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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신의강림 1권

by 아도비야 2021.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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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신의강림 1권 - 쥬논 판타지&무협소설  
 



프롤로그
아르만 제국의 서남방에 위치한 다트리인 성은 제국 남부의 상업 중심지인 대도시
프라인을 방어하는 제일 관문일 뿐만 아니라, 남부 전체를 방어하는 중심축이다.
또한 이곳에는 아르만 제국의 핵심 전역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붉은사자 기사단이
머물고 있다.
그 이름만으로도 위풍당당하던 다트리인 성이건만 지금은 온통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성내에 팽배해진 긴장감만큼 분위기도 음울하고 날씨까지 음산하다.
휘이잉
약간은 빛이 바랜 붉은 패너플리(Panoply; 갑주)를 장착하고 한손에는 키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장창을 꽉 움켜 쥔 기사들. 그들의 눈은 굳은 결의로 빛나고 움켜쥔
주먹에는 힘이 가득 들어가 있다. 성벽 위에 일렬로 늘어선 기사의 숫자만 해도
모두 200 여명. 제국 최고를 다투는 붉은사자 기사 단 전원이 성벽을 사수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대단한 전쟁이라도 치를 듯한 분위기다. 성채 아래에서도 수만이
넘는 군사들이 각자 무기를 든 채 북을 울리며 두려움을 이기려고 애쓰는 모습이고,
곳곳에 배치된 흰 로브의 마법사와 신관들이 공포를 이기는 주문을 걸며 병사들을
독려하는 중이다. 어디 그뿐인가? 성채의 첨탑에는 솜씨 좋은 궁수들과 석궁이
하늘과 땅을 향해 날카로운 화살촉을 빛내고 있다.
붉은사자 기사들의 패너플리에는 상위의 방어 마법 주문이 걸려있는데다, 기사의
움직임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근력증가, 가속마법, 그리고 체력회복 마법도 함께
보완되어 있다.
하지만 그 위용의 이면에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공포가 섞여 있었다. 기사단의
이름이 말해주는 용맹한 사자 같은 용기로도, 다이아몬드처럼 굳건한 신앙심으로도,
넘치는 기사의 신념으로도 온몸에서 배어나오는 공포의 감정을 미처 숨길 수가
없다.
쏴아아
무섭도록 긴 침묵이 이어지던 어느 한 순간!
바람소리만 황량한 가운데 다트리인 성 남쪽 방향으로부터 무언가 기분 나쁜
먹구름이 바람을 타고 성을 향해 서서히 밀려들어오자, 첨탑의 궁수들로부터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조그만 웅성거림은 이내 전채 병사들에게 퍼져나가며 성 전채를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마법사들이 몇 차례 공격 마법을 퍼붓고, 신관들이 영창을
외워봤지만 무소용, 마치 해일에 돌을 던 진 듯이 흔적도 없다.
어느새 코앞까지 검은 먹구름이 소용돌이처럼 성을 중심으로 조여 들더니, 마치
지옥이 지상에 아가리를 벌리듯 동체 중앙을 블랙홀처럼 쩌억 개방했다.
쑤아악
동시에 지상에는 뿌연 안개가 사방에 깔려 성 밖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 메워
버렸다.
"저, 저기다!"
기사 한명이 무엇을 발견한 듯 목 터지게 외치자 군중들의 시선이 모두 한 지점에
가서 멎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그 끝, 안개 가득 차 희끗거리는 허공에는 검은
로브를 눌러써서 얼굴도 보이지 않는 괴인이 유령처럼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저자가 그 악마다. 전원 공격! "
기사단장의 고함과 동시에 수천 개의 화살이 허공을 가르고 장거리 마법이
난무하며, 붉은 사자 기사 들이 검에서 오러(aura)를 뿜어내며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막상 이 엄청난 공격을 한 몸에 받은 괴인은 그저 로브 아래로 비릿한
웃음을 보여주며 서서히 두 손을 벌려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릴 뿐이었다.
츠츠츠
그때 뭔가가 맹렬하게 끓어오르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검은 기류들이 괴인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고, 그 기류에 휘감긴 것 은 무엇이든, 그것이 화살이든,
사람이든, 미스릴로 만들어진 패너플리든, 심지어 기사들이 뿜어내 는 오러나
마법까지도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마치 소금이 물에 녹는 것처럼, 어이없고도
허무하게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기사와 마법사들의 두 눈에 떠오른 믿을 수
없다는 의구심은, 이내 지독한 절망과 공포로 바뀌었다. 어느새 성벽을 넘어온 짙은
안개는 바로 옆 동료의 얼굴도 보이지 않을 만 큼 찐득하게 대지를 감싸 안았고, 그
안에서는 듣기에도 끔찍한 비명소리가 밀물처럼 퍼져나갔다.
크아악!
꺼억!
안개에 휘감긴 모든 병사들은 목을 쥐어뜯고 손으로 석벽을 긁으며 괴로워하며 하나
둘 고꾸라져갔다. 치유 마법을 뿌리는 신관들도 병사들의 모습이 온통 얼굴이
뭉그러지고 온몸에 기포가 돋아나며 칠 공에서 피가 터져 나오자 질린 표정으로
비칠거리며 물러설 뿐 속수무책이다.
" 이, 이건 말도 안 돼. 아아, 이건 재앙이야! "
" 으아 아아! 제발 살려줘! 으아 아아아!"
" 아아아~ 신이시여, 제발 저희에게 자비를. "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며 성문을 열고 도주하려 했지만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고꾸라지며 뭉그러진 몸뚱이를 대지에 처박았다. 성벽 위 기사들 상황도 비슷해서
온 몸에 오러를 두르고 안개의 접근을 막아 보았지만 마나가 고갈 되면서 오러가
수그러들자를 두르고 안개의 접근을 막아 보았지만 마나가 고갈 되면서 오러가
수그러들자 이내 피부에 기포가 솟구쳐 올라오며 무너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붉은사자 기사단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기사단장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악을 쓰며 저주를 퍼붓더니, 발악이라도 하듯이 신형을 날려 괴인에게 폭사했다.
같이 죽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푸화학
하지만 그런 갸륵한 시도마저 괴인의 손에서 피어오른 녹색 불꽃과 부딪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녹색으로 영롱히 빛나는 불꽃이 오러를 뚫고, 그리고
패너플리마저 뚫고 몸에 틀어박히자 기사 단장은 온몸이 갈가리 찢겨져나가고
타들어가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수십 미터 아래 성바닥으로 거칠게 곤두박질 쳐
버렸다.
츠츠츠
뱀의 비늘처럼 일어나는 녹색 불꽃은 삽시간에 기사단장을 태워 버리고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순식간에 거대한 뱀처럼 똬리를 틀며 성탑 10여개를 줄지어
휘감았다.
안개가 다트리인 성을 뒤덮은 지 반시간, 살아있는 생명체라고는 풀 한 포기도
남기지 않은 채 짙은 먹구름과 안개는 주변 수십 킬로미터를 장악하며 천천히
북상을 시작했다.
바람의 이동에 따라 서서히.
인구 백만에 육박하는 대도시 프라인을 향해서.


1. 크로노스의 신탁
" 단 한명의 생존자도 용납하지 않는다. "
눈처럼 흰 패너플리에 황금빛 독수리 문장, 육중한 흰 투구 위에는 눈부시도록 붉은
수실이 화려하게 장식되어있다. 신성제국(神聖帝國) 루안이 자랑하는 흰 독수리
기사단을 진두지휘하는 요오크 후작의 눈이 야성의 매처럼 매섭게 빛이 났다.
가지런히 정돈된 흰머리, 흰 눈썹, 흰수염, 그리고 큰 키에 비교적 마른 체형.
일견하기에도 성정이 칼같이 날카롭고 얼음처럼 냉정할 듯한 모습이다.
백마 위에 올라앉은 요오크 후작이 일갈 사자후를 터뜨리자 백색의 패너플리를 걸친
기사들이 선이 떠나갈 듯한 함성과 함께 질풍처럼 말을 내달렸다.
그 수가 무려 200 여기.
새벽이 아직 오지 않은 시각, 어슴푸레 사물의 윤곽이 보일 정도로 세상은 아직
어둡다.
100여 채 정도 가구가 모여 사는 조그만 마을은 평상시 모습대로 고요하고
적막하다. 집에서 키우 는 가축들도 모두 자고 있는 시각이기에 조용한 바람 소리만
윙윙거릴 뿐이다.
두두 두두두
하지만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거세게 울리더니,
화르르륵 화르륵
순백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던진 불쏘시개가 촌락의 가옥들을 태우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아비규환(阿鼻叫喚)의 비명 소리가 퍼져 나갔다.
고대로부터 전해져 온 신성마법의 축복을 받은 기사들의 검에서는 뿌연 우윳빛의
오러가 광채처럼 타올랐고, 거기에 스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이 사람이건,
가축이건, 집의 담벼락이건 가리 지 않고 갈라지고 무너지고 쓰러졌다. 평범한
서민들의 배를 가르고 머리를 자르면서 기사들의 눈동자에 괴로움이 어린것도
한순간, 뒤이은 요오크 후작의 고함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고 눈에 힘이 솟았다.
"일체 사정을 봐주지 말라! 저들은 신의 뜻에 대항하는 악의 종자들이다."
삽시간에 백여 개 남짓한 가구가 모두 불길에 휩싸이고, 불을 피해 도망쳐 나온
자들은 기사들의 검 에 베여 넘어졌다. 죽는 자들의 눈에도, 그리고 압도적인
힘으로 살육을 벌이는 흰 독수리 기사단의 눈에도 요악한 화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마을이 전화에 휩싸이는 가운데 마을 외곽 쪽에 위치한 가장 허름한 모옥에서도
다급한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제릭스, 굴테인, 하이시스, 그리고 지온.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전부터
일깨워 왔지만 너 희는 우리 크로노스 교단의 미래다. 교의 성지가 불타오를 때
수많은 장로들이 너희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실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 "

사내아이 셋과 여자 한명.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귀를 기울이는 네 아이들
앞에는 30대로 보이는 여인이 서있다. 요악하도록 아름다운 바탕을 일부러 꾸미지
않고 허름한 촌부의 모습으로 가리고 있는 여인의 눈에는 다급함이 가득하다.
"저주 받을 루의 개들이 벌써 여기까지 찾아왔을 줄은 몰랐다만, 그래도 걱정
말아라. 너희 는 평소 연습한대로 이 비상통로를 따라 빠져 나가면 된다. 그러면
숲에서 너희를 기다리는 교우가 있을 거야. 이제부터는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
너희를 돌봐 줄 것이다. "
"테미스는 어떻게 하고요? "
여자아이 하이시스의 질문에 테미스라 불린 여인의 눈가에 어둠이 깔렸다.
"난 저들을 막아야지. 이래봬도 크로노스님의 영광스런 열아홉 사제 가운데 하나야.
저들 몇은 지옥으로 보내 줄 수 있어. 그리고 가능하면 나도 몸을 빼서 너희를 쫓아
갈 생각이고. "
여인의 마지막 말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 아이들은 그 사실을 그녀의 표정으로부터
읽을 수 있었다.
"그럴 리 없지만 만일에 일이 잘못되면 각자 재주껏 숲을 빠져나가 남쪽으로 가서
숨어 있거라. 그러걋?잘못되면 각자 재주껏 숲을 빠져나가 남쪽으로 가서
숨어 있거라. 그러고 있으면 후일 누군가 너희를 찾아갈 거야. 너희에게는
크로노스님의 표징(表徵)이 있으니까. "
뭐가 걱정되는지 잠시 말꼬리를 흘리던 여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 어서 움직여, 어서. 그리고 꼭, 복수를 잊지마라, 복수를. "
아이들이 지하로 연결된 땅굴로 빠져나가자, 여인의 눈가가 검붉게 물들며 사이한
기운이 뿜여져 나왔다.
"루의 개들아, 다 오너라! 다 죽여주마! "
불타오르는 벽을 부수고 뛰쳐나간 여인은 두 팔을 벌리며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인의 미 간 정중앙에 푸른 Y 문양이 타오르듯이 나타났다.
" 저기 악신 크로노스의 마녀가 나타났다. "
언덕 위에서 마을을 주시하던 요오크 후작이 크게 외치자 기사들은 일사분란하게
대열을 갖
추며 테미스를 에워싸는 진용을 형성했다.
"우리의 신 크로노스시여 전능한 파괴의 손을 내려주시고 불로써 이 세계를
정화하소서. "
찢어지는 듯한 여인의 저주가 내뱉어지더니,
화르르륵
모옥들에서 타오르는 불꽃 사이로 타죽은 시신들이 불길에 휩싸인 채로
어슬렁거리며 나타나 기사들 과 대치를 이뤘다.
"그 마녀는 크로노스 교단의 19 사제 가운데 한명이다. 모두 화염의 구울들과 직접
부딪치지 말고 성력으로 밀어내기만 하라. "
요오크 후작은 명을 내리자마자 손수 검을 뽑아 들고는 순식간에 마상을 박찼다.
화려하게 장식된 그의 검에서는 어느새 흰 오러가 1 미터 가까이 쭈욱- 뿜어졌고,
말이 다 끝나기 도 전에 테미스의 코앞에 득달했다. 오러에 둘러싸인 검과 사람의
손이 부딪치는데 불똥이 튀며 금속음이 울렸다.
검붉은 핏줄이 징그럽게 두드러진 테미스의 양손은 시커멓게 죽어 보인다. 그런데도
성국 루안이 자랑하는 기사 요오크 후작의 검과 직접 부딪치고도 흠집하나 나지
않았다.
" 흥, 무고한 임산부와 태아를 더러운 크로노스에게 제물로 바치고 얻은 파괴의
손이냐? 악독한 마녀. "
요오크 후작이 하늘의 신장처럼 준엄하게 외치며 검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곧이어
그의 전신이 성스러운 후광에 휩싸이고, 검에 형성된 오러는 눈 뜨기도 힘들도록
빛을 내뿜었다.
"우리의 주신 루의 권능을 빌어 맹세하니, 이제 마녀의 힘은 성스러운 검 아래 한낱
모래와 같아지리라. "
요오크는 성기사 가운데 성기사로 추대 받는 인물이다. 그의 굳은 신념과 강인한
정신, 그리고 뛰어 난 검격은 성국 루안에서도 발군으로 꼽히고 있다.
요오크의 검에서 뿜어지는 빛에 비칠거리며 물러서는 테미스는 두려움을 떨치며
이를 악물었다.
저자의 검에 얼마나 많은 사제들이 죽었던가!
교의 제사장도 저자의 검을 막지 못했거늘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한창 도주중일 아이들을 떠올리면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누가
뭐라고 비난해도 크로노스 교는 그녀의 신념이며, 아이들은 그녀의 미래다.
기사들과 대치중인 화염의 구울들을 모두 불러들여 요오크를 공격하게 명한 뒤,
그녀 스스로도 빛무 리에 휩싸인 요오크에게 손수 뛰어들었다. 저 빛이 그녀에게
상극임을 잘 알고 있지만, 어떻게든 요오크와 같이 죽기라고 하려는 속셈이다.
"너의 뜻대로 될 줄 알았더냐? 루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검은 사악함이 범접할 수
없다. "
화악 화악
테미스의 검붉은 양손은 철판도 종잇장처럼 찢어발기고 석벽도 감자처럼 으깨
버리지만, 요오크의 오러가 스치고 지나가자 어이없이 잘려 나갔다. 다가서던
화염의 구울들도, 빛무리에 닿자마자 뼈대까지 성화(聖火)에 휘감기며 한줌의 재로
타버렸다. 일합의 겨룸으로 손가락 네 개가 잘린 테미스의 눈가로 절망이 어렸다.
그녀에게는 저 빛이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장벽처럼 느껴졌고 전의가 사그라졌다.
그리고 그녀가 다 물러서기도 전에 바람처럼 따라잡은 요오크의 검이 둥근 궤적을
그리자, 그 궤적 안에 위치해 있던 그녀의 좌수는 팔꿈치 아래로 썽둥 썰려나가며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도 함께.
요오크의 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빛무리가 더 길게 늘어나더니 연속에서 좌로 비스듬한 원을 그리고 우로 비스듬한
원을 그리며, 마 치 빛의 원이 고리에 고리를 이으며 펼쳐지듯이 공간을 메우며
달려들었다.
발 빠르게 몸을 뒤로 빼며, 뼈 무덤을 소환하고, 저주의 늪을 소환하고,
공간이동까지 했건만 요오크 의 검은 이 모든 것을 무처럼 베어버리고 그녀의 턱
끝을 둘로 쪼갰다.
공간 이동이 조금만 늦었어도 턱이 아니라 머리가 양단 되었을 거란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 졌다. 아랫니가 덜덜 떨리며 턱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지는 가운데, 그녀의
우수가 발악하듯이 요오크의 검 사이도 들이밀어졌지만 그도 헛손질.
원을 그리는 요오크의 검은 어느새 방어로 바뀌어 테미스의 우수마저 써걱 팔목에서
베어버렸다. 양손을 다 잃고 그녀가 얻은 것은 겨운 한숨 돌릴 틈뿐이다.
"베어버렸다. 양손을 다 잃고 그녀가 얻은 것은 겨운 한숨 돌릴 틈뿐이다.
"나의 검 아래 이정도 버틴 것은 칭찬해줄 만 하다만, 시간 끄는 것은 의미
없을게다. 숲으로 도 망간 악의 종자들은 하나도 살아남지 못할 테니. "
"무, 무슨 소리냐? 그, 그걸 어떻게? "
"이미 성기사들이 그곳에 대기 중이다. "
" 서, 설마?! 으으- 아르테인이? "
" 흥, 이제 눈치 챘나본데, 열아홉 사제 가운데 아르테인은 위대하신 교황성하의
부름을 받고 크로노스 교단에 잠입했을 뿐이다. 오로지 악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 "

" 으아 아아! 아르테인! 이 배교자! "
피눈물을 뿌리며 악을 쓰는 테미스의 미간 사이로 요오크의 검이 짙은 빛무 리와
함께 떨어졌다.
화륵
불로 지지는 고통도 잠시, 전신이 세로로 양단되며 쓰러진 테미스의 눈은 불길에
쌓인 모옥을 응시하고 있었다.
원한으로 부릅뜬 채로.
쏴아아
세차게 내리는 비 덕분에 마을을 잿더미로 만든 불길은 모두 잡혔다.
하지만 이미 모든 가구는 다 타서 재만 남았고, 목재와 시신이 타서 엉겨 붙은 탓에
모양만 더 지독 해졌다.
흰 독수리 기사단의 말발굽이 지나간 지도 열흘, 그리고 비가 오기 시작한지도
사흘이 지났다.
폐허의 틈새, 마을 중앙 촌장의 집 바닥이 잠시 들썩들썩 하더니 두꺼운 널빤지가
삐익 거리며 올라왔다.
무엇이 그리 조심스러운지, 올라온지도 한참을 지나서야 어두운 가운데 눈동자
하나가 스윽 드러났 다.
' 아무도 없는 것 같아. 탐색 마법은 해지 되었고. '
소곤거리는 소년의 음성이 울리더니 이내 널빤지가 다 들어올려지고 나서
다람쥐처럼 빠르게 소년 하나가 지하에서 튀어나왔다.
이윽고 하나 둘 빠져 나오는 아이들의 수는 모두 넷.
사내 셋 여아 하나다.
' 테미스는 죽었겠지? '
두 번째로 나온 굴테인은 까무잡잡한 피부에 살기 짙은 모습, 그리고 민첩한
몸놀림과 뾰족한 귀를 가지고 있다.
한눈에 봐도 전설의 다크앨프와 인간 사이에 낳은 변종임을 알 수 있다. 머리는
진한 붉은 빛을 띄고 있어 어딘지 모르게 테미스를 연상시킨다.
굴테인의 우울한 음성에 처음 나왔던 아이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 아마도. 그렇겠지. 하지만 우리가 있잖아. 복수할 수 있는 우리가. '
제릭스는 일행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데다 눈이 영활하게 돌아간다. 덩치가 크고
뼈대가 굵은데 다 금발에 수수해 보이는 모습이다.
그가 일행의 리더격인 듯, 모두 그를 중심으로 모여 있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여자 아이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 탐색마법이 해제된 것은 잠시 뿐이야.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숲으로 도주했던
대역들에게 심 어 놓은 생명의 등이 모두 꺼진 것으로 보아, 테미스의 예상대로
아르테인이 배교자일 테고. 모두 잊지 않았겠지? 아르테인의 주특기가 무엇인지? "
" 예지, 그리고. 정신교란! "
" 맞아. 그러니까 우린 안전한 상태 아니라 잠시 시간만 벌었을 뿐이라고. "
하이시스의 말에 제릭스의 눈가에 분노가 자리잡았다.
" 빌어먹을, 안되겠어. 우리 여기서 흩어지자. "
" 흩어지자고? "
굴테인의 물음에 제릭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 중 한명만 잡혀도 아르테인은 머리 속을 뒤져서 나머지를 죄다 찾아낼 수
있어. 그러니까 서로 어디 있는지도 몰라야 해. 각자 도망치다 보면 최소한 한둘은
도주할 수 있겠지. "
" 하지만 도주 후에는? 우리가 뭘 할 수 있지? "
" 각자 힘을 길러. 우리는 크로노스님의 축복을 받았으니까 어디에 있던지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을까 야. 그리고 10년 뒤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 "
제릭스의 냉철한 말에 바로 하이시스가 동조했다.
" 지금 찢어지자. 제릭스의 말대로 우리 크로노스교가 망하기 직전에 장로들이 우리
기억 속에 교단의 방대한 유산을 나누어서 남겨 놓았다고 했어. 그 유산을
각성한다면 복수할 수 있는 길이 보일 거야. "
모두들 그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네 아이 가운데 제릭스가 가장 먼저 등을
돌리며 숲으로 뛰어 들어갔다.
결심이 섰다면 바로 행동하는 것이 좋다.
뒤이어 굴테인이 움직이고 하이시스도 떠났다. 떠나기 전 쥬논에게 손을
흔들어보이더니 빠르게 모 습을 감추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아이는 쥬논.
검은 머리에 약간 마른 편. 이목구비 하나하나는 뚜렷하고 잘생겼지만, 한참을
들여다봐도 잘 기억 이 나지 않을 듯한 소년이다.
말도 없고, 특색도 없다.
심지어 존재감마저 느끼기 힘든데, 아마도 외모에 아무 특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유일하게 기억나는 점은 윤기 있는 검은 머리카락 정도.
쥬논이라 불리는 마지막 소년도 퍼붓는 비를 맞으며 마을을 떠났다.
나머지 셋과는 달리 숲이 아니라 마을의 오솔길을 택한 점만 다를 뿐이다.
십사 년 전 정월, 크로노스의 신탁은 사도들에게 한 가지 예언을 내렸다.
< 나의 축복을 받을 아이를 찾아 준비하라. 그를 통해 나의 진정한 힘이 현신할
것이오, 나의 뜻 이 이루어지>?준비하라. 그를 통해 나의 진정한 힘이 현신할
것이오, 나의 뜻 이 이루어지리라. >
교의 제사장 에그몬트 루시반이 크로노스에게 물었다.
" 그를 어찌 알아보나이까? 미천한 종이 눈이 멀었거늘 그를 어찌 알아보나이까?
그가 어떤 모습으 로 저희에게 오나이까? "
신탁이 답했다.
< 그는 너희 종들 가운데 하나의 모습으 로 너희에게 갈 것이오, 스물 둘의 해가
바뀌면 스스로를 자각하여 뜻을 펼칠 것이다. 그는 시련과 함께 성장할 것이며
고통의 불속에 타오를 것이며 마침내 새 세상을 열 것이다. 그는 바로 나의
살아있는 현신이다. >
제사장 에그몬트는 목이 타는 갈증을 참기 어려웠다.
" 우매하기 그지없는 제가 어찌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그가 언제 오는지, 그리고
사내인지 여자인 지만이라도 신탁을 내려 주십시오. "
< 그는 어둠이 극에 달하는 매해의 마지막 날 자정에 태어날 것이며, 현재로부터
사년 안에 모습 을 드러낼 것이다. 그는 남자의 모습으 로도, 또한 여자의 모습으
로 갈 수 있다. 그를 찾아 준비하라. 나의 종이여. >
그날, 제사장의 지상 명령이 교단의 각 지부로 퍼져 나갔다.
매해 12월 31일 자정에 아이를 낳도록 모든 교도들은 전념을 다하라는 것과, 그
아이들을 제사장 앞으로 데려 오라는 명이다.
크로노스는 난교와 음행에서 오는 열락을 추구하는 종파다.
명이 전달되자마자 12월 말일이 오기 10개월 전부터 약 한 달간 모든 교도들은
각지에서 집단적으로 난교와 음행에 빠져들었고, 그 해 말일 자정에 마침내 첫 아이
제릭스를 얻었다.
사년에 걸친 음행을 통해 매년 한명씩 신기하게도 네 명의 아이가 선택되었으며,
그들의 이름은 각 자 제릭스, 굴테인, 하이시스, 그리고 쥬논이었다.
난교를 통해 얻어진 아이들은 대개 대부(代父)의 성을 따르는데, 네 아이에게는
대부도 없고 성 또한 받지 못했다.
제사장은 자세한 신탁의 내용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교의 장로들이나 19
사제 심지어 네 아 이에게조차 함구했다.
덕분에 교의 장로들은 네 아이 모두 축복의 아이로 받아들였고, 그들 모두에게
골고루 크로노스 교 단이 쌓아 온 지식과 전통을 전수했다.
그리고 교 단이 루안 성국의 성기사들에게 처절하게 붕괴되기 직전, 제사장
에그몬트는 또다시 신탁 을 받았다.
< 나의 축복과 권능을 받은 그 아이에게 시련의 시기가 도래했다. 몇 년 후 스물
둘의 나이에 스스로의 힘을 각성하는 것이 내가 줄 수 있는 유일한 축복. 그
이후로도 그가 받을 고통은 깊고도 클 것이다. 스스로 왜 세상에 왔는지 깨닫기
전까지는. 아니면 그 후로도 계속. >
"
제가 어찌 하오리까? 어찌 그 아이의 고통을 덜어 주리리까? 말씀하소서. "
신탁은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 그 아이 곁의 나머지를 모두 죽일 수 있다면. 하지만 아니 될 일. 넷 중 누가
축복의 아이인 지, 누가 재앙의 아이인지 전하지 못한다. >
제사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넷 가운데 저, 저주 받을 루의 자식이 있나이까? 재앙의 아이라니?! "
신탁은 더욱 더 긴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 너희 사이에 나를 부정하는 자가 생길 것이며 그에게 오염되는 자 또한 생기리라.
더욱 무서운 것은 모든 인과를 거부하는 태고의 혼돈이 억겁의 눈을 뜨려고 하는
것.
허나, 그리 두지는 않으리라. >


2. 사냥의 계절
"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마지막으로 여기. "
눈부시게 아름다운 흰 손이 탁자에 넓게 펼쳐진 지도에 백색 깃털로 장식된 압정을
하나하나 힘주 어 꽂아 넣는다.
손의 주인은 희디 흰 수도사 복장에 허리에는 금빛 수실을 두르고 금발을 치렁하게
늘어뜨린 사내 다. 대개 신관들이 그렇지만 얼굴 또한 빛나도록 아름답다.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지, 두 눈을 감 고 손으로 우툴두툴한 지도를 더듬으며 압정으로
표시를 하고 있다.
" 그 애들이 도주하는 모습은 보이지만, 잡기는 힘들 겁니다. "
" 잡기 힘들다? 허, 이거 봐, 아르테인. 우리 기사단이 고작 애들 넷을 놓친다는
뜻인가? 게다가 어디로 갈지도 다 예언해놓고? "
크로노스를 따르는 열아홉 사제의 한명.
그리고 교를 배반했다는 아르테인의 이름을 부른 기사는 흰 독수리 기사단의 요오크
후작이다.
악신 크로노스의 선택을 받았다는 꼬마들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각성도
하지 못한 어린애 들이다. 마녀 테미스의 꾀에 속긴 했어도 결국 네 아이 모두 잡아
죽일 수 있음을 눈곱만큼도 의심 치 않던 요오크 후작은 아르테인의 말에 기분이
상한 듯 했다.
" 그 중 한명은 강력한 조력자를 만날 궤입니다. 한명. 여자아이의 앞날은 보이지
않고. 또 한명 은 잡힐 듯 잡힐 듯한데 불투명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한명은 그물에
걸려듭니다. 그물에서 퍼덕 여 보지만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미끼 노릇을 하게
될 아이입니다. "
아르테인은 두 눈을 감은 채로 요오크 후작에게 정확하게 얼굴을 돌렸다. 빙긋 미소
지은 아맛?감은 채로 요오크 후작에게 정확하게 얼굴을 돌렸다. 빙긋 미소
지은 아르테인 의 섬뜩한 모습에 요오크 후작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주신 루를 위해 온몸을 던져 사악한 크로노스 교단에 잠입했던 아르테인이다.
이러한 아르테인의 충정을 신심이 굳건한 요오크 후작으로써는 높이 살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별로 미덥지도 않았고.
" 마음에 들지 않는 얘기군. 200명이나 되는 기사가 투입되는데 네 꼬마 가운데
겨우 하나만 건진 다? 주신 루의 충성스러운 흰 독수리 기사단을 너무 무시하는
발언이 아닌가. "
" 저도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습니다만. "
" 강력한 조력자.가 나타난 다는 곳이 어딘가? 내 그곳으로 직접 가지. 만일 그래도
놓친다면 향 후 삼년간 수도원에서 피정에 둠세. "
무뚝뚝하게 말을 마친 후작은 탁자에서 지도를 훅하니 집어 들더니 뚜벅뚜벅 막사를
나섰다.
세상의 연을 모두 끊고 삼년간 오지의 수도원에 틀어박히겠다는 요오크 후작의 서슬
퍼런 모습에 아 루테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르테인도 요오크 후작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도 요오크 후작의
대쪽같은 자존심과 굳건한 신앙심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아르테인의 귀에 막사 밖 후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 전원 다섯 개의 전투 대형으로. 1, 2, 3, 4 중대는 지도의 표시지점으로
이동한다. 마지막 5중대 는 숲 여기부터 동쪽 끝까지를 빠르게 반복 수색한다. 수색
지점에서 발견된 모든 아이를 다 포박하도록. 여차하면 사살해도 좋다. "
분풀이라도 하듯이 빠르게 명을 내린 후작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목청을 높였다.
" 이것은 루께서 허락하신 사냥이다. 사냥감은 사람의 아이가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쓴 짐승임을 잊지 말라. 그들이 어리다고 방심하다 놓친 자가 있다면 내 검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
마상에 뛰어올라 검을 휘두르며 기사들을 독려한 뒤, 요오크 후작은 선두에 서서
빠르게 숲으로 말 을 달렸다. 그리고 그 뒤를 기사단이 함성을 지르며 았다.
막사 안에 홀로 남은 아르테인도 행장을 집어 들고는 그 뒤를 따라 나섰다. 그물에
걸릴 아이를 낚기 위해서.
막사를 나서던 아르테인은 쏟아지는 빗방울이 서서히 그치고 햇살이 구름 사이로
나는 모습을 올려다보며 한마디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 비도 개이고 햇살도 다시 비추고. 사냥하기에 좋은 계절이야. "
쿵쿵-
지금처럼 심장 뛰는 소리가 저주스러운 적도 없었다.
심장 소리를 멈추려고 가슴을 쥐어뜯어 보기도 하고 소리 죽여 심호흡을 하기도
했지만, 굴테인의 귀에는 심장소리가 북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 빌어먹을. 이렇게 빨리 정확하게 추격해오다니. 배교자 아르테인 때문이겠지?
개.새.끼. 내 가 살아나간다면 다른 건 몰라도 꼭 그놈의 목은 따고 말 테다.
으드득- '
이를 꽉 깨문 굴테인의 모습은 우거진 나뭇잎 사이 그늘에 잘 동화되어 있어 눈의
띄지 않는다.
하지만 포위를 이루며 수색하는 백색의 기사들이 나무 아래를 지나갈 때마다
굴테인은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릴까봐 극도로 긴장했다.
그리고 그 긴장은 붉은 수실을 투구에 단 요오크 후작이 등장과 함께 최고조에
이르렀다. 직접 보 진 못했지만 저 악마 같은 요오크 후작의 생김새는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기에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 그놈은 아직 여기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
굵은 빗방울에도 아랑곳 않고 말에서 내려 숲으로 직접 들어선 요오크 후작은
전면의 나무 등걸에 검을 콱 박아 넣고는 신 성력을 끌어 올렸다.
숲은 아직도 장대비가 주륵주륵 그칠 생각을 않고 있었다.
"우리의 주신 루께서 허락하신 힘을 이제 청하오니, 신의 안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미물은 아무것 도 없으리라. 트루 이미지 온리(True image only). "
크로노스 사제들이 펼치는 모든 종류의 환각마법이나 몽환마법이 후작의 이 영능
앞에 철저히 부숴 지고 무너져 내렸었다. 미약한 굴테인의 동화술 정도로 버텨낼 리
만무하다.
두 눈에서 황금빛 광채를 뿜으며 사방을 쭉 훑어본 후작은 일순간 벼락처럼 몸을
날렸다.
몸을 날림과 동시에 검을 꽂아놓은 나무등걸에 손을 쭉 뻗자, 마치 그의 검이
살아있는 생명체인양 저절로 뽑혀 후작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후우우웅
검에서 일어난 기세는 풍압을 일으키며 아름드리 거목을 십자로 베어버렸고,
나뭇가지가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 크아앗~ 악~ "
왼쪽 눈꺼풀에서 턱을 지나 가슴까지 이르는 긴 자상을 입고 땅에 떨어진 굴테인은
야생 살쾡이 마 냥 풀쩍 뛰어 뒤로 물러서며 자세를 잡았다.
오러 검이 날아오는 순간 바람의 실드(shield)를 겹겹이 치고 몸을 뒤로
이동시키기까지 했건만 검 의 오러가 쭉 늘어나며 얼굴을 그어버렸다.
비속에서 흐르는 패덕에 왼쪽 눈은 뜰 수도 없었고, 가슴도 불로 지진 듯이
시큰거렸다.
서서히 왼쪽 눈은 뜰 수도 없었고, 가슴도 불로 지진 듯이
시큰거렸다.
서서히 다가서는 요오크 후작을 보며 굴테인의 눈은 두려움과 공포로 크게
흔들렸다. 아무리 호기 있게 버티려고 해도, 광휘에 뒤덮인 후작만 봐도 몸의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그러는 동안 요오크 후작은 바로 앞까지 다가왔고, 굴테인의 머리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되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요오크 후작의 검이 장대비를 뚫고 천공을 향해 번쩍 치켜 들린 순간!
콰콰쾅 콰쾅
천공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낙뢰가 그대로 후작의 검신을 후려쳤다.
쩌저저적
" 크아악 "
검신을 따라 후작의 몸을 강타한 번개는 후작의 팔과 심장에 쩌릿한 충격을 주었고,
땅으로 분산 된 이후에도 후작의 팔과 검에 남아 불똥을 사방으로 튕겼다. 뿐만
아니라 후작의 머리는 정전기로 인해 사방으로 뻗쳤고 플래너리도 시커멓게 그을려
버렸다.
하지만 요오크 후작은 그런 와중에도 정신을 잃지 않았을 뿐더러 검도 놓치지 않고
횡으로 길게 휘 둘렀고, 그의 검에서 방출된 오러는 길게 늘어나며 공간을 양단해
버렸다.
무언가 굴테인을 덮치고 그 덕분에 바닥에 거칠게 나동그라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굴테인의 목은 오 러에 양단되어 날아갔을 것이다.
어찌된 일이지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드는 굴테인은 무언가 검은 그림자가 자신을 확
떠미는 바람에 그대로 2~3 미터 가량을 날아가 나무등걸에 거칠게 부딪쳤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진 것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굴테인이 있던
자리는 후작의 내려친 검기로 인해 깊은 고랑이 패였기 때문이다.
검은 그림자도 몸을 피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무어라 중얼거리며 주먹에 입을 맞추더니 양 주먹으로 빗물 고인 웅덩이를 내려
꽂자, 쩌저저저적- 쩌적- 쩌적-
시퍼런 불꽃과 함께 강력한 전기가 방출되며 땅에 고인 물을 타고 요오크 후작을
강타했다.
풀쩍 뛰어서 상대의 공격을 피하느라 공세를 멈춘 사이, 흑영은 어느새 혼절한
굴테인을 낚아 채더 니 나뭇가지 위로 몸을 날렸다.
" 전격계 마법 공격은 실로 보기 드문데, 크로노스 교단에 이런 자가 있었더냐? "
다소 놀란 듯 한마디를 던진 후작이지만, 어느새 검을 고쳐 잡고 오러로 원을
그렸다. 좌, 우로 빠르게 교차되는 원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사슬 구조를 형성했고,
그 상태 그대로 파도처럼 흑영에게 밀려들어갔다.
파괴의 손을 지닌 테미스를 가볍게 양단한 바로 그 수법이다.
전면에서 다가오는 요오크 후작, 그리고 이미 빽빽하게 주변을 에워 싼 흰 독수리
기사단.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은 흑영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굴테인을 허리춤에
비끄러매었다. 그리고는 양 손을 10 센티미터 가량 벌리며 가슴께로 모으며
중얼거렸다.
쩌저저적-
흑영의 양 손바닥 사이에는 수많은 전자들이 아우성치며 방전되기 시작했고,
이리저리 아크가 튀며 시퍼런 불꽃을 만들었다.
이윽고 방전되는 아크는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며 서서히 모습을 갖추었다.
작은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형태에 시퍼런 전기로 뭉쳐진 모습의 괴물이 서서히
공간에 모습을 드러내자 요오크 후작은 놀란 표정으로 신음을 흘렸다.
" 전격계 상급 정령 아크랄 이런 비속에서 저런 놈과 싸워야 하다니 최악이군. "
후작의 말대로, 전격계 정령들은 물이 있으면 그 힘이 수배로 늘어난다. 게다가
아크릴을 소환한 상대의 모습을 비로소 확인한 후작은 한 번 더 신음을 흘렸다.
" 다크엘프 거의 멸종되었다는 다크엘프라니! 어쩐지 빠르더라니! 크, 까딱하면
수도원에 쳐 박히게 생겼군. "
입술을 꽉 다문 요오크 후작의 말대로, 나뭇가지에 우뚝 서서 손 위에 아크릴을
올려놓은 흑영은 온 몸이 칠흑처럼 검고 귀가 뾰족한 다크엘프다.
그렇다고 요오크 후작의 눈에서 투지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강한 상대를
만난 것이 즐거운 듯 더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연환검결(連環劍訣)과 주신 루를 철석같이 믿고 있기에, 오히려 이런
강적과 싸워 볼 기회를 주신 루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 전격계 정령사다. 모두들 조심하라. "
크게 외치는 동시에 요오크의 모습은 나뭇가지 위로 빨려 들듯이 득달했다.
훙훙훙훙
검격이 휘몰아치며 오러의 환이 주변을 물샐 틈 없이 에워쌌고, 동시에 모든 원소
마법 공격에 대 한 신성방어주문도 동시에 영창 되었다.
아크랄의 공격 몇 방은 그냥 맞아 줄 심산이다.
요오크 후작의 대담한 공격에 다크엘프도 이를 꽉 깨물었다. 아까 한번 겪어봐서 이
기사의 검이 얼마나 무서운지 느끼고 있었다.
스치기만 해도 몸이 갈가리 찢겨나갈게 뻔하다.
게다가 아이를 매달고 있어 움직임에도 제약이 있다.
다크엘프는 손 위에 든 아크릴을 방출시키며 공격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어둠으로의
동화와 물리력 방어 마법을 둘렀다.
또한 발 빠르게 나무의 정령 위스퍼들을 소환해 나뭇가지로 상대의 흐름을
방또한 발 빠르게 나무의 정령 위스퍼들을 소환해 나뭇가지로 상대의 흐름을
방해하도록 했다.
훙훙훙훙-
오러의 환이 나뭇가지를 깨끗하게 잘라내며 날아오는 가운데 아크랄은 온몸의 털을
곤두세운 자세 로 전기를 내뿜으며 요오크를 공격했다.
패너플리의 방어력과 신성방어주문 덕분에 몇 차례 전기를 그대로 맞아주며,
요오크는 다크엘프의 신형을 따라잡는데 주력했다.
하지만 속도면에서 여타종족을 압도적으로 초월한다는 다크엘프다. 더구나 숲속이고
이런 비속에서 다크엘프를 쉽게 따라잡기는 힘들었다. 몇차례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고, 그동안 아크랄의 전격을 온 몸으로 맞자 구토가 절로 치밀어 올랐다.
모든 전격계 원소마법이 그러하듯이 이런 비속에서는 전기가 비를 타고 전파하기에
도저히 피하기 란 불가능하다. 결국 패너플리에 걸린 저항마법과 스스로 영창하는
신성마법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미꾸라지 같은 다크엘프를 공격하랴, 정령 아크랄의 공격에 대항하랴, 요오크
후작은 점차 손발이 어 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수하 기사들이 검을 휘두르며 도왔지만 다크엘프는 정말 귀신처럼 공격의 틈새를
헤집고 다녔다. 하 지만 전체적으로 기사들이 원진을 그리며 포위하고 있기에
다크엘프도 도주하기가 여의치 않기는 마 찬가지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요오크 후작은 두 눈을 빛내더니 더욱 거세게
다크엘프를 몰아붙였다.
동시에 일시적으로 모든 신성 방어주문을 그치고는 공격 주문으로 바꿔 버렸다.
" 주신 루의 이름으로 맹세컨대 루의 검은 능히 공간을 갈라 어둠을 꿰뚫으리라. "
검의 궤적이 그려내는 오러의 환을 피하기에 급급한 다크엘프는 요오크의 오른 손에
잡힌 또 다른 단검을 보지 못했다. 물론 요오크 후작이 단검을 쥔 우수를 등 뒤로
숨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니었어도 정신이 없어서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요오크 후작의 주문을 듣고서야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허공에서 뚝
떨어뜨렸다.
하지만 어느새 후작의 손을 떠난 단검은 벼락처럼 회선을 그리며 날아가 하강중인
다크엘프의 가슴 을 꿰뚫어 버렸다.
" 끄아아악-- "
가까스로 심장이 뚫리는 것은 피했지만, 그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착지도
못하고 거칠게 땅 에 꼬다 박았다.
동시에 후작의 오러검은 자신에게 득달하는 아크랄의 몸에 정통으로 부딪쳤다.
쩌저저적 쩌적
오러를 타고 흘러들어온 막대한 전기가 후작에게 망치로 후드려 맞은 듯한 충격을
주었지만, 아크랄 또한 무사하지 못해서 강제로 정령계로 소환되어 버렸다.
아마 이 아크랄은 상당 기간동안 주인의 소환에 응하지 못할 것이다.
어쨌거나 후작 역시 충격이 큰 듯, 땅에 비틀거리면서 내려서는 동시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사들 이 놀라서 달려오며 몇몇은 후작을 부축하고, 나머지는 주변을
경계했다.
다크엘프를 포박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기사들 모두 다크엘프의 가슴이 꿰뚫리는
광경을 보았기에 죽은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오직 요오크 후작만이 심장을 비껴 맞은걸 느끼고는 다크엘프의 신병부터
확보하라고 손짓을 했다.
막대한 전기가 흐른 탓에 목소리가 안나오고 쿠토와 현기증이 나는데도 계속 쓰러진
엘프를 가리켰 다.
그의 손짓을 따라 기사들의 고개가 다크엘프에게로 향한 순간, 쓰러진 채 미동도
않던 다크엘프는 가슴 섶에서 가까스로 고풍스러운 회분홍빛 나뭇잎을 한 장
꺼냈다.
엘프 종족이 신봉하는 세계수의 잎이다.
그리고 꼼지락거리며 나뭇잎을 찢는 순간 환한 빛무리가 다크엘프를 감싸 안았다.
" 이런! 세계수 잎이나! 공간이동 마법이다! "
기사 한명이 발악하듯 외치며 검을 창처럼 날렸고, 다들 자신의 검을 날려
다크엘프를 공격했다.
첫 번째 기사가 날린 검은 다행히 - 흰 독수리 기사단 입장에서 - 늦지 않아
다크엘프의 척추 부위를 끊으며 틀어 박혔다.
하지만 나머지 검들은 이미 사라진 다크엘프의 잔영만을 허무하게 뚫었을 뿐이다.
" 이럴.수.가! 악의 씨앗을 이렇게 놓치다니! "
부축을 받은 채 투구를 벗고 안정을 취하던 요오크 후작은 이 어이없는 모습에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의 뇌리 속에 아르테인의 예언이 스쳐 지나가면서 안색이 어두워졌다. 예언이
맞는다면 네 아이 가운데 잘해야 한둘만 잡을 것 아닌가!
숲의 북쪽을 지키고 있는 흰 독수리 기사단의 성기사들은 조를 두개로 나누었다.
경계 조는 삼십 미터 간격으로 서서 길목을 지키고, 수색조는 두 명씩 짝을 지어
산등성이를 훑으며 올라갔다.
산등성이 위쪽 능선은 이미 경계마법을 걸어 놓았고, 다른 방면은 나무도 몇 그루
없이 훤히 드러나 는 지형이어서 도주하기 불가능하다.
게다가 이 북쪽은 이미 비도 그쳐서 사방의 시야가 훤히 확보되었다.
바위틈에 몸을 숨긴 제릭스는 스스로를 저주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서편이나 남편은 아직도 먹구름이 가득한 것이 비가 내리는 모양이다.
여기는資犬?남편은 아직도 먹구름이 가득한 것이 비가 내리는 모양이다.
여기는 이미 쨍쨍하게 해가 뜬데다 숲이 끝나가는 구릉지대여서 사방이 훤하게
드러난다.
산을 넘으면 안전하다는 생각에 이리로 뛰었다. 북쪽 고원지대는 인적도 별로 없고
성국 루안의 힘이 덜 미치는 곳이기도 하다.
마음속으로 이 방향을 결정한 뒤, 다른 아이들이 이리 못 오도록 선수도 쳤다.
급하게 기는 자들은 본능적으로 어두운 숲으로 도주할 것이다.
상대도 바보가 아닌 이상 숲으로 추적할 것이고, 다른 아이들이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자신은 당당 하게 산을 넘는다는 것이 제릭스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제릭스의 계획은 철저하게 봉쇄당했다.
누군가 그의 도주로를 미리 알기라도 하듯이 기사들을 배치해 놓았다.
이런 예지력을 지닌 인물은 그리 흔하지 않다.
' 아르테인! '
그 저주받을 이름을 떠올린 제릭스는 이가 부서져라 악물며 손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살 속에 파고들어 주먹에서 피가 배는 것도 모르고.
어거나 지금 급한 것은 점점 피말리도록 다가서는 기사들이다.
수풀을 헤치며 바위틈까지 꼼꼼하게 검으로 쑤시며 제릭스가 숨어있는 곳까지
서서히 조여 오는 모 습이 기가 질릴 정도로 철두철미하다.
아르테인이라면 이렇게 철두철미할 만 하다. 그러니 이미 네 명의 얼굴 생김도 다
기사들에게 숙지 되 얻을 것이다.
제릭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며 눈이 흔들렸다.
여기 계속 있어봤자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리고 일단 잡히면 악의 종자라는
팻말을 목에 걸고 성국으로 끌려가서 화형을 당할 것이 뻔하다.
불에 대한 친화력이 뛰어나고 불을 능숙하게 다루는 제릭스기에 화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 고 있다.
노예로 끌려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불로써 하는 공격을 시험해 본적이 있는데,
상대의 고통스러워 하 는 모습이 절대 잊혀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제 50 미터 앞까지 다가온 기사들을 보며 제릭스는 이를 악물었다.
화르륵~~ 스스로의 손에 불을 일으킨 제릭스는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불을
응시하더니 화악- 얼굴에 불길 을 뒤집어썼다.
동시에 그는 환각마법으로 무언가 산등성을 빠르게 질주하는 영상을 만들어 내었다.
" 끄아아악~ 크악~ 살려 줘요~ 아악~ 카악~ "
얼굴부터 불에 지글지글 타는 가운데 비명을 고래고래 지르며 뛰쳐나와 데굴데굴
구르는 제릭스의 모습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 저기 누가 도주한다! "
경계 서던 기사 한명이 산등성을 넘는 그림자를 목격하고 고동을 불자 기사들 몇을
제하고는 산등성으로 빠르게 치달렸다.
이목을 다른데 집중 시키고 도주하는 수법 정도로 우리를 속이려 했느냐는 표정으로
추격대가 제릭스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기사 둘이 다가와 그의 전신으로 번진 불을 꺼주며 그에게 치유주문을 외워
주었다.
" 아으~ 아으~ 아으~ 나물 캐는데~ 아으~ 얼굴에~ 불이~ 아으으~ 아으~ "
눈물 콧물 흘리며 산등성으로 사라진 괴영을 가리키는 제릭스의 모습은 영락없이
근처 영지의 소작 농 자식의 모습이다.
옷가지도 다 타버려 전신에 끔찍한 화상을 입은데다 얼굴도 뭉그러졌다.
" 간악한 놈, 어린 놈이 자기 한 몸 살리려고 같은 아이에게 불을 지르다니! 정말
어쩔 수 없는 악 의 씨앗이구나! "
상황을 미루어 짐작한 기사가 분하다는 듯이 발을 구르며 산등성이를 노려 보았다.
" 걱정마라. 화상 때문에 얼굴은 망가졌지만 불을 껐으니 생명은 지장 없을테고, 저
악독한 놈은 우리가 잡을 테니까. "
약을 발라주던 다른 기사는 달래주기까지 했다.
온몸이 화상으로 욱신거렸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던 제릭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 것은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 때문이었다.
" 제릭스, 제릭스 맞지? 덩치로 보건데 분명하네. "
어찌 이 목소리를 잊겠는가!
부드럽기 그지없지만 지옥에서 들리는듯한 목소리, 심장을 멈추게 할 만큼 충격을
주는 목소리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르테인이 등 뒤에 와 있는 것이다.
숲에서 점점 멀어진다.
숲 속에 형성되었던, 하지만 지금은 잿더미가 된 마을에서 점점 멀어진다.
크로노스교의 총탄이 무너지기 전 테미스와 함께 이곳 마을로 왔고, 여기서 일년이
넘도록 숨어 살았다.
이제 좀 익숙해지려고 하는데 또 기는 신세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과 무관한 듯, 오솔길을 걷는 쥬논의 표정은 평상시와 아무 변화가
없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큼지막한 나뭇잎을 몇 장 땋아서 머리에
겹쳐 쓰 고 터벅터벅 길을 걷는 모습은 영락없는 시골 소년이다.
쥬논이 지금 걷고 있는 오솔길은 숲 속 마을과 번화한 도심지를 이어주는 길이다.
이 지역 영주의 성이 위치해 있는 도심지는 딱 한번 나가 보았다.
생필품을 사러 테미스가 도심지로 나간다고 하자, 제릭스 등이 테미스를 졸라 같이
나가 본 것이 오개월쯤 전이다.
그때는 다들 공중에 붕 뜬 기분들이었다. 크로노스 것이 오개월쯤 전이다.
그때는 다들 공중에 붕 뜬 기분들이었다. 크로노스 종단의
그로테스크(grotesque)하고 일그러진 분위기나 숲 속 마을처럼 너무도 조용하고
단조로운 분위기와 달리 도심지의 번화함과 밝음은 모두의 기분을 한껏 올려놓았다.

테미스조차 모처럼 나들이가 즐거운 듯 스스로도 머리에 묶는 색색의 끈을 몇 개
골랐 고, 아이들에게 사고 싶은 것을 하나씩 고르라고 했었다.
제릭스는 아무것도 사지 않는다며 돈으로 가졌고 굴테인은 나무를 깎아 만든 작은
모형 칼을 사서 휘두르며 좋아했다. 하이시스도 테미스를 쫓아 머리끈을 골랐다.
그리고 망설이며 멈칫거리던 쥬논이 고른 것은 놀랍게도 루를 상징하는 원형
목걸이였다. 다른 아 이들이 도끼눈을 뜨고, 테미스에게 따귀를 한대 얻어맞았지만
쥬논은 고집을 꺾지 않고 그 목걸이를 직접 목에 걸었다.
소란을 부려서 좋을 것이 없기에 테미스는 억지로 참아 넘겼고 다른 아이들은
쥬논에게 눈을 흘겼지 만, 그가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자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
" 루의 눈길 아래서 도망 다니려면, 루를 알아야 해. "
크로노스를 맹신하는 테미스 조차 입을 다물었다.
" 루의 눈길 아래서 도망 다니려면, 루를 알아야 해. "
5개월 전 스스로 입에서 나온 소리를 똑같이 한 번 더 중얼거린 쥬논은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루의 원형 목걸이를 꺼내 목에 걸고 만지작거렸다.
그의 말대로 이제 쥬논은 천하에 깔린 루의 눈 아래서 도망쳐야 한다.
아니 그보다 당장 이 숲을 벗어나야 한다.
살아남아야만 한다.
숲이 거의 끝나가는 마을 어귀에서는 영주의 성채가 멀리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 길을 떡 하니 막아선 흰 독수리 기사단이 쥬논의 눈에 들어왔다.
빠르게 쭉 훑어보기에도 20여명이 넘는 기사들이 흰 패너플리를 걸치고 석상처럼
우뚝 서서 길을 막았다. 빗방울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사납게
쏟아 붓고 있는데도 가운데 숲의 북쪽 을 지키고 있는 흰 독수리 기사단의
성기사들은 하늘의 신장인양 꿈쩍도 않는다.
멈칫하던 쥬논의 발길이 더 빨라졌다.
내가 봤으면 이미 저들도 나를 보았다. 여기서 숲으로 다시 도망치면 의심만 살
뿐이다.
" 안녕 꼬마야, 어디서 오는 중이냐? "
굵은 목소리는 다정다감하게 들렸지만 그 속에는 날카로운 탐색의 눈길이 숨어있는
것이 본능적이 로 느껴졌다.
" 에펜 마을이요, 영주님의 성에 멀리서 온 상단이 들른다고 해서요. "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기사들이 신기한 듯 올려다보는 쥬논의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해
보였다.
성기사 백인대장(百人大將) 쿨르망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 나왔다.
아르테인이 예지한 장소여서 이 길목을 막아서긴 했지만, 하필이면 지금 성에
상단이 와 있는 시점 인 것이 문제였다.
에펜 마을을 비롯해 근방의 수많은 마을의 영지 민들이 비속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성으로 몰려들 고 있었다. 추적 대상인 어린아이들도 이미 이십에서 삼십 여명이
지나갔다. 일일이 수색하고 등에 크로노스의 표식이 있는지 수색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 제길, 누가 이런 대로변으로 도망친다고. 그것도 어린애들인데 본능적으로 숲으로
도망가겠지 이리 오겠어. 휴우~ 차라리 크로노스의 마귀들과 격렬하게 싸우는 것이
낫지 이거야 원~ '
까만 머리 사내아이라는 점은 추적대상과 일치한다. 하지만 등에는 아무 표식도
없다.
잡아둘지 보내줄지 잠시 망설이던 쿨르망은 쥬논이 만지작거리는 원형 목걸이에
눈길이 멎었다.
" 우리의 신이시며 만물의 창조주이신 루를 믿나 보구나? 어디 근처 신전에 다니니?
"
쥬논의 목걸이를 본 순간 쿨르망의 눈이 약간 부드럽게 풀렸다.
기사들이 옷을 거칠게 벗기고 등을 확인하는 바람에 쥬논의 눈에는 아까와 같은
신기함 대신 두려움 이 역력했다. 두려운 눈으로 목걸이를 움켜쥐고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의 모습을 보자 쿨르망은 미안 한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쿨르망 자신이 루의 자식이라면 이 소년도 루의 자식이다. 너무 거칠게 대했다는
생각에 약간이지 만 죄책감도 느껴졌다.
" 장하구나. 그래 성으로 가보 거라. "
쥬논이 멈칫멈칫하다가 막 뛰어서 성으로 달려가는 모습에 성기사들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들 도 쥬논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고 백인대장 쿨르망과 비슷한
심정이었던 것이다.
상단이 성에 머무는 동안은 성문이 활짝 열려있다.
성문을 통과하는 인파에 끼어 같이 성안으로 들어온 쥬논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5개월 전 여기 왔을 때 상단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어 놓은 것이 이렇게 써 먹힐
줄은 그도 몰랐다.
아무리 쥬논이 담대하다지만, 아직 어린 나이다.
성기사들의 무시무시한 창날과 검을 코앞에서 보고, 그걸 빠져 나온 생각만 하면
아직도 아찔하고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지역에서 벗어나야 한다.
구?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지역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자면?
쥬논의 눈길은 성내 여관들 앞에 즐비하게 묶여있는 말과 낙타들에게 가서 멎었다.
비가 아직 그치지 않았건만 낙타들 주위는 구경꾼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런 마을에 어디 낙타라는 생물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 흔할까.
나이가 칠순을 훌쩍 지나 앞이 빨이 다 빠진 옆 마을 촌장이 대담하게 낙타에게
다가가 서 높게 솟은 혹을 쓰다듬으며 뭐라 뭐라 중얼거리자 구경꾼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낙타까지 동반한 대규모 상단이 이곳 영지까지 들린 것은 실로 흔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모두들 신기해하는 와중이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지고 웃음이 나오는 소란에 여관 2-3층에 묶고 있는 상인들이
하 나 둘 고개를 내밀었고, 영주민들은 그들이 영웅이라도 되는 듯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 다.
박수 받아 싫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상인들은 멋쩍긴 하지만 기분이 좋아져서 손을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빗방울이 서서히 줄어들더니 어둡던 하늘도 개이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 바람에 여관에 틀어박혔던 상인들도 하나 둘, 각자 여관 앞마당에 상품들
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상단을 주도하는 거상(巨商)들이야 영주나 귀족들을 대상으로 이미 굵직굵직한
거래를 끝냈다.
하지만 상단에 편승한 중소 상인들은 이런 자투리 장사를 해야 이문을 많이 남길 수
있다.
대륙 남부나 동부, 서부에서 산출되는 이국적인 물건들이 즐비하게 깔리면서 모여든
구경꾼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기 시작했다.
장신구에서 시작해서 그릇, 향수, 종이, 심지어 마법물품이나 무기까지 안나오는
물건 이 없을 정도로 바닥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들 물건의 대가로 상인들이 원하는 것은 금이나 은이지만, 흥정하기에 따라서는
물물교환도 가능하고 사람으로도 받는다.
대륙 남부의 제국에서는 노예들이 고가로 거래되고 있기에 여기서 싸게 노예들을 사
서 데려가면 그것만큼 이문이 남는 장사도 드물다.
하지만 상인들이 원하는 대상은 건장한 사내노예들이다.
여자나 아이들을 샀다가 먼 남부까지 돌아가는 동안 노예가 죽기라도 하면 손해만
보 기 때문이다.
" 저. 저를 노예로 사시지 않으실래요? "
수염 덥수룩하고 뚱뚱한 상인 한명에게 비쭉거리며 다가선 쥬논은 한참 망설이다가
입 을 열었다.
" 뭐라고? 뭐라고 했니? "
상인이 눈을 치뜨며 묻자 쥬논은 고개를 푹 숙이고 답했다.
" 집이 어려워서요. 저를 사고 돈은 에펜 마을 촌장께 전해 주시면 되는데. 제 이
름은 시르온이니까. 촌장님이 제 부모에게 전해 주실 거예요. "
쭈뼛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발가락을 쳐다보는 모습이 영락없이 가난한 농노의
아들 이다. 상인의 눈이 의아스러움에 차 있다가 곧 탐욕스럽게 돌아갔다.
뭘 모르는 소년이 제 딴에 가계에 보탬이 되려고 나왔구나 싶었다.
부모가 직접 데리고 와서 파는 경우에는 그 자리에서 가격을 지불하지만, 이렇게
순진 하게 혼자 오면 돈을 지불 안하고 가버리면 그만이다.
뒤늦게 알아채도 이미 상단이 떠난 후일 것이고.
이렇게 공짜로 노예를 사면 가다 죽어도 손해볼일은 없지 않은가!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 상인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리며 쥬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시르온이라고 했지? 저런, 집안 사정이 어려운가 보구나? 허허 이거 참. 그래 이
아저씨를 따라갈 테냐? 그러자면 오늘부터 여기 머물고 내일 아침에 짐을 꾸릴 텐
데. "
쥬논이 고개를 끄덕이자 상인의 번들거리는 입가에 미소가 진득하게 걸렸다.
원래 출발은 모레지만 빨리 성 밖으로 이 아이를 데려간 뒤 거기서 하루를 묶고
상단 에 합류할 생각이다.
" 내 이름은 제르피, 제르피 주인님이라고 부르면 된다. 자, 그러면 노예 인장 부터
찍을까? "
인장이라는 말에 쥬논의 눈가에 불안이 스치는 것을 보고 제르피는 얼른 달래며
여관 부엌으로 데려갔다.
그러면서 허리춤에 꿰어 찬 가죽부대를 뒤져서 'Z' 자가 큼지막하게 양각된
쇠뭉치를 꺼내들었다. 여관 부엌의 화덕에서 벌겋게 달구어진 쇠뭉치에서 Z자가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인다. 제르피의 이니셜(initial)을 딴 Z 인장이 이마에 찍히면
이제 그는 노예의 신분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뜨거운 열기를 동반하며 이마로 다가오는 쇠뭉치를 똑바로 쳐다보며 쥬논의 입가가
굳게 다물어졌다.
그리고 그 표정은 살타는 냄새가 부엌을 진동시키는 동안에도 변하지 않았다.


3. 노예(奴隸) 시르온
제국 노아 부는 대륙 서부에서 중부에 걸쳐 자리 잡고 있으며, 대륙 남부의 대제 국
아르만과 신성제국 루안과 더불어 대륙의 삼강으로 꼽힌다.
대륙을 가르는 오그스카 산맥을 기준으로 아르만과 맞닿아 있으며, 역사적으로
아르만 과 수 많은 전쟁을 치르며 대륙의 패권을 다퉈온 전제국가다.
대개의 역사학자들이 중요 역사적 사안으로 꼽는 대상 가운데 다수가 이들 두
제국간 의 피튀기는 항쟁이 쩜?사안으로 꼽는 대상 가운데 다수가 이들 두
제국간 의 피튀기는 항쟁이 차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기사와 마법사를 주
전력으로 삼아온 아르만에 비해, 노아 부는 전사와 소환술사, 어쌔씬 (assassin)을
중심으로 군제가 편성되어있다.
영토의 삼분지 일 가량이 사막화 되어있는 노아부로서는 이런 군제가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노아부의 수도 메카인 에서 동쪽으로 한참, 좋은 말로 달려서 한 달
이상은 족히 가야 할 거리에 위치한 사막도시 조란이 위치해있다.
조란은 사막의 오아시스를 배경으로 형성된 도시인데, 기후나 토양은 형편없지만
지정 학 적으로 대륙 문물이 움직이는 요충지에 위치해 있다.
자연히 중계무역이 발달하고 문물의 이동이 잦아지면서 크게 번성해있다.
붉게 물든 석양에 사막을 횡단하는 캐러밴(caravan)들은 사막에 우뚝 솟은 조란의
토 성군(土城群)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조란의 토성들이 붉은 흙으로 지어져 있어 석양 노을에 젖어들면 그림과도 같이
환상 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그 안을 들여다 보면 조란만한 요지경도 없다.
거친 사막과, 수많은 노예시장, 자연스럽게 형성된 사창가와 범죄조직.
또한 여러 왕국에서 쫓기는 흉악범들까지 모여들어 아수라장을 만들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이곳이 중계무역지로 각광을 받는 이면에는, 조란의 실질적인
통수권자 인 어미어(emir) 알-제이시의 강력한 통제가 있다.
알-제이시는 대대로 이곳 조란 토후 가문의 수장으로 강력한 사병으로 보유하고
있으며 이곳 조란 의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노아부의 황성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정도다.
그는 도시 조란을 자유롭게 내버려 두고 있기에 갖은 악행이 횡행하고 있다. 하지만
중계무역상만은 철저하게 보호해서, 만일 캐러밴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자가
발각된다 면 그는 참혹한 형벌과 멸족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
오십 여 년 전, 제국 아르만과의 삼 년여에 걸친 전쟁 당시, 알-제이시는 18의
나이로 가문의 형제들을 도륙하고 가문의 정점에 오른 직후였다.
피로 올라선 어미어(emir) 자리를 황제에게 인정받자면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것만큼 좋은 기회도 없다.
그는 손수 가문의 소환술사들과 전사들을 이끌고 아르만 제국의 푸른 사자 기사단을
급습해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수많은 어쌔씬들을 부려 제국 귀족들을 하나하나
암살해갔다.
그때 알-제이 시에게 붙은 별칭이 산상군주(山上君主).
조란 토성 위에서 어쌔씬을 부리는 그에게 실로 적합한 별칭이다.
알-제이시가 이 별명을 마음에 들어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52년의 시간이 지나 올해로 나이 일흔이 된 알-제이시는 이제 산상노인이라
불리며 마귀와도 같은 두려움을 주고 있다.
알-제이시의 일족 가운데 티야 알-제이시는 알-제이시의 총애를 받는 딸이다.
엘-제이시가 낳은 자식은 아들만 29 명, 딸은 34 명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알-제이시가 이름을 기억해주는 자식은 몇 되지 않는다.
알-제이시의 총애를 받을 만큼 타야의 아름다움은 일대에 정평이 났었고, 10년 전
귀족인 라흐만과 혼인을 한 이후에도 부친의 총애는 계속 되었다.
조란에서 황제 이상의 권위를 갖는 알-제이시의 영애이다 보니, 티야 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남편마저도 우습게 볼 뿐 아니라 수많은 이권에도 직접 개입하고 사병마저 육성하고
있다.
현재 나이 서른여섯, 보랏빛 하늘거리는 천으로 온몸을 휘감고 대륙남부에서
공수해온 향수로 매일 목욕하며 다이아몬드가 빽빽이 박힌 팔찌와 발찌를 찰랑이는
티야 알-제이시의 모습은 화려 하다. 붉은 석류를 방불케 하는 도톰한 입술과
사막의 기후로 인해 적당히 그을린 구릿빛 피 부,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가르침을
받은 무술 탓인지 몸에는 적당한 근육까지 붙어 탄력적 이다.
눈초리가 살짝 올라간 눈매는 도발적이다 못해 도전적으로까지 보이며 입가
오른편에 위치한 조그만 점은 퇴폐적인 매혹까지 선사한다.
이 정도면 알-제이시가 아니라 세상 그 누구라도 빠져들 만 하다.
하지만 조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녀가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지, 성정이
얼마나 불같고 집요한지 잘 알고 있다.
남편 라흐만도 그녀가 두려워 떨어져 지낼 정도다.
조란에서 그녀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부친 알-제이 시와 큰오빠인 파하듯
알제이시 둘 뿐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녀가 어쩌지 못하는 상대도 그 둘 뿐이라고.
그러나.
와장창
섬세하게 조각되어 만든 거울이 화병에 맞아 비명을 지르며 깨져나갔다.
드워프가 세공한 듯 정교한 장인의 손길이 스미어 있는 거울은 결혼 당시 라흐만이
선 물한 고가품이다. 거울 값으로 튼튼한 노예 스물다섯이나 주고 구입한 것이고,
티야가 남편에게 받은 선물 가운데는 거의 유일하게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이다.
" 이, 이이이이. "
화병을 던진 타야의 아름다운 미간에 세로 주름이 잡히고 입가가 일그러졌다.
화가 났맘像?아름다운 미간에 세로 주름이 잡히고 입가가 일그러졌다.
화가 났어도 참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모습이지만, 그녀 앞의 사내는 표정에
변화 가 없다. 사내, 검은 머리카락이 허리께까지 길게 늘어져있고, 키는 6피트(약
180 cm)가 넘을 정도로 훤칠하다. 약간 앳된 끼가 남아있는 모습으로 보아 20 초반
정도, 상체는 벌거벗었는데 구릿빛 근육이 보기 좋게 발달해 있다. 운동이 아니라
노동으로 인해 생긴 근육은 부풀어 보이지는 않지만 조밀하고 탄탄해 보인다.
얼굴은 뚜렷하고 잘생겼지만, 한참을 들여다봐도 잘 기억이 나지 않을 듯이 묘한
느낌 이다. 하지만 이마에 굵게 패인 인장이 비천한 노예임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해준다.
'Z' 자와 'T' 자가 겹쳐 찍힌 인장이 이색적인 사내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깨어 진
유리 조각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쫘아아악--
공간을 가르며 날아온 채찍은 흉험한 소리를 내뿜으며 사내의 등에 파고들듯이
감겼다.
사막에서만 서식하는 독사 껍질을 꼬아 만든 채찍은 붉은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알록달록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타야의 오른손에 감긴 채찍은 언뜻 보면 독사가 똬리를 틀고 있는 듯이 보인
다.
이 채찍에 목이 감겨 죽은 사람만도 부기지수다.
하지만 지금 티야는 섣부르게 채찍으로 목을 감지 못하고 등만 후려치고 있다.
그나마도 사내의 등판에 채찍에 맞은 자리가 부풀어 올라 터지며 피가 흐르는 것을
보자 등이 아닌 애꿎은 양탄자 바닥만 후려갈긴다.
한참을 씩씩거리며 채찍을 휘두르던 티야는 묵묵하게 매를 맞는 사내를 보며 입술을
꽉 깨물더니 채찍을 확 집어 던졌다.
불빛 아래 어른거리는 사내의 등, 채찍으로 부은 곳에서 흐르는 선홍의 피, 티야는
왠지 모르게 그가 어둠 속에 쌓여있는 느낌이 들었다.
어둠 속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심연의 어둠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듯이 에워싸인
느낌이랄까?
그는 분명 천하디 천한 노예다. 몇 년 전만해도 쳐다보지도 않던 더러운 노예다.
언제든지 수틀리면 목을 꺾어버릴 수 있는 노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제는 그를 향해서 뜻대로 채찍조차 휘두르기 어렵다. 시르온의 등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티야는 피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갈증을 느꼈다.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녀는 또 갈증을 참지 못하고 시르온의 등으로 다가가 그의 등에 흐르는 피에 붉은
입술을 갖다 대고 있었다.
시르온의 피가 그녀의 입술을 적셔 더 붉게 만들고 그녀의 심장을 마구 뛰도록
만들었다. 그의 피를 핥을 때마다 하복부를 저미는 열락(悅樂)의 쾌감(快感)이
그녀의 머리를 지배했다. 가느다랗고 잘 손질된 티야의 손가락은 이미 노예
시르온의 가슴을 더듬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 하아- 좋아. 그게 노예근성이라면 어쩔 수 없지. 네 뜻대로 명령을 해주마. 나를
안아라. 내 몸을 안아라. 더러운 노예야. 너의 더러운 피로 네 주인의 심장을
덥혀라. 노예야. "
부들거리며 시르온을 끌어안은 티야는 또 그녀의 노예에게 굴복했다.
오늘은, 오늘만은, 명령하지 않고 시르온의 의지로 자신을 안게 만들고 싶었다.
고원의 향사슴에게 난다는 사향도 준비하고 보라빛 얇은 망사로 알몸을 관능적으로
감싸고, 풍염한 가슴도 적당히 풀어헤쳤다.
온몸의 굴곡이 배여 나오는 차림만으로 부족할 것 같아서 향로에는 최음향도
뿌렸다.
서른여섯이면 여자 나이로 한창이다. 잘 가꾼 덕에 스물의 애송이도 부럽지 않다.
그런데도 저 더러운 노예 한명을 굴복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시르온의 손이 천을 풀어 내리며 양지유 같은 살결 속에 묻히자 티야의 혀는 그녀의
입술을 훔치며 갈구했다. 입가에 느껴지는 피의 향기가 최음향과 섞이자 그녀를
참지 못할 정도로 만들어 버렸다. 그의 손길이 스치는 곳곳에서 열기가 피어올라
정염의 불꽃을 태웠고 머리 속이 텅 비는 현기증까지 수반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매서운 눈초리에는 작은 이슬이 맺혔다.
티야는 손가락으로 눈꼬리를 찍어 물기를 닦으며, 이것은 눈물이 아니라 쾌락이
주는 수액일 뿐이라고 다짐했다.
그녀는 티야다.
알-제이시의 딸이자, 사막의 선인장꽃으로 불리는 티야다.
선인장 꽃에는.
눈물이 없다.
알-제이시의 사병은 크게 네 조직으로 구성된다.
대내외적으로 알-제이시의 가병으로 잘 알려진 사막의 기병대와 조란 용병이 장을
통해 형성된 막대한 용병군단, 세 번째로 알-제이시를 산상군주라는 별칭으로
불리우게 만든 어쌔씬 조직이 있으며, 마지막이 사막 지하 던전들에 처박혀 있다는
소환 술사들이다.
소환술사들은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각종 동, 식물의 혼령들을 소환하는
부류와 죽은 자와 마물의 영을 소환하는 부류가 있다.
그렇다면, 죽은 시신을 조종하는 어둠의 네크로맨서들이 가장 많은 곳이 어딜까?
아니, 네크로맨서에 관한 학문이 가장 발달한 곳이 어딜까?
답은 바로 사막과 열대우림의 정?관한 학문이 가장 발달한 곳이 어딜까?
답은 바로 사막과 열대우림의 정글 속이다.
추운 지방에서는 시체가 쉽게 썩지 않는다. 매장해도 뼈를 잘 보존할 수 있다
하지만 푹푹 찌는 더운 지방에서는 시신에 대한 처리를 잘 하지 못하면 순식간에
부패해서 인독(人毒)을 뿜어낸다. 그런 연유로 열대 우림에서는 오랜 세월동안
시신의 처리 방법과 죽은 자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해왔다. 반면 사막지방에서는 그
반대의 이유, 고온과 건조한 기후로 인해 시체의 장기 보관이 천연적으로 가능해
지면서 이 분야에 대한 방대한 실험재료와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네크로맨서라는 무서운 술법자들을 키워 왔다.
그리고 그 정점에 바로 조란이 있다.
조란 주변이 사막에는 수많은 지하 던 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미궁처럼 형성되어
있으며, 그 지하 던전에는 사막에서 죽은 시신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채
네크로맨서들의 연구 재료로 사용되고 있다.
대개 마법사들이 그렇지만 네크로맨서들은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이고 타인의 간섭
받기를 죽도록 싫어한다.
사막 지하던전이 미로처럼 얽히게 된 것도 각 네크로맨서마다 독립적인 영역을
차지하려고 땅속으로 깊이깊이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천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십만 명의 네크로맨서가 머물렀던 조란 지하던전인 이제
천하제일의 미궁이라고 불리 울만큼 방대하고 어마어마한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그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다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그래도 인간 사회이기에 약간의 질서라는 것이 존재한다.
서로간의 반목과 분쟁을 조절하기 위해서 각 지파별로 대표들을 뽑아오던 전통이
아직까지 남아있는데, 그들을 던전 마스터(master)라고 부르고 있다.
현재 조란 지하 던전에는 3명의 마스터가 있으며, 그 중 가장 큰 지지 세력을 확보
하고 있는 에히고랍은 과거 제국 아르만과의 삼년전쟁 당시 알-제이시를 도와
제국의 기사들을 죽음의 공포로 몰고 갔던 대마도사로 유명하다.
대마도사 에히고랍에 마수(魔手) 소환에 조예가 깊은 카마탄과, 네크로맨서의
방대한 의학적,주술적 학문분야에 골고루 정통했다는 예히나탈을 합쳐서 던 전의 3
마스터라 부른다.
뙤약볕이 대지를 불사를 듯이 내려 쬐는 오후, 조란 붉은 토성을 벗어나서 사막을
향해 한참을 걷던 시르온은 집채만한 바위 그늘 아래로 들어섰다.
눈에 잘 안띄는 그늘 아래 모래를 발로 헤치자 두터운 나무로 짜여진 문이 바닥에
그 모습을 드러냈고, 벌겋게 녹슨 문고리를 세게 잡아당기자 끄그그긍- 삐꺽이는
소리를 내며 어둠침침한 지저로 통하는 계단이 드러났다.
사막의 지하 던 전은 사막 곳곳으로 통하는 암굴이 수없이 뚫려 있는데, 이곳도
그런 입구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다른 곳과는 달리 이곳은 마스터 가운데 한명인 예히나탈의 던 전에 직접
도달 하는 특별한 입구다.
어두운 계단이 빛 한점 없어도 익숙한지 성큼성큼 내려 간 시르온은 커다란 석문
앞에 멈춰섰다.
석문에는 끔찍한 몰골로 죽은 시신 한 구가 틀어박혀 있는데, 뼈 곳곳에 썩다 남은
살점들이 으스스하게 붙어 남아있고, 군데군데에는 핏줄과 힘줄이 뒤엉켜 말라붙은
모습이다.
해골의 왼쪽 눈에서는 푸르스름한 인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고, 정수리 부위에는
큼지막한 구멍이 뚫려 있는데 그 곳에는 굵은 못이 삐쭉 박혀있다.
시르온은 익숙하게 시체 앞에 서더니 핏덩이가 뒤엉켜있는 시체의 오른팔을 손으로
잡아 자신의 얼굴로 가져갔다.
그러자 놀랍게도 죽은 시신의 안광이 휘황하게 뿜어지며 삐쩍 마른 시체의 손이
시르온의 얼굴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듬는 일이 끝나자, 구구구궁-
석문이 마치 회전문인양 빙글 돌아가며 던 전 입구를 열어 주었다.
시르온을 자신의 노예이자 시동으로 선포한 티야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그에게
힘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 때 시르온은 네크로맨서의 수업을 받겠다고 청하고, 스스로 미궁의 던 전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티야를 비롯한 사람들은 그가 마스터인 예히나탈에서 직접 수업을 받는 줄은
모르고 있다. 단지 네크로맨서 가운데 한명을 운 좋게 스승으로 잡았을 뿐이라고
생각 할 뿐이다.
3 마스터 중 한명인 예히나탈은 의외로 수수하고 인상 좋은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주름이 적당히 많고, 하의뿐이긴 하지만 약간 밝은 계통의 의복도 걸쳤다.
꾸불꾸불한 흰 수염도 길게 길러 배까지 닿아있다.
엄청나게 방대한 서적으로 가득 찬 던 전 중앙탁자에 앉아 머리를 긁적이는
예히나탈의 모습은 결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네크로맨서의 모습이 아니다.
책에 몰두해있던 예히나탈은 시르온이 들어와서 고개를 숙여 보이자 자리에서
일어나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 이번에는 열흘 만에 왔구나? 너에 대한 티야의 집착이 더 심해지나 보지? 끌끌끌~
어떻더냐? 능숙한 암고양이의 맛이? "
예히나탈이 농을 하는데도 시르
어떻더냐? 능숙한 암고양이의 맛이? "
예히나탈이 농을 하는데도 시르온의 표정에 변화가 없자, 재미없어진 예히나탈이
볼을 실룩이며 무뚝뚝하게 책 하나를 던졌다.
" 재미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놈. 내 평생 제자를 두지 않았건만 어쩌다가 너 같은
놈이 걸려서. 끄응~ 옛다. 이번에 발굴한 지하 서고에서 찾은 책이다. 시기로 봐서
한 800년쯤 전 이곳에 살았던 네크로맨서가 남긴 것 같은데 네가 찾는 내용과
그래도 쫌 비슷하다. "
십년쯤 전, 시르온은 운명에 이끌리듯이 미궁 같은 던전 가운데 이곳으로 정확하게
찾아 왔고, 예히나탈은 시르온의 몸에서 후광처럼 어려있는 크로노스의 표징을
발견하고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예히나탈은 종교 같은 것에 얽매이는 성격이 아니라 크로노스 교도는 아니지만,
그의 하나밖에 없는 친아우는 과거 크로노스 교의 19 사제 가운데 한명이었다.
그리고 예히나탈 자신도 아우를 통해서 크로노스 교가 확보하고 있던 소환술에 대한
비법을 익히기도 했다. 그렇기에 시르온, 아니 쥬논이 찾아오자 크로노스 교에 대한
빚을 갚는 심정으로 그를 받아 들였다.
눈을 빛내며 책을 받아든 시르온은 조심스레 책장을 넘겼다. 책이 워낙 낡다 보니
자칫하면 훼손될까 싶어서이다.
책은 고대 남부 토착어로 쓰여 있었지만, 예히나탈에게 수많은 지식을 전수 받은
시르온은 무리 없이 책을 독파해갔다.
정신없이 책을 넘기는 시르온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예히나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곳에 예히나탈 자신이 모아놓은 책만도 팔만권이 넘는다. 네크로맨서 학(學)에
조금 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모두 모아 놓았다.
이 책들은 그의 평생 역작이자 자부심이다. 그런데 눈앞의 저 꼬맹이는 불과
십년이라는 시간동안 이 책자들을 대부분 다 독파했다.
책을 읽는 무서운 속도와, 한번 일견함만으로도 그 내용을 거의 다 파악하는 놀라운
이해력과 암기력. 시간이 지날수록 예히나탈은 자신이 크로노스의 악마 하나를
키우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일어날 정도였다.
어쨌거나 하나밖에 없는 제자가 정신없이 책을 탐독하는 모습은 보기에 흐뭇했다.
" 세균학에 대한 관련 서적도 저쪽에 뽑아서 모아 놓았고, 여기 세권도 이번에 같이
발굴한 것들인데 읽어볼만 할게다. "
예히나탈의 말에 답도 안하고 고개만 끄덕이며 책 속에 빠져든 시르온의 손끝에는
녹색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빛 무리가 어려 있었다.
희미해서 잘 드러나지 않지만 깊은 어둠속이거나 시르온이 무언가에 몰두하면
나타나는 현상. 예히나탈로도 저게 어떤 현상인지 잘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시르온이 익히고 있는 무언가와 연관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예히나탈의
가르침과 상관없이 시르온은 스스로 읽은 방대한 서적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익히고
있었다.
아마도 예히나탈을 찾아와서 한 첫마디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십년 전, 예히나탈을 처음만난 12세의 노예 꼬맹이 시르온이 꺼낸 첫마디를
예히나탈 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 전, 독을 익히고 싶어요. 포이즌(poison) 네크로맨서가 될래요. "
그 날 이후, 불쌍한(?) 예히나탈은 팔자에도 없는 독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네크로맨서의 모든 분야에 정통해 있는 예히나탈이다.
게다가 대개 네크로맨서들이 어느 정도 독에 대한 기초지식은 갖추고 있고,
예히나탈 은 그 정도 보다 훨씬 더 깊은 조예를 갖고 있었다. 독과 밀접한 의학이
예히나탈의 주 전공 분야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시르온이 요구하는 수준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질문 수준도 상궤를 벗어나 예히나탈의 상식을 깨는 수준으로 깊어졌다.
결국 시간이 조금 지나자, 시르온은 에히나탈의 가르침을 받는 대신 스스로 책을
통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예히나탈은 이 어린 제자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려고 독에
대한 지식을 모아갔고, 지저의 잃어버린 던 전들을 발굴해서 관련분야의 지식을
파악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지금은 시르온이 독에 대해 어느정도 지식을 갖고 있는지 가늠하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단지, 최근 시르온이 하는 연구가, 시체의 부패를 빠르게 촉진시키는 촉매성 세균에
대한 것임을 짐작할 뿐이었다.
" 재미있네요. "
잠시 옛 생각에 잠겨 있다가 시르온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든 예히나탈은 씩 웃었다.
저 건방진 제자가 흥미를 보이는 내용을 찾아 주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에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하지만 이내 기분이 상했다.
먼저 저 책을 다 보았건만 무슨 내용인지 잘 파악이 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 그, 그렇지? 나, 나도 흥미있게 읽었었다. 누군지 몰라도 꽤 깊이 있는 연구를
했더구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균에 대해서. "
" 맞아요. 세균이 생물을 분해하는 시간을 단축하는 방법이 독창적이네요. 제가
생각해온 방법하고 병행해서 실험해 봐야 갰어요. "
" 그, 그러니? 실
생각해온 방법하고 병행해서 실험해 봐야 갰어요. "
" 그, 그러니? 실험 해 보려고? 나, 나도 좀 보여주면 안 되겠냐? 그 실험? "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지긴 했지만, 예히나탈은 호기심을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제자가 하는 연구의 성과를 보고 싶었다.
의뭉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시르온의 눈길이 거북하긴 했지만 호기심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
" 휴- 좋아요, 여기 책에 있는 방법으로 한번 해보죠. 이 책 저자는 촉진법만
연구했지 세균을 실제로 부리는 방법은 몰랐던 게 분명해요. 그래서 실패라고
결론지었지만, 제가 생각한 방법대로 하면 효과가 있을 거예요. 실험재료 없어요?
뭐 산사람이나, 아 무거나. "
" 왜 없겠어? 의학 실험이 내 전공인데. "
예히나탈이 줄을 당기자 한쪽 석벽이 회전문처럼 빙글 돌아가며 그 안에 철장에
갇혀 울부짖는 수많은 사람들이 드러났다.
어린아이에서 노인, 임산부까지, 갖은 실험으로 인해 팔 셋에 다리 넷은 기본이요,
동물들과 합쳐진 괴인들까지 그야말 로 인세의 지옥을 보는 모습이다.
예히나탈, 그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에 속지마라.
그는 저주받을 어둠의 자식, 네크로맨서, 그것도 이곳 네크로맨서 소굴의 마스터다.
철퍽-
예히나탈이 턱으로 지시하자 석상처럼 서있던 거한 둘이 창살 안으로 들어가서 연인
한명을 끌고 나와 바닥에 팽개쳤다.
예히나탈의 명령을 듣는 거한들의 몸을 자세히 보면 시신들 여기저기서 몸을 기워서
만들어진 괴물들인데 울긋불긋한 피부조직 곳곳이 녹아 내려서 엉겨 붙은 모습이다.

비위 약한 사람이라면 보기만 해도 구토를 할 정도의 모습이건만 예히나탈이나
시르온이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끌려나온 여인은 새로 들여온 실험 대상인 듯 정상적인 아직 신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악을 쓰고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있었다.
부들거리는 몸과 공포에 질린 얼굴, 끌려 나오지 않으려고 바닥을 긁는 바람에
손톱이 다 빠지고 피투성이가 되었다.
" 여기서 실험재료가 되느니 이게 더 편할 겁니다. "
입에 거품을 물고 자지러질듯이 바동거리는 여인을 보며 시르온은 담담한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순간 시르온의 손끝이 어둠속에서 영롱한 녹색으로 빛이 나며 마치 반디불이
모여들듯이 반짝거렸다.
예히나탈은 시르온이 어둠속에 편안하게 동화된 듯이 느껴졌고, 녹색으로 빛나는 빛
무리를 황홀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렇지만 곧이어 " 으, 으, 으아 아아 으으으아아악-악- 사, 살려 주세 으아- "
귀청을 찢는 듯한 비명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예히나탈은 바닥에 널브러진 여인에게
고 개를 홱 돌리더니 눈이 왕방울 만하게 커졌다.
푸스스스-
약간의 연기를 동반한 채, 여인의 몸은 시르온이 가리킨 부위를 중심으로 서서히
없어지고 있었다.
뼈와 내장을 비롯한 단면조직이 드러나면서 마치버터가 불에 녹는 것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뼈처럼 딱딱한 경화 조직이건 피부 같은 연성 조직이건 녹는 속도도 동일했다.
여인의 목 부위가 사라지자 굳은 표정의 머리가 땅바닥에 떼군 굴러 떨어졌고, 이내
그 머리도 흩어지듯 사라져 버렸다.
불에 태우건, 황산에 담그건 뼈까지 이렇게 빨리 녹일 수는 없다.
그런데, 사람의 몸 하나가 완전히 없어지는데 걸린 시간은 한 컵의 미지근한 물을
들이킬 정 도 밖에 걸리지 않았고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약간의 연기 외에는.

그야말로 사람 하나가 공중에서 분해 되어 사라졌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 세, 세균이냐? 이, 이게 부패 된 거냐? "
" 부패라기보다, 제 뜻에 따라 인체의 조직을 세균들이 갉아먹은 거죠. 제가 한
일은 세균들을 풀어놓고, 그들의 행동이 촉진되는 분위기를 만들어 준 것 뿐이고요.
"
예히나탈은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무색, 무취, 무미.
색도, 냄새도, 맛도 없이 순식간에 사람을 죽이는 독 네크로맨서는 그야말로 재앙이
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 어느 정도, 얼마나 많은 양의 세균을 부릴 수 있는 거냐? 응? 대체.! "
" 아직 많이 부족해요. 기껏해야 여기 방을 가득 채울 정도의 분량. 게다가 속도도
많이 느리고 탁신(toxin)의 종류도 한정되어 있어요. 그래서 인체 조직에만
효과적이죠. "
" 종류가 한정적이라고? 그게 무슨 뜻이냐? "
" 간단히 설명 드리자면 이런 거예요. 인체의 다양한 조직 세포들은 서로 뭉쳐서
하나의 조직을 이루는데, 그 조직에 따라서 서로 다른 결합을 하고 있죠. 광물이나
이런 것들은 또 다르고. "
시르온이 설명하는 바는 예히나탈도 대충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어떤 종류의
탁신을 쓰느냐에 따라 특정 조직을 잘 파괴한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고.

" 그러니까, 여러 탁신을, 여러 세균을 섞어 써서 동시에 인체조직을 파괴한다는 말
이냐? "
" 광물까지 도요. 두터운 갑옷으로 꽁꽁 싸여있어도 빠르게괴한다는 말
이냐? "
" 광물까지 도요. 두터운 갑옷으로 꽁꽁 싸여있어도 빠르게 녹일 수 있도록 하려면
더 많은 탁신으로 군집된 세균군(細菌群)을 부릴 수 있어야 해요. 녹이진 못하면
갑옷을 통과라도 하던가. "
예히나탈의 이마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 그, 그게 가능하겠냐? 금속을 녹이다니?! "
"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져요. 긴 세월이 흐르면 금속뿐 아니라 그 어떤
것 도 사라지죠. 모든 물질은 주변과 계속 동화되니까요. "
잠시 말을 멈춘 시르온은 다시 말을 이었다.
" 제가 하고 싶은 것은, 그 억겁의 시간을 짧게, 아주 짧게 단축시키고 싶을
뿐이에요. 생명체에게는 그 시간이 더 짧아지겠지만. "
둘의 대화가 이어지는 어둠 속, 이제는 시르온의 손끝이 아니라 눈이 녹색으로
빛나고 있다.
적어도 예히나탈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시르온이.
어둠속의 녹색이라고.
" 이제 스켈레톤을 일으켜 보거라. "
두 손의 검지를 하나로 모으고, 새끼손가락을 서로 마주 걸어 인을 맺고, 긴영창이
시작되자 시르온의 주위로 물결이 파동 치듯이 마나(mana)가 모여들더니, 화악-
시르온을 중심으로 주변 10여 미터에 커다란 빛의 기둥이 생겨났다.
끄그그극- 끄극- 끄르륵- 끄끄끄끄-
그와 함께, 피고름이 엉겨 붙은 뼈 뭉치가 축축한 대지를 뚫고 하나, 둘,
일어서더니 차츰 사람의 골격을 갖추며 고개를 들었다.
썩어가는 뼈와 인광이 시퍼런 해골, 어둠의 네크로맨서가 부리는 수족으로 인식되어
온 스켈레톤이 일어났다.
" 네, 다섯, 여섯, 일곱. 모두 일곱 구를 소환했구나. 여기 묻힌 뼈는 모두
서른아홉 구니까 대충 1/6 정도는 불러낸 셈이네. "
" 진도가 느리지요? "
시르온이 죄송한 듯이 머리를 긁적이자 예히나탈이 고개를 저었다.
" 영창에 걸린 시간하고, 소환한 스켈레톤 병사의 숫자하고 종합해보면. 지금 네
수준은 아직 정식 네크로맨서라고 부르기는 뭣하지만 예비자 정도는 된다. 8년 만에
그 정도면 빠른 편이지. 물론 나는 3-4년 만에 해치웠지만. 클클클클 ~ "
소환술을 가르치는 시간만 되면 예히나탈은 기분이 좋아진다. 의학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비참한 수모가 한번에 가시는 느낌이다.
" 이제부터는 네가 소환한 어둠의 병사들에게 마나로 이루어진 무기와 방어구를
장착 해주는 술법을 연습하도록 하자. 잘 꾸민 스켈레톤 하나, 열 전사
부럽지않다.라는 격언도 잇지 않더냐? 클클~ "
" 그런 격언이 있었던가요? "
예히나탈의 농담에 시르온의 입가에 비로소 웃음기가 한번 맺혔다.
" 물론이지. 네크로맨서 명언 집에 나와 있는 격언중의 격언이다. 나중에
스켈레톤이 아니라 무얼 소환하든지 간에 강력한 무기를 공급해 줄 수 있으면
그만큼 무서운 힘을 발휘시킬 수 있다. "
시르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예히나탈은 더 신이 났다.
" 나는 아직 재료가 없어서 도전하지 못했지만, 검격(劍格)이 극에 다다른 기 사,
그것도 악의 마음에 물든 기사의 영혼과 시신을 온전하게 취할 수 있으면, 거기 에
온갖 주술로 어둠의 기운을 주입시켜서 죽음의 기사 데쓰나이트(Death knight)를
만들 수 있다. "
데쓰나이트라는 말에 시르온의 눈이 빛나자 예히나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그의 동생 예히녹은 크로노스교의 사제로 있으면서 교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데쓰나이트 두 기 제작에 성공한 적이 있었다. 예히녹이 만든 데쓰나이트는
성기사단을 상대로 무서운 신위를 떨치며 공포를 심어 주었다.
성기사들 가운데 데쓰나이트와 싸울 수 있었던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을
정도로 무서웠다.
데tM나이트 얘기가 나오자 동생의 모습이 잠시 떠올라 말을 멈췄던 예히나탈은 다시
말을 이었다.
" 그래, 너도 들어서 알겠지만 데쓰나이트를 너무 맹신하면 안돼. 그들도 정말
무서운 기사를 만나면 붕괴된다. 하지만, 그때 예히녹이 데쓰나이트들에게 좀 더
강력한 무구를 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
" 기사들이 미스릴로 만든 마법의 패너플리(panoply)를 걸치고 싸우는 것과 비슷한
건가요? "
" 그렇지. 그들이 마법 패너플리와 갖가지 공격증가 마법이 걸린 검과 창을 쓴다면,
데쓰나이트도 비슷하게 갖춰줘야 공평하지. "
예히나탈의 눈가에 자부심이 어렸다.
어둠의 힘을 다뤄 각종 소환 물에게 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도록 하는 이 분야는
그 가속한 네크로맨서 지파의 주특기이자 예히나탈의 장기이다.
이런 마법을 하자면, 우선 마나를 잘 다룰 줄 알아야 하고, 마법 주문들을 잘
연결해 야 한다.
또 어둠의 힘을 잘 담을 수 있는 재료나 물성에 대해서도 박식해야 한다.
박식하면 또 예히나탈 아닌가!
" 그러자면 한가지 더 연습할 것이 있는데, 바로 영창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는
일이다. 소환과 동시에 마법 무구가 소환 물에게 부착되어 나와야 하니까, 마나
배열이 길어지지. 그러니까 결국 영창시간 단축이 필수다. "
예히나탈은 정말 열심이었다.
눈앞에서니까 결국 영창시간 단축이 필수다. "
예히나탈은 정말 열심이었다.
눈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물먹는 솜처럼 자신의 지식을 다 흡수하고 있는 시르온이
장차 어떤 악마가 되건 그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시르온이 어디까지 성장할지 그것이 보고 싶어졌다.
장차 시르온이 자신이 가르치는 어둠의 소환술에 스스로 개발하고 있는 무서운
절독까지 겸비한, 그야말로 재앙의 화신이 되어 버리더라도 그 끝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츠츠츠츠츠--
알록달록 화려한 비늘을 자랑하는 독사 한 마리가 한낮의 뙤약볕을 피해 선인장
그늘을 누비며 S자로 미끄러진다.
크기는 50 -60 센티미터 정도, 그리 큰 크기는 아니지만 이곳 사막 부족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화홍사(火紅蛇)다.
일반 독사에 비해 빠르고 교활한데다, 실로 무서운 맹독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놈에게 물리면 독에 강한 오크들도 죽어나갈 정도다.
그보다 더 무서운 점은 이 놈들이 상대의 눈을 향해 기습적으로 뿜어내는 독이다.
독사는 물기만 한다고 잘못 알고 있는 외지인들은 멋모르고 이 놈들에게
다가갔다가, 홱 뿌리는 독액에 눈이 멀기 일수다.
그리고 한 번 상대의 눈이 멀면 어느새 뒤로 다가와 물어 버린다.
츠읏-
사막을 가로지르던 독사는 눈앞에 구릿빛 피부의 사내가 우뚝 서서 만드는 그늘을
발견하고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 운이 좋군. 돌아가는 길에 이런 녀석을 발견하다니. "
던 전에서 나와 조란 토성으로 돌아가던 시르온은 독사 중의 독사로 불리는 놈을
만나자 기분이 좋아졌다.
독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 베남(venom : 뱀, 거미, 전갈, 벌 등의 독액)보다는
탁신(toxin) 쪽에 더 빠른 성취를 얻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베넘에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흥미로웠다.
같은 독이지만 미생물로부터 기인한 탁신에 비해, 생명체가 뿜어내는 베넘은 강한
원념이 느껴져서 좋았다.
하긴 그런 이유로 많은 주술사들이 의식 때 베넘을 종종 사용한다.
카와-
상대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껴서였을까?
화홍사는 진한 독액을 5미터 가까이 뿜어내며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독액을 막은 시르온은 슬쩍 물러섰다.
대개 화홍사의 독을 손으로 막으면 손이 타들어 간다. 하지만 시르온은 손바닥에
묻은 노린
내 나는 독액에 살짝 혀끝을 대어 맛보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 이런, 이런. 알을 밴 어미구나! 이렇게 오래 묶은 화홍사를, 그것도 독이
최고조로 오른 놈을 만나다니 정말 운이 좋구나. "
성큼, 화홍사에게 다가선 시르온이 교묘하게 팔을 꺾어 허공을 낚아챘다.
분명히 빈 허공이었다.
하지만 결과를 보라. 시르온의 손에는 아가리를 쩍 벌린 화홍사의 목 부위가 움켜
쥐 어 있는 것이 아닌가!
독 네크로맨서가 되려고 마음먹은 뒤 수많은 독사에 대해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실제로도 독사굴에 기어들어 간 적도 있었다.
뱀의 움직임이 어떻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몸에 익었다.
시르온의 팔목을 칭칭 감으려 바동거리는 화홍사는 그이 손가락 끝이 녹색으로
번쩍이며 쓰다듬자 쉿쉿- 소리를 내며 축 늘어졌다.
심지어 시르온의 손가락이 아가리 안으로 들어와 날카로운 이빨을 쥐고 부러뜨려
버리는데도 꼼짝도 못하고 늘어졌다.
허리춤에서 조그만 병 하나를 꺼낸 시르온은 화홍사의 머리를 그리 들이밀고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짰다.
뚝뚝뚝-
화홍사의 진득한 독액이 병을 채워가고, 한참을 쥐어짠 시르온은 병을 다시
갈무리하고는 빙긋 웃으며 축 쳐진 화홍사의 머리를 오득 베어 물었다.
" 독만 뽑고 놓아주었으면 좋겠지만, 오늘 돌아가면 티야 주인마님이 날 놓아주지
않을 것이 뻔하니 어쩌겠느냐? 이왕 독도 빼앗긴 바에야 내게 보탬이나 되거나. "
화홍사는 상품의 정력제로 애용된다.
던전에 들려서 찾고 있던 좋은 자료도 구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품질 좋은 독 원료도 구했다.
원래 그런 성격은 아니지만, 시르온의 입에서 모처럼 농이 흘러 나왔다.
멀리 우뚝 솟은 조란 붉은 토성을 향하는 시르온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시르온이 간만에 주인마님을 위해(?) 몸에 좋은 뱀까지 쓱싹하고 왔건만, 티야
소유의 대저택 분위기는 냉랭한 긴장감이 가득했다.
티야 알-제이시의 부친 알-제이시는 일흔의 나이에도 무섭도록 강인한 카리스마를
보이며 조란을 움켜쥐고 있었다.
조란 어느 누구도 알-제이시의 권위에 감히 도전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의 강력한
지배는 끝을 모를 듯이 보였다.
최근 들어 알-제이시가 공식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조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는 자신의 궁에 틀어박혀 있음에도, 아무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틀 전, 알-제이시의 철옹성의 문이 열리더니, 긴 나팔소리와 함께
알-제이시의 사망이 발표 되었다.
그 뿐 아니다.
알-제이시의 장남 파하듯 알-제이시를 제치고 느닷없이 알-무하드를 후계로
삼는다는 유언이 선남 파하듯 알-제이시를 제치고 느닷없이 알-무하드를 후계로
삼는다는 유언이 선포되었다.
알-무하드는 알-제이시의 신임을 받던 친동생이다.
어미어 자리를 얻기 위해 형제들을 모두 죽였던 알-제이시가 유일하게 살려둔 막내
동 생이고, 알-제이시의 손에서 크다시피 했으며, 성장해서는 알-제이시의 그림자로
불리며 어쌔씬 조직을 이끌어 왔던 인물이다.
제일 먼저 분통을 터뜨린 사람은 물론 파하드였다.
파하드는 자신에게 돌아올 몫을 앉아서 빼앗길 만큼 녹녹한 성격이 아니다.
게다가 그는 알-제이시의 막강한 전사조직을 휘하에 두고 있다. 파하드의 명으로
사막 에 퍼져있던 전사들이 얼굴에 문신을 그리며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발 빠르게 대마도사 에히고랍에게도 지지를 요청했다.
비록 에히고랍이 자신은 이번 소용돌이에 끼지 않고 중립을 지키겠다고 해서 김이
빠지긴 했지만, 알-무하드의 편에 서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티야도 큰오빠 파하드를 지지하며 자신의 사병들을 이끌고 나섰다. 그녀가 거느린
사병은 과거 알-제이시가 손수 키운 정예병들이기에 그녀의 가세는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알-무하드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그동안 던 전에만 웅크리고 세상에 나오지 않던 던전의 마스터 카마 탄이 무슨
이유에서 인지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알-무하드의 오른편에 섰다.
이리저리 따져 봤을 때, 전력상으로는 파하드가 앞서지만 알-무하드는 높은 성벽의
철옹성을 차지했기에 양측의 힘은 비등한 상황이었다.
시르온이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는 횃불이 사방에 밝혀져 있고 경비가 삼엄했다.
알-무하드의 어쌔씬 조직은 제국 아르만에까지 이름이 알려져 있을 만큼 무섭다.
그들은 일단 살인 명령이 떨어지면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한다. 대개의 경우 파견
된 어쌔씬이 암살 대상에 가까운 사람들이기에 더욱 무섭다.
50년 전 알-제이시는 도득하고도 무서운 방법으로 어쌔씬 조직을 구축했다.
그가 부리는 어쌔씬은 전문 어쌔씬과 비전문 어쌔씬이 한 조를 이루어서 행동한다.
전문 어쌔씬은 어린 노예들 가운데 후보자를 선별한 후에, 갖은 혹독한 방법으로
훈련 시켜서 인성이 파괴된 살인자를 만든다. 그들은 알-제이시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전투 와 마법을 고루 익히고 끊임없이 스스 로를 갈고 닦도록 키워졌으며,
알-제이시의 명령만 듣도록 세뇌되었다고 한다.
이에 비해, 비전문 어쌔씬은 암살 대상의 선정과 함께 정해진다.
암살 대상과 접촉이 잦은 주변 인물 가운데 한명이 선정되며, 은밀하게 알-제이시의
궁으로 납치되어온다.
그들은 알-제이시가 구축한 하렘에서 수많은 미녀들과 좋은 술과 고급 음식을
즐기며 향락에 빠져든다.
하렘 내에서 알-제이시의 후궁을 제외한 모든 여인들이 제공되고 원하는 어떤
종류의 성행위도 기꺼이 베풀어진다.
그러면서 매일같이 투여 되는 강한 마약.
결국 마약과 여자, 술에 중독이 되었다 싶으면 길거리에 내다 버려진다.
손을 떨고 입가에 침을 흘리며 폐인처럼 삐쩍 마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머물던 궁이
어디인지, 누구 것인지도 모른다.
단지 산 위에 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산을 찾아 헤매며 현실에 괴로워한다.
그리고 떨어지는 명령.
바로 죽음의 명령이자 파멸의 명령이지만, 폐인이 되어버린 그들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뿐이다.
바로 산 위의 노인, 바로 산상노인 알-제이시가 내리는 암살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다.
어려서 알-제이시의 궁에서 살면서 이런 충격적인 과정을 지켜봤던 티야다.
저택의 경비를 강화하면서 제일 먼저 조사한 것이 최근 자신 주변 인물 가운데
행적이 불분명한 자들을 모두 조사했다.
그녀의 요리 담당 여인 한명이 고향마을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불문곡직하고 그녀
앞에 끌려와서 채찍에 목이 감겨 죽었다.
친위병 가운데 한명도 사지의 힘줄이 끊긴 채 저택 지하에 감금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노예 시르온이 돌아온 것이다.
병사들에게 포박되어 거칠게 무릎 꿇려진 시르온을 보는 티야의 눈초리가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사막 던전에 흑마법을 배우러 다녀왔다는 사실은 그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심을 안 해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친위병도 병신으로 만드는데 하찮은 노예 따위를 감싸고도는 모습을 만인 앞에서 보
여 줄 수도 없었다.
촤악- 휘익-
그녀의 채찍이 허공을 가르며 시르온의 목을 조였다.
이번에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는지 단번에 그의 목에 피가 흐르고 힘줄이 부풀어
올랐다.
" 어딜 갔다 오는 길이야? "
티야의 눈이 약간 붉게 물들었다. 차라리 더 오래 있다가 모든 일이 수습된 후에 오
지 그랬냐는 눈빛이다.
하지만 옆에는 남편도 있다. 친위병도 있다.
" 주, 주인 마, 마님의 은덕으로 사막 던전에 배움을. "
" 여기 이자의 허리춤에서 나온 병인데 독이 담긴 것 같습니다. "
친 위병 한명이 그의 변명을 막으며 그에게서 압수한 화홍사의 독쓴求? "
친 위병 한명이 그의 변명을 막으며 그에게서 압수한 화홍사의 독액을 들고
티야에게 갔다.
" 독? 독 네, 네가 정말로? 네가 감히 어떻게 나에게 "
티야의 눈에서 강력한 살의와 함께 분노가 일어났다. 배신감이 들자 눈앞의
시르온을 자신이 얼마나 아끼는지도 잊어버렸다.
채찍에 마나가 실리고, 그의 목이 강하게 조이며 얼굴이 붉다 못해 푸르게
물들었다.
시르온의 목을 조르면서 그녀는 친 위병이 건네주는 병을 받으러 손을 내밀었다.
시르온의 손 끝이 녹색으로 물들고, 고함소리와 비명이 울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 죽-엇 "
후우우우--휘잉
노아부 제국 전사들이 즐겨 사용하는 만월도(滿月刀)가 바람을 가르며 사선으로
격렬 하게 휘둘러졌다.
솟구치는 붉은 피, 시간이 정지한 듯한 적막한 고요.
티야 알-제이시는 왼쪽 뺨에서 시작해서 목 언저리를 훑고 쇄골, 가슴을 지나
복부까지 이어지는 선을 따라 화끈한 뜨거움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시르온의 목에 걸었던 채찍을 당겨 두번째 칼질을 막아내었지만, 그걸로
힘이
다한 듯 풀썩~ 쓰러졌다.
그녀의 긴 머리가 출렁이며 밤하늘을 수놓았고 눈의 초점이 희미해졌다.
그녀를 중심으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이, 주변 친 위병들이 달려오는 속도가
너무 느려보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칼을 휘두른 암살자의 세 번째 칼질이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도 아주 느린 동작으로 보였다.
" 크우웃- "
한번, 두 번, 그리고 세 번째 만 월도를 휘두른 암살자의 손이 점차 붕괴되고 있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제로 가장 가까이 있던 티야도 상대의 손을 볼 정신이 없었고, 미친듯이 만월도를
휘두른 암살자 자신도 자신의 손 상태가 어떤지 몰랐다.
하지만 세 번째 휘두르던 손은 손목까지 붕괴되며 빠르게 썩어 들어갔고, 만월도는
허공에서 힘을 잃고 뿌려지며 티야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 버리는데 그쳤다.
그리고 그녀의 눈 앞, 푸스스스-
없어져가는 손을 붙잡고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암살자에게, 시르온이 달려들면서
상대의 턱을 발로 차고 병을 빼앗는 모습이 들어왔다.
병을 쥔 손으로 마개를 튕겨낸 시르온은 바로 몸을 날려 티야의 몸을 감싸 안으며
병에 든 화홍사 독의 원액을 한 모금 마시고는 남은 독액을 던졌다. 티야에게 제일
먼저 달려온 친 위병을 향해서 뿌렸다.
손이 부서진 암살자는 비전문 어쌔씬이다.
그렇다면 제일 먼저 달려오는 자가 전문 어쌔씬일 것이다.
시르온의 예상대로 남들보다 배는 빠르게 다가온 친위병은 느닷없이 만월도를
뽑아서 휘둘렀다.
그의 도는 뽑히는 동시에 석양 빛 붉은 오러(aura)로 뒤덮여 얇은 막을 형성했다.
저기에 스치면 무엇이든 잘려 나갈 것이다.
하지만 도를 채 휘두르기도 전, 반 호흡 먼저, 시르온의 뿌린 노릿한 독액이 전면을
막았다.
피할지 뚫을지.
어쌔씬의 판단은 정면 돌파였다.
어지간한 독으로는 자신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 설사 해가 되더라도 자신의 목표인
티야의 목만 취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손으로 독액을 쳐내며 만월도를 내리 긋던 친 위병의 얼굴은, 손에 독이
닿는 순간 후회로 일그러졌다.
" 크흡- 이, 이건 "
노란 빛깔의 독 가운데 화홍사의 독이 있음을 잠시 잊었던 탓이다.
아니 비천한 노예의 품에서 나온 병에 귀하디귀한 화홍사 독이 있을 줄은 몰랐다.
화홍사의 독은 닿는 순간 지독한 열기를 수반하며 모든 것을 태워 버린다.
손이 벌겋게 익으며 타오르고, 독을 뒤집어 쓴 부위가 모두 타들어 갔다. 머리도
어지러웠다.
어지러움을 참고 눈을 부릅뜨며 도를 긋는 순간, 시르온의 입에서 뿜어진 독액이
어쌔씬의 눈을 강타했다.
" 크악- "
눈알이 삽시간에 녹고 안면이 뭉그러지며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 덕분에 휘두르던 도의 방향이 살짝 틀어졌고, 오러를 수반한 만 월도는 시르온의
어깻죽지를 가르고, 그 안에 감싸져 있는 티야의 옆구리를 훑으며 땅거죽만 깊게
패여 놓았다.
다시 도를 회수하며 두번째 휘둘렀지만 그때는 이미 눈이 안보이고 감각도
없어졌다.
" 크허어어엉-- "
상처 입은 사자의 울음을 토하며 마구 도를 휘두르던 어쌔씬은 결국 다른 친
위병들이 던진 창이 몸에 하나 둘 꽂히면서 털썩-
고목이 쓰러지듯 무너졌다.
전신에 40개가 넘는 창을 박아 넣은 처참한 모습으로 주저앉았다.
" 주변을 경계하라, 아무도 접근 시키지 말라.
친위대장의 목청이 높아질 즈음, 비로서 티야는 무거운 눈꺼풀을 닫고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의 몸을 덮은 시르온의 체온이 따뜻한 이불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도 때로는 기분이 좋은 일이다.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티야더라도 말이다.
눈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남편 라흐만이었다.
그것이 티야의 눈을 찌푸려지게 만들었다.
겁을 잔뜩 먹은 눈.
어제 소동 속에서 라흐만이 가장 먼저 몸을 빼고 몸을 사렸던 사실이 기억났기 때문.
어제 소동 속에서 라흐만이 가장 먼저 몸을 빼고 몸을 사렸던 사실이 기억났기 때문
이다.
하긴 곱게만 자란 라흐만에게 최근 벌어진 내전은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일 것이다.
그는 티야가 내전의 중심에 끼어드는 것을 싫어했고, 중립을 지키며 잠시 피신해
있기를 원했다.
아니 실제로 자신만이라도 몸을 피하려고 했었다.
티야가 비릿하게 웃으며, 어디로 가던 어쌔씬이 달라붙을 것이라고, 여기가 차라리
더 안전할 거라고 말했기에 이곳 조란에 남은 것뿐이다.
" 시르온. 그. 아이는 어떤가? 무사한가? "
티야가 깨어나서 가장 먼저 물은 것이 노예 시르온의 안위다.
옆에 있던 시종이 다른 곳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다고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 티야는
이번에는 친위대장에게 정세를 물었다.
라흐만의 입술이 꽉 깨물려졌다. 아무리 그 노예가 티야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지만,
그렇다고 남편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비천한 노예의 안위부터 묻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의 주변의 성노(性奴)들과 질퍽한 성교를 나누는 동안, 티야도 건장한 남자
노예 들을 침실로 끌어들이고 있음을 눈치 채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노예일 뿐이다.
맘에 안 들면 언제든지 죽이거나 갈아 치운다.
그게 바로 사막의 선인장 꽃 티야다.
그런데 이번 그 어린 노예는 오랫동안 질리지 않고 곁에 두는 눈치다. 그러더니
이제는 감싸기까지 한다.
아내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렇더라도 하찮은 노예와 비교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흐리멍텅하던 라흐만의 눈에 모처럼 날카로운 기세가 심어졌다.
" 그 병에 들은 독이 화홍사의 독이라던데. 맞느냐? "
어깨에서 배까지 흰 붕대를 칭칭 감고 뺨에 난 상처에 약초를 바른 모습이지만,
휘장 너머 침상에 정좌한 티야의 전신에서는 위엄이 넘친다.
계단 아래 깔린 양탄자에 머리를 조아린 시르온은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도 어깨와 가슴을 붕대로 감고 있다.
" 예, 주인님. "
" 그걸 어디서 얻었고, 뭐에 쓰려고 간직한 것이냐? "
" 사막 지하 던전의 스승께서 주신 것이고, 지금 독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
시르온의 답에 티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독을 뿌리면서 자신의 목숨을 구했던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독을 배운다? 쓸데없는데 힘을 쓰고 있구나. 하긴 덕분에 내 목숨을 구하긴
했다만. "
독으로는 큰 힘을 내기 힘들다.
제대로 배운 전사들에게 걸리면 별 성과도 없이 목숨을 잃기 십상이다. 잘해야
어쌔씬 노릇이나 할까?
안타까운 마음에 티야는 혀를 찼지만 어차피 시르온이 노예의 신분임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한번 노예의 인장이 이마에 찍힌 이상 명예로운 전사가 되기는 틀린 일이니까.
" 어거나 너는 노예의 직분을 다했으니 내 상을 내릴 것이다. 바라는 바가 있으면
말해보아라. 설사 네가 자유를 원한다고 해도 들어줄 것이다. 물론 여기에 계속
머문 다는 조건 하에. "
굳어있던 티야의 안색이 부드럽게 풀렸다.
노예들이 바라는 최대 희망이 자유 아닌가. 그녀는 시르온을 위해 노예 신분을
풀어줄 생각까지 했다.
그러면서 그의 기뻐하는 얼굴을 보기를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시르온은 그녀의 기대에 부응할 생각이 조금도 없는 듯
했다.
" 굳이 있다면, 던 전에서 배우는 시간을 조금 더 늘려주시기를 감히 주인님께
청합니다. "
시르온의 무미건조한 요청에 티야의 안색이 다시 살짝 굳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 시르온이 계속 자신의 노예로 남아있는 점에 대해서는
만족스러웠기에 그녀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시르온에 대한 처우 문제가 완결되자 그녀의 머리 속은 온통 숙부 알-무하드에게 이
빚을 갚아줄 생각으로 꽉 차버렸다. 시르온이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할 일도 잊어버릴 티야가 아니다.
시르온도 이번 첫 싸움을 겪으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독이라는 것이 정말 무섭기는 하지만, 전사들과 피 튀기는 격투를 하기에는 반응
속도 가 너무 느렸다.
독을 풀고, 그 독이 적에게 치명타를 가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면, 자신은 이미 목
이 날아가도 몇 번은 날아간다.
이번만 해도 상대가 티야를 죽이려는 긴박한 상황만 아니었으면, 날아오는 독을
피하지 결코 직접 맞닿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사나 기사를 피해 다니며 암습이나 하려고 독 네크로맨서의 길을 택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티야의 면전에서 물러나오면서, 시르온의 머리 속은 당당하게 기사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더 강력하고, 더 빠르게 중독 시킬 방법을 찾고 있었다.


4. 망혼벽을 찾아라


라흐만은 술에 취했다.
티야 소유의 저택을 나와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것이 이틀 전.
티야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나왔지만, 막상 나오고 보니 알-무하드의 어쌔씬이
언제 나타날까 두려웠다.
두려움을 피하려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다 보니 두려움이 가셨다.
원??두려웠다.
두려움을 피하려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다 보니 두려움이 가셨다.
원래 조란은 용병시장과 노예시장을 끼고 사창가가 넓게 퍼져있다.
라흐만 정도 되는 귀족이 더러운 사창가에 들릴 일은 없지만, 그는 가끔 이곳에
와서 창녀들이 사람들을 붙잡는 광경을 보며 혼자 즐거워하곤 했다.
물론 이곳에 올 때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허름한 차림을 했다.
가끔 짙은 화장의 창녀들이 그를 붙잡았지만, 같이 동침한 적은 없었다. 단지
이곳의 풍경 보는 것을 즐길 뿐이었다.
오늘도 나섰다.
거리가 위험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술도 마셨겠다 호기가 치솟았다.
아니, 티야가 자신을 보는 그 눈초리, 가련하다는 듯이, 비웃는 듯이 바라보는 그
눈초리가 뇌리를 맴돌아 미칠 것만 같았다.
시르온이라고 했던가?
건장하고 탄탄한 체격에 무심한 표정의 노예놈.
그 미천한 노예놈의 근육 아래 깔려 희열을 노래하는 부인 티야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그리고 그런 상상 속에 욕정이 치밀어 올랐다.
창녀들, 그것도 그들 가운데 가장 나이 들어 추한 몸짓으로 손님을 끌려고
바둥거리는 여인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라흐만은 기분이 좋아졌다.
" 더러운. 년! 개 같은 년! "
자신도 모르게 입을 비집고 나온 욕지거리.
저 앞에 서성거리는 창녀들을 향한 욕인지, 아니면 부인 티야를 향한 욕인지 구분이
되지 않지만 욕이 나왔다.
욕을 하자 기분이 더 좋아졌고 키득거리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 좋은가? "
" 누구? 컵- 웁우웁- "
등 뒤에서 속삭이듯 들리는 음성에 기겁하듯이 놀란 라흐만은 누군가의 억센 손이
자신의 입을 막는다고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어두운 뒷골목으로 끌려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발버둥을 쳐도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보는 사람도 없다.
왜 이런 시기에 여기에 왔을까?
후회의 감정이 들면서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술기운은 이미 다 깼다.
라흐만의 정신이 든 곳은 분홍빛 휘장이 겹겹이 쌓인 푹신한 침상 위였다.
은은하게 들리는 음악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금속 치장들이 짤랑거리는 소리.
형형색색의 불빛.
침상은 열댓명이 올라가도 될 만큼 넓고 푹신하다.
" 깼나 보군. "
굵은 중저음의 음색, 라흐만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 누, 누구나? 여, 여긴 어디냐? 내, 내가 우군줄 알고 감히 나를. "
호통을 치려했지만 떨려서 나오는 목소리는 숨길 수가 없었다.
" 여기는 꿈의 궁전. 신들이 허락한 쾌락의 장소. 라흐만, 이곳에 온 것을
환영한다. "
하늘거리는 커튼을 헤치고 나타난 자, 라흐만의 장인 알-제이시를 닮았다.
회색빛 수염과 말랐으면서도 단단한 체형, 냉정해 보이는 눈매와 얇은 입술. 차이가
있다면 알-제이시에 비해 키가 한 뼘 정도 더 크다는 것과, 나이가 훨씬 젊어
보인다. 는 것뿐이다.
라흐만의 뇌리 속에 퍼뜩 한 사람의 이름이 스치고 지나갔다.
알-무하드
알-제이시의 그늘 속에서 그의 어쌔씬 부대를 통솔해온 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겁쟁이에 불과한 라흐만이지만 그래도 노아부 대귀 족으로써 자부심은 남아있다.
알-무하드의 달콤한 속삭임에 쉽게 넘어가지는 안겠다고 다짐하면서 입술을 깨물었
다.
하지만 알-무하드가 손뼉을 치자 그의 머리 속은 텅 비어버렸다. 눈동자는 얼어붙어
버렸다.
알-무하드의 손뼉과 함께 겹겹으로 쳐진 커튼이 좌우로 열리고, 건너편 더 넓은
침상이 화려하게 드러났다.
침상 크기에 놀란 것은 아니다.
침상 위에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뒹굴고 있는 여인들에 놀랐다.
하나같이 뛰어난 미인들.
하늘하늘 속이 비치는 천으로 허리 아래를 가리고, 보석 치장으로 매끄러운 가슴
선을 가리고 머리에 관을 쓴 여인들.
미약을 마셨는지 술을 마셨는지, 깔깔거리며 서로 몸을 간질이고 희롱하는 여인들.
그녀들 가운데 몇몇의 안면이 눈에 익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으로 라흐만의 머리 속에 꽉 자리 잡은 그의 장인 알-제이시의
여인들이다.
그 가운데 특히 라흐만의 시선을 사로잡은 여인, 알-제이시가 가장 아끼는
이시리스도 눈에 띄었다.
제국 노아부 황제의 딸, 황제가 어미어(emir) 알-제이시의 공적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내린 제국의 보석, 예전 한번 본 것만으로도 라흐만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던 여인도 저 안에 있다.
얼어붙은 라흐만의 귓가에 알-무하드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 알-제이시의 아름다운 후궁들이다. 이제는 선택은 너의 몫, 어떠한가? 이대로
돌아 갈 것인가? 그리하겠다면 곱게 돌려보내 줄 것이다. 굳이 겁쟁이를 어찌할
생각은 없으니까. "
라흐만의 몸이 움찔하는 것을 뒤에서 지켜본 알-무하드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 아니면, 군주 중의 군주 알-제이 시와 같이 되고 싶은가? 그의 여인들을
물려받고, 그의 여인들을 정복하며 이 산위의 하렘에서 조란을 호령하는 군주
말이다. 네가 저 여인들 사이로 들어간다면, 너는 알-제이시의 뒤를 이어 求?군주
말이다. 네가 저 여인들 사이로 들어간다면, 너는 알-제이시의 뒤를 이어 나와 함께
조란 통치자가 될 것이다. "
라흐만의 몸은 이제 움찔거리는 단계를 지나 덜덜덜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침이 마르고 타는 듯한 갈증이 몸을 불태우는 것만 같았다.
잊어버리고 있던 권력욕이 거세게 일어나며 광기처럼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뒤이은 알-무하드의 말은 라흐만의 불길에 기름을 부어버렸다.
" 자, 가라 라흐만. 가서 알-제이시의 여인들을 취하고 너의 힘을 보여주어라.
그리하여 여인들로 하여금 너를 진정한 산상군주로 떠받들게 만들라. "
커튼을, 휘장을, 찢듯이 헤집고 침상 위로 올라 선 라흐만.
약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여인들이 그의 발아래 모여들고 그녀들의 백옥 같은 손들
이 그의 몸을 더듬는 순간, 라흐만은 한 가닥 남은 이성의 끈마저 놓아 버렸다.
영활한 뱀처럼 휘감기는 손길들, 그 부드러운 촉감.
차가우면서도 뜨겁게, 분홍빛 혀에 얼음을 머금고 보일 듯 보이지 않게 슬쩍슬쩍
그의 몸을 스쳐 지나가는 붉은 입술.
앞에서, 다리 사이로, 등 뒤에서, 가슴으로, 수 없이 달려드는 매혹적인
여인들이여.
라흐만은 진실한 쾌락이 무엇인지 비로서 깨달았다.
그동안 그가 알고 있던 것은 쾌감이 아니라 장난일 뿐이었다.
그을 에워싸고 정을 갈구하는 십여 명의 여인들, 라흐만은 그녀들과 자신의 몸이
모두 녹아 붙어서 하나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침상 머리께, 엉키고 얽힌 자신들을 매혹적인 눈으로 뚫어지게 직시하는
이시리스가 보였다.
난교에 끼어들지 않았지만, 갸름하고 예쁜 배꼽을 드러내고 푹신한 쿠션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며 입에는 제국 황실에서 공수해온 물 담배를 살짝 머금은 채 눈을
반짝이며 코앞에서 벌어지는 금단의 유희를 지켜보는 공주 이시리스.
손을 뻗어 이 쾌락에 동참하라는 라흐만의 청을 가벼운 미소로 거절하고, 스스로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몸을 슬쩍슬쩍 건드리는 이시리스의 모습에 그의
절정은 더 빨라졌다. 창녀들의 모습을 훔쳐보는 것을 좋아하는 라흐만.
이제는 다른 누군가가 보는 앞에 알-제이시의 후궁들을 정복한다는 생각에 그의
심장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 모든 일이 꿈인 듯만 싶었다.
시녀들에 의해 닫히는 휘장들 사이 알-무하드의 눈이 득의만만하게 번쩍였다. 이제
또 하나의 덫을 놓은 셈이다.
그리고 이미 이성을 잃은 라흐만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공주 이시리스 또한
알-무하드의 퇴장과 더불어 그 모습을 감추었다.
" 더러워. 라흐만, 그자의 끈적이는 눈빛이 싫어. 예전 제국의 황궁에서 벌어진
연회에서 나를 샅샅이 훑어보던 그 때랑 똑같아. "
진저리를 치며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조차 아름답다.
속이 비치는 보라빛 커튼 너머, 침상 위에서 꿈틀거리는 남녀들의 음란한 모습이
그대로 비쳐 보인다.
그들의 작태를 한심하다는 듯이 보는 이시리스의 눈가에는 비웃음과 경멸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런 이시리스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뒤에서 끌어안는 굳건한 손.
바로 알-무하드의 손이다.
노아부는 대대로 형이 죽으면 그 아내들을 동생이 책임진다. 그러니 이제 이 손의
주인 알-무하드가 이시리스의 부군이다.
" 간지러워요, 무하드. 왜이래요 아직 밤이 오지도 않았는데. "
" 그냥 참기엔 공주가 너무 아름다운 탓이겠지. 아니면 라흐만이 알-제이시의
여인들을 안는 모습을 본 탓이던가. "
그의 입술이 이시리스의 여리고 흰 목에 닿아 열정을 뿜어낸다.
겹겹이 쳐진 커튼을 사이에 두고, 이젠 이쪽에서도 정염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렘이여.
하렘이여.
모처럼 티야에게 허락을 받은 시르온은 단숨에 사막의 지하던전으로 달려갔다.
예히나탈이 최근 지하 미궁에서 발굴한 고서들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그를 참지
못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어쌔씬과 겨루어 본 이후 내심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대일로 싸웠다면 그는 살아 있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남들이 안가는 길, 포이즌 네크로맨서가 되기로 한 이상 이대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분명히 무언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시르온이 스승 예히나탈의 던전을 향해 달려가는 그 시각.
예히나탈은 무언가에 잔뜩 흥분한 채, 손으로 턱을 만지며 뱅글뱅글 방안을 맴돌고
있었다.
시르온에게 그가 발견한 놀라운 사실을 어서 말해줘야 하는데, 티야 그 암고양이가
시르온을 그리 쉽게 이곳으로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몇날 며칠을 시르온을 붙잡고 진을 빼야 직성이 풀릴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걸 참고 기다리자니 애간장이 녹는 것 같았다.
몰랐을 때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애간장이 녹는 것만 같았다.
" 망혼벽(亡魂壁), 망혼벽이야! 바로 그거라구. 망혼.벽. " 그래서인지 시르온이
던전에 들어서자마자 예히나탈은 자신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는 시르온의 양 어깨를 꽉 붙잡고 마구 흔들어 대며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는 시르온의 양 어깨를 꽉 붙잡고 마구 흔들어 대며 외쳤다.
" 네? 뭐라고요?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
정신이 쏙 빠진 시르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그제서야 예히나탈도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 응? 으으은? 시, 시르온, 네, 네가 왜 여기 있는거? 너, 서, 설.마? "
" 설.마라뇨? "
" 너 설마. 공간이동 같은 최상위마법을 익혀 버린 거냐? 그건 나도 못하는 건 데.
"
예히나탈의 헛소리에 시르온은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 무슨소리예요. 전 아직 마법 진을 이용해서 이동하는 것도 못하는데. 전 당당하게
(?) 저 문으로 들어 왔다고요. "
시르온이 어이없다는 듯이 보자 예히나탈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 험, 험, 그러냐? 내가 딴 데 신경을 쓰느라고. 엉? 근데 네가 여기 다시
웬일이냐? 티야 그 애가 이젠 네가 싫어졌다더냐? 끌 끌끌~ 그러게 정력을 너무
허비 말라고 내 누누이 충고했건만. 쯧쯧~ "
불쌍하다는 듯이 혀를 차는 예히나탈을 보며 시르온은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근엄하던 스승이 점점 푼수가 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아 참, 이럴 때가 아니지. 그게 문제가 아니야. 난리 났다, 난리 났어. "
눈이 동그래지는 시르온에게 예히나탈은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망혼벽이라 불리는, 지독히 사악하고 저주 받아 마땅할 마물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망혼벽(亡魂壁)을 처음 만든 자는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 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세상에 대한 저주와 분노로 가득 찬 암흑의 드래곤이, 한을
토하듯이 자신의 생명과 맞바꿔 만든 마물이라고 했다.
혹자는 드래곤이 아니라 악마가 세상을 어지럽히기 위해 뿌려 놓았다고도 했다.
악마 가 세상에 내린 재앙 덩어리라고도 했다.
하지만 망혼벽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니, 그 저주 받은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 사람도 극히 드물었다.
기록상으로 보자면, 망혼벽을 세상에 처음 꺼내 보인 사람의 이름은 미케린이라는
네크로맨서다.
그는 역사가 증명하는 최상위급의 흑마법사였으며, 단신으로 기사 일개 조, 즉 기사
20 기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던 유일한 네크로맨서로 기록되어 있다.
네크로맨서를 비롯한 마법사들은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는 최상의 위력을 보이지만,
일대일로 싸운다면 기사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케린은 예외적으로 기사들과 싸울 수 있었는데, 그런 일이
가능 했던 이유가 망혼벽 덕분이라고 전해진다.
몇 백 년도 더 이전, 제국 아르만이 아직 현재처럼 제국의 면모를 보이기 전,
수많은 군소 국가들이 벌이 는 전쟁으로 대지에 피마를 날이 없던 백년 전쟁 당시-
' 암흑의 마스터 '
라는 거창한 별칭으로 통하며 전쟁터를 누비던 미케린의 존재는 공포 그 자체였다.
망혼벽이라는 마물로 몸을 감싸고 전쟁터를 전전하며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취한
암흑의 마스터, 그의 사후 망혼벽은 세상에 모습을 감춘 채 구 전으로만 그 존재를
전해왔다.
미케린이라는 이름은 시르온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크로노스교의 19 사제 가운데 미케린이 어딘가 남겼을지 모를 던 전을 찾겠다고
대륙을 헤집고 다닌 사람도 있었을 정도로 그는 유명 인사다.
망혼벽이라는 명칭은 처음 듣지만, 과거 미케린이 어둠의 마법을 사용해서 혼령 을
모아 갑옷과 방패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다.
" 이 두루마리도 내가 이번 발굴한 곳에서 찾은 것인데, 하도 오래 지나서 글자가
많이 파손되기는 했지만 여기 망혼벽과 미케린에 대한 언급이 되어 있다. "
두루마리를 정신없이 읽으며 시르온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 그러면 그 던전이 미케린과 관련이 있다는 뜻인가요? "
" 그렇지는 않지. 이번에 발굴한 네크로맨서 유적은 시기적으로 미케린이 활동하던
백년 전쟁 당시보다 더 이전이니까. "
" 그런데 무슨 상관이 있는? "
" 여기를 읽어 보거라. 여기를 보면 이 글을 남긴 네크로맨서는 미케린 이전에
망혼벽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쓰여 있다. 그리고 망혼벽의 마성에 미친 나머지
스스로를 망혼벽에 가두는 시도를 하려했고. " 예히나탈의 설명을 들으며
두루마리를 샅샅이 훑은 시르온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 다.
" 망혼벽이라는 것이 정확히는 몰라도 혼을 담을 수 있는 기물인 것 같군요. "
" 나도 그런 것 같다. 이 네크로맨서 이후로 몇몇의 손을 떠돌던 망혼벽이 미케린의
손에 들어갔고, 미케린이 유일하게 망혼벽을 사용했었던 것이 아닌가 싶구나. "
잠시 침을 삼킨 예히나탈은 진중한 표정으로 시르온을 보았다.
" 이 네크로맨서의 혼이 망혼벽 안에 있다면, 이자의 유물을 사용해서 현재
망혼벽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이 되지. "
시르온의 표정도 진중해졌다.
망혼벽이 무언지는 잘 몰라도, 잘하면 미케린의 유적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암흑의 마스터의 유물, 그것은 시르온이 바라는 대 말이 될
수도 있다.
암흑의 마스터의 유물, 그것은 시르온이 바라는 대로 단신으로 기사들과 싸울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변화가 거의 없는 시르온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 해 보시죠. 그의 혼이 어디 있는지. "
시르온의 목소리도 떨려 나왔다.
예히나탈의 답도 떨렸다.
" 이미 해봤지. 망혼벽의 위치, 그러니까 이 두루마리 주인의 혼이 머물고 있는
곳은 바로. "
예히나탈의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르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을 꽉 다물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바로, 조란 토성 위, 산 위의 궁전에 있다. 알-제이시의 하렘에 말 이다. "
" ? "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지만 이내 의문이 들었다.
" 그게 왜 거기 있죠? 암흑의 마스터 미케린의 유적이 왜 하렘 같은 곳에.?
이상하잖아요. "
시르온의 질문에 예히나탈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습관적으로 턱을 만졌다.
" 한가지 추정해볼 수 있는 사실은, 미케린이 이곳 사막 던 전 출신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그것도 이 두루마리 주인과 동일한 지파 출신. 천하를 헤집으며 살육을
일삼다가 죽을 때가 되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았나 싶다. "
가능성 있는 추론이다.
여기만큼 네크로맨서들을 많이 배출하는 곳도 또 없으니까.
그리고 죽을 때가 되면 고향에 가고 싶어지는 것도 일리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의문이 해소 된 것은 아니다.
" 수많은 사람들이, 물론 여기 던전의 소환술사 들도 포함해서, 눈이 벌게질 정도로
미케린의 유적을 찾아 다녔잖아요. 그런데 이리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그 유적을
못 찾았다는 것은 말이. "
시르온의 말은 예히나탈의 두번째 추론에 의해 끊어졌다.
" 이건 어떠냐? 미케린도 선배 네크로맨서들과 똑같이 미쳐서 망혼벽에 스스로의 혼
을 가두었다면? 그러는 바람에 망혼벽 외에는 아무것도, 저서 하나 조차도, 남기지
못했다면? "
네크로맨서의 방대한 학문을 집대성한 예히나탈의 날카로운 추론에 시르온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 그렇다면 그 망혼벽이라는 것이 왜 여기 남아있지 않고 하렘에 있을까요? 하렘은
알-제이시가 불과 팔년 전 이시리스 공주를 위해 새로 지었는데. 설마 그 때. "
" 그렇지. 팔년 전 하렘을 새로 지은 알-제이시는 각처에서 모은 이물들로 궁을
가득 채웠었다. 물론 여기 던전의 각 지파도 희한한 것들을 잔뜩 보냈지. 별로 쓸
데는 없고 겉보기에만 그럴듯한 것들만 골라서 보내기는 했지만. "
팔년 전이면, 시르온이 예히나탈의 제자가 갓 되었을 무렵이다.
그리고 당시 이시리스 공주를 위해 희한한 물건들을 추려서 하렘으로 보냈던 기억이
있다.
" 그렇다면! "
이번에는 시르온뿐만 아니라 예히나탈의 눈도 번뜩였다.
" 당장 찾아야지. 하렘에 잠입해서라도, 그보다 더한 짓을 해서라도 꼭 찾아야지. "
" 제가 가겠습니다. "
퍼억- 쨍그랑-
푹신한 양탄자 위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시르온을 향해 티야가 던진 물질은
정확하게 그의 머리부위를 가격했다.
시르온의 이마를 타고 유리 파편과 함께 흘러내리는 피를 보면서 티야는 약간
후회하는 감정이 들었지만 목소리는 냉랭했다.
" 안돼. 허락할 수 없다. 네가 감히 비천한 노예 주제에 전사 흉내라도 내려는 것이
더냐? "
말은 이렇게 하지만 실제로 티야가 우려하는 것은 시르온의 안위다.
대체 말이 안 된다.
산위에 우뚝 솟은 알-제이시의 궁전이 어떤 곳인데 시르온이 잠입하겠다는 것인가?
그곳은 지금 근위병들과 어쌔씬, 그리고 무서운 소환술사 들로 가득 차 있다.
조란 최고의 용병이라고 해도 그런 곳에 잠입하다가는 다음날 목이 성벽에 내어
걸릴 것이다.
그리고 티야는 시르온의 목이 성벽에 걸리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 이곳 조란에 있는 전사들은 모두 저들이 파악하고 있습니다. 용병들은 감히
목숨을 걸고 궁전에 침투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저들에게 주인님을 암습한
죄를 물을 길은 저 밖에 없습니다. "
" 흥, 네가 감히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냐? "
" 노예의 인장을 가진 자, 하루에도 수없이 궁을 드나듭니다. 명예로운 전사들이
이마에 노예의 인장을 찍을 리 없으니까 인장만 있으면 쉽게 들어갈 수 있지요. "
" 들어간다고 치자. 그렇다고 알-무하드에게 접근이 가능하다고 보느냐? 가까이
가기도 전에 너의 몸이 갈가리 찢어질 것이다. "
티야의 목소리에는 이제 완연하게 걱정의 기색이 깔려있다.
" 제게는 독이 있습니다. 보시지 않았습니까?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주인님의
복수를 하겠습니다. "
딴에는 그러하다.
노예를 써서 설사 실패하더라도, 그런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가 상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주고 아군의 사기를 올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지로 보내기에는 시르온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너무 커졌다.
" 전에 저를 노예에서 풀어주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노예에서
풀려나더라도 이마에 노예의?풀어주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노예에서
풀려나더라도 이마에 노예의 인장이 있는 이상, 사람들이 저를 보는 시선은 벌레를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
시르온의 목소리가 굳어졌다. 이제 그는 땅을 보지 않고 티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가 티야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리고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그 눈빛에 홀린 듯, 티야는 더 이상 그의 청을
거절 할 수 없었다.
" 하지만, 티야 알-제이시의 복수를 하고, 알-무하드의 목을 벤 시르온은 다를 겁이
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저를 벌레 같은 노예로 보지 않을 겁니다. "
그의 목소리에는 힘 있다.
한이 있다.
들어주지 않을 도리가 없다.
마지못한 티야의 고개가 승낙의 뜻으로 끄덕이고, 시르온의 고개가 감사의 뜻으로
숙여졌다.
하지만, 과연, 시르온이 노예 신분이 한스러워서 그랬을까?
말이 없고 조용해 보이지만, 원래 시르온은 성기사들을 속이면서 여기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신(神)은 알 것이다.
티야가 해줄 수 있는 배려는 한가지, 시르온이 잠입하고 이틀 뒤 자신의 친
위병들로 하여금 궁전을 공격하게 하는 것이다.
궁전이 공방전에 정신없을 동안 시르온이 몸을 빼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티야가 못 박은 시간도 이틀.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틀 뒤에는 무조건 하렘에서 빠져 나온다는 맹세를 받고서
야 그녀는 시르온을 보내 준다고 했다.
그의 탄력 있는 가슴 근육을 쓰다듬으며, 이게 마지막으로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티야는 더 안타까워졌다.
그의 손가락이 허리를 조른 끈을 풀고 아래로 스며들자 자신도 모르게 고양이 같은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의 손가락이 닿는 곳은 어느 곳이나 여지없이 희열의 불이 지펴졌고, 몸 구석구석
이 별개의 성감을 느끼며 진동했다.
' 갓 스물을 넘긴 아이가, 어찌 이렇게 여인의 몸을 잘 다루나? '
입술을 깨물고 그의 등에 긴 손톱자국을 남기면서 티야의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이다. 이제는 몸의 어느 곳 하나 시르온의 손길에 반응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의 입술에 항복을 선언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 죽지마라. 꼭 살아서 돌아오너라. 너는 내 것이니 절대 내 허락 없이는 죽을 수.
없다. "
그녀의 집착은 더 심해져만 간다.
예히나탈은 사막 지하던전이 세 명 마스터 가운데 하나다.
그에게는 알-제이시의 궁전 안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마법진이 있다.
게다가 알-무하드는 최근에 끊임없이 예히나탈을 청하고 있다. 예히나탈만
끌어들이면 확실히 승기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문제는 하렘에서 어떻게 아무도 모르게 망혼벽을 찾아낼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빼 내서 무사하게 돌아올지가 관건이다.
망혼벽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는 것도 아닌데다, 또 다른 던 전 마스터 카마
탄의 존 재도 거북스럽다.
각종 마수들을 자유로이 소환해서 부리는 무서운 흑마법사 카마 탄.
그의 눈을 피해 망혼벽을 빼돌리려면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야 한다.
분명히 카마 탄은 예히나탈을 주시할 것이고, 알-무하드도 겉으로는 환영하지만
속으로는 어쌔씬을 동원해서 그를 감시할 것이 뻔하다.
결국, 모든 일은 시르온이 해야 한다.
예히나탈은 시르온에게 뼛가루가 담긴 작은 병을 하나 만들어 주었다.
사람의 뼈를 가루로 빻고 거기에 두루마리에서 채취한 조각을 태워서 섞은 뒤,
흑마법을 걸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뼈가루는 망혼벽 안에 담겨있는 네크로맨서의 혼과 반응을 할
테니까, 결국 망혼벽 가까이 다가갈수록 요동 칠 것이다.
원래 예히나탈은 망혼벽이 시르온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르온을 위해 발굴한 던 전에서 망혼벽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을 때부터, 그는
망혼벽이 시르온과 인연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기에 그 마물이 수백 년의 긴 침묵을 깨고 자신을 드러낸 것이라고.
그라고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망혼벽이라면 굳이 네크로맨서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탐낼만한 것이다.
소유욕이 아니라면 연구 욕심 때문에라도 망혼벽을 갖고 싶다.
하지만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그것은 시르온을 위해서 준비된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런 마물들은 스스로 주인을 정한다지 않았던가!
과욕은 스스로를 망칠 뿐이란 사실을 예히나탈은 잘 알고 있었고, 죽은 동생
예히녹에게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해 주었던 이야기다.
예히나탈이 알-무하드의 대대적인 환영 의심의 눈초리도 동시에을 받으면서 궁전
심장부에 등장할 즈음, 시르온도 궁정 뒤쪽의 노예 드나드는 입구를 통과하고
있었다.
노예는 궁정의 정상적인 문으로 드나들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만 드나드는 입구가 따로 있다.
물론 시국이 시국이니 만큼, 그곳의 경비도 엄격하다.
이마의 노예 인장이 실제로 인두로 지져 찍은 것인지 아니면 그려 넣은 것인지
철저하게 검사한다. 뿐만 아니라 주인져 찍은 것인지 아니면 그려 넣은 것인지
철저하게 검사한다. 뿐만 아니라 주인이 누구며 왜 궁전에 들어오는지도 자세히
조사한다.
시르온이 경비병에게 제출한 문서는 티야가 조작해 주었다.
하렘에 있는 알-제이시 후궁 가운데 한명을 찾아 그 친정집의 노예 문서를
준비했다.
물론 정치적으로 영향력도 없고, 알-무하드 관심 밖에 있는 집안이다.
후궁들과 연락을 취하는 전령으로 종종 노예들이 드나들었기에 별로 이상할 것은
없다. 여자 노예가 오는 경우도 많지만, 남자 노예들도 심심치 않게 들어온다.
하렘은 기본적으로 수많은 여인들이 머무는 곳.
알-제이시 한명만 바라보며 지내기에 후궁들의 밤은 너무 길다.
그리고 하렘에 여인이 후궁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어떤 방법으로든 사내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왔다. 물론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일이기는 하지만.
경비병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진다.
들고 있는 창끝으로 머리통을 기분 나쁘게 툭툭 건드려 보아도 별로 기분 나쁜
표정을 보이지 않는다. 노예 생활에 익숙한 놈이다.
건장한 체격에 차림새로 보아 어차피 이놈은 하렘 여인들의 노리개 감이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별로 의심스러운 구석은 없다.
" 통과. 거기 다음 놈, 빨리빨리 와. 뭘 꾸물거리나? "
경비병의 턱짓에 시르온은 입구를 지나 궁 안으로 들어섰다.
좁은 입구를 지나자 모습을 드러내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화려한 궁전.
티야에게 자세히 들어서 궁 안의 지리나 형태는 대충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 규모에
놀란 시르온은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목표는 망혼벽, 기회가 되면 덤으로 알-무하드 수뇌부에 독침 한방 먹여주고 간다.
시르온이 가진 어둠에 동화하는 능력은 예히나탈도 인정해 줄 정도였다.
궁전의 잡일을 하는 하인 노예 한명의 목을 잡아 비틀고 옷을 빼앗아 입은 시르온은
조용히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궁 안에 어둑어둑 땅거미가 깔리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
시르온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 채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어두운 곳에서라면, 바로 옆을 지나가는 사람도 그의 존재를 느끼지 못 할
만큼 시르온은 어둠에 깊이 동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의 얼굴은 한번 보고
뒤돌아서면 고개를 갸웃하며 잊어버릴, 그런 얼굴이다.
손에 뼈가 루가 담긴 조그만 병을 들고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교교로운 달빛이 창가에 내려앉자 이시리스는 침상에 엎드려 창 밖을 내다보았다.
불도 켜지 않고 어둠속에서 창 밖을 내다보았다.
구름이 적당히 가린 탓에 달빛이 그리 환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성곽들이 어슴푸레
보이는 광경이 더 보기 좋았다.
코끼리의 상아로 치장된 그녀의 침대는, 그녀의 뜻에 의해 창가에 바짝 붙여서 놓아
져 있다. 그녀가 밤경치를 구경하기 좋아하는 탓이다
궁전을 내려다보며 낮에 있었던 알-무하드와의 교접을 떠올린 이시리스는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살짝 뗬다.
비웃음이다.
알-무하드는 긴 시간에 걸쳐 그녀의 몸을 안았다.
근래에 들어 내전 전황이 고조되면서 한동안 그녀를 찾지 않더니, 오늘은 라흐만이
알-제이시의 후궁들과 더불어 즐기는 장면을 본 때문인지 오랫동안 그녀에게 정열을
쏟았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기껍지 않았다.
알-무하드가 부족하다거나, 그의 여자 다루는 솜씨가 나빠서가 아니다.
그녀는 원래 지금까지 단 한번도 성애의 즐거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즐거운 척
연기를 하기는 해도 실제 즐거워 본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재미도 없이 이곳 하렘에 갇혀 사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오르가즘을 느끼는 대상은 따로 있다.
. 권력이라고 불리는 놈 말이다.
그녀의 창문 밖 바로 아래 위치한 정원은 알-제이시가 그녀를 위해 만들어준 조란
최고의 정원이다.
세상 각지의 기화이초를 모아놓은 정원은 노아부의 황궁에서도 볼 수 없는
정원이자, 그녀가 진심으로 아끼는 몇 안 되는 대상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이 정원과 그녀의 방에는,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물건에만 관심을
보이는 이시리스를 위해 알-제이시가 모아 놓은 다양한 소장품이 전시되어있다.
그런 만큼 이곳의 경비는 철저하기 그지없다.
경비병이 정원 담벼락 너머에서 철통같이 지키고 있고, 알-무하드가 부리는
어쌔씬들이 이중으로 경계하고 있다.
물론 그 어쌔씬들은 지금 이시리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녀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르고 있다.
창 밖 정원을 한참 내려다보는 이시리스의 눈에 순간 이채가 돌았다.
어둠속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모습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차림새로 보아 노예가
분명한데, 자신의 노예는 분명히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금지에 서슴없이 돌아다니다니 어이가 없어 화가 나지도 않았다.
정원으로 난 오솔길로 당당히 들어온 것이 분명한데 경비병의 제지도 받지 않았고,
어디엔가 숨어서 이곳을 지키고 있을 어쌔씬들도 저지하지 않았다는 사쏀,
어디엔가 숨어서 이곳을 지키고 있을 어쌔씬들도 저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녀의
호기심을 돋웠다.
그러고 보니 자신도 겨우 발견했을 만큼, 침입자의 움직임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오랫동안 한자리만 응시하지 않았다면 그냥 흘려보냈을 만큼, 침입자의 행동은
주변에 잘 동화되어 있었다.
마치 어둠이 보호라도 해주는 것처럼.
소리를 쳐서 경계를 할까 말까 고민하던 이시리스는 침입자의 묘한 행동에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손에 무언가 작은 병을 든 채, 멈칫 멈칫 거리며 정원을 가로질러 그녀의 창가
쪽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정원을 가로질러 대리석으로 외곽을 쌓은 궁 바로 아래까지 다다른 시르온은
한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지금까지는 무사히 잠입했다.
다행히 행적이 발각되지 않아 사람을 해치지 않고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언제든지 독을 뿌릴 생각으로 손끝에 세균을 잔뜩 모아 놓기는 했다.
예히나탈이 건네 준 뼈가루는 놀랍게도 시르온이 방향을 잡을 때마다 어느 한쪽으로
쏠리며 부르르 떨어대었다.
뼈가 루가 쏠리는 방향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이제는 가루들이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것이 아니라 병마개 쪽으로 잔뜩
몰려들었고, 부르르 떠는 진동도 더 커졌다. 마치 병 속에는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 그럼 위란 말인가? '
고개를 갸우뚱 하며 성벽 위를 수직으로 올려다본 시르온은 순간 심장이 덜컥 멎는
줄 알았다.
누군가의 눈동자, 새까만 어둠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누군가의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기 때문이다.
안색을 굳히기 무섭게 손가락을 들어 상대에게 독을 뿌리려는 순간, 시르온의 목
뒷덜미에 강한 충격이 떨어졌다.
" 크오 큭- 빌어먹.을. "
동시에, 콰악-
양 옆에서 두명의 그림자가 벼락처럼 날아들어 그의 양 팔을 뒤로 꺾으며 포박했다.
팔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대롱대롱 허공에 들린 시르온의 입술이 꽉 깨물어졌다.
너무 갑작스럽게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탓에 시르온의 평정심이 깨졌다. 어둠속에
녹아들듯이 동화된 고요함이 깨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런 포박이다.
온몸을 바동거리며 손끝으로 기를 쓰며 독을 모으던 시르온, 그의 귓가에 아름답게
지저귀는 듯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 그자를 이리 데려 오너라. "
이시리스의 목소리다.
퍼억-
두 팔이 뒤로 묶인 채 궁 안으로 끌려 들어온 시르온은, 무언가에 복부를 강타 당해
앞으로 엎어지듯이 고꾸라졌다.
화려한 실내, 아까까지만 해도 등불하나 없던 실내는 이미 환하게 밝혀져 있다.
시르온이 고개를 들자 중앙에 위치한 침상을 가린 은은한 휘장과, 그 안에 비치는
늘씬한 여인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 너는 누구냐. "
나른하기까지 할 정도로 고혹적인 목소리다.
아까 포박당한 직후에 들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시르온은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었다.
" 높고도 높으신 분이시여. 이 미천한 노예를 용서하소서. 저는 예르나님의 노예
로. 주인님의 부름을 받고 성에 들어왔나이다. "
시르온의 목소리는 겁에 잔뜩 질려 덜덜 떨리는 것처럼 흘러 나왔다.
" 예리나? 예르나가 누구지? "
" 알-제이시의 76번째 후궁의 이름이 예르나입니다. "
이시리스의 질문에, 시르온을 포박한 채 그의 옆에 부복해 있던 복면 사내가
답했다.
또 다른 한명은 시르온의 품을 뒤져서 꺼낸 통행증과 뼛가루 병을 휘장 안으로 공손
히 밀어 넣었다.
" 예르나의 노예라? 그런데 여기서 얼쩡거린 이유는 뭐지? 물론 길을 잃고 헤매다가
우연히 들어 왔다는 둥의 헛소리는 하지 말고. 그리고 이 병은 무엇이지? "
이시리스의 음성은 여전히 나른했지만 호기심이 묻어 있었다.
순순히 속아 줄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느끼고 있었다.
일개 노예 따위가 우연치도 않게 겹겹이 쌓인 경계를 뚫고 여기까지 왔다는 말에
넘어 가지는 않을 것이다.
병 안에 들은 내용물도 이미 호위병들이 다 조사해서 건네주었을 것이다.
위험할지도 모르는 물건을 자신이 지키는 주인에게 갖다 바칠 어설픈 호위병들로
보이지는 않는다.
시르온이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입을 열려는 순간, 휘장이 벌컥 젖혀지며 손에 병을
든 이시리스가 친히 걸어 나왔다.
" 이상한걸. 병 안의 가루가 자꾸 한 방향으로 쏠리는데? "
고개를 갸웃하며 시르온에게 묻는 이시리스, 그녀가 갑작스레 휘장 밖으로 나오자
호위중인 어쌔씬들의 고개가 바닥에 푹 처박혔다.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 변명을 하려던 시르온은 반사적으로 양쪽 손끝에 독을
진득하게 모았다.
방안에는 등 뒤로 묶인 시르온의 손끝이 녹색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지금 이순간만이 저들을 거꾸러뜨릴 유일한 기회다.
결심과 동시에 그의 독이 양 옆의 어쌔씬에게 집중되었고, 동시에 그의 몸이 부은-
허 공을 날았다.
" 이 놈이- "
푸욱-
어쌔씬 한명이 날린 단검이 뒤로부터 시르온
허 공을 날았다.
" 이 놈이- "
푸욱-
어쌔씬 한명이 날린 단검이 뒤로부터 시르온의 어깻죽지를 뚫고 파고들며 앞쪽으로
삐져나왔다.
또 한명이 휘두른 긴 채찍은 시르온의 발목을 낚아채며 빠르게 뒤로 당겨졌다.
이제 시르온은 채찍에 딸려 어쌔씬의 수중으로 떨어지리라.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 크나- 뭐, 뭐, 뭐야? 이게 뭐야?
참담한 비명과 함께 채찍을 쥔 어쌔씬의 손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뼈가 드러나
고 팔 근육과 세포조직이 드러나며 녹듯이 없어지고 있었다. 비명은 다른 한명의
입에서도 터져 나왔다.
그는 허리부터 없어지는 중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해괴한 장면에 눈이 동그래진 이시리스. 그녀의 사슴같이 고운 목은
어느 새 시르온의 큰 손에 우악스럽게 잡혀 있었다.
그녀도 무예를 익혔다.
여인들이 쓰는 얇고 작은 상월도(雙月刀)를 수준급 이상으로 쓴다.
사람의 몸이 녹는 놀라운 광경에 어이없이 선기를 빼앗기긴 했지만, 이시리스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쌍월도를 뽑아 들었다.
하지만, 시르온의 한마디에 그녀의 칼은 채 다 뽑히지 못하고 중간에 멈춰야만
했다.
" 저들처럼 녹아버리고 싶지 않다면, 그만 두는 게 좋아.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마라. 저기 밖에서 들어오는 자들도 모두 멈추라고 해. "
으르렁 거리는 야수처럼, 시르온의 거칠어진 숨결이 귓가에서 느껴졌다.
이젠 상황 역전이다.
소란에 놀라 방 안으로 들어서다가, 주인인 이시리스가 웬 괴한의 손에 목이 잡힌
채 인질이 된 모습을 발견한 어쌔씬들도 어쩔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시르온이 소리를 지르며 이시리스의 목숨을 담보로 위협하자 일정한 거리를 두며
에워싸기만 할 뿐이다.
저 약아빠진 노예놈은 철저하게도 이시리스의 몸을 방패삼아 자신의 몸을 가렸고,
이시리스의 목은 너무나도 약해 보였다.
한 손으로는 공주 이시리스의 가냘픈 목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병을 다시
빼앗았다.
일이 꼬여 조용히 돌아가기는 틀렸지만, 그렇다고 망혼벽을 포기할 수는 없다.
망혼벽은 시르온의 꿈뿐만 아니라 스승 예히나탈의 염원도 담고 있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는 목숨을 걸고라도 원하는 것을 손에 넣어야 한다.
병 안의 뼈가루는 이제 요동치듯 흔들리고 있었다.
가까이에 망혼벽이 위치한 것이 틀림없다.
" 가까이 다가오지 마. 이 여자가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거든 모두 물러나라. "
시르온의 목소리는 긴장으로 인해 갈라져서 쇳소리를 낸다.
까딱 긴장의 끈을 늦추는 순간 단검이 날아올 것이다.
벽을 등지고 어쌔씬들과 대치한 채, 시르온은 조금씩 몸을 이동하면서 뼛가루
흔들리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입안이 바짝 마르고 눈동자가 격랑을 만난 배처럼 빠르게 흔들렸다.
그렇게 대치 상태로 방을 거의 반 바퀴 이상 돌아서 입구 쪽에 다다른 순간.
덜덜덜- 파란- 와작-
심하게 떨던 병은 마침내 더 이상의 진동을 견디지 못하고 깨어져 버렸고, 허공에
뿌려진 뼈가루는 방 입구에 세워진 조그만 청동향로 안으로 빨려 들었다.
향로에는 불이 지펴져 있었기에 뼛가루 들어가자마자 탁탁 타는 소리를 내며 불꽃이
튀었다.
' 이거다 '
저 볼품없이 낡은 향로가 찾던 물건임을 알아본 시르온은 번개처럼 청동 향로를
잡아챘다.
치이이익- 치익-
불에 달구어진 향로를 맨손으로 잡은 덕에 시르온의 손이 타들어 가며 살꺼풀이
향로 표면에 엉겨 붙었다.
하지만 고통도 못 느끼는 듯, 한 손으로는 이시리스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향로를
꽉 끌어안은 채 방안을 벗어났다.
덕분에 아까 어쌔씬이 던진 단검에 꿰뚫린 어깨에서는 피가 멈추지 않고 그의 팔을
타고 흘러내려 청동 향로 표면의 홈을 적셨다.
시르온을 비롯한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모두들 시르온과 이시리스에게만 시선이 집중되는 사이, 놀랍게도 청동 향로에
양각된 기괴한 문양들이 그의 피를 받아먹듯이 흡수하며 서서히 일그러지듯 향로
표면 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한 떼의 물고기들이 먹이를 아 모이듯이, 향로 표면에 새겨진 문양들은 그의
피가 떨어지는 방향으로 쏠리듯이 모여 들고 있었다.
방을 벗어나서 정원으로 나섰지만 사태가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더했다.
이미 정원에는 횃불이 가득 밝혀져 있었고, 경비병들이 장창을 들고 모여 있었으며,
성곽 곳곳에 배치된 궁수들은 매 같은 눈초리로 화살을 먹인 채 시르온을 겨냥하고
있었다.
방 안에서는 벽을 등진 덕분에 삼면만 주의를 하면 되었지만 이렇게 사방에서 활을
겨눈 상황에서는 사방팔방을 모두 경계해야 한다.
시르온의 입술이 다시 꽉 깨물려졌다.
양쪽 손이 다 묶여 있으면 안 된다.
판단을 하자마자 시르온은 향로 안의 재를 털어 버리고는, 향로를 이시리스 공주의
머 리에 씌워 버렸다.
" 앗 뜨거! 이 미친놈이 아악- 웁 푸읍- "
잿더미가 눈 코 할 것 없이 들어오고, 향로 벽에 닿아 살이 익는 고통에 이시리스의
잿더미가 눈 코 할 것 없이 들어오고, 향로 벽에 닿아 살이 익는 고통에 이시리스의
분통이 커져 버렸다.
언제 그녀가 이런 대접을 받아 보았던가!
그 어떤 사내들도 그녀의 위엄과 미모에 꼼짝을 못했다.
산상군주라고 불리던 알-제이시조차 그녀에게는 애틋하게 대했다.
" 내게 겨눈 활촉을 모두 돌려라. 아니면 이 여자는 향로 안에서 목이 졸려 죽을 것
이다. 모두 물러서. "
시르온의 팔에 힘이 들어가자 이시리스의 바동거림이 더 격렬해졌다.
경비를 책임지던 경비대장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어 나왔다.
" 이 미친놈아. 그분이 누군질 알고 감히 그리 대하느? 그분은 제국의
공주마마시니라. 제 너는 죽어도 곱게 죽지는 못하리라. 이 미천한 노예놈아.
으드드득- "
공주라는 말에 시르온의 눈이 번쩍 띄였다.
공주 이시리스라면 시르온도 알고 있다.
그녀를 위해 알-제이시가 수많은 기물을 모았고, 그 가운데 망혼벽이 끼어들어 가지
않았던가.
" 그래? 공주라고? 그러는 너희는 감히 공주의 목숨을 담보로 걸고 활을 겨눈거?
나는 어차피 죽은 목숨이다. 너희가 물러나지 않으면 여기서 공주와 같이 죽을
것이다. "
인질이 공주라는 것을 알자, 시르온은 더 득의양양하게 날뛰었다.
실수했구나 깨달은 경비대장의 눈에서는 더 핏발이 돋았고 시르온을 갈가리 씹어
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무겁고 뜨거운 향로를 뒤집어 쓴 이시리스 공주는 이제 소리도 들리지 않은 채
바둥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쾅- 콰앙-
공주가 바동거리자 시르온은 대뜸 향로를 주먹으로 후려 갈겼다.
무거운 향로 겉을 두들기면, 그걸 뒤집어 쓴 사람에게는 뇌가 부서질 듯한 충격이
전달된다.
대뜸 그녀의 다리가 꼬이며 비틀거렸다.
고막에서는 피가 흘러 내렸다.
바동거리거나 반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켜보는 자의 심정은 더욱 참담했다.
연약해 보이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공주를 저리 마구잡이로 대하는 시르온에 대해
경비병 모
두 악다구니를 보는 표정이 되어 버렸다.
저건 인간이 아니라 찢어 죽여 마땅한 악마새끼다.
하지만, 시르온의 과격한 행동은 효과가 있어서, 경비병들은 더 멀찍이 물러섰고
궁수들도 화살촉을 슬그머니 내렸다.
화살 한방으로 저 놈을 죽이지 못하면 공주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났다.
자칫 공주가 여기서 죽기라도 하면 경비병 모두는 토막토막 나서 사막의 짐승
밥으로 던져질 것이다.
" 움직이지 마라. 꼼짝도 하지 마라. 모두 물러나서 길을 터. "
시르온의 목소리는 이제 완전히 쉬었다.
눈에는 핏발이 가득 솟았다.
살아서 여길 나가려면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사타구니에서 병을 하나 더 꺼낸 시르온은 대뜸 뒤쪽 땅바닥에 집어 던졌다.
매캐한 연기가 바닥에서 피어오르며 스멀스멀 번져갔다.
" 이건 독이다. 숨도 함부로 쉬지 말고 모두 물러나라. "
준비해온 독은 모두 3병, 사타구니 사이에 숨겨서 들어오는 바람에 많이 가져오지
못 했다.
이제 두병 남았으니 아껴 써야 한다.
슈와와왕--
퍼어어억-
"크웃-욱- "
정원 문을 나서는 순간 그늘쪽에서 날아온 단검 하나가 그의 왼쪽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갈비뼈 사이를 뚫고 심장을 노린 것인데, 시르온이 반사적으로 허리를 트는 바람에
옆구리에 꽂혔다.
콰앙- 쾅- 쾅-- 쾅
시르온은 이를 악물고 향로를 주먹으로 마구 후려쳤다.
향로 안의 이시리스의 입에서 고통의 신음이 흘러 나왔다.
" 오냐- 여기서 같이 죽자. 여기서 나랑 공주랑 함께 죽자. 으드드득- "
쾅- 쾅- 쾅-
퍼억- 퍼억- 퍼억-
공주가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았건만 시르온의 매질은 멈추질 않았다. 오히려 더
가열 차게 두들겨 팼다.
그의 손은 향로뿐만 아니라 공주의 등과 허리 가리지 않고 두들겼다.
" 머, 멈춰라- 이 미친 새끼야. 그만 - "그늘에 숨어 있다가 단검을 던진 어쌔씬이
기겁을 해서 말리러 나왔다.
그는 공주에게 충성을 다짐했다. 자신이 섣부르게 저 야수를 건드리는 바람에
공주가 죽게 생기자 견딜 수가 없었다.
" 흥- 그래도 공주의 목숨은 아끼나 보지?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그 자리에 꼼짝
마. "
어쌔씬이 다가서는 것을 손으로 저지하며 시르온은 손끝에 독을 운집했다.
그의 손끝이 영롱한 녹색 빛으로 물드는 것이 어쌔씬의 눈에도 보였다. 그리고
어쌔씬의 눈에 의아한 기색이 감도는 순간,
" 크아악- "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에 가슴으 내려다보던 어쌔씬은 쥐어짜는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자신의 심장 부위가 녹아 없어지며 갈비뼈가 드러나고, 이내 펄떡이는 심장이
드러나자, 견딜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통에 무감각하고 공포가 없다는 어쌔씬이 지르는 비명은 사람들에게 한층
농도 짙은 공포를 안겨 주었다.
모두들 한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제 협박이 먹혔으니 길을 뚫기만 하면 된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시르온의 생각 은, 굵직한 음성에 의해 여지없이 깨어졌뉨?된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시르온의 생각 은, 굵직한 음성에 의해 여지없이 깨어졌다.
" 웬 소란이냐? "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알-무하드의 시선은 시르온을 거쳐 이시리스의 처참한
모습에 고정되었다.
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떨렸다.
" 이. 시. 리스? 이. 시. 리스 공.주.? "
알-무하드의 음성은 천둥과도 같았고 그의 고함은 사자의 포효와도 같았다.
무엇 때문에 그가 반란을 일으켰던가?
무엇 때문에 저 무서운 형 알-제이시를 배반하고 정권을 찬탈하려 들었던가?
바로 이시리스 공주, 그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인 유일한 여인 이시리스를 차지하기
위해서다.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다.
" 이.이. 이놈이 감.히. "
분노가 일자 알-무하드의 의복이 거친 바람을 만난 듯 부풀어 올랐다.
알-무하드의 손에 들린 만 월도는 그의 분노를 대변이라도 하듯이 시뻘건 노을 빛
오러로 충만해졌다.
아니, 오러는 단순히 그의 만월도에서 뿜어지는 단계를 지나, 칼을 움켜쥔 그의
손까지 붉은 빛으로 물들이며 기세 좋게 일렁거렸다.
마치 그의 오른손 전체가 도와 하나가 되고, 또 그 전체가 붉은 불꽃이 되어 버린
양, 일렁거렸다.
알-제이시의 그림자로서, 어쌔씬의 우두머리로써 평생을 살아온 알-무하드의
무서움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시르온의 안색이 어두워 졌지만, 그에게는 아직 카드가 남아있다.
" 그 무서운 검으로 나를 죽이는 것이 빠를지, 아니면 내가 공주에게 독을 뿌리는
것 이 빠를지 한번 해보자는 뜻이냐? "
오러를 뿜어내며 한발짝 한발짝 시르온에게 다가오는 알-무하드는 시르온의 협박에
멈칫 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 네가 그런 모험을 하리라고 보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항복한다면 내 칼에 단번에
죽을 것이오, 아니라면 너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
한마디, 끊어 말하며 저벅저벅 다가오는 알-무하드의 기세에 모두들 숨을 죽엣 다.
시르온의 이마에도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다.
퍼억- 퍽- 퍽- 퍼억-
결심을 굳힌 시르온의 손이 다시 공주를 마구 구타하기 시작했다.
" 오냐, 내가 겪을 그런 고통을 이 년도 같이 겪게 만들어 주마. 크하하하- 와라-
와. 크하하하- 재미있구나. "
시르온의 눈이 광기에 물들며 입가에 거품이 뿜어져 나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알-무하드의 발걸음이 마침내 더 이상 내딛어 지지 못하고 멈추어졌다.
한번 기세에 밀린 이상, 더 이상 몰아붙이기도 힘들다.
그의 눈길은 분노로 타오르고, 그의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지만, 더 이상 공주가
두들 겨 맞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 크하하하- 모두 비켜서라. 성문을 나가서 내 이 년을 놓아줄 테니까 그때까지만
참아라. 크하하하- "
이제는 궁전 안이 모두 깨어났다.
대낮과도 같이 불이 밝혀졌다.
인질이 된 공주와 시르온이 성문을 향해 천천히 걷고, 그 둘을 멀리서 동그랗게
포위 한 채로 알-무하드와 어쌔씬, 그리고 군사들이 이동했다.
웅성거리며 모여 든 인파는 이제 수백, 수천으로 늘어났다.
군사들뿐만 아니라 후궁이나 시녀들도 때 아닌 소동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원진을 만든 군사들의 뒤를 따라 같이 움직였다.
광기에 쌓여 불안하게 움직이는 시르온의 눈동자는 빠르게 인파를 훑었고, 그
가운데 예히나탈의 눈동자를 정확하게 찾아내었다.
예히나탈의 눈과 마주치는 찰라, 그 찰나의 순간만큼은 그의 눈에는 아무런 광기도,
자포자기도 없었다. 오히려 만년 굴의 얼음만큼 냉정하고 차가운 이성만 가득했다.
이심전심(以心傳心).
예히나탈이 시르온의 생각을 읽고 소란스러운 장내에서 슬쩍 몸을 뺏다.
자신 혼자 힘으로는 시르온의 안위를 보장 할 수 없다.
한시바삐 수정구로 티야에게 이 사실을 전해야 한다.
그래야 시르온이 살 수 있다.
잠에서 깨어난 티야는 당장 동원 가능한 모든 사병들을 다 소집했다.
그 뿐 아니라 큰오빠 파하드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비천한 노예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티야의 말에 코웃음을 치던 파하드는, 그 노예가
공주 이시리스를 인질로 잡고 있고, 알-무하드가 손수 뒤를 따르고 있다는 티야의
전언에 당장 군대를 움직였다.
덕분에, 시르온이 알-제이시의 산상궁전 성문에 도착했을 때는 성문 밖에 무려 일만
이 넘는 전사들이 칼과 창, 방패를 들고 진을 치고 있었다.
알-무하드의 얼굴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산상궁전의 성벽은 높고 단단하다.
성문을 걸어 잠그고 싸운다면 저들을 물리치는 거야 식은 죽 먹기다.
그렇기에 파하드 등이 병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궁전 공격을 감히 거행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노예놈이 성 밖으로 나가 공주를 풀어주는 순간, 알-무
하드는
어쌔씬들을 동원해 일제히 추격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성벽 밖에 파하드의 전사들이 진을 치고 있으면 함부럭♣潔駭?
하지만 지금처럼 성벽 밖에 파하드의 전사들이 진을 치고 있으면 함부로 성 밖으로
나 설 수가 없다.
" 여기까지. 성문 밖으로 나서기 전에 공주를 풀어줘라. 공주를 데리고 나가겠다는
말은 절대 들어줄 수 없다. "
" 크하하- 내가 데리고 가겠다면? "
시르온이 한번 알-무하드를 떠봤다.
" 그렇게 하겠다면 이 자리에서 죽일 수 밖에. 더 이상 네놈에게 끌려 다니지
않는다. 성 밖 파하드의 진영으로 공주를 끌고 가면, 공주의 목숨은 어차피 위험할
터. 그러느니 지금 네놈의 목을 베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될 것이다. "
알-무하드의 의지는 확고하다.
더 이상 고집을 부리다가는, 공주를 죽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시르온의 목도 날아갈
것이다.
" 성문에서 정확하게 이 계집을 풀어주겠다. 하지만 내게 화살을 날리지 않는 다는
보장이 있어야겠지. 지금 당장 성벽 위의 궁수들을 다 불러들여라. 어서- "
퍼억-
시르온은 다시 한번 공주의 가냘픈 허리를 발로 걷어찼다.
알-무하드는 눈에 불똥이 튀는 기분이었지만 화를 꾹 눌러 참았다. 저 놈을 육시를
하는 것보다는 공주의 안위가 우선이다.
" 좋다. 경비대장, 궁수들을 모두 성벽 아래로 내려 보내라. "
마지못해 명령을 내리기는 하지만, 알-무하드의 음성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두터운 나무를 겹겹이 붙여서 짠 성문이 육중한 굉음을 내며 내려왔다.
물을 채워 놓은 해자 위로 성문이 내려오면서 다리를 만들자, 이시리스 공주의
목덜미를 움켜 쥔 시르온이 그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시르온의 10여 미터 뒤, 알-무하드가 입술을 꽉 깨문 채 공주가 풀려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눈은 분노한 사자와도 같았다.
그리고 시르온이 이시리스의 얼굴에 뒤집어씌운 향로를 벗겨내고, 이시리스의
헝클어진 애처로운 얼굴이 드러나자 그 분노는 더욱 커졌다.
이시리스의 목을 움켜쥔 채, 그녀의 머리에 뒤집어씌운 향로를 벗겨낸 시르온은
호흡을 한번 가다듬었다.
피와 땀으로 인해 엉망진창이 된 머리를 꼿꼿이 들고 자신을 노려보는 이시리스의
모습에 내심 쓴 웃음이 나왔다.
조용히 망혼벽만 빼내 올 생각이었는데, 생각치도 않게 일이 커져서 이렇게까지
되었다. 이시리스 공주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지만 시르온 자신이 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아직 위험이 가신 것이 아니다.
그녀를 한 번 더 이용해야 한다.
묵묵히 입을 다문 채 서늘할 정도로 분노를 표출하는 이시리스 공주의 귀에
시르온이 조용히 속삭였다.
" 공주마마, 내가 풀어주자마자 죽어라하고 성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 좋을
거야. 풀어주는 동시에 내가 당신 등으로 독을 뿌릴 생각이거든. 아까 봤지? 내가
뿌리는 독. 그걸 피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어. 살아야 복수도 하지. 안 그래? "
" 이, 이, 죽일. 놈. 풀어주려면 얌전히 풀어줄 일이지. "
" 어쩔 수 없어. 알-무하드의 신경이 당신에게 분산 돼야 내가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니까. 자아~ 하나, 둘, 셋 "
셋이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르온은 이시리스의 등을 떠다밀었고, 동시에 그녀
의 등을 향해서 녹색 빛 무리를 겨냥했다.
이시리스는 이를 악물고 뛰었다.
저 놈의 말대로 여기서 살아남아야 복수도 할 수 있다.
갑작스런 이시리스 공주의 뜀박질을 의아스럽게 보던 알-무하드는 그녀의 외침에
다급하게 몸을 날렸다.
" 저자가 독을 풀었어욧. 어서 막아줘요 "
지그재그로 뛰면서 빠르게 다리를 건너는 이시리스를 향해 마주 달려 나가며 그녀의
몸을 끌어안기 무섭게 반바퀴 돌면서 자신의 등으로 그녀를 가렸다.
이것이 시르온이 노리는 한수.
이미 영롱하게 빛을 발산하는 그의 손끝에서는 무섭게 활성화된 세균 덩어리가
알-무하드의 등을 향해 쏘아졌다.
알-무하드의 명을 받은 어쌔씬들이 성벽에서 뛰어 내리며 시르온을 향해 단검을
날린 것과, 시르온이 알-무하드의 등에 독을 쏜 것은 거의 동시였다.
까가가강- 까강-
청동향로를 방패처럼 휘두르며 날아드는 단검을 떨어뜨려 내었지만, 그 중 몇몇은
시르온의 허벅지와 발등을 뚫어 버렸다.
하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린 처지라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단검을 떨어뜨리면서 시르온은 전력을 다해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아마 어쌔씬들이 알-무하드의 비명을 듣고 그를 구하기 위해 돌아가지 않았다면,
시르온은 다리를 건너기 전에 이미 어쌔씬에게 포박되었을 것이다.
독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알-무하드는 이시리스 공주를 감싸는 한편, 자신의
만월도를 등 뒤로 빼고 오러를 잔뜩 일으켜서 풍차처럼 돌렸다.
쌔애애애애애애앵앵
만월도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돌면서 바람을 일으키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만 월도에 주입된 붉은 빛 오러 덕에, 마치 알-무하드의 등 뒤에 붉은 방패가
형성된 듯이 보였다.
살포된 독은 바람에 휘날리기 마련이다.
우선 독을 뿌리쳐서 공주의 안전을 확보한 연후, 단숨에 저 노예 놈 마련이다.
우선 독을 뿌리쳐서 공주의 안전을 확보한 연후, 단숨에 저 노예 놈의 사지를
잘라버리리라.는 것이 알-무하드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르온의 독은 다르다.
그는 독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겨냥한 부근의 세균을 급속도로 활성화 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
알-무하드가 만월도로 막을 형성했을 때는 이미 그의 등 쪽 세균이 무서운 속도로
번식하며 그의 세포 하나하나를 잠식하고 있었다.
" 크아악- 커헉- "
알-무하드는 등이 뻥 뚫리는 고통에 이를 악물며 몸 속의 마나를 움직여 독의
잠식을 늦추
었다.
게다가 어쌔씬들이 빠르게 알-무하드와 공주의 몸을 가리고는 등의 상처에 약을
뿌려준 덕택에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미 그의 등에는 주먹만한 크기의 구멍이 뚫려 척추까지 훤히
드러날 정도였고, 신경계통도 다 녹아버린 탓에 하체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 크윽- 어, 어서, 다리를 올리고, 성. 안으로. 으으윽- "
시르온을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이미 파하드의 전사들이 북을 둥둥 울리며
다리쪽으로 돌격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시르온은 구르듯이 뒹굴면서도 어느새 해자를 다 건너서 완전히
성에서 벗어났다. 한 손에는 향로를 꽉 움켜쥐고 몸 곳곳에 꽂힌 단검들과 함께
그는 다리를 벗어났고, 저 멀리 티야가 빠르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대단한 놈이군. 정말 대단해. "
성벽 위에서 여유만만하게 돌아가는 사태는 관망하던 던전 마스터 카마 탄이 움직인
것이다.
" 여기 산상궁전을 휘저어 놓고 그렇게 쉽게 돌아갈 생각은 아니었겠지? "
검은 로브를 걸치고, 검은 수염과, 검은 눈썹을 길게 기른 카마 탄은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시르온을 향해 긴 주문을 외웠다.
세 명의 던전 마스터 가운데 카마 탄의 장기는 마수소환이다.
그의 주문이 끝남과 동시에, 시르온이 서있는 바로 아래 땅이 시커멓게 죽으며 검은
색으로 물들어갔다. 그리고 검 은 물결은 시르온을 중심으로 순식간에 반경 30여
미터 크기로 커져 버렸다.
츠츠츠--
쿠아아아-
동시에 시르온이 딛고 서있는 땅이 마치 사막의 모래가 되어버린 양, 그대로
붕괴되면서 안으로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 지옥의 사막에서 왕으로 군림하는 앤트라이온(ant lion; 개미귀신)이다. "
꾸아아아아앙
카마 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르온을 빨아들인 모래는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유사(流沙)를 만들어 내었고, 그 원추형 끝에서는 시커먼 집게를 딱딱거리는 거대한
개 미귀신이 흉측한 괴성을 지르며 아가리를 딱 벌렸다.
포효를 했다.
꾸아아아아앙- 구앙
단단한 지반이 삽시간에 개미지옥이 되고, 또 집게발의 크기만 10 미터는 족히 넘을
듯한 괴물 앤트라이온이 집게를 요란하게 부딪치며 끈적이는 타액을 뿜어내자
시르온은 아찔해졌다.
바동거릴수록 몸은 더 빠르게 앤트라이온에게 빨려 내려갔고, 양 팔을 휘저어 봤자
모래더미만 잡혀 의지할 곳이 없었다.
이를 악물고 허리춤에서 독이 든 병을 던져 보았지만 저 거대한 마수는 꿈쩍도
않는다.
최후의 수단으로 시르온은 손끝에 녹색 빛무 리를 모았다.
하지만 저 거대한 괴물을 모두 분쇄시킬 시간이면 자신은 이미 저놈의 밥이 되어
있을 것이다.
" 안티 그래버티 필드(anti-gravity field), 레비테이션(cavitation) "
절망으로 물들어가던 시르온의 눈은 스승 예히나탈의 마법 시동어가 들리자 환하게
빛났다.
시르온의 몸에 안티 그래버티 필드, 즉 반중력장(反重力場) 마법이 걸리자 그의
몸은 빠르게 중력과 반대 방향으로 부웅 떠올랐다.
부아아아앙--
다 잡은 먹이감이 허공으로 떠오르자 화가 난 앤트라이온은 그 육중한 몸을 모래
위로 끌어 올리며 거대한 집게발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 집게발은 아슬아슬하게 시르온의 발밑을 스쳐 지나가는데 그쳤고,
쿠아아아-
앤트라이온의 몸체는 모래더미 깊숙이 다시 처박히며 지축을 뒤흔들었다.
허공에 떠오른 시르온의 몸은 그 상태에서 레비테이션 마법이 걸리면서 허공을
가르며 수평 방향으로 부유(浮游)하며 티야의 군대 머리 위까지 날아갔다.
놀라운 광경이 입을 딱 벌리며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는 티야의 사병들 머리 위까지
날아간 시르온의 몸은 에히나탈의 마법에 의해 다시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중력을 무시하는 안티 그래버티 필드 같은 최고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다.
지옥의 앤트라이온을 소환하고도 먹이 감을 빼앗긴 카마 탄의 입에서 노기에 가득
찬 음성이 신음처럼 울려 나왔다.
" 예. 히. 나.탈 네놈이? 네놈이 무슨 억하 심정으로 내 일을 방해 하느냐? 크러루~
"
예히나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성안의 알-무하드뿐 아니라 파하드 알-제이시의
눈에도 놀라움이 어렸다.
" 클클클클~ 그럼 카마 탄 네놈 같으면 하나 밖에 없는 제자의 목숨이 위험한데
그냥 두겠느냐? 클 클클~ 저 아이는 우리 지파를 이어갈  제자의 목숨이 위험한데
그냥 두겠느냐? 클 클클~ 저 아이는 우리 지파를 이어갈 귀하신 몸이다. 클클~ "
예히나탈의 말에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한 노예 따위를 제자로 삼다니!
그것도 지하던전의 마스터 예히나탈이
" 이, 이이, 미친 늙은이! 저 찢어죽일 노예를 사주한 자가 예히나탈 바로 너? "
카마 탄의 입이 벌어지고, 알-무하드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파하드의 입이 벌어지고, 티야의 입에서 기쁨의 찬탄이 쏟아졌다.
시르온의 보석 같은 면모를 알아본 사람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데서 오는 안도감과,
자부심 같은 느낌이었다.
예히나탈은 어느새 성 밖으로 나와 휘청이는 시르온의 몸을 받아 안았다.
" 클클~ 몸이 엉망이 되긴 했다만, 알-무하드에게 한방 먹여주긴 했으니 손해는
아니지. 클클~ 카마 탄, 또 보자. "
짖꿎게 한번 더 약을 올린 예히나탈은 바로 코앞까지 달려온 티야에게 슬쩍 고개를
숙여 보였다.
" 클클~ 티야님, 지금은 시르온의 몸이 정상이 아니어서 치료가 필요할 것 같군요.
잠시만 더 제게 맡겨 주시지요. 아마도 보름 안팎이면 건강해져서 티야님께 돌아 갈
수 있을 겝니다. "
티야가 뭐라 입을 열려고 하자 예히나탈은 얼른 말을 이었다.
" 클클~ 이 녀석이 알-무하드 등에 주먹만한 구멍을 내 주었으니 티야님의 체면을
세워준 것 아닙니까? 그 정도 청은 들어 주시겠지요? "
알-무하드가 티야에게 어쌔씬을 보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로인해 티야의 기분이 크게 상했으며 그녀의 사병들 사기도 떨어졌다.
알-무하드는 티야가 총애하는 친위대를 이용해서 그녀를 공격했었기에 사기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티야의 노예가 대담하게도 산상궁전에 잠입해서 알-무하드에게 일격을
가하고 돌아왔다. 체면이 상한 주인을 위해 적장의 등에 주먹만한 구멍을 내어주고
돌아왔다.
게다가 그 노예는 알고보니 사막 지하던전의 마스터 예히나탈의 제자이기도 하다.
티야에게 이만한 선물이 있을까?
그녀의 군사들은 당장 사기가 올라 기세등등하게 고함을 지르며 환호했다.
그 함성은 성을 떨어울리며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후우~ "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티야는 예히나탈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 무서운 흑마법사 늙은이의 청을 들어주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르온을 보는 그녀의 눈가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자신이 직접 돌봐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온몸에 8자루 단검을 박아 넣고, 고통 때문에 혼절을 하고서도 시르온은 청동향로를
놓지 않았다.
아무도 이 청동향로에는 신경 쓰지 않고 있지만 실은 이 향로를 위해서 시르온이
목숨을 걸고 움직인 것이다.
예히나탈은 본능적으로 이 향로가 망혼벽임을 알아채고는, 시르온을 안아 들면서
향로도 같이 잘 챙겼다.
그가 걷자, 군사들이 좌우로 갈라서며 길을 내 주었다.
이제 시르온의 이름은 이곳 조란 땅을 진동시킬 것이다.
비록 그가 비천한 노예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모르겠군. "
미간을 찌푸린 예히나탈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네크로맨서 가운데 자신만큼 학문적인 성취를 얻은 자가 없다.라는 자부심만 가지고
살아온 평생이다.
하지만, 손에 든 청동 향로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산더미처럼 고서적을 쌓아놓고, 하나하나 향로에 양각된 부조 문양과 대조해
보았지만, 어떤 주술적인 문양과도 일치점을 찾을 수 없었다.
향로에 어둠의 마나를 주입시켜 보아도 꿈쩍도 하지 않을 뿐더러, 사람을 포함한
각종 동물의 피를 뿌려 봐도 소용이 없었다.
이번에 새로 발굴한 자료를 보면서 연구를 해도 성과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벌써 팔일째 고열에 시달리는 시르온을 치료하면서 망혼벽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시르온이 깨어나면 자신이 알아낸 성과를 자랑스럽게 뽐내 보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자랑은커녕 망신만 당하게 생겼으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 저거, 저 녀석. 혹시 엉뚱한 물건을 착각해서 집어온거 아니야? 이거 정말 그냥
평범한 청동 덩어리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네크로맨서 최고의 지성인 이
예히나탈이 이렇게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할 리가 없잖아! 그래 맞아, 그럴 거야.
'생각이 깊으면 의심도 깊어진다.
서책 쌓아 놓은 옆, 침대 위에 축 늘어져 있는 시르온을 향해 눈을 흘기던
예히나탈은 느닷없이 버럭 화를 냈다.
" 이 바보 같은 놈, 어디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똥덩어리 같은걸 금이야 옥이야
집어와서 스승의 속을 썩여. 이 둔탁이 천치 놈. "
속에 담고 있던 말이 입 밖으로, 그것도 큰 목소리로 튀어나오자 예히나탈은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자신이 지른 소리에 놀라 정신없이 자고 있던 시르온이 벌떡 일어나자 움찔
몸을 추슬렀다.
" 깨, 깨어났었냐? 어, 언제부터 깼냐? 바, 방금 전 한 얘기는 잊어버려. "
순간적으로 당황한 나머지 부리나케 변명을 하던 예히나탈은 시르어버려. "
순간적으로 당황한 나머지 부리나케 변명을 하던 예히나탈은 시르온이 다시 털썩
몸을 눕히자 휴~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이내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자신이 마음을 졸이며 당황했던가!
잘못은 엉뚱한 물건을 집어온 저녀석에게 있지 않던가!
시르온이 품에 꼭 끌어안고 나온 저 청동향로를 처음 본 순간부터 예히나탈은
어쩐지 미심쩍었었다.
망혼벽.
갈기를 잃은 원혼을 모아 벽을 쌓는다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망혼벽이 저런
볼품없이 조악한 향로라는 것이 의심스러웠다.
" 이 미련 곰탕이, 목숨을 걸고 가져온 게 고작 저런 똥덩어리냐? 저걸 어따 쓰냐?
응? 불이라도 지피랴? 어휴~ "
다시 버럭 소리를 지르는 예히나탈이다.
"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스승님이 주신 뼛가루 이 향로와 반응했단 말이에요. "
시르온이 고개를 갸웃하며 향로로 다가갔다.
" 반응은 무슨 반응. 옘병, 그럼 그렇지 네 팔자에 무슨 복이 있어 그런 기물을
얻겠냐? 꼴도 보기 싫으니까, 그 놈의 것 골동품상에 가져가서 팔아버려라. "
예히나탈이 볼이 퉁퉁 부은 채 툴툴 거리자 시르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스승이 삐져도 단단히 삐진 모양이다.
그리고 저리 말하는 걸 보니 무언가 일이 잘못되긴 한 모양이다.
나직히 한숨을 내쉬며, 덩그러니 탁자 위에 놓인 향로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목숨을
걸고 산상궁전에 잠입했었는데 무슨 헛수고를 했나 싶었다.
두근-
손을 통해 무언가 감응이 전달되자 시르온은 움찔 놀라 다급히 손을 떼었다. 분명히
무언가 전달되었다.
다시 슬쩍 손을 대어 보았다.
두근-
심장이 뛴다.무언가 강한 사념들이 시르온의 손을 통해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는
느낌이다.
두근- 두근- 두근-
맥박이 점점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진다.
천장이 빙글빙글 돌고 눈 앞이 캄캄해진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천장과 벽, 바닥 할것없이 석실 내의 모든 것이 붕괴되며 무너지고, 한없이 꺼지며
마침내 심연의 암흑에 그만 홀로 남았다.
예히나탈도 없다. 아무도 없다.
끝을 알 수 없는 암흑의 늪에 그만 홀로 존재한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빛 한점 없는 암흑 속 먼 곳에서부터 무언가 거친 와류가 격랑처럼 시작되더니
세차고 도도하게 그를 중심으로 휘돌았다.
그리고 그 세찬 흐름은 점점 반경을 좁히며 시르온을 향해 조여 들어왔다.
빠져나갈 구멍도 없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해일이 밀려오듯이 무언가 그를 덥치는데 피할 수가 없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조여오는 흐름은 마침내 시르온 코앞까지 다가왔다.
흐름이 보인다.
물인 줄 알았다. 아니면 밀키웨이(the Milky Way; 은하수)라도 되나 싶었다.
아니었다.
격렬하게 흐르는 흐름은 희뿌연 덩어리들의 집합일 뿐이었다.
희뿌연 덩어리들은 이리 저리 일그러진 원혼들이다.
눈과 입이 있을 자리에 검은 구멍만 뚫려있는 어둠의 원혼들, 사악(邪惡)하고
진저리쳐지는 응어리를 토해내며 몸부림치는 원혼들, 수천인지, 수만인지, 아니면
수억도 넘는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원혼들이 하나의 물줄기를 이루며
나선형으로 돌고 돌아 시르온을 향해 폭발적으로 밀어닥친다.
" 끄아아아악 꺽- "
비명을 지르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몸안으로 밀어닥치는 원혼들의 고통과
저주가 그의 몸 구석구석으로 파고드는데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
망령의 혼들은 벌레처럼 파고든다. 장소도 가리지 않는다.
두개골을 뚫고 머리로도 들어오고, 입과 귀, 눈, 콧구멍으로도 들이닥친다.
살갗을 찢으며 심장이나 폐, 간, 복부로도 쑤시고 들어온다. 심지어 그의 양물이나
항문도 가리지 않는다. 거침이 없다.
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다. 이대로 죽고 싶다.
아니, 시르온 자신도 그냥 편하게 이 흐름에 몸을 맡기고 하나의 원혼이 되어 같이
떠돌고 싶다.
그러면 차라리 이런 고통은, 몸 안에 산채로 벌레들이 파고드는 지독한 고통은
없으리라.
덜덜 덜덜덜-
시르온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린다.
이미 그의 몸은 망령의 혼들로 가득 차서 포화 상태가 되었건만, 아직도 파고들
차례를 기다리는 원혼들의 줄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기만 하다.
몸이 부풀어 올라 터져버릴 것만 같은데도 끊임없이 들어오는 원혼들, 그리고
그들이 수반하는 끈적이는 저주(詛呪)와 한(恨), 사념(邪念), 욕정(欲情), 온갖
더러운 감정의 찌꺼기들.
그것들이 시르온의 내부에서 얽히고설키고, 끈적끈적하게 들러붙는다.
뇌수에도, 눈알에도, 심장에도, 위와 장에도, 뼈 마디마디마다, 세세한 근섬유
가닥과 닥마다, 개개의 세포로 연결되는 모세혈관과 신경조직까지, 머리카락
끝까지, 찐득찐득한 감정의 찌꺼기들이 녹아서 엉켜 붙었다.
심지어는 혈관을 흐르는 피까지 그것들이 달라붙어 농도 짙게 오염시킨 느낌이었다.
펄쩍- 펄쩍-
시르온의 ?피까지 그것들이 달라붙어 농도 짙게 오염시킨 느낌이었다.
펄쩍- 펄쩍-
시르온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의 몸이 제멋대로 날뛰며 끊임없이, 그리고 물밀듯이
들어오는 사악한 원념들을 받아들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다.
고통을 느끼느라 시간의 경과를 가늠할 정신이 없었다.
단지 아주 길게만 생각되어졌다. 고통이 너무나도 지독했기에 그렇게 느낀 것인지도
모르지만, 너무나 길어서 억겁의 시간이 흐른 듯이 느껴졌다.
그제서야 원혼들이 모두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가 보다는 모두 시르온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밤하늘의 별만큼 많다고 생각했던 그 많은 망령들이 모두 그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피부와 근육, 내장기관, 세포 하나하나에 맺혀서 그의 일부처럼 되어 버렸다.
" 커헉- 허어억- 헉- 헉- "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전신을 부르르 떠는 시르온에게 예히나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 가 들렸다.
" 왜 그러냐. 시르온? 왜 갑자기 몸을 떨고 그래? 오한이라도 난 게냐? "
정신이 번쩍 들어 주위를 두리번 거려보니, 석실 모습 그대로다.
수북이 쌓인 서책들과, 탁자, 침대, 변한에게 아무것도 없다. 손에 들린 빛바랜
청동 향로도 똑같이 그대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제, 제가 이, 이. 망혼.벽을 잡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죠? "
땀을 삐질 흘리며 묻는 시르온에게 예히나탈이 다시 버럭 고함을 질렀다.
" 망혼벽은 우라질 놈의 망혼벽. 그 구리빛깔 똥덩어리 같은 향로를 잡은 지 1초도
안되었다. 됐냐? 앞으로 망혼벽 같은 말만 꺼냈다간 봐라, 그냥. "
" 1초요? 며칠이 아니고요? 아니 몇 시간도 아니고요? "
" 애가 아직 잠이 덜 깼나, 왜이래? 그냥 잡자마자 깜빡 졸았냐? "
깜빡 졸아서 꿈을 꾼 것일까?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하고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했다.
하지만 꿈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눈곱만큼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뺨을 꼬집어보아도 아프기만 할 뿐이었다.
" 아직 어질어질한가. 본데, 몸조리나 더 하고 공부나 계속하자. 괜히 그놈의
망혼벽인가 얻으려고 가슴 졸 인거 생각하면 분통터지지만, 원래 세상은 운이
아니라 노력이다. 계속 노력하다보면 그런 기물 없이도 기사들과 단신으로 싸울
능력을 갖출 수 있을게다. 이번에 봐라, 너 어쌔씬들과 아주 잘 싸우기만 하더라.
커~ "
시르온의 어깨가 처지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진 예히나탈이 위로를 했다.
시르온에게는 전혀 위로가 안 되다.


5. 산 위의 하렘, 하렘 위의 군주


와장창 쨍그랑-
침대에 비스듬히 앉은 채 시녀가 차려온 저녁 식사를 먹으려던 알-무하드는 무슨
생각 이 떠올랐는지 단숨에 식사 쟁반을 벽으로 집어 던져 버렸다.
그래도 속이 풀리지 않았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 때문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이마에 핏줄이 우둘투둘 솟았다.
알-무하드의 분노가 폭발하자 시녀는 겁에 질려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오들오들
떨었다. 주인 알-무하드의 눈 밖에 나면 죽어도 곱게 죽지 못한다.
와들와들 주먹을 떠는 알-무하드의 핏발 선 눈이 겁에 질린 시녀에게 고정되었다.
와락-
그는 거칠게 시녀의 손목을 잡아 침대 위로 이끌었다.
반란 이후, 형 알-제이시의 후궁들을 안기는 했어도 이런 천한 시녀들에게 손을 댄
적은 없다. 반란 이전에는 더욱 더 여자를 멀리 했었다.
욕정에 자신을 내맡기기에는 그의 몸이 너무나도 절제에 익숙했었기 때문이다.
좍- 쫘아악-
우악스럽게 시녀의 치마를 찢어내더니 양손으로 우악스레 가슴섶을 잡고는 양쪽으로
거칠게 열어 젖혔다.
상의를 여민 단추가 힘없이 흩어져 나가고 뽀얀 가슴이 출렁이며 드러났다.
비록 천한 노예의 신분이기는 하지만, 알-무하드를 직접 시중드는 노예인 만큼
자색도 곱고 피부도 매끈하다. 햇볕에서 일하지 않으니 속살도 하얗고, 나이가
어리니 뽀얀 솜털만 뽀송뽀송하다.
거칠다.
알-무하드는 거칠게 시녀를 다루었다. 그녀의 가슴을 깨물고 사타구니에 거칠게
손을 넣고 움직였다.
고통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시녀는 이를 악물면서도 신음을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자칫 주인의 심기를 어지럽혔다가는 단숨에 목이 날아간다.
헉- 헉-
토해내듯 신음을 낸 알-무하드는 이번에는 시녀의 몸을 확 뒤집었다.
그녀의 허리께에 말려 올라간 찢어진 치마 뭉치를 단숨에 끌어 내리듯 잡아 뜯어
버렸다.
그리고는 겁에 질려 딱딱하게 몸이 굳은 시녀의 달덩이 같은 엉덩이를 손으로 잡아
치켜 올렸다.
헉- 헉- 헉- 헐떡임이 더 커졌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마에 핏줄이 바짝 돋았다.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이건 지옥이다! 지옥(地獄)! 지옥(地獄)! 지옥(地獄)
콰앙- 쾅- 쾅- 쾅-
알-무하드의 바위 같은 손이 침대에 엎드려진 시녀의 뒤통수를 느닷없이 내리
찍었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시녀의 두개골이 함몰되고 피가 사방팔방으로 튀며 침대
위를 흠뻑 적셨다.없었다. 시녀의 두개골이 함몰되고 피가 사방팔방으로 튀며 침대
위를 흠뻑 적셨다.
알-무하드의 몸에도 핏방울이 잔뜩 튀어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마귀 형상이 되어
버렸다.
" 이건. 지옥이야! 이럴.수는. 없.어! "
넋을 잃은 듯이 중얼거리는 알-무하드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울음기마저 배어
있었다.
" 이럴.수.는. 없 어 "
포효하는 사자처럼 그의 절규소리가 궁을 쩌렁하게 울렸다.
발기가 되지 않는다. 이런 짓을 해봐도 그의 남성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죽어버렸다.
시르온의 독에 척추를 다치면서 세부 신경들이 모두 뭉그러져 버렸다. 세균에
잠식당해 녹아 없어졌다.
의술 담당자 말에 의하면, 신경을 이어주는 수술을 하려고 해도 이을 신경 자체가
다 녹아 버려서 어쩔 도리가 없다고 했다.
여긴 하렘이다.
산(山) 위에 우뚝 선 하렘이다.
그리고 난 군주다.
하렘 위에 태양처럼 솟은 군주다.
사방에 널린 것이 여자들이고 나의 후궁들이다.
사랑하는 공주 이시리스도 손에 넣었고 권력도 쥐었다.
그런데. 남성을 잃었다.
하렘의 군주인 내가 사내가 아니게 되어 버렸다.
이건 지옥이다.
이게 바로 지옥이다.
" 우아아아아아아아 시 르-- 온 이 개-애 새 끼 "
알-무하드의 분노는 그의 절규를 타고 흘러넘친다.
그의 하렘 가득히.
메카인, 대륙의 서쪽에서 시작해서 대륙 중앙부근까지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는
대제국(大帝 國) 노아부의 수도(首都)다.
제국 노아부는 프라유스 강을 중심으로 일어난 고대 문명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오그스카 산맥을 사이에 두고 대륙에서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아르만 제국과
힘 겨루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수도 메카인은 프라유스 강이 제공하는 비옥한 퇴적지에 기반을 두고 발달했다.
역사가 증명하듯, 풍부한 곡식과 가축을 지닌 강 유역에서 발생하는 문명은
전제국가 형태로 발전하기 쉽다.
노아부도 예외가 아니어서 농업 생산량에 기반을 두는 토족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더니, 그 들의 힘을 하나로 모은 왕이 대륙에서 가장 먼저 출현 했고, 그
뒤로 수많은 부족들 과 국가들을 병탄하면서 현재 제국의 면모를 갖추었다.
외지인이 노아부의 수도 메카인 에 오면, 우선 엄청난 규모의 신전(神殿)과
어마어마한 크기의 황릉(皇陵)을 보고 기가 질린다.
노아부는 전통적으로 돌을 쌓아 무업을 만드는 풍습이 있는데, 황릉의 경우에는
반듯 한 돌
을 엄청난 규모로 쌓아 올린다. 메카인 근교에만 이런 황릉의 수가 수십 개가
넘는다.
오랜 세월 동안 노아부의 황제의 수가 몇인데 고작 수십 개의 황릉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권력 투쟁이 치열한 노아부의 특성상 황조(皇朝)가 여러 번
바뀌어왔다.
황조가 바뀌면 새 정권이 처음 하는 일이, 이전 황조의 황릉을 털어 거기서 나온
막대한 재물로 새 황조의 재정 기틀을 잡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노아부'라는 이름만은 계속 유지하는 것도 독특하긴 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새 황조가 제국 곳곳에 흩어져 사는 부족 전사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다. 노아부 곳곳에 흩어져 사는 전사들은 오직 노아부의
이름에만 충성을 다하는 습성이 있기에, 황조가 바뀌었다고 해서 쉽게 제국의
이름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검은 로브를 머리 깊숙이 눌러 쓴 노인 한명과 하의만 걸친 노예 청년 한명이
제국의 수도 메카인의 성문을 통과한 것은 해가 서서히 질 무렵이었다.
예히나탈과 시르온, 조란 땅을 떠나 긴 여정 끝에 메카인 에 다다른 사제는
메카인의 웅대한 모습에 감탄선 을 터뜨렸다.
" 여기가 메카인 이구나! "
먼저 감탄 성을 터트린 사람은 세상 구경을 거의 못해본 시르온이 아니라 노회한
예히나탈이었다.
네크로맨서 최고의 지성이라고 자처하는 예히나탈이지만, 그가 지하던전에서 책과
씨름만 했지 언제 이런 대도시에 와봤겠는가?
물론 대도시를 처음 보기는 시르온도 마찬가지 이기는 하지만 원래 시르온은 말이
없고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다.
" 주인님, 우선 숙소부터 정해야죠. "
시르온이 넉살 좋게 주인님이라고 부르자 예히나탈의 입이 귀에 걸리도록 찢어졌다.
" 커- 주인님이라? 거 듣기 좋은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불러 주면 안 되겠냐?
주인님이라고. "
" 정신 차리세요. 우리가 여기 놀러온 줄 아시는 것은 아니겠죠? 제 이마에 노예
인장 이 뚜렷이 찍혀 있는데 여기서 어떻게 스승님이라고 불러요? "
정색을 하고 나직하게 면박을 주는 시르온에게 눈을 한번 흘겨 준 예히나탈은
입맛을 다시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 알았다, 알았어. 하나 밖에 없는 제자가 스승 장단 좀 맞춰주면 어디가 덧니냐?
쯧 쯧쯧쯧~ 그나저나 어디서 묶지? 우선 저쪽 시가지 쪽으로 가보자. "
예히나탈은 대뜸 남쪽 번화가로 발길을 옮겼다.
삐진 듯 했다.
스승이 점잖지 못하고 갈수록 어리광(?)이 느는 것 같다고 느낀 시르온은 나직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늅低???)이 느는 것 같다고 느낀 시르온은 나직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 뭐해 빨리 언오고, 이 게으름뱅이 노예놈아. "
멀찍이서 스승이 버럭 화를 낸다.
. 삐진 게 틀림없다.
시르온과 예히나탈이 조란을 떠나 머나먼 이곳 메카인 까지 오게 된 이유는 바로
파하드 알-제이시, 즉 티야의 큰 오라버니 실종 사건 때문이다.
알-무하드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반쯤 미쳐버린 이후, 전세는 완전히 파하드에게
기울 뻔 했
었다.
매일같이 여자 노예들을 죽이고, 이를 말리는 부하들을 극악하게 처형하면서
알-무하드는 완전히 휘하 어쌔씬들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 버렸다.
그 대신 냉철하게 사태를 수습하는 공주 이시리스에게 어쌔씬들의 충성의 맹약이
줄을 이었다.
어쌔씬의 구할 이상이 그녀에게 복종한 순간, 이시리스는 휘하 병력을 움직여서
알-무하드를 유폐시켜 버렸다. 비록 알-무하드가 그녀를 구하다가 이 꼴이 되었기는
하지만, 권력을 쥔 이상 이제 그는 필요 없다.
원래 권력은 비정하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가 이 산상궁전의 주인이다.
이시리스는 산상궁전을 걸어 잠그고 농성(籠城)을 하면서, 다시 말해 내전을
장기화시키면서 역전의 실마리를 찾고 있었다.
그녀는 제국 황제 알-예리고의 총애를 받는 공주다.
하지만 현제 제국의 실세인 황태자 알-아자르 알-예리고는 이시리스 모녀를 극도로
미워하고 있다.
결국 그녀는 조란에서 힘을 얻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다급한 상황이다.
친구보다 적이 많은 노아부 황실에 섣불리 도움을 요청 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은 이시리스 공주뿐만 아니라 티야 측에서도 익히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내전이 장기화 되어도 공주에게는 뾰족한 승산이 없어 보였다.
그럴 즈음, 노아부의 황태자 알-나자르는 파하드에게 친히 서신을 보내 그를 조란
어미어(emir)로 인정할 것이며, 그의 이름을 알-파하드 알-제이시로 하사하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알-파하드 알-제이시!
이름 앞에 '알-' 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어미어 이상 최고위 귀족들뿐이다. 최소한
한 개 이상의 도시를 지배하는 어미어들만 알- 이라는 영광된 칭호를 황제로부터
하사받을 수 있다.
노아부에서는 자신의 이름 뒤에 부친의 이름을 붙이도록 되어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보면 부친이 누구인지, 가계(家系)가 어떻게 되는지 한번에
알알이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알-제이시의 수많은 자식들은 모두 자기 이름 뒤에 알-제이시를 붙인다. 그로인해
그들이 노아부 어디에 가든지, 어미어의 자식임을 떳떳이 드러내어 진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 앞에 알-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은 그 많은 자식들 가운데 오직
한 명, 어미어의 자리를 이을 진정한 후계자만이 그 영광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황태자의 서신을 받고 파하드가 어찌 흥분하지 않았으랴!
부친 알-제이시도 황제에게 어미어 위치를 승인받기 위해 제국 아르만의 기사단과
피나는 전투를 벌였었다. 이제 자신이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이어받는 것이다.
알-파하드가 되면 산위에 있는 어쌔씬들도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될 것이다.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그는 단숨에 친위대를 이끌고 황궁이 위치한 수도 메카인 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실종되었다.
100 여명이 넘는 전사들을 대동한 그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번에는 티야 측이 큰 타격을 받았다. 파하드 휘하에 모여든 많은 전사들, 사막
부족에서
차출된 전사들은 티야의 명을 듣기 위해 모인 것은 아니라며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제는 다시 백중세다.
티야만으로는 산상궁전을 함락시킬 수 없다.
그때 그녀의 남편 라흐만이 돌아왔다. 메카인의 본가(本家)에 다녀왔다며 몇 개월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티야에게 엄청나게 충격적인 사실을 전했다.
알-제이시는 죽지 않았단다. 그가 살아있단다.
알-제이시는 황실로부터 모종의 서찰을 받고 메카인으로 비밀리에 들어갔다가
그곳에 서 실종되었는데, 라흐만의 부친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어느 고위층이
개인적으로 만든 지하 감옥에 갇혀있다고 했다.
티야는 믿지 않으려 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라흐만에 건네준 팔찌를 보고는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제이시의 60세 생일에 티야 자신이 선물한 팔찌다. 지난 십년간 알-제이시가 단
한번도 손에서 풀어 본 일이 없는 바로 그 팔찌다.
무엇이 알-제이시로 하여금 메카인으로 가도록 만들었을까?
파하드는 어떻게 그 많은 전사들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일까?
조란에서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알 길이 없다.
결국 열쇄는 수도 메카인에 있다.
그리고 결국 이번에도 시르온이 나섰다.
티야가 말리려 했지만 던전 마스터 예히나탈도 거들었다. 예히나탈의 청은 티야라고
해도 쉽게 거절할 수 없다.
결국 티야는 또 지고 말았다. 결코 누구에게도 진 적이 없던 그녀가 시르온에게는
자꾸 진다. 그녀 뜻대로 되질 않는다맙“鍍?진 적이 없던 그녀가 시르온에게는
자꾸 진다. 그녀 뜻대로 되질 않는다.
좁은 여관방을 하나 잡고, 각각 침대와 바닥에 누운 예히나탈과 시르온은 잠을
청했다.
이제부터는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
지리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도와줄 사람도 없는 이곳 메카인 에 알-제이시를
구해야 한다. 사방이 적이고 모두를 의심해야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다.
긴장이 되서인지 예히나탈은 쉽게 잠을 청할 수 없었다.
" 시르온, 자냐? "
" 아니요. 왜요? "
" 그냥, 좀 맹숭맹숭해서. 그나저나 하나만 물어보자. 너 이번에는 무슨 심산으로
이 먼 곳까지 오겠다고 지원했냐? 여기 망혼벽 같은 것도 없을 텐데? "
" 티야 주인님이 너무 늘러 붙어서요. "
" 뭐? 뭐라고? "
" 라흐만이 있을 때도 끊임없이 저를 침대로 끌어들였는데, 라흐만이 사라지니까
그게 더 심해지잖아요. "
" 뭐? 그래도 티야 그 애가 예쁘긴 하잖아. 글래머에다. 너 사내자식 맞나? 아님
이제 좀 딸 리냐? 뱀을 그렇게 먹어 놓고서는 사내자식이. 쯧쯧- "
" 그런 것 보다는 독(毒)이나 소환 술을 연마할 시간이 너무 없어져서요. 장거리
여행을, 그것도 스승님과 같이 하다보면 실력을 많이 키울 수 있잖아요. 실전
경험도 하고. "
" . "
예히나탈이 조용해졌다. 눈시울도 붉어졌다.
감격한 탓이다.
원래. 나이가 너무 들면 쉽게 감동한다.
재정적인 문제로 예히나탈이 묶은 여관은 비교적 허름하고 낡았다.
시르온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티야가 이 먼곳에, 그것도 위험한 임무를 맡겨놓고
비용을 충분히 주지 않았을 리 없다.
' 노예는 돈을 소지할 수 없다 ' 라는 법규 때문에 모든 경비를 예히나탈에게
주었을 뿐이다. 그것도 넉넉하게 챙겨 준 티야다.
하지만 예히나탈의 마음은 엉뚱한 곳에 가 있었다.
메카인 같은 어마어마한 대도시라면 그럴듯한 마법 상점(商店)도 많이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돈 욕심은 없지만, 책이나 마법 물품에 대한 호기심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다.
수중에 쥐어진 큰 돈, 그리고 물류가 풍부한 수도 메카인.
예히나탈은 출발 전부터 이 돈을 어디에다 쓸지 결정해 버렸다.
그리고 고른 곳이 이런 허름한 여관이다.
아침 식사도 이 여관 식당에서 제공하는 식단 가운데 가장 형편없고 저렴한 것으로
골랐다. 시켜놓고 보니 예히나탈의 기대보다 더 형편없었다. 내심 시르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노예생활에 익숙해져서 인지 묵묵히 잘도 먹는다.
" 그나저나, 이 넓은 메카인에서 알-제이시를 어떻게 찾는다니? 우리가 여기에
연고가 있냐? 도와줄 사람이 있냐? 라흐만 집안이라도 찾아가 볼까? "
" 가만히 있으면 그쪽에서 찾아 올 겁니다. "
" 그쪽? 어느 쪽? 라흐만 집 사람들? "
" 아니요, 파하드를 납치한 자들. 그들이 움직일 겁니다. 우리를 노리고 말이죠. "
예히나탈이 펄쩍 뛰었다.
" 우리? 우리를 어떻게 알고? 우리가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고? 대체 그자들이 무슨
억하 심정으로 우릴 노려? 응? 응? "
" 라흐만이 우리가 메카인으로 갔다고 전했을 겁니다. 라흐만이 꼭 아니더라도
이시리스 공주나 누군가가 말했을 테죠. "
" 라흐만? 그 자식이 왜? 그놈이 설마 배신자라는 거냐? "
" 예전에 제가 산상궁전에 잠입했을 때, 이시리스 공주를 인질로 잡소 탈출할 때
기억나세요? "
" 기억나지. 그 살떨리는 순간을 어찌 잊어버릴 수 있겠냐? 갑자기 그건 왜? "
" 그 때 저는 모여든 인파 가운데 스승님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렸었죠. "
" 그래, 눈이 딱 마주쳤잖아. 내 그래서 얼른 티야에게 연락했었지. 커- 그 덕분에
네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 거 아니냐? "
자신의 빠른 판단이 못내 자랑스러웠던 모양이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예히나탈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런 예히나탈의 모습에 시르온도 피식
웃었다.
" 네, 스승님 덕분이죠. 그건 그렇고, 그 인파에서 스승님을 찾으려고 하다가 누굴
봤는지 아세요? "
" 누구? 설마! "
" 예, 라흐만이 거기 산상궁전에 있었어요. 스쳐 지나갔지만 분명히 라흐만이었죠.
"
예히나탈의 눈에서 불똥이 튄다.
" 네 말은 그놈이 배신자라는 거냐? 그럼 우리가 그놈들이 파 놓은 함정 속에
기어들어 왔다는 거냐? 나 잡아 잡수~ 하고? "
아니라고 대답하기를 기다리며 시르온의 입만 바라보던 예히나탈은,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시르온에게 눈을 부라리며 벌떡 일어났다.
" 이런 바보 곰탕이 같은 놈, 티야 고년한테 뭔 충성을 하겠다고 나까지 이런
사자굴로 끌어들여? 왜? 그 여자랑 한 침대 위에서 뒹굴다 보니 목숨이라도 걸고
싶어지는 듯하냐? 이 제보니 고년이 아니라 네가 더 빠져 있었구나? 못난 놈, 나
조란으로 다시 돌아 갈련다. "
" 티야에 대한 충정이 아닙니다. "
" 그럼 뭐냐? "
" 실전 경험이 필요했습니다. "
" 뭐? "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테이블에 앉은 예히나탈은 시르온의颯윱求? "
" 뭐? "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테이블에 앉은 예히나탈은 시르온의 다음 말에 기가 턱
막혔다.
" 산상궁전에서. 알-무하드를 거꾸러뜨리긴 했지만 그건 제 실력이 아니었습니다.
인질을 이용한 심리전 덕분이었죠. 어쌔씬들을 상대할 때도 마찬 가지였고요.
정식으로 겨룬다면, 그리고 그들이 제가 독을 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독을 채
뿌리기도 전에 제 목이 날아갔을 겁니다. 더구나 알-무하드는 제가 살포한 독을
뿌리 치고, 저항 했었습니다. 속도가 느려서 그렇지 일단 독을 살포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거꾸러트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더라구요. "
말이 없던 시르온이 단번에 긴 문장을 토해내자 예히나탈의 표정도 엄숙해졌다.
" 독(毒)이 무서운 것은 사실이다. 용맹한 사자도 전갈에게 잘못 물리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지. 그걸 알면서도 독을 쓰는 사람은 극히 적다. 왜 그러겠냐? 그것은
독이 쓰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사람들이 독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선 독은, 칼에 비해 속도가 너무 느리다.
그리고 의술에 밝은 신관만 독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뛰어난 기사들은
오러를 뿜어내는 마나를 이용해서 독의 침투를 막아 낼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에 네크로맨서들이 모두 독을 주 전공으로 익혔겠지.
나는 네가 일반 기사들이 아니라 그런 초인의 경지에 이른 기사들까지 상대하려는지
몰랐다. "
" 그래서, 그래서 실전 경험이 필요했습니다. 메카인의 일급 전사들과 부딪치면서
무언가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기사들이 입은 갑옷까지 녹여 버릴 수
있는 독을 찾았습니다. 그러면 기사들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뛰어난 기사들은 마나로 신체에 벽을 쌓아서 독을 막을 수 있더군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 벽을 뚫을 수 있는 독을 찾아야 합니다. "
" 이, 이. 이. 후우 "
무언가 반박을 하려던 예히나탈은 시르온의 굳은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도움이 못되는 자신이, 시원하게 답을 못해주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 이런 우라질. "
시내 뒤골목 미로처럼 얽힌 좁은 골목길을 전력으로 뛰어서 모퉁이를 막 돌은 순간,
예히나탈의 입에서 새어나온 소리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그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팔짱을 끼고 오만하게 길을 막은
세명의 사내였다. 모두 하나같이 머리를 빡빡 밀고 상의(上衣) 없이 펄렁거리는 폭
넓은 바지만 입고 있다. 덕분에 구릿빛 근육이 위압적으로 드러나 있다. 귀에는
굵은 링을 차고 있으며 팔목과 발목에도 금테를 두른 팔찌와 발찌를 차고 있는데,
특이한 점은 모두 맨발이라 는 것이다.
힐끗 위쪽을 보자, 빈민가 지붕 위에도 두 명이 양쪽으로 포진한 채 팔짱을 끼고
있다.
" 음- "
뒤이어 막 모퉁이를 돈 시르온도 사내들을 보고는 신음성을 흘렸다.
뒤쫓는 추적자들을 떨어뜨리기 위해 독을 마구 살포하느라 뒤늦게 모퉁이를 돈
시르온도 정면을 막아선 사내들이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윙- 위이이이잉 윙윙- 윙윙- 윙윙- 윙윙-
정면에서 말 없이 팔짱을 끼고 있던 사내 셋이 팔짱을 풀며 양 팔 근육을 미세하게
진 동시키자, 팔목에 찬 굵은 원형 팔찌가 무서운 소리를 내며 엄청난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회전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팔목에 금빛 띠가 하나 빙 둘러 잇는 듯이 보일
정도였다.
더 놀라운 점은, 그들이 땅 위에 꼿꼿이 서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발찌
도 빠르게 회전을 하고 있 다는 점이다.
스스스스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팔찌와 발찌가 회전 하는 주위로 스멀스멀~ 푸르스름한
오러가 일어나고 있었다.
검이나 창도 아니고, 이런 환(環)에 오러를 일으킨다는 말은 난생 처음 들어
보았다.
윙-윙- 위이이이잉- 윙윙윙-
세명의 사지에서 맹렬하게 회전하는 열두개의 환!
푸르스름한 오러를 일으키며 위협적으로 돌아가는 환은 보기에도 무시무시하다.
먼저 움직인 쪽은 시르온이었다.
이런 위험한 싸움에서 먼저 움직이는 쪽이 불리하다는 것은 시르온도 알고 있지만,
그에게는 믿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게다가 스승 예히나탈이 보기드문 네크로맨서이기는 하지만 이런 근거리 투박술에서
저런 기병(奇兵)을 쓰는 전사(戰士)들을 상대하다가는 허무하게 죽기 십상이다.
시르온은 빠르게 옆 담을 타 오르며 손가락을 죽 펴서 중앙의 사내를 가리켰다.
그의 손끝에 녹색 광망이 진하게 뭉친 순간,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전사는 몸을
뒤로 풀쩍 빼내며 양손을 떨쳐내었다.
위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동시에 그의 손목에서 회전하던 환이 시르온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두개의 환은 주인의 손목을 떠나는 동시에 양쪽으로 갈라지며 기이한 궤적을 따라
쏘아졌다.
인간의 동체 시력으로는 추적하기 불가능한 속도와 궤적.
단순한 원호를 그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선형도 아니고, 삼차원 공간상에서
굴幣?원호를 그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선형도 아니고, 삼차원 공간상에서
기이한 자유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 두개의 환은 시르온에게 집중되었다.
하나는 시르온의 좌측면에서, 하나는 어느 틈에 시르온의 등 뒤쪽에서 날아들었다.
시르온이 독을 발출하는 동시에 담장 아래로 뛰어내리지 않았다면, 그의 몸은
갈가리 찢겨 나갔을 것이다.
쐐애애액- 위이잉- 무서운 회전력을 수반한 환이 시르온의 머리위를 스쳐 지나가며
그의 머리카락을 뭉텅 잘라내었다.
땅에 착지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시르온은 파바바박 땅거죽을 뚫고 하늘로
치솟은 환에 기겁하며 뒤로 발랑 누워버렸다.
정신이 번쩍 들고 소름이 쫙 돋았다. 시르온이 내려선 바로 아래에서 솟구친 환은
자칫 그의 사타구니에서 정수리까지 양단시켜버릴 뻔했던 것이다. 눕자마자 옆으로
뒹굴었는데, 그가 누웠던 자리에는 또 다른 환 하나가 땅에 긴 도랑을 파며
직선으로 날 아와 스쳐지나갔다.
팔이 살짝 베였는데 살점이 날카로운 칼에 잘린 것처럼 매끈하게 떨어져 나갔다.
뒤에 날아든 두 환은, 전사의 발에 매달려 있던 것들이다.
" 네크로맨서라고 들었는데 몸놀림이 너무 빠르군. 체술 이라도 익힌 것인가? "
자신 던진 네 개의 환을 시르온이 모두 피한 것이 신기한 듯, 비로써 입을 열었다.
그의 양 손목과 발목에는 어느새 방출했던 환들이 다시 돌아가서 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위이이이이이이이잉
듣기에도 섬뜻한 요악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역시. 독은 너무 느리다.
시르온의 이가 꽉 다물려졌다.
예히나탈은 뒤로 풀쩍 물러서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무언가 도움을 주긴 해야겠는데 섣부르게 나서기가 힘들었다. 너무나도 빠른
공방전이 어서 자칫 끼어들었다가 오히려 시르온에게 상처를 입힐까 싶어서다.
" 다시 한번 받아보지? "
전사의 손이 더 빠르게 떨쳐졌다.
이번에는 우수는 하늘을 향해서, 좌수는 땅을 향해서 뿌려졌다.
쑤애애애애앵
땅으로 패대기 쳐지다시피 던져진 환은 그 회전에서 오는 놀라운 양력(揚力) 덕분에
땅에 내려 꽂히지 않고 부우우웅- 땅에 낮게 깔리며 점차 떠올랐다. 그것도 마치
뱀이 영활하게 움직이듯이 좌우로 요동치며 시르온을 덮쳤다.
하늘로 쏘아진 환은 태양쪽으로 솟구치면서 눈 뜨고 볼 수 없도록 태양 광선을
등지고 내리 꽂혔다.
어느 한쪽도 피하기 쉽지 않다.
게다가 발목에서 출발한 두개의 환은 또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다. 아마 그것들도
여러 각도에서 시르온에게 날아오고 있을 것이다.
쭈웅- 쭝- 쭝-
시르온의 손끝이 껌뻑이듯이 세 번 녹색으로 물들었다.
공간상의 세 위치에 독을 발출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세균을 한번 살포하면 다음 균을 모을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사막 을 지나 여기 메카인 까지 오는 동안 균을 나눠서 살포하는 연습에
전념했었다.
이제는 모은 균을 최대 네 번까지 나누어서 연속으로 발출할 수 있다.
서걱- 서어억-
몸을 뒤로 꺾으면서 땅에서 부상하는 환 하나를 피했다. 아슬아슬하게 스친 바람에
턱 끝의 살점이 약간 잘려 나갔다.
몸을 뒤로 눕힌 채 수평으로 몸을 핑그르르- 돌렸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환을
피하기 위함이지만, 오른 팔이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이 베였다. 화끈한 통증이
밀려온다.
시르온이 위치한 담장 벽이 뚫리며 세 번째 환이 옆에서 치고 나왔다.
" 본메쉬(bone mesh)- "
까가가각-
무언가 위험을 느꼈는지 예히나탈이 소환한 뼈로 짜여진 그물망이 시르온의 몸통
주변 에 돋아났다.
무서운 회전력으로 본메쉬를 뚫고 파고든 환은 회전력이 다했는지 패엔- 주인의
손에 회수되었다. 하지만 충격은 본메쉬를 뚫고 시르온의 내부까지 진동시켰기에
그의 입에 서는 울컥 간음 피가 토해졌다.
무거운 본메쉬 속에 계속 있을 수는 없다. 예히나탈은 환이 회수되자 빠르게 소환한
본메쉬를 거두어 들였다.
그 순간, 어둠속에 웅크리고 있었다는 듯이 마지막 환 하나가 담장 그늘 속으로부터
느닷없이 튀어나오며 시르온의 복부를 뚫고 나왔다.
" 크허어억~ "
이번에는 죽은 피가 아니라 내장에서 역류하는 선홍빛 선혈이 시르온의 입에서
뿜어졌다.
털썩-
힘없이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여기서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
다행히 시르온만 타격을 입은 것이 아니었다.
시르온을 공격했던 전사는 시르온의 손이 녹색으로 물들자마자 옆으로 몸을
피했었는데 그 위치도 시르온의 세균을 활성화 시켜놓은 범주에 드는 곳이었다.
팔꿈치 부근이 세균에 노출되면서 뼈가 드러나고 근육이 녹아내리더니 팔뚝 아래가
어이없이 툭-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옆구리도 부식되며 대장과 소장이 녹이서 구멍이 뚫려 버렸다.
" 이런 "
옆으로 물러나서 팔짱을 끼고 장내를 관전하던 나머지 네 명의 전사들이 그 꼴을
보고 다급하게 막아섰다.
위잉- 위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이이잉
이번에는 시르온을 향해서 僿構?막아섰다.
위잉- 위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이이잉
이번에는 시르온을 향해서 네개의 환이 아니라 열여섯개의 환이 회전을 시작했다.
네 명 모두 같이 공격하겠다는 의미였다.
네개의 환만으로도 정신없어 죽겠는데 16개의 환이 비산하면 시르온이 주저앉은
곳을 아주 난도질해 버릴 수 있다.
위이이잉-- 위잉- 위이이잉--
요사스러운 소리가 더욱 커지면서 일촉즉발의 긴장이 고조되는 순간, 에히나탈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며 대규모 스켈레톤 소환주문을 캐스팅하려는 그 순간.
서거억 써걱 서어어억
무언가 살이 베이는 소리가 울리며 장내는 정적으로 빠져들었다.
놀랍게도, 시르온의 독에 노출되어 내장이 녹아 죽은 전사, 그 전사가 날렸던 환
4개 가운데 세 개가 허공으로 한번 선회하며 내리꽂히더니 남은 전사들을 베어 버린
것이다.
한명은 환에 두개골이 수평으로 잘렸다.
머리뼈가 잘리고 그안의 뇌도 반듯하게 잘렸으며, 자르고 지나간 환위에는 두개골
상부의 머리 뚜껑이 실려 나갔다.
또 한명은 땅속에서 솟구친 환에 의해 사타구니에서 왼쪽 어깨에 이르는 대각선
구간 이 일직선으로 잘려 버려 피를 폭포처럼 내 쏟으며 고꾸라졌다.
마지막 한명은 재빠르게 반응한 덕에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양쪽 허벅지 아래가
몸 과 분리되어 떨어져 나갔다.
이들이 시르온의 독에만 집중해서 환이 날아오는 것을 모르고 있지 않았다면,
방심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렇게 쉽게 당할 자들이 아니다.
이 어이없는 사태에, 살아남은 마지막 한명의 전사는 자신의 환을 날려
공격하려다가 말고 뒤로 풀쩍 뛰어 물러섰다.
우우이이이이이이잉-- 위이잉
동료들의 피를 머금은 세 개의 환은 멋지게 허공을 선회하더니 마치 악마와도 같은
호곡성을 내며 살아남은 자에게 날아갔다.
믿을 수 없는 모습에 눈이 커진 전사는 다급히 자신의 환 네 개를 날려 날아오는
환을 마주 공격했다.
까강- 그가가가가강 까악깡 허공 곳곳에서 환끼리 부딪치며 불꽃이 비산하고, 금속
갈리는 소리가 귀청을 찢을듯 이 울렸다.
" 꺼억- 우욱- 도, 독 "
환 세 개를 막고 한숨을 돌리던 전사는 자신의 복부가 녹아내리자 배를 움켜쥐며
앞으로 쓰러졌다.
내장이 타는 고통에 이어 자신의 장기들이 빠르게 부식되는 끔찍한 모습을 눈으로
보고난 마지막 전사는, 심줄이 툭툭 돋을 정도로 붉어진 얼굴과 공포에 젖은 눈으로
시르온을 노려보며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다가 숨을 거두었다.
위이잉- 위잉- 위잉- 위잉-
피를 잔뜩 묻힌 원반들은 그걸로는 성에 안차는지 허벅지가 잘려나가 쓰러진 전사의
몸을 마구 뚫고 지나가며 다져진 어육 꼴로 만들어 버렸다.
마치 피를 그리워하는 악귀처럼 날뛰었다.
이 놀랍고도 무서운 광경에 무어라 입을 열려고 하던 예히나탈은 순간 심장이 멎을
듯이 놀라 입을 쩌억- 벌렸다.
피를 잔뜩 머금은 환 세 개가 회전을 멈추고 허공에서 뚝 떨어지자 그곳에서
희끄무레 한 무언가가 둥실 떠오르는 거의 아닌가!
희뿌옇고 일그러진 얼굴 같기도 한 모습에, 눈과 입이 있을 자리에 검은 구멍만
뚫려 있는 사이(司?)한 것들, 바로 일그러진 원혼(?魂)들이다.
어둠의 원혼들, 눈과 입이 있을 자리에 검은 구멍만 뚫려있는 망령들, 그것들이
원반에서 기어 나오더니 휘익 허공을 날아 시르온의 손에 달라붙었다.
마치 시르온의 살점인 양, 손바닥에 붙더니 그대로 손바닥 자체가 되어 버렸다.
" 뭐, 뭐냐? 그것들은? 그게 저 환을 조종한거냐? 너. "
예히나탈이 시르온을 괴물 보듯이 보며 묻자 시르온은 담벼락에 기대어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 망혼벽의 망령들이예요. 그 향로 진짜였어요. "
그 말을 끝으로 시르온은 다시 풀썩 쓰러졌다.
그의 복부에 발생한 출혈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피가 끈적거리면서 엉겨 붙고 쏟아지지 않아 살아있었지, 아니었으면 출혈과다로
이미 저세상에 갔을 정도로 심한 상처였다.
" 말해봐라 망혼벽(亡魂壁) 말이다. "
여관 방 안에서 정신이 든 시르온이 처음 들은 말이다.
스승 예히나탈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목소리도 차가웠다.
" 죄, 죄송합니다. 저도 그게 망혼벽인지 뭔지 확신이 없어서. 스승님은 망혼벽의
'망' 자만 꺼내도 질색을 하시니까 저도. "
시르온의 말에 예히나탈의 굳어진 안색이 조금 풀렸다.
처음에는 시르온이 자신을 속였다고 여기고 괘씸해했었다.
하지만 시르온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이 그 향로를 똥 덩어리라고 부르면서
시르온을 좀 구박했던가. 시르온의 잘못이 아니다.
예히나탈은 얼른 말을 돌렸다.
" 험, 험, 그, 그건 그렇고 그 희뿌연 것들이 망혼벽의 실체냐? 나는 벽이라고
하기에 방어용인 줄 알았더니. "
"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 향로에서 제 몸으로 옮아 온 망령은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아무리해도 현재는 세 망령만 끄집어 낼 수 있었어요. 그리고
환 에 달라붙어서 공격한 것도 좌 세 망령만 끄집어 낼 수 있었어요. 그리고
환 에 달라붙어서 공격한 것도 제 뜻이 아니었어요. 저는 단지 환의 속도를
늦추려고 망령들을 끄집어내서 붙인 것인데 그 망령들이 환을 조종해서 공격까지 할
줄은. "
시르온의 말에 예히나탈의 눈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주인의 의지를 벗어나서 스스로 피를 갈구하는 망령이라면 자칫 시르온에게 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지금은 비록 그 수가 셋이지만, 장차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다.
저 무서운 암흑의 마스터 미케린의 원혼도 망혼벽에 갇혀있지 않은가!


6. 어둠의 제왕 네크로맨서


벽에 부착된 동(銅)으로 만들어진 유등 잔에서는 불꽃이 조용하게 타오르고 있다.
사방 벽은 커다란 돌을 반듯하게 자른 뒤 교차하듯이 쌓는 방식으로 축조(築造)되어
있는데, 보기에도 짜임새 있고 단단하다.
더구나 돌마다 그림들이 정교하게 부조되어 있고 그 하나하나가 무슨 신화속의
일들을 표현하는 듯이 보인다.
이들 석조 벽으로 둘러싸인 너른 방 안의 중앙부 바닥은 원형으로 360도 회전
가능하도 록 나무로 짜여 있으며, 그 가운데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의자도 원형 바닥 과 같은 재질의 나무로 한 몸체로 만들어져 있어 그 의자에
앉으면 한바퀴 회전하면 서실 내를 모두 둘러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정중앙 천장에서 강한 조명이 내려쬐고 있기에, 의자 주위가 밝고
외곽 부가 상대적으로 어둡다.
톡- 톡- 톡-
의자에는 비쩍 마른 노인이 한쪽 팔걸이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앉아서 팔걸이 손잡이
부분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톡톡 치고 있다.
머리에는 30 센티미터가 넘는 높고 뾰족한 모자를 쓰고 있으며, 의복도 신관들이 입
는 법복(法服) 위에 어깨에서부터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주홍색 띠를 걸친
모습이다.
얼굴도 바짝 말랐는데다 수염 한은 없어 어딘지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보인다.
" 하림의 아이들이 다 죽었다는 말이냐? "
노인의 얄팍한 입술이 비웃기라도 하듯이 비스듬하게 빗뚫어진다. 그러자 노인 앞에
부복한 사내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노인의 심기가 불편함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부복한 사내의 복장이나 행색은, 시르온을 공격하던 자들과 비슷하다.
" 대승정님, 그, 그렇습니다. 독에 죽은 자가 둘이고, 셋은 무슨 병장기에 당한
듯이 보였습니다. 저들이 시신을 모두 치워버렸기에 자세한 사인(死因)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
" 흥- "대승정이 비웃음을 흘리자 사내의 어깨가 더 굳어졌다.
"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거냐? 어떻소? 하림, 당신이 직접 말해 보시지? "
대승정이 고개를 돌린 곳은 실내에서도 그늘이 많아진 부분이어서 그곳에 사람이
있는 지 잘 보이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한명 키가 장대처럼 큰 노인이 조각상처럼
우뚝 서 있다.
하림이라 불린 노인의 피부는 구릿빛을 넘어서 청동조각 저럼 보일 정도로 푸른
기운을 띄고 있다. 머리카락은 한은도 없으며 귀에는 두툼한 링을 차고 있다.
전체적으로 얼굴이 길고 흰 수염과 흰 눈썹이 길게 뻗어있고 코가 크고 입술이
두툼해서 강인하게 보인다.
의자에 앉은 모습만 봐도 보통사람보다 머리 하나 이상은 더 커서 2미터가 넘어
보이는 장신이며 팔 다리가 특히 길다.
황색 천을 오른쪽 어깨로부터 흘러내리듯이 걸쳐서 하반신을 다 덮고 있으며, 양
팔에는 백금 테를 두른 커다란 환(環)을 세 개씩 차고 있다. 발목에도 같은 모양의
환을 하나씩 차고 있는데, 맨발에다 발이 무척 큰 편이다.
" 예히나탈.이라는 이름은 나도 익히 들어 보았소. 죠란 지하에 사는 세 괴물
가운데 하나라지? 내 예전에 에히고랍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예히나탈이
에히고랍과 비슷한 정도 실력자라면 대승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을까요."
하림의 두터운 입술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까마귀가 짖는 듯이 갈라지고 찢어지는,
아주 듣기 고약한 음성이었다.
" 하되, 만 명대 만 명이 싸우는 전쟁에서 예히나탈의 손에 내 아이들이 죽었다면
수긍 할만 하겠지만, 좁은 골목에서 그 네크로맨서 늙은이가 내 아이들 다섯을
죽였다고는 믿지 못하겠소. 그 골목에 무슨 시체가 있어 스켈레톤을 소환할 것이며.
"
하림의 목소리는 더 커져서 석실 내부를 윙윙거리며 진동시키고 있었다. 석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미간을 찌푸리며 듣고 있던 대승정이 얼른 말을 끊고 부복한 사내에게 명했다.
그도 더 이상 하림의 목소리를 듣고 있기 괴로웠기 때문이다.
" 하여간 너는 그 둘을 찾아내라. 메카인을 다 뒤져서라도 그들을 끌고 와. "
" 옛. "
부복한 사내가 더 머리를 조아려 보이고 석실을 나가자 대승정은 빙글 의자를
돌렸다.
바닥과 함께 돌아간 의자가 정 반대 방향을 향한 순간, 아무것도 없던 빈 공간이
어른어른 거리며 2미터가 훌쩍 넘을 듯이 보이는 장신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중년인은 하림보다도 더 커보인다.
덥지도 않은지 두터년인이 나타났다.
중년인은 하림보다도 더 커보인다.
덥지도 않은지 두터운 통가죽 옷을 목에서부터 뒤집어쓰고, 머리는 정수리 이외의
부 분의 머리들은 모두 뽑아버리고 정수리 부근 머리만 위로 잡아매었다. 그 모습이
마치 사막에 야자수 한그루가 서 있는 형상이어서 보기에 우습지만, 중년인의
무표정하고 낙막한 모습을 보면 절로 입이 다물어진다.
특히 왼쪽 눈 밑에서 뺨을 타고 입술 꼬리까지 붉은 색으로 새긴 불꽃 문신은
사내가 주는 위압감을 한층 더 높여 주었다.
중년 사내는 하림에게만 까딱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대승정을 향해서는 고개를
꼿꼿이 세운 자세를 유지했다.
대승정은 그런 중년인의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무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무어라고 한다고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숨을 한번 쉰 대승정은 중년인에게 입을 열었다.
" 헤이호, 네게 할 일이 생겼다. "
'헤이호' 라고 불린 중년인은 대승정의 말에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고 말도
없었다.
" 알-제이시에 관련된 일이다. 네 부족을 멸살시킨 그 알-제이시 말이다. "
알-제이시라는 말에 중년인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그의 왼쪽 눈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뛰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불꽃 문신이
꿈틀거리면서 마치 불꽃이 살아있는 듯이 보였다.
" 알-제이시가 드디어 직접 왔나? "
으르렁거리듯이 묻는 헤이호에게 대승정은 빙긋 웃어보이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 아니. 파하드를 잡고 있는 것만으로 알-제이시가 함정으로 들어오겠나? 그가 어떤
인물인데. 그는 아들 한명의 목숨 따위는 쉽게 버릴 자다. "
" 그럼 뭐냐? "
" 본인이 직접 오는 대신, 사막 던 전의 괴물 하나를 보냈더군. 예히나탈 이라던가?
"
" 그럼, 내가 할 일은? "
" 당연히 예히나탈을 잡아서 끌고 와야지. 계속 부하들을 보내다가 지치면
알-제이시가 직접 나타날테지. "
헤이호가 무뚝뚝하게 등을 돌리고 나가고 나자 대승정의 눈빛이 불빛 아래
요사스럽게 빛나기 시작했다.
" 대승정, 내 아이들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오? 헤이호까지 부르다니. "
하림의 까마귀 소리가 다시 울리자 대승정은 신경질 적으로 귀를 막으며 답했다.
" 당신 아이들 일곱 가운데 다섯이 죽었는데, 나보러 믿으라는 거요? 그리고
예히나탈만 여기 왔다는 보장이 어디 있지? 우리는 그 여우 같이 잽싸게 도주한
알-제이시의 행방도 모르고 있는데? "
대승정의 말에 무어라 반박하려던 하림은 두터운 입술을 꽉 다물었다.
함정에 끌려 들어온 알-제이시를 놓친 장본인이 바로 하림이었기에 그는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이를 꽉 다문 하림의 귀로 자존심 긁은 대승정의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 헤이호는 친위대를 100명 넘게 끌고 온 파하드를 놓치지 않고 잡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하림 당신은 겨우 십여 명만 데리고 온 알-제이시를 놓쳤고. "
대승정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하림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이 그의 커다란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보고, 대승정도 더 이상 하림의 비위를 긁어서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부드럽게 표정을 풀었다.
" 어쨌거나, 하림 당신은 우리 노아부 제국 최고의 전사가 아니오. 헤이호가 비록
살 떨릴 정도로 강하다지만 아직 당신에게는 미치지 못하지. 그리고. 헤이호는
어차피 이용물 아니오. 알-제이시를 제거하는데 쓰일 이용물. "
나직하게 속삭이는 대승정의 말에 하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지만 속이
편하지는 않았다.
헤이호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가 순수한 전사의 피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하림도
인정하고 있었다. 이런 대승정 같은 모사꾼에게 이용당하는 모습이 같은 전사
입장에서 탐탁하지 않았다.
하지만 헤이호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하림에게는 그동안 음지에서 살아온 그의 부족의 번영이 우선이다.
" 이제 그동안 연습을 통해서 독을 네 번 까지 나누어 살포할 수 있다는 말이지? "
" 예, 더 여러 번으로 나누는 것도 가능할 것 같긴 하지만, 그렇게 세균의 양을
쪼개 다보면 적에게 치명타를 날리기 힘들 것 같아서요. "
" 전체적인 독 기운이 부족하다는 뜻이구나. "
" 제 몸에 쌓을 수 있는 독의 양에 한계가 있으니까요. 근처에 세균을 이용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그래서 그동안 독의 종류를 다양화 시켜서 서로 상충시키는
방법을 고민했었죠. "
" 상충시킨다고? "
" 예, 여러 종류의 독으로 서로의 독기 운을 상쇄시키면 제 몸이 좀 더 많은 독을
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독을 사용할 때는 하나씩 풀어서 사용하고. "
" 독으로 독을 상쇄시킨다? 그럴듯하긴 한데. 나는 영 시르온 네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아서 불안하다. "
" 약간의 성과를 얻어서 독의 양을 늘릴 수는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였어요.
독으로 독을 제어한다는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그렇게 막灌?실패였어요.
독으로 독을 제어한다는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그렇게 서로 보완 관계에 있는 독이
많지 않더라고요. 예를 들면 시체에서 추출한 시독(屍毒)이나 뱀이나 전갈에서
뽑아낸 베넘(venom) 들은 서로 거의 상쇄가 안돼요. 세균류인 탁신(toxin)에서는
서로 중화되는 것을 몇 종(種) 찾아내긴 했는데, 그게 다예요. "
시르온의 표정이 시무룩해지자, 예히나탈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부터 독에 대한 공부를 더 할걸 그랬다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예히나탈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갑자기 시르온이 밝게 웃었다.
" 하지만, 이번 싸움을 통해서 아이디어가 하나가 번쩍 떠올랐어요. "
" ? "
" 바로 망혼벽의 망령들을 이용하는 방법이죠. " 시르온의 눈에서 영롱한 녹색
광망이 은은하게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그가 강한 흥미를 보일 때마다
나타나는 현상이다.
" 망혼벽의 원혼들은 정말 묘해요. 분명히 영혼이어서 물리력을 가질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원반을 조정한다든지 하는 물리적인 힘을 발휘하거든요. 그렇다고
질량체(質量體)라고 보자니 손에 잡히지는 또 않거든요.
그래서 생각 떠오른 것이, 제 신체가 견딜 수 있는 독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망혼벽의 망령에게 대신 독을 주입시켜보면 어떨까 생각 중이예요. "
시르온의 말에 예히나탈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 그게. 가능하겠냐? 만일 가능하다면 네 몸 안에 엄청난 양의 독을 품을 수
있겠지만 자칫하다가는. "
" 어차피 위험은 각오하고 있어요. 하지만 어제 그자들과 같은, 혹은 그보다 더
무서운 상대를 이기려면 여기서 안주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
시르온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예히나탈은 그 속에서
비장한 결의를 느꼈다.
예히나탈은 무거운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르온의 목표가 성국의 팔라딘들이라면 그의 말대로 더 발전할 필요가 있다. 지금
시르온의 실력으로 나섰다가는 성벽에 목이 내걸리기 딱 좋다.
예히나탈은 시르온에게 자신이 전수해 줄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전해주는 것 밖에는
그를 도울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르온은 크로노스교가 안배한 네 아이 가 운데 한명이다.
언젠가 실력이 갖춰지면 그는 크로노스 교단의 부활이라는 무거운 짊을 짊어지고
무시무시한 성국의 팔라딘들과 끝없는 전쟁을 펼쳐야한다.
신성력(神聖力)의 보호를 받고 있는 성국의 팔라딘은 모든 흑마법과 암흑의
소환술에 대해 상극이다. 그들을 감싼 오러는 어둠의 힘을 물리칠 수 있으며, 각종
환각이나 사술(邪術)에도 잘 속지 않는다.
음악(淫惡)한 크로노스의 힘을 빌려 타락시키려고 해도 팔라딘의 강한 믿음 때문에
실패하기일수다.
심지어 시련조차도 오히려 저들의 신앙의 밑거름이 된다고 여기는 자들이다.
시르온이 예히나탈이 가르치는 소환술보다 독공(毒公)에 더 집중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팔라딘을 상대하려면 팔라딘보다 월등히 강력한 어둠의 힘을 보유하고 있거나, 아니
면 어둠의 힘의 도움을 받지 않고 순수한 힘으로 팔라딘을 거꾸러뜨려야 한다.
그러려면 이 정도에서 물러나면 안 된다.
결국, 시르온이 가려고 하는 가시밭길은 다른 누구도 아닌 시르온 자신의 두 발로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이다.
" 그건 그렇고, 그 빡빡머리들은 '하림' 이라고 하는 자의 수하들인 것 같더라.
시르온 너에게 죽은 빡빡머리 시체에서 혼을 불러내서 취조해 보았다. "
" 하림? 혹시 아시는 이름인가요? "
" 아니, 처음 들어본다. 그런데 우리를 잡아오라고 지시한 자는 하림이 아니라
대승정이라 더 라? 상대가 대승정이라면 문제가 간단하지 않아. "
" 대.승정.이요? 대승정이면 아막 신전 사제(司祭) 가운데 최고 위직이잖아요. "
" 그런 동시에 황실의 국사(國師)이기도 하다. 이 나라 에서 황제를 제외하고는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는 인물이기도 하고. "
" 알-제이시나 파하드 사건에도 대승정이 연계되어 있겠네요. "
" 그것까지는 죽은 빡빡머리들도 모르던데, 심정적으로는 대승정이 핵심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시르온, 여기까지 캐내었으니 이대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냐? "
" 대승정이 그렇게 무서운가요? "
" 아막 신전의 사제들이 무섭지. 그들도 조란 네크로맨서들처럼 소환술에 능할 뿐
더러 제 노아부의 핵심 전력들이니까. "
" 하지만 우릴 공격했던 자들은 사제들이 아니잖아요. 대승정도 신전에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이번 일들을 처리하는 것 아닐까요? "
"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대승정쯤 되면 음지에서 부릴 수 있는 자들도 없지
않을게다. 그 빡빡머리들처럼. 그리고 저들이 한번 당했으니까 다음번에는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할 것이 분명하고. "
방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비록 예히나탈이 스승이기는 하지만, 이번 일의 책임자는 시르온이다. 결국
물러설지 나아갈지 결정은 시르온의 몫이다.
" 한번?시르온이다. 결국
물러설지 나아갈지 결정은 시르온의 몫이다.
" 한번.만. 더 부딪쳐보죠. "
시르온이 결정했다. 예히나탈도 왈가왈부 하지 않고 결정에 따를 것이다.
하지만 예히나탈의 얼굴이 휴지처럼 구겨지는 것까지는 시르온도 어쩔 수 없었다.
시르온이 예히나탈의 뜻대로 거기서 멈추고 조란으로 돌아갔으면 어땠을까?
후일 시르온이 내린 판단은,
"서둘러 메카인으로 돌아가려고 했어도 결국 중간에 잡혀서 대승정 앞으로 끌려갔을
것" 이었다.
이 판단에 대해 예히나탈도 머뭇거리면서 동조했다.
그 이유는 그만큼 '헤이호' 라는 괴물의 무력(武力)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시르온과 예히나탈 대승정 일당이 자신들을 다시 찾아내려면 적어도 삼사일은 걸릴
것이라 생각했다.
넓디넓은 메카인의 여관에 숨어 있는데 그렇게 쉽게 찾아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2 미터를 훨씬 넘는 장신에 머리를 위로 묶은 괴인의 방문을 받은 시점은
시르온이 깨어난 그날 저녁이었다.
콰앙-
잠겨진 여관 방문을 통째로 뜯어내고 쓰윽 안으로 들어온 헤이호는 우선 방안을
휘익 둘러보았다.
침대 위에는 늙은 노인이 꾸부정하게 앉아 있고 창문 쪽에는 건장한 젊은 노예가
팔짱을 끼고 창틀에 기대어 있다.
얼굴의 불꽃 문신이 타오르듯이 꿈틀하더니, 헤이호는 다짜고짜 예히나탈을 향해 부
웅- 칼을 크고 빠르게 휘둘렀다.
" 뭐, 뭐야-- "
느닷없는 낯선 방문자에 놀란 탓인지, 아니면 헤이호의 키가 너무 큰 탓에 그냥
방에 들어
오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기우 뚱 눕히고 들어오는 모습이 우습기 때문인지,
예히나탈과 시르온은 헤이호가 방 안에 다 들어 와서 갑자기 칼을 휘두를 때까지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게다가 헤이호가 칼을 휘두른 위치가 방문 앞이고, 거기서 예히나탈이 앉아 있는
침대 까지는 줄잡아 3 미터가 넘는 거리이기에 방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헤이호가 휘두른 칼은 불꽃이 넘실거리는 듯한 오러를 순간적으로 3 미터
넘게 뿜어내며 예히나탈의 오른팔을 어깨 부근에서부터 썽둥- 잘라버렸다.
툭-
" 으아아아악 내 팔 "
어이없이 떨어진 팔을 멍하게 보던 예히나탈은 침대 위에서 펄쩍 뛰어오르며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예히나탈의 몸 주위로 본메쉬(bone mesh) 마법이 발동하며 뼈로 이루어진
그물망이 몇 겹으로 둘러졌다.
시르온도 깜짝 놀라 다급하게 몸을 추스르며 쭝- 쭝- 쭝- 헤이호 전방과 양
옆쪽으로 독을 살포하며 예히나탈 곁으로 달려갔다.
후웅-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칼을 휘두른 그 손으로 손잡이만 돌려 잡은
헤이호는 이번에는 횡(橫)으로 길게 칼을 그었다.
마치 구비에서 물이 돌아 흐르는 듯, 헤이호의 칼은 끊임이 없고 자연스러워서 마치
한복의 유려한 그림을 보는 듯 했다.
덕분에 시르온 등은 비로써 헤이호의 칼을 제대로 볼 수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만월도 비슷하게 뒤로 많이 휜 형태에 길이는 1 미터가 채 안되는 것 같고 타오르는
듯한 붉은 빛을 뿜고 있었다.
헤이호의 도법(徒法)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우선은 목숨이 먼저다.
칼이 횡으로 그어지자마자 시르온과 예히나탈은 본능적으로 침대 뒤로 숨어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예상대로 처음에는 아무런 오러 없이 밋밋하게 출발한 도(刀)는 어느 순간 폭발적으
로 4 미터도 넘는 길이의 붉은 오러를 뿜어내며 엎드린 시르온의 등 바로 위를
스치듯 이 훑고 지나갔다.
여관 벽이 비명을 지르며 횡으로 잘라져 나갔고, 도가 지나간 뒤 후폭풍처럼 뒤이어
몰아닥친 뜨거운 열기는 시르온과 예히나탈의 등을 벌겋게 구워 버렸다.
" 일부러 죽이지 않았다. 어려움을 알았거든 순순히 포기해라. "
헤이호의 입에서 무뚝뚝한 음성이 흘러나오는 순간을 노려 시르온은 침대 아래로
보이는 헤이호의 발을 향해 녹색 빛을 뿜었다.
하지만, 헤이호는 예전 빡빡머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전사(戰士).
가볍게 세균이 번식된 부근을 풀쩍 뛰어넘어 침대위로 올라서더니, 다시 칼
손잡이를 휘릭 고쳐 잡고는 그대로 내리 꽂았다.
슈우우욱- 콰앙-
시르온과 예히나탈이 엎드린 사이 정중앙, 시뻘건 화염을 동반한 칼날이 코앞을
스쳐 지나가며 방바닥에 내리 꽂혔다.
이글거리는 화염은 예히나탈과 시르온의 몸을 휘감아 태워버리고, 칼은 어느새
바닥에 서 뽑혀 시르온의 목젖에 닿았다.
몸을 뒹굴에 옷에 붙은 불을 끄던 시르온의 움직임은 목젖을 살짝 누른 시퍼런
칼끝에 놀라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불을 다 끈 예히나탈도 시르온에게 겨눠진
붉은 칼을 보며 꿀꺽 긴장된 침을 삼켰다.
" 특이한. 독을 쓰는구나? 내 오러를 뚫고 침입한 독은 처음이다. 마치 독이 아니라
병원균 같은 느낌이던데. "
헤이호는 강자를 숭배한다.
어떤 사술이건 암습이건 간에 상관하지 않고 강한 공격 자체를 좋아한다.
네크로맨서 예히나탈을 잡아오라는 대승정의 명을 듣고  공격 자체를 좋아한다.
네크로맨서 예히나탈을 잡아오라는 대승정의 명을 듣고 이곳에 왔을 때는 나이든
예히나탈만 주의했었는데, 움직임이나 공격력으로 보았을 때 시르온에게 더 흥미가
생겼다.
시르온은 심장이 덜컥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독을 이토록 정확히 파악하고, 이토록 쉽게 파훼한 자를 만나지
못했다. 상대는 저항할 의지를 잃어버리게 만들 정도로 막. 강. 하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떠올리면서도 시르온은 한가지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 제가 뿌린 독.이 당신 오러를 뚫고. 들어갔나요? 그런데 왜 아무렇지도 않죠? "
칼로 목젖을 누르고, 온몸에 화상을 입어 이글거리는데도 엉뚱한 질문을 하는
시르온. 그의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본 헤이호의 한쪽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담대한 시르온의 모습에 흥미를 느낀 탓이다.
" 그게 어떤 독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오러를 뚫고 들어왔다. 단지 내 체내의
마나들이 나 를 보호하며 그 독을 몰아내었을 뿐이다. 전체적으로 독의 양이 많지
않아서이겠지. "
헤이호는 솔직하게 답을 해 주었다.
" 하지만 살포된 독의 양이 많다고 하더라도, 독 따위로는 결코 나를 어쩌지
못한다. "
그의 말은 자신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하다.
시르온의 목젖에는 헤이호의 칼끝이 살짝 파고들어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시르온은 그걸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시르온의 머리 속은 다시 온통 독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버렸다.
" 나는 헤이호, 이제 순순히 나를 따라라. 그러면 당장 죽진 않을 것이다. "
헤이호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든 시르온은 예히나탈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헤이호는 무시무시한 칼을 허리춤으로 다시 거둬들이고는 한마디 던졌다.
" 결정을 하는 사람이 예히나탈이 아니라 바로 너로구나. 대승정은 너에 대한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었는데. "
헤이호가 여관을 나서고 그 뒤를 예히나탈을 부축한 시르온이 따랐다.
어느새 여관 밖은 석양으로 인해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날도 어둑어둑 해졌다.
" 욱- 크흡- "
" 스승님, 괜찮으세요? "
예히나탈이 악 다문 입 사이에서 새어나오듯 신음을 토하자 시르온이 걸음을 멈추며
걱정스레 물었다.
스승의 짐 꾸러미를 뒤져서 꺼낸 약을 바른 덕분에 피는 멈췄지만 고통까지 멈추진
못했다. 잘린 오른쪽 팔이 욱씬거리는 듯 인상을 찌푸린 예히나탈은 시르온의
어깨에 기댄 채 비틀거렸다.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앞서가던 헤이호는 고개를 휙 돌려 비틀거리는 예히나탈을 물끄러미
보다 무뚝뚝한 어투로 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런 헤이호의 모습에 시르온이 쏘아붙이며 반발했다.
" 사람이 멀쩡하던 한쪽 팔이 없어지면 균형이 안 잡혀서 걷기가 힘들게 마련
아닙니까? 그렇게 재촉하지는 마시죠. "
하지만 그런게 통할 상대가 아니다.
헤이호는 잠자코 허리춤에서 스는- 칼을 뽑았다.
" 그럼 다른 쪽 팔도 잘라주면 균형이 잘 맞겠군. "
헤이호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시르온과 예히나탈은 손사래를 치며 질겁했다.
" 그, 그럴 필요 없어요. 조금만 지나면 스승님도 익숙해져서 잘 걸을 수 있을
겁니다. "
희미하게 웃어 보인 헤이호는 다시 무뚝뚝하게 등을 돌리며 걷기 시작했고, 그 등
뒤 로 시르온이 주먹을 휘두르며 욕을 퍼붓자마자 다시 한마디 던졌다.
" 등 뒤에서 독을 써볼 생각은 마라. 그 즉시 네 스승의 목을 벨 테니까. "
시르온과 예히나탈이 다시 찔끔해서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저놈은 정말 무서운 괴물이다.
시르온의 생각에 이대로 순순히 끌려가면 대승정을 볼 수 있을 것이고, 기회를 봐서
대승정에게 독을 뿌려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일행이 끌려간 곳은 매케인 외곽 지역의 황무지였다.
사방에 사람 키만 한 잡초들이 우거져서 어디가 어딘지 잘 구분도 되지 않는 곳.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하도 오래되어서 거의 다 붕괴되어가는 오래된 황릉(皇陵)
하나 밖에 없었다.
황릉이래. 봤자, 언제 멸망했는지도 모르는 오래된 옛 황조의 무덤이고 이미 예전에
다 도굴되어 소장품 하나 없는 곳임이 뻔하다.
미케인 외곽지역에는 이렇게 폐허가 된 황릉 유적이 심심치 않게 있어서 저것만
가지고는 여기가 어디쯤인지 알기 어렵다. 더구나 이곳이 초행(初行)인 예히나탈과
시르온에게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헤이호의 강압적인 눈빛에 떠밀려온 입구 안으로 들어간 예히나탈은 곧
자신의 생각 이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황릉은 최근에 개조했는지 벽에 거미줄 하나 없었으며, 최근 것으로 보이는 핏자국
얼룩이 곳곳에 있었다.
벽에는 규칙적인 홈이 파여 있는데, 힐끗 보니까 그 어두운 구멍 안에는 날카로운
석궁 이 빽빽하게 들어 차 있었다.
미로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폐황릉의 회랑(回廊)을 걷기 시작한지도 한참, 이게
이정도로 규모가 큰 황릉이었나 싶도록 회랑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요? "
참다못한 예돈?회랑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요? "
참다못한 예히나탈이 헤이호에게 물었지만 대답조차 없었다. 오히려 대답은
시르온이 했다.
" 스승님,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고 있어요. 지하로 벌써 한참 내려온 것 같아요. "
시르온의 말에 예히나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박했다.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우리는 지금 계속 올라가고 있어. 여기 경사를 봐라,
이게 오르막이지 어떻게 내리막이냐? 시르온, 정신 차려. "
그러나 예히나탈의 말은 헤이호의 급작스런 행동에 막혀 버렸다.
헤이호는 놀란 듯 눈을 번뜩이며 홱 돌아서 느닷없이 시르온의 목을 그 큰 손으로
꽉 움켜쥐고는 번쩍 들었다. 헤이호의 키가 어찌나 컸는지, 그가 좁은 회랑에서
시르온의 몸을 번쩍 들자 시르온의 머리는 쿵 하고 천장에 부딪쳤다.
" 그걸 어찌 알았지? 이게 지하로 내려가는 길인지 어떻게 알았지? 너는 누구냐? 누
구길래. 이 지저감옥(地底監獄)에 대해 아는 거지? "
헤이호의 음성은 무서울 정도로 음산하게 울렸고 여차하면 시르온을 이대로 죽일 것
같아 보였다.
숨이 막힌 탓에 발을 바동거리긴 하지만 이 정도에 기가 죽을 시르온이 아니다.
" 캑- 캑- 쿨럭- 이거. 놔요. 캑- 그럼 내려가면서 그게 내리막인지 구분 못하는
사람도 있단 말 이예요? "
시르온의 눈을 한참 들여다보던 헤이호는 그를 휙 밀듯이 던지며 풀어 주었고, 그
덕에 시르온은 바닥에 세게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뒹굴었다.
" 거짓을 말하는 눈은 아니군. 이 미궁의 비밀을 그렇게 본능만으로 풀어내는
사람이 나 외에 또 있을 줄은 몰랐다. 전사의 피를 이어받은 나도 쉽게 감지하지
못했었는데. 너 같은 아이가 알-제이시의 노예라니. 아쉽구나 "
" 그, 그럼 여기가 진짜 내리막이란 거요? 분명히 오르막인데. "
예히나탈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헤이호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걸 알았다고 해서 너희 노소(老少)가 여기서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품지는 마라. 그건 이 지저감옥의 비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니까. "
이제 일행은 더 이상 말이 없어졌다. 그저 묵묵히 걷기만 했다.
계속 회랑을 따라 돌기를 한참, 마침내 좁은 회랑이 끝이 나고 광장이 일행의
눈앞에 나타났다.
천장까지 높이는 줄잡아 7~8 미터는 되어 보였고, 크기도 웬만한 귀족의 저택이
들어서도 될 만큼 넓었다.
사방 벽은 모두 커다란 암석을 반듯하게 자른 뒤 서로 엇갈리게 쌓아 만들었는데,
이끼가 잔뜩 낀 모습으로 보아 이미 오래전에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황릉 지하에 이런 거대한 공동(空洞)이 나타날 줄은 예상 못했는지라 예히나탈은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공동 저편에는 녹슬어 보이는 육중한 철문이 몇 개 있는데, 각 철문 앞에는
사타구니만 붉은 천으로 가린 근육질의 사내 두 명이서 긴 창을 X 자로 꼬나 쥐고
우뚝 서 있었다.
헤이호가 망설임 없이 중앙에 위치한 철문으로 다가서자 근육질 사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는 철문 옆에 세워진 원기둥으로 가서
양쪽에서 손잡이을 움켜쥐었다. 돌도 된 원기둥에는 옆쪽으로 8개의 손잡이가 비쭉
나와 있는데, 사내들이 그걸 쥐고 힘차게 옆으로 돌리자 그르르르르르릉--
그르르르르릉
쇠사슬 끌리는 소리를 내며 육중한 철문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손잡이를 쥐고 원기둥 바퀴를 돌리는 사내들의 근육이 찢어질듯이 부풀어 오르고
땀이 뚝뚝 떨어질 무렵, 마침내 철문이 다 올라가서 어두운 입구를 드러내었다.
철문 앞에는 폭이 가느다란 계단이 다시 아래쪽을 향해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데, 그
안쪽에
는 빛 한점 없어 계단조차 잘 보이지 않고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마치 지옥의 입구인 양, 아가리를 쩍 벌린 철문 입구를 보며 문을 연 사내들의
표정에도 공포의 감정이 어렸다.
" 계단을 따라 내려가라. "
헤이호의 말에 시르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구로 내려섰다. 그르릉- 거리며 철문이
다 시 내려오고, 문이 닫히기 전 시르온은 무언가 생각난 듯이 질문 하나를 던졌다.

" 알-제이시하고, 파하드가 이 안에 유폐되어 있나요? 이제 그 정도는 말해 줄 수
있겠죠? "
시르온의 질문에 헤이호의 눈이 번쩍 하며 부릅떠졌다. 그는 다급하게 철문 쪽으로
다가서며 되물었다.
" 파하드는 얼마 전 내가 여기쳐 넣었다. 하지만 알-제이시라니? 네놈들은 파하드를
구하려고 알-제이시 그자가 보낸 것 아니냐? "
그르르르르르릉 쿠우우웅
헤이호의 질문에 시르온이 다시 답하기도 전, 철문은 다 내려와 계단 입구를 막아
버렸다.
스는- 쩌렁-
헤이호의 허리에서 벼락처럼 붉은 도가 뽑혀 나오고 철문에 겨누어졌다.
" 어서 문을 다시 열어라. 어-서! "
" 헤, 헤이호님, 무, 문을 다시 연다고 해도. 저 악마의 계단은 이미 끝없는 지저로
내려가 버렸을 텐데요. "
번쩍--
헤이호가 분노하듯이 사선으로 는 지저로
내려가 버렸을 텐데요. "
번쩍--
헤이호가 분노하듯이 사선으로 그은 도에서는 시뻘건 오러가 무섭게 뿜어져 나와
철문을 후려쳤다.
쫘아아아아악
두께만 30 센티가 넘는 철문이 종잇장처럼 베어지며 긴 틈을 만들었고, 입구를
지키는 사내들은 그 모습에 기가 질린 듯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사내들의 말대로 철문 저편에는 계단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두저(無低)의 공동(空洞)만 암흑 속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분노한 헤이호는 철문을 찢어발기고 안으로 들어갈 생각에 철문 바로 앞에서 도를
고쳐 쥐었다.
이번에는 양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 이글거리는 눈으로 철문 앞에 선 헤이호의 귀로 깊은 지하로 떨어지는
예히나탈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다.
" 크하하 하하하- 너희는 실수한거다. 이 아래 어떤 지옥이 있는지 몰라도, 나는
원래 그런 지옥 같은 지하에서 웅크리고 살아온 어둠의 네크로맨서. 밝은
지상에서는 네크로맨서가 전사에 밀릴지 몰라도 이 심연 같은 지저감옥에서 나를
꺾을 자 없다.
기다려라, 헤이호. 내 곧 이 감옥을 통째로 접수한 뒤, 지옥의 군대를 이끌고 다시
기어올라가마. 크하하 하하 "
예히나탈의 말이 맞다.
대승정이 실수한거다.
이 감옥에 백 명의 전사를 가둘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한명의 네크로맨서를 가둘 수
있다고는 장담하지 못한다.
그는 어둠의 네크로맨서, 지저 감옥에서는 그가 제왕이다.
기이이이이잉
시르온과 예히나탈이 계단에 발을 디딘 순간, 지저로 통하는 계단은 기관장치의
작동과 함께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시르온 등이 어-어- 하며 놀라는 사이 어느새 그들이 들어온 철문 입구는 이제 저
높이 멀어져 버렸다. 마치 지저 감옥과 세상을 영원히 단절 시켜 버릴 듯이.
고오오오오
기관은 점차 더 빠르게 움직이며 계단을 하강 시켰을 뿐 아니라 횡 방향으로도
움직여서 계단 자체를 입구에서 멀어지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시르온과 예히나탈의 시야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절벽 윤곽이 드러났다.
이끼가 잔뜩 껴서 미끈거리는 단애(斷崖) 저 높이,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철문은 이미 아득해 보였다.
예히나탈이 목청을 높여 외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팔을 잘라버린 헤이호가 들으라는 듯이 예히나탈은 간오하게 외쳤다. 메아리가
절벽에 반사되어 쩌렁하게 울리도록 악을 썼다.
누가 이런 기관을 만들어 놓았는지 알 수 없다.
주변 상황으로 보아 상당히 오래 전에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을 대승정 일당이
이용하는 것 같은데, 그 예전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엄청난 토목공사를 벌였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끼이이잉 끼인 덜컹-
듣기 싫은 쇳소리를 내며 마침내 계단을 움직이는 기관장치가 동작을 그쳤다. 아마
이지저감옥의 바닥까지 다 내려온 듯싶었다.
들어온 입구가 어디쯤인지 찾아보려 고개를 쭉 빼고 절벽을 훑어보았지만, 워낙
어두운데다 너무 멀어져서 확인이 되질 않는다.
" 라이튼-업(lighting up) "
예히나탈의 시동 어와 함께 그의 앞에 마치 원혼이 뿜어내는 훈불 같은 불덩이가
둥실 떠올랐다.
희미하기는 하지만 근처 사물 식별은 할 수 있을 정도의 밝기는 된다.
" 싸치 앤 프로브(search & probe) "
이어지는 영창에, 불덩이는 스스로 빠르게 주변을 맴돌며 주변 상황을 보여주었다.
계단을 따라 미리 내려가 보기도 하고, 계단을 벗어난 곳도 보여주었다.
탐색한 바에 따르면 계단은 너무나 길어 다 볼 수 없을 정도였고, 계단을 한발 짝만
벗어나면 그대로 끝을 알 수 없는 천길 낭떠러지다. 칠흑 같은 어둠, 난간도 없는
계단에서 자칫 발이라도 잘못 디디면 끝장이다. 몸이 무쇠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여기서 떨어지면 산산조각이 날 성 싶었다.
" 옘병, 그 자식한테 큰소리를 치긴 했다만, 여긴 사막 던 전보다 더하구나. 뭐
이렇게 깊고 끝도 보이질 않아. "
예히나탈의 입에서 죽는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다고 자포자기 상태는 아니다.
아까 큰소리가 허풍은 아닌 것이, 이런 지저감옥에 들어오자마자 예히나탈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평생을 어두운 지하에서 살아온 그가 아니던가.
밝은 메카인보다 이런 음습한 곳이 마음이 편하다
" 스승님, 일단 내려가 봐야죠. 저 아래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불덩이를 길잡이 삼아 조심스레 시르온이 앞장서고 예히나탈이 그 뒤를 따랐다.
둘이 바닥에 도착했을 때는 어림잡아 열 두어 시간 정도 지난 뒤였다.
그만큼 계단은 길고 길어 이대로 평생 내려가다 죽는 것이 아닐까 싶도록 만들었다.
그렇다고 다른 길이 있는 것도 아니니 계속 내려갈 밖에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
그런 심리적인 불안감 탓인지, 마침내 바닥에 도착하자 예히나탈은 털썩 땅에
주저앉아버렸다. 시르온도 충전이 필요한 듯 나란히 옆에 앉아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둠속은 예히나탈에게만 익숙한 것이 아니다.
비록 어둠 속에 살진 않았毓駭?
어둠속은 예히나탈에게만 익숙한 것이 아니다.
비록 어둠 속에 살진 않았지만 시르온에게도 어둠은 어머니 품속처럼 편안하고
익숙하다.
그가 마음을 가라앉히자, 바로 옆에 앉은 예히나탈도 시르온의 존재감을 못 느낄
정도로 어둠에 동화되어 버렸다.
그 때문이었을까?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던 시르온에게 마치 어둠이 일깨워 주듯 무언가 신호가
들어왔다.
크르르르--
조용한 적막속에 느껴지는 역한 피냄새 크르르르르- 크르- 크르- 크으르크크
무언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무언가.
시르온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세포 하나하나가 긴장하고 근섬유
한은 한은이 팽팽해진다.
보이지는 않지만 무언가가 다가오는 느낌, 그런 느낌이 이렇게 생생하게 일어날
줄은 몰랐다.
두근- 두근-
하지만 두려움의 감정은 아니다.
온몸에 흐르는 피가 들끓고 있다. 느낄 수 있다.
광기(狂氣)라도 도는 듯이 피가 빨라지고, 무엇보다 목이 마르다. 갈증이 난다.
손가락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이빨이 근질근질하다.
이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찢어발길 수 있고, 이빨에 걸리는 것은 무엇이든
뜯어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이제는 온 몸이 푸들푸들 떨리기까지 한다.
단순한 경련이 아니다.
희열이다.
살육(殺戮)에 대한 갈구, 그리고 피에 대한 갈증.
이것은 아마도 망령(亡靈)들, 그 피를 갈구하는 망혼벽(亡魂壁)의 망령들이
깨어나는 것이리라.
크으르르르르--
시르온의 입꼬리가 위로 스윽- 치켜 올라가며 악 다문 이빨이 드러났다. 어둠속에서
마치 발광체이기라도 한 양, 소름 끼치도록 새하얀 이가 드러나고 입에서는 야수의
으르렁거림이 새어 나왔다.
동시에 그의 두 손바닥이 찢어지며 검붉은 피가 응어리지듯 흘러내리더니, 희끄무레
한 덩어리들이 빠져 나왔다.
마치 지옥의 틈새에서 악귀들이 비집고 올라오듯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한 망령의
수 는 모두 다섯. 전에는 셋이었는데 어느새 둘이 늘었다.
망령들은 피를 갈구하는 호곡성(號哭聲)을 흘리며 시르온의 주위를 천천히
맴돌았다.
" 뭐, 뭐야? 시르온 너 왜 그래? 미, 미치기라도 한거냐? "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던 예히나탈은 시르온의 괴이한 모습에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 무언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그리고. 제 안에서 망령.들이. 거기에 동 조하고
있어요 조심하세요. "
쥐어짜듯이 힘겹게 말을 이은 시르온의 몸이 어느 순간 퉁기듯이 솟구쳤다.
그의 입에서 소스라치는 포효가 터져 나왔다.
" 크르르르르 키앙 크와앙-- "
예히나탈의 눈이 채 아가지 못 할 만큼 빠르게, 땅을 박차고 도약한 시르온의 몸은
무려 10여 미터를 날아오르더니 폭발하듯이 내리 꽂혔다.
달이 대지를 비추며 돌듯이, 시르온의 몸을 보호하듯이 공전(公轉)하는 망령들도
시르온의 벼락같은 움직임에 보조를 맞추어 같이 떨어져 내렸다.
크악-! 커-! 커-! 크아아아아아왕 크르르르--
시르온이 떨어져 내린 곳에는 짐승의 포효가 가득하고 피비린내가 진동을 한다.
" 멀티플 라이튼-업(multiple lighting up), 본메쉬(bone mesh). "
서둘러 마나를 배열하며 방어 및 공격 마법 캐스팅에 들어간 예히나탈은 십여 미터
밖 에서 악귀처럼 싸우는 시르온과, 그를 둘러싼 괴물들의 모습에 입이 쩍
벌어졌다.
불덩이 수십 개가 둥실 떠올라 장내를 환하게 밝혀주면서 드러난 끔찍한 광경들.
시르온을 덮치는 괴물은 키가 2~3미터 정도.
벌거벗은 피부는 고름과 땀, 각종 부패한 고깃덩어리가 범벅되어 미끈거리고 머리는
옆으로 80 센티미터 높이 방향으로는 50 센티미터 정도 되는 육중한 혹 덩어리
같다.
시뻘겋고 동그란 눈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 뭉클거리는 살 틈에 파묻혀 있는 대
신 입은 마치 악어를 연상시키듯 머리 전체에 걸쳐 길게 찢어져 있다. 누런 가래
같은 침을 뚝뚝 떨어뜨리는데 피에 젖은 날카로운 이빨은 위, 아래 모두 두개 열로
솟아 있어 거기에 걸리면 쇳덩이도 찢어질 것처럼 보인다.
어깨가 넓고 팔은 땅에 닿을 정도로 길며 다리는 짧고 굵은 편이다. 여섯 손가락
끝에 는 검은색으로 번들거리는 묵직한 손톱이 20 센티미터 정도 길이로 자라있다.
" 저, 저게 무슨 괴물이야? 이, 이런 시르-온- "
보기에도 구역질나는 끔찍한 괴물의 수는 수십인지, 수백인지 모를 정도로 많아 거
기 둘러싸인 시르온이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예히나탈은 이내 더 끔찍한 광경을
목 도(目睹)하며 부르르 떨었다.
암흑 속에서 두 눈에서 녹색 광망(光芒)을 뿜어내며 악마의 현신인 양 날뛰는
시르온.
표범보다 더 빨리 움직이는 괴물들이건만, 시르온의 손에 잡힌 순간 뿌드득- 비명
소리를 내며 여지없이 뜯겨져 나간다. 단지 뜯겨지는 것이 아니라 녹색 빛으로
번뜩이는 시르온의 손이 닿는 곳이 모두 뭉그러지고 무서운 속도로 썩어 들어가면서
괴물들 의 살점이 툭툭 떨어져 나간다.
피겜러지고 무서운 속도로 썩어 들어가면서
괴물들 의 살점이 툭툭 떨어져 나간다.
피고름이 비산하고 찐득한 고기 덩어리들이 집어 던져지는 가운데 시르온은 손으로
잡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한지 괴물의 머리를 덥석덥석 입으로 물어뜯기도 한다.
예히나탈이 기겁을 하는 동안에도 아가리를 벌리고 포효하며 달려드는 괴물 하나가
시르온의 손에 잡혔다. 쩍 벌어진 아가리가 양손에 잡혀 점차 벌어지더니,
뿌드드드득-
듣기 끔찍한 소리를 내며 머리가 양쪽으로 잡아 뽑혔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는 잡아 뜯은 괴물의 뭉클거리는 머리를 입에 넣고 씹으며 다른
손 으로는 또 다른 괴물의 팔을 움켜쥐었다.
시르온의 입가는 괴물들의 피와 고름, 고깃덩이가 범벅이 되었고 온 몸에서 피가 뚝
뚝 떨어지고 악취가 진동했다.


7. 바텐키움 신전과 육망성


또 다른 모습도 예히나탈의 눈에 들어왔다.
시르온의 주변, 시르온의 옆과 배후를 보호하는 다섯 마리의 괴물이 있다.
이빨로 물어뜯고 손톱을 휘두르며 시르온에게 접근하는 동료 괴물들을 살륙하는
다섯 마리의 더 기괴한 괴물들.
예히나탈의 짐작대로 그들은 망혼벽의 망령이 씐 변종들이다.
변종 괴물들은 일반 괴물들보다 더 포악하게 날뛰며 살육을 벌이는데, 한 마리 한
마리 죽일 때마다 자신이 뜯어 죽인 괴물의 고기를 자신의 피부에 덧대는 행동을
했다.
팔을 잡아 뽑으면 자신의 옆구리에 그 팔을 가져가 꽂는다.
머리를 쥐고 뽑으면 그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붙인다.
그러고 조금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옆구리에 붙은 그 팔은, 가슴에 붙은 그
머리는, 마치 원래부터 변종 괴물의 신체 일부인 것처럼 스스로 공격을 하고
물어뜯으며 괴성을 질러댄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몸집이 커져 가는 변종 괴물들은, 종래에는 고깃덩이를 산처럼
쌓아서 만든 괴물 모습이 되어 온 몸에서 피고름을 흘리고 꿈틀거리며 게걸스레
주변 괴물들을 먹어 치웠다.
" 우우웨엑- 우웩- "
모골이 송연해 질 정도로 놀란 예히나탈이다.
사람의 신체에 동물의 신체를 이식하는 수술을 밥 먹듯이 하던 예히나탈이지만 이런
모습은 너무 구역질이 났다.
특히 시르온이 괴물들의 붉은 눈을 양쪽 엄지손가락으로 쥐어 짜 뽑아 먹는 모습은
너 무나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 일을 소홀히 할 예히나탈은 아니다.
" 리써시테이트-올(resuscitate all; 전원 재생), 마인드 콘트롤(mind control) "
예히나탈의 왼손이 얼굴 높이로 들려 올려지면서 캐스팅이 이루어지자, 시르온 발
밑에 찢어져서 죽은 괴물들 시체에 회색빛 빛기둥이 작열했다.
그리고는 부스스- 일어서는 죽은 괴물들, 팔이 없으면 없는 대로, 턱만 남기고 머리
윗부분이 없으면 없는 대로, 하나 둘 일어나는 회색빛을 띈 괴물들은 주변에 있는
동족들의 몸에 날카로운 손톱을 박아 넣으며 싸우기 시작했다.
그 수가 무려 20여 구, 그 짧은 시간동안 시르온이 죽인 괴물의 숫자다.
다섯 변종 괴물들이 죽인 숫자는 그보다 더 많지만, 그 시체들은 변종 괴물의 몸에
합체되어 버렸기에 예히나탈의 재생마법이 통하지 않은 것이다.
갈수록 시르온의 움직임은 더 빨라졌다.
이제는 마치 뛰어난 전사의 움직임을 보는 것처럼 빨라졌고, 할퀴듯이 휘두르는
그의 손에 걸리는 괴물은 손가락 자국 그대로 부식되어 뭉크러지며 나자빠졌다.
시체가 늘수록 예히나탈의 흑마법도 빛을 발해 이제는 회색빛을 띄고 게걸스레
이빨을 딱딱거리며 돌아다니는 재생 괴물의 숫자만 100 구가 넘었다.
처음 시르온을 에워싼 괴물들은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았건만, 이제는
괴물들도 겁을 먹도 도망치는 바람에 장내에 남은 수는 현저하게 줄었다.
남은 괴물들도 남고 싶어서 남은 것이 아니라, 변종 괴물들이 도주로(逃走路)를
막는 바람에 도망치지 못한 놈들뿐이다.
꾸에에에에에에에에엑 꾸륵-!
마침내, 마지막 하나 남은 괴물이 이리저리 빠르게 도망치다가 시르온의 손에서
뿜어진 세균 덩이에 걸리며 다리부터 녹아 쓰러져 버리고, 땅바닥에서 처절하게
버둥거리는 괴물의 목이 변종괴물의 여덟개 손에 잡혀 뽑혀나갔다.
광기로 번들거리던 시르온의 눈이 풀리며 털썩 쓰러진 것은 마지막 괴물이 죽고 난
직후였다.
시르온의 혼절과 동시에, 퍼엉- 퍼엉- 퍼엉- 퍼엉- 퍼어엉-
다섯 마리 변종 괴물의 산더미만한 몸이 연쇄적으로 폭발하면서 사방으로 썩은
냄새를 풍기는 괴물의 고기 덩이들이 비산했다. 폭발력이 제법 강했기에 멀리
떨어진 예히나탈도 온 몸에 썩은 고기 세례를 받으며 질겁했다.
그리고 무너져 내린 다섯 고깃덩이에서는 희끄무레한 망령들이 빠져 나오더니
자신들이 저지른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자랑스러운 듯 장내를 한바퀴 휘익-
부유하고는 혼절해 있는 시르온의 손바닥으로 돌아갔다.
" 시르온-- "
예히나탈은 정신없이 쓰러진 시르온에게 달려갔다.
적을 잃고 정신 사납게 서성거리던 회색 괴물들도 시간이 지?달려갔다.
적을 잃고 정신 사납게 서성거리던 회색 괴물들도 시간이 지나자 일시적으로 부여된
생명력이 다해 풀썩- 풀썩- 재로 변하며 쓰러져 버렸다.
시르온이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장내가 정리되고 한시간쯤 뒤였다.
예히나탈이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서 시르온에게 먹이는 등, 지극정성을
다 해 보살핀 덕이었는지 생각보다 일찍 깨어났다.
" 스승님 괴물들은 어떻게. "
정신이 든 시르온의 눈에 자신을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예히나탈이 들어왔다.
괴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묻는 시르온에게 예히나탈은 말없이 턱을 들어 주변을
가리켰다.
사방에 널린 피고름과 고기 덩어리들, 잿더미들, 무시무시하게 다가오던 괴물들은
단 한 마리도 남아있지 않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이 욱신거리는 몸, 야수의 발톱이 스쳐 지나간 듯 곳곳에 난
상처, 그리고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들.
역한 피내임, 괴성과 포효, 살육의 현장,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든 괴물의 영상,
그리고, 오히려 달려드는 괴물의 목젖을 물어뜯는 시르온 자신!
시르온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자신이 망령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망령의 조정을 받는다는 생각에 두려운 감정이
퍼뜩 들었다.
"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피와 썩은 고깃덩이에 절은 양손을 내려다 보던 시르온은 절규하듯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그런 시르온의 모습을 예히나탈이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예히나탈의 예상대로 시르온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망령들에 의해 그와 같은 일을
벌인 것이다. 게다가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시르온이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완전히 망혼벽의 조정을 받는 상태는 아니다.
아직 희망이 있다는 말이다.
절규하며 악을 쓰고 나자 시르온은 조금 속이 풀렸다. 시르온의 안색이 약간
평온해지자 예히나탈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 전에 네가 말했던 것 말이다. 망혼벽의 망령들에게 독(毒)을 품게 하는 것. "
" ? "
" 그거 시도해 보면 어떻겠냐? 특히 생명체에게서 뽑아낸 독을 주입시켜 보면
어떨까 싶다.
그 망령들은 살기가 짙고 원념(怨念)이 깊어 보이던데, 생명체에게서 뽑아낸
독기라는 것도 일종의 그런 원념과 유사한 것들이니까 그 망령들의 강한 원한을
중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독은 철저하게 네 통제 아래 있으니까. 잘만하면
그 망령들도 네가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지 않겠냐? "
" 그, 그럴까요? 일리가 있어 보이기도 하네요. "
예히나탈의 충고에 시르온은 무릎을 탁 쳤다.
스승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시르온의 안색이 다시 밝아지자 예히나탈도 히쭉 웃었다.
무감각하고 무표정해보이지만, 난관에 맞닥뜨려도 언제나 긍정적으로 해결 방법을
찾아가는 시르온이다. 비록 망혼벽 망령들이 무섭기 그지없어서 암흑의 마스터
미케린의 영혼도 잡아먹었는지 몰라도, 시르온만은 그렇게 되지 않고 오히려
망령들을 부리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히나탈은 믿고 있었다.
" 그건 그렇고, 정신이 들었으면 여기 지저감옥을 좀 탐색해보자. 우선 먹을 것을
찾아야지. "
괴물과 일전을 겨루고 또 기절한 시르온을 돌보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그들은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예히나탈의 배속에서는 무언가 먹을 것을 달라는
신호를 계속 보냈다.
스승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연신 나자 시르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 그러게요. 시간이 꽤 지났는데. 근데 스승님, 저는 왜 배가 별로 안고프죠? 저도
뭘 먹은 지 한참 되었는데. "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르온의 모습에 예히나탈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야 이 녀석아, 넌 많이 쳐 먹었잖아. 그 피고름 떨어지는 괴물들을 잘도 먹드만.
뭐 팔이며 창자며, 머리며, 가리지 않고 먹어대던데. "
" 뭐, 뭐라고요? 제, 제가 그. 더러운 고름 덩어리들을. 우우우우웨에에엑- 우웨
에에웩- 우웩- 우웩 "
기겁을 하며 구토를 시작한 시르온의 입에서는 반쯤 소화된 고기 덩이들이 곤죽이
되서 마구 쏟아졌다. 스승이 놀리느라 장난친 것이 아니라 실제 그 괴물들을
먹었구나 하는 생각에 시르온은 아찔해졌다.
" 우우우우웨웨웨웩- "
먹은 것을 다 게워내는 시르온을 보며 예히나탈은 조금 불쌍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원래 스승이 배가 고파 죽겠는데 제자만 배부른 꼴은 눈뜨고 못 보는
성격이다.
정신이 쏙 빠지도록 토악질을 하는 시르온의 귓가에 예히나탈의 한마디가 쐐기를
박았 다.
" 그래 그 징그러운 고기들이 맛은 있었더냐? 너 심지어 그놈들의 조그맣고 새빨간
눈알도 파내서 먹던데. 어디 보자. 눈은 다 소화 되었나? "
" 누, 눈알이요? 우우우우우우우웨웨웨웨웩 쿨럭- 쿨럭- 웨에에엑- "
이번 토악질은 입뿐만 아니라 코로도 쏟아진다.
시르온은 차라리 괴물들과 피 터지게 싸우고 싶었다.
" 라이팅-업, 湊팁愎?
시르온은 차라리 괴물들과 피 터지게 싸우고 싶었다.
" 라이팅-업, 업, 업 "
예히나탈이 검지와 중지를 붙여 펴고 허공 세 군데를 가리키며 시동 어를 외치자
불덩이 세 개가 둥실 떠올랐다.
시르온도 어느 정도 정신을 수습하고 구토를 멈추었다.
불덩이를 앞세우고 우선 주변을 한바퀴 휘익- 탐색해본 결과, 시르온과 예히나탈이
계단을 타고 내려온 곳은 반경 80 미터 정도 되는 지하 공동이었다.
반경 방향으로는 80미터 정도지만 높이 방향으로는 대체 어디쯤 천장이 붙어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높다. 전체적인 형상을 머리 속에 그리면 마치 높은 원통형과
흡사하며 시르온 등은 그 원통형 공동 안에 갇혀 있는 셈이다.
광장은 빙 둘러서 사방이 절벽으로 막혀 있는 가운데 여섯 개의 동혈이 동일한
간격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 음산한 안개에 뒤덮인 동혈들은 그 크기나 생김새도
비슷해서 이곳이 결코 자연적으로 생긴 곳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다.
아마 지하 광장을 뒤덮었던 그 괴물들은 이 동혈을 통해서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던
것 같다.
" 넓은 지하 광장에 중앙에는 이상한 계단이 있고 원형 벽에는 60도 간격으로 동굴
이 뚫려있다. 이거 무슨 마법진 같은데.? "
" 마법진이요? "
네크로맨서 최고의 지성을 자부하는 예히나탈은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으로 턱을
쥐고는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그가 평생 보아온 수많은 서적들, 그 내용을 머리
속에서 빠르게 더듬
으며 비슷한 도형들을 끄집어내는 중이다.
" 원형 바닥에 60도 간격으로 무언가 설치되어 있으면 육안성(六網星) 형태이긴 한
데. 이게 꼭 마법진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추측이기는 하지만 여기 지저감옥
은 아마 바텐키움 황조때 지어진 것 같기는 한데. "
예히나탈의 입에서 '바텐키움' 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시르온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바텐키움은 그도 들어본 이름이다.
제국 노아부의 긴 역사 속에서, 바텐키움 황조가 지배하던 23년은 그야말로 피로
점철 된 암흑시대로 유명했다. 노아부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만큼 그 당시의
공포는 입에 입을 타고 후대로 구전되어 내려왔다.
식인황제라고 불리던 바텐키움을 필두로 그의 아들까지 이어진 23년 동안 노아부
국민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살아가야 했으며 두려움으로 인해
미쳐버린 자가 거리에 속출했다고 한다.
식인황제 바텐키움은 노아부의 정신적인 지주 아막 신전을 박해했으며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고 바텐키움 교단을 창설했다.
오랫동안 신정(神政) 분리 체제였던 노아부를 다시금 신정일치제로 회귀시켰을 뿐
아니라 이를 반대하던 수많은 아막 신도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그의 악행은 단지 종교적인 박해에 그치지 않았다.
그가 창설한 바텐키움 교단은 세상의 모든 이치를 거부해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식인과 근친교배, 난교를 권장했다. 바텐키움 황제 자신도 매일같이
인육을 즐겼으며 형제의 아내와 자식의 여자까지 서슴없이 취했다.
하지만 바텐키움 자신도 말년에 이르러서는 미쳐버려서 마침내 자식들에 의해
폐위되었으며, 세상 끝 어딘가에 유폐되었다고 전해진다. 혹자는 바텐키움 자신이
미쳐버린 끝에 자살했다고도 추측했고, 세상을 지키는 어떤 힘에 의해 실종되었을
것이란 이야기도 있었다.
당시의 진실이 무엇이었건 간에, 바텐키움이 사라지고 난 뒤 그의 뒤를 이은
자식들도 결국 분열을 거듭한 끝에 쇠퇴했고 종래에는 새로운 황조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그 식인황제 바텐키움 시대라면 능히 이런 엄청난 규모의 지저감옥을 지을 만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시르온을 보며 예히나탈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 바텐키움 황제가 또라이라서 이런 무지막지한 건축물을 지었다고 추측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 바텐키움 교단은 육안성을 교리의 중요한 상징으로 여기고 있어서
황제의 궁전도 육안성 형태로 지었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바텐키움의 멸망 이후 그 궁전은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돌 한 장 남기지
못하고 다 부서졌지만.
어거나 여기가 그 암흑시대의 유산이 맞는다면 아까 그 괴물들은 아마 '게르아믹'
일 것이다. "
" 게르아믹.이요? 그게 뭐죠? "
" 무슨 이유에서인지 바텐키움 황제는 아막 신전이라면 기를 쓰고 싫어했었다.
거기다가 기본적으로 인간을 믿지 않았지. 그래서 고대 주술을 모아 오직 자신의
명령만 듣는 괴물들을 만들어 내고는, 그 괴물들에게 '아막'을 '몰살' 시킨다는
뜻으로 게르아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
" 그럼 그 괴물. 게르아믹들이 아직도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우리를 공격했다는
말인가요?
" 아니, 바텐키움 황조가 무너지고 나서 바텐키움 교단이 가지고 있던 온갖 사악한
주술들은 모두 불태워져 버렸다. 게르아믹 제조방법도 사라졌지.
아까 그 괴물들이 게르아믹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만, 만일 맞는다고 하더라도
누구의 조정을 받는 것 같지는 않다. 단졍摸? 만일 맞는다고 하더라도
누구의 조정을 받는 것 같지는 않다. 단지 본능적으로 우릴 공격한 것 같아. 옛
문서상으로 보면, 게르아믹은 일단 명령을 받으면 전멸 당할지언정 물러서지
않는다고 했는데 아까 그 괴물들은 분명히 도주했거든.
그나저나 여섯 구멍 가운데 어느 길을 택하지? 배고파 죽겠다. "
" 쳇, 스승님 덕분에 나도 다 토해버려서 배고프긴 마찬가지라고요. 저는. 음.
이쪽을 택하겠어요. "
시르온이 가리킨 방향은 계단이 바라보는 정면이었다.
곧 죽어도 정면으로 뚫겠다는 거냐? 좋~다. 가자. "
앞장서서 성큼 걸어 나가는 예히나탈의 등 뒤에서 시르온이 조그맣게 독백했다.
" 그게 아니고요, 왠지 이쪽으로 가야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
동혈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꾸불꾸불한데다 폭도
넓어졌다 좁아졌다 엉망진창이었다.
분위기도 음산하기 그지없는 것이, 불덩이가 비추는 동굴 벽면마다 포긴지 고기인지
모를 덩어리들이 으깨져서 붙어 있었고 발끝에 툭툭 차이는 것들을 보면 다
삭아가는 인골들이 대다수였다.
" 대체 이 감옥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거야? 뭐 이렇게 인골이 많아? 이거
이리로 가면 먹을 것 나오는 거 맞아? "
예히나탈이 투덜거리며 해골 몇 개를 밟아 버렸다.
푸스슥-
해골들은 어찌나 오래되었는지 예히나탈이 별로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힘없이
부서져버렸다.
예히나탈 덕에 긴장이 풀어져서 였을까?
시르온의 예민해진 육감이 갑자기 무뎌졌을까?
캬아아아아 캬아앙!
꾸둘꾸불 구절양장(九折羊腸)의 동굴 모퉁이를 막 돈 순간, 느닷없이 이빨을 드러낸
괴물이 뛰쳐나오며 긴 팔을 휘잉- 휘둘렸다.
괴물이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다 급작스레 공격한 덕분에 시르온은 무방비 상태로
그 무시무시한 손톱에 그대로 찍혀 버렸다.
쫘아아아악--
" 크아앗 "
검은색으로 번들거리는 손톱이 훑고 지나간 시르온의 가슴은 10 센티미터 두께의
고랑 4개가 쭈욱- 파이며 살점이 뭉텅 패였다.
갈비뼈가 드러나고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 시르온 본메쉬- "
예히나탈의 영창과 함께 시르온의 주위로 뼈로 된 그물망이 돋아나며 보호하는 동안
콰앙- 괴물이 두 손을 모아 후려친 두 번째 공격이 시르온의 두개골 위로 강타해
버렸다.
목뼈가 충격으로 꺾이고 코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채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괴물이 휘두른 세 번째 공격이 시르온의 얼굴을 옆에서
후려갈겼다.
파-앙--
달팽이관을 건드린 탓일까? 시르온은 갑자기 멍해지면서 균형감각을 잃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예히나탈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윙윙거리는 것으로 보아
고막이 터진 듯싶었다.
기를 쓰고 손끝에 독을 모으면서 몸을 옆으로 굴렸지만, 예히나탈이 씌운 본메쉬가
방해가 되서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 커-욱 "
괴물의 짧고 뭉툭한 발이 옆으로 구르려다 실패한 시르온의 복부를 밟아 버렸다.
본메쉬가 대부분의 충격을 흡수하긴 했지만 장이 파열되며 입에서도 피가 뿜어졌다.

하지만 시르온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옆으로 쓰러지고 피를 뿜으면서도 괴물의 하반신 쪽의 세균들을 극도로 활성화시켜
버렸다.
예히나탈도 불덩이를 쏘아 보내며 괴물의 관심을 시르온에게서 돌리려고 애를 썼다.
커- 커- 크르르르- 크아아아아아왕
시르온이 뿌린 독에 의해 하반신에 구멍이 뚫리면서 뭉그러지기 시작하자, 괴물은
바닥에 누워서라도 긴 팔을 휘둘러 시르온을 공격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누런 침을 뚝뚝 흘리면서 물어뜯을 듯이 달려들었다.
예히나탈이 쏘아 보낸 불덩어리는 완전히 무시했다. 자신이 죽더라도 시르온과 같이
죽으려는 듯이 기를 쓰고 공격만 했다.
하지만, 시르온의 몸 위에는 겹겹으로 본메쉬가 돋아나 점점 방어망이 견고해져가고
있었다. 마치 누에고치를 보듯이 시르온의 몸은 뼈로 만들어진 그물망에 쌓여
버렸다.
게다가 독이 점점 퍼지면서 양 다리가 끊겨 나가고 사타구니를 지나 내장이
드러나며 뼈째 사라져 갔다. 그와 동시에 괴물의 공격도 점점 느려지고 힘을 잃고
있었다.
꺼으으으으으으 꺼으으으으으으
마침내 내장도 다 녹고 가슴까지 무너져가자 괴물의 입에서는 긴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단순히 으르렁 거리는 소리와는 또 다른 소리.
높고 길게 울음을 울고 난 괴물은 악다구니 같은 이를 드러낸 채 움직임을 멈추어
버렸다.
" 시르온, 정신 차려라. 시르온, 정신 차렷. "
괴물의 손이 힘없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나자 예히나탈은 황급히 시르온에게 걸은
본메쉬를 두어들이고 부러진 뼈를 맞추기 시작했다. 응급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뼈를 맞추고 상처를 지혈을 하고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개방했다.
다시 손가락을 깨물어 시르온의 입에 자신의 피를 넣어 주었다.
" 정신 차려. 이 놈아. 넌 여기서 죽으면 안돼. "
눈이 반쯤 풀린 시르羚?주었다.
" 정신 차려. 이 놈아. 넌 여기서 죽으면 안돼. "
눈이 반쯤 풀린 시르온의 뺨을 찰싹- 찰싹- 때리며 예히나탈이 악을 썼다.
하지만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크르르르- 쿼르르- 크르르르르르르르
고약한 냄새와 함께 동굴 저쪽에서 괴물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반대편에서도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까 괴물이 죽으면서 지른 울음소리는, 독에 녹는 고통 때문에 지른 소리가
아니라.
동료를 부르는 소리였나 보다.
크르르르르- 크으르르르르르
불빛에 비쳐서 일렁거리는 괴물들의 그림자,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앞도, 뒤도 꽉 틀어 막혔다. 어디에도 도망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시르온은
정신도 가물가물하고 이 판국에 배도 고프다.
" 이런 빌어먹을 잡것들이 감히 이 예히나탈님을 먹잇감으로 봐? 좋다, 오너라.
어디한 번 여기서 뼈를 묻어보자. 리써시테이트-올(resuscitate all) "
이를 악물고 마나를 재배열했다.
예히나탈의 옷이 급격하게 밀려드는 마나 움직임에 영향을 받아 바람이 부는 듯이
부풀어 올랐다.
결심도 굳어졌다. 여기서 시르온과 함께 뼈를 묻으리라!
하지만.
허탈한 마음만은 어쩔 수 없었다.
리써시테이트-올 같은 최고위급 마법을 펼친들 무엇 하랴.
회색빛으로 겨우 일어난 괴물은 겨우 한 마리, 그것도 가슴까지 다 녹아 버려서
땅바닥에 철썩 붙은 채 팔만 바동거린다.
" 이, 이, 빌어 . 먹을. "
예히나탈의 얼굴이 휴지처럼 구겨졌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시르온에게 한번 크게 데였던 괴물들인지라 쉽사리 공격을
들어오지 않고 거리를 둔 채 으르렁 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서, 누워있는 시르온을 힐끔거리며 괴성만 질러 대었다.
하지만 차츰 그것도 한계에 다다른 듯싶었다.
괴물의 흉성이 어디 갈까? 괴성을 지르며 뒤에서 끊임없이 밀려드는 통에 선두의
괴물들이 차츰차츰 예히나탈에게 다가왔다. 이러다 가까이까지 다가와서 시르온의
상태를 파악하고 나면 곧바로 아가리를 쩍 벌리고 벌 떼처럼 달려들 것이다.
예히나탈의 손에 땀이 흥건하게 배였다.
그가 알고 있는 마법을 최대한 동원해야 한다. 그래야 죽더라도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히나탈은 자신도 모르게 목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선두에 선 괴물과의 거리는 이제 15 미터 가량으로 좁혀졌다. 경기라도 들린 것처럼
몸이 떨린다.
이윽고 14 미터. 숨이 막힌다.
13 미터. 그리고 12미터.
" 컨퓨즈-앤-어트랙트(confuse & attract), 슬로우-무브(slow move), 블러드-익스플
로드(blood explode)! "
괴물들이 코앞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역한 노린내가 코를 괴롭히고 공포의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라도 꾹 참았다.
그러다가 코앞에 이르렀다 싶은 순간, 예히나탈의 캐스팅이 벼락처럼 이어졌다.
적의 마음을 교란시키는 컨퓨즈와, 미혹시키는 어트랙트, 뒤에서 밀려오는 괴물들의
움직임을 느리게 만드는 슬로우- 무브, 괴물들이 뒤엉켜 서로 손톱을 휘두르고
이빨을 박아 넣을
때 그 피에서 일어나는 폭 발, 블러드-익스플로드.
커- 크아아앙- 커- 카아아아앙- 크앙-
선두에 섰던 괴물의 긴 팔이 낫처럼 크게 휘둘려져 뒤에서 밀치는 괴물의 복부를
뚫고 들어가 붉은 내장을 움켜쥐고 쯧-욱-- 뽑아 버렸다.
어트랙션이 걸린 또 다른 괴물의 날카로운 손톱은 옆에 붙어 있던 놈의 머리통을
느닷없이 찍었다.
선혈이 난무하고, 그 피들이 폭발하며 괴물들의 시력을 앗아간다. 머리가 깨지고
허리가 끊어지며 죽는 괴물들이 하나 둘 생겨나자 예히나탈의 캐스팅이 이어졌다.
" 리써시테이트-올, 마인드-컨트롤 "
이번에는 제대로 먹혔다.
회색빛으로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괴물의 수가 대여섯 구, 그들은 일어서자마자
동료의 가슴을 찍으며 긴 포효를 터뜨렸다.
그 가운데 둘은 예히나탈과 시르온을 보호하며 좁은 동굴을 막아섰다.
이제 가능성이 보인다.
예히나탈은 고갈되는 마나를 쥐어짜며 고급 마법을 연속적으로 뿌려댔다. 다리가
휘청이고 현기증이 밀려오지만 혀를 깨물어 피를 내면서까지 정신을 다잡았다.
" 블러드 익스플로드, 슬로우-무브, 리써시테이트-올! "
그가 재생시킨 괴물 여섯 가운데 넷이 찢어져서 죽자 새로 여덟을 더 만들었다.
피가 난무하며 동굴 곳곳에서 폭음이 귀를 찢을 듯이 울렸다.
한 마리 한 마리를 마법으로 일으킬 때마다 마나가 썰물 빠지듯이 빠져나가, 이제는
목과 이마에 핏줄이 터져버릴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뜨겁다.
예히나탈은 뜨겁다고 느꼈다.
마나가 고갈될 때까지 싸운 것도 처음이다. 심장 박동이 두세 배는 빨라진 것 같다.
한마리가 쓰러지면 그 시체를 재생시키고 그놈을 컨트롤해서 다른 놈을 공격
시킨다.
재생시킨 한 놈 한 놈을 컨트롤해서 공격과 방어를 유기적으로 한다.
뒤에서 밀려오는 괴물들에게는 슬로우-무브로 속도를 늦추어준다.
머리가 하얗게 비고 아무런 생각도ス갠涌“都?슬로우-무브로 속도를 늦추어준다.
머리가 하얗게 비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제는 의지가 아니라 무의식 속에서 마나를 배열한다.
전신에서는 땀이 비 오듯이 흐르고 실핏줄이 터져 눈과 코에서는 피가 흘러내린다.
예히나탈, 잘했다.
이만큼 싸웠으면 억울할 것도 없다.
저 무시무시한 괴물들을 수도 없이 죽였다. 여한이 없다.
마지막으로 끌어 모은 마나로 어트랙트를 걸어 버리고는 꼿꼿이 선 자세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예히나탈의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다.
예히나탈이 코에서 피를 쏟으며 고꾸라지고도, 회색빛 괴물들과 어트랙트가 걸린
괴물들은 한동안 동굴의 좁은 병목을 막고 잘 버텼다.
그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듯, 팔과 다리가 잘려 나가도 이빨로 물어뜯어가며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다.
하지만 모든 물리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
결국 하나 둘 쓰려지면서 우글우글 쏟아져 들어오는 괴물들에게 길을 내주기
시작했다.
겨우 반쯤 눈을 뜨고 숨을 헐떡이며 정신이 가물거리는 시르온, 그리고 모든 마나와
정혈이 고갈되어 고꾸라지며 기절한 예히나탈.
그 둘의 머리위로 사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시르온의 눈에 절망의 빛이 걸린 바로 그 때, 회색빛 괴물의 머리통을 바스러뜨리며
처음 길을 뚫은 괴물이 흉성을 터뜨리며 예히나탈에게 도약한 그 순간, 그 순간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그그그그긍- 휘릭-
시르온이 누운 조금 옆 동굴 벽이 빙글 돌아가며 환한 빛이 번쩍하더니, 그 빛 속에
서 괴력(怪影)이 하나 난데없이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동굴 내의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다짜고짜 예히나탈의 몸을 어깨에 걸머지고 시르온의 팔을 잡아 당겨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말로 하기는 길지만, 괴물들이 길을 뚫은 것과 거의 동시에 동굴 벽이 열리고
괴력이 튀어나와 예히나탈과 시르온을 잡아채었고, 다시 벽 안쪽으로 끌고
들어가기까지는 숨 몇 번 고를 정도의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크아아아아아 크아아아--
처음 길을 뚫은 괴물이 그 모습을 보더니 흉악한 괴성을 터뜨리며 도약해 퍼억-
손톱을 내리 찍었다.
온 몸을 던진 괴물의 투혼은 빛을 발해, 날카로운 손톱으로 시르온의 한쪽 종아리를
찍을 수 있었다. 괴인에 의해 거꾸로 질질 끌려가던 시르온은 한쪽 다리에 긴
손톱이 두개 박히면서도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괴인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는지 무지막지하게 시르온의 몸을 잡아 당겼다.
쫘아아아악-
종아리를 뚫고 동굴 바닥까지 틀어박힌 검은 손톱, 그리고 그걸 무시한 채
무자비하게 잡아당긴 괴인, 결국 시르온은 종아리부터 그 아래쪽으로 근육이 세로로
쭉- 찢겨 나가며 간신히 벽 안쪽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그그그그그그긍-- 끼이익--
시르온의 몸이 안쪽까지 들어온 동시에 벽이 다시 닫히기 시작했다.
이제 길을 다 뚫은 괴물들이 그 꼴을 내버려두지 만무하다. 처음 길을 뚫은
괴물처럼 그들도 몸을 사리지 않고 육탄으로 벽에 돌진하며 닫혀가는 문 틈새로
손을 집어넣어 휘저었다.
캬오오오오오-- 크아아아- 크아- 크아-
두 사람을 구한 괴인도 그런 흉포한 모습에 놀랐는지 헛바람을 집어 삼켰다.
그리고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허리춤에서 손에 든 칼을 움켜쥐고 문틈에 들어온
괴물의 긴 팔을 마구 난도질하며 발로 걷어찼다.
발악을 하며 손을 휘두른 몇몇 괴물들은 괴인의 몸에 긴 손톱자국을 남기는데
성공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문은 거의 다 닫힌 상태였다.
그그그긍 뿌드드드득- 으득- 뿌드득-
마침내 육중한 돌로 만들어진 문은 괴물들이 버티는 힘을 이기며 쿠룬- 다시 원
상태로 돌아가며 닫혀 버렸다.
" 헉, 헉, 헉-, 징그러운 괴물놈들. 헉- 헉, 헉 "
끄아아아악
그 틈새에 팔을 쑤셔 넣은 괴물들은 팔이 짓이겨지면서 잘려 나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문을 마구 할퀴어 대었지만, 한번 닫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예히나탈이었다. 모든 마나와 정혈을 쥐어짜며 싸우기는
했지만, 직접적인 공격은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시르온은 아직도 반 가사상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예히나탈은 끄응- 신음을 흘리며 눈을 반쯤 떴다. 그의 눈으로 파고드는 빛 무리.
밝은 빛.
오랜만에 보는 밝은 빛이다.
분명히 어두운 동굴 속에서 괴물들에게 양쪽으로 포위되어 싸우고 있었는데.
싸우다가 진력이 다해 쓰러졌는데, 그러다가 괴물들 손에 죽어 버린 것일까? 여기는
사후 세계란 말인가? 시르온은 어떻게 되었지?
예히나탈의 생각은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의해 깨어졌다.
" 정신이 드십니까? "
예히나탈의 귀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괴물의 울부짖음이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가!
환청인가 싶었지만 소리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희미하게 사람의
윤곽이 맺혔다. 눈의 초점을 잘 맞추려 미간을 찌푸리자 점차 또렷한 사람汰?윤곽이 맺혔다. 눈의 초점을 잘 맞추려 미간을 찌푸리자 점차 또렷한 사람의 모습이
그의 눈으로 들어왔다.
사람이다. 사람이 분명하다.
" 예히나탈님, 드디어 정신 차리셨군요. 거의 10시간 가까이 탈진해 계셨는데. "
예히나탈이 깨어난 것을 반기는 사람의 목소리. 이런 지옥 같은 곳에서 사람을
만나다니, 예히나탈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애써
팔로 지탱해가며 상체를 일으켰다.
상대방도 예히나탈의 의도를 알았는지 그가 일어나 앉도록 부축했다.
" 여기는 어디요? 그리고 당신은 누군데 나를 아는 거요? 그 찢어죽여 마땅할
괴물들은 대체 어떻게 처리 한거요? "
기력이 없다는 것이 거짓말인 듯 예히나탈은 정신없이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황당해 하는 괴인의 표정을 보며 예히나탈도 자신이 너무 서둘렀다고 느꼈는지
헛기침을 몇 차례 했다.
" 여기가 어딘지는 저도 정확하게 파악을 못하고 있습니다. 메카인의 오래된 황릉인
것은 알겠지만. 제 소개부터 해야 갰군요. 저는 파하드님을 모시고 있는 친위대장
술라이만이라고 합니다. "
" 파하드? 조란 그 파하드 알-제이시님 말인가? "
예히나탈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들이 이 머나먼 메카인 까지 온 이유가 바로 실종된 파하드를 찾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 예, 파하드 알-제이시님의 친위대장입니다. 예히나탈님 얼굴은, 전에
산상궁전에서 저기 쓰러져 있는 노예를 빼내실 때 보아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
예히나탈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하드의 친위대장이라면 시르온이 이시리스 공주를 인질로 삼아 산상궁전을 빠져
나오는 소동을 벌일 때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예히나탈의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그제서야 예히나탈은 술라이만의 행색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덥수룩하고 지저분하게 자란 수염, 때와 피딱지가 엉겨붙은 꾀죄죄한 얼굴, 온 몸에
여기저기 난 상처, 다 찢어져서 겨우 걸치고 있는 낡은 옷, 한마디로 술라이만의
행색은 상거지 꼴에 다름없었다.
자신의 행색이 어떤 상태인지 생각도 않고 예히나탈은 내심 혀를 찼다. 파하드의
친위 대장이 저 모양 저 꼴이라니. 하지만 그런 쓸데없는 상념도 술라이만의 다음
말에 싹 가셨다.
" 파하드님도 저기 살아 계십니다. 비록. 몸은. 불편하시지만. "
파하드가 살아있다는 말에 예히나탈의 눈이 더 커졌다. 술라이만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본 예히나탈의 눈은 거기서 또 더 커져 버렸다.
석벽에 기대어 있는 인영 하나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 처참한 행색에 놀란 탓이다.
아니, 그 처참한 사람이 알-제이시의 후계자 파하드라는 사실에 놀란 탓이다.
파하드의 모습을 표현하자면 처참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그는 양 팔이 다 잘려 나갔다. 오른쪽은 어깨에서부터 왼쪽은 팔꿈치부터 뜯어
져 나갔다. 오른쪽 발목도 잘렸다. 잘린 것도 칼 같은 것에 베여 매끈하게 잘린
것이 아니라, 억지로 잡아 뜯고 물어뜯은 듯이 갈갈이 찢어지고 뭉그러지며 잘렸다.

풀어 헤친 가슴에는 선명하고도 징그럽게 4개의 깊은 손톱자국이 꿈틀거리며 패여
잇, 그곳을 중심으로 썩어가면서 고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입을 벌린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한쪽 볼 살이 움푹 뜯겨서
잇몸이 드러나 보였다. 후두부에도 상처를 입었는지 머리카락이 피에 절은 채
딱지가 앉아 굳은 모습이었다.
눈이 흐리멍덩하게 풀리고 입가에서는 침이 흘러내리는 처참한 모습이다.
누가 이 꼴을 보고 조란을 호령하던 파하드라고 하겠는가.
" 어, 어쩌다가 저, 저런 지경에.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
" 황태자 저하의 서신을 받고 이곳에 왔다가 함정에 빠졌습니다. 저희는. "
눈물을 뿌리며 그간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 술라이만, 그의 말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파하드는 자신에게 '알- ' 의 칭호를 내리고 어미어의 위치에 봉하겠다는 황태자의
서신을 받자마자 친위대 100 여명을 이끌고 이곳 메카인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메카인으로 들어오는 성문에서 만난 안내자는 황태자 저하께서 친히 기다리고
계시다며 파하드 일행을 이곳 폐황릉의로 데리고 왔다.
황태자로부터 은밀하게 만나자는 서신을 받기는 했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은 예감이
든 파하드는 친위대장 술라이만에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지시하고 황릉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지하 광장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황태자가 아니라 텅 빈 광장과
으스스하게 녹슨 철문뿐이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는 여긴 파하드는 친위대를 돌려 폐황릉을 빠져 나오려 했지만,
좁은 회랑 입구는 꽁지머리를 한 장신 괴인 헤이호가 떡 버티고 가로 막았다.
좁은 회랑에서 쏟아지는 석궁들, 불덩어리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헤이호의 붉은 칼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러였다.
그의 칼에서 불꽃처럼 일렁이는 오러는 상식적인 수준을 벗어나서 3-4 미터 길이가서 불꽃처럼 일렁이는 오러는 상식적인 수준을 벗어나서 3-4 미터 길이가
되었고, 거기에 스쳐지나가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방패이건, 칼이건, 창이건, 혹은
사람의 몸이건 가리지 않고 모두 잘려 나갔다.
단순히 잘려 나가는데 그치지 않고, 헤이호의 칼이 수반하는 지독한 열기 때문에
잘린 부위가 지글지글 타들어 갔다. 좁은 회랑을 막고 오러를 뿜어내며 다가서는
헤이호.
그 한사람에 의해 고르고 골라 뽑은 파하드의 친위대 100 여명이 뒤로 밀리는 믿지
못 할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같이 오러를 일으키며 덤빈 술라이만도 자신의 칼이 잘려나가는 수모를 겪으며 뒤로
물러섰다. 모두들 헤이호 단 한사람에게 공포를 느끼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리고.
결국 다시 광장까지 밀려났다.
광장에서는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여럿이서 에워싸서 공격하면 저 무지막지한
괴인도 이길 수 있다고 술라이만은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헤이호의 수준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양 떼 사이에 뛰어든 호랑이처럼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는 헤이호, 일행은 그가
휘두르는 시뻘건 오러를 피하기에 급급했다. 헤이호가 광장 안을 헤집으며 날뛰는
동안, 몇 명은 입구로 빠져 나가보려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그 때마다 헤이호는
귀신처럼 눈치 채고 몸을 날려 도주자들의 등을 베었다.
이대로 광장 안에서 다 죽나 싶었다.
인간이 아니라 칼을 든 악마를 만나 여기서 죽나 생각했다.
그 순간 철문이 열렸다. 모두들 상황 판단을 할 겨를도 없었다. 범처럼 달려드는
헤이호의 칼을 피하기에 급급한 파하드 등은 앞뒤 재지 않고 철문 안으로 몸을
피했다.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열렸던 철문이 다시 닫혔을 때까지 살아남은 자는 모두 70 여명, 줄잡아 30 명가량
이 헤이호의 적도(敵徒) 아래 목숨을 잃은 것이다.
정신을 추스르고 부상자를 독려하며 계단을 내려온 파하드 일행은 여기서 한숨 돌리
고 빠져나갈 길을 찾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철저한 오산이었다.
타원형 머리에 누런 침을 흘리고 송곳 같은 손톱 날을 세운 긴 팔을 휘두르는
역겨운 괴물들 수천수만 마리가 일행을 향해 몰려들었다.
그들은 전사다. 자부심 강한 전사다.
싸우고 또 싸우고, 베고 또 베었다. 하지만 물밀듯이 밀려드는 괴물의 행렬은 끝이
보이질 않았고, 친 위병들은 하나 둘 지쳐갔다.
친 위병 한명의 몸통이 괴물의 이빨에 물려 하늘 높이 들려져서 우드득- 씹히자
전사의 긍지도 소용이 없었다. 공포에 몸이 얼어붙었고 점차 죽는 자가 속출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계단 위 광장에서 헤이호의 간밥이 되는 것이 나았을 성
싶었다.
술라이만은 기를 쓰고 오러가 형성된 도를 휘두르며 길을 뚫었다.
주군 파하드만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괴물들을
베었다.
저들의 몸은 피고름으로 번들거리고 가죽이 두꺼워 잘 베이지도 않았지만, 그러면
짓이겨서라도 괴물들을 헤집고 길을 만들었다.
술라이만의 뒤를 이어 몇몇 충성심 강한 전사들이 파하드를 중심으로 원진을 그리며
술라이만이 뚫은 길을 뒤따랐다.
허나, 자신의 목숨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판국에 파하드까지 보호하는 일이 쉬울까?
원진을 이룬 전사들이 하나, 하나 쓰러져서 괴물의 먹이가 되더니, 일행이 지저
광장을 벗어나 동굴 입구에 이르렀을 때는 끝끝내 진형이 허물어져 버렸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동굴은 폭이 좁은 편이어서 소수의 인원으로도 다수의
괴물을 상대하기 용이했다.
술라이만은 몸 안에 있는 최후의 한계까지 마나를 끌어올려 칼을 휘두르며 길을
뚫고 전진
했지만, 기름이 다 된 유등처럼 이제는 더 이상 버틸 기력이 없었고 이 암흑 속 의
동굴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술라이만의 칼이 느려진 순간, 무방비로 노출된 파하드의 몸 위로 괴물들이
무더기로 덮쳐 올랐다. 삽시간에 괴물 대여섯 마리 아래 깔린 파하드는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고, 술라이만과 남은 전사들은 육탄돌격을 하며 괴물들을 물리치고
파하드를 빼내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몸은 넝마조각처럼 되어버렸다.
살아남은 자도 술라이만과 파하드를 제하고는 셋 뿐, 몸까지 성한 자는 술라이만
혼자 뿐이었다.
술라이만이 엎드려서 숨을 몰아쉬는데 그의 손에 툭 튀어 나온 돌덩이가 잡히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꾹 누르지 않았다면, 일행은 아마
거기서 다 죽어 괴물 밥이 되었을 것이다.
돌덩이가 눌려진 순간 동굴 벽면이 그그긍- 소리를 내며 열렸고, 술라이만은
넝마처럼 늘어진 파하드를 안고 벽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건, 또 무엇이 튀어나오건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괴물에게 먹히느니 일단
들어가 보고 싶었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전사들도 괴물을 밀어내며 모두 벽 안으로 들어왔고 다시 문이
닫혔다.
술라이만의 긴 이야기가 끝이 나고, 예히나탈은 나직히 한숨을 내쉬다.
술라이만의 긴 이야기가 끝이 나고, 예히나탈은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괴물들의 무서움을 겪었기에 술라이만이 얼마나 모진 고초를 거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 이야기는 잘 들었네만, 그러면 다른 생존자들은 모두 어디 갔나? 그리고 이
안쪽은 안전하기는 한건가? "
" 아, 아, 안.전이요? 안전한 것 같기는 합니다. 저도 이 벽 안쪽을 다 탐색해
보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그 괴물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 여기 갇힌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저희가 살아 있지 않습니까? "
술라이만은 말을 더듬으면서 답을 했다.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는 눈치이긴 한데
예히나탈은 자세히 추궁하지는 않았다. 술라이만도 얼른 말을 돌렸다.
" 여기서는 이쪽 작은 구멍으로 바깥 동굴의 상황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예히나탈님께서 그 괴물들과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정말 감탄밖에 나오지
않더군요. 능히 마스터라 불리실만한. "
술라이만의 칭찬에 예히나탈은 손을 내저었다. 지금은 칭찬이나 듣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지만 술라이만이 진심으로 감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 괴물들과의 난전에서 네크로맨서가 아니면 그 누가 그렇게 싸울 수 있으랴!
예히나탈은 네크로맨서가 왜 네크로맨서인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술라이만이 갑자기 넙죽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 예히나탈님, 저희를 살려주십시오. "
" 그게 무슨 소린가? 자네가 날 살렸지. 내가. "
" 이 지옥에서 살아나가려면 예히나탈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는 죽어도 좋으니
제발 파하드님이라도 데리고 나가 주십시오. 저 혼자서는 도저히 이 지옥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
술라이만의 음성에는 주군에 대한 충정이 뚝뚝 묻어나온다. 그런 모습에 예히나탈의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걸렸다.
" 우선 이 안쪽을 살펴봐서 길을 찾아 봐야지. 정 안되면 그 괴물들을 뚫고
나가야겠지만. 그건 말 그대로. 최후의 방법이니까. "
예히나탈의 말꼬리가 흐려진다.
솔직히, 그도 괴물들을 다시 상대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진절머리가 쳐지기
때문 이다.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기력이 회복되자, 예히나탈은 벽 안쪽 밀도(密屠)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탐색 결과는 감탄이었다.
예히나탈과 시르온이 거쳐온 거친 동굴 안쪽으로 이런 시설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밀도는 잘 닦여 있었고 띄엄띄엄 발광체도 박혀 있어 환했다. 오래 되서 많이
퇴색되기는 했지만 밀도 벽에는 온갖 그림들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그림을 해석해 볼까 생각하다가 우선 오늘은 둘러보기만 하려고 빠르게 지나갔다.
벽을 더듬으며 꽤 멀리까지 탐색을 나온 예히나탈은, 시장기가 돌고 현기증이 나자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다시 시르온이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예히나탈이 다시 일행에게 돌아왔을 때, 술라이만은 혼수상태에 빠진 시르온의 몸을
올라타고 앉아, 막 시퍼렇게 날이 선 칼 을 높이 쳐들고 있었다.
" 무슨 짓이! 이 노~~~옴~~ "
예히나탈이 천둥같이 고함을 치며 시르온의 몸 주위로 본메쉬를 걸었다.
물론 술라이만 같은 뛰어난 전사가 이정도 근접거리에서 본메쉬를 뚫지 못할 리
없다. 이런 상황에서 술라이만이 시르온의 목을 취하려면 얼마든지 취할 수 있는
것이 다.
하지만 술라이만은 예히나탈 등장과 동시에 화들짝 놀라 시르온에게서 떨어졌다.
예히나탈의 화를 돋구었 다가는 술라이만은 물론 파하드도 이 지옥 같은 곳에 뼈를
묻어야 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술라이만이 순순히 비키자 예히나탈은 다급하게 시르온 옆으로 달려가서 그의
안위를 살폈다. 다행히 혼수상태에 빠지기는 했지만 숨은 고른 편이다.
한숨 돌린 예히나탈은 술라이만의 행동에 몸서리가 쳐지는 듯, 부르르 떨며 노기 띈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술라이만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물러서 있었다.
" 왜냐? 왜 이 아이를 노린 것이냐? 이시리스 공주나 라흐만의 사주를 받은 거냐? "
머뭇,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던 술라이만은 배신자로 몰리는 것은 싫었는지
어렵게 입을 떼었다.
" 예히나탈님께서. 그 천한 노예.를 그렇게 아끼시는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
" 왜 죽이려 했냐니까? 이 아이가 죽으면 나는 여기서 꿈쩍도 안하고 같이 죽을
것이다. 어서 묻는 말에나 답하라. "
술라이만은 더욱 비참한 표정이 되더니 결심을 굳힌 듯 말문을 다시 이었다.
" 그 아이.가 저희가 탈출하는데 방해가 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
" 그리.고? "
" 후우--, 그리고 여긴 시, 시, 식량이. "
" 식량? 식-량-? 시이이이이익 랴아아아아아아앙 그, 그럼 너, 너 이 아이를 "
예히나탈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어이가 없어
오히려 화 내는 것도 잊어버렸다.
" 그럼, 아까 그 동료들이 안 보이는 것도 다 네놈이. "
" . "
술라이만은 죄책감에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푹 떨구 었다.
그와 파하드가 이곳에서 머문지도 이미 한참이茶섭?고개를 푹 떨구 었다.
그와 파하드가 이곳에서 머문지도 이미 한참이 지났다.
등에 맨 짐 보따리에 남아있는 건량은 소비한지 오래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지하수가 샘솟는 우물이 있어 식수는 충분했다. 하지만 먹을 것이라고는 지나가는
벌레조차 보이질 않았다.
그러는 사이, 부상이 심한 부하 한명이 고열로 헛것을 보며 고생하다 숨이 멎었다.
파하드는 정신이 반쯤 나갔지만 그렇다고 신진대사마저 끊긴 것은 아니다.
배가 고프면 우는 듯한 신음소리를 낸다.
모시는 주군의 그런 모습을 보다 못한 술라이만은 마침내 인간으로서는 하지 못할
결정을 하고 말았다.
죽은 부하의 인육을 파하드에게 먹인 것이다.
그러고 나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얼마나 회한이 들었는지 모른다.
평생 눈물이라고는 모르고 살아온 술라이만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몸부림쳤다.
자살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파하드 때문에 죽을 수도 없었다. 자신과 부하들만 있었다면 진작에
자결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파하드는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삼일, 이레를 꼬박 굶고, 부하 가운데 또 한명이 쓰러져
죽었다.
살아남은 한명은 미쳐버렸다.
미쳐버려서 한밤중에 몰래 일어나 동료의 살을 파먹고 있었다.
그래서 죽였다. 술라이만의 칼이 미쳐버린 부하의 목을 끊었다.
술라이만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여기가 바로
지옥이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절규했다.
그래도 살아야 했다.
주군 파하드를 위해 살아야 했다. 스스로는 물로 배를 채우면서 파하드에게는
고기를 먹게 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었다. 악몽을 꾸었다. 무언가 맛있게 먹고 있는데 그 식량에서 피가 흐르고
손이 뻗어 나와 목을 조르는 꿈을 꾸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꿈에서 깨고는 우물에 가서 세수를 하려던 술라이만은, 지옥을
보고야 말았다.
우물 속에 숨어 있는 악마를 만나고야 말았다.
입가에 피를 잔뜩 묻힌 악마.
술라이만 자신과 똑같이 생긴 악마!
이건 꿈이라고 머리를 쥐어 뜯으며 발악을 해보았지만, 냉엄한 현실이었다.
드디어 그도 미친 것이다. 미쳐 버린 것이다. 벽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렸다.
그 이후로 밤마다 꿈을 꾼다.
인육을 먹는 꿈,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을 하지 못하지만, 이제는 포기해서
분간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꿈이기 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 저 괴물들을 뜯어먹던 시르온보다 더한 놈 이구만. 하여간 시르온을 건드렸다간
봐라. "
예히나탈은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에게는 술라이만이 자신과 시르온을 적대만 하지 않으면 되지 일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선악의 통념이 없다.
그가 바로. 네크로맨서이기 때문이다.
" 식량이 하나도 없다구? 그럼 빨리 길을 찾아 봐야지. 시르온 깨어나는 대로
출발할 테니까 파하드를 업고 부지런히 아와. 그리고 너, 앞으로는 시르온 곁에
얼씬도 할 생각 마라. 접근하는 즉시 대갈통에 구멍을 뚫어 줄 테니까. "
8. 지옥(地獄)의 노래
앞장은 예히나탈이 섰다.
일반적으로는 전사를 앞세우고 마법사가 뒤에 서는 것이 보통이지만, 지금과 같이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지저감옥에서는 아무래도 예히나탈이 선두에 서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다.
그 뒤를 안색이 파리한 시르온이 따랐다.
시르온은 괴물에게 기습을 당해 몸이 정상상태는 아니지만, 그래도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주며 정신을 차렸다. 괴물의 무지막지한 공격에 두개골을 강타당해 뼈가
주저앉을 정도로 함몰 됐었는데 이렇게 빨리 상처가 아문 것이 기적 같은 일이다.
아직 어질어질하고 안색이 창백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힘으로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행에게 보탬이 된다.
가장 후미에는, 반송장 상태인 파하드를 등에 업은 술라이만이 섰다.
술라이만은 동료들의 옷을 찢어 등에 파하드를 꽉 비틀어 묶고, 양손에 칼을 움켜쥔
비장한 모습으로 예히나탈의 뒤를 따랐다. 몇 시간을 걸었을까?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까 긴장하며 비장하게 길을 나설 때와는 달리, 예히나탈 등은
약간 맥이 빠져 버렸다.
긴 시간을 걷는 동안 도대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회랑
벽면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석판 부조들만이 무슨 신화 속의 일을 전하는 듯이
이야기를 진행 시키고 있었다.
일행 간에 대화도 단절되고 물통에 가득 담아온 물 먹는 소리만 가끔씩 들릴
뿐이다.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치고, 짜증이 치밀어 오른 예히나탈이 무언가 화를 내려는
순간, 그의 눈에 긴 회랑이 끝 이 나며 밝은 빛이 전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 저게 뭐야? 다 온건가? "
예히나탈의 말에 시르온과 술라이만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누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정신없이 빛을 향해 뛰었다. 마치 빛의 품으로 뛰年? 누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정신없이 빛을 향해 뛰었다. 마치 빛의 품으로 뛰어들려는 듯이.
" 모두 조심! "
긴 회랑이 끝나고 밝은 빛이 폭발하듯이 비춰지는 회랑 입구, 그곳을 한 팔을 쫙
벌리고 막은 예히나탈이 경고를 날리자, 달려오던 시르온과 술라이 만이 급격하게
멈춰 섰다.
" 이, 이게 다 뭐야? 이~~야아아아아~~ "
회랑의 끝, 빛이 들어오는 입구, 그 앞에 선 일행은 눈 아래 드러나는 엄청난
광경에 입을 쩍 벌리고 숨을 멈췄다.
예전에 지하계단을 내려오면서 본 그 지저 광장처럼, 이곳에도 엄청난 크기의
원통형 광장이 있어 일행 앞에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천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절벽이 병풍처럼 빙둘러있는데, 일행이 서있는
입구는 그 절벽의 중간쯤 높이에 위치해 있다.
사방을 둘러보니 원통형 절벽에는 모두 6개의 입구가 60도 간격으로
육망성(六網星)처럼 자리 잡고 있으며, 각각의 입구에서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다리가 놓여 6개 입구를 서로 연결하고 있다.
다리의 폭은 사람 한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얇고, 그 아래 바닥까지는 줄잡아
30~40 여 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다.
다리에 납죽 엎드려 아래쪽을 살펴보던 시르온은 무언가 발견한 듯 아래를
가리켰다.
" 스승님, 저 아래쪽에도 6개구멍이 나 있는데요? 동굴 입구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
시르온의 말에 예히나탈은 불덩이 하나를 아래쪽으로 보내 한바퀴를 휙 둘러보았다.
시르온의 말대로 커다란 동굴 여섯 개가 등 간격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데, 불덩이가
지나가자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그 동굴 입구에는 빽빽하게 그 괴물들이 몰려서서 손톱을 휘두르며 이를 갈고
있었다 .
" 그 괴물들이 저기 다 모여 있네! 그러고 보니 괴물이 사는 6개 동굴은 저
아래쪽으로 이어지고, 벽 안의 길은 이 위쪽으로 모이는 것 같구나! 누가 이런 곳을
축조했는지 몰라도 정말 특이하게도 지어 놓았다. "
" 스승님, 우리가 지나온 지저 광장에도 6개 동굴이 있었잖아요. "
" 그렇지. 그 괴물이 쏟아져 나오던 여섯 동굴. 그 여섯 동굴이 모두 이쪽 광장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마치 두개의 원통형 탑을 연결하는 것처럼. "
" 탑이요? "
시르온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예히나탈을 보자 예히나탈이 끄덕였다.
" 엄밀히 말하자면 탑이 아니지. 탑은 대지 위에 양각으로 솟은 건축물을 뜻하니까.
하지만 실로 흡사하지 않냐? 지상대신 지하로 뻗어있고, 양각대신 음각인 것을 빼고
는.
이 원통처럼 생긴 절벽이, 마치 우리가 거대한 탑 내부에 들어와 있는 것 같잖아. "
예히나탈의 설명은 그럴듯했다.
누가 무슨 이유로 이런 것을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그럴듯하게 들렸다.
" 그런데 스승님,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또 있는데요. 저 괴물들이 왜 그런지는 몰라
도 이 광장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고 소리만 지르네요. "
시르온의 말에 아래를 내려다 본 예히나탈은 다시 불덩이를 내려 보내 바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바닥은 울퉁불퉁하며 칙칙한 색을 띄고 있었는데, 불덩이가
휘익- 지나가며 그 모습을 비춰주자 일행의 입은 더 벌어졌다.
바닥은 돌이나 흙이 아니었다.
곤죽처럼, 늪처럼, 점성을 가진 끈적이는 액체가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표면에서 부유하는 다수의 뼈와 두개골, 반쯤 썩은 내장과 머리카락.
이 넓은 지하광장을 메우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모든 것들이 뒤 섞여 만들어낸.
시체의 늪이다
" 저게 다 시체란 말이야? 대체 시체로 저만한 광장을 채우려면 얼마나 사람이
죽어야 되는 거야? "
평생 수많은 시체를 만지며 살아 온 예히나탈도 이 끔찍한 광경에는 혀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반경 80 미터 가량 되는 넒은 광장을 늪으로 만들 정도의 시체라면 그
수가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저런데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건너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
두 사제가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갈 길을 지체하자 답답해진 술라이만이 한마디
했다.
" 그냥 가면 위험할 겁니다. 썩은 고기를 좋아하는 저 괴물들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죠. 아마 저 괴물들도 견디지 못할 지독한 시독(屍毒)으로
광장이 가득 차 있을 겁니다. "
시르온의 말에 예히나탈이 끄덕였다.
이 자리에서 독을 알아보는 눈에 있어서는 시르온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시르온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 인간의 시체는 썩으면서 지독한 독을 내뿜는데, 적당한 습기와 온도 조건이
맞으면 그 정도가 무서울 정도로 심해집니다.
아마 우리도 이대로 다리를 건너다가는 저 늪에서 올라오는 독무(毒霧)에 중독 되서
정신을 잃고 다리 아래로 고꾸라질 겁니다. 그리고 한번 저기 떨어지면. 끝이죠. "
시르온이 손으로 목을 치는 흉내를 내며 말하자 술라이만도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이런 지옥 같은 험지는 술라이만보다 저들 사제지간이 더 잘 알 것이다.
"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이대로 돌 사제지간이 더 잘 알 것이다.
"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고. "
난감한 표정의 예히나탈을 보면서 시르온은 결심을 굳힌 듯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돌아 갈 수 없죠. 지금 돌아갔다가는 식량 부족으로 굶어 죽을 거예요. 이제는
여기를 돌파하고 전진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전에
스승님께서 말 해주신 방법을 지금 시도해 볼까 해요. "
" 무슨 방법? 너, 너 설마? 너 미쳤냐? 저만한 양의 시독을 어떻게. 절대 안돼"
예히나탈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시르온이 시도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르온은 지금 저 엄청난 양의 시독을 흡수하려는 것이다.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독의 양에는 한계가 있다. 시르온은 망혼벽의 망령들을
이용해서 그 한계를 돌파하려는 것이다. 그 결과 망령들을 통제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저 독은 무시무시한 괴물들도 감히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지독하고 그
양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저 많은 독이 도대체 얼마동안 축적되어 온 것인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 절대 안돼. 내가 말한 것은 적당한 양의 독이었지 저런게 아니었다. 저 독에서
올라오는 수증기 한 모금만 마셔도 죽기 딱 좋겠다. 꿈도 꾸지마. "
단호하게 잘라 끊는 스승에도 불구하고 시르온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 지금 안하면 굶어 죽을 거예요. 제가 독을 다루는 독 네크로맨서가 되기로 한
이상 굶어 죽는 것 보다는 차라리 극독에 중독 되서 죽는 것이 낫잖아요. "
시르온의 고집에 예히나탈은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내쉬었고, 시르온은 천길 허공에
드리워진 좁은 다리 위로 한걸음씩 전진을 시작했다.
다리 중앙까지 줄잡아 80 미터, 다리는 아치를 그리며 중앙이 올라가 있는 형태다.
자칫 발을 삐끗하면 부글부글 거품을 내며 독연을 뿜어 올리는 시체의 늪에 빠져
버린다.
심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며 시르온은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출발할 때는 몰랐지만 일단 다리를 20여 미터 정도 지나오자 바람도 불어 균형을
잡기도 힘들 뿐더러 독의 양도 장난이 아니었다.
단순히 현기증을 유발하는 수준이 아니라, 수증기에 닿는 피부에 검붉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할 정도로 지독했다. 시르온이 독에 대한 내성이 강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목을 쥐어뜯으며 쓰러졌을 정도로 독성이 강했다.
피부에 생긴 반점은 이내 부풀어 오르며 기포를 형성했고, 처음 하나 둘이던 기포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져 조금 뒤에는 시르온의 온 몸을 덮어 버렸다.
시르온은 온몸이 개미에게 뜯어 먹히는 것처럼 따갑고 근지러운 느낌, 소름이 쫙
돋는 느낌을 억눌러 참으며 꾸준히 발을 옮겼다. 그는 여기서 더 지체하거나 기포를
긁으면 사태가 더 악화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르온이 긁지 않아도 기포들은 점점 더 부풀어 오르다가는 짙누런 고름을
쏟 아내며 터져 버렸다. 터진 자리에는 피부조직이 흐물거리며 뭉그러지고, 그
자리에 좁쌀같이 작은 기포덩이가 새로 생겼다.
얼굴이 종기에 뒤덮여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해 버린 것은 50 미터 정도 진격했을
때였고, 머리카락이 견디지 못하고 술술 빠지면서 머리에도 염증이 빽빽이 자리
잡은 것은 60 미터도 채 못 미쳐서 였다.
마침내 다리가 꼬인 시르온은 휘청하며 주저앉았고 그대로 다리 아래로 추락할 뻔
했다.
간신히 다리를 손으로 부여잡고 몸을 지탱했지만 덕분에 가슴 쪽의 기포들이 다
터지면서 지독한 고통을 안겨 주었다.
" 시-르-온-- 안-돼-겠-다 그-만-- 돌-아-와 "
예히나탈의 목소리가 멀리서 울리듯이 들렸다.
고통이 너무 심해진 시르온도 여기서 포기하고 그냥 저 아래 늪으로 몸을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 스승의 목숨도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여기서 멈출 수도
없었다.
편하게 죽을 수도 없었다.
기를 쓰고 다시 중심을 잡고는 이번에는 다리 위를 기어서 전진하기 시작했다.
시르온이 지나간 자리에는 누런 고름과 피가 범벅이 되서 남았다.
머리카락은 한 올도 남지 않았고, 의복도 이미 다 녹아 버렸다.
눈썹이 빠진 자리는 누런 고름이 흐르는 기포가 부풀어 올라 파충류를 보는 듯했다.
뺨에는 고름이 가득 찬 혹이 주렁주렁 달렸고 양쪽 귀는 반쯤 뭉그러져서 아래로
쳐졌다.
심지어 안구에까지 독이 닿아 시뻘겋게 충혈 되었을 뿐 아니라 안구에도 기포가
들어차 서 초점이 맺지 않았다. 눈이 보이지 않고부터는 손으로 더듬으면서 전진해
왔지만 이제는 손의 감각이 전달이 되지 않아서 더 이상 그렇게 할 수도 없다.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시르온은 그 자리에 앉아 손바닥을 위를
향하게 하고 양 팔을 벌려 머리 정도 높이로 들었다.
세균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독에 대한 친화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은
시르온이다.
그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균을 자유자재로 부리고 독을 능수능란하게 다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균을 자유자재로 부리고 독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시르온이다.
기포 때문에 다 감기지도 않는 눈을 반개하고 심호흡을 한 시르온은 서서히 몸 안을
텅 비운다고 생각했다.
그의 의식에 따라 그의 몸이 텅 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것도 없이 순수한 상태로 몸 구석구석이 다 비워진 느낌이 들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물질은 농도가 짙은 곳에서 옅은 곳으로 흐른다.
콰콰콰콰콰콰콰
시르온의 몸이 텅 비었다는 느낌이 든 순간부터, 지하 광장을 가득 메운 독연은
천천히, 하지만 꾸준하게 시르온의 몸속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시르온의 양 손바닥을 통해 독이 체내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씩, 조금씩, 독이 시르온의 몸을 채우며 도도한 흐름을 만들어
내었다.
그렇지만 조금 지나자 시르온 몸 곳곳이 터져 나갔다.
밀려드는 물을 감당하지 못한 둑이 터지듯이, 독은 시르온의 입으로도, 가슴으로도,
정수리로도, 눈, 코, 발바닥, 사타구니 할 것 없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시르온의 몸을 독이 다 채우고 온 몸이 터져버릴 듯이 부풀어 오르자 시르온은
몸속의 망령을 끄집어내었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다섯.
망령들은 원념이 강하다.
그들은 저주와 증오로 가득 차 있으며 피를 즐기고 독기를 품고 있다.
시르온이 머리 속에 그린 것은, 끄집어낸 망령들도 텅 비게 하는 일이었다.
망령들도 시르온의 몸 안에 들어와 세포 곳곳에 녹아 붙어 그의 몸처럼 되었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의 의지에 따라 망령들의 내부도 텅 비어 버렸다. 빈 그릇처럼 되어 버렸다.
시르온의 몸을 꽉 채우고도 남아돌아 넘쳐흐르던 독은 갈 곳을 찾고 있었다.
이러다가 갈 곳을 못 찾으면 시르온의 몸과 함께 펑- 하고 터져 버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독이 마침내 시르온의 체내에서 빈 공간을 찾아내었다.
처음에 멈칫멈칫 하던 독 기운은 서서히 망령들에게 유입되며 그것들을 독으로
채워갔다.
웅웅우우우웅 우우우웅
발악하듯 움직이던 망령들도 서서히 독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원념을 품고 있는 망령들, 시체가 썩어서 생긴 시독과는 어느 정도 친밀성이 있는
것 인지, 시르온의 생각보다 수월하게 독을 받아들였다. 원한들이 깊긴 깊었는지,
받아들이는 독의 양도 시르온의 몸을 가득 채운 양의 몇 배를 받아들이고도
끄떡없었다.
희끄무레하던 망령들이 독을 잔뜩 품자 시커먼 색으로 물들어갔다.
다섯 마리 망령들이 독으로 가득차자 시르온 몸 구석구석에서 무언가 꿈틀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세포마다 배어있는 망령들, 피 속에 녹아 있는 망령들이
강한 절독에 호응하며 깨어나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망령의 혼들이 한번에 깨어난 것인지 모른다.
심장에서 뇌 속에서, 눈과 코 귀에서, 혀에서, 그것들이 일어나며 시르온의 생각과
동조하기 시작했다.
시르온의 몸을 가득 채운 망령들, 그 헤아릴 수 없는 망령들이 일제히 스스로를
개방했다.
공간상의 어느 한곳의 기압이 갑자기 진공이 되어버리면, 나머지 공간의 물질들이
일제히 그곳을 채우려 밀려간다. 블랙홀처럼 되어 버리는 것이다.
농도도 마찬가지다.
시르온의 몸 안에 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엄청난 공간이 확보되고 그것들이 한번에
개방되자, 지하광장에는 일대 돌풍이 불었다.
위로 꾸준히 올라가던 독연이 갑자기 토네이도처럼 용솟음치며 시르온의 몸으로
급격하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 콰아아아아 콰콰콰콰--
시체의 늪 곳곳에서 시작된 토네이도는 강한 독기를 위로 위로 올려 보내며 끝없이
시르온의 몸을 채워갔다.
거목이 뿌리에서 흡수한 물을 삼투압 현상을 이용해 높은 줄기까지 보내 듯, 시체의
늪은 그 독기를 시르온의 몸까지 올려 보내며 그를 채웠다.
아니, 망령들의 목마른 갈구를 채웠다.
광장을 가득 매웠던 독연이 다 시르온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망령의 수가 너무도 많아 채워도 채워도 끝이 나지 않자, 마침내 수십
줄기의 토네이도를 타고 늪의 독 원액이 꾸역꾸역 밀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꾸르르르륵 구르륵- 꾸르르르르르르륵
원액이 시르온의 몸으로 급격하게 주입되면서 시체로 만들어진 늪은 점차 맑아졌다.
시꺼멓고 탁하던 늪이 점점 희석되기 시작했다.
온 몸의 칠공으로 밀려드는 독을 무아지경에 빠져 받아들이는 시르온은 그 엄청난
광경을 보지 못했지만, 예히나탈 등은 시체의 늪이 점차 맑은 물처럼 투명해져 가는
놀라운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수십 미터에 이르는 물기둥, 그것도 시독 원액으로
이루어진 기둥 수십 개에서 빨아올리는 독의 양은 엄청나서, 삽시간에 그 거대한
시체의 늪을 다 비워버렸다.
펌프처럼 그 지독한 시독을 시르온의 몸으로 퍼 올렸다.
쪼르르르륵
마침내, 최후의 한 방울까지 독을 모두 쏟아 부은 시체의 늪은 맑은 담수로 변했다.
곳곳澧컥?한 방울까지 독을 모두 쏟아 부은 시체의 늪은 맑은 담수로 변했다.
곳곳에 뼈 와 인골, 신체 장기들이 떠다니기는 하지만 바닥이 비칠 정도로
맑아졌다.
반면, 시르온의 몸은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모든 독이 망령들에게 주입된 덕분에 그의 신체가 직접적으로 변할 일이 없었기
때문 이다.
온몸에 부풀어 오른 기포도 말끔하게 사라졌고, 뭉그러진 상처도 원 상태로
돌아왔다.
단지 한번 빠진 털은 어쩔 수 없어 온몸에 터럭하나 없고, 의복이 모두 녹아 보기
흉 하다는 것 외에,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앉은 시르온의 모습은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 시르온~ "
시체의 늪에서 뿜어져 나오던 독 수증기가 걷히자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은 역시
예히나탈이었다.
눈앞에서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에 한동안 온 몸이 굳어져 있었지만, 정신을 차리자
제일 먼저 시르온이 걱정되어서 단숨에 뛰어왔다.
" 너, 너 괜찮냐? "
위태위태한 좁은 다리 위에서 평온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양 팔을 벌린 시르온의
모습은 마치 어둠의 성직자를 보는 듯 위압감이 느껴졌다.
약간은 마른 듯이 탄탄한 몸에 머리카락도 눈썹도 하나 없는 모습, 무엇보다
시르온의 미간 사이 노예인장이 인상적이다.
시르온의 이마에는 원래 그의 주인인 티야의 이니셜 T 자와, 노예상인 제르피의
이니 셜 Z자가 함께 찍혀 있었는데, 그것이 이번에 독을 흡수하면서 뭉뚱그려
지면서 마치 마왕의 표정을 형상화 한 듯한 인장이 되어 버렸다.
독으로 피부 한 꺼풀이 싹 녹고 새 피부가 돋아나면서 하얗게 된 얼굴, 그 미간에
흉측하게 도드라진 마왕의 인장.
원래부터 시르온은 있는 듯 없는 듯 그 존재감이 잘 느껴지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그 미간의 인장이 두드러지게 보이면서 마치 시르온의 모습은 기억나지 않고 그
인장만 뚜렷하게 기억되는 독특한 얼굴이 되었다.
" 스승님. 스승님? "
홀린 듯이 시르온의 얼굴을 넋 놓고 보던 예히나탈은 시르온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 어, 엉? 내, 내가 뭐라고 했지? 아 참, 너 괜찮냐? 어떻게 된거냐? 그 토네이도는
다 뭐고. 너. "
" 토네이도요? 그게 뭐죠? 엇? 저 밑에 있던 그 독들은 다 어디 갔죠? 설마 그 많은
것을 제가 다. "
"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하냐? 온통 시커먼 독이 난무해서 난 제대로 보지도
못 했다. 그나저나 무사한 것 같아서 다행이다. 난 네가 여기서 죽는구나 싶었는데.
"
예히나탈의 말에서는 시르온에 대한 정과 걱정이 뚝뚝 묻어 나온다. 시르온은
스승의 그런 모습에 훈훈하게 미소를 지었다.
" 그건 그렇고 여기 가득찬 독을 다 흡수시켰는데도 망혼벽의 망령들 삼분지 일도
다 못 채운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한가지 특이한 점은, 망령에 따라서 어떤 놈들은
다른 망령의 몇 십배 되는 독을 집어 삼키고도 끄떡없는 놈들이 있더 라구요. "
" 그.래? 그거 특이한데? 원한의 정도에 따라 틀린 것인가? 그렇다면 망령에 따라
그 능력도 천차만별이려나? "
예히나탈은 무언가 더 이야기 하려다 술라이만이 가까이 오는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예히나탈이 다리 위를 뛰어가도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술라이만도 부지런히 그
뒤를 쫓아왔다.
" 대체 어떻게 한 것인가? 그 지독한 독이 어떻게 다 없어졌지? "
술라이만은 시르온에게 캐묻듯이 물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가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시르온의 능력이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예히나탈이 얼른 중간에
끼어들어 말을 끊었다.
" 험, 험, 그 정도 독을 해독하는 거야 시체와 독을 다루는 네크로맨서라면
기본이지. 험, 험. "
예히나탈의 눈짓에 시르온이 맞장구를 쳐 주었다.
" 친위대장님, 제 능력으로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다 스승님께서 주신
해독액을 여기 다리 중앙에서 뿌렸을 뿐인데요. 그리고 생각보다 독기가 강하지는
않더군요. "
의심이 가득한 술라이만의 눈초리는 예히나탈이 준 해독액 덕분이라는 시르온의
말에 수그러들었다. 사막 던전의 마스터 예히나탈 이라면 능히 그런 해독 물질을
가지고 다닐 만 하고, 시르온 말대로 독이 생각보다 약했던 모양이다 싶었다.
" 이럴게 아니라 계속 가야죠. "
시르온이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예히나탈이 자신의 상의를 벗어서 건네주었다.
의복이 모두 녹아 없어진 시르온은 예히나탈이 준 상의를 허리에 둘러 묶어 하체를
적당히 가리고는 앞장섰다.
체력을 다 회복한 시르온, 이제부터는 예히나탈 보다는 그가 앞장 서는 것이 낫다.
둘이 출발하고도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술라이만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부지런히
뒤를 따랐다. 그는 머리를 휙휙 가로 저어 방금 전 눈에 들어온 시르온의 나체를
머리 속에서 지우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 그 새끼, 참. 거시기 하나는 실.하네. 그러니까 티야님께서 가까이 두시겠지 만.
노예놈 주제에. 허 참, 그거 하나는 부럽군. "
앞장 선 시르온은 6개 입구 가운데 하 주제에. 허 참, 그거 하나는 부럽군. "
앞장 선 시르온은 6개 입구 가운데 하나를 찍었다.
가는 다리로 서로 연결된 6개의 회랑 입구에는 각기 다른 문양의 이상한 문자가
새겨 져 있었는데 시르온이 택한 길은 그 가운데 가장 뾰족해 보이는 문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고대 바텐키움 교단이 사용하던 주술 문자, 그 가운데 시르온이 택한 문자는 바로
신(神)을 뜻한다.
바텐키움 교단의 살아있는 신, 바로 '식인황제 바텐키움' 말이다.
시르온이 거침없이 화랑 안으로 들어서자 뒤를 따르던 예히나탈은 한숨을 내쉬며
뒤를 따랐다. 그는 이 고대 주술문자를 약간 알고 있다. 시르온이 걷는 길은 살아서
신이 되고자 했던 식인황제 바텐키움의 길이다.
물론 예히나탈 보고 길을 고르라고 해도 바로 이 길을 갔을 것이다.
하지만, 저 글자의 의미도 모르면서 본능적으로 이 길을 택한 시르온의 능력에 두려
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시르온이 택한 회랑의 끝은 놀랍게도 신전 정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물론 현재 노아부 황실의 아믹신전이 아니라 고대에 세워진 바텐키움 신전이다.
회랑 끝을 막아 선 거대한 석문에는 바텐키움의 신점임을 알리는 화려한 문양이
가득하다.
석문 양쪽에는 네 개의 팔에 칼을 움켜쥐고 여섯 개의 눈을 부라리는 높이 5 미터의
거대한 석상이 우뚝 서 있는데, 오랜 세월 탓에 낡긴 했어도 이끼하나 끼지 않았다.

예히나탈이 석문을 더듬으며 해석을 하고는 그 가운데 몇몇 툭 튀어나온 돌을
누르자 거대한 석문이 그그그긍- 열리며 신전의 웅대한 모습을 일행 앞에 내보여
주었다.
" 이거 영광이군. 바닥에 쌓인 먼지로 보아 이 식인황제 바텐키움의 신전에 사람이
들어 가는 것은 바텐키움 황조 이래 우리가 처음인 것 같아. "
" 예, 예히나탈님. 여, 여기가 그, 그 바텐키.움.의 신전이란 말입니까? "
예히나탈의 입에서 바텐키움이라는 말이 나오자 술라이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바텐키움 황조의 암흑시대는 잘 알고 있다. 이 지옥 같은 곳이 그의
유적이라니 놀라 지 않을 수 없었다.
" 자, 또 뭐가 나올지 모르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들어가 봐야겠지. "
이번에는 다시 예히나탈이 앞장을 섰다.
신전은 웅대했다.
배가 불룩한 거대한 석주들이 신전 중심부를 향해 열 지어 서 있고, 그 끝에는 높은
계단이 자리하고 있다.
계단 위 높은 벽면에는, 사자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고 여덟 개의 팔을 휘두르는
커다란 신상이 돌로 조각되어 있는데 그 크기가 문 앞의 석상의 두 배가 되어 보일
정도로 크다.
신상의 여덟 손은 각각 인간의 심장과 뇌, 눈알, 사내의 양물, 그리고 팔다리가
들려져 있는 모습으로 조각 되어 있으며, 각 신체부위에는 녹을 잔뜩 발라 붉은
핏물이 뚝 뚝 떨어지는
형상처럼 보이도록 만들어졌다.
신상은 허리 약간 아래까지만 조각되어 있는데, 그 하복부에서 치솟은 양물은
두개의 머리를 가진 뱀으로 묘사 되어 있어 신상의 가슴어림까지 치고 올라와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의 뱀 머리에는 아름다운 여자가 애걸하듯이 매달려 있는 모습이다.
" 고서에서 보던 바텐키움 신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구나! 바텐키움상은 후대에
모두 부숴 졌는데. 아마 이게 세상에 마지막 남은 바텐키움상 일지도 모르겠다. "
이런 고고학에 관심이 많은 예히나탈은 지금 처지도 잊고 감탄 성을 연신 터뜨렸다.
한편 시르온은 그 신상 앞에 위치한 육망성 마법진에 흥미를 느꼈다.
계단 위신상 바로 아래에는 둥그런 원이 그려져 있고, 그 원 안에 별 모양의
육망성이 그려져 있으며, 육망성 각 위치에는 붉게 칠한 기둥이 세워져 있다.
각 기둥 끝에는 사람의 머리와 사지, 그리고 사내의 양물이 꽂혀 있었는데, 그
오래전에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처리를 했는지 썩지도 않고 생생한
모습이다.
시르온은 예히나탈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홀린 듯이 계단 위로 올라가 그 마법진
중앙에 우뚝 섰다.
그러자,
웅웅웅웅웅웅웅웅웅웅웅웅웅웅웅웅
6개의 붉은 기둥이 진동을 하며 떨기 시작했고 기둥 사이에 푸른 전기가 마구 튀며
마법진을 휘감아 버렸다.
푸른 전기는 마법진을 가득 채울 정도로 퍼져나가며 둥근 원진 안을 메우더니
시퍼런 빛기둥을 형성하며 시르온의 몸을 에워쌌다.
" 뭐, 뭐! 시르온, 더 또 무슨 짓을 하는거! 이, 이, 이~~~ "
예히나탈이 악을 썼지만 시르온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내부에 무언가가 마법진과 공조하며 그의 몸을 덜덜 떨도록 만들었고, 무언가
끔찍한 것이 툭툭- 그의 신경을 끊으며 자라나는 느낌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시르온의 입에서 높은 톤의 소리가 울려 나오면서 빛의 기둥은 더 강해져만 갔고,
그럴수록 시르온의 몸은 마치 무엇에 목이 잡혀 끌어올려진 듯 빛의 기둥 안에서 30
센티미터 정도 높이로 둥실 떠올랐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시르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마치 지올랐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시르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마치 지옥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처럼 음산하게
울려 퍼지며, 바텐키움 신전을 가득 메우고 넘쳐 구비 구비 회랑을 따라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그 소리가 점점 더 음울하고 커지자 견디다 못한 술라이만이 먼저 귀를 막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예히나탈도 귀를 틀어막고 고통에 신음했다.
부르르르 우드드드드드드드드
음파를 견디지 못했는지 거대한 신상 표면에서 돌조각들이 부숴 져서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종래에는 허물어지듯 붕괴되며 돌가루를 비산시켰다.
무너진 바텐키움 신상, 그 뒤쪽에는 커다란 구멍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는데,
그 구멍을 통해서 보이는 커다란 지저 광장은 놀랍게도 시르온등이 계단을 따라
처음 내려온 바로 그 지저 광장이다.
결국 일행은 지하에 세워진 두개의 음(陰)의 탑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뱅뱅 돌아
결국 처음
출발했던 광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광장은 시뻘건 눈을 희 번뜩이는 괴물들로 가득하다.
바텐키움의 신상 뒤에 뚫린 구멍은 지저 광장에서 바닥으로부터 약 5미터 높이,
신상에서 붕괴된 돌덩이가 쏟아지면서 턱을 만들어 준 덕분에 광장을 가득 메운
무서 운 괴물들이 신전 안으로 난입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가 되어 버렸다.
술라이만은 시르온이 내지르는 음파를 견디다 못해 입과 귀, 코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예히나탈은 한손으로 귀를 막고 다른 귀는 벽에 밀착해서 막으며 무너진
광장에 가득한 괴물들을 보고는 절망감에 빠졌다.
오직 시르온만이 그 높은 주파수 대역의 괴성을 쩌렁쩌렁하게 내지를 뿐이다.
지옥(地獄)의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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