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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한 방향으로 치달리는 진실

by 아도비야 2021.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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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엉뚱한 방향으로 치달리는 진실


알아보았는가?
간밤에 갑자기 명부산이 화산처럼 폭발해 버리는 바람에 그곳의 불길을 잡느라 날이 밝은 아침까지도 많은 교도들이 부산을 떨고 있었다.

때문에 직접 그곳으로 갔다가 상황파악을 마치고 돌아온 잠마전주에게 소여천이 그렇게 물었다.

속하가 알아본 바로는 화산폭박은 아니었습니다.

잠마전주의 말에 소연천은 아직도 저 멀리 뭉게구름과 같은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명부산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잠마전주를 향해 다시 물었다.

속하가 알아본 바로는 화산 폭발은 아니었습니다.

잠마전주의 말에 소여천은 아직도 저 멀리 뭉게구름과 같은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명부산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잠마전주를 향해 다시 물었다.

화산 폭발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명부산이 저리 되었단 말인가?
몇몇 목격자들의 말에 의하면 지난밤 명부산이 터지기 직전에 유성처럼 여겨지는  밝은 빛줄기가 그곳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빛줄기?그럼 명부산에 유성이라도 떨어져 내린 것이란 말인가?

소여천의 이어지는 질문에 잠마전주는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목격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 빛줄기는 하늘에서 날아든 것이 아니라 마치 폭죽을 쏘아 올린 듯, 본교의 어딘가에서 솟아 올라 명부산을 향해 날아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유성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소여천은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그제야 창 밖을 바라보던 눈길을 돌렸다.
본교의 어딘가에서 솟아난 빛줄기라''''그럼 그 빛줄기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것을 보았다면 그빛줄기가 대략 어디쯤에서 솟아난 것인지도 알 수 있을 게 아닌가.
소여천의 찌푸려진 눈살에 잠마전주 역시 슬쩍 표정을 굳혔지만 여전히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 빛줄기의 정체에 대해서는 속하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말씀대로 목격자들을 추궁해 보니 대략 백양소축이 있는 근방을 지목하고 있었습니다.
백양소축이라고?그렇다면 혹시'''''아니 그럴 리가 없겠지. 그들은 어제 도착한 자들인데 그들과 연관을 짓는다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소여천은 놀람이 담긴 음성으로 무엇인가 떠오른 듯 말하려다 이내 스스로의 생각을 부정하듯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반문했다.

잠마전주는 그 말을 받아 이번에는 약간 머뭇거리는 태도를 보이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속하의 견해로는 ''''그들과 무관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어째서 그렇다는 것인가
아직 속단할 수는 없겠지만 명부산의 폭발이 화산 폭발이나 유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그 원인은 한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화약에 의한 것으로, 누군가가 사전에 미리 매설해 두었다가 고의적으로 터트린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러한 일을 벌였는가 하는 것인데. 본교의 누군가가 아무런 이유나 목적 없이 그러한 일을 벌일 까닭이 없으므로 결국 중원에서 온 그들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찌푸려진 눈살과 더불어 그 순간 약간의 당혹감마저 어려 있는 표정으로 소여천은 다시 잠마전주에게 의문스런 어조로 말했다.

화약이라고? 화약에 의해 명부산이 저리 될 정도면 족히 수만 관은 필요했을 텐데, 그렇게 많은 양의 화약을 어디서 구했단 말인가? 또한 그 양은 둘째 치고서라도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이 쓸데없이 명부산을 저렇게 만든단 말인가? 자네 말대로라면 어떤 식으로든 목적이 있기 때문일 텐데, 본교의 금지사항중 하나인 화약을 사용하면서까지 명부산을 저렇게 만들 이유가 없단 말일세.

비록 명부산이 사령시매들에게 사기를 흡수시키고 있는 중요한 곳이기는 하지만, 알다시피 그곳에 있는 사령시매들은 아직 모두가 미완성들이고, 또한 앞으로도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대법을 거쳐야만 하는, 아직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시체에 불과하단 말인세. 그런 곳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화약을 사용해서 폭파시켰을 것이라는 말은 도무지 설득력이 없네.

물론 대종사의 허락 없이 본교 내에서 대량의 화약을 지니거나 사용하는 것은 명백히 금지사항입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그러한 화약을 들키지 않고 보유할 수만 있다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아주 든든한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때문에 저희도'''''

어허, 이 사람! 말조심하게,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지 않던가,
죄, 죄송합니다. 아무튼 그러한 효용성을 생각해 보면 저들이라고 그러한 생각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화약을 이용해 명부산을 저리 만든 것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충분한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소여천은 오히려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뭔가 이유가 될 만한 사항이 있단 말인가? 그것이 오히려 더 흥미롭군, 어디, 자네 생각을 한번 말해 보게.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저희 쪽에 대한 일정의 경고의 의미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경고의 의미라'''
그 말은 별로 수긍이 가지 않는다는 듯 소여천이 말끝을 흐리자 잠마전주는 빠르게 설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명부산이 저렇게 된 것이 원로원주나 묵월 부교주의 계획 하에 벌어진 일이라고 가정한다면, 우선적으로 심각하게 여겨야 할 부분은 바로 사용된 폭약의 정체입니다.

소종사님의 말씀처럼 일반적인 화약으로 명부산을 저렇게 만들려면 족히 수만 관의 화약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두의 이목을 피해 그만한 양의 화약을 구한다는 것도 힘들거니와, 그러한 엄청난 양의 화약을 은밀히 명부산에 매설한다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결국 폭약이 사용되었다면 단순한 화약이 아닌, 부피는 작아도 위력은 일반 화약의 수십 배, 혹은 수백 백는 되는 벽력탄과 같은 종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잠마전주의 말이 어어짐에 따라 소여천의 얼굴 역시 어느새 조금은 굳어져 있었다.
그럼 그러한 막강한 위력을 지닌 벽력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본좌로 하여금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는 간접적인 무력시위란 말인가?
만약 그들이 그러한 막강한 위력을 지닌 벽력탄을 정말로 가지고 있다면,분명 그것만으로도 큰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네만, 그런 막강한 위력을 지닌 벽력탄까지 구해 놓았을 정도라면 사전에 어떤 목적으로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상당히 구체적인 검토가 있었을 것이네, 그렇다면 그러한 사실은 오히려 극비에 부처져야 마땅한 일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경고의 의미로 명부산을 저렇게 만들었다는 것은 '''그것은 오히려 본좌에게 경각심만 불러일으키게 될 뿐이니 그들에게도 득보다 실이 많은 일일세. 백양신마나 묵월 부교주가 그리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닌데 어찌 그러한 일을 벌였겠는가? 아무래도 그건 아닌 듯하네.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소여천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말하자 잠마전주는 다시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 한 가지 경우만 놓고 보자면 저들의 행사는 도무지 납득하기도 어렵고, 오히려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는 것과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백양신마나 묵월 부교주가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도 아니겠지요. 하지만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 같이 따져보면 저들의 그러한 행서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닐 것입니다.
또 다른 가능성?
바로 명부산을 터트린 수법, 즉 매설해 둔 화약이나 벽력탄간은 것을 터트린 수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에 소여천은 또다시 두 눈에 의문을 떠올렸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자네 말대로 명부산이 폭약에 의해 저리 된 것이라면 그 빛줄기라는 것은 일종 신호탄이었을 것이고, 명부산에 매복해 있던 자가 그 신호를 보고 화약이든 벽력탄이든 터트렸지 않겠는가? 물론 명부산이 저 지경이 될 정도면 폭약을 터트린 자도 무사히기는 힘들었을 테지. 하지만 백양신마나 묵월에게도 그 정도의 충성심을 가진 수하 몇 명쯤은 분명히 있을 것일세.
어두운 밤에 쏘아 올려진 신호라면 멀리서 보았을 땐 얼마든지 착시현상에 의해 산으로 날아든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이고, 때맞추어 폭발이 일어났다면 더 더욱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속하도 처음에는 그럴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 보면 소종사님의 말씀처럼 그들이 명부산을 저렇게 만들 이유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본 것입니다만''''혹시 그 빛줄기의 정체는 단순한 신호가 아니라 어쩌면 폭발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즉 매설해 둔 폭발물을 터트린 직접적인 도화선 역할을 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잠마전주의 말에 소여천은 언짢은 듯이 눈살마저 찌푸리며 말했다.
자네 도대체 오늘 왜 이러는가? 물론 그것이 단순한 신호탄이 아닌 직접적인 도화선일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인가?
그러한 말에 잠마전주는 가일층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처음에 말씀드렸지만, 목격자들은 그 빛줄기가 생겨난 곳이 틀림없이 백양소축 부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소여천도 무엇인가 느껴지는 것이 있는 듯 약간은 움찔한 기색을 보이다가는 이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말했다.
자네 지금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인가? 설마 하니 백양신마가 자신의 거처에서 이화강기라도 날려 명부산에 매설 해둔 폭약이라도 터트렸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아니면 품검신 그 작자가 이기어검술이라도 펼쳐서 명부산까지 날려보낸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백양소축에서 명부산까지의 거리가 얼마인데''''
잠마전주가 한 말의 의미가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나 심각한 내용이 될 수 있는지 소여천 또한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목소리에는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배어 있었다.
속하라고 어찌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겠습니까,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렇게 했을 경우라야 그들의 행위가 납득이 됩니다.
백양신마나 묵월 부교주 역시 풍검신이 아무리 천마곤패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다른 원로들에게 인정받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 고심했을 것은 당연하다고 보여지고, 그렇다면 그에  대한 해결책도 생각해 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때문에 이번 명부산의 폭발이 그와 관련이 있다고 가정해 보면,단순한 폭발로서는 소종사님의 말씀처럼 오히려 경각심만 불러 일으키게 될 뿐 거의 아무런 실익이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백양소축에서 단번에 명부산을 폭발시킬 수 있었던 그 '어떤 것' 혹은 '방법' 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그러한 일을 계획하거나 벌일 필요가 없었을 거라는 말입니다.
결국 그 빛줄기의 정체는 단순한 신호가 아닌 모두에게 충분한 위협이 될 수 있는 '그 어떤것'혹은 '방법' 이어야만 그들이 원하는 목적과 명부산을 저렇게 만든 이유 또한 명확해지는 것입니다.
소여천이 비록 겉으로는 어처구니없어 하고 있었지만, 잠마전주의 말처럼 오히려 이 순간 명부산의 일에 대한 모든 의문이 깨끗이 걷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더욱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백양소축에서 명부산 초입까지의 거리가 대략 천여 장이 좀 넘는다고 하지만 명부산이 터져 나간 부위는 정상에 가까운 부근이었다. 그것까지 감안한다면 백양소축에서 폭발지점까지는 직선거리로 따져보아도 족히 천이삼백여 장의 거리, 거의 십 리 라는 말이다.
그 정도 거리라면 수강이나 이기어검술 같은 무공은 두말할나위도 없고 날개 달린 새가 날아간 것이 아니라면 어떤 무엇이든,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든 단순히 물리적인 힘만으로 무언가를 단숨에 허공을 격해 도달시킬 수 있는 거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설사 거대한 화포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지면에서 지면으로 닿는 거리라면 혹시 모를까 지면에서 산 정상 부위로 보내는 것이라면 유효 사거리는 기껏해야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칠 것이 분명했다.
화포조차도 그러할진대 도대체 다른 무엇을 생각해 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잠마전주의 말처럼 만약 그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것이 가능했다면 비로소 별다른 의미도 없고 의문스럽기만 하던 명부산의 폭발이 확연하게 여러 가지 심각한 의미를 담게 된다.
천여 장 밖에서도 위력이 막강한 벽력탄을 터트릴 수 있는 방법!
그보다 위협적인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자신에게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드는 확실한 경고의 의미를 갖게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원로들이나 백양신마의 의사에 반하는 자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아니 실질적인 위협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명부산의 폭발은 간접적인 무력시위이며 일종의 협박수단인 것이다.
소여천은 가벼운 심호흡과 함께 마음을 가라앉히며 자신과 마찬가지로 잔뜩 얼굴을 굳히고 있는 잠마전주를 향해 애써 담담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후후, 좋네, 그럼 이제 그 '어던 것'혹은 '방법' 이라는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말해 보게나, 본좌는 충분히 놀랄 준비가 되어 있네.
거벼운 농담마저 섞여 있는 말이었지만 잠마전주 역시 소여천이 무척이나 심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더욱 긴장된신색을 지어 보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모든 일을 확신한고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는 그였지만 정작 잠마전주 스스로는 이 모든 일이 '상당히 억지스러운 일'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그래 왔듯이 모사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야만 하는 것이고, 억지스럽더라도 그러한 상황을 주군에게 인식시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해야 한다.
비록 그 모든 것이 기우에 그칠지라도, 또한 그로 인해 쓸데없는 번거로움만 초래한 결과가 나오기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모사로서 진정으로 주군을 위하는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더욱 자신이 흔들리면 안 되는 것이다. 어차피 판단은 주군의 몫이었고, 자신은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속하로서도 또다시 '만약' 이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역시 그 한 가지밖에는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해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ㅇ게 만약 전설로 내려오는 그 한 가지 물건이 있다면 아마도 그러한 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그것은 바로 '''자모천뢰신궁입니다.
으득!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자모천뢰신궁이라고 했나?
그 순간 소여천은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뒷짐을 지고 있던 양손을 내밀어 잠마전주의 어깨를 움켜잡았고, 그 순간 힘이 들어가 잠마전주의 양어깨에서는 뼈가 엇갈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윽! 소,소종사님''''고정하십시오.
지금 자모천뢰신궁이라고 했냐고 묻지 않나!
하지만 어느새 소여천의 두 눈에서는 평소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마광까지 흘러나오고 있었고, 언성 또한 크게 높아진 채 사이로움이 물씬 풍겨나는 음서으로 변해 있었다.
그,그렇습니다. 소,속하는 '''겨.견디기가''''
털썩!
소여천이 어깨를 놓아주자 잠마전주는 그가 발산해 내는 사이로우면서도 극강한 마기를 견뎌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무너지듯이 풀썩 주저앉으며 전신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기 시작했다.
그래, 자모천뢰신궁,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크크크, 자모천뢰신궁이라니'''
소여천에게서 뿜어지기 시작한 마기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심혼까지 조여오는 듯한 지독한 공포감에 잠마전주는 각혈을 하며 애원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제, 제발'''고정하시고 마기를'''쿨럭! 소, 속하의 말을 '''크윽!
그 순간 잠마전주는 비로소 대항할 수 없는 공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더불어 그러한 괴로움 속에서 문득 예전의 구마군에 대한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이런 것이었던가? 대항할 수 없는 공포라는 것이''''단순히 짐작하고 있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군, 크윽!
자신의 군주인 소종사가 천마신교 역사상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대 초기재였으며 불과 마흔도  되기 전에 이미 극마의 단계에 들어서, 지금은 대종사와 같은 초마의 경지를 바라보고 있는 절대의 마종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소여천과 같이 탈마의 경지에 들어서 있는 자들이 작정하고 마기를 뿌려 댄다면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견디지 못할 것' 이라는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잠마전주가 실지로 느끼는 공포감은 관념적으로만 생각했던 것과는 다라도 정말 한참이나 달랐다.
비록 그가 다른 전주들에 비해 무공이 좀 처진다고는 하더라도 그 역시 극마의 초임에 들어서 있는 상태고, 극마와 탈마의 결지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태양과 반딧불을 비교하는 것처럼 비교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는 있었지만, 실지로 생전 처음 접해 보는 소종사의 마기는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절실히 느끼게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에 구마군인 백혼이 중원으로 나가 풍검신의 기세로 인해 주화입마를 당해 죽었다는 보고를 올리면서도, 솔직히 풍검신의 무위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뛰어난 경지라는 것만을 염두에 두었지 그것이 정말로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절실히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생사경? 자신이 알고 있는 두 명의 부교주와 원로원주, 수석장로, 그리고 소종사보다는 한 단계 위의 경지, 또한 대종사와 같은 경지''''
하지만 그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상대하자면 조금 더 희생이 따른다는 의미일 뿐, 천마신교 내에는 고수들이 넘치고도 넘쳐 자신은 풍검신과 직접 칼을 맞대고 싸울 일이 없을 테니 그런 것을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종사 역시도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소종사 본인에게 실질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 자모천뢰신궁의 존재에 대해서 이렇듯 격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리라.
잠마전주는 소여천이 뿜어내는 마기로 인해 한순간 마차바퀴에 짓눌리는 한찮은 벌레의 심정을 절실히 느끼며, 숨을 헐떡이며 다시 애원하기 시작했다.
허억, 헉! 소,소종사님''''바,방법이''''있습니다.대처 ''''방법이'''쿨럭!
연신 각혈을 해대며 간신히 그 말을 하자, 줄기줄기 마광을 뿜어내면서 빈 공간을 응시한 채 중얼거리고 있던 소여천이 그 제야 바닥에 널브러져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잠마전주를 응시하며 서서히 마기를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다.
대처 방법이라'''생사경에 이른작자가 천하삼대신병 중 하나라는 자모천뢰신궁을 지닌 채 지금 어딘가에서 본좌를 겨누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대처 방법이 있다는 말이지, 흐흐흐, 그런 자를 본교로 들여 스스로 칼을 물고 있는 형세나 마찬가지가 되었는데''''좋네, 자네의 알량한 대처 방법이란 게 무엇인지 들어보도록 하지.
비록 마기는 거두어졌지만 아직도 소여천의 두 눈에서는 사이로움이 흐르고 있었다.
잠마전주는 힘겹게 오체복지의 자세를 취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자,자모천뢰신궁은''''이미 오래 전에 본교에서 회수 조치가 내려진 기물입니다. 그 점을 이용하신다면'''
그러한 말에 소여천은 사이로운이 감돌고 있는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한 손으로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잠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도대체 자모천뢰신궁이 무엇이기에 소여천이 평소의 모습을 잃고 이토록 그 이름 앞에 겁을 먹는단 말인가?
신화의 시대부터 현세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세상에는 실로 적지 않은 수의 신병이기와 기보들이 전설처럼, 혹은 실지로 출몰하여 역사의 한 장을 장식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히 절대라고 불릴 수 있는 여섯 개의 신병이기를 사람들은 따로 고금육대천병이라 칭하고, 각각의 특성에 따라 천하삼대마병과 천하삼대신병으로 구분하여 불렀다.
자모천뢰신궁은 바로 그러한 천하삼대신병 중 하나였는데, 원래 정식 명칭은 앞의 '자모' 란 글자가 붙지 않은 그냥 '천뢰신궁'이었다.
그러한 천뢰신궁이 새로이 자모천뢰신궁으로 불리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팔백여 년 전 중원무림에 마치 장난감처럼 작고 앙증맞게 생긴 벽옥으로 말들어진 활을 사용하는 사람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러나 그가 그 장난감 같은 활로 쏘아내는 화살을 받아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도 당연한 것이 그 장난감 같은 활의 화살은 일반 평범한 화살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의 본신진기로 이루어진 강기 화살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쏘아진 강기 화살의 속도는 가히 빛살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 빠르기였고, 또한 사정거리 역시 추측이 불가하여 아무리 멀리 있는 자라 하여도 일시에 몸이 꿰뚫리고 말았다.
그렇게 그의 강호행보가 이어지는 동안 내로라 하는 고수들이 그의 일시조차 받아내지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자 불과 몇 년 만에 그는 당당히 천하제일인이라 불렸고, 사람들에게 천궁벽뢰자는 명호를 얻게 되었다.
또한 그의 독문병기인 자그마한 활도 전설상의 천뢰신궁과 같은 위력을 지녔다 하여 모양에 걸맞게 자모천뢰신궁이란 명칭이 붙었다.
천궁벽뢰자가 그 자그마한 화살로 천여 장 밖의 바위산을 일시에 허물었다는 것을 목격한 자들이 있었고, 그러한 우력이라면 능히 하늘마저 꿰뚫을 수 있다는 전설상의 신병인 천뢰신궁에 비견할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실지로 일시에 바위산을 허물었던 것은 아니었고, 거의 천여 장 밖에서 바위산 위의 거암을 박살 내어 그 파편이 아래로 구르면서 산사태와 같은 효과를 일으켰지만 그 광경을 목격한 호사가들이 산을 허물었다고 표현한 것이었다.
아무튼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충분히 일시파천의 위력이라고 인정했던 것이다.
한데 어느 날부터인가 천궁벽뢰자의 모습이 강호에 보이지 않게 되었고, 좀더 세월이 지나면서 그의 실종이 강호에 알려지게 되었다.
재미있는 일은 그 다음부터 벌어졌다. 사람들은 천궁벽뢰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비로소 자모천뢰신궁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자모천뢰신궁이 바로 전설상의 천하삼대신병 중 하나인 천뢰신궁임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로 강호는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듯이 들끓기 시작했고, 저마다 미쳐 날뛰었다. 천궁벽뢰자를 찾아서''''천뢰신궁을 찾아서!
하지만 천궁벽뢰자와 자모천뢰신궁의 행방은 이후로 바다 속에 가라앉은 모래알처럼 그 누구도 찾을 수 없었고, 그것은 팔 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왜 사람들은 천궁벽뢰자가 강호에서 활동할 당시에 그가 쓰던 자모천뢰신궁이 바로 전설상의 천하삼대신병 중 하나인 천뢰신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우선은 천뢰신궁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천뢰신궁은 전설상으로나 전해 내려오는 신벼이었고, 그 모습을 알고 사람도 없었으며, 당연히 천뢰신궁이라는 것이 그렇게 자그마한 장난감처럼 생긴 활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또한 천궁벽뢰자는 자모천뢰신궁을 사용하지 않을 때라도 천하제일인이라고 불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본신의 무공 또한 가히 절대적이었다. 그러한 점이 자모천뢰신궁이 가진 위력 자체보다는 그로 인해 자모천뢰신궁이 위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착각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서로의 명칭이 다르다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명칭이 천궁벽뢰자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 스스로가 천뢰신궁과 비슷하다고 여겨 붙여준 이름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고, 결국 자신들이 붙여놓은 이름 때문에 두 개의 물건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착각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심중으로 혹시나 하며 의심하던 사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고정관념에 의해 별다른 의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소수의 의심은 그저 술자리에서의 농담으로나 취급되었고, 또한 실지로 나서서 그것을 확인해 볼 담량을 지닌 자도 당시의 무림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어떻게 자모천뢰신궁이 다시 천하삼대신병 중 하나인 천뢰신궁이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것일까?
그 또한 우습게도 천궁벽뢰자가 강호상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야 비로소 자연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천궁벽뢰자가 자모천뢰신궁을 사용할 때 보여주었던 그 파천의 위력! 아무리 본신의 능력이 뛰어난 설사 무신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하더라도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말 그대로 일시파천의 위력에 대해 떠올리다 보면 당연히 또다시 천뢰신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만 그동안은 천궁벽뢰자라는 절대자의 손에 들려 있었기에, 그리고 사람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천궁벽뢰자가 배제되고 나자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모천뢰신궁이라 부르던 그 자그마한 활이 바로 전설상의 천뢰신구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다.
지금도 아닐 것이라는 의견을 지닌 사람이 있긴 하지만, 예전과 달리 이제는 그러한 의견은 극소수일 뿐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르는 비화가 또 하나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천마신교와의 일이었다.
당시 천마신교에는 천궁벽뢰자가 사용하는 자모천뢰신궁이 바로 전설상의 천뢰신궁일 거라고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그는 당시의 부교주인 수라마군이었는데, 천마신교에서는 고금육대천병에 대해서 모두 출현 즉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회수토록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주장에 의해 당시 삼백여 고수가 그와 함께 은밀히 중원으로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수라마군을 비롯해 천마신교의 삼백여 정예고수들은 중원으로 나선 지 얼마 후 모두 소식이 두절되었고, 이후에 천궁벽뢰자도 강호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천마신교의 고수들 역시 끝내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천마신교에서는 그들이 모두 천궁벽뢰자에게 죽음을 당했을 거라고 판단하고, 다시 그들의 종적을 찾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지만 끝내 천궁벽뢰자는 물론 당시의 부교주인 수라마군을 위시한 삼백여 고수들의 행방도 발견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것은 불가사이한 수수께끼로 여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모천뢰신궁의 행방에 알려진 다면 당연히 천마신교에서는 즉각 회수 조치에 나서게 될 터였다.
소여천은 나름대로 잠마전주가 했던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며, 그 의미 또한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기에 눈을 떠 끓어 엎드려 있는 잠마전주를 바라보았다.
그러한 소여천의 표정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의 담담함을 회복하고 있었고, 사이로움이 넘실거리던 두 눈 역시도 평소처럼 평범하게 돌아와 있었다.
본좌가 조금 흥분했던 모양일세. 하지만 본교의 사대전주 중 한 사람인 자네가 그 정도 기운도 버텨내지 못하다니. 아무래도 무공방면에도  좀더 신경을 쓸 필요가 있겠어, 아무튼 자네의 얘기는 확실히 일리가 있네. 그리고 그 대처 방법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고 말일세, 비록 본좌의 일에 그동안 배제시켰던 장로들을  개입시켜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아쉽기는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어쩔 수 없겠지,
잠마준저는 자신의 생각을 소여천이 충분히 알아차렸음을 느끼고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여전히 오체투지의 자세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꼭 염두에 두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한 말에 소여천의 눈썹이 또다시 가볍게 찡그려졌다.
뭐가 또 남았단 말인가? 이젠 자네 말을 듣기가 겁이 다 날지경일세, 그래, 무언지 말해 보게,
조금 전의 모습은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평소와 다름없는 소여천의 온화한 목소리를 들어면서도 잠마전주는 또다시 몸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지금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은 어쩌면 자모천뢰신궁을 언급했을 때보다 더 소종사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내용이었고, 다시 한 번 소종사에게서 그러한 마기가 뿜어져 나온다면 자신은 정말 견디지 못하고 심맥이 파열되어 죽어비리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조금 전에 맛보았던 그 끔찍스런 공포였다.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것은 두 번 다시 경험하기 싫은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 그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비록 평소에는 자신을 동료처럼 대하는 소종사였지만 사실 소종사에게 있어 자신은 당장 그 앞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벌레 같은 존재라는 것을,
하나 그는 자신이 충성의 맹세를 한 주군이다. 스스로 한 맹세에 대해서는 죽음 앞에서도 지킬 강단쯤은 있는 잠마전주였기에 그는 자신이 토해 낸 피로 흥건한 바닥에 머리를 쿵 찧으면 약간씩 떨리는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본교에는 자모천뢰신궁보다 더 무서운 기물이 하나 있습니다. 비록 지난 천오백 년의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그 위력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자명'''천마종.
그렇습니다. 본교 대종사의 신물이자 또한 천하삼대마병의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그것입니다. 다만 역대의 어느 누구도 자염천마종을 깨울 수 없었기에 단지 대종사의 신물로서만 인식되어 오고 있는 천고의 마병, 폐관 정의 대종사께서도 자명천마종을 깨우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대종사게서 폐관에 든 이유가 단지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쿵!
이번에는 소여천이 자신의 내명에서 무언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 전과 같은 마기를 뿜어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망연한 표정이 되어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이미 인간으로서는 이룰 수 있는 마지막 단계라는 초마의 단계를 이룬 분입니다. 그런 분이 폐관에 든 이유가 다음 단계를 밟기 위해서라는 것은''''지금껏 그리 생각해 왔었지만, 풍검신이 자모천뢰신궁을 지니고 있을 경우를 생각해 보니 독왕 진갈 등은 몰라도 최소한 기횐노조나 그가 부활시킨 마농사괴들은 결코 그러한 천고기병이 없다면 아무리 생사경의 경지를 이룬 자라 하더라도 무공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진정한 불사 마물들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의문스러웠던 점이 비로소'''' 모두 속하의 잘못입니다!
하지만 소여천은 더 이상 잠마전주가 하는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그리고 어째서 이제껏 그것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단 말인가? 어째서'''
진실은 어뚱한 방향으로 치달리고 있었지만, 그 중에도 진실은 존재하고 있었다.

2장 자명천마종의 전설


어떤 계획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노부 역시 자네를 따를 것이네, 하지만 그 전에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 하나 있네,
그것은 바로 폐관에 든 본교의 대종사일세.
마존각의 내부에서 백양신마가 약간은 쓸쓸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천우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자 한쪽에 서 있던 동사왕이 헛기침과 함께 냉큼 그 말을 받았다.
큼! 신마께선 천 아우의 능력을 보시고도 그런 말을 하시오?
대종사건 뭐건 염두에 둘 게 뭐 있단 말이오. 내친김에 이 길로 찾아가서 결판을 내면 간단한 일을 가지고,
아무리 천우를 곤패주로 인정하고 같은 편에 서기로 했다지만 마존각에 남아 있는 나머지 네 명의 원로들은 동사왕의 말에 분노의 표정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중 강퍅한 인상을 지닌 응조마군 구겸이 기어이 참지 못하고 동사왕을 향해 냉랭한 어조로 핀잔을 주었다.
귀하는 혹시 본교를 중원의 시시껄렁한 삼류 문파 정도로 착각하고 계시는 것 아니오? 이곳은 십만의 철혈무인들이 머물고 있는 용담호혈이자 지상 최강의 단체라는 천마신교란 말이외다. 아무리 곤패주의 무위가 무신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 하더라도 그런 본교의 대종사나 소종사를 그렇게 간단히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당신의 두뇌 구조가 심히 의심스러워지는구려.\
응조마군 구겸의 핀잔에 동사왕은 눈초리를 말아 올리며 코웃음과 함께 역시 냉랭한 어조로 맞받아쳤다.
흥! 십만 철혈무인 좋아하시네! 마교에서는 어미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칼을 휘두르면서 나오나 보지? 또 태어나는 놈들은 전부 천고기재라서 가르쳐주기만 하면 어떤 무공이든지 밥먹듯이 소화해 내고, 물 대신 공청석유라도 퍼 먹이나?
아닌 말로, 십만 무인이라면 뭐 하러 이제껏 천산 구석에 처박혀 있었을까? 뭐 칼만 들 수 있으면 전부 철혈무인이라고 부른다면 할 말 없지만 말이야.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하자고, 철혈무인이 아니라 흡혈마인이겠지, 세상 천지에 마교도들을 철혈무인이라고 한다면 세 살베기 어린애도 배꼽을 잡고 웃겠네, 그것은 지독한 독설이었고, 천마신교의 원로쯤 되는 구겸이 듣고서 감내할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뭐,뭐라고? 감히''''
감히 좋아하는 인간 또 있구먼, 한번 해보자고?
동사왕의 모욕에 응조마군 구겸이 순간적으로 격분을 참지 못하고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하자 동사왕 역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마주 기세를 피워 올렸다. 하지만 여전히 바아냥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손톱을 보아하니 계집애처럼 할퀴기가 주특기인 모양인데. 할퀴기는 것보다는 몸에 구멍이 뚫리는 게 좀더 아플걸? 물론 할퀴어봤자 손톱이나 부러지고 말겠지만,
이익! 
그만두게! 곤패주 앞에서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그리고 그의 말도 과히 틀린 것은 아닐세, 본교에 과연 진정한 철혈무인이라 칭할 수 있는 자들이 불과 몇이나 되겠는가, 그리고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없다는 것도 맞는 말이네, 노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말일세,
백양신마가 당장이라도 동사왕을 향해 출수하려는 구겸을 만류하며 그렇게 말하자 구겸은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로 백양신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리 저희가 곤패주를 따르기로 했다지만 이런 모욕을 어찌 참는단 말입니까, 더군다나 저자는 본교를 하찮은 삼류 문파정도로 취급하고 있으니''''
하지만 응조마군 구겸은 백양신마의 냉담한 눈길을 보고는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구겸, 자네는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일세,
백양신마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잔 떨림이 이는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구겸을 향해 냉정하게 그렇게 말한 뒤, 구겸처럼 나서지는 않고 있었지만 완연한 분노의 기색이 띄우고 있는 나머지 세 사람의 원로들에게도 한 차례 서늘한 눈길을 주고는 무심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노부와 자네들이 곤패주를 따르기로 한 것이 무엇 때문인가? 아니 그 전에, 자네들은 어째서 천마곤패를 그토록 기다려 왔는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백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동료로서 그리고 지인으로서 인정해 오던 6인의 죽음 앞에서도 그저 안쓰러운 눈길만을 보냈던 것인가?
그것은 노부와 자네들은 본교에 대해서 그들과 다른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럼 그 가치는 무엇인가? 바로 진정한 강자존의 율법에 의한 무인다운 삶과 죽음일세.
천마 조사의 휘하로 모여들었던 초대 마가의 가주들과 그 식솔들은 무엇을 바라고 모여던 것인가? 바로 천마 조사를 꺾어 보고자 함이었고, 능력이 안 된다면 진정한 강자의 손에 죽음을 맡기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무인으로서 본교인들에게 신이나 다름없었던 천마 조사와 겨룰 수 있는 영광을 얻기 위해 그분들은 피땀을 흘렸으며, 그 자격을 얻고자 경쟁하였고, 최후의 도정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었네,
백양신마는 냉엄한 눈길로 점차 표정을 굳혀가는 4인의 원로들을 다시 한 번 바라보고는 여전히 무심함이 흐르는 어조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가의 후예들은 어느 순간부터 두려움에 젖어 천마 조사에게 도전한다는 것 자체를 포기하고 단지 그분의 종으로 남기를 원하였네, 천마 조사께서 왜 홀연히 그들을 남겨두고 떠나셨겠는가? 나는 그 의미가 두려움에 젖어 진정한 무인이기를 포기한 마가의 후예들에게 실망하였기 때문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네.
그리고 남겨진 종들은 이후부터 서로를 지배하기 위해 싸우게 되었고, 신에 대한 도전자의 영광스런 지위는 종들의 우두머리로 전락했으며, 언제부터인가 다시 그 종들의 우두머리는 가소롭게도 신의 흉내를 내며 도전받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게 되었네.
그뿐인가? 자신을 받드는 나머지 종들에게도 마음껏 취할 수 있는 피의 달콤함과 지베라는 헛된 욕망을 맛보게 하기 위해, 엉뚱하게도 우리와는 전혀 이념과 목적이 다른 중원무림이란 곳을 향해 마음껏 그 추잡한 욕망을 휘두르도록 부추겼네.
그리고 그 마약과도 같은 추잡한 욕망에 사로잡혀 대부분이 피와 지배를 갈구하는 마졸들의 집단으로 전략한 것이 바로 지금의 본교일세, 노부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어디 한번 말해 보게,
딱히 누구를 지목한 것은 아니었지만 응조마군 구겸은 그 순간 백양신마와 눈길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세 명의 원로들 역시 누구도 백양신마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구겸 자네는 아직도 그 알량한 자부심을 가지고 저 친구와 싸우고 싶은가? 아직도 본교를 우습게 여기는 그의 태도에 분노가 이는가 말일세.
죄송합니다. 노사,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천마신교가 아닌 강자존의 율법을 위해서 목숨을 걸겠습니다.
그리고 도전할 것입니다. 후회없는 삶, 아니 죽음을 위해서, 또한 신에게 도전할 수 있는 영광을 위해서'''무인으로서늬 남은 삶을 모두 걸겠습니다.
어느새 고개를 든 응조마군 구겸의 두 눈에서는 활화산 같은 의지가 타오르고 있었고, 진정한 삶의 목표를 찾은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환희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나머지 3인의 원로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백양신마와 묵월의 두 눈도 마찬가지였으며, 한쪽에서 조용히 그 말을 듣고 있던 상천패등도  마찬가지였다.
그 활화산 같은 기세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동사왕마저 움찔하는 기색을 지어 보였다.
뭐, 뭐야 이 노인네, 그리 훌륭한 연설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한순간에 마교 녀석들의 기세를 모두 바꾸어놓다니''''
동사왕에게 있어 백양신마의 긴 연설은 그저 그런 감흥을 주는 일장 연설에 불과했지만, 천마신교에서 태어나 이곳ㅇ서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아온 그들에게 있어서는 받아들이는 의미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천마신교의 사람으로서 이 자링 남은 자들은 각자의 무공 성취와 지위 고하를 떠나서 모두가 그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천마신교에서조차 은연중 배척받는 삶을 살아온 자들이었고, 그런 그들에게 백양신마의 진심이 담긴 말은 잘자고 있던 가슴속의 화화산을 터트리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가만, 이것들 이제 보니''''설마 천 아우를 천마 대신 세워놓겠다는 수작 아냐? 누구 마음대로!
그러한 생각에 동사왕이 다시 쌍심지를 켜며 백양신마에게 따지고 들려는 순간, 백양신마가 타는 듯한 눈빛으로 동사왕을 바라보며 먼저 말을 꺼냈다.
이 보게, 동사왕, 자네가 본교나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것은 잘 아네, 하지만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네, 자네 말대로 곤패주의 능력이라면 이런저런 여건을 따지지 않아도 상관이 없을 테지만, 쓸데없는 피를 볼 필요는 없지 않겟는가, 또한 곤패주나 자네 역시 그러한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네, 때문에 구체적인 검토도 필요한 것이고. 특히 대종사에 관해서는 반드시 알아둘 필요가 있다네.
험!내가 언저 뭐라 했소? 잠자코 있을 테니 할 말이 있으면 마저 하시구려,
그 강렬한 눈빛과 주위의 분위기 탓인지 동사왕은 자신이 지금 따지고 들었다가는 본존도 못 찾을 것 같은 느낌에 '역시 만만치 않은 노인네,'라는 생각과 함께 일단은 한 발 양보하는 태도를 취했다.
백양신마는 동사왕이 불만 가득한 기색으로 뭔가 말하려 하다가는, 일단은 자신의 말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자 빙긋 미소를 떠올리며 다시 천우를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본교의 소종사 역시 최고의 자질을 타고난 절대기재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육십여 년 전에 폐관에 든 대종사야말로 천마 조사를 제외한다면 본교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성취를 이룬 불세출의 기재이자, 또한 절대마종이라 부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분일세.
당시에 이미 생사경과 동일한 경지라는 초마의 경지에 이르러 폐관에 들었으니, 육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그분의 성취가 어느 정도일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네.
물론 그 상태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는 것이 단순히 세월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네만, 일반적으로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궁극의 경지라는 초마의 경지를 이룬 분이 갑작스럽게 폐관에 들었다 함은 분명 이유가 있기 때문일 걸세.
천우는 백양신마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만큼 여전히 무덤덤한 기색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동사왕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은 완연히 놀란 표정들을 지어보였다.
마교의 대종사쯤 되는 자인 그가 초마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는 것도 한 번쯤은 짐작해 볼 수 있는 일이었고, 그렇기에 특별히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 상태에서 육십여 년 동안의 폐관이라는 것은 확실히 심상치 않은 무언가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던 것이다.
중인들의 놀람과는 달리 여전히 담담한 기색을 유지하고  있는 천우를 응시하며 백양신마는 차분한 어조로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대종사가 천마 조사와 같은 경지를 밟아보기 위해 폐관에 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노부는 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네, 얼마 전 곤패주의 신위를 직접보지 않았더라면 그 이상의 단계라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겠지만, 직접 눈으로 보았으니 인전을 해야겠지.
그러나 노부가 우려하는 부분은 그러한 대종사의 성취가 아니라 좀더 현실적인 부분일세.
자네 자명천마종이라고 혹시 들어본 적이 있는가?
모릅니다.
천우는 간단히 대답했지만 오히려 주위 사람들이 놀라는 음성으로 말했다.
자명천마종이라면 천마신교의 절대신물이자 대종사의 신물로도 알려져 있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단리종후가 나서며 아는 척하자 백양신마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렇다네, 한데 그 자명천마종이 바로 전설상의 고금삼대마병 중 하나라는 것도 알고 계시는가?
이미 서로 간에 약식으로나마 소개가 오고 간 후라 백양신마 역시 단리종후의 신분이 중원 정파무림의 맹주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정중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그럴 수가''''
그게 단순히 마교의 신물이 아니라 고금삼대마병 중 하나였단 말인가?
그 순간 중인들에게서는 또다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백양신마는 사람들의 그러한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기 시작했다.
중원에는 단순히 본교 대종사의 신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전에 그것은 천마 조사께서 남긴 고금삼대마병 중 하나일세. 그리고 내가 우려하는 부분은 바로 대종사의 폐관 목적이 바로 자명천마종을 깨우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일세.
그 말에 잠자코 있겠다던 동사왕이 참지 못하고 다시 참견하기 시작했다.
험! 확실히 좀 의외기는 하지만 그게 무슨 걱정이라고 그러시오? 그 고금삼대마병인가 하는 것도 보니까 별것 아니더이다. 그러니 신마께서는 자명천마종이 깨어나건 계속 잠을 자건 신경 쓰지 마시고, 어서 다음 할 일이나 의논해 봅시다.
동사왕의 말에 놀란 건 이번에는 천마신교 측 사람들이었다.
자네 지금 고금삼대마병을 보았다고 했는가? 그게 정말인가?
그까짓 걸 뭘 그리 놀라시오, 어디 보기만 했겠소, 가지고 있는 놈이 우리 중에 버젓이 있는데, 그러고 보니 신병을 가지고 잇는 놈도 있네? 쯧쯧! 어쩌다 저런 녀석들을 주인으로 만나 가지고, 육대천병이라는 이름이 아깝다, 이름이 아까워!
백양신마가 놀라서 하는 질문에 동사왕이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갑자기 곁눈질로 누군가를 바라보면서 혀까지 차며 그렇게 말하자 순간적으로 두 사람이 움찔거렸다.
그 한 사람은 백낙천이었고, 또 한 사람은 자신을 호천문의 후예라 밝혔던 화천악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가까이 붙어 서 있었고, 동사왕의 곁눈질이 정확하지 않았기에 두 사람 모두 그것을 자신을 향한 눈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태양륜을 지니고 있는 백낙천이야 그렇다 쳐도, 동사왕의 곁눈질에 화천악조차 움찔거리는 것은 조금 의아한 일이었다.
하지만 별다른 의미 없이 바라본 것이었기에 동사왕은 곧 시선을 똑바로 하고는 다시 퉁명스럽게 말했다.
쓰는 녀석들이 변변치 않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들 정도면 모를까 천 아우에게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는 것들이오, 뭐, 신마께서도 궁금하면 가진 녀석들에게 보여 달라고 해보시오 만지지 않겠다고 하면 보여줄지도 모르니까.
백양신마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안색마저 변한 채 동사왕을 바라보는 가운데 천우와 함께 온 중인들 역시도 크게 놀란 표정들을 지으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들 역시도 염상의 염와혈옥수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또 다른 신병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반응에 백낙천과 화천악이 남모르게 진땀을 흘리는 가운데,이미 직접적인 원한은 갚았기 때문인지 약간은 허무해 보이는 기색을 띠고 있던 염상이 탁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한 노선배는 내가 염왕혈옥수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그런 말을 하시는 듯하오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오, 비록 내가 염왕혈옥수를 얻기 했지만 실지로 나는 염왕혈옥수가 갖고 있는 능력의 단 3할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있소, 한 노선배의 말처럼 내가 변변치 못하기 때문이긴 하오만, 사실 그 정도만으로도 여기 있는 사람들 정도가 아니라면 대적하기 힘들 것이오.
그리고 한 노선배의 의제 되시는 분의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도 보았소만, 아마 염왕혈옥수가 가진 십 할의 능력이라면 그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역시 가공할 위력을 나타내리라 보고 있소, 사용한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다른 결과가 나올 테니 마교의 신물이 삼대마병 중 하나라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소이다.
여전히 건방지고, 예의없는 말투였지만, 그래도 처음의 그에 비한다면 대단히 양호해진 상태이고, 나름대로도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기에 동사왕은 참기로 했다.
하지만 조금도 인정해 줄 건덕지가 없는 내용이었기에 동사왕은 또다시 가볍게 혀를 차며 말했다.
쯧!네 녀석을 두고 한 말은 아니었다만 어쨌든 겸양을 취하는 모습도 썩 나쁘진 않고, 나름대로 천 아우가 걱정이 돼서 한 말이라고 받아들이마, 하지만 그 정도는 '''''에잉!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붙잡고 떠들어 봐야 괜히 내 입만 아프고,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아무튼 나중에 직접 겪어보면 알 테니 관두자,
동사왕이 정말로 입 아프다는 듯이 입 주변을 쓱쓱 문지르면서 얼렁뚱땅 넘기려 하자, 이번에는 아직도 놀란 심정을 완전히 가라앉히지 못한 백양신마가 염상을 향해 물었다.
자네가 정말 천하삼대마병 중 하나라는 염왕혈옥수를 지니고 있단 말인가?
그렇소,
천성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천마신교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염상이기에 백양신마의 물음에도 퉁명스런 대답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백양신마는 그에 전혀 개의치 않고 나직한 침음성과 함께 다시 말했다.
음, 실례가 되는 행동이라는 것은 알지만, 자네 혹시 이 자리에서 그것을 보여줄 수는 없겠는가?
하지만 염상은 차가운 눈길로 백양신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하오만, 나는 하나뿐인 친혈육을 마교의 쓰레기 같은 놈에게 잃었소이다. 때문에 마교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소, 또한 알게 계실지는 몰라도 염왕혈옥수를 전개하면서 평소의 자제력을 유지하기란 그리 쉽지 않소이다. 때문에 이 자리에서 노야의 부탁을 들어주기는 좀 어려울 것 같소,
하지만 '''나는 유람이나 하러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니 조만간 충분히 견식시켜 드릴 수 있을 것이오. 염왕혈옥수가 왜 염라대왕의 손길' 이라 불리는지 말이오.
기대 어닐 백양신마의 표정이 절로 굳어들 만큼 무례하면서도 명백한 거절이었고, 어느새 염상의 백태 어린 두 눈에서는 독기와 함께 살기마저 뿜어져 나오고 있었지만 백양신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랬는가, 별달리 할 말은 없네만, 아무튼 노부가 괜한 말을 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네.
백양신마의 말에 염상 또한 무의식적으로 들끓기 시작한 살기를 애써 억누르며 무표정한 얼굴로 간단히 대답했다.
괜찮소이다.
마교도라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원한을 지니고 있는 염상이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원수인 모추능을 처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묵월이나, 마교도답지 않게 진정한 무인의 기백이 느껴지는 백양신마에 대해서는 그도 악한 감정을 갖기 힘들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호의적인 감정이 생겨나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발심리가 작용하여 그로 하여금 더욱 퉁명스런 태도와 함께 오히려 살기를 뿜어내도록 만든 것이었다.
염상과 백양신마의 대화로 장내의 분위기가 약간은 어색하게 변했지만, 역시 이백여 년의 세월을 살아온 연륜을 보여주듯 백양신마는 금세 원래의 신색을 회복하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다시 천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일행들 중에 고금육대천병을 지닌 자들이 있을 줄은 몰랐네, 아무튼 저 친구의 말처럼 사용하는 사람이 누구냥 따라서 그 육대천병들은 분명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고, 대종사가 만약 자명천마종을 깨웠다면 절대로 경시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단 말일세,
본교에는 자명천마종에 대해 이런 구절이 전해 내려오고 있네,'자명천마종을 깨우는 자, 마신의 권능을 부여받아 능히 영겁과 파멸과 혼돈의 달을 띄우게 되리니'''
세 개의 달이라니!
백양신마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중인들은 천마가 남겼다는 자명천마종에 대한 전설 중에 영겁과 파멸과 혼돈의 달이라는 구절이 나오자 또다시 가벼운 경악성들을 토해 내었다. 그 바람에 백양신마도 다음 구절을 잇지 못하고 다시 의혹의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비록 천마신교 내에서 극비라고 까지는 할 수 없는 내용이라고 해도 그것은 외부에 함부로 흘러 다닐 만한 내용은 아니었고, 또한 굳이 그 부분에서 사람들이 경악성을 발한 만한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백양신마는 혹시 묵월이 이미 말해 준 내용인가 싶어 그를 바라보았지만, 묵월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있다.
중인들이 경악성을 발한 이유는 당연하게도 천산귀왕이 말했던'세 개의 달이 동시에 뜨는 곳' 이라는 내용과 어딘지 모르게 연관성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묵월 또한 그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어리둥절해 하는 이유는 당시에 홀로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져 있었기에 그 말을 듣기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묵월로서도 중인들의 그러한 반응이 백양신마와 마찬가지로 의아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종일관 무덤덤한 기색으로 백양신마의 말을 듣고 있던 천우 역시 그 부분에 이르러서는 죽립 안쪽에서 두 눈에 이채를 담았으며, 백양신마의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자밋 후 궁금증을 풀어드릴 테니 마저 말씀해 보도록 하십시오.
흠, 자네들의 태도를 보니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모습인데''''도통 알 수가 없구먼, 아무튼 이어지는 전설의 뒷부분은 천하만마가 피를 토하며 그 앞에 엎드려 앙복할 것이며, 천시조차 두려움에 떨게 될리라,'라는 내용일세.
노부로서도 이 구절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자명천마종이 울린다면 온 천하를 앙복시킬 만한 위력이 나타나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일세, 자명천마종과 그러한 구절을 남긴 이가 바로 천마 조사였으니 절대로 허황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지.
결국 그동안 대종사가 어떤 성취를 이루었을지, 또 절대마물인 자명천마종을 깨웠는지의 여부는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일세, 최종적으로 자네는 대종사와 부딪칠 수밖에 없으니 말일세.
백양신마가 그 말을 끝으로 이제는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줄 차례라는 듯이 물끄러미 천우릴 응시하자, 천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혹시 천마무영패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천마무영패라''''글쎄?
이것입니다.
천우가 품에서 천산귀왕에게 손쉽게 돌려 받은 천마무영패를 꺼내어 백양신마에게 내밀자 그것을 받아 든 백양신마가 이리저리 뒤처깅며 살펴보기 시작했다. 가운데가 조금 볼록하니 솟은 타원형 모양인 그것은 아무런 문양이나 기타 특이한 점을 찾아 볼 수 없는, 그저 목에 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값비싼 패물처럼 보이는 홍옥패였다.
그러나 아무리 주의 깊게 살펴보아도 별다른 특이점을 찾지 못하자 백양신마는 그것을 다시 천우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명칭으로 보아 천마 조사와 관련이 있는 물건인 듯싶었지만, 처음보는 것은 물론이고, 명칭이나 내력에 대해서도 전혀 들어본 바가 없는 물건일세.
천우는 다시 백양신마가 건네주는 천마무영패를 받아 들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이 패도 천마가 남긴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천우는 차분한 어조로 천산귀왕에 관한 일을 말해 주었다. 그 얘기를 듣는 동안 백양신마는 물론이고 묵월과 다른 원로들도 크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음, 천산귀왕에게 그런 비사가 있었을 줄은 미처 몰랐네. 더군다나 천마 조사가 남긴 또하나의 신물이라니''''그리고 세 개의 달이 동시에 뜨는 곳이라면 ''''우연인지는 몰라도 확실히 자명천마종의 전설에서 말하는 영겁과 파멸과 혼돈의 달이라는 어귀와도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구먼,
사람들도 무언중에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가 그 의미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보고 있을 때, 동사왕의 무료함에 젖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아함! 세 개의 달이 동사에 뜨는 곳이라기에 마교 어딘가에 있는 폭포가 있는 연못쯤을 암시하는 줄 았더니''''난데없이 영검이 어쩌고 하는 달 세 개가 나오는 것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네.
하긴 당대제일 이라고 불리는 작자들도 뭔가 남기면서 죽을 땐 신비한 척하느라 이리저리 비비 꼬아서 사람들을 골탕 먹이는 판국인데, 천마쯤 되니 오죽하겠어?
영겁과 파멸과 혼돈이라'''''누가 천마 아니랄까 봐 어휘도 살벌하구만, 어떤 놈이 종이라도 울리면 나타나서 세상 종 치게 만들겠다는 건가? 근데 달은 또 뭐 하는'''''
아! 그, 그렇군요! 동 노사님, 그 말''''분명히 의미가 이어집니다.
하품을 섞어가며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나오는 대로 중얼거리던 중에 갑자기 백낙천이 탄성을 토해 내며 불쑥 끼어들자 동사왕이 게스츠레한 눈으로 그런 백낙천을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
동 노사님께서 조금 전에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종이 울리면 나타나서 세상 종 치게 만든다고''''
그 순간 동사왕의 무료한 표정은 금세 본래의 진면목을 회복했고, 눈빛 또한 맹수의 그것처럼 변했다.
오호! 방금 전의 그 말이 네 녀석 종소리였나? 그럼 이제 인생 종 치게 만들어주면 되겠구나.
이미 한두 번 겪어본 일이 이닌지라 백낙천은 엉뚱한 불똥이 튀기 전에 빠른 어조로 말을 잊기 시작했다.
천산귀왕은 분명 동사에 세 개의 달이 뜨는 곳에서'나'를 만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엔 저도 세 개의 달이 뜨는 곳이 어떤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고, '나'란 의미가 천마의 유체나 그가 남긴 유품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천마가 남긴 자명천마종의 전설에서 또다시 구체적으로 세 개의 달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세 개의 달은 같은 의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그 '세 개의 달이 뜨는 곳' 은 어떤 장소라기보다는 자명천마종이 울림으로써 일어나게 될 어떤 조건일 것입니다. 즉 장소가 아닌 어떤 행위로 인해 '나를 만날 수 있다' 고 표현한 것이고, 그것은 바로 천마의 현신이나 강림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지난 세월을 생각해 본다면 당연히 천마 본인일 리는 없으니 그것은 아마도 이혼대법 등과 같은 강림의 의미일 것입니다. '마신의 권능을 부여받아' 라는 구절을 생각해 보아도 그럴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결국 천마무영패와 자명천마종이 전하는 두 글귀의 의미를 합쳐서 생각해 보면, 자명천마종이 울릴 시 어떤 형태인지는 몰라도 세 개의 달이 동시에 나타난다는 것이고, 자명천마종을 울린 자는 천마의 권능을 얻어 세상을 파멸시킬 힘을 얻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으음,
듣고 보니 그럴듯하군,
비록 한 번도 쉽이 없는 빠른 어조였지만 모두들 백낙천이 하는 말을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들을 수 있었고, 그 의미 또한 상당히 일리가 있는지라 또다시 몇몇 사람들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동사왕 역시 험악하게 구겨져 있던 인상이 어느새 놀람으로 바뀌어 있었고, 백낙천의 말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려는 듯 눈동자를 또르르 한 바퀴 굴렸다.
그러니까, 자명천마종을 울리는 놈한테 천마의 귀신이 강림한다 그 말인가?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마신의 권능을 부여받아' 라든가 '나를 볼 수 있다' 라는 표현을 썼겠습니까?
그럼, 천마 그 작자는 자명천마종을 울리는 자에게 강림해서 환생하겠다는 심보고, 그 자명천마종을 울리는 자에게 강림해서 환생하겠다는 심보고, 그 자명천마종은 일종의 주술적 힘을 담은 마개체이자 마교 대종사의 신물이기도 하니''''결국 마교 대종사라는 지위는 천마에게 몸 바치는 제물의 역활이라는''''
그만 하게! 자네가 그렇게 일일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노부는 지금 충분히 혼란스럽고 비참한 심정일세.
아니 뭐 비참하실 것까지야''''
연신 눈동자를 굴려가며 가급적이면 최대한 좋아 않은 방향으로 설명을 이어가는 와중에 백양신마의 침중한 음성이 울려오자 동사왕은 그제야 말끝을 흐리면서 은근슬쩍 딴청을 피웠다.
그 순간 천우의 의식 속에서는 오랜만에 아티오네스의 음성이 울려오고 있었다.
[이봐, 저들의 말을 듣다가 문뜩 떠오른 생각인데, 내가 있던 아벨란 대륙에는 이곳과 달리 세 개의 달이 존재하고 있다, 시조의 드래곤이신 데이얀님께서 말씀하시길 그 세 개의 달에는 마나가 거의 존재하지 않아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척박한 곳이라고 했는데, 인간들은 그것을 모르기에 각기 신의 이름을 따서 축복의 여신인 '헬리나의 미소' 와 창조의 신이자 주신인 '헤모스의 가호' 그리고 풍요와 질서의 여신인 '엘바의 보석' 이라고 부르고 있지.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자니까 그 천마가 말했다는 영겁과 파멸과 혼돈의 달이라는 말은 어쩌면 아벨란 대륙에 존재하는 그 세 개의 달과 극히 상충되는, 정 반대나 마찬가지인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거든, 뭐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어쩌면?]
천우는 백양신마의 말을 들으면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그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고, 백낙천의 말을 통해서도 자신의 생각이 크게 틀리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천우가 생각하고 있는 바와 백낙천이 말한 것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상당히 비슷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들려온 아티오네스의 음성은 일말의 호기심을 느끼게 했다.
[어쩌면 말이지'''그 천마라는 인간은 이미 아벨란 대륙에 다녀온 것이 아닐까? 물론 가능서이 무척이나 희박한 얘기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느낌이 드는군.]
어쩐지 심각한 어투였기에 천우는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척 심각한 투로 말하는군,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지?]
[이런! 한번 생각해 보라고, 아무리 헬로가드 저 녀석이 멍청한 마왕이라지만 그 능력만큼은 누가 뭐래도 마왕이라고, 그런 능력을 고스란히 얻은 자가 딴 세상으로 넘어갔다가 왔다면 조용히 관광만 하다가 왔겠어? 모르긴 몰라도 엄청 분탕질을 쳐놓고 왔을 게 뻔하지.
네 생각을 나도 느끼기에 하는 말인데, 이곳에서 그 작자가 벌여놓은 일을 보면 ㅏ마왕 녀석들이 하는 짓거리와 별반 다를 게 없거든, 의지력 약한인간들을 세뇌시켜서 자신의 종으로 삼아 인간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게 만들고, 한쪽에서는 그것을 구경하면서 즐거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마왕이란 족속들이 벌이는 인간 세상에서의 유희란 말이지.
물론 겸사겸사 어둠의 맹세를 한 인간들의 불쌍한 영혼을 마계로 끌어들이는 것도 목적이랄 수 있겠고,]
그런 말을 얌전히 듣고만 있을 헬로가드가 아니었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정말 기가 막히는군. 좋다, 마왕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인간들에겐 좋게 보이지 않는 일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너희 드래곤이란 족속들은 대체 뭐냐? 지산 최강의 생명체이니 중간계의 조율자니 하면서 인간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드워프나 엘프, 그리고 몬스터들까지 마구 부려먹으면서 심심하면 잡아먹기도 하지 않느냐?
더군다나 삶이 지겹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무런 목적도 없이 유희라는 것을 통해 인간 세상은 물론 중간계를 제멋대로 휘저어 놓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우리마족들까지 끌어들여서 유희를 즐기는 족속들이 바로 너희 들래곤들이다. 그런 주제에 마왕이나 마족들만 인간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처럼 말하다니. 드래곤의 양심에 찔리지도 않는단 말이냐?]
헬로가드의 반격에 천우의 의식세계가 슬며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잡아'''먹어?인간을?]
[아니,아니야. 난 절대로 그런 적 없다, 헬로가드 저 녀석의 말은 어디까지나'''그렇지! 너도 겪어봐서 알겠지만 인간들 중에도 별종이 있지 않느냐, 왜 얼마 전에도 천산귀왕인지 뭔지하는 웨어울프처럼'''''그놈은 변종이던가? 아무튼 그런 별종들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창피한 얘기지만 우리 드래곤들 중에도 그런 별종들이 간간이 존재하고 있고, 그래서 그런 녀석들을 인간들은 미친 드래곤이라고''''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런 별종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드래곤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마왕 녀석들은 백이면 백이 전부 다가'''']
[알았으니 그 얘긴 그만 하도록 하지.]
[정말이라니까!]
[두고보자, 바보 마왕 녀석!]
[흥! 우린 뭐 떳떳하니까!]
백양신마는 어떠한 일에도 흔들림이 없던 천우의 입매가 죽립 아래서 묘하게 비틀려 있는 것을 보고는 그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나직한 탄식과 함께 말하기 시작했다.
후우, 노부 역시 자명천마종의 전설이 그런 의미일 수도 있다는 것은 전혀 생각지 못했네, 지금이라도 부정하고픈 생각이 간절하네만''''그건 스스로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 되겠지.
어쨌든 예상 밖이긴 하지만 노부가 우려하고 있던 일에 대한 실마리가 풀렸고, 지금껏 나누었던 얘기들이 사실로 닥치기 전에 서둘러야 할 것 같네, 자칫 시기를 놓치게 된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겁난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말일세.
그때 이제껏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던 무극검존 단리종후가 나서며 백양신마를 향해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노야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말씀해 보시오.
단리종후는 백양신마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 있는 질문이기에 먼저 사전에 양해 구하였다.
먼저 별다른 뜻이 있어서 하는 질문은 아니라는 것을 양지해 주시고, 혹시라도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궁금히 여기는 것은 어째서 그 자명천마종의 전설에 대해서 노야께서는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심각하게 여기시는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과 같이 한 배를 탓다고 볼 수 있는 상황에서는 엉뚱한 질문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만, 천마신교의 입장에서 보면 그러한 전설의 실현은 정작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원칙 아니겠습니까?
질문의 요지가 상당히 거슬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천마신교를 진정으로 위하는 노야 같은 분이시라면 당연히 그럴 분이라고 여겨지기에 결례인 줄 알면서도 여쭘는 것입니다.
단리종후의 질문에 중인들 중에서도 공감을 표시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고, 아차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만큼 그것은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고, 백양신마나 다른 마교 원로들의 본심을 엿볼 수 있는 질문이기도 했다.
백양신마 역시 단리종후의 질문이 정곡을 찔러오는 질문임을 느끼고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맹주께서 이 늙은이를 그렇게 봐주셨다니 의당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구려, 그리고 당연한 질문이기도 하오, 단순히 생각하자면 본교의 창시자이신 천마 조사께서 다시 부활하는 것과도 같은 의미일 수도 있는데 천마신교의 원로로서 어찌 그러한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소.
하지만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지금과 같은 상황 때문만은 절대 아니오. 정작 문제는''''천마 조사의 부활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이미 천마 조사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그저 피와 죽음만을 바라는 절대 사녀에 불과하기 때문이외다.
자랑할 만한 것을 못 되오만, 아시다시피 본교에는 소위 마공이라 불리는 패도적인 무공 외에도 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사법과 술법들 역시 총망라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오. 때문에 강림술이나 이혼대법과 같은 사법이나 사술에 정통한 만면, 그 폐헤에 대해서도 어느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소이다.
백양신마는 마음이 편치 않은 듯 잠시 말을 멈춘 채 침중한 표정을 짓고 있는 원로들을 한 차례 둘러본 뒤 다시 단리종후를 바라보며 낮게 가라앉은 어조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본시 마공이란 인간의 잠재된 마성을 일깨워 수련을 하는 것이고, 그 마성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단계부터는 극마, 의지로 마를 벗어날 수 있는 단계를 탈마, 완전히 마를 제압하고 다스려 마를 뛰어넘는 단계를 초마의 단계라 칭한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실것이오.
하지만 마공을 익히는 자가 상승의 경지로 간다는 것은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본질을 더욱 진정한 마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오. 때문에 초마의 단계에 다다른 이는 의지로 마를 완전히 뛰어넘어 전혀 마가 아닌 듯하지만, 오히려 그 본질만은 더욱 근원적인 마와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하오.
그리고 이것은 사후에 령 또한 그러한 본질적인 마로서 남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오이다. 한데 문제는 본질적인 마와 가까운 마령일수록 사우에는 생전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더욱 마의 본분을 다하려 애쓴다는 것에 있소이다.
더욱이 이미 유계를 돌아본 마령이라면 생전의 의지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게 되고, 또한 더욱 강력해져서 그러한 마령의 강림을 받은 자는 아무리 의지가 굳건해도 결코 대항할 수 없는 법이오.
그러한 마령을 본교에서는 절대마령이라고 부르고, 그러한 유계를 돌아본 절대마령은 절대로 불러내지 않소이다. 물론 중원의 몇몇 사교에서 그러한 시도를 했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아직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고, 또한 그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소.
왜냐하면 그러한 절대마령이 있는 유계까지 힘이 미치려면 실로 엄청난 영력이 필요한데, 경우에 따라서는 몇만에서 몇십만 명 정도에 해당하는 영력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소, 그러니 절대 마령을 인위적으로 불러내어 강림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소이다.
그러나 간혹 가다가 이러한 절대마령들이 스스로 유계를 돌아 나와 모태에 강림하는 경우가 있소, 그렇게 해서 태어난 자들이 바로 천살성이니 혹은 천마성이니 하는 명칭으로 불리는 것이오. 그리고 그러한 마령을 타고난 자 역시 의지와는 상관없이 결국은 마령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소,
그러한 자의 행동이 아무리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고 또한 본래의 의지가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단지 절대마령의 속임수일 뿐, 유계를 돌아본 마령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단 하나''''바로 유계로 끌고 갈 사람들의 원혼일 뿐이오. 그러한 사념은 결코 바뀌거나 멈추는 법도 없고 그 끝과 한계도 없소이다.
그럼 이제 생각해 보시구려, 천마신교 역사상, 아니 전 무림 역사상 마의 본질에 가장 근접했던 천마 조사의 절대마령이 유계를 돌아 본교의 대종사에게 강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천하만마가 피를 토하며 앙복하는 것은 물론 천신마저 두려움에 떨게 한다는 구절은 바로 세상 전부를 피로 뒤덮겠다는 의미일 것이오. 그리고 그러한 일을 예견하면서도 천마 조사가 이 모든 것을 안배한 것이라면 어찌 이 늙은이라 한들 그것을 마냥 기쁘게만 받아들일 수 있겠소?
이늙은이는 이제껏 진정한 무인이기를 바라며 살아왔소, 유계의 사념뿐인 마령의 종으로서 아무 의미 없이 허수아비처럼 휘둘리다가 피의 제물로 허무하게 사리지기 위해 살아왔던 것이 아니란 말씀이오.
중인들은 백양신마의 말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었고, 그 때문인지 장내에는 잠시 숙연한 감마저 감돌았다.
어리석은 질물을 한 것에 대해 단리종후가 깊이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단리종후가 고개 숙이며 사과의 말을 건네자 백양신마는 마음속의 격정을 가다듬는 듯 가벼운 심호흡과 함께 다시 담담한 모습으로 그에게 말했다.
후우! 아니오. 이 늙은이가 쓸데없이 말이 길었소이다. 그리고 단리 맹주의 궁금증이 풀리셨는지 모르겠소.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어느새 또다시 무료한 표정으로 두 눈이 게슴츨해진 동사왕이 백양신마에게 불만 섞인 음성으로 질문이 있다고 하자 백양신마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그를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말해 보게.
벌써 정오가 지난 듯한데 밥은 언제 먹을 겁니까?
왜 대답이 없으시오?
자네, 배고픈가?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마교에 도착한 이후로 이제껏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했소이다. 그리고 당장 밖에 있는 놈들 부터 처리하려면 뭐든 먹어야 힘을 내서 싸우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오.
그 때문이라면 조금 참도록 하게. 밖에 있는 자들과는 싸우지 않아도 될 테니.
그게 무슨 말이오?
마존각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곤패주를 따르는 사람들 쪽이니 굳이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일세.
에? 하지만 먼저 죽은 그 여섯 사람을 쫓아온 무리들도 많은 것 같던데, 그들이 가만있을 리가 있겠소?
상관없네, 비록 여섯 원로가 죽긴 했지만 이러한 방법도 본교에서는 율법으로 인정되는 의결방법 중 하나일세. 그러니 여섯 원로들의 가솔들도 모두 수긍할 것이네. 단지 그들의 직계들만 율법에 따라 혈수결에 따른 권리를 인정받게 될 것일세.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소, 아무리 마교라지만 원로라는 자들이 회의 도중에 떼거지로 죽었는데 그게 정상적으로 인정되는 회의방법이란 말이오?
그렇네, 비록 원로원에서는 다수결을 원칙으로 하고 있네만,
만약 소수의 의견을 피력한 자들이 다수결의 의견을 절대로 수용할 수 없다면 실력행사로 그를 거부할 수 있네, 즉 소수가 다시 다수가 되면 된다는 것일세. 이를 혈수결이라 하네.
물론 자주 있는 일은 아니고 천마곤패가 사라진 이후 지난 천여 년 동안 혈수결에 따른 의결은 단 한 차례도 없었네. 하지만 그 전에는 몇 차례 혈수결이 단행된 적이 있었네, 비록 성공한 적은 극히 드물었지만 말일세.
백양신마의 말에 중인들은 또다시 아연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들 또한 동사왕과 마찬가지로 이곳을 나서자마자 한바탕 피 바람을 일으켜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그럴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안에서 벌어진 일 또한 마교에서는 정상적으로 인정되는 방법이라는 말에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쩝, 뭐, 마교의 규칙이 그렇다니 따지고 싶은 맘은 없소만, 그래도 살기를 뿜어내면서 이곳을 오고 있는 놈들과는 아무래도 한바탕해야 하지 않겠소? 기세를 보아하니 작정하고 오는 놈들 같은데.
그 말에는 오히려 백양신마가 의문을 표시했다.
이곳으로 누가 살기를 품은 채 오고 있단 말인가?
그때 묵월의 묵직한 음성이 울려 나왔다.
이상하군요, 아무리 소종사라 하더라도 이곳의 일은 예측 불가였을 텐데 벌써 사람들을 보내다니, 거기다가 기세로 보아 장로들도 몇몇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묵월의 말에 백양신마가 놀람을 표시하기도 전에 백난천이 머리카락 하나 없는 뒤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살기도 강하지만 그 선두에 있는 자들에게서는 무언가에 대한 강한 집착이 느껴지는군요. 이런 감정은 뭔가 상당히 갖고 싶은 것을 발견했을 때 그것에 대한 탐욕에 의해 생기는 감정인데'''
그 말에 묵월 약간 놀란 눈빛으로 백낙천을 주시하며 물었다.
자네는 그들의 감정까지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아,예, 좀 특이한 체질이라서''''
중인들은 동사왕에게서부터 시작된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이내 그 의미를 깨닫고는 제각기 기묘한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동사왕 등은 지금 적의를 지닌 자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별다른 것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 간의 격차를 분명히 나타내는 것으로, 중인들도 얼마 전에 마교의 부교주인 묵월이란 자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간 상태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묵월과 태연하게 보조를 맞추고 있는 민대머리 청년이나, 가장 먼저 말을 꺼낸 동사왕에 대해서는 모드들 뜻밖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갈천성이 불만이 잔뜩 섞인 음성으로 동사왕을 향해 말했다.
한 선배, 이거 너무하는 것 아니오?
뭐가 너무해?
의리없게 혼자만 가다니''''
동사왕은 잔뜩 흥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갈천성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쳐다보며 눈살을 찡그렸다.
내가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혼자서 뭘 잘못 먹은 것도 아닐 테데 왜 헛소리를 지껄이고 그러냐?
시치미 때도 소용없소, 주군 곁에서 혼자만 생사경 가고'''''누군 좋겠수다, 치사하게 그러는 거 아니오.
그 순간 동사왕의 표정 또한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지며 갈천성보다 몇 배나 큰 목소리로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뭐? 생사경? 네 녀석이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하겠다는 거야, 뭐야? 그러잖아도 그 생각만 하면 열불이 터지는데, 뭐 생사경? 어떤 얌체 녀석은 태어날 때 별자리 잘 만나서 그으냥 생사경 되고, 또 어떤 놈은 한 대 쥐어 터지고 나서 그으냥 생사경 가긴 하더라만, 그게 부러우면 네 녀석도 다시 태어나든지 아님 쥐어 터져 보면 될 일이지 왜 나한테 시비를 걸어? 내가 그렇게 만만히 보인다 이거냐? 오냐, 와라! 네 녀석의 지옥낭인도인가 뭔가를 지옥걸레도가 되도록 패주마!
동사왕의 험악한 기세에 찔끔한 갈천성이 약간은 당황한 표정으로 떠듬거렸다.
그럼'''아닌 거요?
그걸 말이라고 해! 생사경이 뉘 집 자식 이름인 줄 알아!
그럼 어떻게 알아차린 거요?
뭘 또 알아차려?
지금 오고 있는 놈들''''' 나도 이제야 겨우 그들의 기척을 느끼는데 어떻게 묵월 부교주와 별 차이 없이 느낄 수 있었느냔 말이오, 따로 천이통신공이라도 연마한 게요?
응? 그야''' 네놈 수준이 형편없이 떨어지니가 당연한 거겠지만'''묵월 저놈이 먼저 알고도 잠자코 있었던 거겠지 뭐,
그 순간 단리종후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허허! 한비 이 친구, 이제보니 겸손을 부릴 줄도 알고, 나 역시 자네가 말을 꺼내기 직전에야 그들을 느낄 수 있었네, 아무튼 성취를 이룬 것은 축하하네.
단리종후의 참견에 동사왕의 눈초리가 다시 하늘로 치솟았다.
겸손 좋아하시네! 나는 그런 네놈보다 한참 전에 알고 있었다. 그게 불만이면 네놈도 덤벼보든가.
허허, 그랬는가? 그럼 이제는 창궁무허결로도 자넬 감당하기가 쉽지 않겠구먼,
당연하지! 네놈의 무극검결 따위야 언제라도''''뭐, 창궁무허결? 네놈 설마 무극검겨의 극의라는 창궁무허결을 깨우쳤다는 말이냐?
운이 좋아 이곳에 오기 전에 깨달음이 있었네.
그러자 백낙천이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어쩐지 예전에 맹주님을 뵈었을 때와는 느껴지는 기세가 다르다 했더니, 역시 또 다른 성취가 있으셨군요.
호! 자넨 그것도 느껴지는가? 나는 자네를 다시 만나고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는데, 확실히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일세.
무엇을 말입니까?
나는 사실 무극검걸의 극의라는 창궁무허결을 깨달았을 때 내가 생사경에 접어든 것이 아닐까 생각했네, 그러나 천 대협도 그렇지만 자네를 보니 아무래도 생사경이란 그런 것이 아닌 듯 싶네, 지금으로서는 그저 막막하다고나 할까? 그 전보다 한 걸음 나아간 것은 분명하네만, 지금의 내가 어디쯤 서 있는 것인지 오히려 모르겠다는 말일세.
하하, 저를 천 형과 비교하시다니, 솔직히 저도 천 형을 보면 맹주님과 비슷한 심정일 따름입니다.
그들의 대화 중에 다시 동사왕이 끼어들며 놀람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단리 늙은이, 네놈은 예전에 무극검결의 최후 심득인 창궁무허결은 대자연검의 경지라 하지 않았느냐? 생사경의 결지에서나 그려볼 수 있는''''
분명 그런 줄 알고 있었고, 내가 창궁무허결을 얻은 것도 사실이네, 하지만 와서 보니 과연 생사경의 경지에 들어선 것인지 모르겠다는 말일세.
그러자 이번에 묵월이 여전히 묵직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단리 맹주의 말이 맞는 듯싶소, 나 역시 얼마 전의 천운으로 태양현양기가 11성으로 올라섰는데, 그 단계는 중원무림에서 소위 말하는 생사경의 경지에나 도달해야  감당할 수 있는 기운이오, 그리고 12성의 태음현양기는 물아일체로서 나 자신이 태음현양기로 녹아드는 것이니 그것은 내 육신이 사라진다는 것과 진배없소.
하나 내가 생각하기에 곤패주는 이미 물아일체의 단계마저 벗어나 정,기,신의 삼위일체가 되어 있는 분인 듯싶소만, 그 상태는 이미 ''''그러면서도 현상계에 육신을 두고 있으니 그저 불가사의할 따름이오.
아! 
으음,그런!
백양신마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도 갈천성이 나설 때쯤부터 이곳을 향해 오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 모두 느끼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런 것에는 아무도 개의치 않고 단리종후나 묵월 등의 말에 심취해 있었다.
그들의 대화가 무인이라면 꿈에서도 바라 마치않는 궁극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었기에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마지막 묵월의 말을 통해서 사람들은 그나마 막연하게 느껴지던 천우의 실체에 대해서 더욱 혼란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기에 절로 탄식성들이 흘러나온 것이다.
허허, 묵월 부교주께서 말씀하신 그 물아이체의 단계야말로 진정한 생사경의 경지가 아닌가 싶소, 말 그대로 만물이 나와 다르지 않으며 육신 또한 의미가 없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생사라는 말과 부합되지 않겠소? 그 상태에서 뜻을 가질 수 있다면 아마도 그것이 상상 속에서 말하는 공령의 단계일 듯싶소.
문득 떠오른 생각이기는 하오만, 이제야 나아갈 길이 보이는 듯 하구려, 내 의지는 만물을 담고 있으되 아직 내 육신은 만물과 완전히 하나 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닫게 되다니''''
[아직 안됩니다]
단리종후는 묵월의 말을 듣고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어 자신의 생각을 밝히다가 갑자기 심연 속에 빠져드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한데 갑자기 마음속에서 울리는 천우의 음성으로 인해 화들짝 놀라며 약간은 멍한 표정으로 천우를 바라보았다.
맹주님께서 아직 완전한 준비가 되지 않으셨습니다. 그 상태에서 물아일체를 느끼시게 되면 말 그대로 육신만 빼앗기게 될 뿐 뜻은 남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죽음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방해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경지라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제 형님도 그렇고 맹주께서나 묵월 부교주는 경계점에 서 계신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함부로 그 경계를 넘으려다가는 육신만 빼앗기게 될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생사경이라는 말도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뜻을 갖고 뛰어넘지 못하면 보이는 세상에 관여할 수 없게 되니 죽음과 별반 다를 것이 없고, 경계를 넘으며 뜻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다시 의지로 세상에 관연할 수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천우의 입에서 알쏭달쏭한 말이 흘러나오자 다른 사람들은 의문스런 표정으로 단리종후를 쳐다보았고, 단리종후는 그제야 떨리는 눈빛으로 천우를 보며 말했다.
그럼'''''방금 내가 물아일체로 빠져들고 있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 순간 사람들은 또다시 경악스런 표정으로 단리종후와 천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렇구려, 하지만 앞으로 영원히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데'''조금은 아쉽다는 생각이 드오.
그 말에 천우가 죽립 아래로 희미한 미소를 지오 보이며 말했다.
그래도 맹주이신데 비는 사람 소원도 제대로 못 들어주는 사물의 정령 정도로 남으셔서야 되겠습니까? 기왕이면 산신들과 바둑은 둘 정도의 신령은 되셔야지요.
정말 산신이 있단 말이오.
농담입니다.
크.크하하하! 내가'''나, 동사왕이 생사경이시란다! 흐흐 크크크, 다 덤벼! 크하하하!
단리종후의 어색한 침묵 속에 동사왕의 미친 듯한 괴소가 이어지는 가운데, 사람들은 어렴풋이나마 단리종후가 새로운 깨달음의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3장 천마건곤대전의 시작


천우 일행들과 원로들이 마존각을 나서기 시작하자, 원로들이 이끌고 온 가솔들과 수하들이 마존각 주위에 군데군데 모여 있다가 나서는 그들을 긴장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번 마존각에서의 원로모임이 어떠한 일 때문인지는 그들도 잘 알고 있었고, 더불어 그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일인 만큼 그 결과에 대해서도 관심이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
원로들의 수행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제일 선두에서 백양신마와 천우 등이 나란히 걸어 나왔고, 그 뒤로 묵월 부교주를 위시해서 네 명의 원로들과 중원에서 함께 온 이들이 함께 나서자 여기저기서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원로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마존각 안에서 생전 처음 보는 자들이 우르르 함께 몰려나오고 있었으니 그들로서는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백양신마와 원로들을 향해 모두 허리를 굽히며 예를 취하였다.
원주님과 원로님들을 뵙습니다.
백양신마는 마존각 밖에서 예를 취하고 있는 그들을 보자 걸음을 멈추어 청명한 하늘을 한차례 우러러 보고는, 곧이어 그들을 향해 약간은 침울한 음성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원로원주로서 이번 원로회의의 결정에 대해 공표하도록 하겠다.
뜻밖의 말에 예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경미한 수군거림이 잠시 일었고, 수행원들의 맨 앞쪽에 있던 몇몇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어 자신들이 수행해 온 원로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원로들을 수행해 온 자들은 자신들의 주군이나 가주의 의사를 사전에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원로들의 표정을 살펴봄으로써 원하던 대로 일이 잘 풀렸는지를 알아보려는 행동이었다.
더불어 원로원의 결정사항은 항상 공문으로 만들어져 공표되기 마련인데, 이례적으로 이렇듯 사람들 앞에서 원로원주가 직접적으로 공표한다고 하니 모두들 놀란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본 원로원에서는 이번 사안에 대해 중원에서 온 풍검신을 곤패주로 인정하기로 하였으며, 의결 방법은 율법에 따라'''혈수결을 단행하였다.
헉! 그럴 수가''''
혀,혈수결이라니!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여기저기서 숨 넘어가는 경악성들이 동시에 터져 나왔으니 백양신마는 사람들의 동요에 개의치 않고 나직하면서도 무심한 음성으로 빠르게 말을 잊기 시작했다.
혈수결의 의미는 모두가 알고 있을 터, 혈수결로 제명된 여섯 원로의 직계들은 율법에 따라 언제든지 남아 있는 집법원로에게 정식으로 도전을 신청할 수 있으나, 사사로운 원한에 의한 행동은 인정되지 않는다. 더불어 어떠한 경우로든 집법원로의 사망 시 혈수결의 은원은 종결된다.
또한 살아남은 집법원로는 혈수결로 제명된 원로의 직계들에게 도전을 강요하거나 명백하지 않은 하극상 등의 이유로 처럽을 내릴 수 없다. 그 외의 모든 제반 사항들은 정해진 법규조항과 강자존의 율법에 따른다.
이, 이건 도대체''''
이럴 수가'''할아버님께서'''
크윽! 가주님!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발표에 자신들이 수행했던 원로들의 모습을 찾지 못한 자들은 저마다 비통한 표정으로 신음을 심키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지금 곤패주가 누구로 결정되었는가보다는 자신들이 수행해 왔던 원로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더욱 참담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중인들과 함께 서 있는 네 명의 원로들을 수행해 온 자들은 내심으로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의 숨을 토해 내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도 표정과 더불어 여전히 경악 속에묻혀 있는 것은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전통적으로 원로들을 배출한 가문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다시 그 직계 후예들에 의해 계승되는 형태였다. 그것은 신분의 상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원로가문에서 배출하는 자들이 그만한 자격과 실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러한 원로직의 계승도 기득권에 의한 혜택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절대적인 척도는 역시 실력이었고, 실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면 결코 원로직을 계승할 수 없었다.
때문에 당금의 원로가문 중 천 년 이상을 유지해 오고 있는 곳도 세 곳이나 되었고, 다른 곳도 짧게는 삼백 년부터 오백 년 이상을 원로직을 수행해 온 가문들이었다. 그러니 그들 간의 유대가 결코 얕지 않았고, 가문까리도 서로 잘 알고 지내는 것이 상례였다.
물론 때로는 그 반대로 앙숙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서로 간에 친밀감있게 지내고 있었다.
한데 그 중 여섯 가문의 원로들이 천여 년 간이나 단행된 적이 없던 혈수결에 의해 희생되었으니 수행원들이 쉽사리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고, 더불어 남아 있는 네 원로를 수행해 온 자들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안쓰러운 눈길을 보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율법에 의해 단행된 일이니 결코 어길 수도, 그리고 어겨서도 안 된는 일이다. 공석이 된 여섯 자리는 다시 남아 있는 원로들과 원주에 의해 자체적으로 천거되고 일정 심사를 거쳐 다시 채워질 것이다.
그 과정에 희생된 여섯 원로의 직계가 또다시 천거될 수도 있었고, 아닐 수도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잊고 다시 가문의 영광을 위해 힘쓰는 자가 있는 반면,결국 원한을 참지 못하고 실력이 되지 않아도 남아 있는 원로들에게  도전을 신청하는 자도 생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결국은 강자존의 율법 안에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 또한 백양신마가 한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순간 백양신마는 다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먼저 보낼 6인의 원로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자네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네. 비록 혼령조차 갈곳이 서로 다르다고는 하나, 신이 바보가 아니라면 틀림없이 나 역시 자네들이 머무는 곳으로 보내줄 것일세. 그때 보세나.
전면에 서 있는 원로의 수행원들이 백양신마의 말로 인해 모두 충격에 빠져 있는 동안, 자칫 신선이 될 뻔한 단리종후만이 유일하게 백양신마의 말을 들으며 전면을 응시한 채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마존각 안에서 혈수결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실지로 사람들의 반응을 보게 되자 씁쓸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천마신교의 규칙이 그렇기에 따를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혈육이나 주군을 잃은 자들이라면 그에 대한 원한이나 적의를 표출하는 것이 마땅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서는 별로 적의를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인지 단리종후의 입에서 탄식조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허! 정말 이해하기 힘들군, 어찌 혈육의 죽음 앞에서도 저리 태연할 수 있으며,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단리종후의 독백을 들었음인지 옆에 있던 묵월이 약간은 어두운 안색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은원관계에 대해서는 철저한 중원무림의 입장에서 보면 저들의 모습이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소, 하지만 본교는 초대 마가로부터  천오백여 년을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 외부인의 유입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자면 본교인들은 거의 모두가 혈연관계로 얽혀 있는 거나 다름없소이다. 때문에 직계가 아니라면 방계의 혈연들은 거의 남남이나 마찬가지로 인식되고 있소.
또한 강자존의 율법에 의해 항시 서로 경쟁하고 때로는 피를 보는 경우도 다반사이기 때문에 정당한 율법으로 행해진 일에는 사사로운 은원을따지지 못하도록 되어 있소이다. 다만 직계들에 한해서는 언제든 정당한 대결로 원한을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오.
그리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함부로 자신이 죽인 자의 직계혈족들을 몰살시키는 행위 또한 율법으로 막아놓았소, 그러한 율법이 없었다면 아마도 본교는 끝없는 은원관계로 인해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오.
묵월의 설명을 들으면서 단리종후는 문득 중원무림을 떠올려 보았다. 어찌 보자면 천마신교의 그러한 방식은 오히려 중원무림에서의 철저한 적자생존 방식보다는 관대한 면도 있었다. 특히 무림 전체라는 틀과 비교하자면 확실히 그랬다.
그것을 느꼈음인지 단리종후가 허허로운 웃음과 함께 말했다.
허허, 옛 선인의 말 중에 도가도 비상도라 하더니, 그 말의 의미가 여기서 느껴지다니''''
그 말에 전면을 응시하면서 연신 고개를 빼고 있던 동사왕이 단리종후에게 면박을 주었다.
단리 늙은이 무슨 헛소리냐? 마교에 와서 도를 논하다니, 갑자기 망령이라도 난 게냐?
이 보게, 한비, 자네도 한번 생각해 보게나, 중원의 문파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이곳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네, 일견 이곳이 인륜을 저버린 패악한 집단인 듯싶지만, 중원무림 전체와 비교해 보게나, 오히려 중원무림이야말로 인륜과 천륜마저 짓밟고 있는 지옥 그 자체나 다름없지 않은가.
응?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대어도 결국 중원무림 역시 강자의 논리가 바로 진실이고 법이 아니겠는가, 강한 자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약자를 짓밟고 죽이는 일은 비일비재하고, 원한이 생기면 절대로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철저히 말살시키려 드는 곳이 바로 중원의 무림 아닌가 말일세.
결국 옳다고 여기던 것이 꼭 옳은 것만은 아니고, 또한 그릇된 것이라고 여기던 것이 꼭 잘못된 것만은 아니니 이것이 옛 선인의 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래서? 단리 늙은이도 마교에 가입하려고?
허허,그런 의미는 아닐세.
그런 쓸데없는 헛소리 하다가 또 육신 없는 귀신 되지 말고, 몇 놈이나 때려잡을 건지 궁리나 하라고 그런데 이놈들은 궁뱅이를 잡아먹었나, 왜 이렇게 느려? 좀 빨리빨리 올 것이지,오호! 이제 코빼기가 보이기 시작하는구먼,
두두둑!
그 말과 함께 동사왕이 음흉한 미소를 떠올리며 양 주먹에서 뼈 엇갈리는 소리를 토해 내자 단리종후는  실소를 흘려내며 말했다.
자넨 아주 신이 난 모양일세.
당연하지! 이젠 나도 생사경인데.
그렇게 좋은가?
단리 늙은이는 그동안 내가 생사경이라고 으스대는 얌체 녀석 하나 때문에 얼마나 설움을 받았는지  모를 거야, 암, 모르는게 당연하지.
그러한 말에 백낙천이 한쪽에서 억울하다는 듯이 울상을 짓고 있는 가운데 단리종후가 문득 조아가 서 있는 곳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마동 노선배는 계속 저렇게 뇌두어도 괜찮겠는가?
신경 쓰지 말라고, 잠에서 깨어나 설치면 오히려 피곤해지기만 하니까 그냥 자게 놔두는 게 여러 사람 돕는 거지.
마동은 지난밤 백양소축에 도착한 이후에 어느새 한쪽에서 드러누워 잠을 자기 시작하더니, 아침까지도 깨어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마동을 깨우려 하자 어쩐 일인지 천우가 말리며 조아에게 부탁해 마동을 업고 움직이도록 하였고, 그 와중에도 마동은 깨어나지 않아 아직도 조아의 등에 업혀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무림의 절정고수가 저렇게 오래 잠을 잔다는 것도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 와중에도 계속 자고 있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조아 역시 마동의 정체에 대해 들었기에 영 내키지 않았지만, 천우의 부탁이었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부끄러움을 무릅쓴 채 마동을 없었던 것인데. 여지껏 마동이 깨어나지 않고 계속 자신의 등에 업힌 채 죽은 듯이 잠을 자고 있으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구나 잠시 후면 한바탕 혈전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었기에, 마침 단리종후가 그에 대해 언급하자 기대감 어린 눈으로 천우의 둣모습을 응시하였다.
천우도 단리종후가 하는 말을 들었기에 조아를 돌아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은 지금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식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오. 그러니 수고스럽겠지만 그분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부탁드리겠소.
여,염려 마세요. 제가 책임지고 이분을 보호하겠어요.
천우의 말에 조아는 당황하여 얼른 대답했다.
야속한 분, 수고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부끄럽기 때문인 것도 모르시다니''''
조아가 내심 그렇게 천우를 원망하는 동안 동사왕이 속도 모르고 조아에게 말했다.
너는 아무 걱정 말고 그 애늙은이나 잘 업고 있거라. 노부가 네 근처에는 한 놈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주마, 그리고 기왕이면 중원으로 돌아갈 때까지 푹 자도록 가끔씩 토닥여주는 것도 좋겠지.
도, 동 노사님!
흐흐, 부끄러울 게 뭐 있는냐? 나이만 많지 정신상테나 몸은 영락없는 어린애인데, 그저 좀 별란 꼬맹이 하나 없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느니라,
조아가 부끄러움에 더 이상 대꾸를 못 하고 있는 동안, 충격속에 빠져 있던 수행원들 역시 그제서야 이곳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의 기척을 느낀 듯 분분히 뒤로 돌아서서 다가오는 자들을 살펴보고는 또다시 놀람성들을 토해 내고 있었다.
저,저들은!
선두에 오는 자들은 틀림없이 부교주와 장로들이다. 저들이 이곳에는 왜?
그, 그 뒤에 오는 것은 천살마검대인 것 같은데,
설마''''
그들은 이곳을 향해 오고 있는 자들의 정체를 확인하자 놀람 성과 더불어 개중에는 뒷걸음질을 치는 자들도 있었다. 그만큼 그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특히 천살마검대는 천마신교 내의 무력댄체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막강한 실력과 잔혹성을 인정받고 있는 단체였던 것이다.
그들 개개인이 천마신교 내에서 전체 서열 일천 위 안에 드는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세 명이 모여면 극마급의 고수들, 열 명이면 탈마급의 고수도 도륙낼 수 있다는 공포스럼 집단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자존심도 강해 웬만한 일에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는 천살마검대 전원이 장로들과 함께 오고 있는 것이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수행원들이 불안한 눈길도 다가서는 자들을 바라보는 동안 오백여 명의 천살마검대를 이끌고 마존각을 향해 빠르게 질주해 오던 선두의 인물들이 중인들과 대략 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섰고, 다시 그 뒤로 마치 화살이 내리꽃이듯이 천살마검대의 인물들이 일사분란하게 정렬하여 내려서기 시작했다.
모두 비켜서라! 
가장 먼저 도착한 선두의 인물들 중 잔혹한 인상에 눈초리가 치켜 올라간 혈의 중년인이 앞을 막고 있는 원로들의 수행원들에게 싸늘한 일갈을 토해 내자, 이미 그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는 수행원들은 그의 기세에 놀라 화급히 길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양옆으로 물러서자 그곳을 통과해 마존각의 입구에 서 있던 백양신마의 근처로 다가선 혈의 중년인과, 함께 온 세 명의 인물들이 백양신마를 향해 가볍게 예를 취하였다.
원로원주를 뵙소이다.
자네들이 이곳에는 어쩐 일인가? 더군다나 비상사태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천살마검대까지 이끌고 말일세.
백양신마의 말에 혈의 중년인이 음침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벌써 회의를 마치고 밖에 나와 계실 줄은 몰랐군요. 쉽게 끝날 회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한데'''다른 여섯 분의 원로들은 보이지 않는군요. 벌써 거처로 돌아간 것입니까?
중요한 안건인 만큼 오히려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다른 원로들은 ''''각자 갈 길을 향해 먼저 갔네.
그럼''''벌써 결정이 내려진 것이란 말입니까?
물론일세.
백양신마의 간단한 대답에 질문을 하던 혈의 중년인은 물론 함께 다가온 다른 세명의 인물들도 가볍게 안색이 굳어들었다.
실례지만 원로원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졌는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번의 혈의 중년인 옆에 서 있던, 철로 만들어진 섭선을 든 문사 풍의 중년인이 정중한 어조로 묻자 백양신마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어려울 것이 있겠나 어차피 공표한 상태고, 장로원에도 곧바로 통지를 보낼 참이었네, 알고 있었겠자만 이번 회의는 곤패주를 결정하는 회의였고, 원로원에서는 중원에서 온 풍검신은 곤패주로 인정하기로 결정하였네.
그 ㅁ라에 네 사람은 무척이나 뜻밖인 듯 얼굴에 놀라움을 역력히 드러내었다.
정말 원로원에서 그를 곤패주로 인정하였단 말입니까?
백양신마가 헛소리를 할 리 없다는 것쯤이야 잘 알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너무나 예상 밖의 일이라 이번엔 맨 좌측에 서 있던, 커다란 도를 들고 있는 황포 중년인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은채 다시 한 번 반문했다.
그 질문에 백양신마는 안색을 싸늘히 굳히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왜? 그러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가? 곤패주의 승인사항은 원로원의 고유권한이고, 원로원에서 그를 곤패주로 인정하였으니 이제부터 그는 정식으로 본교의 곤패주일세. 자네들이 인정한든 안 하든 그것과 상관없이 말일세.
백양신마의 싸늘한 어조에 커다란 도를 들고 있던 위맹한 모습의 중년인이 조금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제가 어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조금은 뜻밖이라''''
그것을 알고자 천살마검대까지 이끌고 이곳으로 온 것은 아닐 테니, 이제 자네들이 이곳에 온 용건을 밝히게나, 지금 우리들은 할일이 무척 많다네.
그러자 이번에는 맨 우측에 서 있던, 등이 약간 굽고 팔이 기형적으로 긴 덩치 큰 초로인이 나서며 괴소와 함께 말했다.
흐흐, 빠쁘시다니 용건을 밝히도록 하지요. 우리들은 명부산을 폭파시킨 범인을 책출하러 왔습니다.
그 말에 백양신마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지만 그 뒤에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이 움찔하는 기색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묵월과 함께 천마신교의 부교주로 불리는 잔월혈마와 잘로들이 놓칠 리 없었다.
그 때문인지 4인의 얼굴에서는 회심의 미소가 감돌았지만, 백양신마는 여전히 냉담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일이라면 돌아가게. 본교의 율법을 물론이고, 새로운 법규조항 어디에도 공동묘지를 훼손시켰다고 죄가 된다는 조항은 없네, 그러니 법인이라는 표현도 맞지 않고, 설사 해당되는 사항이 있다 하더라도 천부령 이상의 신분을 지닌 자는 율법에 벗어난 일만 아니라면 새로 제정된 모든 법규조항의 위반 정도로는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게 아닌가.
백양신마의 싸늘한 음성에 잔월혈마가 여전히 음흉스런 미소를 떠올린 채 백양신마를 향해 말했다.
그럼 원주께서는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계시다는 말이로군요, 더군다나 그자는 천부령의 신분을 지닌 자이고 말입니다.
범인이란 말은 맞지 않는다고 했네.
백양신마의 냉엄한 눈빛에 잔월혈마는 한순간 움찔하며 다시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명부산을 폭파시킨 자라고 하죠, 그가 누구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곤패주일세.
잔월혈마를 위시해서 세 명의 천마신교 장로들은 또다시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곧 이어 얼굴 가득히 기쁜 표정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설마 백양신마가 이토록 순순히 모든 것을 시인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자신들은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튼튼한 그물을 충분히 준비해 온 상태였고, 때문에 이번 일에 대해선 확신을 갖고 온 상태였지만 시작부터 일이 너무 순순히 풀리기 시작하자 기쁜 와중에도 약간의 허탈감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어쨌든 백양신마가 모든 것을 순순히 시인한 이상 이제는 자신들이 준비해 온 그물을 결코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이로써 모든 우환을 한꺼번에 제거할 수 있음은 물론 자신들의 입지 또한 강화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절로 기쁜 표정이 떠올랐던 것이다.
흐흐, 그렇군요.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원주께서는 뭔가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이번 일은 단순히 법규조항을 어긴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로 대종사의 명령을 어긴 것과 다름없습니다.
대종사의 명령을 어긴 것은 곧 율법을 어긴 것이니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율법으로 처벌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곤패주라도 처벌을 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알고 계시겠지만 율법을 어긴 자에 대한 징계는 장로회의에서 결정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물론 대종사의 승인을 얻어야 하지만 지금은 소종사께서 권한 대행을 하고 계시니 소종사의 승인으로도 효력이 발휘됩니다. 그러니 곤패주는 율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교주인 잔월혈마의 음충스런 목소리에 백양신마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고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하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어째서 그 일이 대종사의 명령을 어긴 것이 된단 말인가? 노부는 납득하기 힘드니 설명해 보게.
사실 지금과 같은 설전은 동사왕이 보기에 전혀 쓸데없는 일이라고 여겨졌지만, 백양신마의 입장에서는 꽤나 중요한 일이었다.
천우가 곤패주로서 움직이는 것과 곤패주의 신분을 상실하고 움직이는 것은 당연히 천양지차의 차이가 있다. 명문이 상실된다면 자신을 비롯해 묵월이나 네 명의 원로들도 천마신교 전체와 싸워야 되는 일이니 기필코 그들의 주장이 억지임을 밝혀야 하는 것이다.
원주께서 납득을 못 하시겠다니 제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엔 잔월혈마 대신 그 옆에 있던 3장로  철선마유 조운학 다시 나서며 말하기 시작했다.
대종사의 명령으로 본교에서 금기하는 일이 몇 가지 있음을 원주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굳이 그 모두를 여기서 일일이 말씀드릴 필요는 없을 테니 그 중 이번 일에 해당하는 것에 대해서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본교 내에서는 대종사의 허락 없이는 화약이나 폭발물을 소지하거나 사용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대종사의 명으로 회수 조치토록 한 물건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든 그것을 습득하여 개인적으로 은닉하거나 소지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대종사의 명으로 출입이나 이용이 제한된 본교의 중요 시설물이나 장소에 대해서는 역시 무단으로 출입하거나 이용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원주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으실 듯 하니 제외시키더라도, 다른 두 가지 금기사항에 대해서는 새로 임명된 곤패주가 어긴 것이 명백합니다. 그러므로''''''
하지만 어째서 곤패주가 그 두 가지 금지사항을 어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곤패주는 화약이나 폭발물을 소지하지도, 그리고 사용하지도 않았고, 대종사가 회수 조치토록 한 물건도 지니고 있지 않네, 그런데 어째서 그런 억지를 부리는 것인가?
지금 억지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네, 억지일세.
훗! 원주께서는 분명 명부산을 폭파시킨 범인이 곤패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설마 지금에 와서 아니라고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무슨 소리! 노부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는 않네, 하지만 자네들이 말한 사항에는 결코 해당되지 않는다는 얘기일세.
원주께서야말로 억지를 부리고 계시는군요. 좋습니다. 그럼 위의 두 가지 사항을 어기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저희가 말한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달라는 것입니다.
백양신마는 그제야 일의 전말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확연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군, 자네들은 명부산을 폭약으로 터트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로군, 그런 건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폭약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백양신마의 뒤편에 서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중인들도 어찌 된 일인지 파악하고는 어이없다는 듯이 실소를 흘리기 시작했다.
좋네, 일단 그 부분은 넘어가기로 하고, 두 번째 사항에 대해서는 무슨 의미인지 아직 이해할 수가 없으니 좀 구체적으로 말해 보게.
그렇지 않아도 저희 역시 그 두 번째 사항에 대해서 좀더 확인을 해보려던 참입니다. 숨기려 해도 소용이 없겠습니다만'''''
자모천뢰신궁은 대종사의 명이 아니더라도 벌써 팔백 년간이나 본교에서 회수 조치가 내려진 물건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사사로이 지니고 있다는 것만 해도 대종사의 명을 어긴 것이 됩니다.
하지만 본인이 그것을 모르고 있었고, 또한 얻은 시점도 곤패주가 되기 전이라면 면책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지금 당장 내놓아야 한다는 전재 하에서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철선마유의 두 눈에서는 어느새 감출 수 없는 진득한 탐욕의 불길이 일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사람에게서도 술렁임이 일고 있었다.
자모천뢰신궁!
그, 그것을 정말 풍검신, 아니 곤패주가 지니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천우 일행들은 그러한 말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여전히 실소를 흘리고 있었다. 다만 유독 한 사람만이 흠칫하며 표정마저 굳어진 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는데, 때마침 이쯤에서 크게 웃어줄까 말까 고민하고 있던 동사왕이 그 기척을 느끼고는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소곤거리듯이 물었다.
네 녀석, 왜 그러느냐? 이렇게 웃기는 상황에서 표정을 굳히고 있다니, 벌써부터 마교 녀석들에게 겁먹고 있는 것이냐?
아,아닙니다. 저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정말 재미있군요. 
하,하하''''
동사왕은 화천악의 어색한 태도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더없이 재미있는 작금의 상황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다시 전면을 바라보았다.
동사왕이 시선을 돌리자 화천악도 금세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전면을 바라보았지만, 그 순간 동사왕의 두 눈이 순간적으로 이채를 발하였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였다.
이제야 모든 부분에 대해서 이해가 되기에 백양신마 역시 내심 실소를 흘리면서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소곤거리는 말이라 해도 잔월혈마나 철선마유 정도되는 인물들이 동사왕과 화천악의 말을 못 들었을 리가 없다. 결국 그들의 매서운 눈초리가 동사왕과 화천악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고, 그러면서 중인들의 기묘한 표정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한 모습, 그러면서도 한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눈빛들''''
그러한 눈빛이 잔월혈마가 막 분노를 표출하려는 순간, 묵월이 먼저 나서며 특유의 묵직한 저음으로 말했다.
잔월 부교주, 오랜만에 보게 되는구려, 한데 당신들의 그 근거없는 추측은 도대체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오?
묵월의 참견에 잔월혈마도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흥,시치미 떼도 소용없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공모자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질 것이고, 관련된 자들은 지위 고하와 관계없이 율법에 따라 처벌을 받을 것이다. 물론'''그것은 묵월 네놈이라 해도 마찬가지고 말이지.
묵월과 잔월 혈마는 천마신교 내에서도 서로 경원하는 사이였는데, 특히 묵월에 대한 잔월혈마의 감정은 극도로 안 좋았다.
그 원인은 육십여 년 전 대종사가 폐관에 들기 전에 원로원의 천거에 의해 묵월이 부교주로 임명될 당시에 겪었던 수모 때문이었다.
묵월보다 이십 년 정도 연배가 높고, 또한 당시에 이미 부교주라는 직책에 있던 잔월혈마는 묵월의 부교주 임명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종사가 묵월의 실력을 인정하여 부교주로서 부족함이 없다고 하자 그는 묵월과 겨루어 볼 수 있도록 대종사에게 요청하였다.
결국 대종사의 허락 하에 두 사람은 실력을 겨루게 되었고, 그대결에서 잔월혈마는 어이없게도 당시에는 새파란 애송이나 다름없던 묵월에게 패하였던 것이다.
결국 묵월은 부교주로 임명되었고, 천마신교 내에서는 '검은 달이 뜨면 잔월은 스러진다'는 모욕적인 유행어가 떠돌았던 것이다.
그러니 묵월에 대한 잔월혈마의 감정이 결코 좋을 리 없었고, 이후에 잔월혈마는 의식적으로 묵월을 피해 왔었다. 어차피 실력이 안 되면 부딪쳐서 손해보는 쪽은 자신일 것이고, 묵월의 실력을 확인한 이상 부딪쳐봐야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한데 이렇게 60년 동안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던 원한을 일시에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겼으니 잔월혈마로서는 그 또한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잔월 부교주,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 구려, 아무튼 당신들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이곳에 온 것 같으니 그만 돌아가도록 하시오. 곤패주에 의해 명부산이 저리 된 것은 맞지만 결코 폭약이나 자모천뢰신궁 같은 것은 사용하지도, 그리고 갖고 있지도 않소이다.
그리고 그 증거를 보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당신들이 증거를 대야 할 일이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주장한다면 그게 억지가 아니고 뭐겠소.
흐흐, 증거? 물론 있지, 목격자들을 대령하라!
괴소와 함께 자신있는 표정으로 잔월혈마가 오백여 명의 혈의인들이 포진해 있는 곳을 향해 소리치자, 그 선두 쪽에서 혈의에 온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중년인이 각양각색의 복색을 한 인물들을 데리고 잔월혈마가 있는 곳으로 왔다.
그가 바로 천살마검대의 대주이나 천마신교 내에서도 흉명이 자자한 귀혼마검 남염이었다. 실력만으로는 오히려 호법들을 능가한다는 초절정 고수였고, 밥 먹는 것보다 싸움을 좋아하여 능히 전주나 호법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살마검대의 대주로 남아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내심 이번 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천살마검대는 장로원 직할의 무력단체이기에 어쩔 수 없어 나서게 된 것이다.
여기 데려왔소.
남염은 퉁명스럽게 잔월혈마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팔짱을 낀체로 먼 하늘을 응시했다.
그 건방진 태도에 잔월혈마도 내심 핏대가 솟았지만 귀혼마검 남염은 대종사 외에는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는 자로 유명했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쨌거나 지금은 그와 신경전이나 벌일 때가 아니었기에 잔월혈마는 마음속의 분노를 묵월엑로 돌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이들이 증거지,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목격자들이지, 네놈, 그날 본 일을 여기서 다시 한 번 소상히 말해 봐라!
잔월혈마에게 눈짓으로 지적당한 삼십 대의 털보장한이 그 눈짓에 흠짓 몸을 떨고는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속하는 비마당 소속 제13대 소속으로 그날 번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밝은 빛줄기가 솟아나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한던 차에 그 빛줄기가 명부산으로 날아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엄청난 폭음이 올리고, 명부산의 정상 부위가 불길을 토해 내며 폭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그게 전부입니다.
이 녀석! 왜 한 가지는 빼먹는 것이냐! 그 빛줄기가 어디서 솟아난 것인지 말해 봐라
그,그것은 ''''속하가 보기에 원로원주의 거처인 백양소축 부근''''''아니, 틀림없이었습니다. 예!
그는 띄엄띄엄 말하던 도중에 잔월혈마의 섬뜩한 살기를 느낀 듯 사색이 된 채 다시 확신한다는 투로 다급히 말을 끝맺었다.
이놈과 같이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 똑같은 증언을 하고 있지. 전부 듣고 싶다면 말하도록 해주지, 어때, 이래도 시치미를 뗄 참인가?
잔월혈마의 일방적인 태도에 묵월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묵월 역시 지금은 일을 명백하게 밝혀야 할 때라는 것을 알기에 솟아오르는 격분을 참으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목격자는 목격자일 뿐 결코 증거는 아니지 않소, 더군다나 그가 말한 것은 이미 원주께서도 인정한 바 있는 내용이니 달라지는 것이 뭐가 있겠소? 역시 당신들이 억지를 억지를 부리는 것밖에는 되지 않소이다.
흐흥! 목격자들의 말도 다 인정한다는 얘기로군, 그렇다면 이제부터 여기 남아 있는 자들에 대한 몸수색을 하도록 하지,
목격자의 말을 인정한 이상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부교주인 네놈도 잘 알고 있겠지?
또한 그날 그 시간에 분명 원주를 비롯해서 네놈과 여기 있던 자들 대부분이 백양소축에 있었고, 원로원주가 관련된 이상 원로들도 관련 여부에 대해 조사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 결코 이곳의 누구도 몸수색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도 미리 밝혀두지.
만약 거부할 시 그 또한 대종사의 명을 거역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율법에 따라 즉결 처분을 내릴 것이며, 백양소축을 비롯해 원로들의 처소에도 모두 남은 장로들과 조사관들이 파견되었다는 것도 참고삼아 알려주도록 하지, 더 할 말이 있나, 묵월 부교주?
그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기어이 뒤편에 서 있던 원로들 중 사망혈마 곡천이 분개한 표정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잔월혈마 온일추! 네놈이 감히 그따위 망발을 일삼다니, 네놈이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우리들의 몸수색을 한다는 말이냐! 그리고 그따위 망발에 응할 이유도 없겠지만, 그런 억지를 부린다는 것 자체가 우리들을 우습게 여긴다는 것이나 나야말로 네놈을 용서할 수 없다! 헛소리 그만 하고  이 자리에서 네놈과 내가 결판을 내자 물론 생사결이다. 당장 나서라!
하지만 잔월혈마는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괴소를 흘리며 치켜 올라간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흐흐흐, 곡 원로, 분명 말했을 테데? 거부한다면 대종사의 명을 어긴 것으로 간주하고 율법으로 다스린다고, 그리고 지금 내겐 분명 그런 권한이 있소, 대종사께 전권을 위임받은 소종사가 장로원의 의결에 대해 승인한 사항이고, 나는 그 집행의 전권을 위임받아 온 사람이니까 말이오. 그것을 부정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소, 다만 그 이후의 말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지면 될 테니 말이오.
오냐, 책임질 테니 썩 나서''''
곡천,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닐세. 진정하고 잠시 물러서 있게.
사망혈마 곡천이 분기탱천하여 잔월혈마의 말을 시인하여 나서는 순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던 백양신마가 눈을 뜨며 그러한 그를 말렸다.
노야! 더 이상 말해 봐야 무엇하겠습니까. 상대펀에서 이렇게 나오는 이상 차라리''''
평소에도 사석에서는 원주라는 호칭 대시 노야라고 부를 정도로 백양신마의 말이라면 절대적을 신봉하는 사망혈마 곡천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정말 너무나도 화가 너서 그러한 백양신마의 말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하지만 또다시 백양신마의 강렬한 눈빛을 받자 한 풀 꺾인 태도로 수긍하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저 작자들이 하는  짓거리를 잠시만 더 두고 보도록 하겠습니다.
곡천이 분기를 삭이면서 뒤로 한 발 물러서는 동안, 백양신마는 비릿한 웃음기를 담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잔월혈마와 그 주위의 세 장로들을 향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들 말은 모두 들었고, 또한 이곳에 온 의도 역시 잘 알겠네, 하지만 자네들도 몇 가지 착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으니 알려주겠네.
글쎄요, 저희들의 이번 행사는 아무런  하자가 없는 것으로 아는데, 무엇을 착각하고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3 장로인 천선마유 조운학이 말을 받고 나서자 백양신마는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 첫째는 대종사의 명령보다 우선하는 것이 바로 강자존의 율법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네들이 오기 전에 곤패주의 권한으로 천마건곤대전이 선포되어 원로원에서 만장일치로 승인하였다는 것일세.
뭐,뭣이?
처,천마건곤대전이라니 무슨 말씀을''''''
이'''''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장로들과 잔월혈마가 놀라건 말건 백양신마는 계속하서 싸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네들도 천마건곤대전의 의미는 잘 알고 있겠지? 그러니 곤패주는 더 이상 대종사의 명령에 따를 의무가 없네, 그러니 당연히 명령 위반이라는 말도 성립되지 않네.
더불어 천마건곤대전이 끝날 때까지 본교 내의 모든 사안들은 오로지 강자존의 율법에 의해서만 적용을 받네. 그건 대종사로부터 본교 내의 무급자들까지 모두 동일하게 적용되니 이 시간부로 새로 제정된 모든 법규조항은 천마건곤대전이 끝날 때까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 없음도 명심하게. 그러니 자네들도 이만 돌아가서 준비를 하도록 하게나.
그 순간 잔월혈마가 두 눈에서 진득한 독기를 피워 올리며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원주! 지금 정신이 어떻게 되신 것 아니오? 천마건곤대전이라니! 자신들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본교 전체를 피 바람 속으로 몰아 넣으려 하다니, 지금 제정신이냔 말이오!
그리고 천마건곤대전을 벌인다고 해서 당신들이 무사할 것같소? 그것은 오히려 당신들뿐만이 아니라 당신들을 따르는 자들도 모두 죽게 만드는 일임을 모르시오? 당신들 때문에 후손들과 수하들이 모두 죽어도 좋단''''
갈 ! 온일추 네놈이 너무 건방을 떠는구나! 그렇게 자신있단 말이냐? 그럼 덤벼보아라, 네놈들을 그냥 보내주려는 이유는 노부야말로 네놈들에게 생각할 시간과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이러한 자비는 앞으로 없을 것이니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더불어 지금부터 단 일 각의 여유를 주겠다. 그 안에 물러서든지 아니면 덤빌 것인지 결정해라. 다른 말은 않겠으니 판단은 너희가 내려라,
잔월혈마의 외침 도중에 백양신마가 진기를 실어 일갈을 토하고는 전혀 변함 없는 냉엄한 태도로 오히려 엄포를 놓자 잔월혈마와 장로들 3인은 기가 막힌 듯이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천마건곤대전!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천마신교 내 건패주의 세력과 곤패주의 세력이 총력전을 벌이는 피의 혈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총력전이라 함은 단순히 세력 간에 맞붙어 싸운다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모든 수단과 방법이 총동원된다는 것을 뜻했다.
이러한 천마건곤대전은 천마가 존재하고 있을 때와 천마가 모습을 감춘 후 초기에만 몇 차례 이루어졌던 것으로, 그 결과는 당영히 처참지경이엇다.
하지만 가장 확실하게 강자가 남게 되는 방법이었고, 강자존의 율법이 무엇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진정한 의미의 천마건곤대전은 피아와 적이가 구분되지 않는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아군이라 하여도 건패와 곤패의 주인을 죽이고 패를 차지하게 되면 그가 곧 건패주이고 곤패주였으며, 적이라 할지라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면 그가 곧 아군이었다.
배신이라는 말도 적용되지 않았고, 음모라는 말도 사치였다.
최후로 단 한 사람이 건패와 곤패를 차지하고 더 이상의 도전자가 없어 홀로 우뚝 섰을 때, 그때야 비로소 천마건곤대전은 종료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죽고 최후의 1인만이 살아남는 형태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최후의 승자는 바로 천마가 존재할 당시에는 천마와 겨루어야 했고, 천마가 모습을 감추었을 때는 최후의 도전자가 대종사가 되어 다시 천마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자이거나 진정한 강자가 아니라면 그러한 피의 혈전에 직접적으로 끼어들기 보다는, 이리저리 편승하여 몸을 아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좀더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천마건곤대전의 처참함을 인식했기에 양대 세력 간에 자연스럽게 타협이 이루어졌고, 그것은 대종사의 사후에만 미리 추대된 건패주와 곤패주의 대결로써 새로운 대종사의 위를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천마건곤대전은 본래의 의미를 잃고 단순히 지배자를 바꾸는 건곤대전으로 축소된 것이다.
더 이상 천마는 존재하지 않았고, 대종사라는 지위는 권력의 지배자로서 도전받지 않는 자리가 되었기에 나온 타협안이었다. 그리고 그나마도 천 년  전 천마신교의 두 번째 중원장정 당시 천마곤파마저도 사라졌기에 건곤대전마저도 사라진 이름이되었다.
한데 이 순간, 백양신마가 바로 그 초창기의 천마건곤대전을 강자존의 율법을 걸고 공표한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잔월혈마와 세 명의 장로들은 백양신마가 미쳤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마건곤대전이라니'''
물론 백양신마의 말대로 천마건곤대전이 공표된 이상 곤패의 주인은 대종사의 명을 따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천이백년전의 천마신교가 아닌 것이다.
잔월혈마의 생각에 정말 천마건곤대전을 전개한다면 건패주, 즉 소종사의 추종세력으로 원로원과 그들이 허수아비로 내세운 곤패주라는 작자는 물론 그들의 가솔들과 수하세력들까지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말이다.
한데도 자신의 말에 저렇게 당당하게 맞받아치고 나오는 저의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잔월혈마의 입에서 피식거리는 미소는 비어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나직한 소리를 동반하기 시작했다. 조금''''아니, 많이 충격적인 했지만, 어찌 생각하자면 이것이야말로 자신들을 도와주는 일인 것이다. 이것저것 잴 필요 없이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면 된다면 것이니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흐흐,흐흐흐, 좋소이다.  일 각이라''''고맙구려, 그렇게나 만은 시간을 주셔서''''
잔월혈마는 그렇게 빈정거리듯이 말하고는 세 명의 장로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그의 눈짓에 따라 잔월혈마를 비롯해 세 명의 장로들 역시 입가에 비웃음을 담은 채 등을 돌려 천살마검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주는데 마다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공통된 생각이었다.
잔월혈마는 천살마검대가 도열해 있는 곳으로 천천히 움직이며 음산한 어조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이 자리에 있는 놈들 중 천마건곤대전의 의미를 모르는 놈은 없겠지? 그리고 칼을 뽑는 놈은 죽기 마련이지만 꽁지를 마는 놈은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는 것도 설마 모르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이제 반 각의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도, 흐흐흐! 과연 바보들이 얼마나 될는지 두고 봐야지'''
그것은 그들의 결정이 어떠하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려주는 중얼거림이었고, 또한 주변에 늘어서 있는 원로들의 수행원들에게 은연중 가하는 협박이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팔짱을 낀 채 먼 산만 바라보고 있던 남염 역시 앞서 가는 잔월혈마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다가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백양신마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노야, 멋있었소,
그 말과 함께 대답도 듣지 않고 그 역시 천살마검대가 있는 곳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기자 백양신마는 그러한 그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우를 향해 말했다.
자네에게 대략적인 설명은 하였네만'''''적은 피를 흘리기 위해 택한 방법일세, 하지만 시작이 확실해야 앞으로 되도록 피를 적게 흘리게 될 것일세.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백양신마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곡천과 다른 세 명의 원로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전에 자네들의 동의를 얻지 않고 혼자 결정을 내려 미안하게 생각하네.
그 말에 곡천이 말을 받았다.
아닙니다. 노야의 뜻이 바로 저희들의 뜻! 오히려 바라던 바입니다.
뒤이어 빙백수 추렴도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만, 생각해 보니 이것은 곤패주를 따르기로 결정한 때부터 정해진 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천마건곤대전이야말로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정말 오랜만에 잃고 있었던 투지가 느껴지는군요.
천잔수 패가륜과 응조마군 구겸 역시 힘있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백양신마는 미소와 함께 말했다.
고맙네, 모두들 이해해 주어서,
그 말과 함께 백양신마는 빙글 몸을 돌려 두 눈에서 횃불 같은 광망을 토해 내며 주위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백여 명의 수행원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너희들도 지금껏 모든 일을 듣고 보았을 것이니 모든 상황을 알고 있을 터, 결정은 자유이고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다. 지금 부터 본교는 천마건곤대전에 돌입하니, 남을 자는 칼을 뽑고, 두려운자는 돌아가 모두에게 이 사실을 알려라.
천마건곤대전에서는 비겁자도 배신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실력을 가늠하여 움직이고 신념에 따라 행동하라. 그 이상 해줄 말은 없다.
백양신마의 외침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무기를 뽑아 드는 모습이 보였고, 반대로 화급한 몸놀림으로 자리를 피해 달아나는 자도 보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막지 않았고, 비웃지도 않았다. 잔월혈마와 장로들을 위시해 천살마검대의 무사들 역시도 그들을 가로막지 않았다.
그렇게 자리를 피한 자들이 사십여 명 정도였고, 나머지 육십여 명은 칼을 뽑아 든 채 백양신마의 근처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굳은 각오가 서려 있었고, 이미 생사는 벗어 던진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남아 있는 자들 대부분이 네 원로들을 수행해온 가솔들이었지만, 그 외에도 이십여 명이나 더 남아 있다는 것은 무척 뜻밖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네 원로의 수행원들이 빠짐없이 전부 남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수하들로부터도 신망을 얻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통상적으로야 수하들이 자신의 주군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르지만 지금은 천마건곤대전의 상황이었고, 백양신마가 말했듯이 배신자도 비겁자도 없는 것이다. 각자가 최선을 다해 천마건곤대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고, 필요하다면 유리해 보이는 적에게 가담해서라도 살아남는 것이 나중에라도 잘했다는 말을 들을 일이었다.
신념에 따라 죽음을 택하는 자라 할지라도 아무도 칭찬해 주지 않는다, 그것이 천마건곤대전인 것이다.
백양신마는 지금의 상황이 무척이나 흡족한 듯 미소까지 떠올린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천마신교의 원로이기보다는 진정한 무인이기를 바라는 그에게 있어 그들의 모습은 천마신교의 미래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을 엿보게 하였기 때문이다.
반대로 잔월혈마나 세 명의 장로들은 모두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에서 원로들과 중원에서 온 자들 말고도 육십 명이나 남다니.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그들에게 직접적인 암시를 남겼던 잔월혈마의 입잔에서는 절로 이기 갈리는 상황이었다.뿌드득! 아직도 본교에 저런 어리석은 놈들이 있었단 말인가?살길을 알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택하는 미친놈들! 쓸데없는 만용의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곧 알려주마!
잔월혈마가 이를 갈아붙이며 말하자 4장로인 절영마수 위항이 괴소와 함께 음충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흐흐, 백양 늙은이가 설마 이런 초강수를 둘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지만, 어찌 되었건 우리에겐 나쁘지 않은 일이오. 이기회에 원로원은 물론이고 눈에 거슬리던 놈들을 모두 쓸어버립시다.
사실 저 작자들이 사사건건 간섭하는 바람에 중원 진출 계획도 계속 미루어졌던 것이고, 그 바람에 소종사도 우릴 신뢰하지 않고 자꾸 배제시키려 했던 것 아니오. 이제 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거칠 것이 없으니 곧바로 중원까지 밀고 나갑시다.
위항의 말에 7장로 멸절마도 석진도 자신의 거도를 툭툭 치면서 동감을 표시했다.
이 녀석 역시 벌써부터 중원 녀석들의 피맛을 보고 싶다고 아우성치고 있소. 듣자 하니 저 녀석들 중에도 도를 제법 다룰줄 알는 놈이 있다던데, 그놈은 내 차지요.
잔월혈마나 장로들도 풍검신을 비롯해 중원에서 온 자들이 하나같이 만만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천마신교 내에서 대종사를 제외하고 다섯 손가락안에 드는 실력자라는 묵월과 백양신마가 있고, 네 명의 원로들 역시 그들에 비해 그리 떨어지는 자들은 아니니 상대방도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전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토록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이유는 역시 자신들의 뒤에 포진하고 있는 천살마검대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곳에 천살마검대를 대동하고 온 이유가 여차 하면 격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상대방은 혈수결로 여섯 원로가 빠져 있는 상태이기에 그들은 더욱 자신만만해 있었다.
모두가 탈마급 고수라 가정해도 천살마검대원 열 명씩이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고, 생사경의 경지라는 풍검신 또한 오십명으로 이루어진 천살마검대 일개조의 전력이면 역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떨거지들이야 천살마검대 개개인이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니 단순한 수치상으로도 천살마검대 육개조 삼백여명이면 그들 모두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이다.
한데 대주를 포함해 오백 명의 천살마검대가 전부 투입되었으니 결국 자신들이 나설 건덕지도 없는 것이다.
멸절마도 석진 역시 그러한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에 미리 자신의 상대를 밝혀둔 것이다. 이렇게 미리 언질을 해두지 않으면 도를 잘 쓴다는 지옥낭귀라는 놈 역시 순식간에 천살마검대에 의해 도륙이 나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 역시 천살마검대 열 명 정도의 협공이라면 어떻게든 버텨볼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이라면 촌각을 버티기 어려웠다. 천살마검대 개개인은 살인에 미쳐 있는 살귀들이었고, 싸움에서는 목숨을 돌보지 않은 동귀어진의 수법을 서슴없이 감행해 오기때문에 같이 죽자고 맞서봐야 몇 놈 죽이고 황천행일 테고, 실력으로 버텨 보려고 하다가는 순식간에 제대로 손도 못 써보고 도륙이 나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비공식적인 대종사의 친위대이자 통제불능의 마인들만 모인, 십이마군이 포함된 일백마황대와 공식적인 대종사의 친위대로서 폐관 연무관을 지키고 있는 무영사신대를 제외하면 천살마검대는 실질적으로 천마신교내에서 가장 강한 전투집단인 것이다.
그렇게 잔월혈마와 장로들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채 중인들과 그리 멀지 않은 전면에 서서 여유를 부리고 있는 동안, 동사왕 역시 천우를 향해 은근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저기'''이 보게, 천 아우, 부탁이 있는데''''
말씀해 보십시오.
저놈들 말이야''''' 꽤나 한가락씩 하는 놈들인 것 같거든, 그래서 말인데 ''''좀 남기면 안 될까? 요 근래 몸도 뻑적지근하고 말이야'''이 우형쯤 되는 나이가 되면 간간이 몸을 풀어주지 않으면 뼈마디가 녹슨단 말일세.
꽤나 위험한 자들입니다.
알지'''아니까 자네에게 이렇게 부탁하는 게 아니겠는가, 이 우형도 무인이란 말일세. 비록 사람을 죽이는 것은 좋아하지는 않지만 생사결 속에서 존재를 느끼는 무인 말일세.
저놈들이 평범한 놈들이라면 이런 부탁은 하지도 않을 걸세.
이 우형에게 생사의 갈림길을 충분히 느끼게 할 만한 놈들이기에 부탁하는 것일세. 그러니 쫌만 남겨주제. 응?
마치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듯한 말이었지만 그 속에도 무인의 투혼이 담겨 있었다.
그렇소, 풍검신, 나는 결코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기 위해 온 것이 아니오, 귀하가 나선다면 그건 그저 의미없는 살육에 지나지 않소 모두 함께 왔으니 함께 싸울 권리도 있는 것이오. 그러니 내게서 싸우다 죽을 수 있는 권리르 빼앗지 마시오.
동사왕의 말이 끝나자마자 염상이 백태 가득한 두 눈에 불이라도 지핀 듯 혈광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천우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천우에게 비슷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천살마검대는 강호에서 쉽게 만나볼 수 없는 강한 자들이었고, 그러한 강자들 앞에서 투혼을 느끼지 않는다면 오히려 무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가 대등한 상황에서의 승부! 그것은 그 어떠한 일이라도 사람을 흥분시킬 수 있는 일이었고, 특히 무인이라면 그 어떠한 것보다도 가슴뛰는 일인 것이다.
그들 역시 평소에 쉽게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강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목숨을 걸고 싸워볼 만한 상대가 눈앞에 있다는 것은 무인으로서 피를 끓게 만드는 일이었다.
천우는 죽립 아래도 중인들을 둘러보고는 이윽고 동사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그동안 너무 제 생각만 했군요. 모두가 함께 왔으니 제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미처 생각치 못했습니다.
그 말은 염상의 말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기에 중인들은 그때까지 억누르고 있던 투기를 발산해 내기 시작했다.
지금껏 천우가 나선다면 특별히 싸울 일도 없을 것 같기에 억눌러 놓았던 투기였지만 이제부터는 풍검신만의 싸움이 아닌 자신들의 싸움이기도 했기에 본연의 칼끝 같은 긴장감을 갖기 시작했던 것이다.
백양신마 역시 중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기세를 느끼면서 자신의 독문무공인 태양이화기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이쪽의 갑작스런 기세를 느꼈기 때문이지 조금은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잔월혈마 등을 바라보며 진각을 실어 천천히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쿵웅!
시간이 다 되었다.

4장 처음이오,누가 내 손을 잡아준 것은



백양신마의 진간을 실은 발 디딤에 폐부까지 땅울림을 느낀 잔월혈마 등이 인상을 일그러뜨리는 사이. 그동안 마치 남의 일을 보는 것처럼 심드렁한 기색을 짓고 있던 귀혼마검 남염이 흉터 가득한 얼굴에 짙은 미소를 피워 올리며 중얼거렸다.
역시 마음에 드는 노인네란 말이야! 이제야 좀 싸워볼 만한 마음이 생기는군.
그 말과 함께 그 역시도 기세를 끌어올리기 시작하며 일사불란하게 정렬해 있는 천살마검대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모두 들었겠지! 저런 노인네를 상대로 목숨을 아까는 놈이 있다면 그놈은 천살마검대의 수치다. 가라! 죽음이 너희를 부른다!
그의 외침에 석상처럼 도열해 있던 오백 명의 천살마검대원들이 마치 하늘에 붉은 수라도 놓듯이 일제히 몸을 솟구쳐 올리며 전면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백양신마를 비롯해 동사왕 등도 땅을 박차며 그들을 맞아 신형을 띄워 올렸다.
콰르르릉!
쉬쉬쉬쉿!
크아악!
크하하하! 마음껏 놀아보자꾸나, 이 어르신이 바로 동사왕이시다.
순식간에 허공 중에 검기들과 강기들이 어우러지며 폭음과 단발마들이 터져 나왔다.
그 와중에도 동사왕의 광소와 자시 소개가 가장 크게 울려나오는 가운데 장내는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검기광풍에 뒤덮여버렸다.
일반적으로 육백여 명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싸우게 되면 발디딜 틈도 없는 난전이 되겠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절정고수요 초절정 고수들이었기에 허공도 별 제약이 되지 못해 연신 붉은 물결과도 같은 천살마검대와 중인들이 땅과 하늘을 오르내리며 강기와 검기들을 뿌려대는 탓에 하늘마저 몸살을 앓을 지경이었다.
천우는 그러한 격전을 바라보면서 원래 서 있던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조아 역시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마동을 업은 채 그 옆에 서 있었다.
천우는 서 있는 자리에서 모든 사람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면서 혹시 있을지도 모를 불상사에 대비하고 있었다. 비록 중인들의 바람대로 자신이 나서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일행 중에 어느 누구라도 죽게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고, 그들이 나주에 뭐라하던 정말 목숨이 위험한 상태라면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그들에게는 무인으로서 싸우다 죽는 것이 아무런 후회 없는 일인지 모르겠지만 천우로서는 그것은 그다지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관계된 사람을 잃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조아 역시 한껏 긴장된 기색으로 한 손에 검을 뽑아 든 채 격전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등에 업혀 자고 있는 마동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것이다.
앗!
그러던 순간 조아는 자신과 천우가 있는 곳을 향해 검을 뽑아든 채 빛살처럼 날아드는 붉은 무리들을 발견하고는 짧은 경호성과 함께 그들을 향해 검을 발출하려 하였다.
하지만 어느새 검을 휘두르려던 손은 천우에 의해 붙잡혀 있었다. 그 뜻밖의 사태에 놀라 조아가 다급성을 토해 내려는 찰나 천우의 침착한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있으니 괜찮소, 
 그제야 천우의 존재를 인식한 조아가 챙 넓은 모자에 달린 면사 안에서 다시 얼굴을 붉히며 땅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천우가 어떤 존재인지 잘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당황해 나서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고, 그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검을 쥔 자신의 손이 천우의 손을 붙잡혀 있다는 것이었다.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며 달려들고 있는 천살마검대를 앞에 두고 부끄러워 땅만 쳐다보고 있다는 것은 어서 죽여 달라는 행동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지금은 천우가 함께 있었기에 그녀는 무인의 본능도 잊어버리고 대담무쌍한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살마검대 제1조를 이끌고 있는 부대주 추명혈검 반계명과 조원 오십여 명은 천우와 조아를 향해 달려들면서 거침없이 검강의 해일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아라면 그러한 광경만 보고도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랐겠지만 천우는 상대가 검기를 발출해 내든 검강을 발출해 내든 별다른 의미가 없었기에 그저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천살마검대1조 전원은 이미 생사를 도외시한 채 이 한 번의 공세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공이 탐나서가 아니었다. 지금 그들이 바라는 것은 생사경의 고수와 자신들 전원의 목숨을 맞바꾸는 것이었다.
천살마검대는 기본적으로 일반 전투가 아닌 극마나 화경 이상의 초절정 고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그들은 극마잠원결을 익힘으로써 인위적으로 검강까지 펼쳐낼 수 있는 초절정고수들이었지만 진정한 극마에는 도달하지 못한,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앞으로도 극마에 도달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앞으로 언제 찾아올지 모를 주화입마를 기다려야만 하는 자들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극마잠원결은 깨달음에 의한 상태가 아닌 인위적인 방법으로 막강한 내공력을 이용하여 강기를 발현시킬 수 있도록 해주고, 마공진기의 폭죽에 의한 주화입마의 가능성은 대폭 줄여주는 천마신교에서 창안된 상승 마공으로, 마공이 절정의 경지에 이른 후 극마경에 들지 못하고 한계에 봉착한 마공 고수들이 택하는 일종의 편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극마경에 오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에 택하는 방법이기는 했지만, 문제는 일단 극마잠원결을 익혀 사용하기 시작하면 진정한 극마의 단계는 더욱 멀어진다는 것에 있었다.
미지의 장소라 한다면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하지만, 이미 알려진 길이 있다면 그 길을 통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알려진 길을 다니기 시작한 사람은 당연히 다른 길을 찾아보려 하지 않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이치다. 굳이 더 빠르고, 효과적인 길을 찾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즉, 극마잠원결은 극마경에 도달하지 못하면 쉽게 발현시킬 수 없는 강기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고, 주화입마의 위협성까지 줄여주는 효과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그로 인해 스스로 다른 길을 찾아볼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마공을 익힌 고수들이 주화입마에 드는 요건 중 제일 흔한 경우가 포화상태에 이른 진기의 폭주이긴 하지만 운공 중에 심마에 빠져들어 주화입마에 드는 경우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러한 심마는 마공을 익힌 자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지기 마련인데. 그 때문에 극마잠원결을 익힌 자들은 비록 진기의 폭주에 의한 주화입마의  가능성은 대폭 줄어들지만 반대로 심마에 의한 주화입마의 가능성은 점점 높아진다고도 할 수 있었다.
결국 극마잠원결은 두 가지 위험요소 중 한 가지는 없애주는 대신 다른 한 가지 위험요소는 계속해서 키우게 되는 것이고, 그 때문에 극마잠원결을 익힌 자들이라도 심마에 의한 주화입마의 공포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또한 극마잠원결을 익히지 않은 자들이 극마경에 도달할 가능성은 훨씬 더 높았다. 때문에 천마신교에서는 극마잠원결을 익힌 자들을 더 이상의 진척을 이룰 수 없는 일종의 낙오자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러한 자들로 이루어진 조직이 바로 천살마검대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살마검대가 천마신교의 정예 무력단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그런 그들 스스로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오히려 지독한 절망과 자괴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무인으로서 한계에 봉착하여 결국은 언제 찾아올지 모를 주화입마의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더 이상의 진전을 바라볼 수 없는 낙오자의 길이 택했다는 자괴감''''그것이 그들 대부분이 갖고 있는 생각이었고,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보다 뛰어난, 그리고자신들은 넘지 못한 벽을 넘어선 강자들과 싸워 함께 저승길을 동반자로 삼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심마로 인한 주화입마의 공포 속에서 그나마 탈마급의 고수와 싸우다가 동귀어진할 수 있다면 그들로서는 절대 손해 보는 죽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것이다.
천살마검대주인 귀혼마검 남염은 그러한 극마잠원결을 익히고서도 극마경을 이룬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고, 비록 초입이기는 하지만 탈마경까지 이룬 자였기에 천살마검대는 그를 진심으로 따르고 있었다. 남염 또한 그러한 천살마검대 출신으로 그들의 심정을 잘 알고 있기에 호법의 직위를 마다하고 천살마검대의 대주로 남아 있는 것이었다.
천우는 자신과 조아를 향해 생사를 도외시한 채 오로지 공격일변도로 동귀어진을 감행해 오는 혈의인들을 무심한 표정으로 지켜보면서 조아까지 포함하는 방원 삼 장여의 공간을 자신의 의지하에 두었다.
무공으로 말하자면 호신강기를 펼친 것쯤 되겠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결계를 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여전히 자신을 향해 엄청난 기세로 쇄도해 오고 있는 천살마검대의 공세는 일절 무시한 채 여전히 격전장을 차분히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의형인 동사왕과 묵월 부교주, 그리고 단리종후와 백낙천만이 그런대로 여유가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은 혈의인들의 동귀어진식의 공세에 상당히 곤란을 겪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천살마검대의 반수 정도에 해당하는 인원이 동사왕과 묵월 부교주, 그리고 단리종후와 백낙천 그 네명에게 묶여 있었기에 그런대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나 격전 초기에 의형인 동사왕이 보인 활약은 가히 발근이라 할 수 있었다. 최초의 결돌에서 제왕수결로 십여 명의 혈의인을 단숨에 벌집으로 만들어놓은 것은 물론 지금처럼 오십여 명의 혈의인들에게 둘러싸이기 전까지는 몇 차례나 십여 명씩 저승길을 밟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혈의인들이 곧바로 별떼처럼 모여들어 지금은 오십여 명 정도의 혈의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위협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지만 아직 큰 위험은 없어 보였다.
천우가 보기에 동사왕은 손에서 펼쳐지는 제왕수결은 지금의 혈의인들과 같은 공세에 있어서는 가히 극성이라 해도 좋을 만큼 효과적인 공격 방법이었다.
혈의인들이 공격은 수비식을 일절 무사한 공격 일변도의 동귀어진의 수법이었고, 그것은 곧 원하는 개수만큼 공간을 진공 상태로 열수 있는 의형의 제왕수결에 있어서는 지붕 없는 집에 비가 들어치는 것과 다름없는 효과를 나타내었던 것이다.
단리종후나 묵월도 격전이 시작되면서부터 가차없이 살수를 전개하여 각자가 이십여 명 정도의 혈의인들을 줄여놓은 상태였다.
백낙천은 그 와중에도 살수는 전혀 전개하지 않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려는 천살마검대를 귀신 같은 신법으로 가로막으면서 자신을 공격하도록 유도하였기에 오히려 지금은 가장 많은 혈의인들의 발을 묶어놓고 있으니 그럭저럭 자기 몫은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외에도 싸우겠다고 남은 원로들의 수행원들과 역시 오십여 명 정도의 혈의인들이 어우러져 혼전을 벌이고 있는 상태이고, 한쪽에서는 갈천성이 따로 천마신교의 장로라는 자와 어울려 불꽃 튀는 접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상대편에서도 아직 수뇌급 인물 네 명이 가세하지 않고 있긴했지만, 현재로서는 전체적으로 팽팽한 균형이 이루어져 있기에 아직은 자신이 개입하지 않아도 큰 무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천우가 자신에게 몰아쳐 오고 있는 공세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격전장을 살피는 동안 천살마검대의 최정예이자 부대주를 포함한1조 전원이 필살의 기세로 만들어 낸 강기의 해일이 마침내 천우가 만들어놓은 결계에 부딪쳐왔다.
휘스스스스스스스!
어엇!
이, 이게 무슨'''', 그냥 소멸되어 버리다니?
천살마검대의 1조 전원이 사력을 다해 전개해 낸 검강의 해일은 천우가 쳐놓은 결계에 닿자마자 아무런 저항도, 소음도 없이, 말 그대로 허무하게 스러져 버렸다. 마치 물 속에 또 다른 물이 스며드는 광경이랄까? 때문에 천우를 공격해 오던 천살마검대 1조 전원에게서 놀람과 의문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또한 동시에 천살마검대 1조는 자신들의 공세가 몰아닥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도 뽑지 않은 채 태연히 격전장만을 바라보고 있는 천우를 보면서 무한한 분노를 느꼈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 강자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갖고 있는 오만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비록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지만 천우가 무형의 호신강기 정도는 펼쳐놓았을 것이라고 그들도 짐작하고 있었고, 그러한 오만함이 곧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인지 느끼게 해주겠다고 이를 갈아붙였다.
그들은 자신이 있었다. 생사겨의 고수를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이 아니라 함께 죽을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오십 명으로 이루어진 조의 단위는 바로 초마나 생사경 급의 고수를 상대할 수 있도록 짜여진 것이었고, 그렇게 오십 명으로 짜여진 천살마검대의 목숨을 도외시한 동귀어진의 공격을 폐관 전의 대종사에 의해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인정을 받은 바 있었다.
그런데도 전력을 다한 자신들의 공세가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고 그냥 스러져 버리자 놀랄 수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도 의문을 느낀 것은 자신들 역시도 아무런 충격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보통 강한 공세가 가로막히게 된다면 반발력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천우가 방원 삼 장여에 걸쳐 펼쳐놓은 것은 단순히 기를 이용한 강기의 막이 아니라 의지를 이용해 경계점을 완전한 무로 돌려놓은 공의 결계라는 것을 그들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결계에 의해 완전한 무로 돌려놓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들다는 개념과는 조금 달랐다.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인 개념, 하였으되 처음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그리고 모든 것을 완전하게 처음으로 되돌린다는 개념이었다.
천살마검대는 비록 처음의 공세가 너무 허무하게 스러져 버리자 한순간 놀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넋이나 놓고 있을 만한 자들은 아니었다. 어떠한 수법에 의한 것인지 비록 이해하기도 힘들고 당황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달려들던 기세를 늦추지 않고 어느새 천우가 쳐놓은 결계의 경계점까지 도달한 그들은 또다시 공세를 전개해 내었다.
이익! 죽어라!
이따위 사술로는 우리의 공세를 막아낼 수 없다!
저마다 필사의 의지를 불태우며 다시 고함성과 함께 전개해 낸 공세는 여전히 무표정한 기색으로 격전장만을 주시하고 있는 천우를 햐해 뻗어 나갔다.
아니,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기 때문에 모두가 순간적으로 그렇게 착각했을 뿐이었다.
아직도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악에 받친 채 공격을 감해하고 있는 자들도 있었지만, 천살마검대의 부대주인 추명혈검 반계명을 비롯해 대부분의 천살마검대원들은 이미 검을 늘어뜨린 채 천우와 삼 장여의 거리를 남겨두고 멍청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서 있을 뿐이었다.
반계명은 다시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천천히 검을 들어 전면을 겨냥한 후 한 발은 앞으로 내딛어 보았다. 그러자 몸이 움직임에 따라 검 끝도 어느 한 지점을 통과하고 앞으로'''아니, 그렇게 느꼈는데 또다시 아니었다.
자신은 분명 다시 일 보 앞으로 움직인 상태였고, 그것을 증명하듯이 자신의 왼발과 오른발은 순서를 바꾸어 지면에 엇갈려 놓여 있었다. 한데도 눈앞에 보이는 풍검신과의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것이다.
반계명은 이번엔 그 상태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그리고 시선은 풍검신이 아닌 조금 앞의 지면을 향해서 고정시켰다.
자신이 움직인 만큼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자면의 고정점 또한 당연히 자신과 가까워져야 한다. 그런데 지면의 그 고정점 또한 역시 처음과 마찬가지로 가까워지지 않고 있었다. 자신은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천살마검대의 1조 전원이 풍검신을 향해 몇 차례나 공격을 퍼부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그러다가 문득 그들의 자신들의 공세뿐만이 아니라 자신들 역시 풍검신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전혀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무슨 단단하기 그지없는 무형의 강막에 가로막혀서 전진을 못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몸은 허공을 나는 새처럼 자유로웠고 전면을 향해 돌진할 때에는 어떠한 속박이나 가로막는 그 무엇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도 도무지 거리가 좁혀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린 후 몇 차례로 계속해서 시험을 해보았지만 결과는 번하지 않았다. 검강을 발출해도 장푸을 날려보아도 어느 경계점에서 그냥 사라졌고, 돌을 차 넣어보아도 그것 역시 어느 경게점에서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돌은 자신이 차 넣기 전의 원래의 그 자리에 그냥 남아 있었다.
당연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를 꼬집어보니 힘을 준 만큼 고통이 느껴졌고, 혹시 모르는 사이에 진법에 말려든 것이 아닌가 하고 느껴졌고, 혹시 모르는 사이에 진법에 말려든 듯이 아닌가 하고 주변에 예리하게 살펴도 보았지만 그것도 아니라는 것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주변의 환경이 말해 주고 있었다.
생각은 많았지만 무엇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즈음 끈기 있게 공격을 취해 보던 자들 중 지독한 근성과 독기 하나만큼은 천살마검대에서도 알아준다는 1조의 삼분조장 독심사혈 최명의 마지막 공세를 끝으로 이제는 천살마검대 1조 전원이 모든 공세를 멈추었다.
오십 명이 기가 막힌다는 표저으로 삼 장여의 거리를 두고 빙둘러선 채 천우를 바라보며 언제나 그 자리라는 것이 이토록 사람을 황당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새삼스레 깨닫고 있는 것이다.
저,저런! 시작하자마자 벌써 백여 명이나 희생되다니''''
천마신교의 장로들인 조운학과 위항, 그리고 천살마검대의 대주인 남염과 부교주인 잔월혈마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격전장을 지켜보다가, 격전 초기에 벌써 백여 명이나 되는 천살마검대원이 희생된 것에 놀라 경악성들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오. 천살마검대의 반수 정도가 지금 저 네 명에 의해 발이 묶여 있소이다. 그런데도 저들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처음에 희생된 자들도 전부 저들에 의해서요.
으음, 도무지 이해가 안 가오, 천살마검대의 반수의 전력만으로도 모두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원을 투입하고도 오히려 밀리는 형세라니''''
그들은 특히 묵월을 포함한 다른 세 명의 무위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 생각과는 달리 전체적으로 호각세를 이룬 형국이 되자 절로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또 다른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다시 놀람성을 발하기 시작했다.
아니, 풍검신을 공격하고 있는 저들은 왜 또 저리고 있는 것이오? 공격은 않고 포위만 한 채 모두 멍청히 서 있기만 하다니''''
4장로인 위항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서 곤혹스런 표정으로 의문을 표시했다.
하나둘 공격을 멈추는 듯하더니 지금은 모두 공격을 멈추었구려, 혹시 풍검신 저자에게 모두 제압된 것은 아닐지''''
그 말에 천살마검대주 남염이 흉터 가득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로 말했다.
그럴 리가 없소이다. 1조는 천살마검대 중에서도 최정예들이오, 풍검신이 아무리 생사경의 고수라 해도 그렇게 맥없이 쉽게 당할 녀석들은 아니란 말이오.
그럼 왜 공격을 멈추고 저렇게 포위만 한 채 멍청히 서 있단 말인가?
그건'''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소.
남염 역시 1조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기에 자신이 직접 가보겠다고 했다.
칠칠치 못한 놈들 같으니, 그러고서도 무슨 본교의 삼대무력단체 중 하나라고''''
남염은 풍검신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나리려다가 부교주인 잔월혈마의 그러한 말에 흠칫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마치 흉신악살이란 이러한 얼굴이라고 보여주듯이 완전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잔월혈마를 돌아보며 노성을 토해 내었다.
잔월 부교주, 말이 너무 심하오! 칠칠치 못한 자들이라니! 비록 저 녀석들이 언제 주화입마가 올지 몰라 하루하루를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놈들이기는 해도, 어떠한 싸움에서든 결코 물러설 줄 모르는 본교의 정예들이란 말이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귀하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소, 그런데 칠칠치 못하다니, 당장 그 말 취소하시기 발라오.
뭐, 뭐야? 네놈이 감히! 그동안 네놈이 주제넘는 행동을 해도 장로원을 생각해서 몇 번이고 넘어가 주었더니 이젠 아예대놓고 하극상을 벌이려 하는구나, 네놈 눈엔 본좌가 그렇게 우습게 보인단 말이냐! 네놈이야말로 당장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지 않는다면 결코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훗!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요? 높으신 부교주 나으리, 그게 못마땅하시다면 어디 이 자리에서 한번 즉결처분을 내려보시구려, 보잘것없는 천살마검대의 대주 남염은 부교주의 즉결처분을 율법에 따라 받아들이리다. 아, 물론 순순히 목을 내밀겠다는 뜻은 아니오.
남염의 비꼬는 말투에 잔월혈마는 남염 못지않게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리면서 전신에서 지독한 살기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오냐, 네놈 소원대로 해주마!
잔월혈마의 살기에 남염 역시 기세를 끌어올리며 지지 않고 맞서는 태도를 취하자 3장로인 철선마유 조운학이 황급히 나서며 만류하기 시작했다.
왜들 이러는 것이오!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같은 편끼리 분쟁을 일으킨단 말이오. 잔월 부교주께서는 잠시만 고정하시구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시지 않소이까.
그리고 남염 대주도 얼른 잔월 부교주께 사과드리시오. 아무리 잔월 부교주가 조금 말실수를 하였다 하더라도 남염 대주의 그러한 태도는 명백한 하극상에 해당하오, 하지만 지금은 그런걸 따질 때가 아니니 어서 사과하고 차후에 정식으로용서를 빌면 부교주께서도 오늘 일은 이해해 주실 것이오.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한단 말이오? 그럴 맘도 없거니와 사과는 오히려 내가 받아야 한단 말이오. 하지만 높으신 부교주께서는 사과하기는 커녕 즉결처분을 내리겠다고 하니 나 역시 강자존의 율법에 따라 받아들이겠다는 말이오. 나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으니''''
꽈르릉!
크아아악!
3장로인 철선마유의 말류에도 전혀 수그리지 않고 적의를 뿜어내던 남염은 갑자기 장내에 울리는 벽락치는 소리와 비명성에 황급히 시선을 돌렸고, 그 순간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인상을 쓰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이내 줄기줄기 광기와도 같은 살광을 뿜어내며 누가 만류할 사이도 없이 쾌속하게 격전장을 향해 신형을 뽑아 올렸다.
네 이노옴! 그만 멈추지 못할까!
꽈릉!
피,피해''''크아아악!
갑작스런 폭음과 비명성에 시선이 빼앗긴 것은 남아 있던 두 장로와 부교주인 잔월혈마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들 또한 크게 놀라 경악성을 토해 내고 있었다.
저,저것은?
자모천뢰신궁!
분명하오!한데 자모천뢰신궁이 왜 풍검신이 아닌 저놈의 손에''''
그 순간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중원에서 온 자들 중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서생 차림의 젊은 놈 손에 마치 장난감처럼 보이는 작은 활이 들려 있다는 것과, 그 활이 향하는 방향으로 연신 뇌성과 함께 화살처럼 보이는 작은 벼락줄기가 뻗어 나가 천살마검대원들을 벼락맞은 참새 꼴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새 그 주변에는 몸이 사발만 한 구멍이 뚫린 채 그곳에서 연기까지 피워내면서 죽어 있는 십여 명의 천살마검대원을 비롯해, 계속해서 쏘아대는 벼락줄기로 인해 원로들의 수행원들을 착실히 죽음으로 이끌고 있던 천살마검대원들 중 상당수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하나같이 벼락에 타 죽은 듯한 그 참혹한 모습에 남염은 이성을 잃고 앞뒤 볼 것 없이 뛰쳐나갔다. 만약 벼락화살을 쏘아대고 있는 놈을 그대로 놔둔다면 천살마검대가 순식간에 전멸할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었다
수하들의 열망을 꺾고 싶지 않아 처음부터 자신이 격전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 그토록 후회스러울 수가 없었다.
남염 역시 오백의 천살마검대가 전원 투입되면 상황은 금방 정리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수하들이 바라는 것이 무었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을 위해서 일부러 격전에 참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천살마검대에게 있어서 지금과 같은 상황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특별한 기회였다. 아무리 세상 천지가 넓다 해도 그러한 고수들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 있는 기회가 어찌 또다시 있을 수 있겠는가?
남염은 이 한 번의 격전으로 천살마검대원들의 가슴속에 응어리진 웅분과 자괴감 등을 말끔히 날려버릴 수 있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격전이 시작되자마자 뜻밖에도 천살마검대원 백여 명이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한 채 희생되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격전에서도 전혀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고, 또한 애새끼를 등에 업고 있는 계집과 함께 서 있는 풍검신이라는 작자를 공격한 1조 역시 무슨 이유에선지 어느 순간부터 전원 공격을 멈춘 채 멍청히 서 있기만 하는 것이다.
다른 곳은 첫 격돌 이후에 그럭저럭 균형을 유지학고 있는 듯 보였기에 남염은 먼저 1조의 상황부터 파악해 보려고 했다. 한데 도저히 그냥 듣고 넘길 수 없는 잔월혈마의 말 때문에 잠시 언쟁이 벌어졌고, 그사이에 풍검신이 가지고 있으리라던 자모천뢰신궁을 엉뚱한 놈이 쏘아대면서 또다시 이십여 명의 천살마검대원을 불에 탄 고목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다.
남염은 눈이 뒤집히지 않을 수 없었고, 지금 상태에서는 천살마검대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자모천뢰신궁을 사정없이 쏘아대고 있는 그놈이었기에 지체없이 그를 향해 신형을 날렸던 것이다.
남염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향해 쏘아 나가자 뜻밖의 상황에 잠시 놀라 있던 잔월혈마가 이를 갈아붙이며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뿌드득! 이번 일이 끝나면 기필코 남염 저놈을 가만두지 않겠소, 장로들께서도 나중에 말리지 마시오.
험! 그건 나중 일이니 우선은 여기 일부터 얼른 정리합시다.
지금 상황으론 '''우리들도 가세하지 않으면 상황이 좀 어려워 질 듯 싶소.
3장로 조운학의 말에 4장로인 위항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소, 설마 천살마검대 전원이 투입되고도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은''''일단은 자모천뢰신궁을 쏘아대고 있는 저 애송이 놈부터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소? 자모천뢰신궁을 회수하고 난 뒤에''''
하지만 그의 말은 3장로인 조운학에 의해 가로막혔다.
지금은 남염대주가 생대하고 있으니 일단 거긴 놔둡시다.
어차피 누가 회수해도 마찬가지인 물건이고, 남염 대주 역시 우리가 끼어드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게요.
흥! 남염 저놈 역시 다른 놈들처럼 꼬치구이 신세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지. 이무튼 금방 뒈질 놈은 아니니 일단은 가장 상황이 안 좋은 곳부터 처리하도록 합시다.
전월혈마 역시 상황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기에 억지로 분위기를 가라앉히며 조운학의 말에 동의했다.
그럼'''풍검신을 상대하고 있는 1조를 돕는 것은 어떻겠소?
아무래도 상황이 좀 이상한 듯싶고''''
험! 글쎄올시다.
이번에도 위항의 말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변수를 내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고, 그러한 돌발적인 변수란 대개가 위험한 것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위험을 자초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절영마수 위항은 이것저것 재지 않는 비교적 단도직입적인 성격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가 느끼기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너무 많았기에 그로서도 선뜻 독단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느끼기에 현재 풍검신쪽의 상황이 제일 안 좋아보였기에 그 쪽을 지목한 것이었다. 잔월혈마나 철선마유역시 그것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오히려 일부러라도 그쪽은 무시하려고 애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뭐, 아직은 좀더 두고 보아도 괜찮을 듯싶소만, 남염 대주의 말처럼 1조라면 천살마검대 중에서도 최정예들로, 예전에 대종사께서도 인정한 바 있는 자들이오. 그러니 상대가 아무리 생사경의 경지에 있는 인물이라 해도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외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도 어쩌면 진세를 이룬 채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일 가능성이 높소이다. 그런 상태라면 우리가 끼어드는 것은 오히려 방해가 될 여지도 있소이다.
3장로인 조운학의 말이 여러모로 억지스럽다는 것을 위항도 느끼고 있었지만, 그도 눈치가 전혀 없지는 않은지라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높겠구려, 그럼 3장로의 생각에는 어디가 좋을 것 같소? 3장로께서 한번 정해 보시구려,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천살마검대원들을 가장 많이 붙잡고 있는 저 민대머리 녀석이 어떨까 싶소만, 저 녀석을 처치하면 남은 여유 전력이 많이 생길 테니 그 후에는 우리가 참견하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모두 일거에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보오,
조운학은 자신들이 격전장의 어느 곳에 가세한다 하더라도 단번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긴 하겠지만 묵월이나 원로들에게 천살마검대와 함께 손을 쓴다는 것은 아무래도 모양새가 별로 좋지 않을 듯싶었고, 전혀 예상치 못한 놈의 손에서 자모천뢰신궁이 뛰어나오는 것도 보았기에 가급적이면 변수가 가장 적은 곳을 선택한다고 한 것이 바로 백낙천이었다.
비록 칠십여 명에 달하는 천살마검대에게 협공을 당하면서도 미꾸리지처럼 잘 도망 다니고 있는 놈이었지만 아직까지 그에 의해 사상자가 단 한명도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제일 맘에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비록 신법은 뛰어날지 몰라도 공격력은 취약하다는 증거였고, 가장 많은 인원이 그에게 묶여 있으니 정황 상으로도 그 녀석을 제일 먼저 처리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더불어 가장 많은 천살마검대원이 들러붙어 있으니 자신들이 협공을 가하기에도 적당한 명분이 서는 놈이었다.
흐흐, 그렇구려, 역시 지낭이라 불리는 3장로답소, 그럼 저 놈부터 처리하도록 합시다. 부교주께서 어떠시오?
좋소, 저런 애송이 놈에게 우리가 협공을 가한다는 것이 창피한 일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임무가 우선 아니겠소. 게다가 가장 많은 인원이 공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애송이를 어쩌지 못하고 있으니, 실력 또한 만만한 놈이 아니오.
위항과 잔월혈마 역시 그 점을 깨닫고는 흠족한 듯이 흉소를 피워 올리며 조운학의 말에 찬성하였다.
순간, 그들 세 명은 동시에 눈짓을 교환한 후 땅을 박차 그들 말대로 가장 많은 천살마검대원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있는 백낙천을 향해 신형을 폭사시켰다.
한편 천우는 폭음과 기합성이 난무하는 격전장을 뚫고 잔월혈마 등이 멀찍이 서서 하는 말을 모두 들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입가에 희미한 조소를 띄워 올렸다. 현재 적의 입장에서는 가장 탁월한 선택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본심 자체가 비열하기 짝이 없다고 느꼈기에 비웃음을 던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운이 좋게도 상대를 제대로 골랐다. 만약 그들이 백낙천이 아닌 다른 사람을 지목했다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개입해야 했을 테지만 상대가 백낙천이라면 굳이 자신이 참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연신 뇌성을 울려대며 장난감 같은 활로 벼락같은 강기를 쏘아대고 있는 화천악이라는 자가 혈의인들의 대주라는 자를 물리치기만 하면 장내의 상황은 금방 정리될 수 있었다.
확실히 천우가 보기에도 자모천뢰신궁이라는 조그만 화살은 범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백낙천이 지니고 있는 태양륜 정도는 아니더라도 꽤나 강한 신기를 뿜어내고 있는 물건인 것이다.
염상이 염왕혈옥수라는 것을 중인들 앞에 드러내기 전에도 천우는 그에게 극강한 마기를 내포한 기물이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화천악이란 자에게도 범상치 않은 신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그가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천우는 눈치 채고 있었지만, 혈의인들은 화천악의 본신무공만으로는 버텨내기 힘든 자들이니 결국은 그가 지닌 신기를 꺼내어 사용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역시나 십여 명 정도 되는 혈의인들의 협공에 단 몇 수 만에 생사기로에 놓이게 되자 화천악은 천우의 예상대로 신기를 꺼내어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다.
한데 그 물건이 뜻밖에도 상대방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을 거라고 말하던 자모천뢰신궁이라는 활이었다니 천우로서도 조금은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염상이라는 자가 염왕혈옥수를 사용하면서도 열 명의 혈의인들과 호각지세를 이루고 있는 것에 반해 화천악은 순식간에 십여 명의 혈의인을 처리한 것은 물론이고 원로들의 수행원들을 몰아붙이던 혈의인들까지 상당수 처리하는 것을 보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염왕혈옥수와 자모천뢰신궁이라는 두 기물의 우열을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다수의 강기를 퍼부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모천뢰신궁이라는 활이 좀더 효과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혈의인들의 대주라는 자도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러 자모천뢰신궁에서 쉴 새 없이 쏘아져 나오는 작은 벼락줄기들을 막아내고는 있었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할 듯싶었다.
천우는 그렇게 격전장의 상황을 다시 한 번 면밀히 파악해 보고는 자신의 주위에 넋을 놓고 서있는 오십 명의 혈의인들을 어찌 처리할 것인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애초에는 자신을 향해 검강의 해일을 뿌려대며 달려드는 그들을 풍검으로 단번에 처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을 보고는 불현듯 생각이 바뀌었다. 그들의 눈빛은 자신에 대한 적이라기보다는 의형이나 일행들이 보여주었던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것을 의형인 동사왕이나 백양신마는 무인으로서의 죽음이라고 표현했다. 천우는 그들의 눈빛에서도 그것을 볼 수가 있었고, 한편으로는 열망과 하께 절망이 교차되어 있는 그들의 눈빛을 보면서 묘한 감흥을 느꼈다. 그들은 자신에게 덤벼들면서 무인으로서 죽고 싶다는 열망과 동시에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절망을 함께 내비쳤던 것이다.
천우 자신이 다른 건 몰라도 절망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었고, 그러한 눈빛을 지닌 이들이 자신에게 덤벼들면서 무인으로서의 죽음이란 열망을 갈구하는 것을 보았기에 불현듯 생각을 바꾸어 결계로 그들의 공세를 차단한 것이다.
염상이 말했듯이 자신이 공세를 펼친다면 일방적인 살육이 될 뿐 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죽음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어려움을 느끼고 물러설 수 있도록 결계를 펼쳐둔 것인데 그들은 이 순간 오히려 한없는 절망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에게서 또 다른 깊은 절망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었고, 그 때문에 천우는 오히려 곤혹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천우는 그들을 무시한 채 격전장을 주시하면서도 그들의 감정 상태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결국 결심을 굳힌 천우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여전히 이곳저곳이 녹슬어 있는 볼품없는 검, 하지만 천우의 손 안에서라면 그 어떠한 신병이기와도 견줄 수 없는 위력을 보이는 절대의 검! 그 검을 천우는 천천히 치켜들었다.
천살마검대 1조는 그러한 천우의 행동ㅇ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죽어 있는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것은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절망의 나락에서 아무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는 눈이기도 했다.
천우는 검을 들어 천중을 향한 채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을 향해 말했다.
보시오,
천우의 말에 그들은 마치 무엇엔가 홀린 듯한 태도로 천우가 치켜든 검 끝을 바라보았고, 그 순간 그들의 표정이 차츰 변하가기 시작했다.
처음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검 끝이 마치 아지랑이처럼 아련하게 흔들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검 끝을 따라 차츰 모든 것이 지워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들을 비추던 햇살도, 자유롭게 흘러 다니던 구름도, 그리고 밝은 태양과 하늘마저도''''
그렇게 그가 치켜든 검 끝위로 모든 것이 사러졌다가 착각처럼 다시 두 눈에 들어왔고, 그 순간 그들은 또다시 비쳐드는 햇살과 더불어 자신들을 어루만지는 바람의 숨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특별히 그들을 위하는 마음에서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무인으로서의 죽음 정도는 얻을 자격이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했기에 천우는 전력으로 하늘을 향해 품검을 전개해 보여주었다.
어느새 천우의 녹슬고 낡은 검은 다시 검집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천우의 주위에 둘러서 있던 천살마검대의 표정들도 눈빛들도 완전히 변해 있었다.
이윽고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던 1조장 반계명의 입에서 떠듬떠듬 말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고'''맙'''소, 진정으로''''우리들은 ''''오히려 '''''행운아들이오''''이제'''
천우는 그러한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 풍검으로 인해 사라졌어야 할 그들의 육신을 붙잡고 있던 결계를 풀어버렸다.
그들의 신형은 마치 여름 햇살에 녹는 봄눈처럼 빠르게 스러져 갔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여전히 행복감이 충만해 있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행복했으며 또한 통쾌했다. 더불어 그 순간에 모든 절망감과 자괴감 역시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절망에 빠뜨렸던 그 벽이란 것들이 천우의 그 한수로 인해 얼마나 하잘것없고 우스운 것이었는지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그러한 벽을 넘어 진정한 강자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하늘이 있는 줄 모르고 자신들보다 조금 높은 산에 올랐다고 기고만장하던 자들, 그리고 그 하늘을 보며 자신들보다 더한 절망감을 느끼게 될 자들을 생각하면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천우의 검이 하늘을 지워가는 모습을 보며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자신들의 온몸으로 느끼면서 정말 행복한 심정으로 죽음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결계를 거둔 천우는 풍검에 의해 스러져 가는 그들을 보며 여전히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전과 달리 씁쓸함이 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손에 죽으면서도 끝내 고맙다는 말을 남긴 자들, 절망적인 삶을 유지하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삶이 그렇게 못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죽음이 기꺼운 자들''''
절망적인 삶보다는 죽음이 기꺼울 수도 있다는 것을 천우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과연 그러한 죽음이 앞으로 남은 삶 전체와도 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는 그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사람에게는 죽음이라는 것도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과, 무인에게는 무인으로서의 죽음이 그러한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에는 조금이나마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천우는 문득 자신의 손끝을 건드리는 조아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흠칫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니 면사 안에서 복숭아 물이라도 들인 듯이 붉어져 있는 얼굴이었지만 용기를 내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저도''''보았답니다. 그리고 그들의 표정은 진심이었을 거예요.
천우는 조아의 말에 희마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나를 이토록 놀라게 만든 사람은 아마 조 소저가 처음일 것이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천우가 좀더 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어,어머! 죄, 죄송해요. 저,저도 모르게 그만''''
조아는 그제야 자신이 어느새 천우의 손끝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손을 등뒤로 숨기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천우는 조아의 그러한 모습에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짐짓 격전장으로 시선을 주면서 독백처럼 나직이 말했다.
처음이오, 누가 내 손을 잡아준 것은''''
그 순간 조아는 부끄러워하는 와중에도 무의식적으로, 다시 전면을 응시하고 있는 천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천우의 모습은 한없이 강하고 무심하기 그지없는 절대자의 모습이 아니라 햇살 아래 갈 길을 잃은 외로운 고월처럼 비쳐지고 있었다. 더불어 왜 자신의 손이 무의식중에 천우의 손을 붙잡고 있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랬군요, 제가 잡아드릴게요. 계속 앞으로도 영원히''''
조아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우는 다시 격전장을 바라보면소 손끝에 느껴졌던 조아의 따스함을 음미하고 있었다.

5장 넌 우화등선 못 해


백낙천은 첫눈에도 천살마검대라는 혈의인들이 전력으로 공격해 올 경우 자신들의 일행들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을 만큼 막강한 자들이라는 것을 느꼈고, 그 때문에 격전이 시작되자 마자 최대한 많은 인원을 자신이 상대함으로써 피해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물론 위급한 상황에서는 천우가 손을 놓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어쩌면 분위기 상, 그리고 동사왕이나 염상의 말 때문에라도 모르는 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때문에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수만큼 쾌속한 신법으로 혈의인들의 진로를 가로막으며 그들을 자신에게 끌어들였지만, 막상 모아놓고 보니 하나같이 목숨을 도외시한 무시무시한 공격들이라 제압하기도 쉽지 않았고, 그렇다고 태양륜을 이용해 죽일 마음도 없었기에 본의 아니게 혈의인들의 공세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천성적으로 살생과는 좀 거리가 먼 체질인 데다가 불성의 가르침으로 인해 살생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꺼리는 바가 있었기에 처음부터 혈도 등을 제압하거나 무력화시키는 수준으로 상대하려 했던 것인데 그것이 의외로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달리 처음부터 살수를 전개해 낸 동사왕이나 묵월, 그리고 단리 맹주에 의해 혈의인들의 수가 백여 명이나 줄어드는 바람에 전체적으로 팽팽한 국면이 유지되자 일단은 그들의 발을 묶어놓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다가 뜻밖에도 화천악이 기이한 활을 사용하여 혈의인들을 사정없이 격살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고, 그것이 이런저런 이유로 자모천뢰신궁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놀라고 있는 사이에 이제껏 격전에 참여하지 않고 남아 있던 상대편의 수뇌 세 명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탈마급의 고수들이었고, 지금과 같이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혈의인들이 없는 상태라도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은 아니었기에 절로 다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천우가 있는 곳을 바라보니 그는 여전히 오십여명의 혈의인들에게서 둘러싸인 채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자신을 도와줄 생각은 별로 없는 듯싶었다. 아니,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자신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천우이니 절대 도와주려 하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백낙천은 일단 격전장의 외곽 쪽으로 신형을 빼면서 잠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대로 완전하게 몸을 빼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되면 당장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가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에 어느새 그들 세 명은 그가 있는 곳에 도착하여 혈의인들의 공세를 피할 수 있는 길목을 차단한 채 협공을 가해 오고 있었다.
확실히 혈의인들과는 천양지차의 위력이 담겨 있는 공세였고 결코 피하기도 쉽지 않는 공세였다. 문제는 세 사람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상대하고 있던 칠십 명에 달하는 혈의인들의 무시할 수 없는 공세도 함께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섣불리 받아내거나 피하려 했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짓이겨진 육포 신세를 면할 수 없다는 것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백낙천은 그 와중에도 마지막으로 천우에게 애처로운 눈길을 주었고, 그 순간 천우의 검이 뽑혀진 채 천중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또 한 번의 충격이 있었다.
지금껏 수차례 보아온 풍검이기는 했지만 이번에 목격한 광경은 또다시 백낙천의 얼을 빼놓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지금껏 보고 느꼈던 그 어떠한 충격보다도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일까? 그 순간 백낙천의 손에는 햇살보다 더욱 눈부신 백광을 뿜어내고 있는 비슈누의 원반이 어느새 들려있었다.
번쩍!
장내에 있던 사람들은 한순간 적아를 불문하고 눈이 멀 듯한 눈부신 광채와 함께 지독한 열기를 느껴야 했다. 특히 천살마검대를 비롯해 마공을 익히고 있던 천마신교 사람들은 지독한 열기와 동시에 영혼마저 얼어 붙는 듯한 상이한 감정을 느끼며 그대로 심신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와중에 동사왕의 입에서 기겁성이 터져 나왔다. 천우의 검또한 어느새 공간을 가르고 있었다.
흐익! 저 미친놈이 또다시 전부를 태워 죽이려고 ''''모두 엎드려!
쿠웅!
제대로 통제되지 못하는 태양륜의 열기가 어떤 재앙을 몰고 오는지는 이미 사도련에서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던 동사왕이었다. 때문에 빛과 열기를 느낀 순간 이미 백낙천이 태양륜 발출한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고, 그 순간 모든 것을 무시하고 호신강기를 두른 채 무조건 허공중에 떠 있던 신형을 지면으로 내리꽃았다.
태양륜이 발하는 공포스런 열기에 휩쓸리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한순강에 잿더미로 화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혈의인들의 공세 따위는 생각할 여지도 없었던 것이다.
또한 사도련에서 천우가 어떤 식으로 태양륜의 무식한 열기를 차단시키는지도 보았기 깨문에 무조건 지면에 엎드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호신강기를 두른 동사왕의 상체가 지면에 한 자 가량이나 파묻힐 정도로 사정없이 떨어져 내렸고, 그 상탱서 잠깐 동안 주변의 상황을 느껴보다가 직감적으로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어구구, 삭신이야! 저 미친놈을 그냥''''
동사왕은 엄살과 함께 백낙천을 향해 이를 갈며 몸을 일으켰고, 그러다가 다시 드러난 광경에 잠시 의혹 어린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라? 모두 멀쩡'''은 아니고''''저놈은 아직도 저러고 있네?
뜻밖에도 자신과 죽기 살기로 싸우던 혈의인들의 모습이 그대로 보이자 동사왕은 의문성을 토했다. 그들이 괴로운 표정과 함께 마치 석상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는 그들의 상태가 모두 정상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빠르게 주변 상황을 살피다가 아직도 한쪽에서 백낙천이 마주보기도 힘들 정도의 백광에 휩싸인 채 허공 중에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말 그대로 천신이라도 하강한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별다른 열기는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주변에 있던 놈들만 모두 재가 되어 사라진 모양이군, 그럼'''''
동사왕은 그제야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이 멀쩔히 서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번엔 천우가 수평으로 열기를 차단한 것이 아니라 수직으로 차단하여 외곽 쪽에서 백낙천을 공격하던 자들만 태양륜에 휩쓸렸을 뿐, 다른 사람들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공을 익히고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비슈누의 원반에서 뿜어지는 서기에 의해 커다란 심적 타격을 받고 있는 사아태였다. 그것이야말로 태양륜이 지닌 진정한 힘이었고 모든 사마의 극성이 되는 제석천의 광휘였던 것이다.
특히 아직 극마경에 이르지 못한 천살마검대 전원에게는 가히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이 키워왔던 마성은 점차 소멸되어 가고 있는 상태였다.
그 이상의 경지에 있는 원로들이나 서문휴 등은 비록 갑작스럽게 당할 일이라 잠시 심적 타격을 입긴 했지만 곧 이어 나름대로 운기조식을 취하며 그 백색 서기에 대항하고 있었다. 아무리 비슈누의 원반이 뿜어내는 서기가 사마의 극성이라 해도 그것만으로는 극마 이상의 경지를 이룬 자들의 마성을 완전히 소멸시키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천살마검대의 대부분은 그 백색 서기에 대항하지 못하고 완전히 제압되어 그들이 쌓아왔던 마성이 소멸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무력화되어 가고 있었다. 마공의 고수들에게 있어 강제적인 마성의 소멸은 실질적인 무공의 상실과 다름없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들이 쌓아왔던 내공의 기운 자체가 마성을 띠고 있는 것이기에 그러한 마성이 소명되면 내공의 기운 또한 대부분이 소멸되어 버리게 되고, 다행히 일부 남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성질이 변하여 그들이 익힌 마공심법과는 오히려 상층되게 작용하기 때문에 더 이상 마공심법으로는 내공을 운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동사왕은 지금의 상황을 모두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마교 녀석들은 호랑이를 본 쥐새끼들처럼 얼어붙은 상황에서 충분히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과 그들의 기세가 점점 미약해지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땅바닥에 처박힌 것도 자신 혼자뿐이라는 것과 이번 싸움은 여기서 종료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백가 네 녀석이 나를 두 번씩이나 통구이로 만들려 했다 이거지? 네 녀석은 이제 행복 끝, 불행 시작인 줄로만 알아라,
동사왕이 눈살을 찡그린 채 아직도 찬연한 백광에 휩싸여 있는 백낙천을 노려보려고 애쓰는 가운데 한쪽에서는 천우의 나직한 독백이 이어지고 있었다.
축하하오, 백 형, 이제는 완전한 태양륜을 얻었으니 안심이 되는구려,
천우가 백낙천의 완전한 성취를 바라는 이유가 예전에 밝혔듯이 그를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인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이제는 또 다른 의미도 있었다.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최근들어 자신에게 부여된 인과율의 굴레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밝힐 때가 된 것이다.
설마 백 소협 자네가 범밀갑의 비밀을 풀어 태양륜을 지니고 있었을 줄은 노부도 전혀 짐작치 못했네.
아! 예''''어쩌다 보니'''
한데 정말 무섭더구먼, 연유도 모르고 타 죽는 줄 알았네.
죄, 죄송합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께도''''
괜찮네,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원로들과 중원에서 온 분들중 마공을 익힌 분들도 약간의 내상을 입은 모양이지만 그리 심한 상태는 아닌 듯하니 운기조식이 끝나면 모두 괜찮아질 걸세.
그렇긴 합니다만'''아무튼 저분들께 본의 아니게 피해를 주게 되어 죄송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백낙천이 주변에서 아직 운기조식을 취하고 있는  원로들과 서문휴, 그리고 염상 등을 바라보며 여전히 미안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그렇게 말하자 한쪽에 서 있던 동사왕이 두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냉소와 함께 싸늘한 냉갈을 토해 내었다.
흥! 네놈은 그들에게만 미안하고 노부에게는 전혀 마안하지 않은 모양이지?
네? 동 노사님께서야 별다른 피해가''''
있지, 왜 없어? 네 녀석은 노부가 두 번씩이나 영문도 모르고 타 죽을 뻔한 것이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냐?
그,그것야'''동 노사님에게는 천 형이 있으니''''
뭐야? 네놈은 그럼 천 아우를 믿고 일부러 그런 공세를 펼쳤단 말이냐?
그런 뜻이 아니오라''''
아니긴 뭐가 아냐! 전에 사도련에서 나올 때 분명 네놈 입으로 그 비슈누의 원반인지 태양륜인지 하는 것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고 말했지, 그런데도 그 따위로 대책없이 사용한 것을 보면 분명 네놈은 나나 다른 사람들을 공탕먹이려고 일부러 태양륜을 통제하지 못한 척한 것야, 천 아우가 어떻게든 해결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말이야. 그런 거지?
그,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비슈누의 원반을 제대로 다룰  수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번에는 천 형의 풍검을 보고 너무 놀라서 무의식적으로 그만''''정말 저는 비슈누의 원반을 꺼내어 사용했다는 사실조차도 전혀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렇더군요.'
뭐야? 이제 보니 이 녀석 아주 큰일 낼 녀석일세, 그런 위험한 물건을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하면서 마구잡이로 사용했다니! 혹시 네 녀석 자미성을 타고난 게 아니라 천살성을 타고난 거 아니냐?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툭하면 적이건 아군이건 전혀 구분하지도 않고 다 태워죽이려 드냐 이 말이다!
동사왕이 지금 백낙천에게 고의적으로 시비를 걸고 있다는 겄쯤이야 이곳에 있는 중인들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한 편으로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역시 아차 했으면 자신들이 전부 재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로 태양륜의 위력은 전율스러울 정도였고, 그제야 고금육대천병의 진정한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절실히 실감했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염상이나 화천악이란 청년이 가지고 있는 염왕혈옥수나 자모천뢰신궁은 본연이 가진 위력의 3할은 커녕 십 분지 일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백낙천의 활약으로 인해 격전은 일시에 마무리되었고, 살아남긴 했지만 심각한 타격을 입은 천살마검대 삼백여 명과 대주인 남염, 그리고 갈천성과 일 대 일로 자웅을 겨루던 멸절마도석진은 모두 혈도를 제압한 채 일단은 마존각 안에 가두어두었다.
그리고 싸우겠다고 남았던 원로들의 수행원들도 태양륜에 의해 똑같이 피해를 입었기에 일단은 그들도 마존각에 머물면서 요성을 취하도록 하였다.
아직 이곳의 싸움 결과는 소종사나 장로원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고, 네 원로들과 다른 원로들의 가문에도 소종사 측의 사람들이 파견되어 조사를 벌인답시고 횡포를 부리고 있겠지만, 이곳의 상황이 알려지기 전에 속전속결을 감행하여 상대편 수뇌부들을 제압하면 비록 천마건곤대전이 선포되었다 하더라도 많은 피를 보지 않고 끝날 수 있는 싸움이었다.
명분도 있었고 괜히 시간을 끌어 전체 세력 간의 전면전을 벌일 상황을 만들 필요도 없었기에 원로들과 서문휴 등이 운기조식을 끝내는 대로  곧바로 소종사의 거처로 향하기로 의견을 모은 후, 남는 시간에 동사왕이 백낙천에 대한 트집잡기를 한창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동사왕이 입에서 갑자기 자미성과 천살성이란 말이 튀어나오자 사람들은 또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아무리 전설상의 태양륜이라지만 역시 전설상의 자미성체인 백낵천이 펼쳤기에 그러한 위력을 발휘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지금 이곳에는 절설이란 전설은 죄다 모여 있는 상황이 되어버려 이만한 전력이라면 아무리 천마신교 내부라 해도 안방 휘젓고 다니듯 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정도인 것이다.
사람들이 동사왕의 그 말로 인해 제대로 놀라움도 표시하기전에 백낙천은 헛바람까지 들이켜며, 펄쩍 뛰다시피 하면서 당황한 목소리로 극구 부인하기 시작했다.
헉! 무슨 그런 큰일날 말씀을! 제가 천살성을 타고나다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불성 사부께서 저를 거두어주셨을 리가 있겠습니까?
당연하게도 백낙천은 자신이 자미성체라는 것이 모두에게 알려진 것보다도 천살성이라고 매도하는 말에 기절할 듯이 놀란 것이다.
흥!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불성 어르신이 천살성으로 타고 난 네놈을 불쌍히 여겨 자미성 이라고 말해 준 것일지 누가 알겠느냐? 그렇게 해서라도 네놈의 운명을 바꾸어주고 싶어서 말이다. 아니, 그분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분이시지.
쯧쯧, 하지만 어쩌냐, 그분의 불력으로도 끝내 네놈의 살기는 제어하시지 못한 모양이시다. 네놈의 손에 타 죽은 사람이 벌써 몇 명인 줄 아느냐? 그 나이에 벌써 노부가 평생토록 죽인 놈보다 더 많다. 그런데도 네놈이 계속 자미성체라고 우길 테냐?
아,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천 형,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천 형은 내가 천살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요? 그렇지요? 어서 다른 분들께 말씀 좀 해주오.
백낙천이 다급한 김에 유일한 원군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천우를 향해 애원조로 말하기 시작하자 천우가 담담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천살성은 접니다.
그렇지, 그렇지? 저놈 틀림없이 천살'''엥? 그게 무슨'''
제가 천살성이라고 했습니다.
한순간 장내는 마치 만년빙굴로 화한 듯한 싸늘함이 감돌기 시작했고, 곧 이어 동사왕의 어색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하하 자네답지 않게 웬 그런 썰렁한 농담을'''
동사왕은 한 사람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으려는 역천의 시도를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시도하다가 아우인 천우까지 동조해 주는 줄 알고 신이 났다, 한데 잘 나가다가 갑자기 엉뚱한 곳으로 빠져버렷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순간적으로 등줄기로 식은땀마저 흐르는 것을 느꼈다.
관두세, 관둬, 자네가 백가 녀석을 비호하려들자 동사왕은 졌다는 듯이 손사례를 치며 그만두기로 했다. 괜히 더 나아갔다가는 벼룩 잡으려다가 옷까지 찢게 생긴 것이다.
사람들도 동사왕의 말을 통해서 백낙천이 전설상의 자미성체라는 것에 놀랐던 것이지 결코 천살성 운운한 것을 사실로 받아 들이고 놀란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것이 동사왕의 고약한 심보로 인한 백낙천 골탕먹이기 작전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천우가 갑자기 스스로를 천살성이라고 하자 모두들 순식간에 피가 얼어붙는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세상에 태어나 최고로 무서운 농담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백낙천도 천우에게 도움을 청하기는 했지만 설마 하니 그가 자기 대신 천살성이라고까지 하면서 나설 줄은 몰랐던지라 크게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뭉클거리는 감동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큰 감정은 역시 소름마저 돋게 만드는 써늘함이었다.
처, 천 형도 참''''그냥 아니라고 한마디해 주시면 될 것을''''하하! 아무튼 고맙소, 천 형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천살성으로 몰릴 뻔해소이다.
백낙천은 동사왕이 한을 품으면 얼마나 무서운지 새삼 느끼면서 또한 천우의 농담은 풍검만큼이나 위력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이마에서 흐르고 있는 진땀을 소매로 훔치고 있었다.
하지만 천우는 백낙천의 어색한 감사 표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담담한 기색으로 더 이상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었고, 그 때문에 분명 농담이라 여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좌중의 분위기는 더욱 싸늘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동사왕이 당황한 기색을 천우를 향해 다급히 말했다.
이,이보게''''자네 화난 건가? 이 우형이 좀 심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런 걸로 화를 낼 것까지야, 자네가 그러고 있으니 다들 진짜인 줄 알고 있잖은가, 그러니 이제 그만 화를 풀게, 응? 농담도 정도가 있는 것이지, 자네가 그런 농담을 하면 그건 농담이 아니라 심장마비의 사인일세,
동사왕의 말에 천우는 변함없는 기색으로 좌중을 한 차례 둘러보고는 다시 동사왕을 바라보며 침착한 어조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풍도는 제가 천살성인 것을 알고 거두었습니다. 아마 제 운명을 바꾸어보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만 지금은 그의 행동이 옳았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제가 천살성이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동사왕의 표정은 점점 울상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듣지 못하겠다는 듯이 천우의 말을 가로막으며 거의 애원조로 말하다시피 했다.
그만! 자네 왜 자꾸 이러나? 제발 그만 하게, 그러다가 정말''''
하지만 천우는 동사왕의 간곡한 부탁도 못 들은 척하며 멈추었던 말을 다시 잇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자신은 천살성의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최근에 와서 그러한 인과율의 법칙은 결코 맘추는 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습니다. 최소한 제가 죽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 순간 중원에서 함께 온 일행들은 물론이고 천마신교의 사람들 역시도 얼굴이 사색을 변한 채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천우를 주시했다.
천우는 그러한 사람들의 반응에도 여전히 별다른 동요 없이 담담함을 유지한 채 울상을 짓고 있는 동사왕을 바라보면서 다시 말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제가 다시 천살성의 기운에 휘둘릴 일 따위는 없습니다. 저는 지금 이대로의 저이고, 또한 변함없는 형님의 아우입니다.
무,물론일세, 자네가 천살성이든, 아니 그보다 더한 지옥의 대마왕이라 해도 자네는 틀립없는 내 아우일세, 아무렴 어떤가, 다만, 다만, 한마디만 해주게, 자넨 결코 천살성 따위가 아니라고 말일세, 아니 자네 같은 사람이 천살성 따위일 리가 없지, 그렇잖은가, 하하하, 당신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그렇지?
동사왕은 주변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억지로 웃으면서 다시 한 번 너스레를 떨었지만 아쉽게도 이 순간만큼은 아무도 동조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왜, 왜들 그래? 설마 그 말을 믿는 거야? 이건 순전히 내가 시작한 농담일 뿐이라고, 당신들은 농담과 진담도 구분 못 해? 그렇게 멍청하냐고! 좋아,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 한번 나서봐, 그런 것도 구분 못 하는 작자들은''''
동사왕은 그 순간 살기까지 뿜어내면서 천우를 등으로 가로막으며 두 손을 들어 올려 공격자세까지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사왕의 그러한 행동에 신경 쓰는 사람조차도 이 순간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 천 형'''서, 설마''''지금 ''''진심으로''''
오냐! 백가 네놈이 가장 먼저 죽어보겠다 이거냐?
그 와중에 백낙천만이 떠듬거리는 어조로 간신히 사실 여부를 물어오자, 그 순간 동사왕은 노성을 토해 내며 정말로 백낙천을 향해 살기마저 담겨 있는 손길을 전개해 내었다.
턱!
이, 이것 놓게, 저런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은 단숨에 쳐죽여야 마땅해, 백낙천 네 이놈! 오늘 나와 사생결단을 내보다! 어서 덤벼라! 그딴 눈으로 천 아우를 보지 말고 내게 덤벼보란 말이다!
백낙천을 향해 뻗어가던 손길은 어느새 천우의 손에 잡혀 있었고, 동사왕은 백낙천을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악을 써댔다.
형님, 잠시 진정하십시오. 제가 천살성이긴 하지만 천살성의 기운은 이미 쫓아버렸으니 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다른 문제가 남아 있기에 지금 그 사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제 말을 조금 더 들어주십시오.
동사왕은 천우의 말에 한 차례 찬물세례를 받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히며 천우를 향해 말했다.
그,그렇지, 분명 자네가 그렇게 말했지, 그럼 자넨 지금은 천살성이 아닌 거지? 어서 그렇다고 말해 주게.
분명 그렇습니다.
그,그래, 잘되었구먼, 지금 천살성이 아니면 된 거지 뭐 하러 그런 말을 꺼내어 이 우형을 그토록 놀라게 만든단 말인가,
그리고 당신들도 모두 들었지? 천 아우는 지금 천살성이 아니라는 얘기 말이야, 그러니 아무 문제도 없는 거라고, 여기서 더 토를 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누구건 내가 용서하지 않겠어!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사왕은 그렇게 으름장을 놓으며 예리한 눈초리로 사람들을 쏘아보았다.
천우는 그러한 동사왕의 태도에 아무래도 의형부터 확실히 진정시켜 놓아야 제대로 이야기를 풀어 나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는 다시 동사왕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형식으로 말했다.
형님은 예전에 풍도가 풍검을 사람들에게 전수하면서 어떤 심법을 사용토록 했는지 혹시 알고 계십니까?
그러자 동사왕도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천우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그야 물론 잘 알고 있네. 풍도 어르신은 풍검과 함께 전설상의 도가심범인 천원양의심공을 익히도록 '''''가만! 그럼 자네도 천원양의심공을 익힌 것인가?
물론입니다.
그,그럼 당연히 극성으로 익혔겠지?
이번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그랬었어, 내 정신 좀 보게, 자네가 풍검을 완성하였으니 그 근간이 되는 천원양의심공도 대성을 이루었을 거라는 사실조차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니, 푸핫하하! 단리 늙은이 네놈도 천원양의심공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
그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단리종후에게로 모아졌다.
천살성이란 존재는 모든 이들에게 두려움을 넘어선 근원적인 공포나 다름없었다. 그 때문에 천살성을 벗어났다는 천우의 말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동사왕이 의제인 풍검신 천우에 대해서는 맹목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단리종후의 말에서 신빙성을 찾아보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간절한 바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동사왕의 기쁨이 밴 웃음소리와 단리종후에 대한 물음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반신반의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라도 단리종후에게서도 기대하는 답이 나오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었고, 그 다음일은 생각하기도 싫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기대 속에서 잔뜩 표정이 굳어 있는 단리종후의 침중한 목소리가 울려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전설로 전해지는 얘기는 잘 알고 있네, 천원양의심공은 도가의 근원이나 마찬가지인 고대의 심법으로, 대성을 이루게 되면 천인합일의 경지를 이루어 스스로의 의지만으로도 천지만물을 다스리며, 일체의 사심이나 마가 침범할 수 없는 진정한 심도를 이루게 된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아네,
하지만 그것은 전설상으로 구전되어 오는 효능이고, 실지로 무림에 천원양의심공을 대성하여 그러한 경지를 보여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네.
하지만 그러한 말에 동사왕이 냉소를 치며 곧바로 말을 받았다.
흥, 없긴 왜 없어? 지금 단리 늙은이 네놈 눈앞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단 말이냐! 천 아우가 천원양의심공을 대성했다면 천살성의 기운따위는 천 아우 말대로 모두 사라진 지 오래일 것이고, 더 이상 논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단리종후와 동사왕의 말에 사람들이 어느 정도 안도의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는 와중에, 백양신마 역시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천우를 향해 되도록 담담한 어조로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나 또한 천원양의심공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네. 그리고 천원양의심공을 대성했다면 자네의 불가사의한 능력뿐만 아니라 천상성의 기운을 쫓아냈다는 사실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네, 하지만 아직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대답해 줄 수 있겠는가?
일단 의형인 동사왕이 자신이 천살성을 벗어났다는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갖게 된 듯하자 천우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말씀해 보십시오.
자네가 굳이 이 시점에서 스스로가 천살성이었음을 밝힌 이유가 무엇인가? 사실 그것을 우리가 알건 모르건 자네에게는 큰 상관이 없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부러 밝힐 필요는 없지 않았겠는가? 더군다나 자네는 이미 천살성의 기운마저 쫓아내어 실질적으로 천살성이라고 할 수도 없는데 말일세.
그러한 물음에 천우는 이제야 얘기가 제대로 풀린다는 듯 좀더 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백양신마를 향해 말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비록 천살성의 기운이 제게서 쫓겨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저와 인과율에 의해 묶여 있는 기운이기에 제가 죽지 않는 한 그 기운도 계속 세상에 남아 있게 됩니다. 그것은 기운이기도 하지만 저의 또 다른 의지이자 의식이기도 하니까요, 그것을 알려드려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제가 천살성이었음을 밝힌 것입니다.
천우의 말에 백양신마는 문득 어떤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내고 조금은 걱정스런 어투로 다시 질문을 했다.
솔직히 아직 이해가 잘 안 가네. 그 인과율이란 무엇이고, 자네에게 쫓겨난 천살성의 기운이 다시 자네를 어찌 할 수 없다면 세상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별다른 해는 없을 것 아닌가? 혹시 자네에게서 쫓겨난 천살성의 기운이 다른 사람에게 강림할 수 있기 때문인가?
그러한 물음에 천우는 거볍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반은 맞추셨지만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인과율이란 말 그대로 처음부터 정해진 섭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죠, 왜냐하면 그 인과율을 정한 존재가 절대 유일의 존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정해진 결과는 인과율을 벗어나지 못한더라도 과정은 변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제가 천살성을 쫓아낸 것이 그것과 같은 변수이고, 제가 죽음으로써 천살성의 존재 역시 원래 존재하던 곳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 제게 걸려 있는 인과율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그 천살성의 기운 역시 자와 묶여진 인과율에 의해 다른 사람에게는 강림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제가 죽지 않은 상태에서 인과율의 끈이 끊겼을 때입니다. 그때는 천살성의 기운이 다시 다른 사람에게 강림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려드리고자 함입니다.
백양신마의 두 눈은 천우의 설명을 들으면서 오히려 더욱 짙은 의혹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과율의 끈이 끊겼을 때? 어떤 경우에 인과율의 끈이 끊긴단 말인가?
제가 인과율을 적용받고 있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을때입니다.
얘기가 더해질수록 더욱 이해하기 힘든 말이 나오자 백양신마는 조금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완전히 사라진다'''자네의 말을 비리자면 죽음을 말하는 것은 아닐 테고, 어떤 경우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면 고맙겠네.
하지만 그 부분은 천우로서도 설명해 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이해를 시킬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때문에 천우는 이번에도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저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다만,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이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군요.
허! 이렇게 답답할 데가''''
다른 사람들도 백양신마와 같이 천우의 얘기를 들으면서 곤혹스러워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동사왕만은 천우가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설명할 수 없다는 천우의 고충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상태로 사람들을 이해시키지 못한다면 천우에 대한 의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동사왕은 자신의 방식대로 중인들을 이해시키기로 했다.
큼! 그 정도 얘기해 주었으면 얼른 눈치를 채셔야지, 꼭 천아우 입으로 얘기를 해야 안단 말이오? 죽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의미가 하나밖에 더 있겠소? 원 그렇게들 눈치가 없어서야''''
동사왕의 참견에 백양신마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그에게로 모아졌다.
그럼 자네는 그 의미를 알고 있단 말인가?
나 참! 천 아우가 익힌 천원양의심공이 어떤 심법인지 생각해 보시오. 바로 도가의 최고 심법이외다, 그리고 천 아우는 그것을 대성하여 이미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르러 있소이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시겠소?
그,그럼'''?
백양신마의 두 눈이 커지는 것을 보면서 동사왕은 얼마 전과는 달리 한껏 여유를 되찾은 모습으로 어깨까지 으쓱이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다시 말했다.
신선이 되는 심법을 대성하였으니 신선이 되는 게 당연하지 않겠소, 응? 신선이 돼어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닌데 뭘 그리 놀라시오?
백양신마는 동사왕의 말에 놀란 것이 아니라 어처구니가 없었기에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동사왕을 바라보다가 문득 의미상으로는 맞는 말이라는 생각에 혹시나 하여 다시 천우를 바라보았다. 한데 의외로 천우가 진지한 기색을 띠고 있자 그는 동사왕에게 한번 당해 주는 셈 치자고 생각하며 어색한 표정으로 천우를 향해 다시 질문을 하였다.
자네'''정말 우화등선이라도 할 참인가?그게 가능하냐는 말일세.
그렇지 않아도 마땅히 설명할 길이 없어 조금은 고심하고 있었는데 동사왕이 나서서 그렇게 말해 주자 천우 역시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사람들을 이해시키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수도 있습니다.
약간은 찔리는 부분이 없지 않았던지라 조금은 뜸을 들여가며 한 말이었는데, 뜻밖에도 그 대답의 여파는 실로 간단치 않았다.
우,우화등선!
아,안돼요!
처,천 형''''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장내의 상황이 희극의 한 장면처럼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천우의 말이었기에 대부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그 순간 천우의 우화등선을 반대하고 나서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로써 동사왕과 천우의 두 번째 합작 사기극은 훌륭히 성공을 거두는 듯 보였다. 그가 깨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응! 잘 잤다.
어머!
쿵!
크억!
죄,죄송해요.
갑자기 조아의 등에 업혀 세상 모르고 자고 있던 마동의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자 그에 놀란 조아가 마동을 받치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고, 그 순간 마동은 기지개를 켜던 자세 그대로 조아의 등에서 짐짝 떨어지듯이 떨어져 내리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사태를 인식한 조아가 당황하며 사과를 하자 마동은 양팔을 들어 올린 채로 땅바닥에 누워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뭐냐?
괘,괜찮으세요?
응?아,너는 보타암의 계집애구나, 어라?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아직 다른 상황은 인식하지 못하 채 자신이 땅에 누워 있다는 것만을 깨달은 마동은 발딱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면서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백양소축이라는 곳에 있었던 것 같은데, 여긴 어디야? 아무튼 그건 그렇고''''흠! 헤헤, 쑥스럽구면, 다들 그대로인 걸 보니 꿈은 아니었겠고, 아! 너 정말 대단한 녀석이다. 천죽무한만상진을 깨트린 것도 그렇고, 그 산을 발살낸 것도 그렇고, 헤헤! 형님이라 부른 것도 미안하다. 확실히 내가 충격을 좀 먹었던 모양이야, 자고 일어났더니 이젠 말짱해진 것 같으니까, 형님이라 부른 것은 취소하마,헤헤헤.
갑작스런 마동의 정상적인 행동에 동사왕이 눈을 동그렇게 뜨며 물었다. 
이제'''제정신이 돌아온 거유?
응? 그렇지 뭐, 그리고 네 녀석에게 동생이라고 한 것도 취소다.
그건 누가 할 소리인데 그러시오! 나도 마 선배 동생노릇 하느라 미칠 뻔했소,
헤헤헤, 네 녀석이 어디 한 번이라도 동생 노릇 제대로 한 적이나 있는냐? 툭하면 구박이나 주던 주제에, 아무튼 취소다, 그리고 기왕 온 거니까 신나게 한 판''''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렇게 썰렇해? 나 자는 동안 무슨 일 있었냐?
큼! 한 판은 벌써 벌였고, 지금은 천 아우의 우화등선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논의하는 중이오.
우''''''화등선? 누가? 아, 저 괴물 녀석? 그런 거라면 걱정 마라, 다른 건 몰라도 저 괴물 녀석은 우화등선을 절대로 못 한다. 내가 열 손가락에 장을 지져서라도 장담할 수 있다.
손가락에 장 지지는 거야 안 되었을 때 하는 것지, 누가 장부터 지지고 장담을 한단 말이오? 말하는 것을 보니 아직 온전한 정신이 돌아온 것 같진 않소만''''아무튼 어째서 천 아우가 우화등선을 못 한단 말이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느냔 말이외다.
누가 말해 줬거든.
누가 말해 주다니, 뭘 말이오?
저 괴물 녀석은 유계에서 보내진 녀석이었는데, 간섭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와서 저 녀석의 운명을 바꾸어 버렸대, 게다가 지금은 유계의 마귀들도 저 녀석이 올까 봐 전전긍긍하고 았다지 아나? 에''''또 뭐라더라? 그렇지 저 녀석이 선계로 오면 선계도 엉망이 된다고 했던 것 같고''''아무튼 자기들로서도 어쩔수 없는 괴물이래,헤헤헤.
뭐요? 이제 보니 정상을 되찾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세가 더 심각해졌구려, 쯧쯧쯧, 예 늙은이가 이걸 알면 또 얼마나 상심할꼬''''
인석이? 예가 녀석은 이미 꿈속에서 만나봤으니 네 녀석은 그런 걱정 안 해도 되다.
그 말에 동사왕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더 이상 말대꾸하기 싫다는 듯이 마동에게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구시렁거리는 것은 잊지 않았다.
말을 말아야지, 내가'''
하지만 천우는 마동의 말에 오히려 희미한 미소마저 지어 보이며 말했다.
좋아지신 것 같으니 다행입니다.
헤헤헤. 네 녀석이 기억하기 싫은 것들을 감추어두는 바람에 찾느라고 애 좀 먹었는데 이제 괜찮아, 그리고 나도 지금의 내가 더 좋고'''오히려 고맙다고 해야겠지, 헤헤헤.
마동의 밝은 웃음소리에 천우도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보게, 천 아우, 정말 저 노친네 상태가 더 좋아진 것 맞는가? 내가 보기에는'''
새로운 자아가 원래의 자아를 만나보았으니 기억을 모두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자아로 남기로 했으니 성격도 그대로지요.
마동의 상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던 동사왕과 백낙천은 천우의 말을 통해서 마동이 기억은 모두 회복했지만 성격은 원래의 지랄 같은 성격이 아닌 새로 좋게 바뀐 성격 그대로 남게 된다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상태라면 확실히 좋아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여러 사람을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그런가?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왜 자꾸 헛소리를 한단 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저분의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응? 그렇다면''''정말 잠자는 동안 신선이라도 만나보았다는 말인가?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의식이 열려 세상의 이치를 보게 되었으니 스스로 알게 된 것이라는 말이 더 옳을 것 같습니다. 단리 맹주께서 몰아일체, 즉 기와 신이 합일되려 했던 것처럼 저분은 정과 신이 합쳐지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비록 완전하지 않아 다시 세상에 남게 된 것이지만 이후로 계기가 주어진다면 진정한 선을 이루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뭐,뭐야? 마 선배가 신선이 될 수도 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네, 요새 신선을 나쁜 짓 많이 한 순서대로 뽑는 것이라면 몰라도, 천하의 마동이 신선이라니? 차라리 지옥에 가서 한자리할 거라면 몰라도'''''
헤헤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 녀석도 심보가 고약해서 애초에 선을 이루기는 글렀다. 그래도 말년에 저 녀석을 만나 천운이 트였으니 복은 많은 놈이다.
흥! 그런 말 안 해도 신선 노릇 할 생각 눈곱만큼도 없으니 걱정 마시오!
그때 한쪽에 조용히 서 있던 조악 용기를 내어 나서며 천우를 향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천 공자님은 우화등선 안 하시는 거죠?
갑자기 마동이 깨어나서 이상한 얘기를 해대는 바람에 잠시 멍해져 있던 사람들이 그제야 중요한 쟁점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천우를 바라보았다.
천우는 손에 장까지 지진다면서 자신이 우화등선을 못 할 거라고 장담한 마동을 이미 인정해 주었기에 다시 말을 바꾸기가 곤란해졌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기에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소,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저분 말대로 신선들이 싫어한다니 포기해야 할 것 같소,
그럼 ''''어떻게 되는 것인가?
천우의 조금은 농담 섞인 대답에 백양신마가 다시 끈질기게 질문의 끈을 놓지 않아 천우와 동사왕은 또다시 곤혹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천우는 내친김에 가급적 사실대로  말하기로 결심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다른 곳으로 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다른 곳? 어디로 말인가?
저도'''''모릅니다. 그리고 가게 될지, 안 가게 될지의 여부도 지금은 모릅니다.
천우의 대답에 백양신마는 자밋 생각하는 눈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밝은 어조로 말했다.
알겠네, 아니, 더 이상 알려 하지 않겠네. 그리고 자네가 인과율의 끈을 끊을 수 있는 어디론가 가게 될지 모르기에 그러한 사실을 밝혔다는 것도 믿네, 하지만 신선들도 자넬 두려워하고 마귀들도 자넬 두려워한다니 가긴 어딜 가겠는가? 그러니 웬만하면 그냥 이곳에 남이 있게.
백양신마 역시 천우의 말을 빗대어 가벼운 농담을 섞어 그렇게 말하자 천우는 그 속에 담겨 있는 그의 진심을 느끼면서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으로써는 더 이상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러한 인과율의 끈이 끊어진다면 제 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천우의 말에서 앞으로 어떤 큰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은 모두 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더욱 굳은 의지로 결의를 다지는 한 사람이 있었다.
절대 놓치지 않습니다. 그곳이 지옥이건''''선계건''''알 수 없는 어떤 곳이라 해도''''
6장 화끈한 죽음을 택한 진정산 사내들



혈살대의 대주 철마패권 서귀명은 멀리 지붕의 끝 부분만 보이는 마존각을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 서 있다가 일단의 사람들이 이쪽으로 허겁지겁 달려오는 것을 보고는 굵은 눈썹을 찡그렸다.
뭐지? 모습을 보니 원로들의 수행원들 같은데''''
이윽고 그들이 혈살대가 정렬해 있는 곳으로부터 대략 이십여 장 밖에서 걸음을 멈춘 채 쭈뼛거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자 서귀명은 더욱 눈살을 찌푸리면서 중얼거렸다.
뭐야? 아무도 통과시키지 말라고 해놓고는 원로들의 수행원들이 이곳으로 오도록 만들다니, 천살마검대가 막고자 했다면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었도 자리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을 테니 그냥 보내주었다는 얘기인데, 제길! 나보고 어쩌라는 얘기야?
서귀명이 혈살대 전원을 이끌고 이곳에 있는 이유는 마존각으로 향하는 길을 모두 통제하여 마존각 쪽으로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데 마존각 쪽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어찌하라는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그 역시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곤혹스러웠던 것이다.
원로들이 중원에서 온 자들과 작당하여 명부산을 폭파시켰다는 의심이 간다 해도, 천살마검대까지 동원한 것을 보면 무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자신들로 하여금 길목을 통제하라고 한 것일 테고, 접근하지 말라 하였으니 지금에 와서 사람을 보내어 물어보기도 곤란했다.
서귀명은 이십여 장 밖에서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어찌할까 생각하다가 문득 또 다른 의문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한데''''왜 저러고 있는 것이지? 이곳을 통과하겠다고 하면 나도 입장이 곤란하니까 오지 않는 것이 좋긴 한데'''' 혈살대를 경계하여 다가서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무슨 일이 터지긴 터진 모양이군,
그러한 궁금증이 느껴지자 서귀명은 그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쳐 물었다.
나는 혈살대주 서귀명이오, 당신들은 원로 분들의 수행원들 같은데, 왜 그러고 있는 것이오?
그의 고함소리에 이십여 장 밖에 모여 있던 사람들 중 한 사살이 앞으로 나서며 마찬가지로 소리쳐 답했다.
우리들은 원로님들의 수행원들이고, 나는 무음혈수 진일환이오, 귀하는 우리를 막기 위해 그곳에 있는 것이오?
천마신교 내에서 원로원 측의 사람들과 장로원 측의 사람들은 평생토록 인사 한번 나누지 않고 지내는 경우도 허다했지만 서귀명은 예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기에 그가 혈음수 진자앙의 둘째 아들이라는 것은 알아볼수 있었다.
서귀명은 그의 표정과 말을 통해 확실히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느끼고는 애매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왜 우리가 당신들을 막아 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오? 그리고 원로 분들은 아직 저곳에 남아 계시는 듯한데 당신들만 이곳으로 온 이유가 뭐요?
서귀명의 말에 진자장도 혈살대가 자신들을 막기 위해서 길목을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때문에 조금은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안의 상황을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아니면 대충 얼버무리고 통과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혈살대 대주씩이나 되는 자가 그렇게 어설플 리 없었고, 진일환이 알기로도 서귀명은 비록 호방하고 급한 성격이기는 하지만 그리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라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상황을 보아하니 외부의 출입을 봉쇄하기 위해 혈살대가 길목을 막고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그런 상황이라면 자신들도 무턱대고 통과시켜 주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비록 자신들에게 위해는 가하지 않을지라도 순순히 통과시켜 줄 상황도 아니라고 판단되자 결국 진일환은 사실대로 말하고 어서 이곳을 통과하기로 마음먹었다.
더욱이 지금은 시간을 조금도 지체할 수 없는 중요한 순간이다,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가문에도 모든 사실을 알려 대처방안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실은'''이번 원로회의에서는 혈수결이 감행되었소, 그리고''''곤패주로 임명된 풍검신과 원로원주께서 천마건곤대전을 선포하였소이다. 우리는 소종차와 싸울 의사가 없기에 그 자리를 피한 것이오, 그러니 우리를 통과시켜 주시오.
그 순간 혈살대주 서귀명은 너무 놀라 경악 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믿기 힘들다는 어투로 반문했다.
혀,혈수결? 게다가 난데없이 천마건곤대전이라니, 그게 사실이오?
그렇소, 모두 사실이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왜 원로들도 모시지 않고 이렇게 바삐 돌아가려 하겠소, 더군다나 천살마검대까지 온 상황에서 우리가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순순히 보내주었겠소? 우리는 이번 천마건곤대전에는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오. 그러니 길을 열어주시면 고맙겠소,
서귀명은 진일환의 말이 모두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저들만 이곳에 온 것이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서귀명은 너무 큰 충격에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다시 굳은 표정으로 그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알겠소, 천마건곤대전이 선포되었다면 싸울 의사가 없는 자들은 적으로 간주되지 않으니 일단 통과시켜 드리겠소, 막지 않을 테니 어서 가보도록 하시오.
고,고맙소, 그럼,
진일환을 비롯해 혈수결로 희생된 원로들의 수행원들 사십여명은 그 말과 함께 빠르게 혈살대를 통과해서 사라져 갔다.
그들을 통과시킨 후 서귀명은 심각한 기색으로 생각을 정리 하기 시작했다.
혈수결로 중원에서 온 풍검신이란 자가 곤패주로 임명된 데다가 곧바로 천마건곤대전이라니? 더군다나 천살마검대를 앞에 놔두고서''''중원에서 온 자들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그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일 텐데, 그렇게 섣불리 천마건곤대전을 선포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군,
아니지''''오히려 천마건곤대전을 선포할 수밖에 없을 만큼 상황이 안 좋았다는 얘기도 되는군, 이 상태라면 천이백 년 만의 천마건곤대전은 저곳에서 모두 상황이 종료될 것이고, 소종사나 장로원에서 이런 호기를 그냥 넘길 리 없으니 한동안은 본교에 피 바람이 멈추질 않겠군,
천마건곤대전의 진정한 종료상황은 건패주나 곤패주가 죽었을 때가 아니라 천마건곤패를 모두 소지한 자에게 더 이상의 도전자가 없을 때였다.
결국 천살마검대에 의해 곤패주로 임명된 풍검신이란 자가 저곳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소종사라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자들을 모두도전세력으로 간주하여 처단하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설혹 그들이 싸울 의사가 없다 하더라도 싸울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일쯤이야 일도 아닐 테고, 지금의 소종사나 장로들이라면 기어이 그러한 명분을 만들어낼 것이다.
제길! 이 참에 확 바꿔버려?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지만 그럴 수 없음을 서귀명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천마건곤대전 상황에서야 적아가 필요 없고, 얼마든지 주군을 바꾸어 싸워도 율법에 어긋남이 없는 행동이라지만 그것은 천이백 년 전에나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지금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지금 당장에 혈살대를 이끌고 마존각으로 달려간다면 최소한 천살마검대의 절반은 막아줄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곤패주나 원로원 측에서도 이번 상황을 어찌어찌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벌어진 세력의 격차는 너무나 크기에 결국은 곤패주 쪽에서 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 될 것이고, 나중에라도 자신에게 칼을 겨눈 자들을 그냥 보아 넘길 소종사나 장로들이 아니었기에 분명 천마건곤대전이 종료된 후에도 보복을 가해 올 것이 틀림없었다.
결국 자신들 당사자가 문제가 아니라 딸려 있는 식구들과 가문 모두가 피해를 입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고 혈살대는 놔두고 자신만 전향을 감향한다는 것도 지금 상황에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이 정말로 그러한 결행을 한다면 혈살대원 대다수가 자신을 따라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혈살대원들은 그런 녀석들이었다.
제길! 언제부터 본교가 이 모양이 되었는지 무인의 투혼은 없고 소종사나 장로들의 눈치만 살피는 쥐새끼들만 바글거리는 집단이 되었으니'''''그러고 보니 나도 그 쥐새끼에 해당되는군, 
제길,제길랄!
서귀명이 연신 욕설을 토해 내며 마음적으로나마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이유는 그 역시 당금의 소종사나 장로들의 행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한 그나 혈살대원들은 비록 건패 수호세력에 해당하는 십대무력당체 중 하나에 속해 있긴 했지만 애초에 소종사나 장로들에게 충성을 바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성세가 기울긴 했지만 서귀명과 그의 가문 또한 5백 년 전에는 원로원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만큼 전통적으로 곤패주를 지향하는 가문이었고, 서귀명은 가문의 부활을 위해 나이 사십이 넘도록 폐관수련을 자청해 가전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 철마패왕권을 십 성 연성함과 동시에 깨달음을 얻어 극마경을 이룬 무재였다.
하지만 서귀명은 막 출관하자마자 안 좋은 소식을 접했다.
그 안 좋은 소식이란 바로 자신보다 열두 살이나 아래인 누이 동생의 정혼자가 당시의 혈살대주인 잔혼인마 주극의 조카이자 혈살대 백인조장의 신분인 호리살검 채익에게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과, 그 채익이란 놈이 뻔뻔스럽게도 자신의 누이동생을 첩으로 삼겠다고 계속 압력을 가해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분기탱천한 서귀명이 당장 채익이란 놈을 때려죽이겠다고 날뛰자 그의 부친과 누이동생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뜯어 말렸고, 현실적으로도 건패주 쪽의 요직에 있는 사람을 건드려서 좋은 꼴은 못 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기에 서귀명은 그날 울화를 달래기 위해 주루를 찾아 술로 화를 삭혔다.
한데 운명의 장난인지 그가 찾았던 주루는 천마신교 내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환요전 소속의 주루 겸 기루인 환락루라는 곳이었고, 호리살검 채익 역시 여느 때처럼 근무 지를 이탈하여 환락루를 찾았다가 서귀명과 시비가 붙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은 얼굴도 본 적 없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하지만 호리살검 채익이 환락루에서도 최고의 요녀들이자 인기가 높은 환락삼요 중 막내인 홍매요에게 빠져 틈만 나면 근무지를 이탈해 환락루를 찾곤 했었는데, 그날 홍매요가 환락루를 찾아온 서귀명에게 찰싹 붙어서 교태를 부리는 광경을 채익이 목격하게 된 것이다.
호리살검은 그 광경을 보고 눈이 뒤집혀서 다짜고짜 칼을 빼들고 서귀명에게 모욕을 주며 시비를 걸었고, 그에 참지 못한 서귀명이 호리살검을 단 일 수에 쳐죽이고 말았다.
서귀명이 어떠한 소속이나 직책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평범하고도 허름한 복색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별볼일없는 놈일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호리살검 채익의 불행이었다.
소속과 직책이 없다는 것은 실력이 없거나 건패수호혈서에 서명을 하지 않은  자라는 뜻이었고, 건패수호혈서에 서명을 하지 않은 자들 중 실력이 뛰어난 자는 원로가문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면 지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채익은 당금의 원로가문과 전통있는 마가의 시력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꿰고 있는 상태였기에 자신의 기억에 없는 얼굴인 서귀명을 만만하게 보았던 것이다.
아니, 설혹 상대방이 자신이 모르고 있던 시력자라 해도 자신이 혈살대 백인조장이라는 것은 복색과 가슴에 새겨진 금색 표시로 모를 리 없을 테니 어떤 최악의 경우에서도 정말 최악의 사태는 면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 깔려 있던 데다가, 질투심으로 인해 주체할 수 없는 살심이 이성을 갉아먹고 있던 상황에서 그런 만에 하나까지 고려해 볼 여지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에 하나의 상황에서도 자신에게는 살수를 펼쳐서는 안 되는 최소한 경고 내지는 자신이 물러설 수 있는 기회는 주어야 마땅하다는 평소의 호리살검의 지론을 깨고, 서귀명은 자신에게 시비를 건 놈이 혈살대의 백인조장의 복색을 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무런 경고도 없이 일 권으로 그의 머리통을 무참하게 날려버렸던 것이다.
그날 서귀명의 기분 역시 최악이었던 데다가 성격 역시 다혈질적이고, 결정적으로 울화를 달래기 위해 마신 술이라 취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술을 마시게 된 원인인 혈살대의 조장 복장을 입은 녀석이 시비를 거니 단숨에 주먹이 나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을 벌인 후 아차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그날 날이 밝기도 전에 소식을 접한 잔혼인마가 핏발을 세운 채 혈살대 조장 몇 녀석과 함께 찾아온 것은 예정된 수순이라 할 수 있었다.
한데 그 싸움에서도 혈살대주였던 잔혼인마가 오히려 호리살검처럼 서귀명의 철마패왕권에 머리가 으깨져 죽어버리고 말았다.
서귀명의 입장에서는 호리살검과 잔혼인마를 일 대 일의 정당한 대결로 죽인 것이기에 율법 상 아무 하자도 없는 것이었지만, 새로 만들어진 법규조항에는 위반되는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결국 집법전을 통한 처벌은 피할 수 없게 되었고, 건패수호혈서에 서명을 하지 않은 자가 건패주 쪽의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면 거의가 엄중 처벌을 내렸기에 서귀명도 구천혈마옥에 갇히거나 혹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게 될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실럭을 높이 산 잠마전주가 소종사인 소여천에게 건의해 그를 회유하기로 하였고, 결국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식구를 전체의 안위까지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기에 서귀명은 어쩔 수 없이 잠마전주의 제안을 받아들여 오랜 가문의 전통을 뒤로하고 건패수호혈서에 서명하게 된것이다. 그리고 그이후 잔혼인마 대신 혈살대주로 임명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서귀명이 건패수호혈서에 서명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단지 자신의 목숨이나 식구들만의 안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혈살대는 천마신교 내에 있는 열 개의 무력단체들 중에 서도 가장 핍박받고 무시받는 단체였다. 그것은 그들의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바로 혈살대의 구성원들이 애초에는 곤패주쪽을 지향하는 자들이었지만 서귀명처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건패수호혈서에 서명을 하게 된 자들로 구성된 무력단체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들의 실질적인 전력은 천마신교 내에 존재하는 열 개의 무력단체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수준임에도 불구하고도 항상 최하급 대우를 받았으며, 혈살대 내부에서도 조장급 이상의 수뇌부들은 장로들이나 호법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자들로만 임명이 되었다.
때문에 혈살대원들은 다른 무력단체들뿐만 아니라 같은 혈살대 내에서도 조장들이나 대주에 의해 핍박을 받았고, 조그만 잘못해도 즉결처형과 같은 가혹한 처벌을 받고는 했다.
서귀명은 채익이나 잔혼인마 같은 쥐새끼 같은 놈들 때문에 자신이 개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분했고, 혈살대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자들로 이루어진 단체라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잔혼인마 대신 혈살대를 맡으라는 잠마전주의 회유에 고민 끝에 응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후에 혈살대는 서귀명을 중심으로 어느 곳보다 강한 결집력을 보여주는 정예집단으로 거듭났고, 누구도 예전처럼 함부로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못하는 강력한 무력단체로 번모했다.
비록 다른 건패주 쪽의 세력에서 그들을 보는 시각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예전과 달리 어떤 시비에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실력으로 맞서게 되자 자연스럽게 혈살대가 지닌 무력에 걸맞은 입지를 굳혀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귀명을 비롯해 혈살대원들의 입장은 여전히 굴러들어온 돌들이었고,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혈살대원들이었기에 진심으로 소종사나 장로들에게 충성을 바치기는 어려웠다.
소여천과 잠마전주가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소여천의 입장에서는 혈살대는 궂은 일이나 희생양이 필요할 때 가장 먼저 앞세울 수 있는 전위이자 아쉬울 것 없는 소모품이었고, 장로들이나 호법들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혈살대를 차라리 중립적인 성격으로 돌려놓는 것이 오히려 낫겠다는 판단에 서귀명을 혈살대주로 삼은 것이다.
물론 장로원에서는 반대하는 입장이기는 했지만, 서귀명이 대주인 잔혼인마를 정당한 실력으로 누른 데다가 건패수호혈서에 서명까지 하였으니오히려 율법을 앞세운 소종사의 명분 앞에 대항할 건덕지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러한 사정을 지닌 서귀명이었기에 지금의 상황에서 마음적으로나마 원로원의 입장을 생각해서 울분을 터트리고 있는 것도 전혀 무리는 아니었고, 혈살대 역시 지금의 대주인 서귀명을 진심으로 따르고 있었기에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혈살대 전원이 원로들을 도우러 갈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서귀명은 심적으로 갈등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제자리에서 오락가락하며 울분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귓가에 미약하게나마 들려오는 폭음성에 서귀명은 안력을 돋우어 다시 마존각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지만, 지형적으로 마존각은 그가 서 있는 곳보다 높은 언덕 위에 지어져 있었고, 거리 역시 천여 장이 넘게 떨어져 있는 상황이기에 여전히 높다란 마존각의 처마 끝 부분만 간신히 보일 뿐 어떤상황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이 정도 거리까지 격돌음이 들려올 정도면 한두 사람이 격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고, 그 때문에 더욱애가 타는 심정을 느끼면서 주먹을 불끈 움켜진 채 마존각이 있는 곳을 노려볼 뿐이었다.
기어이 공격을 감행하고 있는 모양이군, 비겁한 새끼들 같으니! 그 정도 압도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으면 한 번쯤은 정정당당히 싸울 기회를 줘야 할 거 아니야, 정말 끝까지 정이 안 가는 작자들이라니까. 제길!
비록 격전장의 상황은 보이지 않았지만 희미하게나마 들려오는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청각을 바짝 곤두세운 채 마존각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눈이 아릿해 오면서 순간적으로 마존각 위의 하늘이 잠깐 사리진 듯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 모습에 크게 놀라 한 차례 눈을 비비고 봤더니 역시 착각인 듯 마존각 처마 위의 하늘은 상황과 맞지 않게 지랄맞게 청명한 모습이었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뭐지? 꼭 그림에서 한 부분이 사라졌다가 나타난 것 같은 느낌이라니''''역시 착각이었겠지? 젠장, 이젠 헛것이 다 보이고''''뭐,뭐야,저거?
자신이 잠시 뭔가 착각했다고 느끼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서귀명은 갑자기 마존각 위로 또 하나의 태양이 뜬 것처럼 그 주변 천체가 백광에 휩싸이는 광경을 보게 되자 손을 들어 눈가를 가리며 놀람성을 토해 내었다.
우윽!이,이거''갑지기 왜 이래?
한데 그 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속이 울렁거리면서 기혈마저 요동치는 듯하자 얼른 시선을 피하고 심호흡과 함께 기혈을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요동치는 기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마치 거대한 파도에 흔들리고 있는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있는 듯 울렁임과 함께 정신마저 아찔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그만이 그렇게 느껴는 것이 아닌 듯 길목을 막고 있는 혈살대원들도 마치 술 취한 취객들처럼 비틀거리며 토악질을 해대는가 하면, 자리에 앉아 운기조식을 시도하는 자들도 보였다.
그것이 비슈누의 원반에서 발해지는 서기 때문임을 알 일 없는 서귀명은 갑작스런 상황에 무척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거리가 멀기 때문에 가벼운 구토증세와 기혈의 동요를 느끼는 것뿐이라는 것은 더 더욱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 순간 마존각을 뒤덮었던 백광이 사라지고 나자 겨우 요동치는 기혈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서귀명은 기혈을 안정시킨 후 그 백광의 정체에 대해서 골몰하느라 마존각 쪽에서 더 이상 격돌음이 들려오지 않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나자 서귀명은 마존각 쪽에서 또다시 일단의 무리들이 자신들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아직은 거리가 너무 멀어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불과 이십여 명 정도의 인원이었기에 서귀명은 또다시 원로들의 수행원들이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거리가 좁혀지면서 백양신마를 비롯해 묵월 부교주와 원로들 몇 명이 포함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놀라고 있는 사이 그들 이십여 명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고, 어느새 오 장여 앞까지 다가서서 멈추어 서자 그제야 서귀명은 놀란 심정으로 급헤 백양신마를 향해 예를 올렸다.
혈살대주 서귀명이 원로원주님을 뵙습니다.
그가 예를 취함에 따라 주변에 있던 혈살대원들도 황급히 따라서 예를 취하였다.
원로원주님을 뵙습니다.
백양신마는 서귀명이 자신에게 예를 취하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 자네가 서귀명이군, 자네의 선조부인 서음효와는 살아있을 때 서로 적지 않은 친분이 있었네, 한데 자네가 뜻하지 않은 일로 건패수호혈서에 서명을 하게 되었다고 들었었네, 그때 미처 신경을 써주지 못해 무척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네,
그 말에 서귀명은 예를 거두며 조금은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미''''오래 전 일입니다.
백양신마는 서귀명이 어색해 하는 것을 보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화제를 바꾸었다.
먼저 출발했던 수행원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자네가 모두 통과시킨 모양이군, 자네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듣지 못했는가?
이번에는 서귀명의 표정이 긴장된 기색으로 바뀌었다.
혈수결이 단행되었다는 것과 천마건곤대전이 선포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네, 그건 그렇고 자네는 이제 어찌할 생각인가?
백양신마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서귀명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다가 조심스런 어조로 백양신마에게 말했다.
그 전에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일세, 말해 보게.
마존각 쪽으로 갔던 천살마검대는 어찌 된 것입니까? 잔월부교주와 장로들도 동행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랬지, 장로들 중 멸절마도 석진과 남염대주, 그리고 삼백여 명의 천살마검대원이 지금 부상을 입은 상태로 제압되어 마존각에 가두어졌네, 그 외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었네,
그 말에 서귀명의 안색이 크게 변해 저도 모르게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네? 그, 그게 사실입니까? 어찌 그럴 수가''''
그러자 백양신마가 다시 말했다.
이쯤에서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네, 지금은 천마건곤대전의 상황, 자네에게 이쪽 편을 들라는 무리한 말은 하지 않겠네, 다만 자네도 혈살대원들과 함께 이 싸움에 관여하지 않았으면 하네, 정 그것이 어렵다면 자네들이 조금 시간을 지체하여 이곳에서 반나절 정도만 더 머물다가 복귀하는 것도 괜찮을 걸세.
서귀명은 경악한 와중에도 백양신마의 말을 들으면서 다시 표정이 급변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납득하기 힘든 말이었기에 다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씀은'''설마 오늘 안으로 천마건곤대전을 종료시킬 것이란 말씀이십니까? 혹시 정말로 엄청난 양의 화약을?
서귀명의 말에 백양신마는 고소를 머금은 채 거볍게 고개를 저었다.
소종사 측에서는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네만 결코 화약 따위는 없네, 하지만 오늘 하루면 천마건곤대전은 종료될 것일세. 자네를 현혹시키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가급적이면 쓸데없는 희생을 피하기 위해서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일세.
자네가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혈살대는 물론이고 소종사가 열개의 무력단체를 전부 동원한다 해도 결코 곤패주 한 사람조차 막을 수 없다네.
서귀명은 백양신마가 결코 헛소리나 늘어놓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의 말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기에 또다시 표정을 기이하게 일그러뜨렸다.
이에 백양신마가 다시 가벼운 한숨을 불어내며 말했다.
후우, 시간이 없어 자네에게 더 이상 얘기는 하기 힘드네, 지금 우리는 소종사에게 가는 길일세, 길을 막고 안 막고는 자네의 자유이겠지만, 부디 현명한 판단을 하길 바라네, 그리고 자네가 길을 막아서겠다면 우리는 당연히 길을 뚫고 지나갈 걸세. 그러니 어서 결정하도록 하게.
사실 길을 막고 서 있는 자들이 서귀명과 혈살대만 아니었다면 백양신마는 이러한 얘기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서귀명뿐만 아니라 혈살대 거의 전부가 스스로 원해서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경우에 의해 건패수호혈서에 서명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기회를 주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지금 당장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지금 상황에서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보다는 쓸데없는 희생을 줄이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천마건곤대전으로 인해 다시 한 번 그들의 신념대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기에 최소한의 배려를 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보여주어 그들이 기회에 편승하도록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백양신마는 진정한 신념을 지닌 자라야 이번 일에 함께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여섯 명의 원로가 희생되었던 것이 아니던가?
천마건곤대전을 시작한 이상 이 싸움이 단순한 자리 바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싸움은 천 년의 세월 동안 외면당하고 있었던 진정한 철혈무인들의 터전을 되찾기 위한 일이었고, 그 새로운 터전을 일구어갈 자들은 그만한 자격이 있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것이 백양신마의 신념이었다.
때문에 기회는 주되 그러한 신념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자들이라면 그들은 단지 구성원으로서의 존재로 남긴 하겠지만 새로운 천마신교의 주역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게.
정말''''개죽음이 아니라 화끈하게 싸워볼 수 있는 겁니까?
서귀명의 질문에 비로소 백양신마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물론일세. 최소한 자네나 혈살대가 가진 실력만큼은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 수 있네.
그럼''''좋습니다. 저도 실력 발휘 좀 하게 해주십시오.
그 말에 백양신마가 두 눈을 빛내며 다시 한 번 반문했다.
진심인가?
물론입니다.
서귀명 역시 두 눈에 확고한 의지를 담고 주저없이 대답했다.
그 모습에 백양신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좋네, 하지만 자네나 혈살대가 실력 발휘를 하는 것은 조금 뒤로 미루도록 하세. 오늘 길을 막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 말일세.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왕 칼을 뽑기로 결심했으니 숨어서 구경이나 하는 쥐새끼가 되기는 싫습니다, 그러니 저희도 함께 가도록 해주십시오. 그러잖아도 소종사나 장로들 주변에서 주인만 믿고 툭하면 사람들을 물어대는 잡견 몇 마리는 반드시 제손으로 때려잡고 싶었습니다.
그 말에 백양신마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다시 말했다.
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알겠네, 하지만 자네도 혈살대원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게, 싸움을 원치 않거나 전향할 뜻이 없는 자들은 이곳에서 바로 해산을 명하도록 하게. 그리고 지금이 천마건곤대전의 상황임과 더불어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도 확실히 주지시키게.
명심할 것은 누구도 강제해서는 안 되며, 지금 이곳에서의 결정으로 당장의 어떠한 불이익도 없을 것이란 것도 주시시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것은 서귀명도 바라던 바라 그는 다시 한 번 백양신마를 향해 고개 숙여 대답하고는 뒤로 돌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혈살대원들을 향해 두 눈을 형형히 빛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너희들도 원로원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모두 들었을 것이다. 너희들 모두의 사정에 대해서는 나 또한 잘 알고 있는 바, 누구에게도 모두의 사정에 대해서는 나 또한 잘 알고 있는 바, 누구에게도 나를 따르라고 강제하지 않겠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너희들이 이번 싸움에 나서길 원치 않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개죽음이 아닌 화끈한 싸움이 될 것이라는 원주님의 말씀을 믿는다. 나 역시도 판단은 너희에게 맡기겠다. 나와 함께 갈 자들은 남고, 이 싸움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 자들은 지금 즉시 돌아가라.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다. 이 길로 소종사에게 가도 좋고 아니면 각자의 거처로 돌아가 있어도 좋다. 원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싸움에 관여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불이익은 없을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열을 세겠다. 그 안에 결정을 내려 입장을 정하기 바란다. 하나, 둘, 셋. 네''''
서귀명의 입에서 적당한 여유를 두며 숫자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혈살대원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이미 원로들의 수행원들을 통과시킬 때 상황에 대해서는 들었고, 또한 원로원주와 대주가 하는 얘기도 모두 들었기에 이미 생각들은 나름대로 결정되어져 있었다.
다만 어느 쪽이건 그것을 실행한다는 것 역시 또 다른 결단이 필요한 일이기에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결정한 것에 대해 많은 동의자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서로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귀명의 입에서 여덟이라는 숫자가 흘러나올 때쯤 서로 간의 의중이 거의 파악되었기에 일부는 조금 앞쪽으로, 그리고 일부는 뒤로 빠지기 시작했고, 아홉이 외쳐지자 뒤로 빠졌던 자들은 즉시 몸을 돌려 장내를 빠르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열! 흠, 어리석은 녀석들이 생각 외로 많구나, 좋다, 최소한 너희들은 구차한 삶보다는 화끈한 죽음을 택한 진정한 사내들이라고 인정해 주마, 하지만 멍청한 놈들인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떠난 녀석들을 원망할 필요도 없다. 오욕은 사내로 태어나서 한 번으로 족하다. 이제 무인다운 죽음만 생각해라. 그리고'''천 년 만에 곤패주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 있는 영광도 함께 누리도록 해주겠다.
서귀명은 그 말과 함께 다시 돌아서서 백양신마 옆에 담담한 기색으로 서 있는 천우를 주시하며 말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천우는 그의 사내다운 기백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단도직입적인 그의 말에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여주지 못했다.
당신들은 아직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소,
천 년을 기다려왔던 곤패주입니다. 그 이상 무엇을 더 알 필요가 있겠습니까? 또한 곤패주님 옆에는 본교의 진정한 철혈무인이신 묵월 부교주님과 원로원주님께서 계시고 혈수결을 단행한 네 분의 원로들도 계십니다. 혈수결의 의미는 그 피의 무게만큼이나 절대적입니다. 제가 아무리 멍청해도 그 정도는 압니다.
천우 역시 서귀명이나 그 뒤에 서 있는 혈의인들의 진심을 느끼기에 오히려 더욱 대답하기가 힘든 것이다. 그들의 무게가 더해질수록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고 나중에는 아티오네스의 말처럼 아끼는 사람들로 인해 자신 역시도 말설임이 생길까 우려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진심을 느낀 이상 자신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주어야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자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받겠소,
충!
그 순간 서귀명과 남은 혈살대원 팔백여 명이 어느새 대오를 갖추고는 한쪽 무릅을 땅에 대고 한 팔을 가슴 위로 올려 고개를 숙인 채 일제히 군례와도 같은 충을 외쳤다.
그 우렁찬 외침이 저마다의 가슴을 울리는 가운데 표정이 좋지 못한 사람은 동사왕과 자칭 호국천위왕이라 했던 화천악뿐이었다.


7장 일단 뼈마디부터 추려주마


아직도 소종사가 뿜어내었던 마기로 인해 입은 내상이 완치되지 않아 안색이 좋지 않은 잠마전주 진철위는 이 순간 뜻밖의 보고에 마치 시체처럼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그게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분명 혈수결이 단행되어 풍검신이 곤패주로 임명되었다는 것과 천마건곤대전을 선포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삼백여 명의 천살마검대를 포함해 석진 장로님과 남염 대주가 제압되어 마존각에 갇혀 있다고 했고, 현재 혈살대주 서귀명과 팔백여 명의 혈살대와 함께 이곳을 향해 오고 있는 중입니다.
어,어찌 그런 일이''''
그 순간 잠마전주 진철위는 은영일호의 보고에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넓은 집무탁자를 두 손으로 짚은 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비록 그동안 여러 차례 시행착오가 있긴 했지만 이번만은 어떠한 변수도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더 이상 천마곤패와 풍검신으로 인해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그동안 소종사의 뜻에 따라 개입시키지 않았던 장로원까지 끌어들였다.
게다가 대종사의 친위세력인 일백마황대와 무영사신대를 제외하고 실질적으로 천마신교 내의 최정예 무력단체라는 천살마검대까지 동원하는 초강수를 두었고, 그와 함께 세 명의 장로와 부교주인 잔월혈마까지 함께 움직였다.
그런데도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소종사 측에서 움직일 수 있는 최강의 무력단체인 천살마검대까지 괴멸당한 것이다.
아니, 그뿐이라면 이렇게까지 어이가 없진 않았을 것이다. 난데없이 혈수결과 천마건곤대전이라니?
더군다나 원로들의 지원세력을 막으라고 보냈던 혈살대까지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곤패주와 천마건곤대전이라는 명분을 당당하게 앞세우고 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냉철함을 잃지 않는 그였지만 이번만은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느낌과 함께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음을 절감하고 있었다.
다른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 검토해 보았지만 두 가지 상황만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던 일이 바로 혈수결과 천마건곤대전이었다.
왜냐하면 혈수결이건 천마건곤대전이건 자기 살을 깎아먹는 일이었고, 스스로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일이나 다름없기에 백양신마나 원로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 두 가지 일은 절대로 벌어질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미친 짓이 벌어졌고, 그것도 상대편의 최악의 아닌 최상의 선택이 되어 오히려 자신이나 소종사의 목을 죄어오고 있는 것이다.
분명 지금과 같은 상황이 실지로 벌어지기 전까지는 그것은 상대방이 절대로 취할 수 없는 절대 악수임이 틀림없었다. 한데 어째서 그것이 지금은 최상의 선택이 되어 이 순간 자신들의 목을 죄어오고 있는 것인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잠마전주는 문득 뇌리를 관통하는 한 가지 깨달음에 전신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그것은 희열의 떨림이 아닌 절망의 떨림이었다.
무력!
그렇다. 비로 천살마건대를 괴멸시킬 수 있는 무력,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절대 곤패주가 되지 못하리라고 여겼던 풍검신이 혈수결로 곤패주가 된 것도, 천마건곤대전을 선포함으로써 혈살대가 건패수호혈서에 서명한 것을 무효로 만들 수 있는 명분을 갖게 된 것도 어찌 보면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상대편을 확실히게 처리할 수 있는 명분이 이쪽에도 주어지게 된 셈이니 전력을 투입해서 일거에 처리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미 그 전력이나 마찬가지인 천살마검대가 투입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 반대로 오히려 이쪽 전력이 괴멸되고, 사지에 몰린 셈이 된 것이다.
막을 수 있는 방법? 있을 릴가 없었다. 이미 전력을 투입하여 괴멸되었는데 무엇으로 막는단 말인가?
잠마전주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기어이 바로잡지 못하고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도대체 그런 억지스런 무력이 어떻게 나온 것이란 말인가? 혼전 중에 벽력탄을 사용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아무리 자모천뢰신궁 같은 신병이기가 있었다 해도 이치 상으로 나올 수 없는 결과였다.
천살마검대로도 어찌 할 수 없는 상대라면 머릿수만 많은 다섯 개의 무력단체들로도 결코 막을 수 없었다. 그나마 원로들의 가문을 수색한답시고 다 내보낸 상태만 아니라면 당장에 방패막이로라도 쓰겠지만 지금은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그래도 일단은 뒤에서 위협이라도 가할 수 있도록 불러들여야 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천살마검대를 괴멸시킨 무력을 지닌 그들을 막을 수 있는 힘은 대종사의 친위대인 일백마황대와 수석장로 적천마제 구양천의 친위대인 적천혈검대밖에 없었다.
한데 문제는''''그들은 결코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일백마황대의 수좌들인 12마군중 4마군이 소종사의 부탁으로 중원에 나가 풍검신에게 희생되었지만 그것이 그들을 동요시킬 수는 없었다.
그들은 명칭만 단체이지 철저히 개인 위주로 행동하는 자부심 강한 노마들이었고, 아무리 천마건곤대전의 상황이라 하더라도 소종사를 위해 움직여주지는 않을 자들이었다. 아니, 어쩌면 천마건곤대전의 상황을 이용해 소존사에게 칼을 들이밀 자도 있을지 몰랐다.
적천혈검대 또한 수석장로인 적천마제 구양현의 철저한 개인 친위세력이었기에 수석장로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들 또한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수석장로가 친히 움직여서 막아주어야 하는데. 절천마제 구영헌 또한 천마건곤대전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소종사의 뒤통수를 칠 가능성이 높은 자로 어떤 면에서는 백양신마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었다.
사실 수석장로 구양헌 때문에 자신이나 소종사 또한 장로들의 개입을 극히 꺼렸던 것이지만, 이미 장로들은 개입시킨 상황이었고 지금은 수석장로의 도움을 얻지 못하면 끝장이었다.
그 외 잠마전을 제외한 5전 3당의 고수들은 역시 집결시키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기에 원로들의 가문으로 나갔던 다섯 개의 무력단체들이 올 때쯤이나 몰려들 것이고, 그래 봐야 호법전을 제외하면 태반이 절정급에도 못 미치니 역시 풍검신과 같은 절대고수들을 상대하는 데는 별다른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설사 십만의 고수들로 진을 친다 하더라도 지금 오고 있는 풍검신이나 백양신마 등이 그들의 머리를 타넘어 소종사만을 공격하고자 한다면 일반적인 무사들은 그들에게 칼질 한 번도 할 수 없을 것이니 머릿수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상대가 될 만한 자들이 막아서야 효용이 있는데, 아쉽게도 그만한 고수들은 거의가 모두 소종사의 통제 밖에 있는 자들이었다.
그나마 혈살대라도 남아 있었다면 인원수에 의한 공세도 기대해 볼 수 있으련만, 지금은 오히려 그들로 인해 다른 무력단체들이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곳은 광활한 평야가 아니라 건축물들로 이루어진 천마신교 내부였고, 한 곳에서 천 명 정도의 고수들이 뒤엉킨다면 그 외의 인원은 구경이나 하고 있어야 하는 좁은 곳이었다. 결국 나중에 도착한 5개 무력단체들이나 5전 3당의 고수들이 아무리 몰려들어도 혈살대에게 길목이 가로막히면 그 또한 인원수의 득을 보기 어렵다. 오히려 천살마검대와 적천혈검대를 제외하고는 다른 무력당체들보다 월등한 시력을 지닌 혈살대의 제물이 되기 딱 좋은것이다.
진철위는 간신히 다리에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파악이 끝났으니 이제는 움직여야 할 때였다.
아마도 자신이 제일 먼저 소종사의 분노를 감당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후우! 화약도 아니었던 모양이군, 상대방의 전력을 가늠할 수 없는 이상 진 싸움이라고 봐야겠지. 왜 소종사님과 나는 풍검신의 무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썼던 것일까? 후후, 그가 전설로 말하는 공령의 경지일 거라는 생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지, 어차피 그것이 사실이라면 막을 방도 역시 없었을 테니까. 바로 지금처럼 말이야,
잠마전주는 한숨과 자조적인 웃음을 섞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소여천의 처소로 향하기 시작했다.
잠마전주는 이번 걸음이 자신의 마지막임을 예견하고 있었고, 이싸움은 애초부터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는 것 또한 그 순간에서야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소종사 또한 그 사실을 분명 알고 있으면서도 억지로 외면하려 했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했다.
풍검신의 그 이해할 수 없는 무력!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퍼억!
흐흐, 네놈이 ''''네놈이 감히''''네놈은 죽어 마땅해'''
산산이 부서진 잠마전주 진철위의 머리에서 터져 나온 파와 뇌수가 사방에 흩뿌려지는 가운데 이미 소여천의 단정하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한 올, 한 올이 모두 꼿꼿이 일어서서 천장을 향해 있었고, 두 눈에는 이미 흰자와 검은자가 보이지 않은 채 핏물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분명 마성이 완전히 폭발되어 있는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소여천에게서는 오히려 마기보다는 지독한 냉기와 귀기로움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단 말이지, 흐흐흐, 풍검신 네놈이 정말로 공령의 경지였단 말이지'''흐흐흐, 하지만 나는 인정하지 않아, 아니 끝까지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해, 저놈은'''
마치 유부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음성으로 잠마전주의 머리없는 시신을 바라보면서 독백처럼 중얼거리던 소여천은 자신이 손에 묻어 있는 그의 뇌수를 혈로 핥으며 맛을 음미하듯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바보 같은놈 그것만 말하지 않았어도 숨겨진 내 본성이 이렇게 화를 내지는 않았을 것을'''
차츰 하늘로 향하고 있던 소여천의 머리카락이 다시 등뒤로 차분히 내려앉기 시작했고, 감았던 눈이 뜨여지자 어느새 핏물이 넘실거리던 그 눈 또한 평범한 눈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게 단아한 모습의 귀공자로 돌아온 소여천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버릇처럼 뒷짐을 지고는 몸을 돌려 창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네게 숨겨진 또 하나의 본성이 있다는 것을 나도 얼마 전에야 깨달았지, 솔질히 나는 품검신에게 진작부터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고, 그 두려움이 커지기 시작하자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가 깨어나더군, 후후후 이제껏 두려움이란 존재를 모르고 살았기에 이제야 알게 된 것이지.
창 밖을 바라보며 독백하듯이 중얼거리던 소여천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의 진정한 본성인 천괴의 기운이 일어났을 때 숙적중 하나인 자미성의 기운이 느껴졌는데'''''풍검신 그놈이 자미성체였던가? 놈도 각성이 있었던 모양이로군,후후!
아무튼 천괴의 기운이 깨어난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천괴의 극성인 천살이 없는 한 자미는 천괴의 먹이일 뿐, 내가 천괴가 아닌 천살이었다면 네놈의 먹이가 되었겠지만'''크큭! 이 어찌 하늘의 오묘한 섭리가 아니겠는가! 크핫하하!
소여천은 혼자서 괴소를 섞어가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미친 듯한 광소를 터트리며 정말로 하늘에 감사라 올리듯이 창 밖의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제 이 세상은 나의 것! 하지만 풍검신 네놈은 나를 위해 좀 더 해주어야 할 일이 있다. 성가신 대종사의 개들과 구양 노괴의 처리는 네게 맡기도록 하마, 그러려면 그들 눈에 네가 꼬리를 만 강아지 정도로 보여야 할 테니 잠시 내가 개가 되어야겠군, 후후후!
소여천은 그 말과 함께 치켜들었던 두 팔을 내리고는 가벼운 웃음과 함께 뇌수와 피가 질펀한 실내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소여천의 뒷모습을 빨랫줄같이 긴 시신경을 메단 진철휘의 한쪽 눈알이 탁자에 걸린 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죽은 자의 눈이었지만 그 눈에는 잠마전주가 죽기 직전에 담았던 의미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것은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동정의 눈빛이었다.
왜 그러는가?
백양신마와 나란히 움직이던 천우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고, 그와 동시에 바로 뒤편에서 백낙천의 놀란 경호성이 터지자 백양신마도 따라서 걸음을 멈추고 천우를 향해 물었다.
하지만 천우의 대답이 나오기 전에 백낙천이 다시 천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천 형도 느끼셨소? 나는 마치 심장이 바늘로 찔린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순간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숨이 멎을 뻔했소, 도대체 조금 전의 이 기운이 무엇인지 아시겠소?
백낙천의 말에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천우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갑자기 걸음을 멈춘 이유가 천우와 백낙천이 어떤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란 것을 그 말을 통해서 알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백낙천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당히 강력한 기운이었던 듯하다. 그렇다면 그들도 느꼈어야 당연한 것이기에 의문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천우도 그 순간 조금은 곤혹스런 눈빛으로 백낙천을 바라보면서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처음 느껴보는 괴이한 기운이었소,
아! 그러고 보니 이 느낌은 내가 어렸을 때 숲속에서 갑자기 큰 곰을 마주치고 놀랐던 느낌과 매우 흡사하구려, 그땐 정말 무서웠는데''''
백낙천의 말에 천우는 그가 순간적으로 공포심을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천우로서도 좀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자신도 순간적으로 괴이한 느낌을 받기 했지만 그것을 딱히 어떤 기운이라고 표현하기가 애매했는데 백낙천은 순간적으로 공포심을 느낀 것이다. 결국 그 기운은 백낙천과 상극의 기운이라는 의미이고, 더군다나 백낙천을 압도하고 있다는 얘기도 되기에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백낙천은 자신을 제외하면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도 강했고, 그가 타고난 자미성의 기운은 본질적으로 사마와는 극성이 되는 기운이었다. 때문에 조금 전의 그 기운이 단순한 마기나 귀기였다면 백낙천은 결코 그러한 공표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선한 기운은 아니었고, 자신 역시 처음 접해 보는 기운이었기에 그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생각지 못한 상당히 강력한 존재가 이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듯했다.
하지만 헬로가드의 기운을 지닌 천마는 아닌 것이 분명했고''''폐관에 들었다는 대종사라는 자가 뿜어낸 기운일 수도 있겠지만'''''비록 상당히 강한 느낌이 들긴 했어도 자신이 감당 못할 수준은 아니라고 느꼈기에 천우는 다시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만약 누군가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게 되면 여러분은 함부로 대적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것은 백 형도 마찬가지요, 아시겠소?
물,물론이오. 나야 그 기운을 다시 접하게 되면 오금도 펴지 못할 것 같은데 어찌 싸우려 들겠소, 뭔지는 몰라도 그 기운을 풍겼던 사람이 나타나면 제발 천 형이 좀 막아주시오.
약간은 너스레가 포함된 백낙천의 말이었지만 완전히 농담만은 아니었다. 그만큼 백낙천은 조금 전의 그 기운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천우는 곰곰이 그 기운이 느껴졌던 곳을 가늠해보고는 백양신마에게 물었다.
우리가 가는 방향으로 삼천 장 정도 떨어진 곳이면 어디쯤됩니까?
으음, 그 정도 거리면 지금 우리가 찾아가려는 잠마전이 있는 곳쯤 될 걸세, 그리고 소종사의 거처 또한 그 잠마전 내의 가장 안쪽에 있네.
그 말에 천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백양신마는 그러한 그의 행동에 의문을 느끼고는 다시 물었다.
한데 그것은 왜 물은 것인가?
조금 전 느꼈던 괴이한 기운이 그쯤에서 발산된 것 같아 물어본 것입니다.
그 말에 백양신마가 다시 기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삼천 장이나 떨어진 이곳에서 그것을 느꼈단 말인가?
워낙 갑작스럽고 짧은 순간이라 확신할 순 없겠습니다만, 최소 그 정도 거리는 떨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허 참! 알겠네, 새삼 놀랄 일도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세, 한데 그 기운이 자네로서도 위험하다고 느낄 정도면 분명 심상치 않은 것일 텐데'''소종사가 내가 짐작치 못한 어떤 대단한 준비를 해놓은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되는 구먼,
그 말에 천우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른 분들에게 조금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기에 한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감당 못 할 정도는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그 말에 조금은 근심스러웠던 표정이 밝아지며 백양신마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알겠네, 그리고 지금쯤이면 자네가 곤패주가 되었다는 것과 천마건곤대전이 선포되었다는 것이 본교 내에 웬만큼 알려졌을 것일세, 신간을 두고 이곳까지 천천히 움직인 이유가 그러한 사실을 모두 알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니 이제부터는 조금 빨리 움직이도록 하세, 그러한 사실을 모두에게 알려 우리의 행동에 명분은 세우되 소종사 측에서 준비할 시간을 주는 것은 좋지 않으니 말일세,
물론 어느 정도 대비야 하겠지만 전체 세력을 정비하여 우리를 방비할 시간으로는 턱없이 모자랄 테니 분명 그쪽에서도 정예세력들만으로 우리를 맞이하게 될 걸세,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뒤편으로 계속 건패주 쪽의 세력이 몰려들게 되겠지만, 잠마전은 한쪽이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고 장소 또한 그리 넓지는 않으니 혈살대가 그들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걸세,
요는 이번 싸움에서 쓸데없는 희생은 최소한으로 줄이되 이쪽의 강함을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데있네, 그래야만 단 한 번으로 천마건곤대전을 종결지을 수 있을 것이고, 더 이상의 불필요한 희생도 줄일 수 있을 것일세,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모두 속력을 내서 움직이도록 하세,
백양신마는 그 말과 함께 가장 먼저 신형을 움직였고, 그에 맞추어 천우 일행들과 뒤를 따르던 혈살대 역시 일사분란한 모습으로 신형을 띄워 올렸다.
잠마전은 천마신교가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분지의 남쪽 끝 부분에 구름까지 뚫고 솟아 있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뒤로하고 장원 형식으로 수십 채의 전각들과 함께 이루어진 곳으로 소종사 소여천의 거처는 그곳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천마신교에서 정보를 총과하는 잠마전이 이곳에 위치한 이유는 이곳이 바로 중원으로 나가기 위한 출입로와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출입로와 이어져 있는 잠마전의 정문 앞에는 지금 길을 따라 일천여  명 정도의 사람들이 중앙을 비워둔 채 길 양편으로 나누어 진을 치고 있었다.
그 중앙의 앞쪽에 깨끗한 백삼 차림의 소여천과 특이하게도 귀밑머리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는, 나이를 가늠키 힘든 적포인이 함께 서 있었다.
그들의 뒤편으로는 백여 명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양옆으로 대오를 맞추어 서 있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방만한 모습으로 여기저기 앉거나 서 있었는데, 그들은 복색은 물론 나이와 성별조차 각양각색이어서 젊어 보이는 자부터 당장이라도 관 속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폭삭 늙어 보이는 자들과 심지어 여인과 노파도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양편에 대오를 맞추어 서 있는 자들 중 오른편은 양팔 소매에 금룡이 하늘로 승천하는 문양이 수놓인 화려한 적삼을 걸치고 있는 자들이었고, 왼편에 서 있는 자들은 잠마전 고유의 고유의 복색인 은의경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제 오는군,
전면에서 빠르게 다가서고 있는 일단의 무리들을 보며 적포인이 별다른 어감이 느껴지지 않는 특이한 어조로 그렇게 말하자 소여천이 그 말을 받았다.
정말 혈살대가 뒤따르고 있군요, 죽일 놈들 같으니! 이번 일이 끝나면 결코 용서치 않겠다.!
소여천이 처음에는 적포인을 의식해 존칭으로, 뒷말은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독백처럼 그렇게 말하자 적포인은 희미한 조소가 어린 눈빛으로 소여천을 돌아보았다.
전에 서귀명을 혈살대주로 임명하는 것을 분명히 반대했소만 그때 소종사께서 끝내 고집을 부려 그를 혈살대주로 앉히지 않았소이까, 결국 서귀명 저놈이 배신을 했구려,
적포인의 말에 소여천의 어색한 웃음을 지은 채 거볍게 목례를 하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때 구양 노야의 말씀을 들었어야 하는 건데'''''제가 그동안 잠마전주 그놈의 농간으로 인해 제대로 처신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제게 섭섭한 것도 많으셨겠지만 이번 일만 해결되면'''핫하! 앞으로 본교 내의 대소사는 물론이고 중원 장정에 관한 계획도 노야와 장로원의 조언에 충실히 따를 생각입니다.
그것은 평소의 소여천과는 전혀 다른 말투와 행동이었고,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에서는 비굴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러한 소여천의 말을 들은 잠마전의 고수들은 도열한 채 내색은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저마다 치미는 분노로 인해 눈빛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렇소, 그동안 잠마전주 그놈에 의해 소종사의 눈과 귀가 가려졌던 거요. 이제라도 소종사께서 그것을 깨닫고 그 간사한 놈을 처단했다니 정말 잘한 일이외다. 앞으로는 노부와 장로원에서 소종사를 도와드릴 것이오.
물론입니다. 핫하!노야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든든하군요.
소여천이 쓸개라도 빼줄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그가 바로 천마신교 수석장로인 적천마제 구양험이었고, 백양신마와 더불어 천마신교 내에서는 절대쌍야라 불리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적천마제 구양헌은 누구도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 유명했고, 장로원의 장로들조차 그를 무척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소여천은 그런 그를 찾아가 그동안 자신이 잠마전주 진철위의 감언이설에 속아 은연중 장로원을 배척한 것이라고 변명하고는, 이제야 그것을 깨닫고 잠마전주를 천단하였으며 앞으로 모든 일을 장로원과 상의하여 결정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구양헌에게 도와 달라고 사정을 했다.
구양헌은 소종사인 소여천이 위기에 몰리자 꼬리를 말고 자신에게 찾아와 사정하며 도움을 요청하자 못 이기는 척하며 몇가지 약조를 받아낸 후, 자신의 친위대인 적천혈검대는 물론이고 일백마황대까지 찾아가 그들을 설득하여 함께 이곳에 데려온 것이었다.
이미 제반 사정을 들은 구양헌은 백양신마나 중원에서 온 풍검신 등이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과 적천혈검대만으로는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실질적인 천마신교 최고의 고수들이 모여 있는 일백마황대를 찾아가 협조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그들도 자신들 중 최고의 실력자로 인정받고 있던 검마 소래흠과 12마군 중 4마군이 중원에 나가 풍검신에게 죽음을 당하였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그런 풍검신이 다시 곤패를 지니고 간밤에 천마신교로 찾아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무척이나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한데 난데없이 그가 혈수결에 의해 곤패주로 임명되었으며, 천마건곤대전을 선포한 후 소종사의 건패를 차지하기 위해 잠마전으로 향하고 있다는 말들 듣게 되자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미 부교주 중 한 명인 잔월혈마 와 세 명의 장로들이 함께 이끌고 천살마검대마저 그들에게 모두 당했다는 말을 듣고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구양헌과 함께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들 역시 소종사인 소여천에 대해 좋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는 건패주였다. 자신들은 대종사의 친위대이기도 하지만 건패 수호세력의 핵심이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천마건곤대전이 선포되었다면 굳이 소종사를 보호하려 할 필요가 없었고, 그게 아니라면 풍검신을 처리한 후에 소종사를 처리할 수도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새로운 소종사를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일 뿐이지 실지로 그럴 수는 없었다. 그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었지만 대종사의 뜻에는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율법보다는 대종사의 뜻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미 그들은 주인이 명한 것만 따르는 길들여진 개들인 뿐이었다. 따라서 누구도 야생으로 돌아가 처절한 먹이 싸움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나마 중원으로 나섰던 검마나 4마군은 맹수의 기질이 남아 있던 자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 스스로는 자각하고 있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일이었지만 실지로 그러한 범주를 그들은 벗어날 수 없었다. 때문에 계속 안락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건패주를 수호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협하는 무리들은 힘을 합해 응징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다섯 명이 빠져 있는 일백마황대도 전면에서 오고 있는 풍검신과 백양신마등을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랜만에 마음껏 피를 볼 수 있는 상황도 좋았고, 더욱이 강한자들을 더욱 강한 힘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쾌감이 미리 전해졌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혼자가 아니었고, 때문에 그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백양신마는 자신들을 맞이하는 자들이 예상대로 일백마황대와 수석장로인 구양헌, 그리고 그가 이끄는 적천혈살대임을 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질적인 건패 수호세력의 핵심 중 5할 가량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는 것이기에 저들만 처리하고 나면 대종사와 무영사신대만 남는다. 이곳에서 확실한 강함을 보여준다면 그 외의 세력들은 더 이상 싸움에 끼려 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은 피를 보아야 할 사람들끼리만 피를 보게 되는 것이기에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천우는 이곳에 와서도 얼마 전에 느꼈던 그 괴이한 기운을 풍기는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자 내심 의문이 일기는 했지만, 어차피 때가 되면 나타나리라 생각하고는 전면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여기저기 방만한 태도로 서 있는 자들이 중원에서 마주쳤던 4마군이란 자들과 같은 수준임을 알아보고는 그들이 백양신마가 말했던 일백마황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외 눈에 띄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소종사라는 자일 것이기에 그 둘을 좀더 유심히 살펴보았다.
한 명은 극강한 마기를 내포하고 있는 백양신마 정도의 고수였고, 다른 한 명은 오히려 별다른 마기가 느껴지지 않고 있는. 그래서 더욱 기한 백의청년이었다.
천우는 직감적으로 그 백의청년이 소종사임을 알아차리고는 좀더 유심히 그를 살피면서 상당히 괴이한 자라는 것을 알아볼수 있었다.
듣기로는 그도 이전의 묵월 정도의 실력을 지닌 자라 했는데 그 정도의 마기를 내비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묵월이나 백양신마처럼 현문기공 쪽을 익힌 자도 아닌 듯했다. 느껴지는 기세로는 최소한 백낙천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그러한 원래의 기를 상당히 줄여놓은 듯한 느낌이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일반적으로 기를 감추는 수준이 아니었고, 무언가에 의해 원래의 기운이 흡수되어 버린 것 같은 그런 상태로 느껴졌다. 때문에 겉으로 느낄 수 있는 지금의 상태는 오히려 백낙천 비해 훨씬 못미치지만 그 무언가가 원래의 기를 풀어버리면 어느 정도의 크기일지는 천우조차 짐작할 수가 없었다.
천우는 아무래도 소종사란 자가 얼마 전의 그 괴이한 기운을 느끼게 했던 자라고 짐작했지만 아직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듣던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자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신도 받을 빛이 있었고, 이미 다른 여러사람과도 약속한 바가 있는 이상 그러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줄 생각이었다.
쌍방 간에 서로를 살피는 동안에도 천우 일행이 계속 움직여 소여천 등이 있는 곳과 십여 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서자 혈살대가 길목을 차단하며 뒤쪽에서 진세를 구축하였다.
양쪽이 엇비슷한 인원으로 대치상태를 이루자 백양신마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군, 구양헌!
그렇군,
백양신마의 인사 아닌 인사에 구양헌은 여전히 무미건조한 음색으로 간단히 대답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피차 할 말은 없겠지만, 그래도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대답해 주겠는가?
말해 보게.
자네가 예전에 한때 이혼대법이나 강신술 등에 심취에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네, 그래서 그에 관해 한 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기에 질문을 하려고 하네,
큭'''자네가 그런 사술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군,
자네 혹시 자명천마종의 전설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백양신마가 강신술 등에 묻는다면서 갑자기 자면천마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거의 무면인과 같은 구양헌의 표정이 조금 실룩거렸다.
그야 본교인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 전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느냐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설마 지금 말장난으로 시간이나 끌어보자는 심산인가? 그래 봐야 좋아지는 것도 없을 텐데?
아니, 그런 게 아닐세. 나는 그 중 마신의 권능이란 부분에 대해서 묻는 것일세, 그것은 혹시 절대마령의 강림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자네라면 그 해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네,
그 순간 구양헌은 물론이고 12마군 중 남은 8마군이 포함된 일백마황대 전원과 소여천 역시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구양헌과 소여천의 눈빛은 각기 다른 의미를 담고 크게 흔들렸는데, 그 순간 천우는 조금 미약하긴 하지만 얼마 전에 느꼈던 그 괴이한 기운이 또다시 소여천에게서 느껴지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천우가 그렇게 소여천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 백양신마는 오히려 구양헌의 표정과 기색을 주의깊게 살피고 있었기에 그 또한 구양헌이 확실히 무언가 알고 있다는 심증이 굳어 지고 있었다.
백양, 자네 그동안 술수가 많이 늘었군, 절대마령은 인위적으로 강림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그런 말을 하다니, 천마건곤대전의 상황이라고 그런 구실로 혹여 우리 중에 누군가가 자네 편을 들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물론 그런 생각은 조금도 갖고 있지 않네, 다만 자네가 강림술이나 이혼대법 등에 필요 이상으로 심취했던 것이 나중에 그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일세, 그것은 결국 자네가 자명천마종의 전설에 대한 실체를 어느 정도는 눈치 채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자네는 그런 사람이지.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명천마종의 전설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네, 그리고 강림술과 이혼대법에 조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저 잠시 흥미를 느꼈기 때문일 뿐 다른 이유는 없었네, 이제 대답이 되었는가.
그런가? 그렇다면 조금 실망이로군, 하면 자네는 만약 대종사의 폐관 목적이 자명천마종을 깨우기 위한 것이고, 그 자명천마종의 전설이 사실상 절대마령의 강림을 이루는 방편이라면 어찌할 텐가?
백양신마의 역으로 찔러오는 질문에 구양헌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절대마령은 그야말로 파멸의 존재다. 설사 대종사라 하더라도 그런 존재라면 따를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제 보니 자네, 억지도 보통이 아니군, 자명천마종의 전설이 그러한 절대마령의 강림이라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네, 그리고 그런 억지에 대답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네, 그러니 이젠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떤가.
억지라''''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더 이상 할 말은 없군, 좋네,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하지만 그 전에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네,
아직도 할 말이 있는가? 이번엔 억지 소리가 아니었으면 좋겠군,
글쎄''''자네가 받아들이기 나름이겠지, 내 제안이란 다름 아닌 자네와 나 단 둘간의 1대 1생사결을 제안하는 바일세, 사실 예전에도 승부를 못 내었지만, 그때는 생사결을 다툴 만한 상황이 아니었으니 전력을 기울이지는 못했지,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되네만'''지금 이 순간은 그때 이루지 못했던 승부에 대한 욕심이 이는군, 어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그 말에 구양헌의 얼굴이 또다시 눈에 띌 정도로 실룩거렸다.
어째서지? 지금 상황에서는 시간을 끌수록 사정이 안 좋아지는 것은 자네 쪽일 텐데 그렇게 해서라도 시간을 끌려는 이유가 뭐냔 말일세? 그 제안에 대해서는 대답을 들어보고 결정하도록 하지.
나야말로 자네가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시간을 끌면 왜 우리의 사정이 안 좋아진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건패 수호세력이 계속해서 몰려들 것이기에? 하지만 그들은 결코 혈살대를 뚫지 못하네, 그리고 그들이 와야 진정 곤패주의 강함을 보여줄 수 있을 게 아니겠는가.
지금은 천마곤패대전의 상황, 곤패주의 진정한 강함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더 이상 건패 수호세력으로 남아 있지 않을 걸세, 그러니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해지는 상황이지.
그 말에 또 구양헌은 물론이고 일백마황대 역시 적지 않은 동요를 보여주었다. 백양신마의 말은 절대적인 자신감에서 나온 말이었고, 결국 자신들을 희생양에 불과하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리고 백양신마의 태도에서 그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그들은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당혹스러웠다. 저 절대적인 자신감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인가?
백양신마의 말을 통해서, 혈수결을 통해 곤패주가 된 풍검신에게 그러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이기도 힘든 것이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인간이라면 한계가 있다, 더욱이 생사경으로 알려져 있느니 그 한계는 더욱 분명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만으로는 백양신마가 절대 저러한 자신감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 것인가? 그들이 느끼는 공통된 의문이었다.
구양헌은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를 정도로 느끼는 공통된 의문이었다.
구양헌은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를 정도로 격동을 드러내며 백양신마를 향해 물었다.
천살마검대가 자네들에게 제압당했다는 것을 내가 잠시 잊고 있었군, 물론 순전히 실력으로 제압한 것이겠지?
물론일세.
다른 원조자도 없었고?
그렇다네,
그가'''몇 명이나 상대한 것인가?
곤패주는 나설 필요조차 없었네.
뭐,뭣이?자네 지금''''
사실이네, 곤패주가 너섰다면 당연히 우리가 나설 필요조차 없었겠지,
그 순간 구양헌은 문득 상상조차 하기 힘든 사실이 또 한 가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그럼'''명부산은''''
당연히 곤패주의 솜씨일세. 자네들 생각처럼 화약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고,
그,그렇다면 무엇으로?
장력일세. 단 일 수였네.
평생 동안 말을 더듬어본 적이 없던 구양현은 난생처럼 말을 더듬었고, 백양신마의 마지막 대답에는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이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소여천을 노려보았다.
소여천은 백양신마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두 눈이 서서히 핏빛으로 물들어 가다가 구양헌의 눈길을 의식하자 급히 마음을 가라앉히며 일부러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더듬거렸다.
나,나는'''몰랐소이다. 그것도 잠마전주 그놈이 그렇다고 말해 준 것이라 그런 줄로만 ''''정말이오! 하지만 여기 계신 분들이라면 능히''''
이곳에 있는 우리들 모두가 힘을 합한다 해도 단 일 수에 명부산을 그렇게 만들수 있었겠소? 천 장 밖은 고사하고 바로 고 앞에사도 말이오. 소종사 당신은 우리 모두를 사지로 불러모은 것이오.
무,무슨 그런 말씀을 ''''설혹 여러분들이 여기 오시지 않았다 한들 저자들이 여러분들을 그냥 놔두었겠습니까?어차피 싸워야 할 자들입니다. 더군다나 여러분들은 건패주를 수호해야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저런 말에 현혹되어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천만에, 그 사실을 알았다면 나는 절대로 이곳에 오지 않았소, 왜냐고? 지금은 천마건곤대전의 상황이니까. 그리고 힘을합해 대종사에게 쳐들어갔을 거요. 그 또한 왜냐고 묻는다면 나 역시 대종사가 절대마령의 강림을 받으려 한다고 의심하기 때문이오, 그 때문에 육십 년의 세월을 당신에게 신경 쓰지 않고 준비해 온 것이거늘'''
그 순간 애써 진정시켰던 소여천의 표정 또한 기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대종사 때문에 내게 신경 쓰지 않고 육십 년의 세월을 준비해 왔다고? 그 말은 정말 대종사가 절대마령의 강림을 받으려 한단 말인가?
소종사에게 분갈을 터트리던 구양헌은 그제야 소여천의 표정과 어투가 기묘하게 변했음을 자각하며 흠칫,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어떤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인해 본능적으로 취한 행동이었다.
말해라! 정말 대조사가 폐관한 이유가 절대마령을 얻기 위해 서인가?
소'''''종사''''왜 그러는'''''컥!
자신이 물러서는 만큼 소여천이 다가서며 평소와는 전혀 다른 기괴한 목소리로 다그치자 대항할 수 없는 공포감을 느끼며 떠듬거리던 구양헌은 한순간 소여천의 손에 목이 잡힌 채 호흡이 끊어지는 기음을 토해 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백낙천 또한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 채 전신을 부르르 떨면서 간신히 떠듬거리는 어조로 경악성을 토해 내고 있었다.
저, 저자''''였어'''으으'''이 기운은 대체''''
그 순간 천우가 백낙천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백 형, 진정하시오,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의지를 일으켜 두려움을 떨쳐버리시오. 저자는 단지 백 형과 상반되는 기운을 가진 자일 뿐, 백 형이 의지로 두려움만 떨쳐낸다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는 자요.
천우가 짚은 어깨로부터 심신을 평안케 하는 기운이 순간적으로 흘러들자 백낙천은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며, 그러나 여전히 두려움이 밴 목소리로 말했다.
고, 고맙소, 하지만 알 수 없는 이 두려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듯하오, 노력은 해보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저자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오, 그러니''''
걱정마시오, 나는 저자에게 빛이 많은 사람이오, 백 형이 달라 해도 양보할 수 없는 자이외다.
그 말에 백낙천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다'''행이구려, 후우! 이제 괜찮소, 그럭저럭 버틸 만하니 이제 손을 떼셔도 괜찬소이다. 나도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본능적인 두려움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구려,
그 말에 천우가 가만히 고개를 꺼덕이며 백낙천의 어깨에서 손을 떼자, 백낙천은 그 순간부터 이를 악문 채 의지를 일으켜 본능적인 두려움과 싸우기 시작했다.
천우는 백낙천의 그러한 모습에 싱긋 미소짓고는 다시 전면을 바라보며 소여천을  주시했다.
확실히 괴이한 기운을 흐리는 자였다. 그의 기운에는 마기와 정기, 양쪽 모두를 억누르는 기운이 배어 있었는대, 그 때문인지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소여천은 이 순간 잠마전주의 머리를 박살내었을 때처럼 괴이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모두가 하늘을 향해 곧두선 채 마치 물 속에서 흐느적거리는 것처럼 흔들거렸고, 두 눈은 흑색과 백색 눈동자가 모두 사라진 채 핏물이 넘실거리는 듯한 모습으로 일렁이고 있었으며, 단아하던 얼굴 역시 전체적으로 미소짓고 있는 마귀의 형상처럼 기이한 윤곽을 보이고 있었다.
모습을 보니 상당히 변덕스러운 자아가 깃들어 있는 놈이로군, 게다가 자신을 완전히 감출 정도로 교활하기도 하고,
한데 바로 그 순간, 일행들에게 파묻혀 보이지도 않고 있는 마동의 입에서 억지 웃음과 함께 역력한 경악이 담긴 음성이 흘러나왔다.
헤헤헤, 저놈'''분명'''천괴의 기를 받고 태어난 놈이다, 아주아주 까탈스럽고, 더러운 기운이지, 특히 자미성과는 극성이고, 다른 일곱 성군중 오로지 천살에게만 꼬리를 마는 놈이지 한마디로  아귀와 야차조차 한 수 접어주는 유계의 미친개가 바로 천괴성이다.
마동의 중얼거리는 말에 중인들이 경악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을 때, 소여천이 여전히 미친년처럼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소면귀와 같은 모습으로 구양헌의 목을 움켜잡은 채 다그치고 있었다.
말해 봐''''그동안 무엇을 준비했다는 것이지? 그리고 자명천마종이 불러내는 마령은 어떤 놈이야?
컥! 소, 소종사'''이, 이것 좀 놓고 ''''커헉!
말을 하라면서 점점 목을 죄어오는 소여천의 손길에 구양헌의 특징없는 밋밋한 얼굴은 어느새 사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구양헌 정도의 고수가 전혀 대항도 못 해보고 소여천의 손길에 목을 잡혀버린 것은 연이은 충격으로 그의 심신이 크게 흔들린 데다가 너무 갑작스런 소여천의 행동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역시 대항하기 힘든 공포감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얼어붙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 해도, 혈도나 기타 다른 곳이 제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제대로 정신만 차리고 소여천의 손길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불가능한 것이 아닐에도 불구하고 구양헌은 그러한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마치 고양이 발에 목을 눌린 쥐처럼 꼼짝도 못 하고 간신히 애원 섞인 음성만 토해 내고 잇는 것이었다.
그렇게 잠사만 더 지나면 목뼈가 부러지든지 아니면 호흡 부재로 숨이 막혀 죽을 위기에 놓여 있을 때, 천우의 무심 냉막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하는 짓이 모두 마음에 안 들더니 유계의 잠귀에게 먹힌 놈이었군,
천우의 냉막한 음성에 혈수가 출렁이는 듯한 눈에서 혈광을 쭉 뿜어내며 소여천이 고개를 획 돌렸다.
어떤''''네놈, 자미성이 아니었던가? 저런''''엉뚱한 놈이 자미성의 기운을 지니고 있었군,
소여천도 천괴의 기운이 완전히 깨어나기 전에는 자미성을 느낄 수 없었고, 그 때문에 풍검신이 자미성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구양헌의 말에 천괴의 기운이 깨어나면서 소여천은 다시 자미성의 기운을 강하게 느꼈지만 철지히 무시하고 있었다.
때문에 천우가 있는 곳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다가 갑지기 들려온 천우의 냉막한 음성에 분노를 느끼며 돌아보고는 그제야 자미성체가 풍검신이 아니라 그 뒤쪽에서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식은땀을 흘려내고 있는 대머리 녀석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것을 알게 되자 소여천의 혈수에 잠긴 듯한 두 눈에서 기광이 피어오르며 입술이 조금 더 웃는 모습으로 변해 갔다. 물론 그럴수록 그의 모습은 더욱 기괴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이거 정말 재미있군, 그럼 자미성체도 아닌 놈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있었단 말인가? 도대체 네놈의 정체가 뭐냐? 네놈에게서는 칠성군의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평범한 체질로 타고난 놈이란 말인데'''어떻게 그런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거지?
소여천이 정말로 궁금한 듯이 여전히 한 손으로는 구양헌의 목을 움켜쥔 채 그렇게 질문을 쏟아내자 천우는 천천히 앞으로 나서며 느릿한 음성으로 간단히 대답했다.
천'''살'''성!
그 순간 소여천의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휘날리며 두 눈의 혈수 또한 격랑이 이는 것처럼 사정없이 출렁이는가 싶더니 그는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물러서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구양헌의 목줄기를 놓아주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그 손으로 천우를 가리키며 떨리는 어조로 말했다.
거,거짓말'''마라'''네,네놈이 '''천살이라면'''내가'''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감히''''그따위 '''거짓말을 하다니'''
필요 이상으로 놀라는 소여천의 모습을 보고 천우는 다가서던 걸음을 뚝 멈춘 채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비웃듯이 말했다.
기운도 느끼지 못하면서 단지 말만으로도 경기를 일으키는 걸 보니 천상 앞에서는 꼬리를 만 강아지가 되다는 말이 과연 사실이었군,
네, 네놈이 감히 나를 농락하다니'''
천우의 말에 소여천의 천괴혈안에서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생명체의 심신을 얼어붙게 만드는 혈광이 터져 나왔지만, 천우는 조금도 변함 없는 태도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면서 냉기가 흐르는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천살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따위 유계의 망령은 쫓아낸지 오래다. 그리고 처음부터 네놈이 싫었던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네놈에게는 받을 빛이 많이 있지,
또다시 천우의 입에서 천살이란 말이 거론되자 소여천은 순간적으로 움찔거렸지만 처음처럼 당황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큭, 네놈이 말도 되자 않는 소리를 하는구나! 천살을 쫓아버렸다고? 크큭, 좋아, 그게 사실이라면 나에게는 더욱 좋은 일이지,천살의 기운 자체가 아니라면  그 무엇도 나를 상하게 할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네놈이 스스로 무덤을 판 일이 되는 거지,
하지만 그따위 말은 믿지 않는다.
나 역시 네놈만은 순순히 죽여주지 않는다. 원래는 이곳에 있는 쓰레기들부터 치우도록 맏기려 했는데'''조금은 아쉽군, 각오해라!크크크'''
소여천도 지지 않고 나름대로 최대한 공포심을 줄 수 있도록 외부로 기운을 발산시키면서, 인간의 음성이라 여기기 힘든 괴이하고도 음산한 목소리로 염포를 놓으며 천우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미 스스로의 능력은 천괴의 기운이 완전히 깨어나면서 충분히 자각하고 있는 상태였고, 그의 말처럼 천살의 기운만 아니라면 세상에서 자신에게 해를 입힐 준재는 없다고 여기고 있었기에 천우가 조금도 두렵지 않았던 것이다.
더불어 그동안 자신에게 패배감과 두려움을 안겨주었던 풍검신이란 존재를 자신의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 죽일 수 있다는 희열감에 소여천의 천괴혈안에서는 어느새 진득한 광기마저 내비치고 있었다.
그렇게 천우와 두 사람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가는 동안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은 소여천이 발산해 내는 괴기로움에 미치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나 소종사 쪽에 머물러 있던 일백마황대나 적천혈검대, 그리고 잠마전의 고수들은 심적 타격까지 더해져서 그야말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백양신마가 말했던 풍검신에 다한 경이감과 두려움, 그리고 소종사인 소여천의 갑작스러운 악귀로의 변신 거기다가 대종사의 절대마령에 대한 의구심까지 겹쳐져 그들의 정신상태는 거의 공황상태나 다름없이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도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고, 그저 멍한 눈길로 서로 간에 거리를 좁혀가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두 사람의 거리가 서로 손을 뻗어면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가까워지도록 천우는 검을 뽑지 않았다.
소여천 역시 징그러운 괴소를 흘리면서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은 채 다가섰다.
그리고 반 보씩 더 다사서서 한 걸음의 거리를 두고서야 두 사람은 멈추어 섰다.
크큭, 멍청한 놈! 네놈의 살점을 하나하나 찢어발겨 주마! 크크큭,
예전에 누군가를 통해서 알았지, 정말 고통스러운 것은 따로있다는 것을 말이야.
그 주둥이부터 찢어주마, 크크.
쉬악!
그 순간 소여천의 길고 가늘어진, 마치 마귀의 손을 보는 듯한 흉측한 손이 죽립으로 가려진 천우의 얼굴을 향해 보이지 않는 속도로 대기를 찢으며 짓쳐들었다.
콰앙!
뿌드득!
크악!
하지만 어느새 여인보다 더 섬세한 천우의 손이 단단히 말아 쥐여진 채 소여천의 흉측한 손길을 정면으로 가격했고, 그 순간 육중한 폭음과 뼈가 부러지는 소음과 함께 소여천의 입에서도 고통스런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이, 이놈'''뒈져라!
쿠아앙!
그러나 곧 이어 분노에 찬 폭갈과 함께 소여천의 다른 손이 어느새 천우의 가슴으로 날아들었고, 그 순간 천우의 가슴 부위에서 거대한 종음과도 같은 폭음이 일었다.
일단 모든 뼈마디부터 추려주마.
뿌드득!
크억!
어느새 천우의 새하얀 주먹은 소여천이 가격했던 부위와 동일한 곳에 틀어박혀 있었고, 그곳에서 또다시 뼈가 으스러지는 소음과 함께 소여천의 입에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소여천은 조금도 기세를 죽지 않은 채, 아니 더욱 광기와도 같은 혈광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갈고리 같은 손을 놀려 천우의 전신을 사정없이 할퀴고 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천우 역시 양 주먹으로 소여천의 전신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쿠아아앙! 카캉! 쾅! 쿠앙!
퍽! 뿌득! 퍽! 뿌드득! 퍽! 뚝!
크아'''아아''''아아'''아아악!
소여천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천우의 몸에서는 광량한 폭음이 울려 나왔고, 천우의 주먹이 닿는 소여천의 몸에서는 연신 뼈가 부리지는 소음과 함께 끊임없이 비명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소여천의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천우의 주먹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기괴한 싸움에 어느새 두려운 감정에서 많이 벗어나 있던 중인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사왕 역시 난생처음 보는 무식한 싸움에 입이 쩍 벌어졌다.
세,세상에'''천 아우가 저런 개싸움을''''
서로의 손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그 와중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소리를 들으면서 중인들도 동사왕의 경악 어린 표현에 공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싸움이기도 했다.
온몸의 모든 뼈마디가 완벽하게 박살난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그런 사람을 본 적도, 아니 상식적으로 그런 사람이 서 있을 수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살아 있기나 하겠는가?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그런 상태에서도 지면에 발을 디디고,  더군다나 멀쩡히 살아 있는 별종이 있었다.
두개골을 제외한 전신의 모든 뼈마다가 완벽하게 박살이 났다. 가슴, 갈비뼈부터 시작해서 손, 팔뚝, 어깨를 이루는 뼈와 허벅지, 무릎, 발등과 발가락 뼈는 물론이고 골반과 척추, 그리고 안면의 턱과 광대뼈까지 완벽하게 박살이 나서 함몰되어 있는'''그야말로 완벽한 분쇄였다.
한데도 그는 여전히 서 있었고, 아직도 끊임없이 두들겨 맞고 있었다.
물론 결코 그가 자력으로 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절세가인의 손과 같은 희고 섬세한 손에 머리카락이 틀어 잡힌 채 쓰러지고 싶어도 쓰러지지 못하고 있었고, 그 손에 대롱대롱 매달리다시피 하여 축 늘어진 채 사정없이 날아오는 주먹세례를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퍽!퍽!퍽!퍽!
우''''어''''어'''어''''어'''''어''''주,주겨''''커''''어''''어'''''
이미 치아도 남아 있지 않고, 턱뼈와 광대뼈까지 모두 부서져 있는 상태이니 당연히 말소리도 제대로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저 주먹  한 차례에 그에 맞는 본능적인 음성을 토해 낼 뿐이었다.
더 이상 부러질 뼈도 없었다. 이 정도 맞았으면 범인은 벌써 죽어도 수십 번 죽었어야 마땅하련만 때리는 사람의 기술이 좋은 탓인지, 혹은 맞는 자의 체질이 특이한 탓인지 그는 죽지도 못하고 연신 죽여 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게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는 그는 바로 천마신교의 소종사이자 천괴의 기운을 지닌 소여천이었고, 지금 이 순간까지 묵묵히 그를 향해 주먹질을 해대고 있는 사람은 바로 천우였다.
주먹질의 횟수로 치면 아마8만 4천 대는 때린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겨우 한 식경 정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어느 순간 천우는 자신의 손에 잡혀 있던 소여천의 철심 같은 머리칼이 보통 사람의 머리칼로 돌아온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핏물을 부어놓은 듯하던 두 눈 역시 초점이 없어 백태가 가득한긴 하지만 정상으로 돌아온 것을 보고는 그제야 때리던 손길을 멈추고 주먹을 풀었다.
풀석!
이어 머리칼을 틀어쥐고 높이 쳐들고 있던 손을 놓자마자 소여천의 뼈 없는 신형은 그 자리에서 살과 살이 겹치며 풀썩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주,주겨'''제,제'''바''''
천우는 이리저리 살집이 접힌 채 널브러져서 죽여 달라는 말만 연발하는 소여천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 의식을 차지하고 있던 유계의 잡기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이젠 빠져나갔다. 그대로 죽는다면 영마저 잡귀에게 먹힐 놈이기에 비록 고통받을지라도 자신의 영은 보존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하지만 고마워 할 필요는 없다.
그 말과 함께 천우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는 소여천이 아닌 전면의 허공을 향해 횡소천군의 초식처럼 수평으로 검을 한 차례 베어내고는 다시 검을 검집에 넣고 빙글 몸을 돌려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천우가 소여천을 그대로 놔둔 채 접근해 오자 백양신마는 본능적으로 움찔 놀라 천우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대로 놔둬도 죽긴 하겠지만''''충분히 고통받았으니 일 검에 베어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지옥에 가서라도 저런 형벌이 있을가 싶을 만큼 소여천이 너무나 가혹한 매질을 당했다고 느껴지기에 백양신마는 오히려 소여천이 불쌍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 때문에 고통으로 신음하는 그를 깨끗이 죽여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천우는 그런 백양신마의 말에 손을 들어 올려 뒤편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백양신마는 또다시 놀라서 움찔거렸지만, 다행히 천우의 손이 방향을 바꾸어 절벽 쪽으로 향하자 저도 모륵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러고는 천우가 가리키는 까마득한 절벽을 보면서 의혹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원래부터도 조금은 안쪽으로 기울어진 형태의 절벽이었지만 왠지 이 순간 조금 더 절벽이 가까워진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 천우의 입에서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곳은 곧 저자의 무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속히 벗어나지 않으면 같이 묻히게 될 것입니다.
그 말과 함께 천우는 다시 백양신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더 지체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가 묻힉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노야께서 다시 앞장서십시오. 대종사라는 자가 있는 곳으로 가도록 하죠.
천우의 말에 백양신마는 그제야 절벽이 가까워지는 까닭을 깨닫고는 안색이 허옇게 변해 버렸다.
그,그럼 ''''방금 그 일초는 절벽을 베어버린 것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 절벽이 여기에?
천우는 백양신마의 놀람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드드드드드드드드!
지축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서서히 들려오며 주변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백양신마는 순간적으로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에 뻣뻣이 굳었다가는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이 황급히 몸을 돌려 신형을 날렸다.
그리고 그 순간 동사왕은 자신의 아우가 저질러놓은 만행을 조금이라도 책임지는 의미에서 신형을 뽑아 올리며, 내공을 실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렸다.
피박 터지고 싶지 않으면 전부 튀어!



8장 대종사의 행방




서서히 덮쳐오는 그늘에 천우 일행은 물론이고 혈살대와 잠마전앞에서 넋을 놓고 있던 일백마황대 등도 황급히 정신을 일깨우고는 사력을 다해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뭐가 어찌 된 연유인지는 나중에 따져도 될 일이었고, 어물거리다가는 산 채로 절벽에 깔려서 누구 말대로 피박터지게 생긴 것이다.
그렇게 그들이 필생의 힘을 뽑아 내달려 대략 일천여 장 정도 벗어났을 즈음, 천지가 붕괴되는 듯한 괴음과 더불어 천마신교 전체가 한 차례 들썩일 만큼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지면으로 이어졌다.
쿠아아아아앙!
쿠구구구구구궁!
파도 치듯이 흔들리는 지면과 고막을 터트려 버릴 듯한 엄청난 굉음에 신형을 날리다가 미처 중심을 잡지 못한 몇몇이 사방으로 나동그라지는 가운데, 천우 등을 비롯해 그래도 명색이 초극고수라는 자들은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본 순간 그 무시무시한 광경에 혼마저 달아나 버린 듯 입을 쩍 벌린 채 또다시 석상들이 되어버렸다.
엄청난 분진과 사방으로 휘날리는 돌덩이들이 가라앉으며 드러난 광경은 백오십여 장에 달하는 뚝 잘려진 절벽 하나가 뾰족한 봉우리를 하늘이 아닌 자신들에게 들이민 채 반듯하게 땅에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잠마전 뒤에 병풍처럼 서 있던 삼백여 장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은 정확하게 반으로 잘려, 수십 채의 전각이 들어설 수 있을 듯한 밋밋한 평지를 가진 평범한 바위산이 되었다.
왜, 왜 그랬는가?
동사왕은 아직도 콩닥거리고 있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면서 알 수 없는 천우의 행동에 대해 물었다.
소종사라는 놈을 묻어주려는 의도라고 보기에는 무덤의 규모가 너무나도 거대했고, 그 한 놈 묻어주려고 저런 엄청난 일을 벌일 정도로 그의 아우가 과장된 일을 벌이는 성격도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물은 것이었다.
출입로를 가로막기 위함입니다.
출입로를 막아?
그렇습니다.
동사왕은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반문하고는 또다시 물었다.
저 떨어져 내린 절벽이 비록 출입로를 막은 것은  사실이지만, 가로로 놓여 있는 높이 그리 높지 않으니 무공을 익힌 자라면 얼마든지 터넘어 다닐 수 있을 것 같은데, 단순히 출입로만 가로막아서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게다가 출입로를 막으려는 이유는 또 무었이고 말인가?
동사왕의 물음에 천우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무공을 익힌 자들은 어렵지 않게 넘나들 수 있지요, 하지만 일반인들이나, 특히 만들이라면 통과하지 못할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출입로를 절벽으로 막은 이유는 그런 일반인들이 쉽게 넘나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그 말은 동사왕의 의문을 더욱 부체질할 뿐이었다.
이 보게, 이곳은 천마신교일세, 무공을 익히지 않는 놈보다 익힌 놈들이 더 많은 천마신교 말일세. 한데 무공을 익히지 않은자들의 통행을 어렵게 한다 해서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이곳 사라들의 통행을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외부인들의 통행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답답하니 말 돌리지 말고 좀 자세히 말해 주게.
그건 저보다 화 형에게 물어보시면 확실히 대답해 줄 것입니다.
응? 저 자모천뢰신궁을 가지고 있는 녀석 말인가?
화천악은 천우가 절벽을 무너뜨린 이유를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하지 안색이 급변하여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동사왕을 향해 급히 손사래를 쳤다.
저,저도 모릅니다. 왜 천 대협이 그것을 저에게 물어보라고 하시는지''''
동사왕은 화천악의 당황해 하는 모습에 눈을 가늘게 좁히며 바라보다가는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뭐, 말하기 싫음 관둬라. 노부도 뒤가 구린 녀석한테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 생각 없다. 그리고 천 아우가 하는 일이야 다 이유가 있으니 자연히 곧 알게 되겠지, 하지만 ''''나중에라도 허튼수작 부린 게 들통나면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 걸 그냥 보아 넘길 아량은 없거든.
허,허튼 수작이라뇨! 절대 그런 것 없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어르신!
동사왕은 화천악의 믿어 달라는 말을 속으로 냉소를 치며 들으면서 천우에게 심어를 보냈었다.
[자네, 저 녀석 정체를 알고 있는 거지? 도대체 저 녀석 정체가 무엇인가?]
동사왕의 심어에 천우도 솔직히 답해 주었다.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자신을 호국천위왕이라 하더군요. 황실의 인물인 것 같습니다.]
[황실? 그럼'''']
[일단은 모르는 척하고 계십시오, 특별히 나빠 보이는 자는 아니니까요. 오히려 나중에 황실의 일을 마무리짓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황실 놈들에게 도움은 무슨 도움!  아무튼 자네 말대로 일단은 모르는 척하고 있겠네, 그러고 보니 저 절벽은 바로 황실 녀석들을 막기 위한 것이로구먼,]
[그들이 올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만약을 대비해서 손을 써 놓은 것뿐입니다.]
천우의 심에에 동사왕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화천악을 슬쩍 훑어보았다. 거짓말을 달고 살아서 그렇지 확실히 황실 녀석치고는 무공도 괜찮은 편이고, 심성도 근본부터 악한 놈은 아니라는 것은 동사왕도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황실에서 온 녀석이라면 분명 자신이나 천우 때문에 온 것일 테고, 결국 첩자라는 말이니 그런 그가 곱게 보일 리는 만무한 것이다. 그 때문에 동사왕은 지나가는 어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주먹 써본 지가 꽤 오래되었는걸? 흠, 예전에 천 아우조차 굴복시키지 못한 어떤 미친놈을 순전히 이 두주먹만으로 굴복시킨 적도 있었는데 말씀이야, 앞으로 기회가 오면 녹슬기 전에 다시 한 번 실력 발위를 해봐야겠군'''
완전한 협박이었고, 자신 들으라고 한 말임을 모를 화천악이 아니었기에 방근 전의 그 끔찍했던 광격이 절로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얼굴색마저 시커멓게 죽어들었다.
그 즈음, 무너지는 절벽을 피해 함께 몸을 피했던 일백마황대와 잠마전의 고수들, 그리고 구사일생으로 소여천의 손에서 목숨을 건진 구양헌 등은 백양신마 등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천우를 바라보며 어찌해야 좋을지 망설이고 있었다.
이미 백양신마가 했던 말이 조금도 거짓이 아니었음을 그들도 확실히 알게 되었고, 풍검신이 마음만 먹으면 자신들은 단 일 검에 모조리 황천행이라는 것도 이 순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그들이니 무얼 어찌해 보겠다는 마음은 이미 천리만리 달아난 상태였다. 오히려 천우의 눈치를 보느라 자리를 뜨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하게 서서 행여나 자신들에게 손을 쓰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천우나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본체만체하고 있었고, 아무도 이렇다 할 말을 해주지 않으니 그들로서는 답답히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마침내 답답함을 참지 못한 수석장로 구양헌이 쭈뼛거리며 천우 근처에 있는 백양신마에게 다가서서 어색함이 가득한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이 보게, 백양'''''이제 우리를 어쩔 생각인가?
구양헌의 그런 태도에 백양신마는 속으로 웃음마저 나오려는 것을 감추면서 짐짓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쩌긴''''그건 자네들이 더 잘 알면서 왜 묻는가?
알긴 우리가 무엇을 안단 말인가, 솔직히'''' 우리는 더 이상 곤패주와 싸우지 않았으면 하네, 즉 천마건곤대전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말일세,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지 자네가 한번 물어봐 주게나, 만약''''용납하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되겠지만 ''''그러지 않기를 바라네.
비록 입으로 싸울 수도 있다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실지 그런 상황이 되면 아마도 소종사와 같은 참혹한 꼴을 당하느니 차라리 대부분이 자결을 택할 것이었다.
그들은 천우가 풍검을 펼치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 소종사를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게 패 죽인 장면을 보았기에 그의 무공이 상상을 초월하는 가공지경이면서도 끔찍할 정도로 잔인하게 사람을 죽인다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천우와 대적하여 지옥의 고통을 경험하느니 차라리 속 편하게 자결하고 말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지금 구양헌이 천우에게 공포심을 느껴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쯧, 천하의 구양헌이 이토록 소심해지다니, 하지만 자네들이 싸우지 않겠다 하더라도 여전히 대종사의 친위대나 건패 수호세력으로 남을 게 아닌가.
무슨 소리! 자네나 곤패주는 지금 이 길로 대종사가 폐관하고 있는 곳으로 갈 것이 아닌가. 그리고 결과는 보나마나 뻔할 터인데 어찌 대종사의 친위세력이나 건패주 쪽의 세력으로 남아 있겠는가? 받아만 준다면 이 자리에서 곤패주에게 중성을 맹세할 것일세.
하지만 백양신마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곤패주는 결코 건패주 쪽의 세력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충성의 맹세를 받지 않네.
그,그런가?
구양헌의 괜한 말을 꺼냈다고 후회하며 치욕감에 얼굴을 붉혔다.
이미 그들끼리는 전음을 통해 어느 정도 합의를 본 사항이었고, 필요하다면 곤패주에게 충성의 맹세라도 하겠다고 다수의 의견이 모아졌기에 구양헌은 백양신마가 그들의 지금 위치에 대해서 거론하자 황급히 그런 말을 꺼내었던 것이다. 한데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말았으니 아무리 구양헌이라도 치욕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사실 상대가 웬만큼만 강했어도, 아니 그냥 무인답게 싸우다 죽을 수 있기만 한다 해도 지금 구양헌이나 일백마황대가 이토록 처참한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왕이면 죽음보다는 삶을 택하고 싶었고, 또한 기왕 죽을 거라면 처절한 죽음보다는 편하고 안락한 죽음을 맞기를 원하기에 이런 귤욕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나마 그 자리에서 자결을 택할지언정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지 않고 있는 것도 그들의 마지막 자존심 때문이었다.
백양신마는 구양헌이나 마황대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기에 지금의 구양헌의 초라한 모습에도 비웃음을 던지지는  못했다, 아마 지신이라도 구양헌과 같은 입자이라면 싸울 생각은 들지 않을 듯했고 곧바로 자결을 택했을 것이다.
사실 백양신마로서도 구양헌이나 마황대 드의 처리 문제는 실로 난감한 문제라 딱히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원칙적으로 그들의 천마신교의 장례를 위해서도 잠마전 앞에서 모두 죽었어야 하는 자들이었다. 아니, 장소는 상관없으니 이곳에서라도 그들이 적의를 드러냈다면 가차없이 손을 써서 죽였어야 하는 자들이었다. 한데 스스로 싸울 생각들을 포기해 버렸기에 백양신마로서도 차마 대항하지 않는 그들을 죽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천마건곤대전 상황 하에서 싸움을 포기한 자들이라면 누구라도 그 순간부터는 적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율법에 따라서도 손을 쓰기가 곤란했다.
그렇다고 건패 수호세력의 주축으로서 언제든 최대의 우환거리로 돌변할 수 있는 그들을 그대로 남겨두자니 그 또한 나중을 생각하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곤패주인 천우가 어떤 식으로든 천마신교에 계속 남아 있다면야 얼마든지 포용할 수 있는 문제였지만 백양신마 역시 천우가 천마신교에 계속 남아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고, 곤패주인 천우가 떠난 상황에서는 지금 이곳에 남아 있는 자들만으로도 또다시 천마신교를 뒤집을 수 있는 실로 막강한 전력이라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을 곤패주의 휘하로 받아들인다면 결국은 실력면에서도 가장 최상위층에 해당하는 자들이기에 그들의 입지는 또다시 굳어지게 될 것이다. 결국 건패 수호세력에서 곤패 수호세력으로 이름만 바뀌게 될 뿐 사람은 그대로가 될 테니 이번 천마건곤대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백양신마가 그 때문에 고심하며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천우가 그런 백양신마를 향해 뜻밖의 말을 했다,
노야, 저는 그들을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도록 해주십시오.
그 말에 백양신마는 크게 놀라서 천우를 바라보았고, 순간적으로 구양헌과 일백마황대 등은 기쁨을 드러내며 큭 안도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고,곤패주! 자네 도대체'''''
제게 맡기기로 하셨잖습니까. 그러니 제 뜻에 따라주십시오.
그 말에 백양신마는 잠시 흠칫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가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쓴웃음과 함께 말했다.
그렇군, 내가 잠시 착각하고 있었네, 곤패주인 자네의 뜻에 맡긴다 해놓고 이 늙은이의 생각만 강요하고 있었군, 미안하네. 곤패주의 뜻대로 하게.
천우도 백양신마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보는 견지에서는 백양신마의 생각 또한 하나의 이상에 불과할 뿐이었다.
더욱이 백양신마는 천마신교의 전통에 너무 집착하는 모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묵월 역시 그런 백양신마의 영향을 많이 받기는 했어도 지금은 천마의 실체나 율법이라는 것에 대해서 좀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입장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백양신마는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순간에 있어서도 백양신마가 생각하는 것과 천우가 생각하는 부분은 분명히 다른 선이 그어져 있었기에 천우는 그들을 받아들이도록 한 것이었다.
하지만 몇몇 사람은 천우의 의도를 완전히 알 수 없었기에 백양신마와는 다른 의미로 크게 놀라고 있었다. 특히 동사왕도 순간적으로 놀라서 천우를 향해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자,자네''''설마 이곳 마교에 정말 눌러앉을 작정인가?
동사왕 또한 지금의 전체적인 상황을 거의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기에 백양신마의 고심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구양헌이나 일백마황대를 받아들이는 것은 천우가 이곳에 눌러앉을 작정이 아니고서야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중원의 입장에서 생각해도 지금 백양신마가 추구하는 이념은 중원무림에 거의 해를 끼칠 일이 없는 것이기에 지지해줄 수 있는 입장이지만, 기존의 세력이 고스란히 남은 상태에서 천우가 빠진다면 천마신교는 백양신마의 이념대로 바뀌기는 아무래도 힘들 것이고, 그것은 또다시 중원무림에 위협 요소를 놔두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한데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천우가 구양헌이나 특히 일백마황대를 받아들인다고 하니 그 의미는 결국 천우가 그들을 끝까지 통제하겠다는 의미로 여겨졌기에 동사왕으로서는 펄쩍 뛰는 것이었다.
하지만 천우로서도 지금은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었고, 일단은 모든 상황을 마무리 지은 상태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었기에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형님이 걱정하시는 그런 부분은 아니니 심려 놓으십시오. 저에게는 따로 생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설명 드리기가 곤란한 부분이 있으니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은 자신이 생각했던 그런 부분은 아닌 듯하자 동사왕은 내심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런 것만 아니라면 자네의 뜻대로 하게나,
동사왕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천우는 차분한 시선으로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는 구양헌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들은 내가 아닌 곤패주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는 것이오.
그리고 천마건곤대전이 종료되기 전에 상관없지만 그 이후에는 충성의 맹세를 바꿀 수 없소, 그건 나보다 당신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그것을 염두에 두고 충성의 맹세를 하도록 하시오.
천우의 침착한 말에 구양헌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물론이오. 어찌 그것을 모를 수 있겠소, 그리고 지금이 천마건곤대전의 상황이 아니었다면 모두 자결을 택하는 한이 있더라도 곤패주께 충성을 맹세하겠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오. 최소한 그 정도의 자존심과 신의는 있소이다.
구양헌의 말에 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되었소, 이제 충성의 맹세를 받아들이겠소,
천우의 완전한 승낙에 구양헌은 잠시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후 진중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군례의 형식을 취하며 외쳤다.
충,
그러자 그 뒤에서 일백마황대와 직천마검대, 그리고 잠마전의 고수들도 따라서 군례를 취하며 똑같이 충을 외쳤다.
뒤이어 구양헌의 맹세가 이어졌다.
나 구양헌은 지금 천마건곤대전의 상황에서 곤패주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오이다. 더불어 천마건곤대전이 종료될 시점까지 충성의 맹세를 바꾸지 않는다면 영원히 곤패의 수호자로 남아 곤패주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지킬 것 또한 맹세하오.
맹세합니다.
구양헌의 맹세와 더불어 같은 맹세를 한다는 의미로 또다시 일백마황대와 직천마검대 등도 복창을 하였다.
맹세를 받아들이오. 모두 일어서시오.
천우의 말에 구양헌 등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천우를 향해 반례를 취해 보이고는, 그 중 대표 격으로 구양헌이 다시 천우에게 말했다.
이제 같은 편이 되어 함께 싸우기로 하였으니 우리들도 곤패주라 호칭하겠소이다. 그리고 천마건곤대전의 율법에 따라 곤패주께 충성의 맹세를 하였으니 지금부터는 노부 역시 수석장로의 자격이 박탈되어 직위는 없소이다. 그러니 노부 또한 구양노야 불러주시면 고맙겠소,
구양헌의 말에 천우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구양 노야.
천우의 호칭에 구양헌은 그 특색없는 얼굴에 비로소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곧바로 대종사의 폐관 수련동으로 향하실 것이오?
그럴 생각입니다.
알겠소이다. 노부도 그곳에 따라가도록 하리다.
그때 백양신마가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구양헌을 향해 말했다.
설마 자네와 살아 생전에 같은 곤패주를 모시게 될 줄은 모랐네. 아무튼 반갑네, 그리고''''아까 잠마전 있을 때 하던 얘기중에 자네도 자명천마존의 전설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는 듯하던데'''그 부분에 대해서 얘기 좀 해보게.
으음, 사실 나도 백양 자네가 자명천마종의 전설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무척이나 놀랐네, 그 부분은 나만 알고 있으리라 여기고  있었단 말일세, 아무튼 '''나로서도 확신을 확실히 절대마령, 즉 천마 조사의 영이 강림하리라는 부분으로 해석하고 있었네.
그리고 대종사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대종사가 폐관에 든 이유는 자명천마종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최악의 경우에는 천마 조사의 절대마령이 대종사에게 강림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네, 그래서 나 나름대로 그에 대한 대비를 하기 위해 좀더 그쪽 분양 대해서 파고들었던 것이고, 또한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네,
그 성과란 강제 강림한 절대마령의 원래의 자아를 회복시키는 강력한 주술문을 찾아내었다는 것일세, 하지만 그 주술문은 워낙 고대의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라 완벽히 해독하기가 쉽지 않았고, 또한 중간중간 소실되어 그에 대한 복원도 이루어져야 했네,
나는 그것을 완성하여 만약 대종사에게 천마 조사의 절대마령이 강림하면 그 주술로서 유계에서 잃어버린 천마 조사의 자아를 회복시켜 마령으로서의 본분이 아닌 원래의 자아로서 행동하는 진정한 천마 조사를 부활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이었다네.
때문에 지난 육십 년 동안 그 주술문을 완성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아직도 그것을 완벽하게 완성시키지는 못했네,
구양헌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백양신마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전부 경악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특히 백양신마나 천마신교 측 사람들의 놀라움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음, 그랬었군, 어쩐지 자네가 지난 육십 년 동안 거처에 틀어박힌 채 거의 활동이 없다 했더니 그런 계획이 있었구먼, 정말 뜻밖일세.
하지만 천우는 구양헌의 말이 비록 대부분이 진실이기는 해도 뭔가 숨기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잘못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기에 굳이 그부분을 끄집어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았고, 그의 바람은 이루지지 않을 것이기에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했다.
그때 사람들은 멀리서부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척이나 많은 인원들이 이곳을 향해 몰려오는 것을 느끼고는 그쪽을 바라보았는데, 그 인원이 거의 1만 5천을 헤아리는 데다가 그들이 남아 있는 건패 수호세력의 전부라 할 수 있는 5개 무력단체들과 잠마전을 제외한 4전 3당의 고수들이라는 것 또한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들을 보며 백양신마는 천우를 향해 의견을 물었다.
곤패주는 저들을 어찌 처리하실 생각이신가?
그에 대한 천우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 명료했다.
싸우겠다는 자와는 싸우고, 그렇지 않다면 돌려보내야지요. 그 말에 백양신마는 또다시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만약 저들도 싸우지 않고 전부 곤패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겠다고 한다면 어쩔 것인가?
물론 받아들여야지요.
백양신마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고개르 끄덕이고는 인산인해의 물결을 이루며 달려오고 있는 그들 쪽을 향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독백처럼 한마디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 놈만 죽도록 패면 된다는 것을 전에는 왜 미처 깨닫지 못했는지'''
수석장로인 구양헌이 장로원의 일에 별로 나서지 않는 바람에 장로원의 실권자로 자처하고 있는 제1장로 팔극마검 두진백을 선두로 원로들의 거처를 수색하기 위해 나섰던 다섯 장로들과, 역시 그들과 함께 움직였던 5개 무력단체들의 대주들, 그리고 천마각에 대기하고 있던 두 장로들까지 모두 나서서 가장 앞에서 달려오고 있었고, 그 뒤로 개미떼 같은 1만5천의 고수들이 함성까지 질러대며 달려오는 그 모습은 가히 일대 장관이라 할 수 있었다.
제1장로 두진백은 암천귀살대의 절반인 일천귀살대원들을 일끌고 원로들 중 한 명인 혈음수 진자앙의 거처를 한창 강압적인 방법으로 수색하던 중 진자앙을 수행하던 그의 둘째 아들 진일환이 십여 명의 가솔들과 함께 돌아온 것을 보고는 그에게 상황을 다그쳐 물어보았고, 진일환은 두진백에게 마존각에서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들려주었다.
그 말에 두진백이 대경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미 그곳에는 천살마검대가 파견되었으니 스스로 제 무덤들을 판 것이라 여겼고, 더 이상 화약을 찾아내는 수색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는 수색을 멈춘 채 결과를 보기 위해 느긋하게 일천귀살대와 함께 마존각으로 향했다.
한데 마존각에 도착해 보니 예상과는 다르게 오히려 천살마검대가 제압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두진백은 대경할 수밖에 없었다.
천살마검대와 함께 움직였던 세 장로 중 유일하게 살아 남은 멸절마도 석진에게서 상황을 전해 들은 두진백은 백양신마 등의 행적을 알 수 없었깅 일단은 포로로 ㅈ압되어 있던 천살마검대와 일천귀살대를 이끌고 장로들의 집결처인 천마각으로 향했다.
그렇게 천마각에 도착하여 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다른 원로들의 거처로 향해던 나머지 장로들과 대주들도 속속들이 그곳으로 집결했고, 그 즈음에 소여천이 보낸 전령으로 인해 백양신마 일행이 소종사가 있는 잠마전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때서야 부랴부랴 집결해 있던 장로들과 다섯 개 무력단체전부를 이끌고 잠마전을 향해 움직이던 두진백은 역시 비슷한 시기에 전령을 받고 잠마전으로 움직이던 4전과 5당의 고수들을 만나 합류하게 되었다.
그렇게 모여 다시 잠마전을 향해 이동하던 중 그들은 갑자기 잠마전 뒤편을 가로막고 있던 절벽이 통째로 엎어져 내리는 광경을 이십여 리 밖에서 목도하게 되었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자신들이 서 있는 곳까지 뒤흔들리는 엄청난 충격에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다가 큰일이다 싶어 다시금 화급히 잠마전을 향해 이동을 한 그들은 잠마전을 천여장 정도 앞두고 마침내 천우 일행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백양신마와 혈살대뿐만 아니라 수석장로인 구양헌과 적천혈검대도 보였고,일백마황대의 노마들과 잠마전의 고수들까지 뒤섞여 있었기에 두진백은 아연한 표정으로 멈추어 선 채 자신을 향해 다가서는 백양신마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백양신마는 십여 장 앞에 멈추어 선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서면서 내공을 실어 큰 소리로 말했다.
건패주인 소종사는 곤패주에게 패해 이미 죽었다. 그리고 장로원의 수석장로와 적천혈검대는 물론이고, 일백마황대와 잠마전의 고수들도 모두 새로이 곤패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곤패수호세력으로 전향하였다.
아직 천마건곤대전이 끝난 상황은 아니지만 이러한 상황에서의 싸움은 그대들에게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터, 모두 해산하여 각자의 거처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끝까지 싸워보고자 하는 자는 남아 있어도 상관없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쓸데없는 희생자가 될 것이기에 선의로서 알려주는 것이니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바란다.
백양신마의 외침에 1만 5천의 건패 수호세력을 이끌고 온 두진백은 그저 멍한한 표정으로 백양신마만을 바라볼 뿐이었고, 그 뒤편에서는 경악의 소용돌이로 인해 장내가 온통 웅웅걸는 소음으로 가득 찼다.
정말 믿기 힘든 일이기는 했지만 백양신마의 말이 모두 사실임은 눈앞에 버젓이 보이는 수석장로 구양헌이나 일백마황대등으로 인해서도 확실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너무나 예상외의 상황이라 당장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사실인 이상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하다는 백양신마의 말이 옳았기에 두진백은 얼른 상황 파악을 끝내고는 함께 온 자들의 대표 격으로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럼''''''원하는 사람은 모두 곤패주 쪽으로 전향해도 되는 것니까?
백양신마는 골치가 아파왔지만 이미 천우의 의도를 확인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네, 본교의 사람은 누구든 원한다면 곤패주께 충성을 맹세할 수 있네.
그러한 백양신마의 말에 두진백은 별다른 망설임 없이 나서서 군례의 동작을 취해 보였고, 그에 따라 뒤편에 서 있던 1만5천의 천마신교 고수들이 마치 물결이 치는 듯한 모습으로 전원무릎을 꿇었다.
곧 이어 지축을 떨어 울리는 충성의 맹세가 이루어졌고, 이로써 대종사와 무영사신대를 제외하고는 천마신교는 완전히게 천우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나 진배없게 되었다.
하지만 백양신마를 비롯한 원로들과 천우와 함께 중원에서 온 사람들은 그것을 기쁘게만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저마다 조금씩 굳은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상황은 처음과 또 달라져서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었고, 그들로서는 천우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에 저마다 조금씩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상황은 처음과 또 달라져서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었고, 그들로서는 천우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에 조금은 불안했던 것이다.
저곳이 바로 대종사가 폐관수련에 든 지존연무동일세, 입구의 지존전부터 그 안까지는 무영사신대가 지키고 있고, 통로 곳곳에는 무서운 기관진식이 설치되어 있네, 출구는 따로 있지만 그곳이 어디인지는 오로지 대종사만이 알고 있을 뿐이네.
백양신마의 말에 천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 어느 때보다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며 절벽에 면하여 세워져 있는 그리 크지 않은 전각을 멀찍이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그 지존연무동의 입구 역할을 하고 지존전이 보이는 곳으로 온 사람들은 원래의 천우 일행들 외에도 새로 합류하게 된 구양헌과 일곱 명의 장로들, 그리고 일백마황대에 속한 95명의 극마와 탈마급 고수들과, 남염까지 가세한 여덟 명의 대주들까지 총 망라된, 그야말로 천마신교 내 최고 고수들은 죄다 모여 있는 상황이었다. 아직 천마건곤대전의 상황이 완전히 종료된 것은 아니기에 백양신마나 원로들의 입장에서는 언제든 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자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고 보아도 전혀 무리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천우는 그들 모두가 함께 오는 것을 수락했고, 그들 또한 천마건곤대전의 마지막 상황까지 지켜보기 위해 이곳까지 따라온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그들 모두 자명천마종의 전설에 관해 새롭게 알게 된 질실을 확인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 무엇보다 컸던 것이다.
천우는 백양신마의 간단한 설명을 들으면서 지존전이라는 곳의 상황과 그 안쪽까지 기를 느껴보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죽립안쪽에서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출구가 따로 있다고 하셨습니까?
그렇네, 지존전이 막힐 수 있는 위험에 따른 일종의 안전 대책이라 할 수 있지.
아무래도 그 대종사라는 자는 벌써 그 출구로 나가버린 듯하군요.
천우의 말에 백양신마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안색이 크게 변해 천우를 바라보았다.
아니''''들어가 보지도 않고 자네가 그것을 어찌 안단 말인가?
백양신마의 놀람에 그 옆쪽에서 동사왕의 퉁명스런 음성이 흘러나왔다.
신마께선 아직도 천 아우의 능력을 모르시오? 천 아우에겐 천안통을 능가하는 심안통이 있으니 그까짓 거 알아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요.
동사왕의 말에 백양신마도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는 곧 심각한 안색으로 말했다.
그럼 대종사가 이미 출관하고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란 말인가?
글쎄요, 아무튼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지요. 그래야 그가 어디로 갔는지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천우의 말에 중인들 모두 경악한 와중에도 직접 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기에 모두 스긍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천우 일행들이 모두 지존전으로 다가서기 시작하자 전각의 입구 쪽에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복면까지 하고 있는 야행복 차림의 십여 명이 갑자기 나타나며 그들을 막아섰다.
이곳부터는 본교의 대종사가 아니라면 아무도 들어설 수 없소, 그러니 모두 돌아가도록 하시오.
모여 있는 사람들 모두 고수 아닌 자들이 없었기에 그들의 등장쯤은 당연히 예견하고 있었고, 또한 그들이 지존전을 수호하는 무영사신대의 일원이라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대종사가 아니라면 그 어느 누구에게도 허리를 굽히거나 예를 취하지 않는 자들이었고, 그것은 이미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그들의 건방져 보이는 행동이나 말투로 특별히 기분 나빠하는 자들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말대로 순순히 물러날 상황이 아니기에 백양신마가 나서서 말하기 시작했다.
자네들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원로원주를 맡고 있는 사람일세. 그리고 새로 인명된 곤패주께서 천마건곤대전을 선포하여 지금은 천마건곤대전의 상황이라네. 그리고 건패주인 소종사도 곤패주에 의해 이미 제압되었네.
자네들의 임무는 잘 알고 있네만 우리는 지금 들어가 봐야 하는 상황이고, 막겠다면 어쩔 수 없이 손을 쓸 수밖에 없네, 그러니 막지 말고 길을 열어주었으면 하네.
백양신마의 말에도 그들은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 중 처음에 말을 꺼내었던 선두의 복면인이 다시 무심한 음색으로 말했다.
물론 귀하가 원로원주 백양신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소, 그리고 천마건곤대전이 선포되었다니 좀 뜻밖이긴 하오만 우리는 여전히 길을 비켜줄 수 없소, 그러니 정 들어가야 하겠다면 우리를 뚫고 가시오.
그 말에도 백양신마는 별다른 분노의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자네들 뜻이 그렇다면 더 이상 다른 말은 않겠네 그럼 시작할 테니 준비들 하게.
백양신마의 그 말이 떨어지자 그들 십여 명 뒤로 다시 이십여 명의 인원들이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내며 일종의 검진을 형성한 듯한 모습으로 진형을 이루었다.
백양신마는 그 모습을 유심히 보다가 무척 놀란 표정으로 나직한 경호성을 발했다.

삼십육지살천강진!

백양신마의 경호성에 천마신교의 사람들 모두 두 눈에 놀람을 드러내었다.

소림의 백팔나한진을 몇 배 능가한다는 천마신교 절대 검진인 삼십육지살천강진의 위력은 그야말로 막강하지만, 합격진을 구성하는 개개인이 극마 이상의 고수들이어야 하고, 또한 진을 이루는 그들 서른여선 명이 모두 같은 내공심법을 익히고 있어야만 시전이 가능하다는 절대 살진이었다.

때문에 이론상으로 말들어지긴 했지만 아직 한 번도 실지로 펼처진적이 없었던 초극강의 검진이 무영사신대 36명에 의해서 펼쳐진 것이다.

그것은 결국 그들 개개인이 같은 내공심법으로 극마경을 이룬자들이라는 의미였고 진을 구성함으로써 그들이 지닌  능력을 열 배 이상 발휘할 수 있을 테니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을 지니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실지로 삼십육지살천강진이라면 일백마황대 전원이 상대해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실로 막강한 진법이었다.

무영사신대가 대종사에 의해 친히 키워진 자들이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들이 설마 지살천강진을 펼칠 수 있을 정도일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천우도 그들이 펼친 진세를 보고 그들 간에 이어진 기의 유동을 느끼면서 일전에 개방에서 경험했던 격체전력을 이용하는 진세라는 것을 알아보았지만, 확실히 효율 면에서는 천양지차의 위력이 있는 진세라는 것도 알아볼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들 개개인이 극마경 이상의 자들인 점을 감안한다면 한 점에 가해지는 압력은 오히려 개방도 삼백여 명이 펼쳤던 구화타구진 보다 서너 배 이상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듯했다.

백양신마는 상대의 검진이 삼십육지살천검검진이란 것을 알아보자 홀로 대항할 생각을 버리고 뒤로 물러서서 천우를 바라보았다. 천우가 나서겠다면 다른 사람들은 나서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곳에 있는 자들 모두가 합공에 나서야 깨트릴 수 있는 검진이 바로 지살천강검진이었다. 그것도 상당한 희생을 감수하고서 말이다.

솔직히 백양신마는 천우가 나서지 않기를 바랐다. 아무래도 애초의 예상과는 달리 건패주 쪽에서 전향한 초극 고수자들이 너무 많았고, 지금과 같은 기회에 그들로 하여금 무영사신대를 상대토록 하다면 거의 양패구상할 수 있는 상황이기에 나중을 위해서도 오리려 그쪽이 더 좋은 것이다.

하지만 백양신마의 바람과는 달리 예상대로 천우가 천천히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고, 중인들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특히 풍검신의 무위를 아직 실지로 보지 못했던 장로들이나 대주들은 과연 그 혼자서 절대 무적의 검진이라는 삼십육지살천강검진을 깨트릴 수 있을지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비록 그들도 대세에 따라 곤패주 쪽으로 전향하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들려주는 풍검신의 무위는 도대체가 황당한 얘기뿐인지라 반신반의하는 상태였다. 때문에 만약 그가 혼자서 검진을 결파한다면 그들의 말도 모두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이고, 딴 맘 먹을 일이 없게 되는 것이었다.

삼십육지살천강검진을 구서하고 있는 서른여섯 명의 무영사신대원들은 백양신마가 물러나자 곧 전원 합공이 이루어지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죽립을 깊숙이 눌러쓴 정체불명의 흑의인 혼자서 달랑 걸어 나오자 두 눈에 잠시 어이없다는 빛을 보였다.

실지 그들은 무영사신대 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타월한 자들이었고, 심십육지살천강검진을 구성한 상태에서는 천마신교내의 최강 단체라는 일백마황대 전원과 붙어도 지지 않을 지신이 있었던 것이다. 한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방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단 한 사람만이 자신들을 상대하려는 의사를 보이며 나서자 어이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옥의 수련을 통해서 감정을 철저히 절제하는 법을 체득한 자들답게, 비록 상황에 맞지 않을 경우라 하더라도 상대방을 경시하는 마음은 갖지 않았다. 자신이 없는 자라면 결코 혼자 나설 리도 없을 것이고, 방심이야말로 가장 큰 적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에 비록 한순간 어이없다는 생각이들긴 했지만 조금도 기세를 흩뜨리거나 방만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천우도 그들이 생각보다 훨씬 혹독한 수련을 쌓은 자들이는 것을 마주 대하면서 느낄 수 있었고, 전각 안에 길게 이어진 통로에 은신하고 있는 자들도 전부 이들과 같은 자들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자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어차피 이들은 신념에 의해 결심을 바꾸지 않을 자들이었고, 또한 폐관 연무관이라는 곳에는 이미 대종사라는 자는 없는 것이 확실했다. 게다가 동굴 통로에는 각종 기관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하니 겨우 빈집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러한 기관까지 일일이 파괴해 가며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번거로운 일이었다.

이미 기로써 대종사라는 자의 종적을 살펴보면서 천우는 연무관 안의 모든 통로와 공간의 위치를 파악한 상태였고, 마침 그 연무관이라 짐작되는 넓은 공간이 지상보다 아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자 굳이 번거로운 걸음을 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떠올랐다.

천우는 걸음을 멈춘 상태에서 뒤를 돌아보며 화천악에게 말했다.

잠시 그 자모천뢰신궁이라는 것을 좀 빌려주시면 고맙겠소,

천우가 전면으로 나서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서서 자신에게 자모천뢰신궁을 빌려 달라고 하자 화천악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무인이 남의 무기를 빌려 달라는 것 자체도 엄청난 실례인데, 더군다나 고금육대천병 중 하나인 자모천뢰신궁을 빌려 달라는 것이니 말이다. 만일 그 말이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면 당장에 그 입에 벼락화살을 박아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풍검신 천우였고, 자신이 빌려주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분명 자신을 '쫀쫀한 놈' 으로 볼 것이 분명했기에 화천악은 갑작스러운 천우의 요청에 당황하면서도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무,물론이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천 형이라면 믿고 빌려드릴 수 있소이다. 하, 하하,

그 말은 당신은 결코 남의 물건을 가로채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의미의 말로써, 순수한 의도의 말이라기보다는 혹시 있을지 모를 '눈 버젓이 뜨고 도둑맞는다' 는 재수없는 일을 예방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자신의 대범함을 보이기 위해 말끝에 호탕한 웃음을 보여주었지만 어쩐지 요즘은 자신의 웃음소리가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 화천악은 장포로 가려진 왼팔 소매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곳에 특수한 장치로 부착되어 있던 자모천뢰신궁을 탈착하여 꺼내 들었다.

화천악이 자모천뢰신궁을 꺼내어 들자 눈에서 언뜻 탐욕을 보이는 자도 있었지만 감히 어쩌지는 못하고 그가 천우에게 다가가도록 놔두었다.

천우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자신에게 자모천뢰신궁을 건네는 화천악을 보며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고맙소, 금방 돌려드리리다.

벼, 별말씀을'''조,조심해서 다뤄주시오. 
보기보다 약한 녀석이라''''
천우가 여전히 희미한 미소와 함께 자모천뢰신궁을 받아 들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러리다. 이제 잠시만 뒤로 물러나 계시오.

천우가 그 말과 함께 다시 무영사신대를 향해 몸을 돌리자 화천악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한데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듯 기쁜 표정을 떠올리며 얼른 몸을 돌려 말했다.

천 형, 그 녀석은 천뢰신공을 익히고 있지 않으면 사용하지 못하''''헉!

그 순간, 화천악은 유쾌한 목소리로 외치다가 헛바람을 들이켜며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저,저럴 수가! 저게''''자모천뢰신궁?

오,저런!

역시''''저게 천뢰신궁의 본 모습이었군.
그 순간 화천악은 의문성을 비롯해서 사람들의 입에서 경탄성들이 터져 나오고 있는 이유는 삼십육지살천강진을 구성하고 있는 무영사신대에게 겨누어진 자모천뢰신궁이 이 순간 거대한 크기로 불어나 오히려 웬만한 활보다도 몇 배나 커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거대해진 활 자체의 표면에서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뇌전의 기운이 쉴 새 없이 흐르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활을 쥐고 서 있는 천우의 모습은 그야말로 벼락을 다루는 뇌신처럼 보였다.

지살천강진을 구성하고 있던 무영사신대는 천우가 다가오다가 갑자기 뒤돌아서서 누군가에게 전설상의 기병인 자모천뢰신궁을 빌려 달라고 말하자 다시 흠칫 놀라기는 했지만 크게 상관하지는 않았다. 자신들이 구성하고 있는 지살천강진은 결코 병기의 이점으로 어찌할 수 있는 평범한 검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리들 중 누군가가 장난감 같은 활을 꺼내어 그 에게 건네주고, 그가 그것을 자신들에게 겨눌 때까지도 긴장은 했을 망정 겁은 조금도 나지 않았다.

한데 갑지기 그 활이 죽 늘어나는 듯 보이드니 전체가 뇌전으로 이루어진 듯 보기에도 섬뜩한 뇌전 줄기들이 연신 거대해진 활을 타고 오르내리는 것이 보이자 절로 가슴 한구석이 써늘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황급히 전력을 끌어올려 기세를 한군데로 모아 저 무시무시한 활에서 발출될 기운에  대비할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단 한 발만 쏘겠소, 피하든 말든 그것은 당신들의 자유요.

천우는 그 말과 함께 자모천뢰신궁이 지닌 기운과 동일한 마법의 기운인 라이트닝을 자신의 왼손 안에서 작열시켜 자모천뢰신궁이 그 기운을 흡수하여 원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크기를 유지시키면서, 오른손으로는 또 다른 의지로 헬로가드의 권능 중 하나인 마왕의 창을 일으켰다.

'더 데빌 랜스!

그 순간, 천우의 오른손에는 암흑의 뇌전이 넘실거리는 거대한 흑색 마왕창이 하나 생겨났다. 그리고 천우가 그 창을 들어 뇌전이 흐르고 있는 활중에 거는 순간 그 묵빛 마왕창으로 시퍼런 벼락 줄기가 흐르는가 싶더니 이내 미친 듯이 튀기 시작했다.

치익! 타닥! 치이익!

[뭐, 뭐야'''이 괴물]

[헉! 너 언제 그걸 훔쳐갔냐?]

저, 저게 화살?

저, 저걸 화살이라고 할 수''''

회!

천우의 입에서 다시 한 번 경고성과 같은 짧은 기합성이 터져 나오자 마왕창이 그 상태에서 회전을 일으키기 시작하더니 주변의 모든 대기를 빨아들였다.

휘류류류류류!
지이이이이잉!

그 순간, 삼십육지살천강검진을 구성하고 있는 무영사신대원들의 두 눈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복면으로 가려진 얼굴은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다.

자신들의 십여장 눈앞에서 뇌전과 대기를 빨아들이며 엄청난 회전을 일으키는 화살!

아니 기둥이라 표현해야 맞을 그것이 또한 엄청나게 거대해진 전설상의 활이라는 자모천뢰신궁에 걸려 자신들에게 겨누어진 상황!

그들에게는 그 순간 어떠한 자신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저 무시무시한 흑생 창이 빛살처럼 날아드는 순간 자신들은 산산 조각이 나서 흩어지리라는 것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예감하고 있었덕 것이다.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 순간 천우의 입에서 다시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가급적 피하시기 바라오. 그럼!

치이익! 쉬아아아아악!

그 말과 함께 천우가 천뢰신궁에 걸려 있던 활살 대용의 암흑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마왕의 창을 놓았고, 그 순간 회전하면서 대기를 먹어 치우고 있던 마왕의 창이 무시무시한 파공음과 함께 빛살을 먹어가며 전면으로 퉁겨 나갔다.

아, 안돼''''

제길''''난 못 해!

슈아아앙!
도저히 물러설 수 없다고 마음속으로 수만 번을 외쳤지만 그것은 결코 정상적인 인간의 의지로 대항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천우의 말이 끝남고 동시에 지살천강검진을 이루고 있던 흑의인들이 메뚜가 튀듯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고, 정말 아슬아슬한 차이로 마왕의 창은 그들을 통과했다. 
그리고 자신의 회전 반경에 걸린 장애물들을 모조리 먹어 치우며 전각과 통로를 지나 벽과 암벽들을 먹어치우며 마왕의 창은 그렇게 쏘아져 나갔다.

잘 뚫는근, 무너질 염려도 없고,
그렇다 천우가 굳이 마왕의 창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것이 자신에게 닿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무한공간으로 이루어진 권능의 창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던지기만 해서는 사람이 다닐 수 있을 만한 공간을 만들어낼 수 없기에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뇌전의 기운도 함께 담아 강력한 회전으로 원래의 파괴 반경을 대폭 늘리고. 더불어 회전력으로 인해 뇌전에 의해 파괴된 부산물들이 다시 마왕의 창으로 흡수되도록 한 것이다.

거기에 굳이 자모천뢰신궁을 쓴 이유는 마왕의 창이 암흑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것이기에 일반적인 기운은 모두 흡수되어 버릴 수밖에 없지만, 자모천뢰신궁은 마기에는 상극인 신기를 지닌 기물이니 그것을 통해 흘러나오는 뇌전의 기운 역시 신성한 기운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자모천뢰신궁에서 뿜어진 뇌전기는 다른 기운들처럼 마왕창에 금방 흡수되지 않고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기에 그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흡수되지 않고 마왕의 창 외부에서 사방으로 뻗치는 뇌기는 엄청난 회전력으로 인해 빈틈이 없어지게 되고 , 결국 반자 두께에 불과한 마왕의 창을 일장여가 넘는 엄청난 굵기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천우는 단순히 이것저것 조합해서 모든 번거로움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동굴을 뚫는다는 생각으로 벌인 일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 그것이 단순한 동굴 뚫기가 아니었다. 그 순간 천우를 인간으로 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바정상적인 것이다.
천우는 자신이 뚫어놓은 직경 일장 가량의 반듯하고 한 점의 삐뚫어짐도 없는 시원한 통로를 보면서 말했다.
보시오. 연무관엔 아무도 없지 않소.
그의 말처럼 마왕의 창은 천마신교 대종사의 연무관까지 일직선으로 훤히 보이도록 모든 장애물을 무시하고 시원하게 둘어놓은 상태였다.
과연 그곳을 통해서 보이는 연무관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두 눈에는 여전히 연무관의 그러한 광경은 두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어디로 갔을까? 대종사란 자는''''
여전히 천우의 독백과도 같은 음성만이 장내에 흘러나오는 가운데 정말 기나긴 하루를 밝혀주던 태양도 힘들었다는 듯이 사람들에게 서서히 붉은 노을을 뿌려주고 있었다.

[마검사] 11권에서 계속




1장 무엇을 위한 안배인가


사람들이 천우가 만들어놓은 거대한 통로를 보면서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동안, 연무관으로 향하는 정식 통로를 지키고 있던 나머지 무영사신대 역시 새로운 통로 중간중간에 나와 서서는 아연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원래의 통로는 지그재그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곳에 매복하여 통로를 지키고 있던 그들이었지만 눈앞에서 혹은 등뒤에서 벽들이 무언가에 휩쓸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자 그곳으로 나와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연무관까지 거대한 일직선의 통로가 뚫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들 역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개중에 몇 명은 재수없게 마왕창이 지나는 길목에 매복해 있다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육신이 산산이 분쇄되어 마왕창의 공간 안으로 휩쓸려 들어가 버리기도 했지만 지금 그러한 것을 문제 삼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우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통로에 모습을 보이고 있는 흑의 복면인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경악으로 인해 석상처럼 굳어 있는 화천악을 향해 본래의 모습을 회복한 자모천뢰신궁을 내밀며 말했다.
좋은 활이요.
화천악은 무의식중에 천우가 내미는 자모천뢰신궁을 받아 들고는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드는 듯 떠듬거리는 어조로 물었다.
어, 어떻게''''  한 것이오?
천우는 다른 설명은 하지 않은 채 화천악에게 희미한 미소만 하차례 지어 보이고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백양신마를 돌아보았다.
짐작 가는 곳이 있습니까?
그 물음에 백양신마 역시 억지로 황망한 정신을 수습하고는 난색을 표하며 떠듬거렸다.
그, 글쎄''''일단은 연무관으로 가서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지않겠나? 그곳에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 말일세.
천우가 거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몸을 돌려 자신이 만들어놓은 통로로 향하자, 사람들도 그제야 화급히 정신을 수습하고는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천우가 쏘아냈던 가공할 마왕창의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사방으로 몸을 피했던 서른여섯 명의 무영사신대는 더 이상 중인들을 저지할 생각도 못 하고 통로로 들어서고 있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천우와 그 옆으로 화급히 따라붙은 백양신마가 선두에 서서 통로로 들어서자, 원래의 통로에 매복해 있던 칠십이 무영사신대가 본능적으로 병기를 치켜들며 저지할 테세를 보였다. 그러자 백양신마가 계속 다가서면서 냉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물러서라! 대종사께서 연무관에 계시지 않는 이상 너희들은 더 이상 길을 막아설 이유가 없다.
백양신마의 그 외침에 통로 중간중간에서 무기를 빼어 들고서 있던 무영사신대원들은 오히려 어느 정도 이성을 회복한 듯 보였다. 더불어 뒤쪽에 서 있던 무영사신대원들도 빠르게 앞으로 다가서며 다시 통로의 중간에서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백양신마의 검미가 다시 꿈틀거리는 순간 천우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며 가벼운 소성을 발했다.
피어!
[뭐야? 피어마법을 펼치면서 그걸 그대로 외치면 어쩌라는 거야?]
아티오네스의 핀잔이 이어졌지만, 그 순간 앞을 가로막았던 무영사신대원들은 흡사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며 진저리를 치더니 갑자기 들고 있던 무기로 내팽개친 채 사색이 되어 다시 원래의 통로로 도망쳐 버렸다. 천우의 크지 않은 외침에 발해진 순간 그들의 뇌리를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대항할 수 없다는 본능적인 공포와 도망가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길이 열지자 백양신마는 오히려 가던 걸음을 멈추고는 전면의 통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과 도를 바라보며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잘못 들어는지는 몰라도 천우가 피하라고 명령조로 짧게 한마디한 것 같았는데, 단순히 그 한마디에 통로를 막고 있던 무영사신대원들이 무기마저 팽개치고 도망가 버린 것이다.
당연히 백양신마로서는 그러한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 입구를 막아섰던 자들과는 달리 그들은 곤패주의 무위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에 길을 막고자 나선 것이 분명했다. 한데도 단순한 말 한마디에  그것도 그냥 물러서는 것도 아니고 무기마저 내팽개치고 도망가는 행동을 보인다는 것은 삼류무사들이라 해도 있을 수 없는 행동인 것이다.
천우는 피어마법의 효과가 생각 외로 훌륭해서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무력으로 길을 여는 것도 물론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희생자들을 만들 필요가 없기에 대항할 수 없는 공포를 유발시킨다는 피어마법을 사용해 본 것인데. 지금과 같은 경우는 확실히 무공이나 여타의 방법보다 효과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천우와 백양신마를 선두로 중인들이 다시 움직이자 무기마저 내팽개친 채 도망쳤던 무영사신대원들은 그 모습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들의 뇌리를 지배하던 알 수 없던 공포심은 이미 깨끗이 사라진 상태였다.
하지만 공포감에서는 벗어났다 해도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자신들의 행동에 극심한 혼란을 느끼고 있었고, 그 때문에 더이상 전의를 일으키거나 막을 생각을 못 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차피 그들도 대종사가 연무관에 없는 상태임을 알았기에 절박하게 막아야만 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다만 중인들이 다가서자 본능적으로 막아섰던 것에 불과했다.
그런 무영사신대를 지나친 중인들은 얼마 후 모두 연무관 내부로 들어설 수 있었다.
연무관의 내부는 무척이나 넓었기에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비좁지 않았다.
천우가 둘러보니 연무관 사방의 벽과 천장은 모두 두꺼운 만년한철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때문인지 연무관의 내부에는 살갗이 시릴 정도의 차가운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중인들이 들어선 곳은 원래의 입구가 있는 우측 벽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중인들은 그곳으로 들어서면서 연무관 내부를 둘러싼 만년한철의 두께가 거의 한 자에 육박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연무관 내부를 둘러보다가 또다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들을 지었다. 좀 전의 그 무시무시한 강기의 화살이 백여 장이나 되는 동굴을 뚫어놓았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연무관 내부에는 어떠한 잔해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천우의 풍검을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 외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꿈을 꾸고 있는지 확인해 보거나 혹은 머리를 부여잡은 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 이 순간 대종사가 과연 어디로 사라졌는가 하는 사실보다는, 자신들이 보고 있는 일들이 과연 어떻게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가 더 고민스러웠던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이곳에 온 목적조차 잊은 채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느라 우두커니 서 있는 동안, 천우는 연무관 내부를 빠르게 살펴보며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아보았다.
그가 애초에 천마신교에 오게 된 것은 묵월의 요청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천우 개인적으로도 아티오네스의 부탁을 들어 주려는 의도와 특히 천마에 관해서 알아보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한데 대종사란 자를 만나지 못한다면 그 모든 일들이 낭항에 빠지게 되기에 천우는 최대한 오감을 열어 내부를 살펴보았다.
그렇게 정신을 집중한 순간, 천우는 연무관 내부에서 약간 이상한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미약해서 지금처럼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느끼기조차 힘들 정도였는데, 친숙한 듯하면서도 생소함이 느껴지는, 좀처럼 종잡기 힘든 기운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천우의 느낌을 전해 받은 아티오네스와 헬로가드가 동시에 아는 척을 했다.
[어라? 이곳에 어떤 마법이 발현되었던 모양이네.]
[흠'''느껴지는 기운으로 봐서는 분명히 내 어둠의 마나가 사용된 것이다.]
아티오네스와 헬로가드의 말에 천우가 이채를 발하며 물었다.
[좀 자세히 설명해 주었으면 좋겠군,]
그 말에 아티오네스가 먼저 의식 속에서 대답했다.
[어떠한 마법이든 일단 발현되면 그 장소에는 한동안 흔적이 남게 된다. 그것은 바로 마법이 자연의 성질을 변화시켜 어떤식으로든 강제로 속성을 부여하기 대문이지.
하급 마법이라면 바뀐 성질이 금방 정화되어 원래의 자연의 속성으로 돌아가겠지만, 고위급 마법일수록 강력한 속성이 부여되기 때문에 바뀌 마나의 성질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남아 있는 속성으로 어떤 마법이 발현되었는지 파악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네가 느끼는 그 기운도 바로 마법이 발현된 후에 강제로 바뀐 마나의 속성이 아직 본래의 자연의 속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아있는 것이다.]
[그럼 어떤 마법이었는지 알 수 있겠나?]
[글쎄''''대부분이 자연의 속성으로 돌아가고 남아 있는 기운이 너무 미약해서 확실히 단정 짓기는 좀 힘들 것 같은데''''헬로가드라면 자신의 기운에 의해 발현된 마법이니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느끼기에는 환기 계열의 마법이 아니었나 싶긴 하지만''']
별로 자신없어 하는 아티오네스의 말투에 헬로가드가 득의의 웃음을 흘렸다.
[크크! 이곳에서 발현된 것은 컨틴젼시가 분명하다, 그것도 6서클 정도의 마법 수준이 아닌 마왕의 권능으로 공간 자체에 광범위하게 펼쳐놓았던 것이 틀림없다. 일반적인 컨틴젼시의 마법으로는 결코 스스로가 아닌 외부의 공간에 펼쳐놓을 수 없지.크크크!]
[흥! 네놈의 기운을 몽땅 빼앗아 갔다는 그 천마인가 하는 인간이 발현시켰던 모양인데. 자기 자신의 권능을 알아보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큰소리냐, 그럼 컨틴젼시에 어떤 조건이 걸려 있었는지도 알아볼 수 있겠군,]
[그건'''내가 그놈 의식 속에 들어앉아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이냐!]
[그런 것도 모르면서 무슨 큰소리냐,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드래곤의 용언마법 자체가 네가 말하는 권능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것도 모른단 말이냐.
어차피 마법의 서클이란 개념은 너희 마족들이 인간과 계약하여 설쳐대는 통에 선조 드래곤들께서 인간들에게 마법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놓은 개념일 뿐이다. 당연히 하위 서클의 마법이라도 용언마법을 통해서는 하나하나가 권능으로 발현될 수 있는 것인데 그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으스대는 것이냐.]
[케케, 어림없는 소리! 용언마법 따위를 어찌 마왕의 권능과 비교한단 말이냐, 얼마 전에도 봤겠지만 이 인간이 발현한 마왕창의 권능은'''어라라? 그러고 보니 너 도대체 어떻게 가르쳐주지도 않은 내 마왕창의 권능을 쓸 수 있었던 거지?]
[그냥 생각이 나더군,]
[뭐야? 그런 말도 안 되는'''가,가만! 너 혹시 내가 갇혀 있던 무의식의 공간을 살펴본 거냐?]
[그러니까 내 말은, 무의식의 공간 안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네 의지로 의식화시킬 수 있느냐는 말이다.]
[헬로가드, 너 그 무의식의 공간에 갇혀 있으면서 뭔 짓을 한거냐? 설마 길길이 날뛰면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권능을 다 펼쳐보았던 것은 아니겠지?]
그 순간 천우는 자신의 의식 속에서 헬로가드가 부들부들 떨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그게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서'''하지만 외부도 아닌 말그대로 순수한 무의식의 공간 안에서 벌어진 일을 어찌 인간이 자각할 수 있다는''']
[쯧쯧! 너는 아직도 이 인간이 인간으로 여겨지는 모양이지?]
[이,이런 제길! 천마, 그놈이 아무리 협박해도 다 알려주지 않았던 것들인데''너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펼칠 수 있는 것이냐?설마 내 궁극의 권능까지 훔쳐간 것은 아니겠지?어서 말해봐! 마왕을 등쳐먹는 이 날강도 같은 인간아!]
문득 백양신마의 심각한 표정이 눈에 들어오자 천우는 의식속에서 악악대는 헬로가드를 무시하고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뭔가 알아낸 것이 있습니까?
음, 잠시 경황이 없어서 생각지 못하고 있었네만'''연무관 내부의 사정이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르네,
자세히 말씀해 보십시오.
이곳이 대종사의 연무관으로 만들어진 이유는 바로 엄청난 마기 때문일세, 물론 노부 역시 이 안에 들어와 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긴 하네만, 전해지는 얘기로는 본교가 세워지기 이전부터 천마 조사께서 이곳에 기거했다고 하네, 그리고 이곳에는 엄청난 양의 마기가 잠재해 있었서 최소한 극마경의 경지를 이룬 자가 아니라면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마기에 의해 심맥이 파열되어 죽어버릴 정도였다고 하네,
천마조사께서 의문스럽게 사라지시고 난 후에 이곳은 본교의 대종사를 위한 연무관으로 꾸며졌지만, 역대의 대종사들 중에는 이곳에서 수련하다가 너무나 강대한 마기를 견디지 못하고 오히려 주화입마에 걸리거나 광마가 되었던 적도 있었다네.
한데 지금은 그러한 마기를 전혀 느낄 수가 없지 않는가, 전대의 대종사까지만 해도 연무관 내부의 마기를 흡수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들었으니, 결국 당금의 대종사가 이곳의 마기를 모두 흡수하고 출관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일세.
천우는 백양신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제야 모든 상황을 예측해 볼 수 있었다.
컨틴젼시는 원래 자시 스스로에게 펼치는 조건부 마법이다. 하지만 천마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권능의 힘을 빌려 자신이 아닌 이곳에 공간 자체에 컨틴젼시를 펼쳐두었고, 그것은 누군가가 이곳에 남겨둔 마기를 전부 흡수하는 것이 발현 조건이었을 것이다.
결국 대종사란 자가 천마가 남겨놓은 이곳의 마기를 모두 흡수하였기에 컨틴젼시 마법이 발현되었을 것이고, 그 결과로 천마가 남겨놓은 또 다른 무언가를 얻거나 알게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중원 각처에 천마가 남겨놓았던 마기를 흡수했던 자들이 했던 행동들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들 역시 천마가 남겨놓았던 마기를 흡수한 수에 컨틴젼시의 조건을 충족시킨 대가로 발록을 소환해 내는 방법이라든지, 혹은 마농사괴를 데스 나이트로 부활시키는 방법 등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더불어 천마무영패 등에 대한 비밀도 알려주었을 것이다.
결국 대종사란 자 역시 이곳에서 사라진 이유는 천마가 알려준 무언가를 얻거나 알아보기 위해서일 것이고, 그것은 분명 자명천마종과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천우는 천마가 안배해 놓았던 것들을 전체적으로 연관 지어 생각해 보다가 문득 자신이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천마가 반드시 자신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안배를 해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자신 때문에 펼쳐둔 안배가 아니라면'''가만히 따져보니 천마의 안배를 얻은 자들은 자신이 개입하지 않았을 경우 필연적으로 서로 간에 부딪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천마는 어느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남기거나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그들 모두가 알고 있는 것, 혹은 찾고 있는 것들이 합쳐져야 완전한 안배가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니 ''''내가 없었다면 그들은 필연적으로 부딪치게 되었겠지.
만약 나의 존재를 의식한 것이 아니라면 '''그럼 누가 최종적으로 그 안배를 얻기를 원했던 것일까? 그건 역시 대종사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왜 대종사 한 사람이 얻을 수 있도록 하지 않고 굳이 안배를 나누어놓았던 것일까? 혹시''''
그 순간 천우는 또다시 무언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기에 죽립 안에서 안색이 가볍게 굳혔다.
혹시 천마는 세상의 파멸을 원했던 것일까? 내가 보았던 그 발록이라는 마계의 괴물과 기환노조가 부활시켰던 마농사괴들이라면 충분히 세상을 피로 잠기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게다가 아직 알 수 없는 능력을 지닌 대종사라는 자까지 가세한다면'''
분명 세상을 파멸시킬 만한 힘이었다.
하지만 천마가 원한 것이 세상의 파멸이었다면 굳이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쓰지 않고서도 이미 오래 전에 그 혼자만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대종사란 자를 만나보아야 확실히 알겠군,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란 존재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다면 결코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천마.
천우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다시 백양신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 연무관에는 성취에 따라 나갈 수 있는 출구가 따로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네. 혹시 곤패주는 이곳의 출구를 찾을 수 있겠는가?
백양신마의 물음에 천우는 곧바로 생각을 접고 단단한 청석으로 이루어진 좌대 뒤편으로 묵묵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서 들어선 곳을 제외하고 삼면의 벽이 모두 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이미 감지한 상태였다. 그중 천우는 가장 최근에 움직였던 흔적이 보이는 철문을 향해 다가섰다. 대종사란 자는 분명 그곳을 통해 나갔으리라.
좌대의 뒤편으로 다가선 천우는 주저없이 만년한철로 이루어진 벽면을 향해 두 손을 들어 올리는가 싶더니 양손을 그곳ㅇ 밀착시켰다. 그러자 사람들은 기대 어린 표정으로 두 눈을 반짝였다.
사람든은 워낙에 기상천외한 일들이 여러 번 목격한 상태인 지라 천우가 아무도 모르는 출구를 찾아낸 것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이번에는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 하고 있는 중이었다.
천우도 그러한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자 내심 쓴웃음을 먹금고는 곧 양팔을 좌우로 활짝 벌렸다.
꾸그그그긍!
그러자 곧 하나로 보였던 철벽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엄청난 소음과 함께 좌우로 밀려나 버렸다.
그 철문은 원래 특수한 기관장치에 의해서만 열리도록 되어 있는 것이지만 친우의 엄청난 괴력에 문을 자동시키는 기관이 사정없이 부서져 나가며 강제로 열린 것이다.
사람들은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하며 보고 있다가, 육중한 철벽이 좌우로 갈라지며 맥없이 양쪽으로 밀려나 버리자 오히려 백 빠진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기관이 아니면 열 수 없는 철문을 강제로 연다는 것이 절대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정도 일이라면 아주 평범해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막혀 있는  벽이었다면 모를까 열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철문이었기에 천우는 별다른 조치 없이 그냥 힘으로 열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만년한철로 이루어진 육중한 철문이 열리자 그 뒤로 겨우 한 사람 정도만이 빠져 나갈수  있는 좁고 어두운 통로가 드러섰다.
천우는 출구를 연 후에 주저없이 그 안으로 달어섰고, 곧이어 다른 사람들도 줄줄이 그 뒤를 따라 어둡고 좁은 어두운 통로가 드러났다.
모두가 경지에 이른 고수들이었기에 어둠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또한 가장 선두에 천우가 있었기에 그들은 위험에 대해서도 별다른 걱정 없이 부지런히 앞사람을 쫓기 시작했다.
좁고 구불거리는 통로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거의 일반인들이 전력으로 달리는 정도의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로는 예상외로 길어서 대략 한 식경 정도가 지나서야 막다른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천우는 어둠 속에서도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커다란 바위임을 알아보고는 역시 가볍게 밀쳐버렸다.
쿠르르르릉!
커다란 소음과 함께 집채만 한 바위가 밀려나자 외부가 드러났고, 천우는 밖으로 나서며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잡목이 우거진 야산의 중턱쯤 되어 보였는데, 하늘 위에는 비록 만월이 떠 있긴 했지만 빽빽한 잡목들로 인해 달빛이 쉽사리 접근하지 못해 사위는 무척이나 어두웠다. 하지만 역시 천우가 주변을 살펴보는 데에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곧이어 천아의 뒤를 따르던 백양신마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줄지어 밖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음! 이곳은 본교에서 중원으로 나가는 길목에 있는 야산의 중턱일세. 저 앞에 보이는 얕은 능선 아래쪽이 본교 사람들이 다니는 통행로이고, 저곳부터 본교의 입구까지는 대략 이십여리 정도의 거리일세.
백양신마가 금방 위치를 파악하고 설명을 하는 동안 통로로 들어섰던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섰고, 그들 역시 출구가 천마신교의 외부라는 것에 대해 놀라며 사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천우는 백양신마가 가리키는 능선을 바라보다가 죽립 안에서 이채를 발하며 나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굉장한 인원이로군요.
뭐가 말인가?
백양신마가 반문했지만 천우는 대답 대신 묵월을 돌아보며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묵월 부교주, 우리가 돌아온 길이 아닌 정상적인 길이었다면 황도에서 마편으로 이곳까지 얼마나 걸립니까?
음'''이동 시간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말에게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빨리 이동하고자 한다면 대략 오십여 일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혼잣말처럼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결국 우리가 떠난 것과 별 차이 없이 출발했다는 얘기로군,묵월은 괜이 무안해져 조금은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변명했다.
그때는 종적을 감추며 움직이느라 부득이 먼 길을 돌 수밖에'''
하지만 천우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것을 따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지금 이곳으로 엄청난 수의 기마행렬과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인원수로 보아 아마도 황군일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 이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출발 시기가 우리와 별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이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그들을 안내하고 있다는 말도 되겠지요.
난데없는 그 말에 묵월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화,황군?
황군이 왜 이곳에?
천우는 한편에서 괴이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화천악을 스쩍 바라보고는 먼저 신형을 움직이며 말했다.
아직 상당한 거리가 있긴 하지만 일단 가보도록 하지요.
천우가 움직이자 중인들도 의혹스런 표정을 거두지 않은 채 화급히 신형을 움직여 다시 천우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다 나는 듯이 움직여 백여 리 정도를 더 이동한 후에 중인들은 초원지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천산 초입의 제법 높은 구릉 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저마다 헛바람을 들이켜며 또다시 경악성을 발하기 시작했다.
헛! 저,정말 군대가 몰려오고 있군!
세,세상에 ''''저게 도대체 몇 명이란 말인가?
구릉 위에서 그들은 멀리 보이는 드넓은 초원 위로 그야말로 달빛 아래 새까맣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수의 군마들이 몰려오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음! 중원의 대군이 신강을 가로질러 이곳까지 오다니''''설마 본교와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백양신마의 놀람 가득한 침음성에 천우가 침착한 어조로 대꾸했다.
저들은 저와 제 의형 때문에 온 것입니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황제가 군대를 움직였군요.
저들이 곤패주 때문에 온 것이란 말씀이시오?
천우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분노가 가득 담긴 동사왕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미친 황제 녀석 같으니 ''''한낱 계집 때문에 정말로 군사를 일으키다니, 이보게 천아우, 저놈들이야 머릿수만 많지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을 테니 자네가 대충 혼내 주고 쫓아버리게, 정 버거우면 마교 녀석들을 동원해도 될 것이고, 나는 단장 이길로 중원으로 돌아가서 그 미친 황제 녀석의 목을 꺾어버리고 오겠네.
그 순간 갑자기 화천악이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그러시면 안 됩니다. 황제의 목을 꺾어버리시겠다니요.그런''''
하지만 화천악은 얼음장 같은 동사왕의 싸늘한 눈초리를 받자 말끝을 흐렸다.
왜 안 된다는 것이냐? 황제 놈이 네 녀석 피붙이라도 된단 말이냐?
그,그런 것이 아니오라'''아무리 황제에게 조금의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황제의 백성으로서 그런 대역무도한 일을''''
대역무도는 무슨 대역무도! 그런 미친놈이 황제로 앉아 있으면 오히려 일반 백성들만 괴로울 따름이다. 그러니 그런 녀석의 목은 일찌감치 꺾어버리는 것이 오리혀 천리를 따르는 일이다. 네 녀석이 그런 미친 황제 놈의 편을 들어주겠다면 어디 이 자리에서 노부를 막아보거라, 당장 네 녀석의 목부터 꺾어줄 테니 말이다. 
동사왕의 살기등등한 태도에 화천악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안색마저 퍼렇게 질려갈 때, 천우에게서 다시 침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한데 조금 이상하군요.
뭐가 말인가?
동사왕이 말을 받자 천우는 여전히 참착한 태도로 말했다.
저 중에는 군사들뿐만 아니라 무림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림인들? 그놈들이 왜 황군과 함께 이곳에 왔단 말인가? 혹시 우리 때문이 아니라 마교를 토벌하기 위해서 오는 건가?
그 말에 곁에 있던 백양신마가 조금은 언짢은 투로 말했다.
우리가 곤패주를 따르는 이상 자네도 완전한 남남은 아니네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속이 시원하겠는가, 그리고 본교가 무슨 산적 집단도 아니고'''아무튼 저들이 곤패주 때문에 온 것이든 본교를 노리고 온 것이든, 감히 이곳에 온 이상 무사히 돌아갈 수는 없네.
백양신마의 살기 어린 말에 단리종후가 표정을 굳히며 천우를 향해 말했다.
정말 무림인들이 포함되어 있다면 이 늙은이가 가서 먼저 연유를 알아보도록 하겠소, 그리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면 그들을 설득해서 돌려보내도록 하리다.
그러자 천우는 심유한 눈길로 단리종후를 응시하며 말했다.
맹주님께서 나서시는 것을 말리지는 안겠습니다만, 곧 이곳으로 정황을 알려줄 사람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니 맹주님께서도 들어보시고 움직이시는 게 더 나을 듯하군요.
이곳으로 정황을 알려줄 사람이 온단 말이오?
단리종후가 놀람과 의문이 섞인 어조로 반문하자 천우는 말없이 시선을 돌려 좌측 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단리종후 역시 그 순간 미약한 기척을 감지했기에 자연스럽게 천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고, 곧이어 동사왕의 입에서 의문성이 터져 나왔다.
저놈들은 또 뭐야?
사람들의 시선이 좌측의 능선 위로 향하자 일단의 무리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모두 회포의 복면을 뒤집어 쓴 모습이었다.
동사왕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회포 복면인들 사이에서 취의궁장 차림의 한 여인이 빠르게 앞으로 나서는가 싶더니, 이윽고 그녀를 선두로 백여 명 가량의 회포 복면인들이 중인들이 서 있는 곳을 향해 나는 듯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동사왕의 입에서는 또다시 놀람성이 터져 나왔다.
아니, 저 여우 계집애가 여기는 어떻게?
선두에서 나는 듯이 달려오고 있는 취의궁장 차림의 여인은 입가를 면사로 가린 상태였지만 다분히 형식적인 듯, 범인의 눈에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얇은 비단 면사였기에 시력이 뛰어난 중인들은 모두 그녀의 용모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마치 달빛 아래 선녀가 하강한 듯 너무도 아름답고 뇌쇄적닝 그녀이 용모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렇게 중인들이 놀라고 있는 사이에 취의궁장 여인을 비롯한 백여 명의 회포 복면인들이 순식간에 천우와 중인들이 있는곳에 당도했다.
지존을 뵈옵니다.
소녀 세운령이 지존께 문안드립니다.
천우 앞에 당도한 그들은 즉시 천우 앞에 부복하며 짧게 외쳤고, 그 중 취의궁장 차림의 세운령만이 마치 새색시가 낭군에게 절하듯이 날아갈 듯 대례를 올리며 꾀꼬리 같은 어조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 모습에 천우는 죽립 안에서 쓴웃음을 머금으면서도 부복한 자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얼른 경기를 일으켰다.
문주, 오랜만이오. 설마 문주가 직접 이곳으로 올 줄은 몰랐소,
천우가 발한 무형의 경기에 모두의 몸이 저절로 일으켜 세워졌다.
그 와중에 여전히 담담하면소도 무심한 듯한 천우의 음성을 들은 세운령의 두 눈에는 잠시 서운함이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생긋 웃음 지으며 애교 띤 음성으로 말했다.
과연 지존이세요. 저희가 올 줄 이미 알고 계셨다는 말씀이시로군요. 지존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이곳에 온 것을 용서해주세요. 하지만 워낙 다급한 사안이라 제가 직접 오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비록 말은 용서를 구한다고는 했지만 그녀의 태도는 누가 보기에도 교태는 부리는 듯한 모습이었기에 천우는 다시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니오 다만 군사들이 온 것을 보고 문주라면 틀림없이 사람을 붙였을 것이라 짐작했을 따름이오.
지존께서 소녀를 그렇게 높이 평가해 주시니 소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세운령의 그러한 교태 가득한 모습에 중인들은 가슴이 진탕하여 시선을 어디에 둘 줄 몰라 먼 산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바로 조아였다. 세운령의 자태는 같은 여인이 봐도 너무나 아름답고 우아해 보였기에 조아는 절로 지신이 초라해짐을 느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천우를 대하는 태도나 어투로 보아 상당히 가까운 사이일 것이라 짐작되었기에 그녀는 더욱 위축되었다.
실상 용모만으로 따진다면 조아 역시 어떤여인에게도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껏 자신의 용모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기울여본 적이 없었고, 또한 여인으로서 치장을 해본 적도 없었기에 너무나 화사한 세운령의 모습을 보게 되자 절로 주눅이 들고 말았던 것이다.
조아가 그렇게 세운령의 화사한 모습에 부러움과 위축감을 느끼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있을 때 동사왕의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계집애야, 교태는 그만 부리고 어서 이곳에 오게 된 연유나 말해 보아라. 보아하니 병사들의 꽁무니를 따라온 모양인데. 저놈들은 도대체 이곳의 위치를 어찌 알았다더냐? 그리고 너는 또 천아우가 이곳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고?
그 말에 세운령은 밉지 않은 눈길로 동사왕을 한번 흘겨보고는 사근사근한 어조로 대답했다.
지존께서 천 리 안에만 계시다면 저희가 언제든지 찾을 수 있다고 전에 말씁드렸잖아요.
응? 그 천리향인가 하는 거 말이냐?
본문의 비기인지라 다른 사라들은 느낄 수 없지만, 지존과 동 노사님이 가지고 계신 신패에는 그 천리향이 베어 있어요.
그렇구나! 그걸 잊고 있었구나!
동사왕이 가벼운 탄성을 발하는 사이, 세운령은 흑백이 또렷한 눈망울로 빠르게 좌중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의 그러한 눈길을 의식한 천우가 담담한 어조로 말해 주었다.
문주가 모르는 사람들은 천마신교의 사람들이오. 하지만 지금은 같은 편이라 할 수 있으니 달리 의식하지 않아도 좋소.
천우의 말에 세운령은 놀란 표정을 지오 보였지만 아내 대충의 상황을 짐작한 듯 밝은 미소와 함께 얘기를 꺼내었다.
지존께서 군웅들과 함께 천마신교를 향해 떠나신 직후에 황도에서도 20만 가량의 어림군이 출병했어요. 그리고 얼마 후 무림에도, 지존과 동 노사님께서 황실의 성연귀비를 살해하였기에 황명으로 지존과 지존을 돕는 역도의 무리들을 토벌하기 위해 대군이 출병한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어요.
뿐만 아니라 지존께서 천마신교의 곤패주라는 지위를 얻기 위해 무림의 강자들을 속여서 천마신교로 데려간 것이라는 근거없는 소문도 함께 퍼졌어요.
한데 더욱 놀랄 일은 황실에서 천마신교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 바람에 무림에서는 큰 소동이 벌어졌고 곧이어 각지에서 무림인들이 모여들어 비공식적으로 황군의 뒤를 따르게 되었지요.
세운령의 이야기에 사람들이 저마다 놀람을 드러내는 가운데 단리종후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소저, 그럼 무림인들은 대체 얼마나 합류한 것이오?
소녀가 알고 있기로는 대략 일만여 명 정도의 무림인들이 병사들을 따라 이곳으로 온 것으로 알고 있었요. 그리고  도중에 단리 맹주님의 두 제자 분께서도 탐리목 부근에서 무림인들과 만나 합류하여 다시 이곳으로 온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일만 명이나'''그리고 내 두 제자들도 다시 합류하여 이곳으로 왔단 말이오?
그렇사옵니다. 단리 맹주님,
음! 이 단리 모가 안목이 부족하여 소저의 신분을 알아보지 못함을 용서하시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제라도 소저의 신분을 묻고 싶소만''''
단리종후의 말에 세운령이 표시 나지 않도록 천우를 살펴보고는, 천우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정식으로 예를 취하며 단리종후에게 인사를 올렸다.
소녀는 하오문의 제17대 문주인 세운령이라 하옵니다. 이렇듯 정파무림의 맹주님을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오문!
그녀가 신분을 밝히자 중인들도 모두가 놀람을 금치 못했다.
단리종후 역시 그녀가 하오문의 문주임을 알게 되자 무척이나 놀랐지만, 한순간 고개를 끄덕이며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와서 알게 된 것이었지만 이미 일부 정파무림을  제외한 천하무림 전체가 풍검신, 그 한 사람에게 귀속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게다가 천마신교마저 그에게 굴복하여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마당에 정보와 끈질긴 생존력에 있어서는 천하제일이라는 하오문이 풍검신에게 기대고 있다는 것도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풍검신 천우가 마음만 먹는다면 무림분만 아니라 천하 자체가 그에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단리종후는 절감하고 있었다.
단리종후는 자신이 이곳에 와서 그런 그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을 천만다행이라고 여겼다. 한데 난데없이 정파무림인들이 황군과 합세하여 그런 풍검신을 상대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얘기를 듣게 되자 절로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휴!그렇구려, 이 늙은이가 문주를 몰라 뵌 것을 용서하시오. 그리고 정파 무림인들은 오해 때문에 오게 된 것 같으니 이 늙은이가 설득하여 다시 돌려보내도록 하리다.
그 말과 함께 단리종후가 곧바로 움직이려 하자 세운령이 빠른 어조로 말했다.
단리 맹주님  외람되지만 소녀의 말을 조금만 더 들어주시길 부탁드려요.
단리종후는 무척이나 마음이 급했기에 잠깐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는 곧 안색을 펴며 정중하게 말을 받았다.
아무래도 이 늙은이에게 할 말이 있는 듯하구려, 알겠소 문주는 주저하지 말고 어서 말해 보시오.
단리종후가 예의를 갖추어 말하자 세운령은 가볍게 목례를 하며 말했다.
지존께 드릴 말씀이지만 맹주님과도 깊은 연관이 있기에 청한 것이니 부디 소녀의 무례를 탓하진 말아주세요.
곧이어 세운령은 단리종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천우를 응시 하여 본론을 꺼내었다.
그동안 황실의 동태를 살펴보다가 뜻하지 않게 새로운 사실들을 몇 가지 알게 되었어요. 그것은 이번 황군 출정과도 관계가 있는 사항들이기에 그 사실을 지존께 알려드리기 위해 제가 직접 온 거예요.
잠시 말을 멈춘 세운령은 슬쩍 단리종후의 눈치를 살피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무림맹에 황실의 첩자가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음! 
그 순간 단리종후로부터 억눌린 침음성이 흘러나왔지만 세운령의 말을 자르지는 않았다.
어차피 무림에 신분을 감춘 황실의 인물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나 무림맹에도 황실의 첩자가 한 둘쯤 있다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크게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무림맹 내부에서는 첩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는 반면, 외부에서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과히 유쾌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단리종후는 곧이어 이어진 세운령의 말에 억지로라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다름 아닌 무림맹의 순찰당주 모용휘에요.
뭐,뭣이! 소저, 아니 문주, 그게 정말이오? 그럴리가''''
단리종후의 놀람성이 이어졌지만 그녀는 돌아보지 않은 채 천우를 향해 계속해서 보고 형식으로 말을 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모용가와 성씨만 같은 것이 아니라 실지로도 모용가의 직계 혈족이라는 것이예요. 당연히 성연귀비였던 모용경과도 친족 관계에 있어요.
그 말에 동사왕의 경악성이 뒤따랐다.
뭐라고?계집애야, 방금 무라고 했는냐? 모용휘 그놈이 그 씹어 먹을 모용가의 직계혈족이라고 했는냐?
갑작스런 세운령의 말에 단지종후와 동사왕 모두 경악하고 있었지만 세운령은 대답 대신 바른 어조로 천우를 향해 밝혀진 바라르 얘기했다.
모용세가가 동 노사님께 멸문하기 전 당시 모용가주에게는 서자가 한 명 있었어요. 그는 일찍이 중원으로 나와 독립하였는데, 그의 이름은 모용준이라고 해요. 한데 모용 당주는 바로 그 모용준의 친아들로 밝혀졌어요.
또한 그의 사부는 알려진 대로 한때 중원무린에서 협명을 떨치던 호북검협 사공적 대협임이 틀림없지만, 그 역시도 황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어었어요. 그는 오래전에 강호에서 은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현재 황궁의 어전 수석 시위장으로 머물고 있음 또한 확인되었어요.
그,그럴 수가!
으드득! 모용휘, 그놈이 모용가의 직계 혈족이었단 말이지. 
또다시 단리종후의 경악성과 동사왕의 이를 갈아붙이는 살기 띤 음성이 이어졌지만 세운령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최근에 모용 당주와 접촉하거나 서신을 주고받은 사람들은 낱낱이 조사해 본 결과, 역시 그들 중에는 동창의 인물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그리고''''그러한 조사 과정에서 무림맹의 중요인사 중 또 한 사람에게서 의심스러운 점이 발견되었어요.
그녀의 놀라운 말에도 천우는 여전히 담담한 기색으로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고, 어느덧 천중에 걸린 둥근 만월이 뿌려대는 휘황한 달빛으로 인해 세운령의 두 눈은 마치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처음에 의심스러웠던 점은 그와 모용당주가 비록 같은 무림맹 내에 있기는 하지만 별다른 친분이나 접촉은 없었는데 최근 몇 달 사이에 부쩍 잦은 접촉이 있었다는 보고 때문이었어요. 그 때문에 혹시나 하여 그의 행적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조사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에게도 확실히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장내의 인물들이 모두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시킨 가운데 세운령은 별빛 같은 눈으로 여전히 무심히 서 있는 천우를 응시하며 자신감있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선은 그가 무림맹 자리를 비웠던 지난 몇 년 간의 행적에 대해서 조사해 보았어요, 한데 이상한 것은 그가 어디로 갔는지, 그리고 무엇을 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에요.
다만 의외의 부분에서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무림맹에서 자리를 비웠을 시기게 천마신교의 첩자로 판명난 사람들도 거의 빠짐없이 거처에서 떠나 있었다는 것이에요. 그들 중에는 일정한 거처가 없던 사람들도 있었기에 전부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일정한 거처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그 기간에 모두 거처에서 떠나 일정 기간 동안 잠적했던 것이 밝혀졌어요.
물론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지난 몇 년간의 행적에서 정확히 일치되고 있는 사항이기에 우연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는 판단이에요. 그리고 첩자들로 판명난 자들의 행적을 토대로 대시 세밀히 검토해 본 결과, 그들은 그 시기에 일정한 지역에서 모두 모습을 나타냈다는 것도 확인되었어요.
또한 무림맹을 나선 이후의 그의 행적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의심스러운 점이에요. 결국은 그가 변장을 하거나 혹은 전혀 다른 신분으로 움직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니까요.
그 말에 정파인들의 비리에 대해 그녀와 함께 조사했던 혈리표국주가 검은 피풍의를 두른 채 한쪽에서 고개를 끄덕이자 세운령은 가볍게 눈인사를 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소녀는 그러한 점을 토대로 그가 천마신교에서 파견했던 첩자들의 수뇌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천마신교의 곤패주에 대한 소문이나 황실에서 천마신교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 등은 최근 그가 황실의 첩자인 모용 당주와 잦은 접촉이 이었다는 것과 분명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요. 최소한 천마신교 측 사람의 도움이 없었다면 동창에서 자체적으로 그러한 사실들을 알아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자 그때까지 한쪽에서 세운령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백양신마가 갑자기 나서며 의문을 표시했다.
잠깐만! 문주의 말대로 본교에 곤패죽라는 신분이 있다는 것이 무림에 알려지고, 황실에서 본교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본교의 사람이 개입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오. 그리고 그것이 그를 통해서 알려진 것이라면 문주의 말대로 그는 분명 본교의 사람일 것이오.
하지만 그가 무엇 때문에 그러한 사실들을 황실에 알려주었단 말이오? 그가 소종사가 파견한 본교의 첩자라면 전혀 그럴 이유가 없을 텐데''''
세운령은 백양신마가 나서자 그 또한 천우를 돕는 천마신교 측의 사람임을 짐작하고는 곧바로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소녀로서도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소녀가 알기로 지존께선 천마신교의 양대 세력 중 한 곳인 곤패주라는 신분으로 이곳에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과 관련하여 반대세력 쪽에서 지존을 견제하기 위해 끌어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세운령의 말에 백양신마는 가만히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말처럼 소종사가 곤패주를 견제하여 황실을 끌어들였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지만, 어치피 하오문의 문주라는 그녀도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하고 있었기에 나름대로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한데 바로 그때, 모용휘의 일로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단리종후가 헛기침과 함께 다소 불안한 표정으로 세운령을 향해 단조직입적으로 물었다.
문주! 도대체 그가 누구요?
세운령은 단리종후의 물음에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단리 맹주님, 들으셨듯이 저희가 조사한 바는 정황 증거일 뿐이지 결코 확실한 증거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소녀는 감히 그가 누구라고 맹주님께 함부로 말씀올리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맹주님께서 알고자 하신다면 그것은 지존께서 결정하실 일일 것입니다.
비록 정황에 대해서 밝히기는 했지만 세운령으로서는 단리종후에게 확실한 증거도 없이 그의 정체를 말하기가 곤란했다. 하지만 천우에게는 의당 보고해야 마땅할 사항이었기에 그 결정을 지존인 천우에게 미룬 것이다.
단리종후는 마음만 먹으면 삼대조 조상의 숨겨놓은 자식까지도 찾아낼 수 있다는 천하제일의 정보력을 갖춘 하오문주가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하더라도 분명 그는 천마신교의 숨겨진 첩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단리종후는 은연중에 이미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오문주가 이처럼 자신에게 그의 정체를 밝히기를 꺼리는 것은, 그가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거나 혹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다.
단리종후는 그 때문에 더욱 불안감이 커졌지만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다소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문주의 마음은 잘 알겠소만''''이 늙은이는 지금까지의 얘기만으로도 충분히 신뢰가 가오, 그러니 주저 말고 알려주시오. 설령 오해가 있다 하더라도 이 늙인이는 문주를 탓하진 않을 것이외다. 그리고 이 늙은이 역시 그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보도록 할 것이기에 문주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오,
단리종후의 말에 세운령은 얇은 면사 안에서 가볍게 입술을 깨물고는 여전히 말설이는 기색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천우를 주시했다.
그러자 천우도 그녀의 눈길을 의식한 듯 상념을 접고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에게 다른 이상한 점은 없었소?예를 들면 전과 달리 행동거지가 바뀌었다든가 하는''''
천우의 질물에 세운령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것을 어찌'''아니, 그보다 지존께서는 이미 그가 누구인지 짐작하고 계시는 건가요?
다른 이상한 점이 있다면 먼저 말해 보시오.
세운령은 천우가 이미 그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는 듯하자 약간 흥분한 기색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음'''그래요, 하지만 사소한 것들이라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에요. 확실히 보고에 따르면 그의 행동거지나 습관이 조금 바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예를 들자면 전에는 용정차를 매우 즐겼는데 최근 몇 개월 동안에는 용정차를 전혀 찾지 않는다든가, 전에는 일어나면 하루도 빠짐없이 연무를 한 후에 아침 산책을 하곤 하였는데 역시 최근 몇 개월 동안에는 개인 연무도 중지한 듯하고 아침에 산책하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고 해요, 그 외에도 식습관이라든가 여러 곳에서 조금씩 전과는 다른 행동들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최근에 천마신교의 첩자들이 모두 밝혀졌고 그로 인해 그 역시 초조함을 느끼게 되었기에 보이는 행동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런 것으로 정황 증거를 삼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여겨졌기에''''
그 말에 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한 어조로 짧게 말했다.
역시 그러군!
단정 짓는 듯한 그 말에 세운령이 은근히 기대감 서린 눈빛을 보내자 천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단리 맹주의 대제자'''한상이라고 했던가?
그 순간 세운령의 입에서는 참지 못하고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지존께서는 어떻게 그라는 것을'''
그 순간, 내심 각오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놀란 나머지 단지종후는 오히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천우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천우의 죽립이 가볍게 좌우로 흔들렸다.
하지만 이미 그가아니오.
네?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세운령이 그 말의 의미를 몰라 의문스런 표정을 지어 보이자 천우는 대답 대신 광활한 초원에서 몰려오고 있는 병사들 쪽으로 시선을 주며 독백하듯이 중얼거렸다.
거기 있었는가'''대종사.


2장   풀리는 실마리


설명해 줄 수 있겠소'''
하오문주가 먼저 그 이름을 말했다면 단리종후는 절대 인정 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절대 그럴 리 없다며 분명 화를 내었을 것이다.
하지만, 풍검신 천우가 말했다. 자신의 대제자인 한상이라고'''
단리종후로서는 정말로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설명은 듣고 싶었다.
애써 태연한 척하려 하지만 가늘게 경련하는 입술만은 어쩔 수 없는 듯, 충격과 격정에 휩싸인 단리종후를 바라보며 천우는 내심 탄식을 발했다.
하지만 곧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를 처음 의식한 것은 무림맹에서 맹주님이 제게 곤란을 겪었을 때입니다. 그에게서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사부가 그런 곤란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물론 당시에 저는 그런 것에 대해서 특별히 신경을 썼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것을 느꼈을 뿐입니다. 맹주님의 둘째 제자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 느껴졌으니까요.
두 번째로 그를 느꼈던 것은 이곳에 오면서부터입니다. 그에게서는 예전처럼 항시 감정의 동요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그는 너무나 평범했습니다. 이상하리만치 평범했지요, 그 정도로 감정의 절제가 이루어지는 사람에게서 제가 느낄 수 있는 기운은 너무 평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것이 무척이나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우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단리종후의  두 눈이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이상함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이곳에 와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소종사란 자처럼 본신의 자아를 완벽하게 숨겨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소종사란 자는 그것이 선천적이었던 것에 비해, 그는 고의적으로 스스로를 완벽하게 감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에게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저는 그의 숨겨둔 힘의 실체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제가 무림맹에서 처음 느꼈을 때부터 이미 바뀌어져 있었던 겁니다.
천우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단리종후는 격정을 이기기 힘든 듯 전신마저 가볍게 떨기 시작했다.
그럼'''그 전의 그는''''
단리종후의 띄엄띄엄 이어지는 어조에 천우는 다시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마도 처음의 그는 애초에 소종사와 관련이 있던 사람일 것입니다. 사도련에서 천사혈존의 세 아들 중 한 명이 소종사의 친 혈육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중간에 바뀌었다면 맹주님께서 알아차리지 못해을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처음의 그가 천마신교의 사람이 아니었다 해도 지금의 그는 맹주님의 대제자가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저는 지금 너무나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천우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사람들은 무척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마침내 천우에 의해 결론이 지어지자 모두들 더할 나위 없는 경악스러움에 제대로 숨도 쉬자 못할 지경이 되어버렸다.
결국 천마신교의 대종사는 원래의 첩자 대신 단리종후의 대제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그러한 사실이 쉽사리 믿기지 않았다.
그것은 세운령도 마찬가지였기에,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천우를 바라보다가 다급한 음성으로 물었다.
소녀가 비록 그가 천마신교의 숨겨진 첩자일 거라는 정황은 가지고 왔지만 그가 대종사라니'''그럼 현재 천마신교에는 대종사가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천우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세운령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는 살포시 아미를 찡그렸다.
그 순간 천우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백양신마를 돌아보며 다소 엉뚱한 질문을 하였다.
천마신교의 전력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물음에 백양신마는 잠시 곤혹스러움을 느꼈지만 곧 천마신교가 지닌 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음''''본교의 십만 교도 중 강호상의 이류급 고수 이상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은 대략 절반에 해당하는 5만 정도일세. 그리고 그 중 일류급 이상은 1만 정도라고 보면 맞을 것이네, 또한 절정급으로 분류할 수 있는 고수의 수는 대략 이천여 명 내외이고, 극마나 화경 이상의 초절절 고수들은 무영사신대를 제외하고라도 이백여 명 정도 될 것일세.
이류급의 고수들은 중원무림 전체에 비하면 많이 모자란 수겠지만 일류고수 이상만 따지자면 중원의 모든 정사문파에 속한 일류고수들을 합한 수에 크게 뒤지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네, 그리고 절정고수 이상으로 치자면 오히려 중원무림의 모든 절정고수를 모은다 해도 아마 본교가 보유하고 있는 수만큼은 되지 않을 것일세.
백양신마에 의해 천마신교의 실체가 드러나는 동안 그 말을 듣고 있던 세운령의 두 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백양신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입에서는 다시 경탄성이 터져 나왔다.
과연 천마신교로군요! 그 정도라면 지금 오고 있는 황군이나 중원 무림인들의 수로는 어림도 없는 막강한 전력이라 할 수 있겠어요. 비록 무림인들이 일만여 명 정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 중 일류고수라 할 수 있는 자들은 고작해야 2천을 넘지 않을 테고'''게다가 일반 병사들로는 백여 명으로도 한 사람의 일류고수를 당해 내기 어려우니''''
물론 그가 천마신교의 대종사이고, 황실과 손을 잡은 이상 천마신교 전체를 염두에 두고 출절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너무 과한 수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그러자 백양신마가 냉기가 감도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들이 곤패주를 상대하자면 그것은 본교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는 말이오. 그 이유는 이미 본교 전체가 곤패주께 충성을 맹세한 상태이기 때문이오. 설사 대종사가 개입되어 있다 하더라도 지금은 천마건곤대전을 치르고 있는 도중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에는 변함이 없소.
뜻밖의 그 말에 세운령은 물론이고 함께 온 하오문도들도 모두 경악하고 말았다.
그,그것이 사실인가요? 천마신교 전체가 이미 지존께 충성을 맹세했다는 것이''''
그녀는 천우 주위에 있는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도를 풍기는 천마신교 측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천마신교 내의 곤패주쪽 사람들일 거라고 짐작은 했었지만, 설마하니 천마신교 전체가 이미 천우에게 굴복하였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또다시 떠오른 의문이 있었기에 세운령은 여전히 경악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다시 떠듬거리며 물었다.
그럼'''천마신교의 소종사는 이미''''
그녀의 경악한 태도에 백양신마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알려주었다.
그렇소, 소종사는 이미 곤패주에 의해 죽었소, 그리고 본교의 천마건곤대전의 율법에 의해 대종사 역시도 현재로서는 곤패주의 위에 있지 않소이다. 대종사와 곤패주 사이에 승부가 나기 전까지는 대등한 위치라고 할 수 있소.
결국 대종사가 황실 이용해 곤패주를 상대할 생각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본교 전체와의 세력전이 될 뿐이오.
하지만 여전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어째서 대종사가 중원의 황실을 끌어들였는냐 하는 것이오. 그것은 대종사가 지금의 상황을 모두 예측하였다 하더라도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고, 단지 곤패주와 황실과의 불화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하더라도 역시 납득하기 힘든 일이오.
그때 천우가 죽립으로 가려진 두 눈에서 가볍게 이채를 발하며 뜬금없는 질문을 하였다.
문주, 모용경 그녀가 죽고 난 후에 황실의 실권을 잡은 사람은 누구요?
그러한 물음에 세운령은 즉시 대답했다.
당연히 현 동창의 수반이 제독태감 조덕인이에요. 그는 당금의 황제가 7왕자였던 시절부터 그의 스승 겸 태사 노릇을 하던 자였는데, 당금의 황제가 성연귀비의 힘을 입어 황제가 된 이후에 동창의 수반이 된 자에요. 엄밀히 말하면 성연귀비의 수족노릇을 하던 자였는데, 그녀가 실종되고 나자 자연스럽게 실권을 잡게 된 것이지요.
그럼 현재 그의 최대 결림돌은 누구라고 할 수 있소?
이미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위를 휘두르는 그에게는 별다른 정적이 없다고 할 수 있어요. 상 대학사는 실질적으로 당금의 황실이나 정체에는 관여하고 있지 않는 상태고''''
다만 당금 황제의 숙부이시자 군기대신인 현영왕전하만은 아무래도 껄끄러울 수밖에 없을 거예요. 현영왕의 성품이 매우 대쪽 같다고 알려진 데다가 군권까지 잡고 있으니 아무리 조덕인 그자라 하더라도 그 앞에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죠. 그리고 이번 출정의 총책임자도 바로 현영왕이에요. 한데 갑자기 그러한 것은 어째서''''
황실에서 병사들을 출정시킨 것은 물론 나와 형님 때문이기 하겠지만, 단지 나와 형님만이 목적이라면 20만의 병사들이 출병했다는 것은 문주의 말대로 과한  정도가 아니라 누가 생각하기에도 터무니없는 일이오. 그렇지 않소?
질문과도 비슷한 천우의 착 가라앉은 음성에 세운령은 그가 자신의 말로 인해 기분이 상한 줄 알고 무척이나 당황하며 말을 떠듬거렸다.
소녀는 그런 의미로 드린 말씀이'''
하지만 천우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해는 마시오. 나는 단지 이곳에 온 병사들의 숫자에 관해서 의문이 들었기에 한 말일 따름이오,
천우의 말에 세운령은 금세 안도의 눈빛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확실히''''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해 보면 그렇긴 해요. 하지만'''
그러나 천우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전히 가라앉은 나직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그리고 천마신교 전체와 비교해 보면 너무 빈약한 전력이기도 하오, 물론 문주의 말처럼 제독태감이란 자가 대종사와 손을 잡았기 때문에, 그리고 제독태감이 그를 믿고 천마신교 전체와는 부딪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단지 20만의 병력만으로 이곳에 온 것일 수도 있소.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제독태감이란 자는 어떤 이유로 대종사를 믿게 되었는가 하는 것과, 대종사는 무엇 때문에 굳이 황실을 끌어들였냐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되오.
제독태감이란 자는 나와 형님이 목적일 수 있겠지만, 대종사는 굳이 나와 형님 때문에 황실을 끌어들일 이유가 없소, 백양노사의 말씀처럼 그가 지금의 상황을 모두 예측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지만,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황실을 끌어들이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 또한 그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오.
결국 그가 황실을 끌어들인 이유는 나와 형님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고, 그것은 당연히 그에게도 득이 되는 일일 것이오. 달리 말해 그들 서로간에 득이 되는 약속이 이루어졌다면 제독태감은 대종사를 믿을 수 있는 것이오. 또한 그러한 이유로 천마신교를 상대하기에는 부족한 전력으로도 이곳에 거리낌없이 올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오.
뭔가 결론이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천우의 말은 충분히 수긍이 간다는 듯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처음에 말했듯이 대종사를 믿고 있는 그가 나와 형님만을 상대하기 위해 20만이나 되는 병력을 동원했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소, 또한 그러한 것은 대종사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못한다는 것도 말이오.
그 말에 세운령은 조금 전에 하려다 못 한 말로 의문을 표시했다.
하지만 ''''지존께서는 이미 고금제일이란 호칭을 듣고 계시고 또한 실제로도 그렇지요. 그러한 지존의 소문을 듣지 못했을 리 없으니 조금 많기는 하지만 그 정도의 병력이 동원된 것도 전혀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대종사의 목적이나 득이 되는 부분에 있었서도 그 역시 지존에 대한 소문을 접했을 테니 황실을 통해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니지 않겠어요?
세운령은 조금 전 스스로 했던 말에 대해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떨쳐내지 못했기에 의식적으로나마 천우를 높이는 형식으로 궁금증을 표시했다.
천우 역시 그러한 그녀의 마음을 읽었기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나 역시 짐작일 뿐이니 문주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소, 그리고 그에게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라면 달리 고려해 볼 여지도 없이 한 가지 이유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한 말이기도 하오,
그것이''''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소, 지금 보이는 상황 자체가 바로 그가 원한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오. 즉 대종사는 황실의 20만 군사들이 출정하기를 원했던 것이고, 그것이 목적일 수 있다는 것이오.
하지만 세운령이나 중인들은 천우의 그 말로 인해 오히려 더욱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다만 동사왕만은 무언가를 느낀 듯 얼굴 가득 경악을 드리운 채 천우에게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이보게, 천 아우! 설마 자네 말은 그의 목적이 저들 20만 군사들의 목숨에 있다는 말인가?
확실하진 않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그런'''그가 무엇 때문에'''혹시 대종사도 그놈들처럼'''
천우는 동사왕의 경악한 물음에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것이 긍정의 의미임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고, 그러한 동사왕의 경악스런 외침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이곳으로 오기 전 기환노조를 겪었던 몇몇 사람들도 천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렴풋이 느끼고는 안색을 굳혔다.
곤패주!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대종사가 저들 20만 군사들의 목숨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그리고 그놈들이라는 것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아무 영문을 모르는 백양신마의 이어진 물음에 천우는 은연중 눈빛을 침잠시키며 말히기 시작했다.
대종사는 연무관에서 천마가 남긴 흔적을 얻었지만, 천마의 흔적은 그곳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천마는 중원에도 비슷한 흔적들을 남겼고, 그것을 접한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마의 흔적을 얻은 그들 두 사람은 많은 피와 원령들을 원했습니다. 때문에 저는 대종사 역시도 마찬가지일 수 있으며 그것은 아마도 천마가 남긴 또 다른 무언가를 얻기 위한 방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그럴 수가! 천마 조사가 중원에도 무언가를 남겼다니'''
금시초문의 말에 백양신마와 천마신교의 사람들이 놀라는 동안 세운령은 모용경과 북천검왕 여우명에 대한 일을 알고 있었기에 동사왕 등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사태를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수긍이 가는 것은 아니었기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다시 천우에게 물었다.
외람되지만 지존의 말씀대로라면 적어도 제독태감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대종사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라지만 20만이나 되는 황실 어림군들을 목숨을 대가로 한다는 것은 '''과연 그러한 거래가 서로에게 득이 되는 거래라고 할 수 있을까요? 더구나 이번 출정의 책임자는 현영 왕야이신데, 왕야는 그러한 일을 결코 용납할 리도 없겠지만, 그가 모르는 상태라면'''
말을 이어가던 세운령은 갑지기 떠오르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리며 그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말았다.
호,혹시 ''제독태감의 목적 역시도''''
그녀의 다급성에 천우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그러한 거래가 있었다면 현영왕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소, 그리고 제독태감이라는 자가 모용경과 관계되어 일을 해오던 자라면 결코 황실에 대한 충성이 깊은 자는 아닐 것이오. 그런 그가 황실의 20만 병사의 희생으로 나와형님의 처리뿐만이 아니라 걸림돌이 되는 정적까지 제거할 수 있다면 그로서는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닐 것이오.
세운령은 하오문의 문주로서 세상의 험난함과 추악함을 모르는 여인이 결코 아니었기에 그 순간 모든 상황을 명확히 깨달을 수가 있었다.
천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쪽에서 완전한 사색으로 물들어 있는 화천악에게로 시선을 주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의 신분이 황실의 호국천위왕이라 들었소만'''어떻소, 저들을 설득하여 돌려보내는 것이?
화천악은 천우의 갑작스런 말에 그야말로 대경하여 펄쩍 뛰다시피 하며 뒤로 몇 발짝 물러서서는 핏기 없는 안색으로 천우을 가리키며 떠듬거렸다.
어,어떻게'''내 신분을''''
당신이 단리 맹주의 두 제자들에게 하는 말을 들었소,
그,그럼'''
당신이 그들에게 하는 말을 듣고 황군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소, 하지만 그들이 돌아가서 소식을 전하고 황군이 오려면 상당한 기일이 걸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상황일 줄은 미처 몰랐소,
아무튼 귀하도 모든 얘기를 들었을 것이오. 그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귀하의 몫이오. 하지만 쓸데없는 희생은 줄이는 것이 졸을 것 같기에 귀하에게 부탁하는 것이오.
화천악은 천우의 무심한 시선에 애써 경악스러움을 가라앉히면서 깊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휴! 설마 했는데 정말로 귀하가 전음으로 하는 말을 모두 들었을 줄은 몰랐소, 하긴, 귀하의 능력이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아무튼 이제라도 내 신분을 정식으로 밝히겠소,
나는 황실을 수호하는 호국천위왕의 신분에 있으며, 사실 이번 일을 해결하기 위해 귀하를 따라왔던 것이오. 물론 그 또한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는 충분히 통감하고 있고, 더불어 단리 맹주님의 두 제자 분에게 그러한 부탁을 했던 것도 후회하고 있었소,
변명이 아니라 나는 이곳에서 돌아가는 즉시 현영 왕야와 황제폐하를 찾아뵙고 출병을 적극적으로 말릴 생각이었소, 한데 예상치 않게 이토록 빠른 출병이 이루어지다니 나로서도 정말 뜻밖이오.
그의 신분이 밝혀지자 주변에서 다시 놀란 시선으로 화천악을 바라보았지만, 누구도 지금의 상황에서 그에게 황실의 왕야에 대한 예를 갖추는 사람은 없었다.
천우는 그런 화천악을 바라보며 여전히 무심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귀하의 신분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소, 그리고 그것은 황제라는 자도 마찬가지요. 다만 더 이상 황제와는 부딪치지 않길 원하기에 귀하에게 부탁하는 것이오. 그것은 황제가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그로 인해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오. 그러니 귀하가 가서 저들을 돌려보내고 황제라는 자도 설득켜 주면 고맙겠소,
천우의 말에 화천악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이곳에서 왕야의 신분을 내세우고 싶지는 않았소, 그리고 더욱 남감한 것은 귀하의 말대로 군사들을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하지만 내게는 그럴 만한 권한이 없다는 것이오.
비록 내가 호국천위왕이라는 신분이기는 하지만 황실의 혈통은 아니오, 다만 본문의 시조께서 건국의 태조와 연이 있으셨기에 그러한 신분이 주어졌던 것이고, 이후로 호천문의 문주에게는 호국천위왕이라는 신분도 함께 이어졌던 것이오.
하지만 선사 때부터는 황실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기에 황실에서도 호국천위왕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황제폐하는 만나 보지도 못한 생태요.
다만 선사께서 황실을 위해 한번은 도움을 주라는 당부가 있었기에 이번 일에 주제넘게 나서게 되었던 것이고, 또한 현영왕전하만을 만나 뵙고 신분을 밝혔을 따름이오. 그러니 왕야의 신분이라고는 하지만 황제의 명을 받아 출병한 군사들을 회군시킬 권한은 없는 것이오.
화천악이 솔직하게 자신에 대해서 밝히고 권한 밖의 일임을 말했지만 천우는 변함없는 태도로 그를 주시하며 말했다.
그럴 수 없다면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것이오.
그 말에 화천악의 안색이 다시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나는 아직 이해할 수 없지만 방금 전 귀하의 말대로라면 애초에 병사들을 희생시킬 목적을 지닌 사람은 바로 천마신교의 대종사가 아니겠소,
하지만 지금 천마신교는 모두 귀하에게 충성을 맹세한 상태이고, 대종사라는 자도 분명 그러한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오. 즉, 귀하가 나선다면 오히려 대종사라는 자도 별달리 손을 쓸 수 없는 것 아니겠소.
염치없는 말이기는 하지만 나는 귀하가 나서서 대종사라는 자의 뜻대로 되지 않도록 해주길 부탁드리고 싶소, 그리고 귀하라면 병사들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쫓아 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고 있소, 귀하가 사정을 보아주신다면 나는 현영 왕야와 함께 목숨을 걸고서라도 황제폐하께 간하여 더 이상 귀하를 적대시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보겠소.
천우는 화천악의 말에 잠시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하지만 대종사와 연루된 제독태감이라는 자는 돌아갈  수 없소, 오히려 그가 없는 것이 귀하가 황제를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오.
하지만''''그가 현영 왕야를 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은 단지 추측일 뿐이지 않소, 명확한 증거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턱대고 그를 해친다면 오히려 황제페하를 설득시키는 데 더욱 어려움이 따르게 될 것이오.
하지만 천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는 반드시 없어져야 할 자요. 하지만 귀하의 말처럼 명분은 필요할 것이오. 그래서 하는 말이오만''''그가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서는 귀하의 도움이 필요하오.
화천악은 자신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천우의 말에 움찔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호기롭게 말했다.
귀하의 말이 모두 사실이고 또한 그의 음모가 밝혀질 수 있다면 당연히 나설 것이오.내가 어찌하면 되는 것이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오. 단지 귀하가 가서 이곳의 일이 모두 처리되었다고 말하고 회군을 요청하면 되는 것이오.
그 말에 호기롭던 표정을 짓고 있던 화천악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그럼 나보고 '''' 가서 거짓말을 하라는 것이오?
거짓말은 아니오. 귀하의 목적은 황실의 안위를 지키는 것이고, 나는 분명히 황실과 더 이상 부딪치길 원치 않는다고 했으니 이곳의 일은 처리된 것이나 다름없소, 다만 그들은 다른 의미로 생각하겠지만'''''
음'''내가 이곳의 일이 처리되었다고 말하면 더 이상 병사들을 이끌고 천마신교로 향할 이유가 없어지게 되니 제독태감이나 대종사라는 자가 본색을 드러낼 것이라는 말이구려, 알겠소, 그렇게 하리다.
화천악은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는 못했지만, 그가 생각하기에도 천우의 말이 모두 사실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그 방법 외에는 달리 없을 것 같았고, 또한 그러한 것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에는 현영왕도 천우에게 은혜를 입게 되는 것이기에 황제를 설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그때, 한쪽에서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던 단리종후가 나서며 말했다.
이 늙은이 역시 함께 가도록 하리다.
천우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단리종후는 깊숙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천우를 보며 다시 말했다.
비록 내 제자가 천마신교의 첩자였다고는 하나, 그가 죽고 대종사라는 자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라면''''일단은 이 늙은이에게 우선권이 있다고 생각이오.
천우는 단리종후의 모습에서 무한한 분노를 느낄 수 있었기에 다시 한 번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모용휘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두 눈에 이글거리는 분노를 담고 있는 의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님께서도 잠시 한 노사가 되어주셔야겠습니다.
갑작스런 천우의 요청에 동사왕이 흠칫하며 그를 바라보자 천우는 항상 깊숙이 눌러쓰고 있는 자신의 낡은 죽립을 향해서 천천히 손을 가져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 모습에 기대와 호기심이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는 동안 천우는 천천히 죽립을 벗어 들었고, 어느새 그의 모습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인상의 냉무심이 되어 있었다.
엇!
절세미남자라 들었는데''''
듣던 바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천우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던 천마신교의 사람들이 가벼운 경호성을 발하는 기운데, 동사왕도 천우가 한 말의 의미를 파악하고는 곧이어 만체변용술을 이용해 평범한 중늙은이 모습인 한 노사가 되었다. 그제야 사람들도 천우의 얼굴이 변용한 모습임을 알아차리고는 아쉬운 감을 드러내었다.
천우는 냉무심의 모습으로 죽립을 벗어 든 채 한편에서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혈살대주 서귀명을 바라보며 지시를 내렸다.
서 대주는 수고스럽겠지만 이 길로 돌아가서 천마신교의 고수들을 전부 이리로 집결시키도록 하시오.
그 말에 서귀명을 비롯해 주위 사람들이 흠칫 놀라며 천우를 바라보았다.
본교의 고수들을 말입니까?
그렇소, 
얼마나'''
가능하면 많을수록 좋소.
알겠습니다.
그 즉시 혈살대주 서귀명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신형을 틀어 천마신교가 있는 쪽으로 빠르게 쏘아 나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화천악이 놀라서 다소 걱정스런 어투로 물었다.
어째서 천마신교의 고수들을 ''''
걱정 마시오. 그들이 싸움에 가담하게 될 일은 없을 것이오. 다만 필요하다면 천마신교의 실체를 보여주려는 것뿐이오.
그렇다면 몰라도''''
그 말에 화천악은 안도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주위 사람들도 천우가 한 말의 의미를 단지 황군이나 정파 무림인들에게 천마신교의 실체를 보여주어 겁을 주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의미가 단순히 정파 무림인들이나 병사들에게 천마신교의 실체를 보여주겠다는 의미가 아니었음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수상한 자들이 오고 있습니다.!
환한 달빛 아래 진군을 멈춘 채 숙영 준비를 하도록 지시한 현영왕은 호위 무장의 말에 고개를 돌려 전면을 응시했다.
이미 현영왕의 주위로는 호위무장들이 경계태세를 갖춘 채 서 있었고,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제독태감 조덕인과 동창의 고수들도 예리하게 눈을 빛내며 다가서는 자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인영들이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현영왕은 가장 선두에서 쏘아오고 있는 자가 화천악임을 알아보고는 반가운 기색을 띄우며 앞으로 나섰다.
전하, 위험합니다.
그 모습에 호위무장 중 하나가 다급성을 토하자 현영왕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 선두에서 오고 있는 사람은 본왕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 걱정할 것 없다. 또한 그는 본왕과 같은 왕야의 신분이기도 하니 그대들은 함부로 무례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현영왕의 말에 주위 사람들이 놀라는 가운데 유독 창백한 안색을 지닌 제독태감 조덕인이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현영왕을 향해 물었다.
전하, 황실에 소신이 모르는 왕야가 계신단 말씀이십니까? 조덕인은 일신의 공력이 뛰어나 멀리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화천악을 필두로 뭇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데 선두의 인물은 그에게 낮선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현영왕이 같은 왕야의 신분이라고 하자 의문을 표시한 것이다.
제독태감도 들어보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호국천위왕이란 신분으로 본 황실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사람일세. 제국 성립 초기에 건국 황제에 의해 정해진 신분으로 몇 대에 걸쳐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번 일로 인해 그가 본왕을 찾아왔네, 아마도 신분을 감추고 역도들과 함께 이곳으로 왔던 모양인데.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니 우리가 오는 줄 알고 빠져나온 모양일세.
현영왕의 말에 조덕인은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으로는 의구심과 함께 무척이나 놀라고 있었다.
그 역시 황셀의 수호자 역할을 한다는 호국천위왕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현영왕의 말처럼 지난 몇 대에 걸쳐 황싱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호국천위왕의 존재가 단맥되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갑작스럽게 호국천위왕이란 존재가 이곳에 나타났으니 조덕인으로서는 놀랍고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조덕인이 더욱 안력을 돋우며 쾌속하게 쏘아오고 있는 화천악과 나머지 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가장 선두에서 오고 있는 호국천위왕이라는 인물은 한눈에 보기에도 애송이에 불과했고 그 뒤로 보기만 해도 섬뜩한 인상을 지닌 흑의 청년과 복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낡은 죽립을 쓴 인물, 그리고 평범한 인상의 중늙은이가 전부였다.
그러나 선두의 호국천위왕이라는 애송이도 그렇지만 그 뒤를 따르는 3인의 움직임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워 조덕인은 은연중에 눈살을 한껏 찌푸렸다. 범상치 않은 무공을 지닌 저들이 만약 호국천위왕이라는 애송이의 수하들이라면 자신에게 성가신 존재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덕인이 다가서는 그들을 주시하며 내심 이런전런 궁리를 하는 동안 천우와 동사왕 그리고 단지종후는 군영에서 오 장여 정도 앞에서 멈추어 섰고, 화천악만이 진영 앞쪽으로 나서 있는 현영왕에게 가까이 다가서서 포권으로 가벼운 예를 취하였다.
왕야를 이토록 빨리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한데 어찌 이토록 빨리 출정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까?
이미 어느 정도는 내막을 알고 있는 화천악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인사를 겸한 질문으로 예를 올리자 현영왕은 그 물음에 가벼운 웃음을 발하며 대답해 주었다.
하하! 나 역시 자네의 무사한 모습을 보게 되어 기쁘네, 다행히도 동창에서 마교의 위치를 파악해 두고 있었다고 하는 구먼, 한데 저들은'''''
중원에서 저와 함께 온 일행들입니다. 그보다 제가 알기로 황도에는 많은  수의 군사들이 집결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사온데 어찌 기마병들만을 이끌고 온 것입니까?
화천악이 일단 일행들이라고 대충 얼버리무고는 다시 질문을 하자 현영와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으로 다시 그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제독태감의 말로는 풍검신이라는 자가 마교라는 패악한 무림 단체에서 높은 신분을 지닌 자라고 하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신분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서 이번에 중원의 무림인들을 꾀어 데려가 공을 세우고는 정식으로 신분을 인정받음과 동시에 마교의 세력을 얻으려 한 것이라고 하였네, 때문에 역도인 그가 세력을 규합하기 전에 그를 섬멸하기 위해 이곳까지 서둘러 오자니 말을 다룰 줄 아는 황실 어림군 소속의 정예병들만을 이끌고 급히 오게 된 것일세.
현영왕의 말에 화천악은 가볍게 이채를 발하며 말했다.
그렇군요. 정확히 맞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러한 부분까지 동창에서 파악하고 있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하지만 왕야께서는 더 이상 그곳으로 향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화천악의 갑작스런 말에 현영왕이 놀라 반문하자 화천악은 태연스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황제페하께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회군을 하셔도 무방하다는 말입니다.
화천악의 말에 현영왕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다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기에 다시 물었다.
그럼''''자네가 이미 그 역도들을 모두 처리했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곳에서의 일이 모두 처리되었으니 더 이상 마교로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화천악의 대답에 현영왕은 조금 어떨떨해 하다가는 이내 기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허! 그런'''''아무튼 그리 되었다면 정말 잘된 일일세. 자네로 인해 벼다른 피해 없이 황제폐하의 금심거리가 사라졌으니 그 공이 결코 적지 않네, 그리고 황실의 어림군이 오랫동안 황도를 비우는 것도 그리 바람직한 일은 못 되니 자네의 말대로 날이 밝는 대로 서둘러 회군하도록 하세.
현영왕이 유쾌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회군을 결정하는 순간 갑작스럽게 뾰족한 음성이 장내에 울려 펴졌다.
현영왕 전하 그건 안 될 말입니다.
강경함이 느껴지는 그 어조에 현영왕이 굵은 눈썹이 꿈틀거리며 그 뾰족한 음성의 주인공을 향해 은은한 노기를 담은 시시선을 옮겼다.
무슨 말인가, 제독태감, 이미 역도들이 처리되어 회군하겠다 는데 어째서 안 될 말이라는 것인가?
그 순간 유달리 창백한 안색을 지닌 제독태감 조덕인이 현영왕에게 새삼 예를 취하며 다급히 말했다.
비록 천위 왕야께서 역도들을 처리했다고 말씀하시지만 확인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더구나 황제폐하의 명을 받들어 출정한 이상 역도들의 수급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천위 왕야의 말씀대로 정말 역도들이 처리되었다면 가서 그들의 수급이라도 베어와야 마땅할 것입니다.
조덕인의 말에 현영왕은 여전히 노기 어린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위엄이 서린 어조로 말했다.
그는 황실의수호자인 호국천위왕일세. 그가 처리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지, 무슨 수급 따위가 필요하단 말인가! 본왕은 날이 밝는 대로 회군할 것이니 그리 알도록 하게.
현영왕은 사실 황제의 명으로 어쩔 수 없이 대군을 이끌고 출정하기는 했지만, 이런 일로 황도를 수호하는 어림군 전체가 이먼 변방까지 오게 된 것을 무척이나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또한 그러한 출정 뒤에는 제독태감의 부추김이 있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에 역도들이 처리된 시점에서 굳이 더 이상 날짜를 허비해 가며 이곳에 머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제독태감의 요청을 들어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더구나 따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마교라는 곳은 중원무림 전체가 두려워할  정도로 실로 강대한 세력을 지닌 패악무도한 자들이었고, 역도의 무리가 그러한 곳의 수뇌 중 한 명이라면 아무리 내부 세력 간의 갈등이 있다 하더라도 잘못하면 마교 전체와 시비가 벌어질 가능성도 높았다.
그러한 위험성이 있기에 제독태감 역시 동창의 인물들뿐만 아니라 20만 대군의 출병을 황제께 요청한 것이겠지만, 이미 목적을 완수한 이상 그런 패악한 강호의 무리들과 쓸데없이 시비를 벌여 큰 피를 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 순간 조덕인은 갑자기 나타나 일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화천악을 당장에라도 쳐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 창백한 안색을 더욱 희게 만들며 다시 현영왕에게 말했다.
전하! 자고로 역모죄를 범한 역도에 대해서는 국법으로도 그 삼족을 멸하며, 그들이 속한 단체 역시도 같은 역도의 무리로 보고 모두 처단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풍검신은 마교에서도 곤패주라는 높은 신분을 지닌 자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처단되었다 하더라도 그가 속해 있던 마교 역시 죄를 물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다면 어찌 지엄한 황제폐하의 위험을 세울 것이며 또한 국법의 엄정함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현영왕은 평소 무능한 황제를 등에 업고 국법을 무시한 채 무소불위의 권위를 행사하던 제독태감 조덕인이 자신 앞에서 감히 국법의 엄정함을 논하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애초에 어림군들만으로 급히 출병을 한 이유는 역도들과 그들을 돕는 소수의 무리들을 급히 처리하기 위함이며, 결코 마교 세력 전체와 싸우게 될 일은 없을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어차피 마교는 세력이 갈라져 있고 역도들은 그 중 소수의 세력에게만 비호를 받고 있기에 역도들을 처리하는 데 있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 제독태감 자네인데, 이제 와서 마교 전체를 역도로 규정하여 그들 전부를 처단해야 한다니'''''''지금 자네는 나를 우롱하려는 것인가?
비록 현영왕은 제독태감의 그러한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지금 상황에서는 회군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러한 제독태감의 말을 구실삼아 역정을 내었던 것이다.
조덕인은 현영왕의 노기 가득한 목소리에 움찔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곧 태연한 신색으로 말했다.
어찌 소신이 감히 전하를 우롱할 수 있겠습니까. 소신은 분명 그렇게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하지만 역도들을 처리함에 있어 그 세력이 커지기 전에 우선 당사자들을 처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기에 처음부터 굳이 무리해서 마교 전체를 상대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당사자들을 처리하고 나면 다음 수순은 당연히 관련 인물들에 대한 색출과 함께 처벌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한데 이미 당사자들이 처리되었다면 그 후속 조치가 이루어져야 함이 마땅하옵고, 지금이 그러한 상황임을 말씀드리는 것이옵니다.
분명 말을 바꾸는 행동이었지만 그 말 자체로는 타당성이 있는 말이었고, 나중에라도 돌아가서 그러한 것을 걸고넘어진다면 또다시 줄정이 이루어질 것이 뻔했기에 현영왕은 분노한 와중에도 별달리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현영왕이 노기 띤 표정으로 조덕인을 노려보고 있을때 화천악이 나서며 약간은 비웃음조의 어투로 말했다.
그대가 바로 당금 황실에서 나는 세도 떨어뜨린다는 권세를 지닌 제독태감이시구려, 만나서 반갑소이다. 한데 제독태감께서는 지금이 그러한 후속 조치를 해야 할 상황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본왕은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을 것 같소이다.
애초에 마교 전체를 염두에 두지 않고 20만 어림군만으로 출정한 마당에 소기의 목적이 이루어졌다면 마땅히 물러선 후에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여 다음 일을 진행해야 옳은 것 아니겠소?
내 말은, 애초에 마교 전체와는 상대가 되지 않는 전력으로 출정이 이루어진 마당에 어째서 무리하게 지금이 마교 전체와 싸워야 하는 상황이라고 우기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말이오. 그대는 동창의 수반이라는 직위에 있으면서도 그러한 전술의 기본도 모른단 말이오?
이,이 찢어죽일 천방지축 애송이 녀석이 감히!
조덕인은 화천악의 모욕적인 말에 하마터면 입 밖으로 튀어 나올 뻔한 욕설을 간신히 삼키며 분노를 억누르느라 파들거리는 입술을 간신히 떼어 말했다.
천위 왕야! 말씀드렸듯이 우선적으로 역도의 무리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서둘렸던 것이고, 또한 그러한 의미로 굳이 처음부터 마교 전체를 상대할 필요는 없다는 의미였던 것이지 결코 이곳에 온 병력이 모자란 것은 아니옵니다. 소신은 지금의 전력이면 마교의 무리들을 토벌하는 것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소? 하지만 그것은 제독태감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오. 왜냐하면 본왕은 마교의 전력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오. 지금의 전력으로 마교와 싸운다면 전멸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오. 그러니 적절한 상황도 아니고, 제독태감의 생각처럼 충분한 전력도 아니오.
화천악의 그러한 말에 현영왕은 노기가 가시지 않은 와중에도 궁금증을 드러냈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마교에서 역도들을 직접 처리하고 왔으니 마교의 전력에 대해서도 살펴보았겠군, 한데 도대체 마교라는 단체가 어느 정도의 전력을 지니고 있기에 그렇듯 단언하는 것인가?
비록 긍정적인 방향으로 묻고 있는 질문이었지만 그렇게 묻는 현영왕의 표정에는 화천악의 말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 은연중에 드러나 있었다.
화천악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기에 즉시 안색을 굳히며 심각한 어조로 대답했다.
천마신교에는 자그마치 십만에 달하는 문도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 어린아이부터 시작해서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고, 제가 직접 본 일류고수 이상의 수만 해도 족히 일만에 헤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위 강호에서 말하는 초절정 이상의 고수들도 2백 명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한 전력이면 중원무림 전체와도 충분히 자웅을 겨룰 만한 전력일 뿐만 아니라, 설사 백만대군이 출정했다 하더라도 감당히기 쉽지 않은 전력입니다. 그런데도 제독태감의 주장대로 20만의 병사들만으로 미교 전체와 싸워야 한다면 그것은 집단 자살 행위와 다를 바 없는 것이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화천악의 말에 궁금증을 드러내던 현영왕의 얼굴이 경악으로 인해 굳어지면 말조차 떠듬거릴 정도였다.
그,그 정도란 말인가. 마교라는 집단이''''
그렇습니다. 왕야, 물론 정말로 백만대군이 전부 출정하여 대규모 군사 작전을 통한 집단 전투를 벌인다면 그 결과는 예측하기 힘들겠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전력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독태감의 말과는 달리 한시라도 빨리 물러서야 할 정황인 것입니다.
비록 정말로 지금 회군이 이루어져서는 곤란하겠지만, 화천악은 솔직한 심정으로 진실을 얘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얘기를 들은 조덕인은 너무나 분통이 터져서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원독이 가득한 눈길로 화천악을 노려보며 마치 교성과도 같은 날카로운 음성을 발하기 시작했다.
소신은 왕야의 그 말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비록 마교의 교도수가 십만에 달한다고 하나 그들 중에 일류고스들의 수가 1만 이상이나 된다는 말은 무림인 누구에게 물어도 터무니없는 숫자라 할 것입니다.
중원무림의 전통있는 거대 방파라 해도 그 중에 일류고수라 칭할 수 있는 자들은 일대제자들 이상 중에서도 특출한 재능이 있는 자들만이 이룰 수 있는 성취로, 아무리 많아야 문도수의 10분의 1을 넘지 않습니다. 그리고 웬만한 방파들이라면 그 비율은 수십 분의 일도 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초절정 고수로 분류되는 극마나 화경급의 고수라면 중원무림 전체를 따져도 백여 명이 있을까 말까 한 숫자인데. 어찌 십만의 교도 중에 1만에 달하는 일류고수들과 이백여 명이 넘는 초절정 고수들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당연히 천위왕야의 말씀은 상당히 비약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온 사람들은 단순히 병사들뿐만이 아닙니다.
일류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천여 명이나 되는 동창의 고수들과 역시 상당수가 일류고수들로 구성된 무림맹의 인물들, 그리고 각지의 실력있는 무림인들이 일만여 명 이상이나 저희를 따라 왔습니다. 이 정도의 전력이라면 왕야께서 말씀하신 상당히 비약된 마교의 전력과 부딪쳐도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직접 부딪쳐보기 전에는 알 숭 없는 말뿐인 상황이었기에 조덕인도 지지 않고 나름대로 설득력있는 반론을 제기했다.
화천악은 조덕인이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중간중간 왕야에 대한 예의도 생략하며 하는 말에 그 또한 화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코웃음을 발하였다.
흥! 제독태감께선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함부로 본왕의 말을 허튼소리로 치부한단 말이오? 더구나 무림인들은 전통적으로 황실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그들이 도움을 줄 것이라고 자신한단 말이오. 만약 지금이라도 무림인들이 그냥 먼저 돌아가겠다고 한다면 그 땐 어찌할 것이오. 그때도 제독태감께선 충분한 전력임을 말할 수 있겠소?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중원의 정파 무림인들로, 마교와 오랜 세월 동안 적대 관계에 있던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도 정파물림의 맹주가 역도이자 마교도인 풍검신의 계략에 빠져 위험에 처한 것을 알았기에 분노하여 온 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어찌 쉽게 그냥 돌아갈 리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저희가 마교와 싸울 때 분명히 힘을 보탤 것입니다.
이제는 내심의 분노가 극에 달해 거의 무표정한 기색을 하고 있는 조덕인이 그렇게 말하자 화천악은 혀까지 차며 어쩔 수 없다는 어투로 말했다.
쯧쯧쯧! 제독태감께서 이렇듯 끝까지 억지를 부리시니 증거를 보여 본왕의 말이 사실임을 확실히 밝혀야 하겠구려.
하지만 본왕이 확실한 증거를 보여 제독태감의 말이 모두 잘못된 것임을 밝힌다면 그때는 단순히 본왕과의 견해 차이가 있었던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독태감이 정말로 중대한 실수를 범한 것이 되고, 또한 고의적으로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려 했다는 죄가 성립될 수도 있소, 그때는 제독태감께서도 그에 대한 책임을 지셔야 할 텐데''''어떻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마교와 싸워야 하며, 지금의 전력으로도 충분하다고 억지를 부리실 참이오?
화천악의 그러한 말에 조덕인은 내심 흠칫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무시하며 속으로 냉소를 발했다.
흥! 지금의 상황에서 네놈이 무슨 재주로 증거 따위를 보일 수 있단 말이냐?어차피 직접 마교와 부딪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빌어먹을 애송이 녀석, 머지않아 네놈은 기필코 내 손으로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조덕인은 내심 화천악에 대한 살심을 굳히며 이를 갈았지만, 대놓고 내색할 수는 없었기에 여전히 무표정하게 굳어진 안색으로 말했다.
정말로 소신의 생각이 틀린 것이라면 소신은 당연히 그 책임을 질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부딪쳐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고, 또한 그 결과 역시 소신의 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때는 왕야께서도 명백히 역도의 무리들을 옹호하려 한 것이 되기에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책임을 지셔야 할것입니다.
화천악의 엄포에 조독인 역시 지지 않고 은근한 협박으로 맞섰다.
결과는 호국천위왕이라는 애송이의 말이 옳았다는 것으로 드러나겠지만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제외한 모두가 결코 이곳에서의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기에 조덕인으로서는 얼마든지 장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화천악은 그 속셈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내심 냉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되도록이면 청하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상황이 이러하니 아무래도 단리 맹주님께서 나서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순간 태연을 가장하고 있던 조덕인의 안색이 급변하고 말았다.
단리 맹주라니? 설마!
조덕인이 내심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순간, 결코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의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본인도 왕야가 하는 말과 제독태감이 하는 말을 모두 들었소만, 확실히 제독태감은 이곳에 온 병사들과 무림인들까지 모두 위험에 빠트리려 하고 있구려,
때문에 이 늙은이도 왕야가 했던 말들이 모두 사실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그리고 무림인들 또한 황실의 일에 개입하여 싸움에 끼어들 이유가 없으니 이 늙은이가 나서서라도 모두 돌아가도록 할 것이외다.
그때까지 화천악의 뒤편에서 천우의 죽립을 깊숙이 눌러쓴 채 묵묵히 서 있던 단리종후가 천천히 걸어 나오며 그렇게 말하자 조덕인은 마치 학질에라도 걸린 양 전신에 잔 경련을 일으키며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떠듬거리기 시작했다.
어찌''''그가 이곳에''''
단리종후가 나타나자 조덕인은 그제야 일이 정말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애초의 예상대로라면 무림맹주인 단리종후는 절대이곳에 무사히 나타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어찌 마교에서 자신들의 소굴로 들어온 정파무림 맹주를 순순히 내보내 준단 말인가!
비록 아직까지 살아 있을 수는 있겠지만 마교 내에서 절대로 쉽게 빠져나올 수는 없을 거라고 그 역시 분명히 말한 바 있었다. 한데 그런 단리종후가 멀쩡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왕야! 이분이 바로 정파무림의 맹주은 단리 노야이십니다. 사정이 있어 정식으로 소개를 못 드렸는데 제독태감이 저렇듯 억지를 부리니 어쩔 수 없이 이제라도 소개를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단리 모가 현영 왕야를 뵙소이다.
화천악의 소개에 가까이 다가선 단리종후가 죽립을 벗고 예를 취하자 , 그 모습이 무척이나 젊어 보인다는 것에 조금 놀라면서도 현영왕 역시 답례했다.
이제 보니 정파무림의 맹주셨구려, 무림인들이 많이 걱정하는 듯했느데 맹주의 무사함을 보면 그들도 기뻐할 것이오.
감사하오이다.
현영왕의 입장에서 보면 무례하다 여겨질 정도로 가벼운 존대였지만, 단리종후의 입장에서는 현영왕이라 해도 손자뻘도 안 되는 나이인데다가 그 역시 무림인이라 황실의 신분에 대해서는 크게 염두에 두어본 적이 없었기에 당연한 어투라 할 수 있었다.
또한 정파무림의 맹주엿던 위치가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었기에 아무림 황실의 친왕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의 예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관부와 무림인들은 서로에 대한 인식과 신분체제가 확연히 다르기에 서로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고, 병사들은 따라나섰던 무림인들도 그러한 껄끄러움 때문에 줄곧 거리를 두고 병사들을 따라왔다. 그리고 지금도 무림은들은 군영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맨 후미 쪽에 자리 잡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전면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몇 사람 정도는 선두 쪽의 병사들과 합류해 있는 상태였다. 물론 그들은 무림맹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들도 화천악이 나타나면서부터 줄곧 한족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얘기가 점점 심상치 않게 흐르자 신경을 곤두세운 채 듣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단리종후가 모습을 드러내자 크게 경악하고 말았다.
그리고 곧 그 중 한사람이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빠르게 무림인들이 모여 있는 후미 쪽으로 신형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맹주님!
사부님!
오! 정말 무사하셨군요.
잠시 후 상황을 접한 무림맹의 총관 손숙량을 비롯해 무림맹의 수뇌부들과 정파의 명숙들이 전면 쪽으로 나서며 단리종후를 보고 감격스런 외침을 발했다.
단리종후는 무림맹을 출발할 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기면서 약간 냉정한 기색으로 그들을 둘러보며 꾸짖듯이 말했다.
나도 자네들을 보니 반갑네만, 어째서 이곳까지 대책도 없이 몰려왔단 말인가!
단리종후의 질책에도 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기쁜 표정들을 여실히 들러내면서, 그 중 손숙량이 대표 격으로 나서서 말했다.
맹주님, 풍검신이 마교의 인물이라는 것을 듣고 저희들은 정말 걱정했습니다. 마침 황실에서 병사들을 출정시켜 이곳으로 향한다기에 많은 군웅들이 의기를 품고 자발적으로 합류한 것입니다.
사부님, 저희도 돌아가는 와중에 다행히 고이륵 부근에서 병사들과 무림의 군웅들을 발견하고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도 소식을 접하고 무척이나 걱정했는데 이렇게 무사하시니 정말 대행입니다.
둘째 제자인 하후성도 나서며 감격을 표시했지만 단리종후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여전히 냉정한 기색으로 몰려든 군웅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천마신교로 갔던 일은 모두 잘 처리되었으니 자네들은 이곳에서 돌아갈 준비를 하게.
예? 이대로 그냥 돌아간단 말씀이십니까?
천마신교에서의 일이 잘 처리되었다는 표현도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냥 돌아간다는 말에 손숙량이 놀라서 반문했다.
그렇네.
그렇지만''''
손숙량이 무언가 걸리는 듯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단리종후가 다시 차가워 보이는 눈빛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왜? 그럼 안 될 이유라도 있는가?
무림맹을 떠날 때의 허허롭던 모습이 아닌 예전의 깐깐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한 단리종후의 태도에 손숙량은 약간 당혹스러움을 느꼈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익숙한 모습이기도 했기에 그는 곧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다만 마교를 눈앞에 두고 그냥 물러선다는 것이 왠지''''그리고 황군도 나섰으니 힘을 합해 마교를 공격해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듯싶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맹주님께서 반대하신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천마신교가 가까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과 전정으로 자웅을 겨루자면 지금전력으로는 어림도 없네, 중원의 정사가 모두 힘을 합해 총력을 기울려도 대등한 전력이 될지 의문일세. 그러니 그대들도 허튼 색각 말고 이곳에서 모두 돌아갈 준비를 하도록 하게, 알겠는가?
그때 순찰당주인 모용휘가 나서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맹주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모용휘가 나서자 단리종후는 좀 더 차갑게 인상을 굳히며 말했다.
말해 보게.
함께 갔던 다른 분들은 모두 어찌 된 것입니까? 그리고 풍검신등은''''
모두 잘 있으니 걱정 말게.
예? 
모두 잘 있다고 했네.
그것이'''''
모두 잘 있다는 범위가 누구까지인지를 정확히 말해 주지 않았기에 모용휘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단리종후의 까다로운 옛 모습을 느끼면서도 그는 용기를 내어 다시 물었다.
풍검신과 동사왕은 어찌 되었습니까?
하지만 단리종후는 그에 대한 대답 없이 오히려 모용휘에게 냉엄한 태도를 보이며 물었다.
한데 자네는 왜 아직도 무림맹에 남아 있는 것인가?
단리종후의 엉뚱한 말에 모용휘는 흠칫 놀라며 떠듬거렸다.
예? 그게 무슨''''
이번에 큰 공을 세웠으니 자네도 황실로 돌아가 편안히 지낼때도 되지 않았나 해서 하는 말일세. 자네의 사부인 사공척도 황실의 어전 시위장으로 잘 있다 하니 이번에 돌아가면 무림맹에서 괜한 고생 하지 말고 한자리 달라고 청해 보게, 그동안의 공로가 있으니 황실에서도 섭섭하게 대하지는 않을 게 아닌가.
그 순간 모용휘는 안색이 크게 변해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더니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제독태감 조덕인을 바라보았다.
저런 등신 같은 놈''''
조덕인이 속으로 모용휘의 소심함에 욕설을 토해 낼 때 다시 누군가의 입에서 다급성이 터져 나왔다.
마, 마교다!
병사들의 수도 많긴 했지만 야공을 더욱 새까맣게 물들이며 달빛마저 가려질 정도로 어둠 속을 오르내리면서 나는 듯이 쏘아오는 수만에 달하는 인영들의 모습은 장관을 넘어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그들은 의도적으로 전신에서 마기를 한껏 발산시키며 접근해 오고 있었기에, 그들을 발견한 병사들과 군웅들은 천지간에 가득한 마기로 인해 숨조차 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저, 전투태세를 갖추어라!
히히히히힝!
두두두두두두!
당황한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들 급히 말 위에 올라타자 군마들이 울부짖기 시작했고, 뒤쪽까지 상황을 전달하기 위한 전령들의 말발굽 소리가 진중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 병사들은 물론이고 무림 군웅들까지 안색이 변해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현영왕 또한 놀라서 화천악을 보며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이보게, 마교의 무리들이 먼저 공격을 해오는 모양일세, 어쩌면 좋겠는가?
이미 마교의 무력에 대해 화천악에게 들은 바가 있었고, 또한 실지로 수만에 달하는 인영들이 달빛을 가르며 쾌속하게 쏘아오는 모습을 보자 현영왕으로서는 전의보다는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화천악에게 기대어 묻게 된 것이다.
현영왕은 비록 소심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실지로 그들의 수와 기세를 접하자 지금의 전력으로는 도저히 당해 낼 수 없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수십만 병사들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는 수장으로서 그러한 불리한 상황을 느끼면서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비정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영왕은 그 순간 화천악의 말을 듣고 곧바로 회군하지 않은 것을 절실히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한 현영왕의 모습을 보면서 화천악은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왕야!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들도 저희가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 황군을 상대로 섣불리 손을 쓰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병사들을 진정시키시고 진형을 갖춘 채 대기하라 명하십시오.
화천악의 차분한 모습에 현영왕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는 듯, 이내 긴장한 표정들을 짓고 있는 주위의 무장들을 향해 큰 소리로 명령했다.
모두들 섣불리 공격에 나서지 못하도록 하고, 진형을 갖춘 채 대기토록 하라.
현영왕의 명령에 다시 전령들이 말을 달리며 그것을 군사들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모두 당황하지 말고 말에 올라 진형을 갖춘 채 대기하라! 반복한다! 명이 있기 전까지는 진형을 갖춘 채 대기하라!
전령들의 외침이 곳곳에 울려 퍼질 때 조덕인은 오히려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현영왕을 향해 말했다.
전하! 마교의 무리들은 모두가 포악한 자들이오니 저들은 분명 이대로 공격을 감행해 올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공격을 받으면 큰 피해를 입게 되오니 저희가 먼저 선공을 취해야 합니다.
무림인들은 집단전에 취약할 수밖에 없고, 20만에 달하는 기마병의 돌격이라면 저들도 쉽사리 대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병사들이 나서게 되면 무림인들도 분명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말에 화천악의 싸늘한 음성이 이어졌다.
제독태감, 천마신교의 실체를 눈으로 직접 보고도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한단 말이오! 그리고 이제 본왕의 말이 사실임이 입증되었으니 당신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오.
하지만 조덕인은 화천악의 그러한 말에도 동요하지 않고 태연스레 말을 받았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라고 사료되옵니다. 일단은 적이 몰려오고 있으니 힘을 합쳐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흥! 그렇다면 당신이 먼저 동창의 고수들을 이끌고 나서보시오. 당신의 장렬한 희생을 보면 아마 병사들도 용기백배하여 당신의 뒤를 따를지 모르니 말이오.
그 말에 조덕인은 여인처럼 가는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이내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소신과 동창의 고수들은 이곳에서 현영왕 전하의 신변을 보호할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큰 싸움에서 지휘관의 신변을 지키는 것은 선봉에 나서서 싸우는 것보다 훨씬 막중한 일이오니 감정만으로 나설 수는 없는 일입니다.
조덕인은 어차피 마교의 고수들이 나타나 이상 목적을 이루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여유로움을 가지고 응대했다. 애초의 계획대로 먼저 혼전이 벌어지면 좋겠지만 굳이 이쪽에서 싸우려 하지 않아도 최종적으로 그가 나선다면 목적한 바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교의 고수들이 멈췄다.
또다시 누군가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정말 그의 말대로 병사들이 있는 곳을 향해 쏘아오던 마교의 고수들이 진영과 백영 장 이상 떨어진 곳에 멈추어 서며 도열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장수들과 중원의 무림인들이 일단 가슴을 쓸어내리며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마교의 진영 쪽에서 다시 대략 이백여 명 정도의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서기 시작했다. 친우와 함께 있던 천마신교의 최고 수뇌부들이었다.
일단 그들이 무조건적인 공격은 해오지 않을 듯하자 현영왕도 내심 안도의 한숨을 불어내며 조금 더 앞으로 나섰다.
전하!
호위 무장들의 걱정스런 부름에 현영왕은 한 손을 들어 그들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다가서는 자들을 막지 말고, 너희들도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섣부른 행동을 일절 하지 않도록 하라.
현영왕의 명에 호위 무장들도 전면으로 나서지 않고 뒤쪽에 도열한 채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다가서는 자들을 맞이했다.
서로 간에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그들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가장 선두에 있던 백양신마가 걸음을 멈추고 군영 앞으로 나서 있는 현영왕을 향해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중원의 대군이 어찌 본교의 영역까지 오게 된 것인지 연유를 묻기 위해 나와 보았소이다.
현영왕은 말을 거는 상대방의 비록 외모 상으로는 젊어 보였지만, 무림에는 높은 경지의 무공을 익힌 자들이 반로환동하여 젊어 보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단리종후의 예도 보았기에 그 또한 결코 젊은이가 아닐 것이라 짐작했다.
더욱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백발과 풍기는 위엄이 범상치 않은지라 현영왕도 마주 예를 취하며 대답했다.
본인은 중원의 왕야인데, 이렇듯 귀교까지 병사들을 대동하고 오게 된 것은 황실에 물의를 일으킨 자가 귀교의 인물이라 들었기 때문이오. 하지만 귀교 전체를 문제 삼을 생각은 없었고, 또한 그에 대한 문제는 이미 해결이 된 상태요. 때문에 우리는 이곳에서 회군하여 다시 중원으로 돌아갈 생각이오. 그에 대해 별다른 이견이 없다면 비록 밤길이라 하더라도 마다히지 않을 작정이오만'''
실제로 현영왕은 마교에서 막지만 않는다면 더 이상 이곳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밤길을 도와서라도 되돌아갈 작정이었다.
중원의 왕야셨군요. 아무튼 오셨던 일이 해결되어 지금이라도 돌아가시겠다면 본교에서도 굳이 돌아가시는 발걸음을 막을 이유는 없을 것 같소이다.
현영왕은 상대방이 너무 순순히 회군을 허락하자, 잠시 어리둥절한 심정이었으나 전혀 나쁠 것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내심 천만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정중한 어조로 사의를 표했다.
귀교에서 그렇게 이해해 주시니 중원의 왕야로서 감사드리오, 말씀드린 대로 더 이상 이곳에서 지체하지 않고 곧바라 돌아가도록 하겠소이다. 그런데''''
현영왕이 사의를 표명하며 잠시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자 백양신마는 곧 미소와 함께 말했다.
길을 막지 않겠다고 약속한 이상 허튼 행동은 보이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왕야께서 회군을 명하는 즉시 본인 또한 본교의 사람들을 물리도록 할 것이외다.
현영왕은 상대방이 자신의 의중을 읽고 호의를 보이자 완전히 안도하는 심정이 되어 다시 한 번 사의를 표했다.
귀교의 호희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오.
그럼 안녕히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그 순간 조덕인은 현영왕의 조금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기가 막힌 표정과 함께 명청해지고 말았다.
백여 장 밖에서 마기를 풀풀 뿜어내며 도열해 있는 수만 고수들이 마교의 인물들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어째서 마교에서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자들을 순순히 되돌아가도록 뇌둔단 말인가? 상대가 황군이기 때문에?
물론 황군이라는 존재는 껄끄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껄끄러워한다면 어찌 이들이 마교라 불리겠는가? 그들은 말 그대로 마교도인 것이다.
한데도 어느 누구보다도 예의 바르게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자들을 손님맞이하듯이 배웅이나 하려고 나왔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백번 양보해서 그들이 황군에게 껄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눈에 정파 무림인들이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것도 일만이 넘는 무림인들이 있으니 말이다.
한데 그들을 이대로 돌려보내면 천년이나 비밀을 지켜왔던 지신들의 위치나 전력이 만찬하에 드러나게 될 텐데도 안녕히 돌아가시란다.
조덕인은 지금 이 모든 상황이 마치 한편의 연극처럼 느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실지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연극!
그렇다, 연극인 것이다.
그 순간 조덕인은 갑자기 뇌리를 훑고 지나가는 무언가를 느끼며 창백한 안색이 꺼멓게 죽어들기 시작했다.
주,죽지 않았어! 풍검신은''''
갑작스런 조덕인의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다시 뾰족한 음성으로 고함을 질러댔다.
모두가 연극이다! 이건 사기란 말이야! 풍검신은 결코 죽은 게 아냐. 그렇지? 말해 봐라, 애송이놈, 이 모두가 네놈과 풍검신이 꾸민 일이지?
조덕인의 발작과 같은 외침에 현영왕이 일순간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화천악은 오히려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조덕인을 비웃기 시작했다.
조 내시,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그리고 이를 어쩌나, 감히 황실의 왕야에게 애송이놈 어쩌고라니, 이는 황족 능멸죄에 해당하는데?
이'''이 죽일 놈! 감히 죽지도 않은 풍검신을 죽었다고 거짓 말을 하다니!
어허, 무엄한지고! 어디 증거를 대봐라, 조내시, 그렇지 못하면 조내시 네놈은 감히 황족 능멸죄뿐만 아니라 외부 세력과 결탁하여 무고한 병사들은 물론 현영왕 전하까지 희생시키려 한 반역과 역모죄까지 얹어서 당연히 즉결 참수형감이다. 어떤가, 조 내시, 이쯤에서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그 순간 조덕인은 이성을 상실할 정도로 분노하여 한곳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다시 뾰족한 고함을 터트렸다.
무엇하는 것인가! 내가 이런 애송이에게 계속 이런 수모를 받는대도 아직도 나서지 않을 작정인가! 더 이상 숨길 필요도 없으니 어서 나서라, 그리고 모두 죽여버리란 말이다.


3장 대종사의 출현



후후! 정말 한심한 일이군, 안녕히 돌아가시라니'''언제부터 본교가 그렇게 예의를 갖추기 시작한 것인가?
나작한 웃음소리와 음성이었지만 그 음성은 초원 전체로 넓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악을 쓰던 제독태감에게서 그 음성의 주인에게로 향했고, 그 순간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상 대공자, 갑자기 그게 무슨 말''''
퍼석!
이게 무슨 짓'''커억!
휘류류류류!
크아아악!
맹, 맹주님의 대제자가 미쳤다.
갑자기 울려 퍼지는 비명성과 누군가의 외침에 사람들이 저마다 그의 주변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드러나는 참혹한 광경!
사람들은 그와 그의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주검들을 바라보며 저마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은 채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한 사람의 머리를 수박처럼 터트려 버리고 또 한 사람의 목을 수도로 그대로 관통시킨 뒤 돌풍과도 같은 강기를 일으켜 순식간에 방원 삼 장여 내의 사람들을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어육으로 만들어 버린 단리종후의 대제자 한상은 질퍽한 육편과 핏물 속에서 태연히 걸어 나오며 피식 웃었다.
이거 뜻밖인걸? 당신은 어째서 놀라지 않는 것이오. 사부? 순식간에 벌어진 그러한 참혹한 광경에도 아무런 표정 변화없이 그런 한상을 주시하고 있던 단리종후는 그 물음에 나직하면서도 침착한 음성을 흘렸다.
그대가 내 제자가 아닌데 내가 놀랄 이유가 없지 않는가.
그 말에 한상은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의외라는 표정과 함께 말했다.
호오! 그럼 내가 당신의 제자가 아님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단 말이오? 그럴 리가 없을 텐데'''아무튼 그것을 알고 있었다면 진정 놀라운 일이오. 혹시 내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소?
천마신교의 대종사치고는 너무 유치한 장난이로군,
단리종후의 가라앉은 음성에 한상의 모습을 하고 있는 대종는 진정으로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더니 곧이어 다시 나직한 괴소를 흘렸다.
후후! 이거 아무래도 내가 그동안 귀하에 대해서 잘못 판단하고 있었던 모양이오. 얼마 전에 깨달음을 얻더니 정말 많이 발전했구려, 도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오?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닌 것 같은데''''그리고 그런 모습을 하고 있으면 손을 쓰기가 거북하니 이제 내 제자의 모습은 그만 돌려주는 게 어떻겠소,
그때 백양신마가 나서며 약간은 떨림이 있는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진정''''대종사이시오?
그러한 물음에 여전히 한상의 모습을 한 대종사의 시선이 백양신마에게로 향하며 가볍게 혀를 차기 시작했다.
쯧! 불과 1년도 함께하지 않은 무림맹주가 나를 알아보는데 백년 이상을 함께했던 자네가 나를 못 알아본단 말인가? 게다가 자네의 그러한 태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안녕히 가시라니''''자네가 그 말만 안 했어도 번거롭게 내가 이렇게 나서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 아닌가.
그 말과 함께 한상의 모습을 한 그의 얼굴에 잠시 검은 기운이 흐르는 듯하더니 어느새 단리종후의 대제자인 한상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평범해 보이는 인상의 30대 장한 한 명이 서 있었다.
다만 특이한 것은 그의 눈에는 흰자위가 없이 먹물을 뿌려놓은 듯 온통 검게 물들어 있어 평범한 인상과는 달리 무척이나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대,대종사를 뵈오이다.
대종사를 뵙습니다!
한상의 모습이 사라지고 평범해 보이는 인상의 장한이 나타나자 백양신마는 급히 예를 올렸고, 그 뒤편에 서 있던 이백여명의 천마신교 수뇌들 역시 허리를 굽히며 일제히 예를 올렸다.
그리고 백여 장 밖에 도열해 있던 천마신교의 오만여 고수들도 모두 서둘러 오체투지의 자세를 취하며 예를 올렸기에 그 모습이 마치 검은 파도가 밀려가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참! 그러고 보니 나도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본교로 갔던 풍검신이란 아해는 어찌 되었는가? 묵월이 그런 엉뚱한 행동을 한 것은 그가 천마곤패를 지니고 있기 때문임은 알겠는데''''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네, 물론 지금 상황을 보니 대충 짐작이 가긴 하네만''''
대종사는 평소에도 본좌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 듯 백양신마에게 질문을 하면서도 나라는 호칭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는 본교의 곤패주가 되었습니다.
그 말에 대종사의 검은 두 눈에서 잠시 이채가 발했다.
그렇군, 그럼 소여천, 그 녀석은 죽은 것인가?
그렇습니다.
흠'''확실히 예상 밖이야, 그가 강한 것은 알았지만 그 짧은 기간에 소여천 그 녀석을 처리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말일세.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 무사히 살아 있기만 해도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자리에 묵월과 함께 본교로 향했던 사람들 중 단 두 사람만이 보이질 않는구먼,
그 말과 함께 대종사의 흑안이 냉무심과 한노사로 변장해 있는 천우와 동사왕에게로 향하자 한 노사의 모습을 한 동사왕이 코웃음을 발하며 나섰다.
흥! 그런 것도 못 알아차린다면 마교의 두목 노릇을 할 자격이 없는 거지, 한데 마교의 두목쯤 되는 작자가 어째 하는 짓이 그 모양인 거지? 치사하게 남의 제자로 변장하고 있지를 않나, 황실의 내시 놈과 음모나 꾸미질 않나, 그리고 누가 마교 두목아니랄까 봐 등장하면서 꼭 그렇게 피를 봐야만 하는 거냐? 그런 거 안 해동 마교 두목쯤 되면 웬만한 녀석들은 다 겁을 먹는 다고.
한 노사의 얼굴을 한 동사왕에게서 사정없이 독설이 터져 나오자 대종사는 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하! 여전히 그 독설은 매섭기 짝이 없군, 사실 동사왕 자네는 무공보다는 그 독설이 더 무섭다네, 하지만 네게도 피치못할 사정은 있었다네, 아! 그리고 방금 전 피를 본 것은 가볍게 분풀이를 한 것이니 너무 뭐라 하지는 말게, 나름대로는 굉장히 공을 들인 일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드러나 버렸으니 어찌 화가 나지 않았겠는가. 대종사가 여유로운 태도로 말을 받자 동사왕은 다시 비웃듯이 말했다.
이봐, 지금 와서 호탕한 척해 봐야 아무 소용 없는 일이니까 애쓸 필요 없다고, 그리고 단리 늙은이에게 양보는 했지만, 나도 기다리는 것은 질색이란 말씀이야, 그러니 기다리는 사람 생각해서 그만 뜸들이고 어서 시작하는 게 어때?
동사왕의 말은 빨리 단리종후를 처리하고 자신과 한판 붙자는 내용이었기에 주변에서 어느 정도 정신을 수습하기 시작한 정파 군웅들이 분노의 기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후후! 풍검신 저 아이는 몰라도 사실 자네들은 내 상대가 아니라서 별로 상대하고픈 생각이 없다네, 하지만 무림맹주에게는 지은 죄가 있으니 상대해 주어야겠지, 사실 죄라고 할 수도 없겠지만 그러한 내막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을 것 같고''''아무튼 나는 항시 준비가 되어 있으니 아무 때고 오시게나,
대종사의 그러한 말에 한 겹 얼음을 씌운 듯한 표정으로 서있던 단리종후가 서서히 기세를 일으키기 시작했지만 대종사는 여전히 태연스런 표정으로 뒷짐까지 지어 보이는 여유를 보였다.
단리종후는 무림맹을 출발하기 직전 무극검법의 궁극의 초식이라는 무극 일원결을  깨우쳐 무극검도의 완성을 이루었다.
무극일원결은 세상과 만물의 이치를 흐르는 원리로써 자신의 뜻이 머무는 곳에 검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심검도라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뜻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상하게 하거나 죽일 수도 있다는 의발상인 심즉살의 경지를 이루었다.
하지만 대종사를 상대로는 쉽게 뜻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다.
대종사 역시 이미 오래 전에 진정한 마를 깨달은 자였고, 그것은 만류귀종의 원리로써 깨달은 바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었기에 그 스스로가 단리종후의 뜻이 머무는 곳을 느낄 수 있었고, 또한 스스로가 그에 동화되어 단리종후의 뜻이 머무는 곳을 역시 심기로 모두 차단하고 있었기에 단리종후로서는 선뜻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동사왕은 단리종후가 기세만 일으킨 채 대종사를 노려보고만 있자 답답하다는 어투로 천우를 향해 말했다.
단리 늙은이도 옛날에는 꽤나 성깔이 있었는데 어째 요즘은 죽는 날만 기다리는 맥 빠진 늙은이가 따로 없단 말일세. 벌써 대종사란 자에게 주눅이 들어 겁을 먹고 있는 것 같으니 저 상태로 과연 검이나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는지 모르겠네,
그 말에 천우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너무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단리 맹주 역시 이미 육신의 경게를 넘어가 보았기에 대종사에게 전혀 뒤질 바가 없습니다. 다만 너무 대종사를 의식하고 있기에 아직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어차피 단리 맹주에게 섣불리 공세를 취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천우의 말에 동사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야? 그럼 저 대종사라는 작자가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말이잖나? 처음부터 알아봤지만 허풍도 심한 게 저 작자, 마교 대종사라기보다는 꼭 어디 뒷골목의 삼류 건달패 두목 같단 말일세, 혹시 저 작자도 가짜 아닐까?
동사왕의 그러한 말에 천우가 냉무심 얼굴에 희미한 실선을 그으며 미소 짓자, 그 순간 동사왕은 문득 무언가를 느낀 듯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시 천우에게 질문을 하였다.
가만''''단리 늙은이가 육신의 경계를 넘어가 보았다고? 그럼 혹시 얼마 전에 그 물아일체를 느꼈던 시점을 말하는 것인가?
그 물음에 천우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순간 동사왕은 가일층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그 말은 ''''설마 단리 늙은이가 생사경의 경지마저 뛰어넘었다는 말은 아니겠지?
그러한 경지를 완전히 뛰어넘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벽을 넘어선 이후 단리 맹주는 육신의 경계를 벗어나 보아기에 다음 관문에 한 발짝 들여놓고 있는 상태라고 할수 있겠지요.
그 순간, 동사왕의 두 눈에서 갑자기 질투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아무튼 단리 늙은이가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 아닌가? 그럼 이 우형보다 단리 늙은이가 한 수 위의 경지라는''''
뭐가 그렇게 분한지 동사왕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씨근대며 하는 말에 천우는 다시 실선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직은 형님과 그리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동사왕은 찡그려진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그것이 왜 큰 차이가 아니란 말인가, 그러한 차이가 바로 생사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일세.
그러자 천우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결정적인 요인이 될 정도로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형님과 단리 맹주님의 차이 정도로는 역시 서로가 상대방이 지닌 기운의 허점을 정확히 알아내기란 어렵습니다. 그것은 대종사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상태에서는 서로 간에 지닌 무공의 장단점과 익히고 있는 무공의 위력, 그리고 신체 조건이나 심리적인 요인 등 여러 가지 변수에 의해서 승부가 결정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사왕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천우에게 말했다.
서로 깨달음의 경지가 비슷할 경우야 당연히 그러한 것이 더 중요한 요인이 되긴 하겠지만'''그럼 정말로 단리 늙은이와 이 우형과는 별 차이가 없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천우의 대답에 동사왕은 찡그렸던 인상을 어느 정도 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단리 늙은이는 왜 저렇게 잔뜩 얼어붙어 있는 거지? 서로 별 차이도 없다는데 냉큼 결말을 보지 않고서'''''
또다시 태평스러워진 동사왕의 중얼거림에 천우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상대방의 허를 느낄 수 없는데 너무 자신의 깨달음에만 의지하다 보면 그것은 오히려 과중한 심력을 낭비하는 결과만 가져오게 될 뿐입니다.
단리 맹주와 같은 경지에서는 초식이란 것이 무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자신이 한평생 고련하여 익힌 초식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자신의 뜻과 의지를 반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초식에 얽매일 필요는 없겠지만 단리 맹주와 같은 경지에서는 초식 그 자체가 이미 초식이란 의미를 벗어난 것이 될 것입니다.
천우의 말은 비록 크지 않았지만 중인들뿐만 아니라 서로 대치하고  있는 대종사나 단리종후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말은 단리종후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기에 충분 했다.
단리종후는 즉시 답답할 정도로 느릿하게 자신의 무극검을 뽑아 들며 대종사를 향해 무극검법의 기수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종사 역시 눈살을 찌푸리며 천우를 힐끗 응시한 뒤 무표정한 기색으로 다시 단리종후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단리종후는 더 이상 대종사를 의식하지 않고 천우의 말대로 자신이 한평생 익히고 고련해온 무극검법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무극일원결은 일정한 초식이라기 보다는 검으로써 만류귀종의 이치를 깨우치게 하는 도 라 할 수 있었다. 단리종후는 대종사를 상대로 그러한 무극일원결에 집착하느라 오히려 검을 전개해 낼 수 없었고, 그것은 오히려 스스로의 의지를 얽매이게 하는 일이었다.
물론 상대가 대종사 정도의 인물이 아니었다면 단리종후 역시 그러한 집착에 빠져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깨우침을 얻은 후 진정으로 강한 상대와 생사를 겨루어본 적이 없었고, 또한 은연중에 제자의 일에 대한 분노로 인해 완전한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기에 그 스스로가 미몽 속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천우의 말을 통해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대종사마저 의식하지 않게 되자 진정으로 마음과 의식이 열리며 뜻이 일기 시작했다.
단리종후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무극검법의 초식들을 거부하지 않은 채 곧이어 상대를 의식하지 않고 무극검법의 제1초인 무극섬을 전개해 내었다.
번쩍!
그 순간 단리종후의 손에 들려 있던 무극검이 한 줄기 잔상만을 남긴 채 갑자기 사라진 듯 보였다.
그렇게 단리종후의 무극검이 빛 그 자체가 되어 공간을 찔러들 때, 대종사 역시 무표정한 기색으로 어느새 두 손을 떨쳐내었다.
고오오오오!
쿠앙!
그러자 대종사의 손짓에 따라서 갑자기 달빛마저 가릴 듯한 검은 기운이 천지사방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고, 한순간 어둠 속에서 푸른 기운이 번뜩이는 듯 보이며 천지번복의 굉음과 함께 미친 듯한 경기의 여파가 사방으로 폭풍처럼 휘몰라치기 시작했다.
그러한 경기의 여파에 의해 주변의 땅이 온통 뒤집히며 흙먼지들이 뭉게구름처럼 하늘로 치솟아 올랐고, 화천악이 이미 수십 장씩 물러서게 했던 앞쪽의 병사들과 말들도  그 여파에 휩쓸려 다시 수장씩 날아가 내동댕이쳐졌다.
하지만 제독태감을 보호하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대종사와 단리종후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던 동창의 고수들 태반은 그 경기의 여파에 휩쓸려 육신이 산산이 부서진 채 피 먼지로 화해 날아올랐다.
장내에는 폭음에 놀란 말들의 울부짖음이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대종사의 검은 기운과 단리종후의 새파란 검기가 연신 어우러지며 굉굉한 폭음과 미친 듯한 경기의 여파를 방생시키는 통에 반경 백여 장 이내는 마치 아비규환의 혼돈 속에 빠져버린 듯했다.
현영왕 역시 화천악의 권유로 병사들을 조금 물러서게 하였지만 자신은 호위 무장들과 함께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눈앞에 벌어진 기경할 광경에 넋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현영왕과 그 주변의 인물들은 천우가 은연중에 보호하고 있었기에 별다른 피해가 없었지만 그들도 이윽고 혼비백산하여 곧바로 말을 달려 격돌하는 곳에서 멀찍이 도망쳐 나왔다.
천우와 동사왕, 그리고 천마신교의 소뇌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화천악은 현영왕을 보호하기 위해 같이 물러섰고, 제독태감과 살아남은 동창의 고수들도 현영왕과는 거리를 두고 다른 쪽으로 물러서서 얼굴에 경악을 드리운 채 그러한 격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먼지 구름 속에서 동사왕의 불만 가득한 투덜거림이 이어지고 있었다.
콜록콜록! 생사경씩이나 되는 작자들이 꼭 이렇게 먼지를 피우면서 싸워야 하는 거야?
동창의 고수들이라고 모두가 무림인들을 잘 아는 것은 아니었다. 무림에서 신분을 감추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몇몇을 제외한다면 그들이 접하는 무림인들이란 기껏해야 고관들이 거두어들인 호위 무사들이 전부랄 수 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강호상의 이삼류 수준의 무인에 불과했다.
물론 간혹 그 중에 일류고수라 할 수 있는 자도 끼어 있긴 했지만 절정고수라 할 수 있는 자들은 접해 볼 기회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고, 가끔 부딪치게 되는 일류고수라는 자들도 그리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었기에 숫자만 받쳐준다면 무림의 절정고수라 해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항상 한계를 넘나드는 혹독한 수련과 무수한 살행으로 단련된 그들의 실전 감각은 무림의 웬만한 일류고수들이라 해도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였고, 동창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제아무리 무림의 고수들이라 해도 어느 정도는 위축이 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표적이 된 자들은 제대로 실력 발휘도 못 해보고 죽거나 제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그들은 무림인이라고 해도 크게 대단하다고 여기지 않고 있었고, 강호상에 떠도는 화경급 고수들의 대결 장면 같은 것은 전부 허풍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 때문에 만약을 대비해 이미 멀찍이 물러서 있던 무림은들과 달리 그들은 태연히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고, 내공으로 치자면 태반이 강호상의 이류고수급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그들이었기에 막대한 피해를 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동창의 고수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건 말건 그런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제독태감 조덕인은 경기의 여파가 미치지 않는 곳까지 빠져나와 전혀 엉뚱한 충격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어찌 저럴 수가! 나,나는 생사경의 경지가 아니었던 것인가?
동사왕이나 화천악 등이 들었다면 배꼽을 잡고 웃을 일이었지만, 조덕인은 그 스스로를 생사경의 경지로 착각하고 있었기에 지금 이 순간 단리종후와 대종사의 격돌을 지켜보며 커다란 충격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경지를 생사경이라고 착각하고 있었기에 마교 대종사와도 손을 잡고 이곳에 온 것이었다. 설사 일이 잘못된다 하더라도 자신의 한 몸은 충분히 건사할 자신이 있었으니 말이다.
한데 그는 대종사와 단리종후의 격전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의 창백한 얼굴은 불안감으로 인해 서서히 회백색으로 질려가고 있었다.
조덕인이 그러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에는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사실 어떤 경지라는 것을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어떤 현상들로 인해 구분 짓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한 통설로 따지자면 남들이 보기에 조덕인은 생사경의 경지라 해도 큰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6갑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내공을 지니고 있었고, 환골탈태와 반로환동을 이루었으며, 거기에 더해 금강불괴라 해도 좋을 정도의 단단한 신체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것들이 조덕인의 순순한 깨달음으로 인해 생겨난 것들이 아니라 특별한 심법과 기연으로 얻게 된 영약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라는 점이었다.
따라서 육신이 그 정도의 상태라면 대부분은 의식이 함께 열려 깨달음을 얻는 것이 통상적이겠지만 조덕인은 그에 따른 의식의 각성이 전혀 없었고, 또한 그럴 여건도 아니었던 것이다.
조덕인은 당금의 황제가 즉위한 후에 견마지로를 아끼지 않았던 공로로 동창의 수반이 된 직후 성연귀비의 허락을 얻어 황실의 무고를 둘러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옥로반양진경이란 도가심법서를 찾게 되었다.
그것은 황싱의 회춘보양법으로 전해 내려오는 옥로진결의 실전된  진본이었던 것이다.
옥로반양진경은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중 하나였던 음양가에서 파생된 심법으로, 음양의 도를 추구하여 장생불사와 선인에 이르는 방법으로 추구하던 순순한 음양기에 반발한 이단의 무리들의 의해 창안된 역천의 심법이었다.
비록 그 효능 면에서는 무궁무진하다고 알려진 심법이기는 했지만, 익히는 방법이 괴이음독하고 반인륜적인 부분이 많기에 황가로 흘러 들어간 후 사장되어 버렸다. 그 중 회춘보양법에 대한 일부만이 남아서 옥로진결이라는 명칭으로 황가에 전해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옥로진결 역시도 상당히 퇴폐적인 부분이 많았고, 또한 황실 내에서도 비공식적으로나마 금서로 지목되어 있긴 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말년에 들어선 역대 황제들이나 황족들이 옥로진결을 찾아 그곳에 기술된 온갖 퇴폐적인 행위를 즐기며 그 가치를 인정해 왔던 것이다.
아무튼 조덕인 옥로반양진경이야말로 자신과 같은 사람이 익히기에는 최상의 무공임을 알아보고는 뛸 듯이 기뻐하며 그것을 은밀히 익히기 시작했고, 대성한다면 능히 불로불사지체를 이루게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옥로반양진겨을 수련하기 위해서는 늘 동남동녀의 원기가 필요했고, 때문에 성연귀비가 있던 시절에는 눈치를 보느라 크게 진정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대성하기만 한다면 성연귀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조심에 조심을 기하면서 꾸준히 수련해 오던 중 어느 날 성연귀비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조사해 본 결과 그녀가 풍검신과 동사왕이란 무림인에 의해 죽었음을 확인하게 되자 더 이상 거리낄 바가 없어찐 그는 그동안 은밀히 익히던 옥로반양진경의 완성을 위해 서습없이 동남동녀들을 납치하여 그들의 원기를 흡취하며 옥로반양진경의 완성에 매달렸다.
하지만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9성의 단계에 이르자 더 이상 발전이 없었고, 그때부터는 하루에도 십여 명씩의 동남동녀를 희생시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어느 순간부터는 황궁의 비고까지 뒤져가며 도움이 될 영약들을 찾기에 이르렸다.
그러다가 또다시 천운이 닿았음인지 황실 비고에서 깊숙이 잠자고 있던 전설상의 음양독각사의 뿔이 들어 있는 목함을 찾게 된 것이다.
음양독각사의 뿔이야말로 만년화리의 내단이나 만년삼왕에 비견될 만한 천고의 영약이었지만, 그 가치를 모르는 역대의 누군가가 단순히 불길한 물건으로 치부하고 구석에 처박아 둔 것임이 분명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음양독각사의 뿔은 천지간의 음기와 양기가 모여 고형된 기물로 인반인이 함부로 만진다면 오히려 몸속의 원기를 발려 그것만으로도 크게 몸을 상하거나 심지어 즉사 할 수도 있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예전에 누군가가 황제에게 진상한 것이라면, 그자는 오히려 황제 시해의 누명을 쓰고 참살당했을 가능성도 높았다.
아무튼 효용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더없이 위험한 물건이었지만, 옥로반양진경에는 도움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영약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었고, 그 중 음양독각사의 뿔이야말로 최고의 영약으로 기술되어 있었기에 조덕인은 그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조덕인은 더 이상 동남동녀들의 원정을 흡취하지 않고서도 단시일 내에 음양독각사의 뿔을 이용하여 옥로반양진경을 10성 대성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성을 이룬 순간, 조덕인은 강제적인 환골탈태를 경험할 수가 있었다.
물론 그의 몸은 더욱 여성스러워졌지만 그런 것은 조덕인에게 있어서는 전혀 신경 쓸 가치가 없는 일이었다.
전신에서 끊임없이 흘러넘치는 엄청난 양의 진기와 잔주름 하나 없이 말끔해진 피부, 그리고 도검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는 금강불괴의 신체를 얻게 되자 조덕인은 스스로가 무공을 익힌 무인들의 최고 경지라는 불노불사의 경지, 즉 생사경에 들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것을 실제로 확인해 보기 위해 무림인들이 말하는 화경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는 어전의 수석 시위장 사공척과도 비무를 해보았는데. 그 결과 강호상의 초절정 고수의 반열에 올라있다는 그조차 자신의 7성 공역이 담긴 일장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더불어 사공척으로부터 무림의 맹주조차 그의 일장을 무사히 받아내기는 힘들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애초에 화경의 경지조차 느껴보지 못한 조덕인이었기에 현경이니 생사경이니 하는 것에 대한 감도 없었다. 결국 화경에 이른 고수가 자신의 7성 공력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조덕인은 자신의 실력에 대해서 맹신하게 되었고, 무공의 경지 자체를 우습게 여기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내공을 겨루는 일장이었기에 사공척이 그의 막강한 내공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밀린 것이었을 뿐, 실질적인 생사결에서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내공 면에서는 확실히 무림맹주인 단리종후조차 능가할 것이라는 의미로 한 사공척의 말을 그는 실력의 차이로 받아 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옥로반양진경을 익히면서도 무리 같은 것을 고민해 보거나 따져본 적도 없었고, 10성 대성하기 전까지 남과 제대로 된 비무도 해본 적이 없었으며, 힘들게 검술이나 장법같은 초식을 수련해 본 적도 없었다. 오로지 옥로반양진경에 따라 동남동녀들에게서 그들의 원기를 뽑아내고 그것을 흡취하는 일만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옥로반양진경을 대성하게 되자 그의 주위에는 그의 내공을 능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주위에 금강불괴를 이룬 자도 없었다.
화경을 이룬 고수조차도 그의 일장을 받아내지 못하고 패배를 자인했고, 동창의 무공 교위들이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옥로반양진경을 일으켜 몸에 두르고 있으면 절대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가벼운 일수에 모두 가랑잎처럼 날아가 버렸다.
누구도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고, 자신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죽일 수 있으니 그야말로 무적이 된 것이다. 결국 그 스스로는 무인의 최고의 경지인 생사경에 이른 것이라고 착각할 수밖에 없었고, 그 주변에는 그것이 아니라고 진실을 말해 줄 사람도 없었다.
그는 황실의 고관이지 생사의 싸움터를 누비는 무인이 아니었기에 그러한 성취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없었고, 사공척조차도 조덕인의 경지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필요성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어느 날 갑지기 무지막지하게 강해진 그를 인정해 주면 그뿐이었던 것이다.
조덕인이 그러한 충격으로 멍해져 있을 때, 무시무시한 격돌의 중심지에서 허겁지겁 빠져나온 현영왕과 호위 무장들 또한 낯빛을 온통 경악으로 물들인 채 격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현영왕의 눈에 멀찍이 떨어져서 멍하니 서 있는 조덕인과 불과 백여 명도 채 안 되는 동창의 무리들이 눈에 띄었다.
그 순간 현영왕은 얼굴에 분노한 기색을 가득 띠며 곁에 있는 화천악을 향해 말했다.
정녕 이번 일이 제독태감과 마교의 대종사라는 자가 짜고서 벌인 일이란 말인가?
현영왕의 물음에 화천악은 잠시 대종사와 단리종후가 싸우고 있는 격전지에서 시선을 거두고는 그 역시 넋이 빠져 있는 듯한 제독태감을 응시한 채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제독태감은 애초부터 왕야를 노린 것입니다. 그리고 병사들은 대종사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계획을 꾸민 것입니다. 그는 천마신교가 이미 풍검신의 손에 의해 제압되었다는 것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기에 그러한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음! 감히 그런 대역무도한 짓을 꾸미다니'''
그 말에 현영왕은 분노한 기색으로 침음성을 발하다가 다시 노기 어린 어조로 말했다.
지금 당장 병사들로 하여금 저 역신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잡아들이도록 하겠네.
하지만 화천악은 현영왕을 만류하였다.
왕야, 지금은 병사들을 움직이실 때가 아닙니다. 어차피 저들은 풍검신이 있는 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말에 현영왕도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여전히 노기 어린 기색으로 화천악을 바라보며 불쾌함이 서린 어조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도 나를 속였구먼, 자네가 일행이라고 했던 그 냉혹하게 생긴 젊은이가 바로 역도인 풍검신이 아닌가.
그 말에 화천악은 깊숙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사죄했다.
왕야,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독태감의 음모를 밝히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보시는 바와 같이 단리맹주와 대종사 두 사람만의 격돌로도 저러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풍검신은'''저 두 사람은 물론,이곳에 있는 모든 고수들이 덤벼들어도 어쩌지 못할 사람입니다. 더구나 이미 천마신교 전체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상태입니다. 그런 풍검신을 어찌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황제폐하와 부딪치길 원치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저와 현영왕 전하께서 황제폐하를 설득시켜 주길 원하고 있습니다.
화천악이 그제야 본심을 밝히자 현영왕은 굵은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 지금 싸우고 있는 저들의 위세를 보니 무림의 고수들이 진정 얼마나 무서운 자들인지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네, 하지만 지엄한 황제폐하의 명을 받고 출정한 이상 어찌 이대로 모르는 척하고 회군할 수 있겠는가.
개인적으로는 그가 행한 일이 오히려 황실을 위해서 득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네, 그러나 황제폐하께서 성연귀비를 생각했던 마음이 각별했으니 그 분노가 어찌 쉽게 가라앉겠는가, 그러니 이대로 회군한다 해도 분명 황제폐하의 진노가 대단할 것이고, 오히려 황제폐하의 분노를 부추겨 더욱 많은 군사들이 출정하게 될 것일세. 게다가 제독태감의 일도 믿으려 하지 않으실 것이고''''
현영왕도 무림고수들이 얼마나 강하고 위험한 자들인지 익히 들어왔지만 두 사람의 격전을 보고 나니 정말로 그들이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확실히 저들만 해도 수십만의 병사들을 동원한다 해도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그들보다 훨씬 강하다는 풍검신을 상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황제의 명을 받고 출정한 이상 풍검신이 목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화천악이 더욱 표정을 굳히며 간절함이 느껴지는 어조로 말했다.
왕야, 진정으로 황실을 위하고 황제폐하를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말씀까지는 드리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풍검신은 결코 황제폐하와 백만대군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정말로 황실 전체가 존폐의 기로에 설 수도 있습니다. 황실 전체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다 함은 결국 국가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나온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외세에 의해 진정 황실과 국가가 위험하다 느껴진다면 아무리 적이라 해도 싸우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화친정책을 펼친 예가 적지 않습니다. 상대가 비록 국가는 아니지만 오히려 주변의 변방국들보다 더욱 강한 세력과 힘을 가진 자인온데 어찌 무리하게 그와 대적하려 하십니까. 더군다나 그 스스로 더 이상 부딪치길 원치 않고 있는데 그런 그를 굳이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왕야께서는 이 일을 단순한 역도의 무리들을 처리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를 상대하는 일은 황실 전체의 명운을 걸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 말에 현영왕은 낯빛도 석고상처럼 굳어지며 목소리에 냉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무리 자네라도 용납하기 힘든 말일세.
하지만 화천악은 현영왕의 분노를 무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왕야께서는 풍검신은 고사하고, 그의 의형인 동사왕이 황실로 쳐들어와 황제폐하를 시해하려 한다면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황제폐하뿐만이 아닙니다. 황족 전체를 그렇게 해하려 한다 해도 막을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그 순간 현영왕은 노기를 발하다가 너무 놀라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두 눈을 크게 뜨며 떠듬거리기 시작했다.
어,어찌 그런 터무니 없는 말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십니까? 물론 아무리 국법과 황실을 안중에 두지 않는 무림인들이라 해도 함부로 그런 생각을 갖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는 그는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황실과 황제폐하는 아무런 의미도, 그리고 상관도 없는 사람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황제폐하보다는 그의 명을 더 따를 것입니다.
역대의 수많은 황조들이 흥하고 망한 것이 모두 외세의 침입때문만은 아닙니다. 만약 황실의 존재 자체가 소멸된다면 그는 얼마든지 새로운 황제를 세울 수도 잇고, 그 자신이 황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그에게는 더욱 손쉬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에게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능력과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를 단순히 역도로 몰아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실 생각이십니까?
화천악의 말은 현영왕에게 있어 진정으로 그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 순간 현영왕은 장내의 굉굉한 폭음도 들리지 않았고 수만 관의 화약이 연신 터져 오르는 듯한 험악한 광경들도 눈에 들어 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마치 백짓장처럼 텅 비어버리는 듯했고 전신은 학질에라도 걸린 양 사정없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노 때문이 아니라 정말 화천악의 말대로 될 수 있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느꼈기에 몰려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의 왕조도 초대의 태상황이 기존의 왕조를 힘으로 제압하고  모든 왕족들을 말살한 후에 세운 나라였다. 그런데 상대가 그러한 힘을 갖추고 있는 자라면 그 역시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나라와 나라 간의 싸움보다 더욱 위험한 것이고, 진정그럴 작정을 한다면 손을 쓸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된 것이다.
세상의 이치란 결국 최우의 승자에게 명분이 서게 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정말로 그러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아무리 그러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아무리 그러한 행위를 성토한다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인 것이고, 세상이 바뀐다면 그것이 곧 정의가 되는 것이다.
현영왕은 어느새 자신의 장포가 식은땀으로 인해 물에라도 빠진 듯이 축축이 젖어 있다는 것을 느끼며 더욱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얼굴색 또한 이마 제독태감보다도 더욱 창백하게 질린 채 더 이상 화천악에게 화를 낼 기운도 그리고 의미도 찾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또다시 멍한 시선으로 화천악을 응시하다가 겨우 말을 꺼내었다.
진정''''그는 황제폐하와 더 이상 부딪치길 원치 않는다고 하였는가?
화천악 역시 묵묵히 현영왕의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꺼내는 그 말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제독태감의 음모를 밝힌 것이고, 또한 현영 왕야와 이곳에 온 병사들을 무사히 돌려보내려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곳에 온 병사들은 벌써 모두 희생되었을 것입니다.
현영왕은 다시 침묵하다가 힘겨운 어조로 말했다.
이곳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바로 회군하도록 하세나, 그리고'''목숨을 걸고서라도 황제폐하를 설득시켜 보도록 할 것일세.
그 말에 화천악도 안색을 굳히며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옳은 결정이십니다. 그리고'''저 또한 현영 왕야와 함께 목숨을 걸도록 하겠습니다.
화천악의 그러한 말에 그나마 위안이 된다는 듯이 현영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맙네'''그래 준다면 정말 큰 힘이 될 것이네.
어느덧 현영왕과 화천악이 대화를 나누던 순간에 연신 장내를 울리던 폭음과 광풍이 거짓말처럼 멈추어 있었고, 그에 따라 장내를 자욱이 뒤덮고 있던 먼지 구름도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현영왕과 화천악도 문득 그것을 느꼈기에 대종사와 단리종후가 격전을 치르던 곳을 주시했다.
이윽고 먼지가 거의 가라앉자 여전히 서로 마주 보고 대치해 있는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현영왕은 화천악은 화천악의 긴장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이번이 최후의 격돌이 되겠군요.
먼지가 모두 가라앉고 나자 사람들도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대종사와 단리종후의 주위 백여 장 이내가 황폐해진 채 움푹 파여 있는 것을 보고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둘의 신색은 그러한 엄청난 결돌이 있었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처음과 별로 달라진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종사는 여전히 검게 물든 흑안으로 두 손을 내린 채 단리종후를 바라보고 있었고, 단리종후는 중단세의 기수식이 아닌 검을 축 늘어뜨린 듯한 하단체를 취하고 있다는 것만이 처음과 달라진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대종사에게서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심상치 않은 변화가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언뜻 순박해 보이던 그의 얼굴에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 모를 아수라의 형상을 지닌 검은 기운이 겹쳐지는 듯하더니 그의 얼굴 자체가 그러한 아수라의 형상을 따라 변해 갔고, 그의 전신에서는 지옥의 암연과도 같은 흑무가 뭉클거리며 피어올랐던 것이다.
곧이어 대종사의 그러한 뭉클거리는 검은 기운은 대종사의 신형 자체를 감추어 버렸고, 삽시간에 일정한 형태를 이루며 변해 가기 시작했다.
그 흑무는 잠시 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변하여 암석처럼 굳어졌는데, 그것은 영락없는 거대한 아수라의 형상이었다. 그리고 안력이 좋은 사람들은 그 검은 기운으로 이루어진 아수라상의 표면이 마치 비늘과도 같은 문양을 이루고 있음도 알아볼 수 있었다.
대종사 대신 거의 이 장여에 이르는 거대한 아수라 형상이 달빛 아래 그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또다시 놀람을 금치 못하는 가운데, 자리를 지키고 있던 천마신교의 사람들 측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 저것은'''
이럴 수가! 저것은 틀림없이 천마 조사의 오대마학 중 최강의 지존마학이라는 아수라지존공이 틀림없다. 어찌 대종사가 실정된 오대마학 중 하나를''''
그러한 외침에 천우도 두 눈에 이채를 담고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그렇군,
동사왕은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그러한 아수라 형상을 쳐다보고 있다가 천우의 나직한 음성에 궁금증을 드러내었다.
뭐가 그렇다는 말인가?
예상대로 대종사가 펼친 저 기운은 일전에 기환노조라는 자가 펼쳤던 지옥혈마벽이란 수법처럼 원령들을 금제하고 가둘 수 있는 수법입니다.
그 말에 동사왕은 새삼 크게 분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결국 저 마교 대종사라는 놈은 자신의 무공을 높이기 위해서 황실의 내시 놈과 손을 잡고 20만이나 되는 병사들을 희생시키려 한 것이었군,
그러자 천우는 무표정한 기색으로 대종사를 주시하면서 조금은 굳어진 어조로 말했다.
그렇기도 하겠지만  말씀드렸던 대로 단순히 무공을 높이기 위한 방편만은 아닐 것입니다. 북천검왕이라는 자는 나중에 자신이 금제하여 가두어두었던 원령에게 자신의 몸을 제물로 주었지만, 그 수법은 무공을 높이기 위한 방법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또한 대종사나 천마의 흔적을 얻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수많은 원령들을 금제하거나 흡수하는 방법을 익히고 있다는 것은 결토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천마의 의도일 것이고, 그렇게 수많은 원령들이 필요한 이유가 분명 따로 있을 것입니다.
단언하듯이 말하는 천우의 어조에 동사왕은 또다시 분노를 드러내며 말했다.
천마가 어째서 귀신 나부랭이들을 모으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 대종사란 작자가 이미 죽은 귀신들도 아니고 멀쩡히 살아 있는 수십만의 병사들을 귀신으로 만들어 무엇에든 이용할 작정을 했다면 이미 인간임을 포기한 것이지,쯧! 어째 천마와 관련된 인간들은 하나같이 그 모양인지''''
이어지는 동사왕의 한심스럽다는 어투에 백양신마는 침음성을 발하며 말했다.
음'''대종사가 비록 패도적인 성격이긴 하지만 피를 갈구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건만'''한데 곤패주, 이 늙은이가 궁금한 것이 한 가지 있네, 천마 조사가 중원에 남겨두었다는 안배라는 것이 바로 무영탑을 말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무영탑을 찾은 것이고'''
백양신마는 문득 천우 일행이 온 뒤로 묵월에게서 들었던 천마무영패와 무영탑에 관한 얘기가 떠올랐기에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떠한 계기로 천마가 남긴 것을 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들이 무영탑을 찾았거나 그곳에 들었던 것은 아님을 천우는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알수 있었다. 오히려 그들은 무영탑을 찾으려 했을 것이고, 기환노조라는 자가 천마무영패를 노렸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인 것이다.
백양신마가 무영탑을 거론하자 천우는 문득 자신이 지니고 있는 천마무영패를 품속에서 꺼내어 들며 말했다.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영탑은 아마도''''
한데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천마무영패를 꺼내 든 순간 천우는 말끝을 흐리며 갑자기 두 눈에서 이채를 발하였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기이한 점이 천무무영패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천마무영패는 환한 달빛을 받아 은은한 홍광을 발하고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그런 홍광을 발하는 천마무영패의 중간에 마치 검은 반점처럼 둥근 달 그림자가 어려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자 천우는 문득 느껴지는 바가 있어 다시 천마무영패를 반대편으로 뒤집어 달빛에 비추어 보았다. 그러자 그 반대편에도 달그림자가 어렸지만 신기하게도 그것은 검은색이 아닌 푸르스름한 색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천우는 혼잣말처럼 나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세 개의 달'''그렇군, 세 개의 달은 바로 천마무영패를 이르는 말일지도 모르겠군,
비록 독백처럼 나직한 어조로 중얼거린 말이었지만 장내에 있는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의문을 떠올리며 질문을 하기도 전에 갑자기 검은 아수라상에 완전히 휩싸여 있는 대종사에게서 커다란 광소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하하하! 역시 천마무영패를 네가 지니고 있었구나, 크흐흐!
그 순간 커다란 광소와 함께 대종사의 아수라상에서 엄청난 마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그러한 마기로 인해 몇몇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율스런 공포심을 느끼며 전신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단리종후의 축 늘어져 있던 검이 다시 치켜 올려지며 느릿하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니, 단리종후의 검이 느릿하게 나아간다는 것은 착각일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천우나 동사왕 등은 단리종후의 검 끝이 애초에 미세한 흔들림을 보이다가 그 흔들림이 점점 커지면서 점점 커다란 동심원을 그리며 나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단지 단리종후의 검 끝이 그려내는 수많은 동심원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너무나 빠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검이 느리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느껴졌을 뿐이다.
단리종후는 비로소 무념무아의 상태로 대종사를 향해 최우의 깨달음인 무극일원결을 펼쳐내고 있는것이었다.
그 순간 아수라상에 휩싸여 괴소를 터트리고 있던 대종사의 입에서도 괴이한 음색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수라지존멸!
외침의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어느덧 아수라상의 외부에 비늘처럼 보이던 흑색 강기의 편린들이 일제히 곤두선 채 마치 검은 빛의 폭발처럼 천지사방으로 비산하기 시작했고, 그 순간 단리종후가 그리고 있던 동심원 역시 한순간 크게 증폭되며 전면의 모든 공간을 점유한 채 달빛마저 삼켜가고 있었다. 그리고 곧 대종사의 아수라상에서 발출된 강기의 편린들이 단리종후가 그러놓은 동심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광경이 이루어졌다.
치르르르르릉!
그러나 그러한 광경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던 사람들 역시 불과 몇 사람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한순간 온 세상이 암흑으로 번져가는 듯한 착각과 함께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소성만을 들을 수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전과 달리 별다른 폭음이나 흙먼지도 일지 않았다. 잠깐 동안 세상이 어둠에 잠겼다가 다시 밝아진 것뿐이었다.
어느새 아수라의 형상이 씻은 듯이 사라진 채 대종사는 다시 평범한 인상을 한 장한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고, 그와 대치하고 있던 단리종후는 여전히 무극검을 앞으로 내민 채 서 있었다.
고고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모두가 잠시 동안 시간의 흐름이 멈춘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있을 때 처음으로 움직인 사람은 바로 단리종후였다.
아니, 움직였다기보다는 한순간 신형을 비틀거리는 듯하더니 그 자리에 검을 꽃고 주저앉으며 폭포수 같은 선혈을 토해 냈다.
단리종후의 얼굴에는 어느새 거미줄 같은 상흔이 어리기 시작했고, 그의 백의 역시 조각조각 몸에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더불어 전신으로도 선혈이 베어 나와 단리종후는 삽시간에 혈인의 모습이 되어갔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눈만 크게 뜬 채 놀람을 드러낼 때, 어느새 천우가 단리종후 곁에 이르러 한 손으로 그를 향해 신비로운 빛을 흘러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단리종후의 전신에 서려 있던 상흔들이 삽시간에 아물려 흘러내리던 피가 멈추기 시작했다.
전신이 지옥불 속에 빠져든 듯한 통즈오가 함께 한동안 정신없이 선혈을 뿜어내던 단리종후는 감자기 그러한 통증이 사라지며 청량감이 밀려들자 비로소 힘없는 눈길을 들어 자신의 곁에서 연신 신비로운 빛을 흘러 넣고 있는 천우를 올려다보았다.
좀 전의 그 충고 ''''고마웠소'''쿨럭!
그 말과 함께 받은 기침을 토해 내며 단리종후가 다시 선혈을 뿜어내자 천우는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별말씀을 '''이제 제게 맡기시고 어서 운기조식을 취하도록 하십시오.
사,사부님!
맹주님!
그제야 멀찍이서 정신을 수습한 무림맹의 인물들과 단리종후의 둘째 제자 하후성이 다급한 외침을 발하며 단리종후가 있는 곳으로 신형을 날려 왔다. 그리고 천우 앞에 도착하여 그 신비로운 광경을 주시하면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또다시 머뭇거렸다.
어서 모시도록 하시오. 다행히 치명상은 면했으니 운기조식을 취하면 아무 일 없을 것이오.
천우는 단리종후의 외상과 내부의 손상된 장기들도 모두 치유된 것을 확인하고는 힐링의 수법을 거두며 그렇게 말했다.
사실 단리종후는 대종사의 아수라지존공에 의해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생태였다. 내부의 장기도 크게 손상되었고, 잠시라도 그냥 놔두었다면 전신의 피부와 근육이 모두 갈라져 나가 즉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나마 단리종후였기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도 즉사를 면했던 것이다.
하지만 천우가 펼친 힐링의 기운으로 단리종후의 치명적인 상처들은 삽시간에 모두 아물었고, 다행히 뇌와 심장만은 직접적인 손상이 없었기에 목숨을 건진 것이었다.
아티오네스가 있던 세상에서는 아무리 고위급 마법사라 할지라도 단리종후의 부상 정도라면 힐링만으로는 절대 치유할 수 없었을 테지만, 천우가 펼치는 힐링의 수법은 그러한 마법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드래곤의 용언마법이었게에 외부의 상처뿐만이 아니라 내부의 손상된 장기들도 모두 치유가 가능했던 것이다.
손숙량 등이 아직도 혈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단리종후를 급히 부축하여 물러서자 천우는 냉혹한 얼굴 그대로 대종사를 바라보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 대답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러한 말에 대종사는 다시 여유로운 표정으로 가벼운 웃음과 함께 말했다.
후후! 너는 본교의 곤패주가 되었으면서도 감히 본교의 대종사인 나에게 함부로 말하는 것인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군.
후후! 질문을 하기 전에 내 말을 먼저 들어보도록 하게. 그러면 궁금증은 아마도 상당 부분 풀릴 테니까 말이야.
천마무영패가 천우에게 있다는 것을 안 이후부터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듯이 대종사는 천우의 그러한 태도에도 화를 내지 않고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면서 미소와 함께 스스로 상황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강호에 나섰던 것은 바로 천마무영패를 찾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검마 그놈에게만은 은밀히 내 출관을 알기고 천마무영패의 소재에 대해 알아보도록 지시를 내렸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놈은 사소한 일에 휘말려 풍검신 네 손에 죽어버리고 말았지.
천마무영패를 찾는 데 본교 전체를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는 소여천 그 녀석의 오히려 방해가 될 우려가 높았기 때문이지. 그래서 나는 소여천 그 녀석이 중언에 심어둔 세력을 이용하기로 했다.
나는 첩자들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무림맹주의 대제자를 처리하고 잠시 그의 행세를 하면서 첩자들을 통해 여러 가지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은밀히 천마무영패의 종적에 대해 알아보다가 나는 뜻밖에도 중원에 천마 조사의 기운을 얻은 자들이 둘이 더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리고 그 중 한 녀석은 오히려 소여천 그 녀석에게 접근해 나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놈이 소여천에게 붙은 이유는 생각해 보니 분명 내가 지닌 자명천마종을 노렸던 것일 테고, 결국 그놈 또한 천마무영패와 자명천마종의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대종사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몰라 의혹 어린 표정들을 짓고 있었지만 동사왕이나 백양신마 등은 여실히 긴장된 표정으로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그것을 알게 되자 그놈이 어쩌면 천마무영패의 행방을 알고 있거나 혹은 이미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놈을 처리하며 소여천 그 녀석도 나에 대해 눈치 챌 우려가 있었기에 일단은 그 녀석이 그동안 움직였던 행적에 대해서 조사를 해보았다. 아무래도 특이한 흔적들을 남기는 녀석들이라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
그러다가 대막의 광풍사가 그 녀석과 그놈이 데리고 다니는 강시들에 의해 몰살을 당했다는 것도 알아낼 수 있었고, 나는 그놈이 굳이 머나먼 대막까지 가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은 분명 천마무영패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데 광풍사의 유일한 생존자 한 녀석이 다시 끈질기게 그놈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광풍사의 생존자인 그 녀석 입장에서는 씻지 못할 원한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천마 조사의 기운을 얻은 그놈도 일부러 그를 유인하기 위해 애쓰는 흔적이 여실히 보이더군, 그래서 나는 그놈이 아직 천마무영패를 얻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고, 또한 광풍사의 그 마지막 생존자 녀것이 틀림없이 천마무영패와 관련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천마신교의 사람들과 뒤쪽에 서 있던 곡나휼은 대종사에게서 광풍사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딱딱하게 안색을 굳혔다.
대종사는 그런 곡나흉에게 슬쩍 눈길을 주고는 좀 더 짙은 미소와 함께 계속해소 얘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가 그놈은 무림맹 근처로 와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계속 주변을 맴돌기 시작하더군, 그것은 광풍사의 생존자 녀석도 마찬가지였고 말이야, 그래서 나는 그놈이 소여천 그 녀석의 명으로 너를 기다리는 것임을 짐작했고, 예상대로 네가 광풍사의 생존자 녀석과 함께 무림맹에 온 것을 보고 그놈이 네게 당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광풍사의 마지막 생존자 녀석이 너와 함께 묵월을 따라 본교로 향했으니 나 역시 당연히 본교로 돌아와야 했던 것이다.
다만 묵월, 저 녀석이 엉뚱한 길을 택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중간에 돌아가야 하는 척하기는 했지만,이미 네가 무림맹에 나타나기로 한 날짜에 맞추어 사전에 제독태감에게 출병하도록 해놓았기에 당연히 도중에 저들을 만나서 이곳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이지, 그 때문에 네가 본교에서 어떠한 활약을 했는지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조금은 아쉽지만 말이야.
대종사는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는 여전히 무심한 태도로 서 있는 천우를 응시하며 다시 가벼운 읏음소리를 발하였다.
후후! 그리고 굳이 번거롭게 황실을 끌어들인 이유는 물론 상황에 따라 네 녀석을 상대하게 할 목적도 있긴 했지만, 그거야 어찌 되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보다는 다른 뜻이 있었기 때문이지, 한데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너는 그것도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더구나, 후후후!
그동안은 동사왕 저 녀석에게 휘둘리고 있는 애송이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공뿐만이 아니라 머리까지 그토록 명석하니 너는 정말 여러모로 나를 감탄시키는구나,
아무튼 처음의 계획으로는 본교의 고수들로 하여금 이곳에 온 병사들과 중원 무림인들을 모두 처리할 계획이었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네가 소여천을 죽이고 본교를 작아하리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물론 네가 본교에 도착한 이후 원로원의 비호를 받을 것이라고는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원로원에서도 모두가 너를 인정하지는 않으려 했을 것이고, 또한 소여천 그 녀석이 장악하고 있는 본교의 세력을 감안한다면 너느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대종사의 말이 거기까지 이어지자 묵묵히 듣고만 있던 천우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얼마나 음모를 치밀하게 꾸몄는가 하는 것은 관심없다. 다만 무영탑이나 천마무영패의 용도가 궁금할 뿐, 당신이 그에 대해 설명해 준다면 천마무영패를 넘겨주도록 하지,
천우의 제악이 매우 뜻밖인 듯 대종사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호오! 천마무영패를 순순히 내게 넘겨주겠다는 말인가?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후후! 하지만 천마무영패가 이곳에 있는 이상 굳이 내 손안에 들어오지 않아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곧 알 수 있을 것이니 너무 조급해 할 필요 없다.
뭐 말해 줘도 상관은 없겠지만 네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또한 나를 많이 놀라게 했으니 나도 한 번쯤은 너를 놀래 주어야 공평하지 않겠느냐.
시종일관 농담하듯이 여유롭게 응대하는 대종사를 보면서 천우는 내무심의 냉막한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조소를 머금고 말했다.
어차피 당신의 목적은 천마의 마령을 불러내어 그 힘을 얻거나, 그도 아니라면 그를 부활시키려는 것이겠지, 아니, 어쩌면 천마가 살아 있는지도 모르겠군, 그것이 놀랄 일이라면 별로 기대는 되지 않는군, 다만 그 방법이 조금 궁금했을 뿐이지만'''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면 좀 더 기다려주도록 하지.
천우의 말에 이제껏 여유로움을 보이던 대종사에게서 미소가 씻은 듯이 걷히며 안색마저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지막 말의 의미가 방법을 들었다면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자신을 처리하겠다는 의미임을 대종사도 충분히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의 안색이 굳어진 것은 아니었다.
너는 '''왜 그런 생각을 한 것이냐? 천마 조사께서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 아니냐?
대종사의 표정이 굳어진 이유는 천우의 말 중에 천마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 때문이었다. 이미 많은 부분을 알고 있는 천우였고, 또한 지금껏 천우가 한 말은 거의 모두가 사실에 근접해 있음을 대종사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천우의 그러한 말은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천우는 대종사의 굳어진 표정을 보며 여전히 조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말했다.
천만에, 애초에 천마에 관해서 들었을 때부터 나는 아직 그가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지, 그런 의미에서 당신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모두 부질없는 것이라고 말해 주고 싶군, 그가 살아 있다면 당신은 단지 그의 장난에 휘말린 것이 될 테고, 그렇지 않다 해도 그가 누군가를 위해 안배를 남겼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대종사는 천우의 말을 듣자 단지 근거없는 짐작뿐임을 알고는 다시 여유로운 표정을 회복하며 나직한 웃음소리를 흘러내였다.
후후후'''천마 조시께서 살아 계실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다니, 이제 보니 너는 무척이나 엉뚱한 구석이 있구나.
대종사는 그 말과 함께 이제는 천중을 벗어나 동쪽으로 기울어가는 만월을 힐끗 응시하고는 다시 천우에게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밤이 깊어가는 듯하니 우선은 이쯤에서 주변 정리부터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곳에 온 병사들은 너를 노리고 온 것이고, 너 또한 황실과는 벌로 감정이 좋지 않을 테니 본교의 녀석들로 하여금 먼저 병사들을 처리토록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한데'''
대종사의 은근한 말에 천우는 냉막한 어조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황실과는 더 이상 부딪치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니 그 제안은 따르지 못하겠군,
천우의 단호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대종사는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니 정말 유감이로구나, 할 수 없지, 그렇다면 번거롭더라도 내가 직접 처리를 하는 수밖에.
지금에 와서 대종사가 천마무영패보다는 오히려 병사들의 목숨에 대해 집착을 보이자 천우는 눈빛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결국 저 많은 병사들을 목숨을 원하는 이유가 저들의 목숨이 천마를 불러내기 위한 조건인 것인가?
글쎄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지.
이유가 무엇인든 허락할 수 없다.
허락? 푸하하하! 정말 재미있는 표현이로구나, 흐흐흐흐흐흐!
대종사는 천우의 말에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대종사는 한순간 웃음을 뚝 그치더니 의미심장한 어투로 말했다.
너의 그 광오함은 정말 견줄 자가 없겠구나, 그런 의미에서 네게 재미있는 얘기를 하나 더 해주도록 하마, 오래 전에 그러니까 내가 초마의 경지에 들어섰을 무렵, 나는 스스로도 모르고 있던 본신의 자아에 대해 각성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천기의 흐름을 느껴볼 수 있었다.
흥미로웠던 것은 내가  천마 조사와 같은 천마성의 주인이라는 것보다는 당세에 나 외에도 다른 오혈성의 주인들과 그에 대응해 자미와 천무성의 기운을 받은 자들까지 등장할 조짐이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차는 이었지만 역시 그때 보았던 천기대로 칠성좌의 주인들이 모두 현세에 존재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지.
대종사는 말을 하면서 천우의 반응이 궁금한 듯 기색을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천우는 냉막한 표정으로 무심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모습에 대종사는 짐짓 맥이 빠진다는 투로 말했다.
이번에는 네가 충분히 관심을 보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구나, 그것도 알고 있었다는 것인가? 아무튼 내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너는 분명 오혈성 중 천살성의 기운을 타고난 자일 것이다.
한데 의문서러운 것은 네가 아직 천살성으로서의 각성을 한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나이에 비해서 비정상적일 정도로 강한 것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저렇듯 온몸에서 서기를 줄줄이 흘리고 있는 자미성의 기운을 지닌 녀석과 함께 있으면서도 천살의 기운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더욱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네가 천살의 주인이 아니라면 아무리 광고절금의 무학을 익히고 있다 하더라도 결코 오혈성중 천괴의 주인인 소여천 그 녀석이나 다른 두 녀석도 네게 그렇게 쉽게 당했을 리가 없었을 테니 네가 천살이 아니라고는 더더욱 생각할 수가 없구나,
그 말과 함께 대종사는 다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천살성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오혈성의 수좌인 천마성의 주인에게는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냐?
대종사의 말을 들으면서 천우는 문득 예전에 검마가 죽기 전에 남겼던 말을 떠올렸다.
대종사가 천기를 잘못 짚었다고 했던가''''그러고 보니 그는 무영탑의 부름에 응하지 말라는 말을  했는데, 결국 검마는 천마의 마령이 강림하게 될 것을 우려했던 모양이로군,
천우가 무표정하게 서서 검마가 했던 말을 속으로 되뇌고 있을 때 다시 대종사의 음성이 울려 나왔다.
사실 염두에 두었던 것은 천살인 너를 비롯해 다른 세 놈들이 아니라 저기 서 있는 자미성의 기운을 타고난 녀석과 아직 찾지 못한 천무의 기운을 타고난 녀석이었는데, 엉뚱하게도 네가 걸림돌이 되어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아무튼 더 이상 다른 말은 필요없을 듯하니 이쯤에서 마무리를 짓도록 하자, 그리고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네 풍검이 어느 정도인지도 직접 견식해 보고 싶다마는 할 일이 늘었으니 그러지 못함이 아쉽구나.
그 말과 함께 대종사의 한쪽 팔이 천천히 천중을 향해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더불어 대종사의 팔소매가 조금 흘러내리면서 그의 팔목에 채워져 있는 투박해 보이는 묵빛 철환이 달빛아래 들러났다. 그 순간, 천마신교 사람들의 안색이 번하며 백양신마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자명''''천마종!



4장 뒤틀린 인과율



자명천마종? 저 팔목에 채우져 있는 철환을 말하는 겁니까?
단리종후의 부상이 심해 천우가 나서는 바람에 대종사를 상대할 기회를 놓친 동사왕이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다가 백양신마의 외침에 의문성을 토했다.
그렇네''''저 묵빛 철환이 바로 본교 대종사의 신물인 자명천마종일세.
백양신마는 여전히 대종사의 팔목에 채워져 있는 철환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동사왕의 물음에 침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동사왕이 다시 의문을 표시했다.
한데 어째서 팔찌에 종이라는 명칭이 붙은 겁니까?
저 팔찌의 표면에는 종 모양을 이룬 108개의 아주 작은 홈과 그 주위로도 기이한 문양들이 빈틈없이 정교하게 음각되어 있네, 물론 모습만으로 보자면 그러한 것들을 종이라고 표현하긴 힘들겠지만 아무튼 천마 조사께서 자명천마종이라 명명하셨기에 그 음각된 모양을 종이라고 짐작하는 것일세.
천우도 백양신마의 말을 들으며 자명천마종을 바라보았는데, 그 순간 그의 의식 속에서 아티오네스의 음성이 울려왔다.
[이봐! 저 문양들은 분명'''']
[룬어로군,]
[그래, 틀림없이 룬어들이 새겨진 것이다.]
아티오네스가 천우에게 마법을 가르치면서 마법의 근간이 되는 모든 룬어들의 조합을 천우의 의식 속에 각인시켜 두었기에 천우 역시 자명천마종에 새겨진 기이한 문양들이 룬어임을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저 팔찌에 새겨진 문양들의 정교함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저것은 드워프들의 솜씨인 것 같다.]
[드워프?]
[그래, 내가 있던 곳의 장인 종족들이지, 그들은 타고난 장인들로서 아무리 솜씨가 좋은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따를 수가 없지, 그리고 무엇보다 드래곤인 내가 드워프들이 만든 물건을 못 알아본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건 어째서지?]
[그야 드워프들은''''큼! 그냥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만 알아두어라, 아무튼 지금 중요한 것은, 저 물건에 룬어가 새겨져 있는 것도 그렇지만 저 물건이 드워프들이 만든 것이 틀림없는 이상 천마라는 인간은 분명 내가 있던 세계에 다녀온 것이 확실하다,]
그때 헬로가드의 괴이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낄낄!드래곤들에게 있어 드워프들은 절대적인 착취의 대상이지, 모든 드래곤들의 장신구들과 그들이 세공한 보석으로 가득 채워놓았을 것이다. 그러니 드워프들이 만든 물건을 못 알아본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흥! 헬로가드, 말은 똑바로 해라, 그건 착취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당한 거래다. 장신의 영역에서 광산을 개발하는 것을 허락하는 대가로 조금의 사례를 받는 것인데 그것이 어찌 착취라는 것이냐.]
[낄낄!그거야 너희 드래곤들 생각이고, 당하는 드워프들 입장에서야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이봐, 요즘 헬로가드 저 녀석이 지닌 권능에 대해서 흥미가 많은 것 같던데, 내가 저 녀석의 숨겨진 권능들을 모두 알아낼 수 있는 쉬운 방법을 알려줄까?]
[무, 무슨 소리냐?이미 내가 지닌 권능들을 모두 훔쳐가 놓고서,]
[흥! 명색이 마왕인데 겨우 그 정도 몇 가지 잔재주가 다라면 자나가던 실프도 웃겠다.]
[저, 정말이다! 더 이상 털어봐야 먼지도 안 나온다니까.]
[그것도 내가 알려주는 방법대로라면 사실인지 금방 알 수 있지, 뭐냐 하면''''그냥 저 녀석의 자아를 의식 속에 흡수해 버리면 된자, 그러면 저 녀석이 지닌 모든 것이 네 것이 되는 거지, 어때, 간단하지?]
[이,이,슬라임보다 치사한 도마뱀 녀석 같으니! 네가 그러고도 드래곤이라 할 수 있느냐!]
[뭐야? 오크보다 멍청한 마왕 주제에 누구보고 치사하다는 것이냐!]
또다시 시작된 아티오네스와 헬로가드의 말싸음에 천우가 슬쩍 눈살을 찌푸릴 때 대종사는 달빛 아래 자명천마종을 드러낸 후 기괴하게 미소 지으며 천우를 향해 말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자명천마종은 전설상의 신물일 뿐만 아니라 오대마병의 수좌를 차지하고 있는 절대마병이기도 하지, 자명천마종을 울리는 방법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바로 전설이 실현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바로 절대마병으로서의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과연 네가 견디어낼 수 있을지 보자꾸나.
그때 백양신마가 천우의 뒤편에서 약간의 걱정스러움을 담은 표정으로 동사왕을 향해 말했다.
이보게, 아무래도 자네와 나도 좀 물러서 있는 것이 좋을 것같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오?
동사왕이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백양신마를 쳐다보며 묻자 백양신마는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대종사가 자명천마종을 사용하기로 했다면 자네와 나도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일세, 전해지는 얘기로는 자명천마종이 절대마병으로서의 위력을 발휘하면 태산이라 할지라도 견디지 못한다고 하네, 그리고 자네와 내가 가까이 있으면 곤패주 역시 신경이 쓰일 것 같아서 하는 말일세.
하지만 동사왕은 어림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그런 말에 겁먹을 내가 아니오, 그리고 나 역시 생사경의 경지에 이른 몸이니 정 걱정이 되신다면 신마께서나'''어라?
동사왕은 여전히 전면을 응시하면서서 가소롭다는 투로 말하다가 어눌한 의문성을 발했다. 불현듯 천우의 신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곧이어 동사왕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지며 입은 큰 항아리만큼이나 떡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동사왕뿐만 아니라 다시금 그를 설득하려던 백양신마 역시 별다르지 않았다.
저, 저게'''도대체 무슨 일''''천 아우는 대체 어디로?
동사왕이 천우의 뒤편에서 백양신마와 가벼운 실랑이를 하는 동안 대종사는 여전히 괴이한 미소와 함께 달빛 아래 드러난 자명천마종을 통해 순간적으로 기운을 응집시켜 뿜어내었다.
찌르르르르릉!
하지만 그 음향은 오로지 천우만이 들을 수 있는, 아니 느낄 수 있는 음향이었다. 천중을 향해 들린 자명천마종에서 터져 나온 음향은 인간으로서는 들을 수 없는 음역이었고, 그 음파는 자명천마종을 중심으로 대기를 압축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러한 음파가 사물에 닿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문가지였고, 그것을 느낀 순간 천우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물론 아무리 대단한 음파라 하더라도 천우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자명천마종에서 터져 나온 음파가 자신에게만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순간 설사 대종사를 죽인다 해도 이미 퍼지기 사작한 자명천마종의 가공할 음파는 어쩔 수 없는 것 또한 문제였다. 결국 대종사는 천우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온 병사들은 물론 이고 천마신교 측 사람들의 안위조차 무시한 채 음파를 발산해 낸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설사 전면으로 몰려오는 음파를 차단시킨다 하더라도 후면과 측면으로 퍼져 나간 가공할 음파에 의해 수없이 많은 희생자들이 생기게 될 터였다. 실로 비슈누의 원반이 가진 진정한 위력에 못지않은, 어떤 면에서는 더욱 가공할 살상력을 지닌 자명천마종이었고, 고금오대마병의 수좌라는 별칭을 무색하게 만드는 위력이었다.
천우는 대상을 가리지 않는 대종사의 그러한 행위에 대해 다시금 분노를 느꼈고, 수많은 병사들과 무림인들이 쓸데없이 희생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기에 전면에서 몰려오는 음파를 역으로 가르며 빛살처럼 대종사를 향해 신형을 접근시켰다.
대종사는 전력을 기울여 자명천마종을 울린 직후에 갑자기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하더니 어느새 검은 인형 하나가 자신의 코앞에서 녹슨 철검을 느릿하게 뻗어내자 두 눈을 경악으로 흡떴다.
자신을 향해서인지 아니면 허공을 향해서 느리게만 느껴지는 녹슨 철검을 뻗어오는 그가 천우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이후에 어떤 생각을 하기도 전에 대종사는 마치 수천 개의 철종이 한꺼번에 귓가에서 깨져 나가는 듯한 엄청난 굉음을 느끼며 갑자기 세상이 사라지기라도 한 듯 시야마저도 아무것도 보고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동사왕은 갑자기 시야에서 천우가 사리진 듯 하더니 대종사가 서 있던 자리에서 반경 십여 장에 달하는 혼탁하면서도 둥근 모양을 한 엄청난 크기의 반구가 갑작스럽게 생겨난 것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그 혼탁한 반구는 곧 이리저리 이지러지는 듯하더니 사방으로 먼지를 풀풀 피워내며 모양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동사왕 등은 그 혼탁한 반구가 땅에서 피어오른 먼지로 이루어졌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동사왕 등은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기에 사방으로 흩어지는 먼지 구름들을 쳐다보며 얼떨떨해 있다가 차츰 가라앉는 먼지 속에서 대종사와 천우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또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느새 천 아우가 저기에''''한데''''대종사의 얼굴이'''
처음에는 그들이 서로 손만 내밀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곧 녹슨 철검을 하단으로 내린 채 등을 보이고 있는 천우의 표정을 볼 수 없어도 대종사의 얼굴은 확인할 수 있었기에 그 기괴한 모습에 또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천우의 흑의는 흩날리는 먼지 속에서도 여전히 말끔함을 과시하고 있었지만 대종사의 복장은 온통 먼지로 뒤덮여 있었으며, 머리와 얼굴마저도 마치 분을 바른 듯 희뿌옇게 변해 있는 상태에서 두 눈과 코, 입 그리고 귀에서까지 선혈을 줄줄 흘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먼지로 뒤덮여 오관을 구분하기 힘든 상태에서 그렇게 붉은 선혈을 줄줄 흘려내고 있느니 야차가 따로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천우는 자명천마종에서 발해진 음파가 사방으로 번져 나가자 다른 희생자들이 생기지 않도록 풍검으로 음파를 가르며 대종사에게 바짝 접근한 후에 그 상태에서 오히려 선풍검을 펼쳐 음파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결계나 다름없는 검막을 친 것이었다. 그러자 자명천마종에서 발해진 음파는 천우가 발휘한 선풍검의 검막을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내부에서 충돌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미 권능으로까지 발전해 있는 풍검이었다. 공기를 압축시켜 나가던 초음파가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선풍검의 검막 안에서 충돌을 일으켰으니 그 결과는 엄청난 내부의 폭발이었고, 그 폭발의 잔해로 이루어진 먼지 구름들 역시 천우가 만들어놓은 검막 안을 빠져나가지 못해 혼탁하면서도 거대한 반구 형태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 모든 일들이 천우가 자명천마종에서 발해진 음파를 따라 잡으며 벌인 일이었으니 아무리 동사왕이라 해도 눈으로 그 과정을 제대로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었다.
대종사 또한 직경 20장이나 되는 거대한 종 안에서 스스로 힘껏 종을 친 격이었으니 그 여파로 인해 고막과 눈동자가 모두 터져 나가 버렸고, 기혈 또한 제멋대로 뒤틀려 아직도 상황 파악은 물론 제대로 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얼마나 지났을지 모를 태곳적 같은 적막이 흐른 후에 사람들은 서서히 보이는 상황에 대해서 인식을 하기 시작했다.
풍검신이 마교 대종사를 이겼다.
그러한 생각들에 장내는 서서히 술렁이기 시작했고,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에서 희비가 엇갈렸다.
기뻐하는 사람들은 천우를 따르는 사람들과, 제독태감의 무리들을 제외한 관부의인물들, 그리고 병사들을 따라온 정파 무림인들이었다.
정파 무림인들이라고 해서 천우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종사와의 대화 중에 천마의 부활이 거론 되기 시작하자 그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어도 말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마교 대종사의 패배는 일단 안도감과 함께 기쁨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반대로 천마건곤대전의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천우에게 굴복한 대부분의 천마신교 측 사람들은 대종사의 출현과 천마조사의 부활에 대해 엄청난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있었고, 아무리 곤패주인 풍검신이 강하다 하더라도 결코 대종사를 당해 내지는 못하리라고 여기고 있었다.
한테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대종사가 참혹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그들로서는 자연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하든 천우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대종사를 무심한 눈길로 응시하고 있다가 그의 고막이 터져 나갔기에 심어로써 대종사의 정신을 일깨웠다.
{이제 천마를 불러낼 차례인 것 같군, 여력이 없다면 도와주도록 하지,]
천우의 심어가 뇌리에 울리자 대종사는 전신을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주춤주춤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미쳤어, 크큭! 하늘이 미친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악귀나찰과 같은 형상으로 마치 미친 사람처럼 떠듬거리던 대종사는 갑자기 하늘을 우러러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 천살성의 기운을 타고 난 자가 아니라 천살신 그 자체를 내려 보내다니, 하늘이 미치지 않고서야''' 크흐흐흐흐! 그렇다면 도대체 천마 당신이 남긴 안배는 무엇이란 말인가.아무리 수많은 원혼들을 이용해 절대마령으로부터 스스로의 의지를 지킨다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것이지? 내 의지를 지켜봐야  어차피 한낱 인간에 불과한 것을'''
크크큭! 결국 위대한 당신조차 하늘로부터 우롱을 당한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당신 역시 나를 우롱한 것인가. 크흐흐''''좋다! 어느 쪽이든 내 육신을 제물로 바치겠다. 세상의 파멸이 예정된 것이라면 미천한 인간은 따라야만 하겠지, 크하하하하!
비록 안구와 고막이 처져 나가고 기혈이 뒤엉켜 있는 대종사였지만 그가 공력을 실어 외치는 음성과 웃음소리는 광대한 초원을 들썩이며 사람들이 귀를 부여잡게 만들고 있었다. 더불어 얼마 전 단리맹주와의 격돌로 한차례  소요가 있은 후 간신히 진정시켰던 전마들도 또다시 놀라서 사방에서 울음소리를 게워냈다.
그런 와중에 자명천마종이 채워져 있는 대종사의 한쪽 팔이 다시 천중으로 들리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괴이한 종음이 터져 나왔다.
찌르릉! 찌릉! 찌르르릉!
마치 수십 개의 종으로 연주를 하는 듯 괴이한 운율을 지닌 종음이었다.
야공을 울리는 괴이한 종소리에 다시금 긴장하며 여전히 한쪽 팔을 높이 치켜들고 있는 대종사를 주시했다.
천우는 이번의 종음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느꼈기에 그 역시 무심한 태도로 대종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천우가 품속에서 빼어 든 채 검을 쥐지 않은 왼손에 들고 있던 천마무영패에서 기이한 반응이 일어났다. 종음에 맞추어 천마무영패가 스스로 가벼운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자명천마종의 종음이 계속 이어질수록 그 진동은 점점 강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체인 양 스스로 천우의 손에서 빠져나가려 하는 것 같았다. 한데 그 힘 또한 엄청나서 천우가 아니라면 천마무영패를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런 천마무영패를 천우는 꽉 움켜진 채 다시 손을 올려 바라보았다. 그러자 전면 쪽에 어려 있는 검은색의 달그림자가 마치 물결 속의 그림자처럼 이리저리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자 천우는 짐작이 가는 바가 있어 천마무영패를 움켜진 손에서 슬며시 힘을 풀었다.
그 순간 천마무영패는 마치 날개가 달린 새처럼 천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서서히 허공으로 치솟더니 기울어가는 달빛을 투과시켜 지상에 점점 큰 광원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도 작은 홍옥패가 스스로 그런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당연히 천우에 의해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대종사에 의해 기이한 종소리가 울려 나오기 시작한 직후에 벌어진 일이라 그런 천우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문스러워할 따름이었다.
그때 자명천마종의 울림으로 인해 잠시 말다툼을 멈추었던 아티오네스와 헬로가드의 외침이 거의 동시에 들려왔다.
[저 소리는''''틀림없이 차원의 문을 여는 마법 주문이다.]
[대단한데? 물체에 룬어를 새겨 마나의 기운을 뿜어내는 것만으로 마법 주문이 이루어지도록 하다니!]
[결국 저 패는 차원이동을 위한 매개체의 역할을 하는 물건이었군, 그럼 저 패 역시도 이곳의 물건이 아니겠군,그래.]
[흐흐! 애초에 차원의 좌표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항상 유동적이기 때문이자. 결국 두 차원을 실수없이 오가려면 양쪽에 확실한 매개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일반적인 마법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마왕의 권능을 이용한 것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놀람성과 감탄성에 이어 다시 헬로가드의 자부심 가득한 음성이 이어지는 동안, 달빛을 투과시키며 허공 중으로 떠오르던 천마무영패가 십여 장 정도에 이르러 딱 멈추어 섰다. 그리고 그 순간 약속이나 한 듯이 자명천마종에서 흘러나오던 괴이한 종음도 뚝 끊겼다.
처음 천마무영패가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 직경 한 자 정도에 불과하던 광원이 무려 삼 장여에 달하는 큰 원으로 변해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붉은빛뿐이었지만 지상에 그려지는 광원이 점점 커질수록 중심에 푸른색의 원이 섞이기 시작했고, 푸른색과 붉은색의 원이 더욱 커지면서 정중앙은 빛을 투과시키지 않는 듯 오히려 짙은 어둠이 자리했다.
하지만 손바닥만 한 옥패가 달빛을 가린다고 해서 그렇게 크고 짙은 어둠이 생길 수 있겠는가? 더욱이 그 중심에 서 있는 천우와 대종사의 모습은 짙은 어둠에 가려 일반인들의 시야로는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으니 절대 평범한 어둠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해도 그 어둠의 중심에 서 있는 천우로서는 먹물보다 더 짙은 어둠의 빛이 천마무영패로부터 뿌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백양신마로부터 넋두리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저건''''마치 형체가 없는 빛으로 이루어진 탑의 형태가 아닌가? 게다가 땅에 비추어진 저 형태는 '''혈월과 청월, 그리고 흑월의 형태'''하늘에 떠 있는 서기로운 달이 아닌 지상으로 추락한 세 개의 달'''바로 영겁과 파멸과 혼돈의 달''''
백양신마의 떠듬거리는 말이 이어지는 동안 천우는 갑자기 자신이 딛고 선 바닥이 기이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이봐! 아무래도 지금 서 있는 곳에 차원문이 열릴 것 같은데 어서 피하는게 좋겠다. 잘못하면 저곳에서 나오려는 놈과 하나로 동화돼 버릴 수도 있다고, 그 상태라면 아무리 너라 해도 목숨을 장담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설혹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말 괴물이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아티오네스의 충고에 천우가 흠칫하며 미끄러지듯이 움직여 가장 외곽의 혈원 밖으로 물러서자, 곧이어 천우가 서 있던 짙은 어둠이 밴 지면이 마치 물결치듯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대종사는 아무것도 보고 들을 수 없는 상태였지만 자신이 딛고 선 지면이 일렁이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을 느끼자 전설의 실현이 도래하고 있음을 알고는 몸의 중심을 잡으며 다시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 드디어 오는 건가, 마신이여! 내 피를, 내 영혼을 주겠다, 나를 우롱한, 그리고 그대를 우롱한 하늘을 응징하라, 세상의 모두를 피로 적시고 모든 것을 파괴하라'''' 큭! 커커컥!
하늘을 향해 미친 듯이 저주를 퍼붓던 대종사는 갑자기 숨이 막히는 듯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 답답한 신음성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는 대종사의 얼굴이 서서히 기이한 모양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입 부분이 점점 앞으로 튀어나오는가 싶더니 머리에서는 조금씩 뿔이 돋았으며 팔다리는 점점 길어지고 몸체는 부풀어 오르며 약간씩 앞으로 굽어지기 시작했다.
커컥! 천, 천마시여''''너, 너무 고통스러운'''어, 어서 빨리'''''꺼헉!
그 지독한 고통에 대종사는 여전히 자신의 목을 부여잡은 채 숨 막히는 신음성과 함께 변하가 시작한 입매로 간신히 떠듬거렸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신체의 변화는 여전히 느릿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에 모두가 심장이 멎을 만큼 놀라며 경악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어느 정도 구체적인 모습이 갖춰지기 시작하자 동사왕의 경악성이 가장 먼저 솔직하게 터져 나왔다.
저, 저것'''염소 새끼아냐?
[바,바포메트?]
[저, 저런! 나오라는 천마 놈은 안 나오고 왜 저 변태 마왕 녀석이''']
[헬로가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바포메트라면 분명 마왕 급인데 어떻게 이계인 이곳에''''?]
[낸들 아냐, 저놈이 비록 마왕들의 수치이자 최하급 마왕이긴 하지만 계약은 몰라도 직접 소환 같은 것이  될 리가 없는데''''혹시 저놈, 소멸을 각오하고 스스로 마계에서 뛰쳐나온 것 아냐?]
[뭐?그럼 마왕들도 현상계에 본신으로 나설 방법이 있다는 말이냐?]
아티오네스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기에 놀라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하고자 하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말했듯이 소멸을 각오한다면 말이야. 물론 그것도 그냥 뛰쳐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반드시 소환의 형식에 응해서 강림을 해야 하지.
하지만 마왕이 그렇게 소환에 응해 강림하게 되면 현상계에서의 죽음이 곧 소멸로 이어지게 되는데 어떤 미친 마왕 녀석이 자신의 소멸을 전제로 그런 짓을 하겠어, 당연히 없지, 마계가 생긴 이래 그런 미친 짓을 벌인 마왕은 단 한 놈도 없었고, 그러나 마왕이 현상계에 본신으로 나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마찬가지인 거다.
게다가 현상계의 육신이 형편없다면 오히려 계약에 의한 강림보다도  훨씬 더 힘을 쓰지 못하게 될 것이고, 재수없으면 강림하는 순간이 곧 소멸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데 그런 짓을 할리가 없지.]
[하지만 저건'''분명 바포메트가 맞잖아?]
[끙! 그래서 나도 놀라고 있잖아.]
대종사의 자명천마종에 의해 나타난 것이 천마가 아니라 예전에 상대했던 발록이라는 괴물과 같은 존재임을 알자 천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대상이 누구건 겁이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대했던 천마가 아니었기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은 당연했다.
[발록이라는 괴물보다는 강한 놈인가 보군,]
[뭐''''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지, 발록이 저녀석에게 대항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순수한 전투력 면에서는 저 녀석이 발록보다 위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마왕이 지니는 특유의 권능이 몇 가지 있으니 때에 따라서는 그 권능이 발록보다 더 위험한 요소가 될 수 있는 거지.
물론 내 권능을 몽땅 훔쳐간 네게는 통하지 않을 테니 그저 재롱에 불과하겠지만'''그렇다고 전투력도 아주 약한 것은 아니니 우습게 볼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인간 세상에서는 주제넘게 때때로 마신으로 취급받기도 하는 놈이니까.]
천우의 의식 속에서 대화가 이루어지는 동안 대종사의 얼굴과 몸은 거의 변화가 끝나 이미 인간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달빛마저 삼킬 듯한 검은색의 거대한 두 개의 뿔울 단 염소형상의 머리에 구부정하게 휜 몸, 그리고 엄청나게 길어진 팔다리'''전체적으로 동사왕의 말처럼 거대한 염소가 두 발로 서있는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툭!
마지막으로 안면의 눈 부위에 있던 대종사의 살점이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며 마침내 바포메트의 검붉은 마계안이 드러났다.
그 순간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며 벌벌 떨기 시작했다. 사람들보다 더욱 본능에 민감한 말들이 먼저 사방에서 미친 듯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잘 훈련된 전마들임에도 불구하고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앞발을 치켜들며 난동을 부렸고, 병사가 타고 있건 말건 대책없이 사방으로 도주하는 말들도 속출하고 있었다.
그 혼란 속에서 검붉은 마계안으로 장내를 한번 훑어본 바포메트는 입을 벌리지 않고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음성을 발하며 불만을 표시했다.
충분히 본신으로 화할 정도의 준비가 되어 있을 거라 하더니 겨우 반을 넘을 정도라니 실망스럽군, 하지만 계약에 의한 강림에 비할 바는 아니니 이 정도로도 충분하겠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그 말의 의미 같은 것은 생각해 볼 여력도 없었고, 개중에 강자라 할 수 있는 사람들만 간신히 떨려오는 마음을 다잡고 있을 뿐이었다.
이, 이럴 수가! 자명천마종의 전설이 천마 조사의 강림이 아니라 저따위 악마의 강림이라니'''''
두려움에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하는 와중에도 천마신교의 장로였던 구양헌이 믿을 수 없다는 기색으로 넋두리처럼 그렇게 말하자 비포메트의 검붉은 마계안이 그에게로 향했다.
악마라''''틀린 말은 아니지만 자존심이 상하는군, 죽어라!
커억! 아, 악마'''
단순한 말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구양헌은 동공과 고막이 터져 나가며 조금 전의 대종사의 형상처럼 칠공에서 핏줄기를 뿜어내며 간신히 악마라는 말만 남기고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그것을 본 주위 사람들은 더욱 경악하여 다급히 호신강기들을 끌어놀리며 두려움이 밴 눈길로 바포메트를 응시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천우는 자신이 잠깐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구양헌이 바포메트란 괴물에 의해 그렇게 어이없이 죽어버리자 드물게 두 눈에 분노의 기색을 떠올렸다.
하지만 일전에 있었던 발록과의 싸움으로 섣부른 격돌은 주위 사람들을 매우 위험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마법 상의 파워 워드 킬과 유사한 저 수법에서 사람들을 보호할 방법이 달리 없었으므로 일단은 주위 사람들을 피하도록 하는 것이 먼저였다. 때문에 천우는 분노를 잠시 억누르며 동사왕에게 심어를 보냈다.
[형님, 이 괴물은 일전에 보았던 박쥐 괴물보다 더 위험한 놈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을 데리고 지금 즉시 멀리 피하도록 하십시오.]
천우의 심어가 들려오자 동사왕은 본능적으로 떨려오는 몸을 가누기 위해 애쓰고 있다가 흠칫 놀라며 자신 역시 심어로 말했다.
[괜찮겠는가?]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다만 일전에 보셨겠지만 이 괴물을 상대하면서 주변을 돌보기는 어렵습니다.]
[알겠네, 부디 조심하게나.]
예전의 그 무시무시한 박쥐 괴물보다 더 위험하다는 말에 동사왕은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지만 천우의 말대로 자신을 비롯해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봐야 도움은커녕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에. 즉시 멍하니 서 있는 백양신마를 비롯해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뒤쪽의 사람들을 이끌고 멀찍이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면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 하는 세운령이나 조아를 강제로 끌고 가다시피 했다.
바포메트의 눈길이 그런 그들에게로 향할 때 천우가 천천히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덕분에 동사왕 등에게로 향하던 바포메트의 눈길이 천우에게 고정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바포메트의 마계안에는 언뜻 희열이 감돌았다.
바로 너로군,
무슨 말인가?
시치미를 뗄 작정인가? 평소의 그 오만함은 어디로 가고 발뺌을 하는 거지?
천우는 천마 대신 나타난 바포메트란 괴물의 말에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너는 천마가 보낸 것인가?
글쎄'''보냈다기보다는 제안을 받고 내가 결정한 것이지, 일종의 거래라고나 할까?
여전히 석연치 않은 대답이었지만 그 말로 인해 천우는 천마가 아직까지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슨 거래를 말하는 것인가? 그리고 어째서 천마 자신이 직접 오지 않은 것이지?
이런, 그걸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로군, 하지만 어쩌지? 애초부터 모든 계획은 천마 대신 내가 오기로 되어 있었던 것인데, 물론 천마가 오는 것으로 알게끔 만들어두기는 했지만 말이야.
이해가 가지 않는군, 네가 오는데 왜 굳이 그런 안배가 필요했던 것이지?
그야 몇 가지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지, 그 중 하나는 당연히 너 때문이기도 하고 말이야.
나 때문이란 말인가?
그렇다, 헬로가드,
그 순간 천우의 검미가 또다시 꿈틀거렸고, 그의 의식 속에서는 헬로가드의 놀람성이 터져 나왔다.
[아니! 그 죽일 놈이 왜 나 때문에 그런 안배를 펼쳐놓았다는 것이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헬로가드.]
[몰라'''나도 모른다니까. 가만'''지금 저놈이 너를 보고 내 이름을 불렀지?그렇지?]
[정확히 들었군.]
[저, 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하급 마왕 놈이 감히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어서 저놈의 보기 싫은 주둥이를 뭉개버리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아니지, 이봐, 부탁인데 네 몸좀 잠시 빌려 쓰자, 내가 이 자리에서 저 변태 염소 놈을 깨끗하게 소멸시켜 버릴 테니까. 말이야. 나중에 마계로 돌아가면 새로운 자아로 태어난 놈까지 갈기갈기 찢어서 켈베로스의 먹이로 주고 말 테다.]
하지만 천우는 흥분한 헬로가드의 말을 무시한 채 거대한 염소 괴물 형상의 바포메트에게 말했다.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군, 나는 헬로가드가 아니다. 물론 관계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이름으로 불릴 이유는 없지.
유치하군, 그저 천마가 남긴 헬로가드의 기운을 조금 얻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믿어 달라면 믿어주지.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말이다. 하긴 그토록 멍청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뻔뻔함마저 없었다면 마왕 노릇을 할 자격도 없는 거지.
그 순간 천우의 눈살이 더욱 깊이 찌푸려졌다. 그것은 바포메트의 말 때문이 아니라 그 순간 의식 속에서 헬로가드가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식의 벽을 닫고 싶었지만 일단은 참았다.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엉뚱하게도 헬로가드와 깊은 관련이 있는 듯했기에 그또한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은 없지만, 네가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고 싶군,
나는 시시콜콜 네게 그런 것을 설명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네가 알아서 좋을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말이다. 다만 네가 절대로 다시 마계로 돌아와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유중에 하나라는 것만은 밝혀두지.
천우는 그 말에 또다시 짙은 의혹을 느꼈지만 바포메트란 괴물이 더 이상 자세히 말해 주지 않으려는 듯하자 천천히 녹슨철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듣기로는 소멸을 각오하지 않으면 현상계에 나타날 수 없는 몸이라고 하더군, 천마와 무슨 계약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위험을 무릅쓸 정도라면 당연히 대가도 크겠지, 하지만 여기서 허무하게 소멸돼 버리면 억울하지 않겠나? 모든 것을 밝힌다면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주겠다. 어떤가?
천우의 그 말에 어이가 없는 듯 바포메트는 그 커다란 마계안으로 천우를 한동안 응시하더니 조금은 미심쩍다는 어투의 음성을 흘렸다.
너''''정말 헤로가드가 아닌 것이냐? 그럴 리가 없는데'''혹시 헬로가드 그 멍청한 놈이 또다시 계약이 아닌 상태로 네게 머물고 있는 것이냐? 그런 것이냐?
정답이라고 해두지.
뭐야?큭'''크허허허헝'''''그,그런'''크허허허헝'''
그 순간 전혀 웃음기를 보이지 않던 바포메트가 그 큰 입을 쩍 벌리고 온몸을 들썩이면서까지 괴상한 웃음소리를 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 순간 웃음을 뚝 그치더니 미소를 짓는 모양인 듯 그 못생긴 큰 입을 실룩거리며 말했다.
어찌 그런 멍청한 짓을 또다시 반복할 수가 ''''''정말 마계 마왕으로서 수치스런 짓은 혼자서 다 하고 있구나, 아무튼 좋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더욱 잘된 일이지, 단순히 이곳에 와서 헬로가드가 차지하고 있을 육신을 죽이는 것으로나마 지난날 내가 받았던 모욕의 일부라도 갚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면 헬로가드를 영원히 소멸시킬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로군,
계약도 없이 인간의 몸에 들어 있으니 네가 죽는다면 헬로가드 역시 소멸을 면할 수 없을 것이고, 또한 원래의 자아가 이계에서 소멸되었으니 마계에서 새로운 자아로 태어난다 해도 마왕으로서의 힘으로서의 힘을 갖추지 못할 테니 당연히 하급 마족으로 전락할테지.
나 역시 본신으로 현신한 이상 지금의 자아로는 마계로 돌아가지 못하겠지만 마계에는 헬로가드 그놈에게 이를 가는 마족들이나 마왕들이 넘쳐나니 영원한 괴롭힘을 주기에는 충분하지.
그 순간 천우의 의식 속에서 헬로가드는 거의 발광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천우로서도 견디기 힘들 정도였기에 그는 결국 의식의 벽을 치고 말았다. 저렇게 흥분한 상태의 헬로가드에게서 도움이 될 만한 말을 듣기란 기대하기 어려웠고, 눈앞의 괴물 역시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기에 일단은 정신을 집중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아티오네스 역시 바포메트란 존재에 대해 은연중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우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내 제안은 유효하니까 일단 느껴보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천우는 순순히 대답을 듣기를 포기하고 일단 소멸의 위협을 느끼도록 바포메트에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시로 했다.
그 순간, 바포메트에게 겨우어진 천우의 녹슨 철검에서 검은 기운이 스며 나오는 듯하더니 어느새 짙은 강기의 형태를 이루며 검을 완전히 둘러싸 버렸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바포메트에게서는 비웃음이 담긴 음성이 흘러나왔다.
헬로가드의 기운이 이용한 암흑의 오라인가? 다른 하급 마족에게는 조금 위협적일 수도 있겠군, 하지만 비록 완전하진 않아도 본신의 반에 해당하는 힘을 지니고 현상계에 온 나에게 겨우 그 정도의 기운을 가지고 덤벼보겠다니, 너 역시 헬로가드 못지않게 멍청한 인간이로구나.
그 말에 천우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즉시 바포메트를 향해 일검을 그어 내렸다.
비록 평범해 보이는 칼질이었지만 그것은 역풍검의 변초 중 하나를 전개해 낸 것이었다. 그 즉시 공간과 거리를 무시한 채 천우가 그어 내린 검의 궤적을 따라 백여 장의 공간이 함께 베여 나갔다.
툭!
바포메트는 비웃음을 흘리다가 갑자기 자신의 좌측에서 들려 온 뭉툭한 소리에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시커면 털 같은 것에 뒤덮인 길쭉한 무언가가 땅바닥으로 떨어져 가벼운 먼지를 피워 올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더불어 자신의 왼쪽에 붙어 있어야 마땅한 한쪽 팔이 갑자기 없어진 것도 함께 시야에 들어왔다.
잠깐 동안 사고가 정지한 순간, 바포메트의 귓가에 비웃음이 담긴 천우의 음성이 들려왔다.
정말 멍청한 염소로군, 염소를 썰 수 있는 칼만 있으면 되는거지 그것을 휘두르는 일은 전혀 별개의 일이라는 것도 모르는가.그 순간 검불게 이글거리는 바포메트의 마계안이 천우에게로 향하며 믿기 힘들다는 투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가 가진 힘의 원천이 헬로가드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단 말이냐? 설혹 그렇다 해도 어찌 인간이 지닌 힘으로 나에게 상처를 ''''
외팔이 염소, 이제 내 제안을 다시 생각해 볼 마음은 생겼는가? 그 말에 바포메트는 다시 그 괴이한 웃음소리를 발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크허허헝! 까불지 마라, 건방진 인간! 이 세게에 해당하는 마계의 인과율을 지니고 테어난 인간들은 제법 강하다 하더니 생각했던 것  이상이로구나, 그 정도라면 마음먹고 놀아줄 만하겠는걸, 하긴 헬로가드를 소멸시킬 수 있는 기회인데 너무 싱겁게 끝난다면 그것도 아쉬움이 남겠지.
순간 매끈하게 잘려 나간 바포메트의 왼쪽 어깨 부분에서 새로운 팔이 불쑥 솟구쳐 나오더니, 세로 생겨난 그 왼팔에 땅에 떨여져 있던 왼팔이 스르르 딸려 올라가 잡혔다.
생각지도 않게 아까운 힘이 줄어든 것은 아쉽긴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무기를 지니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헬로가드의 기운 때문에 몸의 일부로 다시 사용할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 순간 바포메트의 새로 생겨난 왼팔에 잡힌 나가 팔이 죽 늘어나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삼지창과 유사한 형태로 변형되었다.
천우는 그리 큰 차이는 아니지만 바포메트의 전체적인 체구가 조금은 줄어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되자 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애초에 바포메트라는 괴물 역시 신체 중 어디를 잘라내든 그것이 완전하게 타격을 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다만 같은 마계의 기운인 헬로가드의 기운이 어느 정도 타격을 입힐 수 있는지 궁금했고, 그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비록 신체의 어디를 잘라내든 재상은 할 수 있겠지만 예전의 발록처럼 다시 붙이가나 하지는 못하고, 또한 다시 신체를 재생시키는 만큼 원래의 힘이  감소한다는 것도 알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예전에 발록이 헬로가드의 기운이 천마로부터 얻는 바람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에 비해 오히려 지금이 훨씬 상대하기 편한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도저히 재생이 불가능할 만큼 조각을 내주는 일이라면 천우로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 여겼다. 다만 아직은 들어야 할 말이 있기에 손을 쓰는 것을 미루어둘 뿐이었다.
물론 바포메트는 방심하고 있다가 어이없이 자신의 팔이 잘린 것만으로도 굉장히 분노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인간을 상대로 삼안의 창을 사용한다는 것이 조금은 자존심이 상하기는 하지만, 나를 화나게 만들었으니 그만한 대가는 치르도록 해주어야겠지, 어떠냐, 지금쯤 헬로가드가 네 의식 속에서 벌벌 떨면서 설명을 해주고 있겠지? 아니면 어서 도망치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나?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테니 아마도 절망감에 몸부림치고 있겠군.
비슷하기는 했다. 단지 절망감이 아니라 분노로 인해 발광하고 있다는 게 다를 뿐,
그때,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아티오네스의 음성이 의식 속에서 울렸다.
[바포메트를 너무 만만히 보지는 마라. 비록 헬로가드의 기운에 의해 피해를 주는 것이 가능하다고는 해도 비포메트는 발록처럼 전투에 능한 마족이 아니라 마법에 능한 마족이다. 특히 듣기로는 바포메트가 사용하는 저 삼안의 창에는 세 가지 특이한 권능이 어려 있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니 헬로가드를 진정시켜서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 텐데''''그리고 나역시 때로는 긴장감이라는 느낌도 가져보고 싶다. 지금과 같은 기회가 자주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하나도 긴장하고 있지 않잖아. 지금 나야말로 조금이라도 긴장하라고 말해 주고 있는 건데 무슨 엉뚱한 소리야.]
[어떤 공격일지 궁금해 하고 있는데'''이것이 긴장감이 아니라는 건가?]
[그런''''휴우! 말을 말자, 아무튼 조심해라. 최소한 전에 발록의 마지막 공격보다 위력이 약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솔직히 천우로서는 바포메트의 공격이 그 정도라면 지금에 와서는 궁금해 할 가치도 없었다.
발록을 상대했을 당시에 처음으로 풍검을 전력으로 펼쳐보았고, 발록을 처리하고 난 이후에 오히려 그 힘이 너무 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럼으로써 새롭게 풍검에 대해 깨닫게 된 바는 결코 그 정도가 한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느끼게 되면서 풍검은 마치 스스로 살아 있는 것처럼 자신을 변모시켜 가고 있었다.
헬로가드와 아티오네스는 그것을 권능이라고 표현했지만, 그 권능도 멈추지 않고 자꾸만 커져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기에 지금으로서는 또다시 전력을 기울여 풍검을 펼친다면 어느 정도일지 천우 자신도 짐작이 가지 않는 상태였다.
때로는 막연하긴 하지만 어쩌면 자신이 딛고 서 있는 세상 전체를 지울 수 있을 정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감과도 비슷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한데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존재가 인간과 더욱 멀어지는 것이라 느껴졌기 때문에 그리 달갑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도 천우는 알 수 없는 승부 속에서 평범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그의 의형이나 백양신마 등이 얘기하던 무인으로서의 감정을 느껴보고 싶어 했지만 아티오네스의 말을 통해 자신이 갖고 있는 감정이 긴장감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닫고는 씁쓸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그리고 그러한 표정은 바포메트가 자신을 비웃는 것으로 느끼도록 하게에 충분했다.
지금쯤 겁을 먹고 벌벌 떨어도 시원치 않을 인간이 오히려 그러한 비웃음을 보이자 바포메트는 분노한 상태에서도 정말 자존심이 상하고 말았다.
천마가 나중에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니 다른 인간들은 놔두고 목적만 이루고 오라 했지만, 너로 인해 생각이 바뀌었다. 너와 이곳에 있는 인간들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죽여버리겠다. 물론 그 중에서도 너는 결코 평안히 죽지는 못한다.
그 순간 바포메트가 삼안의 창이라 부른 창의 끝 부분에서 갑자기 정말로 눈 모양 같은 것이 생겨나더니 동시에 번쩍 뜨여 각기 다른 광체를 흘려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혈광과 청광, 그리고 칙칙한 묵광이었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천우는 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천우였기에 그저 불쾌감을 느끼는 정도였지, 이미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리 물러나 있는 다른 사람들이 그 삼안의 창에 뜨인 눈들을 직시했다면 당연히 불쾌감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 속에서 타오르는 공통을 맛보고 싶으냐, 아니면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속에 갇혀 고통을 당하고 싶으냐? 그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무간의 어둠 속에서 스스로의 살과 뼈까지 씹어 먹는 고통이 영원히 반복되도록 만들어 줄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라도 살려두겠다는 말은 아니고, 네 육신이 소멸된 후에 남은 영혼이 받게 될 영원한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선택하라.
말로는 선택하라고 했지만 별로 들어주고 싶은 의사는 없는듯 바포메트는 천천히 기괴한 눈동자들이 매달려 있는 삼안의 창을 치켜들고 있었다.
아니지, 네놈에게는 특별히 그 세 가지 고통을 모두 맛볼 수 있는 혜택을 주도록 하마, 지금껏 제물로 바쳐진 어떤 인간에게도 두 가지를 한꺼번에 베풀어준 적이 없었으니 너는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그럴 의사였고 단지 공포를 느끼게 해주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천우에게는 그저 쓸데없는 수다로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러나 염소 괴물의 힘도 느껴보고 싶었으므로 그저 슬쩍 눈살을 찌푸린 채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삼안의 창을 주시하고만 있었다.
한순간 바포메트가 치켜든 삼안의 창끝에 떠진 괴안에서 더욱 짙은 광체가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이글거리는 듯 한 붉은 광채와 시리도록 파란 청색의  그리고 그 자체가 시커면 구멍처럼 느껴지는 어둠으로 이루어진 세 개의 구체가 천우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그러나 천우 역시 그냥 순순히 몸으로 맞아줄 생각은 아니었으므로 즉시 선풍검을 전개해 주변의 모든 공간을 차단시켰는데 그것은 마치 돌개바람의 형태로 주변의 빛과어둠을 밀어내는 형상이었다.
외부에서 보자면 천우를 비롯해 일정 공간이 갑자기 시야에서 빠져버린 듯한, 만약 보고 느끼는 것이 가능했다면 그런 현상이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포메트의 마계안에 비친 현상이기도 했다.
그 현상에 바포메트가 놀람을 표시하기도 전에 삼안의 권능이라 불리는 이터널 파이어와 루인 아이스, 그리고 다크 카오스의 권능이 천우가 펼쳐낸 선풍검의 막에 부딪쳤다.
확! 화르르르르!
쩌저저저저정!
고오오오오오!
온 천지가 불타오르기 시작했고, 그 불꽃들마저 삽시간에 얼음의 결정이 되어 산산이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으며, 곧이어 천지를 휩쓸고 있는 어둠의 회오리에 휘말려 사라져 갔다. 그것이 바로 영겁화의 파멸의 얼음, 그리고 어둠의 혼돈이 일으킨, 바포메트의 권능들이 빛어낸 현상들이었고 그 순간 온 세상이 마치 지옥으로 화한 듯했다.
한동안 온 천지가 그러한 불꽃과 얼음, 그리고 어둠의 회오리속에서 몸살을 앓았고, 서로 뒤엉킨 채 미친 듯이 천지를 유린하던 세 기운은 어느 순간 마치 연기가 빨려들 듯이 각자가 바포메트가 들고 있던 삼안의 창에 나 있는 괴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드러난 광경은 천지가 뒤집힌 광경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초원은 이미 초원이 아니었다. 그 어떤 불모지보다 더욱 황폐한 모습! 아니, 차라리 죽음의 땅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신기한 것은 십여 장 위에 하늘에 떠 있는 천마무영패가 여전히 멀쩡한 모습으로 지상에 삼원색의 빛을 뿌려대고 있다는 것과, 검은 빛이 머물고 있는 지면 또한 여전히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포메트에게 있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신기하다 못해 도저히 믿을 수조차 없는 일은 바로 자신이 죽이고자 한 인간이 여전히 자신의 눈앞에 멀쩡히 서 있다는 것이었다.

팔 하나 자른 답례치고는 너무 성대하군,
천우의 무심한 음성에 바포메트의 경악한 음성이 뒤따라 울려 나왔다.

이, 이럴 수가! 비록 완전한 것은 이니라지만 어찌 인간이 삼안의 권능을 받고도 멀쩡할 수가 ''''그러고 보니 좀 전의 그것은 '''너는 대체 누구냐? 인간이 삼안의 권능을 받아낼 수 있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좀 전의 그것은 분명 상급 마왕의 권능과 비견되는 공간을 지배하는 힘이었다. 천마조차도 조금 전의 공격이었다면 그처럼 멀쩡히 서 있기는 힘들 텐데. 너는'''
어리석은 생각이로군, 그럼 천마는 받아낼 수 있는 공격이었다면 나 역시 그 공격을 받아냈다고 해서 인간이 아닐 거라는 생각 자체가 우스운 것 아닌가.
억지 부리지 마라, 그건 경우가 다른 얘기다. 천마가 비록 인간이라고는 해도 그는 헬로가드의 기운을 모두 흡수한 자다. 비록 계악으로 강림한 헬로가드의 기운을 모두 흡수한 정도지만 그것만으로도 마계의 상급 마족들을 물론  하급 마왕들도 함부로 볼 수 없는 힘인데 그런 그를 어찌 인간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런 천마보다 더 강할지도 모를 네가 어찌 인간일 수 있겠는냐.

편한 대로 생각하도록  그리고 지금은 그런 걸 따지기보다는 내 제안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인 듯싶은데.

그 말에 바포메트는 움찔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조금은 당황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어, 어림없는 소리! 너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정도로 큰소리치기에는 아직 이르다. 비록 삼안의 권능을 막아냈다지만 내 힘이 그 정도가 다라고 생각했다면 건방진 생각이다. 진짜는 지금부터니까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가? 하긴 좀 전의 그 공격은 요란하기만 했지 기대했던 것 이하였다. 그럼 한 번 더 기대해 보도록 하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내 방식대로 묻기로 하겠다.

그 말에 바포메트는 마계안이 크게 흔들릴 정도로 정도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의 계획대로 완전한 본신을 이룰 수 있다면 너 따위가 감히 지금 내 앞에서 그런 건방진 말을 하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말했듯이 지금도 너의 그 말은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이다. 지금부터 그것을 절실히 느끼도록 해주마,

그 순간 바포메트의 등 뒤에 나 있는 섬모들이 불꽃같이 일어나며 모여드는 듯하더니 삽시간에 박쥐 같은 거대한 날개를 이루어 즉시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천우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곧 있을 공격에 대비했다.

순식간에 달빛의 검은 점처럼 보일 정도로 솟아오른 바포메트는 한순간 허공중에 신형을 고정시키더니 그 괴이한 웃음소리와 함께 천둥 같은 음성을 토해 내었다.
크허허허허헝! 건방진 인간아! 어디 한번 재주껏 막아봐라.

그 순간 바포메트는 자신이 쥐고 있는 삼안의 창을 힘껏 던졌다.

쿠아아아앙!

그 모습에 천우 자신도 막 바포메트를 향해 신형을 띄워 올리려다가는 안색이 급변하고 말았다. 바포메트의 손을 떠난 삼안의 창이 향한 곳은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아니라 바로 의형과 백양신마등  지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막 지면을 떠오르던 천우의 신형이 갑자기 사라진 듯 보이더니 바포메트가 던진 삼안의 창이 향하는 곳을 향해 빛살처럼 움직여 갔다. 그리고 그런 천우의 귓가에 다시 바포메트의 듣기 싫은 웃음소리와 비웃음 가득한 음성이 메아리 쳤다.

크허허허헝! 네가 인간이라니 인간으로 여겨주마, 하지만 네가 인간이기에 그 약점이 무엇인지 잘 알지, 비록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그냥 돌아가지만 언제고 반드시 네게 당한 이 수모는 천만 배로 갚아줄 것이다. 크허허허헝!

바포메트는 자신이 전력을 기울인 삼안의 권능을 천우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내자 솔직히 겁이 났다. 또한 그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에 도망갈 궁리를 한것이다.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자리를 피한 인간들 대부분이 눈앞의 인간 같지 않은 인간과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눈치 채고 있었고, 바포메트는 인간들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궁지에 몰리자 천우가 아닌 그들을 공격한 것이다.


예상대로 천우가 그들을 향해 움직이자 바포메트는 그 즉시 차원의 문이 열려 있는 지면을 향해 쏜살같이 내려오며 그래도 자존심은 남아 있었기에 두고 보자는 엄포를 남겼다.


그렇게 아득한 천공에서 지면으로 빠르게 내려오던 바포메트는 우선 차원의 문을 열고 있는 천무무영패, 아니 정확한 명칭은 삼안의 보석을 회수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삼안의 보석과 함께 그대로 지면에 열려 있는 차원의 문 안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어차피 헬로가드나 괴물인간 녀석은 자신이 있는 차원계로 올 수 없으니 아쉬운 대로 목적은 이룬 것이다.


한데 그가 막 삼안의 보석이 걸려 있는 곳에 거의 다다라 손을 뻗치는 순간, 이번에는 바포메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향해서 몰려오고 있는,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바포메트가 그 기운을 향해 시선을 돌린 순가, 바포메트의 마계안이 경악으로 흡떠지고 말았다. 자신을 향해 몰려오고 있는 기운이 나팔 모양처럼 공간을 먹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바포메트는 그것이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고, 그것에 휘말렸다가는 재생이고 뭐고 없을 것이라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순간 바포메트의 마계안에 갈등이 어렸다.


갑작스런 그 기운이 누구에 의해서 생겨난 것인지는 뻔한 일이었고, 자신이 이대로 삼안의 보석을 취하려 한다면 도저히 그 기운을 피할 재간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다시 위로 피한다면 그 괴물 같은 녀석에게 시간을 주는 셈이니 잘못하면 자신이 빠져나갈 기회를 잃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저 기세로 봐서는 삼안의 보석이 제대로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자신 역시도 원래의 차원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꼼짝없이 이계에 갇힐 판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당장 삼안의 보석을 취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위로 피했다가 다시 보석을 취하기에는 시간적여유가 없을 것 같자 바포메트는 우선 자신의 몸부터 건사하기로 했다.


삼안의 보석만 포기하다면 굳이 위로 피하지 않아도 나팔 모양으로 공간을 먹어오고 있는 무지막지한 기운을 조금 비껴서 지면으로 내려설 찰나의 여유는 있어 보였다.  그 상태라면 아무리 괴물 같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다른 인간들을 향해 던진 삼안의 창을 처리하고 다시 자신을 가로막기 전에 차원의 문으로 들어설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물론 그 충분이라는 것도 역시 찰나적인 시간에 불과하겠지만 어쨌든 자신이 무사히 빠져나갈 시간은 되는 것이다.


판단이 서자 바포메트는 삼안의 보석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려오던 방향을 조금 틀어서 천우가 발출해 공간을 먹어오는 괴물의 입에 닿지 않을 정도로 약간 바스듬하지만 더욱 빠르게 지면을 향해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천우가 발출한 기운은 삼안의 보석을 집어 삼키며 바포메트를 스쳐갔다.


바포메트는 그 즉시 순간적으로 방향을 틀어 지면에 열려 있는 차원의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물에 스며들듯이 검게 일렁이는 차원의 문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천우는 바포메트가 동사왕 등이 있는 곳을 향해 던진 삼안의 창을 따라 신형을 움직이다가 바포메트의 비웃음이 들려오자 타는 듯한 분노를 느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철검을 전력으로 내던졌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그냥 던진 것은 아니었다.


천우는 바포메트가 의형 등이 있는 곳으로 창을 던져낸 순간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의형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움직이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바포메트의 기를 놓치지 않고 있었고, 바포메트가 천마무영패를 향해 접근하는 적절한 시기에 선풍검의 묘용을 이용해 자신이 들고 있던 검을 던졌던 것이다.


선풍검은 사물을 파괴하기 위한 수법이 아니라 선풍검의 영역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보호하는 수법이었다. 당연히 천우가 던져낸 검은 바포메트를 노리고  던진 것이 아니라 바로 천마무영패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바포메트의 비열한 행위에 분노가 일긴 했지만, 우선적으로 그를 해치운다 한들 전혀 득이 될 것이 없었기에 천우는 차원의 문을 보호하기로 한 것이다.


방법은 알 수 없어도 일단 천마무영패로 인해 차원의 문이 열렸고  그런 천마무영패가 계속 그 자리에 있다면 차원의 문이 닫히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도박이긴 했지만 어쨌든 천우의 생각은 옳았고 그런 천우의 의도를 모른 채 바포메트는 선풍검이 그려내는 무지막지한 위력에 지레 겁을 먹고 천마무영패를 포기하고 몸을 피하기로 한 것이다.


만약 바포메트가 천우의 공세를 무시하고 그냥 천마무영패를 취했다 하더라도 천우가 던진 선풍검은 바포메트의 몸에 천혀 피해를 주지 않고 피해 갔을 것이다.
물론 바포메트가 어떤 행동을 하리라는 것도 천우는 어느 정도 예상했기에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아무튼 그런 의도 하에 천우가 던진 선풍검을 보고 바포메트가 방향을 꺾었을 무렵, 천우는 바포메트가 던진 삼안의 창보다 먼저 동사왕 등이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었고, 그 즉시 방향을 틀어 천공에서부터 쏘아져 오고 있는 삼안의 창을 향해 마주 신형을 띄우며 헬로가드의 권능인 마왕의 창을 발현해 엄청난 회전을 일으키며 접근하고 있는 삼안의 창을 향해 마주 쏘아보냈다.


곧 이계 마왕들이 두 권능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바포메트가 던진 삼안의 창은 산산이 부서졌고, 잔해들이 퍼져 나갈 사이도 없이 마왕의 창 안으로 모두 흡수 소멸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바포메트는 지상에 열린 차원의 문을 통해 사라지고 있었다. 모든 일들이 사람들이 눈을 두어 번 꿈쩍거릴 순간에 벌어진 것이었기에 당연히 영문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백낙천이나 동사왕 등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 모든 장면들이 마치 화폭에 담긴 그림처럼 한 장면으로 느껴졌지만, 워낙 찰나에 망막에 어렸다가 사라졌으므로 사고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천우는 바포메트가 던진 삼안의 창이 말끔히 소멸된 것으로 확인하고, 더불어 차원의 문을 통해 바포메트가 사라져 가는 것을 보면서 씁쓸한 미소와 함께 동사왕의 곁으로 내려섰다.


동사왕은 천우의 모습이 바로 곁에서 보이자 조금은 멍한 표정으로 눈을 두어 번 꿈적거리더니 말했다.
염소 괴물이 '''''다시 땅 속으로 사라졌네'''''
알고 있습니다.
천우는 동사왕의 멍한 표정에 다시 한 번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확인해 보아야 할 일이 있으니 저는 다시 저곳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다시 천우의 신형이 사라졌다가 순간 염소 괴물과 싸우던 곳에 검은 점처럼 다시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 그제야 동사왕도 어느 정도 상황이 수습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급히 그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리고 동사왕이 움직이자 마찬가지로 얼떨떨해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신형을 움직여 천우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천마무영패는 여전히 천공에 걸려 삼색의 광채를 뿌리고 있었고, 바포메트가 사라진 일렁이는 검은 지면도 아직 그대로였다. 천우는 그곳을 잠시 응시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 순간, 의식 속에서 아티오네스의 음성이 울려나왔다.


[전에도 말했지만 네가 나를 위해서 굳이 이곳을 떠날 필요는 없다,]


[약속은 지킨다. 그리고 그 약속 때문이 아니더라도 천마가 그곳에 있는 것은 확실한 듯하니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솔직히 네가 굳이 천마를 만나야 할 이유도 없지 않는가, 천마는 이곳에 없고 너는 이곳에 있으니 엄밀히 말하면 너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일 수도 있다. 네가 저 물건을 없애버리기만 하면  영원히 그렇게 되는 거지.]


[그러면 네가 있던 세상은 어찌 되든 상관없단 말인가?]


[그런 건 아니지만''''']


[미안해 하는 것이라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너로 인해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고, 이제 이곳에서는 더 이상 내가 할 일은 없는 것 같으니 네가 있던 세상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는 이곳에서 맺은 인연들과 영원히 작별을 고하게 될 텐데'''그래도 괜찮겠는가,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가지 않는 편이 좋다. 차원이동은 결코 옆 마을에 다녀오듯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야.]


{그런 기대는 하지 않는다. 다만''''나는 상관없지만 의형을 과연 낯선 세상으로 데려가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다.]


[음'''그것에 대해서도 전에 말한 바가 있으니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겠다. 모든 것은 네가 결정할 일이니까. 그리고 나도 더 이상 참견하지 않으마, 단, 차원이동을 하게 될 때는 혼자라면 상관없겠지만 동행시킬 자가 있다면 반드시 함께 손을 잡고 가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라, 그렇지 않으면 각자가 다른 공간과 다른 신간에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차원이동에는 워낙 많은 변수가 존재하기에 어떤 엉뚱한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 역시 알아둬라, 어쩌면 네가 간 시간대에 천마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혹은 전혀 다른 세상으로 갈 가능성도 있다. 내 말은 어떤 위험 요인이라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차원이동과 그 위험성에 대해서는 누누이 얘기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그 얘기를 꺼낸 것은 진심으로 천우를 배려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우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 천우 곁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천우가 어딘지 모르게 심각한 표정으로 사색에 잠겨 있는 듯하자 모두 그를 주시한 채 긴장된 침묵을 지켰다. 그들로서는 방금 전까지 목격했던 일들이 지금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고, 보았던 것들이 꿈이 아니라면 진짜 지옥의 악마가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바포메트가 천우에게 삼안의 권능을 펼쳤을 때 벌어졌던 현상들은 도저히 신과 악마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생생히 보고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지옥의 악마가 풍검신에게 패퇴하여 다시 땅 속으로 도망친 지금 그들의 눈에 천우가 같은 인간으로 보일 리가 없었다.

그 상태에서 아직도 지옥의 입구가 넘실거리고 있고 천우가 그것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으니 모두가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천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깨어난 듯하자 여기저기서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우는 자신의 주변에 둘러서 있는 사람들의 눈길들을 보면서 그들이 어떠한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비록 전에도 비교적 가까운 사람들조차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에 항상 경외감이 은은히 배어 있었지만, 지금의 눈길들은 완연히 자신을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로 여기는 눈길들이었다. 그 모습에 다시 씁쓸한 마음이 일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우는 마음을 굳힌 후 먼저 의형인 동사왕을 바라보았다. 한데 그 눈길이 심상치 않았기에 동사왕은 저도 모르게 떠듬거렸다.

왜'''그러는가?
이제 가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가,가다니? 어디를''''?
그러다 문득 동사왕도 깨달은 바가 있었기에 안색이 급변하고 말았다.
혹시'''' 전에 말하던 그'''''천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동사왕이 얼른 천우의 팔소매를 움켜잡으며 소리치듯이 말했다.

자네 분명 이 늙은 우형과 약속했네, 나 역시 데려가겠다고 말일세, 그러니 혹여 딴생각은 하지 말게.

하지만''''

하지만이고 나발이고 무조건 나는 자네를 따라간다니까. 이우형을 떼어놓고 가려거든 차라리 여기서 나보고 먼저 죽으로고 하게, 나는 자네가 혼자 떠나는 꼴은 절대 못 보니까 말이야,

그 모습은 마치 사랑하는 정인이 무정하게 떠나는 것을 붙잡고 애원이라도 하는 모양새였지만 아무도 그 모습을 보고 웃거나 하지 않았다.
후회하실지도 모릅니다.
글쎄, 후회고 나발이고''''그럼 자네, 이 우형을 떼어놓자 않겠다는 말이지? 그런 거지?
알겠습니다. 같이 가시도록 하시죠, 그리고''''
천우는 결국 동사왕을 데려가기로 결정하고 다시 눈길을 돌려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딱히 어떤 의미가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떠나기 전에 한번 둘러본다는 의미였고 몇 가지 당부를 남기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존, 저 역시 지존을 따르겠어요, 설사 그곳이 지옥이라 해도 저는 후회하지 않겠어요,
갑작스럽게 세운령이 나서며 그렇게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나서기 시작했다.
지존, 이 늙은이가 비록 쓸모는 없겠지만 어차피 죽을 날도 머지않았으니 악마의 발톱이라도 부여잡고 죽게 해주시오.
녹영검존이 나서며 그렇게 말하자 다시 곡나휼의 말이 이어졌다.
잊으신 것이오?나 곡나휼의 목숨은 이미 당신 것이오. 어디든 좋으니 데려가서 창받이라도 쓰시오, 나 역시 데려가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자결할 것이오.
곤패주, 나 역시 전에 곤패주가 했던 말의 의미를 비로소 확실히 알 것 같소, 천마 조사는'''''아니, 천마는 본교에 대해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았던 것이오. 나는 지옥에 가서라도 그런 천마의 면상을 봐야겠소,

아미타불!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리오. 나 역시 천형을 따라기리다.

백낙천까지 어울리지 않게 불호를 외우며 나서자 천우는 내심 당황하고 말았다.

잠깐만! 여러분,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소, 나는 여러분들을 데려갈 수 없소, 마음은 고맙지만 여러분들은 여기 남아야 하오, 내가 가려는 곳은 나 역시 알 수 없는 곳이지만 한 번 가면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곳임을 확실하오,

문주, 문주는 돌보아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있소, 한데 어찌 그들을 모르는 체하려 하시오, 녹영 노사나 묵월 부교주도 이곳에 남아 분명 해야 할 일들이 있는 사람들이오. 곡 형 또한 원한을 갚았으니 이제는 무인으로서 선친의 뜻을 이루어야 하지  않겠소, 그리고 백 형은 전에 말했듯이 내가 가고 나면 내게 남은 인과율에 의해 또다시 세상이 혼란스러워질 수 있으니 남아서 벌어질 일들을 책임져야 할 것이오.

그리고 백 형에게는 한 가지 부탁이 있소,나와 형님이 가고나면 백 형은 천마무영패를 부숴주시오. 그리하면 다시 이곳에 인간이 아닌 악마나 천마 따위가 올 수는 없을 것이오.

그렇지만''''
반드시 그리 해야만 하오, 그것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내가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은 없소, 다만 좀 전에 보았던 악마와 같은 존재들을 불러들일 뿐이오.

천우를 따라가려고 했던 사람들이 승복할 수 없다는 듯 다시 저마다 무언가 얘기하려 할 때, 갑자기 누군가의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엇! 저것''''빛이 사그라지고 있다.

그 순간 천우의 시선이 급히 천마무영패가 비추고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점차 빛이 사그라지면서 폭이 급격히 좁아 지고 있었다. 천우는 더 이상 머뭇거릴 때가 아님을 느끼고는 아직도 자신의 팔소매를 부여잡고 있는 동사왕의 팔을 같이 잡으며 짤막하게 말했다.

그럼 부탁하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동사왕과 함께 이제는 불과 이 장여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검게 일령이는 중심원을 향해 움직였다.

지존!

그 모습에 놀라 세운령이 비명과도 같은 짤막한 외침을 토해 낼 때 막 검게 일렁이는 중심원에 다다른 천우와 동사왕을 향해 한 검은 인영이 빛살처럼 쇄도해 들었다. 천우도 그것을 느꼈기에 흠칫하며 무작정 자신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리는 인영을 접근하지 못하도록 밀어내려 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그 검은 인영이 조아임을 알아보았고, 또한 그녀의 모자에 달린 망사가 쾌속하게 달려드는 속도에 의해 위로 젖혀져 드러난 그녀의 청초한 얼굴이 온통 눈물로 얼룩져 있음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멈칫거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조아의 신형은 천우의 품속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천우는 내심 가벼운 탄식을 발하며 어쩔 수 없이 남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그 순간 천우는 이미 강력한 기감에 휩싸여 세상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음을 느꼈고, 그곳에서 조아를 밀어낸다 하더라도 이미 조아 역시 이 세상의 경계를 넘어섰기에 따로 이계로 넘어가게 된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순식간에 천우와 동사왕, 그리고 조아가 한 몸처럼 검게 일렁이며 급격히 축소하고 있는 지면으로 스며들 듯이 사라져 버렸고, 그 모습에 사람들이 다시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을 때 세운령이 갈등 어린 눈으로 자신의 옆에 여전히 복면을 한 채 서 있는 진회랑을 바라보았다.

진회랑은 그녀의 절박한 눈길을 접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상태천주님과 중태천주님이 계시니 본문은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풍검신께서 본문의 지존임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게 되었는데 누가 감히 본문을 건드리겠습니까.

그 말에 세운령은 별빛 같은 눈망울에서 한 줄기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고마워, 진회랑 그럼 본문을 부탁해,
그 말과 함께 이미 천우 등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검은 지면 위로 세운령 역시 빠르게 신형을 움직였다.

이제는 검게 일렁이는 부분이 불과 직경 한 자 정도밖에 남지 않아 간신히 한 사람이 올라설 정도의 크기였다. 세운령이 그 위에 다다르자 그녀 역시 순식간에 지면으로 빨려들 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순간 검게 일렁이던 지면 역시 완전히 사라지고 뒤이어 청광과 혈광으로 뒤덮여 있던 부분도 급격히 축소하더니 모두 사라져 버렸다.
툭!

그순간 허공에서 삼색의 광채를 뿌리던 천마무영패 역시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한동안 사람들은 멍하니 서서 지면에 떨어진 채 은은한 홍광을 발하고 있는 천마무영패를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우리를 두고 가신 것인가''''

눈군가의 입에서 찹찹한 음성이 흘러나오자 뒤이어 백낙천이 다시 불호와 함께 말했다.

아미타불! 천 형, 세상을 위해 스스로 지옥에 뛰어든 천 형이야말로 진정한 부처외다. 천 형의 그 숭고한 마음 결코 잊지 않겠소.
 
사람들은 아직도 천우가 말한 돌아올 수 없는 다른 세상이 지옥을 말하는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미 지옥의 악마가 세상에 뛰쳐나온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터였고, 그런 악마가 있는 곳으로 간 것이니 그곳이 지옥 말고는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 말과 함께 백낙천이 천천히 나서며 바닥에 떨어진 천마무영패를 집어 들 무렵, 갑자기 뒤편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깨어지는 적막이라 사람들이 시선을 돌려보니 수십여기의 기마들이 제법 먼 곳에서 중원 방향으로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멀찍이서 일의 추이를 지켜보던 제독태감과 동창의 인물들이었다. 그들 역시 대종사에게 변괴가 일어나 악마까지 등장하자 넋을 놓고 있다가 지금 이 순간 사태가 불리함을 깨닫고 도망치는 중이었다.

제독태감으로서는 일단 황실로 돌아가기만 하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황제를 설득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차하면 현영왕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워 다시 사태를 유리하게 만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비록 악마까지 등자하고 자신이 처리하려던 풍검신이 신계에서 보낸 무신이었다는 것이 께름칙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악마도, 그리고 풍검신도 모두 사라져 버렸으니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제독태감과 동창의 인물들이 도망차기 시작하자 현영왕 역시 정신을 차리고 대노하여 화천악과 함께 제독태감의 무리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현영왕이 움직이자 장수들과 병사들도 움직이기 시작했고 삽시간에 고요하던 평원이 천지를 진동하는 말발굽 소리에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그들과 따로 떨어져 있던 중인들이 눈살을 찌푸릴 때 천마무영패를 집어 든 백낙천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비록 그동안은 되도록이면 살계를 범하지 않으로 했지만 비로소 누군가는 지옥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소, 내 더 이상 주저하지 않으리다. 천 형이 나에게 베풀었던 모든 것들이 지금에서야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것 같소,

그 순간 백낙천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둥실 떠오르는 듯하더니 어느새 아득한 천공에 걸렸다. 그리고 백낙천은 손에 쥐고 있던 천마무영패를 저 멀리 앞서 가고 있는 제독태감의 무리들을 향해 힘껏 던졌다.

백낙천의 손을 떠난 천마무영패가 홍광을 뿌리며 유성처럼  쏘아져 나갈 때 사람들이 보고 있는 백낙천의 몸에서 달빛보다 밝은 휘황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보시오, 천 형! 세상이 뭐라 하든 나 역시 결코 세상의 악을 좌시하지 않겠소!

백낙천의 음성이 천공에서 그렇게 울려 퍼질 때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휘황한 광채가 한순간 천마무영패를 뒤따라 쏘아져 나갔다.

마치 작은 태양이 유성을 따라 쏘아져 나가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중원무림에는 태양광무존이라는  악을 철저히 미워하는 새로운 무신이 등장했다.

더불어 천마신교는 더 이상 중원무림에 나서지 않겠다는 맹약을 했고, 이름 역시 천마신교에서 청풍무신련이란 이름으로 개명하여 또다시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으로 거처를 옮겨갔다.

그리고 진위를 알 수 없지만 풍검신은 악마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천계에서 보내진 무신이라는 소문이 한동안 떠돌았고, 당금의 황제는 그런 악마의 주구가 되어 풍검신에게 대적하려 했다는 흉흉한 소문도 함께 떠돌았다.

그 때문인지 황제는 연일 폭적을 일삼닥 얼마 후 원인 모르게 죽어버렸고, 황제에게 적통을 이를 자손이 없던 관계로 그뒤를 이어 한때 좌천되었던 현영왕이 군부와 만조백관의 추대로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고 풍검신에 대한 얘기는 재담꾼들의 얘기에서난 나오는 전설이 되어갈 무렵, 어둠 속에서 전대미문의 혈마가 출현하여 한차례 홍역을 앓게 되었다.

그러나 천살겁이라 불린 그 혈겁은 명실 공히 어둠 속의 태양으로 추앙받던 태양광무존과 백여 년의 봉문을 깨고 나온 무당파의 엄청난 저력에 의해 종식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 또한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전설이 되어가고 있었다.


5장 마녀 일루아나


번쩍!

아주 오래된 폐허인 듯 음습한 이끼가 가득한 돌들의 잔해와 기둥들이 아무렇게나 쌓인 곳에 갑자기 환한 빛이 일었다.

그리고 빛이 사라지고 나자 그곳에 세 인영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곳인가?]
[글쎄''''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문명의 흔적들이 보이는 것을 보니 최소한 지성체가 존재하는 곳으로 온 것은 맞는 듯싶군, 나가 있던 곳으로 제대로 온 것인지 확인해 보려면 내가 일러주는 좌포로 마나탐색을 해보면 된다.]

[그러도록 하지.]

천우의 물음에 아티오네스가 약간 흥분이 어린 어조로 그렇게 대답하고 난 후에 좌포를 일러주자 천우는 그 좌표를 향해 마법으로 기의 탐색을 시작했다.

곧 어디인지는 알 수 없어도 자신의 기가 실처럼 연결되어 있는 느낌과 함께 별다른 기의 장애 없이 한 장소가 느껴지자 아티오네스에게서 탄성과도 같은 음성이 터져 나왔다.

[제대로 왔군! 제대로 왔어! 지금 일러준 곳은 예전에 내가 머물던 레어의 좌표다. 내 레어가 잡히는 것을 보니 이곳은 틀림없이 내가 있던 좌표다. 내 레어가 잡히는 것을 보니 이곳은 틀림없이 내가 있던 곳이 맞다. 드디어 드디어 돌아왔구나!]

마지막에는 감격에 겨운 듯 아티오네스의 음성이 떨려 나오고 있었다.

아티오네스의 기뻐하는 음성에 천우가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문득 가슴 부위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느낌에 시선을 내려다보았다.

그때까지 조아는 천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그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있었고, 의형인 동사왕 역시도 천우의 팔을 부둥켜 안은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 모습에 천우는 좀 더 짙은 미소를 피워 올리며 말했다.

형님, 이제 눈을 뜨셔도 됩니다. 그리고 조 소저도 진정하고 그만 나를 놓아주시오. 그러다가 내 허리가 부러질까 두렵소,

천우의 웃음기 섞인 말에 동사왕은 꼭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떴지만, 조아는 행여나 천우가 자신을 떼어놓을세라 더욱 자신의 얼굴을 천우의 가슴에 붙이며 팔에도 힘을 주었다.

여,여기가''''
차원의 문 속으로 빨려 들자마자 동사왕은 마치 아득한 심연속에 들어선 느낌과 함께 아무것도 보거나 의식할 수 없었고, 별다른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자신의 몸이 마치 산산이 분해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본능적인 두려움에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대범한 성격의 동사왕이었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두려움과 또 다른 것이었기에 동사왕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 속에서 아무런 생각도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순간 천우의 음성이 들려오자 동사왕은 아직도 두려움이 가시자 않은 상태에서 용기를 내어 슬며시 눈을 떠보았다. 그러자 어딘지 음습하고 낯선 광경이기는 했지만 상상했던 지옥의 풍경은 아닌 듯했기에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여기가''''다른 세상인 것인가?
그렇습니다.

천우의 미소 띤 음성에 동사왕은 여전히 그의 팔을 놓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주위를 휘휘 둘러보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 지옥으로 가는 것인 아닐까 생각했는데''''아무래도 여기가 지옥 같지는 않구먼,

그렇습니다, 분명 지옥은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형님 부터 제 팔을 좀 놓아주십시오.

응? 아! 미, 미안하네, 나잇값도 못 하고 아우 앞에서 추태를 보였구먼.

그제야 자신이 천우의 팔을 꼭 움켜쥐고 있음을 깨달은 동사왕은 얼른 손을 놓으며 쑥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천우는 다시 한 번 빙긋 미소를 지오 보이고는 곧이어 품안의 조아를 어째해야 좋을지 몰라 동사왕에게 난처한 눈길을 보냈다.

저'''여기'''조 소저 좀''''
응? 아니? 저 계집애가 왜 여기에'''''
동사왕은 천우와 함께 차원문에 올라섰을 때 너무 경황이 없어서 누가 달려드는지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조아가 천우의 품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갑자기 뛰어드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형님께서 좀''''
동사왕은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다가 곧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차라리 잘됐네, 그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저 앙큼한 계집애가 결국은 자네를 차지했군, 그래,

그 말과 함께 그는 다시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세운령 고 계집애도 함께 데려오는 건데''''

의형인 동사왕이 자신의 난처함을 해결해 줄 생각은 안 하고 엉뚱한 말만 하자 천우는 짐짓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저와 형님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결코 이곳에 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조 소저 또한 ''''이젠 어쩔 수 없지만 아마도 후회할지 모릅니다.

그때 천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조아가 두 팔에 더욱 힘을 주며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소리쳤다.

아니에요. 저는 절대 후회 안 해요. 천녀를 떼어놓지만 않으신다면 이곳이 어떠한 곳이라 할지라도 상관없어요. 그리고 천녀를 개와 말처럼 취급하셔도 좋고 당장 죽이셔도 좋아요. 그러니'''그러니 제발 천녀를 떼어놓지만 말아주세요.

조아 역시 처음에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차원이동을 하는 동안 동사왕과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두려운 와중에도 그저 본능적으로 천우를 놓치지 말아야만 한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천우의 음성이 들려올 때에도 두려움으로 인해 더욱 그에게서 떨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동사왕의 음성도 함께 들려오고 대화가 이어지자 어느 정도 현실감이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두려웠고, 또한 자신이 천우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자 감당하기 힘든 부끄러움에 차마 고개를 들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회할 것이라는 천우의 말이 들려오자 조아는 또다시 더럭 겁이 나서 여전히 천우를 놓지 않은 채 절실함을 담아 소리친 것이다.

천우는 여전히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치는 조아의 말을 들으며 씁쓸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내가 왜 조 소저를 그렇게 취급하겠소, 그리고 이곳에 온 이상 조 소저 역시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어 다른 모든 인연을 잃어버리게 되었으니, 그것이 안타까워 하는 말이오. 아무튼 무사히 왔으니 이제 그만 진정하시오, 그리고 조 소저도 이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할 테니 주변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시오.

천우는 아직도 조아가 자신의 품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느꼈기에 부드러운 말로 그녀를 위로하여 진정시키는 한편, 여전히 그녀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웠겡 그러한 말로써 조아가 물러설 수 있도록 베려해 주었다.

조아도 천우의 부드러운 음성을 듣자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는지 약간은 망설밍이 느껴지는 태도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리며 천우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자 천우는 어색하긴 하지만 애써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려 했고, 눈물로 범벅이 된 조아와 시선이 마주치자 미소도 지어 보였다.

아''''

그 순간 조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다시 천우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고, 천우는 그러한 조아의 행동에 또다시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실 천우는 동사왕의 모습이 한 노사의 모습에서 본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것을 보고도 별달리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자시 자신의 얼굴 역시 차원이동의 과정에서 변용이 풀려 무심냉막한 냉무심의 얼굴에서 절세준미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조아는 고개를 들어 아름답기조차 한 천우의 본래의 모습에 미소까지 어리는 것을 보자 한순간 모든 사고가 정지함과 동시에 견딜 수 없는 본능적인 부끄러움에 또다시 그런 대담한 행동을 취한 것이다.

계집애야, 아무리 좋아도 이제 그만 떨어지는 것이 어떠냐, 노부의 눈은 눈이 아니더냐, 그리고 네가 그러고 있으니 천아우가 꼼짝도 못 하고 있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악마라도 나타나면 큰일 아니냐.

여전히 짓궂은 농담이 섞인 말이었지만, 아닌 게 아니라 동사왕이 보기에 지금 상태로는 과연 갑작스런 공격에 제대로 방비나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천우의 몸이 굳어 있음을 느꼈기에 한 말이었다.

비록 당장은 어떠한 위협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고, 가장 위험할 때가 바로 예고없는 위험이 닥쳐올 때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는 진심을 섞어 한 말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얼마 전까지 싸우던 염소 악마를 곧바로 뒤쫓아 온 것이었기에 그 무시무시한 염소 악마가 어디서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주변의 풍경도 그리 마음을 놓을 정도로 좋은 광경은 아니었으므로 동사왕은 정신을 차린 이후로 몸에 밴 무인의 본능으로 경각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동사왕의 말이 있고서야 조아는 부끄러움에 고개도 들지 못한 채 팔에 힘을 풀며 슬며시 천우에게서 떨어졌다. 그러자 천우 또한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짐짓 시선을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주변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이끼 낀 기둥과 돌들은 그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커서 페허가 되기 전에 이곳에는 대단한 규모의 건축물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천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것은 비록 주변이 을씨년스런 풍경이기는 했지만 보이는 것과는 달리 주위에서 광장한 풍부한 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굳이 표현하자면 대기 중에 영약의 기운이 스며들어 있다고 해도 큰 무리가 아닐 정도였다. 만약 이런 곳에서 일반 무인들이 수련을 한다면 일정 수준까지는 굉장히 빠른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한 것을 느끼자 좀 더 자세히 주변을 살펴보려는 순간, 갑자기 천우는 자신의 전면에서 강렬한 기의 파동이 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동사왕 등을 향해 경고의 말을 하기도 전에 갑자기 빛이 번쩍이는 듯하더니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미 기의 변화를 느낀 순간 대비는 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빛 속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다짜고짜 뭐라고 빠르게 외치며 자신에게 공격을 가해 오는 듯하자 천우는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아무리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하여도 천우의 시선을 흐리게 하거나 당황스럽게 여겨질 정도는 결코 아니었기에 그 순간 천우는 빛 속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금색의 머릿결에 파란 눈을 한 여인의 형상이라는 것과, 자신을 향해 발출할 것이 붉은 기운이 감도는 손가락 모양의 기운이라는 것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 파란 눈의 여인이 뭐라고 외친 것이 "피의 계약으로 죽음을 가져오게 하라, 블러드 핑거" 라는 말이었다는 것도 거의 동시에 인식할 수 있었다.

천우는 그 파란 눈의 여인이 발출한 붉은 손가락 모양의 기운이 무공이 아닌 마법에 의해 발출된 기운이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그 즉시 가장 만만한 헬 파이어를 일으켜 다가오고 있는 붉은 손가락을 향해 들어 올렸다.

허억! 헤, 헬'''''취,취소! 디스펠 매직!

그 순간 붉은 기운을 발출시켰던 그 파란 눈의 여인이 괴상한 신음성을 삼키며 정말 저렇게 빠르게 말하는 것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다시 그렇게 외치며 날랜 제비처럼 몸을 허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그녀의 몸은 순간적으로 이 장여 정도를 뛰어오른 후 포물선을 그리며 뒤로 한 바퀴 재주를 넘어 원래 서 있던 자리에서 다시 이 장여 뒤쪽에 사뿐이 내려섰다. 실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동작이었다.

그렇게 지면에 내려선 여인은 경악이 가득 담긴 눈길로 여전히 천우의 손에 맺힌 채 백광으로 이글거리는 헬 파이어를 바라보며 경악 어린 음성으로 토해 내었다.

도, 도대체 정체가 뭐기에 헬 파이어를'''

그녀에게서 겁먹은 듯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오자 천우는 곧 헬 파이어를 거둬들이며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안심하시오. 갑자기 공격해 오기에 방비를 하려던 것뿐이었소, 그리고 당신은 누군데 무작정 나에게 공격을 가한 것이오?

그런 천우의 말에 그 파란 눈의 여인은 더욱 당황스런 표정을 지어 보이며 여전히 떨림이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무,무슨 말인지? 혹시 마족?

하지만 천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마족 같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오. 그리고 당신에게 몇가지 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소만'''''''

하지만 천우의 말은 그녀의 말에 의해 채 끝을 맺지 못했다.
나,나는 당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요. 그러니'''''괜찮다면 나는 이만 '''''''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물러나는 것을 보자 그제야 천우는 그녀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제대로 이해하고는 곤혹스러움을 떠올렸다.

그때 천우의 의식속에서 아티오네스의 핀잔이 들려왔다.

[이봐, 네가 있던 곳에서는 몰라도 이곳에서는 그렇게 헬 파이어를 남발하면 곤란하다고 , 고블린 잡는 데 오우거 잡는 마법을 쓰는 것도 아니고, 드래곤도 잡을 수 있는 마법을 쓰는 격인데 누가 너를 인간으로 보겠냐?

그리고 네가 저 여자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내가 네 의식 속에 있기 때문이지만, 저 여인은 당연히 너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그나저나 저 여자 인간도 제법인데? 좀 존의 수법으로 보아 흑마법 계열의 대마도사 급은 되는 것 같은데 몸놀림도 웬만한 기사들 못지않으니 전에 알고 있던 기준에서 보자면 이 대륙의 최강자들에 해당하는 수준이겠는걸,]

아티오네스의 말을 듣자 천우는 당장 곤란한 부분에 대해서 물었다.

[어떻게 하면 저 여인과 대화할 수 있지?]
[그야 너 역시 이곳 대륙의 언어로 말하면 되는 거지, 알아들을 수 있다면 말할 수 있다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잘 생각해 봐라,]

아티오네스의 말에 천우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자신이 이곳의 언어에 대해서도 이미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말이었기에 제대로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고, 무엇보다도 발음 자체가 상당히 어색한 언어들이었기에 천우는 선뜻 말문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때 천우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물러서던 그녀는 천우가 가타부타 다른 말 없이 눈살을 찌푸리자 자신의 그러한 행동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우뚝 신형을 멈춰 세웠다.

그때 동사왕은 번쩍이는 빛과 함께 갑자기 나타나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며 알 수 없는 말로 떠드는 그녀를 보자 약간의 놀람과 호기심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처음엔 자신의 말이 불씨가 되어 또다시 악마가 나타난 것인가 싶었지만, 그 모습이 조금 특이하기는 해도 분명 여인의 모습이었고, 또한 전의 악마들처럼 자신을 주눅 들게 만드는 기운이 느껴지거나 하지는 않았으므로 그녀가 악마는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 또한 전혀 생소한 것만은 아니었다. 동사왕은 천하를 주유하면서 가끔 서역의 색목인들을 본 일을 있었고, 지금 나타난 그녀의 모습이 그런 색목인들의 처녀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이거''''우리가 온 곳이 혹시 서역인 것인가? 그렇다면 다시 돌아갈 수도 있을 텐데'''''

중원에 대해 크게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낯선 곳에 왔다는 사실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천우의 말을 들었기에. 어쩐지 아주 낯설지 않은 그녀의 모습을 대하자 자신도 모르게 약간의 향수와 기대감이 생겨 한 말이었다.

그때 그녀는 천우 외에 또다시 이상한 생김새를 지닌 한 인물이 뭐라고 말을 하자 불안감이 서린 시선으로 동사왕을 쳐다보다가 무엇 때문인지 갑자기 그녀의 두 눈이 동사왕 못지않게 커다랗고 둥글게 변했다.

이, 이제 보니 당신은'''''칼라이스''''나의 계약자 칼라이스로군요, 그렇지요? 내가 곤경에 처한 것을 알고 직접 와주신 것이로군요, 오오, 이럴 수가!

갑자기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이번에는 동사왕을 향해 주춤 주춤 다가서기 시작하자 여전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리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동사왕의 두 눈은  더욱 커졌다.

어? 저 파란 눈의 계집애가 왜 네개 오는 거야? 이보게, 천아우''''

동사왕이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천우를 부르자 천우 또한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으므로 급히 아티오네스에게 물어보았다.

[칼라이스가 누구지? 그녀가 왜 형님을 그렇게 부르는 건가?]
[글세''''말하는 투로 봐서는 네 의형을 자신의 계약자인 마족으로 오인한 듯한데''''  나 역시 그건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세상에 알려진 마왕과 마족들은 사실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에 같은 마족들이 아니라면 다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헬로가드에게 물어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천우는 아직도 의식의 벽 안에서 온갖 난동을 부리고 있는 헬로가드를 진정시킬 자신이 없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의 도움이 절실했기에 내심 함숨과 더불어 헬로가드를 가두고 있는 의식의 벽을 거두었다.

[이봐, 헬로가드, 그만 진정하고 칼라이스가 누군지 말해 봐라,]

천의 음성이 들려오자 헬로가드는 그제야 다시 천우의 의식을 통해 사물이 보이기 시작했으므로 괴성을 섞어 소리쳤다.

[크아아악! 그게 무슨 켈베로스 풀 뜯어 먹는 소리냐! 칼라이스고 뭐고, 그 변태 놈 어디 갔어?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 최소한 그 변태 놈이 소멸되는 것을 네게 보여주지는 못할망정 나를 의식의 벽 속에 가두어버리다니, 그러고도 네가 내''''제기랄! 아무튼, 그놈은 왜 안 보이는 거야? 당연히 소멸 시켰겠지?

바포메트 이 변태 놈,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어디 나중에 내가 마계로 돌아가고 난 뒤에 새로 태어난 테놈이 마왕으로 남게 될지 두고 보자, 네놈은 앞으로 영원히''''']

[놓쳤다.]
[뭐? 지금 뭐라고''']
[바포메트는 그곳에서 소멸되지 않고 도망쳤다. 그리고 그를 따라서 이곳에 왔고''''그보다 칼라이스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해봐라,]

[어,어떻게 그럴 수가''''내 권능을 몽땅 훔쳐가고도 그따위 하급 변태 마왕놈을 소멸시키지 못하고 놓쳤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너 지금 농담하는 거지? 그렇지?]

[농담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묻는 말에 대답 안 하고 자꾸 딴소리하면 좀 더 쉴 시간을 주도록 하겠다.]

[크아아악! 도대체 이런 빌어먹을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이냐! 어디 네 맘대로 해봐라, 그깟 약해 빠진 변태 놈 하나 제대로 소멸시키지 못하면서 만만한 게 나란 말이지? 이런 설움과 모욕까지 받아가면서 존재하고픈 생각 조금도 없다. 차라리 나를 깨끗이 소멸시켜라. 이렇게 비참하게 존재하느니 더 이상 모욕당하지 않고 마왕답게 최후를 맞이하겠다.]

[정말이냐?]
[절말이다.]
[비록 바포메트를 놓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네가 돌아갈 수 있는 곳으로 왔기에 좋아할 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로군, 할 수 없지, 그래도 이곳에서는 새로운 자아로 태어날 수 있다니 그리나쁘지는 않겠군, 나 역시 시끄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그럼'''']

[자,잠깐 여기가 어디라고? 그 변태 놈을 쫓아왔다면 ''''너도 차원이동을 해왔단 말이냐?]

[마왕답게 최후를 맞이하고 싶다면서 갑자기 왜 딴소리인가.]
[아,아니''''원래 마왕이 무엇보다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바로 자신의 존재를 지키는 것이다. 때문에 너는 어떠한 경우라도 마왕이 존재를 걸고 하는 말은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내 말은''''']

[아직 소멸되고 싶지 않다는 말인가?]
[그,그렇지 흠흠! 그나저나 뭘 물어봤더라?]
[칼라이스에 대해서 알고 싶군,]
[아!맞다, 칼라이스! 한데 갑자기 그놈에 대해서는 왜?]
[지금 저 앞에 보이는 여인이 내 의형을 칼라이스로 오인하고 있는 듯하다. 자신의 계약자라고도 말했는데'''왜 저런 오해를 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군,]

[응? 그러고 보니 저 여자 인간에게서 칼라이스의 기운이 엿보이는군, 한데 별일이네, 칼라이스 그놈이 인간과 계약을 다맺다니''''아무튼 칼라이스에 대해서 말해주마, 그놈은 마계에서도 어둠의 귀족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상급 마족인데 꽤나 성격이 유별난 놈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네가 있던 세상의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렇다.

한데 내가 알기론 그놈은 번거로운 걸 싫어해서 인간들과 계약을 맺는 일도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어째서 관례를 깨고 인간과 계약을 맺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인간 여자가 네 의형을 칼라이스로 오해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아무래도 네 의형의 이마에 있는 붉은 점 때문인 것 같다. 다른 건 잘 모르겠고 굳이 유사점을 찾으라면 그것 하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붉은 점? 그렇다면 칼라이스도 이마에 불은 점이 있다는 말이겠군,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의형을 그렇게 생각한단 말인가?]

[이곳의 상황을 전부 지켜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혹시 저 인간 여자가 너나 네 의형을 마족으로 오인하고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주 억지스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마족과 계약한 인간들은 계약 당시에 자신의 계약자에 대한 단상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고, 또한 그 이후에 의사소통이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어 그러한 특징만으로 오해를 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계약자가 자신이 계약한 마족의 모습을 모를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의사소통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

[그렇다, 그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실지로 인간과 계약하는 마족들은 거의 대부분이 그저 계약에 의한 힘만 빌려줄 뿐 그 이외의 것은 전혀 간섭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니 모습을 보여주거나 의사소통을 하는 일도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개중에 계약자에게 모습을 보이거나 혹은 의사소통을 하는 별난 녀석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도 거의가 하급 마족 중에서도 정말로 유별난 몇몇 녀석에게 국한된 일일 뿐이다.
그러니 칼라이스와 계약한 저 인간 여자도 칼라이스에 대해서제대로 알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또한 칼라이스 그놈의 유별난 성격을 생각해 보더라도 자신의 계약자인 저 인간 여자에게 모습을 보여주거나 혹은 의사소통 같은 것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계약 관계라면 뭔가 서로 느끼는 것이 있을 게 아닌가.]

[천만에,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또한 마족이 일부러 느끼도록 간섭하지 않는다면 그런 것을 느낄 일이란 전혀 없다. 계약이 무슨 대단한 것처럼 생각되는 모양이지만, 마족의 입장에서는 영혼을 담보로 그저 약간의 힘을 쓸 수 있도록 해주는 것뿐이고,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칼라이스가 정말로 이 자리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칼라이스가 일부러 자신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지 않는다면 저 인간 여자는 절대로 칼라이스가 자신의 계약자라는 것을 먼저 확신할 수 없다. 다만 계약 시에 보았던 단상이라든가 스스로의 생각에 의해서 그런 느낌을 갖게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느낌일 뿐 절대 어떤 계약의 효과에 의해서 느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헬로가드의 설명을 통해서 천우는 비로소 지금 벌어지는 있는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동사왕을 향해 주춤주춤 다가서면서 하는 그녀의 말을 통해서 더욱 확실히 사태를 깨달을 수 있었다.

칼라이스시여!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제가 당신을 얼마나 애타게 그렸는지 아시나요? 왜 이제야 제게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인가요? 아니, 지금이라도 내 앞에 나타나 주셨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요. 당장 제 영혼을 가져가신다 해도 저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겠어요. 오히려 그것은 제가 바라는 일''''이제 더 이상 이 힘든 삶을 제게 강요하지 마시고 당신의 품에서 영원히 쉴 수 있도록 해주세요.

왜? 왜 그러느냐, 파란 눈의 계집애야? 너 그 이상한 표정은 뭐냐?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는 했지만 그녀의 눈과 표정 그리고 온몸에서 느껴지는 절실함은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것이었기에 동사왕은 그런 그녀의 태도에 적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천우는 바로 얼마 전에 동사왕에게 당했던 곤혹스러움이 생각나 문득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떠올렸다.

형님께서 그녀가 사모하는 누군가와 무척 닮은 모양입니다. 지금 그녀는 형님을 그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천우의 말에 동사왕은 더욱 당황스런 표정을 지어 보이며 급히 천우에게 말했다.

뭐, 뭐야? 도대체 내가 누구랑 닮았다는 거야? 자네는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어서 저 파란 눈의 계집애한테 사람 잘못 본 거라고 얘기 좀 해주게.

하지만 천우는 여전히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저 역시 이곳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어도 잘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니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그래도 어서 말해 보게, 저러다가 저 파란 눈의 계집애가 달려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곧 동사왕의 품을 향해 뛰어들기라도 하려는 모습이었고, 비록 그녀의 태도에 가식은 없어 보였지만 혹시 위험이 있을지 모르기에 천우 또한 그녀가 동사왕에게 뛰어드는 것만은 제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천우는 어색하긴 하지만 이곳 대륙의 공용어를 의식하면서 동사왕에게 다가서는 그녀를 향해 띄엄띄엄 말문을 열었다.

잠깐만''''기다리시오. 우리는''''마족이 아니라 당신과 같은 사람이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왔기 대문에 ''''이곳의 말이 익숙지 않소, 그리고 ''''그분은 당신이 말하는 칼라이스가 아니라''''내 형님이시오. 그러니 멈추시고''''괜찮다면 몇 가지만 물어보도록 하겠소,

비록 발음도 어색하고 어눌한 어조였지만 그녀는 천우의 말을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동사왕에게 접근하던 그녀의 걸음이 뚝 멈춰졌고, 원래부터 새하얀 그녀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지며 시선이 천우에게로 향했다.

마족이 아니라 사람이라고요? 그럴 리가''''하지만 당신들의 모습은 ''''

말하는 투로 봐서는 여전히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는데, 그런 상태입에도 불구하고 동사왕을 향해 그런 행동을 보였으니 그녀의 칼라이스에 대한 염이 얼마나 강한 것이지 알 수 있을 듯했다.

말했듯이''''우리는 다른  곳에서 왔소, 모습은 ''''당신과 조금 다르지만''''우린 분명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오. 그러니 진정하시고''''우선 이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왜 이유없이 공격을 했던 것인지''''말해 보시오.

그 말에 그녀는 여전히 창백한 안색으로 천우와 동사왕은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무언가를 생각해 보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런 모습은 천우를 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행동이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이미 자신이 대항할 수 없는 존재들임을 느끼고 있었기에 무모한 행동만은 아니었다.

잠시 후 그녀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조금은 가라앉은 듯한 눈 빛으로 천우를 보며 말했다.

제가 섣불리 행동했던 것은 사과드려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믿기 힘들군요, 당신들이 마족이 아니라면 좀 전의 그 헬 파이어는''''그 짧은 시간에 아무런 사전 주문도 없이 손에 헬 파이어를 맺히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는 오직 드래곤들과 마족들밖에 없어요.

하지만 드래곤이시라면 대륙 공용어에 서툴 리가 없으니'''''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래도 당신들은 마족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는군요. 그리고 저분의 모습은 틀림없이 칼라이스 그분과 같은데''''

내가 들은 바로는''''마족과 계약한 당사자라 하더라도''''대 부분은 계약한 마족의 모습을 알 수 없다고 들었소, 당신은'''' 그 칼라이스라는 마족의 모습을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오?

천우의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물론'''저 역시 최초의 계약 당시에 그분의 단상만을 느꼈을 뿐이에요. 비록 흐릿한 단상이긴 했지만 그분의 이마에 있는 선명한 붉은 점은 제 기억 속에 너무도 뚜렷이 남아 있어요. 그리고 저분의 모습을 본 순간 저는 마음속의 강력한 끌림을 느꼈고, 그 때문에 직감적으로 저분이 저의 계약자라고 생각한 것이죠, 지금껏 살아오면서 저는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이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그런데 정말 아니란 말인가요?

어느새 호수처럼 파란 그녀의 눈망울에 눈물이 알알이 맺히더니 이윽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흑마법사라지만 사람도 아닌 마족에 대해서 그런 애틋함을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이곳 사람들이 본다면 분명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마녀라고 부르며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를 향해 감히 손가락질을 하는 간 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홍의 마녀 일루아나!

그것이 그녀의 정식 명칭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곳 아벨란 대륙을 뒤흔드는 강자들 중 한 명이었으며 또한 공포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비록 아름다운 젊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지 그녀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백 살은 넘었을 거라는 것과 혹자는 2백 살 혹은 3백 살도 넘었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조차 있었다.

아무튼 그녀의 정체를 모르는 천우로서는 그녀가 눈물까지 흘리며 그렇게 말하자 다시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어떤 일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천우였지만 아무래도 여자의 눈물에는 항상 곤혹스러움을 느끼는 그였다.

그때 천우는 또다시 멀지 않은 곳에서 강력한 기의 파동이 느껴지자 이채를 발하며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예외없이 그곳에서도 빛이 번쩍이더니 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 빛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녀! 멀리 도망간 줄 알았더니 이곳에 있었구나, 이제는 포기한 것이냐? 잘 생각했다. 더 이상 도망가 봐야 결코 우리의 손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러한 외침과 더불어 빛 속에서 나온 사람들은 빠른 동작으로 그녀를 포위했다.

그녀는 상심에 젖어 눈물을 흘리고 있다가 일단의 무리들이 자신의 근처로 텔레포트하여 나타나자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지만, 이내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두 눈에 독기를 드러내었다.

베르츠, 네놈이 기어이''''좋다! 더 이상 네놈들을 피하지 않겠다.

그녀를 포위한 사람들을 모두가 번쩍이는 은빛 갑주로 전신을 가리고 있는 기사들이었고, 그 중 한 사람만이 포위에 가담하지 않은 채 나타난 자리에 서서 코웃음을 치며 말을 받았다.

흥! 네년이 감히 교국의 대신관을 알살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흑마법사 주제에 그동안 겁도 없이 대륙을 활개 치고 다녔지만, 우리가 나선 이상 마녀 너는 끝장이다.

대신관? 그따위 놈이 어떻게 신관일 수가 있단 말이냐! 그놈이 머물고 있던 신전의 지하에는 수많은 여인들과 태어나지도 못한 태아들이 썩어가고 있었다. 그놈은 신관이라는 껍질을 뒤집어쓰고 흑마법사들보다 더 지저분한 짓거리를 하던 놈인데 그런 놈을 대신 죽여주었으면 내게 고맙다고 해야지 왜 나를 쫓는단 말이냐.

모함하지 마라, 마녀! 로데인 대신관은 신실한 신의 사도였을 뿐만 아니라 사교에 물든 이교도들과 마녀들을 신심으로 교화하는 데 앞장서 온 분이시다. 또한 신전 어디에도 마녀 네가 말하는 그러한 시체들은 없었다. 감히 신의 사도인 대신관을 암살한 것도 모자라 그 명예마저 더럽히려 하다니.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마녀로구나.

깔깔깔깔깔! 베르츠 네놈도 그 지저분한 신관 놈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놈이다.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기 위해 네놈들이 그의 사후에 모든 증거를 은폐 조작했다는 것을 네가 모를 줄 아느냐? 아무튼 여기서 그런 걸 따질 필요는 없을 테고, 모두 피의 제물로 삼아주마!

어림없는 소리, 비록 다른 사람들은 마녀 너를 두려워할지 몰라도 교국의 성기사들인 우리에겐 너 역시 그저 마족에게 영혼을 판 하찮은 마녀일 뿐이다.

과연 그럴까? 내가 어째서 진홍의 마녀랄 불리는지 똑똑히 보여주마,

그 말과 함께 그녀의 손이 빠르게 수인을 맺어가며 입에서는 간략하면서도 빠른 주문이 흘러나왔다.

선열한 피의 계약으로 말하노니, 그대의 힘으로 모든 것을 파괴하리라!

그 순간 그녀의 주위로 붉은 안개 같은 것이 어리기 시작하자 베르츠라 불린 자가 안색이 급변하여 빠르게 외쳤다.

기회를 주지 말고 어서 공격하라!
그 말과 함께 그 자신도 한쪽에서 빠르게 신성력의 주문을 읊는 한편, 그녀를 포위한 은빛 갑주의 성기사들 십여 명이 기합성과 함께 이미 붉은 안개의 의해 완전히 가려진 그녀를 향해 전혀 두려움 없이 쇄도해 들어가고 있었다.

타핫!
죽어라,마녀!
그순간 선열한 진홍의 안개에 가려진 그녀에게서 다시 날카로운 외침이 울려 나왔다.
이미 늦었다. 신을 빙자해 온갖 더러운 일을 일삼는 너희들이야말로 살아 있을 가치가 없는 놈들이다. 가라, 크림슨 브리자드!

콰아아아아''''

그녀의 외침이 끝나는 순간 그녀 주위를 뒤덮고 있던 붉은 안개와 같은 기운들이 순식간에 결정의 형태로 뭉쳐지더니 엄청난 기세를 동반한 채 회오리 모양으로 소용돌이치며 쇄도해 들어오는 성기사들을 향해 휘몰아쳐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한쪽에 서 있던 베르츠라 불린 사내의 입에서도 커다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사악함의 적빛의 권능이 그대들을 보호하리라, 세이크리드라이트!
파아아!

그 순간, 주문의 영향 때문인지 그녀를 향해 공격해 들어가는 은빛 갑주의 기사들이 들고 있던 방패와 검에서도 역시 신성력이 담긴 광휘가 뿜어져 나오며 그녀가 발한 진홍의 폭풍과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꽈꽈꽈꽈꽝'''
크어억!
크악! 이렇게 강하다니''''

한순간 마치 철판에 우박이 떨어져 내리는 듯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비명과 신음성들을 동반한 채 그녀를 향해 쇄도해 들던 은빛 갑주의 기사들이 그녀로부터 휘몰아쳐 나오는 진홍의 폭풍에 휘말려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한순간 주변에 휘몰아치던 붉은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지며 그녀의 모습 또한 드러났다.

으음!
그러나 그녀 역시 적지 않은 타격을 받은 듯 나직한 신음성과 함께 제자리에서 비틀거리고 있었고, 그런 그녀의 새하얀 얼굴은 하얗다 못해 푸르게 보일 정도로 핏기가 가셔 있었다. 그리고 쓰러지지 않기 위해 억지로 버터고 있는 듯 잠시 비틀거리던 그녀의 입가에는 어느덧 한 줄기 진홍빛 선혈이 가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이런 교국의 성기사들 중 최상급에 속하는 팔라딘들 열명이 오히려 참혹하게 당하다니''''진정 마녀라고 불릴 만하구나,

그녀의 크림슨 브리자드에 휘말려 사방으로 튕겨 나간 채 널브러져 있는 성기사들의 모습은 실로 참혹했다.

그들이 걸치고 있던 번쩍이던 은빛 갑주는 더 이상 갑주라고 불리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사정없이 우그러져 있었는데, 비록 완전히 구멍이 뚫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모양이 마치 양철로 만들어진 벌집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이음새마다 새빨간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기에 굳이 갑주를 들춰보지 않아도 그들의 상태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베르츠라는 중년인은 마녀를 공격했던 십여 명의 성기사들이 그러한 참혹한 모습으로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보면서 기가 막힌다는 투로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분노라든지 혹은 죽은 자들에 대한 애통함 같은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조금은 뜻밖이라는 표정이 어려 있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번쩍이는 은빛 갑주를 걸치고 있지도 않았고, 또한 방패 같은 것을 들고 있지도 않았다. 다만 모자가 없는 로브 형식의 흰 옷에 허리춤에는 손잡이에 돌 같기도 하고 혹은 보석 같기도 한 이물질이 박혀 있는 롱소드 한 자루를 달랑 걸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지금껏 한편에 서 있는 천우나 동사왕의 존재에 대해서는 마치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일별도 주지 않고서, 천우의 앞쪽에서 아직도 신형을 안정시키지 못한 그녀를 향해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과연 진홍의 마녀라는 이름이 사람들에게 공포를 줄 만하구나, 그 정도 솜씨라면 충분히 내 검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 말에 그녀는 창백한 얼굴에 분노를 가득 드리우며 힘겹게 말했다.

치사한 놈! 처음부터 네놈이 나서지 않은 것은 바로 내 힘을 빼기 위한 수작이었음을 알고 있다. 저놈들은 그저 희생양에 불과했던 거지, 그러고도 네놈이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강자라고 자처할 수 있단 말이냐!

하지만 그녀의 말에도 베르츠라는 중년인은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여전히 음흉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흐흐! 그건 오히려 과분한 칭찬이로군, 나는 그저 신의 이름에 거역하는 배덕한 무리들을 처치하는 교국의 일개 전투사제일 뿐이다. 특히 너 같은 마녀를 없애는 것에 삶의 보람을 느끼지, 이제는 네 더럽혀진 영혼을 마족의 곁으로 보내줄 때가 된것 같구나, 각오는 되어 있겠지?

흥, 어림없는 수작! 내가 그렇게 순순히 당할 것 같으냐!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수인을 맺는 자세를 취하며 빠르게 주문을 암송했다.

어리석긴,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그럴 여유가 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 말과 함께 갑자기 흰 옷의 중년인이 슬쩍 몸을 흔드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그의 신형은 주문을 외고 있는 그녀의 코앞으로 육박해 들고 있었고, 더불어 그의 허리춤에 걸려 있던 롱소드가 번개 치듯이 뽑혀 나와 수인을 맺고 있는 그녀의 양팔을 베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검이 막 그녀의 손목을 잘라내는 듯싶은 순간, 어느새 그녀 또한 번개가 무색하리만치 빠르게 좌측으로 신형을 이동시켜 그의 검을 피해 내며 계속해서 주문을 완성시켜 가고 있었다.

설마 그녀가 그런 상태에서도 자신의 검을 피해 낼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지라 한순간 베르츠라는 중년인은 그녀가 있던 자리에서 잠시 흠칫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 순간, 좌측으로 피했던 그녀의 입에서 주문이 완성되며 그녀의 손이 빠르게 앞으로 내밀어졌다. 그것은 처음에 천우를 공격했던 브러드 핑거라는 수법이었다.

그녀가 뻗어낸 손에서 다시 손가락 모양의 붉은 기운들이 빠르게 베르츠라는 중년인을 향해 덮쳐들었다. 그것은 그녀가 제일 즐겨 쓰는 마법이기도 했고,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는 다른 위력적인 마법을 구사할 여력이 없었기에 마치 최후의 발악과도 같은 브러드 핑거를 발출해 낸 것이었다.

하지만 결코 위력이 약한 마법은 아니었고, 그녀가 구사할 수 있는 1대 1의 대인 마법중에서는 가장 위력적인 수법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만약 블러드 핑거에 적중된다면 상대방은 그 즉시 블러드 핑거가 적중된 부위로 한순간에 온몸의 피가 몰려 폭발을 일으키게 되므로 당연히 살아날 수 없고, 스치기만 해도 그 부위로 피가 몰려 피의 폭발이 일기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된다.

그리고 한번 피의 폭발을 일으킨 부위는 웬만한 포션이나 힐링의 수법으로도 쉽게 치유가 되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과다 출혈로 사망할 수밖에 없는 잔혹한 수법이기도 했다.

또한 자체적인 관통력까지 대단해서 설사 온몸을 튼튼한 갑주로 둘러싸고 있다 하더라도 정통으로 적중되면 강철갑주 정도는 어렵지 않게 뚫어버리는 무서운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베르츠 역시 그녀의 성명마법이나 다름없는 블러드 핑거가 자신을 향해 쏘아오자 한순간 안색을 굳히며 자신의 롱소드를 다가오는 블러드 핑거를 향해서 휘둘러 갔다. 그러자 한순간 그의 롱소드 역시 쭉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며 환상처럼 공간을 베어가고 있었다.

꽈꽈꽝''''!
아악!
또다시 요란한 폭발음이 울리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그 속에서 그녀의 뾰족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발출해 낸 블러드 핑거와 베르츠가 전개해 낸 신성력이 담긴 오러 소드가 순식간에 공중에서 맞다뜨리자 블러드 핑거의 기운은 산산조각이 났고, 더불어 한 줄기 은빛 오러가 그녀의 가슴에 적중하여 그녀는 가슴 부위에서 피분수를 뿜어내며 뒤쪽으로 휠휠 날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베르츠의 오러가 자신의 블러드 핑거를 부수며 다가서는 것을 보고 급히 피한다고 피했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제대로 피해 내지 못한 것이다. 그나마 뒤쪽으로의 회피동작이 있었기에 두 쪽이 나는 것만은 간신히 면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가볍지 않은 상처였고, 그 순간에도 베르츠의 신형은 다시 그녀를 쫓아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베르츠는 그녀가 자신의 검격 안에 들어오자 여전히 허공 중에 몸을 띄운 상태에서 자체하지 않고 다시 그녀를 향해 오러를 발출시켰다.

스컥!
한순간 그녀의 몸이 지면에 닿기도 전에 베르츠가 발출한 오러에 의해 정말로 두 쪽이 나는 듯싶었고, 그녀의 몸을 가르고도 여력이 남은 오러에 의해 지면이 기이한 소리와 함께 쩍 갈라져 나갔다.

하지만 베르츠는 만족한 웃음 대신 눈살을 진뜩 찡그린 채 자신이 갈라버린 지면 위에 내려선 후 천천히 신형을 돌려세웠다.
그런 그의 시선에 지금쯤은 두 쪽이 나서 죽어 있어야 할 마녀 일루아나를 양팔에 받쳐 들고는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사왕의 모습이 비쳤다.
마녀의 졸개들이'''아니었던 건가?


6장 데스기어

저기 ''''내가 괜한 짓을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천우는 갑작스럽게 또 다른 무리들이 나타나서는 그녀와 시비를 벌이더니 급기야는 접전이 시작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특별히 그녀와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단지 이계에 와서 가장 먼저 만난 사람에 불과했으니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남들의 시비에 굳이 끼어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위급한 순간에 의형인 동사왕이 끼어들어 그녀를 구하고는 조금은 난처한 표정과 함께 그렇게 말하자 그 순간부터 그녀는 천우에게도 상관없는 남이 아니게 되었다. 비록 그녀가 의형에게 호의를 보이던 것이 순전히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었지만, 의형인 동사왕이 그것을 무시했다면 모를까 그녀를 구해 낸 이상 의형도 그녀에게 호감을 느낀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아닙니다. 잘하셨습니다.
천우는 동사왕의 두 팔에 안긴 채 의식이 엄엄한 그녀에게 다가서며 미소와 함께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그녀의 쩍 벌어진 가슴을 향해 힐링의 기운을 주입했다.

어느새 의형인 동사왕이 그녀의 가슴부위에 있는 중요한 요혈을 짚어 지혈을 시켜놓은 것에 천우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좀더 짙어졌다.
치료하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듯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천우가 전에도 보았던 그 신비로운 기운을 자신의 팔에 들린 여인에게 주입시키며 그렇게 말하자 동사왕은 특유의 헛기침과 함께 좀 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변명했다.

큼! 뭐,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단지 이 처자가 나랑 닯은 사람을 알고 있다기에 그가 누군지 궁금해서''''긜고 사내 녀석이 이미 부상당해서 힘을 못 쓰는 계집애를 핍박하는 것도 두고 보기가 좀 그렇더구먼,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저놈 보고 나중에 이 파란 눈의 계집애가 멀쩡해지면 그때 다시 정정당당하게 싸우라고 말해 주게.

베르츠는 마녀를 구해 낸 이상하게 생긴 그들이 자신이 알 수 없는 말로 무언가 지껄이더니. 그 중 한 놈이 다가서서는 힐링의 마법을 펼쳐 마녀를 치유하는 것을 보자 더욱 깊숙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생김새도 이상하고 말도 알아들을 수 없다.? 도대채 정체가 뭐지?

그러는 사이 동사왕의 팔에 들린 그녀의 상쳐는 힐링의 수법에 의해 금세 아물었고 한순간 의식이 돌아오는지 그녀의 감겨있던 두 눈이 슬며시 떠졌다.

가장 먼저 동사왕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 순간 그녀의 호수처럼 파란 눈망울이 잔 파랑을 일으켰다.

동사왕 역시 그녀가 깨어나며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을 느끼자 아직도 자신이 그녀를 두 팔로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얼른 두 팔을 뒤로 감추어 버렸다. 그 바람에 그녀는 영문도 모르고 땅바닥에 팽개쳐질 뻔했지만, 다행히 그것을 알아차린 천우가 가벼운 실소를 흘리며 무형의 경기를 일으켜 그녀가 무사히 지면에 바로 설 수 있도록 했다.

동사왕도 한순간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지만 천우에 의해 그녀가 무사히 지면을 딛고 서는 것을 보자 어색한 표정과 함께 본의 아니게 뒷짐을 딛고 서는 것을 보자 어색한 표정과 함께 본의 아니게 뒷짐을 지게 된 자세로 헛기침과 함께 말했다.

험험! 무척 회복이 빠르구먼, 역시 자네의 그 수법은 신기하기 그지없네,

동사왕이 짐짓 딴청을 부리자 이상한 힘에 의해 가볍게 지면을 딛게 된 그녀는 가볍게 놀라면서도 한순간 자신을 구한 것이 바로 눈앞의 동사왕임을 깨닫고는 약간 무릎을 굽히는 자세로 인사를 하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저를 구해 주셨군요. 그런데 정말 당신이 제 계약자가 아니신 건가요?

그녀는 그 와중에도 미련이 남는지 동사왕에게 그렇게 인사를 겸한 질문을 했다. 한데 그 순간 동사왕은 화들짝 놀라며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녀가 자신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인사를 하는 통에 그녀의 피로 물든 가슴 부위의 옷자락이 좌우로 갈라지며 봉긋한 속살 부위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때 그녀의 말은 그들을 주시하고 있던 베르츠의 귀에도 분명히 들려왔고, 그 의미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를 만큼 베르츠는 멍청하지 않았다.

이,이제 보니''''너희들 마족이로구나, 마녀! 네가 정말 미쳤구나, 이 세상에 마족을 불러들이다니!

그녀는 갑작스럽게 베르츠의 외침이 들려오자 그제야 아직 모든 상황이 끝난 것이 아님을 깨닫고는 또다시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것을 본 천우는 그녀가 다시 베르츠라는 자와 싸우려는 생각임을 알고는 약간은 붉으진 얼굴로 여전히 딴청을 부리고 있는 의형을 향해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형님, 저자가 왜 남의 일에 끼어드냐고 형님께 따지고 있군요.

응? 참견한 것은 미안하지만 여러 놈이 떼거지로 연약한 여자를 공격하는 것은 강호의 도의가 아니라고 말해 주게.

그 순간 베르츠는 천우와 동사왕 등이 마족이 틀림없다는 생각에 돌덩이처럼 얼굴을 굳히고는 다시 일루아나를 향해 소리쳤다.

마녀! 지금이라도 참회하고 마족들을 되돌려 보낸다면 너 하나의 죽음으로 모든 걸 끝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너뿐만 아니라 네반 공국 또한 결코 무사하길 바라지마라,

그 순간 독기를 뿜어내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 하얗게 탈색되었다.

무,무슨 말이냐? 네반 공국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흐흐'''마녀, 너는 우리 교국의 정보력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구나, 네가 대신관을 암살한 이상 당연히 너에 대한 모든 조사가 낱낱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네가 네반 공국 출신이거나 그도 아니라면 네 혈족이라도 그곳에 있겠지.
허,헛소리 마라! 나는 그곳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리고 이들은''''
이들은 결코 마족이 아니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녀 자신도 확신이 없었기에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그때 천우가 다시 동사왕에게 말했다.
저자가 형님을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하는군요. 그녀는 형님이 위험할까 봐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뭐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인 건 맞지만'''듣고 보니 저놈 하는 말이 괘씸하구먼 아무래도 저놈 혼 좀 나야 정신을 차리겠는걸. 

동사왕은 천우의 말에 아무래도 버릇을 가르쳐줘야겠다는 생각에 어슬렁어슬렁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천우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자네가 나 대신 말 좀 해주게. 존장을 몰라보고 함부로 지껄인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이쯤에서 물러선다면 한번은 용서해 주겠다고 말일세.

아무래도 먼저 남의 일에 참견한 것은 자신인지라 동사왕은 비록 화가 나긴 했지만 그래도 기회를 주려 했다.
물론 평소에도 그런 것을 눈곱만치도 따져본 적이 없었고 강호의 도의 같은 것도 자신의 기분에 따라 바뀌긴 했지만, 아무튼 지금으로서는 은근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기에 되도록이면 손을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란 바로 파란 눈의 계집애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때문이었다. 혹시나 자신이 손을 쓰는 것이 그 계집애를 위해서 나서는 모양새처럼 여겨질까 저어되어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동사왕 스스로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천우를 통해서나마 경고를 하는 것으로 자신이 나서게 되는 명분을 세우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고, 통상 이런 경우라면 순순히 물러설 놈은 아무도 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튼 자신은 일단 경고를 했으니 이후의 책임은 전적으로 상대방에게 있다는 것이 동사왕의 지론이기도 했다.

그리고 천우는 동사왕이 부탁한 말을 아직 익숙지 않은 이곳의 언어로 사실에 근접하게 통역해 주었다.

물러선다면 살려주겠지만'''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베르츠는 마족이라 여기고 있는 동사왕이 어슬렁거리며 나서는 것을 보고는 흠칫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다시 얼굴만으로는 사내인지 여자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는 마족이 인간의 언어로 그렇게 말하자 두 눈에 분노의 기색을 띄며 말했다.

겨우 인간의 소환에 응할 정도의 하급 마족들 주제에 감히 신의 사제인 나에게 그런 협박을 하다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소환된 마족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너희들이야말로 소멸되고 싶지 않다면 어려움을 알고 스스로 마계로 돌아가라, 최소한 지성이 있는 마족들이니 그 정도 판단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인간의 형상의 마족들은 그로서도 처음 대해 보지만, 이교도들과 사교의 무리들을 처단하는 전투사제로서 소환계 흑마법사들인 네크로맨서들에 의해 소환도니 마계의 마수들은 여러 차례 상대해 본 경험이 있는 그였다.
그리고 마족들이 그런 마수들보다는 훨씬 강하다고 알려져 있긴 하지만, 어차피 인간에 의해 소환될 정도의 하급 마족들이라면 그런 마수들과도 큰 차이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때문에 상대가 마족이라 할지라도 특별히 두려움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상대방의 정확한 능력을 알 수 없었기에 약간의 껄끄러움이 있었으므로 그렇게 회유의 말을 해본 것뿐, 마족들이 스스로 물러나리라고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더 이상 아무런 대꾸 없이 자신을 향해 다가서는 붉은 점이 박힌 마족을 바라보며 베르츠는 다시 마녀 일루아나에게 협박을 가했다.

마녀, 설마 이들 따위로 나를 어찌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다시 한 번 경고하지만 지금 즉시 마족들을 되돌려 보내지 않는다면 너뿐만 아니라 네반 공국은 틀림없이 참혹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내 말이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는 것은 너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정말 그런 것을 원하는가!
하지만 그녀는 이미 동사왕이 나서기 시작하자 더 이상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저 입술만 꼭 깨문 채 자신에게 비열한 협박을 가하는 비르츠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때 천우가 다시 동사왕에게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물러서라고 했더니 죽어도 그럴 수 없다고 하는군요. 만약 여기서 자신을 죽이지 못하면 틀림없이 패거리들을 이끌고 형님과 저 여인에게 보복을 가하겠답니다. 그리고 무슨 국운 운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그 패거리들이 적은 숫자는 아닐 것같습니다.
뭐야? 그렇다면 저놈은 중원 황실의 동창 놈들 같은 못된 녀석인가 보구먼, 어쩐지 온몸을 철갑으로 가린 저 꼬락서니 하며, 검강을 구사하는 녀석이 겨우 단조로운 쾌검밖에 쓰지 못하는 것을 보고 혹시 이곳의 관부 녀석들이 아닐까 생각하긴 했네. 그렇다면 저 파란 눈 계집애도 분명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기는 게 분명할 게야.
관부에 대한 좋지 못한 섭입견이 이곳에서는 그대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삽시간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기는 불쌍한 여자로 돌변했다. 더불어 관부의 속성과 후일의 귀찮음을 피하려면 어찌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던 동사왕이었기에 지금껏 느긋해 보이던 행동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바로 필살의 의지가 서린 살기가 뿜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순간 베르츠는 갑작스럽게 심혼을 죄어오는 듯한 엄청난 살기에 안갯이 급변한 채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했고, 더불어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이,이럴 수가! 아무리 마족이라지만 이 정도의 살기라는 것은 '''''설마 소환된 하급 마족들이 아니라 강림한 상급마족이란 말인가? 그것도 셋씩이나? 그럴 리가''''상급마족이 인세에 강림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거늘''''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기운을 발하는 존재는'''''
베르츠는 감당할 수 없는 동사왕의 살기에 눌려 안색이 퍼렇게 죽은 채 연신 뒤로 물러서면서 저도 모르게 경악이 가득한 어조로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하급 마족이 소환되어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대륙이 한동안 소란스러워질 일이었는데 하급마족이 아닌 상급 마족이 강림한 것이라면 그것은 대륙이 소란스러워질 정도가 아니라 대륙 전체가 공포에 잠길 일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셋이라면 그것은 마왕의 강림만큼이나 큰 사건이었고, 잘못하면 고대에 마왕의 강림으로 겪었던 멸망에 가까운 피해를 되풀이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마왕이 인세에 강림한 적은 있었어도 상급 마족이 강림했던 경우는 대륙의 인간 역사에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상급 마족의 강림은 오히려 마왕의 강림보다 더 큰 피해를 줄 수도 있다고 고대 예언가들은 말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상급 마족들이 강림을 원한다 하더라도 극서은 오히려 마왕이 강림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까다롭기 때문에 실제로 인세에 상급마족이 강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베르츠였기에 그들이 절대 상급 마족일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 살기만으로도 자신을 주눅 들게 만들 수 있는 존재가 결코 하급 마족일 리는 없다는 생각에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또다른 존재에 대해서도 떠올랐지만 그 역시 부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또 다른 존재란 바로 드래곤들이었지만 그 역시 부정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일단 말이 서툴거나 아예 통하지 않는다는 것과 드래곤들은 5백년 전에 있었던 한 가지 사건으로 인해 지금은 절대로 유희를 나오거나 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베르츠는 두려움과 함께 극도의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동사왕이 다가서는 만큼 조금씩 뒤로 물러서며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비록 기세에서는 밀려도 한 놈이라면 신성력의 힘을 빌려 어떻게든 상대해 볼 생각도 있었지만, 그런 존재가 셋이라면 아무래도 불리하다고 느낀 것이다.

그 순간 베르츠는 물러서던 동작에서 갑자기 쏘아진 화살처럼 동사왕을 향해 신형을 폭사시키며 들고 있던 롱소드를 동사왕을 향해 찔러갔다.
그의 롱소드에는 어느새 다시 하얗게 빛나는 오러가 맺혀 있었고, 그런 오러가 한순간 쭉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며 빛살처럼 동사왕의 심장부위를 노렸다.
하지만 동사왕은 단지 빠르기만 할  뿐 평범하다 못해 삼류에도 미치지 못할 것 같은 그런 평이한 수법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흥! 검강만 뿜어내면 다냐? 네 녀석한테는 굳이 제왕수결을 펼칠 일도'''''응? 단순한 쾌검이 아니라 환검이었나?
동사왕은 말하다가 갑자기 자신을 향해 뻗어오던 한 줄기 검강이 마치 부챗살 펴지듯이 쫙 퍼지는 듯한 변화를 보이며 조금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조금은 의외라는 듯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때 이미 동사왕의 한 손 역시 전면을 향해 뻗어 나가고 있었다.
제법이긴 하다만 여전히 장난 같은 수법일 뿐이다. 환검에는 천강산수가 제격이지.
사실 예전에는 아벨란 대륙에서 오러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드 마스터로서 존경받으며 최강자의 반열에 들 수 있었지만, 5백 년 정의 그 일이 있고 나서는 기사로서 진정한 강자의 반열에 들려면 오러 소드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통칭 환상검술이라 칭하는 몸 안의 마나를 움직여 구사하는 독특한 기교의 검술을 구사할 줄 알아야 했다.

그러한 환상검술은 그 일이 있은 후 지난 5백 년 동안 수많은 기사 가문과 소드 마스터들에 의해 연구되고 새로인 창안되어 왔고, 지금에 와서는 그러한 환상검술의 유무를 토대로 기사 가문의 지위와 명예가 결정되고 있었다.
아무튼 베르츠가 동사왕을 향해 전개해 낸 수법은 대륙 최강의 기사 가문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이얀 가문의 비전검술 중 하나로, 이른 바 분광검이라는 수법이었다.
빛살 같은 빠름과 더불어 환상처럼 전개되는 오러 소드의 급작스런 산개는 위력적이다 못해 공포스러울 정도였고,그러한 이얀 가문의 비천 중 하나인 분광검을 완벽히 익힌 이얀 폰 베르츠는 명실 공히 대륙의 최강 검사들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동사왕의 눈에는 이제야 제법 그럴듯한 공격으로 비쳐질 뿐, 기교 면에서 보자면 기껏해야 강호의 일류나 절정 수준밖에 되지 않는 그러한 수법이 눈에 찰 리가 없었다.
그런 수법을 맞이해 제왕수결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동사왕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고, 때문에 오랜만에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잡다한 무공초식 중 적당한 수법 하나로 대응해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베르츠가 전개해 낸 부챗살 같은 오러 소드가 막 동사왕이 뻗어낸 손을 난도질한다 싶은 순간, 갑자기 동사왕의 손이 기묘한 변화를 일으키며 삽시간에 온 천지가 동사왕의 손 그림자로 가득 뒤덮였다.
까가가가가강!

한순간 동사왕이 전개해 낸 천강산수가 베르츠가 전개해 낸 부챗살 같은 오러를 사정없이 두드리며 마치 쇠북을 두드리는듯한 요란한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크윽! 맨손으로 오라를''''두고 보자, 마녀!
베르츠는 자신이 전개해 낸 회심의 일격이 상대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기이한 마법과 같은 수법에 의해 자신의 오러가 금방이라도 깨어져 나갈 듯한 충격을 받자 신음성을 흘리며 달려들 때보다 더욱 빠르게 뒤쪽으로 물러섰다.더불어 그의 한 손은 어느새 품속을 뒤지고 있었고, 입에서는 동사왕이 아닌 일루아나에 대한 원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동사왕은 충격을 받아 뒤로 튕겨져 나가는 그를 보며 예의상 한번 공격을 받아주었으니 이제는 마무리를 지을 생각으로 베르츠를 향해 다시 천강지를 발출해 내려 했다.
한데 막 천강지를 발출해 내려는 순간, 뒤로 튕겨져 날아가던 놈이 품속에서 웬 종이쪼가리를 꺼내 드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냐? 유서라도 남기게 해 달라는 것인가?
동사왕이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는 순간, 베르츠는 텔레포트의 마법이 담긴 스크롤을 찢어버렸다. 그러자 그의 몸이 삽시간에 빛에 휘감겼다.
하지만 그뿐, 그 빛은 곧 사라져 버렸고 베르츠의 몸은 여전히 뒤로 튕겨져 나가 이윽고 지면에 떨어져 나뒹굴고 말았다.
큭! 이럴 수가'''텔레포트 스크롤이 작동되지 않다니''''
한동안 정신없이 구르던 베르츠가 고통스런 신음성과 함께 지면에서 일어서면서 여전히 자신의 손에 들린 찢어진 텔레포트 스크롤을 바라보며 넋 빠진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리자, 그 모습에 동사왕은 잠시 손을 쓰려던 것을 멈추고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놈 유서를 쓰게 해 달라고 부탁하려던 것이 아니었나? 쓸데없이 종이는 왜 찢고 난리야?
베르츠가 스크롤을 꺼내 들 때 천우는 아티오네스에 의해 그가 도망가려는 것임을 들었다. 그 때문에 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 즉시 주변 공간에 대마법 장애결계를 쳐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동사왕으로서는 베르츠의 행동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음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나마 스크롤을 꺼내 들었을 때 유서라도 쓰게 해 달라고 부탁하려는 것으로 오인하고 선심을 베풀어줄 요량이었던 것이다.
한데 그런 종이마저 스스로 찢어버렸기에 그런 그의 행동이 더욱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다시 베르츠의 입에서 악물린 음성이 튀어나왔다.
좋다, 이렇게 된 이상''''어쩔 수 없겠군,
신음과도 같은 중얼거림이 있은 후 베르츠는 갑자기 자신의 롱소드로 손가락을 베어낸 후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자신의 롱소드에 박힌 손잡이 부분의 흰색 돌 위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그의 입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주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계약의 동반자여, 나를 위해 그대의 가슴을 열어 다오.
그 이상한 행동에 동사왕은 또다시 의문스런 눈길로 베르츠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 순간 뒤편에서는 일루아나가 창백한 얼굴을 사색으로 물들이며 다급한 외침을 터뜨렸다.
마,막아요'''어서! 저건 바로''''
하지만 그녀의 외침이 전부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베르츠의 뒤편에 무언가 거대한 물체가 어디선가 나타났고, 베르츠의 신형은 그 거대한 괴물체를 향해 빨려드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정말로 빨려든 것인지 어느새 베르츠의 신형은 온데간데없고 단지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 괴물체만이 덩그러니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워어!

한순간 그 괴물체로부터 이상한 괴성이 천둥처럼 터져 나왔다. 그 모습에 이번에는 동사왕이 놀라서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뭐,뭐야? 갑자기 웬 무쇳덩어리?
그때 다시 일루아나의 임에서 절망과 분노가 가득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신의 사제라는 작자가 데스 기어와 계약을 맺고 있었다니'''''
천우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삼 장여 정도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쇳덩어리를 기이한 눈길로 응시하며 아티오네스에게 묻고  있었다.
[저게 뭐지? 단순한 쇳덩이는 아닌 듯한데.]
[그,글쎄, 생김새는 아이언 골렘하고 비슷하기는 한데'''일반 골렘보다는 휠씬 크고 강력해 보이는군, 그리고 좀 전에 그 놈이 저 골렘의 몸 속으로 들어간 것을 보았는데 나로서도 그러한 광경은 무척이나 생소하군, 저것이 단순한 골렘이라면 인간의 몸이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말이야.

가,가만! 그러고 보니 저 아이언 골렘에서 느껴지는 기운은'''이건 틀림없이 드래곤 하트에서나 느낄 수 있는 마나의 기운이다. 그것도 틀림없는 블랙 드래곤의 ''''하지만 도대체 누가 어리석게도 드래곤 하트를 이용해 저런 골렘을 만들었단 말인가? 비록 완전한 것은 아닌 조각을 사용한 것 같기는 하지만, 드래곤 하트를 저따위 골렘을 만드는 데 사용하다니'''아무튼 저 아이언 골렘이 마나석 대신 드래곤 하트를 이용해 만들어진 것인 만큼 굉장한 위력을 보일 것이다.]
드래곤들은 수명이 다해 죽으면 육신은 대지로 돌리지만 드래곤 하트만은 세상에 남긴다, 그리고 그러한 드래곤 하트를 다른 드래곤들은 결코 건드리지 않는다. 육신은 비록 대지로 돌아갔다 하더라도 드래곤 하트는 세상에 남아 여전히 기의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간혹 그렇게 남겨진 드래곤 하트가 인간들에 의해 발견되기도 하고, 그럴 경우에는 세상이 발칼 뒤집히기도 했지만 그것역시도 다른 드래곤들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것을 어떤 식으로 사용하든  그것은 습득한 인간의 권리였고, 또한 어떤 형태로 변하든 드래곤 하트는 여전히 세상에 존재하는 기의 조화에 일익을 담당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아티오네스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아이언 골렘이 드래곤 하트를 이용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자 흥미로움과 함께 약간은 자존심이 상한 듯한 반응을 보였지만, 천우의 눈에는 오히려 이채가 어렸다.
아티오네스는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천우가 느끼기에는 데스 기어라 불린 저 괴상한 물체에 굉장히 강력한 힘이 어려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괴물체 안으로 사라진 인간의 기운 역시 그것에 함께 동화되어 있는 듯 보였기에 어떤 면에서는 그가 갑자기 강력한 존재로 변신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만 자신의 의형 정도라면 크게 위험하지는 않을 성싶었고, 또한 의형 저런 정도에 겁먹고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천우는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일루아나가 데스 기어라 부른 그 괴물체는 머리에는 사람 키만 한 뿔을 달고 있었고 손에는 역시 사람 키보다 더 커 보이는 묵광으로 번들거리는 거대한 검 형상의 쇠기둥이 들려 있었으며, 안면은 마치 거대한 소를 의인화시켜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누구라도 그 모습을 본다면 겁을 먹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형상이었지만, 동사왕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뒤로 몇 걸음 물러선 것에 대해서 자존심이 상한 듯 얼굴마저 붉게 상기시키며 화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네놈이 감히 그따위 시커먼 무쇳덩어리를 등장시켜서 사람을 놀라게 하다니! 그런 쇳덩이 안에 숨는다고 안전할 성싶으냐? 오냐. 저기 널브러진 놈들처럼 그 쇳덩어리와 함께 아주 벌집을 만들어주마,
그 순간 동사왕은 화가 나서 좀 전까지는 사용할 생각을 안하던 제왕수결의 기수식을 취하였다. 한데 우연찮게도 그 모습이 일루아나가 브러드 핑거를 펼치기 전에 맺는 수식과도 비슷해 보이는 면이 있었다.
비록 순전히 우연이긴 했지만 측면 방향에 서 있던 일루아나는 그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고, 그 순간 그녀의 파란 눈망울이 또다시 격정으로 물결치듯이 흔들렸다.
흐흐! 설혹 너희들이 상급 마족들이라 해도 라헬의 가드였던 데스 기어를 불러낸 이상 나를 어찌하겠는가, 어디 너희들이 진정한 파괴와 공포의 상징인 데스 기어의 힘을 견뎌낼 수 있는지 보겠다.
갑자기 그 거대한 괴물 안으로 흡수되었던 것처럼 보였던 베르츠의 음성이 괴소와 함께 크게 확장되어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그 순간, 제왕수결의 기수식을 취하고 있던 동사왕을 향해 쇠가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거대한 검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비록 단순하기는 했지만 빠르기는 결코 방금 전 베르츠가 맨몸으로 전개해 내던 빠름에 전혀 뒤지지 않았고, 위력 역시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데스 기어가 들고 있는 거대한 검은 물론이고 몸 자체에도 온갖 마법적 처리가 되어 있었기에 설혹 대륙의 소드 마스터나 8서클의 대마도사라 하더라도 맨몸으로 데스 기어를 상대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를 바 없었다. 때문에 베르츠가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고 그렇게 소리쳤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소드 마츠터의 최상급 경지인 소드 컴플리터라 불리는 자신의 오러 소드를 힘들이지 않고 맨손으로 받아내는 괴물이었다. 아무리 데스 기어와 함께라도 그런 존재를 손쉽게 어찌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다만 이자리를 어떻게든 벗어나고 보자는 생각이 우선이었고, 아무리 상급 마족이라 하더라도 전력을 기울인 데스 기어의 검격을 정면으로 맞받지는 못하리라는 생각에 몸을 뺄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다시 선공을 취한 것이었다.
동사왕은 무식할 정도로 거대한 쇳덩이가 자신을 향해 쇄도해 들며 역시 무식하게 큰 검을 휘둘러 오자 제자리에서 꿈쩍도 않은 채 그런 데스 기어를 향해 일견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행동을 취했다. 한 손으로는 데스 기어의 거대한 검을 맞이해 나아가고 있었고, 또 한 손은 몸체 부분으로 느릿하게 천천히 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순간, 거대한 검을 맞이해 나가는 동사왕의 손끝에서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하더니 마치 호수에 돌멩이가 던져진 것처럼 검은 여울 모양의 기운이 어리며 번지기 시작했고, 동시에 다른 한 손에서는 실과도 같은 검은 흑선들이 마치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처럼 잔상을 남기며 데스 기어의 거대한 몸체로 쏘아져 나갔다.
쿠아앙!
찡!
그 순간 전혀 음색이 다른 두 가지 소리가 천둥이 치듯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동사왕의 무모한 행동에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충격으로 입만 벙긋거리고 있던 일루아나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또다시 크게 떠졌다.

당연히 피하리라고 여겼던 그가 한순간 제지리에서 데스 기어의 거대한 검에 의해 발살이 날 것처럼 보였는데, 오히려 뭔가 검은 기운이 환상처럼 어른거리는 듯하더니 거대한 데스 기어의 몸이 또다시 가랑잎처럼 뒤로 튕겨져 날아가고 있는 모습이 두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거대한 몸체의데스 기어가 허공중에 뜬 채 날아가는 모습은 일견 아름답게 보이기조차 할 정도였다. 그녀의 눈에 그 모습이 꿈결처럼 느껴지는 순간, 또다시 거대한 폭음과 함께 데스 기어의 몸체가 주변에 널려 있는 돌기둥 속으로 파묻히며 불꽃과 함께 사방으로 돌조각들을 튕겨 내는 모습 또한 너무도 아름답게 비쳐졌다.
끙! 보기보다는 무지 단단한 놈일세. 제왕수결에도 벌집은 커녕 흠집도 생기지 않는 것 같은데'''''

동사왕은 데스 기어의 엄청난 힘에 의해 거의 무릎까지 석판을 부수고 파고 들어간 자신의 두 다리를 빼내며 그렇게 투덜거렸다. 그리고 사방에 온통 돌 조각들을 흩날린 채 파묻혀 있는 데스 기어를 향해 조금은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한 번으로 안 되면 수천 번이라도 두드려주마, 어디 그러고도 멀쩡할 수 있는지''''어라? 이 덩치만 큰 쇳덩이가 어디로 도망간 거야? 그리고 저놈은 또 언제'''''에? 저놈 죽었네?
어느 순간 돌무더기 속에 파묻혀 있던 데스 기어의 거대한 몸체가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더니, 그 자리에는 전신의 모든 모공에서 피를 흘려내며 죽어 있는 베르츠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 쇳덩이 놈, 치사하게 숨겨준 놈을 죽게 놔두고 도망가 버리다니''''다음번에 만나면 반드시 세상에서 가장 큰 벌통으로 만들어주겠다.

동사왕은 베르츠가 죽은 것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제왕수결에 맞고서도 멀쩡했던 데스 기어에 대해서만 분통을 터트렸다.
이 모근 상황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던 천우는 그런 동사왕의 태도에 슬며시 미소 짓고는 자신의 곁에서 할 말을 잊은 채 멍하니 서 있는 일루아나를 향해 말했다.
이제 상황 정리가 좀 된 듯하니''''얘기를 좀 나누어봅시다.
천우의 말에 그녀는 황급히 정신을 추스르며 다시 기대가 잔뜩 어린 어조로 말했다.
정말'''''저분이 칼라이스가 아니시란 말인가요? 이제는 도저히 아니라는 말을 믿기가 힘들군요.
제발 사실대로 말씀해 주세요. 저분, 칼라이스 맞죠? 그리고 당신들 모두 상급 마족들이 맞죠? 인간이라면 절대로 데스 기어를 당해 낼 수 없어요. 더군다나 저분이 방금 전 데스 기어를 향해 펼쳤던 수법도 단지 내가 흉내만 내고 있는 블러드 핑거의 원형인 데스 핑거가 틀림없어요. 도대체 이렇게 모든 것이 일치하는데 왜 저분이 칼라이스가 아니라고 하시는 거죠? 도대체 왜'''''
급기야 그녀의 푸른 눈에 눈물이 맺히자 천우 또한 할 말을 잊은 채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여기서 시간만 보낼 생각인가, 그 인간 여자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자유에 맡기고 우선 내 레어부터 찾아가 보도록 하자,]
[그건 왜?]
[왜는 무슨 , 이곳에서 지내자면 일단은 이것저것 필요한 것도 챙겨야 할 것이고, 그런 후에는 그 인간 여자가 아니더라도 다른 경로를 통해서 얼마든지 이곳 소식들을 알아볼 수 있으니 더 이상 상관하지 말고 그만 가자는 얘기지.]
[그렇게 하도록 하지.]
[내 레어 좌표는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이다.]

천우 또한 더 이상 그녀를 상대하는 것이 난처하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아티오네스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때문에 그녀의 시선을 슬쩍 피하고는, 자신에게로 다가서고 있는 동사왕과 이제는 한결 진정된 표정으로 여전히 한쪽에서 조용히 서 있는 조아를 향해 말했다.
일단은 잠시 가보아야 할 곳이 있으니 형님께서는 제 손을 잡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조 소저도 네 손을 잡도록 하시오.
응? 어디를 가는데 손을 잡으라는 것인가?
동사왕은 천우의 말에 의문을 표시했고, 조아는 다시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그저 다른 장소로 빨리 이동하려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왔을 때처럼 시공간을 이용하려는 것이기에 손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그 말에 동사왕은 흠칫 얼굴이 굳어지더니 은근한 어조로 물어왔다.
꼭'''그렇게 가야만 하는가? 웬만하면 이곳 지리도 익힐 겸 두 발로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한데''''험! 뭐, 어쩔 수 없다면 모르지만 어쩐지 그 방법은 기분이 요상해서''''
천우는 동사왕이 공간이동에 대해서 거리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자 속으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동사왕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의형이 원하지 않는 바를 강요하고픈 생각 또한 없었다.

더욱이 말해 놓고 나니 천우 자신도 다시 조아의 손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했다. 물론 꼭 손이 아니더라도 옷깃만 잡아도 상관은 없겠지만 역시 그런 행동들도 조금은 어색할 것 같았다.
마법진을 그려서 이동한다면 그런 어색한 일들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조금은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조아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의혹을 갖고 놀라는 것도 아직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일인 듯싶었다.
천우는 그런 생각들이 들자 고개를 끄덕이며 동사왕에게 말했다.
그럼 그러도록 하지요. 어차피 급할 일은 없으니까요.
그때 일루아나는 천우가 자신을 떼어놓고 가려 한다는 것을 눈치로 알고는 다급한 표정으로 천우에게 말했다.
혹시 저를 떼어놓고 가시려는 건가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어디든 저도 함께 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제발''''
천우는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접하자 내심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을 느꼈지만, 문득 의형인 동사왕의 눈길이 그녀를 스치며 미약하나마 관심을 보이는 것을 눈치 채고는 결국 그녀도 동행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소, 당분간은 형님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 말아주시오. 그것이 조건이오. 그리고 '''내가 질문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아는 대로 대답해 주셔야 하오, 어떻소?
천우의 말에 그녀는 기쁜 표정으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알았어요. 그렇게 하겠어요.
알겠소, 그럼 ''''우선은 움직이면서 얘기하도록 합시다.
천우는 이미 아티오네스의 레어를 탐색해 본 것만으로도 방향과 위치를 짐작할 수 있었으므로 일단은 그쪽 방향을 향해서 출발하기로 했다.
그때 그녀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급히 소리쳤다.

잠깐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더니 그녀는 베르츠가 죽어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다가간 후에 그의 손에 쥐여 있는 롱소드를 강제로 빼내었다. 그리고 그의 허리춤에서 검집도 챙겨 검을 집어넣은 후 다시 자리로 돌아오면서 천우에게 생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이제 됐어요. 그만 가도록 해요.
천우는 갑자기 울다가 웃는 그녀의 행동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에 고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마녀라 불리는 일루아나는 천우 일행과 첫 동행이 되었다.


7장 오크와의 조우



우리가 있던 곳은 뭐라고 부르는 곳이오? 평범한 곳은 아닌 듯하던데''''
어느 정도 이곳의 언어에 익숙해진 천우가 처음 도착한 곳을 떠나 어느덧 숲이 우거진 곳을 걸으며 떠듬거림이 많이 가신 어조로 그렇게 묻자 일루아나는 쾌활한 표정으로 대답해 주었다.
그곳은 페허의 마탑이라고 불리는 곳이에요. 아주 오래 전에 이반도프라는 마법사가 있었는데 그가 사용하던 마탑이죠, 당시에 그는 대륙에서 제일가는 대마도사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사용하던 마탑이 원인 모르게 산산이 붕괴되었다는군요.
사람들은 마탑이 붕괴된 이후에 그곳을 철저히 수색했지만 그 대마도사의 시체나 다른 흔적은 찾지 못했고, 또한 그가 평생토록 연구했던 마법 자료들이나 서책들도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다만 어떤 마법인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강력한 마법이 그곳에서 실현되었다는 것만을 대기 중에 남아 있는 마나의 기운으로 짐작했을 따름이라고 해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천우는 그 이반도프라는 이름을 헬로가드에게서 들었음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그 순간 천우의 의식속에서 헬로가드의 흥분한 외침이 울려 나오기 시작했다.
[그곳이 그 때려죽일 마법사 놈이 사용하던 곳이었구나! 그 죽일 놈이 차원이동을 실행한 직후에 마탑이나 그와 관련된 모든 자료들이 사라지도록 안배한 거겠지, 명색이 8서클의 백마법사였는데 나중에라도 나와 계약해 흑마법사가 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았을 테고, 또한 다른 인간들이 차원이동에 대한 단서를 잡아 그곳에서 차원이동 마법진을 복구라도 시킨다면 큰일이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그놈이 마법진을 부수는 것만으로 강림한 내가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마법진이 사라졌다 해도 당시에 네게 조금만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나는 대기 중에 남아 있던 기운만으로도 얼마든지 역으로 추적해서 이곳에 돌아올 수 있었다. 조금만 시간이 남아 있었어도 말이다. 그리고 그 빌어먹을 천마 놈만 만나지 않았어도''''']
[그만하도록, 어쨌든 돌아오지 않았는가.]
[크윽! 돌아오면 뭐 하냐, 이번에는 천마보다 더 악질한테 걸려서 여전히 마계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언제 소멸될지도 모르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해 버렸는데, 게다가 과연 죽기나 할지 의심스러운 인간과 영혼의 맹약까지 맺었으니''''에구, 이런 기구한 마왕 팔자가 또 있을까!]
아무린 곤욕을 치러도 여전히 틈만 나면 비집고 나오는 헬로가드였다.

생대해 주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투정이었기에 천우는 헬로가드의 말을 무시한 채 다시 자신의 곁에서 걷고 있는 일루아나에게 본격적으로 질문을 시작했다.

혹시 천마라고 들어본 적이 있으시오?
처언'''마? 글쎄요''''처음 들어보는 말이로군요.
천마라는 말 자체는 중원의 언어였기에 그녀는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음''''그럼 혹시 바포메트라는 마족에 대해서는 아시오?
그 물음에 일루아나는 흠칫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조금은 기이한 눈초리로 천우를 보며 말했다.
바포메트라면 ''''당연히 알지요. 그 역시 마계의 마왕들 중 하나가 아닌가요?
그렇소, 그러면 그 바포메트가 이곳에 육신을 지닌 채로 강림했던 적이 있소?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알기로는 아직 대륙의 역사에 바포메트가 강림했던 적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다만 지금도 여전히 바포메트를 숭배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요.
음!
그녀의 말에 천우는 나직한 침음성과 함께 잠시 질문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중원에서 육신을 가지고 도망친 바포메트가 아직 이곳에 나타난 적이 없다면 처음부터 이치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차원이동은 시간까지 뒤틀릴 수 있다고 들었기에 어쩌면 자신들이 시간을 거슬러 천마나 바포메트가 이곳에 나타나기 전의 시간대로 온 것일 수도 있었고, 혹은 바포메트나 천마가 무언가 꾸미는 일이 있기에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만약 뒤틀린 시간대로 인해 자신들이 천마나 바포메트보다 먼저 이곳에 와 있는 상태라면 어제 그들과 조우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분명 어딘가에 천마나 바포메트에 대한 흔적이 남아 있을 테지만, 그녀가 천마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고, 또한 바포메트 역시 아직 현세에 강림한 적이 없다고 하니 오히려 전자일 가능성이 높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천우는 조금은 굳어진 기색으로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당신은 그 바포메트를 숭배하는 자들이 있는 곳을 알고 있으시오?
천우의 물음에 일루아나는 다시 기이한 눈빛을 보이며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혹시 바포메트가 인세에 강림한 것인가요? 그리고 당신들은 그 때문에''''
천우는 그녀의 어조에 묻어 있는 또 다른 의미를 느끼고는 짐짓 정색을 하며 말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린 마족들이 아니오. 그리고 바포메트를 찾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은 자세한 것을 알려 하지 마시오. 필요하면, 그리고 말해도 괜찮을 상황이라면 그 때 알려드리겠소, 아시겠소?

아, 알겠어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요.
천우는 또다시 그녀의 오해가 발동하면 나처한 입장에 놓이게 될 듯하기에 미리 그렇게 엄포를 놓은 것이었고, 그녀 또한 잘못하면 천우 일행에게서 떨어져 나갈 수 있기에 애써 동사왕이나 그들에 관한 관심을 보이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천우는 그녀의 불안한 표정을 보자 절로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조금은 관심사를 돌릴 필요가 있었기에 다른 부분에 대해서 질문했다.
한데 당신은 왜 그자의 검을 취한 것이오?  보아하니 당신은 검을 쓰는 것 같지는 않던데'''
천우가 베르츠가 들고 있던 검에 대해서 묻자 그녀는 또다시 생긋 웃으며 품에 들고 있던 그의 검을 천우에게 내밀며 말했다.
사실은 제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당신에게 드리려고요.
그녀의 말에 천우는 잠시 의아한 눈빛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가 그녀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에 골치가 아파왔다.
왜 그 검을 네게 준단 말이오?
당신은''''검을 쓰지 않나요?
그런 건 아니오맘''''
그럼 이 검을 쓰세요.
네게는 다른 검이 필요하지 않소.

천우의 완곡한 거절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검집만 보이고 검은 없으신 것 같은데'''
그녀의 말에 천우는 강호에 출도한 이래로 진정 당혹감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자신이 이곳에 오기 전에 바포메트를 향해 검을 던지고는 회수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천우는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 어처구니없이 하다가 오히려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띠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또한 무언가를 잘 잊기도 한다. 그것은 아무리 머리가 명석한 사람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인 이상 절대로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천우 자신은 강호 출도 이래 한 번도 실수다운 실수를 해본 적이 없었고, 무언가를 잊어버린 적도 없었다. 스스로 완벽하다고 자만해 본 적은 없었지만 이미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너무 완벽하다는 것은 무의식중에 느끼고 있는 바였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처음으로 인간적인 실수를 범한 것이다. 그것은 검을 회수하지 않은 실수가 아니라 자신이 검을 회수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인해 처음으로 말실수를 하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흔하디흔한,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는 일이었지만, 천우에게는 그 의미가 달랐다. 자신도 무언가를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곧 자신이 완벽한 존재가 아니며 무의식 저편에는 분명 인적인 면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셈이었다.
천우 자신은 당연히 검이 있거나 별 상관을 하지 않았고, 가지고 있던 검 자체도 남들이 검이라 인정하지 않던 것이었다. 굳이 검이 아니더라도 검집이든 혹은 의지로 만들어낸 무형검으로든 얼마든지 풍검을 전개해 낼 수 있으니 말이다.
결국 중요하지 않은 물건이었기에 꼭 회수할 필요도 없었던 검이기는 했지만, 평소의 자신이라면 회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몰라도 회수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를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일로 자신도 소홀히 여기는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잊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은 천우는 그 사실에 대해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새 천우로 인해 일행의 걸음은 멈춰져 있었다.
그녀는 천우가 처음에는 걸음을 멈추며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곧 기쁨이 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내민 검을 받아들자 다시 생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검은 결코 평범한 검이 아니에요. 그리고 또한 아무나 쓸 수 있는 검도 아니죠, 검 자체도 흔히 볼 수 없는 명검이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손잡이에 박혀 있는 그 계약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천우는 그녀의 말에 검 손잡이에 박혀 있는 그 자그마한 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베르츠라는 인물이 그 동에 자신의 검지를 베어 피를 흘리며 주문을 외우자 데스 기어라는 그 이상한 아이언 골렘이 나타났다는 것이 떠올랐다.

손잡이에 있는 이 돌이 그 골렘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구려.
골렘'''요?깔깔깔깔! 데스 기어를 골렘이라고 부르다니요. 깔깔까!
그녀는 허리까지 부여잡은 채 한동안 요란한 웃음을 발하더니 곧 억지로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천우 앞에서 그렇게 웃은게 무안한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죄,죄송해요, 하지만 데스 기어를 골렘이라고 하는 말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녀는 그 생각만 하면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올 듯한지 볼을 잔뜩 부풀리며 웃음을 참았다.
그 모습에 천우도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소, 한데 그 말이 왜 그렇게 우스운 것이오?
정말 당신들은 알 수 없는 분들이로군요 분명 데스 기어를 모르시는 것 같은데 '''그것을 보더라도 이곳 분들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죠, 뭐, 그게 아니더라도 달리 의심할 여지도 없지만'''아무튼 데스 기어는 골렘과는 차원이 다른 마법 병기예요. 지금도 각 대륙의 제국과 왕국에는 타이탄이라는 데스 기어를 본따 만든 마법 병기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도 데스 기어와는 비교 자체가 안 되죠.
데스 기어는 진정한 파괴자예요. 물론 데스 기어와 계약을 맺는 당사자들의 능력도 크게 좌우하기는 하지만 아무튼 대륙의 누구도 데스 기어를 골렘이라고 부르지도, 그리고 골렘으로 취급하지도 않아요.

타이탄? 그 또한 얼마 전의 그 데스 기어라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사람들이 모두 그것으로 싸운단 말이요? 
그녀는 천우 등이 정말로 이곳의 사정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자 될 수 있는 대로 자세히 설명해 주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는 않아요. 비록 데스 기어와는 비교할 수 없다지만 타이탄들 역시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강력한 제국이라 할지라도 불과 수백여 기 정도만 보유하고 있을 뿐이에요.
웬만한 왕국이라면 십여 기 정도를 제작하는데만도  모든 국력을 쏟아 부어야 할 정도지요. 또한 타이탄과 계약을 맺고 다룰 수 있는 사람들도 최소한 마나를 능숙하게 다를 수 있는 소드 익스퍼트에 이른 기사들이나 가능하기에 인적 자원 역시도 흔한 것은 아니죠.
천우는 그녀의 설명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나름대로 추려 걸음을 옮기며 다시 질문했다.
그럼 데스 기어라는 그것은 지금은 만들 수 없다는 것이오?
천우가 움직이자 따라서 멈추었던 일행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동사왕이나 조아는 그들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으므로 그저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일에 집중했다. 다만 일루아나가 천우에게 검을 주는 모습이나 천우를 보고 유쾌하게 웃는 모습 등이 조아의 심사를 흔들어놓았을 뿐이다. 그래도 그녀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일루아나는 일단 말이 통하는 천우와 친해질 필요성이 있었기에 의식적으로 더욱 쾌활하게 행동했다. 데스 기어의 계약석이 박힌 검도 천우의 호감을 얻어내기 위해 챙겼던 것이다. 물론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절대로 그냥 버려두고 올 수 없는 물건이긴 했지만 말이다.
천우의 움직임을 따라 그녀도 걸음을 옮기면서 다시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요 지금은 만들 수 없죠, 데스 기어라는 명칭은 모두 5백 년 전 라헬교단의 마법사들에 만들어진 것만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은 모두 타이탄이라고 부르죠, 아니 정확히는, 라헬교단이 사라진 후 데스 기어와 같은 강력한 마법 병기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거예요.
전하는 얘기로는 라헬교단에서 만들었던 데스 기어는 모두 십여 기였지만 그때의 일로 여섯 기는 완전히 파괴되고 단 네기만이 온전히 남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때 파괴된 데스 기어의 잔해들을 각국에서 나누어 가진후, 그것을 토대로 타이탄들이 만들어졌고, '''아무튼 이제는 단 네 기의 데스 기어들만이 존재하고, 그런 네 기의 데스 기어들과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계약석 역시 그 행방을 아무도 모른다고 해요.
그렇게 지난 5백 년간 데스 기어는 세상에 출몰하지 않았는데'''한데 다른 곳도 아니고 설마 교국에서 데스 기어의 계약석을 확보하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그리고 그 계약자가 바로 베르츠였다는 것도 ''''하긴  교국에서 계약석을 확보했다면 베르츠만큼 데스 기어의 계약자로 적당한 인물도 없었을 테니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군요.
데스 기어에 관한 설명은 그쯤 해도 좋소, 한데 그런데스 기어를 만들었다는 라헬교단은 무엇이고 또한 그때의 일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비록 그녀가 자세히 설명한다고 하지만 내용이 조금씩 어수선해지는 듯하자 천우는 다시 질문을 던져 방향을 잡아주었다. 어쩐지 라헬교단과 그때의 일이라는 것이 천마나 바포메트와 무관하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천우의 물음에 생각하는 것만으로 두려움이 느껴지는 듯 약간 안색을 굳히더니 잠시 호흡을 골랐다.
사실 그 일을 언급한다는 것은 모든 대륙 사람들에게 있어 금기나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당신들에게라면 상관없겠죠, 라헬교단이란'''

바로 그때, 갑자기 조용하던 숲이 소란스러워지는 듯하더니 멀리서부터 이상한 소리와 괴음들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숲속에 여러 짐승으로 느껴지는 크고 작은 기척들을 모두 자연스럽게 감지하고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서 일일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기에 일부러 그러한 기척들이 없는 곳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데 갑자기 사방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무리들이 자신들이 있는 곳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지자 절로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것은 천우뿐만이 아니라 동사왕이나 조아 역시 느끼고 있는 부분이기에 자연스럽게 또다시 일행의 걸음이 멈춰졌다.
무슨 일인가? 숲속에 있는 온갖 짐승들이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는 것 같은데'''
동사왕이 묻자 천우는 좀 더 기감을 확대시키며 상황을 파악해 보았다. 그러자 이곳을 향해 몰려오고 있는 것들 중에는 네발로 달리는 짐승들뿐만 아니라 두 발로 뛰는 짐승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 두 발로 뛰는 것들은 기감으로 보아 사람은 아니었다. 여타의 짐승들보다 조금 더 강렬한 기운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분명 사람의 그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을 느끼자 천우는 일루아나에게 물었다.
혹시 이곳에 두 발로 뛰는 짐승들이 살고 있소?
네? 두 발로 뛰는 짐승이요?
그렇소, 이곳으로 오고 있는 짐승 무리들 중에 분명 네 발이 아니라 두 발로 뛰는 것들도 포함되어 있기에 하는 말이오.
천우의 말을 들은 일루아나는 잠시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다가 이내 어떤 뜻인지를 파악하고는 생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마도 몬스터를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사람이 아닌 것들 중에 두 발로 뛰는 것들이라면 몬스터 종류밖에 없죠.

몬스...터?
네, 몬스터요. 혹시 몬스터도 모르신다는''''
모르오.
그 말에 일루아니의 푸른 눈에는 또다시 곤혹스러운 기색이 언뜻 어렸다.
이곳 사람이 아니라 했으니 대륙의 사정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그렇다 쳐도, 몬트서도 모른다는 것은 정말 말이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녀는 아직도 천우 일행이 마족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것 몰라도 마족이 몬스터를 모른다는 것은 더욱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몬스터들은 고대 대륙에 마왕이 강림했을 때 일반 짐승들이 그 마기의 영향을 받아 변이되어 생겨난 족속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몬스터들은 마족이나 흑마법사들에게 약했고, 흑마법사들에게도 몬스터들은 좋은 마법 실험제료로써, 혹은 종종 세뇌시켜서 노예로 부리는 일도 흔했다.
아무튼 그녀로서는 점점 더 천우 일행의 정체에 대해 혼란이 생기는 듯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일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시 생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몬스터들은 마기에 물든 짐승들이 변이된 종족들을 말하는 것이에요. 물론 그것은 짐승들뿐만 아니라 사람들 중에도 마기에 의해 본질이 바뀌어 더 이상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도 포함되어 있어요.

그녀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이제는 보통 사람들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숲 곳곳에서 소란스러움이 일기 시작했다. 일루아나 역시 그것을 느끼게 되자 천우 일행이 걸음을 멈춘 이유를 알고는 다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마도 숲의 오크 무리가 집단으로 사냥을 시작하는 모양이로군요. 오크들이 집단 사냥을 시작하면 일반 짐승들이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몸을 피하느라 숲이 부산스러워지죠.
그녀의 말이 끝아는 순간 천우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몰려오던 짐승 무리가 주변으로 후다닥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고 뒤어어 괴상하게 생긴 무리가 천우 일행이 서 있는 곳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모습들을 본 동사왕은 안색이 크게 변해 저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돼,돼지 악마? 그것도 떼거지다!
취익''''사람들이다.취익''''오늘 횡재했다.
비록 바람 빠지는 소리들이 섞여 있긴 했지만 천우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고, 동사왕의 말대로 그것들은 흉악한 돼지 형상의 머리에 사람의 몸체를 지니고 있었기에 한순간 천우도 바포메트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일루아나에게서 몬스터에 대한 설명을 들었고, 또한 느껴지는 기운 역시 일반 사람들에 비해 별다를 바 가 없었으므로 태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사왕은 발록이나 바포메트의 형상에 대해서 은연중 두려움이 잠재해 있었기 때문에 당장 눈앞에 보이는 오크 모리의 모습을 보고는 그러한 기운을 느껴볼 사이도 없이 경악과 함께 큰일 났다는 생각부터 든 것이다.
그가 보아온 박쥐랑 염소 악마는 한 마리만으로도 자신 정도는 떼거지로 있어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존재였는데, 그런 존재들이 떼거지로 나타났다면 아무리 천우라 할지라도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 때문에 순간적으로 동사왕은 자신이 피하기보다는 천우를 피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이보게 천 아우! 아무리 자네라도 저런 떼거지라면 위험하네, 그러니 난는 상관하지 말고 어서 피하도록 하게.
동사왕의 외침에 천우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말 저것들이 악마라 해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저것들은 그때 보셨던 악마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무,무슨 소린가! 비록 체구가 좀 작기는 하지만 저 돼지 머리 악마도 박쥐 머리 악마니 염소 머리 악마랑 하나도 다를 바없게 생겼는데'''''
그러지 마시고 기운을 느껴보십시오. 그러면 제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아실 것입니다.
응? 그러고 보니 느껴지는 기운은''''
동사왕은 그제야 오크들에게서 전에 보았던 발록이나 바포메트와 같은 엄청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럼 저것들은 도대체 ''''
말씀드렸듯이 몬스터라는 , 이곳 짐승의 일종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럼''''정말로 이곳의 돼지란 말인가?
사람들이 기르는 가축은 아니고'''흉포한 야생 짐승쯤 되겠군요.
그럼 멧돼지란 말인가? 그런데 이곳 짐승들은 저렇게 몽둥이를 들고 다니는가? 하긴''''무쇳덩어리도 검을 휘두르는 판에 멧돼지라고 몽둥이를 들고 다니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
동사왕의 해석은 천우가 말하려는 의도와는 조금씩 어긋나는 감이 있었지만, 일단은 그렇게라도 이해시키는 것이 빠를 듯했기에 천우는 쓴웃음과 함께 말했다.
아무튼 그리 위험한 것들은 아니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순간 동사왕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더니 코에서는 더운 콧김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은 내가''''겨우 멧돼지한테 놀라서 그런 추태를 보였단 말이로군,
동사왕은 수치심에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팔소매를 둥둥 걷어붙이며 앞으로 나서기 사작했다.
이 멧돼지 새끼들, 오늘이 내 한 끼 식사가 되는 날인 줄 알아라!
일순 천우가 말릴 사이도 없이 동사왕의 신형이 오크 무리를 향해 빛살처럼 뛰어들었고, 그 순간부터 횡재를 했다고 여겼던 오크 무리에게는 일생일대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꽤엑! 사람이 오크 팬다!
쿠에엑! 오우거보다 무식한 인간이다.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움직이면서 오크들에게 사정없이 주먹질과 발길질을 날리고 있는 동사왕의 모습을 보면서 일루아나는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뇌리에 처음으로 동사왕에 대한 아주 약간의 의심이 어리기 시작했다.
정말''''저 모습이 어둠의 귀족이라는 칼라이스의 모습이 맞을까?
그녀에게 있어 이들은 정말이지 점점 더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마검사] 12권에서 계속



마검사12편


검박한 듯하면서도 고풍스런 가구들과 서책들이 배치되어 있는 넓은 실내!

한쪽 면이 전부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그곳을 통해 따스한 아침 햇살이 실내로 스며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창 밖을 응시하고 있는 자이텔 공작의 미간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잔뜩 좁혀져 있었다.

평소라면 창 밖으로 보이는 화창한 날씨와 수십 명의 기사들이 기합성과 더불어 아침 햇살 아래에서 역동적으로 검을 위두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함을 느꼈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러한 광경들이 별다른 의미 없이 시야에 비쳐지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무슨 안 좋은 일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평소와는 달리 지난밤 잠자리를 설쳤고, 눈을 뜨자마자 뭔가 불길한 예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막연한 불안감''''

하지만 자이텔 공작은 이러한 갑작스런 불안감이 단순히 나이에서  오는 노파심이나 신경과민 때문이 아님을 스스로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천성적으로 그는 남들보다 무척이나 뛰어난 위기감각을 지니고 있었고, 덕분에 그동안 무수히 많은 고비를 넘겨왔다. 자신이 지금의 위치에 이를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뛰어난 위기감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여기고 있는 자이텔 공작이었다.
특히 검의 극의에 다가설수록 그러한 위기감각은 더욱 다듬어져서 지금은 일종의 예지력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자신의 예감은 정확한 편이었다. 그런데 잠자리를 설치고 일어난 순간부터 무언가 광장히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느껴지고 있었으니 결코 그것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에게는 물론 이고 당장은 가문에도 안 좋은 일이 벌어지거나 그럴 상황이 없는지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 스스로가 대륙 전체를 뒤져도 거의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강자이기도 했고, 그의 가문 또한 대륙의 어떤 나라도 감히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신성제국의 유일한 공작가문이니 안 좋은 상황이라는 것이 있을 리 만무한 것이다.

하지만 자이텔 공작은 자신의 이러한 뜬금없는 불안감이 필시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그리고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벌어질 어떤 일에 대한 안 좋은 예감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더욱 곤혹스러워하고 있는 중이었다.
벌컥!
아, 아버님!
화급히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평소에 차분하기 그지없던 아들, 위튼 백작의 다급한 부름에 자이텔 공작의 신형이 벼락처럼 돌아섰다.
무슨 일이냐?
자이텔 공작은 위튼 백작의 다급한 태도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면서 자신이 느끼던 알 수 없는 불안감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음을 직감했다.

아, 아버님 베, 베르츠가
베르츠?베르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단 말이냐? 어서 말해 보아라,

자이텔 공작은 그 불안감의 정체가 손자인 베르츠의 관계된 일임을 알게 되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으며 다급히 물었다.
베,베르츠가''''그만''''

어허! 답답하구나, 베르츠가 큰 부상이라도 당한 게냐? 혹시 마나 역류라도''''

자이텔 공작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안 좋은 경우를 떠올리며 근심 어린 어조로 아들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나 파들거리는 위튼 백작의 입에서 간신히 나온 말을 듣는 순간, 자이텔 공작은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경험을 해야 했다.

베, 베르츠가 '''주,죽었답니다.

언제부터인가'''아니, 정확하게 5백 년 전! 반신, 혹은 반마라 부리던 라헬과 그를 따르던 라헬 교단이 대륙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난 후부터 대륙에서 검을 다루는 기사와 전사라면 누구나 새롭게 도달해야 할 목표가 생겼다.

이전에는 검을 다루는 자로서 오러 소드를 생성해 낼 수만 있다면 소드 마스터로서 검의 궁극의 경지를 이룬 것으로 여겨져 그 자체만으로도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라헬 교단의 스워드 나이츠들-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기사나 전사가 아닌 스워드 나이츠라 불렀는데, 이후에 기사나 전사와는 또 다른 의미로 그들, 혹은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검을 수련하거나 사용하는 자들을 통칭 검사라 부르기 시작했다.-이 나타난 이후로는 소드 마스터들은 더 이상 검의 궁극의 경지를 이룬 자들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단순히 오러 소드를 만들어낼 뿐인 소드 마스터들과 달리 스워드 나이츠들은 오러 소드를 생성해 내는 것은 물론 이전에 대륙의 그 어떤 소드 마스터들도 생성해 낸느 것은 물론 이전에 대륙의 그 어떤 소드 마스터들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검에 맷힌 오러를 분산시키거나 혹은 허공을 격하고 발출시키기도 했으며, 때로는 검이 없는 상태에서도 오러 소드를 생성해 내는 등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들을 연출하였다.
그렇게 오러 소드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스워드 나이츠들은 기존의 대륙에 있던 소드 마스터들을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했고, 심지어는 여럿의 소드 마스터들이 단 한 명의 스워드 나이츠를 당해 내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스워드 나이츠들의 그러한 놀라운 경지에 대해서 전설상에나 존재하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경지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라헬 교단이 종적을 감추고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대륙의 소드 마스터들에 의해서 그것은 진정한 그랜드 소드마스트의 경지와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편 스워드 나이츠들이 몸 안에 축척된 마나를 통제하여 오러 소드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이 일부분이나마 여러 경로를 통해 알려지자,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에는 대륙의 다른 기사 가문이나 자유기사들 중에서도 드물기는 하지만 그들처럼 오러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검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존의 소드 마스터들보다 분명 강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처럼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자들을 소드 마스터의 윗 단계, 혹은 최상급 단계로써, 검의 완성자라는 의미로 소드 컴플리터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소드 컴플리터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독특한 방식의 마나 운용법과 함께 기존과는 다른 검술 체계가 필요했는데, 그러한 검술 체계를 일컬어 통칭 환상검술이라 칭하게 되었다.

소드 컴플리터들의 출현 이후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났다. 그들의 독특한 마나 운용법이 기존의 마법사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마법사들과 검사들의 마나 운용 자체가 틀릴 뿐만 아니라 결코 한 몸 안에 양립할 수 없는 상반관계에 있다고 여겨졌으나, 소드 컴플리텨들의 출현 이후 그들의 그러한 특별한 마나 운용법에 대해 연구하던 일부 마법사들 의해 마법사들도 어느 정도는 기사들처럼 다른 부작용없이 체내에 마나를 축적하여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물론 정통을 고수하려는 대다수의 마법사들은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분명 밝혀지지 않은 심각한 부작용이 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력을 중요시하는 국가 단위의 병단 소속 마법사들이나, 항시 신변의 위협을 안고 살아가는 흑마법사들 중에는 그러한 마나 운용법을 익히려는 움직임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실 마법사가 체네에 축적한 마나를 이용해 기사나 전사들 처럼 싸울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마법사들의 최대 약점이라 지적되던 허약한 체력을 보강하는 측면과, 극소수이기는 했지만 그러한 마나 운용법으로 인해 마법사이면서도 웬만한  기사들 못지않은 몸놀림으로 근접전에서도 강한 면모를 보여주는 이른바 전사형 마법사들도 탄생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이얀 공작 가문 역시 그러한 마나 운용법과 환상검술로 신성제국 내에서는 물론이고 대륙의 모든 기사 가문들 중에서도 수위로 인정받고 있는 대륙 사대검가 중 하나였으며, 또한 유일하게 당대에 두 명의 소드 컴플리터를 배출해 낸 가문으로도 유명했다.

그 두명의 소드 컴플리터 중 한 명이 자이텔 공작 자신이었고, 다른 한 사람이 바로 자이텔 공작의  친손자이자 검의 귀재라 일컬어지는 베르츠였다.

당금의 대륙에서 소드 컴플리터의 경지에 다다른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불과 열세 명에 불과했는데, 비록 말석이지만 베르츠는 그 열세 명의 소드 컴플리터들 중에서도 영예로운 호칭인 대륙십검의 1인으로도 부릴고 있는 절대 강자였다.

소드 컴플리터의 경지를 이루었으면서도 대륙십검에 들지 못한 다른 세 사람과 더불어 세간의 평가가 조금씩 엇갈리고 있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든 소드 컬풀리터의 경지에 이른 베르츠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을 만한 사람은 대륙을 통틀어도 다른 열두명의 소드 컴플리터들과, 그 외에 두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8서클의 대마법사 정도가 유명했다.

물론 그들이 아니더라도 다수의 협공이나 암습 등으로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는 경우가 아주 없진 않겠지만 적어도 베르츠 정도라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자신의 한 몸 정도는 충분히 빼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더구나 부상이라면 몰라도 목숨을 잃을 경우란 거의 있을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자이텔 공작은 그런 베르츠의 능력과 실력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잠시의 정신적 공황상태에서 벗어나자 아들인 위튼백작의 말에 경악하기에 앞서 의문부터 일었다. 모든 상황을 제쳐두고서라도 베르츠에게 최후의 수단이 있었고, 그 때문에 자이텔 공작은 더욱더 위튼백작의 말이 실감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자이텔 공작은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반문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베르츠가 죽다니?

위튼 백작은 부친의 그러한 태도에 더욱 가슴이 메는 심정으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다시 억지로 끄집어내었다.

바, 방금''''바티안 대신관이 직접 와서 전해 준 말입니다. 이슬란 왕국에 있는 폐허의 마탑에서 마녀 일루아나를 뒤쫓던 베르츠와 팔라딘들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위튼 백작은 부친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다시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정황으로 보아 마녀에게 당한 것으로 보이지만'''정확한 사인 규명을 위해 지금 조사단을 준비 중이라고'''윽!

떨리는 어조로 힘겹게 말을 잊던 위튼 백작은 갑작스럽게 자이텔 공작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숨 막히는 기세에 답답한 신음성을 흘려내며 저도 모르게 주춤,,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그 말을 '''믿으란 말이냐! 베르츠가 한낱 마녀 따위에게 죽었다는 그 말을'''

비록 아직 마스터의 경지에는 다다르지 못한 위튼 백작이었지만 그 역시 최상급 소드 익스피터였다. 그런 그가 자이텔 공작이 뿜어내는 분노의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엄격한 부친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유지할 수는 없었기에 그는 억지로 자세를 바로하여 다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도'''수긍이 가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게르하이와 함께 곧 그곳으로 가볼 생각입니다. 또한 검의 행방도 찿아야 하기에''''

위튼백작의 힘겨워하는 모습에 자이텔 공작은 심호흡과 함께 마음을 가라앉히며 악물린 음성으로 다시 의문성을 발했다.

검? 설마 베르츠의 검을 말하는 것이냐?
위튼 백작은 온몸을 죄어오던 기세가 다소 수그러들자 내심 한숨과 함께 침욱하지만 비교적 차분해진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소식을 처음 알려온 자들은 마법사가 포함된 네 명의 용병들로, 그들은 폐허의 마탑에 들렸다가 성기사들의 참혹한 시신들을 보고는 곧장 그 사실을 가장 가까운 그레아 신전에 알린 모양입니다.

그러자 이슬란 왕국에 있는 크레아 신전에서는 그 사실을 즉시 교국으로 알리고 사실 확인을 위해 그 소식을 전했던 자들과 함께 다시 폐허의 마탑으로 가서 일차적인 조사를 벌였답니다.그리고 그곳에서 베르츠의 시신을 확인했다는 연락과 함께 다른 성기사들의 검은 보이지 않는다는 연락이 있었답니다. 아무래도 베르츠를 죽인 범인이 가져간 것 같다고''''

자이텔 공작은 손자인 베르츠의 죽음 못지않게 충격적인 사실을 또다시 전해 듣고는 얼굴이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베르츠가 죽은 것도 모자라'''계약석이 박힌 검마저 사라졌다고? 그 계약석이 데스 기어의 계약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베르츠를 제외하고는 당금 대륙에서 너와나, 그리고 국왕성하와 정보국의 밀란 후작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검이 사라졌단 말이냐/

딱딱하게 표정이 굳은 상태에서도 약간 어처구니없이 하는 자이텔 공작의 태도에 위튼 백작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아직 뭐라 단정 지울 수는 없겠습니다만''' 비록 오랜 세월이 흘렸다고는 하지만 아직 대륙의 모든 나라들이 데스 기어의 계약석을 찾고 있습니다. 만약 다른 나라에서 베르츠가 가지고 있던 계약석의 존재를 눈치 챘다면 '''어쩌면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것일 수도'''

하지만 자이텔 공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것을 강하게 부인했다.

그럴 리 없다.계약석만을 보고는 그것이 타이탄의 계약석인지 데스 기어의 계약석인지 구분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더군다나 교국에서 데스 기어의 계약석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우연한 일이었고, 또한 베르츠 역시 아직은 그것을 누군가에게 말하거나 혹은 남들 앞에 데스 기어를 내보인 적이 없을 텐데 어찌 다른 곳에서 베르츠가 지니고 있던 계약석이 데스 기어의 계약석임을 눈치 채고 음모를  꾸밀 수 있었겠느냐.

그렇기는 합니다만'''국가 단위의 전력이 개입된 음모가 아니라면 어찌 최후의 수단으로 데스 기어를 불러낼 수 있는 베르츠가 몸을 빼내지 못하고 그렇게 당했겠습니까.

위튼 백작의 가벼운 반론에 자이텔 공작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씹어 뱉듯이 말했다.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다.

위튼 백작은 부친에게서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엄청난 살기와 기세에 말을 잊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자이텔 공작의 두 눈은 어느새 유리알처럼 반투명하게 변해 살기로 변들거리고 있었다.

검이 사라졌다면 분명 그 검을 가져간 자는 베르츠의 검에 박혀 있는 계약석이 데스 기어의 계약석임을 알았기에 가져갔을 것이다. 타이탄의 계약석이 박힌 검이었다고 생각했다면 검을 가져가 봤자 자신의 종적만 노출시킬 뿐 아무련 쓸모가 없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베르츠의 검에 박힌 계약석이 데스 기어의 계약석이라는 것을 누구든 사전에 알았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오히려 베르츠가 최후의 수단으로 데스 기어를 불러내었기에 상대방 역시 데스 기어의 계약석임을 알고 그 검을 가져갔을 가능성이 더욱 클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츠가 몸을 빼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어찌 납득할 수 있겠느냐?

거의 반투명하게 변한 눈으로 허공 중의 한 곳을 노려보며 독백하듯이 말하던 자이텔 공작은 자신의 기세로 인해 힘겨워하고 있는 백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외부에서 그것을 알고 치밀한 음모를 꾸민 것이라하더라도'''데스 기어의 계약석만을 빼돌리는 것이라면 모를까 감히 나 에히르난 자이텔 폰 이얀의 친손자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음모라면, 적어도 그러한 음모는 내 이목을 완벽하게 가릴 수 있는 자신이 있을 때나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설사 그 주체가 당금 대륙의 패권을 쥐고 있는 양대 제국 시아셀과 카이렌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멍청이는 어느 나라에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또한 데스 기어의 가치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런 짓을 벌였을 때 어느 쪽이 더 큰 손해를 보게 될지 모르는 나라 또한 없을 터, 그러나 마녀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그녀 혼자 그런 일을 벌였다고 믿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분명 다른 방조자가 있었을 것이다. 만약에라도''''배후가 있다면 그것이 어디이든 틀림없이 철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절대적인 자부심과 더불어 미묘한 부정과 긍정이 뒤섞여 있는 말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대륙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거인 중 한 사람인 자이텔 공작이 진정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거인의 행보로 인해 대륙은 이제 새로운 파란에 휩싸일 것입을 예고하고 있었다.

헉헉! 정말 죽겠네, 대장, 도대체 이유라도 좀 알고 뛰자고 도대체 왜 우리가 이렇게 미친놈처럼 뛰어야 하는 거야? 헉 헉''''

시끄러워! 조금이라도 더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면 잔말 말고 뛰어!

그러니까 그게 '''몬스터들이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왜 뛰느냔 말이야.

폐허의 마탑을 둘러싸고 있는 광활한 숲 속을 미친 듯이 뛰고 있는 네 명의 인물들, 그 중 맨 뒤쪽에서 뛰고 있는 갈색 머리의 청년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얼굴로 헉헉거리며 가장 선두에서 뛰고 있는 인물을 향해 연신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털썩!

난'''죽으면 죽었지 더 이상은 못 뛰어, 후욱! 후욱''''
마침내 갈색 머리 장년이 아무렇게나 땅바닥에 몸을 던지며 뛰기를 포기했고, 그의 그런 행동에 그 즉시 다른 세 사람도 멈추어 섰다.
텔리안, 어서 일어나, 아직은 주저앉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어서 빨리 이 숲을 빠져나가야만 해.

그럴 거면 '''''후욱 세리나한테 부탁을 해서 빠져나가든가 하지''''후욱! 왜 쓸데없이 사람을 이렇게 죽도록 고생시키는 거야.

갈색 머리 청년이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운 채 가쁜 숨을 몰아 쉬며 꼼짝도 안 하자 가장  선두에서 달리던 인물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인 듯 격한 호흡을 내뱉으며 흠뻑 땀에 젖은 얼굴을 구기고 말했다.

내가 그걸 몰라서 뛰라고 한 줄 알아? 그러면 안 될 이유가 있으니 뛰라고 한 거다. 잔말 말고 어서 일어나, 지금은 그걸 설명할 시간이 없단 말이다.

나는 더 이상 못 뛰단니까'''' 후욱! 후욱! 나를 버리고 가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고,

그 말에 선두의 사내가 더욱 인상을 찡그리며 화를 내려는 순간, 마찬가리로 멈추어 선 후 바닥에 주저앉아 격한 호흡을 가다듬고 있던 회색 머리의 거구의 청년이 우직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장, 나도 더 이상을 못 뛰겠어, 전쟁터에서도 이렇게 오래 뛰어본 적은 없다고, 그러니 좀 쉬었다가 뛰어가자.

고든 너까지.

로크 그렇게 해요. 두 사람도 무척이나 지쳤지만 로크 대장 역시 더 이상 뛰는 건 무리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잠시 쉬었다 가요.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너무 체력을 소진하면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어요. 이곳 고여의 숲은 다른 곳에 비해 몬스터들이 거의 없는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아주 없는 곳은 아니에요, 그러니 너무 무리하면 오키들과 마주쳐도 위험할 수 있었요, 그리고 마법사인 제가 포함되어 있기에 그들은 우리가 이처럼 빠르게 전력 질주를 해 숲을 벗어나고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치 못하고 있을 거예요.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정도면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해요.

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나도 좀 알자고, 페허의 마탑을 벗어나 자마자 지금껏 이유도 모르고 뛰라고 해서 죽도록 뛰기만 했는데, 도대체 이렇게 뛰어야 하는 이유가 뭐야?

제일 먼저 바닥에 드러누워 숨을 헐떡이던 갈색 머리의 청년이 조금은 호흡이 진정된 듯 힘겨운 동작으로 일어나 앉으며 거듭 질문을 던지자 로크라 불린 사내 역시 힘들어하는 기색으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한숨과 함께 말했다.

후! 세리나 말도 일리가 있으니 일단은 좀 쉬도록 하지, 고든, 그리고 텔레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페허의 마탑을 벗어나자마자 여기까지 뛰어온 이윤ㄴ 바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이얀 공작가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서야.

그 말에 여전히 힘든 기색으로 거친 호흡을 고르고 있던 텔리안이 일순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다시 의문을 표시했다.

뭐? 이얀 공작가에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를 추적한다는 거야? 우리가 범인도 아니고, 또 그들의 죽음을 알려주고 두둑한 보상까지 받은 마당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텔리안의 표정을 보며 로크는 왼쪽뺨에 흐릿하게 나 있는 상혼을 가볍게 실룩이며 곧 심각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텔리안 이번 일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베르츠가 죽었어, 그리고 그 일로 이얀 공작가의 자이텔 공작이 직접 나섰고 말이야. 네 말대로 우리는 그저 우연히 페허의 마탑에서 그들의 시신을 발견하고 신정에 알려준 것뿐이지만, 그 중에 베르츠의 시신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게 문제인 거야, 물론 그것은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었고, 그들 중 베르츠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절대로 그 사실을 신전에 알려주는 미련한 짓 따위는 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후회해 봐야 이미 늦은 거지.

아무튼 그게 왜 문제가 되냐 하면, 베르츠의 죽음은 곧 이얀 공작가의 명예와도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이 알려진다면 그가 과연 누구에게. 그리고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것이 가장 먼저 사람들의 관심사가 될 거야.

우리는 범인도 모르고 또한 베르츠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지만 불행히도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베르츠의 시신을 목격한 사람들이다. 만약에라도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성기사들과 함께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 있던 베르츠뿐만 아니라 이얀 공작가의 명예마저 훼손시키는 행위가 되는 거야.

로크의 말에 텔리안은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거야 우리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으면 그만 아냐? 그리고 우리 중에 그런 일을 떠벌리고 다닐 사람도 없고 말이야.
텔리안, 아직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그거야 우리 생각이고, 이얀 공작가에서도 과연 우리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을까? 그런 확신을 가질 만한 아무런 근거나 이유가 없으니 당연히 아니겠지, 그럼 이제 생각해 봐.

이얀 공작가에서는 우리가 떠나올 때 그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어, 정상적이라면 협박이나 엄포를 놓아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었고, 적어도 그에 대한 당부 정도라도 있었어야 해, 한데도 우리가 떠나올 때까지 그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 걸까? 나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그제야 텔리안도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안색이 급변했다.

그 그럼'''''

항상 하는 말이 있잖아,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그 말에 텔리안의 창백해진 안색이 더욱 하얗게 탈색되었다.
제,제길 그럼 우린 뜻밖의 행운을 잡은 게 아니라 사신의 발목을 잡은 거라는 얘기잖아, 한데 그럴 거라면 도대체 왜 우릴 보내준 거야? 입막을을 할 작정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죽였어도 됐을 거 아니야?

텔리안은 로크의 말을 수긍하면서도 억지로라도 부정하고 싶은 듯 욕설과 함께 항변의 목소리를 내었다.

그건 그것에 교국에서 파견 나온 다른 신관들도 있었기 때문이지, 아무리 자이텔 공작이라 하더라도 신관들 앞에서 우리를 죽일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어? 또 그가 직접 나설 필요도 없는 일이고 아마도 지금쯤이면 그를 수행해 온 기사들 중 몇몇이 우리를 열심히 찾고 있을 거야, 그리고 자이텔 공작과 함께 온 그 마법사는 틀림없이 고위 마법사일 게 분명해, 그러니 우리가 텔레포트 마법진을 사용하면 즉시 그에게 종적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죽도록 뛰게 한 거야,

로크의 말에 텔리안은 욕설을 토해 내며 물었다.

제기랄! 그럼 이제 어쩔 거야? 이렇게 뛰어서 숲을 벗어난다 해도 이얀 공작가의 이목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더군다나 애초에 우리가 목적했던 곳까지 가려면 인적을 피해서만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일단 이 숲을 벗어나는 게 급선무다 이러고 있다가 이얀 공작가의 사람들에게 발각되기라도 하면 그것으로 끝장이야, 그러니 대충 쉬었으면 어서 일어나라, 여기서부터는 방향을 바꿔서 다시 뛴다. 세리나 말대로 그들은 우리가 이렇게 전력질주를 하며 숲을 벗어나고 있을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그러니 숲을 벗아나 인적 없는 곳으로 이동하면 이얀 공작가의 이목을 당분간은 피할 수 있을 거야, 구체적인 방법은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아.

하! 다시 그렇게 뛰느니 차라리 죽고 싶지만, 억울해서라도 이대로는 죽을 수 없지, 알았다고 어디 한번 심장이 터질 때까지 뛰어보지 뭐.

마지막으로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선 텔리안의 말과 동시에 일행들은 다시 뛰기 시작했고, 그들이 방향을 바꿔 다시 뛰기 시작한 곳은 공교롭게도 전날 천우 일행이 느긋하게 걸어가던 방향과 일치하고 있었다.

2장 일루아나의 도박

허억! 꺽! 이젠 정말 도저히'''

털썩!

어느덧 밝은 태양이 산 너머로 기울며 숲은 금세 어둠 속에 잠겨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정말 죽도록 뛰던 로크 일행은 또다시 텔리안이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온몸을 바닥으로 던지자 자연스럽게 멈추어 서고 말았다.

방향을 바꿔 뛰기 시작한 후에 중간에 한 번 더 지금과 같은 경우가 있었고, 덕분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지금까지 줄곧 뛰어 온 탓에 텔리안은 물론이고 체력과 지구력이 좋은 고든과 로크마저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듯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마법사인 세리나는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세 사람과는 달리 별로 지치지 않은 듯 여전히 제자리에 선 채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로크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일행들에게 말했다.

허억! 허억! 이제는 나도 한계인 것 같군, 곧 날이 완전히 어두워질 것 같으니 오늘은 이쯤에서 쉬도록 하자, 불은 피울 수 없으니 각자 지닌 건량을 먹으면서 휴식을 취하도록 하고''''세리나는 수고스럽겠지만 우리가 체력을 좀 회복할 때까지만 경계를 서줘,

그 말에 세리나는 로브 안쪽에서 물주머니를 꺼내어 로크에게 건네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괜찮으니까 걱정말고 어서 이 물부터 나눠 마셔요.

고마워, 세리나, 아무래도 이 숲을 벗어나고 나면 세리나가 익히고 있는 그 마나심법을 확실히 배워야 겠어, 세리나가 그 마나심법 때문에 무척이나 민첩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큰 효과가 있는 것인 줄은 몰랐어, 우리가 그래도 명색이 검을 다루는 일급 용병들인데 체력적으로 이렇게 차이가 나다니 말이야.

로크의 말에 세리나는 깊숙이 눌러쓴 후드 안에서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제가 익혀두면 아주 요긴할 거라고 했잖아요. 전에도 얘기했듯이 비록 마법사인 스승님께서 고안하신 마나심법이지만 제대로 익히면 체내의 마나를 효율적으로 움직여 쉽게 지치지 않고, 순간적으로 근 힘을 내는 것도 가능해요, 물론 다른 기사 가문의 마나심법처럼 제가 익힌 마나심법이 검사로서의 입문 마나심법으로도 활용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일반적으로 대륙에 떠도는 마나심법처럼 초기에 마나 역류를 일으키거나 하는 엉터리는 절대 아니에요.

그러한 말에 로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우리 같은 용병들이 결코 쉽게 접할 수 없는 마나심법을 가르쳐준다는 데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유는, 비록 우리가 지금은 용병이지만 마나를 다루는 진정한 검사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야, 제대로 된 마나심법을 익혀 체내에 마나를 축척하고, 검을 통해 그 마나의 기운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진정한 검사 말이야.

하지만 제대로 된 마나심법이 아니라면 초반에 마나 역류를 일으킬 수 있는 데다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를 떠도는 마나심법을 익히다가 죽거나 폐인이 된 사람도 수없이 많아, 물론 세리나의 스승님께서 고안했다는 그 마나심법이 그런 엉터리일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진정한 검사가 되고픈 꿈과, 그런 검사들이 익히는 마나심법은 마법사들이 만드는 마나심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통념 때문에 지금껏 익히는 것을 미뤄왔던 게 사실이야. 하지만 이번에 겪고 보니 그동안 우리가 굴러 들어온 복을 사정없이 걷어차고 있었다는 걸 확실히 알겠어,

대장이 익히겠다면 나도 익히겠어, 세리나, 나한테도 가르쳐 주는 거지?

어둠 속에서 우직스러운 고든의 음성이 들려오자 세리나는 경쾌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고든.
쳇! 그럼 나만 빠질 수도 없잖아, 아무튼, 그걸 익히면 이렇게 뛰다가 죽을 거 같은 일도 없을 테니 반드시 익히고 말겠어.

모두들 숨을 고르면서 새로운 다짐을 하는 가운데 문득 고든의 우직스러운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어? 그런데 저기서 누가 불을 피운 모양인데?

그 말에 다른 일행들이 놀라며 화급히 어둠 속을 둘러보다가 그들 역시 멀리서 깜박이듯 흔들리는 작은 불빛을 발견했다. 숲이 어두워지자 금방 누군가가 불을 피운 듯했는데 그것을 고든이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이다.
모두들 불빛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텔리안의 숨죽인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대장, 혹시 이얀 공작가의 사람들이''''

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쫓고 있는 거라면 횃불은 몰라도 저렇게 한자리에 불을 피우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모닥불을 피운 걸 보니 아마도 이 숲을 들어선 다른 여행자일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저 불빛을 보고 이얀 공작가의 사람들이 이쪽으로 올 수도 있다는 것인데'''아무래도 다시 움직여야 할 것 같다. 저곳을 지나쳐서 좀 더 멀리 가야 돼,

그 말에 어둠 속에서 텔리안의 인상이 또다시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제길'''그럼 또 뛰어야 한단 말이야?

저들이 이얀 공작가의 사람들일 가능성도 있으니 이번엔 기척을 죽이고 조용히 움직여야 해, 일단 조심해서 저들이 누구인지 살펴본 다음에 일반 여행자라면 저 불빛을 지나쳐서 앞쪽으로 나아가고, 저들이 우리를 쫓아온 이얀 공작가의 사람들이라면 다시 방향을 바꿔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도록 해야 해,
그 말과 함께 로크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서자 고든과 텔리안도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윽! 제길''''온몸이 다 부서져 내리는 것 같군''''

텔리안은 몸을 일으키다가 온모모으로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에 저도 모르게 나직한 심음성을 토해 내며 투덜거렸다.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금니를 악물며 일행을 따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곧 죽을 것처럼 헐떡거리던 놈들이 불빛을 보고 다시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서 열심히 꼬챙이에 꿰인 토끼들을 굽던 동사왕의 말에 천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응대해 주었다.
그렇군요.
움직임이나 호흡 소리를 들어보니 어제 보았던 그놈들 패거리 같지는 않군, 그나저나 그 두 발 멧돼지들 맛을 꼭 보고 싶었는데 저 파란 눈 계집애가 그렇게 질색 팔색을 하니 원'''어쨌거나 네 발 멧돼지나 토끼, 사슴들도 있어서 다행일세, 두발짐승들밖에 없었으면 먹을 때마다 저 계집애가 난리를 쳤을 거 아닌가.

그 말에 천우는 어제 오크 무리들을 늘씬하게 두들겨 팬 후 그 중 제일 덩치가 큰 오크 한 마리 부러뜨린 나뭇가지에 넝쿨로 꽁꽁 묶던 의형의 모습이 생각나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제 그 모습을 보던 일루아나가 의아해 하며 천우에게 이유를 물었고, 천우는 의형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기에 아마도 먹을 생각일 거라고 말해 주었다. 그 순간 일루아나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리며 제발 말려 달라고 통사정을 하는 바람에 자신 역시 의형인 동사왕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뺐던 것이다.

천우 자신이야 원래 음식을 잘 섭취하지 않으니 애초부터 의형인 동사왕이 챙긴 오크를 먹을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어쨌든 오크는 먹는 음식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일루아나의 말은 처음에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독이 들어 있느냐는 물음에 그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단지 사람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몬스터의 고기는 먹지 않는다는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먹어서 해가 되는 독이 든 생물만 아니라면 사람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었고, 오크리는 몬스터가 같은 인간 종족이 아닌 다음에야 먹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일루아나는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한 채 그저 무조건 안된다는 말만 연발했기에 천우는 다시 아티오네스에게 물어보았고, 아티오네스의 대답은 굳이 먹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 인간들에게 있어 몬스터는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배어 있다고 대답해 주었다.
덧붙여 사람들은 몬스터의 고기를 먹으면 영혼이 타락하고 더불어 영원한 저주를 받는다고 믿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정도는 아니지만 확실히 몬스터들은 마기의 영향을 받은 생물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몬스터의 고기를 먹을 경우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탈이 생길 가능성이 높고, 또한 인간의 몸에도 별로 좋지 않은 음식이라고 말해 주었다.
어쨌든 먹어서 별로 좋을 게 없다는데 굳이 먹을 이유는 없는 것이고, 그 때문에 천우 역시 의형인 동사왕의 행동을 말렸다.

하지만 '먹지 못하는 음식이랍니다' 라든가 '먹으면 탈이 생긴답니다' 라는 말로는 동사왕의 식탐과 맛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했고, 실지로 천하절독이 들어 있다 해도 지금의 의형에게는 별다른 위협이 될 수 없었기에 결국 천우는 '이 세계의 두발짐승을 먹으면 평생 재수가 없답니다' 라는 말로 간신히 동사왕의 세로운 맛에 대한 열망을 포기시킬 수 있었다.
자신의 아우가 절대로 거짓말을 하거나 자신을 속이지 않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동사왕으로서는 다른 건 몰라도 먹으면 평생 재수가 없을 거라는 말에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도 이곳 세계에 퍼져 있는 미신 정도로 치부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찜찜한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고, 무엇보다 천우에게 매달려 울부짖다시피 하는 일루아나의 모습이 너무도 절박해 보였기에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다음 기회를 엿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한 잠재적인 위험 요서가 남아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일루아나는 아무튼 그 일로 인해 점점 더 천우 일행의 정체에 대해서 극심한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모닥불 위에는 야생 토끼 몇 마리가 꼬치에 꿰여 잘 구워지고 있었고, 그것을 바라보며 군침을 삼키고 있는 동사왕의 모습은 너무도 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그와는 달리 지금껏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고 있는 천우를 생각해 보면 그러한 동사왕의 행동은 그저 인간 흉내 내기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 일루아나였다.

한데 저 녀석들이 아까와는 달리 왜 저렇게 조심스럽게 오는거지? 저놈들 혹시 이곳의 산적이나 뭐 그런 놈들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도둑고양이처럼 저렇게 조심스럽게 숨어서 올 이유가 없지 않겠나.
하지만 천우는 멀리서도 로크 일행이 하는 말을 전부 들을 수 있었기에 희미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하는 말을 들어보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들을 쫓고 있는 사람들인지 확인하기 위해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관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인하면 그냥 지나갈 테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동사왕은 여전히 잘 구워지고 있는 토끼들만 바라보며 말했다.
저런 녀석들에게 신경 쓸 게 뭐 있겠나, 그저 자기들 딴에는 몰래 접근한다고 하는 행동이 좀 거슬리는 것뿐일세. 아무튼 그런 녀석들이라면 이곳에 와서 먹을 것을 나누어 달라고 하지는 않겠구먼,
결국 동사왕은 불청객들이 와서 자신이 굽고 있는 토끼고기를 나누어 달라고 할까 봐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원수를 생각해서 달랑 세 마리만 잡아서 굽고 있었는데 추가로 네놈이나 와서 먹을 걸 나누어 달라고 하면 조금은 곤란해지기 대문이었다.
중원이라면 당연히 아무 문제도 없을 테지만 이곳은 일단 말이 통하지 않는 세계였고, 또한 자신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도 없는 곳이니 그런 요구에 대해 적당히 거절히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물론 못 주겠다는 확실한 의사표시를 하면 되기야 하겠지만 겨우 먹는 걸 가지고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한다면 그 또한 체면을 구기는 일이 될 테고, 더구나 파란 눈 계집애 앞에서는 어찌된 일인지 일거수일투족이 은근히 신경 쓰였던 것이다.
동사왕 스스로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무엇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아무튼 파란 눈 계집애가 자신을 볼 때마다 왠지 어색함과 불편함이 느껴지면서도 기분이 묘한 것이 이상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어색함과 불편함이 불쾌한 감정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결국 동사왕이 중원에서라면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던 부분에 대해서 곤란함을 느끼던 이유는, 자신의 이러한 기분 때문에 만약에라도 다른 이들이 고기를 나누어 달라는 등 터무니없는 요구를 할 경우 어쩌면 자신은 평소와는 달리 그런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거절하기 힘들지도 모른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천우의 말로 인해 동사왕은 더 이상 쓸데없는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졌기에 다소 찌푸려졌던 눈살을 곧게 펴며 다시 토끼를 굽는 데 열중했다. 하지만 이어진 천우의 말에 동사왕의 눈살은 처음보다 더 확실하게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저들은 그냥 지나가려고 하겠지만, 문제는 저들을 쫓는 자들 역시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속도로 보아 저들이 이 근방에 도착할 즈음에 그들 역시 도착할 것 같군요.
통상 그런 경우라면 조용히 식사히기는 힘들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동사왕은 짜증이 솟구치는 것을 느껴야 했다.

로크 일행이 숨을 죽인 채 조심스럽게 접근하여 모닥불을 지피고 있는 천우 일행의 모습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을때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일단의무리들이 포위하는 형식으로 빠르게 모닥불을 향해서 접근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로크 일행은 어둠 속에서 모닥불에 비친 천우 일행은 모습을 확인하며 속삭이는 듯한 어조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모습을 보니 이얀 공작가의 사람들은 아닌 것 같긴 한데''''' 저 금발의 여인을 빼고는 다른 세 사람은 무척이나 특이한 복색인걸? 생긴 모습들도 조금은 이상한 것 같고'''''
그렇지? 나도 저런 복장은 처음 봐, 그리고 저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두 사람 중 하나는 여자가 맞는 것 같긴 한데, 다른 한 사람은 여자야, 남자야?
 글쎄'''분위기 상으로는 남자 같긴 한데, 생긴 걸로 봐서는 여자 같기도 하고'''' 
저 흰옷 입은 사내의 이마에 찍혀 있는 붉은 점 보이지? 마치 악마의 표식처럼 섬뜩하잖아.
 
음! 아무튼 모두 평범해 보이지는 않는다. 일단 추적자들은 아닌 것 같으니 우회해서 가도록 하자, 혹시라도 이얀 공작가의 사람들이 불빛을 보고 이곳에 오더라도 우리가 아닌 것을 알면 그들은 우리의 종적에 대해서 더욱 혼란을 느끼게 될 거야.
로크의 말에 일행들이 불빛을 피해서 다시 조심스럽게 움직이려는 순간, 그들은 모닥불을 지피고 있는 그리 크지 않은 공터에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일단의 인물들을 발견하고는 순간적으로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흡!저, 저들이''''
조, 조용! 텔리안, 여기서 비명횡사하고 싶은 것이냐, 어서 몸을 숙여.
갑작스럽게 나타난 저들의 몸에 은빛 갑주를 두른 기사 차림의 인물들로 그들은 낮에 자이텔 공작을 수행해 왔던 이얀 공작가의 기사들임이 분명했다.
일렁이는 불빛을 받아 그들의 갑주는 이리저리 음영을 드리우며 사방으로 빛을 반사시켜 누가 보기에도 멋진 모습이었지만, 로크 일행에게는 영락없이 사신들의 복장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중 한 사람이 하는 말에 로크 일행은 풀숲에 몸을 숨긴 상태에서 으스스 떨려오는 몸을 추슬려야 했다.
너희는 혹시 숲에서 로브 차람의 한 여인과 용병 차림의 사내 넷을 본 적이 있느냐?
천 아우, 복장을 보아하니 이놈들은 어제 죽은 그놈들과 같은 패거리들 같은데? 저기 쥐새끼들처럼 숨어 있는 녀석들을 쫓아온 게 아니라 우리를 찾아온 것 아닌가?
천우의 말이 있고 나서 얼마 후 동사왕 역시 자신들이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접근하고 있는 무리들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즐거운 식사시간을 방해받게 생격다는 생각에 살금살금 접근하고 있는 녀석들을 제압해 그들을 쫓는 놈들에게 모두 넘겨줄까 하는 고민도 잠시 해보았다.
물론 사정도 알아보지 않고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강호 도의 상 옳은 일이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식사시간을 방해받게 만든 일차적인 원흉들은 지금 살금살금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는 녀석들이라는 생각에 미운 감정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은 생각이었고 경우는 따져보아야 할 일이었기에 잠시 참고 지켜보기로 했다.
잠시 뒤, 살금살금 접근하던 녀석들이 십여 장쯤 밖에서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저희들끼리 뭐라고 수군거리는 동안 쫓고 있는 녀석들이 나타났다. 그들을 보자 동사왕은 그들의 복장이 어제 파란 눈 계집야를 핍박하던 녀석들과 비슷한 복장이기에 천우에게 그렇게 물은 것이었다.
그리고 로크 일행을 쫓아 온 숲을 헤매다가 불빛을 보고 찾아 온 이얀 공작가의 성광기사단 소속 기사들과 성광기사단의 부단장이자 이번 임무의 책임자인 알버트 자작은 자신의 물음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동사왕의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가만히 보니 복장과 모습이 무척이나 트기했고, 게다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로 지껄이고 있으니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때 일루아나는 그들의 갑주에 새겨진 횃불 문양의 표식을 보고는 한눈에 이들이 그 유명한 이얀 공작가의 성광기사단 소속 기사들임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동사왕처럼 그들이 자신을 추적해 온 것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서며 굳은 표정으로 그들을 향해 앙칼진 목소리를 내었다.
나를 찾아왔으면서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 하지만 너희들 정도로 나를 어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망상일 뿐, 그 대가는 오로지 죽음뿐이니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녀의 앙칼진 외침에 알버트 자작은 물론이고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나머지 아홉 명의 기사들도 일순간 얼떨떨한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 곧 정신을 차린 알버트 자작은 당장이라도 검을 빼어 휘두를 듯한 기세로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계집, 도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는 것이냐. 그리고 우리가 감히 누군 줄 알고 그따위 망발을 함부로 내뱉는단 말이냐. 죽고 싶지 않다면 어서 무릎 꿇고 백배 사죄한 뒤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라.
알버트 자작의 화난 표정을 본 일루아나는 그제야 뭔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주위를 포위한 기사들을 쭈욱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들 모두 모욕감에 얼굴을 붉히며 화난 표정들을 짓고 있었지만 특별히 살기를 내비치고 있는 사람은 그들 중 한둘에 불과한 것을 보아 이들이 자신을 노리고 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이 자신이든 아니든 어차피 이제는 이얀 공작가와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고, 또한 이들이 자신을 본 이상 순순히 보내줄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그녀는 코웃음을 발하며 말했다.

흥!네놈들이 그 잘난 이얀 공작가의 성광기사단 소속 기사들이라는 것은 말하지않아도 잘 아고 있다. 지금 누구를 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내가 누군지 알게 되면 너희들은 아마 제대로 찾아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곳이 억울한 피로 얼룩진 너희들의 더러운 검을 묻을 적당한 자리라는 것도 말이다.
자신들의 정체를 알면서도 적의를 드러내며 함부로 말하는 그녀를 보자 알버트 자작 역시 분노한 와중에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좀 더 자세히 그녀를 살펴보았다.
처음에야 이런 숲 속에서 노숙을 하고 있는 자들이기에 단순한 여행자들로 치부하고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주변에 앉아 있는 이상한 복장의 인물들은 둘째치고 당장 눈앞에서 살기를 발하고 있는 이 금발 미녀의 모습은 문득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호,혹시 너는''''
애초에 베르츠를 죽인 법인이라던 마녀 일루아나가 아직까지 이 숲에 머물러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기에 처음 그녀의 모습만 보고는 금방 눈치 채지 못했지만 자신들의 정체를 알면서도 이렇듯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이라면 그녀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어둠 때문에 언뜻 식별되진 않았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상의 역시 굳어버린 피로 물들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기에 의문이 서린 말투와는 다르게 그 순간 알버트 자작은 그녀가 마녀 일루아나가 확실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흥, 그렇다! 내가 바로 일루아나다. 이제는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알겠지?
챙! 채엥!
아니나 다를까''''이어진 그녀의 대답에 알버트 자작의 얼굴은 놀람과 당황으로 인해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들었고 곧이어 주변에 있던 다른 기사들도 모두들 느끼는 바가 있었기에 긴장하고 있다가, 그녀의 대답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들며 경악성을 발했다.
헉!
저,정말 마녀라니''''
알버트 자작은 그녀의 정체가 확인되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오히려 어이없다는 생각에 굳은 안색으로 독백하듯이 중얼거렸다.
기가 막히는군. 마녀가 아직도 숲을 벗어나지 않고 이곳에 남아 있었다니''''
그의 생각에 교국의 성기사들과 베르츠를 죽인 마녀는 이미 찾기 힘든 곳으로 멀찌감치 도망가 있어야 했고, 그런 생각은 그뿐만 아니라 교국에서 파견된 조사단과 자이텔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당장은 그녀의 종적을 찾는 것에 대해서는 서두르지 않고 있었다.
한데 그녀가 아직도 폐허의 마탑이 있는 고요의 숲을 빠져나가지 않고 머무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자 한순간 그녀의 무모함에 어이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자신들 역시 그녀를 찾아야 하는 입장이기는 했지만 당장은 그녀와의 만남을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기에 알버트 자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비록 큰 공을 세울 기회이기는 했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기회를 행운으로 받아들이려면 자신들에게 확실한 승산이 있을 때에나 해당되는 얘기였다.
하지만 오히려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라면 그것은 기회가 아니라 불행이 닥친 것이라는 표현이 옳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녀와의 만남은 바로 행운이기보다는 자신들의 위기라는 것을 기사들과 알버트 자작은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베르츠의 죽음에 대해서 아직은 확실한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교국의 최상급 팔라딘들 전부는 그녀의 흑마법에 의해 당한 것임이 현장 조사 과정에서 드러났고, 더욱이 교국의 성기사들은 분명 지근거리에서 그녀를 포위 공격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한 것임이 밝혀졌다.

중요한 것은 그들 십여 명의 팔라딘들은 교국의 정예들로 결코 자신들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자들이 아니라는 점이었고, 또한 일루아니의 흑마법에 당한 것은 아니라지만 자신들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베르츠마저도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일루아나 못지않은 , 혹은 적어도 소드 마스터 급의 또 다른 방조자가 있었을 거라는 걸 의미했다.
결국 일루아나가 지금 여기에 있다면 그녀의 주변에 태연히 앉아 있는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바로 그 방조자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일루아나에 대해서 크게 두려워하거나 하는 마음은 갖고 있지 않았다. 비록 그녀가 아주 오래 전부터 대륙에 명성을 떨치던 강자 중 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있어 일루아나란 존재는 그저 흔치 않은 7서클의 흑마법사라는 개념일 뿐, 기사들인 그들의 강함을 비교해야 할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마법사가 무서운 것은 마법을 시전할 시간이 주어졌을 때뿐이라는 일반적인 통념에 따라 원거리에서의 마법공격만 아니라면 그들로서는 특별히 그녀가 두려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원거리 상태라면 일루아나뿜만 아니라 마법사는 모두가 그들에게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접근이 가능한 상태라면 7서클의 대마도사라 할지라도 기사들인 그들에게 마법사는 일반인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존재였다.
그러하니 그들은 마녀 일루아나의 움직임은 소드 익스퍼트급의 기사라 할지라도 제대로 따라잡지 못한다는 소문 따위는 애초에 믿지도 않았다. 실지로도 그들은 기사처럼 마나심법을 익혔다는 병단 소속의 전투 마법사들을 다수 보아왔지만, 그러한 머법사들의 움직임은 그저 일반인보다는 조금 나은 정도일 뿐이라 소문이 과장된 것일 뿐 일루아나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폐허의 마탑에서 조사에 의해 드러난 상황은 일루아나에 대한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고, 정말로 자신들 못지않은 움직임을 보이면서 7서클의 마법을 퍼부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그러한 상황들이 지금의 인원으로 갑작스럽게 그녀를 만나게 된 것에 대해서 절대 좋아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인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지 않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상대는 자신들의 주군인 자이텔 공작의 친손자를 죽인 마녀와 그 방조자들이었고, 자신들은 충성스런 이얀 공작가의 기사들이니 설사 목숨을 내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저들을 처단해야만 했다.
마음을 굳힌 알버트 자작은 결전에 임하기 전에 몇 가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일루아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베르츠 님의 죽음은''''바로 저들의 소행인가?
알버트 자작의 물음에 일루아나는 여전히 모닥불 앞에서 토끼를 굽고 있는 동사왕을 힐끗 응시하고는 싸늘한 어투로 대답해 주었다.
베르츠 따위를 죽인 걸 가지고 저분들에게 소행이라는 표현을 쓰다니, 죽어도 곱게 죽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녀의 말은 곧 시인이었기에 알버트 자작을 비롯해 이얀 공작가의 기사들 모두는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안색을 급변시키고 말았다.
특히 그녀의 말에 공대의 표현이 들어 있었기에 알버트 자작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저들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그건'''너희들이 알 것 없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루아나 역시 모르고 있기에 대답해 줄수가 없었지만 알버트 자작은 그녀가 그들의 정체를 숨기려 한다는 의도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정황 상 저 정체불명의 인물들은 이루아나조차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과 베르츠를 죽일 만한 실력자들이라는 것은 분명한 듯했고, 결국 우려하던 대로 상황은 더욱 절망적일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인 대륙의 소드 마스터와 소드 컴플리터의 차이는 라헬 교단의 스워드 나이츠들로부터 파생된 마나심법과, 그것을 토대로 펼쳐낼 수 있는 환상검술을 익히고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깨달음을 얻어 검의 궁극에 다다른 자들인 것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때문에 자신들이 아무리 최상의 마나심법과 환상검술을 익혔다 하지라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이상 단순한 베기와찌르기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대륙의 검술 체계로 소드 마스터에 이른자들이라 하더라도 넘볼 수 없는 벽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비록 숫자로 극복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백단위의 숫자가 아닌 일이십의 숫자로는 그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정설화되어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도 단지 세 명만으로 소드 컴풀리터인 베르츠를 죽일 수 있었다면 그들도 같은 급수인 소드마스터 급은 되어야 하는 것이고, 또한 일루아나를 제외하고도 소드 마스터 급 세 명이라면 소드 익스퍼트 급인 자신들 열 명으로는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각오하고 있던 부분이기에 알버트 자작은 금방 마음을 추스른 후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베르츠 님의 검을 가져간 것인가? 아무리 적이라 해도 전쟁터의 상황이 아니라면 그런 파렴치한 행위로 죽은 자의 명예를 모욕하지는 않는 법이다.
그 순간 알버트 자작의 시선은 침묵을 지키며 조용히 앉아 있는 천우 곁에 놓여 있는 베르츠의 검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자 일루아나는 알버트 자작의 그러한 말에 조금은 당황했지만 곧 냉소를 발하며 더욱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흥. 명예라고? 네놈들이 필요한 상황에서만 부르짖는 그따위 명예를 누가 인정한단 말이냐. 나 역시 네놈들의 명예 따위는 길바닥에 차이는 돌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그런 말은 지나가는 개한테나 떠들어라.
 
그리고 너 같으면 적이 지닌 물건이 지속적으로 위협이 될 수 있는 물건인데도 그냥 뇌두고 가겠느냐? 뻔히 그 검의 가치를 알면서도 오히려 그따위 말로 나는 물론이고 저분들마저 모욕하려는 네놈의 태도야말로 역겹기 그지없다. 더 이상의 대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테니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보든지, 아니면 순순히 죽음을 맞이할 준비나 해두어라.
알버트 자작은 그녀의 모욕적인 언사보다도 그 말의 의미에 대해 더 큰 의문을 느꼈기에 그녀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자, 잠깐! 도대체 무슨 말이냐? 검의 가치라니? 그럼 단순히 베르츠 님의 검을 탐내어 가져간 것이 아니란 말이냐?
그의 태도로 일루아니는 그가 베르츠의 검에 데스 기어의 계약석이 박혀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그 사실을 알려줄 필요성은 전혀 느끼지 못했기에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여전히 싸늘한 표정으로 양손을 들어 올리며 마법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그러한 모습에 알버트 자작은 위시해 천우 일행을 포위하고 있던 성광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은 흠칫 몸을 굳히고는 긴장한 표정으로 눈짓을 교환하며 서서히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상대가 마법사인 만큼 그들로서는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접근할수록 유리하다는 생각에서 취하는 행동이었고 또한 아직은 그녀의 주위에 앉아 있는 정체불명의 인물들은 나설 생각이 없는 듯했기에 당장은 마녀만이라도 처치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의 방책이라고 여기며 그녀에게 모든 공세를 집중시킬 계획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상황에서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끝까지 보고만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어차피 죽음을 각오한 이상 그들까지 신경쓰며 공세를 분산시킨다면 오히려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자신들만 죽게 될 가능성이 크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들 모두 명색이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단 중 하나라는 성광기사단의 정예들이기에 그러한 결정은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행동을 여전히 싸늘한 눈길로 주시하며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던 일루아나는 전혀 다른 의미로 긴장하며 내심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모순된 삶에 연연하기 않겠어. 내 운명은 이제 그에게 달린 거야.
그녀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가시들 못지않은 빠른 움직임으로 근접전에서도 공격을 피하며 마법을 전개해 낼 수 있는 능력이기는 했지만, 그런 그녀로서도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소드 익스퍼트 급의 기사 열 명이 만반의 대비를 한 채 포위하여 공격해 오는 것을 모두 피해 내기는 어려웠다.
전날 성기사들에게 포위되었을 경우에는 그들의 방식을 틈타면서 선제공격을 하였기에 마법의 위력으로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지금처럼 잔뜩 긴장한 채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반응할  준비를 마친 소드 익스퍼트 급의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는 오히려 공격 주문을 완정시키기도 전에 자신이 산산조각 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이얀 공작가의 기사들이 나타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선제공격을 가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고, 평상시의 그녀라면 절대로 그런 기회를 그냥 넘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껏 선제공격을 가하지 않고 그들을 준비를 완전히 마칠 때까지 기다려준 것은 따로 결심한 바가 있었기때문이다.
그녀가 마계의 귀족인 칼라이스와 처음 계약을 맺을 때 칼라이스는 그녀에게 특이한 계약 조건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 삶을 포기하지 않아야 할 것'과 '최선을  다하지 않은 고의적인 죽음은 나와의 계약을 피기하는 것' 이라는 상당한 모순되면서도 이상한 계약을 맺었던 것이다.

결국 조건대로라면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칼라이스와의 계약이 유지되지만 일부러 죽는다면 계약이 파기되기에 그녀의 영은 칼라이스에게 종속되지 않고 자유가 되는 것이다.
어째서 칼라이스가 그런 이상한 조건을 제시했는지 그녀는 지금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만 당시에는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 남아 있었고 . 또한 일반적인 마족과의 계약과는 전혀 달리 사후에 자신의 영이 종속되지 않을 방법마저 존재하는 전혀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기에 그녀로서는 그러한 조건을 거부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녀는 그러한 계약 조건이 오히려 너무나 가혹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찌 된 일인지 칼라이스와의 계약 이후 그녀는 세월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아 항상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녀가 칼라이스와 계약한 지 벌써 3백 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처음 계약한 당시의 스물세 살의 아리따운 아가씨 모습 그대로였다. 한데 문제는 그러한 젊음이 유지되면서 죽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그녀는 칼라이스와의 계약으로 새로운 삶과 힘을 얻은 후 하고자 했던 일을 이룰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특별히 다른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없어 대부분의 세월을 아무런 의미 없이. 되도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평범하게 살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지 않는 그녀의 모습 때문에 어느 곳에서건 오랫동안 정착할 수 없었고 항상 대륙의 곳곳을 떠돌아다녀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의 미모로 인해 이런저런 사소한 사건이 끊이지 않았고 그녀는 그때마다 피를 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녀는 진홍의 마녀라는 별칭 외에도 매혹의 마녀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피를 보게 되면 항상 그곳을 떠나 행방을 감추어 버렸고 사건 역시 마녀가 남자를 유혹하여 피의 제물로 삼았다. 정도로 마무리되었기에 그녀에 대한 일은 잠시간의 화제로 떠올랐다가 곧 흐지부지되고는 하였다.

그렇듯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홀로 외롭게 대륙을 떠돌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정을 붙이지 못했고. 또한 늘 사람들을 경계하고 피해야만 한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삶에 대한 의미를 잃어가며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날이 지속될수록 그녀는 오히려 정신적으로 자신의 계약자인 칼라이스에게 의지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사후에라도 자신의 영이 칼라이스에게 종속되기를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그녀는 영혼의 자유라는 것을 죽어서까지 혼자여야 한다는 끔찍함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차라리 그럴 바에야 차라리 칼라이스에게 종속되기를 바라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계약이 파기되어선 안 되기에 그녀는 더욱 치열한 삶을 유지해 나가야 했지만, 이제 그녀는 삶 자체가 날이 갈수록 영혼마저 짓눌러 버릴 정도로 무거운 짐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하루하루의 삶이 오히려 절망으로 느껴질 시기, 그녀는 한 가지 일로 인해 신성교국의 대신관이란 작자가 저지른 천인공로할 일을 목격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본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그를 죽이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일은 예전과는 달리 쉽게 넘어가지 않았고, 오히려 신성교국에게 대대적인 추적대까지 편성해 끈질기게 쫓는 바람에 도망 다니다가 천우 일행을 마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동사왕을 본 그녀는 그를 정신적으로 믿고 의지하던 대상인 칼라이스라고 인식하며 한순간에 잠재되어 있던 모든 애틋한 감정들을 폭발시키게 되었다.
비록 동사왕이 칼라이스가 아니라는 말에 무척 실망했고 그녀 자신도 지금으로서는 별로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이미 동사왕으로 인해 폭발해 버린 감정들을 그녀들로서도 도무지 주체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이곳까지 오면서 내심으로 수많은 갈등과 고민을 했지만 어느 순간 부터 동사왕의 존재가 정말 칼라이스든 아니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미 그에 의해 죽음의 순간에서 다시 한 번 삶을 얻었고, 생전 처음 느껴보는 걷잡을 수 없는 설렘과 기대감, 그리고 의지하고픈 마음이 사그라지기는 커녕 매 순간마다 더욱 절실해진다는 것을 느끼면서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의 정체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더 이상 자신의 모순된 삶에 대해 힘겨워하기보다는 삶이든 죽음이든 생전 처음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된 동사왕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겨 순응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의 일환으로 지금 그녀는 칼라이스와의 계약이후 처음으로 고의적인 위기상황을 자처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설사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하더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그녀는 자신만의 칼라이스, 즉 동사왕이 자신의 위기를 결코 보고만 있지는 않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3장 죽음의 선


아무래도 뭔가 좀 이상한데? 어떤 방식인지는 몰라도 저 파란 눈 계집애는 공세를 펼치기 전에 먼저 외부의 기운을 몸 내부로 흡수했다가 다시 방출하는 수법을 쓰던데. 지금은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질 않는걸? 지니고 있는 내공이라야 보잘것없으니 그 수법이 아니라면 지금 접근하고 있는 놈들도 일류 정도는 돼 보이니 제대로 상대하기는 힘들 것 같은데 말이야. 게다가 외부의 기운을 끌어들이는 데도 제법 시간이 걸리는 것 같던데''''뭔가 다른 묘수라도 있는 건가?
여전히 모닥불 앞에 앉아 토끼를 굽는 척하며 무관심한 듯 행동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든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고 있는 동사왕이 어제와는 달리 먼저 공세도 펼치지 않고 접근하는 자들을 지켜만 보고 있는 일루아나의 상태를 느끼며 지나가는 어투로 가볍게 의문성을 말했다.
그때 천우 역시 모닥불을 응시하며 담담한 어투로 동사왕의 말에 응대해 주었다.

그녀가 펼치는 수법은 마법이라는 것으로 무공과는 좀 다릅니다. 형님 말씀대로 그녀는 마법을 펼치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저들은 어제의 그자들과 별다른 실력차이는 없지만 지금 그녀는 선제공격을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일단 저들의 공세를 피하며 기회를 보아야 하겠지만 공격하는 인원이 너무 많아 쉽지 않겠군요.
동사왕과 천우의 갑작스런 대화에 조심스럽게 포위망을 좁히던 이얀 공작가의 기사들은 모두 움찔하며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긴장된 표정으로 모두 멈추어 섰다.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그에 대한 의문보다는 혹시 당장에라도 그들이 나서려 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그것이 더욱 걱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 별달리 움직이려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고, 아직 기세조차 느껴지지 않았기에 조금은 안도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의도하던 거리 역시 충분할 정도로 가까워진 상태였기에 더 이상 접근하지 않고 긴장된 시선으로 공격 시점을 가늠하기 시작했다.
동사왕 역시 그들의 기세가 더욱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유지하며 다시 말했다.
저 파란 눈 계집애는 자신이 펼치는 그 마법인가 하는 것의 단점을 잘 알고 있을 텐데 어째서 어제처럼 선재공격을 하지 않고 이 상황이 되도록 놔둔 것인지 모르겠군, 혹시 우리가 도와 줄 거라 믿고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 아닌가? 정말 그렇다면 죽게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허허.이것 참!

여전히 꼬챙이에 꿰인 토끼를 뒤척이며 하는 의뭉스러운 말에 천우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형님께서 도와주시면 되는 일인데 뭐가 걱정이십니까.
험! 사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 사사건건 참견하는 것도 좀 그렇고''''게다가 저 파란 눈 계집애가 펼치는 수법에서 마기가 느껴지던데. 그로 보아 사파 출신이 아닌가 싶네. 그렇다면 저 녀석들은 이곳의 관부나 정파 측의 놈들이겠지, 물론 그런 것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일의 전말은 알고 돕든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제의 경우에는 이 우형이 좀 섣부른게 나선 감이 있긴 하네만, 그건 순전히 맨 마지막에 남았던 놈이 제법 실력도 있으면서 비겁하게 부상당한 아녀자를 핍박하려 하기에 정당하게 싸우라고 충고를 해주려던 의도에서였네. 한데 그놈이 패거리를 이끌고 보복하겠다고 설치는 통에 차후의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서 손을 쓰게 된 것일세.
한데 저 파란 눈 계집애와 관련하여 나타나는 놈들마다 저렇게 흉흉한 살기를 내비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돕고자 한다면 계속해서 피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란 말일세. 비록 당장이야 큰 상관은 없겠지만 이곳은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인데 영문도 잘 모르면서 계속 손에 피를 묻히는 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지 않겠는가. 그래서 하는 말인데''''혹시 자네는 저 파란 눈 계집애가 무엇 때문에 쫓기고 있는 것인지 알고 있는가?

사실 진즉부터 그런 사항을 알고는 싶었지만 왠지 어색한 생각에 묻지 못하고 천우가 말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동사왕이었다. 한데 이제껏 그에 대해서는 별달리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기에 적절한 기회를 보아 묻게 된 것이고, 천우 또한 의형인 동사왕이 생각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아는 대로 말해 주었다.
그녀를 쫓고 있는 자들이 속한 곳의 신분이 높은 자를 죽인 모양입니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죽은 자는 신분과 지위를 이용해 많은 여인들을 능욕하고 죽인 자인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것 역시 그 정도이지만 그런 자라면 죽어 마땅한 자이고, 또한 그녀가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라는 것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날 베르츠와 성기사들이 나타났을 때 천우는 그녀가 외치던 말을 들었고,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도 느낄 수 있었기에 천우 또한 동사왕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사건 자체가 여인들이 관계된 좋지 못한 일임을 알 수 있었기에 천우 역시 묻기가 거북하여 아직 그녀에게 쫓기는 연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묻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 천우의 말에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던 조아가 슬쩍 아미를 찌푸림과 동시에 동사왕의 분노가 담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그런 일로 쫓기고 있었던 거란 말인가? 어제 그 버릇 없는 놈의 행동으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이곳 역시 썩은 놈들이 정의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온갖 추잡한 일들을 벌이고 있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구먼, 알겠네, 그런 무리들이라면 어찌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주저하겠는가, 이놈들도 그 패거리라면 죽어 마땅한 놈들이지.
헉! 고,공격''''
타핫!
죽어라. 마녀!
천우의 말로 인해 사뭇 마음에 걸리던 부분이 해결되자 동사왕은 노성과 함께 기세를 개방시켰고 그 순간 동사왕의 기세를 가장 먼저 느낀 알버트 자작이 헛바람을 들이켜며 악을 쓰듯이  공격 명령을 내렸다.
다른 기사들 역시 그와 거의 동시에 순간적으로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고는 알버트 자작의 명령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합성과 함께 전력을 다해 공세를 펼쳐내었다.
그들은 소드 마스터 급의 강자들이 발하는 기세에 제압당하면 제대로 된 공격은 고사하고 움직이기조차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서둘러 공격을 시작했던 것이다.
기사들은 동사왕의 기세가 자신들의 주군인 자이텔 공작이 발하던 기세보다 더 지독하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느끼면서도 목숨을 도외시한 채 오로지 일루아나를 향해서만 공세를 집중시켰다.
그렇게 열 명의 소드 익스퍼트 급 기사들이 온몸을 던지며 죽을힘들 다해 전개해 낸 검격은 폭풍 같은 기세를 동반한 채 일루아나에게 휘몰아쳐 갔고, 덕분에 일루아나의 전신은 미처 검이 닿기도 전에 밀려드는 검기만으로도 산산조각이 날 듯했다.
하지만 그런 위태로운 순간에도 일루아나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오히려 수인을 맺고 있던 양팔마저 내리며 자조적인 미소를 피워 올렸고, 그 순간 꼬챙이에 꿰어 구워지고 있던 토끼들과 동사왕의 신형이 함께 사라졌다.
저,저럴 수가! 저것은 분명 주''''흡!
텔리안! 너 제정신이야? 조용히 못 해!
흡!흡!우흡!
알았서, 손 치울 테니까 제발 조용히 해, 네가 떠들지 않아도 나 역시 기절 직전이니까 말이야. 여기서 발각당하면 우리 모두 죽은 목숨이라는 걸 명심하라고.
텔리안의 입을 온 힘을 다해 틀어막은 로크가 그의 귀에 대고 떨리는 음성으로 속삭이자 텔리안 역시 이성을 찾은 듯 황급히 고개를 끄덕거렸고, 그제야 로크는 천천히 그의 입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러자 텔리안은 오히려 자신의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여전히 경악으로 부릅떠진 두 눈으로 전면을 응시하며 전신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고든은 시퍼렇게 질린 안색으로 완전히 넋이 빠진 상태였고. 로크 역시 주체할 수 없는 공포감과 경악으로 인해 당장이라도 심장이 멈출 것만 같은 상태였다.

그동안 용병 일을 하며 흔히 인세의 지옥이라 표현하는 전쟁터에서도 온갖 험악한 일들을 보고 겪었지만 지금처럼 공포스러운, 그리고 말도 안 되는 경우를 보기는 정말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숨어서 이얀 공작가의 기사들과 일루아나가 하는 대화를 모두 들었기에 그녀의 정체에 대해서 알 수 있었고, 또한 그녀 주변에 앉아 있는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베르츠를 죽인 자들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 경악스러운 사실 때문에 그들은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 그들이 놀란 것에 비하면 다른 것들은 차라리 웃어넘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을 이얀 공작가의 기사들이 일제히 공세를 전개했을 때 마치 온 천지가 검광에 휩싸인 듯한 착각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나마 감탄과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과연 저러한 엄청난 공세를 일루아나나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받아낼 수 있을까 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물론 그것은 일루아나나 정체불멸의 인물들을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단지 이얀 공작가의 기사 열명이 전력으로 펼친 공세가 정말 엄청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지를 뒤덮었던 검광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다시 드러난 광경은 정말로 조마조마하던 그들의 심장을 멈추게 할 만큼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일루아나는 여전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양팔마저 내리고 서 있었고, 언제 움직인 것인지 그녀 곁에는 이마에 붉은 점이 있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한 손에 토끼가 꿰인 꼬챙이를 든 채 나타나 있었다.
문제는 어두운 하늘을 향해 번쩍 들려 있는 그의 나머지 한 손에서 어둠보다 짙은 심여 가닥의 흑색 선들이 사방을 향해 뻗어 있다는 것, 그리고 흉험한 공세를 펼쳤던 이얀 공작가의 기사들이 그 흑색 선들에 의해 모두 머리가 꿰인 채 허공 중에 걸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 자체도 로크 일행을 놀라게 하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는 광경이었거늘 그들을 진정으로 경악하게 만든 이유는 바로 동사왕의 제왕수결에 의해 이루어진 십여 가닥의 흑선 자체에 있었다.
쿵! 쿵! 쿵!

한순간 동사왕의 손에서 전개된 십여 가닥의 강기들이 거젓말처럼 사라지면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즉사한 이얀 공작가의 기사들이 허공 중에서 사방으로 아무렇게나 떨어져 내리며 갑옷에 의한 둔중한 소리들을 냈다.
비록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동사왕은 이전과 다르게 제왕수결에 의해 이루어진 유형의 강기들을 잠시 유지시켰다가 거두었다. 그것은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이곳의 기운이 중원보다 워낙 농도가 짙어 같은 힘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큰 위력을 나타내며 저절로 유형의 기운을 이룰 정도였기에 동사왕 역시 놀라서 제왕수결을 거두는 시간이 좀 늦어졌던 것이다.
물론 동사왕 역시 대기 중의 그러한 짙은 기운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지금의 동사왕이라면 마음만 먹는다면 이곳이 아니라 중원에서라도 얼마든지 강기들을 유형화시켜 유지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기중의 기운만으로 인해 무공의 위력이 확연히 달라질 줄은 미처 생각치 못했던 것이다.
비록 전날 데스 기어를 향해서도 제왕수결을 펼쳐보기는 했었지만 그때는 스스로 폭발적인 힘이 느껴졌음에도 불구하고 데스 기어가 멀쩡했기에 자존심이 상해서 그러한 사실을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튼 동사왕은 나름대로 적당한 힘을 써서 고통 없이 한순간에 죽여주려 했던 놈들이 유형화된 강기에 꿰인 채 허공에 걸린 모습에 잠시 당황했고, 그러한 모습을 본 로크 일행은 또 전혀 다른 이유로 경악하고 있었다.

5백 년 전 대륙에는 반신, 혹은 반마로 여겨지는 존재가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그는 추종하는 무리에 의해서 라헬이라 불렀고, 또한 그들에 의해 신이 되어 라헬 교단이 성립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라헬의 존재를 강림한 마왕 내지는 마족으로 여기기도 했지만 그 지닌 능력이 고대 문헌에 나타나 있는 강림한 마왕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하고 공포스러웠기에  그는 진정한 반신 내지는 반마로 여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인간 세상의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지 강림한 다른 마왕들처럼 인간들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라헬에 의해 큰 피해를 당한 것은 생명체이면서도 유일한 반신 급의 존재로 인정받고 있던 드래곤들이었고, 라헬로 인해 드래곤들은 거의 멸종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라헬과 라헬 교단이 모습을 감춘 것은 드래곤들과 대륙의 각 교단이 힘을 합해 라헬과 라헬 교단을 물리쳤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었고, 그 과정에서 드래곤들보다 오히려 당시의 신생 교단인 크로아 교단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에 크로아 교단을 주축으로 한 지금의 신성교국이 탄생하게 된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말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러한 내막이야 어떻든 로크 일행들이 이 순간 진정으로 경악하며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동사왕이 보여준 제왕수결에 의한 흑선 때문이었는데, 그러한 수법은 전설로 전해지는 라헬의 권능 중 하나인 '죽음의 선' 과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라헬의 권능인 '죽음의 선'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다는 드래곤들의 비늘과 뼈마저도 수수까처럼 잘라내는 위력을 지녔고, 소드 마스터들의 오러 소드마저 죽음의 선 앞에 서는 썩은 나뭇가지에 불과하다고 전해졌다.
물론 그보다 더 무서운 것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았지만 반신 라헬이 드래곤들을 죽일 때 가장 즐겨 사용하던 수법이 바로 죽음의 선이었고, 그것은 곧 라헬의 권능 중 하나로서 공포의 대명사이자 라헬의 상징과도 같이 여겨졌던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이마에 붉은 점이 있는 정체불명의 괴인의 이얀 공작가의 기사들을 한순간에 죽인 수법은 분명 마법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슨 병장기 종류도 아니었다.

그러니 소드 익스퍼트 급의 기사 열 한명을  그것도 대륙 사대검가 중 하나라는 이얀 공작가의 정예 기사 열 한명을 그처럼 한 순간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게 죽여버릴 수 있는 수법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도 믿기 힘들었고, 더구나 베르츠마저 그들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그 수법은 죽음의 선 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아니더라도 저들은 절대 인간일 수 없었기에 로크는 제발 저들이 자신들을 이곳에 숨어 있는 것을 모르기만을 대륙의 모든 신들에게 간절히 빌 수밖에 없었다.

타닥타닥!
모다불이 타오르는 소리만이 숲의 적막을 깨는 가운데 동사왕은 조금 화난 표정으로 일루아나를 쏘아보며 노성을 말했다.
너는 처음부터 공세를 펼칠 마음이 전혀 없었구나! 도대체 왜 그런 것이냐?
물론 동사왕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기에 화가 나서 한 말이었고, 일루아나 또한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표정과 음색만으로도 동사왕이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기에 오히려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를 복잡한 눈길로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런 눈길에 동사왕은 오히려 흠칫하며 그녀의 시선을 피한 채 못마땅하다는 어투로 투덜거리며 모닥불 곁으로 돌아와 않았다.

에잉! 말이 통해야 혼을 내든지 말든지 하지 원''''
동사왕은 다시 손에 쥐고 있던 꼬챙이를 모닥불 위에 올려놓고는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투덜거렸다.

거참! 토끼도 다 익었는데''''이런 분위기에서는 아무리 나라해도 음식이 넘어가지 않겠어, 이보게. 천 아우.
말씀하십시오.
아무래도 이곳을 걸어서 빠져나가려다가는 계속해서 철갑통 입은 놈들이 몰려들어 피를 보게 될 것 같네. 좀 꺼림칙하긴 하지만 그 텔'''뭐시기로 단번에 조용한 곳으로 이동하는 게 어떻겠는가.
그렇게 하지요.
천우는동사왕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는 미묘한 표정으로 동사왕을 주시하고 있는 일루아나를 향해 말했다.
이곳에서 텔레포트를 이용해 움직일 생각인데, 같이 가시겠소?
천우의 물음에 그녀는 의미 모를 나직한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다른 자들은 어찌했으면 좋겠소?
곧 이어진 천우의 물음에 일루아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다른 자들이라니요?
그녀는 아직 주변에 로크 일행이 숨어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에 당연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곧 그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급히 물었다.

혹시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숨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소, 애초에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지금까지의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기에 물어보는 것이오.
그 말에 그녀의 표정이 또다시 표독스럽게 변하며 즉시 고개를 돌려 주변 숲을 노려보면서 소리쳤다.
누구냐?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놈들은 어서 나서라!

하지만 자신의 외침에도 로크 일행이 숨죽인 채 나서지 않자 그녀는 즉시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 숲을 향해 마나 스캔을 시작했다.
마나 스캔은 마법은 아니지만 정신을 집중해 주변의 마나 흐름을 감지해 그것을 통해 주변의 이질적인 기운들을 구분해 내거나 특정한 기운을 찾아낼 수 있는 마법사들 고유의 능력이었다. 물론 기사들도 비슷한 능력이 있긴 하지만 무엇을 찾아내거나 하는 데에 있어서는 마법사들의 마나 스캔을 따라올 수 없었다.
곧 전면 쪽의 풀숲에 웅크리고 있는 네 명의 종적을 찾아낸 일루아나는 그쪽을 주시하며 다시 말했다.

나서지 않겠다면 숨어 있는 그 주변을 전부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겠다. 그래도 나서지 않을 테가?
그녀의 말에 숨어 있던 로크 일행은 절망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정말로 마법을 시전하려는 듯한 동작을 치하자 로크가 놀라서 다급히 일어서며 소리쳤다.
자,잠깜만! 우리는 적이 아니오.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주시요.
로크가 일어서자 나머지 일행들도 어쩔 수 없이 웅크리고 있던 숲에서 몸을 일으켰다.
너희들은 누구냐? 왜 그곳에 숨어 있는 것이지?

비록 그녀가 손을 쓴 것은 아니었지만 한바탕의 혈겁이 있었기에 그녀의 표정과 전신에서는 금세 뭉클한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로크는 더욱 다급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급히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우린''''여행 중인 평범한 요병들일 뿐입니다. 불빛을 보고 이곳으로 오다가 갑자기 기사들이 나타나는 바람에 놀라서 숨은 것뿐입니다.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 말에 일루아나는 얼마 전 자신과 처음 격돌했던 이얀 공작가의 기사가 했던 말을 떠 올리며 이들이 바로 이얀 공작가의 기사들이 찾고 있던 인물들임을 깨달았다.
너희들은 이들에게 쫓기고 있었던 것인가?
그,그렇습니다.
줄곧 하대를 하는 일루아나였지만 로크는 이미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에 그에 대해서 아무런 반감을 갖지 못했다.
무엇 때문에 이얀 공작가의 기사들이 평범한 용병들인 너희들을 쫓는 것인가?

그녀의 물음에 로크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사실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저희들이 폐허의 마탑에서 성기사들과 베르츠의 시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일루아나는 어찌 된 사연인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기에 더욱 싸늘한 표정이 되었다.
너희들이 그들의 죽음을 알려준 것이로군,
그녀의 차가운 말에 로크는 황급히 변명했다.
저,저희는 그저 여행 경비가 궁했기에 아무런 생각 없이 한 행동일 뿐입니다. 절대로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것을 탓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그 일로 아무런 잘못도 없는 너희들을 죽이려 한 저놈들이야 말로 죽어 마땅한 놈들이지.
그'''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이해한다는 듯한 태도에 잠시 희망을 가졌던 로크와 그 일행은 곧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더욱 큰 절망이 엄습하는 것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너희들은 그냥 보내줄 수는 없다. 너희들이 그저 이자들의 죽음을 목격한 정도라면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만 아쉽게도 이곳에서의 일을 처음부터 모두 지켜보았다. 너희들이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신성교국이나 이얀 공작가에 모두 알려주게 된다면 우리로서도 곤란해질 수 있다. 비록 너희들에게 아무런 악감정은 없지만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해라.
로크는 더 이상 흘려낼 땀이 있을까 싶은데도 불구하고 또다시 등 뒤로 식은땀이 빗줄기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다시 황급히 말했다.
저희도 이얀 공작가에게 쫓기고 있는 처지인데 어찌 미련하게 그 같은 일을 하겠습니까. 저희는 절대로 이번 일에 대해서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로크의 절박한 맘에 일루아나는 더욱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안다. 하지만 너희들이 이얀 공작가의 손길을 언제까지고 피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 말에는 로크도 별달리 반박할 말이 없었기에 인상을 일그러뜨렸지만 그래도 상대가 막무가내로 나오지는 않는 듯했기에 희망을 버리지 않고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그러시다면 저희도 당분간 당신들을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저희도 이얀 공작가에게 쫓기고 있는 몸이니 어떤 의미로는 당신들과 한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별도움은 안 되겠지만 저희들 역시 일급 용병들이니 어느 정도 제몫은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대,대장 미쳤어? 지금 누구를 따라가겠다고''''
텔리안! 입 닥치지 못해!
로크의 말에 텔리안이 저도 모르게 기겁을 해서 외치다가 로크의 험악한 외침에 급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텔리안 역시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색이 하얗게 변한 채 겁먹은 표정으로 일루아나와 천우 등의 표정을 살폈다.
그 모습을 보며 일루아나가 여전히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모든 것을 보고 들었을 테니 내 정체에 대해서도 알 것이다. 그런 나와 같은 편이 돼주겠다는 말은 고맙지만 단지 그것이 이 순간을 모면하려는 말임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당분간은 함께 움직인다 하더라도 너희는 기회만 생기면 도망치려 할 것이 분명한데 어찌 너희들을 같은 편으로 인정할 수가 있겠느냐. 물론 정신 금제로 너희를 네게 강제로 종속시키거나 혹은 이곳에서 보고 들은 일들을 모두 지워버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너희들 또한 죽으면 죽었지 그런 것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이 틀렸다면 어디 말해 보아라.

로크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 어떤 변명이나 애원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기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정신 금제까지 당하면서 종속되거나 혹은 바보가 되는 일은 죽기보다 싫었기에 이후로도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일루아나는 그런 로크를 보며 내심 가벼운 한숨과 함께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너희들에겐 몹시 억울하겠지만 우리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로크는 물론이고 다른 일행들도 그녀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억울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로크는 묵묵히 허리춤에서 자신의 롱 소드를 뽑아 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들에게서 도망친다는 것은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대항한다 해도 역시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얌전히 죽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로크가 검을 빼어 들자 덩치가 큰 고든은 등에 메고 있던 바스타드 소드를 끌어내어 양손으로 움켜쥐었고, 텔리안 역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롱 소드를 빼어 들었다. 그리고 마법사인 세리나는 일행들의 뒤편으로 조급 빠지며 덩치 큰 고든 뒤에서 스태프 없이 맨손으로 마법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혹시 일루아나가 자신이 맺는 수인의 형태를 알아보고 미리 대비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취한 행동이었다.
물론 그녀는 5서클 마스터에 불과한 자신이 어떤 마법을 펼치더라도 7서클의대마도사인 일루아나에게는 전부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법 자체는 그녀에게 무영지물이 될지 몰라도 세명의 동료가 있었고, 자신은 그동료들에게 한순간 기회라도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결과가 달라질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이 곧 그녀의 신념이기도 했기에 지금 이 순간도 미리 포기하기보다는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일루아나는 잠시 두 눈에 이채를 발했다.
분명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일단 대항기로 마음먹은 그들에게서는 두려움보다는 투지가 느껴지고 있었고, 특히 5서클 정도박에 안 된느 마법사는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스태프가 아닌 마법 수인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매우 놀랍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단지 용병에 불과하다는 것이 무척 의아스럽게 여겨졌다.
하지만 일루아나로서는 그녀의 재능이 아까워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녀 역시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리며 일정한 형태의 수인을 맺기 사작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로 일루아나는 그들이 선공을 취할 수 있도록 기다리기로 했다.

고대로부터 계속된 마법의 끊임없는 연구로 지금까지 인간들이 이루었던 마법의 모든 성과들 중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메모라이즈와 마법 수인의 발견일 것이다.
메모라이즈는 마법 주문을 미리 캐스팅 완료 상태로 만들어 두는 것이고. 마법 수인은 메모라이즈 되어 있는 마법을 구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외에 마나심법을 통해 마법사들도 체네에 마나 축적이 가능해짐에 따라 강한 체력과 민첩함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역시 대단한 성과라 볼 수 있겠지만, 이 부분은 엄밀히 말하면 마법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었고, 또한 아직도 정통을 고수하는 대다수의 마법학파들 소속 마법사들이 위험성을 경고하며 옳지 않은 편법으로 치부하고 있었기에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튼 메모라이즈와 마법 수인의 발견은 기존의 마법 질서를 송두리째 뒤흔들 만큼 대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인간의 마법은 완전함에 좀 더 가까워졌다고 말해지기도 했다.

여기서 완전함이란 바로 드래곤들의 용언마법을 일컫는 것으로, 드래곤들 입장에서는 그런 평가가 우습지도 않는 얘기였지만 아무튼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한 대단한 성과임에는 틀림없었다.
특히 고서클 마법사일수록 그 효과와 위력이 극대화된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고, 그 두 가지 방법으로 인해 각 서클 간에 격차는 이전보다 더욱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두 가지 방법에도 단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메모라이즈는 마법 서클에 따라서 메모라이즈 해둘 수 있는 마법의 개수가 한정되어 있었고, 그렇게 메모라이즈 되어 있는 마법을 구현시킬 수 있는 마법 수인은 각각의 마법에 따라 별도로도 익혀야만 했다.

하지만 가장 큰 맹점은 바로 그러한 마법 수인을 제대로 익히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다는 것에 있었다.
물론 그 외에도 메모라이즈 되어 있는 마법을 마법 수인으로 구현하는 것은 제대로 된 캐스팅에 의해 스태프로 구현하는 마법보다 훨씬 많은 마력의 소모를 가져왔고 위력 면에서도 조금은 차이가 난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리고 하위 서클의 마법의 경우에는 시동어를 제외하고 완전하게 모든 주문을 캐스팅 시켜놓을 수 있었지만, 메모라이즈의 경우에는 같은 서클의 마법에 대해서 시동어 외에도 마지막 주문은 메모라이즈 시켜놓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한 단점들은 메모라이즈를 사용할 경우에는 시전자의 엄청난 캐스팅 시간을 줄여준다는 것과 마법 수인에 의해 움직이면서도 마법의 발현이 가능하다는 장점에 비하면 논할 가치도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난해함으로 인해 마법 수인을 제대로 익힌다는 것은 거의 모든 마법사들을 좌절케 하고 혹은 절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당금의 대륙에는 현자라 칭해지는 8서클의 마스터가 두 명 존재하고 있었고, 대마도사라는 7서클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마법사가 대략 이십여 명 내외로 존재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그리고 마도사라 칭하는 6서클 마스터의 마법사는 칠백여 명정도로 추산되고 있었지만 그 숫자도 아벨란 대륙의 인구 대비백만 명을 상화하는 인구 중 한 명 꼴 정도이기에 결코 흔하다고는 할 수 없는 숫자였다.

특히나 대부분의 6서클 이상의 마도사들은 국가보다는 마탑, 혹은 마법학파라 불리는 마법사 고유의 단체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각 소왕국 왕실의 수석 마법사 자리는 6서클의 마도사가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정도로 아주 귀하고 드문 고급인력이었다.

아무튼 깨달음을 얻어야만 도달할 수 있다는 6서클 이상의 마도사들 중에서도 마법 수인을 한 가지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숫자는 채 절반도 안 되었고, 그 이하 5서클 급 마법사들 중에서는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마법 수인 자체는 마법의 서클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5서클 급의 마법사들 중 마법 수인을 제대로 익힌자가 거의 없다시피 하는 이유는 바로 마법 수인이 룬어와 수화체계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룬어란 단순한 기호나 표식이 아닌 그 자체가 생명력을 지닌 언령이자 자연과 우주만물의 이치가 담긴 신의 의지라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룬어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진정한 깨달음의 과정 없이는 불가능했다.
결국 4 서클 이하의 수련 마법사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5서클의 마법사가 부분적인 깨우침으로 간신히 룬어의 의미 정도는 느낄 수 있다 해도 그가 마법 수인을 제대로 구현하기란 힘든일인 것이다.
때문에 같은 서클의 마법사라도 마법 수인을 한 가지라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마법사와 그렇지 못한 마법사와의 격차는 가히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런 난해한 마법 수인을 아직5서클의 마법사에 불과한 세리나가 제대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놀랄 만한 일이었고 그녀는 분명 희대의 천재라 불릴 만했다.
어쨌든 세리나는 고든의 등 뒤에서 자신의 비장의 수법중 하나인'월 오브 포스'를  마법 수인으로 시전할 준비를 했다.

월 오브 포스는 단지 상대방의 시야를 차단시키는 효과뿐이었지만 상대 마법사의 디스펠로도 무효화되지 않는다는 장점이 었었고, 반드시 물리력이 가하져야만 깨어지기에 위급한 순간에 시간을 벌 수 있는 유효한 마법이었다. 어치피 7서클의 대마도사인 일루아나 앞에서는 모든 마법이 무용지물이엇기에 그나마 동료들에게 잠깐의 기회라도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할 수 있었다.
누구든 시야가 가려지고 순간적으로 상대방의 종적을 놓치게 되면 당황하기 마련이고, 또한 적이 어디로 흩어져 들어올리 모른다면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 할지라도 적절한 마법을 구사하기가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녀가 처음부터 고서클의 대단위마법을 무차별적으로 구사한다면 시야가 가려지는 것쯤은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겠지만, 만약에라도 일루아나가 준비하고 있는 것이 광역마법이 아닌 블러드 핑거와 같은 대인 마법이라면 일단'월 오브 포스' 를 깨트리거나 혹은 회피 동작을 취하며 다른 마법으로 전환하여 대응해야 하기에 약간의 시간이나마 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수인이 완성되자 고든의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메모라이즈 되어 있는 '월 오브 포스' 의 마지막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미 그녀와 무수히 손발을 맞추어본 로크 등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그녀의 입에서 시동어가 터져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비록 지금은 상대가 상대인지라 그 어느 때보다 절망적인 상황이긴 했지만 그들 역시 이미 죽음을 각오한 상태이기에 더 이상의 두려움은 없었다. 죽음을 겁낸다면 일류 용병이 될 수 없었고, 또한 그들은 지금껏 무사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헤쳐온 일류 용병들인 것이다.

4장 동행


[이봐, 저 녀석들이 죽도록 그냥 보고만 있을 참인가? 아무래도 저들은 살려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글쎄''']
[글쎄는 무슨! 이미 살리기로 마음먹은 것 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다면서 왜 묻는 건가.]
[혹시나 싶어서지. 그리고 살리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왜 저런 상황이 벌어지도록 놔두는 것인지도 조금 궁금하고.]
[그 이유를 말하기 전에'''''너는 왜 저들을 살려두는 게 좋겠다고 하는 것인가.]
[그건 저들의 신분이나 처지가 지금의 너희와 함께하기에 딱 좋기 때문이다. 또한 저들을 일행으로 받아들인다면 너희들에게도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고 말이지.]

[도움이라면'''어떤 측면을 말하는 것인가?]
[네가 이곳에 넘어온 천마라는 인간과 육신을 얻게 된 바포메트를 찾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그 못지않게 너와 함께 온 일행들이 이곳 세계에 적응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자면 역시 이곳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어야 하는데, 너와 네 일행들은 생긴 모습부터 이곳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고 언어나 지리, 풍습 등 그 어느 것 하나 익숙한 것이 없다. 결국 그 상태로는 이곳 사람들과 친해지기도 어렵고 또한 그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곳 대륙에서는 흑마법사를 역시 모스터들 못지않게 사람들에게 경원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니 저 여자 흑마법사와 함께 움직이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 가까워질 기회를 얻기는 더더욱 힘들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저 여자 흑마법사는 당장 떼어버리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곧이 네가 번거로음을 감수하면서까지 저 여자를 일행으로 삼은 이유에 대해서는 대강 짐작하고 있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찬견하지 않겠다.

하지만 저 여자 흑마법사와는 달리 평범한 용병들인 저들을 일행으로 삼아 움직인다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도 충분히 얻게 될 것이고, 또한 너희가 이곳에서 하고자 하는 일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군''''한데 저들 역시 네 말처럼 우리를 이상하게 생각하기는 마찬가지일 테니 쉽게 친해지거나 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또한 우리를 계속 두려워하며 다른 존재로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녀의 말처럼 기회가 되어 도망갔을 경우에는 저들로 인해 더욱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물론 처음부터 친해지기야 쉽지 않겠지, 하지만 저들도 쫓기는 상황이고, 또한 지금은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이니 일단 살길을 열어준다면 '''이제 보니 너는 저들에게 목숨의 빛을 지우려고 하는 것이구나, 그런 거지?]
의식 속에서 들려오는 아티오네스의 말에 천우는 그제야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목숨 빛이라보다는'''두려움을 없애주려는 것이다.]
[두려움을 없애준다고?]
[저들은 죽음을 겁내는 자들이 아니다. 지금처럼 죽어야 할 때에는 당당히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지. 저런 자들에게는 죽음 자체보다는 오히려 불안감이 더 큰 두려움일 것이다.

한데 저들은 일행으로 삼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능력을 감추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저들 역시 우리를 다른 존재로 여길 것이다. 그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불안할 것이고 진심으로 친해지기도 어렵겠지.

하지만 이미 한번은 죽었던 목숨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추후로도 우리가 자신들을 해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면 놀람이나 의문은 가져도 불안감에 의한 두려움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 불안감만 없앤다면 가장 큰 벽은 허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 말로 아티오네스는 천우의 의도를 확연히 파악할 수가 있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어도 애초부터 저 녀석들을 일행으로 만들작정을 했던 것이로군. 그러고서도 시치미를 떼다니''''더구나 사람의 심리마저 다루려 하는 것을 보니 너도 이제 정말 사악한 인간이 다 됐다.]

아티오네스의 칭찬인지 핀잔인지 모를 말에 천우가 내심 쓴 웃음을 짓는 순간, 마법 수인과 더불어 메모라이즈 되어 있던'월 오브 포스'의 마지막 주문을 완성시킨 세리나의 입에서 마침낸 시동어가 터져 나왔다.
'월 오브 포스!
이얍!
타앗!
세리나의 시동어와 함께 로크와 텔리안 그리고 고든이 일루아나를 향해 전력을 다해 쇄도해 들었고, 그런 그들의 눈에 한 순간 멈칫거리다가 손을 뻗어내는 일루아나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은 아무런 변화를 느끼지 못해지만 일루아나가 순간적으로 멈칫거리는 모습을 본 순간 분명 세리나의 마법이 성공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 로크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일루아나가 손을 뻗어내는 것을 보면서도 기세를 줄이지 않고 더욱 빠르게 그녀에게 접근해 들었다.

자신들은 어차피 쏘아진 화살이나 다름없었기에 상대방을 맞추든, 아니면 자신들이 중간에 부러지든 둘중에 하나였던 것이다.
세리나는 월 오브 포스를 전개해 낸 직후에 일루아나가 잠시멈칫거리다 손을 뻗어내는 것을 보자 마음속에서 절로 '틀렸어! 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세리나는 일루아나가 성명 마법인 블러드 핑거를 준비하고 있다면 일시적으로 시야가 차단된 상태에서 분명 회피 동작을 먼저 취할 것이고, 그렇다면 일행들은 충분히 접근해서 제대로 된 공격을 한 번쯤은 시도해 볼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녀는 일루아나가 그냥 마법 수인이 맺힌 손을 내미는 것을 보자 그녀가 준비한 것이 블러드 핑거와 같은 대인 공격마법이 아닌 광역마법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만약에라도 일루아나의 동작이 대인 공격마법을 준비한 상태에서 먼저'월 오브 포스'를 깨트리려 시도한 것이라면 더없는 행운이 되겠지만, 일루아나 정도의 전투 경험이 풍부한 마법사가 분명 적이 달려들고 있는 상황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일루아나의 동작만으로 셀리나가 모든 상황을 파악한 순간, 그녀의 귀에 사신의 속삭임과도 같은 일루아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데스 스펠!
그 순간 그녀가 뻗어내는 마법 수인을 통해 모든 생명력을 빨아들일 준비가 된 일렁이는 기운이 전면의 공간을 광범위하게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데스 스펠은 뻗어 나가는 죽음의 기운이 범위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생명력을 순식간에 고갈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마법으로, 최소 6서클의 마법사나 소드 익스퍼트에 이른 기사들이 아니라면 제대로 대항조차 해볼 수 없는 죽음의 마법이었다.

데스 스펠은 일반적인 흑마법의 대표 격인 마법이기도 했지만 지속형 마법인 만큼, 위력이 큰 대신에 지속 시간에 따라 마력과 심력의 소모가 엄청나기에 6서클 흑마법사라도 단 한 번의 시전만으로도 마력이 고갈되어 한동안 드러누워 있어야 할 정도의 대단위 광역마법이었다.

또한 아무리7서클의 대마도사라 하더라도 일정 시간 이상 지속시키기 힘든 마법이었게에 차라리 데스 스펠을 펼리느니 다른 7서클의 광역마법을 펼치는 것이 오히려 소모되는 마력이나 위력 면에서 훨씬 효율적인 일이었다.
세리나는 설마 일루아나가 그런 데스 스펠을 준비해 두었을 줄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어둠보다 더 진한 죽음의 그림자가 전면으로 쇄도해 들던 로크 일행을 지나쳐 순식간에 자신 역시 휘감아 오자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하필이면 데스 스펠이라니''''그녀는 진정으로 우리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모양이로군.

데스 스펠은 비록 잔혹한 흑마법이었지만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흑마법답지 않게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죽게 만드는 , 어찌 보면 공격마법 중 가장 편안한 죽음을 주는 마법이기도 했다.

세리나는 일루아나가 굳이 데스 스펠을 펼친 의도를 짐작하며 아쉬워했지만, 처음부터 데스 스펠을 펼칠 것을 알고 그 범위 밖으로 몸을 피했다면 모를까 이미 죽음의 기운에 잠식당한 이상 도저히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데스 스펠의 기운에 휩싸여 마치 끝없는 심연의 바다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무기력감을 느낀 세리나는 의식을 끈을 놓아가면서 그저 탄식을 발할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의식을 끈을 놓기 전, 그 또한 착각인 듯 아련한 한마디 음성과 함께 한 줄기 빛이 자신에게 다가서는 것을 보았다고 느꼈다.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을 뿐만 아니라 도무지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분명 죽는다고 느꼈다. 아니, 죽었다고 느꼈다.
그렇게 느낄 수 있었다는 것도 말이 안되는 것 같기는 하지만 분명 그렇게 느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죽음을 맞기 직전에 느꼈던 기억의 단상이리라.
하자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죽은 자에게 감각이 있을 리 없고, 죽음 자가 사물을 볼 수 있을 리가 없고, 죽은 자가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한데도 무언가 느껴졌고 보였으며 소리가 들렸다.

빛!
한줄기 빛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을 맞이하고 있는 자신의 몸은 엄청난 활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시선으로 그 빛줄기를 따라가자 한 지점에 검집에 꽃혀 있는검을 들고 있는 아름다운 용모의 사내가 보였고 그가 들고 있는 검의 손잡이에서는 끊임없이 영롱한 빛줄기들이 쏘아져 나오고 있었다.

좀 더 자세히 보니 그 빛줄기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어느 한 지점에 석상처럼 굳어 있는 자신의 동료들에게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순간 정지했던 사고가 다시 움직이며 그 빛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해 내기 시작했다.
힐?
그 영롱한 빛은 자신에게도 무척이나 익숙한, 그리고 자신도 시전해 낼 수 있는 종류의 빛이었던 것이다.
맙소사! 힐이라니요''''
일루아나는 마력이 남아 있는 한 지속시킬 수 있는 데스 스펠의 시전을 즉시 중지하며 그렇게 경악에 물든 목소리로 외쳤다.
그순간 천우도 들고 있던 검의 손잡이에 박혀 있는 계약석을 통해 쏘아 보내던 힐의 기운을 거두어들였다.
전날 일루아나가 천우에게 검을 건네주며 그 가치에 대해서 말할 때 아티오네스도 흥미를 보이며 검의 손잡이에 박혀 있는 계약석이란 것이 마정석의 일종이라 말해 주었고, 나름대로 마정석의 용도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마정석은 주입된 마나의 특성을 기억하고 유지시키는 기능이 있기에 따로 정령석 혹은 소환석이라고도 불리며 주로 서모닝 계열의 마법사나 정령술사들이 사용한다고 했다. 마정석이 소환물이나 테이핑 된 퍼밀리어 혹은 하급 정령들에게까지 소환자를 인식시키는 역활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마정석은 자체에 심벌이나 정교한 마법진을 새겨 마법 아티팩트나 스크롤 같은 특정한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아무튼 마법과 관련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보조 도구로서 아주 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귀하지도 않은 그런 물건이란 설명이었다.

아티오네스의 설명을 들은 천우는 검의 손잡이에 박혀 있는 돌에 내력을 슬쩍 주입해 보았다. 그러자 그 순간 그 마정석이란 것이 마치 자신의 신체 일부분인 양 순식간에 내력을 빨라들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냥 살짝 일었던 호기심을 시험해 본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천우는 마정석이란 것의 대략적인 특성과 성질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한데 천우는 지금 그 마정석을 통해 힐을 네 갈래로 나누어 시전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힐의 기운을 네 갈래로 나눈 것이 아니라 내력의 흡수가 빠른 마정석을 이용해 거의 동시에 네번의 힘을 시전해 낸 것이었다.

네 사람 모두 일루아나의 수법에 의해 거의 동시에 빠르게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어느 누구도 촌각이라도 지체한다면 완전히 목숨을 잃을 상황이었기에 취한 조치였다.

물론 그녀가 시전해 낸 데스 스펠이 그들에게 닿기 전에 그녀의 마법을 무효화시킬 수도 있었지만 천우 역시 의도하던 바가 있었기에 일부러 그녀의 마법이 완전히 발휘되도록 기다린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마법이었다면 대응책 역시 달라졌겠지만, 단순히 생명력을 소진시키는 기운이라면 그보다 빨리 생명력을 채워주면 되는 일이었기에 취한 조치였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은 일루아나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도록 했고, 즉시 데스 스펠을 중단함과 동시에 한순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
힐은 마법 이론상 절대로 나누거나 복수로 시전할 수 없는 마법이었다. 그런 힐의 기운을 네 갈래로 나누어 시전한다는 것도 기가 막힐 일이었는데 데스 스펠로 소멸되어 가는 생명의 기운을 단순히 힐로 더 빨리 회복시킬 수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미 헬파이어까지 장난처럼 시전해 내는 능력을 보았기에 억지로라도 수긍하자면 못할 바도 없겠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지금과 같은 경우는 그녀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알고 있는 마법 이론대로라면 3 서클의 치유마법인 힐링이 6서클의 데스 스펠을 상회하는 위력을 보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번 이상의 마나 재배열을 통한 위력의 증폭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마나의 재배열은 배수의 법칙이 적용되기에 3서클의 마법이 재배열되어 4서클의 위력을 나타내려면 시전자는 적어도 6서클 이상의 경지를 이루고 있어야 하고 , 5서클의 위력을 나타내려면 역시 배수의 법칙에 따라 9서클의 경지라야 가능한 것이다.
이론상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마나의 재배열이 가능한 마법은 결국 9서클이 마스터라 할지라도 4서클의 마법까지만 가능하다는 애기였고, 또한 3서클의 마법이라면 두 번, 그리고 2서클의 마법이라면 세 번까지가 한계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러한 이론마저 벗어난 상황이었다. 그러니 결국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이론이 미치지 않는 10서클의 영역, 즉 더 이상 서클로는 논할 수 없는 권능이라 표현되는 신의 영역에 있는 존재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인 것이다.

그건'''치유의 권능이로군요.
힐링이라는 수법이오.
천우의 간단한 대답에 그녀는 고소를 머금은 채 한숨을 내쉴수 밖에 없었다.
후!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그건 그렇다 치고, 어째서 저들을 구하신 것인가요?
참견한 것이 언짢았다면 사과하리다.
아니에요. 제게 사과하실 필요도 그리고 제가 언짢아 할 일도 아니에요. 따지고 보면 저로 인해서 생긴 문제들이고, 또한 제가 일행으로 따라다님으로 해서 앞으로도 번거로움이 끊이지 않을 텐데 사과를 해야 한다면 오히려 제가 해야겠죠. 그리고 가능한 한 당신들의 존재가 신성교국에 알려지는 것을 막는 것이 제가 해야 할 도리일 것예요. 그 때문에 저들을 살려둘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기도 하고요.
 
그런 문제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좋소, 그리고 저들 역시 일행으로 맞아들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오만.
뜻이 그러하다면 전 따르겠어요.
고맙소.
천우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사의를 표시하고는 아직도 멍청한 기색으로 석상처럼 서 있는 로크 일행을 향해 말했다.
좀 전에 당신들은 우리를 따라가겠다고 말했소, 그 생각이 변함이 없는지 다시 묻고 싶소.
천우의 질문에 그때까지 넋을 놓고 서 있던 로크가 세차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보고는 엉겁결에 대답을 했다.
네? 아,아닙니다. 아니, 따라가겠다는 말입니다. 예 따라가야죠.
로크의 대답에 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눈앞으로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소/
천우가 들어 올린 한 손에는 어느새 새하얀 광구 하나가 맺혀서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 광구 안에서 백색의 소용돌이가 휘돌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겠지만 로크는 아직도 뭐가 뭔지 얼떨떨한 상태였으므로 그것을 제대로 살펴볼 정신이 없었다. 다만 혼미한 와중에도 그것이 세리나가 펼치던 라이트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로크는 물론이고 그들 일행 모두는 일루아나의 데스 스펠에 의해 한순간 거의 완전한 죽음 직전까지 갔다. 그 덕분에 그들의 뇌도 순간적으로 가사 상태에 들었다가 다시 천우의 힐로 인해 깨어난 상태이기에 아직 정상적인 활동은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죽었다 살아난 기적을 경험한 것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는 상태인 것이다.

로크는 그렇게 얼떨떨한 상태에서 잠시 천우의 손에 맺힌 채 빛나는 광구를 빤히 쳐다보다가 문득 손을 들어 올려 그 빛을 만져보고자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인 세리나의 비명성이 들려왔기에 흠칫하며 손을 멈추고 말았다.

앗! 아, 안돼요. 로크! 그건 헤, 헬''''
갑작스럽게 들려온 비명성과도 같은 외침에 로크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처음의 자리에 남아 있던 세리나가 화급히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세리나는 한순간에 로크 앞으로 달려와 아직도 헬 파이어 근처에서 어물거리고 있는 로크의 손을 과격하게 잡아채며 다시 숨 가쁜 목소리로 소리쳤다.
파,파이어란 말이에요. 어,어서 피해요.
그녀의 과격한 행동에 로크는 세리나에게 한 팔이 잡힌 채 잠시 비틀거렸고, 그러면서 의문성을 토해 내었다.
세,세리나? 왜''''
로크! 헤,헬 파이어라니까요. 헬 파이어! 헬파이어 몰라요?
정신 차려요. 제발.
애원하는 듯한 그녀의 절박한 외침에 로크는 움찔하는 기색을 보이며 다시 한 번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침착하기 그지없던 그녀였지만 이 순간만은 그녀도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허둥대고 있었고, 또한 그녀 역시 다른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아직은 완전하게 이성을 회복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숲 뒤편에 홀로 서서 전면의 광장을 멍하니 주시하고 있다가 검을 들고 있던 아름다운 사내가 빛 무리가 맺혀 있는 손을 들어 올리는 장면을 보았고, 로크가 그 빛을 만져 보려는 듯한 행동을 할 때서야 비로소 그의 손에 맺힌 빛 무리의 정체를 파악했다. 그리고 그 순간 세리나는 갑자기 정신이 확 깨는 것을 느끼며 이것저것 가릴 경황도 없이 무작정 소리치며 달려 왔던 것이다.

로크는 머리를 힘차게 흔들어대다가 조금은 정신이 맑아지는 듯하자 세리나가 거듭 외쳐대던 말이 무직막지하게 무서운 단어였던 것 같다는 인식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정신을 집중해서 그 말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보고자 노력한 덕분에, 이제는 어느 정도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한 로크의 뇌가 그 말의 의미를 확실히 인식하도록 해주었다.
흐,흐억! 헤.헬''''모두 뛰어!

비로소 자신의 눈앞에 있는 빛 무리의 정체를 깨닫고 나자 로크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과 함께 이런저런 생각을 해볼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무조건 뛰라고 소리쳤다. 그러고는 마치 번개 맞은 개구리처럼 펄쩍 뛰어오르며 무작정 뒤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한데 얼마나 달렸을까? 전력을 다해 달리던 로크는 문득 뭔가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제자리 달리기를 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정말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열심히 달리는 데도 불구하고 눈앞의 지형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연히 의문을 느낀 로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열심히 달리고 있는 자신의 발 쪽으로 향했고, 그 즉시 그는 동작을 멈추고 다시 멍청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지리 달리기를 하는 느낌이 아니라 실지로 자신은 제자리 달리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잠깐 살펴본 것에 불과했지만 자신은 열심히 발을 바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같은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당연히 그런 상태에서는 더 이상 달릴 의욕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로크는 그것을 확인하고 멈추어 섰지만 그 옆에서 아직까지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텔리안과 덩치 큰 고든이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열심히 제자리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그러한 허둥대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절로실소를 자아내게끔 했지만 천우는 어느 정도나마 그들의 상태를 알고 있었기에 그들이 좀 더 정신이 들도록 목소리에 약간의 내공을 담아서 다시 말했다.
이걸 그대들에게 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 안심하시오. 단지 이것을 알아본다면 그대들이 우리와 동행하는 동안은 쫓기는 자들로부터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 한 것뿐이오.
물론 그런 의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사실 그들이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가벼운 위협용으로,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보게 될 여러 가지 설명하기 난해한 것들에 대한 사전 충격 완화용으로 내보인 것이었다.

하지만 헬 파이어는 그들에게 절대 가벼운 위협용일 수 없었고, 또한 사전 충격 완화용으로 감상하기에는 너무나 무서운 것이었기에 미처 정신을 제대로 차리기도 전에 로크 일행은 천우가 의도했던 것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역시 그러한 이유로 일련의 우스꽝스런 행동들이 나왔던 것이다.

아무튼 내공을 실은 천우의 목소리가 그들의 고막을 아프도록 두드리자 뛰라는 로크의 외침에 반사적으로 반응하여 정신없이 뛰던 텔리안과 고든 역시 우뚝 멈추어 서며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의 신형이 거의 동시에 팽이처럼 돌아서는가 싶더니 한껏 부릅뜬 그들의 두 눈에는 다시 천우의 손에 맺힌 채 공포스럼 모습으로 이글거리고 있는 헬 파이어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제야 그들도 어느 정도 제대로 된 사태 파악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밀려드는 것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한 두려움과 공포였다.
헤.헤.헬''''
마,맙소사 ! 헤,헬 파이어라니''''
세,세리나 , 저게 정말로''''
어느 정도 냉철한 이성을 회복한 세리나였지만 그 순간은 그녀의 입에서도 여전히 경악이 가시지 않은, 떨림이 있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그래요. 명색이 마법사인 제가'''어찌 헬 파이어를 몰라 보겠어요.
그,그럼?
그러고 보니 좀 전에''''
그 순간 그들은 또 다른 무언가를 느낀 듯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치 벽을 등에 기대고 뒷걸음질 치는 것처럼 여전히 자신들과 눈앞에 보이는 헬 파이어와의 거리는 벌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낀 그들은 또다시 안색이 급변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천우는 헬 파이어를 거두어들이며 이제는  상당히 익숙해진 대륙의 언어로 침작하게 말했다.
우리들은 알려지지 않은 다른 대륙에서 온 사람들이오. 그래서 복장도 다르고,모습도 약간 달르며,모습도 약간 다르며, 이곳의 언어도 익숙지않고, 풍습이나 지리등도 아무것도 모르오. 그래서 당신들에  일상적인 도움을 얻고자 하오. 물론 일행이 되었으니 우리 또한 당신들을 도울 것이오. 참고적으로 한 가지 더 말한다면, 나는 이곳 세계의 드래곤 한 명을 친구로 두고 있소, 내가 이곳의 말을 할 줄 알고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것은 그 때문이니 다른 오해는 하지 말기 바라오.

천우의 말에도 로크 일행의 표정은 쉽게 펴지지 않았고 , 금세 의문성이 뒤따랐다.
다,다른 대륙?
이곳 아벨란 말고 다른 대륙이 있다는 말은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차피 천우로서도 풀어줄 수 없는 의문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비록 의혹은 있더라도 최대한 자신들에 대한 두려움이나 이질감 같은 것은 줄여보자는 의도에서 한 말이었기에 천우는 아테오네스를 통해 들은 토대로 좀 더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 하기로 했다.

듣기로는 아직 이곳 대륙의 어느 누구도 '마의 해역' 을 건너거나 나갔다가 돌아온 적이 없다고 들었소. 하지만 그 마의 해역을 지난 본체로 화한 드래곤이 어느 쪽이든 이십여 일 정도를 전력으로 날아가면 그곳에도 이곳 아벨란 대륙만큼은 아니어도 다른 대륙이 한 존재하고 있소.
그러한 말에 로크 일행은 물론이고 일루아나까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본체로 화한 드래곤이 비행 속도는 결코 새들에 비할 바가 아니어서, 아벨란 대륙의 남쪽 끝을 가로지른다 하더라도 결코 이삼 일을 넘기지는 않을 터였다. 한데 그런 드래곤으로서도 전력으로 이십여 일을 날아가야 한다면 그 거리는 거의 아벨란 대륙의 스무 배에 해당하는 거리라는 말이었고, 만약 정말 그런 곳이 있다면 아마도 십수 년의 세월은 걸릴 터였다.

도무지 믿을 수도 그리고 믿기지도 않는 말이었지만 그보다 더 황당하게 들리는 말은 바로 '마의 해역'을 지난다는 것이었다.
'마의 해역'은 아벨란 대륙을 감싼 모든 해안선을 따라 거리의 단위로는 약 1만 크로나, 벳길로는 상황에 따라서 대략 두 달에서 세 달 정도를 항해해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둘러쳐져 있는 모든 해역을 말하는 것으로, 그 지점부터는 바다의 온갖 거대 마수들이 득시글거리고 있다고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모종의 결계가 쳐져 있기에 절대로 지날 수 없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진실인지는 몰라도 그 결계는 바다의 신 프로네가 거대 해양 마수로부터 아벨란 대륙을 보호하기 위해 쳐놓은 것이란 학설이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또한 그 결계는 바다의 모든 거대 해양 마수들을 가두어놓은 결계이기에 결코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통과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으며 그것은 사실이었다. 결계 자체가 단지 바다에만 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쯤이 끝인지 모를 창공마저도 모두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러한 결계는 신이 아니고서는 결코 펼쳐낼 수 없는 것이라 여겨졌으므로 사람들은 그 결계를 프로네의 결계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반쯤의 진실이었고, 완전한 진실은 오직 영혼의 보석을 통해 지식을 주입받은 드래곤 로드들만이 알 수 있었다.
'마의 해역' 이 생긴 이유는 아득한 태고 시대에 거대 해양 마수들로부터 대륙이 침범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드래곤들에게도 최초의 마법 시조라 불리는 시조 드래곤 데이얀과 그로부터 마법을 전수받은 각 종족의 드래곤 수장들이 힘을 합해 만들어놓은 결과물이었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아벨란 대륙 전체를 중심으로 각기 1 만 크로나에 해당하는 모든 영역에 걸쳐 반구 형태의 보이지 않는 절대 결계가 쳐져 있었고, 그 때문에 대륙이 거대 해양 마수들의 위험 없이 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결계 밖의 지역은 아직도 태곳적부터 존재하던 해양 마수들의 세상일 것이고, 그 다른 대륙은 지금 어떤 모습일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결계가 쳐진 이후로는 드래곤들 역시 그 결계를 통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에 그 어떤 존재도 마의 해역 밖으로 나가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만약 다른 대륙에도 지성체가 존재하고, 그들로 인해 어떤 식으로든 문명이 이루어졌다면 또 다른 의미에서는 오히려 아벨란 대륙이 결계로 인해 사라진 대륙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공간만으로도 하나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어느 누구도 그것을 아쉬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무튼 로크 등은 천우의 말을 '자신들은 마의 해역을 건너 그 다른 대륙에서 이곳으로 왔다' 라고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런 의미가 아니라면 굳이 그런 황당무계한 얘기를 꺼낼 필요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스스로를 마족이나 드래곤이라고 자백하는 것보다 더 믿기지 않는 얘기였기에 무수한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반론을 제기하지는 못했다. 의문은 가득해도 '마의 해역' 이든 '다른 대륙' 이든 제대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으니 어떤 의문을 제기할 것인가?

또한 그런 식으로 인간임을 주장하고 있으니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아무리 드래곤을 친구로 두고 이곳과는 다른 대륙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든 대인 마법의 궁극이라 칭해지는 헬 파이어를 마치 1서클의 라이트 마법을 쓰듯이 펼쳐내는 그가, 자신들처럼 평범한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그가 정말 인간처럼 보이지 않을 따름이었다.

헬 파이어를 구사하는 존재!
그들이 알기로 헬 파이어는 9서클의 대마법사나 드래곤, 그리고 마계의 상위 마족들이나 구현 가능한, 가히 이야기 속에서나 존재하는 공포의 마법이었다.
때문에 지금 자신들에게 헬 파이어를 장난하듯이 내보이며 인간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이 특이한 모습의 인물을 정말 9서클의 대마법사라고 인정해 주어도 아주 억지스러운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9서클의 대마법사가 대륙 역사에 몇 명쯤 있었다고 전해지기는 하지만 그들은 모두 유희 중인 드래곤들이었다는 학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9서클의 대마법사일 수는 있어도 결코 그의 말처럼 인간일 가능성은 그야말로 사막에서 모래알 찾기만큼 거의 희박하다는 얘기였다.
게다가 생전 처음 보는 특이한 복장과 마족들의 특성 중 하나라는 흑안, 흑발은 다른 대륙에서 살다 왔다고 하니 기후나 풍토 상 그럴 수 있다 해도,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이자 공포의 대명사라는 진홍의 마녀 일루아나가 그 앞에서는 온순한 고양이 처럼 구는 모습만으로도 이들의 정체가 어느 쪽에 가까울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었다.

여기서 또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들이 따라갈 상대가 일루아나 혼자뿐이라면 나중에 어떻게든 도망칠 기회가 있을 수 있고 또한 다른 방법도 모색해 볼 여지가 있겠지만, 그녀뿐만 아니라 마족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그것도 하나가 아닌 셋씩이나 되는 상위의 마족들과 함께라면 이들에게서 벗어나거나 도망친다는 것은 꿈에 불과한 얘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따라갔다가는 오히려 죽는니만 못한 험한 꼴을 당하게 될 가능성 역시 매우 높다는 것 또한 염두에 두어야 했다.

마족이 달리 마족이겠는가? 그들의 정체가 정말 마족이라면 이제는 단순히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죽은 다음의 일까지도 심각하게 걱정해야 할 상황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깔끔하게 죽어버린 이얀 공작가의 기사들을 부러워해야 할 지경이었다.
로크나 텔리안 그리고 단순한 고든까지 그런 비슷한 생각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천우를 응시하고 있을 때, 마찬가지로 수 많은 생각을 떠올리며 고심하던 세리나가 여전히 후드에 가려진 모습으로 슬쩍 천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저기'''이런 질문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혹시 라헬을 아시나요?
그녀의 물음에 로크 등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순간 펄쩍 뛰며 비명성을 토해 내었다.
으헉''''
세,세리나'''그런 건'''''
하지만 천우는 상관없다는 투로 간단하게 대답해 주었다.
모르오.
그저 모른다는 말뿐이었지만 세리나는 오히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비교적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라헬에 대해선 거의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는 반신 혹은 반마라 불렀죠. 그리고 그가 쓰던 수법 중에 죽음의 선이라는 것은 비교적 알려져 있는 것 중에 하나예요. 한데 저기 앉아 계시는 붉은 점이 있는 분이 이얀 공작가의 기사들을 향해 사용한 것이 바로 그러한 라헬의 권능 중 하나라 불리는 죽음의 선과 매우 흡사했어요. 그건 분명 어떤 마법도, 그렇다고 병기도 아닌 말 그대로 죽음의 선이었어요. 혹시 그 다른 대륙에서는 그러한 수법들을 흔히들 사용하는 것인지 알고 싶어요.
그녀의 말에 천우는 가벼운 이채를 발하며 답변해 주었다.
저분은 내 형님이시오. 그리고 죽음의 선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형님께서 사용했던 수법은 무공이라는 것으로 이곳 세계의 마법처럼 수련을 통해 일정 경지에 이르면 사용할 수 있는 수법이오.

그것이''''마법처럼 수련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수법이란 말인가요?
그렇소.
천우의 대답에도 선뜻 믿기 힘들다는 듯이 세리나가 잠시 침묵을 지키자 이번에는 천우가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는 내가 묻겠소, 당신은 왜 그런 질문을 한 것이오?
그건''''
단지 궁금해서 한 질문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소, 당신은 그 라헬인가 하는존재에 대해 무언가 아는 듯하구려.
아,아니에요. 전 단지'''음'''''
뭐지?
그녀가 황급히 변명하려 하자 천우는 약간의 의지를 담아 후드 속에 감추어진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고, 그 순간 그녀는 전류에라도 감전된 듯 가볍게 진저리를 치며 나직한 침음성을 흘려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놀란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천우 역시도 마음 한구석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끼며 놀라야만 했던 것이다.
그것은 무어라 확실히 표현하기는 힘들었지만 마치 서로가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을 대한 듯한 의외의 상황에 대한 놀람이었다.

그것이 세리나는 직접적인 표현으로 나타났지만 천우는 그 정도로 반응을 나타낼 정도는 아니었기에 미약한 놀람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그러한 놀람조차도 천우로서는 거의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조금은 당혹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침음성을 흘려내던 그녀는 곧 한숨 비슷한 숨소리를 내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후''''어느 누구라도 그 눈 앞에서는 거짓을 말할 수 없겠군요. 하지만 저는 라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어요. 다만'''''
세,세리나!
그,그건 말하지 않는 게'''''
세리나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하자 로크와 텔리안이 다시 기겁하며 다급성을 토했다.
괜찮아요. 비록 함부로 밝힐 내용은 아니지만 어차피 일행이 되기로 했으니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그리고 제가 숨기려 해도 이분 앞에서는 불가능해요, 당신들이 제게 거짓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의 말에 정말 다급한 표정을 지어 보였던 로크나 텔리안은 휴지 조각처럼 얼굴을 구기며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녀 앞에서는 절대로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한데 그녀 자신이 그런 표현으로 얘기하는 상황이라면 절대 불가항력임을 느꼈던 것이다.
그녀는 로크와 텔리안에게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말하고는 다시 천우를 향해 차분한 어조로 얘기를 꺼내었다.
사실 저희들은 라헬 교단의 유적지를 찾아가고 있었어요. 정확한 위치를 아는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단서가 있죠, 그리고 그 단서는 제가 스승님께 전해 받은 것이에요.

천우는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느낄 수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추가적인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이미 자신이 그녀와 소위 운명이라 말하는 미묘한 관계로 얽히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그 운명의 정체도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했기에 서두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잠시 들러야 할 곳이 있소, 텔레포트로 이동할 것이니 모두 준비하시기 바라오.
그러나 텔레포트를 시전할 당사자 외에 별달리 준비할 것이 있을 리 만무했고, 천우로서도 지면에 마법진을 그리기 위해 사람들을 피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었기에 그는 곧 자신의 방식대로 마법진을 형성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크 일행과 일루아나는 곧 천우의 손짓에 따라 일순간에 허공 중에 형성된 오러의 기운, 즉 강기로 형성된 마법진을 쳐다보며 저절로 입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5장 아티오네스의 레어


드래곤 산맥,
대륙의 중서부에 있는 루미나트 왕국과 대륙 남부에 있는 시아센 제국의 칼라드 영지에 걸쳐 끝자락을 두고 있는 이 산맥은 대륙 제일의 크기와 험준함을 자랑하는 산맥이었다.

게다가 이곳을 발원지로 하는 강줄기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였고, 특히 시아센 제국의 척박한 영토를 적셔주는 젖줄이자 대륙제일의 사금 생산지이기도 한 루단 강과 대륙 중부의 미란다 중부연합국을 가로지르며 대륙 교통의 대운하 역할을 하는 에일 강은 각기 황금의 강과 상인의강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대륙 경제의 양대 축을 형성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드래곤들이 가장 많이 둥지를 틀고 있는 산맥으로도 유명하지만, 작금에 이르러서는 드래곤들은 단지 고문헌 속에서나 등장하는 전설상의 존재처럼 여겨지고 있었고, 과연 지금도 드래곤 산맥에 드래곤들이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런 드래곤 산맥의 남쪽 끝자락, 루단 강의 발원지이자 시아센 제국의 북서쪽 끝에 있는 칼리드 영지의 입장에서 보면 드래곤 산맥의 시작 지점이라 할 수 있는 깊은 산중에 일단의 인물들이 이동하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백여 명은 넘는 인원이 백여 필의 말을 이끌고 험준한 산길을 헤치며 오르고 있었고, 그 중 십여 명의 인원이 무리보다 좀 더 앞서서 연신 투박한 칼을 휘두르며 길을 열고 있었다.

그리고 길을 여는 십여 명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는 무리의 선두에는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기사 차람의 중년인과 로브 차림의 인물이 걸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앞으로 목적지까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가?
별일이 없다면 오늘 해가 지기 전에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음! 거의 도착했다는 말이로군, 그나저나 이번에 찾은 그곳은 틀림없어야 하는데'''''
걱정마십시오. 드래곤 산맥의 깊은 산중에 마법적 결계가 쳐져 있는 동굴은 드래곤의 레어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결계는 비록 환상마법에 불과하다지만 일반적인 환상마법이 아닌 서쿼스터라는 강력한 환상마법으로 입구가 가려져 있었습니다. 또한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바위들은 분명 골렘의 잔해들이 분명합니다.

예전에는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의 역할을 하였겠지만 잔해들로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레어의 주인은 이미 수명이 다해 죽었거나, 혹은 5백 년 전의 그 일로 희생된 드래곤의 레어임이 분명합니다. 입구를 가리는 환상마법은 내부의 영구 마법진 같은 것으로도 얼마든지 유지되지만 골렘은 대부분 소환자의 의지가 있어여만 움직일 수 있는 것들이니까요.

그래야지, 그동안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 일인데 틀림없어야 하고말고, 그래야만 1왕자 전하의 숙원을 이룰 수 있음은 물론, 야만 제국인 사이센으로부터 왕국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네.

휴! 역사가 깊은 우리 루단 왕국이 어쩌다가 이런 상황까지 몰리게 되었는데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국왕 폐하께서는 북쪽의 카이센 제국과 신성교국을 믿고 계시지만, 그곳은 우리 루단 왕국과 너무 멀기도 하거니와 실지로 사이센이 침공하면 우리를 도와줄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아무튼 1왕자 전하의 이번 계획만 성공한다면 아무리 사이센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우리 루단 왕국을 넘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말에 중년으로 보이는 기사가 무거운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번 일에 왕자 전하께서는 왕국의 운명을 거셨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위험하더라도 이런 방법이 아니라면 결코 빠른 시일 내에 사이센을 견제할 만한 힘을 얻을 수도 없지, 그곳이 드래곤의 레어인 것이 사실이기만 하다며 설사 그 안에 드래곤이 머물고 있다 하더라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시간이 없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일세. 

사이센 제국의 칼리프 영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왕국 루단의 왕실 근위 기사단장이자 대륙에 열세 명밖에 없다는 소드 컴플리터의 한 사람이기도 한 치르넨 후작과 그의 로열 나이츠 기사단 중 절반, 그리고 왕실 마법사들 이십여 명이 그렇게 비밀리에 드래곤 산맥 깊숙이 전진하고 있었다.

천장은 물론 사방이 막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지하 공동!

외부에서는 빛 한 점 들 수 없는 곳이었지만 공동의 내부의 다섯 곳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빛으로 인해 공동 안은 그리 어둡지 않았고, 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천장과 단단함이 느껴지는 벽면 모두가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어 이 거대한 공동이 인공적인 손길이 닿은 곳임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황량할 정도로 넓은 공동의 중아에는 음각으로 새겨진 거대한 마법진이 놓여 있었고, 그 마법진을 중앙에 두고 벽면 쪽으로 좀 더 작은 마법진들이 오망성의 형태로 새겨진 채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좀 더 자세히 보면 벽면에 새겨진 작은 마법진들이 중앙에는 둥근 모양의 돌들이 돌출된 형태로 박혀 있다는 것과 공동의 내부를 비추는 은은한 빛은 그 돌출된 형태의 둥근 돌에서 흘러나오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

그저 은은한 빛만이 존재할 뿐 태고와 같은 고요와 적만을 간직하고 있는 공동의 내부가 갑자기 환해지며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거대한 마법진이 새겨진 공동의 정중아에는 어느새 존재하지 않던 일단의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폐허의 마탑이 있던 고요의 숲에서 텔레포트로 한꺼번에 이동해 온 천우 일행들이었다.

일렁이던 사야가 한순간 고정되며 사물의 경관이 잡히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고, 천우는 아티오네스에게 제대로 도착한 것인지 물었다.

[이곳인가?]
[그래, 제대로 찾아왔다.]
[생각보다'''광장히 넓군.]
[넓기는, 내 레어는 윔 급일 때 사용하던 그대로의 크기이고 에이션트 급이 된 이후에는 늘리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사실 약간 비좁은 편에 속한다. 잠잘 때 웅크리고 자야 하기 때문에 좀 불편한 감이 있지만, 그래도 드워프들을 고생시키는 것보다야 내가 조금 불편을 감수하는 게 낫겠다 싶어 그냥 참고 지냈던 곳이지.]

천우는 아티오네스가 말하는 윔 급이니 에이션트 급이니 하는 말에 대해서는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는 정확히 들었기에 약간의 놀람과 의문을 담고 다시 물을 수 밖에 없었다.

[이곳이 ''''잠잘 때 비좁다는 말인가?]

그 물음에 아티오네스가 대답하기 전에 헬로가드가 괴소와 함께 껑들었다.
[크크크! 이제야 왜 내가 비만 도마뱀이라도 부르는지 알겠지?]

[시끄러워! 네놈은 덩치가 좀 큰 거랑 비만도 구분 못 하나? 드래곤들은 덩치에 비해서 오히려 광장히 날씬한 편에 속한단 말이다!]

가끔 가다가 아티오네스를 두고 비만 도마뱀이라고 표현하던 헬로가드의 말은 덩치가 거대하다는 의미보다는 뚱뚱하다는 것을 연상시키는 말이었기에 천우는 아티오네스의 모습이나 몸집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얼핏 보아도 공동의 내부는 중원에서처럼 전각을 짓는다면 족히 십여 채 정도는 너끈히 지을 수 있을 만한 넓이였고, 천장 또한 이십여 장 이상은 되어 보였기에 일반들에게는 까마득하게 느껴질 정도의 높이였다.

한데 이런 곳이 잠잘 때 비좁다고 한다면 그 덩치가 어느 정도일지는 천우로서도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 천우와 함께 도착한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시야에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구조물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특히 이곳 세계의 사람인 일루아나나 로크 등은 단번에 이 거대한 공동의 정체를 짐작해 낼 수 있었다.

들어보지도 못한 허공 중의 마법진으로 자신들을 순식간에 이동시켜 온 곳이 설마 이런 어마어마한 크기의 공동일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고, 더군다나 그 규모나 형태로 보아 이런 거대한 공동이 어디일지는 충분히 잠작이 가고도 남는 그들이었다.

비록 드래곤을 친구로 두고 있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쪽보다는 오히려 마족에 가깝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던 로크 등은 자신들이 이동해 온 곳이 말로만 듣던 드래곤의 레어인 듯하자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족은 절대로 드래곤과 친구가 될 수 없으니.이곳이 드래곤의 레어가 확실하다면 결국 이들은 마족보다는 폴리모프한 드래곤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들이 마족이 아니라면 최악의 상황만은 모면한 것이라고도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마족이든 드래곤이든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들을 드래곤의 레어라고 짐작되는 곳으로 데려온 것에 대해서도 몹시 불안함이 느껴졌다.

그들은 아직까지 이야기 속에서라도 드래곤이 사람들을 자신의 레어로 데려가서 구경시켜 줬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고, 혹시 자신들을 레어로 데려온 것이 무언가 다른 용도로 쓰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에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루아나 역시 너무나 뜻박이었기에 곤혹스럽긴 마찬가지였지만 로크 등과는 다른 이유로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천우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이곳이 거처이신가요?
아니오.
그럼?
친구의 집이오.
드래곤을 친구로 두었다 했으나 수긍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인정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라 재삼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은''''드래곤의 레어 아닌가요?
그렇게 알고 있소.
그 말은 ''''정확히 모르신다는 말씀이신가요?
나 역시 이곳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오. 나는 그가 알려준 대로 찾아온 것뿐이고, 그는 드래곤이니 이곳은 드래곤이 레어가 맞을 것이오.

그녀 또한 마족들과 드래곤들과의 관계가 어떻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고, 비록 그녀가 동사왕이나 일행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기로 마음먹기는 했지만 그녀 입장에서는 차라리 마족이라면 몰라도 드래곤들이라면 조금은 곤란한 감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드래곤이시라는 친구 분을 만나러 오신 거군요. 한데 그분은 어디에''''

더 이상 다른 가정은 할 수 없을 듯했기에 그녀는 약간은 맥빠진 음성으로 그렇게 물었고, 천우는 그러한 물음에 오히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는 이곳에 머물고 있지 않소. 그리고 몇 가지 필요한 것이 있기에 들른 것뿐이니 그를 만날 수는 없소.

천우의 말에 일루아나는 무언가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내심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공동의 내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이곳이 드래곤의 레어라면 자신은 정말 엄청난 곳에 와 있는 것이었던 게다.

로크는 천우와 일루아나의 대화를 들으며 숨죽이고 있다가 끝내 그가 다른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자 약간은 안도감을 느끼는 한편, 가벼운 흥분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고로 드래곤의 레어라면 인세에서는 보기 힘든 온갖 보물들이 모여 있는 보물창고로 여겨지고 있었으니 흥분과 기대감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로크는 문득 새로운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그들은 결코 자신들에게 굳이 정체를 숨기려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비록 말로는 부인하고 있지만 버젓이 헬 파이어를 시전해 보이는 것이나, 허공 중에 마법진을 생성시켜 이 많은 사람을 텔레포트로 데려온 곳이 드래곤의 레어라는 것 등을 종합해 볼 때 그것은 결코 정체를 숨기려는 행동이 될 수 없었다. 더구나 그런 걸 보고서도 그들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결국 그것은 자신들이 정체를 알아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간사에 드래곤이 정체를 드러내 놓고 유희를 벌일 적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고, 또한 그래서야 유희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 로크는 어쩌면 이들은 단순히 유희 따위가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인간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일루아나는 제외 하더라도 분명 같은 종족으로 여겨지는 일행이 둘이나 더 있다면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일반적인 드래곤의 유희 개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드래곤들이라는 가정 하에 지금까지의 상황을 곰곰이 따져보던 로크는 이들이 굳이 별 볼일 없는 자신들을 동행으로 삼으려 한 이유에 대해서도 상당히 일리 있는 가정 한 가지를 세울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이얀 공작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 좀 더 넓은 의미로는 신성교국에게 쫓기는 처지라는 것과 그것은 자신들보다 먼저 일행이 된 일루아나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바로 신성교국과의 마찰이라는 것이었다.

만약 그것이 일루아나나 자신들을 일행으로 삼은 이유라면 결국 이들의 목적은 역시 한가지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바로 신성교국과 부딪칠 명분 혹은 계기를 만들려는 것, 그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은 미끼 혹은 희생양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동료를 해치려는 자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적이라는 논리도 충분히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정말 그러한 핑계로 신성교국과 부딪칠 생각이라면 그들이 셋씩이나 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명칭으로는 단순한 교국이었지만 실지로는 대륙의 양대 제국인 사이센과 카이렌보다도 더 무서운 곳이 신성교국이었고, 실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힘 역시도 오히려 양대 제국을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있고 보면, 아무리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그런 신성교국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혼자서는 무리인 것이다. 아니. 지금의 숫자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신성교국의 크로아 교단에서 내세우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교리는 바로 인간만이 진정한 신의 자식이며, 신이 세상을 창조한 것도 인간을 위해서이고 그런 인간을 실질적으로 보살펴주는 신은 크로아 신만이 유일하다,는 교리였다. 그러한 오만하고 독선적인 교리가 스스로를 위대한 종족임을 자부하는 드래곤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치는 것이었다.

비록 5백 년 전의 신마전쟁에서 드래곤들은 별다른 힘도 써보지 못하고 죽어간 반면, 최후에 그 신마전쟁을 종식시킨 주역이 당시만 해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던 신생교단인 크로아 교단이었고, 그로 인해 지금의 신성교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크로아 교단의 그러한 교리는 로크 역시 너무 심한 감이 있다고 느껴왔던 바였다.

엄연한 인간인 자신이 그런 느낌을 받을 정도인데 아무리 그러한 전쟁으로 위축당한 드래곤들이라 해도 크로아 교단이 대륙을 지배하는 지난 5백 년간 잠잠했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신기한 일인 것이다.

물론 로크도 드래곤들이 멸종을 당했다거나 혹은 신성교국을 두려워하여 더 이상 세상에 나서지 못한다는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야기 속에 나오는 드래곤들이 정말로 남아 있다면 언제고 한번은 신성교국과 부딪치게 될 거라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자신의 생각대로 드래곤들은 남아 있었고, 이제 신성교국과 드래곤들의 전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짐작대로라면 자신들은 드래곤들의 앞잡이가 되어 전 대륙의 공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점점 상상이 비약되자 로크의 안색은 핏기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귓가로 소곤대는 텔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여기가 드래곤의 레어라면 엄청난 보물들이 많겠지? 혹시 우리에게도 보물들을 하나씩 나눠주려고 대려온 것이 아닐까?

텔리안의 귓속말에 로크는 이런 상황에서 보물 타령이나 하는 그에게 화가 솟구쳤지만 일순간 번쩍 스쳐가는 생각에 핏기없던 그의 얼굴에 묘한 흥분이 어리기 시작했다.

가만''''텔리안의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어, 내 짐작대로라면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가'''그래, 정말 보물을 주려는 걸지도 몰라, 어찌보면 나쁘게만 생각할 것도 아니잖아.

이들의 목적이 자신의 짐작대로라면 분명히 자신들은 중요한 미끼이자 명분을 세우게 해줄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자면 최소한 명분을 얻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이 소중한 동료라는 것을 시성교국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릴 필요가 있을 것이고, 그러자면 자신들이 허무하게 너무 일찍 주어버려도 안 되는 것이다.

일루아나 정도라면 어떤 상황에서라도 자신의 한 몸 정도는 충분히 지킬 수 있겠지만, 자신들은 이얀 공작가나 신성교국의 성기사들에 비하면 어린아이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만약의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비책은 세워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제대로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라면 마법무구만 한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인간들 세상으로 나와 있다가 자신들이 합류하자마자 필요한 물건이 있다며 다시 이곳으로 온 것이라면 역시 그 이유는 자신들에게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또한 자신들은 어차피 이얀 공작가에 쫓기는 몸이니 이들의 도움이 없다면 앞으로 얼마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들은 무슨 거창한 대의를 위해 한 목숨을 초개처럼 바칠 수 있는 기사나 영웅 따위가 아닌 용병들이었다. 돈을 위해 목숨을 팔고, 돈을 위해 남을 죽이며, 돈을 위해서는 어떤짓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비록 지금의 동료들과 함께하면서부터는 되도록이면 일을 가려가면서 하기는 했지만, 자신 역시 용병이 되고 난 후 악마들도 치를 떨 정도의 잔인한 일들을 서슴없이 해왔고 그 때문에 대륙의 용병들치고 눈곱만큼이라도 신의 구원을 바라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신성교국 전체와 자신들의 목숨 중 어느 것이 귀한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자신들의 목숨이 백배 천배나 더 소중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신성교국이나 이얀 공작가가 망해야 오히려 자신들이 살아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고, 또한 신성교국 자체를 절대로 신성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크로아 신도 믿지 않으니 마음에 거리낄 것도 그다지 없었다.

어차피 이얀 공작가라는 사신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원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나빠질 상황이란 것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지금의  상황은 자신들에게 그다지 나쁜 상황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로크가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무수한 생각을 하는 사이에 텔레포트의 이질감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슬쩍 눈살을 찌푸린  채 넓은 공동의 내부를 살펴보던 동사왕 역시 놀람을 드러내며 천우에게 물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가? 규모도 엄청나지만, 도대체 누가 이런 거대한 석실을 만들 수 있었는지 실로 대단하다는 생각밖에는 안 드는구먼,

천우는 의형이 자신과 일루아나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함을 알고 있기에 그러한 물음에 다시 대답해 주었다.

전에 말씀드렸던 드래곤이 살던 곳입니다.
아,그 드래'''''공, 이곳이 그 친구 거처였구먼, 한데 이곳에는 왜 온 것인가?
이곳 세계에서 필요한 물건들이 몇 가지 있을 것이라 해서 들렀습니다. 그리고 형님이나 조 소저에게도 꼭 필요한 것도 있고 해서 그걸 가지러 왔습니다.

그게 뭔가?
이곳 말로는 아티팩트라고 하는 물건인데. 형님이나 조 소저가 몸에 지니고 있으면 이곳 사람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해준다고 합니다. 일단 상대방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이곳의 말을 배우는 것도 한결 쉬워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호오, 그런 신기한 물건이 있단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무척이나 답답했던 참일세. 일단 말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다면 당장은 그것만큼 좋은 게 없지.

동사왕은 천우의 말에 무척이나 기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거처치고는 너무 넓기도 하지만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하니 어디 감춰진 곳이 있는 모양일세. 도대체 여기는 무슨 용도로 사용하는 곳인데 이렇게 넓은 것인가? 연무장이라고 생각하기에도 이 정도면 혼자 사용하던 곳으로 생각하게에는 규모가 너무 크니 말일세.

동사왕의 물음에 천우는 조금 전 아티오네스의 말을 듣고 놀랐던 것이 생각나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곳은 그 친구 침실이었다고 하더군요.
침실? 여기가 말인가?
이곳도 혼자 편히 자기에는 좀 비좁았답니다.
혼자 자는데 이곳이 비좁아? 도대체''''그게 무슨 말인가?

그만큼 육신을 갖고 있었을 때에는 커다란 덩치였다고 하는군요.
저,정말 그게'''''

이곳 세계에는 다른 드래곤들도 살고 있다고 하니 언제고 직접 눈으로 볼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천우의 말에 동사왕이 입을 딱 벌리고 믿기지 않는 듯 다시 한 번 까마득한 높이의 천장과 드넓은 공동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런 동사왕의 태도에 천우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는 아무 말 없이 중앙을 벗어나 정면 쪽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벽면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고, 다른 이들도 곧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이백여 보 정도를 움직이자 일행들은 벽면에서 약간 돌출되어 빛을 발하고 있는 어른 몸통만 한 크기의 둥근 돌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한데 바로 그 순간, 가까이에서 그 돌의 정체를 파락한 세리나가 탄성을 발했다.

과연!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정말로 마나석이로군요. 이정도 크기의 마나석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지만, 다섯 개씩이나 있다니'''도무지 어느 정도의 마나가 응집되어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군요.

특별히 누구를 두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세리나의 마나석이란 말에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은 그렇지 않아도 혼자만의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어 있던 텔리안이었다.
허억! 이.이게 정말 마나석이란 말이야? 세상에''''이런 마나석이 다섯 개면 도대체''''
세리나는 순수한 마법사의 입장에서 감탄성을 발한 것이었지만 텔리안의 놀람은 세리나와는 달리 마나석이 가지고 있는 값어치를 염두에 두고 경악하는 것이었다.

마나를 활성화시키는 성질을 가진 마정석도 같은 무게의 금값은 나가지만, 마나 자체를 응집시켜 저장할 수 있는 마나석은 그 가치 면에서 마정석과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았다.

콩알만 한 크기의 마나석의 가치는 같은 크기의 금덩이로 환산하면 족시 수십 배는 더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이었고, 주먹만한 크기의 마나석이라면 그 가치는 더욱 커져서 족히 수백 배를 넘어서는 상상불허의 초고가품이었던 것이다.

마나석이 그렇게 높은 값어치를 가진 이유는 당연히 마나의 저장이 가능하기 때문이었고, 그러한 기능은 바로 인세 최고의 보물이라는 드래곤 하트가 가진 기능의 일부를 대신한 수 있기때문이었다.

물론 드래곤 하트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긴 하겠지만 어쨌든 마나석은 드래곤 하트를 대신해서 영구 마법진을 유지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고, 당금에 이르러서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전략 병기인 타이탄의 동력원으로서 더욱 필요성이 증가하고 있는 최고의 보물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박혀 있는 것이 정말 마나석이라면 텔리안이 생각히기에 그 하나만으로도 당장 알아주는 거부 행세를 할 수 었을 것 같았고, 그런 초거대 마나석이 다섯 개라면 적어도 큰 왕국의 백작령 정도는 사고도 남을 정도인 것이다.

그러니 다른 어떤 보물들이 더 있을지는 모르지만 다른 것은 다 젖혀두더라도 이곳에 있는 마나석 다섯 개만 하더라도 최고의 보불창고라고 불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마나석을 흘린 듯이 바라보고 있는 텔리안의 두 눈에는 어느새 가느다란 실핏줄이 돋아 있었고, 이 귀한 것들이 한 낱 동굴을 밝히는 등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물론 마나석이 이곳에서 하는 역할은 따로 있었고, 레어 안을 비추고 있는 것은 단지 부수적인 효과일 뿐이었지만 텔리안에게 있어서 그런 것은 이 순간 전혀 관심 밖의 일이었다.

로크 일행은 물론 일루아나까지 마나석에 정신이 빼앗겨 있을 때. 천우는 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이내 조금 방향을 틀어서 마법진이 새겨져 있지 않은 벽면을 향해 그대로 걸어갔다.

그 행위가 마치 벽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걷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보였지에 마나석에 별다른 관심을 두고 있지 않던 동사왕과 조아는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 천우를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천우가 그대로 벽을 관통하여 스미듯이 사라지는 것이 보이자 놀람으로 인해 두 눈이 커지고 말았다.

어,어? 이, 이보게. 천 아우'''''
동사왕이 놀라서 천우를 부르자 벽 속으로 사라진 천우의 음성이 들려왔다.

벽은 신경 쓰지 마시고 그냥 오던 길을 따라서 오십시오.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천우의 음성이 들려오자 동사왕은 신기한 생각에 천우가 사라진 벽면으로 다가서서 벽을 만져보았다.그러자 두 팔이 그대로 벽을 통과하며 쑴 들어가는 것을 보였다.

그 모습에 동사왕은 눈에 보이는 벽면이 단지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서습없이 벽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벽을 통과하자마자 몇 걸음 앞에 서 있는 천우의 모습이 다시 보였고, 동사왕은 자신이 들어선 곳이 일종의 통로처럼 생긴 곳임을 알 수 있었다.

허! 내 눈마저 감쪽같이 속이다니. 실로 굉장한 환상진이러구먼,

동사왕이 그렇게 감탄하는 동안 뒤이어 조아 역시 벽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섰고, 잠시 후에는 마나석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온통 마나석에 정신을 빼앗겨 있던 텔리안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도 천우 등이 벽면을 통과해 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조아까지 벽 속으로 사라지고 나자 급히 그 뒤를 따라 들어온 것이었다.

물론 그들은 천우가 동사왕에게 한 말을 알아듣지 못했기에 그들이 벽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잠시 당황했지만, 마법사인 일루아나나 세리나는 벽에 환각마법이 걸려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고, 또한 따라오지 말라고 경고는 없었기에 일루아나를 선두로 그들도 모두 환상으로 만들어진 벽 속으로 들어선 것이다.

특히 맨 마지막으로 텔리안을 벽 속으로 밀어 넣고 들어서던 세리나는 벽을 통과하면서 또다시 감탄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정도의 환각마법이라면 분명 일루전 마법의 절정이라는 서퀴스터겠군, 마법 탐지도 불가능하고, 시전자가 아니면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그녀의 생각처럼 아티오네스의 레어 곳곳에는 서퀴스터의 환각마법으로 가려진 비밀스러운 장소들이 여럿 있었고, 그 중 천우가 들어선 곳은 아티오네스의 말에 의하면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을 모아둔 창고라고 했다.

물론 에이션트 드래곤의 입장에서는 이런저런 잡동사니일 수 있어도 인간들에게는 절대로 잡동사니로 분류될 수 없는 물건들이긴 했지만 말이다.

천우는 아티오네스의 권유로 의형이나 조아에게 필요한 물건을 얻기 위해 이곳으로 들어선 것이었는데 그런 그가 환각으로 이루어진 벽을 통과해 역시 잘 다듬어진 석벽을 걷는 동안 다시 아티오네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곳엔 내가 심심할 때 만들어둔 아티팩트들 외에도 재료들로 사용하던 귀금속이나 보석들도 꽤 있으니 필요한 물건 외에도 그것들 역시 적당량 챙겨두는 게 좋을 거다. 아무래도 사람들 틈에서 움직이려면 어느 정도의 재화는 필요할 테니 말이야.

그리고 언어 해석마법이 새겨진 아티팩트 외에도 잘 찾아보면 그럭저럭 쓸만한 것들도  제법 되니까 저 흑마법사나 용병들도 필요한 게 있다면 갖게 해라. 기왕 일행으로 삼았으니 선물삼아 주면 좋아할 테고, 위급할 땐 스스로를 지키는 데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으니 말이야.]

천우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더 걸어 들어가자 막혀 있는 석벽이 보였다. 그러나 천우는 주저함 없이 계속 걸어서 그 석벽도 통과해 버렸다.
[도대체 시야만 가리는 이런 것은 왜 만들어둔 거지?]
[그래도 명색이 레어 안에 있는 보물창고인데 그냥 훤히 보이게 둘 수는 없잔아. 게다가 진짜 문은 열고 닫는 게 귀찮기도 하고,]

순간 천우는 갑작스럽게 비쳐드는 현란한 빛 무리에 우뚝 멈춰 서야 했다. 바로 그때, 뒤이어 앞선 경험이 있던 다른 일행들도 천우를 따라 아무런 제제 없이 석벽을 통과하며 들어섰고, 그들 또한 모두 입을 쩍 벌리며 몸이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을 느껴야 했다.

[이것저것 모아둔 것치고는 ''''좀 많군,]
천우가 감상 소감을 밝히는 순간 , 곧이어 기이한 비명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크헉! 이.이게 다뭐야?
세.세상에''''이게 전부'''''
그 순간, 갑자기 번개가 무색하리만치 빠른 움직임으로 천우를 지나치며 현란한 빛 무리 앞을 양팔을 벌리고 막아선 채 소리치는 인물이 있었다.

천 아우 빼놓고''''다가서는 놈은 전부 다 죽을 줄 알아!


6장 시련의 금안



치르넨 후작 일행이 산중의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한 곳은 높은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작은 분지 형태의 막다른 곳이었고, 그 곳은 특이하게도 숲이 주변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었지만 정닥 안쪽으로는 나무나 풀들이 전혀 보이지 않고 듬성듬성 바위 같은 것들만 놓여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한 분지를 가로막고 있는 절벽은 깎아 세웠다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로 가파르면서도 높고 험한 모습이었고, 그 절벽의 중간 부위에는 기이하게도 거대한 고량 모양의 네 줄기 홈이 절벽 전체에 걸쳐 가로질러 파여 있는 듯한 형상이 보였다.

이곳인가?
그렇습니다. 일전에 조사하고 난 이후로 여전히 벌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는군요.
흠! 동굴의 입구는 어디쯤에 있는 것인가?

바로 절벽 하단의 중앙 부분이 입구입니다. 서쿼스터로 만들어놓은 환상마법은 어떠한 경우라도 직접 부딪치기 전에는  환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처음 이곳을 찾은 탐색자들이 곳곳에 놓여 있는 바위의 형상을 이상하게 여기고 절벽을 직접 만져가면서 세밀히 살피지 않았더라면 결코 이곳에 숨겨진 동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말에 따라 치르넨 후작도 곳곳에 놓여 있는 바위들을 살펴보고는 과연 그 바위들이 자연 그대로의 형태는 아니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알겠네, 자네는 지금 즉시 마법사들과 함께 타이탄들을 워프시킬 준비를 해주게. 내 동료인 가이안 외에도 왕국에서 보유한 타이탄 열 기 중 여석 기를 이번 일에 투입하기로 했으니 타이탄들이 소환되는 즉시 진입을 시도하도록 하겠네.

알겠습니다. 즉시 워프 마법진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치르넨 후작의 명령에 왕실 수석 마법사인 게일 백작은 대답과 함께 곧 이십여 명의 마법사들을 데리고 바위들이 없는 공토 한쪽에 마법진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너희들도 서둘러 무장을 갖추고, 계약의 기사 여섯 명은 마법진이 완성되는 대로 타이탄을 워프 시킬 수 있도록 대기하라.

연이은 치르넨 후작의 명령에 대다수의 기사들은 말에 신고온 자신의 갑옷과 방패 등을 내려 서로 도와가며 착용하기 시작했고, 그 중 여섯 명은 차고 온 검 외에는 여전히 별다른 장비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로 마법진을 설치하고 있는 마법사들 겉으로 가서 대기했다.

타이탄은 그 하나하나가 워난 덩치도 크고 무겁기에 무언가에 싣고 움직이기는 힘들었고, 타이탄을 다루는 계약의 기사들도 소드 마스터급이 아닌 다음에는 타이탄에 탑승해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두세 시간 정도가 한계였다.

또한 그렇게 움직이고 나면 적어도 이삼 일 정도는 휴식을 취해야 몸에 무리가 가지 않았기에 장거리를 움직일 때면 타이탄을 타고 이동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물론 상황이 급박할 때면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타이탄을 움직여야 할 때가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원래의 위력이나 실력은 충분히 발휘되기 힘들고, 너무 무리할 경우에는 타이탄을 움직이는 기사가 마나 역류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대부분은 목적지에서 마법진을 이용해 타이탄을 워프 시키는 방법이 가장 보편화되어 있었다.

다만 치르넨 후작이 자신의 동료라 칭한 가기안과 같은 타이탄은 자신의 아공간을 보유하고 있기에 그런 절차가 필요 없었다.

가이안은 가장 초창기에 만들어진 아마르 급 타이탄으로, 당시에 만들어진 타이탄들은 라헬 교단의 데스 기어를 철저히 분석하여 되도록이면 그 원형에 가깝도록 만들어졌기에 현재 대륙의 각 나라에서 양산되고 있는 타이탄과는 질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었다.

대륙에 가이안과 같은 아미르 급 타이탄은 총 아홉 기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가장 초기에 만들어진 타이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최강의 타이탄이란 의미를 지닌 아미르 급으로 분류가 되는 이유는 동력의 핵심 요체인 타이탄의 심장이 드래곤하트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 드래곤 하트가 아닌 최상급 마나석을 이용하는 어느 정도 타이탄의 양산이 가능해 지기는 했지만, 마나석을 이용한 타이탄들은 결코 드래곤 하트를 심장으로 사용하는 타이탄들처럼 자체적인 아공간을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공간의 생성은 9서클에 해당하는 마법이기에 타이탄 역시 그러한 아공간을 보유하기 위해서는 자체적인 마법진을 활용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8클래스의 마법진을 활용할 수 있는 마력과 마나 양이 필요했다.

그러한 마력과 마나 양의 상관관계를 수치 상으로 표현한 단위가 마인이라는 단위였고, 8서클의 대마법사가 일순간에 방출할 수 있는 최대의 마력과 마나 양을 물리력으로 환산하여 이론적인 수치로 표기한 것이 4.0기가 마인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타이탄의 심장으로 사용하는 마나석의 최대 출력 한께는 마나석의 크기와 여러 가지 설계 상의 문제로 인해 3.2기가 마인 정도가 그 한계였고, 결국 마나석을 동력으로 삼는 타이탄은 아무리 증폭 마법진을 내부에 새긴다 하더라도 자체적인 아공간을 보유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치르넨 후작의 명령으로 로열 나이츠 기사단은 일사 분란한 동작으로 대인 전투용 갑주를 걸치기 시작했고, 한쪽에서 마법사들이 게일 백작을 도와 타이탄들을 워프 시킬 마법진을 설치하여 빈집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레어를 점령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환상으로 이루어진 석백을 통과하자마자 눈을 멀게 할 듯 비취드는 보광으로 인해 텔리안은 이성을 잃고 그 보석더미 속으로 몸을 날릴 뻔했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보다 먼저 앞을 가로막고 서며 살기를 뿜어내는 흉악한 인상의 동사왕으로 인해 텔리안은 움찔거리며 간신히 자신의 행동을 제어할 수 있었다. 뭐라고 소리친 것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의 행동은 더 다가서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기운을 전신으로 명백히 풍기고 있었으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곳에 있는 재화는 형님께서 전부 차지하셔도 상관없지만, 이들에게도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한 가지씩은 선물로 주라는 주인의 말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동료로 지내게 될 테니 형님께서도 그 정도는 양해해 주십시오.

야,양해는 무슨''''거험! 이 우형이 달리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이 보물들은 사실 자네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나는 단지 자네의 보물에 손이 타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뿐일세. 아무튼 전 주인이 그렇게 당부했다면 따라주는 것 예의 겠지, 한데''''딱 하나씩만 주라고 했는가?

개수는 정하지 않았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씩이면 좋하겠지요.

알겠네, 뭐 그렇다면 자네가 데려온 녀석들에게 딱 하나씩만 고르라고 말하게나, 그 이상 욕심내는 녀석이 있으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도 분명히 전하게.

동사왕은 설마하니 이곳에 이런 엄청난 양의 보물들이 쌓여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만약 알았더라면 조아까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을 이곳까지 데려오는 것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뜯어 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무심코 들어선 곳에 엄청난 양의 보화가 쌓여 있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보고 난 뒤였다.

동사왕은 이곳의 주인이 이미 육신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보물의 주인은 당연히 천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은 아직 세상물정에 어두운 아우를 대신해서 그의 재산을 지켜줄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불타는 책임감과 의무감은 이곳에 들어선 순간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기는 했지만, 전 주인의 당부가 있었다고 하니 선물로 하나씩 주겠다는 것까지는 반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두 눈이 벌개진 채 당장이라도 달려들 대세를 보이고 있는 눈앞의 허여멀건 녀석들을 보면 단순히 하나로 끝날 것 같지가 않았고 더욱이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아까운 줄 모르는 자신의 아우가 마구 선심을 베풀까 싶어 확실하게 개수를 한정해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천우는 동사왕의 말에 다시 한 번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일루아나와 로크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곳에서 당신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한 가지씩만 골라 보도록 하시오. 혹시 고른 물건의 용도를 잘 모르겠다면 내게 보여주면 알려주도록 하겠소.

물론 천우가 그것을 알고 있을 리가 없으니 아티오네스가 알려주겠다는 말이었다.

석실의 중앙 부위에는 갖가지 색채의 보석들을 물론이고 금과와 은괴, 그리고 미스릴과 심지어는 오리하르콘이나 신의 금속이라는 아만다티움으로 이루어진 철괴들까지 족히 큰 마차 한대 분량은 될 정도로 많은 양의 보물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벽 쪽으로는 선반처럼 층층이 파인 곳에 갖가지 장신구나 조형물들 그리고 무기와 갑옷류들이 빽빽이 진열되어 있었다.

아티오네스의 레어에 이처럼 많은 보물들이 쌓여 있는 이유는 그의 취미가 바로 아티팩트의 제조였기 때문이다.

아티오네스는 인간 세상의 유희도 자주 하는 편이었지만 윔급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유희보다는 주로 아티팩트의 제조에 열을 올렸다. 때문에 드워프들을 이용해 질 좋은 보석들과 광물들을 많이 모았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천우 일행의 눈앞에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드래곤들처럼 드워프들을 협박해 무차별적으로 빼앗는다거나 착취를 해온 것은 아니었고, 그 나름대로는 정당한 대가를 치러주면서 공을 들여 모은 것들이었다.

뛰어난 아티팩트를 직접 제조하자면 마법적 능력 외에도 장인 기술과 보석이나 각종 광물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필수였기에 아티오네스는 드워프들과도 상당한 친분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떼는 직접 그들과 같은 풀무질과 망치질을 했던 적도 있었다.

물론 그런 장인 기술이 없어도 윔 급의 드래곤이라면 얼마든지 마법적 능력만으로 물건들을 변형시키거나 만들어낼 수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장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마법만으로 변형시켜 만든 물건은 그져 흉내 내기일 뿐이지 제대로 된 물건이 만들어질 수는 없었다.

더구나 아티오네스는 대충 마법적 능력만 갖춘 마법 물품이 아니라 말 그대로 물건 자체로도 뛰어난 예술품이라 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기에 그런 수고로움을 감내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석실에 놓여 있는 수많은 물품들이 바로 그러한 아티오네스의 시험작들이었다. 인간 세상에서는 하나같이 뛰어난 아티팩트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는 물건들이었지만 불행히도 아티오네스는 그때까지 자신의 이름을 대표할 만한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때문에 아티오네스는 이곳에 있는 물건들을 잡동사니들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아무튼 천우가 데리고 온 일행들에게 한 가지씩 물건을 갖도록 허락하자 동사왕의 험악한 기세 때문에 간신히 이성을 유지하고 있던 텔리안이 가장 먼저 홀린 듯이 물건들이 놓여 있는 석벽을 향해 주춤주춤 다가서기 시작했고, 로크는 그 와중에서도 흥분을 억제하려고 무척 애를 쓰면서도 텔리안처럼 섣불리 석벽으로 다가가지 않고 조심스럽게 천우의 눈치를 살피며 먼저 사의를 표명했다.

우리들에게 이런 과분한 선물을 주시겠다니 그 호의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목숨을 살려주신 것도 지금 감사를 드립니다. 비록 우연한 계기로 일행이 되었습니다만 이런 큰 호의를 베풀어주시니 앞으로 하시려는 일에 저희들도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천우는 로크의 그러한 말에 잠시 동안 그를 심유한 눈길로 바라보다가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특별히 어떤 일에 대한 대가의 의미로 주려는 것은 아니오. 
말했듯이 우리는 아직 이곳 사정에 그리 익숙지 않기에 그대들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아야 하니, 굳이 의미를 두자면 그에 대한 답례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오. 그러니 너무 부담은 갖지 마시오. 또한 분명히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대들에게 어떤 피해를 주려는 의도도 전혀 없다는 것이오. 다만 당신들도 당분간은 우리와 함께 지내는 것이 안전할 거라는 생각에 일행이 되기를 권했던 것이고, 정말 원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당신들이 떠나고자 할 때 보내줄 것을 약속하겠소, 이곳에서 나가는 즉시라도 말이오.

로크는 너무도 뜻밖에 말에 오히려 당황했지만 곧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말씀대로 저희들만의 능력으로는 결코 이얀 공작가의 손길을 피할 수 없고, 또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진정한 호의임을 모른다면 그 또한 바보나 마찬가지지요. 염치없지만 그 호의를 거듭 감사히 받아들이고, 저희 또한 대가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동료로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도록 할 것입니다.

로크는 천우의 말로 인해 자신이 짐작했던 바가 거의 틀림없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또한 자신들에게도 결코 악의가 없다는 말도 상당한 믿음이 갔기에 정말로 굴러들어 온 복을 발로 차는 바보짓은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을 놓거나 이런저런 의혹이 말끔히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자신들을 해칠 의사가 없다는 것은 확실한 듯했고, 또한 꿈에서도 보기 힘든 보물까지 얻게 된 마당에 이런저런 의혹이 남아 있다고 해서 미적거리는 행동을 보인다면 그건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용병이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이들이라면 언젠가 찾게 될지 모를 라헬 교단의 유적지에 무엇이 있건 욕심을 내지 않을 거라는 점에서도 기꺼이 일행으로 삼아도 마음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죽음을 늘 곁에 두고 사는 자신들인데 상대가 인간이아닐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두려움 때문에 일생일대의 기회일지도 모르는 큰 건수를 놓쳐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천우는 로크의 얼굴에 어느 정도의 안도감과 더불어 모종의 결심이 어리는 것을 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석벽을 향해서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선반처럼 파여 있던 석벽에서 여러가지 물건들이 스스로 허공을 날아와 천우의 손 안으로 들어왔고, 그러한 모습에 로크나 일루아나 등은 또다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우는 굳이 가진 능력을 숨길 마음도 없었고, 어차피 이곳에서 해야 할 일들이 능력을 감추면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일행으로 삼은 그들이 놀랄 수 있는 일이라도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초반에 그들이 자신의 이런 면모를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앞으로 함께 행동하는 데 있어서도 또 다른 불편함이나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대로 일루아나나 로크 등은 천우의 그러한 허공섭물의 수법이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수법이기는 했지만 이미 여러 차례 보여준 믿지 못할 광경들을 목격했기에 다소 놀라기는 했어도 다른 의혹이나 이상하다는 생각은 갖지 않게되었다.

천우는 허공섭물의 수법으로 끌어들인 물건들을 자신의 손위에 올려놓은 채 로크 등의 시선에는 신경 쓰지 않고 아티오네스에게 물었다.

[이것들인가?]
[그래, 그들이 물건을 찾는 것보다는 내가 적당한 물건을 찾아주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 같다. 그 물건들을 내가 생각하기에 네 일행들에게 적합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들이니까 네가 하나씩 나누어 주면서 들은 대로 기능을 알려주면 될 것이다.]

아티오네스의 말에 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손 위에 놓여 있는 물건 중 두 자루의 검을 집어 든 뒤 그것을 로크에게 내밀려 말했다.

받으시오.
이,이검들은?

갑작스런 천우의 행동에 로크가 선뜻 검을 받아 들지 못하고 주저하자 천우는 아티오네스에게서 들은 검의 기능에 대해서 나름대로 요약해 설명해 주었다.

이곳에 있는 검들 중 제일 쓸만한 검 두 자루요. 좀 큰 탈은 폭열의 플랑베쥬라는 이름으로 화염계 마법이 걸려 있고, 좀작은 검은 뇌전의 불레이드란 이름으로 전격계의 마법이 걸려 있소. 내가 보기에도 당신이 큰 칼을 쓰는 것이 적당할 것 같고, 저쪽에 있는 친구에게는 작은 검을 주면 될 것 같소. 물론 당신 같은 경우 검이 바뀌면 좀 어색할 수도 있겠지만, 체격 조건으로도 그렇고 양손에 굳은살이 박힌 것을 보니 당신 역시 저 덩치 큰 친구처럼 양손 검을 수련한 적이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검이 바뀌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오.

로크는 아티오네스의 판단에 의해 고른 두 자루의 검을 건네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자신은 실전적인 용병 검술을 익혔고, 또한 양손 검 역시 익혔기에 중형 몬스터 토벌처럼 필요한 경우에는 롱소드 대신 바스타드나 클레어모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니 양손 검 중 가장 가벼운 측에 속하는 플랑베르쥬 정도라면 사용하는 데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러한 자신의 특성을 파악해서 준 검인 데다가 이곳의 물건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쓸 만하다고 골라준 검이나 굳이 다른 것을 욕심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말을 들어보니 검에 화염과 전격계 마법이 걸려 있다 했으니 마법 검이 틀림없었고, 파이어 볼이라도 시전할 수 있는 마법 검은 웬만한 귀족들로서도 구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고가의 물건이기에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이기도 했다.

로크가 두 자루의 검을 받아 들자 천우는 이번에는 그 곁에 우직한 표정으로 서 있는 덩치 큰 고든에게 손잡이는 길지만 끝에 달려 있는 반월형의 날을 오히려 앙증맞아 보일 정도로 작은 기형의 할버드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름은 가중의 할버드라 하오. 에디테이션 마법이 걸려 있어 당신이 휘두른 힘의 두 배의 타격력을 줄 수 있소. 날은 아만다티움이란 금속으로 되어 있어 웬만한 방패나 갑옷 등은 그대로 쪼개거나 베어낼 수 있고, 자루 역시 전체가 미스릴이라 무게 또한 상당하니 조금만 숙달시키면 당신이 사용하는 큰 검과 별차이를 못 느낄 것이오.

고든은 조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천우가 내미는 가중의 할버드를 받아 들다가 그 말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입을 떡 벌렸고, 로크 역시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에 그만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토해 내고 말았다.

아.아만다티움''''
미스릴은 몰라도 아만다티움은 신의 금속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금속으로 오히려 드래곤의 비늘과 본을 능가하는 강도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명칭답게 절대로 인간의 힘으로는 제련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금속이기도 했다. 한데 날 전체가 아만다티움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 위력을 둘째 치고 그 자체만으로도 능히 작은 도시국가 하나 정도는 통째로 사고도 남을 정도의  가치가 있는, 능히 드래곤 하트에 버금가는 보물인 것이다.

천우는 석고상처럼 굳어버린 고든에게 가중의 할버드를 건네 준 후 자신 옆에 조용히 서 있는 조아에게 한 쌍의 귀걸이를 내 밀며 말했다.

받으시오.
조아는 천우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진주처럼 회색 빛깔을 내는 작은 구슬이 달려 있는 귀걸이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설레는 마음에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이.이것은''''
중원의 다른 여인들이 하는 것처럼 귀에 걸면 되는 물건이오. 그리고 이것을 착용하면 이후부터는 이곳 사람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오.

그렇군요. 하지만 전 이런 것을 달아보지 않아서 이상하게 보이지나 않을는지''''

조아는 천우가 건네주는 귀결이 한 쌍을 받아 들며 얼굴을 붉힌 채 조금은 엉뚱한 걱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에 천우는 가벼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하오문주도 이런 귀걸이가 무척이나 어울렸으니 그대 역시 어울리리라 생각하오. 그러니 걱정 말고 착용해 보도록 하시오.

천우의 말에 용기를 낸 조아는 더욱 얼굴을 붉히면서도 조금 고개를 든 채로 조심스럽게 귀걸이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귀걸이의 끝부분은 세밀한 문양이 새겨진 작고 납작한 두 겹의 금속으로 귓볼에 끼울 수 있도록 되어 있었는데, 조아가 착용하자 그 두 겹의 얇은 금속은 잠깐 동안 스스로 희미한 빛을 내며 떨어지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조아의 귓볼에 밀착되었다.

조아는 귀걸이를 끼우는 순간 일시적으로 귀불이 따끔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곧 아무런 착용감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별다른 거부감이 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귀걸이를 착용하고 난 뒤에 더욱 정신이 맑아지는 듯한 느낌도 있었기에 기분 상으로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그동안 차보지 않았던 장신구를 천우가 보는 앞에서 달았다는 부끄러움에 귀걸이를 달고 난 뒤에도 여전히 고개를 바로 돌리지 못하고 벽 쪽으로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때 천우의 음성이 그녀의 귓가로 들려왔다.

역시 어울리는구려, 훨씬 보기가 좋소.

천우의 칭찬에 조아는 날아갈 듯 기쁜 마음이 들었지만 그만큼 부끄러움에 시선을 더욱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고개를 풀 숙이고 말았다.

호오! 천 아우 말대로 장신구를 다니 너도 세운령 고 계집애 못지않게 여우 티가 나는구나. 기왕이면 그거 말고도 몇 가지 더 챙기는 게 어떻겠느냐, 다른 녀석들이야 함부로 욕심을 내면 이 어르신이 가만두지 않겠지만 너는 예외로 해주마, 사실 이곳에 있는 물건들이 다 천 아우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네가 몇 가지 더 챙긴들 누가 뭐라 하겠느냐.

동사왕까지 나서서 그렇게 거둘자 조아는 더욱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익숙지 않은 말소리가 들려와 놀라며 고개를 들고 말았다.

저분 귀걸이가 꽤나 어울리는군요. 저 역시 오랫동안 장신구같은 것을 달아보지는 않았지만 문득 저분의 모습을 보고 나니 저도 저런 예쁜 귀걸이 하나쯤은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귀왕이면 제게도 저런 예쁜 장신구를 선물해 주세요.

조아가 놀란  것은 일루아나가 하는 말을 전과는 달리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곧 그 말이 지닌 의미 때문에 다시 눈이 커지고 말았다.

일루아나가 일행이 되고 난 이후에 천우에게 보이는 그녀의 행동이 무척이나 대답해 보였기에 조아의 마음은 그리 편치 않았다. 한데 일루아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 지금 보니 그녀는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해 볼 수 없는, 아니 간절하지만 차마 요구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닌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기에 더욱 당혹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불안감이 어려 있는 시선이 자연스럽게 천우에게로 향했고, 천우는 그런 조아의 눈길을 의식하고는 내심 고소를 짓고 말았다.

물론 천우는 일루아나가 자신에게 별다른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그러한 말에도 전혀 부담감이 생기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은 다른 사람이 듣기에는 오해의 여지가 충분했고, 앞으로도 그녀의 그런 행동은 좀 곤란할 듯 싶었다.

더욱이 의형 역시 조아처럼 그녀의 말을 알아듣게 되고 난 후에 그녀의 대범한 언행으로 인해 괜한 오해의 여지가 생겨서 좋을 것은 없었으므로 천우는 짐짓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이곳에 있는 물건들은 평범한 장신구들이 아니오, 그러니 용도에 맞는 물건을 찾아 달라면 들어줄 수 있어도 그저 어울리는 자신구를 찾아 달라면 내게는 그런 안목이 없소.

일루아나 또한 천우를 이성이 아닌 존재로만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거지만 상대가 그 말에 정색을 하며 반응하자 그녀도 자신의 말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말인지를 깨닫고는 오히려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죄,죄송해요. 저는 그저'''''
천우는 그녀가 왜 당황스러워하는지 알기에 그 정도면 일루아나도 앞으로는 주의를 기울일 것이라 생각하고는, 조금은 표정이 좋아진 조아를 슬쩍 응시하며 다시 말했다.

내 일행에게 준 귀걸이에는 이곳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기능이 있소, 그리고 다른 한 분도 이것을 착용하고 나면 앞으로는 이곳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될 것이오. 애초에 이곳으로 온 목적은 그 때문이었지만, 이곳 주인의 허락이 있었기에 당신들에게도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주려는 것이오. 일단 당신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골라보았으니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시 찾아보도록 하시오.

천우가 당황스러워하고 있는 일루아나에게 실수하지 않도록 다시 그러한 사실을 말해 주자 일루아나는 얼굴을 붉힌 채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천우에게 사과의 말을 했다.

좀 전의 말은 그 귀걸이가 저분에게 너무 어울려 보였기에 한 말이었어요. 그 외에 다른 의미는 없었으니 제 말실수를 이해해 주세요. 그리고 ''''골라주신 물건은 고맙게 받도록 하겠어요.

그녀의 말에 천우는 손에서 범상치 않아 보이는 팔지 하나를 집어 들며 그녀에게 내밀었다. 표면에 기이한 문양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는 그것의 빛깔은 은색에 가까웠지만, 재질은 결코 은이 아닌 듯했다.

천우가 팔찌에는 실드 마법이 새겨져 있소, 하지만 단순한 실드가 아니라 한 번의 시동어로 총 세 겹의 실드가 자동적으로 중복되어 펼쳐지도록 되어 있기에 이곳의 소드 마스터라는 자들도 그 실드를 단번에 깨지는 못할 것이오. 마법 역시 7서클의 대인 공격마법 정도는 막아낼 수 있으며, 연속 시전이 가능하기에 제때에 활용만 잘하면 훌륭한 방어막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오.

주의할 점은, 중복 실드이기에 하나의 공격에 대해서는 뛰어난 완충 작용을 해내지만 다수의 공격이 집중되면 각각 하나씩의 실드 역할밖에 하지 못하기에 중복 실드로서의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오, 그 점만 주의한다면 당신이 싸우는 방식으로 볼 때 그 팔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오.

천우의 설명에 일루아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실드 자체는 그리 뛰어난 방어력을 지닌 마법도 아니었고, 중복 시전이 가능한 마법이기는 해도 위급한 순간에 그런 실드를 여러 번 시전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주어질 리 만무했기에 효용성에 있어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티팩트로써 한 사람이 그런 중복 실드를 마음먹은 대로 구사할 수 있다면 그건 전혀 얘기가 달라진다.

그의 말처럼 동시에 펼쳐진 세 겹의 실드라면 소드 마스터의 오러 소드나 7서클의 대인 공격마법으로도 단번에 부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 말은 결국 그 정도의 인물들과 싸울 때 일 대 일의 상황이라면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이 된다는 말이었다.

그만큼 자신이 받아 든 팔찌는 대단한 물건이었고, 자신에게는 그야말로 날개를 달아주는 것과 다름없는 물건이기도 했다.

일루아나가 팔찌의 기능을 듣고 너무 놀라서 얼굴이 굳어진 순간, 조금 뒤편에 서 있던 세리나 역시 크게 놀랐는지-그녀가 걸친 로부 전체가 잔 떨림을 일으킬 정도였다.

지금도 대륙의 강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일루아나였는데 그녀가 자닌 팔찌의 위력이라면 일 대 일 상황에서 그녀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실전에서는 여러 가지 변수가 있기에 절대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자신조차도 저 팔지만 있다면 일루아나와 싸워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여겨질 정도이니 부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있는 보물들에 대해서 그다지 욕심이 나지 않던 세리나도 이제는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을 겪고 보니 자신도 당장 더욱 강해질 필요가 있었고, 이곳에 있는 물건들은 단순히 보물 차원이 아니라 정말 필요한 물건들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세리나는 천천히 자신의 후드를 걷어내며 기대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죄송하지만''''제게도 꼭 필요한 물건을 찾아주셨으면 고맙겠어요.

그녀가 후드를 걷어내자 폭포수 같은 금발이 그녀의 손길을 따라 쏟아져 내리며 그녀의 허리 이름에서 출렁였고, 역시 금빛으로 보이는 두 눈동자는 약간의 흥분 때문인지 실내에 비치는 보광을 따라 일렁이고 있었다.

갑작스런 그녀의 말에 천우는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다가 정말 이례적으로 흠칫하는 기색을 지어 보였고, 그 순간 그녀의 모습을 본 다른 모든 사람들도 순간적으로 아찔한 현기증을 느껴야 했다.

금빛과 너무도 하얀 백색의 조화로 이루어진 그녀의 미모 자체도 충분히 마력적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보다는 일렁이는 듯한 그녀의 금빛 눈동자를 바라본 순간 동사왕이나 조아조차도 일시지간 심혼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이,이런 진정한 요물은 따로 있었구나, 노부조차 순간적으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라니''''

가장 먼저 정신을 수습한 동사왕이 그렇게 당혹감을 드러낼 때, 천우의 의식 속에서도 두 마디 놀람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럴 수가! 저건 분명 시련의 금안!]
[어떤 빌어먹을 존재냐? 또다시 마족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려는 존재가!]
[무슨 말인가?]

천우의 의문성에 아티오네스의 당혹스러운 음성이 이어졌다.
[저 눈은 신들 중 누군가가 인간들에게 시련을 주기 위해서 인세로 보낸 치천사의 눈이다.]
하지만 헬로가드의 해석은 조금 달랐다.
[한마디로 빌어먹을 신들 중 어느 놈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들을 잔뜩 괴롭히고는, 그 죄를 몽땅 우리 마계에 뒤집어씌우려는 수작이라는 거다.]

[그건 아니고''''신들은 인간들이 자신들을 잊거나 부정할 때 자신들의 존재를 다시 각인시키는 방편으로 시련을 내린다고 한다, 그렇게 시련을 주는 것에도 여러 가지 방편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금안의 시련이라 해서 치천사의 능력을 갖고 태어난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을 심판하게 하거나 혹은 구원하도록 하게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우리 드래곤들도 시련의 금안을 갖고 태어난 존재가 하는 일에는 어떤 식으로든 간섭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것이 과연 창조신의 뜻인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아무튼 주신들 중 한 존재가 벌이는 일이 분명한 만큼 태초부터 드래곤들에게 정해진 율법이라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다.]

아티오네스의 말에 다시 헬로가드의 흥분한 음성이 뒤따랐다.

[같잖은 소리!정말 주신이란 존재들이 인간들을 위하는 존재들이라면 시련 같은 것은 전적으로 우리 마계에 맡기고 신들은 자신들을 숭배하는 인간들만 구해 주면 되는 것이다. 선택은 인간들에게 맡겨야 하는 것인데 강제로 그런 인간들의 믿음을 가져오기 위해 마왕들이 벌이는 일보다 더 지저분한 일들을 벌이고 있으니 그런 주신들이란 존재가 우리 마왕들보다 더 나은게 뭐냥?

그들이나 우리 마왕들 그리고 인간들과 드래곤들까지, 모든 차원의 존재자들은 단지 태초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부산물들이자 조각난 의지들인데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이라고 해서 인간의 의지나 운명을 지배하려는 것이 당연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굳이 그런 일이 안 해도 믿어주고 따르는 인간들은 많잖아. 그들이나 잘 토닥거려 주면 될 일이지 왜 건방지게 우리 마왕들이 할 일들까지 가로채서 마음대로 벌여놓고는 그 책임을 몽땅 우리 마계에다가 뒤집어씌우느냐 이거다.]

[그만 하도록 아무튼 저 여인은 중원에서의 나와 비슷한 운명을 타고 났다는 애기로군,]

천우 자신도 신이란 존재에 대해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다만 의지의 크고 작음과 육신을 벗고서도 의지를 지닐 수 있는 존재 역시 중원에서는 신으로 불린다는 것과 인간으로서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 또한 그것을 가능케 한다는 것 정도가 현재 까닫고 있는 신의 영역이었다.

그 이상의 것은 알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말 그대로 그러한 존재가 된다 해도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육신을 벗고서도 의지를 지니고 있는 아티오네스나 원래부터 정신체인 헬로가드의 말들이 모두 옳은 것도, 또한 일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무의미한 논쟁이라 여긴 것이다.

다만 그들의 말을 통해 눈앞에 금안의 여인이 이 세계의 신이라 부릴는 어떤 존재, 혹은 의지에 따라 지정된 운명을 타고난 여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아직은 각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 얼마든지 스스로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혹시 내게 골라준 것 말고 저 여인의 눈을 가릴 수 있는 것은 없겠나.]

[뭐? 혹시 내가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거여? 설마하니 신의 의지가 개입된 저 시련의 금안을 지닌 여인의 운명에 개입하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굳이 안 될 이유가 있는가?]
[그,그런''''방금 전에도 말했듯이 우리 드래곤들도 신의 의지가 개입된 일에는'''']
[나는 드래곤이 아니라 저 여인과 같은 인간이다.]
[그러니까''']
[인간인 내가 개입한다고 해서 바뀔 운명이라면 그것은 신의 절대 의지라고 할 수 없겠지.]
[그렇긴 한데, 너는 보통 인간과는 좀'''']
[크크크! 이거 처음으로 네가 마음에 들려고 하는데? 암! 신이라 자칭하는 존재들이 부여한 운명 따위는 결코 절대 불변의 진리도 아닐뿐더러, 오히려 태초의 절대 의지를 모독하는 오만한 행위일 뿐이지, 마왕인 나로서도 존재의 시작과 끝을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신과 마는 태초의  절대 의지 안에서 동일한 존재였으며 그런 신과 마를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인간들 역시 태초부터 각기 다른  공간과 시간 속에서 존재해 왔다는 것, 그리고 또한 끊임없는 창조와 파괴 그리고 탄생과 소멸의 반복만이 유일한 진리이자 절대 의지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뭐 너도 깨닫고 있는 것이겠지만 아무튼 너 자신이 운명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존재이고, 또한 진정한 절대 의지가 아닌 신이나 마가 속박할 수도 없는 존재이니 네가 하고자 하면 문제 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얘기지만, 이 세계의 신들과 나도 시실은 급수 차이가 별로 없거든, 그러니까 나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나를 보내주기만 하면 내가 마계로 가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줄 수도 있는데. 어떻게 안 될까?]

[헬로가드, 자꾸 그런 궤변을 늘어놓을 테냐! 게다가 그런 어설픈 수작이라니, 쓸데없이 끼어들지 말고 너는 바포메트의 종적에 대해서나 곰곰이 생각해 봐라.]

[여기서 그 변태 놈의 얘기가 왜 나와? 그리고 내가 마계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 변태 놈의 행적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소멸시켜 버릴 수도 있잖아. 지금 상태로 날 붙잡아 놔둬 봐야 별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능력 있는 마왕을 활용할 좋은 방안이 있는데 왜 이런 끔찍한 곳에 가둬놓고 아깝게 썩히느냐 이 말이다.]

[흥! 네놈같이 덜떨어진 마왕 녀석이 함부로 설치면서 더 이상 엉뚱한 일을 벌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중간계는 큰 시름을 더는 일인데. 그런 네놈을 왜 놓아준단 말이냐?]

[뭐라고?마왕에게 사기나 치는 뚱땡이 망령 드래곤 주제에 이제는 중상모략까지 서슴치 않다니! 너야말로 정말 드래곤이란 이름에 먹칠을 하는구나.]

[먹칠이 뭔지 내 알 바 아니다. 그리고 내가 언제''']
[둘 다 그만, 내 의지로 하고자 하는 일이다. 그러니 이해해주면 좋겠다. 물론 우려하는 부분이 뭔지도 안다. 하지만 천마가 이곳으로 넘어왔다면 그는 이곳 세계의 인과율을 벗어난 존재이니 그것을 이곳의 신들도 알 것이다. 그 상황에서 신의 대리 역할로 보내진 여인이라면 분명 천마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고, 그런 여인을 돕는 것이 이곳 신들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나와 얽히는 것도 의도된 것인지도 모르지.]

[그건''''불가능해, 아무리 신이라 할지라도 차원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에 관여한다는 것은,]

[누가 관여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지는 일일 수 있겠지. 아무튼 거기까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의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그녀가 어떤 운명을 타고났든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할 수는 있는 것이다. 헬로가드의 말처럼 태초의 의지가 준 그러한 권리로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도전해 볼 수 있는 것이고, 설사 그것이 주어진 운명에 거역하는 것이라 해도 그것이 반드시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네 의지가 정 확고하다면''''어쩔 수 없지. 알았다. 일단 저 여인에게 줄 물건은 별도로 하고, 저 여인의 눈을 가릴 수 있는 방법은 드래곤의 눈물을 사용하면 될 것이다. 뭐 이름이 그렇다고 진짜 드래곤의 눈물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라. 그건 아티팩트가 아니라 일종의 마법 시약인데, 그걸 눈에 넣게 되면 시력이 아주 좋아지지만 눈동자가 백색으로 탈색된다는 것과 한번 탈색된 눈동자는 원래의 색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단순히 눈동자의 색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신경 조직 자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이지.

아무튼 꽤나 강력한 마법 시약이기 때문에 아직 각성하지 못한 저 여인의 기운 정도는 외부적으로 충분히 가려줄 수 있다. 하지만 저 여인의 동의는 얻어야 할 것이다. 그게''''남들이 보기에는 꼭 장님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게 좋겠군. 어디 있는가?]
[저 맨 구석 하단에 있는 작은 유리병에 들어 있다.]

천우는 즉시 허공섭물의 수법으로 아티오네스가 말한 작은 유리병을 손 안으로 끌어당긴 뒤, 여전히 심혼을 건드리는 일렁이는 금빛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리나에게 그 병을 건네주며 말했다.

드래곤의 눈물이오.
네? 
그녀가 유리병을 바라보며 짧은 의문성을 발하자 천우는 약간은 무심한 태도로 그 용도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병 안의 내용물을 눈에 바르면 아주 시력이 좋아지는 물건이오. 단점은 눈동자의 색깔이 탈색된다는 것이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얼굴을 가리지 않고 다녀도 될 것이니 그 정도는 감수해도 좋을 것이옹.

천우의 말에 그녀는 잠시 기이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는 이내 가벼운 한숨과 함께 말했다.

후!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여기 계신 분들에게는 제 눈을 보여주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가 항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것도 바로 저의 눈 때문이죠 하지만 눈의 색이 바뀐다고 해서 괜찮을까요?제 눈을 본 사람들은 항시'''''

당신은 그 눈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었을 것이오. 당신의 눈은 사람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본성을 건드리는 눈이오. 때문에 당신의 눈을 본 남자들 대부분은 추악한 욕망을 드러냈을 것이오. 그나마 일행들인 저들은 꽤나 진실한 마음으로 당신을 좋아하고 있는 것일 테니 함께할 수 있었을 것이오.

천우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로크와 고든은 물론 정신없이 보물들을 살펴보고 있던 텔리안조차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황급히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세,세리나! 절대로 우리는'''''
하지만 그들의 당황스런 외침에도 세리나는 변함없이 차분한 표정으로 천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행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에요. 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 말에 천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이 약을 바르며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눈을 보더라도 더 이상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않게 될 것이오, 물론 당신의 모습때문에 감정의동요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그건 누구나가 생각하는 정도일 뿐이니 그것이 당신을 힘들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마침내 세리나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천우가 내민 유리병을 받아 들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정말 제게 꼭 필요한 것을 찾아주셨군요.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더욱 심하게 일렁이자 천우 역시 가볍게 마음이 미묘해질 지경이었기에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아직 제대로 각성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그녀의 금안이 갖고 있는 마력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재앙을 불러 일으킬 만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줄 게 하나가 더 있소.
천우는 그 말과 함께 원래 그녀에게 주려고 했던 물건을 내밀었다. 그것은 어린아니 팔뚝 길이의 아주 짤막한 완드로, 그 끈에는 우윳빛이 감도는 수정구 형태의 구슬이 박혀 있었다.

사계의 완드라는 것이오. 일루젼과 정신 계열의 마법이 걸려 있고, 이곳에 있는 물건들 중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물건이라 하오. 일정한 지역에 환영으로 계절의 변화를 일으키거나 혹은 특정 대상에게 기온 차이를 느끼도록 할 수 있는데, 비록 환영이지만 그 지역 안에 있는 자들 혹은 대상에게는 당신이 그려내는 이미지대로 정신 계열의 참마법이 스며들기에 실질적인 타격을 줄 수 있소.

예를 들자면 이것으로 주변을 여름으로 만들고 계속 뜨거워지는 태양을 그려낸다면 그 지역 안에 있는 자들은 실지로 뜨거운 태양을 느끼게 될 것이고, 추운 겨울과 모든 것을 얼려버리오, 다만 그 효과는 마법의 서클이 아닌 순순한 당신의 정신력에 달려 있는 것이기에 그 대상 역시 의지력에 따라 효과가 증대할 수도, 감소할 수도 있소.

그녀 역시 가장 주력으로 삼는 분야가 바로 일루젼 계열의 마법이었기에 천우가 하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었고, 실질적인 위력은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그녀의 의지만으로 환영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굉장히 유용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셀리나는 이미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드래곤의 눈물을 얻었기에 천우가 내미는 완드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다. 다만 주는 것이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 들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사계의 완드가 이곳의 주인인 아티오네스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물건이라는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것이야말로 아티오네스가 그때까지 만들었던 아티팩트들 중에서 그나마 다른 드래곤들 앞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유일한 물건이라고 생각했던 것인 만큼 그것은 결코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아무튼 천우는 그녀가 사계의 완드를 받아 들자 마지막으로 의형인 동사왕을 향해 하나의 물건을 내밀며 말했다.

형님께서는 이것을 착용하시면 될 것입니다.
응? 이것은 가면 아닌가? 게다가 눈 부위도 가려져 있는데?
천우가 동사왕에게 내민 물건은 입 주변을 제외한 눈과 이마를 가리게끔 만들어진 금속 재질의 은빛 가면으로, 동사왕은 그 형태를 보고는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은신의 가면이란 것입니다. 조금 불편하시겠지만 이것을 착용하시면 이곳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은신' 이 라고 외치시면 남들의 눈에 형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는 기능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면의 눈 부위에는 이곳 세계의 마법을 알아볼 수 있는 디텍트란 마법이 걸려 있지만, 형님께는 굳이 필요 없는 것일 테니 평소에는 눈 부위를 가리고 있는 이 부분을 밀어 올려놓으면 됩니다.

천우가 그 말과 함께 가면의 눈 부위를 가리고 있던 검은색 재질의 보석같은 것을 밀어 올리자 막혀 있던 부분이 드러났다.

동사왕은 은신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이며, 누가 가로챌세라 얼른 천우의 손에서 가면을 받아 들고는 좀 전과 달리 기대어린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정말 이걸 차면 내 몸이 보이지 않게 된단 말이지?
필요하실 때 '은신' 이라고 외치시면 됩니다.
험! 거 정말 신기한 물건이로군, 아무튼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니''''
동사왕은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슬그머니 가면을 얼굴에 착용해 보았다.

특별히 걸칠 수 있는 부분이 만들어져 있지는 않았지만 가면을 착용하자 마자 아교라도 바른 것처럼 얼굴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었고, 내부의 감촉 역시 보기와는 달리 그다지 나쁘지 않았기에 동사왕은 그 상태로 천우를 보며 물었다.

어떤가?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는가?
괜찮습니다. 그 가면 역시 형님께 어울려 보입니다.
어디, 그럼''''은신!
그 순간 동사왕의 신형이 점점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곧 사라져 버렸고, 그 즉시 로크등이 가벼운 놀람성을 발했다.

어엇! 사라졌다.
그분께선 어디로''''
천우가 동사왕에게 한 말은 조아 외 에는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당연히 그들은 동사왕이 사라진 이유를 몰랐다. 하지만 마법사인 일루아나나 세리나는 그러한 현상이 투명화 마법 때문임을 눈치 채고는 그다지 놀라워하지는 않았다. 또한 어쌔신들이 사용하는 마법 무구 중에는 투명화 마법이 걸려 있는 것들이 간혹 있었기에 그 가면의 용도가 은신용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투명화의 수법은 감각이 뛰어난 기사들이나 마나의 흐름에 민감한 고위 마법사들에게는 그다지 위협적이라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그가 어째서 굳이 그런 용도를 시험해 보는 것인지 오히려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때, 투명화가 발휘된 상태에서 동사왕의 놀람성이 흘러나왔다.

헐! 내 눈에도 내 모습이 보이지 않다니, 이거 정말 신기한 물건일세, 그려 중원의 살수 녀석들이 보면 군침을 한 동안은 흘리겠구먼, 한데 이제는 어찌해야 다시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가? 가면을 벗어야 하는 건가?

동사왕의 음성에 천우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냥 해제라고 말하시면 됩니다.
알겠네, 해제!
다시 동사왕의 외침과 함께 곧 원래의 자리에 가면을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이 드러나자 그제야 로크 등도 그 가면에 투명화 마법이 걸려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리고 일루아나 등과는 달리 그들로서는 실지로 투명화 마법을 처음 보기 때문에 그 가면이 대단한 보물처럼 인식되었고, 특히나 고든에게 준 할버드에 비하면 자신에게 준 장검은 평범하기 그지없다고 여기고 있는 텔리안 같은 경우는 오히려 동사왕의 가면에 더 욕심이 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검 대신 자신에게 그 가면을 달라고 요구할 처지는 아니었기에 미스릴과 아만다티움으로 말들어졌다는 고든의 할버드를 쳐다보며 은근히 불만스런 표정을 내비칠 따름이었다.

그때, 투명화를 해제한 동사왕이 천우를 응시하며 말했다.
한데 이 가면을 쓰고 나니까 어디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데?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있는 듯합니다.
천우의 말에 가면 속에서 동사왕의 눈이 시퍼렇게 빛을 발했다.
그럼 어떤 놈들이 이곳의 보물을 노리고 오고 있다는 말인가?

글쎄요. 우여히 수도 있으니 만나봐야 알겠지요.
흠'''그런데 소리는 미약하게나마 들리는데 아직 어떤 기운 같은 것은 느껴지지는 않는구먼,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면 기운도 느껴질 텐데''''

동사왕이 조금은 의아한 듯이 말하자 천우는 다시 미소와  함께 의문을 풀어주었다.

이곳에 오시면서 보신 환영으로 이루어진 벽들은 음파나 외부의 기운 역시 어느 정도 차단시키는 기능이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 정도라면 모를까 이곳으로 오고있는 자들과는 아직 여러겹의 벽들이 가로막고 있기에 그들의 기척을 알아차리기 힘든 것입니다. 다만 형님께서 쓰고 계신 그 가면에는 아주 작은 소리라도 파악할 수 있는 기능이 있기에 귀가 더욱 밝아지신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천우의 말에 동사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신기한 듯이 쓰고 있는 가면을 쓰다듬어 보고는 천우에게 은근한 어졸 말했다.

자네가 그놈들을 만나보는 동안 내가 여기를 지키고 있을까?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곳은 외길이니까요.
그래도 혹시 도굴꾼 같은 녀석들이면 벽을 뚫고 들어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곳의 벽들은 만년한철만큼이나 단단하니 그럴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 우리처럼 번쩍 하고 이곳에 나타나면''''
아무 곳에나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곳의 주인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뭐 그렇다면야''''알겠네. 그럼 어서 주인 허락도 없이 침입한 불청객들을 처리하러 가세나.

여전히 이런 엄청난 보물들을 나두고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것이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더 이상 머물겠다고 우길 명분도 없었기에 차라리 괘씸한 침입자들을 어서 처리하기로 마음먹은 동사왕이었다.

천우의 말대로 비록 우연히 들어온 자들일 수도 있겠지만, 이미 이곳이 보불창고임이 확인된 이상 어떤  우연도 결코 우연으로 넘길 마음이 없었고, 그 때문에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로크 일행들도 비록 천우가 하는 말 외에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떤 상황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고, 그 때문에 긴장한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이곳은 드래곤의 레어였고 드래곤의 레어에 찾아올 수 있는 존재란 같은 드래곤이거나 혹은 목적이 있기에 무언가 준비를 하고 찾아오는 무리들일 가능성이 높은것이다.

상대가 다른 드래곤이라면 그 역시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고, 혹시라도 자신들을 추적해 온 신성교국이나 이얀 공작가의 기사들이라면 그 또한 안심할 수 없는 상대들인 것이다.


7장 관음배불의 기수식


루딘 왕국은 5백 년 전만 해도 대륙의 어느 나라도 함부로 볼 수 없는 강대국 중 하나였다.

하지만 대륙 남부에 존재하던 시아 족과 센 족의  수많은 소부적들이 차츰차츰 하나로 병합되면서 국가의 기틀을 이루더니 마침내 전쟁을 통해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었고, 그러한 두 부족국가의 이름을 딴 시아센국은 방대한 영토와 많은 인구를 기반으로 점차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여파로 차츰 힘을 잃게 된 비운의 왕국이 바로 시아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루단 왕국이었다.

그나마 전 국왕이었던 르베아 18세가 통치하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루단 왕국은 내실 있는 국력과 잘 훈련된 정예 군대가 있었기에 어느 정도 시아센의 야욕을 견제할 정도의 힘은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르베아18세가 죽고 당금의 루단 국왕인 르베아19세가 즉위한 이후로는 사정이 많이 바뀌어 지금으로서는 시아센을 견제할 만한 힘을 전혀 지니고 있지 못했다.

그 주된 원인은 바로 소심한 성격에다가 겁이 많은 르베아19세가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 때문에 자국의 안전을 전적으로 신성교국의 힘과 영향력에 맏기고 의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루단 왕국은 전통적으로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수호신으로 섬기던 나라였다. 그리고 5백 년 전의 신마전쟁이 있기 전만 해도 가이아 교단은 대륙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있던 큰 교단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신마전쟁 이후에 가이아 교단은 다른 교단들과 마찬가지로 쇠퇴하더니 지금은 그저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조그만 교단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단 왕국의 국민들은 전 국왕이었던 르베아18세가 통치하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신성교국의 크로아 교단보다는 여전히 가이아 교단을 더 신봉하고 있었고, 그러한 이유로 신성교국을 비롯한 크로아 교단을 적극 후원하고 있는 대륙의 다른 나라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냉대를 받아오고 있었다.

그러자 르베아19세는 자신들 루단 왕국이 시아센에게 끊임없이 위험을 받고 있는 것도 그렇듯 크로아 교단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 신성교국의 보호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르베아18세가 죽고 왕위 계승자인 제1 왕자로서 루단의 국왕으로 즉위한 직후에 르베아 19세는 곧바로 크로아 교단을 루단 왕국의 국교로 삼는 한편, 막대한 국비를 들여가며 루단 왕국 내에 있던 크로아 교단의 신전을 호화롭게 증축하고 , 또한 나라 곳곳에도 거대한 신전을 세워 적극적으로 신성교국의 환심을 사는 정책을 펼쳤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해마다 크로아 교단에 막대한 후원금을 지원하는 한편, 크로아 교단에 신도로 등록한 자국민들에게도 각종 세제 상의 혜택은 물론 병역 문제에 있어서까지 혜택을 부여하여 크로아 교단을 적극 장려하였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전통적으로 섬기던 가이아 교단에게는 모든 지원을 중단함과 더불어 그 신도들에게도 역시 크로아 교단의 신도들에게 베푼 만큼의 손실을 모두 떠넘겼다.

당연히 각종 불이익으로 생활이 점점 어려워지고 막중한 병역 문제까지 모두 떠안게 된 가이아 교단의 신도들은 차츰 시간이 지나자 모두 크로아 교단의 신도로 등록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작금에 이르러서는 루단 왕국도 명실 공히 크로아 교단이 지배하고 있는 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크로아 교단은 루단 왕국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루단 왕국의 국력은 오히려 날로 쇠퇴해져 가고 있었다.
이제는 귀족들은 물론이고 평민들도 대부분이 크로아 교단의 신자로 등록이 되어 있었고 그러한 크로아 교단에 해마다 쏟아붓는 막대한 국비와 신도들에 대한 국비와 신도들에 대한 각종 세제 상의 혜택은 물론 이고 병역의 혜택까지 주어졌기에 자연히 국가의 재정은 비어 가고 병역 또한 감소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부족한 재정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최우선시되는 방안이 바로 군비의 축소였고, 자연히 어느 나라 못지 않게 강병임을 자랑하던 루단 왕국의 정예 병사들은 어느새 제대로 된 장비조차 갖출 형편이 못 되는 오합지졸로  변해 버렸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시아센 제국에게 침략의 빌미를 주고 있다는 것을 르베아 19세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고, 오히려 이제는 루단 왕국이 완전히 신성교국의 보호막 속에 있다고 믿으며 그러한 군비의 축소나 병력의 감소 같은 문제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르베아 19세의 주변에도 그러한 것이 잘못된 일임을 말하는 인물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엇다. 하지만 정치를 담당하고 있는 대부분의 중앙 귀족들 역시도 크로아 교단의 그늘 아래서 개인적으로도 막대한 이득을 챙기고 있었기에 그러한 주장을 일소시키며 더욱 국왕을 부추기고 있었고, 당연히 르베아 19세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자들은 점점 정치권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르베아 19세를 비롯해 대부분의 귀족들과 심지어는 평민들까지도 태평성대를 말하고 있기는 했지만, 정작 왕국의 운명이 거대한 해일 앞에 침몰 직전인 조각배 신세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는 현 루단 왕국의 제1왕자 카하알라 로시안 폰 르베아는 충심으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는 몇몇 인물들과 함께 손을 잡고 최후의 수단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런 로시안 왕자의 계획에 동참한 핵심 인물으 아직까지는 군부의 실세임이 분명한 예히안 치르넨 폰 아시르 후작과 궁중 수석 마법사인 아트 게일 폰 라이만 백작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로시안 왕자의 계획에 의해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사실 황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근위기사단과 기사단장, 그리고 궁중의 수석마법사까지 황실을 비우는 경우란 겨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들이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크로아 교단을 신봉하고 있는 르베아 19세와 중앙 귀족들이 크로아 교단에 큰 공헌을 할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갖도록 한 빌미가 된 것은 바로 로시안 제1왕자가 사라진 라헬 교단의 유적 중 한 곳일 가능성이 높은 곳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국왕에게 올렸기 때문이다.

라헬 교단은 어느 나라, 혹은 어느 한 지역에서 발호한 것이 아니라 전 대륙에 걸쳐 라헬의 믿을 수 없는 강맹함을 숭배하던 무리들이 모여들어 만들어진 것으로, 처음에는 일정한 근거지를 지니고 있지도 않았고, 또한 교단을 형성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라헬이 움직이는 경로를 따라 신봉자들에 의해 언제부터인가 곳곳에 비밀스러운 교단이 세워졌고, 그러한 비밀 교단에는 라헬에 의해 죽은 드래곤들의 온갖 보물들과 마법 자료들이 모여 있어 데스 기어라는 공포스런 마법 병기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라헬 교단의 수호자들이었던 스워드 나이츠들이 익혔던 마나심법이나 환상적인 검술 등도 기록되어 있다고 전해졌기에, 그러한 라헬 교단의 유적지 중 어느 한 곳이라도 발굴할 수 있다면 어느 나라건 초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5백 년 전의 신마전쟁으로 라헬이 소멸되고 난 후 그 잔당들을 찾기 위해 모든 나라들이 혈안이 되었지만, 마치 신기루가 사라지듯이 라헬의 소멸 이후에 라헬 교단의 흔적 역시 너무도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다. 지난 5백 년간 누구도 라헬 교단의 유적지나, 심지어 교도라고 추정되는 인물들조차 찾아 볼 수 없었고, 또한 나타나지도 않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라헬에 의해 죽었던 드래곤들의 레어가 그들의 근거지로 사용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었지만, 라헬과 그 교단들이라면 이를 가는 드래곤들이 뻔히 알고 있을 장소를 그들이 근거지로 사용했을 리가 없다는 반론이 더욱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었고, 또한 이후에 발견된 몇 개의 드래곤의 레어 모두 아무것도 없는 쓸모없는 공동에 불과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후자의 주장이 더욱 확실하게 뒷받침되고 있었다.

그렇듯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라헬 교단의 유적지일지도 모를 곳을 발견했다는 로시안 왕자의 말에 르베아 19세늘 물론 중앙 귀족들도 큰 기대를 품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근위기사단과 왕실 마법사들이 대거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시안 왕자가 애초부터 계획했던 것은 가망성 없는 라헬 교단의 유적지를 찾는 것이 아니라 드래곤의 레어, 그것도 주인 없는 빈 곳을 찾아내는 것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라헬 교단의 유적지를 언급한 것은 왕국의 지원을 끌어내기 위한 목적과 더불어 절대 드래곤의 레어를 탐색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알려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비록 라헬의 의해 많은 드래곤들이 죽었다고 알려졌고 그로 인해 주인 없는 드래곤의 레어도 생겨났지만, 만약에라도 빈 곳이 아닌 고룡이 머물고 있는 레어에라도 침입하게 된다면 그 후환으로 어떤 재앙이 뒤따를지 모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드래곤의 심기를 건드려 큰 재앙을 당하거나, 심하면 멸망까지 당한 나라가 한둘이 아닌 것을 보면 감히 어느 나라도 직접적으로 그런 위험을 감수하며 드래곤의 레어를 침입할 모험은 감행할 수 없는 것이다.

로시안 왕자 역시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시아센 제국의 침략이 멀지 않았다고 느껴기에. 지금 상태에서 빠른 시일내에 루단 왕국의 전력을 증각시킬 방법은 그것 외에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렇듯 무모해 보이는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신마대전 당시 라헬에 의해 죽은 드래곤들 외에도 전쟁 통에 무고하게 희생된 드래곤들의 숫자 역시 결코 적자 않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해 볼 때, 그러한 드래곤들의 레어를 찾을 수만 있다면 그 레어는 라헬 교단에 의해 처리되지 않고 분명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러한 생각을 한 사람이 그동안 로시안 왕자 한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나라건 다 한 번쯤은 생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분명 이득보다는 위험 요소가 더 많은 일이었기에 직접적으로 국가가 드러내놓고 나서지 못하는 일이기도 했다.

다남 일확천금을 노리고 있는 자들이 여전히 라헬의 숨겨진 유적지와 더불어 그러한 드래곤의 레어를 찾아다니고 있었고, 그들로 인해 지난 5백 년간 몇 개의 비어 잇는 드래곤의 레어가 발견되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러한 꿈을 쫓다가 비명횡사한 자들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재수 없게 드래곤이 머물고 있는 레어에 침입하여 변을 당하더라도 그것이 직접적으로 국가가 개입한 일만 아니라면 드래곤들 역시 당사자들 외에는 그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기에 그러한 것에 대해서 금지하거나 하지는 않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로시안 왕자는 자신의 사조직을 이용한다 할지라도 만약에라도 찾아낸 곳이 드래곤이 머물고 있는 레어고, 그로 인해 일이 실패했을 경우에 드래곤의 배후를 알아내고자 한다면 자신의 존재를 감추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럴 바에야 애초부터 확실하게 최강의 전력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로시안 왕자의 그러한 생각 이면에는 시아센 제국의 침략이 가까워졌다는 절박함과 더불어 만약에 드랜곤이 머물고 있는 곳이라 해도 드래곤을 물리치고 드래곤 하트와 몸체까지 얻을 수 있다면 확실하게 시아센의 침략을 저지할 방안이 마련될 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그회로 루단 왕국이 어느 나라도 넘볼 수 없는 강국으로 다시 거듭나는 것도 결코 꿈이 아니라는 생각이 잠재해 있었다.

드래곤보다는 오히려 시아센 제국이 더욱 감당할 수 없는 위협이었기에 결국 로시안 왕자는 왕국의 운명을 걸고 도박을 감행한 것이고, 치르넨 후작과 게일 백작 역시 그런 로시안 왕자의 뜻에 동참하여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끝이 어딘지 모를 긴 통로를 조심스레 전진하고 있는 로열 나이츠 기사단의 선두에는 치르넨 후작과 게일 백작이 있었고, 가장 후미 쪽에는 선대의 국왕이었던 르베아18세가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엄청난 재정을 동원해 마련한 사피루스 급 타이탄 여섯 기가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뒤따르고 있었다.

높이 6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덩치에, 이름에 걸맞게 전체가 푸른색 마법 시약으로 도색이 되어 있어 일명 전장의 청기사라고도 불리는 사피루스 급의 타이탄 여섯 기가 지축을 울리며 움직이는 모습은 누구라도 위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고, 그러한 여섯 기의 타이탄을 배경을 두고 전진하는 로열 나이츠 기사단은 앞으로 나아감에 있어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그 전까지 루단 왕국은 카이렌 제국의 보급형 타이탄인 출력2.4기가 마인의 프록시 급 타이탄 네 기를 보유하고 있었을 따름이었지만 전력 강화를 위해 여섯 기를 더 증강하는 한편, 그것도 카이렌 제국의 보급형 타이탄이 아닌 마도 왕국 루마나트에서만 소규모로 생산되고 있다는 최상급 타이탄인 출력3.0기가 마인의 사피루스 급 타이탄으로 추가 증강을 한 것이다.

루미나트에서는 사피루스 급 타이탄 위로도 효율 면에서 아미드 급 타이탄에 버금간다는 디아만티 급의타이탄도 생산하고 있었지만 디아만티 급의 타이탄은 절대 외부로 방출하지 않는다는 정책이 세워져 있었기에 실지로 타국에서 마도왕국인 루미나트로부 구입할 수 있는 최상의 타이탄은 사피루스 급이 한계였다.

하지만 그 아래의 크리소스 급이나 루미나트의 보급형이라는 일렉트른 급 역시도 카이렌 제국에서 생산하고 있는 프록시 급의 보급형 타이탄보다는 훨씬 성능이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있었고, 그조차도 외교적 친분이 없다면 여간해서는 팔지 않는 물건이었기에 르베아18세가 루미나트부터 시피루스 급의 타이탄을 구입하기 위해 들인 공은 가히 눈물겨울 정도였다고 선대의 외교대신들은 말하고 있었다.

아무튼 지금 로열 나이츠 근위기사단과 왕실 마법사들은 이곳이 드래곤의 레어라는 사실과 어쩌면 정말로 말로만 듣던 드래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황 앞에서도 전혀 두려운 마음은 갖고 있지 않았다.

사실 진정한 드래곤의 실체를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기는 했지만, 그들 나름대로는 드래곤도 충분히 때려눕힐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는 최강의 타이탄 여섯 기와 대륙에 존재하는 소드 컴플리터 중 한 사람인 치르넨 후작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드래곤 아니라 마왕을 만나더라도 두렵지 않다는 마음을 갖도록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한동안 그렇게 전진하고 나자 가로막힌 벽면이 나타났지만 그또한 마법으로 이루어진 환상이었기에 모두 쉽게 통과할 수 있었고, 그 즉시 그들은 엄청나게 크고 넓은 광장 형태의 공동 내부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음! 생각보다 엄청나게 크군.

그,그렇군요, 이 레어의 주인은 아마도 윔 급에 이른 드래곤이었던 모양입니다.

혹시 모르니 긴장을 늦추지 말고 주위를 잘 살펴보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만약 레어의 주인이 있었다면 이미 저희가 들어섰을 때부터 가만히 놔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도 그렇겠군, 한데 넓기만 할 뿐 다른 통로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데''''혹시 이곳도 예전에 발견되었다던 그 드래곤의 레어들처럼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치르넨 후작은 레어를 둘어보며 당장은 특별한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에 약간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곳을 보십시오.
치르넨 후작의 걱정스런 물과는 달리 게일 백작은 오히려 흥분이 담긴 목소리로 그렇게 소리치며 광장의 중앙 쪽을 가리켰다.

저건 마법진이 아닌가, 벽 쪽에 있는 것들도 그렇고''''
그렇습니다. 마법진이지요. 이곳 레어의 입구와 통로에 설치 되어 있었던 서쿼스터의 환상마법이 유지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저 중앙과 벽 쪽에 있는 마법진들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법이 유지되려면 마법진 역시 지속적인 활성화가 되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이곳에는 마법진을 활성화시키고 있는 존재가 따로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렇습니다. 저 마법진들은 소위 말하는 영구 마법진입니다.
벽 쪽에 있는 네 개의 보조 마법진이 중앙의 주 마법진을 활성화시키고 있는 형태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구 마법진은 드래곤 하트나 그에 준하난 마나석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 말에 치르넨 후작 역시 얼굴에 기쁜 표정을 드러내었다.
그럼 이 공동의 내부를 밝히고 있는 저 벽 쪽의 마법진 중앙 에 박힌 돌들이 드래곤 하트나 마나석이란 말인가?
드래곤 하트는 아니지만, 마나석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오,그런! 저 정도 크기의 마나석이라면 하나만으로도 능히 최상급 타이탄 10기는 구입할 수 있는 가치가 있을 듯한데, 그런 마나석이 네 개씩이나'''''

이곳은 분명 신마전쟁 때 희생된 드래곤의 레어가 분명합니다. 결코 라헬 교단의 손을 탄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잘 살펴보면 분명 공동 내부에 입구처럼 마법으로 가려진 다른 장소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그런 곳을 샅샅이 찾아  내'''헉! 저,저기''''

게일 백작은 기쁨에 겨워 흥분된 어졸 말하다가는 갑자기 공동 내부의 맞은편에 있는 벽 쪽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놀라서 그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떠듬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그들을 발견한 것은 게일 백작뿐만이 아니었기에 모두들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로열 나이츠 기사단의 근위기사들은 그 즉시 검을 뽑아 들며 경계 태세를, 그리고 마법사들 역시 저마다 스태프를 곧추세우며 마법을 시전할 만반의 준비에 들어갔다.

이곳에'''웬 사람들이란 말인가?
치르넨 후작 역시 너무도 뜻밖의 일이었기에 울순간 표정이 굳어들며 약간은 당황스런 어조로 의문성을 흘려내었다.
가,각하! 호,혹시 저들은'''''
진정하게, 게일 저들이 모두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물러설수 없네, 그리고 이곳이 드래곤의 레어라지만 저들중 한 명이 폴리모프한 드래곤이라면 몰라도 드래곤들이 저렇게 한꺼번에 모여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그렇군요.
우리는 강하네, 저들이 누구이든 겁먹을 필요 없단 말일세.
일단 자네는 나서지 말고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마법 시전을 준비해 두게. 청기사들은 앞으로 나서고, 근위기사들은 간격을 넓히고 전투 준비를 하도록.
쿵!쿵!쿵!쿵!

치르넨 후작의 침착한 명령에 맨 후미에 있던 여섯 기의 타이탄들이 앞으로 나서며 후작의 좌우로 정렬하여 섰고, 밀집해 있던 로열 나이츠 기사단은 마법 공경에 대비해 넓게 산개하여 전투의 진형을 갖추었다. 그리고 마법사들은 그러한 기사들의 사이사이에 파고들어 각자가 공격마법의 캐스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완벽한 전투태세가 갖추어지자 치르넨 후작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좀 더 앞으로 나서며 자신들을 향해 다가서고 있는 무리들을 노려보았다.

가죽옷을 입은 전형적인 용병 차림의 사내가 셋, 그리고 평범한 복색의 금발 여인과 후드를 깊숙이 눌러쓴 로브 차람의 인물이 하나, 거기에 생김새도 특이하고 복작 역시 괴상한 인물들이 셋, 도합 여덟 명의 정체불명의 인물들이었다.

치르넨 후작은 먼저 자신의 감각으로 다가서는 그들의 기세를 느껴보았다. 그러자 예상 밖으로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강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고, 그나마 그 한 사람도 특이한 복색을 한 자들 중 여인으로 보이는 자였다.

그 외에 아리따운 외모의 금발 여인에게서도 흑마법사의 기운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자신의 판단대로라면 그들 중에 폴리모프한 드래곤은 없는 듯했고, 또한 지금 이곳에 와 있는 전력이라면 아무런 걱정이 없을 정도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자신이 느낀 그러한 감을 완전히 신뢰하기에는 지금의 여건 상 여러모로 무리가 있다고 판단되었기에 치르넨 후작은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오십여 보 앞으로 가까워진 그들을 향해 날카로운 일칼을 토했다.

멈추시오! 당신들은 누구요?
치르넨 후작의 외침에 다가서던 천우 일행은 멈추어 섰고 그 즉시 일루아나가 좀 더 앞으로 나서며 싸늘한 목소리로 마주 소리쳤다.

그렇게 묻는 당신들은 누구인가요? 허락 없이 남의 거처에 침입했다면 먼저 주인에게 정체를 밝히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요.

주인이라는 그녀의 표현에 치르넨 후작은 내심 흠칫하기는 했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은 채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다시 외쳤다.

그럼 당신들이 이곳의 주인이란 말이오? 하지만 믿지 못하겠으니 그 증거를 보여주시오.

치르넨 후작의 외침에 일루아나는 조금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다시 응대해 주었다.

주인에게 자기 거처임을 증명하라니 정말 어이가 없군요. 못할 건 없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주인으로서 침입자인 당신들에게 합당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면 될 뿐이죠, 다만 당신들이 정체를 밝히고 또한 이곳에 온 목적 역시 순순히 밝힌다면 그 여부에 따라서 처우가 결정될 거예요.

다분히 위협적인 말이었지만 치르넨 후작은 냉정함을 잃지 않고 다시 외쳤다.

이곳은 드래곤의 레어, 따라서 이곳의 주인은 드래곤이어야 하오. 하지만 당신들 중에는 이곳의 주인을 자처할 만한 존재는 없는 것 같소, 내 생각이 틀렸다면 존재를 드러내어 증명해 보이시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당신들을 이곳의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우리를 기만하려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오.

흥! 결국은 이곳이 드래곤의 레어임을 뻔히 알면서도 침입했다는 말이로군요. 타이탄은 물론이고 백여 명의 기사전원이 소드 익스퍼트 급에, 마법사들 역시 4서클 이상의 마법사들이니 드래곤 슬레이어를 꿈꾸는 허황된 무리들은 아닐 테고, 분명 어느 국가 소속의 근위기사단과 왕실 마법사들이겠군요. 목적 역시 뻔할 테지만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이처럼 무모한 일을 감행한 것인지 놀라울 따름이에요. 이런 일에는 절대로 국가가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불문율까지 어길 배짱이 있는 나라가 도대체 어느 나라인지 몹시 궁금하군요.

그녀의 말에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던 치르넨 후작의표정이 급격히 흔들렸지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곧 입가에 미소마저 떠올리며 한결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비록 말로는 주인을 자처하며 자신들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지만, 그들이 자신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다는 것과 또한 그들 중 용병 차림의 세 인물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무척이나 불안해 하고 있다는 것이 확연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 때문의 그의 말투 역시 자연스럽게 변하였다.

후후''''이제 보니 너희들은 이곳의 보물을 노리고 침입한 자들이었구나, 하지만 정말 대단하다, 단지 그 인원으로 이 험준한 드래곤 산맥을 뚫고 이곳까지 왔다는 것도 그렇지만 버젓이 우리들 앞에 나타나서 협박까지 할 수 있다니 말이다.

도대체 너희들의 정체는 무엇이냐? 그만한 실력과 배짱을 지닌 자들은 대륙이 아무리 넓다 해도 그리 흔치는 않을 테니 분명 꽤나 알려져 있는 자들일 것이다. 순순히 정체를 밝힌다면 네 말처럼 상황에 따라 처우가 달라질 수도 있으니 허장성세는 그만두고 어서 정체를 밝혀라!

치르넨 후작은 절대 그들이 드래곤들이 아님을 확신했고, 또한 자신들보다 먼저 이곳에 들어온 자들인 만큼 이곳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 있다면 그 또한 알아낼 필요가 있었기에 은근한 협박과 회유를 겸한 말로 엄포를 놓은 것이다.

그러한 치르넨 후작의 태도에 일루아나는 특유의 교성을 터트리며 말했다.

깔깔깔! 나 역시 당신의 정체가 무척이나 궁금하니 서로 밝히는 것이 어떤가요? 그리고 당신 말대로 어쨌든 우리가 먼저 와 있었던 것은 틀림없으니 당신이 먼저 성의를 보이세요. 그러면 나 역시 당신의 물음에 대답해 주겠어요.

여전히 위축된 없는 일루아나의 태도에 치르넨 후작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어치피 살려둘 수 없는 자들이었고, 또한 여러 가지를 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기에 곧 표정을 풀며 가벼운 끄덕임과 함께 자신의 신분을 알려주었다.

좋다. 내 이름은 예히안 치르넨 폰 아시르, 루단 왕국에서 로열 나이츠 기사단의 기사단장 직을 맡고 있다.

헉! 치,치르넨 후작''''
그,그럼 저들은'''''

치르넨 후작이 신분을 밝히자 로크와 텔리안은 펄쩍 뛸 듯이 놀라며 경악성을 토해 내었고, 일루아나 역시 조금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놀람을 드러내었다.

설마 당신이 그 유명한 치르넨 후작일 줄은 미처 몰랐네요.
그럼 저들은 루단 왕국의 근위기사단인 로열 나이츠 기사단이겠군요.

치르넨 후작은 그들의 경악해 하는 태도에 더욱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며 완전히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젠 너희들이 정체를 밝힐 차례다.
전혀 걱정할 만한 상황이 아님을 느끼자 치르넨 후작은 본연의 위엄을 담아 심문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고, 일루아나는 순순히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그러죠, 저는 일루아나라고 해요.
그녀 역시 치르넨 후작처럼 간단히 자신의 이름만을 밝혔을 뿐이지만 이번에는 치르넨 후작과 뒤편에 서 있던 기사와 마법사들이 놀라고 말았다.

이,일루아나!
진홍의 마녀라는'''''
그녀의 명성 역시 결코 치르넨 후작 못지않았고, 더군다나 그녀가 이곳에 있는 일이 자신들이 이곳에 온 것보다 더욱 뜻밖의 일이었으므로 놀람 또한 클 수밖에 없었다.

네,네가''''당신이 정말 진홍의 마녀 일루아나란 말인가?

놀란 치르넨 후작이 다시금 말투를 하대에서 평대로 고쳤으나 일루아나는 그런 것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생긋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말했다.

무엇하러 제가 이름을 속이겠어요.
음,정말 뜻밖이로군, 대륙에서 가장 신출귀몰하다는 당신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
이제 통성명은 끝났으니 서로 다른 것에 대해서 물어보도록 하죠, 당신들이 이곳에 온 목적은 무엇 때문인가요?
그녀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치르넨 후작은 잠시 놀랐던 마음을 가라앉히며 싸늘한 어조로 대답했다.

짐작하고 있다면서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겠소,
그럼 정말로 이곳의 보물을 노리고 온 것이란 말인가요? 혹시 이곳의 주인을 만나기 이곳의 주인을 만나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닌가요? 어느 쪽인지 알려쥣면 고맙겠네요.

굳이 대답 못 해줄 일은 아니었지만 사실 자신들이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서는 자랑스럽게 떠벌릴 만한 일은 아니었기에 치르넨 후작은 그러한 질문에 대해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방의 신분을 안 이상 치르넨 후작은 더욱 대화의 필요성을 느꼈기에 불편한 마음을 감수하고 대답해 주었다.

우리는 이곳의 주인과는 볼 일이 없소.
결국 보물을 노리고 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그 대답에 일루아나는 내심으로는 약간의 실망감을 느끼며, 수긍의 표시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렇군요. 한데 이런 일은 통상적으로 국가에서 직접 나서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면서까지 왕실 근위기사단이 직접 나선 이유는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는군요.

그런 사정에 대해서는 구구절줄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오. 다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온 것일 따름이오.

좋아요. 당신들의 신분과 목적을 알았으니 다른 것은 굳이 알 필요가 없겠죠. 이제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물어보세요. 저 역시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숨기지 않고 말해 드리죠.

그녀의 말에 치르넨 후작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조금은 어색해 하는 표정으로 가장 궁금해 하는 사항에 대해 물었다.

이곳에'''세간에서 말하는 그러한 보물들이 있는지 알고 싶소.

있어요.
일루아나의 주저함 없는 대답에 치르넨 후작은 눈을 번쩍이며 약간은 흥분 어린 어조로 다시 물었다.

얼마나'''있소?
많아요. 아니 그런 표현으로는 좀 부족하겠군요. 제 생각으로는 루단 왕국을 통째로 사고도 남지 않을까 싶을 만큼이라고 해두죠.

그녀의 말에는 은연중 뼈가 있었지만 치르넨 후작은 지금 이 순간 너무도 기쁜 마음에 그것을 무시할 수 있었다.
그,그게 정말이오?
제가 본 바로는 그래요. 과연 그게 전부인지는 모르겠지만 ''''
그 순간 치르넨 후작뿐만 아니라 그 말을 들은 게일 백작은 물론이고 기사들과 마법 캐스팅을 중지한 마법사들까지도 기쁨에 겨워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이제는 은신의 가면으로 인해 일루아나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 동사왕을 비롯한 로크나 텔리안은 잔뜩 인상이 구겨지고있었다. 일루아나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될 사항을 속속들이 알려주는 것이 못마땅했고, 또한 그렇게 자세히 알려주어서 좋을 것도 없는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사왕은 인상을 찡그리기는 했지만 굳이 일루아나의 행동을 만류하려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침입한 녀석들이었고, 그렇다면 충분히 죽을 이유가 성립된다.
무엇을 알든지 간에 무덤 속으로 가져가게 될 것이니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숨길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보물에 관한 애기를 남에게 자세히 알려준다는  것 자체가 약간은 언짢은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그러한 동사왕의 심사가 어떻든 일루아나는 정말 자신이 아는 사실대로 치르넨 후작의 물음에 충실히 답변해 주고 있었다.
그 보물들은'''당신들이 나왔던 곳에 있는 것이오?
그래요.

여전헤 주저함 없는 그녀의 대답에 치르넨 후작은 약간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날카로운 눈매를 번뜩이며 질문의 방향을 바꾸었다.

한데''''그렇게 모든 것을 순순히 알려주는 의도가 무엇이오?

그러한 물음에 일루아나는 다시 웃음을 터트리고는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깔깔깔! 묻는 것에 대해 사실대로 답변해 드리는 것에 무슨의도가 있겠어요?

하지만 그럴수록 치르넨 후작은 그녀의  의도가 의심스러웠기에 자신이 짐작하는 바에 대해서 말했다.

혹시 어떤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없는가 해서 묻는 말이오.
대가라'''제 답변에 대한 대가를 제공하실 의향은 있는 건가요?
물론 없소,
깔깔깔! 그렇다면 저도 솔직히 말하죠. 대가를 바라는 마음은 없어요. 오히려 모든 가능성을 지워버렸으니 제가 미안하다고 해야겠군요.

치르넨 후작은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아 다시금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에 분노의 표정을 드러내며 일루아나에게 살기 띤 눈빛을 쏘아 보냈다.

당신들이 이곳을 살아 나갈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마저 지워 버린 미안함을 말하는 것이에요.
지금'''또다시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오?
전혀 아무튼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사실들을 모두 알게 된 당신들을 살려 보낼 수 없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쿵!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 해도 그런 식의 모욕적인 발언은 삼가해 주시오! 좋소, 비록 이런 상황에서 마주쳐 당신들의 목숨을 살려줄 수는 없겠지만, 대신 당신의 성의 있는 답변에 대한 대가로 원한다면 한 차례씩 정당한 대결의 기회를 드리겠소, 물론 그 대결에서 이긴다 해도 보내주지는 못하오. 다만 조금이나마 당신들의 얼울함을 풀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것뿐이오. 그 대상은 바로 나요, 동의한다면 한 사람씩 나서시오. 거절하게다면'''어쩔 수 없이 전체 공격이 이루어질 것이오.

이루아나의 말에 치르넨 후작은 공동 내부가 울릴 정도로 발을 구르고는 싸늘한 기세를 피워 올리며 그렇게 외쳤다.

치르넨 후작은 그녀의 말을 다수의 무력으로 자신들을 죽이려 하는 것에 대한 바아냥거림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물론 그것을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살려 보내 줄 수는 없는 일이었고, 또한 그런 식의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외면하기에는 약간의 가책과 함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기에 그러한 제안을 한 것이다.

물론 일루아나는 사실을 말한 것이었고, 그러한 자신의 말을 치르넨 후작이 여전히 오해하고 있다는 것도 알기에 한차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앞으로 나서려 했다. 어차피 서로간의 입장이 분명한 이상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는 상황이었고, 기왕에 나섰던 자신이기에 치르넨 후작을 상대해 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물론 그녀는 치르넨 후작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서는 반드시 동사왕이 나설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고, 그 순간 바로 치르넨 후작의 마지막이 될 것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에 대한 걱정보다는 오히려 별다른 원한도 없는 대륙의 절대자 한 사람이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씁쓸함이 앞섰다.

하지만 그때 천우의 음성이 들려왔기에 그녀는 멈칫하며 곧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다만 한 가지 조건을 더 추가하는 것이 어떻겠소?

치르넨 후작은 그들 무리의 우두머리는 당연히 이루아나일 거라고 생각했고 그의 그러한 제안도 사실은 일루아나를 겨냥해 한 말이었다.

물론 최소한의 배려가 깔려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보다는 일루아나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는 치르넨 후작으로서는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수하 기사들이나 왕실 마법사들의 피해를 없애기 위해 그러한 제안을 내놓았던 것이다.

그녀는 7서클의  대마도사였기에 혹시라도 그녀에게 마법 시전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비록 게일 백작을 비롯한 이십여 명의 왕실 마법사가 대비를 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피해 없이 그녀의 마법을 제대로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우려가 있었기에 일루아나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인데, 지금껏 나서지 않던 엉뚱한 인물이 나서며 자신의 제안을 수락한다고 응대하자 약간은 당혹스러움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일루아나가 그의 말에 화를 내기는켜녕 오히려 뒤로 한발 물러서며 침묵을 지키고 있자 치르넨 후작은 직감적으로 이들 우두머리는 일루아나가 아닌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말한 괴상한 복장의 인물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괴상한 복장의 인물은 일루아나보다 더 대단한 인물이라는 얘기인데''''

순간 치츠넨 후작은 어쩌면 일루아나의 말이 단지 바아냥거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감을 느꼈다. 하지만 곧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훌훌 털어버리고는 천우를 응시하며 싸늘함이 담긴 어조로 외쳤다.

당신은 누구인가!
천우라 하오.

치아'''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인 듯한데''''성은 없는가?
그 이름이 전부요. 이름은 중요한 것이 아니니 당신의 제안에 한 가지 조건을 더 추가하자는 내 제안에 동의하는지 대답해보시오.

성이 없다면 평민이라는 얘기인데, 그런 자가 아무리 막나가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감히 자신에게 평대는 물론이요, 처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추가 조건이 어쩌고 하는 말을 늘어놓자 치르넨 후작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물론 일루아나 역시 성을 밝힌 적이 없으니 그녀 역시 평민인지 귀족인지 알 길이 없지만, 그녀는 이미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대륙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인물이니 신분을 떠나서 그녀의 연륜이나 명성으로 보아 자신과 평대를 나누어도 별로 기분이 나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치아누라는 이름은 전혀 들어본 바가 없을뿐더러, 또한 그에게서는 이렇다 할 기운 역시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여러모로 괴상한 복색만 뺀다면 평범한 자에 불과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자가 오히려 하대처럼 느껴지는 어투로 말하고 있으니 치르넨 후작으로서는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그런 일로 분노를 표출할 정도로 그의 수양이 낮지는 않았기에 치르넨 후작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은 뒤 냉엄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어리석군, 아직도 삶에 대한 기대가 있는 것인가? 그대들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치르넨 후작의 그러한 말에도 천우는 무심한 태도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추가하려는 조건은 바로 당신들에게 삶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오. 다수라도 상관없으니 우리 중 한 사람에게 모두 패한다면 이곳에 오게 된 상세한 이유를 밝히시오.

뭐,뭐?
치아누 님/
이.이보게, 천 아우?
천우의 말은 그들을 살려 보낼 수도 있다는 말이었기에 일루아나나 동사왕은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놀람성을 발한 것이고, 치르넨 후작으로서는 너무도 황당한 말이었기에 뭐라 답변할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미처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천우는 다시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조아를 향해 말했다.

일단 제압만 하도록 하시오.
네?
조 소저의 실력이라면 저들을 죽이지 않고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오.

천우의 뜻이 자신더러 나서라는 것임을 알자 조아는 눈을 동그렇게 뜨며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곧 기쁜 표정을 떠올리며 대답과 함께 즉시 앞으로 나섰다.

네, 알겠어요.
사실 그녀는 천우와 함께 있게 된 이후 전혀 싸워볼 기회가 없었다. 그건 마교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도 뭔가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워낙 천우의 능력이 상상을 초월하다 보니 변변히 나설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것이다.

한데 지금 자신으로 하여금 나서도록 하자 조아는 천우가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그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당연히 기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예전에 천우의 도움을 얻고 난 이후 무지막지한 내공과 함께 신체 또한 거의 강제적으로 환골탈태를 이루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자연스럽게 깨움을 얻어 진정한 조화지경의 경지에 들어설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러고서도 여력이 남았던지 보타암의 일이 해결되고 난 후 얼마간의 각고정진을 통해 그녀는 빠르게 화경의 초입을 벗어나 지금은 현경의 문턱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즉 그녀는 화경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있다는 말이었다.
그녀 역시 검의 길을 걷는 구도자로서 다른 건 몰라도 검의 궁극을 이루고 싶은 욕심이 없을 수 없었고, 또한 마교에서의 일을 겪으며 앞으로도 자신이 천우에게 뭔가 도움이 되려면 지금보다는 더욱 강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 때문에 늘 정신적인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계속 느끼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실전의 감각이었다.

그녀 정도의 경지면 굳이 직접적인 칼부림이 없어도 명상과 마음적인 수련만으로도 충분한 효과가 있지만, 생사를 건 혈투가 아닐지라도, 때로는 단순한 한 번의 비무만으로도 또 다른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늘 그러한 부분이 아쉬웠던 것이다.

한데 뜻하지 않게 그러한 갈증을 풀 수 있는 기회가 왔고, 또한 굳이 상대방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 하니 그녀로서는 일말의 부담감도 없이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치르넨 후작은 조아가 자신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음성을 발하며 앞으로 나서자 날카로운 눈길로 그녀를 살펴보다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가만''''허장성체를 부리는 것치고는 저들 용병 차림의 3인을 제외하고는 다들 너무 태연하지 않은가. 그리고 저 여인은 처음 볼 때부터 저들 일행 중 가장 강한 기운이 느껴지던 여인인데''''좀 모호하기는 하지만 내 느낌이 틀림없다면 저 여인은 분명 소드 마스터 급의 검사다.

한데 남자라면 몰라도 소드 마스터 급의  여검사라면 대륙에서도 극히 드무니 내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저 여인의 정체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혹시 가면을 쓴 저자를 포함해 이상한 복장을 한 저들 3인은''''

치르넨 후작은 조아가 나설 때에야 비로소 그들 중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단지 용병 차림의 인물 셋뿐이라는 사실과,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동요 없이 너무도 태연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깨닫고 나자 치르넨 후작은 자신이 너무 경솔하게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또 다른 이상한 점과 더불어 은근히 걱정스런 마음이 들기 시작했지만 곧 그것을 강하게 부정하기 시작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한곳에 드래곤이 셋씩이나 모여 있을 리가 없지 않는가, 더구나 일루아나나 용병들임이 분명한 자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볼 때 저들은 절대 드래곤이 아니다. 그렇다고 소환된 마족들도 결코 아니다. 비록 복장과 모습이 조금 이상하기는 해도 마족들이라면 아무리 마기를 감추고 있다 해도 내가 그러한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결국 저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오판하기를 바라고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는 저들이 드래곤이든 마족이든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이지 않는가.

그리고 내가 일 대 일의 대결을 유도한 것은 일루아나와 바로 저 여인 때문이다. 저 여인이 방해한다면 일시적으로 일루아나의 마법 시전을 저지하지 못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내놓은 제안이니 지금 상황은 내가 바라는 대로 된 것이다.

일루아나는 마법사이니 당연히 나와의 정면 대결을 꺼리는 것이고, 대신 저들 중 가장 강한 저 여인을 내세워 혼란을 유도하는 것이다. 만약에라도 내가 패한다면 저들은 그 상황을 최대한 이용해 탈출하려는 계획인 것이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 치르넨 후작은 결코 자신이 패할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만약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일!
예. 후작 각하!
만약 내가 패하여 사로잡히거나 죽게 되면 그 즉시 지체하지 말고 전부 총 공격을 감행하도록.
네? 후작 각하께서'''패하시다니요?
만약이라고 했네, 그리고 저 여인은 내 느낌으로 소드 마스터급의 검사야, 그래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당부를 해 두는 것일세.

그,그럴 리가''''
내 안목을 의심하는가?
아,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열두 명의 소드 컴플리터가 아니라면 대륙에 누가 있어 후작님의 상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아무튼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결코 후작님을 직접 나서시게 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지금 일제 공격을 명하십시오.

이미 내 입으로 저들에게 한 차례씩 정당한 대결을 할 기회를 주겠다고 말한 것을 자네는 듣지 못했는가. 설사 내가 패해서 저들에게 죽게 되더라도 한 입으로 두말할 수는 없네.
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 말게. 일제 공격 시점은 별도의 명령이 없다면 지금부터 내가 저들에게 사로잡히거나 죽었을 때일세.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게일 백작 또한 치르넨 후작이 그런 제안을 한 이유가 저들중에 7서클의 대마도사인 일루아나가 있기 때문임을 짐작하고 있었고, 그녀에게 단 한 차례라도 대단위 마법 시전을 허용한다면 자신들에게 상당한 피해가 있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 와 있는 근위기사들과 마법진들은 그 한 명 한 명이 지금과 같이 어려운 시기의 루단 왕국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사람들이었기에 가능한 한 모두가 아무런 피해 없이 왕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했다.

하지만 설사 이곳에 온 모든 사람들이 죽더라도 오히려 치르넨 후작만은 무사해야 했다. 만약에라도 치르넨 후작의 신상에 조금이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일 백작이 지금껏 잠자코 있었던 것은 치르넨 후작의 실력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절대 위험할 일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인데. 나서는 상대가 진홍의 마녀 일루아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치르넨 후작이 그런 식의 당부를 내리자 게일 백작은 그가 형식적으로 하는 말이 아님을 느꼈다.

조금이라도 그런 위험이 있다면 차라리 어느 정도의 피해가  생긴더라도 일시에 공격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지만, 한번 내뱉은 말은 결코 번복하는 법이 없는 치르넨 후작의 쇠고집을 잘 알고 있는 데다가 또한 여전히 치르넨 후작이 패할 리가 없다고 믿음이 더욱 컸기에 게일 백작은 대답과 함께 물러섰다.

치르넨 후작은 당부를 마치자 차분한 발걸음으로 다가서고 있는 조아를 향해 그 역시 마주 걸어 나갔다. 그러고 서로가 심여 보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선 후에 치르넨 후작은 눈을 빛내며 조아에게 물었다.

그대 이름은?
조아도 이제는 이곳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기에 그 물음에 간단하게 자신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조아!
조이'''아?역시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로군, 아무튼 좋다. 나는 여자라고 사정을 봐주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할 것이니 그대 역시 최선을 다하도록.

치르넨 후작은 그 말과 함께 미스릴로 만들어진 자신의 롱소드를 뽑아 들고는 중단세를 취한 채 채내의 마나를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즉시 치르넨 후작의 전신에 황금빛 광휘가 어리는 듯하더니 그의 롱소드에도 금빛 오러가 맺히며 원래의 검보다 더 긴 황금빛 오러 블레이드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공동 내부는 치르넨 후작이 형성시킨 오러 블레이드와 전신에서 뿜어내는 금빛 광휘로 말미암아 마치 작은 태양이 내려앉은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아!무적의 황금 오러 블레이드다!
여,역시 치르넨 후작님''''
그 모습에 뒤편에 서 있던 로열 나이츠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한껏 경외감을 담은 목소리로 탄성을 터트리기 시작했고, 조아는 약간 의혹 어린 눈빛을 지어 보이고는 곧 중원에서부터 가져온 장검을 등 뒤로부터 뽑아 들었다.

스르릉!
경쾌한 금속성과 함께 장검을 뽑아 든 조아는 자연스런 태도로 검을 늘어뜨리고는 그녀 역시 사문의 수월관음신공을 이용해 강기를 일으키며 검에도 강기를 주입시켰다.

그녀의 경지는 굳이 검을 펼쳐내기 전에 외부적으로 검강을 이룰 필요도 없었고 뜻이 일 때 자연스럽게 발출되는 경지였으므로 지금처럼 검강을 미리 형성시킬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치르넨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지닌 자도 화경 급의 고수였고, 그런 그가 대결 전에 전신의 진기를 뿜어내며 호신강기와 검강을 이룬 채 자신을 바라보자 그것이 이곳 세계에서는 결전에 앞서 예의를 차리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어 그녀 역시 같은 방식으로 호신강기와 검강을 미리 펼쳐 보인 것이다.

그녀의 수월관음신공은 치르넨 후작의 황금빛 오러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깨끗한 물막을 두른 듯 은은한 푸른빛과 함께 불문의 신공답게 파사현정의 기운마저 담고 있어 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청량감과 더불어 무언가 모를 엄숙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허억! 저,저럴 수가''''후작님과 같은 오러의 막을 펼치다니''''
그녀의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는 절로 말도 안 된다는 경악성들이 터져 나왔다.

마, 말도 안 돼! 소드 컴플리터라니'''''
그녀의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는 절로 말도 안 된다는 경악성들이 터져 나왔다.

치르넨 후작은 아예 그 정도가 아니라 하마터면 심장이 멎을 듯한 충격에 전신에 두르고 있던 오러의 막과 오러 블레이드마저 흩트릴 뻔했다.

그녀가 소드 마스터 급의 여검사라는 것은 짐작했지만 설마 하니 자신처럼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르는 존재, 즉 소드 컴플리터였을 줄을 정말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소드 마스터는 단지 오러 블레이드를 형성시키는 데 그칠 뿐이지만 소드 컴플리터는 그러한 오러를 어느 정도 의지대로 다룰 수 있는 존재이기에 그 격차는 마치 7서클의 마법사와 8서클의 마법사 간의 격차와도 비견될 만큼 큰 것이었다.

또한 소드 컴플리터는 완벽한 마나섬법과 환상검술의 바탕이 없이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 두 가지가 구비되지 않는다면 정통적인 소드 마스터가 한계일 뿐인 것이다.

물론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른다면 그러한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기는 했지만, 아직 대륙 역사에 인간으로서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다다른 자는 없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다만 인간들보다 수명이 월등히 긴 엘프 족 중에서 단 두 명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고, 그것도 일반 엘프가 아닌 하이 엘프였다고 하니, 사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경지란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꿈꿀수 없는 경지나 다름없는 것이다.

아무튼 그런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능력을 어느 정도라도 흉내낼 수 있는 자들이 바로 소드 컴플리터들인 것이고, 그 흉내라는 것이 바로 오러를 의지로 어느 정도는 자유롭게 다스리는 것이기에, 검이 아닌 온몸으로 오러를 방출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바로 소드 컴플리터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오랜 시간 유지하기는 힘들지만 그렇게 전신으로 방출시킨 오러의 막은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조차 어느  정도는 견디어낼 수 있었고, 7서클의 공격마법도 상당 부분 방어가 가능했다.

때문에 치르넨 후작은 그의 말처럼 정말로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기 위해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전신으로도 오러를 형성시켰던 것인데 눈앞의 여인 역시 자신처럼 전신으로 오러의 막을 형성시킨 것이다.

지금껏 알려진 소드 컴플리터 중에는 비록 두 명의 여인이 포함되어 있기는 했지만 절대로 눈앞에 있는 여인은 그 두 명 중 한 명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결국 대륙에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소드 컴플리터였다는 말이 되겠지만 그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벨란 대륙의 인간은 수억 명에 달했다. 그 중 소드 컴플리터라 불리는 존재는 단 열세 명, 대륙에서 왕이라는 칭호를 얻고 있는 존재들보다도 훨씬 더 적은 숫자가 바로 소드 컴플리터인 것이다. 한데 그런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고 감추어질 수 있다? 치르넨 후작이 생각하기에는 절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소드 컴플리터란 결코 한순간에, 그리고 혼자서 이루어지는 경지가 아니었다. 소위 검에 대한 귀재, 혹은 천재라 불리는 재능을 지니고서 완벽한 마나심법과 환상검술을 토대로 명사의 지도 아래 적어도 수십 년간은 밤낮으로 검을 휘두르며 피땀을 흘려도 천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도달할 수 없는 경지가 바로 소드 컴플리터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완벽한 마나심법과 환상검술의 체계를 갖춘 곳은 이미 대륙의 명가롯 모두가 알려져 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고, 설혹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이 있었다 해도 그런 곳에서 소드 컴플리터가 탄생하였다면 그것은 오히려 전 대륙에 소문을 내고 자랑할 일이지 결코 숨기거나 감출 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여인은 틀림없이 소드 컴플리터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알려지지 않은 여인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저런 여인이 나타났단 말인가? 내가 모르는 소드 컴플리터라니''''호,혹시''''아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만약에라도 내가 정말 패하기라도 한다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저들의 정체가 무엇이든 지금은 오로지 승부에만 전념해야 할 때다.

치르넨 후작으로서는 또다시 밀려드는 의문과 혼란스러움에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파왔지만 상대가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된 이상 지금 정신을 흩트린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어금니를 악물며 다른 생각들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은 오로지 상대의 빈틈을 찾고, 빛살보다 빠를지도 모를 상대의 검격을 막아내기 위해 집중해야 할 때인 것이다.

치르넨 후작이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심호흡과 함께 전신을 팽팽히 긴장시키는 순간, 조아는 일단 상대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다고 생각했기에 호신강기와 검강을 거두어들이며 평온한 모습으로 관음배불의 기수식을 취하며 상대의 공격을 기다렸다.

오,오러를 ''''''거둬들여?
그녀의 행동에 치르넨 후작은 하마터면 마나 역류를 일으킬 정도로 분노하고  말았다. 그 때문인지 치르넨 후작의 전신에 두른 오러가 물결치듯이 출렁였고 그에 따라 공동 내부를 비추던 찬연한 금광 역시 보는 사람의 시야가 어리저울 정도로 불규칙하게 일렁거렸다.

곧이어 치르넨 후작으로부터 피어를 방불케 하는 엄청난 노성이 터져 나오며 금빛 오러로 둘러싸인 그의 신형이 조아를 향해 폭사해 나갔다.

감히!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아-!
하지만 치르넨 후작을 이성을 잃게 만들 정도로 분노케 만든 조아의 행동은 그녀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녀가 취한 관음배불의 기수식은 검은 지면으로 향하고 왼손은 단전 부위에 손바닥을 위로 한 채 관음수결을 맺는 형식이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치르넨 후작의 눈에 그녀가 맺은 관음수결 중 유독 중지가 높이 세워져 있는 것만이 눈에 보였다는 것이다.


8장 흑안의 소드퀸


조아는 그가 왜 갑자기 이성을 잃고 분노하여 달려드는지 영문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비록 화경 급의 초절정 검수인 것은 분명한 듯해도 어딘지 기의 운용이 조금은 어설퍼 보였고, 도한 대치 중인 그의 기세나 자세에도 허점이 여러 곳 느껴졌기에 그가 자신의 적수는 아니라는 것을 벌써부터 느끼고 있었다.

더구나 이 순간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크게 흥분하여 달려드니 더욱 큰 허점이 드러나며 마음만 먹으면 일시에 숨통을 끊어 놓을 수도 있을 듯했다.

하지만 상대방을 해치지 말라는 천우의 당부도 있었고, 그녀 또한 오랜만의 실전 상대가 그나마 흥분으로 제 실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상황에 이르자 수월관음검법을 펼치려던 생각을 바꾸어 마치 장작을 패듯이 무서운 기세로 휘둘러오는 치르넨 후작의 검에 힘으로 맞서 나갔다.

쿠앙!
그 순간, 치르넨 후작의 황금빛 오러 블레이드와 순간적으로 강기를 머금은 조아의 검이 부딪치자 귀를 먹먹하게 하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큭!
터터턱!
구 충격의 여파로 조아를 향해 달려들던 치르넨 후작이 답답한 신음성과 함께 지면으로 떨어져 내리며 묵직한 발걸음으로 서너 걸음 물러섰고, 조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차분한 기색으로 다시 하단세를 취하고 있었다.

우엑!
치르넨 후작은 물러서던 몸이 멈추자 한 모급의 진한 선혈을 뱉어내고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드는지 스스로를 자책하며 황급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 무슨 경솔한 짓이란 말인가! 강적을 눈앞에 두고 이성을 잃다니''''

하지만 여전히 관음배불의 기수식을 취하고 있는 조아의 모습을 보자 치르넨 후작은 진정되던 마음이 다시 폭발하려는 것을 입술을 짓깨물며 참아내었다.

지,진정하자. 여기서 또다시 흥분하면 그땐 정말 죽음밖에 남는 것이 없다.
치르넨 후작은 심호흡과 함께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조아를 노려보다가 문득 조금 전의 상황이 뇌리에 떠올랐다.

비록 자신이 너무 흥분하여 제대로 된 검술을 펼쳤던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온 힘이 담긴 분노의 일격임은 분명했다. 한데 상대는 그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긴 것에 반해 자신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오러 블레이드를 받아낸 검은 분명 오러를 거두어들인 상태의 평범한 것이었다. 너무 흥분한 상태라 자신이 잘못 봤을 수도 있겠지만, 분명 자신의 오러 블레이드를 막았을때 상대의 검에서는 오러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 역시 소드 컴플리터의 경지이니 분명 그 검에도 오러가 주입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의 검이 저처럼 멀쩡할 리도 없을뿐더러 자신이 받은 충격 역시 오러와 오러의 부딪침에서 생기는 마나의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한데도 상대의 오러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서,설마 그랜드 소드 마스터? 아, 아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는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해, 하지만 오러를 보이지 않도록 검 내부에 갈무리시킬 수 있는 경지는 오직 그랜드 소드 마스터뿐''''가만, 그렇지 않다, 라헬 교단의 스워드 나이츠들! 데스 기어의 계약자들이자 암흑 검사라 불렸던 그들 열 명은 비록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경지는 아니었지만 오러를 마치 수족 부리듯 했을 뿐만 아니라 검에 갈무리시키는 것도 가능했고, 심지어 화살처럼 쏘아 보낼 수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저들은'''''

치르넨 후작은 조금 전 애써 부정했던 생각이 다시 떠오르자 점전 그것이 진실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의 라헬 교단의 암흑 검사들은 기존 대륙의 기사들과는 달리 싸우기 전에 제각기 독특한 포즈를 취했다는 얘기와 또한 대륙의 검들과는 전혀 다른 모양의 이상한 검을 사용하는 자도 있었다는 얘기까지 속속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눈앞에 서 있는 조아에게 대입시키자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만약 저 이상한 복장의 인물들이 라헬 교단의 인물이라면, 그리고 이곳이 떠도는 소문처럼 라헬 교단이 근거지로 삼은 드래곤의 레어라면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지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눈앞에 있는 자들이 숨어 있다면 오히려 위험에 처한 것은 저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불해하게도 지금까지의 일루아나의 말이나 저들의 태도를 보아서는 그럴 가능성이 큰 것 같았다.

결국 치르넨 후작은 더 이상 무턱대고 싸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좀 더 자세한 상황을 파악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그대에게 한 가지만 묻겠소, 혹시 당신들은 라헬 교단 소속이오?

조아는 자신과 일검을 나눈 그가 어느 정도 진지한 듯한 기색을 보이더니 갑지기 질문을 해오자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 비록 말은 알아듣게 되었다니잠 아직 이곳의 말을 할 줄 모르니 대답을 해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상대를 눈앞에 두고 뒤를 돌아보는 행동은 할 수 없었기에 그저 묵묵히 그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러자 그에 대한 답은 조아가 아닌 뒤편의 이루아나에게서 흘러나왔다.

갑자기 그건 또 무슨 말인가요? 우린''''''

일루아나는 조아가 이곳의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대신 그 물은에 대해 부정하고자 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 역시 조금은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었기에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그녀 역시 천우가 라헬과 라헬 교단에 대해서 관심을 보였던 것이 생각이 났고, 또한 치르넨 후작 역시 무언가 그에 대한 연관성을 발견했기에 그러한 질문을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이나 새로 합류한 자들은 분명한 라헬 교단과 아무런 연관이 없지만, 자신이 천우 일행들까지 그렇다고 대변할 입장은 아닌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천우를 바라보았고 천우는 그 즉시 간단하게 대답해 주었다.

아니오.
천우의 말에 일루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치르넨 후작을 향해 말했다.
아니라는군요.
그녀의 태도에 치르넨 후작은 또다시 의문이 일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같은 일행이 아닌 것이오?
맞아요.
한데''''
일행이 된 지 하루가 좀 지났을 뿐이죠 그리고 이곳에 저희를 데려온 것도 이분들이고요.
그럼 도대체 저들은 누구요?
저도 모르니 대답해 드리기 곤란하군요. 다만 이곳이 아닌 다른 대륙에서 오셨다는 말을 들었어요.

다른 대륙?
마의 해역 너머에는 다른 대륙이 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그런 말도 안 되는!
그 이상은 저도 모르니 대답해 드릴 수 있눈 것은 여기까지예요. 한데 일검을 나누어보신 소감은 어떠신가요. 지금쯤은 제가 했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느끼셨으면 좋겠군요. 뭐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호의인지 비아냥거림인지 모를 일루아나의 말에 치르넨 후작은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눈앞에 있는 조아를 향해 소리쳤다.

당신에게 대답을 듣고 싶소. 정말 당신은 라헬 교단의 스워드 나이츠가 아닌 것이오?

하지만 그에 대한 답변은 또다시 일루아나에게서 들려왔다.

그 분은 이곳 말을 알아듣기는 해도 할 줄은 몰라요. 말을 알아든는 것도 언어 해석 마법이 걸려 있는 아티팩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그분에게는 질문을 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얄미울 정도로 친절하게 답변해 주는 일루아나의 말에 치르넨 후작은 정말 머리가 터질 것처럼 또다시 혼란에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천우의 무심한 음성이 다시 공동 내부에 울려 퍼졌다.

다시 대화를 할 마음에 있는 듯하니 말해 두겠소, 당신을 비롯해 누구든 그녀를 이길 수 있다면 당신들에게 이곳에 있는 물건들을 전부 주겠소, 물론 목숨도 보장해 주겠소, 하지만 당신들이 패한다면 이곳에 온 사정에 대해서 자세히 밝혀야 하오.

치르넨 후작은 천우의 말을 더 이상 무시하지 않았다. 직접 검을 나누어본 결과 눈앞에 있는 여검사는 오히려 자신을 능가하는 절대 강자임을 알 수 있었고, 자신이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다른 두 인물도 결코 생각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아닐 것임을 자각한 것이다.

그것은 왜 알고자 하는 것이오?
치르넨 후작의 말투는 다시 하대에서 평대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천우는 여전히 무심한 태도로 답해 주었다.

듣자 하니 당신들은 어느 일국의 비중 있는 사람들인 모양이던데, 그런 당신들이 이곳에 온 이유를 정확히 알아야 도울지 말지를 결정할 것 아니겠소,

도,도와? 왜 우리를 돕는단 말이오?
너무도 뜻밖의 말에 치르넨 후작이 기가 막힌다는 투로 묻자 천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당신들의 말을 들어보고 난 후에 알려주겠소.
어느새 치르넨 후작도 전신으로 피워내던 오러와 오러 블레이드를 거두어들인 채 조금은 창백한 표정으로 천우를 향해 말했다.
그대는 우리 모두가 저 여인을 당해 낼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구려, 아무튼 좋소, 저 여인이 강한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당신이 어떤 호의를 베풀어도 우리의 목적과 의도에는 변함이 없소, 그것을 안다면 당신의 제안은 너무 손해보는 제안일 것이오. 그런데도 그 제안의 답변을 원하시오?

그렇소.
천우의 주저함 없는 대답에 치르넨 후작은 다시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렇다면 좋소, 당신의 제안을 수락하겠소, 하지만 내가 패한다 해도 그것이 끝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오. 또한 타이탄의 계약 기사들 역시 타이탄과 함께 그대로 공격을 감행 할 것이오. 그리고 '''''우리 중 한 사람이라도 사망자가 생긴다면 당신의 제안은 무효요. 그때는 설사 우리 모두가 패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밝히지 않을 것이오. 우리 모두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맞겠소, 그런 일이 생긴다면 결코 당신의 제안은 호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오.

정말 너무도 일방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치르넨 후작 역시 잘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원하지 않는 조건을 제시한 것은 상대방이었다. 자신들은 그런 조건이 있든 없든 어차피 상대를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물론 타이탄까지 동원된 로열 나이츠 기사단과 이십여 명의 황실 마법사들이 모두 눈앞의 여인에게 패한다면 그 상태는 모두 전멸당한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그런 상황에서 저들이 자신들을 모두 죽인다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다만 만약에라도 그런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경우 다소 수치스럽더라도 우두머리인 듯한 남자가 말한 대로 절대적인 비밀이라 할 것도 없는 왕국의 사정을 말해 주고 한 번쯤 희망을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자존심을 버리는 일이었지만 이곳에서의 실패는 결국 머지않은 시점에 왕국 전체의 멸망으로 이어질 것이 분명했고, 그것을 생각한다면 자신의 명예쯤은 진흙탕에 처박힌다 할지라도 지금처럼 뻔뻔해질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치르넨 후작이었다.

하지만 천우는 치르넨 후작의 그러한 추가적인 요구 상항에도 별다른 불만이 없는 듯 즉시 대답해 주었다.

알겠소, 
사실 따지고 보면 천우 쪽의 입장에서도 별달리 불만이 있을 게 없는 일이었다. 비록 일방적인 조건이긴 했지만 설혹 조아가 그들을 모두 상대하지 못하거나 혹은 결전 중에 사망자를 내게 되어도 그저 상대방의 사정을 들을 수 없다 뿐이지 별달리 손해 볼 사항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조아로서는 천우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실수로라도 절대 사망자가 생겨서는 안 된다는 부담감이 더욱 커지게 되어 그녀 역시 긴장감을 느끼게 되었다.

치르넨 후작은 더 이상 갈팡질팡하지 않고 차분한 마음으로 정신을 집중시키며 다시 황금빛 오러와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치르넨 후작의 창백한 얼굴에는 또 다시 흥분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지금껏 여러 가지 혼란스런 상황 때문에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전되고 제대로 결투에 집중할 수 있게 되자 그제야 지금 이 순간이 평소에 그가 늘 꿈꾸었던 상황,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있어야만 했던 진정한 강자와 결투를 하게 된 순간임을 자각한 것이다.

치르넨 후작은 소드 컴플리터가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전력을 다한 대련 같은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도 당연한 것이, 그가 전력을 다하려면 상대 역시 그만한 수준이어야  얘기가 되는 데 안타깝게도 그 정도 수준을 지닌 사람은 대륙에 단 열세 명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나라에서건 끔찍할 정도로 애지중지 보호를 받고 있는 존재들로, 그들 간의 격돌은 마치 불문율처럼 각 나라에서 금기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고서는 그들은 만나볼 수도 싸워볼 수도 없는 존재들이었고, 치르넨 후작 역시 그들 중 한 사람이었기에 절대 강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부모에게 보호받는 갓난아이처럼 국왕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국외로 나갈 수도 없었고, 심지어 자국 내에 있는 소드 마스터와의 진검 대련도 금지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그것은 어느 나라에서건 그들의 비중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이 속해 있는 나라의 가장 큰 전력을 잃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치르넨 후작 역시 소드 컴플러터로 인정 받은 후 제대로 된 대련을 할 기회가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속에는 언젠가 한번은 자신과 같은 소드 컴플리터와 전력을 다해 검을 겨루어보고 죽는 것이 그의 감추어진 평생 숙원처럼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열두 명의 소드컴플리터 모두가 지니고 있는 소망일지도 몰랐다. 단 그 중 유일하게 어느 정도 그런 답답함을 해소하고 있는 인물은 바로 신성교국의 베르츠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었다.

치르넨 후작은 베르츠가 굳이 소드 컴플리터가 된 이후에도 전투 사제의 신분으로 남아 대륙 곳곳을 누비며 이교도들이나 흑마법사들을 처단하고 다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갈증과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한 측면이 강했다.

자이텔 공작 역시 소드 컴플리터로서 그런 베르츠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가 전투 사제의 신분으로서 여러 위험한 일에 앞장서는 것을 묵인해 주고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아무튼 상황은 처음 이곳에 들어섰을 때보다 그다지 좋지 않았고 또한 왕국의 미래가 걸려 있는 중요한 순간이었기에 개인적인 바람을 논할 때도 아니었지만, 일검의 부딪침만으로 자신을 피를 토하게 만들 정도의 절대 강자와 전력으로 겨룰 수 있게 된 것은 분명 그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치르넨 후작은 아직 자신이 졌다거나 혹은 패배할 거라는 생각 따위는 갖고 있지 않았다.

비록 한차례의 격돌로 상대방의 축적된 마나 양이 자신보다 더 높다는 것도 알 수 있었고 또한 그로 인해 손해를 본 것도 사실이지만, 소드 컴플리터 간의 대결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그러한 축적된 마나의 차이보다는 오히려 누가 완벽하게 환상검술을 펼쳐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대륙의 사대검가에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아시르 가문의 환상검술이 있었고, 그 환상검술의 최후의 비기라면 누구에게든 절대 맥없이 패하지 않을 자신 또한 있었다.

치르넨 후작은 여전히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자세로 조용히서 있는 조아를 바라보며 처음부터 그 환상검술의 비기를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힘으로 검을 부딪쳐봐야 자신만 손해일 듯했고, 더구나 약간의 내상까지 입은 마당이니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차핫!
결심이 서자 곧 치르넨 후작의 입에서는 우렁찬 기합이 터져 나왔고, 그와 함께 황금빛 오러를 전신에 두른 그는 그대로 조아를 향해 짓쳐들었다.

그 순간, 길쭉하게 늘어난 치르넨 후작의 오러 블레이드는 잔상을 끌며 조아의 목을 향해 쏘아져 나갔으나 조아는 성급히 마주쳐 나가지 않고 침착한 눈길로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검 끝을 주시하며 좀더 기다렸다.

여전히 빠르기는 하지만 쾌검이라 하기에는 많이 미흡한 속도였고, 오히려 얼마 전 이성을 잃고 달려들 때에 비해서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기에 분명 또 다른 변화가 있을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그녀 역시 상대가 공격한 시점에 맞추어 검을 펼쳐내야 하겠지만 만약에라도 그가 자신의 검세를 제대로 받아내지 못할 경우 뜻하지 않은 실수가 생길 수도 있기에 조금 위험하더라도 적절하게 그의 검을 받아내기 위해 최후의 변화를 보고 검을 전개하려는 것이었다.

물론 중원에서 화경 급에 이른 고수와의 대결이라면 그런 여유를 부린다는 것 자체가 거의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위험한 일이겠지만 그녀는 이미 이곳의 검사들이 전개하는 검법을 몇 차례 보았기에 이곳 세계의 검법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고, 또한 눈앞의 상대 역시 그러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도 느끼고 있었기에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치르넨 후작의 검 끝은 그녀가 가늠하고 있는 시점을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목 부위를 노리고 찔러오던 검 끝이 미세하게 갈라지며 하단 부위까지 노리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변화가 가미되어 자신의 양쪽 어깨도 표적으로 삼은 채 검강을 분출시킨 것이다.

산검의 형태로군, 하지만 예상대로 변화를 주는 시점이 너무 정직해.

중원의 검술은 확실하게 변을 위주로 한 환검인지 아니면 빠름을 위주로 한 쾌검인지가 발검 단계에서부터 결정되거나 아니면 마지막 순간에 드러나도록 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쾌에 중점을 둔 변환 검처라면 그러한 변화는 상대가 방비할 수 없는 마지막 순간에 이루어져야 그 효과가 극대화되는 것인데, 조아가  느끼기에 이곳의 검술은 그러한 묘용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검의 쾌와 변이 서로의 장점을 죽이고 있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즉 쾌와 변을 이루는 서로의 비중이 거의 차이가 없어서 생대방의 허를 찌르기에도 부족하고 하나의 묘용을 극대화시키지도 못하는 , 소위 이류나 삼류에 해당하는 어설픈 형태의 검술을 구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아가 느끼는 바와는 달리 치르넨 후작이 전개해 낸 환상검술은 최소한 아벨란 대륙 내에서는 같은 소드 컴프릴터들이 아니라면 절대 받아낼 수 없는 공포스러운 검법이었다.

그도 당연한 것이, 오러 브레이드 자체도 무척이나 다름없는데 그런 무시무시한 오러 블레이드가 갑자기 여러 갈래로 나위어 쏘아져오거나 혹은 어느 곳을 노리고 쏘아져오는지 모르는 상태라면 상대방은 막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저 눈감고 죽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 기사들이라면 몰라도 검의 극의를 깨달은 소드마스터들이나 소드 컴플리터의 경지를이룬 자들이 조아가 의문스러워하는 그런 검의 이치조차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치르넨 후작이 익힌 마나심법으로는 지금 정도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 정도는 버겁게 느껴질 정도로 아직 대륙의 마나심법 자체가 완벽하지 못했다.

중원식의 절대 쾌검을 구사할 수 있는 폭발력을 내기도 힘들었고, 진정한 환검의 극치를 이룰 마나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정도로 정순하지도 못한 것이다.

체내의 마나가 따라기지 못하는 무리한 검의 전개는 오히려 마나 역류를 일으키기 마련이었고, 그 상태에서 그나마 위력을 가장 극때화시킨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검술이 바로 현 대륙의 환상검술이었다.

더구나 중원에서라면 말도 안 되는 애기겠지만 아벨란 대륙은 내공심법이나 마나심법 자체가 없어도 육체적인 한계의 수련만으로도 기를 느낄 수 있고, 운이 따른다면 검강의 형태인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한 곳이었다.

때문에 검에 대한 깨우침의 본질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해도 기에 대한 운용이  그 깨우침을 따라가지 못하기에, 순순한 육체적인 측면이라면 몰라도 마나를 운용하는 검술의 형태는 아직 의지를 따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조아는 사방으로 짓쳐드는 치르넨 후작의 황금빛 검강을 향해 순간적으로 무형의 검강을 일으키며 침착하게 마주쳐 나갔다.

그 순간, 검과 검이 부딪쳤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엄청난 폭음이 연이어 터져 나오며 단순한 황금빛이 아닌 마치 태양이 폭발하는 것 같은 번쩍이는 불꽃들이 천지사방으로 비산했다가 순식간에 명멸해 갔다.

크어억! 마, 말도 안 돼! 오,오러 블레이드가''''쿨럭! 쿨럭! 
긴장한 시선으로 치르넨 후작과 정체 모를 여인의 대결을 주시하고 있던 로열 나이츠 기사단과 왕실 마법사들은 한순간 엄청난 폭음과 함께 잠시 눈을 멀게 할 정도의 섬광이 사라지고 나자 손잡이만 남은 롱소드를 부여잡은 채 멀찌감치 날아가서 연신 피를 게워내며 절규하고 있는 치르넨 후작의 모습을 볼수 있었다.

부서지다니''''마,말해 봐''''쿨럭! 분명''''내 오러 블레이드가 산산이 부서지는 걸 이 두 눈으로''''쿨럭! 쿨럭!
후,후작님!
저, 저럴 수가''''치르넨 후작님의 미스릴 검이 산산조각이 나버리다니!

도저히 믿지 못할 광경에 루단 왕국의 기사와 마법사들이 다급성을 토해 내며 우르르 치르넨 후작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몰려들자 치르넨 후작의 고통에 겨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뭐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쿨럭! 어, 어서''''공격해!
후작님! 말씀하지 마십시오. 일단 상세부터 치료해야 합니다. 힐!
급히 도착한 게일 백작이 6서클의 마도사답게 빨게 힐을 시전해 내자 치르넨 후작은 연신 입으로 피를 게워내면서도 다시 쥐어짜듯이 소리쳤다.

게, 게일! 내 명령을 ''''어길 셈이냐.
그, 그럴 리가요. 하지만 상세를 치료하고 난 후에''''
와, 왕국의 운명이 걸린 일이다. 저 괴물에게 조금이라도 회복할 시간을 주면 안 돼, 어서 '''''공격하란 말이다. 어서!
치르넨 후작의 뜻을 알아차린 게일 백작은 여전히 힐을 멈추지 않은 채 주위로 몰려든 기사들과 마법사들에게 명했다.
로열 나이츠 기사단과 마법사들은 전원 후작님을 보호하며 방어태세에 들어간다, 그리고 청기사들은 즉시 공격에 나서라!

후작님을 이렇게 만든 저들을 절대 살려두어선 안 된다!
알겠습니다!
감히 후작님을''''
쿵!쿵!쿵!쿵1
그 즉시 대기하고 있던 사피루스 급 타이탄 여섯 기가 그 육중한 몸체를 움직이며 조아를 향해 나섰고, 조아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잠시 난감해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겁이 나서는 아니었다. 다만 전날 저들과 비슷한 거대한 철 인형에 타고 있던 자가 동사왕의 공격을 받고 전신의 기혈이 모두 터져 죽어 나온 것을 보았기에 내부에 있는 자들을 해치지 않으려면 어떠한 방법으로 상대해야 할지 언뜻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뒤편에서 다시 일루아나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탑승한 기사들을 해치지 않으려면 타이탄의 다리를 자르거나 못 쓰게 만들면 돼요. 기사들은 인간의 심장에 해당하는 왼쪽 몸통 부위에 있으니까요.

그녀의 외침에 조아는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루단 왕국의 사람들이나 직접 타이탄을 움직이고 있는 계약 기사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다.

타이탄이 어떤 존재인가? 아무리 소드 마스터나 소드 컴플리터의 오러 블레이드라 하더라도 잘라내기는 커녕 타이탄의 몸체를 일부 꿰뚫는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물며 그 두꺼운 다리를 잘라내자면 타이탄을 나무토막처럼 가만히 세워놓고도 오러 블레이드를 수차례나 정확하게, 집중적으로 가격하지 아니하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타이탄은 움직이지 못하는 단순한 쇳덩어리가 아니라 마나를 다루는 소드 익스퍼트 급의 기사가 자기 몸처럼 움직일 수 있는 인간형 마법 병기였다. 아무리 오러의 막을 두른 소드 컴플리터라 해도 타이탄이 휘두르는 엄청난 파괴력이 담긴 무기에 정면으로 가격당한다면 살기를 바랄 수 없었다.

그런 타이탄 여섯 기를 눈앞에 두고 달랑 검 한 자루만을 들고 있는 여인에게 타이탄의 다리를 잘라서 무력화시키라고 소리치고 있다니!

물론 그녀가 그들의 우상인 치르넨 후작을 무참히 패배시킨 것도 보았고, 후작의 말처럼 괴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물이라도 혼자서 타이탄 여섯 기를 감당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만은 절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믿었고, 게일 백작 역시 그렇게 믿고 있었기에 그들 여섯 기의 전장의 청기사들로 하여금 먼저 나서게 한 것이었다. 또한 여섯 기의 타이탄이 마음껏 움직이려면 로열 나이츠 기사단은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었기에 기사들을 후방에 대기시칸 것도 당연한 조치였다.

그렇게 게일 백작의 명령에 따라 앞으로 나서던 여섯 기의 청기사들 중 두 기는 조아가 있는 곳으로 계속 나아갔고, 나머지 네 기는 조금 나아가다 멈춰 서서 천우 등이 서 있는 곳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타이탄이 비록 탑승한 계약 기사의 의지에 따라 인간처럼 움직인다고 해도 그 큰 덩치가 인간의 움직임을 완벽히 따라갈 수는 없었다.

가지고 있는 출력에 따라서는 직선으로 돌진하는 고속 기동성이나 변화가 없는 단순한 무기를 휘두르는 동작 등은 오히려 계약 기사의 본신 능력을 뛰어넘는 순발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세밀함이 부족하기에, 그 엄청난 덩치로 좁은 공간에서 한 사람을 상대하는 경우라면 오히려 서로에게 방해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우선 두 기만 앞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또한 상대가 도망 다니지만 않는다면 한 기의 청기사만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실질적인 싸움에서는 두 기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더욱이 상대편에서는 7서클의 대마도사인 일루아나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으므로 혹시라도 그녀가 마법을 펼칠 기미를 보인다면 그 즉시 돌진을 감행해 그녀를 막아야 하기 때문에 만약을 대비할 필요도 있었다.

물론 어차피 모두 처리해야 할 자들이기에 즉시 공격을 감행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우선 최상의 방법은 아군에게 아무런 피해가 없도록 처리해야 하는 것이므로 섣불리 행동할 수는 없었다.

만약에라도 치르넨 후작을 상하게 한 여인이 자신들을 상대하지 않고 피해서 곧장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든다면 자신들은 구경만 할 뿐 그들을 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가장 위험한 존재인 그녀를 제압하는 것이 우선이었고, 그녀가 제압되고 난 뒤 그때 가서 다른 무리들을 처치하도 늦지 않는다는 판단이었다.

그러한 의도 하에 두 기의 거대한 덩치를 지닌 타이탄들이 접근해 오자 조아는 치르넨 후작을 상대할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먼저 스스로 자신의 잠검에 검강을 한껏 쏟아 부었다. 지금은 정묘한 검술을 발휘해야 할 때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몸통만큼이나 두꺼운 쇠기둥을 잘라내야 할 때이기에 그녀는 아낌없이 힘을 쓰기로 한 것이다.

그녀가 작정하고 검강을 뿜어내자 물경 일 장여에 달하는, 이곳 단위로는 3베드(3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길이의 푸르스름한 검강이 그녀의 검을 따라 쭉 솟아올랐다.

쿵!쿵!
그 모습에 거침없이 다가서던 두 기의 청기사들은 우뚝 멈추어 섰고, 또다시 뒤편에서는 경악성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세, 세상에! 물경 3베드에 달하는 오러 블레이드라니'''''
저, 저 여인''''정말 인간이 맞긴 한 건가?

조금 전 치르넨 후작이 전신에 황금빛 오러를 두르고 그 빛으로 공동 내부를 물들였다 해도 그가 실제로 만들어낸 오러 블레이드의 길이는 고작 해봐야 그가 지녔던 롱소드의 길이 정도였다. 그러나 그 정도만 해도 웬만한 소드 마스터가 만들어낼 수 있는 오러 블레이드의 길이에 두 배나 되는 엄청난 길이였는데, 이 순간 조아가 만들어낸 검강은 무려 그 세 배에 달하는 길이 였으니 모두 경악으로 입이 떡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것은 그녀가 체내에 보유한 마나의 양이 치르넨 후작의 세 배에 이른다는 얘기였고, 그건 이곳 세계의 기사들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이었다.

사실 조아의 냉공은 현재 물경 6갑자에 이르러 있었고 그 정도라면 동사왕이 지닌 내공에 비해서도 크게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동사왕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큰 경지 차이가 있었지만, 일전에 천우의 도움으로 5갑자에 해당하는 내공을 얻은 후 그녀는 깨달음의 벽을 넘어 다시 6갑자로 진일보한 상태였다.

그리고 6갑자의 내공으로 전력을 대해 붐어내는 검강이라면 8서클의 물리마법까지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진, 현재 아홉 기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미드 급 타이탄이 아닌 이상 다른 타이탄들의 다리 아니라 거대한 몸통까지도 충분히 잘라낼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루단 왕국의 기사들도 오러 블레이드의 길이가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그 길이에 따라 검에 어떤 위력이 더해지는지 잘 알고 있기에 이 순간 일루아나가 했던 말이 그냥 한 말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증명하라도 하려는 듯이 조아는 일 장이 넘는 길이의 검강이 맺힌 장검을 가슴 부위로 끌어당겨 수평으로 치켜든 채 그들의 알아들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호기로운 음성을 발했다.

철인형의 다리를 자른다고 저를 원망하지는 마세요! 타앗!
그 외침과 함께 조아의 신형이 다가서다가 우뚝 멈춰버린 두기의 타이탄을 향해 쇄도해 들었고, 그 기세가 마치 검은 제비가 날아드는 듯 날렵하고 빨랐기에 놀람과 당황으로 인해 멈추어 서 있던 두 기의 계약 기사들은 황급히 청기사들이 들고 있던 거대한 검을 쇄도해 들어오는 조아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쿠앙! 쾅!
하지만 조아의 신형은 그들 청기사들을 내리치는 검을 교묘히 빠져나가며 그들 앞에 도착했고, 청기사들이 내리친 검들이 공동의 바닥을 직격하며 커다란 소음을 만들내는 사이에 그녀의 몸은 일장여에 달하는 푸르스름한 검강이 맺힌 검을 휘두르며 질풍처럼 몸을 회전시켰다.

철컹! 철컹!
곧 기묘한 음성이 뒤따라 이어지며 두 기의 타아틴 앞에서 한 차례 몸을 회전시킨 조아의 신형이 곧바로 그 사이를 빠져나가 다시 뒤쪽에 있는 네 기의 타아탄을 행해서 쏘아져 나갔다.

마, 막아!
에잇!
뒤쪽에 있던 네 기의 타이탄에 타고 있던 계약 기사들은 조아의 신형이 앞선 두 기의 타아탄을 스치듯이 빠져나오고도 여전히 나는 듯이 접근해 오는 모습을 보자 미처 경황을 살필 겨를도 없이 다급한 음성과 함께 그들 역시 무작정 거대한 검을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마구잡이식으로 휘두르는 검에 맞을 조아가 아니었다. 그녀는 수월관음보를 밟으며 교묘하게 몸을 비틀어 스치듯이 네 개의 거대한 검 사이를 빠져나갔다.

곧 그녀의 몸이 또다시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질풍 같은 속도로 회전을 시작하자 여전히 일 장 길이의 수월검강을 유지하고 있던 그녀의 장검 또한 그 회전에 따라 거대한 강륜을 형성한 채 네 기의 타아탄을 휩쓸어가기 시작했다.

철컹!철컹!
엇!
이,이게''''
또다시 좀전에 울렸던 기묘한 소음이 연달아 울리며 뒤이어 계약 기사들의 당혹스러워하는 짤막한 음성들이 이어졌다.
쿠앙!쿠앙!쿠아앙!
곧 로열 나이츠 기사단과 루단 왕국의 왕실 마법사들은 타이탄의 그 거대한 동체가 앞 다투어 공동의 내부 바닥에 사정없이 꼬꾸라지는 모습을 볼 수 었었고, 그 모습을 본 순간 더 이상 놀랄 여력도 없는지 그저 찢어져라 두 눈만 부릅뜬 채 입을 딱 벌리고 서 있을 뿐이었다.

조아의 신형은 어느새 검강을 거두어들인 채 이리저리 스러진 거대한 타이탄들의 동체를 뒤로하고 그들 앞에 차분한 태도로 서 있었다.

그때, 쓰러진 타이탄들의 동체에서 마치 튕켜지듯이 계약 기사들이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즉시 등을 보이고 있는 조아를 향해 이성을 잃고 덮쳐들며 고함을 질러댔다.

이 마녀! 우리도 죽여라!
내 청기사를 저 지경으로'''''죽어!
조아도 갑자기 등 뒤에서 그들이 나타나며 덮쳐들 줄은 몰랐는지라 잠시 흠칫했지만, 곧 그들의 욕설에 고운 아미를 찡긋하고는 그 즉시 몸을 돌려 덮쳐드는 그들의 검세를 맞받아쳤다.

수월휘산!
물에 뜬 달그림자가 산을 비춘다는 초식명처럼 그 즉시 그녀의 검이 둥근 원을 그려내자 곧 은은한 달빛과도 같은 검기들이 덮쳐오는 여섯 명의 계약 기사들을 덮어씌워 가기 시작했다.

차차차차차창!
크윽!
컥! 어찌 인간의 검술이'''''
조아를 향해 덮처들던 여섯 명의 계약 기사들은 고통스런 신음성과 함께 사방으로 튕켜져 나갔다. 조아가 손속에 사정을 두기는 했지만 비겁하게 뒤에서 욕을 하며 달려든 죄로 검을 쥐었던 손들을 모두 파열되어 지닌 검들마저 놓쳐버린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들이 체내에 쌓은 마나의 기운은 치르넨 후작과 비교하면 매우 미약한 수준이었기에 그처럼 마나 충격에 의한 내상은 별로 심하지 않았지만, 대신 도저히 검을 잡고 있을 수 없는 충격으로 인해 손이 파열되거나 심지어는 손가락이 꺾인 자들도 있었기에 검을 사용하는 기사들로서는 결코 작은 부상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들은 기사로서 죽는 순간까지 결코 놓아서는 안 될 검을 놓쳤다는 사실에 치욕스러움을 느끼고 있었기에 고통스런 와중에도 분노로 인해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자신들의 분신이자 친구이며 생명처럼 여기고 있는 청기사들이 모두 다리가 잘려 고철이 되어버린 분노가 그들의 이성을 잃게 만들었고, 또한 그 분노로 인해 앞뒤 가릴 것 없이 달려들었다가 최후의 자존심이자 명예인 검까지 놓쳐버렸으니 그들의 심정은 죽음을 맞이한 것보다도 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치료를 받았지만 여전히 창백한 안색으로 모든 상황을 지켜본 치르넨 후작의 입에서 발악적인 고함이 터져 나왔다.

어서''''모두 공격해! 상대는 인간이 아니야. 저 괴물을 ''''''처리하지 못하면 왕국은 끝이란 말이다.
그 말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게일 백작의 입에서도 악물린 고함이 터져 나왔다.

마법사들 모두 집중 공격! 기사들 모두 돌진해!
그 순간 몇몇 마법사들은 너무 놀라 정신 집중이 흐트러져 미처 준비해 두었던 마법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반수 이상의 마법사들은 일제히 조아를 향해 가장 자신하는 공격마법을 퍼붓기 시작했다.

파이어 볼!
프리임 애로우!
라이트닝 볼트!
게일 백작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4,5서클 정도인 루단 왕국의 왕실마법사들이 그들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대인 공격 마법을 위해 일제히 시동어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로열 나이츠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 역시 전장의 구호를 외치며 일제히 우렁찬 함성과 함께 조아를 향해 돌진했다.

국왕 폐하께 영광을! 명예로운 죽음을!
우와왓!
조아는 갑작스럽게 엄청난 기의 파동이 느껴지자 황급히 전력을 다해 호신강기를 펼쳐냈다. 그러자 그 즉시 그녀가 두른 호신강기 위로 무수한 불덩이와 얼음 화살, 그리고 뇌전들이 날아와 꽂혔다.

퍼펑! 쩌정! 찌지직!
그녀가 펼쳐낸 호신강기 위로 갖가지 마법들이 작렬하며 온갖 굉장한 소음과 화려한 시각적 효과를 연출했지만, 비록 수가 많다 해도4,5서클의 마법사들이 펼쳐내는 공격마법 정도로는 엄밀한 호신강기를 두른 그녀에게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했다.

모양만 화려한 공격에 이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백여 명의 검을 든 자들이 일제히 달려드는 것을 보고 조아는 입술을 꼭 깨물며 호신강기를 거두고 그대로 그들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비록 수가 많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위협을 느낄 만한 실력자들은 이들 중 없어 보였고, 또한 그녀의 호신강기를 뚫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게 뻔했기에 이 싸움에서 그녀가 원하던 실전감각의 묘용을 전혀 찾을 수 없을 듯싶었다.

더욱이 호신강기의 반탄력은 뜻하지 않은 피해를 줄 우려도 있었으므로 한 사람의 사망자도 내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그들의 검을 직접 받으며 일일이 제압해 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훗날 아벨란 대륙에서 흑안의 소드 퀸이라 불리게 될 조아의 실력이, 경이로움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할 말을 잃은 채 멍청한 모습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로크 일행들 앞에서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었다.



9장  황혼의 숲


슈앙!
한 기사의 검이 조아가 거볍게 숙인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며 바람 소리를 이끌었다.

터엉!
크윽!
그러자 조아의 검 끝이 하프 플레이트 메일로 상체를 보호하고 있는 기사의 갑옷 위를 찌르며 둔탁한 소리를 내었고, 그 즉시 기사는 전신을 울려오는 충격을 느끼며 뒤로 날려갔다.

쉬익! 쉭!
그 순간 가볍게 비튼 그녀의 허리와 목 부위로 스쳐 지나가는 두 개의 검이 있었고, 그녀의 검이 목을 찔러왔던 기사의 갑주 주위를 가볍게 찍음과 동시에 그 역시 고통스런 신음성과 함께 멀찍이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조아가 미끄러지듯 뒤로 빠진 빈 공간에 다시 검을 찔러 넣은 채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금발의 기사를 보며 조아가 속으로 외쳤다.

마지막!
터엉!
키악!
유령처럼 뒤로 미끄러지던 조아의 몸이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어느새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 찌른 검에, 미처 방비하지 못하고 갑옷의 옆구리를 찔린 그가 유난히 괴상한 신음성과 함께 다른 모든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십여 보 이상을 튕겨 나가더니 사정없이 공동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조아는 그들이 금속으로 만든 튼튼한 갑주로 상체를 보호하고 있었기에 마음 놓고 그들에게 일 검씩을 선사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들은 몸에 구멍이 뚫리는 신세는 면했지만 모두가 타이탄이 휘두른 검에 찔린 듯한 충격을 느끼며 십여 보 이상씩 나가떨어져야만 했다.

하지만 실제 그들은 조아가 절묘하게 운용한 기운으로 인해 멀찍이 밀려난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아의 검이 닿을 때마다 엄청난 충격이 느껴졌던 것은 격산타우의 수법으로 약간씩 밀어 넣은 조아의 경력이 그들의 내부에 있는 마나에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전격마법이나 벼락을 정통으로 맞은 느낌과 흡사했고, 그들은 조아의 검이 닿을 때마다 그러한 충격으로 몸이 굳어져 특별히 몸에 부상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동의 바닥을 뒹굴며 제대로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한편 백여 명에 해당하는 기사들의 물밀 듯한 공세를 막거나 피해 내며 일일이 제압한 그녀 역시 무척이나 힘들었는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긴장된 전투를 벌였기 때문인지 마음은 무척이나 후련한 상태였다.

그들을 죽거나 크게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긴장감만 없었다면 전혀 힘들 것도 없는, 그리고 무의미한 전투였겠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부담감은 실력 차이가 많이 나는 무리들과의 싸움을 그녀 나름대로 상당히 의미 있게 그리고 성과도 있게 한 싸움이 되도록 만들어주었다.

조아는 마지막 기사를 쓰러뜨리고 난 후 검이 아닌 지팡이를 든 채 한쪽에 모여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은 어찌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바로 그때, 그녀의 귀로 천우의 음성이 들려왔다.

수고하였소, 이제 되었으니 돌아오도록 하시오.
천우의 음성에 그녀가 뒤돌아보자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아는 쑥스러움에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저들은 아직 소녀와'''''
그들은 이미 당신에게 마법공격을 하였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으니 당신에게 패한 것과 다름없소, 그러니 돌아와도 상관없소.
네, 알겠어요.

그녀가 등 뒤로 장검을 꽃고 일행이 있는 쪽으로 오자 천우는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여전히 창백한 안색으로 넋을 놓고 있는 치르넨 후작을 향해 다시 말했다.

처음에 제시한 조건대로 당신들은 우리 중 한  사람에게 모두 패하였소, 그리고 당신이 말한 것처럼 당신들 중에 죽은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소, 그러니 이제 당신이 조건을 이행할 차례요.

이제 당신들이 이곳에 오게 된 연유에 대해서 상세히 말해보시오. 그것을 듣고 당신들을 도울지 말지를 결정하겠소, 만약 당신들을 돕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들은 살게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신들은 모두 이곳에서 죽게 될 것이오. 물론 말하지 않아도 죽소, 강제로 알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지금의 상황이라면 당신들에게 손해 보는 제안은 아닐 것이오.

어찌'''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대륙의 곳곳에는 먼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는 워프 게이트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것들은 국가에서 엄중히 관리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 지역의 워프 게이트나 군사용 워프 게이트는 아무나 함부로 이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중요 지역을 제외하고 누구라도 막대한 비용을 지불할 능력만 있다면 어느 정도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워프 게이트도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러한 지역에 설치된 워프 게이트를 공용 워프 게이트라고 불렸다.

그러한 공용 워프 게이트들은 국가의 주요 수입원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마법사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곳이었다.
고위 마법사들일지라도 함부로 텔레포트를 감행하는 것은 어떤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를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으므로, 그 때문에 각 나라에서 운용하고 있는 워프 게이트 지역은 마법사들에게 가장 안전한 텔레포트 지역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안정의 대가로 공용 워프 지역으로 텔리포트한 마법사나 일행들은 도착 후에 결코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도록 되어 있었다. 비록 워프 게이트를 직접 이용하는 것에 비해서는 무척이나 저렴한 비용이라지만, 그것 역시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기에 그러한 워프 안전 지역을 이용하는 것도 상당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대룩에는 국가에서 운용하는 워프 게이트나 워프 안전지역 외에도 텔레포트 좌표가 공개되어 있는 곳이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그러한 지역으로의 텔레포트는 절대적 금기 사항이나 마찬가지였다.
텔레포트 좌표가 알려져 있는 거의 모든 지역은 그러한 지역을 포함하고 있는 곳의 영주 입장에서 보자면 무척이나 불안한 요소가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각 영주의 입장에선 그러한 공개 좌표 지역이 자신의 영지 내에 있다면 만약을 위해서라도 엄중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필요에 따라서는 위험 요소를 더욱 증거시켜 놓는 경우도 많았다.
어차피 영주들이나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는 안전한 곳이 있었기에 많은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그것을 사용하면 되는 것이지, 자신의 영지 내에 불안 요소를 남겨둘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다만 큰 상단이나 길드 같은 곳에서 지방 영주와의 계약을 통해 사설로 안전 지역으로 운용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그것은 전체 공개 좌표 지역에 비하면 아주 적은 수일 뿐이었고, 또한 당사자들이 아니라면 그 역시 사용이 엄중 금지되어 있었기에 결국 텔레포트가 가능한 마법사라도 대륙에서 텔레포트 할 수 있는 지역은 극히 제안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루단 왕국의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체르넨 후작의 영지인 아시르에도 그러한 공개 좌표 지역이 한 곳 있었고, 일명 황혼의 숲이라 불리는 그곳은 아시르의 동쪽에 있는 꽤나 크고 울창한 숲으로 드래곤 산맥과도 연결되어 있는 곳이었다.
특히 아시르 지역은 왕국의 수도와도 가깝기에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절대 소홀히 방치할 수 없는 곳이었고, 어차피 수도가 아닌 이상 외부인이 텔레포트로 아시르 지방에 올 일도 거의 없었기에 그곳은 남들이 텔레포트 할 수 없도록 폐쇄되어야 마땅한 곳이었다.
하지만 특별한 경계나 보완 조치는 미련해 두고 있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주 오랜전부터 황혼의 숲 전역에 사악함을 정화시키는 신성켤게가 펼쳐져 있어 텔레포트가 절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신성결계는 황혼의 숲에 어려 있는 사악한 기운을 정화시키는 역활도 하지만, 곧 숲 내부에 흐르는 마나의 기운 자체를 바꾸어놓는 역할도 하기에 그러한 지역으로의 텔레포트는 자살행위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또한 이 지역의 신성결계 유지는 가이아 신정에서 대대로 관리해 오고 있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기에 신성결계만으로도 충분히 공개 좌표 지역의 감시가 가능했던 것이다.
비록 가이아 교단의 세가 더없이 위축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어느 누구도 교단의 신관들을 함부로 해칠 수는 없었고, 그것은 전시라도 마찬가지였기에 사실 영지나 국가에서 직접 공개 좌표 지역을 관리하는 것보다는 교단에서 관리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안전하면서도 확실히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방편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다만 영지나 국가에서도 그러한 교단에 어느 정도 지원을 해주어야 마땅한 것이겠지만 현 루단 왕국의 실정 상 그러한 지원이 끊긴 지는 이미 오래였다. 더구나 나날이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교단에서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아무튼 황혼의 숲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숲 내부의 사악한 기운으로 인해 일반인들의 발길도 없는 곳이었고, 또한 외부에서 누군가 텔레포트를 해올 수도 없는 지역이었기에 태고의 고요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번쩍!
한데 그러한 황혼의 숲 한가운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숲의 중간 지점에 해당하는 아득한 상공 위로 엄청난 마나의 유동과 함께 갑자기 휘황한 빛 무리가 일었고, 곧 그러한 빛 무리가 사그라지자마자 갖가지 괴상한 비명성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으허억!
히히히힝!
뭐, 뭐야?
빛이 사라지며 황혼의 숲 상공 위에 나타난 무리들은 백여 명이 넘는 사람과 무언가를 잔뜩 짊어진 말들이었고, 그들은 공동 내부의 마법진들이 갑자기 빛을 발하다가 사라지고 나자 자신들이 아득한 허공 중에 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기함을 토하는 중이었다.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말과 사람 가릴 것 없이 놀라서 아우성 치는 그들의 귀로 천우의 음성이 또렷이 들려왔다.
곧 내려갈 테니 놀라지들 마시오. 그리고 마법사들도 굳이 마법을 시전할 필요는 없소.
천우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 상황에서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리버스 그레비티는 실력이 안 되니 말할 것도 없고, 플라이 마법도 허공 중에서 떨어지면서 발휘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인간의 정신력이 가질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었다.
물론 그들은 허공 중에 머물러 있을 뿐 결코 떨어지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놀라 그러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허공 중이니 당연히 떨어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힘이 깃든 것인지 마음속을 울리는 그 음성에 그들은 곧 마음이 진정됨을 느낄 수 있었고 또한 그 말의 의미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 파악은 오히려 또 다른 경악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이럴 수가! 마치 새털처럼 천천히 내려가고 있다!
 
그, 그보다 여기는'''''

맙소사! 이 많은 사람과 말들이 함꺼번에 텔레포트 되다니!
아무리 공동 내부에 있는 마법진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이것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시 분분히 경악서들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누군가의 표현처럼 새털 정도는 아니지만 충분히 안전하다고 느낄 정도의 적당한 속도로 숲을 하강하던 인마들이 결국 모두 숲의 지면을 밟을 수 있었다.

히히히힝!

그렇게 지면에 발이 닫자 말들이 흥분하여 투레질을 하는 가운데 몇몇 마법사들은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기도 했고, 개중에는 공포가 완연한 눈빛으로 천우를 바라보는 자도 있었다.
지금의 상황은 얼마 전까지 공동의 내부에서 충분히 놀랐던 상황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말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그들은 더 이상 천우나 조아 등을 같은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그러한 표정들이나 반응은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기에 천우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담담한 어조로 자신과 가까이 서 있는 치르넨 후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곳이 말했던 장소가 맞는지 보시오.
천우의 물음에 치르넨 후작 역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크게 소리쳤다.
여,여기는 분명 황혼의 숲! 내게 아시르 지방에 황혼의 숲이 있느냐고 물은 이유가 바로 이곳으로 텔레포트 하기 위해서였단 말이오?

그렇소,

그,그런''''이곳은 절대 텔레포트 할 수 없는'''''
하지만 치르넨 후작은 곧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맥없이 중얼거려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왔지 않는가, 도대체 꿈이 아니고서야'''''
그러다 또다시 큰소리로 외쳐 물었다.
귀하는 이곳에 마나의 흐름과 성질을 바꾸는 신성결계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잠시 살펴보았더니 느낄 수 있었소,
사. 살펴? 설마 그 공동에서 수백 크로나나 떨어져 있는 이곳을 살폈다는 얘기는'''
텔레포트 전에 위험 요소를 살피는 것은 필수라 하더구려,
그럼''''그 때문에 결계가 미치지 못하는 아득한 허공 중으로 모두를 이동시킨 것이란 말이구려.
천우가 고개를 끄덕여주자 치르넨 후작은 헛웃음밖에 안 나온다는 듯 실성한 사람처럼 피식거리며 다시 독백하듯이 말했다.
허헛! 말과 사람을 포함해 이백이 넘는 숫자를 동시에 텔레포트 시티고''''그것도 모자라 결계가 미치지 못하는 아득한 상공에 이동시킨 후 알 수 없는 힘으로 모두 안전하게 착지시켰단''''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는지 그는 눈을 부릅뜨며 천우에게 진지한 어조로 다시 외쳐 물었다.
이게 정녕 꿈이  아니라면 귀하는 우리 모두를 시아센 제국의 황궁 위로 이동시킨 후 그곳에 내려줄 수도 있겠구려, 그렇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그런 걸 바라지 마시오.
당신은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하지 않았소? 그 때문에 그곳에 있던 보물들도 몽땅 가져오게 한 것 아니오? 한데 왜 그런 일은 바라지 말라는 것이오.
마치 따지듯이 묻는 후작의 말에 천우는 여전히 담담한 어투로 대답해 주었다.

어떻게 돕겠다고 아직 구체적으로 말한 적 없소. 보물들 역시 줄 수 있다고 했지 아직 주겠다고 한 것은 아니오. 어떻게 도울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고, 당신들 역시 내가 말한 조건에 응할지는 그대들의  제1왕자라는 자가 결정할 사항이라 하지 않았소, 아직 서로 간에 완전한 거래가 성립된 것이 아니니 섣불리 바라지 말라는 것이오.
하지만 치르넨 후작은 여전히 정색한 표정으로 오히려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우리를 돕는 대신 당신들의 동료로서, 그리고 우호적인 관계로서 당신들의 일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는 사항  말이오? 도대체 당신들이 하려는 일이 무엇이오? 왜 구체적으로 말해 주지 않는 것이오? 그 일이 우리 왕국에 피해가 되는 일만 아니라면 나는 당연히 왕자님께 애원을 해서라도 당신들의 조건에 응하도록 허락을 구해 낼 것이오. 그러니 지금이라도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시오.
하지만 천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서두르지 마시오. 그리고 당신이 말한 그 1왕자 역시도 내 조건을 수용할 자격이 있는지는 만나보고 결정할 것이오.
그''''
천우는 치르넨 후작의 두 눈에 얼핏 분노가 떠오르는 것을 보자 냉담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나는 당신들에게 전혀 아쉬울 게 없소, 또한 당신의 윗 사람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라고 단정 짓지도 마시오. 당신과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의 수하들 정도의 실력을 가진 무인이라면 나 역시 전에 있던 곳에서는 수십만을 수하로 두고 있던 사람이오. 그러니 그대의 상전인 1왕자라는 사람에 비해서도 결코 낮은 위치에 있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또한 내가 있던 대륙의 제국 황제라 해도 내 위에 두지는 않았소, 내 말뜻을 이해했다면 내 언행에 화를 내기보다는 그대의 윗사람에게도 그 사실을 주지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오.


천우의 말에 치르넨 후작의 두 눈에 떠올라 있던 분노의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온통 경악만이 그득했다.
물론 치르넨 후작으로서는 결코 화를 내거나 할 처지가 아니었지만, 자신은 몰라도 1왕자를 자칭하는 말에서도 경어나 존중하는 표현이 전혀 섞여 있지 않았기에 그만 무의식적으로 분노가 표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다면 그는 소드 익스퍼트 급의 기사들 수십만을 수하로 두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태어나서 지금껏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도 가장 황당한 말이었다. 하지만 치르넨 후작은 그런 황당한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고 느껴졌기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그가 알기로 아벨란 대륙 전체의 소드 익스퍼트 급 기사들은 다 끌어 모아도 1만을 채울 수 없을 정도였다. 이제 막 검을 든 순기사까지 몽땅 포함해야만 아마도 수십만이란 숫자가 나올 것이다. 그것을 생각해 볼 때 천우의 말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얘기였지만, 사실이라면 그의 말대로 대륙의 황제조차도 감히  그에게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문득 생각한 것이지만, 지금 그가 보여준 능력이나  그와 함께 있는 괴물 같은 여검사의 순수한 능력만 해도 당장 제국의 대공이나 공국의 공왕자리 정도는 우습지도 않게 꿰찰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최하로 생각해 볼 때가 그런 것이고, 황제가 황제의 자리를 내어줄 수는 없으니 그렇다는 것이지 개인적인 능력만으로 급수를 매긴다면 충분히 황제 급 이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 후작은 결코 밝지만은 않은 표정으로 약간은 풀이 죽어 말했다.
알겠소''''솔직히 당신들이 정말 인간이라고 믿기지도 않지만 충분히 자격이 있는 존재임은 인정하겠소, 하지만'''1왕자님을 뵙게 되면 최소한 예의는 지켜주시면 고맙겠소.
그렇게 하리다.
천우의 선선한 대답에 치르넨 후작은 억지로 인상을 펴며 다시 말했다.
한데 왜 굳이 이곳으로 모두를 이동시킨 것이오?
당신은 보물들을 얻게 되었을 경우에도 그 1왕자라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실대로 알리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그렇긴 하오만, 그것을 어찌''''
당신의 얘기를 들어보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사항이오. 그리고 내 생각에도 그대들 왕국의 사정 상 아직은 보물의 존재난 우리에 대해서 밝히지 않은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소,
치르넨 후작은 그의 심계 역시 능력만큼이나 추측할 수 없을 만큼 깊다는 것을 느꼈고, 또한 그가 여러모로 호의를 보이는 것이 결코 것짓된 행동처럼 느껴지지는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일단 내 영지의 성으로 갑시다. 이곳은 내 영지에 속한 곳이지만 내가 황실에 머물고 있기에 현재는 영주 대리를 두어 관리하고 있소, 일단 이곳의 성에 머물러 계시면 나는 왕성으로 가서 로시안 제1왕자님께 말씀드리고 당신을 만나뵐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겠소,
그렇게 하시오.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이곳에 왔기에 선선히 승낙해 주자 치르넨 후작은 여전히 당혹스런 표정들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기사와 마법사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너희들도 알고 있겠지만 지금부터는 모두가 입조심을 해야 한다. 우리는 허탕만 치고 돌아온 것이고, 우리가 갔던 곳은 아무것도 없는 쓸모없는 동굴이었을 뿐이다. 그리고''''함께 온 사람들은 물론 지금껏 보고 겪었던 모든 일에 대해서도 절대 말해서는 안 된다. 이번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모두 잘 알고 있을 테니 더 이상 따로 말하지 않겠다. 일단 영주성으로 갔다가 다시 왕궁으로 복귀할 것이니 그리 알고 지금 즉시 이동한다. 출발!
치르넨 후작의 출발 명령에 모두가 서서히 숲에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때까지 좋지 않은 안색으로 서 있던 게일 백작이 치르넨 후작 곁으로 다가서며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이번 일을 다른 귀족들에게 사실대로 알리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만, 청기사들을 복귀시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어찌 설명하실 요량이신지''''
치르넨 후작도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곧 주위를 둘러보고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타이탄들이 보이지 않는군.
그때 곁에 있던 천우가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그 타이탄이란 것들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함께 가져간다면 곤란을 겪을 것 같아 남겨두었소,

그렇기는 하오만''''우리가 왕궁으로 돌아간 뒤에도 타이탄들이 복귀하지 않으면 그에 대해 마땅히 해명할 말이 없으니 문제인 것이오, 또한 다리가 잘리기는 했지만 타이탄들은 왕국의 귀중한 재산이라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소,
그것을 가져오는 것은 필요하면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오.
그리고 정 곤란하다면 해결책 한 가지를 알려주겠소,
천우의 말에 치르넨 후작은 반색을 했다.
해결책이 있단 말이시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오?
당신들이 갔던 곳을 매우 위험했던 곳으로 말하면 되오, 그과정에서 타이탄들이 소실된 것으로 적당히 말하면 될 것이오.
하지만 그러한 천우의 말에 치르넨 후작은 곧 실망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게'''말로만 해서 될 사항이 아니오. 그리고 타아틴 여섯기가 전부 소실될 정도로 위험한 곳이었는데 그 계약 기사들이 멀쩡하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결정적으로 타이탄이 소실될 정도로 위험한 것이 무엇인지를 어찌 설명한단 말이오? 또한 그 정도 희생을 치르고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는 것은 1왕자님을 곤경에 빠지도록 만들 뿐이오.
단순히 손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적당한 대가를 얻은 것으로 하시오, 1왕자가 추궁을 당하지 않을 정도의 물건을 내어주겠소, 그리고 타이탄이란 것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증명할 만한 것도 가져가면 될 것이오.
그가 1왕자가 추궁을 면할 정도의 물건을 내어준다는 말에는 수긍을 했지만, 타아탄을 모두 잃을 수밖에 없었던 증거가 될 만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설마 저 괴물 같은 여검사를 데려가라는 말은 아니겠지 ?
치르넨 후작이 내심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물으려는 순간, 천우에게서 먼저 질문이 흘러나왔다.
혹시 이곳 황혼의 숲에 대한 이야기를 아시오?
뜬금없는 그 물음에 치르넨 후작은 흠칫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해 주었다.
황혼의 숲에 대한 전설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소, 지금은 평범한 숲이지만 고대에 이곳에는 귀족 급의 뱀파이어가 머물던 고성이 있었다 하오, 그리고 당시 아무도 그 고성의 주인의 뱀파이어임을 눈치 채지 못했지만, 당시 대륙의 현자이자 9서클의 대마법사였던 제 카이드가 그의 정체를 알아내고는 그 뱀파이어를 처치했다고 하오.
그리고 그 결전의 와중에 그 고성은 모두 무너졌지만 사악한 기운이 대지에 남아 이곳은 오랫동안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저주의 땅이 되었다 하오, 하지만 이후에 가이아 교단에서 이곳 아시를 지방에 들어오면서 저주받은 이 땅을 정화시키는 신성결계를 펼쳐놓아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지금의 숲이 이루어졌다는 전설이오. 그리고 저주받은 뱀파이어가 있었다는 의미로 이 숲은 황혼의 숲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알고 있소,
천우는 치르넨 후작이 설명하는 동안 레어 안에서 아티오네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주 오래 전인데 당시 내가 젠 카이드란 이름으로 인간 세상에서 유희를 하다가 아시르란 지명을 갖고 있는 곳에 뱀파이어 한 놈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해지, 뱀파이어란 인간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종족을 말하는데, 원칙적으로 그런 놈들은 저급한 놈들이지만 그래도 귀족 계급에 있는 놈들은 함부로 피를 빨지 않고 반려라는 대상을 두어 함께 오랜 삶을 살면서 다른 인간들에게는 굳이 피해를 주거나 하지는 않아, 때문에 우리 드래곤들도 귀족쯤 되는 놈들은 단지 뱀파이어란 이유만으로 발견하더라도 죽이거나 하지는 않지.
그런데 그놈은 뱀파이어 귀족이면서도 소위 그놈들의 말로 죽지 않는 자들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의 율법' 이라 부르는 법칙을 어기고 있었지, 간단하게 말하면 인간을 마구 납치해서 저급한 뱀파이들을 무수히 만들어내고 있었다는 얘기야, 그래서 찾아가서 박살을 내놓기는 했는데'''알고 보니 그놈은 뱀파이어 귀족들 중에서도 퍼스터 뱀파이어의 일곱 직계 중 한 놈이더군,
퍼스트 뱀파이어란 직접적으로 마신의 권능을 받아 반신 급의 존재가 된 중간계 최초의 뱀파이어를 말하는데, 이곳 세계의 뱀파이어들의 시조이기도 하지, 그런 퍼스트 뱀파이어의 피를 직접 이어받은 일곱 직계를 뱀파이어 세계에서는 뱀파이어 로드라 칭하는데, 문제는 퍼스트 뱀파이어의 피와 마력을 이어받은 놈들은 영혼이 소멸되지 않는 한 육신은 얼마든지 부활시킬 수 있는 불사신들이라는 거야, 그리고 자아를 지닌 영혼이 소멸되어도 그들은 마치 마족들처럼 자아가 바뀐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뿐이다.
아무튼 그렇다 해도 엉뚱한 생각을 품고 있는 놈이니 영혼까지 소멸시켜야 마땅하지만, 당시에 윔 급에 불과했던 나로서는 그놈의 육신을 파괴하는 것은 가능했어도 자아를 지닌 영혼까지 소멸시키기에는 힘이 부족했지,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그놈의 자아를 지닌 영혼을  소울 트램 마법으로 수정구 속에 봉인시켜서 내 레어에 갖다놨는데, 나중에 가이아 여신을 따르는 인간들이 그 지방에 정착해서 흩어진 그놈의 육신이 스며든 땅을 정화시킨는 신성결계를 펼쳐놓았더군, 하지만 그놈의 영혼이 풀려난다면 그 정도의 힘으로는 그의 부활을 막을 수 없어.
아무튼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저 다리 잘린 쇳덩어리들에 대한 문제는 황혼의 숲으로 가서 그 뱀파이어 녀석을 활용하면 될 거라는 말이다. 네가 그놈의 영혼을 봉인시킨 수정구를 황혼의 숲으로 가져가서 깨버리면 그놈은 그 즉시 육체를 부활시킬 것이고, 그때 네가 사로잡아서 저 녀석들에게 넘겨주어 데려가게 하면 어느 정도 핑계가 마련될 것이란 얘기다.
주의할 점은, 그놈이 부활하면 신성결계 덕분에 힘이 크게 줄어 있기는 하겠지만 단순히 손발을 묶는 정도로 제압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랬다가는 나중에 저 녀석들 모두 그놈의 식사거리가 될 테니까. 그러니 그놈이 육체를 부활시키고 나면 그 즉시 템포럴 스타시스로 완전히 가사상태로 만들어 버리고, 그놈 심장 부위에 검 하나쯤 박아서 넘겨주면 될 것이다.

어차피 인간들 중에는 그놈의 육신만 보고는 어떤 수법에 당한 것인지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 테니 네가 나중에 그놈을 확실히 처리하면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저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네가 이곳에서 하려는 일도 한결 쉬워질 테니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도 결코 나쁘지는 않을 것이나, 어느 곳이든 비빌 언덕을 마련해 둔다면 그만큼 도움이 되는 법이니까 말이야}

아티오네스의 그러한 계획에 헬로가드가 힘없는 뱀파이어를 못살게 구는 사악한 도마뱀이라느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인간들을 모두 세뇌시키는 게 더 간편한 방법이라느니 하면서 따지는 바람에 또다시 시끄러운 말싸움이 시작되었지만, 아무튼 천우는 아티오네스의 의견을 수렴하여 그들을 돕기로 한 것이고 또한 이곳으로 온 것에도 의도한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치르넨 후작의 설멸이 끝나자 천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그곳에 있던 위험한 존재가 뱀파이어 로드였다면 어떻겠소?
아니, 그건 또 무슨''''?
천우는 곧 레어에서 챙겨온 뱀파이어의 영혼이 봉인된 보석을 치르넨 후작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곳은 당신이 말한, 이곳에 있던 뱀파이어의 영혼이 봉인되어 있는 구슬이오.
그,그럴 수가! 그럼 당신이 설마 그 젠 카이드란''''
물론 아니오. 하지만 뱀파이어의 육신을 소멸시키고 영혼을 이곳을 봉신시킨 그는 그 레어의 원래 주인이었고, 나는 그를 통해서 들었을 뿐이오. 그리고 그는 내친구이기도 하오.
그런'''제 카이드는 역시 드래곤이었다는 말이 아니오. 그리고 당신 역시''''''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마시오. 사정이 있어 그외는 친구가 되었지만 나나 동료들은 분명 그대와 같은 인간이오.
아,알겠소, 하지만 그 보석만 가지고는''''
퍼석!

헉!그,그걸 부수면''''.
순간 천우는 두말없이 치르넨 후작에게 보여주던 어린아이 주먹만 한 수정구를 움켜쥐어 산산이 부숴버렸고, 그러자 그의 곁에 있던 치르넨 후작과 게일 백작이 헛바람을 들이켜며 경악성을 토해 냈다.
그들 또한 거의 불사신과 다름없는 귀족 급 뱀파이어의 영혼을 가두어두는 보석이 부서지면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것쯤은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당연히 천우의 그러한 행동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곧 그들의 우려처럼 천우의 손에서 수정구가 부서지자마자 그들이 있던 곳으로 기이한 기운이 번져 나오며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숲은 아직도 어두워질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주변이 어두컴컴해지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 붉은 안개와도 같은 기운이 숲 주변에 자욱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숲을 가득 메우기 시작한 그 붉은 안개들이 곧 그들의 전면 쪽으로 마치 소용돌이치듯이 몰려들고 있었다.
저,저것은''''!
그것이 어떤 현상인지 치르넨 후작이나 게일 백작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긴장된 시선으로 그것을 지켜보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투 준비! 곧 뱀파이어가 나타날 것이다. 잘 알겠지만 모두 물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인 뱀파이어라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뱀파이어 로드라면 문제가 달랐다. 직접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뱀파이어 귀족들은 일반적인 소드 마스터나 7서클의 마법사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로 알려져 있었고, 더욱이 뱀파이어 로드라면 치르넨 후작으로서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는 강력한 존재인 것이다.
물론 자신들 곁에는 뱀파이어 로드보다 더한 괴물들이 버터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고 혹시라도 수하들이 물리는 사태가 생겨서는 안 되기에 충분히 조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점차 형체를 갖추기 시작하는 핏빛 안개를 긴장과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드디어 주변의 핏빛 안개가 말끔히 사라진 전면에는 창백한 안색의 백발을 지닌, 한눈에도 뱀파이어같이 생긴 귀족 풍의 중년인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그는 나타나자마자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사람들을 한번 쓰윽 훑어보고는 곧 괴이한 웃음소리를 발하기 시작했다.
크흐흐흐흐'''도대체 아무것도 없는 그 지긋지긋한 곳에 얼마동안이나 갇혀 있었던 거지? 게다가 나를 가두었던 젠 카이드'''아니, 아티오네스라고 해야겠지, 그 거만하고 사악한 마룡도 보이지 않다니! 크흐흐, 누가 나를 실수로 풀어준 것인가? 아니면 어떤 목적이 있어서 풀어준 것인가?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군, 어차피 당장은 약해진 힘을 보충해야 할 식사거리로 삼아야 할 테니'''크크크!
다시 부활한 뱀파이어 로드 레퀴안 백작은 눈앞에 있는 자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마음껏 기쁨을 드러내며 오만한 눈빛으로 좌중을 쓸어보았다. 비록 주변에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신성력이 흐르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부활한 육체 또한 거의 마력이 없다시피 하여 제대로 힘을 쓰기도 힘들 것 같았지만 그래도 눈앞에 있는 인간들 정도는 뜻대로 처리할 자신이 충분히 있었다.
자신은 불사의 존재이니 우선 약해 보이는 놈들부터 한 놈, 한 놈, 처리하다 보면 마력은 금방 회복될 것이고, 결국 꽤 강해 보이는 몇몇 놈들도 시간문제일 뿐이지 결국은 자신의 먹잇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었다.
그의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도 아니었고,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었다. 단지 그를 불러낸 존재가 그의 영혼을 봉인시켰던 아티오네스보다 더한 괴물이라는 것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을 뿐이다.
천우는 그의 기고만장한 태도를 보며 별로 시간을 끌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에 별도로 준비한 미스릴제 검을 꺼내어 들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크크크'''감히 대항해 보겠다는 것이냐? 용기는 가상하다만''''
째앵!
응?
파파파파파팍!
크워웍!
피하고 자시고 할 사이도 없었다, 천우는 레퀴안이 음소와 함께 건방을 떠는 사이 다짜고짜 들고 있던 검을 손가락으로 튕겨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리고 그 소리에 레퀴안이 말하다 말고 의문성을 발하는 순간, 수십 개의 날카로운 파편으로 변한 미스릴 조작을 마치 빛살과 같이 날려 사정없이 레퀴안의 전신에 틀어박았다.
모양은 대충 된 것 같고'''템포럴 스타시스!
풀썩!
그 순간, 수십 개에 달하는 미스릴 파편을 전신에 꽃은 채 괴로운 신음성을 토하며 경력에 의해 뒤로 튀겨져 나가던 레퀴안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진 채 숲으로 바닥으로 사정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주변의 마른 나뭇잎들이 분분이 솟구쳐 올랐다가 미스릴 파편으로 전신에 꽃은 채 나무토막처럼 뻣뻣이 굳어버린 그의 몸 위로 가라앉았지만, 불사의 존재라는 그는 더 이상 신음성도 발하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치르넨 후작은 그 모습을 보며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뻐끔거렸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 않고 있었고, 천우는 그런 치르넨 후작을 향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저 상태로 가져가서 보이면 당신의 검이 부서진 것도 모두 설명이 될 것이오. 가져가서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지만, 육체를 소멸시켜면 정신이 다시 깨어나 부활할 수도 있으니 그 점을 주지시키시오.
치르넨 후작은 문득 이 모든 일들이 결코 우연이 아닌, 어쩌면 애초부터 치밀한 음모에 의해서 진행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어 이들이 새삼 무서워졌고, 자신이 음모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았지만 이미 질주하는 오우거의 등에 올라탄 형세였기에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후우! 제발 흉악한 늑대들을 피하려다 사자를, 아니 악마를 끌어들인 것이 아니기를'''''
그저 마음속으로 가이아 여신에게 그렇게 기원할 수밖에 없었다.



10장 파란의 시작


자네''''정말로 저 많은 보물들을 그 녀석들에게 그냥 내어줄 참인가?
정말 화려하고 넓은 내실이었다. 사방은 온통 이곳 세계만의 독특한 장식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척 보기에도 장인의 품격이 느껴지는 고급스런 원목형 가구들이 푹신한 소파, 그리고 수십개의 양초들이 타오르며 황홀한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샹드리에가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바닥 역시 눈을 밟듯이 푹푹 들어가는 최고급의 양탄자가 깔린 채 그 호화스러움을 더해 주고 있었다.
이곳은 치르넨 후작의 영주성에 있는 특별한 귀빈들만이 들수 있는 백합관의 내실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곳이었다. 그런 화려함과 이국적인 풍모라면 동사왕도 두 눈이 휘둥그레질 만도 하건만, 동사왕은 지금 그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천우에게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말씀드렸듯이 그냥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한 대가를 받고 주려는 것입니다.
동사왕이 바라보는 화려한 내실의 한쪽에는 그곳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단단히 밀봉된 상자들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한데 그것을 가리키며 하는 자신의 말에 천우가 담담한 어조로 그렇게 대답하자 동사왕은 더욱 답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가라니, 이 우형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네, 저 엄청난 보물도 넘겨주고 그놈들 일도 도와주겠다면서 그에 대한 대가가 고작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자는 것이라니''''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대가라고 하기에는 너무 손해 보는 일이란 말일세.
발이 푹푹 빠지는 양탄자 위를 정신없이 서성이면서 동사왕이  애타는 표정으로 말했지만 천우는 이국적인 풍모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 그 감촉을 느끼면서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만 생각하실 일은 아닙니다. 일국의 도움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무력이 아니라 정보가 필요한 것이고, 또한 저희가 이 땅에서 자유롭게 지낼 여건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 정도의 물건으로 일국의 도움을 얻을 수 있게 된다면 저희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손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사왕은 여전히 수긍할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중원에서처럼 시간을 두고 이곳 세계의 무림 세력을 장악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자고로 관과 무림은 서로가 침범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고 보면, 아무리 그 녀석들의 나라에 도움을 주고 호의를 얻는다 하더라도 어디 제대로 도와주려 하겠는가? 정치하는 관료 놈들은 어디나 다 똑같은 법일세. 행여 뒤통수나 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지.
동사왕이라고 천우의 말을 전혀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고, 자신들이 하려는 일의 중요성에 비추어 아무리 보물이 아깝더라도 쓸 때는 써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동사왕이 생각하기에 전혀 쓸데없이 아까운 보물들만 낭비하는 상황으로 여겨졌고, 특히나 그 대상이 무림의 단체도 아닌 국가라는 것에 대해 더욱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중원에서처럼 앞으로 얼마든지 이곳 세계의 무림 단체들을 복종시켜서 부리면 될 일이었기에 굳이 관과 연관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또한 그 편이 더욱 수월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더 효과적일 것이기에 지금 천우의 생각이 답답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사실 동사왕의 생각도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어서 이곳 대륙에 존재하는 도둑 길드나 마법 길드 그리고 거대 용병단 같은 곳을 복속시키는 것은 천우나 동사왕의 능력이라면 결코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고, 만약 그러한 세력을 규합한다면 분명 전대미문의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임도 분명했다.
하지만 천우가 이곳 대륙이 중원에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엄청나게 크고 넓은 곳이며, 또한 한 나라가 아닌 수많은 나라들이 이해관계에 얽혀 마치 하나의 무림에서처럼 세를 다투는 형국으로 보아야 한다는 아티오네스의 말을 들었기에 결코 그러한 단체들만으로는 중원에서처럼 제대로 효과를 내기는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곳은 마치 한 나라를 중원의 큰 세력처럼 인지해야 하는 곳이었고, 천마가 이곳으로 왔다면 그 역시 결코 어느 한 나라 안에서만 머무르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천우는 아티오네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연이 닿은 국가와 친분을 만들어두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물론 굳이 이 나라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지만, 천우는 레어로 찾아왔던 그들의 눈에 담긴 열망과 무인으로서의 기백을 보았기에 이들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의형인 동사왕의 불만 사항이 무엇인지 모르는 바도 아니었기에 천우는 다시 차분한 어조로 동사왕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형님께서 우려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는 잘 압니다. 하지만 저희가 움직여야 할 곳은 한 나라 안이 아니라 이곳 대륙 전체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우리가 있던 무림의 세계와 같은 곳이 없습니다. 다만 수십여에 달하는 국가들과 각각의 목적에 따른 여러 단체들이 있을 뿐아라 합니다.

물론 그들을 이용하여 세를 규합하는 것도 분명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만 그들은 무림의 단체와 달리 해당 국가의 간섭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고 합니다. 또한 각 나라의 권력자들과도 모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에 설사 그런 세력들을 얻는다 하더라도 저희들 역시 국가의 간섭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 관계가 독립적이지 못한 이상 오히려 해당 국가로 부터 더욱 심한 견제를 받거나 혹은 곤란한 일만 생길 것입니다.
결국 싫든 좋든 이곳에서는 적어도 어느 한 국가를 우군으로 두지 않는다면 모든 행동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지금 이들 나라는 위기에 처해 있고 기왕 어느 나라든 각별한 친분을 맺어두어야 한다면 오히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돕는 것이 보다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될 것이기에 이들을 돕고자 하는 것입니다.

천우의 설명에 동사왕은 갑자기 얼굴이 핼쑥해지며 다급한 질문을 했다.
무,무림이''''없어?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럼 이곳에서는 무림인이란 신분도 없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그런''''그럼 여기서는 우리조차도 무림인이란 신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닌가? 더구나 어떤 일이든 우리의 일에 관부에서 개입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고, 게다가 한두 나라도 아닌 수십여 국가에서 ''''내 말이 맞는가?
맞습니다. 우리는 중원에서처럼 자유롭게 움직여야 하지만 그 대상이 크고 작은 수십여 개의 나라이며, 또한 모든 행동에 국가의 간섭이 따를 수 있습니다. 그들 모두의 적이 될 수는 없지 않겠슺니까.

비록 이곳에 오기 전의 대륙에도 중원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여려 나라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또한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나라들도 꽤많이 있었을 것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무림이라는 틀에서 생각해 보면 국가라는 개념은 개입할 여지도 전혀 없는 것이고 또한 염두에 둘 필요도 없었지만, 천우의 말대로라면 자신들은 수십 개의 국가들을 넘나들며 천마의 흔적을 찾아보아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게다가 무림이라는 독립된 세계도 없고, 모든 세력과 단체가 국가의 간섭을 받고 있다면 이 세계에서는 자신들이 설 자리가 전혀 없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생각하자 동사왕은 갑자기 모든 것이 막막해지는 느낌을 받았고, 무림인의 신분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조차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국가들을 무력으로 제압해서 수하로 삼을 수도 없는 노릇임은 동사왕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제야 천우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며 현 상황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반대할 여지도 없었고 상황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었지만 오히려 그것을 알고 나니 동사왕은 새삼 중원무림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이제는 무림인도 뭣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온몸의 맥이 풀리며 보물에 대한 집착도 사라져 버렸다.
천우는 동사왕의 그러한 모습을 보자 내심 고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형님의 말씀처럼 이곳의 단체나 세력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무림의 하오문처럼 정보를 주로 다룬다는 도둑 길드라는 곳이나 중원의 살수 단체와 비슷한 어쌔신 길드, 그리고 일반 무림인들처럼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용병들에 관해서는 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자들이라면 정보에도 밝을 것이고, 또한 상황에 따라서는 저희에게도 실절적인 도움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 순간 허탈한 심정으로 멍하게 서 있던 동사왕의 두 눈에 섬광이 번쩍였다.
자네 금방''''이곳에도 하오문과 살수 단체들이 있다고 했는가? 하지만 무림이 없다면서,
중원의 무림인들 중에 표물을 운송하고 보호하는 표사나 신번을 보호하는 보표 혹은 보수를 받고 대리전을 치르는 낭인무사들이 있는 것처럼 이곳 세계에도 직업으로 그런 일들을 하는 자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 중 정보를 다루거나 살수와 같은 일을 하는 자들은 모두 용병이라 부른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들과의 관계에서도 국가를 전혀 배제할 수는 없기에 그들을 무림인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고,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무림도 없는 것입니다.

흠, 그렇군, 이제 충분히 자네의 말을 이해했네, 그리고 자네말대로 이번 일은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도 이젠 알겠네, 그러니 더 이상 반대하지 않고 자네 뜻에 따르겠네, 한데 말일세.''''
그 용병이라는 자들이 표사 일도 한다면 이곳에도 분명 녹림도들이 많이 있겠군, 그렇지 않다면야 굳이 표물을 운송할 때 용병이라는 무사를 붙일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일세.

물론 이곳에도 그러한 표물을 노리는 산적들이나 마적들이 많이 있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일전에 말씀드린 모스터라는 것들이 이 곳곳에서 사람들의 목숨을 노리기에, 그러한 몬스터의 습격으로 부터 목숨을 보호하기 위한 이유가 더 크다고 하는군요.

흠, 그런가? 그럼 할 수 없지, 꿩 대신 닭이라고 ''''그 요병이란 녀서들, 꽤나 숫자가 많겠지?
글쎄요, 대륙의 용병을 전부 합치면 못 돼도 백만은 족히 될거랍니다.
배,백만'''크흐흐 갈천성 네놈은 그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니'''험험, 아닐세. 생각보다 꽤나 많구먼, 백만이라''''크흐흐'
동사왕의 의미심장한 괴소가 이어지는 가운데 천우도 동사왕의 생각을 짐작하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오늘의 이 대화로 인해 대륙에는 훗날 '은면의 사신' 혹은 '가면의 폭풍왕' 이라 불리는 용병계의 신화적인 존재가 탄생하게 되었다.

모두 예를 갖추시오! 국왕 폐하께서 나오십니다.
빰빠라빰! 빠라빰!
왕궁의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중앙 홀 좌우로 소식을 듣고 급히 입성한 중앙 귀족들과 군신들과 군신들이 도열해 있는 가운데, 우렁찬 나팔 소리와 함께 화려한 왕관을 쓰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의복을 갖춰 입은 르베아 19세가 상단의 좌측 커튼을 젖히며 등장했다.
르베아 19세는 곧 상단의 중앙에 놓인 왕좌에 앉으며 가볍게 손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모두 예를 거두시오.

그러자 깊숙이 허리를 숙이고 있던 군신들이 모두 예를 거두는 가운데 단독으로 중앙 홀을 울리는 외침이 다시 울려 퍼졌다.
신 예히안 치르넨 폰 아시르가 국왕 폐하께 임무를 마치고 복귀했음을 고합니다.
르베아 19세가 바라보는 홀의 중앙에 한쪽 무릅을 굻은 채 강직한 인상의 치르넨 후작이 군신의 예를 취하며 무사히 복귀했음을 고하자 후덕한 인상을 지닌 르베아 19세가 웃는 낮으로 말했다.
정말 수고하셨소, 어서 일어나시구려,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소?
르베아 19세의 물음에 치르넨 후작은 자리에 일어서며 다시 목례와 함께 말했다.
송구스럽게도 저희가 갔던 곳은 라헬 교단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던 곳이었습니다.
그 말에 르베아19세는 조금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좌우로 늘어서 있던 중앙 귀족들과 대소신료들 대부분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슬그머니 조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아주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어진 치르넨 후작의 말에 르베아 19세는 조금은 기대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호! 그것 참 다행이구려. 이번 일을 제안했던 1왕자를 비롯해 그대들의 고생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오. 그래, 어떤 성과가 있었소?
그곳은 비록 숨겨진 라헬 교단의 근거지는 아니었지만 아주 위험한 존재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비록 왕국의 청기사 여섯 기를 잃기는 했지만 폐하에 대한 충성심과 용맹으로 그 위험한 존재를 처치할 수 있었음은 물론 그곳에 있던 여러 가지 물건들도 수거해왔습니다.
지,지금 그게 무슨 말이시오? 위험한 존재는 또 뭐고 왕국의 청기사 여섯 기를 잃었다니''''

청기사 여섯 기를 잃었다는 말에 성과가 있었다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그 순간 르베아19세는 안색이 급변하여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놀람성을 발했고, 다른 군신들 역시 모두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웅성거렸다.
치르넨 후작, 설마 지금 왕국의 타이탄 여섯 기를 전부 잃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오?
르베아 19세에 뒤이어 왕자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서 있던 벨라트 후작이 추궁하듯이 묻자 치르넨 후작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를 상대하지 않고 르베아 19세를 향해 다시 말했다,
폐하! 말씀드렸듯이 비록 청기사 여섯 기를 모두 잃기는 했지만 저희가 얻은 소득은 그에 비해 훨씬 큰 것입니다. 그러니 고정히시고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음''''알겠소, 어디 자세히 말해 보시오.
르베아 19세는 그 말에도 여전히 안색을 펴지 못하고 다시 왕좌에 등을 기대며 억지로 태연함을 보이며 말했다.
그 전에, 먼저 폐하께 저희들의 이번 출정에서 얻은 성과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성과라''''그리 하시오.
르베아 19세의 허락이 떨어지자 치르넨 후작은 홀 뒤쪽을 향햐 큰 소리로 외쳤다.
게일 백작, 성과물들을 가지고 들어오도록 하게!
원래는 치르넨 후작과 함께 보고를 올려야 할 게일 백작이었지만 평소 표정 관리가 그리 좋지 못한 백작이었기에 치르넨 후작은 게일 백작으로 하여금 필요할 때 들어오도록 했고, 치르넨 후작의 그러한 외침에 게일 백작은 후드를 쓴 채 몇몇 근위기사들과 함께 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순간, 중앙 홀은 여기 저기서 울리는 놀람성으로 인해 상당히 시끄러워졌다.
헛! 저게 도대체''''
관,관이 아닌가?
후드를 깊숙이 눌러쓴 게일 백작이 앞장서고 그 뒤를 따르는 로열 나이츠 근위기사 네 명이 받쳐 들고 온 것은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진 관이 분명했고, 그 뒤로 역시 근위기사 한 명이 평범해 보이는 상자 하나를 가슴에 안고 들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은 그 검은색 관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상황과 장소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뜻밖의 물건이 들어서고 있으니 모두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그때 다시 루단 왕국의 세 후작 중 한 명이자 재무대신이기도 한 벨라트 후작이 큰 목소리로 추궁하듯이 소리쳤다.
치르넨 후작! 폐하께서 계신 이곳에 검은 관을 들이다니, 이 무슨 경망된 행동이오? 꼭 보여야 할  물건이라도 그런 것이면 마땅히'''
벨라트 재무대신, 나는 지금 폐하의 허락을 얻어 우리가 목숨을 걸고 얻은 성과물을 보여드리고자 하는 것이오. 그러니 좀 조용히 하시오.

치르넨 후작의 싸늘한 말에 벨라트 후작은 눈가를 실룩이며 다시 반박하려 했지만 르베아 19세가 여전히 편치 않은 얼굴로 그런 벨라트 후작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아! 그만 하시구려, 설마하니 저 관속에 정말 시체라도 들어 있겠소, 치르넨 후작의 말대로 그곳에서 뭔가 귀중한 것을 얻었으니 짐에게 보이려 가져왔을 것이오.
르베아 19세의 참견에 벨라트 후작이 입을 다물며 치르넨 후작을 쏘아보자 치르넨 후작은 속으로 냉소를 발하며 국왕에게 다시 말했다.
송구하옵니다만 저 관 속에는 시체가 들어 있는 것이 맛사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시체가 아니라 폐하께서나 크로아 교단에서도 크게 기뻐할 만한 시체이오니 신이 이 자리에서 관 뚜껑을 여는 것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르베아 19세의 예상과는 달리 시체가 맞다는 말에 다시 웅성거림이 일었지만 이어진 치르넨 후작의 말에 모두가 관 속에 든 시체의 정체가 궁금했기에 반발하고 나서는 자는 없었다.
짐이나 크로아 교단에서도 크게 기뻐할 만한 시체라''''그곳이 라헬 교단의 근거지는 아니라고 했으니, 혹시 사악한 흑마법사의 소굴이었던 것이오.
르베아 19세는 관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정말 시체라는 말에 선뜻 그 뚜껑을 여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폐하! 이 관 속에 있는 시체는 흑마법사 따위의 시체가 아니라 뱀파이어의 시체입니다. 그것도 일반적인 하급 뱀파이어가 아니라 뱀파이어 귀족의 시체입니다.
뭐, 뭣이 뱀파이어!
헛! 뱀파이어라니''''그것도 귀족 급이라면''''''
뱀파이어란 존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고, 게다가 귀족 급의 뱀파이어라면 거의 불사신과 다름없으며, 간혹 마신으로 추종하는 이단자들이 있을 만큼 강력하고 무서운 존재로 알려졌기에 무도가 경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르베아 19세 역시 귀족 급의 뱀파이어란 말에 또다시 안색이 크게 변하며 소심하고 겁 많은 성격답게 두려움마저 내비친 채 불안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좌우에 도열해 있는 여러 군신들도 크게 다를 바 없어, 기어이 벨라트 후작이 다시 나서며 큰 소리로 죄인에게 하듯이 소리쳤다.
치르넨 후작, 지금 제정신이오? 다른 것도 아닌 그런 위험한 것을 폐하 앞으로 가지고 오다니 그 진의가 의심스럽구려, 그러다 만약의 사태라도 벌어지면 어쩌려고 그런'''''''
벨리트 재무대신, 나는 분명히 시체라고 말했소, 죽은 시체를 가져온 것인데 무엇이 위험하다는 것이오?
하지만 귀족 급 뱀파이라면'''''
나를 못 믿겠다는 것이오? 그리고 지금 이곳에는 성력이 충만한 크로아 교단의 헤이브 주교가 계시지 않소, 더구나 벨라트 재무대신을 비롯해 이곳에 있는 거의 모든 분들이 크로아 신의 은총을 받고 있는 분들이 아니오. 한데 이미 죽은 뱀파이어 따위를 두고 무엇을 걱정하는 것이오?

우리 루단 왕국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크로아 신전의 뜻에 충실히 따르는지 잘 알게 되었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헤이브 주교?
르베아 19세의 물음에 오른편 아래에 서 있던 흰색 성직자 로브 차람의 헤이브 주교가 불안감이 담긴 시선으로 검은 관을 힐끗 응시하고는 황급히 대답했다.
무,물론입니다. 폐하의 신심은 교국의 국왕성하는 물론이고 크로아 신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또한 이번에 대륙의 모든 이들을 위해서 사악한 뱀파이어를 처치하는 쾌거를 이룩하셨으니 칭송받아 마땅하며, 또한 그 공로에 대해서도 분명 교국의 국왕성하로부터 치하가 있을 겁니다.
그의 말에 르베아 19세는 아무런 반감 없이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치르넨 후작은 내심 들끓는 분노로 인해 얼굴색이 시뻘겋게 변할 지경이었다.
비록 신성교국의 국왕은 제국의 황제와도 동급을 여겨지며 신의 뜻에 따라 스스로를 낮추고 있을 뿐이라고는 하지만, 한낱 교단의 주교 따위가 한 왕국의 국왕에게 치하라는 표현을 서슴없이 입에 담을 정도로 그 오만은 저 하늘 끝까지 닿아 있는 것이다.
헤이브 주교는 치르넨 후작으로부터 갑자기 전해져 오는 섬뜩한 느낌에 흠칫 놀라며 다소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애써 치르넨 후작과는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르베아 19세에게 다시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치르넨 후작께서 가져오신 뱀파이어의 시체가 진정 귀족 급의 뱀파이어임을 증명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영광된 자리이고, 또한 그러한 사악한 존재는 보는것만으로도 마음을 어지럽힐 수 있으니 차후에 저희 크로아 교단에서 인수하여 확인케 함으로써 치르넨 후작과 예하 기사들의 용맹과 충성심을 온 대륙에 증명토록 하시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헤이브 주교의 말에 르베아 19세는 얼른 그의 말에 동의해 주었다.
그렇소, 헤이브 주교의 말이 옳소이다. 저 뱀파이어의 시체는 크로아 교단에서 인수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오. 내 그것을 허락하겠소.
헤이브 주교는 루단 왕국의 크로아 교단을 책임지고 있는 대신관으로서 성직자답지 않게 계산이 빠르고 욕심 또한 많은 편이라, 그는 귀족 급 뱀파이어의 시체가 갖는 가치를 잘 알고 있기에 그러한 말로써 치르넨후작의 공로를 거저 빼앗으로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르베아 19세는 꺼림직한 뱀파이어의 시체를 처리해 준다는 말에 오히려 반색을 하며 더없이 고마워할 따름이었다.
사실 공국도 아닌 왕국의 한 교단을 책임지는 위치라면 마땅히 추기경 급의 대신관이 상주해 있어야 옳겠지만, 루단 왕국은 르베아 19세가  국왕으로 등극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륙의 다른 왕국들에 비해서 크로아 교단의 세가 가장 약했던 곳이었기에 주교 급이 파견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 르베아 19세가 즉위할 시점에 헤이브 주교 역시 루단 왕국으로 파견되었고, 신의 가호인지 르베아 19세가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로는 그 열렬한 성원에 힘입어 교세를 크게 확장시킬 수 있었기에 그 공로를 인정받아 조만간 추기경이 될 것이라는 소문도 자자했다. 한데 이번에 뱀파이어 로드의 시체를 가져간다면 확실히 추기경으로 올라설 가능성이 더욱 커지는 것이다.

아무튼 치르넨 후작으로서는 르베아 19세가 교국이나 크로아 교단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양보하려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이 자리에서 자신이 화를 내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일으킨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애써 내심의 분노를 억누르며 다시 말했다.
폐하께서 신들의 충정을 알아주시니 그저 황공할 따름입니다. 그럼 뱀파이어의 시체가 들어 있는 관은 물리고 또다른 성과물에 대해서 고하겠습니다.
치르넨 후작이 관을 물린다는 말에 그제야 르베아 19세의 안색이 조금 퍼지며 다시 온화한 어조로 물었다.
또 다른 성과물이 있단 말이시오?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뱀파이어의 시체가 되겠지만, 그 외에도 적지 않은 소득이 있었습니다. 비록 왕국의 청기사 여섯 기를 모두 잃기는 했지만 그곳으로부터 수거해 온 물건들이라면 그 손해를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오! 그건 듣던 중 정말 반가운 말이구려, 그래, 또 무엇을 얻었기에 그 막대한 비용에 해당하는 손해를 상쇄시킬 수 있단 말이오? 궁금하니 어서 말해 보도록 하시오.
르베아 19세의 독촉에 치르넨 후작이 눈짓을 하자 관을 들고 있던 네 명의 근위기사와 게일 백작이 뒤로 빠지며 홀을 벗어나기 시작했고, 가장 뒤쪽에서 상자를 안고 들어섰던 근위기사가 앞으로 나서며 치르넨 후작 앞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바로 이것입니다. 폐하.
치르넨 후작은 그 즉시 상자의 뚜껑을 열었고, 그 순간 홀의
천장에서 비추는 상들리에의 조명에 의해 영롱한 보광들이 폭
발하듯이 뿜어져 나왔다.
웃! 무엇이 들었기에 저런 보광이''''
저,정말 엄청나군!
치르넨 후작이 상자를 열자 뿜어져 나온 영롱한 보광에 조금전과는 달리 모두가 홀린 듯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며 감탄성 발하기 시작했다. 르베아 19세 역시 상자 가득 들어차 있는
휘황한 보석들을 보며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물었다.
허! 그것이 다 무엇이오?
이것이 바로 저희가 갔던 곳에서 얻은 또 다른 성과물입니
다, 신이 보건대 그 하나하나가 값을 매기기 힘들 만큼 큰 가치
를 지닌 보석들로 여겨집니다. 이것이라면 이번에 잃은 청기사
들 여섯 기뿐만 아니라 루미나트로부터 족히 열 기의 청기사를 
더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정말 대단하오! 1왕자의 계획대로 이번 출정은 본국과 대륙
전체를 위해서도 큰 공헌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토록 막대한
재와까지 얻었으니 정말 대성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구려, 이
모든 것이 크로아 신께서 우리 루단 왕국을 보살피시기 때문이
아니겠소, 그런 의미에서 잃었던 여섯 기의 타이탄은 그것으로
다시 보충을 하되 나머지는 크로아 신의 은총에 감사하는 뜻으
로 모두 교단에 기부하는 것이 좋겠소,
과연 폐하께서는 크로아 신의 은총을 받으실 자격이 있으신
분입니다. 저는 폐하와 신의 뜻을 받들어 내려주신 물품을 소중히 사용하도록 할 것입니다.
혹여 딴말이 있을까 싶어 헤이브 주교는 르베아 19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두 눈에 탐욕을 가득 담은 채 얼른 매끄러운 혀를 
놀렸고, 다른 군신들도 아깝다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이미 결정
난 바나 다름없는 사항이기에 달리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들은 이번에 엄청난 재화를 얻게 된 크로아 교단의 
이득을 암묵적으로 동의해 준 것에 대한 자신들의 공로에 대해서
도 따져보기에 바빴고, 그로 인해 얻게 될 직간접적인 이득에 
대해서도 열심히 눈알을 굴리며 계산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지금껏 크로아 교단이 성장하는 만큼 그들 역시 직간접적으
로 막대한 권익을 챙겨왔다. 그런데 이번의 소득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형태의 기부금보다 규모가 크기에 그에 따른 자신들의 
이득 역시 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치르넨 후작은 그 순간 헤이브 주교는 물론이고 좌우에 서 있
는 작자들을 모조리 쳐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눈을 질끈
감으며 억지로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로아 교단에 무엇이든 더
주지 못해 안달하는 르베아 19세가 그나마 여섯 기의 타이탄을
 복구할 수 있는 재화를 남겨두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해야 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루단 왕국의 국왕 르베아 19세는 그런 인물이었다.
장인어른!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1왕자 전하, 마땅히 소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인데 수고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휴우! 오랫동안 준비해던 일인데 그곳이 드래곤의 레어가 아
닌 뱀파이어의 소굴이었다니, 정말 가이아 여신께서는 저희를 버리신 모양입니다. 그나마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면 벨라트 후작이 
어떤 식으로든 꼬투리를 잡아 장인어른을 물론 저 역시 성토하려 
들었을 테니 그것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을 삼아야겠군요.
르베아 19세를 알현하고 보고를 마친 치르넨 후작은 궁정에
서의 상황이 정리되자 곧 1왕자의 거처로 찾아왔다. 그리고 제1
왕자인 로시안 왕자도 이미 상황을 전해 들었기에 그렇게 한숨
과 함께 아쉬움을 토로하는 것이었다.
전하!
괜찮습니다. 장인어른께선 충분히 최선을 다하셨고, 저희 왕국의 운이 여기까지인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그나저나 왕자비를 
한번 만나보고 가십시오. 장인어른께서 이번에 출정하시고 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한데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에일린도 꼭 얼굴을 뵙고 싶어 할 것입니다.
로시안 왕자의 왕자비로 간택된 에일린은 바로 치르넨 후작
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던 것이다. 서로가 추구하는 뜻도 같았고 장인과 사위 사이이기도 했으니 치르넨 후작이 로시안 1왕
자를 적극적으로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주변에 적
이 너무 많아 치르넨 후작으로서도 사위이자 마음으로 섬기는
주군이기도 한 로시안 왕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는 것에 항
상 마음이 아플 따름이었다.
전하! 에일린은 천천히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보다''''전
하께 드릴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혹시 다른 문제라도''''
로시안 왕자의 근심 어린 표정에 치르넨 후작은 목소리를 낮
추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실은 소신들이 다녀왔던 곳은 뱀파이어의 소굴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네? 그럼 그 뱀파이어의 시체라는 것은''''혹시 위장이었던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헤이브 주교나 벨라트 후작의 눈을 가리
기 위해 가져온 것일 뿐입니다.
그,그런''''어찌 그런 무모한 일을 벌이셨습니까? 장인어른께서 가져오신 그 보석들만 해도 소환해 갔던 왕국의 타이탄들을 모두
잃은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고도 남지 않습니까? 어차피 그 정
도의 재화로는 사아센의 도발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기에 
다른 잡음을 막고자 국왕 폐하께 모두 내보인 것임은 짐작하고 있
습니다만''''굳이 가짜 뱀파이어의 시체를 만들 필요까지는'''''
아니, 그게 아닙니다. 그 뱀파이어의 시체는 분명 진짜입니다.
그것도 일반 귀족 정도가 아닌 뱀파이어 로드의 시체입니다. 시
체라는 표현도 좀 그렇긴 하지만''''아무튼 크로아 교단에서 그 
시체를 가져가서 확인하면 엄청난 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
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그런 사항이 아닙니다.
비록 이번에 궁정으로 가져온 것은 뱀파이어 로드의 시체와
폐하께 보여드렸던 보석이 전부인 것은 사실입니다만 제 영주성에 궁정으로 가져온 재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아니 상
상을 초월한다고 해야 맞을 정도의 엄청난 재화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비단 보석들뿐만이 아니라 온갖 마법 아
티팩트까지 총 망라되어 있는 그야말로 왕국을 통째로 사고도 
남을 정도의 엄청난 분량이 말입니다.
그,그럴수가! 그 뱀파이어 로드에게 그렇게 엄청난 재화가 있었단 말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 재화들은 바로 드래곤의 레어에 있었던
것들입니다. 저희가 갔던 곳은 뱀파이어 로드의 소굴이 아니라
바로 드래곤의 레어였습니다.
그 순간 로시안 왕자는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멍한 표정을 지
은 채 치르넨 후작을 바라보다가 이내 격동으로 떨려오는 전신
을 주체할 수 없는 듯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치르넨 후작의 손
을 덥석 맞잡으며 흥분된 어조로 외쳤다.
그렇게 된 거로군요! 이번 계획은 성공했던 것이로군요! 장인
어른께선 헤이브 주교나 벨라트 후작이 그 정도의 보석만 가져오면 틀림없이 그 위치를 알고자 할 것을 우려하여 뱀파이어 로
드의 시체를 가져오신 것이로군요. 이럴 수가! 가이아 여신께선
결코 우리 루단 왕국을 버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하하하!
어릴 때부터 무척이나 영민하다는 말을 들어왔던 로시안 제1
왕자였기에 치르넨 후작의 말로 즉시 앞뒤 정황을 비교적 정확
하게 추리해 내고는 기쁨에 겨워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기뻐하는 로시안 왕자의 모습을 보며 치르넨 후작 역
시 덩달아 마음이 흐뭇해졌지만 상황이 마냥 기뻐히기에는 그다지 좋은 것만은 아니었기에 저도 모르게 나직한 한숨을 불어
내고 말았다.
그 모습에 로시안 왕자는 뭔가 또 다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얼른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시 물었다.
왜 한숨을 쉬시는 것입니까? 혹시 뭔가 다른 문제가''''
전하!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믿으셔야 합니다. 또한 반드시 수락해 주셔야 합니다.
치르넨 후작의 굳어 있는 표정에 분명 뭔가 심상치 않은 문제
가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로시안 왕자는 두 눈에 힘을 주며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
말씀해 보십시오, 장인어른,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리고 제
가 장인어른의 말씀을 믿지 못하면 누구의 말을 믿겠습니까?
또한 장인어른께서 제 목숨을 달라 해도 드릴 것이니 걱정 말고 말씀해 보십시오.
그,그런''''제가 어찌 꿈에서라도 왕자 전하께 불경한 마음을
먹겠습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제가 미덥지 못하다고 말
씀하시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그러니 저더러 죽으라고 명하실지 
언정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전하의 명 한마디면 신은 당장
이 자리에서라도 주저 없이 심장에 칼을 박아 넣을 것입니다.
하하! 장인어른이야말로 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을'''아무튼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저 카히알로 로시안 폰 르베아는 제 이
름을 걸고 장인어른께서 요청하시는 것을 수락할 것을 맹세합
니다. 이정도면 되겠습니까?
두 사람의 신뢰는 단순히 장인과 사위라는 것을 뛰어넘어 진정 서로의 목숨을 스스럼없이 맡길 수 있는 정도였기에 치르넨 
후작 역시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곧 정색을 하며 진지한 어조로 자신이 레어 안에서 겪었던
일과 천우 일행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고, 치르넨 후작의 
얘기가 이어질수록 그렇게 확고히 마음을 다지고 있던 로시안
1왕자의 눈빛도 물결치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치르넨 후작의 얘기는 로시안 왕자로서도 믿음의 문제로 해결하기 힘든 상식의 파괴였기 때문이다.



그,그게 진정''''
지금까지 말씀드린 사항은 추호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어,어찌 그럴 수가 '''3베드가 넘는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내는 여검사에게 장인어른은 물론이고 함께 갔던 로열 나이츠 기사단이 전부 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기사 여섯 기는 모두 다리가 잘려 못 쓰게 되었다고요?
게다가 2백이 넘는 숫자의 인마들을 한꺼번에 텔레포트가 불가능한 지역인 황혼의 숲으로 이동시켰을 뿐만 아니라 제 카이드, 아니 드래곤이 봉인시킨 뱀파이어 로드를 불러내어 한순간에 제압한 또 다른 능력자라니''''그리고 그들 중에는 대룩 제일의 흑마법사이자 공포의 마녀라 불리는 일루아나까지 포함되어 있으며, 그런 그들이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했다니 도무지'''''
전하!
후우! 믿어야지요. 아니, 믿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장인 어른의 말씀이니 받을 수밖에요. 그럼 언제 그들을 만나볼 수 있는 것입니까?
치르넨 후작 역시 누구든 그러한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로시안 왕자 또한 완전히 수긍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라도 수긍하고 그들을 만나보는 일이었기에 그 이상 믿어 달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며칠 내로 기회를 만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왕자님께서 갑자기 제 영지로 방문한다면 그 여우같은 벨라트 후작이 의심할 우려가 있으니 자연스럽고 은밀한 접촉이 필요합니다. 제 생각에는 왕자님께서 사냥을 나서시는 것으로 하고 그곳에서 만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음'''''그게 좋겠군요. 왕실 안에도 도처에 그의 이목이 있으니 외부가 더 안전하겠지요. 한데''''장인어른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그들은 드래곤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만''''''
물론 그들이 인간이 아닌 드래곤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쩌면 마족일 수도 있고 혹은 라헬 교단의 인물들일 수도 있습니다. 저 또한 그들이 인간들이라고 완벽히 자신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들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매우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선 그들의 두움을 받을 수 있다면 당장 눈앞에 닥친 위기는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위기는 피할 수 없는 왕국의 멸망이며 어차피 그런 상황이라면 상대가 누구든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설혹 그로 인해 왕국이 파멸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해도 오히려 모든 것에 속수무책인 지금보다는 차후에 그에 대해 무언가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결코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이 꼭 우리에게 해가 되리라는 보장도 없으며,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그들에게서는 분명 악의보다는 호의가 더 크다는 것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본 후에 자세한 얘기를 나누어본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수 있을테니, 그때 가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을 내려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군요. 저희에게 지금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을''''설사 그들 중에 강림한 마왕이 있다 하더라도 도움을 거절하지는 못하겠군요. 고대에 마왕과 손을 잡았던 제센이라는 국가 역시 비록 멸망을 당하기는 했어도 자신들을 억압하던 주변 국가들을 모두 쓸어버림으로써 한풀이는 했지요.
역사적으로 볼 때 제센은 당시에 마왕과 손을 잡지 않았더라도 주변의 강국들에 의해 갈가리 찢겨 모두가 비참한 노예 신세로 살아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센이 강림한 마왕과 손을 잡았던 것은 전적으로 그들 탓만은 아닐 것입니다. 하물며 저희들 입장에서 상대가 드래곤이면 어떻고 마족이건 라헬 교도들이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저 또한 사아센의 야만인들이게 멸망을 당해 왕국민 모두가 가축보다 못한 비참한 노예로 전락하느니 차라리 제센과 같은 전철을 밟더라도 그 길을 택하겠습니다. 그리고 힘이 없어 멸망을 당한 모든 나라들도 그러한 기회가 없었기에 못했을 뿐이지 분명 그럴 기회가 있었다면 대부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분명 거부할 수 없는 기회입니다.
노예로 살아가는 삶이 비참하기는 해도 죽음을 놓고서 비교해 본다면 그러한 삶이라도 영위하려는 자가 분명 더 많을 것이다.
때문에 로시안 왕자의 생각이 전적으로 옳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시아센 제국이 정복한 타국의 국민들을 가축보다 못하게 다룬다는 것은 이미 대륙에 잘 알려진 사실이었고, 또한 고귀한 혈통을 부족하지 않은 사람을 살아온 일국의 왕자로서 그러한 생각을 갖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튼 치르넨 후작을 깊이 신뢰하고 있는 그로서는 치르넨 후작의 안목과 판단을 믿었고, 현 왕국의 사정 상 득과 실에 있어서도 득이 많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기에 로시안 왕자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이로써 아무도 알지 못하는 대륙의 새로운 파란은 위기일로에 놓인 루단 왕국으로부터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마검사]13권에서 계속


1장 벨라트 후작의 음모


의문의 인물들?
마른 듯한 체구에 매부리코를 지닌 벨라트 후작은 자신의 집무실로 찾아와 보고하는 심복이자 부관인 리코 자작에게 못마땅하다는 눈초리를 주었다.
그렇습니다. 후작 각하!
의문의 인물들이라 했으니 아직 정체는 모른다는 것이겠군?
벨라트 후작의 어조에 약간은 추궁의 기색마저 들어 있자 심복인 리코 자작은 얼른 변명조로 말했다.
후작성의 별관 특급 귀빈실에 머물게 했지만 치르넨 후작이 귀한 손님들이라고만 말했을 뿐 그들의 신분을 집사에게도 말하지 않아 하인들도 알지 못하고 있답니다.
흠! 치르넨 후작 일행이 황혼의 숲을 통해서 영지로 복귀했고, 거기에 정체 모를 8인이 합류하고 있다가 귀한 손님들로 별관에 묵게 했단 말이지''''
벨라트 후작이 턱을 문지르며 무언가 진중히 생각하는 투로 말하지 리코 자작은 덧붙여 조심스럽게 추가적인 사항을 보고했다.
그리고 그들 중 3인의 복색이나 외모가 무척이나 특이했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복색이나 외모가 특이하다면 구체적으로 어떻다는 말인가?
대륙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복장이었다 합니다. 그리고 머리카락도 짙은 검은색이었고, 그중 한 명은 은색 가면을 쓰고 있어서 생김새는 알수 없었지만 다른 두 사람은 흔히 묘사하는 마족과 비슷한 이미지였다고 합니다.
마족과 비슷한 이미지?
왜 있잖습니까. 인간과는 다르지만 너무나 특이한 아름다움으로 인간의 넋을 빼놓는다는 서큐버스나 인큐버스와 같은 모습 말입니다.
그런 말에 실소라도 흘릴 만하건만 벨라트 후작은 오히려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 다시 리코 자작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이번에 1왕자가 소수의 수행원들만 데리고 사냥을 나섰는데, 후작성의 그들도 복장을 갈아입고 어디론가 향했다는 보고도 올라와 있습니다. 그로 보아 그들과 1왕자가 접촉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그 말에 벨라트 후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1왕자가 직접 만나려 하는 자들이라면 분명 중요한 인물들일 텐데'''''한데 미행은 붙이지 못했다고 하던가?
그게'''그들이 갑자기 말을 타고 후작성을 빠져나갔고 뒤늦게라도 말발굽 자국을 찾아 미행해 보려 했지만, 그들이 성을 빠져나간 직후에 그날 하루 동안은 아무도 후작성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치르넨 후작에 의해 봉쇄령이 내려졌답니다. 더구나 성 내의 마법사들까지 순찰병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마나 유동에 대해 감시하는 듯했기에 통신구도 사용하지 못하고 전서구로 그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봉쇄령이 내려졌다고?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치르넨 후작은 요새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라 성문을 봉쇄하고 나면 다른 곳으로는 출입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 정도라면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닌 모양인데'''''어쩔 수 없지, 차후로 시간을 두고 알아보는 수밖에, 그건 그렇고, 치르넨 후작이 가져온 그 뱀파이어 시체를 헤이브 주교가 인수해 갔다고 들었는데 그 일은 어찌 되었나? 치르넨 후작의 말대로 정말 귀족 급의 뱀파이어 시체라던가/
그러잖아도 그 문제에 대해서 말씀드리려던 참입니다. 아직 공식적인 발포는 없었습니다만 제가 알아본 바로는 귀족 급 뱀파이어의 시체가 틀림없다고 합니다.
흐음, 그래? 한데 뱀파이어들은 죽으면 시체를 남기지 않고 소멸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듣기로는 이번에 치르넨 후작이 가져온 뱀파이어 시체는 전신에 미슬릴 파편이 박혀 있는 끔찍한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체가 소멸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고 합니다.
미스릴은 뱀파이어들에게는 순은보다도 더 치명적으니 금속으로 알려져 있고, 일반적인 하급 뱀파이어라면 그런 상태에서는 육신이 소멸하고 재밖에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데 치르넨 후작이 가져온 뱀파이어의 시체는 그런 상태에서도 육신을 보존하고 있기에 귀족 급 뱀파이어가 확실하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그 말에 벨라트 후작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모습만으로 귀족 급의 뱀파이어임을 판단했다고? 신성력으로 확인한 것이 아니고?
그게 ''''신성력을 주인한다고 해서 특별히 귀족 급의 뱀파이어인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부정한 존재니 그 시체가 신성력을 견디는 정도에 따라 얼마나 사악한 존재인지를 추측해 볼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시체가 견디지 못하고 소멸할 우려가 있기에 신성력을 주입해 보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일단 그 상태로 교국으로 보내면 그것을 교국에서 행하게 될 것이라 하더군요.
사실 지난 수백 년간, 혹은 그보다 오랜 세월 동안 귀족 급 뱀파이어가 나타났다거나 누군가에게 죽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들릉 고대 문헌 속에나 등장하는 존재고, 그러한 문헌 속에서도 9서클의 대마법사나 혹은 신화적인 영웅들이 퇴치했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어떻게 죽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이는지도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었다.
다만 지금도 대륙의 곳곳에서 가끔씩 등장하는 하급 뱀파이어들은 신성력은 물론이고 은이나 미스릴과 같은 자체적인 정화력과 항마력을 지닌 금속에는 무척이나 취약했다. 빽빽하게 꽃힌 상태에서도 소멸하지 않고 육신을 보존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강력한 귀족 급의 뱀파이어라고 판단하는 것도 큰 무리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벨라트 후작은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흥! 그 욕심 많은 헤이브 주교가 자신의 공을 인정받지 못할 까봐 손도 못 대게 했겠지. 정말 그 뱀파이어의 시체가 귀족급의 뱀파이어라고 확인되면 교국에서도 그 공로를 모두 헤이브 주교의 것으로 인정할 테니 말이야. 아무튼 그게 사실이라면 이번 원정에 대해서는 전혀 꼬투리를 잡을 사항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인데'''''
그때 리코 자작이 다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데 그 일에는 제가 보기에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상한 점? 뭔가 말해보게.
치르넨 후작이 그 뱀파이어를 처치한 것이라면 그 뱀파이어의 전신에 꽃힌 무수한 미스릴 파편들은 분명 치르넨 후작이 지니고 있던 미스릴 검의 부서진 파련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듯 순수한 미스릴 검을 수십개의 예리한 파편으로 만들어 상대를 격살할 수 있는 수법이 있다는 애기는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아니,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분명 제가 아는 바로도 치르넨 후작에게는 그러한 기술이 없습니다.
그러한 말에 짜증스런 표정을 짓고 있던 벨라트 후작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래? 하긴 자네 또한 최상급의 소드 익스퍼터인 데다가 검에 관한 한 왕국의 양대 검가라 불리는 포르헨 가문 출신이니 자네의 그러한 판단은 틀림없겠지, 그럼 어떻게 그런 상태가 된 것인지는 짐작 가는 바가 없는가?
제 생각으로는 뭔가 다른 방법으로 처리한 뒤에 일부러 검을 부숴 전신에 하나하나 박아 넣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째서 말인가. 그리고 그렇게 할 이유가 뭐겠는가?
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만''''솔직히 이유에 대해서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다만 애초부터 그런 말도 안 되는 수법으로 제압한 것은 절대 아니라고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읍니다.
흠! 그렇단 말이지 '''''
벨라트 후작은 또다시 턱을 쓰다듬으며 이번에는 서재 내를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무언가 생각해 낸 듯 우두커니 서 있는 리코 자작을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한데 말일세. 그 뱀파이어의 시체가 미스릴 파편을 전신에 꽃고도 소멸하지 않았기에 귀족 급의 뱀파이어라고 판단했다고 해도 그 시체 자체가 뱀파이어의 시체인지는 어찌 알았다던가?
그러한 물음에 라코 자작은 약간 당혹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이내 아는 대로 대답했다.
그건''''한눈에 보기에도 생긴 모습이 뱀파이어처럼 생겼답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입까지 크게 벌린 상태로 죽은 모습이었다고 하는데, 그 입에는 뱀파이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양 쪽 송곳니가 확연히 드러나 있었답니다. 그리고 그런  얼굴 부위에도 미스릴 파편이 여러 개 박힌 채 가시처럼 돋아나 있었기에 정말 섬뜩한 모습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설마하니 신관들이 뱀파이어인지 아닌지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겠습니까.
하지만 벨라트 후작은 야릇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이곳 루단에 와 있는 크로아 교단의 신관이란 작자들은 헤이브 주교를 비롯해 모두가 욕심에 눈먼 돼지들일 뿐이야, 그런 작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는 신성력을 발휘하긴 하니 크로아 신이 정말 자비롭거나 아니면 그들처럼 욕심이 많은 거겠지,
아무튼 욕심 많은 헤이브 주교가 시체를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신성력을 주입해 보지 않을 것을 미리 예상하고 겉모습만 감쪽같이 위장해 놓은 가짜라면? 그렇기에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그런 상태에서도 시체가 소멸하지 않고 멀쩡히 남아 있는 것이고, 또한 겉모습만으로 귀족 급의 뱀파이어라고 판단하도록하기 위해 일부러 미스릴 파편을 전신에 꽃아 넣은 것이라면? 어찌 생각하는가, 그만하면 그의 의문스런 상황도 설명이 될 듯한데.
그럴 듯하다, 하지만 리코 자작이 보기에는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운 점 또한 많았기에 약간은 떠듬거리는 어조로 자신의생각을 밝혔다.
하지만''''정말 가짜라면 교국으로 보내진 후에는 즉시 밝혀질 사항인데 치르넨 후작이 그렇게 무모한 일을 꾸몄으리라고는 '''''또한 가짜라면 그 시체와 함께 가져온 그 많은 보물들에 대해서도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만'''''
그러한 말은 또다시 벨라트 후작으로 하여금 혀를 차게 만들었다.
쯧쯧! 하나만 생각하지 말고 둘을 생각해 보게,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루단에서 신성교국까지 그 시체를 가져가려면 워프게이트를 이용한다 해도 단번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네, 그리고 마도왕국인 루미나트를 반드시 거쳐야만 하지, 우리 루단을 비롯해 다른 왕국에서는 신성교국의 행사를 존중하기에 무료로 워프 게이트를 사용할 수 있지만 루미나트에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지,
하지만 한 푼의 돈에도 벌벌 떠는 헤이브 주교가 그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며 루미나트에서 워프 게이트를 이용할 것 같은가?
또한 그러한 루미나트의 처사에 불만을 표시하는 의미로 크로아 교단의 인물들은 루미나트를 통과할 때면 급한 일이 아닌한 일부러라도 워프 게이트를 사용하지 않고 육로를 통해 움직이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네, 그걸 감안해 볼 때 마음만 먹는다면 중간에 그 시체를 가로체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더구나 루미나트에서라면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기껏해야 건성으로 조사하는 척 흉내나 내다가 말 것이네, 보물들도 마찬가지야, 치르벤 후작은 이번에 본국의 타이탄 여섯 기를 전부 잃었다고 했네, 그리고 가져온 보물들의 가치가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충분한 양이기에 벌다른 문제를 삼지 못했지만, 그 또한 달리 생각해 보면 충분히 수작을 부리는 것이 가능한 일이네.

루미나트와는 선대의 국왕 시절까지만 해도 본국과는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였
지, 또한 치르넨 후작과는 지금도 어느 
정도는 교분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고 
말일세, 그럼 치르넨 후작의 부탁이라면 
사피루스 급 타이탄 여섯 기를 담보로 그 정도의 보물을 빌리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보네,
물론 좀 과한 감이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소드 컴플리터가 없는 루미나트에서 훗날을 위한 치르넨 후작에 대한 투자라고 볼 수도 있고 말이야. 어떤가, 그럴듯하지 않는가?
리코 자작은 벨라트 후작의 얘기가 이어질수록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다가 화급히 대답했다.
과,과연 그렇군요. 충분히 그럴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네.
네? 그것은 또 무슨 말씀이신지'''''
후후! 만약 그 시체가 가짜라 해도 오히려 우리가 그 시체를 진짜로 만들어야 하네, 그것도 온몸에 미스릴 파편을 박고서도 다시 부활할 만큼 강력한 뱀파이어의 시체로 말이지.
하지만 리코 자작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시체가 진짜라 해도 오히려 가짜로 만들어야 하는 일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그러한 물음에 벨라트 후작은 오히려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부활할 만큼 강력한 시체라고, 그러니 부활을 해야 하고, 부활을 했다면 당연히 문제를 일으키고 어디론가 사라져야 하겠지,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려면 역시 가장 좋은 것은 부활한 뱀파이어에게 잔혹하게 죽은 시체들이 있어야 하겠지, 내 말 무슨 말인지 안겠나?
그 순간 리코 자작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크로아 교단의 사제들의 제물로 삼고 뱀파이어의 시체는 없애버리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왜? 무슨 문제 있나?

다른 것은 상관없습니다만''''그렇게 일이 커지면 신성교국에서도 조사단이 파견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좀 곤란해질 수도'''''

그건 오히려 내가 원하는 일이야.

네?

그런 큰일이 생긴다면 자네 말대로 신성교국에서 조사단이 파견되지 않을 수 없지, 그리고 상대가 부활한 귀족 급의 뱀파이어라면 분명 그에 걸맞은 사람이 오게 될 거야. 현재 그런 일에 가장 적극적인 사람이 교국에서 누구이겠는가?

그러한 말에 리코 자작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인물이 있는지 좀더 굳어진 표정으로 자신의 짐작을 말했다.

설마 베르츠를'''''

그렇지, 십중팔구는 분명 그가 오게 될 것이야,

그 순간 리코 자작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어렸다.

그는 굉장히 위험한 자입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심계또한 보통이 아니어서 그가 관여하게 되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질 수 있습니다.

그가 오게 되면 얻는 것이 훨씬 많아질 테니 그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겠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저로서는 도무지''''''

시간일세.

네?

그가 오게 되면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란 말일세.

아무리 시아센 제국이 교국을 신경 쓰지 않는다 해도 베르츠 정도의 인물이 와 있는 상태에서는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겠지.

베르츠가 죽었다는 것을 벨라트 후작이나 리코 자작은 아직 모르고 있기에 그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지만, 아무튼 베르츠라는 이름은 그만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리코 자작 또한 그제야 벨라트 후작의 의도를 눈치 첼 수 있었다.

아직 시아센 측에서 어떤 응답도 없는 상태고, 이 상태로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나나 자네 또한 비참한 신세를 면할 길이 없네, 이번 일로 어떻게든 1왕자와 치르넨 후작을 궁지로 몰아 넣어야 하겠지만, 원하는 바를 이룰 때까지는 시아센의 침략이 일어나서는 곤란하지.

베르츠 정도의 인물이 온다면 그런 시간을 늦추는 데에도 분명 효과가 있을 걸세. 그리고 그가 돌아갈 때쯤이면 1왕자나 치르넨 후작은 더 이상 방해요소가 되지 않을 거야. 그런 후에 시아센에 다시 협상을 넣으면 그때는 분명 반응이 있을 걸세. 설마 나라를 통째로 바치겠다고 하는 데도 반응이 없을 수는 없겠지.

아무리 전력이 차이가 난다 해도 전쟁에는 피해가 따르는 범,

시아센 또한 그것을 달가워하지는 않을 테니 그것을 감안한다면 내 요구는 틀림없이 받아들어질 것이네.

과연''''후작 각하이십니다.

경탄 섞인 리코 자작의 말에 벨라트 후작의 얼굴에는 벌써부터 승자의 미소가 어렸다.

예전에 시아센은 침략으로 점령한 나라들의 왕족은 물론 귀족들도 절대 그 지위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것은 전쟁 중에 항복한 귀족들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복종, 아니면 죽음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혹여 저항이 심하거나 조금이라도 자신들에게 피해를 입히게 했다면 그에 따른 보복은 더없이 잔혹했다. 그 때문에 예전에 시아센에게 침략을 당한 나라들의 경우에는 영지민들이 오히려 저항하려는 영주를 죽이고 시아센의 군대에게 무조건 항복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을 정도였다.

물론 그런 영지라면 이미 영주가 인심을 잃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경우는 시아센이 아닌 타국과의 전쟁에서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시아센의 군대가 그만큼 공포스럽고 잔혹하다는 것을 대변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귀족들의 입장에서야 항복해도 죽느니만 못한 비참한 노예 신세라면 당연한 결사항전을 각오한다지만, 공포에 질린 병사들이나 영지민들이 제대로 따라주지 않으니 제대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후방에 있는 귀족들은 그런 소식을 듣게 되면 결국 항전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국외로 도망가는 길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았고, 영주나 귀족들이 떠난 영지민들 또한 일찌감치 싸울 생각을 포기하고 도망치거나 항복해 보리는 악순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국가 간의 전쟁에서는 성문을 부수는 것보다 점령지를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임에도 불구하고, 시아센에게 침략당한 나라들은 다른 나라들의 지원을 받기도 전에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해보고 삽시간에 멸망당해 버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렇게 시아센이 세워지고 난 후 철저하게 멸망당한 나라가 무려 5개국에 이르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그러한 침략 행위는 시아센이 성립된 초기의 일이었고, 공포의 정복 황제라 불렸던 시아센의 초대황제 아부 율탄 대제가 죽은 후 시아센의 침략행위도 멈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즈음에 신마전쟁 이후로 대륙의 중북부에서 크게 교세를 떨치기 시작한 크로아 교단이 신성교국이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선포함과 동시에 시아센의 무차별적인 침략행위에 대해 더 이상 묵과하지 않겠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였고, 그와 더불어 북부의 초강대국인 카이렌 제국마저 그런 신성교국의 입장을 지지하며 적극 개입할 의사를 밝혔다.

그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시아센은 이후로는 더 이상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대륙은 근 사오백 년간 그럭저럭 평화를 유지해 오고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하지만 요 근지에 이르러서는 시아센의 움직임이 여러모로 심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만약 시아센의 발호가 다시 시작된다면 가장 먼저 불벼락을 맞게 될 나라가 루단 왕국이 될 것임 또한 모두가 짐작하고 있는 일이기도 했다.

루단 왕국은 시아센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초장기의 나라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시아센의 침략을 면하고 기적처럼 살아남아 지금껏 독립 왕국으로서의 이름을 유지해 오고 있었지만, 주변 국들이 모두 멸망당하는 바람에 지리상으로는 영토의 대부분이 거대한 시아센 제국에게 둘러싸인 형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아직까지 루단이 살아남아 있다는 것 자체를 기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시아센의 침략 대상 1순위로 꼽히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비록 지금의 루단 국왕인 르베아 19세가 신성교국과 적극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고, 그로 인해 루단의 국민들 대다수는 시아센이 침략하게 되면 강력한 신성교국이 나서서 해결할 것이라고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상태였지만, 이를 낙관할 수는 없었다.

시아센은 대륙에서 유일하게 신성교국의 크로아 교단이 발붙이지 못하고 있는 곳이었고, 그러한 시아센 제국이 다시 발호한다면 신성교국의 영향력이 얼마나 통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단의 대다수 귀족들이 국왕의 정책을 열렬히 지지하고 있는 것은 어차피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더불어 만약의 사태가 일어난다면 타국으로의 망명 시에 크로아 교단의 열렬한 신도라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귀족들 대부분은 시아센 제국이 침략해 들어온다면 대항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고, 살길을 찾아 타국으로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벨라트 후작 역시 현 상황이나 정세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 또한 살길을 모색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귀족들처럼 타국으로의 망명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특별히 애국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나라잃은 떠돌이 망명귀족이 되어 멸시받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뼛속까지 귀족이었고,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지위와 사람의 질이 하향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결심한 것은 차라리 가망성 없는 나라를 팔아 원하는 것을 얻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러한 생각으로 벨라트 후작은 일찌감치 시아센에 줄을 대어보려 시도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시아센 제국에서는 자신의 협상 요구에 대해 아무런 답을 주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벨라트 후작은 그것을 시아센의 자신감 때문으로 해석했고, 첩자 역할이나 일반적인 것으로는 시아센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벨라트 후작은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현 상황을 타개해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루단 왕국을 자기 손으로 통째로 바치는 대가로 좀더 큰 것을 얻어보자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계획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자들이 바로 1왕자와 치르넨 후작이었고, 그들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에 대한 암살 같은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따를 뿐만 아니라 실행 후에도 많은 문제가 따르는 일이었고, 그 때문에 어떻게든 정치적으로 실각시킨 후에 뒤처리를 해야 했지만 지금껏 마땅한 기회가 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 벨라트 후작은 이번 일을 절호의 기회로 보고 실행할 마음을 굳힌 것이다.

좋네, 더 이상 자네도 이견이 없는 듯하니 실행 계획을 세워 보도록 하게, 중요한 것은 절대 꼬리가 밟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지, 이번에도 자네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믿네, 무엇보다도 이번 일은 나와 자네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일이자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일세.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절대 각하를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서두르도록 하게.

그럼.

리코 자작은 벨라트 후작에게 충직한 표정으로 목례를 올리고는 서재를 나서기 시작했다.

그런 리코 자작의 뒷모습이 벨리트 후작에게는 믿음직스러워 보였겠지만, 서재를 나서는 리코 자작의 입가에 걸려 있는 야릇한 미소를 보았다면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어두운 하늘에 수많은 별들과 함께 아벨란 대륙의 밤하늘을 지배하는 세 개의 달이 저마다 다른 모양새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중 가장 왼쪽에 떠 있는 '헬리나의 미소' 는 그 이름처럼 형태만 보일 듯이 가는 초승달의 모양새로 자신을 알리고 있었고 가운데에 떠 있는 둥근 달인 '해모스의 가호' 는 만월의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어두웠다.

오른쪽 밤하늘을 차지하고 있는 '엘바의 보석' 만이 반달의 형태로 그나마 가장 밝게 보이고 있었지만 그 호자의 힘만으로는 어두운 대지를 밝하기에는 너무 힘겨워 보였다.

항상 가운데를 점하고 있는 '해모스의 가호' 가 어두우면서도 지금처럼 만월의 형태로 보일 때와, 완전히 태양처럼 밤하늘을 비추며 밝아질 때를 반복하면 대륙의 한 달이라는 날짜가 지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청명한 4월의 계절에 오늘처럼 '해모스의 가호' 가 완전한 제 모습으로 둥글게 만월의 형태를 띠면서도 빛을 발하지 않는 날이 한 달이라는 기간 중 가장 어두운 날이기도 했다.

오늘이 지나면 '헤모스의 가호' 역시 조금은 둥근 모습을 잃어가며 빛을 발하기 시작할 것이고, 양옆에서 보좌하는 '헬리나의 미소' 와  '엘바의 보석' 역시 더욱 커지며 밝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세 개의 달이 걸려 있는 어둠 속에서 문득 쇠를 긁는 듯한 음산한 음성이 울려 나왔다.

"저곳이 크로아 신전인 모양이로군.
미약한 달빛 속에서도 온통 새하얀 대리석으로 치장된 외벽으로 인해 마치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구조물 앞에서 어둠과 동화되어 있는 다섯 인영이 있었고, 그중 한 사람의 듣기 거북스러운 음성에 복면을 쓰고 있는 다른 한 사람이 대답했다.

이곳 크로아 신전은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신전들 중에서도 호화로움으로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곳입니다.

흥!가짜 신 주제에 어디서나 호사를 누리고 있군, 어리석은 놈들 같으니'''''
거북스런 목소리의 주인공 역시 복면에 야행복 차람이었고, 겉으로 드러난 체형이 무척이나 말라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지금 제낙 받들고 있는 놈은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놈인 모양이야, 이렇듯 기발한 생각을 다 해내다니 말이야,

그러한 말에 비록 복면으로 인해 보이지는 않지만 대답을 했던 자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모략에는 타고난 자입니다. 저조차 이런 식으로 일을 해결하게 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으니까요.

크크''''그래 봐야 자네 손에 놀아나는 멍청이일 뿐이지,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한데 이번 일로 설마 테리카 님께서 직접 오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역시 뱀파이어의 시체 때문이신가요?

그렇네, 보고를 받고 상황을 분석한 결과 역시 그 뱀파이어의 시체는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이 났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기에 보아브딜 닐께서 나를 파견한 것이지.

그렇군요 한데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뭐가 말인가?

제가 본국에서 받은 명령은 루단의 포르헨 가문 출신의 방랑기사였던 리코가 되어 벨라트 후작에게 접근해 그를 도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야 당연히 혼란을 유도하여 전력을 약화시키려는 정치공작인 줄 알았습니다만,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겠더군요.

사실 이곳 루단 정도야 전력을 약화시키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쓸어버릴 수 있는 곳이니 이런 식의 정치 공작을 한다는 것 자체도 의아했던 부분이긴 합니다만, 벨라트 그자는 이미 본국에 줄을 대려고 여러모로 애쓰고 있는 상황인 데도 불구하고 본국에서는 그에 대한 답을 내려주고 있지 않습니다.

결국은 위에서 그를 특별히 이용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한데도 저를 파견해 그를 돕도록 하고 있으니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말에 마른 체구의 복면인이 가볍게 혀를 차며 말했다.

쯧! 자넨 그런 생각 할 필요가 없네, 솔직히 말해서 나 또한 그 이유는 몰라,다만 이번 일을 주관하고 계시는 분이 대승정이시기에 뭔가 교단과도 관련된 일일 거라고만 짐작하고 있지.

그분께선 '인바라'의 '사도님'과 직접 대화를 나누시며 모든 일을 처리하고 계시니 그분의 말씀이 곧 '인바라'의 뜻일세, 신의 말씁에 대해서는 의혹을 가질 필요도, 그리고 이유를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임을 모르는가.

약간은 꾸짓는 듯한 투의 그 말에 대꾸했던 복면인은 약간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놀람이 담긴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이번 일이 군부나 정도국에서 벌이는 일이 아니라 교단의 대승정께서 주관하시는 일이란 말씀입니까?

몰랐는가? 그렇다면 내가 괜한 말을 한 것이로군. 그리고 앞으로도 자네는 모르는 것으로 해두게, 자네를 파견하면서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일 테니까, 오래전에 자네가 오마르 대공의 부관으로 있으면서 자주 보았던 안면이 있기에 호의로 말해 주는 중고이니 필히 명심하도록 하게, 알겠는가?

무,물론입니다.

좋아, 그건 그렇고, 이제 얼마 후면 세벽이 밝아올 것 같으니 이쯤에서 시작하도록 하지,

그러한 말에 지금은 리코 자작이라 불리는 복면인이 뒤를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 데려온 키메라 하나로 과연 모두 정리가 되겠습니까? 안에는 제법 실력이 있는 자칭 성기사란 놈들도 십여명씩이나 상주하고 있는데'''''

그 말에 테리카라는 마른 체구의 복면인이 다시 혀를 찼다.

쯧쯧! 자네 한동안 안 보는 사이에 의심만 늘었군, 그래, 걱정 말게, 이번에 데려온 키메라는 보아브딜 님께서 최근에 완성시킨 아주 특별한 녀석일세, 키메라라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 자아도 지니고 있고, 더군다니 진짜 귀족 급 뱀파이어의 인자를 지니고 있기에 사람의 피를 무척 좋아하지,

게다가 지금과 같은 밤이라면 신체를 안개화시키는 것도 가능하고, 오우거를 능가하는 힘과 소드 마스터 정도의 스피드를 낼 수 있으니 진짜 괴물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거야, 특히 신체를 안개화시켰을 때에는 그 하나하나가 생물체에게는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기에 그야말로 무적이라고 할 수 있지, 저 안에 있는 놈들을 모두 지옥으로 보내는 것을 물론이고 확실하게 뱀파이어의 역할도 해낼 테니 두고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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