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의 황제(皇帝) 01 - 10
“으아아아악!!!!!!!!!!!!!!”
엄청난 비명소리에 눈이 떠졌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오빠 방으로 뛰어갔지만, 없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화장실?!
화장실로 걸어가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자, 역시나!
울상인 얼굴에 분홍색 키티 헤어밴드를
착용한 오빠의 모습이 거울을 통해 비춰졌다.
“오늘은 또 뭐야?”
“제순아...”
“질질 짜지 말고 말해봐!”
“이거”
이마 한쪽을 가리키는 오빠의 손을 따라가자
뚫어져라 쳐다봐야지만 볼 수 있는 아주 작은 뾰루지 하나가 보였다.
“그게 뭐?”
“왜 하필 오늘 뾰루지가 났냐구!!”
“그러니까 지금, 겨우 그 뾰루지 때문에 집 떠나가라 소리 지른 거야?”
“겨우라니!! 제순이 너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몰라?”
오라버니, 제가 모를 리 있나요.
오늘을 위해 태어난 당신이거늘...
“이번에도 오빠가 뽑힐 텐데 뭐가 문제야?”
“아니야! 이 뾰루지 때문에 망했어. 제순아, 나 이제 어떡해.”
날 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이 망할 놈의 인간.
이 인간 팬클럽 년들은 이런 모습을 보면
소리 질러가며 좋아하겠지만, 난 소리 지르며 죽도록 패고 싶다.
특히 잘난 저 얼굴을...
하지만 얼굴이 생명인 인간인데...
작은 뾰루지 하나 났다고 이 난리를 치는 인간인데...
신이시여, 오늘도 거짓말 할 수 밖에 없는 절 용서하소서.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오빠보다 잘생긴 남자는 본적이 없어.”
“진짜?”
“당연하지~ 오빠가 최고야!”
“하긴, 이런 얼굴은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지.”
자신의 얼굴에 심취한 인간을 본 적 있는가!
정말이지, 빈 속에 버터 덩어리와 기름 한 통을 마신 기분이다.
울 오라버니!
평소에도 얼굴에 무지하게 신경을 쓰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이 난리를 피우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 학교는 매년 4월 1일 ‘황제 대회’라는 축제를 한다.
다른 학교 학생들조차 수업을 빼먹고 구경 올 정도로 유명하다.
국경고의 자랑, ‘황제 대회’ 에 대해 짧막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각 학년에서 제일 잘생긴 남학생을 투표를 통해 한 명씩 뽑는데,
뽑힌 남학생에게는 ‘얼굴의 황제’ 라는 칭호가 붙는다.
간혹 얼굴이 무지하게 딸리는 놈들이 만우절에 한다고
‘구라 대회’ 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런 놈들의 말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의 자랑스런 오라버니께선 올해 고3으로,
‘황제 대회’ 에서 3관왕을 노리고 있다.
오빠가 입학한 년도부터 이 대회가 시작됐는데
1학년 때도 그렇고, 2학년 때도 당연하듯 오빠가 얼굴의 황제에 등극되었다.
원조 꽃 미남 킬러이자 오빠의 팬클럽 회장을 맡고 있는 나의 베스트 프렌드 서예,
오빠 팬클럽 회원들, 그 외 많은 여학생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국경고 얼굴의 황제는 ‘왕제요’ 라고....
그런데 들리는 소문으론 이번엔 여자도 뽑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오빠, 이번엔 여자도 뽑는다며? 여자도 얼굴의 황제야?”
“아니.”
“그럼?”
“황제의 시녀.”
시녀? 황녀도 아닌 그렇다고 공주도 아닌 시녀라고?
“자세히 말해봐.”
“황제로 뽑힌 남자들이 원하는 여자를 뽑는거야. 안 뽑아도 상관없고.”
“뽑히면? 뽑히면 어떻게 되는데?”
“무슨 규칙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 거울 보냐고 못 들었어.”
그렇지!
왕제요 인생에 거울이 빠지면 붕어 없는 붕어빵이지!!
음, 3학년은 나의 오라버니가 될 것이고, 2학년은 문보문 선배!
그리고 1학년인 우리 학년에선 같은 반인 동시에
입학 날 첫 눈에 반해 현재 내가 열심히 짝사랑 중인 화려한 녀석이 유력하다.
아, 나의 사랑스런 려한이~
잘생긴 려한이의 얼굴이 떠오르자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찝찝한 이 느낌은 뭐지?
갑자기 차가운 무언가가 내 얼굴을 덮는게 느껴져
주위를 둘러보자 난 어느새 소파에 누워 팩을 하고 있었다.
“오라버니, 지금 뭐하는 짓이지요?”
“내가 요즘 바빠서 관리를 안 해줬더니 피부가 엉망이야.”
“필요 없어! 이딴 건 오빠나 실컷 해!”
이마에 올려진 당근 팩을 쓸어내며
몸을 일으켰는데 오빠가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미친듯이 괴성을 지르려다 참았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말릴 수 없을 지경까지 가는데...
그리고 오늘 ‘황제 대회’ 인데 울어서 눈이라도 부으면...
난 후다닥 소파에 누워 말했다.
“오빠야, 내 얼굴 정말 말이 아니지? 어서 팩 해줘.”
“필요 없다며?”
“내가? 어머머!! 내가 언제? 나도 오빠처럼 뽀얗고 부드러운 피부를 갖고 싶다고~”
내가 정말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아빠라도 있었으면 이런 짓까지는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15분 후, 당근 팩 찌꺼지들을 떨쳐내고
세수를 시작으로 학교 갈 준비를 했다.
교복을 입고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리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웃음 띤 얼굴로 내게 걸어오기 시작한 나의 오라버니.
헛!! 저 웃음은...
하지만 도망가려고 했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오빠의 손에 의해 바쁘게 움직이며 차츰 완성되어 가는 나의 머리.
“쨔잔~”
거울 속엔 조선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양 갈래로 땋은 촌년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매일같이 오빠가 내 머리를 해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뿐, 이름만 단아하고 얌전한 참서예양.
서예는 내 머리를 무척이나 부러워 하지만
어떤 정신 나간 년이 이런 구닥다리 머리를 좋아하냐고!!
“제순아, 어때? 맘에 들어?”
여기에서 또 아니라고 하면
울게 뻔한 일이기에 억지로 웃어보였다.
아~ 왕제순, 불쌍한 인생이로다.
“그럼 가방 가지고 거실로 나와.”
“오늘은 뭔데?”
“쑥차.”
쑥차라는 말을 듣자마자
기억하고 싶지 않은 몇 달 전 일이 떠올랐다.
그때 쑥차 마시고 무지하게 올렸는데....
“저기...”
쑥차 마시고 올렸던 일이
기억나지 않느냐고 말하려는데, 어느새 나가고 없다.
이제 어쩌나...
저 인간 말 할 기회도 주지 않고 억지로 마시게 할 게 분명한데...
그래!! 내가 살 길은 오직 그것 뿐이다.
가방을 단단히 메고,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제발 자빠지지만 말아라...
3, 2, 1...... 으다다닷!!!
문을 열자마자 초스피드로 현관으로 달려가 신발을 신었다.
“왕제순!!!!!”
쑥차를 들고 현관으로 뛰어오는
오빠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와 죽어라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숨이 턱까지 차고 올라올 때쯤 달리는 걸 멈췄다.
제길, 아침부터 정신 나간 사람처럼 뛰어야 하다니...
왕제요!!! 아빠한테 다 이를꺼야!!!
“10”
“아무리 그래도 10이 뭐냐? 난 27”
살짝 나온 콧물을 닦을 무렵,
뒤에서 이해할 수 없는 숫자가 포함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수학 점수 말하는 건가?
앗싸!! 난 55점인데... 놈들보다 높다~
“려한이 넌?”
“-100”
마이너스 100? 그리고 려한? 혹시 나의 려한이?
려한이라는 이름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 정말 나의 려한이다!!
어머, 어머!! 등교길에 려한이를 보다니!! 땡 잡았다!!
려한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콩닥 콩닥 콩닥-
그런데 녀석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면서
짜증나는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게 아닌가!
“정면이 압권이군. -1000!!”
그때 려한의 옆에 있던 녀석들 중,
튀는 머리를 한 녀석이 배를 움켜 잡고 웃기 시작했다.
“풋, 크하하하~”
귀여운 외모가 돋보이는 산새록이였다.
놈 옆엔 싸움으로 유명한 해나언이라는 녀석이 서 있고...
근데 -1000 은 뭐고, 또 왜 날 보면서 웃는거지?
놈들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슬슬 기분이 잡쳐왔다.
그때 려한이가 내 옆을 지나가며 입을 열었다.
“촌년. 대한독립만세 라고 소리치며 뛰어다니면 딱 이겠군.”
려한이가...
나의 려한이가 지금 나한테 촌년이라고 한건가...?
“우히히히- 댕기촌년!! 영광의 -1000 이니까 잘 기억해둬. 대한독립만세!!!”
충격에서 채 헤어나오지 못한 그때,
려한을 뒤따라 오던 산새록이 내 앞에서 팔을 번쩍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혹시 녀석들이 말한 숫자가,
흔히 남자들이 여자를 보고 점수 매길 때 말하는 그것인가?
근데 내가 1000 점도 아닌 -1000 이라고?!
“댕기촌년~ 댕기촌년~ 너는야 댕기촌년이라네~”
저... 저 자식을 그냥!!
안 그래도 려한이한테 촌년 소리 들어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
난 불난 집에 왕 부채질을 해대는 산새록을 향해 가방을 던졌다.
가방은 정확히 놈의 뒤통수로 날아가 놈의 머리를 강타했다.
“윽! 뭐야?”
녀석은 곧 비명을 지르며 땅에 주저앉았다.
황당한 얼굴로 날 쳐다보는 려한이가 보였다.
그래!! 려한이한테 촌년 소리도 들었는데, 이판사판이다!!
“으, 씨벌! 댕기촌년!!!”
새록이 새끼가 잡아먹을 듯, 내게 달려들었다.
“이 자식이!! 누구보고 댕기촌년 이라는 거야?”
“요즘 어떤 미친년이 너 같은 머리를 하고 다니냐?
졸라 촌시려! 쪽팔리지도 않냐? 땡촌!! 이제 어쩔 거야?”
혹시 지금 하고 있는 머리 모양 때문에
댕기촌년이라고 부르는 건가?
으.... 이 저주 받을 인간, 왕제요!!!!
“땡촌!! 대답 안 해? 보상, 보상!!”
“뭔 놈의 보상?”
“긴말 않겠어. 백 내놔.”
“뭔 백?”
“치료비 100 만원!”
치료비 100 만원?
이 자식, 머리 맞더니 살짝 맛이 갔나?
소문으로 들은 산새록은 여자에게 친절하고 애교 많고,
절대 화내거나 소리 지르는 일 없다고 했는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인간은 뭐지?
“산새록, 그만하고 가자.”
“안돼! 치료비 100만원 받아야돼!!”
“씨발, 쪽팔리게 길거리에서 이럴래?”
“우씨, 알았어. 너! 다음에 걸리면 10배로 받을 거니까 명심해!! 근데 태극기는 어디갔냐? ”
어디서 미친 개 새끼가 시끄럽게 짖어대냐~
난 녀석을 철저히 무시하며 귀를 후벼팠다.
“댕기촌년, 내가 네 주제곡 만들었는데 들어볼래?
원투, 원투 쓰리 뽀!!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댕기촌년 손에서 펄럭입니다~”
정신나간 사람마냥 이리저리 날 뛰며 팔을 휘두르는 산새록 녀석.
저거 완전 싸이코 아니야?
이 싸이코야, 너야말로 다음에 걸리면 뒤통수 1000 대야!!
보다 못한 려한이가 이리저리 날 뛰는 산새록을 억지로 끌고 갔다.
난 그런 녀석들의 뒤통수에 대고 마음껏
혀를 내밀었는데 누군가 내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
“븅딱-”
난 왜 해나언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것일까?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지금의 상황을 정리해봤다.
려한을 만나서 기분 좋은 것도 잠시,
놈에게 난 -1000 댕기촌년이 되었다.
그리고 산새록 놈에게는 치료비 1000만원이 걸려있고,
해나언 녀석에겐 졸지에 정신 나간 애로 찍혀버린 오늘.
정말이지, 죽어버리고 싶다!!!!
학교에 도착해서도 우울한 맘은 풀리지 않았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교문을 통과하려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내 목을 졸라왔다.
“컥.. 누구야? 이거 안 놔?”
“제요오빠 어디로 빼돌렸어?”
오빠 다음으로 내 인생의 걸림돌, 참서예.
“숨 막혀!!”
“나의 로미오님은 어디 있어? 빨리 말해!”
“오늘은 같이 안 왔어!”
“왜?”
내 목에서 손을 떼며 묻는 서예.
“미리 황제 된 거 축하해 주려고 했는데...”
“그만 포기하시지? 오빤 자기보다 피부 깨끗한 사람을 좋아하는 거 너도 알잖아.”
“내 피부가 어때서!!!”
백번, 천 번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프지.
자기 스스로가 느끼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난 오빠에게 선물로 받은 거울을 꺼내 서예에게 내밀었다.
거울을 받아든 서예는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거울을 덮었다.
“나중에 수술하면 돼. 난 꼭 제요오빠한테 시집 갈 거야!!
그래서 너한테 새언니라는 소리 듣고 말거야!!!”
서예야, 네가 수술해서 피부가 깨끗해진다 하더라도
넌 이미 팬클럽 회장이라는 이유만으로 오빠에게 찍혔단다.
쯔쯔, 불쌍한 것.
“근데 너 오늘 머리가 왜 이 모양이냐?”
“뭐?”
“사극이라도 찍어? 웬만하면 좀 푸는 게 어때?
사람들이 한번씩 다 쳐다보고 가는 거 안 보이냐?”
“그래? 내 머리 오빠가 해준다는 거 잊은 거야?
네가 한 말, 글자 하나 빼먹지 않고 오빠한테 전해줄게.”
그러자 서예가 내게 달라붙으며 콧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잉, 제순아~ 농담이야. 알지? 나 원래 농담 잘하잖아.”
“방금 했던 말은 전혀 농담 같지 않은데?”
“아니야~ 이렇게 환상적인 머리는 처음 봐!! 정말 너한테 잘 어울려. 왕제순, 짱!!!”
난 서예를 밀쳐내고, 빌어먹을 댕기 머리를 풀었다.
“야! 제요오빠한테 들키면 또 난리 날 텐데 왜 풀어?”
“괜찮아! 들어가자.”
같은 반에 짝 이였던 서예와 함께 교실로 들어가자 눈에 띄는 인간들이 있었으니,
몇 분전, 최악의 만남을 가졌던 화려한, 산새록, 해나언.
“제요오빠만 아니면 려한이를 내껄로 만드는 건데... 1학년에선 려한이가 되겠지?”
“너 시력 검사 좀 해야겠다! 저게 어디가 잘생겼다고 황제야? 쟤가 황제 되면 학교 망신이야!!”
“갑자기 왜 그래? 어제까지만 해도 려한이가 될거라고 했잖아.”
“내가 언제!!!”
“너 오늘 그날이냐? 승질 드러운 마귀할멈 같아.”
너도 한번 촌년, 그것도 댕기 촌년이라는 소리 들어봐!
걸음을 옮겨 자리로 가던 도중, 려한이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헌데 녀석이 갑자기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윙크를 해왔다.
캬악~ 멋져, 멋져!! 역시 나의...
아니지!! 왕제순!! 넘어가면 안돼!!
저 자식이 너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잊으면 안돼!!
놈은 얼굴로 사람을 유혹하는 싸갈마왕이야!!!
애써 놈의 시선을 외면하고 자리에 앉았다.
쪼르르 내 뒤를 따라 와 옆에 앉은 서예는
잠시 후에 있을 황제 대회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늘은 정말 역사적인 날이야. 나의 제요오빠가 3년째 황제 자리를 차지하다니..”
“야! 침 튀기지 마.”
“왕제순, 넌 네 오빠가 자랑스럽지도 않아?”
“그 웬수같은 인간이 뭐가?”
“어머머! 너 킹제요한테 집단 구타 당해볼래?”
이름부터가 유치하고 촌스러운 킹제요.
이름에서 알수 있듯, 나의 오라버니 팬클럽 이름이다.
“캬아아악!!!!!”
갑자기 복도에서 돼지 멱 따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지배들의 흥분 된 목소리가 들려오는걸 보니 대충 무슨 일인지 감이 온다.
헉!!!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왕제순, 튀어!!!!!!!!!!!!!!!!!!!!!!!!!!
쿵-
부딪힌 상대에게서 익숙한 향기가 퍼져나왔다.
떨려오는 심장을 진정시켜가며 얼굴을 들었다.
이런 젠장, 젠장, 젠장!!
“우리 제순이, 무슨 급한 일 있어?”
“아하하하, 오빠...”
오빠에게 들킨 이상 도망가는건 무리였기에
애절한 얼굴로 오빠를 바라봤다.
“그런데 내가 정성스럽게 땋아준 머리는 왜 풀었어?”
오빠의 온화한 미소에 주변에 있던 여학생들이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이것들아, 정신차려!!
저건 양의 탈을 쓰고 짓는 거짓 미소야!!!
“응? 왜 대답이 없어?”
“그게.. 갑자기 풀어졌어.”
“그럼 다시 묶어야겠네? 우리 교실로 가자.”
내 손을 꼭 잡고 자신의 교실로 걸음을 옮기는 오라버니.
이 와중에도 오빤, 여학생들에게 살인미소 날리는 걸 잊지 않았다.
“캬악~!!”
“제요오빠 멋져요!!”
내 언젠가 이 인간의 실체를 낱낱이 공개하겠어!!!!!
잠시 후, 저 멀리 3학년 7반이란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돼!! 교실로 들어가면 난....
“오빠야~ 나 머리 묶는것보다 푼게 더 이쁘지 않아?”
“지금 그 말은 내가 해준 머리가 맘에 안 든다는 소리야?”
“무..무슨!! 오빤 미용사 자격증도 있잖아.”
인정하기 싫지만, 타고 났는지
헤어디자이너 저리가라 솜씨를 가지고 있다.
“제순아, 오늘은 아주 아주 중요한 날이야. 그건 너도 알지?”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부터 착한 동생이 되어 오빠 말 듣는거다, 알았지?”
“으..응.”
이런 모습들을 보고 모두들 하나같이 자상한 오빠 있다고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는데...
어디 하루, 아니 1시간 이라도 이 인간 동생이 되어보고 그런 시선으로 쳐다보란 말이다!!
교실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해질 만도 됐지만 여전히 부담스런 시선들.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선배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받아가며 오빠 자리에 앉았다.
“자, 마셔.”
오빠가 보온병에서 따른 쑥차를 내밀었다.
윽! 냄새만 맡았을 뿐인데 벌써부터 속이 울렁거린다.
“어쩜! 제순이는 좋겠다~ 오빠가 이런 것도 챙겨주고..”
“그러게~ 나도 제요 같은 오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저번과 마찬가지로 내 주위를 둘러싸고
부러움 가득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언니들.
“제순아, 제요 손 떨어지겠다. 얼른 받어.”
“그래. 네 건강 생각해서 이렇게 학교까지 싸가지고 왔는데 먹어야지.”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울며 겨자 먹기로 쑥차를 받아 들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건 맛있는 복숭아 음료수다!!
부드럽고 달콤한 복숭아 맛이 난다!!
주문을 외우며 숨을 멈추고 쑥차를 들이켰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완벽하게 마시고 컵을 내려놓자
만족스런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오라버니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엔 머리를 손질해 볼까? 풀어지지 않게 꽁꽁 묶어줄게.”
자리에서 일어선 오빠가 내 뒤로 오자
또 다시 난리난 우리의 언니들.
“제요가 머리도 손질해줘? 뭐야~ 아무리 동생이지만 질투난다~”
“아마 세상에 제요같은 남자도 없을거야.”
난 세상 다 산 사람마냥 초점 없는 시선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바쁘게 움직이던 오빠의 손길이 차츰 사라져갔다.
잠시 후 오빠의 전용거울에 비춰진 내 모습을 보자
몇십 분 전, 내 가슴에 비수를 꽂은 려한이의 말이 떠올랐다.
‘촌년. 대한독립만세 라고 소리치며 뛰어다니면 딱 이겠군.’
곧 있을 녀석 생일에 고백하려고 했는데....
내 17년 순정을 받치려 했는데...
이게 다....
이게 다 왕제요라는 인간 때문에!!
“왜 아무 말 없어? 맘에 안 드는 거야, 제순아?”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해, 왕제순!
초인적인 인내를 발하며 뒤돌아 오빠를 향해 웃어보였다.
“맘에 들어. 그럼 나 갈게.”
“데려다 줄게.”
“아니야~ 오빠는 대회 준비로 바쁘잖아. 난 괜찮아.”
“제순이는 오빠가 데려다 주는 게 싫어?”
싫어!! 싫어!! 죽도록 싫어!!!
하지만 맘 속으로만 울부짖을 뿐,
소리내어 말하지 못하는 내 신세여...
거부할 수 없는 나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순간,
“왕제요!! 교장실에서 호출이다.”
스포츠 머리를 한 남자가 교실로 들어오며 소리쳤다.
이대로 오빠 손에 끌려가는 가 싶었는데..
교장선생님,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해요~
“오빠! 교장선생님 기다리시겠다, 어서 가봐.”
“그 놈의 영감탱이는 왜 또 부르는 거야!”
“이따 응원 많이 할게~ 왕제요, 파이팅!”
날 데려다 주지 못한 게 억울한 건지,
교장선생님한테 가는 게 짜증나서 인지 오빠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오빠에게 해방된 난 노래를 흥얼거리며 교실로 향했다.
하지만 기분 좋은 것도 잠시,
“어머! 제요오빠가 다시 머리 해준거야? 너무 너무 뷰리풀하다~”
“수업 종 쳤다.”
“가서 무슨 얘기했어? 혹시 오빠가 내 얘기하지 않던? 부담갖지 말고 말해봐. 응?”
“안 했으니까 그만 입 좀 다물어줄래?”
“제요오빠는 어쩜 볼때마다 멋있어지는지 몰라~ 제순이 넌 좋겠다!
우리들의 왕자님이랑 매일 같이 등교하지, 밥도 같이 먹지, 손까지 잡지. 부러워~!!”
으... 참는 것도 한계다.
도저히...
“못 참아!!!”
드르륵-
어쩜 이렇게도 아름답게 때맞춰 들어오시는지...
“방금 돼지 멱따는 소리 낸 동무, 앞으로-”
국어선생님 말씀에 내 몸은 즉각 반응해 앞으로 나갔다.
말 없이 뚫어져라 내 얼굴을 쳐다보던 선생님이 조용히 물었다.
“뭘 못 참겠다는 거지?”
“그러니까 그게.... 화장실이요!!”
하필 떠오른 단어가 화장실이라니...
덕분에 교실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왕제순동무, 많이 급한 것 같은데 날래 갔다오시라요.”
“..네...”
차마 고개를 들수 없어 땅만 쳐다보며 뒷문으로 걸어가는데
바닥에 의자 끌리는 소리와 함께 려한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못 참겠는데요?”
“너도? 음.. 얼른 갔다 와.”
터벅터벅.
점점 내게로 다가오는 려한이 녀석.
날 비웃는 듯한 얼굴을 한 녀석이 내 옆을 지나가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촌년. 멍청히 서 있지 말고 따라나와.”
초....촌년?! 또 다시 날 촌년이라고 부르다니!!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 않겠어!!
교실 문을 인정사정 없이 닫고 어느새 멀찌감치 앞서 가고있는 녀석을 뒤쫓았다.
“야!! 너 거기 서!!”
이성을 떠나보낸지 오래인 난,
지금이 수업시간이란걸 망각하고 녀석을 향해 소리쳤다.
허나 한치의 멈춤도 없이 가던 길 계속가는 화려한.
저게 귓구멍이 막혔나?
아님 나 엿먹으라고 일부로 무시하는거야, 뭐야?
이런!! 잠시 딴 생각하는 사이 녀석이 사라졌다.
서둘러 복도 끝까지 뛰어가 녀석을 찾았다.
녀석은 긴 다리를 자랑하며 내게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헌데 녀석이 향하는 방향을 보자니 선생님들도 알면서 눈 감아주는 곳.
비행청소년, 좋게 말해 타락천사들의 흡연장소로 이동중인 녀석.
따라갈까, 말까.
따라갈까, 말까.
따라가? 아니야.
혹시라도 녀석이 덮치기라도 하면... 좋은 거잖아.. 흐흐흐
려한이와 단둘이 있는 시간을 얼마나 꿈꿔왔던가..
흐르는 침을 닦아가며 녀석의 뒤를 쫓았다.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갖은 폼 다 잡아가며 구름과자를 먹고 있는 녀석.
그런 녀석이 신기한 동물 구경하듯, 날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녀석의 눈빛에 몸이 멋대로 꼬이기 시작했다.
왕제순!! 정신 차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려한이랑 뽀뽀를.. 뽀뽀.. 어머나.. 부끄럽게..
“이제 보니 촌년이 아니라 광년이네. 야! 그만 실실거리고 이리와 봐.”
촌년도 모자라 이젠 광년..?
솔직히 오빠에게 좀 딸리지만..
어디 가서 귀엽다는 소리 빼먹지 않고 듣는 난데..
“삐삐광년, 빨리 와라.”
“뭐야!!”
단걸음에 달려가 녀석 앞에 팔짱 끼고 섰다.
“앉아.”
“싫다면?”
“아이스께끼 할까?”
녀석의 말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이 빌어먹을 몸뚱이 같으니!!
“쿡-”
“웃지마. 이 변태야.”
“변태라.. 그럼 변태를 좋아하는 넌 뭐냐?”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야. 녀석이 분명 자길 좋아하는 난 뭐냐고 했어!!
“왜 대답을 못해? 대답해봐.”
“내...내가 널 좋아한다고? 웃기지도 않아, 정말!”
심하게 떨린 목소리.
“푸하하하~”
녀석이 비웃는다.
하지만 절대 들켜선 안돼!!
“난 너처럼 싸가지 없고 얼굴만 믿고 깝치는 애는 밥맛이야! 알아?”
“거짓말 참 못하네. 너, 나 좋아하잖아.”
“안 좋아해!! 안 좋아해!! 진짜 진짜 안 좋아해!!”
또 실수할까 싶어 녀석의 눈을 피해가며 말했다.
그래. 분명 넘겨짚는 거야.
서예한테도 말하지 않은 나만의 비밀인데 녀석이 알리 없잖아?
그때 내 손을 잡는 녀석의 손길이 느껴졌다.
안 그래도 초긴장 상태에 있던 난, 너무 놀라 녀석을 밀치며 일어섰다.
“아씨..발”
내가 너무 세게 밀었나?
려한이 몸을 일으키며 교복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그..그러게 왜 갑자기 손을 잡고 난리야. 난리가..”
살짝 미안한 맘에 말을 꺼냈는데
녀석, 굳은 얼굴로 날 무시하며 내 옆을 지나갔다.
분명 세게 밀치건 미안한 일이지만 허락도 없이 손 잡은 게 누군데!!
“야! 화려한!!”
아까와 마찬가지로 어찌나 내 말을 껌처럼 잘도 씹어대는지..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화를 내야 하는 사람은 니가 아니라 나야!! 나!!
내 말 씹으니까 맛있냐? 그래. 씹어라. 씹어!! 실컷 씹어서 배 터져 죽어라!!!”
헉헉... 숨 한번 쉬지 않고 말했더니 숨차네.
굳건한 대한의 건아, 화려한!
끝내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내 앞에서 사라져갔다.
쫌생이 같은 녀석..
좋았는데.. 녀석의 손이 닿았을 때 숨이 멎는 줄 알았는데..
한동안 난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려한이가 잡았던 왼손을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조용히 뒷문을 열고 자리로 가는 도중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뭐하는데 이렇게 늦었냐는 눈빛에 큰 거 해결하냐고 늦었다는 눈빛을 보냈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시는 선생님.
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놓기 무섭게 서예가 옆구리를 찔러왔다.
“아까 나갈 때 려한이가 너한테 귓속말 하는 것 같던데 뭐라고 한거야? 사실대로 말해.”
기지배, 눈도 좋아~
그냥 대충 둘러대자.
“나보고 예쁘대.”
찌릿찌릿-
너무 대충 둘러댔나?
”멍청히 서 있지 말고 비키랬다. 됐냐?”
“그럼 그렇지. 려한이가 너한테 말을 걸리 없지. 오호호호호~”
서예야, 컸다.
결국 내 짝은 선생님께 불려나가 꿀밤 한대 맞고
수업 끝날때까지 손 들고 있어야만 했다.
4교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안내방송이 나왔다.
“아! 아! 사랑하는 국경고 학생들. 내 말 들리지요? 2시부터 황제대회가 있을 예정이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1시 30분까지 강당으로 모이세요. 그리고 후보들은 지금 즉시 교장실로 오도록~
내 사랑 제요군! 또 도망가면 알아서해용~ 그럼 점심 맛있게들 먹고 이따봐요~”
교장의 오바스런 발언에 우리 반은 물론
다른반에서 터져 나온 야유로 학교가 들썩였다.
오빠가 왜 교장선생님을 싫어하는지 알겠다.
헌데 교장선생님이 오빨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
저렇게 공개적으로 커밍아웃 선언하는걸 보면..
빙고! 교장샘, 감사해요!
즐거운 맘에 콧노래를 부르며 도시락을 꺼내려하는 찰나,
서예가 내 팔을 잡아끌며 일어섰다.
“너 지금 밥 먹을 시간이 어딨다고 도시락을 꺼내! 일어서!”
“어디가는데? 나 배고파~”
“돼지같은년. 윽! 애들 달려가는 것 좀 봐. 빨리 빨리!!”
복도를 울리는 굉음에 서예가 흥분하며
의자에서 채 일어서지 못한 날 끌고 뛰기 시작했다.
“참서예!!”
“왕자님, 서예가 가요~ 꼭 앞자리에 앉아 오빠 응원할게요. 앞에 있는 것들아, 비켜!!!!”
이미 제정신이 아닌 서예는 앞서 뛰어가는 아이들의 머리채를 잡아당겨가며 앞질러갔다.
그런 서예의 눈물 겨운 노력 덕분에 맨 앞자리에 앉게 된 난,
실실 쪼개는 친구년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얼마나 열심히 뛰었는지 산발이 된 머리에, 심하게 달아오른 얼굴.
서예가 아닌 오빠를 위해서 거울을 꺼냈다.
오빠가 서예 얼굴 보고 놀라 기절하면 곤란하니까.
“왠 거울? 나 가지라고?”
“네 꼴이 어떤지 좀 보라고 주는거다. 우리 오빠 쓰러지기 전에 정리해라.”
“제요오빠가 쓰러질 정도로 퍼펙트~ 하단 말이야?
그럼 안봐도 되잖아. 혹시 너도 날 질투하....으아악!!!!!!”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는지 비명을 질러대는 서예.
“제순아, 머리가 제대로 엉켰나봐. 안 풀어져. 나 어떡해. 으아앙...”
이미 꽉 들어차 있는 강당.
따가운 시선을 참지 못한 난 서예의 입을 틀어막았다.
“풀어줄테니까 조용히 해. 한번만 더 정신 나간 년처럼 웃거나 울면 안 풀어줘. 알았어?”
끄덕끄덕-
솔솔 올라오는 머리냄새를 참아가며 엉킨 머리카락들을 풀어나갔다.
웅성대던 강당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무슨일인가 싶어 서예의 머리를 밀쳐내고 무대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미소년 밝히기로 소문이 자자한 음악 선생님.
오늘을 위해 돈 몇백을 썼다는 소문이 사실이였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펄펙했다.
아무리 돈 몇백을 투자했다 하더라도
노처녀가 꾸며봤자 호박에 줄긋기 아니겠어?
음악샘은 가운데 세워진 마이크 앞에 서더니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잠시 후면 국경고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황제대회가 시작합니다.
갑자기 무대 위로 뛰어오르거나 난동 부리는 학생은 바로 퇴장이니까 유의하세요.
그리고 이번 대회에는 새로운 무언가도 있으니까 기대하세요.”
“뭔데요?”
어디선가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학생들은 상관없고, 여학생들에게 기회가 있다는 것만 말해줄게요.
그럼 잠시 후 후보들이 나올텐데 맘껏 감상합시다. 오호호~”
“우~~~~~”
학생들의 야유 따윈 들리지도 않는 듯,
음악샘은 유유히 무대 뒤쪽으로 사라졌다.
황제의 시녀.
오빠 때문에 알게 되었지만 정확한 내용은 대회가 시작되야 알 수 있다.
이름을 보아하니 좋을 것 같진 않은데..
“제순아, 나 너무 흥분돼!”
“어제 본 야한 비디오라도 생각나?”
“야!! 어제는 안 봤어.”
이 웬수 때문에 오빠에게 당한걸 생각하면..
며칠 전, 아무것도 붙여져 있지 않은 비디오 테잎을 맡긴 서예.
테잎의 정체를 몰랐던 난,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몇시간 후, 이유도 모른체 오빠에게 감금되어 벌을 받아야만 했던 아픈 기억.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려왔다.
“오줌 마려워? 대회 시작하기 전에 얼른 갔다와.”
“말걸지마, 이 웬수야!”
“무대에 선 나의 왕자님은 태양, 그 자체일거야. 눈부셔서 어떻게 쳐다보지?”
차라리 귀를 막아버리자!!
“캬아아악!!!!!!!!!!!!!!!!!!!!!!!!!!!!!!!!!”
귀를 막았는데도 멍멍할 정도로 큰 비명소리.
후보들이 무대로 나오자 여학생들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귀 막길 잘했다, 왕제순.
교장샘이 흥분하는 여학생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나섰다.
“자, 자!! 여러분들 맘, 이해하니까 잠시만 조용히 해 줘용~”
효과가 즉시 나타났다.
일순간 조용해진 강당에 다시 한번 교장샘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오늘은 이전 대회랑은 다르다는걸 말씀드리고, 각 후보들의 인사가 있겠습니다. 1학년부터.”
1학년은 려한이를 포함 총 4명의 후보들이 있었는데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 뼈다구인지 려한이의 발뒷꿈치도 따라올 수 없는 상태들이였다.
드디어 려한이의 차례!!
한참을 입을 다문체로 마이크 앞에 서 있던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이어진 녀석의 윙크-
“캬아아악!!!!!”
여학생들이 비명소리를 뒤로하고 려한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제순아, 너도 봤지? 려한이가 나한테 윙크한거!! 혹시 나한테 맘 있는게 아닐까?”
서예야, 니가 아닌 나란다.
라고 말할까 하다 그만두고 려한이를 바라봤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꼬라지가 참으로.. 반항적인게 멋지구나, 화려한!!
2학년과 3학년은 다른 후보들의 기권으로 문보문 선배와 오빠뿐이였다.
오빠의 차례가 되자 강당은 거의 콘서트 분위기였다.
인기 많은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줄은..
“안녕? 환영해줘서 고마워.
사랑하는 우리 제순이. 끝나고 집에 같이 가는 거 잊지마~”
언제 발견했는지 날 향해 손을 흔드는 오라버니로 인해
수많은 여인네들의 질투로 불타는 시선을 받게 된 나.
하지만 누군가의 한마디에 질투의 시선들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뀌었다.
“쟤 제요오빠 동생이래.”
앞으로의 학교 생활, 무지 피곤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와닿았다.
이미 이틀 전에 치뤄진 투표.
그 결과를 기다리는 후보들과 학생들.
심하게 뜸 들이던 교장샘이 천천히 결과를 발표했다.
“1학년 황제는 화려한!”
“캬아악!! 려한아, 사랑해~”
감히 어떤 년이 나의 려한이를!!
그나저나 려한이가 황제!! 당연한 결과지만 기분 째진다!!
“2학년 황제는 문보문!”
“마지막으로 3학년 황제는..”
“왕제요!! 왕제요!! 왕제요!! 왕제요!! 왕제요!!”
하나 되어 외치는 킹제요.
서예는 플랜카드까지 치켜들며 외쳤다.
“왕제요!! 제요군은 3년 내내 황제 자리를 차지하는 군요.
자, 아까 제가 말한 거 기억하지요? 음악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이번 대회는 좀 다릅니다.”
다들 궁금한 눈으로 교장샘을 응시했다.
“이번 대회에는 황제말고 다른 무언가를 뽑습니다.”
“궁금해요!!”
“빨리 말해줘요!!”
“궁금하죠? 조용히 잘 들으세요~
화려한, 문보문, 왕제요 황제들이 각각 여학생 한 명을 뽑게됩니다.”
술렁거리기 시작한 강당 안.
“뽑고 안 뽑고는 황제들 맘인데, 뽑힌 여학생에겐 황제의 시녀라는 칭호가 붙게되고
황제의 시녀에겐 지켜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뭔지 궁금하겠지만
그건 뽑힌 다음에 말하기로 하고 먼저 3년 내내 황제자리를 차지한 제요군에게 물어볼까요?”
마이크를 뽑아든 교장샘이 느끼한 미소를 지어가며 오빠 곁에 섰다.
“제요군, 혹시 맘에 두고 있는 사람 있나요? 있으면 말해봐요.”
“없습니다. 전 그냥 화려한 황제로 있을래요.”
순간 려한이 이름이 나와서 깜짝놀랐다.
그나저나 오빠가 자기 자신이라고 말 안한게 천만 다행이군.
“왜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지? 그래, 왕제순!!
너 내가 오빠한테 주라고 한 편지들과 선물들. 니가 고냥 꿀꺽했지?”
서예를 무시하고 보문 선배 대답에 귀 기울였다.
선배역시 화려한 황제의 길을 택했고, 이제 남은건 화려한 녀석.
교장의 질문이 이어지고 모두의 시선이 려한에게 집중됐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찝찝하지?
자꾸만 시녀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모두가 숨죽이는 가운데 려한이의 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땡촌! 나와.”
땡촌? 어떻게 사람 이름이,
그것도 여자 이름이 땡촌일 수... 뭐야..? 땡촌이면 나잖아!!
땡촌이 누굴까 둘러보던 시선이 려한에게로 쏠렸다.
타이밍이 어찌나 잘 맞는지 눈이 마주치고 손가락을 까닥이며 날 부르는 녀석.
“제순아! 저기 봐봐. 려한이가 날 부르고 있어!
근데 땡촌은 무슨 뜻이지? 려한이가 부르는 나만의 애칭인가?”
차라리 나도 너였음 좋겠다, 참서예.
그래. 나 대신 서예 니가 나가라!!
려한을 애타게 바라보는 서예 등을 미려는 그때,
무대에서 내려와 내게로 걸어오는 녀석이 보였다.
뭐..뭐야... 안돼!! 오지마!!
간절히 기도했건만 떡하니 내 앞에 선 화려한.
제기랄! 내가 다시는 기도 따위 하나봐라!!
안해!! 안해!! 안 믿어!!
아직도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서예가 귓속말을 해왔다.
“나 대신 니가 나가줘. 제요오빠가 보고있는데
내가 어떻게 려한이를 따라 무대에 올라가. 알았지? 부탁해!”
병원에서조차 포기했다잖아, 제순아.
..포기하자..
그리고 화려한! 니가 아무리 노려봐도 안 일어나!
네 시녀따윈 되지 않을거야!!
녀석, 안되겠는지 내 팔을 잡아 당기기 시작했고,
난 일어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엉덩이에 그렇게 힘을 줬거늘
려한의 힘을 이기지 못해 무대로 끌려나간 내 몸뚱아리.
내가 오빠 때문에 중학교때 얼마나 힘들었는데!!
고등학교에서만은 그런 사태를 막아야 해!!
오빠 동생이란 사실이 전교생에 퍼지는 일은 없어야해!!
“1학년 려한군만 시녀를 뽑았는데, 자기 소개 해보세요.”
교장이 내 앞에 마이크를 내밀었다.
“교장선생님, 황제의 시녀라는 거 없던 걸로 하면 안될까요?”
이게 무슨 꽃향기에 취한 꿀벌 날아가는 소리다냐?
날 구해 준 왕자님은 누구란 말이지~?
왕자님을 찾아 고개를 돌리자 의자에서 일어선 오빠를 볼 수 있었다.
왕제요!! 왜 니가 나서고 난리야!!
앞에 나와서 이러쿵 저렁쿵 얘기하다 내가 동생인걸 말하기라도 하면...
난 교장샘이 들고있던 마이크를 빼앗아 크게 소리쳤다.
“저 시녀할래요!! 시녀합니다!!
아, 저는 1학년 9반에 재학중인 땡촌이라고 합니다.”
왕제순이라고 했다간 오빠의 동생이란게 들통날 위험이 커
땡촌이라 했거늘, 순식간에 웃음 바다가 된 강당.
“땡촌이래~ 푸하하하!!”
“쟤 열라 골 때린다!!”
“땡촌~ 네 이름 기억해줄게.”
다시 마이크를 빼앗아간 교장샘이
아이들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황제의 시녀가 지켜야 할 규칙을 말할테니 땡촌학생, 새겨 들으세요.”
“쿡-”
옆에 있던 려한이 날 쳐다보며 웃었다.
좋아하기엔 아직 이르다고, 화려한.
오빠때문에 하겠다고 말했을 뿐, 난 절대 네 시녀따윈 되지않을거야!!
“첫째, 다른 남자와의 교제는 금지한다.”
그럼 황제랑은 괜찮다는 말이야?
이거 맘이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둘째, 황제와 항상 함께 다닌다.”
시녀가 아니라 부인이네.
려한이랑 항상 함께 다닐 수 있다라...
“셋째, 황제를 책임지고 보필한다. 넷째, 황제 말에는 무조건 복종한다.
불 복종시 반성문 100장에 운동장에서 토끼뜀 20바퀴.”
뭐야! 부인 취소!! 말 그대로 시녀잖아!!
“마지막으로 황제를 사랑할 시, 퇴학.”
뭐? 퇴학?!
이 놈의 영감탱이가 미쳤나?
눈을 부라리며 교장을 노려봤지만 눈만 시려왔다.
“그럼 이상으로 황제대회를 마칩니다!
황제 3명과 땡촌 학생은 절 따라오세요.”
교장샘을 중심으로 오빠와 보문선배가 앉고, 나와 려한이가 나란히 앉았다.
막 시녀 따윈 안하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내 앞에 상자 하나가 놓여졌다.
“이게 뭐예요?”
“황제의 시녀에게 주는 선물.”
선물이라면... 공짜다!!
살며시 뚜껑을 열어 안에 든 선물을 확인했다.
“앞으로 황제를 잘 보필하면서 학교 명예를 세워주렴.”
“호호호~ 교장선생님 저만 믿으세요~”
난 상자를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싱글벙글.
히죽이죽.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그 놈의 영감탱이,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거야.
내일 당장 받은 거 돌려주고 안 한다고 말해.”
“싫어! 할거야!”
“지금 오빠 말, 무시하겠다는거야?”
얼굴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180도 왕제요로 변하면 큰일이다!
“물론 아니지~ 내가 어떻게 오빠 말을 무시해? 난 단지 시녀를 정말 하고 싶은 거 뿐이야.”
“화려한 자식인지 뭔지한테 복종하겠다고?”
“규칙같은 거 무시하면 그만이지. 그리고 그 녀석한테 복수해야 한다고!”
“복수?”
난 분명 불지옥에 떨어질게 분명해.
하지만 그토록 갖고 싶었던 핸드폰이랑 핸드폰에 달려있는 순금돼지를 포기할 순 없어!!
중학교 때, 전교생에 핸드폰 없는 사람은 나뿐이였다.
아빠가 생일선물로 사준다고 했지만 오빠라는 인간이 절대 안된다고
단식투쟁하는 바람에 친구들은 물론 전교생에게 원시인으로 놀림 받았었다.
그런데 이렇게 공짜로 핸드폰이 생기고
요금까지 내준다는데 시녀를 안 할 수 없지!!
오빠의 예리한 시선에 생각을 접고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오빠가 정성스럽게 해준 머리를 모욕했거든.”
이건 사실이니까.
“뭐라고 했는데?”
“오빠도 아까 녀석이 날 땡촌이라고 부르는 거 들었지?
그거 댕기촌년의 줄임말이야. 오빠가 해준 머리, 촌시렵데.”
역시나 내 생각대로 오빠는 내 손을 붙들며 이를 갈았다.
“왕씨 가문의 명예를 위해 제대로 복수해야 한다.
오빠는 공식적인 사람이라 나설 수 없으니까 니가 이 오빠를 대신해 복수해줘.”
뭐야.. 나만 나쁜 사람 되라는 거잖아.
뭐 어쨌든 핸드폰 사수 성공!!
다음날 아침, 그래도 먹어줄만한 토마토쥬스를 마시고 학교로 향했다.
날 보며 수군거리는 아이들.
전교생 앞에서 시녀하겠다고 소리쳤으니 당연한 결과겠지..
거기에 스스로 땡촌이라고 했으니..
교실에 들어서자 반 아이들이 축하인사를 건내왔다.
“제순아, 어제 정말 인상 깊었어. 축하해~”
“근데 려한이 팬클럽 애들은 조심하는게 좋을거야.
벌써부터 왕제순 제거작전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야.”
그땐 오빠의 반나체 사진을 뿌리면 문제없다고~
갑자기 복도가 술렁거리더니 려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과 눈이 마주치고, 난 서둘러 자리로 와 앉았다.
하지만 뒷통수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몸이 제멋대로 꼬였다.
참서예 이것은 왜 이렇게 안오는거야!!
애꿎은 서예를 탓하고 있는 가운데
등 뒤에서 려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녀, 이리와봐.”
눈을 반짝이며 날 주시하는 아이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가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안 가자니 아이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우리 시녀님, 많이 바쁜가봐? 그럼 황제는 누가 보필하나?”
그래! 간다, 가!!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 앞으로 걸어가 물었다.
“왜?”
“앉아.”
녀석이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자리를 보자 몸이 절로 떨려왔다.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다른반 아이가 나언이 자리에 앉아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때 한번도 학교에 나오지 않던 나언이 려한이와 나란히 등교했다.
녀석은 려한에게 자신의 자리가 어디냐고 물었고 려한이 그 아이가 앉아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천천히 자신의 자리로 걸어간 나언이
순식간에 의자와 함께 그 아이를 걷어찼다.
그리곤 피가 나고 정신을 잃을때까지 주먹을 휘둘렀다.
아마 려한이가 말리지 않았다면 그 아인 평생을 병원 신세를 졌을 것이다.
자신의 책상과 의자를 정리하고 앉은 나언이
소름끼칠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앞으로 이 자리에 앉는 놈은 죽을 각오하고 앉는게 좋을거야.’
그때의 녀석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일주일에 한,두번 학교 나온다지만 오늘이 그 날 일수도 있다.
“죽지 않으니까 앉아.”
황제답게 시녀의 생각을 읽은 녀석.
아무리 녀석의 친구라지만 두렵다.
“서있는게 편해.”
“대가리 들고 니 얼굴 쳐다보는거 짜증나니까 당장 앉아!”
에이, 몰라 몰라!! 설마 황제의 시녀를 죽이겠어?
난 황제의 복종에 따랐을 뿐이라고!!
의자에 앉자마자 녀석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순간 멈칫하고 멍하니 있던 난,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떨려?”
“떠..떨리긴 누가 떨린다고 그래! 갑자기 들이미니까 그렇지.”
“그럼 말하고 다가가면 안 떨리겠네?”
“다..당연하지!”
“나, 다가간다.”
말을 마친 녀석이 방금전보다 더 가까이 다가왔다.
살짝만 움직여도 닿을 것 같은 려한의 입술.
키스하고 싶다.. 려한이 입술에 키스하고 싶다..
윽!! 왕제순, 너 미쳤구나? 정신차려!!
녀석은 네가 단순히 놀려먹는게 재미있어 시녀로 선택한 것 뿐이라고!!
“안 떨려?”
려한의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정신차리자, 왕제순!!
조국 통일!! 민족 통일!!
“그..그럼!”
“하지만 몸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몸이 뭐가!”
“봐.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잖아.”
갑자기 내 가슴 위로 손을 가져다 대는 려한.
“캬아악~!!!!!”
비명을 지르며 나도 모르게 녀석을 밀쳤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뒤로 나가떨어진 녀석.
쥐죽은 듯 조용한 분위기 속에 뒷문이 열리며 나언이가 들어왔다.
그 자리에 멈춰 선 녀석이 날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렇다. 난 지금 나언의 자리에 앉아있다.
도움의 눈길로 려한을 바라봤지만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서는 녀석.
불안하다. 심히 불안하다.
천천히 내게로 걸어오는 나언이가 보였다.
난 일어서지도 못하고 팔짱 낀 체 서 있는 려한에게 계속해서 구조요청을 했다.
나언이 의자에 발을 올리곤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툭툭쳤다.
“그..그러니까 려한이가 시켰어!”
나언의 시선이 려한에게로 옮겨졌다.
“감히 시녀가 황제를 팔아넘기려 하다니.
그래도 내 시녀니까 적당히 해줘. 걸어다닐 정도는 되야 부려먹을 수 있으니까.”
이 망할 놈의 화려한!!!
난 네 시녀라고!! 시녀~!!!!!!
두려움에 눈을 감았다.
조금 있음 발이나 주먹이 날아오겠지?
바닥에 쓰러지면 나 죽는다고 소리치는거야! 그럼 불쌍해서라도 조금만 때릴거야.
근데 왜 안 때리지? 벌써 때렸나?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걸 보니 기절했다 정신이 돌아온건가?
살며시 눈을 떴다.
여전히 날 노려보는 나언이가 보였다.
“꺼져.”
나언이 입에서 지금 무슨 말이 나온 것 같은데...
“맞고 꺼질래, 그냥 꺼질래?”
“그...그냥 꺼질래.”
황급히 자리로 돌아와 언제 왔는지 모를 서예의 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내 볼 좀 꼬집어봐.”
“왜?”
“글쎄 꼬집어봐.”
다분히 개인적인 감정을 담아 볼을 꼬집은 그녀.
“죽을래?”
“꼬집으라며!”
“그래, 꼬집으랬지 누가 잡아 뜯으랬냐!!”
“그렇게 아팠어?”
이 웬수!! 하지만 어쩌겠는가.
단 하나뿐인 친구인걸.
심한 고통이 느껴지는걸 보니 꿈은 아니다.
한번도 용서란걸 해본적 없는 녀석이라 들었다.
여자라고 봐주는 녀석이 아니라 들었다.
려한의 시녀라서 봐준걸까?
난 조심스레 뒤를 쳐다봤다.
날 물먹이지 못한게 못낸 억울한지 나언이를 괴롭히는 려한이 보였다.
화려한, 미안하지만 이번엔 나의 승리다!
1교시는 담임의 수업 영어였다.
종이 울리고 5분정도 늦게 들어온 담임이 서예와 려한이를 일으켜 세웠다.
“둘이 자리 바꿔요~”
“선생님!”
서에가 다급히 담임을 불렀다.
“교장선생님이 황제랑 시녀를 같이 앉히라고 하셔서 어쩔 수 없어.”
오빠 말대로 다른 꿍꿍이가 있는게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전 뒷자리가 좋은데요.”
“그래? 그럼 나언이가...”
담임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다.
나언이 도끼눈을 뜨며 담임을 노려보고 있었다.
“려한아, 그러지 말고 서예랑..”
“NO!”
담임이 나와 서예를 보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우리가 무슨 힘이 있다고...
“흐윽.. 너희들 너무해!!”
결국 교실을 뒤쳐나가는 불쌍한 우리 담임.
어떻게 된게 여자보다 더 잘 삐치고, 더 많이 운다.
반장이 담임을 쫓아 나가자 교실은 금새 아수라장이 되었다.
서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앉았다.
“살았다.”
“아깝다.”
“살인충동 느껴진다.”
“어차피 나언이 학교에도 잘 안나오잖아.”
“그래도 싫어. 아마 같이 앉으면 숨막혀 죽을거야.”
기 팍 죽어 입 다물고 있는 거 봐야 하는데...
그때 냄새가 심해 본의 아니게 따가 되어
구석에 혼자 앉는 오순덕이란 녀석이 서예 옆에 섰다.
냄새가 얼마나 심한지 주위에 있던 아이들이
녀석에게서 멀리 떨어지기 위해 책상과 의자를 끌기 시작했다.
“저...저기...”
“어머! 이게 무슨 냄새야?”
서예가 호들갑 떨며 자리에서 일어서 멀찌감치 달아났다.
심한 악취에 머리가 띵해진 나 역시 도망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앞을 가로막는 녀석으로 인해 다시 뒷걸음질 쳤다.
“제..제순아.. 자..자리 바꾸자..”
“자리를 바꾸자고?”
“으..응... 나..나언이가.. 그러니까 제발...”
돌아보니 나언이 뒤에 혼자 앉아 있었고
려한이 자신의 빈 옆자리를 가리키며 날 불렀다.
“싫어!”
“도...도와줘, 제발...나..나언이한테 마..맞기 싫어...”
“안 때릴거야!”
“바..바꿀 때까지..여..여기 있을거야...”
멀리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이 말할 때 마다
음식물 썩는 냄새가 코를 마비시켜 왔다.
긴급대피!!
서둘러 가방을 챙겨 려한의 옆에 앉았다.
“왕제순!!”
서예야.. 미안하다... 그러게 아까 바꾸라고 할 때 바꾸지..
뭐 려한이가 순순히 응했을리 없었겠지만...
그리고 네 짝 순덕이.. 계속 있다보면 냄새 같은 거 안 날거야..
금방 익숙해 질거라고... 부디 새로운 짝꿍과 잘 지내길 바란다.
때맞춰 들어온 반장과 담임.
담임은 바뀐 자리를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서예가 날 끌고 복도로 나왔다.
“너 어떻게 그럴수 있어! 수업시간 내내 속 울렁거려 죽을 뻔 한 거 알아?
입에선 악취가 나고, 머리는 며칠 안 감았는지 계속 긁어대고, 힐끔힐끔 쳐다볼땐 정말 소름까지 돋았다구!!”
아... 불쌍한 내 친구...
하지만 바꾸지 않았으면 걘 나언이한테 얻어터졌을거야...
네가 사람 목숨 하나 살린거라고...
“어쩔 수 없잖아. 교장선생님 말씀이니.”
“사실대로 말해.”
“뭘?”
“사실은 려한이랑 앉고 싶어 교장선생님 협박했지?
뭘로 협박했어? 또 머리 위에 개구리 올렸어?”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중학교 입학 당일.
연설하는 교장선생님 머리 위에 개구리를 올리고 딴 학교 보내달라고 협박했다.
이유는 단 하나, 오빠와 같은 학교 다니기 싫어서.
“뭘 그렇게 생각해? 협박했지?”
“나도 이제 어엿한 고등학생이라고~
그리고 뭐가 아쉬워 그런 녀석이랑 앉겠다고 교장선생님을 협박하냐?”
“잘생겼잖아.”
서예에게 남자란 존재는 오직 꽃미남, 미소년 뿐이다.
성격 나쁜건 용서해도 얼굴 못생긴건 용서하지 못하는게 바로 참서예다.
“서예야~ 오늘 우리 집에 갈래?”
서예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했다.
“정말? 정말 가도 돼? 제요오빠한테 쫓겨나는 거 아니지?”
중학교때까진 오빠도 서예를 귀여워했다.
하지만 작년 크리스마스날, 샴페인 한잔에 취한 서예가
오빠를 덮치려고 한 후부터 오빠 근처는 물론 우리집 출입도 금지 당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불쌍한 여자다.
“괜찮을거야.”
“오빠가 좋아하는 딸기도 사가자!!”
과연 쫓겨나지 않을까...?
팬클럽 회장인것까지 알아버렸는데......
수업 종이 울렸고, 들어가지 않겠다는 서예를 억지로 끌고 들어왔다.
멀리서 봐도 눈에 띌 만큼 서예와 순덕이의 주위는 뻥 뚫려 있었다.
충격으로 몸이 굳은 서예를 조용히 달랬다.
“오늘 토요일이잖아. 3교시까지만 버티면 돼.”
“제순아, 부탁이 하나 있어.”
“자리 바꾸자는 것만 아니면 들어줄게.”
내 예상이 맞는지 눈물을 글썽이는 서예.
“냄새에 취하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길 빈다, 친구야.”
망연자실한 서예를 뒤로하고 자리로 와 앉는데,
려한이 눈을 반짝이며 날 이리저리 훑었다.
아씨! 얼굴은 가슴 두근거려 못 쳐다보겠고,
왜 쳐다보냐고 묻고 싶지만 이상한 대답 할 것 같아 못 물어보겠잖아!!
“야.”
“왜?”
“나 쳐다봐.”
“싫어.”
“가슴 두근거려서 못 쳐다보겠지?”
이 자식, 독심술이라도 쓰나?
가만히 있으면 녀석의 말을 긍정하는 게 된다.
왕제순!! 17년간 왕제요 얼굴 보며 살았잖아!!
화려한이 쬐끔 더 잘생기긴 했지만 면역성 있는 얼굴이라구!!
속으로 주문을 외우며 고개를 돌렸다.
“오~ 쳐다볼 수 있어?”
“목 디스크 걸린 것도 아닌데 못 쳐다볼 거 없지.”
“선생님께 인사.”
언제 들어왔는지 반장과 아이들이 윤리선생님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인사 안하는 걸 봤는지 날 째려보는 선생님의 눈을 피해 윤리 책을 꺼냈다.
“땡촌, 다시 얼굴 돌려.”
“수업해야해.”
“수업 시간마다 침 질질 흘리며 자는 거 다 알아.”
“윤리가 째려보잖아. 얼른 책 꺼내.”
그러나 녀석은 꺼내라는 책은 꺼내지 않고
주머니에서 꺼낸 핸드폰을 내 앞으로 던졌다.
“화려한, 넌 이게 윤리 책으로 보여?”
“저장시켜.”
“뭘?”
“어제 교장한테 받은 핸드폰 번호.”
혼자 본다고 봤는데 언제 봤지?
오빠한테는 별거 아니라고 뻥쳤는데...
핸드폰을 밀어 올리자 액정에 잘난 녀석의 얼굴과 함께
‘국경고 얼굴의 황제’ 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황제 안 됐으면 아주 통곡을 했겠네.
이름 란에 땡촌이라고 쓰고, 번호를 저장시켰다.
“자-”
완벽하게 저장시켰다고 생각했는데
녀석은 뭐가 맘에 안 드는지 수정을 하기 시작했다.
뭘 수정하는지 보려고 몸을 기울였지만
이내 슬라이드를 내리고 핸드폰을 넣는 녀석.
“뭐 한거야?”
“알거 없고 수업 끝나면 깨워.”
말을 마친 녀석은 당당하게 책상에 쿠션을 올려놓고 잠을 자기 시작했다.
윤리선생님, 쳐다만 볼 뿐 말이 없다.
왜냐! 아줌마지만 윤리도 여자니까!
나도 오빠나 화려한 같은 남자로 태어났어야 하는 건데!!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녀석을 깨웠지만 요지부동.
너무 살살 흔들었나?
교복마이를 한 움큼 움켜쥐고 신나게 흔들었다.
그래!! 이 기분이야~
알 수 없는 쾌감이 밀려와 더 세게 흔들었다.
그러나 기쁜 것도 잠시 내 손목을 잡고 날 노려보는 려한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하하.. 일어나셨어요?”
“시녀 교육을 안 시켰더니 엉망이네.”
“깨워도 안 일어나길래...”
“훗- 기대해. 해나언!!”
녀석이 뒤에서 자고 있던 나언이를 깨우기 시작했다.
설마 나언이에게 날 때리게 하려는 건 아니겠지?
조금씩 밀려오는 두려움 속에서 나언이가 몸을 일으켰다.
“뭐야?”
“가자.”
“새록이는?”
“밖에서 만나기로 했어.”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서는 두 녀석.
두 녀석 다 가방이 없었기에 몸만 챙기면 되는 상황이였다.
“비켜.”
안 쪽에 앉았던 려한이 발로 내 의자를 걷어차며 말했다.
그냥 말로하면 어디 덧나냐!!
의자를 최대한 땡겨 녀석이 편히 나갈 수 있게 만들었다.
“땡촌, 이따 보자.”
이해 못 할 말을 남긴 체 홀연히 사라진 녀석.
다음 3교시 자율시간만 지나면 집에 가는데 뭘 보자는 건지.
에이~ 지나가는 똥개가 짖었다 생각하자!
종례가 끝나자마자 서예 손을 잡고 교문을 향해 달렸다.
“야! 왜 뛰는 거야?”
“잠 말 말고 뛰어!”
“제요오빠랑 같이 가고 싶단 말이야~”
이것아! 그럼 넌 우리 집 대문 구경도 못한다고~
질질 끌려오다시피 뛰던 서예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으아악~ 아퍼~ 아퍼~!!”
다른 중, 고등학교 아이들이 지나가던 걸음을 멈추고 키득거렸다.
쪽팔려 고개를 돌리고 있던 난, 서예를 내려다 보며 입을 열었다.
“야, 빨리 일...”
하지만 난 충격적인 장면에 말을 잇지 못했다.
대자로 뻗은 서예의 치마가 홀라당 뒤집혀 있었다.
유치원생도 안 입는다는 땡땡이 팬티!
점점 더 모여드는 아이들로 인해 서둘러 서예를 일으켜 세웠다.
“제순아, 나 여기 까졌어.”
상황을 모르는 서예가 까진 무릎을 내보이며 말했다.
“쪽팔리니까 입 닥치고 얼른 가자.”
“넌 친구가 다쳤는데 쪽팔린 게 문제야?”
사실대로 말하면 3일은 울고불고 난리 칠 텐데..
그 히스테리가 고스란히 내게로 쏟아 질 텐데..
말하지 않음 꼼짝도 않고 물고 늘어질 그녀이기에 사실대로 말했다.
“아까 너 넘어졌을 때 땡땡이 팬티 보였어.”
내 얼굴만 빤히 쳐다보는 서예.
갑자기 서예의 새로운 짝꿍이 떠올랐다.
냄새나는 짝꿍도 모자라 많은 아이들 앞에서 이런 창피를 당하다니.
서예야,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너 우리 집에 있게 해줄게.
부디 우리 오빠 얼굴 보면서 조금이라도 오늘의 악몽에서 벗어나라.
집에 도착해보니 오빠는 교복까지 갈아입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 뒤를 따라 들어오는 서예를 보자 싸늘하게 변하는 얼굴.
서둘러 오빠 입을 막으며 말했다.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오빠를 끌고 몇 개월째 비워있는 아빠 방으로 들어갔다.
입을 막았던 손을 놓자 잔소리가 시작됐다.
“집에 같이 오려고 너희 반에 갔었는데 없더라? 뭐 때문에 오빠를
기다리지도 않고 간 거야? 그리고 쟨 뭐야? 내가 우리 집에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잖아!!
오빠 말 안 들으면 오빠 가출한다고 했던 거 기억나, 안나?”
다 끝나셨나요, 왕제요 오라버니?
입만 열면 수다쟁이야! 수다쟁이!!
“오빠, 나 부탁이 하나 있어.”
“부탁?”
“오늘 하루만 서예 허락해라.”
내 말을 다른 식으로 해석했는지 오빠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뜻이 아니라 오늘 우리 집에서 놀다 가는 거 허락해 달라고.”
“안돼!!”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짐 싸서 서예네 집으로 갈게.”
뒤돌아 문 앞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잡았다.
“허락하는데 내 방 출입은 금지야! 그리고 내 옆에 오는 것도 안돼.”
맘 변할까 싶어 오빠 손을 잡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아있는 서예 옆으로 걸어갔다.
“서예야, 오빠를 위해 사온 거 있지? 꺼내봐.”
충격 받아 정신없을 만도 한데 딸기 사는 걸 잊지 않은 서예.
가방에서 딸기가 든 팩을 꺼내 오빠 앞으로 내민 서예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이거 진짜 맛있데~ 내가 씻어 올 테니까 오빠는 앉아!!”
억지로 오빠를 앉히고 재빨리 딸기를 씻어 서예 옆에 앉았다.
“서예야, 맛있게 먹을게~”
“오빠, 드세요.”
참서예, 살짝만 건드려도 폭발할 것 같으니 제발 오빠 심기 건드리지 말아라.
딸기 먹는 오빠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서예가 불안하기만 하다.
그러던 중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오빠 얼굴에 정신 팔려있는 서예가 딸기가 아닌 오빠 손을 잡은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실실거리며 오빠만 바라보는 서예.
네가 기어이 일을 저지르는구나!
난 다급히 서예를 끌고 내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왕제순, 아무리 질투 나도 이런 식으로 오빠와 날 갈라놓으면 안 되는 거야!”
나와 5년을 함께하고도 아직 오빠 성격을 모르는 걸까?
아니면 오빠의 그런 성격까지도 좋아하는 걸까?
“쾅쾅!! 문 열어!!”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 같은데..
문 열려는 서예의 팔을 잡고 소리쳤다.
“너 정말 죽고 싶어?”
“오빠가 문 열라잖아.”
“문 열면 넌 죽어, 이 바보야!!”
“왕제순!! 문 열라니까!!!”
안되겠다. 도망가는 게 살 길이다.
창문을 열고 서예 등을 밀었다.
“너 지금 날 죽일 작정이야? 믿었던 친구한테
이런 식으로 배신을 당하다니. 사람 살려~ 살려주세요!!”
너 오빠한테서 벗어나면 보자!!
다시 한번 서예의 등을 힘껏 밀어 밖으로 내보내고
나 역시도 창문을 넘어 밖으로 나왔다.
또 다시 치마가 뒤집힌 체 넘어져 있는 참모 양.
저걸 찍어서 말 안들을 때마다 써먹어?
굿, 굿!!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참서예, 넌 이제 내 밥이다! 푸하하~
“제순아, 혼자서 뭘 그렇게 웃어?”
어떻게 들어왔는지 창문에서 우릴 내려다보고 있는 오빠.
“참서예, 튀어!!!”
창문을 넘어 내게로 손을 뻗는 오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서예를 두고 달려야만 했다.
그래.. 서예는 오빠한테 맞아도 좋다고 웃을 거야.. 절대 날 원망하지 않을 거야..
오빠한테 잡히지 않은 것 까지는 좋은데 갈 데가 없다!
그리고 그냥 들고튀는 바람에 교복 차림에 수중에 있는 건 핸드폰 뿐.
친구라곤 서예 하나뿐인데 그것이 집에 있다 하더라도 가고 싶지 않다.
예전에 아무것도 모르고 놀러갔다가 쌍둥이 남동생한테 당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떨린다.
그럼 이제 어쩌나.
요 핸드폰을 팔아먹을 수도 없고.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연평 바다에 어얼싸 돈 바람 분다~ 얼싸 좋네~”
깜짝이야!
들고 있던 핸드폰이 흥겹게 울려댔다.
폴더를 열자 ‘얼굴의 황제 화려한’ 이라는 글자와 함께 번호가 깜빡거렸다.
레터링까지 얼굴의 황제로 설정해 놓다니.. 정말 징하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왜 이렇게 늦게 받아?”
받자마자 승질부터 내는 녀석.
확 끊어버려?
“전화한 용건이나 말해.”
“세마동 오스카빌 아파트 알지?”
“아는데 왜?”
“204동 1107호로 와. 지금 당장.”
알았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잠깐, 내가 왜 간다고 했지? 그야 갈 데가 없으니까.
그래. 난 갈 데가 없어서 가는 거야.
절대 려한이가 오라고 해서 가는 거 아니야.
서예가 세마동에 살기에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1107호 앞에서 교복을 단정히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혹시 집에 혼자 있어서 날 부른 게 아닐까?
아...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려한이가 갑자기 덮치기라도 하면...?
“몰라.. 몰라..”
“못 봐주겠군.”
한심하다는 듯 날 바라보고 있는 해나언.
제기랄! 언제 나온 거지?
“쇼 더 하다 들어와.”
미친년으로 제대로 찍혔다, 왕제순.
근데 집에 혼자 있는 게 아니였네? 치.. 좋다 말았네.
소파에 누워있던 새록이 녀석이 날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저 땡촌 뭐야!!!”
내가 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나 보다.
내 앞에 선 녀석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뭐냐, 그 손바닥은?”
“치료비.”
무슨 소린가 하고 회상해보니 어제 아침,
내가 던진 가방에 맞고는 치료비 100만원 내 놓으라고 소리소리 질렀었지?
난 살포시 녀석 손을 잡고 말했다.
“내가 너의 그 정신병을 고쳐주고 싶다만 지금은 돈이 없네?
10년 뒤에 찾아오면 그땐 꼭 치료비 줄게. 알았지?”
“으아악!!!!!!”
갑자기 내가 잡았던 손을 들고 이리저리 날 뛰는 산새록.
왕제순, 하루빨리 돈 벌어서 새록이의 정신병을 고쳐주자!! 꼭!!!
얼굴의 황제(皇帝) 11 - 20
새록이의 발작은 려한이의 등장으로 멈췄다.
난 거실 가득 너질러져 있는 물건들과 상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짐 정리하는 거야?”
“알면 시작해.”
“뭘?”
다시 방으로 발길을 옮기던 려한이 뒤돌아 말했다.
“해나언, 땡촌 잘 감시해. 산새록 넌 따라 들어와.”
려한과 새록이가 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닫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던 중 나언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하하, 뭐부터 하면 돼? 말만해! 나, 이래 뵈도 일 되게 잘해.”
“우선 바닥에 있는 것부터 상자에 담아. 차곡차곡 깔끔하게.”
“차곡차곡 깔끔하게. 알았어!!”
하지만 난 따가운 시선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려한이 녀석이 감시하라고 했어도 그렇지!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면 어쩌라는 거야, 해나언!!
“저기, 나언아.”
“친한 척 이름 부르지 마.”
“그럼 뭐라고 불러?”
“왕자님.”
순간 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차갑고 무섭기로 유명한 나언이 입에서 지금 왕자님이라는 말이 나온 거야?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한번만 말해줘.”
“왕.자.님.”
특종이다!! 해나언이 자길 왕자님이라고 부르라는 개그를 했다!!
“너도 유머스러운 면이 있네. 하하, 재미있다.”
“닥치고 하던 일이나 계속해.”
가만, 이제 보니 화려한 이 자식!! 일 시키려고 부른 거잖아!!
갈 데가 없어 자발적으로 오긴 했지만 이따위 잡일 하러 온 게 아니라고, 난!!
려한에게 따지기 위해 벌떡 일어섰다 다시 조용히 앉아 짐 정리를 시작했다.
해나언, 그래. 어디 눈알 빠질 때까지 노려봐라!!
정리를 다 마치자 주방을 가리키는 해나언.
“밥 차리라고?”
“그릇 정리해. 깨지는 건 신문지로 싸는 기본적인 상식은 알고 있겠지?”
“근데 왜 넌 안 해?”
찌릿찌릿.
알았다!! 알았어!! 하면 될 거 아니야!!
그릇정리까지 다 마치고 시계를 확인하니 7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지났지? 오빠한테 완전 죽었다.
아까 도망친 거까지 해서 2시간 설교 듣고, 일주일간 오빠 따라 팩 해야 하고,
이젠 저녁에도 오빠가 만든 주스를 마셔야 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릇 정리하는데 신경을 쏟아 몰랐는데 언제 나왔는지
려한이와 새록이, 나언이 옆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지금 누군 누구 때문에 죽게 생겼는데!!
텔레비전 앞으로 가 전원버튼을 눌렀다.
“저게!! 야, 땡촌!!”
“화려한,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부터는”
“띵동~”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새록이 현관문으로 달려가 문을 열자 철가방을 든 아저씨가 들어왔다.
철가방에서 나오는 자장면, 짬뽕, 탕수육, 군만두를 보자 배에서 난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아침 식사 이후 아무것도 먹질 않았잖아?
자리를 잡고 앉아 먹기 시작하는 세 녀석.
군침을 삼키며 녀석들 곁으로 다가갔다.
“침 닦고 앉아.”
려한의 말에 후다닥 려한과 나언이 사이에 앉았다.
“먹어.”
“먹어도 돼?”
“먹기 싫음 말고.”
“싫기는~ 내가 자장면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맛있겠다.”
앞에 있는 자장면을 뜯어 허겁지겁 입으로 집어넣었다.
집에서 만든 음식 외엔 먹지 않는 오빠 덕분에
외식은 물론 배달음식은 꿈도 꾸지 못한다.
“정말 밥 맛 떨어지게 먹네.”
“더 이상 못 먹겠어? 그럼 그거 나줘.”
그릇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하고 자장면을 먹던 난
얼굴을 들어 려한이를 보며 말했다.
“며칠 굶었냐?”
“점심 못 먹었어.”
“야, 얼굴 치워. 꿈에 나올까 두렵다.”
“그거 먹을 거야, 말 거야?”
“먹어라, 먹어.”
려한이 얼마 먹지 않은 짬뽕을 내게 건네며 일어섰다.
“고마워~”
“하나부터 열까지 맘에 드는 구석이 없어! 그지 새끼, 내꺼도 먹어라.”
새록이 역시 자신이 먹던 자장면을 내 앞에 놓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또 다시 어색하게 나언이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조심스레 나언이를 쳐다봤다.
“내꺼도 달라고?”
“아니! 아니야!”
“배고프다고 미련하게 다 먹지 마라.”
지금 나언이가? 설마~ 이번엔 정말 잘못 들은걸 거야.
려한이의 짬뽕을 먹어가며 탕수육과 군만두도 열심히 먹어나갔다.
“으아~ 더 이상 못 먹겠다. 배가 터질 것 같아.”
방금 전 나언이 마저 방으로 들어갔기에
마음 놓고 바닥에 누워 빵빵해진 배를 문질렀다.
근데 왜 이렇게 졸리지? 잠깐만 잘까?
잠들면 녀석들이 알아서 깨우겠지. 부모님 때문에라도 깨울 거야.
아, 기분 좋다. 착한 려한이 꿈까지 꾸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이봐, 학생! 학생!!”
려한이랑 좋은 시간 보내고 있는데 누구야!!
천천히 눈을 떠 내 몸을 흔드는 사람을 올려다봤다.
“세상에, 어제 자장면 먹고 씻지도 않고 잠들었나보네.”
몸을 일으켜 경비 옷과 경비 모자를 쓴 아저씨를 쳐다봤다.
“학생 말 못 혀? 이거 듣지도 못하는 거 아니여?”
“아저씬 누구세요?”
“멀쩡하네? 난 이 아파트 경빈데 학생이야 말로 빈 집에서 뭐하는겨?”
“빈 집이요? 여기 친구네 집인..”
하지만 텅 빈 집 안 광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분명 어제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다 있었는데 어디로 사라진 거지?
“다 어디 갔어요?”
“여기 살던 그 잘생긴 남학생? 그 학생 친구여?”
“네! 어떻게 된 거예요?”
“아까 이사 갔어. 이삿짐 옮기느라 학생 깨우는 걸
깜빡한 모양인가보네. 좀 있다 여기 청소해야 하니까 얼른 집에 가봐.”
자면 누가 업어가도, 때려도 모르는 나지만 그래도 그렇지!!
짐도 아닌 날 버려두고 그냥 가? 부모님은 안 들어 오셨었나?
잠깐! 나 외박한거잖아!! 한번도 외박 한 적 없는데. 오빠야~!!
땡전 한 푼 없었기에 죽기 살기로 달렸다.
부처님, 하나님, 알라신, 염라대왕님, 머털도사님!!
어린 양을 굽어 살피소서!! 오빠 손에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해 주소서!!
집 앞에 도착하고 땀으로 범벅인 얼굴을 닦아내며 숨을 골랐다.
180도 왕제요보다 더 심하게 변하겠지?
난생처음 360도 왕제요를 보는 순간인가?
반쯤 열려있는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어? 왜 이렇게 조용하지?
분명 내가 올 때까지 현관 앞에서 지키고 서 있을 텐데.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뭐야? 잘못 들어온 건가 싶어 나갔다 주소를 확인하고 다시 들어왔다.
하지만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텅 비어있는 집.
밤새 도둑이라도 들었나?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오빠!!!”
거실, 주방, 욕실, 아빠 방, 오빠 방, 내 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오빠는 없었다.
그리고 가구와 물건 역시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완전한 빈 집이였다.
순간 10년 전 기억이 떠오른 난, 떨려오는 몸을 감싸 안고 주저앉았다.
수업을 마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친구들과 놀다
허겁지겁 뛰어 온 집엔 어둠만이 날 반기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무서움에 떨며 지쳐 잠들 때까지 울던 기억.
다시 그때로 돌아간 듯한 느낌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디 있는 거야!! 또 나 혼자만 두고 어디 간 거야!!!!!!!!
“으허허엉~ 오빠~ 아빠~”
통곡 하다시피 하며 우는데 투명해야 할 눈물이 까맣게 변해 떨어지고 있었다.
손등으로 얼굴을 문지르자 시꺼먼 게 잔뜩 묻어 나왔다.
화장실로 달려가 얼굴을 확인하니
자장면 양념 범벅으로 꼴이 말이 아니였다.
거지가 따로 없네.
세수를 하기 위해 물을 틀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물이 나오지 않았다.
주방 싱크대 수도 역시 물이 나오지 않긴 마찬가지.
그래, 이건 꿈이야! 꿈일 거야!!
꿈에서 깨기 위해 인정사정없이 볼을 꼬집었다.
“아야~”
젠장. 눈물나게 아프다.
오빠한테 연락할 방법도 없고, 내일 학교 가야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빈 집에 있을 수도 없고, 결국 서예네 뿐인가.
아니야! 오빠가 찾으러 올 거야!
그때처럼 자고 일어나면 내 옆에 있을 거야!!
밖에서 신문지와 빈 박스를 주워 와
내 방에 박스를 뜯어 깔고 그 위에 신문지도 몇 장 깔았다.
정말 판타스틱 한 잠자리다.
자리에 앉아 남은 신문지를 이불삼아 덮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5시.
오빠, 딱 5시간만 줄 테니까 그 안에 와야 해.
1초라도 늦으면 매일 못생겼다고 말해 세뇌시킬 거야.
6시가 넘자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스위치를 눌렀지만 아무 변화 없었다.
전구 간지 일주일도 안 돼 벌써 나갈리 없는데.
뭐야!! 물도 안 나오고, 불도 안 켜지고!! 5시간 취소야!!
한 시간 내로 안 오면 팬티만 입고 찍은 사진 학교에 뿌릴 거야!
망신당하기 싫으면 빨리 와, 왕제요!!
쪼그리고 앉아 핸드폰 벨소리를 들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던 중, 한 가지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어제 려한이랑 통화했으니까 녀석 전화번호가 남아있을 것이다.
바보바보! 이제야 생각이 나다니.
오빠가 언제 올지도, 혹은 안 올지도 모르는데 여기 계속 있을 수 없지!
듣고 있던 벨소리를 정지시키는 순간 요란한 소리를 내며 꺼지는 핸드폰.
난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봤다.
누가 제발 좀 꿈이라고 말해줘!!!!
“철컹.”
그때 현관문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귀..귀신인가? 아님 도..도둑?
오빠라면 내 이름을 부르며 날 찾을 텐데 발소리만 들린다.
창문으로 가기 위해 몸을 틀었지만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넌 또 왜 말썽인 거야! 움직여!!
마음을 진정시키며 힘겹게 창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 창문을 여는 순간 문이 열리며 시커멓고 큰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캬악~ 사람 살려!!”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는데
갑자기 나타난 무언가가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아, 귀 따가워.”
이 목소린..?!
“나 누군지 알겠지?”
끄덕끄덕.
녀석이 손을 떼고는 핸드폰으로 내 얼굴을 비춰왔다.
“너 세수 안 했냐?”
“물이 안 나와!”
“없는 정 마저 떨어지네. 따라와.”
“어디 가는데?”
그러나 대답 없이 집을 나가는 녀석.
혼자 남게 되자 등꼴이 오싹해져 왔다.
“가..같이 가!!”
서둘러 녀석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우리 집은 어떻게 알고 왔어?”
“아니까 오지, 모르는데 왔겠냐.”
“무슨 대답이 그래?”
“야, 좀 떨어져서 와. 사람들이 너랑 나랑 일행인 줄 알고 쳐다보잖아.”
“무슨 소리~ 황제 옆을 지키며 보필하는 게 시녀의 임무잖아. 안 그래?
근데 나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배고파. 우리 떡볶이 먹자.”
껌이 그렇게 씹고 싶은지 들은 체도 안하고 내 말을 씹는 녀석.
“나 배고프다고!! 안 들려? 크게 말해?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앞서 걸어가던 녀석이 우뚝 멈춰서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말없이 계속해서 째려보는 녀석.
“안 배고파! 하나도 안 배고파!!”
“10m 떨어져서 따라 와.”
“왕 치사한 자식. 꼭 복수하고 말 테다. 두고 봐!”
녀석이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깔끔하고 예쁘게 지어진 2층 집 앞.
“우와~ 여기로 이사한 거야? 집 되게 좋다.”
“맘에 들어?”
“응! 2층 집에서 사는 게 꿈이거든.”
“앞으로 몸조심해라.”
이상한 말을 하고 안으로 들어가는 화려한.
시녀에 걸맞게 제대로 부려먹겠다는 소린가?
내가 아무리 널 좋아한다 해도 순순히 당하고만 있진 않을 거야!
그나저나 려한이 부모님껜 어떻게 인사하지?
그 전에 얼굴에 묻은 양념부터 지워야겠다.
드러웠지만 얼굴에 침을 발라가며 문질렀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현관문 앞에서 쉼 호흡 한번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제순아!!!”
들어가자마자 날 부등켜 안고 울기 시작한 인간이 있었으니,
내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오라버니였다.
“근데 얼굴이 이게 뭐야? 쓰레기통이라도 뒤졌어?”
내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살피는 오빠를 밀쳐내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오빠가 왜 여기 있어?”
“저쪽으로 가서 얘기하자.”
오빠를 따라 려한이와 나언이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근데 어디서 많이 보던 물건들이 하나, 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거 우리 소파잖아. 그리고 이 탁자, 저 그림, 저 화분도 우리 거잖아.”
“우리 집이니까.”
“우리 집이라니?”
“앞으로 려한이랑 나언이랑 같이 살 우리 집이라고.”
오빠 말에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려한이와
얘기 따윈 관심 없다는 듯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나언이를 쳐다봤다.
앞으로 려한이랑 한 집에서 같이 산다?
려한이랑? 나의 려한이랑?
“우히히히-”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나온 웃음.
“해나언, 들었지? 잡혀 먹고 싶지 않으면 문단속 잘해라.”
“야, 화려한!”
녀석을 불렀고,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왜?”
“너도 문단속 잘하라고.”
아씨, 이게 아닌데!! 왕제순, 이 바보 멍충이!!
“푸하하하하~”
옆에 있는 나언이를 때리며
숨넘어갈 듯 웃는 녀석을 무시하고 오빠에게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봐.”
“너 도망가고 얼마 안돼 아빠한테 전화가 왔어.”
그렇게 오빠의 설명은 시작됐다.
오빠의 얘기를 다 들은 난, 내용을 정리하며 물었다.
“그러니까 그곳에서 같이 활동하는 아줌마도 아이들만 살고 있고
우리도 부모 없이 우리만 살고 있어 서로 외롭지 말라고 집을 합친 거다?”
“응.”
“이유는 그것뿐이다?”
“그래.”
왕제순, 뭘 고민해?
넌 그렇게 원하던 2층 집에서 살게 됐어.
그것도 네가 좋아하는 려한이랑.
“오빠야, 아빠한테 전화 오면 우리 잘 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거기에 오래오래 있으라고 해. 알았지?”
“언제는 안 온다고 난리 쳤잖아.”
“그땐 어렸으니까 그랬지~”
“며칠 전인데?”
그냥 대충 좀 넘어갑시다, 오라버니~
“내 방은 어디야?”
“2층으로 올라가서 오른쪽 맨 끝 방. 그 전에 세수 좀 해.”
“잘 때 하면 돼. 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어서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었어.”
“토 나올 것 같으니까 얼른 세수해!”
침으로 닦아서 토 나올 정도는 아닐 텐데.
하지만 화장실 거울과 마주한 순간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망을 맛보아야만 했다.
몇 번이고 세수를 하고 나오자
문 앞에 서 있던 오빠가 시꺼먼 액체가 담긴 컵을 건넸다.
“뭐야?”
“마셔.”
“뭔데?”
“마셔!!”
오빠의 기에 눌려 정체 모를 액체를 허겁지겁 들이켰다.
“윽! 구린내~”
“몸에 좋은 거니까 남기지 말고 다 마셔.”
“재료나 알고 마시자.”
“지렁이.”
잘못 들은 건 아닌가 하고 오빠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루 동안 오빠 얼굴 못 봐서 보고 싶어 하는 건 이해하는데 우선 마셔.”
“지금 뭐라고 했어? 재료가 뭐라고?”
“지렁이. 오빠가 직접 잡아다가 한의원에 맡겨서 가루로 만들어 온 거야.
그런 감동스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오빠는 제순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잡을 수 있으니까.”
으아아악!!!!!!!!!
컵을 내려놓고 화장실로 들어와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제순아, 왜 그래?”
뒤돌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오빠에게 소리쳤다.
“왕제요 미쳤어?”
“오빠한테 그게 무슨 말이야?”
“미치지 않았음 어떻게 동생한테 지렁이를 먹여!! 그동안 쑥차니 뭐니 했던 것들도
다 이상한 재료 아니야? 나한테 또 어떤 징그러운 걸 먹인 거야? 말해봐!!”
내 말에 상처라도 받은 걸까?
한참을 슬픈 눈으로 날 바라보던 오빠가 돌아서며 말했다.
“너 사계절 내내 감기 달고 살잖아. 지렁이가 해열 작용을 해 감기에 좋데.”
쓸쓸한 뒷모습은 이내 방으로 모습을 감췄다.
왕제순, 너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오빠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어느새 내 곁으로 온 려한이가 등을 떠밀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야?”
“오빠한테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
“네가 뭔데?”
“넷째, 황제 말에는 무조건 복종한다. 불복종 시 반성문 100장에 운동장에서..”
려한이의 입을 틀어막고 오빠가 들어간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 엎드리고 있는 오빠가 보였다.
걸어가 오빠 옆에 앉아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미안해. 그거 홧김에 한 말이지, 내 진심 아니야.”
“.......”
“정말 잘못했어! 앞으로 오빠 말 잘 들을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몸을 일으켜 내 손에 컵을 쥐어주는 오라버니.
“그럼 이거 마셔.”
“이것만은..”
“그래, 네 말대로 오빠는 미친놈이야. 미친놈이 살아서 뭐해.
제순아, 오빠 죽으면 지렁이 옆에 묻어줘. 지렁이야, 내가 간다~”
창문으로 달려가 커튼으로 목을 조르는 오빠를 말리면서 대답했다.
“아..알았어! 마실게. 마시면 되잖아.”
이번에도 주문을 걸며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코코아다. 이건 지렁이가 아닌 달콤한 코코아다.
“우리 제순이 잘 먹네? 내일은 여치 주스 마시자.”
“오빠야.”
“응?”
“미쳤지?”
“미쳤다는 건 그만큼 열정이 있다는 거야.
그래서 오빤 미쳤다는 말 좋아해. 제순이 너도 미쳤다는 말 들을 수 있게 노력해.”
나, 오빠 연기에 속은 건가?
담배 냄새로 숨 쉬는 게 불편해 눈을 뜨자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냄새 추적에 나섰다.
커다란 창문을 열자 더욱 짙게 내 코를 후벼 파며 들어오는 담배 냄새.
밖으로 몸을 내밀자 옆 베란다에서 담배를 펴고 있는 나언이가 보였다.
베란다로 나오긴 나왔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계속해서 내 쪽으로 오는 담배 냄새를 맡아야만 했다.
“왜 쳐다봐?”
“응?”
갑작스런 나언이의 질문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난 벌떡 일어서며 대답했다.
“너도 피고 싶어?”
“아..아니!”
“그럼 왜 쳐다보는데?”
“그러니까 그게.. 그냥! 그냥 쳐다보는 거야.”
나언이 피식하며 웃더니 순식간에 내가 있는 베란다로 넘어왔다.
아무리 거리가 가까워도 그렇지, 무섭지도 않나?
소문대로 눈에 뵈는 게 없는 녀석임이 분명해!
“입고 있는 거 잠옷이냐?”
나언이의 말에 고개를 숙이자
속옷을 훤히 비추고 있는 하얀색의 잠옷이 눈에 들어왔다.
서둘러 몸을 감싸며 주저앉았다.
아직 려한이한테도 보여주지 않은 몸이란 말이야~
아, 정말 이 녀석한테는 볼 거, 못 볼 거 다 보여주는구나.
담배를 입에 문 나언이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녀석의 숨결이 느껴지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심장아!! 이 녀석은 려한이가 아니라 나언이야!!
넌 아무 때나 두근거리면 안돼!!
“유혹 안 해?”
“유혹이라니?”
“속옷이 훤히 비추는 잠옷 입고 나타났으면 유혹해야지.
별 볼일 없는 몸매이긴 하지만 노력이 가상하면 넘어가 줄 수도 있어.”
주인 허락도 없이 달아오르는 얼굴!
“그..그만 네 방으로 가.”
“싫은데?”
날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고,
잠시 후 긴 숨결과 함께 담배 연기가 얼굴을 덮쳐왔다.
“저기..”
용기 내어 첫 마디를 던지곤 말을 이어갔다.
“나 담배 냄새 맡으면 어지러운데.”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
뒤이어 믿기 힘든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직 반 밖에 피우지 않은 담배를 공중으로 던지는 해나언.
설마 내가 한 말 때문에?
“너 때문에 버린 거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라.”
역시나 왕 착각이었다.
일어서 다시 베란다를 넘으려는 녀석을 붙잡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
돌아선 녀석에게 여전히 쪼그린 채로 물었다.
“너랑 려한이 성이 틀린데 어떻게 형제야?”
“훗- 누가 형제래? 려한이가?”
“아니. 우리 아빠가 만난 아줌마가 너희 엄마면 너랑 려한이는..”
말끝을 흐리며 나언이를 쳐다봤다.
흔들리는 나언이의 눈동자가 가슴 깊숙이 박혀오기 시작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남. 하늘이 두 쪽 나도
난 려한이가 될 수 없고 려한이도 내가 될 수 없어. 무슨 뜻인지 알아?”
베란다를 넘어 방으로 들어가는 나언이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해나언, 나 뭐가 뭔지 모르겠어.
네가 한 말,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어.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나, 나언이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준비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평소와 마찬가지로 컵을 들고 내 앞에 선 오빠.
“여치 주스?”
“아니. 여치보다 더 좋은 거.”
“메뚜기?”
“딩동댕!”
어렸을 때 메뚜기 튀긴 거 몇 번 먹어봤기에 그다지 거부감이 들진 않았다.
그리고 여치보다 메뚜기가 낫지 않은가!!
실랑이 벌일 기분이 아니었기에 말없이 받아들어 마셨다.
“맛이 어때? 어제 지렁이보다 맛있어?”
오빠의 말에 멀쩡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맛있어! 맛있으니까 어제 그거는 입 밖으로 꺼내지마!”
“그럼 오빠랑 사이좋게 등교할까?”
“도시락은?”
“오늘부터 급식이야. 그 놈의 영감탱이 내가 입학하자마자 작년까지
급식하자고 건의해도 들은 척 안하더니 졸업할 때 되니까 급식을 해?”
교장선생님 얘기라면 평소 안하는 욕까지 하는 우리의 오라버니.
아무래도 교장선생님에 대한 화풀이를
내게 이상한 주스 먹이는 걸로 대신 하는 건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든다.
예전엔 과일이나 야채가 주재료였는데 지금은 여치, 메뚜기, 지렁...윽!!
“먹자. 알았지?”
“응? 뭐라고?”
생각에 빠져 있던 터라 오빠의 말을 듣지 못했다.
“점심 같이 먹자고. 내가 자리맡아 놓을게. 창가 쪽이 좋겠지?”
“나 서예랑 같이 밥 먹는데 괜찮겠어?”
“앞으로 걔랑 먹지 말고 오빠랑 먹어!”
“서예 나 말고는 친구 없잖아. 오빤 서예가 청승맞게 혼자서 밥 먹었으면 좋겠어?
애들 손가락질 받으면서? 걔 보기보다 마음 여려서 학교 그만둘지도 몰라.”
뭘 고민해, 왕제요? 그냥 서예랑 먹으라고 말해!
“후- 어쩔 수 없군. 걔도 같이 먹는데 지켜야 할 규칙이 있어.”
서예라면 치를 떠는 인간이 왜 이러는 거야!
혹시, 싫은 척 하지만 실제론 좋아하고 있는 거 아니야?
“내게 말 걸지 말고, 내 얼굴 3초 이상 쳐다보지 말라고 전해.
그리고 내 몸에 터치하는 건 무조건 안돼!! 토요일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면.”
잠시 뜸을 들이던 오빠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나 절로 들어갈 거야.”
과연 얼굴 다음으로 아끼는 비단결 같은 머리를 박박 밀어버릴 수 있을지.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왔다 갔다 하는 발소리랑
려한이가 나언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는데..
“려한이랑 나언이는?”
“나갔어.”
지각과 결석을 밥 먹듯 하는 놈들이 벌써 학교를?!
갈 리 없었다.
완벽하게 비어있는 두 녀석의 자리.
그렇담 어딜 가려고 일찍 나간거지?
“제순아~”
교실로 뛰어 들어오며 날 부르는 서예.
무시하고 책상에 엎드렸다.
“야~ 일어나봐. 토요일에 제요오빠가 나한테 말 걸었어!”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몸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몸을 일으켜 잔뜩 흥분해 있는 서예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 인간이 뭐라고 했는데?”
“그 인간이라니! 그 인간이라니!!”
매운 손에 등짝을 두 대나 맞았다.
“야!!”
“오빠가 나한테 얼른 집에 가라고 했어. 내가 나쁜 놈들한테 끌려갈까봐 걱정됐나봐.
내 완벽한 미모에 오빠도 걱정이 되는 거야. 네가 오빠의 근심 가득한 눈빛을 봤어야 되는데.”
훤한 대 낮에 네 얼굴 보고 퍽이나 끌고 가겠다!
“오빠한테 가서 전해. 나 참서예는 왕제요 로미오님만을 섬기겠다고.”
“너의 그 완벽한 얼굴을 들이밀고 직접 말해.”
“얘는~ 부끄럽게 어떻게 그래. 참! 오늘부터 급식한다며?”
“참서예, 네 짝꿍 왔다.”
난 교실로 들어오는 오순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순덕이를 보자마자 울상 짓는 서예.
“제순아, 나 전학 갈까봐.”
“제발 좀 가라.”
“다른 반으로.”
“헛소리 그만하고 네 자리로 가. 짝꿍이 기다린다.”
책상에 앉아 힐끔힐끔 우리 쪽을 쳐다보는
오순덕의 소름 돋는 행동에 서둘러 서예의 등을 떠밀었다.
“제순아, 나 좀 살려줘.”
“네가 사람 차별하는 거 알면 오빠가 완전 실망할 텐데~”
“내가 언제 사람을 차별했다고 그래!”
“다시는 네 얼굴 안 볼지도 모르는데~”
“나, 내 자리로 간다.”
누군가에게 질질 끌려가듯 자신의 자리로 가는 서예가 안타까웠지만 별 수 있나?
서예야, 내가 교장선생님이랑 친해지면 짝꿍 바꿔줄게. 조금만 더 냄새에 취해 있어라.
점심시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부재중인 려한이와 나언이.
안내방송을 따라 밖으로 나가 새로 지어진 건물로 들어갔는데 시장바닥이 따로 없었다.
밥을 타기 위해 긴 줄로 서 있는 아이들은 물론 밥 먹는 아이들도 떠들고 장난치기 바빴다.
“이건 불공평해!”
옆에 있던 서예가 발로 땅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왜 1학년이 제일 늦게 먹어야 되는 거냐고! 항의해야겠어.”
“그럼 너의 로미오님은 어쩌고?”
“제요오빠? 제요오빠가 왜?”
“네가 항의해서 1학년이 먼저 먹는다고 쳐.
그럼 3학년은 두 번째나 꼴찌로 먹을 텐데 우리 오빠 배고파서 쓰러지면?”
그러고 보니 서예 말이 맞네? 왜 우리가 늦게 먹어야 되지?
이 놈의 영감탱이! 왕제요가 3학년이라고 3학년을 먼저 먹게 해주는 거 아니야?
“아, 그렇구나! 로미오님이 배고프면 안 되니까 내가 참아야지.
그나저나 줄은 왜 이렇게 안 줄어들어? 야!! 빨리들 받아가서 얼렁얼렁 처먹어!!”
지금과 같은 과격한 서예와 오빠를 좋아하는 서예 중에
어떤 게 서예의 참 모습인지 나조차도 헷갈린다.
이런 이중적인 모습, 왕제요랑 똑같다.
우여곡절 끝에 식판에 밥을 받아 빈자리를 찾았다.
“제순아~!!!!”
창가 옆 테이블에 선체로 힘차게 손을 흔들고 있는 오라버니.
“로미오님이 부르신다. 가자!”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오빠 앞으로 걸어갔다.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밥이 그대로 있었다.
“뭐 하러 기다려? 밥이고 국이고 다 식었잖아.”
“같이 먹기로 했잖아. 오빠가 해 준 밥보다 맛 없겠지만 맛있게 먹어.”
열심히 수저와 젓가락을 움직이는 오빠와 나완 달리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서예.
예상대로 서예는 밥은 거들떠도 안보고 오빠 얼굴에 빠져 있었다.
오빠가 눈치 채지 못하게 서예에게 속삭였다.
“오빠가 먼저 말 걸지도, 자기 쳐다보지도 말래.”
“왜?”
“부끄럽데.”
그래도 하나 뿐인 친군데 상처 받는 건 원치 않는다.
뭐 사실대로 말해도 상처 받을 서예가 아니지만.
“뭘 그렇게 속닥거려?”
“아무것도 아니야! 서예야, 얼른 먹자.”
“응! 와~ 내가 좋아하는 멸치대가리다!!”
멸치를 집어 들고 소리치는 서예를 오빠와 난 혀를 차며 바라봤다.
수업이 끝나고 담임이 종례하러 들어왔을 때도 두 녀석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집에 있는 건 아닐까 기대하고 갔지만 녀석들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저녁을 먹고 실컷 텔레비전을 보다 방으로 들어와 시계를 확인했다.
밤 11시. 아침 일찍 집을 나가곤 지금까지 코빼기도 볼 수 없는 두 녀석.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어디에서 뭘 하 길래 집까지 들어오지 않는 거냐고~!!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심하고 졸린 눈을 부릅뜨며 침대에 앉았다.
하지만 슬금슬금 유혹을 해오는 잠.
자면 안돼. 녀석들 얼굴 봐야해.
나언이한테 미안하다고 말해야해.
“쾅-!!”
천둥 치는 소리에 놀라 눈을 뜨자 침대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일어나 사복 차림으로 문 앞에 서 있는 려한이를 쳐다봤다.
“자장면 국물에 이어 두 번째 베스트 얼굴이군.”
“으음, 몇 시야?”
“침이나 좀 닦지 그래?”
비몽사몽. 정신없는 와중에도 손등으로 입 주위를 문질렀다.
“추하다 못해 더럽고 쏠린다, 쏠려.”
“몇 시지? 새벽 1시? 지금 들어온 거야?”
내 말은 무시하고 방으로 들어온 녀석이 종이 한 장을 던지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아직까지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난 눈을 비벼가며 종이를 집어 들었다.
‘시녀의 화려한 황제 모시기’
001. 황제 방 절대 출입금지(황제가 부를 시 허용)
002. 황제의 기상 시간은 새벽 6시니 그 전에 일어날 것
003. 매일 아침마다 상큼한 오렌지 대령
004. 황제의 사생활 터치 금지
005. 황제 숙제는 곧 시녀의 숙제
006. 황제에게 대들지 말 것
007. 황제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것
008. 매주 일요일 갈 곳 있으니 약속 잡지 말 것
009. 떨어져 있을 경우 한 시간마다 보고할 것
010.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는 부리지 말 것
.
.
.
.
.
099. 황제 외 딴 놈에게 눈길 줄 시 사형
100.
근데 마지막 100번엔 왜 아무 것도 안 써져 있지? 깜빡했나?
에이! 알게 뭐야? 어차피 무시할건데. 잠이나 자자~
얼마 안 잔 것 같은데 시끄러운 꽹과리 소리에 잠이 깼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자 화려한 녀석이 꽹과리를 들고 옆에 서 있었다.
“기상!”
“뭐하는 짓이야? 당장 나가!”
“벌써 아침 7시다. 일어나.”
“오늘 식목일이라 학교 안 간다고!!”
“잘 알고 있네. 갈 데 있으니까 준비하고 내려와.
10분 내로 안 내려오면 지렁이 탕 먹인다.”
문을 닫고 나가는 녀석을 향해 뒤늦게 베개를 던졌다.
“으아악!! 아침부터 어딜 처가겠다고 사람을 깨우고 지랄이야!!
내가 네 말대로 움직일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야! 난 잘 거야!!”
누워 이불을 덮었지만 지렁이 탕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설마 진짜로 먹이는 건 아니겠지? 오빠가 녀석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지렁이 가루를 순순히 줄 리 없지. 암, 그렇고 말고! 난 오빠를 믿어!
다시 잠을 자기 위해 애 쓸 무렵 오빠와 려한이가 나타났다.
오빠 손엔 설마 하는 컵이 들려 있었다.
“제순아, 이게 그렇게 먹고 싶었어? 이제부터 오빠가 매일 아침 준비해줄게.”
“그거 뭐야?”
“뭐긴, 네가 그렇게 먹고 싶어 하는 지렁이 탕이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걸어온 오빠가 입으로 컵을 가져왔다.
왕씨 가문의 명예를 위해 제대로 복수하라던 오빠였는데 그걸 그새 잊었나?
난 문 앞에 서 있는 려한이를 견제하며 오빠에게 귓속말을 했다.
“왕씨 가문 모욕 사건 잊었어?”
“네가 귀여워서 그랬데.”
“아니야! 오빠가 속은 거야!”
“지렁이 탕 안 주면 뛰어내리겠다고 난리쳤으니, 뛰어내리기 전에 얼른 먹이죠.”
“제순아, 오빠가 지렁이 많이 잡을 테니까 혹시나 나중에
못 먹게 되는 건 아닐까 라는 걱정은 하지 마. 알았지? 자, 쭉 들이켜.”
내 머리를 받치고서는 억지로 컵을 쑤셔 넣는 오라버니.
코로 솔솔 올라오는 냄새에 벌써부터 속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컵을 뺏어 들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까 그만 나가봐.”
“그럴래?”
“힘들게 잡은 지렁이를 동생이 맛있게 먹을 텐데 그걸 안 보겠다고요?”
“야!! 화려한!!”
소리는 질렀지만 간절한 눈빛으로 녀석에게 호소했다.
네가 시키는 건 뭐든 할 테니 제발 지렁이만은 안 먹게 해줘. 제발~!!
“형, 아까 가스렌지에 뭐 올려놓지 않으셨어요?”
“아차! 내 북어국~”
서둘러 방을 나가는 오빠를 바라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말없이 내 쪽으로 걸어온 녀석이 컵을 빼앗아 들더니 창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갔다.
컵에 들어 있던 지렁이 탕이 힘차게 낙하하는 게 보였다.
화려한, 너 아주 나쁜 놈은 아니구나. 내가 좋아하는 녀석인데 당연히 그래야지.
“이번엔 5분이다. 5분 안에 준비 마치고 내려와.”
“머리 감는 데만 5분이라 그건 무리야. 한 시간만 기다려.”
“형!! 제순이가 지렁이 탕 더 먹고 싶다는.”
옆에 있는 인형을 던져 려한이의 입을 막았다.
“10분! 10분 줘!”
“1초라도 늦으면 사발로 들고 올 거니까 10분 뒤에 보자~”
녀석의 뒤통수에 대고 온갖 저주를 쏟아 붓는 것도 잠시
욕실로 달려가 대충 세수하고, 대충 머리 감고, 대충 양치질하고 나왔다.
대충 했는데도 불구하고 8분이나 소요됐다.
머리 말리는 건 포기하고 편해서 자주 입는 트레이닝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소파에 앉아있는 려한이 앞에 섰다.
“꼴이 그게 뭐냐?”
녀석이 한심한 눈빛으로 내 몸을 위, 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나 역시 고개를 숙여 내 꼴을 살폈다.
옷이 전체적으로 심하게 구겨져 있는 건 기본이었고,
김치 국물로 추정되는 벌건 얼룩이 가슴 근처에 잔뜩 묻어 있었다.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건 심하게 튀어나온 무릎.
빤다, 빤다하며 빨지 않다 이사 오면서 깜빡하고 걸어놓은 게 화근이었다.
“김치 국물은 봐주겠는데 튀어나온 무릎은 도저히 못 봐주겠다.”
“내가 한 시간은 필요하다고 했잖아!!”
쪽팔림에 괜한 신경질을 내며 2층으로 뛰어 올라왔다.
왕제순, 더 이상 추한 꼴은 안돼!
지금까지 보였던 모습보다 더 추한 꼴이 있을까 만은 더 이상은 안돼!! 절대 안돼!!
아침밥마저 굶기며 녀석이 날 끌고 온 곳은 거대한 화원.
꽃과 야채 씨앗과 나무 몇 개를 사더니 그걸 다 나보고 들으란다.
“말이 돼? 이걸 어떻게 나 혼자 들어?”
“너 힘세잖아. 그리고 그런 건 시녀가 할 일이고.”
“시녀는 학교에서 정해준 거고 내가 진짜 네 시녀는 아니잖아!”
“시녀하기 싫어? 싫으면 교장한테 말해서 다른 시녀 뽑고.”
옆에서 지켜보는 아저씨 눈치를 살피는 사이 밖으로 나간 녀석.
허겁지겁 앞에 있는 것들을 끌어안고 녀석을 뒤쫓았다.
“내가 착해서 드는 거지, 네가 들라고 해서 드는 거 아니야.”
“누가 뭐랬어?”
“그냥~ 궁금해 할까봐. 근데 이건 왜 산 거야?”
“식목일이 뭐하는 날인지도 모르는 바보는 아니겠지?”
“내가 그것도 모를 것 같아? 뭐야? 네가 나무를 심는다고?”
의혹의 눈초리로 녀석을 째려봤지만
녀석은 오히려 내게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 왔다.
“설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식목일에 나무 한번 안 심어본 건 아니지?”
양심을 찔러오다 못해 마구 후벼 파며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무를 꺾으면 꺾었지, 심은 적이 있던가?
아니, 꽃이라도 한 송이 심어 본적이 있던가?
하지만 난 양심을 버려가며 거짓말을 했다.
“날 뭘로 보는 거야~ 이따 나무 심으러 산에도 간다, 뭐!”
“나도 매년 심으러 다녔는데 어느 산 다녀 봤어?”
“하..하도 많이 다녀서 그건 모르겠고 아무튼 심었어!”
“그~래? 그럼 이따 간다는 산에 나도 좀 데려가라.”
지금이라도 거짓말이었다고 말해야 해!
려한이가 너한테 실망하기 전에 어서 말해!
“좋아. 힘들다고 불평하기만 해봐.”
결국 난 스스로 무덤을 파고 말았다.
집에 도착해 정원에 씨앗을 뿌리는데 왕창 쏟는가 하면
나무를 거꾸로 심는 등 실수만 해댔다.
“다 심었으니 산으로 가볼까? 앞장 서.”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
산이라고는 아빠 따라 몇 번 갔던 동네 산뿐인데
거기라도 끌고 가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해야 하나?
려한의 떠밀림에 억지로 대문으로 걸어가고 있을 무렵
대문이 열리며 나언이와 새록이가 나타났다.
“왜 또 땡촌이 너희 집에 있는 거야?”
“그건 려한이한테 듣고, 넌 따라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갑자기 나언이 내 손을 잡더니 뛰기 시작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더 이상 뛰는 게 무리다 싶을 때 녀석이 멈춰 섰다.
땀범벅에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나와는 반대로 너무나 멀쩡한 해나언.
“흥분 되니까 그만 좀 헐떡거려.”
“변태.”
“누가 더 변태인지 잊은 모양이군.”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녀석을 쳐다봤다.
“어제 아침.”
녀석의 말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떠올랐다.
맞다! 사과해야 하는데 지금 할까?
“미안하고 고마워.”
“뭐가?”
“어제일 미안하고 지금일 고맙다고.”
려한이한테서 구해줬으니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해야지.
“근데 여긴 어디야?”
이사 온 동네가 낯선 탓도 있지만
무작정 녀석에게 끌려와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딘지 전혀 모르겠다.
아파트 단지 인건 확실히 알겠는데.
“아파트 이름 안 보여?”
“아니, 날 왜 여기까지 끌고 왔냐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날 여기까지 끌고 온 이유가 뭐야?”
너무 뛰어서 청력에 문제가 생겼나?
열심히 귀를 파고 있는데 나언이 아파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야! 어디가?”
“…….”
집으로 갈까 했지만 길도 모르고 또 지금 갔다가는
려한이가 다시 산으로 가자고 할 게 뻔했기에 서둘러 나언이를 따라갔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8층에서 내렸다.
801호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자 꽤 잘생긴 녀석이 문을 열고 나왔다.
“누구냐?”
녀석이 날 가리키며 물었다.
“려한이 시녀.”
“그 황제대횐지 뭔지 하는 그거? 정말 시녀처럼 생겼다.”
녀석과 나언이가 안으로 들어갔는데도 선뜻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나언이 나왔다.
“안 들어와?”
“그냥 집에 갈래.”
“날 여기까지 끌고 왔으면 같이 놀아야지.”
억지로 들어오게 된 집.
거실엔 네 녀석들이 텔레비전을 보며 구름과자를 열심히 먹어대고 있었다.
한 녀석은 나언이와 말썽을 일으키는 우리 학교 놈이었고,
세 녀석은 아까 문 열어 주었던 놈을 비롯해 처음 보는 놈들이었다.
“시녀~ 이리 와봐.”
문 열어주었던 꽤 생긴 놈이 날 불렀다.
도움의 눈길을 보냈지만 쌩까며 녀석들 옆으로 가 앉는 나언이.
나언이를 제외한 네 명의 시선이 내게로 쏠려 있었다.
“려한이 말만 듣는 시녀인가? 려한이 녀석 불러야겠네.”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누르는 녀석에게 뛰어가 인사했다.
“안녕? 만나서 반가워.”
“려한이 이름이 나오자마자 움직이는 걸 보니 제대로 교육시킨 모양이야.”
“그 자식 얼굴이 무기잖아. 그 얼굴에 맛 간 년들이 어디 한 둘이냐?”
물론 나도 아니라고 말할 수 없지만
난 녀석의 얼굴보다 마음에 먼저 반했었다.
“시녀면 뭐하는 존재야?”
“척하면 삼천리지. 황제가 원할 때마다 응해주는 게 시녀의 일이지. 안 그래, 시녀?”
“야, 시녀 얼굴 달아올랐다. 려한이 같은 선수면 이미 여러 번 넘어뜨렸겠는 걸?”
막말하는 녀석들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나언이 테이블 위에 널려있던 맥주 캔들을 집어 던지며 일어섰다.
“야, 너 왜 그래?”
“려한이 시녀다. 말 함부로 하지 마.”
“장난인거 알면서 왜 과민 반응이냐?”
“그럼 나 장난 싫어하는 거 알면서 일부로 한 거냐?”
분위기 왜 이래? 나 때문에 우정에 금가는 거 아니야?
“나언아, 나 괜찮아. 장난인 거 알고 있었어.”
“거봐. 쟤도 장난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잖아.”
어색한 분위기 속에 나언이에게 이끌려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 참 여러 번 끌려 다니는구나. 그것도 아주 질질-
똥 폼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폼을 잡으며 구름과자 잡수시고 계신 해나언씨.
그런데 우리 학교, 머리 길이 자유였던가?
그래, 자유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보다 더 길게 기르는 것도 허용되나?
왜 갑자기 나언이의 긴 머리가 눈에 들어오고 궁금증이 이는 걸까?
“해나언.”
살짝 떨린 목소리가 그대로 녀석에게 전달됐으리.
“너 오디션 좋아해?”
“관심 없어.”
“그 오디션 말고 만화책 오디션.”
녀석이 책상 위에 있는 재떨이에 담배를 끄며 날 바라봤다.
“그 만화책이 왜?”
“거기에 류미끼라는 머리 긴 녀석이 나오는데 혹시 그 머리 따라 한건 아닌지.”
싸늘한 눈빛에 말꼬리를 흐리며 대답했다.
갑자기 묶었던 머리를 풀더니 내게로 걸어오는 녀석.
평소 머리 긴 남자를 볼 때면 소름이 돋았는데
나언이는 잘 어울려서 인지 거부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
“만져봐.”
느닷없이 자신의 머리를 만져보라는 나언이의 말에 소름이 돋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만지기 시작했는데 분위기가 묘해졌다.
“이제 그만 만져도 되지?”
“느껴지는 거 없어?”
“그냥 머리카락 만지는 느낌인데.”
“기대한 내가 바보지. 됐다.”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뭔가 큰 잘못을 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와 닿았다.
“부드러워. 짱 부드러워.”
“늦었어.”
“근데 만화책 주인공이면 모를까 남자가 머리 기르는.”
서둘러 입을 막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집으로 오는 내내 미안하다고 노래를 불렀지만 겨울바람이 따로 없었다.
방 앞까지 따라왔지만 문 닫히는 소리만 쩌렁쩌렁 귀를 울렸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방에서 나온 화려한.
“허락도 없이 어딜 쏘다니다 오는 거야?”
“아, 배고프다. 밥 먹어야지.”
아침, 점심 굶었더니 배고프다 못해 위가 쓰려왔다.
려한이를 무시하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밥을 차리는데 어느새 식탁에 앉아 있는 녀석.
“나언이랑 구린 짓 하고 왔냐?”
주걱을 들고 있었는데 놀부 마누라처럼 녀석의 볼을 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할 일 없으면 가서 네 얼굴이나 봐.”
“말 돌리는 거 보니까 그런가보네. 시녀의 바람이라…….”
좋아하는 녀석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정말이지 두들겨 패고 싶다.
보아하니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밥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
무슨 말을 해도 무시하고 밥만 먹자!
씹지도 않고 그냥 삼키며 한순간에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웠다.
“위가 불쌍하다. 불쌍해. 주인 잘못 만나서 학대나 당하고.
자기 마음대로 주인을 바꿀 수도 없으니 완전 불쌍하네.”
그래, 그렇게 계속 혼자 떠들어라.
난 가서 모자란 잠을 보충 할 테니.
하지만 녀석에게 붙들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새 배웠냐? 난 씹어도 되지만 넌 안돼.”
“나 무지 무지 졸리거든? 할 말 있으면 이따 해라.”
“독재 정치가 가끔 실패하는 경우가 있으니 그렇게 하지.”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참.
그나저나 무지 졸리다. 가서 잠이나 자자.
오후 2시에 든 잠은 다음날 아침 6시에 끝이 났다.
너무 오래 잔 탓인지 온 몸이 쑤셔왔다.
하품을 하며 방을 나오는데 화장실에서 나오는 나언이와 딱 마주쳤다.
헌데 이상하다. 분명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일찍 일어났네?”
최대한 부드럽게 인사했지만 무시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녀석.
아직까지 삐쳐 있는 거야? 의외로 소심하네.
머리 긴 거 보고 이상하다고 한 게...
그래! 달라 보인 게 머리 때문이었어.
설마 내가 한 말 때문에 자른 건 아니겠지?
하지만 하루아침에 머릴 자를 이유가 없잖아!
이제 어떡하지? 말 뿐인 사과는 받아주지 않을 텐데.
가발이라도 주면서 사과해야 하나...?
처음 갖는 녀석들과의 아침 식사.
오렌지주스를 대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째려보는 려한이를 외면하며 나언이를 살폈다.
깔끔하기는 하나 전보다 더 반항아적인 끼가 넘쳐 보이는 것 같다.
“시녀 물!”
“냉장고에 있어.”
“제요 형, 목마르시죠?”
친한 척 오빠에게 말을 거는 화려한.
“응.”
“들었지? 두 분의 황제가 목마르시다. 얼른 대령해.”
오빠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젓가락을 놓고 쳐다봤다.
동생 말보다 안 지 며칠 안 되는 화려한의 말을 믿는다?
“오빠, 나 제순이야. 오빠가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동생.”
“알지. 근데 제순아, 오빠 진짜 목마르다.”
변했다. 왕제요가 변했다.
언제 어디서나 자기 자신보다 내가 우선이었는데.
가방을 들고 일어서 현관으로 걸어갔다.
“제순아, 양치질 안 해?”
분위기 파악 못하고 소리치는 오라버니.
그냥 나갈까 하다 더러운 애로 찍힐까 서둘러 대답하고 나왔다.
“학교 가서 할 거야!”
정말 평생 도움 안 되는 왕제요!!
내가 저런 인간을 믿고 따르다니!!
이제부터 왕 무시다!! 왕 무시할거야!!
교실로 들어서자 내 자리에 앉아있는 서예가 보였다.
중요한거라도 되는지 무언가를 열심히 만지작거리고 있다.
기분도 꿀꿀한데 놀라는 얼굴이나 구경하자.
조용조용 걸어가 서예의 뒤에 선 후, 귀에 대고 소리 지르려는 순간,
“어흥!!”
하고 소리치며 얼굴을 돌린 서예.
너무 놀란 나머지 딸꾹질이 시작됐다.
“안쓰러운 영혼이여, 가서 물 한 사발 들이 키고 오시죠.”
“물의 ㅁ자도 꺼내.. 딸꾹.”
“그럼 코 막고 침 한번 꿀꺽 삼켜.”
몇 번을 해도 멈추질 않아 정수기에 매달려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물을 마셨다.
“딸꾹... 딸꾹...”
역시나 소용없었다.
“친구 놀리지 말고 착하게 살라는 하늘의 뜻이다.”
“두고 보자. 딸꾹. 근데 그건 뭐야?”
정체 모를 자그마한 자주색 병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무슨 말이야?”
“냄새는 냄새로써 대응한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듯 싶다.
짝꿍 때문에 평소 쓰지 않는 머리를 이런 데에 쓰다니.
참서예, 너야말로 진정한 안쓰러운 영혼이다.
“제순아, 이거 내 몸에 왕창 뿌려줘.”
“무슨 향인데? 딸꾹.”
“몰라. 닥치는 대로 섞었어. 오순덕 냄새보다 낫겠지.”
망설일 것 없이 병에 든 액체를 서예 몸이 들이부었다.
서예 말대로 오순덕 보다 나았지만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강하고 또 오묘했다.
“오순덕! 기다려라!!”
주먹을 불끈 쥐며 자신의 자리로 가 앉는 서예.
10분 뒤면 1교시 시작인데 여전히 비어있는 두 녀석의 자리.
교실로 들어온 담임이 얼굴을 찡그리며 코를 막았다.
“이게 무슨 냄새야?”
모든 창문과 앞문, 뒷문을 다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예의 향기가 교실을 뒤덮었다.
코를 막은 채로 조회를 하던 담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교실을 뛰쳐나갔다.
종이 울리고 1교시가 시작됐다.
사마귀라는 별명을 가진 국사 선생님이 들어왔고
이내 들고 있던 막내기로 교탁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냄새 풍기는 놈 누구야!!”
반 아이들 시선이 일제히 서예와 오순덕에게 향했다.
“꼬질꼬질한 놈 일어서!”
선생님의 호령에 오순덕이 일어섰다.
“운동장으로 나가 냄새 빠질 때까지 뛴다! 실시!”
아무 말 없이 교실을 나가는 오순덕.
평소 자기에게서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아는 걸까?
수업이 시작되었고 10분 뒤,
신경질적으로 칠판을 두드리는 국사.
그도 그럴 것이 냄새의 주범이 여전히 현장에 있으니.
“꼬질꼬질 짝꿍도 나가 운동장 뛴다!!”
“선생님, 전 여자고 또 아직 날씨도 쌀쌀한데.”
“참서예, 빨리 나가~”
“그래! 양심이 있으면 나가!!”
참다 참다 못 참겠는지 반 아이들이 눈에 쌍심지를 켜며 소리쳤다.
얼마 뒤 서예와 오순덕이 사이좋게 들어왔다.
하지만 다시금 풍겨오는 냄새로 인해 교실에서 쫓겨났다.
“너희 둘, 수업 끝날 때까지 교실에 들어오지 마!!”
국사가 나가고 쉬는 시간이 되자 미친 듯 내게 달려드는 서예.
필통을 무기 삼아 가까이 오는 걸 저지시켰다.
“뭐야! 너마저 날 버리는 거야?”
“버릴 수밖에 없는 딸꾹 상황이잖아.”
빌어먹게도 딸꾹질은 계속되고 있었다.
“맞아! 딸꾹 체육복으로 갈아입어. 딸꾹 머리는 대충 물에 헹구고.”
“너보다 머리 좋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근데 나 체육복 없는데.”
“나도 없으니까 그런 딸꾹 눈으로 보지 마.”
“빌려야겠다!”
신나서 교실을 나가는 서예를 향해 혀를 찼다.
과연 냄새나는 네게 누가 체육복을 빌려줄까?
2교시 수업 종이 울리고 예상대로 빈손으로 돌아온 서예.
수학선생님마저 순덕이와 서예를 복도로 내쫓았다.
수학공식들과 꿈속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눈을 감으려 하는데 려한이와 나언이가 들어왔다.
“황제께서 이렇게 늦어서야 되겠나?”
수학선생님 답지 않게 인자한 인상을 가진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시녀가 자기만 살겠다고 먼저 가서요.”
“제순 시녀, 앞으론 황제를 잘 보필하세요.”
“크하하하하~”
엎드려 자고 있던 아이들까지 일어나 웃기 시작했다.
옆에 앉는 려한에게 주먹을 쥐어 보이며 말했다.
“죽을래? 딸꾹.”
“딸꾹은 효과음이냐?”
“지금까지 밥 먹은 건 딸꾹 아닐 테고.”
“딸꾹질 소리 듣기 싫으니까 입 다물어.”
딸꾹질 때문에 말하는 게 힘드니 입 다물지.
하지만 딸꾹질 멈추면 마구 떠들어 주마.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감았지만
계속되는 딸꾹질로 인해 오던 잠마저 달아났다.
딸꾹질아, 제발 좀 멈춰라!
“쾅-!!”
그때 뒤에 있던 나언이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나언아, 왜 그러니?”
수학 선생님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쥐새끼가 찍찍거려서요.”
“쥐새끼라니?”
“없어진 것 같으니 수업 하시죠.”
조심스레 고개를 돌리자 나언이와 눈이 마주쳤다.
서둘러 시선을 거두려는 그때 나언이의 입이 벙긋거렸다.
뭐라고 하는 거지?
시선을 집중해 녀석의 입 모양을 주시했다.
‘쥐새끼’
나언이 날 보며 쥐새끼라 말하고 있다.
혹시 아까 쥐새끼 어쩌고저쩌고 한 게 내 딸꾹질 소리 때문에?
그러고 보니 어느새 딸꾹질이 멈춰있었다.
이거 고마워해야 하나?
수업이 끝나고 체육복을 빌리러 가려는 순간 교장 목소리가 들려왔다.
“1학년 황제 화려한과 시녀 땡촌은 지금 즉시 교장실로 오길 바랍니다.”
망할 놈의 교장! 내 이름 알면서도 땡촌이라고 부르다니!
한 걸음에 달려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아직 방송실에서 돌아오지 않았는지 비어있는 교장실.
의자에 앉아 문이 열리고 교장 선생님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허나 3교시 수업종이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교장은 물론 려한이 마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려 보자하고 몇 십 분을 기다렸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일어나려는 찰나 교장과 려한이 다정히 동시 입장했다.
“교장선생님!”
참고 참았던 분노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무시당했고 두 사람은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계속 서 있을 참이냐? 앉아라.”
자리에 앉아 옆에 앉아 있는 교장선생님을 죽어라 째려봤다.
“허허, 계속 째려 볼 작정이냐?”
“네!”
“나중에 나 때문에 눈 찢어졌다고 원망하지는 말아라.”
“하나도 안 웃겨요.”
“왕제순, 그만해.”
조용하다 했다, 화려한.
하지만 이건 교장선생님과 나의 일이니까 참견 마.
“보셨죠? 도통 말을 듣지 않는다니까요.”
“그렇구나. 그럼 그 방법밖엔 없는 건가?”
둘이 무슨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두 사람.
직감적으로 안 좋은 말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교장선생님 말을 들어선 안돼! 어서 나가!
마음속에서 누군가 소리쳤지만 몸이 거부했다.
“제순아, 내신 점수 깎이는 걸 원치 않지?”
“당연하죠!”
“그럼 앞으로 려한이 말 무시하지 말거라.”
“그런 적 없어요.”
“만약 그런 얘기가 들려오면 그때마다 내신점수 1점씩 깎을 테니 그리 알아라.”
너무 어이가 없어 멍하니 교장선생님 얼굴을 바라봤다.
“학교의 모범이 되도록 노력해 주고, 이만 가 봐도 좋다.”
“저, 그만둘래요.”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다.
려한이와 친해지고 옆에 있을 수 있어 선택한 길이였지만
이런 식으로 밖에 지낼 수 없다면 사절이다.
“아니 제순아, 갑자기 왜 그러느냐?”
“핸드폰 여기 있습니다.”
핸드폰을 꺼내 탁자 위에 놓으며 일어섰다.
“진심이냐?”
“네.”
“욱하는 마음에 하는 소리라면”
“하기 싫다는 사람 붙잡지 마세요.”
내가 먼저 안하겠다고 했는데
왜 려한이 말에 섭섭해지고 야속하게 느껴지는 걸까?
“시녀 새로 뽑죠.”
화려한, 이 나쁜 자식!
그래! 어디 새로운 시녀랑 잘 먹고 잘 살아라!!
교장실을 나와 매점으로 향했다.
“1학년 시녀네? 지금 수업시간이잖아.”
“저 이제 시녀 아니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제일 큰 빵이랑 우유 주세요.”
“네 오빠가 제요라며? 근데 하나도 안 닮았다.”
어떻게 매점 아줌마가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냐고!!
“그 인간 역시 제 오빠 아니에요! 얼른 빵이랑 우유나 주세요!”
“그 날인가보네? 생리대는 안 필요해?”
안 먹어! 안 먹어!!
짜증지수 200%에 폭발하기 일보 직전.
늦기 전에 어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쳐야 한다.
아무도 없고 누구도 들을 수 없는 강당으로 달려가 있는 힘껏 소리쳤다.
“화려한 황제 좋아하시네!! 치사한 황제다!!”
후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무대를 가리고 있던 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귀신의 짓이 아니라면 누군가 무대 뒤에 있다는 뜻!
들키기 전에 도망가야 한다.
그러나 입구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멈춰!!”
선생님일까, 아님 땡땡이치는 질 안 좋은 놈일까?
내게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이라면 교장선생님이 시켰다고 말하고,
질 안 좋은 놈이면 뭐라고 해야 하나.
발소리가 멈추고 목소리의 정체가 등 뒤에 서 있다.
자포자기하고 돌아서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는 얼굴이다.
“화려한이 언제 치사한으로 바뀌었지?”
“농담이야! 농담! 근데 여기에서 뭐해?”
“잠자는데 네가 깨웠어. 어떻게 책임질래?”
화가 좀 풀린 것 같은데 다시 사과해 볼까?
“저기, 어제는 정말 미안했어. 절대 진심이 아니야.”
“잊었는데 다시 생각나려 하네?”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생각하지 마!
이야~ 오늘 날씨 정말 죽인다. 이런 날엔 수업 땡땡이치고 자는 게 최고야!”
정말 눈물나게 오버한다, 왕제순.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색해져만 가는 분위기.
“수업 끝나려면 15분 정도 남았는데 뭐하지? 뭐할까?”
어색함을 모면하려 혼잣말 한건데, 대답이 들려왔다.
“농구 어때?”
“농구?”
“농구 한 판 하자.”
나언이 손에 이끌려 체육관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수업하는 반이 없어 체육관은 비어있었다.
농구공을 들고 와서는 내 앞에서 요란하게 움직이는 해나언.
“나 농구 해 본적 없는데.”
“내가 골 넣으면 1점, 넌 3점.”
드리블을 하며 농구골대로 향하는 녀석을 뒤쫓아 손을 펼쳐 막았다.
“허수아비 놀이 하냐?”
“수비하잖아.”
“팔만 벌리고 서 있으면 어쩌냐. 몸을 움직여야지.”
“맞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대로 팔을 마구 흔들어댔다.
하지만 간단히 제치고 골대 밑으로 가 슛을 성공시킨 녀석.
구석으로 굴러가는 공을 집어와 바닥에 튕기며 골대로 향했다.
“왼손으로만 수비 할 테니 성공시켜봐.”
“후회하지 마.”
열심히 드리블을 하며 골대 가까이 다가갔다.
점프를 하며 슛을 하는데 너무 가벼운 두 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손에 있던 공이 나언이 손에 들어가 있었다.
막았지만 슛은 들어갔고, 공은 번번이 빼앗겼다.
더 이상 공 잡을 힘조차 남아 있질 않았다.
그대로 바닥에 누워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켜 나갔다.
잠시 후 나언이 내 옆으로 와 앉았다.
“21 대 0”
“21 대 3 아니야?”
“자책골. 내가 이겼으니 앞으로 넌 내 꼬봉이다.”
“그래.”
앞으로 난 나언이의 꼬봉... 뭐? 꼬봉?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지만 나언인 체육관을 나가고 없었다.
교실로 들어가자 새록이 녀석이 내 자리에 앉아 려한이와 장난을 치고 있었다.
걸어가 새록의 어깨를 살며시 두들기며 말했다.
“새록아, 그만 비켜줄래?”
“누가 친한 척 이름 부르라고 했냐, 촌년아?”
“그럼 나도 너처럼 별명 하나 지어서 부를까? 뭐가 좋을까?
그래! 오방 어때? 오방이 뭐냐고? 오도 방정의 줄임말이야.”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녀석.
“따라 나와.”
“할 말 있음 여기에서 해.”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라 볼 일이 있으니까 따라와.”
“볼 일은 화장실에서 봐야지. 잘 가.”
새록이를 밀쳐내며 의자에 앉으려는 찰나 녀석이 팔을 잡았다.
“강제로 끌고 가기 전에 따라와.”
“그만하고 네 교실로 돌아가, 산새록.”
화려한, 누가 너보고 도와달래?
“따라갈 테니 앞장 서.”
녀석을 따라 들어간 곳은 남자 화장실.
설마 볼 일 보는 거 보여주기 위해 오라고 한 건 아니겠지?
“남자 화장실 구경도 시켜주고 고마워.”
“야! 왕재수.”
“니은이 빠졌어. 수가 아니라 순이야.”
“어이가 아니라 아이의 재다. 그리고 더 이상 려한이 곁에서 얼쩡거리지 마.”
처음 본 순간부터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인 산새록.
내가 미움 살 짓이라도 했나? 먼저 날 놀려 가방 던진 일 밖에는 없는데.
“너 혹시 려한이 좋아해?”
장난으로 한 말인데 새록이의 얼굴이 심하게 달아올랐다.
“누..누가 누굴 좋아한다는 거야!!”
“얼굴은 달아오르고 말은 더듬고. 정말 좋아하는 거야?”
“너 자꾸 헛소리 할래?”
당황하는 모습 보이니까 놀리고 싶어진다.
“언제부터 좋아했어? 보아하니 아직 고백 안 한 것 같은데 언제 할 거야?
내가 도와줄까? 근데 네가 아무리 귀엽게 생겼어도 려한이가 너처럼 남자를 좋아할까?”
우당탕탕탕-
녀석이 옆에 있던 양동이를 걷어 찬 덕분에 귀가 멍멍해져 왔다.
“잘 들어. 려한이는 둘도 없는 친구야. 나언이도 마찬가지고.
우리 사이에 불청객, 특히 여자가 끼는 거 원치 않으니까 시녀 때려 치고 꺼져.
그리고 다시 한번 헛소리 지껄이면 혀 바닥 잘라버린다. 명심해.”
방금 장난이라 하더라도 말이 지나쳤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내가 너희 사이를 갈라놓는 불청객이라는 말은 이해가 안돼. 정말 이해 안돼.
점심시간 기지배들의 비명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등장한 오라버니.
“밥이나 먹으러 가지, 왜 왔어?”
“너희 올 때까지 기다리면 국 식어. 근데 나언이는 어디 갔어?”
“어머! 제요 오빠~”
오빠를 발견한 서예가 내 자리로 달려왔다.
“윽! 야, 냄새나니까 저리 가.”
쉬는 시간마다 이런저런 사건으로
체육복을 빌려다 주지 못해 여전히 냄새를 풍기고 있는 서예.
“서예야, 오늘은 밥 따로 먹어야 할 것 같다.”
“제순아, 나 지금 마음이 아파. 눈물 날 것 같아.”
“아니다! 너 오늘 급식 먹지 마. 매점 가서 빵 사먹어.”
내가 아직 의자에 앉아있었던 터라
나언이의 책상을 밀며 자리를 빠져나가는 화려한.
“려한아, 같이 가자.”
“남매 둘이 오순도순 맛있게 드십시오.”
화를 내며 싸운 것도 아닌데 녀석의 말에 기분이 나빠져 왔다.
“아침에 네가 남긴 밥까지 먹어 배 고프지 않은가?”
“누가 누구 밥을 먹었다고?”
“오빤 머리 나쁜 동생은 싫단다.”
“려한이가 내가 남긴 밥을 먹었다고?”
“딩동댕. 배고프니까 얼른 가자, 동생아.”
말도 안돼. 오빠도 내가 남긴 건 절대 먹지 않는데
려한이가 아이스크림도, 과자도 아닌 지저분하게 먹다 남긴 밥을 먹었다고?
오빠 말에 충격 받아 멍하니 서 있는 서예를 뒤로하고 급식소로 향했다.
점심을 먹고 간신히 오빠를 떼놓은 후 교실로 돌아가던 그때였다.
별로 착해 보이지 않는 5명의 걸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너 려한이 시녀 땡촌 맞지?”
“아니.”
“우리가 잡아먹기라도 할까봐 뻥 까는 거야?
걱정하지 마. 그냥 한마디 하려고 하는 것뿐이니까.”
“뭔데?”
“시녀 그만 둬.”
우려했던 일이 터졌지만 더 이상 난, 려한이 시녀가 아니다.
“너희가 듣고 싶어 하는 대답 해 줄 수 있어 기쁜 걸?”
“무슨 말이야?”
“두 시간 전에 교장선생님한테 그만둔다고 얘기했어. 려한이도 시녀 새로 뽑자고 말했고.”
“캬아악~ 시녀 새로 뽑는데!!”
서로를 부둥켜안고 기뻐하는 다섯 걸들.
내가 려한이랑 같이 사는 걸 알면 당장 죽이려고 달려들겠군.
“역시 넌 제요오빠 동생이야!”
“제요오빠가 동생 교육 하나는 잘 시켰다니까.”
내가 시녀 그만 둔거랑 오빠랑 무슨 상관인지.
“이제 그만 가 봐도 될까?”
“물론. 제요오빠한테 안부 전해줘.”
“만약 려한이 팬클럽에 들고 싶으면 1학년 11반으로 찾아와. 얘들아, 가자.”
쟤가 소문으로만 듣던 려한이 팬클럽 회장 나빠순이군.
“제순아.”
막 계단을 올라가려는 순간,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린....?!
얼굴의 황제(皇帝) 21 - 30
마음속으로 아니기를, 제발 아니기를 기도하며 돌아섰다.
그러나 부정의 존재는 너무도 당당히 내 앞에 서 있었다.
“아하하, 언니.”
“오랜만이다. 두 달 만인가?”
직접 마주 보며 얘기하는 건 두 달일지 모르지만
난 이 선배를 종종 봤으며 2주 전에도 봤다.
“점점 오빠를 닮아가는구나. 예뻐.”
“언니도 점점 밝아지시는 것 같아요.”
내가 이렇게 말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싸늘한 목소리만큼이나 얼굴은 죽은 사람마냥 창백하고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기운 또한 상당히 어둡고 음침하다.
“궁금한 게 있어서.”
“뭔데요?”
“어디로 이사 갔어?”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러니까 그게...”
“혹시 오빠가 내 존재에 대해 눈치 챘어? 그래서 이사 간 거야?”
내가 이 선배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고작 나이와 오빠를 좋아한다는 사실 뿐.
4년 동안 오빠 앞엔 절대 나타나지 않고 그저 뒤에서 조용히 지켜만 본다.
스토커마냥. 아니, 스토커가 맞겠지.
“사정이 생겨 이사했어요. 오빠는 언니에 대해 전혀 모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다행이다. 내가 알아 볼 수도 있지만 그러면 스토커 같아서.”
언니, 스토커 맞아요!!
“이사 한 집 주소 좀 가르쳐 줄래?”
솔직히 집 주변 또는 학교에서 눈을 번뜩이며 오빠를 몰래 지켜보는 걸 제외하면
피해 주는 게 없기에 지금까지 스토커 선배와의 이상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서 가는 길은 알아도 주소는 몰라요.”
“오늘 보충수업 안 할 건데 집에 같이 가자.”
“오빠랑 같이 갈지도 모르는데.”
“네가 자주 써 먹는 방법 있잖아. 햄버거 가게 앞에서 기다릴게.”
무슨 수를 써도 막을 수 없다는 걸 경험으로 잘 알기에 체념하고 돌아섰다.
교실에 도착하고 나서야 서예의 체육복이 생각났다.
하지만 5교시 시작 1분 전.
서예야, 오늘은 수업 받는 거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생각해보면 수업도 안 받고 얼마나 좋아. 안 그래?
나언에게 꼬봉에 대해 말해야 하는데 학교를 완전히 떴는지 가방까지 없다.
예상대로 서예랑 순덕이는 복도로 쫓겨났고, 려한이는 종례시간까지 퍼 잤다.
담임의 말이 다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교실을 빠져나와 교문을 향해 달렸다.
전교생을 통틀어 내가 제일 먼저 교문을 빠져나왔는데
순간이동이라도 했는지 먼저 도착해 있는 귀신보다 더 무서운 언니.
“힘들게 해서 미안해. 음료수 사줄까?”
“괜찮아요. 근데 언제 나왔어요?”
“종례 마치고. 제요 나타나기 전에 얼른 가자.”
아무 말 없이 가려니 어색해 미치겠다.
“우리 오빠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제요는 하늘에서 내려준 천사야.
누구도 소유할 수 없고 소유해서도 안 되는 천사.”
4년 동안 지켜봤으면 알만도 한데,
어떻게 천사라는 말이 나오지?
“오빠 방귀도 끼고, 트림도 하고, 똥도 싸는데.”
“분명 그 소린 아름답고, 냄새는 향기로울 거야.”
본전도 못 찾을 얘기 왜 꺼냈냐, 왕제순.
어느덧 집 근처까지 왔다.
“저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2층 집 나오는데 거기가 우리 집이에요.”
“두 사람이 살기엔 집이 좀 큰 것 같은데?”
“하숙생 두 명 있어요.”
“하숙도 해? 혹시 남은 방 있니?”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고, 아빠 친구 분 자식들이랑 같이 살아요.”
휴. 말 한번 잘못했다 큰일 날 뻔 했네.
“어? 제요 발소리다. 나 그만 갈게.”
내 귀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오빠 발소리라니?
역시 스토커는 스토커였다.
“왕제순~ 오늘도 오빠를 버리고 토꼈겠다?”
“갑자기 달리기가 하고 싶어져서. 오빠, 나 배고파.”
“호흡기도 안 좋은데 달리기를 했다고? 지렁이 탕 두 잔 마셔야겠다.”
“어머! 내가 달리기라고 했어? 달리기가 아니라 경보야.”
“경보도 호흡기에 안 좋아. 오빠 맘 아파서 눈물 나오려고 하니까 얼른 가서 마시자.”
누가 이 인간 좀 말려줘~
지렁이 탕, 두 잔 연속의 후유증으로 몇 시간을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깜빡 잠이 들었었는지 둔탁한 소리에 눈을 떴다.
‘탁-’
다시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자
베란다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앉아있는 나언이가 보였다.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운 나쁘면 죽는 거고, 운 좋으면 멀쩡하거나 팔이나 다리 하나 부러지겠지.”
“알면서도 계속 앉아있을 셈이야?”
“꼬봉아, 말 가려서 해라.”
지금 말하지 않으면 평생 나언이의 꼬봉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베란다로 나가 헛기침 한번 하고 꼬봉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나 꼬봉 안 해.”
“누구 맘대로?”
“내가 왜 네 꼬봉이 돼야 하는데?”
어느 정도 친해졌다 생각되었고 또,
소문만큼 나쁜 녀석이 아니라는 판단에 겁도 없이 대들었다.
“몇 번 상대해 줬더니 내가 만만한가 보네?”
가볍게 내 베란다로 넘어 온 녀석이 무서운 눈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뒷걸음질쳤지만 더 이상 도망 갈 공간이 없었다.
“나언아, 장난이야. 장난 한 거야.”
“꼬봉의 장난이니 한번 봐주지. 앞으로 어떤 꼬봉이 될 생각인지 말해봐.”
“친구 같은 꼬봉 어때? 참 좋을 것 같은데.”
“나랑 맞먹겠다고? 꼬봉 정신 교육에 들어가야 하나~”
왕제순, 이 바보 멍청이야!
농구는 왜 해가지고 이 지경까지 오게 만들어!!
“알았어! 그냥 꼬봉 할게. 말 잘 듣는 꼬봉! 됐지?”
“말 잘 듣는 꼬봉은 재미없으니까 가끔 반항도 해.”
“너무 고마워서 눈물 날 것 같은데 꼬봉 울어도 돼?”
“질질 짜면 죽여 버려. 특히 딴 놈 앞에서 울면 그땐 작살나.”
순간 나언이의 목소리가 떨린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거겠지?
“나 들어가서 자도 되지?”
“일일이 대답하게 만들지 마.”
완전 잘나셨어.
네가 분명 말 잘 듣는 꼬봉은 싫다고 했어!
매일 매일 반항할 거야!!
“야, 왕 꼬봉.”
녀석의 부름에 몸을 돌리자
어느새 자신의 베란다로 가 있는 해나언.
“왜?”
“뭐가?”
“불렀잖아.”
“내가 언제?”
꼬봉 인내심 테스트 하는 거 일수도 있으니까 참자.
헌데 그 순간 달빛으로 반짝이는 나언이의 머리가 눈에 박혔다.
나오면 안 되는데 궁금증이 참질 못하고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머리 왜 잘랐어?”
“분명 잊었다고 말한 것 같은데?”
“하지만 내가 한 말 때문에 자른...”
“알았으면 앞으로 꼬봉 역할에 충실해라.”
butterfly effect. 나비효과.
나비의 날갯짓과 같은 작은 변화가 증폭되어 폭풍우가 된다는 이론.
곧 작은 변화가 결과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경우를 말한다.
평소의 아침과는 사뭇 다르다.
해가 더 쨍쨍하고 밝다고나 할까?
시계로 눈을 돌리자 시침은 8시, 분침은 35분을 막 지나가고 있었다.
“오빠~!!!”
오빠를 부르며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우유를 마시고 있는 나언이와 마주쳤다.
“오빠는?”
“지금이 몇 신데 아직까지 집에 있냐?
그나저나 려한이한테 들었지만 정말 자다 일어난 몰골은 못 봐주겠다.”
“날 깨우지도 않고 혼자 갔단 말이야? 말도 안돼!”
“그럼 열심히 뛰어와라.”
현관으로 걸어가는 녀석을 뒤쫓아 가방을 잡고 늘어졌다.
“기다려 달라거나, 같이 가자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꼬봉을 버리는 건 아니겠지?”
“내 가방이 들고 싶은 모양인데, 허락하지.”
가방을 벗어던지고는 냉정하게 집을 나가는 녀석.
치사한보다 더 치사한 자식아!
꼬봉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는 게 어디 있냐!
잠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대충 씻고, 교복도 입는 둥 마는 둥 하며
나언의 가방까지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흔들어가며 뛰어가던 중이였다.
슈퍼 앞에 쪼그리고 앉아 개랑 놀고 있는 나언이가 보였다.
내가 다가가자 갑자기 미친 듯 짖기 시작하는 잡견.
“워월월월!!”
그러나 나언이의 손길 한번에 온순한 양이 되었다.
“사람 차별하는 거야, 뭐야.”
“질투 하냐?”
“똥개한테 미쳤다고 질투를 해? 살다보니 별 소릴 다 들어보네.”
“그 말투 귀에 거슬린다.”
“그럼 앞으로 꼬박 꼬박 존댓말 할까?”
나언이의 눈동자와 마주치고 나서야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오, 마이 갓~!!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한 거야?
“아니야! 지금 한 말 농담이야, 농담. 재미없는 농담.”
“나도 꼬봉한테 존댓말 같은 거 듣기 싫으니까 안심해.”
말 한번 잘못했다가 하마터면 존댓말 쓸 뻔 했네.
“자-”
가방을 내밀었지만 못 본 척 자리에서 일어서 걸어가는 녀석.
“가방 안 들어?”
“꼬봉이 괜히 있는 줄 알아? 아끼는 가방이니까 잘 들고 와.”
말해봤자 씨도 안 먹히고, 배만 고프니 입 닥치고 가자.
요동치는 배를 진정시켜 가며 녀석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런데 뭐가 들었길래 이렇게 무거운 거지?
교과서는 죄다 학교에 있어 교과서가 들어있을 리는 없는데.
“가방 열어.”
“뭐라고?”
“내 가방 열라고.”
궁금했는데 기회가 왔다.
가방을 열자 온갖 먹을거리가 들어 있었다.
음료수부터 시작해서 과자, 빵, 초콜릿, 소시지, 심지어 당근까지.
“혹시 위에 구멍 났어?”
녀석의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
“먹어.”
“먹으라니? 뭘?”
“짜증나게 자꾸 못 들은 척 할래?”
그래. 분명 정확히 들었다.
하지만 해나언이 할 대사가 아닌 것 같아 다시 물은 거다.
“나중에 돈 내 놓으라고 하는 건 아니지?”
“가방 닫아.”
“에이~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잘 먹을게.”
녀석의 가방을 앞으로 매고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배가 불러 먹는 걸 멈추자 가방 속엔 당근과 담배 각 하나만이 덩그라니 남았다.
“안 되겠다. 돈 내놔.”
“뭐야! 돈 내 놓으라는 소리 안 한다면서?”
“난 가방 닫으라는 소리 밖에 안 했다.
그리고 몇 명이서 먹어도 남을 양을 네가 다 먹어치웠는데 양심도 없어?”
내가 봐도 심했다.
어떻게 그 많은 걸 순식간에 먹어 치울 수 있는지.
“너무 배가 고파서.”
“꼬봉이니까 10% DC 해서 22,500원.”
“이게 무슨 22,500원이야? 만원도 안 되잖아!”
“초콜릿 박힌 비스킷 수입과자라 무지 비싸.”
어쩐지 심하게 맛있다 했더니만.
한달 용돈이 3만원 밖에 안 하는데 이걸 어쩌나.
“네가 시키는 건 뭐든지 할 테니까 안 받으면 안 될까?”
“어차피 꼬봉이라 내가 시키는 건 뭐든지 해야 한다는 거 잊었냐?”
“나, 돈 없어! 몸으로 때울 거니까 그렇게 알아.”
“훗- 접수하지.”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는 게 심히 불안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설마 개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겠어?
뛰어도 안 될 판에 먹을 거 먹고, 할 말 하며
느긋하게 오니 2교시 수업이 시작 되고 있었다.
선생님께 한소리 듣고 걸음을 옮기던 난,
그 자리에서 멈춰 내 자리를 바라봤다.
비어있어야 할 내 자리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선생님의 따가운 눈총에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와보니 나언의 책상 옆에 내 책상이 붙어 있다.
나언이를 따라 자리에 앉아 려한이와
내 자리에 앉아있는 여자아이를 쳐다봤다.
누구지? 누굴까? 누군데 내 자리에 앉아 있는 거지?
교과서를 꺼내며 작은 목소리로 나언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얘 누군지 몰라?”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녀석이
갑자기 손을 들어 보이며 선생님을 불렀다.
“선생님~”
“왜?”
모든 시선이 우리 쪽으로 쏠렸다.
려한이와 내 자리에 앉아있는 정체 모를 여자아이만 제외하고.
“제순이가 앞에 있는 애가 누구냐고 물어보는데
전 도통 누군지 모르겠거든요? 아시면 대답 좀 해주실래요?”
그제 서야 고개를 돌리는 려한이.
쪽팔려! 쪽팔려! 꼬봉을 공개적으로 망신 줘도 되는 거야, 해나언?
“너희는 늦게 와서 모르겠구나. 소리야, 네가 직접 소개할래?”
설마 윤소리는 아니겠지?
소리라는 아이가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뒤이어 눈에 들어와 박힌 얼굴, 설마 하던 윤소리였다.
“안녕? 려한이의 새로운 시녀 윤소리야. 다시 같은 반이 되어 정말 반가워.”
중학교 시절, 오빠에게 채인 분풀이를 내게 하기 시작해 원수가 되어버린 존재.
사사건건 내가 하는 일에 간섭해 방해하는가 하면,
잘난 얼굴로 내가 좋아하던 녀석들을 낚아 채 가기 일쑤였다.
고등학교 올라와 같이 반이 되지 않은 건 물론,
눈에 띄지 않아 살만 했는데 잔잔히 흐르던 피가 들끓기 시작했다.
“태성여고 간다더니 왜 여기로 왔어? 아직도 우리 오빠 잊지 못했니?”
“어머! 그게 무슨 말이야?”
“기억 안 나? 너 우리 오빠 좋다고 죽자 살자 쫓아 다녔잖아.”
“거기 둘! 수다는 쉬는 시간에 하도록.”
선생님의 개입으로 우리의 첫 번째 대결은 일단락되었다.
새로운 시녀라고?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절대로 안 되지.
이번만큼은, 려한이 만큼은 안 뺏겨!! 죽어도 너 안 줘!!
쉬는 시간, 려한이의 어깨를 살며시 두드렸다.
녀석이 뒤돌았고 난 따라오라는 손짓을 해보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나 책상에 얼굴을 파묻는 녀석.
무시 하겠다? 지조 지키지 못하고 새로운 시녀 뽑은 주제에!!
녀석의 교복을 한 움큼 움켜쥐고 마구 흔들었다.
“쾅!!”
책상을 내리치며 일어선 려한이 날 마구 째려봤다.
“눈 찢어지겠어.”
“간땡이 부었냐?”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으니 부었는지 안 부었는지 모르지.”
이 놈의 주둥이가 멋대로 움직인다.
“그럼 갈라서 확인해 볼까?”
“할 말 있어.”
“전 시녀이기도 하니 들어주지. 해봐.”
“여기에선 곤란해. 따라와.”
안 따라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잘 따라오고 있다.
적당한 장소가 나오지 않아 계속 걷고 있는데
녀석의 불평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까지 갈 셈이야?”
그때 비어있는 음악실이 눈에 들어왔으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커튼이 처져있어 무지 어두웠다.
“이런 음침한 곳으로 날 끌고 온 이유는?”
“말했잖아. 할 말 있다고.”
“덮칠 생각 같은 건 안 하는 게 좋아.”
말 나온 김에 확 덮치고 책임지라고 난리 쳐?!
“할 말이란 게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윤소리 말이야!”
흥분한 나머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어이없어 하는 려한이의 표정을 보라.
“네가 상관 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전 시녀로써 알아야 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짓는 녀석.
설마 진짜 의도를 눈치 챈 건 아니겠지?
“윤소리가 우리 학년 퀸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고.”
나도 오빠처럼 태어났으면 윤소리 같은 건
퀸이라는 소리 죽어도 못 들었을 텐데!!
“퀸과 황제의 만남은 당연한 거니까 촌년은 그만 퇴장해라.”
웃는 얼굴로 협박 비슷하게 한 려한이 음악실을 나갔다.
쪽팔려서 다시 시녀 하겠다고 말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윤소리가 려한이 옆에 있는 꼴은 죽어도 못 보겠고!!
하늘이시여, 어찌 저를 시험에 들게 하십니까.
한참을 망연자실 음악실에 있다 교실로 돌아왔다.
점심시간, 급식소로 향하는 길에 서예에게 물었다.
“붓글씨~ 아침에 공개적으로 시녀 뽑았어?”
“아니, 담임이랑 같이 들어오더니 이제부터 지가 려한이 시녀라나 뭐라나~
정말 꼴 보기 싫어 죽을 뻔 했어! 어떻게 된 거야? 왜 윤소리가 려한이 시녀가 된 거야?”
“안 하겠다고 했어.”
그래서 지금 죽어라 후회하고 있지.
“왜!! 왜 안 하겠다고 한 거야!!”
흥분해서는 내 등을 마구 후려갈기는 서예.
“아파!! 그만 때려!!”
“혹시 나 때문이야?”
이것이 또 무슨 헛소리를 하나 지켜보기로 했다.
“아무리 려한이가 나 대신 널 뽑았어도 그렇지! 그게 그렇게 자존심 상하디?
덕분에 시녀 자리 윤소리한테 넘어가고 아주 꼴좋다~”
역시나 나의 기대를 져 버리지 않는구나, 친구야.
“이대로 있을 거야? 나 윤소리 설치고 다니는 꼴 절대 못 봐!! 내가 2년 전
일만 생각하면 치가 떨려! 감히 나의 로미오님을 흠모하는 것도 모자라 탐하려 하다니!!”
“그 부분에 대해선 너도 할 말이 없을 텐데?”
“걘 일방적인 사랑이지만, 난 아니야! 너도 오빠가 날 귀여워한다는 거 알잖아.”
상처 받아 의욕을 잃은 채로 사는 것보단
이렇게 착각하며 사는 게 서예 삶에 도움이 될 거야. 이렇게 살게 냅두자.
와글와글. 입구부터 시끄럽고 복잡한 급식소.
밥 한번 먹으려고 이게 뭔 고생인지.
도시락 금지한 것도 아닌데 내일부터 도시락 싸와야겠다.
“왕제순, 어떻게 해서든 다시 시녀 해. 내 눈치 보지 말고.”
“완전 고맙다.”
어렵게 밥을 타고 빈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려한이와 윤소리가 주위의 시선을 받으며 앉아 있는 모습이 포착됐다.
마침 둘 옆자리도 비어 있겠다, 그곳으로 가 앉으며 능청스레 말했다.
“자리가 여기 밖에 없네~”
“시력이 많이 안 좋은가 보네? 우리 뒤쪽에도, 옆쪽에도 빈자리 있는데.”
“난 이 자리가 아니면 밥이 안 넘어가서. 서예야, 앉아.”
윤소리의 옆자리였기에 오만상을 구기며 자리에 앉는 서예.
서예가 앉음과 동시에 려한이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려한아, 아직 다 안 먹었잖아.”
친한 척 려한이에게 말 거는 윤소리야,
널 잘근잘근 씹어 먹고 싶어지는구나.
“밥 맛 떨어지는 게 옆에 앉아서 더는 못 먹겠다.”
“나도 갑자기 입맛이 없네? 려한아, 우리 매점 갈래? 짝 된 기념으로 한 턱 쏠게.”
그렇게 둘은 밥 먹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정히 내 앞에서 사라졌다.
“아우~ 백년 먹은 불 여시 같은 것!! 야!! 걱정하지 마. 내가 려한이한테 말해줄게.
내 부탁이면 들어주고도 남을 테니까. 윤소리, 여시 짓 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밥 맛 떨어지는 게 옆에 앉아서 더는 못 먹겠다고?
화려한, 꼭 그렇게까지 말해야 했어?
그렇게까지 말 할 정도로 내가 싫은 거야?
시녀 그만 두겠다고 한 게 그렇게 큰 잘못이니?
너,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는 속담 알아?
처음에는 촌스럽다는 말로, 지금은 밥 맛 떨어진다는 말로
날 두 번이나 죽인 거, 화려한 너 알아?
네겐 아무렇지 않고 아무 의미 없는 말이겠지만
내겐 독이든 돌이야. 그것도 아주 강한.
앞에 있는 빌어먹을 커플을 보지 않기 위해 엎드려 연습장 위에 낙서를 했다.
반대편 쪽을 바라보며 엎드려 자고 있던 나언이 내게로 얼굴을 돌렸다.
감고 있던 눈이 떠지고 마주쳤다.
낙서하는 소리가 좀 컸기에 사과를 했다.
“미안. 안 할 테니까 자.”
헌데 내가 든 펜을 빼앗아 가더니 연습장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난 슬픈 얼굴 하라고 한 적 없다.’
꽤 또박또박하고 예쁜 글씨체.
분명 직접 쓰는 걸 봤는데도
누가 써준 건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럼 꼬봉 어떤 얼굴로 있을까?’
‘바보처럼 실실거려.’
‘그럴까? 히히히~’
쓴 글에 맞춰 소리 없어 바보처럼 웃어보였다.
‘누가 미친년처럼 웃으랬냐.’
‘바보처럼 웃은 건데.’
‘눈 버렸다. 자련다.’
나언이 얼굴을 돌리는 순간,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캬아아아아악~!!!!!”
이 엄청난 비명소리의 주인공,
나의 하나뿐인 친구이자 웬수덩어리인 서예였다.
그런데 소리 지른 것까지도 모자라 교실을 뛰쳐나간다.
선생님도, 반 아이들도, 나도 그저 멍하니 서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오빠한테 버림받는 꿈이라도 꿨나?
“지금 뛰쳐나간 애 이름 대봐.”
“참서예요.”
대답을 듣곤 교탁으로 걸어가 펜을 잡는 선생님.
서예야, 너 점수 깎였어.
아무래도 대학은 우리오빠 못 따라갈 듯 싶구나.
종례가 끝나고 교실이 텅텅 빌 때까지도 서예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웬수탱이!! 너 죽을 줄 알아!!”
신경질적으로 서예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왔다.
가방은 또 어찌나 무겁던지,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마구 일어났다.
집 근처에 도착해 집으로 가는 대신 공중전화로 향했다.
핸드폰을 받지 않아 집으로 하자 남동생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너희 누나 좀 바꿔줄래?”
“누구야?”
동생아, 누군지도 모르면서 왜 반말이니.
설마 나라는 걸 눈치 챈 건 아니지?
“누나 친구야.”
“혹시 놀려 먹는 재미가 있는 왕순대?”
녀석들에게 난 왕순대로 통한다.
“그게 누군데? 아니야~ 얼른 누나 바꿔줘.”
“누굴 속이려고? 요즘 왜 안 놀러와? 심심하니까 놀러와.”
“호호호~ 초대 고마워. 근데 나 정말 왕순대 아닌데.”
“지랄. 그럼 이번 주에 오는 걸로 알고 끊는다.”
철컥.
전화기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야!!!”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질 않는다.
빌어먹을.
서예보다 더 웬수같은 것들아! 어서 전화 받아!!
그러나 몇 번을 다시 해도 신호만 들려왔다.
포기하고 돌아서는데 생긋생긋 웃으며 앞에 서 있는 쌍둥이들.
“왔으면 들어오지, 사람 귀찮게 왜 전화질이야?”
초등학교 1학년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말이나 행동들이 거친 쌍둥이.
아무래도 한 성격 하시는 서예 어머니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다.
“얘들아, 안녕?”
“인사는 됐고, 오늘은 뭐 사왔어?”
도망가야 해.
집으로 끌려가기 전에 도망가야 해.
“이거 너희 누나 가방이야! 그럼 나중에 보자~”
가방을 던지다 시피 하고 미친 듯이 달렸다.
쫓아오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앞만 보며 죽어라 달려 집에 도착했다.
“헉, 헉..”
참서예, 너 내일 동생들 몫까지 배로 두들겨 팰 거니까 알아서 해.
집으로 들어가자 목마른 걸 어떻게 알았는지 오빠가 컵을 내민다.
“왜 이렇게 땀을 흘려? 스무 마리 가지고는 안 되겠네.”
“이번엔 뭐야?”
“여자한테 좋은 거야. 어서 먹어.”
“이 정체모를 뻘건 액체가 뭔 줄 알고?”
“여자한테 좋다니까~ 설마 오빠가 동생한테 이상한 거 먹일까.”
저번에 지렁이 먹였잖아!!
“말 안 해주면 안 먹어.”
“석류랑 요구르트 섞은 거야. 석류가 여자한테 좋다고 해서 오는 길에 사 왔어.”
“진짜 석류랑 요구르트만 들어간 거지?”
“오빠 눈물날라 그래.”
지렁이도 먹었는데 뭔들 못 먹겠냐!
또 울고불고 난리치기 전에 먹어 치우자.
헌데 진짜 석류랑 요구르트가 맞는지
입으로 컵을 가져오자 요구르트 냄새가 났다.
맛 또한 지금까지 먹은 주스 중에서 제일 맛있다.
“맛있다.”
“앞으로 새로운 주스 많이 만들어 줄 테니 기대해.”
“오늘처럼만 만들면 맛있게 먹어줄게.”
“그 말은 즉, 지금까지 먹었던 건 맛이 없었다는 뜻?”
“아니! 다른 것도 다 맛있었는데 오늘 주스가 제일 맛있다는 뜻이야.”
만족스런 얼굴로 돌아서는 오빠의 뒷모습을 보자니 잊고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잠깐, 왕제요씨.”
“왜? 한잔 더 줘?”
“오늘 아침, 동생 내 팽겨 치고 가셨더라구요.”
“려한이가 너 곤히 잔다고 깨우지 말자고 하 길래.”
이번에도 려한이 말에 넘어간 거야?
17년을 살아 온 동생보다 5일 산 려한이 말을 더 신뢰한다고?
밀려오는 배신감에 날 부르는 오빠를 무시하고 2층으로 올라왔다.
려한의 방 앞에 서 문을 부시다시피하며 열고 들어갔다.
어딜 가려는지 꽤 빼 입은 티가 났다.
멋있다. 그냥 교복만 입어도 멋진데 사복 입으니까 더 멋있잖아!
역시 내가 찜한 남자는 뭘 입어도 멋져~
“나가. 그리고 내가 있건, 말건 내 방에 멋대로 들어오지 마.”
저 재수 없는 주둥이만 어떻게 하면 참 좋을 텐데.
“약속 있나봐?”
“소리랑 만나기로 했거든.”
“시녀가 예뻐서 좋겠다? 끌고 다녀도 쪽팔리지 않고 말이야.”
“내가 너랑 다닐 때 얼마나 쪽팔렸는지 이제야 알겠냐?”
차라리 그냥 몰래 좋아하면서 몰래 바라볼 때가 훨씬 좋은 것 같다.
아무리 곁에 있고, 얘기 나누면 뭐해! 말 하나, 하나에 상처만 받는 걸.
“그동안 같이 다녀줘서 정말 고맙다, 얼굴만 잘난 화려한아.”
“알았으면 됐어. 할 말 끝났으면 내 방에서 나가.”
“앞으로 우리 오빠한테 꼬리치지 마! 네가 아무리 꼬리쳐도 오빠는 나 밖에 없어.”
“너 브라더 콤플렉스냐?”
가끔 오빠가 시스터 콤플렉스 아니냐는 말은 들어봤어도
날 보고 브라더 콤플렉스라고 하는 건 처음이다.
“어딜 보고 내가 브라더 콤플렉스라는 거야?”
“너 오빠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잖아. 툭하면 오빠나 찾고. 아니야?”
내가 그랬었나?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부모님은 항상 바쁘셨고, 지금도 아빤 내 곁에 없으니까.
“오빠는 내게 부모님과 같은 존재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 함부로 하지 마.”
“그래! 나 아무것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까 앞으로 서로 상관하지 말자고.”
이게 아닌데. 이러려고 들어온 게 아닌데.
내 스스로가 려한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차갑게 내 옆을 지나 방을 나가는 화려한.
윤소리 같이 예쁜 애가 시녀 되서 좋다잖아.
지금도 만나러 간다잖아. 네가 싫다잖아. 서로 상관하지 말자잖아.
시녀자리 포기하고 더 이상 려한이 귀찮게 하지 말자, 왕제순.
나언이와 오빠와의 저녁 식사는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왜 내 눈치 봐? 내가 밥 먹지 말라고 했어?”
계속해서 내 눈치를 보는 두 사람의 시선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제순아, 아픈 건 아니지? 오빠가 약 사올까?”
“안 아파! 오빠가 내 부모야? 왜 사사건건 내 일에 참견이야?
그리고 애들이 오빠보고 뭐라고 하는 줄 알기나 해?”
“쫙-!!”
얼얼하면서도 후끈거리는 뺨을 감싸며 녀석을 노려봤다.
“더 죽일 듯 노려봐야 상대가 쫄지. 그 정도 가지고는 안돼.”
“왜 때려!! 네가 뭔데 때려!! 아빠도, 오빠도 안 때리는 뺨을 네가 왜 때리냐고!!”
“교육을 안 시켰더니 완전 엉망이잖아? 따라와.”
“놔! 이거 안 놔? 나 네 꼬봉도 안 하고, 려한이 시녀도 안 할 거야!!”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바닥에 주저앉자 번쩍 안아 올리는 해나언.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날 바닥에 내 팽겨 치고는 방문을 굳게 걸어 잠근다.
“나언아!!”
오빠가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형, 저 믿죠?”
“그래. 너 믿는다.”
“언제 봤다고 믿어? 빨리 보조키 가져와서 문 열어! 이 바보 오빠야!”
“나언아, 내가 너무 오냐오냐 했나봐. 제순이 버릇 좀 고쳐줘.”
오빠가 변해가고 있다. 아니, 변했다.
녀석들과 같이 살고부터 내가 알던 왕제요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다.
나언이 걸어올 때마다 뒷걸음질 쳤지만 이윽고 벽과 맞닿은 등.
아까 그 당당하던 왕제순은 어디로 갔는지 나언이의 시선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내게 달려드는가 싶더니 창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가는 녀석.
나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나와.”
분위기를 보아하니 때릴 것 같진 않다.
베란다로 나가 녀석과 최대한 떨어진 곳에 앉아 밑을 쳐다봤다.
“려한이가 그렇게 좋냐?”
너무 놀란 나머지 벌떡 일어서 녀석을 쳐다봤다.
“대답 한번 빠르네.”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리고 그게 무슨 말이야?”
“너도 얼굴에 반했냐? 하긴, 그 자식 얼굴 하나는 잘났지.”
“누가 누굴 좋아한다는 거야!!”
누구에게도, 설사 일기장에도 려한이를 좋아한다 말한 적 없는데
어째서 려한이도 그렇고 나언이까지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거지?
“꼬봉의 사랑이라. 대장이 도와줘야 하나?”
“해나언!!”
“계속 그런 반응 보이면 대장 섭섭할지도 몰라.”
“아니야! 안 좋아해! 누가 그딴 놈을 좋아해!!”
요즘 살짝 미운 털이 박혔지만 그래도 녀석이 좋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나만의 비밀이다. 내 소중한 감정이다.
“려한이, 저번에 본 친구들 만나러 간 거니까 걱정 마.”
“누가 걱정한데? 걱정 안 해!”
“그 자식,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맘에도 없는 말 잘 하니까 아까 한 말들도 잊어 버려.”
궁금하지만 감히 물을 수 없는 나언이와 려한이의 관계.
어찌되었건 넌 려한이의 친구이자 가족이니까 려한이에 대해 잘 알겠지?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려한이 편이고 말이야.
“왜 자꾸 그 녀석 얘기 하는지 모르겠다.”
“려한이는 려한이고, 네 오빠는 네 오빠다. 오빠에게 괜한 화풀이 하지 마.
다시 한번 그딴 식으로 오빠에게 버릇없이 굴면 꼬봉이라해도 용서 안 해.”
녀석 말이 사실 이였기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시녀 자리 다시 찾아, 꼬봉.”
“적응 안 되게 왜 내 일에 관심 갖는 거야?”
“내 꼬봉이니까.”
이상하다. 기분이 이상해지려 한다.
“꼬봉이 아파서 누워 있으면?”
“일어 날 때까지 팰 거야.”
“에? 아픈 사람을?”
“약해빠진 꼬봉은 재미없어. 오늘 반항 한번 했으니 당분간 조용히 지내라.”
조금 가까워지나 했더니 다시 거리를 두는 녀석.
“다시 한번 말하는데 시녀 자리 되찾아.”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느니 안 해. 그냥 윤소리랑 잘 먹고 잘 살라고 해.”
“남자는 자기 좋다는 여자 거부하지 않는데 걔한테 뺏기고 싶음 가만히 있던가.”
“지조 없는 자식! 설마 려한이 여자 보는 눈도 없는 건 아니겠지?”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덕분에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만 꺼져.”
목소리를 듣자하니 우리 대장, 기분이 영 아니다.
잘못 걸려 얻어터지기 전에 꺼지자.
방을 나와 오빠를 찾아갔다.
“나 오빠가 만들어 준 건강 주스 먹고 싶어.”
“어떤 거 만들어 줄까?”
“오빠 마음대로.”
이게 내 사과 방식이다.
잠시 후, 내 앞에 누런 액체가 들어있는 컵이 놓여졌다.
“처음 보는 건데 재료가 뭔지 물어봐도 될까?”
“배, 마늘, 생강, 파 밑 둥”
“어디에 좋은 건데?”
“감기. 지금부터 대비하지 않으면 여름부터 콜록댈 게 뻔해.”
색은 봐줄만한데 냄새가 코를 찌르다 못해 후벼 파며 들어왔다.
단숨에 들이 킨 것 까지는 좋았다.
“으~ 써.”
입을 열자마자 후각을 혹사시키는 냄새가 퍼져 나왔다.
“왕제순, 말하지 마!”
오빠가 코를 막은 채로 두어 걸음 뒷걸음질치며 말했다.
욕실로 뛰어가 치약 한 통을 다 써가며
칫솔을 바삐 움직였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어느새 난 마늘, 생강과 한 몸이 되어 있었다.
만약 이 냄새가 내일 아침에도 사라지지 않는다면
서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취급은 받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향기로운 아침이 아닐 수 없었다.
냄새가 떠나지 않은 관계로 식탁에서 쫓겨난 건 물론
항상 나랑 같이 등교하기 위해 기를 쓰던 오빠마저 날 버려둔 채 학교로 갔다.
오빠가 주위 사람들을 생각해서 챙겨 준 분홍색 키티 마스크를 쓰고 집을 나섰다.
유치원 꼬마서부터 40대 아줌마, 아저씨까지 날 이리저리 훑으며 지나갔다.
심지어 초등학생들은 분홍마스크 귀신이라고 소리치며 내 뒤를 쫓아오기까지 했다.
왕제요, 이 웬수야!!
왜 가지고 있는 마스크가 죄다 분홍색 밖에 없냐고!!
교실에 도착하자 또 한명의 웬수가 눈에 들어왔다.
달려가 서예의 뒷목을 움켜잡았다.
“켁! 사람 살려~”
“너 때문에 하마터면 쌍둥이들한테 당할 뻔 했어!”
“당할 뻔 했지, 안 당했잖아.”
“어제 왜 토꼈어?”
마침 순덕이가 자리에 없어 마음 놓고 물었다.
“손놓으면 얘기해 줄게.”
손을 놓자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서예.
“풉~ 푸하하. 그 유치찬란한 마스크는 뭐냐?”
“너의 로미오껀데 많이 유치찬란해?”
“농담이야. 감기 걸렸어?”
마스크 쓴 채로 계속 얘기하다가는 내가 질식해 죽겠다.
마스크를 벗으며 대답했다.
“아니.”
“욱! 야!! 너 마늘 공장 갔다 왔어?
아님 양치질 안 한 거야? 어우, 냄새~ 저리 가!”
그때 일을 복수하려는지 꽤 세게 나온다.
도망가지 못하게 서예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친구한테 저리가라니. 너 내 새언니 되고 싶지 않아?”
“그래도 인간적으로 너무 심하잖아.”
“그보다 어제 왜 미친년처럼 소리 지르고 토꼈는지 얘기해.”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떠는 서예.
“쉬 마렵냐?”
“어제 일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아.”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그러니까 수업시간에 순덕이가 날 쿡쿡 찌르는 거야. 무시했지.
계속해서 내 이름 부르면서 귀찮게 굴잖아. 너처럼 냄새나는 입으로 말이야!”
감히 순덕이 냄새와 내 냄새를 동급 취급해?
목 조르기에 들어갔다.
“제순아!!”
“아직도 내 입에서 마늘 냄새나?”
“안 나! 하나도 안 나!!”
“얘기 계속 해.”
시뻘개 진 목을 보자니 살짝 미안해져 왔다.
“그래서 쳐다보니까 자기 친구를 소개시켜 준다고 하면서 가방을 막 뒤지더라?
그리고는 웃으면서 갑자기 손바닥을 확 내미는 거야! 근데 글쎄 손바닥 위에 그게, 그게!!”
“뭔데? 손바닥에 뭐가 있었는데?”
“그거 있잖아. 쭈글쭈글한데 털은 없고 만지면 기분 더러워지는 거!!”
“지렁이?”
갑자기 녀석 손바닥에 있었을 지렁이를 생각하자 소름이 돋았다.
“아니! 하얀색인데 꿈틀거리기도 해.
으~ 그만 얘기 할래. 그게 꼭 내 몸을 기어 다니는 것만 같아.”
“서예야, 안녕? 근데 지금 내 친구 쭈구리 얘기 하는 거야?”
언제 왔는지 자리에 앉으며 묻는 순덕이.
상당한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요상한 냄새가 얼굴을 덮어왔다.
“제순아, 쭈구리 보여줄까?”
“괜찮아. 서예한테나 많이 보여줘.”
“왕제순!! 너, 나 좀 봐!!”
하필 화장실로 올게 뭐람!
오늘 아주 이 냄새, 저 냄새에 취하는구나.
“나 담임한테 말할 거야.”
“너 정신상태 안 좋은 거? 담임도 알걸?”
“자리 바꿔 달라고. 만약 안 바꿔주면
반 바꿔 달라고 할 거고 그것도 안 된다고 하면 전학 갈 거야.”
장난으로 받아들이기엔 서예의 표정이 심각했다.
“친구 버리고 가겠다고?”
“집도 가깝고 매일 만나면 되잖아.”
“우리 오빠는?”
친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버리더니, 오빠는 도저히 못 버리겠냐?
에이! 나도 너 필요 없으니까 전학 가버려!!
“미쳤나봐~ 내가 제요 오빠를 버리고 전학을 가다니! 말도 안돼! 나 전학 안 가.”
“왜 한 입 가지고 두 말 해? 전학 가~”
“나의 하나뿐인 친구가 뭐 때문에 삐졌을까~요.”
“나 밥상에서 쫓겨나서 아침 못 먹었어.”
“배고프겠다. 내가 사달라는 거 다 사줄 테니까 매점가자.”
한달 용돈 다 날아갔다며 울고불고 난리 치는 서예를 뒤로 하고 교실로 왔다.
냄새가 완전히 가신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 했다.
자리에 앉자 앞에 있던 윤소리가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어머! 이게 무슨 냄새야?”
냄새의 정체를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얼굴 쪽으로 바람을 불어줬다.
“윽! 너 양치질 안 하고 학교 오면 어떡하니?”
“내가 좀 더러워. 냄새나도 이해해.”
만약 려한이가 냄새의 정체가 주스 때문이란 걸
모르고 있었다면 결코 저런 말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려한아, 그동안 힘들었겠다.”
“냄새는 둘째 치고 엉망인 얼굴 데리고 다니느라 졸라 쪽팔렸지.”
미안하지만 화려한, 네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이젠 아무렇지 않아.
왜냐고? 우리 대장이 네가 하는 말은 진심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럼 려한아, 난? 나도 쪽팔려?”
“저 촌년이랑 비교하는 자체가 우습지 않아?”
“그건 그래. 시녀가 나 정도는..”
“아, 씹. 그거 되게 말 많네.”
엎드려 자고 있던 나언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찍소리 못하고 공부하는 척 자세 잡는 윤소리.
이렇게 통쾌 할 수가!! 대장, 고마워!!
다시 엎드리는 통에 고맙다는 눈빛을 보낼 수 없었지만 마음으로 전달됐으리.
하루 종일 룰라랄라.
나언이가 냄새나니까 입 닥치라고 소리쳐도 랄라룰루.
하지만 교문을 나서는 순간, 흥은 깨지고 말았다.
“왕순대!!!”
나와 서예를 향해 뛰어오는 쌍둥이 녀석들.
서예는 좋다고 난리를 쳤고, 난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녀석들에게 조금이라도 틈을 보여선 안 된다.
“벼루야! 먹아! 누나 학교엔 어쩐 일이야? 꺄아악~ 누나가 보고 싶어서 왔구나!”
그렇다. 벼루와 먹이 저것들의 이름이다.
서예가이신 서예 할아버지가 직접 지으신 이름.
“왕순대, 안녕?”
“어제도 보고 오늘도 보니까 무지 반갑다, 얘들아.”
“달리기 잘 하던데?”
“하하, 원래 못하는데 어제 삘을 좀 받았나봐.”
인사한 애가 먹이고, 얘가 벼루인가?
아님 인사한 애가 벼루고, 달리기 하자는 녀석이 먹인가?
아~ 둘이 키는 물론 머리 모양, 눈동자 색깔, 목소리,
심지어 옷 까지 똑같이 입어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
“누나가 맛있는 거 사줄 테니 가자. 참! 제순이한테 다 털렸지?”
서둘러 서예 입을 막았지만
쌍둥이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왕순대, 나 배고파.”
“나도 배고파. 왕순대 사줘.”
“저기, 오늘은 누나가 바빠서 그러는데 다음에 사줄게.”
녀석들,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누나라는 사람이 동생들 굶기기나 하고~”
“1학년 9반 왕제순이 저희 누나랍니다. 혹시 저희 누나”
“벼루야! 먹아! 순대 먹고 싶다고? 가자! 가!!”
“떡볶이랑 김밥이랑 만두는?”
젠장. 내 한달 용돈이 날아가는구나.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대답했다.
“다 사줄게.”
“오랜만에 우는 연기 했더니 배고프네.”
“난 어지러워. 왕순대, 달리기는 잘 봤으니까 얌전히 따라와.”
저것들은 악마야! 악마!!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동생들이라면
눈이 뒤집어지는 서예였기에 감히 함부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녀석들한테 덤벼봤자 나 왕제순, 질게 뻔하다.
지금까지 덤벼서 이겨본 적이 있던가? 없다.
세상이 두 쪽 나도 녀석들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녀석들을 따라 도착한 곳은 집 앞 분식점.
이거 어째 집까지 끌려갈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온다.
“아줌마, 순대 3인분, 떡볶이 2인분, 참치랑 치즈 김밥 각각 한 줄.”
“그리고 만두 2인분 주세요.”
이것들아, 그걸 누가 다 먹는다고 시키는 거야!!
순대 1500원, 떡볶이 2000원, 김밥 2500원, 만두 2000원.
그걸 곱하고, 더하면.... 흐어억!! 17500원!!
맙소사! 용돈 받은 지 일주일 밖에 안 됐는데...
“쌍둥이들, 누나들이 맛있는 거 사주나봐?”
“왕순대 누나가 저희가 너무 귀엽다고 사주고 싶대요.”
“왕순대 누나? 누가 왕순대 누나니?”
“제 앞에 있는 누나요. 좀 덜 떨어져 보이긴 해도 착하고 순진해요.”
부모님이나 사람들 앞에선 철저히 가면을 쓰는 녀석들.
녀석들에게 난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는 존재요, 살아 움직이는 장난감이다.
“안녕하세요.”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줌마에게 인사 했다.
“귀엽게 생겨서 쌍둥이들이 잘 따르나봐? 옆에 있는 친구는 쌍둥이들 누나?”
“네~ 동생들이 여기 순대가 맛있다고 해서 왔는데 맛있게 해 주세요.”
“우리 집만큼 순대 맛있게 하는 집도 없지. 조금만 기다려~”
쌍둥이들에게 세뇌당해서인지 순대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날 부르는 듯한 착각이 든다.
잠시 후 보기만 해도 배가 터질 것 같은 음식들이 놓여졌다.
두 녀석, 순대만 먹어치우고는 젓가락을 놓는다.
“벼루야, 먹아. 설마 배불러서 젓가락 놓은 거 아니지?”
“그럼 더 먹으려고 젓가락 놓겠어?”
“왕순대도 다 먹었지? 집에 가서 할 일 있으니까 얼른 가자.”
“음식 남기면 벌 받아. 그러니까 이거 다 먹자꾸나.”
하지만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의자에서 일어선다.
녀석들 눈을 피해 서예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야!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왜 꼬집어!!”
“어머머~ 내가 언제 꼬집었다고 그래? 많이 먹어.”
참서예, 너 지금 매점 일 복수하는 거지?
이것아! 넌 돈 뜯기는 걸로만 끝났지만
난 네 동생들한테 몸도 뜯기게 생겼어!!
“서예누나, 더 먹을 거야?”
이 녀석들, 자기 누나한테는 무지 잘한다.
“더 먹고 갈 테니까 제순이랑 먼저 가 있어.”
“아니야! 나도 더 먹을래. 너희들 먼저 가.”
“참 먹, 왕순대가 상했나봐? 어떻게 해야 할까?”
“두들겨 패야지. 하지만 터지면 곤란하니까 살짝 주물러주는 정도만 해야겠다.”
애초부터 내겐 선택권이 없었다.
쌍둥이들에게 끌려 가게를 나가는 순간, 날 부르는 서예.
“제순아.”
드디어 네가 날 살리는구나!
“왜? 나의 하나뿐인 친구 서예야.”
“그냥 가면 어떡해. 돈 주고 가야지.”
그럼 그렇지! 잠깐이나마 기대했던 내가 바보였다.
한 달 만에 다시 찾은 서예네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옳고 바르게’ 라는 가훈이 보인다.
서예 할아버님, 아버님.
참 씨 집안 아이들은 절대 옳고 바르지 않습니다.
부탁인데, 제발 옳고 바르게 키워주세요!!
텔레비전 앞으로 간 녀석들이 오라고 손짓했다.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긴장하며 천천히 걸어갔다.
“이거 한번 해봐.”
먹인지, 벼루 녀석 인지 텔레비전을 가리킨다.
텔레비전으로 눈을 돌리자 한 여인네가 열심히 요가를 하고 있었다.
“나보고 지금 요가를 하라고?”
“응. 바로 이 동작!”
녹화 해둔 건지 화면을 정지 시키는 녀석.
요가의 요 자도 모를뿐더러 몸 또한 막대기처럼 뻣뻣한 게 나다.
그런 내게 몸을 완전히 뒤집는 저 동작을 하라고?!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빠져나갈 방법이 생각나질 않는다.
“뭐해? 저런 동작이 진짜 되는 지 궁금하니까 얼른 해봐.”
“그렇게 궁금하면 너희가 직접 해보지 그러니?”
“남자가 요가 하는 거 봤어?”
요가를 즐겨보거나 많이 본건 아니지만
남자가 하는 건 한번도 본적이 없다.
“다른 동작도 해야 하니까 얼른 해!”
“저기 얘들아, 누나 치마 입어서 곤란한데.”
녀석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서예의 체육복 바지를 내민다.
오늘로써 내 허리랑 안녕이구나. 그동안 고마웠다, 허리야.
부디 다음 생에선 몸이 유연한 주인 몸에서 태어나거라.
체육복을 입고 녀석들이 친절하게 틀어주는 요가를 보며 자세를 잡았다.
한참을 낑낑거리는데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서예와 서예 어머니가 들어왔다.
“왕제순, 너 지금 뭐해?”
보면 몰라? 빌어먹을 네 동생들한테 당하고 있잖아!
몸을 일으켜 어머니께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그동안 왜 안 왔어? 우리 쌍둥이들이 너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지금이 기회야. 서둘러!
체육복 바지를 벗어 던지고 현관 쪽으로 달려가 신발을 신었다.
“어머니, 저 가볼게요!”
“왜? 저녁 먹고 가.”
“그럼 오빠 혼자 밥 먹어야 돼서요. 안녕히 계세요.”
“내일 토요일이니까 놀러와~”
쌍둥이들아,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가 다시는! 다시는 오나봐라.
오늘처럼 학교 앞에서 기다려도, 울면서 연기해도 안 와! 죽어도 안 와!!!
다음날,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집을 나갔다는 녀석들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학교에 없었다.
서예에게 복수 할 계획을 짜고 있는 그때, 새록이 녀석이 나타났다.
“땡촌, 이제야 네 주제를 알았구나.”
“뭐냐? 웬 친한 척?”
“못 올라갈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아야지. 암 그렇고 말고~”
헛소리 하는 거 보니 또 정신병이 도진 모양이다.
“깝치고 다니더니 쌤통이다. 너 같은 게 려한이랑 어울리기나 하냐?
생각만 해도 울렁거린다. 네 주제 알았으면 앞으로 얌전히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
못 참아!! 아니 안 참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녀석에게 소리쳤다.
“산새록 넌! 넌 려한이 좋아하는 주제에!!”
웅성거리는 소리들 속에 뒷문에 서 있는 려한이와 눈이 마주쳤다.
려한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조금씩 작아졌다.
가방을 자리에 던지고는 내 앞에 선 화려한.
“방금 한 말, 다시 한번 해봐.”
고개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말해보라고!!”
“…….”
“무슨 말 했는지 기억 안 나? 내가 대신 말해줄까?”
“새록이가 먼저 시작했단 말이야!”
“내가 뭘 먼저 시작해? 장난도 구분 못하냐? 그리고 내가 누굴 좋아한다고?”
야, 왕제순! 눈물은 슬플 때 흘리는 거야!
지금은 안 슬프니까 안 흘려도 돼! 울지 않아도 된다고!
“새록이 넌 가만히 있어. 왕제순, 왜 그딴 헛소리를 했는지 말해봐.”
씨발. 그렇게 울지 말라고 했는데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저번에 새록이가 려한이 너한테서 꺼지라고 해서 그랬다!
너 좋아하냐는 질문에 말 더듬고 얼굴 붉혀서 너 좋아하는 줄 알고 헛소리 했다! 됐냐?”
왠지 그곳에 가면 날 위로해 줄 누군가가 있을 것 같아 달려갔지만 텅 비어있다.
왕제순, 왜 여기에 나언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냐? 나언이랑 언제부터 친했다고.
바닥에 누워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우는 날 보고 당황해 하던 려한이 얼굴이 떠올랐다.
척, 척, 척, 척-
이때 체육관을 울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언이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어섰으나 눈에 들어온 건 새록이였다.
녀석, 내 앞에 털썩 주저앉더니 손수건을 던진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 다리에 떨어진 손수건을 바라보는데,
“뭘 보고만 앉아있어? 닦아!”
날 찾아온 것도 놀랄 일인데 손수건을 주며 눈물을 닦으란다.
손수건을 집어 들고 이미 말라버린 눈물을 닦았다.
“그때 그런 행동을 보였던 건 네 말대로 려한이를 좋아해서야.
하지만 친구로서 좋아하는 거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절대!”
“흠, 흠! 누가 뭐랬나.”
“소문 이상하게 나면 죽을 줄 알아.”
지금 새록이는 내게 사과를 하러 왔고, 사과를 하고 있다.
“장난이었으니까 애들도 장난으로 받아들일 거야.”
“한 순간에 사람을 게이로 만들었는데 장난?”
“너도 장난! 나도 장난! 아무튼 소문나지 않게 할 테니 걱정 마.”
“이딴 게 뭐가 좋다고 그러는지. 눈이 삐었어.”
“뭘 좋아해서 삐었다고?”
고개를 가로젓던 녀석이 일어서 출구로 걸음을 옮겼다.
“산새록! 그거 내 욕이지? 그치?”
“인정한 건 아니야. 앞으로 지켜볼 거야.”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야! 기다려!!”
녀석을 뒤쫓아 가며 소리쳤다.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입 싸다고 소문 난
은애라는 아이의 핸드폰 번호를 입수해 문자를 보냈다.
물론 서예 폰으로 번호 없이.
담임이 나가자마자 들어온 새록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야, 땡촌! 네 짓이지? 네가 퍼트린 거지?”
역시 입 한번 제대로 싸네.
“애들 듣겠다. 조용히 말해.”
“내가 지금 조용히 말하게 생겼어? 내가 널 좋아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게이보다 낫잖아. 네 생각해서 한 일인데 너무 하네.”
“으아아악!!!!”
상태를 보아하니 거품 물고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다.
려한이 새록이를 끌고 나가며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는 게 보였다.
“새록이 말고 려한이가 좋아한다고 소문내지 그랬니?
소문내봤자 믿을 사람 하나도 없겠지만. 오늘 려한이랑 데이트나 할까?”
엉덩이를 살살 흔들어가며 나가는 윤소리.
려한이가 미쳤다고 너 같은 여시랑 데이트 하냐!
월요일부터 시녀 자리 되찾기에 돌입할 거니까 각오해.
아직까지 자고 있는 나언이를 깨웠다.
“나언아, 수업 끝났어. 집에 가야지.”
얼굴에 난 단추 구멍 자국하며, 한 가닥 삐져나온 머리카락 한 올.
“풉-”
“일어나자마자 기분 드럽게 왜 웃어?”
대답 대신 거울을 꺼내 얼굴에 갖다 댔다.
“저리 치워.”
“거울 봐봐.”
“집어 던지기 전에 치워.”
꼬봉한테는 좀 친절하면 안 되냐.
나중에 꼬봉이 섭섭해서 떠나면 어쩌려고.
“제순아, 안 가?”
나언이의 눈치를 살피며 말하는 서예.
가방을 매고 일어서 나언에게 물었다.
“집에 갈 거지? 같이 가자.”
가방은 또 어따 팔아먹었는지 몸만 챙긴 녀석이 교실을 나갔다.
“야! 쟤랑 같이 가겠다고?”
“응. 왜?”
“왜라니! 너 언제부터 나언이랑 친했다고 같이 간다는 거야?”
“나름대로 친해졌어. 야, 서둘러. 나언이 벌써 건물 빠져나갔겠다.”
“나랑 갈 건지, 걔랑 갈 건지 결정해.”
참서예,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당연히 나언이랑 같이 가지~ 툭하면 배신 때리는 너랑 내가 왜 같이 가?
서예의 욕설을 뒤로하고 달렸다.
죽어라 달려 교문을 통과하는 나언이와 만날 수 있었다.
“같이 가자니까.”
“꼬봉이 알아서 따라와야지.”
“그런가? 근데 가방은 어디 있어?”
“네가 또 거덜낼까봐 안 가지고 다닌다.”
창피하게 또 그때 일을 꺼낼게 뭐람.
할 말이 없어진 난 조용히 나언의 옆을 걸었다.
“시녀 자리 찾기는 어떻게 돼 가고 있어?”
“월요일부터 하려고 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고백해.”
“고백하라니?”
“려한이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하라고.”
고백하라는 말을 들었을 뿐인데 심장이 뛰어댔다.
“안 좋아한다니까.”
“대장한테는 거짓말 안 해도 돼.”
하지만 려한이한테 먼저 말하고 싶어.
나언이 네가 아닌 려한이한테 제일 처음 말하고 싶어.
“빨리 해라. 빨리 해서 그만 끝내게 해라.”
“뭘 빨리하고 뭘 끝내?”
“꼬봉한테 하는 말 아니야.”
나언아, 너 지금 무지 슬퍼 보이는 거 알아?
내가 내 마음 말하지 않았으니 너도 나한테 네 마음 말하지 않겠지?
하지만 나언아, 우리 언젠가는
대장한테 마음 여는 꼬봉 되고, 꼬봉한테 마음 여는 대장 되자.
도착한 집엔 오빠는 물론 려한이와 새록이까지 있었다.
날 보면 달려들 줄 알았던 새록이 어째 조용하다.
“산새록.”
“간신히 참고 있으니까 말 걸지 마.”
“나 용서해 주는 거야?”
“사람 인내심 테스트 하지 마라.”
려한이 때문인지, 아님 용서해 주기로 맘먹은 건지
꾸역꾸역 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새록이랑도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으니까
앞으로 시녀 자리 되찾고 려한이랑 잘되는 일만 남았다.
월요일아, 빨리 돌아와라.
너무 너무 지루하고 심심한 일요일 오후.
두 녀석은 점심을 먹자마자 집을 나갔고,
오빠는 대청소를 한다며 아까부터 열심히 걸레질을 하고 있다.
“오빠야~”
소파에서 누워 뒹굴 거리던 난,
허리를 두드리며 잠시 쉬고 있는 오빠를 불렀다.
“심심해?”
“응. 너무 너무 심심해. 심심해 미칠 것 같아.”
“계단만 닦으면 되니까 기다려.”
계단만 닦으면 된다는 사람이 한참이 지났는데도 보이질 않는다.
몸을 일으켜 찾으러 가려는 순간, 익숙한 노란색 볼을 들고 오는 오빠.
“팩 할 시간입니다~”
“저번에 했는데 뭘 또 해!”
“일주일이나 지났어. 그리고 봄 자외선이 얼마나 무서운 지 알아? 어서 누워.”
축축한 게 얼굴 위에 있으면 기분 더러운데.
그래서 정말 정말 팩 하기 싫은데.
얼굴 위에 눈, 코, 입이 뚫린 거즈가 올려지고
거무죽죽한 액체가 얼굴을 덮어왔다.
“무슨 팩이야?”
“또 오빠 의심한다.”
“무슨 팩인지는 알아야지.”
“그냥 닥치는 대로 섞었어. 난 천연재료 아니면
바로 반응이 나타나는데 제순이 넌 뭘 바르든 트러블이 안 나더라.”
동생이 못 나서 참 좋겠어요, 왕제요씨.
자기 올 때까지 절대 움직이지 말라며 신신당부 하는 오빠.
“도둑이 들어도 절대 움직이지 않을게. 됐지?”
“야, 야. 말하지 마. 팩 한 거 망가지잖아.”
곧 죽어도 동생보다는 자신이 만든 팩이 더 중요하지!
진짜 도둑 들어오면 꼼짝도 안 할 테니 두고 봐!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며 있는데 현관문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 누군지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오빠가 나가는 소리가 아니면 려한이와 나언이 들어오는 소리일 것이다.
내 쪽으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려한이 날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너도 여자는 여자구나. 근데 얼굴 가리니까 훨씬 낫다.”
지금 무지 추할 텐데 이 인간은 왜 안 오는 거야~
“팩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꽤 재미있는 상황이네.”
뭔가 일을 저지를 것 같은 저 표정!
녀석이 불길한 표정을 지으며 점점 다가왔다.
얼른 녀석을 밀어내고 도망가라고 외쳤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려한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눈 떴을 때 려한이의 얼굴과 마주하지 않기를 비는 그때, 무언가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는 걸 느끼고 눈을 떴다.
하지만 녀석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입으로 손을 가져가 입술을 만져보았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려한이가 미쳤다고 나한테 뽀뽀를 하냐고!!
그럼 입술에 닿았던 건 뭐지? 손? 얼굴? 말랑한 젤리?
아씨! 뽀뽀를 해봤어야 그 느낌을 알지!! 물어볼까? 하지만 뭐라고?
나한테 뽀뽀했냐고? 만약 그렇게 물었다가 아니라고 하면 어떡하지?
다행히 려한이랑 마주치지 않았지만 밤새도록 고민한 끝에
퉁퉁 부운 눈으로 월요일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
진실을 알고 있는 려한이만이 날 보며 마음껏 웃었다.
“운 것 같지는 않고, 뭐 때문에 눈이 부었을까.”
태도를 보아하니 장난친 거구나, 화려한. 에이! 좋다 말았네.
잠시라도 려한이 입술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게 부끄럽기 까지 했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교장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앉아있는 교장선생님.
“눈이 많이 부었구나. 무슨 일 때문에 울었니?”
“이게 울어서 부운 눈으로 보이세요? 안 울었어요!”
“그래, 그래.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아침부터 날 찾아온 거지?”
안하겠다고 당당히 나갔으면서 지금 와서 다시 하겠다고 하면 비웃으려나?
하지만 려한이 옆에 있어야 할 사람은 나야! 나만이 려한이 시녀가 될 수 있어!
“뭔데 그리 뜸을 들이지?”
“시녀 다시 할래요.”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는지 말해줄 수 있겠니?”
“황제도 한번 뽑으면 그만이듯, 시녀도 한번 뽑으면 그만이잖아요!”
할 말이 없었기에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했다.
“황제는 너희들이 뽑지만, 시녀는 황제가 뽑는다.”
“알고 있어요.”
“잊지 않았다니 다행이구나. 알고 있듯 시녀는 황제가 뽑는다.
다시 말해 려한이가 다시 널 선택하지 않는 한 넌 시녀가 될 수 없단다.”
교장실을 나와 힘없이 걸어가는데,
“야! 너 어떻게 된 거야?”
“뭐야! 뭐야! 왜 윤소리가 려한이 시녀가 된 거냐고!”
“반까지 바꿔서 려한이 옆에 앉는다며!!”
전혀 모르는 아이들이 날 붙잡아 세우더니 따지기 시작했다.
“저기, 난 너희들 모르는데.”
“지금 그게 문제야? 너 왜 시녀 그만둔 거야? 말해봐!”
“차라리 네가 낫지. 윤소리 그건 언제 려한이를 꼬실지 모른다고!!”
내가 윤소리한테 딸리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들보다 내가 훨씬 더 괜찮게 생겼단 말이다!!
“그냥 안하겠다고 했어. 가도 되지?”
“네가 뭐가 잘났다고 안하겠다고 한건데!”
“그러게. 뭐 때문에 안하겠다고 한 거야? 응?”
안 그래도 그나마 있던 희망이 사라져서 우울해 죽겠는데 이것들이!
“그 자식이 재수 없어서 그랬다! 윤소리가 그렇게 꼴 보기 싫으면 대모라도 하던가!”
교실로 오자마자 눈에 띈 건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려한이와 윤소리.
확 엎어버리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신경질적으로 자리에 앉자 나언이 째려본다.
앞에 있는 것들이 짜증나는데 그럼 어쩌라고!
“윤소리, 오늘은 더 예쁜 것 같다.”
“아잉, 려한이도 참~ 네가 그런 말 하니까 가슴이 두근거리잖아.”
내가 시녀였을 땐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더니 윤소리한테는 뭐? 오늘은 더 예뻐?
정말 이렇게 차별해도 되는 거야? 그것도 내가 보는 앞에서?
1교시를 5분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으아아아악~!!!!!”
소름까지 돋게 만드는 이 괴성, 서예의 짝 순덕이었다.
아주 짝끼리 돌아가면서 쌩쇼를 하는구나.
순덕이의 괴성에 놀랐는지 서예가 내 자리로 달려왔다.
“제순아, 나 무서워.”
“네 짝 왜 저래? 어제 스크림 이라도 봤데?”
“나도 몰라. 화장실 간다면서 갔다가 와서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잖아.
나 쟤 옆에 못 앉겠어. 아니, 안 앉아! 나 수업 안 들을래.”
눈물까지 흘려대는 서예를 보자니 마음이 약해진다.
연습장에 글을 써 나언에게 내밀었다.
영어 선생님이 들어옴과 동시에 답장이 왔다.
‘한번뿐이다.’
고마워, 대장!
일어서 서예를 내 자리에 앉히고 서예 자리로 갔다.
뭘 하는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훌쩍거리는 순덕이.
“거기, 누구 자리지?”
선생님이 순덕이 자리를 가리켰다.
“지금 연필을 떨어뜨려서 줍고 있어요. 야, 오순덕. 빨리 자리에 앉아.”
“제순아, 우리 쭈구리가.. 우리 쭈구리가...”
쭈구리라 하면 서예가 말한 그 징그러운 거?
“쭈구리가 뭐?”
녀석의 손을 따라 몸을 숙이자
시퍼런 액체와 함께 죽어있는, 아니 터져있는 누에가 보였다.
왜 그때 서예가 소리를 지르고 뛰쳐나갔는지 이해가 된다.
“우선 자리에 앉아! 선생님이 자꾸 쳐다보잖아.”
다행히 자리에 앉았지만
냄새가 본격적으로 내 코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서예야, 너 어떻게 이 냄새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던 거니?
나 2학년 때도 얘랑 같은 반이면 전학 간다!
그땐 오빠도 없으니 내 맘대로 할 수 있을 거야.
“쭈구리.. 내 쭈구리..”
앉아서도 넋 나간 사람마냥 쭈구리를 찾는 녀석.
조용히 하라고 다그쳤지만 녀석은 계속해서 쭈구리를 찾았다.
“순덕아, 쭈구리가 죽어서 슬픈 건 알겠는데 우리 수업하자. 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란 말이야.”
“그래, 그래. 하지만 쭈구리는 네가 이러는 거 원치 않을 거야.
자기 때문에 순덕이 네가 슬퍼하는 거 알면 맘 아플 거라고.”
이게 뭐냐고~
내가 왜 누에 때문에 이런 정신 나간 소릴 해야 하냔 말이야~
내 말이 먹혔는지 눈물을 닦으며 씩 웃는 녀석.
정신 나갔어. 정신 나간 게 분명해!!
“근데 왜 서예랑 자리 바꾼 거야?”
순덕아, 제발 얼굴 좀 들이밀고 말하지 말아줘. 나, 올라올 것 같아.
녀석의 입을 막기 위해 노트에 글을 써 보여줬다.
‘서예가 뒷자리에 앉고 싶다고 그래서.’
글로 썼으니 글로 답장을 할 거라 기대했지만,
“뒷자리가 뭐가 좋다고. 다음 시간에는 다시 원래대로 바꾸는 거지?”
이 빌어먹을 자식아! 왜 입으로 말하는 건데!
내가 노트에 글로 적었으면 너도 노트에 글로 적어야지!!
고개를 끄덕이고 수업에 집중하는 척 선생님을 쳐다봤다.
“있잖아. 서예는 어떤 꽃 좋아해?”
봄 바람마냥 살랑 살랑 불어오는 순덕이의 입 냄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입을 틀어막아야 한다!
“선생님이 자꾸 쳐다보잖아. 할 말 있으면 공책에 써.”
“조용히 말하면 괜찮아. 서예 무슨 꽃 좋아해?”
내가 그런 세세한 것 까지 어떻게 알겠어, 이 정신 나간 놈아!!
“꽃 안 좋아해.”
“그럼 생일이랑 혈액형은?”
가만, 왜 서예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 거지?
설마 서예를 좋아하는 건?!
“혹시 서예 좋아해?”
“어떻게 알았어? 하지만 서예한테는 비밀이야. 알았지?”
순간 소름이 쫙 하고 돋았다.
서예야, 너 이제 어떡하니? 너 이제 어쩌면 좋니?
네 짝꿍이 너 좋대. 순덕이가 너 좋아한대. 우리 서예 불쌍해서 어떡해.
“왜 대답이 없어? 서예한테 말 할 생각이야?”
“아..아니. 말 안 해. 근데 언제부터 좋아했어?”
“같이 앉은 순간부터. 나한테 땍땍거리는 게 너무 매력적이야.”
그건 네가 무지무지 싫어서야!
만약 내가 이 녀석과 짝이 돼 저리가라고, 말시키지 말라고 땍땍거렸다면?
소름이 좀처럼 사라지질 않는다.
그런데 이 녀석 원래 이렇게 말을 잘 했던가?
자리 바꾸자고 왔을 때만 해도 심하게 더듬었었는데.
“가끔 서예에 대해 물어봐도 되지?”
“본인한테 직접 들어.”
“아잉~ 부끄럽단 말이야~”
크아악!! 닭살! 닭살! 닭살! 닭살!!!
불 위에 올려진 오징어처럼 몸이 뒤틀렸다.
“너 제요동생이지?”
동작이 컸는지 선생님이 날 쳐다보며 물었다.
중학교 때도 그랬지만 제순이라는 이름보다 제요동생이라는 말로 더 많이 불려졌다.
“아까부터 짝꿍이랑 떠들던데 수업시간에 떠들어야 할 만큼 중요한 얘기야?”
수업이 끝나려면 아직 40분이나 남았다.
이건 신이 준 기회야! 잡아야 해!
“잘못했습니다. 벌 받을게요.”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수업시간에 떠들었는데 당연히 벌 받아야죠! 복도에 나가 손들게요.”
자처한 일이지만 벌 받으면서 웃는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덕에 지나가는 선생님들한테 꿀밤을 맞긴 했지만 냄새에서 해방된 기쁨은 가히 컸다.
쉬는 시간 웃는 얼굴로 들어오는 내게 서예가 눈을 흘기며 물었다.
“너 순덕이 옆에 앉기 싫어서 벌 받는다고 한거지?”
“눈치도 빠르셔. 너 나한테 빚 졌다.”
“오늘 하루, 아니 점심시간 때까지만 자리 바꾸면 안 될까?”
서예의 얼굴과 순덕이의 얼굴이 오버랩 되었다.
그와 함께 서예에 대한 동정심이 마구 치솟았다.
하지만 다시는 순덕이 향기에 취하고 싶지 않아!!
“나언이가 이번만 봐준다고 해서 바꾼 거 모르지?
아마 이번에 나언이 옆에 앉으려면 맞을 각오해야 할 걸?”
축 처진 어깨로 자리로 돌아가는 서예.
그런 서예를 보며 미소 짓는 순덕이.
서예를 위해서라도 모른 척 하는 게 낫겠지?
하지만 순덕이가 고백이라도 한다면...?
얼굴의 황제(皇帝) 31 - 40.완결
종례를 마치고 교실을 나설 무렵, 순덕이 다가왔다.
“저기, 있잖아.”
서예가 재빠르게 내 뒤로 숨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녀석이 슬픈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쭈굴이 장례식에 참석해 주지 않을래?”
세상에! 세상에!
그 누에새끼 장례를 치러준단다.
그리고 참석해 달란다.
“오늘 약속이 있어서 안 될 것 같은데.”
“잠깐이면 돼.”
“서예야, 늦겠다! 뛰어!!”
소리를 지르고 냅따 달렸다.
“으아악!! 오순덕 이거 안 놔? 더러운 손 치워!!”
듣자하니 순덕이에게 잡힌 듯 싶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서예야, 순덕이가 덮칠지 모르니까 조심하고, 내일 보자.
집에 도착하니 낯선 신발 하나가 놓여져 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찾아 나섰는데 오빠와 방을 나오는 신발 주인.
“나의 하나 뿐인 딸, 제순아~!!!”
3년 만에 보는 아빠 얼굴은 힘든 일 하는 사람치곤 꽤 좋아 보였다.
징그럽게 얼굴을 비벼대는 아빠를 밀어내고 2층으로 올라왔다.
“아빠 안 보고 싶었어? 아빠는 우리 제순이 보고 싶어서 이렇게 달려왔는데.”
“보고 싶었다는 사람이 3년 만에 나타나? 그것도 이렇게 불쑥?”
“학교에서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옷 갈아입을 거니까 나가!!”
“그래. 그래. 아래층으로 내려와~”
이 참에 분명히 얘기하자!
오빠와 나인지, 아님 아프리카 빈민촌인지.
옷을 갈아입고 내려가자 려한이와 나언이를 앞에 두고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것처럼 웃고 떠드는 아빠가 보인다.
“저희 엄마는 잘 계시죠?”
“그럼~ 걱정하지 마. 조만간 너희들 보러 올 거야.”
아빠 옆으로 가 앉았다.
“같이 사는 데 불편함 점들은 없고?”
“제순이가 밤에 몰래 들어와 덮칠 줄 알았는데 얌전하더라고요.”
“어이구~ 그런 일이 생기면 절대 안 되지.
제순아, 려한이가 아무리 잘생겼어도 덮치면 안 된다.”
만난 지 오 분도 안 됐는데 어찌 저리도 쿵짝이 잘 맞는지.
아니지, 쿵짝이 잘 맞는 게 아니라 아빠가 유치한 거다.
“이번엔 언제 갔다, 언제 올 거야?”
“이틀 뒤에 갔다가 한달이나 두 달 후에 완전히 온다.”
“완전히 온다고? 그럼 두 번 다시 아프리카 안 가? 봉사 활동 접는 거야?”
“봉사는 한국에서 하면 되는 거니까. 제순아, 기뻐 죽겠지?”
녀석들이 앞에 있어 차마 아빠를 끌어안고 기뻐할 순 없었다.
“딸한테 거짓말 하는 거 아니겠지?”
“왜 아빠를 믿지 않는 거니, 우리 딸.”
“각서 쓰기 전까지는 안 믿어.”
“각서보다 더 확실한 게 있으니 걱정마라.”
난 그게 뭐냐고 물었고, 아빤 떠나기 전에 말해주겠다 대답했다.
다음날 아침, 오빠 입학식은 물론 내 입학식조차
참석하지 않은 아빠였기에 학교를 구경하겠다고 따라나섰다.
아빠로 인해 처음으로 넷이서 함께 하게 된 등굣길.
함께하는 등굣길이라고는 하나 나만 뒤에 뚝 떨어져 걸었다.
그들은 꽃향기를 맘껏 뿌려대며 여학생들의 발길을 멈추게 만들었고
그녀들의 시선을 자신들에게로 집중시키는데 성공했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 아빠는 제외다.
“제순아, 저 황홀해 하는 눈빛들 보이지? 아빠 아직 죽지 않았다.”
“오빠가 저렇게 된 데에는 아빠 잘못이 커. 아들 인생 망친 게 뭐가 잘났다고.”
“아름다움은 죄가 아니야. 아름다움을 억지로 가지려 해서는 안돼.”
분명 엄마는 이런 아빠가 지겨워 일찍 떠난 걸 거야.
교문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큰소리가 들려왔다.
싸움이라도 났다 싶어 달려가보니 수십 명의 여학생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윤소리는 물러가라!”
“물러가라!”
“시녀자리에서 물러가라!”
“물러가라!”
말도 안돼! 앞에서 확성기를 들고 대표로 소리치고 있는 아이,
며칠 전, 왜 윤소리가 시녀가 됐냐고 따졌던 아이들 중 한 명이였다.
“네가 시켰냐?”
려한이가 비웃 듯 물었다.
“아니야! 내가 왜!”
“그럼 너 말고 누가 저런 짓을 해?”
“진짜 아니야!”
대모 하라고 한 건 사실이지만, 그것 그냥 홧김에 한 말이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교감과 학생주임을 비롯해 선도부원들이 아이들을 진정시켜 나갔다.
“혼나기 전에 다들 교실로 들어가!”
“윤소리가 시녀 그만 둘 때까지 절대 안 들어가요.”
“너희들 다 퇴학당하고 싶어? 누구야? 누가 주동자야?”
“제순이가 대모라도 하라고 그래서 그런 거예요. 우린 아무 잘못 없어요.”
“야! 내가 언제? 그건 그냥 홧김에 한 말이라고!!”
나까지 끼어들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제순이 아버지 왕제필 입니다.”
“아, 예. 아버님이 아침부터 어쩐 일로.”
“자식들이 어떤 학교를 다니는지 궁금해서요. 참견일지 모르겠으나
아이들 사이에서 생긴 일 같은데 아이들 스스로가 푸는 게 어떨까요?”
그나마 이럴 때라도 부모 노릇해줘서 고맙네요, 아빠.
“1분 내로 교실로 안 가면 퇴학처리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의 주동자 녀석들, 화해하면 두 손 꼭 잡고 나한테 와.”
“…….”
“왜 대답이 없어?”
“..네.”
시위하던 아이들도, 구경꾼들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우리 제순이 학교생활 잘하고 있네?”
“누구 딸인데.”
“뭐해? 친구 기다린다. 가봐.”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얼굴을 돌리는 아이.
그 아이 앞까지 걸어가는데 성공했으나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네 핑계 대서 미안.”
“나야말로 그런 소리해서 미안.”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쫓아내지 못하는 거 보니 그 자리, 걔 자린가 보다.”
“황제가 바뀌는 일 없듯, 시녀도 바뀌는 일이 없어야지.”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어?”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도움 필요하면 말해. 난 4반이고 이름은 신영리야.”
“고마워. 내 이름이랑 반은 알지?”
“저기, 뒤에...”
영리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뒤에 서 있던 려한이 내 어깨를 움켜잡았다.
“나중에 봐~”
치사하게 혼자 내빼도 되는 거야, 뉴 프렌드?
잘 보여도 안 될 판인데 이런 일까지 벌였으니
진정 시녀 자리는 찾을 수 없는 건가?
“무슨 꿍꿍인지 말해.”
“그런 거 없어. 쟤네들이 귀찮게 해서 그럼 대모라도 하라고 말한 것뿐이야.”
“다시 시녀 하고 싶은 건 아니고?”
이 나쁜 자식아, 알면서 왜 물어~
하고 싶어! 하고 싶어! 정말 정말 하고 싶어!!
말할까? 그래! 밑져야 본전. 다시 하라고 할지도 모르잖아.
“저기 사실은...”
“려한아~”
정말 재수 없게도 딱 맞춰 나타난 윤소리.
려한이 옆으로 착하고 달라붙더니 팔짱을 낀다.
“제순아, 우리 려한이한테 무슨 볼 일 있어?”
“지금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넌 시녀지, 려한이 여자친구가 아니야!”
“그야 모르지. 려한아, 가자.”
지금 윤소리보다 ‘그러게 누가 시녀 그만두래’ 라는 표정으로 웃는 려한이가 더 밉다!
잠깐!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순간 떠오른 기가 막힌 아이디어에 오빠에게 향했다.
“제순이가 오빠를 먼저 찾아오다니! 이거 꿈은 아니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오빠인 거 알지?”
“나도 우리 제순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앗싸~ 분위기 좋으시고~
“오빠, 혹시 윤소리라고 기억해?”
“오빠가 여자 이름을 기억 할 것 같아?”
“미안. 왜 있잖아. 중학교 때 오빠 좋다고 쫓아다니다가
거절당하니까 나한테 시비건 애.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좀 예쁘장하게 생겼고.”
열심히 생각 중이신 오라버니.
“아~ 좋아하는 애들을 뺏겼다고 울고불고 난리 쳤었지?
생각은 안 나는데 내 기억으론 걔 못생겼는데 왜 그런 애한테 진 거야!”
오빠한테 걔가 못생긴 거면 오빠 동생인 난 뭐냐고~
“열 받지? 윤소리한테 복수하고 싶지?”
“아니.”
“오래전 일이지만 열 받잖아!”
“열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제순이 너지.”
이 인간 왜 이렇게 변한 거야!
내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던 인간이 말이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어. 오빠, 걔 좀 꼬셔.”
“개? 멍멍 개를 왜?”
“그 개 말고! 윤소리 말이야! 윤소리 꼬셔서 오빠한테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어.”
“아무리 네 부탁이라 해도 그건 들어줄 수 없어.”
“왜? 왜 안 되는데?”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순 없잖아. 오빠가 나쁜 사람 됐으면 좋겠어?”
나쁜 마음먹고 있는 동생을 질책하는 건
오빠로서 당연한 건데 왜 이렇게 섭섭하지?
그동안 나도 모르게 오빠에게 길들여 졌나보다.
나 밖에 모르고, 나만 생각하는 그런 오빠에게.
왕제순, 언제까지 오빠가 네 곁에 있어주는 건 아니잖아.
언제까지 오빠가 널 지켜주는 건 아니잖아. 정신 차려.
말없이 돌아서는 날 잡아 세우는 오빠.
“제순아.”
“미안한 목소리네? 하지만 오빠 말이 맞으니까 미안해하지 마.
그리고 다시는 오빠에게 투정 부리는 일 없을 거야.”
뭘 잘했다고 끝까지 잘난 척이냐, 왕제순?
오빠, 미안해. 오빠가 달라졌듯 나도 이제 달라질게.
잘난 동생은 못될망정, 폐 끼치는 동생은 되지 말아야지.
교실로 들어와 자리로 가던 중, 서예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외면한 채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는 서예.
기분도 꿀꿀한데 이따 풀어주자.
앞에 있는 것들을 최대한 보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데 시선이 따갑다.
민망할 정도로 쳐다보고 있는 나언에게 물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내가 언제 뭐 묻었다고 했어?”
“그럼 왜 쳐다봐?”
“지금 나한테 화풀이 하는 거야?”
나언이의 얼굴이 점점 굳어진다.
나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말했나보다.
“꼬봉이 감히 대장한테 어떻게 그래? 아니야.”
“한번만 더 그딴 식으로 나오면 죽어.”
“다음에도 내가 이러면 대장 마음대로 해.”
“점심시간에 밥 먹으러 갈 거니까 깨워.”
“걱정 붙들어 매! 선생님 나가자마자 깨워줄게.”
학교에서 돈 주고 밥 먹는데 무슨 도시락이냐며 도시락을 거부한 오빠로 인해
아직 화가 덜 풀린 서예와 인상이란 인상은 다 쓰고 있는 나언이와 함께 급식소로 향했다.
나언이 나타나자 줄을 서고 있던 아이들이 하나, 둘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기다려야 하는 수고를 덜고 바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앞에 있는 나언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안절부절 못하는 서예.
“째쟁쨍!!”
그런 서예의 시선이 나언이의 심기를 건드렸고,
아무잘못 없는 수저는 바닥에 내팽겨지는 신세가 되었다.
일순간 조용해진 급식소.
조용하기만 하면 다행이게, 모두 먹는 걸 멈추고 우리를 쳐다봤다.
갑자기 서예가 날 안으며 울기 시작했다.
“제순아, 살려줘~ 나 무서워.”
“뭐가 무섭다고 그래? 울지 마!”
“으아앙~ 나 죽을지도 몰라. 나 죽으면 네 책임이야.”
우는 서예 모습에 더 화가 난건 아닌지 걱정돼 쳐다보자 급식소를 나가는 나언.
다행이긴 한데 이상하게 나언이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이 상황에서 밥 먹을 수도 없고, 나언이를 따라 나섰다.
급식소 뒤 쪽은 처음인데 잘 꾸며진 두 개의 화단이 보였고
나언인 화단 사이에 놓여 있는 돌 위에 앉아 있었다.
옆에 앉는 대신 돌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너도 그래?”
“응?”
“내가 화내거나 기분 나빠 하면 무섭냐고.”
“예전에 그랬는데 지금은 별로.”
별로라고 했다고 화내는 거 아닐까?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씁쓸하게 웃는 녀석.
“대장.”
“헛소리 하려거든 입 다물어.”
“슬퍼 보여.”
“그 단어가 나랑 어울린다고 생각해?”
녀석의 한 마디, 한 마디마저 슬프게 들린다.
“그때 대장이 그랬잖아. 대장한테는 말하라고.”
“…….”
“대장 꼬봉이 말이야. 화려한을 좋아해.”
“…….”
“도와달라거나 뭘 바라고 말하는 거 아니야.
그냥 말하는 거야. 대장이니까 그냥.”
려한이에게 말하기 전엔 절대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정말 나언이가 내 마음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말할 생각 없었는데.
“그거 헛소리니까 입 다물어.”
“헤헤, 헛소린가?”
“다물어.”
낮게 깔린 음성.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구나, 제순아.
그래도 언젠가는 지금의 나처럼 대장도 맘 열 테니 기다리자.
교실 앞에서 서성이던 영리가 날 발견하자마자 뛰어왔다.
“큰일 났어!!”
“무슨 일인데?”
“윤소리! 윤소리가 고백했데!”
영리의 말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너 지금 걔가 려한이한테 고백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래! 점심시간에 옥상에서 무릎까지 꿇고 고백했데!”
“누가 그래? 헛소문 아니야?”
“우리 패밀리중 한 명이 애들이랑 올라갔다가 봤데.
려한이가 대답을 안했다고는 하지만 대답하는 건 시간문제야.”
아침에 ‘그건 모르지’ 라며 자신감을 보였던 게 이거냐, 윤소리?
한번도 생각해 본적 없다. 윤소리가 려한이한테 고백할거라는 생각을 말이다.
난 왜 시녀자리만 신경 쓰고, 그 부분에 대해선 아무 생각 없었을까?
“다 끝났어. 이제 우리들의 황제는 없어.”
“속단하긴 일러.”
“려한이가 거부할 것 같아? 전교생이 대모한다 해도 소용없을 거야.”
얜 왜 자꾸 불길한 말만 하는 거야!
교실에 없는 녀석을 찾아 밖으로 나왔지만 어디 숨었는지 안 보인다.
순간 옥상에서 고백 받았다는 말을 떠올려 가보니!
녀석이 돌아섰고, 난 문 앞에 선 채로 가만히 있었다.
“나오지 않고 뭐해?”
옥상으로 나와 녀석 옆에 섰다.
난 왜 기를 쓰고 려한이를 찾으려고 했던 거지?
윤소리가 사귀자고 한 게 사실이냐고? 사실이면 사귈 거냐고 묻기 위해?
궁금한 건 사실이지만 물을 수 없다.
녀석에게서 불안해하는 내 마음의 소리가 나올까 두렵다.
“달리기라도 했냐?”
“내가 육상선수야?”
“옥상엔 왜 왔어?”
“그러는 넌 왜 여기 있는 건데?”
“있고 싶으니까.”
대화가 중단되고 침묵이 이어졌다.
종이 들려왔지만 녀석도 나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있고 싶어서 있는 거라고?”
“왜?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아?”
“있잖아. 옥상에 있는 이유 따로 있잖아.”
녀석이 내 쪽으로 얼굴 돌리는 게 느껴졌지만
계속 앞만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렇게 놀래?”
“너야말로 옥상에 온 이유가 있었네.”
“옥상에서 느끼는 자유는 생각보다 크고 기분 좋거든.”
“시녀자리도 빼앗기고, 나도 빼앗기는 건 아닌지 불안하지?”
“핸드폰이 다시 갖고 싶어서 그런다!”
그냥 사실대로, 나언이에게 했던 것처럼
말하면 되는데 왜 맘에도 없는 말만 나오는 지 모르겠다.
“그래~? 이틀 내로 대답 달라고 했는데 이따 집에 갈 때 말해야겠다.”
“그 자리에서 바로 오케이 하지 왜 안 했데?”
“보는 눈들이 있어서. 없었으면 바로 승낙했지.”
화려한! 윤소리 좋아하면서 왜 그때 날 시녀로 선택한거야?
왜 선택해서 갖고 놀다 버려진 기분 느끼게 만드는 거냐고!!
“왕제순, 정말 할 말 없어?”
“있어도 안 해!”
“핸드폰이 갖고 싶다면 사 줄 테니 시녀자리 그만 탐내.
그럼 옥상에서 느끼는 자유, 맘껏 느끼고 내려와라.”
진짜 가는 거야? 정말 내가 아닌 윤소리 선택하는 거야?
“이 나쁜 자식아!!”
간 줄 알고 소리쳤는데 문을 열고 나타난 녀석.
“그렇게 뒤에서 욕하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해.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말하면? 내가 말하는 대로 할 거야?”
“같이 살면서 생긴 정도 있고, 전 시녀니까 들어주지 뭐.”
“하지 마.”
녀석에겐 절대 들리지 않을만한 작은 목소리.
“뭐?”
녀석이 걸어오며 물었다.
마주 볼 자신이 없던 난, 고개를 땅에 처박고 소리쳤다.
“하지 말라고!”
“쿡-”
웃는다. 그것도 그냥 웃는 게 아니라 비웃는다.
“뭘 하지 말라는 거야?”
“웃어서 말 안 해.”
“그럼 나 그냥 간다?”
“치사한 자식. 윤소리 고백에 오케이 하지 말라고!”
돌아서 운동장 쪽을 바라봤다.
화끈거리는 걸로 봐 지금 내 얼굴, 잘 익은 사과일 것이다.
“그 이유는?”
“내 말대로 한다며!”
“그래도 이유는 들어야지.”
“윤소리가 싫으니까! 더 이상 묻지 마.”
“이유가 부적절해서 네 말대로 못하겠다.”
꾹꾹 누르고 있던 감정이 용암이 분출하듯 터져 나왔다.
“내가 너 좋아해서 그런다!
윤소리가 시녀 되는 것도, 네가 걔랑 사귀는 것도 싫어!”
말했다. 드디어 말했다. 하지만 멋대가리 없는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이틀 뒤인 14일, 녀석 생일에 정말 여자답게, 로맨틱하게 고백하려고 했는데 젠장.
“그 말이 뭐가 어렵다고 질질 끌었냐?”
“누굴 좋아한 적이 없으니까 그런 말이 나오는 거겠지.”
“좋아한 적 있다면? 아니, 현재 진행 중이라면?”
지금 나,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려한이가 좋아하는 애 있다고 말한 거 맞지?
“좋아하는 애가 있다고?”
“나도 사람인데 당연한 거 아니야?”
“윤소리는 아니지?”
“윤소리도 아니고 윤소리처럼 예쁜 애도 아니니까 안심해.”
이거, 좋아해야 돼 말아야 돼?
“누군데?”
“넌 자존심도 없냐?”
“무슨 말이야?”
“방금 좋다고 고백한 사람한테 그런 걸 묻다니.”
만약 려한이가 말해서 그 상대를 알게 되면?
쫓아가서 패기라도 하게? 모르는 게 약이라고, 알려고 하지 말자, 왕제순.
근데 려한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데도 아무렇지 않다.
려한이 좋아하는 게 맞는지 의심 될 정도로.
“윤소리한테는 내가 말할게.”
“내가 핸드폰 주기 전까지는 아니야.”
“뭐? 언제 줄 건데?”
“너 하는 거 봐서.”
고백까지 했는데 뭔들 못하겠어.
생일에 다시 한번 고백하고 시녀 자리 완전히 되찾자!!
“제순아, 내일 보자~”
곧 버림받을 거란 사실도 모르고 나한테까지 인사를 하고 가는 윤소리.
과연 려한이한테 차이고, 시녀 그만두라는 얘기 듣고도 그런 얼굴 할 수 있는지 보자.
“제순아, 오늘 우리 집에 가자.”
“갑자기 너희 집엔 왜?”
“왜라니? 엄마가 너 보고 싶으시데.”
동생들한테 당해보라 이거군.
“아빠랑 놀아야 돼.”
“그런 뻔한 거짓말을 하면 친구 맘 아프다.”
“거짓말 아니야. 먼저 간다.”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너희 아빠 안 계시면 우리 집에 가는 거다.”
자신의 승리를 예감하는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서예.
이거 얄미워 죽겠는데 순덕이한테 고백하라고 부추길까보다.
여긴 어디냐는 서예의 질문을 무시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왜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르냐?”
“이사했어.”
“뭐? 이사했는데 나한테 말도 안했단 말이야?”
“아빠 딸 왔구나. 아빠가 맛있는.”
“아빠! 잠깐 밖으로 나와 봐.”
아빠 목소리를 확인한 서예의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그것도 잠시, 서둘러 머리와 교복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지만, 서예에겐 시아버지를 만나는 순간이니까.
“친구랑 같이 왔구나? 그런데 낯이 익네.”
“안녕하세요, 아버님? 제순이의 하나뿐인 친구 서예에요.”
“아~ 너무 오랜만이라 깜빡했구나.”
“나의 하나뿐인 친구 서예야, 확인했으니까 됐지? 그럼 잘 가.”
아빠를 끌고 집으로 들어오자
내가 좋아하는 음식 냄새로 숨이 막힐 정도였다.
“부대찌게다! 맛있겠다~ 맛있겠다~”
교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식탁에 앉아 부대찌게를 먹어댔다.
“네 친구, 놀러온 거 아니야?”
“아니야. 근데 아빠 진짜 맛있다.”
“한국 오면 매일 매일 해줄게.”
“어? 부대찌게 냄새!”
같이 먹고 자라서인지 오빠 역시 나만큼이나 부대찌게를 좋아한다.
서로 더 많이 먹으려고 싸우다 그만, 부대찌게를 엎지르는 결과를 초래했다.
“동생한테 양보하면 안돼?”
“부대찌게만큼은 양보할 수 없어.”
“아빠 부대찌게가 그렇게 맛있니? 아, 정말 얼굴만 잘났어야 하는 건데.”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식탁을 떠났다.
옷을 갈아입고 부대찌게 국물이 튄 교복을 빨았다.
밤이 깊었을 때쯤 아빠가 노크를 해오며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 딸, 아빠랑 얘기 좀 할 수 있니?”
“물론. 오늘은 어떤 얘기 해 줄 거야?”
조심스레 옆으로 와 앉는 아빠가 왜 이렇게 낯설까?
망설이는 모습에서 불안함마저 느껴졌다.
“무슨 얘긴데 그래?”
“제순이는 우리 가족이 완벽하다고 생각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아빠는 아빠가 대신 해 줄 수 없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아빠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닌.”
그제 서야 난 아빠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래. 이젠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아빠가 무슨 말 하려는 지 알아.”
“그럼 찬성하는 거야?”
“내가 반대할 줄 알았어? 어떤 분이야?”
“너도 잘 아는 사람이야.”
뭐지? 이 불안감은?
“내가 잘 아는 사람? 누구?”
“려한이랑 나언이 엄마.”
“누구?”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녀석들 엄마 말이다.”
말도 안돼! 말도 안돼!!
아빠랑 려한이 엄마가 결혼한다고?
그럼 난? 나는?
“제순아, 괜찮니?”
“아빠 지금 거짓말 하는 거지? 나 놀리기 위해 오빠랑 짠 거지?”
“갑작스럽지? 하지만 아빤 엄마 떠나보낼 때부터.”
“거짓말! 거짓말!!”
벌떡 일어서 소리쳤다.
“제순아!!”
속이 울렁거려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뒤따라오는 아빠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와 달렸다.
아빠랑 려한이 엄마가 결혼한다. 려한이랑 한 가족이다.
절대로 좋아해선 안 된다. 가족으로 대해야 한다. 가족으로.
젠장! 하늘은 내 편이 아닌가보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려한이와 마주쳤다.
그것도 새록이와 함께.
“땡촌, 우냐?”
새록이 놀려 먹을 건수 생겼다는 표정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무시하고 가면 좋으련만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산새록, 그냥 집에 가라.”
“뭐? 너희 집에서 오락하기로 했잖아.”
“땡촌 아빠 오신 걸 깜빡했어. 내일 해.”
“빌어먹을 땡촌 같으니! 어쩔 수 없지. 내일 보자.”
새록이 사라지고 침묵이 흘렀다.
녀석을 외면하고 지나치는데,
“왜 울어?”
처음 듣는 녀석의 부드러운 음성에 그만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말없이 바라만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왜 우냐니까!”
넌 아무렇지 않겠지? 우리 아빠랑 너희 엄마가 결혼해도 아무렇지 않지?
아니다. 나 같은 애랑 가족 되서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입에 접착제라도 붙였어? 대답 안 해?”
내 몸을 잡고 흔들어 대는 려한이가 왜 이렇게 밉지?
아무렇지 않을 려한이를 생각하니까 왜 이렇게 밉냐.
“황제의 명령이다. 대답해.”
“쿡-”
웃음이 났다. 이젠 시녀 같은 것도 필요 없는데.
시녀가 되지 않아도 평생 녀석 옆에 있을 텐데.
“하는 거 봐서 시녀 결정 한다고 했을 텐데?”
“필요 없어.”
“다시 한번 말해봐.”
“그런 거지같은 거 필요 없다고.”
화려한, 왜 상처 받은 눈을 하는 거야?
잘됐잖아. 내가 스스로 떨어져 나가주겠다는데. 안 그래?
“그거, 내가 윤소리랑 사겨도 상관없다는 말이냐?”
“내가 무슨 권리로 네 감정에 이래라, 저래라 해?”
“그럼 아까 그 고백은 뭐야? 어? 얼굴까지 붉혀가며 좋다고 소리친 건 뭐냐고!!”
좋아해. 려한이 너, 많이 좋아해.
하지만 아빠가 너희 엄마랑 결혼한다잖아!
우리 엄마 떠났을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잖아.
난 겨우 한달이지만 아빤 10년이야.
난 겨우 좋아하는 감정이지만 아빤 인생을 건 결혼이야.
“너도 나 가지고 놀았잖아. 가지고 논다는 게 어떤 건지 궁금해서 해봤는데 꽤 재미있네?
이런 기분이구나. 숨이 탁하고 막히면서 가슴 한구석이 조금은 아린 느낌. 너도 이랬니?”
숨이 막혀온다. 려한이의 품에 안긴 내가 숨이 막혀온다 말하고 있다.
하지만 녀석을 밀치고 집으로 달렸다.
당황스러워 나온 것이지, 어딘가를 가기 위해 집을 나온 게 아니니까.
사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돌아가는 게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 소파에 앉아있던 아빠와 오빠가 벌떡 일어섰다.
오빠가 다가왔지만 그냥 지나쳐 방으로 들어왔다.
열려 있는 창문을 바라보자 베란다에 서 있는 나언이 보인다.
무시하고 침대에 누울까하다 베란다로 나갔다.
드럼 채를 들고 있던 녀석이 난데없이 베란다 난간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아파서 그런지 몰라도 슬프게 들려온다.
녀석의 옆모습만큼이나 슬프게.
“박수 안 쳐?”
연주를 끝낸 녀석이 물어왔고, 난 손바닥을 천천히 마주쳤다.
“드럼 치는 줄 몰랐는데.”
“잘하는 거 하나쯤은 있어야지.”
“대장, 싸움도 잘하잖아.”
내 말에 피식하고 웃는 녀석.
녀석의 미소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 지는 것만 같다.
“내가 왜 려한이랑 같이 살고 려한이 엄마가 엄마인지 궁금하지?”
“전에는 궁금했는데 지금은 안 궁금해.”
“알고 있는 대로 진짜 아들이 아니야. 호적상으로도.
하지만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면 그때 진짜 아들이 되겠다고 했어.”
나언이가 왜 이런 얘길 하는 거지?
설마 아까 아빠와 내가 하는 얘기를 들은 건 아니겠지?
“려한이 언제부터 좋아했냐?”
“어? 려한이가 뭐?”
“언제부터 좋아했냐고.”
“입학하자마자.”
“사십년을 살아온 어른들과 십칠 년을 살아온
우리들 중 누가 올바른 결정을 내린다고 생각해?”
대장답지 않다. 대장답지 않은 질문이다.
“순간의 감정과는 질부터 다르겠지.
너, 아빠 믿지? 그럼 아빠 결정도 믿어.”
방으로 들어가 방을 나가는 녀석을 잡지 않았다.
나언이의 말,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들었구나. 나언이 너 아까 들었구나.
그럼 지금 내가 어떤 심정인지 잘 알겠다?
잘 아니까 그런 말 하는 거겠지?
나도 알아. 하지만 나, 짧은 시간이지만
소중히 키워온 감정이라 한순간에 정리하기 힘들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시간을 준다 해도 장담 못하지만.
뒤척이다 힘들게 든 잠이었건만, 얼마 안돼 눈이 떠졌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문고리를 잡은 순간
문에 붙여져 있는 메모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딸에게
이렇게 글로 전하고 떠나는 아빠를 용서해라.
많이 당황스럽고 갑작스러웠다는 거 안다.
아빠에겐 10년도 넘은 시간이지만 네겐 그러지 않다는 걸 왜 미처 몰랐을까?
하지만 아빠는 말이다. 아빠 욕심이라고 해도 완성된 가정을 이루고 싶다.
제순이에게 아빠, 오빠가 아닌 엄마가 해 주는 밥 먹이고 싶고,
제순이가 엄마라고 부르는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어.
지금까지 티 없이 맑고 예쁘게 자라줘서 정말 고마워.
앞으로도 예쁜 딸, 착한 딸 되 줄 거지?
그리고 려한이랑 나언이는 녀석들 엄마가
직접 얘기한다고 하니까 모른 척 해라.
4월 13일 새벽 4시 14분,
왕제순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왕제필이
바보아빠! 멍충이아빠! 똥개아빠!!
정말 미워!! 세상에서 제일 미워!!
침대에 누워 아무 생각 없이 천장을 바라봤다.
얼마나 흘렀을까?
교복까지 차려입고 준비를 다 마친 듯 보이는 오빠가 들어왔다.
“아직까지 자고 있으면 어떡해? 얼른 일어나.”
“학교 안 가.”
“왜? 어디 아파?”
퉁퉁 부은 눈을 감추기 위해 이불을 덮어쓰며 말했다.
“감기 걸린 것 같아. 학교에 대신 말 좀 해줘.”
“병원 가자.”
“병원 갈 정도 아니야.”
“정말 많이 아픈 거 아니지? 또 그때처럼 쓰러지면.”
“오빠, 나 쉬고 싶어.”
괜히 오빠에게 화풀이 하는 것 같아 짜증이 밀려왔다.
“우리 중에 핸드폰 있는 사람은 려한이 뿐이니까
무슨 일 있으면 려한이한테 전화해. 그리고 밥 챙겨먹고, 오빠가 만든 차도 마시고.”
잠시 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나 이러면 안 되는 거지? 그럼 왜 아무 말도 안 해?
따끔하게 한마디라도 해야 하잖아. 아무리 오빠 동생이라고 하지만 잘못하면 혼내야지.
오빠도 바보 오빠네. 바보 아빠 아들, 왕제요.
정말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은데
점심때가 되자 배가 보채고 나섰다.
씻지도 않은 몸을 이끌고 주방으로 향했다.
허겁지겁 밥을 먹을 때쯤 현관문 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을 들자 봉지를 든 려한이 걸어오고 있었다.
다 먹은 건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속을 채웠기에 식탁을 정리하고 걸음을 옮겼다.
“키위 좀 사왔으니까 먹어.”
아플 때면 어김없이 키위를 찾는 나다.
려한이가 그걸 알리 없고, 오빠가 가보라고 한 걸까?
바보탱이 오빠 같으니. 차라리 나언이에게 부탁하지.
마음 정리 할 때까지 려한이랑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한 집에 사는 이상, 같은 반인 이상 그건 불가능한 일.
애써 녀석의 시선을 외면하며 욕실로 들어왔다.
아깐 배가 난리를 치더니, 이번엔 머리와 얼굴이 난리다.
꼴에 려한이에게 추한 모습은 보일 수 없다나?
씻고 방으로 들어가자 침대에 앉아 있는 화려한.
기분 이상하게 키위가 담긴 접시까지 들고 있다.
“쉬고 싶으니까 나가.”
“어디가 아픈 거야?”
“안 아파! 그러니까 어울리지도 않는 관심 꺼.”
아주 막 나가는구나, 왕제순.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평소 같지 않은 려한이 모습에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데.
“뭐야?”
“뭐가?”
“지금 네 태도 뭐냐고.”
“황제대접 받고 싶으면 네 시녀한테 가.
그리고 내 방에 있고 싶음 마음대로 해. 내가 나가줄게.”
녀석이 잡을까 싶어 서둘러 나왔지만, 역시나 오버였다.
쓰레빠를 질질질 끌며 걷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다.
시선을 따라 내 행색을 살피자 무릎이 예쁘게 튀어나온
츄리닝 바지와 군데군데 헤져 초라하기 그지없는 반팔 티.
씻지 않았다면 아마 미친년으로 오해받았을 게 분명하다.
분위기 잡고 맘 아파해도 모자랄 지경에 이 지랄 같은 상황은 뭐냐고.
슬픔의 눈물이 아닌 짜증으로 인한 눈물이 흘러나왔다.
“얘야.”
고개를 들자 아줌마 한분이 활기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서 계셨다.
“네?”
“안녕?”
뭐..뭐지? 혹시 광신교 회원?
“이름이 뭐니?”
“이..이름 같은 거 없어요!”
“아줌마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성이 왕씨지?”
점쟁인가? 아니야! 정신 차려!
오빠가 이 사람들 말은 무조건 믿지 말라고 했어.
“우리나라에 왕씨도 있어요?”
“네 나이도 맞춰볼까? 열일곱, 맞지?”
“우와.”
서둘러 입을 막았지만 내 반응에 즐거워하는 아줌마 표정이 보인다.
“아줌마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니?”
“으아악~ 사람 살려!!!”
끌려가기 전에 도망가야 한다.
쓰레빠 한쪽이 벗겨진 것도 모르고 죽어라 달렸다.
그리하여 하이힐을 신고 있었던 광신교 아줌마를 따돌리는데 성공했지만
무작정 뛴 덕에 지금 이곳이 어딘지 모르겠단 말씀.
덜 마른 머린 뛰면서 헝클어지고, 몸은 땀으로 찐덕거리고, 쓰레빠 한 짝은 보이지도 않고.
소풍이라도 가는지 노란색 옷과 모자를 착용한 유치원생들이 떼를 지으며 지나갔다.
“와! 여자 거지다!!”
“아니야! 미친년이야.”
“초롱유치원 여러분! 합죽이가 됩시다, 합!”
다소 어려보이는 여자가 아이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바위에 계란 치는 격이었다.
수많은 병아리들이 날 둘러싸더니 빙글빙글 돌아가며 놀려대기 시작했다.
“거지래요~ 거지래요~”
“거지 미친년이다!!”
“입 닥치지 못해!!!!!!”
나조차도 놀랄 정도의 괴성이었다.
내 말대로 입 닥친 것까지는 좋은데,
한 놈이 울자 하나, 둘 소리 높여 울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으아아앙~ 엄마~”
“엄마아~ 엄마아~”
이 빌어먹을 병아리들아!!
울고 싶은 건 나라고!!
울고 싶은 건 나란 말이야!!!
꼴이 꼴인지라 더 이상 방황할 수 없어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물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몇 번을 망설이다 들어간 집,
광신교 아줌마가 려한이랑 마주보며 앉아 있다.
“어머! 제순아~ 아프다는 애가 어딜 갔다 오는 거니? 이리와.”
아줌마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
아니,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으며 집 안까지 들어와 있는 거지?
아줌마와 려한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걸어갔다.
“화려한, 네가 문 열어줬어?”
“그럼 귀신이 열어줬겠냐?”
“왜? 왜 열어줬는데?”
“정말 모르는 거니, 제순아? 아줌마 섭섭해지려고 하는데 어쩌지?”
뭘 모르고, 왜 섭섭하다는 거지?
“나, 려한이랑 나언이 엄마야.”
이럴 수가! 려한이랑 나언이 엄마라고?
그러고 보니 려한이랑 많이 비슷하잖아?
그래서 아까 내 나이랑 성을 맞췄던 거구나.
“아..안녕하세요.”
“하나도 안 변했어. 그대로야.”
“네?”
“10년 전, 려한이랑 나언이 데리고 가끔 놀러왔었는데 기억 안 나?”
10년 전으로 기억을 되돌렸다.
엄마 장례식 날, 유난히 따갑게 내리쬐는 태양에게
화풀이하며 울고 있는 내게 살아있는 예쁜 소녀 인형 하나가 다가왔다.
우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소녀가
뒤에 감추고 있던 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하지만 난, 소녀를 뒤로하고 달렸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낯선 소녀가 우리 집 앞에 서 있었다.
날 보자마자 해맑게 웃는다.
미소만큼이나 빛나는 소녀의 단발머리.
다가가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소녀의 머리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계속 기르면 예쁘겠다.”
그때 문이 열리며 낯선 아줌마와 엄마 장례식 때 보았던 인형이 나왔다.
“제순아, 안녕?”
아줌마가 인사를 해왔지만,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경계했다.
“아줌마 모르겠어? 아줌마, 아빠 친구야.”
“거짓말! 아빠는 아줌마 같은 친구 없어.”
“그럼 지금부터 친구해도 되지?
자, 우리 귀여운 공주님들 놀이터에서 재미있게 놀다오세요~”
인형과 단발머리를 만날 때마다 슬픔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기다려도 오지 않아 많이 슬퍼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런데 인형이랑 려한이가 닮았다.
단발머리랑 나언이가 닮았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려한이를 쳐다봤다.
“둔탱이.”
“말도 안돼. 그 인형이랑 단발머리는 여자야. 여자였어.”
“쿱-”
아줌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려한이랑 나언이를 여자처럼 꾸며놓고,
내가 공주님이라고 불러서 그런 오해가 생긴 모양이네.”
갑자기 현기증이 인다.
그럼 려한이랑 나언이는 알고 있었던 걸까?
같은 반이 되었을 때도, 같이 살 때도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던 걸까?
“변태 아줌마.”
“엄마한테 변태 아줌마가 뭐니, 아들아.”
“아들들을 여자로 키우려고 한 게 변태가 아니고 뭐야?”
“딸이 좋은 걸 어째. 진짜 제순이가 내 딸이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땡촌이지만 아줌마 같은 엄마는 사양일 거다.”
너였구나. 그때 꽃으로 날 위로해 주려던 게 려한이 너였구나.
좋아한 건 한달이지만 10년 전부터 인연이 닿았던 거네, 우리?
이걸 위로 삼으면 되려나? 내 마음의 보상, 이거면 되려나?
“근데 나언이는 언제 와?”
“수업 끝나고 바로 오던가, 놀다 오던가 하겠지.”
“사랑하는 아들 보고 싶어서 그때까지 언제 기다리지? 우리 마중가자.”
“아줌마, 정신 차려. 또 학교에 이상한 소문 퍼지게 하려고 그래?”
“엄마가 아들을 사랑하는 게 뭐가 이상하다고 그러니?”
“모자지간이 아니라 원조교제로 소문나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두 사람, 아빠와 나처럼 정말 가깝고 다정해 보인다.
아빠와 많이 닮았고, 아빠와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핸드폰이 울렸고 아줌마가 전화를 받으며 자리를 떴다.
“왜 말 안 했어?”
“공평하지 않아서.”
“뭐가?”
“나랑 나언이는 보자마자 알아봤는데 넌 전혀 모르더라고.
기억 할 때까지 말 안하려고 했는데 저 변태 아줌마가 나타나는 바람에.”
못 알아 본 내 잘못인데 왜 배신감이 느껴질까?
아줌마의 성화에 못 이겨 학교 앞까지 오게 된 려한이와 나.
교문을 빠져나가는 아이들이 하나, 둘 생겨나고 잠시 후 혼자 걸어오는 나언이 보였다.
“내 사랑 나언아~ 보고싶었어~!!!”
주위의 모든 시선이 나언이와
나언이를 심하게 껴안는 아줌마에게로 쏠렸다.
“땡촌, 가자.”
갑자기 내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기는 화려한.
“아줌마랑 나언이는?”
“십분 넘게 저러고 있을 텐데 기다리자고?”
“너희 지금 배신 때리고 가는 거니?”
려한이가 거짓말을 한 걸까?
아줌마가 무표정한 나언이를 끌고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웬일로 일찍 떨어지셨데?”
“나언이는 점점 남자다워지는데 넌 어째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니?”
“뭐? 이 변태 아줌마가!”
“푹-!!”
아줌마 핸드백과 려한이 머리가 충돌하며 둔탁한 소리가 만들어졌다.
“아, 씹! 무식하게 핸드백을 휘두르면 어떡해!!”
“오늘 같은 날 기분 망치기 싫으니까 입 좀 닥치세요, 아들님.”
본지 얼마 안 됐지만 정말 못 말리는 모자지간이다.
“나언아, 뭐 먹고 싶어?”
“그냥 집으로 가죠.”
“왜? 혹시 선생한테 혼났어? 어떤 선생이야?”
“나언이한테 하는 거 반에 반만이라도 나한테 해봐라. 내가 아줌마라고 부르나.”
아줌마의 눈빛이 달라지는 게 일 한번 크게 날 것 같은 분위기다.
려한이 역시 아들답게 단번에 알아차리고는 냅따 달리기 시작했다.
“너 거기 안 서?”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나, 아줌마 아들 아니지?”
“이 건방진 아들새끼!! 잡히면 죽을 줄 알아!!!”
고개를 가로젓다 나언이와 눈이 마주쳤다.
“대장은 익숙하겠다.”
“그럼 내가 어떤 기분일지도 알겠네?”
“대장 기분?”
“모름 됐고.”
빠르게 앞서 걸어가기 시작한 나언이를 뒤쫓았다.
전에도 느꼈었던 기분.
나언이에게 큰 잘못을 한 듯한 기분.
“저기, 대장..”
“…….”
“그러니까, 있잖아.”
“내가 헛소리 할 거면 어떻게 하라고 했지?”
정말 할 말 없게 만든다.
저녁을 먹고 방으로 올라와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 디제이가 가지각색의 사연을 소개하고, 그에 맞는 노래를 들려준다.
지금 내 상황을 적어 보내면 어떤 노래를 틀어줄까?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에 관한 노래? 아님 재수 없는 인생?
“무슨 개 같은 소리야!!!”
그때 려한이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방을 나와 소리가 들려오는 려한의 방문에 귀를 가져다댔다.
“화려한!”
“왜, 해나언!”
“엄마한테 사과해.”
“사과? 내가 왜?”
“아들님들, 진정하고 앉아.”
려한이는 물론 나언이까지 흥분상태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난 인정 못해! 아니 안 해!!”
“좋은 사람 있으면 시집가라고 노래까지 부르던 아들님아.”
“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야. 제순이 아빠랑 결혼하는 거 반대야!!”
아줌마가 온 이유, 그 때문이구나.
그런데 화려한, 나랑 한 가족 되는 게 그렇게 싫냐?
나도 싫어! 나도 정말 정말 싫어!!
“이유는?”
“썅! 안돼!! 무조건 안돼!!”
“엄마도 장난하는 거 아니란다.”
“내가 제순이 좋아한다면?”
지금 려한이가?
려한이가 날 좋아한다고 말 한 거야?
“제순이를 좋아하다니?”
“10년 전,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고 지금도 많이 좋아해.
이래도 결혼할 거야? 어? 이래도 결혼 할 거냐고!!”
말도 안돼. 정말 말도 안돼.
좋다는 표현, 한번도 안 했어.
툭하면 놀려대고, 시녀 핑계 대며 부려먹기만 했어.
“아들, 거짓말이지?”
“결혼하고 싶음 하세요, 아줌마.
나 역시도 계속해서 제순이 좋아 할 테니까.”
벌컥. 문이 열리며 려한이 나왔다.
“쥐새끼처럼 몰래 엿들으니까 좋냐?”
방금 전, 날 좋아한다고 소리친 게 무색할 정도로 차갑다.
큰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가더니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마구 뛰어대는 걸 느낄 수 있다.
직접 들었지만 믿을 수 없다.
놀려먹기 위해 연기를 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니까.
하지만 믿고 싶다. 아니, 벌써 믿기 시작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날 위로해 주던 인형이.
국경고 1학년 얼굴의 황제 화려한이 나, 왕제순을 좋아한다.
다음 날 아침,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차린 생일상이 식을 때까지도 려한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언이와 둘만의 등굣길.
조용하다 못해 불편하기까지 했다.
“꼬봉.”
“응?”
“일년 중 좋아하는 날.”
갑작스런 엉뚱한 질문에 조용히 녀석을 올려다봤다.
“토 달지 말고 대답만 해.”
“노는 날은 다 좋아.”
“제일 좋아하는 날로 딱 하나만 골라.”
“음... 크리스마스.”
물을 엄두도, 기대도 안 하고 있었는데 녀석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 내 생일은 크리스마스다.
네가 정해줬으니까 잊지 말고 꼬박꼬박 생일상 차려라.”
“무슨 소리야? 태어난 날이 생일이잖아.”
“그런 거 없어. 크리스마스가 생일이라. 눈 내리면 봐줄만 하겠는 걸.”
해나언, 그런 목소리로 말하지 마.
외롭고 쓸쓸해 죽을 것만 같은 목소리로 말하지 마.
“쫙-!!”
날 보자마자 등짝을 있는 힘껏 후려치는 서예.
“앗, 따거~ 붓글씨! 죽고 싶어?”
“내가 좀 차갑게 굴었다고 결석까지 하면 어떡해! 다른 사람이 알기라도 하면
나만 나쁜 년 되잖아. 잘못은 네가 했지만 결국엔 나만 욕먹는다고!”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그래. 마음 넓은 내가 용서할게. 그러니까 소심하게 굴지 마.”
“지금 순덕이 얘기 하는 거야?”
“으아악!! 걔 얘긴 꺼내지도 마!!”
반응을 보건데 그 날, 무슨 일이 있긴 있었나보다.
지금 물었다간 손톱을 치켜들고 달려들게 분명하니 다음에 묻자.
1교시가 막 시작할 때쯤 도착한 려한.
녀석을 보자 어제 일들이 떠오르며 심장이 뛰어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녀석, 윤소리 옆이 아닌 비어있는 나언이 자리
그러니까 내 옆에 앉는 게 아닌가!
아이들은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수업에 집중했지만
윤소리만은 끈질기게 날 째려봤다.
뭐라고 한마디 해야 하나? 하지만 뭐라고?
“야.”
감히 쳐다 볼 엄두조차 못 내고 있는데 녀석이 말을 걸어온다.
하지만 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아니,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왕제순!!”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는 녀석.
그 덕에 수업은 중단되었고, 교실에 있는 시선들이 우리 쪽으로 쏠렸다.
날 더욱 당황스럽게 만든 건 녀석에게 이끌려 교실을 나왔다는 사실.
“화려한!”
“입 다물고 따라와.”
“너 미쳤어?”
“…….”
그러나 녀석은 대답 없이 팔을 잡아끌며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황제대회가 열렸던 강당.
허나 날, 없는 사람 취급하며
무대 위로 올라가 앉더니 다른 곳을 멍하니 응시한다.
“야! 화려한!”
“언제부터 알고 있었냐?”
앙칼진 내 목소리와는 반대로
씁쓸함마저 느껴지는 려한이의 음성.
“너희 아빠랑 우리 엄마 결혼한다는 거, 언제부터 알고 있었냐고.”
“...아빠 왔을 때.”
“뭐라고 했어?”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답답해 미칠 것만 같다.
“나처럼 소리 지르면서 싫다고 했어?”
“말하고 싶지 않아.”
“병신같이 가만히 있었냐? 아님 찬성이라도 했어?”
“화려한!!”
“부모가 네 인생 대신 살아줘? 부모가 죽으라면 죽을 거야?
왜 네 의견은 없는 건데? 왜 네 의견, 아니 네 감정을 무시하는 건데?”
려한이의 한마디, 한마디가 깊숙하게 찔러 들어온다.
“말해봐.”
“뭘?”
“솔직한 네 심정.”
싫다. 아빠가 아줌마를 많이 좋아한다 해도 싫다.
“싫지? 너도 반대지?”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지금 그 마음, 절대 변하지 마.
아니, 변해도 좋아. 내가 다시 돌려놓으면 되니까.”
그리곤 강당을 빠져나간다.
이상하게 려한이의 뒷모습에 안도감이 든다.
오랜만에 오빠와 함께하는 하교 길.
어릴 때 오빠 손을 놓았다가 고아 될 뻔한 기억이 있다.
그 후로 가끔 내 손을 꼭 잡고 걷는데, 쪽팔려 미치겠다.
옆에 있는 서예는 날 노려보기 바쁘고.
“오빠야, 나 이제 다 컸어.”
“납치범들한테 잡혀가면 큰일 나.”
“누가 나 같은 걸 잡아간다고 그래? 빈티가 줄줄 흐르는데.”
“맞아요, 오빠. 제순이는 아무도 안 잡아가니까 그만 손놓으세요.”
기어이 끼어드는구나, 참서예.
아무리 그래도 우리 오빠랑 손잡는 일은 없을 거다.
느닷없이 귓속말을 해오는 오라버니.
“내가 손을 한번 꽉 잡으면 죽어라 달려.”
“싫어.”
“오빠가 어제 지네주스 만들었는데 마실래?”
날 어떻게 조정하면 되는지 너무도 잘 아는 빌어먹을 인간.
고개를 끄덕이고 신호가 오기를 기다렸다.
“어? 제요오빠! 서예도 같이 가요~”
울 오라버니, 서예가 지독히도 싫은가보다.
서예 역시 오빠보다 더 잘난 놈이 나타나기 전엔 절대 오빠를 포기하지 않을 텐데.
비유가 부적절하지만,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게 생겼다.
누구 소원대로 서예 따돌리기에 성공.
숨을 고르며 만족해하는 그 누군가에게 물었다.
“서예가 그렇게 싫어?”
“내 아름다움을 구속하려는 자는 적이야.”
“내가 말을 말아야지. 하여간 이 망할 놈의 주둥이가 문제라니까.”
서로 입 다문 체 걷기를 십여 분.
대화가 끊겨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
“제순아.”
무게 있는 목소리에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오빠가 무슨 말 할지 알기라도 하는 냥 마구 뛰어대는 심장.
“평소대로 해.”
“아빠 재혼, 반대해?”
“뭐야! 왜 이럴 때만 오빠인 척 하는 건데? 평소에 좀 그래봐.”
오빠가 진지하게 나올 만큼이나 아빠 재혼이 중요한걸까?
그럼 내 감정은? 려한이 감정은?
우리 어리니까, 한 순간의 감정일 뿐이니까 접으라고?
“려한이... 좋아하니?”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하면 오빠가 아빠한테 말하게?
그래서 아빠 재혼하지 말라고 부탁해주게?
“제순아...”
“좋아해! 그것도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라 미치고 팔짝뛰게 좋아해!!”
“…….”
“왜 말이 없어? 오빠 차례야. 말해. 너 그러면 안 된다고.
너 나쁜 딸이라고. 내 동생은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란 말이야, 이 바보 오빠야!”
어느새 오빠의 크고 따뜻한 품에 안겨있다.
오빠... 나 이러면 안 되는 거지? 그치?
아빠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나... 이제 어떡하지...?
아빠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지신 아줌마.
이틀 뒤인 토요일, 아빠와 함께 우릴 기다리고 계셨다.
이십여 분 후 도착한 려한이 역시 놀란 눈치다.
“려한이도 이쪽으로 와 앉아라.”
아빠의 말에 려한이 내 옆으로 앉았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아빠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다. 너희들 의견부터 들었어야 했는데.”
“이제 저희들 의견은 잘 아시잖아요.”
참을 수 없었던지 려한이 끼어들었다.
“그래. 그래서 확실한 의견들을 듣고 싶어서 다시 왔다. 려한이부터 말해볼래?”
“십대의 반항이라 생각해도 좋고, 광기라 해도 좋고, 어리석음이라 생각해도 좋아요.
하지만 후회를 하더라도 과감히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고 배운 반면, 절대 놓치지 말라고도 배웠거든요.”
그냥 얼굴만 잘난 화려한 아니였나?
얼굴만 믿고 살아가는 화려한 아니였어?
“제순아, 넌 어떠니?”
아빠의 질문에 내게로 향하면서
세 사람의 시선을 한꺼번에 받아야만 했다.
“난...”
어떡하지?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내 한마디 때문에 모든 게 잘못되면?
“제순아, 아빠는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존중해.
그리고 네가 행복해지는 결말이 되었으면 좋겠어.”
“미안해, 아빠. 하지만 아빠가 결혼하는 걸 원치 않는 건 아니야.”
“아빠가 원하는 대답 해줘서 고마워, 우리 딸.”
아빠의 눈이 진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너희는 지금 예쁜 감정들을 키워나가고 있어. 부모라 해도 끼어들 수 있는 부분이 아니지.
아저씨와 아줌마 감정을 말하자면, 너희들 관점에서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을 듯 싶구나.”
아빠는 자기 몫을 다 끝낸 사람마냥 편안히 몸을 뒤로 젖혔다.
아빠와 눈짓을 주고받은 아줌마가 말을 이어갔다.
“결론부터 말하면,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어.
단, 너희가 성인이 되어서도 지금과 같은 마음이라는 전제하야.”
“성인이 되어서도 서로 사랑한다면?”
사랑? 려한아, 과연 우리가 사랑이란 걸 하고 있는 걸까?
“계속해서 교제를 허락하는 거지. 결혼할 시기가 되면 결혼도 할 수 있고.”
“엄마.”
려한이에게서 처음 듣는 단어라도 되는 듯
아줌마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연연했다.
“아들, 가슴 떨리게 왜 그래?”
“고맙다고.”
“너한테서 그런 말 나올 정도로 엄마보다 제순이가 좋은 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난 늙은 변태 아줌마는 싫다고~”
려한이 녀석,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현관으로 달려간다.
“도망 가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야, 아들~”
“어디 그 무거운 엉덩이로 잡을 수 있음 잡아보시지.”
“너 나중에 제순이 시집살이 엄청나게 시킬 거야!”
“누가 변태 아줌마랑 같이 산데? 꿈도 크셔.”
그리곤 밖으로 사라진 녀석.
아줌마 역시 거친 말들을 내 뱉으며 사라졌다.
난 이미 한번 봤던 장면이라 무덤덤했지만, 아빠는 아닌가보다.
“표현 방식이 다를 뿐, 우리랑 같은데 뭘 그리 놀래?”
“그래도 저건...”
“아프리카 간다는 거 뻥이었지?”
“사실 소여사랑 같이 왔었어.”
“소여사?”
“녀석들 엄마 이름이 소춘자야. 그래서 갈 때도 같이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일이 터졌지. 어떤 게 옳고, 후회 안 할 선택인지는 모르겠으나
후회를 하더라도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고 싶은 게, 솔직한 내 마음이다.
“아빠,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이건 후회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란다.
우리 딸 인생, 그 자체지. 아빠, 아침도 못 먹었는데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왕제요씨가 알면 난리 날 텐데요?”
“설마 아빠를 때리지는 않겠지?”
“오빠가 실실 웃으면서 다가오면 도망가. 그게 최선의 방법이니까.”
일요일 오후, 아빠와 아줌마는
내년에나 보자는 인사를 하고는 아프리카로 떠났다.
려한이가 달라진 건 다음날 아침부터였다.
빨리 준비하라고 소리소리 지르길래 무슨 상관이냐고 대답했다.
잠시 후, 방을 나오니 이게 웬일?
천하의 왕제요까지 버려두고 간 나를,
려한이 녀석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느린 곰탱이새끼 삶아 먹었냐? 왜 이렇게 느려 터져?”
“누가 기다려 달랬나?”
“오늘부터 시녀 교육 들어가니까 각오 단단히 해.”
“윤소리한테 직접 말하지, 왜 나한테 말해?”
려한이 마음도 알았겠다~
이제 난 무서울 게 없는, 겁 대가리 상실한 시녀였다.
“반항을 좀 해보시겠다? 네가 아직 나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러나본데
난 자유연애주의자라서 좋아하는 사람 있어도 다른 사람이랑 얼마든지 사귈 수 있어.”
“무슨 자유주의? 그래서 지금 윤소리랑 사귀겠다는 거야?”
“걔 아직 첫 키스도 안 해봤다는데 내 테크닉에 홀딱 빠지면 어쩌나 걱정이네.”
“그걸 믿어? 그 여시 같은 게 아직까지 첫 키스를 안 했을 리 없잖아!!”
“가자마자 옥상으로 불러야겠군. 좋은 시간 보내고 있을 테니 천천히 와라.”
미련 없이 돌아서는 녀석.
좋아한다면서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거지?
내가 만만한 거야, 아님 내 말에 화가 난 거야?
“화려한! 기다려!!”
녀석을 뒤쫓아 가며 소리쳤지만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달려가 잡아 세워야만 했다.
“넌 화려한이 아니라 치사한이야. 알아?”
“시녀는 그런 말해서는 안돼. 무조건 황제 말에 복종이야.”
“그래! 내가 복종 한다 해!
대신, 다시 한번 윤소리 들먹거리면 황제고 뭐고 없어.”
려한이의 눈빛과 미소가 말하고 있다.
왕제순을 좋아한다고. 왕제순을 정말 많이 좋아한다고.
“그렇게 웃지 마.”
“명령은 내가 해.”
“바보야! 다른 여자한테 그렇게 웃지 말라고!”
민망함에 고개를 돌렸는데, 녀석이 내 손을 강하게 잡아왔다.
“시녀야, 가자.”
힘들게 잡은 손, 놓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놓지 마.
우리 죽을 때까지 황제, 시녀하면서 즐겁게 살자.
〈 해나언 〉
출근시간 보다 퇴근시간이 좋은 이유,
집에 가서 쉴 수 있다는 여유로움이 사람들의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행동에 들어가기 전, 며칠 전부터
꽤나 귀찮게 구는 아저씨가 있는지, 없는지부터 확인했다.
평소와 달리 일찍 와서 인지 보이지 않는다.
계획이 틀어지기 전에 행동을 개시하자.
살아있는 시체 마냥 멍한 눈으로 앉아있는 중년 아저씨가 오늘의 먹잇감.
논현역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먹잇감이 문으로 걸어가 섰다.
문이 열리고 열차에서 내리는 먹잇감을 바짝 뒤쫓으며 재빨리 행동을 취했다.
생각했던 대로 두둑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오늘은 배불리 먹고 잘 수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계단을 막 오르려는 순간, 누군가에 의해 뒷덜미가 잡혔다.
“요 녀석! 나쁜 짓 하면 경찰아저씨한테 혼난다고 했어, 안 했어?
빌어먹게도, 그 아저씨다.
겨우 7살이었던 난, 아저씨를 당해내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 억지로 의자에 앉아야만 했다.
“내가 널 본 건 일주일 전, 나쁜 짓은 오늘이 다섯 번째.”
“아저씨 경찰도 아니잖아!”
“이젠 네 이름이랑 나이 정도는 말해줘도 될 것 같은데, 어때?”
“경찰도 아니면서! 참견하지 마!!”
재빠르게 도망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말 안 했나? 아저씨 육상 선수 출신이야.
너도 내 실력 봐서 알잖아. 우리 괜한 체력소모는 하지 말자.”
그렇다. 어떻게든 도망쳤지만 얼마 안 가 잡혔다.
그래도 이 부근에서 발 빠르다고 소문 난 난데.
“음, 내가 볼 땐 7살 정도 된 것 같은데 이름은 뭐지?”
“…….”
“그럼 아저씨 마음대로 부른다? 려미야. 화려미.”
“내가 왜 려미야!! 난 해나언이야!! 그런 기지배 같은 이름이 아니라고!!”
미소 짓는 얼굴을 보자, 내가 당했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해나언, 멋진 이름이구나. 아저씨가 나언이에 대해 더 알고 싶은데
아저씨네 집에 가지 않을래? 만약 네가 7살이면 네 친구도 만날 수 있어.”
친구? 과연 내게 친구란 게 생길 수 있을까?
이곳에서는 친구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설사 쓰더라도 그건 단지 경쟁상대를 뜻하는 말일 뿐이다.
“저 녀석이에요! 저 녀석이 제 지갑을 훔쳐갔어요!!”
젠장!! 날 가리키며 경찰과 함께 걸어오고 있는 먹잇감.
앞에 있는 아저씨를 밀치고 달렸다.
“삐이익 - 거기 서!!”
“나언아!!”
호각소리와 뒤섞여 아저씨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대로 잡히면 다시는 아저씨 얼굴을 못 볼지도 몰라.
귀찮다고 느끼면서도, 사실은 관심 가져 주는 아저씨가 좋았다.
딴 생각을 해서일까? 계단 하나를 앞두고 발을 헛디뎠다.
몸이 뒤로 넘어가는 걸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넓고 따뜻한 품이 내 몸을 감싸왔다.
계단을 구르는 느낌이 났지만 조금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움직임이 멈추자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구급차!! 빨리 구급차 불러!!!”
빠르게 뛰던 아저씨 심장이 조금씩 느려지는 게 느껴져 온다.
한 아이의 아버지가, 한 여자의 남편이 바보같이 죽어간다.
겨우 나라는 인간 때문에.
도둑질만 배운 해나언이라는 고아 때문에.
〈 황제’s 〉
악몽 같던 일 년이 지나가고, 어김없이 다가온 황제 대회.
“제순아~ 문 좀 열어봐. 오빠가 예쁘게 해준다니까.”
려한이한테 세뇌라도 당했는지
2년 연속 시녀 되는 걸 축하한다며 저 난리다.
대학가면 좀 달라질 줄 알았는데.
그건 그렇고 이번엔 절대 화려한의 시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녀석은 날 좋아하면서도, 괴롭히는 걸 즐기는 사악하고 치사한 황제였다.
‘시녀의 화려한 황제 모시기’ 를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잡념을 하는 사이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온 오빠.
“우리 제순이, 그럼 시작할까?”
도망 갈 틈이 없다.
빠져나갈 구실이 없다.
차마 볼 자신이 없어 눈을 감고 기다렸다.
“완성! 어때?”
머리가 심하게 당겨졌던 걸로 미루어 보아 심상치 않을 게 분명하다.
조심스레 눈을 뜨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거울 속엔 조선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비녀 꽂은 월출이가 앉아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
“너무 맘에 들어서.”
“어제 사극 보는 데 너무 예쁜 거야. 그래서 우리 제순이한테 꼭 해주고 싶었어.”
안 그래도 되는데. 이런 건 정말 안 해줘도 되는데.
어차피 학교에서 마주치지도 않겠다, 가면서 풀어야겠다.
“그럼 나간다.”
“데려다 줄게.”
“무슨 말씀을~ 오빠도 학교 가야지.”
“오후 수업이라 괜찮아.”
쓰벌!! 망했다!!
오빠와 함께 다닐 때면 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시선을 받게 된다.
하지만 지금의 시선은 오빠를 향해 있지 않다.
머리!! 월출이 같은 이 머리로 쏠리는 시선들!!
“오라버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발길을 돌리시지요.”
“강의시간까지 4시간이나 남았어. 걱정 안 해도 돼.”
“그게 아니라 오빠 나타난 거 알면 팬클럽 애들 몰려들 거야.”
“졸업식 때 없앴는데 무슨 소리야?”
분명 서예를 자신의 앞까지 대령해 놓고 해결했지.
하지만! 소문 듣고 입학 한 신입생들이
‘킹제요 황제’ 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만들었다.
킹제요라는 전설 아닌 전설의 팬클럽 회장인 서예는
‘왕제요한테 시집가기’ 라는 프로젝트에 돌입했다지, 아마?
다행스러운 건 장본인은 전혀 모른다는 사실.
알기라도 하는 날엔 서예와 나의 관계는 그 순간 끝날 것이다.
“신입생들이 만들었어.”
“주인공인 나도 없는데 왜?”
“그야 나도 모르지. 오빠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게 있는데
이번 애들, 서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아. 정보통도 어찌나 좋은지”
뭔가 허전한 것 같아 옆을 보니 어느새 사라진 인간.
이렇게 여자들에게 시달리기만 하다 평생 혼자 사는 거 아니야?
만약 그렇게 되면 두 목숨 살리는 셈 치고 서예에게 팔아야겠다.
킥킥거리며 지나가는 여중생들 모습에 월출이가 떠올랐다.
왕제요!! 오늘 서예 데리고 갈 거니까 각오해!!!
아는 인간이라곤 서예, 려한이, 나언이, 새록이가 전부인 내게
2학년 3반은 한달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낯설었다.
그나마 서예가 쉬는 시간마다 놀러 와 외로움을 떨쳐버릴 수 있었지만.
한 사람이 빠진 것 같은데~ 그래!
개인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전학을 간다며 떠난 윤소리!
공개적으로 망신당했는데 쪽팔려서 어떻게 학교를 다니나~
그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점심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작년과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 사랑하는 국경고 학생들. 내 말 들리지요? 2시부터 황제대회가 있을 예정이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1시 30분까지 강당으로 모이세요. 그리고 후보들은 교장실로 와용.
그리고 내 사랑 제요군! 아! 제요군 졸업했지? 제순아, 제요한테 안부 좀 전해줘~”
정말 오빠 말대로 못 말리는 영감탱이다.
“왕제순!! 가자!!!!”
도망 갈 기회조차 주지 않는구나, 이 망할 붓글씨야.
하지만 난 절대 가지 않을 거란다. 려한이 시녀 따위는 안 할 거라고!!
붓글씨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까지는 좋았는데
누군가와 부딪혀 뒤로 나자빠지는 신세가 되었다.
“아이고, 엉덩이야.”
“븅딱-”
이 목소리와 이 단어는?!
일년 전, 처음 마주했던 순간 나언에게서 들었던 거다.
“모자란 촌년 같으니.”
옆에 있던 새록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산새록, 우리 그만 친해질 때도 되지 않았니?”
“누가 너 같은 거랑 친해진데? 꿈 깨.”
“잡았다! 왕순대, 너 죽고 잡냐? 앞자리 없으면 죽을 줄 알아!!”
결국 난 서예의 분노에 찬 힘을 이기지 못하고 강당으로 끌려갔다.
여전히 오빠가 일순위지만,
미소년이라면 죽었다가도 깨어날 인간이니 이해하자.
단!! 려한이 눈에 띄어 저 무대 위로 올라가는 날엔,
내 기필코 순덕이랑 너!! 커플 만들어 버릴 거니까 각오해!!
작년과 마찬가지로 한껏 멋을 낸 음악샘이 나와 설명을 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뛰쳐나온 순덕이 마이크를 가로채며 소리쳤다.
“참서예!!!!”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옆에 있는 서예를 바라봤다.
눈이 반쯤 튀어나온 상태에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다.
녀석, 서예를 발견했는지 우리 앞으로 와 서더니 무릎을 꿇고 말을 이어갔다.
“서예야! 일 년 넘게 너만을 바라보며 네 뒤에 있었어.
하지만 더 이상은 혼자 하는 사랑은 못하겠어. 제발 내 마음을 받아줘!!”
언젠가 일이 터질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크게 터질 줄은 몰랐다.
이미 제 정신이 아닌 듯 보이는 서예를 흔들자 그대로 쓰러진다.
“서예야!!!”
무대에서 뛰어 내려 온 순덕이 서예를 안더니 뛰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휘파람과 함께 격려의 응원이 쏟아져 나왔다.
“와우! 고백 멋진데?”
“스멜맨!! 잘 해봐~”
“빼도 박도 못하게 확 덮쳐버려!!”
이 상황에서 웃으면 안 되는데 자꾸 웃음이 난다.
서예야, 직접 말하기 쑥스러울 테니 오빠한테는 내가 말할게.
참서예는 오순덕 거니까 절대 넘보지 말라고 말하면 되지?
그리고 순덕아, 내 마음 미리 알고 행동해 줘서 너무 고마워.
이제부터 난 너의 든든한 후원자야. 오순덕, 파이팅!!!
순덕이의 열렬한 사랑 고백으로 잠시 중단된 황제대회가 다시 시작됐다.
잘생긴 전학생이 없던 관계로 2, 3학년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문보문 선배와 려한이가 황제자리를 차지했다.
1학년은 려한이와 버금가는 외모를 가진 녀석이 뽑혔다.
교장샘이 마이크를 들고 앞으로 나와
이제 시녀를 뽑는 건가 했더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확실히 결정된 건 아니지만 또 다른 황제를 뽑아 봤어요.
그 이름하야 몸짱의 황제! 어때요? 얼굴의 황제만큼 죽이죠?”
몸짱의 황제?
얼굴 잘난 황제도 모자라 이젠 몸매 죽이는 황제를 뽑는다고?
“우선 2학년에서 뽑아봤는데, 반응 좋으면 내년부터 몸짱의 황제도 뽑습니다.
그럼 제 1대 몸짱의 황제가 될지도 모를 해나언 학생, 무대 위로 나오세요.”
나언이? 해나언이 몸짱의 황제?
얼굴의 황제 때와는 달리 고요하기만 한 강당.
무대로 나온 나언이 려한의 옆에 섰다.
“그럼 우선 시녀부터 알아볼까요? 3학년 문보문 황제부터 말해보세요.”
“없습니다.”
소문엔 여자친구가 있다고 들었는데.
하긴, 누구와는 차원이 틀려 시녀로 만들어 괴롭힐 리 없지.
“아쉽군요. 이번엔 2학년 화려한 황제차롄데,
과연 작년과 같이 땡촌 학생을 지목할까요? 자, 화려한 황제.”
“저부터 말하면 안 될까요?”
려한이에게 마이크을 넘기려던 교장샘이 멈칫했다.
“몸짱의 황제 해나언군의 말부터 들어볼까요?
참고로 얼굴의 황제가 시녀라면 몸짱의 황제는 몸종입니다.”
얼씨구~ 시녀, 몸종. 아주 난리 났네.
“꼬봉.”
“땡촌 만큼이나 특이한 꼬봉! 꼬봉 학생, 나와 주세요.”
우어우어- 나언 대장!!!!!
“해나언, 땡촌은 내 시녀다.”
“내가 먼저 지목했으니 내 몸종이지.”
“정면승부 하시겠다? 좋아. 땡촌! 나와!!”
두 사람, 내가 만만해도 그렇지!! 이건 아니야!!
머리로 얼굴을 가렸지만 주위에 있던 아이들로 인해 무대에 서게 된 나.
“말해! 시녀야, 몸종이야?”
“꼬봉아, 배신은 곧 죽음이다.”
“얼굴 황제의 시녀냐, 몸짱 황제의 몸종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지금 상황이 꽤나 재미있는지
교장샘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빨리 말해!!”
내게 괜한 화풀이를 해대는 화려한.
“소리는 왜 지르고 그래!! 안 해! 시녀도 안 하고, 몸종도 안 해!!”
“자, 자. 그럼 이렇게 합시다. 제순양을 똑같이 사용하는 거 어때요?
행사 있으면 셋이 같이 활동하고, 필요에 따라 시녀나 몸종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내가 무슨 물건이냐고, 이 변태 교장아!!
막 싫다고 말하려는 순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두 녀석.
“2년 연속 시녀자리는 물론 몸종자리까지 차지한 제순양에게 박수!!”
“뭐냐고요!! 안 한다고 했잖아요!!”
“너에겐 선택권이 없단다.”
“그럼 저, 전학갈래요. 내일 당장 전학 갈 거니까.”
“미안하지만 내가 이미 모든 고등학교에 얘기 해놓은 상태라
아마도 넌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구나. 그냥 시녀, 몸종 해라.”
내 반드시!! 반드시 황제대회 없애고 말 거야!!!!
사람 노예취급 하는 이 망할 놈의 구라대회!! 없앨 거야!! 없애고 말 거야!!!!!
[국경고 명예의 전당]
이곳엔 2, 3년 연속으로 황제로 뽑힌 자나
뽑힌 황제에게 3년 연속 선택 당한 자만이 오를 수 있다.
<얼굴의 황제>
제 1 대 황제 왕제요.
제 2 대 황제 화려한.
제 3 대 황제 산 오.
<몸짱의 황제>
제 1 대 황제 해나언.
제 2 대 황제 리써니.
<황제의 시녀>
제 1 대 시녀 왕제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자 황제가 뽑혔는데,
그 인물이 바로 제 2대 몸짱 황제인 리써니.
-현재 국경고는 얼굴의 황제, 몸짱의 황제 말고도
애교의 황제, 미소의 황제 등 다양한 황제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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