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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편 - 무공

by 아도비야 2021.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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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天剛)

[2] 설정편 - 무공. 


-장법(掌法)편

1. 연화장(蓮花掌): 개방의 기초적인 독문장법.  힘보다는 변화를 중시하는 장법으로 펼치면 
주위에 연화무늬의 장력이 형성된다. 하나 하나의 위력은 그렇게  강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자가 쓰면 무서워진다. 류흔이 가장 즐겨 쓴다. 


2.백결신장(百結神掌): 연화장보다 위에 위치한 장법. 100개의  매듭이 엮여있는 듯 그 변화
가 끝이 없어 일대일 승부에서 큰 위력을 발휘한다. 이것을 먼저 펼친다면 상대방은 월등한 
실력을 갖추지 않은 이상 수세(守勢)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3.옥현쇄심장력(玉玄碎心掌力): 심장을 단번에 부술 수 있는 변화와 위력을 가지고 있다. 정
파무공답지 않게 잔인한 관계로 익히고  있는 자가 거의 없는 상황.  하지만 그 위력만큼은 
매우 매력적인지라 몇몇은 익히고 있는 걸로 추정된다. 류흔도 그중 한 명이다. 


4.파옥신장(破玉神掌): 오히려 옥현쇄심장력보다  강한 위력을 가진  파괴수법. 초식도 없고 
그냥 후려치는 모든 것을 파괴시킨다. 다만 그 위력에 한계가  있어 나중에 가면 진전이 없
다는 것이 단점이다. 


5.용음십이수(龍吟十二手): 강룡장과 고하를 가릴 수  없는 위력을 가진 장법. 삼십육로타구
봉법, 강룡십팔장과 함께 대대로 오직 개방방주만이 익힐 수 있는 3대 절기 중 하나이기 때
문에 류흔도 정식으로 익히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6.강룡십팔장(降龍十八掌): 두 말할 나위 없는 최강의 장법. 예로부터 개방하면 강룡장과 타
구봉을 떠올릴 정도로 유명한 장법이다. 모두 18가지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류흔이 자
주 쓰는 것만 꼽자면  항룡유희(亢龍遊戱), 신룡탐주(神龍貪珠), 쌍룡쟁투(雙龍爭鬪), 화룡토
주(火龍吐珠), 잠룡물용(潛龍勿用)등이 있다. 각기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어 기타 장법 거의 
대부분의 요결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현재는 일부가 소실되어 12개의  초식만이 내려오고 
있다. 



-권법(拳法)편

1.백결신권(百結神拳): 백결신장과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그  변화와 범위가 조금 적은 
대신 위력은 더 강하다. 류흔이 잘 사용하지 않으므로 그리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


2.취팔선권(醉八仙拳): 류흔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권법. 팔괘, 즉 건태이진손감간곤(乾兌離
震巽坎艮坤)의 효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일 대 일, 일 대  다수의 싸움 어디에서나 위력을 
발휘한다. 취팔선보와 함께 운용되면 배로 강해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언뜻 보면  단순한 
취권처럼 보이지만 그보다는 훨씬 절도 있고 강하다. 


3.파옥권(破玉拳): 파옥신장이 넓은 면에 충격을 준다면  파옥권은 큰 점에 충격을 준다. 상
당히 강한 관통력을 가지고 있어 오히려 더 위험한 권법. 


[3] 설정편 - 무공(2) 

-신공(神功)편

1.홍무자염신공(洪武紫焰神功): 황궁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는 양강(陽强)의 신공. 모두 6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 층 한  층 연성할 때마다 내공의 증가량이  크다. 제1층 초열경
(焦熱勁)에서는 뜨거운 양강지기를 양손에 모을 수 있는 정도이고, 제2층 열화수의 경지부터 
불길을 밖으로 발산해낼 수 있다. 제6층 용무염(龍舞炎)까지 연성하면 불길을 유형화시켜 자
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고 한다. 다만 양강의 기운이 너무 강한 관계로 대성한 사람은 아
무도 없는 상황. 현재 류흔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연성하고 있지 않다. 

제1층 초열경(焦熱勁), 제2층 열화수(烈火手), 제3층 염화경(炎火勁), 제4층 지옥염(地獄炎)
제5층 자염환(紫焰環), 제6층 용무염(龍舞炎)



2.옥현귀진현공(玉玄歸眞玄功): 장로 이상이 배우는  절정심법. 양강의 기운이 비정상적으로 
강한 홍무자염신공과 달리 매우 안정되어 있고 정신 수양에도 좋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옥현귀진현공의 공력으로 옥자 돌림 무공(파옥권, 파옥신장 등)을 펼치면 보통 때보다 배의 
위력을 낼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이 공력으로 펼쳐지는  옥현쇄심장력은 한 때 개방 내에서
도 금기가 되었을 정도로 강하다. 류흔은 익히지 않았다. 



3.혼천강룡신공(混天降龍神功): 개방의 제자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익히는 심법. 상승의 내
공은 아니지만 처음에 내공을 느끼기가 쉽고 나중에 상승심법에 흡수도 잘 되기 때문에 개
방의 모든 이들이 한 번씩은 익히는 내공이다. 위에 말한 두 가지 특징말고는 신(神)자를 붙
이기 뭐한 그저 그런 심법. 류흔도 익힌 바 있다. 



4.백결연화신공(百結蓮花神功): 개방의 4결 제자 이상이  배우는 상승내공심법. 연환(連環)과 
순환(循環)의 묘리가 특히 발달된 심법으로 같은 내공이라도  여타의 내공심법보다 오래 사
용할 수 있다. 백결신장과 백결신권의 전용심법으로 두 가지 무공이 가진 최상의 위력을 발
휘하게 해준다. 류흔은 익히지 않았다. 



5.혼원귀일신공(混元歸一神功): 혼천강룡신공 바로 위 단계의 심법으로 혼천강룡신공으로 다
져진 내공을 더욱 정순하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이걸 안 익혀도 내공증진에 별 상관은 없기
에 익힌 자가 드문 실정. 그러나 사실 이것이야말로 음과 양을 조화시킬 수 있는 최상의 내
공심법이다. 역대 방주들은 이걸 극성까지 성취했던 것이다. 



6.취팔선공(醉八仙功): 도가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정종내가신공(正宗內家神功). 경지에 오를
수록 세사에 초탈해지며 어떤 일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을 얻게 된다. 류흔
이 홍무자염신공과 함께 가장 힘써서 연마한 신공이었지만 희상아를 만난 후로 더 이상 수
련하지 않는다. 무소유(無所有)의 소유(所有)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 목적. 

 
 


- 1. 만남 - 

쾌청하고 창창하기 짝이 없는 높은 하늘. 그 하늘 위에서 한낮이라는 것을 대변하듯 
쨍쨍한 햇살이 지면에 내려앉으며 안 그래도 후끈한 날씨에 한 몫을 더했다. 

“아 짜증나, 됼라 덥네.”

이런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따가운 햇살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햇살을 죽어라 
마주 노려봤지만, 애초에 그걸로 인해 뭘 한다던가, 현재 상황보다 조금 더 나은 
무언가를 바란다던가 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으며 쳐다보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듯 한여름의 태양은 이글거리며 사람들의 시선을 거부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심술 맞게 천하의 모든 것을 바라보며 즐기고 있었다. 

이런 더운 날씨의 하늘 아래에서는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개들이 수난을 당한다. 
초복, 중복, 말복 등 개 잡는 날이 공식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 거리에는 그 흔한 개 한 마리가 보이질 않았다. 이미 모두 끌려간 건지 본능적으로 
몸을 피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거리에 개가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류흔(流昕)은 이런 후끈한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도 길거리를 떠돌며 먹을 
것을 찾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찾아야만 했다. 류흔은 요즘에 흔한 고아들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했으며 13살의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거지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길게 
늘어놓았지만 결국 류흔은 거지라는 간단한 이야기다. 

올해로 13세의 소년인 류흔은 거지임에도 타고난 체질이 그런지 거지답지 않게 
좋은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두툼한 살집은 없었지만 깡마르지도 않은 체구. 7척
(168cm)은 되어 보이는 지나치게 훤칠한 신장에 군데군데 붙어있는 근육이 그의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게 당당해 보인다. 

사실 거지란 직업은 그리 나쁘지 않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떠돌아다닐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공식적인 수입이 없기 때문에 세금도 내지 않는다. 그 
뿐인가? 관병들도 웬만하면 거지를 건드리지 않으며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구걸기술만 
있으면 굶어죽지는 않는다. 게다가 인심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야말로 그 날은 땡잡은 
날로, 단 하루라 할지라도 거지로서는 크게 호강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뭐 인심 더러운 놈 만나면 몇 대 맞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건 다년간의 경험으로 
충분히 피해갈 수 있는 인재(人災)이므로 크게 신경 쓸 것이 되지 못하는 일이다. 
다만 주의점이 있는데, 무엇이 딸린 사람, 즉 가족이나 부양해야할 사람이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하지 말아야할 직업이라는 것이다. 

하여간 이런 거지들 중 하나인 류흔은 지금 잔치를 벌이는 것이 분명한, 그러니까 
풍악이 울리고 온갖 붉은 색의 비단과 형형색색의 천으로 정문을 장식한 커다란 
장원(莊園)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잔치라 하는 것은 집안에 경사(慶事)가 있을 때 하는 것이며, 간단히 말해 기쁜 날 
여는 것이었다. 기쁜 날 돈 안 쓰고 언제 쓰는 가? 따라서 온갖 사람들을 다 초대하여 
축하를 받는 행사가 바로 잔치이므로 거지들에게도 야박하게 굴지 않는 것이 상례
(常禮)였다. 이런 특수성 때문에 거지들 중에 조금 머리가 돌아가고 정보력이 있는 
자들은 잔치를 벌이는 집들을 사전에 알아두고 찾아다닌다. 그러나 류흔은 머리가 
비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요, 정보력이 없는 것도 아니건만 잔칫집만을 찾아다니는 
일은 하지 않았다. 왠지 치사해 보여서 내키지 않는 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잔칫집의 음식은 너무나 호화롭기 때문에 자칫 길들여지기라도 한다면 진정한 
거지로서의 식성은 사라지게 되므로 평소에 견뎌내기가 힘들어진다는 것도 또 
다른 이유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잔치하는 집 출입을 웬만하면 피하던 류흔이었지만, 이번에는 
며칠 간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배가 등짝에 붙을 정도였으므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보통 사람은 하루만 굶어도 죽을 것 같다고 엄살 부리는 
데 며칠이나 굶었으니 여러 번의 경험으로 인해 습관이 되지 않았다면 13살의 
소년으로서는 견뎌낸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류흔이 발걸음을 옮긴 그 장원은 무지막지하게 컸다. 일개 개인의 집이 이렇게 
커도 되는 것인지 불안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크기에 압도되어 주눅이 드는 몸을 
추스르며 류흔은 정문으로 다가갔다.

정문은 아까도 말했다시피 붉은 비단과 온갖 천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붉은 색은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인만큼 특별히 비단을 사용한 것 같았다. 
류흔은 괜히 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색을 왜 그리 
좋아하는지……. 사실 그 자신은 모르고 있는 일이지만 류흔의 몸속을 흐르고 
있는 피는 중국인의 피가 아니었으니 그런 감정을 가지는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개인차라는 건 어디서나 존재하는 것이었으니까.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이미 잔치는 한창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술 취한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중에는 거지들이 태반이었다. 
집에 가져가서 먹으려고 그러는지 호로병에 술을 담고 있는 사람들까지 보였다. 

그런 그들을 둘러보다가 대청에 걸려있는 현수막에 쓰인 글을 읽은 류흔은 내심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헤헷, 나는 운이 좋은 편인 걸. 이 부근에서 가장 미녀라는 희상아(姬?娥) 아씨의 
13번째 생일이라니.]

류흔이 말한 희상아라는 소녀는 세련된 미녀가 많은 왕도(王都) 북경(北京)에서도 
가장 아름답다고 칭송 받고 있는 미녀였다. 고작 13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절세적인 
미모는 벌써부터 빛을 발하여 앞으로 2, 3년만 더 지난다면 고금제일미녀의 칭호가 
모자랄 것이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 덕에 벌써부터 청혼자가 끊이지 않아 희상아의 
부모들은 사람들과 희상아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그런 그녀의 출입이 자유롭게 허락되는 그녀의 생일날 찾아온 류흔은 
확실히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어이, 소형제! 자네도 나와 같은 거지인가?”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던 류흔의 귀로 약간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자신을 부르는 것 같은 목소리에 류흔은 몸을 돌려 자신을 부른 사람을 찾았다. 
류흔을 부른 사람은 술병을 든 손을 흔들어 류흔의 시선을 붙잡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류흔이 다가가 용건을 묻자 그 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류흔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하! 뭐 그렇게 딱딱하게 묻나? 그저 자네가 마땅히 앉을 곳을 찾지 못하는 
것 같기에 부른 것뿐이네.” 

그제야 류흔은 자신을 부른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거지답지 않게 부리부리한 
빛을 뿜어내는 봉목(鳳目)이 특징인 이 사람은 대략 30대 초반의 나이인 것처럼 
보였다. 류흔은 그 동안 주워들은 정보들을 총 검색하여 이 사람에 대한 것을 
찾았으나 당연히 나오지 않았다. 

이내 생각하기를 포기한 류흔은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어 사내의 손을 잡았다. 

“제가 잠시 실례했군요. 저는 류흔이라 합니다.” 

“자네가 먼저 이름을 밝히니 나 또한 안 가르쳐 줄 수가 없군. 내 이름은 
맹정(孟正)이라네. 바르게 살라는 부모님의 바람으로 지어진 것이지. 물론 
지금 나는 불효를 저지르고 있네만.” 

맹정이란 사내의 말에 류흔은 먼지와 흙들로 인해 더러운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비록 더러운 흙과 먼지에 가려져 있다고는 하지만 도저히 거지의 미소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글쎄요. 거지라도 꼭 바른 길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저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되는 것 아닐까요?” 

맹정은 순간적으로 이 거지소년의 미소에 흠뻑 취해 있다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정신을 차리고는 맞장구를 쳤다. 

“하하! 소형제에게 크게 배우는 군. 그렇지! 내 행동에 부끄럼이 없으면 됐지 또 
뭐가 필요하단 말인가?” 

같은 거지라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이 크게 작용하는 바람에 류흔과 맹정은 
금방 친해져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담소라고 해봤자 서로의 거지생활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들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껄껄 웃어가며 이야기를 끊지 않았다. 

사사사삭! 우걱우걱! 

“.......”

맹정과 즐겁게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류흔은 자신의 배가 요구하는 욕구를 외면하지 
않고 열심히 음식을 넘기기 시작했다. 아직 술은 배우지 못해서 마시지 않았지만 
술 외에 근처에 있던 거의 대부분의 음식들이 류흔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한참 떠들던 
맹정은 문득 말을 멈추고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자네 정말 잘 먹는군. 자네 몇 살이라고 했지?” 

튀긴 닭다리를 입에 물고 우물거리던 류흔은 다시 다른 음식에 손을 뻗으며 대답했다. 

“우물우물, 13살이요. 쩝쩝쩝.” 

“뭐? 13살?”

“네. 아마 맞을 거예요. 내가 혼자되었을 때가 11살이었으니까. 음……. 맞네요.” 

맹정은 크게 놀랐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류흔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무슨 
13살짜리의 덩치가 저렇게 크단 말인가. 아무리 봐도 류흔의 체격은 적어도 16살
이상의, 그것도 꽤 크다고 하는 소년처럼 보였던 것이다. 맹정은 내친김에 류흔의 
근골을 살펴보다가 다시 한 번 놀랐다. 

[이, 이럴 수가. 무슨 근골이 이렇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근골의 훌륭함에 놀란 맹정은 급히 손을 내뻗어 류흔의 맥을 잡았다. 류흔은 
멀뚱히 있다가 갑자기 맹정이 손을 잡아채려 하자 손목을 뒤집어 그의 손길을 
피해버렸다. 맹정은 또 한 번 놀랐지만 동추수라는 금나수(擒拏手)를 써서 결국 
그의 맥을 잡아챘다. 

“무슨 짓입니까?”

“소형제, 잠깐만 실례하겠네.”

맹정은 류흔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의 몸에 진기(眞氣)를 주입했다. 진경(盡境)에 
이른 몇 안 되는 고수인 그의 진기는 거침없이 류흔의 몸으로 흘러들어 그의 온몸을 
휩쓸고 다녔다. 그리고 진기가 류흔의 몸을 휩쓸고 다닐수록, 맹정의 얼굴은 점점 
더 숙연해져서 진기가 모두 회수된 후에는 입정(入靜)을 앞둔 고승(高僧)처럼 
무거운 기색이 되었다. 

[뭐지, 이 심맥(心脈)은? 심맥이..... 한줄기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소년이 
예전에 최상승의 내공심법을 수련해 대주천반운을 타통했었단 말인가?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한 줌의 내공도 없지? 게다가 심맥 자체도 천무심맥(天武心脈)?] 

대주천반운(大周天盤運)이란, 십이정경(十二正經), 십오락맥(十五絡脈), 
기경팔맥(奇經八脈)을 모조리 포괄하는 전신주천(全身周天)에 익힌 내공심법 
나름대로의 오의(奧義)가 더해진 가상의 심맥으로서 이것을 타통했음은 무공의 
경지가 이미 진경(盡境) 초입에 들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결과는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데 현재 이 류흔이란 소년의 심맥은 그 중에서도 
최상승의 내공으로 형성된 것으로 맹정 자신도 며칠 전에야 겨우 이룬 경지였다. 
맹정은 문득 그가 자신의 손을 한 번 피했었다는 것을 생각해내고 그에게 물었다. 

“소형제, 혹시 예전에 무공을 익힌 적이 있었나?”

류흔은 난데없는 맹정의 말에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니요. 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아까 전에는 어떻게 내 손을 피했지?” 

“아, 그냥 갑자기 손으로 뭔가가 다가오기에 피하려고 움직이다보니......”

맹정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보기에 아까 전 류흔의 회피동작은 수련을 아주 
오랫동안 했던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다. 아무리 무(武)의 
경지를 끝없이 끌어올릴 수 있다는 천무심맥이며, 무인의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해도 수련 없이는 나올 수 없는 동작이었던 것이다. 

류흔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맹정에게 물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아, 아닐세. 하하, 미안하군.” 

사과의 말과 함께 류흔의 손목을 놓아준 맹정은 그 뒤로도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최상승의 내공을 닦아 형성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리고 그 중간에 어떤 
기연(奇緣)이 끼어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13살에 대주천반운을 타통했다는 것은 
이 소년이 개세기재(開歲奇才)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근골도 
그렇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 소년은 다시없을 기재가 분명했다.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방(?)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분명히 어디엔가 이 
소년을 이 정도까지 키워놓은 자가 있을 것이었다. 만약 나중에 그 자가 와서 
류흔을 찾는다면? 자신들 개방의 정보가 모조리 그 쪽으로 흘러가고 말 것이다. 
현 무림이 평화롭다고는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옛날 속담에도 
있듯 사람 마음속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지 않는가?

[……하나의 음모일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맹정은 류흔을 데려가기로 결심했다. 이런 기재를 놓친다는 것은 
하나의 경지를 이룬 자로서 매우 아쉬운 일이었고 어차피 인생이란 도박의 
연속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심을 굳힌 맹정은 정신없이 음식을 집어먹고 
있는 류흔을 바라보았다. 




[5] 천강 - 1.만남(2) 

이 때 류흔은 맹정이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이 혼자 생각에 잠겨 있자 그와 대화 
나누기를 포기하고 음식에 파묻혀 있는 중이었다. 그의 손놀림은 무척이나 빨라서 
그의 주위에 있는 음식들은 빠른 속도로 없어져 가고 있었다. 거의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들어 있는 류흔이었다. 자신이 평소에 그렇게 먹고 싶어 했던 음식들이 총망라되어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한동안 음식에 파묻혀 있던 그의 눈에 문득 경단(瓊團)이 
띄었다. 

탁! 

“응?”

“아!”

다른 것을 동시에 먹느라 경단 쪽을 보지도 않고 손을 뻗었던 류흔은 뭔가가 자신의 
손을 저지하자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것과 대비되는 깨끗하고 하얀 손이었다. 그 
손이 너무나 깨끗하고 눈부시게 하얀 섬섬옥수(纖纖玉手)라는 것에 놀란 류흔은 짧게 
감탄했지만, 경단은 평소에 매우 먹고 싶어 했던 것이었으므로 이내 다시 손을 내뻗어 
음식을 쟁취했다. 그리고 나서야 류흔은 몸을 돌려 자신의 손을 잠시 멈추게 한 그 
섬섬옥수의 임자를 바라보았다. 

“응? 넌 누구냐?” 

“아하, 안녕?” 

류흔의 손길을 막은 섬섬옥수의 주인공은, 깨끗한 분홍빛 비단으로 만든 능라주의
(綾羅紬衣)를 곱게 차려 입고 입가에 재미있다는 듯 배시시 미소를 띠고 있는 너무나 
아름다운 13세 가량의 소녀(少女)였다. 류흔의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천상으로 
돌아가는 길을 잊어 지상에 남게 된 선녀의 모습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비록 아직 
나이가 어려 얼굴에 어린 티가 나긴 했지만 그것대로 매력이 되어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을 박아 넣은 듯한 영롱한 눈동자는 매혹적이면서 신비로운 
빛을 뿌렸고, 백옥(白玉)같이 깨끗하고 뽀얀 얼굴은 조물주의 창조력과 예술성을 극찬하고 
싶을 정도로 극치의 미를 발산하고 있었다. 더 이상 묘사한다는 것이 입만 아픈, 바로 
이 생일잔치의 주인공인 희상아, 바로 그녀였다. 잔치의 주인공인 그녀가 왜 손님들 
대접하는 곳에 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의 말만 들었지 얼굴을 본적이 없는 류흔으로서는 그녀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 
중요한 일인지 아닌지 몰랐지만. 

이 둘이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경로를 간략히 설명하자면 희상아는 부모님 
몰래 자리를 빠져 나와 마음껏 돌아다니다가 류흔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음식에
파묻혀있다시피 했던 그는 거지인 듯 매우 남루한 옷차림이었지만 희상아는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보통 소년보다 훨씬 큰 체구의 그가 신기하여 호기심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상한 사람이네. 뭐가 이렇게 크지? 풋, 그리고 바보 같아.] 

희상아는 속으로 웃으며 한 손에 경단을 든 채 멍청히 서있는 그를 요목조목 
살펴보았다. 얼굴이 먼지와 흙들로 더럽혀진데다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인해 
나이를 알 수는 없었지만 결코 자신보다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키만 본다면 두어 살 더 많다고 해도 모자를 지경이었다. 

찬찬히 그를 살펴보고 있는데,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안녕? 너 나 알아?” 

여전히 한손에 경단을 들고 있는 상황에서였다. 커다란 체구의 소년이 경단을 한
손에 든 채 시비조로 반문하는 모습이 왠지 우습게 느껴져 희상아는 소맷자락으로 
입술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천상에서 옥황상제 옆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선녀의 목소리가 이런 것일까? 무조건 
그렇다고 대답해주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성(美聲)이었다. 옥구슬이 쟁반에 
구르는 듯 가슴에 묘한 울림을 주고, 평생 기억하고 싶은 그런 목소리. 작은 
웃음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장내의 모든 사람들의 말소리가 한 순간에 그치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희상아에게 모였다는 것이 그것의 증명이었다. 이런 천상의 
목소리가 귀를 달콤하게 해주는데도 류흔은 별다른 감흥 없이 손을 휘저었다. 

“이봐, 이봐. 왜 웃는 거야?” 

입을 가린 채 한참 웃던 희상아는 문득 자신이 너무 무례했다고 생각하고는 
사과했다. 웬만한 사람들로서는 차마 우러러 볼 수도 없는 고귀한 신분과 
일국의 황녀(皇女)도 부러워할 아름다움을 가진 그녀가 한낱 거지에게 사과를 
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어머, 미안해요. 혹시 기분 나쁘셨어요?” 

“뭐, 별로 그런 건 아니지만.” 

류흔은 여전히 별다른 감흥 없는 어조로 태연하게 말했다. 그로서는 여자가 
예쁘든 말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배고파 죽겠는데 여자는 무슨 여자? 게다가 
나이가 아직 어려 남녀의 일에 관해서 무지한 상태였으므로 그녀에 대해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다. 

류흔의 태연한 대답에 희상아는 또 웃음이 나왔으나 참았다. 상아(?娥)는 말문이 
트인 김에 그를 처음 본 순간 가졌던 여러 가지 궁금증을 풀기로 했다. 

“나이가 몇이죠?” 

주위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왜 그녀가 이런 하찮은 거지에게 다정하게 대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무언가 뜻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계속 지켜보았다. 

“13살.” 

“어머, 저랑 같은 나이군요. 그럼 말 놔도 되죠?” 

류흔은 잠시 동안 그녀가 한 말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제까지는 안 놨었나? 아, 나만 놨었군. 하하.]

“그러든지.”

“아하, 고마워. 그런데 이름이 뭐야?” 

상아는 이상하게도 그에게 계속 마음이 끌려 계속 질문을 던졌다. 얼굴도 별 
볼 일 없고, 입고 있는 옷차림을 보니 거지고, 특별히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마음이 끌렸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까지 수많은 연상의 남자들에게 달콤한 말을 
들어왔던 그녀지만 그의 담담한 말 만큼 그녀의 가슴을 뒤흔드는 것은 없었고, 그 어떤 
세도가의 자제들이 보였던 세련된 태도보다 그의 자연스러운 행동이 마음을 끌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데도 마음은 편했다. 그래서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낌 없이 말을 
걸게 되는 것이었다. 

류흔은 상아가 계속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자 이상하게 생각했다. 확실히 예쁘고, 
호감 가는 여자아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간까지 빼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초면이 아닌가. 그리고 그녀는 알아야 했다. 지금 그녀를 상대하느라 
자신이 얼마나 손해를 보고 있는지. 손이 멈춰버렸지 않은가! 그러나 결국 그도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굴복하여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기로 했다. 

“류흔, 천류흔(天流昕). 흘러  다니면서 살아도 밝게  살라고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
야.”

“아하, 천류흔? 멋지고 좋은 이름이네. 내 이름은 알지? 훗, 숙녀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니까.”

그러면서 살짝 얼굴을 붉히는 그녀의 모습이란 차마 형용할 수조차 없었다. 그 
아름다움을 나타내기에 글이란 도구는 너무나 조잡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굳이 묘사를 필요로 한다면, 현재 그녀의 모습을 보는 자들이 모두 황홀함에 기절하기 
직전인 상태라고 하면 될까? 모자를 듯 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류흔은 타고난 면역성(?)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정신을 
잃지 않았다. 물론 가슴은 약간 빠르게 뛰었지만 오묘한 몸의 작용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나이였기 때문에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질문에
대해서도 조금 생각해야했기 때문에 더욱 멀쩡한 그였다. 류흔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넌 이상한 여자애구나. 왜 네 이름을 내가 알거라고 생각하지?”

“그건……” 

막 상아가 대답하려 할 때, 갑자기 류흔이 왼팔을 비스듬히 뒤로 뻗었다. 빠르게 
올라간 그의 왼손은 때마침 날아오는 하나의 돌을 잡아채고 있었다. 

팍! 

류흔의 왼손에 잡힌 것은 주먹만한 돌덩이였다. 정확히 류흔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온 돌은 상상외로 강한 힘을 내재하고 있었지만 선천적으로 신력(神力)과 
감각(感覺)을 타고난 류흔의 머리를 맞출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었기에, 상아는 자신이 하려던 말도 잊어버리고 
그에게 다가가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어머! 괜찮아?” 

류흔은 날아온 돌을 자신도 모르게 막아낸 왼손을 바라보다가 걱정스런 상아의 
목소리에 빙긋 웃었다. 

“아, 걱정 마. 아무렇지도 않아.”

“아......!” 

상아는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에서 환상적인 미(美)를 보았다. 그의 미소란 그 
추레한 몰골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멋지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한 것이었다. 이 
미소를 현재 그를 깔보고 있는 모든 이들한테 보여줘야 할 텐데. 상아는 문득 
그의 얼굴을 덮은 먼지와 흙을 소매로 닦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한편, 진작부터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맹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었다. 저 류흔이란 소년은 무인으로서의 모든 조건을 
타고났을 뿐만이 아니라 훌륭한 무공을 닦은 적이 있었다는 것을. 맹정은 기이한 
눈빛으로 한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훗, 저 꼬마 녀석. 조금 당황했겠지.” 

맹정이 말한 꼬마 녀석이란 류흔이 아니라 류흔에게 돌을 던진 질 좋은 화복(華服)을 
입은 어떤 준수한 청소년을 말하는 것이었다. 15살가량 되어 보이는 약간 성숙한 
얼굴이었지만 체격은 류흔보다 작은 청소년. 그 청소년은 지금 놀란 와중에도 
질투에 불타는 얼굴로 류흔을 노려보고 있었다. 꽤 괜찮게 생기긴 했지만 눈초리가 
살짝 찢어지고 위로 말려 올라가 그의 성격이 신경질적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 신경질적 용모의 청소년은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의 집합소인 이곳 북경(北京)에서도 
막강한 세도를 자랑하고 있는 대장군부(大將軍府)의 외동아들이었다. 

악소강(岳少强)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청소년은, 평소에도 희상아에게 접근하는 
남자라면 그게 고관대작의 자제이든 뭐든 무조건 자신의 집안이 가진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세도를 이용해 처리하곤 했다. 그런데 그렇게 지켜온,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여신(女神)과 감히 어디서 굴러온 지 모를 거지새끼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평소에 자신을 근처에도 못 오게 했던 희상아가 다정하게 웃고 이야기하는 것에 
배신감을 느끼기 전에 그 거지새끼가 너무 괘씸했다. 명색이 장군부의 외동아들이라 
어려서부터 많은 무예를 배워온 악소강은 비록 얼마 되지 않지만 전 내공을 실어서 
저 꼴 보기 싫은 거지 녀석에게 짱돌을 던졌다. 맞아서 죽는다해도 저쪽은 거지요, 
이쪽은 대장군부의 아들이니 별 탈이 없을 것이고, 안 맞는다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사이에서 자신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벌어진 일련의 
상황은 그의 예상을 크게 벗어났다. 

그 거지 자식은 자신이 전력을 실어 던진 짱돌을 우습게 잡아버린 데다가,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정확하게 자신을 쳐다보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 눈빛은 이제까지 
악소강이 살아오면서 대한 적이 없는 무서운 것이었다. 악소강은 그가 노려보는 
눈빛에 심한 압박감을 느끼며 움찔했으나, 곧 그가 고개를 돌린 덕분에 땅바닥에 
주저앉는 볼썽사나운 꼴은 면할 수 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추스른 악소강은 나중에 잔치가 파하고 나서 두고 보자고 이를 갈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사라졌다. 저 녀석을 반쯤 죽여 놓지 않고서는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생각에 집에서 밥만 축내는 식객들을 동원할 생각인 것이다. 15살이나 
먹었으면서 하는 짓은 꼬마 애들보다도 못했다. 

짱돌을 손에서 내던지고 다시 희상아와의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방금 전의 일을 
뇌리에서 지운 류흔은 현재 또 다른 질문을 받고 있었다. 

“류흔은 왜 혼자야?” 

원래는 ‘너는 왜 하고많은 직업 중에 거지야?’ 라는 말이었겠지만 상아는 얼굴이 
예쁜 만큼 언어도 순화된 것만 골라 썼다. 그러나 그 안에는 그녀가 류흔에게 궁금했던 
모든 것이 들어있었으므로 류흔이 대답하기에는 조금 곤란한 질문이었다. 과거의 
기억이란 얼마 남아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12살 이전의 과거는 류흔에게 있어 
떨쳐버리고 싶은 악몽이었던 것이다. 새장 속의 새로 살았던 지옥 같은 생활,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본능적으로 기억하길 거부하고 있음은 느끼고 있었다. 

류흔이 곧바로 대답하지 않자 상아는 자신이 말을 잘못했음을 깨닫고 곧바로 사과했다. 

“미, 미안! 내가 너무 쓸데없는 걸 물었지? 잘못했어, 미안해......” 

류흔이 조금만 더 침묵을 지키고 있으면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신의 최고 
걸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녀의 얼굴에 눈물이 어리는 것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것이겠지만 류흔으로서는 별로 보고 싶은 얼굴이 아니었다. 울만한 일을 겪는 사람은 
자신하나뿐이면 충분한 것이다. 류흔은 상아의 등을 토닥이려다가 자신이 현재 매우 
더럽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담담한 음성으로 그녀의 마음만을 보듬어 안아주었다. 

“하하,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렇게 사과할 필요 없어. 넌 정말 이상한 여자애구나. 
내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사과를 하는 거지?”

류흔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상아는 울먹이던 얼굴을 환하게 펴고는 갑자기 애지
(새끼손가락)를 내밀었다. 벌써부터 가늘고 고운 형태가 살아있는 그런 정교한 
아름다움을 가진 손가락이 류흔의 눈앞에서 멈춰 섰다. 류흔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자 상아는 그 고운 옥음을 흘렸다. 

“약속해.” 

“에? 뭘?” 

“나중에 모두 이야기해주기로. 이 손가락에 걸고 약속하는 거야.”

“……이거 꼭 해야돼냐?”

“응, 응!”

류흔의 회의적인 반응에 상아는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그를 재촉했다. 류흔은 
잠시 그녀의 아름다운 손가락을 바라보다가 결국 자신도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거기에 걸고서는 맹세했다……가 아니라 하려했다. 

“나 천류흔은 ......아, 네 이름이 뭐지?”

류흔이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묻자 상아가 놀라며 말했다. 

“어머, 내가 말 안했어? 음...... 호호, 오늘 생일잔치가 누구를 축하하기 위한 것이지?”

“그야 물론 희상아 아씨......엥? 그러면 네가 바로 그 희상아 아씨란 말이야?”

“후훗......”

상아는 예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류흔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눈앞의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상아가 물었다. 

“왜 그래?”

“아니, 소문은 믿을 만한 게 못된다고 또 한 번 느꼈을 뿐이야.”

류흔이 그렇게 대답하자 상아가 조금 조심스런 어조로 다시 물었다. 

“그건 무슨 의미?”

류흔은 자신에게 의미를 묻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어려 있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정말 예쁘긴 예뻤다. 류흔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져주며 말했다. 

“소문으로 들었던 것보다 훨씬 예쁘다는 의미지. 하하, 어쨌든 맹세 할게. 손가락 
다시 내밀어줄래?”

“…….”

상아는 얼굴을 곱게 붉힌 채 조용히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류흔은 근처의 
잔에 들어있던 물을 쏟아 오른손을 씻고는 그녀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나 천류흔은 희상아와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천지신명(天地神明)께 맹세합니다.” 

“나 희상아는 천류흔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상아의 맹세가 끝나자, 류흔이 물었다. 

“응? 너는 나랑 무슨 약속을 했는데?”

“바보,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하하! 그렇지. 하하하!” 

별것도 아닌 약속의 맹세가 엄청 거창하지만 이 약속은 류흔의 일생에 아주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니 어찌 보면 오히려 모자란 감이 있었다. 오늘 상아의 13번째
생일잔치는, 그녀의 인생에 있어 한 획을 긋는 일대사건이 되었으며 류흔과 그녀가 
함께 천지신명께 맹세하는 것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6] 천강 - 1.만남(3) 


자정(子正). 

보통 사람이라면 왠지 나돌아 다니기가 꺼려지고 묘지라도 갈라치면 오만 잡귀 
생각이 다 드는 시간대이다. 양상군자(梁上君子)들이 주로 활동하는 시간이며, 
보통 사람들이라면 깊은 잠에 빠져 있거나 한창 애 만드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시간대인 것이다. 희상아의 생일잔치에 등장했던 류흔은 보통 사람 중에서도 
전자에 속하기 때문에 단잠에 빠져 있었다. 

“코올……. 코올......” 

낮은 코고는 소리가 류흔의 주요 잠자리인 고요한 헛간에 울리고 있었다. 푹신푹신한 
짚단 위에서 활개를 펼친 채 자는 잠의 달콤함은 겨울에 추위에 새우처럼 웅크리며 
자는 잠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를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모처럼 배를 가득 채운 
만큼 류흔은 전례 없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끼이익― 

문득, 류흔이 잠들어 있는 헛간의 문이 조심스레 열리고, 보기만 해도 육중한 느낌을 
주는 몽둥이를 꼬나 잡은 거한 몇 명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손에 
든 몽둥이로 인해 결코 좋은 뜻으로 온 것은 아님이 분명해 보였다. ‘선자불래(善者不來) 
내자불선(來者不善)’ 이라는 말이 절로 생각나는 상황이었다. 

“크큿, 이놈 팔자 좋게 자빠져 자고 있구만.” 

괴한 중 하나가 몽둥이를 움켜쥐며 낮게 괴소를 흘렸다. 사람을 때려죽이는데 최적으로 
제작된 몽둥이는, 끝이 검게 번들거리는 것을 보니 철령목(鐵靈木)으로 만들어진 듯 
했다. 철령목은 남만(南蠻)의 오지에서만 자란다는 나무로 그 강도가 일반 쇠를 훨씬 
뛰어넘는다고 알려져 있는 특이한 나무였다. 하지만 원래 소문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인 
만큼 실제로 쇠를 훨씬 뛰어넘는 정도는 아니고 그저 약간 단단한 정도였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해도 보기 힘든 재질임에는 틀림없었으므로 값이 상당히 비싼 물품에 
속했기 때문에 이런 무뢰배들이 가지기에는 무리인 고급품이었다. 

“이렇게 쉬운 일을 하라고 이처럼 좋은 무기를 주다니……. 역시 있는 집안은 다르구먼.” 

“누가 아니래나. 그나저나 조금 불쌍하군. 어쩌다가 악 공자의 눈에 잘못 들었는지......”

“에잉, 그런 거 생각할 게 뭐 있나? 그냥 후딱 해치우고 가자고.” 

“그러지.”

마지막 말은 그들 사이에서 나온 목소리가 아니었다. 중후한 30대의 저음인 그 
목소리는, 공기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괴한들의 귀를 괴롭게 했다. 결코 보통 사람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음성이 아닌, 뭔가 특수한 신공을 운용한 음성임이 분명했지만 
정식으로 무공을 배운 것도 아닌 동네 건달들이 알리는 없었다. 그저 갑작스런 
이질적인 음성에 놀랐을 뿐이었다. 

“누, 누구냐?!” 

너무나 전형적인 상황에 또한 전형적인 대사였다. 하지만 전형적이라는 이야기는 
그만큼 그 상황에 어울리는 것도 없다는 소리인 것이다. 그런 고로, 이 괴한의 
반응은 상당히 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피식!” 

갑작스레 나타난 정체불명의 사나이는(괴한들도 마찬가지지만......) 괴한의 물음에 
소리를 내서 피식 웃고는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퍼억! 

“컥!” 

갑작스런 강룡십팔장(降龍十八掌)의 강렬한 내가장력(內家掌力)이 괴한의 복부에서 
굉음을 일으키며 그 위력을 보였다. 

콰당! 

한참을 날아간 괴한의 몸은 벽에 부딪혀 구덩이를 형성시킨 채 그대로 파묻혀 
버렸다. 장력 하나하나가  강기(剛氣)의 수준이라는 강룡십팔장  중의 항룡유희(亢龍遊戱)였
다. 

“뭐냐?!” 

예상치 못한 기습에 크게 놀란 괴한들은 저마다 철령목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죽기 살기라는 말이 생각나는 형상이었다. 그들로서는 필사적인 행동이었으나 
이 정체불명의 사나이에게 위협이 될만한 행동은 되지 못했다. 

쩌엉! 쩡! 

정체불명사나이의 손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두 사람씩 떨어져 나갔다. 손놀림이 
어찌나 절묘한지 괴한들은 맞는 순간에도 무슨 환상이 아닌가 착각하며 얻어맞는 
것이다. 이런 환상적인 장법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 있던(하긴 이런 상황에서 계속 
자고 있다면......) 류흔의 동공을 평소의 배로 커지게 만들었고, 그의 시선을 
온통 사로잡아버렸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일은 류흔의 뇌리 속에 강룡십팔장의 
묘리가 떠오르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이, 이거 또 시작이군. 젠장, 한 번 떠오르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어! 항룡유희, 
잠룡물용(潛龍勿用), 신룡탐주(神龍貪珠), 화룡토주(火龍吐珠)......]

놀랍게도 류흔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지금은 실전되어 12장밖에 내려오지 
않는다는 강룡십팔장의 완전한 구결이었다. 

이런 일은 전에도 가끔씩 있었던 일인데, 무엇을 보면 그에 관련된 수만 가지 
지식들이 한꺼번에 류흔의 머리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그게 어느 분야든 
상관없었다. 의학(醫學), 서(書), 시(詩), 음(音), 무(武), 심지어 진법(陳法)에 까지. 
실로 모든 방면을 아우르는 지식이 류흔의 머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어떤 계기가 있지 않으면 절대로 생각나지 않았다. 

어쨌든 현재 류흔의 눈과 이어진 류흔의 뇌는 엄청나게 맹렬히 회전하고 있었다. 
맹정이 강룡장을 운용하는 순간마다 류흔의 머릿속에서 강룡십팔장에 관련된 수많은 
사실들이 류흔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강룡십팔장의 위력 및 약점, 강룡십팔장과 
비견되는 삼십육로타구봉법(三十六路打狗棒法)이 떠오르기 시작하고, 이에 맞설 수 
있는 천하에 산재한 몇 안 되는 장법들까지 류흔의 뇌리 속에서 생성되었다가 
소멸하는 것이 수차례, 이제는 고통마저 느껴졌다. 

류흔은 머리를 움켜쥔 채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사실 무아지경(無我之境)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되는 상태가 아닌데다가, 현재 
류흔의 머리 속은 주인의 의사를 깡그리 무시한 채 오만가지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이러한 노력은 헛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급기야는 터질 것 같은 
기분에 뒹굴기 시작하는 류흔이었다. 

한 편 동네 건달들을 아주 가볍게 요리하고(?) 손을 털던 정체불명의 사나이 
- 이쯤 되면 이름을 밝히는 것이 예의겠지? - 맹정은 갑작스런 류흔의 발광에 
크게 놀라며 한 걸음에 류흔에게 다가갔다. 비명을 지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류흔의 얼굴은 매우 일그러져 있었다. 

사람들은 확실한 일을 보면서도 그것을 당사자의 입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기묘한 습성이 있다. 이 같은 습성에서는 맹정도 예외가 아니어서 류흔의 뻔한 
상태를 보면서도 수혈(睡穴)을 짚어 고통을 없애줄 생각은 하지 않고 류흔의 몸을 
흔들면서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이봐, 괜찮나?” 

맹정이 몸을 거세게 흔드는 바람에 안 그래도 터질 것 같던 머리 속이 더욱
복잡해져 강한 고통을 느낀 류흔은 자신도 모르게 강룡십팔장 중에 아주 치명적인
(거의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살초(殺招) 화룡토주를 맹정의 몸에 뿌려냈다. 

화악! 

뜨거운 열기와 함께 구형(球形)의, 차라리 장강(掌剛)이라고 불려야 할 장력이 
맹정의 몸을 강타했다. 

“크억!” 

다행히도 류흔의 양손에서 막강한 기운이 모이는 것을 감지한 맹정의 몸이 
화룡토주가 발동된 순간 뒤로 젖혀지지 않았다면, 무의식중에 진기가 움직여 
일종의 반탄막(反彈膜)을 형성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양팔이 반사적으로 
방어태세를 취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화룡토주의 기운이 약해지지 않았다면 
지금쯤 맹정은 아마 새까맣게 탄 인육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 정도로 류흔이 
무의식중에 펼쳐낸 화룡토주 아니, 실전된 강룡십팔장의 화룡토주는 막강한 
위력을 자랑했다. 

“이, 이게 대체......” 

화룡토주를 한방 갈긴 뒤에 곧바로 쓰러져 버린 류흔을 바라보며 맹정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내공이 30년 가까이 되는 고수들이 전력을 다해도 
발휘할 수 없는 강맹한 장력을 이제 13세의 류흔이 쏘아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는 황당한 감정이 앞섰다. 사실 잘 자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혼자 
발광하다가 몸을 흔들어주니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장강에 가까운 장력을 갈기고 
다시 쓰러져버리는 류흔의 행동에 황당한 표정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 정신상태까지 
심히 의심 가는 바였다. 게다가 그 위력이란 개방의 차기방주로 내정된 자신의 
기혈을 들끓게 만들 정도로 막강한 것이었으니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맹정의 머리 속을 스쳐 가는 동안 맹정의 코는 무언가가 익는 
듯한 냄새를 감지하고 그것을 콧속으로 유도하기 시작했다. 

“엥? 이게 무슨 냄새지?” 

한참 두리번거리며 냄새의 근원지를 찾던 맹정은 자신의 팔에서 그 근원지를 
찾을 수 있었고, 이어서 비명을 질렀다. 

“으악! 이게 뭐야?!” 

류흔의 장력을 막아냈던 양팔의 소매가 다 타버린 것은 물론이고 그 안의 
팔마저 벌겋게 익어버렸던 것이다. 만약 팔에 실린 내공이 조금만 약했다면 
실제로 그의 팔은 식용으로나 쓸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맹정은 이 굉장한 위력에 혀를 내둘렀다. 

“거참.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굉장한 장력이군. 개방의 팔결(八結)인 
나 걸무개(乞武?) 맹정의 팔을 이렇게 만들 수 있다니......”

팔결이란 말뜻 그대로 풀이하자면 매듭 여덟 개란 뜻이지만 개방사이에서는 
굉장히 높은 서열을 나타냈다. 개방의 서열 중 칠결인 장로의 위 서열, 
그리고 후개(後?) 즉, 차기방주로 내정된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개방 최강의 무공이자 방주만이 익힐 수 있는 강룡십팔장은 물론 삼십육로
타구봉법마저 어느 정도 깨우친 사람으로 그 무공수위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또한 걸무개란 별호도 최고의 후기지수들을 뜻하는 구무룡(九武龍) 1대 중의 
하나로서 천하에 이름을 떨치며 얻은 것으로 그 무게란 굉장한 것이다. 류흔은 
무의식중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의 팔을 익혀버린(?) 무서운 아이였다. 

기재들을 찾아다녔던 맹정에게 있어 자신의 팔이 익은 것은 류흔을 발견한 
기쁨에 비하면 댈 수도 없는 사소한 일이었다. ‘분노’이라는 감정은 ‘희열’
이라는 감정에 밀려 고개도 내밀지 못했다. 그만큼 류흔에 대한 기대란 굉장한 
것이었다. 아직 틀도 제대로 잡혀있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이런 충격을 준 이 
어린 소년이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지 상상하는 것은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하하하하! 어린 친구! 이제부터 자네는 개방에서 최초로 천하최강의 고수가 될 것이네! 
하하하!” 

엄청나게 유쾌한 듯 대소를 터뜨린 맹정은 정신을 잃은 류흔을 어깨에 들쳐 메고 
신법을 펼쳐 이 구질구질하지만 자기들 같은 거지들에게는 최고의 안식처인 헛간에서 
사라졌다. 

맹정과 류흔이 떠난 헛간에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건달들의 몸뚱이만이 
방금 전의 결투(?)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 2. 개방의 기재 - 

개방(??).

무림의 전통적인 강호 구파일방(九派一?)중의 일방(一?)인 거지들의 집합소이다. 
방도 수가 무려 십만이요, 중원 전역에 펼쳐진 분타가 백 개를 헤아리는 등 모든 문파들 
중 최대의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전국에 퍼져 있는 만큼 정보력 또한 하오문(下午門)과 
함께 무림 이대 정보 집단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문파이다. 단지 무력이 없는 하오문과는 
달리 상당한(사실은 굉장한) 무력을 갖추고 있어 그 어떤 문파에게도 무시 받지 않고 
이용당하지 않는다는 점이 하오문과의 격차를 하늘과 땅만큼 벌려놓고 있었다. 

이렇게 거대한 개방의 방칙은 ‘대의숭상(大義崇尙)’이라는 글자 수로 보면 넷이요, 
그 뜻은 하나인 단어로 매듭지을 수 있겠다. 단 하나의 규칙인 만큼 어겼을 시 그 
처벌이 강할 뿐만 아니라 같은 방도들 사이에서 받는 무시와 멸시가 굉장했으므로 
개방의 방도로 자처하는 사람 치고 의리 없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디까지나 ‘거의’
니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말이긴 하지만 처음 입문하여 3년 간 의결이 없는 
백의개라면 모를까 적어도 일결(一結)이상의 직위라면 단연코 없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것이 개방의 방도들인 것이다. 그 덕분에 
‘거의 대부분의 무림인들에게는 꼭 하나씩 개방에 몸담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라는 
말이 나올 만큼 개방 방도들의 신용은 좋았다.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는 거지들의 특성과 무공을 기막히게 잘 찾아내는 무림인들의 
특성이 조화된 개방의 방도들은 그 방도 수만큼이나 방대한 양의 무공을 중원 전역을 
떠돌아다니면서 입수했다. 그 수는 실로 수천까지는 안 되지만 수십, 조금 과장해서 
수백은 족히 되는 굉장한 양이었다. 물론 그 대부분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그렇듯이 
별 볼일 없는 것이었지만 ‘닭이 백이면 그 중에 봉이 하나있다.’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가끔씩 발견되는 진기한 무공들은 그야말로 최상승의 무공들뿐이었다. 개중에는 
가끔씩 황궁무고(皇宮武庫)에서 흘러나온 무공도 있었다.(대체 어떻게 얻은 거지?)

우선 무림에 잘 알려진 내공심법(內功心法)만 해도 개방의 모든 방도들이 익히는 
혼천강룡신공(混天降龍神功), 4결(四結) 이상이 배우는 백결연화신공(百結蓮花神功), 
장로 이상이 배우는 옥현귀진현공(玉玄歸眞玄功) 등 그 수가 굉장한 것이다. 거기에 
개인에 따라 배우는 무공이 또 다르고, 하여간 이것저것 해서 개방의 개인이 지니는 
무공의 개수는 적어도 열 가지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개방의 무공 중에서 가장 강한 무공은 강룡십팔장(降龍十八掌)과 
변화에 있어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삼십육로타구봉법(三十六路打狗棒法)이다. 이것은 
개방고유의 무공으로서 개방의 방주(?主)와 후개(後?)만이 익힐 수 있고 비급으로 
남길 수 없으며 오직 구결만으로 전수한다. 그래서 개방의 방주는 총명해야 했고, 
자질이 상당히 뛰어나야 했다. 그러나 9대인가 10대인가의 방주가 눈깔이 삐었는지 
아니면 정파답게 자질보다 성품을 더 따졌는지 몰라도 그 다음대의 방주가 강룡십팔장을 
모두 익히지 못해 현재에는 겨우 12초식만 내려오는 현실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가 죽을 정도로 노력해서 삼십육로타구봉법은 모조리 익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강룡십팔장의 소실로 인해 개방은 천하의 패권다툼에서 뒤로 물러나야 했으며 그 세가 
많이 약해졌다. 

개방이 뒷전으로 물러선 당금 무림에서 최강의 문파를 꼽으라면 몇 군데를 꼽을 수 
있다. 그 존재이유가 불분명한 정도(正道)의 무림맹(武林盟), 힘을 추구하는 마도(魔道)의 
독불장군 마교(魔敎), 순수하게 힘만을 추구하는 마도와는 달리 온갖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하고 다니고 대체 뭘 믿는지 알 수 없는 사도(邪道)의 종교집단 혈사교(血死敎)가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 무림맹과 혈사교에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저마다 기재양성소의 
역할을 하는 정천무관(正天武官)과 사천무각(邪天武閣)이라는 사상초유의 무관들을 
지었는데 이 집단들의 힘은 오히려 무림맹과 혈사교를 넘어설 정도였다. 이 외에는 
전통적인 강호 구파와 오대세가, 천독문(千毒門), 살야림(殺夜林)등이 그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런 복잡한 상황의 무림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나 힘을 기르고 있던 개방에 그들의 
염원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재가 나타났다. 걸무개 맹정이 발굴한 이 기재의 이름은 
바로 ‘천류흔(天流昕)’이었다. 



“푸아!” 

고된 수련 뒤 폭포에서의 목욕은 정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상쾌함을 전신에 
가져다준다. 세찬 물보라가 등을 부서져라 때리며 활력을 불어넣는다. 잔잔할 날 
없는 수면에 물과 물의 충돌로 인해 생기는 물보라가 보는 사람마저 시원하게 만들었다. 

어떤 수를 썼는지 잔잔하지도 않는 수면에 생성된 뿌연 물안개로 인해 그 정체가 
모호한 한 명의 청년이 폭포를 맞아가며 목욕을 하고 있었다. 덩치는 웬만한 장정들보다 
훤칠했지만 언뜻 언뜻 보이는 앳된 얼굴이 그가 그리 나이가 많지 않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목욕이 끝났는지 물안개를 소멸시킨 그 소년(이라기엔 덩치가 너무 크지만)은 
격공섭물(隔空攝物)의 묘기로 바위 위에 놓아두었던 수건을 집어 들었다. 물론 그 
용도는 자신의 아래를 가리기 위해서였지 수분을 닦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런 
물기정도는 홍무자염신공(洪武紫焰神功)을 약간 운용하는 것으로 날려 보낼 수 있는 
것이다. 

“후아……. 이럴 때는 정식 개방도가 아닌 게 다행이라고 생각된다니까.” 

소년의 입에서 즐거운 듯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아주 멋진 목소리였다. 
낮게 깔린 탁한 저음도 아니었고 여자처럼 높은 고음도 아니었다. 설사 방금 상을 
당한 사람이라 해도 얼굴에 웃음을 띨 수 있게 만드는 그런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소년은 자신의 얼굴을 덮은 기다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러자 머리로 가렸을 
때 유일하게 드러났던 매끄러운 턱의 선으로 보아 상당한 미남일 것이라 예상되었던 
용모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수려(秀麗), 준수(俊秀), 미려(美麗), 이 세 가지 말을 모두 합쳐봐야 십분의 일도 
표현할 수 없는 정말 엄청나게, 굉장한, 같은 남자들마저 절망에 앞서 경탄하게 
만드는, 해처럼 맑고 시원하게 생긴 그의 얼굴은 아무리 콧대 높은 여자라 해도 
단번에 굴복시킬 수 있는 매력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었다. 윤기가 나는 치렁치렁한 
흑발과 묘한 대비를 이루는 대리석으로 깎은 듯 하얀 얼굴은 흠집 하나 없이 
깨끗했고, 이미 8척에 가까워진 체구 또한 그의 잘생긴 얼굴과 맞물려 매력을 
더하고 있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아직 치기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체구와 약간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개미오줌만큼의 흠조차 
되지 않았으니……. 실로 대단한 용모였다. 

그의 얼굴에서 가장 매력적인 곳을 찾으라면 근소한 차이로 수위를 차지할 수 있는 
그의 눈동자는, 샛별의 정기(精氣)같은 빛을 사방에 뿌리며 빛나고 있었다. 다른 
것들을 다 제한다하더라도 오직 이것만으로 여인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은 그의 
눈빛은 선명함과 함께 그와 상반되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은 찬사를 앞머리를 내려 다시 얼굴을 가리는 것으로 
간단히 무시해 버린 소년은 그의 의복으로 지정되어 있는 누더기 옷을 걸쳤다. 
누가 봐도 거지나 입을 것 같은 그런, 의복이라기보다는 넝마라 불러야 마땅할 
그 누더기는 소년의 몸에 입혀지자 더 이상 누더기가 아니었다. 마치 누더기가 
한 순간에 태자나 입는 자색의 장삼(長衫)으로 바뀐 듯 그 어떤 귀족 집안의 
자제가 그 어떤 멋진 옷을 입더라도 이 소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진 
자태가 절로 배어 나오게 만드는 것이었다. 태양을 한 손으로 가려봤자 그 빛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옷을 입어도 그의 태양 같은 용모는 가려지지 
않는 것이다. 

거지 차림이면서도 엄청난 미안(美顔)을 가지고 있는 이 소년은 이제 16세가 된 
류흔이었다. 정식 거지(?)가 된 뒤에 오히려 더 잘 살고 있는 류흔은 맹정과 전 
개방방도들의 열렬한 지원 속에서 솜이 물을 흡수하듯 빠른 속도로 무공들을 익혀 
나가 겨우 3년이 지난 지금 그의 무공수위는 믿을 수 없게도 화경(化境)을 바라보는 
경지에 와 있었다. 거기에는 류흔의 머릿속에 잠재되어 있는 수많은 지식들이 한몫 
단단히 했음은 물론이다. 

비록 결이 없는 백의개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이고 
실상 그의 지위란 맹정 바로 아래로 굉장히 높은 것이다. 다만 그의 얼굴이 워낙 
잘생겼기 때문에 여자가 많이 따를 것으로 생각하고 무소유(無所有)가 원칙인 
개방에 매어두지 않기 위해 맹정이 조치를 취한 것 뿐 이었다. 여담이지만 처음 
류흔을 씻기고 그의 얼굴을 봤을 때 그 자리에 있던 거지 전원이 일각동안 말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고 한다. 

각설하고, 이미 해는 서산 쪽으로 뉘엿뉘엿 지고 있는 지금, 목욕까지 마친 
류흔이 할 일이란 없었다. 한마디로 자유시간이란 소리다. 

“흠…….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 

어느새 폭포를 벗어나 바깥으로 나온 류흔은 앞 머리카락을 내려 그 절세적인 
용모를 가린 채 이리저리 목적 없이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개방방도들의 생활이란 
큰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무한한 자유로움 그 자체였으므로 류흔에게 급할 것은 
없었다. 그저 밤이 되면 아무 데서나 자고 배고프면 아무 데나 들어가 먹고 
일해주면 되는 것이다. 원래는 그의 본래직업인 거지답게 구걸을 해야 하지만 
전 개방방도들이 극구 말렸으므로 류흔은 아쉽게도(?) 구걸을 하지 않았다. 아마 
류흔이 얼굴을 드러낸 채 구걸을 한다면 애걸복걸하지 않아도 중원에 있는 모든 
여인들이 집에 있는 금들을 모조리 가져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건 개방방도들이 준 돈도 있겠다 현재로서 아쉬운 것 하나 없는 류흔이었기에 
걸음을 옮기는 속도가 무척 느렸다. 그러나 느릿느릿한 류흔과는 달리 그의 앞과 
뒤의 수많은 사람들이 무지하게 바쁜 듯 그의 몸을 지나치며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보니 문득 류흔의 머리 
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갈까? 모두 다른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일까?] 

길은 하나지만 그곳을 다니는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다르고, 그들이 길을 
지나는 목적들도 모두 다르다. 아마 평생 동안 하나의 길을 쳐다보고만 있어도 
심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잠깐 동안 한 류흔은 문득 앞을 막아서는 
무언가를 느끼고 발걸음을 멈췄다. 

“오빠, 꽃 사세요. 좋은 꽃이에요.”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팔이 소녀였다. 이런 꽃을 파는 소녀의 몰골이란 대부분이 
거지보다 그리 뒤떨어질 게 없는 초라한 행색이었지만 이 소녀는 좀 더 그 정도가 심했다. 

며칠을 안 빨았는지 알 수 없는, 아니 언제 빨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듯한 
구질구질한 옷에 꽃바구니를 한 아름 들고 애처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란 뜨거운 심장을 가진 인간이라면 그 꽃이 아무리 시들고 못생긴 것이라 
해도 다 사서 그녀의 짐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식이란 것이 통할 때보다 통하지 않을 때가 더 많은 것이 세상사이며, 세상사가 
다 그렇듯 이런 모습의 소녀를 보고도 그런 마음을 가지는 사람이란 생각 외로 
적었고, 특히 이곳 북경이란 저마다 살기 바쁜 곳이라 이런 소녀들이 실제로 꽃을 
팔 수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한동안 상거지였고, 팔자가 나아졌지만 지금도 거지인 류흔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충동적으로 가졌던 돈을 모조리 내놓고 그녀의 꽃바구니를 빼앗듯이 
안아들었다. 그리고는 어리벙벙하게 서있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사는 데가 어디야? 오늘 장사 다했으니 집으로 돌아가야지.” 

“에? 아.......” 

거지주제에 하루 동안 구걸하여 얻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 10냥에 가까운 
돈을 내고서(사실은 다른 거지들이 준 것이지만) 보통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꽃바구니를 안아들고,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으려 하는 자신의 손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덥석 잡는 그의 태도는 돈보다도 정에 굶주려 있던 
소녀의 마음에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소녀는 그가 전혀 필요 없어 보이는 
꽃바구니를 안아든 이유가 그녀에게 자격지심을 느끼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사실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충분히 감동했고 눈물을 참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즐거운 기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눈물을 가까스로 
참아내는 소녀였다. 

류흔은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아무리 류흔이 16년 
간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경험을 쌓았다하더라도 어렸었기 때문에 여자의 마음을 
알 수는 없었다. 그리고 어떤 방면의 문제라도 그에 대한 지식이 술술 나오던 
자신의 머리도 여자의 마음, 아니 여자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無知)였다. 
아무 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사람을 보면 어떤 유형인지 순식간에 
파악해낼 수 있는 배경지식까지 잠재되어 있는 류흔의 머리의 유일한 
미개척지가 바로 ‘여자’였다. 

“어, 왜 울어? 내가 뭘 잘못했어?” 

여자아이와의 대화라고는 3년 전에 만났던 희상아와의 짧았던(길었나?) 대화가 
거의 유일한 류흔에게 있어 여인의 눈물이란 실로 처리 곤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만큼 대응방법도 미숙했지만 다행히 소녀는 눈물을 닦아내며 
류흔의 고민을 없애주었다. 

“아니에요.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리고 저 혼자 갈 수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되요.”

소녀의 말에 류흔은 고개를 흔들었다. 비록 여자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늦은 
시각에 여자가 혼자 다닌다는 건 별로 안전한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런 처지의 소녀는 그 위험농도가 더 높은 법이다. 

“큰일 날 소리하지 마. 벌써 해도 졌는데 여자가 혼자 돌아다니겠다는 거야? 
위험하니까 같이 가줄게.  으슥한 곳에서의,  그것도 어두운 밤의  남자들은 무서운  법이라
고.” 

사실 생각해보면 류흔의 말은 상당한 어폐가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자신도 
남자가 아닌가? 여자와 으슥한 길목으로 들어가면 자신이라고 늑대가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하긴 세상 남자들이 다 쾌락원칙에만 충실하다면 
이런 인간사회라는 것이 성립되지 못할 테니 조금 심한 비약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류흔이 한 말에 모순이 있건 말건 꽃팔이 소녀는 생면부지(生面不知)인 
자신을 이렇게 염려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에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아주 흡족한 얼굴로 동행을 허락한 그녀는 절로 흥이 나서 발걸음도 
경쾌하게 날아갈 듯 했다. 수도 없이 다닌 어두운 길이지만 오늘은 왠지 달라 
보이는, 정확히 말하면 아름다워 보이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 기분이 옆에 있는 
큰 체구의 남자(비록 거지이긴 하지만)로부터 나왔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8] 천강 - 2.개방의 기재(2) 

어둑어둑해진 북경 외곽의 관도 위. 외곽이라고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수도인 
북경으로 통하는 길이므로 도로는 잘 닦여져 있었다. 대체 어느 정도의 인력이
들었는지 추측할 수도 없는 긴 길이 모두 깨끗하게 밀려 있는데, 그 위를 
미끄러지듯 걸어가는 사람이 보인다. 

이런 달도 없는 칙칙한 밤에 관도라고는 하지만 산적이 나올지도 모르는 길을 
가는 사람이라면 운에 모든 걸 맡기는 사람이나 산적들을 잡을 능력이 있는 
사람, 또는 그 패거리밖에는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위의 세 가지 경우 중에 어느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별빛에 의지해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그가 걸친 옷이 군데군데 덕지덕지 기운자국이 보이는 누더기라는 
것과 그의 체구가 상당히 크다는 것이었다. 바로 소녀를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류흔이었다. 

소녀를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길 위에서 하늘을 보고 현재 시간을 추측한 류흔은 
고개를 흔들면서 중얼거렸다. 

“이런, 조금 늦었나. 동굴에서 밤을 새야 할지도 모르겠군.” 

말은 늦었다 하면서도 느릿느릿하게 걷던 류흔은 평소에 봐둔 동굴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어차피 늦었고 같이 생활 중인 사람들의 잠을 깨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동굴에서 밤을 지새우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늘에 수놓아진 별에서 발해지는 은은한 빛에 의지해 길을 걷던(사실 빛이 
없어도 상관없다.) 류흔은 문득 희상아 생각을 했다. 비록 그 동안 수련과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잊은 듯 보였지만 사실 3년 전 그녀와의 짧았던 만남은 
류흔의 가슴속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화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혹시 결혼을 했나? …약속은 기억하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그녀와의 약속을 했었다. 크게 되면, 즉 그 아픔을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모두 이야기해주겠노라고. 그리고 그 
쪽에선 들어준다고 했었지. 하지만 그녀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항산에서 기본 수련을 마친 후, 일부러 이곳 북경 분타로 온 것도 사실은 
그녀를 보기 위한 것일 만큼 희상아를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지만 왜 그런지는 
자신도 몰랐고, 그녀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리라는 생각은 거의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 지체 높은 집안의 여식이 자신같이 비천한 비렁뱅이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마음에 담아 두겠는가. 그저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불쑥 내일이라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그의 마음속에서 자라났다. 
별로 실현 가능성 없는 말 그대로 희망일 뿐이었지만. 

“뭐, 인연이 있으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한창 희상아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걸어가고 있는 류흔의 감각에 
익숙하다면 익숙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꽤 수가 많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아 이 산의 주인이라 자처하는 자들일 듯하다. 

[산적들이군. 잠도 안자나? 그냥 좀 내버려두지.] 

류흔의 생각이 어떻든 산적들은 그를 가만히 놔둘 생각은 전혀 없는 듯 했다. 
오히려 더욱 움직임이 은밀해지고 빨라졌다. 그 동안 여행자들을 얼마나 많이 
털어먹었는지 몰라도 상당한 수준의 움직임이었다. 

[흠……. 앞에 여섯, 좌우에 2명씩, 후방에 둘, 다해서 12명. 보초치고는 꽤 많은 걸?] 

보초만 12명을 헤아리는 것을 보니 아마도 상당히 큰 산채인 듯 했다. 대충 
100명은 넘어서는 규모일 것이다. 류흔은 한동안 추측을 하다가 문득 자신이 
거지라는 것을 상기하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 털릴 게 있어야지 산적을 
무서워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여자’라면 ‘몸’이라는 것이 있으므로 
안심할 수 없지만 돈 한 푼 없는 ‘거지’인데다가 ‘남자’인 자신은 전혀 
거리낄 게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류흔은 아주 당당히 애초에 동굴에서 
노숙하려던 생각을 바꾸어 하루 정도 산채 신세를 지기로 했다.

산적소굴을 하루 묵어가는 객점 정도로밖에 생각 안 하는 류흔의 배짱이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이런 배짱은, 선천적으로 타고나기도 하고 어려서부터 
거지생활을 해오면서 자연히 강화된데다가 자신의 능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었다. 한낱 만용(蠻勇) 따위가 아니다. 

산적들이 점점 가까워져 오는 것이 그의 감각에 잡히고, 류흔은 그들이 자신을 
최대한 잘 볼 수 있게 밝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거지인 것을 못 
알아보고 손을 섞게 된다면 일이 잘못 돌아갈 확률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류흔의 의도가 통했는지 빠르게 움직이던 그들의 움직임이 급격히 
느려지더니 이윽고 완전히 멈추었다. 아마도 류흔이 거지인 것을 알아보고 
데려갈까 말까 토의 중일 게 분명했다.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류흔이 
자신의 계획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거니와 결정적으로 그들의 음성이 모두 
들렸기 때문이었다. 

“...... 야, 어떻게 하지? 저 녀석 꼴을 보니까 거지같은데. 괜히 데려갔다가 
두목한테 우리만 깨지는 거 아냐?” 

“얌마, 두목이 뭐냐 무식하게. 두령님이라고 불러.” 

“젠장! 지금 그게 문제냐? 야, 장이(張二)! 어떻게 할래?” 

“글쎄요……. 그래도 혹시 압니까? 저래 보여도 굉장한 부자일지?” 

장이라 불린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청년이 그렇게 말하자 뒤에서 동조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맞아요. 어차피 오늘 수입도 없는데 저 녀석이라도 데리고 가보죠.”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 아뇨?” 

찬성의 목소리가 많아지자 보초의 지휘자 역에 있는 정소추(丁少秋)는 
불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일단 저 거지 녀석이라도 건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일이 되려고 그러는지 저 멀리서 마차가 
달리면서 땅을 진동시키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진동소리가 
굉장히 강렬했기 때문에 틀림없이 돈 많은 어떤 귀족 녀석이 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정소추는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부하들의 위치지정을 
다시 하여 마차 탈취에 어려움이 없도록 한 것은 물론이었다. 

한편 류흔은 류흔대로 의문에 빠져들었다. 이런 한밤중에 마차의 
진동소리라니? 그것도 자신이 온 쪽에서 오는 것으로 보아 반박의 여지없이 
북경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분명했다. 이런 밤중에 외곽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은 어쩐지 비상식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호기심이 생긴 류흔은 약간 과장해서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도 대낮같이 
환하게 볼 수 있는 자신의 안력을 이용하여 저 멀리서 빠르게 다가오는 마차를 
주시했다. 물론 ‘주시한다’는 이 행동은 이미 마차가 보이기 전에 온 몸을 
흐르는 기와 감각으로 미지의 마차에 관해 알아본 뒤였다. 

“땅의 진동이 큰 것으로 보아 말의 숫자는 최소한 8마리 이상. 무공을 갖춘 
여인 2명, 무공이 없는 여인 한 명. 뭐 대충 이 정돈가?” 

잠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원래부터 자신도 알 수 없는 굉장한 능력을 가진데다가 
3년 동안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류흔은 대단했다. 마차가 빠르게 다가오기는 했지만 
아직 류흔과의 거리는 30장(90m), 그런 먼 거리에서 마차의 구성인원을 정확하게 
맞추어낸 것이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류흔의 눈에 드러난 마차의 모습은 
류흔이 이야기했던 구성 그대로였다. 

굉장히 아름다우면서 독특한 미모를 자랑하는 여인 두 명이 허리에 검을 맨 채 
채찍으로 말들을 격려(?)하고 있었고 총 8마리의 말들은 그 격려에 힘이라도 난 
듯 입에 거품을 무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힘차게 뛰고 있었다. 그 덕분에 
류흔과 마차와의 거리는 급격히 가까워져 버렸다. 앗, 하는 순간에 류흔의 코앞까지 
도달한 것이다. 

“비켜욧!” 

날카로운 목소리가 마부석에 앉아있던 여인의 입에서 나왔다. 어두워서 잘 
안보였는지 경고의 음성은 상당히 늦었다. 류흔은 굳이 마차에 부딪히기도 
싫었고 마차가 가는 길을 막을 이유는 없었는지라 군말하지 않고 신형을 뽑아 
올려 마차의 뒤로 내려섰다. 큰 덩치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깨끗한 동작이었지만 옷이 누더기라 그런지 별로 멋진 모양새는 아니었다. 
만약 류흔의 얼굴이 드러났다면 평가는 달라졌겠지만 지금의 평가는 그랬다. 

하여간 그렇게 마차와의 충돌 위험에서 벗어난 류흔은 그녀들이 산적들의 
희생양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을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마차의 움직임이 멈추며 마부석에 있던 여인 중 한 명이 뛰어내려 류흔을 불렀다. 

“저기, 잠시 만요!” 

뭐가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급한 목소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 귀 
안 먹었어. 조용히 말해.’라는 헛소리를 할 만큼 류흔은 넉살이 좋지 못했기에 
그저 얼굴 가득 ‘왜 부르시죠?’의 뜻을 띄우고 서있었다. 물론 어두운 밤인 
데다가 이 어두운 밤보다 더 새까만 흑발로 가리고 있기에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류흔의 태도로 그 뜻을 미루어 짐작한 여인은 꾀꼬리 같은 음성으로 류흔에게 말했다. 

“당신은 무림인인가요?” 

다짜고짜 인사도 없이 물음부터 던지는 그녀에게 잠시 어이가 없다는 생각을 한 
류흔이었지만, 그녀들에게도 급한 사정이 있겠지 라고 이해를 하며 정중히 대답을 
해주었다. 

“그렇습니다. 또 거지이기도 하죠.” 

무림인과 거지, 이 두 개의 단어를 연결시키면 진짜 바보가 아닌 한 누구든 
알 수 있는 하나의 문파가 나온다. 물론 이 여인은 바보가 아니라 오히려 비상한 
축에 끼었기 때문에 금방 류흔의 출신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개방의 사람이시군요?”

류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인의 행동은 눈에 띄게 정중해졌다. 무림의 
물을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개방의 이름이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몰라 뵙고 실례했어요. 들으니 개방의 사람들은 모두 신의가 있고 불의를 참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초면에 실례지만 저희를 도와줄 수 있으신 가요?” 

초면인 처지에 확실히 실례인 부탁이긴 했지만 상황이 급한 듯한 여인에게 뭐라 
할 수도 없었고, 개방의 명성을 이용하여(?) 옭아매는 데에는 어쩔 수 없었다. 
류흔은 산채에서 하루 쉬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이 여인들을 도와주기로 했다. 



[9] 천강 - 2.개방의 기재(3)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안 도와드릴 수 없군요. 그런데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죠?” 

류흔이 그렇게 묻고 여인이 대답하려는 순간 진을 치고 있던 산적들이 함성을 지르며 
튀어나왔다. 각기 병장기(兵仗器)를 꼬나 잡은 모습이 그럴 듯해 보였지만 풍기는 기세로 
보아 류흔의 눈에는 영 아니었다. 어쨌든 그 수장인 정소추가 호기롭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 녀석들! 가진 것 다 내놔라! 그러면 곱게 죽여주마!” 

“……이, 이봐들. 단어선택을 잘못한 거 아냐? 곱게 죽여주마라니?”

“에잇, 거지는 닥쳐! 넌 꺼지고 거기 빤질빤질한 계집들만 남아라!” 

약간 무서운 산적들이었다. 보통 ‘목숨만은 살려준다’라고 하는 것이 정석인데 
이 산적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녀석들인가 보다. 그리고 여자들도 다 죽인다니? 
혹시 다 고자? 류흔이 이렇게 잡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소류에게 도움을 청하던 
여인이 검을 빼어들고 날카롭게 외쳤다. 

“건방진 것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망발이냐!” 

설마 거지인 류흔의 앞이라고 저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겠고, 아마 마차 속에 
중요한 인물이라도 타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산적이 되면서 배짱만 
늘고 머리는 돌이 된 산적들에게는 그 정도까지 추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고 
설사 알았다하더라도 오히려 좋아했을 것이다. 인질로 유용하게 써먹을 수가 
있을 테니까. 

“에이! 다 필요없다! 쳐라!” 

신중한 일면도 있지만 본래 성정(性情)이 불같은 정소추는 일단 목표가 멈추자 
앞뒤 재지 않고 부하들을 독려하여 곧바로 공격했다. 비렁뱅이 하나랑 여인 
둘이라면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될 것 같았으나 이런 때 졸개들에게 체면을 
안 세우면 언제 세우나라고 생각하여 앞서 달리는 정소추였다. 

“와아아!” 

원래는 적막감에 휩싸였어야 할 밤의 산중에서는 때 아닌 함성이 울려 퍼졌고, 
곧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카앙! 캉! 

소류에게 도움을 청했던 여인을 포함해 마부석에 있던 여인들의 실력은 굉장했다. 
어느새 인원을 보충했는지 30명에 가까워진 산적들을 맞아 당황하는 기색 없이 
하나하나 제압해 가는 것이다. 

그녀들의 검에서 발해진 하얀 백광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어김없이 산적들의 
수가 하나씩, 때로는 둘씩 줄어들었다. 덕분에 30명을 헤아리던 그들의 수는 
어느새 20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정소추는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직감했으나 만약을 대비해 아까 졸개 하나를 
산채로 보냈으니 조금만 버티자고 부하들을 독려하면서 박도(朴刀)를 휘둘렀다. 
부하들을 앞으로 내보내고 뒤에서 이리저리 멤돌고 있던 정소추의 눈앞에 가만히 
팔짱을 낀 채 서서 상황을 구경하고 있는 비렁뱅이 녀석이 보였다. 자신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 등까지 돌린 채 서 있었다. 기회다. 

“하압!”

커다란 기합소리와 함께 도를 전력을 다해 내려친 정소추는 곧 비렁뱅이의 몸이 
두 쪽으로 갈라질 것을 의심치 않았으나, 손에 느낌이 나질 않았다. 의아함에 
고개를 들어 앞을 본 정소추의 눈앞으로 그 비렁뱅이의 것이 분명하지만 웬만한 
귀공자들보다 더 깨끗한 손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고, 곧 별이 보였다. 

뻐어억! 

정소추의 몸이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짐과 동시에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류흔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곳에 뭉쳐 마차를 보호하고 있던 
여인들에게 다가간 류흔은 몰려드는 20명가량의 산적들을 개방의 수많은 절학 
중 하나인 취팔선보(醉八仙步)와 그와 함께 운용될 때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취팔선권(醉八仙拳)을 사용하여 일거에 떨쳐내고 여인들에게 말했다. 

“갈 길이 급하신 듯한데 먼저 떠나십시오. 곧 쫓아가겠습니다.” 

여인들은 말로만 듣던 개방의 절학이 가진 위력에 놀라다가 류흔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예의를 표할 사이도 없이 마부석에 올라 말에 채찍질을 가했다. 
자신들을 쫓는 ‘그자들’이 언제 닥칠지 몰랐기 때문에 뒤돌아보지도 않고 
말들을 더욱 재촉하여 그야말로 질풍처럼 내달렸다. 뒤쳐진 류흔이 어떻게 
쫓아올 지는 생각지도 않은 채. 

뒤에 남은 류흔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흉흉한 눈으로 쳐다보는 산적들과 
대치했다. 별로 시간을 끌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류흔은 홍무자염신공
(洪武紫焰神功)을 일으켜 좌수에 모으기 시작했다. 불끈불끈 힘줄이 
드러나며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뜨거운 기운이 그의 왼팔을 달구었다. 

잠시 눈치를 보던 산적들은 그가 주먹을 굳게 움켜쥐고 있을 뿐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참지 못하고 산을 떠나갈 듯한 기합과 함께 먼저 달려들었다. 

“죽어라!” 

“뒈져!” 

“황천으로 보내주마!” 

각기 문장의 길이와 사용된 문자는 달라도 뜻은 일맥상통하는 험한 말을 
내뱉으면서 덤벼드는 산적들에게 류흔은 좌수하나로 항룡유희(亢龍遊戱)를 
선물했다. 항룡유희는 후에 밝혀지겠지만 항룡유회(亢龍有悔)의 명타(明打)격으로 
가장 단순한 초식이지만 그 파괴력은 강룡십팔장 중에서도 발군인 초식이다. 

용이 승천할 때 일으키는 선풍처럼 류흔의 좌수에 기류(氣流)가 형성됐고, 
형성된 기류로 인해 만근거석도 일거에 파괴시킬 만한 위력으로 탈바꿈한 장력
(掌力)이 달려오던 산적들의 땅위에 작렬했다. 

콰아앙! 

항룡유희가 땅과 부딪힘과 동시에 경천동지(驚天動地)의 굉음이 산을 뒤흔들었고 
그 굉음에 걸맞은 결과가 나타났다. 땅에 거죽이 일어나 달려오던 산적 전원을 
덮쳐 기절시켜버린 것이다. 직접적인 타격이 아니었는데도 이 정도였으니 과연 
제대로 맞았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기도 싫은 초식이었다. 

강룡십팔장의 일초로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한 류흔은 약속대로 곧바로 그녀들의 
뒤를 쫓았다. 저 멀리서 심상치 않은 기운의 소유자들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지만 
확실히 마차를 추격한다는 보장이 없었으므로 일단 마차에 합류하기로 결정한 
류흔은 빠르기라면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비천무영신법(飛天無影身法)을 
펼쳐서 그 자리를 떠났다. 



한편, 마부석에 앉아 마차를 몰던 제갈초혜(諸葛楚慧)와 남궁려려(南宮麗麗)는 
힘껏 내달리면서도 뒤에 남은 류흔의 걱정을 지우지 못했다. 

“제갈 언니, 그 사람 괜찮을까? 혹시 그들이라도 만났으면 어쩌지?” 

려려가 걱정스런 어조로 입을 열자 초혜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괜찮아. 내가 보기에 그 사람은 강해 보였으니까. 아까 려매도 봤잖아? 단 
일격에 그 많은 산적들을 물리친 것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내가 보기에 그건 취팔선권 같았는데......” 

려려가 웅얼거리는 음성으로 뒷말을 줄이자 초혜는 려려의 눈썰미에 놀라면서도 
흐뭇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개방의 절정고수들이 익히는 취팔선권이었어. 그 정도의 무공이라면 
그들과 맞서도 뒤지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 정도로 
높은 무공을 지닌 그가 결이 없는 백의개였다는 거야.” 

려려 역시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그의 누더기 옷에서 매듭을 보지 못했던 것은 
확실했으므로 같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녀들이 이렇게 의문에 빠져 있는 동안 
어느새 8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를 쫓아온(!) 류흔은 마차의 지붕위로 튀어 올랐다.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기척에 려려와 초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검을 내뻗었다. 
실로 기민한 대응이었지만 류흔은 가볍게 손을 내뻗어 공수입백인(空手入白忍)의 
수법으로 두 개의 검을 한꺼번에 잡아버렸다. 

“!” 

“어머! 공자(公子)!” 

초혜는 류흔이 자신들이 내뻗은 검을 맨손으로 잡아챈 것에 놀랐고, 려려는 
그가 류흔이라는 것에 놀라며 안도의 탄성을 질렀다. 

류흔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하, 혹시 늦었다고 제 험담한 것은 아닙니까?” 

초혜와 려려는 그가 그에 대해 말한 것을 가지고 놀리는 것을 알아채고는 
홍조를 띄우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이상하게도 그가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토록 초조했던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끼고 초혜와 려려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동안 류흔은 지붕 위에서 뛰어 내려 마부석 옆에 매달렸다. 그런 상태로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아직 통성명도 못한 것 같군요. 친해지기 위한 시작은 이름을 아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운양(雲陽)이라고 합니다. 뭐 아시겠지만 개방 소속이죠.” 

갑작스런 충동으로 가명을 댄 류흔은 지금 자신이 한 말이 나중에 얼마나 
후회가 될 일인지 알지 못했다. 어쨌거나 려려와 초혜는 그가 내건 이름이 
가명이든 뭐든 알지 못했으므로 그저 그의 여유가 넘치는 편한 어조에 빙긋 
웃으며 자신들의 소개를 했다. 주로 말을 한 쪽은 려려였다. 

“저는 남궁세가(南宮世家)의 막내 남궁려려라고 하고요, 이 언니는 제갈세가
(諸葛世家)의 제갈초혜라고 해요.”

“려매가 말한 대로예요. 아까는 실례했어요.”

류흔이 살펴보니 15세 정도로 보이는 려려는 매우 발랄하고 붙임성 있는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확실히 예쁘긴 하지만 아직 예쁘다기보다는 
귀엽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미모를 가지고 있었고, 초혜이라 불린 옆의 
여인, 덧붙여 말해서 자신에게 도움을 구했던 여인은 17세 가량의 이지적인 
미녀로 상당히 차분해 보였다. 이런 어린 소녀들이(자신도 어리지만) 가진 
무공수위가 상당히 높다는 것에 류흔은 속으로 순수한 감탄을 하고 드디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저기 그런데, 대체 이런 밤중에 급하게 달려가는 이유가 뭡니까? 정체불명의 
강도들에게 쫓긴다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그 이유가 궁금해서요.” 

척 느끼기에도 고수로 분류할 수 있는 정체불명의 그자들을 한 순간에 강도로 
강등시켜버리는 류흔을 초혜와 려려는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곧 웃음을 
흘렸다. 그들이 누군지 모르니 할 수 있는 말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다. 

“호호, 그자들을 그런 식으로 비하시키는 사람은 공자가 처음이군요. 그래요, 
공자의 말씀대로 저희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어요. 그것도 상당한 고수에게.” 

초혜의 말이 끝나자 류흔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고수는 고수들이더군요. 대략 정관(精關: 내공의 여섯 단계 중 세 번째)에서 
진관(眞關: 내공의 여섯 단계 중 네 번째)에 가까운 내공을 가진 것 같던데. 
다섯 사람이죠?”


[10] 천강 - 2.개방의 기재(4) 


"........!" 

류흔의 중얼거림은 그녀들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다. 대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혹시 부딪

힌 것 아닐까? 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그들과 충돌했다면 아무리 고수라 해도 


렇게 빨리 자신들을 쫓아올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려려가 머리 속에 떠오른 의문
을 

표현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산적들을 때려눕히고 있는데 멀리서 은밀하지만 강한  기가 다가오는 게 느껴지더군요. 그


도 상당히 빠른 속도로. 이쪽으로 오는 것 같아서 대충 짐작한 겁니다."

그 '멀리서'라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기를 느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굉장한 일이었기 때문에 두 소녀는  다시 한 번 그를 바라보았다.  상식적으로 내공이 강한 
사람

의 기운을 느끼는 것이 아무 무공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기운을 느끼는 것보다 쉬울 것 
같지

만 그건 기를 방출할 때 이야기다. 지금처럼 은밀히 기를  숨긴 채 다가오는 고수들을 느끼


란 그들보다 하수인 자들로서는 하늘의 별따기보다 힘든 일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느꼈


는 것은 이미 류흔의 무공경지가 그들을 넘어서면 넘어섰지 못하지는 않다는 증거였다. 

"정말 공자의 무공수위는 짐작할 수가 없군요.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초혜가 조심스레 묻자 류흔은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올해로 16살입니다." 

"에에?! 열 여섯이요?!" 

얼굴은 확인할 수 없지만 덩치와 무공수위로 미루어 적어도 20세는 넘겼으리라고 생각한 그


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말이었다. 대체 16살이 어떻게 이런  덩치를 가질 수 있단 말인
가. 

자신들과 위아래로 한 살 차이나는, 소년이라 불러야 마땅할 나이가 아닌가 말이다. 

류흔은 자신의 나이를 밝히자 멍한 상태로 자신을 주시하는 려려와 초혜의 시선에 어색함을 

느끼고 화제를 돌렸다. 밤이라 다행이지  낮이었으면 아무리 머리칼로 가리고  있다고 해도 
붉어

진 얼굴을 들켰을 것이다. 

"그보다 마차 안에는 누가 타고 있죠? 상당히 높은 신분을 가진 것 같은데......" 

류흔이 마차 쪽으로 눈길을 주며 묻자 려려와 초혜는 흠칫 했으나 의외로 쉽게 대답해주었

다. 

"황태자비(皇太子妃)로 공포된 운학림(雲鶴林)의  소저(小姐)예요. 아시죠? 하긴  고금제일미
(古今第一美)로 공인된 희상아(姬 娥) 소저를 정보에  밝기로 유명한 개방의 사람이 모를리 없겠죠." 

려려의 뒷말은 이미 정신공황상태가 되어 버린 류흔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다. 
오직 희상아라는 이름 석자와 황태자비가 될 것이라는 문장을 듣는 순간 
류흔의 머릿속은 백지상태로 화해 버린 것이다. 

[그랬었나? 3년 간의 그리움이 이렇게 끝나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이었나? 하하하......]

갑자기 어둠만큼이나 자신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의 박동수가 기이할 정도

로 빠르게 변했고 무언가가 자신의 입으로 솟구쳐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류흔은 쓰


질 것 같은 몸을 겨우 지탱하며(여기서 떨어지면 죽음이다)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제기랄........ 큭큭큭큭.] 

평소에 생각도 하지 않던 욕까지 내뱉으며 가슴속에서 모든 것을 풀려는 류흔의 노력은 실
로 

가상했다. 그 가상함이 마음에 들었던지 하늘은 그에게 울분을 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어느새 추적자들이 10장까지 쫓아온 것이 류흔의 감각에 잡혔던 것이다. 

한편 급작스레 분위기가 변한 류흔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내고 있던 려려와 초혜는 문득 류


이 얼굴을 굳히자 자신들도 모르게 긴장했다. 곧 이어 그의 입이 열렸다. 

"조심하십시오. 추적자들입니다. 제가 막을 테니 가십시오." 

말을 마친 류흔은 미처 그녀들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몸을  날려 마차에서 뛰어 내렸다. 어


피 그렇게 끝날 인연이라면 지금 미련을 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곁
에 

있다면 자신이 미련을 버리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기도 했다. 

[제기랄!] 

아무리 마음을 모질게 먹어도, 가슴 속 가득 들어찬 울분은 참을 수 없었다. 심지어 그의 가

슴을 가득 매운 울분을 밖으로 뿜어낼 수 있게 해준 추적자들에게 감사의 마음까지 드는 류


이었다. 


[11] 천강 - 3. 류흔, 개방을 떠나다(1) 

- 3. 류흔, 개방을 떠나다. - 


황실의 비밀 집단인 황실추영대(皇室追英隊)의 대주라는  신분을 가진 사극운(査克芸)은 현
재 

매우 비참한 기분이었다. 그 학식과 인품이 천하에서 으뜸이라는 운학선생(雲鶴先生)의 장중


보이자 고금제일미로 공인된 그녀가 황태자비자리를 마다하고  도망칠 줄이야. 정녕 생각지
도 

못한 변수였다. 

처음엔 연약한 여인이 가봐야 얼마나 가겠냐고 생각하여 느긋하게 행동했지만 그녀는  청혼


(請婚狀)이 날아들었을 때부터 준비를 해두고 있었는지 팔두마차까지 동원하여 자신들의 추


을 벗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하기 까다로운 무림세가의 여식들까지 합류하여 그녀의 도


를 돕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래저래 골치 아픈 상황에서 운학선생은 그저 허허 웃어 넘길 뿐 별로 의욕적으로 딸을 찾


려는 것 같지도 않아 사극운의 머리를 더욱 아프게 했다. 그래서 결국 동창(凍瘡)에서 자신
이 

직접 추적술과 경신법(輕身法)이 뛰어난 네 명의 대원들을 뽑아 이렇게 뒤쫓고 있는 것이었

다. 

"25호! 흔적으로 보아 우리가 몇 장이나 뒤쳐져 있나?"

사극운의 부름을 받은 25호는 아주 잠시 동안 계산해보더니 대답했다.

"앞으로 반 각 후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좋아! 속도를 올린다! 가자!" 

사극운은 진기를 발끝에 집중시켜 지금까지 달려온 속도의 배로  속도를 올렸다. 안 그래도 


람 같았던 그들의 움직임이 이번엔 아예 바람이 되어 공간을 뛰어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정신 없이 달리던 그들의 눈앞에 한 명의 거지가 갑작스레 나타났

다. 사극운은 웬만하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으나 거지에게서 발해지는 위압감이 그를 


아매었다. 황제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굉장한 위압감이었다. 그 종류는 달랐지만. 

"뭐냐? 지금은 공무수행중이다. 비키지 않으면 처단하겠다." 

사극운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췄지만  결코 시간낭비를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위패(位
牌)

를 내밀며 거지를 협박했다. 뒤의 대원들이 검을 뽑아들며 위협을 가하는 것에 흐뭇함을 느


며 거지를 바라본 사극운은 문득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물론 그것은 뒤의 대원들도 마찬가


였다. 자신들을 막아섰던 거지가 그 곳에 없었던 것이다.

[헉! 분명히 있었는데? 내가 헛것을 본 건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뜬 사극운은 이번엔 심장이 튀어나올 듯  놀라야 


다. 거지가 자신의 목을 붙잡은 채 자신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억! 컥!"

사극운은 벗어나려 했으나 어느새 마혈(痲穴)을  찍혔는지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격한 상황 변화에 놀란 대원들이 공격자세를 취했으나 자신들의 대장이 잡혀 있으므로 경거


동할 수는 없었다.

문득 거지의 입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공무수행? 관부(官府)의 인물들입니까?" 

"컥... 컥컥!" 

목이 막힌지라 대답을 못하는 사극운을 대신해 대원 중 34호가 대답했다.

"그렇다! 그러니 어서 그 손을 놓아라!" 

류흔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무엇 때문에 이들이 그녀를 쫓아온단 말인가? 

[설마 그녀가 황태자비 자리를 마다했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너무 이기적일지도 모르겠지만 류흔은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아니 이기적이라 해도 


았다. 자신의 추측이 사실이기만을 빌었다. 

그런데 너무 희망에 가득 찬 나머지 류흔은 실수를 했다. 고수라 할 수 있는 이들과의 대치 

상태에서 너무 쉽게 다른 생각에 빠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실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건방진 녀석! 홍무신장(洪武神掌)!

퍼어엉! 

어느새 마혈을 풀어버린 사극운이 자신의 성명절기 홍무신장을 류흔의 가슴에 후려갈겨  버


고, 때를 같이하여 대원들의 합격이 이어진 것이다. 제각기 검을 들은 대원들은 자황구검(紫


九劍)의 절초를 펼쳐 류흔의 전신을 난도질했다. 

불의의 기습에 제대로 신공을 끌어올리지도 못하고 거의 무방비로 얻어맞은 류흔은  기혈이 


류하려는 것을 진기로 억누르고 대원들의 자황구검을 급한  김에 신장(神掌)이라고 까지 불


는 강룡장(降龍掌)으로 맞았다. 

꽈아앙! 카앙! 챙! 

신룡탐주(神龍貪珠), 쌍룡쟁투(雙龍爭鬪)의 절초가 연이어 펼쳐지며 대원들의 검초를 여지없

이 무너뜨렸다. 게다가 검초를 흩트리는 걸로 끝나지 않고  덤으로 그들의 검까지 여지없이 


수어 버리는 강룡장의 장력과 흩어지는 검편(劍片)이 그들 사이의 공간을 수놓았다. 

장력 하나 하나가 강기의 수준인 강룡장은 그 위력에 있어서 가히 무림독보라 칭할만했지만 

근력과 내공이 빨리 소모되는 것이 단점이었다. 아주 고명한  내공이 아니라면 오래 사용할 


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연속적으로 펼친다는 것은 범인으로서는 엄청난 무리였다. 

류흔도 예외는 아니어서 평소에도 5연발 이상은 그의 내공이 버텨주지 못했다. 근력은 천력

(天力)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강한 그였으나  내공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홍무신장으로 


해 기혈까지 엉클어진 지금 강룡장의 남발은 절대 불가한 것이다. 

"허억! 헉!" 

단 두발의 강룡장을 쏘아내고는 거친 숨소리를 내뱉는 류흔을 보며 잠시동안 얼이 빠져 있
던 

사극운은 정신을 챙기며 대원들에게 다시 공격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도 절세의 장력인 


무신장을 극성으로 운용해 공격해 들어갔다. 대체 왜 이렇게 까지 그를 공격하는지 그 이유
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단지 이 자를 기필코 제거해야겠다는 맹렬한 적개심만 불타올랐다. 

검이 박살나 빈손이 된 대원들은 검을 잃었을 때를 대비하여  필수적으로 익히는 옥황수(玉


手)를 전개했다. 옥황수는 손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무공으로 날카로운 검을 잡거나 하는 


도는 아니었지만 바위정도는 우습게 깨뜨릴 수 있는 정도의 수공(手功)이었다. 

홍무신장의 이글거리는 듯한 황금빛 광채와 옥황수의 새하얀 빛이 어둠을 몰아내며  류흔을 


렸다. 저것 중에 하나라도 맞는다면 현재의 류흔으로서는 세상과  작별한 채 뻗어버리는 수


에 없을 것이다. 

[큭, 처음에 너무 강한 걸 당했어. 딴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투덜거리긴 했지만 결과가 치명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잠시나마 행복한 생각을 했다는 것에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는 류흔이었다.  3년 전의, 단지 2각(30분)동안의  만남이 류흔의 


생을 결정지어버렸던 것이다. 단순히 '첫눈에 반했다'는 말로는 부족한, 이상할 정도로 강렬

한 그리움이었다. 

류흔은 그녀의 영상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삶의 의지를 불태웠다.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소


을 들었는데, 그녀를 만나지도 못하고 이대로 죽을 순 없었다. 

[약속을 지키기 전까지는 죽지 않아. 절대로!] 

류흔은 들 끊는 기혈을 억누르던 진기마저 풀어내어 한방을  준비했다. 금방이라도 피가 역


하여 입으로 나올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어 참아내고는 현재 내공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이 


용할 수 있는 최강의 절초를 뿜어냈다. 

"쇄―! 천―! 일―! 식!(碎天一式)"

"헉! 이런! 모두 방비하라! 막아라!" 

강룡십팔장의 실전된 절초들과 거의 맞먹는 위력을 가진 강기공(剛氣功) 쇄천일식이 류흔의 

손을 타고 그 위용을 드러냈다. 천무심맥(天武心脈)의 특별한 효용으로 인해 그 위력이 더욱 

증폭된 강기의 기둥이 류흔을 위협하던 모든 것을 소멸시켜갔다. 

콰― ― ― ―앙!!

인간의 귀로는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큰 굉음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진천뢰(震天雷)라도 터


린 듯 자욱한 먼지가 주성분인 인위적인 구름이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산을 타고 올라갔고 
그 

내부에는 돌풍이 몰아쳤다. 

쿠오오오오―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강한 바람이 아직 폭발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산을 뒤흔들었
고 

나무들은 미친 듯이 춤을 춘다. 과연 쇄천일식이라는 광오한  이름이 아깝지 않은 위력이었
다. 

물론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 이 결과는 쇄천일식이라는 손바닥에 별로 뒤지지 않는 홍무신


과 옥황수라는 또 다른 손바닥이 있었기에 나타난 결과였다. 

여담이지만 강룡십팔장의 화룡토주(火龍吐珠)나 그 외의 실전된  절초들은 극성으로 전개했
을 

때 작은 동산 하나 날려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었지만 현재 류흔으로서는 화룡토주를 사용하
지 

못했다. 3년 전 어렴풋이 날린 화룡토주가, 내공도 거의 없다시피 했을 때 날렸던  화룡토주
가 

개방 최고의 무재(武才)로 칭송 받던 걸무개  맹정의 팔을 익혀버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때 

이후로 강룡십팔장의 절초들은 더 이상 기억나지 않았고 현재는 불완전한 12초식을  익히고 


을 뿐이었다. 그러니 쇄천일식이 현재 류흔의 최강 무공임에는 틀림없다. 

뭐 최강의 무공이야 어쨌든  쇄천일식과 홍무신장, 옥황수의 충돌로  생긴 폭발력으로 인해 


방에 자욱했던 먼지와 안개들이 흩어져 가면서 상황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서 있는 것은 류


뿐, 다른 사람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땅에 널브러져 있었다. 

"쿨럭! 쿨럭!" 

격렬한 기침과 함께 기혈을 토해내던 류흔은 근처의 나무에 등을 대고 주저앉아 희미한 미


를 지었다. 

[쳇, 애써 수련해왔던 내공지기가 상당부분 소실돼버렸군. 이거 다시  채우려면 며칠은 걸리


는데.]

이는 결코 홍무신장에 격타 당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류흔 자신에게 있었다. 

[나도 미친놈이지. 임독이맥(任督二脈)도 타통하지 않은 주제에 강기공을 거두려 했다니. 후

우......] 

한 번 발출한 강기공을 임의로 거둔다....... 이게 사실이라면 류흔은 미친놈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다. 체외로 배출한 진력을 거둔다는 것은 임독이맥을  타통하여 전신의 진기가 끊이
지 

않는 고수들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만약 억지로 했을 때의  그 여파는 감당하기 


든 것이다. 결국 그 순리(順理)를 거스른 류흔은  더 이상 생각을 잇지 못하고 의식의 끈을 


아버리며 그대로 쓰러졌다. 

털썩! 

그의 거대한 몸체가 쓰러진 후  주위는 정적에 휩싸였다. 그리고 일각이  채 지나지 않아서 
두 

명의 거지차림을 한 사내들이 정적을 깨뜨리며 나타났다. 

"앗, 여기! 혹시나 했더니 역시 류흔이잖아!"

"빨리 옮겨야겠군. 기경팔맥(奇經八脈)이 뒤틀린 것 같아. 자, 빨리 업도록 하세."

"이들은 어떻게 하지?" 

한 사내가 쓰러져 있는 다섯 명의 관부인들을  가리키며 묻자 막 류흔을 업은 사내가 잠시 


각하더니 곧 대답했다. 

"그냥 응급처치만 한 후 내버려두도록 하지.  원래대로라면 약방에 데려다 줘야겠지만 류흔
과 

싸웠으니 별로 좋은 뜻으로 여기에 널브러져 있는 것은 아닐 거야. 그보다 빨리 뜨세."

물음을 던졌던 사내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쓰러져 있는 자들의 혈도를 짚어 피가 


러나오는 것을 방지한 후 이내 둘은 그 자리를 떴다. 

[12] 천강 - 3. 류흔, 개방을 떠나다(2) 


"아빠! 나 드디어 다 외웠어요!" 

소동, 이제 겨우 5살이나 되었음직한 어린 아이가 만면에  기쁜 기색을 띠고 젊은 청년에게 


가간다. 부자지간인 듯 어린 아이의 얼굴에는 청년의 흔적이 있었다. 청년은 손을 내밀어 자


에게 다가오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우리 류(謬)아, 잘했구나." 

그의 손길은 소동에게 더 없는 뿌듯함과 감동을 주었다. 어린  아이는 몇날 며칠 동안 고생


던 것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에 빠졌다. 

[헤헤, 나는 아빠가 세상에서 젤루 좋아.]

챙그랑!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아버지와 아들이 비 오는 산 속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서 있는 장면으로 전환되었다. 어린 아이는 좀 더 자라서 10살 정도로 보였고(덩치만) 청년 


시 나이를 좀 더 먹어서 서른 둘의 나이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 

"......" 

이제는 32세의 장년이 된 그는 슬픈 얼굴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 아이에게 

그런 운명이 씌워졌단 말인가. 아들의 앞날이 왜 이리 어둡기만 한 것인지 그는 화가  났다. 


늘을 부수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힘이 없으니 참아야 했다. 

"잘 들어라 아들아." 

"......" 

이번에는 아들이 침묵을 지켰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너는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 천소류(天燒謬)라는 이름도 잊어야 하고, 네가 익혔던 모든 

무공들도 잊어야 한다. 네가 천강일문(天剛一門)의 후계자라는 것도 천무심맥의 소유자라는 


도 잊고 너의 과거를 잊어라. 그리고...... 이 아비도 잊거라."

마지막 말은 왜 이리 하기 힘든 것인지. 가슴속에서 올라오려 하는 이 뜨거운 기운은...... 

왜 자신이 아들을 버려야 하는 건가. 왜 눈앞이 이리 뿌옇게 변해 가는가. 

아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아름다운 눈동자 가득  슬픈 빛을 띄우며 자신의 아


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모습을 자신의 눈동자  속에 각인하려는 
듯 

찬찬히, 그리고 꼼꼼히 아버지를 바라보던 아들은 문득 대례(大禮)를 올렸다. 

"아버지, 부디 만수무강하십시오." 

아버지는 아들의 기억을 지우고 절벽에서 떨어뜨렸다. 



류흔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울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환상처럼 떠오
른 

아름다운 얼굴, 자신이 3년 간 그리워했던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의 여인이 될 여인.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여인.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며 울고 있다.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들리지는 않


다. 

"...상아( 娥)..." 

류흔은 그 한마디만 내뱉고는 밀려오는 피로에 다시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다. 



"한푼만 줍쇼." 

나는 거지다. 북경에서는 수많은 평범한  거지 중에 한 명이지만 가장  벌이가 좋은 거지로 


름을 날리고 있으니 '평범한' 거지는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지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그저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때부터 

나는 이곳에 있었다. 내 나이가 몇이더라? 할아버지랑 지냈던 게 11살까지였으니 지금은 12


이겠군. 

이름은 류흔. 성은 목에 걸려있는 옥패(玉佩)에 쓰여진 천(天)으로 삼았다. 나 같은 거지가 

성을 가져봤자 무슨 쓸모 있겠냐고 하겠지만 나는 이름이 2자인 것보다는 3자인 것이 더 좋
다. 단지 그뿐이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내 앞을 지나간다. 울고 가는 꼬마아이, 당장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비대한 살집의 아저씨,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이 끊이질 않는 젊은 연인들. 헤

헤, 어린 마음에도 상당한 이질감을 느낀다. 어째서 사람들은 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이


게나 다른 것일까.

수많은 사람을 봐왔지만 성격이 닮은 사람은 봤어도 얼굴까지  똑같은 사람은 보지 못했고, 


굴이 닮은 사람은 봤어도 성격까지 똑같은 사람은 보지 못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다르
게 

할까? 내가 알리 없다. 나는 그저 수많은 '평범한' 거지 중에 돈을 제일 잘 버는 약간 '특별

한' 거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역시 나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건 없다. 

그 때, 누군가가 마음 속에서 나를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류흔!" 

챙그랑! 



류흔은 어둠의 늪을 헤매다가 한줄기 빛의 음성에 의식이 돌아옴을 느끼며 억지로 눈을 떴

다. 거짓말 안 보태고 진짜 천근(千斤)의 무게가 느껴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리며 빛을 

흡수한 류흔의 눈동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 자신이 쇄천일식을 사용하고 나서 탈진하여 쓰러진 것은 확실
히 

기억하고 있었던 류흔은 기억에 없는 장소에 이질감을 느끼며 눈을 몇 번 깜박였다. 

흐릿하던 초점이 완전히 잡히고 나서 류흔이 느낀 것은 '참 깨끗하다'라는 감정이었다. 자신

은 깨끗하게 다녔지만 아무래도 거지이다 보니 주위 환경은  더러울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 


곳은 부호가 산다고 해도 믿어줄 정도로 깔끔했다. 그러고 보니 코로 약초 냄새가 유입되는 

것 같기도 하다. 

의아함에 정신을 못 차리는 류흔의 귀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허허, 이 사람아. 지금 내 실력을 못 믿어서 그러는 것인가? 소무개(少武 )는 괜찮다니까." 

둘 중에 먼저 들린 비교적 젊은 목소리는 분명히 걸무개 맹정의 목소리였고 늙은 목소리는 


종 신세를 졌던 성수의(聖手醫)  신도겸(申屠謙)이 분명했다. 아마 이번에도  상당히 망가진 


신의 몸을 고쳐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류흔은 몸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홍무자염신공을 운용해 보니 순환하는 진기의  양도 많아진데다가 소통도 원활하여  기혈을 


렇게 많이 토했는데도 오히려 전보다 내공이 높아진 듯했다. 게다가 몸도 상당히 가뿐한 게 


시 전보다 나았다. 

[역시 내 몸은 불가사의 그 자체다. 어째서 큰  위험을 겪고 나서는 몸이 더욱 좋아지는 것


지?] 

천강성(天 星)의 정기(精氣)와 천하최고의 무골(武骨)이라는  천무심맥(天武心脈)의 소유자


서는 당연한 일이었으나 류흔은 그 사실을 몰랐으므로 자신의  몸이 신기하기만 했다. 역경
에 

처할수록 강해지는 능력, 그리고 사경을 헤매다가 다시 회복되었을 때 일취월장하는 신체능


과 무공. 류흔을 어쩔 수 없이(?) 강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이었다. 

"이보게, 소무개는 신골(神骨)이라고까지 불리는 천무심맥의  소유자일세. 사실 가만히 내버


두어도 소무개의 몸 스스로 치료할 판인데 바쁜 사람 붙잡아 놓고는 이렇게 닦달하긴가?" 

학의 깃털을 연상하게 하는 색상을 가진 가슴까지 늘어진 수염을 쓰다듬으며 신도겸이 안절


절못하는 맹정에게 핀잔을 주었다. 이 젊은 친구는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일이


면 성격이 급해지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여기서 잠깐 이 둘의 관계를 정의하자면  아직 30대 중반인 맹정과 이제 고희(古稀:70세)를 


라보는 나이인 신도겸은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맹정이 젊은 시절, 구무룡의 일원이었을 때부터 맹정과 교분을  쌓아오던 신도겸은 그의 정
이 

넘치는 마음과 자유로운 정신을 사랑했고 맹정 역시 신도겸의 신선을 방불케 하는 고고함과 


은 정신을 존경했다. 

처음 맹정이 류흔을 데리고 왔을 때 신도겸은  그 고고한 기상과 침착함도 잊고 기절할 듯 


랐다. 류흔이 전설로만 전해 들었던 천무심맥(天武心脈)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천무심맥


란 몇 세기(世紀)에 한 번 나타난다는 아주 희귀한 체질로, 내공을 움직이는 통로인 심맥이 


통사람과는 판이하게 발달되어 있어 무공을 익히는 데는 이보다 더 좋은 체질이 없을 정도


다. 그만큼 보기 힘든 신체였기 때문에 일반 의원들과 달리 무림인들을 많이 상대하는 신도


이 흥분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때 일로 맹정에게  두고두고 놀림감이 되고 있기는 하지
만. 

각설하고, 40년 차가 나는 형님 신도겸의 핀잔을 들은 맹정은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긴 하지만, 사실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게 쉽게 다스려지지 않는 거 아닙니까?"

맹정의 정이 넘치는 대답에 신도겸은 고고함의 표상이자 상대방으로 하여금 신선 같은 풍모

를 받게 하는데 필수 요건이라 할  수 있는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혀를  찼다. 하긴 이런 


이 40년 가까이 연상인 자신과 그를 친구로 만들어주는 결정적인 계기이긴 했으므로 흐뭇한 


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신도겸은 고개를 슬쩍 돌려 아직 누워 있는 류흔을 일견(一見)


더니 누구에게 인지 모르게 담담한 음성을 흘려냈다. 

"쯧쯧, 사람하고는. 아이야, 이제 일어나거라." 

신도겸의 갑작스런 부름에 깜짝 놀란 류흔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알았지? 하여간......]

정말 귀신같은 늙은이라는 생각에 기가 차있는 류흔에게 맹정은 얼굴에 화색을 띄우며 다가


다. 

"괜찮으냐, 소무개?" 

마치 전장에 나갔다 살아 돌아온 자식을 맞이하는 부모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자신에게 다가


는 맹정을 보며 류흔은 인간 사이의 정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생각했다. 

[그 때 죽었으면 맹정 형님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하, 어째 결과가 무서워진다.] 

아마 류흔이 그때 죽었다면 모르긴 몰라도 흉수를 찾는다고 천하를 뒤집어 놓았을 것이 틀


없었다. 맹정은 능히 그렇게 할 사람이었다. 아니 맹정뿐만 아니라 개방에서 류흔을 아는 사


이라면 모두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류흔은 개방도 사이에서 소중한  존재였고, 


랑 받는 존재였다. 그가 가진 빛나는 용모와 재치 있고 여유가 넘치는 성격이 그의 이런 인


관계 형성에 큰 기여를 한 것은 별로 언급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더 몸이 가뿐해진걸요." 

류흔의 대답에 맹정은 안도하며 가볍게 훈계를 내렸다. 

"그러니까 이놈아. 싸울 때는 항상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냐? 이번엔 또  어쩌다가 다친 거
냐?" 

"무리하게 쇄천일식을 전개하다가 막바지에 다시 거두어들이는 바람에......하하하..." 

"뭣? 쇄천일식을 거두었다고?!" 

"헛헛!"

류흔의 대답에 기절할 듯 놀란 맹정은 전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역력히 드러내며 반문했

고 신도겸은 헛웃음을 흘렸다. 쇄천일식을 거두어들였다니!  절대로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쇄천일식(碎天一式). 하늘을 깨뜨린다는 오만방자한 이름을  가진 만큼 그 위력이란 세인의 


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무공의 이름을 아는 사람도 드물지만 그걸  익힌 사람은 더 드문 초
절정

의 무공에 해당하는 개방 유일의 강기공 쇄천일식은  한 번 펼치면 중간에는 절대 거둘 수 


는 극강의 위력을 가진 것인데, 그걸 거두었단 말인가? 그것도 다단계로 증폭되는 쇄천일식
의 

특성상 위력이 최강이 되는 마지막 순간에? 

"하하, 뭐 그 덕분에 몸이 완전히 망가지긴 했지만 말이에요."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류흔과 달리 맹정과 신도겸은 얼이 


진 얼굴로 류흔만을 바라보았다. 천골(天骨)이라 알려지긴 했지만 천무심맥의 한계는 어디까


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자신을 괴물 보듯 쳐다보는 두 사람을 잔잔한 눈빛으로 마주 대하던 류흔은 담담히 웃다가 


차에 대해 생각해내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혹시 그곳에서 마차 하나 못 봤어요? 그걸 쫓던 사람들과 부딪힌 건데......" 

류흔의 물음에 정신을 차린 맹정은 기다렸다는  듯 개방 특유의 정보력으로 입수한  마차의 


든 것에 대해서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네 말 대로다. 보기 드문 8두 마차인 데다가 뭔가 있는 것 같아서 조사해 보았다. 마부석의 

두 여인은 올해로 각각 17세, 15세인 제갈초혜와 남궁려려로 하북(河北)에 있는 세가들의 자


들이다. 지(知)의 가문이라 불리며 주로 쾌검을 쓰는 제갈세가(諸葛世家)와 기(奇)의 가문이

라 불리며 남자들은 중검(重劍), 여인들은  무검(舞劍)으로 유명한 남궁세가(南宮世家)가 그


이지. 나이는 어리지만 무림세가의 자제들인  만큼 상당한 무공수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기서부터가 너에게 있어 진짜 중요한 것인데...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천하제일


(天下第一美)로 공인된 희 소저라는 것이다. 너도 잘 알겠지.  최근 입수한 정보로는 황태자
의 

청혼을 받았다던데...... 왜 도주하는 지 그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다만 행선지가 숭산이라

는 것만 추측될 뿐이다."

맹정의 말이 끝나자 류흔은 안도감을 느끼며 긴장을 풀었다. 그녀가 도주한 이유가 무엇 때


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청혼을 뿌리쳤다는 것에 안도한 것이다. 바짝 오그라들었던 심


이 다시 원래 형상을 찾으며 제 기능을 다하기 시작했다. 

류흔의 얼굴이 삭막한 겨울의 바람에서 봄날의 햇살처럼 밝게 변하는 것을 본 맹정은 '큭!'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도 3년 전에 그 자리에 있었던지라 류흔의 희상아에 대한 마음을 잘 


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운명적인 사랑이란 작은 일에서 시작하는 법이니까. 물론 맹정도 사


을 해보았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일이다. 비록 개방의  거지라는 신분에 매여 헤어지게 됐지
만. 

맹정이 별로 즐겁지 않은 옛 사랑을 기억해내고 있을 때 류흔은 신도겸에게 감사의 인사를 


고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르신께는 신세만 지는군요."

16세의 소년 같지 않은 류흔의 인사에 신도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저었다. 

"허허, 무슨 말씀이신가. 사실 이 늙은이는 별로 한 일도 없다네. 다 자네의 몸이 알아서 치


한 것이지. 그리고 어르신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신도겸이 손까지 내저으며 말하자 류흔은 읍으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실로 바른 생활 청년

의 표본이 아닐 수 없다. 신도겸도 그 인자한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우며 류흔의 감사를 받아 


였다. 

"그럼 형님,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옛 추억에서 한참 만에야 벗어난 맹정이 손을 흔들면서 작별의 인사를 고했다. 사실 맹정과 

신도겸의 나이 차이를 생각하면 싸대기 맞을 언행이었지만 신도겸이 그렇게 대해주기를  희
망했

으므로 벌써 15년 째 이렇게 버릇없는 인사를 해온 맹정이었다. 그들의 친분이 대단함을 단


으로 보여주는 예이기도 했지만 달리 생각하면 역시  아무리 성자(聖子)라 불리는 신도겸이
라 

해도 자신이 늙었다는 것에 비애를  느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류흔에게 
어르

신이라 불리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 그럼 잘 가게나." 

뭐 서로가 지내는 곳이 가깝기 때문에 얼굴 못 보고 사는 처지도 아니었으므로 가벼운 인사


다. 류흔은 맹정과 함께 신도겸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13] 천강 - 3. 류흔, 개방을 떠나다(3) 



한낮이라 태양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보통사람은  바라보지도 못하는 태양을 아무렇지도 


게 바라보던 류흔은 옆에서 땀을 흘리며 악취를 풍기고 있는 맹정에게 말을 걸었다. 

"걸무개 형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만." 

"뭔데?" 

저 빌어먹을 놈의 태양을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그늘을 찾아다니던 맹정은 류흔의  부탁이라
는 

말에 짜증이 일어나려던 마음을 접고 대꾸했다. 물론 어떻게 하면 햇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까 궁리하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저... 여행을 떠날까 합니다." 

"마차를 쫓아가려는 것이냐?"

류흔은 고개를 끄덕였고, 맹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던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가려고 하다니...... 사실 류흔은 

개방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인재였다. 무림의 주축이자 역사가 가장 오래된 구파(九派), 

단일세력으로 최강의 무력을 자랑하는 마교(魔敎), 사도무림의 하늘 혈사교(血死敎) 등 어디

를 뒤져봐도 류흔 만한 천재는  없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욕하는 셈이 


는 그의 재질이란 엄청난 것이었으며, 개방의 정수무학(精髓武學)들로 다져진 류흔의 무공수

위 또한 이미 개방 내에서는 맹정과 몇몇 장로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감히 함부로 이길 수 


다고 장담하지 못하는 경지에 있는  것이 류흔이었다. 게다가 개방의  후계자 자격으로 2년 


에 있을 천하신성비무대회(天下新星比武大會)에 나가야 하는 의무까지  있는 류흔이었기 때


에 쉽게 허락하기는 힘들었다. 

이를 알기에 류흔은 류흔대로 긴장했다.  맹정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개방에  크나큰 은혜를 


은 자신으로서는 거역할 수 없다. 자신의  사랑을 접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나중에  그녀를 


시 만난다해도 그때는 어떻게 변해있을지 모르는 것 아닌가. 류흔은 격전 중에도 흘리지 않


던 땀을 흘리며 뜨거운 긴장과 애원의 눈초리를 맹정에게 보냈다. 

한동안 고민하던 맹정은 문득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에 류흔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

다. 그가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면 거절을 하려야 할 수가 없다. 결국 놓아주어야 하는가? 맹


은 속으로 고소를 흘리면서 겉으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쯧, 임마, 언제 우리 개방에게 구속이라는 것이 있었느냐? 네 마음대로 하면 되지 왜 물어

봐? 쯧쯧......" 

"가, 감사합니다!" 

갑작스레 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모이자 쑥스런  웃음을 


린 류흔은 얼굴 어딘가에 착잡한 감정이 숨어있는 맹정을 바라보며 한가지 약속을 했다. 

"2년, 2년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결론을 내고 올게요." 

용케 '의무'는 잊지 않는 류흔에게 맹정은 더  이상 씁쓸한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호탕한 


음으로 그의 길을 축복해주는 수밖에. 

"하하하! 그래도 의무는 잊지 않았구나!  그렇지만 꼭 2년 후에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다만 어디서나 네가 자랑스러운 개방의 인재라는 자존심만 잃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나 걸무개의 아우라는 것도......] 

"물론이죠!"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아우였다는 것만큼은......]

결코 입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이미 마음으로 통해있는 의형제들이기에 류흔 또한  마음속으
로 

대답해주며 작별을 고했다. 



세상을 떠돌아다닌다는 것은 상당히 불쌍한 신세임과 동시에 매력적인 일이기도 하다. 세상


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한 평생 살아가며 그 많은 일들 중에서 극히 일부


이나마 체험할 수 있다면, 그것 나름대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사람

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류흔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관상에 역마살이 꼈는지도 모
르겠

지만 류흔은 방랑생활이 체질에 맞았다. 

또다시 류흔이 방랑을 시작한 시간적 배경인 여름은 태양이 그 위력을 최고로 발휘하는 계


로, 사람에게 상상치 못할 짜증을 준다.  그 빛 아래에서 모든 생명체들은 싱싱한  생명력과 


명한 빛을 뿜어내건만, 사람이라는 이 오만하고도 이상한 동물은  태양의 은총도 모르고 원


만 할 뿐이다. 그럴 때면 화가 난  하늘은 구름과 물의 힘을 빌어 땅을 후려친다.  그때마다 


많은 인명피해가 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가끔 하늘에 감사할 줄 알고 자연을 경외
할 

줄 아는 예외인 사람들이 있어 하늘은 기분을 풀고, 그 때 마다 다시 날씨가 좋아지는 것이

다. 

류흔은 이런 하늘과 자연에 감사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들 중에 하나로서 자신을 감싸는 따


한 - 사실은 따가운 - 햇살에 감사하고 무한한 자연의 생명력을 느꼈다.  화경에 가까운 경


에 들어선 덕분에 어느 정도 자연의 기를  감지할 수 있는 류흔에게 있어 자연이란 경외의 
대상

이 될 뿐 감히 거스를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하아...... 벌써 5일 째인가? 이제 거의 윤곽을 잡았으니 오늘 내로 만날 수 있겠군." 

맹정과 헤어져 마차의 뒤를 따른 지 5일 째. 그 동안  류흔은 막강한 개방의 정보력을 바탕


로 희상아의 행방을 수소문한 결과 여기까지 쫓아올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석해보니 전에 맹정이 말했듯이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로 가는 것이 분명했으므로 곧장 


공으로 쫓아온 터라 금새 따라잡을 수 있었다. 

어느 정도 거리를 확보했으므로 마음이 느긋해진 류흔은 근처의 바위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

고 쉬기로 했다. 객잔에라도 들어가서  쉬고 싶었지만 거지 주제에  객잔을 들락날락한다는 
것은 저 까마득한 배분의 노선배 거지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자신은 백의개의 신분인만큼 분수를 지켜야 했다. 

심술궂은 햇살을 피해 우거진 나무의 밑으로 이동한 류흔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땀을 식혔

다. 무공을 익혔어도 일단 인간은 인간인 만큼  더위를 느낄 수밖에 없다. 땀이 안 날  수가 


는 것이다. 화경에 들어섰거나 내공을 운용하고 있다면 달라지겠지만 항상 내공을 운용하고 


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바위 위에 걸터앉은 류흔은 상아의 행로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좀 덥군. 그런데 대체 숭산엔 무슨 이유로 가는 것일까......" 

설마 여승이 되려는 끔찍한(?) 생각은 아닐  테고, 단지 몸을 피신하기 위해서일까? 그것도 


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하필 소림사란 말인가? 하북성(河北省)에도 절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소림사에 가려고 하다니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


다.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던 류흔은 어느 정도 땀이 식자 생각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소림사까지 오는 이유는 어쨌든 부지런히 걸어가면 오늘 내로 숭산에 도착할 수 있을 거란 


각을 하며 류흔이 일어서려는 찰나, 그 상황에선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났다. 

슈슛! 

류흔이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나무  위에서 비침이 쏟아져 내린 것이다.  보기만 해도 위험
(危

險)했고 실제로는 흉험(凶險)하기까지 한 공격이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보통 사람이라면 


짝없이 죽어야할 상황, 그러나 류흔이  누군가? 벌써 화경을 바라보는  경지에 다른 이른바 
고수

가 아닌가? 겉으로는 위험해 보이지만  살기(殺氣)도 없고 어딘가 어설픈  이런 삼류공격에 
다치

기는커녕 놀라지도 않을 류흔이었다. 게다가 이미 기척을 감지했던 류흔이다. 

펄럭! 

가볍게 손을 휘저어 소매로 간단히 공격을 무마시킨 류흔은, 이어서 연화지(蓮花指) 다섯 줄

기를 나무위로 쏘아 보내고 놀라  튀어나오는 인영을 동추수(銅錘手)라는 금나수(擒拿手)로 


압했다. 

털퍼덕! 

"아야야......." 

"잉?"

류흔의 동추수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엉덩방아를 찧고 엉덩이를 문지르는 암습자는 여자였

다. 그것도 매우 예쁜. 

대충 24세에서 25세 가량 되어 보이는 성숙한 몸매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오밀조밀한 이목


비와 맑은 빛을 뿌리는 눈이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동안(童顔)을 가지고 있었다. 


냥 가만히 있어도 예쁜데 지금 아픈 듯 얼굴을 찡그리며 엉덩이를 문지르는 모습은 귀엽다
는 

느낌과 묘한 색감(色感)을 동시에 불러 일으켰다. 묘한 분위기의 여자였다. 

"아프잖아요! 그렇게 세게 잡아당기기가 어딨어요!"

한참 둔부를 문지르던 그녀는 류흔이 빤히 보고만 있자 소리를 버럭 질렀다. 화났나보다. 

"그럼 자신을 공격한 사람한테 사정 봐주면서 대합니까?" 

류흔은 너무나 당당한 얼굴로 대꾸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먼저 공격해놓고  잡아채니까 


프다는 건 또 뭔가?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 

"흥!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는 여자라고요! 그리고 살기가  없었다는 거 알았으면서도 이


기예요!"

"아, 소리 좀 지르지 마십쇼. 나 귀 안 먹었으니까." 

류흔은 귀를 탁탁 터는 시늉을 하며 일단 시간을 벌고 말을 이었다. 

"무림에 이런 말이 있죠. '노인과 여인과 어린 아이는 조심하라.' 고금불변의 진리이자 명언

이 아닙니까? 당신이 여자라는 것은 나에게  경각심을 심어줄 뿐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
다. 

그리고 살기가 없었다고요? 그럼 사람이 아무렇게나  던진 돌에 죽는 개구리는 뭡니까? 그 
사람

이 '아무 개구리나 죽어라.' 라는 뜻과 살기가 있어서 개구리가 죽습니까?"

류흔의 논리 정연한 반박에 여인은 할 말을 잃은 채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결
국 

말발에서 밀리니 목소리로 이기자라는 심보로 소리를 질렀다.

"그래요! 아는 거 많아서 좋겠네요! 먹고 싶은 것도 많죠?!" 

'아는 게 많으니 먹고 싶은 것도 많다.'라는 말은 대체 그 출처가 어딘지 짐작도 가지 않았

고, 더 이상 시끄럽게 여자랑 싸우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므로  류흔은 그녀를 무시한 채 몸
을 

돌렸다. 자신을 공격한 이유를 알고 싶긴 했지만 별로 말해줄  것 같지도 않아서 그냥 넘어
가기

로 마음먹었다. 더 이상 그녀와 실랑이 해봤자 자신의 머리만  아프고 소득은 없을 게 뻔했
다. 

그리고 아무리 자신을 공격했던 사람이라 해도 여자와는 크게 다투기 싫었기 때문이기도 했

다. 

한편 자신을 무시한 채 가려 하는 류흔의 태도에 여인은 멍한 상태에서 정신을 차렸다. 

"이봐요! 당신 그냥 갈 거예요?!"

그럼 그냥 가지 더 이상 뭘 어쩌란 말인가. 여인은 자신이 한 말이지만 이상하다는 것을 깨


고는 그가 무시하고 갈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이 사내는 또 자신의 예상을 빗나갔다. 

"쩝. 그렇군요. 그냥 갈 수는 없죠."

몸을 돌려 터벅터벅 걸어오는 류흔의 얼굴에는 치기 어린  악동의 미소가 걸려있었다. 여인
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앉은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상당히 불길한 예감이 그녀
의 

전신을 엄습해왔다. 

"뭐, 뭐예요?"

류흔은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뭐긴 뭡니까? 그냥 갈 거냐면서요?  상당히 아쉬워하는 것 같기에 기대를  충족시켜주려는 
것뿐

입니다."

대체 어느새 구했는지 류흔의 손에는 새끼를 꼬아만든 하나의 줄이 잡혀 있었다. 어디서 나


는지 언제 준비한 건지는 몰라도 보기만 해도 튼튼하다는 것이 느껴지는 밧줄이었다. 

줄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완전히 위기를 감지한 여인은 순식간에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도로 신형을 뽑아 올렸다. 그녀의 직업이 정보원인만큼 그녀의  경공실력이란 수준 급의 그
것이

었다. 하지만 이미 류흔에게 한 번 잡히지 않았던가. 게다가 이미 마음을 먹은 류흔의  손에
서 

그녀가 벗어난다는 것은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고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쯧, 늦었습니다." 

어느새 그녀의 진로를 가로막은 채 여유 있는 웃음을 흘리는 류흔을 바라보며 여인은 식은


을 흘렸다. 그리고 그녀가 주춤하는 틈을 타 동추수가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털썩! 

마혈 여덟 곳을 한 번에 찍혀버린 그녀의  몸은 시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뻣뻣해져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약간의 누런 먼지가 일어나며 여인의 몸을 살짝 덮었다. 

"콜록! 콜록!" 

마혈(痲穴)을 제압당했지만 아혈(啞穴)까지 제압당한 것은  아니므로 그녀가 기침하는 데는 


무런 불편이 없었다. 

"대체 무슨 짓이야?! 여자한테 이래도 돼?" 

여인이 악을 바락바락 썼지만 류흔은 들은 척도 안했다. 그저 그녀의 몸을 들쳐업고는 나무

에 줄을 맬 뿐이었다. 그제야 그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챈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흥! 거꾸로 매달려고? 그런다고 내가 빌 것 같아?"

"거참 되게 시끄럽군요. 누가 그렇게 시시하게 놉니까?  그저 당신은 가만히 당해주기만 하
면 

됩니다. 한 번만 더 입놀리면 지금 이 상태로 산적 굴에 던져버릴 테니 알아서 해요."

단순히 '산적 굴'이지만 현재 그녀가 처한 상태에서의 산적 굴은  평소에 그녀가 발톱의 때


큼도 여기지 않던 그런 허접들이 모인 장소의 의미가 아니었다. 아주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타격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장소인 것이다. 고로 그녀의 입은 놀란 조개처럼 아주 꽉 다물어


다. 

효과가 직방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며 피식 웃은 류흔은 그녀의 육감적인 몸을 거꾸로 매달


다. 태양이 뻔하니 내려다보는 그런 상황에서 나무에 거꾸로 매인 그녀의 몸은 바람이 부는 


도 아닌데 이리저리 흔들렸다. 뭐 이건 자연적인 현상으로 그녀의 머리가 무게 중심을 잡을 


쯤이면 멈출 것이었다. 

그녀를 매단 후 손을 탁탁 턴 류흔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어디 보자........ 이게 좋겠군요." 

여인이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류흔이 집어든 것은  자그마한 돌이었다. 엄지 손톱 


한 크기의 아주 작은 돌 말이다. 

[14] 천강 - 4. 개 같은 날의 오후(1) 



"꺄르르! 그, 꺄르르르..... 만!, 꺄아아아! 제, 제발!"

대낮에 웬 정신이상으로 진단 받은 듯한  여인의 웃음소리냐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니 뒤에 것은 아니고........ 어쨌든 지금 관도에 울려 퍼지는(진짜 길에서 소리가 울려 퍼지

는 지는 잘.......) 이 정신이상으로 진단 받은 여인의 웃음소리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

도 아주 말짱한 여인이 내는 소리였다. 물론 그게 아주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서 그렇지만. 

"잘 안 들리는데요?" 

타악! 

류흔은 벌써 20개 째 되는 돌을 퉁겨내면서 시큰둥하게 말했다. 류흔의 손에서 쫓겨난 돌은 

아주 정확하게 여인의 혈에 가서 박혔다. 

툭! 

드디어 점혈(點穴)되었던 8곳의 모든 마혈이  풀렸지만 여인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지막 남아있던 마혈이 풀림으로써 전신에 일어나는 간지러움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 

"꺄하하하! 제, 제발. 꺄하하하하! 흑! 흐윽!" 

결국 여인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물론 훨씬 큰  웃음소리에 먹혀서 잘 들리지 않


지만 류흔에게는 그 정도로 충분했다. 

[이쯤이면 됐겠지. 후후, 하여간 신 어르신의 혈도에 대한 지식은 기가 막힌단 말이야. 어떻

게 이런 혈도들을 찾아 내셨지?] 

류흔은 다시 한 번 신도겸이 지닌 사람의  혈도에 대한 지식에 감탄하며 돌을 던져 그녀의 


신에 돌아다니고 있는 간지러움의 원인인 혈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이 간지러움을 유발시키
는 

혈도들은 신도겸의 풍부하다 못해 그 끝을 알 수 없는 의학지식이 발견해낸 획기적인 것으
로 

고문하는 데 그만이었다. 사실 이 방법은 사람을 탈진시키는 건 금방이고 심하면 죽일 수도 


는 것이므로 류흔이 조금 독했다 할 수 있겠다.

"흐윽! 흑! 흐으윽...... 훌쩍!" 

"이런, 내가 너무 심했나...... 이봐요, 그만 울어요."

모든 통증(?)이 사라진 뒤에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그녀에게  당황한 류흔은 그녀를 달래기 


작했다. 물론 그것은 전에 봐서 알겠지만 서툴기 짝이 없었다. 

"미안해요. 그렇게 고통스러웠어요? 이런...... 소용이 없네." 

......할 말 다했지 않은가. 

류흔이 이렇게 열심히 달랬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울음을 멈출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했다. 

아니 소리는 오히려 처음보다 더 커졌고, 그 억양은 점점 어린애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엉엉! 훌쩍! 훌쩍!"

억양도 그렇거니와 행동도 점점 가관이 되어 갔다. 눈물을 퍼내는  듯 두 눈을 마구 비비면
서 

온 몸을 비틀어대는 행동이란 거의 10살에 가까운 어린애가 하는, 아니 요즘에는 그보다 어


애도 하지 않는 그것이었다. 그런데 마치 정신연령이 10살 이하로 퇴행해버린 듯 그녀의 이
런 

행동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류흔도 처음엔 몰랐으나 어느 순간 그녀의  태도가 시사하는 바를 깨닫고는 그만  등줄기가 


늘해졌다. 그녀의 여자답지 않은 인내심이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해버린 것이다. 

[이, 이런! 부작용이다! 제기랄, 상태를 보니 한 일주일은 가겠구나!] 

신도겸이 가르쳐준 이 점혈 방법은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그게 오래 지속되면 

매우 치명적인 것으로, 방금 전처럼 정신의 퇴행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

가 많이 참아내어 류흔이 혈을 12개나 자극했으니 이런 현상도 당연히 도출될 수밖에 없었
던 

결과라 할 수 있겠다. 

"으아아앙! 으앙!" 

"허억! 이런! 잠시만 기다려요!" 

류흔은 그녀가 대성통곡을 하자 마을  쪽으로 다급히 몸을 날렸다. 일  벌여놓고 째려는 게 


니라 무언가 먹을 것을 사기 위해서였다. 예로부터 어린아이를 달래는 데는 먹을 것이 최고


지 않았는가! 

대체 어쩌다가 이런 상황까지 왔는지...... 류흔은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이 일은 처음부터 상

식을 벗어났었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머리를 휘휘 저어 생각을 관두어 버렸다.

[크으..... 골이야.]



류흔이 도망치듯 떠난 후 여인은  더욱 서럽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컸던 그녀의 


음소리는 이제는 우렁차다 할 정도로 커져서 상당히 귀찮은 상황을 가져왔다. 길 근처의 숲 


을 걸어가던 무림인들 몇 명이 난데없는 여인의 울음소리에 달려온 것이다. 

그들이 수풀을 헤치고 공터를 발견했을 때, 여인은 나무에 등을 대고 걸터앉아 무릎에 얼굴

을 묻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인 것은, 그녀가 아무렇게나 앉아버린 까닭에 무릎을 가리지 못

해 그 기능을 상실한 치마위로 그녀의 늘씬한  다리가 유감 없이 드러나 있어 남자란 동물 
본연

의 욕망을 꿈틀거리게 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하필이면 나타난 무림인들
은 

하나같이 동네의 건달처럼 생긴 우락부락한 남정네들이었으니...... 

"꿀꺽!" 

발해진 곳은 여러 곳이었으나 난 소리는 하나였다. 이  한가지 감탄소리만으로도 현재 이들
의 

심정을 살펴볼 수 있겠다. 그야말로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난 그런 상태인 것이다. 

이들 다섯 명의 별호는 하남오흉(河南五兇)으로 생긴  것과 하고 다니는 짓, 그리고  심보가 


조리 일치되고 핵심을 잘 집어낸 아주 훌륭한 별호라 할  수 있었다. 자신들은 그래도 자존


이 있다고 하남오웅(河南五雄)이라 부르는 모양이지만 늑대 털이 하얗다고 양이 될 수는 없
는 

법, 세인들에게 불리는 그들은 어디까지나 하남오흉이었다. 

그들 중에 대형(大兄)자리를 맡고 있는 중이(中二)가 아우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우들아!"

"네! 대중(대형(大兄) 중이(中二)의 줄임말)형님!"

"에...... 저 꾸냥이 날 유혹하는데, 어떻게 하지요?" 

"여인의 유혹에 당해주는 것은 남자의 도리! 당연히 형님께서 응해주시는 것이 지당한 일이


고 생각합니다!"

"에...... 역시 그렇지요?"

"물론입니다!" 

대체 '지당하다'란 표현과 남자의 도리는 어디서 배워왔는지 모르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

은 세뇌교육의 무서운 효과였다. 물어보는 즉시 바로바로 튀어나오는 대답이란....... 

이렇게 검은 욕망에 물들어버린 다섯 사내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인은 어느새 울음을 멈추고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만 있었다. 

"훌쩍.....!" 

그러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느꼈는지 고개를 발딱 드는 그녀. 눈물에 젖어 더욱 아름다워 보


는 얼굴에 내리쬐는 햇살정도의 환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그녀는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녀의 


는 얼굴 앞에는 입가의 침을 다시는 중이가 서 있었지만 그 뒤에는 양손 가득 빙당(氷糖)을 


득 든 류흔이 서 있었다. 

"와아아!"

갑작스레 뛰어드는 그녀의 육탄공세에 중이는 흠칫하면서도 입을 헤벌쭉 벌리며 그녀를  안


다. 그런데 이게 웬일? 그녀의 탄력 있는 몸체는 느껴지지 않고  만져봐야 좋을 것 하나 없
는 

허공을 움켜쥐었다는 생각만이 그의 머리 속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가? 그가 이상한 생각에 


을 뜨고 고개를 획하니 돌린 그 곳에 류흔이 사온 빙당을 맛있게 먹고 있는 그녀가 있었으

니....... 실로 열불 터질 일이었다.(왜?)

"홀짝! 홀짝!" 

"저기, 좀 천천히 먹는 게...... 아닙니다."

순식간에 2개를 없애버리는 미사의 먹는 속도를 보며 조금 천천히 먹도록 권한 류흔이었지
만 

싹 쏘아보는 그녀의 눈길에 꼬리를 말았다. 

[여자들이 쏘아보는 건 너무 무섭단 말이야.] 

빙당이란 이름만 들어서는 얼음으로 만든 어쩌구저쩌구일 것 같지만, 그냥 설탕덩어리다. 단

지 생긴 것이 부서진 얼음 같다 해서 빙당이라 부르는 것뿐이다. 보통 과실주(果實酒)를 담
글 

때 당원(糖原)으로 많이 사용하는 것이지만  류흔이 가져온 것은 특별히  과자 형태로 만든 
것으

로 '엿'이라 보면 된다.

너무나 맛있게 빙당을 핥아먹는 그녀를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눈으로 바라보다가, 류흔은 


신을 향해 쏘아지는 강렬한 살기를 느끼고 시선을 옮겼다. 조금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흐리


덩하게 생긴 놈 하나가 생긴 것 답지 않게 강렬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막말
로, 

그리고 쉽게 말해 자신을 갈구고 있었다. 

"뭡니까?"

류흔이 묻자 중이는 잘 됐다는 듯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이놈! 감히 나의 꾸냥을 그깟 빙당으로 꼬시려 하다니! 너 같은 놈은 내 동생들이 용서
치 

않을 것이다! 에..... 그렇지 않아요?"

"물론입니다, 대중형님!" 

중이를 제외한 사흉이 순식간에 류흔을 둘러쌌다. 저마다 박도(朴刀)를 들고 빙빙 도는 모습

은 사뭇 위협적이었지만 류흔에겐 아니었다. 무슨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허술한 진
(陳)

을 짜서 뭐하겠다는 것인가? 너무나 단순한 사방진(四方陳)은 상대할  맛도 나지 않는 그런 


이었다. 

"지금 이게 저 위협하는 겁니까?"

류흔은 기가 찬 음성으로 중이에게 물었다. 물론 들려온  대답은 욕설이 가미된 시건방지기 


이 없는 불한당의 말투, 그 전형이었다. 

"당연하지 이 덜떨어진 자식아! 게다가 감히 나의 꾸냥을 으슥한 데로 끌고 가서 강제로 그 


을 하려 하다니! 너 같은 놈은 관에 끌고 갈 것도 없이 나 대중이 심판해주마!"

[자신은 뒤에서 놀고 있으면서 자신이 심판하다니...... 그리고 뭐가 어쩌고 어째? 허허!]

류흔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고는 빙당의 맛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는 여인의 허


를 끌어안아 자신의 품에 밀착시켰다.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그들과 


우는 도중 이 중이라는 작자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끌어당긴 것뿐이지만, 그걸 자기 멋대로 


석한 중이의 머리위로 물을 최고 온도에서 끓이는 듯한 증기가 피어오른 것은 말할 것도 없


다. 

"아우들아! 쳐라!" 

"와아아아! 억!"

우렁찬 함성소리와 처절한 비명소리는 거의 동시에 들려왔다. 류흔을 포위하고 있던 하남사


이 몸을 날리는 순간 류흔의 좌수에서 수십 개의 연화(蓮花)가 떠오른 것이니....... 바로 개

방의 가장 기초장법인 연화장(蓮花掌)이었다. 

비록 기초적인 장법이라 해도 쓰는 사람 나름. 류흔의  연화장은 그보다 고급장법인 백결신


(百結神掌)에 전혀 뒤지지 않는 위력과 그보다  훨씬 멋진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분분히 


중에 흩날리는 연화들...... 상당히 멋있었다. 그 결과도 멋있는 것이었고. 

"허억....... 이럴 수가. 이런 개 같은 일이......." 

단 일수에 아우들이 격퇴 당하자 중이는 식은땀을 흘렸다. 제기랄, 대체 저 덩치를 왜  무시


었단 말인가. 남보다 목 하나 정도는 더 큰 저 체구는 결코 껍데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

리 후회해도 이미 지난 일. 그는 지나간 일보다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걱정해야했다. 그  덩
치 

녀석이 어느새 자신의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하하...... 형씨...... 장난이었수다. 헤헤......"

일단 어색한 웃음으로 사태를 마무리해보려는 중이였지만 이게 그렇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


다. 류흔이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완성된  인격자, 즉 군자(君子)라면 허허하고 넘어갔겠지
만 

류흔은 결코 군자가 아니었다. 아무리 성격이 좋다하지만 대화보다는  싸움으로 모든 걸 결
정하

는 무림인의 기질이 은연중 류흔에게도 배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천성적으로 뒤에서 


을 조장하다가 자신만 쏙 빠져나가려는 이런 자들을 싫어했다. 이럴 때는 일단 맞고 시작하
는 

게 상례였다. 

뻐억! 

중이의 어색한 웃음이 끝나기 무섭게 류흔의 주먹이 그의  복부를 강타했다. 어찌나 충격이 


렬한 지 비명소리도 목구멍으로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였다. 

"어억억......."

"저도 장난이었습니다. 이제 진짜로 시작하죠."

류흔이 빙그레 웃으며 주먹을 모아 쥐자 안 그래도 호흡곤란으로 새파래졌던 중이의 얼굴은 

아예 사색(死色)이 되어버렸다. 방금 전의 일격이 장난이라니....... 더 이상 맞았다간 단 두 

방에 맞아 죽는 사태가 벌어질 지도 몰랐다. 다행히 중이는 이럴 때 빠져나갈 수 있는 대처


법을 잘 알았다. 

"끄어억......"

마치 아까 맞은 충격이 이제야 전신을 다 돌았다는 듯 괴상한 신음소리를 흘리며 뒤로 넘어


는 중이. 뒤통수가 땅과 아주 친밀하게 접하는 바람에 쓰러진 그의 얼굴이 약간 찡그려졌으
나 

곧 펴졌다. 자세히 보면 얼굴 근육이 찌르르 떠는 것이  보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굉장한 연
기력

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중이의 대처방법에 류흔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환장하겠군. 하하핫! 그렇게 맞는 게 무서운가....... 뭐 이쯤에서 봐주기로 할까. 크

게 잘못한 것도 없으니.] 

류흔이 희미한 미소를 띤 얼굴로 쓰러진 중이를 뒤로 하고 몸을 돌릴 때 마침 누군가가  류


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응?"

류흔이 고개를 돌리니 여인이 아주 아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갈망


는 듯한 눈빛, 류흔은 그녀의 손을 바라본 후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

다. 

그녀의 손에서는 아무것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다만 약간의 끈적거리는 느낌만이 그녀의 손

에 그 어떤 것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리고  있을 뿐. 그새 빙당을 다 먹은 것이다.  그것도 


자라 더 원하고 있었다. 

류흔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디서부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빙당, 더 먹고 싶어요?"

끄덕끄덕! 

느낌표가 느껴질 정도로 강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아무래도 떼어놓고 갈 수는 없을 것 

같다. 류흔은 문득 아직 그녀의 이름조차 모른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물었다. 

"알았어요. 사줄 게요. 그보다 이름이 뭐죠?"

"웅...... 미사(美沙)."

아마 그녀가 어렸을 적에 그녀의 성격은 매우 조용하고 소심했을  것 같다. 이렇게 말을 짧
게 

하다니. 

"미사...... 예쁜 이름이네요."

류흔이 칭찬하는 말에 살짝 볼이 붉어진 그녀는 류흔이 걸음을 옮기자 걸음도 가볍게 그의 


를 따랐다. 졸지에 일행이 생겨버린 류흔은 그녀의 정신이  원래대로 돌아올 것으로 추측되
는 

일주일 후까지만 그녀를 데리고 다니기로 결정했다. 

[이거 왠지 적을 하나 데리고 다니는 것 같아 찜찜하군. 아무래도 난 무림인이 되기에 별로 


절한 체질이 아닌 것 같다. 후우........ 어쩔 수 없지.]

확실하진 않지만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그녀는 분명 자신에게 그리 이로운 사람

은 아닐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지금 죽여버리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긴 했지만 쯧,  그러
면 

그게 사람인가? 나중에 손해를 보더라도 인정머리 없이 살고 싶지는 않은 류흔이었다. 류흔
과 

미사의 모습은 곧 언덕 아래로 사라졌다. 

두 명의 남녀가 사라진 후, 기절한 채 하고 있던 중이는 득의의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일으


려 했다. 더 이상 맞지 않은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방방 뛰며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마치 혈도를 찍힌  듯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 


닌가! 

"이, 이건 또 무슨 일이야?! 왜 내 마혈이 찍혀 있는 거지?"

분명 류흔은 복부를 후려갈긴 것말고는 그에게 손댄 것이 없었다. 혹시 그가 지력을 썼을까 

의심이 가기도 했지만 그가 무음지(無音指)를 익힌 것도 아니었고 아무 느낌도 없었으니 그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나오는 단 하나의 결론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해야 할까. 

아까 넘어질 때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돌덩이에  등뒤에 있는 마혈들 중 하나가 찍혀버린 듯 


다. 

"이, 이런 개 같은 일이........ 우아아아!"

중이는 오늘 일진 정말 사납다 생각하며 통곡을 했다. 그리고 길고 길게 울부짖었다. 

"에..... 누가 나 좀 구해줘요!" 

저녁 무렵인지라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오직 하늘을 붉게 물들인 석양의 노을만이 그의 외침

을 들어주고 있을 뿐이었다. 별로 관심은 없는 듯 하지만 들어주는 게 어딘가. 그냥  그것만


로도 감지덕지 하는 수밖에 없을 듯 하다. 참으로 개 같은 날의 오후였다. 


[15] 천강 - 4. 개 같은 날의 오후(2) 




저녁 무렵, 하남성(河南省) 내에 있는 수많은 객잔 중에서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객잔의 역
시 평범하기 짝이 없는 방.

"이거 정말 난감하네...... 어떻게 하지?"


아까 잠깐 구걸하여 얻은 돈(전에도 말했지만 류흔의 '잠깐 구걸'은 다른 거지의 '하루종일


걸'보다 낫다.)으로 근처의 객점을 찾아 들어가 방을 잡은 류흔의 입에서 나온 난감한 음성


었다. 뭐가 그렇게 문제일까? 그의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는 사람을 보면 자연히 답이 나온다. 

그의 앞에서는 콧노래를 부르며 뭐 그리 신기하게 볼 게 있는지 좁은 방 안 이곳저곳을  돌


다니는 미사가 있었다. 밖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어 야심한 시각을 알리고 있건만, 남녀가 

한 방에 있다니...... 연인 관계가 아니고서는 결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상황인 것이

다. 

류흔이 난감해 하는 부분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돈은 충분히 되지만 이 미사라는 막무가내

인 아가씨가 자신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질 않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방을 하나만 잡긴 했는

데...... 막상 들어오고 보니 방이 좁아서 마땅히 미사를 피해 눈을 둘 곳을 찾을 수가 없었

고 거기에 따라서 젊은 류흔의 피도 용솟음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운기조식으로 마음을 가
라앉

히긴 했지만 결코 마음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나한테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고요, 이 아가씨야. 제발 방 좀 따로 잡자고

요!"

물론 처음에는 이렇게 푸념도 늘어놓아 보았다. 그러나 듣기는커녕  듣는 시늉도 하지 않는 


사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릴 수밖에 없었으니, 어쩔  수 없이 류흔 혼자서 나름대로 그 


유를 추측해 본 결과 나온 가설은 '빙당'의 위력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유치한 이유

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녀의 뇌리 속에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하라는 임무가 강


게 박혀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곧 류흔은 고소를  흘리며 두 번째 가설을 부정


다. 이유는 간단했다. 

[별로 어울리지 않아. 푼수 같기만 한데.] 

어쨌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 어떤 가설도 무의미한 것이기에 류흔은 생각하기를 포기하
고 

좁은 땅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그래도 명색이 남자인데 여자를  놔두고 자신이 침대에서 잘 


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양보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저지 당했다. 

방안을 구석구석 탐색하던 미사가 류흔이 이부자리를 깔자마자 자신이 그곳에 가서  누워버


는 것이다. 그리고는 베개를 껴안고 좌우로 구르기까지 한다.

"꺄아∼ 꺄아∼"

몸매는 바라보는 사내를 녹일 정도로 성숙한 여자가, 하는 짓은 어린애나 할 법한 짓이라

니...... 어찌 생각하면 역겹기도 했지만 현실은 오히려 황홀할 정도였다. 나이답지 않은 천진

함은 사람에게 매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백치미(白痴美)니 뭐니 하는 말이 나오지.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매력이 어떻든 류흔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자신의 잠자리마저 빼앗겨버


으니 뭐가 눈에 들어오겠는가. 류흔은 멍하니 서 있다가 데굴거리는 그녀를 붙잡았다.  그리
고 

벽 쪽에 마련된, 지금은 휘장이 걷어져 있는 침상으로 던져버렸다. 

출렁! 

방은 초라하지만 침대의 솜은 좋은 것을 썼는지 침대는 상당한 충격에도 파삭 부서지지 않
고 

출렁거렸다. 류흔은 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을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를 반듯이 눕히
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자, 밤이 늦었으니까 그만 자요."

그녀의 잠자리를 정리해주고 또다시 뺏길까 두려워 곧바로 자리에 누운 류흔은 자신의 다섯 

치 옆에서 환하게 타오르고 있는 촛불을 손으로 비벼 껐다. 

촛불이 꺼지자 안 그래도 별로 밝지 않았던 실내는 단번에 어둠으로 물들었다. 밖은 조용했

고, 실내도 조용하여 잠을 자는데 최적의 조건이 갖추어졌다. 

그런데 이렇게 잠자는데 최적의 조건이 충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류흔이 잠 못 드는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뒤에서 자신을 껴안는 탄력 있는 동체 때문이었다. 

[흐미....... 또 뭐야......]

"무슨 일이에요?"

대답은 없었다. 류흔은 혀를 차고는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무언가를 

보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류흔이 바라본 그녀의 눈동자는 어떤 불안으로 떨리고 있었다. 

"나 혼자 자는 거 무서워. 같이 잘래."

"......." 

어이가 없었다. 대체 뭐가 무섭단 말인가. 그리고 이 상황이 뭐가 혼자 자는 건가? 한 방에

서 자는 게 같이 자는 게 아니고 혼자 자는 거라고?

류흔은 정말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혹시 이거 그 말로만 듣던 색녀(色

女) 아냐? 정말 갈수록 골을 지끈거리게 하는 여자였다.  그냥 거기다 버려버리고 올 걸 하
는 

후회가 그의 가슴으로 물 밀 듯 밀려 들어왔다. 

가만히 있는 류흔의 반응을 긍정의 표시라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몸을 

더욱더 밀착시켰다. 대체 어렸을 때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는지 심히 걱정이 되는 바였다. 

갑자기 류흔은 그답지 않게 표정을 굳히고 차가운 음성을 흘려냈다.

"미사. 침대로 올라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약간 굳은 어조와 그녀의 실제 나이를 감안하여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
던 

하대였다. 마치 엄포를 놓는 듯한  류흔의 말투에 미사는 살짝 몸을  떨었으나 오히려 더욱 


의 품을 파고 들 뿐 올라갈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미사. 올라가라고 했어."

그녀가 품을 파고듦에 따라 더 강경해진 류흔의 말투는 그녀의 행동을 주춤거리게 하는 데 


분했다. 미사는 울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미사는 어두운 데서는 잘 못 잔단 말이야. 그러니까 미사 혼내지마. 응?"

다른 부분에 비해 약간 큰 듯한 그녀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맑고 아름답다 할 수 있는 작

은 물방울들이 모이고 있었다. 여인의 최대 무기인 눈물 공격이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

고 불행히도 류흔에게는 여자의 이런 눈물에 대항할 만한 유일한 무기인 철로 된 심장이 없


다. 

"......"

그놈의 눈물이 뭔지. 눈물에 밀린 류흔은 어쩔 수 없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자신의 이 

성격은 언제나 고쳐질는지. 하지만 아마 평생 고쳐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휴...... 알았어요. 혼내지 않을 테니까 제발 울지만 말아요. 후...... 어쩔 수 없군요. 

단, 품속에 파고들지는 말아요. 알았죠?"

고개를 끄덕이며 맑은 웃음을 짓는 미사를 바라보며 류흔은 순간 뛰는 가슴을 억제했다. 솔


히 말해서 그녀는 찾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그녀의 몸매는 미모


다 더 뛰어난 것이었으니 붙어 있는 지금 류흔의 가슴이 뛰는 것도 당연했다. 

[으이구. 정말 큰일 낼 아가씨구만. 이거 내가 무슨 일 벌이는 거 아냐? 우욱! 또 머리가!] 

그의 머리 속에서 갑작스럽게 통증이 일어났다.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증상이 또다시 나


난 것이다. 류흔은 이마에 손을 댄  채 고통을 참아내려 노력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통증이 


리 심하지 않았다. 

"으음......"

항상 그랬듯이 고통 후에 나타나는 어떤 지식, 이번에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의 구절(句節)들

이었다. 

[으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정말 상황

판단 한 번 기차게 하는 군. 누구 머리인지 존경하고 싶다, 정말.]

자화자찬(自畵自讚)이라 들리지 모르겠지만 사실이었다. 상황에 딱 알맞은 지식들이 떠오르

는 것이므로 배우기만 하고 응용은 할 줄 모르는 요즘 청년들에 비해서 매우 대단한 것이라 


니할 수 없겠다. 기억 속 너머의 자신에 대해 존경심이 절로 생기는 류흔이었다. 

어쨌든 다행히도 불문(佛門)의 유명한 경전(經典)인 반야심경을 암송하자 뛰던 가슴이 어느 

정도 가라앉는 것 같았다. 불문의 경전을 암송하기만 하면 꼭 마음이 가라앉는 것은 아니지
만 

류흔은 곧 경전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으휴....... 내가 이게 무슨 고생이냐......"

"코올∼ 코올∼"

때아닌 고생에 투덜거리는 류흔의 중얼거림과, 그에 화답하는 미사의 코고는 소리가 어우러
지며 그날 밤은 깊어져만 갔다. 



짹짹짹―! 

닭 대신 참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아침은 시작되었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창 밖의 빛을 

역시 게슴츠레한 눈으로 느끼며 일어난 류흔은 눈을 비벼 흐릿함을 떨쳐냈다. 

"아침이군."

아무 뜻도 없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은 류흔은 한가지 사실을 상기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

다. 자신의 왼편에 그가 찾는 것(?)이 있었다. 

"새근- 새근-. " 

자신의 실수로 인해 정신연령이 10살 이하로 뚝 떨어져버린 그녀. 그녀는 아주 달콤하게 자

고 있었다. 자신의 왼손을 꽉 붙잡은 채로. 그리고 그것은 류흔이 전신을 다 일으키지  못한 


인도 되었다. 

[어쨌든...... 곁에 있으니 다행이군. 응? 뭐라고? 지금 내가 뭐라고 한 거지?] 

자신도 모르게 그녀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다행이라고 여겼던 류흔은 곧바로 화들짝 놀라며 

연이어 떠오르는 생각들을 애써 떨쳐내었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

다.) 벌써부터 이런 마음이 든단 말인가? 류흔은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심란하다, 심란해."

"우웅, 심란해."

미사의 잠꼬대였다.

"......제기랄." 

그동안 결코 짧지 않은 거지생활을 하면서 쌓아온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지금 시각이 묘시(5

시 ∼ 7시)말이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시간은 자신이 개방도가 된 이후
로 

항상 일어나서 운기조식하던 시간이기도 했다. 

"에이, 이거 어떻게 빼지?"

류흔은 미사의 양손에 꼭 잡혀있는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며  갈등했다. 만약 상대가 남자


다면 아무 주저 없이 뺀 다음 혹시라도 깨면 다시  수도(手刀)로 기절시켰을 테지만 상대가 
'여

자'라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있을 수도 없었으므로 류흔은 조심스럽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빼내기 시작했다. 

[조, 조금만 더...... 휴우∼ 빼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오래 걸렸다면 땀을 흘리는 류흔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어쨌건 그

의 손이 빠져나가자 미사는 뭔가 허전해진 듯 몸을 뒤척였다. 그녀의 뒤척임에 따라 이불이 


라 말려 올라가 늘씬한 다리가 노출되었지만, 류흔은 이젠 담담해진 얼굴로 그저 이불을 끌


내릴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그런 유혹에 휘둘릴  만큼 심지가 약한 
류흔

이 아니었던 것이다. 

"후∼ 아∼. 후∼ 아∼."

몇 번의 심호흡 뒤에 드디어 오심(정수리와 양 손바닥, 양 발바닥)을 하늘을 향해 열고 눈을 

내리 감은 류흔은 자신이 최근 힘쓰고 있는 홍무자염신공이 아닌 만사에 초탈한 넓은 마음
을 

형성시켜주는 취팔선공(醉八仙功)을 운용했다. 유혹에 대한 저항력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면


이 되었다고 하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기에 예방은 철저해야 한다. 

취팔선공은 선(仙)이란 글자가 괜히  붙은 게 아닌 만큼  도가(道家)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는 신공이다. 그런 이유로 원래 도가의 무공이 그렇듯 취팔선공의 극의(極意) 또한 모든 것
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며  궁극에 이르면 무소유(無所有)의  소유(所有)에 대한 깨달음을 


는 것이었으므로 꾸준히 익히기만 한다면 모든 일에 초탈한 자세를 가질 수 있게 되는 무공
이 

바로 취팔선공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도가계열의 무공은 아니라서 무당파나 청성파(靑城派)의 무공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불가나 도가  계통의 무공이 세사에 초연(超然-:속세나 명리  따위에 


계하려는 태도가 없다)해지는 것이라면, 취팔선공은 극에 이를  경우 초탈(超脫:세속이나 어
떤 

한계를 뛰어넘어 벗어남)해지는 것이다.  실로 개방에서 풍진기인들이  많이 나오는 이유도 
취팔

선공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취팔선공은 장로 이상쯤은 되어야 배울 수 있는 자격이 주


지기 때문에 그 기인들의 나이가 대체적으로 많은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물론 어느 경우에나 예외는 있어서 간혹 가다 류흔처럼 젊은 나이에 장로를 넘어서는 직위
에 

오른 사람들도 있지만, 그럴 경우  피끓는 청춘을 달래기 위해 대성하기  전에는 별 위력이 


어 보이는 취팔선공을 익히느니 차라리 다른 신공을 더 완숙시키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
람들

이 대부분이다. 여기서 세사에 초탈한 기인들의 연령이 60을 넘어가 밖에 안 나오는 이유를 


측할 수 있다. 

다만 위에서 말한 젊은이들이 취팔선공을 익히는 태도에 있어서 류흔은 예외였다. 젊은, 아

니 어린 나이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8성이라는 상당한 성취를 이룬 류흔이었다. 


젠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맹정이 물었을 때, 류흔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었
다.

'글쎄요.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서가 아닐까 합니다.' 

상당히 뼈가 있는 말이었다. 완전하지  않은,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기억마저 그를  옭아매고 


다는 것. 대체 과거가 어떻기에........ 하지만 중요한 건 위 같은 설명이나 류흔의 과거가 아

니고 앞으로의 류흔의 행보였으므로 빨리 본 편으로 돌아가기로 하자. 

[16] 천강 - 4. 개 같은 날의 오후(3) 



운기조식(運氣調息)을 마치고 상쾌한 기분으로 창문을 연 류흔은 사정없이 내리쬐는 햇빛에 

자신도 모르게 눈가를 찌푸렸다. 선시력(線視力)을 익혀서 그 어떤 물체를 봐도 눈에 부담을 

주지 못하는 류흔에게도 여름의 태양이 쏘아내는 빛이란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got빛을 피
해 

창 밖을 바라보니 대충 현재의 시각이 유추되었다. 

어느새 시각은 묘시에서 진시(7시∼9시)로 넘어가 있었고 창  밖으로 보이는 길거리에도 상


수의 사람들이 활보하고 있었다. 

"흠... 이제 슬슬 움직여야겠다. 오늘이나 내일이면 그녀를 만날 수 있겠지. 휴우∼."

약한 한숨을 내쉰 류흔은 요즘 부쩍 한숨쉬는 일이 많아  졌다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햇살
이 

따가운지 이불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쓰고 있는  미사가 조금 애처로워 보였지만 방을  빼줄 


가 됐으므로 싫어도 일어나야 했다. 

"미사, 일어나요. 미사, 일어나라니까요."

"우우웅...... 아찌, 잘 잤어?"

미사는 일어나자마자 류흔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누, 누가 아찌라는 거냐! 난 16살의 소년이라고! 당신보다 나이가 적단 말이다!] 

류흔은 속으로 질겁하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미사, 난 아찌가 아니라 류흔이에요. 류흔! 알았어요? 이제 앞으로 부를 때 그렇게 불러요." 

미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류흔은 안심했으나 곧 이어지는 미사의 말에 고개를 푹 숙여야 했

다. 

"알았어, 류흔 아찌. 됐지?"

[맘대로 불러라, 맘대로.]

미사로부터 류흔이라 불리기를 포기한 류흔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자신이 할 일만을 생각했

다. 계속 이대로 장난만 치고 있는 건 안될 일이었다.

"자 그럼, 이제 그만 나가죠. 미사, 좀 일어나요."

"우웅..... 난 싫은데."

"제기랄, 그럼 여기 있어요. 계산은 하고 갈 테니까."

그녀의 투정을 류흔은 더 이상  받아주지 않았다. 류흔이 냉정하게 딱  잘라 말하고는 뒤도 


아보지 않고 방을 나오자, 얼마 안 있어 허겁지겁 그녀가 뒤따라 나왔다. 물론 그녀의  눈가


는 눈물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가, 같이 가! 미사 혼자 두지마!"

"노, 농담이었으니까 그렇게 울 듯한 얼굴 좀 하지 마요!"

류흔의 당황하는 모습에 미사는 우는 얼굴에서 금방 '꺄아꺄아' 하며 좋아하는 얼굴로 바뀌


다. 표정변화가 상당히 능숙한 걸로 보아 이런 걸 즐기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류흔
은 

객점을 나왔다. 그리고 번잡한 도시를 빠져나가 숭산(嵩山)으로 가는 길에 접어들었다. 

애초에 산에서 가까운 도시에 묶었었기 때문에 숭산은 별로  멀지 않았다. 넉넉잡고 걸어서 


루면 갈 수 있는 거리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가까운 거리임에도  지금 류흔의 발걸음은 
상당

히 빨라져 있었다. 그녀를 만나고 싶은 생각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듯 했다. 점점  빨라지던 


음은 결국 경공으로까지 발전했다.

"류흔 아찌!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정신연령은 어려졌지만 무공은 전혀 퇴색되지 않아  미사는 별 무리 없이 류흔을  쫓아오고 


었다. 그 뿐이면 별 거 아니라 하겠으나 입까지 열었기  때문에 류흔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라보았다. 

[상당한 무공을 지니고 있군. 경공을 펼치는 와중에 태연하게 입을 열 수 있다니.]

여기서 잠깐 변명 좀 하자면 미사가 전에 류흔에게 너무나 쉽게 제압당한 것은 어디까지나 


흔이 센 것일 뿐 그녀가 약해서가 아니라고 하겠다. 

류흔은 미사의 물음에 간단하게 대답했다. 

"숭산 소림사." 

정신에 충격을 받으면서 지식마저 같이 사라진  것인지 미사는 숭산이 어딘지 알지  못하는 


치였다. 그러나 더 이상 귀찮게 류흔에게 묻지는 않았다. 그녀에게서 아무 말이 없자 류흔도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달리는 데만 집중했다. 이 정도 속도를 유지한다면 저녁이 되기 전
에 

숭산 아래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응?"

한참을 달리던 류흔은 문득 심상치 않은 기척을 느끼고 좌우 숲을 바라보았다. 어떤 기운을 

가진 자들이 숨어 있는 것이 느껴진 것이다. 그리고 주변 정황도 이상했다. 숲 한  가운데로 


히 뚫린 관도건만 지나는 사람은 자신과 미사밖에 없었고, 숲 속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았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조차 언제부터인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대충 상황을 눈치 챈 류흔은 자신이 멈추자 의아해하며 다가오는 미사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손짓을 보내고, 기운을 양팔에 천천히 끌어 모아 불시에 좌우로 내쳤다. 홍무자염신공의  희


한 자색 기운이 쏜살같이 날아가 좌우 숲을 박살냈다. 

쿠콰콰콰쾅! 

"이런, 들켰다! 쳐라!"

"제압해라!"

폭발이 일어나자마자 좌우 양측에 숨어 있던 자들이 뛰쳐나와 류흔에게 다짜고짜 검을 휘둘


다. 제법 기세는 강했지만 그리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좌우 합쳐서 10명. 무공수위로 봐서 부담되는 숫자는 아니군.]

생각을 마친 류흔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들  중에 하나를 공수입백인(空手入白忍) 수법


로 잡아버린 후 옆으로 강하게 밀었다. 그러자 사방팔방에서  날아오던 검들은 류흔이 잡고 


어낸 검날에 부딪혀 모두 퉁겨나갔고 류흔은 그들이 잠시나마 주춤거리는 틈을 타 다시 양


을 휘둘러 허공을 쪼갰다. 

쩌저정! 

"크윽! 굉장한 공력이다!"

류흔이 귀신같이 내친 장력을 검으로 받았던 암습자 한 명이 그 와중에도 감탄성과 함께 밀


나갔다. 공간을 확보한 류흔은 멈추지 않고 연화장을 좌우로  떨쳐내어 다른 자들의 접근을 


은 후 가장 처음 밀려나간 암습자에게 쇄옥파운지(碎玉破雲指)를 퉁겼다. 

퍼억! 

"크억!"

옥을 부수고 구름을 깨뜨린다는 말처럼 쇄옥파운지는 여타 지공의 위력을 훨씬 뛰어넘는 파


력을 가지고 있었다. 쇄옥파운지에 당한 암습자의 어깨 뼈 전체가 함몰되어버린 것이다. 

"이, 이런! 제기랄! 빨리 진을....... 크악!"

빠가각!

동료가 낭패한 모습으로 쓰러지자 다른 흑의인 한 명이 재빨리 외쳤으나 말을 다 끝마치지
도 

못하고 류흔이 퉁긴 쇄옥파운지에 두개골을  얻어맞고는 뒤로 넘어갔다. 이마에  깊게 패인 
손가

락 자국이 섬뜩하다. 만약 류흔이 진력(眞力)을 조금만 더 썼다면 어떤 꼴이 되었을지 상상
만 

해도 끔찍한 위력이었다. 

남은 이들이 혼비백산한 와중에도 진을 짜 대항하려 했으나 류흔은 그들이 진을 짤 틈조차 


지 않았다. 넘치는 홍무자염신공의 진기가 통제를 벗어나려 한다. 

"쌍룡쟁투(雙龍爭鬪)! 신룡탐주(神龍貪珠)!"

전에도 써먹은 바 있던 강룡십팔장의 두 초식이 연이어 전개되며 남은 자들에게 휘몰아 쳐


다. 2마리의 용이 다투듯 격렬한 장력과 신룡이 여의주를  탐하듯 맹렬한 기세가 담긴 장력
이 

흑의인들을 휩쓸어버린 후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듯 관도마저 모조리 부수어  버렸
다. 

꽈과과광! 

전에 내공에 상당히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사용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위력을 내보이는 강


십팔장이었다. 백성들이 피땀 흘리며 애써 닦아놓은 관도가 단  한 방에 여지없이 박살나며 


음을 일으켰다. 모은다면 태산도 쌓을 수 있을 만큼 많은  먼지가 피어오르고 그 속에서 원


이 뭔지 파악이 잘 안 되는 파편들이 휘날렸다. 

"후, 후퇴하라!" 

그제야 자신들이 류흔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느낀 흑의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부상자들을 


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류흔이 마음만 먹는다면 모조리 죽여버릴  수도 있겠으나 그는 그


게 잔인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이 했던 '제압해라.'라는  말도 마음에 걸렸기에 아


도 죽이지 않은 류흔이었다. 

"쯧, 의외로 포기가 빠른 놈들이군. 뭐, 별로 쫓을 필요는 없겠지."

류흔은 손을 털고는 멍하니 서  있는 미사에게 다가갔다. 미사는 이  싸움에서 아무런 해도 


지 않았다. 

"자, 이제 가죠?"

"그, 그 사람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였지?"

혼란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미사를 보며 류흔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완벽하게 돌아오지 

않은 기억이 이번의 충돌로 단편적이나마  떠오른 것이리라. 그리고 그것은  이들과 미사가 


은 곳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에휴, 미사. 애써 떠올릴 필요 없어요. 시간이 지나면 생각날 테니까. 그보다  빙당 사줄 테


까 빨리 가요."

류흔의 말에 미사는 곧 찌푸렸던 얼굴을 펴고는 환하게 웃었다. 류흔은 정말 빙당이란 어린


이에게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몸을 날렸다. 곧 미사도 그를 따라 몸을 날렸

다. 

[흠...... 대체 미사가 소속되어 있는 곳은 어딘데 날 노리는 거야? 상당히 껄끄럽군.]

몸을 날리는 동안 류흔은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지우지 않고  계속 유지했다. 그러나 
정보가 너무 없었다. 

한참이 지나도 답은 떠오르지 않았고 결국 류흔이 먼저 포기했다. 당장 위험한 것도 아니었


니 그 답을 찾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에이, 정보가 너무 없군. 다음에 다시 생각하자. 지금은 그녀를 만나는 게 먼저다.]

그녀 생각을 한 류흔은 갑자기 마음이 급해져서 뒤쳐져 달리던 미사의 손을 덥석 잡고는 비


무영신법(飛天無影身法)을 극성으로 전개하여 쏘아진 화살처럼 날아갔다. 

"아앙∼ 류흔 아찌, 너무 빨라∼."

류흔의 경공속도는 그의 바로 옆에서 터지는 미사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뒤에서 쫓아오

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빨랐다. 마음이 따르면 몸이  따른다는 상승무학의 도리가 생각나
는 

것은 왜 일까? 


[17] 천강 - 5. 재회(1) 



중원오악(中原五嶽) 중 중악(中嶽)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숭산(嵩山), 높이 약 480장(1장=3

미터), 동서 길이 20000장에 달하는, 72개의 봉으로 이루어진 그 거대한 산을 향해 말대가리 
8

개의 마차가 힘차게 황진(黃塵)을 일으키며 달리고 있었다.........는 아니고, 그저 그런 속도

로 걸어가고 있었다. 

"제갈 언니, 저기가 숭산 맞죠?"

8두마차의 마부석 왼 편에 앉아있던 깜찍한 용모의 소녀가  바른 편에 앉은 지성미(知性美)
를 

풀풀 날리는 용모의 여인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이지적인 미녀, 초혜(峨幸)는 려려(素榮)의 


음에 가볍게 대꾸했다. 

"맞아. 저기가 바로 숭산이야. 천년소림(千年少林)이라  불리는 소림사가 있는 곳이지.  이제 


리들의 여행도 끝이 날 때가 오는 구나." 

"히잉∼ 조금 아쉬워요. 운 공자님도 없고...... 대체 그 몸으로 어딜 가셨지?"

려려의 푸념에 초혜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너 전에 거지는 싫다고 하지 않았었니? 운 공자는 아무리 백의개(白衣 )라 하지만 엄연한 


지야."

"흥, 사랑에는 그런 거 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우리 집이 돈이 많은데 뭐 어때요?  아무리 


위에게는 재산 상속이 안된다지만 내가 달라는 데 안 줄 수 있나요, 뭐?"

려려가 얼굴을 찌푸리며 대꾸하자 초혜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처음 마차에 오를 때만 해

도 3년 전에 만난 거지 때문에 가출까지 하는 희상아가 이해 안된다고 했던 려려였건만  지


은 그녀 자신이 거지한테 빠진 것이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  생각 못한다더니 딱 그 꼴이


다. 

"뭐예요? 그 웃음은? 그러고 보니 언니 요즘 웃음이 많아졌어∼."

"그, 그러니? 호호호..."

갑작스레 정곡을 찌르는 려려의 말에 초혜는 빙긋 웃음으로 넘어갔으나 속으로는 뜨끔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를 만난 후로 생각된다. 자신의 웃음이 많아진 것은. 

"뭐가 그렇게 즐거워?"

그녀들이 서로 웃고 떠들고 있을 때 가히 천상의 목소리라  칭할 만한, 영롱한 빛을 머금은 


한 아름다운 목소리가 마차 안으로부터 흘러 나왔다. 어딘가 모르게 지친 기색이 깃들어 있


으나 그것이 아름다움에 어떤 훼손을 주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남자에게 보호본


을 무럭무럭 일으키는 또 다른 매력이 되고 있었다. 

"아, 희 언니. 몸은 조금 어때요?"

려려가 뒤돌아보며 걱정스런 음성을 발했다. 초혜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걱정스러운 표


을 지으며 뒤돌아본 것은 마찬가지였다. 수레 앞부분의 창이  열리면서 면사로 얼굴을 가린 
한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괜찮아. 콜록! 그보다, 전에 너의 그 운 공자님 이야기나 더 해줄래?"

면사를 쓴 여인, 그러니까 희상아는 작게 기침을 한 번  하고는 려려에게 웃는 목소리로 말


다. 려려는 쑥스런 미소를 띄우면서도 결코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에이, 남이 사모하는 사람 이야기는 왜  그렇게 들으려고 해요? 그분이 멋있긴  했지만, 호
호."

"으응... 한 번만... 나도 내 그 분 이야기 해줄게. 응?"

"그래도........"

려려가 몸을 비비꼬며 거절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초혜가 중간에 끼여들었다. 

"어머, 그러고 보니 아직 나는 상아의 그이 이야기도 못 들어봤잖아? 려매, 빨리  해봐 나도 


게." 

"흠, 별로 손해보는 건 아니네요. 그러니까 그이가......"

한가로운 길 위를 달리는 마차  위에서는 때아닌 이야기꽃이 피어났다. 려려는  그 동안 몇 


이나 머리 속에 그렸던 류흔의 활약상을 신나게 풀어놓았고 듣는 두 여인 역시 이미 몇  번


나 들었고 초혜의 경우 실제로 보기도 했었지만 려려의 몸짓이나 화술이 매우 뛰어난 관계
로 

흥미진진함이 가득한 얼굴들이었다. 

"호호호! 그때 반했다는 거니?"

"어머, 정말 얼마나 멋졌다고요. 언니는 그때 운 공자 얼굴도 못 봤죠? 나는 봤어요."

"뭐? 정말?"

초혜와 상아의 놀라는 모습이 기분 좋은지 려려는 어깨까지 으쓱해가며 자랑스러워했다. 

"아아, 난 그때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고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운 공


님의 웃는 얼굴이란... 하아... 특히 그 미소가 너무 아름다웠어요."

'미소'라는 단어가 나오자 면사위로  유일하게 드러난 상아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행복함과 


쓸함이 동시에 어렸다. 

[미소...... 그 때의 그도 미소가 아름다웠는데...... 아아, 그는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

을 알까? 그리고......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까?]



'약속해.'
'에?'
'나중에 모두 이야기해주기로. 이 손가락에 걸고 약속하는 거야.'
'나 천류흔은 희상아와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잊지 못할 13세의 생일, 그곳에 나타난 큰 덩치의 소년,  그와 했던 약속. 그때 열려버린 방


(芳心)은 그 이후로 다른 사내가 마음 속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너무나 짧은 만


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을 한 남자만을 향하게 만드는데는 충분히  긴 만남이었다. 그렇기 때


에 지금 이렇게 그를 찾으러 나온 것이고. 

려려와 초혜는 자기들끼리 떠들다가 갑자기  상아가 조용해진 것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리고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 서로의 눈빛에는  이런 뜻이 전해지고 있


다.

[또 추억에 잠겼구나.......] 

이렇게 그녀들이 상아의 현재 행동에 대한 답을 바로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전에도 가끔 

몇 번 이런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어김없이 그녀가 그 때의 그를 추억


고 있다는 것을 아는 데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었다. 

"언니, 또 그 분 생각하고 있죠?"

려려가 또다시 정곡을 찌르자 상아는 화들짝 놀라며 급히 얼버무렸다. 

"응? 아, 아니야......"

"아니긴. 자 이제 언니 차례예요. 빨리 언니 그이에 대해서나 말해줘요. 전에는 그냥 거지소


이라고만 했잖아요."

"정말....... 알았어."

단 한마디로 상아의 변명을 일축한 려려는 이번엔 제대로 듣고 말겠다는 듯 눈동자를 초롱


롱하게 빛냈다. 어색한 미소를 짓던 상아는 려려와 초혜가 귀를  쫑긋 세운 채 자신을 주시


자 곧 환한 미소를 머금고는 그동안 가슴 깊이 꼭꼭 숨겨놓았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

다. 

잠시 후, 상아의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에 려려와 초혜는  꿈꾸는 듯한 분위기에 흠뻑 빠져


었다. 3년 전의 인연 때문에  황태자의 청혼까지 단호하게 뿌리치고  가출까지 한 희상아가 
너무

나 멋져 보였기 때문이었다. 

"언니! 너무 대단해요! 3년 전의 순정을 위해 황태자비의 기회까지 버리다니!"

"호호, 너도 그의 미소를 봤으면 나처럼 행동했을 거야. 그만큼 그의 미소는  순수하고 아름


웠거든."

"그래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예요. 아........ 너무 낭만적이네요."

"후훗."

상아와 초혜가 서로 네가 잘났다고 추켜세우고 있는 동안,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초혜
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그 느낀 바를 바로 입 밖으로 내었다. 

"그런데, 려매. 우리가 봤던 운양공자의 모습하고, 상아가  말하는 그의 모습하고 상당히 닮
은 

것 같지 않아? 려려도 그랬잖아. 운양공자의 미소가 아름다웠다고."

"어? 정말? 희 언니, 그 분 이름이 뭐예요?"

려려의 걱정 어린 질문에 상아는 걱정 말라는 듯 살포시  웃으며 대답했다. 면사에 가려 보


지 않는데 어떻게 아냐는 멍청한 질문은  하지 않을 걸로 안다. 기색이란 게  괜히 있는 게 
아니

다. 

"호호, 걱정 마. 류흔이야. 천류흔. 이름 멋지지?"

"휴, 다행이다. 언니랑 같은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면 나는  이길 자신이 없는 걸. 만약 그렇
게 

되면 언니한테 사정해서 작은 부인이라도 돼야지. 호호!"

려려의 당돌한 말에 초혜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꿀밤을 때렸다.

딱! 

"15살 밖에 안된 애가 못하는 말이 없어, 정말."

"아얏! 히잉∼ 두고 봐. 운양공자님만 다시 만나면 이야기해서 혼내주라고 할거야. 흥!"

"얘, 얘가!"

"호호호!"

세 여인들의 꽃이 무색할 정도로 화사한 웃음소리가 관도에 퍼지는 가운데 어슬렁거리며 걷

던 말들은 힘을 내어 기운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18] 천강 - 5. 재회(2) 


한편, 그녀들의 마차가 달리는 곳의 반대편에서는 류흔과 미사가 쉬고 있었다. 

"누가 내 이야기 하나......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지."

전국을 떠돌아다닌다는 한 빙당장수로부터 빙당을 사고 있던 류흔이 갑자기 귀에  간지러움
이 

느껴지자 한 말이다. 과학적으로 전혀 판명이 되지 않은  이야기지만 누구나 아는 속설이므
로 

따지고 들지 말자. 

류흔이 간지러움을 없애기 위해 귀를 후비고 있을 때, 그 손가락을 뚫고 탁한 음성이 들렸

다. 목소리도 그랬지만 더욱 중요한 건 그 내용이 돈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별로 듣고 싶지 


은 음성이기도 했다. 

"은자 한 냥입니다."

"아, 예. 여기 있습니다. 수고하세요."

"헤헤, 멋진 공자님. 안녕히 가십시오."

"하하, 예."

횡재했다는 감정을 얼굴에 역력히 드러내며  등을 돌리는 빙당장수에게 류흔은  감자바위를 
한 

번 먹이고 미사가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갔다. 숭산으로 오르는  길 중턱에서 작은 돌들 5개
를 

위로 던졌다가 손등으로 받는, 이른바 '공기'라 불리는 놀이를 하던 미사는 류흔이 봉지 가
득 

빙당을 들고 오자 금방 돌을 내던지고 기쁜 얼굴로 뛰어가 봉지를 받아 들었다. 

"와아∼ 류흔 아찌. 최고!" 

무려 은 한 냥이란 거금을 투자하여 사온 것인 만큼  빙당의 양은 엄청나게 많았다. 보통사


이라면 먹다 질려서 갔다 버릴 정도로. 처음엔 류흔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몇 번  겪


본 후 류흔이 내린 결론은 미사에게 있어 보통 사람의 입이란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는  사
항이

라는 것이었다. 이 정도 양의 빙당은 그녀에게 있어 전혀 많은 양이 아니었다. 한 이틀 정도

나 갈까?

[이거면 적어도 이틀은 가겠지. 에휴, 반나절동안 구걸한 걸 한번에 다 날려버리다니...... 아

깝다. ......돈은 둘째치고, 이러다가 무슨 몹쓸 병 같은 것 걸리는 것 아냐? 신 어르신이 단 

것을 너무 많이 먹으면 안 좋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류흔은 은 한 냥을 잃어버린(?)  아픔과 그녀에 대한 염려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으나 곧 


뻐하는 미사의 얼굴을 보고는 이런저런 생각 다 집어치우고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가 웃는 


습을 보면 다른 생각들은 어느새 다른 곳으로 쏙 들어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
서 

그녀에 대한 감정이 연정(戀情)이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보다 나이 많은  여동생(이게 


이 되나.......)을 보는 그런 감정인 것이다. 

빙당이 들어 있는 봉투를 몇 번이나 열어 보며 행복해하는 미사의 미소에 잠시 취했던 류흔

은 곧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생각해내고 그녀를 재촉했다. 

"미사, 이제 올라가죠."

"응, 그래. 아찌, 가자!"

많은 양의 빙당에 행복해진 미사는 앞장서서 걸어갔다. 류흔은 그런 그녀의 뒤를 가벼운 발


음으로 쫓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하늘 속에 13세 때 만났던 그녀의 얼굴이 아른거


다. 그동안 어떻게 변했을까?

"오늘이면...... 만날 수 있겠지."

[그리고, 약속도 지킬 수 있을 거야. ...응?]

잠시 낭만적인 생각에 빠져들었던 류흔은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으로 돌렸다. 잿빛 옷감으로 싸여있는 짜리 몽땅한 허벅지가 보였다. 

"어라?"

이번에는 위로 고개를 움직인 류흔. 

번쩍! 

"우왓! 눈부셔!"

류흔은 무언가가 햇빛을 반사시키자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렸다. 그리고 그 후 그 무언가가 

자신의 정수리에 빠르게 내려오는 것을 느끼고 손을 뻗어 올려 막아냈다. 그러나 그것은 류


의 손위로 가볍게 미끄러지며 류흔의 이마에 그대로 충돌했다. 

미끌! 꾸우웅!! 

"허억!" 

[뭐, 뭐냐 이건......]

두개골을 가르는 듯한 엄청난 충격에 아득해지는 정신을 애써 붙잡은 류흔이었지만  비틀거


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단 한방에 다리가 풀려버린 것이다. 류흔의 골이 울리는 가운데 장


기 가득한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뚫고 들려왔다. 

"허허, 이 놈 내 마빡신공에도 버티다니 대단한 놈이군. 상당히 쓸만한 놈이야."

"류흔 아찌!"

쉬이익!

류흔이 비틀거리는 것을 보고 놀란 미사가 비침을 날렸다.  비침들은 정확히 류흔의 어깨에 


터앉은 자의 목을 향해 날아갔지만 맞출 수는 없었다. 그  자가 다리를 끌어당겨 류흔의 목
을 

껴안은 채 뒤로 누워버린 것이다.  비침들은 류흔의 머리 위를 지나  멀리 사라졌고 류흔의 
허리

는 직각에 가깝게 꺾였다.

"허억!"

부지불식간이라 신음소리를 내뱉긴 했지만 무공을 익힌  지 오래라 별로 부담이 가진  않았
다. 

이보다 더 꺾일 수도 있는 유연성은 무공을 오랫동안 익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다. 류흔은 갑작스레 꺾이는 허리에 양쪽 발을 땅에서 띄워 탄력을 주고, 그 회전력을  이


해 양발로 머리 위의 적을 공격했다. 

"어쭈, 이놈 봐라?"

류흔이 다리를 들어올리며 등 쪽으로 회전하는 바람에 자신이 아래로 가게 되자 그는 류흔
의 

임기응변에 놀라면서 감탄했다. 하지만 감탄했다고  해서 당해줄 마음은 없었다. 그는  팔짱 
낀 

양손을 풀지 않고 순전히 몸의 탄력만으로 다시 한 바퀴 몸을 휘돌렸다. 

꽈앙! 

진짜로 죽일 생각이었는지 류흔의 양발에는 공력이 잔뜩 실려  있었다. 류흔의 발이 내려찍


던 땅에 세 치(약 9cm) 깊이의 구덩이가 파였던 것이다. 

"허허, 이놈, 성질 한 번 급한 놈일세."

"제기랄!" 

아직도 어깨에서 그를 떨쳐버리지 못한 류흔은 팔을 사용하여 자신의 목을 속박하는 다리를 

붙잡고 좌우로 벌리기 시작했다. 천근추(千斤墜)라는 공력을 운용하고 있는 지 더럽게 무거


지만 류흔의 힘을 뻐길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과연! 굉장한 힘이로구나!"

그는 천근추의 공력을 운용하고 있는 자신의  다리 힘을 훨씬 능가하는 류흔의  무지막지한 


에 감탄하며 슬쩍 힘을 풀고 그에게서 빠져나왔다. 그에 따라  갑자기 힘을 줄 데가 사라진 


흔은 균형을 잃고 휘청했으나 곧 자세를 바로잡고 보법을 운용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물
론 

류흔의 손에서 빠져나온 그의 모습이 사라진 것도 이미 오래 전이었다. 

타앗! 탁! 타탓! 타타탁! 파악! 

순식간에 미사의 시야에서 둘의 모습은 사라지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오기 시작했

다. 두 사람이 너무나 빠르게 움직이기에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그 움직임을 꿰뚫어  볼만한 


체시력이 없는 미사는 갑자기 류흔의 모습이 사라져버리자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주위에  있


는 것을 알기에 그 자리를 떠나지는 않았다. 

미사가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류흔 역시 그렇게 좋은 상황은 되지 못했다. 오른손이 가는 곳

에 왼손이 따르고, 땅을 밟는 족족 깨어나는 땅의 기운을  손에 실어 내치며 사방을 압박하
는데

도 단 한 번도 그를 맞추지  못한 것이다. 발놀림이 어찌나 절묘한 지  그가 왼손을 내밀면 
왼발

로, 오른손으로 좌에서 우로 쓸어 가면 오른발로 같이 따라가 흘려내고, 동시에 3권을  떨쳐


면 그보다 꼭 하나 더 많은 4퇴로 맞받아 쳤다. 도대체 어떻게 공략해볼 수 있는 길이 보이
지 

않았다. 

이렇듯 취팔선보(醉八仙步)와 취팔선권(醉八仙拳)을  동시에 펼치며  상대방을 압박해 가는 


도 우위를 점하지 못해 낭패한 기색을  보이던 류흔은 상대방의 얼굴과 몸집을  확인하고는 


욱 낭패한 음성을 발했다. 

"이런! 이제 보니 꼬마잖아!"

"이런, 아이야. 말조심하거라. 내가 이래 보여도 너보다 백살은 더 먹었다."

류흔의 폭풍 같은 공세를 단지 발로만 막아내던  그 꼬마는 여유 있는 잔잔한 음성을 흘렸
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전혀 담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지라 류흔
은 

놀라면서 그 폭풍 같던 공세를 한 순간에 멈췄다. 그러나 그건 완전히 실수였다. 꼬마는  멈
출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에? 백살? 그리고 승복(僧服). 그럼 혹시...... 어이쿠!"

빠가각! 

"우욱?"

"아이야, 갑자기 손을 멈추면 어떻게 하느냐? 쯧쯧."

[그래도 이 녀석 대단하군. 그렇게 격렬하고 빠르던 공세를  이렇게 쉽게 거두다니. 화경(化
境)

을 바라보는 경지에 올라있는 건가?]

동자승(童子僧)의 모습을 한 노화상은 다시 한 번 감탄했지만, 아쉽게도 그의 생각이 어떻든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강타를 얻어맞은 류흔의 눈에는 이제 무림의 선배고 반노환동(反老還
童)

의 노기인이고 뭐고 없었다. 머리에 받은 충격이 너무 강했기에 뇌의 사고활동이 잠깐 정지


고 그 시간은 류흔의 감정을 폭발시키기에 너무나 적당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류흔의 손에서 아까 전보다 더 막강한 위력의  취팔선권이 뿜어져 나왔다. 취팔선


와 함께 펼쳐지는 취팔선권은 실로 막강한 위력을 담고 있었지만 이 노화상은 아까도 그랬
듯 

별로 힘들이지 않고 피해내고 가볍게  발을 써서 막아냈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충고까지 


고 있었다. 

"쯧쯧, 그렇게 무식하게 휘두르기만 해서야, 어디 파리 한 마리 잡겠느냐?"

그러나 노화상이 뭐라고 하든 류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하는 것만이 최선이


는 듯 점점 더 빠르게  전력을 다해 취팔선권을 뿌려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노화상이 


혀 짐작하지 못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이야, 이렇게 고지식...... 헉! 설마!"

혀를 차던 노화상은 어느 순간, 류흔의 고지식하기까지 했던  몸짓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깨


고는 경악 어린 외침을 내뱉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류흔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크게 

외쳤다. 

"쇄천일식(碎天一式)! 잠룡(潛龍)!"

"이, 이런! 이 놈아!"

퍼퍼퍼퍼퍼퍼펑! 쿠우우웅! 

순식간에 류흔이 노기인의 주위에 만들어 두었던 기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가면서 공기를 진


시켰다. 그 연쇄적인 폭발은 노화상의 36방위를 모조리 점했기에  노화상은 피할 곳도 찾지 


하고 호신강기로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퍼펑! 퍼퍼퍼펑! 

[무슨 기의 폭발이 이렇게 많이 일어난단 말이냐! 아미타불!]

35번째의 폭발이 끝났을 때, 노화상의 무상대능력(無想大能力)에 기원을 둔 그 막강한 호신


기 또한 거의 깨지기 직전에 있었다. 노화상은 혀를 내두르면서도 다시 공력을 끌어올려 호


강기를 보충하고, 마지막 폭발을 기다렸다.  그러나 노화상의 바램(?)과는 달리  더 이상 의 


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앞에는 숨을 헐떡이는 류흔만이 있을 뿐이었다. 노화상은  경계
를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휴, 다 끝난 거냐?"

물론 아니었다. 

꽈아아아앙! 

"우왓!"

마지막 폭발은 노화상의 호신강기를 여지없이 깨뜨리며 그의 몸을 몇 장 뒤로 밀어냈다. 그


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노화상이 입고 있는 승복(僧服)의 소맷자락을 찢어버리는 쾌거를 이


해냈다. 

"헉! 헉!" 

류흔은 너무 많은 기를 소모했기에 숨을 쉽게 고르지 못했다. 절정의 무공인 취팔선권을 계

속 운용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양의 기를  필요로 하는 쇄천일식의 변형을 운용하자니  그럴 
수밖

에 없었다. 사실 쇄천일식의 변형은 사방(四方)과 천지(天地)를 합한 육합(六合)의 방향에서 

터뜨리는 건데 류흔은 그 6배에 달하는 기의 폭탄을 운용했으니...... 천무심맥이 아니고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고 멀쩡히 서있다는 게 기적인 일이었다. 

"류흔 아찌!" 

류흔의 호흡과 신형이 불안정한 것을 보고 재빨리 미사가  달려와 류흔을 부축했다. 자신의 


일하고도 중요한 빙당수입원이었으니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찌! 괜찮아? 아찌!"

"으응, 괘, 괜찮아."

[이 아가씨야! 흔들지마! 호흡 찾기가 더 힘들잖아!]

류흔은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처음 그녀가 자


에게 다가온 진의(眞意)야 어떻든 지금 자신을 걱정하는 모습은 가식이 아니었으니까. 

[19] 천강 - 5. 재회(3) 


미사가 류흔의 몸을 걱정하며 흔드는 동안, 잠시 말없이  자신의 소맷자락을 내려다보던 어


아이의 탈을 쓴 노화상은 문득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류흔에게 다가갔다. 

"허허, 정말 대단한 아이로군. 거기 여 시주. 잠시 비켜주시겠나?"

"흥! 이 꼬마! 또 류흔 아찌 때리려고 그러지! 안 돼!"

노화상이 다가오자 류흔의 앞으로 나서서 노화상을 결사적으로 막는  미사. 류흔은 그런 그


를 보며 흐뭇함을 느꼈으나 이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미사, 괜찮으니까 잠시만 비켜있어."

"응? 류흔 아찌!"

"하하, 괜찮다니까." 

류흔은 미사를 물러나게 한 후 자신의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는 작은 키의 노화상에게 포권
을 

취한 채 허리를 굽히는 읍(揖)의 예를 올렸다. 

"어르신. 죄송합니다. 노선배를 몰라 뵙고 후배가 잠시 실례를......"

"하하하, 이놈아. 누가 너보고  사과를 하라더냐. 그보다 대단하더군.  혹시 천무심맥(天武心
脈)

의 소유자냐?" 

"신도겸 어르신으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 천무심맥이 아니고서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무공을 펼칠 수가 없지. 그런데 그 신도


은이도 아직 살아있었군. 그래, 내가 누구인지는 아느냐?"

자신보다 탱글탱글하고 보송보송한 피부를 자랑하는 이 애늙은이(?)  승려를 잔잔한 눈빛으
로 

바라보며 류흔은 입을 열었다. 

"소림의 최고배분을 지니신 공공대사(空空大師)가 아니십니까. 또한 현재 천하무림을 주름잡

는 8명의 절대자중 정도4절(正道四絶)의 일불(一佛)이시기도 하죠. 뭐 그 정도입니다."

류흔의 정확한 대답에 공공대사는 흡족한 어조로 말했다. 

"과연 개방의 제자로군. 네 녀석 이름은 뭐냐? 아, 천무심맥의 소유자라 했지. 그렇군. 네가 

바로 근자에 들리는 소무개라는 녀석인 게냐?"

"하하, 별로 신경 쓰실만한 놈은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백의개일 뿐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하시는 중이셨습니까?"

따악! 

"윽! 왜 때리십니까?"

"이놈아, 여기가 어딘지 잊었느냐? 바로 소림의 영역이다!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이란 말이

다! 넌 대체 여기 뭐 하러 온 거냐?"

류흔의 주객전도(主客顚倒)격인 말에 공공대사가 단번에 뛰어올라  류흔에게 알밤을 먹이며 


짖고 내려오는 순간 미사가 불쑥 끼여들었다. 

"이쒸! 이 꼬마가! 류흔 아찌 때리지 말라고 했지!"

".....그러고 보니 이 여아(女兒)는 누구냐? 네 아내냐? 아니야, 아무리 요즘 아이들이 발랑 

까졌다고 해도 나이 16살에 벌써 결혼했을 리는 없지....."

공공대사가 황당한 음성으로 묻자 류흔은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제가 잠시 실수하여 데리고 있는 여인입니다. 6일 후면 알아서 사라질 여인이지요."

그러면서 류흔은 전음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상황을  파악한 공공대사는 고개를 끄덕이


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자신을 노려보는 미사를 보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뭐야? 꼬마!"

미사가 쏘아붙였지만 공공대사의 통통한 얼굴에 어린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불호를 

외우며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끊기지 않을 인연이로다. 그보다 이놈아. 너는 아직 내 물음에 답하지 않았
다."

"아, 저는 이곳으로 향하고 있는 여인을 만나려고 왔습니다."

"여인? 그게 무슨 말이냐? 혹시 그  대가리에 글자만 들은 고지식한 대머리 놈들이  사찰에 
여자

를 데려다 놨다는 거냐?"

공공대사가 머리에 물음표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류흔은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대체 이 애늙은이는 정말 소림에 속한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간다. 

"하하! 설마요.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설명하자면 조금 길어서요......"

류흔이 난처한 기색을 보이자 공공대사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는 무슨 생각에서인
지 

류흔의 얼굴을 잠시 살펴보다가 밝게 웃었다. 

"허허, 이제까지의 고생이 헛되지 않겠구나. 인연도 많고, 실로 다복할 상이로다. 아미타불."

"아니, 갑자기 무슨........"

갑자기 한 손을 바로 세우며 엄숙한 태도로 예를 표하는 공공대사에게 류흔은 크게 당황하
며 

마주 예를 표했다. 한 손만을 세우는 이 예법은 달마대사(達磨大師)의 제자가 되기 위해 설
원 

위에서 왼팔을 잘랐다는 제이조(第二祖) 혜가(慧可)를 위해 만들어진 소림만의 독특한 예법


었다. 그러고 보니 공공대사의 왼쪽 가사(袈裟)자락은 완전히 팔을  가리고 있었다. 이 역시 


가를 추종하는 의미에서 온 옷차림이다.

예를 마친 공공대사는 갑자기 뛰어올라 류흔의 어깨에 걸터앉더니 말했다.

"그럼 이제 네가 만나자는 여아나 한 번 보러 가보자. 얼마나 예쁘게 생겼기에 너처럼 잘생
긴 

놈이 목을 매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공공대사가 사전의 동의 없이 마음대로 어깨 위에 걸터앉았음에도 불구하고 류흔은 전혀 불


해 하지 않았다. 단지 공공대사의 성격이 과연 듣던 대로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을 뿐이었
다. 

류흔은 공공대사가 놀리는 말에 웃는 목소리로 화답했다. 

"하하, 타심통(他心通)의 경지까지 이루셨습니까?"

"아미타불, 경험이니라." 

[허허, 맹랑한 녀석. 내 마음에 이렇게 드는 놈은 일찍이 없었거늘...... 에잉, 하필 그 하고
많은 연(緣) 중에 불가의 연만 없을꼬.]

생긴 건 영락없는 어린 아이인데 속은 백살 넘게 먹은 늙은이인 중과, 생긴 건 24세인데 정

신 연령은 10살인 처녀, 그리고  정상인보다 큰 체구를 가진 16세  소년이 걸어가는 모습은 
겉으

로만 보면 영락없이 어린 아이를 목마 태우고 가는 젊은 부부였다. 

"아앗! 대사님! 미사 걸 뺏어먹으면 어떻게 합니까?!"

"이 꼬마! 빙당 내놔! 내 꺼야!"

"허허허, 맛있는 건 나눠먹는 것이 인정이거늘. 아미타불."

......잠시나마 진실을 가렸던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사과를 드린다. 



흔히들 하는 말이지만 확실히 산은 비인간화(非人間化)의 상징이다. 사람이 감정이 없어진다

거나 잔인해진다는 소리가 아니고 뭐랄까,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것들을 잠시나마 벗어버릴 

수 있다고나 할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오르다가 지쳐서 근처의 바위에 앉아 아래를 내려
다보

면, 분명히 자신이 살아왔던 똑같은 세상임에도 또 다른 세상처럼 느껴진다. 

갑자기 웬 헛소리냐고? 허허, 이거 너무하군. 현재 류흔도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결코 괜히 나온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류흔은 여전히 어깨에 공공대사를 올려놓은 채 숭산 중턱을 조금 올라가면 있는 커다란 바


에 앉아 그런 기분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그의 이마를 스치며 아무렇게
나 

흘러내린 그의 머리카락을 희롱했다. 미사는 그의 옆에 앉아서 빙당을 빨고 있었다. 

"미사, 그렇게 단 거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아. 조금 쉬었다가 먹는 게 어때?"

류흔은 3분의 1밖에 남지 않은 보따리 속의 빙당을  바라보며 말했다. 공공대사까지 합세한 


분에 이틀은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류흔의 예상은 완벽하게 깨져버렸고 오늘이나 버틸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허허, 먹는 것에는 그렇게 쪼잔하게 구는 게 아니다, 이놈아. 너도 하나 먹어보지 그러냐?"

류흔의 타이르는 말의 대상은 미사인데 오히려 공공대사가 대꾸하며 권하기까지 한다. 그리

고 미사는 어느새 류흔 편으로 돌아서 있었다. 

"이 꼬마! 그만 좀 먹어! 류흔 아찌가 몸에 안 좋다고 하잖아!"

공공대사가 어린애의 모습을 하고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도  제일 배분의 기인이다. 결
코 

미사 정도가 이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이야기다.  만약 여기에 있는 사람이 공공
대사

가 아닌, 예를 들어 사도4절 중의 수라마도(修羅魔刀)  팽거악(彭巨岳)이었다면 미사는 단번
에 

목이 날아가고 그것도 모자라 천참만륙(千斬萬戮)당하여 시체조차  온전히 보존하지 못했을 


이다. 하지만 공공대사는 자비를 가치관으로  삼는, 그리고 정신혼란까지 겪고 있는  미사의 


중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아량을 가진 고승(高僧)이었다. 물론 아무리 공공대사의 


질이 좋다고 해도 미사가 제정신이었다면 정도제일배분의 기인에게 이렇게 까불기는커녕 감
히 

나서지도 못했을 것이다.

"허허, 여 시주가 성질이 고약하군. 그보다 류흔이라고 하였더냐? 그래, 류흔. 언제까지 여기 

있을 셈이냐?"

공공대사의 물음에 씩씩거리는 미사를 한 손으로 달래고 있던 류흔이 대답했다. 

"글쎄요. 아마 오늘 중으로 마차가 도착할 것 같은데....... 여기선 잘 안 보이는군요."

"응? 마차 말이냐? 그거라면 지금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이 소리가 안 들리느냐?"

벌떡! 

"예?! 저, 정말입니까?" 

류흔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고 그 덕분에 어깨에서 떨어질 뻔한 공공대사는 류


의 목을 부여잡고 균형을 잡았다. 

"으윽!"

류흔은 목이 삐끗해지자 고통에 찬 소리를 내뱉었지만 몸을  휘청거리거나 하진 않았다. 그


기엔 류흔의 몸이 너무 강했고, 현재 류흔의 정신상태 또한  다른 쪽으로 가 있었으므로 처
음 

꺾였을 때만 '어? 아프네?' 했을 뿐 목도 더 이상의 고통을 호소하지는 않았다. 

"화, 확실히 이쪽으로 오는 거 맞습니까?"

류흔이 이번에는 목을 부여잡아 안전사고(?)예방을 한 후에 묻자 공공대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지금 내 청력을 의심하는 것이냐. 정확하게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으니 걱정 마라." 

공공대사정도의 초고수가 말하는 것이라면 정확할 것이었다.  사실 공공대사가 지닌 무공의 


이란 류흔을 훨씬 아래로 두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아까 전의 결투에서도 봤듯이 무공을 


룬다면 류흔이 이길 수가 없다. 초식의 운용이라면 모르겠지만 내공의 깊이, 깨달음의 정도 

등 공공대사는 현재의 류흔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해 있는 고수인 것이다. 그런 


수가 말하는 데야 틀릴 리가 없었다. 

"드, 드디어......"

류흔은 급하게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공공대사가 가리킨 방향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드디어, 

잠시만 기다리면 그렇게도 그리던 그녀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참동안 공공대사가 마차가 온다고 가리킨 곳을 바라보던 류흔은 공력을 집중한 귓가에 마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경공을 펼쳐 앞으로 달려나갔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냥 막연히 류흔과 떨어지기 싫은 미사도 경공을 펼쳐 그를 따랐다. 

희망에 차서 그런지 류흔의 신형은 쭉쭉 뻗어나갔다. 그런데  갈수록 류흔은 뭔가가 잘못되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채채챙! 카아앙! 

그 소리는 류흔이 달려나갈수록 점점 더 뚜렷해졌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극성까지 공력을 


어올린 류흔은 실로 번개같은 속도로 마차 쪽으로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류흔은 그곳에 


착할 수 있었다. 

그 곳에 펼쳐진 장면은 마차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고 있는 격전(激戰)이었다. 

"아앗! 운양 공자님!"

마차 위에서 적들을 맞고 있던 두 명의 여인 중, 제일 먼저 남궁려려가 류흔을 알아보고 반


움이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류흔 역시 반가웠지만 그보다 그녀들에게 닥친 위험을 해


하는 게 먼저다 싶어 곧바로 마차 위의 허공으로 몸을  띄운 후 파옥신장(破玉神掌)을 후려


다. 

파아아아! 

류흔의 손에서 형성된 새하얀 장력이 맹렬한 기세로 날아가 마차를 공격하던 자들 중 한 명

의 가슴팍에 적중했다. 

뻐어억! 

"크아악!"

천하에서 제일 단단하기로 이름난 청옥석(靑玉石)도 가볍게  깨부순다는 이름의 파옥신장의 


력에 당한 그 자의 가슴뼈는  단번에 부서져나갔다. 그리고 장력의 여파에  휩쓸려 그 뒤의 
대여

섯 명이 나가떨어지는 것도 동시였다. 그로 인해 일시지간 공격이  멈췄고 그 틈을 타 류흔
은 

마차 위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운양 공자님!"

"어엇!"

류흔이 자리를 잡자마자 남궁려려가 곁에 있던 제갈초혜가 무안할 정도로 그의 품속으로 달


들었다. 그 때 마침 미사의 비침이 날아오지 않았다면 곧바로 안겼을 것이다. 

"저리가! 아찌한테 오지마!"

미사는 소중한 장난감을 지키려는 아이처럼 류흔에게 찰싹 달라붙어서는 남궁려려를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미사의 이 같은 행동은 남궁려려와 제갈초혜를  포함해 여기 이 자리
에 

있는 모두에게 썰렁한 침묵을 안겨주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긴장감이  별로 


어서 그렇지 현 상황은 어디까지나 마차가 공격받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류흔은 마차를 공격하려고 자세를 잡고 있는 자들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검은 복면에 검
은 

옷을 걸친 것을 보아 그리 떳떳한 문파의 인물들은 아닌  듯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류흔은 


격한 자들이 또 검은 옷인 것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쳇, 나는 아무래도 검은 놈들이랑 인연이 많은 가봐? 이들은 그 때 그들이 아닌 듯 한

데........]

류흔이 입맛을 다시는 동안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너는 뭐 하는 놈이냐?"

류흔은 대답대신 기부터 죽여놓기 위해 다시 한 번 파옥신장(破玉神掌)을 내갈겼다. 

파아아아! 쩌저저정! 

"으헉!"

입을 연 자에게 날아간 파옥신장은 상대방을 적중시키지 못하고  애꿎은 땅만 때렸다. 비록 


추지는 못했지만 류흔이 마음먹고 갈긴 만큼 땅에 커다란 균열을 일으키는 등 보는 이들의 


슴을 섬뜩하게 하는데는 충분한 위력을 보여주었다. 

"파옥신장을 보니 개방의 인물이군. 파옥신장은 위력이  잔인하여 정파의 인물들 중에는 익


는 자가 드물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니군."

모든 이들이 굳어 있는 가운데  상당히 담 큰 녀석인지 복면인들  중 하나가 비아냥거렸다. 


러나 류흔은 태연함을 가장한 그의 음색에서 미미한 떨림을 읽어내고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럼 이건 어떠냐?"

류흔이 공력을 집중하고 끌어올리자 그의 팔에서 은은한 자색(紫色)이 섞인 붉은 색의 연기

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연기들은 류흔의  팔 전체를 감쌌고 곧이
어 

류흔의 전신을 뒤덮었다. 

[홍무자염신공(洪武紫焰神功) 제4층(第四層) 공력! 지옥염(地獄炎)!]

"호, 홍무자염신공!"

경악성은 복면인들이 아닌 제갈초혜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녀가 알기로  온몸으로 붉은 


운을 내뿜는 신공은 개방의 홍무자염신공밖에 없었다.  사파(邪派)의 기공인 혈라공(血羅功)
도 

있기는 있지만 그건 지금 류흔이 끌어올린 것처럼 자색이 섞이지 않고 오직 피처럼 붉기만 


여 섬뜩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으므로 확실히 그건 아니었다.

홍무자염신공(洪武紫焰神功). 그 유래가 황궁이라는 불분명한 설이  나도는 양강(陽强)의 신


(神功)이다. 같은 내공을 가지면 홍무자염신공을 익힌 자가 월등히 유리하다는 이야기가 전


지는 패도신공의 대표격. 모두 6층으로 나뉘어져 있고  5층까지만 연성해도 무림8절에 맞먹
는 

무공수위를 가질 수 있다는 절정의 신공이 바로 홍무자염신공이었다. 

그 정도로 유명한 무공이었으니 홍무자염신공을 전신에 끌어올린 류흔을 바라본 복면인들의 

입에서 신음성들이 흘러나오는 것도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무서운 놈....... 개방에 있는 패도무공은 모조리 갖췄군." 

이들의 수장인 구양사(九陽絲)의 중얼거림이었다. 패도적인 면으로 이름이 나있는 파옥신장

을 목격한 데다가 이번엔 패도신공의  대표격인 홍무자염신공까지 보게 되다니.  게다가 저 
녀석

의 경지를 보니 적어도 제3층 염화경(炎火勁) 이상의 성취를 이룬 듯했다. 솔직히 저 꼬마계


들만 해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는데 저 녀석까지 끼여든다면....... 이미 자신들이 상대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흐음, 오늘은 길보다 흉이 많겠군. 제기랄, 대체 어디서 저런 놈이 튀어나온 거지? 하여간 

그 망할 놈의 소군(小君)자식. 꼴에 눈만 높아 가지고는.' 

거듭 말해서 미안하지만 이 복면인들을 이끌고 있는 수장,  구양사는 침음성을 흘리며 이번 


을 시킨 자신들의 소군을 원망했다.  이 일은 마차를 이끌고 있는  제갈초혜를 보고 첫눈에 


한 소군이 시킨 일이었던 것이다. 대강 훑어보니 그 계집들말고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마
음놓

고 쫓아왔는데, 일이 이렇게 되다니....... 마음 같아선 그대로 돌아서서 줄행랑을 놓고 싶었

지만 여기서 놓친 다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리
고 

결정적으로 그때 그의 염장을 지르는 목소리들이 들려 왔기 때문에, 그는 돌아갈 기회를 놓


다. 

"어이, 이봐! 싸울 거냐 말 거냐?" 

"호호, 운양공자님의 신위에 눌려 모두 굳어버렸나 본데요?"

여전히 홍무자염신공 제4층의 경지 지옥염을 운기하고 있는 모습이라 상당히 기괴하고 무서

운 모습의 류흔과 치기 어린 남궁려려의 대화(對話)에 열 받은  구양사는 이를 악물고는 다
시 

한 번 공격명령을 내렸다. 

"공격! 소군이 찍은 계집만 빼고 모두 죽여버려도 상관없다!"

복면인들은 구양사의 명령에 따라 검을 움켜쥐고 마차에 달려들었다. 류흔은 지옥염의 공력

을 더욱 활성화시켜 눈앞으로 덤벼드는 복면인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걸 기점으로 다
시 

싸움이 시작되었다. 

퍼억! 

"크악!"

다짜고짜 달려들다가 류흔의 주먹에 얻어맞은 복면인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지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걸로 오인하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물론 홍무자염신공의  패도적인 


운은 복면인을 즉사시키기에 충분했으나 류흔이 힘을 빼고 때렸기 때문에 죽지는 않았을 것


다. 다만 일시지간 기절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정을 모르는 다른 이들은 흠칫 몸을  떨며 


저했다. 

"덤벼라!"

그 틈을 타 한소리 우렁찬 외침으로 기운을 북돋은 류흔은 지옥염의 공력을 마구 방출하기 


작했다. 그의 몸에서 세차고 뜨거운 바람이 일어나며 주위로 기를 싣고 뻗어나갔고,  류흔도 


마 전에 이룬 제4층 지옥염의 막강하기 짝이 없는 공력은 상대방의 어떤 방어도 뚫고  들어


다. 검으로 막으면 검을 부쉈고 팔로 막으면 팔뼈를 부쉈다. 이런 꼴이니 싸움이 제대로  될 


가 없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류흔에게 덤벼드는 복면인들은 모조리 땅바닥에 눕는 신


가 되고 말았다. 

한편, 남궁려려와 제갈초혜, 그리고 얼떨결에 말려든 미사도 복면인들을 상대로 우세한 싸움

을 펼치고 있었다. 제갈초혜의 깨끗한 쾌검이 복면인들의 요혈(要穴)들을 찔러갔고 남궁려려

의 무검(舞劍)은 복면인들의 운신(運身)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미사는 그런 복면인들을 

향해 비침을 날려 확실하게 거꾸러뜨리고 있었다. 

"더 이상 못 봐주겠군. 우랴압! 이노옴!" 

싸움의 형세를 지켜보던 구양사는 터지는 분통을 참지 못하고 외마디 호통과 함께 류흔에게 

달려들었다. 좌우로 움직이거나 하는 기교(技巧)없이 똑바로 돌진하는 구양사에게서는 맹렬
한 

투지밖에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구양사가 맹렬히 달려오는 것을 느낀 류흔은 내공소모가 큰 홍무자염신공 제4층 공력을 거


고 제1층 공력 초열경(焦熱勁)을 사용해 구양사를 맞았다. 류흔의 전신을 뒤덮었던 기운들이 

오직 그의 양 주먹에만 모이며 은은하게 뜨거운 기운을 발산했다. 

"타아앗!"

구양사가 기합과 함께 내지른 주먹에는 그의 10성  공력이 담겨 있어 만만히 볼 게 아니었
다. 

척 보기에도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다. 호승심이 치민  류흔은 피하거나 기교로 제압하
지 

않고 그대로 부딪혔다. 

쩌어어엉! 슈아아아아! 

양 주먹의 격돌은 커다란 충격음과 함께 양 방향으로  퍼져나가는 돌풍을 만들어내었다. 구


사는 류흔과 부딪힌 주먹에 통증으로 인한 마비가 오는 것을 느꼈으나 이를 악물며 다시 주


을 내질렀다. 

"이야압!"

"호오, 대단하군요!"

구양사의 투지에 류흔은 진정으로 감탄하고는 공력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제2층 공력, 열화

수(烈火手)의 공력이 운기된 류흔의 주먹에서는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그 불길을 소매로 삼

아 다시 구양사의 주먹과 부딪힌  류흔의 주먹. 예상대로 아까 전과는  전혀 딴판의 결과가 
나왔

다. 

"커어억!"


열화수의 뜨겁고 강한 공력이 구양사의 내부를  뒤흔들어버린 것이다. 원래 홍무자염신공이 


2층에 진입하기 시작하면 내부를 부수는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의 효용을 갖추기 시작하는 


인데, 구양사의 공력으로는 그 수법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류흔은 열화수의 공격이 성공하자 곧바로 내공을 거두고 이미 전투능력을 상실한 구양사의 

가슴에 일장(一掌)을 내려쳐 기절시켰다. 

"크억!"

구양사를 제압한 류흔은 아직 남아 있는 자들을 한 번에 처리하기 위해 자신에게 현재 남아 

있는 모든 공력을 집중하여 다시 홍무자염신공 제4층, 지옥염을 끌어올렸다. 

지옥염을 끌어올리자 천지를 진동시킬 듯한  거대한 기운이 류흔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까 전에 맛보기로 끌어올렸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커다란 불길이 류흔의 전신을 덮으
며 

위세를 떨치다가 류흔이 기의 제어를 풀어버리자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쿠콰콰콰쾅! 콰콰콰쾅! 

"카아악!"

"피해랏! 우악!" 

지옥염의 공력에 당한 자들의 비명소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마차로 돌아온 류흔은 잠시 내공

을 고르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니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았
다. 

옷에 불이 붙어 좌우로 뛰어다니는데 여념이 없는 복면인들의 행태를 바라보던 류흔은 제갈


혜와 남궁려려를 재촉하여 마차를 움직였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빨리 움직이도록 하죠."

"알았어요. 이럇!"

남궁려려의 낭랑한 외침소리와 함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금 전의 격전으로 인해 6


(頭)로 줄어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마차는 빨랐다. 순식간에 격전지로부터 20장 이상 벗어난 


이다. 

"으악! 으악!"

"내 옷이 탄다!"

"물, 물을 찾아!"

뒤에 남은 자들의 악쓰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20] 천강 - 6. 재회(2-1) 



어느 정도 추적자들과의 거리가 벌어지고 나자 류흔은 숨을  고르며 내공을 다스렸다. 그가 


기를 시작하자 지옥염의 맹렬하게 용솟음치던 뜨거운 공력이 서서히 잠잠해지며 류흔의  기
해혈

(氣海穴)로 모여들었다. 그와 동시에 뜨겁게 달구어졌던 류흔의 몸도 식어갔다. 

류흔이 내식(內息)을 조절하고 눈을 뜨자 려려가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운양 공자님!"

"어엇!"

류흔은 미사가 경계하기 전에 달려드는 려려를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당해(?)버렸다. 려려
는 

침투가 성공하자 류흔의 널찍한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떨었다. 

"호홍,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너무나 보고 싶었다고요."

"아아, 남궁 소저....... 저기....... 이러시면......."

류흔은 얼굴을 가득 붉힌 채 남궁려려를 밀어내려 했지만 기회를 잡은 남궁려려는 요지부동


다. 미사도 류흔의 품에 남궁려려가 안겨 있기 때문에 차마  비침을 던지지 못하고 발만 동
동 

구를 뿐이었다. 초혜는 무안해져서 얼굴을 가린 채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린 상태였으

니...... 누가 류흔을 구해줄 수 있겠는가? 아마도 없을 거라고 생각되었지만....... 딱 한 

명 있었다. 

차르르륵......... 

"당신이 운양 공자인가요?"

"!"

마차의 안과 마부석을 나누고 있던 발이 걷히며 찰랑거리는 맑은 물 같은 목소리가 들림과 


시에 면사를 쓴 희상아의 아리따운 자태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녀가 완전히 마차에서 내려


는 순간, 류흔은 굳어버렸다. 그녀였다. 

희상아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는지라 처음에는 류흔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눈

을 들어 시선을 그에게 던진 순간......... 그녀 역시 굳어버렸다. 

"저희를 구해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드려야.......! 서, 설마......."

"상아......."

서로를 응시하자마자,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이들 두 남녀의 머릿속은 동시에 하얗게 

타버리고 말았다. 

특수한 천잠사로 짜여진 면사라 류흔의 안력으로도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었지만 류흔은 확


했다. 이 여인이야말로 자신이 그렇게도 찾았던 그녀, 희상아임을. 그리고 그녀도 확신했다. 

눈앞의 이 거한이야말로 자신이 그렇게 그리워했던 그, 천류흔임을. 

희상아는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류.....흔?"

[제발 이게 꿈이 아니기를. 신이시여. 소녀의 간절한 바램을 들어주소서.]

류흔은 자신의 볼을 꼬집고 싶은 충동을 겨우겨우 억제했다. 

"상아......?"

[이건 꿈이 아닐 거야. 그래, 이제까지 모두 현실이었잖아? 이건 절대 꿈이 아닐 거야.]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려려는 저도 모르게 류흔의 품안에서 빠져나와 그들 둘을 바라


았다. 미사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침묵을 고수했고, 초혜 또한 뜻밖의 상황전개에 눈만  깜박


릴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상아는 가슴속에  억눌러 왔던 감정들을 폭발시켰
다. 

희상아의 면사가 걷혀지고 온갖 보석들의 영롱함과 갖가지 꽃들의 영화로움을 한 곳에 모아 

놓은 듯한 그녀의 눈동자에서 흘러내리는, 천상의 이슬이라 해도 기꺼이 믿어줄 수 있는 옥


(玉淚)가 흘러내림과 동시에 가냘픈  그녀의 교구(嬌軀)가 류흔의 듬직한  품에 안겨들었다. 


녀의 움직임을 따라 허공에 맑은 수정의 궤적이 그려졌고 그걸 바라보는 류흔의 눈시울 또
한 

어느덧 축축이 젖어들고 있었다. 

"류흔! 류흔 맞지?! 류흔!"

그녀다. 지금 자신의 품속에 느껴지는 감촉은 분명한 그녀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지만, 자

신의 감정과 이성은 그녀가 맞다고 소리치고 있다.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절로 입이 열리며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온다. 

"......잊지 않았었구나........ 보고싶었어."

그가 잊지 않았었냐고 묻는다. 절대  그럴 리 없었는데. 그러나  자신이 보고싶었다고 한다. 


제 됐다. 그 한마디면. 자신을 잊지 않았었다는 그 한마디면. 다시는 놓지 않을 것이다. 

"류흔!"

가냘픈 그녀의 몸 어디에서 이런 힘이 솟아나는 것일까. 상아는 다시는 죽어도 놓지 않겠다

는 듯 그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류흔의 몸집이 거대한지라  작은 체구의 그녀가 양팔로 감
싸는

데 조금 힘이 들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3년 간 하루도 쉬지 않고 그려왔던,  황태


의 청혼을 일언지하에 거절할 정도로 강렬한 그리움을 느끼게 했던 그의 품에서 그냥 울고 


을 뿐이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그의 이름만을 계속 불렀다. 

"류흔......! 류흔......!"

"상아......." 

귓가를 울리는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희상아는 식구들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포근함을  만


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심약한 몸에 류흔과의 재회는  굉장히 큰 충격으로 작용했던 


이다. 

"상아......"

류흔은 조용히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아니 그들의  사


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타타탁! 타탁! 

마른 나뭇가지들이 타는 소리가 고요한 숲의 적막을 홀로 깨고 있는 가운데 소림사를 향하
던 

마차는 정차해 있었다. 6마리의 말들은 모두 서서 잠을 자고 있었고, 마차에 탔던 사람들

은 모두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있었다.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는 류흔에게  전신을 기대고 있는 상아는 연신 행복한 미소를 


으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공인된 천하제일미녀가 짓는  행복한 미소는 꼭 그녀


게 반한 사람이 아니라도 넋을 빼앗을 만큼 황홀하고  한편으론 부담스러운 것이었지만, 류


은 편안함과 행복함만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모든  것에 마음을 빼앗긴 류흔인지라 


녀의 숨막힐 듯한 미모는 그리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하더라도 아무


지도 않게 마주 바라볼 수 있는 정도까지 된 것은 아니지만. 

그런 그들의 바로 옆에는 미사가 입술을 삐죽인 채 앉아  있다. 소중한 장난감을 빼앗긴 어
린 

아이처럼, 얼굴에 불만의 기색이 가득했다. 희상아를 만나고서부터 열외로 밀려버린  미사였


니 그럴 만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려려 쪽도 만만치 않았다. 

아까부터 애꿎은 돌만 내던지며 상심한 빛을 띄우고 있는 려려. 초혜는 그런 그녀를 달래려 

했으나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의 마음 한  구석 또한 아파 왔기에 자신
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도 벅찼다. 한 번 본 것뿐인데 어째서 마음이 울렁거리는 것인지...... 상

아나 려려처럼 그의 잘생겼다는 얼굴을 본 것도 아니다. 단지  그와 잠시 동안 같이 있었던 


뿐인데도 그녀의 잔잔하던 마음에 아주 커다란 파문이 생겨버린 것이다. 

서로 지난 이야기를 풀어놓기에 여념이 없는  두 연인을 제외하고는 아주 어색하고  무거운 


기가 일행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걸 느꼈는지 류흔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어색한 미소를 


었다. 미사와 려려가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부담스런 시선에 류흔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갑자기 반가운 표정으로 바꾸


는 숨어 있는 자를 불렀다. 

"공공대사님! 언제까지 숨어 계실 겁니까?"

"류흔?" 

무공이 없는 상아는 류흔이 갑자기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자 어리둥절해했다. 그러나 무림


가(武林世家)의 자제인 려려와 초혜는 공공대사라는 말에 낯빛을 고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나들, 여기야, 여기." 

어느새 류흔의 앞에 나타난 조그마한 소동(겉으로만) 공공대사가  손을 흔들며 여인들의 시


을 이끌었다. 려려와 초혜는 자신들의 이목을 속이고 나타난 조그만 소동을 보고 어이가 없


지만 이내 류흔의 눈짓에 의해 그 소동이 공공대사임을 알아채고 급히 예를 차렸다. 

"무림말학 남궁려려가 대사님을 뵙습니다."

"무림말학 제갈초혜가 대사님을 뵙습니다."

나름대로 예를 차려서 한 인사였지만 공공대사는 오히려 눈살을 찌푸렸다. 

"에잉, 필요 없다! 쯧쯧........ 에잉......"

뭐가 그리 기분이 나쁜지 '에잉'만을 연발하는 공공대사를 바라보며 류흔은 피식 웃음을 터


렸다. 

[음흉하긴...... 100살 이상 먹은 노인네가 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시대의 절대자들인  무림8절에서도 일도(一道) 태극우사(太極羽士)와  함께 수위에 꼽을 


한 높은 무공을 가지고 있다는 일불 공공대사. 그가 갑자기  화를 내자 려려와 초혜는 자신


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 여기고는 어쩔 줄 몰라했지만 류흔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단서는 공공대사의 겉모습을 처음 봤을 때 예상되는 여인들의 반


과, 그걸 제지한 류흔의 눈짓이다. 

"킥, 대사님. 제가 작전에 훼방을 놓은 것 같군요?"

"......으흠!" 

류흔에게 속을 들켜 순간적으로 얼굴빛이 흐트러졌던 공공대사는 류흔의 입을 막기 위해 재


리 화제를 돌렸다. 마침 공공대사의 눈에 류흔에게 다소곳이 기대어 있는 상아의 모습이 들


왔다. 

"호오, 이 여아가 네가 말하던 그 여아냐? 과연 네가 목을 멜 만 하구나.  솔직히 너한테 아


울 정도다."

상아는 잘은 모르겠지만 류흔이 존대하는 것으로 보아 눈앞의 소동이 보기와는 달리 굉장히 

높은 신분이란 것을 알았는데 소동의 입에서 자신을 칭찬하는 말이 나오자 살짝 얼굴에 홍


를 띠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류흔이 입을 열어 변명했다. 

"하하, 솔직히 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란 있을 수 없지요. 물론 같은 남자의 눈으로 봤을 때 

말입니다."

류흔의 재치 있는 대꾸에 공공대사는 허허 웃었다. 확실히 이 녀석과 있으면 즐거웠다. 

"쯧, 고얀 놈. 늙은이한테 한마디도  안 지려고 하다니. 그래,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냐?" 

"이제야 인정하시는군요. 어쨌든 칭찬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빨리도 권하는 구나. 하지만 청춘남녀가 모여  노는 데 눈치 없게 낄  순 없는 일 아니냐? 
난 

이만 갈 테니 내일쯤 본사에서 보자꾸나."

그 말만 남기고 공공대사는 능공천상제(凌空天上梯)라는 초절정의  고명한 신법을 사용하여 


늘로 날아올라 사라져버렸다. 대체 뭐 하려고 왔는지....... 공공대사의 정신 상태가 의심 가

는 바이지만 즐거운 날이므로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어쨌거나 쓸데없어 보였던 공공대사의 등장에 이은 퇴장은 분위기 쇄신에 상당한 도움을 주


다. 어느새 미사가 다가와 류흔의 반대 팔에 매달렸고, 려려와 초혜 역시 아까 전보다는  많
이 

풀린 표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상아는 갑자기 분위기가 변해버린  자신들의 경쟁자들을 
바라

보고는 류흔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빙긋 웃었다. 

"류흔, 잠깐만."

류흔은 상아가 갑자기 자신의 팔을 끌어당기며 걸음을 옮기자 영문을 모르면서도 헤벌레 넋

이 빠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따라갔다. 팔에 매달렸던 미사를 가까스로  떼어낸 후 움직인 


라 뒤에서 날카로운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거지 시절(아, 지금도 거지지.)  연마한 두피신공
(?)

을 끌어올려 싹 무시해버렸다. 



[21] 천강 - 6. 재회(2-2) 



스슥! 사삭! 

상아가 친히 수풀을 헤치며 류흔을 데리고 간 곳은 원래 그들이 있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별다른 풍경의 변화는 없었다. 다만 나무가 유난히 많아 자연의 숨소리가 다른 


보다는 크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른 것이었다. 

"왠지 시원한 느낌이 드는데....... 그래 상아, 무슨 일이야?" 

류흔은 근처 바위에 걸터앉으며 상아에게 용건을 물었다. 

"........"

상아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단지 고개만을 숙인 채  애꿎은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류흔의 


에 그런 그녀의 아름다움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한 점 빛이 들지 않는 이  곳에서도 그녀에게서는 광휘가 뿜어져 나오는 듯  했다. 저 미를 


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무공을  익히는 틈틈이 시문(詩文)이나 유가(儒家),  도가(道家) 등의 


문들을 꽤나 읽었던 류흔이었지만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상아의 미를 완전히 형용할 수 


는 표현어구는 찾아낼 수가 없었다. 

당대(唐代)의 시선(詩仙)이라 불렸던 이태백(李太白)이라면  표현 할 수 있을까?  혹시 모를 


이지만 자신 정도로는 그녀가 지닌 미의 만분지일도 표현해낼  수가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탁한 세상에 내려온 홀로 고고한 여신? 미(美)라는 단어의 형상화?  신이 반쯤 미친 상태에
서 

만들어낸 이상형? .......더 이상 생각하다간 골이 빠개질 것 같으니 관두자. 

각설하고, 상아는 류흔을 이곳까지 끌고 온 장본인답지 않게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무언

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부끄러워서 차마 꺼내지 못하는  듯 했다. 침묵이 
지속

되자 조금 답답해진 류흔은 비상한 머리를 이용해서 그녀의 생각을 짚어냈다. 

"미사? 그리고 남궁 소저?"

"으, 응......."

상아는 류흔이 정확히 자신이 하려던 말을 짚어내자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려


는 그렇다 하더라도 류흔만을 바라보고 있던 그 미사라는 여인은 상아 자신이 모르는 여인
이었

으므로 더욱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과 만나지 못했던 3년 간의 생활 속에서 생


버린 애인일 수도....... 있다는 최악의 생각까지 하는 희상아였다. 

"음...... 미사는 말이야....... 하아,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지?"

결코 상아에게 쓸데없는 의심을 받고 싶지 않은 류흔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녀를 처
음 

제압하고 고문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불상사(?)로 인해 데리고 다니게 되었다는 것과, 곧 있


면 그녀의 정신이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은 결코 그녀에게 아무
런 

감정이 없다는 것까지 역설(力說)했다.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걱정 안해도 돼."

류흔의 마지막 말에 상아는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부정했다. 

"벼, 별로 걱정 한 건 아니야. 저, 정말이라니까!"

강한 부정에도 류흔이 빙글거리며 웃고 있자 더욱 얼굴을  붉히면서 소리치는 상아였다. 그


나 그 후에도 류흔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가 상아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매섭게 꼬집
히고

서야 사라졌다. 상아는 그런 류흔의 능청에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3년 간 못 본 사이에 능청만 늘은 것 같아. 처음 봤을 때는 날 제대로 바라

보지도 못하더니........"

상아가 툴툴거리면서도 즐거운 목소리로 과거를  회상하자 류흔의 얼굴에도 푸근한  미소가 


올랐다. 

[그렇군. 그 때의 나는 상아가 말을 걸어주자 얼어버렸었지.]

류흔은 그 때와 많이 달라진 자신의 성격을 생각하니 3년이란 세월이 알게 모르게 많은  걸 


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보다 키도 훨씬 커졌고, 무공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자신이 지금은 고수반열에 들어서 있었으며, 아는 사람 하나  없던 자신에게 든든한 후원자


이 생겼다. 그 전까지의 삶과 너무나 달라지게  만든 3년. 그러나 그 시간도 단 한가지만은 


꾸지 못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그건....... 상아에 대한 그리움.......]

상아를 바라보는 류흔의 눈에는 어느새 애틋함이 떠올라 있었다.  그런데 대체 자신은 그녀
의 

무엇에 반한 것일까? 그녀의 외모?  아니다. 아무리 희상아가 어렸을 때부터  비할 데 없이 
예뻤

다고는 하지만 13살이면 사실 아무것도 모를 나이. 그 나이에서 외모보고 반했다는 것은 아
주 

조숙한 아이가 아니라면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일까?

"류흔?"

상아는 류흔이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부담을 느끼고는 류흔
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류흔의 자세는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뭔가 홀린 듯한 눈빛으로 자신

을 응시하고 있는 류흔의 시선에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낀 상아는 얼굴을 붉히면서 작은 목
소리

로 말했다. 

"류흔, 그렇게 보면 부끄러워." 

그런데 류흔의 반응이 영 이상하다. 

"어? 아....... 아하, 왜?"

"뭐? 뭐가 왜야? 무슨 생각했어?"

상아는 그제야 류흔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꽤나 매서운 어조로 류


을 다그쳤다. 이에 흠칫 놀란 류흔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급히 변명했다. 

"응? 아, 아무 생각도 안했어."

그러나 이런 변명이 먹혀들어 갈리 없었다. 상아는 설마 류흔이  이럴 줄은 몰랐다는 듯 울


이기까지 하면서 류흔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나를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다니....... 역시 다른 여자가 생긴 거지? 흑흑, 나는 오

직......."

"무, 무슨 소리야? 정말 아무 생각도 안했다니까! 상아가 너무 예뻐서 홀렸던 것뿐이라고!"

류흔은 설마 상아가 울 줄은 몰랐는지라 크게 당황하면서 생전 안 해본 별 소리를 다해가면

서 달래려 애썼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아는 고개까지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
기 

시작하여 류흔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었다. 

"흐흑! 흑!"

"으....... 상아, 다시는 다른 생각 안할 테니까 제발 울지마. 응? 상아......"

이럴 때는 그냥 가서 안아 주는 게 최곤데 멍청한 우리의 류흔은 상아에게 다가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쩔쩔매고 있었다. 쯧, 남자망신 다 시키는  구나. 이런 놈에게 과연 여자를 밀


주어야 할지 상당히 고민되는 중이다. 

이렇듯 류흔이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상아의 입술에서 웃음소리가 


어나와 류흔을 다시 한 번 멍하게 만들어버렸다. 

"쿡쿡쿡! 설마 류흔, 내가 그런 거 가지고 진짜로 울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도 아직 순진하

네? 호호호!"

"에? 이, 이런...... 하, 하, 하......"

상아의 시원하고 낭랑한 웃음소리의 지속시간에  비례하여 류흔의 허탈한 심정도  배가되었
다. 

새삼 맹정이 말했던 강호에서의 불문율이 떠올랐다. 

[맹정 형님이 강호에 나가면 노인과  아이, 그리고 여자를 조심하라고 하더니,  과연 여자는 


단하구나. 나를 바보로 만들어버리다니.]

상아는 한참 웃다가 류흔이 멍청히 서 있는 것을 보고 싱그러운 미소를 지은 채 살풋  다가
가 

류흔의 눈앞으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엇!"

갑자기 코를 자극하는 상큼한 향기와 함께 불쑥 나타난 상아의 얼굴에 놀란 류흔은 반사적


로 마치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섰다. 눈 깜짝할 새에 그녀와 5장이란 거리를 벌린 


흔은 볼을 부풀리며 자신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상아를  보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시 거리를 좁혔다.

벌써 키가 8척을 바라보고 있는 류흔인지라 상아는 그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머쓱한 표

정을 짓고 있는 류흔을 지그시 바라보며 상아는 천천히 그에게 몸을 기대었다. 

"정말....... 여자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니까....... 바보......"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아무리 여자에 대해 모르고 이런 데는  둔하기까지 한 류흔이지만 적어도 사랑하는  여자가 


기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 지는 알았다. 어림잡아도 상아의 섬세한 손의 2배는 될 듯한 


흔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았고 그들은 잠시  동안 그 상태로 서로를 내맡겼다. 
이 

순간만큼은 시끄럽게 울어대던 매미들도 침묵을 지키며 두 연인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

다. 

잠시의 꿈같은 시간이 지나가고  매미들도 그쳤던 울음소리를 다시  내기시작한 때에, 그의 


속에 다소곳이 안겨있던 상아가 조용히 속삭였다. 언제까지라도 이렇게 있고 싶었지만 주위 


건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 돌아가.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아."

류흔은 그녀를 속박했던 손을 풀러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 편, 희상아와 류흔이 같이 어디론가 사라진 뒤 한참이  지나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자 려


와 미사는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의외로 특히 더 심한 것은 미사가 아닌 려려로, 그녀는 그


이 없어진 직후부터 낸 신경질을 아직까지 내고 있었다. 

"차∼암! 대체 둘은 어딜 가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려매, 가만히 좀 있어. 때 되면 알아서 돌아오겠지."

"에잇!"

퍼억! 퍼억!

초혜의 타이름에 려려는 애꿎은 돌만 발로 걷어찼다. 연약하고  작아 보이는 발이지만 공력
을 

실어서 찼기에 보기에도 단단함이 느껴지는 짱돌들은 그 느껴지는 단단함이 무색하게  퍽퍽 


서져 나갔다. 어린 나이에 비해 상당한 공력이었다.(류흔 같은 경우는 제외하자. 그 놈은 괴


에 가까우니.......) 하지만 지금은 공력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렇게 돌을 부수어 대는 려려

의 마음 역시 부서지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다. 

[왜 항상 안 좋은 예감만 맞는 거지? 정말로 운 공자가 상아 언니의 그이일게 뭐냐고! 에
잇!] 

생각하면 할수록 열이 받는지 려려의 움직임은 더욱 거칠어져 갔다. 순식간에 40여 개의 돌

이 으깨어지며 주위를 어지럽혔다. 초혜도 더 이상 말리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미사는 박


에 쫄았는지 조용히 있었다. 그 와중에 돌들이 부서지는 소리만이 높아져 갔고, 또 하필이면 

그 때 그들이 돌아왔다. 

"어라? 남궁 소저, 돌들에 원수졌습니까? 왜 그러십니까?"

"아? 아, 이, 이건..... 그러니까......."

갑작스레 난입한 류흔의 목소리에 려려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느  여자가 이런 상황에서 당당하게 이유를  밝힐 수 있겠는
가? 

그저 몸을 배배꼬며 얼버무리는 것이  최고였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가 이렇게 
신경

질적인 행동을 한 이유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다른 것에 바로 신경을 돌리는 류흔이었기
에 

려려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어쨌든, 상당한 공력인데요? 돌들을 이렇게 잘게 부수다니. 이 정도 내공을  지닌다는 것도 


실 쉽지 않은 건데. 수련을 착실히 쌓으셨나보네요."

"아이, 운양 공자님도...... 별 거 아니에요."

류흔의 칭찬에 려려는 몸둘 바를 몰라하면서도 꼬박꼬박 대답은  다했다. 그녀의 성격을 단


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녀의 애교 섞인 몸짓에 류흔은 웃음으로 답해주었다.

"별 거 아니라니요. 대단한 건 대단한 거죠. 아, 그보다 뭐 좀 먹지 않으시겠습니까? 미녀들

은 이슬만 먹고산다지만 저는 미녀가 아니라서 말입니다. 배가 고프군요." 

류흔이 배를 어루만지며 말하자 일행은  모두 갑자기 허기가 지는 것을  느꼈다. 아까 전의 


움으로 인해 허비된 체력을 아직 보충하지 못한 것이다.  류흔과의 재회가 그녀들의 정신을 
못 

차리게 한 것이 주된 이유라 할 수 있겠다.

류흔의 배고프다는 말에 상아가 문득 마차에 있는 몇 가지 식량을 기억해내고 류흔에게 말

다. 

"그러고 보니 집에서 나올 때 음식을  좀 가져왔었어. 지금도 조금 남아 있을  거야. 육포랑 
건량 뿐이지만, 그거라도 먹는 게 어때?" 

애초에, 상아가 집을 나올 때 댔던 핑계가 영험하다는  소림사에서 불공을 드리겠다는 것이


으므로 그녀들에게 비축식량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핑계는 곤궁을 빠


나가기 위한 도구일 뿐, 실상을 알아보면 류흔을 찾기 위해  집을 나온 상아였으므로 이 정
도 

준비는 오히려 당연하다 할 수 있겠다.

"육포랑 건량......." 

모처럼 상아가 제안을 했지만 류흔은 그리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설마 여기까지 오면서 


포랑 건량으로 식사를 때웠다는 것인가? 그렇게 배만 채우는 음식으로는 건강이 나빠질 수


에 없다. 특히 무공을 배우지 않은 상아로서는 몸이 크게 상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상아, 설마 집에서 나온 후부터 지금까지 그것만 먹고 온 것은 아니겠지?"

다행히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하긴 그래도 귀하게 자라온 그녀가 이런 음식만 먹고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야. 육포를 먹은 건 몇 번 되지 않았고 대부분 객잔에서 사서 먹었어. 그런데 왜?"

"그래...... 다행이다. 쩝, 그럼 육포랑 건량 밖에는 지금 먹을 게 없는 거지?"

나름대로 안심한 류흔이 확인하듯 재차 묻자 상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류흔은 사냥을 하기

로 마음먹었다.

"어쩔 수 없네. 낭자들은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맛없는 육포랑 건량으로 입맛을  버릴 순 
없으니까......... 간단한 채소랑 짐승 몇 마리 잡아 가지고 올게요."

"앗, 그럼 나도 갈래요."

류흔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튀어나온 이 발언은 바로  려려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자 


아와 초혜도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녀를 거들었다. 

"데리고 가세요. 려매가 어려 보여도 여러 가지 도구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많으니까 도움
이 
될 거예요." 

"맞아. 려매의 가문이 원래 기관(機關),  조금 확대해서 여러 가지 도구를  잘 다룰 줄 아는 

궁세가잖아."

"호호, 칭찬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어리다는 말은 빼주면 좋겠어. 제갈 언니."

여인들이 말하는 동안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류흔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사냥이란 어줍잖은 무공보다는 덫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는 게 훨씬 편하니
까. 


[22] 천강 - 6. 재회(2-3) 





"그렇게 하도록 하죠. 금방 돌아올 게요. 남궁 소저, 갑시다."

"넷!"

이리하여 류흔과 남궁려려는 자비(慈悲)를 근본가르침으로  하는 불가(佛家)의 대표적인 사
찰 

소림사가 있는 숭산에서 사냥을 하게 되었다. 

조금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간 류흔은 려려의 제안에 따라 몇 가지 도구를 만들기로  하고 


단한 재료들을 모아왔다. 재료라고 해봤자 류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밧줄하고, 자연목의  줄


만 있으면 되었으므로 실상 그들이 모아온 것은 없었다. 

탄성이 좋은 나무줄기를 찾아다니던 류흔의 눈에 좋은 것이  발견되었다. 류흔은 손을 뻗어 


기를 구부려본 뒤 려려를 불렀다. 

"남궁 소저. 이 정도 줄기면 괜찮을 것 같은데....... 이리 와봐요."

"어디요? 이잉....... 손이 닿지가 않아요......."

류흔의 부름에 가까이 다가온 려려가 줄기로 손을 뻗었으나 닿지 않았다. 류흔 정도의 키나 

되니까 쉽게 잡지 이제 겨우  6척 3촌(151cm)이나 될까 말까한 작은  키의 려려가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만약 뛰어올라 잡는다 해도 줄기의 탄성이  장난이 아니라서 대롱대롱 매달린 


긴 꼴이 될 터였으므로 함부로 뛸 수도 없었다. 잘못하다가  그 탄성을 이기지 못해 하늘로 


아가 버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 텐가?

려려가 줄기를 잡지 못한 채 어쩔 줄 모르고 있자 류흔은 아무 생각 없이 그녀의 허리를 끌


안아 위로 들어올렸다. 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에 려려가 당황하여 바동거린 것은 물론

다.

"꺄악! 무, 무슨 짓이에요?" 

그녀로서는 당연한 반항(?)을 했지만 류흔은 오히려 의아한 음성으로 이렇게 묻는다. 

"아니, 키가 안 닿는다면서요. 그래서 올려주는 것 아닙니까? 왜 그래요?" 

너무나 태연한 그의 반문에 려려는 일시지간 할말을 찾지 못하고서는 멍해져버렸다. 여인의 

허리를 함부로 껴안아 놓고서는 이렇게 당당한 태도라니...... 꼭 려려가 아니라도 누구로서

도 이해를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류흔의 성장배경을 생각해보면 그의 이런 태도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 저편의 그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기억할 수 있는 범
위 

내에서의 그는 여자를 많이 접해보지 못한 채 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거지였기 때문에 길


닥에 나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던 관계로 많은 여자들을 보기는 했지만, 먹을 수 있는 떡(?)
이 

아니었으므로 아무런 생각을 갖지 않은 것이다. 남자들을 보는 눈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
이 

정확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여튼, 이런 성장배경으로 인해 류흔에게 있어 진정한 두근거림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여자

는 현재로서는 상아밖에 없었다. 미사는 워낙 성숙했기에 남자로서의  본능이 꿈틀댄 것 뿐


었고 사실은 그마저도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15살밖에 먹지 않은(어

이,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어린애의  허리를 안은 것이 대수이겠는가. 려려에게
는 

무척이나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의 그에겐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물론 기본적인 촉감, 즉 부


럽고 따스하다는 것은 느끼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류흔이 그녀를 재촉했다. 

"남궁 소저. 빨리 손을 뻗어서 구부려봐요. 이렇게 있는 게 싫으면 빨리빨리 해야할 거 아닙


까?" 

류흔의 재촉 아닌 재촉에 려려는 얼굴을 붉히면서 더 이상 반항하지 않았다. 달리 생각해보

면 이것도 추억이라면 추억이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푸름이 가득한 숲 속의 밤. 커다란 나무 밑에서 사랑하는 두 연인이 환히 떠오른 달을 바라


며 소원을 빌고 있다. 믿음직한 체구를 가진 남자는 달을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가녀
린 

여인의 부탁에 주저 없이 여인의 허리를 끌어안아 어깨위로  올려준다. 이 얼마나 낭만적인 


경이란 말인가! 약간의 허구와 그  앞에 붙는 '짐승을 잡기  위한 덫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단서

만 뺀다면 말이다. 

각설하고, 반항을 그만둔 려려는 줄기를  잡고 구부려보았다. 굉장한 탄성이 느껴지는  것이 


흔의 말대로 덫으로 쓰기에 딱 알맞을 것 같았다. 

려려가 고개를 끄덕이자 류흔이 확인하듯 물었다. 

"어때요?"

"아주 좋아요. 여기에 설치하도록 하죠. .......저 좀 내려주세요."

류흔은 조용히 그녀를 땅바닥에 내려주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려려의 얼굴
은 

홍시처럼 붉어져 있으리라고 추측된다. 평소의 활달했던 성격은 어디 출장이라도 갔는지 고


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충분히 추측이 되질 않는가? 

그건 그거고, 려려와 류흔은 자신들이 할 일을 망각하지 않았다. 려려가 발판을 장치하는 동

안 류흔은 여전히 출처가 불분명한 밧줄로 그 굵은 줄기를  묶고, 쐐기를 박아 발판을 밟으
면 

언제든지 풀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는 밧줄 끝에 고리를 만들어 려려가 설치해 놓은 


판 위에다가 올려놓았다. 

"다 된 것 같네요."

려려가 작업하느라 구부렸던 허리를 펴며 말하자 뒷손질을 하던 류흔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를 칭찬했다. 

"확실히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군요.  그런데 남궁 소저 발판 만드는  솜씨가 한 두 번 


본 것 같지가 않은데요? 근처 산의 동물들이 상당히 싫어했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무슨 말을........ 그저 어렸을 때부터 이런 것 만들기를 좋아했었기 때문

에...... 그러는 운양 공자님도 보통 능숙한 게 아니던데요?"

려려의 반격에 류흔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물음은 둘째치고  왜 아직까지 운양이라 부르는 


지.......

"아직도 운양이라고 불러요? 제 이름 류흔인 것 이제 아시지 않습니까. 어쨌든 물으신 것에 


한 답을 하자면 저야 뭐, 8살부터 9살까지인가? 하여튼  그때까지는 여름이나 가을에 산 속


서 살다시피 했으니 그렇죠. 어려서 힘이 없었으니 먹고살려면  도구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
었거

든요. 그리고 마을에 내려가 봤자 다 어려운 살림이라 얻어먹기도 미안해서요."

"........죄송해요."

려려는 괜히 류흔의 아픈 곳을  건드린 것 같아 미안한 음성으로  그에게 사과했다. 그러자 


흔은 또 한 번 웃었다. 

"아니, 뭐가 죄송합니까? 그 때 내가 살던 곳은 하북(河北)이 아니라 산동(山東)의 태산(泰

山) 부근이었단 말입니다. 우연으로라도 마주칠 일이 없었을 걸요? 얼굴도 몰랐던 사람한테 


저가 죄송할 게 뭐 있습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류흔이 자신이 놀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려려가 조금 화난 어조로 따지듯 말하자 류흔은 


을 내저으며 한마디로 일축해버렸다. 

"저는 지금 그런 이야기 꺼낸 것 정도로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러니 그렇게 일일이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구요. 여린 마음의 아가씨."

"아......"

류흔의 말이 끝날 때쯤에는 그가 허리를 숙인 관계로 그의 이마와 려려의 이마가 맞닿을 정


로 가까워져 있었다. 서로의 숨결이 바로 앞에서 느껴지고 별빛 같은 그의 눈동자가 그녀의 

눈 속으로 박혀 들어오는 것 같다. 그에 따르는 당연한 반응으로 려려가 홍조를 띤 채로 어
쩔 

줄 몰라하자, 류흔은 피식 웃더니 그녀의 콧잔등을 살짝 퉁기며 물러섰다. 

"자, 이제 소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수주대토(守株待兎)꼴이 될지 모르니 저는 몇 마

리 몰아와야겠습니다. 어디 가지말고 있어야 합니다. 산에서 길 잃어버리면 대책 없어요. 금

방 갔다올게요." 

"......." 

려려는 아직 볼에 떠오른 홍조와, 가슴의 두근거림이 가시지  않아 류흔에게 배웅을 해주지 


했다. 그런 그녀를 놔두고 류흔은 마치 자연과 동화된 듯이 그 빽빽한 나무 사이를 쓱쓱 자


스럽게 헤치고 지나가며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혼자 남은 려려는 그의 숨결이 닿았던 이마를 매만지며 뜻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 

숨이 가빠졌는지라 한숨이라도 내쉬지 않으면 호흡곤란으로 기절해버릴 것 같았다. 잠깐 동


이지만 그의 눈빛으로 정면으로 받은 일은, 그녀에게 있어 크나큰 의미가 되어가고 있었다. 

한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순진한 소녀를 사랑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장본인
인 

류흔은 취팔선보를 이용하여 그 넓고 거친 산 속을 잘도  헤치고 다녔다. 아까 전에 말했던
가? 

그가 태산에서 놀았다는 것을. 그 때의 경험이 보탬이 되었는지 류흔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
로 

능숙하게 수풀을 헤치며 돌아다녔다. 

"하아....... 쩝, 이거 이 정도 돌아다녔으면 멧돼지 한 마리 정도는 보여야 할 것 아

냐....... 무슨 산에 이렇게 작은 동물밖에 없냐?"

거의 날아다니는 수준으로 한참을 뛰어다니던 류흔의 입에서 문득 한숨이 새어나왔다. 꽤나 

오래 돌아다녔는데도 토끼나 꿩 같은 것  잔챙이(?)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평소라면 


이라도 봐줄 수 있겠으나, 이번엔 사람들 수가 5명이나  되기 때문에 멧돼지 정도는 되어야 


넉히 배를 채울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꿩 정도는 무시하고 있는 류흔이었다. 


[23] 천강 - 6. 재회(2-4) 


"이것들아, 제발 좀 나와주라........ 한 마리만 잡아먹을 게. 응?"

알아듣지도 못하겠지만 설사 알아들었다고 해도 씨알도 안 먹힐 말만 나불거리며 주위를 탐


하던 류흔은 갑자기 눈에 들어오는 이색적인 것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정확히 말해 채소들
이었

다. 이런 야생에서 자라고 있다는 게 기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다양하고 많은 수의 채소들
이 

한 곳에 모여 류흔의 시선을 빼앗고 있었다. 

채소들에 정신을 빼앗겨 그곳이 어디, 혹은 누군가의 사유지라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아무 


리낌없이 발을 들여놓은 류흔은 아무거나 쑥 뽑아들고 맛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

다. 

"오호, 이거 괜찮은데? 과연 하늘은 무심치 않군. 이건 분명히 하늘이 내린 복이야. 일단 이


라도 가지고 남궁 소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겠다. 혹시 모르지. 내가 이러고 있는  동안 


주대토(守株待兎)에 나오는 돌대가리 토끼처럼 머리 나쁜 것들이 걸렸을 수도 있는 것 아니


어? 뭐 아니면 이것들로 때우자고. 이건 결코 내가 귀찮아서  돌아가는 게 아니야. 암, 그렇


말고."

더 이상 찾는 걸 포기하는 것에 대한 자기합리화를 하며  류흔은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발


을 돌리는 류흔의 손에는 이곳에서 자라고 있던  모든 종류의 채소가 한 포기씩 뽑혀 들려 
있었

다. 참 영리하게 뽑아 가는 류흔이었다. 한 포기씩만 뽑으니 그의 손에 들린 건 많은데도 정

작 밭을 보면 별로 많이 뽑힌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과연 세상에  공짜는 


다란 말을 실감나게 하려는 지 한소리 외침이 류흔의 고막을 뒤흔들었다. 

"이노옴! 게 섯거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도둑질이냐!!"

내공을 사용했는지 고막으로 유입된, 소리를 실은 공기가 웅웅 울리는 바람에 귀가 여간 괴


운 게 아니었다. 무공을 배우지 않은 보통 사람들을 주저앉히기에 충분한 내공이 실린 소리


던 것이다. 

그러나 보통사람이 아닌데다가 도둑으로 매도당한 류흔은 보복심리로 몸을 홱 돌린 다음 자


에게 소리를 지른 자를 꼬아보며 그보다 더 큰 소리를 질렀다. 

"아니!! 대체 내가 무슨 도둑질을 했단 말입니까?!! 산 속에 자연히 난 것에 무슨 주인이 있

소?!! 물론 당신은 여기가 자기 땅이라  우기고 싶겠지. 그러면 여기가 당신  땅이란 증거를 


보시오!! 문서 까보라고(?)!!"

현장에서 잡혔는데도 뻔뻔하게 대드는 류흔을 보며  처음 소리를 질렀던 자는 벙찐  얼굴을 


며 몸을 비틀거렸다. 아니, 그보다 류흔의 말소리에 실린 내공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고 

보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하지만 류흔은 그의  반응을 자신이 말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이라
고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는 위풍당당하게 등을 돌려 려려가 기다리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래
도 

찔리는 구석은 있는지 비천무영신법(飛天無影身法)을 극성으로 펼쳐 도망가는 류흔이었다. 

"야! 이 ¢Å♂&%!@#%$한 놈아! 거기 서........"

뒤에서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 밭주인이 분명한 사람이 어렴풋이 악다구니 쓰는 소리가 들


왔다. 그러나 이 정도 앙탈(?)쯤은 가볍게 받아넘길  수 있는 뻔뻔함이 내재되어 있는 류흔
이었

는지라 한 귀로 듣는 순간 바로 다른 귀로 흘려버렸다. 

"하하! 감사히 먹겠소이다!! 내년에도 또 올 테니 섭섭해 마쇼!!"

이쯤 되니 밭주인이 거품을 물며 쓰러지는 것도 무리가 아닌 듯 싶다. 

한편, 이렇게 류흔이 도둑질을 하고 도망쳐 오는 동안 려려는 덫 근처 바위에 앉아 덫에 잡

힌 멧돼지들을 하나 둘 놓아주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멧돼지들이 떼로 몰려와 덫 하나에 


세 마리의 멧돼지들이 잡힌 것이다. 

려려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똑같은 덫을 대여섯 번 더 반복해서 설치했는데, 그때마다 어김


이 류흔이 자기합리화 할 때 잠시 언급되었던 돌대가리 토끼정도의 지능지수를 가진 멧돼지


이 두세 마리씩 돌진해 오는 바람에 현재 려려의 옆에 모여있는 멧돼지들의 수는 장난이 아


었다. 그 와중에는 바로 앞의 놈이 걸리는 것을 본 후에도 걸리는 놈들도 있어 숭산의 산짐


들은 모두 해태눈깔이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이것들을 모아서 판다면 상당히 돈이 될 


였다. 

그러나 려려는 자신들이 먹을 만큼의 양만 있으면 되었으므로 과욕을 부리지 않았다. 한 쪽 

눈에 칼빵이 나있고 덩치도 가장 큰  멧돼지 한 마리만 남긴 채 모두  놓아준 것이다. 현재 
그녀

는 칼빵멧돼지를 감시하면서 금방 온다고 해놓고 차 한잔 마실 시간(1다경: 15분)이 지나도
록 

감감무소식인 류흔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 참..... 금방 온다고 해놓구서......."

처음에는 류흔이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멧돼지들이 몰려오기에 정말 류흔이 일을 금방 


내고 오려나보다고 생각한 려려였다. 그러나 하나  열(?)씩 멧돼지들이 쌓이면서 류흔이 이


게 욕심이 많았던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던 그녀였고, 조금 더 지난 뒤에는 멧돼지들이 몰


오는 이유가 류흔 때문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은 그녀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걱정이 


는 것이, 그가 자신에게 했던 걱정을 그가 겪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설마...... 길을 잃어버린 건? 에이, 류흔 공자님이 그렇게 칠칠맞을 리가 없지. 아니야, 의

외로 칠칠맞을 지도......."

려려의 걱정에 찬 중얼거림은 방금 도착한 류흔의 귀에 한자도 빠짐없이 모두 들렸다. 류흔

은 당돌한 아가씨의 혼잣말을 들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소저, 소저도 그런 말 할 줄 알아요? 하하하! 기다리기 심심했나보군요. 늦어서 죄


합니다."

려려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류흔의 목소리에 이마에 굵은 땀방울을 매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가 양손 가득 채소를 든 채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서 있었다. 

"어, 언제 왔어요?"

"방금 왔습니다. 이야...... 무식하게 큰놈이 걸렸네요. 내가 그렇게 찾아다닐 때는 없더만."

류흔은 려려의 떨떠름한 반응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홀로 잡혀 있는 칼빵 멧돼지를 이리


리 살펴보며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살집도 두툼한 것이 아주 맛이 좋게 보였다. 

"자, 소저, 이제 돌아갑시다. 운이 좋아서 마음씨 좋은 사람에게 야채도 많이 얻었으니 영양
식을 할 수 있어요."

기분이 좋아진 류흔이 뒤를 돌아보며 려려에게 말했다. 그러나 려려는 자신이 한 말 때문에 

그가 화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저........ 화나지 않으셨어요?"

"에? 갑자기 무슨 소리십니까? 화나다니요?"

영문을 모르는 류흔이 그렇게 되묻자  려려는 잠시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한 


이 자신을 비꼬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이 사람....... 마음이 넓어.......]

본래, 뒷땅까는 것은 다 알지만 면전에서는  싫은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게 사람의  심리다. 


리고 무림인들, 그 중에서도 체면을 중시하는 소위 기재(奇才)라 불리는 자들은 자존심이 유


히 강하기 때문에 약간의 욕만 얻어먹어도 죽이네 살리네 하며 칼 들고나서는 게 다반사였
다. 

설사 자신이 사모하는 여인의 앞이라 해도 불편한 심기를 은근슬쩍 드러내는 건 이 시대 모
든 

남성들의 공통점인 것이다. 전에 상아의  부탁으로 같이 만났던, 대장군부의 아들이라는  그 


소강(岳少强)이란 자만 생각해봐도 조그만 일에 트집잡고 일을 크게 벌이는 데는 선수가 아


었던가. 그런데 이 남자는 전혀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다. 가식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말로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려려가 대답은 하지 않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자 류흔은 그녀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더 이상 묻지 않고 딴 짓을 했다. 그 행위는 짐 챙기기였다. 

"웃차, 이놈 몸 한 번 진짜 빵빵하네. 그리고....... 포대자루가 여기에 있던가? 

류흔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칼빵멧돼지의 짧은 앞다리와,  그것과 도토리 키재기인 뒷다리
를 

애써 모아 밧줄로 묶어 어깨에 둘러맨 다음 자신의 품속을 뒤져 포대자루를 찾아내고는 채


를 그 안에다가 집어넣었다. 전혀 그렇게 안보이긴 하지만  그도 역시 개방의 인물이었으므
로 

필수 장비(?)인 포대자루를 항상 가지고 다녔던 것이다. 그렇게 짐을 챙긴 후 설치해두었던 


들도 모두 치워 돌아갈 준비를 마친 류흔은 려려를 불렀다. 

"남궁 소저?"

"......."

알아듣지 못했는지 반응이 없었다. 류흔은 그녀가 현실로 되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줄까 생


하다가 상아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근처에서 2자 길이의 나뭇가지를 주워 그


의 볼을 툭툭 찔렀다. 

톡톡! 

"......!"

그 자극에 현실로 돌아온 려려는 어떤 반응을 보이기 이전에 류흔이 하는 행동이 너무 어이


어 다시 멍해졌다. 양갓집 규수의 볼을 손가락도 아닌 나뭇가지로 찌르다니. 거침이  없어도 


무 거침없었다. 하긴 이런 점이 그녀로 하여금 그에게 끌리게 하는 면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일단 일반적인 반응을 보여줘야 했다. 

"아...... 엣?! 뭐, 뭐 하는 거예요?"

약간 뒤늦었지만 이 상황에 적당하다 생각되는 그녀의 반응에 역시나 류흔은 아무것도 아니


는 듯 나뭇가지를 뒤로 집어던지며 대답했다. 

"불렀는데 반응을 하지 않아서요. 자, 빨리 돌아갑시다."

"........."

천연덕스러운 류흔의 대답에 려려는 이게 지금 자신이 한 질문에 대한 타당한 대답인가 고


에 빠졌다. 그러나 곧 류흔이 자신의 손을 잡아끄는 것을  느끼고는 더 이상 고민을 이어갈 


가 없었다. 그의 손에서 따스함이 느껴진다. 

[따뜻해.......]

손의 따뜻함은 그녀의 온몸을 불태울 듯 급격히 열기를 더해갔다. 그의 손과 맞닿은 손끝에

서 시작된 그 열기는 순식간에 얼굴까지 올라와 그녀의 얼굴에 보기 좋은 홍조를 맺히게 했

다. 그러나 그녀는 손을 빼내지 않았다. 오히려 모르는 척 그가 이끄는 대로 몸을 내맡길 뿐


었다. 


[24] 천강 - 6. 재회(2-5) 


담편 정도에서 이번 챕터가 끝이 날듯. 리메이크의 총아인  장이로군요. 아, 그리고 어떤 분
께서 야월을 여자로 만드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내주셨는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 
저는 야월과 같은 성격의 여자가 나중에 하나 나올 예정인지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의
견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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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가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간 류흔은 상아와 미사에게 엄청난  구박을 받아야 했다. 아무 


각도 없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던  그녀들의 배가, 류흔이 밥 먹자는  말을 꺼내고 사냥하러 
간 

후부터 허기가 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류흔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멧돼지를 통째로 꼬챙


에 껴서 불 위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그리고 눈치를 보면서 물을 찾아 슬금슬금  이동했다. 


러자 지옥염에 의해 가죽은 다 홀랑 타버리고 살집만 남은 멧돼지가 구워지는 것을 신기한 


으로 바라보던 상아가 류흔을 불렀다. 

"어디가?"

류흔은 손에 든 야채를 들어 보이며 대꾸했다. 

"어디 가긴........ 야채 씻으러 가지. 그냥 먹을 수는 없잖아."

"나도 갈래."

상아는 펄럭이는 치마를 한 손으로  단단히 고정시키며 류흔에게로 뛰어갔다.  그런데 평소 


으면 좋아 해야할 류흔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걸  느꼈는지 상아가 의아한 음성으
로 

물었다. 

"왜 그래........?"

"아니....... 야채 씻을 줄도 아나 싶어서."

"......."

순간 상아의 이마에 작은 핏줄이 생기더니 당혜(唐鞋)를 신은 그녀의 발이 류흔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퍼억! 

"아얏!"

정강이를 걷어찬 쪽, 즉 공격한 쪽은  상아였지만 손해를 본 쪽도 그녀였다. 그녀가  류흔의 


강이를 걷어찬 순간 기이한 반탄력이 발생하여 그녀의 발을 퉁겨내 버렸던 것이다. 정작 류


은 멀뚱히 서 있다가 상아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는 크게 놀라 달려갔다. 

"아앗, 괜찮아?" 

"아파......."

상아는 숫제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리며 발을 감싸안았다. 상당히 아플 만도 했다. 류흔이 

익힌 공력은 강하기로 이름난 홍무자염신공이었으니까. 그걸  아는 류흔이었기에 전신에 기
를 

돌리고 있는 게 습관화된 자신을 탓하며 상아를 조심스레  부축했다. 그리고 남은 여인들에
게 

고개를 돌려 멧돼지를 부탁했다. 

"전 상아와 같이 야채나 씻으러 갔다올 테니 멧돼지의 살이 붉은 색에서 살짝  검어진다 싶
을 

때 불을 끄세요. 뭐, 그 전에 돌아올 것 같지만........"

아까부터 심드렁한 표정이던 미사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고 초혜와 려려만이 고개를 끄덕였

다. 

"알았어요."

대답하는 그녀들의 눈빛 속에 부러움이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상아만의 착각일까? 

[......류흔을 좋아하는 거야? 둘 다?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 나에게 무슨 권리가 

있다고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 하지만, 가장 먼저 류흔을 좋아한 건 난데......]

상아가 심각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류흔은 귀에 공력을 집중하여 물소리를 찾았다. 다행

히 별로 멀지 않은 곳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상아를 부축하면서 물가에 도착한 류흔은 갑자기 상아에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상아, 잠깐 실례할께."

"응?"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상아였지만 류흔은 승낙의 의미로 생각했는지 그녀의 치마를  무릎까
지 

걷어올렸다. 그녀의 눈부시게 새하얀 다리가 그의 눈을 어지럽혔다. 

"앗! 무, 무슨 짓이야?"

상아는 크게 놀라며 황급히 치마를 내리려 했지만 류흔은 이미 그녀의 당혜까지 벗기고 있
는 

상태였다. 그제야 상아는 류흔이 왜 이러는 지 눈치챘다. 다친 곳을 봐주려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하더라도 발을 보이면 정조를 잃은 것으로  생각하는, 여인의 발은 남
편만

이 볼 수 있다는 시대의 관습상 껄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 어떻게 하지? 나쁜 뜻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건.......]

이성적으로라면 류흔의 행동을 막아야 하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의 감정은 류흔이라면 

상관없다는 쪽이었다. 그리고 이성과 감정의 싸움에서는 감정이 이겼다. 

[괜찮아...... 류흔이라면......]

류흔이 그녀의 당혜를 벗기자 빨갛게 부어오른 작은 발이 보였다. 약간의 화상까지 입은 것 

같았다. 류흔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 번 자신을 자책했다. 

"후우...... 역시 화상이군. 상아, 발등이 따끔따끔하지?"

"으응......"

감정은 인정했지만 부끄러움은 없앨 수 없는지  그에게 발을 보인 상아의 목소리의  크기는 


미 기어가는 소리만 했다. 

"미안....... 부기를 빼줄 테니 잠시 발을 물 속에 담그고 있어. 그러면 며칠 가지 않아 괜찮

아 질 거야."

"으응......"

류흔은 그녀의 작은 발등을 부드럽게 감싸쥐고  내공을 불어넣어 그녀의 발등에 모인  울혈
(鬱

血)들을 사방으로 밀어냈다. 그러자 발등의 부기가  점차적으로 가라앉는 게 눈으로도 보였
다. 

"자, 이제 발을 물 속에 담그고 있어. 나는 야채를 씻을 테니까."

"알았어..... 그런데 상류 쪽에 담그고 있어, 아니면 하류 쪽에 담그고 있어?"

미묘한 문제였다. 상아가 상류 쪽에 발을 담글 경우 발 씻은 물로 야채를 씻어야 하고, 하류 

쪽에 발을 담글 경우 상아는 야채  씻은 물에 발을 담그고 있어야 했다.  비록 그녀의 발이 
우유

가 무색할 정도로 뽀얗고 깨끗하며, 야채 씻은 물도 그리 더럽지 않다고 하나 이건 기분 문


였다. 하지만 류흔은 간단히 해결했다. 

"우리 둘이 같은 지점에서 시내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면 되지. 내가 저쪽으로 건너갈게."

"후훗, 알았어."

류흔이 야채를 들고 시내 건너편으로 가자 상아는  이왕 물에 발 담그는 것 제대로 하자고 


각하며 다른 한쪽의 당혜도 벗고 양발을 모두 물에 담갔다. 물의 차가움이 순간적으로 그녀
의 

몸에 소름을 돋게 했지만 조금 지나니 시원해졌다. 

상아가 발을 물에 담그는 것을 본 류흔은 그녀에게 빙긋 웃어주고는 야채를 씻기 시작했다. 

이런 것에는 이골이 나있던 터라 그의 야채 씻는 속도는 '웬만한 가정집 유부녀는 저리 가

라'였다. 너무나 능숙한 솜씨로 야채를 씻어 차곡차곡 쌓아놓는 류흔의 손놀림을 보던 상아
는 

뜻 모를 미소를 머금으며 류흔에게 말을 걸었다. 

"류흔 정말 잘하네...... 나중에 부인이 행복하겠다."

"뭘, 아마 사내대장부가 이런 짓 한다고 한심하다는 소리만 들을걸?"

하긴 이 시대에서 남자로 태어나 이렇게 아낙네들이나 할 짓을 한다는 건 같은 남자가 봤을 

경우, 혹은 드물겠지만 여자들도 한심하게 생각할 소지가 다분한 짓이었다. 류흔도 지금  그 


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해보던 상아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도 모르게 중


거렸다. 

"걱정 마. 나는 그러지 않을 테니까...... 핫?"

"......" 

류흔은 고개를 숙였고 자신이 한 말이 무엇인지 자각한 상아는 홍조를 띄우며 얼굴을 양손


로 감싸 가렸다. 그러나 엉큼하게도 슬며시 손가락을 벌려 류흔이 어떤 반응을 보이나 살펴


는 상아였다. 

"......."

아무 반응도 없는 그에게 조금 실망한 상아. 괜히 심술이 나서 물장구를 한 번 친다. 

참방―! 

"웃! 갑자기 뭐 하는 거야?" 

두근거림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류흔은 갑작스레 날아오는 물방울들을 그  와중에서도 


을 들어 모조리 막아내며 짐짓  소리를 질렀다. 방금 전의 두근거림을  감추기 위한 과장된 
행동

(Overaction.......)이었다. 

상아는 류흔이 단 한 방울의 물방울도 침입을 허용하지 않자 약이 올라 마구 양발을 움직이

며 물장구를 쳤다.

"에잇! 에잇!" 

참방! 참방! 철퍽! 철퍽! 

순식간에 아래로 흐르던 물들 대다수의 진행방향이 바뀌며 물방울의 형태로 류흔에게  날아


다. 호승심이 인 류흔은 연화장(蓮花掌)으로 자신의 몸 주위에 병풍을 둘러치듯 연화무늬를 


성하여 물들의 침입을 막았다. 그 결과 상아가 일으킨  물보라들은 허공에서 흩어져 날리는 


밖에 없었고 이제는 류흔의 공격이었다. 

"후훗, 상아, 조심해."

류흔은 손을 수면에서 한 치 떨어진 곳에 대고, 초열경(焦熱勁)의 공력을 급격한 속도로 끌


올렸다. 

퍼어어어엉! 

"꺄아!" 

초열경 공력에 의한 충격을 받은 수면 위에서 엄청난 물기둥이 수직으로 치솟아 오르며 거


서 파생되는 파편들이 상아의 전신에 흩뿌려졌다. 
천강(天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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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천강 - 6. 재회(2-6) 마지막. 


여러분들의 유형무형의 격려에 힘입어 재회 마지막 편을 올립니다....... 전보다 한 '장'이  많
이 길어져서 짜증도 나실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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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의 비단 옷이 모두 물에 젖어버린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행이라면 속이 비치지 않는
다는 것 정도일까? 

"핫핫핫! 어때?"

"히잉........ 옷이 다 젖었어......"

상아가 우는 소리를 내며 양팔을 들어 보이자 색이 바래져버린 소매가 같이 따라 올라왔다. 
완전히 마르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것이리라. 그러나 류흔은 천진하게 웃고만 있었다. 

"여름인데 뭐, 오히려 시원해서 좋겠네."

"흥, 류흔은 못됐어. 내공을 사용하다니. 반칙이야."

상아는 입술을 뾰족이 내밀며 류흔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진정으로 악의가 담겨 있는 건 아
니었다. 류흔은 그런 그녀에게 빙긋 웃어주곤 씻은 야채, 나물들을 다시 포대자루에 담고 몸
을 일으켰다. 

"지금쯤이면 멧돼지도 다 구워졌을 거야. 가자."

포대자루를 왼쪽 어깨에 맨 류흔이 상아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으나 그녀는 무슨 일인지 움
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류흔이 이상히 여겨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상아의 목소리가 그보
다 약간 더 빨리 나왔다. 

"나........ 신발도 신을 수 없고, 옷이 젖어서 움직이기도 불편해. 그러니까......"

"그러니까?"

"업어 줘." 

도대체가 유림(儒林)의 최고 원로라는 운학림(雲鶴林)의 영애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대담함
을 보이는 상아였다. 여염집 아낙들도 하기 힘든(여염집 아낙이라 하면 보통 유부녀를 뜻한
다. 즉, 아줌마를 뜻하는 것이다.) 요구를 처녀인 상아가 스스럼없이 하고 있는 것이다. 

아, 여기서 어떻게 상아가 처녀라고 단정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골을 빠개주겠다. 감히 무협
에서 여주인공의 순결(純潔)을 의심하다니......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가 젖은 소매를 걷어
올리자 그녀의 팔뚝에 찍혀 있는 붉은 색의 홍점, 즉 수궁사(守宮砂)가 만천하에 훤히 드러
나기까지 했으니 더 이상 의심의 여지는 없을 것으로 믿는다.

상아의 대담한 요구에 류흔은 잠시 벙찐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서 있다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돌려 일행들이 기다리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아를 그냥 내버려두고 
말이다. 

이에 당황한 상아. 

"류, 류흔? 나 안 업어 줘?"

그 말에 몸을 반쯤 돌린 류흔. 

"아, 그거 농담 아니었어?"

"......."

진정 몰랐다는 얼굴로 되묻는 류흔에게 그 상큼하기만  했던 아미(蛾眉)를 찡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상아는 심통이 났는지 당혜를 그에게 던지며 그 자리에 무릎을 쪼그려 앉았
다. 일종의 시위였다. 빨리 달래주지 않으면 나중에 앙금이 남을 수도 있는 상황. 상아가 던
진 당혜를 어렵지 않게 받아낸 류흔은 조금 난처하다는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앞에 다가가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었다. 

"상아, 정말 업혀서 가고 싶어?"

".......몰라, 이제 됐어."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싸늘하기까지 한 음성이었다. 찔끔한 류흔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고는 구부렸던 무릎을 펴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포대자루를 어깨에 걸치더
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뭐, 그렇다면 나 먼저 갈게. 먹을 건 남겨놓을 테니까 걱정 말구."

"!" 

류흔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상아는 반사적으로 돌아서려는 그의 옷깃을 잡았다. '정말 가려
는 거야?' 정도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이어지는 류흔의 행동은 의외였
지만 그녀를 실망시키는 건 아니었다. 

덥석! 

"아?"

상아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류흔의 억센 손은 자신의  옷깃을 잡았던 그녀의 가녀린 팔
을 끌어당겨 자신의 품으로 인도했던 것이다. 놀란 상아가 올려다본 그의 얼굴에는 환한 미
소가 어려있었다. 

"......아까 같은 말은 하면 안되겠지?"

"......한번 더 하면 진짜로 화낼 거야."

"운다고?"

"정말......." 

류흔의 얼굴을 바라보는 새침한, 그러나  정이 듬뿍 담긴 그녀의 눈빛은  저 야공에 빛나는 
달빛이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세상을 다 준다해도 바꾸기  싫은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
빛을 정면으로 받는 류흔은 천하제일의 행운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그 행
운아는 그녀의 몸을 가슴에 안은 채 걷는 또 다른 행운을 얻고 있었다.

"이 자세는 부끄러워."

차마 얼굴을 마주보기 부끄러운지 슬며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상아가 애교 비슷한 불
평을 말하자 류흔은 부드럽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지만 업는 건 상아의 옷차림을  봤을 때 무리라고. 치마가  그렇게 치렁치렁한데 어떻게 
업어?"

"하여간......"

여전히 낭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현실적인 류흔의 대답이었다. 이에 상아는 작게 툴툴
거리면서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의 목을  끌어안아 자세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누
가 봐도 닭살이 아니 돋을 수 없는 모습이다. 

젖은 그녀의 옷을 내공을 끌어올려 말리면서  일행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간 류흔은  먹기 
알맞게 익어 있는 칼빵멧돼지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는 
미사와 려려의 눈길도....... 안 그래도  매서웠던 그녀들의 눈빛은 맨발로  그에게 안겨 있는 
상아를 발견하고 나서부터는 염라대왕도 쫄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무섭게 변해버렸다. 

"뭐하다 이렇게 늦었어요?" 

려려가 톡 쏘는 듯한 어조로  류흔을 다그쳤다. 미사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심통이 
난 듯 류흔을 외면하고 있었다. 류흔은 상아를 품에서 내려준  뒤 알맞게 익어 있는 멧돼지
를 보며 말했다. 

"적당한 시간에 왔다고 생각하는데요. 멧돼지가 아주 알맞게 구워졌지 않습니까."

태연한 어조로 - 과연 속까지 이렇게 태연한 지는  미지수다 - 대꾸하는 류흔의 태도에 려
려는 일시지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의 말대로 멧돼지는 더 구워서도, 덜 구워서도 안  될 
만큼, 조금 더 강조해서 누가 봐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적당
하게 익어 있었던 것이다. 

려려를 간단히 패퇴시킨 류흔은 고기를 쫙쫙 찢어서 근처에서 주어온 나뭇가지들로  꿰뚫었
다. 그러니까 꼬치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대략 스무 꼬치 정도 나왔는데 아무리 배가 고프
다 해도 여인들은 여인들인지라 꼬치의 거의 대부분은 류흔 차지였다. 

맛은 그런 대로 괜찮았는지 불평하는 여인은 없었고 서로 입가에 묻은 검은 재를 보고 놀리
며 깔깔대고 웃을 뿐이었다. 이때만큼은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와  상관없이 그 모두가 천상
의 선녀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천상의 선녀들이 입가에 재를 묻히고 서로 깔깔대며 놀릴 일
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잡혔을 때 날도 더욱 어두워져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 사람들에 한해
서 이제는 불이 아니면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일행은 배도 채웠겠다 날
도 어두워졌겠다 앞으로 할 일은 잠밖에 없었다. 

류흔은 미사를 제외한 여자들을 마차 안에서 자게 했다. 미사는 출신도 모호하고 언제 어떻
게 될지 모르니 류흔이 데리고  자기로 한 것이다. 상아를 비롯한  여인들은 잠시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여인들이 마차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류흔은 공력을 끌어올려  주위의 기척을 살폈다. 감각
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터라 거짓말 조금 보태서 20장 밖의 개미가 기어가는 기척까지 감지
할 수 있는 류흔이었다. 아무  위험요소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류흔은  공력을 풀고 야외의 
잠자리를 만들었다. 

잠자리라 해봐야 별거 없었다. 그냥  널찍한 바위를 찾아서 평평하게  깎아버리고 내공으로 
달군 후에 그 위에 누우면 되었으니까.  그런데 문제인 것은, 미사의 잠자리를 만들어준  후 
다시 바위를 찾으려니 이 근처에는 류흔이 누울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바위가 없다는 것이었
다. 미사 쪽을 돌아보니 이미 그녀는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하아, 조금 멀리 가봐야 하나...... 에이, 그냥 땅바닥에 누워서 자자."

여인들을 놔두고 멀리 갈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기 때문에 류흔은 그냥 누워서 자기로  마
음먹었다. 오, 여인들을 위해서 자신의 한 몸을 희생하는  저 정신....... 하지만 그 속을 들여
다보면 단지 귀찮아서라는 지극히 타당하고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태울 것이 없어서 색채가 바래진 모닥불을 손짓 한 번으로 꺼버린 뒤에  류흔
은 하늘을 바라보며 누웠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풀 내음이 류흔의 코를 간질였고 한 여름밤
의 서늘한 바람이 류흔의 앞머리를 허공에 흩날리게 만들었다. 

풀밭 위에 누운 채로 아무것도 없는, 그러나 무수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암천(暗天)을 
바라보던 류흔은 문득 자신이 상아와 재회했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하고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그리워했던 그녀가 몇 발자국만 걸으면 볼 수 있는 곳에 있다는 것이,  자신
과 같이 있다는 것이 정말 꿈만 같았다. 

"하하, 상아가 나랑 있단 말이지...... 꿈만 같다. 이제 취팔선공의 수련은 그만둬도 되겠군."

이미 취팔선공(醉八仙功)의 8성이라는 경지에 오른 류흔이었다. 남들 같았으면 이쯤 되면 아
까워서라도 수련을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처음 취팔선공을 익히기 시작한 이유가 
과거의 아픈 기억들에 대해 초탈해지고 싶어서였으니 희상아를 만난 지금에 와서는 더 이상 
수련할 필요가 없는 류흔이었다. 가끔씩  생각나는 과거의 단편적인 기억으로  인한 고통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웃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녀가 곁에 있었기에. 

"하아....... 이제는 어떻게 한다....... 상아가 소림에 온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을 본 
뒤에 행로를 정해야 되는데. 북경으로 돌아가야 하나?"

자신은 맹정으로부터 2년 간의 자유시간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앞으로 어디로  가든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상아는 문제가 조금 달랐다. 엄연히 말해서 황제의 명을 어기고 도망
쳐 나온 범법자인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편한 생활은 꿈꿀 수 없을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류흔은 눈살을 찌푸리며 허공에 대고 한마디 내뱉었다. 

"골치 아프군. 하여간 그 정략결혼인가 뭔가는 없애버려야 한다니까. 아무래도  북경으로 가
서 상아의 부모님들을 뵙는 게 가장 좋은 방법 같다."

지금 류흔이 중얼거리는 말속에는 그녀를 책임지겠다는,  그러니까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의
미가 담겨 있었다. 16살짜리가 벌써 결혼을 생각하다니 너무 조숙한 것 아닌가 걱정된다. 하
지만 사실 현실을 직시해보면 이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설마  황제도 체면이 있지 
남의 아내를 빼앗아 가겠는가? 

[만약 상아가 내 아내가 된 뒤에도 요구한다면 나라를 한판 뒤집어엎고 도망가야지. 개방의 
힘을 조금만 빌리면 일도 아니지 뭐.]

......아무래도 황제는 나라를 생각해서라도 상아를 며느리로 맞는 것은 포기하는 게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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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크게 바뀌는 점은 없고 문장이나 류흔의 전투장면등이 조금 더 세세하게 변하는 정
도겠네요. 솔직히 수정판이라 하기도 뭐하지만 안할 수도  없는 일이기에.......(덕분에 조회수
는 절반도 채 안되는 수준으로 뚝 떨어졌군요.)

격려멜 보내주신 분들 중 답장 못드린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이거 날  높이는 건지...... 여
러분들을 높이는 건지.......)과 함께 죄송하다는 말씀 같이 올리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26] 천강 - 7. 한 밤의 불청객(1) 





7. 한 밤의 불청객.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류흔은 줄기차게 자신을 유혹하는  수마(睡魔)의 꾀임에 자시가 지나
서야 응해주었다. 물론 마지막으로 주위의 기척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가 잠든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별로 길지 않았다. 자신의 온 몸을 죄어오는 짜증과 
함께 귀찮음을 유발하는 기분 나쁜 느낌에 문득 잠에서 깬 류흔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침도 아니었고 생리현상이 급한 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왜 깼는지  모르겠지만 3년 간의 
수련으로 극대화된 자신의 본능은 절대로 잠들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류
흔은 예전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던 본능을  절대적으로 믿어왔다. 본능 역시  류흔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바위 침상 위에 고이 누워있던 미사가 사라졌다. 

[이런, 미사?]

류흔은 놀란 와중에도 순식간에 2가지 가능성을 추론해냈다. 

[미사의 뇌가 원래대로 돌아왔거나,  그들이 미사를 데려갔거나  인가...... 하지만 대체 어떻
게? 이상한 걸.......] 

현재로선 위의 2가지가 가장 타당하다 할 수 있는  가설이었으나, 아무리 류흔이 잠에 빠져
들어 있었다하더라도 기척을 들키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고수가 별로 없다는 것이 문제였
다. 설사 류흔보다 무공이 2배정도 높은 고수가 왔었다  하더라도 류흔의 감각은 타고난 것
이기 때문에 빠져나갈 수 없다. 

적어도 공공대사 정도는 되야 류흔의 감각을 바보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미사 정도의 무
공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설사 은잠술을 전력으로 익혔다 하더라도 내공에서 워낙 차이가 
나기 때문에 류흔의 이목을 속이지 못한다. 그런데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이
상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응? 저건?]

한 동안 의문에 잠겨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거리던 류흔은 문득 미사가 누워있던 바위를 바
라보더니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자세로 고개를 끄덕인 류흔은 그것을 확
인하기 위해 공력을 끌어올렸다. 

[홍무자염신공 제3층 공력 염화경(炎火勁)!]

순수하고 뜨거운 신공의 기운이 손가락 끝에 모여 작은 불길을 피워 올리며 고밀도 상태를 
이루자 류흔은 지체 없이 손가락을 퉁겨 지력을 발출 했다. 

철판도 가볍게 뚫을 수 있는 쇄옥파운지(碎玉破雲指)가 미사가  누워있던 바위를 향해 매섭
게 쏘아져 나갔고 이내 지력의 주인이 목표로 한 그것을 꿰뚫었다.

퍼퍽! 

누가 듣더라도 명백히 바위가 뚫리는  소리라고 말할 수 있는 효과음이  났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분명히 쇄옥파운지가 바위를 뚫는 소리가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바위는 흠집하
나 없이 멀쩡한 것이 아닌가? 

"훗, 역시 그렇군. 환술(幻術)인가? 이봐요, 이제 그만 나오시죠."

자신의 짐작이 맞았는지 류흔은 조소와 함께 몸을 돌려 마차 쪽을 등지고 서서 지면에 길게 
그 모습을 그리고 있는 자신의 그림자를 오른발로 내려찍었다. 

쩌어어엉! 

"무슨 일이에요?!"

숲을 크게 울리는 충격음에 마차의 문이 열리고 상아와 려려, 초혜 등이 뛰어나왔다. 그리고 
그녀들 뿐만 아니라 전혀 예기치 못했던 다른 곳에서 한 명이 더 나타났다. 

"크으으윽!" 

놀랍게도, 류흔의 그림자 속에서 비명소리와 함께 하나의 인영이 튀어나온 것이다. 한  손에
는 자그마한 막대를 들고 기괴한 문양이 가득 수놓아진  학창의(鶴 衣)를 입은 사람이었는
데 방금 전 류흔이 내려친 발길질에 당했는지 입가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괴인을 보자 려려와 초혜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괴인은 
그녀들에게 별로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하긴 거리 상으로 봐도, 그리고 겉으로 봐도 
괴인이 경계해야 할 인물은 류흔이 분명했지만.

"......" 

자신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괴인의 시선에 류흔은 싱긋 웃음으로 답해주고는  뒷
걸음질쳐서 미사가 있던 바위로 갔다.  바위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육안(肉眼)으로는 그 위에 무언가가 있으리란 것을 밝혀낼 수가 없었다. 

"류흔?"

바위 위의 허공을 더듬는 류흔의  손길에 상아가 의아한 음성을 발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리라. 류흔은 그녀의 음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허공을 더듬다가  뭘 잡는 시늉을 하더
니 다시 손을 거두었다. 

"어머?"

"미사 언니......?"

상아와 려려는 크게 놀라며 류흔의 손을 주시했다. 류흔의 손에 놀랍게도 기절한 듯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미사가 들려있었던 것이다. 오직 초혜만이 어느  정도 예상을 했다는 듯 미
미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학창의를 입은 괴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역시 기재(奇才)라 불리는 족속들은 다르군. 눈이나 감각으로는 절대 알 수 없었을 
터인데....... 어떻게 알아챘나?"

류흔은 전음으로 상아에게 뒤로 물러나 있으라고 전하고는 여유 있는 태도로 응답했다. 

"별 거 아닙니다. 그림자를 보고 알았을 뿐. 기운마저 차단하는 건 굉장했지만  아직 만무은
형술(萬無隱形術) 극의(極意)의 경지에 다르지는 못한 것 같군요."

"그림자? 그렇군. 어째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지?"

류흔이 미사가 있던(있는) 바위 쪽을 살피다가 발견한 이상한 점은  바로 땅에 그려진 바위
의 그림자였다. 아무것도 없는 평평한 바위이니 그림자의 모양이 반듯하게 생겨야 정상이건
만, 이 바위의 그림자는 사람이  누워있지 않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양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밤이었기 때문에 땅에 진 어둠과 그림자를 구분하기가  힘들었지만 류흔의 눈은 그 
미묘한 이질감마저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발달되어 있었다. 

학창의를 입은 괴인은 자신의 실수를 납득하다가 갑자기 류흔을 죽일 것 같은 눈으로 노려
보았다. 

"이놈! 내가 누군지 아느냐? 빨리 인사를 올리지 못할까?!"

"엥?"

이제까지의 분위기와는 전혀 상호연관성이 없는, '난데없다'라 표현할 수 있는 괴인의 호통
소리에 류흔은 잠시 멍청해져버렸다. 저 인간을 보고 반색을 표한 여인이 아무도 없는 것을 
보아 일행들과는 별 상관이 없을 듯 한데 뭘 믿고 인사를 올리라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
다.

"저....... 누구 신지.......?"

거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자신의 일행 중에서 누군가의 지인(知人)일지 모르므로 
조심스럽게 묻는 류흔에게 그는 버럭 역정을 냈다. 

"허∼허! 네 놈이 내 딸을 백치로 만들어 데려가 놓고 발뺌을 한단 말이냐? 내가 바로 혁련
청운(赫連靑雲)이다!"

"에? 딸이요? 그리고 백치로 만들었다고요?"

류흔은 반사적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흐음........ 벼락이 떨어질 기미는 안 보이는  군. 안심
한 류흔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모습(어깨를 으쓱)을 취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
었는지 안색을 바꾸고 경악의 목소리로 물었다. 

"서, 설마, 미사의 아버지?" 

"맞다! 이제야 알아듣는 구나! 그럼 어서 인사를 올려야지! 헛헛헛!"

혁련청운은 류흔이 알아맞히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이상하게도 얼굴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는 느낌이 팍팍 드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기분이  어떻든 류흔은 별로 웃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고, 그의 가슴과 뇌 속에는 황당함만이 가득 차 오르고 있었다. 

[미사의 아버지......? 미, 믿어지지 않는 군.]

그도 그럴 것이, 혁련청운의 외형은 호리호리해서 도저히 미사와  같은 육체파 미녀의 유전
자가 들어있다고는 생각을 못할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얼굴도 유들유들하게 생
긴 혁련청운의 딸이라 보기에 미사는 너무나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닮은 점을 찾기가 힘들었
다. 이와 같은 괴리감에 류흔이 벙찐 모습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때, 상황이  돌아가는 
꼴을 보던 려려가 날카롭게 일침을 놓았다. 

"어머, 무슨 말씀이시죠? 류흔공자님보고 인사를 올리라니요? 뭔가를  착각하고 계신 것 아
닌가요?"

혁련청운은 난데없이 끼여든 려려를 바라보다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흥, 너는 오대세가(五大世家)라는 허명(虛名)에 얽매인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자제로군?  비
록 남궁세가의 검이 무섭다하지만 한참이나 어린  네가 40줄에 접어든 나한테 그런  어조를 
사용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그의 입에서는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지만 그의 왼손은 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비침(飛
鍼)을 던져내고 있었다. 미사가 사용하던  것과 똑같은 종류의 그것이었다. 얇은  바늘 모양
의......(침이라고 했으니 당연한 건가?) 

"암습(暗襲)을!"

혁련청운의 치사한, 그러나 노련하다 아니할 수 없는 습격에  려려는 크게 놀라면서도 몸을 
뒤로 빼어 어느 정도 시간을 벌고  재빨리 검을 뽑아 호접무(胡蝶舞)의 방어초식을 펼쳤다. 
꽃을 희롱하는 나비처럼 유려한 궤적을 그리는 아름답기까지 한 검초였다. 

본래 남궁세가의 독문절기(獨門絶技)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섬전십삼뢰(閃電十三雷)라 부르
는 공격위주의 뇌검(雷劍)이다. 그러나 이 뇌검은 강하고 빠름을 추구하는 것으로, 선천적으
로 유연성(柔軟性)을 타고나고 강건함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여인들의 골격에 맞지 않
는다 하여 따로 전승되어 오는 검공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호접무(胡蝶舞)였다. 

이외에도 유려함을 기본으로 하는  무공들이 있었으나 그 무엇도  호접무24절(胡蝶舞二十四
節)보다 뛰어나진 못했다. 그리고 려려는 현재 호접무 거의 대부분의 초식을 익힌 상태였다. 
완숙함이 떨어진다고는 하지만 그 외에는 이 따위 비침 정도에 자신의 몸을 내어줄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역시나 혁련청운이 던져낸 비침들은 려려의  부드러운 검초에 막혀 좌우로  퉁겨져 나갔다. 
은은한 달빛을 받아 선명한 은빛을 띄며  좌우로 비산되는 비침들이 허공에 그리는  자취는 
멋있기까지 했고, 좌우로 정신 없이 비산되는 그 비침들을  소매를 펄럭이는 동작만으로 모
조리 거두어들인 혁련청운의 기교 역시 놀랍고 멋있는 것이었다. 

짝! 짝! 짝! 

"과연 큰소리칠만한 실력은 가지고 있구나."

혁련청운은 려려의 깨끗한 방어 동작에 조금은 놀랐다는 듯 박수를 치며 순순히 감탄해주었
다. 그런 혁련청운의 여유 있는 행동은 곧추 서 있던  려려의 마음을 잠시나마 풀어지게 했
고, 혁련청운은 그 틈을 놓칠 만큼 애송이가 아니었다. 이를 눈치 챈 초혜의 음성이 야공(夜
空)을 갈랐다. 그러나 확실히 늦은 감이 있었다. 

"려매, 피해!!" 

"응? 아앗!"

파파파파팟! 

초혜의 외침과 려려의 비명 소리가 채 발해지기도 전에 혁련청운의 양쪽 소매가 동시에 떨
쳐졌고 아까 전의 비침들은 장난이었구나 생각될 정도로 많은 수의 비침이 검을 쥔 손에 힘
을 거두던 려려에게 쏘아져 날아갔다.  이는 순전히 혁련청운의 치사하고  아니꼽고 더러운 
대결 습관을 알지 못한 려려에게 있었으니....... 어찌 남을 원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현재 려려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심지어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
할 절대절명의 위기가 닥쳤다는 것이다. 자신의 눈앞을 가득  매우는 비침들에 려려는 자신
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그 비침들 앞에서 그녀가 무사하리라
고는 때려죽인다 해도 생각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항상 모든  일에 구멍은 있는가? 아
니 실제로 기적은 있는가? 조용하지만 한없는 믿음을 주는 한줄기 음성이 담담히 허공을 맴
돌다 려려의 귀로 쏙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에 펼쳐진 장면 또한 려려의 믿음을 더욱 굳게 만들어주는 그것이었다. 

"강룡십팔장(降龍十八掌) 절초(絶招) 반룡식일(般龍食日)."

쿠아아아아아아! 

류흔의 손에서 발생한 거대한 한 마리의 용이 똬리를 틀며 비침들을 모조리 휘어 감아버리
는 장관을 연출하며 려려를 위기에서 구한 것이다. 거대한  용의 몸이 회전하면서 일으키는 
선풍(旋風)의 인력(引力)에 대항하기에 혁련청운의 비침들은 너무나 그 가진 힘이 미약했다. 

"선배, 손속이 좀 심하신 것 아닙니까? 까마득한 후배한테 말이죠."

우수수수! 

손을 가볍게 쥐는 것만으로 그 안에 들어있는 비침들을 가루로 만들어버린 류흔이 마치 농
담이라도 던지는 듯 말을 던졌다.  그러나 혁련청운은 류흔의 기민한 반응에만  신경 쓸 뿐 
류흔의 말에는 전혀 대답해 줄 눈치가 아니었다.

"호오, 역시 대단하군. 이번엔 어떻게 알아냈나?"

류흔은 남의 호기심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의 호기심 충족에만 힘쓰는 혁련청운의 반문에 얼
굴을 잠깐 찡그렸다가 폈다. 뭐 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저런 사람도 있을 수 있
는 것이겠지. 이기심이란 사람들의 중요한 본성 중 하나였으니  그게 크게 드러났다고 해서 
굳이 탓할 마음은 없었다. 

"뭐, 제가 조금 손해보는  느낌이지만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말도  있으니 제가 져드리죠. 
처음에 아무 거리낌없이 남궁 소저에게 비침을 날리는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그 교활함과 
노련함에는 감탄이 절로 나오더군요. 

어쨌든 제가 감탄한 원인에  힘입어 회수동작을 주시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왼손이 슬쩍 소매에 들어갔다  나오더군요. 이중으로 노련미를 보여주는  선배의 
무림경험이 농축된 이 한 수에 삼가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언제부터 류흔의 말투가 이리 청산유수(靑山流水)마냥 매끄러워졌던고. 그의 능글능글한 말
투에 혁련청운이 뭐라 대꾸하려 했지만 류흔은 틈을 주지 않았다. 

"자......"

"아, 이해를 잘 못하셨나보군요. 달리 말씀드리자면 선배의 정정당당하다고는 주둥아리가 찢
어져도 말할 수 없는 교활함을 단 번에 꿰뚫어본 명석한  초혜 소저의, 핵심을 정곡으로 찌
르는 찰나적인 조언 때문이었다고 해드리죠."

"이봐...... 자......."

"어허, 아직도 이해를 못하셨단 말입니까?  이거 큰일이군요. 나이가 40줄에 들어서  이렇게 
간단한 말조차 이해를 못하신 다니....... 아무 상관이 없는 저까지도 앞날이 걱정되는군요. 어
라? 손은 왜 떨고 계시죠? 서, 설마....... 전간(癲癎:간질) 증세까지 있단 말입니까?"

"으아아!"

결국 참지 못한 혁련청운의 담담한 표정이 깨지며 그의 입에서 나온 괴성이 숲 전체에 울려 
퍼졌다. 아까부터 그의 이마에 돋아있던 핏줄이 터진 것은 물론이요, 그의 이성을  지탱하고 
있던 한 가닥의 끈이 끊어진 것도 물론이다. 그의 양손에서  각종 암기들이 닥치는 대로 뻗
어 나와 류흔을 노렸다. 

혁련청운과 그의 암습도구의 대명사인 암기들이 바로 눈앞에서 험악한 기세를 보이며  달려
오는 데도 류흔은 유유자적(悠悠自適),  무사태평(無事泰平)이었다. 오히려 이제까지 재미있
게 류흔의 색다른 면을 감상하던 여인들이 크게 놀랐다. 

"꺄악! 류흔!"

"류흔 오라버니! 뭐 하는 거예요?! 앞을 봐요, 앞을!"

"......조심해요."

류흔에 대한 감정을 여과 없이 실어 응원(?)하는 상아, 려려와는 달리 매우 소극적인 초혜였
다. 그러나 귀가 좋은 류흔에게는 초혜의  목소리도 별 무리 없이 들려왔고, 그것은  류흔의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런....... 지랄병이 발동해버렸군요."

태평스런 음색을 발하는 입과 마찬가지로  유유자적한 움직임을 보이는 류흔의  신형. 그에 
따라 취팔선보(醉八仙步)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났다. 

취팔선보(醉八仙步) 극의(極意) 소요유(逍遙遊)! 

피잉! 피잉! 피잉!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는 류흔의 좌우로  혁련청운이 던진 비침들이 스쳐지나가며  파공성
(破空聲)을 일으켰다. 수십 개,  수십 종의 암기(暗器)와  혁련청운의 매서운 장법이 류흔을 
노렸지만 그의 몸을 스치는 것조차 없었다. 

하늘거리는 류흔의 몸.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있는...... 아니 이 세상에 태어나 호흡을 하
고 살아가는 존재라면 예외 없이 적용되는  모든 물리법칙과 땅을 밝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지면의 마찰력이라는,  실재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힘을 모조리 무시하는 
류흔이었다. 

말 그대로 구름 속을 유유히 거니는, 극단적으로 말해서 마치  노는 듯한 경지의 신법 취팔
선보(醉八仙步). 왜 개방을 구파일방(九派一 )의 하나로 꼽는지 그 이유와 저력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최상승의 절예(絶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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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리 폰트가 없는 한자들이 많은 지...... 쩝,  전투장면과 혁련청운의 성격을 많이 바꾸었
습니다. 전에는 준비하고 나온 놈 답지 않게 너무 멍청하게 만들어서....... ㅎㅎ  

 

[27] 천강 - 7. 한 밤의 불청객(2) 




매섭게 류흔을 공격해가던 혁련청운은 그토록 애를 썼음에도 단 한 방도 맞추지 못하자 힘
이 

빠졌다. 뭔가 묵직하게 감이 와야지 때릴 맛이 나지 않겠는가?  그런데 느껴지는 건 허공뿐


니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힘이 빠진다고 이제 와서 공세(攻勢)에서 수세(守勢)로 

바꿀 수도 없었다. 간간이 내뻗는 류흔의 주먹에 실린 기운이 사뭇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

다. 예사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맞았다간 뼈도 못 추릴 정도의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나아갈 수도, 후퇴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형세에 빠진 혁련청운은 공세를 강화


는 방법이 최선이라 여기고는 한층 기세를 더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류흔을 잡을 수 있
는 

것은 아니었다. 

"이 놈! 대체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것이냐? 너는 정녕 자랑할 수 있는 재간이 보법밖에 없
단 

말이냐?"

"......뭐, 그렇게 생각하셔도 상관없지만 확실히 어른을 맞는 예의가 아니로군요. 알겠습니

다."

참다 못한 혁련청운이 류흔에게 내지른 소리는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사방이 좁다하고 이


저리 흔들리며 주위를 헤집던 류흔의 신형이 안정을 되찾아 우뚝 멈추었던 것이다. 

뚝! 

위 같은 소리와 함께 류흔이 신형을 고정시키자 혁련청운은 옳다구나 하고 재차 암기를 뿌


다. 도대체 암기가 몇 개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수도 없이 던져대니 원....... 류흔은 피하

지 않고 내공을 잔뜩 끌어올려 몸을 철탑같이 단단하게 만들어 암기들을 모조리 퉁겨냈다.

태앵! 태앵!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아스라이 허공으로 사라지는 암기들, 개중에는  약한 독이 발라져 있
는 

것도 있었지만 꽂히지도 않는데 독이 퍼질 여유 따위는 없었다. 

"대, 대단하군......."

호신강기(護身剛氣)의 수준에는 한참 못 미쳤지만 쇠로 만든  암기도 가볍게 퉁겨 내버리는 


흔을 보며 어지간한 혁련청운도 질리지 않을 수 없었는지 허탈한 음성을 뱉어냈다. 

"스물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그 정도로 강한 호신공(護身功)을 가지고 있다니...... 대단한 

재질이로군."

"별거 아닙니다. 그보다 밑천이 다 떨어지셨습니까? 설마 이걸로 끝나는 건 아니겠지요?"

이대로 끝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말하는 류흔이었다. 그러면서  은근 슬쩍 여인들 쪽을 


라본 류흔은 아직까지 죽은 듯 누워있는 미사를 보고서는 알 듯 모를 듯 묘한 미소를  지었
다. 

혁련청운은 류흔의 뒤통수를 뚫고 그의 표정을 볼 수 있는 능력까지는 없었기에 그 미소를 


치챌 수 없었다. 만약 알았다면 이후에 벌어질 일의 결과가 조금은 달라졌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류흔이 한 말의 진의(眞意)야 어떻든 혁련청운은 그를 배반할 생각은 병아리 오줌만


도 없었다. 오히려 그가 이렇게 물어봐 주기를 기다린  것처럼, 류흔의 고강한 무위(武威)에 


렸던 안색을 환히 펴며 안정을 되찾았다. 거기다가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웃음소리까지 곁
들인

다. 

"헛헛헛헛! 물론이지! 설마 자네는 내가 이렇게 무모할 거라고 생각했나?"

"핫핫핫핫! 물론 아니죠! 하오문의 실질적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지낭백사(智囊白蛇)께서 이


게 무모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두 사람의 대화는 너무 이상했다. 아니, 두 사람의 성격 자체가 꼭 정신병자 같았다. 어디까

지나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해선 자신이 가진 것을 감추고 또 감추는 것이 상식이다. 상대방
은 

아예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 백 번 생각해보고 한 번 더 생각해봐도 자신에게  유익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 쪽에서는 그 '비장의 수'가 있다는 것을 당당히 밝히고 있고, 또 다

른 쪽은 '비장의 수'가 있다는 것 자체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쪽의 


속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고, 다른  한쪽의 말속에는 어렴풋이, 그러나  확실히 냉기(冷氣)가 


르고 있었다. 

상아와 초혜, 그리고 려려는 바로  이와 같은 작금의 현실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었다. 

"아무래도...... 류흔 공자가 이상해진 것 같아요.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려려가 걱정이 가득 담긴 어조로 동의를 구하자 초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류흔 공자는 지금 저자의 장단에 맞춰주고 있는 것뿐일걸."

"그리고...... 지금 류흔은 뭔가에 화난 것 같아. 목소리 전체에서 어쩐지 한기(寒氣)가 느껴

져......."

상아의 말대로 현재 류흔은 화가 난 상태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고 있지만 혁련청운

이 려려 정도의 - 15살 밖에 안 되는 -  까마득한 후배한테 암습을 했다는 것에 상당히 열 


은 것이다. 아무리 무림에 나온 이상 그 어떤 짓도 통용된다고는 하지만 불문율(不文律)이라

는 게 있다. 해서는 안 될 짓이 있다는 말이다. 혁련청운은 그걸 어긴 것이고. 

한동안 대치 상태가 계속되었다. '비장의 수'가  있다는 말을 꺼낸 후부터 여인들의 토론이 


날 때까지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소음을 일으키던 두 원인이 잠잠
히 

있으니 잠시 걷혀져 있던 고요의 장막이 다시 둘러쳐져 현재의 숲은 태초의 고요함으로 돌


가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류흔 쪽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선배, 이렇게 있기도  지루하군요. 웬만하면 그  '비장의 수'를 지금  꺼내주시지 않겠습니
까?" 

"허허. 무릇 모든 일에는 '때'라는 게 있는 법이네. 아직은 그 '때'가 아니야."

"'때'라...... 그렇군요. 확실히 모든 일에 '때'라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죠."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류흔의 입가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동시에 새어나오고  있었
다. 

"그녀가 의심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을만한 때가......."

물론 이 말을 할 때 류흔의 목소리는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만큼 작았기 때문에 들은 사람은 

없었다. 의외로 속에 능구렁이 몇 마리는 키우고 있는 듯한 류흔의 심기(心機)는 뭇사람들이 

예측하기엔 너무 깊었다. 

평소에 보여주는, 순진하기까지 한  모습은 다 어디로 갔는지  지금의 류흔에게서는 보이지 


는다. 그리고 이런 유형의 사람은 모든 이들이 적으로 삼길 두려워하는 가장 전형적인 유형


기도 하다. 혁련청운 역시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속마음은 류흔에 대한 두려움에 


들어가고 있었다. 

[대체...... 마치 모든 일을 알면서 관조(觀照)하는 듯하니...... 정말 이 녀석이 무림에 갓 

출도한 16살밖에 안된 녀석이란 말인가? 무섭군....... 하지만 틈만 만들면 내 승리다.] 

"훗, 그럼 다시 시작해볼까?"

피잉! 

혁련청운은 '다시 시작해볼까'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날려 류흔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그가 하오문의 무공 중에서 유일하게 절예(絶藝)라 부를 수 있는 추영미리보(追影迷利步)를 


치자 그의 신형이 5개로 나누어지며 각각 다른 방향에서 류흔을 노렸다. 

"천지사방(天地四方), 육합(六合)에서 지(地)를 뺀 나머지 방향인가......."

추영미리보(追影迷利步)가 기본으로 가지고 있는 원리를 단숨에 꿰뚫어본 류흔은 빙긋 웃으

며 혁련청운의 공격을 받아내기 시작했다. 좌측에서 들어오는 혁련청운의 장력을 허리를 뒤
로 

꺾어 비껴내고 우측에서 복부를 노리고 내려쳐지는 퇴법과 전후에서 동시에 날아오는  암기


은 허리를 꺾은 상태에서 아예  누워버리는 것으로 약간의 시간을 번  다음, 누운 상태에서 


게 원을 그리며 바깥으로  빠져나와 피해버렸다. 철판교(鐵板橋)에서 이어지는  반태극(反太
極)

이라는 보법이었다.

순식간에 혁련청운의 사정거리에서 빠져나온 류흔은 수직으로 높이 뛰어오르는데 있어서 일


충천(一鶴衝天)과 맞먹는다는 연쌍비(燕雙飛)의 수법으로 날아올라 아직 공격동작의 여운이 


은 혁련청운의 위로 발을 앞세우고 떨어져 내렸다. 

"허업!"

불리한 자세에서 적을 맞게된 혁련청운은 소모되었던 진기를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것으로 


충한 뒤 천(天)의 방향에서 공격하느라 굽혀졌던 몸을 크게 틀어 펴면서 쌍장(雙掌)을 내밀

다. 

꽈아앙! 

"크윽!"

류흔의 각(脚)과 혁련청운의 장(掌)이 부딪히며 굉음을 일으켰다. 육신(肉身)과 육신(肉身)

의 부딪힘으로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나겠느냐 만은, 기(氣)와 기(氣)의 부딪힘이라면 충분히 

날 수 있는 소리였다. 

이번의 격돌로 손해를 본 혁련청운은 신음소리와 함께 비척비척  뒤로 물러섰다. 자세가 좋
지 

않았고 류흔의 기운이 예상보다 훨씬  강했던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이게 


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혁련청운의 손바닥과 부딪힌 후 그 여력으로 뒤로 퉁겨져 나간 류흔
이 

착지와 동시에 상상도 못할 속도로 돌진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몸에서 장력에 부딪힌 


격 따위는 눈 씻고 찾아봐도 뵈지 않았다. 하긴 이것저것 다  치우고 덩치로만 따져 봐도 8


에 가까운 류흔에게 끽해야 7척 조금 넘는 혁련청운이 충격을 준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긴 


다. 

류흔의 돌진 속도는 실로 엄청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속도였다. 류흔이 지금 사용한 신법
은 

궁신탄영(弓身彈影)이라는 것으로, 허리를 굽혔다 펼 때 얻는 탄력으로 튀어나가는 초인적인 

허리힘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돌진전용신법이었다. 5장이라는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져 버렸
다. 

혁련청운을 제압하는 건 손 한 번 내밀 시간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혁련청


이 숨겨둔 그 '비장의 수'가 나왔다. 

"잠깐!!"

많이 들어본 목소리. 바로 죽은 듯 누워있던 미사의 목소리였다. 막 혁련청운의 몸에 부딪혀 

가려던 류흔은 순식간에 손을 거두고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
한 

류흔의 후퇴 동작을 보고 혁련청운이 속으로 감탄했음은 물론이다. 

[공력의 수발(受發)이 저렇게나 자유롭다니...... 갈수록 믿어지지 않는 것만 보여주는 군. 미

사가 조금만 늦었으면 낭패볼 뻔했어.] 

하지만 류흔이란 애송이 아닌 애송이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도,  어쨌든 자신은 그를 제압


다. 비록 그 방법이 딸을 이용한 것이라는 게 걸리긴 하지만 어차피 무림에 나온 이상, 그리

고 자신이 하오문 소속인 이상 체면 같은 건 저리 쓰레기통에 처박아 놓는 게 신상에  이로
웠으

므로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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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짧네요. 그런데 수정판이 그렇게 지루한가요? 조회수가 5분의 1로 뚝....... 흠.......
하하, 1회는 10000분 가량이나 보아주셨는데....... 놀랐습니다. 뭐  그 뒤는 뚝뚝뚝 이지만 말
이죠. 

방학입니다. 보충과 자습 때문에 방학같지도  않지만 어쨌든 방학이니 모두  재밌게 지내시
길....... 안녕히 계시고,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라는 말씀을 드리며,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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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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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초혜와 려려는 갑자기 일어나 상아의 목을 비침으로 위협하고 있는 미사를 보며 일시


간 상황판단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머리가 돌지 않았
던 

것이다. 평소에 침착하고 항상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하던 초혜조차 의외의 상황에 굳어버렸


지라 미사가 그녀들의 혈도를 제압하는 데는 하등의 문제가 없었다. 

"......." 

"......."

아혈(啞穴)마저 제압당했기에 아무 말도 꺼낼 수 없는 초혜와 려려. 그러나 미사는 그녀들을 

바라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때로는 말보다 더 확실한 뜻을 전할 수 있는 눈빛 때문이었다. 

미사는 등에 확연히 느껴지는 그녀들의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련청운과 대치 상태인 류흔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아아,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으니 그렇게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제가  사과 드
려 

야죠. 잠시 나마 어린아이처럼 만들어버려 목적을 실행하는 데 애로사항을 주었으니까요. 정


으로 사과 드리죠. 혁련 소저."

미사는 상황이 이지경이 되었는데도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띄운 채 자신의 말을 자르는 류흔
을 

계속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말, 정식으로 자신에게 사과한다는  말은 


제까지의 정리(情理)를 모두 접겠다는 것이 아닌가. 차라리 이렇게 정이 들기 전에 모든 일
이 

끝났으면, 아니 아예 이런 상황이 오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현실은 냉혹한 법


었다. 미사는 북받쳐 오르는 가슴을 억누르고 그를 외면했다.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미사에게  감정(感情)이 아닌 이성(理性)이  시키는 대로 차가운 


을 던진 류흔은 착잡한 심정이 들었다. 꼭 그렇게 차가운 말을 할 필요는 없었는데.  상아를 


협하고 있는 모습에 잠깐 욱하는 성질이 튀어나온 것 같다. 

[쳇, 나도 아직 멀었군. 지금 처한 상황이 짜증난다고 그녀에게까지  짜증 낼 필요는 없었는
데 

말이야. 에휴, 어쨌든 상황을 해결해볼까?]

짝짝짝! 

류흔이 막 마음을 굳히는 순간 혁련청운이 박수를 치며 자신이 있다는 것을 주위에 주지시


다. 잠시나마 왕따를 당한 것에 대한 복수인지 주먹을 허공에  대고 가운데 손가락을 펴 보
인 

혁련청운은 주위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짐짓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흠흠! 자자, 이제 상황을 정리해봐야겠지? 후후, 어떤가? 내 '비장의 수'가 마음에 들었나?"

혁련청운의 얼굴에서 류흔이 궁신탄영(弓身彈影)으로 돌진했을  때 잠깐 비쳤던 사색(死色)
은 

그 자취를 지운 지 오래였다. 현재 그의 얼굴에는 일이  자신 마음대로 돼서 즐거워 죽겠다
는 

표정만이 가득했다. 류흔에게 그 기분에 동조해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흠이지만. 

류흔은 잠깐 허리를 숙여 작은 돌을 만지작거리다가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뒤로 휙 던지

며 말을 꺼냈다. 

"확실히 저를 제압하는 데는 최상의 방법이로군요. 음....... 다만 제 생각을 크게 못 벗어난 

게 아쉽네요."

"뭐?"

"말 그대롭니다. 제게 생각을 읽혔다는 것이죠. 그리고 수(數)를 읽혔다면 실패한 거라고 봐

도 무방하겠죠? 이제 도착할 때가 됐나? 아니, 조금 부족한 가?"

"무슨...... 이런! 미사! 피해라!"

물음표가 난무하는 류흔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혁련청운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다가  이내 


요한 사실을 깨닫고 미사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미사에게  소리치기보다는 제 몸 빼낼 


각부터 했어야 했다. 류흔이 회선무궁(回旋無窮)의 수법으로 던져낸 돌이 미사에게 도달하는 

동시에 류흔의 몸도 그를 노리고 움직였던 것이다. 

일보(一步)에 따른 공간(空間)의 압축, 그리고 전신(全身)에  두른 기의 순간적인 압축과 폭
발. 

선풍신법(旋風身法) 일진광풍(一陣狂風)! 타격일기(打擊一技) 산비벽정(散飛擘霆)! 

타악! 꽈광! 

"!"

"크윽!"

가벼운 충돌음과 강한 충돌음, 무언(無言)의 비명과 큰 소리의 비명이 교차되었다. 돌에 의

해 마혈(痲穴)을 제압당하는 것과 돌진에 이은 전신 박치기로 인한 충격(衝擊)은 확실히 격

(格)이 다른 것이다. 

류흔은 산비벽정(散飛擘霆)에 의해 저만치 밀려나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혁련청운에


는 더 이상 신경을 끄고, 마혈을 제압당해 뻣뻣해져 있는 미사 쪽으로 몸을 날렸다. 아직 화


(化境)에 이르진 못했지만 신법에서만큼은 웬만한 화경의 고수들도  못 따라갈 정도의 성취
를 

이룬 류흔이었기에 5장거리를 압축하는 데는 한 걸음이면 충분했다. 

초혜와 려려의 혈도를 풀어준 류흔은 위협받는 상태에서도 침착한 눈빛으로 장내의  상황을 


시하고 있던 상아에게 안녕(安寧)의 여부를 물었다. 

"상아, 어디 다친 데 없어?"

상아는 빙긋 미소를 머금고는 류흔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아주며 대답했다. 

"걱정해준 덕분에. 괜찮아."

감각이 발달하지 않은 상아로서도,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에게 신경을 집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으므로 자신이 다쳤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묻는 그가 고마웠다. 그리고 


신의 대답에 슬며시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리는, 때때로 보이는 그의 이런 순진함이 좋았
다. 

"......."

"......."

황홀(恍惚)이란 이름의 늪에 보는 사람을 빠져 죽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微

笑)란 게 있을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류흔을 바라보는 상아의 미소를 보라. 답을 알 수 있을 


만 아니라 경험까지 할 수 있을 테니. 그런 다음 혹시 정신이  남아 있다면 고개를 돌려 류


을 보길 권한다. '세상에 이렇게 잘 어울리는 남녀가  또 있을까?' 하는 새로운 의문과, '절
대 

없다'라는 확실하고 이의 없을 - 있다고 해도 미친 소리라고 무시할  수 있는 - 답, 마지막


로 '남자의 미소가 이렇게까지 멋질 수 있구나' 하는 새로운 지식(知識)을 얻게 될 것이다. 

상아와 미소를 주고받은 류흔은 입술을 삐죽인 채 쀼루퉁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
는 

려려와 얼굴을 붉히고 있는 초혜를 바라보며 뒤늦은 인사를 건넸다.

"두 분 소저 모두 괜찮으세요?"

초혜는 몰라도 려려에게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흥. 빨리도 물어보네요. 안 괜찮아요."

"려매! 공자, 저희도 괜찮아요."

"하하....... 다행입니다."

톡 쏘는 려려의 대답에 류흔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혁련청운에게 돌렸다. 어색한 


위기를 바꾸기 위한 행동이었다. 

"후우,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하오문(下午門)의 비영단주(秘瑩團主) 어른. 저에

게 부탁할 일이 뭡니까?"

"!"

담담하게 내뱉는 류흔의 말에 혁련청운은 평생에 다시없을 충격을  받았다. 대체 이 청년이 


떻게 알고 있는 것인가....... 자신이 이곳을 찾아온 진짜 목적을. 망연자실(茫然自失)한 모습

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혁련청운을 바라보며 류흔은 고개를 좌우로 한 번 저어 생


을 정리한 뒤 말했다.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나중에 말씀드리죠. 우선 부탁할 일이 무엇인지나 가르쳐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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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제 조회수는 포기했고........ 그저 지금 봐주시는 분들이나 재밌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
습니다. 이제 자기 비하 따위는 하지 않기로 하죠. 타고난 능력은 다른 법이니까.......

안녕히............  


간만에 연참이로군요. 수정할 부분이 그리 많지 않아서...... 대사는 많이 바뀌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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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류흔, 낙양(洛陽)의 하오문(下午門)으로 가다 -

따각 따각......

여름의 관도 위에서 마차를 끌면서 한가로이 걷는 말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방향은 이


까지 그들이 가던 곳의 반대편. 그러니까 간단히, 이해가 쉽게 되도록 말하자면 힘들게 달려

서 지나쳐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말들의 불평이 없을 수 없었다. 

"푸, 푸르륵! 푸르르륵!"
'이봐, 우리 주인들 정말 짜증나지 않아? 힘들게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고 있잖아.'

"푸르르르륵!, 푸륵."
'원래 인간들이나 누구에게나  귀소본능(歸巢本能)이란 게 있는  거야. 그리고 예쁘니까  봐
줘.'

"히힝!"
'호색마(好色馬)자식.'

"푸르르륵! 푸륵!, 푸......."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본성. 애써 감추려 하지  마시지. 솔직히 너도...... 
'

"히히힝!"
'난 여자야!'

.......잠시 한심한 말들의 대화였다. 크흠! 이제 본격적으로 가자. 

류흔이 물었다. 

"상아, 정말 소림(少林)으로 안 가도 되겠어? 원래 그곳으로 가기로 하고 나왔다며?"

"으응. 류흔을 만났으니 됐어. 콜록!"

류흔은 상아가 말을 하다말고 기침을 하자 재빨리 그녀의 등에  손을 대고 기(氣)를 불어넣


다. 취팔선공으로 인해 쌓인 부드러운 기운이 상아의 전신을  돌면서 그동안의 치료로 어느 


도 보강된 기운들을 다스려 전신으로 확산시키기 시작했다. 

여기서 잠시 상아의 건강을 이야기하자면, 지금까지 곱게 키워주신 부모님께 집을 나오면서 

끼쳐드린 심려에 대한 생각과 이렇게까지 하면서 나왔는데 류흔을 만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나라는 걱정, 오랜 마차생활로 인한 건강의 훼손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아의 건강은 별로 좋은 편이 아니었었다. 그러나 류흔을 만난 후로, 류흔이 신도겸의 밑에서 

지내면서 곁눈질로 배운(여기서 곁눈질로 배웠다는  것은 진짜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얕게 
배웠

다는 것입니다) 의술(醫術)과 또래에서 보기 힘든 깊은 내공(內功)으로 매일매일  기운을 북


아주고 있었기에 현재는 예전처럼 건강한 몸으로 돌아가 있었다. 

상아의 온 몸을 순환한 기운들은 마지막으로 상아의  등에 닿아있는 류흔의 장심(掌心)으로 


려 들어갔다. 상아는 갑작스레 이마가 어지러워짐을 느끼며 흥건하다  할 정도로 많은 땀을 


렸고, 류흔이 상아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면서 말했다.

"이제는 완전히 나았다고 할 수  있겠다. 조금 머리가 어지러웠던  것은 노폐물들이 일시에 
한 

곳에 몰려 빠져나오느라 그랬던 거야. 근처에는 씻을 만한 데가 없어서 이마에 몰아서 나오
게 

했거든."

상아는 그 신비하고 투명한 눈빛을 류흔에게 고정시키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뭘......."

류흔은 상아가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오자 쑥스러움을 느끼며 말을 얼버무렸고  상아는 


런 그를 보면서 빙긋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살랑∼ 

문득 더운 날씨로 인해 유발될 수 있는 짜증을 예방하려는 듯 전형적인 효과음과 함께 미풍

(微風)이 전방(前方)에서 불어왔다. 그리고 그 바람들은 미풍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부드러웠


며, 미풍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상쾌했다. 

"바람맞는 기분이 좋아." 

현재 둘은 마부석에 나와 있었는지라 부드럽게 부는 바람의 상쾌함을 아무런 방해 없이 만


하고 있었다. 류흔과 상아의 얼굴에는 연신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고 그 분위기에 감화되었


지 마차 안에서도 간간이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호호! 정말 류흔 공자가 그랬단 말이야? 호호호!"

"정말이야. 그땐 진짜 죽는 줄 알았어...... 얼마나 웃었는지 배가 경련을 일으킬 정도였다니

까."

"호호호! 너무하다 정말. " 

이제는 완전히 정신이 돌아온 미사와 려려의 대화다. 류흔은 미사가 말하는 것이 처음 만났

을 때를 가리킴을 알고 쓴웃음을 짓다가 갑자기 울상을 지었다. 울상을 지은 이유는 상아도 

그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마구 웃으면서 류흔을 꼬집었기 때문이다.

"으웃!"

"후훗, 류흔에게 그런 면이 있을 줄이야....... 너무 했어."

상아가 꽃이 활짝 피는 듯한 웃음과 함께 류흔을 다시  봤다는 듯 말했다. 류흔은 상아에게 


녀의 손가락 힘이 결코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잔뜩 울상을 지었으나 상아는 


경도 쓰지 않고 두세 번 더 꼬집었다. 손을 먼저 든 쪽은 류흔이었다. 

"우우...... 상아....... 그 이야기는 전에 해줬잖아....... 그리고 꼬집는 거 정말 아프다

고." 

"호호, 그때는 분위기에 휩쓸렸었거든. 여자에게 못되게 한 것에 대한 벌이야, 벌."

류흔은 자신이 확실히 미사에게 심하게 하긴 했었는지라 상아의 말에 한마디 변명도 할 수 


었고, 설사 억울했어도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녀가 자신의  품속으로 


대오는데 그깟 억울함이 문제이겠는가? 그런 억울함은  백 번 쌓여도 그녀의 미소 한  번을 
당하

지 못하고, 천 번을 쌓인다해도 그녀의  은쟁반에 옥 굴러가는 듯 맑고 고운  목소리 한 번 


는 것을 당하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지금, 류흔의 넓디넓은 가슴에 반쯤 안겨있는  상아의 


술이 달싹였다. 

"류흔."

"응?"

"우리 낙양(洛陽)으로 가는 중이지?" 

"응."

"왜?"

"왜라니? 아차, 상아는 그때 자고 있었구나. 이야기 해줄게."

류흔은 상황을 알지 못하는 상아를 위해 이틀 전에 있었던 혁련청운과의 일을 다시 꺼냈

다. 




한바탕 싸움을 치른 뒤 일행과 같이 모여 앉은 혁련청운과 혁련미사(赫連美沙). 그들의 몸에

는 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아혈(啞穴)과 마혈(痲穴)이라도 제


당한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앞에는 상아를 제외한 일행
이 

모두 모여 앉아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무림인에 속하는 류흔이나 려려, 초혜와는  달리 


반인에 속하는 상아만은 오랜 여행으로 인한 피로를 감당하지 못했는지 마차 안으로 들어가 


을 청했기 때문에 이 모임에서 제외되었다.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오는 것을 보니 현재 시각은 묘시(5시∼7시) 정도로 추정되었다. 류흔

은 잠을 못 잔 것이 아쉬운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는 혁


청운에게 말을 걸었다. 

"후우.... 이왕 이렇게 됐으니 잠은 포기해야겠군요. 대화나 나누도록 하죠. 아까 전에도 물어

봤지만, 저에게 부탁하실 일이 뭡니까?

"........."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 귀가 있고 막혀있지 않으니 듣지 못한 것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다

른 생각에 빠져 있거나 대답을 회피한다는 결과가 나온다.  류흔은 혁련청운의 의도가 무엇


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맞춰보죠. 틀림없이 하오문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무슨 일이란 하오문의 

정보력을 탐하는 자의 압력이겠죠. 저에게 바라는 건 그걸 해결해달라는 것이고요."

".......귀신(鬼神)이로군. 어떻게 알았나? 아니, 그보다 아까 내 정체는 어떻게 안 것인가?"

"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우선 선배의 정체를 알아챈 것부터 말

씀드리죠. 간단합니다. 제가 혁련소저에게 펼친 대법(大法)......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어쨌

든 제어를 잘못해서 혁련소저의 정신상태가 어릴 때로 돌아갔었습니다. 그걸 정상으로 돌리
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정신을 조종할 수  있는 제령대법(制靈大法), 초혼대법
(招

魂大法) 따위를 할 줄 아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일찍이 하오문에 기환술(奇幻
術)

의 대가가 있다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말을 멈춘 류흔은 혁련청운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본론을 말씀드리죠. 혁련소저를  데리고 다닌 지 이제  사흘? 아니 나흘째인가? 
어쨌

든 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조사를 하셨을 테니 만큼 제가 혁련소저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을 것이라는 건 아주 잘 아셨을 테죠. 어느 정도 조사를 하셨다고 했지만 여러모로 잘 알려


지 않은 저에 대해서 확실히 파악할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제가  혁련소저
를 

데리고 다니도록 내버려두셨을 겁니다. 둘째 날 습격이 있기 했지만 혁련소저를 구출하려는 


늉만 하더군요. 절 제압하려고만 했지 혁련소저를 구출할 생각은 없어 보였으니까요. 작금의 

상황과 별 상관없어 보이는 것 같지만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동료에게 일이 생겼
을 

때 반나절 내로 조까지 짜서, 목표의 행로를 파악하고 습격을  감행할 수 있는 문파는 그리 


지 않다는 것이죠. 아니 제 소속문파인 개방(  )과 하오문(下午門)밖에 없다고  해도 되겠


요.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습니다. 하여간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저와 혁련소저가 동행한 지 겨우 나흘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 대해서 파악하기에 그리 


넉한 시간이 아니죠. 더욱이 확실한 정보만이 살수 있는 길인 하오문임에야......." 

혁련청운이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내가 나타났을 때부터, 내가 하오문의 문도라는 것을 알게된 순간부터 자네는 모

두 눈치챘었다는 거로군." 

류흔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독문무공(獨門武功)이  다른 문파들에 비하여, 명문


파(名門正派)는 꿈나라이야기고 군소방파(群小 派)들에 비해서도 한참 딸리는 하오문의 유


한 생명줄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정보이다. 그런데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류흔에 대한 


보를 수집할 수 있는 너무나 좋은 기회를 혁련청운 자신의 발로 차버리면서까지 류흔의 앞
에 

나타났을 때부터, 류흔은 곧바로 전후사정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생각을 이어가

다 보니 그가 나타난 이유마저 알 수 있었고 자신에게 요구하려던 것이 무엇인지까지도 짐


할 수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빨리 돌아가는 머리다. 

"쯧, 조금 솔직하셨으면 좋았을걸요."

류흔이 푸념하듯 말하자 혁련청운은 나이에 맞지  않게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고개를  숙였
다. 

그 모습에 방금 전까지도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내던 려려와 초혜는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


고 그들 사이에 흐르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부드럽게 변해갔다. 

류흔은 지풍 두 줄기를 날려 모닥불을 끈 후 혁련청운에게 말했다. 

"먼저 가 계십시오. 늦지 않게 뒤따라가겠습니다."

"크흠! 알겠네. 꼭 와주는 걸로 믿겠네. 그럼 미사, 가자!"

혁련청운은 아까 전에 보였던 자신의 태도가 부끄러웠는지 황급히 미사를 데리고 자리를 뜨


고 했다. 그러나 혁련미사는 혁련청운의 부름에도 움직이지 않고  무언가를 바라는 듯한 눈


을 류흔에게 보내며 머뭇거렸다. 

우연히도, 정말 우연히도 고개를 돌리던  류흔의 눈과 혁련미사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고, 


련미사는 눈빛에 간절함을 담았다. 결코 계획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고, 자신을 믿어달라

고. 믿지 않을 것이 뻔했지만, 그래도 매달렸다. 이대로 헤어지긴 싫었다. 이렇게 어색한  관


로 그와 헤어졌을 경우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그녀가 원하는 바
가 

아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실제로는 수유(須臾)의 시간이었지만 그녀에게 있어선 억겁(億劫)과

도 같았던 시간이 지나고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잠깐만, 선배님. 제가 하오문까지 가는 길을 모르니 미사 누님과 동행할 수  있도록 허락해


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떤 정보를 얻었을 때, 그걸 중원 전역으로 퍼뜨리는 데 하루밖에 안 걸린다는 하오문.  그


고 그런 하오문의 정보력에 비견되고도  남음이 있는 개방. 1결  제자라 할지라도 중원전도
(中原

全圖)를 즉석에서 그려낼 수 있다는 개방의 제자들. 그 중에서도 기대주인 류흔. 이 네 가지

를 연결하여 귀납추론(歸納追論)을 해보면  나오는 결과는 뭘까?  '류흔은 하오문의 위치를 


고 있다.'이다. 혁련청운도, 미사도, 려려와 초혜도 그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인 것이다. 그


나 그는 길을 모른다며 미사를 데리고 갈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그것도 상대방의 의사(意
思)

를 물어보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해달라고 청하는 어조로 말이다. 

".......그렇게 하지. 훗, 자네는 진짜 인물이군. 핫핫."

혁련청운은 이제까지의 가식적인 웃음과는 다른, 듣기 좋은 웃음소리와  미사를 남긴 채 보


(步法) 겸 신법(身法)인 추영미리보(追影迷利步)로 사라졌다. 숲을 가득히 메우고 있는 울창

한 나무들이 그의 존재감을 완전히 가린 후에, 류흔은 눈시울을  붉히며 가만히 서 있는 미
사에

게 다가갔다. 

"이제 빙당은 사주지 않아도 되겠죠? 미사 누님."

"......으흑흑! 흑흑!"

"언니...... 울지 말아요."

결국 미사는 울음을 터뜨렸고 려려와 초혜는  불편했던 마음을 털어 내고 그녀에게  다가가 


로를 해주었다. 아버지의 의도를 몰랐기에 류흔을 배신하는 것  같은 행동까지 했던 여인이
었으

니 뭐라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행의 수는 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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