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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베니아 1권

by 아도비야 2021.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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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루베니아 연대기 1권


 
   목차

   1. 신대륙 아르카디아

   2. 아르카디아의 이주민 벗겨먹기 대작전

   3. 백일하에 드러나는 레온의 벌목실력
  
   4. 렌달 국가연합으로

   5. 알리시아에게 흑심품었다 큰 코 다친 사나이

   6. 무식한 방법으로 도둑길드에 난입하다

   7. 무토회의 본고장 레드리나

   8. 본 브레리커 러프텍의 대활약



  1. 신대륙 아르카디아


 정말 맑고 화창한 날씨였다.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푸른 하늘이 시리도록 눈을 파고들었고 그 아래에는 끝없
는 대양이 펼쳐져 있었다. 어딜 봐도 육지의 윤곽이 보이
지 않는 망망대해(忘忘大海).
 그곳을 한 척의 배가 항해하고 있었다. 고래처럼 통통한
동체 위로 복층 구조의 갑판이 있었고 그 위에 선실이, 또
그 위에 세 개의 마스트가 솟아 있었다.
 전형적인 대양 운행용 갤리언이었다. 거대한 사각 돛에
순풍을 가득 안은 채 범선은 서쪽을 향해 하염없이 나아
가고 있었다.
 촤아아악.
 용골에 와서 부딪혀 갈라지는 파도가 흰 포말을 만들어
냈다. 항해하기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었기에 범선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대양을 항해하고 있었다.
 범선의 선미에는 세 개의 깃발이 걸려 있었다. 그중 하
나에는 아르카디아 대륙을 상징하는 독수리 문양이 아로
새겨져 있었다. 가운데에는 아르카디아 최대의 무혁항인
페이류트의 깃발이, 그리고 제일 오른쪽에는 배의 선사를
상징하는 날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 범선은 아르카디아의 독시국가인 페이류투 소속의
대륙간 여객선이었다. 한 번에 500명 이상의 승객과 화물
을 운송할 수 있는 아르카디아에서 제일 큰 범선인 것이
다.
 범선의 함교에는 수염이 희끗희끗한 50대 중반의 선장
이 눈빛을 빛내며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디클레어, 평생을 바다에서 보낸 전형적인 바다 사나이였
다.
 함교에는 그 외에도 항해사가 항법사와 함께 해도를 펼
쳐놓고 조류를 조사하고 있었다. 중앙부에는 조타수가 자
리를 잡은 채 능숙한 손길로 큼지막한 방향타를 돌렸다.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 바다를 쳐다보던 선장 디클레어
가 조타수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방향을 우현으로 5도 틀어라. 그 상태로 내일 아침까
지 항해한다."
 "알겠습니다."
 조타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방향타를 틀었다. 범선의
이름은 페가서스(Pegasus) 호였다. 선장 디클레어의 지휘
하에 든 지 벌써 5년이 넘은 선박이었다. 그동안 단 한 번
도 사고가 없었기 때문에 승무원들은 선장 디클레어를 깊
이 신뢰하고 있었다. 미간을 지긋이 모은 채 항해일지를 
작성한 디클레어가 고개를 들었다.
 "운이 좋군. 아무런 일 없이 100일 간의 항해를 거의 끝
마쳤으니 말이야."
 옆에 서 있던 항해사가 맞장구를 쳐왔다.
 "정말 그렇군요. 바람도 순풍이었고 폭풍 한 번 몰아친
적이 없으니 말입니다. 트루베니아 간의 항로에 뛰어든
후 가장 조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지난 1년 동안 10척의 배가 침몰했을
정도로 험준한 뱃길인데……."
 과거의 일을 떠올랐는지 디클레어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벌써 40년 가까운 세월을 바다에서 보내온 베테랑
이었다. 그리고 바다에서 보낸 세월 중 반 가량은 트루베
니아 간의 항해에 바쳤다. 비록 지금은 배를 책임지는 선
장의 입장세서 아드리아 해를 건너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
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반 선원으로 시작해서 갑판장, 항법사를 거쳐 왔
고 일등항해사로 5년 정도를 근무했다. 그리고 불과 7년
전에 선장으로 임명되어 지금까지 선박을 이끌어 왔던 디
클레어였다.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왔기 때문에 배에 대한 애착
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문득 10여 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당시 그는 일등
항해사로 커먼베이(Commonbay)라른 갤리언에 승선해 있었
다. 그 범선은 페가서스와 마찬가지로 트루베니아와 아르
카디아 사이를 운행하는 범선이었다.
 페가서스는 여객선이지만 커먼베이 호는 화물선이라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였다. 그때의 일은 떠올려 보던 디클
레어가 돌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벌써 10년이 더 지난 일이지만 아직까지 생각만 해도
몸이 떨리는군.'
 당시 커먼베이 호는 엄청난 사고를 겪었다. 바다의 악몽
이라고 전해지는 시 서펜트(Sea Serpent)가 배를 습격해
온 것이다.
 시 서펜트는 선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바다 괴물이었
다. 지능이 뛰어나서 배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기
에 더더욱 위험한 몬스터이기도 했다.
 당시 커먼베어 호는 시 서펜트의 공객에 의해 키가 파손
당하고 닻줄이 끊어지는 손상을 입었다. 엎친 데 덮친 격
으로 시 서 펜트가 바다 밑으로 들어가서 배 바닥을 뚫기
시작했으니…….
 배의 조향능력을 망가뜨린 뒤 침몰시켜 탑승한 사람들
을 먹잇감으로 삼는 것이 시 서펜트의 주요 공격방식이었
다. 놈은 물속에서 은밀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석궁이나
노포 따위로는 공격할 방도가 없다.
 놈은 정말 영리한 몬스터였다.
 곤경에 처했지만 커먼베어 호의 선원들은 비교적 현명
하게 대처했다. 가장 먼저 그들은 식량창고를 죄다 털어
시 서펜트를 꾀었다. 식량을 바다에 던지자 바닥을 뚫던
시 서펜트가 냄새를 맡고 바다에 던져진 식량으로 달려든
것이다.
 제아무리 지능이 뛰어나도 몬스터는 역시 몬스터였다.
그 틈을 타서 커먼베이 호는 돛을 활짝 펼치고 전속력으
로 달려 겨우 시 서펜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선원들
이 벌떼처럼 달라붙어 물을 퍼내고 파손된 부위를 수리했
기에 커먼베이 호는 다행히 침몰되는 신세를 모면했다.
 커먼베이 호는 그렇게 해서 시 서펜트를 따돌릴 수 있었
다. 하지만 피해는 컸다. 무엇보다도 식량을 몽땅 잃은 것
이 가장 큰 타격이었다.
 아르카디아와 트루베니아 사이에 위치한 아드리아 해는
낚시나 투망으로 식량을 장만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워낙 무서운 해양 몬스터들이 득실득실거리기 때문에 빠
른 속력으로 통과해야만 몬스터의 이목을 벗어날 수 있다.
 함선이 한 군데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
름없다.
 그 때문에 커먼베이 호는 힘겨운 항해를 거듭해야 했고
여러 명의 선원들이 굶어죽고 나서야 겨우 트루베니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한 기억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본 디클레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만약 페가서스가 그 꼴을 당했다면 더욱 난리가 났을
것이야."
 그나마 커먼베어 호는 화물선이다. 배를 다루는 선원을
모두 합쳐봐야 50명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페가서스는
사정이 다르다. 500여 명의 승객과 100여 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기에 시 서펜트의 습격을 받는다면 그야말로 끝장
이었다.
 "그나마 자이언트 훼일(거대한 고래:Ganit Whale)보다
는 낫지. 그놈은 배를 보면 다짜고짜 돌진하여 무턱대고
부숴버리니까……. 어쨌거나 이번 항해는 정말 평탄했어."
 아드리아 해는 매해 10척 이상이 몬스터의 공격으로 침
몰하는 위험한 바다였다. 선박이 아무런 위험 없이 순탄
한 항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신의 축복으로 생각해야 한
다.
 "휴우……. 이저 마음을 놓을 수 있겠군."
 디클레어의 얼굴에는 한숨 돌렸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페가서스 호는 머지않아 아르카디아의 내해에 닿을 것이
다. 그곳은 위험한 해양 몬스터들이 서식하지 않는 곳이
다. 그때가 되면 비로소 모든 위험에서 놓여나 쉴 수 있
는 것이다.
 그러던 사이 서서히 석양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뱃머리
가 서쪽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지는 해가 시야에 정면
으로 들어왔다. 디클레어가 매혹된 눈빛으로 석양을 물끄
러며 응시했다.
 "매일 저녁 보아오던 장면이지만 너무도 아름답군."
 석양을 쳐다보던 그의 시선이 문득 아래로 향했다. 뱃머
리 부분이었다. 닻줄이 돌돌 말려 있는 옆으로 그림자 두
개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디클레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오늘도 어김이 없군. 저토록 바다를 좋아하는 이들은
처음이야."
 그의 옆에 서 있던 항해사가 말을 거들었다.
 "정말 기묘한 커플이지 않습니까? 연인 같지는 않은데
항상 둘이 붙어 다니는군요."
 "그러게 말이야. 사내의 덩치를 보니 가시처럼 보이지
는 않은데?"
 어느새 함교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뱃머리 쪽으로 향
했다. 그곳에 있는 두 남녀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하
염없이 바다를 쳐다보고 있었다.


 소금기가 섞인 바닷바람이 머리칼을 시원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을 맨얼굴로 맞으며 알리시아가 한없이 매
혹적인 표정을 지었다.
 "정말 아름답지 않아요? 석양을 언제 봐도 신비하고 황
홀하군요."
 그 말을 무뚝뚝한 음성이 맞받았다.
 "그렇군요."
 너무나도 간결한 대답에 알리시아가 살짝 눈웃음을 쳤다.
 "레온. 당신은 너무 여유가 없어요. 한가할 땐 저처럼
대자연의 풍광에 매료되어 보세요. 며칠 있으면 더 이상
바다를 보지 못할 텐데 아쉽지 않나요?"
 그 말을 듣자 레온의 얼굴에 멋쩍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여전히 짤막했다.
 "조금 아쉬울 것 같군요."
 "풋!"
 실소를 터뜨린 알리시아가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
았다. 붉게 변한 태양은 벌써 절반 정도 바다에 잠겨 있었
다. 그것이 색다른 감흥을 주었기에 알리시아는 정신없이
석양을 감상했다. 
 알리시아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일단 붉은
머리가 인상적이었으며, 아담한 체구에 잘 정돈된 이목구
비가 단아한 이미지를 풍겼다. 눈에 확 띄는 미녀라기보
다는 쳐다볼수록 귀엽고 예쁘다는 느낌을 주는 아가씨였
다.
 반면 레온이라 불린 청년은 거인(Giant)이라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덩치가 컸다. 2미터가 훌쩍 넘어가는 키에 
팔뚝이 어지간한 처녀의 허리둘레만 했다. 속에 받쳐 입
은 가죽갑옷 사이로 역동하는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에 비해 인상은 무척이나 순박했다. 마치 갓 시골에서
나온 촌뜨기처럼 보인다고나 할까. 부스스한 갈색 머리칼
아래에는 큼지막한 눈망울이 자리 잡고 있었고 주먹코와
입은 덩치만큼이나 컸다.
 결코 미남이라고는 할 수 없는 외모였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대뜸 호감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순수해 보였
다. 그런 순한 인상이 당당한 근육질의 덩치가 주는 위압
감을 상당부분 상쇄시켜주었다.
 알리시아는 여전히 매료된 눈빛으로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레온은 그녀 뒤에 철탑처럼 버티고 서서
알리시아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도대체 둘은 무슨 관계일까. 그 해답은 레온의 독백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암소처엄 순해 보이는 눈동자였지만 레온의 눈빛은 깊숙
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은 마치 세상사를 달관한 현자
에게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눈빛이었다.
 '서쪽으로 항해한 지 거의 100일이 되었다. 별다른 사건
이 없다면 2,3일 내로 아르카디아 땅을 밟을 수 있겠군.'
 신대륙에 도착한 다고 생각하자 레온은 자시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어왔다. 그것은 신대륙 아르카디아는 레온이
품은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온이 가장 그리워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는 잠자코 어머니 레오니아를 떠올렸다. 그가 가장 사
랑하는 어머니가 바로 아르카디아에 있었다. 레온은 자신
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어머니, 레온이 곧 가겠습니다.'
 어느덧 레온의 뇌리에는 어머니 레오니아와 헤어진 이
후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레온은 원래 하프 블러드였다. 반쪽의 피(Half Blood).
즉 혼혈아인 것이다. 그것도 평범한 혼혈아가 아니다. 인
간과 몬스터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종간잡종(種間잡種)이다.
 레온의 아비 로보는 흉포한 몬스터의 대명사인 오우거였
다. 그것도 중부대로의 살육자란 별명이 붙은 악명 높은
존재였다. 로보는 단순한 먹잇감으로 생각하고 어머니인
레오니아를 납치했다. 그러다가 약에 중독되어 레오니아
를 범했고 그 결과 레온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레온은 인간의 지능과 오우거의 육신을 함께 지니고 태
어났다. 바로 그 때문에 레온의 운명이 그토록 기구했을 
지도 모른다.
 레오니아는 오우거의 외모를 가진 레온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기구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레온의 심성이 비뚤
어지지 않은 것은 어머니 레오니아의 헌신적인 사랑 때문
었다.
 어미니를 떠올리자 또다시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
리움이 봇물처럼 밀려드는 것을 느낀 레온은 자신도 모르
게 속으로 어머니를 불러보았다.
 '어머니…….'
 어머니의 자상한 얼굴이 눈에 선했다. 시선이 흐려지는
것을 느낀 레온이 얼른 고개를 흔들어 눈물을 뿌리쳤다.
그중 한 방울이 날아가 알리시아의 뺨에 붙었다.
 살짝 고개를 돌린 알리시아는 깜짝 놀랐다. 레온의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있는 것을 보자 그녀의 얼굴이 의혹으로
물들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지금껏 여러 번 보아왔던 장면이라 알리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입을 열어 물어볼 만한 상황이 아니
었기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레온의 정체에 대해 또다시 고민을 거듭했다.
 '도대체 무슨 비밀을 품고 있는 사람일까? 도대체 뭘 생
각하기에 저토록 강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것지?'
 하지만 알 수 없었다. 레온은 그 덩치만큼이나 과묵했고
쓸데없는 말은 거의 입 밖에 내지 않는 전형적인 무인이
었다.
 알리시아는 레온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그녀는 아르니아(Arnia)의 공주였다. 지금은 멸망하고
없는 나라 아르니아. 바로 옆에 위치한 강대국 헬프레인
(Helfrain) 제국은 무려 세 차례나 아르니아를 침공했다.
아르니아는 여러 왕국과 연합국을 형성하여 침공에 맞섰
지만 버텨내지 못했다.
 제국의 세 번째 침공 당시 알리시아는 여자임에도 불구
하고 연합군에 가담하여 제국군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농노들로 구성된 연합군은 강력한 헬프레인 제국의 힘을
버텨내지 못하고 그만 패배하고 말았다. 완전히 허물어진
연합군은 뿔뿔히 흩어져서 패주를 거듭했다.
 당시 알리시아는 아르니아 출신 기사들 몇 명의 호위를
받으며 후퇴하다 그만 제국군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그
때 만난 자가 바로 레온이었다.
 평범한 옷차람에 파이크(Pike) 병들이 쓰는 길쭉한 창을
들고 나타난 레온은 놀랍게도 엄청난 무위를 발휘하여 포
위한 제국의 기사들을 모조리 물리쳤다. 제국 기사들 중
에는 오러(Aura)를 발현시킬 수 있는 궁극의 무예가인 소
드 마스터(Sword master)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지만 레
온을 당해내지 못했다.
 그녀는 레온의 호위를 받으며 아르니아로 안전하게 물러
날 수 있었다. 그 후 레온의 행적은 알리시아도 몰랐다.
아르니아에 도착하자마자 헤어졌기 때문이었다.
 이후 이어진 헬프레인 제국의 침공으로 인해 아르니아
왕족들은 도성과 백성들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머나면 동쪽의 트로보나 왕국까지 피난가야 했던 아르니
아의 왕족들은 이른바 나라 잃은 설움을 톡톡히 느껴야
했다.
 트로보나 왕국의 늙은 국왕이 젊고 아름다운 알리시아
에게 눈독을 들였으니…….
 늙은 국왕의 후처가 되기 싫었던 알리시아는 급기야 아
르카디아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르카디아에는 아르니
아의 종주국이었던 크로센 제국이 있다. 크로센 제국의
도움을 받는다면 잃어버린 국토를 회복할 가능성이 있었
기에 알리시아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아르카디아행 배에
몸을 싣기로 작정했다. 그러다 거기에서 레온을 다시 만
나게 된 것이다.
 현재 레언은 알리시아에게 고용된 용병 신분이었다. 당
시 레온은 아르카디아로 건너갈 여비가 없어 쩔쩔매고 있
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알리시아는 데리고 온 기사들을
돌려보낸 뒤 레온을 호위로 고용했다. 물론 의뢰비는 아
르카디아로 건너가는 여비였다.
 둘의 관계는 그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알리시아가 상기
된 눈빛으로 레온을 쳐다보았다.
 '얼마 겪어보지 않았지만 정말 임무에 충실한 사람이야.'
 계약을 맺은 이후 레온은 어김없이 알리시아의 뒤를 따
라다녔다.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면 일정거리 이상 떨어
져본 적이 없었다. 다행히 알리시아가 극도로 열리해서
거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기에 분란이 일어난 적은 없지
만 레온은 언제 어디서나 호위 임무에 충실했다.
 그 사실을 상기한 알리시아가 살며시 웃었다.
 '그를 고용한 것은 정말 잘한 선택이야. 그렇고말
고…….'
 원래 그녀는 아르니아 시절부터 거느렸던 기사들 중 한
명을 대동하고 아르카디아로 건너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레온의 무위는 기사 100명을 합친 것보다도 뛰어났다. 말
로만 듣던 초인(超人:그랜드 마스터)이 아닐까 생각해 보
는 알리시아였다.
 '저 젊은 나이에 어떻게 해서 그토록 뛰어난 무예를 익
혔을까?'
 문득 저런 실력자가 자신을 도와준다면 아르니아 왕국
을 되살리는 것이 한결 쉬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었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저 정도 실력자가 무엇이 아쉬워서 아르니아를 도와줄
것인가. 이미 멸망해서 사라진 나라가 아닌던가. 게다가
아따금 보이는 레온의 태도를 보니 뭔가 곡적이 있는 사
람 같았다.
 살짝 레온을 훔쳐본 알리시아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
다.
 '무엇 때문에 아르카디아로 가는지 모르지만 부디 원하
는 바를 이루기를…….'
 레온은 아직까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파도를 헤치
고 나가느라 배가 흔들렸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어두워진 밤바다를 응시했다. 그 모습을 본 알리시아가
몸을 일으켰다.
 "이만 들어가도록 하죠."
 그 말에 레온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둘은 느릿하게 걸어서 묵고 있던 선실로 돌아왔다. 선실
은 좁디좁았다. 거대한 갤리언이라고는 하나 500명의 넘
는 사람들을 수용하니 당연히 숙소가 비좁을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허락된 공간은 사방 2미터 남짓 되어 보이는
선실이었다. 한쪽 벽에 2층 구조의 침대가 놓여 있고 맞
은편 벽에 조그만한 붙박이 탁자가 설치되어 있었다.
 방에 들어선 레온의 몸이 멈칫했다. 식사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한 것이다.
 "제가 가시 식사를 가져오겠습니다."
 그 말에 알리시아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려요."
 고개를 끄덕인 레온이 다시 복도로 나왔다. 비좁은 복도
의 양 옆에는 선실의 문이 다닥닥 붙어 있었다. 그 안에
는 아르카디아로 피난을, 혹은 이주를 결심한 귀족들이
파도에 시달리고 있을 터였다.
 아르카디아로 가는 뱃삯은 엄청나게 비싸다. 극히 부유
한 귀족이 아니면 엄두도 낼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저들
대부분은 귀족들이 틀림없으리라.
 레온이 살짝 머리를 흔들었다.
 '정말 운이 좋았지. 알리시아 공주를 만나지 않았다면
머나먼 엘프의 숲까지 갔다가 다시 왔어야 했을 텐데…….'
 얼른 생각을 지운 레온이 서둘러 식량배급소로 향했다.

 아르카디아행 범선에는 식당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워낙 많은 사람들을 수송하기 때문에 식당을 만들 만한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범선 내부에서는 식량을 배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승객들은 오랜 항해를 대비해 준비한 유통기간이 긴 식
량을 배급받아서 각자의 선실에 가서 먹어야 했다. 그 때
문에 배급되는 식량의 질은 형편없었다. 딱딱한 빵에 굳 
어버린 치즈, 곰팡내기 나는 베이컨이 전부였다.
 "이게 대관절 사람이 먹는 요리인가?"
 "돼지가 먹는 것도 이것보다 낫겠다."
 고급 요리에 길들어져 있던 귀족들이 불평을 털어놓았
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배 안에 비축된 식량이라고는
오직 그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식량배급소에 간 레온은 길게 늘어진 줄 뒤에 가서 섰
다. 식사 때라 그런지 음식을 타러 온 사람들이 길게 줄
을 지어 서 있 었다.
 줄에 서 있는 사람들은 태반이 귀족들이었다. 군데군데
갑주를 걸친 기사들이 서 있긴 하지만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레온이 쓴웃음을 지었다.
 '곱게 살아온 귀족들이 여기서 고생하는군.'
 처음에는 귀족들도 지금의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
았다. 심지어 뱃일을 하는 선원들에게 음식을 배달해 달
라고 하는 작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요청이 섣불
리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선원들은 대부분 아르카디아 출신의 거친 뱃사람들. 트
루베니아 출신 귀족들의 억지가 그들에게 먹힐 리가 없는
것이다.
 이미 100일 가까이 항해를 한 덕택인지 귀족들은 군소
리 없이 줄을 서서 음식을 배급받아갔다. 예상대로 메뉴
는 빵과 츠즈, 그리고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였다.
 목적지가 가까워진 탓인지 귀족들이 한 마디씩 불평을
털어놓으며 음식을 들고 갔다.
 "젠장, 따듯한 스프라도 있으면 원이 없겠군."
 "아르카디아에 도착하면 빵과 치즈는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다."
 레온은 이런저런 푸념들을 들어가며 자기 차례를 기다
렸다. 시간이 갈수록 줄이 점점 짧아졌다.
 그때 누군가가 레온의 앞으로 불쑥 끼어들었다. 은빛 
흉갑을 걸친 건장한 체구의 기사였다. 레온의 앞자리를 
새치기 한 기사가 레온에게 싸늘한 눈빛을 던졌다.
 "우리 주공께서 시장하셔서 그러니 네가 이해하라."
 레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그는 초인의 경
지에 든 무인, 따라서 마음을 다스리는데 능숙했다. 새
치기를 당하긴 했지만 조금 더 기다리면 될 뿐이다.
 태연하게 넘기기로 마음먹은 레온이 씁쓸히 웃었다.
 '나도 정말 많이 변했군. 예전 같았으면 결코 참지 않
았을 텐데…….'
 예전에 레온은 결코 분노를 참지 않는 광전사였다. 자신
에게 모욕울 가하는 자는 지극히 끔찍한 방법으로 응징했
다. 하지만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접어든 이후 그는 성
격은 많이 가다듬어졌다. 자신의 차례를 새치기 한 상대
를 이처럼 너그럽게 용납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기다리는 동안 마침내 레온의 차
례가 돌아왔다. 바닷바람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의 선원이
레온을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몇 명이오?"
 "두 명입니다."
 "당신을 제외하고 말이오? 포함해서 말이오?"
 "포함해서입니다."
 선원은 두말 하지 않고 두 명 분의 식량을 나무접시에 
얹어 내밀었다.


 식량을 받아들고 선실로 가던 레온은 상념에 빠져 있었
다. 그것은 어머니와 헤어진 이후 그가 겪어온 기구한 운
명에 관해서였다. 어머니 레오니아는 레온이 곡마단에서 
일하고 있을 때 트루네니아를 떠나갔다. 레온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레오니아 역시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보고 싶
었던 것이다.
 레오니아는 자신이 떠나온 조국인 아르카디아의 팬슬럿
왕국으로 떠났고 레온은 트루베니아에 홀로 남겨졌다.
 오우거의 육신과 인간의 이성을 함께 가지고 태어난 덕
분에 레온은 어릴 때부터 지극히 기구한 삶을 살아야 했
다.
 인간들은 자신들과 생김새가 다른 레온을 가만히 내버
려 두지 않았다. 그 때문에 레온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가지 일들을 겪어야 했다.
 곡마단의 차력사가 되기도 했었고 전장의 용병이 되기
도 했다. 심지어는 대제국 헬프레인의 황제를 암살하기
위한 자객으로 훈련받기도 했었다. 그 과정에서 레온은
모틀게임이라 불리는 몬스터 대전의 선수로도 활약해야
했다.
 정말 인간의 삶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처참한 삶의 연
속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레온에게 시련만 내려주지 않
았다. 그에게 데이몬이라는 걸출한 스승을 만나게 해 준
것이다.
 스승 데이몬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것도 마계왕을 지배
하는 마계 군주, 즉 마왕이었다. 그는 다른 차원으로 여
행을 하는 과정에서 잠시 트루베니아를 방문했다. 그리
고 레온을 만나 그를 제라로 삼았다.
 데이몬은 레온에게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우선
레온이 익히고 있던 불완전한 마나연공법을 보완해 주었
고 다른 세계의 뛰어난 창법을 가르쳐 주었다. 무엇보다
도 레언을 감복시킨 것은 항상 그를 둘러싸고 있던 불행
한 운명의 굴레를 벗겨준 것이다.
 데이몬은 레온으로 하여금 자신이 원하는 종족으로 다
시 거듭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만약 네가 정체되어 있는 벽을 깨고 초인으로 거듭날
경우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걸
어둔 마법이 네 염원에 맞춰 네 몸 속에 존재하는 한 종
족의 인자를 소멸시킬 터이니, 그때 비로소 네가 원하는
종족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레온은 스승의 당부대로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다. 그것
은 처절한 생사결을 통한 수련이었다.
 블러디 스톰(Bloody Storm)이라는 이름으로 전장에 뛰
어든 레온은 생사의 고비를 거듭 넘겨가며 사투를 벌였고
마침내 원하는 경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되었다. 헬
프레인 제국 제일의 강자인 벨로디어스 후작과의 대결에
서 얻어낸 결과였다.
 스승의 예언은 적중했다. 초인이라 일컫은 그랜드 마스
터의 경지에 접어든 레온은 몸이 재구성되는 과정을 겪는
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레온은 판이하게 바뀐 자신의 외
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오우거의 인자가 사라지며 완전한 인간으로 변한 자신
의 모습을…….
 "되었어. 이젠 당당히 어머니를 찾아 아르카디아로 건
너갈 수 있어."
 레온은 어머니가 떠나간 것이 오우거의 육신을 가지 자
신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완전한 인
간으로 다시 태어났으니 어머니를 찾아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레온에게는 아르카디아로 건너가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부디 강해져라. 그리고 세상에서 초인이라 불리는 강
자들을 모조리 꺾어 스승의 무학이 위대하다는 사실을 만
천하에 증명하라."
 굳이 어머니가 아니더라도 레온은 어차피 아르카디아로
떠나야 할 운명이었다. 이미 그는 트루베니아에 존재하는
네 명의 초인을 꺾은 상태. 하지만 아르카디아에는 그보
다 수준이 높은 초인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다.
 그들을 모두 꺾어 스승이 전수한 무학의 위대함을 입증
해야 하는 것이 레온에게 부여된 임무였다.
 임무를 떠올린 레온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반드시, 반드시 입증할 것입니다. 스승님의 무학이 월
등히 뛰어나다는 사실을 아르카디아 대륙에 당당히 각인
시킬 것입니다.'
 생각에 잠겨 걷는 사이 어느새 알리시아가 기다리는 선
실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문을 열
고 들어갔다.



 식사를 마친 둘은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알리시아의 잠
자리는 위쪽 침상이었다. 공간이 워낙 협소했기 때문에
배 안에서는 이처럼 남녀가 혼숙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
다.
 알리시아가 살짝 웃으며 침상의 위장을 닫았다.
 "그럼 잘 자요, 레온."
 고개를 끄덕였지만 레온은 침상에 들어가지 않았다. 저
녁수련을 하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는 선실 바닥에 가
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의 반개한 눈이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레온은 이미 초인의 경지에 들어선 무인이다. 그런 그에
게 병장기를 휘두르는 수련은 그리 의미가 없다. 명상을 
통한 가상전투와 마나연공이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루하고 단조로운 항해 내내 틈만 나면 수련에 몰
두했다.
 '아르카디아의 초인들은 트루베니아의 초인들보다 월등
히 수준이 높고 강하다. 실력을 부쩍 올려놓지 않는다면
스승의 명을 이행하지 못할 수도 있어.'
 그의 머릿속에는 그동안 겪어왔던 수없는 혈전들이 떠
오르고 있었다. 개중에는 레온이 감당하기 힘들었던 강자
들도 있었고 여러 명의 기사가 협공하던 때도 있었다. 그
싸움들이 레온의 머릿속에서 하나씩 분석되고 파헤쳐졌다.
 어느덧 그는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옆 선신에서 기묘한 교성이 흘러들어왔지만 레온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흐으응."
 더없이 단조롭고 지루하기까지 한 선실생활이다. 거기
에다 남녀가 같은 방을 쓴다. 그러니 불장난이 일어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벽이라 해 봐야 얇은 판자 한 장이 전부였기에 불장난의
여파는 여과 없이 선실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는지 알리시아가 몸을 뒤척
였다. 참다못해 베개로 머리를 덮었지만 소리를 완전히
막아낼 순 없었다.
 '고역이로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알리시아가 살짝 휘장을 들췄다.
 선실 바닥에는 레온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채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알리시아가 나직이 한숨을 내
쉬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이런 상황에서도 수련을 하다
니…….'
 처음에는 알리시아도 레온을 경계했다. 한창 나이의 건장
한 젊은 남자와 한방을 쓰게 되었으니 두려움이 치밀어 오
르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알리시아의 우려는 단 며칠 만에 말끔하게 해소되
었다. 레온이 그녀에게 전혀 흑심을 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리시아는 지금까지 레온이 자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이 없다. 자기 전이나 자고 일어났을 때 그녀가 본 것은 항
상 좌정한 채 명상에 빠져 있는 레온의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녀는 곧 이유를 깨달았
다. 레온 정도의 수준에 오른 무사에겐 긴 수면시간이 필
요 없기 때문이다.
 '정말 철두철미한 사람이로군. 하긴 그러니까 저토록 젊은
나이에 저런 경지에 들어섰겠지?'
 한편으로는 자존심이 조금 상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매력이 결코 모라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미모 하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기 때문
에 레온의 무관심에 약간 속이 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알리시아에겐 능히 그것을 겉으로 표출하지 않을 자제심이
있었다.
 '뭐 잘 된 일이지. 어차피 그와 나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그는 어느 왕국에 가도 능히 백작 작위 이상을 받을 수 있
는 무인이야. 하지만 난 이미 멸망한 왕국의 공주에 불과
한 걸.'
 머리를 살짝 흔든 알리시아가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그녀의 볼에서는 어느덧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
다. 망국의 설움과 왕족들이 겪고 있을 고초를 떠올리니 자
신도 모르게 슬퍼진 것이다.
 물론 레온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명상에 빠져 있었다.

 페가서스 호는 드디어 100일간의 항해를 끝마치고 페이류트
항에 접어들었다. 내해에서의 항해는 지극히 순탄했다. 내해
를 경비하는 전선(戰船)들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었기에
더 이상 해양 몬수터를 겁낼 필요가 없었다.
 "페이류트 만에 들어섰습니다. 앞으로 한 시간이면 항구에
접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원들의 말에 승객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간의
항해가 정말로 지겨웠던 터라 기쁨도 컸다.
 "드디어 도착인가? 감개가 무량하군."
 "역시 인간은 땅을 밟고 살아야 해."
 승객들은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들의 최종 목
적지는 페이류트가 아니다. 아르카디아 대륙 안쪽에 산재한
여러 왕국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짐을 줄여야 
한다.
 승객들의 대부분은 아르카디아로 이주를 결심한 귀족들이
었다. 트루베니아에 있던 재산과 영지를 모두 처분하고 왔
으며, 대부분 가족 단위였기 때문에 짐이 무척 많았다.
 정리하는 데에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승객들
은 부랴부랴 짐을 꾸리는 데 열중했다.
 좁은 공간에서 여러 사람들이 한꺼분에 움직였기 때문에
배 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배가 도착하고 나서 짐을 정리해도 충분합니다. 지금은
자제해 주십시오."
 선원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통제에 나섰지만 혼란
은 쉽사리 수습되지 않았다. 승객들의 머릿속에는 한시라
도 빨리 땅을 밟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서도 유독 한가한 두 사람이 있었다. 선실과 
갑판에서 벌어지는 아수라장을 피해 뱃머리에 가 있는 한
쌍의 남녀였다.
 "짐은 없다는 것이 이토록 홀가분할 줄은 몰랐어요."
 알리시아의 일성이었다.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승객들과 달리 둘에겐 전혀 짐이
없었다. 기껏해야 레온이 둘러매고 있는 자그마한 배낭이
전부였다. 다른 승객들이 세간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온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승객들은 대부분 이주를 목적으로 건너왔다. 하지만 둘
은 그렇지 않다. 품고 있는 목적이 있었기에 알리시아는
언니 세로나가 싸준 짐까지 모두 기사들 편에 돌려보냈
다. 짐이라고 해 봐야 옷가지와 패물이 전부였지만, 알리
시아는 미련을 두지 않았다.
 '옷이야 아르카디아에서 사 입으면 돼. 게다가 패물 따
윈 그다지 필요 없을 테니…….'
 사정은 레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배낭 안에는 갈아입을
옷가지 몇 벌만 들어 있었다.
 때문에 둘은 한가로이 뱃머리에 서서 갑판과 선실에서 
벌어지는 아수라장을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2. 아르카디아의 이주민 벗겨먹기 대작전


 페이류트 항은 몹시 혼잡했다. 아르카디아에서 제일 큰
무역항이자 포경의 산실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배가 만 안
에 대기하며 접안 허가가 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페가서스 호의 경우는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트
루베니아를 오가는 여객선이나 화물선에겐 기다리지 않고
전용 부두에 우선적으로 접안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페가서스 호는 곧바로 부두로 접근해 들어갔다.
 끼이이익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페가서스 호의 뱃머리가 부두에 가볍
게 부딪혔다. 대기하고 있던 일꾼들이 재빨리 선원들이 던
져둔 밧줄을 잡아 말뚝에 감았다. 페가서스 호가 100일간
의 항해를 마치고 육지에 도착하는 순간이었다.
 배가 접안하자 기다리고 있던 일꾼들이 재빨리 달려들었
다. 
 쿠르르릉.
 큼지막한 이동식 계단이 굴러와 뱃전에 고정되었다. 계단
아래쪽에는 어느새 수십 명의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개중에는 은빛 갑주를 걸친 기사들도 중간 중간 끼어 있었
다. 트루베니아에서 승선한 승객들을 출입국관리소로 안내
하기 위한 자들이었다.
 마침내 페가서스 호에서 승객들이 하선하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가장 먼저 나무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승객은 알리시아와
레온이었다. 가진 짐이 없어 홀가분했기 때문에 아르카디
아 땅을 먼저 밟는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기사 레리어트는 약간 놀란 눈으로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남녀를 쳐다보았다. 트루베니아에서 건너오는 승객으로 보
기엔 짐이 너무 단출했기 때문이다.
 아르카디아로 건너오는 승객들은 대부분 이주를 목적으로
오는 자들이다. 따라서 세간이나 패물 따위를 바리바리 싸
들고 오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니 두 남녀가 이상할 수밖에 하지만 레
리어트는 쓸데없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의 
뒤에는 수많은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다. 저 남녀는 자신
이 맡아 출입국 사무소로 안내해야 할 자들이다.
 '어차피 임무에만 충실하면 될 터.'
 그가 머뭇거림 없이 알리시아와 레온에게로 다가갔다.
 "어서 오십시오. 아르카디아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 말에 알리시아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저는 트루베니아 이주민들의 출입국관리소 안래를 담
당하는 가시 레리어트라고 합니다. 우선 저를 따라오십시
오."
 말을 마친 레리어트가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갔다. 레
온과 알리시아는 묵묵히 뒤를 따랐다. 레온과 알리시아가 
하선한 이후 아직까지 다른 승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
다. 짐을 챙기느라 분주했기 때문이었다.

 레온과 알리시아는 항만 바로 옆에 위치한 큼지막한 건
물로 들어갔다. 그들이 안내된 곳은 일렬로 늘어선 조그
마한 사무실이었다. 레온이 예리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
번거렸다.
 '생각보다 경비가 삼엄하군.'
 항만이라고 생각하기엔 경비가 무척 삼엄한 편이었다.
배가 접안하는 항구에도 빈틈없이 병사가 배치되어 있었
고 군데군데 기사들고 끼여 있었다. 게다가 항만에서 출
입국관리소까지는 사람 키보다 높은 울타리가 쳐져 있었
다. 배에서 내리면 무조건 출입국관리소를 방문해야 하는
것이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레리어트가 늘어선 방 중 하나의 문
을 열었다.
 덜컥.
 그들이 걸어온 복도에도 상당히 잘 훈련된 병사들이 군
데군데 배치되어 있었다. 병사들을 슬쩍 훑어본 레온이
레리어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방 안에는 큼지막한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뒤에는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50대의 사무관이 앉아 있었다. 레
리어트가 탁자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여기에 앉으십시오."
 말을 마친 레리어트가 사무관 뒤에 걸어가서 시립했다.
그 모습을 본 레온이 생각했다.
 '소드 익스퍼트 중급 정도……. 안내를 맡은 기사라고
보기엔 과한 실력이로군. 도대체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
어지기에…….'
 레온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알리시아가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러나 레온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 알리시아의
뒤에 버티고 선 레온을 보자 사무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도 의자에 앉으시오."
 레온이 묵묵히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오. 난 알리시아 아가씨를 호위하는 가드(Guard)
요. 임무를 위해서는 서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소."
 그 말에 사무관이 다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더 이상 권하
지는 않았다.
 "아무튼 좋소. 내가 당신들을 담당하는 사무관이오. 당
신들은 지금부터 아르카디아에 입국하기 위한 절차를 밟
아야 하오."
 그 말에 알리시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르카디아에 입
국하는데 대관절 무슨 절차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러나
사무관은 알리시아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말을 이어나갔
다. 보아하니 이런 일을 많이 겪어본 것 같았다.
 "먼저 신분을 밝히시오. 트루베니아에 있었을 때의 작
위와 영지의 위치. 소숙 왕국을 명확히 밝혀야 하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알리시아가 입을 열였다.
 "제 이름은 알리시아 도르네 아르네티아에요. 아르니아
왕국의 제2왕녀 신분입니다."
 그녀가 신분을 밝히자 사문관의 눈이 약간 커졌다. 트루
베니아의 이주민들 중에서 왕족은 거의 없다. 그가 잠자
코 옆에 놓여 있던 책을 꺼내어 펼쳤다. 명부에서 아르니
아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잠시 후 그의 눈이 빛났다.
 '여기 있군. 그런데?'
 아르니아의 국명 위에 붉은 색으로 사선이 그어진 것을
발견한 것이다. 책을 덮은 사무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알
리사아를 쳐다보았다.
 "미안하지만 아르니아란 국명은 명부에 없소. 현제 트
루베니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오."
 그 말에 알리시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르니아가 멸
망한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아르카디아의 출
입국관리소 명부에서 삭제된 것이다. 나라 잃은 설움이
봇물 터지듯 밀려왔다.
 "사무관의 말이 맞아요. 아르니아는 이미 멸망했어요."
 고개를 끄덕인 사무관이 무표정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잘 알고 있으니 다행이로군. 설득하는 것이 쉬워지겠
어. 간략하게 말하리다. 단신의 왕녀 신분은 이 시간 이후
로 아르카디아에서 통용되지 않소. 그 점을 먼저 알아주시
오."
 익히 예상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알리시아는 별달리 놀라
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떤 신분으로 인정받게 되나요? 백작이나
자작 정도로는 인정해 주나요?"
 왕자나 왕녀는 공작에 맞먹는 성골 귀족이다. 따라서 알
리시아는 어느 정도의 신분 하락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
지만 사무관은 냉혹하게 알리시아의 기대를 깨버렸다.
 "미안하지만 귀족 신분도 인정되지 않소. 일단 아르카디
아에 온 이상 당신은 지금부터 평민으로 살아가야 하오.
어느 한 나라에서 고을 세우거나 귀족과 결혼을 히지 않
는 한 작위를 얻을 수 없소."
 그 말에 알리시아의 눈이 커졌다. 이미 멸망했다고 하
나 그녀는 한 나라의 왕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평민 신분
으로 행동하라고 하니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 말도 되지 않아요. 그런 법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그게 바로 아르카디아의 법이오. 아르카디아에서는 트루
베니아에서의 신분을 일절 인정하지 않소. 설사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라고 해도 이곳에서는 평민으로 간주될 뿐이
오. 그 점을 숙지해 주기 바라오."
 알리시아는 입을 딱 벌린 채 놀라워했다. 정말 믿기 힘든
일에 봉착한 것이다.
 뒤에 시립해 있던 레온은 뭔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
덕였다. 비로소 그는 항만 부근의 경비가 특별히 엄중했던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랬군. 그래서 병사들이 저토록 많이 배치되어 일었던
것이로군. 트루베니아에서의 신분을 싹 무시하고 평민이
되어라? 어지간한 귀족들이라면 결코 가만히 있지 않겠어.'
 트루베니아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은 대부분 특권계층이다.
영지가 넓고 재산이 많지 않다면 섣불리 아르카디아로 건
너올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렇게 모든 것을 정히하고 건
너온 귀족득에게 막무가내로 평민이 되라고 한다면 누구
를 막론하고 반발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아르카디아는 트루베니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발전된 대륙이다. 생활수준이나 문화, 사람들의 사고방식
등 모든 면이 월등히 진보해 있다. 이주민들은 그런 아르
카디아를 동경해서 이주를 결심했다. 하지만 도착하고 보
니 트루베니아에서의 신분을 일절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이주민들이 그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결코 이주를 결심하
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려 본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썽이 많이 일어나겠어. 특권의식에 젖은 귀족들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충격이 큰 듯 알리시아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지
금껏 수도 없이 겪어왔던 일이라 사무관도 조용히 알리시
아의 동태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한편 기사 레리어트는 바짝 긴장한 채 검 자루를 움켜쥐
었다. 이럴 경우 트루베니아 출신 이주민들이 가장 많이
보이는 반응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였다. 귀족 신분을 박
탁하고 평민으로 강등한다는 말에 발끈한 귀족들이 검을
휘둘르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주민들은 다시 트루베니아로 돌아가겠
다고 고집을 부린다. 하지만 그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사 아르카디아 사람이라고 해도 승인을 받은
자 외에는 트루베니아로 건너갈 수 없다.
 이주민이 트루베니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법으로 엄
격히 금지된 사항이다. 바로 그 때문에 아르카디아의 처
사가 트루베니아에 전혀 소문이 나지 않는 것이다.
 다행히 이번 방문객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가요? 알겠어요. 아르카디아의 방침이 그렇다고
하면 어쩔 수 없죠."
 채념해 버린 듯 알리시아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의외라
고 생각한 사무관이 고개를 들어 레온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당신도 마찬가지요. 보아하니 호위기사인듯 한
데 아르카디아에서는 기사 작위도 인정되지 않소. 기사가
되고 싶다면 다시 서임을 받아야 하오."
 물론 레온은 지극히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원래부터 평
민이었던 그가 그 사실에 동요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
다.
 "상관없소. 어차피 트루베니아에 있을 때도 평민이었으
니까."
 그 말에 사무고나이 살짝 놀랐다.
 "기사가 아니란 말이오?"
 "나는 기사가 아니라 용병이오. 의뢰인과 계약을 맺고
호위임무를 맡은 것이지."
 그 말에 사무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용병
이 아르카디아에 오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뱃삯
이 워낙 비싸기 때문에 심지어 거느리던 기사도 버리고 
오는 판국인데 용병을 데리고 오다니……. 그 사이 옆방
에서 거친 고성이 올려 퍼지기 시작했다.
 "뭐가 어쩌고 어째? 나더라 하찮은 평민이 되라니…….
이것들이 정말?"
 이어 검을 뽑아드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성난
귀족들이 아르카디아의 기사들과 싸움을 벌이는 모양이
었다.
 촹! 촤촻---!
 칼 부딪히는 소리도 들려오는 것을 보아 소란이 쉽게 수
습되기는 그른 모양이었다. 사무관이 눈살을 찌푸리며 옆
방의 벼을 쳐다보았다.
 "저렇게 소란을 부리면 아르카디아의 법에 의해 엄중히
처벌받소. 페이류트의 감옥에는 소란을 피운 죄로 갇혀
있는 이주민들이 제법 많다오."
 다문히 레온과 알리시아를 의식한 설명이었다. 하지만
레온과 알리시아에겐 애당초 소란을 피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레온을 쳐다보던 사무관이 다시 입을 열었
다.
 "당신은 이제부터 평민을 아르카디아에서 살아야 하오.
트루베니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소."
 그 말에 놀란 것은 알리시아였다. 크로센 제국으로 가서
조력을 얻어 다시 트루베니아로 돌아가려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트루베니아로 돌아갈 수 없다니…….
 다행히 그녀는 쓸데없는 말을 해서 분란을 일으키지 않
을 만큼 영리했다. 뭔가를 생각해 본 알리시아가 힘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잘 알아들었어요."
 "이제부터 그대들은 평민 신분이오. 그렇게 알고 행동
하기 바라오."
 서슬 퍼런 사무관의 말에도 둘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숨을 길게 내쉰 사무관이 다음 절차로 들어갔
다.
 "그럼 지금부터 입국세를 걷도록 하겠소. 아르카디아로
입국하려면 소정의 세금을 내야 하오."
 "세금이요?"
 사무관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부여
된 임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트루베니아의 이주
민들을 벗겨내는 것이다. 세금의 액수는 달리 정해져 있
지 않고 사무관의 재량에 달려 있다. 돈이 많아 보이는 이
주민에겐 많은 세금을, 없어 보이는 이주민에겐 비교적
적은 세금을 걷는다.
 평생 세금을 내본 적이 없는 귀족들에겐 사뭇 가혹한 처
사라고 봐야 한다. 여기서도 충돌할 우려가 충분히 있었
기 때문에 레리어트는 다시 긴장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두 사람의 반응은 그리 험악하지 않았다.
 알리시아가 울상을 지으며 손을 양옆으로 벌렸다.
 "하지만 세금을 낼만한 돈이 없는 걸요? 가진 돈을 모두
털어 뱃삯을 지불해서 여력이 없어요."
 그러나 사무관은 시큰둥한 표저을 지었다. 이미 그는 이
런 경우를 무척 많이 겪어보았다.
 '그래봐야 털어보면 패물이 수도 없이 나올 테지.'
 그가 손가락을 뻗어 집무실에 붙어 있는 조그마한 방을 
가리켰다. 둘이 이미 평민 신분임을 인정했기 때문에 사
무관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지시를 내렸다.
 "저곳으로 들어가시오. 그곳에 여기사가 한 명 대기하
고 있을 것이오. 그녀가 몸수색을 할 테니 순순히 협조하
기 바라오."
 잠시 망설이던 알리시아가 순순히 방으로 들어갔다. 홀
로 남은 레온에게 기사 한 명이 접근했다.
 "지금부터 몸에 있는 것을 모두 꺼내놓으시오."
 "알겠소."
 고개를 끄덕인 레온이 순순히 지시에 응했다. 어차피 그
에겐 숨겨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배낭을 풀어 탁자 위에 올려놓은 레온이 주섬주섬 외투
를 벗었다,
 "상의를 모두 탈의하시오. 주머니에 있는 것을 모두 탁
자 위에 올려놓어야 하오."
 튜닉을 벗자 마신갑(魔身鉀)이 드러났다. 몸수색을 하던
기사가 의아한 기색으로 마신갑을 두드렸다.
 "입고 있는 흉갑도 벗도록 하시오."
 그 말에 레온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벗을 수가 없습니다. 몸이 자라서 벗으려면 갑옷을 부 
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고개를 끄덕인 기사가 다가와서 몸수색을 시작했다. 물
론 그에게 마신갑의 비밀을 알아볼 안목이 있을 턱이 없
다. 레온은 소지품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
 트루베니아에서 가지고 온 그럭저럭 쓸만한 장창 한 자
루와 배낭 속의 옷가지 몇 벌. 그 외 모든 마법을 무위로
돌릴 수 있는 디스펠 링(Dispel Ring)이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엔 거의 값이 나가지 않는 구리반지처럼 보였다. 드
래곤 로드가 직접 만들어 준 디스펠 링은 그동안 쓸 기회
가 없었기에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탈탈 털어 몸수색을 해 본 기사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
을 지었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오랫동안 몸수색을 해 본 덕택에 기사는 이주민들이 통
상적으로 어느 곳에 보석과 패물을 숨기는지 잘 알골 있
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완전히 허탕이었다. 가진 것이 거
의 없었기 때문에 몸수색은 금방 끝났다.
 사정은 알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언니가 챙겨준 패물
과 옷가지를 고스란히 돌려보냈기에 그녀도 금세 몸수색
을 마치고 방에서 걸어 나왔다. 그 뒤를 이어 날카로운 눈
매를 가진 여기사 한 명이 알리시아의 몸에서 나온 것들
이 담긴 상자를 들고 뒤따라왔다.
 "여기 있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탁자 위에 놓인 소지품을 본 사무관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저을 지었다. 용병은 말 그대로 거지나 다름없었다. 창
한 자루와 몸에 걸친 검붉은 흉갑을 빼면 거진 것이 아무
것고 없었다. 그나말 알리시아가 약간 낫기는 했지만 다
른 이주민들에 비하면 역시 빈털터리나 다름없었다.
 트루베니아에서 사용하는 금화 몇 개가 전부였다. 심지
어 그 흔한 목걸이나 반지 따위의 패물도 착용하고 있지
않았던 알리시아였다.
 '어떻게 하지?'
 탁자 위에 놓인 물건들을 보며 사무관은 고민했다. 통상
적으로 몸수색을 해서 나오는 물품의 절반 정도를 입국세
로 걷는 것이 관행이다. 하지만 이번 이주민들은 거둘 만
한 세금이 전혀 없었다. 20골드 정도 되는 트루베나아 금
화가 있기닌 하지만 저들도 써야 할 것이 아닌가.
 한숨을 내쉬던 사무관이 결정을 내렸다.
 '어쩔 수 없군. 벼룩의 간을 꺼내 먹을 수는 없는 노릇
이다.'
 입국세를 탕감해 주기로 마음먹은 사무관이 손을 흔들
었다.
 "소지품을 모두 집어넣으시오. 이번에는 특별히 입국세
를 면제해 주도록 하겠소. 소란을 부리지 않은 대가라고
생각하시오."
 레온과 알리시아는 덤덤히 소지품을 수습했다. 그 모습
을 지켜보며 사무관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젠장, 임시 신분증도 무료로 발급해 줘야겠군. 지금까
지 겪은 이주민 중에서 이토록 가난한 자들은 처음 보겠
군.'
 원래는 아르카디아를 여행할 수 있는 임시 신분증도 상
당한 돈을 받고 만들어 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야말로 철
저히 이주민들의 등골을 뽑아먹는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트루베니아의 귀족들은 엄청난
특권의식에 젖어 있어. 이렇게라도 재산을 빼앗아야 기가
죽어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니…….'
 사무관은 조사해 놓은 인적사항을 토대로 임시 신분증
을 만들어주었다. 동그란 동판에 뾰쪽한 송곳으로 레온과
알리시아의 이름을 적어 넣은 사무관이 거기에다 직인을
찍었다.
 "자, 받으시오. 이것이 그대들에게 발급된 임시 신분증
이오. 정신 신분증은 정착할 나라에서 다시 발급받도록
하시오. 그동안 이것이 당신들의 신분을 증명해 줄 것이
오."
 "고맙습니다."
 신분증을 받아드는 레온과 알리시아를 보며 사무관이
조언을 덧붙였다.
 "이곳을 나가면 큼지막한 건물이 있소. 내륙으로 향하
는 마차들이 모여드는 장소이지. 사정을 보니 마차를 타
기 힘들 것 같소만, 아무튼 참고로 알아두시오. 그리고 트
루베니아의 돈은 이곳에서 통용되지 않소. 바깥으로 나가
면 환전소가 있으니 거기서 아르카디아의 공요화폐로 바
꾸기 바라오."
 "알겠습니다."
 "그럼 아르카디아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바라오.
입국절차는 이것으로 모두 끝났소."
 사무관이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기
사 한 명이 걸어가 그들이 들어온 반대쪽 문을 열었다.
 "이리로 나가시오."
 레온과 알리시아는 조용히 지시에 따랐다.

 문 뒤쪽은 큼지막한 공터였다. 여러 개의 문이 벽을 따
라 나 있었다. 공터에 나온 사람은 오직 그들 둘뿐이었다.
간간히 고성과 칼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다른
이주민들이 소란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뒤쪽을 한 번 돌
아본 둘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알리시아의 얼굴에서는 도저히 핏기를 찾아볼 수 없었
다. 아르카디아로 건너와서 맞닥뜨린 현실이 너무도 냉혹
했기 때문이다. 이미 멸망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한 나라의 왕녀였다. 그런 그녀가 평민 신분으로 내동댕
이쳐지다니……. 무엇보다도 다시 트루베니아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 충격이었다.
 '그럼 트루베니아에 남겨진 언니와 아버지는 어떻게 되
는 거지?'
 크로센 제국으로 가서 조력을 얻더라도 다시 트루베니아
로 돌아갈 수 없다면 말짱 헛일이다. 현기증을 느꼈는지
그녀가 잠시 비틀거렸다.
 그때 억센 팔뚝이 그녀를 부축했다. 고개를 도리자 레온
의 순박한 얼굴이 들어왔다.
 "용기를 내십시오. 왕녀님, 찾아보던 방도가 있을 것입
니다."
 그녀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전 이제 왕녀가 아니라 평민이에요. 그러니 레온님께
서 구태여 말을 높일 필요가 없어요."
 레온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래도 제게는 영원한 왕녀이십니다. 제 조국은 엄연
히 아르니아이니까요."
 "위로해 주셔서 고마워요."
 알리시아가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고개를 돌린 그녀
의 눈에 큼지막한 환전소의 간판이 들어왔다.
 "일단 돈을 바꿔야겠군요. 식당에 가려면 아르카디아의
공용화폐가 필요하니 말이에요."
 "좋은 생각입니다. 따듯한 스프 생각을 하니 절로 군침
이 도는군요."
 둘음 머뭇거림 없이 환전소로 향했다. 환전소의 규모는
상당히 컸다. 여러 개의 창구가 있었는데 각 창구는 튼튼
해 보이는 철창으로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돈을 취급
하는 장소라서 그런지 방비가 철저했다. 그중 한 창구로
간 알리시아가 가진 돈을 모두 올려놓았다.
 "전부 24골드 17실버에요. 모두 아르카디아의 돈으로
바꿔주세요."
 돈을 받아든 사무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은화를 다시 밀
어냈다.
 "이곳에서 은화는 환전되지 않습니다. 환전할 수 있는
것은 오르지 금화뿐입니다."
 "알겠어요. 그거라도 환전해 주세요."
 사무원이 내민 돈은 트루베니아의 화폐보다 작은 은화
였다. 그러나 제련기술이 발달한 곳이라서 그런지 은화의
모양새가 월등히 정교했다. 환전액수는 도합 72실러였다.
돈을 받아든 알리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1트루베나아 골드가 아르카디아의 화폐로는 3실버밖
에 되지 않는군.'
 그녀의 귓전으로 사무원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그 돈은 아르카디아 전역에서 통용됩니다. 하지만 각
자의 고유통화에 비하면 환육에서 손해를 볼 수 있으니
가급적 방문국의 통화로 환전해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고마워요."
 살짝 웃어준 알리시아가 환전소를 나섰다.
 "일단 식사를 하러 갈까요?"
 "그러죠."


 근처에는 상가가 잘 발달되어 있었다. 식당도 많았고 여
행자들이 묵는 여관도 곳곳에 있었다. 여러 가지 상품을 
파는 상점과 전당포는 발길에 걸릴 정도로 많았다. 알리
시아는 그중 가장 근사해 보이는 식당을 향해 걸어갔다.
 "아르카디아 사람들의 억양은 많이 이상하군요. 멀리서
들으면 도무지 알아듣기 힘들어요."
 "바다로 인해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요."
 식당에 들어가 비어 있는 자리에 앉자 점원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뭘 드시겠습니까?"
 "메뉴판을 주시겠어요?"
 그 말에 점우너의 눈에 이채가 번져갔다.
 "트루베니아에서 오신 이주민이신가보군요?"
 알리시아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트루베니아에서 왔어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잠시 후 점원이 가져온 메뉴판을 펼쳐본 알리사아가 음
식을 시켰다.
 오랜 선상생활로 인해 뺭과 치즈에 질려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따듯한 스프와 함께 육류 위주로 음식을 시켰다.
주방에서 풍겨오는 향긋한 냄새에 벌써부터 정신이 혼미
해지는 둘이었다.
 "햐! 정말 먹음직스런 냄새로군요. 지금껏 이토록 음식
을 기다려본 적이 없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잠시 후 음식이 도착했다. 둘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음식
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음식의 맛은 훌륭했다. 소스도 나
무랄 데 없었고 육질도 부드러웠기에 식사를 마치고 난
둘은 기분이 무척 좋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점우너이 가져온 계산서를 들여다본
순간 알리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음식값이 상상을 초
월할 정도로 비쌌기 때문이다.
 "이건 말도 안 돼요. 12실버라니……. 설마 이 음식값이
트루베니아 돈 4골드나 된다는 말인가요?"
 트루베니아에서 1골드면 6인 가족이 석 달 이상 생활할
수 있는 금액이다. 일급 용병이 한 달 동안 벌어들이는 금
액과 동일하다.
 두 사람이 식사를 한 대가로 4골드라면 정말 엄청난 바
가지였다. 그러나 점원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응했
다.
 "음식값은 12실버입니다. 그러셨다면 가격표를 미리 보고
음식을 주문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지금 당장 음식값을 지
불해 주십시오."
 식당 안쪽에서 건장한 점원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아 이런 일을 많이 경험해 본 것 같았다. 한숨을 푹 내
쉰 알리시아가 은화를 꺼내 식대를 지불했다.
 "여기 있어요."
 점원은 돈을 받고 나서야 웃는 낯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방문해 주십시오."
 그러나 식당을 나서는 알리시아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
다. 두 사람이 식사를 함으로써 가진 돈의 20%가 날아갔다.
이제 남은 돈은 고작 60실버. 이 돈으로 크로센 제국까지
가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가 한숨을 푹 내
쉬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군. 언니가 챙겨준 패물을 모두 가지고
왔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만약 패물을 가지고 왔다면 상당한
액수의 입국세를 내야 했으며, 또한 임시 신분증도 돈을 주
고 발급받아야 했다는 사실을……. 식당들이 죽 늘어선 식
당가를 보자 그녀가 눈을 빛냈다.
 "아무래도 음식값을 바가지 쓴 것 같아요. 음식 시세를 한
번 알아봐야 할 것 같네요."
 알리시아는 그때부터 식당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자리에 앉아 가격표를 확인하고 그냥 나오는 과정이 거듭
되었다. 일국의 왕녀에겐 생각하기 힘든 종류의 일이었지
만 알리시아는 아무 거리낌 없이 가격을 물어보고 또 물어
보았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식당의 등급이 다르긴 했지만 원천
적으로 음식 가격에서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둘이 식사
를 할 경우 최소 5실버 정도는 잡아야 한다.
 '어떻게 된 거지? 설마 환전을 잘못한 것인가?'
 고민하던 알리시아의 눈이 순간적으로 빛났다. 식당의 점
원이 공통적으로 물어본 말이 떠올린 것이다.

 "트루베니아에서 오신 이주민입니까?"

 대부분의 점원들이 그렇게 물어왔다. 억양 자체가 많이
틀리기 때문에 점원들은 금세 둘의 정체를 파악했다.
 '트루베니아에서 왔다고 바가지를 씌우는 것인가? 아무
래도 한 번 알아봐야겠군.'
 그녀는 즉시 확인 작업에 나섰다. 레온은 영문을 모른
채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상점들이 늘어선 곳에 도착한
알리시아는 귀를 활짝 열고 유심히 대화내용을 엿들었다.
 물건을 흥정하는 대화내용이 여과 없이 그녀에게 들려
왔다. 그녀는 그중 한 중년 부인이 정육점 주인과 흥정하
는 내용을 열심히 엿들었다. 억양을 들으니 중년 부인은
이곳 아르카디아 사람이 분명했다.
 '분명히 소시지가 한 묶음에 1실버 50쿠퍼였어. 처음에
부른 것은 1.8실버……. 그렇다면 트루베나아 억양으로
가격을 물어본다면?'
 알리시아는 머뭇거림 없이 다가가서 소시지 가격을 물
어보았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정육점 주인은 알리시아
에게 소시지 가격을 무려 4실버를 불렀다. 무려 두 배나 
바가지를 씌운 것이다.
 '역시. 아르카디아 사람들은 트루베니아 출신 이주민들
을 봉으로 보고 있어.'
 생각해 보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곳으로 오
는 이주민들은 태반이 경제관념에 어두운 귀족들이다. 부
르는 대로 돈을 내니 자연히 바가지를 씌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의 눈빛이 더욱 날카롭게 빛났다.
 '그러고 보니 식당의 가격표도 이중으로 되어 있을 것
같군. 현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가격표와 트루베니아
출신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가격표.'
 그녀는 즉시 추측한 내용을 레온에게 말해주었다. 사실
을 들은 레온은 아연해 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정말 너무하군요."
 "너무하다고 할 순 없죠. 이 사람들 사고방식이 그러하
니까요. 아무래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것 같아요. 아르카
디아 사람들은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풍문이 거의 사실
이었어요."
 알리시아가 정색을 하고 레온을 쳐다보았다.
 "일단 아르카디아의 억양을 익혀야 해요. 최대한 트루
베니아 출신이란 사실을 숨겨야 바가지를 덜 쓸 거예요."
 레온이 굳은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자신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
군요."
 "괜찮아요. 이곳 말투는 제가 익힐게요. 대신 레온님께
서는 제가 흥정을 할 때 조용히 침묵을 지켜주세요. 그럼
될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뭔가를 생각해 본 알리시아가 다시 레온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며칠 묵어야 할 것 같아요. 이곳 사
정을 알아야 제대로 대처할 수 있죠. 시립도서관에 가서
아르카디아에 대해 어느 정도 정보를 수집한 뒤 떠나는게
나을 것 같아요. 그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자의 몸으로 일개 부대를 통솔하는 작점참모의 위치에
까지 올랐던 알리시아였다. 그 점을 떠올린 레온이 묵묵
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무인인 자신보다는 영리한 알리시아의 판단에 따
르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보니 여비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던데, 맞습니까?"
 알리시아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래서 도서관에 가서 이곳 정보를 얻으려는 
거예요. 그래야만 최대한 여비를 아낄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제가 돈을 좀 벌어오겠습니다."
 그 말에 알리시아의 눈이 커졌다.
 "레온님이 왜요? 레온님은 숙식은 전적으로 의뢰인인
제가 책임져야 해요."
 레온이 조용히 그녀의 말을 끊었다.
 "제 뱃삯을 지불한 탓에 곤란을 겪고 있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힘 하나는 자신 있으니 일이라도
해서 여비를 보태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레온님이 할 만한 일자리를 그리 쉽
게 구할 수 없을 텐데요? 레온님은 용병 자격증도 없잖
아요. 기사 신분도 인정하지 않는데 하물며 용병 자격을
그리 쉽게 허락하겠어요?"
 그 말에 레온이 빙그레 웃으며 순가락을 뻑어 뒤쪽을 가
리켰다.
 "아까 오가다 봤습니다. 인력시장인 것 같았는데 그곳
에서 벌목공을 뽑고 있더군요. 그곳에서 일하면 여비 정
도는 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알리시아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순 없어요. 당신 같은 분이 어찌 벌목 따위의 하찮
은 일을……."
 "어차피 여기에선 전부 평민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걱정
하지 마십시오. 이래 뵈도 제 전직이 나무꾼이었습니다.
나무 베는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 말에 알리시아가 입을 닫았다. 그녀의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가 본 레온은 엄청난 경
지에 오른 무인이다.
 당장 실력을 드러낸다면 아르카디아의 왕국들은 레온을 
결코 가민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어디 가서도 최소한 백작 자리 이상을 받을 수 있는 분
이야. 그런 분이 날 위해 벌목을 한다니…….'
 눈시울이 시큰해졌지만 그녀는 억지로 표정을 고쳤다.
 "괜찮으시겠어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힘 하나는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
으니까요."
 하염없이 레온을 쳐다보던 알리시아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부탁드리겠어요. 그동안 저는 도서관
에 가서 이곳에 대한 지식을 공부하겠어요. 크로센 제국
까지 레온님과 편안히 여행할 수 있게요."
 "그게 가장 좋은 방법 같군요. 이제부터 머리 쓰는 일은
왕녀님께 일임하겠습니다. 그러니 힘쓰는 일은 저에게 맡
겨주십시오."
 둘은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시아가 빙긋이 웃
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단 묵을 숙소를 잡아야겠군요. 며칠 머물려면 편히
쉴 수 있는 숙소가 있어야 해요."
 "그렇게 하십시오."

 둘은 숙소를 잡기 위해 한참을 돌아다녀야 했다. 여관들
도 식당과 마찬가지로 트루베니아 출신이란 이유로 바가
지를 쒸웠기 때문이다.
 알리시아는 한참을 헤맨 끝에 구석진 곳에 위치한 허름
한 여관에 숙소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빨이 다 빠진 꼬부랑 할머니가 허리를 두르리며 둘을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하도 늙어서 바가지를 씌우는 것
도 귀찮았던 모양인지 둘은 일주일에 10실버라는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방을 잡을 수 있었다.
 "숙박비는 선불이오. 끄응…… 허리야. 비가 오려나? 그
리고 식사는 아침만 제공해요. 빵과 치즈뿐이니 다른 걸
먹고 싶다면 외부의 식당으로 가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관은 외관에 비해 방은 비교적 깨끗한 편이었다. 내부
를 둘러본 알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럭저럭 묵을 만하군요. 방을 하나만 잡았는데 괜찮
겠어요?"
 레온이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배의 선실에 비하면 이곳은 대궐이나 마찬
가지군요."
 침대가 하나뿐이었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노숙을 밤
먹듯 해 온 레온이었기에 마룻바닥은 그에게 한 마디로
비단침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레온은 하루에 두 시간 이상 잘 필요가 없다. 운
기조식만으로 충분히 피로를 풀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알리
시아가 주뼛거리며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제가 먼저 씻겠어요."
 "그렇게 하십시오."
 "오늘은 늦었으니 쉬고 내일 시립도서관을 방문할래요."
 "저도 내일부터 벌목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감동받은 눈빛으로 레온을 쳐다보던 알리시아가 욕실문
을 닫았다. 욕실 안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레온
이 마나연공에 들어갔다.
 틈나는 대로 마나연공에 몰두하는 것은 레온에겐 완전히
습관이 되어 있었다. 아르카디아의 초인들을 꺾기 위해서
는 마나의 절대량을 높이는 것이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일찍 일어난 둘은 지체 없이 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다. 버터 바른 빵과 치즈뿐이었지만 무척 맛이 있었다.
배에서 먹던 바짝 말라붙은 빵과 퀴퀴한 냄새가 나는 치
즈와는 차원이 틀렸기에 둘은 모처럼 맛있는 아침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럼 저는 도서관에 다녀오겠어요."
 알리시아가 먼저 나섰다. 이미 그녀는 여관 주인에게 시
립도서관의 위치를 물어서 알아둔 상태였다.
 "다녀오십시오. 저도 바로 일을 나가겠습니다."
 알리시아를 보낸 뒤 레온도 곧바로 여관을 나섰다. 인력
시장이 있는 곳과 시립도서관은 가는 방향이 정반대였다.
장차을 등에 동여맨 레온이 한가롭게 주위를 두리번거리
며 인력시장으로 향했다.
 페이류트 시는 활기에 차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삐
오가며 생업에 몰두했다. 칙칙하고 암울한 트루베니아의
도시와는 분위기 자체가 많이 달랐다.
 "역시 아르카디아답군. 트루베니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되어 있어."
 처음 대하는 아르카디아의 도시를 감상하며 레온이 발길
을 재촉했다. 인력시장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
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며 고용주가 오기만
을 기다렸다.
 레온이 다가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
다. 2미터가 넘는 근육질의 거구는 여기서도 쉽게 찾아보
기 힘든 덩치였다.


  3. 백일하에 드러난는 레온의 벌목 실력


 핀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모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아
르헨 남작 휘하의 벌목장을 관할하는 그는, 인력시장에서
인부를 충원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젠장. 언제 인원을 모두 채우지? 이러다가 반도 채 못
채울 것 같은데 말이야.'
 아르헨 남작의 벌목장은 임금이 비교적 싼 편이었다. 그
런 탓에 인부들은 여간해서는 아르헨 벌목장에서 일을 하
려 하지 않았다.
 세상 물정이 어둡거나 뭔가 결함이 있는 인부가 아니고
서는 끌어 모을 재간이 없다. 모여 있는 십여 명의 인부를
보며 핀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임금을 조금만 올려줘도 할당 인원을 채울 수 있을 터
인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의 고용주인 아르헨 남
작은 엄청난 자린고비였다. 인부들의 점심 식대조차도 제
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 구하기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큰일이야. 사람 구하기가 이토록 어렵다니…….'
 페이류트 시는 대표적인 상업도시였다. 인구 중 태반이
선원이었으며 다른 주민들도 대부분 상업에 종사하고 있
다. 그런 탓에 허드렛일을 하는 인부를 구하기가 다른 곳
보다 비교적 어렵다고 봐야 한다.
 일당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선원이 인부로 나서는 것은
가능성이 거의 없다. 뱃일로 벌어들인 돈을 술과 여자로
탕진하는데 바쁜 데다 외지에서 들어온 뜨내기들도 좀처
럼 힘든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도박장이나 술집에서 일하면 더욱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판국인데 구태여 벌목같은 벌이도 시원찮고 힘든 일을 할
턱이 없다.
 한숨을 푹푹 내쉬던 핀들의 눈에 걸어오는 장대한 체구
의 덩치가 들어왔다. 순간 그의 눈이 빛났다.
 '잘 되었군. 잘 하면 한 놈 건지겠어.'
 차림새르 보니 이곳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외지
에서 굴러들어온 뜨내기도 아니다. 상체에 걸친 튜닉이
트루베니아 풍인 것을 봐서 십중팔구 바다를 건너온 이주
민 같았다. 핀들이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돈이 없어 막일을 하려는 모양인데, 흐흐. 아르카디아
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지.'
 사실 덩치는 좋았지만 그리 쓸 만한 일꾼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벌목이란 순간적으로 낼 수 있는 힘보다는 지구
력이 더욱 요구되는 작업이다.
 저런 근육질의 덩치는 힘이 좋지만 금세 지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핀들에게는  찬밥 더운밥 가릴 여유가 없었
다.
 핀들은 머뭇거림 없이 앞으로 나갔다. 다른 사람들이 눈
독들이기 전에 먼저 가로채야 했다.
 "일자리를 구하러 왔나?"
 그 말에 덩치가 걸음을 멈췄다. 물론 그는 레온이었다.
 "그렇소. 이곳에서 벌목공을 구한다고 해서 말이오."
 "벌목 일을 해본 적이 있나?"
 "조금 해 보았소. 어렸을 때 나무군이었소."
 그 말에 핀들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레온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믿어지지 않지만 구태여 상관할 필요는 없지.'
 머리를 흔든 핀들이 조건을 제시했다.
 "벌목 일을 일당제로 한다네. 하루 일당은 4실버야. 점
심식사는 제공되지 않으니 인부가 직접 준비해 와야 한다
네."
 말을 마친 그가 상대의 반응 유심히 살폈다. 덩치가 별
로 내키지 않아 하면 2실버 정도 올려줄 생각이었다.
사실 그것은 조금 터무니없는 금액이었다.
 그가 고용한 다른 인부들은 하루 6실버에 계약을 했다.
다른 벌목장에서 통상적으로 7내지 8실버를 지급하는 것
을 감안할 때 절반밖에 안 되는 액수였다.
 하지만 세상 물정을 모르는 레온은 아무 생각 없이 고개
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적지만, 하겠소."
 그 말에 핀들이 내심 쾌재를 불렀다.
 '흐흐흐. 멍청한 놈. 봉 잡았군. 2실버는 이제 내 것이
다.'
 고개를 끄덕이던 핀들의 시선이 레온이 차고 있는 창으
로 향했다.
 "멋진 창이로군. 그런데 벌목 장비는 가지고 왔겠지?"
 그 말에 레온의 눈이 커졌다.
 "장비는 벌목장에서 제공하지 않소?"
 "어허! 큰일 날 소릴 하는군. 장비는 엄연히 인부들이
준비해야 한다네. 저쪽으로 가면 대장간이 있으니 가서
그곳에서 벌목용 도끼를 구입해 오도록 하게. 나는 여기
에서 기다리겠네."
 고개를 갸웃거리던 레온이 알겠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핀들이 조소어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2실버 가로채기는 했지만 도끼까지 준비해 줄 필요는 
없지.'

 대장간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땅. 땅. 땅--
 상체를 걷어붙인 대장장이들이 연신 망치질을 해댔다.
풀무로 인해 화끈한 열기가 바깥까지 뿜어져 나왔다. 레
온이 다가가지 중년 대장장이가 망치질을 멈췄다. 구릿빛
피부가 인상적인 멋진 대장장이였다.
 "무슨 일로 왔소?"
 "벌목용 도끼를 사려고 왔습니다."
 대장장이가 심드렁하게 손을 들어 대장간 한쪽을 가리
켰다.
 "저쪽에 많으니 하나 골라보시오."
 그가 가리킨 곳에는 갓 만들어진 도끼들이 질서정연하
게 걸려 있었다. 그리로 다가가려던 레온이 멈칫했다. 가
진 돈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일단 차을 팔아야겠군. 구태여 이곳에서 쓸 일이 없을
것 같으니…….'
 레온이 등에 메고 있던 창을 풀었다.
 "이 창을 팔 수 있겠습니까? 돈이 없으니 이걸 팔아서
도끼를 사야 할 것 같네요."
 대장장이가 창을 받아들고 유심히 살폈다. 잠시 후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중상급 정도 되겠군. 쓸 만한 창이긴 한데 요새 창을
쓰는 사람이 없어서 얼마 받지 못할 거요. 용병들도 창을
거의 외면하는 판국이라 판로가 막막하니……."
 그 말에 레온의 안색이 씁쓸해졌다. 아르카디아에서도
창이란 무기를 외면한다고 생각하니 창술을 익힌 창수로
써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얼마 정도 받을 수 있습니까?"
 "2실버 쳐 드리겠소. 그래도 괜찮다면 넘기시오."
 잠시 고민하던 레온이 창을 건넸다. 창을 받아든 대장장
이가 한쪽에다 창을 기대어 세웠다.
 "벌목용 도끼는 한 자루에 3실버요. 1실버만 더 내면 도
끼는 가지고 갈 수 있소."
 레온은 난감해했다. 가진 돈이 단 1실버도 없었기 때문
이다.
 "더 싼 도끼는 없습니까?"
 그 말에 대장장이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레온을 쳐다보
았다.
 "돈이 없소?"
 "그렇습니다."
 난감한 표정을 짓는 레온을 보며 대장장이가 살짝 이맛
살을 모았다.
 "싼 게 있기는 한데……. 당신 덩치를 보니 어쩌면 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저렴한 도끼가 있습니까?"
 "있긴 한데 벌목용은 아니요. 전쟁용 그레이트 엑스
(Great Axe)인데 하도 무거워서 찾는 사람이 없소. 녹여
서 쓸 요량으로 놔둔 게 있는데 그거라도 괜찮다면 2실버
에 가지고 가시오."
 그레이트 엑스라는 말에 레온의 눈이 번뜩였다. 용병시
절 한동안 썼던 무기였기 때문이다.
 "한 번 볼 수 있겠습니까?"
 "따라오시오." 
 대장장이의 뒤를 따라 들어가자 벽에 기대어 세워놓은 
여러 가지 무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메이스(Mace)
나  프레일(Flail)따위의 중병기들이었다.
 시뻘겋게 녹이 슬어 있는 것을 봐서 녹여서 다른 무기를
만들려고 보관 중인 것 같았다. 대장장이는 그 중에서 큼
지막한 도끼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어이쿠! 이렇게 무거우니 보통 사람들은 제대로 휘두르
지도 못하지."
 건장한 체구의 대장장이가 인상을 쓰며 겨우 집어 드는
도끼였다.
 "한 번 살펴보슈."
 도끼를 받아든 레온이 유심히 살폈다. 도끼는 시뻘겋게
녹이 슬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문지르니 녹이 마구 묻어
나왔다. 그러나 도끼 자체는 쓸 만했다.
 균형도 잘 잡혀 있었고 재질 자체도 잘 정련된 강철로
되어 있었다. 무게는 25kg정도, 보통 사람들은 한 손으로
들어올리기조차 힘든 중병기였다. 하물며 그걸 휘두른다
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통상적으로 용병들이 많이 사용하는 롱소드(Long Sword)
는 무게가 2~4kg 정도 된다. 보기보다 가볍다고 생각하겠
지만 휘둘러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원심력으로 인해 무게
가 서너 배 늘어나기 때문이다.
 두 손으로 휘두르는 투 핸드 소드(Two hanf Sword)도 고
작해야 3~7kg정도밖에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투 핸드 
소드를 얕봐서는 안 된다. 한 손으로 휘두르다간 팔이 빠
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무게가 더 나가는 중병기도 있다. 
 기다들이 상대방을 중갑주를 두들겨 부수기 위해 사용하
는 메이스나 워해머(War Hammer)도 보통 8~15kg 내외이다.
그런 관전에서 25kg짜리 그레이트 엑스는 정말 무지막지한
무기였다.
 보통 사람이 한 번 휘두르고 나면 힘이 다 빠져 헉헉거
릴 수밖에 없다. 그 점을 느꼈는지 대장장이가 얼굴 붉혔
다.
 "아무래도 벌목용으론 부적합할 것 같소. 어느 벌목장에
서 일하는 지를 알려 준다면 외상으로 해 줄 수도……."
 "아니 괜찮습니다.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레온은 두말 하지 않고 그레이트 엑스를 집어 들었다.
용병시절 한동안 애용했던 병기였기 때문에 감촉이 무척
친숙했다. 도끼를 어깨에 척 걸친 레온이 몸을 돌려 갈어
나갔다.
 "저, 정말 괜찮겠소?"
 "괜찮습니다. 예전에 다뤄본 적이 있거든요."
 어쩔 수 없다는 판단한 대장장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럼 잘 쓰도록 하시오."
 
 도끼를 어깨에 걸친 레온이 머뭇거림 없이 인력시장을
향해 걸어갔다. 도끼는 자루까지 강철로 되어 있었다. 온
통 녹이 슬어 있어 손바닥이 시뻘겋게 변했지만 레온은
상관하지 않았다.
 "잘 되었군. 녹을 벗겨내서 들고 다니면 그럭저럭 폼이
나겠어."
 주위를 살짤 둘러본 레온이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파
악하자 살짝 마나를 끌어올렸다.
 우우웅--!
 마나가 도끼로 주입되었다. 자루가 강철로 되어 있어 마
나를 주입하기가 한결 편했다.
 돌연 도끼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마나가 집중되며 오
러가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오러가 깃들자 도끼를 뒤덮
고 있던 고이 버티지 못하고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후두둑--!
 도끼는 금세 본연의 몸체를 드러냈다. 녹이 모조리 떨어
지자 무딘 도끼날이 드러났지만 레온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에겐 그 어떤 마법병기보다 날카로운 오러라는 날이 있
기 때문이다. 새로 언은 병장기를 어깨에 둘러맨 채 레온
은 아까 핀들을 만난 곳으로 걸어갔다.

 "그, 그 도끼로 벌목을 할 생각인가?"
 레온이 들고 온 그레이크 엑스를 본 핀들이 어처구니 없
어 했다. 벌목용 도끼를 구해 오라고 했더니 저런 무지막
지만 무기를 들고 온 것이다. 모여 있던 인부들도 놀란 눈
빛으로 레온이 짊어진 도끼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 번 휘두르고 포기할 생각인가?"
 "걱정 마시오. 이래 뵈도 힘 하나는 자신 있으니까."
 짜증이 치밀어 올랐는지 핀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좌우지간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품삯은 없네. 알아두
도록 하게."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린 핀들이 한쪽에 놓인 마차를 가리
켰다.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전형적인 짐마차였다.
 인부들이 하나둘 마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꼴을 보니 벌
목장까지 마차를 타고 가야 하는 모양이었다. 레온도 군소
리 없이 마차에 올랐다.
 '20명을 구해야 되는데 고작 11명이라니……. 할 수 없
는 일이지.' 
 머리를 흔든 핀들이 마부석에 올라탔다.

 벌목장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시 외곽으로 나간
마차가 산길을 타고 한참을 올라갔다. 길이 잘 닦여 있어
마차가 그리 흔들이지도 않았다.
 레온은 한가롭게 마차 벽에 등을 묻고 처음 보는 아르카
디아의 산야를 감상했다.
 "다 왔다. 모두 내려라."
 핀들의 고함소리에 인부들이 하나둘 마차에서 내렸다.
그들의 손에는 날이 시퍼렇게 갈린 벌목용 도끼가 두세자
루씩 들려 있었다.
 도끼로 나무를 하다 보면 이가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잘 갈아놓은 도끼를 여분으로 준비
해 온 것 이다. 옆에 앉은 인부 한 명이 어이없다는 표정
으로 레온의 도끼를 쳐다보았다. 구레나룻을 멋지게 기른
중년 인부였다.
 "아니 자넨 도끼도 안 갈아 왔나?"
 아닌 게 아니라 레온의 도끼는 날이 무딜 대로 무뎌 있
었다. 마나로 녹을 벗겨냈으니 무딜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괜찮소. 나무를 베는 데는 이 정도로도 충분하오."
 "이곳에 있는 나무들은 연한 삼나무가 아니라 단단한 전
나무야. 조직이 치밀해 무딘 도끼로는 불가능할 걸세. 뭐
어쨌거나 자네 사정이니 내가 관여할 필요가 없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인부가 마차에서 내렸다. 레온도
따라 내렸다. 한데 모여 웅성거리는 인부들에게 다가간
핀들이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오늘의 할당치는 전나무 100그루이다. 1인당 10그루를
채워야만 일당을 받아 갈 수 있다."
 불평어린 음성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왔다.
 "젠장. 1인당 10그루라니? 단단한 전나무를 어떻게 10
그루나 벤단 말인가?"
 "품삯이 너무 짜오."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인부들은 곧 도끼를 들고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불만이 있다면 다음에 이곳으로 
오지 않으면 그만이다.
 불평할 시간에 나무 한 그루라도 더 베자는 생각에 인부
들이 일제히 벌목을 시작했다.

 레온은 느릿하게 걸어서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빽빽하게
심겨진 전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었다. 아까 말을
건 구레나룻 인부가 다가왔다.
 "이쪽에 있는 나무들은 수령이 50년 이상 된 것들이네.
그만큼 조직이 치밀하여 베기가 어렵지. 이쪽 나무는 건들
지 말고 반대쪽으로 가게. 괜히 힘쓰려다가 오늘 할당치를
못 채울 수도 있어."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오랜만에 나무를 보니 이왕이면
큰 놈을 노리고 싶구려."
 인부가 못 말리겠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집이 덩치만큼이나 대단하군. 자네 알아서 하게."
 그는 레온이 채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탈진할 것이라
예상했다. 전장에서나 쓰는 그레이트 엑스로 나무를 베는
것은 지극히 미련한 것이다.
 '끌끌. 아마 오늘 일은 십중팔구 공칠 테니. 품삯은 기
대하지 말라고. 핀들 놈이 도대체 어떤 놈인데……. 나도
다리가 불편하지 않았다면 결코 아르헨 벌목장 일을 하지
않았을 거야.'
 그가 머리를 흔들며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아름드리 전나무 앞에 선 레온이 심호흡을 했다. 그에
따라 활력이 사지백해로 뻗어나갔다.
 '정말 오랜만에 병장기를 휘둘러보는군.'
 아르카디아로 오는 100일 동안 레온은 변변찮게 창 한
번 휘둘러보지 못했다. 좁은 선실이나 갑판에 병장기를
휘두를 만한 공간이 있을 턱이 없었다.
 레온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그레이트 엑스를 들어
올렸다. 순간 그의 건장한 몸이 살짝 휘청했다.
 '윽, 조금 무겁군.'
 과거에 쓰던 그레이트 엑스는 오히려 이것보다도 더 무
거웠다. 그런 육중한 도끼를 한 손으로 잡고 마구 휘둘렀
던 레온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오우거의 육신을 가지고 있던 시기. 인간
이 된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제아무리 체격이 좋고
근육기 우람하다 하더라도 인간과 오우거는 원천적으로 
낼 수 있는 힘이 다르다.
 '부득이 마나를 써야겠군.'
 마나를 운용할 경우 몸의 근력과 순발력이 월등히 증가
한다. 하물며 레온 정도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면 족히 수
십 배 이상의 힘을 낼 수 있다. 
 단점이라면 마나홀의 마나가 빨리 소모된다는 점인데,
레온에겐 해당사항이 없었다. 지금의 그는 일주일 밤낮
동안 나무를 해도 끄덕없을 정도의 경지에 올라 있다.
 마나를 끌어올리자 도끼의 무게감이 월등히 줄어들었
다. 레온이 눈빛을 빛내며 나무를 응시했다.
 "그럼 벌목을 시작해 볼까?"
 두 손으로 자루를 움켜줜 레온이 도끼를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퍼억--!
 내리꽂힌 도끼는 정확히 전나무의 결을 파고들었다. 오
러를 끌어올릴 필요도 없었다. 결대로 파고들어간 도끼가
정확히 전나무를 반을 쪼개어 버렸다.
 밑둥의 반이 날아가자 전나무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레온 주변에서 나무를 하
는 일꾼들이 없었기에 굳이 경고성을 내지를 필요도 없었
다.
 콰지직--!
 밑둥이 잘려나간 전나무가 나뭇거지을 우수수 부러뜨리
며 쓰러졌다.
 쿵,
 사방으로 먼지가 난무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단 일격
이면 충분했다. 레온은 단 한 번의 도끼질로 수십 년 이상
을 자란 아름드리 전나무를 쓰러뜨렸다. 구태여 도끼질을 
두 번 할 필요도 없었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도끼가 아래로 내리꽂히는 순간 나
무 밑둥이 여지없이 잘려나갔다.
 우지지직-- 쿵!
 레온은 눈 깜짝할 사이에 5그루의 전나무를 쓰러뜨렸
다. 그것도 수령이 족히 50년은 되는 아믈드리나무로만.

 "으헉."
 핀들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한 그루도 베지
못하고 헉헉거릴 줄 알았던 덩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전
나무를 5그루나 쓰러뜨린 것이다.
 어른 둘이 팔을 맞잡아도 닿을 까 말까 한 나무가 도끼질
한 번에 턱턱 넘어갔다. 지금껏 수많은 벌목꾼들을 봐왔
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입술을 비집고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가, 가히 도끼질의 신이로군."
 인부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수십 번 도끼질을 해서
겨우 한 그루 쓰러드린 인부들이 태반이었다. 그런데 그
들이 쓰러뜨린 나무보다 월등히 두꺼운 나무를 무려 5그
루나 쓰러뜨리다니……. 구레나룻 인부가 놀란 눈빛으로
레온에게 다가갔다.
 "저, 정말 놀랍군. 도대체 어떻게 한 건가?"
 그 말에 레온이 고개를 돌렸다. 무려 5그루나 쓰러뜨렸
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는 땀 한 방울 보이지 않았
다. 숨결조차 전혀 거칠어지지 않았기에 인부가 혀를 내
둘렀다.
 "어릴 때부터 나무를 했었소. 결을 잘 쪼갠다면 단단한
전나무도 쉽게 쓰러뜨릴 수 있소. 참나무는 이것보다 더
욱 베기가 힘들지."
 "도대체 어떻게 결이란 것을 보는 것인가? 좀 가르쳐 주
게."
 물론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레온
도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결을 파악하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에 뭐라 설명해 줄 수 없었다. 속 시원한 해답을 듣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부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정말 대단하이. 어런, 아직까지 통성명을 하지 못했군.
내 이름은 허드슨이라네."
 "레온이라 불러주십시오."
 "말투를 들어보니 트루베니아에서 건너온 모양이군."
 레온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특이하군. 트루베니아 출신의 이주민들을 많이 봐왔는
데 자네 같은 친구는 처음이야."
 그때 핀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지금 잡담할 시간이 어디 있나? 어서 일을 해야지."
 그 말에 레온이 순순히 그레이트 엑스를 집어 들려 했
다. 그러나 허드슨이 손을 뻗어 말렸다. 핀들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싸늘했다.
 "흥! 하루 할당량이 10그루라고 하지 않았나? 이 친구는
벌써 반을 해냈네. 그만하면 충분히 쉴 자격이 있어."
 "그건 아니야. 실력이 있으면 의당 할당량이 늘어나기
마련이지. 다른 인부들의 작업속도가 느리니 자네가 조금
더 맡게."
 만약 허드슨이 없었다면 레온은 순순히 나무를 베었을
것이다. 어차피 그에게 나무 10그루 정도 더 베는 것은 식
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 계통에 대해 해박한 지
식을 가진 허드슨은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일단 할당량만 채우면 끝이야. 감히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날 속이려 하다니……. 이보게
레온. 나랑 같이 일하지 않겠나? 다른 데 가면 이곳보다 
두 배 이상 보수를 받을 수 있을 걸세."
 "어허. 이 사람이……."
 핀들이 발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칫 이 바닥에서 
이상한 소문이 나면 더 이상 인부를 구하지 못할 수도 있
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변해가던 상황을 보던 레온이 한
숨을 쉬며 그레이트 엑스를 집어 들었다.
 "그냥 일을 하겠습니다. 차라리 그 편이 편하겠군요."
 그 말에 허드슨은 당황했고 핀들의 얼굴에는 회심의 빛이
떠올랐다.
 "잘 생각했네. 내 특별히 품삯을 2실버 올려줌세."
 
 레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인부들은 작업하는 것도 잊은 채 레온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살폈다. 허드슨 여식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떻게 결이란 것을 보는 거지?'
 레온의 도끼질은 겉으로 보기에 무척 단순해 보였다. 두
손으로 도끼 자루를 잡고 하늘 높이 치켜 올린 뒤 그냥 내
려찍는 동작뿐이었다. 그렇지만 결과는 달랐다.
 콰지직--!
 무뎌 보이는 도끼날은 그 두터운 나무둥치의 절반 이상을
파고들어갔고 나무는 무게를 이기지 못해 옆으로 비스듬히
쓰러지고 말았다.
 단 다섯 번의 도끼질을 하고 나자 레온의 하루 할당량이
모두 차 버렸다. 보고 있던 인부들이 일제히 감탄사를 내
뱉었다.
 "캬, 정말 대단하군. 태어나서 줄곤 나무만 베었나보지?"
 "힘도 좋고 기술도 뛰어나군. 지금까지 자네처럼 나무를
잘 베는 인부를 보지 못했어." 
 그렇게 되자 다급해진 쪽은 핀들이었다. 할당량을 다 채
웠으니 더 이상 나무를 베라고 독촉할 수가 없다. 게다가
산전수전 다 겪은 허드슨이 붙어 있으니 속여먹는 것은 
불가능하다.
 '젠장. 허드슨 놈을 괜히 데리고 왔어.'
 투덜거리던 핀들이 레온을 쳐다보았다.
 "수고했네. 이젠 벤 나무의 가지를 정리하도록 하게."
 원칙적으로 벌목이란 나무를 베기만 한다고 끝나는 것
이 아니다. 먼저 무성하게 자란 가지를 모조리 제가한 다
음 근처에 있는 강으로 운반해서 뗏목으로 엮어야 한다.
 여기서 벌목꾼들의 역할은 나무를 베어 가지를 정리하
는 일이다. 말의 힘을 이용해서 강가로 옮긴 다음 고용된
다른 일꾼들이 뗏목을 엮는 것이다.
 허드슨이 레온에게 다가왔다.
 "혹시 자네 나와 같이 콤비로 일할 생각 없나?"
 "무슨 말씀이신지."
 허드슨이 손가락을 뻗어 자신의 발목을 가리켰다. 심하
게 부어오른 것을 보니 아직까지 부상이 낫지 않은 것 같
았다.
 "한 달 전에 쓰러지는 나무에 깔려 발목이 부러졌네. 원
래대로라면 조금 더 쉬어야 하지만 목구멍이 포두청이다
보니 어쩔 수 없더군. 솔직하게 말하겠네. 발목이 불편하
다 보니까 나물르 베는 게 쉽지 않아. 그래도 가지 정리하
는 것은 잘 해낼 자신이 있네."
 "……."
 "그러니 이엃게 하는 게 어떤가? 자네가 내 몫까지 나무
를 베어주게. 그럼 내가 자네 몫까지 가지를 정리해 주겠
네. 어차피 자네의 그레이트 엑스로 가지를 정리하는 것
은 쉽지 않을 테니……."
 그 말에 레온이 도끼날을 쳐다보았다. 뭉툭한 도끼날로
가느다란 가지를 정리하는 것은 상당히 힘이 드는 일이다.
차라리 나무를 베는 것이 나았기에 레온은 고개를 끄덕였
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 말에 허드슨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정말 고맙네. 대신 내 품삯 중에서 2실버를 떼어주겠네.
자네 일이 월등히 힘드니 의당 그렇게 해야지."
 그렇게 되자 다른 인부들도 앞다투어 같은 요청을 해 왔
다. 수십, 수백 번 도끼질을 해서 나무를 쓰러뜨리는 것보
다 가지를 정리하는 것이 월등히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나도 부탁하겠네. 허드슨과 같이 2실버를 줄 테니 그렇
게 해 주게."
 레온은 인부들의 부탁을 모두 수용했다. 어차피 나무를
쓰러뜨리는 것은 도끼질 한 번으로 끝난다. 금전적으로
곤궁했기 때문에 레온은 힘을 조금 더 쓰기로 마음먹었다.
 이후부터 인두들은 매우 편해졌다. 레온이 나무를 쓰러뜨
리면 두터운 정글도나 작은 도끼를 이용해 가지를 정리하
기만 하면 되니 그럴 수밖에 없다.
 레온은 마치 스톤 골렘처럼 쉬지 않고 나무를 쓰러뜨려
나갔다. 도끼질 한 번이면 백중 백, 나무가 쓰러졌다.
 레온의 입장에서도 그게 편했다. 쓰러뜨리기만 하면 인
부들이 달려들어 깔끔하게 뒤처리를 해 주니 그저 마음편
하게 도끼질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날의 할당량인 전나무 100그루는 단 두시
간 만에 끝났다. 깔끔하게 정리된 채 늘어서 있는 나무를
본 핀들은 말을 잃었다. 어쨌거나 작업량이 모두 끝났으
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모두들 수고했소. 여기 오늘 치 품삯이오."
 체념한 핀들이 일꾼들에게 품삯을 지불했다. 1인당 6실
버씩 받아든 인부들은 그중 2실버를 레온에게 건네주었
다. 순식간에 26실버를 벌어들인 레온이 흡족한 표정으로
은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잠깐 기다리게. 아직 두 시간밖에 안 지났는데 일을 더 
할 생각이 없나? 100그루를 더 베어주면 동일한 품삯을 
지불하겠네."
 핀들의 제안에 인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자들이다. 기회가 있을 대 더
벌어두는 것이 좋다.
 게다가 잔가지만 정리했기 때문에 체력까지 쌩쌩한 상
황이다. 그런데 역시 문제는 레온이었다. 허드슨이 걱정
스러운 눈빛으로 레온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 괜찮겠나?"
 레온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를 사용해서 나무
를 베었기 때문에 거의 피로감을 느끼지 않았다. 이미 일
주일 내낸 나무를 베어도 끄덕없을 정도의 마나를 보유한
레온이었다.
 "전 괜찮습니다. 여러분들이 괜찮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
죠."
 그 말에 인부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우리야 쌩쌩하지. 그럼 일을 시작해 볼까?"
 레온은 다시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도끼날에
은근슬쩍 오러를 불어넣었다.
 제아무리 덩치가 좋은 레온이라도 도끼 무게가 그리 만
만치 않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오러가 깃든 도끼는 나무를 마치 종이장처럼 베어 넘겼
다. 인부들이 쓰러진 나무에 달라붙어 잔가지를 정리했
다. 그렇게 해서 2차 작업 역시 두 시간 만에 종료되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핀들은 한껏 신이 났다. 원래 그에게 부여된 작업량이
나무 200그루였다. 그런데 일꾼을 채우지 못해 포기하고
있었는데 레온의 등장으로 인해 할당량을 채운 것이다.
 기분이 좋아진 핀들은 원래는 제공되지 않는 인부들의
중식까지 제공했다.
 고기를 얇게 썰어 넣은 파이였는데, 힘든 일을 하고 난
인부들에겐 정말로 꿀맛일 수밖에 없었다.
 식사를 마친 인부들은 레온을 살살 꾀어 한 번 더 작업
에 들어갔다. 벌목장의 주인인 아르헨 남작으로부터 압력
을 받고 있던 핀들로서는 반가운 제안일 수밖에 없다.
 "나야 이견이 없네. 자네들이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게.
품삯은 동일하게 지급하지."
 그렇게 해서 레온은 300그루의 나무를 베어주고 무려 78
실러의 품삯을 받아 챙겼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마차에서 인부들은 연신 레온의
괴력을 칭찬했다.
 "내 지금껏 살아오며 자네처럼 힘 좋은 친구는 처음일세."
 "어디 힘뿐인가? 지구력도 정말 대단하지. 혼자서 300그
루를 도대체 어떻게 벨 수 있단 말인가?"
 허드슨이 중간에 말을 끊고 나섰다.
 "그러지 말고 우리 벌목단을 구성하는 것이 어떤가? 레온
이 나무를 베고 우가 뒷수습을 하면 나무 300그루 정도는
금세 벨 수 있지. 그럼 품삯도 더욱 후하게 받을 수 있을
걸세. 어떤가?
 허드슨의 제안에 인부들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오늘 그들
은 그리 힘들게 일하지 않고도 12실버라는 거액을 챙겼다.
꼬박 이틀 공안 나무를 베어야 받을 수 있는 품삯이었기에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다.
 "거 좋은 생가가이야. 오늘 정말 손발이 척척 맞지 않았
나?"
 "그렇게 하세. 레온. 자네만 승낙하면 우리도 좋아."
 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레온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일단 제 고용주에게 물어봐야겠습니다. 만약 그분이 떠
나신다고 하면 더 이상 벌목 일을 할 수 없을 지도 모릅니
다."
 "고용주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전 용병입니다. 계약을 맺고 고용주를 호위하는 입장인
데 여비가 떨어져서 벌목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말에 인부들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그런 고용주가 어디에 있나? 노자가 떨어졌다고
호위하는 용병에게 막일을 시키다니……."
 "그런 계약관계는 당장 해지하게. 그런 고용주와는 일할
필요가 없네."
 레온이 조소를 베어 물었다. 저들도 정작 사저을 안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인력시장에 도착한 인부들은 떠나려는 레온을 붙들었다.
 "그냥 가면 섭섭하지. 자네 덕에 품삯을 많이 받았으니
한 잔 사겠네."
 "일 끝난 뒤 한 잔 하는 것이 우리에겐 최고의 즐거움이
지."
 오랫동안 술맛을 보지 못했던 터라 레온은 순순히 인부 
들을 따라갔다. 그들은 레온을 데리고 누추한 펌으로 데
리고 갔다. 종업원이 가지고 나온 것은 오크통에서 숙성
된 위스키였다.
 술맛을 본 레온이 놀라워했다.
 '놀랍군. 위스키라면 트루베니아에선 귀족들이 즐겨 먹
는 술인데 아르카디아에선 한낱 인부들이 이것을 마시는
군.'
 물론 고급 위스키는 아니었다. 쭉 들이키는 순간 눈앞이
아찔한 것을 봐서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
러나 트루베니아의 평민들은 평생을 가도 위스키 맛을 보
지 못 한다. 몇 잔 오고가지 않았는데도 인부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을 보아 무척 독한 모양이었다.
 "캬. 죽이는군. 노동을 하고 난 뒤 즐기는 한 잔의 위스
키는 온몸을 노곤하게 녹여버리지."
 "내일도 함께 일하도록 하세. 레온이라고 했나?"
 "자네 정말 멋진 친구야. 자네랑 일하는 것이 정말 즐겁
네."
 벌써부터 인부들의 혀가 꼬부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레온은 전혀 취기를 느끼지 못했다. 지금껏 레온은
술에 취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체질 자체도 그랬지만 품고 있는 마나가 워낙 방대하다
보니 술기운이 금세 해독되어 버리는 것이다. 독한 위스
키라도 레온을 취하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인부들과 어우러져 술을 마시는 레온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트루베니아와 아르카디아 사람은 기질 자체가 상당히
다르군.'
 이미 트루베니아의 하층생황을 많이 겪어본 레온이었
다. 그 점에서 트루베니아 사람들은 무척이나 순박한 편
이었다. 남을 속일 줄도 모르고 이용하지도 않는다. 감정
표현도 솔직했고 겉과 속이 다르지도 않다. 하지만 아르
카디아 사람들은 달랐다. 얼마 겪어보지 못했지만 인부들
을 보니 입맛이 씁쓸했다.
 '달라도 어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처음에는 인부들도 레온을 무척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덩치만 커다란 애송이가 전쟁터에서나 쓸 법한 그레이트
엑스를 어깨에 짊어지고 나타나서 얼마나 같잖았을까?
 하지만 레온이 능력을 발휘하자 그들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레온의 활약으로 인해 이득을 보자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친분을 쌓으려는 것이다.
 사실 인부들은 레온으로 인해 많은 이득을 보았다. 레온
이 쓰러뜨린 나무의 잔가지만 쳐주고 두 배에 가까운 품
삯을 챙겼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문제는 그들이 계속해서
한 팀이 되어 일하자고 조른다는 점이다.
 어떻게든 레온을 이용해 먹으려는 의도가 역력히 드러
났기에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시간이 지나자 인부들이 하나둘씩 나가떨어졌다. 고된
노동으로 지친 상태에서 독한 위스키를 뱃속에 퍼부었으
니 멀쩡할 리가 없다.
 취기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허드슨이 레온을 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자, 자네 히. 힘만 좋은 게 아니라 주량도 어, 엄청나
군. 저, 정말 대단해."
 레온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남아있는 술잔을 비웠다.
 "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고용주가 기다리고 있
거든요."
 "벌써 가, 가려고? 그, 그래 가야지. 그럼 내일 보세. 기
다리고 있겠네."
 허드슨은 아직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묵묵
히 고개를 끄덕인 레온이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사, 살펴 가게."
 밖으로 나오자 밤바람이 몹시도 상쾌했다. 약간의 취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낀 레온이 마나를 살짝 끌어올렸다. 그러
자 취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해가 져서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알리시아님은 돌아오셨을까?"
 고개를 갸웃거린 레온이 숙소를 향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알리시아는 밤늦게 돌아왔다.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것을
보아 하루 종일 책을 읽은 모양이었다. 책을 읽는데 정신
이 팔려 식사조차 거른 그녀였다.
 "일찍 들어오셨군요?"
 레온이 잠자코 오늘 품삯을 꺼내 알리시아에게 내밀었
다.
 "오늘 번 돈입니다."
 78실버를 받아든 알리시아의 눈이 커졌다. 하루 동안 벌
목 일을 품삯치고는 과한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레온은 
놀라는 알리시아에게 오늘 겪은 일을 설명해 주었다.
 하루에 300그루나 되는 잔나무를 베었다는 말에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덕문에 몸은 확실하게 풀었습니다."
 "그런데 돈을 왜 저에게 주시죠?" 레온님이 버신 돈이잖
아요?"
 "알리시아님께서 관리하시면서 쓸 데가 있으면 쓰십시오.
어차피 여행경비에 보태려고 일한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알겠어요. 제가 가지고 있겠어요."
 그러나 알리시아는 반은 돈 중에서 20실버를 다시 레온에
게 내밀었다.
 "이 정도는 항상 가지고 다니세요. 언제 돈 쓸 일이 생길
지 모르니까요."
 "알겠습니다."
 레온이 선선히 돈을 받아들었다. 도끼를 구입하면서 돈이
없어 쩔쩔맸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알리시아가 살
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런데 내일도 그 사람들하고 일을 할 건가요?"
 "모르겠습니다. 내키지 않지만 아마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요."
 그 말에 알리시아가 계책을 알려 주었다.
 "제가 가르쳐 준 방법대로 한 번 해 보세요. 이렇게 하면
더욱 많은 품삯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에 레온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내일 가시면 먼저 핀들이라는 사람을 만나 협상을 하세
요. 전나무 300그루를 잘라주는데 얼마, 이런 식으로 말
이에요. 제 생각으론 족히 1골드(100실버) 이상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핀들이라는 사람에게도 이
득이죠. 벌목공들을 고용하지 않고 잡일꾼만 고용해도 되
니 말이에요. 나뭇가지를 정리하는 것은 잡일꾼들도 충분
하니까요."
 "그,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상황에 따라서는 그보다도 더 많이 받을 수 있을 것 같
아요. 중요한 것은 이곳 인력시장의 품삯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아야 할 것 같아요."
 그 말에 레온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말해 자신이 없습니다. 머리 굴리는 것은 질색
이거든요."
  그 말에 알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좋아요. 제가 대신 협상을 해 드리죠. 어차피
레온님께서 일한 대가인데 받을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받아야죠."
 그 말에 레온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다음날 아침 레온은 알리시아를 대동한 채 인력시장으로
나갔다. 알리시아는 협상을 마치고 난 뒤 도서관으로 향
할 생각이었다. 인력싣장은 어제와 다름없이 부산했다.
 특이한 점은 인력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일단으 벌목
공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본 레온이 떨떠
름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로군요. 아마 절 기다리고 있
나 봅니다."
 "일단 저들의 눈에 띄어선 안 되겠군요. 제가 대신 다녀
올게요. 그런데 핀들이라는 사람이 누구죠?"
 주위를 살짝 둘러본 레온의 시선에 핀들이 들어왔다. 그
역시 입구 부근에서 주위를 부산하게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저기 저자입니다. 머리가 반쯕 벗거진 갈색머리의 중년
인이죠."
 "알겠어요. 그럼 저에게 맡겨두세요."
 알리시아는 호기롭게 걸어갔다. 인력시장에 아리따운 아
가씨가 들어서자 모인 인부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휘파
람을 불었지만 그녀는 일체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핀들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그녀는 우선
인부를 고용하려고 온 사람들을 찾았다.
 '흠 저 사람 같군.'
 튜닉을 멋지게 차려입은 중년인에게 다가간 알리시아가 
말을 걸었다. 아르카디아 억양으로 말을 걸었기 때문에
상대는 그녀가 트루베니아 출신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벌목고의 하루 일당이 얼마죠?"
 귀족가의 집사로 보이는 사내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알
리시아를 쳐다보았다.
 "설마 당신이 일을 할 거요?"
 "물론 아니죠. 제 남편이 벌목공인데 제가 대신 품삯을 
알아보러 왔어요. 벌목 경험이 많으니 일 하나는 확실하
게 할 수 있어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알리시아였다. 다행히
사내는 상당히 후한 품삯을 불렀다.
 "하루 8실버요. 물론 중식은 제공하오. 생각 있으면 남
편을 이리로 데리고 오시오."
 "알겠어요. 감사드려요."
 이후로도 알리시아는 여러 고용주들에겍 다가가 품삯을 
조사했다. 그 결과 통상적으로 하루 7~8실버에 중식 포
함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시장조사를 마치자 그녀는 머
뭇거림 없이 핀들에게로 다가갔다.
 
 핀들은 초조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왜 안 오지? 오늘은 일을 할 생각이 없나?"
 고개를 돌린 그의 눈이 커졌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아리따운 아가씨가 자신의 곁에 다가왔기 때문
이다. 눈이 확 띄는 미모였기에 핀들의 얼굴이 부드럽게
변했다.
 "아가씨. 나에게 볼 일이 있소?"
 알리시아는 주위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음성을 낮췄
다.
 "저는 레온님의 대리인이에요. 어제 당신의 벌목장에서 
일했는데 혹시 아시겠어요?"
 순간 핀들의 눈이 커졌다. 지금까지 눈이 빠지게 레온을
찾고 있던 그였다. 
 레온 하나만 고용한다면 굳이 다른 벌목공들을 고용할
필요가 없었다. 얼마나 마음이 급했는지 핀들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무, 물론 알고 있소. 그는 지금 어디에 있소? 설마 오
늘 일은 나오겠지?>"
 "그 문제에 대해 의논하려고 제가 왔어요?"
 알리시아는 능숙한 말투로 협상을 시작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레온님은 다른 인부 10명분의 몫을 
할 수 있어요. 그 점을 인정하시나요?"
 "물론이오. 그래서 어제보다 후한 품삯을 주니배 놓고
있소?"
 "얼마 정도 예상하셨나요?"
 핀들은 눈을 딱 감고 준비해 온 금액을 불렀다.
 "70실버 드리겠소. 나무 300그루를 베어줄 경우에 말
이오. 원래는 제공하지 않지만 중식 제공까지 생각하고
있소."
 그러나 알리시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림도 없는 조건이로군요. 인부 10명분의 일을 하는
데 70실버는 말도 되지 않아요. 태반이 중식 제공에 8실
버 이상 준다는데, 아무래도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네요."
 그렇게 되자 급해진 쪽은 핀들이었다.
 "하, 하지만 우리 벌목장의 임금은 원래 6실버요. 70실
버라면 10명분 이사을 계산한 것이오."
 그 말에 알리시아가 빙긋 웃으며 반론을 제기했다.
 "산술적으로 따지면 그렇지요. 하지만 레온님이 일을
하면 다른 벌목공들이 필요 없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았군
요. 벌목공이 아닌 잡일꾼들을 고용할 경우 하루 3~4실버
정도면 충분하잖아요? 가지를 정리하는 일 정도는 잡일꾼
들도 충분히 해낼 테니 말이에요."
 여기서 잡일꾼들은 12~16세 사이의 소년들을 말한다.
어른들에 비해 힘과 체력이 약하기 때문에 월등히 적은 
품삯을 받고 잡일을 한다.
 그런 아이들이 인력시장에는 무척 많이 나와 있다. 솜씨
있는 벌목공을 구하기는 힘들지만 잡일꾼들은 지척에 널
려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핀들의 머리가 부산하게 돌아
갔다.
 '애들을 쓰면 일인당 3실버면 충분하다. 가지정리 따위
야 그 녀석들도 충분히 해낼 테니 잡일꾼들을 고용한다
면……. 어이쿠. 머리가 무척 복잡하군.'
 핀들의 표정변화를 보고 있던 알리시아가 재빨리 계산해
주었다.
 "벌목공 10명의 품삯이 60실버. 그들이 하루에 벨 수있
는 나무가 100그루에요. 그렇다면 300그루를 베기 위해
서는 180실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레온님을 고용하면
잡일꾼 10명만 고용하면 되요. 거기에 필요한 경비가 30
~40길버 정도 들겠군요. 그렇다면 레온님께 얼마를 지불
해야 하는지 간략하게 나오지 않나요?"
 남은 계산은 핀들의 머리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모든 일
을 도맡아 하는 레온에게 140~150실버를 줘야 한다는 결
론이 나온다. 계산해 보던 핀들이 입을 딱 벌렸다.
 한 사람에게 지급하는 품삯치고는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
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론은 이미 나와 있었다. 레온이
없다면 어제와 같은 작업효율을 기대할 수 없다.
 "좋습니다. 저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1골드 30실버를 
드리겠습니다. 중식을 제공해 드리니 그 정도는 이해해
주십시오."
 "잡일꾼들도 중식을 제공하나요?"
 "그,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알리시아가 화사하게 웃으며 결론을 내렸다.
 "그들에게도 중식을 제공해 주세요. 그럼 조건을 승낙
하겠어요."
 잠시 고민하던 핀들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300그루의 나무를 베려면 180실버의 경비가 소요된다.
레온을 고용하는 것이 월등히 이득이었기 때문에 승낙하
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럼 잡일꾼 10명을 고용해거 저쪽 건물 끝으로 가세
요. 거기에 레온님이 기다리고 있답니다."
 "알겠습니다. 금방 가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핀들이 잡일꾼을 구하기 위해 주위를 두
리번거렸다.

 협상결과를 전해들은 레온이 입을 딱 벌렸다.
 "130실버라면 어제 번 품삯의 두 배에 가깝군요."
 "레온님에겐 충분히 그만한 돈을 받을 자격이 있어요.
세상에 어느 누가 하루에 300그루의 나무를 벨 수 있겠어
요."
 "아무튼 협상능력이 대단하시군요. 어제 보니 핀들이라
는 사람 그리 만만치 않아 보이던데."
 그 말에 알리시아가 싱긋 웃으며 응수했다.
 "그보다는 레온님의 능력이 더 대단해요. 저는 지금까지
300그루의 나무를 베었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시립도서관에 볼 만한 책이 정말 많
더군요."
 "그럼 저녁때 뵙겠습니다."
 레온의 인사를 받으며 알리시아가 걸음을 옮겼다. 이젠
도서관에 가서 책과 씨름할 시간이었다.
 핀들은 금세 잡일꾼 10명을 구해서 건물 모퉁이로 왔다.
마차 안에는 비쩍 마른 소년 10명이 정글도를 움켜쥐고
대기하고 있었다. 레온이 올라타자 마차는 어제의 작업
장을 향해 쏜살같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드슨
과 인부들은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눈이 빠져
라 레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알리시아는 도서관에서 책일 읽는데 여념이 없었
다. 페이류트 시에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도서관을 운영
하고 있다.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도서
관을 방문할 수 있다.
 그러나 도서관에 올 만한 사람은 엄격히 한정되어 있다.
귀족이나 돈 많은 상ㅇ니이 아니면 글을 알지 못하기 때문
이다. 
 페이류트 시립도서관은 상당히 한산한 편이었다. 얼마되
지 않는 귀족만 이용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알리
시아는 정규 교육과정을 모두 이수한 왕족 출신이다. 근
본적으로 아르카디아와 트루베니아는 동일한 활자를 쓰니
책을 읽지 못할 이유가 없다.
 도서관에 자리를 잡은 알리시아는 하루 종일 책을 파묻
혀 지냈다. 그녀가 중점적으로 파고든 책은 아르카디아에
선재한 여러 왕국의 역사와 풍물에 관해서였다. 모험가들
의 여행기 역시 그녀에게 많은 지식을 전해 주었다.
 '역시 대단하군. 트루베니아가 오크 치하에서 신음하는
동안 아르카디아는 비약적인 발전을 했어.'
 사실 아르카디아의 실상은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
다. 아르카디아 사람들이 거의 방문하지 않는데다 간혹
가다 방문하는 기사들은 아무런 정보도 전해 주지 않았다.
 말 그대로 철저히 차단되어 있어 정보를 얻기 어려웠는
데, 막상 아르카디아에 도착해 보니 정보 얻기가 무척 쉬
운 편이었다. 그러나 책을 통해 정보를 얻어나가는 알리
시아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아르카디아에서는 트루베니아를 식민지 정도로만 보고
있어. 그 때문에 두 대륙의 교류를 철저히 차단하는 거
야.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르카디아의 경제는 최근
100년 사이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그것이 트루베니아에
서 수탈한 공물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정말 많은
것을 시사한다. 앞으로도 트루베니아가 계속 식민지 상태
로 머물러야만 아르카디아가 계속해서 이득을 취할 수 있
다는 사실을…….
 '이 사실을 트루베니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상당히
파장이 클 텐데…….'
 하지만 이처럼 철저히 차단해 둔 상태에서 지금의 현실
이 트루베니아에 알려질 가능성은 적었다.
 그 외에도 그녀는 아르카디아 각 왕국의 문화나 관습을 
공부해 나갔다. 그녀가 도서관에 파묻힌 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알리시아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책에서 얻는 지식이라 단편적이었지만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창 밖을 내다본 그녀가 한
숨을 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알리시아가 읽던 책을 서가에 꽂아 넣었다. 오늘도 책에
파묻혀 지내다 보니 점심을 걸렀다. 저녁이라도 챙겨 먹
어야만 버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그녀는 망설임 없
이 몸을 일으켰다.
 그때 그녀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시간데로 일하는 도
서관 사서였다. 2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금발 사내였
는데 꽤나 잘 생긴 편이었다. 눈가에 색기가 역력한 것을
보니 어지간히 바람둥이인 모양이었다.
 "이제 들어가시나 보죠?"
 그녀가 웃는 낯으로 목례를 했다.
 "네. 이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네요."
 나무랄 데 없는 아르카디아 억양이었다. 하지만 사서는
 그녀가 트루베니아 출신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처
음 그녀가 도서관을 방문했을 때부터 보아왔기 때문이다.
 "정말 말투를 빨리 바구시는군요. 트루베니아 출신들은
말투를 바꾸기가 쉽지 않은데……."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요?"
 그 말에 사서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참 그러고 보니 인사도 나누지 않았군요. 제 이름은 한
스랍니다. 남쪽의 렌달 국가연합 출신이죠."
 "알리시아라고 불러주세요."
 "예전에 안면을 익혔는데 이제야 겨우 인사를 했군요.
괜찮으시다면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어떠세요? 저
도 마침 퇴근하려던 참이었거든요." 
 그 말에 알리시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뻔히 보이는 수작이로군.'
 정중히 거절하려고 했던 그녀가 잠시 멈칫했다.
 '가만, 이자를 통해 아르카디아의 정보를 조금 더 알아
볼까?'
 아무래도 책에서 얻은 지식은 죽은 지식이라고 봐야 한
다. 도서관 사서라면 아르카디아에 대한 지식이 풍부할
것이 틀림없다. 게다가 타 지역 출신이라 하지 않았던가?
머리를 굴려본 알리시아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야 저야 감사하죠."
 한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정리하고 나오겠습니다."

 
 레온은 오늘도 열심히 나무를 베고 있었다. 마나를 불어
넣어 내려찍자 아름드리 전나무가 맥없이 쓰러졌다. 그러
자 대기하고 있던 소년들이 달라붙었다.
 이미 이력이 붙었는지 소년들은 칼과 조그만 도끼를 이
용해 능숙하게 가지를 쳐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온
이 손을 들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이것으로 오늘 일이 모두 끝났군."
 지금 쓰러뜨린 나무를 끝으로 오늘의 할당량인 300그루
가 모두 해결되었다. 옆에서 작업 현장을 관리하던 핀들
이 다가왔다.
 "수고 많았네. 자네 나무 베는 솜씨는 정말 일품이야.
내일도 나와 줄 수 있나?"
 레온이 가세하고 나서 작업효율이 월등히 높아졌기에
핀들이 기대 어린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러나 레온의 대
답은 무뚝뚝했다.
 "모르겠소. 고용주의 의향을 들어봐야 할 것 같소."
 "그러지 말고 우리 벌목장과 장기계약을 맺는 것은 어
떤가? 자네만 승날한다면 우리 벌목장에서 해약금을 대신
지급해 줄 의향이 있네."
 핀들의 말인즉슨, 현 고용주와의 계약관계를 해지하고
자신이 일하는 벌목장과 장기계약을 맺자는 뜻이었다.
 계약해지에 들어가는 돈을 대시 지급한다고 나서는 것
을 보아 레온의 능력을 눈여겨 본 모양이었다. 그러나 레
온으로서는 그 제의에 응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럴 수는 없소. 계약은 고귀한 것이오. 그렇게 쉽게
계약을 해지할 순 없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난 이미 아르헨 남작님께 승
인을 받아 놓은 상태네. 자네만 응낙한다면 내가 전적으
로 알아서 처리하겠네."
 끈덕지게 달라붙는 핀들의 태도에 레온은 짜증이 났다.
 "한 번 생각해 보겠소. 하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마시
오."
 "알겠네. 그럼 오늘의 보수를 지급하겠네. 1골드 30실
버, 여기 있네."
 래온은 핀들이 내민 품삯을 받아들었다. 금화 하나와 은
화 여러 개를 품속에 집어넣은 레온이 마차를 향해 다가
갔다.
 뒤에서는 잡일꾼으로 고용된 소년들이 품삯을 받아 챙기
고 있었다. 마차에 올라탄 레온이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래도 아르카디아 사람들은 한 번 맺은 계약내용은
철저히 지키는군.'
 레온이 핀들과 계약을 맺고 일한 지 벌써 보름이 지났
다. 그 기간 동안 핀들은 계약한 금액을 군소리 한마디 없
이 꼬박꼬박 지급했다.
 더 주지도, 덜 주지도 않았다. 그 점은 트루베니아와 조
금 차이가 있었다.
 트루베니아에서는 계약내용에 상관없이 돈을 덜 지불하
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인부들이 합심해서 계약서에 적힌
내용보다 돈을 더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고용주
가 일처리가 깔끔하지 않다고 트집을 잡아 품삯을 깎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벌목장에서 일하며 레온은 그런 경우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일단 계약을 맺으면 인부들은 군소리 없이
할당량을 채웠다. 고용준느 철저히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
대로 품삯을 지불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아르카디아가 훨씬 낫군. 월등히
체계적이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작업장을 정리한 소년들이
하나둘 마차에 올라탔다. 거리가 워낙 멀어서 마차를 타
지 않고는 시내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레온은 곁눈질로 소년들의 얼굴을 살폈다. 비쩍 말라 있
었지만 소년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열심히 일해
서 하루 품삯을 받은 만큼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아이들에게도 정확한 품삯을 지불하는군. 이 점은 트루
베니아에서 배워야 할 것 같아.'
 트루베니아에서는 아이들 품삯은 거의 떼먹는 것이 관행
이다. 뼈 빠지게 일하고도 한 푼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온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마차의 벽에 등을 묻었다.
두 시간 정도만 달리면 인력시장이 있는 시내로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달리는 사이 날이 저물었다. 레온과 소년들은 해가 완전
히 지고 나서야 인력시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고 많았네. 내일 보세."
 "알겠소."
 살짝 고개를 끄덕인 레온이 지체 없이 숙소 쪽으로 걸어
갔다.
 그런데 레온을 노려보는 일단의 그림자들이 있었다. 그
들 중 한 명의 얼굴이 어딘가 낯익었다.
 바로 허드슨이었다. 첫날 레온 덕택에 편하게 일하고 많
은 품삯을 챙긴 그가 건물 그늘에 숨어 레온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내들은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게 생
긴 자들이었다. 하나같이 얼굴에 흉터가 나 있었고, 인상
이 험악한 것을 보니 평범한 직종에서 일하는 자들은 아
니었다. 그들 중 한쪽 눈이 일그러진 장년 사내가 허드슨
에게 물었다.
 "저놈인가?"
 허드슨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렇습니다. 알아본 결과 아르헨 벌목장과 계약을 맺고
하루 1골드 이상을 받고 있다고 하더군요. 보름가량 일했
으니 최소한 15골드 이상은 소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15골드라면 제법 쏠쏠하군."
 애꾸 사내가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드슨이
비굴하게 웃으며 굽실거렸다.
 "헤헤. 좋은 정보를 알려 드렸으니 제게도 돌아오는 몫
이……."
 그 말에 애꾸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허드슨을 쳐다보
았다.
 "정보료로 1골드 주지. 물론 15골드 이상 들어왔을 경우
에만……."
 "어이쿠, 감사합니다요."
 허드슨의 얼굴에는 만족한단느 빛이 역력했다. 정보 하
나를 제공해 주는 것만으로 1골드를 챙길 수 있다면 정말
로 수지맞는 장사였다.
 '동료를 팔아먹는 버러지 같은 놈.'
 못마땅하다는 듯 허드슨을 훑어본 애꾸 사내가 뒤를 돌
아보았다. 네 명의 사내들이 우두둑 주먹 마디를 꺾고 있
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그 말에 사내 두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의 손에는 묵
직해 보이는 블랙잭(Black jack)이 들려 있었다. 양말에다
돌이나 금속 부스러기를 넣어 만든 기초 병기였다.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을 보니 모래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이 같은 블랙잭은 피를 보지 않고 상대를 기절시킬 수 있
는 가장 효율적인 무기였다.
 애꾸눈 사내가 그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순식간에 기절시킨 뒤 재빨리 털어서 도망쳐야 한다.
순찰병들이 오기 전에 떠야 하니 서둘러라."
 "알겠습니다."
 블랙잭을 옷 속에 감춰 넣은 사내들이 아무 일 없다는
듯 걸어갔다. 그들의 목표는 멀찍이서 걸어오고 있는 레
온이었다.

 레온은 다가오는 사내들이 자신에게 좋지 않은 뜻을 품
고 있음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이미 건물 모퉁이에 여섯
명이 모여 뭔가 모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레온
이었다.
 그의 기척을 속이고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들의 목적은 굳이 머리를 굴려보지 않아도
뻔했다.
 레온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십중팔구 오늘 받은 품삯을 노리고 있을 터, 여기에도
쓰레기 같은 놈들이 많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온의 얼굴에는 전혀 감정변화가
없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걸어가는 레온. 마침내 그와
두 사내가 교차했다.
 레온이 지나간 순간 사내들이 품속에서 블랙잭을 꺼내 들
고는 망설임 없이 휘둘렀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은
밀한 암습이었다. 블랙잭이 정확히 레온의 뒤통수에 꽂혔
다.
 "헉!"
 사내들은 몹시 놀랐다. 정확히 블랙잭이 상대의 뒷통수를
때렸는데 손에 아무런 감각이 전해지지 않은 것이다. 황당
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둘의 시야에 싸늘한 표정의 레온
이 들어왔다. 어느새 레온이 사내들의 뒤로 돌아가 있었다.
 "굳이 이유를 물어볼 필요가 없겠지?"
 싸늘한 일성과 함께 사내 한 명이 허공에 떠올랐다.
 쫘악!
 손가락을 활짝 편 레온의 손바닥이 사내의 따귀를 강타했
다.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사내가 쿵하고 벽에 처박혔다.
맥없이 늘어진 것을 보아 곧바로 기절한 것 같았다. 홀로
남은 사내의 안색이 확 변했다.
 "이 자식이?"
 손에 든 블랙잭을 휘두르려는 순간 안면에 강력한 타격이
가해졌다. 손바닥이 날아오는 기미도 느끼지 못했기에 사
내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어, 언제?"
 허공에 떠올랐다가 저만큼 나가떨어진 사내의 얼굴은 어
느새 찐빵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부들부들 경련하는
사내의 몸이 축 늘어졌다. 강력한 타격으로 인해 의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싸늘한 미소르 거두지 않은 채 레온이 몸을 돌렸다.
 "그럼 나머지를 정리하러 가볼까?"
 건물 모퉁이 쪽으로 접근하자 세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
러냈다. 하나같이 손에 시퍼렇게 날이 선 대거가 들려 있
었다. 애꾸눈 사내와 두 명의 직속 수하였다. 레온의 아래
위를 훑어본 그가 탄성을 토했다.
 "덩치만큼이나 힘이 좋군. 두 명을 대번에 제압하다
니……. 하지만 네놈은 운이 없었다. 순순히 기절했더라면
몸에 칼자국이 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야."
 레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어깨에 걸
친 그레이트 엑스를 꺼내 들었을 뿐이다.
 쿵! 
 육중한 도끼머리에 부딪히자 땅바닥이 푹 패여 들어갔다.
 "긴말 할 필요가 없겠지? 제압한 뒤 물어보면 되니 말이
야."
 애꾸눈 사내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거를  
든 도적들 앞에서 그레이트 엑스를 빼어들다니……. 상식
적으로 그레이트 엑스는 중장갑을 걸친 보병이나 기사를 
대상으로 사용하는 무기이다. 빠르고 날렵한 도적들을 상
대로 쓸 만한 무기가 절대 아니었다.
 "멍청한 놈. 특별히 죽이지는 않은마."
 싸늘한 일성과 함께 사내들이 비호처럼 달려들었다. 정
면에는 애꾸눈 사내가, 좌우로 나머지 사내들이 절묘하게
방위를 잡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레온은 무표정하게 애꾸
눈 사내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끝났군.'
 애꾸눈 사내는 공격의 성공을 확신했다. 자신이 도끼를 
피하거나 막는 순간 수하들의 대거가 덩치의 양 옆구리를
파고들 것이다. 문제는 상대가 들고 있는 그레이트 엑스
였다.
 '막기는 힘드니 부득이 피해야겠군.' 
 하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일 뿐이었다.
 둔탁한 음향이 두 번 울려 퍼지는 순간, 상황은 말끔하
게 종료되었다. 둔탁한 도끼가 살짝 흔들렸던  것뿐인데
어느새 양옆에서 달려들던 사내들이 피를 뿌리며 훨훨 날
아가고 있었다. 팔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인 것을 보아 완
전히 부러진 것 같았다.
 "헉!"
 안색이 변한 애꾸눈 사내가 급히 회피동작을 취했지만 역
부족이었다. 거무튀튀한 도끼가 어느새 자신의 얼굴 앞에
다가와 있었다.
 퍽!
 둔탁한 음향과 함께 애꾸눈 사내의 눈이 풀렸다. 머리가 
깨졌는지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도끼날이 아니
라 등에 부딪혔기에 애꾸눈 사내는 용케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길게 뻗어버린 세 명의 도적을 레온이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멍청한 놈들 노릴 사람을 노려야지.'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허드슨이 찢어져라 눈을 부릅
떴다. 그가 불러들인 사내들은 이곳 암흑가에서 소문이 자
자한 불량배들이다.
 제각기 사람 한두 명씩 죽여본 적이 있는 노련한 자들인데
레온 하나를 당해내지 못하고 모두 뻗어버린 것이다. 그것
도 승부가 길게 가지도 않았다. 일인일격. 단 한 방에 모두
기절한 것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거렸다.
 '내, 내가 사람을 잘못 건드렸군.'
 허드슨이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
났다. 레온이 안 보이는 거리에 도착하자 그는 걸음아 나
살려라, 도주하기 시작했다.

 레온이 손을 뻗어 늘어진 애꾼눈 사내를 집어 들었다.
목적이야 뻔했지만 그래도 정확한 사실을 알아낼 필요는 
있었다. 일단 이놈들을 사주한 자가 누군지 알아내야 했다.
 애꾸눈 사내는 도끼에 박치기를 한 충격으로 아직까지 정
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울
려 퍼졌다.
 삐이이익--!
 고개를 돌리자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지나가다가 상황을 목격한 순찰병들인 것 같았다.
레온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떠올랐다.
 "곤란하군. 심문하지 못했지만 어쩔 수 없지."
 미련 없이 애꾸눈 사내를 바닥에 던져 버린 레온이 몸을 
날렸다. 신법을 발휘했기에 그의 몸은 금세 그곳에서 사
라져 버렸다.
 결국 그 자리에 도착한 순찰병이 본 것은 게게 풀린 눈
으로 게거품을 물고 있는 다섯 명의 사내들뿐이었다.

 그 시각 알리시아는 도서관 사서와 함께 식사를 마친 뒤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노스랜드에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그때는 대
단했지요."
 "호호호. 그러셨군요."
 알리시아는 눈웃음을 지어가며 맞장구를 쳤다. 물론 사
내의 경험단은 태반이 허풍이었지만 그 중에서 건질 것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도서관 임시 사서인 한스는 생각보다
여행 경험이 많은 자였다.
 그는 페이류트에서 남쪽으로 보름가량 가면 만날 수 있는
렌달 국가연합 출신이다. 하지만 북부의 노스우드까지 가
봤을 정도로 여행광이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알리시아는 많은 정보를 챙길 수
있었다.
 살짝 맞장구를 쳐주면 알아서 각 나라의 경험담을 주절주
절 털어놓으니 실속 있는 장사일 수밖에 없다.
 물론 알리시아는 한스의 목적을 잘 알고 있었다. 이따금
자신을 쳐다보며 음흉하게 흘리는 웃음 속에는 끈끈한 욕
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대할 때마다 코웃음을 
치는 알리사아였다.
 '아르카디아에서는 이런 식으로 여자를 꼬시나 보죠? 하
지만 잘못 짚었어요.'
 한 나라의 왕녀로서 전문교육을 받고 연합군대의 참모까
지 맡아본 알리시아였다. 한스가 요리하기엔 너무 힘든 먹
잇감일 수밖에 없다.
 예상대로 한스는 짜증이 있는 대로 나 있었다.
 '미꾸라지가 따로 없군. 걸릴 듯 걸릴 듯하면서도 감쪽
같이 빠져나가는데? 결코 만만치 않은 여자야.'
 여행을 즐기며 한스는 각지의 여인들을 많이 섭렵해 보았
다. 통상적으로 여인들은 자유롭게 여행 다니기 힘든 처지
이다. 제아무리 치안이 잘 유지되는 아르카디아라도 여인
의 몸으로 여행을 생각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 여인들에게 허풍을 조금 섞은 경험담을 들려주면 자
진해서 품에 안겨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눈앞에 트루베니아 출신 여인만큼은 예외였다. 지
금껏 그가 알아낸 것은 오직 알리시아라는 이름뿐이었다.
 한스의 눈동자에 슬그머니 오기가 떠올랐다.
 '젠장. 그냥 힘으로 덮쳐버릴까?'
 트루베니아 출신이라니까 뒤탈도 없을 것이다. 한스가 그
런 마음을 가질 정도로 알리시아는 아름다웠다. 한스가 머
리를 굴리며 궁리하는 사이, 알리시아가 마음을 정했다.
 '이제 알아낼 것은 다 알아냈어. 게다가 눈빛을 보니 좋
지 않은 뜻을 품고 있는 것 같고…….'
 마음을 정한 알리시아가 살짝 목례를 했다.
 "이만 일어나야 할 것 같네요. 숙소에 들어갈 시간이 되
었어요."
 그 말에 한스의 눈이 커졌다. 비싼 저녁까지 사주면서 공
을 들였는데 정작 목표물이 빠져 나가려는 것이다. 그렇다
고 해서 순순히 물러날 한스가 아니었다.
 "숙소까지 에스코트 해 드리겠습니다. 숙녀 혼자서 밤길
을 걷다 보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요. 이게 아르카
디아의 예의입니다."
 거절하려던 알리시아가 멈칫했다. 그것가지 받아들이지 
않으면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게다가 그녀에겐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시다면 부탁드리겠어요."
 "걱정 마십시오. 이래 뵈도 불량배 한둘 정도는 가볍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알리시아가 식당 밖으로 나서자 한스가 찰거리처럼 달
라붙었다, 그가 팔짱을 껴달라는 듯 팔꿈치를 내밀었지
만 알리시아는 모른 척 하며 계속 걸었다. 물론 한스는 
옆에서 계속 작업을 걸어왔다. 
 "그러고 보니 나이도 모르는군요. 어떻게 되시는지 알
려 주시면 안 될까요?"
 "호호호, 트루베니아에서는 숙녀의 나이를 묻는 것이
무척 무례한 일이랍니다."
 "하, 하지만 여기는 아르카디아인데……."
 "그래도 내키지 않네요. 아르카디아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스는 결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
다.
 "그렇다면 성이라도 알 수 있겠습니까?"
 "성은 없어요. 성은 귀족만이 가지는 것 아닌가요?"
 알리시아는 거짓말을 요령 있게 섞어가며 한스가 퍼붓
는 질문을 은근슬쩍 회피했다.
 좀처럼 건지는 것이 없자 한스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걸 그냥 확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서 덮쳐 버려?'
 물론 그런 표정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알리시아가 아니
었다.
 '큰일이로군. 숙소로 가기 전에 우격다짐으로 나오면
어떻게 하지?'
 알리시아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자신은 트루베니아 출신이다.
 이곳 사람들의 성정을 보아 분란이 일어나면 자신의 편
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순찰병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자신보다는 한스의 증언을
더욱 신뢰할 터, 그녀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시간을 너무 끌었어, 조금 더 일찍 일어났어야 하는 건
데…….'
 때마침 한스가 우격다짐으로 팔짱을 껴왔다. 거친 음성
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좋은 말로 할 때 순순히 말을 들어. 일단 저쪽 골목으
로 가자."
 그때 알리시아의 시야에 든든한 구원병이 모습을 드러
냈다. 불량배들과 푸닥거리를 마친 레온이 때마침 골목으
로 들어선 것이다.
 알리시아는 머뭇거림 없이 고함을 질렀다.
 "여보, 여기에요. 여기."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레온의 눈이 커졌다. 알리
시아가 웬 사내와 팔짱을 끼고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보다고 놀란 것은 알리시아가 자신을 부른 호칭이었
다.
 '여보?'
 레온이 황당하다는 듯 입을 딱 벌리고 있는데, 알리시아
가 살짝 윙크를 했다. 그 모습에 레온은 뭔가 곡절이 있다
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군.'
 레온이 걸음을 재촉해서 알리시아에게 다가갔다.


 한스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노리고 있던 여인
의 남편과, 그것도 결정적인 순간에 맞닥뜨리다니…….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는 없다. 게다가 덩치가 장난
이 아니다.
 '젠장맞을, 유뷰녀였단 말인가?'
 덩치 좋은 사내가 다가와 한스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깡패들과 싸우느라 이리저리 핏자국이 묻어 있었기에 레
온의 풍모는 사뭇 괴기스러웠다. 게다가 엄청난 크기의
크레이트 엑스를 어깨에 메고 있어서 위압감이 만만치 않
았다.
 '이크!'
 한스가 재빨리 팔짱을 풀었다. 괜히 의심받을 짓을 했다
가는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알리시아가 살
포시 웃으며 레온에게 말을 걸었다. 한쪽 눈을 계속 찡긋
거리면서…….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레온이 지체 없이 맞장구를 쳤
다.
 "오늘 받은 품삯을 노리고 건달들이 다섯 명씩이나 달려
들지 뭐요. 그래서 몽땅 때려눕히고 온다고 조금 늦었소.
그런데 그 사람은 누구요?"
 "아, 제가 다니는 도서관 사서님이에요. 친절하게 오늘
저녁을 대접해 주시더라고요. 게다가 고맙게도 숙소까지
에스코트를 해주셔서……."
 그 말에 레온이 한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부러 인상을
험악하게 구겨가며 말이다.
 "아내를 돌봐주셔서 감사하오."
 말을 마친 레온이 그레이트 엑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쿵 하며 바닥이 푹 패여 들어가자 한스의 얼굴이 창백해
졌다. 덩치를 보나 힘을 보나 도저히 개길 만한 상황이 아
니었다. 
 "하하. 제, 제가 뭐 하, 한 것이 있다고요? 저, 저는 이
만……." 
 몸을 돌린 한스가 꽁지가 빠져라 줄행랑을 쳤다. 그 모습
을 알리시아가 한숨을 내쉬며 쳐다보았다. 하마터면 몹쓸
꼴을 당할 뻔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가슴이 떨려왔다.
 '이젠부턴 조심해야겠어.'
 레온의 태도는 어느덧 판이하게 변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곳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저 사내와 저녁식사를 같
이 했어요. 그런데 저자가 갑자기……."
 뒷말은 듣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었다. 레온의 눈동자에
싸늘한 살기가 돋아났다.
 "그런 줄 알았다면 단단히 혼쭐을 내줄 걸 그랬나 봅니
다."
 "괜찮아요. 소란은 원치 않거든요. 그런데 웬 핏자국이
죠?"
 "조금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품삯을 노리고 하루
살이 다섯 마리가 덤벼들더군요. 그놈들 피가 튀어 묻은
모양입니다."
 레온의 무위를 떠올려 본 알리시아가 배시시 미소를 지
었다.
 "상대를 잘못 골랐군요. 하필이면 레온님을 노리다
니……."
 그녀의 관점에서 레온은 불량배 수백 명이 노리더라도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는 강자였다. 소드 마시터가 낀 헬
프레인 제국의 기사 20명을 모조리 때려눕히는데 채 10분
도 걸리지 않았던 레온이 아니던가?
 그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던 그녀였기에 레온의 능력에 의
심을 품을 필요가 없다.
 "일단은 숙소로 들어가도록 하죠. 상의할 일도 있고."
 "알겠습니다."
 
 알리시아가 욕실에서 씻는 동안 레온은 여관에 딸린 식당
에서 밥을 먹었다. 빵과 치즈뿐이었지만 비교적 저렴한 가
격에 배불리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나가지 않은 
것이다.
 식사를 마친 레온이 알리시아와 마주앉았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알리시아였다.
 "이제 더 이상 페이류트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요. 여비도 충분히 모였고 이곳 사정도 대충 파악했어요."
 듣고 있던 레온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부터 벌목장에 나갈 필요가 없겠군요."
 "그렇죠. 어차피 여관숙박비도 오늘까지니까 내일 아침에
이곳을 떠나기로 해요."
 "알겠습니다. 그럼 출입국관리소 옆 역사에서 마차를 타고
가실 겁니까?"
 알리시아가 조용히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제가 잡은 경로는 남쪽의 국경을 통과해 렌탈
국가연합을 거쳐 가는 길이에요. 아르카디아의 여행자들은
대체로 그곳을 경유해서 가죠. 마찻길로 곧바로 가면 사막
지대를 만나기 때문에 준비해야 할 것도 많을뿐더러 여행
이 단조로울 우려가 있어요. 게다가 사막에는 트루베니아 
이주민들을 노리는 마적단도 많이 출몰한다고 해요."
 그 말에 레온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트루베니아 출신 이주민들을 정말 철저히 벗겨 먹는군요.
목적지인 해당 왕국에 가면 거의 빈털터리가 되어 버리겠
습니다."
 "의도적인 아르카디아의 전략이죠. 트루베니아 출신 귀족
들은 특권의식에 젖어 있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기를 죽
여야 순순히 지시에 따르니까요."
 "만약 이 사실을 트루베니아에 알려진다면 아무도 이주하
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이죠. 그러니까 그토록 기를 쓰고 정보를 통제하는
거예요."
 알리시아가 종이 위에 대략 그려 놓은 아르카디아 전도에
가야 할 경로를 펜으로 그려 넣었다.
 "우린 이렇게 해서 크로센 제국으로 갈 거예요. 그렇게 할
경우 따라붙는 감시의 눈길도 피할 수 있어요. 일단 렌달
국가연합으로 가면 그때부턴 아르카디아 사람으로 행세할
생각이니까 명심하세요."
 그 말에 레온이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임시 신분증을 제시하면 바로 탄로 나지 않습니까?"
 그 말에 알리사아가 살포시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르카디아에서 신분증이 필요한 경우는 장사를 하거나
정착할 때분이에요. 여행 다닐 때에는 신분증 검사를 거의
하지 않죠. 이 사실은 한스를 통해 알아낸 거예요."
 "그렇군요."
 레온이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자신보다는 알리시
아가 훨씬 영리하니 그녀의 계획에 따르는 것이 현명한 판
단이다. 알리시아가 지도를 접어 넣으며 당부했다.
 "오늘은 일찍 주무시도록 하세요. 내일 아친 일찍 여관을
떠나 곧바로 국경을 넘을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 먼저 잠자리에 들겠어요. 한스란 작자와 입씨름
을 했더니 몹시 피곤하군요."
 알리시아가 침대로 올라갔다. 그 모습을 레온이 지켜보고
있었다. 뭔가를 고민하는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다.
 '어떻게 하지? 지금 말을 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던 레온이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내일 국
경을 통과한 후에 상황을 봐서 본심을 털어놓기로 마음 먹
은 것이다. 물론 알리시아에게 밝힐 내용이 뭔지는 오로지
레온만이 알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난 둘은 지체 없이 짐을 꾸렸다. 청소를 
하다 그 모습을 본 여관 주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더 묵지 않고 갈 거요?"
 알리시아가 살포시 웃으며 목례를 했다.
 "예,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그녀의 깍듯한 인사에 할머니가 다 빠진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흘흘, 신세라고 할 것까지야 있나? 아무튼 딴 곳에 가서
도 잘 살기 바라네. 젊은 네외의 금슬이 정말 보기 좋더군.
내 그래서 여관비도 특별히 싸게 해 준 거야. 흘흘."
 알리시아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지나갔다.
 '내외? 금슬?'
 고개를 돌리자 레온 역시 낭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
금까지 자신과 알리시아를 부부로 알고 있었단 말인가? 어
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마주보고 있던 둘이 피식 웃었다.
 "그럼 저흰 떠나보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잘들 가게. 가서 아들딸 쑥쑥 낳아 잘 기르고……."
 "네? 네."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한 알리시아가 재빨리 여관을 나
섰다. 부쩍 늘어난 짐을 짊어진 레온이 급히 뒤를 따랐다.

 "주인 할머니가 우릴 부부로 봤나 보네요. 푸훗!"
 실소를 짓는 알리시아를 보며 레온이 마주 웃어주었다.
 "그러게요. 아까는 조금 난감하더군요."
 알리시아의 입가에서는 웃음기가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둘의 겉모습을 상상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단 레온은 키가 2마터가 넘어가는 거구이다. 몸무게가
거의 130kg에 육박한다. 반면 알리사아는 160이 조금 넘
는 체구를 가졌다. 체중이 채 50kg이 나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알리시아와 레온이 나란히 서 있으면 체
격 차이가 정말 극명했다. 덩치는 차지하고서라도 알리시
아의 키가 겨우 레온의 가슴팍에 와 닿으니 외견상 정말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 아닐 수 없다.
 그 모습을 상상해보던 알리시아가 실소를 터뜨렸다.
 '풋! 한 마디로 고목나무에 매미가 붙은 격이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알리시아가 앞서 걸어갔다. 무덤
덤한 표정을 지은 레온이 재빨리 뒤를 따랐다.

 그들이 향한 곳은 이곳의 상설시장이었다. 주로 현지 주
민들이 애용하는 시장은 몹시도 시끌벅적했다. 알리시아
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사기 시작했
다. 이것저것 물건을 고르고 가격을 흥정하는 모습이 현
지인 뺨치는 수준이었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레온은 
무척 놀랐다.
 불과 보름 사이에 알리시아가 완벽한 아르카디아 억양을
구사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아르카디아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정말 대단하군.'
 물건을 파는 상인들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게다가 에
누리하는 기술도 탁월했다. 알리시아가 워낙 가격을 많이
후려쳤기 때문에 상인들이 울상을 지었다.
 "거참. 예쁘장한 숙녀분이 정말로 살림꾼이로군. 좋아요.
그렇게 가져기시오."
 물건을 종이봉지에 담아 건네준 상인이 알리사아의 뒤에
멀뚱이 서 있는 레온을 쳐다보았다.
 "아내가 살림을 잘해서 좋겠소. 당신들은 필히 잘 살 것
이오."
 레온의 얼굴이 별안간 홍당무가 되어 버렸다. 난처해진
알리사아가 재빨리 레온을 잡아끌었다.
 "다른 것을 사러 가요."
 시장에서 파는 물품들은 정말로 저렴했다. 거의 반나절
가량 돌아다닌 끝에 둘은 여정에 필요한 물품을 충분히 구
입할 수 있었다. 세심한 성격의 알리시아는 꽤나 꼼꼼히
물건을 구입했다.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았기에 레
온이 또다시 감탄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일단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 같군
요."
 시장 한쪽에는 돈을 받고 대여해 주는 탈의실이 있었다.
알리시아가 큼지막한 종이봉토를 레온에게 내밀었다.
 "이것으로 갈아입으세요. 체격을 고려해서 구입했으니 
잘 맞을 거예요."
 "꼭 갈아입어야 합니까?"
 "국경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갈아빙어야 해요."
 대답을 들은 레온은 두말 하지 않고 탈의실로 걸어갔다.
20쿠퍼를 건네자 탈의실 주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알리시아가 준비한 옷은 단정한 여행복이었다. 회색 계
열의 옷이라 먼지가 탈 우려도 없었다. 지저분한 튜닉을 
벗어버린 레온이 셔츠를 갈아입었다.
 바지는 주머니가 많이 달려 있어서 이것저것 소소한 물
건들을 챙겨 넣는데 편리했다. 마지막으로 사슴가죽으로 
된 부츠를 집어든 레온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어머니인 레오니아가 종종 레온의 부츠를 직접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신 부츠가 특이하다 했더니 아르
카디아 방식이었군."
 옷을 모두 갈아입은 레온이 입고 있던 옷을 둘둘 말아 
손에 쥔 채 탈의실을 나왔다.
 알리시아가 기다리고 있다가 큼지막한 배낭을 내밀었
다. 속에는 오늘 구입한 물품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
었다.
 "지금까지 가지고 다니던 배낭은 버리세요. 장기간 여
행하려면 어깨가 편해야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건 뭐죠?"
 레온이 가리킨 것은 조그마한 배낭이었다.
 "제가 멜 게예요. 레온님 혼자서 짐을 다 들고 다닐 수
없잖아요?"
 "걱정 마시고 이리 주십시오. 힘쓰는 일은 모두 제가 하
기로 했지 않습니까?"
 "괜찮아요. 저도 조금은 들고 다녀야죠."
 그 말에 레온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짐은 제가 모두 들겠습니다. 힘 하나는 자신 있으니 제
게 모두 맡기십시오."
 물끄러미 레온을 쳐다보던 알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저도 웃을 갈아입고 오겠어요."
 

 잠시 후 알리시아는 깔끔한 여행복 차림으로 탈의실을 
나왔다. 긴 머리는 단정하게 묶었고 바지에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레온과 거의 비슷한 차림새였다.
 그녀가 나온 것을 본 레온이 배낭을 돌러맸다. 알리시아
의 배낭을 속에다 구겨 넣었기에 부피가 늘어나 있었다.
 "그럼 가실까요?"
 "그러죠."
 이미 방향을 잡아놓은 듯 알리시아가 앞장서서 걸었다.
레온이 묵묵히 뒤를 따랐다.
  


   4. 렌달 국가연합으로 


 렌달 국가연합으로 통하는 도로에는 수많은 여행자들이
오가고 있었다. 잘 포장된 관도 중앙에는 마차들이 분주
하게 오고갔고 양옆으로 인도가 길게 뻗어 있었다. 그 덕
에 둘은 비교적 편하게 걸을 수 있었다.
 한동안 묵묵히 걷던 레온이 알리시아게게 불쑥 물었다.
 "아까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까?"
 "무슨 말씀이시죠?"
 "여관주인 할머니와 상인이 저와 알리시아님을 부부로 
간주했을 때 말입니다."
 레온의 의문은 당연했다. 여러 번 겪어 보았기 때문에
그는 트루베니아 귀족들의 특권의식과 자존심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왕녀라면 성골 중 성골 귀족이다. 그런 여인
이 평민 출신 용병과 부부로 오인 받았다면 화가 나서 펄
쩍 뛰고도 남을 터였다.
 하지만 알리시아의 반응은 사뭇 뜻밖이었다.
 "그게 뭐 어때서요? 도리어 전 기분이 좋던데요?"
 "네?"
 "레온님처럼 멋진 분의 아내로 보였다면 도리어 제가 영
광이지요. 어차피 저도 이제부터는 평민이에요. 하지만 
레온님은 달라요. 당장 어느 왕국에 가셔도 작위를 받으
실 수 있는 실력이 있는 분이시잖아요."
 "과, 과찬입니다."
 머쓱해진 레온이 쩔쩔맸다. 알리시아가 처연한 눈빛을
재빨리 지우며 고개를 돌렸다.
 "신분이 변했다면 빨리 적응하는 것이 현명해요. 예전의
영광만 기억하고 있다가는 아무것도 못하기 마련이죠."
 레온이 조용히 알리시아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현명하고 사리판단이 분명한 여인이었다. 사실 레
온은 알리시아에 대해 그리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멸망한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 종주국을 찾아간다는
것부터가 예전에 누렸던 부귀영화를 되찾으려는 욕심 아
니던가?
 알리시아는 모르지만 레온은 이미 그녀와 많이 접해 보았
다. 오우거의 육신을 가지고 있던 시절, 블러디 스톰이라
는 신분으로 알리시아와 함께 전쟁터에 나갔었던 레온이었
다.
 당시 알리시아는 레온을 효율적으로 이용해 먹기 위해 여
러 가지 술수를 썼다. 델파이 공작과의 대전사 결투에 나
서여 했고 그녀의 꼬드김에 넘어가 헬프레인 제국과의 전
투에도 참가했다.
 공교롭게도 레온이 원하는 바와 맞아떨어졌기에 둘은 서
로간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이용당한 것이 사실이기에 레온이
알리시아에게 좋은 감정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신분으로 만난 이후 알리시아는 레온에게
여러 가지 색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앞서 걸어가는 알리
시아를 쳐다보며 레온이 생각에 잠겼다.
 '당시의 상황이 그토록 절박했었다는 뜻이지.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해야 할 정도로…….'
 알리시아는 생각보다 장점이 많은 여인이었다. 영리하며
또한 이재에 밝았다. 그리고 사고방식이 자유로워 판이하
게 변한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물론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매력일 뿐이었
다. 여성으로서 알리시아에 대해 레온은 그리 큰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직까지 내 몸 안에서 오우거의 잔재가 완전히 사라지
지 않았나보군. 같은 방을 쓰면서도 별다른 욕망을 느끼지
못하니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리시아는 레온에게 상당히 큰 도움
을 주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무위를 가졌지만 세상
물정에 상당히 어두운 레온이다. 만약 혼자서 아르카디아
에 건너왔다면 상당한 곤란을 겪었으리라. 하지만 알리시
아의 현명함 덕분에 그는 쉽게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다.
만약 앞으로 그가 해야 할 일에 알리시아가 가세한 다면
일이 윌등히 쉬워질 터였다.
 '기회를 봐서 한 번 의향을 물어봐야겠군. 어차피 그녀
에게도 해야 할 일이 있을 테니…….'
 
 둘은 거의 한나절을 걸어서야 남쪽 국경에 도착할 수 있
었다. 대표적인 무역항답게 페이류트 시 외곽에는 성이 지
어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튼튼한 방책과 사방에 깔려 있
는 병사들을 보니 몰래 지나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물론 레온 혼자라면 가능하겠지만 알리시아와 동행한다면
병사들의 눈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레온이 걱정스러운 눈
빛으로 관문을 쳐다보았다.
 "저곳을 지나가실 겁니까?"
 "네. 국경을 통과해야 렌달 국가연합으로 넘어갈 거예요."
 "경비가 꽤나 삼엄해 보이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알리시아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요. 일단 레
온님은 벙어리로 위장하도록 하세요. 경비병 앞에서는 아
무런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이죠."
 "……."
 알리시아가 살짝 눈웃음을 치며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하는 대로 잘 따라주시면 무사히 검문을 통과할 수
있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레온을 쳐다본 알리시아가 관문 앞에 길게
늘어선 줄로 걸어갔다.

 줄은 상당히 길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검문소를 통과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알리시아와 레온은 한 마디 대
화도 나누지 않고 차분히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레온
의 말투에서 트루베니아 출신이라는 사실을 드러날 수도 있
기 때문이다.
 대략 한 시간 정도 기다리자 마침내 차례가 왔다. 꽤나 날
카로워 보이는 인상의 장교 한 명이 레온과 알리시아를 훑
어보았다. 대뜸 반말로 하느 것을 보니 귀족 신분인 것 같
았다.
 "어디로 가는 길인가?"
 알리시아가 살짝 앞으로 나섰다.
 "렌달 국가연합으로 일자리를 찾으러 가는 길이에요."
 놀란 눈으로 레온을 아래위를 훑어본 장교의 시선이 알리
시아에게로 향했다.
 "엄청난 근육질이로군. 일행인가?"
 "제 남편이랍니다. 얼마 전에 결혼한 사이죠."
 그 태연스런 소개에 레온이 적이 놀랐다. 설마 남편으로 
소개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묘한 표정으로 레온과 알리
시아를 번갈아 쳐다보던 장교가 손을 내밀었다.
 "아무튼 좋다. 신분증을 제시하라."
 그 말에 알리시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생생했
기 때문에 도무지 꾸민 표정으로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정확한 아르카디아 억양을 구사했기 때문에 장교는 그들의
정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무슨 신분증을 제시하란 거죠?"
 "관문을 통과하려면 신분증을 제시해야지."
 "지금까지 신분증을 가지고 여행 다닌 적이 없어서…….
죄송하지만 신분증을 집에 놓고 왔답니다."
 고개를 갸웃거린 장교가 의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출신 국가가 어디인가?"
 "북부에 카토 왕궁이에요. 어머니가 남부 출신이라 키가 
별로 크지 않지만요."
 장교의 시선이 레온에게로 향했다.
 "그렇다면 그대의 고향은 어디인가?"
 그러나 레온은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장교가 막 눈을 부
라리려는 순간 알리시아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남편은 말을 잘 못해요. 용병으로 일할 때 동료가 휘두른
메이스에 턱을 맞아 혀를 다쳤거든요. 얼굴 표정이 조금 부
자연스러운 것으 바로 그 때문이에요. 남편의 고향은 펜슬
럿이랍니다. 20살 때까지 살다 그곳을 떠났지요."
 알리시아의 능숙한 답변에도 불구하고 장교는 쉽사리 의심
을 지우지 않았다. 트루베니아의 이주민들이 하선하는 페이
류트 항이다 보니 검문을 철저히 해야 했던 것이다.
 '카토 왕국 사람들은 여간해서는 신분증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나라 자체가 척박해서 워낙 많이 떠돌아다니기 때
문이지. 펜슬럿 사람들은 전통적인 강국이라는 자존심 때
문에 신분증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편이고,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장교는 알리시아에게 연거푸 질문을 퍼부었다. 오랫동안
관문을 지켜왔기 때문에 장교는 아르카디아 전역의 사정
에 대해 해박한 편이었다. 그러나 알리시아는 모든 질문
에 척척 대답했다.
 "남편과는 에너벨에서 만났답니다. 그때 여급생활을 하
고 있었는데 우연히 만나 눈이 맞았지요. 일자리를 찾아
페이류트로 들어왔는데 생각보다 할 만한 일이 없더군요.
한 달가량 벌목 일을 하다가 렌달 국가연합으로 넘어가는
중이에요."
 막힘없는 알리시아의 답변에 마침내 장교가 의심을 완전
히 접어버렸다.
 "그래도 렌달 국가연합에서 장사를 하려면 신분증이 필
요할 텐데?" 
 "그땐 고향에 가서 가지고 오면 되죠. 그런데 장사를 할
가능성의 희박해요. 자본금이 전혀 없으니 뭘 할 수 있겠
어요?"
 고개를 끄덕인 장교가 고개를 돌렸다. 
 "관문을 열어라. 아무런 문제가 없다."
 명령을 받자 병사들이 차단기를 들어올렸다.
 "그럼 좋은 여행하기 바란다."
 "고마워요, 장교님. 어서 가요. 여보."
 살짝 목례를 한 알리시아가 레온의 팔짱을 꼈다. 레온이
당황한 표정으로 끌려갔다. 그 뒷모습을 장교가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만에 그의 말문이 열렸다.
 "거참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로군. 여자 체구가 남자의 3
분지 1도 채 되지 않으니……. 뭐 그거야 내가 상관할 바
는 아니지만."
 
 검문소를 통과한 레온과 알리시안느 렌달 국가연합으로 
가기 위해 바삐 걸었다. 한적한 관도였지만 빈틈없이 포장
되어 있었다. 한동안 머뭇거리던 레온이 어렵게 말문을 열
었다.
 "왜 절 남편으로 소개했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거든요. 통상적으로 부부에겐 그
다지 경계심을 갖지 않아요."
 레온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이채가 떠올랐다.
 "절 펜스럿 사람으로 소개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까?"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책을 읽어보니 펜슬럿 등과 같은
전통적인 강대국 사람들은 신분증을 잘 소지하지 않는 다
고 나와 있었거든요."
 "크로센 제국도 강대국 아닙니까?"
 "크로센 제국 사람들은 조금 달라요. 종주국이라는 위상
때문인지 항상 철두철미하게 서류를 준비해 다닌다고 해
요. 만약 크로센 제국 출신이라 했다면 장교가 분명히 의
심했을 거예요."
 물 흐르듯 유창한 알리사아의 대답에 레온이 탄성을 토했
다. 전문적으로 검문을 담당하는 장교까지 속여 넘길 정도
라니……. 거기에다 아르카디아에 온 뒤 불과 보름도 지나
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언제 이토록 유창한 아르카디
아의 억양을 익혔단 말인가.
 '어디에 데려다 놓더라도 잘 적응할 여인이로군.'
 레온은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
에는 알리시아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고개를 끄
덕인 레온이 관도에서 조금 떨어진 나무를 가리켰다.
 "조금 쉬었다 갈까요?"
 "왜 그러시죠? 별로 피곤하진 않는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대화를 좀 나눴으면 해
서……."
 의아한 눈빛으로 레온을 쳐다보던 알리시아가 순순히 고
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요."
 
 나무그늘 아래 마주앉은 레온이 우선 주위를 살폈다. 누
군가의 귀에 들어가면 곤란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다행
히 근처에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내 감각을 속이고 숨어 있을 만한 자는 없지.'
 고개를 끄덕인 레온이 알리시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살
짝 손을 모은 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현재 그녀의 신세는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진 것이나 다름
없다. 평민 신분으로 전락한데다 트루베니아로 돌아갈 수
도 없는 실정이다. 크로센 제국으로 간다고 해도 환대 받
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르니아 왕실은 그간 아르카디아로 보내는 공물을 계속
해서 줄여왔다. 백성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의도였지만 그 덕에 크로센 제국에 밉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런 상황이라 크로센 제국에 가더라도 실세들을 만날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운이 나쁠 경우 문 앞에서 바로 쫓겨날 수도 있었다. 그
렇게 될 경우 그녀는 평생 동안 평민 신분으로 아르카딩아
에서 살아야 한다. 지금껏 그 문제 때문에 고민해 온 알리
시아인지라 레온의 말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날 도와준다면 크나큰 힘이 될 수 있을 터인데…….
크로센 제국으로 가서 실세들을 만나기도 어렵지 않을 테
고, 하지만 그는 나에게 관심이 전혀 없는 것 같아 보였
어. 넉 달가량이란 한 방을 써 왔어도 눈빛이 항상 담담
하기만 했으니…….'
 게다가 레온은 자신의 신상에 대해 하나도 밝히지 않았
다. 알리시아가 자신이 처해 있느 사정을 모두 말해주었
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대관절 무슨 내용일까?'
 그녀의 귓전으로 레온의 굵직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크로센 제국으로 가시는 일이 시급합니까?"
 뜻밖의 질문에 알리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능하면 빨리 가는 것이 좋죠. 그런데 왜 그러시죠?"
 "혹시 그 전에 제 일을 좀 도와주실 의향이 없습니까?"
 "일이라니요?"
 의아해하는 알리시아를 보며 레온이 속에 있는 말을 털
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저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아르카디아로 건너
왔습니다. 다행히 왕녀님을 만나 이곳까지 순탄하게 오게
되었군요." 
 "목적을 가지고 오셨다고요?"
 알리시아의 얼굴에 묘한 흥분감이 떠올랐다. 이 목석같
은 사내가 드디어 자신의 신상을 밝히려는 것이다. 그러니
긴장이 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무슨 목적인지 알아도 될까요?"
 "저는 스승님의 당부를 이행하기 위해 아르카디아로 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승님께서는 제게 전수해 주신 무예
로 아르카디아의 초인들을 모두 꺾으라고 하셨으니까요."
 그 말에 알리시아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초, 초인아리면 그랜드 마스터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게 대관절 가능한 건가요?"
 레온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이미 어느 정도 이행했습니다. 트루베니아에 존재하는
초인들을 모두 꺾었으니 말입니다. 엘다르 대공, 스패니
아 대공, 쏘이렌의 펠릭스 공작, 헬프레인의 벨로디어스
후작 등 트루베니아의 공인되 초인들은 모두 내 창에 꺾
였습니다."
 레온을 쳐다보는 알리사아의 눈이 어느새 경악으로 물들
어 있었다. 드디어 레온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이다. 그녀
가 덜덜 떨리는 손을 뻔어 레온을 가리켰다.
 "그, 그렇다면 다, 당신이 말로만 들었던 불러디 나이트
란 말인가요?"
 그 말에 레온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알리시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그녀가
떠나올 당시 트루베니아는 블러디 나이트로 인해 무척 떠
들썩했다.
 공인된 3대 초인을 꺾고 새롱누 초인이 등장했으니 입소
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지 베일에 가려진 헬프레인
제국의 상황만이 전해지지 않았을 뿐이다.
 "세상에……."
 알리시아가 필사적으로 떨리는 몸을 진정시켰다. 그 유
명한 블러디 나이트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다. 막연하
게 레온이 그랜드 마스터에 근접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만 설마 소문이 자자한 블러디 나이트일 줄은 꿈에도 생
각하지 못한 그녀였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
의 음성은 아직까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소문에는 피처럼 붉은 갑옷을 입고 활동하신다고 들었
어요."
 그 말에 레온이 손가락을 들어 셔츠에 가려져 있는 마신
갑을 가리켰다.
 "이것이 바로 붉은 갑옷의 정체입니다. 저는 이것을 마
신갑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일종의 마법 갑옷으로 마나
를 주입하면 순식간에 증식해 풀 플레이트 메일(Full Pla
te Mail)로 바뀌죠. 창도 갑옷 속에 숨어 있습니다."
 "정말 놀랍군요. 그럴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녀가 나직이 탄성을 토해냈다. 자신은 지금 엄청난 비
밀을 듣고 있는 것이다. 귓전으로 레온의 음성이 파고들
었다.
 "아무튼 스승님께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초인들을 
꺾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르카디아로 건너오기
로 마음먹은 것이고요."
 "자신은 있나요?"
 "무인들 간의 승부는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깨달
음의 차이로 인해 승부가 순식간에 판가름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저 지금껏 배운 무예와 깨달음을 모조리 발휘해서
상대와 겨룰 뿐이지요."
 눈을 초롱초롱 빛내던 알리시아가 감탄성을 토해냈다.
 "햐! 꼭 이기셨으면 좋겠어요. 트루베니아 출신의 블러디
나이트가 아르카디아의 초인들을 모조리 꺾는다면 얼마나
신날까요? 이거 아르카디아 사람들의 자존심이 많이 상하
겠는걸요?"
 아무래도 알리시아는 아르카디아로 와서 쌓인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녀답지 않게 사소한 일로 흥분하니 말이다.
그러는 사이 그녀가 냉정을 되찾았다. 알리시아의 차분한
음성이 레온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저에게 밝히는 이유가 뭐죠? 아무에
게나 알려서는 안 될 종류의 비밀 같은데?"
 레온이 정색을 하고 알리시아를 쳐다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셨으
면 합니다."
 "제가요? 제가 뭘 어떻게요?"
 "알리시아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스승님의 당부를 이행하
는 것이 한결 편해질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트루베니아
의 초인들을 꺾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습니다.
어떤 자들은 심지어 꽁꽁 숨어서 나오지 않더군요. 펠릭
스 공작이 바로 그랬습니다. 쏘이렌이라는 나라 전체가 
들고 일어나서 그를 보호하려 했으니까요. 그와 겨루기
위해 상당히 고생해야 했습니다."
 그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알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죠. 그랜드 마스터라면 해당 왕국의 가장 소
중한 보물이나 마찬가지이니까요. 초인 한 명이 지니는
전쟁억지력을 생각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보호
해야 하죠. 만약 초인이 죽거란 패배할 경우 해당 왕국은
엄청난 타격을 감수해야 하니 섣불리 비무에 내보낼 턱이
없죠."
 "바로 그래서 알리시아님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트루베
니아에서도 그렇게 고생했는데 사정을 전혀 모르는 아르
카디아는 어떻겠습니까? 꽉 막힌 제 머리로는 도무지 방
법이 생각나지 않더군요. 알리시아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
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알리시아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제, 제가 뭘 할 수 있다고……."
 "그간 같이 지내며 확신이 짙어졌습니다. 알리시아님이
라면 분명히 속 시원한 해법을 제시해 주실 것입니다."
 맹신이나 다름없는 레온의 믿음에 알리시아가 조금 당황
했다.
 "제, 제가 과연 해낼 수 있을 까요?"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거라 자신합니다."
 감정을 차분히 가라앉힌 알리시아가 생각에 잠겼다. 평
민 출신 용병이라고만 알고 있던 레온의 정체가 블러디 
나이트라는 사실은 그녀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비로서 레온의 모호한 태도가 이해가 되는 그녀였다.
 '그랬군. 그래서 자신의 신상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
았던 것이로군.'
 사실 기분이 좋기는 했다. 그 사실은 레온 이외에는 오
직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다. 세상 그 누구도 이 사실
을 모른다. 그렇지 않겠는가? 알리시아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레온을 빤히 쳐다보았다.
 '세상 누가 알 수 있을까? 저토록 순진해 보이는 덩치
큰 촌뜨기처럼 보이는 사람이 아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블러디 나이트라니…….'
 물론 레온의 부탁한 일은 그녀도 장담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다. 당장 그녀는 아르카디아의 어느 국가에 얼마만큼
강한 초인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상대를 알아야 승
산을 점칠 수 있는데 도무지 계산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상황을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모르면 알아내면 그만이야. 책을 통해 지식을 얻고 도
둑길드 따위의 정보조직을 이용하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
어. 그리고 이곳의 그랜드 마스터를 레온님과 대결하게 
만드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무사에겐 누구
나 승부욕이 있어. 그랜드 마스터 정도의 경지에 오른 고
수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지. 문제는 레온님의 실력이 얼
마나 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초인들과 대결하는 순서도 무척 중요했다. 가장 약한 상
대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가야지 남은 대결의 성사
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처음부터 강한 상대와 맞붙는 것
은 순리가 아니다. 그렇게 될 경우 그보다 하수라고 평가
되는 초인들이 대결을 회피할 가능성이 높다. 싸워봐야 
패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상당히 복잡한 경우의 수로군. 하지만 이 정도 쯤이
야…….'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레온이 초조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드디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충분히 승산이 있는 일이야. 가능해.'
 알리시아가 레온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한번 해 볼 만한 일 같네요. 무엇보다도 이것은 트루베
니아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잖아요?"
 그 말을 듣자 레온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정말 고무되는 일이로군요. 정말 감사……."
 레온이 사의를 표시하기 전에 알리시아가 재빨리 말을 
끊었다.
 "하지만 제게도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나요? 아시다시
피 상당히 머리를 써야 할 것 같은 일이니까요."
 레온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 그렇군요. 제 생각만 해서 죄송합니다. 혹시 제에
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까?"
 복잡한 눈빛으로 레온을 쳐다보던 알리시아가 살짝 시
선을 피했다.
 "제 조건은 이거에요. 일단 전력을 다해 당신의 일을 도
와드리겠어요. 만약 성공했을 때 제 부탁을 하나 들어 주
실 수 있나요?"
 "무슨 부탁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알리시아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그
리 무리한 부탁을 하진 않을 거예요."
 물끄러미 알리시아를 쳐다보던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알리시아님의 부탁을 힘닿는 한 들어드릴 것
을 약속합니다. 그럼 계약이 성립된 것입니까?"
 "계약은 성립되었어요. 잘 부탁드려요."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레온이 머쓱한 얼
굴로 악수를 했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감촉이 너무도 
부드러웠다.
 "그럼 입장이 역전되었군요. 조금 전까지는 레온님이 고
용인이었지만 이젠 제가 고용된 신세로군요."
 "그런가요?"
 알리사아가 상큼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이제부턴 레온님께서 제 숙식을 해결해 주셔야
해요. 아셨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막일을 해서라도 알리시아님
을 잘 모시겠습니다."
 알리시아의 얼굴에는 묘한 흥분감이 떠올라 있었다. 트
루베니아를 떠들썩하게 했던 블러디 나이트와 한 팀을 이
뤄 아르카디아의 초인들과 대결하게 되었으니 흥분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녀의 작은 주먹이 자신도 모르게 불끈
쥐어지고 있었다.
 '이번 일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이야. 하늘이 나에게
주신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 반드시 대결을 성사시킬 거야.'
 기대감으로 몸을 부르르 떨던 알리시아가 돌연 레온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두 가지 목적이라고 하셨는데 나머지는 뭔가요?
 "궁굼하십니까?"
 "솔직히 그래요. 이제 한 팀이 되었으니 가능하면 레온
님의 모든 것을 알고 싶네요."
 "그러시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레온은 자신이 품고 있던 두 번째 목적을 알리시아에게 
털어놓았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가 사실은 아르카디아 출신이며 자
신이 열세 살 되던 해에 트루베니아를 떠났다는 것, 그리
고 스승의 당부에 이어 어미니를 만나기 위해 아르카디아
를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세세하게 전했다.
 "제 어머니의 모국은 펜슬럿입니다. 왕녀였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다른 것은 모릅니다. 그래서 아까 알리시아
님께서 절 펜슬럿 사람으로 소개하셨을 때 잠시 놀랐던 
것입니다.  제 몸에 흐르는 피의 반은 엄연히 펜슬럿의 것
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요. 아무튼 저는 이곳의 초인들
을 모두 꺾은 뒤 어머니를 찾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제 두
번째 목적입니다."
 레온의 말을 들은 알리시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렇다면 블러디 나이트는 완전한 트루베니아 인이 아니 
다. 절반은 아르카디아 인이라고 봐야 한다. 기대담에 젖
어 있던 알리시아에겐 찬물을 끼얹는 소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레온님은 구태여 트루베니아로 돌아갈 필요가
없는 분이시군. 어머니가 북부의 강대국 펜슬럿의 왕녀라
면 능히 그곳에서 호의호식하며 사실 수 있을 테니…….'
 사실 그녀는 레온에게 나중에 자신을 데리고 트루베니아
로 가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했었다. 레온 정도의 능력이
면 가능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알
게 되었으니…….
 알리시아가 재빨리 표정을 고쳤다. 빠른 상황적응력이 그
녀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었다.
 '그래 어차피 힘든 부탁이었는지도 몰라. 일단은 레온님
을 도와 이곳의 초인들을 꺾는 것이 시급한 일이야. 그일
을 먼저 해내야 해.'
 그녀가 서둘러 생각을 정리했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은
이곳 초인들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다.
 "정말 잘 되었군요. 렌달 국가연합에는 거대한 왕립도서
관이 있다고 해요. 잘 하면 그곳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렇습니까?"
 "렌달 국가연합은 다섯 개의 소국들이 합병한 형태의 국
가에요. 각 왕국의 왕실에 소장하고 있던 책을 한데 끌어
모아 도서관을 만들었기 때문에 소장한 책의 양이 아르카
디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많다고 나와 있었어요. 일단 
그곳에 가서 정보를 좀 얻은 뒤 움직이는 것이 어떨까요?"
 그 말에 레온이 잘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알리시아님께서 책을 읽으시는 동안 전 벌목을 하
겠습니다. 아르카디아 전역을 여행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
할 테니까요."
 그 말에 알리시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일단 렌달 국가연합 정도 되는
나라의 수도 부근에는 벌목장이 없을 거예요. 게다가 레
온님의 능력이라면 더욱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테니까요."
 "다른 일자리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책에서 읽는 바로는 렌달 국가연합은 무투회가 매
우 자주 벌어지는 나라라고 나와 있었어요. 거기에 걸린
상금이 결코 만만치 않을 거예요. 레온님의 실력이라면 
무투회의 우승을 걸머쥐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을 
터, 제가 적적히 돈을 건다면 많은 여비를 벌 수 있을 거
예요."
 무투회란 말에 레온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뭐 싸우는 것이라면 자신 있습니다."
 "그 점은 저도 동감이에요. 바로 제 앞에서 제국 기사 
20명을 때려눕히셨잖아요? 그 중에는 소드 마스터도 끼어
있었는데……. 아무튼 관건은 레온님이 보유하신 능력을
적절히 숨기는 것이에요. 실력이 너무 빨리 드러날 경우
레온님께 베팅이 집중될 테고, 그렇게 되면 여비를 벌기
가 곤란해요. 겨우 상대를 이겼다는 느낌을 줘야 하는데,
가능하겠어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이라면 잘할 자신이 있습니
다."
 알리시아의 머리는 부산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일단 레온님의 존재를 아르카디아에 확실히 알려야 할
필요가 있어. 잘 하면 렌달 국가연합에서 한 건 터뜨릴 수
있을 것 같아. 얼핏 본 책 내용에 따르면 각국에 일류 기사
들이 비밀리에 벌이는 무투회가 벌어진다고 했으니까. 일단
은 그곳에 가서 도서관에 틀어박혀야 해. 조금이라도 많은
정도를 끌어 모아야만 계획이 성공할 수 있어.'
 레온과 아르카디아 초인들의 대결을 성사시키지 위해 알
리시아는 그야말로 머리를 짜내고 또 짜냈다. 레온은 무심
한 눈빛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알리시아를 쳐다보았다.
 곧 아르카디아를 뒤흔들 남녀의 행보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렌달 국가연합은 다섯 개의 작은 나라가 합쳐서 탄생한
형태의 국가이다. 디오넬, 사이어드, 티논 왕국과 판드라
덴, 아파스 공국이 렌달 국가연합의 전신이었다.
 약 100여 년 전, 전통의 강대국이었던 테르비아 왕국이
멸망하고 마루스 왕국이 생겨났다. 권력투쟁으로 여러 조
각으로 찢어졌던 테르비아 왕국을 다시 통일한 7왕자가 
국명을 마루스로 바꾼 것이다. 그 와중에 인근의 작은 왕
국이나 공국이 대거 합병되었다. 태생이 그렇다보니 마루
스 왕국은 무척이나 호전적인 성향을 가진 국가가 되었다.
 마루스는 건국한 지 채 10년도 되지 않아 인근에 위치한
테제로스 왕국과 전쟁을 벌였다. 혼란했던 국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잔머리를 쓴 것이다. 그러려면 국민들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는 것이 가장 훌륭한 선택이다. 10여
년에 달하는 지루한 공방전 끝에 마루스는 마침내 테제로
스를 멸망시키고 영토를 모조리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켰
다. 바야흐르 크로센 제국 다음으로 큰 왕국이 탄생한 것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루스는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새
로이 국경을 맞대게 된 펜슬럿까지 눈독을 들인 것이다.
하지만 펜슬럿은 힘없이 무너진 테제로스와는 차원이 다
른 나라였다. 전통적인 강대국이었던 펜슬럿은 강력한 마
루스의 군대에 맞서 한 치의 밀림도 없이 맞서 싸웠다. 이
두 나라는 현재까지도 밀고 밀리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여나가고 있다.
 이런 마루스의 모습은 아르카디아의 왕국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끼쳤다. 조금 힘이 있다고 자부하는 국가의 군주
들이 인근 국가를 쳐서 영토를 넓히려는 야심에 사로잡혔
던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크로센 제국에서 마루스 왕
국에 대해 아무런 제제를 가하지 않았다. 그에 고무된 각
국 군주들이 결국 전재을 벌였다.

 "영토를 넓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크로센 제국의 침묵하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
 
 영토분쟁이 각지에서 벌어졌고 수많은 전쟁으로 인해 사
상자가 기하급적으로 발생했다. 아르카디아 전체가 동요
할 정도로 큰 혼란기였다.
 그런 정황 때문에 당시 조그마한 소국들이던 렌달 반도의
다섯 나라는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이러다간 인근 왕국에게 먹힐 수 있어."
 그들은 다른 왕국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 국가를 합치기
로 마음먹었다. 각 왕국들은 작은 나라였지만 다섯 나라가
합병할 경우 무시하기 힘든 규모가 된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각 왕국들은 의견을 잘 수렴하여 마침내 하나가 되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태어난 것이 랜달 국가연합이었다.
 기존 나라의 영토는 그대로 소공국이 되었고 각 나라의 
군주들은 국왕에서 대공으로 한 단계 강등되었다. 하지만
어떤 군주도 거기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았다. 5년을 주기로
차례가 오면 국가연합의 최고수장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태동한 렌달 국가연합은 지금까지 그 형태를 
계속 유지해 왔다.
 혼란기는 계속되지 않았다. 영토분재이 너무 심하다고 판
단한 크로센 제국이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크로센 제국
에서는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로 사신을 보내 분쟁을 일으키
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로 인해 각지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크로센 제국이 아르카디아에 미치는 영향력이 어
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영토분쟁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렌달 국가연합은 새로
바꾼 체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한 번 시도해 본 시스템
이 이전보다 월등히 나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작금의 렌달
국가연합은 당당히 강대국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었다. 국토
의 넓이나 군대의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졌기 때문이다. 그
렇게 해서 아르카디아에 단 하나밖에 없는 연합 형식의 국
가. 렌달 국가연합은 아르카디아의 서남부에 확실하게 자리
를 잡았다.

 렌달 국가연합의 수도인 레르디나는 번화한 신흥도시였다.
도시 전체가 잘 정돈된 계획도시였는데 각 도로들이 중앙의
왕궁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 있었다. 레르디나는
생겨난 지 불과 90년 밖에 안 된 신흥도시였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아르카디아에서 손꼽히는 도시 중 하나로 당당히 자
리매김한 상태였다.
 렌달 반도의 다섯 왕국의 수도를 정할 때 상당히 많은 진
통이 있었다. 각급 군주들이 저마다 자신의 영토 내에 있는
도시를 수도로 삼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필리스를 수도로 합시다. 렌달 반도에서 가장 큰 항구가
있지 않소?"
 "페노리아가 훨씬 낫소. 가장 큰 무역의 중심지이지 않소."
 저마다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에 쉽게 절충이 되지 않았다.
결국 어느 왕국에도 연고가 없는 접경지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해서 수도를 삼자는 의견이 나왔고 군주들은 모두 여
기에 동의했다. 
 그렇게 해서 선택된 곳이 바로 레드디나였다. 아이러니하
게도 레르디나가 아리카디아 대륙에서 명성을 떨친 도시로
부상한 것은 그 때문이다.
 보통 도시는 자연적으로 생겨나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하
나둘 모이며 상업 활동을 하다 입소문이 퍼지며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물론 거기에는 모종의 메리트가 필요
하다. 교통의 요충지이거나 큰 항구를 옆에 끼고 있는 경
우가 그렇다.
 그렇게 해서 도시가 점점 특유의 모습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라에서 관청을 지어 관리를 파견하고, 귀족
들이 이주하고, 시장이 생겨난다. 마치 생명체처럼 서서히
몸집을 불리며 자라나는 것이다.
 아르카디아에 존재하는 도시들은 태반이 그렇게 생겨났다.
그 과정에서 성이 건설되고 도시의 규모가 늘어나면 성벽
을 허물고 외곽으로 확장하게 된다.
 가장 여건이 좋지 않은 곳에 빈민가가 생겨나고 편의에 
따라 도로가 생긴다. 그렇다 보니 도시의 구조는 상당히
어지럽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점은 아르카디아의 각
도시에 대부분 적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레르디나는 태생 자체가 달랐다. 처음부터 렌달 국
가연합의 수도로 삼기 위해 철저히 검증을 거쳐 탄생시겼기
때문이다. 이름난 건축가들과 도로건설 전문가들이 대거 달
라붙어 설계를 했다.
 교통이라든지 주거 등등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설계한 계
획도시이기 때문에 다른 도시들과는 구조 자체가 다를 수밖
에 없는 것이다. 상하수도 시설도 완벽했고 주택가가 사방
에 적절히 분산되어 있었다.
 도로는 물론 시장이나 관청도 가장 적합한 위치에 자리 잡
은 상태였다. 그 때문에 레르디나는 전체적으로 상당히 여
유로운 도시로 보였다.

 레르디나의 중심부에는 거대한 왕궁이 자리 잡고 있다. 렌
달 국가연합을 다시리는 다섯 대공 중 임기제로 뽑힌 한 명
의 통령이 머무는 곳이다.
 연방의 왕궁에서는 지금 대공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현재
연방을 다스리는 통령을 비롯해 나머지 4대 대공들이 한데
모여 회의를 벌이고 있었다.
 회의를 주관하는 통령 에반스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드디어 우리의 숙원이 이루어졌소."
 그의 얼굴에는 희열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도 그럴 것이.
크로센 제국에서만 개최되덕 초인선발전을 오랜 로비끝에
곧 렌달 국가연합에서 유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인선발전이란 말 그대로 재야에 숨어 있는 실력자가
초인으로 등극할 수 있는 대회였다.
 아르카디아에는 도합 10명의 초인이 존재한다. 모두가 검
증된 최고의 그래드 마스터들로서 그 숫자가 항상 10명으
로 제한된다. 제아무리 실력이 있는 자가 등장하더라도 숫
자에는 변동이 없다. 왜냐하면 초인선발전이란 시스템 때
문이었다.
 초인선발전은 5년에 한 번씩 치러진다. 공고가 나면 아르
카디아의 전역에서 숨은 실력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그들이 한데 모여 예선전과 결승전을 치른 다음 단 한 명
의 승리자를 뽑는다. 여기까지의 과정이 초인선발전이다.
 여기서 선발된 예비초인에게는 기존의 초인 중 한 명에게
도전할 자격이 주어진다. 기존의 초인에게는 그 도전을 승
낙할 수도 있고 거절할 자유도 있다.
 그러나 역대 초인들 중 도전을 거절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괜히 안위를 생각해서 거절했다가는 개인의 명예
와 소속된 국가의 위상에 치명적인 타격이 가해지기 때문
이다. 때문에 초인들은 거의 절대적으로 예비 초인의 도전
을 승낙한다.
 그때 벌어지는 대결이 바로 초인대전이다. 이 초인대전에
서 기존의 초인이 이길 경우는 초인의 명단에 아무런 변화
가 없다. 반면 도전한 예비초인이 이길 경우. 기존의 초인
은 초인명부에서 이름이 삭제되고 예비초인의 이름이 대신
올라간다.
 그래서인지 아르카디아 대륙에 소속된 초인들의 이름은 
10년에서 15년을 주기로 한 번씩 바뀌어왔다.
 수련에 게으름을 피우거나 나이가 들어 노쇠한 초인들이
신인들에게 자리를 내주기 때문이다. 초인명부에서 이름
이 삭제되는 것을 방지하려면 부단한 수련을 하는 수밖에
없다. 역시 철저한 경쟁으로 인재를 뽑는 아르카디아의 방
식다웠다.
 그런데 그 초인선발전을 렌달 국가연합이 유치한 것이다.
아파스 대공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정말 고무되는 일이오. 이번 유치로 인해 본 연방은 엄청
난 금전적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이오."
 디오넬 대공이 그 말을 받아 맞장구를 쳤다.
 "그야 이를 말이오? 경제적 이득에 이어 렌달 국가연합의
명성을 전 아르카디아로 떨칠 수 있는 발판이 마침내 만들
어졌소."
 나머지 대공들의 얼굴에도 흥분감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럴 것이 이번에 유치한 초인선발전은 렌달 국가연합의
경제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렌달 국가연합에서는 이번 초인선발전을 유치하기 위해
엄청난 돈과 노력을 투자했다. 노력을 아끼지 않고 발언권
을 가진 국가들을 구워삶았고 천문학적인 수준의 돈을 들
여 로비도 했다. 그 결실이 머잖아 드러나는 것이다.
 초인선발전을 무사히 치러낸다면 그동안 들어간 자금을 
모두 회수함은 물론이고 더욱 많은 이득이 기대할 수 있다.
 지금까지 초인선발전은 크로센 제국에서만 치러왔다. 10
대 초인 중 유일하게 두 명을 거느리고 있는 강대국인데다
모든 왕국들의 종주국이라는 입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주변 왕국들의 심기가 점차 불편해
졌다. 크로센 제국이 초인선발전을 유치하며 매번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기 때문이다.
 초인선발전이 벌어질 경우 아르카디아 전역에서 실력자들
이 몰려든다. 초인의 명부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만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단 대회를 위해 관람객들이나 선수들이 해당국가에서 
머물며 쓰는 돈말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러나 
그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초인선발전의 가장 큰 이익금은 바로 운영비였다. 참가비
중 50%를 대회운영비로 거둘 수 있기 때문에 렌달 국가연
합에서 이처럼 기를 쓰고 유치작전을 벌이는 것이다.
 초인선발전의 참가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쌌다. 
무려 1만 골드, 그 천문학적인 액수의 거금을 내야만 초인
선발전에 참가할 수 있다. 그것은 어중이떠웆이를 걸러내려
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평민 기준 5~6인 가정의 1년 생활비가 겨우 1~2골드 정도
이다. 많아봐야 2.5골드를 넘지 않는다. 그러니 1만골드만
얼마나 엄청난 거금이다.
 그런 만큼 선발전에 그 정도 액수를 지불할 수 있는 국가
가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한다. 다시 말해 국가나 부유한 
귀족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는 자들만이 참가할 수 있다는
뜻이다. 
 통상적으로 초인선발던에는 100명 이상의 검사들이 도전
한다. 모두 합해 100만 골드, 그중 절반을 운영비로 건을
수 있으니 각 국가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달려들 법도 했
다. 그 메리트에 눈독을 들인 강대국들이 끊임없이 크로
센 제국으로 사신을 보내 압박을 가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오. 어째해서 크로센 제국만 초
인선발전을 치른단 말이오."
 "다른 왕국들에게도 초인선발전을 유지할 기회를 주어야
하오."
 처음에는 크로센 제국도 그 항의를 깡그리 무시했다. 초
인선발전으로 거둬들이는 이익이 국가재정에 큰 도움이 되
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왕국들의 목소리가 점차 높
아지자 제국에서도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알겠소. 그렇다면 일정 비율을 다른 국가에 양보하리다.
하지만 몇 가지 조건을 걸겠소. 우선 초인선발전을 치를 
수 있는 국가는 기존의 초인을 보유한 국가에 한정하겠소.
이를 이사국이라 칭하겠소. 또한 이사국 전부의 동의를 
받는 국가에서만 개최를 허락하겠소. 단 한 국가라도 반
대가 있다면 개최할 자격이 없소."

 당시 초인선발전을 유지할 수 있는 국가는 고작 9개국,
그 중에 적극적으로 유치에 가담한 국가는 5개국 정도되
었다. 모두가 국력이 부유하고 강한 군대를 가진 강대국
들이었다. 다른 나라들은 준비가 불충분했기 때문에 감
히 초인선발전을 치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참가할 자격이 되는 왕국이 5개국으로 좁혀지자 그들은
필사적으로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물론 렌달 국가연합도
마찬가지였다. 다섯 왕국이 합병한 덕을 톡톡히 본 것이
다.
 그 유치전에서 승리한 나라는 바로 렌달 국가연합이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펜슬럿과 마루스
의 알력 때문이었다. 전통적인 강대국인 펜슬럿과 마루스
는 각각 초인 한 명씩을 보유했기에 충분히 초인선발전을
치를 자격이 있는 국가였다.
 하지만 이 두 나라는 벌써 40년 가까이 국지전을 치르고
있는 적대국이었다. 그러니 상대 국가가 초인선발전을 치
르게 방관할 리가 없었다. 나머지 나라들은 펜슬럿과 마
루스에 모종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다. 오직 렌달 국가
연합만이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웠다.

 "우릴 자원해 주시오. 나중에 후사하겠소."

 렌달 국가연합에서는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자신들을 
지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렌달 국
가연합에 악감저을 가진 나라는 없었다.
 결국 만장일치로 렌달 국가연합이 초인선발전을 유치했다.
펜슬럿과 마루스도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렌달 국가연합을
지지했다. 렌달 국가연합으로써는 그야말로 국가차원의 경
사가 아닐 수 없었다.
 현재 통령을 맡고 있는 티논 출신의 에반스가 눈빛을 빛
내며 대공들을 둘러보았다.
 "이번 초인선발전을 각별히 신경 써서 잘 치러내야 하오.
이미 경기장은 완공되었소. 레르디나의 도시적 특성때문에
우리는 많은 득을 본 것이오."
 레르디나는 황무지 위에 세워진 계획도시이다. 때문에 도
시 외곽에는 휑한 공터가 즐비하므로 인근에 경기장을 건
선할 부지가 충분했다. 초인선발전은 보통 유치국가의 수
도에서 치러진다, 그래야만 모든 참가자들과 관광객들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왕국들이 경기장을 건립할 공간이 없어 쩔쩔매고 있
을 때 렌달 국가연합은 벌써 경기장을 착공한 상태였다.
그 점이 초인선발전을 유치할 수 있었던 두 번째 요인이기
도 했다.
 "이번 초인선발전은 반드시 성대하게 치러내야 하오."
 에반스의 말에 둘러앉아 회의를 벌이고 있던 대공들이 눈
을 빛냈다.
 "맞습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입지를 아르카디아 전역에 
떨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레온과 알리시아는 한가롭게 관도 변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들은 무려 이틀 동안을 걸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
적지까지 고작 절반밖에 오지 못했다. 페이류트와 렌달 국
가연합 사이의 거리는 그 정도로 멀었다.
 다행히 관도에는 여행자를 위한 시설이 적절히 갖춰져 있
어 노숙을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군데군데 먹고 잘 수있
는 숙박시설이 설치되어 있었기에 해가 저물면 비교적 편
히 쉴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 레온이 입을 열었다.
 "아르카디아는 정말 기반시설이 잘 되어 있군요. 트루베
니아에서 이 정도 거리를 가려면 반절 이상 노숙을 해야
할 텐데……."
 불행히도 알리시아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완전히
지쳐 체력이 바닥을 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색이 누렇게
뜬 상태로 알리시아는 관도 옆 경계석에 기대어 축 늘어졌
다. 
 레온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많이 힘드신가 보군요."
 "조, 조금 힘들군요. 이토록 오래 걸어본 적은 없거든요."
 알리시아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왕녀로 태어
난 그녀가 꼬박 이틀을 걸었으니 지칠 법도 했다. 과거에
는 장거리를 이동할 때 언제난 마차를 타고 다녔던 그녀였
다. 심지어 말도 몇 번 타보지 못했다.
 알리시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는 평민 신분을 적응했는데 몸은 아직 그렇지 못한
가 보군요."
 "금방 익숙해질 것입니다. 사람의 몸이란 오묘하기 짝이
없는 법이니까요."
 "그나저나 레온님은 정말 대단해요."
 알리시아가 감탄했다는 눈빛으로 레온을 쓸어보았다. 자
신은 이틀 동안 아무것도 들지 않고 단순히 걷기만 했다.
반면 레온은 묵직한 배낭을 메고 걸었다. 알리시아의 배
낭까지 함게 짊어졌기 때문에 더욱 힘들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레온은 지금까지 힘든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았
다. 알리시아가 널브러져 쉴 때에도 배낭을 집어 들고 우
두커니 서 있기 십상이었다. 만약 알리시아가 아니었다면
더욱 많은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역시 초인은 다른가 보군요. 건장한 기사들도 이 정도
거리를 행군했으면 분명 힘들다고 했을 텐데……."
 그 말에 레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걸어다니는 것이 몸에 익어서 그렇습니다. 정 힘드시면
말을 한 필 구해서 타고 다니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네요. 배를 타고 오며 피로가
많이 쌓였나 봐요."
 고개를 끄덕이던 알리시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관도 뒤
쪽에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소리 때문이었다. 규칙적인 말
발굽소리에 이어 수레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
다.
 레온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지나가는 마차인데, 한 번 부탁해 볼까요?"
 이미 레온은 마차가 접근하는 사실을 한참 전에 알고 있
었다. 초인의 이목은 범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
민한 법, 그는 보지 않고도 이미 마차의 종류까지 판별한
상태였다.
 "여덟 마리의 말이 끄는 대형 마차입니다. 가벼운 말발굽
소리가 섞여 들리는 것을 보아 호위하는 기병까지 있나본
데요? 아무래도 귀족의 행차 같습니다."
 레온의 말에 알리시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전 그저 마차가 다가오는 소리밖에
듣지 못했는데, 아무튼 귀족이라면 그냥 지나치게 놔 두는
것이 나을 것 같네요."
 왕족이었던 알리시아는 귀족들이 평민들을 어떻게 대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평민이 된 지금이라면 떨어지는 낙엽에
도 조심해야 했다. 그들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차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큼지막한 마차 한 대가 먼지구름을 몰고 달려오고 있었다.
레온의 말대로 서너 명의 기병들이 바짝 붙어 호위했다. 그
쪽을 쳐다보던 레온이 고개를 돌렸다.
 "도시에 가면 말 한 필을 사도록 하죠. 아무래도 그게 편
할 것 같습니다."
 "두 필을 사는 것이 낫지 않나요? 아무래도 말이 걷는 속
도가 빠를 텐데……."
 그 말에 레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 체격을 보십시오. 어지간한 말이 아니면 제 체중을 지
탱하지 못할 겁니다. 게다가 전 말을 탈 줄 모릅니다."
 그 말에 알리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을 타지 못하신다고요?"
 레온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환골탈태를 하기 전까지
그는 신장 3미터에 체중은 250kg에 가까운 오우거였다. 당
연히 레온을 태울 만한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런 이유
로 레온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말을 타보지 못했다.
 그 사실은 알리시아에겐 일종의 충격이었다.
 '세상에……. 말을 타지 못하는 기사라니?'
 기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승마술이다. 오히려 검술보다
도 중요하게 간주되는 기술인 것이다. 그런데 레온이 말을
타지 못한다니……. 그녀가 재빨리 안색을 고쳤다.
 "그렇다면 이번에 한 번 배워보도록 해요. 좋은 기회잖아
요."
 "승마에는 그다지 생각이 없습니다. 그냥 맨땅에 발을 디
디고 걸어다니는 것이 나으니까요."
 그들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차가 가까이 다가
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둘은 마차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의당 지나쳐 가야 할 마차가 갑자기 속도를 줄였다.
 히히힝--
 마부가 고삐를 잡아당기자 말들이 투레질을 하며 그 자리
에 멈춰 섰다. 레온과 알리시아가 의아한 눈빛으로 마차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설마 태워주려고 세운 걸까요? 지금까지 상황을 보니 그
러진 않을 것 같은데……."
 그동안 겪어본 결과 아르카디아의 인심은 상당히 야박한
편이었다. 둘이 터덜터덜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대부분
의 마차들이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한 대의 마차가 멈춰
서니 기대를 품을 만도 했다.
 호위하던 기마병 한 명이 마차 곁으로 다가갔다. 멀리서 
볼 때는 기병으로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기병이 아닌 기
사였다. 머리에 뒤집어 쓴 투구와 흉부를 가린 부레스트 
플레이트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뭔가 귓속말이 오가는가
싶더니 기사가 레온과 알리시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알겠습니다. 어김없이 봉행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기사가 말을 몰아 레온과 알리시아에게 다
가왔다. 둘은 영문을 모른 채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여행자들인가?"
 대뜸 하대를 하는 것을 보아 상당히 권세 있는 귀족가문
의 기사인 것 같았다. 알리시아가 나서서 얼른 대답을 했
다.
 "네, 렌달 국가연합으로 가고 있어요."
 알리시아의 용모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 기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자께서 은총을 베푸셨다. 여자의 몸으로 걸어서 여행
하기가 힘들다고 특별히 마차에 태워준다고 하셨다. 어떤
가? 타고 가겠는가?"
 그 말에 알리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레
온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타고 가십시오. 그 편이 훨씬 편할 것입니다."
 "하, 하지만……."
 알리사아가 망설이는 데이는 이유가 있었다. 트루베니아
에 있으면서 그녀는 이런 작태를 무척이나 많이 봐왔다.
귀족이 마차를 타고 가다가 반반한 용모의 평민을 보면 
으레 마차 안으로 끌어들이기 마련이다. 마차 안에서 무
슨 일이 벌어지는 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하지만 레온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누군지 잊으셨습니까?"
 레온의 말에 용기를 얻은 듯 알리시아가 기사를 쳐다보았
다.
 "알겠어요. 그럼 신세를 좀 지겠어요."
 힘겹게 몸을 일으킨 알리시아가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다가가자 마차 문이 열렸다. 그 모습을 본 레온이
마차로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기사가 손을 내밀어
레온을 막았다.
 "공자께서 초청한 사람은 여자뿐이다. 그대는 걸어가야 한
다. 마차의 속도가 느리니 충분히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의외로 레온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렇게 하리다."
 그러는 사이 알리시아가 마차 안으로 들어갔고 문이 닫혔
다.
 쿵!
 마부가 머뭇거림 없이 마차를 출발시켰다. 기마병들이 마
차의 속도에 맞춰 말을 움직였다.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
였기에 레온이 빠른 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5. 알리시아에게 흑심을 품었다 큰 코 다친 사나이



 마차 안의 분위기는 야릇했다. 안으로 들어간 알리시아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가운데 앉아 있는 장년인이었다.
서른 대여섯 정도로 보이는 눈썹이 짙고 잘 생긴 사내가
여자 한 명을 옆에 끼고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약식 갑
주를 걸친 기사 두 명이 좌석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눈썹 짙은 사내의 시선은 알리시아의 전신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탄성을 내뱉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훨씬 괜찮군. 역시 마차를 세운 보람이
있어."
 그 말에 살짝 눈살을 지푸렸지만, 알리시아는 얼른 표정을
바꾸며 목례를 했다.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당히 지친 상태였거든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장년인이 기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기사들이 두말 하지 않고 마부석으로 옮
겨갔다. 흔들리는 마차에서 자연스럽게 옮겨가는 것을 보
아 상당한 수련을 쌓은 기사들 같았다.
 기사들이 옮겨가자 장년인은 옆의 여자를 가리키며 손가
락을 까닥거렸다.
 "너도 이만 꺼져라. 보름 동안 주구장창 주물렀더니 손가
락을 지겹구나."
 상당히 모멸감을 주는 말이었지만 여인은 아무런 표정변
화 없이 뒤에 있는 문을 열고 나갔다. 마차 내부가 이중
으로 되어 있는지 다른 공간이 드러났다. 이윽고 마차 안
에는 장년인과 알리시아만 남겨졌다.
 그가 손가락을 뻗어 비어 있는 좌석을 가리켰다.
 "저기 앉아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지만 알리시아는 아무런 대꾸 없이
좌석에 가서 앉았다. 레온을 그만큼 믿고 있는 것이다. 폭
신한 쿠션에 기대자 몸이 나른해졌다. 거듭된 여정에 피로
가 쌓일 만큼 쌓인 모양이었다,
 "어디서 왔나?
 "페이류트에서 왔어요."
 "고향은?"
 알리시아는 검문소에서 했던 대답을 되풀이했다.
 "노스랜드 인근의 키토 왕국 출신이에요. 남판과는 에너
벨에서 만나 결혼을 했죠."
 그 말에 장년인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남편? 같이 가던 덩치 큰 녀석이 남편인가?"
 알리시아는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결혼을 했다는 말에도 별로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뭐 유부녀라도 잠깐 화포를 푸는 데는 전혀 상관이 없겠
지."
 말을 마친 장년인이 품속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냈다.
 "이 정도면 널 품는데 충분하겠지? 모자라면 말하라."
 데구르르--
 금화 한 닢이 데굴데굴 굴러와 알리시아의 발치에 와서 멎
었다. 1골드짜리 금화였다. 순간, 그녀의 몸이 모멸감으로 
인해 파르르 떨렸다.
 '나, 날 창녀로 간주하다니?'
 알리시아가 사력을 다해 마음을 진정시켰다. 사실 1골드라
면 상당한 거금이었다. 책에서 본 바로 환락가의 하급 창녀
를 사는데 통상적으로 5~10실버 정도밖에 들지 않는다. 미
모가 빼어난 고급 창녀를 사는데도 50실버를 넘지 않는다.
1골드는 평범한 평민 여자라면 두말 없이 치마끈을 풀 정도
의 금액인 것이다.
 하지만 한때 왕녀였던 알리시아에겐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죄송하지만 저는 남편이 있는 여자에요. 남편이 눈 시퍼
렇게 뜨고 지켜보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알리사아의 대꾸에 눈살을 찌푸린 사내가 마차 벽을 두드
렸다. 그러자 마차가 별안간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마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나란히 걷고 있던 기마병들도 덩
달아 달렸다. 깜짝 놀라 알리시아가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마차 뒤로 흩뿌려지는 먼지구름 사이로 레온의
신형이 멀어지는 것이 사야에 들어왔다.
 빠른 걸음으로 따라가던 레온이 멀어지는 마차를 우두커
니 지켜보고 있었다.
 알리시아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마차를 세워요."
 그 말에 사내가 흐물흐물 웃었다. 
 "그럴 순 없지. 자고로 방해물은 확실하게 제거해야 하거
든?"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금화 한 닢이 다시 알리시아의 앞에
떨어졌다.
 "잠깐만 참으면 거금을 손에 쥘 수 있다. 그런 다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남편에게 시치미 뚝 떼는 거야. 그게 낫
지 않을까?"
 어이가 없어진 알리시아가 입을 딱 벌렸다.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걱정하지 말고 나에게 안기도록 해.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화끈한 쾌감을 느끼게 해 줄 테니……."
 그녀는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일단 레온님이 오실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해. 섣불리 
반항할 경우 이 사내의 욕저을 더욱 자극할 수 있어.'
 표정을 고친 알리시아가 배시시 웃으며 바닥의 금화를 집
어 들었다.
 "2골드라면 상당한 거금이군요. 그런데 이렇게 돈을 낭비
해도 되나요?"
 사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 보는 여자를 품는데 뭐 그 정도쯤이야. 환락가의
창녀들은 너무 닳고 닳아서 품는 재미가 없지."
 말투를 보니 어지간히 굴러먹은 바람둥이 같았다. 알리시
아가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말을 걸었다.
 "부유하신 귀족 가문의 분이신가보네요? 어느 왕국에서 
오셨죠?"
 그 말에 사내가 멈칫했다. 길거리에서 낚은 여자에게 섣
불리 신분을 알려 주기가 난감했던 모양이었다. 눈치를 
챈 알리시아가 눈웃음을 쳤다.
 "그래도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요. 전혀 모르는 사람
과 어떻게 살을 섞을 수 있나요?"
 사내가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금화 두 닢이면 
두말 없이 치마끈을 풀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까다롭게 나
오는 것이다. 게다가 여인에게는 알 수 없는 기품이 느껴
지고 있었다.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알리시아게게 호감을
느꼈다.
 그는 순순히 자신의 신분을 털어놓았다.
 "나는 마루스 왕국 출신이다. 몬테즈 백작가의 식솔이지."
 "고귀하신 귀족 분이셨군요. 그런데 렌달 국가연합으로는
무슨 일로 가시는 거죠?"
 사내가 심드렁하게 이유를 늘어놓았다.
 "뭐 볼 일 보러 가는 거지. 아버지가 너무 닦달을 해대니
견딜 수가 없더라고……. 가문에 속해 있다면 의당 가문의
명예를 높여야 하니 말이야."
 "몬테즈 백작가라면 권세 있는 가문인가요?"
 그 말에 사내가 두말할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마루스에 가서 몬테즈 백작가가 어떤 가문인
지 물어본다면 어린 아이도 술술 대답해 줄 거야. 그 정도
로 전통 있는 가문이지."
 사내는 서서히 알리시아의 입담에 넘어가기 시작했다. 탁
월한 화술을 가진 알리시아는 상대를 적절히 추켜 세워가
며 이것저것 캐물었다.
 사내 역시 알리시아와 대화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는지 계
속 말을 늘어놓았다. 눈가에 떠올랐던 욕정은 어느새 사라
지고 없었다.
 알리시아가 재치 있게 응수하는 것을 본 사내의 눈가에 
이채가 떠올랐다.
 "직접 대화해 보니 평범한 평민이 아니로군. 교양이 있고
예법에 밝은 것을 보니 몰락한 귀족의 영애인가?"
 "그렇게 봐 주셔서 고맙군요."
 "아냐. 평민은 이 정도로 능숙하게 귀족과 대화를 나누지
못해. 그런 점에서 당신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여인이야."
 사실 사내가 탄복한 법도 했다. 왕녀로서 엄격한 교육을 
받은 알리시아였다. 왕실의 예절과 법도가 완전히 몸에 배
어 있었기 때문에 사내는 금세 알리시아가 평범하지 않다
는 사실을 깨달았다. 급기야 사내는 자신의 신분을 털어놓
았다.
 "내 이름은 멤피스, 몬테즈 백작가의 4남이다."
 "4남이시라면 작위를 몰려받지 못하시겠군요."
 예상외의 반응에 멤피스가 눈을 크게 떴다.
 "확실히 평민이 아니로군. 그 사실을 알고 있다니 말이야.
하지만 틀렸어. 아버지의 작위는 내가 물려받게 되어있어."
 "어째서 그렇죠?"
 "왜냐하면 내가 소드 마스터이기 때문이지."
 그 말에 알리시아는 깜짝 놀랐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
내가 소드 마스터라니…….
 소드 마스터(Sword Master). 마나로써 검강을 피워 올릴
수 있는 최고의 기사를 일컫는 말이다. 수많은 기사들이 
마스터가 되길 바라며 수련을 하지만 개중에서 원하는 바
를 성취하는 이는 극소수였다. 그 정도로 오르기 힘든 경
지인 것이다.
 알리시아의 눈에 탄복의 빛이 떠올랐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그 나이에 소드 마스터가 되시다
니……."
 멤피스가 씁쓰하게 미소 지었다.
 "뭐 대단할 것도 없지. 내 나이에 마스터의 경지에 접어
든 기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까. 특별한 점이
라면 내가 백작가의 직계혈족이라는 점을 들 수 있을까?"
 둘은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멤피스는 알리시아와
의 대화가 상당히 즐거운 모양이었다. 마차는 일정한 속
도로 달렸고 멤피스의 사연이 계속해서 알리시아의 귀로
흘러들어갔다.

 멤피스는 몬테즈 백작가의 4남이었다. 물론 그의 어머니
는 정실부인이 아니다. 그는 첩의 몸에서 난 자식이기 때
문에 작위는커녕 재산조차 변변히 물려받지 못하는 처지
였다. 그러나 멤피스는 그 점을 비관하지 않았다.
 "운명이 기구하면 극복하면 그만이다."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검을 쥔 멤피스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수련했다. 다행히 몬테즈 백작가에서는 지원
을 아끼지 않고 멤피스를 뒷받침해 주었다. 그 결과 멤피
슨는 30대 초반에 소드 마스터가 되는 기염을 토했다. 물
론 그것은 널리 인정받는 마루스 명가의 마나연공법을 익
혔기 때문이었는데, 몬테즈 백작가에서는 돈을 아끼지 않
고 명가의 마나연공법과 검술을 사사받게 했다.
 소드 마스터가 되자 멤피스의 위상은 하루아침에 뒤바뀌
었다. 가문의 직계 혈족 중 유일하게, 그것도 30대 초반
의 젊은 나이에 소드 마스터가 되었으니, 그를 보는 몬테
즈 백작의 눈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만족할 순 없다. 반드시 우리 가문에서 초인을
배출해내야 한다."
 만약 멤피스가 초인이 된다면 몬테즈 가문은 백작가를 뛰
어넘어 후작가로 도약할 수 있다. 욕심을 품음 몬테즈 백
작은 멤피스를 더욱 다그쳤다. 그로 인해 멤피스는 쉴틈도
없이 수련에 수련을 몰두해야 했다.
 하지만 진정 높은 경지는 단순한 수련만으로 도달하기 힘
든 법. 멤피스는 마침내 거듭되는 수련에 지쳐버렸다. 그
리고 정처 없이 방황하기 시작했다. 수련하는 시간보다 술
에 취해 있는 시간이 많았고 그동안 절제하던 여자들도 마
구 품기 시작했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가문의 염원을 저버릴 생각이냐?"
 몬테즈 백작이 버럭 고함을 질렀지만 멤피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어릴 적 받은 냉대와 질시
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점이 가문에 대한 반항
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지."
 자신의 신상을 털어놓은 멤피스가 서글픈 눈빛을 창밖으
로 돌렸다. 귓전으로 알리시아의 담담한 위로가 파고들었
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정말 슬펐겠어요."
 "그다지 슬프진 않았어. 귀족가의 서자라면 대부분 겪는
일이니 말이야."
 재빨리 표정을 고친 멤피스가 알리시아를 쳐다보았다.
 "렌달 국가연합에는 그런 이유로 오게 된 거야. 아버지가
초인선발전에 참가하라고 하셨서든."
 "초인선발전이라니요?"
 "하긴, 초인선발전에 대해서는 모르겠구나."
 멤피스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알리시아에게 초인선발전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귀족들 중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는
일급 기밀사항이었지만 애당초 멤피스에게는 걸릴 것이 없
었다. 사실 그가 초인선발전에 참가하게 된 데에는 몬테즈
백작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우선 멤피스가 초인선발전에서 우승할 가능성은 거의 없
다. 무려 1년 가까이를 술과 여자로 허비했기 때문이다.
멤피스의 머릿속에는 어느덧 아버지의 신랄한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초인선발전에 나가거라. 거기서 쟁쟁한 실력자들과 싸우
다 보면 그동안 잊고 있던 무(武)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날
지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1만 골드라는 참가료
가 필요합니다. 그 많은 돈을 허무하게 날리실 생각이십니
까?"
 "물론 적은 돈은 아니다. 하지만 널 초인으로 만들기 위해
서 그 정도 돈쯤은 아깝지 않다. 가거라. 가서 네 마음 깊
은 곳에 숨은 무(武)에 대한 열정을 깨워 오너라."

 멤피스는 아버지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길을 떠났다.
그러다 알리시아를 만난 것이다.

 "그런 것이 있었군요."
 초인선발전에 대한 사항을 모두 들은 알리시아가 눈을 초
롱초롱 빛냈다. 그녀의 머리가 부산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 사내를 만난 것은 천고의 행운이다. 레온님을 위해서
는 더할 나위 없는 해운이나 마찬가지야.'
 초인선발전, 그것은 한 마디로 레온을 위한 것이나 마찬가
지였다. 트루베니아에서 건너온 블러디 나이트란 이름을 아
르카디아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그보다 적합한 방법이 없
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참가료가 1만 골드라는 말
에 알리시아가 입을 딱 벌렸다.
 "세, 세상에 그토록 많은 돈을 내야 참가할 수 있다니……."
 "어중이떠중이를 골라내기 위한 방편이지. 참가료가 그 정
도 되지 않는다면 개나 소나 다 참가할 것 아닌가? 아무튼
이것으로 내 신상은 다 밝혔다."
 말을 마친 멤피스의 눈가에 서서히 욕정이 자리잡기 시작
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군. 순순히 벗겠느냐?" 아니면
내가 벗겨주랴?"
 알리사아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드디어 결정적인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녀가 몸을 사리며 고함을 쳤다.
 "힘으로 레이디를 억압하는 것은 기사의 본분이 아닐 텐
데요?"
 "흐흐흐. 난 지금까지 내가 기사라고 한 번도 자각해 본적
이 없다. 게다가 넌 레이디가 아니지 않느냐? 자고로 레이
디란 곱게 자란 귀족 가문의 영애를 칭하는 말이지."
 멤피스가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알리시아의 몸매를 훑었다.
 "몸에 서린 기품과 말투를 보니 평범한 평민은 아닌 것 같
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난 욕적만 풀면 되니까. 더 이상 
얼굴 볼 일도 없을 테고……."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알리시아가 마차 벽을 바짝 붙었다.
 "이, 이러지 마세요. 전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거야 네 사정이지. 아무튼 난 너를 가질 것이다."
 말을 마친 멤피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석에 몰린 알리
시아는 부들부들 떨며 레온의 구원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
다.
 '레온님. 어서 도와워요.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요.'
 그때였다. 알리시아에게 다가가려는 멤피스의 얼굴이 돌
연 딱딱하게 굳었다.
 "헉!"
 멤피스가 눈을 부릅떴다. 바깥쪽에서 갑자기 강렬한 기세
가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마차가 멈췄다. 이어 호위기
사의 호통소리가 울려 퍼졌다.
 "웬 놈이냐? 어인 일로 길을 막고 있는 것이냐?"
 멤피스의 관심이 바깥쪽으로 쏠렸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마차 문을 열과 밖으로 나갔다.

 관도 중앙에는 누군가가 철탑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검붉
은 빛이 도는 갑주를 걸친 기사였다. 호위하던 기사들이 바
싹 긴장한 채 길을 막은 기사를 노려보았다.
 핏물을 머금은 듯 불게 빛나는 갑주를 착용한 장대한 덩치
의 기사는 특이하게도 긴 창을 들고 있었다. 여간해서는 기
사들이 쓰지 않는 무기였기 때문에 멤피스의 눈가에 의혹이
스쳐지나갔다.
 "아르카디아에 창을 쓰는 기사가 있었나?"
 순간 붉은 기사에게서 사나온 기세가 쫙 뻗어나왔다. 전신
을 엄습하는 그 세찬 기세에 기사들이 움찔 놀라며 뒤로 주
춤주춤 물러섰다. 괴이하게 공명되는 음성이 그들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내 이름은 블러디 나이트. 강자를 찾아 트루베니아에서 
건너왔다. 나와 한 번 싸워볼 용의가 있느냐?"
 붉은 기사의 시선은 멤피스에게 꽂혀 있었다. 멤피스의 안
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말 대단한 기세로군. 그런데 트루베니아에서 건너오다
니? 그게 대관절 가능한 일인가?"
 트루베니아 출신 이주민들은 엄격한 관리를 받는다. 특히 
마나를 다루는 기사들은 더욱 엄밀한 감시를 받는다. 지금
처럼 길을 막고 도전하는 일이 있을 수 없었기에 멤피스가
당황할 만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검수. 백주대낮에
받은 도전을 회피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멤피스의 입에서 착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무기와 갑주를 준비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기마병들이 말에서 내렸다. 마차 뒤편으
로 다가간 기사들이 멤피스의 갑주와 검을 꺼냈다. 그 사이
알리시아가 살며시 마차에서 내렸지만 기사들은 누구도 그
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 틈을 타서 알리시아가 관도
옆 숲으로 사라졌다.
 "정말 절묘한 등장이로군."
 나무 사이에 숨은 알리시아가 눈빛을 빛내며 상황을 살폈
다. 레온을 쳐다보는 그녀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뛰고 있었다.
 "정말 멋있어. 그런데 레온님은 도대체 어떻게 따라오셨
을까?"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알리시아가 대결을 관전하
기 시작했다.

 그동안 멤피스는 수행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 갑주를 착용
했다. 대마법 방어진이 새겨진 최고급 갑주였다. 그가 속
한 몬테즈 백작가는 상업을 주력으로 하는 부유한 가문이
다. 그런 만큼 멤피스는 최고급으로만 치장했다. 그의 손
에 든 장검은 최고의 장인이 만든 명품이며 갑주 역시 명
인의 손길이 깃든 회심의 역작이다. 그 모습을 레온이 느
긋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알리시아를 태운 마차가 갑자기 속도를 올리자 레온은 깜
짝 놀랐다. 마차와 기마병들이 자신만 남겨 놓고 속도를 
내며 달려가 버린 것이다. 만약 레온이 평범한 기사였다
면 손을 쓸 틈이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빨리 달려
도 말을 따라잡을 수 없는 법이므로…….
 하지만 레온은 경공술과 신법을 극한까지 익힌 무인이었
다. 곧바로 정신을 차린 레온이 추적을 시작했다. 그가 선
택한 길은 길 옆 나무숲이었다. 어릴 때부터 숲에서 살았
던 탓에 레온에게는 지극히 친숙한 장소였다.
 "오래 달리진 않을 것이다. 머지않아 속도를 줄일 테니 
그때 상황을 봐서 알리시아님을 구해내야겠군."
 레온의 예상을 적중했다. 마차는 얼마 달리지 않아 속도를
줄였다. 숲속에서 마차를 관찰하던 레온이 청력을 집중해서
멤피스와 알리시아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엿들었다.
 잠시 후 그는 귀가 솔깃해지는 것을 느꼈다.
 "초인선발전이라. 이거 뜻하지 않은 낭보로군."
 초인선발전에 나가 우승한다면 한 명의 초인을 상대로 싸
울 수 있다. 문제는 선발전에 참가하는데 1만 골드라는 거
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레온은 대수롭지 않게 생
각했다.
 "뭐 그거야 알리시아님께서 알아서 해결해 주시겠지."
 열심히 엿듣고 있는데 마차 안의 상황이 심상찮게 변했다.
멤피스가 욕정에 불타는 짐승으로 변해 알리시아를 덮치려
고 하고 있었다.
 이제 나설 때가 되었음을 직감한 레온이 배낭과 그레이트
엑스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물론 멤피스 따위는 결코
그의 적수가 될 수 없다.
 "따끔히 혼을 내줘야겠군. 좋은 정보를 알려 준 대가로 죽
이지는 않겠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레온이 마신갑에 마나를 주입했다. 오
랜만에 정순한 마나를 빨아들인 마신갑이 순차적으로 레온
의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파츠츠츠--
 삽시간에 레온은 붉은 빛이 도는 중갑주에 장창을 든 블러
디 나이트의 모습으로 화했다. 그 상태로 레온은 몸을 날려
마차 앞을 막아섰다. 그것이 레온이 멤피스 앞에 나타나게
된 과정이었다. 알리시아가 무사히 몸을 피한 것을 확인한
상황이라 걸릴 것은 전혀 없었다.
 그 사이 갑주를 모두 차려입은 멤피스가 몸을 돌렸다. 욕
정에 젖어 있던 그의 눈빛은 어느덧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
다.
 "강자를 찾아 트루베니아에서 건너왔다고?"
 레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차분히 멤피스를 응시했다.
그 순간 레온은 볼 수 있었다. 멤피스의 눈에 서린 경멸의
빛을……. 대부분의 아르카디아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멤피
스 역시 트루베니아 출신의 기사들을 업신여기고 있었다.
 "트루베니아에서 제법 이름을 날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아
르카디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네놈이 우물 안 개구리였
다는 사실을 여실히 깨닫게 해주겠다.
 멤피스는 자신만만했다. 그것은 레온의 몸에서 그리 강한
기세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레온이 이미 그랜드 마스터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경지에
올라섰다는 사실을…….
 환골탈태를 거친 레온의 기도는 범인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러니 멤피스가 레온의 실력을 얕잡아볼 만 했다. 깊게
심호흡을 한 멤피스가 장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명인의 손길이 닿은 장검에서는 서늘한 광채가 피어올랐
다. 곧 장검에서 찬연한 빛무리가 맺혔다. 마나가 주입되
자 검신에 닿는 모든 것을 잘라버리는 공포의 오러가 서
린 것이다. 잠시 후 오러가 점점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른
바 오러 블레이드의 발현이었다.
 "오너라. 아르카디아 기사들의 실력이 어떤지 보여주마."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레온을 노려보는 멤피스였다. 레온
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마치 유령처럼 아
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곧 날카로운 기
세가 멤피스에게로 집중되었다.
 "헉!"
 깜짝 놀란 멤피스가 몸을 틀었다. 순간 어깨에서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콰직!
 어깨보호대가 산산히 부셔져 흩뿌려졌다. 와이번 본을 가
공해 만든 갑주가 마치 쿠키처럼 부스러진 것이다. 상대의
공격이 날아오는 기미도 눈치채지 못했기에 멤피스는 소스
라치게 놀랐다.
 "이, 이렇게 빠르다니……."
 목직한 저음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내뿜는 것만이 능사는 아냐. 생각했던
것보다 실력이 모자라군."
 레온의 이죽거리는 말투에 멤피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잘난 척 하지 마라. 간다! 챠아앗!" 
 우렁찬 고함소리와 함께 눈부신 검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
왔다. 마루스의 명가에서 사사받은 검술이 유감없이 펼쳐
졌다. 삼엄한 검기가 사방을 완전히 점했다. 하지만 레온
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미 멤피스보다 강력한
상대와 여러 번 겨뤄봤던 레온이었다.
 '고작해야 마스터 상급 정도로군. 그랜드 마스터에는 턱
없이 못 미치는 실력이야.'
 레온은 빨리 승부를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정도의 
상대에게 굳이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그의 창이 바람
개비처럼 휘둘러지며 멤피스의 검영을 일일이 격파했다.
 파파파팟--!
 눈 깜짝할 사이에 멤피스의 공세가 모조리 차단되었다.
 "이익!"
 입술을 질끈 깨문 멤피스가 다시 검을 휘두르려 했다. 하
지만 레온에게는 애당초 승부를 길게 끌고 갈 마음이 없었
다.
 쐐애애액--
 시뻘건 선이 허공에 연거푸 그려졌다. 순간 멤피스가 들고
있던 장검 중단이 허무하게 부러져 나갔다.
 푸캉!
 이름난 장인이 정서을 들여 만든 최고급 장검이었고 오러
블레이드가 서려 있었지만, 더욱 막강하고 파괴적인 기운
앞에서는 저항할 수 없었다. 멤피스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
떠졌다. 상식적으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벌어진 것이
다.
 "미, 믿을 수 없어, 오러 블레이드가 서린 검이 부러지다
니……."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멤피스가 입고 있는 갑주
가 차례대로 부서지기 시작했다. 레온이 무표정한 얼굴로
창을 휘두르는 순간 투구가 석류처럼 쪼개졌다.
 쩌엉!
 이어 브레스트 플레이트가 갈라졌고 호버크가 산산히 찢
어져 흩뿌려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멤피스는 갑주 대부분
이 부서져 나간 볼쌍사나운 모습으로 화해 있었다. 레온이
서늘한 눈빛으로 넋이 나간 멤피스를 쳐다보았다.
 "제법 하는 녀석인 줄 알았더니 햇병아리였군. 아르카디
아의 기사들은 다 그런가?"
 멤피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이렇게 허무
하게 지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멤피스를 강자
로 볼 수는 없다. 아르카디아에는 그늘 능가하는 고수가 
무수히 존재한다. 하지만 멤피스는 정통 검술을 깊이 있게
익힌 기사였다. 정면대결에서 이렇게 압도당하리라곤 꿈에
도 생각하지 못했다.
 충격이 컸던 것일까? 
 멤피스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음성은 어느새 경어
로 변해 있었다.
 "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이미 말하지 않았나? 강자를 찾아 트루베니아에서 건너
왔다고……."
 필사적으로 정신을 추스른 멤피스가 레온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투구 사이로 흘러나오는 서
늘한 안광뿐이었다.
 "초, 초인선발전에 참가할 생각이오?"
 레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멤피스에게 긴 말
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멤피스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무참히 패하고 나니 술과 여자에 절어 지냈던
지난 시절이 더없이 원망스러웠다.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
았다면 이처럼 허무하게 패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돌연 멤피스가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
었다.
 "다시 한 번 도전할 기회를 주시오. 실력을 길러 오늘의 
수모를 갚고 싶소."
 레온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고, 고맙소."
 어깨가 축 늘어진 멤피스가 마차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음
을 옮겼다. 딱딱하게 질린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
사들이 얼른 멤피스를 부축했다. 용무를 마친 레온이 막 몸
을 돌리려 했다. 그때 한 마디 음성이 그를 불러 세웠다.
 "잠시 기다려 주시오?"
 그 말에 레온이 고개를 돌렸다. 그를 부른 이는 멤피스와
동행한 초로의 기사였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기사가 다급
한 발걸음으로 레온에게 다가왔다.
 "본인은 몬테즈 백작가의 석양기사단 단장 보로나이요. 당
신에게 할 말이 있소."
 "무슨 일이오."
 자신을 보로나이라고 밝힌 초로의 기사가 상기된 표정으로
레온을 쳐다보았다. 사실 멤피스는 수련에만 몰두하느라 세
상 물정이 어두운 편이었다. 그 때문에 몬테즈 백작은 석양
기시단 단장인 보로나이를 보내 멤피스를 보필하게 했다.
 초조했는지 보로나이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이것은 몬테즈 백작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다.'
 나이가 훨씬 많지만 보로나이의 검술 실력은 멤피스보다
떨어졌다. 그가 석양기사단장을 맡은 것은 실력이 아니라
그의 풍부한 경험과 상황대처능력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엄청난 무위를 발휘한 레온을 그냥 보낼 리가 만무했다.
잘만 하면 상당한 실력을 지닌 기사를 몬테즈 백작가로 영
입할 수 있었기에 그가 재빨리 머릿속을 정리했다.
 '일단은 좋은 말로 구슬려 봐야겠군."
 보로나이가 공손히 검례를 취했다.
 "트루베니아에서 오신 귀빈을 뵙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
는다면 존함을 듣고 싶군요."
 흘러나오는 레온의 대답은 퉁명스러운 편이었다.
 "블러디 나이트라 불러주시오. 트루베니아에서 그렇게
불렸소."
 "블러디 나이트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얼핏 듣기로 초
인선발전에 참가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참가
하려면 1만 골드의 참가료가 필요합니다."
 레온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혹시 그만한 돈을 가지고 계십니까?"
 레온이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그에게 그만한 거금
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자 보로나이의 얼굴이 환하게 밝
아졌다.
 "그러시다면 저희 몬테즈 백작가가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
겠습니다. 참가료를 저희 측에서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어
떠십니까?"
 말을 마친 보로나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멤피스는 아직까지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창백한 표정으로 좌석에
기대어 있었다. 데리고 온 시녀가 열심히 그의 팔다리를 주
물렀지만 멤피스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상태를 보니 초인선발전에 참가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보로나이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그들은 멤피스의
참가료 1만 골드를 소지한 상태였다.
 '멤피스님 대시 이자를 참가히킨다면 어떨가? 그를 몬테즈
백작가의 이름으로 출전시킨다면?'
 생각에 잠겨 있는 보로나이의 귓가로 묵직한 저음이 파고
들었다.
 "호의는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어딘가에 얽매이는 것은 딱
질색이오."
 말을 마친 레온이 몸을 돌리려 했다. 다급해진 보로나이가
한 발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레온의 몸에서 가공할 만한 기
운이 폭사되었다.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 뒤로 주르르 밀려
날 정도로 강력한 기세였다.
 "더 이상 날 귀찮게 하지 마시오. 알겠소?"
 보로나이는 더 이상 설득해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입을 닫
았다. 그 모습을 싸늘한 눈빛으로 지켜본 레온이 몸을 돌렸
다.
 저벅저벅.
 그의 우람한 신형은 어느새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레
온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들은 한참 만에 말문을 열었다.
 "저, 정말 엄청난 기세였습니다. 아무래도 그랜드 마스터
가 아닐까 짐작되는데요?"
 "어떻게 합니까? 렌달 국가연합으로 계속 가여 합니까?"
 그 말에 보로나이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멤피스는 이미 정
신을 놓고 있는 상황이라 현재의 결정권자는 자신이었다. 얼
굴을 일그러뜨린 보로나이가 씹어뱉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마루스로 되돌아간다."
 그 말에 기사들이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백작님께서 단단히 당부를 하셨는데……."
 보로나이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손가락을 뻗어 마차를 가
리켰다.
 "멤피스 공자님께서 저렇게 되셨는데 어떻게 초인선발전에
참가할 수 있단 말인가? 군소리 말고 마차를 돌려라."
 머뭇거리던 기사들이 말없이 말에 올라탔다. 한참 동안 서
있던 마차는 곧 방향을 바꿔 마루스 쪽으로 느릿하게 움직
이기 시작했다.
 
 그 대결을 몸을 숨기고 지켜보던 알리시아는 마치 꿈을 꾸
는 것 같았다. 붉은 갑주를 걸치고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선
레온의 모습이 너무도 멋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레온이
당당히 트루베니아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혔을 때 모종의 희
열까지 느꼈던 그녀였다.
 "정말 멋있어."
 대결은 레온의 압승으로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리
사아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이미 레온의 승리를 예견하
고 있었던 그녀였다. 레온이 사라지고 멤피스의 마차가 방
향을 돌려 마루스 쪽으로 향하자, 그녀가 길게 한숨을 내쉬
었다.
 "휴. 끝내주는군."
 아직도 두근대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만약 레온이 적
절한 순간에 나타나 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꼼짝없이 멤피스
에게 몸을 빼앗길 뻔했다. 
 "각별히 조심해야겠군. 역시 여자의 몸으로 여행을 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냐."
 그때 나직막한 음성이 알리시아의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철저히 보호해 드릴 테니까요."
 고개를 돌리자 순박한 레온의 얼굴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블러디 나이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낯익은 레온
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알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달
려들어 레온을 얼싸안았다. 
 "정말 고마워요. 아까는 정말 무서웠어요."
 레온이 난감한 기색으로 말을 더듬었다. 알리사아의 체취
가 확 풍겨왔기 때문이다.
 "저, 저 배, 배낭을 가지러 가야 하는데……."
 그제야 알리시아가 포웅을 풀었다. 두 손으로 볼을 감싸며
외면하는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배낭은 이 근처에 숨겨 두었습니다. 그래도 마차 덕분에
상당한 거리를 왔군요. 피로는 많이 풀리셨습니까?"
 "네, 이, 이젠 괜찮아요."
 
 배낭을 찾으로 가며 둘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우었다. 알리
시아가 눈을 빛내며 레온을 쳐다보았다.
 "보로나이라는 사람이 참가료를 지불하겠다고 했단 말이
죠?"
 "네 그렇습니다."
 "어떻게 대답하셨어요?"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구태여 몬테즈 백작가의 신세를 질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요."
 그녀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잘 하셨어요. 레온님은 백작가 따위에 얽매여서는 안될 
분이에요. 어머니께서 펜슬럿에 계시니 더욱 그러라죠.
아시다시피 펜슬럿과 마루스는 앙숙지간이에요."
 "그랬군요. 그럼 어떻게 하죠? 1만 골드라는 돈을 만들 방
법이 없는데……."
 알리시아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돈 문제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어떻게든 만들어 볼게
요. 레온님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만들고도 남을 거예요."
 "아무튼 알리시아님만 믿겠습니다."
 배낭은 레온이 숨겨놓은 곳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잠자코
배낭을 짊어진 레온이 그레이트 엑스를 들어 어깨에 걸쳤다.
 "그럼 가실까요?"
 "그래요. 렌달 국가연합이 우릴 기다리고 있군요.'
 알리시아가 웃는 낯으로 앞장섰다. 레온이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둘의 여정은 이후로도 일주일 가까이 이어졌다. 다행인점
은 중간에 지나가던 마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르카디아의 인심은 역시 야박했다. 적지 않은 돈
을 쥐어주고 나서야 마차를 탈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
튼 둘은 그렇게 해서 일주일 만에 렌달 국가연합의 수도
레르디나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국경을 통과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페이류트를 나
설 때나 삼엄했지 렌달 국가연합의 국경경비대은 거의 형식
적으로 검문을 했다. 그 탓에 둘은 무사히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물론 알리시아의 재치 있는 답변이 빛을 발했기
에 나온 결과였지만…….
 각설하고, 레온과 알리시아는 마침내 렌달 국가연합의 수
도인 레르디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햐. 정말 훌륭하군요."
 "정말 잘 정돈된 도시입니다. 이렇게 깨끗한 도시는 처음
보는군요."
 레온과 알리시아는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탄성을 토
해냈다. 지금까지 이렇게 잘 정돈된 도시는 본 적이 없었
다. 트루베니아에는 계획도시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도 주변 사람들은 전혀 이상하게 느끼지 
않았다. 레르디나의 시가지를 보고 감탄하는 이들은 그들
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수한 관광객들이 레르디나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레온과 알리시아는 한동안 시가지를 둘러보며 레르디나의
정경을 감상했다. 그것에 싫증이 날 무렵, 알리시아가 레
온을 쳐다보았다. 
 "일단 숙소를 정해야 할 것 같네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알리시아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저렴한 곳으로 알아볼게요."
 그때부터 둘은 레르디나의 뒷골목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
달가량 묵어야 했기 때문에 숙박비가 비교적 싼 곳을 골라
야 했다. 다행히 여관은 많은 편이었다.
 "가급적 도서관과 가까워야 할 것 같아요. 무투장과는 멀
어도 큰 상관이 없을 테니까요."
 "저야 상관없습니다. 걸어다니는 데는 이력이 났으니까요."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둘은 마침내 적합한 숙소를 구할 수
있었다. 숙박비는 페이류트에서 묵던 곳보다는 오히려 저렴
했다. 전체적으로 레르디나의 물가는 소비도시인 페이류트
보다 월등히 싼 편이었다.
 그들은 25실버에 방 하나를 한 달 동안 세낼 수 있었다. 방
을 열어준 사환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이 방입니다. 식사는 아침만 제공합니다. 11시 이전까지
오셔야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레온이 느긋하게 방 안에 들어가서 배낭을 내려놓았다. 그
렇지만 사환은 물러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마치 뭔가를 원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레온이 미간을 찌푸릴 무렵 알리시아
가 재빨리 나서서 10쿠퍼짜리 동전 하나를 사환의 손에 쥐어
두었다. 그때서야 사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사환이 공손히 문을 닫고 나갔다. 레온이 어리둥절한 표정
으로 알리시아르 쳐다보았다.
 "사환에게 돈을 왜 준겁니까?"
 "팁(Tip)이에요. 아르카디아에는 팁 문화가 활성화되어 있
다고 책에서 보았거든요. 아깝긴 하지만 의심받지 않으려면
여기 문화에 적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레온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아르카디아는 트루베니아와 정말 다르군요. 사용하는 언
언도 같고, 인종도 다르지 않는데 말입니다."
 머리를 끄덕인 알리시아가 일어나서 나갈 채비를 했다.
 "워낙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격리까지 되어 있으니 차이
가 점점 벌어질 거예요. 그럼 쉬고 계세요. 도서관에 잠시
다녀올게요."
 "내일부터 가시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알리시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미리 알아두어야 할 것 같아요. 페이류트에서는 평민에게
도 도서관을 개방했지만 렌달 국가연합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긴."
 레온이 일리가 있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 트루베니
아는 귀족과 평민의 차별이 아르카디아보다 더욱 극심한 편
이다. 도서관도 그리 많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평민이 도서
관을 이용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그 때문에
알리시아가 페이류트의 도서관을 다니는 것이 레온에게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가 웃는 낯으로 문을 열었다.
 "그럼 저 다녀오겠어요."
 "부디 조심하십시오."
 알리시아가 나가고 나자 레온은 자체 없이 명상에 들어갔
다. 얼마 전에 겪었던 멤피스와의 격전을 되새겨 보는 것
이다. 사실 멤피스는 레온에 비해 수준이 많이 떨어지는 
자였다. 하지만 검술 자체만 보면 쓸 만한 구석이 있었다.
 '상당히 정교하고 날카로운 검술이었어. 마루스 출신이라
고 그랬던가? 만약 나와 비슷한 경지의 무사가 그런 검술
을 전개한다면 상대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거야.'
 레온은 묵상을 통해 며칠 전 벌였던 대결을 분석하고 또
분석했다. 아르카디아의 절대자와 싸워 이기려면 한시라도
수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눈을 반개한 채 명상을 거
듭하던 레온. 하지만 그의 묵상은 얼마 하기도 전에 깨어
졌다.
 알리시아가 채 10분도 되기 전에 돌아온 것이다.
 덜컥.
 문이 열리자 레온이 고개를 돌렸다. 알리시아가 어깨가 축
늘어진 채 들어오고 있었다. 그가 명상을 멈추고 몸을 일으
켰다.
 "일이 잘 안되셨습니까?"
 "이곳 사정은 페이류트와는 다르군요. 평민은 도서관에 들
어갈 수 없어요. 오직 정식 작위가 있는 귀족만이 도서돤에
출입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무투회에 참가하려면 
반드시 출신 국가가 명시된 신분증이 있어야 해요. 현재 상
태로 레온님께선 무투회에 참가할 수 없어요."
 알리시아의 말을 들은 레온의 안색이 딱딱해졌다. 무투회
에 참가할 수 없다면 초인선발전에 참가할 금액을 모으지 
못한다. 레온으로서는 이만저만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실망하는 레온을 보며 알리시아가 걱정 말라는 듯 빙긋 미
소를 지었다.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달리 생각해 놓은 방법이 있으니
까요."
 "……."
 "다른 사람의 신분증을 구해 위장하면 되요. 도둑길드를 
찾아내면 신분증을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책에 나와 있더
군요."
 페이류트에 머물면서 알리시아가 중점적으로 읽은 책은 
다름 아닌 여행기였다. 거기에는 모험가들이 겪은 별의별
경험들이 다 나와 있었다. 알리시아는 그 중에서 한 가지
를 기억해낸 것이다.
 "무릇 도시에는 어디에나 암흑가가 존재하기 마련이죠. 
도둑길드, 암살자길드, 매춘길드 등의 조직들이 암흑가를
주름잡고 있어요. 그곳에 가면 신분증을 위조할 수 있다고
해요. 그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돈을 주고 인상착의가 비
슷한 타인의 신분증을 사는 것이죠. 암흑가에서는 사람들
이 흔적도 없이 실종되는 일이 종종 일어나기 마련이니까
요."
 "그런 방법이 있었습니까?"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나 통용되는 법칙이 있기 마련이
죠. 그럼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지금 당장 신분증을 구
하러 가 볼까요?"
 냉큼 몸을 일으키는 알리시아를 보며 레온이 눈을 끔뻑
거렸다.
 "하, 하지만 도둑길드가 어디 있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제가 읽은 여행기에 도둑길드를 찾는 방법이 나와 있었
어요. 단 실력에 자신이 있는 여행자만 시도해 보라고하
더군요. 그만한 실력이 없는 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
져 버린다고 하네요. 뭐 그 문제는 레온님이 계시니 상관
없겠지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던 레온이 몸을 일으
켰다. 벽에 기대어 세워놓은 그레이트 엑스를 어깨에 걸치
는 레온을 보며 알리시아가 생긋 웃으며 문을 열었다.
 "그럼 신분증을 구하러 나갈볼까요?"

 거리로 나간 그들은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해가 져서 시
워가 어둑어둑했다. 알리시아가 눈을 빛내며 주위를 돌러
보았다.
 "일단은 유흥가에 위치한 큰 술집을 찾아야 해요. 가급적
하류인생들이 몰려드는 곳으로요."
 "혹시 생각해 놓은 방법이 있습니까?"
 알리시아가 생긋 웃으며 귀엣말을 건넸다. 말을 들은 레온
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위험천만한 방법이로군요. 아무나 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레온님께서 계시니까 쓸 수 있는 거예요. 힘의 법칙은 트
루베니아나 아르카디아나 다르지 않게 통용되죠."
 "그렇다면 준비를 좀 철저히 할 필요가 있군요."
 레온의 시선이 주위를 훑었다. 길가에는 상점들이 줄지이
늘어서 있었다. 보편적으로 여행자들이 묵는 숙소 부근에
는 여행용 물품을 파는 상점들이 자리 잡기 마련이다. 여행
에 필요한 물품들은 대부분 숙소 부근에서 구할 수 있다.
 "뭘 찾는 거죠?"
 "무기를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그레이트 엑스는 둔할
뿐더러 파괴력이 너무 강하죠."
 "하긴 한 대 맞므연 최하가 사마일 테니……."
 주위를 훑던 레온이 마침 원하는 상점을 찾았다. 무기를 잔
뜩 진열해 놓고 파는 무기점이었다. 그가 머뭇거림 없이 그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무기점 안으로 들어가자 늙수그레한 주인이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어떤 무기가 필요하십니까?"
 레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진열대를 죽 둘러보았다. 입
을 열었다간 트루베니아 출신이란 사실이 탄로 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뒤따라 들어온 알리시아가 주인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기를 하나 사러 왔어요. 괜찮은 무기들이 있나요?"
 "물론입니다. 저희 가게에서는 자체적으로 공방을 두고 병
장기를 공급받고 있습니다. 품질 하나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알리시아가 주인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레온은
진열대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진열된 병기들은 태만이
장검이었다. 롱 소드 종류가 거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것
을 봐서 아르카디아에서는 검이 가장 일반적으로 쓰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레온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아르카디아에서도 역시 창을 천시 받는 무기로군.'
 레온의 짐작대로 창 종류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헬버트(Halbard:도끼창) 한두 자루가 구석진 곳에 기대어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필럼(Pilum:투척용 창)이나 파이크
종류는 하나도 진열되어 있지 않았다. 창술을 깊이 익힌 
레온에겐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기필코 창이란 무기의 무서움을 아르카디아에 확실히 각
인시킬 것이다.'
 묵묵히 다집한 레온의 발걸음이 다음 진열대로 향했다. 거
기에는 모닝스타(Morningstar)나 워 해머, 베틀 엑스(Battle
Axe) 따위의 타격용 무기가 진열되어 있었다. 무심코 지나려
던 레온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진열대 아래쪽엔 놓인 메이스
를 본 것이다.
 메이스는 둔중한 머리통을 가진 타격용 무기이다. 날이 서
있지 않아 몽크나 신관전사들이 자주 애용하지만 용병들 사
이에는 그리 폭넓게 이용되는 무기가 아니다. 전신갑주를 입
은 기사를 때려눕히는 데에는 훌륭한 무기지만 무게 때문에
휘두르기가 만만치 않다. 또한 몸놀림이 재빠른 용병이라면
어렵지 않게 메이스를 피해낼 수 있다. 물론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소드 익스퍼트 이상의 검수에겐 더더욱 통하지 않
는다. 하지만 레온의 시선은 좀처럼 메이스에서 떠나지 않
았다. 
 '그러고 보니 이게 쓸 만하겠어. 스승님과 대련하며 비슷
한 형태의 곤봉을 많이 다뤄봤으니 말이야.'
 레온의 눈동자는 어느덧 아련한 그리움에 젖어 있었다. 사
실 그는 스승에게서 병기술을 거의 배운 게 없다. 스승 데이
몬의 주력무기는 호조(虎爪), 스파이크드 건들릿(Spikde Gau
ntlet)과 흡사한 무기였다. 그런 무기로 창을 쓰는 레온과
제대로 된 대련을 하기 힘들다. 그런 만큼 데이몬은 다른 무
기를 써서 대련을 했다.
 스승이 선택한 것은 강철로 된 곤봉이었다. 하나는 길고 하
나는 짧은 곤봉을 들고 창을 든 레온과 대련을 했던 것이다.
 '정말 신묘한 움직임이었지, 길고 짧은 두 자루의 곤봉으로
그토록 원활한 공격과 방어가 가능할 줄은 몰랐어.'
 데이몬의 곤봉술에 매료된 레온은 틈나는 대로 기술을 전수
받았다. 종국에는 서로가 곤봉으로 이용해 치고받는 대련을 
벌였을 정도였다. 그런데 진열대에 놓인 메이스는 그때 사용
하던 곤봉과 생김새가 매우 흡사했다. 마음을 정한 레온이 
손을 뻗어 메이스를 집어 들었다.
 '잘 되었군. 이걸 이용한다면 하수들은 손쉽게 때려눕힐 수
있을 거야. 뭐, 날이 없으니 크게 다칠 염려도 없을테고…….'
 메이스도 종류가 여러 가지였다. 레온은 그중 길이가 80cm
정도 되는 것과 60cm정도 되는 메이스를 한 자루씩 골랐다.
그 모습을 본 주인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메이스 두 자루를 사용하시려고요? 그럼 길이가 같은 것을
고르셔야 할 텐데?"
 레온은 상관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알리
시아가 주인과 흥정을 벌였다. 그녀의 흥정기술은 이미 경지
에 올라있다. 그래서 알리시아는 도합 20실버라는 싼 가격에
메이스 두 자루의 가격을 치렀다.
 돈을 받은 상인이 울상을 지었다.
 "이렇게 팔면 남는 것도 없는데……."
 "그래도 밑지지는 않잖아요? 그럼 수고하세요."
 병장기를 패용하는 가죽 혁대까지 덤으로 받아온 알리시아
가 그것을 레온에게 내밀었다. 말없이 혁대를 찬 레온이 메
이스 두 자루를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무기점 밖으로 나온
알리시아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레온의 허리춤에 덜렁거
리는 메이스를 쳐다보았다.
 "두 자루를 동시에 사용하려면 길이가 같아야 하지 않나요?"
 "길이가 길고 짧으면 궤적과 무게 차이로 인해 덕욱 현란
한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긴 것은 묵직하게, 짧은 것은 
날렵하게……."
 "그런가요?"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머리를 흔든 알리시아가 잰걸음으로
레온을 따라붙었다.
 "그럼 이제 목적을 이루러 가야죠?"

 알리시아의 목적지는 환락가 중심부에 위치한 허름한 주점
이었다. 건물이 낡았지만 규모 자체는 매우 컸다. 족히 200
명 이상의 취객들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머뭇거림 없
이 가운데 자리에 앉은 알리시아가 위스키 두잔을 시켰다.
 "자, 이제부터 작전을 시작해 볼까요?"
 그녀는 상당히 위험천만한 일을 감행했다. 경비가 든 가죽
주머니를 꺼내어 풀어헤친 것이다. 그 안에는 레온이 벌목
으로 번 금화가 들어 있었다. 모두 합쳐서 20골드가 넘었는
데 레온이 워낙 많은 돈을 벌었기에 이것저것 사고도 이 정
도나 남은 것이다. 누런 금화가 모습을 드러내자 주변이 조
용해졌다. 술을 마시던 취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 테이
블로 쏠렸다. 그들의 눈동자엔 어느덧 탐욕이 어려 있었다.
 취객들의 탐욕스런 시선을 받으며 알리시아가 금화를 하나
씩 헤아렸다. 레온이 못 말리겟다는 듯한 눈빛으로 알리시
아를 쳐다보았다.
 '정말 당돌한 아가씨로군.'
 알리시아가 꾸민 계획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술집에서 거
금을 보인다면 일확천굼을 노린 날파리들이 분명 꼬여들 것
이다. 그들을 하나둘씩 족치다 보면 틀림없이 도둑길드의 
길드원이 나올 것이란 계산이었다. 위험천만하지만 효과 하
나는 확실한 방법이다.
 느릿한 태도로 돈을 센 알리시아가 다시 금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취객들의 시선은 도무지 주머니에서 떨어질 줄
을 몰랐다. 술값으로 동전 두 닢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알
리시아가 몸을 일으켰다.
 "그럼 미끼를 풀어놓았으니 일어나 볼까요?>"
 이미 주문한 위스키 두 잔은 레온의 뱃속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묵묵히 몸을 일으킨 레온이 알리시아의 뒤를 따
랐다.
 주점을 나선 알리시아가 인적이 드물고 어두운 골목을 향
해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주점에서 그림자들이 속속 나
와 레온과 알리시아가 들어간 골목을 향해 몸을 날렸다.
 "우아악!"
 뼈가 생으로 부러지는 통증에 청년이 비명을 내질렀다. 상
박이 퉁퉁 부어오른 것을 보아 골절이 확실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앞의 거구를 쳐다보았다. 돈을 빼앗
기 위해 술을 마시던 친구들과 무리를 지어 나온 것까진 좋
았지만 거구의 사내는 강해도 너무 강했다.
 길고 짧은 메이스를 빼어들고 기다리는 거한을 보며 청년
들이 서로 눈짓을 했다.
 "괜찮아. 우리들이 일제히 덤비면 제아무리 덩치 큰 놈도
어쩔 수 없어."
 메이스는 단 두 자루뿐이다. 여섯 명이 일제히 덤비면 충
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였기에 그들은 머뭇거림 없
이 달려들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크으윽!"
 "아, 아파!"
 건달 여섯 명은 여기저기 널브러져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사지중 하나가 부러진 상태였다. 그들은 상대의 
메이스가 어떻게 움직였는지조차 제대로 식별하지 못했다.
거구의 사내는 저 육중한 메이스를 마치 장난감처럼 휘둘
러 자신들을 때려눕혔다. 그들의 귓전으로 싸늘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돈을 노리고 사람을 습격했으니 그 정도 대가는 치러야
지. 빨리 사라지지 않는다면 한두 군데 더 분질러 주마."
 그 말에 기겁을 한 건달들이 필사적으로 기어서 그곳을 
빠져나갔다. 육중한 메이스에 맞아 뼈가 으스러지는 경험
은 산전수전 다 겪은 건달들에게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레온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틀거리며 멀어지는 건달들을 
쳐다보았다.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저들은 결코 도둑길드
의 조직원들이 아니다. 한 조직의 조직원이라면 특유의 기
질이나 기개가 있을 터, 그런 명에서 저들은 그냥 이리저
리 굴러먹는 건달일 뿐이었다. 그런 레온의 판단력을 믿
었는지 알리시아는 잠자코 또다시 등장할 손님을 기다렸
다.
 "또 왔군요."
 골목 입구에는 또다시 여러 명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
다. 그들을 쳐다보는 레온의 눈빛이 또다시 스산해지기 시
작했다.

 알리시아의 예상은 적중했다. 네 번째 나타난 무리들이 바
로 도둑길드의 조직원들이었다. 세 번째가지는 단순히 돈을
노린 건달 무리였다. 그들은 레온의 메이스에 톡톡히 혼이
난 뒤 엉금엉금 기어서 빠져나가야 했다.
 네 번째 만에 기다렸던 무리들이 나타났다. 이들의 등장은
이전의 건달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우선 차림새부터가 틀
렸다.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에, 몸에는 착 달라붙는 야행
의를 걸쳤다. 신발바닥에 무두질한 가죽을 붙였기에 둘이 
깔린 골목을 걸어오는데도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레온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저놈들이 도둑길도원인 것 같군요."
 그 말에 알리시아가 바짝 긴장했다.



  6. 무식한 방법으로 도둑길드에 난입하다 



 레드디나의 도둑길드에 소속된 알폰소는 눈매를 가늘게
뜨며 두 명의 남녀를 쳐다보았다. 터질 듯한 근육을 가진
거구의 사내와 날씬한 체구의 여인이 골목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뭐하는 놈들일까?'
 그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드에서 데리고
온 다섯 명의 행동대원들이 팔짱을 낀 채 덩치를 노려보
고 있었다.
 사단이 벌어진 것은 바로 조금 전이었다. 도둑길드에서
는 각지의 건달들 중에서 정보원을 심어두고 있다. 그중
한 명이 팔이 부러져 엉엉 울면서 길드의 지부를 찾아왔
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정보원의 설명을
들은 알폰소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그 작자는 절 마, 만나자 마자 대뜸 도둑길드 소속
이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래서 아니라고 했더니 마구잡이
로……."
 만약 그 정보원 하나로 상황이 끝냈다면 알폰소도 출동
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로도 두 명의
정보원이 더 들어왔고 그들 역시 팔이 부러져 울상을 짓
고 있었다. 그렇게 되자 알폰소도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놈일까? 도대체 뭐하는 놈이기에 도둑길드를 찾는
거지?"
 결국 알폰소는 행동대원 다섯 명을 대동한 채 지부를 나
섰다. 그들은 건달들과는 차원이 다른 실력을 가진 정예
요원들이었다. 감히 도둑길드를 수소문하는 건방진 놈들
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것이 알폰소의 판단이었
다. 그 결과 이렇게 골목에서 두 남녀와 마주하게 된 것
이다.
 물끄러미 거구의 사내를 쳐다보던 알폰소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당신들은 누구지?"
 그러나 입을 연 것은 거구의 사내가 아니라 옆에 서 있던
왜소한 체구의 여인이었다.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여인은
상당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당신들은 도둑길도원인가요?"
 알폰소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체를 모르는 이
방인에게 자신의 신분을 노출할 순 없는 노릇이다.
 빨리 정리하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알폰소가 버럭 고
함을 질렀다.
 "별 시답잖은 소릴 하고 있군. 아무튼 조금 전 너희들이
때려눕힌 자들은 우리 정보원들이다. 뼈를 부러뜨렸으니
거기에 대한 대가를 받아 내야겠다."
 그가 눈짓을 하자 행동대우너들이 앞으로 쓱 나섰다. 뒤로
돌려 감춘 그들의 손바닥 안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각각 한
자루씩 숨겨져 있었다. 알폰소가 신호를 할 경우 도합 열
자루의 단검이 거구의 사내를 향해 날아갈 터였다.
 '우리 정보원들을 다치게 했으니 가만히 둘 수 없지. 사내
는 죽여 버리고 계집은 잡아가야겠군. 미모가 상당하니 짭
짤한 가격에 매춘길드에다 팔 수 있을 것 같아.'
 건달들을 때려눕힌 것을 보니 제법 실력이 있는 자 같았지
만 알폰소는 상관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용
병이라도 사방을 점하고 날아가는 단검 열 자루를 피할 순
없다. 단검에는 독이 발라져 있기 때문에 살짝이라도 스칠
경우 사내는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알폰소가 머뭇거림 없이 명령을 내렸다.
 "하룻강아지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어라."
 말을 마친 순간 다섯 자루의 단검이 대기를 갈랐다. 이어
나머지 다섯 자루 역시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날아갔다.
 쐐애애액--
 도합 열 자루의 단검이 날아왔지만 레온의 얼굴에는 아무
런 표정변화도 없었다. 상식적으로 고작 저 정도의 공격이
그에게 위해를 가할 순 없다.
 알리시아의 앞을 막아선 레온이 메이스를 슬쩍 들어올렸
다. 살짝 움직인 메이스가 두 자루의 단검을 가볍게 퉁겨
냈다.
 파팍!
 이어 짧은 메이스가 빈틈을 파고들던 단검 세자루를 잇달
아 쳐서 떨어뜨렸다. 그 모습을 본 알폰소가 눈이 툭 튀어
나올 정도로 놀랐다.
 '저, 저토록 가볍게 단검을 쳐내다니…….'
 이어 사내가 가볍게 메이스를 휘둘러 뒤이어 날아든 다섯
자루의 단검을 모두 쳐내자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후퇴 명령을 내렸다. 저 정도 실력이라면 자신들로서는 감
히 당해낼 수 없는 강자였다.
 "모두 후퇴한다!"
 명령이 떨어지자 행동대원들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도주하는 데는 이력이 난 도둑길드원들이라 그들
은 자신들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고 확신했다.
 거리를 유지했기 때문에 상대가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에 불과했다.
 "커헉!"
 다급한 신음소리와 함께 두 명의 길드원이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알폰소의 눈에 거구의
사내가 어느새 다가와 메이스를 휘두르는 모습이 들어왔다.
팔을 움켜쥐고 늘어진 길드원 두 명에 이어 또다시 두 명
의 길드원이 메이스에 맞아 맥없이 쓰러졌다. 그야말로 일
인일격이었다.
 우두둑--!
 뼈 부러지는 소리가 알폰소의 오금을 저리게 했다.
 '도, 도망쳐야 해.'
 그가 반사적으로 담장 쪽으로 몸을 날렸다. 나머지 한 명
의 길드원이 시간을 벌기 위해 단검을 뽑아들고 거한의 앞
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몸부림일 뿐이었다.
메이스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더니 길드원의 몸이
난데없이 훨훨 날아 담장에 처박혔다.
 팔이 반대반향으로 돌아간 것을 보아 뼈가 부러진 것이
확실했다. 알폰소의 이마에는 어느덧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으으……. 어디서 저런 놈이…….'
 공포가 전신을 장악했지만 혹독하게 훈련받은 몸은 아랑
곳없이 움직였다. 벽을 슬쩍 디딘 알폰소의 몸이 어느새
담장 위에 올라서 있었다.
 막 뛰어내리려던 순간 알폰소의 눈이 툭 불거졌다. 우악
스러운 손길이 어느새 목을 뭄켜쥐었던 것이다. 허공에 대
롱대롱 매달린 상태로 알폰소가 마구 발버둥을 쳤다.
 
 레온은 무심한 눈빛으로 포획한 도둑길드원을 쳐다보았다.
그의 안목으로 볼 때 상당히 훈련을 거친 자가 분명했다.
 '단검술이 꽤나 쓸 만했지. 내 짐작이 맞다면 이자들은 
도둑길드원이 확실해.'
 고개를 끄덕인 레온이 몸을 날렸다.
 쿵!
 그의 거구가 사뿐히 바닥에 내려섰다. 그러자 벽 쪽에 웅
크리고 있던 알리시아가 재빨리 다가왔다.
 "성공하셨군요."
 살짝 고개를 끄덕인 레온이 알폰소를 바닥에 내동댕이쳤
다. 가쁜 숨을 몰아쉰 알폰소가 독기 어린 눈빛으로 레온
을 노려보았다.
 "무, 무슨 의도로 이, 이러는지 모르지만 너희들은 이, 
이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우, 우리가 누구인지 아느
냐?"
 알리시아가 태연히 말을 받았다.
 "제가 보기엔 도둑길드 소속 분들이 맞는 것 같군요. 안
타까워요.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는 신사적으로
대할 수 있었을 텐데요."
 "크으으……. 빌어먹을 년! 네년을 갈기갈기 찢어 개밥으
로……."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털어놓던 알폰소의 눈이 커졌다.
뭔가 육중한 것이 엄청난 속도로 그의 머리통을 향해 떨
어져 내렸던 것이다. 미처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알폰소
가 눈을 부릅떴다. 뭔가가 그의 눈동자 바로 위에 멈추며
부르르 떨었다. 불과 종이 한 장 정도의 간격을 둔 채.
 "헉. 허억!"
 알폰소가 그때서여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긴장이 풀리며
그의 바지춤이 젖어 들어갔다. 공포감을 참지 못하고 그만
오줌을 지려버린 것이다. 그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린 
것은 한 자루의 육중한 메이스였다. 거한이 힘껏 휘두른
메이스를 정확히 알폰소의 눈동자 앞에서 멈춘 것이다. 말
이 종이 한 장 간격이었지 당사자인 알폰소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경험이다. 
 말을 잃고 숨을 할딱거리는 알폰소의 귓전으로 억양의 고
저가 없는 괴이한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한 번은 경고다. 한 번만 더 불손하게 굴 경우 머리통을
돌바닥에 깊숙히 박아주겠다."
 듣고 있던 알폰소는 등골이 오싹했다. 저토록 육중한 메이
스를 휘둘러 마음먹은 곳에 딱 멈출 정도라면 그가 감히 개
길 만한 상대가 아니다. 팔이 부러진 도둑길드원들은 이미
그곳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분명 본부에 이 사실을 보고하
러 갔을 터였다.
 레온의 무심한 시선이 알폰소에게 머물렀다.
 '억양의 고저를 없애면 트루베니아 말투를 숨길 수 있다
고 알리시아님께서 말하셨지. 그럼 지금부터 심문을 시작
해 볼까?'
 레온의 약점은 명백히 드러나는 트루베니아 억양이다. 트
루베니아 출신이란 사실이 대번에 드러나기 때문에 알리시
아는 레온에게 한 가지 충고를 했다. 세 번째 건달 패거리
를 때려눕힌 다음에 나눴던 대화였다.
 "억양의 고저를 없애세요. 조금 괴이하게 들리긴 하겠지
만 레온님이 트루베니아 출신이란 사실을 어느 정도 술길
순 있을 거예요."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억양을 없애는 것은 그리 어렵게 않아요. 한 번 해 보세
요. 혀를 입천장에 대고……."
 알리시아와의 대화를 떠올린 레온이 혀를 말아 입천장에
대고 말문을 열었다. 괴이한 음성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
왔다.
 "도둑길드원이 맞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알폰소가 감히 부인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귓전으로 알리시아의 청아한 음
성이 파고들었다.
 "당신들 길드에 볼 일이 있어 왓어요. 저희들을 도둑길드
의 본부로 안내해 주시겠어요?"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알폰소의 눈가에 스산한 빛이 떠올
랐다. 비록 지금은 힘이 없어 당했지만 도둑길드의 본부에
는 실력 있는 어새신들이 수두룩하다. 비록 정면대결로는 
상대가 되지 않지만 어새신의 장기가 무언가? 바로 암습 아
니겠는가? 곳곳에 숨겨진 함정을 감안하면 설사 상대가 소
드 마스터도 능히 제압할 수 있다.
 '행동대원들이 돌아갔으니 본부에서도 상황을 보고받았을
터, 이놈들을 데리고 본부로 가야겠군.'
 알폰소의 얼굴이 다시금 이전의 평온을 되찾았다.
 "좋소. 당신들을 우리 길드의 본부로 안내하겠소."
 어두운 밤거리를 알폰소가 창백한 얼굴로 걷고 있었다. 그
뒤를 레온과 알리시아가 바짝 붙어 뒤따랐다. 도둑길드가 
위치한 곳은 상당히 멀었다.
 환락가 중심지를 관통해 인적이 드문 골목을 빠져나간 알
폰소가 황량함이 느껴지는 야산으로 올라갔다. 레온과 알리
시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뒤를 따랐다.
 야산을 넘어가자 또 다른 시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리
시아가 기이한 눈빛으로 시가지를 둘러보았다.
 '시가지 중심부에 도둑길드의 본부가 있나보군.'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알폰소는 시가지
와곽에 있는 허름한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건물 주변에는
건장한 체구의 사내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사내들이 레온을
보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알폰소가 손을 들어올리자 그
자리에 도로 주저앉았다. 알폰소가 거만한 태도로 명령을
내렸다.
 "본부로 찾아온 손님이다. 접대 준비를 하라."
 그 말에 사내 몇 명이 머뭇거림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
어갔다.
 
 허름한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끝없이 펼쳐진 복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온과 알리시아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알
폰소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쳐다보는 알리시
아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내가 말로만 듣던 도둑길드에 들어와 보다니…….'
 자고로 암흑길드는 어느 왕가에나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
다. 국법이 미치지 못하는데다가 지닌 무력이 만만치 않았
기 때문에 멸망한 아르니아 왕가에서는 도둑길드의 정체를
알면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괜히 건드렸다간 크나큰 피해
를 입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실력행사를 한 국왕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기사들을 투입하더라도 암흑가를
깔끔하게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도리어 기사들이 흔
적도 없이 실종되는 일이 종종 일어나자 국왕은 결국 암
흑가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국가 전체의 힘으로 암흑가를 정리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대대적으로 군대를 투입한다면 암
흑가를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
서 무얼 얻겠는가? 암흑가 하나를 쓸어버린다 해도 1년이
내에 또 다른 조직이 생겨날 것이 분명했다. 그 때문에 
권력자들은 여간해서는 암흑가에 손을 대지 않는다. 나름
대로 체계를 잡고 돌아갈 수 있게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다.
 정규교육을 받으며 알리시아는 그런 암흑가의 생리에 대
해 배웠다. 그러니 도둑길드에 들어서는 심정이 남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레온은 살짝 긴장하고 있었다. 보기에는 지극히 평
범해 보이는 벽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 숨어 있는 자들의
기척을 레온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기관장치도 적지 않게 매설되어 있군. 조심해야겠어.'
 지금 걷고 있는 바닥에도 함정이 설치되어 있었다. 미미
하게 공명하는 것을 보아 아래쪽이 비어 있는 것이 확실
했다. 그 사실을 간파한 레온이 살짝 마나를 끌어올렸다.
 만약 바닥이 꺼진다면 그 즉시 알리시아르 안고 신법을
발휘해 뛰어오를 생각이었다. 벽을 통해 화살이나 단검이
쏘아지겠지만 호신강기를 뿜는다면 털끝 하나 다치지 않
는다.
 이렇게 레온은 모든 상황을 예상한 채 복도를 걷고 있었
다. 하지만 기관장치는 발동되지 않았다. 앞장서서 걷고
있던 알폰소의 눈가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상하군. 함정이 있는 곳을 그냥 지나치다니……. 길드
장께서 무슨 마음을 품으셨는지 모르겠군. 한 번 만나 보
고 결정하실 생각인가?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본부로 가야
겠군.'
 모르긴 몰라도 길드원들은 지금쯤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
을 터였다. 혹시라도 뒤를 쫓는 무리가 있다면 길드 소속
원들은 그 즉시 본부를 폐쇄하고 비밀 통로를 통해 빠져
나가야 한다. 철저한 비밀엄수, 이것이 바로 도둑길드가
지금가지 존재해 온 토대였다.
 복도를 지나치자 큼지막한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이
바로 도둑길드가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였다. 그 뒤에 늘어
선 방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다. 응
접실에는 이미 20여 명의 장한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앞에는 장대한 체구의 사내가 팔짱을 낀 채 유유히 서 있
었다. 그가 바로 레드디나의 도둑길드장이었다. 슬며시 그
와 눈빛을 나눈 알폰소가 옆으로 빠졌다.
 "다 왔소. 여기가 바로 우리 길드의 본부요. 이제부터는 
길드장과 대화를 해 보시오."

 알리시아가 담담한 눈빛으로 도둑길드장을 쳐다보았다.
등 뒤에 레온이 버티고 서 있었기에 두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천신이 뒤에 도사리고 있는 양 든든했다.
 "당신이 레르디나의 도둑길드장인가요?"
 길드장은 아무런 말없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불
필요한 대화를 하기 싫다는 태도 같았다.
 "원한느 게 있어서 귀 길드를 찾았어요. 우선 당신 길드원
들을 상하게 한 점에 대해서는 사과드리죠. 하지만 당신들
이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면 대화로 해결할 수 있었을 거예
요."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탁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우리에게 무얼 원하는 건가?"
 알리시아가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것은 위조신분증이에요. 가급적이
면 우리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타인의 것이면 좋겠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길드당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고작
그 정도의 일 때문에 도둑길드의 본부를 찾아왔다는 말인
가?
 사실 도둑길드는 현재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외부인이
본부까지 들어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엄청
난 일을 저질러 놓고 고작 위조신분증 따위 시답잖은 용무
를 꺼냈으니 기가 막힐 수밖에 없다.
 길드장의 눈가에 스산하게 살기가 떠올랐다.
 "고작 그런 일 때문에 길드를 발칵 뒤집어 놓은 거요?"
 "……."
 "그런 용무라면 통상적인 방법으로 청부를 넣어도 충분하
지 않았소?"
 길드장의 말에 알리시아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통상적인 방법을 전혀 몰랐거든요."
 길드장의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이렇게 무모한 방법을 듣고
찾아온 거요."
 "책에서 읽었어요. [오르테거의 여행기]란 책에 나와 있
더군요. 페이류트의 도서관에서 읽었어요."
 순간 길드장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잊고 있던 기억이 떠
오른 것이다.
 길드장의 이름이 바로 오르테거였다. 그는 젊은 시절 아르
카디아 전역을 돌아본 모험가 출신이기도 했다. 추억을 떠
올렸는지 오르테거의 눈빛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래, 맞아. 그때 나도 충동에 사로잡혀 여행기를 쓴 적
이 있어. 그런데 뜻밖이로군. 내가 쓴 책이 페이류트의 도
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니…….'
 자세히 생각해 보니 그런 내용을 쓴 것도 같았다. 오르테
거 자신도 같은 방법을 써서 북부에 위치한 한 도시의 도둑
길드 본부를 찾은 적이 있다. 당시 오르테거는 도둑길드원
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반사상태에 빠져
있었다. 함께 하던 동료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 곳에 뼈를
묻어야 했을 것이다.
 이후 오르테거는 모험을 계속하다가 나이가 들어 레드디나
에 정착했다. 그리고 수많은 싸움을 거쳐 이곳의 도둑길드
장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모험가 시절 심심풀이삼아 쓴 
여행기를 읽고 누군가가 똑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찾아오다
니…….
 오르테거의 입가에 실소가 걸렸다.
 '세상은 요지경이야. 정말 보통 인연이 아니로군.'
 원래대로라면 사내는 죽여 없애고 여자는 적절한 대가를 
받고 매춘길드에 팔아넘기는 것이 정석이다. 이곳까지 들
어온 외부인의 태반은 그런 방법으로 세상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오르테거에게는 그러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어쨌거나 자신이 제시한 방법을 따라 시행한 후배 모험가
가 아닌가?
 마음을 정한 오르테거가 손짓을 했다.
 "비상사태를 해제한다."
 그것을 본 길드원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공격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외부인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지하라
니……. 이해하기 힘든 명령이었지만 길드원들은 군소리
없이 명령에 복족했다. 사내들 대부분이 응접실을 나갔고
알폰소 역시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다시 복도로 사라졌
다. 비상사태가 해제되었으니 다시 지부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이곳까지 들어온 외부인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그랜드 마스터란 사실을……. 만약
길드장이 공격 명령을 내렸다면 그날이 바로 레르디아 도
둑길드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날이 되었을 터였다. 그 사실
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길드장 오르테거가 성큼성큼 걸어
와서 알리시아 앞에 섰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런 방법을 쓰지 마시오. 세상에
서 감쪽같이 증발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오."
 "……."
 "위조신분증을 구해줄 테니 날 따라오시오."
 눈을 크게 뜨고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알리시아가 얼
른 뒤를 따랐다. 레온은 비로소 긴장을 풀었다.
 '잘 되었군. 한바탕 푸닥거리를 해야 할 줄 알았는데 생각
보다 쉽게 해결되었어.'

 다시 복도로 나간 둘은 길드장의 뒤를 따라 조그마한 방으
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큼지막한 탁자와 의자 몇 개가 놓
여 있었다.
 길드장이 손을 뻗어 의자를 권했다.
 "당신들은 정말 운이 좋소. 하필이면 내가 자리에 있을 때
방문했으니 말이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 이름이 바로 오르테거요."
 그 말을 들은 알리시아의 눈이 커졌다. 그렇다면 길드장이
바로 여행기를 작성한 장본인이란 말인가?
 알리시아의 의문을 알아차린 듯 길드장이 어깨를 으쓱였
다. 
 "젊은 시절 심심풀이로 여행기를 썼지. 아무튼 내 책을 읽
어 주어 고맙소. 하지만 길드장의 입장에서는 결코 권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오. 만약 길드장이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
이었다면……."
 살짝 말을 끊은 길드장이 두 사람을 물끄러니 쳐다보았다.
 "당신들 두 사람은 아주 흉한 꼴을 겪게 되었을 것이오. 
그러니 정말 다행으로 생각하시오."
 하지만 레온과 알리시아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길드장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을 것이
고 그런 다음 둘은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도둑길드가 풍비박산이 난 다음에 말이다. 그런 관점
에서 보면 그들이 아니라 도둑길드장이 정말 운이 좋은 것
이었다.
 알리시아의 영리한 눈빛이 반짝였다.
 '어쨌거나 다행이야. 지금으로썬 레온님의 정체를 철저히
감춰야 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은 오르지 블러디 나이트로
한정시켜야 해. 레온님은 그저 조금 실력 있는 용병으로 
행세해야 한다고…….'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길드장이 서랍에서 펜과 종
이를 꺼냈다.
 "금화가 제법 있다고 하니 치를 금액은 충분하겠지. 그래
어떤 신분증을 원하시오."
 살짝 마음을 가라앉힌 알리시아가 길드장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귀족 신분증이면 좋겠네요. 자작이나 남작 정도의 영애
신분으로 활동할 생각이거든요."
 길드장이 알리시아의 말을 듣자마자 머리를 흔들었다.
 "어리석은 생각이오. 귀족 사칭죄는 엄청나게 큰 범죄행
위요. 만약 발각될 경우 운 나쁘면 사형, 그렇지 않으면
평생 동안 감옥에서 썩어야 하오. 게다가 귀족 행세는 아
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
 "단순한 말투를 흉내낸다고 해서 귀족 행세를 할 순 없소.
일단 귀족들의 예법과 형식을 깊이 있게 익혀야 할 뿐만
아니라 귀족가의 생리에도 해박해야 하오."
 길드장의 말은 지당했다. 단순히 지식만 익힌다고 귀족행
세를 할 순 없다. 어릴 때부터 평민과는 판이하게 다른 삶
을 살아온 귀족들에게서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품이 느
껴진다. 평민들이야 식별하기 힘들겠지만 귀족들이라면 대
번에 차이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길드장이 알리시아의 정체를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알리시아는 귀족 중에서도 최고의 귀족인 왕족
출신이다. 비록 트루베니아의 작은 왕국이라고는 하지만 
어릴 때부터 예의범절을 익혀왔다. 그런 관점에서 길드장
의 우려는 전혀 소용이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려를 불식시킬 필요가 있었기에 알리시아가 살짝 미소
를 지었다.
 "괜찮아요. 전 어릴 때부터 귀족가의 시녀로 자랐어요. 
그것도 상당한 고위 귀족가에서 일했죠. 그러니 귀족의 
예법이나 옷차림, 생리에 대한 것은 귀족에게 뒤지지 않
을 만큼 잘 알고 있어요."
 그 말에 길드장의 얼굴이 풀렸다.
 "그렇다면 생각할 만하군. 하지만 귀족의 신분증은 매우
비싸오. 최소한 20골드 이상 지불해야 할 것이오."
 생각보다 비싼 금액에 알리시아가 입을 딱 벌렸다. 하지
만 그들의 입장에서 신분증은 가장 절실히 필요한 물건이
었다. 그 이상의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구매해야 하는 물
품인 것이다.
 "신분이 확실한가요? 나중에 이상은 없겠죠?"
 "걱정하지 마시오. 신분증의 주인은 이미 썩어서 뼈만
남아 있을 것이오. 대금을 지불하면 신분증 주인에 대한
상세한 신상자료를 알려 주리다. 그 전까지는 비밀을 유
지해야 하니 이해해 주시오."
 길드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알리시아가 입을 열었다.
 "20골드를 지불할 테니 덤으로 남자 신분증을 하나 더 
구할 순 없나요? 평민이라도 상관없어요. 그저 무투회에
참석할 수만 있으면 되요."
 그 말을 들은 길드장이 살짝 고민하는가 싶더니 흔쾌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그래도 명색이 내가 쓴 책을 보고 찾아온 손
님인데 말이오. 뭐 남자 신분증이야 발길에 채일 정도로 
넘쳐나는 판국이니. 내가 적당한 것을 골라 주리다."
 그 말을 들은 알리시아가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20골드를 추려 건네니 길드장이 잽싸게 금화를 받아 챙겼
다. 그런 다음 은으로 된 고급스럽게 생긴 원판을 꺼내 내
밀었다.
 "이 신분증 주인의 이름은 레베카 드 스탤론이오. 렌달 국
가연합 북쪽의 타르디니아 왕국에 소속된 스탤론 자작가의
영애이지. 스탤론 자작가는 4년 전 벌어진 권력암투에 휘말
려 세상에서 사라졌다오. 가문 구성원 대부분이 역모죄를 
덮어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걸릴 것이 아무것도 없
을 것이오."
 "하지만 역모죄라면 이 신분으로 돌아다니는데 문제가 있
지 않나요?"
 "예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상관없소. 스탤론 자작가가 속
했던 파벌이 다시 권력을 잡은 덕택에 사면령이 내려졌으니
말이오. 하지만 한 발 늦어버렸지. 스탤론 자작가의 모든
남자들은 형장에서 목이 잘렸고 여자들은 모조리 팔려 버렸
으니 말이오. 레베카란 여자도 경매장에서 팔려 이곳 레르
디나까지 끌려왔다오. 매춘길드의 고급 창녀가 되었으니 귀
족가의 영애 치고는 정말 기구한 운명으로 전락했지."
 알리시아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왜 죽었나요?"
 "사면령을 받기 두 달쯤 전에 병들어 죽었소. 보통 귀족여
인들은 이런 곳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오. 워낙 곱게 자랐기
때문에 판이하게 변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
사지. 우리 길드로써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오. 귀족 여인들
은 특유의 기품 때문에 찾는 고객이 많은 편이거든."
 남 말 같지 않았기에 알리시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
신도 언제 레베카와 같은 운명에 처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권력을 잡은 자들도 복권은 시켜줬지만 그다지 기대를 하
지 않는 것 같았소. 레베카의 주소지로 달랑 신분증 하나 
보내고 연락을 끊었으니 말이오. 아무튼 이 신분으로 돌아
다니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을 장담히오, 물론 출처가
우리 길드라는 것은 철저한 비밀이오."
 그 말을 들은 알리시아가 신분증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
는 레베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름: 레베카 드 스탤론
   나이: 26세
   머리색: 붉은 머리
   신체적 특징" 호리호리하고 왜소한 체구의 미인형

 패를 훑어본 알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신체조
건이 거의 비슷했기 때문이다. 귓전으로 길드장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신분증에 눈동자 색이 명시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오. 레
베카는 당신과 같은 다갈색 눈이 아니라 녹색이었으니까…….
미모만을 따지면 당신이 약간 나은 것 같소."
 알리시아가 만족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신분증을 품속에 집
어넣는다.
 "좋아요. 그럼 거래가 성립되었어요."
 "잠깐 기다리시오. 신분증을 챙겼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
나는 것이 아니오."
 길드장이 서랍에서 조그마한 책자를 꺼내 내밀었다.
 "레베카의 가족사와 스탤론 자작가에 대한 사항들이 상세
히 적혀 있소. 가급적 책자를 외워야 할 거요. 모두 외우면
태워 버리시오."
 생각보다 깔끔한 도둑길드의 일처리에 알리시아가 탄복했
다. 이 정도라면 레베카의 신분으로 행세해도 아무런 문제
가 없을 것 같았다.
 "고마워요. 그럼 남자 신분증도 마련해 주세요."
 "잠깐 기다리시오."
 눈을 가늘게 뜨고 레온을 쳐다본 길드장이 투덜거렸다.
 "적합한 신분증을 찾기가 생각보다 어렵곤. 손해 보는 장
사야. 저런 거구는 그다지 흔하지 않지. 요새는 용병들도
흔하게 마나를 다루는 판국이니 구태여 덩치를 키울 필요
가 없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길드장이 서랍을 열어 이리저리 뒤적
거리더니 신분증 하나를 더 꺼냈다. 알리시아의 것과는 달
리 그 신분증은 동판으로 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페이류
트에서 발급받은 임시 신분증과 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그
것보다는 월등히 많은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이름 러프넥, 나이는 22세, 2미터가 넘어가는 신장, 갈
색 머리, 갈색 눈동자, 이 정도요. 용병시험에 응시한 적
이 있지만 자격미달로 탈락했으니 용병길드에 등록되지 않
았을 것이오. 가민히 보자."
 길드장이 눈매를 가늘게 뜨고 신분증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6년 전에 발행된 신분증이로군. 그렇다면 현
재 나이가 28세가 되었겠어. 그 점은 잘 알고 행동하시오.
러프넥에 대한 책자는 없소. 그러니 이후의 일들은 알아서
행동하면 될 것이오."
 알리시아가 슬쩍 입을 열었다.
 "러프넥이란 자는 어떻게 죽었죠?"
 "비밀이오. 아무튼 뒤탈이 없다는 것만 명심하시오."
 길드장의 말에 레온이 지긋이 미간을 모았다. 보아하니 러
프넥의 죽음에 뭔가 흑막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레온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알리시아가 배시시 웃으면 말했
다.
 "저희는 이제부터 무투회에 참석할 생각이에요. 가급적 돈
을 많이 벌 수 있는 곳을 원하죠. 혹시 추천할 만한 장소가
있나요?"
 그 말에 길드장이 눈살을 찌푸린 채 알리시아를 쳐다보았
다. 뭔가를 알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 하낱 책자의 내용을 믿고 도둑길드를 방
분한 자들이 어찌…….'
 세상에 양지가 있다면 의당 음지가 있기 마련이다. 같은 맥
락으로 무투회 역시 겉으로 드러난 것 외에 음지에서 성행하
는 무투회가 존재한다. 부편적으로 무투회에서는 상대를 죽
이는 것을 철저한 금지사항으로 삼는다. 제아무리 실력이 있
는 무투가라도 상대를 죽일 경우 자동적으로 패배로 인정된
다.
 하지만 음지의 무토회는 사정이 달랐다. 수많은 무투가들
이 경기장에서 죽어갔고 신분을 감춘 관객들이 그 모습에 환
호한다.
 러프넥이란 청년 역시 그런 식으로 세상에서 사라졌다. 생
각대로라면 눈앞의 두 남녀를 그런 음지의 무투회로 소개시
켜 주는 것은 간편했다.
 거기에 발을 들인 자들은 언젠가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
라지기 마련이다. 비밀엄수를 하는데 그보다 좋은 장소는 없
다. 그러나 길드장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자들을 그리로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군. 내 책
을 일고 찾아온 자들이라서 그런가?'
 살짝 머리를 흔든 길드장이 정색을 했다.
 "그런 곳은 레르디나에 없소. 그러니 정식절차를 밟아 나
가시오. 레르디나의 무투회는 여러 가지가 있소. 실제 병기
를 사용하는 상급 무투장과 목제 병기를 이용하는 중급 무
투장, 그리고 맨손 격투로 승부를 가리는 초급 무투장이 있
소. 초보 무투가는 무조건 초급 무투장에서 시합을 치러야
하오. 그런 다음 실력을 인정받으면 차근차근 승급하는 것
이지. 그러니 괜한 욕심 부리지 말고 초급 무투장을 찾아가
도록 하시오."
 레온과 알리시아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초급
무투장에서는 큰돈을 벌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드
장이 소개시켜 주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다. 더 이상 볼 일
이 없다고 판단한 알리시아가 몸을 일으켰다.
 "좋은 거래 감사드려요. 신분증 잘 쓸게요."
 그 말에 길드장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요. 우리 길드에서는 신분증 따위의 불법적인
거래를 하지 않소. 우린 단순히 상담을 해 준 것뿐이니 더
이상 비약시키지 마시오, 그럼 볼 일이 끝났으니 가보시오."
 냉정하게 선을 긋는 모습에 알리시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저희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살펴 가시오. 그리고 앞으로는 찾아오지 마시오."
 살짝 목례를 한 알리시아가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레
온은 길드장을 물끄러님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그는 사람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면에서 저 길드장은 자신들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 분명했다.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로군. 언젠가 기회가 되면 도움을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고개를 끄덕인 레온이 몸을 돌렸다.

 도둑길드를 나서자 깜깜한 어둠이 그들을 반겼다. 길드장
은 친절하게도 길드원 하나를 시켜 그들을 숙소 인근까지 안
내해 주도록 시켰다.
 "이리로 오십시오." 
 길드원의 안내를 받으며 둘은 바삐 걸음을 옮겼다. 내일부
터 바쁜 나날이 펼쳐질 것이라서 서둘러 숙소에 가서 쉬는
것이 나았다.
 
 숙소에 도착한 둘은 지체 없이 마주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알리시아가 무척 미안해하며 입을 열었다.
 "레온님께서 힘들게 번 돈을 모조리 써버렸군요. 이를 어
쩌죠?"
 "괜찮습니다. 다시 벌면 되니까요."
 대수롭지 않다는 레온의 반응에 알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였
다. 
 "내일부터 바뻐지겠군요. 저는 예정대로 도서관에 가서 공
부를 할게요."
 "그럼 저는 뭘 하면 됩니까?"
 알리시아가 머뭇거림 없이 레온이 할 바를 정해 주었다. 
 "레온님은 초급 무투장에 가서 활약하세요. 신분증이 있으
니 바로 참여할 수 있을 거예요. 현재 저희에겐 내기에 걸
만한 돈이 없어요. 그러니 일단은 자금을 만드는 것이 급선
무에요."
 말을 마친 알리시아가 주머니를 탁자 위에 대고 털었다. 
거기서 나온 것이라곤 은화 몇 닢뿐이었다.
 "모두 14실버 50쿠퍼로군요. 일단 이 돈을 모두 가지고 가
세요. 그리고 시합을 할 때마다 레온님 자신에게 거세요. 
그럼 돈이 기하급적으로 불어날 거예요."
 "절차를 전혀 모르는데 할 수 있을까요?"
 알리시아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책에서 본 바로는 그런 경우가 비교적 흔하다고 하더군
요. 모험가들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초급 무투회에 자주
참가한다고 하니 그런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을 거예요."
 "그동안 저는 도서관에서 이곳의 지식을 공부하고 있을게
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려면 아르카디아에 대해 더 많
이 알아야 해요."
 레온이 지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그럼 저는 내일부터 무투장에 출근
하겠습니다."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하지만 조금만 참으세요. 아르카
디아에 대한 지식이 쌓인다면 더 이상 레온님을 고생시키
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레온을 쳐다보는 알리시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둘은 길을 나섰다. 알리시아는 어제 도둑길
드로부터 구입한 신분증을 소지하고 도서관으로 갔다.
 "그럼 전 다녀오겠어요. 부디 조심하세요." 
 레온을 쳐다보는 알리시아의 눈동자에는 걱정이 서려있
었다. 비록 레온이 궁극의 무예가인 그랜드 마스터란 사실
을 알긴 하지만 맨손 격투에까지 강하라는 법은 없다. 레
온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그녀의 걱정을 불식시켜 주었다.
 "걱정 말아요. 주먹다짐에는 일가견이 있으니까요."
 레온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우거의 육신을 가지고
있었다. 맨손 대결에서 오우거를 이길 만한 몬스터는 세상
에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레온은 체술도 깊이 있게 익힌 상태였다. 자객으
로 훈련받을 당시 리플리에게서 사이클론을 배웠고 스승인
데이몬으로부터 그보다 더욱 위력적인 체술을 여러 가지 
전수받았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그가 겁을 먹어야 할 필요
가 없다.
 "그럼 전 다녀오겠어요. 저녁때 봐요."
 살짝 목례를 한 알리시아가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 모습
을 유심히 쳐다보던 레온이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옆에 없으니 무척 허전하군.'
 느릿하게 거리를 걷던 레온이 살짝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
면서 그는 또다시 알리시아에 대해 생각했다. 사실 알리시
아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아가씨였다. 살짝 눈웃음칠때의 모
습은 레온마저도 아찔하게 했다. 객관적인 관점에서도 충분
히 미인이라 불릴 수 있는 아가씨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녀의 매력은 레온에게 크게 호감을 주지 못했다, 아
니 알리시아 뿐만 아니라 모든 여인들이 대동소이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우거로 산 삶이 아직까지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군.'
 오우거의 육신을 가지고 있을 당시 그는 사랑을 완전히 포
기했었다. 제정신이 박힌 여자라면 감히 오우거와 함께 살
려 하지 않을 터, 거기에서 유일한 예외가 바로 제나였다.
 그녀는 흉측한 외모를 가진 레온을 진심으로 사람해 주었
다. 레온 역시 제나를 가슴 깊이 사랑했다. 비록 육체적 관
계는 맺지 못하겠지만 평생을 아끼며 사라할 것이라 다짐했
던 레온이었다.
 하지만 그런 레온의 기대는 하루아침에 산산히 깨어져 버
렸다. 환골탈태를 한 레온이 헬프레인 제국으로 잠입하며 
본 것은 누군가와 결혼하여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제나
였다. 그녀의 뱃속에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이가 자라고 있
었다. 그 모습을 본 레온은 넋을 잃었다.
 '제, 제나가 나, 날 배신하다니…….'
 돌연 불같은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생각 같아서는 제나를
가로챈 간 사내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레온은 얼른
마음을 수습했다. 제나의 해맑은 미소를 보니 그녀의 행복
을 깨어버리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그녀는 영원한 내 반려가 아니었어.'
 마음을 비운 레온은 지체 없이 카르타스로 가서 벨로디어
스 후작과 대결을 벌였다. 그때 비웠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사실은 아직까지 앙금으로 남아 레온을 붙들고 있었다.
 그 일 이후로 레온은 섣불리 여자들에게 마음을 주지 못했
다. 또다시 배신당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엘프의 숲에서 아
리따운 여성 엘프들이 수도 없이 구애했지만 레온은 신경조
차 쓰지 않았다. 이미 그의 마음은 단단히 닫힌 상태였다.
그러니 레온이 섣불리 알리시아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데에
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두 번 다시 여자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때 입은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컸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 사이 주위가 떠들썩해졌다. 생
각에 잠긴 사이 벌써 열 블록이나 지나텨 온 것이다. 퍼뜩
정신을 차린 레온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대로 찾아왔군. 이곳이 바로 무투장 골목이었군."
 주위는 온통 관중들의 함성소리로 가득했다.
 군데군데 철장이 쳐져 있었고 그 속에는 건장한 청년들이
들어가서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는 육체의 향연을 즐기고
있었다.


  7. 무투회의 본고장 레드디나

 
 렌달 국가연합은 무투회로 이름이 높은 나라였다. 거의 
연중생사로 무투회를 열었기 때문에 수많은 무투가들이 렌
달 국가연합을 찾았다. 렌달 국가연합은 상업으로 부를 축
척한 나라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무투회가 국가경제
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무투회를 벌일 경우 무투장 주변 도시의 경제가 획기적으
로 살아난다. 여기서 무투가와 그 주변 사람들이 머물며 
쓰는 돈은 문제도 아니었다. 문제는 무투회로 인해 아르카
디아 전역의 도박꾼들이 한데 모여든다는 점이다. 거기에
서 대박을 거둔 도박꾼들은 그야말로 돈을 물 쓰듯한다.
그 돈을 노리고 상인들이 모여들고 여자들이 모여들고 사
기꾼들이 몰려든다. 그 돈이 돌고 돌아서 무투장이 위치한
도시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렌달 국가연합의 지도자들은 레
르디나를 건립하며 대대적으로 무투자을 세웠다. 교통의 요
지에는 빠짐없이 원형극장이 들어섰고 외곽에는 초급 무투
장을 세울 부지를 충분히 마련했다. 그리고 그 부지를 무투
장을 열려는 상인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대여해 주었다.
 그런 노력은 헛되지 않아 당금 레르디나는 무투회의 도시
로 일컬어지고 있다. 렌달 국가연합의 성공을 본 다른 국가
들이 부랴부랴 흉내를 내었지만 본시 짝퉁은 원조를 능가하
지 못하는 법, 무투장으로 인해 레르디나는 나날이 번영해
가고 있었다.
 레온이 서 있는 이곳은 바로 초급 무투장이 헤아릴 수 없
을 정도로 난립한 곳이었다. 병기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맨몸으로 격투를 벌이기 때문에 사상자가 거의 나오지 않는
다. 때문에 무투가를 꿈꾸는 초보들이 많이 등단하는 곳이
기도 했다. 
 주위는 온통 시끌벅적했다. 도박꾼들이 뻘겋게 충혈된 눈
으로 시합을 관전했고 호객꾼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
다. 레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약삭빠르게 생긴 중늙은이 한 명이 레온에게 접근했
다.
 "무투가가 되려고 왔는가?"
 그 말에 레온이 고개를 돌렸다. 중늙은이가 재빨리 자기 
소개를 했다.
 "내 이름은 스니커라네. 무투장의 무투가 등록을 대행하
고 있지. 보아하니 무투가가 되려고 온 것 같은데 맞는가?"
 레온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그 말을 들은 스니커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스쳐지나갔
다.
 '그러면 그렇지.'
 스니커의 직업은 거간꾼이었다. 무투가를 꿈꾸며 찾아온
애송이들을 꾀어다 무투장에 소개하는 것이 그가 주로하는
일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레온은 애송이 중의 애송이
였다. 덩치가 당당하고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었지만 전신
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다. 생김새 역시 막 시골에서 상경
한 풋내기의 얼굴이다. 그러니 스니커에겐 좋은 먹잇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무투가라고 하면 레온 같은 근육질의 거구를 연상하
기 쉽다. 실제로 이름을 날리는 무투가 중에서 레온 같은 
거구도 적지 않다. 하지만 체격이 크다고 다 싸움을 잘하
는 것은 아니다. 거구는 힘이 좋지만 상대적으로 동작이
느린 편이다. 그러니 적당한 체격에 몸이 빠른 자들이 실
력있는 무투가로 성장할 확률이 높은 편이다.
 스니커가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레온의 아래위를 훑었다.
 '어디서 근육만 잔뜩 키워온 모양인데 다 쓸데없는 일이
지.'
 하지만 속마음을 겉으로 표출하지 않는 것은 거간꾼의 기
본 중 기본이다. 그가 얼른 낯빛을 바꾸고 입을 열었다.
 "그래 어디에서 싸우고 싶나?"
 "달리 정해 놓은 곳은 없소. 가급적 자유롭게 베팅할 수 
있는 곳에서 싸우고 싶소."
 "혹시 자네 자신에게 베팅을 할 생각인가?"
 레온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니커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정말 잘 되었군. 보아하니 돈을 벌기 위해 온 모양인데
단단히 쓴 맛을 보게 될 거야. 덩치가 당당하니 맷집은 충
분할 테고…….'
 스니커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한 장의 그림이 그려지고 있
었다. 이곳에서 외곽으로 조금 나가면 다른 종류의 무투장
들이 있다. 
 사실 이곳의 무투장들은 대부분 주먹을 이용해 상대의 상
체를 공격하는 권투형 격투를 주로 한다. 때문에 경기자체
가 그리 격력하지 않았고 그런 만큼 큰 부상을 당할 우려
도 없다. 하지만 외곽의 무투장은 킥(Kick: 발차기)뿐만
아니라 조르기나 꺾기 등 모든 종류의 체술을 사용해도 무
방한 곳이다.
 워낙 험한 경기이다 보니 사상자가 속출하고 또한 악명 높
은 무투가들도 많았다. 상대를 거의 반신불수로 만들어 버
리기 때문에 피에 굶주린 관객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했
다.
 그런 곳의 관객들은 승부 자체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오직
사람이 처참이 망가지는 모습에 열광하는 것이다. 그러다보
니 그곳에 참가하려는 무투가도 드물 수밖에 없다. 스니커
는 레온을 그곳에다 소개해 줄 작정이었다.
 '잘 되었군. 소개료를 톡톡히 챙길 수 있겠어.'
 스니커는 이미 무투장 한 곳을 정해 놓은 상태였다. 헬 케
이지(Hall cage: 지옥의 철장)라고 이름 붙은 그 무투장은 
잔인한 경기를 벌이기로 이름 높은 장소였다. 그곳에 참가
한 무투가들은 태반이 폐인이 되어 버린다. 그런 만큼 정신
이 제대로 박힌 무투가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경기장에
서 경기를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 케이지 무투장을 찾는 관객은 많고
도 많았다. 대부분 잔인한 장면에 열광하는 변태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경기를 관람함에 있어 일절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돈을 바탕으로 헬 케이지 무투장에서는 돈을 아낌없
이 풀어 악명 높은 무투가들을 마구 끌어 모았다. 그렇게 
해서 멋모르고 참가한 초보 무투가들을 완전히 걸레로 만들
어 버리는 것이다.
 마음을 정한 스니커가 레온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리로 오게. 자네에게 적합한 경기장이 있네."
 레온은 영문을 모르고 스니커에게 이끌려 갔다.

 그들이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외곽에 위치한 큼지막
한 무투장이었다. 새장 모양의 거대한 철장이 쳐져 있었고
나무로 된 관람석이 경사를 두고 설치되어 있었다. 이미 관
람석에는 수많은 관객들이 모여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경
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와아아--!
 환호성이 들려오는 것을 봐서 한창 경기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레온을 그곳으로 데리고 온 스니커가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게. 내 들어가서 조건을 협
상하고 오겠네."
 막 몸을 돌리려던 스니커를 레온이 불렀다.
 "그런데 수수료를 얼마나 드려야……."
 "내 커미션은 무투장에서 알아서 챙기니 걱정하지 말게.
대신 돈을 벌면 술이나 한 잔 사도록……."
 고개를 돌린 스니커의 입가에서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병신 같은 녀석……. 아무튼 안 되기 했군. 헬 케이지 
무투장에서 폐인이 되어 버릴 테니…….

 사무실로 들어가자 날카롭게 생긴 인상의 중년인이 반색
하며 스니커를 맞았다.
 "어서 오게. 인 그래도 선수가 모자라던 참인데 말이야.
혹시 하나 물어왔나?"
 스니커가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이지. 내가 누군가? 헬 케이지 무투장의 선수 대다수
를 조달해 주는 스니커 아니겠는가?"
 "그래 이번에는 어떤 녀석인가?"
 "시골에서 막 상경한 것 같은 녀석이야. 덩치가 당당해서
제법 오래 버틸 걸세. 문제라면 인상이 워낙 순박해서 관객
들에게 그리 강한 인상을 주지 못하겠더군."
 중년인이 걱정할 것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거야 문제될 것이 없지. 철가면이나 투구를 뒤집어 쒸
우면 되니까. 그래 싸움은 좀 해 봤다고 하던가?"
 "무슨 상관이 있나? 곧 처참히 망가질 터인데 말이야. 아
무튼 멍청한 놈이 자기 자신에게 베팅을 하고 싶다는군."
 그 말에 중년인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돈이 급한 애송이였군. 뭐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여태껏
그런 놈들이 적지 않았으니 말이야. 뭐 우리야 경기수당까
지 챙길 수 있으니 더욱 좋지."
 "아무래도 그 녀석은 자신이 건 돈을 영원히 만져보지 못
할 거야."
 한동안 낄낄거리던 중년인이 서랍을 열어 조그마한 주머
니를 꺼냈다.
 "자, 받게 이번에는 후하게 넣었네."
 스니커가 당연하다는 듯 주머니를 받아 내용물을 확인 해
보았다. 액수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
다.
 "그래 누구랑 붙일 생각인가?"
 중년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어렸다.
 "곧바로 투입할 생각일세. 지금 철장의 야수 커틀러스가
시합을 하고 있거든……."
 스니커가 안 되었다는 듯 혀를 찼다.
 "쯔쯔쯔. 첫 시합에서 완전히 폐인이 되어 버리겠군. 커틀
러스라면 관절부수기의 달인인데 말이야."
 "뭐 상관할 것은 없지.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는 서류
를 받아 놓은 참이니까."
 "아무틑 나는 이만 가보겠네. 수고하도록."
 "살펴 가도록 하게."
 사무실을 나온 스니커가 레온을 향해 손짓을 했다.
 "이야기가 잘 되었네. 경기수장도 많이 올렸고 자네 자신
에게 돈을 걸 수 있도록 했네. 그러니 잘 해 보도록 하게."
 그 말을 들은 레온이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나중에 잘 되면 술 한 잔 사드리겠습니다."
 "뭐 그것가지야. 그럼 잘 해 보게."
 스니커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때 누군가가 레온을 불렀다.
 "이리로 오게."
 고개를 돌리자 반쯤 열린 사무실 문틈으로 중년인이 손짓
을 하는 것이 보였다. 레온은 머뭇거림 없이 사내에게로 다
가갔다.

 사무실 안에 들어간 레온에게 중년인이 의자를 권했다. 의
자에 앉아 중년인이 맞은편 탁자에 앉아 서류를 펼쳐들었다.
 "신분증을 주게."
 레온은 태연하게 도둑길드에서 구한 신분증을 꺼내 내밀었
다.
 "이름은 러프넥, 나이 스물여덟. 디오낼 영지의 우르백장
령 출신. 맞나?"
 "그렇소."
 "그렇다면 여기 서명을 하게/"
 중년인이 내민 서류를 살펴본 레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서류에는 경기에서 부사을 입을 경우 무투장에 아무런 책
임이 없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거기에 서명할 경우
무투장에서 어떠한 보상도 받을 수 없다. 레온은 직감적으
로 뭔가 흑막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내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것 같군.'
 하지만 레온은 순순히 서류에 서명을 했다. 뭔가 음모가 
있더라도 그랜드 마스터인 레온을 곤란하게 할 것은 없다.
서명이 된 서류를 받아든 중년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경기수당은 2골드일세. 원래 1골드인데 스니커의 부타도
있고 하니 후하게 쳐준 것이지. 스니커에게 듣자니 자신에
게 돈을 건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경기수당까지 함께 걸 
것인지 여부를 알려 주게."
 레온이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2골드라면 생각
보다 후한 금액이었다.
 "맞소. 경기수당까지 함께 걸 생각이오."
 중년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경기수당 2골드를 다시 회수
할 수 있으니 기쁠 수밖에 없다. 이미 그는 레온의 패배를
기정사실로 하고 있었다.
 그가 탁자 위의 벨을 누르자 문이 열리며 사내 한 명이 
들어섰다. 그는 눈에 잘 띄도록 녹색 조끼를 걸치고 있었
다.
 "여기서 활약하는 도박중개인 중 한 명일세. 그에게 경기
수당을 직접 주도록 하지. 그럼 자네도 가진 돈을 걸도록
하게."
 레온은 머뭇거림 없이 가진 돈 14실버를 모두 꺼내 내밀
었다. 도박중개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에다 금액을 적
어 넣었다.
 "모두 2골드 14실버입니다. 경기장에서 쓸 이름이 무엇인
지 알려 주십시오."
 레온이 도박중개인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해 눈을 끔뻑
거렸다. 재빨리 상황을 파악한 중년인이 앞으로 나섰다.
 "본 브레이커(Bone breaker), 본 브레이커 레프넥이네.
내가 즉석에서 지은 이름인데 어떤가?"
 "그럭저럭 괜찮군요. 그 이름으로 하겠습니다."
 레온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도박중개인이 파란 종이
한 장을 반으로 찢어 내밀었다. 거기에는 레온의 이름과
자신에게 2골드 14실버를 걸었다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었
다. 
 레온이 묵묵히 종이를 받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중년
인이 몸을 일으켜 레온에게 손짓을 했다. 그 사이 도박중
개인은 밖으로 나갔다.
 "날 따라오게. 자네의 사물함과 경기에 쓸 장비를 챙겨
주겠네."
 작은 방으로 안내된 레온은 사물함에다 소지품을 보관했
다. 메이스 두 자루와 거대한 그레이트 엑스를 집어넣고 
셔츠를 벗자 터질 듯한 근육이 드러났다.
 중년인이 투구 하나를 자져와 레온에게 내밀었다. 성 모
양으로 된 일자형 투구였는데 사각형의 눈구멍이 두 개 
뚫려 있었다.
 "이 투구를 쓰게. 머리를 보호해야지."
 레온은 별생각 없이 투구를 덮어썼다. 그러자 레온의 순
박한 얼굴이 완전히 가려졌다. 그 모습을 본 중년인이 싸
늘한 미소를 지었다.
 '훌륭하군. 저 정도면 관객들이 여간해서는 이 애송이에
게 동정심을 갖지 않을 거야.'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날려버린 중년인이 벽에 붙어 있는
문을 가리켰다.
 "저곳이 선수대기실일세. 거기에 거서 대기하고 있도록하
게. 자네 차례가 되면 시종이 데리러 올 거야. 그럼 잘 싸
우도록 하게."
 레온은 아무런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경기장은 완전히 피바다였다. 그 위에 건장한 체구의 털
복장이 장한 한 명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데 장한의 모
습이 너무도 처참했다. 팔과 다리가 모두 반대 방향으로 
꺾어져 있었고 무릎과 팔꿈치를 통해 부러진 뼈가 비어져
나와 있었다. 한마디로 관절이 완전히 박살난 모습.
 칠공으로 꾸역꾸역 피를 토해내는 것을 보니 치료하더라
도 사람 구실을 하기에는 애초에 불가능할 듯 싶었다. 옆
구리가 툭 불거져 나온 것을 보니 늑골 몇 개가 부러진 
것 같았는데 코와 턱은 완전히 짓뭉개져 있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연신 환호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와아아아!"
 "최고다. 커틀러스!"
 완전히 폐인이 되어 버린 털복숭이 장한을 내려다보는 사
내 하나가 있었다. 뺨을 가로지른 칼자국이 인상적인 사내
는 당당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하관이 쫙 빠져 몹시 잔인한
인상을 풍겼다.
 그가 바로 철장의 야수인 커틀러스였다. 본시 용병 출신으
로 전장을 전전하다 무투계에 투신한 자로서 지극히 잔인한
심성을 지녔다. 하루라도 피를 보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
다는 일설이 있으며, 조르기와 꺾기 등 체술의 달인이었다.
 커틀러스와 겨룬 자는 예외 없이 관절이 박살나 폐인이 되
어 버러기 때문에 헬 케이지 무투장에서 상당히 인기있는
무투가 중 한 명이었다. 관중석에서는 끊임없이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 커틀러스 최고다!"
 "우리에게 더욱 많은 자극을 다오!"
 잔인한 웃음을 흘리며 관중석을 둘러본 커틀러스가 널브
러진 털복숭이에게로 다가갔다. 쓰러진 사내는 복부 출신
으로 무투계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던 자였다. 하지만 도박
에 빠져 큰 빚을 지고 종국에는 헬 케이지 무투장으로 오
게 된 비운의 사내였다. 제법 버티기는 했지만 털북숭이는
애당초 커틀러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널브러진 털북숭이를 쳐다보던 커
틀러스가 발을 들어 상대의 사타구니를 인정사정없이 짓밟
아버렸다.
 "끄어어어!"
 정신을 잃은 것 같았던 털북숭이가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사타구니에서 전해지는 통증은 그 정도로 강렬했다. 그 모
습에 관중석은 또다시 열광하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잠시 후 백의를 걸친 시종 두 명이 들것을 들고 달려왔다.
커틀러스를 쳐다보는 시종들의 눈빛에는 공포감이 역력히
배어 있었다. 커틀러스는 패자를 수습하러 온 시종까지 공
격해 폐인으로 만들어버린 전력이 있다.
 다행히 이번에는 그럴 마음이 없는 듯 커틀러스가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시종들은 안심한 눈빛으로 널브러진 털북
숭이를 들것에 올려 들고 나갔다. 모르긴 몰라도 털북숭이
장한은 두 번 다시 무투장에 나오지 못할 터였다.
 "커틀러스! 너의 멋진 모습을 한 번 더 보여다오!"
 "우리는 더 많은 경기를 원한다!"
 경기장이 한창 시끌벅적해질 무렵 누군가가 앞으로 나갔
다. 레온을 상대했던 바로 그 중년인이었다. 그가 목청을
높여 관객석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여러분, 아쉬우시죠?"
 그 말에 관람석이 한층 더 시끄러워졌다. 대부분의 관객
들은 커틀러스의 시합을 한 번 더 보기를 원하고 있었다.
상대 선수를 항상 철저히 망가뜨리는 탓에 커틀러스의 인
기는 언제난 상위를 유지하고 있다.
 분위기가 고조될 즈음 중년인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관람석이 일시에 조용해 졌다.
 "여러분의 염원을 신께서 느끼셨나 봅니다. 엄청난 선수
한 명이 대기실에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도 유명
한 본 브레이커 러프넥! 그가 마침내 헬 케이지 무투장에
등장한 것입니다!"
 그러자 관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러프넥을 연창하기 시
작했다.
 "러프넥! 러프넥!"
 도전자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지만 관객들은 잘 알고 
있었다. 러프넥이라는 자가 대관절 어떤 자인지는 모르지
만 애당초 커틀러스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
졌다는 사실을……. 도전자는 십중팔구 조금 전 실려 나
간 털북숭이처럼 완전히 망가진 폐인이 되어 버릴 터였다.
 도박중개인들이 열광하는 관객들 사이를 솜씨 있게 누비
며 돈을 걷기 시작했다. 물론 대부분의 관객들은 커틀러
스에게 돈을 걸었다. 그의 일방적인 승리를 확신하는 것
이다.

 "쓰레기 같은 놈들이로군."
 레온은 눈살을 찌푸린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선수대기실은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레온이 들어가는
순간 강철로 된 문이 단단히 잠겨버렸다.
 철컹.
 철장을 통해 경기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털복
숭이가 처참한 몰골로 실려 나가는 모습을 여과 없이 관전
했다. 보통의 선수라면 참혹한 광경에 완전히 기가 질려
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레온에게는 해당사항이 전혀 없
었다. 처참한 전쟁터를 수도 없이 전전한 그는 이보다 참
혹한 광경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레온은 경기장에 버티고 서 있는 커틀러스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저항할 능력이 없는 상대를 공격하다니……. 천하의 몹
쓸 놈이로군. 단단히 혼내 줘야겠어."
 그 순간 커틀러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레온은 조용히 
눈빛을 빛내며 경기에 출전할 순간을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중년인이 손을 펼쳐 레온이 있는 대기실을 
가리켰다.
 "그럼 소개하겠습니다. 악명 높은 본 브레이커 러프넥의
등장입니다!"
 그와 동시에 관중석의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대기실을
쳐다보는 중년인의 눈빛은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흐흐흐, 놈. 지금쯤이면 기절초풍을 하고 있겠지? 모르
긴 몰라도 오줌까지 지렸을 거야.'
 그가 보고 있는 사이 대기실의 철장이 느릿하게 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프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러나 중년인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커틀러스와의 시합을
앞둔 선수둘이라면 대동소이하게 보이는 모습이었기 때문
이다. 
 조금 전에 실려나간 털북숭이 역시 커틀러스가 들어가 
질질 끌고 나왔다.
 중년잉의 시선이 비릿하게 웃던 커틀러스와 마주쳤다. 그
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커틀러스가 머뭇거림 없이 대기
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커틀러스가 들어가 끌어 내는 것만 남았군."
 그러나 커틀러스는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대기
실 문을 통해 장대한 체구의 덩치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
이다. 
 "뜻밖이로군."
 중년인이 의외라는 눈빛으로 모습을 드러낸 레온을 쳐다
보았다.



   8. 본 브레이커 러프넥의 대활약


 레온이 등장하자 관객석은 또다시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
들었다. 투구로 얼굴을 가린 레온의 모습이 그 정도로 당
당했기 때문이다.
 커틀러스보다도 머리통 반 정도는 큰 신장에 덩치도 월등
했다. 게다가 성 모양의 투구가 레온의 순한 얼굴을 완전
히 가리고 있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무척 실력이 있어 보
이는 무투가처럼 보였다.
 "와아아아! 본 브레이커, 파이팅!"
 "러프넥, 잘 싸워라!"
 관중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레온이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
다. 그의 시선에 배당률이 적힌 판자가 들어왔다. 판자에
적힌 수치는 '89:11' 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커틀러스
가 승리하는 쪽에 돈을 건 것이다. 레온의 입가에 미미하
게 미소가 걸렸다.
 "잘 되었군. 제법 돈을 벌 수 있겠어."
 고개를 돌리자 커틀러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잔인한
미소를 띠고 레온을 응시하던 커틀러스가 불쑥 말을 걸었
다.
 "이봐 덩치."
 "……."
 "우리 깔끔하게 팔치온식 치고받기로 시작할까?"
 팔치온식 치고받기란 서로가 번갈아가며 한 대씩 갈기는 
단순무식한 방법이다. 그리고 커틀러스가 항상 권유하는 
통과의례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도전자들은 경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겁에 질려
있다. 공포의 커틀러스와 맞서 싸우게 되었으니 그럴수밖
에 없다. 그래서 커틀러스는 항상 팔치온식 치고받기를 
먼저 권한다. 그럴 경우 선수들은 머뭇거림 없이 그 제안
을 수용하기 마련이다. 커틀러스가 파놓은 함정인지도 모
르고 말이다.
 그것은 원천적으로 커틀러스가 진행하는 쇼의 일종이었
다. 상대가 응낙하면 커틀러스가 항상 먼저 선방을 날린
다. 그러면 한 대 얻어맞은 상대는 필연적으로 약이 오르
기 마련, 상대 선수는 의당 온 힘을 다해 반격을 가하려
한다. 그러면 커틀러스는 주먹을 슬쩍 피하며 지나가는 
팔을 붙잡아 인정사정없이 부러뜨려 버린다.
 우두두둑--!
 이후로부터 커틀러스의 독무대였다. 저항할 힘을 잃은 
상대의 몸을 자근자근 부러뜨리며 관객들의 환호를 즐기는
것이 커틀러스에겐 가장 큰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번에 나온 덩치 큰 녀석은 조금 색다른 반응을 보였다.
 "팔치온식 치고받기가 도대체 뭐지?"
 억양의 고저가 없는 괴이한 음성. 하지만 그것을 떠올리기
전에 커틀러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투장에 나온 선수가
팔치온식 치고받기를 모르다니…….
 '이거 순 맹탕이잖아? 어디서 이런 초보를…….'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커틀러스가 팔치온식 치고받기에 대
해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들은 레온이 싱긋 웃으며 제안을
수락했다.
 "그럼 그렇게 해 보도록 하지."
 "좋아. 그럼 내가 먼저 치겠다."
 커틀러스는 상대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주먹을 내뻗었
다. 그의 주먹이 정확히 레온이 쓰고 있는 투구 한가운데에
명중했다.
 텅!
 선방을 날리고 난 커틀러스가 인상을 썼다. 주먹에 전해지
는 감촉이 이전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투구는 겉모습만 그럴 듯했지 거의 얼굴을 보호하지 못한다.
안에 누빈 솜이나 가죽끈을 받쳐 놓아야만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데 레온이 쓰고 있는 투구에는 그런 것들이 전혀 없다.
그래서 외부의 충격이 고스란히 안으로 전해진다.
 주먹에서 아련한 통증을 느낀 커틀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잘못 쳤나? 왜 이러지?"
 커틀러스는 체술 못지않게 주먹도 강한 편이다. 그의 돌주
먹에 맞으면 상대는 으레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가 마련이
다. 하지만 이번에 나온 선수는 전혀 충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머리만 살짝 흔들었을 뿐 아무런 충격도 없다는 듯
태연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마치 생고무를 가격한 것 같았어.'
 그때 귓전으로 억양 없는 괴이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로군. 가도 되겠나?"
 커틀러스가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언제든지 들어오게."
 얼굴에 미소를 지었지만 커틀러스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우선 잘 발달된 반사신경으로 상대의 펀치를 피한
다음 팔을 잡아 부러뜨리는 것이 그가 준비해 놓은 전술이다.
 바짝 긴장 커틀러스가 눈매를 좁히며 상대의 주먹을 응시했
다. 하지만 상대는 준비동작을 일절 취하지 않았다. 이럴 경
우 대부분의 상대는 몸을 힘껏 비틀거나 팔을 빙글빙글 돌리
며 결정적인 한 방을 먹이려 할 테지만 눈앞의 덩치는 그저
고요히 서 있을 뿐이었다.
 참다못한 커틀러스가 입을 열려 했다. 
 "어서 치…… 컥!"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커틀러스의 건장한 몸이 눈에 끠게
휘청했다. 전혀 기미도 느끼지 못한 사이 레온의 주먹이 날
아와 커틀러스의 얼굴 한복판을 강타했던 것이다. 발경이 
가미된 레온의 일격은 커틀러스의 뇌에 엄청난 타격을 안겨
주었다.
 "끄으으으……."
 코와 입으로 낭자하게 피를 흘리며 커틀러스가 주춤주춤 뒤
로 물러나다 맥없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얼마나 큰 충격을 받
았는지 눈동자가 완전히 풀려 있었다.
 그 믿을 수 없는 장면에 중년인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
다.
 "뭐, 뭐야! 어찌 이런 일이……."
 관중석도 조용해졌다. 누구 하나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
다.
 
 커틀러스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려 했다.
하지만 골이 올려 도무지 정신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사물
이 두세 개로 보였고 땅이 마구 흔들렸다. 사력을 다해 몸을
일으킨 커틀러스가 레온을 향해 비치적거리며 걸어갔다.
 "이, 이번에는 내, 내 차례겠지?"
 커틀러스의 벌어진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레온이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너 같은 놈은 경기장에 설 자격이 없어. 저항할 능력을 잃
은 상대를 공격하다니. 이참에 내가 네놈을 확실하게 폐인으
로 만들어주지. 지금까지 네 손에 당한 선수들의 원한을 풀어
주는 뜻에서…….'
 커틀러스의 머릿속에는 강력한 경력이 침투한 상태였다. 뇌
혈관의 대부분이 파열되었기 때문에 커틀러스는 앞으로 정상
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힘들 터였다. 비틀거리며 다가온 커틀
러스가 주먹을 내뻗었다. 그러나 맥이 풀린 그의 주먹은 레
온의 가슴팍에 겨우 와서 닿을 뿐이다.
 커틀러스의 귓전으로 싸늘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로군. 그럼, 간다."
 그 말을 들은 커틀러스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안 돼!'
 그러나 막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강력한 기를 내포한 주먹
이 커틀러스의 앞가슴을 가격했다.
 퍼억--!
 그것이 마무리였다. 눈이 게게 풀린 커틀러스가 게거품을 물
고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이곳에서는 생소한 기술인 발경이
커틀러스의 오장육부를 온통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 뿐
만이 아니었다. 뼈대와 근육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커틀러스는 앞으로 포크조차 제 힘으로 들지 못하는 완전한
폐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커, 커틀러스님!"
 시종들이 들것을 들고 황급히 달려왔다. 무심한 눈빛으로 
커틀러스를 내려다보던 레온이 몸을 돌렸다. 그가 대기실 안
으로 사라지고 나자 그제야 경기장이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뭐가 이렇게 금방 끝나?"
 "지금 커틀러스가 당한 것 맞아?"
 "내가 보기엔 그런 것 같네."
 관중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웅성거렸지만 이미 승패는 완
전히 결정 난 다음이었다. 레온을 경기장에 투입한 중년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딱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커틀러시가 이토록 맥없이 당하다니……."
 하지만 커틀러스의 패배는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그가 망연
한 표정으로 레온이 들어간 대기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
었다.

 선수대기실의 철문은 열려 있었다. 레온이 밖으로 나오자 
아까 보았던 도박중개인이 초조한 기색으로 기다리고 있었
다. 레온이 머뭇거림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내 바당은 얼마인가?"
 머뭇거리던 중개인이 입을 열었다.
 "예. 승률배당이 89:11이었습니다. 거신 돈이 2골드 14실
버, 거기에다 수수료와 대리비용을 제외하면 러프넥님의 몫
은 정확히 8골드 56실버입니다. 네 배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금 배당을 지불해 드릴까요?"
 레온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중개인이 막 돈을 지불하
려는 순간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자, 잠깐 기다리게."
 고개를 돌리자 벌겋게 상기된 중년인의 모습이 보였다. 숨
ㅇ을 헐떡거리던 중년인이 레온에게 말을 걸었다.
 "자, 자넨, 한 경기 더 할 생각 없나?"
 "싸울만한 선수가 있소?"
 긍정적인 레온의 말에 중년인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참!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 내 이름은 맥넌
이라네. 헬 케이지 무투장을 총괄 관리하고 있지."
 레온이 퉁명스럽게 그 말을 받았다.
 "러프넥이오. 뭐 잘 알고 있겠지만……."
 "관중들은 더욱 많은 여흥을 원하네. 자네가 승낙한다면
한 게임 더 주선하고 싶네. 어떤가?"
 레온이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빨리 끝난
참이라 몸도 제대로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합시다. 난 괜찮소."
 "자네, 정말 주먹이 세더군. 커틀러스가 단 두 방에 뻗어
버리다니 말이야."
 그 말에 레온이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맥넌이라는 중년이
이 발경에 대한 비밀을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심지어 소드
마스터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기술이 발경이었다.
 "그렇다면 바로 경기를 속행하겠네. 이곳에서 조금 기다리
고 있게."
 맥넌은 레온이 맞서 싸울 상대의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다.
단지 도박중개인의 귀에 대고 나직이 귀엣말을 건넸을 뿐이
다. 
 도박중개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아 그리 
만만치 않은 상대인 것 같았다. 물론 그들의 귀엣말이 레온
의 이목을 피해갈 순 없었다.
 「그가 이번에 맞서 싸울 상대는 학살자 터커라네. 관객들
에게 그렇게 소개하도록 하게.」
 귀엣말을 훔쳐들은 레온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별명을 보니 이 녀석도 꽤나 악명을 높은가보군. 두 번 
다시 무투장에 나오지 못하게 만들어 버려야겠어.'
 사실 레온은 무투회 자체를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
었다. 무예란 신성한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시연할 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다. 게다가 헬 케이지
무투장에서 벌어지는 경기는 레온으로서는 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다. 사람이 처참히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환호하는
모습은 레온에게 과거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
문이다.
 '마치 모틀 게임장의 관중들 같아. 정말 가증스러운 짓거
리로군. 아참에 헬 케이지 무투장의 주력 무투가들을 모조
리 망가뜨려 버리면 어떨까?'
 단단히 마음먹은 레온이 도박중개인을 쳐다보았다.
 "배당을 모조리 걸도록 하겠소. 나에게 말이오."
 눈매가 미미하게 떨렸지만 도박중개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8골드 56실버와 이번 경기 수당 2골드를 모
조리 러프넥님에게 걸겠습니다. 합계가 10골드 56실버입니
다."
 그는 푸른 종이에다 내용을 기재한 뒤 반쪽을 찢어 레온에
게 내밀었다.
 "그럼 좋은 경기 치르십시오."

 잠시 후 중년인 맥넌이 관객들 앞에 나가 연설을 시작했다.
 "본 브레이커 러프넥과 철장의 야수 커틀러스와의 시합이
너무 일찍 끝나 아쉬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
헬 케이지 무투장에서 다른 경기를 준비했습니다. 어떠십니
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관람석이 떠들썩해졌다.
 "와아아아!"
 "역시 헬 케이지 무투장이야! 내가 이 맛에 이곳에 온다
고……."
 관중석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린 맥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선수는 앞서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 본 브레이커
러프넥과 또 다른 선수와의 시합입니다. 이번에는 챔피언
과 도전자가 뒤바뀌었군요. 그럼 챔피언을 소개하겠습니
다!"
 말을 마친 맥넌이 팔을 쫙 펴서 뒤를 거리켰다. 그곳에는
레온이 어슬렁거리며 걸어나오고 있었다. 물론 얼굴을 완
전히 가리는 투구를 쓴 상태였다.
 "와아아아!"
 "본 브레이커 파이팅!"
 환호성이 잦아들자 맥넌이 이번에는 반대쪽 선수대기실을
가리켰다.
 "도전자를 소개하겠습니다. 아드리안 해의 공포, 석양의
학살자, 터커가 등장하겠습니다."
 그러나 환호성은 터저 나오지 않았다. 등장할 선수가 전
혜 예상 밖이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곧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터거, 터커!"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선수대기실에서 누군가가 느릿하게
걸어나왔다. 오히려 레온보다 키가 커 보이는 선수였다. 팔
을 축 늘어뜨린 채 걸어 나왔는데 얼굴을 은빛 가면으로 가
려서 도무지 용모를 식별할 수 없었다. 비교적 깡마른 몸매
였고 팔다리가 호리호리했다. 하지만 근육이 무척 잘 발달
되어 있었다. 또한 피부를 빽빽이 뒤덮고 있는 흉터를 보니
지금껏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바로 석양의 학살자 터커였다. 철장의 야수 커틀러스
보다 윗줄에 속하는 선수로, 헬 케이지 무투장이 자랑하는
세 명의 무투가 중 하나였다.
 그는 원래 해적 출신이었다. 아드리아 해를 주름잡는 해적
선의 돌격대장으로 활약하다 무투가로 전향한 사례얐다. 해
적으로 활약하던 당시 터커는 운 없게도 페이류트 해군 소
속의 전함에 사로잡혔다. 원래 해적은 잡히는 즉시 교수형에
처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페이류트 해군에서는 터커를 처형하지 않기로 결정
했다. 그를 잘 구슬려 해적단의 근거지를 알아낸다면 골칫
거리들을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잇다른 회유
에 터커는 결국 굴복하여 해적단 근거지를 정확한 위치를 토
설하고 말았다. 그 결과 터커가 소속되었던 해적단은 페이류
트 해군의 집중공격으로 인해 섬멸되고 말았다.
 그 대가로 자유를 얻었지만 터커가 갈 만한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도리어 살아남는 해적 잔당들의 복수를 염려해야 하
는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오갈 데가 없어진 터커는 결국 렌달 국가연합에 와서 무투
가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터커에게 제2의
인생을 열어주었다.
 터커가 슬그머니 양손을 들어올렸다. 날카로운 손톱이 5선
티 가량 튀어나와 있었다. 인간의 손톱이라기보다는 마치 맹
금류의 손톱처럼 생겼고 끝이 유난히 예리했다. 터커가 무투
장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손톱 때문이었
다. 맨손 무투가라지만 실제로는 병장기를 지닌 것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터커는 본시 기형아였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모르지만 태어
날 때부터 이런 손톱을 가지고 태어났다. 해적으로 활동하며
터커는 이 손톱으로 인해 상당한 악명을 떨쳤다. 강도가 거
의 금속과 맞먹었기 때문에 병장기를 사용할 필요가 전혀 없
었던 것이다. 도리어 물속에서도 자유자재로 공격과 방어가
가능했기 때문에 터커는 다른 병장기를 일절 사용하지 않았
다. 
 무투계에 뛰어든 뒤 터커는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칼날만
큼이나 날카로운 손톱이 맨손으로 싸우는 선수에겐 치명적인
무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터커는 극히 잔인하며 피를 즐기는 성품을 지녔다. 때문에
그와 상대하고 난 선수는 날카로운 손톱에 전신이 갈가리 
난자당한 참혹한 모습으로 화해 버린다. 처음에는 인기를 
끌었지만 터커는 오래지 않아 무투계에서 외면 받아야 했
다. 상대 선수를 회생불능으로 갈가리 찢어버리니 그 누가
터커와 싸우려 하겠는가?
 그 때문에 터커는 일거리가 없는 한동안 놀고먹어야 했다.
그런 터커에게 접근한 이는 바로 헬 케이지 무투장의 관리
인 맥넌이었다. 그는 터커에게 귀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우리 무투장에서 싸워주시오. 대전료를 후하게 치러드리
러다. 대신 지금까지 싸우던 방식대로 상대를 참혹하게 망
가뜨려야 하오. 우리 고객들은 바로 그것을 원하오."
 극히 잔인한 심성의 터커로서는 불감청일지언정 고소원인
제안이다. 헬 케이지 무투장에서 한 번 싸워본 다음 터커
는 그 즉시 전속계약을 맺었다. 그의 방식으로 상대 선수
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니 관객들이 아주 열광을 했던 것이
다.
 '내가 몸담을 곳은 바로 이곳이야.'
 그 후 2년 가까운 세월 동안 활약하며 터커는 헬 케이지 
무투장의 간판스타가 되어 버렸다. 석양의 학살자란 멋진
별명까지 얻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레온의 상대역으로 
나온 것이다.
 경기장에서 마주친 두 무투가는 서로를 노려보며 서서히
전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맥넌이 비웃음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애송이 자식 때문에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로군. 커틀
러스가 뻗어 버린 것은 예외로 치더라도 승부가 뒤바뀌어
서 손해가 상당히 커."
 당시의 관례로는 무투장 관계자도 경기결과에 돈을 걸수
있다. 맥넌은 커틀러스가 승리한다는 쪽에 상당히 많은 돈
을 걸었다. 공금을 사적으로 유용하는 것이다. 선수들의 
내력을 모두 알고 있으니 당연히 승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왔다. 처음
무투회에 참가하는 촌뜨기가 커틀러스를 가볍게 꺾은 것이
다. 결국 커틀러스에게 건 50골드의 돈이 깡그리 허공에 
날아가 버렸다. 그러니 맥넌으로서는 어떻게든 그 금액을
복구해야 했고 결국 재경기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가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경기장을 쳐다보았다.
 "어떻게든 본전을 찾아야 해. 게다가 분풀이도 해야 하
고……."
 커틀러스는 완전히 넉 다운이 되어 병상에 누워 있다. 그
사실을 떠올린 맥넌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상태를 보니 1주일 정도는 경기에 나가지 못할 것 같군.
애송이 놈. 손해를 끼친 대가를 확실하게 치러야 할 것이
다."
 하지만 맥넌은 몰랐다. 커틀러스는 1주일이 아니라 10년
이나 지나도 무투장에 서지 못한다는 사실을……. 레온이
내뿜은 경력이 뇌혈관뿐만 아니라 근육과 근골을 온통 헤
집어 놓았기에 커틀러스는 완전히 폐인이 되어 버린 상태
였다.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맥넌이 스산한 눈빛
을 뿌렸다.
 "흐흐흐. 단단히 당부해 놓았으니 터커가 촌뜨기 놈을 갈
기갈기 찢어버릴 거야. 터커의 실력이라면 틀림이 없지."
 터커의 강점은 날카로운 손톱뿐만 아니라 빠른 몸놀림을 
들 수 있다. 게다가 해적으로 활동하며 적지 않은 실전경
험을 쌓았다. 비록 촌뜨기에게 커틀러스를 때려눕힐 정도
로 강한 주먹이 있다지만 맞히지 못하면 그만이다.
 승리를 자신한 맥넌이 경기장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이미
그는 운용할 수 있는 공금 전부를 터커의 승리에 베팅한 
상태였다.
 "조금만 있으면 아까 잃은 돈을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터커가 스산한 눈빛으로 레온을 쳐다보았다.
 '커틀러스가 팔치온식 치고받기를 하다 뻗었다고 그랬지?
그렇다면 가급적 펀치를 허용하지 말아야겠군.'
 헬 케이지 무투장의 무투가들에게는 엄연히 서열이 있다.
그중 1위는 따로 있었고 2위가 바로 터커였다. 그 아래에
커틀러스가 랭크되어 있다. 그런 만큼 터커는 커틀러스의
실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감각을 되살리자는 명
분으로 이따금 친선경기를 벌였기 때문이다.
'커틀러스를 꺾었다면 그리 만만치 않은 놈이야. 하지만 
내 손톱에 걸린 이상 도리가 없지.'
 터커가 날카롭게 갈린 손톱을 느릿하게 들어올렸다. 마치
독수리의 발톱처럼 생긴 손톱의 끝이 예리하게 빛났다.
 입술을 비집고 착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럼 시작해 볼까?"
 터커는 커틀러스처럼 여유를 부리지 않았다. 그는 바짝 
긴장한 채 레온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래로
축 늘어드린 손톱은 언제라도 상대의 몸을 그어버릴 채비
를 갖춘 상태였다. 레온 역시 제자리에서 몸을 돌려 터커
를 마주보았다.
 '특이한 손톱을 가짐 녀석이로군.'
 레온은 우선 터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하얀 자위가
유난히 번들거리는 모습은 터커의 심성을 여실히 대변해주
고 있었다.
 '사람을 수도 없이 죽여 본 눈이로군. 그것도 최대한 잔인
하게 말이야. 네놈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겠어.'
 마침내 터커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커틀러스의 운명을 그
대로 계승하기로 말이다.

 먼저 선공을 가한 쪽은 레온이었다. 터커는 상당히 신중히
경기에 임했다. 레온의 움직임에 주목할 뿐 먼저 공격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애당초 경기를 길게 끌고 싶지 않았기
에 레온이 먼저 나서서 주먹을 휘둘렀다.
 부우웅--!
 파공성과 함깨 솥뚜껑만한 주먹이 터커의 면상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순간 가면으로 가려진 터커의 눈동자가 빛났
다.
 '기다렸다. 이 순간을…….'
 터커는 지체 없이 손을 좍 펼쳐 레온의 손등을 내려찍었다.
상대의 공격을 철저히 역이용하는 것이 터커의 전략이다. 상
대의 주먹을 위에서 마치 보자기처럼 감싸 쥘 경우 손톱이 
상대의 손가락을 파고든다. 그렇게 되면 상대는 다시 주먹을
쥘 수 없게 된다. 지금껏 수없이 써먹은 방법이었고 대부분
먹혀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휘이익--!
 주먹 쥔 손이 갑자기 좍 펼쳐지며 뒤집히더니 터커의 손과
깍지를 꼈다. 그 때문에 날카롭게 번들거리돈 손톱은 그만 
허공을 그어버렸다.
 깜짝 놀란 터커가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 했지만 마치 쇠갈
고리에 물린 듯 요지부동이었다. 그 상태로 레온이 손에 힘
을 불어넣었다.
 우드드득!"
 관절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터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손
에 가해지는 악력이 장난이 아닌 것이다. 인상을 있는대로
찌푸인 터커가 불시에 킥을 날려 왔다.
 "에잇!"
 터커는 발과 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격투술의 달인이다.
다리가 긴 만큼 발차기 한 방이면 상대의 균형을 일거에 무
너뜨릴 수 있다. 그가 노린 것은 레온의 허벅지였다. 하지
만 터커의 발차기는 목표에 닿지 못했다. 레온이 절묘하게
발을 들어 터커의 발목을 먼저 걷어 차버렸기 때문이다.
 파팍!
 발차기가 무산되며 터커의 건장한 몸이 휘청거렸다. 레온이
깍지 낀 손을 잡아당기자 터커가 앞으로 딸려오며 한쪽 무
릎을 꿇었다.
 레온이 인정사정없이 무릎으로 터커의 등판을 찍어 눌렀다.
 "크으윽!"
 팔이 비틀리자 터커의 몸이 고통으로 부르르 떨렸다. 이어
터커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레온이 왼손을 이용해
깍지 끼고 있던 터커의 손톱을 하나씩 부러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콱직! 
 날카롭게 갈아놓은 손톱이 맥없이 부러져 나갔다. 터커의
눈이 극심한 통증과 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이대로 가다간 지고 만다.'
 이를 으스러져라 악문 터커가 팔이 비틀리는 것을 각오하
고 땅을 짚은 손을 휘둘러 레온의 얼굴을 그어버리려했다.
그러나 레온은 왼손을 뻗어 여유 있게 날아오는 팔을 잡아
챘다. 그런 다음 그 손을 바닥에 발로 밟아 짓누른 뒤 계
속해서 손톱을 부러뜨려 나갔다.
 뚝, 뚜뚝--!
 손톱이 하나둘 부러쨔 나감에 따라 터커의 이마에서 식은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렸다. 빠져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
지만 상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나까지 운용하는 레
온의 힘은 터커가 어찌 해 볼 수 없을 만큼 강했다.

 관중석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헬 케이지 무투장의 서열
2위에 랭크되어 있는 터커가 변변찮게 힘도 써보지 못하고
당하고 있는 것이다.
 "세, 세상에……."
 관중들 대부분은 터커의 압승을 예상했다. 본 브레이커 러
프넥이 터커의 손톱에 의해 전신이 참혹하게 난자당할 것이
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승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
되었다. 관중들은 마른 침을 삼키며 본 브레이커가 느긋하
게 학살자 터커의 손톱을 부러뜨리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맥넌은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그는 레온을 그
저 주먹만 센 애송이로 간주하고 터커와의 대결을 주선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애송이는 엄청난 체술을 발휘해 터커를 간
단히 제압한 뒤 손톱을 부러뜨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 정도라면 체술의 달인 커틀러스를 능가하는 실력이었다.
그의 이마에서는 어느덧 식은땀이 비 오듯 떨어지고 있었다.
 '비, 빌어먹을…….'
 우두둑!
 마침내 마지막 손톱이 부러져 나갔다. 터커의 몸이 극심한
통증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손톱을 다 부러뜨리고 나자 레
온이 터커를 풀어주었다. 자유를 되찾은 터커가 몹시 아픈
듯 손가락을 어루만졌다.
 스사한 살기가 레온을 향해 폭사되었다.
 "이런 개자식. 내, 내 손톱을 모조리 부러뜨리다니……."
 "많이 아프지? 지금까지 네가 쓰러뜨린 선수들을 그보다
훨씬 많이 아팠을 거야."
 아무런 억양의 고저가 없는 레온의 음성이 터커에게는 조
롱하는 어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터커가 무턱대고 몸을 날렸다.
 "죽여 버리겠다!"
 비록 손톱이 모두 부러져 나갔지만 터커에겐 아직까지 쓸
수 있는 기술이 남아 있다. 큰 키를 이용한 발차기와 무릎
치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사력을 다해 레온을 얼싸안은 터
커가 있는 힘껏 무릎을 상대의 복부에 박아 넣었다.
 퍽--!
 원래대로라면 상대는 몸을 꾸부린 채 괴로워해야 한다. 
심한 경우 먹은 것을 토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상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했다. 도리어 터커가 무릎에서
치밀어 오르는 극통에 얼굴을 찌푸려야 했다.
 "욱! 마치 돌벽을 친 것 같군."
 호신강기를 이용해 무릎치기를 막아낸 레온이 씩 웃었다.
 "그 실력으로 여태 밥 먹고 살았나? 무릎치기는 바로 이
렇게 하는 거야."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폭음이 올려 퍼졌다.
 쾅--!
 터커의 몸이 펄쩍 뛰어오르며 기역자로 꺾였다. 레온의 
무릎이 번개처럼 터커의 복부를 가격한 것이다.
 "우왝!"
 터커가 먹은 것을 게워내며 괴로워했다. 경력이 침투해
오작육부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레온의 공격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터커의 면상으로 강력한 무릎치
기가 재차 작렬했다.
 콰앙--!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터커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오르더
니 한참을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그가 날아가는 궤적
으로 부러진 이빨이 옥수수 알처럼 우수수 흩날렸다.
 큰 대자로 뻗은 채 눈을 까뒤집은 터커의 입가로 게거품
이 부글부글 흘러나왔다. 경력이 내장에 침투했으니 앞으
로 무투장에 나서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터였다.

 "미, 미치겠군."
 맥넌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자신만만하게 주선한 시
합에서 또다시 패한 것이다. 터커에게 걸었던 50골드가 
또다시 허공으로 훨훨 날아가 버렸다. 만약 이 사실이 무
투장 주인에게 알려진다면 그대로 내쫓길 것이 틀림없었
다. 돌연 그의 눈빛이 번들번들 빛났다.
 "이대로 끝낼 순 없어. 어떻게든 복구를 해야 해."
 입술을 살짝 깨문 맥넌이 어딘가로 서둘러 사라졌다. 그
는 이미 이런 상황을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춰두고 있었
다.
 
 선수대기실로 돌아온 레온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두번
의 승리로 인해 상당한 자금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도박중
개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레온의 배당금을 계산해 주었다.
 "이번 경기의 승률배당은 82:18입니다. 따라서 러프넥님
께서 건 10골드  56실버가 도합 36골드 96실버가 되었습니
다. 3.5배 정도로 튀겼다고 생각하십시오."
 "꽤나 짭짤하군."
 돈을 받아든 레온이 주머니를 열고 집어넣었다. 도박중개
인이 주뼛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나름대로 저도 수고했으니 수고비를 좀 챙겨주심이 어떠
신지……."
 중개인을 힐끔 쳐다본 레온이 1골드짜리 금화 하나를 손
에 쥐어주었다. 순간 중개인의 눈이 커졌다. 상대가 설마
1골드라는 거금을 쥐어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한 달동
안 뼈 빠지게 일해도 1골드를 벌 수 없었기 때문에 무표정
하던 그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행여나 레온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봐 그는 서둘러 몸
을 돌렸다. 그 모습을 레온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
다.
 '팁을 너무 많이 줬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확실히 경제개념이 없는 레온이었다.

 정신없이 달려 나가던 도박중개인은 그러나 얼마 가지 못
하고 누군가의 손에 팔목이 잡혔다.
 "어딜 가는 겐가? 다시 따라 들어오게."
 그는 조금 전 나섰던 선수대기실로 다시 들어가야 했다.
맥넌이 도박중개인을 강제로 끌고 온 것이다. 뭔가를 결심
한 듯 맥넌의 눈빛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레온을
마주 대한 순간 표정이 판이하게 바뀌었다.
 그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레온의 실력을 칭찬했다.
 "정말 실력이 대단하군. 훌륭한 솜씨였어."
 레온이 건성으로 머리를 까딱했다.
 "고맙소."
 "혹시 한 번 더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나? 관중들은 경기
를 더 원한다네."
 "뭐, 선수가 있다면야 얼마든지 싸울 수 있소."
 그 말을 듣자 맥넌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정말 프로다운 마음 자세로군, 아마 자넨 무투가로 대성
할 수 있을 거야. 암 그렇고말고. 프로 무투가라면 힘이 
남아 있는 한 싸워야 하는 법이지."
 "이번 상대는 누구요?"
 "우리 무투장의 간판스타라네. 지금 사람이 데리러 갔으
니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점심때도 되었으니 그가
올 동안 느긋하게 식사나 하게. 선수들의 식사는 원래 무
투장에서 제공하게 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말을 마친 맥넌이 레온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손뼉을 쳤
다. 그러자 시녀 두 명이 푸짐하게 차림 음식상을 들고 들
어왔다. 정성껏 요리된 고급 요리들이 상 위에 가득 차려
져 있었다.
 맥넌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레온을 향해 손짓을 했다,
 "어서 들도록 하게. 그리고 돈을 걸려면 지금 거는 것이
어떤가?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하는 법이지."
 그 말을 들은 레온이 순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소. 지금까지 딴 돈을 모두 걸겠소."
 그 말을 듣자 도박중개인이 난색을 표했다.
 "하, 하지만 돈을 걸 수 있는 상한선은 최고가 30골
드……."
 그때 맥넌이 나서서 도박중개인의 팔을 움켜쥐었다.
 "하하! 괜찮네. 원래는 30골드가 상한선이지만 이번에는
내 재량으로 모두 걸 수 있도록 해 주겠네. 자네가 원하
는 대로 걸어도 되네."
 그 말을 들은 레온이 돈주머니를 꺼내어 도박중개인에게
건넸다.
 "35골드 96실버요. 경기수다을 합치면 38골드가 약간 안
되겠군. 모두 걸겠소."
 도박중개인은 주뼛거리며 돈주머니를 받아들었다. 그가
불안한 눈초리로 맥넌을 쳐다보았지만, 맥넌이 고개를 끄
덕이자 체념한 표정으로 파란 종이를 꺼냈다. 대충 승률
계산을 해 본 도박중개인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이번에도 이긴다면 상당한 돈이 긁어모을 수 있겠군.'
 레온은 도박중개인이 내민 파란 종이를 품속에 집어넣은
다음 식탁에 앉았다. 때마침 시장하던 참이었기에 레온은
맛있게 음식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맥넌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았다. 이
미 그는 음식에 수작을 부려놓은 상태였다.
 '흐흐흐. 적절히 독을 배합해 놓았으니 경기가 시작하자
마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잘 가도록 하게.
우리 무투장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으니 그 정도는 감수해
야지.'
 그는 레온이 먹는 음식에 여러 가지 독을 첨가했다. 앞이
안 보이게 하는 독과 함께 전신에서 힘이 쭉 빠지게 만드
는 독, 그리고 균형감각을 잃게 하는 독을 섞어 놓았으니
30분 정도 지나면 눈앞의 애송이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이번 경기의 상대는 헬 케이지 무투장 최고의 스
타인 스콜피온이었다. 복부 야만족 출신으로 가공할 위력
을 가지 몸통박치기가 장기인 스콜피온은 헬 케이지 무투
장 서열 1위의 무투가였다. 특유의 몸통박치기로 상대 선
수를 경기장 벽에 처박아 피떡을 만들어비리는 기술로 소
문난 선수이기도 했다. 
 경기 결과를 상상해 보던 맥넌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
 '독에 중독되어 해롱거리는 녀석을 스콜피언이 트레이드
마크인 몸통박치기로 경기장 벽에 박아버린다면 정말 깔
끔하게 해결되겠군. 두 번이나 맹위를 떨쳤으니 적지않은
관중들이 본 브레이커에게 돈을 걸 터, 잘하면 그동안 손
해 본 돈을 한 번에 벌충할 수 있겠어.'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레온은 식사를 마쳤다. 차려
놓은 음식을 깔끔하게 먹어치운 것을 보니 먹성도 대단했
다. 물론 음시에 뿌려놓은 독도 말끔히 뱃속에 들어갔을
터였다.
 시녀를 시켜 상을 내가도록 한 뒤 맥넌이 레온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곧바로 시합을 주선하겠네. 그동안 선수대기실에서
기다리도록 하게."
 레온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잠시 후 경기장을 나선 레온의 앞에 헬 케이지 무투장의
간판스타 스콜피온이 등장했다. 스콜피온은 레온보다도 오
히려 더 덩치가 큰 거인이었다. 이마와 턱이 툭 튀어나와
있어 인상이 무척 험상궂었고 근육이 꿈틀거리는 팔다리에
는 온갖 흉터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가 버티고 서자 경
기장 안이 꽉 차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레온이 등장하자 스콜피온은 머뭇거림 없이 몸을 구부렸
다. 곧장 자신의 장기를 발휘하려는 것이다.
 "워어어억!"
 마치 물소의 괴성과 비슷하게 부르짖은 스콜피온이 맹렬
히 경기장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레온도 마주
몸을 날렸다. 두 거구의 무투가가 서로를 향해 정신없이
달음박질치는 모습은 한 마디로 장관이었다.
 그 모습을 본 맥넌은 깜짝 놀랐다.
 "뭐, 뭐야?"
 지금쯤이면 몸을 주체하지도 못해야 할 본 브레이커가 믿
을 수 없게도 전력질주를 하고 있었다. 독에 중독된 증상
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도, 독을 잘못 배합했나? 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거
지?'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경기장에 나간 본 브레이커가
사실은 독이 전혀 통하지 않은 초인이라는 사실을…….
 두두두두--!
 상대와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스콜피온이 살짝 자세를 낮
추며 오른쪽 어깨를 앞으로 내밀었다. 왼쪽보다 비정상적
으로 크고 우람한 어깨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쇳덩이
처럼 단단한 근육이 온토 어깨를 뒤덮고 있었다.
 레온 역시 비슷한 자세를 취했다. 마치 스콜피온의 동자
을 따라하려는 것 같았다. 스콜피온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
가 떠올랐다.
 '멍청한 놈. 따라하는 것이 능사인 줄 아나?'
 그 상태로 레온과 스콜피온은 정통으로 격돌했다.
 콰아앙--!
 덩치 하나가 굉음과 함께 맥없이 튕겨나갔다. 믿을 수 없
게도 튕겨나간 쪽은 스콜피온이었다. 한참을 날아간 스콜
피온의 거구는 거칠게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육중한 체구가 거의 10미터 가까이 날아간 것이다. 네
활개를 활짝 펴고 부들부들 경련하던 스콜피온의 몸이 축
늘어졌다. 눈동자가 완전히 뒤집혔고 벌린 입에서는 게거
품이 흘러나왔다. 인간의 몸으론 수용하기 힘든 타격을 받
았으니 이런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레온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리플리에게서 전수받은 싸이클론을 오랜만에 써먹어 봤
군."
 회전력을 이용해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하는 비기인 싸
이클론. 그것을 전사경과 섞어서 써먹었으니 스콜피온이
그대로 튕겨나가 까무러칠 만했다.
 아마도 스콜피온은 두 번 다시 몸통박치기를 써먹을 수 없
을 터였다. 어깨의 근육이 가닥가닥 찢어져 버렸으니 한 팔
을 영원히 쓸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관중석은 조용했다. 누구 하나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
다. 무명의 한 무투가에 의해 헬 케이지 무투장이 자랑하는
3대 무투가가 처참하게 박살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특
히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맥넌은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
다.
 '파, 파산이야. 나, 난 이제 끝장이라고…….'
 이번 스코리피온과의 대전에 운용할 수 있는 모든 공금을 
털어 넣은 맥넌이었다. 이 사실을 무투장 주인이 알아차린
다면 맥넌은 그날로 죽은 목숨이었다. 쫓겨나는 것으로 해
결될 문제가 아니다.
 '사, 살려면 도망쳐야 해.'
 어느덧 맥넌은 야반도주를 떠올리고 있었다.

 선수대기실로 돌아온 레온을 도박중개인이 웃는 낯으로 맞
았다. 역시 팁의 힘은 대단했다.
 "이, 이번 승률배당은 조금 낮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
이 러츠넥님께 걸었기에 67:33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러프
넥님께서 받으실 배당은 총 73골드 93실버입니다. 대박을
축하드립니다."
 레온이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돈을 받아 주머니에 집어 넣
었다. 팁을 원했는지 도박중개인이 손을 싹싹 비볐지만 이
번에는 팁을 주지 않았다.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금화를
보며 그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럼 앞으로도 좋은 경기 치르십시오."
 아까 준 1골드가 충분했는지 도박중개인은 더 이상 팁을 
요구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고맙소."
 살짝 고개를 끄덕인 레온이 몸을 일으켰다. 상당한 거금을
벌었기에 그는 무척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이 상태로 간다면 어쩌면 1만 골드를 모으는 것이 가능할
지도 몰라.'
 고개를 끄덕인 레온이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반대
편 문으로는 짐을 꾸려든 맥넌이 살금살금 무투장을 빠져나
가고 있었다.

 레온은 기분 좋게 숙소로 돌아갔다. 14실버로 74골드라는
거금을 뻥튀기하듯 벌었으니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74골드
라면 보름 동안 벌목 일을 해야 번 돈의 세 배에 가깝다. 
그 많은 돈을 단 하루 만에 벌었으니 흥이 나지 않으면 이
상한 일이다.
 '잘 하면 초인선발전이 열리기 전에 충분히 1만 골드를 만
들 수 있겠어.'
 숙소로 돌아간 레온은 먼저 몸을 씻고 식사를 했다. 알리
사이는 아직까지 귀가하지 않은 상태였다.
 '늦게 돌아오시려나 보군.'
 레온은 느긋하게 수련을 시작했다. 운기행공을 통해 지닌
마나를 일주천시키는 것이다. 그는 이내 무아지경에 빠져
들었다.
 알리시아는 비교적 늦은 시간에 숙소로 돌아왔다. 초췌해
진 얼굴에 피로감이 가득한 것을 보아 하루 종일 책에 파
묻혀 보낸 모양이다.
 레온이 수련을 중지하고 그녀를 맞이했다.
 "돌아오셨습니까?"
 "일찍 오셨군요."
 레온은 아무런 말없이 주머니를 꺼내 탁자 위에 쏟았다.
 좌르르르--
 눈비신 금화가 사방으로 흩어져서 반짝였다. 그것을 본 
알리시아의 눈이 커졌다.
 "엄청난 거금이로군요. 도대체 어떻게……."
 레온은 의기양양하게 오늘 겪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일
의 전모를 듣고 난 알리시아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대단한 활약을 하셨군요. 정말 놀라워요. 하루만에 74골
드를 만들어 오다니……."
 "이대로라면 1만골드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알리시아는 레온의 장담을 그리 긍정적으로 생각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쉽지 않을 거예요. 도박사들은 보편적으로
정보에 빠르기 마련이죠. 모르긴 몰라도 본 브레이커 러프
넥에 대한 소문은 도박사들 사이에 좍 퍼져 나갔을 거예요.
그렇게 되었다면 오늘같이 높은 배당률을 기대하기 힘들어
요."
 "전혀 다른 무투장으로 가면 되지 않습니까?"
 "다른 무투장에도 소문이 퍼지지 않았으리라곤 기대하기
힘들어요. 도박사들은 보편적으로 이곳저곳 기웃거리기 마
련이니까요. 아무래도 레온님께서 처음부터 너무 실력을
내보이신 것 같아요. 겨우겨우 이기는 모습을 보였다면 더
욱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 텐데……."
 그 말에 레온이 침울해졌다.
 "제가 실수를 한 것이군요."
 "그렇게만 볼 것도 아니에요. 아직까지 기회가 많잖아요?
중급과 상급 무투장을 거치다보면 충분히 의도했던 금액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아직까지 초인선발전까지는 기한이
많이 남았으니까요."
 이번에는 레온이 알리시아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도서관에 볼 만한 책이 많았습니까?"
 "엄청나게 많아요. 지금은 귀족의 예법과 예절에 대해 공
부하고 있어요. 트루베니아와는 예법이 조금 차이가 있더
군요. 하지만 그리 크게 차이나지 않으니 금방 배울 수 있
을 거예요."
 "사회상은 어떻던가요?"
 "아직 거기까진 공부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약간 훑어 본
것만으로도 트루베니아와는 많이 다르더군요."
 알리시아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아르카디아의 국가들은 사회적 시스템이 마치 톱니바퀴
처럼 잘 맞물려 돌아가고 있어요.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는
트루베니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죠."
 "그렇게 차이가 많이 나던가요?"
 "가장 차이가 나는 것은 귀족들의 마음가짐이에요. 트루베
니아의 귀족들은 단순히 권리만 누리고 군림하려고만 하는
반면 아르카디아의 귀족들은 거기에 따른 의무까지 생각하
더군요. 그것을 여기에서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고 표현해요."
 레온으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무척 복잡하군요."
 "아무래도 공부해야 할 것이 정말 많을 것 같아요. 아무튼
레온님께서는 지금처럼 무투장에서 자금을 마련하세요. 이
왕 소문이 났으니 지금까지 하시던 대로 하시면 될 거에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레온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시아의 예견은 정확했다. 본 브레이커 러프넥에 대한
소문은 어느새 무투장 사이에 좍 퍼져 있었다. 헬 케이지 
무투장의 3대 선수가 무참히 박살이 났고 무투장을 관리하
던 맥넌이 파산하여 야반도주했다는 사실은 모든 무투장 
주인들이 알고 있었다. 그 덕에 레온에 대한 승률이 파격
적이로 치솟아 버렸으니…….
 레온은 사흘 정도 무투장을 돌아다니며 경기를 했다. 다
행히 그곳들은 헬 케이지 무투장과 달리 평범하게 격투술
을 겨루는 무투장이었다.
 레온은 도합 10명의 무투가와 싸워 압도적으로 승리를 장
식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레온이 번 돈은 그리 많지 않았
다. 우선 대부분의 무투장이 20골드 이상의 거금을 걸 수
없게 방침을 세워놓았다. 그리고 많은 도박꾼들이 레온이
승리한다는 쪽에 돈을 걸었기 때문에 기껏해야 20~30% 정
도의 배당금밖에 거두지 못했다.
 그런 데다 사흘이 지나자 더 이상 레온을 받아 주는 무투
장이 없었다. 워낙 압도적인 실력을 과시했기에 대부분의
무투가들이 레온과 싸우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제가 실수한 것이 확실하군요. 알리시아님의 의견에 따
라야 했을 것을……."
 풀죽은 레온의 모습에 알리시아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아직까지 기회는 많으니까요. 내일은 목제병
기를 사용하는 중급 무투가로 승급신청을 하세요. 지금까
지 벌인 활약이 있으니 어렵지 않게 승급시켜 줄 거예요."

 "거기에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중급 무투장부터는 제가 함께 가겠어요. 제가 관중석에
따로 돈을 건다면 수익률이 지금보다는 나을 거예요."
 그 말에 레온의 얼굴이 밝아졌다.
 "알리시아님께서 따라오신다니 한결 든든하군요. 그럼 기
대하겠습니다."
 
 다음날 레온은 머뭇거림 없이 무투가 길드에 가서 승급신
청을 했다. 레온의 활약상에 대해 들었는지 길드에서는 얼
마 안 되는 심사비를 받고 레온을 승급히켜 주었다.
 "초급 무투장에서 대단한 활약을 벌이셨더군요. 그 정도
라면 병장기도 잘 다루실 터, 승급을 인정하겠습니다. 그
럼 사용하실 병기를 보여주십시오."
 길드 사무원의 말에 레온이 길고 짧은 메이스 두 자루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길이가 하나는 길고 하나는 짧둔요. 원래 이렇게 사용 하
십니까?"
 "그렇소."
 "뭐 메이스라면 간편하겠군요. 클럽(Club: 박달나무 몽둥
이)으로 대치해도 되니까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승급 인정서를 받아든 레온이 길드를 나섰다. 알리시아는 
길드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차림새가 판
이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남장을 하고 있었다. 붉은 머리를 단단히 묶어 뒤
로 늘어뜨리고 고급스러운 빌로드 셔츠와 모직 바지를 걸
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영락없는 귀족가의 곱상한
도련님이었다. 그 모습을 본 레온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정말 잘 어울리시는군요."
 그 말에 알리시아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놀리지 말아요. 그럼 무투장으로 가볼까요."
 중급 무투장은 시가지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대부분의 초
급 무투장이 외곽에 산재한 반면 비교적 수준 높은 경기를
펼치는 중급 무투장은 사람들이 접근이 용이한 시가지 안쪽
에 배치한 것이다.
 알리시아가 죽 늘어선 경기장을 훑어보며 속삭였다.
 "상급 경기는 대부분 원형경기장에서 치러요. 이곳에서 실
력을 인정받으면 상급으로 승급할 수 있으니 당분간 이곳에
서 시합을 해야 할 거예요."
 중급 무투장에서는 무투가들이 나무로 된 병기를 이용해서
무예를 겨룬다. 그런 만큼 사용하는 무기가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목검이나 목도, 클럽, 봉 이렇게 네 가지 병기만을
쓸 수 있기 때문에 독특한 병기를 쓰는 무투가들에게는 다
분히 손해였다. 물론 그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무기가 목검
이었다.
 중급 무투장은 직업 무투가 외에도 기사 지망생이나 용병
들이 이따금 참가하는 곳이다. 나름대로 실전경험을 쌓을
수 있기 때문에 수련 기사들도 흔히 참가한다. 알리시아는
도서관에서 무투회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쌓아 온 상태였
다.
 적절한 무투장을 고르자 알리사아가 레온에게 눈짓을 했
다. 
 "그럼 저는 따로 들어가겠어요. 관중석에 앉아 있을 테니
제 위치를 잘 파악해 두세요."
 "알겠습니다."
 "경기가 시작되면 제가 승률을 파악해서 따로 손짓을 하
겠어요."
 잠시 말을 끊은 알리시아가 조심스럽게 레온에게 말을 걸
었다.
 "혹시 경기에서 져 주실 수도 있나요?"
 잠시 생각해 보던 레온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러프넥이란 이름으로 활약하고 있으니 상관없습니다.
블러디 나이트일 때는 패배가 용납되지 않지만 무투가 러프
넥에게는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다행이로군요. 그렇다면 신호를 정하죠. 시작 신호가 올
렸을 때 만약 제가 귀를 만진다면 상대를 이기세요. 압도적
으로 이기진 마시고 겨우겨우 이겼다는 느낌을 주어야 해요.
그리고 제가 코를 만진다면 져 주세요. 그렇게 하는 것이
돈을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이죠."
 레론이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표를 사서 관중석으로 가겠어요. 레온님께서는
무투가로 참가신청을 하세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레온이 가자 무투자에서는 두말없이 경기에 참가시켜 주었
다. 본 브레이커 러프넥이 중급 무투가로 승급했다는 사실
이 이미 무투장 주인들의 귀에 들어갔던 것이다.
 "병기를 사용해 본 경험이 있소?"
 "충분히 연습했습니다. 잘 할 자신이 있습니다."
 "클럽이라……. 가장 사용하기 쉬운 병기이긴 하지. 그런
나 중급 경기장은 초급과는 다르오. 일단 목제이긴 하지만
병장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치명적인 부상을 당할 수도 있
소."
 레온이 태연히 말을 받았다.
 "무투가로 나선 마당에 부상 따위를 염려하겠습니까? 걱
정 마십시오."
 "좋소. 그럼 선수로 출전시켜 드리리다. 대전료는 3골드
요. 거기에는 부상 치료비가 포함되어 있소. 부상을 입을 
경우 우리 무투장에서 일절 책임지지 않소. 그 점을 명심
하시오."
 "알겠습니다."
 표식을 받아든 레온이 조용히 선수대기실로 향했다. 거기
에는 오늘의 경기에 출전할 선수들이 삼삼오오 모여 웅성
거리고 있었다.
 경기에 필요한 목제 병기는 무투장에서 제공했다. 선수 
대기실의 탁자 위에는 목제 병기들이 종류별로 나열되어 
있었다. 무투장에서는 오직 이 병기만 사용할 수 있다. 그
중 가장 숫자가 많은 것이 목검이었다. 검을 사용하는 검사
들이 가장 많다는 뜻이다.
 선수대기실을 훑어본 레온이 살짝 이맛살을 모았다.
 '확실히 중급 경기장은 초급과는 판이하게 다르군.'
 초급 경기장은 선수들 대부분이 근육질의 덩치이다. 맨손
격투인 만큼 덩치가 당당하고 힘이 좋아야 잘 싸울 수 있
다.
 하지만 중급 경기장의 선수들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대부분의 무투가들이 균형이 잘 잡힌 체구를 가지고 있었
다. 평균적으로 1.8미터 정도의 키에 전신이 근육이 잘 단
련된 편이었다.
 레온과 같은 거구는 여간해서는 찾아볼 수 없다. 덩치가
크면 힘이 좋지만 동작이 느려진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게다가 목제라고는 하나 병장기를 사용하면 주먹이나 발차
기보다도 월등히 강력한 타격을 가할 수 있다. 그렇게 때
문에 중급 무투가들의 체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대기실에 모인 무투가들의 체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경
기장에서 피 퀴기며 싸워야 할 처지이기 때문에 여간해서
는 친분을 나누려 하지 않는 것이다. 레온 역시 적당한 크
기의 클럽 두 개를 고른 뒤 한쪽 구석에 가서 앉았다.
 이제 이름이 호명되면 나가 싸우면 되는 것이다.

 "이번 시합은 오늘 중급 무투가로 승급한 본 브레이커 러
프넥과 라바에서 온 에스틴과의 대전입니다."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고함소리를 들은 알리시아가 바짝
긴장했다. 이제 레온의 시합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승률판을 살폈다. 선수의 이름을 들은 도박꾼
들이 계속 돈을 걸었기 때문에 승률판의 수치가 계속 변
하고 있었다.
 계속 변하던 승률판의 수치가 차츰차츰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과는 레온의 현저한 우세였다. 대부분의 도
박군들이 본 브레이커 러프넥의 압도적인 우세를 점쳤다.
비록 첫 시합이긴 하지만 초급 경기장에서 워낙 인상깊은
경기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반면 에스틴은 그리 지명도가 높지 않은 무명의 검사였
다. 주위에서 수군대는 소리를 들어보니 에스틴은 20대초
반의 곱상한 기사 지망생이다. 실전경험을 쌓기 위해 무
투회에 참가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무투장에서 러프넥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맞붙였나 보군.'
 '이번 시합은 져 줘야겠군.'
 마음을 정한 알리시아가 손을 들어 도박중개인을 불렀다.
녹색 조끼를 걸친 도박중개인이 재빨리 다가왔다.
 "돈을 거시겠습니까?"
 알리사아가 의도적으로 목청을 탁하게 하여 입을 열었다.
 "한 번에 걸 수 있는 돈의 한도가 얼마요?"
 "40골드입니다. 한도꺼지 거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알리시아가 금화 40개를 꺼내 내밀었다.
 "누구에게 거시겠습니까?"
 알리사아가 호명한 이름을 들은 도박중개인의 눈이 휘둥
그레졌다. 모두가 열세로 짐작하는 무명의 검사 에스틴에
게 걸었기 때문이다. 에스틴에게 건 도박꾼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베팅을 한 자들도 겨우 5~10골드 정도의 푼돈만
을 걸었기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직업
이 직업인지라 도박중개인은 얼른 냉정을 되찾았다.
 "여기 있습니다. 그럼 경기 결과에 따라 배당해 드리겠
습니다."
 파란 종이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알리시아가 의자에 몸을
묻은 채 레온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레온이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관중석을 훑어본 그는
금세 알리시아를 찾아냈다. 알리시아는 초조한 듯 코를 만
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져 주라는 말이로군.'
 레온이 씁쓸이 미소를 지었다. 사실 레온 정도의 실력자가
일부러 져 주는 것이 기분이 좋을 리는 없다. 하지만 초인
선발전에 참가하려면 1만 골드라는 거금이 있어야 했기 때
문에 레온은 억지로 마음을 억눌렀다.
 고개를 돌리자 오늘 맞서 싸울 선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2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애송이였다.
나름대로 수련을 쌓아온 듯 자세가 다부졌지만 목검이 미미
하게 떨리는 것을 보아 레온에게 적지 않게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레온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내가 초급 경기장에서 워낙 악명을 떨쳐 놓았으니…….'
 레온의 손에는 길고 짧은 두 자루의 묵직한 클럽이 들려있
다. 클럽을 고쳐 잡으며 레온이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본 에스틴이 움찔했다. 얼핏 보기에도 세 배가 
넘는 체구의 거한이 묵직한 클럽을 들고 다가오니 겁을 집
어먹지 않을 수 없다.
 '젠장! 상대가 너무 강한 것 같아.'
 하지만 명색이 기사 지망생인데 물러설 수는 없다. 목검 
손잡이를 으스러져라 움켜쥔 에스틴이 자세를 잡았다. 하지
만 공포의 본 브레이커 러프넥은 너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는 듯 어슬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둘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관중들의 손아귀에는 서서히 식
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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