복잡하네."
" 허억.. 정말로 들려? "
" 음, 혜안이라고 하나 이런걸? 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약간의 힌트만 있으면 마치 경험한 듯이 실감할 수 있어.
더 나아가 그 상대방의 과거부터 이어질 미래까지 넘볼 수도 있지.
거기에 내 경우는 타인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능력까지 첨가된 거야. 대대로 트로웰들에게 내려진 특별한 능력이지.
정령왕들은 저마다 특유의 능력이 하나씩 있거든. "
허걱.. 그럼 내가 생각하는 소리가 전부 들린단 건가?
처음 트로웰과 대면했을 때 그를 보면서 평가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내 안색은 자동으로 하얗게 질렸다.
무성이긴 하지만, 어쨋든 남성체인 트로웰을 보며 섹시하게 생겼다느니, 남자 건 여자 건 홀리지 못할 것이 없겠다느니,
나부터 조심 하자느니.. 얼마나 주책을 부렸었던가!
그걸 트로웰은 다 듣고 있었단 말이잖아!!!
" 어어? 뭐야, 그 표정은? 아주 파랗게 질렸네? 괜찮아~ 괜찮아~ 아주 다 들리는 건 아니라니까?
네가 남한테 알려주기 싫다고 생각하는 감정은 읽히지 않아.
같은 정령왕급 이라서 혜안이 통하는데도 한계가 있거든. 인간이라면 얘기가 다르지만. "
....참으로 지옥 끝에서 구조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저절로 터져 나오는 안도의 한숨을 들이키며 이마에 삐질 거리는 식은땀을 닦았다.
설마, 트로웰. 일부러 이런 반응을 즐기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여유 만만 한 듯 웃고있는 녀석을 보니 아주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앞으로 이 녀석 앞에 있을 때는 속으로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겠군.
" 그..그런데.. 정령왕들마다 한가지씩 특유의 능력이 있다면, 미네르바나 이프리트는 뭔데? "
무안해 하는 것 자체가 속으로 찔리는 생각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최대한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원래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았던, 나머지 정령왕들의 능력도 알아볼 생각을 한 것이다.
내 질문에 트로웰은 기다렸다는 듯이 눈에 빛까지 뿜어가면서 대답했다.
" 미네르바는 최대의 바람을 이용한 강력한 실드를 생성할 수 있어. 그 무엇.
심지어 신계의 상급 신들까지도 부술 수 없을 만큼 강력하지.
그리고 이프리트는 최상의 공격력을 자랑하는 불의검을 소환 할 수 있어. 그 검에 닿은 어떤 것도 형태를 제대로 유지할 수 없을걸?
그 둘이 싸워보면 볼만 할텐데. 애석하게도 한번도 본적이 없으니 결과가 어찌 되는진 알수 없지.
유추하기로는 '주변의 피해가 막대하다 '...정도? "
" 하, 그..그래? "
그러나 이러한 공격과 방어에 대한 최고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정령왕들 끼리는 서로의 힘에 별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별 볼일이 없다고 한다.
온전히 그 힘이 가해지는 경우는 그 상대가 정령이 아닌 다른 존재일 경우 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신계의 신들이 정령계로 일부러 찾아와 시비 걸지 않는 이상, 그들과 맞붙을 일도 없는 데다 인간계에서는
정령왕 본래의 힘의 2/3 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이래저래 본래의 힘이 드러날 일이 거의 없는 능력이라는 소리다.
그래서인지 어느 한쪽의 극에 달한 것이 아닌, 공격과 방어 모두를 일반적으로 무난히 사용할 수 있는
물의 정령왕-엘퀴네스가 가장 강한 정령왕으로 알려져 있다고 그랬다.
그 얘길 듣는 순간 어찌나 황당하고 민망스럽던지..
남들 다 하는 정령 만들기도 이제 겨우 성공해서 기뻐하는 내가 가장 강한 정령왕이라니 .. 웃기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이프리트도 그랬다. 4대 정령왕중 최고의 가드와 공격을 자랑하는 엘퀴네스의 실력이 왜 이따윈 거냐고... 흐흐흐...
" 그렇게 의기소침해할 필요 없어. 지훈의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될 것들이니까..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벌써 한계의 일부분을 깨트렸잖아? 정령도 만들었고 말이야. 그러니까 너무 조급해 하지마. "
이런, 나도 모르게 너무 조급해 했던 모양이다.
이제 정령을 만들기에 성공했으니, 나머지는 천천히 배워 가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게 아니었던 거야. 음..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는 트로웰의 모습에 나는 적잖은 감동과 위안을 얻었다.
달달볶는 이프리트에 비하면 이 얼마나 위대하고 따스한 천사의 모습인가 말이다!
트로웰! 내가 네 팬클럽 회원 1호가 되 주마!!
" 아참. 그리고 또 하나! 엘퀴네스가 정령왕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야.
엘퀴네스가 가진 고유의 능력 도 만만치 않지. "
" 내 능력? "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정령계의 모든 정보를 나한테 알려주기로 작정을 한 모양인지 트로웰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러고 보니 미네르바, 트로웰, 이프리트의 능력만 들을 생각만 하고 정작 내 능력을 알아볼 생각은 안 했던 것이다.
호기심에 눈빛을 반짝이는 나를 보며 트로웰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물의 정령왕 고유의 능력은 치료술이야. 그것도 목숨만 붙어있다면 언제든지 100% 원상복귀 시킬 수 있는 완벽한 회복능력이지.
이건 타인이 아닌 본인에게도 시전 할 수 있기 때문에 물의 정령왕을 상대로 장기전은 거의 불가능해.
체력에 상당히 자신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단기전도 도박이지.
인간계에서야 좀 약해지긴 하겠지만..그래도 여느 고위 신관들보다는 훨씬 뛰어날걸? "
" 오오....."
상처를 회복시킬 수 있다고? 그게 인간이야?...아.참..나 인간 아니지. 흠흠.. 아무튼.
하지만 이런 대단한 능력 역시 정령들에게는 그다지 필요할 일이 없다고 한다.
우선 정령계 자체가 워낙에 평화로운 곳이라 정령들이 다칠 일이 없다는 것이 그렇고,
인간계에서는 실체가 아닌 정신체로서 자연에 동화되어있는 상태 기 때문에, 정령계의 본체가 죽지 않는 한,
외부의 힘을 받아도 다치거나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엘퀴네스의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고칠 정령이 없는 데야 쓸모가 없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닌가.
환자 없는 의사의 신세가 처량하듯. 엘퀴네스의 능력도 그런 범주였던 것이다.
사실, 고만고만한(?) 정령왕들 중에서 누가 더 강하다느니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엘퀴네스가 그런 식으로 알려졌는지 모르겠다는 내 말에 트로웰은 키득거리고 웃으면서 그 일의 연유를 설명해 주었다.
" 우리들한테야 필요 없는 능력이지만 인간들은 아니잖아? 어떻게 하다가 보니 네 능력이 우연하게 인간들에게 알려졌는데,
그걸 듣고 인간들이 모여서 저들끼리 정령왕의 등급을 매겨버린 모양이야.
녀석들이 그렇게 열광하기 전까진 엘퀴네스도 그 능력의 쓸모를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말이지.
하기사. 인간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가장 강한 정령왕은 엘퀴네스니까. "
공격과 방어가 무난히 되고, 거기다 다치면 회복까지 자유자재로 되니.. 솔직히 무적이긴 했다. 쩝.
나로서는 능력이 있어도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니 도무지 실감이 들지 않지만.
그래서인지 지금 트로웰이 설명하는 엘퀴네스라는 존재와 나라는 존재가 전혀 연관이 없는 별개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이것도 내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 일까나? ..
" 아, 근데 트로웰. 한가지 물어볼게 있는데.. "
" 뭔데? "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질문을 건넬 의사를 보이자 트로웰은 너무 반갑다는 듯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질문 받는 게 저렇게 좋나? 아니면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에 보람을 느끼는 걸지도.
그렇다면 트로웰은 딱~ 학교 선생님 체질이로군..
10대 후반의 매력적인 외모에 섹시한 눈웃음을 가진 선생님이라..
생각만 해도 실실 웃음이 새어져 나왔다.
'아마 그 학교 학생들은 트로웰만 보러 등교할거야.. '
" 에이~ 그 정돈 아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러 학교를 가야지~ 선생을 보러 학교를 오면 안되는거 아니야? "
".....쿠..쿨럭.. 부탁이니 내 마음 읽지 말아 줘......"
" 하하~ 뭘 그렇게 쑥스러워해~ 우리사이에."
난 바보인 거야. 어쩌자고 트로웰이 마음을 읽는다 는걸 알고있으면서도 딴 생각에 빠져들었단 말인가.
사실 트로웰도 내 마음을 읽어볼 생각은 없었지만,
내가 질문은 안하고 딴 생각에 빠져 실실거리고 있으니까 궁금해서 알아본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내 생각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트로웰의 혜안이란 능력은, 타인의 감정.
더 나아가 그의 과거와 미래까지 내다볼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이지만 본인이 원치 않으면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고,
정령왕을 상대로는 거의 통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그래서 트로웰은 비교적 능력을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그리고 읽게 된 경우에는 지금처럼 아~주 솔직하게 타인이 속으로 생각하던 내용에 대한 대답을 해버리는 것이다.
참으로 적응이 안되긴 하지만.. 듣고 나서 모른 척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는 나였다.
" 물어볼게 뭔데? "
" 아, 그게 말이지. 정령을 만들었을 때.. 내 목소리가 이상하게 달라진 것 같아서 말이야.
환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선명하고, 그렇다고 그냥 넘기려니 자꾸 마음에 걸려. "
" 흐음? 그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는데..진짜 환청 아니야? 목소리가 어떻게 변했는데? "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트로웰로 인해 오히려 내가 더 당황해 하고 말았다.
어라? 목소리가 변하는 건 정령을 만들 때 일어나는 현상중의 하나라고 생각해버렸는데..그게 아니란 말이야?
나 설마 엄청 중요한 일을 무심하게 넘겨버린 게 아닐까?
의문 섞인 트로웰의 시선을 보자니 그럴 확률이 80%는 되어 보인다. 크흑..
나란 놈이 워낙에 눈치 없고 둔감한 녀석인줄은 알고있었지만 이렇게 한심스러울 줄이야.
나는 밀려오는 자괴감에 한숨을 내쉬면서 재촉하는 트로웰의 시선을 못 이겨 떠듬떠듬 대답했다.
" 변성기가 덜 지난 남자의 목소리랄까? 왜 있잖아, 여자애처럼 가늘지도 않고, 남자처럼 걸걸하지도 않은 중성적인 목소리.
내 목소리는 약간 허스키하고 굵은 편인데 그런 목소리가 나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
어라?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
나를 보는 트로웰의 시선이 미묘하게 굳어 있는 것 같다.
사태가 생각보다 더 심각한 것일까?
나도 모르게 바짝 긴장해서 바라보자니 트로웰은 한참이고 그런 나를 응시하다가 이윽고 뜬금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 하아...... 지훈. 네 목소리가 어떻다고? "
" 에? 굵고 허스키한 편이라고 했잖아.. 듣고도 몰라? "
어째 옆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운디네와 시큐엘의 표정까지 이상하게 변하는 것 같다.
왜들 그런 다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시선으로 맞받아 치자 트로웰의 한숨소리가 더욱 깊어졌다.
" 에구구..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
" 그게 무슨소 리야? "
" 무슨 소리긴~ 아직도 인간의 틀을 완전히 벗지 못했다는 거지. 지훈 네 목소리가 뭐가 굵고 허스키 하다는 거야?
아주아주 듣기 좋은 소년의 미성이라구.
정령은 인간과 달리 의지로 파장을 전달하는 형식이니까 스스로가 목소리가 달라졌음을 눈치챌 겨를이 없었겠지."
" 허걱.. 그럼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이 목소리는 실제가 아니라는 거야? "
" 그래, 인간일 때의 목소리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에 너에겐 그렇게 들린 것 뿐이야.
그나마 나쁜 결과는 아닌걸. 우연히 나마 '그것'을 사용하게 되었으니 "
" 그것? "
의도적으로 감추려는 듯한 어휘선택에 내가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도대체 언제 나타났던 건지 예상치 못하게 등장한 방문자가 나의 의문을 자연스럽게 받았다.
" '언령' 을 말하는 거겠지. "
" 이프리트!! "
" 야아~! 너어. 왜 이제야 나타난 거야, 지훈의 일은 너한테 맡겼었잖아! "
여느 때와 같이 도도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프리트는 나의 놀란 외침이나
트로웰의 면박 어린 추궁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축되는 기색 없이 당당하게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내 옆에서 새로운 정령왕의 등장으로 인해 눈에 띄게 움찔거리고있는 두 명의 정령, 운디네와 시큐엘을
탐색하듯이 빤히 쳐다보는 것이다.
아니, 가뜩이나 정령왕들 때문에 기죽어있는 애들을 그렇게 쳐다보면 어쩌겠다는 건지..
그나마 시큐엘은 담담한 척 애를 쓰고 있었지만 운디네의 표정은 울기 직전의 꼬마 여자애와 똑같아서 불쌍한 기분이 들었다.
" 그만 노려봐, 애들이 무서워하잖아. "
" 노려보긴 누가 노려봤다는 거야? "
그럼 그렇게 치켜 뜬눈으로 바라 보는게 노려 보는게 아니라면 뭐라는 건데?
기가 막혀 할말을 못하고 있자 이프리트는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놈의 정령왕은 어째 갈수록 하는 짓이 얄미워진 다냐.
며칠만에 보는 거니 반갑기도 해야 하련만, 오히려 불쾌한 기분만 드는 것을 보니 이프리트와 나는 틀림없는 악연인 거다.
여기서 이대로 당할 수 없단 생각으로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 누구 긴 누구야, 이프리트 너지. 얘들한테 무슨 감정 있어? 봐~ 떨고있잖아. "
" 흥. 시끄러워. 정령왕이 3명이나 모였는데 정령들이 기를 못 펴는 건 당연한 거지."
" 뭐..시..시끄러워? 네가 쳐다보면 서부터 무서워하기 시작했단 말이야. 즉, 원인은 너라고! "
" 뭬야? 그래서 어쩌라고? 지금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야? "
그 말을 마침과 동시에 이프리트의 전신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뻘건 불길은 이프리트의 노려보는 눈빛과 어우러져 무척이나 공격적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때 나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였다.
그러니 평소라면 찍소리도 못하고 움츠렸을 무시무시한 장면을 보고도 코웃음을 친채 정면승부를 걸었던 것이다.
" 하! 해보자면 못할 줄 알아? "
당당하게 맞받아 친 다음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한쪽 손에 물의 기운을 끌어 모았다.
내 손을 중심으로 금새 둥그렇게 형성된 물덩이는 그냥 보기엔 별거 아니다 싶었지만 자세히 보면 끊임없는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만약 지금 내 상대가 정령왕이 아닌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이 한방으로 저세상 구경을 하러 보내줄 수도 있을 만큼의 강력한 힘이었다.
그리고 마음만 먹는다면 나는 이 물의 영역 전부를 이용해서 이프리트를 공격할 수도 있었다.
싸움이라고 하면 육탄전밖에 떠오르지 않는 내가 이런 식으로 물을 움직여 공격을 하려하다니.. 정말 장족의 발전이지 않은가.
때마침 옆에서 트로웰이 중얼거리지만 않았더라면 물의 영역은 나와 이프리트의 싸움으로 초토화 됐을 것이다. 틀림없이!
" 흠.. 역시 피(?)는 못속이는 건가.. 어째 전대 엘퀴네스를 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
" 엉?..."
" 이딴 녀석하고 그를 비교하지마!! "
첫 번째의 어리버리한 대답은 나고, 두 번째의 앙칼진 대답이 이프리트였다.
거의 동시에 외쳤지만, 내 대답(?)이 상대적으로 짧은 바람에 본의 아니게 이프리트의 뒷말은 너무도
선명하게 물의 영역을 혼자 메아리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처절한 메아리가 끝나는 순간, 이프리트의 분홍색 얼굴은 트로웰보다 더 검은 흙빛으로 변해버렸고 반대로
나의 얼굴엔 회심의 미소가 피어올랐던 것이다.
후.후.후. 이프리트? 너. 딱.걸.렸.어.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있었지만 본인이 드러내질 않으니 속마음을 알 길이 없어 설마 하고 있었는데..
이건 완전히 제 입으로 전대 엘퀴네스한테 마음 있다고 광고한 꼴이 아닌가?
이미 승기는 내 앞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약간 비웃는 것 같이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딱딱하게 굳어진 이프리트를 바라보았다.
" 호오~ 이프리트? 방금 그 말 어째 상~당히 기분이 나쁘다? "
" 윽...그..그게 아니라.. "
" 나.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그' 전대 엘퀴네스가 그렇게 대단했던 모양이지? 사이가 안좋았다더니 그렇지도 않은 가봐? "
후후후. 점점 더 당황해 하는 이프리트를 보라지.
그동안 알게 모르게 받았던 온갖 스트레스와 설움들이 한꺼번에 해소되는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진 내가 씨익 웃는 모습을 보고 트로웰이 '역시 괜히 엘퀴네스가 된 게 아니었어..'
라고 중얼거리긴 했지만 중요한 것이 아니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어쨋든 내 말의 오묘함을 깨달은 이프리트는 이젠 더할 수 도 없을 만큼 새빨개진 얼굴로 바락바락 악을 쓰기 시작했다.
" 그게 아니야! 그냥 말이 헛 나온 거야. 네 실력이 전의 엘퀴네스보다 아직 모자란 건 사실이잖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게 아니라구!"
" 강한 부정은 긍정이란 말 못 들어 보셨나? 이거 왜이래~~ 그리고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했다는 건데? "
" 윽..그러니까..그게.."
" 엉? 왜 강한 부정이 긍정이 돼? "
"........."
한창 잘 나가고 있는데 옆에서 트로웰이 초를 쳤다.
크흑. 질문을 하려면 나중에 하란 말이야. 왜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결국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한순간 당황한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고,
이프리트는 이런 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반격에 들어갔다.
" 그래~ 나도 그게 궁금하네. 왜 강한 부정이 긍정이 된다는 거야?
하여튼~ 인간세상에서 몇년 살다왔다더니 완전히 이상한 사상에 절어들어 있다니까.
그러니 그런 말도 안돼는 추측에만 빠져서 본업에 충실하지 못하는 거 아냐~ "
커헉. 저 정령왕이 또 생 정령 잡네?
내가 언제 말도 안돼는 추측에 빠져서 본업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거냐?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너한테 뭔가 꿀리는 게 있다는 생각은 안드는 거야?
지금 이프리트는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게 틀림없다. 유감스럽지만 약점을 잡힌 것은 이 몸이 아니라 바로 너라고!
" 이게 지금 나를 물로 보나~ 너 자꾸 내 우중충한 과거 들쑤셔서 복장을 뒤집는데 말이야!
이번엔 상황이 다르단 걸 모르겠냐? 그래, 너 말 잘했어.
도대체 내가 이상한 사상에 절어서 했다는 그 추측이 뭔데? 엉? 말해봐, 나도 궁금하네. 그게 대체 뭐냐고! "
" 으..으윽... "
" 어라? 지훈, 너 물 맞잖아? "
"....크흑!! 트로웰!!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
" 내가 뭘... "
가만히만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데..
트로웰은 한술 더 떠서 말하는 족족 태클을 걸고 있으니 내가 뒤집어 지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원망 섞인 시선으로 째려보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받아 치니 더욱 미칠 노릇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도 그의 말을 꼬투리 잡아 나에게 반격할 줄 알았던 이프리트는 꾸욱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후훗. 나의 승리인가?
그 때였다.
".......ㅇ.. 싫어. "
" 뭐? "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바람에 표정이 가려진 이프리트가 떠듬떠듬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뱉았다.
어쩐지 위험스러운 분위기랄까.
부들부들 떨고있는 어깨며, 아까부터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한 불의 아지랑이들이 주변 공기를 급격하게 살벌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내가 너무 이프리트를 궁지로 몰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급히 숨을 들이켰다.
' 젠장. 망했다.. 그냥 가볍게 놀리려고 했던 건데. '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을 또 건드리고 말았다. 나는 대체 왜 이렇게 생각 없이 행동 하는거야!
이번엔 아까 처럼 장난스러운(?) 대결 분위기 정도로 끝날것 같지 않다.
분노로 타오르는 이프리트의 기운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던 것이다.
' 이젠 끝장이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안됐는데 그냥 이렇게 죽는 건가~! '
...그러나 내 염려와는 다르게 이프리트는 그 상태로 한참이나 가만히 서있기만 할뿐, 다른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숙였던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프리트가 내 영역을 그의 힘으로 초토화 시키는것 만큼이나 나에게는 커다란 복수와 마찬가지였다.
나를 노려보는 이프리트의 두 눈엔 맑은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있었다.
" 커헉, 이..이프리트? "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듯. 미인의 눈물은 때론 독사의 송곳니보다 더욱 처절한 맹독이 되어 가슴을 헤집어 놓는다.
나 역시 그러한 남자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지라, 이프리트의 눈물은 너무나도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할말을 잃고 굳어져 버린 나를 보며 이프리트는 앙 다문 입술을 열었다.
" 네가 정말 싫어. "
"..........."
" 돌아갈 거야, 다시는 너 같은 거 보지 않을 거야. "
".........."
그게 끝이었다.
더 무수한 저주나 폭언을 퍼부은 것도. 폭력을 행사하거나 욕설이 난무했던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딱 두 마디만 또박또박 말한 이프리트는,
내가 아차 할 기회도 없이 그대로 불길이 되어 영역 안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건.. 여지껏 이프리트가 나에게 했던 그 엄청난 구박이나 험한 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나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 나 같은 놈은 죽어야 돼에~~!!'
...만약, 트로웰이 여전히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중얼거리지만 않았다면 나는 내 자신을 책망하고 또 책망하며
후회의 난무로 남은 여생(?)을 마쳐야 했을지도 모른다.
" 헤에. 이프리트 삐졌네. 저 모습도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굉장히 신선할걸?
본인도 아마 감회가 새로울 거야. 레파토리가 하나도 안 변했으니까. "
" ........뭐? "
" 전 엘퀴네스와는 매일 생활이 이런 것이었거든. 싸우고 울고 삐지고.
그때는 엘퀴네스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어서 항상 이프리트가 졌었어."
" 하하하....."
매일 이런 생활이었다고? 그리고 언제나 울고 나서 삐졌다고? 오.랜.만.에. 봐서 신선하고..
본인의 감회도 새로울 거라 이거지.. 하..하하.. 이런 썩을~~!!!
' 또 당했다!!!'
애초부터 이프리트를 여자라는 관점으로 대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까짓 좀 울렸다고 가슴이 미어질 건 뭐란 말인가!! 괜시리 머뭇거리고 죄책감 느꼈다가 오히려 나만 바보 됐잖아!!
어떤일이든 진실을 알게되면 그에 해당하는 대가를 치뤄야 하나보다.
더 이상 어찌해 볼 수도 없을 정도의 재기불능이 되어 허우적거리는 나를 보며 트로웰은 쿡 하고 짧게 웃었다.
" 지훈이 너무 마음이 좋아서 그런 거니까 괜찮아. 오히려 이프리트가 문제지. 근데 왜 화가 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네. "
" ...보고도 몰라? 이프리트가 전 엘퀴네스를 좋아하잖아. 그걸 내가 자꾸 추궁하니까 열 받은 거지. "
나한테 태클 걸 생각만 하느라고 정작 이프리트와 나 사이에 오고간 대화는 못들은 모양이다.
근데 이걸 이렇게 그냥 말해버려도 되나 몰라..
이프리트가 비겁한 수(남자에게 눈물공격은 비겁하다!)까지 써가면서 은폐하려고 했던 진실인데.
하긴, 나 정도의 둔치가 눈치챌 정도면 트로웰이나 미네르바는 이미 훤히 꽤고 있던 사실일 테니 별 상관 없으 려나?
하지만 이런 내 생각과는 다르게 트로웰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뜨악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 이프리트가 엘퀴네스를 좋아하다니? 둘이 만나기만 하면 싸웠는데? "
"....그거야 이프리트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 연기한 거겠지~
아까도 전엘퀴네스가 나같은 거랑 비교 당한다고 엄청 화내는 거 못 봤어? 하여간 유치하다니까. "
" 에에? 하지만 이프리트는 맨날 엘퀴네스가 싫다고 노래를 불렀는걸? "
" 그러니까~ 그게 바로 좋아하는걸 숨기기 위해서 한 연극이라니까? "
" 말도안돼. 왜 좋아하는데 일부러 싫은척을 한다는 거야? 지훈이 뭔가 잘못 알고있는 거 아닐까?"
"....그..글쎄? "
다른 녀석이면 몰라도 타인의 감정을 읽을 줄 아는 트로웰이 이렇게 말한다면 생각이 달라진다.
때문에 나는 고집스럽게 내 주장을 펼치지 못하고 애매모호 하게 끝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게 아니라면, 이프리트의 아까 그 행동은 도대체 무슨 이유란 말인가.
설마 나한테 말발로 밀렸다는 것에 대한 울분?
그거야 자존심이 상하긴 했겠지만,
애초에 그것도 이프리트가 전 엘퀴네스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면 반박을 못하지도 않았을 거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질질 울면서 삐져있는 것은 이프리트가 아닌 나여야 한다는 소리인데...
' 그렇다고 트로웰의 능력을 무시할 수도 없고.. 으 정말 골치 아프네..'
트로웰의 말을 듣자니 의심 가는 구석이 한 두 군데가 아니고, 그렇다고 내 직감을 믿자니 너무 신뢰도가 떨어진다.
남의 연애사 라는 것이 복잡한 것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골치가 아플 줄이야.
한창 끙끙거리고 있는데 트로웰이 지나가듯 한마디 이었다.
" 어쨋든 이프리트와 화해할 생각이라면 네가 먼저 찾아가는 게 좋을 거야. 한번 삐지면 100년간 상종 안하려 드니까.
전 엘퀴네스와는 500년 가까이 말도 안한 적도 있었어. "
"........."
년도가 적응이 안 된다.. 년도가...
5일도 아니고.. 5년도 아니고.. 500년? 커헉..
1만년을 넘게 사는 종족들이니 500년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100년을 기한으로 바라보는 인간의 입장에 익숙해져 있는 나에게는 정말 경악이 저절로 흘러나올 만큼의 긴 시간이었다.
그러자 막상 단순히 삐진 것 이라고 생각했던 이프리트의 태도도 다시금 심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 농담이 아니야, 100년이나 이프리트와 안면몰수하고 지내라고?
아무리 못마땅한 사이라지만 친구들끼리 어떻게 그런 험악한 정령관계(?)를 만들 수 있겠냐고..
그래! 사과하자. 어쨋든 남의 연애사를 빌미로 놀리려고 한건 내 잘못이니까. '
그래서 나는 당장이라도 이프리트에게 찾아가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역시 현실은 만만치 않은 것이었으니..
" 어? 왜 그러고 있어? 이프리트한테 사과하러 가는 거 아니었어? "
그 자리에서 굳어져 도무지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보며 트로웰이 의아하게 물었다.
이프리트한테 간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떡 하니 알고있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내 마음을 읽은 것이겠지만
따지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그것보다 당장 급한 문제가 눈앞을 왔다갔다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최대한 덤덤해 보이는 표정을 유지하며 트로웰을 돌아보았다.
지금 이순간, 신이 나에게 희망을 내려줬다면 그것은 바로 트로웰이 내 옆에 있다는 것이었다.
".......저기 트로웰... "
" 응 ? "
" 텔레포트는 어떻게 하는 거지?...... "
"............."
이후로 트로웰은 장장 1시간을 넘도록 물의 영역 전체를 굴러다니며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운디네와 시큐엘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위엄스럽게 있었지만 얼굴에 부르르 떨리는 경련까지는 막지 못하고 있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정령왕이었다.
미친 듯이-정말 미쳤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트로웰은 오도 방정을 떨며 웃어댔다.
- 웃어대던 트로웰이 진정한 것은 물의 영역주위로 스산한 밤의 기운이 짙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장장 2시간이나 쉬지도 않고 웃어대던 것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던 나는 그가 진정할 기미를 보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이러다 날 새겠거니 하고 거의 체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 아무리 재미있는 상황이 와도 몇 분 웃고 나면 다시 시시해 지고 말텐데.. 트로웰은 정말 징글맞게 웃었다.
꼭 웃음자루를 입안에 넣어놓고 다니는 녀석처럼 말이다.
오죽하면 처음엔 그와 같이 웃음을 참고있던 운디네와 시큐엘까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겠는가.
진정이 되고 나서도 트로웰은 한동안 계속 키득거려서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하아. 정말이지.. 예쁘니까 봐준다, 트로웰. 네 외모를 평생의 복으로 알고 살거라.
" 푸훕.. 알았어, 지훈. 미안해. 삐지지마. 내가 원래 한번 웃으면 좀 정신을 못 차리거든.. 키득.. "
또 내 맘을 멋대로 읽은 거냐?..... 그나마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하니 다행 이다만.
불쾌하다는 듯이 바라보긴 했지만 그다지 트로웰이 얄미운 것은 아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저렇게 오랫동안 가슴속을 뻥 뚫리게 만들만큼 크게 웃을 수 있는 트로웰의 풍성한 감성이 부러웠다.
거기다 어른스러운 미네르바나 이프리트의 외모와는 달리,
트로웰은 10대 중반 정도의 아직 어린 소년의 모습에 더 가까웠기 때문에 더욱 그 모습이 순수하게 보였던 것이다.
물론, 절대적인 이유로는 그의 뛰어난 외모 탓이라 하겠다. 흐흠..원래 예쁘면 뭐든지 용서가 되는 법이다.
이건 절대 변하지 않을 만고불변의 진리 중에서도 베스트 상위권을 차지한다고 봐야 옳다.
조금 시간이 더 흐른 뒤, 완전히 진정된 트로웰은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너무 오랫동안 그의 웃는 모습만 보느라 나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진지하게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처음엔 그의 뜬금 없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한참을 버벅 거려야만 했다.
" '언령'이야. "
"......엉? "
갑자기 난데없는 왠 '언령'? '언령'이 뭐시긴데?
생소한 단어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트로웰은 처음부터 내가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텔레포트 하는 방법 말이야. 네가 물어봤잖아 어떻게 하는 거냐고. '언령'을 사용해라! 그게 내 대답이야. "
" 아~ 그거.. 근데 '언령'이 뭔데? "
처음 듣는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낯익은 기분이 든다. 언제 들은 적이 있던 건가? 누구한테?
잠시기억을 되짚어 본 난 곧 어렵지 않게 낯익은 기억의 출처를 발견해낼 수 있었다.
' 아, 그러고 보니.. 이프리트가 나타나자마자 했던 말이 그거였지, '언령'이라고..'
트로웰은 내가 우연히 라도 '그것'을 사용하게 되어 나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그것'? 하고 되물었던 바로 그때 이프리트가 나타나 '언령'이라고 답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바로 나와 이프리트의 실갱이(?)가 벌어지는 바람에 대화 자체가 무산되어 버렸었다.
하필이면 그때 나타나서 복장을 뒤집어 놓았담. 정말이지 이프리트는 여러 가지로 내 정령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다.
또 다시 그에 대한 불만의 감정이 슬며시 고개를 들이미려는데 그보다 먼저 트로웰의 설명이 이어졌다.
덕분에 이프리트에 대한 반감은 기세도 펼치지 못하고 조용히 한쪽 구석에 처박히고야 말았다.
" '언령'이란건 정령왕들이 사용하는 마법을 말하는 거야. 드래곤에게 용언이 있는 것처럼 정령왕 고유만의 힘이라고나 할까?
마나를 배합하고 원하는 위치를 지정해야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이나 여타 다른 종족들과는 달리,
드래곤과 정령왕은 자신들의 힘을 끌어낸 '말'을 내뱉는 것으로 마법을 부릴 수 있어.
효과도 일반 마법에 비할 바가 못돼."
" 드..드래곤? 용언?? 마나? "
".....못 알아듣는구나, 어쩔 수 없지. 그냥 그런 게 있다고만 알아둬.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다는 '언령' 이라는 거고 , 넌 그 '언령'을 사용할 수 있으며, 또한 이미 사용했다는 거야. "
" 엥? 내가 언제? "
트로웰은 이프리트가 나타나기 직전까지 하던 대화에서도 내가 '그것'-언령-을 사용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도무지 언령 이란 것을 사용한 기억이 없는 것이다.
설마 이 정령왕의 본능이라는 놈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것(?)을 습득해 버린 것인가?
속으로 맹렬히 머리를 굴렸지만 막상 떠오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 어떤 얘기를 하다가 그 말이 나왔더라? 아, 그래.
내 목소리가 이상하게 변했다고 트로웰한테 말하니까, 아직도 갈 길이 멀다나 어쨌다나 하더니 그래도 '그것'을 사용하게 되어
나쁘진 않다고 했었지.
흐음.. 혹시 목소리가 변했다는 걸 내가 인식 했다는게 언령 이란 것과 관계가 있는 건가?
아, 그래.. 내가 목소리가 변했다 는걸 알았을 때가.. 정령을 만들 때였지.. 헉!! 그럼 정령을 만든 게 설마!! '
" 그래, 그게 바로 언령을 사용한 거야. 말을 내뱉음으로서 정령을 탄생시켰지?
그것도 한개체가 아닌 다수를 대량으로 탄생시킬 수 있는 건 언령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하지.
그것 하나만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도 정령왕 으로서의 모든 행동 가짐을 깨우쳤다고 봐도 될 거야, 소감이 어때? "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하는 트로웰의 말에 나는 입을 어버버 거리며 할말을 잇지 못했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말을 그냥 내뱉었던 것뿐인데.. 그게 언령이라는 마법이었다고?
내가 그렇게 운이 좋은 놈이었던가? 도무지 믿기질 않는다.
전에 정령을 만들었던 방식은 이미 내 머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나는 이제 얼마든지 다시 정령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건 한마디로, 내가 언령을 언제든지 구사해 낼 수 있다는 소리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 믿기지 않는 행운(?)에 감동하고 있는 나를 보는 트로웰의 표정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를 보는 형(!)마냥
자랑스러움이 가득 담긴 뿌듯한 모습이었다.
전생의 가족으로부터는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기특하단 시선에 괜시리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트로웰은 쑥스러워하는 나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언령이란 사용할수록 주문의 길이가 짧아지고 숙련된 단계에
이르러서는 속으로만 생각해도 시전 될 수 있으니 열심히 연습 하라고 충고해주었다.
원래라면 정령왕은 일일이 연습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언령을 마음껏 다룰 수 있지만,
나는 특이케이스이기 때문에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 아참, 그러고 보니 이런 얘기를 하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뭐, 어쩔 수 없지.
우선은 물의 상급정령들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
" 엉? 왜? 무슨 문제라도 있었어? "
" 아니, 그게 말이야~ 사실은 지금부터는 네가 직접 인간 세상에 나가서 비를 불러야 했거든.
자연이 너무 망가져 있어서 시큐엘들 만으로는 단기간에 회복시키기가 무리라서 말이야.
하지만 뭐, 지금은 이프리트의 일도 있고 하니 그냥 넘어 가주지. 나중에 하자."
그렇게 말한 트로웰은 마치 수업을 땡땡이치는 친구를 눈감아 주는 녀석처럼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미네르바였다면 어림도 없었을 테니 자신에게 고마워 해야 한다나?
내가 정령을 만들고 나서도 뭔가를 해야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인 모양이다.
그후 트로웰은 앞으로의 정령생활에 필요한 자잘한 정보와 텔레포트를 하는 언령의 방법 등을 가르쳐 주곤 이프리트와
'잘해 보라'면서 땅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뭐랄까.. 어쩐지 코끝이 찡하면서 감동이 둥실 거리며 밀려오는 것이..
낯선 세계, 낯선 환경에서 불안감만 가득했던 내가 처음으로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드디어 안심이 되는, 믿을 수 있는 존재를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런 내 기분이 정령들에게도 그대로 전달이 되는 건지 내 옆을 지키고 있던 운디네와 시큐엘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자아..그럼 이제 이프리트와의 면담을 시작해 볼까나?
나는 가벼워진 기분으로 이프리트에게 가기 위한 언령의 주문을 외웠다.
【 이동 】
엘퀴네스의 장-5. 이프리트
정령계의 구조는 동서남북으로 나뉘어진 커다란 성 4개와 그 앞에 펼쳐져 서로를 연결하고 있는 무한한 정원이라 보는 게 옳았다.
단지 그 성이란 것이 바깥의 정원에서 바라볼 때만 '아, 이게 성이었구나' 하고 납득하게 만드는 건물로 보인다는 것이지,
안으로 들어가면 각 고유의 정령왕들의 특성을 나타내는 끝없는 공간의 확장에 불과할 뿐이다.
이를테면, 엘퀴네스의 성으로 들어갔을 경우, 문을 연 순간 보이는 것은 여느 성의 구조와 같이 넓게 이어지는 복도라던가,
수십 개의 방문 또는 이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따위가 아니라 곧바로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온 듯한 광활한 물결의 중심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정령왕들의 사정도 마찬가지. 참으로 가구의 배치나 인테리어 따위는 과감히 무시한,
실속만을 중시하는 엄청난 실용주의적인 공간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가 없었다.
'성'이라 불리는 각 정령왕들의 고유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는 하급을 제외한 각 속성의 정령들이다.
본래라면 정령왕의 허락이 있을 경우엔 하급도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하급의 정령들이 워낙에 정령왕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강하기 때문에 감히 성으로 들어갈 엄두를 못내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하급정령들은 영역 밖의 정원에서 각 정령왕들의 기운을 강하게 느끼는 것 만으로 만족하며 지내는데,
이 때문에 정령왕들이 하급 정령을 보기 위해 일부러 그 몸을 영역 안에서 빼어 정원으로 행차하시는 웃지 못할 사례가
여러 번 일어나기도 했다.
정령왕들이 서로 왕래하게 되는 경우, 사용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마법을 사용하여 공간이동을 하는 방법으로, 가장 간편하고 빠르기 때문에 정령왕들이 가장 각광 하는 방법이고,
나머지 하나는 영역에서 나와 -지훈은 아직 그 존재도 모르고 있는- 정원을 통해서 각 정령왕의 영역으로 걸어가는 방법인 것이다.
각 정령왕의 영역 중심에 펼쳐져 있는 이 아름다운 정원의 이름은 ' 에바스 에덴 '
푸르른 창공과 그 위를 흐르는 유유한 구름들, 정원을 가득 채운 수많은 풀숲과 아기자기한 나무들,
그 사이로 흐르는 맑은 시냇물과 청명한 바람.
풀숲에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꽃들의 잎은 모두 인간세상에서는 진귀한 보석이 되는 것이었다.
사파이어의 잎사귀에 루비의 꽃잎. 순금으로 만들어진 개나리와 다이아몬드로 빚어진 장미.
불꽃으로 피어있는 카네이션과 백금으로 만들어진 에델바이스.
유리로 된 아카시아의 꽃잎에서 나오는 꿀은 인간세상의 술과 같은 효과를 일으킨다.
그날 나무의 기분상태에 따라 돌아가며 바뀌는 맛은 칵테일, 샴페인, 백포도주와 와인의 맛.
그리고 그 사이를 쉴새없이 재잘거리며 오고가는 수많은 4대 하위 정령들은 환상보다 더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인간세상의 누구 하나라도 보았다면, 그 눈에서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릴 만큼 지독히 아름다운 광경.
그러나 이 아름다운 정원을, 무심한 시선으로 ..그것도 자신의 공간 안에 주저앉아서 영상을 통해 바라보고 있는 한 존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이프리트. 모든 불꽃의 권능이자 수장이 되며, 주신의 명령에 따라 이곳 아크아돈의 모든 불의 세력을
관장하는 정령들의 왕.
장작도 없이 타오르는 뜨거운 불길의 한가운데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주저앉아있는 이프리트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아찔할 정도로 위험스러워 보였다.
당장이라도 그 뜨거운 불길 속에 휩싸여져 형체도 없이 타버릴 것만 같은데,
정작 이프리트 본인은 자신이 현재 앉아있는 것이 불길 위라는 것 자체에 대한 인식마저 없어 보였다.
그저 땅이라도 꺼지라고 기도하는 것처럼 한숨만 푹푹 늘어놓으며 인상을 사정없이 구기고만 있는 것이다.
" 하아... 우울해. 저 딴 정원 아무리 봐도 나아지지가 않아. 나란 녀석은 맨날 왜 이러는거지?
이놈의 입이 문제야, 입이.. 이제 어떡하냔 말이야... "
이프리트는 한쪽 무릎을 세운 체 그 아래로 고개를 푸욱 숙이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방금 전, 엘퀴네스의 영역에서 벌이고 온 행동의 탓으로 현재 이프리트의 마음은 몹시 심란한 상태였다.
" 그 녀석도 화났겠지? 아무리 마음이 좋아도 참고 넘기는 게 한두 번이지.. 으윽..
그렇게 매정하게 대하고 왔으니 이제 두 번 다시 상종 안 하려 들지도.."
이전대의 엘퀴네스는 농담이 통하지 않는 존재였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까탈스럽게 굴거나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동을 하면 그때그때 잘못을 끄집어내어 싸움을 벌이는 것은 기본이고,
한번 사이가 틀어지면 100년 간은 상종 안하려 드는 것이 예사였으며,
사과 받기 전까지는 설령 아크아돈의 공적인 일에 관계된 일이라 할지라도 먼저 말을 붙이는 법이 없었다.
그게 너무 얄미워서 이프리트 자신도 똑같은 수법으로 맞받아 쳤기 때문에 다른 정령왕들 한테는 피장파장이란 소리만
들었을 뿐이지만.
그러던 그가 딱 한번, 정말 딱 한번 이프리트의 새침한 말에도 그저 웃으며 넘어간 일이 있었다.
그 날도 시작은 평소랑 똑같았었다. 언제나처럼 정원에서 우연히 만난 두 정령왕은 서로의 모습을 보며 빈정 거리를 찾기에 바빴었고,
결국 입씨름에 밀린 이프리트가 자기도 모르게 ' 빨리 소멸이나 해버려!' 하고 외쳤었다.
한두번 하던 말도 아니었고, 그때마다 번번히 화를 내며 몇 백년 간을 상종 안 하던 엘퀴네스가 이상하게 이때는 ..그냥 웃었었다.
즐거워 보이지도, 그렇다고 씁쓸하다거나 외로워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엘퀴네스는 그냥 웃고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이프리트는 정말로 거짓말같이.. 엘퀴네스가 소멸을 하러 명계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믿을 수가 없어서. 정말로 믿을 수가 없어서 차라리 다음 대의 물의 정령왕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버렸는데,
그게 또 무슨 하늘의 장난인지 정말로 다음대의 엘퀴네스가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서 닥친 아크아돈의 재앙.
물의 정령왕의 부재로 인한 사태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심각했다.
정령왕 본인들도 자신들의 존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그제 서야 깨달았을 정도니 말 다했지 않은가.
모조리 말라버린 샘과 강물.. 염분이 늘어 걸러 마실 수도 없게 되어버린 바다와 속속히 늘어나는 사막.
간신히 다른 차원의 자연을 관장하는 신들의 힘을 빌려 멸망이라는 최악의 결과까지는 막을 수 있었지만,
너무나 망가져 버린 자연은 설령 엘퀴네스가 돌아온다고 해도 다시 회복 될 수 없을 것만 같이 보였다.
미래의 걱정에 시름하는 정령왕들 사이로, 이프리트는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책임인 것만 같아 가슴이 더욱 무거워졌다.
' 내가 그때 이번 엘퀴네스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아니, 그때 그 녀석한테 얼른 소멸해버리라고 말하지만 않았어도...'
만약 그랬다면 지금 느끼고 있는 죄책감의 절반도 그가 느껴야할 이유가 없을것이었다.
실제로 정령왕의 탄생 유무가 누군가의 저주 따위가 개입 될 수 없는 것이며,
엘퀴네스의 소멸 역시 주어진 운명에 대한 순응 이었을 뿐,
그가 했던 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는데도 이프리트는 스스로를 심하게 자책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드디어 엘퀴네스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온 것은,
아크아돈의 회복 문제를 떠나서도 이프리트에게는 완전한 구원의 빛이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프리트는 이번에 태어날 물의 정령왕에게 반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돌아와 준 것이 너무도 고.마.운. 그 존재에 대한 호감이 더욱 강한 상태였다.
다시 생명이 충만해진 물의 영역을 보는 것이 눈물나도록 반가웠고,
그 속에서 꿈틀거리며 탄생하는 엘퀴네스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감동 이라는 것을 느꼈다.
전 엘퀴네스와 꼭 닮은 푸른색 머리카락. 투명하도록 시린 하얀 피부와 조각해 놓은 것 같은 수려한 이목구비.
전체적으로 여성적이지도, 남성적이지도 않은 중성적인 분위기가 묘한 충동감을 불러일으켰다.
외모상으로는 전 엘퀴네스와 그다지 닮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물의 정령왕만이 가지는 특유의 청명한 기운만큼은 똑같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맑고 시원한 느낌이었다.
그만큼 그의 영혼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탓이겠지. 그래서 이프리트는 더욱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심혈을 기울여 정성껏 조각한 사파이어를 그 두 눈에 박아 넣은 것 같은 아름다운 눈동자가 천천히 떠지는 순간,
이프리트는 울컥해버리고 말았다.
전 엘퀴네스와 너무도 똑같아서, 그 라고 착각하게 만들어 버릴 만큼 선명한 파란색 눈동자가 다른 정령왕들을 눈에 담는 순간,
무척이나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던 것이다.
보는 사람이 절로 마주 웃어버리게 만들만큼 따스한 미소는 그의 아름다운 외모에 무척 잘 어울렸지만,
이프리트의 심기를 거스르게 만들어버렸다.
' 왜 저렇게 바보같이 웃는 거야!! '
대대로 내려오는 엘퀴네스의 성격은- 싸가지 그 자체였다.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이 딱 그랬다.
인간을 벌레 보듯 하는 건 기본이며, 심지어 물의 정령 외의 다른 정령은 정령 취급도 안 하던 엘퀴네스도 있었을 만큼,
그들의 성격은 같은 동료 입장에서 보기에도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데 탁월한 뭔가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바로 전대의 엘퀴네스가 가장 심각했는데, 그나마 시비 걸기 위해 삐죽삐죽 말을 걸던 이프리트를 제외하면
누구도 먼저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 될 정도 였다.
그런 최강의 싸가지 집안(?)에서 태어난 녀석이!! 저딴 헤픈 웃음이라니이!!!!
어리버리하게 내뱉은 '안녕?' 이란 소리도 웃기지 않았다.
엘퀴네스들이 언제부터 다른 존재에게 인사를 하는 녀석들이 되었단 말인가.
미네르바와 트로웰이 그에게 더욱 호감을 가지는 것을 보자니 가슴속에서 한없이 끓어오르던 것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 저런 녀석이 엘퀴네스의 능력을 물려받았다니, 인정할수 없어! '
그래서 일부러 화내는 모습을 보기 위해 첫 대면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나는 족족마다 시비 걸기 일쑤였으며,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정령 만드는 수업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 마음만 좋은 물의 정령왕이 그러한 이프리트의 기대에 만족을 시켜주는 듯 싶었다.
자신이 시비걸때마다 일일이 말대꾸하면서도 결국 밀리고 마는 모습이 재미있었고,
진행하기 어려운 수업방식에 쩔쩔매는 모습이 고소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렇게 바락바락 대들고 있는 엘퀴네스의 모습이 ..정작 진짜로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점이 못내 이프리트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때문에 그나마 조심스러웠던 처음과 달리 갈수록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반격까지 가하게된 엘퀴네스의 태도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그는 결국 절교선언(?) 까지 퍼붓고 돌아와 버린 것이다.
불의 영역으로 돌아와서 마음이 진정되고 나서야 아차 싶었으나, 이미 때는 늦은일.
조금만 심통을 부려보려던 것이 겉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다.
이프리트와 엘퀴네스 사이에 흐르는 감정의 골이 너무 깊어져 버린 것 같았다.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리가 없는 엘퀴네스가 사과할 리는 없을 것 아닌가?
그렇다고 자기가 먼저 사과를 하기는 곧 죽어도 싫은 이프리트였다.
" 몇 년이나 갈까.. 10년? 100년? 아니, 이번에야말로 대 기록을 세워 1000년이 될지도... 중얼중얼... "
이보다 우울할 순 없다! 하는 포즈로 구석에 처박힌 이프리트는 실성한 듯이 중얼거렸다.
그에 대답하듯, 믿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족히 몇 십년 간을 그러고 앉아서 궁상을 떨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 뭐야~ 나랑 1000년이나 말 안하고 지내겠다고? 야, 아무리 내가 싫어도 그렇지~ 1000년은 좀 너무 한 거 아니냐? "
" !!!!! "
텔레포트하는 방법은 굉장히 심오하면서도 간단했다. 그 순서를 나름대로 정리해 보자면
첫째, 정신을 집중한다.
둘째, 텔레포트할 대상을 계속 생각하며 언령의 주문을 외운다.
셋째, 그럼 눈 앞에 가야할 장소가 갑자기 환영처럼 등장할 것이다. 거기로 쭈욱 걸어가라.
너는 그냥 걸어가는것 같아도 남들이 보기엔 텔레포트 한 것이다.....였다.
그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라고 외치고 싶겠지만.. 사실이 그러하니 날더러 어쩌라고?
실제로 나는 지금 그 방법을 써먹어서 불의 영역에 도착했다. 지금 산 증인이 눈앞에 있는데 못 믿겠다고 우길 거야?
내가 도착하자마자 본 광경은 금방이라도 온 세상을 태워 시커먼 그을음을 만들어 낼 것 만 같은 엄청난 불구덩이 였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덩이들은,
화산 속 용암처럼 벽을 타고 걸쭉하게 흘러내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온 공간을 크고 작은 불씨들로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공기가 덥다거나 바닥이 뜨거운 건 아니었지만 보는 것 만으로도 심장이 다 벌렁거렸다.
바닥의 시뻘겋다 못해 새까맣게 보이는 숯 덩이들을 보자니 걷고 싶은 마음도 싹~ 사라진다.
이거 그냥 걸어가면 화상 입는 거 아닐까?
텔레포트한 그 자리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바닥만 노려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왠 시뻘건 형체가 불쑥 들이밀어졌다.
" 으악!...허억. 뭐야, 이그니스. 놀랐잖아. "
그것은 불의 상급 정령인 이그니스였다. 내 허리만큼이나 오는 커다란 독수리의 모양을 한 이그니스는,
부리며 깃털이 모두 타오르는 불꽃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때문에 주변의 불덩이와 헷갈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 죄..죄송합니다. 엘퀴네스님... 계속 한자리에만 서 계시기에 무슨 문제가 있으신가 싶어..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제발 용서를..
" 엥? 아니, 뭐..그렇게 까지 말하면 내가 더 미안하지.. 뭘 그 정도 갖고 용서를 구하고 그러냐?
듣는 정령왕 무안하게 시리.. 아참, 이프리트는 어디에 있어? "
- 예..예? 아, 왕께서는 현재 침소에 계십니다.
" 침소?... 라고 해봤자 그냥 여기서 쭈욱 걸어가면 되는 거지? 어느 쪽이야? "
- 오..오른쪽입니다.
어라? 정말 그냥 걸어가기만 하면 된단 말이야?
나는 그저 불의 영역이라고 해도 물의 영역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 해본 말이었는데. 정말 이었다니.허허허.
이를테면 간단하다. 각 영역들은 하나의 커다란-그 커다랗다는 것이 거의 왠만한 야구장 정도의 거대한 크기이긴 하지만..
- 원룸이라고 보면 되는 것이다.
그 커다란 방안 한쪽구석에 침구를 비롯한 자잘한 생필품이 준비되어있고, 화장실이나 욕실이나 부엌은 필요 없으니 제외.
한마디로 가구라고는 침대와 손님 접대용 테이블 몇 개뿐이 없는,
정령이 얼마나 간소하고 썰렁하게 지내고 있는지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사례라고 볼수 있겠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10000년이란 긴 수명을 다 채우고 죽는다니..
도대체 정령이란 것들은 하루종일 뭐하고 지낸단 말인가? 그야말로 앞날이 캄캄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미래의 일은 미래에 가서 걱정할 일이니 지금은 논외로 치고.
나는 이그니스가 가리켰던 방향인 오른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맨발이었기 때문에 바닥에 발이 닿을 때마다 움찔움찔 놀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뭐...
여기까지 와서 불 바닥(?)을 걷기 싫다는 이유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잖아? 어쩔 수 없지. 그냥 눈 감고 걸어가는 수밖에...
조금 걸어가다 보니 불구덩이 속에서도 용케 타지 않고 버티고 있는 침대와 책장을 발견할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바닥에 주저앉아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이프리트도 보였다.
대체 뭐하고 있는 거라지?
그냥 바닥도 아니고, 숯 덩이가 끓어오르는 불구덩이에 앉아서 혼자 뭔가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자니, 무슨...
도라도 닦는 인도의 기인들 같이 위대해 보인다.
저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한국의 매스컴에 뿌린다면 정말 대박 날텐데, 아깝구만. 쩝.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혼잣말로 떠드는 이프리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평소의 너무 생기발랄하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한 목소리는 어디로 갔다 버렸는지,
잔뜩 기죽어진 목소리엔 후회가 가득 담겨있었다.
" 몇 년이나 갈까.. 10년? 100년? 아니, 이번에야말로 대 기록을 세워 1000년이 될지도... 중얼중얼... "
커헉! 저건 설마 나랑 인연 끊고 지내겠다는 기간을 말하는 것인가?
기운이 없어 보이 길래 그래도 제 잘못은 아나보다 했더니만.. 1000년이라니!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 뭐야~ 나랑 1000년이나 말 안하고 지내겠다고? 야, 아무리 내가 싫어도 그렇지~ 1000년은 좀 너무한 거 아니냐? "
" !!!!! "
갑작스런 나의 등장에 놀랐는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이프리트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그리곤 한참동안이나 멍하게 나를 바라보더니, 곧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면서 다시 얼굴을 무릎에 파묻는 것이다.
마치 못 볼 것을 봤다는 그 엄청난 작태에 나는 내 말이 씹혔다는 것에 대한 민망스러움도 차마 느끼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었다.
이제 사람.. 아니 정령을 눈앞에서 무시하기냐?
덕분에 사과하려고 했던 기분이 싸악 사라져버렸다. 오냐, 그래 이프리트. 네 도전을 받아주마. 어디 한번 갈 때까지 가보자고!
나는 한 손을 펴서 당당하게 이프리트를 가리키곤 소리쳤다.
" 에에잇! 이젠 나도 못 참아! 결투다, 이프리트! 여자처럼 생겼어도 안 봐줄 거야!!! "
" 시끄럿! 환상주제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 엉? 뭐야, 너 진짜 엘퀴네스였어? "
이제 서야 알아봤다는 듯이 놀라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이프리트. 그..그럼 너는 뭐냐, 지금 나를 환상 취급했다는 거야?
기가 턱 막혀오면서 모처럼 결심했던 결투의지가 처참히 사그라들었다.
정말 한순간에 여러 가지 감정을 가지게 만드는 괘씸한 이프리트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 반성할 줄 모르는 정령왕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한참이나 내 여기저기를 찔러보고 살펴보더니,
드디어 내가 현실인걸 알았는지 갑자기 도끼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 네가 여긴 왠일이야? 내가 너 다시는 안 본다고 했잖아? "
훗. 그렇게 말하면 내가 쫄줄알고? 이미 나에게는 비장의 카드가 있다~ 이 말씀이야.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이프리트의 시선을 맞받아쳐 주면서 씨익 웃었다.
" 트로웰한테 다 들었어, 이프리트. 전대 엘퀴네스하고 맨 날 그렇게 싸웠다며? 오랜만에 봐서 감회가 새롭다고까지 하던걸~
그 정도 가지고 어린애 같이 삐.지.기.는."
" 뭐..뭐야? "
" 솔직히 내가 틀린 말 했나. 전 엘퀴네스 좋아한 거 맞잖아? 내가 아무리 눈치가 꽝이라도 그 정돈 알아챈다 이거야.
그게 뭐가 창피하다고 숨기고 그러냐? "
" 뭐..뭐가 어째?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나! 좋아하긴 누가!! "
" 그럼 아니란 말야? 에이~ 그건 말도 안 된다. 그럼 아까 내 말에 왜 반격을 못한 건데? "
" 으윽..그..그건... 뭐, 뭐야 지금 너! 아까 로는 부족해서 더 시비 걸려고 온 거야? 트로웰이 그건 말 안 했나 본데~
난 한번 화가 나면 적어도 100년 이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상대 안 한다고!"
벌떡.
스프링이 튕기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프리트가 신경질 적으로 소리쳤다.
두 눈을 어찌나 부릅뜨고 있는지 그 붉은 눈동자에서 불똥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그 앙칼진 태도에 순간 찔금 했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여전히 이죽대는 낯으로 이프리트를 바라봐 주었다.
" 어라? 정말 그렇단 말이야? 백년이라니.. 아까 나 왔을 때 중얼거린 걸로는 천년이라고 하지 않았어?
천년에서 백년이면 감지덕지네 뭐. 나 백년 후에 다시 올까? "
내 말이 그렇게 쇼크적 이었나? 벼락을 맞은 듯이 온몸을 부르르 떠는 이프리트의 상태가 정녕 심각해 보였다.
아마 내가 이렇게 까지 반격을 가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모양이다.
하긴. 나도 지금 스스로의 말발에 놀라고있는 지경인데, 딴 녀석이야 오죽하겠는가.
" 뭐..뭣시라? 필요 없어, 백년이든 천년이든 다신 너 안볼 거니까 찾아오지 마! "
" 정말? "
" 그..그래, 정말이야. 뭐야, 지금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너 자꾸 그런 식으로 밀어붙이면 내가 사과라도 할 줄 아는 모양인데~그건 천만의 말씀 이라구! "
이미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붉게 물들어버린 얼굴로 바락바락 소리친 이프리트는 당장이라도 나를 영역
밖으로 쫓아 낼 듯이 사정없이 한 손을 휘이휘이 흔들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나가!'라는 말은 이프리트의 입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결국 최후의 운명을 마감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지고온 '비장의 카드' 로 인해서....
" 알아들었으면 지금 당장 나.. "
" 미안해. "
".......!!!! "
이 순간 이프리트는 완전히 한방 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누가 봐도 질질 끌면서 시비 걸 것 같았던 내가 대뜸 미안하다고 사과해버렸으니 황당한 건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완전히 할말을 잃었는지 '뭐라고?'라며 되묻지도 않는 이프리트를 바라보며 난 정말 미안한 듯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만 화 풀어. 남의 감정을 가지고 장난치려고 했던건 확실히 내 실수였어. 정말 미안해. "
" 너..너..지금... "
" 원래는 오자마자 바로 사과하려고 그랬는데..어쩌다 보니 또 투닥거리게 됐네, 하하.. 내가 원래 좀 이렇다. 미안."
어라라? 근데 어째 사과 받는 이프리트의 표정이 영~ 아니다?
내가 숙이고 나오면 신나서 방방 뛰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잘난 척 하면서 '당연히 그렇게 나와야지~'
라고 말할 줄 알았거늘..
벌레라도 씹은 듯이 잔뜩 표정이 구겨져서 부들거리는 이프리트를 보자니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설마 내가 또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걸까?
그럴 리가. 굳이 만들자면 난 사과한 죄 밖에 없단 말이다!!
그러나, 정말 엉뚱하게도... 이프리트 에게는 그것이 죄가 되는 모양이었다.
" 왜 네가 사과를 하는 거야!!! "
" 엥?.. 왜..왜냐니.. "
" 바보 아냐? 왜 네가 사과를 해? 내가 가서 사과할 때까지 기다릴 자존심도 없는 거야? 네가 왜 날 찾아와?
왜 네가 먼저 숙이고 들어오는 거냐구! "
" 저..저기 ..이프리트? "
사과하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었단 말인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프리트의 태도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땀만 삐질 거리는 데,
그 사이에도 이프리트는 계속해서 바락바락 소리쳤다.
" 태도가 너무 밋밋하잖아! 화가 났다면 계속 화를 내란 말이야. 전 엘퀴네스라면 이런 식으로 넘어가지 않았어!
찾아오기는 커녕 우연히 만나더라도 못 본 척 고개를 돌려 버렸을 거야!
100년이고 200년이고 사과를 받기 전까지는 꿈적도 하지 않았을 거라구! 그게 누구의 잘못이던 간에!! "
" 그..그건 좀 심했다. 그리고 난 전 엘퀴네스가 아닌데..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 그의 능력을 물려받았잖아! 그와 똑같은 기운을 가지고 있잖아! 똑같은 파란색 눈동자에 똑같은 물빛색 머리카락이잖아!
그런데 왜 그와 다른 거야!!! "
".........."
으으음.. 그렇게 물어보면 내가 할말이 없지.
복잡 미묘하면서도 떨떠름한 것이 어째.. 돌아가신 아버지의 옛 애인이 나타나 '왜 니 아비를 닮은 구석이 없냐!' 하고
따지는 것을 듣는 아들이 된 심정이었다.
도대체 전 엘퀴네스는 어떤 놈 이었길래 이다지도 나를 괴롭힌단 말인가.
" 언제나 거만하게 혼자만 위대한 척 지내란 말이야! 다른 녀석들에게 웃지도 말고, 얘기도 나누지마!
시비 거는 녀석은 반죽음을 만들어 놓는 한이 있어도 그냥 넘어가지 말고,
그것 때문에 다른 녀석들과 사이가 틀어져도 절대 사과하지도 마!
다른 하급정령들이 조금만 실수해도 그 존재 자체를 소멸시켜 버리라구! "
" 허걱..이프리트..나를 성격 파탄자로 만들고 싶은 거냐? "
" 맞아! 성격 파탄자! 바로 그거야!"
".........."
이프리트.. 너.. 정상이 아니구나..크흑.
아주 당당하게 '바로 그거야'를 외치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이프리트를 보자니 정말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런 일을 당하고
있는지 회한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퍼뜩 스치는 것이..
' 설마 전대 엘퀴네스의 성격이 그랬던 건가? '
친하게 지내고 싶다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성격을 저렇게까지 단호하다못해 비장하기까지 강조하고있는
이프리트의 태도를 보면 거의 확실한 것 같다.
이프리트와 항시 투닥 거리면서도 져본 역사가 없다길래 과연 대단한 성격일거라 짐작은 했었지만..
그런 엄청난 녀석이었을 줄이야.
전 엘퀴네스도 대단하지만, 그런 녀석을 좋아한 이프리트가 훨씬 더 위대해 보인다.
그러고도 모자라 순진한(?) 후대의 나까지 똑같은 성격으로 만들고자 하다니... 너의 정신세계는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거냐!
난 여기서 확실하게 선을 그어둬야 겠다고 생각했다. 안 그러면 이 위대한 이프리트가 나를 전대엘퀴네스와
똑.같.은. 성격으로 만들고도 남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트로웰, 네가 틀렸어. 이프리트는 전 엘퀴네스를 좋아한 게 맞았다고~!
" 저기...이프리트? 말해두지만, 나는 전대 엘퀴네스가 아니야. "
"....? 그건 나도 알아. "
" 아니야, 너 지금 착각하고있어. 난 전 엘퀴네스와 같은 녀석이 아니야.
그러니까 그 녀석과 똑같은 성품을 지닐 필요도, 그럴 생각도 없다구.
내가 아무리 전생의 기억에 매여 정령왕의 자각이 더디다고 해도, 이프리트 네가 전대 엘퀴네스의 성격을 나에게 강요한다는건
잘못됐다는 것 정도는 알아.
지금 네가 취하고 있는 행동은.. 그래, 기억을 잃은 녀석에게 억지로 기억해내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 같아.
실제로 그 녀석은 그저 닮았을 뿐인, 전혀 다른 사람이었는데도 말이야. "
".........."
내 말이 어느 정도는 맞았는지 이프리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곤 기운이 빠졌는지 기세 좋게 일어나던 것과는 반대로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물론, 여전히 불타오르는 바닥에 적응을 못하고 있던 나는 순간 움찔하며 놀랐지만 말이다.
그 후 이프리트가 다시 나에게 말을 건넨 것은 조금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뭔가를 정리하는 듯이 한참을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던 이프리트는 곧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촉촉히 젖은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한마디로 그동안 나는 계속 서있었던 것이다! 손님이 왔는데 앉으라고 권유하지도 않다니!! 가 아니고.. 허걱.. 왜 또 우는 거야!!!
".....내가 바보같지? "
" 엉? "
" 그래, 내가 생각해도 나 ..정말 바보같아. 근데 말이야.. 정말 그런 식으로 엘퀴네스가 소멸하게 될 줄은 몰랐거든..
만약 알았다면.. 너 같은 거 빨리 소멸해버리라는..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하지도 않았을 거야. "
" 쿨럭.. 그..그랬었냐? "
" 응... 정말 이상했어.. 분명히 나는 그를 좋아했는데..
왜 입으로 나가는 말은 항상 저주와 비난이었을까?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모자랐을 시간을 자존심만 내세우고 싸우느라 바빴어.
지금도 마찬가지야. 사실은 네가 먼저 사과하러 와줘서 기뻤어.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밖에 대하질 못하다니.. 난 모순덩어리야. "
씁쓸한 듯이 고개를 젓는 이프리트가 처음으로 슬퍼 보였다.
다가가서 어깨를 끌어 안아주고 '괜찮다'라고 말해주고 싶었을 만큼.
으음. 이럴 땐 대체 뭐라고 말해야 위로가 되는 걸까? 이상한 말하느니 차라리 그냥 입다물고 있는 게 더 나을지도.
그러나 입은 이러한 내 생각과는 다르게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괜찮아~ 이프리트. 원래 인간은 다 모순적인 존재라고...에엥? 그러고 보니 우린 인간이 아닌가..허걱.. "
그렇다면 정령들은 모순적인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걸까?
트로웰이나 미네르바가 나보다 훨씬 오랜 기간을 이프리트와 있었으면서도 이프리트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던 이유가..
녀석의 '모순' 적인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지도.
그러고 보니 트로웰은 '강한 부정은 긍정' 이란 말에 의문을 표했었다.
그것보다 더 확실한 인간의 모순을 표현한 단어는 없었겠지. 정령이 만약 모순이란 것의 개념이 없다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싫다고 하는데 좋다고 알아듣는 것 자체가 무리니까.
' 이렇게 놀라울데가!! '
정령세계의 새로운 한가지를 깨달아 버린 까닭으로 정신 없이 감탄해 하고 있는 날 보던 이프리트는 한심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 넌 어째 갈수록 어리버리 해지냐....."
" 내..내가 뭘? "
" 내가 가장 궁금한 게 뭔지 알아? 전 엘퀴네스가 지금 여기 나타나서 널 보면 무슨 말을 하게 될까야.
대대로 싸가지의 전통을 이어오던 집안(?)에서
이번 대에 이런 얼빵한 녀석이 탄생했으니..아마 적잖이 기가 막혀할걸? "
쳇. 그딴 싸가지는 부럽지도 않네요.
본인이 옆에 있는데 아주 대놓고 욕을 하는 이프리트를 바라보면서 나는 속으로 조용히 투덜거렸다.
남이 모처럼 새로운 경지(?)를 깨달아 감탄하고 있건만, 축하해주지는 못할망정 구박을 하다니.
어라?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정령이 모순 이란걸 모르고 있다면, 이프리트는 대체 어떻게 그런걸 습득 한 거 라지?
그냥 모순이란 것의 대한 개념만 없을 뿐, 정령들도 얼마든지 모순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건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학습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이프리트는 정령의 탈을 쓴 인간인 것이야!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날 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던 이프리트는 문득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 아무튼 네가 먼저 사과했으니, 나도 미안하다고 인정해 주지. 이제 그만 돌아가. 혼자서 생각할게 있으니까. "
.. 그게 진정 사과하는 태도냐? '미안하다'도 아니고.. 미안하다고 '인정'해준다는 또 뭐람?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돌아서는 이프리트의 표정이 정녕 쓸쓸해 보여서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혼자서 생각할 거란다면.. 지금 상황에서야 전 엘퀴네스에 대한 과거 회상밖에 더 되겠는가.
그나마 나를 통해서 엘퀴네스의 부재를 만족하려던 모양이었는데,
그걸 내가 단호히 끊어버렸으니 지금의 이프리트는 굉장히 허전하고 허탈할 것 같다.
고백이라도 한번 해봤다면 후회라도 없었을 것을..
이프리트의 말에서 유추하기로는 엘퀴네스가 소멸하기 직전까지 싸웠다고 하니 얼마나 스스로가 한심하고 원망스러울까?
전 엘퀴네스 녀석은 이런 이프리트 마음도 모르고 지금쯤 신나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갑자기 전 엘퀴네스가 괘씸하게 느껴졌다.
뭐랬더라? 소멸한 정령왕은 신계로 들어가거나 내세에서 환생하거나..둘 중 하나라고 했던가?
아, 그러고 보니 내세에서 환생하게 되는 경우, 가장 많이 태어나는 케이스가 드래곤이라고 했었던 것 같다.
그럼 혹시나 여기 아크아돈에서 드래곤으로 환생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참으로 그럴듯한 생각에 나는 한줄기의 희망을 느끼면서 이프리트를 돌아보았다.
" 이프리트, 혹시 이번에 드래곤 새끼가 태어났다거나..뭐, 그런 일 없었어? "
" 드래곤 새끼라니.. 해츨링을 말하는 거야? 글쎄..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레드드래곤의 헤츨링이 태어났다는 얘기는 들었어.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
이프리트 입장에서는 돌아갈 줄 알았던 내가 전혀 뜬금 없는 질문을 늘어놓으니 황당했을 거였다.
그런데 내가 워낙 진지한 태도로 물어보니까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친절히 답을 해준 것이다.
때문에 나는 그러한 이프리트의 마음씀씀이에 대한 보답을 하고자 성심 성의껏 내 생각을 내놓았다.
" 아니, 그게 말이야. 정령왕이 소멸하게 되면 드래곤으로 태어나게 될지도 모른 다잖아.
혹시 이번에 태어난 헤츨링이 전 엘퀴네스가 아닐까해서. "
"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정령왕이 소멸하면 드래곤으로 태어난다니? "
" 아니, 전부다 드래곤으로 태어나는 건 아닌 것 같고.. 신계로 들어가거나 내세로 환생하거나 둘 중 하나라던데.
그럴 경우에 가장 많이 태어나는 게 드래곤이라고.. "
"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어오는 이프리트로 인해 나는 등뒤로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저건 아직 정령왕의 자각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그런 건 언제 배웠냐는 뜻일까,
아니면 전혀 금시초문인 사실을 내가 어떻게 알고있냐는 뜻일까?
비참해지지 않으려면 후자의 질문이 더 나은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억지로 후자의 뜻이라 여기고는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 명계에서 들었어. 영혼의 위치를 찾아준다는 '소울메이트'에 대해 설명할 때였나?
신계로 들어간다는 말도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연락해보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
"........세상에. 정령왕이 신이 되기 전의 견습과정이라는 말이 사실이었구나... "
"....엉? "
그건 또 뭔 소리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충격 받은 듯 멍한 얼굴이 되어있는 이프리트가 침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 실은 이전부터 그런 소문이 돌았거든. '신'으로 탄생한 존재가 '신'이 되기 전에 미리 업무에 적응하도록 만들어진 직분이
바로 '정령왕'이란 거야.
정령왕으로 있을 동안에 이룬 성과에 따라 인세로 가느냐, 신이 되느냐가 결정되는 거지.
본인이 신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면 바로 인세로 들어 갈 수도 있다고 하더군.
소멸된 이후에 일은 아무도 알지 못하니까 그저 떠도는 소문이거니 했었는데..
명계에서 허튼 소리를 할 리가 없으니 아마 네 말이 맞을 거야. "
" 헤에..그래? 그럼 전 엘퀴네스가 지금 신이 됐을 수도 있다는 거네? "
" ....그럴 거야, 아마. 정령왕들은 업적이 나쁘거나 타락하는 일이 거의 없을뿐더러,
엘퀴네스들은 자존심이 강해서 스스로 인세에 얽매이지 않으니까. "
그..그렇게 말하면서 왜 나를 쳐다보는 건데?
아무래도 이 성질 나쁜 불의 정령왕은 내가 소멸하게 되면 반.드.시. 인간세상에서 태어나게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얍삽하게 올라간 눈꼬리하며 비웃는 것 같이 살짝 치켜진 입 모양을 보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기사 정령왕이 되자마자 업무에 차질을 빚은 최초의 녀석인 데다가,
자존심도 없는 놈이니 나중에 인세에 들어가게 되도 할말은 없다만.
젠장. 괜히 말해줬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속 태우는 거나 구경하고 있을 것을.
왜 나란 정령은 스스로 삽질을 해서 놀림 당할 일을 늘여 놓는단 말인가. 정말이지 내가 생각해도 나란 녀석은 이해할 수 가 없다.
" 쳇. 그거야 모르는 일 아니야? 전 엘퀴네스가 신계에 들어갔을지, 인세에서 환생하게 됐을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잖아.
네가 엘퀴네스가 신이 된 거 봤어? 봤냐고~! "
" 누가 봤다니? 애석하지만 신계를 비롯한 다른 차원에는 텔레포트가 불가능해.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은 '신'과 명계의 인물들 뿐이라고.
거기다 설령 네 말처럼 드래곤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여기 아크아돈에서 태어났으리라는 보장도 없잖아?
드래곤이 존재하는 차원이 어디 한 두개 인줄 알아?
운이 좋아 아크아돈에서 태어났다 치자. 기운이며 외모며 모든 것이 달라졌을 텐데 그걸 어떻게 알아봐? 너 바보야? "
" 크..크흑, 아니 이 정령왕은 왜 걸핏하면 날더러 바보래? 내가 뭘 어쨋 다고! "
" 그럼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보던가! 에잇, 너 때문에 기분만 더 잡쳤잖아! 짜증나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 "
이프리트의 명백한 축객령에 내 얼굴은 금새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어째 이놈의 정령왕은 예뻐할래야 예뻐할 구석이 하나도 없는 거야!
" 뭣이라? 남은 기껏 생각해줬더니 한다는 말이 겨우 그것뿐이냐?
내가 차원이동이 가능한게 신이나 명계놈들 뿐인줄 어떻게 알... 어? 잠깐만. 명계의 사람들이 차원이동이 가능하다고? "
한바탕 벼락으로 몰아치려던 소란이 한순간 가라앉는 듯한 고요한 기분이 들었다.
퍼뜩 떠오른 생각으로 소리 지르던 것을 멈춘 나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본 이프리트는 무뚝뚝하긴 했지만
내가 원하던 대답을 내놓았다.
"...? 그거야 당연하지. 죽는 사람은 차원을 가리지 않고 발생하니까. 그들을 명계로 데려오려면 그 정도 권리는 당연한 거 아니야? "
" 아하~ 그렇구나... 아무래도..그렇지? "
" .......? "
훗훗훗. 이프리트? 나 방금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나를 보고있는 이프리트를 마주보았다.
" 어쩌면 .. 전 엘퀴네스의 현재 상황 정도는 알 수 있을지도 몰라. "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외전2.
【전대 엘퀴네스의 이야기】
" 넌 하루종일 이런 곳에 있으면 심심하지 않니? "
어느 날 문득 내게 그렇게 물어오는 녀석이 있었다.
무료한 시선으로 돌아보니 얼마 전 새로 탄생한 이프리트가 새초롬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무시하기 시작해서 언제나 말을 걸어도 무시. 존재를 봐도 무시.
계속 무시하고 있는데도 꿋꿋하게 말을 걸어오는 이상한 녀석.
혹시 이번 대의 이프리트는 학습능력이 없는 건가? 그렇다면 정말 곤란한걸.
다른 건 다 참아도 피곤한 건 못 참는다고. 제길. 아무래도 저 녀석은 몇 번 밟아줘야 주눅이 드는 스타일인가 보다.
재수 없는 인간들 중에 학대를 즐기는 미친놈들이 있다더니. 그게 이 녀석한테도 옮은 모양이다.
정령에게도 옮기는 전염병이었던가?
하여간 인간들이란 박멸을 해도 모자를 해충이라니까. 아아 짜증나.
언제고 한번 날잡아서 쓸어버리든지 해야지 원.
나는 굉장히 인심쓰는 기분으로 이 녀석에게 고운 말로 그냥 돌아가도록 권유했다.
지금 나의 위대한 정신이 너로 인해 피폐해져 가고 있으니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가라고.
" 꺼져. "
" 뭐..뭐야? 뭐, 이런 싸가지가!!!
나는 그래도 하루종일 정원에서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는 네가 불쌍해서 말이라도 걸어주러 왔건만! 정말 이렇게 나오기야? "
" 후.. 착각도 지나치면 분수를 모르는 게 되는 거다. 꼬맹아.
한번만 더 그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려봐. 어떻게 되는지 몸소 체험하게 될 테니. "
지금 이 위대하신 몸은 정령왕들 중에 가장 연배가 높다 이 말이시다.
이제 겨우 태어난 지 500년 밖에 안된 네가 시비 걸 대상이 아니시라고.
정령왕들의 힘은 다 비슷하지만 경험과 연배는 절대 그냥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싸움을 하더라도 나의 경우엔 더 효율적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방법을 몸으로 습득하고 있다 이 말씀이야.
그래도 아주 무모한 건 아니었는지 나의 경고에 잠시 분한 표정을 짓던 이프리트는 곧 말없이 돌아섰다.
그래. 그건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조금만 더 귀찮게 굴었으면 날려버리려고 했으니까.
각 정령왕 고유의 힘(트로웰의 혜안이나, 미네르바의 방어력, 이프리트의 공격력을 말함)으로는 같은 정령왕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지만, 그냥 보통의 힘으로는 충분히 소멸까지 가능한 상처를 낼 수 있다고.
그리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런 힘으로는 나 엘퀴네스가 정령왕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
특히나 속성이 불인 이프리트는 더 치명적인 데미지를 받겠지.
그런데 저 녀석이 언제부터 나한테 시비 걸 게 되었더라? 처음엔 그래도 다른 녀석들처럼 가만히 있었던 것 같은데..
태어나는 그 순간 동그랗게 눈을뜨고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 ' 면상깔어! ' 라고 대꾸해준뒤로 100년간은
이프리트도 꽤 얌전하게 지냈었다.
트로웰은 마음을 읽는 녀석인 만큼 내 속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 테니 귀찮게 안 했었고..
미네르바는 원체가 모든 일에 무관심한 녀석이니 귀찮다는 상대한테 굳이 맞춰주는 타입은 아니었지.
그건 전 이프리트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중요한 볼일이 아니면 먼저 말을 걸어오지 못하도록 내가 압력을 가해두었으니까.
그런데 저 녀석은 왜 꿋꿋하게 면박을 당하면서도 오냔 말이야.. 뭔가 모자란 게 있는 게.. 아! 그렇군. 그때부터였나.
이프리트가 태어나고 나서 얼마 후에 있었던 일이었던가.
녀석이 시범 삼아 만든 불의 정령이 실수로 내 귀한 머리카락 한올을 증발시켜버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모든 불의 정령을 초토화시키고 싶은 것을.. 넓은 아량으로 그놈 한 놈만 몸소 소멸시켜주었거늘..
그걸 고맙다고 여기지는 못할망정 이프리트가 대들기 시작했지.
음..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한 녀석이다. 그나마 안면이 없다고 봐준 것도 모르고 덤비다니.
더불어 그때부터 계속 눈만 마주치면 삐죽삐죽 시비를 걸어오니 만날 때마다 짜증이 샘물 솟듯이 솟아오르는데..미치겠다.
언제 한번 날 잡아서 정신차리게 만들어줘야 하나? 아..귀찮은 건 질색인데.
그때였다.
벌써 돌아간 줄 알았던 이프리트가 냉큼 돌아서더니 나에게 혀를 낼름 내밀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 엘퀴네스 바~~보!! 멍청이~~!!!! 그대로 소멸이나 해버려라~! 늙은이야!! "
" !!!!! "
뭐...뭐가 어쩌고 어째!!!!!!!!!!!!
그래도 제 잘못은 아는지 그렇게 외친 이프리트는 쏜살같이 어딘 가로 텔레포트를 해버렸다.
나는 그야말로 화낼 타이밍도 못 잡은 상태로 녀석에게 꼼짝없이 당해버린 것이다.
이제는 허무하게 비어버린, 이프리트가 방금 전까지 있었던 자리를 노려보며 나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훗. 이프리트? 나 정말 열 받았어. 건드린걸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 으에엑!! 이프리트! 너 또 엘퀴네스한테 뭐라고 한 거야!! "
" 내가 뭘? "
" 정원의 모든 물이 얼음으로 변했다구!
엘퀴네스 화나면 속성이 얼음으로 변하는 거 몰라? 최악이야!! 정원의 모든 꽃이 말라버렸어.
나이아스들이 얼음덩어리가 되 서 다른 하급정령들을 괴롭히고 있단 말이야. 인간계는 지금 일주일째 우박만 내려!
벌써 아크아돈의 상급신이 몇몇 와서 경고하고 갔단 말이야.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가만히 안 있을 거래!! "
트로웰이 허둥지둥 내뱉는 말을 여유 있게 듣고 있던 이프리트의 안색이 점점 파랗게 질려갔다.
이 싸가지 물의 정령왕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르는 거야!
며칠 전 그를 약올리고 도망친 사건이 불쑥 떠올랐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자신의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 이프리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 흐흥~ 그까짓 얼음이야. 내가 녹여버리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걱정 마~ 지금 당장 이그니스들을 대량으로 탄생시킬 테니. "
" 미쳤어? 그러다가 역효과가 나서 불바다가 되면 어쩌려고 그래? 인간세상은 너희들이 시험삼아 장난치는 장소가 아니야.
당장 가서 엘퀴네스에게 사과하고 그만두라고 해! "
" 시..싫어. 내가 왜?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정 안되겠음 트로웰 네가 가면 되잖아!! "
붉어진 얼굴로 팩 쏘아보며 말하자 트로웰의 안색이 흐려졌다.
그러자 이제껏 묵묵히 옆을 지키고 있던 미네르바가 나섰다.
" .......갔었어. "
" 뭐? "
" 엘퀴네스한테 갔었다고. 어찌됐든 누구든 말려야 했으니까.
가서 본전도 못 찾고 엘퀴네스의 얼음 그물에 갇혀서 장난감이나 되 주고 왔다는 게 문제지만. "
" 으에에~~ 미네르바! 말하지마!! 그 악몽이 다시 생각나잖아!!! "
머리를 부여잡고 흔들어대는 트로웰.
그런 트로웰을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리는 이프리트와 재밌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에 눈빛을 빛내는 미네르바.
" '귀여운 짓' 10가지를 하고서야 풀려났지. 피식 "
" 으아아악~~ 그마안~~~!!!! "
"....미..미네르바.. 넌 그동안 뭐하고? 그냥 구경만 한 거야? 동료가 당하고 있는데? "
다른 정령왕들에 비해 그나마 엘퀴네스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미네르바인지라,
엘퀴네스도 그의 의견은 어느 정도 존중해 주는 편이었다.
그래서 항상 엘퀴네스에게 하는 부탁은 그의 입을 통해서 이루어졌었기에 이프리트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미네르바를 바라보았다.
" 말려보긴 했지. "
" ..그..그런데? "
"....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죽여버릴 거라 더 군. "
"........."
" 그러니 당장 가서 사과하도록. "
"시..싫어! 나도 자존심이 있지!!!"
매일 항상 이런 식이다. 어떻게든 놀리는데 성공하게 되도 그 뒤에 이어지는 엘퀴네스의 보복에 밀려 결국은 사과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만은 기필코!!
라는 신념으로 끝까지 버텨보려는데 무표정한 미네르바의 안색이 유달리 흐려지는 것이 이프리트의 눈에 포착되었다.
" 너의 자존심 때문에 정령계가 소멸되어도? "
" ...하..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잖아. "
" 내가 장담하지만 엘퀴네스는 마음먹으면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녀석이야. "
그리고 실제로 과거에는 그 비슷한 지경까지 간 적이 있었다.
현재의 이프리트가 탄생하기 전. 그러니까 전대 이프리트가 쌩쌩하게 살아있을 시절의 일이었지만.
" 무서웠지. 그때 이프리트가 자존심 살린답시고 몇날 며칠 시비 걸었다가 거의 소멸 할 뻔하고.. 정령계는 반 초토화 됐지.
지금 이프리트 네 영역이 그 시절한번 무너졌다가 다시 복구한 거란 거 알아?
소식을 들은 상급신들이 필사적으로 엘퀴네스를 막아준 바람에 간신히 그 정도에서 그친 거라고.
그 사건으로 엘퀴네스는 몇 백년 근신처분을 받고 말았지만 이프리트는 두 번 다시 엘퀴네스를 건드리는 만행을 저지르지 못했어.
엄청난 교훈을 몸으로 보여준 거지. "
"............"
싸가지가 괜히 싸가지라 불리겠는가.
아무리 유치한 행동을 하는 녀석이라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찍소리도 못하고 당해야 하는 것이 양육강식의 세계였던 것이다.
결국 이프리트는 그 날로 두 정령왕의 눈치를 못 이겨 엘퀴네스를 찾아가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엘퀴네스가 소멸하기 직전까지 되풀이되는 정령계의 일상적인 나날중 한 개의 사건으로 기록된다.
내일이면 소멸인가.
정령이란 몸은 정말 편리하게도 자신이 죽을 때가 다가오면 정확하게 신호가 들어온다.
내 바로 전에 소멸한 이프리트도 일주일 전부터 소멸할거라고 떠들고 다녔었지.
그리고 모두의 배웅 속에서 인도자들의 팔에 꿰어 정령계를 떠났다고 들었다.
왜 들었다냐고 하냐고? 그거야.. 내가 배웅이란 귀찮은 일을 할 리가 없잖아? 그래서 하루종일 영역 안에서 빈둥빈둥 놀았지만..
마지막까지 내 면상을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니 난 녀석에게 매우 고마운 일을 해준 거나 다름없다.
그 빚은 언제고 꼭 되받아야지 하고 벼르고 있었는데 이제 얼마 안 남았군.
명계에 가면 녀석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테니 붙잡아서 이자까지 고이 쳐서 받아먹을 테다. 후훗.
즐거운 미래를 상상하면서 이제 오늘이면 정령왕으로서는 마지막일 정원의 광경을 다시금 둘러보았다.
2만년인가.. 지긋지긋하게도 오래 살았군.
보통 정령왕의 수명이 1만 5천..
길어야 1만 8천년에서 끝난다는 점을 감안해 봤을 때 나는 정말 끈질기게 오래 살아남은 녀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가. 새삼스레 감회가 드는 것이. 문득 센치해 지는 기분이다. 이게 바로 떠나는 자의 고뇌인가.
그러나 그런 아련한 기분을 단번에 망가뜨리는 목소리가 내 상념에 끼어 들었다.
" 안 어울리게 멋있는 척하기는! 네가 그렇게 폼잡으면 뭔가 있어 보이는 줄 아냐? 그래봤자 넌 싸가지밖에 안되~! "
......이프리트.
이제 제법 연륜이 있다고 부쩍 대드는 횟수가 많아진 녀석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찾아와 시비를 걸었다.
그래봤자 이제 겨우 2000살밖에 안된 주제에 2만년의 긴 수명을 다 채운 내 앞에서 까불어 대다니.
이게 바로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건가. 정말이지 질리지도 않는 녀석 같으니 라고.
뭐,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니 좀 가볍게 놀아 줄까나.
" 싸가지라.. 어느 입이 그렇게 예쁜 말만 골라서 할까... 매 타작이 요즘 줄었지? "
" 으..으윽. 치사하게 힘으로 해결하려고 들다니!! "
" 훗. 치사라... 강한 자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양육강식의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 아닌가? 억울하면 너도 힘을 기르던가. "
" 으으으윽!!!! "
그래도 몇 천년동안 나와 티격태격하면서 저 녀석 성격도 내 고귀한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한마디로 더러워졌단 소리다-_-).
세상을 살아가는 또 다른 힘을 부여받은 셈이니 감격해도 모자를 녀석이 오히려 원망이라니. 은혜도 모르는 놈.
뭐, 그래도 ... 재미있었으니까.
언제부터인가.. 녀석이 시비 걸러 오지 않으면 오히려 하루종일 지루하고 심심해졌다.
만사가 다 귀찮은 나에게도 재미라는 것이 생겼으니 저 정도의 괘씸죄는 봐주도록 할까.
" 흥! 난 이제 꽃다운 2000살이라고! 차 오르는 초승달 몰라? 니가 아무리 용써봤자 어차피 정령왕은 거기서 거기!
연륜이나 경력쯤은 금새 따라잡힌다 이거야!! "
" 그런 건 따라잡고 나서 얘기하는 거란다, 꼬맹아. 가서 수련이나 하고 오던가. "
" ~~~~~!!!! "
네가 아무리 용써봤자 태어난 차이를 어찌해볼 수는 없는 거지.
무식하면 그런 것도 무시할 수 있는 거냐?..라는 눈빛으로 바라봐 주자 부들부들 떠는 이프리트의 어깨가 더욱 격렬해졌다.
오, 이제 폭발할 차례인가?
" 이이익! 너 따위!! 너 따위 빨리 소멸이나 해버렷!!!!!!! "
역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떻게 넌 내 예상에서 하나도 벗어나질 않는 거지?
자기가 말해놓고도 스스로 놀라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우스워졌다.
평소라면 바로 반격을 가해야 할 내가 오늘은 잠잠하니 이상한 거겠지?
의연한척하고 있어도 속으로 놀라고 있는 게 다 보인다, 꼬맹아.
그동안 알게 모르게 울리는 재미가 꽤 있었던 녀석이었는데. 그것도 오늘로 마지막인가? 아, 그건 좀 아쉽다.
2만년의 긴 세월엔 미련 따윈 안 남을 줄 알았는데.
약간의 충격요법을 먹이고자 소멸한다는 말은 입도 벙긋 안 했으니 아마 적잖이 놀라겠지. 그걸 못 본다는 게 또 아쉽구만.
흐음. 꽤 볼만할 텐데.
불의 정령을 모아다가 하나씩 사형시키는 재미도 꽤 쏠쏠했지. 거기에 경악하는 이프리트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웠고..
내가 약올릴 때마다 눈물이 그렁하게 맺힌 눈동자를 보는 것도.... 재미있었던 것 같아.
아. 이상하다. 미련이 남는 게 너무 많아졌어. 그게 하필이면 이프리트 녀석과 관계된 것들 뿐이라 더 혼란스러워.
" 운명에 순응하실 시간입니다. "
명계에서온 두 명의 인도자가 천천히 허리를 굽히며 내게 말했다.
운명에 순응? 웃기고 있네. 그냥 죽을 시간 됐다고 하면 됐지, 거창하게 운명은 무슨..
저 놈들은 한 두번 본 사이도 아닌데 꼭 이럴 때 폼을 잡는단 말이야.
저번에 정원에 놀러왔 을때 나한테 호되게 놀림 당하고 울면서 돌아간 주제에.
" 저어. 엘퀴네스. 정말 이프리트한테는 아무 말도 안하고 갈 꺼야? 서운해할텐데. "
옆에서 배웅을 해주러 나온 트로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난 너한테도 소멸한다는 말 한 적이 없을 텐데? 하여튼 땅의 정령왕들은 속마음을 읽어서 곤란하다니까.
" 귀찮아.."
" 아..아무리 그래도..이프리트한테 알려줘야.. "
" 기각. "
"........"
아아..역시. 이프리트랑 달라서 대들지 않는 트로웰은 너무 심심하군.
그냥 이프리트한테 배웅 나오라고 할걸 그랬나?
" 저어.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물의 정령왕이시여. 이제 그만 가지 않으면..."
" 입 닥쳐. 누가 안간 댔냐? 하여간 별것도 아닌 것들이 쫑알쫑알 잘도 나불거린다니까. "
" 크흐흑. 너무해요."
반항의 기미를 보이는 인도자 녀석들을 잠시 지긋이 밟아준 다음, 난 그들이 이끄는 데로 차원이동의 행렬에 몸을 맡겼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트로웰과 미네르바의 얼굴을 마주보지도 않고 잘 있으라고 해주지도 않았으니 좀 매정하게 대했나?
아, 귀찮은데 아무렴 어때.
뭐, 그래도.. 내 다음대의 물의 정령왕은 너희들을 끔찍하게 위해주는 녀석이기를 바래주지. 그 정도면 되겠지?
이제 조금 있으면 이프리트는 내 소멸을 알고 길길이 날뛸 거다.
그렇게 좋은 걸 왜 이제야 알려줬냐고 트로웰을 붙들고 닦달할지 도 모르지.
아니면 그새 미운 정 이라도 들었다고 좀 서운해하거나..
가끔씩은 그리워질지도 모르겠는걸.
..이프리트 녀석.
-외전 끝-
" 뭐? 어..어떻게? "
내심 자포자기를 하고 있었던 탓인지, 어두워 보였던 이프리트의 표정이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에 나는 만족감을 느끼면서 우선은 내가 먼저 궁금했던 것부터 물어보기 시작했다.
" 그런데 말이야. 정령왕이 소멸하게 될 때는 명계로 가서 후계자에게 힘을 물려준다고 그러던 데..
차원이동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명계로 들어가는 거야? "
" 그거야 당연히 명계의 인도자들이 데리러오니까지. 인간들이 죽을 때처럼,
정령왕도 소멸시기가 가까이 오면 명계에서 인도자들이 데리러 오거든. "
" 아하. 그럼 명계의 사람들은 자신 외의 다른 존재도 같이 차원이동을 시킬 수 있다는 거네? "
" 그거야 그렇... !! 너 설마? "
잠깐의 대화에서 내 계획을 눈치챘는지 이프리트의 입 모양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그렇다. 바로 그런 것이다.
명계의 인도자들이 어디든지 나타날 수 있는 거라면, 그들에게 부탁해 신계로 차원이동을 할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설령 그게 불가능하더라도 적어도 현재 엘퀴네스가 어떤 처지인지를 알아봐 줄 수는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프리트는 그런 내 말에 기뻐하면서도 상당히 회의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좋은 방법이긴 한데, 아마 불가능 할거야.
이미 끊어졌던 전생의 인연을 새로운 삶에서 거듭하는 건 명계에서도 그렇지만 운명의 신들이 좋게 보지 않을 거야.
서로간의 사이가 아주 좋았던 정령왕들도 소멸하고 나서 다시 찾는 경우는 없었거든. "
" 흐음..그거야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지. 스스로 찾아볼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못 만난 것 일 수도 있잖아?
운명에 너무 순종적이랄까? '이미 소멸했으면 끝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외로 쉽게 만날 수 있는데도 외면한 것일 수도 있어. "
"..........!...."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 이프리트의 말처럼 쉬운 일이 될것 같지는 않았다.
우선 내 계획의 가장 중요한, 명계의 저승사자들을 만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전의 한국에 있었을 때야 병원이란 곳이 있었으니, 하루종일 죽치고 앉아서 기다리기만 해도 됐다지만 ..
정령계에 병원이 있을 리는 없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저승사자들을 만날 수 있다지?
가뜩이나 만만치 않은 문제인데 첫 번째부터 이런 난관을 겪게 되다니, 정말이지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내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프리트는 계속 뭔가에 충격 받은 얼굴로 멍하니 앉아있었을 뿐이지만.
그래도 눈빛에 어린 기대를 풀지 못하는걸 보면, 아닌 척 해도 어지간히 전 엘퀴네스를 만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때문에 더 더욱이 이번 계획을 성사시켜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불타오르는 나였다.
내 생전(?)에 사랑의 큐피트 역할을 자청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이래뵈도 한때는 '닭살커플 훼방놓기 운동본부회'의 총 회장직을 맡았었던 몸인데 말이다.
" 후우. 그나저나 진짜 큰일이네.. 저승사자를 만나야 뭔가 시도라도 할 것인데.. 도대체 어딜 가야... "
" 있어. "
" 응? "
푸념처럼 한마디 내뱉은 말에 이프리트가 정신을 차렸는지 단호한 얼굴로 대답했다.
기쁨으로 가득 만개한 얼굴엔 이전엔 보이지 않았던 희망이 샘물 솟듯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
" 명계의 인도자들이 가끔 여유 삼아 놀러 오는 곳이 정령계에 있어. "
내 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이 이어진 푸르른 초원과 한편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꽃밭이었다.
정령으로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보는 구름 가득한 창공과 넓은 대지,
초원을 사이로 흐르는 맑은 시냇물에 나는 할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그것들을 구경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둥그스런 언덕 너머로 보이는 숲은 자그마한 바람에 잎사귀를 흔들며 나를 반기는 듯 맞이하고 있었고,
그 위를 날아다니는 한때의 요정들은 바람의 하급정령인 실프가 틀림없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본 그 광경은 더욱 가관이었다.
이름을 알 수조차 없는 수많은 아름다운 꽃들이 전부...전부!!!!!
" 보석이잖아!!!! "
척 보기에도 셀 수조차 없을 만큼 많은 수십만 종의 꽃들이 전부 보석으로 되어있었던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들이 햇빛에 반짝이는 순간, 그 눈부심에 차마 눈을 뜰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거기다 자세히 보니 시냇물아래 깔려있는 조약돌은 전부 다 물방울 다이아몬드다.
은은히 퍼져있는 향기는 꿀 향 보다 더욱 진하고 달콤했고, 나무에 익어있는 과실마다 먹음직스러운 빛이 튼실하게 맺혀있었다.
굴러다니는 쓸모 없는 돌멩이라고 여겼던 것은 전부 금덩이요, 은덩이다.
" 무슨 이런 황당한 곳이 다 있어!~! "
감탄보다는 먼저 경악으로 굳어져버린 내게 이프리트가 옆에서 친절하게 이곳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 에바스에덴.
이곳 정령계 밖에 없는 황금의 정원이지. 너도 보다시피 굉장히 아름다운 광경이라, 신계나 명계에서 관광차(?)
자주 놀러오는 곳이야. "
" 뭬야? 그런데 왜 나한테는 이제 서야 가르쳐 주는 건데?!! "
" 그야 내 맘이지. "
"..........."
그렇다. 나는 정령계에 이러한 정원이 있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던 것이다.
명계의 저승사자들이 자주 놀러 오는 곳이 있다는 말에 반색을 하며 이프리트와 함께 나와서 본 광경은 그야말로 하나의 절경이었다.
텔레포트도 아니고, 그냥 무작정 불의 영역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이프리트의 행동에 처음엔 왜 저러나..
하는 심정이었지만, 조금 걷다보니 보란 듯이 왠 문짝이 떡 하니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서야 나는 정령계의 본 모습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이어진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무한한 보석의 정원을
가운데로 두고 각각 동서남북으로 하나씩 커다랗게 지어진 그림 같은 궁전 4개. 그것이 바로 정령계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안에서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엄청난 모습에 놀라고 있는 나를 보면서,
이프리트는 그 4개의 궁전이 각 정령왕 고유의 영역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정원은 4대 정령들의 성질이 모두 혼합된 곳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건지 정원 곳곳에서 서로 다른 4대 상,중,하급의 정령들이 어울려 뛰놀고 있는 모습이 심심찮게 보였다.
" 그런데 저 녀석들은 왜 저렇게 벌벌 거리는 건데? "
나는 아까부터 나와 이프리트를 바라보면서 벌벌 떨고있는 바람의 하급정령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결 좋은 생 머리에 전체적으로 투명한 모습을 가진 실프들은 내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크기였는데,
그들의 왕인 미네르바의 축소판이라고 봐도 좋을 만큼 분위기가 닮아있었다.
" 하급들은 정령왕의 기운에 본능적인 두려움이 굉장히 강하거든.
그나마 저 녀석들은 용감한 편이라 저렇게 공중에 떠있기라도 하지,
땅의 정령들은 이미 땅속으로 숨어버렸을걸? 잘 찾아보면 나이아스들도 있을 거야,
네 휘하의 정령들인데 아는 척 이라도 해두지 그래? "
" 흠. 그럴까... 물의 정령이니까 샘물 가까이에 있겠지? 아, 부르면 오려나? 나이아스! 집합! "
그러고 보니 운디네와 시큐엘은 봤지만, 정작 내가 애써 만들지 않아도 저절로 탄생해주었던 기특한 나이아스들은 본적이 없었다.
호기심이 생겼지만, 그렇다고 직접 찾아다니기는 귀찮고 해서 그들을 내 쪽으로 부르기로 했다.
설마하니 지들 왕이 부르는데 배째라고 버틸 녀석이 있겠는가 싶은 심정으로 말이다.
그런 내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었는지,
내가 그들을 부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내 앞으로 수 십 개의 물방울들이 우르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물방울들은 내 앞에 도착하자마자 수 십 명의 물의 하급정령-나이아스의 모습으로 뒤바뀌었다.
실프와 같은 손바닥 크기의 작은 나이아스들은, 푸른색의 곱슬 거리는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귀여운 생김 샘이 였는데,
귀와 허리아래가 물고기의 지느러미로 되어있었다.
한마디로, 동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인어공주의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박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 이렇게 신기할 수가! '
내가 감탄하는 사이, 나이아스들은 갑작스런 나의 부름에 무척 당황했었는지,
척 보기에도 한없이 움츠려드는 모양으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 부..부르셨습니까, 왕이시여...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 지요...
전에 물의 영역에서 들었던, 끊임없이 재잘거리던 수다쟁이들의 소리와 똑같은 목소리였다.
다만 지금은 긴장한 탓인지, 주눅이 들은 목소리에 기운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이 너무 무서워하지 않도록, 나름대로 착해 보이려고 애쓰면서 반갑게 인사를 하기로 했다.
" 하핫, 겁먹지마. 그냥 보고싶어서 부른 거니까. 첫 대면이지? 앞으로 잘 지내보자. "
- !!!!
술렁.
내 인사가 뭐가 잘못되었을까?
갑자기 눈이 호박 만하게 동그래진 나이아스들이 무척이나 놀란 듯이 저들끼리 심각하게 쑥덕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내가 미처 왜 그러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생글생글 웃더니, 갑자기 내게 소란스럽게 인사를 걸어오는 것이었다.
- 꺄악 꺄악 잘 부탁드려요, 엘퀴네스님~~
- 엘퀴네스님 너무 예뻐요~~~ 멋있어요~~~~ 사랑해요~~~~
- 엘퀴네스님 저도 잘 부탁해요~~~ 꺄악
"..........."
" 하급정령들은 정령왕의 마음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거든.
네가 자신들에게 호의적인걸 알고 두려움이 없어진 거야. 저 수다쟁이들을 앞으로 감당하려면 좀 힘들겠네. 잘해봐. "
순식간에 일어난 태도의 변화에 내가 적응을 못하고 있자, 옆에 있던 이프리트가 지나가듯이 한마디 내뱉았다.
그..그런 건 진작진작좀 말해주란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겁이 없어진 나이아스들은 그때부터 정말로 끈덕지게 나를 쫓아다니며 이리저리 수다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찌나 쟁알쟁알 떠들어대는지 나중에는 파리채로 한 마리씩 휘어잡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좀 조용히 해!' 라고 외치면 '네에~' 하고 대답하는 것이 귀여워서 봐주고는 있지만,
정말이지 이 징글맞은 수다쟁이들을 앞으로 감당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노래지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떡 하니 명계에서 놀러온 저승사자들을 발견한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게 내려주신 축복이나 다름이 없었다.
드디어..드디어 이 시끄러운 녀석들을 떨구어낼 수단이 생긴 것이다!!!
나는 기쁜 마음을 굳이 숨기려고 노력하지 않은 채 나이아스들을 바라보았다.
" 저기, 얘들아. 나는 이제부터 아~ 주 중요한 일을 해야하거든? 그러니 이제 너희들끼리 놀지 않으련? "
- 에? 정말요? 에이.. 더 놀고싶었는데.
- 그럼, 엘퀴네스님~ 다음에 놀아주세요. 네?
- 헤헤헤.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엘퀴네스님~
- 그럼 이제 뭐하고 놀지?
- 실프들이다, 우리 실프랑 놀러가자.
- 꺄악~ 그래그래~~
"................."
다행스럽게도 이들을 떨궈내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들끼리 알아서 다른 장난거리를 찾아 떠났던 것이다.
아마 내 마음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만큼, 내가 그들의 수다에 지쳐가고 있다는 것을 느껴서 쉽게 물러난 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떠나고 난 후, 마치 몇 년만의 여유를 찾는 듯한 해방감에 나는 감격으로 눈물을 그렁그렁 맺었다.
옆에서 한심하다는 듯이 지켜보는 이프리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냥 조용히 무시했다.
그 대신 이제 막 정원에 도착했는지,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하고 있는 저 세상(?)사람에게 큰 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 거기~! 정령 아닌 녀석! 잠깐 스토옵~~~~!!! "
내가 너무 큰소리로 외쳤나? 나의 외침을 들은 저승사자가 불에라도 데인 듯이 화들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아니, 실제로 불에 데였다.
마침 타오르는 불꽃으로 만들어진 장미에 흥미를 보이던 녀석이 그것에 다가가려는 때에,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놀라 꽃잎에 손을 대고 말았던 것이다.
데인 손을 부여잡고 '아뜨뜨~' 를 외치고 있는 녀석이 진정으로 괴롭고 불쌍해 보였다.
옆에서 이프리트가 박장대소를 하고 웃지만 않았더라도 충분히 나는 그에게 가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위로해줄 용의가 있었던 것이다.
" 꺄하하하하~~ 저거 바보 아냐? "
" 이..이프리트. 너무 그렇게 웃지 마. 나 때문이잖아.. "
" 훗. 척 봐도 불로 된 꽃에 가까이 다가가는 놈이 정상이 아닌 거지, 정 미안하면 가서 치료라도 해주던가.
회복능력은 엘퀴네스들의 특기잖아? "
이런 썩을. 내가 그런 것까지 할줄 알면 오늘날 이 시점에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겠냐?
많은 의미가 담긴 눈으로 쏘아보자 이프리트는 흥 하고 코웃음 쳤다.
정말이지 날 놀리는것을 정령생활의 보람이라도 잡은 모양이다.
" 크읍.. 아, 정령왕들을 뵙습니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
화상의 통증을 조금 가라앉혔는지, 처음보다 많이 진정된 저승사자가 우리들을 알아보곤 인사를 걸어왔다.
초록색의 짧은 컷트 머리에 구릿빛 피부.
검은색 망토로 온몸을 칭칭 감고 있는 몸은 그냥 겉으로 보기에도 근육으로 떡 벌어져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전에 명계에서 봤던 저승사자들과는 상당히 다른 이미지라고나 할까?
예쁘장하기만 했던 그때의 저승사자들에 비해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녀석은 부리부리한 눈매에 눈썹이 굵은,
전체적인 선이 투박한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못생긴 건 아니고.. 말 그대로 정말 남자답게 생겼다는 거다. 이런걸 터프하게 생겼다고 하지, 아마.
꽃 소년들과는 다른 의미로 여자들을 울리고 다닐 놈이었다. 젠장, 나도 이젠 평범하게 생긴 놈을 만나고 싶어!
" 부르긴 했는데, 저기. 괜찮아요? 화상입은것 같던데. "
" 아..하하. 괜찮습니다. 잠시 실수한 것이니까요. 그나저나 이곳 에바스에덴은 정말 아름답군요.
선배들이 관광지로 적극 추천한 까닭을 알 것 같습니다. 거기다 운이 좋게도 이렇게 정령왕들까지 뵈었으니.. "
그러나 그렇게 멀쩡하게 대답하는 녀석의 손은 그냥 보기에도 괴로울 정도로 시뻘겋게 달아올라있었다.
살짝 데인 건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꽃잎을 세게 움켜쥐었었나?
살풋 인상을 찡그리자 이프리트가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 그 꽃은 그냥 불로 된 게 아니거든. 지옥에서 피어나는 염화의 일부야.
땅속 깊은 곳에 흐르는 용암과 같은 성질이라고 보면 될 거야.
육체를 가진 녀석은 물론, 영혼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그러니 저 정도 화상으로 그친 것이 용한 거라고.
자칫하면 손이 아주 녹아버렸을지도 모르니까. 뭐, 그렇다고 지금도 괜찮은 상태라는 건 아니지만."
아아. 이런..경악으로 굳어져버린 저승사자가 보인다.
녀석은 화상 입은 손을 부여잡고 실성한 듯이 '지옥의 염화를 만지다니~!' 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 염화라는 것이 상당히 무서운 놈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용암이나 마찬가지라는데 대단하지 않을 수가 없지.
꽃 주제에(?) 왜 그런 위험한 성질을 띄고 있단 말인가? 거기다 저걸 정원에 심어놓은 이유는 또 뭐고?
저러다 정령들이 다치면 어쩌려고.
" 저거..저렇게 그냥 둬도 괜찮은 거야? "
아닌게 아니라 꽃 위를 날아다니는 실프들의 모습이 굉장히 위태해 보였다.
나의 걱정스러운 시선에 여전히 시큰둥한 이프리트의 대답이 이어졌다.
" 정령들은 각 자연의 속성을 극한까지 가지고 있는 녀석들이야.
불의 정령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물의 정령이라고 해도 염화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해.
지까짓게 아무리 화상을 입히려고 난리를 쳐도 물의 기운에 덮혀 버리거든.
아무렴 정령에게 위험한 것을 정령계의 정원에 가져다 두겠어? "
" 하긴 그렇겠구나... 하하. "
"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하고, 저 인도자의 상처나 어떻게 해봐.
염화의 불꽃은 만만한 게 아니어서 완전히 치료하기까지 화상의 열기가 멈추지 않고 전신에 퍼지니까. 저러다 죽을지도 몰라. "
"........헉?.. "
이프리트의 말에 놀라 황급히 상처를 살펴보니, 정말로 손바닥에 입었던 화상이 팔뚝까지 번져있었다.
연신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땀을 흘리는 폼새가 심상치가 않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녀석의 화상 입은 손을 꾸욱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끙끙거렸다.
" 어떡하지, 이프리트? 치료할 수 있는 약 같은 건 없는 거야? "
" 그런 게 어디 있어? 정령이 다칠 일이 있어야지.
거기다 다치게 되더라도 엘퀴네스의 능력이 있으니 필요하지도 않았단 말이야. 네가 알아서 해봐.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까. "
저..저런 마녀 같으니라고~!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데 저렇게 태연하게 대꾸하다니..
눈앞에서 시름시름 앓고있는 저승사자가 떡 하니 보이는데 이프리트는 '나하고는 상관없음' 이라고
이마에 써 붙여 놓은 듯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 이프리트에게 원망의 눈빛을 보낸 뒤, 이 화상을 어찌 처리하면 좋을 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점점 번져 가는 상처는 벌써 어깨를 타고 올라가 있었다.
나는 우선 저승사자의 몸을 감싼 망토를 벗겨낸 후, 서있는 것도 힘들어하기 시작한 녀석을 편히 자리에 앉혔다.
화상을 입은 사람의 응급처치가 뭐였더라.. 아, 그래. 우선 찬물로 열을 식혀야지.
" 이프리트! 가서 물 좀 떠와! "
" ..... 넌 지금 네 자신을 뭘로 생각하는 거야? "
엥? 그게 무슨... 아, 맞다. 내가 물의 정령이구나. 이런 바보 같은~!!
물을 관장하는 정령왕이 다른 것도 아니고 물을 떠오라고 시키다니.. 정말이지 나는 갈수록 멍청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물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모른단 말이야! "
" 아주 바보라고 광고를 해라!! "
물의 영역에 있었을 때는 사방에 보이는 모든 것이 물이었으니 그걸 내 마음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됐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공기 중에 있을 때는 물을 가지고 놀(?) 방법이 없는 것이다.
내가 무슨 수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물을 만들어 낸단 말인가!
엄청난 난관에 직면해 뻣뻣하게 굳어버린 내게 이프리트는 바락바락 소리쳤다.
" 네가 물을 만들긴 뭘 만들어, 멍청아! 네 자체가 물이란 말이야, 물!!
네가 이 녀석 팔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물로 식히고 있는 상태라고! "
" 헉? 정말? "
" 그래!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공기중의 수분은 물 아니냐? 그걸 끌어만 모아놔도 호수 한 개는 만들겠다!
한가지만 알아둬. 아크아돈의 모든 물은 완전히 네 거야.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원하는 대로 이동한다고! 그러니 어디 가서 물이 없어서 뭘 못하겠다는 멍청한 말은 하지마. "
흠.. 어지간히 열 받았나 보다. 과격하게 씩씩거리는 이프리트를 뒤로하고
나는 조용히 내가 잡고 있는 저승사자의 팔 부분을 바라보았다.
이프리트의 말을 들어서 인지 몰라도 아까 봤을 때는 심각하게 보였던 상처가 조금 진정된 듯도 하다.
새빨갛게 익어있는 피부위로 커다란 물집들이 보기 흉하게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으음.. 이걸 어떻게 좀 치료를 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내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였을까?? 어쩐지 이 화상 입은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강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상처부위를 잡고 있던 손바닥에 물의 기운을 끌어올린 것이다.
끌어 올려진 물의 기운은 마치 수증기가 증발하듯,
수십 개의 물방울이 되어 내 손바닥을 통해 저승사자의 화상부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저승사자의 상처부위를 완전히 장악한 물방울들은, 내가 '앗'하고 소리치기도 전에 그의 피부 아래로 스며들더니,
곧 상처가 완전히 회복된 말끔한 피부를 드러내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시간으로 치자면 불과 몇 초 사이에 일어난,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인 것이다.
덕분에 뭔가 더 잔소리를 하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이프리트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고,
아픈 팔을 끙끙거리며 부여잡고 있던 저승사자의 눈도 동그래졌다.
그는 화상 자국이라곤 찾아볼 길이 없이 깨끗해진 자신의 팔을 바라보며 감탄을 내뱉았다.
" 이..이런! 지옥의 염화로 인한 상처가 이렇게 말끔하게 회복되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엘퀴네스님의 회복능력은 귀가 따갑게 들어왔지만, 이렇게 제 눈으로 확인하게 될 줄이야. 정말 영광입니다. "
" 하아. 피곤하니까 말시키지 마요... "
아닌게 아니라 정말 몸이 피곤해졌다. 정령왕으로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육체적 피로인 것 같았다.
덕분에 기운이 빠지는 것을 느끼면서 자리에 털푸덕 주저 앉아버렸는데,
저승사자 녀석은 상처가 나은 것이 마냥 기뻤는지 성의 없게 대답하는 내 말에도 연신 싱글벙글한 미소를 감추질 못하고 있었다.
" 돌아가면 선배들에게 자랑할겁니다.
정령왕들을 뵌 것도 모자라 이렇게 직접 은혜까지 입었으니 말입니다. 아마 다들 부러워서 뒤집어 질 거예요. 하하하 "
...퍽이나 부럽기도 하겠다.
자칫하면 죽었을 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 직면했던 놈치고는 너무나도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나는 황당한 심정을 감추질 못했다.
육체를 가진 종족이야 죽어도 영혼이 있으니 배째라고 버티기라도 한다지만, 이미 영혼인 저승사자는 죽으면 그걸로 끝 아닌가?
근데 저 놈은 왜 저렇게 멀쩡한 거야?
나와 같은 심정인지 놈을 보는 이프리트의 표정도 황당함으로 가득했다.
" 엘퀴네스보다 웃긴 놈일세. 너 그거 알아? 엘퀴네스가 치료를 안 했으면 네 존재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었을 거라는 거.
지옥의 염화에 의한 화상은 어지간한 상급신 정도의 치유력이 없으면 못 고친다는 거 알지? "
" 하하. 물론입니다. "
" 근데 왜 그렇게 태연한 거야? 너 방금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거라고. "
껄껄거리고 웃는 저승사자의 모습에 불만을 느꼈는지 이프리트의 이마가 살짝 찡그려졌다.
그러나 이놈의 간덩이가 부은 저승사자는 그저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이는지 여전히 태연하게 대꾸하는 것이다.
" 죽을 뻔하긴 했지만, 이렇게 살아있지 않습니까?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는 것은 명계의 인도자들이 할 짓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살아있는 데 무엇 하러 죽었을지도 모를 미래를 상상한단 말입니까? 아무튼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네요.하핫 "
"........."
..강적이다. 단숨에 이프리트가 할말을 잃게 만들어 버린 대단한 저승사자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호기롭게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름은 '너'가 아니라 ' 유라우스 ' 라면서 친근하게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까지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대단한 넉살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 아, 그러고 보니 엘퀴네스님에 대해서는 명계 에서 많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저희 측 실수로 큰 폐를 끼쳤다고..
결정자님의 염려가 이만저만이 아니셨지요.
하지만 오늘 이렇게 치유술을 하시는 모습을 보니, 안심하셔도 된다고 보고 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
" 하아. 뭐 ..보고할 것까지야.... "
" 아닙니다.
우연히 라도 정령계에 갈 때 엘퀴네스님을 뵙게되면,
어찌 지내시는지 알아봐 달라고 모든 인도자들에게 신신당부의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굉장히 기뻐하실 겁니다. "
결정자라고 하면.. 아레히스를 말하는 거겠지?
그렇지 않아도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져서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그렇게 까지 나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니..
어쩐지 내가 천하의 몹쓸 짓을 하고 도망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으음. 그넘의 맛 더럽게 없던 액체만 아니었어도 마지막까지 고운 인상으로 남았을지도 모르는 것을..
잠시 옛 추억(?)에 잠기면서 나름대로 찡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데, 유라우스가 하는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 그런데.. 저는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
"..!! 아, 맞다. 상처 치료하는 것 때문에 깜박 잊고 있었어. "
"........"
찔금한 시선으로 이프리트를 바라보니, 어쩐 일인지 대뜸 '바보'라고 중얼거려야 했을 녀석이 이번엔 묵묵부답이다.
그렇다는 것은...
' 너도 잊고 있었냐!!.. '
뜨악한 눈으로 보자 붉어진 얼굴로 '흥' 하고 고개를 돌리는 것이.. 정말로 잊고있었던 모양이었다.
무관심한 척 태연한 눈으로 있었어도, 저승사자가 다쳤을 때 당황하긴 당황했었나 보다.
거기다 이 놈의 저승사자가 워낙의 타고난 언변(?)으로 정령왕들의 정신을 다 빼놓았으니..
제 아무리 이프리트라도 페이스를 잃지 않을 순 없었겠지.
어쩐지 굉장히 기분이 유쾌해졌다. 동지를 만난 것 같은 기분 이랄까나?후훗.
그런 내 모습이 못마땅했는지 표정을 잔뜩 구긴 이프리트가 빽하고 소리쳤다.
" 뭘 그렇게 실실거리고 있는 거야? 바보같이. 빨리 저 녀석한테 용건이나 말하라고. "
" 아아. 미안. "
" 저어. 저는 '저 녀석'이 아니라 엄연히 '유라우스'라는 이름이.... "
" 시끄러. 닥쳐. 내가 저 녀석이라면 저 녀석 인 거야. 어디서 말이 많아!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야? "
"......."
살벌하게 몰아붙이는 이프리트의 말에 결국 저승사자는 찍소리도 못하고 움츠리고 말았다.
아니, 그것보단 어느새 이프리트의 손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불로 된 아름다운 검의 기새가 너무 찬란했던 탓이지 싶다.
역시 욕은 만국 공통어이고, 폭력 앞에서는 장사도 없다는 말이 진리 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프리트의 능력은 최상의 공격력을 자랑하는 불의 검을 소환하는 거랬던가?
한번도 본적이 없고, 이프리트가 그렇다고 말해주지도 않았지만,
나는 이프리트가 지금 들고 있는 검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가 있었다.
보기만 해도 저절로 기겁을 할 만큼, 흉흉한 불길에 타오르고 있는 황금빛 검신의 검이 그렇게 흔한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손잡이까지 불로 감싸져 있으니 아마 저것을 온전히 쥘 수 있는 자는 불의 정령 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이프리트만을 위한 검인 것이다. 이 얼마나 부러운 것이란 말인가!
쳇. 나도 이런 기운 빠지는 치료술 말고 저런 멋지구리한 검을 소환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힘으로 여자에게 밀리는 것은 남자로서는 최대의 수치이자 비극이다.
아무리 이프리트가 여자가 아니고, 내가 남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슬픈 것은 슬픈 것이다. 암, 그렇고 말고.
나는 한껏 부럽다는 눈빛을 이프리트에게 보내면서, 저승사자 유라우스에게 힘없이 말을 걸었다.
" 저기,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혹시..우리들을 신계로 이동시켜 줄 수 있을까요? "
기대로 반짝이는 이프리트의 눈동자가 보인다.
그러나 저승사자는 내 말을 듣는 순간 몹시도 허둥대는 기색으로 사정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 예에? 신계요? 아..안됩니다. 아무리 저희 인도자들이 차원의 이동이 가능하다지만, 신계로의 출입은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결정자가 동행하는 경우가 아니고는.. "
" 결정자? 그럼 그를 만나게 해주면 안될까요? 그에게 부탁해 볼게요. "
" 하..하지만.. 불가능 할 겁니다. 아무리 그 분이라도 공식적인 업무에 관계된 일이 아닌 이상 신계로의 방문은 꺼리시는 편이라.. "
" 그래서 해주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
시뻘겋게 타오르는 이프리트의 검신이 순간 저승사자의 목을 향해 겨누어 졌다.
같은 정령들에게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지만, 정령이 아닌 타인.
그것도 힘의 제약을 전혀 받지 않는 정령계에서의 이프리트의 능력은 굉장히 위협적인 것이다.
미네르바의 방어벽이 상급신의 능력으로도 뚫을 수 없을 정도의 대단한 것이라고 하니,
이프리트의 능력도 그것을 상회했으면 상회했지, 적어도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런 것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저승사자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한 것은 당연한 일.
결국 그는 벌벌거리는 얼굴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모..모시겠습니다. "
사랑에 빠진 여자(?)는 위대했다.
엘퀴네스의 장-6. 재회
" 하아. 이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엘퀴네스님. "
난처한 얼굴로 낮게 한숨을 쉬면서 말하는 이는 그 이름도 유명한 결정자
- 명계의 부장급이라 밝힌 바 있던- 영혼의 분배와 관리를 책임지는 아레히스였다.
그는 나와 이프리트가 유라우스를 끌고 명계로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척하니 나타나더니,
마치 처음부터 모든 상황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 마냥 대뜸 이런 말을 꺼내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혹시 이녀석도 트로웰처럼 혜안인지 뭔지가 있는 거 아냐?
어떻게 저승사자와 도착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저런 말이 가능한 걸까?
당황한 것은 이프리트나 유라우스도 마찬가지인지, 벌쭘한 얼굴이 되어 나만 바라보는 것이..
어떻게든 이 상황을 내 힘으로 해결해 보라는 것 같다.
제 아무리 이프리트라도 명계의 높으신 분한테는 함부로 굴 수가 없던 모양이다.
아니면 명계에서는 불의 검의 힘이 약해지는 것일 수도.
" 하하...오랜만이네요, 아레히스... "
오랜만이라고 해도, 제대로 계산하면 아직 헤어지고 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레히스는 그런 내 인사에 별다른 지적 없이 예의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마주 응수해주었다.
" 그렇군요.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사실 그렇게 헤어져 버려서 걱정이 되었거든요. 외모도 몰라보게 바뀌셨군요.
만약 제가 영혼의 기운을 느끼는 능력이 없었다면,
그때의 지훈군과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
" ...하하..그거 칭찬인가요? "
" 물론입니다. "
그렇게 말하면서 씨익 웃는 아레히스의 얼굴이..어쩐지 한대 쳐주고 싶을 만큼 얄미워 보였다.
그러나 그가 곧바로 정색을 하며 얼굴색을 바꾸는 바람에 시도도 해보지 못한 채 찔끔한 상태가 되 버렸던 것이다.
순식간에 얼굴을 굳힌 그는 이제껏 본적 없는 굉장히 엄한 얼굴로 훈계하듯 말을 이었다.
" 무모하셨습니다. 정령왕이 둘씩이나 아크아돈에서 자리를 비우다니.
몇 년 간의 부재로 재앙의 위기까지 갈 뻔했던 것을 벌써 잊으신 겁니까?
엘퀴네스님은 아직 자각이 덜 되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이프리트님까지 동참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
" 하..하지만.. "
" 하지만이 아닙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서로 상극인 두 분이 함께 자리를 비우셔서 망정이지,
두분 중의 어느 한 분만 빠졌어도 간신히 진정된 아크아돈에 또 다른 피해가 생겼을 겁니다.
완벽한 힘을 가졌다고 하는 정령왕에게 차원 이동의 능력을 정하지 않으신 주신의 뜻을 모르시겠습니까? "
"..........."
쩝. 할말 없다.
명계의 인간들은 모두 왜 저렇게 말발이 세단 말인가?
눈에 띄게 기죽어 버린 이프리트를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나마 나는 어느 정도 안면이 있던 지라 그의 말투에 익숙해져 있었다지만,
이프리트는 첫 대면에서부터 정확하게 문책을 당한 꼴이 아닌가.
하지만 여전히 눈빛이 확고한 것을 보니, 이제라도 그냥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아무리 시어머니 같은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해도, 현재 아레히스가 전대 엘퀴네스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프리트의 결심을 읽었는지, 아레히스도 그 이상 책망의 말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그 대신 한결 담담해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 그래, 여기까지 오신 용건은 무엇입니까? 이리 대책 없이 차원까지 건너오셨으니 중요한 일이겠지요? "
" 어라?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난 우리가 오자마자 나타나 길래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
" 설마요. 저는 단지 인도자들의 차원 이동시에 발생하는 파장에 정령왕들의 기운이 서려 있기에 서둘러 나와 본 것뿐입니다.
아무리 명계의 책임을 맡고 있는 자들 중에 하나라곤 해도 직접 보지 않은 일까지 다 알아낼 방법은 없거든요.
그러니 말씀해 보십시오. "
아레히스의 그 말이 마쳐짐과 동시에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이 전에 영혼의 위치를 찾기 위해 사용했던, 화려한 티 테이블과 카페트가 깔려진 바로 그 방인 것이다.
순식간에 달라진 공간의 배경에 무척 놀랐는지 이프리트의 눈이 동그래지는 것이 보였다.
나야 이미 한번 경험한바가 있고, 유라우스는 이런 것이 생활이나 마찬가지 일테니 별로 놀라지는 않았지만.
" 자, 앉아서 얘기하도록 하죠. 유라우스, 두 분 왕을 모시고 오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당신은 이제 그만 가도 좋습니다. 분명 휴가 중이었지요? "
테이블의 의자를 권유하면서 지나가듯이 하는 말에, 마침 자리에 앉으려고 했던 유라우스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그는 뭔가 애원하듯, 갈망하는 눈동자로 아레히스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 저어. 저는 이대로 함께 있다가 왕들이 돌아가실 때 정령계로 다시 모셔다 드렸으면 합니다만.. "
"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
" 아, 예..그게.. 제가 실수를 하여 크게 다쳤었는데...여기 엘퀴네스님의 도움을 받아 무사할 수 있었기에..
뭔가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
" 흐음. 그렇습니까? 그럼 좋을 대로하십시오. 어차피 휴가기간이니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문제니까요."
아레히스의 허락에 유라우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저렇게 부탁하면서 까지 우리를 도와주려 남을 필요는 없는데.. 괜시리 마음에 부담이 든다.
사실 그를 치료한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 이었을 뿐,
오히려 엘퀴네스의 능력을 자각하게 되었으니 도움을 받은 것은 내 쪽이나 마찬가지 아니던가.
금쪽 같을 휴가기간까지 쪼개어서 도움을 받는다는 건 가당치도 않은... 어? 잠깐. 휴가? 휴가라고??
" 명계에도 휴가가 있어요? "
뜨악하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자 아레히스가 친절히 웃으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 물론입니다, 엘퀴네스님. 영의 세계라고 해도 인간계와 크게 다르지 않답니다.
명계는 뭐랄까..하나의 직장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명계의 인간들 모두가 이 직장을 이루는 구성원들인 셈이지요.
설마 저나 여기 있는 유라우스가 하루종일, 몇 날. 몇 백. 몇 천년간을 일만하며 산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지요? "
" 아..아니..하하.. "
"이 기회에 알려드리겠습니다. 명계를 구성하는 종족은 대부분 신족으로, 명계에는 크게 세 가지의 부서가 존재합니다.
운명이 다한 영혼을 판별,
지정하고 각 영혼의 선악을 구분하는 '감시부'와 , 수명이 다한 영혼을 명계로 데리고 오는 '인도부', 영혼의 위치를 지정하고
분배하는 등, 명계의 총 관리를 책임지는 '결정부'입니다.
이들 중에서도 각 부서의 책임자들을 가리켜 각기 감시자, 인도자, 결정자 라고 칭하지요. 계급으로는 결정자가 가장 높고,
그다음이 감시자. 인도자 순입니다. "
" 헤에? 책임자라고 하면 .. "
" 흐음. 설명하기 쉽게 .. 지구에서 사셨을 때의 세계관으로 말씀드릴까요? 책임자들은 한 부서의 팀장, 혹은 과장급입니다.
부서마다 여러 개의 팀으로 다시 나뉘기 때문에 팀장이라고 보는 쪽이 정확하겠군요.
그 중에서 감시부의 수가 조금 많은 편입니다.
전 차원 모든 영혼들의 운명을 살피고 선악을 판단하여 인도부와 결정부에 보고해야하기 때문에 가장 고되고 기피하는 부서지요.
그리고 인도부는 ..뭐랄까. 그냥 형식적인 부서입니다. 책임자도 따로 있지 않고, 소수의 팀원으로 명계 밖을 주로 돌아다니지요.
보통의 사원들보다는 직위가 높지만, 결정자와 판별자의 명령을 따릅니다. 이를테면, 특수요원 이랄까요? "
그리고 결정자는 아레히스를 비롯한 5명의 원로회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결정자라고 해서 모두 다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고, 각 사람마다 조금씩 명계의 관리를 나누어 맡았는데,
그중 아레히스가 맡은 것이 바로 운명을 잃은 영혼의 위치를 찾아 다시 재분배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이번에 내가 잘못 태어나게 된 것은 영혼의 처음 분배와 생산을 관리하고 있는
결정자 '아스카'측의 소관이었다면서, 자신의 잘못이 없음을 피력했다.
이번 아스카의 팀에서 새로운 신입을 대거 투입했는데, 그들 중에 한 명이 벌인 실수라는 것이다.
그는 지금 이번 일의 책임을 물어 근신에 들어가 있다고 들었다.
한 차원의 존재를 위태하게 한 일인 만큼 원래라면 사형을 선고받아도 할말이 없지만,
아직 신입인 점과 이번에 내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감안해 비교적 가벼운(?) 500년의 근신 처분을 받았다는 것이다.
" 5.. 500년이 짧은 건가요?... "
" 짧은 거지요, 무척. 신족의 수명은 2만년이니까요.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거의 무한대로 사는 종족인데 500년이면 잠깐 낮잠 잤다고 할 수도 있는 시간 아니겠습니까? "
되려 정색을 하고 되묻는 아레히스로 인해 오히려 내가 민망해졌다.
그거야 그렇지만...신족이란게 그렇게 오래 사는 놈들인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고.
어째 인간들만 차별 받는 기분이 든다. 인간은 아무리 용써봤자 100년 밖에 못사는데.. 다른 종족들은 너무 오래 사는 거 아냐?
은근슬쩍 부아가 치밀었지만 대놓고 투덜거리지는 못했다. 어찌됐던 이젠 나 역시 오래 사는 종족이 되 버렸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내 마음을 어떻게 눈치챈 건지, 빙긋이 웃는 아레히스의 말이 이어졌다.
" 수명이 긴 종족들은 그 만큼의 짊어져야 할 책임이 더 강한 겁니다.
엘퀴네스님만 해도 인간이었을 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의무와 책임을 느끼고 계시지 않습니까?
거기다 지금은 인간이라 해도, 내세를 거치면 어떤 다른 운명을 맞이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
" 하..하. 그렇군요. 음..그럼, 유라우스나 아레히스도 신족 ..인건가요? "
정해진 수명이 있는 거라면 정령계에서 다쳤을 때 담담했던 유라우스의 행동도 이해할 수 있다.
일단 육체가 있는 거니 죽어도 다른 삶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거기다 자기 자신이 직접 저승사자의 역할을 해봤으니,
죽어도 무서울 게 없다 는걸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런 내 생각이 틀렸는지, 곧바로 이어지는 이프리트의 반격이 있었다.
" 바보야, 아레히스는 결정자!
명계의 관리를 맡고 있는 존재야. 하나의 차원을 관리하는 건 신계의 중급신 이상이 아니면 안된 다고. "
" 헉.. 신? "
아레히스가..신이라고? 저 모습의 어디가?
신이라고 하면 일단 근엄하고 흰수염이 가득 난 할아버지 인상이어야 하는 거 아냐?
그에 비해 아레히스는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여러 여자들을 껌뻑 죽일만한 엄청난 미남이었다.
검은색의 결 좋은 머리카락이 어깨에서 찰랑거리고.. 싱글싱글거리는 저 느끼한 미 청년의 어디가 신으로 보인다는 거냐!!
경악으로 굳어진 내게 피식 웃은 아레히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 맞습니다. 그리고 유라우스도 신족이 아니지요.
신족은 신계에 사는 인간종족을 칭하는 말입니다. 짊어진 업이 없거나,
이미 내세를 통해 업을 소멸한 영혼들이 새로이 부여받는 종족이지요.
신족의 삶을 통해서 쌓인 업이 다시 내세로 이어지긴 하지만, 특별한 일이 없으면 다시 신족으로 태어나게 되어있습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된다고나 할까요?
유라우스와 같은 인도자의 경우는, 이미 죽어 육체에서 나온 영혼이 자의로 명계에 남아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지요.
당연히 영혼이기 때문에 수명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
" 그...그럼 감시자라는 것은... "
" 그들도 신족이 아닙니다. 명계를 구성하는 인물들 중에서 책임자의 직분을 받은 자는 모두 신족이 아니라고 보시면 됩니다.
감시자들은 신계의 하급신들중, 그 능력이 보통에 못 미치는 자들에게 벌주기 위한 직분입니다.
하루종일 서류의 바다에 파묻혀서 일만 하는 직위거든요. 상당히 피곤한 일이죠. "
"............."
뭐랄까.. 참으로 세상이 달라져 보였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시선이 바뀌어졌다고 해야하나?
신족이며, 정령이며 .. 그냥 그런게 있구나..하고 막연하게 생각해버렸던 것과 달리, 이번엔 정말 현실로 납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멍청히 굳어져 버린 나를 무시한, 이프리트와 아레히스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 아, 잠깐만. 신족들이 신계에 살고 있다면 어떻게 명계로 오는 거지? 설마 그들도 차원 이동이 가능한 거야? "
" 아아. 명계에서 일하기를 희망하는 자들 만입니다. 그들에게는 특별히 상급신의 이름으로 차원이동의 권리가 내려졌지요.
하지만 명계외의 다른 차원의 이동은 불가능합니다. "
" 호오~ 상급신이라면? "
"천국을 담당하는 신, '에누스'님과 명계의 신 '헬라스트'님입니다. 두 분 사이에 암묵적인 협약이 있는 것 같더군요.
덕분에 한동안 마족들도 명계에서 일하고 싶다고 탄원이 들어오는 바람에 골치가 아팠습니다.
지옥의 신인 '크라제'님이 간신히 진정시킬 수 있었지요."
여기서의 천국이란 신족이 사는 신계를 뜻한다고 했다.
그리고 마계가 바로 지옥인데, 마계의 전부가 그런 살벌한 곳인 건 아니고,
그곳에 지옥의 역할을 하는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어찌 할 수 없을 정도의 구재 불능이거나,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되는 악한 영혼들을 벌주기 위한 장소라는 것이다.
" 마족들은 바로 그러한 지옥의 관리를 겸하면서 살고있습니다.
원체가 호전적인 성향이 강하고 난폭해서인지 별다른 거부감 없이 공존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크아돈에도 가끔 놀러 가는 것 같으니 어쩌면 보시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 예? 아크아돈에 놀러와요? 뭐야, 신과 명계인 빼고는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이 불가능한 거 아니었어요? "
설마 이프리트가 또 날 놀리려고 거짓말 한 거야?
씩씩거리는 얼굴로 돌아보자 무슨 멍청한 소리냐는 듯이 인상을 잔뜩 구긴 이프리트가 보였다.
" 내가 말한 차원이란 건 인간계를 제외한 나머지 4대차원 이었다고. "
" 그건 또 뭔 소리야? "
태초에 주신이 정하신 차원은 모두 5개. 신계와 마계, 정령계와 명계.. 그리고 인간계였다.
그 중 4대(大) 차원이라 불리는 신계,마계,정령계,명계는 오로지 하나씩 존재할 뿐이고,
인간계는 몇 백개의 무수한 차원으로 또다시 세분할 된다.
바로 그것들 중에 아크아돈이 들어가는 것이다.
" '4대 차원'은 상급신의 허락을 받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과 명계인을 제외한 타종족의 자유로운 출입을 금하고 있어.
그에 비해 인간계에 속한 차원들은 몇 가지 제약이 걸리긴 해도 능력만 있다면 누구든지 이동할 수 있지.
하지만 우리와는 상관없잖아?
어차피 우리가 갈려고 했던 건 신계였으니까. 그래서 알아듣기 쉽게 '4대차원' 만을 기준으로 설명한 것 뿐이야. "
" 그럼 인간계의 다른 차원은 우리도 갈 수 있는 거네? "
혹시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지구에도 갈 수 있을까 하는 희망에 나는 눈빛을 빛내며 이프리트에게 물었다.
그러나 이프리트는 잠깐의 생각도 고려해 보지 않은 채 매몰차게 부정했다.
" 아니, 아크아돈과 정령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동이 가능하지만, 다른 곳은 안돼.
우리가 정령계를 비우면 아크아돈의 자연이 큰 타격을 입거든.
그래서 주신께서는 애초부터 정령왕에게 차원이동의 능력을 정하지 않으셨어. 아까 아레히스가 화낸 것도 그것 때문이잖아.
정령왕이 둘이나 아크아돈을 비웠으니까."
" 그..그렇군.. 어? 잠깐만.. 그럼 유라우스도 명계인이니까 신계에 갈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냐? ..
그런데 왜 결정자의 동행이 있어야만 한다고.. "
" 아아. 그건, 이동이 불가능하다기 보다는 관례문제입니다. 규칙이랄 까요?
신계는 신족이 사는 왕국과 신들이 있는 성지로 구분되지요..
유라우스가 말한 신계는 아마 신들이 모여사는 성지를 뜻했던 걸 겁니다.
지엄한 신들이 모여 계시는 곳에 인도자 혼자 함부로 드나들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서 말입니다.
괴팍한 신들이 꽤 되거든요. 신족의 영혼을 인도 해야 할 인도자들이 정작 신계에 못 들어 간다는건 말이 안돼죠.
그런데.. 여기에 오신 이유가 신계에 가시려던 거였습니까? "
"........"
아레히스의 물음에 나와 이프리트는 똑같이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찔끔하는 심정 이었달까?
그 대신 이제껏 별말 없이 옆자리에 앉아있던 유라우스가 냉큼 끼어 들어 대답했다.
" 정령계에서 뵈었을 때 저에게 신계로 이동해줄 수 없냐고 물으셨습니다. 신계에 용건이 있으신 게 맞는 듯 합니다. "
" 흐음? 엘퀴네스님은 이제 갓 태어나셨으니 신계와 안면이 없으실 텐데요.. 그렇다면 이프리트님의 문제로군요.
아무리 저라고 해도 개인적인 용건으로 타인을 신계에 들이는 것은 어렵습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그러나 그걸 그렇게 쉽게 대답하면 천하의 이프리트가 아니었다.
아무리 나한테 들켰다지만, 적어도 몇 백..혹은 몇 천년간을 숨기려고 아웅다웅했을 감정이 아니었던가.
오늘 처음 보는 생판 남한테 세세하게 설명해줄 수는 없을 것이었다.
힐끗 돌아보니 역시나 잔뜩 긴장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프리트가 보인다.
이미 아레히스는 이번 일의 요점이 녀석에게 있을 것이라 단정하고는, 계속해서 이프리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
"......."
짧은 침묵이었지만, 모든 사정을 알고있는 나에게는 천만년같이 긴 시간이 지나간 것 같았다.
거의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이프리트를 보자니 아무래도 안되겠지 싶다.
결국 나는 내 한 몸 희생해서 한 생명을 구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지금 속이 바짝바짝 마르고 있을 이프리트일지,
아니면 더 이상의 수모(?)를 참지 못한 이프리트에 의해 쓰러질 가까운 미래의 아레히스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신계에 용건이 있는 건 저예요, 아레히스. "
마치 자수하듯 한 손을 들어 보이며 하는 말에 이프리트와 아레히스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특히나 이프리트는 저게 지금 뭘 잘못 먹었나..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괜히 총대 매고 나선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크흑.
" 엘퀴네스님이요? 하지만 당신은... "
" 예, 신계에 아는 녀석은 없어요. 하지만 만나고 싶은 존재가 있어서요. "
" 만나고 싶은..? "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레히스에게 씨익 웃어주었다.
근데 어째 옆에 있는 유라우스 놈의 얼굴이 붉어지는 게야? 너 나한테 뭔가 숨기는 거 있냐?
의심이 치솟았지만 녀석과 만난 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점과, 때문에 나한테 뭔가 숨길만한 건덕지가 없다는 생각이
미쳐 그냥 넘어가 주었다.
" 제 바로 전대의 엘퀴네스였다는 자를 만나보고 싶어요.
이프리트가 자꾸 그와 비교하는 바람에 우울증 비슷한 것까지 경험했거든요. 대체 얼마나 잘난 면상인지 구경이나 해보려구요.
" 뭐..뭐라? 내가 언제? "
" 그랬잖아. 툭하면 전 엘퀴네스는 이랬다느니, 저랬다느니. 듣는 정령 얼마나 기분 나빴는지 알아?
아마 스트레스로 머리카락이 수십 개는 빠졌을 거다. "
멀쩡하게 잘만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을 집어 보이며 당당하게 외쳐봤자, 씨도 먹히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정령이란게 스트레스로 인한 탈모증을 겪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전혀 금시초문이니 말이다.
그러나 역시 괜히 신이 된 게 아니었는지, 기가 막혀하는 이프리트에 비해 아레히스는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무슨 재밌는 걸 발견한 아이처럼 눈빛이 초롱초롱한 것이.. 꼭 '나는 지난 여름에 네가 한 일을 알고있다!
그러니 순순히 불어!' 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거..잘못 건드린 거 아냐?
도둑이 제발 저린 다고..
괜시리 뜨끔한 심정으로 그 눈빛을 마주해 주는데, 이상하리 만치 유쾌하게 느껴지는 아레히스의 음성이 들렸다.
" 고생이 많으셨군요. 어쩐지 피곤해 보이신다 했습니다. 그런데 전엘퀴네스님이 현재 신계에 있으리라는 보장은 어찌 하신겁니까? "
" 보..보장은 없었는데요.. 그냥 무작정 가보면 되지 않을까 해서.. 전에 아레히스가 그랬잖아요.
정령왕이 소멸하면 신계로 들어가거나 내세의 길을 걷거나 둘 중 하나라고..그래서 그냥..
이프리트는 제가 같이 가자고 졸라서 어쩔 수 없이 따라온 거예요.."
" 흐음 그런가요... "
무언가 잔뜩 의미가 담긴 한숨을 내쉬며 아레히스는 말끝을 길게 끌었다.
어딘지 착잡해 보이는 어두운 표정에 내 등뒤로 식은땀을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사사로운 용건이라 안 되는 걸까? 차라리 그냥 사실대로 말해놓고 동정심 작전을 끌걸 그랬나?
사랑하는 존재의 소멸. 그러고도 그를 포기하지 못하는 애틋한 이프리트의 마음을 알아준다면 일이 수월히 풀릴지도 모르는 것을..
삽시간에 굳어지는 주변공기를 느끼며 나는 몸을 살짝 움츠렸다.
그리곤 잔뜩 기죽어 가는 목소리로 그나마 이프리트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타협점을 내놓기로 한 것이다.
" 저기.. 곤란하다면 그냥.. 전엘퀴네스가 지금 어떻게 됐는지 라도 알아봐 주심 안될까요? 설마..그것도 어려울까요? "
" 글쎄요...."
무지 난처하다는 듯이 어색한 미소를 짓는 아레히스의 표정을 보며 난 절망했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그냥 돌아가야 하는 건가?
신이라면서 그 정도는 봐줘도 괜찮잖아, 아레히스!!
잔뜩 침울해진 이프리트의 모습을 보자니 괜한 기대감을 안겨준 것 같아 죄책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 걱정 마, 이프리트. 정 안되면 유라우스를 협박해서라도 반드시 신계에 가고 말 테니까.'
내가 그렇게 속으로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였다.
" 엘뤼엔 입니다. "
" 예? "
뜬금 없는 아레히스의 말에 나와 이프리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모습이 퍽 이나 웃겼는지 잠시 쿡쿡 거리고 웃은 아레히스는 여유 만만한 자세로 다시 말을 이었다.
" 전 엘퀴네스님의 새로운 이름말입니다. '엘뤼엔*크리노*루사테' 라 합니다. 엘퀴네스님의 생각이 맞습니다.
그분은 현재 신계로 들어가 상급신의 지위를 받았습니다. 차원 ' 바이톤 '을 담당하게 되셨지요. "
" 허억? "
" 저...정말요? "
이프리트의 손끝이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초조하고 불안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자세- 몸을 움츠리고 어깨를 살짝 떨면서 입술을 깨무는 모습에 덩달아
나까지 긴장이 되 버렸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이프리트의 표정에서 작은 아쉬움이 맴돌았지만, 곧 사라졌다.
아마 전 엘퀴네스의 현재 상황을 안 것만으로 만족하려고 애쓰는 거겠지.
그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뭔가 확고해진 듯한 눈빛의 아레히스가 천천히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나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 뭐하십니까? 신계에 안 가실 겁니까? "
" 예에? 아..그..그럼? "
설마 신계에 데려다 주겠다는 거야?
유라우스도 말한바 있지만, 아무리 그라고 해도 공식적인 업무에 관계된 일이 아닌 이상 신계의 사사로운 방문은 꺼린다고 했었다.
게다가 타인까지 함부로 출입을 시키는 거니 어지간히 곤란한 것일텐데...
생각지도 못한 수확에 놀란 나와 이프리트가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아레히스가 피식하고 웃었다.
" 엘퀴네스님에게는 빚이 있으니까요. "
" 아..그..그래도.. "
" 대신 잠시만 입니다. 아크아돈을 오래 비워두면 안되니 아주 잠시만 만나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은 없다는 것도 알아두십시오.
이번 일은 굉장히 이례적인 사건이거든요. 정령왕이 선대의 정령왕을 만나기 위해 차원을 건넜다는 것도 그렇지만,
만나는 것에 성공한 사례도 이제껏 없었으니까요. "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날것을 촉구하는 아레히스가 굉장히 위대해 보였다.
그 동안 얄밉다거나 뻔뻔하다고 생각했던 거 다 취소할게, 아레히스. 당신은 진정한 신이었어!!
말 만 해, 내가 뭐든지 다 들어줄게!! 아레히스 '님' 이라고 불러줄까?
내 눈빛이 너무 초롱초롱해서 부담스러웠던 걸까?
안내를 하기 위해 먼저 앞장서서 걸어가던 아레히스의 발이 잠시 멈칫했다.
" 아, 그렇군. 한가지를 빼놓을 뻔했군요. "
" 말씀만 하세요, 아레히스!! "
"...........? "
씨익.
어느새 그의 열열한 추종자가 되어버린-존대 말을 쓰는 것이 그 증거다-
이프리트를 바라 본 아레히스의 고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로 돌려졌다.
어째 식은땀이...
" 동료를 위하는 마음은 아름답지만, 거짓말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엘퀴네스님. "
" 아..하하..."
' 들켰다!! '
하기사... 용건이 있던 녀석치곤 내가 너무 담담하게 행동했던 것 같다.
오히려 이프리트가 안절부절 했으니 눈치를 못 채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
민망한 기분에 헤벌쭉 웃어 보이는데, 이프리트가 그제 서야 깨달았다는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 뭐야, 그런 거였어? 나는 왜 네가 갑자기 끼어 드는가 했지~ 재미있다, 너? "
" 재미있다니..그럴 땐 고맙다고 말하는 거라고. 친구를 위해 총대를 맸는데 감상이 그게 다냐? "
" 흐응~ 누가 그러랬나? 뭐 어쨋든, 너한테도 좋은 점이 있긴 하구나. "
" ........ "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야?
고맙다고 말하는 건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모처럼 친구를 위해 줬다는 보람이라도 얻을 줄 알았거늘..
오히려 신기한 동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대하는 이프리트의 태도에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어째 앞으로도 저 녀석과는 친해질 일이 영원히 없을 것 같다는 기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내가 안 되 보였는지 유라우스가 냉큼 달려와 내 옆으로 와서 섰다.
" 저렇게 말씀하셔도 상당히 기뻐하시고 계실 겁니다. 엘퀴네스님이 잘하신 거예요. "
" 하하하... "
당근이 기쁘기야 하겠지. 뭐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바로 코앞에 고대하던 님을 만날 순간이 다가왔으니 말이다.
거기다 본인의 입으로 말하기엔 민망스러울 과거 고백까지 자체 생략되었으니 지금의 이프리트는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일 것이다.
그게 다 잘난 동료를 둬서 그렇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지만.
" 자 여기 입니다. "
티 테이블에서 벗어나 조금 걸어 도착한 것은, 방의 한쪽 벽면에 크게 자리잡은 어른 크기 만한 길이의 거울 앞이었다.
은으로 둘러진 테두리에 별다른 장식 없이 전체적으로 심플한 디자인이었지만,
마치 호수처럼 고요하게 빛나는 맑은 유리를 보는 순간,
세상의 그 어떤 화려한 보석에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누가 보면 나르시스트가 아니냐고 물어봐도 할말 없을 만큼 정신 없이 거울을 들여다보는데
(정확하게는 거울의 유리를 쳐다본 것 뿐이다) 아레히스의 입이 열렸다.
" '연결의 거울' 입니다. 중급신 이상의 존재가 동행하지 않을 시에는 그냥 평범한 거울이지만,
지금과 같을 때에는 신계로 이어주는 통로의 역할을 하지요.
텔레포트를 해서 가도 상관없지만 이 편으로 가는 쪽이 두분 정령왕께 더 안전할 것 같습니다. 그럼, 가볼까요? "
" 에? 거..거울을 통과 한다구요? "
아니나 다를까. 싱긋 미소지은 아레히스의 손이 거울에 닿는 순간,
마치 잠잠한 호수의 파문이 일어나듯 유리의 면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유라우스가 척하니 등장. 나 보란듯이 먼저 거울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 "
아무런 거리낌 없이 걸음을 내딛던 유라우스의 형체는 곧 거울 속으로 빨려들어 간 듯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 헤에.. 그냥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나 먼저 들어가도 돼죠? "
" 차례는 상관없습니다. "
긍정적인 아레히스의 대답에 신이 난 이프리트는 콧노래를 부르며 거울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이따보자~' 하고 여유 있게 손까지 흔드는 것이..
거울을 통해 어딘가를 간다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거부감 자체가 없는 모양이다.
머뭇거리는 내 태도에 아레히스의 재촉이 이어졌다.
" 엘퀴네스님은 안 들어가십니까? "
" 저..저기..하하.. 꼭 거울로..가야하는 건가요? 신기한 경험이긴 하겠지만..
왠만하면 텔레포트로 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데... 하하."
" 흐음~ "
그러나 이러한 내 바램은 아레히스의 친절한 한마디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
" 빨리 안 들어가면 거울 문이 닫힐지도 모릅니다.
제가 아직 안 들어간 상황에서 거울 문이 닫혀 버리면 먼저 들어간 이프리트님과 유라우스는 영원히 거울 속에서 헤매게 될지도...."
" 으악~!! 가요! 간다구요!!! "
그 순간 나는 보고야 말았다. 승리감에 젖어 씨익 입 꼬리를 올린 아레히스의 짖궂게 휘어지는 눈동자를!!
얄밉고 뻔뻔하다고 한 거 취.소.했.던. 거 다시 취.소.야!! 제길!!!!!
버글거리는 사람들, 곳곳에 자리잡은 수많은 상가들과 노점. 탁 트인 창공과 활기찬 길거리.
이것이 바로 오늘 신계를 처음 본 나의 감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신계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품고있던 지난날의 과거가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솜사탕을 들고 뛰어다니는 꼬맹이들부터 시작해서 여유있게 물건값을 흥정하는 장사꾼들까지..
전체적인 복장이 그리스시대 라는 것 빼고.. 도대체 인간세상과 다른게 뭐가 있는거야!!
" 이게...신계? "
떨떠름하게 중얼거린 내 말을 들었는지 옆에서 길을 안내하던 아레히스가 돌아 보았다.
" 말씀드렸잖습니까. 신족이란 신계에 사는 인간 종족이라고. 그러니 신족들의 삶이 인간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기 인간들은 신과 공존하며 산다는 것의 차이지요. 실망하셨나요? "
" 하아.. 뭐.. 상상력의 차이겠죠. 이런 건. "
억지로 거울을 통과해서 가장 먼저 본 것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한 마디로 나는 속은 것이다.
아레히스가 들어가지 않아도 거울 문은 안전하게 두 존재를 신계로 이동시켜둔 것이다!
아레히스는 거울 문을 여는 역할만 할뿐, 실제로 그가 이동에 동참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나 어쨌다나(뿌득)-
이프리트와 유라우스 보다 커다란 상가들과 지나다니는 무수한 사람들이었다.
갑자기 등장한 우리들로 인해 잠시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우리 일행 중에 아레히스를 발견하고는 황망히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비켜주기 시작했다.
과연 신은 신이구나.. 하고 생각했달까?
우리가 도착한 곳은 신들이 산다는 성지에서 조금 떨어진 신족들의 왕국이었다.
신족들의 왕국은 몇 개의 커다란 마을로 이루어진 부족이 뭉친 형태였는데, 왕국이라곤 해도 단 하나뿐이고,
인구의 수도 적어 대체적으로 한산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가정을 꾸리고 살긴 하지만, 종족 번식의 능력이 없는 신족들은 아이를 기르기 위해서는 신들이 사는 성지로 가서 새로 신족의
삶을 부여받은 아기를 데리고 오는 형식이라고 들었다.
성지의 커다란 과수원에 있는 나무에서 새로 신족이 태어날 때마다 열매가 맺히는데,
그 열매를 받아다 안을 가르면 그 안에서 아이가 나온다는 것이다.
"....너무 엽기적인거 아니야? "
" 마족에 비해서는 나은 편입니다.
마족의 아이들은 대게 마물의 몸에서 기생하며 자라다가 태어날 때에 마물의 몸을 가르고 나오거든요. "
"............"
무슨 에어리언이냐? 남의 배를 가르고 태어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마족이란 녀석들의 성격이 그리 좋을 것 같이 보이진 않았다. 나중에 만나더라도 친해지지 말아야지.
그렇게 마음의 결심을 굳힌 나는 여전히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헤치며 열심히 아레히스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아레히스를 본 신족들이 자연히 길을 비켜줘서 크게 불편하진 않았지만 복잡한 길거리와 상가들은 확실히 한산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 그런데 여긴 왜 이렇게 복잡해요? 인구도 적다면서.. "
" 하하. 여긴 왕국의 수도에 해당하는 마을입니다. 교육기관을 비롯한 상가가 다수 밀집되어있는 지역이지요.
성지에 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
" 왕국이라.. 신족들에게도 왕이 있는 건가요? "
" 당연하죠. 마족들에게 마왕이 있는 것처럼 신족들에게도 성왕이 있답니다. 천성이 게을러서 성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지만요.
그에 비해 마왕은 굉장히 활달한 성격이라 들었습니다.
마신의 허락을 얻어 종종 이곳에도 놀러 오기도 하죠. 심심한걸 못 참는 녀석이거든요. "
조금 더 걸어가다 보니 커다란 성이 나타났다. 옛날옛날 아주 먼 옛날에 공주님이 살았어요~ 라는 뻔한 설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전형적인 동화 속 왕궁의 모습 그대로다.
벽돌로 가지런히 쌓여있는 성벽과 그 뒤로 아련하게 보이는 궁전의 지붕을 덮은 돔, 그
위에는 아무런 무늬도 없는 하얀 깃발이 바람결에 펄럭이고 있었다.
성문은 활짝 개방된 상태로 여러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고, 한쪽 구석에 책상과 걸상을 놓은 몇몇의 왕궁 관계자들이
오가는 이의 출입증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프리트의 감상은 아주 담담했다.
" 전~ 혀 품위가 없어. "
" 뭐가? "
" 그렇잖아. 왕궁이라고 하면, 절도 있는 옷차림새의 보초들과 성벽의 경비들.
그리고 한때의 기사들이 험상궂은 인상으로 왕성 출입을 관리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근데 저건 너무 한가롭잖아. "
허허롭게 웃으며 사람들과 농담까지 주고받는 푸근한 인상의 왕국관계자라..
중세를 경험한 적이 없으니 어때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조금 이상하긴 했다.
하다 못해 한국에서 살았을 적 어지간한 회사의 경비도 저렇게 허술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우리들의 의문은 옆에 있던 유라우스가 대화에 끼어 듦으로서 자연스럽게 해소됐다.
" 신족들은 업이 없어 내세를 걷지 않는, 선한 성품을 가진 영혼들이 입은 육신입니다.
인간처럼 희노애락의 감정을 가지긴 해도 본성이 선하니 딱히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거든요.
그래서 대체로 자유로운 분위기인 겁니다. "
" 아하. 그래요? 그럼 마족은? "
" 마족은... 정 반대죠. 너무 악하다 못해 지옥으로도 벌을 줄 수가 없는 어둠의 속성을 가진 영혼들이 가지는 육신입니다.
개중엔 착한 녀석들도 있긴 하지만, 본성은 하나같이 썩어빠졌죠. 엘퀴네스님도 나중에 녀석들을 만나면 아시게 될테지만..
만나면 무조건 피하고 보십시오.
끈덕진 놈들이거든요.
얼마나 심각하면 마족의 삶을 사는 동안 단 한번이라도 선한 일을 하면 바로 다음 생에 드래곤으로 태어나는 혜택을 누리겠습니까?
허~ 참. "
"...... 하하하..."
알고 보니 유라우스가 바로 그 마족들의 영혼을 인도해오는 담당이란다.
그 동안 쌓인게 많았던 모양인지 한시도 쉬지 않고 마족을 씹어대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보지 않아도
그간의 쌓인 노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오죽 스트레스가 많으면 남들의 배에 해당하는 휴직을 받고서도 얼마를 못 가 다른 담당으로 바꿔달라 사정을 해대겠는가.
'참된 인도자의 삶은 마족의 영혼을 인도하는데서 비롯된다' 라는 명언까지 있을 정도란다.
그만큼 인내심과 끈기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성 문 앞 출입을 담당하는 관계자들의 앞으로 가자 아레히스를 알아본 그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두 신족은 무척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 이야~ 아레히스님 아니십니까? 유라우스도 오랜만이군요.
명계의 분들이 이곳엔 왠일로.. 드디어 성왕의 영혼을 인도하러 오신 겁니까? "
" 이봐~이봐~ 그럴 리가. 성왕의 영혼을 인도하러 오실 목적이었다면 유라우스의 모습이 우리눈에 보일 리가 있나?
성지에 용무가 있으신 게지. 거기다 아직 왕의 열매도 열리지 않았다네. "
" 아, 그런가? "
무언가 굉장히 아쉽다는 얼굴로 입맛을 다신 신족 하나. 그리고 그것에 맞장구 치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다른 신족 하나였다.
설마 자기들 왕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무서운 놈들..
저런 것들을 부하라고 거느리고 있을 성왕이란 작자가 심히 안타깝게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앞으로의 정령생활에서 운디네와 시큐엘에게 잘해줘야겠다는 결심을 다진 계기가 되기도 했다.
" 왕의 열매? "
" 성왕이 태어나는 열매 이름입니다. 황금색의 커다란 메론열매인데, 그 안에서 태어나는 신족만이 왕이 될 수 있지요.
현 왕이 죽을 때가 되면 다음 대의 왕을 담은 열매가 탄생의 나무에서 열리게 됩니다. "
호오? 그런 편리한 시스템이?
어떤 방식으로 왕의 열매 안에 들어갈 신족이 결정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후계자문제에 골치를 썩히지 않아도 되니 굉장히 편리할 것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건, 바늘 가는데 실 가듯 신족 설명에 마족 얘기를 빠트릴 수 없다며 마왕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는 유라우스에 의해서
증명되었다.
" 마족들의 경우는 1천년에 한번씩 피의 제전이 열립니다.
그것에 참가한 마족들끼리 배틀로얄식으로 하나만 남을 때까지 서로를 무참히 학살하죠.
그때 살아남은 마지막 마족이 왕이 되는 겁니다. 마왕은 피의 제전에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하죠. "
" 하..하.. 그럼 여러 마족이 한 마족을 왕으로 추대할 가능성은? "
" 없습니다. 마족은 개인 중심적이라 서로간에 협조라 는걸 모르는 녀석들이거든요.
여럿이 모여 한 존재를 왕으로 추대할 줄 알았다면 애초부터 '피의 제전'이 열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뭐, 덕분에 마족들은 대부분 2만년이나 되는 수명의 절반도 못 채우고 죽지만요."
" .. 대단하네요. 그렇게 호전적이라면 왕 노릇하기도 힘들겠군요. "
얼떨떨하게 중얼거리자 곧 유라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 그렇진 않습니다. 일단 마족들은 자신들보다 힘이 강한 존재에게는 절대로 반항하거나 저항하지 않거든요.
스스로가 상대방을 넘어설 힘이 있다고 자부하기 전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덤비지 않습니다.
좋게 말하면 주제파악을 잘 하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비열한 사고방식이란 겁니다. 그러니 왕에게는 고개조차 못들지요. "
그..그렇군. 역시 마족들은 상종 못할 것들이었어.
아직 만나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선입견이 생기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어색하게 눈앞의 신족들을 바라보았다.
어깨까지 흐르는 꿀 같은 금발에 준수한 얼굴들이 무척이나 상대방에게 호감 있는 인상이다.
마족들 얘기를 듣고 나선 지 몰라도, 선량하게만 보이는 이들에 대한 호감이 배로 상승되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방금 전에 신족들의 말에서 유라우스에 대해 언급한 것을 떠올리고는 조심스럽게 옆에
서있던 이프리트에게 물었다.
" 그런데..영혼을 인도하러 올 때는 저승사자의 모습이 안 보이는 거야? "
" 응. 저승사자가 눈에 보이는 거 봤어? 지금은 휴가중이라서 특별히 사람들 눈에도 보이는거야.
유라우스가 걸고있는 목걸이 보이지? 그 목걸이가 주변의 마나를 조합해서 육체의 모습을 형성해주지. "
우리들의 대화가 들렸는지 유라우스가 몸소 망토사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목걸이를 꺼내 나에게 보여주었다.
금 사슬로 이어진 목걸이엔 역시 금으로 되어있는 매달이 달려있었는데,
커다란 별무늬의 조각에 군대군대 어지러운 도형들과 글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헤에.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마법진 이란건가?
신기한 마음에 조금 더 가까이 가서 보자니, 목걸이를 목에 걸고있는 상태인 유라우스와 자연스럽게 신체접촉이 일어날수밖에 없었다.
근데 이놈은 또 왜 얼굴이 붉어지는 거야? 역시 나한테 뭔가 찔리는 게 있는 거 아냐?
혹시나 '에바스에덴'에서 꽃 한 송이 슬쩍한 게 아닌가 싶은 의심이 마음 한구석에서 솟구쳤다.
온통 보석으로 도배가 되어있던 꽃밭이니 그 중에서 한 개 챙겨간다고 눈치챌 수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한번 추궁해볼까?
그러나 이러한 내 생각은 나와 이프리트의 존재를 눈치챈 두 신족으로 인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 그런데 이 분들은 뉘신지.. 처음 뵙는 분이로군요. 청명한 기운이 꼭..불과 물의 정령왕이라 해도 믿겠습니다.
하하.. 물론, 말이 안 되는 소리이긴 하지만요."
그 순간. 두 신족을 바라보는 아레히스의 눈빛이 사악하게 빛나 보였던 건 내 착각만이 아니었다.
단아한 미소로 표정을 감춘 아레히스는 아주 담담하게 두 신족이 경악할만한 사실을 내 뱉았다.
" 맞습니다. 정령왕들 이십니다. "
"......."
휘이잉~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선선한 봄바람 같았던 것이
겨울의 태풍보다도 매서운 추위로 변해 우리들과 두 신족의 사이를 유유히 스쳐지나간 것 같았다.
뭔가를 잘못 들었다는 듯 한참이나 머리를 쥐어흔들며 귀를 파내던 신족들은 다시금 경련이 일어나는 얼굴을 감추면서
친절하게 물어왔다.
" 하하. 저도 이제 갈 때가 다 되었나 봅니다. 환청을 듣다니. "
" 자네도 그런가? 나도 그렇다네. 신족의 육체라는 것도 영 쓸모가 없다니까. 늙으면 인간이나 신족이나 다 매한가지지.
그런데 방금 뭐라고 하셨죠? "
.....으음. 이봐요들.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들은 20대 초반의 창창한 젊은이들로만 보이는걸?
아직도 주름하나 잡히지 않은 탱탱한 얼굴을 가진 주제에 늙었다느니 갈 때가 다 되었다느니 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울컥하는 심정이었다.
전 차원의 인간들을 적으로 돌릴 소리를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주절거리다니..
그 용기에 새삼 감탄의 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다.
너무 황당한 소리를 들어서 현실도피하고 싶은 건가?
하지만 그 이름도 위대한 아레히스는 결코 이들이 편한 세상으로 도망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 아니요. 아주 잘 들으셨습니다. 저는 분명히 정령왕이 맞다고 했거든요. 늙은 게 아니니 기쁘시겠습니다? "
" ........허어어억!! 아레히스님!!! 대체 그 무슨!!!! "
" 무슨 짓을 저지르신 겁니까!! 정령왕들이 아크아돈을 비우게 하시다니! 대체 어쩌시려고!!! "
더 이상의 진실외면은 소용없음을 깨달았는지 이번엔 아레히스의 말에 정통으로 충격을 받은 신족들의 모습이 가히 가관이었다.
어버버 거리면서 할말을 제대로 잊지 못하면서 나와 이프리트를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려대는 모습을 보자니,
찔끔하고 양심에 작.은. 가책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우리에게도 우리 나름대로의 사정이란 게 있다고. 명계에서도 그랬지만, 여기까지 와서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단 말이야.
그리고 그건 아레히스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것인지 성지로의 절대 출입불가를 외쳐대기 시작한 신족들에게 음흉한 미소를 날린 것이다.
신의 성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왕이 머무는 왕성 내부에 새겨진 마법진을 통해 가는 수밖에 없다.
때문에 필수불가결 적으로 왕궁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우리들로서는,
왕궁의 출입을 관리하고 있는 두 신족의 허락이 꼭 필요한 것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무력으로라도 억지로 들어가 버릴 수 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이 신족들이 가만히 안 있을게 분명하고.
괜한 트러블 때문에 조용히
전 엘퀴네스만 보고 가려했던 계획이 물거품 된다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나와 이프리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다.
" 어서 아크아돈으로 돌아가십시오. 이번 사건이 채 가라앉지도 않았는데 또 다시 말썽을 일으키시려는 겁니까?
무례하다 생각지 마시고 제발 조금만 더 생각해 주십시오!! "
" 아레히스님도 그렇습니다. 어쩌자고 두 정령왕을 이곳으로 모셔오신 겁니까?
누구보다 위치의 책임과 의무를 잘 알고 계시는 분이.. "
"...훗. "
헉. 그 순간 나는 보았다.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았던 아레히스의 이마에 새겨지는 작은 십자 모양의 혈관을!!
단단히 열받았는지 검은 기운을 풀풀 풍기기 시작한
아레히스로 인해 두 신족들도 그제서야 자신들이 너무 흥분했음을 깨닫고 안색을 시퍼렇게 굳혔다.
그러나 이미 타올라 버린 아레히스의 표정은 도무지 펴지지 않은 채 지극히 차가워진 눈으로 두 신족을 쏘아보았다.
" 지금 감히 신족의 위치로 신인 나에게 책망을 하는 것인가? "
" 그..그런 것이 아니오라..."
" 다..당치도 않으십니다, 아레히스님. 저희는 그저... "
" 닥쳐라.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너희들의 말에 이리저리 참견 받을 사항이 아니다.
너희들은 지금 한가지의 권리에 빠져 전체를 보지 못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감히 신족주제에 신이 하는 일을 지적하는 것인가!
성지로 이동하는 마법진이 너희의 왕국에 있다 하여 그것이 너희 것으로 보이는가 말이다!
정녕 이대로 신의 심판을 받아 지옥구석으로 떨어지고 싶은 거냐? "
" 히이이익... "
휘익~
나도 모르게 작은 휘파람이 나왔다.
박력있는 아레히스라니.. 그동안의 모습으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수확이 아닌가.
존칭을 사용하던 그는 충분히 고고하고 위대해 보이긴 했지만, 언제나 상대방에게 한 수 접어주는 기분이 들었었다.
마치 칭얼거리는 꼬마를 달래기 위해 자신의 사항을 양보하는 어른의 모습 이었달까?
그런데 이렇게 상대방에게 하대를 하는 모습을 보니 과연 역시 신이구나 하는 감탄이 저절로 들었던 것이다.
주위로 퍼지는 고고한 검은색의 오오라에. 날카롭게 뻗어진 차가운 눈빛.
상대방을 찍소리도 못하게 만들만큼 강력한 카리스마를 전신에서 풍기는 당당하면서도 오만한 자태.
얌전한 놈이 화나면 무섭다고 했었지 아마.
감춰둔 본성이 드러난 아레히스는 지옥의 사자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분위기만으로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과연 명계의 신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던 거다.
그 와중에서도 '잘생긴 사람은 뭘 해도 멋져 보이는 구나'..하고
태연하게 생각한 내 속마음을 알았다면 아마 이중에서 가장 대단한 놈은 나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솔직히 이프리트까지 찔끔해있는 현재의 상태에서 나는 스스로가 놀랄 만큼 너무도 태평한 기분이었다.
후에 트로웰이 이 얘기를 듣고 '그게 바로 엘퀴네스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본성(?)'이라고 말해주긴 하지만.
이때 나는 정말 아무생각 없이 분노하는 아레히스의 모습을 무슨 그림 감상하듯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숨막히게 고요해진 신족과 우리 일행들 사이를 보며,
가장 먼저 말을 꺼내 분위기를 전환시킨 것도 나였다.
" 미안합니다. 제 고집으로 아레히스님께 부담을 드렸습니다.
아크아돈엔 되도록 피해가 되지 않도록 성지에서의 용건을 되도록 빨리 마무리짓고 돌아갈 테니,
두 신족분께서 양해를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
" 예..예? 아.. 그.. 그게.. "
그들로서는 아레히스가 설마 이렇게 까지 분노할 것이라 생각지 못했는지 무척 당황한 상태였다.
신족의 신분으로 신에게 무례를 범한 죄는 절대로 가벼운 것이 아닐 터.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심판 받아 지옥으로 떨어질 상황인 것을 내가 짐짓 미안한 척 나서자 그들은
움찔하면서도 은근히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의 등장으로 인해 서릿발같이 차갑게 굳어있던 아레히스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기 때문이다.
" 엘퀴네스님이 사과하실 사항이 아니십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 무례한 신족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니까요. "
오오. 다시 존대말로 돌아왔다!
솔직히 열 받은 마당에 신족이고 정령왕이고 구분 안하고 막말로 나갈 것 같던 아레히스가 너무 쉽게 진정된 듯 해서
마음 한구석에 은근히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아, 그래. 그동안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새침 때고 있었지만, 이래뵈도 나는 남의 불행을 상당히 기뻐하는 녀석이라고.
오죽하면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도 죽은 내 걱정을 하기보다, 날 치어버린 운전자를 더 고소해 했겠는가.
커플훼방놓기 위원회의 회장직을 맡았던 과거로도 지난날의 화려한 전적이 충분히 입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악동 적인 심술이 은근슬쩍 다시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오, 역시 그렇군요.'하고 물러서서 아레히스가 신족들을 압박하는 모습을 더 보고 싶었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초인적인 인내로 참았다.
" 이분들로서는 아크아돈에 문제가 생기면 아레히스에게도 책임이 돌아 갈 테니 걱정이 되어 그런 거겠죠.
그러니 아레히스가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저 때문에 정말 여러 가지로 피해만 끼쳐드리네요.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
" 그렇지 않습니다. 엘퀴네스님에게는 빚이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겪으신 일에 비하면 이 정도의 피해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뭐, 그래도 엘퀴네스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들의 무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
아레히스의 말에 두 신족이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리곤 날 향해 존경과 감동의 눈빛을 새록새록 보내오는 것이.. 어지간히 감격한 모양이다.
아마 속으로 나를 엄청 착하고 친절하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그렇게 생각되니 양심이 찔려왔다. 난 그냥 여기서 더 이상의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는데.
싸움구경도 시간이 남아 돌 때나 재미있는 거지, 지금처럼 한시가 촉박한 상황에서는 시간 끌기 밖에 더 되겠는가?
그러니 그렇게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지 말란 말이야!
다행히도 신족들은 더 이상 내게 시선을 집중시키지 못했다.
마치 그들이 안심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잽싸게 아레히스가 다시 그들에게 말을 붙였던 것이다.
" 레오, 마테르. 두 사람은 이번 생을 살고 나면 하급천사로서의 생을 부여받던가요? "
" 예? 아, 그..그렇습니다. 아레히스님. 이번이 신족으로서 꼭 3번째 삶입니다. "
" 저도 그렇습니다. "
다시 평소대로의 존대말로 돌아온 아레히스의 말투에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한편으론 바짝 긴장한 상태가 되었다.
여기에서 또 무슨 말을 잘못해서 꾸지람을 들을지 모르기에 아까보다 신중을 가하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무엇을 느낀 건지, 아레히스의 눈빛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섬뜩하게 빛났다.
" 이번에 '업'이 생기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되겠군요. 내세의 길을 걷게 될 테니까요. 두 분의 목표는 상급천사입니까? "
" 헉..어..어림없습니다. 저희는 하급천사로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
" (끄덕 끄덕)..."
신족들은 천사가 될 수 있다.
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선 조금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것은 신족으로서의 삶을 3번 이상 거쳐야 하급천사로서 승격이 된다는 것이다.
평균 2만년가까이 사는 신족의 삶을 3번.
신족은 업이 없는 선한 영혼이 가지는 종족이기 때문에,
다음 생에서도 신족으로 태어나려면 절대로 사는 동안 새로운 업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한마디로 만 6만년 가량을 업을 만들지 않고 살아야 비로소 하급천사로서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하급천사로서의 삶을 다시 3번 살면 중급천사. 중급천사의 삶을 다시 3번 살면 상급천사로 승격된다.
상급천사의 삶을 다시 3번 살면 '대 천사장'의 칭호를 받게 되는데, 이때의 천사는 하급신 보다 지위는 낮지만,
주신을 보좌하게 되면서 그와 맞먹는 대우를 받게 된다고 했다.
하급천사의 날개는 두 개이며, 중급은 4개. 상급의 날개는 6개인데. 대 천사장인 천사들의 날개는 무려 8개란다.
아무튼 그 와중에 단 한 개라도 업이 생성되면 이미 천사가 된 신족은 호된 벌을 받거나
다음 등급으로의 승격을 영구히 포기하게 되고,
천사가 아닌 신족들은 변명할 기회도 가지지 못한 채 내세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수명이 사라지는 혜택'을 받는 대 천사장을 제외한, 누구에게나 골고루 적용되는 일종의 규칙이라고 했다.
천사들은 성지의 출입이 허락되어 신들의 일을 돕는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신족과는 엄연히 존재가 구분되어 서로의 영역에 참견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를테면 인간세상의 귀족이나 마찬가지인 직분이었다.
인간세상과 다르다면, 명예는 있어도 혜택이 따르지 않는다 정도..?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건지 대부분의 신족들은 천사의 반열에 오르려 혈안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내 눈앞에서 아레히스의 말에 쩔쩔매고 있는 두 명의 신족도 바로 그러한 신족들 중 하나였다.
그들은 난데없이 '천사'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 아레히스의 태도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거의 새파래진 얼굴로 진땀을 흘려대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못 본 건지,
아니면 보고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아레히스는 여전히 여유 있는 모습으로 태연하게 남들의 심장을
녹일만한 얘기를 지나가는 개 품평하듯 간단하게 털어놓았다.
" 흐음. 그런데 이를 어쩐다. 아무래도 천사가 되기엔 무리겠는데요. "
" 예..예에? 어..어째서요??? "
" 아아.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아시다시피 저는 명계를 관리하고 있는 신이라서 말입니다.
영혼의 업이 눈에 훤히 보이거든요.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두 분의 영혼엔 어떠한 업도 없었습니다만.. "
" 그...그런데요? "
덜덜거리며 불안하게 물어보는 신족들을 아레히스는 미안한 듯이 바라보았다.
옆에서 맙소사.하고 고개를 수그리는 유라우스를 보자니, 그에게도 영혼의 업이 눈에 보이는 모양이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아레히스의 대답에 신족들과 마찬가지로 '도대체 왜?' 라는 의문을 삼키고 있던 나와 이프리트의 입은
저절로 경악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 당신들의 태도에 제가 화를 냄으로서 '업'이 생기고 말았군요.
보통의 신족 끼리라면 화해하는 것으로 금새 소멸될 정도의 사소한 것이었지만..
제가 신인 관계로 '신성모독죄'가 된 모양입니다. 이 일을 어쩌지요? "
" 허어어억!!!! "
" 그...그럴수가.... "
이번이 3번째라는 신족의 삶. 하급천사로서의 승격도 얼마 남지 않은, 고지를 눈앞에 두고 두 신족들은 무너지고 만 것이다!
듣자니 이 두 신족은 반드시 천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새로 탄생하기 전에 마셔야 하는 망각의 물까지 거부하고 6만년의 긴 세월을 모든 기억을 가진 채 살아왔다고 했다.
원래 신족의 경우는 다시 태어나더라도 특별히 전생에서 가졌던 자신의 목표와,
현재의 탄생이 몇 번째인지를 알려주기 때문에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이들은 자신의 각오를 다지기 위해 명계에 몇 번이고 부탁해서 망각의 물을 거부해 왔던 것이다.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것은 바로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세상이 멸망한 듯한 표정이 되어 넋을 잃어버린 두 신족은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두 눈에 금새 눈물이 차 올랐지만 용캐 흘리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에서 이들이 얼마나 좌절하고 상처받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레히스는 이들이 결코 이 상태로 좌절에 빠져드는 것을 묵인하지 않았다.
지금까지가 채찍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당근을 사용할 작정인지 조금 미안한 눈빛을 보내는 아레히스의 말투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 너무 그렇게 실망하지 마십시오.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
".......? "
".........? "
처연한 표정이 된 두 신족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아레히스를 바라보았다.
이런 와중에도 그에 대한 공경심만 가득할 뿐, 눈빛에 원망이라곤 한줌도 자리잡고 있지 않다니..
설명으로 들은 마족과는 또 다른 의미로 대단한 놈들이다.
괜히 6만년이나 신족으로 산 게 아니라는 건가?
그 모습이 만족스러웠는지 아레히스는 뜸들이지 않고 다음 말을 이었다.
그들이 먹을 수밖에 없는 먹음직스러운 당근을 내민 것이다.
"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명계의 신이라서 말입니다. 이미 생성되어 어찌할 수 없는 '업'이라 해도 소멸시켜드릴 수 있습니다. "
" !!! 그..그게 정말입니까?!!! "
" 오오!! 아레히스님!!! "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서서 감동하는 두 신족.
'저게 정말이야?'하는 의심스러운 눈빛을 유라우스에게 보내자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명계의 신들은 임의로 영혼에게 지워진 업을 소멸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될 것을 어째서 저런 식으로 두 신족의 애간장을 녹였단 말인가?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그 이유는 금새 알 수 있었다.
"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두분 정령왕들을 모시고 왔다는 사실을 비밀로 붙여주십시오. 물론, 성지로의 통과도 허락하시고요. "
이때 빛나는 아레히스의 눈빛이 사악하게 느껴진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이것을 노리고 신족들에게 화낸 것일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신의 노여움을 입으면 반드시 '신성모독죄'가 되어 업을 지게 된다고 하니까.
........아레히스의 진정한 위대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아레히스.. 상당히 약았어요. "
후에 이 말을 듣고 아레히스에게 어떤 보복을 당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안 그러면 저 멀리서 하얗게 우리를 배웅하는 두 신족의 얼굴을 영원히 못 잊을 것 같아.
저 무언가에 초월한 것 같은 허무한 표정들을 보자니 양심에 가책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현재 우리는 두 신족의 허락을 받고 왕성 안의 성지로 통하는 마법진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왕궁의 출입인을 기록한다는 서류에는 아레히스와 유라우스의 방문만 기록될 것이다.
고도의 협박술로 이루어진 이른바 '증거인멸' 이랄까?..
서류상으로는 오늘 나와 이프리트는 신계에 들어온 적조차 없게 되었다는 소리다.
" 솔직하게 말해요. 그때 일부러 화낸 거 맞죠? 일부러 업을 지게 만들어서 그걸 빌미로 협박하려던 거였죠? "
" 하하하. 글쎄요... "
나의 추궁에도 불구하고 아레히스는 여전히 태연한 미소로 응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끝말을 길게 늘이는 것을 보아 내 생각이 맞다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어떻게 신이란 자가 신족들을 상대로 협박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우리 때문에 벌어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지만 기가 막힌 기분이 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이거 왠지 멀쩡한 신 하나 망가뜨린 기분이 들어서 영 찝찝하달까..
" 그럴 필요까지 있었나요? 아까 화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통과 시켜줄 것 같았는데.. "
묘한 시선으로 아레히스의 뒷통수를 바라보자 옆에서 따라 걷고 있던 유라우스가 냉큼 끼어들었다.
" 어쩔 수 없답니다. 신족들의 영혼이 선하긴 하지만, 그 부작용인지 뭔지..굉장히 고지식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거든요.
우선은 분노한 아레히스님을 달랠 작정으로 통과를 허락하긴 했겠지만,
그 뒤로 성지의 출입을 관리하는 신에게 당장 보고가 될 겁니다. 이런 식으로 약점을 잡아두지 않으면 뒷일을 감당하기 어렵죠. "
" 그..그래요? 음.. 하지만, 그렇게 고지식하다면 지금이라도 보고하게 되지 않나요? 아레히스가 업을 소멸시켜줬잖아요. "
" 아직 아닙니다. 신이 임의로 소멸시켜주는 업은 영혼인 상태에서만 가능하거든요.
그들은 죽기 전까진 업을 지우지 못 할겁니다. 그러니 뒷 수작을 부릴래야 부릴 수가 없을걸요? "
하아. 그야말로 완벽한 약점을 잡힌 셈이로군.
나는 다시 한번 아레히스의 위대함을 깨닫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가 인간이 아닌 것이 이때만큼 감격스러운 일도 없을 거야, 아마.
마법진이 있는 곳은 왕궁 안의 거대한 홀 가운데였다.
순백색의 고아한 복도를 걸어서 하얀 기둥과 조각상이 장식된 방을 지나자 사방이 탁 트인 넓은 파티 홀이 드러났다.
색색깔의 스테인 글라스에 기둥마다 장식된 갖가지 보석들이 화려한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만들었지만,
예전에 명계에서 보았던 하얀 공간의 홀보다는 멋지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명계에서의 홀은.. 아무것도 없이 온통 하얗기만 했어도 뭔가 숨길수가 없는 위압적인 신비감(?)이 풀풀 풍겨 나왔단 말이야.
그에 비하면 이 왕궁의 홀은 넓고 화려하긴 해도 어딘지 신성하단 분위기가 사뭇 떨어지는 것이다.
성지와 직통으로 연결되는 마법진이 있는 곳치고는, 그다지 점수를 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홀의 가운데에 새겨진 동그란 모양의 금빛 무늬를 보고 나자 싹 바뀌었다.
그것은 유라우스가 걸고있는 목걸의 무늬와 비슷한 모양이었는데,
넓은 금빛의 테두리에 화려한 별모양과 여러 가지 도형들이 새겨진 그림이었다.
마치 그림 자체가 빛을 내뿜고 있는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무늬는 흡사 별가루라도 뿌려놓은 것처럼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이 넓은 공간이 오로지 이 금빛무늬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라면.. 내가 너무 오버하는 걸까? 하하.
멋쩟게 웃는 나를 보고 의문 어린 눈빛을 보내는 유라우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에 간단하게 내가 생각했던 것을 반 장난스럽게 말하자 그는 뜻밖의 사실을 알려 주었다.
" 바로 보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지로 통하는 마법진이지요. 이 홀 전체가 저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엘퀴네스님이 생각하신 것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
" 허걱. 저게 마법진이었나요? "
" 예에. 이제 저 위에 올라서시면 바로 성지로 이동 될 것입니다. 마법진을 이용한 공간이동은 처음이신 가요?
하긴, 아직 인간 세상에 소환되신 적 없으시죠? "
".........? "
마법진의 이동이 처음인 것 과 인간 세상에 소환되지 않았던 게 무슨 상관이 있나?
진지하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여 혼자 납득하는 유라우스를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이프리트가 그 의문을 해결해 주었다.
" 정령들이 인간계에 소환될 때는 마법진이 뜨거든. 너도 언젠가 경험하게 될 거야. "
" 흐음... "
언젠가 경험하게 될 거라.. 그럼 지금은 굳이 염두에 두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뜻이렸다?
그래서 나는 그 문제를 그냥 가볍게 넘겨버렸다.
어차피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될 일을 지금 머리 싸매고 고민해서 알아봤자 이득이 될게 전혀 없겠다는 생각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우리는 곧, 아레히스의 재촉에 따라 마법진에 다가갔고, 서로의 눈치 볼 겨를 없이 사이좋게 마법진에 올라섰다.
파아앗.
금빛의 무늬는 우리가 그 위에 올라서자마자 앞도 제대로 안보일 만큼의 엄청난 빛을 뿜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득한 현기증. 발 밑의 허전함과 함께 짧은 추락감을 느끼며 내 몸은 잠시 어지러움에 휘청거렸다.
그러자 옆에서 단단히 부축해 주는 손길이 느껴진다. 누구?
살짝 찡그린 얼굴로 도와준 사람을 보자 유라우스가 유난히 붉어진 얼굴로 내 허리를 팔로 지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알자마자, 나는 곧 주변의 풍경이 확연히 달라진걸 깨달을 수 있었다.
왕궁의 홀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백합 향이 진동하는 흰색 꽃 일색의 정원 한가운데에 서있는 우리를 발견한 것이다.
" 여..여기가 .. 성지? "
" 아아.. 사실 저 마법진은 랜덤이라서요. 성지의 아무 곳이나 무작위로 텔레포트 시키는 것이라..
어디로 떨어지게 될지 아무도 모르죠.
이 백합정원이라면.. 꽃의 하급여신인 '프라워스'님의 정원 같은데..
엘뤼엔님의 영역에서 그다지 멀지 않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어떤때는 만 하루를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의 장소에 떨어지기도 하거든요. "
아레히스의 설명에 입이 뜨억하게 벌어졌다.
마법진이 랜덤? 아무 곳에나 무작위로 떨어진다고??? 대체 어째서 그딴 것을 만든 거야!!
지금 보니 이프리트의 표정 역시 상당히 요상하게 찡그려져 있었다.
나보다 훨씬 오래 살았을 녀석인데도 이런 상황은 똑같이 금시초문이었던 거다.
" 하..하하.. 어째서 그렇게 불편한... "
" '마법'분야의 '이동'에 관련된 것을 담당하신 상급신 '하이튼'님이 워낙 괴짜라서 어쩔 수 없답니다.
그분의 소소한 장난거리 중 하나죠. 그 바람에 다른 신들에게 박해를 당하고 계시지만.. "
박해를 당해도 싸다~~!. 그 순간 나와 이프리트가 마음속으로 동시에 외친 생각이었다.
아무리 괴짜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성지로 연결되는 마법진을 저따위로 만들 수가 있단 말인가.
오늘이야 운이 좋아서 엘뤼엔의 영역과 가까운 곳에 떨어졌다지만,
만약 아레히스 말처럼 하루 걸어서 도착할 장소에 도착했다면 어쩔 뻔했냐고!!
그리고 동시에 전 엘퀴네스라는 엘뤼엔에 대한 새로운 궁금증이 생겼다.
지금 보니 신들은 자신이 맡은 차원 외에도 한가지의 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를테면, 꽃의 여신이라던가 마법의 신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엘뤼엔은 어떤걸 담당하고 있는 거지?
나는 나의 궁금증을 가장 간결하고 빠르게 해결해줄 대상-아레히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저기, 아레히스. 전 엘퀴네스라는 엘뤼엔은 지금 어떤 담당의 신인가요? 지금 보니 신들마다 맡은 분야가 있는 것 같은데..
꽃의 신이라던가, 마법이라던가..하는.. "
" 으음. 그게 궁금하십니까? "
그러자 이제껏 담담하던 아레히스의 표정에 미미한 동요가 일었다.
뭔가 꺼림직 하면서도 말해줘야겠단 사명감이 깃 든 복잡한 표정이랄까?
그 옆엔 내 질문에 덩달아 긴장한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이프리트의 부담스럽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있었다.
그것을 잠시 비장하게(?) 마주본 아레히스는 뭔가 체념한 듯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곧 '각오하고 들으십시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시작으로 입을 열었다.
" 엘뤼엔님이 담당하신 차원이 '바이톤'이라고 했던걸 기억하십니까? "
" 아, 예. "
" 바이톤은 말입니다.. 마계와 유일하게 공간이 연결되어있는 차원입니다. 정령계와 연결된 아크아돈과 마찬가지지요.
당연히 마족들이 가장 자유롭게 왕래하는 차원이 되어, 현재는 제 2의 마계라고 칭해지는 곳이랄까요?.. "
" 헤에..."
" .... 몇몇 상급신들이 담당하셨다가 몇 년도 안돼서 포기했던 차원이죠."
" .......에? "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지? 신들이..포기했던 차원이라고?
멍청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곳엔 우는지 웃는지 모를 애매한 표정으로 나와 이프리트를 바라보는 아레히스가 있었다.
" 마계의 상급신은 2명입니다. 지옥의 신인 '크라제'님과, 마계의 신인 '카노스'님이시죠.
말씀드리지만, 이 분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신도 마계를 감당하지 못했었습니다.
워낙에 성정이 난폭한 마족들이라, 그들을 돌보다 보면 하루에도 몇 십 번씩 울분을 참지 못해 쓰러지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런데 이런 마족들이 판치는 또하나의 '마계'가 등장한겁니다. 그것이 바로 '바이톤'이죠. "
" 꿀꺽... "
" 아무리 마신이라 하여도 마족들을 살피는데는 한계가 있고,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 마족들을 일일이 관할하기는 어려운 일이죠.
그래서 대부분 자신들이 담당하는 차원의 존재가 타 차원으로 넘어갔을 경우,
그 처분은 그쪽차원의 상급신에게 넘겨주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바이톤은 말씀드렸다시피 또 하나의 마계로 불릴 정도로 마족이 많아서 말입니다. 보통 신들이 감당을 못하는 것이 당연하죠.
어떤신은 열 받아서 차원을 아주 소멸시키려고 벼르기까지 했다니까요. "
" 아하하... "
그런데 그런 엄청난 차원을 전 엘퀴네스가 담당하게 되었단 말인가? 맙소사.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만남엔 악운이 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프리트의 안색도 하얗게 질린 것이..
그리워하는 님이 엄청난 위험에 매일같이 시달리고 있다는 것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이제 겨우 상급신이 된지 얼마 안 된 엘뤼엔이 감당하기엔 너무 무모한 차원이었던 거다.
" 에..엘뤼엔은 괜찮은 건가요? "
" 하아.. 왠지 엄청 위험할 것 같은데... "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리는 말에 아레히스가 씨익.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보았다.
" 전 엘퀴네스의 새로운 이름인 '엘뤼엔*크리노*루사테'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
... 알 리가 있나.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자신에 가득 차있는 듯한 태도에 나와 이프리트는 서로를 마주보며 점점 더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어갔다.
" 엘뤼엔은 신어로 '파괴시키다'란 뜻입니다. "
" 허억? "
" 크리노는 '심판하다'.. 루사테는 ' 헐다'. 또는 '파멸시켜 죽이다'..라는 뜻이지요. "
" !!! "
" 한마디 참고하자면, 현재 마족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신은 마신들이 아니라, 바이톤의 '엘뤼엔' 이라는 소리가 있습니다. "
할말을 잃고 우어어 거리는 우리를 보며 아레히스는 피식 웃었다.
" '형벌'의 신인 엘뤼엔님에게 '바이톤'보다 적절한 차원이 없다고 판단하신 건 주신의 뜻입니다.
그러니 두 정령왕들께서는 그 분을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
"........."
그리고 나와 이프리트는 찍소리도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형벌? 하하... 그래, 형벌... 형벌의 신이라 이거지.... ....
문득 옆을 보니 이프리트가 '그 녀석이 그럼 그렇지' 라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 나.. 그녀석이랑 만나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전 엘퀴네스가 형벌의 신이 되었다는 소리를 들은 이후부터 나의 걸음은 지독히도 느려지기 시작했다.
내가 자처해서 들어온 길이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영 내키지가 않은 만남이었던 것이다.
아크아돈을 비우고 왔다고 뭐라고 하면 어쩌지? 이번엔 아레히스처럼 그저 엄한 훈계정도로 끝날 것 같지 않은데.
휴우. 강지훈. 넌 왜 사서 고생하는 거냐, 응? 아주 무덤을 팠구나, 팠어...크흑.
하지만 이런 우울한 내 마음과는 별개로
이미 우리들은 처음 도착했던 장소인 백합정원을 지나서 크고 웅장한 기둥으로 받쳐진 넓은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내가 두 팔로 감싸도 다 끌어안지 못할 만큼의 큰 기둥들이 곳곳에 세워져 높은 지붕을 받치고 있는 형식의 건물은,
기둥에 새겨진 조각이나 장식을 포함한 모든 것이
흡사 그리스로마 시대의 신전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바닥의 색은 투명한 하얀색, 가끔씩 피부 위를 스치는 실바람엔 아까 정원을 스치면서 맡았던 향기로운 백합 향이 묻어있었다.
나는 낯선 곳에 들어오는 이가 흔히 그렇듯, 주위를 천천히 두리번거리면서 아레히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 여기가 어디예요? "
" 엘뤼엔님이 거처하시는 성입니다. 집무실과 생활관이 같이 포함된 신전이지요.
신들은 각기 성지에 자신만의 신전을 가지고 있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명계에 거의 살다시피 하느라 있으나 마나한 곳입니다만. "
" 그..그럼 엘뤼엔이 지금 여기 있는 건가요? "
" 아마도 그럴걸요? 하급신들이라면 몰라도 일단 상급신들은 맡은 일이 너무 많아서 자리를 쉽게 뜨기 힘드니까요.
아마 집무실에 계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
그의 친절한 대답에 이프리트의 전신이 바짝 굳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조금 있으면 엘뤼엔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생각보다 무척이나 떨리는 모양인지,
아까부터 전혀 안정을 못하고 있는 이프리트의 표정은 거의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왠지 저러다 '나 그냥 돌아갈래'라고 대뜸 억지를 부릴 것 같은 모습이랄까?
그러나 다행히도 이프리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돌아가고 싶어져서 문제였지. 음....
조금 복도를 걸어가다 보니 막다른 곳으로 커다란 문이 드러났다.
상아색의 양손이 달린 문 두 개에 금빛으로 빛나는 테두리. 그 위에 작은 팻말로 처음 보는 글자가 가지런히 적혀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오늘 처음 보는 생판 낯선 글자임에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그것이 뜻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집무실>
오오, 여기가 엘뤼엔의 집무실? 뭐야. 생각보다 빨리 찾았네? 운이 좋은가?
" 헤에.. 다 왔나 보네요.. "
" 그렇군요. 그럼 이제 노크를 할까요? "
" 으악!! 자..잠깐만!!! "
너무 쉽게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멍하니 하는데, 마침 노크를 하려는 아레히스의 손을 막는 이가 있었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새빨개진 얼굴로 간신히 서있는 것 같은 이프리트가 덜덜 떨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의 행동과 전혀 매치가 안 되는 그 모습에 나는 웃음이 나오는걸 참지도 못하고 얼떨떨하게 입을 열었다.
" 풋....뭐..뭐야, 이프리트..지금 긴장했어? "
" 시끄럿!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긴장을 안 할 수 있어?
우리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라지만 그래도 15년이나 못 봤었단 말이야.
거기다 저쪽은 신이래잖아, 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줘야 할거 아냐? "
" 흐음. 의외네. 이프리트라면 당장 문 열고 들어가서 '어이~ 나왔어!' 하고 외칠 줄 알았는데. "
" 뭐야? 이래뵈도 나 역시 감수성이 풍부한 정령이라고! 누굴 그런 무대포로 보는 거야, 지금? "
" 흐음. 투닥이시는 걸 보니 긴장이 다 풀리신 모양인데요? 그럼 문을 열고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
아아 역시. 대단한 아레히스. 이프리트의 입을 단 한번에 다물어 버리게 하다니. 과연 존경할만한 지고.
하지만 이프리트와의 짧은 대화는 마찬가지로 긴장하고 있던 내 마음도 상당히 풀어지는 효과를 일으켰다.
나만 떨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걸 알아서 그런지 조금 해 볼만 해졌달까?
그래서 인지 나는 그 이름도 용감 무식하게 겁도 없이 집무실의 문을 열어보는 무모함을 보였던 것이다.
" 으아악!!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
" 쉿! 그냥 살짝만 열어보는 거야. 안에 무슨 상황인지를 먼저 알고 들어가는 것도 괜찮잖아? "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랬다고!
엘뤼엔이 우리의 적 인 건 아니지만 어쨌든 알아놔서 나쁠 게 없는 대상인 이상,
현재 안이 어떤 상태인지 몰래 살펴보는 것도 꽤 괜찮은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운 나쁘게 뭔가 중요한 회의를 하는 중에 들어가게 된다면 반기기는커녕 크게 혼쭐만 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런 내 생각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레히스도 재미있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군요. 이런 편이 긴장을 푸는데도 도움을 줄지 모르지요. 상황이 나쁘면 몰래 빠져나가기 편하고 말입니다. "
" 으으음.. "
아레히스까지 그렇게 인정하고 나자 이프리트도 마지못한 듯 동조의 빛을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사냥꾼이 몰래 염탐하는 것처럼 문 옆에 바짝 기대서서 안에서 들려올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손잡이를 돌리자 소리도 없이 스윽하고 열리는 문 틈 사이로 네명의 눈동자가 호기심에 반짝 빛을 내뿜었다.
안의 공간은 문틈으로 얼핏 보는 건데도 상당히 넓어 보였다.
따사로운 햇살을 그대로 여과 없이 투과시키는 창문과 부드러운 실크의 커튼. 한쪽벽면에 자리잡은 테이블과 소파.
그리고 서류가 산처럼 쌓여 위태롭기 그지없어 보이는 넓은 책상이 보였다.
그 책상에 기대어 무언가를 열심히 흩어보는 한 사람을 발견한 순간,
나와 이프리트의 숨이 동시에 멎었다는 것은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거이라 생각된다.
그의 머리카락은 등을 타고 내려올 만큼 긴 눈부신 백금발이었다.
입고있는 하얀색 옷과 마찬가지로 햇살을 받아 더욱 투명하게 빛나는 모습이 무척이나 신비롭고 고아해 보였다.
조각해놓은 것 같은 수려한 턱선과 섬세한 손가락이 자칫 여자 같다는 느낌을 주었으나,
강한 눈매라던지 다부진 어깨가 위풍당당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어 금새 그런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레히스만큼 아름답게 생겼지만. 그처럼 느끼하다는 인상은 받기 힘들었다. 아레히스의 인상이 부드럽고 유약하다면,
저 사람(?)은 좀더 정제된 느낌이랄까? 날카롭게 다져진 분위기랄까. 뭐, 암튼 그랬다.
냉철한 꽃미남이란게 바로 저런 이미지를 두고 하는 말일테지. 왠만한 여자보다 훨씬 아름다웠지만,
절대로 여자라고 볼 수는 없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잠시 감탄의 눈으로 바라본 나는 옆에서 나와 같이 몰래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프리트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 어때? 엘퀴네스 맞아? "
" 으응.. 머리색깔이 달라졌지만.. 맞아. 틀림없이 녀석이야. "
힘들게 고개를 끄덕인 이프리트는 그렇게 대답한 후 다시 정신 없이 엘뤼엔의 모습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마 그 직후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뛰어가 엘뤼엔을 끌어안고도 남을 만큼 절박함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가? "
" ....입니다. "
" 응? 누가 또 있었나? "
"....!! "
엘뤼엔을 발견한 탓에 주변을 더 자세히 둘러보지 못했더니 이런 복병이 존재했을 줄이야.
집무실 안에는 엘뤼엔 혼자만 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바짝 긴장한 채 안을 살펴본 우리는 곧 어렵지 않게 엘뤼엔 앞에 서있는 또 하나의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강한 오렌지 빛을 머금은 긴 금발에 수려한 외모.
드레스처럼 바닥에 끌리는 통이 큰 옷을 입은 그는 어깨에 그의 몸집 만한 4개의 커다란 하얀색 날개를 매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와 이프리트가 흠칫 하고 놀라자 아레히스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중급 천사로군요. 아마 엘뤼엔님의 일을 돕는 수행천사 일겁니다. 무슨 보고중인 것 같은데요?
아까 노크하지 않기를 잘했던 것 같네요. 일하시는 중이었군요. "
" 아.... "
그러고 보니 천사들은 신의 일을 돕는다고 했었지. 날개 달린 사람(?)은 처음 봐서 적응이 안 되는 구만.
저렇게 큰 날개를 등에 매달고 있으면 무겁지 않으려나?
내가 잠시 쓸데없는 호기심을 가지는 사이, 안에서는 엘뤼엔과 천사의 대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 그래서 신전에 청원을 넣었다? "
" 예, 그렇습니다. 엘뤼엔님. 그들은 이번 문제의 가장 빠른 해결책을 당신으로 보고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
" 흠. 무슨 문제였지? "
건성건성 대답하는 엘뤼엔의 목소리엔 작게나마 짜증이 섞여있었다.
그다지 흥이 가지 않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하는 것이 귀찮았는지,
들고 있는 서류의 검토도 한눈에 대충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보고하는 천사는 의례 당연히 그래 왔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계속해서 그가 원하는 대답을 늘어놓고 있었다.
" 두 어미가 있습니다. 한 여자는 아이를 낳은 어미이고, 또 다른 여자는 아이를 길러준 어미이지요.
친 어미는 불의의 사고로 아이를 잃어버린 이후 계속해서 행방을 찾아왔고,
양어미는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를 데려다가 제 자식처럼 키웠습니다.
그리고 근래에 들어 친 어미가 드디어 아이를 발견해 낸 것이죠. "
" 유치하군. 그래서? "
" 두 어미 모두가 아이를 너무 사랑하여 서로에게 내주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변의 동정도도 비슷한데다 아이의 입장도 애매해서 섣불리 한 사람의 편을 들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민 끝에 이 문제의 해결을 신에게 맡기기로 하고 신전을 찾았습니다. "
" 호오. 그 신전이 하필이면 내 신전이라고? 그것들은 대체 형벌의 신을 뭘 로 보는 거야?
내가 무슨 재판의 신이라도 되는 걸로 착각하는 거 아니야? 귀찮게 됐군. "
짧게 투덜거린 엘뤼엔은 살풋 인상을 찡그리며 이마를 덮었던 머리카락의 일부를 가볍게 쓸어 올렸다.
그 모습이 무지 멋있어서 이프리트의 얼굴이 다시금 빨개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나저나..상당히 골치 아픈 문제네. 천사의 말마따나 누구 하나 섣불리 편들어 주기 어려운 상황이잖아, 이거?
누구 한사람이라도 나쁜 인간이었다면 처리하기도 쉬웠을 텐데, 이 경우는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아이도 어찌해야할지 몰라하는 것 같다니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것 아닌가?
엘뤼엔은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떤 식으로 해결할 생각이지?
명 재판관의 현명한 판정을 기다리는 사람 마냥,
잠시 나는 두근두근한 가슴을 부여안고 이 흥미진진한 상황이 어떻게 해결이 될지 몹시 기대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엘뤼엔의 첫인상이 무척 호감이 있던 탓이었는지,
이때의 나는 그가 '형벌의 신'이라는 것과 '마족'이 가장 무서워하는 신으로 꼽히는 존재라는 소릴 들었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상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은 그러한 기대를 가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셋 다 죽여. "
" 예? 하지만.. "
" 서로 아이는 죽어도 포기 못하겠다!? 그럼 죽어야지. 그리고 스스로 부모를 선택하지 못하는 멍청한 놈도 살 자격은 없다.
그냥 죽여. 아니면 분쟁의 시발점이 된 아이만 죽기를 원하는 건가? "
" 그..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
" 그럼 그냥 잔말말고 죽여라. 신의 심판을 받아 죽는 거니 반드시 지옥으로 떨어지겠지.
그 속에서 저 살 궁리 하다보면 그런 시덥지도 않은 일로 고민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거다.
어차피 인간이란 다 그런 생물이야. 자기들 욕심밖에 모르는 이기심 덩어리니까.
위기가 닥치면 가장 사랑한다고 여기던 것도 외면하는 법이지.
이러니 저러니 감정싸움에 매여있어도 결국은 다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법이니까. "
" 알겠습니다, 엘뤼엔님. "
커허헉, 정말로 그 셋을 다 죽인다고?
엘뤼엔의 그 파격적인 판정은 우리 일행 사이에 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충격으로 한마디도 못하고 얼이 빠져버린 나와, '역시..저놈은..'이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이프리트.
지옥에 갈 영혼이 또 늘어 곤란하다는 아레히스와 저 영혼을 인도하게 될 저승사자를 위해 기도하는 유라우스.
대체.. 대체 저 놈의 사고방식은 어떻게 되어먹은 거야!!!!!
그 순간 나는 현재의 상황도 잊고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말았다.
갑자기 등장한 낯선 이의 모습에 엘뤼엔이 의아하게 돌아보는 것이 보였지만, 이때의 나는 뒤에서 혼비백산하는 일행들도,
내 목적이 무엇인지도 까맣게 잊은 채 당당하게 소리쳤다.
" 인간의 생명이 무슨 벌레인줄 알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네 마네..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어!!!!"
엘퀴네스의 장-7. 새로운 시작
< 이놈의 자식, 죽어라! 죽어!! 빨리 죽어서 그 재수 없는 면상 좀 내 눈앞에서 꺼지란 말이야!!!>
< 대체 왜 이래요! 내가 뭘 잘못했는데!!!>
< 아니, 그래도 이놈의 자식이? 네가 뭘 잘못했냐고? 오냐, 그래 알려주마!! >
< 넌 태어난 것 자체가 죄였어!!!!! >
" 으으음..... "
정신이 대략 몽롱해지고 눈앞이 뿌연 것이.. 잠시 꿈을 꾸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이상하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힘겹게 눈을 뜨자, 새하얀 천장에 다이아를 박은 듯한 샹데리아가 보였다.
.....여기가 어디지?
자다 일어나서 그런가.. 조금 전에 무슨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 정령계가 아닌것 만큼은 확실한데 말이야.
내가 왜 여기 있는거지?
정신을 차려보려 고개를 흔들었지만 여전히 기억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알수 있는 거라곤, 생판 처음 보는 낯선 방안에 내가 누워있었다는 것 정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자 찌릿찌릿한 엄청난 통증이 전신으로 퍼졌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과는 비교도 할수 없을 만큼 아픈 고통에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꼭 아버지한테 붙들려서 흠씬 두들겨 맞고 난 다음날 같은 것이... 이래서 그런 꿈을 꾼 건가?
꿈에서의 나는 중학교1학년 때의 모습이었다. 평소처럼 어김없이 이어지는 구타에 이제 익숙해질 만도 했건만,
그날따라 이상하게 억울한 기분이 들어서 처음으로 반항을 시도 해보았던 날.
그때 되돌아온 아버지의 마지막 한마디에 그대로 굳어버려 이후로 반항이란 건 생각해 본적도 없었는데..
이제는 다시 경험할 일이 없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지난날의 불쾌했던 과거가 꿈이라는 수단을 이용해서 다시 나를 괴롭힐 줄은 몰랐다.
아무리 새로운 육체를 얻었어도, 전생을 기억하는 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걸까?
상당히 무뎌져있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조금 아프다고 금새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한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다 퍼뜩 떠오르는 생각.
내 몸이 왜 이렇게 아픈 거지?
' 흠.. 멍든 것 같지는 않은데 여기저기 상당히 쑤시네. 흠씬 얻어터진 것 같기는 한데 말이야.
이래봬도 정령 왕인 내게 대체 누가 이런 짓을? '
그러고 보니 전 엘퀴네스를 찾기 위해 아레히스의 도움을 받아 신계에 왔었던 것 같다.
왕궁 문을 지키는 신족들과 작은 트러블이 있긴 해지만 아레히스의 재치(?)로 무난히 상황을 넘겼었지.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엘뤼엔이라고 하는 전 엘퀴네스가 사실은 형벌의 신이라는 것.
그 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았던 이후의 일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 뭔가 엄청난 일이라도 있었었나?..으으 어디 보자. 아, 그래. 엘뤼엔의 신전까지 들어갔었던 것 같은데..
집무실도 엄청 쉽게 찾아서 운이 따라준다고 생각했었고. 몰래 문을 열어서 안을 살펴봤었던가? "
그래. 그랬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나자, 묶어뒀던 보따리가 풀어지듯 그 다음 상황이 자연스럽게 머리 속에서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어째서 잊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도 선명하게.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인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엘뤼엔의 모습에 화가 난 나는 대책 없이 문을 열어젖히고 화를 냈었다.
인간의 생명의 무슨 벌레인줄 알어? 함부로 죽이네, 마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어!' 라고 외쳤던가?
그래서 나는 의례 그가 낯선 이의 등장에 당황하거나, 침착한 상태로라도 ' 넌 뭐야? 누구지?' 라고 물어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엘뤼엔은 그런 상식적인 반응들을 싹 무시한. ' 네가 왜 여기 있지?' 라고 말했던 것이다.
마치 오랜 시간을 알아왔던 상대가 우연히 자신을 찾아온 것처럼.
정령계에 있어야 할 내가 어째서 이곳에 있느냐고 묻고있는 듯한 눈빛에
처음엔 내가 아니라 이프리트를 보고 있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틀렸다는 걸 증명이라도 듯,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 엘뤼엔의 시선을 보고서야 그가 한눈에 내가 엘퀴네스임을 알아봤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신족들도 나와 이프리트가 정령 왕인걸 알아봤었지.. 도대체 어떻게?
내가 그렇게 물의 정령왕인게 티 나게 생겼나??
정령 왕들마다 특유의 기운이 있다는 걸 아직 몰랐던 내가 예상 밖의 상황으로 움찔하는 순간,
냉랭한 표정의 엘뤼엔의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 돌아가라. "
" 아니..뭐.. 그렇지 않아도 잠깐만 보고 갈 생각...이 아니라! 잠깐 기다려!!
쓸데없는 참견이긴 하지만, 네 판정에 항의하고 있잖아! 그런데 아무런 변명도 안 할 생각이야? "
" 변명? 누가? 그들이 원해서 내린 판정이다. 그런데 왜 내가 그것에 변명을 해야하지? "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대꾸한 엘뤼엔은 들고있던 서류중의 일부를 거칠게 책상위로 던져놓았다.
그리곤 한낮의 햇살을 그대로 머금은 창문을 흘낏 보더니 앉아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 그들이 원한 건 두 사람중의 한 명이 아이를 키울 수 있게 되는 거였잖아. 셋 다 죽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
" 그거야 내가 알 바 아니지. "
" 헉... "
순간 ' 뭐 이런 싸가지가~~ '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솟구쳐 올랐지만 필사의 의지로 억눌렀다.
내가 이곳에 저 녀석이랑 싸우러 온 것도 아닌데 지금 여기서 뭐라고 땍땍 거려 봤자 이프리트에게 좋을 게 하등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게다가 아직 정령 왕의 자각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형벌의 신'인 엘뤼엔의 상대가 될 리도 없었고 말이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그렇게 말할 시간이 없었다는 표현이 적당하겠다.
텔레포트라도 한 건지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코앞으로 다가온 엘뤼엔이 내가 미처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음산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던 것이다.
" 난 분명히 돌아가라고 했다. 그 경고를 어긴 건 너야. 그러니 원망하지 말도록. "
" 엥? "
그 직후, 나는 엘뤼엔의 손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는 것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엄청나게 아픈 것 같은 느낌, 전신에 몰아치는 뜨거운 바람을 느끼며 내 의식은 점차 몽롱해져갔다.
얼핏 비명을 지르는 이프리트와 다급한 아레히스의 목소리가 들린 듯도 했으나,
거의 희미했기 때문에 내가 제대로 들었던 건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기절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나는 쑤시는 몸도 무시한 채 거칠게 이불을 제치고 침대 위에서 내려섰다.
말도 한마디 없이 갑자기 사람을 공격해서 기절시키다니..뭐 그딴 놈이 다 있어!!
기억나는 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눈부신 빛과 몽둥이로 타작 당하는 것 같은 아릿한 통증뿐이었지만,
마지막의 엘뤼엔의 말에서 녀석이 나를 때린 게 분명하다고 나는 확신했다.
뭐? 분명히 돌아가라고 경고했어? 그걸 어긴 건 나니까 억울해 하지 말라고???
너 같음 그런 말 듣고 나서 기절하면 '아. 제가 잘못했습니다, 전 맞아도 싸요..' 이러겠냐!!!
준수한 외모 덕에 엘뤼엔에게 쌓였던 처음의 호감은 이미 씻은 듯이 사라진 후였다.
아마도 그렇게 기절시킨 뒤에 신전의 아무 방에나 던져놓은 모양인데~ 만나기만 해봐라!! 기필코 절단 내고 말겨!!!!
" 아, 엘퀴네스님!! 정신이 드셨습니까?? "
얼마나 씩씩거리고 있었을까..
전신에 엄습하는 통증에 이를 악물던 내가 문득 회복능력을 떠올리고는 부리나케 치료에 들어가는 순간,
갑자기 문이 벌컥-열리더니 유라우스의 얼굴이 빼꼼이 내밀어졌다.
그는 내가 일어서서 스스로 치료하고 있는 모습을 조금 멍하니 바라보더니,
곧 무지무지 반가운 표정으로 허겁지겁 방안으로 뛰어들어왔다.
" 걱정했습니다. 아무리 깨워도 도무지 일어나실 생각을 못하시기에..이러다 정령계로 강제 송환 되는 게 아닌가 얼마나.. "
" 강제송환? "
" 모르셨습니까? 정령들은 정령계를 벗어나면 일단 실체가 없어지거든요. 외부의 공격을 받아 소멸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정령계로 강제 송환되는 겁니다.
목숨이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상황에 처하면 본능적으로 정령계로 송환되게 되어있어요. "
" 실체가 없다뇨? "
" 정령이 육체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정령계 뿐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마나를 이용하여 겉모습만 투영하는, 어디까지나 임시모습에 지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정령계가 아닌 곳에서는 아무리 공격을 받아도 상처를 입거나 죽지 않지요.
그나마 4대차원에서는 모습이라도 투영할 수 있지,
보통의 인간계에서는 '소환'이 되어 계약을 맺지 않는 한,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평범한 인간들이 계약을 하지 않은 자연계의 정령을 보기는 무척 힘들다고요. "
아마 내가 지금 이 상태로 아크아돈의 인간계에 가게되면, 사람들은 내가 바로 옆에 있는지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4대 차원의 마나는 인간계에 비해 그 성질이 온순한 편이라 누구나 마음껏 다룰 수 있는데 비해,
인간계의 마나는 굉장히 거칠고 난폭해서 그것을 다룰려면 누군가 매개체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령들은 인간세상의 종족들과 계약을 맺어,
자신의 모습을 인간 세상에 투영시킬 수 있는 마나를 제공받는 대신 그들이 원하는 일을 도와 준다고 했다.
" 그렇다고 모든 종족이 다 정령과 계약을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반드시 정령을 '소환'해 내는 존재만이 가능하지요. 굳이 '소환'형식을 거치는 건,
정령과 계약을 할 자가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지를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정령을 무사히 세상에 투영시킬만한 마나와 자연친화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거랄까요?
이것은 상급정령으로 올라갈수록 훨씬 많은 수치를 요구하죠.
그래서 보통의 존재가 정령왕의 존재를 소환하기는 하늘의 별을 따내는 것보다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
" 보통의 존재..라고 하면? "
" 별다른 특징이 없는 평범한 인간. 혹은 능력수치가 높은 종족이더라도 본인의 실력이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또는 아이들입니다. 드래곤의 헤츨링 같은 경우가 가장 적절한 예이지요. "
으음. 평범한 인간은 정령왕을 소환해 내기 힘들다는 건가.
이거 참.. 이왕 소환될 거라면 인간과 계약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그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군.
상상의 존재로만 알려져 있는 드래곤을 만나 보는 것도 나름대로 굉장할지도.
모처럼 유익한 지식을 습득했다며 만족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지금 내 앞에 유라우스와 함께 나타나야할 존재들이 없음을 깨닫고, 의아한 눈을 들어 유라우스를 바라보았다.
"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요? 이프리트나 아레히스는? "
" 아, 그분들은 지금 엘뤼엔님과 면담중이십니다. "
" 면담? "
그러니까 유라우스 말에 의하면, 내가 엘뤼엔의 공격을 받고 기절한 직후,
그 장면을 목격한 한정령왕과 중급신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엘뤼엔에게 달려들었다(?)고 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천사가 엘뤼엔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고,
이에 열 받은 이프리트가 당장 불의 검을 소환해서 녀석에게 들이댔으며,
그것을 막느라 진땀 흘리는 아레히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쓰러진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느라 동분서주한 유라우스로
인해 집무실안이 상당히 난장판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흘리는 말이, 이프리트가 화냈던 것이 엘뤼엔이 나를 공격해서라기 보단,
그 천사가 엘뤼엔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인 것 같다고 했다.
일단 중성이긴 하나 빼어난 미인인 만큼, 질투심을 느낀걸 거랄까나?
" 뭐, 그래봤자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못 가지긴 하지만,
몇몇 신들이 천사들과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억측이라고 볼 수는 없지요. "
" 엥? 신인데 아이를 가진다고요? "
" 신은 성별이 있으니까요. 남신과 여신으로 나뉘지요.
두 상급신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는 능력차이에 따라 중급신과 하급신이 됩니다. 모르셨어요? "
허걱. 몰랐다. 신들이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는다니.
" 그..그럼 아레히스도 누군가의 아이..라는 거예요? "
" 아~ 그건 아닙니다. 신이 되는 경우는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서 중급신은 주신께서 애초부터 중급신으로 태어나게 한 경우와, 두 상급신 사이의 결합에 의해서인 경우죠.
아레히스님은 주신께서 처음부터 중급신으로 창조하신 경우입니다.
남신이니까 누구 다른 여신과 결혼하시면 하급신을 낳을 수는 있겠지 만요. "
" 하하.. 그..그래요? 그럼 상급신은 어떻게 되는 건데요? 설마...주신이 결혼해서? "
얼떨떨하게 웃으며 질문하자 유라우스가 금새 정색을 하며 얼굴을 굳혔다.
주신이 결혼하다니..절대 그런 일은 없다나?
상급신은 주신이 신으로서 창조한 순결한 영혼이, 정령왕의 직분을 거치고 나야 받는 직위라는 것이다.
정령왕의 직분을 거치지 않은 존재는 아무리 애를써도 절대 상급신의 위치를 받을 수 없다고했다.
그 설명을 들은 나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 역시.. 엘뤼엔이 괜히 상급신이 된 게 아니라는 거네요, 그럼. "
"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으십니까? 아무리 실제적인 형체가 아니라 공격을 받아도 상처가 생기지 않는다지만,
신력에 의한 직접적인 손속이었던 만큼 고통이 상당하셨을 텐데요. 그것 때문에 지금 이프리트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
호오? 이프리트가 내 걱정을 다 했다고?
생소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녀석이 이젠 걱정씩이나 해주는 단계로 승격을 하다니.
세상 살고 볼 일이라는 걸까?
나는 문제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생긋 웃었다.
또다시 유라우스의 얼굴이 붉어지긴 했지만 그거야 원래 그랬던 녀석이니 그랬다 치고. 문제는..
" 엘뤼엔과 면담중이라니.. 이프리트와 아레히스..괜찮을까요? "
" 아..괜찮을 겁니다. 저도 그 분들과 함께 하던 중에 엘퀴네스님의 상태가 걱정되어서 혼자 빠져나온 거거든요.
걱정되시면 같이 가보시겠습니까? "
유라우스의 제안에 나는 냉큼 '그러겠다' 고 대답하며 침대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솔직히 말해서 이프리트와 아레히스의 안전보다는,
엘뤼엔에 대한 분노와 억울한 감정이 더욱 컸기 때문에 빨리 만나서 그 녀석과 담판을 짓고 싶었다.
신이면 다야? 어차피 지금 내가 아무리 공격을 받아도 죽지 않는다는 걸 안 이상, 이제 무서울 게 없다 이거야!!
그놈의 재판건도 그렇고, 기습적으로 공격한 것도 그렇고..정말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지 않은가.
대체 이프리트는 그런 놈의 어디가 좋아서 그렇게 애걸복걸을 해댔던 거야!!!
설마 엘뤼엔의 외모만 보고 좋아했던 거 아니야?
그렇다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다른 건 몰라도 얼굴만큼은 단번에 호감을 얻을 만큼 잘나게 생긴 엘뤼엔이 아니던가.
하지만 어디 성격이 저래서야.. 학대를 당하길 즐기는 변태가 아니라면 오래 버티지도 못하고 떨어져 나갈 것이 틀림없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프리트를 끌고 정령계로 돌아가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친구의 사랑은 응원해야 마땅하지만, 상대가 저따위라면 말리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 내 평소 지론이니까.
그리하여 나는 발걸음도 당차게 유라우스의 안내를 받아, 엘뤼엔과 내 일행들이 면담중이라는 응접실로 향했던 것이다.
처음 만났던 장소인 집무실은 이프리트가 발작을 하는 바람에
여기저기 쌓여있던 서류더미가 무너져서 완전히 쓰레기더미가 되 버렸다나?
뒤늦게 호출되어온 수행천사들이 그 광경을 보고는 차례로 실신해 버릴 정도로,
앞으로 그 방을 정리하려면 무척이나 까다로울 것이라고 했다.
엘뤼엔 마저도 그 광경엔 난감한 표정이 되어버렸다니까.
그 말을 듣고 어찌나 통쾌한 기분이 들었던지.. 아무래도 나는 엘뤼엔에게 단단히 미운 털을 박아버린 게 틀림없었다.
내가 한 것 도 아닌, 다른 사람의 우연한 행동으로 인해 곤란한 지경이 된 그가 그렇게나 고소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이런 기분은 응접실에 도착하여 엘뤼엔과 아레히스의 대화를 듣는 순간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처음 응접실에서 본 두 신들은 각자 맞은편의 소파에 앉아있는 상태에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노려보는 쪽은 엘뤼엔이고, 아레히스는 여유롭게 그 모습을 감상하는 얼굴이었지만.
아마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던 모양인지, 이미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숨막히게 돌아가는 위압적인 공기에,
멋모르고 응접실에 들어섰던 나는 한순간 움찔하며 걸음을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던 엘뤼엔의 입에서 서릿발보다 차가운 목소리가 냉기를 풀풀 뿌리며 흘러나온 것이다.
" 그렇지 않아도 아레히스. 그대하고는 할말이 많이 있었다. 만나기를 고대해왔지만 보다시피 일거리가 잔.뜩. 쌓여있어서 말이야.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더군. "
" ..그러십니까? 상급신의 일이 고되다고는 들었습니다만.. 설마 잠깐의 여유도 허락되지 않는지는 미처 살피질 못했군요.
그런데 저는 무슨 일로? "
짐짓 모르겠다는 듯 의아하게 물어오는 아레히스였지만, 어색하게 굳어진 표정을 보니 그는 이미 엘뤼엔의 용건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바람에 더욱 살벌하게 굳어진 엘뤼엔의 눈빛에 응접실에 들어가자마자 한바탕 해주려고 했던 나는 슬그머니 눈치만 보는 것으로
사태를 좌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째 이때 건드리면 이번엔 그냥 기절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달까?
흘낏 아레히스의 옆을 보니 잔뜩 굳어져 앉아있는 이프리트가 보였다.
그런데 녀석의 시선은 엘뤼엔에게 가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엘뤼엔의 수행천사에게 머물러
떨어질 줄 모르는 것이다.
흡사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있는 그 모습에 내가 얼떨떨해 하자,
유라우스가 '내 말이 맞지요? 질투라니까요~'하면서 또 잽싸게 참견을 해왔다.
그리고 그때만큼은 나도 그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끄덕 해주고 말았다.
옆의 살벌한 기운은 전혀 개이치 않은 상태에서 이프리트가 천사만 노려보고 있을 이유가 그것말고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는 것 같으니까.
어이, 이프리트? 너는 지금 저 두 신들의 묘한 상태가 안 보이는 거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려보는 척이라도 해야할 것 아니냐고~!
지금 시덥잖은 존재를 보며 질투나 할 때가 아니란 말이야!!
그러는 와중에도 엘뤼엔과 아레히스의 대치는 계속 되고있었다.
노려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을 한 엘뤼엔은 진정 아레히스가 가증스럽다는 듯이 가볍게 치를 떨었다.
" 몰라서 묻는 건가? 명계에서 만났던 일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설마 잊었다는 건 아니겠지?
신인 그대에게 망각의 물이 통할 리도 없고 말이야. "
" 으음..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 잊었다면 말해주지. 나는 이야기를 끄는 것이 질색이다. 그때, 엘퀴네스의 임무를 마치고 선택의 시간을 갖았을 당시.
나는 분명히 내세의 길을 걷길 바랬었다. 안 그런가? "
" 아아..예에.. "
뜨끔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레히스의 대답에 나는 경악했다.
저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치는 듯한 싸가지가 내세의 길을 걷기를 바랬다고?
이프리트도 놀랐는지 천사를 노려보던 시선을 돌려 황당한 표정으로 엘뤼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말끔히 무시한 엘뤼엔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 귀찮은 것은 싫다.. 그렇게 말했었지.
신이 되면 맡아야 할 의무와 책임이 많아져서 아무리 누릴 권리가 많다해도 사양하고 싶다고.
그런 것은 이미 정령왕인 지난 시절로도 신물나게 겪었다고 말이야.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신이라는 것에 적성이 맞지 않는 존재였다.
애초부터 신이 되기 전에 정령왕의 직분을 먼저 수료하는 이유가 자기 스스로를 진단해 보기 위한 것 아니었던가? "
" 그렇습니다. 엘뤼엔님. 그리고 저는 당신만큼 신의 위치에 어울리는 존재는 없다고 설득했지요. "
" 그래. 기억하고있다니 다행이군. 그리고 나는 다시 거절했지. 아무리 그래도 역시 내세의 길을 걷겠다고 말이야.
그대도 그걸 납득한 듯이 보였다. 그런데.. "
잠시 말을 끊은 엘뤼엔은 서슬 퍼런 표정으로 아레히스를 노려보았다.
" 왜 내가 신이 되어있는 거지? "
" 아..하하..그..그게.... "
" 기가 막히더군. 그대가 안내하는 길로 따라 걸으면서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내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잠시 눈을 감고 깨어나 보니.. 뭐? 상급신? 엘뤼엔의 이름을 하사 받아?
거기다 나중엔 기다렸다는 듯이 그 썩을 것들인 넘쳐흐르는 땅 바이톤을 담당하라고 서둘러 임명장이 오더군.
그때부터 나는 그대를 다시 만나기를 정말 손.꼽.아.서. 기다렸지. 감동해도 좋아.
내가 누군가를 이토록 그리워해 보기도(?) 처음이니까. "
이를 갈 듯이 낮게 말하는 엘뤼엔. 대충대충 아무렇지 않게 설명했으나 그 말이 끝나고서 오는 파장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만 벌리고 있는 이프리트는 그렇다 치고,
일단 나만해도 경악으로 인해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있잖은가.
유라우스 역시 십 년은 갑자기 늙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설마..아레히스.. 아레히스 당신!!!
' 엘뤼엔을 속여먹은 거야??!!!!!'
맙소사.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일이 아닌가?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반장자리를 맡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일이었다.
기가 막혀서 할말을 못 찾는 일행들 사이로 아레히스는 난감한 표정이 되어 머리를 긁적였다.
" 그게..변명을 하자면..정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제와 말씀드리는 겁니다만..주신께서 미리 당부해 두신 일이 있었거든요.. "
" .......? "
" 하아. 상급신이 대거 부족해져서 말입니다.
요즘 정령왕의 수료과정을 거치신 신의 영혼들이 이상하게 다들 내세의 길을 고집하시는 바람에..
새로운 차원은 자꾸만 늘어나는데 그것을 담당할 상급신들의 수는 부족하고..
그래서 주신께서 고민하신 끝에 이번에 선택의 시간을 갖는 신의 영혼은 억지를 쓰더라도 반드시 신이 되게 하라고... "
일단 내세의 길을 선택한 신의 영혼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만든 업을 소멸하기 전까진 보통의 영혼들처럼 계속해서 내세를 떠돌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동안의 업이 전부 소멸하게 되면 신족의 삶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신이냐 내세의 길이냐는 선택의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얼마든지 내세를 경험하고 나서 나중에 신이 되더라도 상관없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번에 주신께서 새로운 차원을 대거 생성하셨는데, 그것을 맡을 상급신들이 부족해지자,
이번 선택의 시간을 갖게될 신의 영혼은 강제적인 수단을 이용해서라도 반드시 신의 길을 택하게 만들라는
엄명이 명계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엘뤼엔은 그것에 희생된 운 나쁜 첫 번째 타자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의 설명을 들은 엘뤼엔은 기가 막히다 는 표정으로 한참을 무언가 납득해보려는 듯이 생각을 곱씹더니,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여는 것처럼 간신히 말을 뱉어냈다.
" .....그럼 내가 '바이톤'을 맡게된 이유는? "
" 그게.. 원래라면 엘뤼엔님은 이번에 새로 창조된 차원 중에 하나를 담당하셨어야 합니다만..
당신의 성정과 능력이 너무 뛰어난 관계로.. 바이톤만큼 합당한 차원이 없다며..주신께서.. "
"...........빌어먹을. "
유라우스가 말하기를, 제 아무리 대단한 엘뤼엔이라 하여도 유일하게 반항하지 못하는 단 한가지의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을 창조한 주신이라고 했다.
주신께 대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것은 마치 본능과도 같은 거라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허락 받은 모든 창조물들은
주신의 명령에 절대적인 복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아레히스도 필사적으로 주신의 핑계를 댔던 것이고, 엘뤼엔 역시 폭발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거겠지.
'으음. 엘뤼엔..너도 알고 보니 꽤 불쌍한 놈이었구나. '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내게 벌인 행동을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 말씀.
유달리 우중충해지긴 했으나, 급박했던 상황이 대충 정리된 듯 하자
나는 발걸음도 당차게 엘뤼엔의 옆으로 가서 크흠 하고 인기척을 냈다.
그러자 여지껏 다른 곳에 신경 쓰느라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아레히스와 이프리트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 엘퀴네스님! 정신이 드셨습니까? 몸은 좀 어떠세요? "
" 엘퀴네스!! 너 뭐 하는 놈이야!! 이런 곳까지 와서 기절씩이나 하는 놈이 어디 있어! 내가 얼마나 걱정 했는 줄 알아??? "
언제나 그렇듯 상대방을 배려해주는 말투의 아레히스,
그리고 말과는 다르게 전혀 걱정이 묻어나지 않은 목소리로 윽박지르는 이프리트의 말이 차례로 이어졌다.
그러나 정작 내가 관심을 끌려고 했던 엘뤼엔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세상 다 산 듯한 무료한 표정만을 지어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내가 그의 공격을 받고 바로 저 세상으로 갔다 하더라도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인지 나는 괜히 울컥하는 마음에 걱정하는 아레히스들에게 '괜찮다'고 말해줄 겨를도 없이 다짜고짜 엘뤼엔에게
시비를 걸어버리고 말았다.
"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뭔가 해줄 말 없는 거야? "
"......? "
" 다짜고짜 멀쩡한 정령을 쳤잖아? 이럴 땐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던지, 뭔가 납득할만한 이유를 대야하는 게 아니냐고.
그렇지 않아도 오랜만의 통증 때문에 잊고싶었던 기억까지 떠올라 버렸으니까 뭔가 변명이라도 하란 말이야, 안 그러면.. "
" 안 그러면? "
재미있다는 듯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는 엘뤼엔의 모습에 나는 잠시 머뭇거리고 말았다.
내가 뭐라고 떠들던 말던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더니, 또 갑자기 왠 관심 이라냐?
괜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곤 퉁명하게 대꾸했다.
" 나도 똑같이 맞장 뜰거라고. 어차피 공격받아도 안 죽는다는 걸 안 이상, 무서울 게 없다 이거야. "
" 흐음? 안 죽는다고? 누가 그러지? "
" 그거야 유라우스가.. 정령은 정령계를 벗어나면 실체가 없다고 했어.
죽는 것 같이 보여도 실제론 정령계로 강제 송환되는 거라고. "
내 말에 조금 어이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본 엘뤼엔은 잠시 킥킥거리고 웃었다.
그 바람에 이프리트가 말세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저 녀석이 웃을 줄도 알았나?'라고 기겁하며 외치긴 했지만 ,
정작 그 모습을 보는 나는 꼭 비웃음 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매우 나빠지기 시작했다.
" 뭐야, 왜 웃는 건데? 멋대로 정령 쳐놓고 기절시키더니, 이젠 웃기까지 하냐?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아~ 그래. 나 자각도 제대로 못하는 덜떨어진 정령왕이다. 그래서 뭐? 니가 뭐 보태준 거 있어? "
이상하게 이 녀석의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짜증이 났다.
막무가내의 판정 건이나 나를 때려서 기절시킨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 자체에 울화가 치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엔 별거 아닌 것을 가지고 나는 괜히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 모습에 이프리트가 '저 녀석이 저렇게 화낼 줄도 알았나? 오늘 여러 가지로 신기한 경험을 하네..'
하고 중얼거리긴 했지만 당연히 무시.
나는 당돌하게 엘뤼엔의 시선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녀석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 대답해 줘야겠어. 어째서 나를 때려 기절시켰는지. 아니, 그전에 그 인간들의 재판 건도 해명 해줘.
셋 다 죽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좋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잖아? 너의 판정은 너무 권력남용이야. "
" 하아. 이거야 원.. 이렇게 감정적인 엘퀴네스가 태어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역시 불가능은 없다. 이건가?
정령왕이란 녀석이 정령에 대해 다른 존재에게 설명을 듣고서야 납득을 하다니 웃기지도 않아서.. "
" 쳇. 그거야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남이사 감정적이던 덜떨어지던 무슨 상관이야? 어쨌든 빨리 대답이나 하란 말이야! "
욱 하는 심정에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엘뤼엔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전처럼 소리소문 없이 내 앞으로 바짝 다가온 것이다.
헉.. 설마 또 때리려고?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한 발짝 물러서자 엘뤼엔은 망설임 없이 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따악-
" 아얏! 이게 무슨 짓이야!! "
" 말부터 높여. 네가 너보다 나이를 먹어도 몇 만년은 더 먹었고, 능력도 너보다 훨씬 강하며, 너의 직계 선배나 마찬가지야.
봐주는 것도 이번뿐이다. "
이런 나쁜 놈. 갑자기 꿀밤을 때려놓고 할 소리냐, 그게?
그리고 니가 언제부터 나를 봐줬다는 거야? 아까 때려서 기절시킨 게 봐 준거면 안 봐주는 건 대체 뭐라는 건데?
정말 기가 막히는 건 욱씬거리는 이마를 부여잡고 인상을 쓰는 나를 보며 천사가 하는 말이었다.
녀석은 아주 감탄했다는 듯이 손뼉까지 치며 엘뤼엔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 그분이 굉장히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엘뤼엔님. 이 정도로 가볍게 처벌하시는 건 처음이신 것 같군요. "
" 아아. 그러게. 물의 정령이라 그런가? 그다지 기분 나쁘지는 않은걸. "
' 나는 기분 나빠!!! '
아주 정령왕 하나를 바보 취급하는 한 신과 천사를 보며 나는 증오심에 이빨을 갈았다.
그리하여 더 이상은 못 참아!! 하고 달려들어 한방이라도 먹여보려 했건만.. 바로 그 찰나-
생각났다는 듯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여는 엘뤼엔으로 인해 내 계획은 잠시간 보류되고 말았던 것이다.
" 그 인간들이 왜 내 신전에 와서 청원을 넣었다고 생각하지? "
" 에? "
" 그 인간들은 '바이톤'의 주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차원을 담당하는 상급신을 제쳐두고 나를 찾아왔지. 그게 어떤 의미일 것 같아? "
" 그게 무슨? "
" 너는 잘 모르겠지만, 상급신들은 전속으로 담당하는 차원 외에도 각기 맡고 있는 분야가 하나씩 있어.
예를 들어 나의 경우, 차원 '바이톤'을 담당하는 상급신이기도
하지만 또한 '형벌'의 신이기도 하지. 모든 차원의 '형벌'에 대한 것을 관리하고 책임질 의무가 있다는 소리야.
그래서 바이톤외의 다른 차원에서도 나를 섬기는 신전이 있지. "
그런데 그게 대체 어쨌다는 건가? 지금 자기 신도 수가 많다고 자랑하는 거야?
도무지 요점을 알 수 없는 엘뤼엔의 설명에 내가 알아듣지 못하고 미간을 좁히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 생각해봐라. 내 신전이 있다는 것은 다른 신들의 차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소리다.
예를 들어, 이번 사건의 경우는 나보다는 재판의 신이나 명철의 신을 찾아가는 것이 더욱 현명했을 거야.
게다가 그들이 사는 차원을 담당하는 상급신은 '타협과 평화'의 여신이었지. 그런데 왜 하필 나를 찾아왔을까? "
"...그..그러고 보니... "
듣고 보니 그렇잖아? 정확한 판정을 원했던 거라면 재판의 신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은 성격도 더러운 엘뤼엔의 신전을 찾은 거지?
그 해답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옆에서 나와 같이 설명을 듣고 있던 천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내놓은 것이다.
" 형벌.. 엘뤼엔님의 직함이 '형벌'을 뜻하기에 그러했겠지요. "
" 엥? "
" 그래. 바로 그거야. "
이미 설명에 열중해 버린 엘뤼엔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엄청 지저분한 벌레를 바라보는 것처럼 인상을 잔뜩 구기더니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내가 '형벌'의 신이라서 찾아 온 거다. 빌어먹을 놈들은 처음부터 아이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어.
당연히 이 아이는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고,
내 앞에서 사연을 구구절절히 늘어놓으면 아이를 노린 괘씸한 상대방에게 '형벌'을 내릴 것이라 기대한 거지.
그것도 서로 똑같이 말이야. 그런데도 내가 봐줘야 하나? "
헉.. 그런 뜻이 있었단 말이야? 그래서 일부러 '형벌'의 신인 엘뤼엔을 찾았다고?
어쩐지.. 굳게 믿고 있던 상대에게 배신당하는 기분이었다.
하얗게 질려 가는 안색을 느끼며 그래도 나는 희망을 놓치고 싶지 않아 떠듬떠듬 최소한의 반박을 시도해보았다.
" 으음... 그.. 그렇다 해도 아이까지 죽이는 것은... 불쌍한 것 같은..데.. 아이는 잘못이 없지 않나? .."
"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이거야 원.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니..
이프리트 녀석한테 꽤나 장난감이 되 주고 있겠군. 그건 그렇다 치고 너 말이야. 그 '아이'가 대체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
" .......? "
뜬금없는 엘뤼엔의 질문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가 몇 살이라니? 적어도 '아이'라고 불리 울 만한 나이 라면.. 7살? 10살? 아무리 많이 잡아도 13살 정도는 될 것 같은데?
그러나 이런 내 예상은 깨끗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 올해로 21살이다. 그것도 남자녀석이지. 가족부양의 책임을 질 수도 있고, 혼자 독립해서 살아가기에도 충분한 나이다 이 말이야. "
" 헉? "
" 키워준 어미는 부자였다. 낳아준 어미는 가난뱅이지. 아들은 선택해야만 했어.
욕심으로는 부자어미가 좋았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가난한 친 어미도 외면할 수 없었다.
녀석 역시 두 어미가 신전에 청원을 넣을 때 함께 자리했지. 그것이 '형벌'의 신전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있으면서 말이야.
그 녀석은 두 어미가 모두 '형벌'을 받길 바랬어.
부자어미가 죽으면 유산이 돌아올 테고, 친 어미가 죽으면 귀찮은 일에서 해방이었으니까. 그걸 어떻게 생각해? "
"............. "
할말을 잊어버렸다.
뭐라고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날 보며 엘뤼엔은 짓궂은 목소리로 한마디 뼈아픈 교훈
어린 충고를 덧붙였다.
" 네가 인간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하지만 기억해 둬. 인간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추악한 욕심덩어리다.
세상이 모두가 아름답지는 않다고들 하지? 바로 인간이란 존재가 그렇기 때문이야.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마족보다
인간을 더욱 혐오한다. 왜냐고? 마족은 원체가 썩은 놈들이라 무슨 짓을 해도 그러려니 하지만, 인간은 착한 척 하면서 뒤로
호박씨를 까거든. "
".........."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나는 내 스스로의 웃기지도 않은 정의감을 내세워 엘뤼엔의 판정에 항의 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보니, 멋대로 엘뤼엔을 원망하고 나쁜 놈이라 단정지은 내가 몹시도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으으..내가 미쳤나봐.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랬던 거지?
아무래도 지난 몇 일간 정령왕의 대접을 받고 나더니, 나도 모르게 우쭐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이 틀림없다.
...인간이 그리 아름답지 않은 생물이란 건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있었는데.
이제 무슨 얼굴로 엘뤼엔을 바라보냔 말이야~~!! 난 맞아도 싼 녀석이었잖아!!!
어쩌면 엘뤼엔은 생각보다 훨씬 마음 좋은 녀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투가 거칠고 행동이 제 멋대로 이긴 해도, 나를 배려했기 때문에 저런 것도 설명을 해주었던 걸 테지.
멋대로 선입견을 가지고 상대방을 판단하려 한 건 확실히 내 실수였다.
그래서 나는 정말로 진심 어린 마음을 담아 그에게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바로 그 직후에 이어진 엘뤼엔의 말을 듣기 전까진.
" 아, 그리고 널 때린 이유도 설명해 달라고 했나? 그건 그냥 짜증나서 때렸다고 해두지.
나는 두 번 경고할 줄 모르는 녀석이거든.
그때도 말했지만..처음 경고 때 안들은 건 너니까 불만 없지?
그리고 말해두겠는데, 실체가 없다고 해서 죽지 않는 건 아니야.
신력으로 인한 공격은 정령계가 아니더라도 즉석에서 소멸시킬 수 있거든.
그러고 보니 아까 한 공격이 신력을 사용했던 거였나?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게 없어서 깜빡했네. 그래도 뭐.. 살.았.으.니.까. "
"......................"
'역시 이 녀석은 성격이 나쁜 거였어!!!'
벙쩌지는 일행들을 사이로 두고 아무 문제없지? 라고 말하는 듯 눈을 빛내는 엘뤼엔을 보며 나는 속으로 외쳤다.
죽어도.. 죽어도 잘못했단 말 하나봐라!!
" 이이이익!! 태도가 그게 뭐야, 태도가!! 사람을 죽일 뻔했으면서 너무 능청스럽잖아!!! "
결국 나는 또다시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재판 건은 내가 제대로 알지 못하고 끼어 든 실수라고 쳐! 하지만 나를 멋대로 죽이려고 했던 것만큼은 절대로 이해 못해! 네버!!
네가 신이면 다냐!
그러나 그 순간, 엉뚱하게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엘뤼엔에게 조금이라도 더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을만한 방법 따위가 아니라,
저 멀리 정령계에 있을 트로웰의 반응이었다.
' 그 녀석. 분명히 지금 내 말을 들었으면 '어라? 넌 사람이 아니라 정령이잖아?' 라고 트집잡았을 게 분명해. '
참으로 대담하지 않은가?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감을 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다면야 어찌 저 위험한 엘뤼엔에게 대항을 해놓고서 딴 생각에 빠져들을 수가 있었단 말인가!
녀석이 생각보다 나쁜 녀석이 아니란 걸 알게 된 부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위험천만한 모험을 감행 한 거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잠깐의 부실한 대응의 결과로, 나는 당연한 듯이 이어지는 엘뤼엔의 가벼운 처벌을 면하지 못하고 말았으니...
따악-
" 아얏!! "
" 존.대.말.하랬지. 한번 말하면 못 알아듣는 녀석이군. 아니면 그냥 말로 해서는 안 듣는 타입인가?
봐주는 건 아까 뿐이라고 말했을 텐데? 내가 왜 형벌의 신으로 선택되었는지 그 몸으로 직접 가르쳐 줄까? "
허거거걱.
전혀 표정이 없는 얼굴로 싸늘하게 노려보는 엘뤼엔의 눈빛은 정말이지 정면으로 마주 바라볼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나도 모르게 필사적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하자, 마음에 들었다는 듯이 그제 서야 입술 끝을 올려 보이는 엘뤼엔.
그러나 그 직후 능글맞게 웃으며 건네는 말에 나는 물론이고, 주변의 사람(?)들은 또다시 굳어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 흐음. 역시 마음에 든단 말이야? 어이, 아레히스. 이 녀석 나주면 안 돼나? "
" 허거거걱? 무슨 소리를??? "
" 으음. 그것은 곤란합니다, 엘뤼엔님. 엘퀴네스님이 무슨 물건도 아니고..
거기다 영혼의 등급으로 따지자면 엄밀히 저보다 상급의 위치 신지라. 저한테 허락을 구하셔봤자.. "
안타깝다는 듯이 말끝을 흐리는 아레히스로 인해 가뜩이나 패닉으로 치달은 내 머리는 한계 직전까지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신들이 지금 순진한 정령왕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건가? 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됐다고 무시하는 거야, 뭐야?
그러나 나는 이러한 속 터지는 상황에도 뭐라고 한마디 퍼부어 줄 수가 없었다.
울컥하는 심정에 막 따지고 들려는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엘뤼엔의 수행천사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 든 것이다.
" 엘뤼엔님. 그런 식의 발언은 좋지 않습니다. 엘퀴네스님이 오해하실 겁니다. "
" 오해라니? "
" 그러니까 예를 들면.. 엘뤼엔님의 말씀은 자칫하면 일종의 구애라고 생각이 되는 .."
그런 식으로 생각 안 했어!! 나를 대체 뭘로 보는 거야!
정말이지 괘씸한 천사가 아닌가? 말려줄 생각은 안하고 오히려 상황을 더욱 최악으로 몰아 넣다니 말이다.
그 바람에 엘뤼엔은 '그런가?'하며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 되어버렸고, 아레히스는 '그런 뜻인게 아니었습니까? ' 하고 되물었으며,
이프리트는 ' 천사주제에 어딜 끼어 드는 거야! 엘뤼엔에게 충고하지마!' 라고 외쳐서 나를 더욱 심란하게 만들어 버렸다.
어딜 봐도 남신인 엘뤼엔이 역시나 어딜 봐도 남자의 모습을 한 내게 무슨 억하심정으로 사랑고백을 지껄이겠냔 말이다!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자라면, 엘뤼엔이 한 말이 그런 의미가 아님은 생각해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 뭐냐고? 뻔한 거 아니겠는가? 가지고 놀기 적당한 장난감 취급하는 거라고!!
그러니 유라우스!! '저도 그 심정 이해합니다'라면서 고개 끄덕이지 말란 말이야! 너 날이 가면 갈수록 이상해지고 있다는 거 알아?
분한 마음에 방금 전까지 당했던 처벌도 잊고 다시 엘뤼엔을 노려보았다.
" 당신 때문에 내 입장만 자꾸 곤란해지고 있잖아..요! 내가 그렇게 괴롭히기 좋게 생겨어..요? 왜 자꾸 나만 갖고 이러냐구..요!!! "
훗. 어떠냐? 이 정도면 훌륭한 존대말이지?
비록 아슬아슬한 끝말의 컨트롤이 좌우하기 했지만 어쨌든 반말은 아니었다.
그 점이 나쁘지는 않았는지, 엘뤼엔도 더 이상 내 말투에 꼬투리를 잡지는 않았고 말이다.
그 대신 그는 여전히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흠.. 역시 이런 타입에게는 단도직입적인 표현이 어울리려나? "
" 그런 것이 옳을 듯 합니다. 엘뤼엔님. 이제 다들 돌아가셔야 할 시간이니 서두르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만. "
" 크아악!!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어? 돌아갈 시간이라니? "
천사의 말에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아레히스를 바라보았다.
정말 돌아가야 한다고? 라고 묻는 내 눈빛에 그는 그렇다는 표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이 이상 지체하시면 아크아돈에 무리가 갑니다. 슬슬 돌아가시는 것이.. "
" 하..하지만 온지 얼마 안됐잖아요? 아직 제대로 된 용건도... "
내가 여기로 온건 순전히 이프리트와 엘뤼엔의 묵은 감정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였다고!
이런 식으로 죽어라 놀림만 당하고 씩씩거리기 위해서 온 게 아니란 말이야!
그러나 나는 그 뒤에 이어지는 유라우스의 말에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 으음. 엘퀴네스님이 기절하시고 만 하루가 지났습니다. "
"..........."
" 더불어 이프리트님의 용건 역시 모두 끝마쳐진 상태고.. 다들..엘퀴네스님이 깨어나시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참이었습니다. "
" .......... "
세상에 이 보다 더욱 허무한 경우가 있을까?
밤을 새서라도 꼭 보고싶었던 TV프로를, 방영하기 바로 10분전에 깜빡 잠이 들어 놓쳤다 하더라도 이보다 더욱 억울하고 서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정말.. 정말 내가 기절한 그 잠깐 사이에 모든 상황이 종결지어졌단 말이야?
구원을 바라는 듯한 눈빛으로 잽싸게 이프리트를 쳐다봤지만 돌아온 결과는 무언의 긍정이었다.
쑥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슬쩍 붉힌 녀석은 헛기침을 동반하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던 것이다.
고백을 했는지, 아니면 끝까지 대판 싸웠는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이미 이프리트의 얼굴은 굉장히 홀가분한 상태.
말 그대로 자유인의 모습이 되어있었다.
그것을 목격한 내 심정이 다시 한번 무너졌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이건..이건~~~!!
" 전부 다 당신 때문이야!!! "
" 오, 그래. 결정했다. 너 내 아들 해라. "
홱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돌리며 무엄하게도 손가락질까지 한 나는 그대로 엘뤼엔에게 원망의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이 놈의 성격 나쁜 신은 그런 와중에서도 전혀 엉뚱한 말을 꺼내놓아 내 복장을 또 다시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뭣이라? 뭘 하라고? 아들? 지금 당신 날더러 아들 하라고 그랬어????
세상에 어떤 부자지간이 '너 내 아들해라' 그러면 '네'하고 대답하는 것으로 결정지어진단 말인가!
그것도 '할래?' 라고 물어보는 권유채도 아니다. 다짜고짜 '아들 해라' 라니!
이런 것도 명령으로 때울 수 있는 걸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아니, 그건 그렇다 쳐도..
" 갑자기 무슨 아들타령이야? "
" 마음에 들었으니까. 내 아들 하라고. 마침 자식도 가지고 싶었거든. "
" 허거걱. 당신은 마음에 들면 무조건 아들로 삼고 보나 보지? 아이를 가지고 싶으면 결혼을 하면 될 것 아니야. 날 끼워 넣지마. "
내 대답에 엘뤼엔 뿐만이 아니라, 저 멀리 나와 녀석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프리트의 미간도 살며시 찌푸려졌다.
으음. 오늘 이러다 두 성격 나쁜 녀석들한테 고이 죽어 주는 건 아닐까 몰라.
어째 정령왕이 된 이후로 점점 상황이 나쁘게 돌아가는 것 같다면.. 내 착각 일까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엘뤼엔의 제안-강요라고 보는 쪽이 더 맞을 듯 하지만-은 너무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마음에 들었다는 것 도 믿을 수 없는 일이건만. 갑자기 아들이 되라니?
20대 초반의 창창한 얼굴로 나처럼 다 큰 녀석을 아들로 삼고 싶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더구나 나는 부자지간이란 것에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당연하다.
내게 있어서 언제나 아버지란 폭행을 밥먹듯이 하고 저주의 말을 퍼붓길 주저하지 않는 철천지의 원수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니까.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한, 아마도 아버지란 존재는 영원히 그런 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었다.
특히나 오늘은 잊고있었던 기억까지 꿈으로 되살아나는 바람에 더욱 타이밍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당연히 알 리가 없는 엘뤼엔은 불만이 가득 찬 내 얼굴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 결혼이라.... 그건 내키지 않아. 난 아들을 갖고 싶을 뿐이지, 아내가 필요한 게 아니니까. "
" ....정상적인 가정에는 항상 여자와 남자가 주축을 이루는 법이라고. 그리고 다른 녀석들도 많잖아. 왜 하필이면 나야? "
어느새 나는 엘뤼엔에게 존대 말을 해야한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다시 반말 체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나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아니면 그 역시 못 느끼고 있는 건지 엘뤼엔은 이전처럼 처벌을 내리지 않고 재밌다는 듯이 빙긋 웃기만 하는 거였다.
" 마음에 들었다고 했잖아? 그것 외에 다른 이유가 필요하나? 그리고 정상적인 가정이란 것은 인간들에게나 존재하는 범위다.
그런 것에 내가 맞춰갈 필요는 없어. "
"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아들을 하라니.. 납득을 못 하겠다고. "
불만스러운 듯이 투덜거리자 엘뤼엔은 다시 가볍게 말을 이었다. 의외로 이런 것에는 끈질김을 보여주는 녀석이었다.
성질대로라면 벌써 날려버리고 ' 하라면, 해!'라고 외칠 것만 같았는데 말이다.
" 갑자기는 아니야. 널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결정했으니까. "
" 누..누구 맘대로? "
" 그야 내 맘이지. 너에게도 그다지 나쁜 조건은 아닐텐데? 절대적인 아군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
이..이런 뻔뻔스러운 것을 보았나!
너는 처음 보자마자 '아들로 삼아야겠다' 생각한 녀석을 단순히 짜증난다는 이유로 패서 기절시킬 수 있는 거냐?!!
이런 녀석이 아버지가 되면 분명히 돌아올 결과는 뻔할 뻔자였다. 도대체 과거의 아버지와 녀석의 다른 점이 뭐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단숨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 거절할래. 아군은 별로 필요하지도 않고.. 아버지란 존재가 절대적인 아군이라는 말에도 동의할 수 없어. "
" 그래? 그럼 지금 네가 나한테 반말하는 것에 대한 처분을 내려도 상관없겠군. "
" ............. "
싸악.
핏기가 모두 얼굴에서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드니, 존대말을 하라며 경고를 줬던 때의 서늘한 엘뤼엔의 눈빛이 정면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녀석의 손에는 어느새 만들었는지 둥그런 모양의 빛 덩이가 살포시 자리잡고 있는 상태였다.
바보가 아니라면야 저것이 나를 기절시켰을 때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신력'이란 것을 눈치 체지 못할 리가 없잖은가!
치사하다!! 라는 무언의 항쟁을 담은 눈빛으로 떨떠름하게 노려보자, 엘뤼엔은 능청맞은 표정으로 씨익 미소지었다.
" 아들이 되었을 때의 첫 번째 혜택. 반말을 해도 용서해 준다. 어때? 지금의 너에게 굉장히 필요한 조건이 아닐까? "
"........ "
비겁한 놈.. 놈의 잔머리와 그것을 능가하는 사악성에는 정말이지 감당할 수단이 없었다.
아들이 안되면 죽이겠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결국 나는 암담한 미래와 불행한 현재의 처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억지로 정리하며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뻐하는 천사와 흥미진진한 아레히스.
감탄하는 유라우스와 깔깔거리는 이프리트 따위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말 그대로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던 것이다.
" 할게. 한다고!! 하면 되잖아!!!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버.지.!!! 젠장!!!!! "
발악을 하듯이 소리지르는 나를 만족스러운 눈길로 바라본 엘뤼엔은 피식 웃으며 한 손을 들어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그런 행동에 어쩐지.. 자상함이 배여 있었던 같이 느꼈다면.. 나만의 착각이겠지?
이상하리 만치 부드럽게 대답하는 엘뤼엔의 목소리도 역시 착각이길 바란다.
급조로 만들어진 아버지 따위에 .. 기대고 싶어지길 바라지 않으니까.
" 현명한 선택이었다. 아들아. "
그 이후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모르겠다.
거의 반 협박이긴 했지만 어쨌든 엘뤼엔의 아들로 낙점 받고 난 이후,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며 아레히스가 정신 없이 나를 신계에서 이끌어 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엘뤼엔의 입에서 흘러나온 '아들아'라는 소리에 이상하게 목이 매인 나는 가파오르는 숨을 진정시키느라
무진 애를 써야만 했고,
유라우스의 '저에게 맡겨주십시오'라는 말이 들린다 싶자 어느새 정령계로 돌아와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주변은 보석으로 도배된 꽃밭과 향기로운 바람, 부유하는 정령떼(;)들이 활개치고
있는 정령계의 황금정원-'에바스에덴' 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광경이 무척 낯익다는 것을 인식하고 나자,
이번에는 방금 전까지 신계에 있었던 일이 현실이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뭐랄까. 무척이나 달콤하면서도 가슴아픈...복잡한 꿈을 꾸고 일어난 기분이랄까?
가슴이 어째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한 것이.. 무언가 말못할 미련을 가득 담고 돌아온 것만 같아 기분이 영 찝찝하다.
이건 혹시나.. 차원간에 벌어지는 시차적응이 안돼서 일어나는 현상 일까나?
바로 옆에 유라우스나 이프리트가 서있지 않았다면,
나는 정말로 신계에서의 일을 한 낯의 낮잠정도로 치부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어라? 그러고 보니 아레히스는? "
분명 신계에서 나온 사람은 나를 비롯해서 4명이었는데, 도착한 것은 3명뿐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유라우스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 기억 안 나십니까? 그 분은 곧 바로 명계로 직행하셨습니다. 가시면서 인사도 하셨잖아요? "
" 그..그랬던가? "
" 그랬어. 멍청하게 그것도 못 듣고 뭐하고 있었던 거야? 아니, 그것보다 말이야. 나 한가지 결심했어! "
"..........? "
그건 또 무슨 소리래? 거창하게 웬 결심씩이나...
얼마나 또 대단한 각오인가 싶어 나는 자세까지 바로 하며 이프리트의 이어질 말을 기대했다.
지금 상황에서야 이프리트가 각오할 것이라 한다면 엘뤼엔과 관계된 것 밖에 더 있겠는가.
기절하는 바람에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는 나로서는 앞으로의 이프리트가 걸어갈 행보가 무척이나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누누히 말하지만 세상은 그다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당당하게 화색이 만연한 얼굴로 나를 가리킨 이프리트는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 나 말이야~ 네 엄마가 될 거야!!! "
" ....... "
.........역시 신은 내 편이 아니었어!!!
그렇지 않아도 엘뤼엔의 '아버지선언' 때문에 받은 쇼크가 아직 제대로 풀려지지도 않는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이번엔 또 뭐? 엄~마아?
니들 전부 쌍으로 날 놀리려고 작정한 거지? 엉? 그렇지 않다면 절대 이럴 순 없음이야. 이럴 순 없음이라고!!!!!
패닉상태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시작한 나를 보며 이프리트는 샐쭉하게 입을 내밀었다.
" 목표가 그렇단 거야, 어디까지나. 넌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엘뤼엔의 아들이니까.
엘뤼엔과 결혼하려면 너라는 아들을 감수해야 한다는 거라고. 그걸 미리 각오하겠다는데 그렇게 경악할 필요는 없잖아? "
" .... 후우.. 그래.. 다 내 잘못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녀석의 제안을 거절했어야 했는데..
그깟 죽음이 뭐가 대수라고 겁먹어 가지곤 냉큼 아들이 돼버렸는지..
내가 생각해도 충분히 한심하니까 이제 농담은 그만해. 그보다..내가 기절한 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너.. 엘뤼엔에게 제대로 고백은 한 거야? "
나의 푸념섞인 한탄을 들은 이프리트는 뭐라고 반박하려는 듯 입술을 들썩였다가 그 후로 이어지는 질문에 뚝하고 다물었다.
오호라...설마.. 묵비권을 행사하시겠다?
이거 왜 이러셔~ 알 거 모를 거 서로 다 아는 처지에, 그렇게 튕긴다고 내가 포기할 줄 알아?
흥 하고 고개를 돌리는 이프리트를 보며 나는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 왜? 엘뤼엔이 너 싫대? "
" 무..무슨 소리야? "
" 대답을 안 하니까 궁금해서 이러는 거잖아.
계속 수행천사만 노려보면서 질투하는 것도 그렇고.. 내 엄마가 되기를 목.표.로 한다니..
일이 제대로 안 풀린 게 아니고 뭐겠어? 솔직히 말해봐. 고백도 안하고 보자마자 싸움만 했던 건 아니야? "
" 으~~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네가 멍청하게 엘뤼엔한테 맞아서 기절했기 때문이잖아!! "
억울하다는 듯이 날카롭게 소리지르는 이프리트의 반응에 이번엔 내 쪽이 당황하고 말았다.
허걱. 설마 정말로 싸웠던 거야? 그것도 나 때문에???
불안한 표정으로 유라우스를 바라보자 그는 난처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말씀드렸잖습니까. 엘퀴네스님이 기절하신 직후, 이프리트님과 아레히스님이 엘뤼엔님께 공격을 감행했다고.. "
".. 헉.. 맞다. 그랬었지... "
그래. 그러고 보니 그랬었다.
그때 열 받은 이프리트가 불의 검을 소환해서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엘뤼엔의 집무실안이 엉망이 되어버렸었다고.
사실 그것은 날 위해서라기보다는 수행천사에 대한 질투의 의미가 더 강한 난동이긴 했지만,
어찌됐든 그 모든 일의 원인은 다름 아닌 나인 것이다.
내가 기절만 하지 않았어도.. 아니 그때 제멋대로 안으로 뛰쳐 들어가 엘뤼엔에게 항의만 하지 않았어도,
엘뤼엔과 이프리트는 훨씬 더 원활한 재회를 이루었을 것 아니겠는가?
찔끔한 표정으로 이프리트의 눈치를 보는 내게 유라우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그 바람에 엘뤼엔님이 폭발해 버리셔서.. 이프리트님과 계속 다투셨죠.
결국 '왜 왔냐'는 엘뤼엔님의 질문에 이프리트님이 순간적으로 '보고싶어서'라고 대답하시는 바람에 상황이 종결되었지만.. "
" 유라우스!!!! 그건!!!! "
" 호오오... "
뭐야? 그럼 결국은 어떻게든 고백은 전해졌다는 소리잖아?
이게 바로 불행 중 다행이라는 걸까?
만약 고백도 못하고 싸우기만 했던 거면 나는 정말 천하의 죽일 놈보다 못한 상태가 되 버리는 것이다.
친구의 사랑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방해만 해버린 꼴이니까.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 있는 이프리트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 잘된 거 아니야? 이프리트 네 성격상, 진지한 분위기에서 제대로 된 고백은 닭살 돋아 못했을 것 같으니까 말이야.
오히려 그런 식으로 티격태격하는 중에 얼떨결에 흘러나오는 고백이 상대방에게 더 큰 타격을 입히는 법이라고.
엘뤼엔도 많이 놀랐겠네? "
" 글쎄에? 놀라기나 했을려나? 그 녀석 말이야. 아주 당연한 듯이 '정령왕 수료나 끝낸 뒤에 찾아와' 라는 거야, 글쎄!!
여신이 되기 전엔 상대도 안 해주겠다 이거지.
어째 신이 된 이후로 성격이 능글맞아 졌다니까? 아아, 정말 기분 나빴다고. "
흐음? 그래도 어째 그 정도 대답이면 많이 신경 써준 것 같은데? '여신이 된 이후'에는 연인으로서 바라볼 생각이 있다는 뜻이잖아.
아닌가?
투덜거리면서도 은근히 기쁜 기색을 비추는 이프리트의 모습을 보자니 내 생각이 아주 틀린 것 같지는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엘뤼엔은 의외로(?) 신계에서 인기가 좋아서 그와 교제하려는 여신들이 줄을 서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어지는 애정공세에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꺼져'를 연발해 오던 녀석이 이프리트에게만은
' 더 커서 와라 ' 라는.. 그야말로 희망적인 답변을 내주었다는 소리였다.
그 이야길 아레히스로부터 전해들은 이프리트가 얼마나 기뻐했을 지는 대충 상상이 가지 않겠는가?
엘뤼엔도 물의 정령왕 시절, 은근히 이프리트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 후우. 그럼 그냥 나중에 너랑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면 될 것을.. 왜 갑자기 날 아들로 삼겠다고 하는 건지. 원... "
단순히 가지고 노는 것이라 보기에는 엘뤼엔의 마지막 표정이 너무도 마음에 걸렸다.
내가 녀석의 아들이 되겠다고 체념했을 때, 엘뤼엔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쁜 표정을 지어 보였던 것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나는 그와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져 온 것이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 상태였고 말이다.
복잡한 표정으로 연달아 한숨을 쉬는 나를 보며 이프리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 글쎄. 내가 생각하기에는 말이야. 엘뤼엔에게 너란 존재는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아. "
".......하아? "
" 흐음. 같은 물의 정령왕이라서 뭔가 통하는 거라도 있는가 보지.
신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속성이 전부 변하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자연의 4대 속성은 모든 인성의 기본을 이루거든. 그래서 너에게 더 정감을 느끼는 걸지도 몰라. "
" 흐음... "
정말 같은 물의 정령왕이라 호감이 있다는 걸까?
겨우 그런 걸로 상대방에게 호의를 보이기엔 엘뤼엔의 성격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뭐, 얼떨결에 성립된 부자관계라고 해도, 앞으로 엘뤼엔과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테니 크게 상관은 없겠지.
애초부터 아레히스는 신계로의 차원 이동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경고했었다.
엘뤼엔이 찾아오지 않는 이상, 절대로 우연히 라도 우리가 다시 만날 확률은 0%가 된다는 소리다.
녀석이 나를 만나기 위해 귀찮음을 감수하면서까지 차원이동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안 되고,
또한 그러고 싶어도 상급신의 일이 워낙 많기 때문에 자리에서 꼼짝도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한마디로 엘뤼엔과의 악연은 이것으로 끝이란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오히려 아쉬워지는 건 왜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찝찝한 여운이 감정 끄트머리를 집요하게 잡은 채 놔주지를 않았다.
나 설마.. 엘뤼엔이랑 다시 만나기를 바라고 있는 거 아닐까? 으악. 말도 안 돼!!
그 때였다.
정리가 안 되는 복잡한 감정에 필사적으로 머리를 흔드는 내게 유라우스가 비장한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입니다. "
"........? 뭐, 뭔 데요? "
" 어째서 엘퀴네스님이 엘뤼엔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까? 정령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성이잖아요?
그럼 굳이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고 해도 될텐데 말입니다. "
" 아... 하지만.. 딸 쪽은... 좀..이상... "
" 왜요? 엘퀴네스님은 상당히 중성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성의 이미지가 더 강한걸요?
오히려 아들이라고 하면 다들 고개를 갸웃할 것 같은데.. "
"............."
내가.. 여성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고? 그거 한마디로 여자같이 생겼다는 소리?
커헉. 말도 안 돼! 이프리트는 아무리 봐도 남자같이 생겼다고 그랬단 말이야!!!
소리 없는 비명을 삼키며 필사적으로 이프리트를 돌아보자, 녀석은 뻘줌한 표정이 되어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아주 여자같이 생긴 건 아니야.. 엄청 예쁘장한 남자아이 같달까..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여자로 보일 수도 있는 거지 뭐.... 으으음... "
" 이프리트!!! "
" 에잇! 정령한테 성별을 따지는 저 놈이 더 웃긴 거야! 남자든 여자든 생긴 게 뭐가 중요해?
어쨌든 나한텐 남자녀석으로 보이니까 그렇게 알고 살아!
유희 다닐 때 양쪽 성별을 다 사겨 볼 수도 있으니 오히려 좋지 뭘 그래!!! "
"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
양 쪽 성별을 다 사귀어 보라니.. 날더러 변태가 되라는 건가?
허망한 얼굴로 되묻는 내게 이프리트는 '양성'을 가졌다는 드래곤까지 예로 들어가며 새로운 시각의 연애론을
장장 1시간동안 펼쳐놓았다.
오래 살아가는 종족일수록 한 성별에만 매여있는 건 좋지 않다나, 어쨌다나.
오히려 신선하게 살아가기로 치자면 중성적인 내 모습이 딱 좋다는 것이다.
정령이 누군가와 사귄다는 것 자체도 기가 막히는 일이었지만,
오랜 시간의 설명을 듣자니 점점 설득이 되어 가는 나를 보며 어쩐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나....이러다 정말 이프리트말에 홀라당 넘어가 어느 세월엔가 남자녀석이랑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어있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넘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그런 혼란한 생각은 갑자기 등장한 누군가의 존재로 인해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으니...
" 기각. 이 녀석은 내 '아들'이야. 앞으로 남자로 안보는 놈들은 다 죽여버린다. "
" ..... !!!! .... "
도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내 뒤에 서서 태연한 자세로 모든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엘뤼엔이 한마디 내뱉은 것이다.
" 엘뤼엔? 네가 여긴 어떻게??!!! "
숨도 못 쉴 정도로 놀라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며 엘뤼엔은 가볍게 미소를 그렸다.
" 무정한 아들놈이 인사도 제대로 안하고 돌아가서 말이야. 교육 좀 시켜주려고 왔지. "
" 허걱... 그..그건 아레히스가 멋대로 끌고 간 건데... "
" '핑계 없는 무덤 없다'. 익숙한 속담이지? 자아~ 아들아, 우리 진지한 대화를 나눠볼까? "
" 크어어..... "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은 엘뤼엔은 조용히 한 손을 들어 신력으로 만든 몽둥이를 생성시켰다.
이 나쁜놈!! 할 짓이 없어서 신력으로 몽둥이 따위나 만들다니! 아들은 패려고 만들었던 거냐?
엘뤼엔이 무기(?)를 꺼내자, 이번에는 내가 맞는 것을 볼 수가 없다는 듯, 유라우스가 냉큼 내 앞을 감싸며 막아섰다.
" 안됍니다, 엘뤼엔님! 차라리 저를 치십시오!! "
오오오! 이 얼마나 투철한 희생정신이란 말인가.
감격한 눈으로 바라보자 얼굴이 붉어진 유라우스가 짐짓 쑥스러운 듯이 헛기침을 했다.
...자기가 무슨 위험에 빠진 공주를 구해주는 기사라도 되는걸로 착각하고 있는게 아닐까?
그러나 신은 유라우스가 그 이상의 폼을 잡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여기서의 신은 그 이름도 위대한 엘뤼엔을 뜻했던 것이다.
" 그래? 그렇지 않아도 너한테 사용하려고 꺼낸 것이다. 걱정하지 말아. "
" ...........에? "
" 여자같이 생겼다고 말해서 내 아들에게 혼란을 줬지? 자아~ 나는 본분을 잊지 않는 신이라서 말이야. 형벌.. 개시해 볼까나? "
" 허어어어억!!!!! "
그 날..... 에바스 에덴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괴 생명체의 비명이 한동안 정령계를 메아리쳤다고 한다...
" 헤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 "
그 뒤, 엘뤼엔은 '위험인자'는 절대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며 일장 연설을 펼친 다음, 유라우스를 끌고 신계로 돌아갔다.
아마도 가는 길에 적당한 자리에다 녀석을 떨구고 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버리는 거지만.)
엘뤼엔이 가버리자 이프리트도 피곤하다며 불의 영역으로 들어갔고,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에는 정령들도 모두 잠자리에 들어버렸는지 나 혼자만이 적막한 상태로 덩그라니 남겨져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정말로 반갑게도, 우연히 정원으로 나오던 두 명의 정령왕, 트로웰과 미네르바를 조우했던 것이다.
도대체 어디에 갔었던 거냐며 울기 직전까지 되 버린 트로웰의 얼굴을 보며,
나는 그제서야 우리들의 외출을 다른 정령왕들에게 한마디 언질조차 건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프리트와 싸운걸 사과하려고 갔다가 얼떨결에 신계까지 쳐들어간 거였으니, 말 할 시간조차 없었다는 표현이 옳았지만.
화해하러 간다는 녀석이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져 버렸으니 얼마나 황당해 했겠는가?
거기다 이프리트까지 더불어 사라진 다음에야.. 두 정령왕의 근심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필사적으로 사과하며 이제껏 있었던 신계에서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 할 수밖에 없었다.
흥미진진하게 듣던 두 정령왕은 내가 엘뤼엔의 아들이 되 버렸다는 대목에서 황당한 표정을 감추질 못했으나
결국은 어떻게든 납득하는 듯 보였다.
그 중에서도 트로웰의 반응이란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으니..
" 잘됐다. 지훈. 아버지가 생겼잖아? 엘뤼엔이라면 예전부터 자기 것에는 지극히 호의적이었으니까 너에게 도 잘 해줄 거야. "
" 자기 것이라니.. ? 내가 ..엘뤼엔 거라는 거야? "
" 자식은 기본적으로 그 부모의 소유잖아?
하지만 정말 의외였어. 정령왕이 죽어서 신이 된다니 말이야. 그것도 다름 아닌 상급신이라니..
가만? 그럼 지금 여기 아크아돈을 책임지고 있는 상급신도 예전엔 정령왕이었단 소리네? "
" 그렇군. 어쩐지 유달리 정령계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다 했지. 흐음.
그나저나 나야말로 의외인걸. 이프리트가 정말로 엘뤼엔을 좋아했었다니.. "
정령왕들에게는 이름이란 것이 특별히 중요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전 엘퀴네스의 이름이 '엘뤼엔'으로 바뀌었다고 하자 바로 거부감 없이 엘뤼엔이라고 바꿔 부르는 것을 보니 말이다.
하긴, 정령왕들의 이름은 직위에 대한 호칭이지, 정확한 이름이 아니라고 했었던가?
나는 미네르바의 중얼거리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궁금한 얼굴로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 정말 눈치 못 챈거야? 마음을 읽을 수 있는데도? "
" 말했잖아. 같은 정령왕끼리는 능력이 통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고.
숨기고 있는 감정은 읽히지 않아. 이프리트는 자존심이 강해서 약점이 될만한 마음은 한 톨도 허용하지 않거든.
겉과 속이 반대인 모순적인 행동에 익숙해지지 않는 우리로서는 그냥 겉모습만 보고는 알아채기가 쉽지 않아.
그런 의미에서 지훈, 넌 정말 대단한 거야. "
" 하하.. 뭘 그 정도 가지고.. "
사실 나도 의심만 있었지 확신이 있던 건 아니었다. 어쩌다 밀어붙이다 보니 고백을 받아낸 꼴이랄까?
어색한 웃음으로 맞받아 치자 미네르바가 조용히 대답했다.
" 그렇지 않아. 우리는 의심을 가진다 해도 '그럴 리가 없다'고 치부해 버리고 말거든.
지훈처럼 적극적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떠보려 하지 않지. 그래서 낭패를 보는 경우도 많아. "
" 킥킥. 맞아, 미네르바. 너 그때 인간과 계약했을 때 실수했었던 적 있었지? "
여간해서는 표정을 거의 짓지 않는 미네르바가 트로웰의 장난스런 말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대체 어떤 실수이기에?
궁금한 눈으로 재촉하자 트로웰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유쾌하게 말을 이었다.
" 지금은 죽었지만, 한때 미네르바의 계약자가 인간이었는데 말이야.
그 녀석이 속으로 어떤 백작가의 여자를 좋아하고 있었거든.
그 여자도 계약자에게 매달리는 상태여서 잘만 하면 둘이 사랑하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지.
근데 이놈이 워낙에 자존심이 강한 녀석이라, 겉으로는 여자를 굉장히 싫어하는 척을 했다는 거야.
그리고는 멍청하게도 미네르바한테 부탁까지 하면서 '귀찮으니까 제발 저 여자 좀 죽여줘' 라고 말한 거지. "
" 헉? "
" 미네르바는 그 백작영애가 계약자에게 항상 편지를 건넨다는 걸 알고있었어.
그리고 그것을 볼 때마다 투덜거렸던 계약자도 알고 있었지.
어지간히 귀찮았나 보다 생각하고 큰 선심을 써서 여자를 죽여줬던 거야.
근데 알고 보니 그 계약자는 자신이 그런 식으로 말하면 미네르바가 '그래선 안 된다. 그녀의 사랑을 받아줘라' 라고
할 줄 알았다나봐.
그럼 위대한 존재의 권유를 못 이겨서라도 그녀와 결혼하려고 했던 거지. "
".........하하하... "
기가 막힌 놈이 아닌가? 사랑하는 여자를 받아들일 용기도 없어서 남의 힘을 빌리려 하다니 말이다.
황당한 표정으로 애매한 웃음만 흘리는 내게 트로웰은 어깨를 으쓱하며 한심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 웃기는 녀석 아니야? 그런 주제에 정말로 그녀를 죽이고 돌아온 미네르바에게 온갖 저주란 저주는 다 퍼부었어.
자신들 인간과 정령왕의 사고방식이 사소한대서 틀어질 수도 있다는 걸 생각지도 못하던 녀석이었지.
그 이후로 사람들에게 '바람의 정령왕'은 잔 학 무도하고 냉정한 정령이라고 알려져 버렸다구. 미네르바로선 정말 억울한 일이지. "
" 그런 녀석을 그냥 놔뒀어? "
" 물론 계약이 파기됐지. 녀석은 한순간에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명예를 잃은 거야.
죽을 때까지 폐인이 되어 미친 듯이 거리를 돌아다녔어. "
그러나 그 순간마저도 미네르바는 어째서 인간이 자신을 원망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원하던 소원을 들어주었는데 왜 화를 내는지 말이다.
모순이란 감정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한눈에 분별 해 낼만큼 익숙해져 있는 상태는 아니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을 살았어도 어쩔 수 없는 게 있다며 미네르바는 어색하게 변명했다.
그리고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언급하는 게 싫은지 은근슬쩍 다른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 그나저나 엘뤼엔의 성격도 많이 변했군. 이곳에 있었을 땐 무엇에도 관심이 없고, 세상을 달관한 듯한 분위기만 풍기더니.. "
" 후후. 다행이잖아? 지훈에게 아버지가 생겼다구. 좋은 게 좋은 거지 뭘 그래~ "
" 에? 왜 나한테 아버지가 생긴 게 좋은 일이 되는 건데? "
별로 아버지 따윈 필요 없었단 말이다! 오히려 귀찮다고~~..
샐쭉한 표정으로 트로웰의 말을 받자, 그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이런, 그 의미를 모르겠어, 지훈? 엘뤼엔이 너에게 굳이 아버지라는 형식이 되어 관계를 맺은 이유 말이야. "
"........? "
의미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엘뤼엔은 단순히 내가 마음에 들어 아들로 삼고 싶다고 했다. 그것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마주보자 이번엔 미네르바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네가 인간의 입장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야. "
" 엉 ? "
"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은 경험이 인간생활이었기 때문이었는지, 너는 정령왕의 본능을 상당수 스스로 억누르는 경향이 있어.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지만,
앞으로도 인간의 입장으로 다른 것을 판단하게 될 거야. 아크아돈엔 여러 가지 종족이 있어.
엘프와 인간과 드래곤, 드워프와 수많은 몬스터들이지. 그 종족끼리 전쟁이 벌어졌을 때,
너는 너도 모르게 인간의 편에 서게 되고 말걸? "
" 그..그럴지도? "
확실히 인간과 몬스터가 싸운다면 인간의 편을 들어 몬스터를 없애줄지도 모르겠다. 설마..그러면 안 되는 걸까?
긴장한 시선으로 두 정령왕을 바라보자 트로웰이 따뜻한 눈빛으로 미소를 그렸다.
"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야.
너무 지나친 건 좋지 않지만,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인간 세상에 꼭 중립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도 없으니까.
하지만 너의 경우는 인간세상을 너무 동경하게 되어 정령왕의 세월을 무료하게 여길 가능성이 있어.
지금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못 느끼고 있을 뿐, 100년만 지나가도 적응하기 힘들어 질 거야.
특히나 아끼던 사람이 죽었을 때, 그 허망감을 배로 느끼게 되겠지. "
"........."
내가 좋아하던 사람이 나보다 먼저 죽는다.
나보다 어렸던 아이가 어느샌가 할아버지가 되어 병들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지금의 모습 그대로다.
문득 소름이 돋았다.
나.. 지금의 처지를 너무 낙관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보다 훨씬 살아간다는 것이 힘들어 질지도 모른다.
" 맞아. 서서히 본능이 깨어날수록 그 상태가 약해지겠지만, 네 전생의 기억이 남아있는 한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는 거야.
정령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가족의 존재를 동경하게 될지도 모르지.
동료는 우리들이 있으니 상관없고, 연인도 만들 수 있겠지만, 가족은 힘들잖아. 특히, 아버지나 어머니의 존재는 말이야. "
"......!!....."
" 나나 다른 정령왕들은 처음부터 부모에 대한 개념이 없어. 우리가 나중에 신이 되어 부모가 될 수도 있고,
내세를 경험하면서 누군가의 아이가 되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도 하나의 유희로 밖에 인식을 못하겠지.
어차피 인간들과 우리는 처음부터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너는 달라.
이미 독자적인 혼자일 수밖에 없는 정령보다 '인간'의 개념을 먼저 이해했어. 아마 그리워하게 될 거야. "
" 그..렇지 않아. 나.. 예전에도 부모님하고는 좋은 기억도 없었고... "
" 하지만 부모란 것이 아이에게 어떤 의미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절대적인 아군' 이라고들 하잖아? 행복한 가족을 볼 때마다 지난날의 부모를 떠올리게 되겠지.
'나에게도 저런 부모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그 사람들이 저런 부모였다면 행복했을 텐데..'하고 말이야.
그건 정령에게는 있을 수 없는 감정이야. "
".........."
날카롭게 벼린 칼로 심장을 내려꽂을 때의 기분이 이럴까?
사정없이 후벼지는 듯한 따끔한 통증을 느끼며 나는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 트로웰은 한숨을 쉬며 다음 말을 이었다.
" 이를테면 다른 정령왕들이 가볍게 인식해버리는 것을, 너는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된 다는 거야.
아마 그것 때문에 가장 정이 많고,
가장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는 정령왕이 되겠지. '지훈'이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한 그건 신이 돼서도 변하지 않을 거야.
나쁘지 않아. 정말 나쁘지 않은데..
네 스스로 상처를 만들까봐 걱정스러운 거야. 우리들은. "
".............."
그런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었다. 과거의 내가 인간이었던 간에 지금의 나는 정령이고,
다시 태어남으로 인해서 지난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녀석들의 눈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걸까? 어째서?
나는 이제껏 인간 세상에 연연해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데?
설마..내가 능력의 자각이 느렸기 때문에?
" 기뻐했기 때문이야. "
" 응? "
무슨 소린지 이해를 못하고 고개를 들자 트로웰이 자상하게 미소지었다.
" 엘뤼엔이 네 아버지가 됐다고 말했을 때 네 감정이 말이야.. 두근두근하고.. 굉장히 기쁘게 울렸거든.
네가 태어나고 나서 이제껏 그런 기분 좋은 울림을 느낀 적이 없었어. 그래서 알았어.
'아.. 지훈은 부모를 가지고 싶었던 거구나.' 하고.."
".....! "
" 그리고 또 알았지. 엘뤼엔 역시 이런 너를 알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되고자 했던 것이란 걸.
아마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언인지 깨달았을 거야, 엘뤼엔은. "
" .....때려서 기절시켰는데도? "
조심스런 나의 의문에 트로웰도 한순간 말이 막혔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것만큼은 그 자신도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무언가 홀가분하다는 표정으로 트로웰은 어렵지 않게 그 대답을 내놓았다.
" 엘뤼엔은 괴팍하니까. 아마 시험해 보려던 것이었을걸? "
" 시험? "
" 네가 자신의 아들이 될 자격이 있는지 말이야. 신력에 의한 타격은 아무리 정령왕이라지만 굉장히 위험 하다구.
죽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런데 그렇게 기절하고도 너..
엘뤼엔에게 전혀 기죽지 않았었지? 오히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이런 심정 아니었어? "
" 그..그랬었던 것 같아. "
얼떨떨한 나의 대답에 트로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키득키득하고 웃었다.
" 그게 마음에 들었던 걸 거야. 고분고분하기만 하는 타입은 엘뤼엔이 금방 싫증내거든.
아마 누군가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도 너처럼 키울 자신이 없었을 거야.
엘뤼엔에게 육아라니..전혀 어울리지 않잖아. 아마 때려서 성격을 아주 버려 놓던가.
기죽게 만들어서 소심하게 만들던가. 둘 중 하나밖에 안될걸?
그런 점에서 지훈 너는 적당히 타협할 줄 알고, 적당히 반항할 줄 알고, 적당히 정을 주기도 하니 완벽했던 거지. "
"............"
여기서 납득이 된다는 게 더 무서운 점이다. 나쁜 놈. 그거야말로 정말 장난감 취급이잖아?
하지만 그런 식의 호의도 평소의 엘뤼엔에게는
정말로 어림없는 일이라고 하니 나로서는 정말 대단한 행운을 잡게 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비록 전혀 내키지 않는 행운이었지만.
" 받아들이도록 해.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지훈에게는 의지할 존재가 필요해.
그것이 우리들 다른 정령왕들이 될 수는 없을 거야.
우리는 어디까지나 동료, 혹은 친구로서 서로의 갈 길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라고 하면 언제나 한 자리에서 너를 지켜봐 준다는 거니까..
외로움을 잘 타는 지훈에겐 가장 커다란 의지가 될 거야. "
" 으음... "
" 엘뤼엔은 일단 자신의 것이라고 정해놓은 것에는 한없이 자상한 면이 있었어.
예전에도 물의 정령들에게는 어떠한 해코지도 하지 않았지.
절대적인 그들의 방어책이 되 주는 거야. 너는 아들이니까..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로 못하지는 않을걸? 그 증거로 너를 '아들'로 인정했잖아?
딸로 칭할수도 있는데도 굳이 아들이라고 한것은, 네가 '남자'라는 자각이 강하기 때문이야.
네가 스스로를 남자로 생각하고 있는 이상, 엘뤼엔은 너의 의견을 언제까지나 존중해 줄 것이 틀림없어."
" 쿨럭.. 그..그런가..? "
" 그래. 네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던, 무슨 사건에 부딪치던 엘뤼엔은 절대로 너를 외면하지 않을 거야. 그건 네게 큰 힘이 되어..
네가 정령생활을 못 견디게 힘들어할 때도 가장 큰 의지처가 되어주겠지.
그리고 나중에는 '지훈'이었던 시절을 잊어버릴 만큼, 새로운 시작에 익숙하게 만들어 줄 거야. "
"......!! "
새로운 시작이라..
정령으로 태어나게 된 지금도 충분히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했는데. 난 아직도 해결해야 할게 많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확실히 트로웰의 말은 옳았다.
아마도 나는 정령으로 살면서도 끊임없이 인간들의 생활에 간섭하게 될 테고. 그들의 모습을 동경하게 될 테지.
나보다 어린 사람이 먼저 나이 들어 죽는 것에 큰 충격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나게 될 이는 아버지인 '엘뤼엔'이 될 것이었다.
나의 절대적인 아군이 되어주겠다는 약속 하나로.. 한없이 의지하고 고민을 털어놓고 싶어지게 될 테니까.
...과연 정말로 녀석이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했다. 그것은 트로웰이나 미네르바.
이프리트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를 싫어하지 않는 존재가 있는 이상, 그것만으로도 나는 얼마든지 힘든 일을 털고 일어날 수 있을 테니까.
" 부탁이 있는데... "
" 뭔데? "
"......? "
똑같은 눈빛으로 의아하게 바라보는 두 정령왕을 보자니 괜시리 웃음이 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하면 오히려 천벌 받을 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방금 떠오른 제안을 조심스럽게 내보았다.
" 내 이름말이야.. 다시 엘퀴네스로 불러줄래? "
" 어? "
"........? "
" 지훈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면.. 어쩐지 계속 과거에 얽매여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너희들의 동료로서, 하나의 정령왕으로서 다시 나의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 "
".......!! "
"........"
엘퀴네스란 이름이 익숙치않았기 때문에.. 예전에 사용했던 '지훈'이란 이름을 고집했었다.
하지만 이프리트는 '자각을 위해서'란 명목으로 '엘퀴네스'란 이름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나름대로 이프리트만의 애정표현일지도 몰랐다.
'수긍'해줌으로서 나의 마음을 배려해준 트로웰과 미네르바와는 또 다른.. '강요'라는 이름의 진실을 알리는 애정.
투덜거리며 심통만 부렸지만 본심은 나의 인간으로 살았었다는 기억을 지워주고 싶었던 걸지도.
그래서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진정한 '시작'을 위해서 과거의 나를 벗어 보겠다고.
뭐, 사실 서양사람 얼굴에 '지훈'이란 이름이 어울리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런 내 감정을 알아챈 건지 트로웰과 미네르바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미네르바는 피식 웃으며 언제나 그렇듯이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어렵지 않아. 엘퀴네스. 오히려 이쪽이 더 익숙한걸? "
" 헤헤.. "
" 아아, 맞아 이건 어때? 애칭으로 엘퀴네스를 줄여서 '엘'이라고 부르는 거야. 귀엽겠다~ "
" 쿠..쿨럭. 귀엽다니..트로웰.. "
귀여운건 오히려 네 쪽이라고~!
붉어진 얼굴로 연신 헛기침을 내뱉자 트로웰과 미네르바는 하하 웃었다.
난데없는 정령왕들의 웃음소리에 저 멀리 꽃잎에 누워 잠들어 있던 수많은 실프들이 궁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보였다.
공중에 떠다니는 자그마한 불씨들은 불의 하급정령인 카사들이었다.
나비의 모양을 한 카사는 저들끼리 춤을 추며 밤하늘에 별빛보다 아름다운 무늬의 수를 놓았다.
언젠간 ..이 모든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될 때가 오겠지. 그리고 그때에 난 더 이상 외롭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얼마든지 나를 아찔한 행복 속으로 밀어 넣는 주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사랑하는 동료들과, 부하(?)들... 그리고 아직은 어색한.. 사랑을 주는 이름, 아버지..
" 탄생을 다시 한번 축하해. 엘. 정령계로 온 것을 환영할게... "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외전.3
- 그대가 잠든 사이에...-
퍼억---
작렬한 어퍼컷과 함께 눈부신 빛이 터지며 엘퀴네스는 힘없이 쓰러졌다.
아무리 능력의 자각이 덜 되었다 곤해도, 정령왕중 가장 육체적인 능력이 뛰어난
엘퀴네스가 별다른 저항도 못해보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는 것은 절대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일.
게다가 여긴 신계가 아닌가! 정령계를 벗어난 정령은 실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엘퀴네스가 기절했다는 것은 방금 엘뤼엔이 그에게 행한 공격이 단순한 타격이 아니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 설마 신력? "
경악한 얼굴로 비명을 지른 이프리트는
상황이 이렇게 되자 몸을 숨기고 말 것도 없이 그대로 문을 박차고 엘퀴네스에게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레히스와 유라우스역시 마찬가지였다.
" 엘퀴네스! 엘퀴네스! 정신차려! 눈 좀 떠봐! "
" 엘퀴네스님!! "
몸에 상처자국이라고 하나도 없었지만 쓰러진 엘퀴네스의 감긴 눈은 도무지 떠질 줄은 몰랐다.
당황한 이프리트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엘퀴네스의 몸을 흔들었고,
아레히스 역시 창백한 얼굴로 상태를 점검해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무심한 눈으로 돌아본 엘뤼엔은 짧게 한마디 내 뱉았다.
" 귀찮은 것들이 또 있었군. "
" 이익_!! 이게 무슨 짓이야, 엘뤼엔! 신력으로 정령을 공격하다니..
소멸시키려고 작정한 거야? 엘퀴네스는 아직 태어난 지 며칠 안됐단 말이야! "
" 무모와 용기의 차이를 가르쳐 준 것뿐이다.
나서야 할 자리와 나서지 않을 자리도 가릴 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이 녀석이 태어난 지 얼마 안됐다는 건 나도 알아.
그래서 많이 봐 준거다. "
" 너 정말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
화가 난 이프리트는 자기도 모르게 그대로 엘뤼엔에게 뺨을 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이 엘뤼엔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끼어 들어 제제를 가했다.
그것은 어느새 소리 없이 엘뤼엔의 옆으로 다가온 수행 천사였다.
그는 치켜든 이프리트의 손을 붙잡은 상태에서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무례하십니다. 엘뤼엔님 으로 부터 떨어져 주십시오. "
" 하.. 뭐, 뭐가 어째? 무례? 수행 천사 따위가 감히!! "
" 그만 둬, 이프리트. 이 녀석에게 함부로 대하면 너라고 해도 봐주지 않는다. "
" !! "
앙칼지게 쏘아붙이려던 이프리트는 그대로
수행천사를 감싸고도는 엘뤼엔의 행동에 참아왔던 무언가가 머리 속에서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정령왕의 시절 몇 천년을 같이 보내왔던 나보다 저런 하찮은 천사가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그의 후배나 다름없는 엘퀴네스는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면서..
내가 천사에게 무어라 하는 것은 불쾌하다는 뜻?
훗.
그 순간 이프리트는 어이없게도 웃음이 나왔다.
내가 도대체 저 녀석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이곳에 온 걸까?
그의 손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불의 검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정령계를 벗어나면 그 힘이 크게 반감되기 하지만, 그래도 신계는 인간세상보다는 나았다.
2/3 정도에 해당하는 능력을 충분히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정도면 적어도 엘뤼엔에게 타격을 입히기 충분한 힘이었다.
순식간에 검을 끌어낸 이프리트는 미처 아레히스나 유라우스가 말려보기도 전에 그대로 엘뤼엔에게 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이 있던 공간은 폭격을 맞은 전쟁터 마냥 엉망으로 변해버렸다.
정작 공격대상이었던 엘뤼엔은 별것 없다는 듯 가볍게 피해버려 멀쩡했던 것에 반해, 그 파장이 집무실 안에까지 미쳐,
쌓여있던 서류들과 책상을 한꺼번에 두 동강을 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콰아아앙-!
후두두둑.
부서진 책상과 먼지조각이 된 서류더미들. 그것이 아직 결제조차 하지 않은 것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망연자실해 있는 천사를 대신하여 멍하니 그것을 돌아본 엘뤼엔은 이마에 작은 십자마크를 띄웠다.
" 죽고 싶어 작정했나 보군. "
" 하, 그래! 죽여라, 죽여!
누가 얌전히 당해주기나 할려고? 네가 뭔데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천사 따위보다 내가 가치가 없다 이거야? 절대 용서 안 할거야~! "
" 용서할 쪽이 어딘데 지금-!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바이톤의 1/10에 할당하는 주민들의 생명기록서가 사라져버렸어! 작성하는 데만도 만 10년이 걸리는 일을~! "
" 하, 내가 알게 뭐야? 지금부터 죽어라 일만하면 될 것 아니야, 바보야! "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
싸늘하게 대답하는 엘뤼엔의 표정에 주변의 공기가 급격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악악거리던 이프리트도 조금 움찔하긴 했지만, 다시 표독스러운 얼굴로 엘뤼엔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 그래, 말이라고 했다. 어쩔래! 그렇게 노려보면 누가 겁낼 줄 알고? "
" 네가 무모하단 건 이미 지난 세월로도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까지 막무가내일줄 몰랐군. 솔직히 말해 실망이야. "
" 흥.. 실망씩이나 하셨어? 네가 나한테 호감이라도 있긴 했니? 매일 꼬맹이라고 부르고, 모자라다 고 무시하고,
마지막에 소멸할 땐 인사조차 건네고 가지 않은 주제에 이제와 무슨 실망? 실망한 건 오히려 내 쪽이라고! "
" 그렇다면 잘 됐군.
저 녀석이나 데리고 빨리 정령계로 돌아가. 정령왕이 아크아돈을 비우다니.. 이래서 내가 너를 꼬맹이라고 하는 거다.
도대체 이런 위험까지 감수하면서까지 이곳을 온 이유가 뭐냐? 그렇게 할 일이 없었나? "
" 뭐..뭐가 어째? 할 일이 없기는 왜 없어! 그렇지 않아도 지금 아크아돈이 회복단계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
" 그런데 여긴 왜 온 거야? "
" 그거야 네가 보고 싶었으니까 잖아, 이 멍청... 헉.. "
" 흐음... "
이프리트가 저도 모르게 꺼낸 본심은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되어 버리고 말았다.
고백을 하던 말던 흥 하고 코웃음 칠 것만 같았던 엘뤼엔의 예상외로 부드러운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덕분에 험악하게 돌아가던 공기가 단숨에 사그라들었다.
" 내가 보고싶었다고? "
" 그..그게 아니라.. "
" 정령왕 수료나 끝내고 찾아와. 이왕이면 여신이 되는 쪽이 더 좋고. "
" 뭐..어? "
새빨개진 얼굴로 멍하니 되물었지만 엘뤼엔은 원래 한번 한말을 두 번 건넬 정도로 친절한 성격이 아니었다.
애초에 엘퀴네스를 기절시켰던 이유도 경고를 두 번 하는 게 귀찮아서였지 않은가.
상황이 대충 마무리지어지는 것 같자, 기절한 엘퀴네스를 부축하고 있던 유라우스가 재빠르게 끼어 들었다.
" 저어. 어딘가 이 분을 눕힐만한 곳이 없을까요? "
" 아. 맞아! 엘퀴네스!! 어..어떻게 할거야! 저 녀석이 죽으면 다 네 책임이야! "
" 죽을 정도로 때리지는 않았어. 무엇보다.. '시험'이었을 뿐이니까. "
" 시험? "
의아하게 묻는 이프리트를 무시한 엘뤼엔은 유라우스의 손에서 가볍게 엘퀴네스를 낚아 채 버렸다.
그 모습에 엘퀴네스를 들고있던 유라우스부터 주변의 일행들이 모두 '어어어'하고 바라봤지만 엘뤼엔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는 되려 눈빛을 사납게 굳히면서 성난 사자와 같은 얼굴로 유라우스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마치 자신의 물건을 남이 만지기라도 했던 것처럼.
" 내 아들이 될 녀석이다. 함부로 만지지 말아. "
" 헉? 아..들이요? "
" 그게 무슨 소리야?!! "
엘뤼엔은 이번에도 경악하는 두 존재를 무시했다.
그리고는 천사를 시켜 엘퀴네스를 안전하게 눕힐만한 장소로 옮기라고 명령한 것이다.
그것에 기가 막힌 이프리트가 막 따지려는 찰나, 냉정한 목소리가 그것을 가로막았다.
" 여신이 된 다음에나 오라고 했다. 지금의 내 생활에 끼어 드는 건 용납 못해. "
" !!......."
저게 진정 남의 마음을 받아준 녀석이 보일 수 있는 태도란 말인가!
그러나 이프리트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엘뤼엔의 성격상 타인에 대해 무심한 태도가 쉽게 바뀔리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말없이 지켜본 아레히스는 싱긋 웃으며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 엘퀴네스님을 아들로 삼으시려고요? 프로포즈해오는 여신들도 많은데 일부러 양자를 들일 필요는 없잖 습니까? "
" 당신이 끼어 들 일이 아니다. 그저.. 지켜보고 싶은 것 뿐이야. "
" 지켜본다 고요? "
엘퀴네스를?
그 순간 그 곳에 있던 모든 이들의 머리 속에 하나같이 떠오른 의문이었다.
그 시선들을 멋쩍은 눈빛으로 마주한 엘뤼에는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 대대로 엘퀴네스가 다른 정령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야.
자신 외의 다른 존재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
나 역시 신이 되고 나서야 깨달았어. 그것은 엘퀴네스들만이 가지는 고유의 특성이다. "
" 나르시즘과 비슷한 겁니까? "
" 그럴지도. 하지만, 이 녀석은 아니야. "
그렇게 말하며 엘뤼엔이 가리킨 것은 기절한 상태의 지훈-현재의 엘퀴네스였다.
" 인간세상의 경험에 의한 충격으로 본성을 잊어버린 걸지도 모르지. 이 녀석이 그렇게 된 것은 어쩌면 내 탓일지도 몰라. "
" 엥? 그건 또 무슨..? "
놀란 눈으로 이프리트가 바라보자 엘뤼엔의 무심한 눈빛에 약간의 망설임이 스며들었다.
마치 말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는 듯한 태도였다.
잠시 침묵을 지킨 엘뤼엔은 이윽고 한숨과 함께 사실을 털어놓았다.
" 정령왕이 소멸직전에 바라는 것은 '소원'이 되어 운명을 움직이게 만들더군.
그때 나는 무심코.. 내 다음대의 엘퀴네스는 다른 정령들을 위해주는 녀석이길 바랬었지. "
" 헉.. 말도 안 돼.."
" 그래. 나답지 않은 생각이었지만..
그때 잠깐 떠올린 그 생각이 소원이 되었기 때문에 이 녀석의 생활이 꼬인 거라면, 그에 따른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 "
" 하..하지만 겨우 그런 이유로 네가 아들로 삼을 것까진 없잖아? "
보상하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꼭 부자의 연을 맺을 생각까지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당황한 목소리로 그것을 지적하는 이프리트의 말에 엘뤼엔은 가볍게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맞아. 하지만 어떻게 된 건지 정말 욕심이 나버렸어. 이유 따윈 없지. 그냥 이 녀석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도 나, 거부하는 것도 나야. 누구도 뭐라 참견할 권리는 없어. "
그렇게 말하며 엘퀴네스를 내려다 본 엘뤼엔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맺혀있었다.
" 아들이 있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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